401~500/(476~500)2021. 1. 6. 16:30

 

 

((No.479))—1992년 하안거 해제(92.08.13) (73분) (용479)

 

479-1:4(1992년 하안거해제:약21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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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3:4(1992년 하안거해제:약20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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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4:4(1992년 하안거해제:약15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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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약 21분. (2/4) 약 17분. (3/4) 약 20분. (4/4) 약 15분.

(1/4)----------------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타가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나무~아미타불~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야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 젊어서부터 주욱 저 먼 타관(他官)으로 타관으로 방황을 하는데 아주 익숙해졌어.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몇 번이나 형산(衡山)을 돌고, 몇 번이나 소상강(瀟湘江)을 건넜던가. 저 타관으로 타관으로 젊어서부터 타향살이로, 나그네로 방황을 하면서 몇 번이나 형산을 돌고 몇 번이나 소상강을 건넜더냐 이거거든.

 

'젊어서부터'라고 하는 말은 저 무량겁(無量劫)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자기 마음의 고향을 등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천상(天上)에 갔다가, 인간세(人間世)에 왔다가,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졌다가,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졌다, 지옥고(地獄苦)에 떨어져서 무량겁을 그렇게 육도를 돌고 돌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왔더냐 이거거든.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니, 하루아침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으니,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다. 비로소 그 타향살이로, 타향으로 돌고 도는 그 세월이 길고 긴 것을 알게 되었더라 그거거든.

 

무엇 때문에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가?

'좀 더 돈을 좀 벌어 볼까, 무슨 공부를 좀 해 볼까, 남부럽지 않게 좀 잘살아 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조그마한 이양(利養)을 구하기 위해서 부모가 계신 고향을 떠났더라 그거거든.

그래 가지고 타향으로 가니 낯설고 기반이 없어 놓으니 발붙일 곳이 마땅치 안 해. 그래서 또 다른 데로 가고, 가서 보니 또 마땅찮으면 또 다른 데로 가고, 이리 갔다 동서남북을 그렇게 해매면서 저 끝없는 타향살이로 타향살이를 하면서 수없는 고초를 겪은...

 

그러다가 문듯 좋은 친구를 만나. 어진 선배를 만나 가지고 직장도 구하고 살길을 얻어.

그것이 바로 무엇에다가 비유했냐 하면은 육도윤회를 하다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을 구하기 위해서 육도(六道)를 돌고 돌다가 다행히 어느 날 불법(佛法)을 만났더라 이거거든.

어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법문을 듣고, 어느 도반(道伴)을 만나서 소개를 받고, 그래 가지고 정법(正法)을 믿게 되어서 그래서 자성(自性)을 깨닫는 참선(參禪)을 하다가 보니 정말 그동안 생사고뇌(生死苦惱) 속에서 헛되이 많은 세월을 보낸 것을 깨닫게 되었더라.

 

 

오늘 임신년(壬申年) 7월 15일 백중날을 맞이해서 용화사 법보선원 대중, 보살선방 대중, 시민선방에 모다 대중과,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회룡사 의정부 회룡사선원 대중, 대전에 세등선원 대중, 저 전주에 위봉선원 대중들, 그리고 멀고 가까운 사암(寺庵) 토굴에서 정진하는 도반들, 각 가정에서 분 따라서 정진(精進)하는 노소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이 해제일(解制日), 백종일을 맞이해서 이 도량(道場)에 가뜩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그동안에 그 삼복성염(三伏盛炎)에 그 더위를 이기면서 등어리에는 참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고 그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느라 더운 줄도 모르고 석 달 구순안거(九旬安居)가 그렇게 석 달이지만 어떻게 지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정말 남이 억지로 시켜서는 못할 일이여. 이것은 스스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친 대신심(大信心)과 분심(憤心)이 아니고서는 이 삼복성염에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죽비를 치고 정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 달을 지내고 나면 휘청거리고—아무리 외호(外護)를 잘해서 대중공양(大衆供養)이 들어와서 잘 먹고 지냈다 해도 골(骨) 속이 비어서 휘청거리고, 앉었다 일어서면 앞이 캄캄하고, 오줌을 누면은 발등에 가서 떨어져.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다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다 면목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눈물 나는,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새카만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그러한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그러한 도반들을 위해서 몇 마디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해제(解制)를 하면 석 달 동안 정진하던 선원(禪院)을 모다 이 걸망을 지고 또 모다 떠나시게 됩니다. 어디를 가던지 또는 다시 그 선원에 머물러서 산철 결제를 하던지, 앞으로는 더위도 가시고 차츰 서늘해질 거이니 그동안에 더위 때문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정말 알뜰하게 착실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하여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한 부처님, 두 부처님 내지 천만 부처님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여. 부처님들이 모두 다 눈은 옆으로 백이고, 코는 바로 이렇게 백이셨드라 그거거든.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로, 석년(昔年)에 무량겁으로부터 오시면서 친(親)히 선근(善根)을 심어 왔어. 온갖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여. 금일(今日) 이와 같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으시게 되었더라.

그러한 선근(善根)을 심어 오지 안 했으면 어찌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추어서 스스로 깨닫고 무량(無量) 중생을 제도(濟度)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그런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부처님이 몸소 시범(示範)하신 바와 같이 그런 선근(善根)을 심지 않고서는 그런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출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육조(六祖)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천만 부처님 처소(處所)에서 일심(一心)으로 공양(供養)을 하고,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순(隨順)을 하고, 또 모든 보살(菩薩)이나 선지식 또는 스승님 · 부모 또는 연세가 많은 어른 존장(尊丈)의 처소에서는 항상 공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하고, 그 명령에 어기지 않고 그 뜻을 받들어서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어 왔고.

 

그런 부처님이나 보살님이나 또는 선지식 스승 부모뿐만이 아니라 육도(六道) 중생을 만나서는 살해(殺害)를 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중생을 속이지 않고, 천대하지 아니하고, 훼방하지 아니하고, 욕하지 아니하며, 그 축생(畜生)을 타지 아니하며 채찍질을 하지 아니하며 그 고기를 먹지 아니해. 항상 그 육도 중생을 '어떻게 하면은 좋게 해 줄까? 이익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상대해 왔더라 그말이여. 그렇게 해서 선근(善根)을 심어.

그리고 일체 빈고(貧苦),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할 때에는 자민심(慈愍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상대하고, 싫어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그 중생(衆生)이 요구하는 바는 자기의 힘 따라서 베풀고, 이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더라.

 

그러면 일체 악류(惡類), 악한 무리들—나를 해꼬자하고, 해꼬자하려는 그런 악한 무리를 상대할 때에는 유순(柔順)하고 화평(和平)한 마음으로 상대하고, 인욕(忍辱)하고 환희(歡喜)한 마음으로 이렇게 맞이하고.

나에게 좋게 해 준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악한 마음으로 나에게 피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그러한 상대를 만나서도 유순하고 인욕하고 환희한 마음으로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보살(菩薩)에 마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고, 고집 세고 비꼬인 생각을 쉬게 하는,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다 그거거든.

 

이것이, 그렇게 무량겁을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대표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우리의 교주(敎主)이시고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같은 그러한 성현 중에 대성현(大聖賢)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성현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 순종(順從)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1분17초)

 

 

 

 

(2/4)----------------

 

그래서 우리는 낱낱이 구체적으로 간략히 선근(善根)을 심는 법을 육조(六祖) 스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을 드렸거니와,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근기(下根機)로서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불보살과 스승과 어른 존장, 그리고 모든 육도 중생과 빈곤한 그런 중생들, 심지어는 우리를 해꼬자할 악한 무리들에까지도, 그러한 무리를 만나서도 우리의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고 선근을 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근기 약한 것만을 한탄하고 그러한 선근 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런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성색불애처(聲色不礙處)가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색(色)을 보되 색(色)에 관계치 아니하고, 관여(關與)하지 아니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어.

 

우리는 눈을 통해서 온갖 색상(色相)을 보는데, 그 색상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그것에 관여를 하게 됩니다.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크다 적다', '좋다 나쁘다' 그것이 바로 색에 관여하는 것이거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여. 무슨 소리든지 귀로 들으면, '아, 저건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애기 소리다. 저것은 개 짖는 소리다' 거기에서만 끝나지 아니하고, '저것은 나를 해롭게 하는 소리다. 나한테 욕하는 소리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다' 온갖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관여를 하고, 거기에서 싫어하는 생각을 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고, 다투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고, 원한심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色相). '저 사람은 이쁘다. 미웁게 생겼다. 뵈기 싫게 생겼다. 입맛 떨어지게 생겼다' '저 아무 점께 나한테 저렇게 욕한 인간이 또 오는구나'

하루 종일 · 날마다 · 달마다 · 일 년 내내 · 일생 동안을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을 보고 그렇게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업심(業心)이 발동(發動)을 하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를 통해서 시비를 일으키고 업이 발동을 해서, 얼굴에 그 표현(表現)이 되고 행동으로 표현이 돼.

그래서 한량(限量)없는 업(業)을 짓고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무슨 색상이 들어오거나, 처음에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들어오거나 말거나 거기에 걸리지를 안 해.

눈에 보이면 보인 대로 맺겨 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면은—내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거나, 나를 비방(誹謗)하는 소리를 듣거나 그냥 그런대로 놔두는 거여.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할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안 보려고 할 것도 없어. 보이면 보인 대로 놔두고 들으면 들린 대로 흘려보내는 거여.

 

부처님께서 어느 외도(外道)를 만나셨는데, 그 외도가 입에 못 담을 비방(誹謗)을 해. 온갖 비방을, 부처님 비방을 한다. 부처님 제자들에 관한 비방, 부처님에 관한 비방, 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로 갖은 고약한 소리를 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욕을 하고 비방을 하는데, 부처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그만하라는 말도 않고 다 들으셨다 그말이여.

 

다 듣고 난 다음에, "이제 말이 끝났습니까?"

"네, 끝났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한마디 묻겠는데, 내 집에 참 손님이 오셔서 그 주인이 참 갖은 음식을 많이 차려서 내놓고 손님한테 내놨는데, 손님이 그 음식을 안 먹고 가면 그 음식은 누가 먹어야 겠습니까?"

 

"그 손님이 안 먹으면 주인이 먹어야죠"

"그러면 되었다"고. 그리고서 부처님이 거기서 떠나셨습니다.

 

내게 당치않는 행동이나, 내게 당치않는 말로써 나를 비방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것을 취(取)하지 아니하면, 그것에 관여(關與)하지 아니하면, 그 욕과 악한 비방은 한 사람이 다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공연한 사람을 흔들어 놓을 흔들려고 그러고, 공연한 사람을 비방을 하고 욕하고 했으면, 상대방이 그놈을 받아들이면 그리 건너가겠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무심(無心)으로 상대(相對)해.

화두(話頭)를 떠억—그럴수록에 당치않는 소리를 하면 얼굴 하나 찌푸릴 것도 없이 화두를 떠억 들고 '이 뭣고?' 그러면 구태여 안 들을라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열심히 들은 것처럼 눈을 따악 뜨고 잘 들은 척하고, 들으면서 그냥 '이뭣고?'를 떠억 하란 말이여. 그러면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는 한 사람 입으로 도로 들어가는 거여.

그놈 지가 토해 낸 독(毒)을 잔뜩 들어마시고, 그 사람은 그 지은 죄업(罪業)으로 삼악도(三惡道)에 가서 고(苦)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 (욕하는) 말을 들으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뭣고?'를 하고, '판치생모'를 하고, '정전백수자'를 하고, '무자' 화두를 했기 때문에 그 공덕(功德)으로—(욕한 사람은) 한량없는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그 (욕한) 사람이 불법(佛法)을 믿게 될 것이다 이거거든.

같이 싸우고 그랬으면 다 같이 지옥에 떨어질 텐데, 내가 거기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시비(是非)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떠억 정심(正心)으로 상대를 하고 나는 화두를 들고 최상승법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욕한) 사람이 지은 죄 만큼은 받어야 되는 거고,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도 그놈을 받고 나서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했을 때에는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그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하고.

또 내가—그렇게 비방을 하고 욕을 한 데도—동심(動心)이 안 되고 떠억 화두를 들 수 있게끔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많은 부처님과 많은 선지식에게 공양(供養)을 하고 선근(善根)을 심어 온 그 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나를 비방하고 욕한 데 마음이 동요가 안 되고 화두를 거각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잘 길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한 그런 예를 들었거려니와,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팔풍(八風) 경계, 여덟 가지 종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러한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많은 일들,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많할 것입니다마는, 이 예(例)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를 무장(武裝)하고 그러한 '이뭣고?'에 철갑과 투구로써 무장을 하고 나간다면 그 앞에 이기지, 당해낼 수 있는...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천하 간단한 무기(武器)의 하나지마는 팔만사천 마구니를 퇴치(退治)할 수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에 그러한 좋은 무기를 우리는 지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여러 도반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팔만사천 마구니를 우리가 그것으로 이겨 낼 수가 있느냐 하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거든.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이 뭣고?' 하나만 탁! 챙기면 천하 없이 무서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도 그 앞에는 무릎을 꿇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들이 나를 보호하고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깨달라서 성불(成佛)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호위병(護衛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도반들은 앞으로 어데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화두(話頭)를 드는 그 정진력(精進力)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거나 무장무애(無障無礙)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역경계(逆境界)에 처(處)하더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화두(話頭)를 들고 나아간다면 무장무애하게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에 더 분심(憤心)이 나고,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21분18초~38분35초)

 

 

 

 

(3/4)----------------

 

오늘은 백종날, '일백 백(百)' 자, '가지 종(種)' 자, 백종(百種).

백 가지의 과일과 음식으로써 부처님과 오늘 해제를 맞이한 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림으로 해서, 그 공양을 받으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위해서 그 청정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축원(祝願)을 해 주시기 때문에, 또 공양을 올린 그 공덕으로 우리의 삼악도(三惡道)에 빠져서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에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 지옥도(地獄道)에 빠져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 청제부인(靑提夫人)을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애를 썼으나 워낙 그 업(業)이 중(重)하기 때문에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그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가르켜주시라'고 간청(懇請)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백 가지 과일과 백 가지 음식으로써 오늘 해제(解制)를 맞이한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리도록 권하셨던 것입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백 가지 음식과 과일, 맛있는 공양으로써 해제를 맞이한 스님네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공덕(功德)으로 청제부인은 무서운 지옥고로부터 벗어났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因緣)으로 해서 해마다 돌아오는 해제일, 7월 15일 백중날에는 지옥(地獄)에 문(門)이 열려서 오늘 이 법당(法堂)에도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들이, 선망부모에 그 영가(靈駕)들이 어데서 무슨 고통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법회(法會)에 귀빈(貴賓)으로 초청(招請)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의 영가들도 또 이 법보전(法寶殿)에 만년위패(萬年位牌) 법보영가들과 함께 법문(法門)을 듣고 또 여러분의 정성으로 올리는 많은 과일과 음식을 공양을 받고 그리고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고 받고 있는 우리의 부모들의 얼마나 그 고통스러운가를 우리는 우리의 육안(肉眼)으로는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마는, 경전이나 또는 드라마나 그런 영화 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실지로 본 바와 다름없을 만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전이나 그런 영화에 나오는 고통은 그 일부에 지내지 않고, 정말 그 팔만사천 감옥에서 고통 받는 모냥은 우리는 차마 볼 수가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왜 그러한 고통을 받게 되느냐? 순전히 탐심(貪心) 때문입니다. 탐심, 무엇이든지 자기 욕심(欲心)을 부리는 거여.

그다음에는 진심(瞋心)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안되면은 썽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의 버릇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주장을 하다가 자기 주장대로 안되면 썽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 번 해 보고 안되고, 두 번 해 봐도 안되고, 세 번 해 봐도 안되면, '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는 것은 내 욕심대로 무엇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로구나. 내 주장만 내세우다 보니까 상대방과 부딪치게 되고 결국은 싸우게 되고 서로 감정을 사게 되는구나. 그러지 말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尊重)하고, 내 주장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양보할 중도 알고, 이렇게 해야 서로 화합(和合)이 되고 서로 마음과 마음이 합하고 힘과 힘이 합해서 어떠한 어려운 일도 성공할 수가 있겠구나' 이렇게 지혜(智慧)로운 마음을 내야 할 텐데,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러한 지혜로운 마음을 낼 줄을 모르고 끝까지 점점 고집이 세어지고 심술이 궂어지고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이 조끔도 누그러지지 않아. 그러니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衆生)이더라 그 말이여.

탐내는 마음, 썽내는 마음, 그걸 빨리 깨달을 줄을 모르고 끝까지 버릇을 못 고치니 그것이 어리석더라 그거거든.

 

그래서 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자기도 지옥고로 가고, 남도 뒤흔들어서 남에게 해독(害毒)을 끼친 그런 악한 못된 독(毒)이더라 이거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거여. 삼악도에 근본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거든.

 

선방(禪房)에서도 자기의 욕심만 챙기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고, 그래 가지고 그 안되면은 썽내고, 간 곳 마다 그러한 성질을 쓰는 사람.

가정(家庭)에서도, 가정이라는 게 참 가장 가까운 식구끼린데, 어찌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고 자기의 욕심만을 챙기고 그래 가지고는 부모자식 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부부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고부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형제자매 간에도 화합이 안되는 거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여. 관공서나 회사에서나 어느 단체 어느 모임에 가서도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되는 일이 없어.

 

국회도 마찬가지요, 정부도 마찬가이요, 당(黨)도 마찬가지요, 어떠한 친목 단체도 마찬가지여.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 옳다 그러고, 상대방의 의사를 짓밟고 업신여겨 가지고서는 잘될 수가 없어요. 큰 기업체도 그렇게 해서 망(亡)하고 큰 국가도 그렇게 해서 망(亡)하는 거야.

잘못된 것은 전부 상대방한테 몰아붙여. 여당은 야당한테 몰아붙이고 야당은 여당한테 몰아붙이지만, 책임은 각자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 집안이 화목을 찾게 되고, 국회도 정상화되고 한 당내(黨內)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여.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실천한 사람이라야 '자기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의 마음을 돌릴 때, 상대방의 마음도 누그러지고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화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단한 원리를 모른 사람이 어떻게 큰 정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대통령 선거니 무슨 지방장 선거니 그런 게 있겠습니다마는,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상대방을 역적(逆賊)으로 몰아붙이는, 이조(李朝)에 노론(老論) 소론(少論) 그런 사색정당(四色政黨)과 같은 그런 사람에게는 표를 찍어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표를 던지면 또 이조와 같이 나라를 망해 먹고, 나라를 왜(倭)놈한테 팔아넘길 수밖에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허고  사의순환기요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나무~아미타불~

금일여군도할단(今日與君都割斷)하고  출신방호장부아(出身方號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여. 한 물결이 움직이자마자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 고요한 호수에 돌맹이나 낚싯대를 한번 던져 봐라 그 말이여. 그 찰나에 수천수만의 물결이 거기서 끝없이 일어나더라.

우리가 '한 생각' 딱! 돌이키면 될 일을,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탐진치 삼독으로 뻗어나갈 때에는 온 집안을 흔들어 놓고 온 세상을 꾸정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의순환기요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그러한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를 못하고 끝없이 되풀이를 하니, 마치 개미가 쳇바퀴를 돌듯이 돌고 돌고 또 돌고 해서 한량없이 도는데 언제 끝날 기약이 없더라.

 

금년에 이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선방 · 사무실 · 후원 · 보살선방 해서 이백 명 대중(大衆)이 이렇게 지내는데, 후원에서 행자들과 또 여러 보살님네들이 모다 참 그 더위 속에서 참 많은 애를 쓰셨는데, 그러한 속에서도 서로서로 말을 조심(操心)하고 행동을 조심(操心)하고, 그 가운데에 일을 잘한 사람도 있고 또 서투른 사람도 있고 그래서, 그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석 달 동안을 그렇게 애를 쓰는 가운데에 참 많은 애를 썼지만, 서로서로 충고하고 서로서로 잘 아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켜주고 이렇게 해서 화합(和合)한 가운데 일을 잘 추려 나갔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패당(牌黨)을 지어서, '니가 잘한다, 내가 잘한다' '내 시킨 대로 해라' 자기의 주장을 앞세우고 상대방을 짓누르고,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이 석 달 동안에 무장무애하게 이렇게 해제를 맞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기의 패당(牌黨)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직접 간접으로 압박을 주고 피해를 주는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면, 한 쪽으로는 공덕(功德)을 쌓고 또 한 쪽으로는 공덕을 소멸(消滅)하는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은 공덕(功德)은 좁쌀만큼 짓고 나쁜 업(業)은 산만큼 지어서 그 지은 공덕과 악한 업을 비교하면 비교가 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와서 일을 도운답시고 같이 일하는 대중에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주어서 모처럼 신심(信心)으로 와서 일하는 사람을 그렇게 흔들어 놓고 압박을 주고, 다시 와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한다면 그 한 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무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백 명 식구를 석 달 동안 이렇게 외호(外護)를 하고 한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 봉사하는 보살도(菩薩道)를 행(行)하는 그런 원력(願力)을 가진 신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 후원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어느 선방 어느 후원이라도, 후원에서 그 겨울에는 손이 꽁꽁 얼고 발이 꽁꽁 얼고, 여름에는 아무리 씻고 옷을 갈아입어도 금방 흠뿍 젖고 몸에는 땀띠가 돋고,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말없이 원주(院主) · 별좌(別座) · 공양주(供養主) · 채공(菜供), 그밖에 여러 후원 대중들의 그런 수고가 아니고서는 그 한 철 대중이 정진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38분35초~58분19초)

 

 

 

 

(4/4)----------------

 

그래서 불법(佛法)이 있는 동안 선방(禪房)이 안 없어질 것이고, 선방이 있는 동안에는 어느 선방이나 후원에서 애쓰는 보살화현(菩薩化現)들이 없이는 선방이 잘 운영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원에서 소임(所任)을 보는 원주 스님이나 도감, 별좌나 공양주나 채공, 또 그걸 돕는 여러 자원봉사(自願奉仕)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들도 그런 긍지를 가지고 신심으로써 잘 함으로써 한량없는—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화두(話頭)를 들어야 하거든. 일하면서도 화두를 열심히 들면 남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없고, 또 누가 자기한테 '잘하네 못하네' 말을 한다고 해도 조끔도 중심(中心)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분들이나, 외호(外護)하는 대중(大衆)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입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어야 그 속에서, 선방에서 정진하는 대중 가운데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분이 나올 것이고, 후원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툭! 터지는 대중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사(佛事)인 것입니다. 불사는 자기 하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를 위한 불사여. 일체 중생(衆生)을 위한 불사이기 때문에 불사는 아상(我相)이 없어야 하고,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아상과 자존심을 버릴 때, 저 사람이 바로 나요, 내가 바로 저 사람이어서 우리가 모두 한 몸뚱이가 되는 것이고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큰 불사(佛事)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용화사(龍華寺)가 전강 조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17년이 되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불사—법당이라든지 선방이라든지 또 이 각 기타 모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이렇게 볼 수 있는 불사가 이렇게 잘 이루어지고,

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 이렇게 신도님네들이 이렇게 많이 또 이 운집(雲集)을 하게 되는 것, 또 많은 분들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고 해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을 중심으로 해서 최상승법이 온 나라에 이렇게 자꾸 선양(宣揚)이 되고 외국에까지 이렇게 자꾸 선양이 되는 것은 이것이 온통 우리 법보제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精進)을 하신, 그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모든 불사(佛事)에 동참(同參)하신 그 공덕(功德)으로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산승(山僧)은 믿고 있습니다.

 

이 살아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모셔 있는 4만7천 위(位)의 이 법보영가, 우주법계(宇宙法界)에 수없는 우리의 선망부모들도 이 법회(法會)와 불사(佛事)에 모두가 다 동참을 하실 수 있도록 항상 이 법회 때마다 그러한 영가들을 이 법회에 청(請)하는 거량(擧揚)을 한 것입니다.

이 법당에 들어온, 또 이 법당에 들어오지 못한 밖에 있는 모든 영가들도 이 법문(法門)을 듣고서 이 불사에 동참을 한 그 공덕으로 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백종날, 이 해제(解制) 법회는 다른 법회보다도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또 비명액사한 모든 영가(靈駕)들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한 그러한 법회인 것입니다.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들께서도 이 법회의 그러한 특별한 의의(意義)가 있는 법회에 대해서 깊이 인식을 하시고 앞으로 이어지는 천도 법요식(薦度法要式)에 경건하게 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삼제구심심불견(三際求心心不見)호되  양안의전대양안(兩眼依前對兩眼)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수유검각주심(不須遺劍刻舟尋)하라  설월풍화상견면(雪月風花常見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제구심심불견(三際求心心不見)이여. 과거 · 현재 · 미래, 이게 삼제(三際)인데, 과거의 마음을 구(求)해도 구할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고, 미래의 마음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어.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한 번 찾어보시라 그 말이여. 어떻게 생겼나?

암만 찾어봐도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으로도 잡을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으로도 아무리 어떻게 생겼는가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양안의전대양안(兩眼依前對兩眼)이여. 두 눈은 예나 다름없이 두 눈을 대하고 있더라.

거울을 떠억 보시라 그말이여. 거울을 따악 들여다보면 자기의 그 두 눈이 거울 속에 따악 들어 있거든. 거울 속에 들어 있는 그 두 눈이 바로 자기 두 눈에 영상(影像)이거든.

자기 두 눈을 아무리 보려고 해도, 하늘땅을 다 찾어봐도 그것은 찾을 수가 없는데, 거울을 딱 보면 그 속에 자기 두 눈이 딱! 들어 있거든.

 

그러면 거울 속에 들어 있는 그 눈이 진짜 자기 눈이냐 하면 아니여. 자기 눈에 그림자이지, 영상(影像)이지 진짜 자기 두 눈은 아니거든.

진짜 자기 두 눈은 아니지만, 자기 눈을 보려면은 거울을 보는 수밖에는 없어. 거울을 통(通)해서 자기 눈을 보는 거여.

 

거울을 딱! 보면은 자기 눈에 눈꼽이 끼인 것도 볼 수가 있고, 자기 눈이 빨갛게 충혈한 것도 볼 수가 있고, 그 거울을 가자(假藉)해서 진짜 자기 눈을 딱! 인식을 할 수가 있는 거여.

거울을 가자(假藉)하지 않고 아무리 눈을 찾어도, 땅을 파고 들어가도 그 속에는 없고, 하늘을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도 그건 없는 거다 그 말이여.

 

불수유검각주심(不須遺劍刻舟尋)이다. 잃어버린 칼을 찾기 위해서 뱃전을 찍지를 말아라.

배를 타고 가다가, 배에서 일을 하다가 칼을 잃어버렸어. '바로 여기에서 칼을 잃어버렸다' 해 가지고 그것을 표(標)하기 위해서 뱃전을 찍어서 표(標)를 하지 말아라 이거거든. 칼은 물에 빠졌는데, 그 물에 빠졌는데 뱃전에다가 표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거거든.

 

설월풍화상견면(雪月風花常見面)이여. 칼은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기 손에 들고 있거든.

자기 손에 들고 있으면서 칼을 잃어버린 줄 알고 뱃전에다가 그 칼로 '탁탁' 흠집을 내서 칼 잃어버린 자리를 표(標)를 했다면 어떻게 된 것이냐.

 

겨울이면은 펑펑 쏟아지는 흰 눈, 가을이면 휘황창 밝은 달, 여름이면 시원하게 부는 바람, 봄이면은 청황적백(靑黃赤白)으로 피는 아름다운 꽃, 설월풍화(雪月風花)를 항상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더라 그거거든.

 

겨울에 나리는 눈과 가을에 밝은 달과 여름에 부는 바람, 봄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들을 볼 때에 무엇을 봐?

 

'아! 꽃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아! 시원한 바람이 불면 '아! 시원하다'

달이 밝으면, '아! 달도 밝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아! 눈도 참 잘 쏟아진다'

 

그것을 화가(畵家)는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을 것이고, 시인(詩人)은 그것을 보고 시를 읊을 것이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보고 무엇을 해? 춤을 출까?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느니라. (58분21초~1시간13분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자소내내관원방~ /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없다 / (게송)일불이불천만불~ /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인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게송)견색비간색~ / 팔풍(八風)이 휘몰아치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팔만사천 마구니를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마구니는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다.

 

백종(百種)법회로 선망부모(先亡父母)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 /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근본. 원인 / (게송)일파자동만파수~ / 선방(禪房) 대중이나, 외호(外護) 대중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사(佛事).

 

(게송)三際求心心不見 兩眼依前對兩眼 不須遺劍刻舟尋 雪月風花常見面 /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다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다 면목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눈물 나는,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새카만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자기도 지옥고로 가고, 남도 뒤흔들어서 남에게 해독(害毒)을 끼친 그런 악한 못된 독(毒)이더라 이거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거여. 삼악도에 근본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거든.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분들이나, 외호(外護)하는 대중(大衆)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입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어야 그 속에서, 선방에서 정진하는 대중 가운데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분이 나올 것이고, 후원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툭! 터지는 대중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겨울에 나리는 눈과 가을에 밝은 달과 여름에 부는 바람, 봄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들을 볼 때에 무엇을 봐?

'아! 꽃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아! 시원한 바람이 불면 '아! 시원하다' 달이 밝으면, '아! 달도 밝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아! 눈도 참 잘 쏟아진다'

 

그것을 화가(畵家)는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을 것이고, 시인(詩人)은 그것을 보고 시를 읊을 것이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보고 무엇을 해? 춤을 출까?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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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