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身世)는 등공화(等空華)요, 이 몸뚱이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공의 꽃과 같고, 이명(利名)은 여분토(如糞土)로구나. 이끗, 재산과 명예 이러한 것은 똥 묻은 똥 덩어리와 같다.
공화(空華)라 하는 것은, 허공의 꽃이라 하는 것은 실지로는 없는 것인데, 안질병(眼疾病)이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을 보면 그 허공 속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실지는 없는 것인데 눈병이 걸린 사람에게는 꼭 무엇이 실지로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허공 속에 보이는 거 그것이 공화(空華)인데, 이 몸뚱이와 이 세계도 역시 공화(空華)다 그 말이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가합(假合)해서 임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깨닫지 못한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볼 때에는 이 몸뚱이가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 세계도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상(實相)이 아니라 허공 속에 피어 있는 꽃처럼, 안질병(眼疾病) 환자가 볼 때에 허공 속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무명(無明)으로 보니까 이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가 참자기, 참자기라고 느껴지고 이 세계도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지 실지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도자(道者)가 합여사(合如斯)하면, 도 닦는 사람이, 정법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이 합당(合當)이 이와 같이 볼 것 같으면, 자기의 몸뚱이와 이 세계 그리고 명예와 재산 이런 것들을 공화(空華)와 같이 보고 흙덩어리나 똥 무더기처럼 본다면, 기시과능소(豈是誇能所)리요. 어찌 능소(能所)를 자랑하리요. 능소(能所)라 하는 것은, 능(能)이라 하는 것은 주관을 말하는 것이요, 소(所)라 하는 것은 객관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모다 능소라 하는 것은 인아상(人我相)이거든.
‘내’라 하는 생각, ‘이것은 나다’ 하는 생각, ‘내 것이다’ 하는 생각, ‘나는 잘한다’ 하는 이러한 주관적인 생각, 그리고 ‘남이다, 내가 아니고 저것은 남이다’ 하는 그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것은 내 것은 소중하고 내가 옳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헐뜯고, 내가 남을 디디고 올라서서 나만 잘살려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내 가지고 남과 다투고 이러한 생각을 어찌 가질 것이냐.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로 얽혀진 허망한 것이라 하지만 먹여 주어야 하고, 입혀 주어야 하고, 춥고 더운 곳에서 이 몸을 잘 보호를 해야 하고, 병이 나면 치료를 해 줘야 하고, 또 내가 사는 집도 비가 새지 않고 차운 바람을 막아 주고 이렇게 집도 단속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명예나 재산 같은 것도 그것이 똥 덩어리와 같고, 흙덩어리와 같이 허망한 것이요 영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마는 당장 명예가 없으면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고, 재산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먹고 입고 거주하는 것이 온통 다 재산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아들딸을 낳아서 길러서 가리키는 데에도 재산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허공의 꽃처럼 보고, 똥 덩어리나 흙덩어리처럼 그렇게 달관을 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니 병이 들어도 내싸두어 버리고, 춥거나 덥거나 얼어 죽거나 더위를 먹어서 쓰러지거나 방치를 해 버리고, 집이 쓰러져서 무너져도 내비두어 버리고, 재산을 갖다가 남이 다 가져가 버리거나 재산이 다 없어져도 관리를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살 것인가? 부처님 법문을 잘못 이해하면 그러한 단상견(斷常見)에 떨어져서 중도(中道)의 뜻을 이해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어도 단견(斷見)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상견에 떨어지지 말도록 법문을 하면 당장 찰나간에 단견에 떨어지고, 이래 가지고 단견 아니면 상견, 상견 아니면 단견, 양두(兩頭)에 걸려 가지고 중도의 뜻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중생견(衆生見)이라 하는 것입니다.
방에서 파리를 날리면,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천장에 가서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은 동쪽 벽에 가서 붙고, 동쪽 벽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서쪽에 가 붙고, 그 파리를 종일토록 날려도 동서남북 벽 아니면 천장에나 방바닥 어딘가는 기어코 붙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무명업식(無明業識)을 여의지 못한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설해 주어도 유무(有無) 아니면 중간에 떨어져서 중도의 뜻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으면, ‘몸과 이 세계가 허공꽃과 같다’ 해도 그 말에서 깨달아 얻을 것이요, ‘명예와 재산이 똥 무더기요, 흙덩어리와 같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의 그릇된 애착과 집착과 소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부처님 법문에 깊은 산중에 다섯 신선(神仙)이 도(道)를 닦고 있었는데, 각기 책임이 있어서 그 다섯 신선 가운데 한 신선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밥을 짓는 부목과 공양주의 책임을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너무 피곤해 가지고 뜨뜻한 양지 바른 언덕에 잠깐 쉰다고 하는 것이 깊은 잠이 들어 가지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식사 시간이 다 지나 버리고 늦게 늦게사 돌아오니까 그 다른 네 분의 신선들한테 호되게 걱정을 들었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을 지키지를 못하고 자기 멋대로 실컷 자고 때가 지내서사 이렇게 돌아오면 그러한 게으른 생각을 가지고 무슨 도를 이룰 것이냐?’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니까 거기에서 참 미안한 생각과 자책감이 나서 강으로 가 가지고는 한 발을 딛고, 몇 시간을 한 발로 딛고 손을 들고서 발을 들고서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벌을 주기로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이렇게 한 발만 딛고 발을 들고 그렇게 벌을 서고 있는데, 그러다가 너무 지쳐 가지고 신발, 발에 신었던 칠보로 잘 만들어진 신이 강물에 떨어져서 흘러 내려가고 또 그러다가 몸이 쓰러져 가지고 결국은 그 사람은 물에 떠내려 가지고 기진맥진했기 때문에 헤엄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길로 물에 빠져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 신선이 그렇게 해서 죽은 뒤에 오랜 세월이 걸려 가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한 여나므 살 이렇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 소년이 신선이 죽어 가지고 태어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마을 아이들과 같이 어울려서 놀고 장난하고 그렇게 하면서—별로 부잣집이나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지를 못하고, 가난하고 천한 그런 집에 태어나 가지고 마을 아이들하고 섞여서 놀고 있는데, 어느 도사(道士)가 그 마을을 지나다가 놀고 있는 아이들을 이렇게 주욱 살펴보더니, 그 신선이 (다시) 태어난 그 아이를 보고서 찬찬히 그 아이를 보니 설사 옷은 남루하게 입었지만, 그 얼굴 생김새라든지 눈매라든지 모든 것이 여러 아이들에게 비교해서 특출하게 준수하게 생겼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아이를 “너 이리 좀 오너라” 하고 부르니까 다른 애들도 ‘와~’ 하니 삥 둘러섰다.
“너는 지금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너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 나라 왕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천한 집 아이가 무슨 왕이 된다고 그러십니까? 점잖은 어른이 왜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러한 장난 말을 하십니까?”
“아니다, 후일에 반드시 네가 왕이 될 터이니 그때 왕이 되거든 나를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만일 제가 왕이 된다면 내가 도사님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왕이 될 까닭도 없지만, 만일에 된다 하더라도 제가 도사님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잊겠습니까?”
그래서 마을 애들도 ‘미친 영감이, 미친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한다’ 해 가지고 모두 곧이듣지 않고 웃어 버리고 말았는데, 몇 해 안 가서 그 나라 임금님이 병을 앓다가 승하(昇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밑에, 왕 밑에 왕자가 없어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를 왕으로 모시느냐?’ 대신(大臣)들이 모여서 여러 날을 두고 토의를 한 결과, ‘이 나라 방방곡곡을 뒤져서 임금님으로 모실 만한 그런 어진 분을 우리가 찾기로 하자’ 그래 가지고 각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 가지고 임금님이 될 만한 그런 어진 현자(賢者)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치 그 신선이 죽어서 태어난 그 애가 사람들의 눈에 띄어 가지고 추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궁에서는 칠보로 장엄한 가마를 보내 가지고 그 청년을 모셔 갔습니다. 가서 보니 만조백관이 전부 다 ‘과연 이만하면 우리가 임금님으로 모실 만하다’ 해 가지고 임금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딱 되던 날, 몇 해 전에 자기가 임금이 되리라고 수기를 준 그 도사가 찾아왔습니다. “상감이 저 얼굴을 기억을 하시겠습니까?” “아! 제가 기억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도사님 말대로 임금이 되었으니 내가 도사님의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던지 다 원(願)대로 해 드리려니와 우선 당장 이 나라를 절반으로 갈라서 드릴 테니까 그 나라 임금이 되십시오” 그러니까.
“저는 그런 것도 다 싫습니다. 싫고, 임금님이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모든 것은 내가 임금님으로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둘째는 모든 크고 작은 정사(政事)를 하는데 있어서 나의 자문(諮問)을 받아서 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 두 가지만 해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 그것이야 내가 어찌 못하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왕궁에 특실을 만들어서 임금님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고, 똑같이 잘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시설을 다 마련을 하고, 크고 작은 모든 정사에 전부 다 문의를 해서 자문을 받아 가지고 하게 되었습니다. 몇 해 안 가서 어떻게 정치를 잘하고 잘 다스리던지 온 나라가 온통 질서가 잘 잡히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사가 차츰차츰 교만(驕慢)이 생겨 가지고 모든 대신들을 너무 짓밟고,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래 가지고 그 나라 모든 정치는 그 도사의 한 주먹 속에 다 들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대신이 수십 명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니까 대신들이 여기서저기서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평을 해도 임금님은 다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그 도사(道士) 말에만 전적으로 의존을 하게 되어서 모든 대신들은 ‘저 요망한 저 도사를, 거라지놈 같은 정체를 모르는 저 도사놈을 갖다가 내쫓아야 한다’고 모다 주장을 했습니다. 임금님은 여러 차례 그것을 거절을 하고 물리치고 그랬지만, 하도 대신들이 물러가지 아니하고 연일 연좌데모(連坐demo)를 하고 그러니까 하다하다 못해서 임금님도 ’그 도사를 한번 시험해 볼 수밖에는 없다‘ 이래 가지고 그 도사가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그전 같으면 도사가 돌아올 때까지 상감이 식사를 아니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도사가 오거든 항시 같이 했었는데, 그날은 도사가 오기 전에 더 이상 기다리지를 아니하고 임금님이 먼저 식사를 해 버렸습니다. 도사가 돌아와 보니 벌써 먼저 임금이 수라(水剌)를 다 들어 버렸다 그 말이여.
“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고 임금만 먼저 식사를 했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내가 먼저 했습니다”
“벌써 상감은 나와 최초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을 언제나 함께 하고, 똑같이 하기로 그렇게 철통같은 약속을 해놓고 조끔 배고프다고 해서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나 먼저 먹다니, 당신은 의리를 배반한 사람이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 개새끼같은 놈이다” 이렇게 상감을 향해서 입에 못 담을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신들이 ‘와~’ 일어나 가지고 ‘상감님을 향해서 저러한 무례한 소리를 할 수가 있느냐? 저러한 불경스런 놈을 가만히 둘 수가 없다’ 해 가지고 ‘저놈은 귀도 짜르고, 코도 짜르고, 혀도 짜르고 해 가지고 그리고 팔다리를 다 짤라서 항아리 속에 담아 가지고 태워 죽여야 옳다’ 이래 가지고 대신들이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임금님은 (도사의) 소퉁이를 생각하면 마땅히 그렇게 엄벌에 처할 일이로되, 자기와의 오랜 의리가 있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이 사람을 먹고 입고 살만한 돈과 곡식을 주어 가지고 저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해라” 이래 가지고 대신들의 연좌 항의를 갖다가 물리치고 귀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도사(道士)는 할 수 없이 왕실에서 쫓겨나 가지고 저 먼 지방으로 추방을 당했는데, 할 수 없이 자기 받았던 돈과 곡식이 다 떨어지니까 옛날에 자기 다정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들은 그 사람을 갖다가 농토를 주어 가지고, 소와 농토를 주어 가지고 농사를 짓도록 상당한 많은 토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여러 종들을, 일꾼과 머슴을 들여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는데, 어떻게 머슴과 종들을 갖다가 혹독하게 부리던지 그 일꾼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갖다가 소 돼지처럼 그렇게 혹독하게 부리던지 살 수가 없어서 그 머슴 가운데 한 사람이 거기서 도망쳐 가지고 ‘물에 빠져서 차라리 자살을 해 버려야겠다’ 이래 가지고 강가로 가서, 자살하려고 강가로 갔더니 거기에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것이 있어서 가까이 가 보니까 칠보로 장엄한 신짝 한 개가 있더라 그 말이여. 그래서 그것을 주워 가지고 이모저모로 보니까 기가 막힌 보물이여. 그래서 ‘이것을 갖다가 우리 주인한테 갖다 바치면 나와 우리 모다 동료들을 혹독하게 부리지 아니하고 잘 따뜻하게 해 줄 거다’ 해 가지고 그 신을 갖다가 바치니까, 그 도사가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 신을 갖다가 상감한테 바치면은 상감이 나의 잘못을 용서하고 귀양을 풀어주지 않을까?’ 이래 가지고 그 신발을 갖다 상감한테 바쳤습니다.
상감이 대단히 기뻐서 귀양을 풀어줄려고 했는데 대신들이 ‘와~’ 하니 일어나 가지고 모두가 반대를 했습니다. ‘그까짓 신발 한 짝을 가져왔다고 해서 그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차라리 신발 두 짝, 한 켤레를 다 가져온다면은 혹 몰라도 한 짝 가지고 어떻게 용서를 해 줄 수가 있느냐?’ 그래서 상감은 ‘그러면 가서 어떻게 찾던지 마지막 한 짝을 더 찾아서 한 켤레를 채운다면 용서를 해 주겠다’ 이리해서 그 도사는 다시 추방을 당해 가지고 자기 농토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 일꾼과 종을 거느리고 그 강가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 신발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 강을 거슬러서 거슬러서 저 산중 깊이 들어가니까, 아! 신선들 네 분이 바둑을 두면서 그렇게 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신선들한테 인사를 하면서 “내가 신발 한 짝만 더 주운다면 내가 모든 이런 고생으로부터 풀려나고, 다시 임금님의 스승이 되어 가지고 호강을 할 수가 있겠는데, 이 신발 한 짝을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것을 어떻게 찾게 좀 해 주십시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선이 “너의 상감은 옛날에 우리와 같이 도를 닦던 우리의 친구다. 친구가 조그만한 실수가 있어 가지고 스스로 그 조그만한 실수를 깊이 뉘우치고 참회하다가 마침내 몸까지 버리게 되었어. 조그마한 허물을 깊이 뉘우친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 상감의 복록을 누리게 되었는데, 너는 큰 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을 모르니 너 같은 사람을 어디다 쓸 것이냐?” 이렇게 꾸짖으니까, “과연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임금님이 나하고 약속을 잘 지켜서 나를 그렇게 임금님과 똑같이 그렇게 명예와 권리와 모든 복록을 그렇게 잘 해 주었는데, 내가 그것에 너무 놀아나 가지고 교만심을 내 가지고 그렇게 함부로 하다가 이러한 벌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무런 참회를 할 줄 모르고 오히려 대신들과 임금님을 원망했으니 참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깊이 뉘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선이 ‘그러면 그 신발 한 짝은 저리 아무 데를 가면은 거기에 신발이 한 짝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러주어 가지고 그 도사가 거기를 찾아 가지고 신발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짝을 채워서 한 켤레를 상감한테 바치니까 상감이 그렇게 좋아하고, 대신들도 차츰 미워하는 생각이 없어져서 다시 상감의 자문에 응하면서 아주 바르게 그리고 겸허하게 그렇게 위로는 상감을 받들고, 아래로는 만조백관의 의사를 들어서 아주 정치를 잘해 가지고 그 나라가 번창을 했다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이 있습니다.(처음~33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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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명예와 재산과 권리를 누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게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벼슬이 높을수록에 그 뜻을 겸허하게 갖고, 도가 높을수록에 하심(下心)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 원효 스님의 법문도 있습니다. 작은 허물이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큰 저수지의 둑도 모래 구녁 하나로 인해서 물이 졸졸졸졸 그리 새 가지고 차츰차츰 구멍이 커져 가지고 열 길, 스무 길 되는 무서운 저수지 댐이 무너져 가지고 큰 물난리가 나듯이, 우리가 세속(世俗)에 살건 또는 도를 닦는 도문(道門)에서건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설사 자기에게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驕慢)한 생각을 갖지 아니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조그만한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뉘우치는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용서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큰 공(功)이 있어도 그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교만심이 나지 아니하면, 그럴수록에 자기의 공이 더욱 빛날 것이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큰 지탄을 받게 되고, 아무리 큰 공이 있어도 교만심을 낼 때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의 인격이 인증을 받게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공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는 큰 재앙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장양(張良)이는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그 큰 공이 있었지만 스스로 자기가 세운 그 공로에 자만심을 갖지 아니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았기 때문에 재앙을 면했고, 한신(韓信)이도 역시 그러한 큰 공을 세웠지만 천자(天子)로부터 자기의 공로에 대한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포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해 항시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참형(慘刑)을, 참혹한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또는 회사에서나 또는 국가에서나 또는 이런 도문(道門)에서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이러한 작은 허물이 있으면 크게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새로운 발전을 해 나가도록 마음을 쓸 것이고, 설사 어떠한 공(功), 작은 공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큰 공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공로에 대해서 자만심을 갖지 아니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우리가 몸담아 있는 회사나 직장, 어디서라도 존경을 받게 되고 자기에게 모든 재앙이 닥쳐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흔히 가정에서 싸움도 자기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를 하고, 상대방의 잘못은 추상(秋霜)같이 다루려고 하는 데에서 큰소리가 나고 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간, 형과 아우와의 관계에 있어서까지 자기의 잘못은 뉘우칠 줄 모르고 상대의 잘못은 조그만한 것도 용서를 아니하고 크게 문제를 삼으려고 하는 데에서 시비가 일어나고 큰소리가 나고 마침내는 불화(不和)가 이루어지게 되고, 부부간에도 그러한 조그만한 문제가 원인이 되어 가지고 이혼을 하게 되고, 불행한 때에는 한쪽에서 가출을 하고 자살을 하고 이러한 참 참담한 사건이 일어나는 예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을 하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한다면 우리의 가정, 우리가 몸담아 있는 회사, 우리가 몸담아 있는 고장과 나라, 그리고 수행하는 스님네는 그 사찰이 모든 재앙은 눈 녹듯이 다 녹아 버리고, 정말 부처님께서 그 육화(六和), 여섯 가지의 육화의 법이 실천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정법문중(正法門中)은 영원히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 ‘햇볕이 문틈이나 그런 틈으로 햇볕이 스며들 때 방안에 있는 그 수많은 먼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햇볕이 스며들지 아니할 때, 문을 닫고 방안에 있으면 그 방안에 먼지 있는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마는, 햇볕이 문틈으로 스며들 때에 보면 그 방안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먼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환하니 보입니다. 그리고 못에, 맑은 못 그리고 조용한 못가에 섰으면, 그 못 속에 자기의 모습과 근처 산과 나무나 하늘에 떠 있는 달에 모든 것들이 그 물속에 소소(昭昭)하게 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열심히 공부를 하면 우리 자신의 모든 크고 작은 모습이 우리의 몸가짐에 있어서나, 말씨에 있어서나, 마음가짐에 있어서 모든 것이 소상하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햇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스러운 마음으로 비추어 본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고요한 연못」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화두를 들고 정진(精進)함으로써 번뇌와 망상이 다 가라앉아서 맑고 고요한 상태에 들어간다고 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진을 하지 아니하고 도(道)를 닦지 아니하면, 호수의 물이 흙탕물이 그나마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상태와 같고, 방안에 있으되 햇볕이 들어오지를 않는 껌껌한 방에 있는 거와 같아서 그런 상태에서는 먼지도 보이지 아니하고 모든 영상(映像)도 보이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그런 껌껌한 방이나 물결치는 흙탕물 속과 같은 그러한 마음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기의 허물은 보지 아니하고 밤낮 남의 잘못한 것만 살펴 가지고 그것을 피차 서로 시비(是非)를 하다가 결국은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옷을 찢고 저 사람은 내 옷을 찢으며, 나는 저 사람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고 상대방은 내 얼굴을 갖다가 할켜 가지고, 결국은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곳은 바로 그 세계가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이고, 도 닦는 마음이 없는 그래 가지고 자기의 이끗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명예와 권리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남을 거리낌없이 짓밟고 해롭게 하는 그러한 세계는 바로 아수라(阿修羅)의 세계다 그 말이여. 지옥(地獄) 세계다 그 말이여.
어느 이상한 곳이 있어서 거기를 찾아 들어가 가지고 보니까, 원숭이를 몇십 마리를 잡아넣어 논 것처럼 뭔 사람 소리도 같고 이상한 소리가 나서 괴이한 소리가 나서 이리 가 봤더니 사람들이 꼬치꼬치 말라서 뼈만 남은 앙상한 그런 꼭 귀신같은, 아직 죽지 아니한 해골같은 그러한 무리들이 그 안에 버글버글버글 하고 있다 그 말이여. 또 한쪽을 저리 갔더니 희망에 찬 노래소리가 나고,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얼굴이 포동포동하니 모다 살이 찌고 얼굴이 환히 아주 신선도골(神仙道骨)이 되어 가지고 모다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조금 있으니까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식사가 주욱 가운데 식탁이 있고 그런데 그 식탁에 바짝 가서 먹게 되어 있지를 않고 멀찌감치 앉아서, 숟가락이 기다란 해 가지고 국자같이 만들어져 가지고 먼 데서 음식을 떠먹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러고 가운데다가 밥통을 주욱 갖다 놨기 때문에 같이 이쪽에서도 떠먹고 또 저쪽에서도 마주 앉아서 이렇게 떠먹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런데 이렇게 뜰라고 하면 저쪽에 앉은 사람이 긴 숟가락을 탁! 때려 버리고 못 퍼가게 하고, 자기가 퍼 먹으려고 하면 또 이쪽에 앉은 사람이 또 그 숟가락을 탁! 때려 버리고는 못 떠먹게 하고 그래 가지고 또 저만 떠먹으려고 하고, 그러다가 피차 한 숟갈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음식물은 밖으로 다 쏟아지고. 그리 못 먹고 상대방이 못 떠먹게 하니까, 그 숟갈로 상대방의 얼굴이고 머리빡이고 사정없이 때리고 후려갈겨 가지고 모다 상처가 나고, 그래서 상처가 난 데다가 못 먹고 하니까 뼈만 앙상하니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 또 한쪽에를 갔더니 아까 그 살이 찌고 신선도골과 같이 생긴 데에 식사가 나왔는데, 그 긴 숟갈로 밥을 떠 가지고 제 입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입에다가 따악 떠 넣어 주더라 그 말이여. 또 상대방에 앉은 사람은 또 긴 숟갈로 음식을 떠 가지고 또 자기 앞에 있는 상대방 입에 다 떠 주고 해서 피차(彼此) 떠먹여 주니까, 그렇게 밥은 음식물은 엎지러지지 아니하고 다 같이 살이 포동포동하니 쪘어. 얼굴도 하나도 상처가 나지 아니하고 그렇게 살이 쪄서 그렇게 참 화목한 가운데에 살고 있더라 그 말이여.
이 세계도 서로 도우면서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에 해(害)가 가지 않도록 항시 자기의 어떤 일을 하면서 ‘이 일을 하면 상대방에 어떠한 해(害)가 있을 것인가? 이 일을 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에는 어떠한 해가 있을 것인가?’ 항시 남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살 길을 찾아나가고, 자기의 사업을 해 나가는 그러한 세계가 된다면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정말 살지고 살기 좋은 그러한 세계가 될 것이고. 자기만 잘살고 자기만 배불리 먹고 또 상대방을 못 먹게 훼방을 놓고, 그것도 상대방을 갖다가 숟갈로 사정없이 후려갈겨서 상처를 내게 하면 상대방도 역시 가만히 안 있고 나로 하여금 못 먹게 할 것이고,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겨서 상처를 내게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어리석은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실지로 그러한 일을 당하면—지금 법당에서 이렇게 말을 듣고 있을 때는 ‘아! 과연 그렇구나. 그래야 하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다 하시겠지만, 가정으로 돌아가고 사회에 나가면서 어떠한 명예나 권리나 이끗을 만나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졌던 그러한 생각은 간 곳이 없고 확! 눈이 뒤집혀 가지고 다시 그 숟갈로 상대방 얼굴을 후려갈기게 되지 않을란가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한 분도 그런 분이 계시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되고, 그러한 참 신심(信心)을 갖으신 분이기 때문에 참 여기에 이렇게—연휴가 있어서 모두 여기저기 명승고지(名勝故址)로 모다 유쾌한 여행을 떠나실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그러한 것을 다 그만두고 이렇게 이 법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정말 갸륵하고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들이야 여러분 입에 넣기 위해서 상대방을 숟갈로 후려갈기거나 그런 일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너무너무 살기가 어렵습니다. ‘밤낮 남의 입에만 떠 넣고 누가 내 입에 떠 넣어 주기를 기다려봤자 동서남북을 다녀봤자 아무도 내 입에다가 떠 넣어 줄 사람을 만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이 세상은 나쁜 사람도 많이 있지만, 내 마음이 착하고 보면 참 좋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어질고 착하고 항시 남을 사랑하고 애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멀고 가까운 데에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 나쁘다, 저 사람이 나쁘다’ 하지만, 내가 나쁘면 좋은 사람도 다 나쁜 사람으로 변하고, 내가 어질고 착하고 좋으면 모두가 ‘나쁘다’고 지탄을 받는 그 사람도 나한테는 참 좋게 상대해 주는 경우를 많이 겪게 됩니다. 좋고 나쁜 것은 객관적이기보다는 나한테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바로잡고, 내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지면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 마음 하나가 잘못되어 가지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한집안 내에도 모두가 미운 사람뿐이고, 이웃간에도 전부가 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요. ‘옛날에는 참선을 하면 모다 깨칠 수가 있고, 지금은 말세가 되어서 참선해 봤자 근기(根機)가 얕아서 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한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나, 참선에는 예[古]와 이제[今]가 없어.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라도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다 깨칠 수가 있다.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다못 밖을 향해서 찾지를 말어라.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觀照)할 뿐이지 문자상에서 책에서 찾는다든지, 귀로 듣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눈으로 보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다함이 없는 보배를 자기 속에서 타개(打開)를 하면 개발을 하면, 촬토(撮土)가 시황금(是黃金)이니라. 흙을 움켜쥐어도 그것이 곧 황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눈으로 보는데,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만 봐 버리면 눈으로 보는 것이 전판 다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손으로 잡는 것이 흙덩이 건 돌덩어리 건 손에 쥐었다 하면 전부가 그것이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더라. (33분39초~63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신세등공화(身世等空華)~ /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어야 한다 / 전생에 신선인 왕과 교만한 도사의 이야기 /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이라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驕慢)한 생각을 갖지 아니해야.
육화(六和) /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곳은 바로 그 세계가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이고, 도 닦는 마음이 없는 세계는 바로 아수라(阿修羅)의 세계, 지옥(地獄) 세계 / 긴 식탁의 가운데에 음식을 두고 양쪽에 긴 숟가락을 들고 식사하려는 사람들, ①서로 못 먹게 하려고 음식을 뜬 상대방의 숟가락을 치는 경우, ②음식을 떠서 상대방에게 떠 먹여 주는 경우. ‘똑같은 환경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모두가 좋겠는가?’의 비유 설화 /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게송) 일념근본미(一念根本迷) 만사상상축(萬死常相逐) 타파진로옥(打破塵勞獄) 공창환향곡(共唱還鄕曲) / 대중 정진 / (게송) 참선무고금(參禪無古今)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 촬토시황금(撮土是黃金) /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〇방에서 파리를 날리면,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천장에 가서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은 동쪽 벽에 가서 붙고, 동쪽 벽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서쪽에 가 붙고, 그 파리를 종일토록 날려도 동서남북 벽 아니면 천장에나 방바닥 어딘가는 기어코 붙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무명업식(無明業識)을 여의지 못한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설해 주어도 유무(有無) 아니면 중간에 떨어져서 중도의 뜻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으면, ‘몸과 이 세계가 허공꽃과 같다’ 해도 그 말에서 깨달아 얻을 것이요, ‘명예와 재산이 똥무더기요, 흙덩어리와 같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의 그릇된 애착과 집착과 소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〇작은 허물이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큰 저수지의 둑도 모래 구녁 하나로 인해서 물이 졸졸졸졸 그리 새 가지고 차츰차츰 구멍이 커져 가지고 열 길, 스무 길 되는 무서운 저수지 댐이 무너져 가지고 큰 물난리가 나듯이, 우리가 세속(世俗)에 살건 또는 도를 닦는 도문(道門)에서 건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설사 자기에게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한 생각을 갖지 아니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〇내 마음을 바로잡고, 내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지면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 마음 하나가 잘못되어 가지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한 집안 내에도 모두가 미운 사람뿐이고, 이웃간에도 전부가 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요. ‘옛날에는 참선을 하면 모다 깨칠 수가 있고, 지금은 말세가 되어서 참선해 봤자 근기(根機)가 얕아서 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한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나, 참선에는 예[古]와 이제[今]가 없어.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라도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다 깨칠 수가 있다.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다못 밖을 향해서 찾지를 말어라.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觀照)할 뿐이지 문자상에서 책에서 찾는다든지, 귀로 듣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눈으로 보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다함이 없는 보배를 자기 속에서 타개(打開)를 하면 개발을 하면, 촬토(撮土)가 시황금(是黃金)이니라. 흙을 움켜쥐어도 그것이 곧 황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눈으로 보는데,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만 봐 버리면 눈으로 보는 것이 전판 다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손으로 잡는 것이 흙덩이 건 돌덩어리 건 손에 쥐었다 하면 전부가 그것이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더라.
가련억만인천중(可憐億萬人天衆)이여 부지황엽경비전(不知黃葉竟非錢)이로구나. 가련(可憐)하다, 인천(人天)의 억만 대중이여. 하늘나라나 이 인간 세상에 백만억 대중이여, 가련하구나! 노란 이파리가 마침내 돈이 아닌 줄을 아지 못하는구나.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하셔 가지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시다가 대도(大道)를 깨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涅槃)에 드실 때까지 49년간을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그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법문이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노란 단풍잎을 어린아이에게 쥐어주면서 “이것이 돈이다. 여기 있다 돈, 여기 돈 많이 있다” 이러면서 어린아이에게 준 것이다 그 말이여.
약사인천(若使人天)으로 지본심(知本心)하면, 인천(人天), 하늘나라나 인간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마음, 근본 본성(本性)을 깨닫게 해 버린다면, 하용애애측이청(何用獃獃側耳聽)이냐. 어찌 바보같이 귀를 기울이고 듣게 할 필요가 있느냐. 자기 본성만 탁! 깨달아 버린다면 구태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준 노란 이파리 같은 것에 왜 속을까보냐 그 말이여.
오늘은 계해년 7월 칠석날입니다. 칠석(七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칠성님, 칠성(七星)을 숭배하는 토속 신앙인데, 원래 도교(道敎)에서 칠성을 섬기고 또 칠성님께 치성(致誠)을 드리면 수명을 연장하고, 인간의 오복(五福)을 모다 성취하고 그런다 해서, 『삼국지(三國志)』에도 보면 제갈공명이 그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칠성단(七星壇)을 모아 놓고 기도를 하다가 잘못해 가지고 기도를 성취 못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마는.
그러한 토속 신앙이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고 우리나라로 오면서 그런 도교에서 들어온 그런 토속 신앙을 불교에서 흡수를 해서 사찰 내에서도 다 큰 절, 작은 절에 가면 모두 칠성각, 산신각이 다 있고 그럽니다마는. 불교는 너무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교법(敎法)이 넓고 크고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아서 동서 사방에서 흘러들어 오는 어떠한 종류의 강물이라도 일단 바다에 들어오고 보면 전부 짠맛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떠한 종교도 불교가 들어가면 다 흡수해 버려. 불교 내에는 어떠한 종교의 교리도 원래 그 안에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불교는 어떠한 종교라도 다 흡수해서 녹여서 ‘한맛’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종교가 좁고, 교리가 옅고 그러면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싸우고 비방을 하고 피를 흘리고 그러는데, 불교는 너무 높고 넓고 깊고 커서,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어떠한 종교를 만나더라도 싸울 것이 없어요. 다 받아들여 가지고 그냥 다 소화를 시켜 버려. 그래 이 칠성을 믿는 사상도 그렇게 해서 흡수를 하게 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원래 원시 종교(原始宗敎)는 태양이라든지, 달이라든지, 별이라든지, 바다라든지, 이런 우주 천체와 대자연을 두려워하고, 두려운 나머지 공경하고 이래 가지고 하나의 원시 종교의 발상이 자연을 숭배하는 데서부터서 시작한 것입니다. 저 북두칠성(北斗七星), 북극성(北極星)은 그래서 다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다’ 모다 이렇게 해서 해는 일광보살(日光菩薩)이라 그러고, 달은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 해서, 불보살의 명호(名號)를 붙여 가지고 그래서 숭배하게 되고 오늘날까지도 칠성을 숭배하는 사상은 거의 모든 불자(佛子)들 속에 깊이 뿌리가 박혀서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산신단(山神壇)이나 칠성단(七星壇)은 비불교적이다’ 해 가지고 절에서 그러한 신앙은 없애고 철저하게 이 정법만을 믿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어나고 있습니다마는, 넓은 눈으로 보면 해도, 달도, 별도, 우주세계에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신불을 대일여래(大日如來)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을 대일여래라고도 부릅니다마는 대일여래가 바로 태양이다. 태양과 같이 온 세계를 비추고 그 태양으로 인해서 모든 동물과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삼라만상이 태양의 힘을 가자(假藉)하지 않고서는 생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그러한 칠성을 믿는 신앙을 불교에 받아들였냐 하면 바로 그러한 이치로 해서 칠성 신앙을 받아들여 가지고 완전히 불교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칠성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차츰차츰 정법을 믿는 그러한 불자로 승화(昇華)시켜 온 것입니다.
민간에서는 오늘 칠석날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銀河水)를 통해서 1년에 오늘 저녁 한번 만난다고 그러한 설화가 있습니다. 1년 동안 서로 사랑하고 그리운 사람이 떨어져서 만나지 못하다가, 오늘 하루 까막까치가 놓아준 오작교(烏鵲橋)를 통해서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고 하는 설화는 대단히 재미있는 설화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 세상은 모든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별하는 고통이 있고, 미워하는 사람과는 자주 만나게 되는 고통이 있고, 구하고 원하는 것은 얻어지지 않는 그래서 그러한 고통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나아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그러한 고통이 있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러한 작용이 지나치게 성(盛)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것이 다시 자기에게 괴로움을 갖다 주는 오음성고(五陰盛苦), 이리해서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의 고통[八苦]’이 있는 것입니다마는. 그러한 여덟 가지의 고통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밤낮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가, 단 한번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아준 오작교를 통해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어떠한 숙세의 인연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자기의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또 칠석날을 맞이해서 여러분 자신들은 그동안 이루지 못한 뜻을 오늘 법문을 듣고 마음속에 괴로움이 사라지고,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구했던 소원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그러한 원(願)을 성취하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란 존자를 데리고 무능적국(無能敵國)에 들어가셔서 항하사(恒河沙) 강변을 지나고 계실 때에, 마치 한 수행승이 부처님 곁으로 다가와서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그 수행승에게 무슨 법문을 해 주셨냐 하면은 마치 그때에 갠지스 강 가운데에 큰 나무 기둥 하나가 떠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기둥을 부처님께서 가리키시면서, “저 기둥을 봐라! 저 나무 기둥이 이쪽 언덕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저쪽 언덕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또 강 중간에도 걸리지 아니하며, 또 강물의 소용돌이 속에도 들어가서 뱅뱅 맴돌지 아니하면, 결국은 저 나무 기둥은 흐르고 흘러서 마침내는 저 바다로 도달하고 말 것이니라”
그러면 ‘이쪽 언덕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뚱이로 감각하고, 생각으로 알고 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걸리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는 게고. ‘저쪽 언덕에도 걸리지 아니한다’는 말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상대가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바깥 경계에도 집착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중간에 걸리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어떠한 색(色)을 보면 속에 안식(眼識)이라 하는 것이 생기고, 귀로 바깥 경계 소리를 들으면 속에 이식(耳識)이라고 하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식(六識)이 생기기 때문에 '그 육식에도 걸리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의 소용돌이 속에 걸리지 아니한다’ 하는 것은 학문이나 경전이나 그러한 것을 보다가 알음알이에 집착을 한다고 하는 데에 비유를 한 것입니다. 요새 불자 가운데에 지성인 측에서 교리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그러는데, 무슨 경전이나 다 부처님의 소중한 진리가 담겨 있는 법문이기는 사실이나, 그러한 경을 올바르게 보지를 못하고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들어가는 데에 맛을 붙여 가지고 그렇게 해서 거기에 집착을 하면, 그 나무토막이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뱅뱅뱅뱅 도는 그 소용돌이 속에 한번 들어가면 밤낮 그 자리에서 돌기만 하고 거기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기 때문에 바다에는 도달을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도 이쪽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저쪽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중간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소용돌이에도 머꾸지를 않는다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법문을 그 수행승에게 해 주셨습니다. 그 법문을 듣고 그 수행승은 깨달음을 얻고 떠났습니다.(20분52초)
그 법문을 설하실 때에 그 곁에서 소를 치는 목동(牧童)이 어떻게 열심히 그 법문을 들었던지, 거기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목동을 그만두고 당장 그 자리에서 출가할 결심을 하고 부처님께 허락을 해 주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지금 목동의 책임을 맡아 가지고 남의 소를 기르고 있으니 그 소를 갖다가 주인한테 갖다가 인계를 하고 주인한테 인사를 하고 그리고서 오너라” 목동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소들은 전부 송아지들이기 때문에 소 어미는 주인한테 있으므로 그냥 놔두어도 송아지들은 제 어미를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럴 필요도 없이 당장 이 자리에서 계를 설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아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저 송아지를 주인한테 정식으로 인계를 하고, 너도 네 몸도 그 주인한테 고용이 되어 있으므로 정식으로 하직(下直) 인사를 하고 와야지 그럴 수가 있느냐”
그래서 그 목동은 그 송아지 떼를 몰고 그 주인한테로 달려갔습니다. 송아지는 자기의 목동이 달려가니까 덩달아서 달려가는데, 목동은 달려가면서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하면서 계속 달려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목동들도 "무엇이 무서우냐?"고 하면서 달려갔습니다.
‘무엇이 무서우냐? 하면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무섭고, 늙은 것이 무섭고, 병든 것이 무섭고, 죽는 것이 무섭다’ 이런 뜻으로써 계속 “무섭다. 무섭다” 하면서 주인한테 쫓아가 가지고 송아지를 인계하고 그리고 하직 인사를 하고 되돌아오면서 계속 “무섭다”고 또 오니까, 5백 명의 다른 목동들도 그 목동을 따라서 같이 부처님 처소로 와 가지고, 그 목동과 다른 5백 명의 목동이 일시에 출가를 해 가지고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동이 법문을 들을 때에 가지고 있던 지팽이가 있었는데, 그 지팽이 끝에 꽂혀서 죽은 두꺼비가 한 마리 있었던 것입니다. 목동은 부처님 법문 듣는 데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기 작대기가 두꺼비의 등어리에 놓아져 있는 것도 모르고 계속 열심히 듣다 보니까 힘을 계속 그 작대기에다 힘을 주어 가지고, 작대기가 두꺼비 등어리를 뚫고 창자를 꿰뚫어서 맞창이 났던 것입니다.
그 두꺼비는 작대기가 자기 등어리에 닿을 때에 비명을 질렀으면 그 목동이 깜짝 놀라서 그 작대기를 치웠을 텐데, 그 두꺼비라는 놈은 ‘자기가 만약에 빽빽 하고 소리를 지르면 그 목동이 깜짝 놀라 가지고 부처님 법문 듣는 데에 방해가 될까봐 차라리 내가 이대로 죽을지언정 어찌 부처님 법문 듣는 그것을 방해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 가지고 그 두꺼비도 보통 두꺼비가 아니라 이상한 두꺼비가 되어 가지고 두꺼비 저도 법문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서 목동의 작대기에 찔려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두꺼비는 죽어서 바로 사천왕(四天王)에 태어나 가지고 천자(天子)가 되었던 것입니다. 천자가 되어 가지고 가만히 생각하니 너무너무 부처님 은혜가 지중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천자의 옷차림을 떠억 하고서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을 뵈옵고, 전생(前生)에는 두꺼비의 몸으로 법문을 들었지만, 금생에는 내가 천자의 옷을 입고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리라. 그리고 감사한 예배를 올리리라’
이래 가지고 달밤에 달은 휘황창 밝은데 하늘나라에서 꽃비를 내리면서 찬란한 모습으로 천상에서 부처님 처소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올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서 다시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천상에를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중들은 꽃비가 내리고 장엄한 하늘나라의 음악이 울린 것만 보았지,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내려온 것은 보지를 못해서 그 이튿날 부처님께 “어젯밤에 부처님께 무슨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까?”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해서 그 목동이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이렇게 자기뿐만이 아니라 5백 명의 목동을 데리고 이렇게 와서 출가해 가지고 부처님 법문에 의지해서 이렇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부처님께 여쭈니까 부처님께서 그 목동의 전생과 두꺼비의 전생에 대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전생에 가섭파여래(迦攝波如來)라고 하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에 목동이 그 부처님을 뵈옵고 발심을 해 가지고 출가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 목동이 수행을 하다가 어느 절에서 다른 경(經) 공부를 하는 스님과 같이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동으로 있다 출가를 한 그 수행인은 참선이 좋아서 계속 참선만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함께 그 절에서 머무른 여러 스님들은 모두 경(經) 공부를 해서 밤새도록 경을 큰 소리로 읽고 외우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해서 마음을 고요히 집중을 해 가지고 정(定)에 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너무너무 경 읽는 소리가 크고 시끄러워서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이튿날 너무너무 부애가 나니까, 욕을 하기를 “밤새 두꺼비 우는 소리를 하는 통에 참선을 못했다”고 이렇게 욕설을 한 그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몸을 받으면서 내려오다가, 금생에 이렇게 참 자기 몸뚱이에 그 작대기가 꽂혀서 죽게 됨에도 불구하고 법문, 법(法)을 존중하고 아끼는 그러한 신심과 보살심을 냄으로 해서 두꺼비의 몸을 벗고 천상에 태어나서 사왕천(四王天) 궁의 천자가 되었다고 하는 원인을 말씀을 하시고.
또 이 목동이 이렇게 도를 얻은 인연은, 전생에 한 수행인이 있었는데 너무너무 수행을 잘하고 덕(德)이 있어서 대중 가운데 누가 싸움을 하기만 하면 이 스님이 말을 몇 마디 하면 금방 싸움이 가라앉고 화해를 잘 시켰던 것입니다.
마치 그 가섭파여래 회상에서 있을 때인데, 두 사람이 싸움을 해 가지고 며칠째 서로 말을 안 하고 지냈습니다. 지금 이 보살선방에도 가끔 옛날에는 사소한 일에 타시락거리면 며칠씩 속으로 꽁해 가지고 말도 안 하고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마는, 요새는 그런 일이 거의 없고 모두가 다 화합하고 합심해서 석 달 동안을 하루같이 그렇게 엄숙하고 거룩하게 그렇게 정진들을 잘해 오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싸움을 해 가지고 말을 안 하는데, 그 스님한테 화해를 시켜 달라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당장 그 자리에서 화해를 붙여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있으니까 다른 스님한테 요청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안 되거든 나한테 오너라’ 이렇게 미뤘습니다. 그렇게 미룬 것은 ‘다른 사람한테 가서 해도 안 되어 가지고, 그때 자기한테 와 가지고 화해가 되어야 자기의 권위가 설 것이다’ 해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미루고 자기는 외출을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벌써 다른 스님한테 말을 해 가지고 화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화해가 되었느냐?”고 내막을 물으니까 “약허이약허이 해서 화해가 되었다. 그 스님이 이러 이러한 말씀을 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 오해를 풀고 화해를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양치기 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식으로 화해를 붙이지, 어찌 수행승이 그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욕설을 했습니다. 그 ‘양치기 같은 짓을 했다’ 하는 그러한 속으로 신경질을 내면서 그러한 퉁명스런 말 한마디를 뱉은 그 인연으로 5백 생 동안을 양치기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아까 두꺼비는, 경 읽는 소리를 갖다가 “두꺼비 우는 소리를 하는 통에 시끄러워서 참선을 못했다’고 한마디 욕을 내뱉은 그 과보로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과보를 받았고, 이번에는 “양치기 같은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식으로 화해를 붙이지 어찌 수행승이 그럴 수가 있느냐” 그렇게 신경질을 내면서 욕설을 한 그 과보로 양치기를 5백 생 동안을 양치기를 했다 이것입니다.
‘한 생각’ 불쑥 신경질을 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과보로 5백 생 동안을 양치기 노릇도 하고, 또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노릇을 하게 된 그 인과(因果)를 우리가 살펴본다면 한 생각,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부모자식 간에 또는 친구간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한마디씩 툭툭 내뱉은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우리는 오늘 이 부처님의 설화를 통해서 한 생각 움직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나 살기 위해서 남을 상처내고 남을 죽인다고 할 때에 그 과보는 비단 5백 생이 문제가 아니라, 무량 아승지겁(阿僧祇劫)을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고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칠석날을 맞이해서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이렇게 많이 정성스러운 공양구(供養具)를 가지고 법보선원에, 불전(佛前)에 이렇게 동참(同參)을 하셨습니다.
과거 한량없는 생(生) 동안 깊은 불법의 인연이 있어서 금생에 이렇게 모다 한자리에 모이셨습니다마는, 앞으로 다시는 퇴전(退轉)하지 아니하고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려면, 우리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말 뼈아프게 단속해 나가서 다시는 일어나는 한 생각을 섣불리 흘려보내지 말 것이며, 눈으로 한 가지 일을 보거나, 귀로 어떤 한 소리를 듣거나,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 육식(六識)을 물샐틈없이 단속을 해 가지고 화두(話頭)를 들고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처음~39분43초)
적수성빙신유지(滴水成氷信有之)나, 되게 강추위 할 때는 물 한 방울 톡! 떨어지면은 그 물 한 방울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얼음이 딱 되어버립니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쩍 쩍 들어 앵깁니다. 수도꼭지에서 계속해서 물이 똑똑 떨어져도 떨어진 쪽쪽 땅바닥에서는 계속 얼음산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불법(佛法)은 말로써 그 진리를 표현할 수가 없고, 귀로써 들어서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설할 것도 없이 이미 사람마다 다 진묵겁(塵墨劫) 전에 완전무결하게 성불(成佛)해 마쳐져 갖고 있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지금 인류가 45억을 추산하고 있습니다마는, 45억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소나 돼지나 말이나 벌레나 모기나, 꿈적꿈적한 것은 전부가 다 이미 다 있어. 원만하게 다 성불을 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고. 태양이나 달이나 별이나, 나무나 산이나 바윗돌이나, 길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모래알,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성불(成佛)해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몸뚱이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대중 가운데에는, ‘그렇다면은 왜 나도 부처라면은 왜 내가 지금 이렇게 범부(凡夫)로서 깜깜한 상태에서 이렇게 중생으로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가?’ 모두가 다 의심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마는. 틀림없이 부처님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이 잠시 졸고 있다가—졸고 있는 상태에서는 분명히 졸고 있다고 해서 죽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잠이 꼬박 들어서 잠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다고 해서 죽은 것도 아니요,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님니다. 분명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지만, 잠깐 잠이 들어가지고 꿈을 꾸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꿈만 깨 버리면 생시(生時)가 된 것처럼, 우리 그 중생의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참선(參禪)만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각(正覺)이다, 대각(大覺)이다, 본각(本覺)이다’ ‘깨달을 각(覺)’ 자를—‘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선문(禪門)에서는 ‘견성(見性)’이라 그러거든. ‘성품(性品)을 본다[見]’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성품을 보면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어디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탁! 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녹양방초(綠楊芳草)가 색의의(色依依)여. 녹양(綠楊), 푸른 버드나무 휘영청 늘어지고 산과 들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달은 가을달대로 운치가 있고, 봄의 꽃은 꽃대로 아름다워서, 가을꽃도 깨달음의 경지요, 봄꽃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깊은 뜻을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秋月春花無限意) 그러기 때문에 깨달은 눈으로 보면 가을꽃도 설법(說法)이요, 가을달도 부처님의 얼굴이요, 봄에 핀 꽃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고새가 우는 소리를 한가히 듣는 것도 또한 방해롭지 않다(不妨閑聽鷓鴣啼)’ 한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낱낱이 그것들이 다 ‘참나’로 돌아오는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이고, 파란 것이나 붉은 것, 풀에서는 풀 냄새, 아카시아꽃에서는 아카시아꽃 냄새, 장미꽃에서는 장미꽃 냄새, 그 꽃마다 그 꽃에서 풍기는 향내가 다 다르지만, 코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낱낱이 다 나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좋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여러분은 칠석날을 맞이해서 우리집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고, 우리 남편이 승진하기를 바라고, 우리 아들과 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혼기를 맞이한 우리 딸이 좋은 신랑감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 간절하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러한 소원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너무너무 작은 일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그것도 또한 중대한 일일시 분명합니다.
그러한 원(願)을 성취하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콩을 많이 수확한 사람이 바늘에다 그 콩을 꿰어가지고 등잔불에 구워 먹고, 계란을 많이 구해 가지고 계란 알맹이는 쏟아 버리고 그 계란 속에다가 쌀 한 숟갈을 씻어서 넣고, 그래 가지고 그 계란을 젖은 종이로 싸 가지고 부엌 불속에다 넣어서 계란밥을 해 먹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릴 적을 추억을 하실 것입니다마는, 농사지어 가지고 바늘에다 콩을 구워 먹고, 양계(養鷄)를 해 가지고 알맹이는 쏟아 버리고 거기다 계란밥을 해 먹기 위해서, 그래 양계를 하고 콩 농사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은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불법을 믿으면서, 정말 불법(佛法)의 근본 목표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수행을 해 나가면 높은 벼슬을 하고, 재수(財數) 대통(大通)하고, 아들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러한 일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저절로 이루어지냐 하면 참선을 열심히 하면 저절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던 모든 업(業)이 소멸(消滅)이 되기 때문에 업이 소멸이 되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한 생각 원하면, 인간 세상에 제일 큰 원(願)이 천자(天子)가 되는 원이라면 천자도 가능하거든 그밖에 조그마한 원(願)이야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칠성불공을 하고 산신기도를 하고, 좋다는 데는 강화 보문으로, 양양 낙산사로, 남해 보리암으로 발이 닳아지도록 쫓아다녀도 여간 소원이 잘 성취가 안 되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과거에 지은 업(業)이 꽉 쩔어 가지고 그놈이 장애가 되어가지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원(願)을 성취하려면 그러한 성지(聖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나, 그보다도 더 빠르고 더 요긴한 방법은 강화까지 안 가고 자기 있는 가정에서 일하면서, 밥 지으면서, 빨래하면서, 차를 타면서, 절에 오면서, 절에 가면서, 법회날은 절에 오면서, 절에 와서 또 법문을 다 듣고 가면서,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무엇을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도 ‘이뭣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 계신 법당(法堂)이요, 강화 보문이요, 양양 낙산사요, 오대산 적멸궁이요, 남해 보리암이다 이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만약에 오대산 적멸궁에만 계시고, 양양 낙산사에만 관세음보살이 계시고, 남해 보리암에만 관세음보살이 계시고,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불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성지(聖地)를 마련한 것은 거기에 정성스럽게 감으로써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신심을 내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절이 필요한 것이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날 때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무슨 파란 나무나 빨간 꽃 한 송이를 볼 때 거기에서 바로 법신불을 친견할 줄을 알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화사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부처님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르켜 드리는 도량(道場)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러한 최상승법을 듣고 한 생각도 옮기지 아니하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불법을 깨닫고 부처님을 친견할 길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나는 자신 있게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대도(大道)도 틀림없이 성취하시고, 인간 세상의 크고 작은 소원도 반드시 성취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보증을 하는 바입니다.
불법(佛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많이 알아서 속에다 따 담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기의 속에 있는 것을 비우는 것이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닦아가는 것이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눈으로 보고 속으로 그것을 따 담고, 귀로 뭔 소리를 들으면은 그 소리를 속에다 따 담고 해 가지고, 속에는 일생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한 것들이—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좋은 일, 악한 일, 좋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는 그러한 무기(無記)의 일들, 수수(數數) 백억만 가지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차곡차곡 쟁여져 갖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은혜스러운 일과 원망(怨望)한 웬수스러운 일들이 비빔밥이 되어가지고 얽히고설켜서, 그것들이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돌아오면 거기서 다 싹이 나가지고 또다시 새로운 은혜를 맺고, 또다시 새로운 웬수를 맺으면서 무량겁을 두고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렵고 지겹기 한이 없는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일들이 되풀이되어서 무량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할 것을 생각해 보면 몸서리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금생에 이 불법을 만난 이 기회를 결단코 놓치지 말고 철저하게 최상승법을 믿어서 열심히 닦아 간다면 반드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59분22초)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절히 말씀드리는 바를 명심을 하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내생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음력 7월 보름날 백종날이 돌아옵니다. 그날은 백일기도 회향날이며, 여름 하안거 해제일입니다. 그날을 기해서 지옥문이 열려 가지고 우리의 다생(多生)에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우리와 인연 있는 모든 영가(靈駕)들이 하루 동안 특별휴가를 맡아 가지고 오시는 날입니다. 그날에는 우리 법보전에서도 선망부모를 천도(薦度)하는 법요식이 거행이 됩니다.
그날은 여러분께서도 잘아신 바와 같이 목련(目連) 존자가 그 죄를 짓고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천도하는 그러한 유래가 있는 날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 어머니를 천도했느냐 하면,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제자들 스님네께 만 가지 온갖 맛있는 음식과 맛있는 과일 공양(供養)을 올려서, 그 석 달 동안 청정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신 스님네께 공양을 올린 그 공덕으로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청제부인, 목련 존자의 어머니를 천상(天上)에 태어나시게 한 그러한 날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또 가족이라든지 친척이라든지 이웃 친구들 모다 권고해서 오셔서 동참을 하시고,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만년위패에 모시지 아니한 분도 임시위패라도 모셔서 선망부모를 천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모다 지옥문이 열려서 오셨다가 내 아들, 내 며느리, 내 딸이 안 왔나 하고 두루 찾아보아도 다른 사람은 다 왔는데 자기의 아들딸들이 안 왔으면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하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영가(靈駕)의 세계나, 우리 이 살아 있는 우리 인간 세계나 그 정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등이 없는 것입니다. 요새 그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번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무슨 뭐 영가고 뭐 그런 게 소용 있느냐?’ 이러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영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이 세계나 쪼끔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더 정확하고 더 영특하고 그런 것입니다.
오늘은 칠석날에 한 생각 일으키고, 말 한마디 하는 그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설화를 말씀을 드리고, 그러기 때문에 그 한 생각, 한마디를 조심할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해 나가면은 생사해탈(生死解脫)도 하고 우리의 모든 소원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법문을 해 드렸습니다.
이어서 칠석의 법요식이 진행이 되겠습니다.(39분45초~65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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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가련억만인천중~’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1,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가련하다(可憐-- 가히 가/불쌍히여길 련) ; 가엾고 불쌍하다. *노란 이파리[黃葉] ; 황엽(黃葉). 어린 아기가 울 때에, 버드나무의 누런 잎[黃葉]을 돈[金]이라 하여 어린 아기에게 주어서 울음을 그치게 한 것. 부처님이 33천이 항상[常]하고 즐겁고[樂] 나[我]이고 깨끗함[淨]과, 단정하고 자재하여 훌륭한 궁전에서 오욕락(五欲樂)을 받는 일과, 육근(六根)으로 상대하는 것이 모두 즐거운 일이라 말하여 중생이 악업을 짓지 아니하고 33천에 태어날 선업을 짓게 하는 것에 비유한 것. 그러나 실제로는 나고 죽는 것이며 무상(無常)하고 낙이 없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건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常樂我淨]’고 방편(方便)으로 말[說]하는 것이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 25품』 (宋代沙門慧嚴等依泥洹經加之) 제18권. 제21 영아행품(嬰兒行品).
또 어린 아기의 행[嬰兒行]이라 함은 어린 아기가 울 때에는, 그 부모가 누른 버들잎[楊樹黃葉]을 주면서 달래기를 “너에게 돈[金]을 줄 터이니 울지 말라”하는데, 아기가 보고는 참말 돈인 줄 생각하고 울지 않으니 그것은 버들잎이지 참말 돈이 아니니라. 나무로 만든 소와 나무 말과 나무 남자와 나무 여자를 어린 아기가 보고는 참으로 남자나 여자인 줄 생각하고 울지 않는데, 참으로 남자와 여자가 아닌 것을 남자와 여자인 줄 생각하므로 어린 아기라 이름하느니라.
여래도 그와 같아서 만일 중생들이 나쁜 업을 지으려 하면,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33천이 항상[常]하고 즐겁고[樂] 나[我]이고 깨끗함[淨]과, 단정하고 자재하여 훌륭한 궁전에서 오욕락(五欲樂)을 받는 일과, 육근(六根)으로 상대하는 것이 모두 즐거운 일이라 말하는데, 중생들은 이러한 즐거움을 들은 까닭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쁜 업을 짓지 아니하고 33천에 태어날 선한 업을 짓거니와, 실제로는 나고 죽는 것이며 무상(無常)하고 낙이 없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건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常樂我淨]’고 방편(方便)으로 말[說]하는 것이니라.
또 어린 아기라 함은 어떤 중생이 나고 죽음을 싫어할 때에는 여래가 2승(二乘)의 도를 말하거니와, 실제로는 2승의 실상이 없는 것이며, 2승의 법으로 인하여서 나고 죽는 허물을 알고 열반의 낙을 보는 것이며, 이런 소견으로 말미암아 끊을 것과 끊지 못할 것이 있으며. 참된 것과 참되지 않은 것이 있으며 닦을 것과 닦지 않을 것이 있으며, 얻을 것과 얻지 못할 것이 있음을 아느니라.
선남자야, 저 어린 아기가 돈이 아닌데 돈이란 생각을 내듯이, 여래도 그러하여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 말하거니와, 여래는 제일의(第一義)를 얻었으므로 허망함이 없느니라. 어린 아기가 소와 말이 아닌데 소와 말이라 생각하듯이 어떤 중생이 도(道)가 아닌데 도라는 생각을 하는데, 여래도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말하나니 도가 아닌 데에 실로 도가 없지만 능히 도를 내는 작은 인연이 되는 것이므로, 도가 아닌 것을 말하여 도라고 하느니라.
어린 아기가 나무로 된 남자와 여자에게 참말 남자와 여자인 생각을 내듯이 여래(如來)도 그와 같아서 중생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중생이라 말하지만 실로는 중생이란 모양이 없느니라. 만일 부처님 여래가 ‘중생이 없다’고 말하면 모든 중생이 잘못된 소견에 떨어질 것이므로 여래가 ‘중생이 있다’고 말하느니라. 중생에 대하여 중생이란 모양을 지으면 곧 중생의 모양을 깨뜨리지 못하나니 중생에 대하여 중생의 모양을 깨뜨리는 이라야 능히 대반열반(大般涅槃)을 얻을 수 있느니라. 이렇게 대반열반을 얻으므로 울음을 그치는 것을 어린 아기의 행[嬰兒行]이라 이름하느니라.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칠성(七星)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것으로 칠성에 대한 신앙은 특히 중국의 도교에서 발달하여 이후 ①불교에서 칠성은 호법선신(護法善神)의 하나로 수용되었고 ②민간에서는 특히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어졌다. *칠성단(七星壇)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단. *교법(敎法) ; ①가르치는 방법. ②부처님이 설법한 가르침. *한맛 ; 부처님의 설법은 근기(根機, 가르침을 받는 이의 자질)에 따라 다르지만, 그 본뜻은 꼭 같다는 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북극성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 북극성은 그 빛이 밤하늘의 별 중 가장 밝아 치성광(熾盛光)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칠원성군(七元星君) ; 북두(北斗)의 일곱 성군(星君). 북두칠성을 말한다. *명호(名號) ; 명자(名字), 명(名)이라고도 함. 이름. 주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기에 존호(尊號), 가호(嘉號)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명호(名號)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 커다란 작용이 있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등의 행(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 ;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은하수(銀河水) ; ‘은하(銀河 천구상에 남북으로 길게 보이는 수억 개의 항성 무리)’를 강물에 비유하여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까막까치 ; 까마귀와 까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오작교(烏鵲橋 까마귀 오/까치 작/다리 교) ; 음력 칠월 칠석에 견우와 직녀를 서로 만나게 하기 위하여,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서 자기들의 몸을 잇대어 만든다는 다리. *팔고(八苦) ;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여덟 가지의 괴로움. 생(生)·노(老)·병(病)·사(死)를 사고(四苦)라 하고, 여기에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고통(愛別離苦), 원망스럽고 미운 것을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오음이 성하는 고통(五陰盛苦)의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부처님의 ‘큰 나무 기둥[大方梁]’ 비유 설법, 목동·두꺼비 인과 설화 ; 대정신수대장경 제24책 No. 1448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 제11 참고. *항하(恒河) ; 갠지스 강(Ganges江,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벵골 만(灣)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 길이는 2,510킬로미터) *머꾸다 ; ‘멈추다’ ‘막히다’의 사투리.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하직(下直) ; ①먼길을 떠날 때 웃어른에게 작별을 아룀. ②'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지팽이 ; ‘지팡이’의 사투리. *맞창 ; [주로 ‘나다’, ‘뚫다’ 따위의 말과 함께 쓰여] 마주 뚫린 구멍. *무수배례(無數拜禮) ; 헤아릴 수 없이(無數) 많은 절을 하여 예를 표함. *제석천(帝釋天) ; 제(帝)는 산스크리트어 indra의 번역, 석(釋)은 산스크리트어 śakra의 음사. 신(神)들의 제왕인 샤크라〔釋〕라는 뜻. 천(天)은 신(神)을 뜻함.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고 함. *유숙(留宿 머무를 류/묵을 숙) ; (사람이 어디에) 여장(旅裝, 여행할 때의 차림)을 풀고 묵음. *정(定) : ①계(戒)•정(定)•혜(慧) 3학의 하나。 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부애 ;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아승지겁(阿僧祇劫) ; 아승지(阿僧祇)는 산수로 나타낼 수 없는 가장 큰 수 중의 하나이고, 겁(劫)은 연•월•일로써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말함.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공양구(供養具) ;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바치는 음식물·향·꽃 등의 물건, 또는 그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퇴전(退轉) ; 불교를 믿는 마음을 다른 데로 옮겨 처음보다 더 밑으로 전락(轉落)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의 소의(所依)가 되어 육식을 일으켜 대상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다。곧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여섯 가지 기관(器官)을 말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육적(六賊)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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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적수성빙신유지~’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2, 야부도천 게송 참고. *진묵겁(塵墨劫) ; 티끌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윤회(輪廻) ; ①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業)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生死)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②어떤 사물이 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함. *생시(生時) ; ①자지 않고 깨어 있을 때. ②태어난 시간. ③살아 있는 동안.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선문(禪門) ; 선종(禪宗).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설법(說法) ; 불교의 이치나 가르침[法]을 풀어 밝힘[說].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양계(養鷄) ; 닭을 먹여 기름. 또는 그 닭.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소멸(消滅) ; 사라져 없어짐. *천자(天子) ;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제국의 군주를 이르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또는 왕(王)이라고 하였다.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법당(法堂) ; ① 불상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 ② 설법하거나 각종 의식을 행하는 사찰의 건물. ③ 사찰에 있는 전각(殿閣)을 통틀어 일컬음.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참고]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〇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수수(數數) ; 아주 여러.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시절(時節)—어떤 시기나 때. 도래(到來)—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〇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〇“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목련 (目犍連, 目連) ; 산스크리트어 maudgalyāyana의 음사. 대(大)목건련 또는 마하(摩訶)목건련이라고도 한다. 원명 꼴리따.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사리불(舍利弗)와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사리불이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리불한테 듣고는, 사리불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사리불과 함께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외도(外道)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고통을 겪는 중에,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에게 나아가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마수촌에서 열반에 들었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법문 내용]
(게송)가련억만인천중~ / 우주세계에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표현 / 칠성 신앙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차츰차츰 정법을 믿는 불자로 승화(昇華)시켜 온 것 / 부처님의 ‘큰 나무 기둥[大方梁]’ 비유 설법, 목동·두꺼비 인과 설화 ; 대정신수대장경 제24책 No. 1448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 제11 참고 / 한 생각 한마디의 결과가 무섭고 소중하다 /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해 화두를 들고 나가라.
(게송)적수성빙신유지~ / 모든 동물 벌레, 모래알,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성불(成佛)해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몸뚱이 /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참선(參禪)만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보게 된다 /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성품을 보면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고, 모든 것들이 낱낱이 다 나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좋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원(願)을 성취하는 빠르고 요긴한 방법은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무엇을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도 ‘이뭣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뭣고?’ / 불법(佛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〇불교는 너무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교법(敎法)이 넓고 크고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아서 동서 사방에서 흘러들어 오는 어떠한 종류의 강물이라도 일단 바다에 들어오고 보면 전부 짠맛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떠한 종교도 불교가 들어가면 다 흡수해 버려. 불교 내에는 어떠한 종교의 교리도 원래 그 안에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불교는 어떠한 종교라도 다 흡수해서 녹여서 ‘한맛’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〇어째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그러한 칠성을 믿는 신앙을 불교에 받아들였냐 하면 바로 그러한 이치로 해서 칠성 신앙을 받아들여 가지고 완전히 불교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칠성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차츰차츰 정법을 믿는 그러한 불자로 승화(昇華)시켜 온 것입니다.
〇‘한 생각’ 불쑥 신경질을 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과보로 5백 생 동안을 양치기 노릇도 하고, 또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노릇을 하게 된 그 인과(因果)를 우리가 살펴본다면 한 생각,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부모자식 간에 또는 친구간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한마디씩 툭툭 내뱉은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우리는 오늘 이 부처님의 설화를 통해서 한 생각 움직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정각(正覺)이다, 대각(大覺)이다, 본각(本覺)이다’ ‘깨달을 각(覺)’ 자를—‘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선문(禪門)에서는 ‘견성(見性)’이라 그러거든. ‘성품(性品)을 본다[見]’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성품을 보면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어디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탁! 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〇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낱낱이 그것들이 다 ‘참나’로 돌아오는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이고, 파란 것이나 붉은 것, 풀에서는 풀 냄새, 아카시아꽃에서는 아카시아꽃 냄새, 장미꽃에서는 장미꽃 냄새, 그 꽃마다 그 꽃에서 풍기는 향내가 다 다르지만, 코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낱낱이 다 나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좋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〇불법을 믿으면서, 정말 불법(佛法)의 근본 목표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수행을 해 나가면 높은 벼슬을 하고, 재수(財數) 대통(大通)하고, 아들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러한 일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저절로 이루어지냐 하면 참선을 열심히 하면 저절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던 모든 업(業)이 소멸(消滅)이 되기 때문에 업이 소멸이 되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한 생각 원하면, 인간 세상에 제일 큰 원(願)이 천자(天子)가 되는 원이라면 천자도 가능하거든 그밖에 조그마한 원(願)이야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〇원(願)을 성취하려면 그러한 성지(聖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나, 그보다도 더 빠르고 더 요긴한 방법은 강화까지 안 가고 자기 있는 가정에서 일하면서, 밥 지으면서, 빨래하면서, 차를 타면서, 절에 오면서, 절에 가면서, 법회날은 절에 오면서, 절에 와서 또 법문을 다 듣고 가면서,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무엇을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도 ‘이뭣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뭣고?’
빨래하면서 ‘이뭣고?’ 속상하면서 ‘이뭣고?’ 슬퍼하면서 ‘이뭣고?’ 기뻐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 계신 법당(法堂)이요, 강화 보문이요, 양양 낙산사요, 오대산 적멸궁이요, 남해 보리암이다 이 말씀입니다.
〇성지(聖地)를 마련한 것은 거기에 정성스럽게 감으로써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신심을 내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절이 필요한 것이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날 때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무슨 파란 나무나 빨간 꽃 한 송이를 볼 때 거기에서 바로 법신불을 친견할 줄을 알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화사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부처님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르켜 드리는 도량(道場)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〇불법(佛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많이 알아서 속에다 따 담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기의 속에 있는 것을 비우는 것이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닦아가는 것이다.
〇오늘은 칠석날에 한 생각 일으키고, 말 한마디 하는 그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설화를 말씀을 드리고, 그러기 때문에 그 한 생각, 한마디를 조심할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해 나가면은 생사해탈(生死解脫)도 하고 우리의 모든 소원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법문을 해 드렸습니다.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한데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로구나. 백운(白雲)이라고 하는 자식이 만리의 바람에 나부끼는데, 원래 백운은 청산에 의지해서 뭉쳐서 있다가 바람이 부니까 그 바람에 실려서 저 만리 하늘에 나부껴 날아갔다 그 말이여.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여. 그렇게 바람에 불려서 만리 하늘을 떠내려갔지만 그 백운은 항시 그 마음속에는 자기가 본래 놀며 의지하며 살고 있던 그 푸른 산을 마음속에는 잊지를 않고 있더라 그 말이지.
내하유자부지환(乃何遊子不知還)인데, 어째서 무슨 일로 이 백운은 청산으로 다시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길이길이 자기 본래 살던 그 청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향으로 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이리저리 바람 따라서 물결 따라서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있구나.
우리는 본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처럼 본래는 똑같은 본각(本覺)의 경지에 있었습니다. 새로 닦지 아니하고, 닦을 것도 없이 본래 깨달아져 있는 그러한 본각성(本覺性)이었건마는 한 생각 잘못 일어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풍파에 나부껴 가지고 무량겁을 동서사방 육도(六途)를 돌고 돌면서 오늘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그 부처님과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한 집에서 한 자리에서 기거를 같이 하고 생활을 같이 했건마는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렇게 그 본 자리로 돌아갈 줄을 모르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이렇게 돌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바람이 그칠런지, 바람이 부는 한에 있어서는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날아가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날아가고, 북풍이 불면 남쪽으로 몰려가고, 남풍이 불면 북쪽으로 나부껴서 동서사방 정처가 없습니다. 조끔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가고, 축생도 되었다 인간도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되 좀 잘살기도 하고 못살기도 하고,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마치 우리의 이 존재가 청산을 떠난 흰구름과 같이 그렇게 비유를 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태자로 태어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에 들어가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해서 현재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면면(綿綿)히 전해오고 있습니다마는, 삼천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에 부처님께서 전하신 그 정법(正法)은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썩은 사내끼에 매달려 있는 바윗돌과 같이 언제 그 썩은 새끼가 뚝 끊어져 가지고 그 바윗돌이 땅에 뚝 떨어질런지 모른 그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 불법이라고 하는 그 맥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그 불교가 동양에 여러 나라에 전해 내려오고 그 경전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또 번역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지마는, 참으로 그 불법에 등등상속해서 내려오는 그 법맥(法脈)이라고 하는 것은 실오라기만큼 그러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육조(六祖)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육조 스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물으시기를,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떠받고 아래로는 땅을 기둥하며,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가 없다. 항상 이 동용(動用)하는 가운데에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에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는 “제불지근원(諸佛之根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고 이 하택 저 자신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제불의 근원이니, 하택의 불성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네가 앞으로 커서 공부를 열심히 해 가지고 설사 네가 큰 스님이 된다 하더라도 너는 마침내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 되것다”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법을 공부하는 학자나 강사 그러한 알음알이로 불법을 해석하고 강론하고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 되것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 선사가 떠억 육조 스님 앞에 와서 절을 했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 물으니까, 남악회양 선사는 망지소조(罔知所措)여. 꽉 맥혀 가지고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완전히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가지고 물러 나와서 8년 간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가슴속에 북받치는데 콱 맥혀서 ‘대관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무슨 물건인가?’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1년 이태 3년을 그렇게 되아 8년 만에사 탁! 깨쳤는데, 육조 스님 앞에를 갔습니다. “제가 깨달랐습니다”
“깨달랐으면 어디 일러봐라”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할 것은 없지 아니하나 더럽히고 물들인 것은 없습니다. 오렴은 곧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러니라’ 이렇게 해서 쾌히 인가(印可)를 하시고 법(法)을 남악회양 선사에 전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제불의 근원’이니, 무슨 ‘나의 불성’이니 그렇게 이론으로 따지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있고,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음알이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떠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콱 맥혀서 답답해 알 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 가로막고 있고,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절벽이라,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고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어.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이렇게 해서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다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악회양 선사 같은 도인(道人)은 다 숙세에 선근종자(善根種子)로 다 전생에부터서 많이 닦으신 그러한 도인이 태어나셨겠지만 그래도 8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이 걸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근기(根機)가 박약(薄弱)한 우리 말세(末世) 중생들은 8년 아니라 80년이라도 지루한 생각을 갖지 말고 목숨을 바쳐서 한 화두(話頭)에 대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만한 공력과 그만한 끈기와 그만한 노력이 없이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어떻게 기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해서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진 것보다도 더 쉽다’ 이렇게도 쉬웁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웁다고 표현을 하셨지만, 어렵기로 말하면은 깨 한 말을 갖다가—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럭지 있는 데서부터서 굴려서 저 열 길이나 되는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서, 그 나무의 몸뚱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을 굴려서 나무 꼭대기에다 올려다 놓고, 다시 또 내려와서 깨 한 알을 갖다가 뿌리에서부터서 굴려서 올려 가지고 저 꼭대기에 갖다 놓다가, 중간에 잘못해서 뚝 떨어지면 다시 뿌리에서부터서 굴려 올리고 그래서 깨 한 말을 굴려 올릴 만큼.
그것이 얼마나 공력을 드려야—그 하나를 평면으로 굴려 올린다면 모르지만, 서 있는 나무에 굴려서 올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만큼 공력과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겠다고 출발을 했지만 중도에서 물러서거나 중도에서 쉬어버리거나 또는 딴 길로 빠지거나 이러기가 십상(十常) 쉽고, 끝까지 나아가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그렇게 흔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까딱하면 중간에 어떠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해태심(懈怠心)을 내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한결같이 쉬지 않고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모시고 법문(法門)을 들어야 하고, 또 좋은 도반들과 항시 같이 수행을 해 나가야, 내가 혹시 해태심이 나거나 딴생각을 내더라도 도반(道伴)으로부터 경책(警策)을 받고 선지식으로부터 법문을 들어서 그러한 위기를 면하면서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9분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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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한 거사(居士)가 있었는데 그때에 그 거사는 네 사람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네 사람을—그때 당시는 일부다처제로 아마 부인을 첫째 부인, 둘째, 셋째, 넷째 그 사람 능력 따라서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살 수가 있었던지 네 사람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었는데,
그 사람은 첫째 부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어디 외출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언제 어데서라도 잠시도 그 첫째 부인과 같이 붙어서 살았습니다. 그만큼 그 첫째 부인을 사랑하고 애끼고 좋아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잘 먹이고, 이 세상에서 없는 제일 좋은 것은 다 먹이고 다 입히고, 누가 조금이나 해꼬자 할까 항시 자기 몸 가까이에 놓고 그렇게 사랑하고 이뻐했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사랑하기는 어려웠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둘째 부인도 첫째 부인만큼은 못해도 너무너무 사랑해서 도대체 다른 사람이 그 자기 아내를 볼까 두려워서 항시 가둬 놓고 그 아내를 사랑을 했습니다. 행여나 남이 눈독을 들일까 혹 남이 아내를 훔쳐갈까 이래 가지고 아내는 도저히 어디 밖에 내보내지도 않고, 마당에도 잘 내보내지도 않고, 항시 자기 방이나 특실에다가 딱 넣어 놓고 쇠통을 채워 놓고 그렇게 아내를 사랑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애끼고 사랑을 하고 심지어는 의처증(疑妻症)이라고 할 만큼 그 아내를 밖으로 내놓지를 않고 남이 보는 것을 그렇게 꺼려했습니다.
셋째 부인은—셋째 부인도 애끼는 생각도 있고 사랑하는 생각도 있고 그랬지만, 마음대로 밖으로도 외출하고 싶으면 하게 하고, 그렇게 날마다 보지는 아니하고 가끔 한번씩 보기만 하고 그저 수수허니 그렇게 살았습니다.
넷째 부인이 있었는데, 그 넷째 부인은 항시—자기(거사)는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지마는, 넷째 부인은 그렇게 남편을 하녀가 상전 모시듯이 그렇게 잘 따르고 또 명령을 복종을 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마는, 남편은 여간해서 옷 한 벌 명절이 되어도 해주도 않고, 그냥 영 그저 종 비슷하니 그렇게 취급만 했지 별로 그렇게 아끼지도 않고 따뜻하게 봐 주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네 아내를 그렇게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러자 그 장자(長者)는 하룻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저 먼 데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기가 어려울 그러한 참 급박한 상황에서 먼 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부인을 보고 "내가 이렇게 인자 가는데 다시 돌아올런지 못 돌아올런지 알 수가 없고, 나는 당신을 여의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러니 나를 따라서 가자"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니 큰 마누라는 "내가 평생 동안 당신을 모시고 살았고, 당신도 나를 끔찍이 애끼고 사랑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못 따라가겠다"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했지만 "더이상은 죽었으면 죽었지 못 따라가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할 수 없이 "이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여자가 있단 말이냐"고 호통을 치고, 그래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데야 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부인한테 또 말을 했습니다. 둘째 부인도 "당신이 나를 너무 지극히 사랑해서 평생을 참 문밖을 마음대로 못 나가고 가둬 놓고 키우고 그랬지만 나는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다" 둘째 부인도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 셋째 부인한테 또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동안에 살면서 첫째와 둘째한테만 내가 주로 사랑을 쏟고 당신한테는 그렇게 내가 사랑을 못 해주고 해서, 내가 이 마지막 가게 될런지도 모른 이 먼 나라를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기가 미안하나, 어디 그래도 첫째 둘째가 저렇게 배은망덕을 해서 안 가니 당신이라도 좀 같이 갈 수가 없겠느냐?" 사정을 하니까, "평생 동안 괄세를 하고 첫째 둘째한테만 퐁 빠져 가지고 그 돌아본 채도 안 해 놓고서 어째 오늘은 나보고 아주 가자고 하냐"고, "그런 철면피(鐵面皮) 같은 소리를 할 수가 있단 말이냐"고, "나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그래 마지막에 참, 넷째 부인한테 또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하녀처럼 생각하고 옷 한 벌 변변히 해 준 것도 없고, 손 한번 내가 따뜻하게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세 여자들이 저렇게 배은망덕을 하고 안 따라가니 도저히 나 혼자 가기는 도저히 갈 수가 없고 천상 당신이 나를 좀 따라가 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넷째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피차 나는 일생 동안 당신의 종노릇을 하면서 푸대접을 받아도 그것이 나의 팔자거니 하고 참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당신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내가 기꺼이 내가 따라 모시겠다" 그래 가지고 승낙을 했던 것입니다.
첫째 부인은 '국경까지는 바라다 주겠다', 둘째 부인은 '이 문 방안까지 밖에는 못 가겠다', 또 셋째 부인은 '저 마을 밖에까지 밖에는 못 가겠다'. 이렇게 모다 해서 거절을 당하고 그렇게 인자 마지막 넷째 부인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첫째 부인은 무엇이냐 하면은 우리의 육신(肉身)이라 이것입니다. 사람이 그 영혼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육신을 받아서 태어나게 되고 또 그러기 때문에 일생 동안 그 육신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떠나는데 육신이 따라갈 수가 없고, 육신은 결국은 영혼이 떠날 때 육신은 떨어져서 쓰러지면 땅에다 묻거나 불에 태우거나 하지, 육신이 절대로 영혼을 따라갈 수가 없는 데다 비교를 한 것이고.
둘째 부인은 재산(財産)에다가 비교를 한 것입니다. 육신이라 하는 것은 자나깨나 항시 같이 살고 있는 것이지만 재산은 누가 보면 훔쳐갈까, 달라고 할까 두려워서 항시 창고나 궤 속에다 가둬 놓고 쓰기 때문에 둘째 부인은 재산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고.
셋째 부인은 부모나 형제나 처자권속에다가 비교를 한 것이어서 가끔 만나면 좋고 그저 든든한 맛으로 그저 형제간은 그렇게 살되, 그 영혼이 죽은다 해서 형제간이 같이 죽어갈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런데 마지막 넷째 부인은 우리의 마음에다가 비교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살면서 그 마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라든지, 재산이라던지,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온갖 인정을 쏟고 애지중지하고, 그 어쩔 줄을 모르고 심지어는 그 육신을 위해서는 온갖 음식이다 보약이다 또 좋은 옷이다 화장품이다 해 가지고, 그렇게 온 정성을 쏟아서 그 육체 하나를 갖다가 잘 가꾸기 위해서 평생 동안 보호를 하고 애지중지하지만 먼 데로 떠나는 날에는 완전히 언제 봤던가 완전히 배신을 해 버리고 따라가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둘째, 재산도 그 재산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참 피땀 흘려서 고생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고생을 하고, 그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알고 모르고 지은 죄가 얼마인 줄을 알 수가 없고 그렇지마는 죽어 가는 마당에는 재산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라던지 형제간이라던지 처자권속도 내가 희생을 해 가면서 봉사를 하고 그걸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쏟고 하지만, 내가 죽어 갈 때에는 부모도 어찌하지 못하고 형제간도 어찌하지 못하고 심지어 처자와 아내와 자식들도 내가 죽어 갈 때에는 나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 내가 죽을 때에 따라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넷째에 평생에 괄세하고 소박을 했던 넷째 마누라는 바로 우리의 마음자리에다 비교한 것인데, 그 마음자리 마음은 제일 소중하고 애끼고 잘 먹이고 잘 입혀야 할 넷째 마누라인데, 그것을 등한히 했기 때문에 그것을 등한히 하고 첫째 마누라, 둘째 마누라, 셋째 마누라한테만 퐁 빠져 가지고 괄세를 했기 때문에, 그 셋째까지 먹여 살리느라고 죄만 퍼지었지 마지막 가는 마당에는 그 죄만 짊어지고 가게 되고 아무도 따라와 주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의 본성(本性)을 갈고 닦아서 과거에 지은 업(業)도 소멸하고, 새로 업을 짓지 말아야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거나 또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되 좋은 가문과 좋은 부모와 또 정법을 만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에 태어나서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인품도 좋게 태어나서 공부도 걸림이 없이 하고 또 이 최상승법과도 인연이 있어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겠지만, 그것을 괄세를 하고, 불고(不顧)를 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를 괄세를 하고 닦지를 않았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그동안에 애끼고 가꾸고 한 육신이나 재산이나 부모 처자권속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특히 우리나라는 지금 부인을 하나밖에는 갖지를 못하게 법률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이 네 명의 부인을 갖는다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재산과 부모와 형제 처자권속과 또 우리의 본래부터 타고난 그 마음자리와 이 네 가지를 비유를 했을 뿐, 사실 우리는 아직도—불법을 믿고, 도를 닦고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지만—첫째 둘째 셋째만 이뻐하고, 넷째 부인은 영 겨우 시간이 조끔 있으면 형식상으로 조끔 들여다본 척하고 실재 마음을 딴 데에가 있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분이 많이 계시다면 이것은 불법(佛法)의—위태로운 그 썩은 새끼에 매달린 불법이 위태로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불법을 그렇게 위태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첫째 둘째 셋째, 마지막 가는 길에는 여지없이 배신해 버리고 말아버릴 그러한 (첫째) 둘째 셋째 부인한테만 퐁 빠져 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진짜 나를 따라가 줄 넷째 부인한테는 그렇게 등한히 하기 때문에 마지막 떠나는 길이 그렇게 처량할 수 밖에는 없는 것처럼. 우리의 자성(自性) 본성(本性) 바로 그놈을 제일 애끼고 사랑하고 돌봐줘야 하고 잘 먹이고 잘 입혀야 할 터인데 그것을 괄세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장래, 우리 자신들의 금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저 내생 무량겁을 두고 처량한 신세로 객지로 육도윤회를 떠돌이 할 수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불법의 명(命)을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종단은, 여러분 앞에 종단 이야기를 하기가 대단히 죄송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마는, 우리 종단의 일은 스님네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사부대중 전체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 종단이 하루속히 바로잡아지고 안정이 되어서 불법이 나날이 융성해 가고 많은 사람들이 불법에 귀의해서 바른 길을 찾아서, 실오래기 같은 그 불법의 맥이 동아줄보다도 더 크고 아름드리 고목(古木)나무나 강철로 된 밧줄과 같이 아무리 끊어도 끊어질 수 없는 그런 튼튼한 맥이 되도록 우리는 진심으로 기원을 하고 협조를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19분3초~39분3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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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아 가느냐?' 거기에서 불법이 융성해지는 것이지 어떠한 사회적인 조직으로 인해서 불법의 명이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러한 종단 체제가 바로 잡아져서 안정이 되어야 그 종단 산하에 귀의한 신도들도 마음이 잡혀서 가정이라던지 사회에 옳게 생활을 해 나가시고 일을 해 나가실 것이고, 우리 출가한 스님네들도 마음이 놓여서 정진을 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종단 문제는 여러분들이 신문을 통해서 알고 계신 분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마는 뭐라고 여러분 앞에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 종단의 이러한 가끔 일어나는 여러 사태에 관해서 염려를 하는 신도분이 계셔서, “대관절 출가한 스님네들이 어째서 도만을 열심히 닦고 청정한 마음으로 해 나가면 종단도 그러한 스님네들이 나와서 잘해 나가면 종단도 잘되고 참 다른 많은 사람들도 불법에 대해서 신심을 내서 많이 귀의를 하게 되고 그럴 텐데, 꺼떡허면 종단이 시끄럽고 모다 그래 가지고 어디다가 내가 불교신자라고 얼굴을 내놓기가 참 창피한 때가 많다. 대관절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 신도들은 처자권속이 있고 모다 가정이 있고 해서 돈이나 권리가 없으면 도저히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번연히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악착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을 벌라고 애를 쓰고, 심지어는 부정도 하고 자칫 잘못하다가 들키면은 징역도 살 만한 그러한 일도 가정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스님네야 살아서 무슨 상투가 있나, 죽으니 뭐 자식이 있나, 아내가 있나, 무엇이 걱정이 있어서, 그저 한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두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그뿐인데 왜 그렇게 시끄럽게 그래 쌓습니까?” 아주 내 앞에 와서 탁! 까놓고 공격을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참 나도 승려의 한 사람으로서 그 공격을 나도 받어야 하고, 참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으나 내가 가만히 그 문제를 생각해 보니까, 나는 나대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그래서 "나는 그 종단에 나와서 일하는 모다 스님네들은 어느 모로 보던지 다 똑똑하고 다 훌륭한 스님네들인데, 그렇게 서로 싸움을 하고 물의를 일으키고 하면 모든 불자와 모든 국민으로부터 참 많은 욕을 얻어먹을 줄 빤히 알면서 그렇게 분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그분네들이 그 불보살 화현(化現)이 나타나 가지고 일부러 그러시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모든 종교가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 처음 천 년간은 계속해서 발전을 해 나가고 번영을 해 나가다가 그다음 천 년간은 평행을 이루고, 그다음 천 년간은 차츰차츰 쇠퇴해 가는 기간이다. 그런데 특히 불교는 지금 3천 년이 되었으니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는 벌써 2천 년 지내면서부터 차츰차츰 쇠(衰)해 가지고 벌써 3천 년이 되었으니, 고목나무 가운데에도 아주 속이 참 완전히 썩어서 꽃도 잘 피지 못하고 열매도 맺기 어려운 그러한 아주 극도로 썩은 그런 고목나무와 같은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고대로 놔두고는 새싹이 돋아날래야 돋아날 수가 없어.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빨리 쓰러뜨려 버려야 그 밑에서 새싹이 나 가지고 그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 가지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열매가 맺을 게 아니냐. 그래서 지금 종단에 나와서 일을 보시는 스님네들이 참 욕 얻어먹을 것을 각오하고 또 심지어는 지옥에 들어갈 것도 각오를 하고, 그 고목나무를 비어서 쓰러뜨려 버리고 새싹을 기르기 위해서 나오신 불보살의 화현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분네들도 참 피땀을 흘려서 고생을 하고 밤잠을 못 자고 고생을 하고, 심지어는 때로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참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생각이 아마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과연 그 말을 들으니까 그럴싸하다"고.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마는, 내일이면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가지고 새로운 길을 모색을 한다고 승려대회에 참석을 하라고 통지가 왔습니다.
우리 사부대중은 하루빨리 종단이 바로잡아지고, 정말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목숨바치는 그러한 실답고 참다운 수행자, 출가승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하신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종단은 반드시 또 바로잡아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일신(一身)에 관해서도 첫째나 둘째, 셋째 부인보단 넷째 부인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아야겠고 또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인류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우리 종단을 위해서도 그러한 마음가짐과 그러한 풍토가 이루어져야만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신 바와 같이 칼(KAL)기가 그렇게 참 소련의 그런 무도한 폭격으로 인해서 269명이라고 하는 아까운 생명이 죽어갔고, 또 이러한 분개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하느냐? 우리는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슬픔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조 때부터 내려오면서 계속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궁중에서 왕가에서는 서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와 숙질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밑에 모다 벼슬아치나 선배들은 모다 노론, 소론이다 해 가지고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그래 가지고 불교는 갖다가 탄압을 하고, 이리 내려오다가 결국은 경술년에 왜놈한테 나라를 빼앗기고 그래 가지고 왜정 36년간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는 핍박을 당하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마는 38선이 갈라져 가지고 계속 오늘날까지 참 내려오면서, 많이 우리나라가 좋아졌습니다. 옛날에는 보릿고개라 해서 참 수없이 많은 사람이 굶주림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그러다가 차츰차츰 우리나라는 다 먹고살 만하게 되었고 또 국위도 많이 선양이 되었고, 참 옛날에다 비교하면 참 말로 할 수 없이 참 잘살게 되었으나, 그래도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났고 아직도 우리나라는 힘이 약해서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참 분통 터질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니 만큼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온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일치단결해서 각기 자기 맡은 바 소임을 완수를 하고 더욱 나라를 갖다가 부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본성(本性)을 찾는 일에 충실을 하고 그것을 뿌리로 해 가지고 모든 사업도 해야 하고 각기 학생은 학생대로, 또 학자는 학자대로, 실업가는 실업가대로 또 각기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고 그 밖에 일은 아무리 그것이 소중하다 해도 줄기요, 가지요, 잎이기 때문에 그 잎과 가지와 줄기가 올바르게 자라게 하려면은 뿌리가 제대로 박혀야 하고, 뿌리가 충분한 영양과 수분과 좋은 토양 속에 묻혀야만 거기에서 좋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행복하고, 한 가정이 평화롭고, 한 나라가 부강하고 나아가서 인류의 평화를 유지할라면 그 뿌리인, 근본인 각자의 자성(自性)을 바로잡아 깨달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현들이 참 한결같이 다 말씀한 바지만, 특히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온 법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퍽 살기는 편리하게 되었지마는 이렇게 살벌(殺伐)해 가고, 나라와 나라끼리 이렇게 참 못 할 짓을 하고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성현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뿌리를 북돋은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해 온 까닭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신 바와 같이 대학, 세계 각국의 모든 교육이 오직 그 잎이나 가지를 갖다가 충실히 하는 그런 지엽적인 과학기술 교육에 치중을 해 왔을뿐 뿌리를 북돋은, 우리의 자성을 깨닫는 그러한 교육은 거의 무시를 해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첫째 둘째 셋째 부인만 애끼고, 그리고 제일 그 배신(背信)을 해 버리고 말 첫째나 둘째한테만 빠져 가지고 넷째 부인—진정 애끼고 사랑해야 할 넷째 부인에 대해서 괄세를 하고 냉대를 한 그 죄과로써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까딱 잘못해서 미국이나 소련 같은 데서 핵무기라던지 레이저 광선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참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이 세계 인류는 다 같은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시체로 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사 없는 도리'가 내게 있으므로 내게 있는 그 생사 없는 도리만 본다면 백 번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종단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 최상승법에 목숨 바쳐서 철저하게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데, 금강의 보배 칼이 하늘에 의지해서 싸늘한데, 하늘에 금강 보검이 번쩍거리면서 서 있다 그 말이여.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한 번 번쩍 하는 바람에 능히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가 두 동강이가 났구나.
변계마군종차락(遍界魔軍從此落)한데, 온 세계에 두루 펴져 있는 마군(魔軍)이가 일로 좇아서 전부 함락이 되었는데,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무슨 도깨비가 있어서 그 속을 엿볼 것인가.
여러분에게 있는 보배 칼을 항시 갈고 닦아서 손에서 놓지 아니한다면 어떠한 마군(魔軍)이도 여러분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종단과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매월 일요법회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열리는데, 어린이 법회도 이 지하 아래층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니까 국민학교 학생들 또 유치원 학생들 그런 자녀분이 있으시면 같이 데리고 오셔서 그 일요법회에 참석을 해 가지고 불교의 좋은 노래도 배우고 또 재미있는 불교의 설화도 듣고 이렇게 해서 어릴 때부터서 불교의 씨를 심어주면 차츰 커가면서 훌륭한 불자가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39분36초~60분58초) (끝)
[법문 내용]
(게송)백운아향만리표~ / 육조 스님과 남악회양 선사, 하택신회 선사 / 활구참선. 은산철벽(銀山鐵壁) / 참선은 쉽다(세수하다가 코 만지기), 어렵다(깨 한 말을, 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리에서 굴려서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 올릴 만큼)
네 아내(육신, 재산, 부모형제 처자권속, 마음)의 비유 / 우리의 자성(自性) 본성(本性) 바로 그놈을 제일 애끼고 사랑하고 돌봐줘야.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금강보검의천한~.
〇오늘날까지 그 불교가 동양에 여러 나라에 전해 내려오고 그 경전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또 번역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지마는, 참으로 그 불법에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내려오는 그 법맥(法脈)이라고 하는 것은 실오라기만큼 그러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〇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진 것보다도 더 쉽다’ 이렇게도 쉬웁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웁다고 표현을 하셨지만, 어렵기로 말하면은 깨 한 말을 갖다가—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럭지 있는 데서부터서 굴려서 저 열 길이나 되는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서, 그 나무의 몸뚱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을 굴려서 나무 꼭대기에다 올려다 놓고, 다시 또 내려와서 깨 한 알을 갖다가 뿌리에서부터서 굴려서 올려 가지고 저 꼭대기에 갖다 놓다가, 중간에 잘못해서 뚝 떨어지면 다시 뿌리에서부터서 굴려 올리고 그래서 깨 한 말을 굴려 올릴 만큼.
그것이 얼마나 공력을 드려야—그 하나를 평면으로 굴려 올린다면 모르지만, 서 있는 나무에 굴려서 올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만큼 공력과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〇우리의 본성(本性)을 갈고 닦아서 과거에 지은 업(業)도 소멸하고, 새로 업을 짓지 말아야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거나 또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되 좋은 가문과 좋은 부모와 또 정법을 만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에 태어나서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인품도 좋게 태어나서 공부도 걸림이 없이 하고 또 이 최상승법과도 인연이 있어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겠지만, 그것을 괄세를 하고, 불고(不顧)를 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를 괄세를 하고 닦지를 않았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그동안에 애끼고 가꾸고 한 육신이나 재산이나 부모 처자권속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〇우리의 자성(自性) 본성(本性) 바로 그놈을 제일 애끼고 사랑하고 돌봐줘야 하고 잘 먹이고 잘 입혀야 할 터인데 그것을 괄세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장래, 우리 자신들의 금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저 내생 무량겁을 두고 처량한 신세로 객지로 육도윤회를 떠돌이 할 수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불법의 명(命)을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〇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고 그 밖에 일은 아무리 그것이 소중하다 해도 줄기요, 가지요, 잎이기 때문에 그 잎과 가지와 줄기가 올바르게 자라게 하려면은 뿌리가 제대로 박혀야 하고, 뿌리가 충분한 영양과 수분과 좋은 토양 속에 묻혀야만 거기에서 좋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행복하고, 한 가정이 평화롭고, 한 나라가 부강하고 나아가서 인류의 평화를 유지할라면 그 뿌리인, 근본인 각자의 자성(自性)을 바로잡아 깨달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현들이 참 한결같이 다 말씀한 바지만, 특히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온 법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〇‘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사 없는 도리'가 내게 있으므로 내게 있는 그 생사 없는 도리만 본다면 백 번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종단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 최상승법에 목숨 바쳐서 철저하게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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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한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구나. 동서남북 정처가 없어. 출가해서 걸망을 지고 도반과 선지식을 찾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해서 행각을 하는 분상에는 동서남북 정착(定着)함이 없어. 생애(生涯)는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오직 주장자 하나에 온 생애를 다 맽겨버렸다 그 말이여. 주장자가 동쪽으로 행하면 동쪽으로, 금년 여름에는 동쪽에서 지내다가 겨울철에는 북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갔다 남쪽으로 갔다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주장자 하나로 생애를 맽겼는데.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煙霞味)여. 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그래 가지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천봉(千峰), 바로 천(千) 봉아리 속을 향해서 들어가고 다시 또 만(萬) 봉아리를 향해서 간다.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그 수없는 것을 보고, 수없는 것을 듣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것들이 모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이 천 봉오리고 만 봉오리다 그 말이여. 그 봉오리 봉오리 넘을 때마다 거기에서 피렴심(疲厭心)도 느끼지 아니하고, 소득심(所得心)도 갖지를 아니하고, 만족심도 갖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향해서 목숨을 걸어가는 데에다가 비유하는 게송입니다.
오늘은 계해년 가을 산철 해제일을 맞이했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수행 납자(衲子)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너무 감격스럽게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용화사 선방대중과 또 도봉산 원효암 대중 그리고 여러 용화사 모다 돈독히 조실 스님의 법을 믿고 정진하는 신도 여러분도 참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히 5재 천도식을 맞이한 민병태 영가를 위해서 좋은 법문을 설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이 용화사 법보선원 이 법요식에는 사부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만년위패 법보제자 영가들도 동시에 청혼(請魂)을 해서 이 법요식에 법문을 듣도록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특히 이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해제 법문을 잘 듣고, 과거 무량겁에 지은 선(善) · 악(惡) · 무기(無記)에 업연(業緣)이 봄눈 녹듯이 녹고, 온갖 원한을 다 풀어 버리고 도솔천내원궁이나 또는 극락세계에 왕생을 하고,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게 되면 다시 불법문중(佛法門中)에 귀의해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 일대사인연,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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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 새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건마는, 우리는 심(心), 마음이, 마음의 원숭이[心猿]가 나부대고, 뜻의 말[意馬]이 날뛰는 바람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종이 되어 가지고 망령되이 인아상(人我相)을 내고,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그럴 때마다 얼음 위에다가 물을 찌뜨린 거와 같애서 점점 얼음덩어리는 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그래 가지고 한 생 한 생 거듭될 때마다 업(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얽히고설켜서 자기의 영광(靈光), 자기의 신령스러운 빛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가리워져 가지고 캄캄한 칠통(漆桶) 칠야삼경(漆夜三更)처럼 되어 가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이렇게 본래 불보살(佛菩薩) 불조(佛祖)와 조끔도 차등이 없는 그러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대사(一大事)를 요달치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무량겁을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 빠져서 와서,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또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생사의 윤회는 끄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쇠로 지어 붓은 그러한 굳은 결심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이 생사윤회를 계속 치성하게 만들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원숭이와 뜻 속에 말, 그 원숭이와 망아지를 때려잡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이 얼마만큼 어려우냐 하면, 급히 흘러가는 그 급수(急水), 급히 흘러가는 여울물에 배를 갖다가 대는 거와 같애. 물결이 세지 아니한 데 배를 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물살이 센 데다가는 물살 따라서 배도 따라서 흘러 내려갈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배를 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위태로운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아(人我) 시비(是非)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밥 먹고 옷 입은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잠깐도 한눈팔 겨를이 없이 발에다가 힘을 주고 버티면서 그 배를 대는 데, 잠깐 사이도 딴생각을 낼 겨를이 없다. 어떠한 사람이 머리를 내 머리를 짤라 가고, 손발을 짤라 가고, 심장과 간장을 도려내서 죽음에 이르른다 할지라도 이 배를 기어코 댈려고 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아니한 것처럼, 이러한 정도로 정진을 지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찌 공부를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법에 이르러서 성현 가신 때가 멀어.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믿는 마음이 철저하지를 못해 가지고,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다 할지라도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지고, 보고 듣고 알고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것으로써 살림을 삼아 가지고, 금년도 이럭저럭 또 내년도 이럭저럭 한 철 한 철, 철은 지나가지만, 정진 속에 사량계교(思量計較)와 천착(穿鑿)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수행은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에 참으로 그것을 그러한 정진력을 써먹을 수가 있느냐?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있다면 세존(世尊)은 무엇 때문에 6년 동안에 설산(雪山) 고행을 하셨으며, 달마대사는 소림(少林)에서 9년 동안을 왜 묵무언(默無言) 하셨으며, 장경(長慶)선사는 7개 포단(七個蒲團)을 앉아서 뚫었으며, 향림(香林)은 왜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으며, 조주(趙州)는 30년에사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한 필요가 있겠느냐.
이 참선은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잊어버려. 그래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 먹되 밥맛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 공안을 보나 하나도 맥힘이 없어, 자기 나름대로. 조주 무자(無字)도 맥힐 것이 없고, 판치생모(板齒生毛)도 맥힐 것이 없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들어봐도 하나도 의심이 안 간다 그 말이여. 부처라고 하나 중생이라고 하나, 된장이라고 하나 똥이라고 하나, 천상천하 두두물물이 무엇을 봐도 그것이 다 바로 그것이 자기요, 자기와 부처와 이 법계가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이 도리는 이게 체중현 도리여. 공리(空理)라 그 말이여.
여기에 이르러서 만약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점검을 받지 못하면 자기도 '초견성이다, 한소식했다' 해 가지고, 그러한 그 체중현의 경지에서 보면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없고 맥힐 것이 없으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가서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 체중현 도리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일대사 문제를 요달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현중현 도리에 나아가서는 그것 가지고는 되지를 안 혀.
더군다나 후배, 다른 사람이 공부를 해 가지고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냐, 안 얻었느냐?' 그것을 점검하는 데에 나아가서 자기의 경지와 같으니까 '옳다'고 일러줄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그르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기 때문에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지만, 바르게 닦지를 못하고 바르게 깨닫지를 못하면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하고 마침내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중대한 죄과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산철 두 달 동안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어떻게 수행을 해 가야 하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지어 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정말 차라리 안 하려면 몰라도 일단 이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진을 해 나가는 마당에는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마한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써 작은 견처를 가지고 만족을 삼지를 말고, 고조사(古祖師)에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대는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자기의 견처(見處)를 용감하게 부정을 해 버리고 언제나 처음 발심(發心)할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견처(見處)와 견지(見地)에 이르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견처를 부정해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발심 수행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병에다가 악지(惡知) 악각(惡覺), 악한 알음 악한 깨달음—마치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어떠한 견처도 스스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병에다가 썩은 변질한 고약한 음식을 담은 거와 같애서 그 병 속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 병 속에 담어져 있는 변질된 고약한 악취가 나는 음식 때문에 새로 담은 음식까지도 먹지 못하게 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 병 속에 좋은 음식을 담으려면 먼저 그 병 속에 들어 있는 변질된 물질을 까꾸로 다 쏟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 완전히 그 속에서 그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씻고 또 씻고 소독을 해서 그래도 또 냄새가 나면 그것을 삶고 해 가지고라도 기어코 그 병을 깨끗이 해야, 완전 소독을 해야 그런 연후에 라사 거기에 어떠한 좋은 음식을 담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15분2초~35분50초)
차신(此身)은 성고취(誠苦聚)요. 이 몸뚱이는 정말 이 괴로움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온갖 괴로움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몸뚱이도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그렇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 여가 안 아프면 저가 아프고, 저가 안 아프면 여가 아프고, 오장육부가 다 그렇고. 우리의 마음도 이 걱정 아니면 저 근심, 저 근심 아니면 이 걱정, 내 일신(一身)뿐만 아니라 부모 걱정 · 자식 걱정 · 남편 걱정 · 사업 걱정 · 가정 걱정, 전체가 이 고통 고민의 뭉텅이다 그 말이여.
그리고 온 이 세계는 참으로 불집[火宅]이여. 불집! 불이 훨훨훨훨 불이 타고 있는 불집이여. 옛날 부처님께서 '이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다' 그러셨는데, 정말 이 말세가 되고 보니 저 온 세계가 만드느니 무기만 만들어. 무기가 순 그게 불인데, 불덩어리인데, 맨 새로 만들지 안 해도 이 삼계가 고대로 화택인데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머리 좋은 천재만을 골라 가지고 그 사람들을 시켜서 만드느니 원자탄 · 수소탄 · 레이저 무기, 그러한 무서운 불로써 온 세계를 갖다가 찰나간에 잿더미를 만들어 버리는 그러한 무서운 무기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고 또 상대방을 그 태워 죽임으로써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 무기를 만드는데, 결국에 가서는 그 무서운 무기로 인해서 상대방도 타 죽고 나도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찾아야만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이르를 텐데, 상대방을 죽이고 나만 살려고 나를 지킬려고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도 죽고 남도 죽게 하는 결과가 올 것이 빤합니다. 10년 후에 올 지, 20년 후에 올 지, 백 년 후에 올 지 그것은 알 수가 없지만, 현재 세계 정세의 되어 가는 껄세로 보아서는 그 시간이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언제 올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연 추측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깊은 복(福)과 인연(因緣)을 지었음인지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경행한 일이나, 이 문제는 범범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판이 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불보살이 다 그러셨고, 과거에 모든 고조사(古祖師)들도 역시 다 그러셨습니다. 더군다나 이 말세에 태어난 우리 근기가 약한 우리들은 과거에 불보살과 고조사에 몇십 배, 몇백 배를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러한 뜻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온 세계와 인류, 다시 우리에게 가까이 눈을 돌려보면 우리 조계종 종단 그리고 우리 자신, 멀리 생각하나 가까이 생각하나 우리는 시간을 아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정말 이를 악물고 다시 우리 정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천고(千古)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만산(萬山)에는 공연히 두견새만 울고 있구나. 밤새도록 두견이는 울고 있는데, 아무도 그 두견새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에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이라. 목동이는 한 소리 젓대를 불면서 소를 타고 석양을 지내가는구나.
전강 조실 스님께서 생존 시에 즐겨 읊으시던 게송이었습니다.
법보단에 모셔 있는 만년위패 법보제자 모든 영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오늘 5재를 맞이한 민병태 영가는 이 법문을 들은 인연으로 속성정각(速成正覺)하시기를 바랍니다. (36분1초~48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 /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
왜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느냐? 첫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자신, 자기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고, 둘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길을 가리켜 줄 수 있는 본분작가(本分作家)를 만나지 못한 탓 / 대분심과 대신심과 대의단을 가지고 심원(心猿)과 의마(意馬)를 때려죽임으로써 망상진로(妄想塵勞)를 제거해야 / 사량계교와 겨우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러한 얻은 바를 가지고 생사 문제를 당적(當敵)할 수 없다.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나아가야 / 구경(究竟)의 깨달음.
(게송)차신성고취~ / 삼계(三界)가 화택(火宅) / 무기가 순 그게 불덩어리 /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 / (게송) 천고무인문(千古無人聞) 만산공두견(萬山空杜鵑) 목동일성적(牧童一聲笛) 기우과석양(騎牛過夕陽).
〇무엇을 먹고 사느냐? 무슨 음식을 먹고서 영양을 섭취해 가지고 이 생애를 끌고 가느냐? 연하(煙霞), 안개와 연기를 씹어서 먹고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도 안개는 끼고, 끼어 있는 그 안개를 먹고 살지, 쌀이나 콩이나 팥이나 무슨 고기나 그러한 세속에서 말하는 영양 있는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하루 세끼 밥을 먹되 맛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한 오리도 걸칠 것이 없이, 그러기 때문에 밥을 먹되 쌀이 없는 밥을 먹고, 옷을 입되 실오라기가 없는 그런 옷을 입고, 그리고 먹는 것은 연하(煙霞), 자욱이 아침에 끼었다 낮에는 또 벗거지고, 다시 해가 저물면 또 끼었다가 또 벗거지고 하는 그 자욱한 안개를 먹고 산다. 이 안개라고 하는 것은 생사(生死) 요달(了達)을 하기 위해서 입으로 물질로 된 그것을 먹고 이 영양을 섭취한 것이 아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공안 화두에 대의심(大疑心) 그놈 하나로 그놈에다가 나에 온갖 정성과 온갖 분심(憤心)과 생명을 거기다가 걸고, 먹어도 먹은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오직 그 의단(疑團) 하나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연하(煙霞)를 먹고 산다.
〇만약 이 일대사인연의 근원을 살펴볼 거 같으면 사람 사람이 본래 다 갖춰져 있는 것이여. 본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낱낱이 다 원만(圓滿)하게 다 이루어져 있는 것이여. 새로 닦고 새로 깨달을 것이 없이, 닦지 않고 깨닫기 이전에 진묵겁 전에 다 성불(成佛)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만들고, 그 손바닥을 다시 쥐어서 주먹을 만들고 한 것처럼 조끔도 힘을 들일 것이 없어.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은 전부가 다 『화엄경』이요, 귀로 듣는 것은 전부가 다 법문(法門)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작위(作爲)하는 모든 행동은 다 그것이 불사(佛事)요.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행하고 느끼고 하는 그리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주관적인 것이나 객관적인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의 불사요, 설법이요, 경전이요.
그래서 부처와 조사(祖師)가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하시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먼저 수행을 해서 닦아 가지고 깨달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때에 부처와 조사의 허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의 마음속에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 어떠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가지고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자기 속에 조그마한 견처라도 남아 있으면 그러한 견처로 인해서 어떠한 좋은 법(法)도 들어갈 수가 없고, 좋은 법문을 들어도 바로 자기식(自己式)으로 변질이 되어서 올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그러한 불견(佛見), 법견(法見), 어떠한 경전에 있는 말씀이고, 어떠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그러한 것도 깨끗이 버려 버리고 언제나 초심(初心)! 초심인으로써의 마음가짐과 지조를 가지고 정진을 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른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을 가져서는 아니 되거든, 바른 깨달음 아닌 그러한 견처를 가지고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〇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깊은 복(福)과 인연(因緣)을 지었음인지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경행한 일이나, 이 문제는 범범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결판이 나기가 어렵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셈 치고 목숨을 바쳐서 해야만 이 문제는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불보살이 다 그러셨고, 과거에 모든 고조사(古祖師)들도 역시 다 그러셨습니다. 더군다나 이 말세에 태어난 우리 근기가 약한 우리들은 과거에 불보살과 고조사에 몇십 배, 몇백 배를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러한 뜻에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온 세계와 인류, 다시 우리에게 가까이 눈을 돌려보면 우리 조계종 종단 그리고 우리 자신, 멀리 생각하나 가까이 생각하나 우리는 시간을 아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정말 이를 악물고 다시 우리 정진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8월 첫째 일요법회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사람이 태어나 가지고 사람으로서의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꿈속에서 태어나서 술을 잔뜩 취해다가 취한 채 죽어 가는 인생에 허망(虛妄)한 모습에 대해서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몽중확득황금장(夢中钁得黃金藏)하고, 꿈속에서 황금덩어리를 캐서 얻어 가지고, 청란(靑鸞)새를 타고서 천상(天上)에 올라갔습니다. 꿈에 그 많은 황금 무데기를 캐 가지고서 거기에다가 청란새를 타고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는 천상에까지 올라갔으니, 그 기쁨을 무엇에다가 비교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진야(盡夜), 밤이 맞도록 너무너무 기뻐서 춤을 추고 몸 둘 바를 모르다가, 천명지락득장애(天明只落得場獃)로구나. 날이 새 가지고 꿈을 깨 보니 금덩어리도 간 곳이 없고, 청란새도 간 곳이 없고, 옥황상제가 있던 그 칠보로 장엄한 그 옥경(玉京)도 간 곳이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가 덮고 자던 더러운 포대기에 좁다란 어지러진 방구석 밖에는 없더라.
이 세상에는 권리(權利) 높은 사람도 많고, 돈이 많은 사람도 많고, 좋은 집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많고, 높은 명예를 가진 사람도 많고, 인물을 잘 타고 난 사람도 많지만, 내가 나를, 내가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그러한 것들은 하룻밤 꿈과 조끔도 다른 것이 없어요. 인간이 오래 살면 한 칠팔십 사는데, 지내놓고 보면 아무리 잘살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다 하더라도 마지막 늙어서 눈을 감을 때 생각하면 일생(一生)이라 하는 것은 잠깐 동안 하룻밤 꿈에 지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그때에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중국에 순치황제(順治皇帝) 법문이 나왔습니다마는, 순치황제는 19년 동안 중국 역사상 참 훌륭한 성군(聖君)으로 그렇게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 한 그러한 훌륭한 천자(天子)로 있다가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출가시(出家詩)를 적고, 그리고서 산중 절로 은신(隱身)을 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 출가시에 보면, 전생(前生)에 자기가 인도(印度)에서 도(道)를 닦던 한 스님이었다고 하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마는, 스님으로 도를 잘 닦다가 어느 임금님 행차(行次) 그런 것을 보고 '아, 나도 저렇게 임금이 한 번 되어 봤으면' 이런 생각을 먹고, 또 임금이 정치를 잘 못한 것을 보고, '내가 만약에 천자가 되어서 정치를 한다면 저런 식으로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이렇게 훌륭하게 정치를 해서 백성을 모다 잘살게 하리라' 공부하는, 수행하는 수좌(首座)가 잠시 그러한 생각을 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그다음 생에는 중국 땅에 천자로 태어나서 19년 동안을 그렇게 천자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은 좋은 생각을 먹거나 나쁜 생각을 먹거나, 한 생각 먹은 것이 여촉없이 그렇게 그다음 생에는 그러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마음이 맑은 상태에서는, 마음이 청정(淸淨)한 상태에서는 두드러지게 잠깐 먹은 그런 생각이 그렇게 바로 가까운 장래에 그러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일생 동안 어떠한 원(願)을 세워 가지고 정성스럽게 그 원을 다지고 다진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그 원을 성취(成就)하게 된 것입니다.
기왕 우리가 원을 갖는다면 영원성(永遠性)이 있는 원(願),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 스님네들, 모든 불보살(佛菩薩)들이 세운 그러한 원대(遠大)한 원, '참나를 깨달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引導)를 해서 생사(生死)를 해탈(解脫)케 하고, 구경(究竟)에 가서는 온 우주법계(宇宙法界)가 깨달은 부처님으로 가득차게 하리라' 이러한 대원(大願)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조그마한 물질이라든지 오욕락(五欲樂)이라든지 그러한 원에 집착(執著)이 되어 가지고 기도를 한다든지 또는 주력(呪力)을 한다던지 그러한 식으로 불교(佛敎)를 믿는다면, 불교를 그 위대한 그러한 영원한 불교의 진리를 갖다가, 말하자면 좋은 귀(貴)한 보물을 가지고 돼지우리 같은 것을 수선을 한 거와 마찬가지여서, 불법을 믿고 불자(佛子)가 되어 가지고서 '참 불법'을 참되게 믿지를 못하고 그러한 허망하게 불교를 믿고 만다고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천자보다도 더 높은 지위가 없지만 한 생각 잘못 먹은 탓으로 천자로 태어나서 19년 동안을 그렇게 잘 정치를 해 보았자, 해 보고 나면 백년 삼만육천일, 백년(百年)의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천자(天子) 생활이라 하더라도 승가(僧伽)의 반나절 한가한 것만 같지 못하다고 이 순치황제는 읊고 있습니다. 반나절, '절집에 반나절 한가한 것'이라 하는 말은 절에서, 선방(禪房)에서 반나절 동안 참선(參禪)을 하는 것만 못하다. 왜 그러냐 하면 백년 동안을 아무리 세속(世俗)에서 명예와 권리와 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룻밤 꿈에 지내지 못하고, 또 그렇게 호강을 하고 호의를 하고 부귀를 누려봤자 그것은 다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根本)밖에는 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반나절 참선을 하면 그 공덕(功德)으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引導)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입해산사도비력(入海算沙徒費力), 바다에 들어가서 그 모래를 세어. 바닷가에 가 가지고 그 많은 모래를 몇 개나 되는가 하나하나 세어 봤자 힘만 소비하고 피로만 하지, 바다 모래를 몇 개 된 줄 세어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다 셀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세어 봤자 무엇을 할 것이냐 그 말이여. 구구미면주홍진(區區未免走紅塵)이라. 죽을 때까지 바다 모래를 세어 봤자 결국은 아무짝에도 쓸 것이 없고, 몸은 땀에 젖고 피로해졌고 그래 가지고 지쳐서 쓰러져 버릴 것이다 그 말이여.
쟁여운출가진보(爭如運出家珍寶)하야, 내 집에 있는 보배를 끌어내 가지고, 고목에서, 죽은 고목나무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게 한 것만 어찌 같을 것인가.
우리 중생(衆生)은, 우리의 중생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졌어. 한 번 태어나면 결정코 한 번은 또 가게 되는데, 태어났다가 죽고 태어났다가 죽고 그 허망한 몸뚱이 그걸 보면 아무짝에도 쓸 것이 없는, 속에는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이 가득찬 하나의 그런 더러운 가죽 주머니에 지내지 못하고 결국은 죽어서 썩어져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고목나무 덩어리와 마찬가지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내 마음 닦는 방법을 지도를 받아서 일상생활 속에서 열심히 내 마음을 닦아 가면, 이 똥주머니 오줌주머니 속에 영원히 쓰고 남을 진귀한 보배를 찾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18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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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경(譬喩經)』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죽어서 그 시체(屍體)를 딱 갖다가 뉘어 놓고 홑이불로 덮어 놓았는데, 생전 보지 못한 사람이 와 가지고 그 시체를 홑이불을 걷어 제끼고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몽둥이로 시체를 막 그냥 뼈가 으서지도록 시체를 뚜르러 팬다 그 말이여. 옆에 사람이 '아, 어떤 미친놈이 와 가지고 여그 시체를 팬다. 무슨...' 그래서 막 말려도 워낙 기운이 세고 날래고 해서 가까이 범접(犯接)을 못해. 가까이만 갔다 하면은 막 발길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치고 몽둥이로 때리고 한 통에 그 죽은 사람의 자손도 달라들덜 못해. 달라들었다가는 모조리 다 한 대씩 맞고 꺼꾸러져서 맥을 못 추는 거여.
그래서 "대관절 당신이 누구관데 우리 아버지를 이렇게 뚜드러 팹니까?" 말을 하니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의 전생(前生)에 난데, 바로 이 사람의 전생의 주인(主人)이 바로 난데, 내가 이놈 때문에... 이놈이 살아 있을 때에 지집질하고 도둑질하고 사기치고 온갖 못된 짓은 가려가면서 해 가지고 그 과보(果報)로써 내가 악도(惡道)에 떨어져 가지고 한량없는 죄(罪)를 받다가 간신히 틈을 타서 지금 나왔는데, 내가 이렇게 그동안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이 고통을 받는 것은 이놈이 전생에도 그런 못된 짓을 하다가 금생(今生)에도 또 그런 못된 짓을 했는데, 진즉 와서 이놈을 아주 죽여서 가루를 만들어 버리려고 했는데 내가 얽매어서 나오지를 못하다가 오늘에사 잠시 틈이 나서 내가 쫓아왔다"고. 그러면서 분(憤)을 풀지를 못해 가지고 펄펄 뛰면서 시체를 아주 그냥 작살을 냈다 그 말이여. 이건 『비유경』에 있는 말씀인데.
이 『비유경』에 있는 말씀을 검토해 보면, 이 몸뚱이로 인해서 이 몸뚱이를 잘 맥이고 잘 입히고 편안하게 거처(居處)하게 하고 또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일생 동안 한없는 죄(罪)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는 아무리 잘 입히고 잘 맥이고 편안하게 거처하고, 아름답게 꾸민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내가면 주름살이 잡히고 흰머리가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사지(四肢)가 힘이 없어지고, 오장육부(五臟六腑)가 고장이 나서 버근버근해지고, 더이상 버티지 못할 만큼 되면은 결국은 죽게 되는데, 죽으면 흙으로 불기운으로 물기운으로 바람 기운으로 다 썩어서 없어지고,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업식(業識)은 이 몸뚱이 때문에 지은 그 죄(罪)로 인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혹은 지옥(地獄)에도 가고, 축생(畜生)으로도 떨어지고, 귀신(鬼神) 되고, 다행히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면 혹 천상(天上)에 태어난 수도 있지만, 천상에 태어나 봤자 자기가 지은 죄만큼 받으면 다시 또 떨어지고 마는 것이라, 그러니 이 몸뚱이 있을 때 정법(正法)을 믿고 참나를 닦아서 깨달르면 가(可)하거니와, 정법을 믿지 못하고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바른 길을 행(行)하지를 못하면 내생(來生)에 가서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틈을 타서 자기의 전생(前生)에 자기(自己)였던 그 시체를 와서 가루를 만든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불법(佛法)은 이 허망한 몸뚱이를 타고났을 이때에 이 허망한 몸뚱이 속에 있는 이 주인공(主人公)을 찾고, 무상(無常)한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고, 선(善)과 악연(惡緣)이 엉크러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찾는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나 가지고서도 신심(信心)이 박약(薄弱)하고 끈기가 부족하고 용기(勇氣)가 없어서, 마냥 귀로는 좋은 말을 들으면서도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고, 또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사흘이 못 가서 배시시 흩어져 버리고. 우선 공부는 하려고 하면은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졸리고 맛이 없고, 무슨 좋은 음식은 먹기 좋고 좋은 음악은 귀에 듣기 좋고, 그저 눈에 귀에 편할 대로 몸뚱이에 편할 대로 구경도 다니고 그럭저럭 지내면은 썩 지낼 만하다 그 말이여.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밤낮 그러한 이 몸뚱이 업식(業識)의 입맛에만 좋도록 그럭저럭 지내다가 하룻밤 꿈을 깨고 나면 천당도 간 곳이 없고, 금덩어리도 간 곳이 없고, 청란(靑鸞)새도 간 곳이 없는 그러한 신세가 우리 앞에 돌아올 것을 지끔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큼 젊었을 때 뼈아프게 느끼고 정신(精神)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이 삼복더위에 산이나 바다로 놀러가시면 참 더위를 잊을 수 있고 재미있게 지내실 텐데, 그러한 모든 계획을 다 물리치고 이 더웁고 답답한 이 법당(法堂)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내가 이러한 말씀을 할 필요도 없이 이미 발심(發心)을 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이렇게 많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오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기특하고 신통하고, 거기다 대고 천배(千拜) 만배(萬拜)를 해도 만족이 되지 아니할 만큼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더운 것은 잠깐 동안의 괴로움이고, 참선(參禪)을 해서 참나를 깨닫고 보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요, 입에 임시 달고 몸에 잠깐 편안한 것은 잠깐 동안의 즐거움이지만, 지끔 닦지 않고 공부해 놓지 아니하면 영원한 괴로움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이 문제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男女)가 없고, 빈부귀천(貧富貴賤)이 없습니다. 부자일수록에 더욱 이 점에 대해서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할수록에 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몇 번이나 윤회(輪廻)를 했으며 무엇 때문에 윤회를 했는가? 그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금생(今生)에 올 때까지 그 수없는 생사윤회를 해 왔는데 그 까닭을 물어보자 이거여. 지리여하가자만(至理如何可自瞞)이리오. 지극한 이치를 어떻게 스스로 속일까 보냐.
한 점, 일점애원(一點愛源)이 상정력(常滴瀝)하야, 한 방울 한 방울 그 한 점에 애정(愛情)의 물방울이, 애정의 근원(根源)에서 한 방울 한 방울 계속해서 그 애정의 물이 흘러 가지고 떨어져 흘르고 흘러서 만 길이나 되는 오욕락(五欲樂)의 바다, 고해(苦海)의 바다가 갈수록 점점 넘쳐서 흐르는구나.
무량겁의 생사윤회(生死輪廻)는 그 원인이 한 생각의 그 애정(愛情) 때문에 그렇다. 남녀 간의 애정, 부모자식 간의 애정, 친구 간의 애정, 그러한 그 한 생각의 애정(愛情)으로 인(因)해서 그 한 생각 한 생각의 애정이 점점점점 흘르고 흘러 가지고 천길만길이나 되는 끝없는 깊은 바다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결국은 한 생각 돌이키지 못해 가지고 무량겁(無量劫)의 생사윤회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여.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모든 선지식들은 그 한 생각을 돌이켜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영원(永遠)의 세계(世界)로 들어가셨고, 우리 중생(衆生)은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해 가지고 무량겁 고해(苦海)에 빠져서 신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울 때 추울 때 고단할 때, 눕고 싶지만 '누우까? 마까? 한숨 자까?' 그 자고 싶은 생각, 눕고 싶은 생각이 나오지만, '아니다. 내가 조끔 괴롭다고 내가 눕게 되면 금방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내가니, 그래도 내가 일어서서 포행(布行)을 해서라도 잠을 깨 가지고 정진(精進)을 해야겄다' 그 한 생각으로 자 버린 사람, 한 생각을 이겨 가지고 포행을 하면서 화두(話頭)를 챙긴 사람, 그 조그마한 일이지만 계속해서 편안한 것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은 결국은 고해(苦海)로 들어가는 것이고, 지끔은 좀 괴롭지마는 그놈을 참고 이겨 가지고 정진(精進)으로 나아간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쌓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쌓아가고 일 년 일 년을 그렇게 다잽이를 해 나간 사람은 결국은 정진(精進)에 득력(得力)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된 것입니다.(18분19초~34분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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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누가 부모에 대한 애정이 없으며, 누가 그 자녀에 대한 애정이 없으리오마는, 그리고 누가 재산이라든지 명예라든지 권리에 대해서 생각이 없으리오마는, 그 한 생각을 돌이키는 데에 '북쪽으로 가느냐, 남쪽으로 가느냐' 출발하기 전에는 똑같은 한 자리에 있어도 북쪽을 향해 출발한 사람은 하루 뒤에는 백 리(百里)를 북쪽으로 가 있고, 남쪽을 향해서 출발한 사람은 하루 뒤에는 벌써 백 리(百里), 두 사람의 거리는 2백 리(二百里)의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방향을 어디로 두느냐에 따라서 한 시간 뒤에 다르고, 하루 뒤에 다르고, 한 달 뒤에 다르고, 일 년, 일생 뒤에는 한 사람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 있는데, 한 사람은 끝없는 지옥(地獄)으로 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락과 지옥이 멀다 하지마는 최초에 이별(離別)하는, 갈라지는 곳은 한 장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려서 한 마을에서 태어나 가지고 한날한시에 태어났는데, 두 아이가 차츰 어릴 때부터서 소꿉장난을 하면서 자랐는데 두 아이가 절로 놀러갔습니다. 칠석날이나 초파일날과 같이 손님들이 많이 오시는 날 절로 구경을 하러 갔는데, 가서 보니까 좋은 신들이 수십 커리 수백 커리가 주욱 놓여져 있다 그 말이여. 두 아이가 그 속에서 제일 좋은 신으로 한 켜레 씩을 골라잡어 가지고 옷 품속에다가 숨겨 가지고 집에로 돌아갔습니다.
한 아이의 어머니는, "어머니, 이 좋은 신을 가지고 왔..." "어디서 왔느냐?"
"저 어디 갔더니 좋은 신이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당장 그걸 갖다 주라!"고 호통을 해서 쫓아 보냈습니다.
또 한 아이는, "어디 길에서 이 좋은 신이 떨어져 있어서 줏어 왔다"고 그러니까, 훔쳐 왔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좋아라고 할 이 없겠지요? 줏어 왔다고 하니까, "아 그래, 줏어 왔어? 거 참 좋다" 아주 그것을 반갑게 그것을 받았다 그 말이여.
그 뒤로 이 두 아이는, 하나는 다시는 그런 그 줏어 오거나 훔쳐 온 버릇을 아니했고, 한 아이는 계속해서 그 절로 가 가지고, 법회 때마다 가 가지고 좋은 신을 훔쳐 왔다 그 말이여. 차츰차츰 자라 가지고 하나는 그 나라를 통치하는 통치자(統治者)가 되었고, 한 아이는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도둑놈에 괴수(魁首)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그 한 사람은 풍신수길(豐臣秀吉)이가 되었고, 한 아이는 이시까와 고에몽이라고 하는 일본에 제일가는 도둑에 괴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화(實話)로서 어렸을 때에 한날한시에 태어나서 아마 사주(四柱)를—무엇이 되었건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사람이 될 사주를 타고난 모냥인데, 부모를 잘 못 만나 가지고 그것을, 그 신 한 켜레로 인해서 하나는 통치자(統治者)가 되었고, 하나는 도둑에 괴수가 되었다 이 말인데, 이러한 예는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녀 교육상으로도 그러려니와 우리 자신의 한 생각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그 장자(長者) 그 신도(信徒) 댁에서 대중공양(大衆供養)을 청(請)해서 밤낮 부처님을 위수(爲首)로 해서 부처님만 가시게 되니까, "오늘은 내가 집을 볼 테니 너희들이 갔다 오너라, 너희들끼리만 갔다 오라" 해서 제자(弟子)들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장자(長者) 집으로 공양(供養)을 받으러 안 가시고 그 근처의 마을에 혼자 가셨습니다. 가니까 집집마다 사람이 없습니다. 왜 없나 하니까, 그날은 우리나라 같으면 추석날과 같은 명절날로서 온 마을 사람들이 동산에 모여 가지고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축제가 있어서 다 가버려서, 일곱 집을 차례차례 탁발(托鉢)을 하셨지만 한 집에서도 공양거리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율(戒律)에 많이 얻건, 적게 얻건 또는 아주 못 얻건, 일곱 집을 차례로 탁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얻어도 일곱 집, 적게 얻어도 일곱 집, 도저히 한 숟갈도 얻지를 못해도 일곱 집 이상은 얻지 못하게 불교에 그 계율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곱 집을 다 돌았지만 밥을 조끔도 얻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빈 발우(鉢盂)를 가지고 절로 돌아오시는데, 마왕(魔王)이 뒤에 바짝 따라오면서, "부처님, 지금쯤은 다시 돌아가면 사람들이 다 축제가 끝나 가지고 집에 돌아왔을 테니 지금쯤 가면 얼마든지 좋은 음식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서 다시 탁발을 하십시오" "아니다, 계율에 일곱 집 이상은 못 걷게 되어 있는데, 내가 어찌 하루의 배고픔을 참지를 못하고 계율을 어길 수가 있겠느냐?"
그리고 계속해서 절을 향해서 걸어오시니까, 마구니는 또 부처님을 유혹(誘惑)을 했습니다. "지끔 돌아가지 아니하면 24시간을 굶을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에 한 끼밖에 공양을 안 하시면서 오늘 사시공양을 안 하시면 24시간을 어떻게 배가 고픔을 견디시겠습니까? 연세가 많아 가지고 공양을 못 잡수면 기력(氣力)이 떨어지실 텐데, 어떻게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어떻게 정진(精進)을 하시겠습니까? 지금쯤 다시 마을에 가시면은 좋은 음식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 세 번을 유혹을 했지만, "내가 규칙(規則)을 지키므로... 하루 동안 배가 고프더라도 법도(法度)를 지키는 것이 옳지, 하루 배고픔을 참지 못해 가지고 법도를 어긴다면 어찌 내가 많은 제자의 스승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내가 먼저 솔선해서 법도를 지키고 규율을 지켜야지, 하루의 배고픔을 못 참고 설사 제자들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런 법도를 어긴다면은 내가 어찌 성현(聖賢)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이래 가지고 끝까지 마귀(魔鬼)에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오셨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전해집니다.
인도에 표현방식으로, 부처님 자신이, '아 지금쯤 가서, 다시 가서 밥을 얻을까, 말까?' 이렇게 그러한 생각이 나시고, 또 한편으론 '아니다. 내가 배가 고프더라도 참자' 이렇게 부처님 자신 속으로 '이렇게 허까, 말까?' 스스로 이렇게 망설이고 주저하시는 그것을, 그 부정적(否定的)인 면(面)을 마귀를 등장을 시켜서 표현을 한 걸로 현대 그 학자들은 분석을 합니다마는, 어떻게 되었던지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있어서 항시 '이렇게 허까? 저렇게 허까?' 그러한 경우를 많이 당하게 됩니다.
정진(精進)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고, 어떠한 이끗을 취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고, 가정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도 그렇고, 친구 간이나 이웃을 상대할 때에도 그렇고, 어떤 사업을 할 때에도 그렇고, 반드시 '갑(甲)이냐 을(乙)이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그러한 문제를 당할 때에, 우리는 그러한 마귀에 유혹은 용기(勇氣)와 지혜(智慧)로써 뿌리치고 자기의 바른 길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마귀의 유혹은 한 번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온갖 수단으로 끈질기게 유혹의 손을 뻗쳐 오기 때문에, 지혜와 용기로써 자기를 무장(武裝)하지 아니하면 십상팔구(十常八九) 넘어가고만 마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하느냐?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기를, '극기추상(克己秋霜)이요 대인춘풍(對人春風)이다, 내 마음 내 몸을 이기는 것은 추상(秋霜)과 같이 그렇게 혹독하게 취급을 하고,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 주어라'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보통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처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잘못도 용서(容恕)를 하지 아니하고 추상(秋霜)과 같이 다루는 경향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부 간에도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고, 부모자식 간에도 또 그러한 일이 있을 수가 있고, 특히 친구 간이나 이웃 간에나 직장에 있어서의 상하 관계나 동료 간에도 극기추상(克己秋霜)을 하지 아니하고, 극기(克己)에는 춘풍(春風)과 같이 하고 대인(對人)에는 추상(秋霜)과 같이 하는 데에서 많은 문제점이 생기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 불자(佛子)들은 자기(自己)를 다스리는 데에는 추상(秋霜)과 같이, 서릿발과 같이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고, 다른 사람을 상대(相對)할 때에는 봄바람과 같이 이해해 주고 용서하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불자로서 정말 스스로 나날이 향상(向上)해 가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일요법회이기 때문에 날씨가 더웁지만 이러한 더운 것도 우리의 정진을 향상(向上)시키는 좋은 계기(契機)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원래 고행, 인도에서 모든 수행인들은 고행(苦行)을 위주로 수행을 해 왔습니다마는, 그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서 그 고행이라고 하냐 하면은 인도는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그 더위를 참고 이겨 나가면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아니한다' 한 더위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 고행(苦行)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그럽니다. 이 더운 때를, 내일이 입추(立秋)고 모레 글피가 인자 말복(末伏)입니다마는, 이 더운 때에 우리 천여 명 대중이 한 10분간 같이 정진(精進)을 하는 것도 좋은 인연(因緣)이 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편안히 앉으세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궁댕이는 뒤로 내밀고 아랫배는 앞으로 내밀고 이렇게 하면 몸이 주욱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앞으로나 뒤나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주욱 펴되, 어깨의 힘은 빼고, 이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갖다 대십시오. 그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
죽비(竹篦) 쳐. (죽비 3번)
(민방위 훈련경보) 오늘은 특별 훈련이 있으니까 지하실로 내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거기 가서 잠시 우리의 불자로서 얼마만큼 그 수행이 쌓아졌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지하실로 내려가십시오. 차례차례 신을 신고 차례차례 해서 지하실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34분52초~52분20초) (끝)
[법문 내용]
(게송)몽중확득황금장~ / 내가 나를, 내가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인간 일생은 하룻밤 꿈에 지내지 못한다 / 중국 순치황제(順治皇帝), 전생의 한 생각 /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의 대원(大願)을 가져라 / (게송)입해산사도비력~.
『비유경』에 있는 말씀 / 불법(佛法)은 이 허망한 몸뚱이를 타고났을 이때에 이 허망한 몸뚱이 속에 있는 이 주인공(主人公)을 찾고, 무상(無常)한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고, 선(善)과 악연(惡緣)이 엉크러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찾는 길 / 지끔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큼 젊었을 때 뼈아프게 느끼고 정신(精神)을 차려 공부해라 / (게송)기회윤회문래단~ / 한 생각 애정(愛情)으로 흐르지 말고, 한 생각을 돌이켜 생사해탈(生死解脫)해라.
한 생각 방향을 어디로 두느냐에 따라 극락과 지옥이 멀지 않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풍신수길(豐臣秀吉)과, '이시까와 고에몽'이라고 하는 일본에 제일가는 도둑 / 부처님 탁발 때, 마구니의 유혹 / 우리의 크고 작은 일(모든 생활)에 있어서 용기(勇氣)와 지혜(智慧)로 자기의 바른 길을 취해야 / 극기추상(克己秋霜)이요 대인춘풍(對人春風)이다.
〇기왕 우리가 원을 갖는다면 영원성(永遠性)이 있는 원(願),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 스님네들, 모든 불보살(佛菩薩)들이 세운 그러한 원대(遠大)한 원, '참나를 깨달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引導)를 해서 생사(生死)를 해탈(解脫)케 하고, 구경(究竟)에 가서는 온 우주법계(宇宙法界)가 깨달은 부처님으로 가득차게 하리라' 이러한 대원(大願)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조그마한 물질이라든지 오욕락(五欲樂)이라든지 그러한 원에 집착(執著)이 되어 가지고 기도를 한다든지 또는 주력(呪力)을 한다던지 그러한 식으로 불교(佛敎)를 믿는다면, 불교를 그 위대한 그러한 영원한 불교의 진리를 갖다가, 말하자면 좋은 귀(貴)한 보물을 가지고 돼지우리 같은 것을 수선을 한 거와 마찬가지여서, 불법을 믿고 불자(佛子)가 되어 가지고서 '참 불법'을 참되게 믿지를 못하고 그러한 허망하게 불교를 믿고 만다고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〇중국(中國) 순치황제(順治皇帝)에 대한 법문.
〇불법(佛法)은 이 허망한 몸뚱이를 타고났을 이때에 이 허망한 몸뚱이 속에 있는 이 주인공(主人公)을 찾고, 무상(無常)한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고, 선(善)과 악연(惡緣)이 엉크러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찾는 길인 것입니다.
〇더운 것은 잠깐 동안의 괴로움이고, 참선(參禪)을 해서 참나를 깨닫고 보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요, 입에 임시 달고 몸에 잠깐 편안한 것은 잠깐 동안의 즐거움이지만, 지끔 닦지 않고 공부해 놓지 아니하면 영원한 괴로움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이 문제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男女)가 없고, 빈부귀천(貧富貴賤)이 없습니다. 부자일수록에 더욱 이 점에 대해서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할수록에 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〇무량겁의 생사윤회(生死輪廻)는 그 원인이 한 생각의 그 애정(愛情) 때문에 그렇다. 남녀 간의 애정, 부모자식 간의 애정, 친구 간의 애정, 그러한 그 한 생각의 애정(愛情)으로 인(因)해서 그 한 생각 한 생각의 애정이 점점점점 흘르고 흘러 가지고 천길만길이나 되는 끝없는 깊은 바다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결국은 한 생각 돌이키지 못해 가지고 무량겁(無量劫)의 생사윤회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여.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모든 선지식들은 그 한 생각을 돌이켜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영원(永遠)의 세계(世界)로 들어가셨고, 우리 중생(衆生)은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해 가지고 무량겁 고해(苦海)에 빠져서 신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〇한 생각을 돌이키는 데에 '북쪽으로 가느냐, 남쪽으로 가느냐' 출발하기 전에는 똑같은 한 자리에 있어도 북쪽을 향해 출발한 사람은 하루 뒤에는 백 리(百里)를 북쪽으로 가 있고, 남쪽을 향해서 출발한 사람은 하루 뒤에는 벌써 백 리(百里), 두 사람의 거리는 2백 리(二百里)의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방향을 어디로 두느냐에 따라서 한 시간 뒤에 다르고, 하루 뒤에 다르고, 한 달 뒤에 다르고, 일 년, 일생 뒤에는 한 사람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 있는데, 한 사람은 끝없는 지옥(地獄)으로 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락과 지옥이 멀다 하지마는 최초에 이별(離別)하는, 갈라지는 곳은 한 장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〇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하느냐?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기를, '극기추상(克己秋霜)이요 대인춘풍(對人春風)이다, 내 마음 내 몸을 이기는 것은 추상(秋霜)과 같이 그렇게 혹독하게 취급을 하고,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 주어라' 이런 말입니다.
〇오늘부터 우리 불자(佛子)들은 자기(自己)를 다스리는 데에는 추상(秋霜)과 같이, 서릿발과 같이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고, 다른 사람을 상대(相對)할 때에는 봄바람과 같이 이해해 주고 용서하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불자로서 정말 스스로 나날이 향상(向上)해 가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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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진리를터득한눈으로보면생사는없는것이지만, 우리깨닫지못한우리범부(凡夫)에게는분명히생노병사가있어서정말우리의목숨은믿을것이못됩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사대(四大) ; ①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을 말함. 대(大)란 원소란 뜻.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네(四) 가지 원소[大].
(1)지대(地大) : 굳고 단단한[堅] 것을 성(性)으로 하고, 만물을 실을 수[負載] 있고, 또 질애(質礙)하는 바탕. 질애(質礙)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다른 존재와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는 뜻.
(2)수대(水大) : 습윤(濕潤)을 성으로 하고, 모든 물(物)을 포용(包容)하는 바탕.
(3)화대(火大) : 난(煖)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숙(成熟)시키는 바탕.
(4)풍대(風大) : 동(動)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장케 하는 바탕.
②신체를 말함. 원래, 신체는 지•수•화•풍의 4대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함.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 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념(正念) ; 바른 생각. 선종(禪宗)에서의 바른 생각이란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한 생각(叅究一念). 일체 경계(境界)에 끌려가지 않고, 바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법왕(法王) : [범]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마왕(魔王) ; 마귀(魔鬼 요사스럽고 못된 잡귀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우두머리.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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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생사고해(生死苦海) ;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바다.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윤회의 고통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불파염기(不怕念起) 유공각지(唯恐覺遲) ;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참고]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14. 『수심결』 (지유선사 현토역해 | 도서출판 窓) p83~88 참고.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하셨다.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라, 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하셨고 또 ‘생각이 일어나거던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셨다.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다 제호를 이룬다. 다만 미혹(迷惑)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과 같은 삼계(三界)가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은 육진(六塵)이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 것이다.
만일 이처럼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근본 무명, 근본 번뇌)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快樂)해 근심이 없으리니, 이름하여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 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1231 ~ 1298 또는 1308) (용화선원刊) p97-99.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나무를 그릇처럼 깎아서 칠을 한 스님의 공양(供養, 식사) 그릇. 보통 발우 한 벌은 4개의 그릇으로 이루어지고, 4개의 그릇이 포개져서 하나의 그릇처럼 보관하며, 공양(식사)할 때 4개의 그릇을 펼쳐 놓는다.
*구참(久參) ; 오랫동안 참선 수행한 사람.
*청풍납자(淸風衲子 맑을 청/바람 풍/옷을 꿰맴 납/사람 자) ; 수행을 하여 맑은 기운을 지닌 스님을 청풍(淸風), 맑은 바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참고] 운수납자(雲水衲子) ; 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묻거나 수행을 하러 여러 곳으로 다니는 스님[衲子]을 머무름이 없는 구름[雲]과 물[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참고]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〇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만일 실답게 정진을 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말하자면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바람을 거스르고 물살을 거슬러서 한 척의 밑 없는 쇠배를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함과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함을 묻지 말고, 곧 마음 마음이 끊임없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평생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한다.
밀어서 다리를 붙일 수 없는(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과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 이르르면 별안간 물살과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집에 이르른 소식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이가 있느냐? (주장자로 한 번 치고 말하기를) 십만(十萬) 팔천리(八千里)로다.
*실참실오(實參實悟)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깨달음.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무잡(純一無雜)할 수가 없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주리(周牢)를 틀다 ; 주리 틀다. 예전에, 죄인을 심문할 때 주리(죄인의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긴 막대기를 끼워 비틀던 형벌)의 형벌을 주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송담스님(No.088)]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하고,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기러기 놀던 모래밭에는 그 발자죽만 남아 있고,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구나. 사람은 저 황천(黃泉)으로 가 버렸는데, 황천으로 간 그 사람 이름만 자기집에 남아있더라.
KAL(대한항공)기 피습으로 인해서 그 많은 아까운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갔고, 또 얼마 안 되어서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그 아까운 우리나라 인재요, 일꾼이요, 그런 참 기둥과 같은 그런 분들이 이승을 하직을 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서 짐승만도 못한 그러한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그러한 행동으로 아까운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많이 앗아갔습니다.
6·25동란(六二五動亂) 때 남침을 해가지고 그 많은 동족(同族) 살상을 한 그들이라 무슨 일을 못할까마는, 그러한 야만적인 대죄를 퍼지어서 그 과보로 무량겁을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을 그러한 괘씸하고도 가련한 중생들이요,
다른 사람 아닌 우리와 피를 같이한 동포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더욱 우리의 가슴은 아프고 찢어질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 까닭 없이 이러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因果)의 법칙에 비춰서 보면 반드시 그럴만한 숙세(宿世)의 업연(業緣)이 있어서 이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일이고, 아무리 바늘 끝만한 조그만한 일이라도 원인이 없이 나타난 결과란 없는 것입니다.
<미묘 비구니 설화>
부처님 당시에 미묘(微妙)라 하는 비구니(比丘尼) 스님이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바라문(婆羅門)의 딸로 태어났어. 그 부친이 일국에 널리 이름이 날 만큼 인격이 높고 덕망이 있는 그러한 가정에 태어났는데, 그 미묘라 한 그 여성도 절세의 미인이었습니다.
그래, 멀지 않는 곳에 또 한 바라문이 있어서 그 미묘라고 하는 그 여성이 그렇게 좋은 집안이요, 또 그렇게 인물이 아름답고 행실이 얌전하고 그러니까 거기서 며느리로 맞아 갔습니다.
그래서 좋은 신랑과 결혼을 해서 머지않아서 첫아들을 낳습니다. 첫아들을 나서 온 집안에 경사가 일어났는가 싶어서 그리 좋아했는데 시어머니가 병들어 돌아가시고 이어서 또 시아버지가 병들어서 돌아가셨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즐거운 뒤끝에는 흔히 그러한 또 슬픈 일이 뒤따르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 시부모가 돌아가셨는데 또 그러한 슬픈 뒤끝에 언제 생겼는지 또 두 번째 애기를 또 뱄습니다.
그때에 풍습으로 애기를 배면 친정(親庭)으로 돌아가서 해산(解産)을 하는—역시 지금 우리나라에도 해산할 때는 친정으로 가서 해산을 한다든지, 친정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돌봐 주신다든지 지금도 역시 그러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친정으로 가서 해산을 하기 위해서 남편과 의논을 해가지고 첫아들은 데리고 남편과 같이 친정으로 가는 길인데, 길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인자 가는데 갑자기 가다가 해산이 임박했었던지 배가 아프고 진통이 일어나서 할 수 없이 근처에 나무 밑에다가 자리를 펴고 거기에 뉘였습니다.
뉘여서 얼마 동안을 기다리니까 배가 아프다 가라앉다, 아프다 더하다 그러다가 인자 해가 저물어도 애기는 아직 해산을 못하고,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해서 남편은 저만큼 다른 나무 밑으로 가서 지쳐가지고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사 배가 몹시 아프더니 해산을 했습니다.
몸부림을 치면서 불러도 남편이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영 오지를 않고, 간신히 혼자 애를 낳아 놓고 그리고서 남편을 아무리 불러도 안 오니까, 금방 애를 낳아 놓고는 기어서 남편 있는 데로 가니까 남편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꼼짝도 안한다 그말이여.
막 흔들어 봐도 영 움직이지 않아서 맥을 짚어보니까 이미 죽어가지고 있다 그말이여. 나무 그늘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독사가 와서 물어가지고 그 독이 몸에 번져서 그래가지고 죽어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남편이 죽은 것을 보고, 그렇지 않아도 해산할 때에는 산모(産母)가 신경이 날카롭고 그런 것인데 남편이 죽은 걸 보고 기절을 해버렸어. 기절을 해가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새벽녘에 그 어린아이가, 그 장남이 막 우는 소리에 깨 보니까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을 갖다가 숲 밑에다가 그럭저럭 긁어 묻어 놓고는 장남은 걸리고, 금방 난 애기는 보자기에다 싸서 품에 안고서 친정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얼마를 걸어가니까 큰 강물을 만났다 그말이여.
그 강을 건너야겠는데, 그 서이 같이 건너갈 수는 없고 그래서 장남은 그 강둑에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일러 놓고는 갓난애기만 안고서 강을 건너가는데 굉장히 깊고도 넓어서 간신히 건너가가지고,
애기를 그 강 건너 언덕에다가 가만히 뉘여 놓고 다시 그 장남을 데리러 올라고 하니까, 장남이 그걸 참지를 못하고 엄마를 부르면서 저 혼자 강을 막 건너오다가 넘어져가지고 강물에 떠내려간다.
그래서 그 부인이 쫓아가니까 벌써 급류에 휩쓸려서 저 어디로 떠내려가서 찾지를 못하고 그래서 울면서 되돌아서 이쪽 언덕 갓난애기 있는 데로 향하고 있는데,
그동안에 그 갓난애기, 그 핏덩어리 애기, 그 애기 냄새를 맡고 늑대란 놈이 와서 애기를 꿀떡 삼켜 버렸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걸 보고는 또 기절을 해버렸어.
기절을 했다가 다시 눈을 떠서, 다시 또 슬픔과 산후(産後)의 그 무거운 몸을 끌고서 울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친정을 가다가 어떠한 사람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자기 친정아버지의 친구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사연을 전부 다 울면서 얘기를 하고서 친정 소식을 물으니, 아! 친정부모와 동생들이 며칠 전에 자다가 화재가 일어나가지고 친정부모도 타서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모다 타 죽었다 이말이여. 그 말을 듣고는 또 기절을 했어. 몇 번을 기절을 했어.
그래가지고는 눈을 떠 보니까—그 친정아버지의 친구가 업어다가 자기집으로 데리고 가서 병구완을 해주어서, 눈을 떠 보니까 그 댁에 누워있다 그말이여.
몇백 리를 걷고, 그 연거퍼—시부모 돌아가고, 남편 죽고, 큰아들 죽고, 금방 난 애기 죽고, 친정부모 · 동생 다 죽고, 산후에 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받은 그 충격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면 아주 죽지 않고 살아난 것도 기적이라 할 수가 있지요.
그래 몇 달을 그렇게 친딸처럼 돌봐주어서 그래서 치료를 잘 받고 있는데, 마치 이웃집에 바라문이 있어가지고, 어떻게 그 미모(美貌)로 생겼던지 청혼이 들어와서 그래서 그분하고 또 두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놓고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두 달 있어보니까 흉악한 술주정뱅이여. 뭔 사업한다고 나가서는 잔뜩 술을 먹고 들어와서 그 주벽(酒癖)이 심해가지고 꺼떡하면 뚜드려 패고, 도저히 하루 이틀을 참다 참다, 한 달 두 달을 참다 못해서 거기서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해서 저 멀리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을 쳐가지고 인도에 그 베나레스(Benares)라고 하는 그 성밖에 나무 밑에 앉아서 거기다가 의지를 하고. 뭐 친정도 집이 다 없어져 버리고, 시집도 없어져 버리고, 사고무친척(四顧無親戚)이여.
그래놓으니 인자 천상 그런 부잣집 딸로, 부잣집 며느리로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그러한 부인이었었고 일세(一世)의 미인이었었지만, 그러한 연속적인 재난을 당하고 보니 갈 곳 없는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밑에 의지해서 얻어먹으면서 지내고 있는데 날마다 근처 무덤에 와가지고 그 무덤 앞에 절을 하고 가고, 무덤 앞에 와서 울면서 절을 하고 가고 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는 참 부잣집이요, 좋은 사람인데 상처(喪妻)를 해가지고 너무 아내가 그리우니까 날마다 그 아내의 무덤에 와 가지고 울고 가고 울고 가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몇 번 그 나무 밑에를 지나면서 그 미묘(微妙)라고 하는 여인의 얼굴과 서로 마주치고 마주치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며칠이 지나자 서로 이야기가 되어가지고 또 청혼을 해서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이 사람도 남편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슬픔으로 인해서 마음 붙일 곳이 없고, 또 그 미묘라는 여인도 친정과 시집과 온 가족이 다 비명횡사(非命橫死)를 해가지고 의지할 곳이 없고 피차 외로운 처지에 우리가 서로 같이 사는 게 어떠냐 해가지고, 그냥 결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을 하고 참 심덕(心德)이 좋고 얌전한 사람이었었는데, 아! 그 남편이 병이 들어가지고 시늠시늠하다가 백약이 무효로 결국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남편이 죽으면 여자도 같이 무덤 속에 산 채로 들어가서 같이 죽는 그러한 인습이 있어서 이 미묘라는 여자는 두 번째 결혼한 남자와 같이 생매장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자 무덤 속에 들어가서 그 며칠간 먹을 양식과 음식과 그 촛불 같은 것을 켜서, 인자 그 불도 꺼지고 먹을 것도 떨어지고 하면 그 안에서 그냥 죽는 거죠.(처음~20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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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자 그 안에서 얼마를 울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 밤중에 텅텅 무덤을 누가 파 들어오는데, 아! 자기를 꺼내서 데리고 간 뒤에 가서 보니까 흉악한 도둑놈들이여.
도둑놈이 '예쁜 여자가 생매장 되었다' 그 소문을 듣고서 그 무덤을 파가지고 여자를 데려다 제 마누라를 삼았어.
도둑놈 계집이 되었으니 죽은 것보단 나을란가 모르겠으나, 그래도 죽지 못해서 도둑놈을 남편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아! 그 얼마 안 되어가지고 그 도둑놈이 요새 같으면 형사, 무슨 죄 있는 것이 들통이 나가지고 체포가 되어서 살인강도질을 했든가 그 교수형에 처해가지고 세 번째 남편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상에 우리의 주변에 말로 다 못할 기구한 그러한 참 처참한 환경을 당한 사람도 많이 있지만, 아무리 많다 해도 이 '미묘'라고 하는 이 사람만큼 그렇게 처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소설에도 그렇게 비참한 사람은 구경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미묘 비구니의 출가, 정진>
그래가지고 거기서 비탄에 빠져가지고 사고무친척(四顧無親戚)이여.
그러다 어디서 말을 들으니까 '기원정사(祇園精舍)라 하는 곳에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하는 성현이 계시는데 그분은 전생(前生) 일도 환히 알고, 내생(來生) 일도 훤히 알고 하는 그러한 성현이 계신다'하는 말씀을 듣고,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자살할 수도 없고, 모진 것이 목숨이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네 번째 남편을 또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얻어봤자 또 팔자가 빤할 것 같고 그래서 '그 석가모니라고 하는 부처님한테 가서 대관절 내 팔자나 한번 물어보고 죽어야겠다' 그래가지고는 거기를 갔어.
그 기원정사를 찾아가서 멀찌감치 서서 이래 보니까, 막 춘삼월에 꽃이 활짝 핀 것처럼 환하고, 하늘에 그 많은 별 속에 둥근달이 떠있는 것처럼 그렇게 먼 데서 봐도 그렇게 위엄스럽고 거룩하고 환한 그런 어른이 계신데, '바로 저 어른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그러거든.
그러나 감히 자기와 같은 그런 비참한 여인이 찾아가서 뵈올 수는 없고 머뭇머뭇하고 있으니까, 그 부처님이 떠벅 떠벅 자기 가까이로 걸어오셔서 ‘어디서 왔느냐? 이리 오라’해 가지고는, 그 지난 모든 사연을 두루 다 들으시고—그거 다 말씀을 다 여쭈었는데.
여쭙고서, "저와 같은 이러한 미천한 그런 여자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도(道)를 닦을 수가 있겠습니까?"
"네가 참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한다면 왜 못 닦겠느냐"
그래가지고 고타미 비구니를 시켜서 머리를 깎이고 계(戒)를 설해서 그래서 비구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비구니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열심히 도를 닦았던지—인자는 누가 잘했다 못했다 그런 말도, 자기한테 잘하네 못하네 그런 시비도 자기한테는 귀에 들리지도 않고, 누가 다른 사람이 잘하고 못하고 한 것도 그런 것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그저 대중과 같이 탁발(托鉢)을 할 때는 따라가서 탁발을 하고, 밥을 먹을 때는 같이 먹고, 소지(掃地)할 때는 같이 소지를 하고, 그저 눈을 뜨나 감으나 앉으나 서나 부처님께서 지도하신 고대로 도를 닦아 가는데 세월가는 줄을 몰라.
비가 오는지, 해가 뜨는지 지는지, 도대체 그 여러 대중 속에 살아도 대중이 하나도 눈에 보이지를 안하는 거여.
지금도 누구를 막론하고 참선을 하려면은 그렇게 해야 돼!
앞으로 음력 시월(十月) 보름이 되면 또 겨울 결제가 시작이 되지만, 보살님네가 5~60명 내지 70명 방부(房付)를 들여도 그렇게 철저히 도를 닦아야 무엇이 뚫리던지 뚫리지,
밥이 되니 지니, 반찬이 짜니 싱거우니, 네 떡이 크고 내 떡이 작으니, 왜 너만 먹고 나는 안 주느니, 방이 더웁다 차웁다, 너는 왜 저만큼 안 앉고 내 바짝 옆에 왔느냐, 너는 왜 저기 안 앉고 여기 왔느냐, 여기가 내 자리다 네 자리다,
사사건건이 시비(是非)를 하고 그래가지고 무슨 참선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남의 흉보느라고 언제 참선을 하냐 그말이여.
참선한다고 선방에 와 가지고 자기 집안 망신하고, 자기집에서는 절로 참선한다고 의기양양하게 와 가지고 하는 짓이 똥싸고 뭉개는 그러한 참선을 해가지고 무슨 도를 통할 것이냐 그말이여.
그렇게 무섭게 도를 닦아 가지고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어.
확철대오를 해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는데, 겸해서 숙명통(宿命通)까지 툭 뚫어졌는데, 자기의 과거를 터억 숙명통으로 비추어보니까 인과법(因果法)이라 하는 것이 참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서’ 털끝만큼도 어기지 아니한 사실을 분명하게 봤다 그말이여.
<미묘 비구니의 전생(前生)>
전생(前生)에 어느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부인도 얌전하고 가정도 넉넉하고 한데 아들을 못 낳아서 할 수 없이 작은 마누라를 얻어가지고, 아들을 보기 위해서 작은 마누라를 얻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작은 마누라는 별로 양갓집 규수가 아니고, 천한 집 딸을 작은 마누라로 데려왔는데 얼굴은 참 기가 막히게 예뻤다 그말이여.
속담에 재취(再娶)나, 작은 마누라한테 미치지 아니한 남자는 ‘배안에 병신’이라고 그런 말도 있는데,
아들 낳는 것이 목적이어서 작은 마누라를 얻었건만, 얻어가지고 살아보니까 큰 마누라보다는 훨씬 정이 그리 쏠린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머지않아서 포태를 해가지고 애를 낳는데, 마치 다행히 옥동자(玉童子)를 낳다 그말이여. 그렇지 않아도 예뻐서 죽겠는데 아들까지 낳았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그말이여.
그러니까 큰 마누라는 그저 든든하게 저만큼 놔두고 그저 점잖하게만 상대하고, 밤낮으로 작은 마누라한테 아주 퐁 빠졌어.
그러다가 아들까지 낳으니 집안에 경사가 났다고 야단이고, 이웃집에서도 모다 야단이고 그런데, 그 사람마다 다 잘했다고 그러는데, 한 사람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이 슬프고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말이여. 물어볼 것도 없이 그게 큰 마누라여.
가만히 생각해보니 겉으로는 좋아한 척하지마는 속으로는 기가 막히다 그말이여.
이 재산도 저놈이 크면은 저놈 앞으로 다 갈 것이고, 저놈이 크면은 자기 생모(生母)만 알지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편도 작은 마누라와 자식만 좋아하지 나는 벌써 인자 저 무용지물로 취급을 하고, 지금도 그러거든 나중에 10년 20년 뒤에 가서 생각해보면 빤하다 그말이여.
'그러니 저것을 어쨌던지 크기 전에 저것을 없애야겠다' 아! 이러한 못된 생각을 냈어.
그래가지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한 끝에 그 애기 정수리에다가 바늘을 갖다가 꽂아 넣었어.
그래놓으니 겉으로는 감쪽같은데 애가 울고 보채고, 젖도 안 먹고, 업어줘도 소용없고, 달래도 소용없고, 별짓을 해도 소용이 없어. 의사한테 별별 약을 갖다 먹여도 소용없고 열흘이 못되어서 그 애기는 결국은 죽어버렸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 애기 엄마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그렇게 울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달덩어리 같은 어린아이가 왜 죽었을까?' 생각해보니 알 수가 없어.
그런데 마음이 짚이는 데가 있는데, ‘틀림없이 이것은 큰엄마가 이것을 죽였지 않는가?’하는 의심이 단통 고리 간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애기는 당신이 죽인 거 아니요?"하고 물어보니까,
펄쩍 뛰면서 "자네가 그 애기를 낳지마는 그것이 바로 내 자식인데 내가 왜 죽일 리가 있겠느냐"고.
"그러면 이 애기가 어째서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병이 나서 죽을 리가 있느냐?"
"왜 내가 죽이냐? 내가 만약에 이 애기를 죽였다면, 내생(來生)에 내가 남편은 독사에 물려 죽을 것이요, 자식은 물에 빠져 죽거나 호랑이한테 물려 죽을 것이요, 친정부모와 동생은 불에 타서 죽을 것이요. 나는 생매장을 당할 것이요, 그럴 것이다" 그렇게 맹세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내가 맹세를 해도 나를 못 믿겠느냐?" 어떻게 그런 입에도 못 담을 무서운 맹세를 하고 펄쩍 뛰던지, ‘과연 큰 마누라가 죽이지는 안 했는가 보다’하고 그냥 비통하기만 하고, 큰 마누라에 대한 의심은 그런대로 그냥 일단락이 되었는데.
바로, 작은 마누라한테서 난 애기 머리에다 바늘을 꽂고 그 무서운 맹세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 미묘(微妙)라고 하는 비구니였더라 그말이여.
그러니 그 비구니는 아무도 모르는 병을 혼자만 앓고 백방으로 약을 먹어도 안 낫는 병이 하나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서 평생 동안 아라한과를 증득했어도 그 안 낫는 병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기가 아파! 여기가 득신득신 득신득신 정수리가 아파가지고 아무리 약을 먹어도 안 낫는 거여, 일평생 동안을.
그게 전생에 그 애기 머리빡에다가 바늘을 꽂은 그 과보로 평생 동안을 머리 아픈 병을 면(免)치를 못했다 그거여.
소설에나 옛날 얘기에 가끔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와의 사이, 그 본마누라한테서 난 애기를 재취가 괄세하는 팥쥐 콩쥐 그런 얘기 뭐 참 많지만, 참 이러한 그 경전에 있는 말씀으로써 가만히 이 설화를 듣고 여러분도 생각해보시면 인과(因果)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그 인과는—이 여자가 지은 죄는 바늘로 애기를 하나 죽인 것 뿐인데, 그리고서 맹세를 하기를 그렇게 고약한 맹세를 했다 그말이여. 자기가 자기의 혐의를 갖다가 엄폐(掩蔽)하기 위해서 그렇게 무서운 맹세를 했어.
그 맹세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꺼떡하면 그 맹세를 잘 하지요.
내가 뭐 모래에다 혀를 박고 죽어도 어쩌고 저쩌고 하고, 무슨 내가 당장 바가지를 차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네 돈은 안 쓰겠다는 둥—무슨 입에 못 담을 그런 독한 고약한 맹세를 하는데, 그거 하는 것 아닙니다.
설사 그러한 죄가 없을 경우라도 그런 맹세를 하는 게 아니에요. 한번 그 입에 그런 고약한 말을 하면 그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러한 고약한 맹세, 자기의 그 혐의(嫌疑) 없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고약한 맹세는 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 입으로 맹세한 그것이 고대로 다 받아졌다 그말이여. 죽였기 때문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죽이지 안했다 하더라도 그런 맹세를 하면 그 맹세한 그 과보로 그것이 그와 비슷한 과보를 또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행동으로도 죄를 안 지어야 하고, 입으로도 그러한 고약한 그러한 말은 혀나 입에 건너지를 말아야 하고, 생각으로도 그런 고약한 생각은 해서는 아니된 거다.
몸으로 짓는 죄, 입으로 짓는 죄, 마음으로 짓는 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은 다 마찬가지여.
마찬가지인데 제일 우리가 소홀히 취급한 것이 '마음으로 지은 죄'다 그말이여.
‘행동으로만 내가 안 하면 그만이다’하지만 행동으로 안 해도 마음으로 이미 살생(殺生)을 할 생각을 먹으면 이미 살생죄를 범(犯)한 거여.
마음으로 ‘저것을 내가 훔쳐야겠다’하면 벌써 도둑질을 범한 것이고, '저 사람을 내가 한번 기어코 가까이 해야겠다'하는 그런 음심(淫心)을 품으면 벌써 음행(淫行)을 범한 것이다 그말이여.
이건 대승계(大乘戒)에 있어서는 대승계는 '마음의 계(戒)'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지어도 대승계는 이미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무서운 것은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도 '마음으로 지은 죄'가 더 무서운 것이다」하는 것을 우리 대승법,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깊이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먼저—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마음에서 먼저 일어나가지고 그것이 말로 표현이 되고, 마침내는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중대하거든.
성냥불은 성냥개비 하나지마는 그놈 하나 탁! 쳐댐으로 해서 큰 집도 태울 수 있고, 큰 공장도 태울 수도 있고, 한 도시도 태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 마음으로 『‘한 생각’ 탁! 일어난 것』이 결국은 바늘로 찌르게 되고, 바늘로 찌른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 무서운 여러 가지 맹세를 입으로 했기 때문에 그러한 무서운 과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 그 마음에 ‘한 생각’ 탁! 먹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20분31초~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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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는 데에 요점을 두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탁! 일어나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겨가기 전에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누구를 미워하는 생각이 탁! 일어나도 그 미워하는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미워하는 생각이나, 또는 사랑하는 생각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바로 단속을 해서 화두(話頭)를 들도록 이렇게 습관을 들여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뭣고?’해도 한번 속에서 부애가 나면은 아무리 ‘이뭣고? 이뭣고?’해도 속에서 뽀글뽀글 화가 치밀어 오르지요.
그러지만 자꾸 하면은—심호흡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후우~하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2번 3번하면 그 치밀었던 화가 스르르르르 가라앉게 되거든.
그렇게 해서 노여움도 그렇게 다스려 나가고, 미운 생각도 그렇게 다스려 나가고, 억울한 생각도 그렇게 다스려 나가고, 슬픈 생각도 그렇게 다스려 나가고, 기쁜 생각도 그렇게 다스려 나가면, 그것이 세월이 흘러가면,
탁! ‘이~’ 하면 벌써 턱!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서 자취 없이 그 미웁고 노여운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처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해서 힘을 얻은 사람은 성도 낼라면 내고 안 낼라면 안 내고, 통곡을 하고 슬퍼할라면 하고 또 슬퍼 안 할라면 안 하고,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받는 모든 업(業)이 전부가 다 우리 자신이 전생에 지어서 받는 일이라,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남을 원망하지 말고,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자기 자신을 깨달음의 경지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면,
이 세상에 만나는 모든 어려운 일은 우리로 하여금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하는 좋은 시련이요, 나를 미워하고 해코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신심과 발심을 해서 도업을 성취하게 하는 불보살의 화현(化現)으로 변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한 생각’ 돌이켜서 한걸음에 부처님의 경지에 뛰어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저 버마에서 일어나는 그 통탄하고 분이 풀리지 않는 그러한 일을 참 당했지만 우리나라 백성들은 그 분통을 그 통탄의 마음을 진정을 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돌이켜 뭉쳤고, 다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들은 그 마음을 돌이켜서 ‘이뭣고?’ 나를 깨달아서 나와 진리가 하나가 되게 하는 불사(佛事)에 마음을 돌이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나라를 잘 지키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두가 다 마음을 합해서 나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해지냐 하면, 자기 마음을 비워야 해.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뜻에 자기를 맞추려고 노력을 해야 하거든.
독선(獨善)주의, 독단(獨斷)주의—‘내가 제일이고 나만이 옳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 그런 생각을 비워야만 내 마음과 저 사람 마음이 합해지는 것인데, ‘그 마음을 어떻게 하면 비워지냐?’하면 참선(參禪)을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되거든.
아무리 내 마음을, 내 주장을 버리고 저 사람을 따라가려고 해도 그게 잘 안됩니다.
'내가 이제부터서는 시부모 말씀을 순종하리라. 남편 말이라 하면은 무조건하고 따르리라' 또는 '내가 남편이지만 덮어놓고 아내를 윽박지를 게 아니라 아내의 말도 내가 좀 따라주리라'하고 평소에 마음은 안 먹는 건 아니지만, 일을 딱! 당하면 독사대가리 같은 아만(我慢)이 탁! 추켜들고 나서거든.
그래가지고 고집을 부리고 한바탕 큰소리가 난 뒤에사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공연히 내가 그냥 참아버리면 되었을 것을 공연히 내가 그랬구나' 싶으지만, '이 다음에는 다시는 안 하리라’해도 또 얼마 지내서 일을 당하면 또 그게 안 되거든.
늙어가면서 점점 더 못되게 되어 가. 심술이 더 고약해지고.
그거 왜 그러냐 하면은 ‘나이 먹는다’고 덮어놓고 좋아질 까닭이 없거든. 마음을 자꾸 수양을 하고 닦아야 좋아지는 거지, 닦지 않고 ‘나이 먹는다’고 좋아질 까닭은 도저히 없는 것이여.
곡식을 심어 놓고 손질을 잘하고 잘 가꿔야 좋은 결실을 맺는 거지, 심어만 놓고 날수만 찬다고 해서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닌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서도 우리는 참선을 열심히 해야 하고, 가정을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닦아야 하고, 내 일신을 위해서도—일신의 행복과 생사해탈을 위해서도 참선을 해야 해.
한 가지 일을 해가지고 여러 가지 일이 좋은 이 최상승법을 금생에 이렇게 만났을 때 아니하고 언제 하려고 미루느냐.
형식적으로 조금하다가 금방 바깥 경계에 끄달려 버리고, 이래가지고서는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해도 무슨 깨달음이 있겠느냐.
부애 날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괴로울 때 ‘이뭣고?’
억울할 때 ‘이뭣고?’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사정이 허락할 때 ‘이뭣고?’를 열심히 해서 기어코 금생(今生)에 도업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보탑필경쇄위진(寶塔畢竟碎爲塵)이어니와 일념정진성정각(一念精進成正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사람이 잠깐 동안 떠억 정좌(靜坐)를 하고 ‘이뭣고?’를 하면, 참선(參禪)을 하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훌륭하냐 하면,
칠보(七寶), 금 · 은 · 유리 · 호박 · 자거 · 마노, 이러한 칠보로써 탑을 항하사(恒河沙),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 있는 그 모래수 알과 같은 그만큼 많은 칠보탑을 조성해 모신 공덕보다도 더 수승을 하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훌륭한 칠보탑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천재지변이나 또는 전쟁으로 인해서 그것이 파괴되어 버릴 때가 있어.
그러나 잠깐 동안 정진(精進)한 그 공덕으로는, 그 인연공덕으로는 언젠가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입니다.
잠깐 동안 ‘이뭣고?’한 공덕으로도 언젠가는 성불(成佛)을 하거든, 하물며 밤잠을 안 자고 목숨을 바쳐서 참선을 한다면 금생에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일요법회입니다. 잠깐 동안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죽비를 치고 입선에 들거든, 처음 1분 간은 KAL기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 또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관(觀)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죽비 세번)
(정진)
(죽비 세번)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비록 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산[雲山]처럼 천만 가지 일을 설한다 하더라도, 저 바다 하늘 위에 밝은 달은 본래 말이 없구나.(41분1초~56분28초)(끝)
*(게송) '채득백화성밀후(採得百花成蜜後) 부지신고위수감(不知辛苦爲誰甘)' ;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36. (가로판 p142) 게송 참고. 당대시인(唐代詩人) 나은(羅隱 833~909)의 시 《봉(蜂)》 참고.
*하늘갓 ; 하늘가(하늘의 끝). 천애(天涯 : 하늘의 끝.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황천(黃泉) ; 저승(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業]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미묘 비구니 설화 ; 『현우경(賢愚經)』 제3권 제16. 「미묘비구니품(微妙比丘尼品」 (단본丹本에는 이 품이 제4권에 있으며 순번이 19이다)
*바라문(婆羅門) ; 산스크리트어 brāhmaṇa의 음역어. 고대 인도 바라문교의 카스트(caste 네 가지[四種姓]로 분류되는 세습적 신분 계급 제도) 제도의 최상위 계급인 사제(司祭) 계급을 일컫는다.
베다(Veda 바라문교 근본 경전)를 교육하고 사원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제식(祭式)을 관장했다.
*해산(解産 풀다·가르다·떼어내다 해/낳다·나다·태어나다 산) ; 몸을 풀어[解] 아이를 낳음[産].
*서이 ; ‘셋’의 사투리.
*병구완(病구완) ; 병을 앓는 사람을 돌보아 줌.
*주벽(酒癖 술 주/버릇 벽) ; 술 마신 뒤에 나타나는 버릇.
*야반도주(夜半逃走 밤 야/가운데·한창·가장 반/달아날 도/달릴 주) ; 남의 눈을 피하여 한밤중[夜半]에 도망함[逃走].
*베나레스(Benares) ;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위치한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다. 바라나시(Varanasi) 또는 카시(Kashi)라고도 한다.
이 바라나시의 북방 약 10km에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 初轉法輪]을 한 녹야원(鹿野園 사르나트)이 있다.
*사고무친척(四顧無親戚 사방 사/돌아볼 고/없을 무/친하다·가깝다·어버이·친척 친/친척·일가 척) ; 사방(四方)을 돌아봐도[顧] 친척(親戚)이라고는 아무도 없음[無]. 주위에 의지할 만한 친척이나 사람이 전혀 없음.
*심덕(心德) ; 마음이 너그럽고 착한 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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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정사(祇園精舍) ;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정사의 약어(略語). 중인도 코살라국(國)의 수도 사위성(舍衛城 : 슈라바스티) 남쪽 1.6 km 지점에 있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동산에 지은 절.
이는 ‘기타태자의 동산에 수달(須達 : 給孤獨長者)이 지은 승원’이라는 뜻인데,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란 ‘고독한 이들에게 보시를 많이 한 부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계(戒) ; 계율(戒律).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말미암은 모든 악(惡)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
계는 좋은 습관이나 도덕적 행위의 뜻으로 모든 불자가 지켜야 할 불교도덕이며, 율은 모든 그릇됨을 여의고 깨달음의 세계로 선도해야 할 출가 교단의 통제 규범.
*비구니(比丘尼) ; 출가하여 불교의 구족계(具足戒)인 348계(戒)를 받고 수행하는 여자 스님. 팔리어 bhikkuni 걸사녀(乞士女)라고도 한다.
*탁발(托鉢 맡길 탁/바리때 발) ; 도를 닦는 스님이 경문(經文)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보시를 받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의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동시에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이 있다고 하여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행하였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 · 사다함 · 아나함 · 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재취(再娶 두·두 번 재/장가들다·아내를 맞다 취) ; ①아내를 여의었거나 이혼한 사람이 다시 결혼하여 두 번째 아내를 맞음. ②아내를 여의었거나 이혼한 사람이 다시 결혼하여 맞아들인 두 번째 아내.
*옥동자(玉童子) ; 옥(玉)같이 잘생긴 사내아이[童子]란 뜻으로 어린 사내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
*단통 ; 그 자리에서 대번에 곧장.
*엄폐(掩蔽 가릴 엄/가릴 폐) ;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김.
*혐의(嫌疑 싫어하다·의심스럽다·혐의하다·나쁜 일 혐/의심하다·의심스럽다 의) ; ①(법률)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봄(의심). 또는 그 가능성. 수사를 개시하게 되는 동기가 된다. ②의심스러움. ③미심쩍음. 꺼리어 싫어함.
*삼업(三業) : trini karmani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이것이 삼업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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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는 데에 요점을 두는 것입니다' ;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법문 내용]
(게송)안비천말적유사~ / KAL(대한항공)기 피습의 가슴 찢어지는 아픔 / 인과(因果)의 법칙, 원인이 없이 나타난 결과란 없다. 우리가 금생에 받는 모든 업(業)이 전부가 다 우리 자신이 전생에 지어서 받는 일 / 미묘 비구니의 전생에 못된 '한 생각'의 무서운 과보.
미묘 비구니 설화(미묘 비구니의 전생에 행한 악행惡行과 그 악행을 덮기 위해 한 고약한 맹세로 인한 금생의 무서운 과보. 다행히 과거세에 연각緣覺에게 공양을 올리고 그와 같이 도를 얻게 되기를 서원한 인연으로 현생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 출가하여 도를 닦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였다)
*미묘 비구니는 아라한이 되었지마는 (전생에 둘째 마누라의 아들 정수리에 바늘을 꽂아 죽인 그 과보로) 항상 뜨거운 바늘이 정수리로 들어가 발바닥으로 나오는 듯 밤낮으로 그런 고통을 받아 쉴 때가 없었다고 한다. (『현우경(賢愚經)』 제3권 제16. 「미묘비구니품(微妙比丘尼品」 단본丹本에는 이 품이 제4권에 있으며 순번이 19이다)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는 데에 요점을 둔다 / 최상승법은 ‘한 생각’ 돌이켜서 한걸음에 부처님의 경지에 뛰어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의 길 / (게송)약인정좌일수유~.
〇밥이 되니 지니, 반찬이 짜니 싱거우니, 네 떡이 크고 내 떡이 작으니, 왜 너만 먹고 나는 안 주느니, 방이 더웁다 차웁다, 너는 왜 저만큼 안 앉고 내 바짝 옆에 왔느냐, 너는 왜 저기 안 앉고 여기 왔느냐, 여기가 내 자리다 네 자리다,
사사건건이 시비(是非)를 하고 그래가지고 무슨 참선을 할 것이며, 남의 흉보느라고 언제 참선을 하냐 그말이여. 참선한다고 선방에 와 가지고 자기 집안 망신하고, 자기집에서는 절로 참선한다고 의기양양하게 와 가지고 하는 짓이 똥싸고 뭉개는 그러한 참선을 해가지고 무슨 도를 통할 것이냐.
〇대승계(大乘戒)에 있어서는 대승계는 '마음의 계(戒)'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지어도 대승계는 이미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무서운 것은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도 '마음으로 지은 죄'가 더 무서운 것이다」하는 것을 우리 대승법,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깊이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마음에서 먼저 일어나가지고 그것이 말로 표현이 되고, 마침내는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중대하거든. 성냥불은 성냥개비 하나지마는 그놈 하나 탁! 쳐댐으로 해서 큰 집도 태울 수 있고, 큰 공장도 태울 수도 있고, 한 도시도 태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마음으로 『‘한 생각’ 탁! 일어난 것』이 결국은 바늘로 찌르게 되고, 바늘로 찌른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 무서운 여러 가지 맹세를 입으로 했기 때문에 그러한 무서운 과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 그 마음에 ‘한 생각’ 탁! 먹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는 데에 요점을 두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탁! 일어나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겨가기 전에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누구를 미워하는 생각이 탁! 일어나도 그 미워하는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미워하는 생각이나, 또는 사랑하는 생각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바로 단속을 해서 화두(話頭)를 들도록 이렇게 습관을 들여 나가는 것입니다.
〇우리가 금생에 받는 모든 업(業)이 전부가 다 우리 자신이 전생에 지어서 받는 일이라,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남을 원망하지 말고,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자기 자신을 깨달음의 경지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면, 이 세상에 만나는 모든 어려운 일은 우리로 하여금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하는 좋은 시련이요, 나를 미워하고 해코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신심과 발심을 해서 도업을 성취하게 하는 불보살의 화현(化現)으로 변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한 생각’ 돌이켜서 한걸음에 부처님의 경지에 뛰어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의 길인 것입니다.
〇형식적으로 조금하다가 금방 바깥 경계에 끄달려 버리고, 이래가지고서는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해도 무슨 깨달음이 있겠느냐.
부애 날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괴로울 때 ‘이뭣고?’
억울할 때 ‘이뭣고?’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사정이 허락할 때 ‘이뭣고?’를 열심히 해서 기어코 금생(今生)에 도업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중생은「깨닫지못한부처님」이고,「다시미(迷)한부처님」이고,「잠깐미(迷)한부처님」이고,마치보석이잘못해서쓰레기통에빠지듯이,쓰레기통에빠져서먼지가묻어가지고또는진흙밭에그몇천만 원이 나가는 그런 세계적인 그런 보물이 하수구에 빠졌다고 해서 그것이 보석이 아닌 건 절대로 아닌 것은 아니거든. 쓰레기통에빠졌건똥통에빠졌건그보석자체에는아무변함이없어.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 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마왕(魔王) ; 마귀(魔鬼 요사스럽고 못된 잡귀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우두머리.
*범승(凡僧) ;평범한스님.
*죄과(罪過허물죄/허물과) ;죄가될만한과실이나허물.
*덩그다; '불이붙다'의사투리.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어피차(於彼此) ;어차피(於此彼).이렇거나저렇거나귀결되는바.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〇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복덕(福德) ; ①착하고 어진 행실에 대한 보답으로 받는 행복과 이익. ②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착한 일.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〇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무생(無生) ; ①생겨남[生]이 없는 것[無]. 일체법이 생겨나고 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도 자성적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멸하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
②성문사과(聲聞四果)의 하나인 아라한(阿羅漢 arhat)의 한역어. 삼계의 번뇌를 여의어 다시 삼계에 목숨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무생이라고 한다.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망지(妄知) ;중생의망령(妄靈)된알음알이.
*요(要) ; [주로‘요는’의꼴로쓰여]사물의핵심이되는가장중요한요점이나골자.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常] 변하지 않는[寂] 광명[光]의 세계[土]. 부처님의 거처나 빛나는 마음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생멸심(生滅心) ; 생사심(生死心).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ā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법문 내용]
(게송)춘래동견방초록~ / 영지(靈知) 진지(眞知) 망지(妄知) / '용화선원 원장(院長)'이라 하는 굴레 / 불법(佛法)은 많은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게송)보만삼천급대천~ / 중생은 '미(迷)한 부처님', 부처님은 '깨달은 중생' / 바른 믿음을 가져야 / 『열반경』 '제행무상게' / (게송)도장칠보시삼천~ / 금강경사구게.
〇참선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사량분별을 통해서 아는 것은 그것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고 해설을 하고 설할 줄 안다 하드라도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달은 것이 아니다.
〇중생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아무리 공안을 따져서 그럴듯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침내 망지(妄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그 자체가 깨달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져 버려.
〇말로써 공부를 할 수가 있고, 말로써 가르켜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육도(六道)를 윤회하고 있는 중생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〇진리는 찾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여러분은 또한 그것을 듣기 위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〇부처님께서 그 많은 경전을 설하셨지만 참으로 부처님의 그 경전의 뜻을 올바르게 체달(體達)을 하고 보면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으는 그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여. 이 도리를 믿는 사람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이고, 이 도리가 믿어진 사람은 최상승법의 인연을 무량겁을 두고 심어온 그러한 상근대지(上根大智)라 할 수가 있어.
〇바른 믿음을 갖지 아니하면 마구니를 불보살로 착각하기도 하고, 불보살을 마구니로 착각하게 되기 때문에 바른 신심을 가지고 불법을 믿고 수행을 해야 그것을 가려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망상 일어나는 것도 걱정을 하지 말고 「이뭣고?」 화두를 들 것이고, 나를 정신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손해를 뵈인 그러한 미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미움으로써 미운 생각을 일으켜서 미워하지 말고, 빨리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어 나간다면 그 미웠던 사람이 바로 불보살의 모습으로 변해질 것입니다.
〇중생의 번뇌 망상, 인간의 생로병사 속에 대해탈도(大解脫道)는 조끔도 숨김없이 열려져 있다고 하는 사실, 어느 망상, 어느 번뇌 한마디에서도 진리로 통하는 길은 있다고 하는 사실에 명심을 하고, 일어나는 한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화두를 들도록 노력을 할 것입니다.
이 길 밖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백천만 억의 불보살이 출현한다 하더라도 중생의 번뇌를 여의고 부처는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서 육조 스님과 법거량(法擧揚)을 하고 그리고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오역여시(吾亦如是)다. 너도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쾌히 인가(印可)를 받고서 그길로 돌아서서 떠날려고 하니까, ‘하룻밤 쉬어가거라’
이렇게 해서 하룻밤을 쉬어간 일이 있어서 그래서 영가진각 선사의 별호(別號)가 일숙각(一宿覺)이라, ‘하룻밤 쉬어간 객이다’해서 일숙각이라고 하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본각(本覺) 도리에 입각해서 보면 본래 미(迷)한 바가 없기 때문에 다시 또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따라서 미할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기 때문에 구태여 미한 것을 돌려보내지 아니해도, 미(迷)함을 쫓아 보내지 아니해도 깨달을 것도 또한 없다 그말이여.
미(迷)한 바가 없으니 무엇을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있느냐? 깨달을 것이 없으니 또한 닦을 것이 무엇이 있어?
깨달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그렇다면은 오늘 이렇게 결제(結制)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해마다 여름이 오고 겨울이 오면 결제를 해서 석 달 안거(安居)를 했습니다.
지금은 엊그제 7월 백중날 해제(解制)를 하고 지금은 해제 기간이라 걸망을 짊어지고 동서남북에 걸림이 없이 행각(行脚)을 하며 도반을 찾고 선지식(善知識)을 찾는 그러한 계절인데,
수년 이래로 산(散)철 동안이라 할지라도 공연히 동서남북으로 왔다갔다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精進)을 하는 것이, 정진해 나가는 데에 이익이 많을 것이다 해 가지고 이렇게 산철 결제를 여기저기 선원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산철에도 결제 때나 다름없이 계속해서 그렇게 정진을 쭉 해 오다가, 수년 전부터서는 산철에 그냥 막연하게 정진하기 보다는 정식으로 간략히 결제 법요식(法要式)을 갖고서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정진을 하는 것이 좋다, 이래 가지고 이렇게 산철 결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용화사에서 이렇게 하게 되니까 이 용화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봉산 원효사라든지, 저 의정부 회룡사라든지, 또 수원에 봉래사 같은 절에서도 비구니 수좌(首座)들이 10여 명씩 모여서 거기서도 산철 결제를 하게 되어서 오늘 이 결제 법요식에 모다 참석을 했습니다.
기왕 이렇게 결제 법요식을 갖고 산철 결제를 할 바에는 다른 여름 안거나 겨울 안거 못지않게 더욱 굳게 정신을 가다듬어서 알뜰하게 정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여름에는 그 오뉴월, 유월 칠월 계속해서 더워, 더위 속에 시달리면서 더위와 싸우느라고 참 애를 많이 쓰고 그랬지만 앞으로 두 달간 가을 산철 결제는 춥지도 더웁지도 안 해서 정말 정진을 할 마음만 낸다면 밤에나 낮에나 마음껏 정진할 수 있는 계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조 홍인대사(五祖弘忍大師)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法)을 설하셨는데 그 최상승론에 보면,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을 안으로부터 발(發)하지 아니하면 삼세(三世)에 비록 모든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부처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무소능(無所能)이니라. 능히 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다,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삼세의 부처님을 친견한다 하더라도 속으로부터 안으로부터 진정한 발심(發心)을 하지 못한다면은 도(道)는 이루지를 못할 것이다 이말이여.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정(大疑情)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참선의 삼요(三要)인데 세 가지 요긴한 것인데, 신심과 분심과 대의정이 한목 속에서부터서 자발적으로 폭발을 하지 아니하면,
억지로 신심을 내고 억지로 분심을 내고 억지로 의심을 낸다 하더라도 잠시 뿐이고 금방 비그르르 하니 식어 버리고, 아무리 의심을 내서 화두(話頭)를 들려고 해도 들 때 뿐이지 1분도 못 가서 의심이 없어져 버리고 이러한 것은 그 정성이 안으로부터 발하지 아니하고, 지어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말 안으로부터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돈발(頓發)을 해야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도(道)를 이룰 수가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을 하시기를 ‘다만 능히 떨어진 옷과 거치른 밥을 먹으면서’, 이것은 떨어진 옷과 거치른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검박한 생활을, 잘 먹을라고 하지도 아니하고 잘 입을라 하지도 아니하고,
'다못 근본 참마음을 지켜서 말귀도 못 알아들은 거짓 바보가 되라' 바보는 뭔 말을 일러줘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만공 스님께서도 학자들에게 항시 말씀을 하시기를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공부를 할 수가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썩은 나무둥치’는 왜 그러냐 하면, 산에 좋은 나무가 있으면 목수가 비어 가고 또 나쁜 나무도 다 쓸데가 있어서 비어 가는데 그리고 나무 비어 간 나뭇등걸도 썩지 않은 나무는 그걸 패다가 짜개서 화목(火木)으로 쓰기 위해서 그것도 파 가지만,
그 썩어서 버글버글버글한 아주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할 것이며 또 땔나무로 연료를 할 것도 못 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은 캐 가는 사람이 없어.
이것이 바로 말귀도 못 알아들은 그런 바보 천치(天癡)와 같이—진짜 속속들이 바보 천치가 아니라, 사리(事理)가 분명한 다 발심한 수행인(修行人)이니 그렇게 바보가 분명 아니지만 정말 그런 말귀도 못 알아들은 바보 천치가 되어라 이거거든.
거짓 바보 천치가 되어 가지고, 남이 보면은 진짜 바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러한 바보가 되어야만 가장 도를 닦는데 효과적이다.
쓸모가 있고 똑똑하고 그러면은 자기 공부해 나가는데 여러 가지로 시간적으로 이리저리 불림을 받게 되고 이용을 당하게 되고 그러니까,
썩어빠진 나뭇등걸이나, 완전히 바보 천치가 되어 버려야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비(是非)를 걸어올 까닭도 없고, 그 사람보고 이 일을 해라 저 일을 해라 할 까닭도 없고, 그렇게 되어 버려야만 정말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도 딴 데에 정신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정진만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능히 이렇게 공부를 해 가야만 비로소 '대정진인(大精進人), 대정진, 크게 정진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오늘부터 두 달간 용화선원이나 또는 원효사나 회룡사 봉래사 선원에서 정진하는 납자(衲子)들은 이 두 달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철저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신도 여러분들도 각기 가정에서—그 바보가 되어 가지고 계속 그렇게 해서는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할 일은 하고 처리할 것은 처리하면서, 꼭 필요한 데에는 모두 여법(如法)하게 일을 처리해야겠지만,
그밖에 쓸데없는 잡담, 친구끼리 만나서 남의 흉이나 보고, 시부모 흉이나 보고, 남편 흉이나 보고, 이러한 쓸데없는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정말 이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을 항시 생각하면서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처음~19분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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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만겁비연착(刹那萬劫非延促)이요 불파허공교단장(不把虛空較短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변여마시환제당(便與麽時還諦當)이니 차귀문외착상량(且歸門外錯商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찰나만겁비연착(刹那萬劫非延促)이요. 찰나간이, 눈 한 번 깜박할 그 찰나간이 만겁(萬劫)이나 된다. 그러면 찰나가 만겁이면, 그 찰나간의 시간을 갖다가 늘여 가지고 잡아 늘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찰나(刹那)가 무량겁(無量劫)이다 그말이여.
불파허공교단장(不把虛空較短長)이니라. 허공을 잡어 가지고 어느 허공이 더 길고, 어느 허공이 더 짧은가를 비교할 수가 있겠느냐.
변여마시(便與麽時)에 환제당(還諦當)이니, 문득 이와 같을 때에 도리어 알아차려야 할 것이니,
차귀문외착상량(且歸門外錯商量)이라. 또한 문 밖에 돌아가서 그릇 상량(商量)하지를 말 것이니라.
세월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갑니다. 금방 엊그제 더워서 앉어도 더웁고, 서도 더웁고, 밖에를 나가도 더웁고, 방안에 들어와도 더웁고 그렇게 발광할 정도로 더웠었는데 금방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해져서 오동나무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또 이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금방 또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해가 또 지내가고 또 한 해가 지내가다 보면 어느덧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잡히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눈이 어두워지고 그래 가지고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젊었을 때 이 일 저 일 뒤로 미루거나 핑계대지 말고, 어쨌던지 일 초 일 초,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단속해서 화두(話頭)를 놓치지 말고 관조(觀照)해 나가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1초를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무량겁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고, 1초 1초를 등한히 한 사람은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가 갈 곳이 없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衆生)의 식심(識心)은, 중생의 깨닫지 못한 그 마음은 자기가 제도(濟度)를 해야 하지, 불불능도중생(佛不能度衆生)이다. 부처가 능히 그 중생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중생으로 하여금 다 깨달라서 성불(成佛)시켜 줄 수가 있는 것이라면, 과거에 모든 부처님이 항하사(恒河沙) 모래수만큼 그렇게 많이 계신데 무슨 까닭으로 우리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성불을 못한 채 있을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은 중생으로 하여금 깨닫는 길을 가리켜 줄 수 있을 뿐이지, 부처님이나 선지식이 중생을 깨닫게는 할 수가 없어.
깨닫는 방법만을 일러주면 본인이, 중생 자신이 목숨을 걸고 달라들어서 그 방법에 의해서 도(道)를 닦아서 스스로 깨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성이 형식적으로, 결제(結制)하니까 죽비(竹篦)치고 돌아앉고 방선(放禪)하면 잡담하고, 온갖 시비에 다 참견하고, 이것이 좋고 나쁘고, 밥이 맛이 있고 없고 반찬이 좋고 나쁘고, 어디가 좋고 어디가 나쁘고, 니가 잘하고 내가 잘못하고,
밤낮 눈으로 보면 보는 대로 시비, 귀로 뭔 소리를 들으면 듣는데에 신경을 쓰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도를 닦아도 끝장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자기 마음 속으로부터 자동으로 터져 나와야, 그래야 이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의 근원을 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19분58초~27분5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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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고금천지수증오~’ ; 『신심명(信心銘) -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161 게송 참고. *(頻伽藏)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十二之中 信心銘闢義解中 게송 참고.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영가(永嘉)스님, 육조 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거량(法擧揚 법 법/들 거/나타낼•밝힐 량)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禪)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〇영가현각(永嘉玄覺) 선사는 어려서 경전과 논서를 익혀 천태(天台)의 지관(止觀) 법문에 정통하고 『유마경(維摩經)』을 본 인연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우연히 육조 스님의 제자 현책(玄策)이 찾아와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는 이야기들이 모든 조사 스님의 말씀과 합치되었다. 현책 스님이 말하였다.
현책 : 그대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현각 : 제가 『방등경론(方等經論)』에서 “공부를 마친 이는 누구나 나름대로 스승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뒷날 『유마경(維摩經)』을 보다 부처님 마음의 종지를 깨달았지만 이를 증명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현책 : 위음왕(威音王) 이전은 혼자서도 깨달음을 얻었지만, 위음왕 이후에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모두 천연외도(天然外道)입니다.
현각 : 당신께서 저를 위하여 증명해 주옵소서.
현책 : 저는 큰 법을 감당 못합니다. 조계에 계신 육조 스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 그대가 가신다면 같이 가겠습니다.
현책과 함께 육조 스님을 찾아갔던 현각은 최소한의 존경심은 나타내었지만 육환장을 흔들며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육조 : 사문(沙門)이란 삼천위의(三千威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대는 어디에서 왔기에 잘난 마음이 그리 크신가?
현각 : 생사의 일이 큰데 세상의 변화는 너무나 빠릅니다.[生死事大 無常迅速]
육조 : ’생멸이 없는 법’과 변함이 없는 영원한 자리를 어찌 체득하여 알지 못하는가?[何不體取無生 了無速乎]
현각 : 체득해보니 생멸이 없는 법이고, 알고 보니 본디 빠르고 더디게 변해 갈 것이 없었습니다.[體卽無生 了本無速]
육조 : 맞다, 맞는 소리이다.[如是如是]
현각이 위의를 갖추어서 육조 스님께 절을 하고 떠날 인사를 하니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리 크신가?[返太速乎]
현각 : 본디 마음은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 어찌 빠르고 더딘 마음이 있겠습니까?[本自非動 豈有速耶]
육조 : 누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는고?[誰知非動]
현각 : 스님께서 분별하고 계십니다.[仁者 自生分別]
육조 : 그대는 정말 ‘생멸이 없는 뜻’을 알았구나.[汝甚得無生之意]
현각 : 생멸이 없거늘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無生 豈有意耶]
육조 :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는고?[無意 誰當分別]
현각 : 분별한다 해도 또한 뜻이 아닙니다.[分別亦非意]
육조 : 훌륭하다. 적어도 하룻밤은 쉬었다 가라.[善哉 少留一宿]
이때의 인연으로 그를 일숙각(一宿覺)이라고 불렀다. 뒷날 증도가(證道歌)와 영가집(永嘉集)을 저술하니, 훌륭한 책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많이 보았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별호(別號 나눌•따로 별/부를 호) ; 본이름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걸망(乞網 빌다·구걸하다 걸/그물·싸다 망) ; 망태기처럼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바랑). 또는 동냥할 때 매고 다니는 베낭(배낭背囊)을 말한다.
*행각(行脚) ; 스님이 일정한 거처를 가지지 않고, 스승의 밑을 떠나 참선의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지식이나 좋은 벗을 구해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러곳을 편력하는 것. 운수(雲水)와 같은 의미.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산철(散철) ; 본철(本철 - 하안거, 동안거)가 아닌 시기.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오뉴월[五六月] ; 오월과 유월을 아울러 이르는 말. 흔히 여름 한철을 이른다.
*오조 홍인대사(五祖弘忍大師)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최상승론(最上乘論) ; 1권. 5조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저술.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불성(佛性)을 확인하여 잘 지키는 수심(守心)을 강조한 저술.
돈황 출토본 중에 「기주인화상 도범취성 오해탈종 수심요론(蘄州忍和尙導凡趣聖悟解脫宗修心要論)」이 이것과 같은 것으로, 제목은 다르나 기주 인화상이 곧 홍인대사이며, 「수심요론」이 우리나라에서 「최상승론」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경(經)에 이르되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스러운 마음이 안으로부터 돈발(頓發)하지 아니한 자는 삼세(三世)에 비록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무소득(無所得)이니라. 어찌할 바가 없느니라.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서 자기가 자기를 제도(濟度)해야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항하사 무량의 수없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무슨 연고로 우리들은 아직도 성불(成佛)을 못했을 것이냐.
지극한 정성스런 마음을 발하지 못해 가지고 막연하게 성불하기를 바라고 자재해탈(自在解脫)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될 일이 아니고, 그럭저럭 속심(俗心)을 버리지를 못하고 명예나 이끗을 탐구해서 그렇게 그럭저럭 지낸다면은 당래(當來)에 대지옥에 떨어져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다만 능히 해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요연히 근본 참마음을 지키면서 거짓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처럼 하는 것이 가장 힘은 적게 들이면서 공부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대정진이니라.
세간(世間) 사람은 이러한 이치를 아지를 못하고서 무명심(無明心) 가운데에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널리 상(相)에 나타나는 그러한 선(善)을 닦음으로 해서 해탈도(解脫道)를 바래니, 그러다가 결국은 생사고(生死苦)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느니라. 요연히 바른 생각을 잃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만이 이것이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
*정성(情誠 진심·성심·참마음 정/정성·진실 성) ; 정성(精誠). 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삼세(三世) : 과거와 현재와 미래. 또는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와 내세(來世).
*항하사(恒河沙) ;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항하(恒河) ; 갠지스 강(Ganges江,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벵골 만(灣)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 길이는 2,510킬로미터)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 大疑情)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정(疑情) ; 의심(疑心).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말귀 ; 말이 뜻하는 내용.
*만공 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나무둥치 ; 큰 나무줄기에서 뿌리에 가까운 부분.
*나뭇등걸 ; 나무를 베어 내고 난 밑동.
*화목(火木) ; 불때는 데 쓰는 나무.
*천치(天癡, 天痴 천성·성질 천/어리석을 치) ; ①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선천적으로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하여 어리석고 못난 사람.
*사리(事理) ; 사물의 이치나 일의 도리.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납자(衲子 기울·옷을 꿰맴 납/사람 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법 법) ;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 할 법령이나 이치 · 규범에 맞음.
*흉 ; 남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비웃음을 살 만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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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찰나만겁비연착~’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234 게송 참고. *(頻伽藏)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게송 참고.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겁(劫) ; (산) kalpa의 음사.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긴 시간.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〇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〇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알음알이. 지해(知解).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〇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등한(等閑)히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생사윤회(生死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항하사(恒河沙) ;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미륵불(彌勒佛)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의 미륵이라 한다.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법문 내용]
(게송)고금천지수증오~ / ‘최상승론’ 안으로부터 진정한 발심을 해야 / 신심 · 분심 · 의심, 삼요(三要)가 돈발 / 썩은 나무둥치 · 바보 · 천치가 되어 정진만을 해야 대정진인(大精進人).
(게송)찰나만겁비연착~ / 1초를 단속할 줄 알아야 무량겁 문제가 해결된다 / 자기가 자기를 제도(濟度)해야지, 부처가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가 없다.
경(經)에 이르되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스러운 마음이 안으로부터 돈발(頓發)하지 아니한 자는 삼세(三世)에 비록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무소득(無所得)이니라. 어찌할 바가 없느니라.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서 자기가 자기를 제도(濟度)해야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항하사 무량의 수없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무슨 연고로 우리들은 아직도 성불(成佛)을 못했을 것이냐.
지극한 정성스런 마음을 발하지 못해 가지고 막연하게 성불하기를 바라고 자재해탈(自在解脫)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될 일이 아니고, 그럭저럭 속심(俗心)을 버리지를 못하고 명예나 이끗을 탐구해서 그렇게 그럭저럭 지낸다면은 당래(當來)에 대지옥에 떨어져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다만 능히 해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요연히 근본 참마음을 지키면서 거짓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처럼 하는 것이 가장 힘은 적게 들이면서 공부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대정진이니라.
세간(世間) 사람은 이러한 이치를 아지를 못하고서 무명심(無明心) 가운데에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널리 상(相)에 나타나는 그러한 선(善)을 닦음으로 해서 해탈도(解脫道)를 바래니, 그러다가 결국은 생사고(生死苦)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느니라. 요연히 바른 생각을 잃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만이 이것이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
〇만공 스님께서도 학자들에게 항시 말씀을 하시기를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공부를 할 수가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중생 교화를 하기 위해서 중생 속에 발을 벗고 들어가신 그것이 풀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풀’이라 하는 것은 ‘중생(衆生)’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진 속에 들어가서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이 그렇게 왕래를 하시니까, 이도작료수마사(利刀斫了手摩挲)라. 날카로운 칼로 손 살을 갖다가 갈기갈기 쪼슨 거와 같더라.
가시덤불 속에, 중생의 그 고(苦)를 받고 있는 그 고해(苦海) 속에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부처님이 들어갔다 나왔다 동서남북으로 출입을 하시는데, 갈기갈기 손이 찢기고 발이 찢기고 옷이 찢기고 그 살이 찢기기를, 날카로운 칼로 쪼사논 것처럼 그렇게 참 많은 상처를 입으셨더라.
수연출입무종적(雖然出入無蹤迹)이나, 그러나 비록 그렇기는 그러나, 부처님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시는데 종적(蹤迹)이 없어. 들어가시되 들어간 바가 없고 나오시되 나온 바가 없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셔서도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셔서 무량 중생을 제도하셨지만, 한 글자도 한 말씀도 설하신 바가 없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셨건만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중생이 없더라 그말이여. 그래서 이거 자취가 없는 것이여.
만약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법(法)을 설하셨으되 설한 바가 있다면 그 법은 참법이 아닐 것이고, 한 중생이라도 제도 받은 바가 있다면은 부처님께서 참으로 중생을 제도하시지를 못했을 것이다 그말이여.
비록 출입하시되 종적이 없으나, 문채전창견야마(紋彩全彰見也麽)라. 그 문채(紋彩)가 온전히 드러났으니 그 드러난 문채, 그 부처님의 모습을 참으로 보았느냐?
큰 눈이 아니면 감히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은 계해년 3월 30일 봄 산철 정진을 마치고, 오늘 산철결제 해제를 하는 날입니다.
원래는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1년에 두 번씩만 결제(結制) · 해제(解制)가 있었는데, 참으로 봄에는 더웁지도 춥지도 않고 또 가을에 석 달도 덥지도 춥지도 않기 때문에 그 좋은 시기를 그럭저럭 동서남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세월을 보내기 보다는, 차라리 그 두 달 간을 여름이나 겨울 결제 때와 같이 방(榜)을 짜고 도반(道伴)들이 모여서 짬지게 정진하는 것이 참 좋겠다. 이리해서 정식으로 결제를 하고 또 이렇게 해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용화선원 법보선원도 그렇게 두 달을 그렇게 했는데 도봉산 원효암에서도 그렇게 비구니 선객(禪客)들이 십여 명 모여서 그렇게 착실히 정진을 잘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미 다 법문을 잘 들어서 다시 거기에다가 무슨 첨가할 말이 있으리요마는, 결제와 해제의 법요식을 갖는 것은 한철 동안 착실히 정진을 하기 위해서 마음을 다지는 데 목적이 있고.
또 해제날은 지난 안거 동안에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그것을 다시 회고하고 반성을 해서 앞으로 더욱 정진을 잘하기 위한 그러한 좋은 계기를 삼기 위해서 이렇게 해제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진을 해 가야 올바르게 해 가느냐?
중국에 천목산 고봉(高峰) 스님의 법문 한 구절을 같이 살핌으로써 법회를 삼고자 합니다. 이건 고봉 스님 자신의 경험담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선요禪要』 2.시중示衆)
출가해 가지고 계(戒)를 받고 또 그래 가지고 경(經)도 보고, 율원에 가서 율(律)도 배우고 그래 가지고 선원(禪院)에 들어가서, 스스로 마음으로 다지기를 '3년 동안을 철저하게 정진을 해 가지고 3년을 해도 깨닫지를 못하면 자살을 하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실컷 이 망상 저 망상이 일어나다가 망상이 좀 가라앉을 만하면 졸음이 와 가지고 혼침(昏沈)에 빠지고, 혼침이 오면 앉아서 졸을 수가 없으니까 일어서서 밖에 나가 가지고 동서(東西)로 왔다갔다하면서 포행(布行)을 했어.
그래서 졸음이 좀 깨면은 또 자리에 가서 앉어. 앉아서 조금 있으면은 금방 또 혼침이 와.
혼침이 와서 일어나면 또 포행. 포행을 하고 들어가서 하면은 망상.
이 망상과 혼침이 두 가지로 범벅이 되어가지고 거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리에 정식으로 앉아서 정진을 할 수가 없어. 어떻게 졸음이 퍼오던지.
내가 이 몸뚱이를 받아가지고 24년 간을 항시 병(病) 가운데 있어서, 의사를 만나가지고 약을 먹어서 (병을 치료하는데) 만 가지 고통을 다 겪었다 그말이여.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만 가지 약을 먹으면서 해도 그 병이 좀해 낫지를 않고 그 병 중에 신음을 했는데, 약으로서는 낫을 수 없는 고황병(膏肓病)에 걸려 있음을 어찌 알았겠느냐.
그러다가 쌍경사(雙徑寺)에 이르러서 꿈 가운데에 단교 화상(斷橋和尙)으로부터서 약(丹藥)을 받았어. 무슨 약을 받았나 하면은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이 일귀하처, ‘만법일귀하처(萬法一歸何處)’의 그 화두(話頭)를 꿈속에서 단교 스님한테 받아가지고 그날부터서 6일 동안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망상을 안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다 끊어졌어.
하루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밥을 먹되 밥맛도 모르고, 산을 보되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아침부터 저녁, 저녁부터 아침까지 온전히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렸다.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입으로만 들지, 드는 그 순간만 들어져 있지 1초만 지나가버리면은 화두는 간 곳이 없고 망상. 그렇게 애를 먹어도 안 되었던 그 화두가 꿈속에 단교 스님한테 ‘만법귀일’ 화두를 타가지고는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졌어.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사흘을 그렇게 지내고 그렇게 해서 6일 만에, 그날이 마치 달마 스님의 제사날인데, 달마 스님의 추모재를 지내기 위해서 삼탑(三塔)에 탑전에 올라가가지고 인자 그 제사에 참석을 했는데,
처음에 앙산(仰山 : 雪巖祖欽) 노화상을 모시고 공부를 하는데 '날마다 한 번씩 내 방에 와서 점검을 받아라' 그래서 앙산 조실 스님 방에 들어가서 문을 열고 막 절을 할라고 하면 ‘이 송장덩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이냐’하면서 고함을 치면서 몽둥이로 한 대를 패 가지고는 밖으로 내쫓아 버려.
매일 그렇게 들어가서 매일 그렇게 혼나가지고 쫓겨나고, 또 그래 가지고는 한 대씩 얻어맞고 나와서 그 분심과 신심으로 정진을 과거에 그렇게 했었는데, 이 꿈에 단교 화상의 화두를 타가지고 6일 만에 확철대오를 했다 그 말이예요.
그렇게 확철대오를 하고 보니 그 사대(四大) 육신이 편안하기를 일백이십 근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가 그놈을 부려버린 것처럼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했더라.
그 꿈에 단교 화상한테 받은 그 약(藥 : 丹), 그 약을 한 번 먹고서 3년 동안 낫으지 못한 그 무서운 병을 낫었는데 그 약을 오늘 대중에게 노나주겠다.
너희들 대중이 이 약을 먹을라면은 먼저—보통 사회에서 어떤 약을 먹더라도 그 약을 먹을라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 ‘개고기나 닭고기를 먹지 말아라’ ‘두부, 콩을 먹지 말아라’ 그리고 뭘 조심을 해라, 여러가지 금기가 있는데.
이 고봉 스님께서 대중한테, 한 번 그 약을 먹으면 무량겁 업장(業障)이 녹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약을 대중에게 노나 주시면서, 이 약을 먹을라고 할진대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면,
‘육정(六情) · 육식(六識)과 사대(四大) · 오온(五蘊)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만상삼라(萬象森羅)를 가져 가지고 총(總)히 녹여서 한덩어리의 의심(疑心)을 만들어서 몰록 눈앞에다가 떠억 놓으면 한 창(鎗), 한 깃발[旗]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平定)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정(六情) · 육식(六識)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알고 하는 육식 · 육정 그것과 사대(四大) · 오온(五蘊), 사대(四大)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가지 원소,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色)은 육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우리의 정신작용이여.
그러니까 한 말로 말해서 이 육체와 정신 또 산하대지, 산이나 물이나 이 온 땅, 만상삼라 삼라만상 모든 것.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우리의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하나로 뭉쳐서 녹여 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의심을 만들어라.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을 만들어라 그말이여.(처음~20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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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의심 밖에는 자기 몸뚱이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희로애락 정신작용도 다 잊어버리고, 눈앞에 벌어진 모든 해나 달이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밥이 맛이 있거나 없거나, 반찬이 좋거나 나쁘거나, 수용(受用)이 좋거나 나쁘거나, 누가 나를 잘한다고 하거나 못한다고 하거나, 일체 선악을 완전히 그것에 아주 관심을 놔버려라.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전부 뚤뚤 뭉쳐가지고 자기의 본참공안상에 의심으로 모든 것을 다 쏟아라 그말이여.
그렇게 나간다면 내가 오늘 대중에게 노나주는 이 약을 먹을 자격이 비로소 있다 그말이여.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약을 먹어봤자 약이 발효가 안돼.
귀한 약을 먹을 때에는 의사가 지시한 대로 ‘술을 먹지 말아라’하면 술을 먹지 말아야 하고, ‘비리고 기름기 있는 것을 먹지 말아라’하면 안 먹어야 하고, ‘콩이나 두부를 먹지 말아라’ 그러면 안 먹어야지,
그 귀하고 비싼 약을 먹으면서 개고기 닭고기 뭐 마구잡이 닥치는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술 막 먹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 약의 효과가 나타나기를 바랄 수가 있느냐 이 말이여.
육정 · 육식과 사대 · 오온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을 녹여서 한덩어리 의심을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춘하추동 사계절, 1년 삼백육십오 일을 참선한다고 결제(結制)를 하고 안거(安居)를 한들 도저히 확철대오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하고, 자기의 모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고대로 놓아 먹이면서 할 짓 다 하고, 생각할 것 다 생각하고, 시비할 것 다 시비하고, 그러면서 형식적으로 죽비(竹篦)를 치고 돌아 앉었다가 죽비를 치면 일어났다가 그래 가지고 어떻게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냐.
걸어갈 때도 오직 이 의심뿐이요, 앉았을 때도 요 의심뿐이요, 밥을 먹고 옷을 입을 때에도 요 의심뿐이요, 똥을 누고 오줌을 눌 때도 이 의심뿐이여. 보고 듣고 뭣을 감각하고 알고 하는 데에도 오직 의심뿐이여.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며,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하게 될 때 이것이 득력(得力)이라 그랬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화두가 의심이 돈발(頓發)해 가지고 항시 의심이 고대로 있어. 그래서 의심이 한덩어리여. 어제 하던 의심이나, 오늘 하는 의심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노상 그 한 의심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기 때문에 의심이 한덩어리여.
그 속에는 아무것도 섞여 있지를 안 하고 온전히 의심만이 한덩어리가 되었어. 조금도 그 이음새가 없어, 틈이 없다 그말이여.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아무리 쫓아도 가지를 안 해. 소소영령(昭昭靈靈)해서 항상 눈앞에 의심이 나타나.
마치 흐르는 물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젖지 아니해도 저절로 배가 술술술술 미끄러져 흘러간 거와 같애. 조금도 손을 쓸 필요가 없어. 이것을 가리켜서 ‘득력시절(得力時節)’이라 하는 것이여.
죽음을 각오하고 3년을, 법답게 여법(如法)하게 3년을 해서 안 되면, 내가 확철대오를 못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했기 때문에 마지막 기한 날을 며칠 두지 아니하고 이러한 수승한 경계가 나타난 것이다 그말이여.
과연 여기에 참석한 대중이 지난 2달 동안을 이렇게 정진을 했던가?
산승(山僧)이 보기에는 정말 2달 동안을 그렇게 열심히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지만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앞으로 계속해서 또 그렇게 해 나가시면 반드시 이러한 경계가 돈발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두지천혜각답지(頭指天兮脚踏地)하고 기즉긱반곤즉수(饑則喫飯困則睡)로다
나무~아미타불~
처처원정변시년(處處元正便是年)이요 남북동서지자시(南北東西秖者是)니라
나무~아미타불~
두지천혜각답지(頭指天兮脚踏地)하고, 머리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리로는 땅을 밟았어.
기즉긱반곤즉수(饑則喫飯困則睡)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바탕 자.
우리가 지금 딱 서 있을 때, 머리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섰으면 발로는 땅을 밟지, 어떻게 머리로 땅을 가리키고 발로 하늘을 디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곤하면 조는 것이여. 하나도 기특할 것이 없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정월 초하루 날은 호남에도 그날은 정월 초하루고, 서울도 정월 초하루고, 도처가 원정(元正)이요 바로 계해년이다 그말이여.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어디를 가던지 계해년 정월 초하루여.
고봉 스님이 주신 이 환약을 먹고 그렇게 정진을 하면 바로 그러한 시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송담이 처음에 출가할 때, 출가하기 전에 학생 때부터 ‘참선을 하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방에 가서 참선에 관한 책을 여러 권을 구해 가지고, 근데 일본 책인데 구한 책이 마치 조동종 계통의 책을 구했습니다.
일본의 도원 선사(道元禪師)는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 조실부모를 해서 출가해 가지고 당나라로 건너가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은 것이, 여정 선사(如淨禪師)라고 하는 조동종 계통의 대종장(大宗匠)을 만나가지고 거기서 한 3년 간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아서 일본으로 돌아와가지고 조동종(曹洞宗)의 초조(初祖)가 되었습니다.
그 조동종 도원 선사의 어록을 구하고 또 조동종의 참선법 · 교리 · 선학 그런 것을 해설해 놓은, 도원 선사에 대한 연구하는 책을 구하고 그래가지고 그놈을 날마다 읽고 그래가지고 조동종의 참선을 참 여러 달을 내 나름대로 했는데, 그 조동종에서는 임제종(臨濟宗) 계통에 간화선(看話禪)을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법이라 해 가지고 힐난하게 비방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임제종 계통에서는 조동종의 참선을 묵조사선(默照邪禪)이니 해 가지고 대단히 또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을 공격을 하고 해서, 중국에서부터서 임제종과 조동종 간에는 대종사끼리 그렇게 힐난하게 아주 사마외도라고 참 극렬한 표현을 하면서 피차 비방을 하고.
그런데 내가 학생 때 마치 그 조동종 계통의 책을 읽어 가지고 나도 '확실히 조동종 계통의 참선법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간화선은 대단히 나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아무래도 속가(俗家)에서는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가지 복잡하고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참선을 할라면은 천상 절로 가서 해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에를 갔는데, 마치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 훌륭하시단 말씀을 듣고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절을 찾아갔습니다.
광주 지산동 골짜구니에 들어가면 향로봉 밑에 ‘자운사’라 한 조그만한 암자가 있었는데, 그 절에다가 그해 여름에 전강 조실 스님과 또 종정을 지내신 윤고암 스님, 두 스님이 거기에서 참선방을 하신다 그래 가지고 거기를 찾아가서 방부(房付)를 들였습니다.
내가 꼭 중노릇을 할려고 간 것은 아니고 참선을 할려고 갔는데, 집에서 다 한복을 만들고 그래가지고 식량과 찬대(饌代) 모다 그런 것을 다 준비를 해 가지고 가서 방부를 들이고 그래 있는데.
가자마자 조실 스님을 만나 뵈옵고, 나는 거기서는 화두 어쩌고 해도 ‘그건 다 못된 참선을 하고 있다’ 이리 생각을 하고, 나는 내 속으로 조동종의 묵조선(默照禪)을 딱 하고 있는데 조실 스님이 "너는 앉아서 뭣을 하냐?"
"참선합니다"
"무슨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그냥, 이렇게 속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소상하니 (말하라 해서) "생각없는 생각으로 관조를 하고 있습니다"
"너 조동종의 묵조선을 하고 있구나"
"예, 그렇습니다. 왜 그것이 나쁩니까?"
"차라리 참선을 안 하는 것이 낫지, 천하 못쓸 것이니다"
"그것이 왜 나쁜가요? 어떤 참선이 좋습니까?"
"화두를 타 가지고 화두를 의심을 해야지, 화두도 없이 그렇게 앉아서 무슨 깨달음에 이르겠느냐"
"그 화두라 하는 것이 화두를 들고 앉아서 깨닫기를 기다리고 앉었는 것이 그것이 어찌 바른 참선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래부터 우리는 본래 이 자신이 부처고 우리 자성이 있는데, 그 있는 자성을 바로 보기 만하면 관조하기 만하면 고대로 새로 깨달을 것 없이 본래 부처인대, 무엇을 깨달을 것을 기다릴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벌써 시작할 때부터서 소견이 삿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조동종 계통에 읽은 책을 본 대로, 있는 대로 다 조실 스님 앞에 내 놓으면서 계속 조실 스님하고 토론을 해서 며칠을 해가지고 며칠 동안을 내가 강경허니 버티다 버티다 내가 딸려 가지고, 결국은 조실 스님한테 항복을 하고 화두(話頭)를 정식으로 타서 참선을 했습니다.
난 중이 될려고 가지도 않았는데 조실 스님이 장삼(長衫)을 주시면서 입으라고 하시고, 들어가자마자 나를 조실 스님이나 고암 스님이나 거기에 계신 여러 스님네들 또 신도들도 이십 여명 있었는데 모다 나를 스님 대우를 했습니다. 계(戒)도 받지도 않고 또 행자(行者)도 아니죠.
그랬는데 나를 ‘은(隱) 수좌, 은 수좌’하고 수좌(首座)로 아주 정식으로 대접을 받었습니다. 장삼을 입고 예불을 하고 또 조실 스님이 어디 법회가 있어서 가시게 되면은 나를 시자(侍者)로 데리고 가시고, 그래서 승속 간에 나를 아주 스님으로 대접을 하고 그래서 참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철을 지냈는데, 그 지내보니까 모다 거기에 모이신 스님네나 모다 정말 이 고봉 스님처럼 목숨을 바쳐서 철두철미하게 정진을 했으면 나도 그것을 보고 발심(發心)을 해서 그냥 그길로 계를 받고 출가를 했을런지도 모르는데,
모다 입선(入禪)하고 방선(放禪)하고 하는데 형식적으로 하고, 방선만 했다 하면은 돌아서서 잡담하고 맨 뭐 못된 소리나 하고.
그래서 내 자신이 ‘에이, 이런 데 있으면은 나까지 물이 들겠다’ 그래 가지고 '절에 가서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집으로 가서 선조(先祖) 산소 밑에 그 산재각(山齋閣)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런 데 가서 방을 하나 치워 놓고 혼자 생식(生食)을 하면서 차라리 참선을 한 것이 낫겄다’ 이리 생각을 해 가지고 해제를 하고서 짐을 꾸려 가지고 나오니까,
조실 스님께서 "아, 중이 될 줄 알았는데 중이 안 되고 가는가?"
"예, 애당초부터 중이 될라고 오지도 않았고, 어디 산재각 같은 데 가서 혼자 생식을 하면서 정진을 좀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 자네가 언제라도 중이 될 때에는 내한테 와서 중이 되어야 하네"
"아, 그렇고 말고요. 되기만 함사 내가 스님한테 와서 상좌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중 될 생각은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실 스님이 손을 잡고 이별을 하시면서 "자네가 아무때라도 날 찾아오고 말 것이네" 그러시거든요.
그래도 속으로는 ‘내가 확철대오나 하면 스님을 찾을까, 내가 중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는 생각을 하면서도 각박하게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 "예, 제가 스님을 찾아 오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로 그렇게 하고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으로 와서 다시 산재각 재실(齋室)을 찾아가서 생식을 하면서 겨울 한철을 지냈습니다.(20분55초~41분4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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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고 보니, 절에 있으니까 새벽 3시가 되면 자동으로 대중과 같이 일어나서 같이 정진하게 되고 시간 맞춰서 하니까 참 좋은데, 혼자 가서 하니까 새벽에 영 일어나기가 어렵고,
또 자명종을, 시계를 틀어 놓고 하니까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일어나서 억지로 세수를 하고, 추우니까 이불을 둘러쓰고 앉었으니까는 영 졸음이 퍼오고 참 안 좋다 그말이여.
조실 스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아침마다 법문을 듣고, 그때도 조실 스님이 꼭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 법문을 설하시고 그래서 법문을 듣고, 또 법회가 가끔 있어서 또 법문을 듣고,
또 대중과 같이 하니까 해태심(懈怠心)을 낼라야 낼 수가 없고 그래 좋더니, 혼자 있으니까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헐라고 해도 그 혼침(昏沈)을 막기가 어렵고, 해태심이 나서 억지로 이를 갈아붙이고 해도 잘 안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다시 내가 결심을 하기를 '내가 천상 이 공부를 헐라면은 싫거나 좋거나 가서 출가를 해서 중이 되어야겠고, 일단 중이 된 이상에는 남이야 공부를 하거나 말거나, 잡담을 하거나 말거나, 술을 먹거나 담배를 먹거나 고기를 먹거나, 무슨 별 못된 짓을 하거나 말거나, 남의 흉을 보지를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해태를 할수록에 나는 더 분심을 내고 더 신심을 내서 공부를 해야겠다. 그러니 그 시비에 내가 말려들지 아니하고, 잡담하고 그런 데 내가 말려들지 아니할려면 묵언(默言)을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가 아직 학교를 졸업을 채 못한 때인데, 그때 집안에선 모다 다니던 학교니까 졸업하고 절에 가도 늦지 않으니까 졸업을 마치고 가라 그래서, 그래서 다시 학교에 들어가가지고 그럭저럭 그냥 졸업을 하고는,
졸업한 날 학교 이발소에 가서 면도로 머리를 싹 깎어버리고는 그길로 절로 가서 조실 스님을 찾아가서 뵈옵고, 가니까 마침 고암 스님도 계시고 조실 스님도 계시고 해서 거기서 며칠 사이로 그저 가사 · 장삼을 준비를 해가지고는 계(戒)를 받았습니다.
받고 나서 며칠 안 있다가 묵언을 하고 그렇게 정진을 했는데, 근기(根機)가 원래 둔하고 약해서 고봉 스님처럼 그렇게 철저히 정진을 못하고, 묵언을 하면서도 온갖 시비에 다—자연히 뭔 말을 하면은 손짓 발짓을 하고 뭐라고 써서 문답을 하고, 그렇게 철저히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한 과거를 생각해 볼 때에 ‘선지식(善知識)을 여의고서는 이 공부는 못할 것이다’한 것을 알고.
조동종은 원래 그런 무슨 삿된 종파가 아니고, 육조(六祖) 스님 밑에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라고 하는 큰 도인이 있었는데, 그 청원행사 선사 밑에서 벌어지는 종파가 이 조동종입니다.
임제종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 밑에서 벌어졌고, 조동종은 청원행사 선사 밑에서 벌어진 동산(洞山) 선사나 조산(曹山) 선사, 그런 대선지식 밑에서 벌어진 종파로써 전혀 삿된 종파가 아닙니다.
아닌데, 왜 묵조사선이라고 하냐?
선학사(禪學史)적으로 본다면은 오히려 조동종이 임제종보다도 더 사형(師兄)이기 때문에 조동종이나 그 선학사상(禪學史上)으로 볼 때에는 조동종이 오히려 달마 스님으로부터서 내려오는 정통이다. 이렇게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는 이 조동종 계통의 종파가 정식으로 내려오지를 못했습니다.
조동종이 내려오지를 못하고 임제종이 계속해서 계계승승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와서,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사람으로서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을 헐라야 내려오는 종사(宗師)가 없어서 천상 묵조선을 할라면은 책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데, 책을 봐가지고 참선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하는 방법은 알 수가 있지만 공부를 하다가 어떤 소견이 난다든지 경계(境界)가 났을 때에 어떤 종사가 없기 때문에 점검을 받을 수가 없어. 이런 어떤 경계가 났을 때 이것이 옳은 경계인지 나쁜 경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옳게 해 가면서도 그른지 옳은지 의심을 끊틀 못하고, 잘못된 경계가 나타나도 그것이 옳은 경계인 줄 알고 거기에 그대로 나간다면은 정말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자기도 그르치고 자기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도 그르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것을 생각하라’ 조동종 계통의 어록을 보면 공부하는 방법을 그렇게 표현을 했다 그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생각을 생각하라’ 무슨 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것을 어떻게 생각해?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아까 고봉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단(丹), 단을 얻어가지고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목숨 바쳐서 정진을 여법히 하지 않고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또는 달마 스님과 같은 그러한 대종사가 나오셔서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이 간화선보다도 더 훌륭한 법을 개척을 해서 지도를 하신 때에는 몰라도, 그러기 전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보다도 더 수승한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법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산승(山僧)은 믿는 바입니다.
‘과거에, 무슨 육조 스님 이전에 무슨 화두란 소리가 어디가 있느냐?’
좁은 소견으로 내가 삼십 여년 전에 국집(局執)했던 그러한 생각이 떠올라서, 마치 오늘 고봉 스님의 단(丹)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그 단(丹)이라고 하는 법문이 나왔기에 지나간 일을 더듬어서 여러 대중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추위가 한바탕 강추위를 해서 뼈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어찌 코를 치는 진한 향기를 얻을 수가 있을까 보냐.
언제 읊어봐도 좋은 게송입니다.(41분42초~53분2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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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입초구인불내하~’ ; 『금강경오가해』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야부 게송 참고.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문채(紋彩 무늬·아름다운 광채 문/고운 빛깔·무늬·빛·모양 채) ; 문채(文彩)와 같은 말. ①어떤 사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무늬. 어떤 분별이나 행위의 결과로 남는 흔적 또는 자취. ②사물의 실상 또는 본분의 소식.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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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고봉(高峰) ; (1238~1295) 송대 말기 원대 초기의 임제종 스님. 법명은 원묘(原妙), 법호는 고봉(高峰), 속성은 서(徐)씨. 강소성(江蘇省) 오강(吳江) 출신. 15세에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여 가화(嘉禾) 밀인사(密印寺)의 법주(法住) 스님에게 귀의하여 은사로 삼고 16세에 삭발하여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18세에는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에 선문(禪門)으로 공부를 바꾸어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단교묘륜(斷橋妙倫 1201~1261)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22세에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에 들어가 단교묘륜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약정했던 3년의 기한이 다가왔을 때 태주(台州)의 정(淨) 사형의 권유로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 선사께 가르침을 청해 지도를 받아 수행하였다. 1271년 임안(臨安 : 浙江省 杭州) 용수사(龍鬚寺)에서 어느날 잠에서 깨어 화두를 의심하던 차에 함께 잠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설암 선사의 법을 이었다.
1274년 무강(武康 : 浙江省 湖州) 쌍계봉(雙髻峰)에 주석하였다. 1279년 항주(杭州) 천목산(天目山)으로 가서 서봉(西峰)의 위쪽에 있는 사자암에서 지내다가, 사자암 서편 바위 동굴에다가 작은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지냈다.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수계자는 수만에 이르렀다. 1295년 세수 58,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고봉대사어록』 상하 2권과 고봉대사어록 上下권 중 법어 · 서신을 수록한 상권에서 발췌한 『선요(禪要)』가 전한다.
[참고] 고봉스님의 수행에 대한 법문 : 송담스님(No.537) (『선요禪要』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좀해 ; 좀처럼(여간하여서는).
*고황병(膏肓病) ; 고황(膏肓) · 고황지병(膏肓之病)이라고도 한다. 고황에 들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황은 심장과 횡격막의 사이에 있는 부분으로 이 사이에 병이 생기면 낫기 어렵다고 한다. 고(膏)는 심장의 아랫부분이고, 황(肓)은 횡격막의 윗부분.
고황에 병이 들었다는 의미는 병이나 못된 버릇이 고칠 수 없도록 심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벼운 것이 아닌 불치의 병, 중병 등을 말한다.
*단교 묘륜(斷橋妙倫) ; (1201~1261) 남송(南宋)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스님. 절강성(浙江省) 황암현(黃巖縣) 송산(松山) 출신. 속성은 서(徐)씨. 18세에 스님이 된 뒤 처음에는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들었고, 그 뒤 설두산(雪竇山)으로 가서 무준사범(無準師範) 문하에서 공부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1241년 대주(臺州) 기원사(祇園寺)에 주석하다가 다음에는 서암의 정토선사(淨土禪寺) 천태산 국청사(國淸寺) 임안 정자사(淨慈寺) 등 여러 절에 두루 주석하였다. 1261년, 세수 61세로 입적하였다. 시자 문보(文寶) 선정(善靖) 등이 『단교화상어록』 2권을 엮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화두(공안)의 하나.
〇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조주는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 장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진영(眞影) ; 주로 얼굴을 그린 초상화(肖像畫) 또는 얼굴을 찍은 사진.
*영찬(影讚) ;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보고 찬양하여 지은 글.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설암조흠(雪巖祖欽) ; (1215~1287)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가운데 파암파(破庵派) 스님. 절강성 무주(婺州) 출신으로 5세 때에 출가하여 16세 때 삭발하고 18세부터 유행(遊行)하였다. 무준사범(無準師範)의 법을 이었다. 원(元) 세조(世祖) 지원(至元) 24년(1287) 73세에 입적하였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만상삼라(萬象森羅) ;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오온(五蘊) : 온(蘊)은 무더기•모임•집합•더미를 뜻함.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
①색온(色蘊) : 몸이라는 무더기. 몸의 감각 무더기 ②수온(受蘊) : 괴로움이나 즐거움등, 느낌의 무더기 ③상온(想蘊)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생각•관념의 무더기 ④행온(行蘊)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지•충동•의욕의 무더기 ⑤식온(識蘊) :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무더기.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정(平定 편안할·평정할 평/다스릴·평정할·편안할·안정시킬 정) ; ①반란이나 소요를 큰 어려움 없이 평온(平穩)하게 진정(鎭定)시킴. ②적을 쳐서 자기에게 예속되게 함.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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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종장(宗匠 근본·우두머리 종/장인·우두머리 장) ; 수행한 바가 다른 이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여 법맥을 이어받은 고승(高僧).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조동종(曹洞宗)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조동종은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으로부터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 839-901)에 의해 형성된 종파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였다.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동」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동이겠지만, 「조」는 동산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종지를 크게 밝혀서 완성한 때문이라 하는 말도 있다. 중국의 문법에 선후와 시종을 거꾸로 붙이는 전례가 아주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제자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 위에 놓은 것이 당연한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후에는 조계산(曹溪山)의 「조」로써 육조의 바른 갈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왔다. 또한 조산 본적의 조산도 조계산을 사모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 가풍은 정편 오위(正偏五位)를 세워서 아주 세밀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고, 이치와 일이 무르녹게 합하여, 본래면목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원(道元: 1200~1253)이 1223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여정(如淨)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였다. 도원 선사는 1227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초조(初祖) ; 한 종(宗)을 처음 세운 스님.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하였다.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마외도(邪魔外道) ; 불법(佛法)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외도. ‘사마’란 삿된 마구니라는 뜻으로 불도(佛道)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장애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인데, 외도 중 삿된 견해로써 불도 수행자를 어지럽히는 자를 사마외도라 한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장삼(長衫) ; 스님의 웃옷.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든다.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시자(侍者) ; ①시중(侍從)을 드는 사람. ②스승, 장로를 따라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승(高僧)의 가까이서 시중을 들고 명령에 따르며, 항상 용무를 다하는 제자를 말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재각(齋閣) ;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
*선조(先祖) ; 한집안에서 윗대의 조상.
*생식(生食) ; 음식물을 익히지 않고 날로 먹음. 또는 그런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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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 고려 중기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신라의 원효(元曉)가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고려 후기 야운(野雲)이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세 가지의 글을 합쳐서 한 권으로 엮은 책.
《계초심학인문》은 불교에 입문한 초심 행자가 알아야 할 범절과 수행에 관한 내용이고, 《발심수행장》에는 수행에 필요한 마음가짐이 적혀 있고, 《자경문》에는 수행인이 스스로 일깨우고 경계해야 할 내용이 담겨 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 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 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스물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십팔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청원 행사(靑原行思) : (? – 740) 속성 유(劉)씨。강서성 길안부(吉安府) 여릉현(廬陵縣)에서 났다。어려서 출가하여 깨친 바 있어, 조계(曹溪)에 가서 육조의 인가를 받고, 대중의 상수(上首)로 있었다.
그리하여 육조 문하의 장로(長老)이더니, 뒤에 그 고향인 길주(吉州) 청원산 정거사(青原山靜居寺)에서 교화하였는데, 육조가 열반한 뒤에 학자들이 그 곳에 많이 모였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8년에 입적하였다.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고봉 스님의 단(丹)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그 단(丹)이라고 하는 법문' ; 송담스님(No.201)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법문 내용]
(게송)입초구인불내하~ / 천목산 고봉스님 자신의 수행 경험담, 『선요禪要』 2.시중示衆 / (게송)두지천혜각답지~.
송담 스님의 출가 일화 / 간화선(看話禪)은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가장 수승한 법.
〇결제와 해제의 법요식을 갖는 것은 한철 동안 착실히 정진을 하기 위해서 마음을 다지는 데 목적이 있고, 또 해제날은 지난 안거 동안에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그것을 다시 회고하고 반성을 해서 앞으로 더욱 정진을 잘하기 위한 그러한 좋은 계기를 삼기 위해서 이렇게 해제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되는 것.
〇‘육정(六情) · 육식(六識)과 사대(四大) · 오온(五蘊)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만상삼라(萬象森羅)를 가져 가지고 총(總)히 녹여서 한덩어리의 의심(疑心)을 만들어서 몰록 눈앞에다가 떠억 놓으면 한 창(鎗), 한 깃발[旗]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平定)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말로 말해서 이 육체와 정신 또 산하대지, 산이나 물이나 이 온 땅, 만상삼라 삼라만상 모든 것.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우리의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하나로 뭉쳐서 녹여 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의심을 만들어라.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을 만들어라.
그러니까 그 의심 밖에는 자기 몸뚱이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희로애락 정신작용도 다 잊어버리고, 눈앞에 벌어진 모든 해나 달이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밥이 맛이 있거나 없거나, 반찬이 좋거나 나쁘거나, 수용(受用)이 좋거나 나쁘거나, 누가 나를 잘한다고 하거나 못한다고 하거나, 일체 선악을 완전히 그것에 아주 관심을 놔버려라.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전부 뚤뚤 뭉쳐가지고 자기의 본참공안상에 의심으로 모든 것을 다 쏟아라 그말이여.
〇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아침마다 법문을 듣고, 그때도 꼭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 법문을 설하시고 그래서 법문을 듣고, 또 법회가 가끔 있어서 법문을 듣고, 또 대중과 같이 하니까 해태심(懈怠心)을 낼라야 낼 수가 없고 그래 좋더니, 혼자 있으니까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헐라고 해도 그 혼침(昏沈)을 막기가 어렵고, 해태심이 나서 억지로 이를 갈아붙이고 해도 잘 안된다 그말이여.
〇앞으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또는 달마 스님과 같은 그러한 대종사가 나오셔서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이 간화선보다도 더 훌륭한 법을 개척을 해서 지도를 하신 때에는 몰라도, 그러기 전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보다도 더 수승한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법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산승(山僧)은 믿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