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여래(如來)가 본래 일어나는 인연을 물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본래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여래가 본래 일어나는 것, 여래(如來)는 부처님인데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부처님이 아니라, 본래 오시되 오신 바가 없고 가시되 가신 바가 없는 그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이여. 그 '본래 법신으로서의 그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그 도리를 물을 거 같으면,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여. 그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면 벌써 천진(天眞)을 상실(喪失)한다.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원상이다. 원래 둥그런 것이다.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이요, 모든 부처도 서로 보지를 못하고 가섭도 전할 수가 없다. 원상(圓相)이니 비원상(非圓相)이니 벌써 그것을 표하면, 그렇게 해서 표적을 하면 벌써 무명(無明)의 함정에 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여. 벌써 그것을 깨달랐느니 못 깨달랐느니, 무엇을 일러서 깨달랐다. 깨달라서 부처가 되고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나왔다느니 벌써 깨달랐다고 이르면 벌써 누진(漏塵)에 떨어진 것을 면치를 못할 것이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어떻게 하면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느냐?' 그 생사해탈하는 그 길을 깨닫기 위해서 훌륭하다는 여러 스승을 찾았습니다. 찾아가서 그 스승 밑에 수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단 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의 인가를 받고 그 스승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법을 이어받을 것을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으로써 만족하시지 않고 그것이 구경(究竟)에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더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또 그 스승 밑에 가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또 도를 수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많은 스승을 찾았고 수없이 많은 스승을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히말라야 산속에 찾어볼 만한 모든 스승을 다 찾어보고 다 해봤지만 그것으로써 마침내 만족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 앉아서 「내가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에는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한 그런 서약을 하고서, 결심을 하고서 스스로 도(道) 닦는 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문 앞에 길, 문 앞에 길. 집집마다 자기 집 문 앞에서 시작한 길이 모두가 다 장안(長安)으로 통하는 것이여. 서울로 다 통해. 어느 깊은 산골짜구, 어느 촌에 있는 조그만한 오두막살이라 하더라도 문밖에 나가면 그 길이 결국은 상감마마가 계신 서울로 통하는 길인데, 그 길이 결국은 어디로 가던지 통하지만 가장 바로 가는 길,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른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돌아서 가기로 하면 북쪽에 있는 서울을 가는데 남쪽으로 가더라도 저리 저리 돌고 돌아서 간다면 못 갈 배는 아니지만,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좋은 길은 그 많은 길 가운데에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여. 온 몸뚱이가 전신이 다 이 병(病)이요, 전체가 다 이 약(藥)이다 그 말이여.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이여. 온 세계가 전부가 참[眞]이요, 온 세계가 바로 띠끌[塵]이더라. 길, 길이 다—서울을 바로 안다면 어디를 어느 곳을 향해서 가거나 서울로 통하는 것이고, 잘못 가면 어디를 가나 그 길이 전부가 다 잘못된 길이여.
이 바른길을 알기 위해서 깨달음을 향해서 수많은 남녀노소가 이 깨달음을 향해서 길을 찾고 있는데, 그 자기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하고 고생을 하고—말을 아니한다든지, 밥을 굶는다던지, 잠을 안 잔다던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한다던지, 참 그 애쓰는 모습도 가지가지고 방법도 천 가지 만 가지지만, 이것이 모다 그 바른길을 찾기 위한 한 몸부림이고 애쓰는 것이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또는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 때문에 깨달음을 찾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걸 의심하다가 죽었느냐?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면 더 나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을까?' 이래 가지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한량없는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불(佛), 부처님과 조사의 편안한 집이요, 모든 성현에 걸어가는 길이요, 한량없는 중생이 떠받드는 바고, 만세(萬世)에 향해 나갈 길이고, 삼계(三界)에 근본이여. 근본이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그것 때문에 출세(出世)하셨고, 그것 때문에 법(法)을 전하고 받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그 한 일을 위해서 출가도 했고, 그 한 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이 추위에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또 법회에 참석을 하시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그랬어. 꼭두각시의 근원이다. 어째서 ‘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꼭둑각시, 몽환(夢幻)의 근원이냐 하면 그 여읠 것을 여의어 버리면, 그 환상이라 하는 것을 여의어 버리면, 참으로 바로 여의어 버리면 환(幻) 위에다가 무슨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세울 것이냐? 또 그 보내 버릴 것을 보내 버리면 공(空) 가운데에 다시 공(空)을 용납할 것이 있겠느냐?
우리가 번뇌와 망상, 모든 그런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버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 버릴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새로운 번뇌가 일어나고 새로운 몽환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여. 또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그런 번뇌와 망상을 보내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진공(眞空)으로 맨들려고 비울려고 하기 때문에 그 비울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오히려 비지를 못해.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망상을 버릴려고 하다가 새로운 망상을 일으키게 되고, 우리의 마음을 비게 할라다가 오히려 공(空) 가운데에 새로운 공(空)이라고 하는 소견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은 애써서 도를 닦고 애써서 정진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바른길을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버릴려고 애쓰다가 새로운 번뇌 속에 파묻히게 되고, 마음을 비울려고 하다가 오히려 마음은 비기 커녕은 점점 무서운 망상을 생각 속에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을 깨끗이 할려고 하다가 깨끗이 할려고 하면서 그 흙탕물이 빨리 말가지게 하기를 바랜 사람이 자꾸 진흙을 타면서 내휘저은 거와 같애. 차라리 가만 놔두면 그 제절로 말개질 텐데 빨리 말개지기를 바래 가지고 자꾸 손을 넣어서 휘저으면 점점 흙탕물만 더 일어나고 마는 것이여.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그러다 보면 온갖 망상도 일어나고 혼침도 오고 그러지만, 그 망상이니 혼침이니 그런 것을 애써서 없앨려고 하지 말고 자꾸 화두(話頭)만을 들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꾸 화두만을 들어.
앉아서도 화두(話頭)를 들고 서서도 화두를 들고, 포행(布行)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앉아서 하다가 혼침이 오면 포행을 하면서 하고, 포행을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아서 하고.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들 줄 알면 무슨 깨달음을 빨리 얻기를 바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성화댈 필요도 없고, 망상을 버릴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하는 것이여.
번뇌가 일어나도 그 번뇌를 '일어난다'고 짜증을 낸다든지, '이 망상 번뇌 때문에 이거 공부를 못한다' 그런 생각을 추호도 낼 필요가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처꺽 거각(擧却)하면 일어났던 망상이 뿌리가 없는 것이라 찰나간에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거여. 없앨려고 하면은 무장 일어나고, 없앨라고 하는 생각 없이 화두(話頭)만을 들면 망상은 제절로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온갖 방편을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 오히려 몸만 쇠약하게 맨들고, 정신만 무장 이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점점 조급해지고, 조급해질수록 마음은 더 안정이 안 되고, 마음이 안정이 안 되니 몸은 점점 쇠약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한 철, 두 철, 세 철, 네 철 하다 보면 아무 까닭도 없이 몸이 차츰차츰 쇠약해지고 그래 가지고 정진을 하는 데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이여. 이것이 정진을 바로 해 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
모든 방편, 또 모든 망상 이런 것들을 그 처리할 줄만 안다면 그 일어나거나 말거나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망상이 일어나고 주변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을 한다 하더라도, 크고 작은 시비(是非)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내가 그것을 잘 처리만 할 수 있다면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여. 바람 부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나, 나의 주변에 시비가 일어난 것이나 조끔도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바람 부는 소리에 퍼뜩 깨달라 화두를 들고, 새 우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들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챙긴다면 그런 바람 불고 새 울고 물 흘러가고, 주변에서 '잘했네 못했네' 시비가 일어난 것이 안 일어난 것보단 오히려 더 무방하다 그 말이여. 혼침에 빠져서 그렇게 지낼 것을, 그런 시비(是非)와 사건이 좀 일어남으로 해서 거기서 정신을 가다듬고 또 정진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없는 것보단 낫다.
이렇게 해서 밝은 일을 당하면은 바로 밝은 놈으로 돌이키고, 어두운 일을 당하면 어두운 놈에서 바로 돌이키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간다면 마침내는 모든 번뇌와 망상, 일체 시비 사건이 제절로 다 자취가 없어.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하셨는데,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돌을 가리켜서 이것이 옥이다 하면 바로 그것이 옥이 되는 것[指石爲玉]‘이고, '쇠를 점쳐서 금을 이룬다[點鐵成金]', 무쇠 덩어리를 보고 이것이 금이다 하면 그것이 황금덩어리가 되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계제(階梯)가 없어. 차례차례 일 계단, 이 계단 올라가는 그 계제가 없는 가운데에 계제가 있고, 점차(漸次)가 없는 가운데에 점차가 있는 것입니다.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정말 간절히 알뜰하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
닦을 것이 있고,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리킬 수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지만, 부처님과 조사들은 그렇게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중생(衆生)을 가리키셨고, 모든 우리의 선배들은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곳을 향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습니다.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을축년 납월팔일(臘月八日)에 맞이해서 우리 사부대중은 다시 새로운 분심(憤心)과 발심(發心)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갈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돌아오는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우리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법회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동안에 어린이 법회를 해서 처음에 삼사십 명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칠팔십 명, 백 명, 백오십 명 이렇게 해서 나날이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불어나서 참 그 어린이들이 환희심을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고, 어린이 법회를 갖기 전에는 '부모님이 절에 그렇게 다니시는데 뭣 하러 다니는가? 왜 가는가?' 아무 뜻도 모르고 '불교라 하면은 미신'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종교를 믿는 학생들이 '불교는 미신이다, 사탄이다' 이렇게 해서 놀려대니까 거기에 말 한마디 대답을 못하고 어디 가서 '부처님 믿는다' 소리 하는 것을 매우 챙피하게 그렇게 생각을 해 왔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린이 법회를 시작해서 일 년, 이태 이렇게 되니까 어린이들이 우리 부모님이 불교를 믿고 자기도 불교를 믿게 된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학년이 높아져 가지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또 이렇게 올라가게 됩니다. 중학생이 되어 가지고 또 어린이 법회에 나와서 그 어린이들하고 같이 그 참석하기가 좀 계면쩍고, 그렇다고 해서 가고 싶은데 적당한 데가 없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여러 신도님으로부터서 말씀을 듣고 진즉부터 생각해 오다가 금년 새해부터서는 그래서 그 중고등학생 법회를 용화사에서도 갖기로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해 가지고 다음 달 2월부터서는 중고등학생 법회를 창설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니 그동안에 그 어린이 법회에 나오다가 이제 중학생으로 올라간 사람, 또 진즉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러한 자녀분을 가지신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께서는 법회에 그 자녀들로 하여금 참석을 해서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는 왜 훌륭한 종교며, 불교를 믿으면 결국 어떠한 목적에 이를 수가 있는가?' 이런 것을 알고, 어릴 때부터서 알면서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 훌륭한 청신사(淸信士)가 청신녀(淸信女)가 되도록 한다면—그 자녀들에게 재산이나 모다 그런 것을 많이 물려준 것으로써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재산은 별로 물려준 것이 없지만 「바로 사는 길」을 가리켜 주고,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준다면 돈 몇 억, 뭐 재산 준 것에다 대겠습니까? 재산이라 한 것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단시일 내에 그걸 참 없애 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재산이 많다고만 해서 꼭 행복하다고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자식이 불행해진 예도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게 할려면 입으로 "불교 믿으라, 불교 믿으라. 불교를 믿어야 한다" 자꾸 입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다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불교를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해서 '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불교를 믿으시더니 저렇게 참 행복해지시고 저렇게 훌륭해지셨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께서 불교를 믿으시더니 어느 누구의 부모보다도 더 훌륭하시고 참 좋으시다.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버지처럼 불교를 믿고 나도 바른길을 알아서 정말 행복한 삶을 영위해야겠다' 그러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해 주시라 이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금생에, 금생—‘금생’이라 하니까 '앞으로 20년 30년 내지 50년 60년 살다가 죽은, 죽은 그때까지를 금생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당일념(當一念)을 단속하지 아니하면은 바로 그 당념(當念) 일초 후에는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지금 일념을 단속하지 아니하면 다음 일념이 무엇이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 이 몸뚱이 죽은 뒤에 지옥에 간 것은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건 내생 일이니까 지금 알 수가 없고, 당장 지금 이 한 생각 단속하지 아니하면 일 초 훗일이 참 삼악도(三惡途) 갈 것밖에는 더 있느냐 그 말이여.
그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4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약문여래본기인~ /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신,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게송) 욕개지식문전로~ / 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깨달음 때문에 출세(出世)하셨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 정진(精進)은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다 /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해야.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야 /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〇부처님께서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〇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〇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〇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〇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투득(透得)해 버리면 산하대지가 넓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댄, 인간의 분별 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 같으면, 녹수(綠水)와 청산(靑山)에 어찌 구애(拘礙)를 받을 것인가.
중생은 자기 본마음 자리를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이 넓고 넓은 산하대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 육도법계(六道法界)가 온통 다 자기의 집이요 한마당이건만, 자기의 본 마당, 본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자기의 분별 경계에 떨어져 가지고 거기에 취사(取捨)와 집착(執着)이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어. 어디를 가나 편안치를 못하고, 어디를 가나 걸리고 몸 둘 곳이 없어.
한바탕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확연히 깨달아버리면 천당과 지옥도 걸릴 것이 없고, 인간의 부귀와 영화와 시시비비(是是非非)에도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을축년(乙丑年) 시월 15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청풍납자(淸風衲子)가 사방에서 모여서 한철을 한 지붕 밑에서, 한 도량에서 정진을 하게 되었고 또 보살선원에도 경향 각지에서 백 명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고락(苦樂)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을 해 가면 공기가 탁하고, 공장과 자동차에 모든 소음이 이렇게 심하고, 또 수용이 박(薄)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할지라도 ‘한 생각’ 철저해 버리면 그런 것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돈독(敦篤)하고 철저하지 못하면 눈으로 보는 거, 귀로 듣는 거, 사사건건 걸리게 되고 내가 거기에 끌려 나가고,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내게 되고, 아무 일도 아닌 일에 마음이 동요가 될 것입니다.
온 세계는 그 자체가 낱낱이 자성(自性)이 있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생각’이 발로(發露)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인 것입니다. 하늘에 달이 떴으되 달 자체가 ‘내가 달이다’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고, 하물며 ‘나는 밝다. 밝지 못하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한 생각은 더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달 자체는 때에 따라서 둥글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캄캄하게 안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는 전혀 그런 상(相)이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서, 내가 들어서 온갖 분별심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대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둥글다, 밝다’ 모두 이리 분별을 내서,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백 명 대중이 한 방에 모여서 석 달 동안을 지낼 때에 한 생각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철저히 단속하지 못한다면 그 백 명 대중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 누군가는 마음이 동요가 되고, 한 사람 동요됨으로 해서 그 방에 여러 사람이 속이 불편해질 것이고 이리해서 바람 잘 날이 없어.
그래서 몽산(蒙山) 스님께서 결제 법문에 말씀을 하시기를,[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만약 이 도량에 와 가지고 함께 이 고요함을 함께 하고자 할진댄, 참선 정진을 하고자 할진대는 세상에 인연을 다 끊어 버리고, 집착과 거꾸러진 그런 생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진실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 생사대사만을 위해서 선원에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인사(人事)로 왕래하는 거, 인사로 왕래하는 그 인사를 끊어 버리고 모든 수용은 인연 따라서 해. 밥이면 밥, 죽이면 죽, 반찬이 좋으면 좋은 대로, 짜면 짠 대로 인연 따라서 수용을 하되, 아홉 시부터서 세 시까지 삼경(三更) 동안을 제외하고는 수면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문밖에 거리에 나가지를 말 것이며, 밖에서 어떤 신도가 공양을 청(請)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말 것이며,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전에는 경(經)도 보지 말 것이며, 대중적인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경도 보지를 말아라. 이와 같이 여법(如法)하게 3년을 정진을 하되 견성(見性)을 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여러 대중을 대신해서 지옥을 가겠다’ 이렇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3년, 10년 내지 30년을 정진을 하되 확철대오를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여법하게 정말 생사대사를 위해서 잠깐 동안도 한눈 팔 겨를이 없고, 잠깐 동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 오직 이 한 생각 화두에 대한 의심, 그 한 생각 돈독함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히 그렇게 알뜰히 그렇게 해서 3년을 한다면 반드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한 말씀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보증하신 그러한 표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디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路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 철 두 철 하다 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17분47초)
『화엄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그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서 남쪽으로 일백십성(一百十城)을 향해 가면서 차례차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친견했습니다.
한 선지식 친견하고 거기서 법문을 듣고 그리고 또 거기서 마음에 얻은 바가 있어. 그다음에 그 선지식이 또 그다음 선지식을 소개를 하면 또 그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선지식 밑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승사(承嗣)를 해서 그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거기서 또 얻은 바가 있어.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53선지식을 친견해 나가는 데 그 53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 스님도 있고, 신(神)들도 있고, 외도도 있고, 창녀도 있고, 보살도 있고, 동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선지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위법망구적으로 친견하고 승사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53선지식한테 배운 들은 깨달은 법문을 조옥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고대로 가슴에 간직을 하고 마지막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륵보살을 친견해서 미륵보살이 손 한번 탁! 튕기는 바람에 53선지식한테 들은 모든 법문을 일시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을 해라. 맨 처음에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해라” 한 말씀을 듣고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리라’ 하고 마음을 먹자마자, 문수보살이 저 먼 일백십성이나 멀리 떨어진 그 문수보살이 오른손을 터억 뻗쳐 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만져 주셨습니다.
만지시면서 “선재선재(善哉善哉)라, 착하고 착하구나! 네가 철저한 신근(信根)이 없었다면, 53선지식을 그렇게 아무 딴 퇴타심(退墮心)이 없이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그렇지 못했으면 조금 얻은 것으로 해서 만족을 삼아 가지고 중단을 했을 것이며, 조금 얻은 것으로써 거기에 집착을 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해탈과 선지식의 섭호(攝護)한 바가 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문수보살(선재동자)은 확철대오를 해서 문수보살과 같이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모든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삼독(三毒)이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변했으며, 육식(六識)이 육신통(六神通)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역력(歷歷),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그 말이여. 역력해서 빈주(賓主)를 여의었어. ‘주관 객관, 너다 내다’ 하는 그러한 마음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여. 적적요요(寂寂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모든 ‘색상(色相)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이다’ 그런 색공의 견해도 다 끊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하라. 우리 눈앞에 형단(形段)이 없으되—볼라야 볼 수도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이놈이 분명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알라야 알 수 없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古人)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은 우뚝 백운(白雲) 가운데 섰느니라.(처음~27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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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경(涅槃經)』에 나온 말씀인데,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共同墓地), 묘지 곁에다가 집을 짓고 사는 데 밤에 어디서 소리가 들리기를 자꾸 자기 이름을 불러 싸. ‘어디서 들리는고?’ 하고 가만히 귀를 종그리고 그 소리 나는 쪽을 가 보니까 무덤, 묘지 속에서 소리가 난다 그 말이여. 그래서 공포심이 발칵 나면서 그냥 거기서 물러나왔어. 그 다음날 저녁에도 밤만 깊어지면 무덤 속에서 또 자기를 불러. 그래서 또 겁이 잔뜩 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그 이튿날 날이 새 가지고 그 마을에 담력(膽力)이 센 사람, 용기가 있는 사람한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아! 밤만 되면 무덤 속에서 소리가 나고 나를 불러 싸니 이것 참 무서워서 혼이 났다” 그러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한번 오늘 저녁에는 가봐야겠다” 그 무덤 옆에 집에 가 가지고 그날 저녁에 가만히 그 무덤 옆에 가까이 가서 있으니까, 아! 소리가 난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소리 나는 무덤 있는 데로 가니까 그 속에서 말을 하기를 “나는 이 땅속에 묻혀 있는 황금 덩어리다. 그러니 내가 이 황금 덩어리를 너에게 주고자 하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집안 소지(掃地)를 깨끗이 하고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그리고서 그 방에다가 맑은 물을 여덟 그릇을 떠다 놓고 또 죽을 잘 쒀서 여덟 그릇을 따악 갖다가 놓고서 기다려라. 그러면 먹물 옷 입은 스님이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 스님을 네 방으로 모셔 들여 가지고 그 물과 죽을 대접을 해라. 공양을 해라. 그러면 그 스님들이 그 물과 죽을 맛있게 잡술 테니 그러고 난 다음에 방을 여덟 개 칸으로 막아 가지고 한 칸 한 칸에다가 그 스님을 딱 모셔라. 모시고서 문을 딱 잠가 놓으면 그 스님들이 바로 황금으로 변해 가지고, 항아리 속에 황금이 가뜩 담아진 것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인자 그렇게 약속을 하고 그 이튿날 시키는 대로 그대로 따악 했습니다.
사시(巳時)가 되니까 스님네들이 주욱 여덟 분이 오는데 준비해 놓은 방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죽 공양을 다 잡숫고 물을 잡숫고 난 다음에 여덟 칸 방에다가 한 칸, 한 칸 안내를 해서 모셔 놓고 문을 딱 잠갔는데,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스님은 간 곳이 없고 칸칸이 항아리 속에 황금이 담뿍담뿍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마을 사람이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마치 흥부가 제비 다리를 짬매서 날려보내 가지고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놀부가 성한 제비를 뚜드려 잡아 가지고 그 부자가 되려고 하듯이, 그 어리석은 사람이 집에다가 죽을 쒀서 여덟 그릇을 해 놓고 물을 뜨고 해 놓고는 며칠을 기다리니까, 마치 탁발(托鉢)하는 스님이 여덟 분이 오니까 그분을 초청을 해서 그 죽과 물을 공양(供養)을 올리고는 다짜고짜로 여덟 칸에다 갖다가 넣고 문을 잠가 놓으니까, 그 스님은 뭣도 모르고 죽을 먹고서 강제로 구금(拘禁)을 당해서 아무리 문을 따 달라고 해도 문을 따 주지 않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문을 박차고 나오고 하는 바람에 그래 가지고는 관가에까지 알려져 가지고, 그 사람이 성스러운 스님을 갖다가 이유 없이 감금을 시켰다 하는 죄목으로 엄하게 취조를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그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살던 그 사람도 ‘그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또 그렇게 해서 스님을 여덟 분을 초청을 해다가 또 죽을 공양을 올리고 또 칸칸이 여덟 분을 따악 닫어 놓고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아! 항아리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요리 내다보니까, 아! 혀를 널름널름 하는 큰 구렁이가 항아리마다 들어있어 가지고 노려보면서 물라고 달라들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도망을 쳤는데.
이러한 소식이 그 나라 임금님한테 들려 가지고, 임금님이 불법(佛法)을 믿는 그러한 훌륭한 임금이었던지 거기서 죄인들을 불러다 놓고 또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다 불러다 놓고 그리고서 훈계(訓戒)를 했습니다.
“목욕재계를 하고 죽과 물을 떠다가 스님네를 갖다가 공양을 올리고 또 별실에다가 모신 외면상의 행동은 세 사람이 다 똑같았지만, 맨 처음에 그 사람은 용기가 없었고, 용기가 없고 겁약한 사람이 욕심만 있었기 때문에 자기는 그 황금을 얻지를 못했고. 다음에사 욕심만 치성해 가지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 남의 본(本)을 따 가지고 황금만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렁이한테 물리게 되고, 중간 사람은 분(分)에 없는—용기 있는 사람이 그 황금을 얻은 것을 보고, 욕심을 가지고 멀쩡한 스님을 갖다가 죽 한 그릇 먹여서 때려 가둬 가지고 황금을 얻으려고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벌을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다. 용기를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목적 달성을 하기 위해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저렇게 황금을 얻었다. 도를 닦는 데에 있어서도,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은 어느 사람이 그것이 없겠느냐. 첫째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생사 문제, 육신의 생명을 바치고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의 말씀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낱낱이 다 ‘불법을 믿고 참선 수행을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리라’ 그러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법망구적인 그런 대용맹지(大勇猛志)가 없어 가지고서는 이 일은 성취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성(一百十城)을 넘으면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생각 퇴전(退轉)함이 없이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승사(承嗣)를 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信心)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분심(憤心) 용맹심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에 갖추어질 것입니다.
한 생각 진실하다면 성도 다르고, 연령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팔도에서 운집(雲集)한 선객(禪客) 스님네나 보살선방의 여러 보살님네들은 하등에 걸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성격을 가진 분하고도 아무 장애가 없이, 간격이 없이 화합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적응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더 발심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더 분심을 낼 수가 있을 것이고, 더 철저한 간절한 의단이 독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인(古人)네들, 과거에 모든 불보살들, 순경계(順境界)에서 보단 역경계(逆境界)에서 다 대사(大事)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순경계는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빠져들어가고, 속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그런 역경계에서 오히려 더 용기와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독로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업(道業)이 증장을 하게 되고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 큰 사업을 이룬 사업가들도 그러한 수많은 역경계를 굴복함으로써 그러한 대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간 날씨는 엄동설한 움츠려들고, 그 추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禮佛)하고, 십악참회(十惡懺悔)하고 그리고 입선(入禪)을 하고 또 각기 소임에 따라서 소임을 맡아서 행할 때에 문자 그대로 고행(苦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는 허락이 되지를 않습니다. 선원의 규칙에 따라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잠깐 비끄러지면 화두도 놓쳐 버리고 번뇌와 망상과 잡념에 부린 바가 되어서 그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경계가 무너져 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 업(業)의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결제에 들어가면 앞으로 석 달간 아무 장애 없이 하루같이 알뜰하게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또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비록 선방에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댁에 계실지언정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생활 그것이 선방(禪房)이요, 가족이 도반(道伴)이요, 이웃이 도반이라 생각하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부처님이요, 귀로 듣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요, 선지식의 법문이다.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장소는 선방이요 그 시간은 입선(入禪) 시간이다’ 이리 생각하고, 선방에 방부 들인 여러 대중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하신다면 오히려 가정에 계시고, 밖에 속세에 계신 분이 더 힘있고 철저한 정진을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시비해리(是非海裏)에 횡신입(橫身入)이다. 시비(是非)—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그러한 온갖 시비의 바다 속에, 전체가 중생 사는 데는 시비 아닌 것이 없고 전체가 다 시비요 차별이기 때문에 ‘바다’라 하는 거요. 그 시비(是非)의 바다 속에 몸을 비켜서 들어가. 사람이 많이 꽉 들어찰 때에는 이렇게 정면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 몸을 이렇게 비끼고, 이렇게 삐지고 들어가듯이 시비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삐지고 들어가며,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여. 표범과 범이 떼를 이루고 있는 그 속을 갖다가 그 가운데를 자재(自在)하게 나아간다 그 말이여.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네가 잘하고 내가 못한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곳은 밝고 저곳은 어둡다, 이것은 짜고 저것은 싱겁다’ 전부가 다 중생의 인아(人我)로 인한, 인아—‘너[人]와 나[我]’라고 하는 그런 시비의 바다 속에, 그 시비가 바로 그것이 호랑이요 표범인 것입니다. 그 속에 그것을 피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몸을 삐지고 막 적극적으로 그 속을 향해서 간다 그 말이여.
시비를 잡아서 나에게 와서 가리지를 말아라.(莫把是非來辨我) 나한테는 그까짓 시비를, 이러쿵저러쿵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이여. 나는 그까짓 시비를 평생 천착(穿鑿)을 하지 않노라.(平生穿鑿不相關) 그건 내가 따지지 않는다 그 말이여. 시비 속에 마구 들어가서 시비를 막 잡아서 내가 막 요리를 해버리고, 시비를 여의지 않고 시비 속에서 바로 화두(話頭)의 의단(疑團)을 가지고 막 삐지고 들어가는데 시비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이러한 기개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셔서 일생 동안 여태까지 정진한 가운데, ‘금년 삼동(三冬)이 가장 뜻있는 가장 보람 있는 한철이 되고, 금년 삼동에 정말 일대사(一大事)를 갖다가 해결하고야만 말리라’ 한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부탁을 드리고 맺고자 합니다.(27분53초~50분40초)(끝)
[법문 내용]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하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법문.
〇용화선원(龍華禪院) 가풍(家風) 「언제나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선재동자가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철저한 신근(信根),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이다 / (게송)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 / 대의지하 필유대오.
〇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 '용기'에 대한 비유 설화.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〇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성(一百十城)을 넘으면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생각 퇴전(退轉)함이 없이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승사(承嗣)를 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信心)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분심(憤心) 용맹심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에 갖추어질 것입니다.
〇고인(古人)네들, 과거에 모든 불보살들, 순경계(順境界)에서 보단 역경계(逆境界)에서 다 대사(大事)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순경계는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빠져들어가고, 속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그런 역경계에서 오히려 더 용기와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독로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업(道業)이 증장을 하게 되고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〇한 생각 잠깐 비끄러지면 화두도 놓쳐 버리고 번뇌와 망상과 잡념에 부린 바가 되어서 그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경계가 무너져 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 업(業)의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〇‘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서상경방대광(寒暑相更放大光)헌디, 춥고 더운 거, 겨울이 되았다 여름이 되았다 한 춥고 더운 것이 서로 바뀌되 항상 대광명(大光明)을 놓더라. 하늘에 달은 겨울이 돌아와도 밝고 여름이 돌아와도 밝고, 하늘에 해와 달은 춘하추동이 상관없이 항상 대광명을 놓더라.
그러니, 막언영악조동방(莫言靈嶽照東方)이여.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여기만 이 동방(東方)에만 햇빛이나 달빛이 비친다고 하지를 말아라. 북쪽이나 남쪽이나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해와 달은 한결같이 비추니 거기만 햇빛이나 달빛이 비친다고 하지를 말아라.
일조계설대선설(一條溪舌帶宣說)이여. 한 줄기 시냇물이 선명묘법(宣明妙法)이여. 잘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說)하더라 그 말이여. 시냇물 졸졸졸 흘러가는 그 시냇물을 혀로 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고 계신다 그 말이여. 그러니, 하처강산부도량(何處江山不道場)고. 어느 곳 어느 강산인들 도량(道場)이 아니겠느냐? 도 닦는 곳이 아니겠느냐?
이 게송은 소요(逍遙) 스님의 게송(偈頌)입니다.
오늘 을축년 삼동 결제(三冬結制) 해제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백일기도 회향(廻向) 법요식도 함께 거행이 되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오늘로 끝마치고 해제를 하게 되면, 스님네는 또 다른 선지식과 도반과 도량을 찾아서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떠나시게 됩니다. 물론 떠나지 않고 눌러서 정진하신 스님네도 계시겠지마는, 옛날부터서 해제를 하면 다 걸망을 지고 또 어느 곳 강산과 선지식과 도반을 따라서 떠나는 그러한 풍습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발걸음 디딘 곳마다, 걸망을 내려놓는 곳마다, 바로 그 곳이 도(道) 닦는 선방(禪房)이요, 도량이요,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듣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곳만이 제일 좋고 또 다른 곳은 좋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인(當人)의 신심(信心)과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천당을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육도법계(六道法界) 어디를 가든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어느 곳이라고 부처님의 설법이 없는 곳이 없고, 어느 곳이라고 해서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다 중생의 시비(是非) 분별심으로 보니까 좋고 나쁜 곳이 있고 그렇지,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버리고 취(取)할 것이 없고, 친(親)하고 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뭐 30년 만에 처음 추위라고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모질고 강추위 한 이 서해 바닷가에서 공기도 나쁘고 소음도 많고, 수용(受用)도 박(薄)하고 이러한 속에서 잘 견디면서 정진을 모다 알뜰히 해 주셨습니다. 선방(禪房) 대중스님네와 또 보살선방에 백네 분의 보살님네들이 석 달 동안을 잘 정진을 하셔서 별다른 장애없이 해제를 맞이하고, 또 결제에 방부(房付)는 안 들이셨지만 또 가정에서 분(分) 따라서 정진하신 백일기도 동참재자 여러분들, 이렇게 해서 한 철이 또 지내가고 또 병인년 새해를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들어서 편의상 '을축년이다, 병인년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였지, 해는 을축년도 동쪽에서 뜨고, 병인년에도 동쪽에서 뜹니다. 문제는 해가 뜨고 지고 할 때마다 우리는, 이 무상(無常)한 몸뚱이는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미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생사(生死)를 요달(了達)한 분상(分上)에는 죽음을 향해서 갈 것도 없고 삶을 향해서 올 것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사를 요달하지 못했으니 생각 생각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生死)가 무상한 줄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도(道)를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도를 깨달으시고 녹야원(鹿野苑)에 가셔서 초전법문(初轉法門)을 하실 때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이 몸뚱이는 괴로운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다' 왜 괴로우냐 하면은 이 세상에 무엇이고 한 번 생겨난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고 마침내 죽게 되고 없어지게 되니,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요, 또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요, 늙은 뒤에는 또 병든 것이 괴로운 것이요, 그래 가지고 마지막에 죽어가는 것도 또한 괴로운 것이다.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 또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이 사상(四相)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이러한 흘러간 것이 하나도 괴로움 아닌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분명 괴롭다고 하는 사실에 철저하면, 무상(無常)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고, 무상을 철저히 깨달으면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도(道) 닦는 마음이 미상불(未嘗不) 간절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간절한 도 닦을 마음이 날 때에 그것을 갖다가 '발심(發心)'이라 그러는데, 발심도 여러 가지 경우에 따라서 발심이 되는데 제일 좋은 발심이 어떠한 것이냐 하면은 포구발심(怖懼發心)이다. 두렵고 무서운 발심. 생사고(生死苦), 지옥고, 그 지옥고(地獄苦)를 받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이며, 그 지옥고 받는 것에 대한 두렵고도 무서운 생각이 철저하게 나는 거, 그것이 바로 포구발심인데. 우리의 주변에서는 시시때때로 사람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들이 여기서 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강 건너 등불'로 볼 것이 아니고, '이것이 바로 나에게 염라대왕으로부터서 생사(生死)에 두려움을 깨닫게 하기 위한 그 통지(通知)해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 정든 사람이 죽으면 그것을 슬퍼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 다른 사람 죽은 것은 그 예사로 들에 한 떨기 꽃이 피었다가 진 것처럼, 또 나무가지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가 또 날아간 것처럼 보통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도살장에 가서 그 소가 죽게 되는 현장을 본다든지, 또 감옥에 가서 그 죄수들이 그 고(苦)를 받는 모습이라든지, 또 화장장에 가서 그 사람들을 갖다가 화장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그 생사의 괴로움이 어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딱! 가다듬고 보면, 구태여 도살장에나 화장장에를 가보지 안 해도 우리 눈앞에 모든 현상을 보고, 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무상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중생은 이 생사 없는 도리에서 생사(生死)를 보고, 그 생사를 보고서 무상(無常)을 깨닫고, 무상을 깨달은 그 마음으로 발심(發心)을 하고, 그래 가지고 도(道) 닦을 마음을 내서,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법문(法門)을 듣고, 이 화두(話頭)를 타서 공부를 하고—그 과정이 참 몇 고비를 거쳐서 몇 해를 걸려서 겨우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내고, 겨우 조끔 흉내를 내고 조끔 해본 척하다가 그럭저럭하다 보면 늙게 되는 것입니다.
'철 들자 죽는다'고, 그러니 바로 맨 처음에, 최초에 탁! 한마디에 그 여러 과정을 갖다가 생략을 해 버리고 한 생각 골똘하면 되는 일인데, 그렇게 여러 고비를 거쳐서 10년 20년 30년 만에 겨우 이 '참선(參禪)이 좋다' 한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오셔서 백네 분이나 이렇게 방부(房付)를 들이셨는데, 그 가운데는 벌써부터 발심을 해서 정진을 열심히 하신 보살님들도 계시겠지만, 저 지방에서 참 오랫동안 불교를 믿다가 이렇게 '참선이 좋다'고 하니까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오셔서 그 참 안 해본, 모다 이 고생을 하시면서 석 달을 지내셨는데.
화두를, 화두만이라도 옳게 들 줄 아시고 가시는지, 아직도 화두가 무엇인지, '이 뭣고?' 하면 좋다고 하니까 '이 뭣고, 이 뭣고' 도대체 '이 뭣고?'란 뜻 자체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이뭣고를 해야 그것이 참선한 것이다' 자꾸 그 흉내만 내다가 멋도 모르고 그럭저럭 이 해제를 맞이하게 되셨는데. 그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서 그 씻은 둥 만 둥 하고, 또 아침에 그 씁쓸한 김치 하나에 그저 공양(供養)을 잡숫고, 그러고 죽비(竹篦)를 치면 앉았으니 다리는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꼼짝도 못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석 달을 그럭저럭 지내셨는데.
하여칸 이 숲속에 이 원숭이란 놈이 그 참선하는 스님네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참 그 스님네 흉내를 낸 그 공덕(功德)으로 마침내는 성현(聖賢)이 된 그러한 일도 있고, 어린아이들이 그 진흙에다가 오줌을 싸서 그래 가지고 그 진흙을 버무려 가지고 부처님을 맨들기도 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는 그러한 공덕으로도 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도 하고.
그러니 직접 이렇게 '이뭣고?'가 무엇인 줄 알았든지 몰랐든지 선방(禪房)에 오셔서 석 달 동안을 같이 정진을 하시다가 그러다가 가시니, 뭐 그분이야 뭐 물어볼 것도 없이 세세생생에 삼악도(三惡道)를 면하실 것이고, 세세생생에 어디에 태어나시든지 항상 정법(正法)을 만나시게 될 것이고, 그래 가지고 반드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시게 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 시간을, 시일을 단축하는 데에는 '본인이 앞으로 얼마만큼 올바르게, 그리고 철저하게 정진을 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금생(今生)에 이룰 수도 있고, 내생(來生)에 이룰 수도 있고 또 저 내생에 낼 수도 있고, 그것은 지끔으로서는 말할 수가 없지마는, 하여칸 좋은 줄 알고 처음에는 흉내내다가 차츰차츰 한 철 두 철 하다 보면 공부하는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서 올바르게 정진을 해 간다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참선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철저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으로 올바르게만 해 나가면 이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처음~19분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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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解制)를 했으니 이제 댁에로 돌아가시고 또 산철 결제에 방부를 들이신 분은 또 와서 두 달간 하시게 되겠습니다마는, 댁에 계시던지 절에 와서 방부를 들이시고 하시던지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고, 댁에서는 댁에서 대로, 또 오시는 차중(車中)에서는 차중에로, 이 도량에 들어서면 들어오신 대로, 댁에서도 공양을 잡술 때나, 손자를 갖다가 희롱하실 때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 어디서 · 무엇을 하시던지 딱!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신다면 바로 댁에 계신 그 댁이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한 생각이, 단속을 하면 도량(道場)이 되고, 한 생각을 방일(放逸)해 그냥 놓아 버리고 범연히 지내면은 그것이 해태굴(懈怠窟)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놓아 버리고 해태한 데에는 온갖 마구니가 그 틈을 타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만큼, 그 한 생각만 단속을 하시면 거기에 뭐 마구니가 들어올 수도 없고 삼재팔난(三災八難)도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댁에서 시비와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성냄, 그러한 그 중생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우(風雨), 바람 불고 비 오는 그리고 파도치는 그러한 속에서, 떠억 앉었다 섰다 누웠다 거닐다 하는 그러한 속에서 화두(話頭)를 단속하고 그 가운데 화두가 성성(惺惺)하도록 잡드리를 하신다면,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기 와서 방부를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차 소리 '뛰-' 하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바로 죽비(竹篦) 소리고, 손자가 '빽-' 하고 우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가 이 법문(法門)이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 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이라' 이리 생각하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화두를 떠억 거각을 하신다면. 또 며느리나 딸이나 손자가 할머니 말을 잘 안 듣고 뭐라고 말대꾸를 하고 그러면 속이 상하지요. 그러지마는 속상할 겨를도 없이 터억 화두를 들고 껄껄 웃으면서 그런 데에 조끔도 마음이 동요가 되지 않고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어진다면 그분이 얼마나 그 수행력이 생긴 거냐 그 말이여. 그게 바로 자기의 수행력을 그런 데에서 시험을 해 보고, 그런 데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향상되어 가는 것을 스스로 점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비구 · 비구니 모다 여러 수좌(首座) 스님네들이 원근에서 모다 정진들을 하시다가 해제라 해서 이렇게 모다 많이 모이셨는데, 스님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산철 동안, 또는 산철 결제를 하시더라도 이 산철 동안에—이제 그 추운 겨울도 지났고, 앞으로 더운 여름도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런 좋은 계절에 정말 이 마음껏 정진을 하시되, 아까 보살님네한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규범에, 엄격한 규범에 얽매이지 아니했으되 스스로 항상 근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어느 강변을 지나시든지, 어느 산기슭을 지나시든지, 어느 들녘이나 어느 산중에 처하시게 되더라도 항상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화두를 잡드리해 가신다면, 오히려 결제 중에 꼼짝달싹 못 한 그런 규칙 속에 있는 것보다도 더 정진이 활발(活潑)하게 잘 되실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자진(自進)해서 그러한 규범에 얽매이기를 바래고, 그런 규범 속에서 모두가 함께 규칙 생활을 함으로써 스스로 항상 잠깐 동안도 방일(放逸)을 하지 않도록 그러자고 결제(結制)를 하고 이렇게 모다 방부를 들이고 그렇게 지내고는 있습니다마는, 참으로 공부에 득력(得力)을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힘을 더는 경계(境界)라면 그 동서남북 어데를 가시나 걸림이 없을 것이고,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운주천무동(雲走天無動)이요 주행안불이(舟行岸不移)로다. 구름이 달아나되, 구름이 계속 바람에 날려서 구름이 달아난 것이지 하늘이 움직인 것이 아니여. 그런데 어떻게 잘못 보면 구름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계속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하늘에 달이 떴는데, 구름이 막 바람에 지내가는데 구름이 지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달이 계속 달아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또 배가 강(江)에서 강을 타고 막 지내가면, 어떻게 잘못 보면 배가 가는 것이 아니라 양쪽 언덕이 기슭이 계속 달음박질을 친 것처럼 보이거든. 구름이 달아나되 하늘이 움직인 것이 아니고, 배가 달릴지언정 양쪽 언덕이 움직인 것이 아니여.
본시무일물(本是無一物)이여.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하처기환비(何處起歡悲)리오. 어느 곳에 기쁘고 슬플 것이 있느냐.
사업이 흥(興)하고 또 새 아들이나 손자가 태어나고 또 모다 그렇게 되면 모다 다 기뻐서 모다 어쩔 줄을 모르다가, 사업이 여의치 못해서 손해를 보거나, 또 사람이 아퍼서 죽거나, 내가 소원한 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모다 슬퍼하는데, 이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죠. 기쁜 일을 당하면 기뻐하고, 슬픈 일을 당하면 슬퍼한 것 그 자체가 꼭 그것이 나쁜 일이라 한 것도 아니고, 기쁜 일을 당하는데 슬퍼하고, 사람이 죽어서 야단인데 거기서 손뼉을 치고 웃고 그러라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좋다 나쁘다' '슬프다 기쁘다'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客觀的) 상황이기는 하지만, 좀더 근원(根源)에 돌아가서 보면 모든 것이 다 그 주관(主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사(生死)의 현장에서, 모든 생멸(生滅)의 상황 속에서 근본의 이치(理致)로써 관조(觀照)하면 그것이 봄 되았다 여름 되았다 가을 되았다 겨울이 되고, 겨울이 되았다가 다시 또 새봄이 돌아온 것과 같애서, 거기에 무슨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조끔도 없는 것이지마는, 근본을 떠나서 현상에만, 일어나는 모든 현상계에만 치우쳐서 생각하면 참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너무너무 슬프고 괴로운 일이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는 이 사바세계에 와야 도를 바르게 닦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모든 언짢은 그런 일들에서 우리는 그 슬프고 괴로운 일에 빠져 가지고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데에만 근치지 말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하고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契機)로 삼아 나가고, 그런 계기로 우리가 해서 향상(向上)되어 갈 수 있는 발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말세(末世)라 하고 그거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하는 이 사바세계가 정말 도처(到處)가 선지식이고, 도처가 불보살이고, 도처가 살아 있는 수도(修道)에 도장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해제와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지난 석 달, 지나간 석 달을 회고(回顧)해 보고 스스로 부족하고 미흡한 점은 잘 반성을 해서 오늘 이후의 자기의 생활과 정진에 그것을 반영을 해서 새로운 발전과 향상이 되도록 그렇게 살려 나가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말 불법(佛法)은 슬픔에서 오히려 발심을 하고, 괴로운 일에서 오히려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가 있도록,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참 좋은 거 같습니다. 이 불법을 모르는 사람은 조그마한 슬픔을 통해서 큰 슬픔으로 빠지게 되고, 조그마한 괴로움과 노여움을, 그것을 거기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그것으로 해서 큰 재앙을, 스스로 재앙의 구뎅이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빠져서 더욱 불행하게 되어 가는데, 이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명두래명두타(明頭來明頭打) 암두래암두타(暗頭來暗頭打), 밝은 놈이 오면 밝은 놈에서 어두운 놈이 오면 어두운 놈에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놈을 막 잡어서 쓰고, 어떠한 역경계(逆境界)에서도 거기에 넘어지지 않고 바로 거기서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얻어 나갈 수가 있어서,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참 좋은 거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최상승법을 믿음으로 해서 인생의 그 지긋지긋한 슬픔과 괴로움의 구렁텡이에서 용케도 거기에 붙잽히고 거기에 빠지지 않고 거기서 뛰쳐나와 가지고 새로운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신 분이 상당히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역경(逆境)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고, 오히려 거기를 잘 살려 나갈 수 있게 되니,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닦아감으로 해서 자기만 행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아는 모든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까지도 모두 다 말 없는 가운데에 포교(布敎)를 하시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로 맞이한 이 병인년을 맞이해서 지난 한 해보다도 훨씬 더 큰 비약과 발전이 있기를 바라고, 이 백일기도 회향에 여러분의 과거에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消滅)이 되시고 또 소원을 성취하시기를 빌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이여. 한 움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다 걸어 둔다.
수영버들이, 그 실 수영버들이 여러 가지가 해가지고 바람에 자꾸 휘날리니까, 그것을 어떻게 이렇게 거두어 잡지를 못해서 그냥 옥난간에,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다가 걸어 둔다. (19분53초~39분32초) (끝)
[법문 내용]
(게송)한서상경방대광~ / 당인(當人)에 신심(信心)과 마음가짐에 따라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 / 생사를 요달하지 못하면 생각 생각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 /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 / 간절한 도 닦을 마음이 날 때에 그것을 갖다가 '발심(發心)'이라 그러고, 제일 좋은 발심은 포구발심(怖懼發心), 두렵고 무서운 발심 / 우리 주변에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들이 바로 염라대왕(閻羅大王)의 편지 / 철저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으로 올바르게만 해 나가면 이건 갈 곳이 없는 것.
한 생각 단속(團束)을 하면 선방(禪房), 도량(道場)이 된다 / (게송)운주천무동~ / 도(道)는 이 사바세계에 와야 도를 바르게 닦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 / 불법(佛法)은 슬픔에서, 괴로운 일에서 오히려 발심을 할 수가 있도록 한다 / (게송)일파유조수부득 화풍탑재옥난간.
〇어디를 가시든지 발걸음 디딘 곳마다, 걸망을 내려놓는 곳마다, 바로 그 곳이 도(道) 닦는 선방(禪房)이요, 도량이요,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듣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곳만이 제일 좋고 또 다른 곳은 좋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인(當人)에 신심(信心)과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천당(天堂)을 가거나 지옥(地獄)에 가거나 육도법계(六道法界) 어디를 가든지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어느 곳이라고 부처님의 설법(說法)이 없는 곳이 없고, 어느 곳이라고 해서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다 중생(衆生)의 시비(是非) 분별심(分別心)으로 보니까 좋고 나쁜 곳이 있고 그렇지, 부처님의 진리(眞理)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버리고 취(取)할 것이 없고, 친(親)하고 먼 것이 없는 것입니다.
〇사람이 들어서 편의상 '을축년이다, 병인년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였지, 해는 을축년도 동쪽에서 뜨고, 병인년에도 동쪽에서 뜹니다. 문제는 해가 뜨고 지고 할 때마다 우리는, 이 무상(無常)한 몸뚱이는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미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생사(生死)를 요달(了達)한 분상(分上)에는 죽음을 향해서 갈 것도 없고 삶을 향해서 올 것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사를 요달하지 못했으니 생각 생각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도(道)를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하여칸 이 숲속에 이 원숭이란 놈이 그 참선하는 스님네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참 그 스님네 흉내를 낸 그 공덕(功德)으로 마침내는 성현(聖賢)이 된 그러한 일도 있고, 어린아이들이 그 진흙에다가 오줌을 싸서 그래 가지고 그 진흙을 버무려 가지고 부처님을 맨들기도 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는 그러한 공덕으로도 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도 하고.
그러니 직접 이렇게 '이뭣고?'가 무엇인 줄 알았든지 몰랐든지 선방(禪房)에 오셔서 석 달 동안을 같이 정진을 하시다가 그러다가 가시니, 뭐 그분이야 뭐 물어볼 것도 없이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악도(三惡道)를 면(免)하실 것이고, 세세생생에 어디에 태어나시든지 항상 정법(正法)을 만나시게 될 것이고, 그래 가지고 반드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시게 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〇언제 · 어디서 · 무엇을 하시던지 딱!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신다면 바로 댁에 계신 그 댁이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한 생각이, 단속(團束)을 하면 도량(道場)이 되고, 한 생각을 방일(放逸)해 그냥 놓아 버리고 범연(氾然)히 지내면은 그것이 해태굴(懈怠窟)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놓아 버리고 해태한 데에는 온갖 마구니가 그 틈을 타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만큼, 그 한 생각만 단속을 하시면 거기에 뭐 마구니가 들어올 수도 없고 삼재팔난(三災八難)도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차 소리 '뛰-' 하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바로 죽비(竹篦) 소리고, 손자가 '빽-' 하고 우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가 이 법문(法門)이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 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이라' 이리 생각하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화두를 떠억 거각을 하신다면.
〇모든 생사(生死)의 현장에서, 모든 생멸(生滅)의 상황 속에서 근본의 이치(理致)로써 관조(觀照)하면 그것이 봄 되았다 여름 되았다 가을 되았다 겨울이 되고, 겨울이 되았다가 다시 또 새봄이 돌아온 것과 같애서, 거기에 무슨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조끔도 없는 것이지마는, 근본을 떠나서 현상에만, 일어나는 모든 현상계에만 치우쳐서 생각하면 참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너무너무 슬프고 괴로운 일이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는 이 사바세계에 와야 도를 바르게 닦고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모든 언짢은 그런 일들에서 우리는 그 슬프고 괴로운 일에 빠져 가지고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데에만 근치지 말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하고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契機)로 삼아 나가고, 그런 계기로 우리가 해서 향상(向上)되어 갈 수 있는 발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말세(末世)라 하고 그거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하는 이 사바세계가 정말 도처(到處)가 선지식(善知識)이고, 도처가 불보살(佛菩薩)이고, 도처가 살아 있는 수도(修道)에 도장(道場)이 될 것입니다.
〇불법을 모르는 사람은 조그마한 슬픔을 통해서 큰 슬픔으로 빠지게 되고, 조그마한 괴로움과 노여움을, 그것을 거기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그것으로 해서 큰 재앙을, 스스로 재앙의 구뎅이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빠져서 더욱 불행하게 되어 가는데, 이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명두래명두타(明頭來明頭打) 암두래암두타(暗頭來暗頭打), 밝은 놈이 오면 밝은 놈에서 어두운 놈이 오면 어두운 놈에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놈을 막 잡어서 쓰고, 어떠한 역경계(逆境界)에서도 거기에 넘어지지 않고 바로 거기서 새로운 지혜(智慧)와 용기(勇氣)를 얻어 나갈 수가 있어서,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참 좋은 거 같습니다.
〇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이여. 한 움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다 걸어 둔다.
수영버들이, 그 실 수영버들이 여러 가지가 해가지고 바람에 자꾸 휘날리니까, 그것을 어떻게 이렇게 거두어 잡지를 못해서 그냥 옥난간에,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다가 걸어 둔다.
당당한 대도(大道)가 혁혁(赫赫)해서, 밝고 밝아서 분명해. 사람 사람이 본래부터 낱낱이 다 원만하게 갖추어 이루었더라.
부처님이나 조사(祖師)나 우리 범부(凡夫)나 축생에 이르기까지도 본래 그 대도는 갖추어 있어서 닦아 가지고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 낱낱이 다 원만하게 다 원성(圓成)해 있더라. 본래 갖추어져 원만하게 이루어져 가지고 그것을 갖추어 있다.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진, 한 생각 어긋진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영겁현출만반형(永劫顯出萬般形)이여. 영겁을 두고 만 가지 형상을 나타내더라.
본래는 더 닦을 것도 없고 증(證)할 것도 없고 남고 모지램이 없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다.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어긋짐으로 해서 이렇게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면서 때로는 지옥에 갔다, 때로는 축생이 되었다—축생도 개 · 돼지와 소 · 말 · 뱀과 구렁이 온갖 종류에 축생이 다 있고, 사람으로 출현하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형형색색으로 태어나고.
또 선행을 닦으면 천상에서 태어나 가지고 온갖 낙(樂)을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영겁을 두고 쉴 사이 없이 윤회를 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한 생각 어긋난 그 때문이다.
금년 새해를 맞이해서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이 소한절을 맞이해서 수십 년 내로 처음 오는 그런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설한(雪寒) 속에 이렇게 참석을 하셨습니다.
모두 정법을 믿는 신심(信心)과 또 새해를 어떻게 분심(憤心) · 발심(發心)해서 도를 닦아갈 것인가, 희망과 용맹으로 가득찬 그리고 빛나는 눈매와 얼굴의 모습을 뵙게 되니 매우 감개(感慨)가 무량합니다.
이렇게 많이 모이신 가운데에 저 봉암사에서 정진을 하다가 지견(知見)이 나서 찾아온 젊은 도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단히 그 얻은 바가, 설사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러한 자기 나름대로 희유한 그런 지견이 나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온 데 대해서는 매우 반갑고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다가 지견(知見)이 나면 그 도량(道場)에 선지식(善知識)이 계시거나 선배가 있으면은 거기에 자기의 깨달은 바를 개로(開露)해서 점검을 받고, 그 도량에 또 그럴만한 분이 없으면은 불원천리하고 선배와 선지식을 찾아서 자기의 그 깨달은 바를 갖다가 기탄없이 개로를 해서 탁마(琢磨)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종문(宗門) 중에 있어서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행해 내려오는 우리의 가풍(家風)이라 할 수가 있고.
참 아무리 말세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납자(衲子) 세계에 있어서 대단히 영원히 전해 가야 할 그러한 좋은 한 풍속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혼자, 얻은 바가 있어 가지고 자기 혼자만 그것을 꼭 지켜가면서 그것을 자기 살림살이로 알고, ‘누구한테 지금 물어 볼 것은 뭐 있으며, 이 이상 더 누가 아니라고 해도 이것은 소용이 없고, 이것은 절대적이고 이건 틀림이 없다’해 가지고 혼자 그놈을 지켜나가면서 살림을 해 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조사(祖師) 말씀에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다. 또 깨달은 뒤에 지견이 난 뒤에 사람을 만나질 못하면은 큰 해가 된다'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호(醍醐)라고 하는 것은 우유로 만드는, 아주 좋은 우유를 가지고 만들은 최고에 맛있고 아주 신령스러운 효험이 있는 약인데, 그러한 좋은 제호가 그것을 잘못 관리함으로 해서 그것이 변질이 되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독약으로도 변할 수가 있다.
무량겁을 생사윤회하다가 금생에 불법을 만나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다가 소견이 낫다고 하면, 마치 그 많은 우유 가운데에 최고품을 가지고 잘 특수한 방법으로 제호라고 하는 약을 만들은 데다가 비교를 할 수가 있는데.
그 제호라는 좋은 약도 잘못 관리해 가지고 독약으로 변한 것처럼, 그 무량겁으로 도를 닦아서 모처럼 어떠한 경계가 나타났다 이것인데.
그것을 바른 선지식에게 탁마를 해서 점검을 해서 그것을 갖다가 점검을 바로 받아 가지고, 그것이 미급(未及)하거나 잘못된 것이면 여지없이 탁마를 통해서 때려치워 버리고서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고 정진을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그 소견(所見)이 난 학자의 지견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어떻게 가리느냐?
옛날 눈 밝은 조사스님네는 벌써 거동을 보고 그 눈빛을 보면은 벌써 확연히 다 가려내셨던 것입니다. 벌써 입 벌리기 전에 딱! 점검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거기다가 공안(公案)을 물어 가지고 그 공안을 어떻게 답하는가?
그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답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견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제1구(第一句)는 상신실명(喪身失命)이고, 제2구(第二句)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라. 제3구(第三句)는 분기소추(糞箕掃箒)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이 삼구(三句)에 대한 법문을 해 주셨는데.
학자(學者)가, 참선(參禪)하는 납자가 공부를 해 가지고 최초에 지견(知見)이 나면 대부분 체중현(體中玄)—일체 삼라만상이 모든 것이 다 큰 것과 작은 거, 흰 것과 검은 거, 선과 악, 또 밝은 것과 어두운 거, 부처와 중생, 모든 것이 이 상대로 다 이루어졌는데, 이 상대(相對)와 차별(差別)이 다 끊어져버리는 그러한 경계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에 눈을 떠, 지견이 나가지고 이러한 경계에 계합이 되면 이 세상을 갖다가 콧구녁으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콧구멍으로 들랑거리고, 이 삼천대천세계가 눈으로 다 덮어 버릴 수가 있고, 부처와 중생이며, 선과 악이며, 육도법계(六途法界)도 온통 한 할(喝)로써 다 부셔 버릴 수도 있고 또 다 이룰 수도 있고, 도무지 그 경계가 쇄락(灑落)하기를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고종견저(海枯終見底)하고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시방무허공(十方無虛空)하고 대지무촌토(大地無寸土)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바다가 마르면 마침내는 그 바다 밑바닥을 갖다가 볼 수가 있어.(海枯終見底) 바다가 다 말라서 밑바닥이 환히 볼 수가 있을 때까지는 몇천만 년이 지나가야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바다가 마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가 마르면은 마침내는 그 밑바닥을 볼 수가 있으나, 사람이 죽으면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어.(人死不知心) 아무리 많이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더라.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어. 그런데 안 볼라야 안 볼 수가 없거든.
보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고 잡으려고 하면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데, 안 볼라야 안 볼 수가 없고, 안 들을라야 안 들을 수가 없고, 안 잡을라야 안 잡을 수가 없어.
그것이 이 두 말이 완전히 서로 위패되는 말인데, 이 두 가지 반대되는 말이 동시에 딱! 계합(契合)이 되거든.
시방(十方)에 무허공(無虛空)이여. 이 시방이 꽉 차 있는 것이 허공인데 허공이 없어. 대지(大地)는 온통 땅인데, 흙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대지에 한 치만한 땅도 없다 그말이여.
이 체중현(體中玄)에 눈을 뜬 경계가 바로 이렇다 그말이여.(처음~19분17초)
(2/3)-----------------
공안을 물으면—마조원상(馬祖圓相),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묻는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 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상을 그려놓고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러니까, 일어서서 방석을 들고서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하고, 그러고는 방석을 놓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로 이르지를 못했느니라"
"그러면 입으로 이르겠습니다"
"그러면 일러 봐라"
"알라야 알 수가 없고, 모를라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 공안에 대해서 그러한 답을 할 수가 없느냐 하면,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活句) 문중(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소견이 나서 불원천리하고 온 것까지는 대단히 좋고 반가우나, 그 학인이 그러한 소견에 주저앉아서 '알았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공부에 진취가 없을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학자의 지조를 가지고 그러한 소견을 스스로 다 쓸어버리고 정말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느냐?’
도저히 이빨이 들어갈 수가 없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질 수가 없는 그러한 공안을 가지고 목숨을 바쳐서 새로 공부를 지어 나간다면 이 학자는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해를 맞이해서 그러한 좋은 참 반갑고도 기쁜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드리고.
우리들도 공부하다가 그러한 소견이 나더라도, 나면 반드시 자기가 믿는 또 믿을 수 있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바로 점검을 받아 가지고 나아가되,
그러한 이 불조(佛祖)와 같은 그러한 견지가 아니면 여지없이 버려 버리고, 재발심(再發心)을 해 가지고 그 전에 보다도 몇십 배 더 분심과 신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께는 ‘진심(瞋心)을 내지 말자’ 그해에 ‘진심을 내지 말자’ 이렇게 말씀을 했고.
작년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瞋心)을 내게도 하지 말자’ 물론 자기 자신도 진심을 안 내야겠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내도록도 하지를 말자. 이러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금년에는 여러분에게 그 진심(瞋心) 나는 거, 어떻게 하면 진심을 안 내고 어떻게 하면은 남도 진심을 안 나게 할 수가 있을까?
사람이 살다 보면은 억울한 소리를 듣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니까 진심이 나는 경우가 있고, 또 내가 억울하고 그러면은 남에게도 또 한마디씩 할 수가 있는데, 하면 남도 진심을 나기 마련이고 그렇게 저렇게 그렇게 하다 또 풀어지고 또 성을 냈다가 풀어지고 가까운 사람일수록에 그러한 크고 작은 접촉과 알력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인생살이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해 보면 또 뭐 성 좀 내는 것도 무방하다 할 수가 있겠지만, 이 '성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참 무서운 것이며 중대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한 일화를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 그 무렵인데 안식국(安息國)이란 나라가 인도 근처에 안식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안식국에 세자(世子)가 있었는데 그 세자의 이름은 안세고(安世高)라 했습니다.
그 안세고는 안식국에 세자였었는데, 자기가 응당 왕위를 물려받아서 임금이 될 것인데, 자기가 왕이 되지 아니하고 숙부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 드리고서 자기는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를 해 가지고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다 섭렵(涉獵)을 해서 널리 공부를 해 가지고 큰 학승(學僧)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동남아 일대를 불법을 널리 포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에 인연이 있어서 그때는 중국은 한나라 시대인데, 한나라 건화 4년에 중국으로 들어와 가지고 이 낙양(洛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난리(亂離)가 나 가지고 배를 타고서 노산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노산에 이르러 가지고 그 강변에 당집이 하나 있어서 그 당집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습니다.
난리가 일어났으니 정식으로 어디 절을 찾아가기도 어렵고 그래서 우선 당집을 들어가서 자는데, 그 묘당(廟堂)에 자고 있는데 그 묘신(廟神)이 ‘이 주변은 내가 관할하는 지역인데, 나는 전생에 당신하고 같이 도를 닦던 도반이여. 그런데 내가 파계(破戒)를 하고 진심(瞋心)을 낸 과보로 해서 이렇게 이런 추악한 몸뚱이를 받아 가지고, 그래도 이런 추악한 몸뚱이는 받았지마는 그래도 전생에 도를 닦은 그 인연으로 해서 내가 이 몇백 리 안통에를 갖다가 다스리는 아주 두목이 되었다’
그래서 '대관절 니가 무슨 추악한 몸뚱이를 받았느냐? 어디 그 몸뚱이를 좀 보여줄 수가 있느냐?'
‘내가 그 전체를 보여 줄 수는 없고 내 몸뚱이 일부를 보여주마’
보여 주는데 수십 미터가 되는 큰 대명이여. '대명이'라 하는 것은 구렁이라. 얼룩덜룩해 가지고 참 무서운 그런 구렁이 몸뚱이를 하고 있어.
그래서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이런 몸뚱이를 받아 가지고 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그 비늘 속에 가서 온갖 수천 마리의 균과 벌레가 득실거려 가지고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고 답답하고, 함부로 어디 나가자니 사람 눈에 띄면 까딱하면 죽일라고 그러고. 그래서 이 괴롭기가 말로써 형언할 수가 없어. 지옥고(地獄苦)가 얼마나 괴로운가는 몰라도 세상에 이보다 더 괴로울 수가 있겠느냐?
이 당집 안에는 많은 비단도 있고 금은 보배 많은 보물과 구슬이 있으니까 이걸 갖다가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여기다가 절을 하나 지어다오. 그러면은 그 인연으로 내가 이 구렁이 몸을 벗고 천당에 가서 태어날 수가 있으니 그렇게 해다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깨어나 가지고 그 작관을 하면서 경을 읽고 축원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그 후에 묘당에 있는 많은 비단 피륙과 여러 가지 보물을 갖다가 팔아서 그래 가지고 거기다가 절을 지었는데, 그 절 이름이 대안사(大安寺)라 해 가지고 지금도 그 대안사라고 중국에 유명한 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날 저녁에, 낙성(落成)을 한 그날 저녁에 소년, 아주 잘생긴 소년 하나가 떡 나타나더니 ‘스님의 덕택으로 내가 이 추악한 몸뚱이를 벗고서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떠난 꿈을 꾸었는데, 그리고 난 뒤에 보니까 그 큰 강에 수십 미터 되는 구렁이가 죽어 가지고 썩어서 떠내려가는 것을 많은 사람이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瞋心)을 내서, 그렇게 도를 잘 닦던 그런 스님도 진심을 낸 그 과보로 해서 그런 무서운 몸뚱이를 받은 한 일화입니다마는. 또 홍도 비구도 역시 진심을 내 가지고 그런 무서운 독사의 몸을 받았던 일화도 있고, 지금 이 안세고 스님의 전생에 도반도 진심을 내가지고 이런 무서운 구렁이 몸을 받아 가지고 한 그런 일화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승속을 막론하고 진심을 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중대한 일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심도 내 버릇하면 그것도 질이 나서 자꾸 더 진심이 더 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을 내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 내는 것도 좋지 않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을 내게 하는 죄도 또한 무서운 것입니다.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그 진심을 냄으로 해서 여러 가지 일을 다 파탄으로 이끌게 되고 원수를 맺게 되고, 자기 자신 살아 있는 이 몸뚱이로—죽어서 뱀이 되고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서 이 진심을 내는 그 찰나에 이 사람 몸뚱이를 하고 있으면서 바로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진심 낼 그 찰나에 '사람독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심을 내면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 싫어하냐 하면, 누가 구렁이나 독사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진심을 낸 사람을 사람들이 보고 싫어하기를 마치 구렁이나 독사처럼 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렇고, 직장에 상관이나 모든 사람이 다 진심을 내면 모두가 다 진심 내는 사람을 구렁이처럼 독사처럼 다 보기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바르고 연지곤지 찍어서 이쁘게 해서 남으로 하여금 이쁘게 보일라구 노력을 하면서, '한 생각' 단속을 잘 못해 가지고 어찌 구렁이 · 독사 취급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19분20초~39분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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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 진심(瞋心)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도 꽉 참고서 이를 악물고 그놈을 억지로, 대소변 내려온 것을 억지로 참듯이 이것도 억지로 참어야 하느냐?
경우에 따라서는 잠깐 참어야 할 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마는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참고 또 참고 계속 한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네 번 참고 또 참고 하다 보면 그놈이 속에 쌓이고 쌓이고 해 가지고, 언젠가는 참다 참다 못 참으면 폭발할 때에는 무서운 탄력을 가지고 폭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참으면 그것이 썩 좋은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 있지만, ‘억지로 무엇을 참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정말 수행을 올바르게 해 가는 활구 참선객은 억지로 참는 것으로써 능사(能事)를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일어나는 성이 날 그 '한 생각' 탁! 치밀어 오를 때, 그놈을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성나는 마음을 돌려 가지고 화두를 들어.
성나는 생각을 누르지 말고 그놈을 돌리라 그말이거든. 돌려서 화두(話頭)를 든다면 그 성나는 생각이 화두 드는 마음으로 승화(昇華)를 하게 된다 그말이여.
기운이 왕성해서 넘쳐 가지고 싸우기를 좋아하고 때려 부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권투선수를 만들면, 그래 가지고 권투를 잘 가리켜서 사각 링 위에서 싸우게 해서 그 넘치는 힘을 갖다가 링에서 싸우게 만들면 동양선수권도 찾게 되고 세계선수권도 찾아서 돈도 많이 벌고 국위도 선양을 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놈을 그러한 권투 선수로 인도를 하지 아니하고 그냥 놔두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뚜드려 패고 때려 부수고 싸움을 하고 하면은 갈 곳이 어디냐 그말이여. 폭행죄로 때로는 살인죄로 평생을 감옥을 제 집으로 삼고 드나들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 중생은 지가 생각을 냈다 하면은 탐심(貪心)이요, 그렇지 않으면 진심(瞋心)이요, 그렇지 않으면 치심(痴心)일 것이다 그말이여. 무량겁을 그렇게 업(業)을 지어왔기 때문에 별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진심 아니면 치심이요, 그렇지 않으면 탐심이지, 지가 무슨 생각이 날거냐 그말이여.
다행이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고 불법을 만났기 때문에 그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갖다가 턱! 돌이켜서 삼학도(三學道)로 승화시키는. 해탈, 그래 가지고 해탈도를 얻게 해 주셨다 그말이여.
불법(佛法), 부처님 법이 좋은 줄을 알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지로 어떻게 그 불법을 우리 몸에 구현시켜 나가느냐? 이건 활구참선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장소도 따로 찾을 것이 없고, 시간도 따로 찾을 것이 없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귀로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도 그 일어나는 생각을 즉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어 나가.
특히 그 성내는 마음, 노여운 마음, 그 진심(瞋心) 탁 일어나자마자, 일어나려구 속에서 살짝 이렇게 꿈틀거리려고 할 때—이미 그놈이 터져 나온 다음에는 수습하기가 힘이 드니까—처음에 일어날라고 할 그 찰나(刹那)는 아직 남도 눈치채기도 전에, 밖으로 나타나기 전에 저 속에서 한 생각 일어나려고 하는 바로 그 찰나에 떠억 심호흡을 해. 숨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거 이 독사가 되기 이전에 바로 깨달음으로 한 걸음 성큼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잘못 해 가지고 무량겁을 윤회하기보다는 그 '한 생각' 잘 돌이키면은 해탈도를 증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 내가 각별히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성내는 마음 돌이키는 것이 매우 어려워. 그 생각을 돌이키는데, 비단 성내는 마음을 돌이킬 줄 아는 사람, 성내는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밖에 무슨 생각, 다른 생각이야 뭐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돌이키기 어려운 생각이 그 성내는 마음이요 또 탐내는 마음이요, 어리석은 마음이지만 그 가운데서 유독 그 중대한 것은 이 성내는 마음이거든. 그 성내는 마음을 돌이켜 버릇하면 그밖에 다른 생각은 문제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므로써 나도 성을 내지 아니하고, 남도 성을 내지 아니한다면은 한 가족이 화평(和平)을 얻을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공연히 한 생각 풀쑥 잘못해 가지고 상대방 기분을 쑤셔 놔 가지고, 쑤셔놓으면 상대방에서는 더 고약한 소리를 해서 나는 더 갑절로 또 충격을 받게 되고,
이렇게 한 것이 결국은 아침에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 직장에 나가면 직장에 가서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또 부애풀이를 하게 되고, 그래서 직장에서 그러면 또 집에 오면... 이래서 1년 열두 달 항상 그러한 일이 되풀이된다면 그 죄를 어떻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생각 다스리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바이니.
금년 새해에도 이 한 생각을 잘 다스려 나가셔 가지고 모든 재앙은 미연에 다 방지해 버리고 그리고 1년 내내 신심과 환희심과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단속해 나가신다면 정말 여러분은 가정에서는 행복을 성취하실 것이고, 도문(道門)에서는 해탈도를 증득을 하셔서 온 세계에 평화에 광명을 여러분은 선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탄거해수(毛呑巨海水)하고 개자납수미(芥子納須彌)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한일륜월(碧漢一輪月)이 청광육합휘(淸光六合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탄거해수(毛呑巨海水)하고 개자납수미(芥子納須彌)여.
조그마한 터럭이 저 큰 바닷물을 다 삼켜버리고, 쬐그만 겨자씨가 수미산(須彌山)을 갖다가 삼켜버린다. 그 어마어마한 큰 수미산이 겨자씨 속으로 다 들어가 버려. 겨자씨 속에 다 받아들인다 그말이여.
벽한일륜월(碧漢一輪月)이 청광육합휘(淸光六合輝)여.
저 푸른 하늘에 조그마한 한 달이 육합(六合), 오대양 육대주를 갖다가 맑게 비춘다 그말이여.
우리의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생각들이여.
자잘구레한 희로애락과 오욕락(五慾樂)과 탐진치, 그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 수없이 되풀이해 온 우리의 그 많은 생각들, 그 참 쇠털같이 많은 숫자고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그 한 터럭 그 겨자씨만도 못한 그런 조그만한 생각이지만,
그놈이 어떠한 우리의 마음속에 대혁명이 일어나 버리면 그 한 터럭이 저 끝없는 바닷물을 다 둘러 마실 수가 있고, 그 큰 수미산 둥치도 다 집어삼킬 수가 있고, 이 육도법계(六途法界)와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도 다 줏어 삼켜 버릴 수가 있습니다.
마치 허공에 저 한 조각 달이 온 세계를 밝게 비출 수 있듯이 우리는 그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가지고 더이상 클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르면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금년 한 해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결의를 가지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전진(勇猛精進)을 해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성취하는 해로 삼고자 합니다.(39분45초~55분6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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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
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奮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불원천리(不遠千里)하다 ;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종문(宗門) ; ①선종. 선문(禪門). 선종에서는 선문(禪門)이 불교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 ②종파. 종지(宗旨). 자기가 속해 있는 종파.
*가풍(家風) ; ①종풍(宗風)—종문(宗門)의 풍규(風規 풍습상의 규정). 문풍(門風)—선문(禪門)에 있어서의 종풍(宗風).
②선림(禪林, 선종禪宗)에서의 행위의 규범. 청규(淸規, 선원에서 일상의 생활규정). 선종에서 가르침을 나타낼 경우, 각자가 갖는 독자적인 방식, 또는 지도의 방법을 말함.
③그 종(宗)만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 지도의 방법. ④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러운 생각을 내야 한다。도(道)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이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 하지 말라。깨친 뒤에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미급(未及) ; 아직 미치지 못함.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〇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〇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No.112)—19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36초)
〇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것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지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할(喝) ; 선종(禪宗)에서 진리를 문답하는데 쓰는 독특한 수단이다. 선종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진리를 나타낼 때, 또는 수행자를 꾸짖거나 호통칠 때 토하는 큰 소리.
큰 소리로 『엑 !』하고 꾸짖는 형세를 보임이니, 이것을 처음 쓰기는 마조(馬祖)가 한 번 할했는데 백장(百丈)이 사흘이나 귀먹고 눈이 캄캄하였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 그 뒤로부터 흔히 쓰는데, 임제(臨濟)가 가장 많이 썼다. 보통 속음(俗音)의 「갈」로는 발음하지 않는다.
*쇄락(灑落 물뿌릴 쇄/떨어질 락) ;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함.
*(게송) ‘해고종견저(海枯終見底) 인사부지심(人死不知心)’ ; 『선문염송•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김월운 역 | 동국역경원) ‘제11권 417칙 불성(佛性)’ p236 진정문(眞淨文) 게송 참고.
*(게송) ‘시방무허공(十方無虛空) 대지무촌토(大地無寸土)’ ; 『禪宗頌古聯珠通集』 남당흥(南堂興) 게송 참고.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마조 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참고.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방장(方丈) ; ①선원(禪院)의 운영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 스님, 또는 그가 거처하는 방. ②선원(禪院)·강원(講院)·율원(律院)을 모두 갖추고 있는 총림(叢林)의 가장 높은 스님.
*방(棒) ; 몽둥이. 또는 주장자(拄杖子).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확연(確然)히 ; 아주 확실하게.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시금석(試金石) ; ①층샛돌(귀금속의 순도를 판정하는 데 쓰는 검은색의 현무암이나 규질의 암석). ②가치, 능력, 역량 따위를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기회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견처(見處) ; ①(틀린) 견해가 생긴 곳이라는 뜻. 집견(執見,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집하는 견해. 여러 종류의 망견妄見)이 일어나는 장소. 유루법(有漏法)의 다른 이름. ②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특수한 세계관의 입장.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활구(活句) 문중(門中)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집안.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그러께 ; 재작년(지난해의 바로 전 해).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안식국(安息國) ; 기원전 250년경부터 기원후 220년경까지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
*안세고(安世高) ; 안식국(安息國)의 태자. 이름은 청(淸), 세고(世高)는 자(字). 부왕이 죽자, 왕위를 숙부에게 주고 출가함.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146-167) 초에 중국의 낙양(洛陽)에 와서 20여 년 동안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 · 보법의경(普法義經) · 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 ·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 음지입경(陰持入經) · 아비담오법경(阿毘曇五法經) · 도지경(道地經) 등 55부 60권을 번역함.
*삼장(三藏) ;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세 가지 불서(佛書)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섭렵(涉獵 건널·섭렵할 섭/찾을·사냥할 렵) ; 물을 건너[涉] 찾아다닌다[獵]는 뜻으로,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거나 다양한 경험을 쌓음을 이르는 말.
*당집 ; [민속] 신을 모셔 놓고 받들어 위하는 집.
*묘당(廟堂) ; 조상의 혼백을 모시거나 그 밖의 여러 신을 모신 당우(堂宇). 묘(廟), 묘우(廟宇)라고도 한다.
*피륙 ; 아직 끊지 아니한 베나 무명, 비단 따위의 천을 통틀어 이르는 말.
*안통 ; 안쪽(안으로 향한 부분이나 안에 있는 부분).
*낙성(落成) ; 건축물을 완성하여 공사를 끝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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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화통(鬱火통) ; [주로 ‘치밀다’나 ‘터지다’, ‘터뜨리다’ 등과 함께 쓰여]몹시 답답하거나 분한 마음이 쌓이고 쌓인 것. ‘울화(鬱火)’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여섯 가지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인욕(忍辱) : [범어] Ksanti 욕되는 것을 견디어 참는 것이다。여섯 가지 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 무슨 곤란이나 역경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그 고통과 곤란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즐겁게 받아야 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능사(能事) ; [주로 ‘아니다’, ‘알다’, ‘생각하다’, ‘여기다’ 따위와 함께 쓰여]잘하는 일. 또는 쉽게 잘 해낼 수 있는 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승화(昇華) ;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업(業) : [범어] karma [팔리어]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삼학(三學) ;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
삼증상학(三增上學)·삼승학(三勝學)이라고도 하는데, 즉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를 말한다. 이것을 증상(增上: 탁월하다는 뜻)계학·증상심학(心學)·증상혜학 또는 줄여서 계·정·혜라고도 한다.
①계는 악을 저지르지 않고 선을 닦는 계율(戒律), ②정은 심신을 고요히 하고 정신통일을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선정(禪定), ③혜는 번뇌를 파하고 진리를 증득(證得)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부애풀이 ; 부아풀이. 분하고 노여운 마음을 푼다는 뜻으로, 엉뚱하게 다른 사람이나 딴 일에 화를 냄을 이르는 말.
*도문(道門) ; ①도에 이르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 ②불문(佛門). 부처님의 법문(法門). 불교(佛敎)라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서는 문.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
*(게송) ‘모탄거해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금륜(金輪) 위에 우뚝 솟은 높은 산. 둘레에 7산 8해(海)가 있고 또 그 밖에 철위산이 둘려 있어 물 속에 잠긴 것이 팔만 유순, 물 위에 드러난 것이 팔만 유순이며, 꼭대기는 제석천, 중턱은 사왕천의 주처(住處)라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
*육합(六合) ; 천지와 사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하늘과 땅, 동ㆍ서ㆍ남ㆍ북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진심(瞋心)을 내지 말자 / 안세고 스님의 일화 / 불법(佛法)은 ‘한 생각 다스리는데 있다’ / (게송)모탄거해수~ / 마음속에 대혁명.
〇그러나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〇진심을 냄으로 해서, 죽어서 뱀이 되고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서 이 진심을 내는 그 찰나에 이 사람 몸뚱이를 하고 있으면서 바로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바르고 연지곤지 찍어서 이쁘게 해서 남으로 하여금 이쁘게 보일라구 노력을 하면서,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 가지고 어찌 구렁이 · 독사 취급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〇성이 날 그 '한 생각' 탁! 치밀어 오를 때, 그놈을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성나는 마음을 돌려 가지고 화두를 들어.
성나는 생각을 누르지 말고 그놈을 돌리라 그말이거든. 돌려서 화두(話頭)를 든다면 그 성나는 생각이 화두 드는 마음으로 승화(昇華)를 하게 된다 그말이여.
〇불법(佛法), 부처님 법이 좋은 줄을 알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지로 어떻게 그 불법을 우리 몸에 구현시켜 나가느냐? 이건 활구참선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한 생각' 잘못 해 가지고 무량겁을 윤회하기 보다는 그 '한 생각' 잘 돌이키면은 해탈도를 증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마치 허공에 저 한 조각 달이 온 세계를 밝게 비출 수 있듯이 우리는 그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가지고 더이상 클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르면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2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사부대중이 잘 들었습니다.
활구참선법.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조실 스님 생존시, 조실 스님께서 15년간을 이곳에 머무르시면서 많은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시면서 항상 활구참선법, 최상승법을 선양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성불(成佛)을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는데, 그 팔만사천 법문을 교(敎)라 한다면 그 교(敎) 밖에 따로 마음을 전하신 것이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 교외별전 선지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잠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는 ‘화두(話頭)’라 하는 말이 없었습니다마는.
물론 그러한 체계화된 간화선(看話禪)은 없었지만, 부처님 때부터서 그 부처님의 설법과 중생을 교화하는 그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는 가운데에 그 법(法)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세상이 흐름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根機)가 차츰 약해지고 또 사량분별심이 점점 영리한 마음은 점점 늘어나 가지고 순박성을 잃어가고, 그러기 때문에 차츰차츰 그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을 중생 근기 따라서 마련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붙이지 안 했지마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는 옻칠과 같은데, 항상 우리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말은 안 붙였지만 이 화두선(話頭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이 간화선(看話禪)이 바로 그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원을 바로 거기다가 두는 것입니다.
하택신회 선사는 그 물음에 대해서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저 하택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라야 그릴 수도 없는데 어찌 네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신회의 불성이니, 그것이 벌써 이름이 아니냐? 이름이 없다고 그랬는데 왜 이름을 붙이느냐?’ 이렇게 꾸짖으시고서,
‘네가 나중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知解宗徒) 밖에는 되지 못하겠구나. 사량(思量)으로 따지고 이론적으로 따지는 강사와 같은 그러한 무리 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렇게 점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육조 스님을 뵈러 와서는 절을 하니까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물으셨는데, 남악회양 선사는 그 물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꽉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물러 나와서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이냐?’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하는 그 의심이 꽉~ 찼던 것입니다.
일부러 ‘이뭣고?’ ‘이뭣고?’ 형식적으로 하고, 또 할 때는 잠시 알 수 없는 생각이 있다가 금방 돌아서면 의심이 없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육조 스님의 그 물음 뒤끝에 꽉 막힌 그 의심이 잊어버릴라야 잊어버릴 수 없고, 안 할라야 안 할 수 없고, 저절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꽉 막힌 그 의심이 차오르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한목 퍼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8년 동안을 그러한 상태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던 것입니다.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던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뭘 이리저리 좀 하다가 무슨 어떠구라한 무슨 경계가 나타난다고 ‘아! 알았다. 내가 알았다’ 이런 생각을 내고서 무슨 공안을 갖다가 자기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뭐라고 이를라고 하고. 그러헌....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나 애써서 한 철 두 철 하면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일체다. 전체가 바로 나요, 나 밖에 이 세계가 어디가 있느냐.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산을 보나 들을 보나 돌을 보나 그것이 모두가 딴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 내 면목(面目)이다’
이러한 체중현(體中玄)의 그런 공견(空見)이라 하는 것은 한 철 아니면 두 철이면 누구나 그러한 경계는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所見)을 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떠억 지어간다면 그 사람은 조그만한 그릇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자기 그릇으로 평생을 수용하다 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그분은 우리나라 6.25동란 때 전쟁고아로서 미국에 양자를 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해 가지고 그 사진을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이가 한번 어느 분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이 참선에 대해서 항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참선이란 게 대관절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며, 참선을 해 가지고 구경(究竟)으로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러한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전혀 하지를 못하고 겨우 자기 이름만을 한글로 서투르게 쓸 정도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갔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통역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참선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도 어렵고 그래서 풍선을 하나의 예로써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이 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꼭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지마는 그 사진을 찍고, 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사람은 글씨를 쓰고, 또 쇠를 만드는 그러한 그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쇠를 녹여서 좋은 쇠를 만드는 그 가운데, 또 백정이 소를 잡는 데에는 소를 잡는 바로 거기에도 참선이 있을 수가 있고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풍선을 불고 있다.
누가 가장 큰 풍선을 불며, 금방 그 풍선을 잘못 불면 처음에 조금 훅 불다가 어문 가운데에서 툭 터져 가지고 실패해 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당히 클 때까지 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개중에는 이 우주의 법계에 가득찰 만큼 그러한 큰 풍선을 불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 가지고 터트릴 수 있는, 그렇게 풍선을 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우주, 동서고금에 가장 크고도 좋은 풍선을 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지금 우리는 승려로서 우리 나름대로에 가장 좋은 풍선을 불려고 목숨을 바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사진작가로서 당신의 풍선을 잘 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예술가도 상당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런 도(道)나 법(法)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이해를 잘 하는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달 후에 그이가 인편에 쪽지를 써서 보냈는데, 지금도 풍선을 열심히 불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그 전단을 보내왔었습니다.
'참선을 꼭 가부좌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화두를 타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 고정된, 참선에 관한 고정된 관념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런 고정된 생각을 가지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지루한 것이다. 장소가 없으면 못하고 시간이 없으면 못하고 어떠한 특별히 혜택 받은 사람이 아니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참선 자체를 경원시(敬遠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려고 하니까 지루하고, 발이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프고 나중에는 졸음이 오고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으니까, ‘하! 이거 화두가 나한테 맞지 않는 것이냐?’ 또는 '내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는 '나는 이 참선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냐? 내 근기가 참선을 할 만큼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차라리 이렇게 아무리 해 봤자 재미도 없고 별 성과도 없는 참선을 이렇게 한다고 해 봤자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경을 읽어 볼까? 염불을 할까? 주력을 할까?'
그래 가지고 경을 읽다가 염불을 하다, 주력을 하다, 그러다가 보면 또 다시 참선을 하고 싶어서 또 참선을 하다가 말다가, 참 이러한 분을 상당히 많이 겪어 봤습니다.
이 참선은, 초학자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그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하는데,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한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또 망상이 일어남으로써 오히려 참선을 잘할 수도 있는 그러한 면도 있는 것입니다.(처음~20분18초)
(2/3)----------------
어떤 사람이 그 집안에 어떻게 쥐가 많이 들끓든지, 그 쥐를 갖다가 없애기 위해서 별별 약을 다 놓기도 하고, 고양이를 다 갖다 놓기도 하고 그러되,
오히려 더 약을 놓아 가지고 몇십 마리 잡아봤자 며칠 안 있으면은 더 쥐가 성해 가지고 더 야단을 치고 더 번성을 하고 하는 것을 보았고, 고양이를 갖다 놔봤자 몇 마리 잡아서 찢어발겨 놓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쥐가 없어지지를 않고.
오히려 더 부엌이나 창고나 다락이나 천정이나 수채구녁 할 것 없이 뭐 집안에 있는 걸 잡아도 이웃집에서 오고 또 산중에서 내려오고 들에서 오고 이렇게 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연구한 끝에.
쥐를 갖다가 잡아서, 새끼 때 그 쥐구녁을 파 가지고 그 새끼를 잡아 가지고는 살살 그 쥐를 꽁댕이를 잘라버리고서 그 쥐를 갖다가 키웠는데.
주로 무엇을 먹여서 키우냐 하면은 쥐를 덫을 놓아서 잡아 가지고, 쥐 고기를 썰어 가지고 새끼 때부터 먹였던 것입니다.
쥐의 고기를 먹여서 차츰차츰 크면서, 쥐를 잡아서 큰 쥐도 넣어주면 배가 고프니까 그 쥐를 막 깨물라 먹고 해서, 인자 그 육식을 하니까 쥐가 굉장히 빨리 잘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쥐가 쥐 고기를 참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놓으니까 그 쥐란 놈이 천장이고 부엌이고 쥐구녕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쥐란 쥐는 다 잡아먹었습니다.
고양이를 시켜봤자 쥐구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나절씩 쥐구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오면 잡아먹을지언정 쥐구녁에 딱 들어가 갖고 안 나오면 잡아먹지를 못하는데,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내 놓으니까 구녁구녁이 다 드나들면서 싹 다 잡아먹어.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그 쥐는 사람에게 잘 길이 들어져서, 저를 갖다 마지막에 그놈을 잡어가지고 ‘니가 그동안에 모든 쥐를 잘 잡은 공로를 크게 치하를 하고, 그러나 미안하지마는 너도 너 갈 데를 가거라’ 이렇게 해서 처단을 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쥐 때문에 곡식을 많이 먹고 모든 물건을 다 쏠고 그래서 그렇게 쥐 때문에 피해가 많은,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쥐가 1년에 먹는 양곡이 수십만 수백만 석이라 그럼니다.
그래서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쥐를 잡게 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드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일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이 화두! 이론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 가지고 어떠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법문 하신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다맛 그렇게만 참구하는 것이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과도 비교해서 ‘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따진다든지, 조사의 어록이나 다른 공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 보고 이렇게 해서 어떠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도 꽉 막히고 뒤도 막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관, ‘이뭣고~?’
또 판치생모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글귀나, 어떠한 물건이나, 어떠한 일을 갖다가 그것만 밤낮 생각해 가지고 생각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고 그 생각만 하도록, 그러면은 애인을 이별한 사람이 밤낮 애인 사진만 놓고 애인만 들여다보고 애인 생각만 하면 그것이 참선이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죽은 자식을 생각해 가지고 밤낮 죽은 자식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나깨나 생각 안 할라고 아무리 떨쳐 버릴려고 해도 그 자식 얼굴이 환히 나타나면서 자식 생각만 한다면, 그러면 꿈에서도 자식 꿈을 꾸고, 눈을 떠도 자식 생각, 누구 청년 학생들을 봐도 자식 생각하면 그 사람이 그러면 참선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왜 아니냐 하면, 그 한 일에 생각이 집중된다고 한 점에서는 그 점 하나는 혹 공통점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생사해탈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하는 이 참선은 알 수 없는 의심! 의심으로 그것을 관(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관이라야 하는데, 의심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한 것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뭣고?’를 하라니까, ‘이뭣고?’ 소리를 잊어버리고서 ‘이웃집 영감, 이웃집 영감’ 며칠을 하다가 와서 ‘이웃집 영감’을 많이 찾아도 잘 안된다고 그런 소리를 하고.
또 어떤 노인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집에 가서는 자나깨나 큰소리를 지르면서 ‘전강 스님! 전강 스님!’ 자꾸 전강 스님을 불러싸서,
그 며느님과 손녀가 그 할머니를 모시고 와 가지고 ‘원장 스님이 전강 스님을 자꾸 부르라고 했다’고, '그래서 밤낮으로 전강 스님을 불러싸니 정말 원장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나는 ‘이뭣고?’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 할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가서 밤새도록 전강 스님만 불러싼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잘 타일러 드려가지고 얼마 동안을 그 노보살님이 잘 하시다가 지금은 인자 저승으로 가셔서 극락세계를 가셨거나 다시 몸 바꿔 나셨지 않은가 그리 생각이 됩니다마는.
이 한 자리에서 같이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다 각기 달리 듣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엉뚱하게 이해를 해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법회 때마다 이 참선 하는 법,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것은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오신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정말 가끔 한 번씩 ‘이뭣고?’소리는 듣지만 '대관절 이뭣고?라는 것이 무엇이냐?'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그러한 분들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전강 스님'을 불러싸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올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만 알면 공부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도 바라지고 또 단전호흡을 함으로써 피로회복도 되고 또 좋지 못한 성격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잘 골라지고, 그러면서 이 참선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체 생활 속에서 자꾸 단속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직장에서나 언제라도 그 의단이 독로해서, 일이 있을 때에는 일하는 가운데에도 화두가 떠나지를 않고, 화두 드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을 접견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때가 기어코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해 가다보면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갖다가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고 무엇이고 간에 그것을 소반 위에 있는 쌀이나 곡식을 갖다가 거머쥐듯이[大地撮來如粒米], 온 삼천대천세계도 한 손으로 쏵 휘어잡아서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참, 기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온 태양과 별, 뭐 달까지라도 한 손에 거머쥐어다가 밝은 데다 갖다 놓고서, 그걸 갖다가 손바닥에다 놓고서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걸림 없는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當陽打鼓大家看].
그러면 제도 받을 중생이 어디가 있으며, 제도를 할 부처가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천당과 지옥이 무엇이며, 중생과 부처가 무슨 차별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러나 안중(眼中)에 약미제금설(若未除金屑)이면, 눈 가운데 만약 금싸래기를 제거, 빼 내지 못하면,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다. 어떤 것이 누르고 어떤 것이 검은 것을 가려내기는 크게 어려운 것이다.
겨우 공견(空見),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가 일념(一念) 속에 있고, 육도법계가 바로 이 일념 속에 있어서 동서남북에 걸릴 것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막힐 것이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현중현(玄中玄), 공안에 있어서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마치 눈 가운데에 금싸래기를 빼내지 못한 거와 같은 것입니다.
겨우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그래 봤자 그것은 체중현(體中玄)의 경계라, 체중현의 경계는 공(空)의 이치거든.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인데, 진공의 이치도 이렇게 옅은 분별심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확철대오해서 그렇게 크게 봐 버리면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바로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활구(活句) 문중에, 이 조사(祖師) 문중에 있어서는 체중현 도리 보는 그러한 것을 깨달랐다고 인증(認證)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한 체중현 도리를 보는 것으로서 인가를 해 주면 그 각견(覺見)을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이치(理致)로는 짐작을 하지마는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자기는 부처가 와도 한 방맹이, 조사가 와도 한 방맹이, 그래서 뭐 거침이 없을 것 같은 그러한 횡행자재(橫行自在)한 그러한 생각을 갖지만, 이치로 그럴지언정 사(事)에 막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인가를 해 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공부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해서, 법(法)을 설하되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것이고, 현(顯)과 밀(密)이 있는데 현밀(顯密)을 가리지를 못해 가지고 함부로 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기가 막힌 도인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정말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해 줄 말이 있고 안 해 줄 말이 있는 것이며,
때에 따라서 인과법이라든지 모든 방편설이 다 적재적소에 쓰면은 좋은 약이 되려니와, 그것을 함부로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쓰게 되면, 법도 못쓰게 만들고 또 중생도 못쓰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중대한 과오를 범해서 용서받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보단 훨씬 나은 사람에게 인가를 해 주고 그 사람에게 법을 전해야지, 자기와 같은 정도의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인가를 해 주면, 인가 받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반 밖에 못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인가(印可)라 하는 것은 '옳다! 옳다! 니가 옳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 준 것이 인가가 아니고, 그 종사(宗師)가 그 학인(學人)한테 꼼짝을 못해야 그것이 바로 인가다" 이러한 말씀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활구참선을 하시되,
이 불법(佛法)을 10년 20년 믿지마는 참선이 무엇인지, 활구참선이 무엇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그저 부지런히 시주하고, 염불하고, 부처님께 공을 들이고, 그러한 것이 불법인줄 알고 일생을 지극정성으로 믿고서 스스로도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도 '참, 그분이 신심이 있다. 참, 공덕이 장하다.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가셨을 것이다' 이러한 칭송을 듣고 그러면서 일생을 마친 분들도 참 많습니다마는, 활구참선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기에까지 이르른 사람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여러 해 되시고, 또 법문도 많이 들으시고, 경책(經冊)도 많이 보신 그런 분도 계시고, 여러 절을 거치고 거쳐서 오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처음 오신 것이 바로 여기에 오신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자리에 법회에 참석하셔서 활구참선을 들으시게 된 인연(因緣), 이것은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시고 그리고서 그 49년 동안 설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듣기도 어렵고, 들어도 믿기 어렵고, 이렇게 듣고 믿어도 직접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20분19초~41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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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공부는 하면 한 만큼 알아진 것이 있고,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무엇이 얻어진 것이 있고 그래서 하면 재미가 있고 보람을 느끼는데, 이 활구참선은 무엇이 알아진 것도 없고 나타난 것도 없고 맨날 해봤자 이게 죽 떠먹은 자리고. 그러니 이거 재미 붙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지만, 확철대오 하기 전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건강이 좋아진다든지 또는 자기의 모든 나쁜 성격이 완화가 되고,
예를 들자면은 신경질을 내는 거, 사소한 일에 싸우고 모다 그런 것이 이 참선을 함으로써 차츰차츰 그런 신경질을 안 내게 되고 또 감정에 끄달리지 않게 되고 또 자기의 감정을 자기의 힘으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러한 것은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열심히 하다보면 누구나 그런 효과를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인간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좋은 것이고, 모든 가족들에게 직장에서 사회에서 존경받을만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옅으고, 힘이 세고 약하고 간에 대부분 자기 감정을 자기가 마음대로 조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정이 일어나지 아니할 때는 참 훌륭한 분이라고 다 하는데, 한번 어디를 건드려 가지고 감정이 폭발했다 하면 뭐 박사고 교수고 장관이고 장군이고 간에 한번 속이 뒤집어졌다 하면은 여간 자기가 자기 감정을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평소에 이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극기(克己)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자기가 자기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도 ‘백만 군사를 호령을 해서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가 자기를 이기기는 어려우니라.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대장부(大丈夫)니라’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힘은 억지로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참선을 조석으로 한 시간씩 하고 낮에도 생활 속에서 항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참구하고 이럼으로써 그것이 참선이 생활화 될 때에 무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내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찰나적으로 무슨 기분 나쁜 생각이 탁! 속에서 뭉클 일어날라가도 떠억 ‘이뭣고?’해 버리면 간단하게 없어지고, 그 일어나는 성나는 마음이 금방 화두로 돌이켜져 버린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성을 낼라면 내고 안 낼라면 안 내고, 슬퍼할라면 하고 슬퍼 안 할라면 안 하고, 미워할라면 미워하고 또 안 미워할라면 안 미워하고. 그까짓 것 뭐 희로애락이 자유자재해.
이것이, '자유자재다, 해탈이다'하는 것이 다른 데에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生死)에 자유자재, 또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이고, 일념을 잘 단련을 하고 일념을 갖다가 돌이켜서 그놈을 갖다가 단속을 하는 가운데에 생사 자유의 이치,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이지, 뭐 금방 오늘 툭 깨쳤다고 해서 그러면 다 일이 끝났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확철대오를 한 것은 겨우 어린아이 낳아 놓은 거와 같다.
어린아이는 낳아놔서 분명히 그것도 이목구비가 다 있고 사람이지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또 이 옷을 입히고 가리키고 해서 제 앞을 꾸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권리를 인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의 수도(修道)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해서 잘 보림(保任) 공부를 해서, 그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가 있게 되어야 그래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깨달라 가지고 오후보림(悟後保任)을 안 하고 등한(等閒)히 하나, 더디 깨달라도 깨달을 때까지 그 공력을 들여서 정진을 해 놓은 사람은 깨달은 뒤에 오후보림 공부가 벌써 깨닫기 전에 많이 다 숙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는 것을 문제 삼지 말아라.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께서도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조급한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누누이 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내 가지고 빨리 깨달을려고 급한 생각 낸 것이야말로 깨달음을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생각만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의사량처불상간(擬思量處不相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명예와 권리를 구하는 젊을 때에는 공자님을 섬기다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뜻을 착(着)해 가지고 구해야 할 것인가?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다가 금생에 태어나서는 유교를 믿고 제 부모의, 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나라 모든 생활이 대부분 다 이조(李朝) 동안에 유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종교가 없는 사람은 대부분 다 유교를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공자님을 믿고 삼강과 오륜을 지키면서 그렇게 공자님을 믿어 오다가 늘그막에사,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친하게 되었다. 이제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말 그것을 똑바로 알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뉘기 짜서 이리저리 사량심(思量心)을 가지고 무엇을 찾고 알려고 하면, 벌써 그것은 이 최상승법에는 어긋나 버린 것이다[擬思量處不相干] 그말이지.
왜 그러냐 하면, 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생각하면 벌써 그것 자체가 중생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그 화두, 공안 모다 그런 것에 대해서 책이 나오기도 하고, 또 일본 책도 나오기도 하고 해서 그 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는 싶은데, 밤낮 ‘이뭣고?만 하라' 그러고 하니까,
일본말을 아는 사람은 일본 책을 사서 이리저리 읽어 보면 공안에 대해서 이리저리 해설도 되어 있고, 또 천착(穿鑿)이 되어 있고, 파설(破說)도 되어 있고 해서, 썩 그것을 보면은 재미가 있고, 그것 얼마동안 지내면은 자기도 다른 공안도 요리 보면은 가늠이 가고 하니까, 그 버썩 재미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 식으로 공안을 천착을 하고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봤자 그것은 생사해탈과는 영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알 수 없는 의심, 지금 이렇게 설교를 듣고 하더라도 이 들은 가운데에도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그 의심이 있어야. 그 의심 속에서 말을 들어야 하거든.
그 법문을 들을수록에 의심이 더 간절하고 돈발(頓發)을 해야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고.
걸음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고 꺼질 때마다, 자기의 본참화두에 충실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올바르게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다음 3월 일요법회 때는 중·고 학생 창립법회가 있습니다. 오늘 그 준비회가 있었는데, 현재 53명이 그 학생법회에 중·고등 학생법회에 신청을 했다고 그럼니다. 대단히 많은 수라고 생각이 되는데.
아직도 여러분의 자녀 가운데 중·고등학생이 있다면 이다음 일요법회 때 많이 참석을 해서 이 창립법회 때부터서 주욱 나오시도록 하신다면, 그 학생이 한참 이 사춘기를 당해서 앞으로 한량없이 발전을 해 나가기 위한 발돋움을 하는 중요한 때인 만큼 부처님 법문을 듣고 부처님 법으로 중심을 잡아주도록 한다면, 올바르게 그리고 훌륭한 소년으로서 그 앞길을 잡아나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덮어놓고 ‘부처님을 믿어라’ ‘관세음보살을 해라’ 이렇게만 해 가지고서 학생들이 불교를 믿게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어머니나 할머니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불법을 믿어도 애들은 뭐 '불교' 하면, '우리 잘되라고 우리 어머니가 절에 가서 공들인다' 이러한 정도로 밖에는 몰라 가지고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불교를 부모님들이 믿으면서도 올바르게 인도를 못한다면 그 학생들은 정신적인 방황은 바로 잡아질 수가 없고, 그래서 다른 종교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을 꼭 나쁘다고는 않지만 한 집안에 어른들은 불교를 믿고, 애들은 예수교나 다른 종교를 믿으면 종교 간에 서로 갈등이 생겨 가지고 한 가정이 화합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만나나 또는 궂은 일을 당하거나 한 집안에 종교가 다르면 그런 의식을 거행하는 데에도 갈등이 생기고 자연히 서로 가정이 화합이 깨지게 됨으로써,
여러분들의 어린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서 부처님 법을 믿고 이 정법으로써 자기의 본성을 찾도록 그렇게 하신다면 그 어린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대학을 졸업하고 또 결혼을 하더라도 그 사람은 갈 곳 없이 정법을 믿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어린 자녀들 보고 ‘불교를 믿으라. 믿으라’하기 보단, 여러분 자신들이 불법을 믿고 참선을 하심으로써 인격적으로 그 어린 자녀들에게 존경 받을 만큼 되신다면, ‘아! 우리 어머니가 불법을 믿고 참선을 하시더니 저렇게 훌륭해지셨다. 참 거 불교라 한 것은 좋은 것이로구나’
'그 새벽이면 일어나서 한 30분 내지 1시간씩 그렇게 참선을 하시는데, 그 참선을 하시니 저렇게 참! 그전에는 엄마 아빠가 밤낮 싸워쌓고 밤낮 우리한테도 신경질만 내고 그러시더니, 하! 저렇게 참선하시더니 신경질도 안 내시고 엄마 아빠가 그렇게 참 정분이 좋으시고 화합을 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을 보니 정말 이 참선이란 것은 참 좋은 것이로구나. 에잇! 그러면 나도 그것을 해 봐야겠다' 스스로 그러한 마음이 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불법을 믿게 할라면 여러분들이 정말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하심으로써 자연히 어린 자녀들은 여러분을 따라오시게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옴큼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난간에 매어 두노라.(41분46초~63분1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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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166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게송 참고.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 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敎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敎外別傳禪旨]가 되리라.
*선지(禪旨) : [범] dhyana 음을 따라 선나(禪那) • 타연나(駄衍那)라 쓰고, 줄여서 선(禪)이라고만 한다。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하여 닦음(思惟修), 악한 것을 버림(棄惡) 또는 공덕림(功德林) 등으로 번역한다。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가섭존자가 전한 선법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교법만이 유포되었었는데, 달마대사(達摩大師)가 건너온 뒤로부터 선법이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육조스님, 하택신회, 남악회양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화두 게문
[참고] 송담스님(No.306) - 19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〇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〇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19초)
〇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〇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19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36초)
〇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어문 ; '딴', '다른', '엉뚱한'의 사투리.
*경원시하다(敬遠視--) ;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하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관(觀)한다(관하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〇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금싸래기 ; 금싸라기(①금의 잔부스러기. ②아주 드물고 귀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싸래기는 '싸라기(①부스러진 쌀알. ②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서 쌀알처럼 되어 떨어지는 눈)'의 사투리.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活句) 문중(門中)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집안.
*조사문중(祖師門中)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조사선(祖師禪)을 수행하는 집안.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사(事) ; ①구체성. 현상. 나타나는 현상. ②개별적 현상. 차별의 상(相)의 하나하나. 구체적, 차별적인 것. 이(理)의 반대. 현실.
*방맹이(방망이) ; 방(棒). 몽둥이. 또는 주장자(拄杖子). 방(棒)은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횡행자재(橫行自在 가로 횡/갈 행/스스로 자/있을 재) ;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마음대로 행동함.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종사(宗師) ; 정법(正法)이나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하여 대중의 존숭(尊崇)을 받는 스님.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파설(破說) ; 설파(說破).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게송)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 화풍탑재옥난간(和風塔在玉欄干)’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제23권 황정견(黃庭堅)거사 게송 참고.
*옴큼 ; 한 손에 옴켜쥔 만큼의 분량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법문 내용]
(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 / 육조 스님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하택신회, 남악회양 / 깨달을려면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러야 / <사진작가의 ‘참선’ 질문에 대한 ‘풍선’ 법문>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백정이 소를 잡는 바로 거기에도 참선이 있을 수가 있고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
쥐가 쥐 잡아먹는 법문(法門) /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 /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 /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
체중현(體中玄)의 경계, 공(空)의 이치, 그것을 가지고 바로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체중현(體中玄), 현중현(玄中玄), 인가(印可) / 활구참선을 듣게된 인연(因緣), 이것은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
극기(克己)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대장부(大丈夫) / 생사해탈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 일념 단속하는 가운데에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 최상승법 /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 오후보림(悟後保任) /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 (게송)구명소일모선성~.
〇육조 스님께서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붙이지 안 했지마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는 옻칠과 같은데, 항상 우리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말은 안 붙였지만 이 화두선(話頭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이 간화선(看話禪)이 바로 그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원을 바로 거기다가 두는 것입니다.
〇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〇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가부좌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 조사와 선지식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〇참선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〇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〇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인가(印可)라 하는 것은 '옳다! 옳다! 니가 옳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 준 것이 인가가 아니고, 그 종사(宗師)가 그 학인(學人)한테 꼼짝을 못해야 그것이 바로 인가다" 이러한 말씀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
〇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시고 그리고서 그 49년 동안 설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듣기도 어렵고, 들어도 믿기 어렵고, 이렇게 듣고 믿어도 직접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〇생사(生死)에 자유자재, 또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이고, 일념을 잘 단련을 하고 일념을 갖다가 돌이켜서 그놈을 갖다가 단속을 하는 가운데에 생사 자유의 이치,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〇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의 수도(修道)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해서 잘 보림(保任) 공부를 해서, 그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가 있게 되어야 그래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깨달라 가지고 오후보림(悟後保任)을 안 하고 등한(等閒)히 하나, 더디 깨달라도 깨달을 때까지 그 공력을 들여서 정진을 해 놓은 사람은 깨달은 뒤에 오후보림 공부가 벌써 깨닫기 전에 많이 다 숙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는 것을 문제 삼지 말아라.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〇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그것이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〇자녀들을 불법을 믿게 할라면 여러분들이 정말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하심으로써 자연히 어린 자녀들은 여러분을 따라오시게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