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01~325)2021. 11. 11. 18:15

 

(No.324)—1987년 신수기도 회향(87.02.06) (50분)

 

 

(1/3) 약 21분.

 

(2/3) 약 16분.

 

(3/3) 약 12분.

 


(1/3)----------------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장단대소재목전(長短大小在目前)한데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자연의 조화, 천지의 조화가 사사로움이 없어. 사사로움이 없는 그 부사의력(不思議力)이다 그 말이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알 수 없는 그런 위대한 힘이,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다. 낱낱이 푸르고 푸러서 세한(歲寒)의 빛이여. 누가 사람의 인조(人造)로 인력(人力)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무도 인공(人工)으로 손을 대지 아니하는데, 자연의 이법(理法)에 의해서, 그 불가사의한 그 힘에 의해서 소나무는 푸르고, 대나무도 푸르고, 산천에 초목이 각자 그 종류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빛깔을 나투는데.

장단대소(長短大小)가 재목전(在目前)컨만,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아서 형형색색으로 우리의 눈앞에 조금도 숨김없이 펼쳐져 있건마는,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다. 우습다, 때 사람이, 모든 사람들이 그 숨김없는 적나라(赤裸裸)한 그 도리를 아지를 못하는구나.

오늘은 정묘년 정월 초아흐레 신수기도(身數祈禱) 회향(廻向)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에 여러분께서는 7일 동안을 정말 정성껏 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직접 기도에 참석을 하셔서 정성을 다해서 목이 쇠도록 정근(精勤)을 하셨습니다.

기도 입재(入齋)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도는 정성(精誠)이 제일인데, 참 정성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이러 이렇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구태여 말하자면은 첫째,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그리고 한결같아야 하고, 그리고 참된 그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청정하고 정성스러우면 시작할 때 이미 목적은 달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3일이라든지 7일이라든지 또는 백일(百日)이라든지 천일기도(千日祈禱), 만일기도(萬日祈禱) 그렇게 기도 날짜를 많이 잡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억지로라도 참고 견디면서 노력을 하다보면 그 어느 땐가는 청정하고 일여(一如)하고, 참된 생각에 부합이, 계합(契合)이 되는 것입니다.
자고(自古)로 기도를 정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간절히 해서 성취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어려운 일을 당해서, 중대한 일을 당해서 많은 분들이 기도를 여기서 저기서 모다 하시지만, 기도했다고 해서 '자기가 바라는 만큼 그때에 바로 성취되냐?' 하면은 혹 된 사람도 있고, 안 된 사람도 있고 혹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 사람과 그 성취하고자 하는 그 목적과 모다 그런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한결같이 다 되지를 않는 것을 우리는 보고 또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는데 기도가 성취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느냐?
첫째는 자기의 정성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냐,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또 정성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차라리 안 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자기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오히려 안 된 것보단 더 해로울 때에는 그 기도 성취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 또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기커녕은 생각지도 않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고통이 한목 몰아닥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금생, 또 내생, 저 내생까지 계속해서 그 좋지 못한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전생에 그러한 업(業)으로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되어 있는 삼생(三生)에 걸쳐서 받을 죄를, 금생에 신심껏 기도를 하고 그 공덕으로, 기도를 한 공덕으로 삼생에 걸쳐서 받을 것을 금생 일생 동안에 다 몰아서 다 받아 버리고, 그리고서 이 다음 생에는 정말 큰 원을 성취하도록 그렇게 될 경우에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코앞에 조그만한 원(願)을 세워서 목이 쉬도록 기도를 했다가 그것이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그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다. 나도 기도해 봤지만 그거 이루지도 못하더라’
이러한 반감심(反感心)을 갖고 불신을 하고 퇴태심(退怠心)을 낸다면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정성스러운 그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였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만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원했다가 큰 것을 바라지도 안 했는데 성취되는 수도 있고, 큰 것을 원했는데 조그만한 것이 우선 코앞에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코앞에 전혀 이루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니 별로 소원을 이룬 것 같지도 않은데, 살아가면서 점점 신심이 돈독하고 모든 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 풀려나가고 그러한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서,

그래서 이 기도라 하는 것은 청정한 몸과 마음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가 회향(廻向)을 했다고 해서 인자 빨리 자기 목적한 것이 돌아오기만을 급급하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스러운 행동,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정성스러운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 성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로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牡丹一日紅)한대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하되,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요, 세상 사람들의 뜻에는 들지를 안 해. 별로 그렇게 소나무, 잣나무 그렇게 뭐 '좋다'고 '아름답다'고 별로 안 그런다 그 말이여.

목단(牧丹), 모란(牡丹)은 하루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는 하루 동안밖에는 붉지를 않는데,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요.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이 꽃 가운데 왕이라고 그렇게 모다 좋아하고 칭찬을 하고 거기에 모다 반하더라 그 말이지.

송백은 무루법(無漏法), 무루복(無漏福), 영원한 복에다가 비유한 것이고, 모란은 유루복(有漏福)에다가 비유한 게송(偈頌)입니다.영원한 우리 생사해탈법은 한번 깊이 믿고 실천을 하면 당장 금생에부터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참 좋은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지를 안 해.

물론 특수한 신심이 있는 사람은 모르되,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그것에 관심이 없고, 유루복(有漏福)—당장 부자가 된다든지, 높은 벼슬자리 벼슬을 한다든지, 부귀영화, 모다 이런 해봤자 별수 없고 또 뜻대로 얻어진다고 해도 영원성이 없는 그러한 재산이나 명예, 권리 모다 그런 것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못 얻어서 야단이고 그것을 얻으면은 거기에 빠져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과연 무루(無漏)의 복(福)을 원하셨는가? 또는 영원성이 없는 유루복만을 목적에다 두고 기도를 하셨는가? 또는 저 궁극적 목표는 무루복에다 두되, 우선 당장 급해서 그래서 유루복에 원(願)도 세우시고 하시는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데에는 우선 당장 급한 것은 재산이요, 명예요, 권리요, 가족의 행복이요, 아들딸의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요. 아무리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참선을 한다 해도 당장 코앞에 그 문제가 절박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을 절대로 나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1년에 한 번 있는 신수기도에 동참을 해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 것도 참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할머니는 참선 밖에는 모르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못한 것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고, 또 할머니 · 어머니 ·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의 학교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고, 우선 나중에야 어떻게 될망정 우선 대학에는 들어가 놓고 봐야 하는 것이고, 그놈이 대학엘 못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기도를 참 일주일 동안 목이 쇠도록 그렇게—그 날씨가 상당히 강추위 했는데 그 눈을 뒤집어쓰면서 새벽기도부터서 모다 참석을 하시고, 대단히 참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이 신수기도 때와 같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 열렬한 마음, 그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고 싶은 잠을 깨고 새벽에 날마다 이렇게 참석하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성이면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에도 응당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처음~21분13초)





(2/3)----------------

부디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태함이 없이 방심(放心)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동안에 일주일 간은 기도 참선을 하셨는데 앞으로 1년 간은 참선 기도—참선하면서 바로 그 참선이 기도가 되도록, 그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그 말이여. 그러면은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거든. 절대로 참선과 기도가 둘일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하는 데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한결같은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선도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그런 말이 있듯이, 참선 하나 제대로 할 줄 알면 기도고, 주력(呪力)이고, 경을 읽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참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일륜명월영청휘(一輪明月映淸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한데  득견항하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저 만 리나 된 넓고도 긴 저 하늘에 비가 갰어.
일륜명월(一輪明月)이 영청휘(映淸輝)다. 한 바퀴 밝은 달이 밝고 맑게 빛나는데, 비가 오고 운무(雲霧)가 끼었을 때에는 그 달이 떠도 보이지를 않고 컴컴하니 그러다가 비가 쫙 개 가지고 그 새파란 하늘에 밝은 달이 휘영청 밝았다 그 말이여.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이여. 뜬구름이 한덩어리가 날아와 가지고 달을 가리워 버리니까, 모든 사람의 눈에 그 밝고 맑은 달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 구름이 가리워 버리니까 그 달을 보기가 어렵더라.

사실은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둘이 아니어.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願)하고 원해도 잘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일념(一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참된 마음이 그 어두운 부정적인 생각에 가로막혀서 장애를 받아가지고 원(願)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로막는 것만 없으면 바로 원하는 대로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장벽만 없다면 몇백 미터고 저 앞을 다 볼 수가 있지만, 앞에 종이 한 장만 가로막혀 있어도 밖이 보이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기도와 참선 공부가 내나 서로 상통(相通)한 것이고 둘이 아니라’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기도를 목이 쇠도록 큰 소리로 정근(精勤)만 하면 그것이 정성을 다한 것이냐? 참, 이 기도가 쉬운 거 같아도 정말 이 기도가 참선과 똑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목청을 돋아서 한 시간, 두 시간 내지 네 시간을 막 불러 대면은 되냐? 어떻게 해야 기도를 참 정말 훌륭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냐?
‘관세음보살’ 부르면서도,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부르고 목이 터지도록 부르면서, 아 그렇게 부르는 속에도 우리의 생각은 계속 집안일도 생각하고, 과거 일도 생각하고, 어릴 적 일도 생각하고, 이 일 저 일 할 것은 다 합니다.


그 ‘관세음보살’ 부를 때는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불러야 되겠는데,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온갖 잡념 망상이 조금도 거침없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거든.
기도를 해 보면서 가만히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관조해 보면 알 수가 있고, 다 그것을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도를 하면서 탁자 위에 촛불이라든지, 향이라든지 또는 청수 그릇이라든지 또는 탁자 위에 모신 부처님 눈, 코, 입이라든지 이런 걸 보면서 입으로는 외치면서도 그 눈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에 계속 우리의 생각이 그런 데로 다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촛불이 크게도 보였다, 작게도 보였다, 자기 앞으로 가까이도 보였다, 멀리도 보였다, 부처님 얼굴도 이렇게 우러러보면서 정근을 하면 부처님 얼굴이 이리 변했다, 저리 변했다, 가까워 왔다, 멀어졌다 야단이거든. 단 일분일초도 정말 망상이 없이, 번뇌가 없이 깨끗하게 정진이 되어 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눈으로 보이는 부처님 얼굴에다가 집중을 하는 것이 좋으냐? 훨훨훨 타고 있는 촛불에다가 눈을 대고 하는 것이 옳으냐? 무엇을 어디다가 우리의 눈을 고정하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대단히 이것도 참선할 때에 덮어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을 그 참선을 잘한다고 할 것이냐?

‘참선을 어떻게 해 나가야 올바르게 하느냐?’ 한 것과 똑같이, ‘기도도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은 그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아주 그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를 계속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찾고 또 찾고—물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고 그렇다고 하되,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가면서는 그렇게 화두를 염불하듯이 그렇게 자꾸 들먹여 쌓는 것이 아니에요.

‘이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이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있을 때에는 그 의심을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그 의심을 관(觀)해 나가야지, 거기다 대고 이미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떠억 있는데도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래 쌓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린애, 애기 잠재울 때 잠 막 잘라고 한 놈을 더 잘 자라고 가슴을 턱! 턱! 때려 쌓는 거와 마찬가지거든 그게.

그놈이,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거를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 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그래서 그 관(觀)이, 의심관(疑心觀)이 그것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여.

이 '관세음보살'도 목이 터지도록 막 부를 것이 아니라 적당한 음성으로—물론 여기서 목탁을 치면서 여러 사람이 정근할 때는 자기도 소리를 내서 같이 그 음성과 음성이, 내 음성과 다른 사람의 음성이 혼연일치(渾然一致)가 되어서 전체 그 동참(同參) 대중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거든.
자기 혼자 어디 가서 한 것 보단 여러 사람이 모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 정성도 하나요, 그 정근하는 음성도 그 목탁에 맞춰서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

뭣헌 사람은 (음을 아주 낮게)‘관세음보살’ 하는데, 뭔 사람은 (음을 고음으로)‘관세음보살’ 이래 가지고 한 사람은 크게 하고 작게 하고, 한 사람은 더디게 하는데, 한 사람은 늘어져 쳐지게 하고 도저히 그래서는 안되거든. 목탁을 치면은 그 목탁 소리에 저 법당에 가득한 그 동참재자(同參齋者)가 한마음 한뜻이 되고, 음성도 같이 이렇게 나가야 되거든.
우리가 남북통일을 바라는데, 한 사람이 바란 것보단 전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통일을 염원하고, 그 통일을 위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혼연일치가 될 때에 우리의 생활도 달라지고 나라에 대한 충성도 달라지고 모든 면에서 다 나날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마침내 통일 성업(成業)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칠일 동안의 기도도 모든 점에 있어서 전 동참재자(同參齋者)가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마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재(入齋) 법요식(法要式)도 하고. 또 시간도 맞추고 또 병법(秉法) 스님이 나서서 목탁도 치면서 같이 하고, 이것이 바로 전 동참재자로 하여금 한결같은 마음, 한덩어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구태여 추운 새벽같이 오시지 않고 집에서 해도 기도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근에서 그 바쁘고, 춥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나오신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 마음을 합해서 하는 데에서 몇백 배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21분14초~37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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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생각은 딴 데 가 있고, 눈은 눈앞으로 보는 데에 제멋대로 요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목소리만 크게 불렀지 조금도 그것이 경건성이 없이 부른 것은 그 목만 쇠었지 정말 기도의 그 참된 경계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목소리를 참 경건하고 엄숙한, 저 뱃속에서부터서 울려 나오는 그 정성스러운 음성 소리로 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자기의 목소리를 자기가 관(觀) 해.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고 ‘아이고, 저 사람 목소리도 되게 크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지 말고, 자기의 음성을 들어야 되요. 자기의 음성을 들으면서 ‘관세음보살’ 하면 눈을 떴으되 딴것이 보이지를 않고, 귀가 열렸으되 다른 소리가 들리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한결같이 한다면 가장 여법(如法)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탁은 너무 늘어지게 쳐도 힘이 들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빨리 쳐도 숨이 가빠서 따라갈 수가 없고, 그런데 처음에는 느릿느릿 쳐도 점점 10분, 20분, 30분 이렇게 해 가다보면 열기가 올라가지고 약간은 빨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빨리 하는 것은 너무 숨이 가쁘고 그러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이 대체적으로 한결같은 것이 좋은데, 하다보면 좀 빨라져요.

그렇게 해서 하여간 일주일 동안을 내가 법당에 올라와서 참석은 안 했지만, 계속해서 나도 그 기도에 참석을 했고, 기도 정근하는 소리와 목탁 소리를 계속 나도 거기에 마음을 합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에 기도가 얼마만큼 정성스럽게 잘 진행이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반드시 크고 작은 여러분 각자의 소원이 성취가 되실 것이고, 또 그런 유루(有漏)의 복(福)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무루(無漏)의 대원(大願)까지 연결이 되어서 기도 성취는 정말 원만히 성취가 되시리라고 나는 확신(確信)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확신을 하십시오. 그 원이 빨리 이루어지고 더디 이루어지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목적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또 정월 대보름이 한 5~6일 남았습니다. 대보름에 해제 법요식과 백일기도 회향 법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는 분은 기도를 하시고 또 참선 기도 하시는 분은 참선을 열심히 하셔서 백일기도 회향 때 또 해제 법회도 참석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정월에 접어들어서 일요법회, 입춘법회 또 기도 입재, 회향 아주 불과 며칠간에 여러 차례 법요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법회가 많이 있은 것이 좋은가?' 많이 있어서, '아이고! 참 몇 번은 뺐으면 좋겠다' 또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계신가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난한 사람 제사(祭祀) 돌아오듯이 법회가 이틀거리, 사흘거리로 자꾸 있어서 집안 모다 비워 놓고 참석하시기가 힘이 들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 또 댁에 계시는 거사님이나 가족들은 ‘참 뭔 놈의 법회를 갖다가 이틀 사흘거리로 날마다 쫓아다니고, 집은 비워놓는다’고 또 그러한 핀잔을 하신 분도 계셨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무엇을 뺄라야 뺄 수가 없습니다.

이틀, 사흘 있어도 일요법회를 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입재(入齋)를 또 뺄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입춘기도를 뺄 수도 없고 그래서 계속 참 여러 차례 했는데, 신심이 있는 분은 많을수록 더 신심을 내고 참 더 좋게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억지로 오기 싫은 것을 끌려서 오신 분은 좀 불만이 있으셨을런지도 모릅니다마는, 모든 것이 다 자기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너무 법회가 자주 있어서 나는 법상(法床)에 몇 번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마는, 오늘은 게송을 하나만 읊고 내려가겠습니다.

 


불구명리불구영(不求名利不求榮)하고  지마수연도차생(只麽隨緣度此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촌기소수시주(三寸氣消誰是主)오  백년신후만허명(百年身後謾虛名)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구명리불구영(不求名利不求榮)하라. 명예와 이끗도 구하지 말고, 부귀영화도 구하지 말아라.
지마수연도차생(只麽隨緣度此生)하라. 다못 인연 따라서 이 생(生)을 지낼지어다. 부자면 부자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잘 먹으면 잘 먹은 대로, 못 먹으면 못 먹은 대로, 각자 자기의 현재 주어진 그 인연, 그 정도에 따라서 그렇게 인연 따라서 지내라 그거거든.


삼촌기소수시주(三寸氣消誰是主)오. 세 마디[三寸] 이 숨이 끊어져 버리면 누가 이 몸뚱이의 주인이냐? 지금은 숨이 들랑달랑 하고 이럴 때에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이 들랑달랑 하는 숨이 딱! 끊어져 버리면 주인이 누구여?
백년신후만허명(百年身後謾虛名)이니라. 백 년 뒤에 공연히 헛된 이름만 남아 있더라.

금생에 살아서 아무리 부귀공명을 누리고 그 권리가 하늘에 닿도록 높은 권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또 문장(文章)이 온 세상을 갖다가 놀라게 한다 하더라도 숨 한번 딱! 끊어지면 내생(來生)이고, 또 죽은 뒤에 백 년 못 가서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더라’ 하고 사람들 기억에 조금 남는 것 외에는 무엇이 남을 것이 있느냐 그거거든.


우리는 어쨌든지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숨 한번 내쉬면 바로 그것이 내생」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을 해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숨 한번 내쉴 때마다 자기(自己)를 찾는 정진에 등한(等閒)히 해서는 아니될 줄 생각합니다.(37분27초~49분1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조화무사부사력~ / 기도는 정성(精誠)이 제일인데, 정성이라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한결같이, 그리고 참된 마음으로 해야 한다 /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가야 / (게송)송백천년취~ / 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신수기도 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다 /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 (게송)만리장공우제시~ /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거를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 (게송)불구명리불구영~ / 「숨 한번 내쉬면 바로 그것이 내생」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을 해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숨 한번 내쉴 때마다 자기(自己)를 찾는 정진, '이뭣고?'


기도라 하는 것은 청정한 몸과 마음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가 회향(廻向)을 했다고 해서 인자 빨리 자기 목적한 것이 돌아오기만을 급급하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스러운 행동,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정성스러운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 성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신수기도 때와 같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 열렬한 마음, 그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고 싶은 잠을 깨고 새벽에 날마다 이렇게 참석하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성이면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에도 응당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신수기도 동안에 일주일 간은 기도 참선을 하셨는데 앞으로 1년 간은 참선 기도—참선하면서 바로 그 참선이 기도가 되도록, 그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그 말이여. 그러면은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거든. 절대로 참선과 기도가 둘일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그런 말이 있듯이, 참선 하나 제대로 할 줄 알면 기도고, 주력(呪力)이고, 경을 읽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참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둘이 아니어.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願)하고 원해도 잘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일념(一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참된 마음이 그 어두운 부정적인 생각에 가로막혀서 장애를 받아가지고 원(願)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로막는 것만 없으면 바로 원하는 대로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거를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 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그래서 그 관(觀)이, 의심관(疑心觀)이 그것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여.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생각은 딴 데 가 있고, 눈은 눈앞으로 보는 데에 제멋대로 요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목소리만 크게 불렀지 조금도 그것이 경건성이 없이 부른 것은 그 목만 쇠었지 정말 기도의 그 참된 경계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반드시 크고 작은 여러분 각자의 소원이 성취가 되실 것이고, 또 그런 유루(有漏)의 복(福)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무루(無漏)의 대원(大願)까지 연결이 되어서 기도 성취는 정말 원만히 성취가 되시리라고 나는 확신(確信)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확신을 하십시오. 그 원이 빨리 이루어지고 더디 이루어지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목적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