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51~275)2023. 4. 1. 10:06

 

 

(No.268)—1985년 6월 첫째일요법회 (45분)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소리가 튀거나 끊김이 자주 있으니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23분.

 

(2) 약 22분.

 

(1)------------------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허고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참선을 함에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뚧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心路] 끊어짐을 요하느니라. 참선은 조사관을,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해 가지고, 그 조사관을 갖다가 뚧어버려야 하고, 묘한 깨달음을 얻을려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댄 솔바람 불고 칡덩쿨 우거진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런 곳에 들어가서 길이길이 샘[漏]이 없는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하노라.


여러분은 을축년(乙丑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한 시간 동안에 걸쳐서 전강선사(田岡禪師),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법문의 내용에 아마 72세 때, 77세에 열반하셨는데 72세 때 설하신 법문인 거 같습니다.폭포수가 쏟아지듯 하고, 저 태평양 바다에 그 산더미 같은 파도가 파도치듯 하며, 때로는 수십 질, 깊은 저 바다 밑까지 환히 들이비치듯 그렇게 또 잔잔한 가운데에 우리에게 너무나 감명을 주는 감동을 주는 그러한 법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왕궁에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히말라야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목숨을 바쳐서 수행을 하셔서 대도를 성취를 하셨고, 또 방금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중국에 순치황제(順治皇帝)도 19년간 천자(天子) 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느 산중에 들어가서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도를 닦으려면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출가(出家)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출가하면 문자상으로는 '집[家]을 떠난다[出], 집을 나온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무조건 우리가 살고 있는 부모형제 가정을 버리고 저 산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일반적으로는 출가라고 말을 합니다마는,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는 출가에 네 가지로, 네 가지 가운데에 참으로 어떻게 출가한 것이 바른 출가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몸은 출가했으되 마음은 출가하지 못한 그러한 출가가 있고, (둘째) 몸은 비록 속가(俗家)에 있으되 마음은 출가한 그러한 출가가 있고, 또 (셋째)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그러한 출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 몸도 마음도 다 같이 출가를 못 한 사람, 이렇게 해서 출가(出家) · 재가(在家)에 네 가지로 노나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심으로 도를 잘 닦는 것은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것이 되겠고.
속가(俗家)에 비록 몸은 담겨 있지마는 그 마음은 속가 탐진치(貪瞋痴)와 오욕락(五慾樂)에 염착(染着)됨이 없이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해 나가는, 세속을 버리지 아니하고 세속에 염착하지 아니하면서 도를, 수행을 여법(如法)하게 하는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되, 마음은 출가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출가하지 못한 것은 설명하지 아니해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를 닦으려면 몸도 마음도 출가를 하던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되 마음만이라도 출가를 하던지, 어느 길이 되었건 일단은 출가를 해야 도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하는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인도에 유마거사(維摩居士)나, 중국에 방거사(龐居士), 우리나라 부설거사(浮雪居士) 같은 그러한 대거사(大居士)는 몸은 비록 세속에 담아 있으되, 그 마음은 출가한 스님네와 조끔도 다름없이 출가한 그러한 모범을 보여주신 그러한 성현들인 것입니다.
세속에 몸이 담겨 있건, 그 몸이 세속을 벗어나서 스님이 되었건 그 마음이 출가하면 하등(何等)에 차이가 없는 것이고 또 깨달음을 얻은 그 궁극에 이르러서는 더군다나 추호도 차등(差等)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은 조사관(祖師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깨달음의 문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얻으려면은 우리 중생의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計較), 복탁(卜度), 이리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하는 그러한 우리의 사량분별로 이론적으로 따지는 그러한 마음, 마음이 끊어지... (녹음 끊김)

게송(偈頌)에 '솔바람 불고 칡덩쿨 우거진 사이로 달빛이 비치는 그러한 산중에 들어가서 길이길이 샘[漏]이 없는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한다' 그랬는데, 비록 차 소리가 나고, 기계 소리가 나고 모든 소음이,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음) <그치지 않는 세속에 살되 거기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집착하지 아니하면 벌써 그러한 분이 계신 곳 바로 그곳은 송풍나월하(松風蘿月下), 송풍나월하인 것입니다. 아무리 솔바람 부는...>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탔으면 그 화두가 바로 본참공안(本參公案)이라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에는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가 있지마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화두라 그렇지만 그 많은 화두 가운데에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선지식으로부터 지정 받은 그 한 화두를 본참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 가지고 공부를 해봐서 조끔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쪼끔 해보고, 그것 가지고도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이것 쫌 해보다 저 화두 가지고 좀 해보다 이렇게 하면 공부는 올바르게 되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도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했습니다. 잘되건 못 되건 무조건하고 그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하나만을 향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을 해 나가는데 눈을 부릅뜨고 눈에다가 잔뜩 독기를 품고서 눈을 부릅뜨고, 몸과 마음을 갖다가 잔뜩 무슨 이 용을 쓰듯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 가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무엇인가 공부가 좀 된 것 같다’ 그럽니다.

'눈에 힘도 주지 아니하고, 목에 힘도 주지 아니하고, 또 몸에 힘을 주지 아니하고 그래가지고 맹하니 우두커니 앉었으면 도무지 공부한 것 같지도 않고 화두도 잘 들리지도 아니하니까, 몸에도 힘을 주고, 목에도 힘을 주고, 눈에도 힘을 주어 가지고 잔뜩 용(을 쓰고) 해 나가야 공부 좀 된 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으나, 힘을 너무 힘을 주면 반드시 상기병(上氣病)이라든지, 또는 혈액이 고르지 못한 그러한 병을 유발할 우려성이 있는 것입니다.

몸은 어디까지나 단정하게 앉되, 목이나 등에다가 너무 지나치게 힘을 주어서는 아니되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너무 뚝! 부릅떠서도 아니될 뿐만 아니라 또 눈을 너무 작게 뜨면 스르르르—처음에는 눈을 감고 하거나, 눈을 조끔만 뜨고 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조용한 것같이 느껴지지만, 눈을 감고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혼침(昏沈)에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몸은 단정히 하되, 목과 몸에 힘을 다 빼고, 눈을 뜨되 눈에다 독기를 품지 말 것이며 평상으로 뜨되 자기 앉은 자리에서 약 2~3m 지점에다 눈을 떨구되 어떠한 특별한 점을 정해 놓고 그 점을 들여다볼 그럴 필요는 없고 눈은 평상으로 뜨되, 의식적으로 어떠한 점을 응시(凝視)하거나 주시(注視)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눈이 따악 정해지면 안정이 되면 마음도 또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 몸도 따악 자리가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을 깜박거리고 눈동자가 왔다갔다하고 이러면은 벌써 마음이 안정이 안된 증거고, 마음이 안정이 안되면 몸을 갖다가 몸이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부시럭대 쌓고, 꺼떡거려 쌓고 이래서...

그러나 처음에 처음으로 한 분은 다리가 저리는 수가 있습니다. 다리가 저릴 때에는 위에로 올렸던 다리를 밑에로 내리고, 밑에 있던 다리를 위로 교대해 교환을 하는 것은 그것은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얼마 동안을 지내면 다리가 저린 것도 차츰 없어지게 되고, 한 시간가량 고대로 앉았어도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내일부터 석 달 동안 여름 결제(結制)가 시작이 됩니다마는, 한 시간마다 일어나서 포행(布行)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더 앉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포행 시간에는 다 같이 일어나서 포행을 하고,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해서 다시 새로운 정신으로 와서 앉는 것은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고—눈이 안정이 되면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 몸이 안정이 되는데, 눈과 마음과 몸이 다 안정이 될 때에 그것으로써 능사(能事)를 삼지 말아라. '아 인자 되었다, 인자 공부가 잘되는구나!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그것에 만족한 마음을 갖지 말아라.
그 몸과 눈과 마음과 몸이 다 안정이 되어서 너무너무 고요하고 편안하고 그러니까 '아 인자 이거 되았다' 하고, 그러한 그 조용하고 깨끗한 마음에 빠져 가지고 화두(話頭)를 잊어버리면, 화두를 잊어버리면은 공(空)에 떨어져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과 마음과 몸이 안정이 된다 하드라도 그 고요하고 편안한 데에 집착을 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그 본참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그 의단(疑團)이, 그 의심(疑心)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과 몸이 편안하고 경계가 조용하다 하더라도 화두를 놓쳐 버리면은 그것은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도 안정이 되고, 몸도 편안하고, 너무너무 조용하고 깨끗하다가도 화두도 곧장 잘 들려 가다가도 뚝 변해 가지고—공부가 잘되는 것도 같고, 때로는 먹먹해서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마음도 산란하고 몸도 그렇게 괴롭고, 다른 때는 1시간이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지내갔는데, 5분 10분이 1시간보다도 더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면서 매우 괴로웁게 느껴지는 그러한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그러니 그럴 때에는 아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가 그 대단히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흔히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조용하고, 화두가 순일(純一)해서 잘되어 가면 '아, 참 내가 공부가 잘되어 간다' 하고 좋아하고.
조끔 잘된 듯하다 화두도 잘 안 들리고, 정신도 좀 맑지를 못하고, 몸도 편안하질 못하고 하면 '아이고 이 공부가 잘 안된다'고 굉장히 그 번뇌심을 내고 걱정을 하고, '이게 공부에 내가 인연이 없어서 그런가? 공부를 잘못해서 이런가?' 해 가지고 이 대단히 번민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걸 걱정할 만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고비야말로 앞으로 새로 발전을 하기 위한 좋은 계기가 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재미없는 그러한 경계(境界)가 온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잘 용심(用心)을 해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잘 잡드리를 해서 화두를 들고 나가면 또 얼마 지나가면 또 그러한 그 재미없는 경계가 차츰차츰 안정이 되고 고요해져서 화두가 잘 들리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경계가 이르르면 그 정(定)에 들게 되는데, 그 정(定)이라고 하는 데에도 삿된 정과 바른 정이 있는 것입니다.
눈도 고대로 아주 못박힌 듯 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눈까풀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생각도 전혀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몸도 아주 바윗덩어리처럼 고대로 까딱도 아니하면서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데 그런 경계에 들어가면 정에 들게 되는데 그 정에 사(邪)와 정(正)이 있다.
그러한 정(定)의 경지에 들어가서도 화두를 놓쳐 버리면 그 정은 삿된 정이 되는 게고, 그러한 정(定) 속에서도 화두 자기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면은 그것은 바른 정(定)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에 들게 되면, 들었다가도 또 포행을 한다든지 방선(放禪)을 할 때에 자리에서 일어서게 됩니다. 그러한 정에 들으면은 그 정이 행여나 흩어질까봐 일어서기를 싫어하고 그러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일어...(녹음 끊김) (처음~22분51초)





(2)------------------

몸과 마음이 가볍고 맑아서 일체처에—걸어가거나, 똥을 누거나, 세수를 하거나, 무슨 소지를 하거나, 뭐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무엇을 하거나 조끔도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그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드러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앉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가운데에서도 일여(一如)하게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이런 때 마음 씀[用心]을 매우 자세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마음 씀[用心]을 자세히 하느냐?
앉아 있을 때나, 섰을 때나, 공부를 해 나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할 정(靜)' 자와, '깨끗할 정(淨)' 자, 고요하고 맑은 그 두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앉아 있을 때는 고요하고 맑은데, 서 버리면 간 곳이 없고 흔들리고 화두도 잘 안 들리고 경계(境界)에 팔린다면 그 공부는 올바른 궤도에 들어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앉아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서서 포행을 하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또 무슨 운력(運力)을 하거나 하는 가운데에서도 화두가 떠억 들린 상태가 되어야 그래야 그 공부가 올바르게 되어간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상이, 자기 기분이 엄숙하고 그 풍모가 청정해서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동정경계(動靜境界)에 마치 가을 하늘처럼 탁! 트여서 맑은 그렇게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이것을 첫째 정절(程節)이라, 첫째 과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려면, 참선을 시작해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려면은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단계 중에 지금 말씀한 이것이 바로 첫째 단계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둘째 단계는, 그 첫째 단계—움직일 때나 고요히 앉어 있을 때나 조끔도 상관없이 그 마음 경계가 가을 하늘처럼 맑고 높이 툭 트여서 그러한 상태에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러한 경계에서 그 때 놓치지 말고 그 때를 타서 공부를 지어나가되 마치 맑은 가을 들물처럼, 여름에는 농사짓느라고 모다 들물이 흙탕물이 모다 내려가고 모다 그러는데, 농사 다 짓고 나면은 가을에 들에 나가면은 말간 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을 들물처럼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출출출출출출 끊임없이 흘러가되 계속 맑은 물이 흘러가고, 옛 사당(祠堂) 향로(香爐)처럼, 옛 사당에 들어가 보면 그 적적한 가운데에 향로가 떠억 놓여 있는데, 그 향로처럼 그렇게 지극한 정(靜)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적적(寂寂)하면서도 성성(惺惺)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해. '적적(寂寂)하다' 하는 것은 일체 번뇌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한 거고,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졸음이라든지 흐리멍덩하지를 않고 깨끗한 정신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적적하면서도 성성해야 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그래 가지고 마음 길이 다 끊어졌을 때에 이럴 때에 이 몸뚱이가, 이 우리의 육체가 이 세상에 있는 인간 세상에 있는 것도 느끼지를 못하게 됩니다.
다맛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는데, 그럴 때에 모든 번뇌 망상은 제절로 쉬어 버리고 그 경계는, 그 성성하고 적적한 그 경계는 환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빛이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녹음 끊김) ...가라앉어 버리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바로 이 단계가 두 번째 단계인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자칫 잘못하면 지각심(知覺心)을 내게 됩니다. 지각심.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와서 나를 탁 깨치게 해줬으면' 이러한 지각심을 내거나,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이러한 생각을 내면 순일지묘(純一之妙)를 끊어버려. 머지않아서 깨닫게 될 텐데, 그러한 부질없는 생각을 냄으로 해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대해(大害)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각심을 내는 이러한 허물이 없이, 앉았거나 섰거나 일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동정(動靜)이 한결같애. 앉았다고 해서 공부가 더 잘되고, 일어서서 움직인다고 해서 뭐 화두가 달아나고 그러지를 않고,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한결같이 되고, 오매(寤寐)가 성성(惺惺)해서, 잠을 잘 때나 잠을 깰 때도 한결같이 성성해서 화두가 현전(現前)하면,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떠억 현전하면,
그때의 경계가 어떠냐 하면은 맑은 물에 달이 비추듯이, 아무리 그 물이 파도가 치고 물결이 인다 하드라도 그 물에 비친 달은 활발(活潑)해서—가만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파도도 치고, 물결도 치고, 이리저리 하지마는 거기에 부딪치는 달빛은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모아지되 종내 그 밝은 빛이 없어지지 않듯이,
아무리 대질러 밖에서 어떠한 충격이 들어와도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경계가 흩어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그 경계를 흩어 버릴려고 해도 그 독로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그 의단이 독로한 상태가 없어지지 아니할 때에 그 마음 경계 고요한 것, 경계는 고요하고 밖으로 아무리 그 사람을 흔들어도 화두 의단은 흩어지지 아니해. 그런 경계가 흩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셋째 번 단계인 것입니다.

아무리 충격을 주고, 아무리 옆에서 떠들고 그래도 조끔도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이러한 경계가 바로 이 셋째 번 경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셋째 번 경계에 이르르면 의단이 파(破)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가 머지않다 이것입니다.

이 공부는 이것은 부처님 이후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숙세(宿世)에 많이 닦은 분은 이 세 가지 단계가 일시에 지나는 수도 있고, 차례차례 오는 수도 있고, 이것이 언하(言下)에 있기도 하고, 석 달 만에 있기도 하고 또는 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십 년 만에 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인(當人)의 숙세로 닦은 업적과 금생에 얼마만큼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간은 결정이 날 것입니다마는,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어떠한 형태로던지 거쳐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도 언제나 이러한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을 해 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망상이 일어나서 공부가 잘 안된다. 혼침이 와서 공부가 안된다. 주변이 시끄럽고 복잡해서 공부가 안된다' 이러한 말씀을 종종 호소해 오십니다마는, 참으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해서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나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을 하신다면 누구라도 한 분도 빠짐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서시고 입증을 하신 겁니다.


내일부터 석 달 동안 하안거(夏安居) 여름 결제가 시작이 됩니다. 방부(房付)를 들이고 이 선원(禪院)에 오셔서 공부를 하시는 분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백일기도 동참을 하신 분도 내나 이 결제에 입방(入房)을 하신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하시고, 여러분 가정에서 항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으로라도 들으시면서 열심히 정진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으면 될 수 있으면 앉아서 하시고, 앉을 시간이 없으면은 행동하면서 생활하시면서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서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를 의심을 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 회광자간(廻光自看)을 하시면 오히려 고요한 데에만 탐착한 그러한 공부보단 오히려 시끄럽고 복잡한 속에서 시시때때로 챙기고 돌이키고 잡드리를 하는 가운데 정말 살아 있는 정진을 하실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석 달 결제에 입방을 하신 모든 신도 여러분, 인간은 정말 무상한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고, 평소에 건강이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무상한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우리의 앞뒤에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상을 느끼지 않고서는 이 공부는 할 수가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형언도는 받았으되, 그 집행일이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도 빼놓지 아니하고 언젠가는 우리는 목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 날짜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그것이 언제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반드시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끔 이 자리에서 바로 이 시간을 그 일 초 일 초를 범연히 넘기지 말고 앉어 있으면 앉어 있는 대로, 서 있을 때는 서 있는 대로,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대로, 일할 때는 일하는 바로 그 자세에서 화두(話頭)를 돌이켜 관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언제 어느 때 올런지를 모르기 때문에 천재일우(千載一遇)로 그 깨달음이 올 그 찰나를 놓쳐 버리고 지나치면 또 (녹음 끊김) 몇 겁(劫)이 올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깨달음이 올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화두에 의심을 놓쳐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마치 나라에 중대한 어떤 발표가 있되, 시간이 정확하지 아니할 때는 언제나 다이알을 딱 맞추어 놓고 그 중대한 발표를 기다리듯이 우리의 깨달음도 또 우리의 죽음이 언제 올런지를... (녹음 끊김) 언제나 그 다이알을 맞추듯이 화두를 들고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모든 재앙을 방어하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효과가 있어서 언제나 화두를 가다듬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다잡이해 나가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어떠한 마귀도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해 나가면 앞에 말한 세 단계를 거쳐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진로, 생사진로(生死塵勞)를 멀리 벗어버리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녀.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꽉! 그 승두(繩頭)를 잡어서, 화두를 잡어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뼛골에 사무치는 추위를 만나지 아니하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피는 매화라야 그 향취가 진동한 법이지, 겨울에 강추위를 하지 못하고 이상 난동(異常暖冬) 끝에 매화꽃이 피면 별로 코를 치는 그런 향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정진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정말 특달(特達)한 회포(懷抱)와 신심(信心)과 결단심으로 여법(如法)하게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내일 결제 법요식에 모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모다 백일기도에도 동참을 하시고 또 여기 와서 직접 참선을 못하신 분도 가정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절에 나오신 분보다 못지않게 알뜰히 정진을 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22분52초~44분4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참선수투조사관~ / 출가(出家). 어떻게 출가한 것이 바른 출가인가? / 깨달음을 얻으려면은 우리 중생의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법문 / 본참공안(本參公案) / 참선 자세는 단정하면서 몸에 힘을 주어서는 안된다 / 공부가 안된 그러한 고비야말로 앞으로 새로 발전을 하기 위한 좋은 계기가 돌아온 것 / 삿된 정(定)과 바른 정(定) / 공부를 해 나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할 정(靜)' 자와, '깨끗할 정(淨)' 자, 고요하고 맑은 그 두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 삼개정절(三箇程節).

살아 있는 정진을 하라 / 우리는 이미 사형언도는 받았으되, 그 집행일이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 /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참선은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해 가지고, 그 조사관을 갖다가 뚧어버려야 하고, 묘한 깨달음을 얻을려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심으로 도를 잘 닦는 것은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것이 되겠고. 속가(俗家)에 비록 몸은 담겨 있지마는 그 마음은 속가 탐진치(貪瞋痴)와 오욕락(五慾樂)에 염착(染着)됨이 없이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해 나가는, 세속을 버리지 아니하고 세속에 염착하지 아니하면서 도를, 수행을 여법(如法)하게 하는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되, 마음은 출가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속에 몸이 담겨 있건, 그 몸이 세속을 벗어나서 스님이 되었건 그 마음이 출가하면 하등(何等)에 차이가 없는 것이고 또 깨달음을 얻은 그 궁극에 이르러서는 더군다나 추호도 차등(差等)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두(話頭)에는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가 있지마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화두라 그렇지만 그 많은 화두 가운데에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선지식으로부터 지정 받은 그 한 화두를 본참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 가지고 공부를 해봐서 조끔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쪼끔 해보고, 그것 가지고도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이것 쫌 해보다 저 화두 가지고 좀 해보다 이렇게 하면 공부는 올바르게 되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도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했습니다. 잘되건 못 되건 무조건하고 그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하나만을 향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과 마음과 몸이 안정이 된다 하드라도 그 고요하고 편안한 데에 집착을 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그 본참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그 의단(疑團)이, 그 의심(疑心)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과 몸이 편안하고 경계가 조용하다 하더라도 화두를 놓쳐 버리면은 그것은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삼개정절(三箇程節) ; 세 개[三箇]의 정절(程節). 세 가지 단계.
정절(程節) : ①길목. 길가는 데 종요로운 어귀. ②공부해 나가는 데 중요한 고비.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몽산화상이 총상인에게 보이심)」 p60~64. (가로판 p60~63)
趁逐工夫하야 始終에 不離靜淨二字호리니 靜極하얀 便覺하고 淨極엔 光이 通達하나니라

공부를 해나감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 정(靜)과 조촐할 정(淨) 두 자를 여의지 말지니, 고요함[靜]이 지극하면 곧 깨칠 것이요 조촐함[淨]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하나니라.

氣肅風淸하야 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가 是第一箇程節이니 便宜乘時進步이니라

기운(氣韻)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서 동정(動靜)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 같을 때, 이것이 첫번째 정절(程節)이니, 곧 마땅히 그 때를 타서 나아갈지니라.

如澄秋野水하며 如古廟裏香爐相似하야 寂寂惺惺하야 心路不行時에 亦不知有幻身이 在人間하고 但見箇話頭綿綿不絕하리니 到這裏하얀 塵將息而光將發하리니 是第二箇程節이니라 於斯에 若生知覺心하면 則斷純一之妙하리니 大害也이니라

마치 맑은 가을 들물 같으며, 옛 사당 안의 향로 같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하야 마음길이 끊어졌을 때, 또한 이 육신이 인간에 있는 것도 모르고 다못 화두만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음을 보리니, 이 속에 이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광명은 장차 발하리니, 이것이 두 번째 정절이니라. 여기에서 만약 지각심(知覺心)을 내면 순일(純一)한 묘(妙)가 끊어지리니 크게 해로우니라.

無此過者는 動靜에 一如하고 寤寐에 惺惺하야 話頭가 現前호대 如透水月華하야 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하야도 不散하며 蕩하야도 不失時에 中寂不搖하며 外撼不動矣리니 是第三箇程節이니 疑團이 破하야 正眼開가 近矣리라

이러한 허물이 없는 사람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고, 자나깨나 성성하야 화두가 앞에 나타나되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 여울물결 가운데 있어 활발발(活潑潑)하야, 대질러도 흩어지지 않으며 헤쳐도 잃지 아니한 때, 중심이 고요하야 흔들리지 아니하며 밖으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세 번째 정절이니 의단이 파하야 정안(正眼)이 열림이 가까우리라.

이 공부는 이것은 부처님 이후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다 이러한 삼개정절(三箇程節)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숙세(宿世)에 많이 닦은 분은 이 세 가지 단계가 일시에 지나는 수도 있고, 차례차례 오는 수도 있고, 이것이 언하(言下)에 있기도 하고, 석 달 만에 있기도 하고 또는 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십 년 만에 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인(當人)의 숙세로 닦은 업적과 금생에 얼마만큼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간은 결정이 날 것입니다마는,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어떠한 형태로던지 거쳐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해서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나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을 하신다면 누구라도 한 분도 빠짐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서시고 입증을 하신 겁니다.

이것은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모든 재앙을 방어하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효과가 있어서 언제나 화두를 가다듬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다잡이해 나가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어떠한 마귀도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해 나가면 앞에 말한 세 단계를 거쳐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