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92))—1986년 동안거 해제 법어(86.02.23) (40분)
(1) 약 20분.
(2) 약 20분.
(1)------------------
한서상경방대광(寒暑相更放大光)하니 막언영악조동방(莫言靈嶽照東方)하라
나무~아미타불~
일조계설대선설(一條溪舌帶宣說)헌디 하처강산부도량(何處江山不道場)고
나무~아미타불~
한서상경방대광(寒暑相更放大光)헌디, 춥고 더운 거, 겨울이 되았다 여름이 되았다 한 춥고 더운 것이 서로 바뀌되 항상 대광명(大光明)을 놓더라.
하늘에 달은 겨울이 돌아와도 밝고 여름이 돌아와도 밝고, 하늘에 해와 달은 춘하추동이 상관없이 항상 대광명을 놓더라.
그러니, 막언영악조동방(莫言靈嶽照東方)이여.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여기만 이 동방(東方)에만 햇빛이나 달빛이 비친다고 하지를 말아라.
북쪽이나 남쪽이나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해와 달은 한결같이 비추니 거기만 햇빛이나 달빛이 비친다고 하지를 말아라.
일조계설대선설(一條溪舌帶宣說)이여. 한 줄기 시냇물이 선명묘법(宣明妙法)이여. 잘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說)하더라 그 말이여. 시냇물 졸졸졸 흘러가는 그 시냇물을 혀로 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고 계신다 그 말이여.
그러니, 하처강산부도량(何處江山不道場)고. 어느 곳 어느 강산인들 도량(道場)이 아니겠느냐? 도 닦는 곳이 아니겠느냐?
이 게송은 소요(逍遙) 스님의 게송(偈頌)입니다.
오늘 을축년 삼동 결제(三冬結制) 해제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백일기도 회향(廻向) 법요식도 함께 거행이 되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오늘로 끝마치고 해제를 하게 되면, 스님네는 또 다른 선지식과 도반과 도량을 찾아서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떠나시게 됩니다. 물론 떠나지 않고 눌러서 정진하신 스님네도 계시겠지마는, 옛날부터서 해제를 하면 다 걸망을 지고 또 어느 곳 강산과 선지식과 도반을 따라서 떠나는 그러한 풍습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발걸음 디딘 곳마다, 걸망을 내려놓는 곳마다, 바로 그 곳이 도(道) 닦는 선방(禪房)이요, 도량이요,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듣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곳만이 제일 좋고 또 다른 곳은 좋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인(當人)의 신심(信心)과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천당을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육도법계(六道法界) 어디를 가든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어느 곳이라고 부처님의 설법이 없는 곳이 없고, 어느 곳이라고 해서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다 중생의 시비(是非) 분별심으로 보니까 좋고 나쁜 곳이 있고 그렇지,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버리고 취(取)할 것이 없고, 친(親)하고 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뭐 30년 만에 처음 추위라고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모질고 강추위 한 이 서해 바닷가에서 공기도 나쁘고 소음도 많고, 수용(受用)도 박(薄)하고 이러한 속에서 잘 견디면서 정진을 모다 알뜰히 해 주셨습니다.
선방(禪房) 대중스님네와 또 보살선방에 백네 분의 보살님네들이 석 달 동안을 잘 정진을 하셔서 별다른 장애없이 해제를 맞이하고, 또 결제에 방부(房付)는 안 들이셨지만 또 가정에서 분(分) 따라서 정진하신 백일기도 동참재자 여러분들, 이렇게 해서 한 철이 또 지내가고 또 병인년 새해를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들어서 편의상 '을축년이다, 병인년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였지, 해는 을축년도 동쪽에서 뜨고, 병인년에도 동쪽에서 뜹니다. 문제는 해가 뜨고 지고 할 때마다 우리는, 이 무상(無常)한 몸뚱이는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미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생사(生死)를 요달(了達)한 분상(分上)에는 죽음을 향해서 갈 것도 없고 삶을 향해서 올 것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사를 요달하지 못했으니 생각 생각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生死)가 무상한 줄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도(道)를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시고 녹야원(鹿野苑)에 가셔서 초전법문(初轉法門)을 하실 때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이 몸뚱이는 괴로운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다'
왜 괴로우냐 하면은 이 세상에 무엇이고 한 번 생겨난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고 마침내 죽게 되고 없어지게 되니,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요, 또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요, 늙은 뒤에는 또 병든 것이 괴로운 것이요, 그래 가지고 마지막에 죽어가는 것도 또한 괴로운 것이다.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 또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이 사상(四相)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이러한 흘러간 것이 하나도 괴로움 아닌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분명 괴롭다고 하는 사실에 철저하면, 무상(無常)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고, 무상을 철저히 깨달으면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도(道) 닦는 마음이 미상불(未嘗不) 간절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간절한 도 닦을 마음이 날 때에 그것을 갖다가 '발심(發心)'이라 그러는데, 발심도 여러 가지 경우에 따라서 발심이 되는데 제일 좋은 발심이 어떠한 것이냐 하면은 포구발심(怖懼發心)이다. 두렵고 무서운 발심.
생사고(生死苦), 지옥고, 그 지옥고(地獄苦)를 받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이며, 그 지옥고 받는 것에 대한 두렵고도 무서운 생각이 철저하게 나는 거, 그것이 바로 포구발심인데. 우리의 주변에서는 시시때때로 사람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들이 여기서 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강 건너 등불'로 볼 것이 아니고, '이것이 바로 나에게 염라대왕으로부터서 생사(生死)에 두려움을 깨닫게 하기 위한 그 통지(通知)해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 정든 사람이 죽으면 그것을 슬퍼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 다른 사람 죽은 것은 그 예사로 들에 한 떨기 꽃이 피었다가 진 것처럼, 또 나무가지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가 또 날아간 것처럼 보통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도살장에 가서 그 소가 죽게 되는 현장을 본다든지, 또 감옥에 가서 그 죄수들이 그 고(苦)를 받는 모습이라든지, 또 화장장에 가서 그 사람들을 갖다가 화장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그 생사의 괴로움이 어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딱! 가다듬고 보면, 구태여 도살장에나 화장장에를 가보지 안 해도 우리 눈앞에 모든 현상을 보고, 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무상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중생은 이 생사 없는 도리에서 생사(生死)를 보고, 그 생사를 보고서 무상(無常)을 깨닫고, 무상을 깨달은 그 마음으로 발심(發心)을 하고, 그래 가지고 도(道) 닦을 마음을 내서,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법문(法門)을 듣고, 이 화두(話頭)를 타서 공부를 하고—그 과정이 참 몇 고비를 거쳐서 몇 해를 걸려서 겨우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내고, 겨우 조끔 흉내를 내고 조끔 해본 척하다가 그럭저럭하다 보면 늙게 되는 것입니다.
'철 들자 죽는다'고, 그러니 바로 맨 처음에, 최초에 탁! 한마디에 그 여러 과정을 갖다가 생략을 해 버리고 한 생각 골똘하면 되는 일인데, 그렇게 여러 고비를 거쳐서 10년 20년 30년 만에 겨우 이 '참선(參禪)이 좋다' 한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오셔서 백네 분이나 이렇게 방부(房付)를 들이셨는데, 그 가운데는 벌써부터 발심을 해서 정진을 열심히 하신 보살님들도 계시겠지만,
저 지방에서 참 오랫동안 불교를 믿다가 이렇게 '참선이 좋다'고 하니까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오셔서 그 참 안 해본, 모다 이 고생을 하시면서 석 달을 지내셨는데.
화두를, 화두만이라도 옳게 들 줄 아시고 가시는지, 아직도 화두가 무엇인지, '이 뭣고?' 하면 좋다고 하니까 '이 뭣고, 이 뭣고' 도대체 '이 뭣고?'란 뜻 자체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이뭣고를 해야 그것이 참선한 것이다' 자꾸 그 흉내만 내다가 멋도 모르고 그럭저럭 이 해제를 맞이하게 되셨는데.
그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서 그 씻은 둥 만 둥 하고, 또 아침에 그 씁쓸한 김치 하나에 그저 공양(供養)을 잡숫고, 그러고 죽비(竹篦)를 치면 앉았으니 다리는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꼼짝도 못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석 달을 그럭저럭 지내셨는데.
하여칸 이 숲속에 이 원숭이란 놈이 그 참선하는 스님네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참 그 스님네 흉내를 낸 그 공덕(功德)으로 마침내는 성현(聖賢)이 된 그러한 일도 있고, 어린아이들이 그 진흙에다가 오줌을 싸서 그래 가지고 그 진흙을 버무려 가지고 부처님을 맨들기도 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는 그러한 공덕으로도 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도 하고.
그러니 직접 이렇게 '이뭣고?'가 무엇인 줄 알았든지 몰랐든지 선방(禪房)에 오셔서 석 달 동안을 같이 정진을 하시다가 그러다가 가시니, 뭐 그분이야 뭐 물어볼 것도 없이 세세생생에 삼악도(三惡道)를 면하실 것이고, 세세생생에 어디에 태어나시든지 항상 정법(正法)을 만나시게 될 것이고, 그래 가지고 반드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시게 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 시간을, 시일을 단축하는 데에는 '본인이 앞으로 얼마만큼 올바르게, 그리고 철저하게 정진을 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금생(今生)에 이룰 수도 있고, 내생(來生)에 이룰 수도 있고 또 저 내생에 낼 수도 있고, 그것은 지끔으로서는 말할 수가 없지마는, 하여칸 좋은 줄 알고 처음에는 흉내내다가 차츰차츰 한 철 두 철 하다 보면 공부하는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서 올바르게 정진을 해 간다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참선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철저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으로 올바르게만 해 나가면 이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처음~19분49초)
(2)------------------
해제(解制)를 했으니 이제 댁에로 돌아가시고 또 산철 결제에 방부를 들이신 분은 또 와서 두 달간 하시게 되겠습니다마는, 댁에 계시던지 절에 와서 방부를 들이시고 하시던지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고, 댁에서는 댁에서 대로, 또 오시는 차중(車中)에서는 차중에로, 이 도량에 들어서면 들어오신 대로, 댁에서도 공양을 잡술 때나, 손자를 갖다가 희롱하실 때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 어디서 · 무엇을 하시던지 딱!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신다면 바로 댁에 계신 그 댁이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한 생각이, 단속을 하면 도량(道場)이 되고, 한 생각을 방일(放逸)해 그냥 놓아 버리고 범연히 지내면은 그것이 해태굴(懈怠窟)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놓아 버리고 해태한 데에는 온갖 마구니가 그 틈을 타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만큼, 그 한 생각만 단속을 하시면 거기에 뭐 마구니가 들어올 수도 없고 삼재팔난(三災八難)도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댁에서 시비와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성냄, 그러한 그 중생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우(風雨), 바람 불고 비 오는 그리고 파도치는 그러한 속에서, 떠억 앉었다 섰다 누웠다 거닐다 하는 그러한 속에서 화두(話頭)를 단속하고 그 가운데 화두가 성성(惺惺)하도록 잡드리를 하신다면,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기 와서 방부를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차 소리 '뛰-' 하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바로 죽비(竹篦) 소리고, 손자가 '빽-' 하고 우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가 이 법문(法門)이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 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이라' 이리 생각하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화두를 떠억 거각을 하신다면.
또 며느리나 딸이나 손자가 할머니 말을 잘 안 듣고 뭐라고 말대꾸를 하고 그러면 속이 상하지요. 그러지마는 속상할 겨를도 없이 터억 화두를 들고 껄껄 웃으면서 그런 데에 조끔도 마음이 동요가 되지 않고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어진다면 그분이 얼마나 그 수행력이 생긴 거냐 그 말이여.
그게 바로 자기의 수행력을 그런 데에서 시험을 해 보고, 그런 데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향상되어 가는 것을 스스로 점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비구 · 비구니 모다 여러 수좌(首座) 스님네들이 원근에서 모다 정진들을 하시다가 해제라 해서 이렇게 모다 많이 모이셨는데, 스님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산철 동안, 또는 산철 결제를 하시더라도 이 산철 동안에—이제 그 추운 겨울도 지났고, 앞으로 더운 여름도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런 좋은 계절에 정말 이 마음껏 정진을 하시되, 아까 보살님네한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규범에, 엄격한 규범에 얽매이지 아니했으되 스스로 항상 근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어느 강변을 지나시든지, 어느 산기슭을 지나시든지, 어느 들녘이나 어느 산중에 처하시게 되더라도 항상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화두를 잡드리해 가신다면, 오히려 결제 중에 꼼짝달싹 못 한 그런 규칙 속에 있는 것보다도 더 정진이 활발(活潑)하게 잘 되실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자진(自進)해서 그러한 규범에 얽매이기를 바래고, 그런 규범 속에서 모두가 함께 규칙 생활을 함으로써 스스로 항상 잠깐 동안도 방일(放逸)을 하지 않도록 그러자고 결제(結制)를 하고 이렇게 모다 방부를 들이고 그렇게 지내고는 있습니다마는,
참으로 공부에 득력(得力)을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힘을 더는 경계(境界)라면 그 동서남북 어데를 가시나 걸림이 없을 것이고,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운주천무동(雲走天無動)이요 주행안불이(舟行岸不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시무일물(本是無一物)인디 하처기환비(何處起歡悲)리오
나무~아미타불~
운주천무동(雲走天無動)이요 주행안불이(舟行岸不移)로다.
구름이 달아나되, 구름이 계속 바람에 날려서 구름이 달아난 것이지 하늘이 움직인 것이 아니여. 그런데 어떻게 잘못 보면 구름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계속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하늘에 달이 떴는데, 구름이 막 바람에 지내가는데 구름이 지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달이 계속 달아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또 배가 강(江)에서 강을 타고 막 지내가면, 어떻게 잘못 보면 배가 가는 것이 아니라 양쪽 언덕이 기슭이 계속 달음박질을 친 것처럼 보이거든.
구름이 달아나되 하늘이 움직인 것이 아니고, 배가 달릴지언정 양쪽 언덕이 움직인 것이 아니여.
본시무일물(本是無一物)이여.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하처기환비(何處起歡悲)리오. 어느 곳에 기쁘고 슬플 것이 있느냐.
사업이 흥(興)하고 또 새 아들이나 손자가 태어나고 또 모다 그렇게 되면 모다 다 기뻐서 모다 어쩔 줄을 모르다가, 사업이 여의치 못해서 손해를 보거나, 또 사람이 아퍼서 죽거나, 내가 소원한 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모다 슬퍼하는데, 이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죠.
기쁜 일을 당하면 기뻐하고, 슬픈 일을 당하면 슬퍼한 것 그 자체가 꼭 그것이 나쁜 일이라 한 것도 아니고, 기쁜 일을 당하는데 슬퍼하고, 사람이 죽어서 야단인데 거기서 손뼉을 치고 웃고 그러라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좋다 나쁘다' '슬프다 기쁘다'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客觀的) 상황이기는 하지만, 좀더 근원(根源)에 돌아가서 보면 모든 것이 다 그 주관(主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사(生死)의 현장에서, 모든 생멸(生滅)의 상황 속에서 근본의 이치(理致)로써 관조(觀照)하면 그것이 봄 되았다 여름 되았다 가을 되았다 겨울이 되고, 겨울이 되았다가 다시 또 새봄이 돌아온 것과 같애서, 거기에 무슨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조끔도 없는 것이지마는,
근본을 떠나서 현상에만, 일어나는 모든 현상계에만 치우쳐서 생각하면 참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너무너무 슬프고 괴로운 일이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는 이 사바세계에 와야 도를 바르게 닦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모든 언짢은 그런 일들에서 우리는 그 슬프고 괴로운 일에 빠져 가지고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데에만 근치지 말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하고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契機)로 삼아 나가고, 그런 계기로 우리가 해서 향상(向上)되어 갈 수 있는 발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말세(末世)라 하고 그거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하는 이 사바세계가 정말 도처(到處)가 선지식이고, 도처가 불보살이고, 도처가 살아 있는 수도(修道)에 도장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해제와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지난 석 달, 지나간 석 달을 회고(回顧)해 보고 스스로 부족하고 미흡한 점은 잘 반성을 해서 오늘 이후의 자기의 생활과 정진에 그것을 반영을 해서 새로운 발전과 향상이 되도록 그렇게 살려 나가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말 불법(佛法)은 슬픔에서 오히려 발심을 하고, 괴로운 일에서 오히려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가 있도록,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참 좋은 거 같습니다.
이 불법을 모르는 사람은 조그마한 슬픔을 통해서 큰 슬픔으로 빠지게 되고, 조그마한 괴로움과 노여움을, 그것을 거기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그것으로 해서 큰 재앙을, 스스로 재앙의 구뎅이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빠져서 더욱 불행하게 되어 가는데,
이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명두래명두타(明頭來明頭打) 암두래암두타(暗頭來暗頭打), 밝은 놈이 오면 밝은 놈에서 어두운 놈이 오면 어두운 놈에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놈을 막 잡어서 쓰고, 어떠한 역경계(逆境界)에서도 거기에 넘어지지 않고 바로 거기서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얻어 나갈 수가 있어서,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참 좋은 거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최상승법을 믿음으로 해서 인생의 그 지긋지긋한 슬픔과 괴로움의 구렁텡이에서 용케도 거기에 붙잽히고 거기에 빠지지 않고 거기서 뛰쳐나와 가지고 새로운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신 분이 상당히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역경(逆境)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고, 오히려 거기를 잘 살려 나갈 수 있게 되니,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닦아감으로 해서 자기만 행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아는 모든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까지도 모두 다 말 없는 가운데에 포교(布敎)를 하시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로 맞이한 이 병인년을 맞이해서 지난 한 해보다도 훨씬 더 큰 비약과 발전이 있기를 바라고, 이 백일기도 회향에 여러분의 과거에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消滅)이 되시고 또 소원을 성취하시기를 빌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이여. 한 움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다 걸어 둔다.
수영버들이, 그 실 수영버들이 여러 가지가 해가지고 바람에 자꾸 휘날리니까, 그것을 어떻게 이렇게 거두어 잡지를 못해서 그냥 옥난간에,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다가 걸어 둔다. (19분53초~39분32초) (끝)
[법문 내용]
(게송)한서상경방대광~ / 당인(當人)에 신심(信心)과 마음가짐에 따라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 / 생사를 요달하지 못하면 생각 생각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 /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 / 간절한 도 닦을 마음이 날 때에 그것을 갖다가 '발심(發心)'이라 그러고, 제일 좋은 발심은 포구발심(怖懼發心), 두렵고 무서운 발심 / 우리 주변에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들이 바로 염라대왕(閻羅大王)의 편지 / 철저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으로 올바르게만 해 나가면 이건 갈 곳이 없는 것.
한 생각 단속(團束)을 하면 선방(禪房), 도량(道場)이 된다 / (게송)운주천무동~ / 도(道)는 이 사바세계에 와야 도를 바르게 닦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 / 불법(佛法)은 슬픔에서, 괴로운 일에서 오히려 발심을 할 수가 있도록 한다 / (게송)일파유조수부득 화풍탑재옥난간.
〇어디를 가시든지 발걸음 디딘 곳마다, 걸망을 내려놓는 곳마다, 바로 그 곳이 도(道) 닦는 선방(禪房)이요, 도량이요,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듣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곳만이 제일 좋고 또 다른 곳은 좋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인(當人)에 신심(信心)과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천당(天堂)을 가거나 지옥(地獄)에 가거나 육도법계(六道法界) 어디를 가든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어느 곳이라고 부처님의 설법(說法)이 없는 곳이 없고, 어느 곳이라고 해서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다 중생(衆生)의 시비(是非) 분별심(分別心)으로 보니까 좋고 나쁜 곳이 있고 그렇지, 부처님의 진리(眞理)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버리고 취(取)할 것이 없고, 친(親)하고 먼 것이 없는 것입니다.
〇사람이 들어서 편의상 '을축년이다, 병인년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였지, 해는 을축년도 동쪽에서 뜨고, 병인년에도 동쪽에서 뜹니다. 문제는 해가 뜨고 지고 할 때마다 우리는, 이 무상(無常)한 몸뚱이는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미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생사(生死)를 요달(了達)한 분상(分上)에는 죽음을 향해서 갈 것도 없고 삶을 향해서 올 것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사를 요달하지 못했으니 생각 생각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도(道)를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하여칸 이 숲속에 이 원숭이란 놈이 그 참선하는 스님네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참 그 스님네 흉내를 낸 그 공덕(功德)으로 마침내는 성현(聖賢)이 된 그러한 일도 있고, 어린아이들이 그 진흙에다가 오줌을 싸서 그래 가지고 그 진흙을 버무려 가지고 부처님을 맨들기도 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는 그러한 공덕으로도 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도 하고.
그러니 직접 이렇게 '이뭣고?'가 무엇인 줄 알았든지 몰랐든지 선방(禪房)에 오셔서 석 달 동안을 같이 정진을 하시다가 그러다가 가시니, 뭐 그분이야 뭐 물어볼 것도 없이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악도(三惡道)를 면(免)하실 것이고, 세세생생에 어디에 태어나시든지 항상 정법(正法)을 만나시게 될 것이고, 그래 가지고 반드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시게 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〇언제 · 어디서 · 무엇을 하시던지 딱!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신다면 바로 댁에 계신 그 댁이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한 생각이, 단속(團束)을 하면 도량(道場)이 되고, 한 생각을 방일(放逸)해 그냥 놓아 버리고 범연(氾然)히 지내면은 그것이 해태굴(懈怠窟)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놓아 버리고 해태한 데에는 온갖 마구니가 그 틈을 타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만큼, 그 한 생각만 단속을 하시면 거기에 뭐 마구니가 들어올 수도 없고 삼재팔난(三災八難)도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차 소리 '뛰-' 하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바로 죽비(竹篦) 소리고, 손자가 '빽-' 하고 우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가 이 법문(法門)이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 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이라' 이리 생각하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화두를 떠억 거각을 하신다면.
〇모든 생사(生死)의 현장에서, 모든 생멸(生滅)의 상황 속에서 근본의 이치(理致)로써 관조(觀照)하면 그것이 봄 되았다 여름 되았다 가을 되았다 겨울이 되고, 겨울이 되았다가 다시 또 새봄이 돌아온 것과 같애서, 거기에 무슨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조끔도 없는 것이지마는, 근본을 떠나서 현상에만, 일어나는 모든 현상계에만 치우쳐서 생각하면 참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너무너무 슬프고 괴로운 일이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는 이 사바세계에 와야 도를 바르게 닦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모든 언짢은 그런 일들에서 우리는 그 슬프고 괴로운 일에 빠져 가지고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데에만 근치지 말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하고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契機)로 삼아 나가고, 그런 계기로 우리가 해서 향상(向上)되어 갈 수 있는 발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말세(末世)라 하고 그거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하는 이 사바세계가 정말 도처(到處)가 선지식(善知識)이고, 도처가 불보살(佛菩薩)이고, 도처가 살아 있는 수도(修道)에 도장(道場)이 될 것입니다.
〇불법을 모르는 사람은 조그마한 슬픔을 통해서 큰 슬픔으로 빠지게 되고, 조그마한 괴로움과 노여움을, 그것을 거기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그것으로 해서 큰 재앙을, 스스로 재앙의 구뎅이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빠져서 더욱 불행하게 되어 가는데,
이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명두래명두타(明頭來明頭打) 암두래암두타(暗頭來暗頭打), 밝은 놈이 오면 밝은 놈에서 어두운 놈이 오면 어두운 놈에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놈을 막 잡어서 쓰고, 어떠한 역경계(逆境界)에서도 거기에 넘어지지 않고 바로 거기서 새로운 지혜(智慧)와 용기(勇氣)를 얻어 나갈 수가 있어서,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참 좋은 거 같습니다.
〇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이여. 한 움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다 걸어 둔다.
수영버들이, 그 실 수영버들이 여러 가지가 해가지고 바람에 자꾸 휘날리니까, 그것을 어떻게 이렇게 거두어 잡지를 못해서 그냥 옥난간에,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다가 걸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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