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전암(1~73)/(1~25)2023. 6. 6. 21:20

 

 

(복전암No.05)—1981년 관음칠성회 기도 회향(81.10.07) (80분)

 

(1) 약 43분.

 

(2) 약 37분.

 

(1)------------------


역겁전전무진등(歷劫傳傳無盡燈)이요  부증도별진장명(不曾挑別鎭長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임타우쇄겸풍란(任他雨灑兼風亂)헌데  누옥허공영자청(漏屋虛空影自淸)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역겁전전무진등(歷劫傳傳無盡燈)이요. 무량억겁(無量億劫)을 두고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 다함이 없는 등불이여.
부증도별진장명(不曾挑別鎭長明)이로구나. 일찍이 등(燈)에 심지를 돋구지 아니해도 항상 밝아 있구나.

임타우쇄겸풍란(任他雨灑兼風亂)인데, 비 뿌리고 바람이 냅대 불고, 비가 뿌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내버려 두건마는,
누옥허공(漏屋虛空)에 영자청(影自淸)이로구나. 북쪽 하늘에는 그 그림자가 스스로 맑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등불은 기름을 붓고 심지를 자주자주 돋구어 주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뿌리지 못하도록 잘 가리워 주어야만 그 등불은 꺼지지를 않고 광명을 발산할 수가 있건만, 억천만 겁을 두고 전해 내려오는 이 등불은 기름을 치지 아니하고 심지를 돋구지 아니해도 항상 그 등불은 계속해서 밝아 있고, 아무리 비가 뿌리고 폭풍이 불어도 이 등불은 까딱도 않고 꺼지지를 안 혀.
과연 이 등불이 어디에 켜져 있을까? 이 등불은 여러분의 가슴속에, 낱낱이 한 분도 빠짐없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이 등불이 켜 있습니다. 등불이 켜 있는데 왜 스스로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그 등불이 켜져 있는 증거를 내가 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등불은 어떠한 등불이냐 하면,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아는 놈, 욕을 하면 썽을 낼 줄 아는 놈, 칭찬하면 기뻐할 줄 아는 놈,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알고, 그때가 바로 그때 그 장면이 그 등불이 켜져 있는 증거입니다.

이 등불,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켜져 있었던 그 등불, 이 몸뚱이가 죽어서 땅에 묻거나 화장을 해서 자취가 없어져도 이 등불은 꺼지지 않는 등불,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밝아 있었고, 이 우주가 앞으로 몇억만 년 뒤에는 이 지구도 가루도 남지 않게 없어질 때가 옵니다마는, 설사 이 세계가 없어져 버리더라도 우리 낱낱이 가슴속에 켜져 있는 이 등불은 꺼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스스로 등불이 켜져 있는 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이요, 성불(成佛)이요, 생사 없는 진리와 내가 합해지는 곳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바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을 하신 분인 것입니다.


복전암(福田庵) 주지 스님이 일곱 살에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 가지고 서울에서 살다가 6·25 동란(動亂)을 맞이해서 대구로 피난을 가서 고생을 하다가 서울이 회복(回復)이 되자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서 대전까지 왔었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서울이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하니까 이 복전암에 들어와서 방 한 칸 얻어 가지고 동냥을 해 먹고살면서 여그서 붙여서 살다가 여러분과 인연이 깊어서인지 아주 여기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32년간을 오늘에 이르도록 온갖 고생을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어 예경(禮敬)하고, 기도하고, 여러 신도님들을 위해서 소원을 성취하도록 그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면서 매월 초이렛날에는 법회(法會)를 열어서 처음에는 큰스님네를 초청을 해다가 설법을 들려 드리다가 큰스님을 매월 초청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서 그래서 주지 스님 자신이 여러분을 향해서 어릴 때부터서 보고 듣고 배운 바를 여러분에게 정성스럽게 말씀을 해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정성에 감동이 되어 가지고 신도가 해마다 불어서 이렇게 수천 명의 신도를 모이게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목적으로 그 고생을 하면서 이 복전암을 이렇게 확장을 시켰느냐?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것이냐? 명예와 권리를 위해서 그런 것이냐?
오직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부처님의 뜻을 전해 드려 가지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깨달라서 그 고해(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해 드리려는 그 뜨거운 마음 하나 뿐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정성이 이토록 큰 힘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그 무서운 고행을 하신 끝에 대도(大道)를 성취해 가지고 팔십 평생을 오직 이 하나의 일을 위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묘법(妙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 부처님의 거룩한 뜻이 삼천여 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꺼지지 아니하고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동남아 · 중국 · 한국 · 일본으로, 20세기가 된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불교가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것을 가지고 고해(苦海)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고, 아무리 명예와 권리가 높아도 그것을 가지고 영원한 행복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선진국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이제사 참행복을 찾기 위해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불교를 갈망을 하고 있습니다. 근자에는 한국에 스님들이 미국으로 몇 분이 건너가서 그 사람들을 교화를 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마른 땅에는 비가 오면 잘 배어 들어가듯이—그 사람들은 예수교를 믿고, 물질문명(物質文明)만이 행복에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오든 사람들이 물질문명의 최첨단에 이르고 봐도 그것이 참행복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그렇게 불교를 잘 받아들이고, 열성을 가지고 불법을 믿고 알고 행할려고 한다고 그럽니다.

우리는 천육백 년 전에 불교가 한국에 전해 온 이후로 신라 · 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로 숭배를 받았고, 이조(李朝)에 와서는 유교를 숭배한 탓으로 탄압을 받았지만, 그 탄압을 받으면서도 온갖 수모를 받고 고생을 하면서도 부처님 믿는 마음을 변치 아니하고 죽음으로써 실천 수행해 가지고 부처님의 법(法)에 등불이 전전(傳傳)이 계승해서 오늘날에까지 이르러 왔습니다.

해방 후에 불교에 대한 탄압이 없어지고, 차츰 불교가 생기를 타서 오늘날에는 불교 신도가 천오백만에 이르고 있습니다. 숫자는 그렇게 많이 불어났지마는 참으로 올바른 불법(佛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느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복을 빌고 소원성취를 비는 그러한 불법을 불교의 전부인 줄 알고 믿고 있는 신도는 얼마나 되느냐? 불교의 정법(正法)을 올바르게 믿고 실천할 줄 아는 신도는 과연 몇천 분의 일이요, 몇만 분의 일인가? 엄격히 생각하면 정말 정신차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예수교 교회는 100m 거리마다 세워지고, 나날이 예수교가 번창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교도 나쁜 종교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지마는, 그이들은 입만 벌리면 불교를 우상 숭배(偶像崇拜)라고 비난을 하고, 헐뜯고, 그러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나날이 교세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예수교 확장하는 것이 겁나고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우상 숭배라고 비난을 하는 통에 아직 어린 학생들, 젊은 사람들은 그러한 말을 곧이 듣고 그리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과연 우상 숭배냐? 절대로 우상 숭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불교 신자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무나, 흙이나, 돌이나, 쇠붙이로 부처님 모습을 조성(造成)을 해 가지고 거기다 금물을 입혀서 모셔 놓고 있으니 정말 잘못 이해하면 우상(偶像)을, 그리고 그 앞에다가 돈을 바치고, 떡을 바치고, 과일을 올리고, 거기다 절을 하고 잘살게 해달라고 공을 들이고 하니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를 참으로 옳게 이해한다면 절대로 이 불교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원래 불법(佛法)은 아까 말한 우리에 마음자리, 본성자리, 천성자리 깨닫는 것이 불교(佛敎)에 전부인 것입니다.

불교(佛敎)에 '불(佛)'이라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깨닫는다'는 뜻이여.
'부처님' 하면 ‘깨달은 어른’이라 그 말이고,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이란 말이고, 불법(佛法)이라 하면 ‘깨닫는 법’이라 이 말씀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저 높은 하늘에 별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태양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무슨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런 것을 깨닫는 게 아니라,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여기 앉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20년 30년 어릴 적을 생각해도 시대가 환한 우리에 마음자리를 깨닫는 길이라 이 말이여.
우리는 ‘마음, 마음’ 듣고 마음이란 말은 알지만, 과연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겨 있는가를 깨달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것을 깨달라야만,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불교를 믿고 실천해야만 불교를 옳게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란 말이 나왔습니다마는, 우상(偶像)이라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는 거.
부처님 하면 그 ‘깨달은 어른’이란 말인데, 깨달음을 깨닫는 어른의 말씀을 믿고, 깨닫는 법을 실천해야만 불교(佛敎), 불법(佛法)을 옳게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여. 우리가 불법을 옳게 믿고 옳게 실천한다면 누가 불교를 우상 숭배라 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부처님과 같은 모습, 등상불(等像佛)을 모셔 놓고, 왜 거기다가 치성(致誠)을 드리느냐? 최초에 어떻게 해서 불상(佛像)을 모시게 되었느냐?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부처님께서—돌아가신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저 도리천(忉利天)에 계셨는데, 그 도리천에 올라가서 부처님의 어머님께 설법을 해 드리기 위해서 석 달 동안을 도리천에 올라가 계시고 이 지상에는 안 계셨습니다.
그때 부처님을 너무너무 간절하게 믿고 존경하던 우전왕(優塡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날마다 빠짐없이 부처님께 와서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에 법문을 듣고 그리고 가고, 그래야만 그날 하루에 마음이 편안하고, 그날 하루에 정치를 잘 다스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부처님이 안 계시니까 너무너무 허전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천하에 광고를 내 가지고 가장 훌륭한 조각가를 초빙을 해 가지고 전단향(栴檀香)이라 하는 향나무로—그 전단향은 그 향을 피면은 10리, 20리 밖에까지도 그 향냄새가 풍기는 그러한 훌륭한 향나무를 구해 가지고 부처님과 크기도 똑같고, 모냥도 똑같이 부처님을 조성을 할려고 그러는데, 아! 그 훌륭한 조각가지만 너무너무 부처님의 모습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어서 도저히 똑같이 조성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목련존자(目連尊者), 신통(神通)이 제일가는 목련존자한테 부탁을 해 가지고 신통력으로 도리천에 올라가서, 그 조각가를 끼고서 도리천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의 모습을 고대로 그려 가지고 눈여겨보고 그래 가지고 와서 고대로 그리고. 또 하다 보면 또 뜻과 같이 안 되면 또 가고 해서 여러 차례를 올라가 가지고 뵙고 와서 조각을 하고, 뵙고 와서 조각하고 그래 가지고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을 떠억 했습니다.
그래 모셔 놓고 보니, 도저히 살아계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같어. 그래서 거기다가 공양을 올리고, 참배를 드리고 그러면서 부처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를 기다렸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석 달 어머님을 위해서 설법을 마치고 떠억 돌아오셨는데, 아! 전단향(栴檀香)으로 깎아 모신 그 등상불(等像佛)이 불단(佛壇)에서 떠억 내려와 가지고 진짜 살아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영접(迎接)을 하는데, “무사히 설법을 하시고 돌아오셨습니까” 하고 절을 하니까, 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동안에 내 대신 중생교화를 하시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하셨습니까” 인사를 하는데, 부처님의 제자를 비롯한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보아도 어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인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말이여.

그때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를 「이 후(後)에도 나와 똑같이 생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모시거나, 또는 흙이나 나무나 돌이나 금속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알고 거기에 예배를 드리고 그 앞에서 경을 읽고, 그 앞에서 참선을 하고 그렇게 하드라도 살아 있는 나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에게 법문을 들은 것과 똑같은 공덕(功德)을 받으리라」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을 한낱 우리 범부(凡夫)와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지로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마야부인의 배를 빌려서 이 세상에 탄생을 하신 하나의 범부다. 범부가 설산에 들어가서 깨달라 가지고 그래서 참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되었으니, 아무리 위대해 봤자 사람이지 별수가 있겠느냐?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로서 하느님의 명을 받아서 중생을 고해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태어났지,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났지 진짜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이요, 범부는 인간은 아니다 이러한 식으로 생각을 하고 부처님을 별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佛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이 훌륭하지 아니하다고 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분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오히려 부처님이야말로 위대하게 보면 하느님보다도 몇천만 배 위대하고, 자비(慈悲)스러운 면으로 본다면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우리가 무릎 우에라도 앉어서 어리광이라도 부릴 수 있을 만큼 인자하시고 따뜻하신 할아버지와 같은 그렇게 느껴지는 참으로 위대하신 성현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부처님은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셨고,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시고, 하늘나라에 모든 왕(王) 가운데에도 최고에 왕이라 그렇게 사실이 그렇고, 그렇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하신 부처님이시면서도 부처님은 「나를 부처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설하는 이 법, 법신불(法身佛), 법신불을 참부처라고 너희들은 믿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부처님은 백천만 겁(劫)에 우리의 목숨을 다 바쳐도 한(限)이 없는 그러한 위대한 부처님이십니다.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지만,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그 길을 열어 주신 부처님이야말로 우리는 정말 목숨 바쳐서 은혜를 갚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 은혜를 갚는 길은 무엇이냐?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법(法)을, 그 위대한 법을 실천할려고 노력한 데에 은혜 갚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는 길이 그렇게 어렵고 먼 것이냐? 꼭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그 경(經)을 보면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어서 여간 공부해 가지고서는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이 삼천년을 두고 그 경을 읽고 연구하고 해 왔습니다.
또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의 경(經)을 한 글자 한 토도 어김없이 조로로록 외울 수 있는 부처님의 제자에 아란존자(阿難尊者)가 있었습니다. 그 아란존자를 비롯한 오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께서 평생 동안 설하신 법(法)을 다 결집(結集)을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한문(漢文)으로 번역을 해 가지고 봉안(奉安)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해인사에 가시면 그 팔만대장경을 경판(經板)을 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시기 전에 그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법(法)에 등(燈)을 누구에게 전하셨냐 하면은 그 경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우는 아란존자(阿難尊者)에게 전해야 할 텐데, 전법(傳法)을 아란존자에 하시지 아니하고 한마디도 법을 설할 중도 모르는, 그리고 평생을 누데기를 입고 거지처럼 두타행(頭陀行)을 하는, 거지처럼 얻어먹고 다니면서 당신 공부만을 철저히 하는 가섭(迦葉)이라고 하는 제자에게 법을 전하셨습니다.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해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당에도 왔다갔다하고 수천리 밖에도 왔다갔다하는 신통제일(神通第一)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있었고, 법을 설하기를 부처님 못지않게 그렇게 법을 잘 설하는 제자도 있었고, 십대제자(十大弟子)가 각각 그 장기가 있어서 훌륭한 제자가 많았지마는 거지로 다니면서 평생 누데기를 입고 사는 정말 저런 사람이 도인(道人)일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생긴 가섭존자한테 그 법을 전하셨다. 왜 그러냐?

불법(佛法)은 지식이 많은 데에 있는 것도 아니요, 경을 잘 읽고 외우고 해석할 줄 아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신통이 자재하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연설을 잘하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여.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계율만을 지키는 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여. 오직 참나를 깨닫는 데 있는 것이다.

그 가섭존자에게 법을 설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부처님께서도 내 대신, 내가 기운이 없고 그러니 니가 내 대신 법을 설해라 그렇게 가끔 권고를 하시면, 가섭존자는 아니올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법을 설하기보단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듣기를 더 좋아합니다. 법을 설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섭존자가 팔십에 이르러서 무거운 누데기를, 누덕누덕 기운 누데기를 입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아, 네도 나이가 팔십이 넘었는데, 젊었을 때는 누데기를 입었다 하지만 팔십이 넘어서 기운이 없는데 그렇게 무거운 옷을 입을 게 아니라, 내게 비단으로 맞는 가벼운 가사(袈裟)가 있으니 이것을 입으면 가볍고 뜨시니 이제는 누데기를 그만 입고 이것을 입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섭존자가 말씀을 하시기를 “아니올시다. 저는 이 누데기를 입는 것이 편안합니다. 조금도 무거움을 느끼지 아니하니 염려 마시옵소서. 저는 이 누데기를 입겠습니다” 이렇게 사양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열반(涅槃)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사방팔방에서 신통력으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날아서 신통력으로 날아서 모다 참예를 했습니다.
가섭존자는 저 수백 리 밖에 숲속에서 떠억 정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물론 가섭존자도 대나한과(大羅漢果)를 증득을 했기 때문에 물론 신통으로 날아올 수가 있었지만 너무너무 부처님을 존경하는 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일주일이나 한, 긴 여러 날을 걸려서 걸어서 부처님의 열반하신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가섭존자가 떠억 부처님 발밑에 절을 했습니다. 절을 하자 일주일 전에 열반하신 부처님, 관(棺) 속에 떠억 모셔 놨는데 관 밖으로 두 발을 주~욱 뻗으셨습니다. 일주일 전에 열반(涅槃)하신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떠억 뻗으신 뜻이 무엇인가?
이 도리(道理)를 깨달라야만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깨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법, 불교의 진리, 그 진리가 경(經) 속에 담아 있건마는, 경을 아무리 읽고 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이 깨닫는 법, 참선법(參禪法)은 교(敎) 밖에 전한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법을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교 밖에 따로 전한 법이다’

만약에 교(敎)가—경(經)을 잘 읽고 외우고 쓰고, 잘 해석하고 하는 것이 불법(佛法)이라면 응당 부처님께서는 아란존자에게 법(法)을 전하셨으련마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섭존자에게 이 법을 전하셨다 이 말이여. 그 가섭존자에게 전한 불법(佛法)이 그다음에는 누구에게 전해졌냐 하면 아란존자에게 전해졌다 그 말이여.

아란존자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백 일만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결집(結集)을 하는데 그때 아란존자가 ‘아, 이제 결집을 하면 응당 나를 중심으로 해서 결집을 하게 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오직 나만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법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외우고 있으니까 이제사 내가 참 대접을 받을 때다, 알아줄 때가 왔다’ 이리 생각했고 많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가섭존자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안 했습니다.

아란존자가 떠억 가섭존자 앞에 나와서 “부처님께서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부처님께서 남기신 발우(鉢盂)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섭존자가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著)하라. 문 앞에 찰간대(刹竿臺)를 꺾어 버려라”

찰간대(刹竿臺)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저 갑사(甲寺)나 마곡사(麻谷寺)나 해인사(海印寺)나 큰 절에 가면 법당 앞에 큰 돌을 나란히 이렇게 세워 놓고 구녁, 구녁을 뚫어서 세워 논 것이 양쪽에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 갑사에 가면 거기에 쇠로 높은 기둥을 세워 놨습니다. 그 꼭대기에다가 깃발을 달았습니다. 그 깃발을 달면 먼 데에서도 ‘아, 지금 절에 법회가 열리는구나’ 그것을 알고 그 법회에 참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무슨 큰 법회가 있던지, 법요식이 있거나 행사가 있으면 그 찰간대에 깃발을 달았던 것입니다.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著)하라. 저 문 앞에 찰간대를 꺾어 버려라’ 아란존자가 그 뜻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니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육두백판으로 다 외운다하더라도 이 뜻을 모르면 너는 이 오백 명의 성승(聖僧) 가운데 너는 끼지 못한다, 당장 나가거라!’ 내쫓아 버렸습니다.
아란존자가 가섭존자에 방(棒)을 맞고 쫓겨나 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 가지고 뒤꿈치를 들고 교족(翹足) 공부를 했습니다. 발 끄터리, 발가락만 땅에 닿게 선 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용맹정진을 어떻게 했던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대분심(大憤心)과 기상(氣像)이 나 가지고 가섭존자 있는 데를 쫓아가서 문을 뚜들었습니다. “어서 문 열어라” 고함을 치면서 문짝을 두드리니까 “니가 참으로 깨달랐으면 문을 열지 말고 들어오너라”
터~억 거기에서 아란존자가 그 문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가섭존자는 아란존자를 인가(印可)를 했습니다.(처음~42분45초)





(2)------------------

오백성중(五百聖衆)의 한 사람으로 인증을 해 가지고 그때 비로소 아란존자가 ‘어느 때 어디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출출출출... 외우는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른 오백 명의 성승(聖僧)들이 ‘과연 그렇게 틀림없이 그렇게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셨다’ 그러면 한 구절이 따악 결집(結集)이 되고, 또 그다음에 출출출출... 외우면 또 오백 명의 성승들이 ‘그때 과연 틀림없이 그렇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또 그 구절이 결집이 되고 해서 부처님의 경전이 결집이 된 것이 제1회 칠엽굴(七葉窟)에서 그렇게 결집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불경(佛經)을 잘 외었어도 부처님의 진리, 참나를 깨닫지 못한, 견성(見性)을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법(法)을 전해 받았다고 할 수가 없어. 확철대오한 뒤에사 가섭존자가 아란존자에게 제2대 조사(祖師)로 법을 전하셨다 그 말이여.
그다음에 아란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존자에게... (녹음 끊김) ...안에 도착을 해 가지고 중국에 오셔서 법을 전하셨어. 그래 가지고 77대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까지 법이 전해 왔다 그 말이여.

여러분 가운데에는 그 전강 스님을 직접 친견하시고, 불명(佛名)도 타시고, 화두(話頭)도 타시고, 설법(說法)을 들으신 분이 이 가운데는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얼마나 인자(仁慈)하시고, 그 음성과 그 설법하신 것과 그 게송을 읊으신 것을 아까 녹음을 통해서도 들으셨겠지마는, 그 설법을 듣고 신심(信心)을 내지 못하고, 발심(發心)을 얻지 못하고, 참나를 깨닫기 위한 참선(參禪)을 하지 아니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병(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병을 신기하게도 잘 낫을 수 있는 명의(名醫)를 만나 보고도 그 병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 명의가 주는 약을 먹지 아니하고, 그 명의가 주는 침 맞기를 거부한다면, 살기를 싫어한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병을 낫기를 바래고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명의가 주는 약과 침을 잘 맞고 그 사람이 일르는 대로 병 조리(調理)를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바라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확철대오한 선지식(善知識)의 법을 믿고 그것을 실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법이 옳은 줄 알고, 그 스님이 바른 선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돈 벌기 걱정, 자식 걱정, 살림 걱정, 좋은 옷을 입고, 좋은 패물을 갖기를 원하는 그러한 사치스러운 마음 때문에 인정(人情)에 끄달려서, 오욕락(五欲樂)에 끄달려서 이 생사해탈하는 법을 뒤로 미루고 등한히 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냐 이 말씀이여.

사람은 절대로 목구멍에 거미줄 치는 법이 없습니다. 굶어서 죽은 사람은,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굶어서 죽는다 하지만 굶어서는 여간해서 죽지 않습니다. 결국은 며칠 굶다가 죽을 때는 굶어서 죽은 게 아니라, 밥을 보거나 먹을 것을 보면 잔뜩 먹기 때문에 결국은 죽을 때는 먹어서 죽는 것입니다.
‘부황(浮黃)났다’ 그러는데, 굶어 가지고 부황난 게 아니라, 굶은 뒤끝에 잔뜩 먹어 가지고 먹어서 병나서 죽는 것이 그것이 부황나는 것이어요.
일주일을 설사 밥이 없어서 굶드라도 물을 마시면서 미음을 식혀서 먹으면서 잘 조리를 했으면 굶는 덕택으로 위장병도 낫고, 혈압병도 낫고, 당뇨병도 나을 텐데, 굶고 난 뒤끝에 잔뜩 먹고 위장이 터져 가지고 죽거나 부어 가지고, 얼굴 띵띵 붓거든, 부은 것은 굶을수록 살이 빠지게 되어 있지 절대로 붓게 되어 있지 않어. 잔뜩 처먹고 위장이 고장이 나니까 얼굴이 띵띵 부어 가지고는 헐근헐근하다 죽는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은 병이 나면 될 수 있으면 굶는 것이 좋습니다. 굶고 물만 마시면 어지간한 병은 다 낫습니다. 감기도 사흘만 굶으면 낫고, 배탈 난 것도 사흘까지도 안 갑니다. 하루만 굶어도 배탈 난 것은 낫습니다. 굶고 물만 마시면 99%는 병이 낫게 되어 있습니다.
이 참선도 무엇을 잔뜩 많이 읽고 외우고 알려고 하지를 말고, 될 수 있으면 마음 비우는 공부를 하면 참선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마음도 편안하고, 마음도 깨끗하고, 나를 깨달을 수 있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단 일분일초도 뺀한 틈이 없이 뭘 생각하고 분이 나고, 이 생각 저 생각 뭔 한 생각만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부르르르 타오르고, 타올랐다 꺼지면은 또 딴생각에 불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그러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그 끊임없이 타오르던 마음에 불이 꺼진다 그 말이여. 마음에 불이 꺼지고 지혜(智慧)의 등불이 환하니 밝아질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입니다. 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이 공부를 믿는 것이 불법을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 인제는 불공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고 집에서 그 공부만 해야겄다’ 그렇게 되면 절은 큰일이 납니다. 이 절이 있어야 스님네도 도(道)를 닦고, 절이 있어야 포교(布敎)도 할 수가 있고, 포교를 해야 여러분들이 불법이 무엇인가를 알고, 정법이 무엇인가를 알고, 모든 마음에 번뇌와 괴로움을 극복하는 법도 배우게 되고 생사해탈(生死解脫)도 할 수가 있고, 영원한 행복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네 자신만 먹고 입는 것이라면, 동냥해 먹고살면 실컷 먹고삽니다. 하루만 나가서 탁발(托鉢)을 해도 석 달 먹을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절을 지어야 하고, 법당을 크게 지어야 하고, 그 포교를 해야 하느냐?
불교는 자기만을 위하는 종교가 아니여. 나도 생사해탈을 해야 하고, 모든 사람도 생사해탈을 하도록 해야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해야만 할 그러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중노릇 하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고 쉬운 것이 아니여. 참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입고 싶은 것도 안 입고, 물론 이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지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보통 그러고 ‘스님네는 얼마나 편할까. 자식 걱정을 할 것이 있느냐, 집안 걱정이 있느냐, 얼마나 편안하고 좋을까?

사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이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3시 이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씻고, 그리고 나가서 도량석(道場釋)을 하고, 종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그리고 예경(禮敬)을 하면서 ‘모든 신도들이 모든 재난(災難)과 액(厄)이 소멸이 되고 모든 소원을 성취해서 정법(正法)을 믿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그러한 진실한 불자(佛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축원을 하고, 그리고 나서는 염불하고, 참선을 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 때에 설사 이름나는 대도인(大道人)이 아니라도 정말 그 앞에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할 만한 그러한 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석천왕(帝釋天王), 온 이 사천하(四天下)에 모든 중생들의 복과 죄를 관장하는 제석천왕이 원(願)을 세우기를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제자로서 출가해 가지고 도를 닦는 부처님 제자들이 어떠한 죄를 짓고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보지 않고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서약을 하고 원을 세우신 것입니다.

설사 물론 스님이라고 해서 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부처님과 똑같이 그렇게 모든 점에 있어서 훌륭하기는 어렵습니다. 잘못이 있어도 또 참회(懺悔)하고, 또 결심을 다져서 새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그래서 새벽마다 참회를 하고 원(願)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도 본의 아니게 어떠한 또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눈물을 흘리면서 팔에 향불로 팔을 지지면서 또 새로운 참회를 하고 서약(誓約)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평생을 부처님 앞에 먹물옷을 입고 도(道)를 닦은 것입니다. 그러한 스님네들이 있었기에 삼천년이 되도록 불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한 스님이 아니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러한 스님네가 잘 잡숫고, 잘 입고, 잘 거처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러면서 도를 닦고, 그 도를 닦은 그 결과로 얻어지는 도(道)의 힘으로 여러분에게 훌륭한 법을 설해 주십시요. 이렇게 해서 절이 필요하고, 법당이 필요하고, 부처님이 필요한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 돈 몇천 원 갖다 바치고, 쌀 몇 되 갖다 바치고, 그리고서 스님네들이 자기 앞에 굽신굽신하기를 바래고, ‘내가 이렇게 절에다 시주(施主)를 했는데, 나를 잘 받들어 모셔라, 나를 알아라’ 그래 가지고 아주 스님네 보기를 우습게 보고, 조끔 뭐 잘못이 있으면은 아주 ‘스님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막 눈 아래로 깔고, 우아래로 훑어보고.

보시(布施) 가운데에는 무주상(無住相)이 제일입니다. 돈을 몇천만 원을 갖다 바쳤건, 몇백만 원을 바쳤건, 쌀을 몇 가마니를 바쳤건, 불량답(佛糧畓)을 몇백 마지기를 바쳤다 하더라도 ‘바쳤다’는 생각이 없고 그럴수록에 겸손하고, 조끔도 내로라하는 생각이 없고.
설사 마을[사회]에서 대통령 부인이 되고, 장관의 부인이 되고, 장군의 부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끔도 아만(我慢)과 교만(驕慢)이 없이 수수하도록, 겸손한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때 그분이야말로 큰 복을 받게 되고, 정말 부처님으로부터 ‘이마를 만져 주심[摩頂]’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큰 복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 상(相)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하는 그러한 자만(自慢)하는 마음이 없는 그러한 보시를 하면은 그 보시 공덕(功德)은 위대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돌아가게 되느냐?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대관절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 마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뭣고?’ 한마디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보다도 수승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 말을 듣고 참선(參禪)이 불교의 근본이요, 최고라 한 것을 아심과 동시에 그럴수록에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성의를 다해서 스님네를 잘 받들고, 절을 잘 받들어야겄다’ 그러한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주지 스님이 아까 ‘비가 온다’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도 그만 듣고, 나보고 빨리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쬐게만 이야기하라고 나한테 귀뗌을 했는데, 내 말이 끝나야 비가 오지 절대로 비는 안 올 것입니다. 또 비를 좀 맞으시면 어떻습니까? 좀 배가 고파도 좀 참으셔야 하고, 평생 잡수는 밥을 조끔 늦게 잡숴야 점심이 맛있는 것입니다.

옛날이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 아! 그 가만히 놀고 있으니까 어디서 떡 한 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그 말이여. 아 그래 집어서 보니까 그 맛있게 생긴 떡인데, 아 그 집을라고 하니까 훌떡 뛰어서 저리 도망간다 그 말이여. 또 쫓아가면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해서 걸음걸음이 해서 계속 그 점점 이상해서 그 떡을 따라가니까 숲속으로 떡이 굴러 들어가.
그래서 계속 또 따라 들어가니까 바위 밑에 무슨 굴이 하나가 있는데, 아! 굴속으로 그 떡 덩어리가 훌떡 뛰어들어간다 그 말이여. 아 그래서 ‘그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소년이 또 굴속으로 따라 들어가니까, 들어가는 입구는 조그만한데 들어가서 보니까 큰 광장이 있는데 그 안에 부처님이 떠~억 모셔져 있다 그 말이여. 참 신기하고 묘하다 말이여.

아! 그런데, 부처님을 보고는 ‘참 이상하다, 웬 이런 데에 부처님이 계신가?’ 하고, 아 그 떡을 거기 가서 떡을 요렇게 집을라고 하니까 딱 집어지니까, 떡을 요리 보니까 흙이 묻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흙 묻은 데를 살살 띠어서 옆에다 놓고, 흙 안 묻은 속을 따악 부처님 앞에다 놓고, ‘여까지 왔으니까, 부처님 앞에는 떡도 올리더라. 천상 이것이라도 올리고 절을 해야지, 내가 맨 입으로 할 수가 없다’ 떠억 올리고 절을 하고는, 부처님한테 절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석 자리를 떠~억 하고 부처님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부처님이 삥긋이 웃으시면서 “너 잘 왔다, 내가 너를 이리 불러들였다. 너 이리 올라오너라”
“부처님, 어떻게 부처님이 있는 데를 나보고 올라가라 합니까? 그건 함부로 올라가다는 ‘지벌 맞는다’는데

괜찮다, 이리 올라오너라 간신히 탁자 위로 기어 올라가 가지고는, 내 무릎 위로 올라오너라 또 부득이 무릎 위로 올라갔습니다.

“내 어깨 위로 올라오너라”
“허! 거그는 못 올라가겄습니다”

“괜찮다, 이리 올라오너라” 그래서 간신히 팔을 듣고[딛고] 해서 어깨 위로 올라가니까, “내 이 모가지 뒤로 올라오너라
부채를 떠억 뭣이 그 불을 끄는 그 부채를 요리 주면서 “이걸 니가 가지고 있거라. 가지고 있다가, 조금 있다 어두워지면 도깨비란 놈들이 잔뜩 와서, 어디 칠보를 잔뜩 갖다가 이 내 앞에 마당에다 놓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럴 거다. 그러면 그때 이 부채를 가지고 탁탁 치면서 ‘꼬끼오’ 하고 닭 우는 소리를 해라. 그러면 도깨비란 놈이 혼비백산해 가지고 도망갈 거다”
“예, 알겄습니다”

그 숨을 죽이고 있으니까, 밤중쯤 되니까 도깨비란 놈이 뿔이 둘 달린 놈, 하나 달린 놈, 눈이 쭉 째진 놈, 송곳니가 두 개가 나와 가지고는 그런 도깨비들이 몇십 명이 와 가지고는, 아 과연 잔뜩 칠보를 갖다가 금 · 은 · 유리 · 호박 모다 그런 보물을 갖다가 마당에다가 가뜩 갖다 놓고는 춤을 추고 노는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옳다, 이때로구나’ 해 가지고는 그 부채를 가지고 탁탁 치면서 “꼬끼오” 하고 세 번 우니까, “아따, 이거 날 샜다”고 그냥 그놈들이 그냥 겁이 나 가지고 보물도 가지도 않고 그냥 똥이 빠지게 도망갔다 그 말이여.

도망간 뒤에 “이 보물은 니 것이다. 그 니가 이놈을 갖다가 한목 내놓으면은 공연히 니가 어디서 훔쳐 왔다고 모함을 받을 테니, 딱 갖다 깊이 단속을 해서 놓고, 이걸 가지고 논도 사고, 또 집도 새로 짓고, 곡식도 많이 해서, 가난한 사람이 오면 밥도 주고 할 것이고 또 병든 사람이 오면 약도 주고, 돈이 없어 공부 못 한 사람 있으면 돈도 주고 그렇게 해서 너도 필요한 만큼 쓰고, 많은 사람에게 이 재산을 풀어 주고, 너도 불법(佛法)을 공부해서 많은 사람에게 불법을 갖다가 펴라”
그렇게 부처님한테 부촉(咐囑)을 받고 떠억 왔는데. 그래 가지고 살살 논도 사고 집도 짓고 하니까는 아! 이웃집 놈이 “너, 어디서 그렇게 도독질해 왔냐? 너, 나 좀 다오. 너 안 주면 너 도독놈이라고 내가 고발을 하겠다”고.

“나보고 달라 하지 말고 이것은 함부로 주는 것이 아니고. 너 저 숲속에 가면 거기 굴이 있어. 너, 떡 한 덩어리 어디서 굴러 들어와 가지고 떡을 따라갔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그 얘기를 조로록 얘기했다 그 말이여.
“그래! 나도 그러면 한번 그렇게 해봐야겄다”

아! 그 사람 앞에 떡이 한 덩어리 어디서 굴러 떨어졌다 그 말이여. 잡을라고 하니까 계속 떡이 홀딱 홀딱 홀딱 뛰어서 그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아 되었다. 나도 인자 큰 부자가 되었다’ 좋아서 따라가니까, 아 굴속으로 들어가서 보니까 과연 부처님이 있다. 부처님 앞에 가니까 그 떡이 도망가질 않거든.
그래서 그 떡을 줏어 가지고 요리 보니까 흙이 묻었거든. 요리 흙 묻은 데를 그 띠어서 부처님 앞에다 놓고, 안 묻은 놈은 지 입에다 넣었다 그 말이여. “나도 배고프네”
아! 그래 놓고는 절을 떠억 저도 형식적으로 절을 석 자리하고 “나에게 좋은 보물을 나도 좀 많이 주십시요 안 들려? 나에게도 좋은 보물을 주십시요, 부처님. 아무개만 주고 나는 안 줄 수가 있습니까, 나도 많이 좀 주십시오. 나도 좀 잘 먹고 살아야겠습니다. 부처님은 평등하시고 일체중생에 자비로우시다는데, 왜 아무개만 주고 나는 안 주십니까?

이리 올라오너라 올라왔어. ‘올라오라’ 하기가 무섭게 막 모가지 뒤로 올라가. 올라가서 “그 부채, 나도 좀 집어 주시오”
“여기 있다” 부처님이.

가만히 있으니까 밤중에 도깨비들이 모여드는데, 정말 마당 가운데다 칠보를 번쩍번쩍 번쩍번쩍한 찬란한 보물을 갖다 놓고 춤을 추는데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녀. ‘옳다, 저놈들 빨리 쫓아 버려야 되겠다’ 부채를 가지고 탁탁 치고 “꼬끼오”
“저놈의 자식이 엊저녁에 아직 날도 새지도 않았는데 닭 울음소리를 하고 내 보물 쫓아 다 뺏어가더니, 저런 나쁜 놈의 자식” 도깨비들이 달라들어서 그놈을 끌어내려 가지고 뒤지게 뚜드러 패 놓고 보물을 다 짊어지고 가버렸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뻐르적 뻐르적 뻐르적.


여러분, 이것은 조그마한 간단한 동화(童話)에 지내지 못하지만, 여러분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것 사 가지고, 나를 낳아 주시고 나를 키워 주신 부모님은 뒤로 미루고 자기들 내외만 오붓하니 잡수지는 않습니까?
내 자식, 내 딸만 귀엽게 생각하고 부모 지리(至理) 못해서 고생하는, 고아원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자식 잘못 두어서 늙발에 고생하는, 양로원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고생하고 있는 부모를 생각해 보신 이 있습니까?

아무리 자기가 피땀 흘려서 큰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건 자기 돈이 아닙니다. 재산(財産)이라 하는 것은 크고 작고 간에 자기는 관리인(管理人)으로서 그 재산을 맡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면 죽을 때 다 가지고 가야 할 텐데, 아무리 억만금(億萬金)도 죽어갈 때는 한푼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지고 있을 때, 자기도 물론 먹고 입어야 하고, 자손도 가리켜야 하고, 필요할 때 써야겠지만 항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그것을 적절하게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와서 못 쓰고 있어 봤자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할 거, 자손에게 전해 줘 봤자 자손이 복(福)이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요긴하게 쓰고 행복하게 살지, 아무리 많은 재산을 주어 봤댔자 복이 없는 사람은 그 재산 때문에 오히려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고, 비명에 죽기도 하고, 오히려 불행하게 된 예가 참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에게는 재산을 많이 전해 주기보다는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가리켜 놓는 거,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을 전해 주는 것이 참으로 부모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관리인(管理人)이라 나는 재산을 임시(臨時) 맡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을 해야겠다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불법(佛法)을 위해서 불사(佛事)를 위해서 적절히 쓴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참으로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거, 재산으로 인해서 재앙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관리인이란 생각을 모르고 욕심만 부리고 자기만 생각하면 그 재산은 자기에 오래 붙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편의상 제석천왕(帝釋天王)이란 이름을 여기서 씁니다마는, 제석천왕이 나한테 재산을 관리하라고 맽겨 놨다가 그 사람의 관리 상태가 바르지 못하면 ‘안되겄다. 너한테 맽겨 놔 봤자 소용이 없다. 다른 사람한테 주어야겠다’ 당장 그 사람한테 뺏어다가 다른 사람한테 맽기는 것입니다.
정말 그 제석천왕에 뜻을 옳게 알아 가지고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그 재산이 자기 평생 동안 점점 불어날지언정 줄어지지 않고, 그 자손에게 전해서 자손도 관리를 잘하면 그 자손 대(代)에도 그 재산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3대도 가고, 4대도 가고, 5대도 가고, 9대도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자손이 관리를 잘못하면 슬쩍 뺏어다가 딴 사람 주어 버리고, 그 뒷끝이 비참하기를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것을 잘 보고 알고 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 대전 충남 지방에도 큰 부자가—이 대전 천지 그 사람 땅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만큼 그 큰 부자가 그이 죽자마자 자손들이 재판질을 하고 싸움하고 날거지가 될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비참한 사람 예가 현실에도 있습니다. 지방마다 있습니다.

산승(山僧)이 일러 드리는 말씀, 참선에 대한 말씀, 재산에 대한 말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말씀, 사회 국가를 위하는 말씀, 이 말씀 말씀을 깊이 뼛속에 새겨서 어떠한 일이 닥칠 때마다 그 복전암에서 그 말하던 송담(松潭) 스님 얼굴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생각하고, 주지 스님 얼굴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칫 잘못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때그때 바른길을 찾아서 실천하고 행해 가신다면 금생 일생 동안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행복한 삶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 법회가 끝나면 오늘 이 부처님 앞에서 법(法)을 설하고, 법문(法門)을 들은 그 인연을 길이길이 기념하고,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 아직 불명(佛名)을 타시지 아니한 분에게는 불명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작년에 또는 재작년에 또는 오래 8년 전에 전강 조실 스님이나 저에게 불명을 타신 분이 많이 계실줄 생각합니다.

불명을 타 가지고도 남이 받으니까 뭣도 모르고 자기도 받아 가지고, ‘그것이 무슨 좋은 것인가 보다 싶어서 너도나도 앞을 다퉈 받어 가지고 열어 보니까 글씨가 써졌고 도장이 찍어 있어. 이까짓 거 뭐
무당한테서 얻은 부작(符作) 한 장은 몇십만 원씩 주고 사다가 소중히 갖다 간직하면서 여기서 드리는 불명은 요리 떠들어 보고 울긋불긋하지 아니하니까 그냥 갖다가 어디 서랍에다 넣어 놓고.

“불명이 무엇 입니까?”
“아 그 불명을 받았는데, 보현심이던가, 문수궁이던가? 모르겠습니다. 또 주십시요”

불명(佛名)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부처님[佛]의 이름[名]입니다. 이 불명 하나 탐으로 해서 그분은 정식으로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 되었다고 하는 증서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표구를 해서 집에다 떠억 붙여 놓고, 그걸 한번 볼 때마다 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분이 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눈에 뜨일 때마다 ‘이뭣고?’ 한 번씩 할 때에 그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녹아질 텐데, 책상 서랍에다 넣어 놓고 불명(佛名)도 모르고,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불명은 불러 주고, 내가 부른 사람도 좋고, 부름을 받는 사람도 좋고, 불명을 ‘아무개’ 하고 부를 때마다 공덕(功德)이 그렇게 있는데, 그러니 오늘 드린다니까 ‘아이고, 그렇다면 나도 또 받아야겄다’ 그전에 받으신 분은 그전에 받으신 것을 찾으시면 되고, 또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눈 한번 감었다 다시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來生)입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뒤로 미루시지 말고, ‘나중에 돈 벌거든 부모한테 잘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돈 벌거던 시주(施主)를 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지끔 이만큼 살 때 부모한테도 잘하고, 부처님과 스님네에게도 잘하고, 이웃 형제간에도 잘하고. 많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여. 가직허면 작어도 좋고, 많으면 많은 대로 좋은 것이여.

뒤로 미루지 말고 어쨌든지 시간을 다퉈서 ‘이뭣고?’ 하십시요.(42분46초~1시간19분27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역겁전전무진등(歷劫傳傳無盡燈)~ / 우리 낱낱이 가슴속에 켜져 있는 꺼지지 않는 등불 / 복전암(福田庵)이 있는 목적 / 참으로 올바른 불법(佛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느냐?

불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자리, 본성자리, 천성자리 깨닫는 것이 불교(佛敎)의 전부이다 / 최초에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 우전왕(優塡王) / 부처님은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시다 /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그 길을 열어 주신 부처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지만,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위대한 법을 실천할려고 노력한 데에 은혜 갚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法)에 등(燈)을 가섭존자한테 전하셨다. 왜 그러냐? 불법(佛法)은 오직 참나를 깨닫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뻗으신 이 도리(道理)를 깨달라야만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깨닫는 것이 되는 것 / 참선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교 밖에 따로 전한 법이다 / 아란존자의 교족(翹足) 공부.

부처님의 법(法)이 가섭존자, 아란존자, 상나화수존자... 이렇게 전하여 77대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까지 법이 전해 왔다 /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바라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확철대오한 선지식(善知識)의 법을 믿고 실천을 해야 한다 / ‘이뭣고?’ 한마디에 그 끊임없이 타오르던 마음에 불이 꺼지고 지혜(智慧)의 등불이 환하니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보시(布施) 가운데에는 무주상(無住相)이 제일 /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 마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뭣고?’ 한마디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보다도 수승하다 / 참선(參禪)이 불교의 근본이요, 최고.
굴속으로 들어간 떡 한 덩어리를 따라 들어가 집어서 부처님께 공양한 소년 / 재산(財産)이라 하는 것은 크고 작고 간에 자기는 관리인(管理人)으로서 그 재산을 임시(臨時) 맡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을 해야 한다.

불명(佛名)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佛]의 이름[名]입니다. 이 불명 하나 받음으로 해서 그분은 정식으로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 된 것입니다 / 서로서로 불명은 불러 주면 둘 다 공덕(功德)이 있다.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켜져 있었던 그 등불, 이 몸뚱이가 죽어서 땅에 묻거나 화장을 해서 자취가 없어져도 이 등불은 꺼지지 않는 등불,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밝아 있었고, 이 우주가 앞으로 몇억만 년 뒤에는 이 지구도 가루도 남지 않게 없어질 때가 옵니다마는, 설사 이 세계가 없어져 버리더라도 우리 낱낱이 가슴속에 켜져 있는 이 등불은 꺼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스스로 등불이 켜져 있는 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이요, 성불(成佛)이요, 생사 없는 진리와 내가 합해지는 곳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바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을 하신 분인 것입니다.

원래 불법(佛法)은 아까 말한 우리에 마음자리, 본성자리, 천성자리 깨닫는 것이 불교(佛敎)에 전부인 것입니다.
불교(佛敎)에 '불(佛)'이라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깨닫는다'는 뜻이여. '부처님' 하면 ‘깨달은 어른’이라 그 말이고,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이란 말이고, 불법(佛法)이라 하면 ‘깨닫는 법’이라 이 말씀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저 높은 하늘에 별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태양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무슨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런 것을 깨닫는 게 아니라,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여기 앉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20년 30년 어릴 적을 생각해도 시대가 환한 우리에 마음자리를 깨닫는 길이라 이 말이여.
우리는 ‘마음, 마음’ 듣고 마음이란 말은 알지만, 과연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겨 있는가를 깨달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것을 깨달라야만,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불교를 믿고 실천해야만 불교를 옳게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를 「이 후(後)에도 나와 똑같이 생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모시거나, 또는 흙이나 나무나 돌이나 금속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알고 예배를 드리고 거기에 그 앞에서 경을 읽고, 그 앞에서 참선을 하고 그렇게 하드라도 살아 있는 나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에게 법문을 들은 것과 똑같은 공덕(功德)을 받으리라」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참선도 무엇을 잔뜩 많이 읽고 외우고 알려고 하지를 말고, 될 수 있으면 마음 비우는 공부를 하면 참선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마음도 편안하고, 마음도 깨끗하고, 나를 깨달을 수 있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단 일분일초도 뺀한 틈이 없이 뭘 생각하고 분이 나고, 이 생각 저 생각 뭔 한 생각만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부르르르 타오르고, 타올랐다 꺼지면은 또 딴생각에 불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그러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그 끊임없이 타오르던 마음에 불이 꺼진다 그 말이여. 마음에 불이 꺼지고 지혜(智慧)의 등불이 환하니 밝아질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입니다. 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이 공부를 믿는 것이 불법을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피땀 흘려서 큰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건 자기 돈이 아닙니다. 재산(財産)이라 하는 것은 크고 작고 간에 자기는 관리인(管理人)으로서 그 재산을 맡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면 죽을 때 다 가지고 가야 할 텐데, 아무리 억만금(億萬金)도 죽어갈 때는 한푼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지고 있을 때, 자기도 물론 먹고 입어야 하고, 자손도 가리켜야 하고, 필요할 때 써야겠지만 항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그것을 적절하게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 한번 감었다 다시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來生)입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뒤로 미루시지 말고, ‘나중에 돈 벌거든 부모한테 잘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돈 벌거던 시주(施主)를 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지끔 이만큼 살 때 부모한테도 잘하고, 부처님과 스님네에게도 잘하고, 이웃 형제간에도 잘하고. 많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여. 가직허면 작어도 좋고, 많으면 많은 대로 좋은 것이여.

뒤로 미루지 말고 어쨌든지 시간을 다퉈서 ‘이뭣고?’ 하십시요.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