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17))—1983년(계해년) 추계산철 해제 법회(83.09.30.음) (49분)
(1/3) 약 15분.
(2/3) 약 21분.
(3/3) 약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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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허고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하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한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동서남북 정처가 없어. 출가해서 걸망을 지고 도반과 선지식을 찾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해서 행각을 하는 분상에는 동서남북 정착(定着)함이 없어.
생애(生涯)는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오직 주장자 하나에 온 생애를 다 맽겨버렸다 그 말이여. 주장자가 동쪽으로 행하면 동쪽으로, 금년 여름에는 동쪽에서 지내다가 겨울철에는 북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갔다 남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주장자 하나로 생애를 맽겼는데.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여.
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그래 가지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천봉(千峰), 바로 천(千) 봉아리 속을 향해서 들어가고 다시 또 만(萬) 봉아리를 향해서 간다.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그 수없는 것을 보고, 수없는 것을 듣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들이 모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이 천 봉오리고 만 봉오리다 그 말이여.
그 봉오리 봉오리 넘을 때마다 거기에서 피렴심(疲厭心)도 느끼지 아니하고, 소득심(所得心)도 갖지를 아니하고, 만족심도 갖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
오늘은 계해년 가을 산철 해제일을 맞이했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수행 납자(衲子)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무 감격스럽게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용화사 선방대중과 또 도봉산 원효암 대중 그리고 여러 용화사 모다 돈독히 조실 스님의 법을 믿고 정진하는 신도 여러분도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히 5재 천도식을 맞이한 민병태 영가를 위해서 좋은 법문을 설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이 용화사 법보선원 이 법요식에는 사부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만년위패 법보제자 영가들도 동시에 청혼(請魂)을 해서 이 법요식에 법문을 듣도록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특히 이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해제 법문을 잘 듣고, 과거 무량겁에 지은 선(善) · 악(惡) · 무기(無記)에 업연(業緣)이 봄눈 녹듯이 녹고, 온갖 원한을 다 풀어 버리고 도솔천내원궁이나 또는 극락세계에 왕생을 하고,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게 되면 다시 불법문중(佛法門中)에 귀의해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 일대사인연,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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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 새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건마는, 우리는 심(心), 마음이,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나부대고, 뜻의 말[意馬]이 날뛰는 바람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종이 되어 가지고 망령되이 인아상(人我相)을 내고,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그럴 때마다 얼음 위에다가 물을 찌뜨린 거와 같애서 점점 얼음덩어리는 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그래 가지고 한 생 한 생 거듭될 때마다 업(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얽히고설켜서 자기의 영광(靈光), 자기의 신령스러운 빛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가리워져 가지고 캄캄한 칠통(漆桶) 칠야삼경(漆夜三更)처럼 되어 가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렇게 본래 불보살(佛菩薩) 불조(佛祖)와 조끔도 차등이 없는 그러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대사(一大事)를 요달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량겁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 빠져서 와서,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또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생사의 윤회는 끄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쇠로 지어 붓은 그러한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이 생사윤회를 계속 치성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와 뜻 속에 말, 그 원숭이와 망아지를 때려잡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만큼 어려우냐 하면, 급히 흘러가는 그 급수(急水),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애.
물결이 세지 아니한 데 배를 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물살이 센 데다가는 물살 따라서 배도 따라서 흘러 내려갈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배를 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위태로운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아(人我) 시비(是非)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밥 먹고 옷 입은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잠깐도 한눈팔 겨를이 없이 발에다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그 배를 대는 데, 잠깐 사이도 딴생각을 낼 겨를이 없다.
어떠한 사람이 머리를 내 머리를 짤라 가고, 손발을 짤라 가고,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서 죽음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이 배를 기어코 댈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아니한 것처럼, 이러한 정도로 정진을 지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법에 이르러서 성현 가신 때가 멀어.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이 철저하지를 못해 가지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지고, 보고 듣고 알고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것으로써 살림을 삼아 가지고, 금년도 이럭저럭 또 내년도 이럭저럭 한 철 한 철, 철은 지나가지만, 정진 속에 사량계교(思量計較)와 천착(穿鑿)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수행은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참으로 그것을 그러한 정진력을 써먹을 수가 있느냐?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면 세존(世尊)은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에 설산(雪山) 고행을 하셨으며, 달마대사는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을 왜 묵무언(默無言) 하셨으며, 장경(長慶)선사는 7개 포단(七個蒲團)을 앉아서 뚫었으며, 향림(香林)은 왜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으며, 조주(趙州)는 30년에사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한 필요가 있겠느냐.
이 참선은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잊어버려. 그래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 먹되 밥맛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 공안을 보나 하나도 맥힘이 없어, 자기 나름대로. 조주 무자(無字)도 맥힐 것이 없고, 판치생모(板齒生毛)도 맥힐 것이 없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들어봐도 하나도 의심이 안 간다 그 말이여.
부처라고 하나 중생이라고 하나, 된장이라고 하나 똥이라고 하나,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무엇을 봐도 그것이 다 바로 그것이 자기요, 자기와 부처와 이 법계가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이 도리는 이게 체중현 도리여. 공리(空理)라 그 말이여.
여기에 이르러서 만약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점검을 받지 못하면 자기도 '초견성이다, 한소식했다' 해 가지고, 그러한 그 체중현의 경지에서 보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없고 맥힐 것이 없으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가서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 체중현 도리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일대사 문제를 요달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서는 그것 가지고는 되지를 안 혀.
더군다나 후배, 다른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그것을 점검하는 데에 나아가서 자기의 경지와 같으니까 '옳다'고 일러줄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지만, 바르게 닦지를 못하고 바르게 깨닫지를 못하면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하고 마침내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중대한 죄과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산철 두 달 동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을 해 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지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정말 차라리 안 하려면 몰라도 일단 이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진을 해 나가는 마당에는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마한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써 작은 견처를 가지고 만족을 삼지를 말고, 고조사(古祖師)에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대는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자기의 견처(見處)를 용감하게 부정을 해 버리고 언제나 처음 발심(發心)할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견처(見處)와 견지(見地)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견처를 부정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발심 수행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병에다가 악지(惡知) 악각(惡覺), 악한 알음 악한 깨달음—마치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어떠한 견처도 스스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병에다가 썩은 변질한 고약한 음식을 담은 거와 같애서 그 병 속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병 속에 담어져 있는 변질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음식 때문에 새로 담은 음식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병 속에 좋은 음식을 담으려면 먼저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변질된 물질을 까꾸로 다 쏟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 완전히 그 속에서 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소독을 해서 그래도 또 냄새가 나면 그것을 삶고 해 가지고라도 기어코 그 병을 깨끗이 해야, 완전 소독을 해야 그런 연후에 라사 거기에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15분2초~35분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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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신성고취(此身誠苦聚)허고 삼계진화택(三界眞火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여아구출몰(汝我俱出沒)헌디 겁해종난측(劫海終難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신(此身)은 성고취(誠苦聚)요. 이 몸뚱이는 정말 이 괴로움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온갖 괴로움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몸뚱이도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그렇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여가 안 아프면 저가 아프고, 저가 안 아프면 여가 아프고, 오장육부가 다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이 걱정 아니면 저 근심, 저 근심 아니면 이 걱정, 내 일신(一身)뿐만 아니라 부모 걱정 · 자식 걱정 · 남편 걱정 · 사업 걱정 · 가정 걱정, 전체가 이 고통 고민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그리고 온 이 세계는 참으로 불집[火宅]이여. 불집! 불이 훨훨훨훨 불이 타고 있는 불집이여.
옛날 부처님께서 '이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다' 그러셨는데, 정말 이 말세가 되고 보니 저 온 세계가 만드느니 무기만 만들어. 무기가 순 그게 불인데, 불덩어리인데, 맨 새로 만들지 안 해도 이 삼계가 고대로 화택인데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머리 좋은 천재만을 골라 가지고 그 사람들을 시켜서 만드느니 원자탄 · 수소탄 · 레이저 무기, 그러한 무서운 불로써 온 세계를 갖다가 찰나간에 잿더미를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무서운 무기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고 또 상대방을 그 태워 죽임으로써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 무기를 만드는데, 결국에 가서는 그 무서운 무기로 인해서 상대방도 타 죽고 나도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찾아야만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이르를 텐데, 상대방을 죽이고 나만 살려고 나를 지킬려고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도 죽고 남도 죽게 하는 결과가 올 것이 빤합니다.
10년 후에 올 지, 20년 후에 올 지, 백 년 후에 올 지 그것은 알 수가 없지만, 현재 세계 정세의 되어 가는 껄세로 보아서는 그 시간이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언제 올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연 추측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깊은 복(福)과 인연(因緣)을 지었음인지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경행한 일이나, 이 문제는 범범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판이 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불보살이 다 그러셨고, 과거에 모든 고조사(古祖師)들도 역시 다 그러셨습니다. 더군다나 이 말세에 태어난 우리 근기가 약한 우리들은 과거에 불보살과 고조사에 몇십 배, 몇백 배를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러한 뜻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온 세계와 인류, 다시 우리에게 가까이 눈을 돌려보면 우리 조계종 종단 그리고 우리 자신, 멀리 생각하나 가까이 생각하나 우리는 시간을 아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정말 이를 악물고 다시 우리 정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천고무인문(千古無人聞)헌디 만산공두견(萬山空杜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헌디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고(千古)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만산(萬山)에는 공연히 두견새만 울고 있구나.
밤새도록 두견이는 울고 있는데, 아무도 그 두견새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에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라.
목동이는 한 소리 젓대를 불면서 소를 타고 석양을 지내가는구나.
전강 조실 스님께서 생존 시에 즐겨 읊으시던 게송이었습니다.
법보단에 모셔 있는 만년위패 법보제자 모든 영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오늘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법문을 들은 인연으로 속성정각(速成正覺)하시기를 바랍니다. (36분1초~48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 /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 /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없다.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구경(究竟)의 깨달음.
(게송)차신성고취~ / 삼계(三界)가 화택(火宅) / 무기가 순 그게 불덩어리 /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 / (게송) 천고무인문(千古無人聞) 만산공두견(萬山空杜鵑)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
〇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〇만약 이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〇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깊은 복(福)과 인연(因緣)을 지었음인지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경행한 일이나, 이 문제는 범범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판이 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불보살이 다 그러셨고, 과거에 모든 고조사(古祖師)들도 역시 다 그러셨습니다. 더군다나 이 말세에 태어난 우리 근기가 약한 우리들은 과거에 불보살과 고조사에 몇십 배, 몇백 배를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러한 뜻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온 세계와 인류, 다시 우리에게 가까이 눈을 돌려보면 우리 조계종 종단 그리고 우리 자신, 멀리 생각하나 가까이 생각하나 우리는 시간을 아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정말 이를 악물고 다시 우리 정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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