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76~300)2023. 4. 16. 21:06

 

 

(No.286)—1985년(을축년) 성도재법회(85.12.08.음) (43분)

 

약 43분.


약문여래본기인(若問如來本起因)인댄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여래(如來)가 본래 일어나는 인연을 물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본래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여래가 본래 일어나는 것, 여래(如來)는 부처님인데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부처님이 아니라, 본래 오시되 오신 바가 없고 가시되 가신 바가 없는 그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이여.
그 '본래 법신으로서의 그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그 도리를 물을 거 같으면,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여. 그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면 벌써 천진(天眞)을 상실(喪失)한다.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원상이다. 원래 둥그런 것이다.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이요, 모든 부처도 서로 보지를 못하고 가섭도 전할 수가 없다.
원상(圓相)이니 비원상(非圓相)이니 벌써 그것을 표하면, 그렇게 해서 표적을 하면 벌써 무명(無明)의 함정에 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여. 벌써 그것을 깨달랐느니 못 깨달랐느니, 무엇을 일러서 깨달랐다. 깨달라서 부처가 되고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나왔다느니 벌써 깨달랐다고 이르면 벌써 누진(漏塵)에 떨어진 것을 면치를 못할 것이다.


오늘은 을축년(乙丑年)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입니다.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어떻게 하면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느냐?' 그 생사해탈하는 그 길을 깨닫기 위해서 훌륭하다는 여러 스승을 찾았습니다.
찾아가서 그 스승 밑에 수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단 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의 인가를 받고 그 스승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법을 이어받을 것을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으로써 만족하시지 않고 그것이 구경(究竟)에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더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또 그 스승 밑에 가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또 도를 수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많은 스승을 찾았고 수없이 많은 스승을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히말라야 산속에 찾어볼 만한 모든 스승을 다 찾어보고 다 해봤지만 그것으로써 마침내 만족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 앉아서 「내가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에는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한 그런 서약을 하고서, 결심을 하고서 스스로 도(道) 닦는 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욕개지식문전로(欲開只識門前路)인대는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인디  고금의쇄기다인(古今疑殺幾多人)고
나무~아미타불~

문 앞에 길, 문 앞에 길. 집집마다 자기 집 문 앞에서 시작한 길이 모두가 다 장안(長安)으로 통하는 것이여. 서울로 다 통해.
어느 깊은 산골짜구, 어느 촌에 있는 조그만한 오두막살이라 하더라도 문밖에 나가면 그 길이 결국은 상감마마가 계신 서울로 통하는 길인데, 그 길이 결국은 어디로 가던지 통하지만 가장 바로 가는 길,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른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돌아서 가기로 하면 북쪽에 있는 서울을 가는데 남쪽으로 가더라도 저리 저리 돌고 돌아서 간다면 못 갈 배는 아니지만,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좋은 길은 그 많은 길 가운데에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여. 온 몸뚱이가 전신이 다 이 병(病)이요, 전체가 다 이 약(藥)이다 그 말이여.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이여. 온 세계가 전부가 참[眞]이요, 온 세계가 바로 띠끌[塵]이더라.
길, 길이 다—서울을 바로 안다면 어디를 어느 곳을 향해서 가거나 서울로 통하는 것이고, 잘못 가면 어디를 가나 그 길이 전부가 다 잘못된 길이여.

이 바른길을 알기 위해서 깨달음을 향해서 수많은 남녀노소가 이 깨달음을 향해서 길을 찾고 있는데, 그 자기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하고 고생을 하고—말을 아니한다든지, 밥을 굶는다던지, 잠을 안 잔다던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한다던지, 참 그 애쓰는 모습도 가지가지고 방법도 천 가지 만 가지지만, 이것이 모다 그 바른길을 찾기 위한 한 몸부림이고 애쓰는 것이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또는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 때문에 깨달음을 찾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걸 의심하다가 죽었느냐?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면 더 나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을까?' 이래 가지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한량없는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불(佛), 부처님과 조사의 편안한 집이요, 모든 성현에 걸어가는 길이요, 한량없는 중생이 떠받드는 바고, 만세(萬世)에 향해 나갈 길이고, 삼계(三界)에 근본이여.
근본이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그것 때문에 출세(出世)하셨고, 그것 때문에 법(法)을 전하고 받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그 한 일을 위해서 출가도 했고, 그 한 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이 추위에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또 법회에 참석을 하시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그랬어. 꼭두각시의 근원이다.
어째서 ‘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꼭둑각시, 몽환(夢幻)의 근원이냐 하면 그 여읠 것을 여의어 버리면, 그 환상이라 하는 것을 여의어 버리면, 참으로 바로 여의어 버리면 환(幻) 위에다가 무슨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세울 것이냐? 또 그 보내 버릴 것을 보내 버리면 공(空) 가운데에 다시 공(空)을 용납할 것이 있겠느냐?

우리가 번뇌와 망상, 모든 그런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버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 버릴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새로운 번뇌가 일어나고 새로운 몽환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여. 또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그런 번뇌와 망상을 보내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진공(眞空)으로 맨들려고 비울려고 하기 때문에 그 비울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오히려 비지를 못해.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망상을 버릴려고 하다가 새로운 망상을 일으키게 되고, 우리의 마음을 비게 할라다가 오히려 공(空) 가운데에 새로운 공(空)이라고 하는 소견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은 애써서 도를 닦고 애써서 정진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바른길을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버릴려고 애쓰다가 새로운 번뇌 속에 파묻히게 되고, 마음을 비울려고 하다가 오히려 마음은 비기 커녕은 점점 무서운 망상을 생각 속에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을 깨끗이 할려고 하다가 깨끗이 할려고 하면서 그 흙탕물이 빨리 말가지게 하기를 바랜 사람이 자꾸 진흙을 타면서 내휘저은 거와 같애. 차라리 가만 놔두면 그 제절로 말개질 텐데 빨리 말개지기를 바래 가지고 자꾸 손을 넣어서 휘저으면 점점 흙탕물만 더 일어나고 마는 것이여.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그러다 보면 온갖 망상도 일어나고 혼침도 오고 그러지만, 그 망상이니 혼침이니 그런 것을 애써서 없앨려고 하지 말고 자꾸 화두(話頭)만을 들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꾸 화두만을 들어.

앉아서도 화두(話頭)를 들고 서서도 화두를 들고, 포행(布行)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앉아서 하다가 혼침이 오면 포행을 하면서 하고, 포행을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아서 하고.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들 줄 알면 무슨 깨달음을 빨리 얻기를 바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성화댈 필요도 없고, 망상을 버릴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하는 것이여.

번뇌가 일어나도 그 번뇌를 '일어난다'고 짜증을 낸다든지, '이 망상 번뇌 때문에 이거 공부를 못한다' 그런 생각을 추호도 낼 필요가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처꺽 거각(擧却)하면 일어났던 망상이 뿌리가 없는 것이라 찰나간에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거여.
없앨려고 하면은 무장 일어나고, 없앨라고 하는 생각 없이 화두(話頭)만을 들면 망상은 제절로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온갖 방편을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 오히려 몸만 쇠약하게 맨들고, 정신만 무장 이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점점 조급해지고, 조급해질수록 마음은 더 안정이 안 되고, 마음이 안정이 안 되니 몸은 점점 쇠약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한 철, 두 철, 세 철, 네 철 하다 보면 아무 까닭도 없이 몸이 차츰차츰 쇠약해지고 그래 가지고 정진을 하는 데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이여. 이것이 정진을 바로 해 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

모든 방편, 또 모든 망상 이런 것들을 그 처리할 줄만 안다면 그 일어나거나 말거나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망상이 일어나고 주변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을 한다 하더라도, 크고 작은 시비(是非)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내가 그것을 잘 처리만 할 수 있다면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여.
바람 부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나, 나의 주변에 시비가 일어난 것이나 조끔도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바람 부는 소리에 퍼뜩 깨달라 화두를 들고, 새 우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들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챙긴다면 그런 바람 불고 새 울고 물 흘러가고, 주변에서 '잘했네 못했네' 시비가 일어난 것이 안 일어난 것보단 오히려 더 무방하다 그 말이여.
혼침에 빠져서 그렇게 지낼 것을, 그런 시비(是非)와 사건이 좀 일어남으로 해서 거기서 정신을 가다듬고 또 정진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없는 것보단 낫다.

이렇게 해서 밝은 일을 당하면은 바로 밝은 놈으로 돌이키고, 어두운 일을 당하면 어두운 놈에서 바로 돌이키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간다면 마침내는 모든 번뇌와 망상, 일체 시비 사건이 제절로 다 자취가 없어.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하셨는데,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돌을 가리켜서 이것이 옥이다 하면 바로 그것이 옥이 되는 것[指石爲玉]‘이고, '쇠를 점쳐서 금을 이룬다[點鐵成金]', 무쇠 덩어리를 보고 이것이 금이다 하면 그것이 황금덩어리가 되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계제(階梯)가 없어. 차례차례 일 계단, 이 계단 올라가는 그 계제가 없는 가운데에 계제가 있고, 점차(漸次)가 없는 가운데에 점차가 있는 것입니다.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정말 간절히 알뜰하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

닦을 것이 있고,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리킬 수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지만, 부처님과 조사들은 그렇게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중생(衆生)을 가리키셨고, 모든 우리의 선배들은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곳을 향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습니다.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을축년 납월팔일(臘月八日)에 맞이해서 우리 사부대중은 다시 새로운 분심(憤心)과 발심(發心)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갈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돌아오는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우리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법회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동안에 어린이 법회를 해서 처음에 삼사십 명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칠팔십 명, 백 명, 백오십 명 이렇게 해서 나날이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불어나서 참 그 어린이들이 환희심을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고,
어린이 법회를 갖기 전에는 '부모님이 절에 그렇게 다니시는데 뭣 하러 다니는가? 왜 가는가?' 아무 뜻도 모르고 '불교라 하면은 미신'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종교를 믿는 학생들이 '불교는 미신이다, 사탄이다' 이렇게 해서 놀려대니까 거기에 말 한마디 대답을 못하고 어디 가서 '부처님 믿는다' 소리 하는 것을 매우 챙피하게 그렇게 생각을 해 왔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린이 법회를 시작해서 일 년, 이태 이렇게 되니까 어린이들이 우리 부모님이 불교를 믿고 자기도 불교를 믿게 된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학년이 높아져 가지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또 이렇게 올라가게 됩니다.
중학생이 되어 가지고 또 어린이 법회에 나와서 그 어린이들하고 같이 그 참석하기가 좀 계면쩍고, 그렇다고 해서 가고 싶은데 적당한 데가 없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여러 신도님으로부터서 말씀을 듣고 진즉부터 생각해 오다가 금년 새해부터서는 그래서 그 중고등학생 법회를 용화사에서도 갖기로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해 가지고 다음 달 2월부터서는 중고등학생 법회를 창설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니 그동안에 그 어린이 법회에 나오다가 이제 중학생으로 올라간 사람, 또 진즉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러한 자녀분을 가지신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께서는 법회에 그 자녀들로 하여금 참석을 해서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는 왜 훌륭한 종교며, 불교를 믿으면 결국 어떠한 목적에 이를 수가 있는가?' 이런 것을 알고, 어릴 때부터서 알면서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 훌륭한 청신사(淸信士)가 청신녀(淸信女)가 되도록 한다면—그 자녀들에게 재산이나 모다 그런 것을 많이 물려준 것으로써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재산은 별로 물려준 것이 없지만 「바로 사는 길」을 가리켜 주고,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준다면 돈 몇 억, 뭐 재산 준 것에다 대겠습니까? 재산이라 한 것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단시일 내에 그걸 참 없애 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재산이 많다고만 해서 꼭 행복하다고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자식이 불행해진 예도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게 할려면 입으로 "불교 믿으라, 불교 믿으라. 불교를 믿어야 한다" 자꾸 입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다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불교를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해서 '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불교를 믿으시더니 저렇게 참 행복해지시고 저렇게 훌륭해지셨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께서 불교를 믿으시더니 어느 누구의 부모보다도 더 훌륭하시고 참 좋으시다.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버지처럼 불교를 믿고 나도 바른길을 알아서 정말 행복한 삶을 영위해야겠다' 그러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해 주시라 이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금생에, 금생—‘금생’이라 하니까 '앞으로 20년 30년 내지 50년 60년 살다가 죽은, 죽은 그때까지를 금생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당일념(當一念)을 단속하지 아니하면은 바로 그 당념(當念) 일초 후에는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지금 일념을 단속하지 아니하면 다음 일념이 무엇이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
이 몸뚱이 죽은 뒤에 지옥에 간 것은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건 내생 일이니까 지금 알 수가 없고, 당장 지금 이 한 생각 단속하지 아니하면 일 초 훗일이 참 삼악도(三惡途) 갈 것밖에는 더 있느냐 그 말이여.

그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4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약문여래본기인~ /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신,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게송) 욕개지식문전로~ / 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깨달음 때문에 출세(出世)하셨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 정진(精進)은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다 /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해야.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야 /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