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26~250)2023. 3. 16. 14:49

(No.236)—1984년 춘계 산철 해제 법회(81.04.30) (40분)

 

약 40분.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몰형단(沒形段)헌데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몰형단(沒形段)이여. 위(位)가 없는 참사람, 위(位)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우리가 보는 사람은 다 육체가 있고, 눈 · 코 · 귀가 있고 손발이 다 있어서 이런 형단(形段)이 있는데, 위(位)가 없는, 지위(地位) 위(位)가 없는 참사람은 형단이 없어. 형단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어.

형단(形段)이 없건마는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다. 항상 면문(面門) 가운데—이 낯, 얼굴, 낯반대기, 이 얼굴, 면문 가운데로 항시 들어갔다 나왔다 출입을 한다 그 말이여. 면문(面門), 눈 · 코 · 입 · 귀를 통해서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해.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 마치면—그 들어갔다 나왔다 항상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거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면문중(面門中)을 통해서 들랑달랑하는데 한 생각 탁! 돌이켜 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라. 번갯불이나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으리라.
번갯불을 무슨 수로 밟으며, 흐르는 물소리를 어떻게 탁! 밟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런데 항상 우리 면문을 통해서 들락날락하는 바로 그놈을 한 생각 돌이켜 요달(了達)해 버리면은 바로 번갯불, 번쩍 하는 번갯불도 탁! 밟을 수가 있고, 흐르는 물소리도 탁!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갑자년 봄철 산(散)철, 두 달 동안 산철 결제(結制)를 했는데, 그 산철 결제의 해제(解制)날입니다.
본래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이렇게 여름과 겨울만을 90일씩 이렇게 안거(安居)를 해 왔었는데, 중국에서부터 저 인도에서부터.

인도에서는 우기(雨期)라고 해서 그 장마가 계속되는 때에 모다 숲속에나 산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으니까, 모다 임금님이나 또는 장자(長者)나 또 신심 있는 신도가 지어 드린 그 기원정사(祇園精舍)라든지 죽림정사(竹林精舍)라든지 그런 정사에서 부처님을 비롯해서 여러 부처님 제자들이 이렇게 모여서 그렇게 그 장마철을 지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안거(安居)라 하는 것인데.
중국에는 인도와 또 달라서 여름 더웁고 비 올 때 뿐만이 아니라,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겨울에도 산중에서 숲속에서 그런 데서 공부를 할 수가 없고 왕래하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겨울에도 석 달 동안을 안거, 결제(結制)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이렇게 결제를 해 가지고, 석 달씩 이렇게 안거를 하고 또 해제를 했습니다마는, 근자에 와서는 정월 보름에 겨울 해제(解制)를 하고 4월 15일까지 산철 동안이 석 달인데, 그 산철 동안 석 달 동안을 걸망을 지고 동(東)으로 갔다 서(西)로 갔다 선지식(善知識)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또 이 도반(道伴)도 찾어가서 서로 도담(道談)도 하고 대단히 그 뜻깊은 일이기는 하나,

그렇게 석 달 동안을 짊어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다 보니 산만해서, 마땅히 그 걸망을 석 달 동안을 부려 놓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하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 용화선원에서는 산철에도 잠깐 특별한 일이 있으면 잠깐 가서 일을 보고 들어와서, 산철 동안에도 계속해서 정진을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
수년 전부터서는 산철에도—그때는 인자 산철 결제(結制)라 한 것도 없었고, 또 산철 뭐 해제(解制)라 한 것도 없이 그저 그냥 계속해서 정진만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기왕이면 산철도 결제를 하고, 산철도 해제 법요식(法要式)을 가져서 좀 더 법도(法度) 있게 그렇게 좀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이 있어서, 수년 전부터서 이 산철, 2월 초하루에 결제 법요식을 갖고 이렇게 또 3월 말일 날 이렇게 또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다 '어떻게 하면은 좀 더 정진하는 데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了達)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신심(信心)의 발로(發露)로써 이렇게 되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라 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일대사를 우리가 해결을 하느냐 하면, 큰 말 앞에 탁! 부딪쳐.
우리가 말이 있는데, 말 앞에 갑자기 말 앞에 갖다가, 탁! 달려오는 말에 내가 부딪쳤을 때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는가?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그 찰나간에 무슨 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또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듯 하라. 촛불이나 전깃불을 켜 놓고 그 밝은 데에서 바늘에 실을 뀐다면 뭐 천천히 이렇게 뀔 수가 있겠지만, 번갯불이 번쩍 한 그 찰나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뀔 때 그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해 나가는 것도 이와 같애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計較) 이러한 것이 도무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존(世尊)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영산회상에 백만억 대중이 운집(雲集)을 해서 부처님 설법을 들을려고 떠억 운집해 있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어.
그 부처님의, 그 부처님 세존의 거룩하신 세존을 찬양하기 위해서 찬탄하기 위해서 하늘에 제석천왕이 꽃비를 내루왔는데, 그 꽃 한 송이를 부처님이 떠억 들어서 대중 앞에 보이셨어. 백만억 대중이 보고 있는데 아무도 그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시는 뜻을 아지를 못했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 한 분이 비긋이 미소를 했습니다.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일상,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통해서 드나드는 형단(形段)이 없는 그놈을 바로 보는 일이 지극히 가깝고 쉬웁다고 하지마는, 참으로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한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백만억 대중이 모인 가운데에 오직 가섭(迦葉) 한 사람이 이것을 승당(昇堂)을 했다. 이것을 깨달랐다' 이렇게 볼 때에 이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고, 그렇게 수월하고, 그런 작은 일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지 않는 일을 우리 말세 중생, 말세(末世)에 태어난 우리 중생(衆生)으로서 그 참선(參禪)을 한다고 해서 그걸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런 짓을, 그런 어려운 일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가고, 무슨 옴마니반메훔을 불러서 부자가 되고 잘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법문(法門)의 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일이 그렇게 적은 일이 아니요, 간단한 일이 아니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우니까 하지 말라. 미리서부터 일찌감치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목숨 바쳐서 해야만 된다'고 이렇게 말을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그러한 것을, 평소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한 모든 그 법문이나 이론 철학적인 것 다 속에다 꽈악 담어 놓고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밑천을 삼고 살림살이를 삼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참선을 한다면, 그 참선은 도저히 옳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거든.

마치 병에, 옛날에 참기름도 담고 들기름도 담고 간장도 담고 한 그러한 병이 있는데, 그 병의 바닥에 찌께기가 남아 있고 병 속 몸뚱이 면에 그러한 아무리 좋은 기름을 담아서 기름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거기에다가 다른 음식을 담을 때에는 그 다른 아무리 좋고 좋은 음식을 담아도 먼저 담았던 기름 냄새나 간장 냄새가 완전히 가시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뒤에 담은 음식은 결국은 변질이 되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금방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이 한 말씀이라도 나쁜 말씀일 수가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있는 말씀이 한 귀절이라도 그것이 나쁜 귀절일 수는 없어.
그러나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러한 조사어록이나, 기언묘구(奇言妙句)나, 경전에 있는 좋은 부처님의 말씀 같은 것이 우리의 가슴속에 고대로 남아 있어 가지고 그것에서 계속 그것이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하면, 마치 병 안에 참기름 냄새나 들기름 찌깽이 같은 것이 눌어붙어 있고, 또 간장 같은 것을 담아서 간장 냄새가 나는 거기에다가 아무리 좋은 깨끗한 물이나 또는 술을 담는다고 할 때에 그 물과 술은 금방 변질(變質)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參禪)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거—불문(佛門)에 귀의해 가지고 참 많은 선지식(善知識)도 친견하고, 또 많은 법문도 듣고, 또 많은 경전도 읽고 해서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잘 알고, 죽죽죽죽죽 다 외우고 쓰고, 뭐 말을 하라고 하면 법사 스님 이상으로 말을, 불교에 대한 말을 잘하고 교리에 대해서 말을 잘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참선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냐 하면, 그러한 찌께기가 남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참선을 해도 안 돼.

화두(話頭)만 들면 그 경전에 있는 말씀이 생각이 나고, 조사어록에 있는 말이 생각이 나고, 어떤 공안(公案)을 갖다가 물으면은 그 자기가 보고 듣고 하는 그 살림을 갖다가 그 살림으로 그 공안을 따져서 분별을 하고 대답을 하고, 이렇게 하는 한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을,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정진(精進)을 해 가되, 밥을 먹어도 밥 먹으면서 그 생각, 옷을 입으면서도 오직 그 생각, 걸어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세수를 할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차를 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그래 가지고 마침내 밥을 먹으면서도 밥맛을 모르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는 줄을 모르고, 걸어가면서도 걸어가는 줄 모르고,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줄을 모르고,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할 지경으로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오직 화두에 의단(疑團) 하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정진을 잡드려 가면,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 상식 · 이론 · 교리적인 것 · 철학적인 것, 모다 그런 것을 동원해 가지고 공안을 이리저리 분별해서 따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 이것이다' 하고 어떤 결론을 하나 얻고, 그다음에 또 다른 공안을 하나를 또 추켜들고 해 가지고, 한 3일이나 내지 일주일 동안 그 이리저리 수수께끼 풀듯이 이리저리 분석하고 따져서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해 가지고 그런 식으로 참선을 하면, 이런 따위를 갖다가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건데, 이런 사구선이라는 것은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는 거여. 천칠백 공안을 그런 식으로 해서 낱낱이 따져서 알아맞춰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거여.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마음 길이 끊어져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고, 조사관을 타파해야 그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조사관(祖師關)을 뚫을라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지, 마음 길이 끊어지지 않고서는 세상없이도 조사관을 뚫을 수가 없고, 조사관을 뚫지 않고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산철 해제에 전강 조실 스님 법문도 활구선에 대한 말씀, 또 산승(山僧)의 말도 이 활구선에 관한 심심(甚深)한 당부를 해 드렸는데, 우리가 보다 더 수행해 나가는 데에 법도(法度)를 세워서 좀 더 알뜰히 공부하자고 결제와 해제를 이렇게 가진 것뿐이지, 해제했다고 해서 우리 공부하는 마음이 조끔도 해이해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주일이 지내면 초파일이 돌아오고, 또다시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갑자년 하안거가 시작이 됩니다. 그때까지 보름 동안 계속해서 좀 더 알뜰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다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니라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得之在心)이요 응재수(應在手)라. 마음에 얻어.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하게 돼.
제절로 손으로 잡으나 놓으나, 글씨를 쓰나, 밥을 먹으나—마음에서 얻지 못하면 손으로 무슨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몸으로 뭣을 일을 하나, 전부가 그게 다 업(業)을 짓는 것이요, 생사윤회를 하는 것인데, 마음에 탁! 근원을 얻어버리면 손으로 잡으나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앉고 서고 누우나 그 다 딴 일이 아닌 거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여. 눈 내린 밤에 달이 비추고, 봄바람 부는 데에 꽃이 피는 것이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변함이 없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요,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을 향해서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오면 들과 산에 곳곳에 울긋불긋 꽃이 피는 것이다. (처음~39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안거(安居)의 유래. 동안거, 하안거 / 산(散)철 결제를 하는 이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 법문(法門)은 오직 중생들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기 위해 남기신 것 / 일대사(一大事)라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 / 달려오는 말에 부딪쳤을 때처럼,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는 것처럼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정진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

(게송)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 / (게송)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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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