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26~250)2023. 4. 1. 11:32

(No.249)—1984년 추계 산철해제 법회(84.10.23) (38분)

 

약 38분.


요면삼도해(要免三途海)인댄  수참활구선(須參活句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광음양가석(光陰良可惜)하고  신물등한면(愼勿等閑眠)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요면삼도해(要免三途海)인댄, 지옥 · 아귀 · 축생,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할진대는,
수참활구선(須參活句禪)이니라. 모름지기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할지니라.

광음(光陰)이 양가석(良可惜)하니, 세월이 시간이 참으로 아까우니,
신물등한면(愼勿等閑眠)이어다. 삼가 등한히, 잠자는 것을 등한(等閑)히 하지 말지어다.

우리 몸 안에 맥박이 발딱발딱 뛰고 있는 그 맥박 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生死)를 재촉하는 것이고,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는 것이 우리의 생사를 재촉하는 것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육도(六途)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일념(一念) 속에 있는 그 육도(六途),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라'는 말씀입니다.

해탈(解脫)이라 하니까 무슨 강물 속에, 더러운 강물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 낸 것처럼 우리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러한 것이 없어. 그런 것이 없건마는, 미(迷)한 중생에게는 분명히 지옥(地獄)이 있고 축생(畜生)이 있고 아귀도(餓鬼道)가 있고 인간(人間)과 아수라(阿修羅)와 천당(天堂)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 없으니까 미(迷)한 중생에게도 실지에는 없지마는,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괴롭고 즐겁고 하니, 실지로 아무리 없다 하더라도 있는 것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가 계합(契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도리를 설하시고 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전하시고, 가섭존자는 아란존자(阿難尊者)에게 전하시고, 아란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에, 이렇게 해서 인도에서 28대 달마조사(達摩祖師)까지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달마조사는 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로부터 이 법등(法燈)을 전해 받았는데, 보리달마(菩提達摩)존자, 28대 보리달마존자는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에 셋째 왕자이십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출가를 했는데, 그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를 뵈옵고서 법(法)에 등(燈)을 전해 받아 가지고, "제가 이미 이 법을 얻었는데, 장차 어느 나라에 가서 불사(佛事)를 지어야 하겠나이까?" 하고 여쭈어봤습니다.
반야다라존자가 "니가 비록 법은 얻었으나 아직은 저 멀리 가서는 아니되느니라. 아직은 이 남천축(南天竺)에 머물러 있다가, 내가 열반에 든 뒤 67년이 되거든, 진나라 진단(震旦), 저 중국으로 건너가거라. 건너가서, 거기에 가서 대법약(大法藥)을 가지고 상근대지(上根大智)를 제접(提接)을 할지니라"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 달마존자는 반야다라존자를 가까이 모시고 시봉을 하면서 착실히 보림(保任)을 하시기를 40년 동안을 잠깐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문자 그대로 위법망구(爲法忘軀)요, 여법(如法)하게 시봉(侍奉)을 하면서 보림행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 스승이신 27조 반야다라존자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일절 입을 딱 다물고, 오직 시봉하면서 자기 수행만을 하다가, 반야다라존자가 열반하신 뒤에사 반야다라존자의 뒤를 이어서 인도—남인도 · 북인도 · 오천축(五天竺)을 두루 다니시면서 중생교화를 하셨습니다. 몇 살까지 하셨냐 하면은 140세까지 하셨다.

140세의 고령이 되어 가지고사 비로소 부왕(父王), 그 향지국(香至國)에 왕이 준비해 준 배를 타고서 3년간이라고 하는 긴 항해 끝에 중국 남해안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양(梁)나라 보통(普通) 8년입니다.
그때 광주자사(廣州刺史)가 인도에서 생불(生佛)과 같은 도인(道人)이 오셨단 말을 듣고 융숭하게 영접을 하고, 양무제(梁武帝)에게 그러한 달마존자가 도착했다고 하는 말씀을 주달(奏達)을 하니까, 양무제가 또 사신을 보내서 그때 서울인 금릉(金陵)에까지 모셔 갔습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만나자마자, "짐(朕)이 즉위(卽位) 이래에 많은 절을 짓고, 경(經)을 인포(印布)하고, 많은 스님네를 도승(度僧)을 하고 그랬으니, 짐에 공덕(功德)이 얼마나 되오니까?"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고 또 경과도 보고할 겸, 아울러서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응당 그랬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달마대사 대답이 "공덕이 없습니다" 뜻밖에 이러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양무제는 깜짝 놀래 가지고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하십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그러한 공덕이 공덕이 아닌 것은 아니여.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다운 공덕이 되지 못하고 인천(人天)에 조그마한 유루(有漏) 공덕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그러면 참다운 공덕입니까?"
달마대사가 이르시기를, "지혜가 원명(圓明)하고 공적(空寂), 스스로 공적의 진리를 깨달라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어떠한 것이 성스러운 제일가는 뜻이오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확연(廓然)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짐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양무제는 마침내 달마대사에 상근(上根)을 접(接)하는 그 자비한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달마대사는 그길로 양자강을 건너서 위(魏)나라 숭산(崇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소림사(小林寺) 소림굴 속에 들어가서 9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면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참! 큰 공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한 공덕은 무엇에다 비교할 수가 없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라면, 양무제가 대환희심을 내 가지고, 생불(生佛)과 같이 받들어 모시면서 계속해서 큰 불사(佛事)를 하고 그랬을 텐데,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은 그러한 대화로 인해서 양무제는 그 달마대사의 참 말씀을 이해를 못했던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소림굴로 들어가서 9년 동안을 계시는 동안에, 신광(神光)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은 속가에 유교나 도교에 모든 경전을 다 통달을 하고, 출가를 해서도 모든 십이부장경(十二部藏經)을 다 통달을 하고 그랬지만, 큰 깨달음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아침에 머리가 빠개질듯 아프면서 도저히 그 아픔을 참지를 못하고 몸부림을 치다가 머리를 만져 보니까, 머리에 다섯 봉우리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이거 인자 죽을려고 큰 병이 났다 싶었는데 공중에서 청하기를, "이것은 병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환골탈태(換骨奪胎) 하느라고 그런 것이니 걱정을 말아라. 저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가면 참법을 깨달은 스승이 거기에 계시니 그리를 가서 법을 받으라" 한 그러한 공청이 있어서 달마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어가서 며칠을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어도, 달마대사는 벽을 향해서 묵묵히 앉아 계실 뿐, 돌아다보시지도 안 혀. 하루 종일 서 있어도 소용이 없고, 밤이 되어 가지고 눈이 폭설이 쏟아지는데, 밤중에는 허리까지 눈이 차올랐다 그 말이여.
발부터서 얼어 올라오는데, 다리가 얼고 배가 서늘해 가지고,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사람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완전히 꽁꽁 얼어서 마비가 되다시피 했어도 꼼짝을 않고 고대로 아주 서 있다 그 말이여.

달마대사가 너무 측은(惻隱)해서 "뭣 때문에 거기 그렇게 오래 서 있느냐?"
"법(法)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너 같은 박덕(薄德)하고 조그만한 재주밖에 없는 그러한 박덕한 사람이 무슨 법을 구한단 말이냐?"
그 말을 듣고서 허리에서 칼을 빼 가지고 자기 팔을 탁! 꺾어서 달마대사 앞에 바쳤습니다.
달마대사가 그제사 "그만하면 법을 배울만한 신심(信心)이 있다" 이렇게 인증을 하시고서 "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니라" 한마디를 일러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법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이 편안치를 않습니다"
"그러면 니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리라"

신광(神光)이 아무리 그 마음을 찾어서, 마음을 달마대사에게 드릴려고 아무리 찾어봐도 찾을 수가 없어.
"아무리 찾을라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달마대사 말씀이 "내가 니 마음을 편안해 마쳤느니라" 여기에서 신광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신광(神光)은 혜가(慧可)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혜가대사는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었습니다. 달마대사는 150세의 고령으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달마대사가 반야다라존자로부터 확철대오를 해서 법을 이어 가지고서도 40년이라고 한 세월을 반야다라존자, 그 스승을 시봉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 이만한 끈기와 신심과 참을성이 있어야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능히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어받아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불사(佛事)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릇이 작고 참을성이 없고 끈기가 약해서 조그마한 바람만 불어도 이리 휙 날아가고, 저리 휙 궁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신심과 끈기가 아니고서는 정말 이 공부는 완성하기가 어려웁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처님과 역대조사에 행적을 살펴보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근기와 인내와 정성 신심 이런 것과 비교를 해 보면, 우리 자신들의 박약함에 부끄러운 한탄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무량겁을 목숨 바쳐서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으면서 수없는 고비를 넘기면서 그러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정진(精進)함으로써 그러한 도(道)의 결과를 얻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아니해서 법회가 여러 시간 지연이 되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아니해도 법회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법회를 천천히 시작한다 하더라도, 법당에 앉었으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앉자마자 입선(入禪)인 것입니다.
우리 수행하는 사람은 차를 타던지 자동차를 타던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정거정 대합실에 차를 기다리거나, 어디서 오는 사람을 기다리거나, 기다린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면 지루하기가 짝이 없지만, 왜 기다린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냐 그 말이여.
기다릴 것이 아니라, 딱! 앉었다 하면은 화두를 떠억 들고, 딱! 섰다 하면 척! 화두를 추켜들고, 그러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 되고 수선 도량(修禪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한두 시간 그렇게 지루해서 못 견디게 기다리신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이러한 조용한 시간을 갖지 못해서 한탄한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지금, 겨울처럼 그렇게 춥지도 않고, 여름처럼 그렇게 더웁지도 아니한 이 도량에 떠억 두 시간 정진을 했으니 얼마나 그동안에 법문 들은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보람을 느끼셨을 줄 생각합니다.

혜가대사가 그 한마디 법문을 듣기 위해서 눈이 쌓여서 가슴까지 차오르고, 전신이 얼어서 마비가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그 자기의 팔을 자기의 손으로 짤라서 달마대사에 스승 앞에 바치는 그러한 신심(信心),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버릴 줄 아는, 잊어버릴 줄 아는 그러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우리는 얼마던지 책에서도 볼 수 있고, 누구한테도 들을 수 있지만 위법망구에 그러한 신심으로 들어야 그 말이 자기에게 와서 꽂히고, 그 말로 인해서 자기의 칠통(漆桶)이 타파(打破)가 되는 것이지, 그 말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 신심도 없고, 그 숭산(崇山)에 놀러갔다가 그 이상한 중이 굴속에 앉었으니까 구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달마대사가 그런 말을 해 봤자, 그 사람이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신심으로써 타오르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그러한 상태에 놓여지면, 그 말 아니고 욕하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새 우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개 짖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도리는 계란이 깨어날 때, 병아리로 깨어날 때, 암탉이 스무하루 동안을 알을 품고 있으면, 결국은 그 알 속에 병아리가 거의 다 되어 가면, 밖에서 어미닭이 그 때를 잘 알아 가지고 그 계란 껍데기 속에 병아리가 다 되어 갖고 있는 그 병아리와 품고 있던 어미닭과 서로 상합(相合)이, 의기가 상합이 되어 가지고, 안에서 쫒고 밖에서 쫒아서 그래 가지고 딱! 쫒을 때, 줄탁동시(啐啄同時)다 그 말이여. 안에서 쫒고 밖에서 쫒은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 가지고 병아리가 튀겨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위법망구에 마음을 갖는 것이 도업(道業)을 성취한 가장 중요한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30분33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역력해서, 역력(歷歷)한 것은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아주 성성(惺惺)하고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들고, 화두를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어서,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계속 참구(參究)해 나가면,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그래서 성성하고 역력해서 들려고 하는 나도 없고, 들리는 화두도 없고, 지금 내가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이 내가 앉어 있는 데가 여기가 선방이요 절이다' 그런 생각도 없고, 객관과 주관이 완전히 둘 다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오직 화두에 의단만이 독로해.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해서 색(色)과 공(空)이 다 끊어져 버렸어.
색(色)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여. 사대(四大),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뭉쳐진 이 육체와 이 기세간(器世間), 온 태양과 달과 별과 지구 산천초목 그런 것들이 모두 색(色)이고.
공(空)은 이 색이라고 하는 것이 본바탕은 그것이 공이다 그말이여. 중생의 눈에는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는 공한 것이거든.

해가 '내가 해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달이, 달 자신이 내가 달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책상이 '내 자신이 책상이다'는 생각이 없어. 그래서 책상이 고대로, 책상 있는 고대로 그것이 공(空)한 것이여.
그 책상이 불에 넣으면 타버리니까 공(空)이 되고, 또 오래되면은 썩어서 없어지니까 공(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책상으로 존재한 모습 그대로 그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말이여.
사람인 내가 들어서 '저것은 책상이다. 책상이 네모졌다. 저것은 나무로 이루어졌다' 내가 이름을 붙이고, 모냥을 명상(名相)을 붙이니까 그것이 책상이지, 책상 자체는 책상이라고 하는 상(相)이 없는 것이여. 그래서 그것을 공(空)이라 그러는 것이여.

비단 책상뿐만이 아니라, 태양도 그렇고, 달도 그렇고, 별도 그렇고, 산천초목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그 자체가 다 공(空)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육체도 바로 공(空)한 것이요, 희로애락과 탐진 번뇌 그 자체도 낱낱이 그 자체에 들어가서는 공(空)한 것이여.

'공한 것이다 또는 색상이 있다' 그러한 생각까지도 다 끊어져 버리고,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여. 빈주(賓主)도 여의어 버렸고, 색공(色空)도 다 끊어진 자리에서 목전(目前)에 분명(分明)히 취(取)하라. 형단(形段)이 없고, 형단이 없건마는 우리의 목전에 분명한 놈을 취하라 그 말이여.
그 목전에 분명한 놈, 그놈을 바로 요달(了達)을 해 버리면,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푸른 산은 흰구름 가운데 우뚝 서 있느니라. 오늘 갑자년 추계산철 해제법어를 일로써 마칩니다. (처음~37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요면삼도해~ /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려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 / 28대 보리달마존자는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에 셋째 왕자.

양무제(梁武帝)와 달마대사의 대화 / 달마대사와 신광(神光), 즉 혜가(慧可)대사의 만남 / 난행(難行)을 능행(能行) /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신심(信心) / 줄탁동시(啐啄同時) / (게송)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


우리 몸 안에 맥박이 발딱발딱 뛰고 있는 그 맥박 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生死)를 재촉하는 것이고,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는 것이 우리의 생사를 재촉하는 것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육도(六途)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일념(一念) 속에 있는 그 육도(六途),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라'는 말씀입니다.
해탈(解脫)이라 하니까 무슨 강물 속에, 더러운 강물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 낸 것처럼 우리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러한 것이 없어. 그런 것이 없건마는, 미(迷)한 중생에게는 분명히 지옥(地獄)이 있고 축생(畜生)이 있고 아귀도(餓鬼道)가 있고 인간(人間)과 아수라(阿修羅)와 천당(天堂)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 없으니까 미(迷)한 중생에게도 실지에는 없지마는,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괴롭고 즐겁고 하니, 실지로 아무리 없다 하더라도 있는 것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가 계합(契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혜가대사가 그 한마디 법문을 듣기 위해서 눈이 쌓여서 가슴까지 차오르고, 전신이 얼어서 마비가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그 자기의 팔을 자기의 손으로 짤라서 달마대사에 스승 앞에 바치는 그러한 신심(信心),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버릴 줄 아는, 잊어버릴 줄 아는 그러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우리는 얼마던지 책에서도 볼 수 있고, 누구한테도 들을 수 있지만 위법망구에 그러한 신심으로 들어야 그 말이 자기에게 와서 꽂히고, 그 말로 인해서 자기의 칠통(漆桶)이 타파(打破)가 되는 것이지, 그 말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 신심도 없고, 그 숭산(崇山)에 놀러갔다가 그 이상한 중이 굴속에 앉었으니까 구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달마대사가 그런 말을 해 봤자, 그 사람이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신심으로써 타오르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그러한 상태에 놓여지면, 그 말 아니고 욕하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새 우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개 짖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역력해서, 역력(歷歷)한 것은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아주 성성(惺惺)하고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들고, 화두를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어서,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계속 참구(參究)해 나가면,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그래서 성성하고 역력해서 들려고 하는 나도 없고, 들리는 화두도 없고, 지금 내가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이 내가 앉어 있는 데가 여기가 선방이요 절이다' 그런 생각도 없고, 객관과 주관이 완전히 둘 다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오직 화두에 의단만이 독로해.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