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전암(1~73)/(1~25)2023. 6. 7. 10:07

 

 

(복전암No.21)—1990년 관음칠성회 기도 입재 법문(1990.10.01) (58분)

 

(1) 약 31분.

 

(2) 약 27분.

 

(1)------------------

편안하게 앉아서 법상을 향해서 눈을 딱 뜨고 그리고 법문을 들으십시요.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연화근발유니리(蓮花根發游泥裏)하면  각소거진불염진(却笑居塵不染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다.
마음자리, 마음에 근원을 몰록 깨달라서 자기 몸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보배를 개발을 하면 모든 중생들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사대 오온(五蘊)으로 이룩된 이 무상한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한 본래신(本來身)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화근발유니리(蓮花根發游泥裏)하면, 저 연꽃이, 그 깨끗하고 향그럽고 아름다운 그 연꽃이 그 뿌리는 더러운 흙탕물 속에 박고 핀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청정법신(淸淨法身) 자성불(自性佛), 자성불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이 청정법신이 들어 있는 것과 연꽃이 그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 뿌리를 박고 그렇게 아름답게 핀 도리와 똑같은 것을 알고 보면 정말 비긋이 웃음이 나올 것이다.


오늘은 경오년(庚午年) 음력 시월 초하루 관음칠성회 법요식입니다. 관음칠성회가 6 · 25 동란 직후에 발족이 되어 가지고 오늘날까지 40년의 역사가 쌓였습니다. 주지 스님의 원력으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청신남 청신녀가 해마다 수효가 불고 불어서, 처음에는 불과 몇십 명에 지내지 못하고 회원이 오늘은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칠성회 축원 명단을 보면 수천 명에 이릅니다.
관음회도 있고 칠성회도 있고 절절이 다 회원이 있지마는, 이 복전암은 관음칠성회라 그래. 시월 초하루부터 7일간 기도를 봉행하고 그리고서 동짓달, 섣달 또 내년 정월, 2월해서 내년 시월까지 열두 달 동안 다달이 초이렛날 법회가 있습니다. 기도법회가 있어. 기도도 하고 법회도 열고.

무슨 목적으로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기도법회를 열어 오고 있느냐?
첫째는 이 험난한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어떻게 하면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살아가며, 가정의 평온을 유지하며, 나아가서는 사회 국가를 위해서 항상 불자(佛子)로서의 기도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험난한 세상을 무사히 지내가기가 어려워.

그리고 둘째는 이 말세(未世)에 한 사람이라도 더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불법(佛法)을 믿고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이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한 것이다. 해마다 저 고봉 큰스님, 열반하신 고봉 큰스님 생존 시에는 고봉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고봉 큰스님 열반하신 뒤에는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를 초빙을 해서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40년의 한 해도 궐(闕)한 바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칠성회에 가입한 분은 신심(信心)이 안 날라야 안 날 수가 없고 또 정법(正法)을 안 믿을라야 안 믿을 수가 없어. 무엇이 정법이던가?

불교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세 가지 보물이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이요, 둘째는 법보(法寶)요, 셋째는 승보(僧寶)인데, 불보(佛寶)는 이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불상. 더 들어가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실달 태자(悉達太子)로 탄생하셔 가지고 출가하셔서 성불(成佛)하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더 확대해서 보자면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계시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여.
거기서 우리에서 가깝게 부처님을 찾자면 이 사대(四大) 오온(五蘊)으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자성불(自性佛), 이것이 바로 불보(佛寶)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목적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셔 가지고 중생 한 사람 한 사람 중생의 몸뚱이 속에, 각자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자기의 부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하신 것이다.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하셨는데 그 대장경의 뜻이 ’너의 자성(自性)을 깨달라라. 너의 자성을 어떻게 공부를 해 가지고 어떻게 수행을 해서 어떻게 깨달러라‘ 이것을 고구정녕(苦口叮寜)하게 중생의 천차만별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설해 놓으신 것이 바로 법보(法寶)다.

승보(僧寶)는 무엇이냐?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法)에 의지해서 법답게 수행을 해 가지고 그 부처님의 법을 끊이지 않도록 영원히 유통해 가는 그런 부처님의 제자를 승보(僧寶)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그 일부가 나무에 조각을 해서 해인사(海印寺)에 봉안이 되어 있지마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요 우주법계에 가뜩 차 있어. 나무에 조각해 놓은 것은 그 일부에 지내지 못한다.
낮에면 빛나는 저 태양, 밤에는 빛나는 달, 그 높은 하늘에 무수히 반짝거리고 있는 별들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이요, 봄에는 꽃이 피고 잎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이것들이 다 부처님의 상주설법에 하나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은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그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며, 푸른 풀 잎사귀 하나도 부처님의 몸뚱이가 아닌 것이 없어. 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체(體)여. 그러건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그저 평범한 해요, 달이요,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그 말이여.

어떻게 하면은 부처님의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법신불(法身佛)을 친견하며, 어떻게 하면 잠시도 끊이지 않고 설하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까?
언제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언제나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질라야 떨어질 수가 없고, 해태(懈怠)할라야 해태할 수가 없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빠질라야 빠질 수가 없어.

오늘 이 법요식에 참석한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를 뵈니 전부가 다 경건하고 엄숙하고, 이 법희선열(法喜禪悅)이 그 얼굴에 넘쳐흐르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바로 여러분의 눈동자를 통해서 역력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단 법회가 끝나서 댁으로 돌아가셔서 세속생활에 시비와 흥망성쇠 속에 휩쓸려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瞋心)을 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심(貪心)을 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절에 오실 때 뿐만 아니라 댁에 가셔도 또는 어느 직장에서도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부처님이 바로 자기 눈앞에 계시고, 자기의 몸속에 계신 것을 역력히 깨닫고 친견한다면 어느 겨를에 감히 부처님 앞에서 진심을 내며 탐심을 내며 어리석은 마음을 내겠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法)에 의해서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부처님의 법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지만 가장 우리가 알기 쉽고, 실천하기 좋고, 어디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여.

한문(漢文)을 몰라도 참선은 할 수가 있고, 설사 대학을 나오지 안 해도 참선은 할 수가 있고, 이 참선법은 남녀노소가 상관이 없고,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고, 아픈 사람은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성질이 고약해서 노상 진심을 낸 사람도 이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시작하면 차츰차츰 그러한 나쁜 성격도 순화가 되어 간다.
연꽃은 절대로 저 고산(高山)에 석간수, 그 맑고 깨끗한 석간수에서는 연꽃이 피지를 못합니다. 저 밑으로 내려가서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 만이 연꽃은 뿌리를 박고 그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청정하시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만덕(萬德)을 다 갖추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이시지만 그 부처님도 원래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가 법(法)에 의지해서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니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탐심(貪心)이 많고, 진심(瞋心)이 많고,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법의 배에만 타게 되면 부처님이 운전하시는 그 배에 의해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가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다, 소승(小乘)이다’ 승(乘) 자가 ‘탈 승(乘)’ 자입니다. 탈 것. 수레. 그 수레에만 타면 그 수레의 운전은 부처님이 하시니까 부처님 나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대승법이다 또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하는 것이여.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요  만로피대긱신산(謾勞皮袋喫辛酸)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하야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여. ‘부처다, 마음이다, 또는 한 물건이다’ 여러 가지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여. 그러한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하고 신령스러운 물건을 우리가 다 낱낱이 다 가지고 있어.
무량억겁(無量億劫)부터서 그놈이 천 가지 만 가지 탈을 쓰고 여기에 났다가 저기에서 죽고, 저기에서 났다 여기 와서 죽고. 그래 가지고 지은 업(業)에 따라서 천상에도 태어났다, 인간으로 태어났다, 축생에도 태어났다, 지옥에도 갔다, 그래 가지고 무수억겁(無數億劫) 동안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 왔더라.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며,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흰 눈이 펄펄 나려서 온 세계가 은색(銀色) 세계로 된다.
이러한 사계절을 따라서 나타나는 모든 경색이 경치가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여. 낱낱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서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 중생들에게 설해 주신 고구정녕(苦口叮嚀)한 설법이요 경전이더라.

세종대왕이 한문(漢文)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한글을 창제를 하셨다고 우리는 굉장히 그 세종대왕을 숭배하고 찬양을 하는데, 한글을 통해서 우리가 다 우리의 의사를 글로 표현할 수 있고, 남이 써 논 것을 읽을 수가 있고, 어린아이들도 금방 배우기가 쉽고 참 편리한 글자요, 세계에서도 으뜸가는 참 좋은 글이라고 찬양을 받고 있지만,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께서 설해 주신—사계절을 통해서 오색찬란한 꽃을 피워 주시고 나무, 풀, 가지가지 모냥으로 잎을 피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을에는 온갖 곡식 과일을 여물게 하고, 그 설악산이나 내장산에 가 보면 그 단풍이 꽃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 말이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곱다고 야단들이지만 고와 봤자 서리 한 번 오고, 두 번 오면 참 볼상 사납게 시들어서 떨어져버린다. 고운 것에 탐착해 가지고 그것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 단풍이 노랗고 빨갛고 한 그 단풍이 법신불(法身佛)이 설하신 경전이요, 법문(法門)이라고 한 것을 바로 봐 버린다면 빨간 단풍은 빨가서 좋고, 노란 단풍은 노래서 좋고, 서리가 와서 시들으면 시들어서 좋다 그 말이여.
단풍이 지나간 뒤에는 겨울이 다가와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아무 뜻도 모르고 눈이 오면 모다 좋다고 그런다 그 말이여. 눈이 와서 좋다고 한 사람은 좋지마는, 운전하는 사람은 영 안 좋아한다 그 말이여. 미끄러지면 사고 나고 사람 죽고 차가 뿌서지고 하니까 안 좋아한다 그 말이여.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어야, 눈을 통해서 법신불(法身佛)의 법문을 듣는다면 무엇이 그렇게 좋을 것은 또 무엇이며, 무엇이 그렇게 싫을 것이 또 무엇인가?

세계에 60억 인구가 있지마는 전부 다 자기의 지은 업(業)이 다른 만큼 생긴 모습이 다 다르다 그 말이여. 비슷한 사람은 있지마는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쌍둥이가 많이 닮았지마는 똑같지는 안 해. 왜 그렇게 다르냐 하면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달라. 한 부모 뱃속에서 나왔지마는 달라.
지은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빈부귀천도 다르고 일생 동안 흥망성쇠도 다르다 그 말이여. 잘나 봤자 거기서 거기고 권리가 높아 봤자 거기서 거기여. 좋아할 것도 없어.
그 자기가 왕이 될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권리를 쥐었으며,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세계 각국이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갖은 모략과 중상과 수단을 부려 가지고 그것을 서로 할라고 그러냐 그 말이여. 그래 봤자 평생하는 것도 못 되고, 하다가 잘못되면 쫓겨나고 죽고.

우리가 정말 목숨 바칠 곳이 어디냐 그 말이여. 명예냐, 권리냐, 재산이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인들 하루에 밥 세 그릇 이상 못 먹고, 죽어 봤자 한 평 이상 차지를 못해. 그런데 그 욕심이 한도 끝도 없이 그놈을 자기 것을 만들려고 야단이다. 형제간에 싸우고 부자간에 싸우고 재판하고 죽이고 이것이 무슨 짓이냐 그 말이여.

불법(佛法)을 믿은 사람은, 정법(正法)을 믿은 사람은 오욕락(五欲樂)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알게 될 것이다.(처음~31분25초)





(2)------------------

앞으로 10월 7일 날에는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원하는 사람에게 설해지게 되는데, 그 십선계는 재가 신도들이 가져야 할 가장 좋은 계(戒)—계는 오계가 있고, 십계가 있고, 또 250계 또 500계 또 보살십중대계와 사십팔경계가 있지마는 그 여러 가지 종류의 계 가운데에 지금 7일 날 설해지게 되는 십선대계(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그 말이여.
그걸 받아서 잘 지킴으로 해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최고로 잘 지키면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같이 거기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다가 미륵불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실 때 같이 이곳에 하강(下降)을 해서 중생교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쯤, 썩 그렇게 잘 닦지 못하고 중간쯤만 지키고 실천을 해도 어디에 태어나되 어느 세계에 태어나되 항상 훌륭한 가문에 좋은 몸뚱이에 왕(王)으로 태어나거나,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중생의 지도자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정법(正法)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성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제일 하급으로 닦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된다 하더라도 축생 중에 왕이 되어 가고, 그러다가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지옥에 왕(王)이다. 혹 귀신의 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귀신의 왕(王)이 되는 거여. 왕이 되어 가지고 있다가 머지않아서 다시 이 불법을 만나게 되어 가지고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여.

그러니 작년에 받으신 분은 금년에 또 안 받으셔도 좋고, 아직 받지 못하신 분은 사무실에 성명을 등록 신청을 해서 7일에는 꼭 참석을 해서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고 그 계첩(戒牒)을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해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 이것이 불법(佛法)의 궁극에 목적이고 최고에 정법(正法)이지만, 우리가 설사 법문을 듣고 정법을 믿는다 해도 우리의 수행력이 알차지 못해서 생각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하리라’ 해도 실지 생활 속에서는 많이 일에 끄달리고 파묻혀서 그렇게 철저히 못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달이 7일 동안에 법회(法會)를 열어서 부처님께 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또 법문을 듣고, 마치 차(車)가 가끔 보링(boring)을 한 것처럼 이렇게 최소한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법회에 꼭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이렇게 해서 또 한 달을 지내고 지내고 하다가 시월이 돌아오면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이 법요식(法要式)에 참석을 해서 아주 대법요식을 통해서 일 년 동안에 쌓인 죄를 다 참회(懺悔)하고 새로 태어나서 새로 일 년 동안을 기약을 하고 또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매월 7일에는 처음에 한 50명, 80명, 100명 하다가 지금은 한 3백여 명씩 이렇게 참석을 하신다고 하는데, 칠성회 회원이 수천 명인데 겨우 3~4백 명 정도 오신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적어도 천 명은 오셔야 하거든.
스님네가 모다 준비를 해서 공양을 해 드리고 할라면 힘이 드시겠지만, 스님네는 어떻게 하면 여러분으로 하여금 모든 죄업(罪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해탈도를 증득하도록 해 드릴까 하는 그 불보살(佛菩薩)의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써 아주 이 주지 스님을 비롯한 삼직(三職) 스님과 전 대중스님네가 발을 벗고, 선방에 가는 것도 뒤로 미루고 원력을 세워서 하시는데 스님네 준비하실 것 걱정해서 안 오실 것은 없습니다. 칠성회날 오시면은 그 음식을 정성스럽게 장만을 해서 공양을 준비를 하니까 마음놓고 오셔서 법요식에는 꼭 참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가게문을 다 닫고 전부 다 교회마다 새벽부터서 하루에 몇 축씩을 교회를 가뜩가뜩 채우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는 ‘집 볼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가게 볼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겨우 특수한 신심 있는 분만이 몇 분만 참석을 하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인 것입니다.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그 돈 조끔 더 벌어 봤자 백 석(百石) 밖에 못할 복(福)밖에 안 타고난 사람이 천석(千石)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라는 것도 한도가 있어. 아무리 안 입고 아주 피가 나오게 애껴도 다 천석군이 만석(萬石)군이 되는 거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 함부로 그렇다고 해서 낭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애낀다고 큰 부자 되는 것이 아니여.

큰 부자는 전생에 큰 복을 지은 사람이 큰 부자 되는 것이지, 애껴 가지고 보시도 안 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지도 않고, 쓸 데가 있어도 쓰지 않고 아주 구두쇠가 되어 가지고 아조 딱! 한번 그 손에 돈 들어가면은 곰팡이가 슬도록 애낀다고 해서 부자 되는 거 아녀. 버는 것은 쓸 데 쓰자고 버는 것이지, 애껴서 항아리에다 담어 가지고 땅속에 묻어놓고 굶어서 죽으면 뭣이 되냐 그 말이여. 죽었다 하면은 구랭이가 되어 가지고 그 항아리 옆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집 뜯으면은 ‘업’이라고 해서 구렁이가 대들보 있는 데서 나오는 예가 흔히 있는데. 쌀 곳간에도 있고, 장작 쌓아 논 데 속에서도 있고. 그게 ‘업’이라고 야단들입니다마는, 그 업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생(前生)에 자기가 못 먹고 안 쓰고 모아 논 재산, 그 재산에 탐착심(貪着心)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지 못하고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그걸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긍께 그것이 ‘업’이거든.
그것이 ‘업’이란 말을 좋게 해석해 가지고 ‘그 구랭이 쫓아내면 가난해진다’고 해 가지고 구랭이를 갖다가 못 나가게 살살 다시...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거 잘 몰라서 그러거든. 그래서 검박하게 잘 소중하게 재산을 아껴 쓰는 것은 좋으나 덮어놓고 탐착심을 가져서는 안 돼.

이 칠성 이 법요식을 맞이해서 기도를 성취하는데—부자 되기 위한 원(願)을, 무슨 장사 사업이 잘되기를 비는 그러한 분도 계실 것이고, 아들딸 대학에 꼭 합격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원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아들을 못 나신 분은 아들 낳기를 소원하신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병고에 시달린 분은 병고를 빨리 쾌차해서 건강한 사람 되기를 빌 것이고, 또 바람난 사람이 있는 사람은 바람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또 그런 원이 있을 것이고. 천 가지 만 가지 소원이 있으시겠으나, 그런 크고 작은 모든 소원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시면 반드시 성현(聖賢)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그 소원성취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그러한 중생의 탐심(貪心)을 충족시키는 데 그친다면 그 사람은 그 불법에 조끄마한 방편(方便)으로 설하신 그것밖에는 모르는 것이고, 정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철저하게 ‘이뭣고?’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꼭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만이 하는 것이 아니여. 선방에 들어가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하실 분은 모든 여건이 허락이 되신다면 아 그 이상 더 좋을 수가 없으나, 여러 가지 형편이 그러지 못한 분은 그냥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앉아서 ‘이뭣고?’
서서 ‘이뭣고?’ 걸어가면서 ‘이뭣고?’ 일하면서 ‘이뭣고?’
속상할 때 ‘이뭣고?’ 괴로울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기쁠 때 ‘이뭣고?’
자꾸 챙겨. 깜빡 잊어버리면 턱! 챙겨서 ‘이뭣고?’

자꾸... (녹음 끊김) 여러 가지 춤도 추게 맨들고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게 맨드는데, 곰이 귀는 물론 뚫려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그대로 하면은, 먹을 것을 주고 하면은 곰도 몇 가지 말은 알아듣고 북을 ‘둥둥 둥둥 두둥 둥둥’ 치면은 곰도 그 장단에 맞춰서 영락없이 춤을 춥니다. 코끼리도 추고, 곰도 추고 하는데.

그 미련한 곰을 어떻게 길을 들이냐 하면은 큰 깡통에다 따악 곰을 태워서 매달아 놓고 깡통 밑에다가 불을 핍니다. 처음에는 불을 약하게 피어. 약하게 피면서 북을 천천히 치거든. ‘둥~닥 둥~닥 둥닥쿵 쿵닥쿵’ 천천히 하다가, 그러면은 곰이 발이 뜨거우니까 이쪽 발을 들었다 저쪽 발을 들었다 그러거던.
그러면 불을, 화력을 돋구면은 이놈이 뜨거우니까 빨리빨리 들었다 놨다, 그놈에 따라서 북을 그때는 빨리빨리 쳐 주거던. 그래서 불을 아주 세게 피면서 북을 빨리빨리 치면 이놈이 ‘뚱딱뚱딱뚝딱뚝딱’ 이러다가, 또 화력을 차츰차츰 줄이면서 북을 천천히 치면 그때는 또 천천히 하다가, 아주 화력을 줄이면 그때는 아주 천천히 이러거던.
그렇게 해서 몇 번을 훈련을 시킨 다음에는 불을 피지 않고 그냥 북만 천천히 치면 천천히 하다가, 빨리빨리 치면은 빨리빨리 발을 옮기고, 인자 북만 치면 아무 때라도 북만 치면 북 맞춰서 그 장단에 맞춰서 춤을 영락없이 춘다 그 말이여. 이렇게 해서 곰을 가리킵니다.

그 미련한 곰도 그러한 북과 도라무통[drum桶]과 그 화력(火力)으로 해서 그런 방편(方便)을 써 가지고 영락없이 장단 맞춰서 멋지게 춤을 춰 가지고 써커스단에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할 수가 있거든, 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사람이 어찌 ‘이뭣고?’를 못할 리가 있느냐 그 말이여.
처음에는 안 돼. 그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되게 되어 있다 그 말이여. 개도 산수를 가르키면은 산수를 하고, 짐승도 영락없이 다 가리키면 다 하는데 사람이 못할 리가 없거든.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데 왜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재미가 없어. 인과설(因果說)을 얘기하면 재미가 나서 눈이 초롱초롱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하면은 처음에는 떠억 눈 감고 잘 들은 척하다가 꾸벅꾸벅 하거든. 최상승법을 설하면은 왜 잠이 오냐?
최상승법을 설하면은, 만약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그 최상승법을 잘 듣고 너 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참선(參禪)을 해서 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궁전이 흔들려 가지고 팍싹 주저앉어 가지고 마왕 파순이가 발 디딜 곳이 없어져. 그러니까 어쨌든지 마왕 파순이란 놈이 눈뚜껑을 막 처누르는 거여. 그러니깐 눈뚜껑이 천근만근(千斤萬斤)이 되어 가지고 아무리 눈을 뜰라고 해도 눈이 안 떠져. 자꾸 눈이 갬겨 가지고는 꾸벅꾸벅 졸고. 그 못 듣게 하는 거여.

‘졸음이 오는 것은 내가 어제 저녁,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더니 법문 듣느라고 잠이 왔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거든. 마구니란 놈이 눈뚜겅에 올라타 가지고 막 누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 마구니에게 지느냐, 마구니에게 지지 않느냐는 그 사람의 신심(信心)에 달려 있어.

내일 법문을 들으러 올라면은 저녁에 좀 일찍 자서 잠을 푹 자 놓고 오면은 괜찮은데, 밤에 그럭저럭 늦잠을 자 갖고 그 이튿날 와 가지고는 처음부터서 법문만 시작했다 하면 처음부터서 꾸벅꾸벅.
마구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그래서 선방에도 죽비만 치면 5분도 못 되어서 꾸벅꾸벅 졸거든. 마구니란 놈이 눈뚜겅이에 올라타 가지고 쪄누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중을 모르고.
그래서 그 마구니는 다 마구니지만 오신통(五神通)을 다 갖추어져 갖고 있거든. 수단과 방법—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실라고 할 때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도(道) 성취한 것을 방해를 한 것을 『팔상록(八相錄)』을 보면은 그 항마상(降魔相), 『팔상록』에 항마상을 보시면은 가지가지 마구니의 그 하는 수단을 아실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여. 법문 들을 이 법요식에 참석할라면 뭔 일이 그렇게 요리 ‘여기서 오라, 저기서 오라, 누구누구 결혼식한다, 누가 돌아가셨다, 누구 환갑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거든. 그것이 다 마구니가 들어서 어쨌든지 법회에 참석 못하게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진실로 이 신심이 있고 마구니를 이겨 낼 용기가 있는 분은 어지간한 것은 다 뒤로 미뤄 버리고 법회에 참석하셔야 하고, 될 수 있으면 미리미리 약속을 그 법회날을 피해서 약속을 하시고 이렇게 하신다면은 법요식에 아주 이 마당이 가뜩차고, 저 일주문 밖에 마당에까지 가뜩차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러면 마지막으로 게송(偈頌) 하나를 읊고 내려가고자 합니다. 이 법요식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기도성취하시고 업장소멸(業障消滅)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해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회상(佛會上)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을 하고 다짐을 합니다.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헌디  법성해중친인득(法性海中親認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하야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이다. 지혜 반야, 반야(般若)의 그 신령스러운 구슬이 그 조화가 무궁무진하다.
법성해중(法性海中)에 친인득(親認得)이다. 법성(法性)의 바다 가운데, 법성은 우리의 몸뚱이와 우주법계가 다 법성해(法性海), 법성의 바다여. 법성해 가운데에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반야의 영주(珠妙)를 우리는 캐야 할 것이다.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이요. 그 반야의 신령스러운 보배 구슬, 용지불갈(用之不竭)이요 취지무궁(取之無窮)이다. 취해도 취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써도 끝이 없는 그 반야의 영주가 우리의 오온색신(五蘊色身) 가운데에 그 보배 구슬이 있다 그 말이여.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여. 안으로 밖으로, 낮이나 밤이나 그 광명이 그 신기하고 묘한 힘이 반짝거리고 있다. 어떻게 반짝거리느냐?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빛나는,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바로 그때가 반야영주의 작용이 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탐심(貪心)을 낼 때도 그 탐심이 어디서부터서 나왔는가? 반야영주로부터서 나오는 한 모습이여. 그러기 때문에 탐심이 나자마자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은 찰나간에 났던 그 탐심도 정말 반야영주의 신령스러운 작용이요, 법신불(法身佛)의 한 법문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이렇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직장이 발 디디고 발을 들고 내리는 그 찰나찰나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순간순간이,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며, 무슨 업장이 소멸하지 못하며, 무슨 웬수가 용서하지 못할 웬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대승법(大乘法)이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31분26초~58분26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무슨 목적으로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기도법회를 열어 오고 있느냐? 이 험난한 세상을 무사히 지내고, 이 말세(未世)에 한 사람이라도 더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불법(佛法)을 믿고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불교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세 가지 보물이 있다 / 어떻게 하면은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법신불(法身佛)을 친견하며, 잠시도 끊이지 않고 설하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까? 자기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法), 바로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깨달라야만 된다. 참선법은 남녀노소,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게송)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 /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께서 설해 주신 법문 / 우리가 정말 목숨 바칠 곳이 어디냐? / 대승 십선대계(大乘 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 법회(法會)에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

‘이뭣고?’는 꼭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 곰을 춤추게 길을 들이는 법 / ‘이뭣고?’도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되게 되어 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데 왜 못할 것이냐? /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우리 도(道) 성취한 것을 방해. 신심(信心)으로 이겨 낼 용기가 있어야.

(게송)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 /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그 일부가 나무에 조각을 해서 해인사(海印寺)에 봉안이 되어 있지마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요 우주법계에 가뜩 차 있어. 나무에 조각해 놓은 것은 그 일부에 지내지 못한다.
낮에면 빛나는 저 태양, 밤에는 빛나는 달, 그 높은 하늘에 무수히 반짝거리고 있는 별들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이요, 봄에는 꽃이 피고 잎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이것들이 다 부처님의 상주설법에 하나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은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그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며, 푸른 풀 잎사귀 하나도 부처님의 몸뚱이가 아닌 것이 없어. 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체(體)여. 그러건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그저 평범한 해요, 달이요,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그 말이여.

부처님은 청정하시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만덕(萬德)을 다 갖추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이시지만 그 부처님도 원래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가 법(法)에 의지해서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니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탐심(貪心)이 많고, 진심(瞋心)이 많고,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법의 배에만 타게 되면 부처님이 운전하시는 그 배에 의해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가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다, 소승(小乘)이다’ 승(乘) 자가 ‘탈 승(乘)’ 자입니다. 탈 것. 수레. 그 수레에만 타면 그 수레의 운전은 부처님이 하시니까 부처님 나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대승법이다 또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하는 것이여.

십선대계(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그 말이여. 그걸 받아서 잘 지킴으로 해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최고로 잘 지키면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같이 거기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다가 미륵불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실 때 같이 이곳에 하강(下降)을 해서 중생교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쯤, 썩 그렇게 잘 닦지 못하고 중간쯤만 지키고 실천을 해도 어디에 태어나되 어느 세계에 태어나되 항상 훌륭한 가문에 좋은 몸뚱이에 왕(王)으로 태어나거나,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중생의 지도자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정법(正法)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성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제일 하급으로 닦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된다 하더라도 축생 중에 왕이 되어 가고, 그러다가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지옥에 왕(王)이다. 혹 귀신의 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귀신의 왕(王)이 되는 거여. 왕이 되어 가지고 있다가 머지않아서 다시 이 불법을 만나게 되어 가지고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해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 이것이 불법(佛法)의 궁극에 목적이고 최고에 정법(正法)이지만, 우리가 설사 법문을 듣고 정법을 믿는다 해도 우리의 수행력이 알차지 못해서 생각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하리라’ 해도 실지 생활 속에서는 많이 일에 끄달리고 파묻혀서 그렇게 철저히 못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달이 7일 동안에 법회(法會)를 열어서 부처님께 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또 법문을 듣고, 마치 차(車)가 가끔 보링(boring)을 한 것처럼 이렇게 최소한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법회에 꼭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이렇게 해서 또 한 달을 지내고 지내고 하다가 시월이 돌아오면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이 법요식(法要式)에 참석을 해서 아주 대법요식을 통해서 일 년 동안에 쌓인 죄를 다 참회(懺悔)하고 새로 태어나서 새로 일 년 동안을 기약을 하고 또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이다. 지혜 반야, 반야(般若)의 그 신령스러운 구슬이 그 조화가 무궁무진하다.
법성해중(法性海中)에 친인득(親認得)이다. 법성(法性)의 바다 가운데, 법성은 우리의 몸뚱이와 우주법계가 다 법성해(法性海), 법성의 바다여. 법성해 가운데에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반야의 영주(珠妙)를 우리는 캐야 할 것이다.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이요. 그 반야의 신령스러운 보배 구슬, 용지불갈(用之不竭)이요 취지무궁(取之無窮)이다. 취해도 취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써도 끝이 없는 그 반야의 영주가 우리의 오온색신(五蘊色身) 가운데에 그 보배 구슬이 있다 그 말이여.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여. 안으로 밖으로, 낮이나 밤이나 그 광명이 그 신기하고 묘한 힘이 반짝거리고 있다. 어떻게 반짝거리느냐?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빛나는,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바로 그때가 반야영주의 작용이 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탐심(貪心)을 낼 때도 그 탐심이 어디서부터서 나왔는가? 반야영주로부터서 나오는 한 모습이여. 그러기 때문에 탐심이 나자마자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은 찰나간에 났던 그 탐심도 정말 반야영주의 신령스러운 작용이요, 법신불(法身佛)의 한 법문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복전암(1~73)/(1~25)2023. 6. 6. 22:28

 

 

(복전암No.17)—1988년 관음칠성회 기도 입재(1988.10.01) (68분)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소음이 다소 많고 끊김이 있으니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36분.

 

(2) 약 33분.



(1)-------------------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개개(個個)이, 낱낱이 모든 사람의 얼굴 앞에 밝은 달이 희고, 사람 사람이 다리 밑에, 다리 아래에 맑은 바람이 불어. 하늘에 뜬 휘황찬 밝은 달이 누구 앞이라고 해서 특별히 밝게 비춰 주고, 어떤 사람 앞에는 비춰 주지 않고 한 그런 법이 없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누구 앞에나 똑같이 다 환히 밝혀 주고 있더라.
봄이나 가을에 맑은 바람이 불 때에는 누구 앞 다리 밑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 불어 주지, 이쁘다고 해서 더 시원한 바람을 불어 주고, 나쁜 사람이라 해서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그렇지를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 맑은 바람이 불고 있더라.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니,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그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지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아름답게 핀 꽃가지에 새가 올라가 울더라.

무슨 거울을 타파(打破)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졌냐?
그 거울이라 하는 것은 모든 반연(攀緣)을 따라서, 반연 따라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가지고 육식(六識)의 무명(無明) 망상(妄想)이 동요하는데, 그 경계(境界) 따라서 경계를 반연해 가지고 육식이 발동하는 것이 마치 거울 앞에 나타난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과 같다 그 말이여.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비추이는 그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거울도 없어져 버리고 또 거기에 비추던 청황적백(靑黃赤白) 삼라만상 모든 밖에 경계도 다 없어져 버리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이 말이여.

저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보살(菩薩)과 일체중생(一切衆生) 내지는 짐승과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그 본 성품은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어. 다 똑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불성(佛性)이여. 그러건만 경계에 반연해서 번뇌망상으로 인해서 그 원만구족한 불성이 가리워져 가지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이여.


오늘 무진년(戊辰年) 시월 초하루, 이 복전암에 매년 거행하는 행사로 칠성회 관음기도가 봉행되는 그 입재날입니다. 40년, 40년 전부터서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오늘날까지 거행한 법요식입니다. 그전에는 고봉 스님께서 설법을 해 주시고, 그다음에는 전강 선사께서 설법을 해 주시고, 전강선사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는 부득이 산승(山僧)이 와서 해마다 이 법상에 올라왔습니다.
해마다 거행하게 되면 사람들은 만성(慢性)이 되어 가지고 ‘으레히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무런 마음에 감동도 없고, 마음을 가다듬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예사로 그날그날을 지내게 됩니다.

사람의 목숨은 이 세상에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 나 가지고 오래 살면 칠팔십 년, 그렇지 않으면 육칠십 년, 빨리 죽으면 삼사십 내지 열살 미만에도 죽고, 나와서 어려서도 죽고, 천하에 믿지 못하고 무상(無常)한 것이 이 사람의 목숨입니다. 이 무상한 세계에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나서 숙세(宿世)의 수승한 인연으로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만났습니다.
온 세계 사람들은 이 허망한 목숨이 영원한 줄 알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무상하고도 짧은 인생에 우리는 불법(佛法)을 만났으면서도 그 불법의 위대함과 감사함을 아지를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참나를 깨닫지 못한 채 그럭저럭 이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근기(根機) 따라서 이 세간(世間)을 보게 되는데, 이 세상은 똑같이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있고, 아침에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고, 춘하추동 사시절 따라서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오곡백과가 결실을 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립니다. 이 똑같은 세계를 보고서 근기에 따라서 그 관점이 다릅니다.

마치 물은 한 물인데, 고기는 그 물을 보고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는 집. 조끔도 그 물속에 헤엄을 치고 오르락내리락 다니면서 숨이 맥힌 줄을 모르고 아주 편안합니다. 자기 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여.
그 다음에 아귀(餓鬼)는 물을 보고서 불인 줄 알고 겁을 냅니다. 아귀는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로 알고 그놈을 먹는데, 물을 먹기만 하면 목구녁에서 불이 훨훨훨훨 타 가지고 몸뚱이가 타 죽어 갑니다. 그래 몇 번이고 그렇게 해보다가 확실히 ‘아하, 저것은 불이로구나’ 이렇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돼. 그래서 아귀는 물을 보고 불인 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 하늘나라에서는, 하늘나라에 모다 신(神)들은 지상(地上)의 물을 보고서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리(琉璃)라고 생각을 해. 번쩍번쩍 훤히 그러니까 하늘나라 있는 사람들은 물을 보고서 유리로 생각을 한다 그 말이여.

사람은 물을 보고서 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귀는 아귀대로 달리 보고,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은 하늘나라 사람대로 달리 보고, 고기는 고기대로 달리 보듯이, 이 세계에 삼라만상 두두물물 이 온 세계를 갖다, 세간(世間)을 갖다가 범부(凡夫)는 세간낙(世間樂)을 보고 그것을 낙(樂)이라고 생각한다.
오욕락(五欲樂)을 보고서 참 기쁘게 생각하고, 그 오욕락이 참 좋은 것인 줄 알고 그 오욕락에 젖어서 거기에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거기서 유희(遊戲)를 하면서, 오욕락이 진짜 괴로움에 원인인 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에 대한 거, 명예 권리에 대해서,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편안한 그 안락에 대해서 그리고 잠자는 거,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이 다섯 가지의 오욕락을 그것이 인간으로서 최고에 목적이라 생각을 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쇠고랑 찰 줄도 모르고, 감옥에 갈 줄도 모르고, 그것을 마음껏 무제한으로 즐기다가 지옥에 갈 줄을 몰라.

불법(佛法)을 믿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나아가서 확실히 도(道)를 닦아서 깨달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과법만 믿어도 그런 짓을 아니할 텐데, ‘아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재산, 명예, 권리, 먹을 거, 잠자는 거, 그러고 이런 것들이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리 생각이 들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만 누리고 욕심을 안 내도 될 텐데, 무제한으로 욕심을 내 가지고, 장관한 사람은 장관한 대로, 대통령한 사람은 대통령한 사람, 무제한으로 욕심을 내 가지고 온 세계를 자기 혼자 다 차지하고, 다 누리기 위해서 법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백성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막 그냥 긁어 담다가 쇠고랑을 찬 사람이 지금 우리 이 현재에 얼마나 많냐 그 말이여.


소승(小乘), 이승(二乘)들은,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 이승들은 ‘이 삼계(三界)를 고(苦)라’ 이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여. 정말 이 삼계는 괴로운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이 삼계는 불집이다(三界火宅)’ 이렇게 생각을 해. 소승에 있어서 성문과 연각들은 불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은 이 삼계에서 벗어날까?’

삼계(三界)라 하면은 생사인데, 생로병사(生老病死)인데, 늙어서 병들어서 죽는 전체가 이 생로병사요, 이 모든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요, 우리의 육체는 생로병사요, 우리의 마음 생각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낳다 하면은 늙고, 늙었다 하면 병들고, 병들었다 하면 죽게 되니까 그러니까 전부가 고통이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안 죽는 사람이 누가 있냐 그 말이여. 이 세상에 생겨난 물건치고 결국은 부서져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늙어서 병들어서 죽으니 이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니, 어떻게 하면은 늙어서 병들어 죽지 않느냐? 따져보면은 태어나지 아니해야만—태어나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아니하면 늙을 것도 없고, 병들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다. 그래서 소승들은 태어나지 않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어. 그래서 생각도 일어나면 없애 버리고, 일어나면 없애 버리고 해 가지고 생각도 안 일어나게 맨들고, 몸뚱이도 태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평생 적공(積功)을 들여서 이룬 것이 소승사과(小乘四果)다 그 말이여.

그러면 보살(菩薩), 모든 보살들은 이 삼계(三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삼계는 공(空)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 말이여. 모든 반연(攀緣)해서 일어나는 생각도 그것도 본래 공(空)한 것이요, 우리가 보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도 전부가 다 공(空)한 것이다.
공(空)한 것이 본래는 공한 것인데, 중생이 망령된 생각으로 보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될 뿐이지 그 자체는 공(空)한 것이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눈병 난 사람이 이 허공에 아무것도 없건마는, 마치 무슨 허공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눈병 난 사람이 볼 때는.
눈병이 없는 사람이 보면 말간히 깨끗하니 아무것도 없는데, 허공에. 눈병 난 사람이 보면은 침침해 가지고 무슨 꽃이 피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눈병 든 사람의 눈으로 보듯이, 망령된 중생(衆生)의 무명심(無明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세계가 모두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여. ‘생로병사(生老病死)도 본래 없건마는, 본래 공한 것이지만 중생의 망령된 무명 번뇌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생사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지는 모두가 다 공(空)한 것이다’ 이렇게 보살들은 보는 거여.

그러면 모든 부처님은 이 삼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 삼계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묘(妙)한 것이다. 다 묘하게 밝은 마음이다. 오직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묘(妙)하게 밝은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우리 중생들은 ‘마음’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뭘 보면 눈을 통해서 뭣을 볼 줄도 알고, 귀를 통해서 무슨 소리도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냄새도 맡을 줄도 알고, 혀를 통해서 모든 맛을 볼 줄도 알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느낄 줄을 알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것, 이놈이 마음인 줄 안다 그 말이여.
그러나 부처님이 보실 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댕기는 그놈 뿐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도 마음이요, 이 하늘도 마음이요, 태양도, 별도, 달도,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전부가 오직 한마음 뿐이다 이것이여.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따로 없다’ 이렇게 부처님은 보시는 것이여.

그러니 우리 범부(凡夫)가 보는 것과 소승, 성문(聲聞) 연각(緣覺)이 보는 것과 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그런 보살들이 보는 것과 모든 부처님이 보는 바가 그렇게 다 다르다 그 말이여. 똑같은 삼계를 두고서 보는 바가 달러. 그렇게 달러.

그런데 부처님은 왜 때로는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삼계(三界)가 다 공(空)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삼계가 다 오직 한마음이다’ 이렇게도 말씀하셨냐 그 말이여.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부처님은 중생에게는 중생이 알아들을 말로써 설하셨고, 소승에게는 소승이 알아들을 말로써 설법을 하셨고, 보살에게는 보살이 알아듣는—보살도 대승보살, 또 중승보살, 그 보살도 여러 계층이 있어서 그 각기 그 계층의 보살에 맞춰서 설법을 하셨고,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설법을 하셨어. 그래 놓은 것이 49년 동안 설하신 12부 경전이요, 팔만사천 경전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모두가 다 방편설(方便說)이여.

아무리 훌륭한 법(法)을 설한다 하드라도 자기 근기(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소용이 없어. 그 근기에 맞춰서 법을 설해 주어야 일단 알아듣고, 그놈을 알아들은 다음에는 또 조끔 더 깊은 법문을 하고, 또 그 법문을 알아들으면 또 저 더 높은 법문을 설해서 차츰차츰 그 근기에 맞춰서 법을 설하시다 보니 팔만사천(八萬四千)의 그 많은 법을 설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궁극에 가서는 부처님은 무슨 법을 설하셨냐 하면은 「나는 한 법(法)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법을 설하셨어. 그렇게 많은 설법을 하시고서도 「한 법(法)도 설한 바가 없다」

그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신 분이 아니고, 헛된 말씀을 하신 분이 아니고, 실답지 않은 바를 설하신 바가 없는데, 그렇게 많은 설법을 하시고서도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이게 무슨 말씀일까?
중생의 생각으로는 많은 법을 설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부처님 분상(分上)에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면 우리 중생들은 어떻게 부처님의 법문을 알아듣고, 어떻게 마음을 닦아 가서 우리도 해탈도(解脫道)를 증득을 해야 할 것인가?


부용산(芙蓉山), 중국에 부용산에 영훈(靈訓) 선사가 처음으로 귀종(歸宗) 선사라고 하는 큰 도인을 가서 친견을 했습니다.
그 귀종 스님께 묻기를 “어떤 것이 이 부처입니까?”
귀종 선사가 대답하기를 “내가 너에게 부처님을 말해 주기는 어렵지 않지마는, 니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할까 두렵다”

그러니까 그 영훈 선사가 “큰스님은 가장 진실한 말, 실다운 말을 하시는 도인으로 내가 믿고 있는데, 감히 어찌 제가 큰스님의 법문을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귀종 스님이 “곧 니가 바로 부처님이니라”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영훈 선사가 “그러면 어떻게 보림(保任)을 해 가겠습니까?”
귀종 스님 대답하기를 “일예(一翳)가 재안(在眼)에 공화(空花)가 난타(亂墮)니라. 한 티가 눈에 있으니 공화(空花)가 어지러히 떨어지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영훈 선사는 그 ‘니가 바로 부처라’ 한 귀종 스님의 한마디 말씀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렸고, 확철대오한 뒤에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난타(空花亂墮)라’ 한 그 말 한마디에 깨달은 뒤에 보림(保任)을 하는 법을 여지없이 알아 버렸습니다. 터득을 해 버렸습니다.

지금 이 복전선원 법당 안과 마당에 천 명에 가까운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였습니다. 영훈 선사는 ‘니가 바로 이 부처다’ 한 귀종 선사의 한마디에 확철대오를 했거니와 금일 이 자리에 모인 사부대중은 과연 이 법문을 듣고서 과연 확철대오를 했겠느냐, 말았느냐?
이 가운데에는 반드시 ‘니가 바로 이 부처라’ 한 이 한마디에 여지없이 바로 봐 버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법문을 여지없이 바로 봐 버린 사람이 있건마는, 어째서 이 가운데에는 아직도 그 말은 알아들으면서도 왜 바로 그 말을 바로 깨닫지를 못했을까?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영훈 선사는 여지없이 귀종 스님의 그 말을 조끔도 의심 없이 바로 믿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버렸어. 조끔도 의심이 없기 때문에 ‘바로 자기 자신이 부처다’
믿음 하나가 철저해 버리면 긴 법문이 필요 없고, 많은 경전이 필요가 없어. ‘네가 바로 부처다’ 하고 그 말 한마디면 무슨 더 구구한 법문이 필요할까?

「삼계가 곧 한마음이다.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화엄경』에 첫머리에 있는 게송(偈頌)인데, 입으로는 우리는 수없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날마다 외우고, 귀에 따껭이가 앉도록 떠껭이가 앉도록 읽고 외우고 들었지만 우리는 신심(信心)이 부족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아집(我執)이 있고, 아상(我相)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입으로 외우고 귀로 들으면서도 그 말이 마음에 와서 계합(契合)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치(我癡)는 중생의 살림살이여. ‘내 것이다, 나다, 내 몸뚱이다, 내 재산이다, 내 남편이다, 내 자식이다’ 무엇이든지 보면은 자기와 관련을 시켜. 그래 가지고 내 것을 삼을려고 그러고, 내 것이다하고 그놈을 붙잡고, 그놈을 붙들고 늘어져. ‘내 몸뚱이, 내 재산, 내 집’

어찌 그것이 내 몸뚱이여?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서 잠시 이 몸뚱이를 이루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내 것이냐 그 말이여. 재산도 잠시 자기가 관리만 하고 있는 거여. 자기 집도 자기가 잠시 관리하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죽을 때 그것을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수백억 되는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재산이겠습니까? 잠시 자기가 관리만 하고 있는 거여.
자기가 그것 다 먹지도 못하고, 먹어 봤자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등기를 자기 앞으로 해놨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여. 잠시 자기가 관리하고 있다가 이 몸뚱이에서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영혼은 떠나 버리는데 재산을 어디로 가지고 가겠습니까? 등기 문서 관 속에다 넣어 가지고 간다고 해서 그것이 저승에 가서 그것이 자기 재산 되겄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신라 · 고려 · 백제 · 이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임금님이 계셨습니다마는, 그 시대 그 나라에 임금 노릇만 했지 그 재산 하나도 못 가지고 가고, 산이나 들이나 논, 고대로 있습니다. 그 임금이 죽을 때 못 가지고 갔습니다.
해방 후로 여러 대통령이 있었습니다마는, 제1 · 제2 · 제3 · 제5 · 지금 6공화국까지 왔습니다마는 대통령 자기 앞으로 해 놔 봤자 못 가지고 갑니다. 가지고 가지도 못할 것을 뭐하러 그렇게 욕심을 부려 가지고 그 백성들한테 지탄을 받고 쫓겨가냐 그 말이여. 발 디딜 곳이 없어져 버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밤잠 못 자고, 먹을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못 입고, 아끼고 아껴서 재산을 모아 놔 봤자 못 가지고 갑니다. 못 가지고 갈 것을 자기 먹을 만큼 그날그날 먹으면 족하지, 뭣하러 그렇게 잔뜩 해 놓고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벌벌 떨다가 죽어가.
그래 가지고 자식들이 그놈을 서로 먹을려고 웬수가 돼 가지고, 재판하고 싸우네. 차라리 없었으면 형제간이 화목하게 살 것을, 재산 많이 냉겨 놨기 때문에 그놈 서로 차지할려고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싸워.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정말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달라야 되겄습니다. 그것 하나만 깨달라서 불같은 욕심만 버려 버리면, 그날로 다리 뻗고 잘 수가 있습니다.(처음~35분4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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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목구녁에 거미줄 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자기 평생 먹을 것은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터무니없이 많은 욕심을 내 가지고 산데미처럼 쌓아 올릴려고 하니까 서로 웬수가 되고 싸움이 되지, 적당한 방, 좋은 방, 바른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먹을 만큼 살면, 그래도 전생(前生)에 복(福)을 짓는 사람은 큰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면은 자기 먹을 만큼 내놓고는 자꾸 보시(布施)를 해야 됩니다. 절에도 보시하고, 사회에도 보시를 하고, 없는 사람에게 장학금도 주고, 병든 사람 병도 낫궈 주고 해서 자꾸 쓰면 쓴 만큼 또 생깁니다. 그래 가지고 금생에도 부족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에 쓰고 남은 것입니다.
금생에 다 재수(財數)가 있어서 사업이 잘된 사람은 전생에 다 그만큼 복(福)을 지어서, 복(福)에 종자(種子)를 심어 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생(來生)에도 잘될라면 금생에 많은 보시를 하고 복에 씨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상(我相) · 아만(我慢) · 아애(我愛), 이것을 갖다가 버려 버리면 거기서 비로소 도(道)의 제일 계단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아상! 아상이 무너져 버려야 도(道)의 제일 관문(關門)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상(我相)이 있어 가지고서는 세상없는 짓을 해도 도(道)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놈을 없애 버려야 ‘니가 바로 부처다’ 해도 그 말이 탁! 와서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어 버려. 아는 것이 아녀. 아는 것과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깨닫는 것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인 것입니다.
‘꿀을 먹으면 달다’ 하고 아는 것과 꿀을 직접 입에다가 한 숟갈 탁! 넣어 놓고 먹은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좋다하고 아는 것과 실지로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아는 것과 실지로 아상(我相)이 무너져 가지고 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그 뜻을 확실히 그 뜻을 깨달라서 계합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我相)을 없앨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안 없어져. 어떻게 해야 그것이 아상이 없어지냐 그 말이여.
그 아상 없애는 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수백만 번을 불러. 부르다 보면은 제절로 번뇌 망상이 끊어지면서 아상이 무너지면서 마음이 허공과 같이 비어진다 그 말이여. 그런 염불(念佛)하는 방법도 있고, 그보다 더 수승한 방법이 ‘이뭣고?’다 그 말이여.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썽이 날 때 ‘이 썽내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고 있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해서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썽날 때도 이뭣고?
속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천하 맛없는 소리지만 콱! 믿고 부처님이 왜 우리를 속일 리가 있겠는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왜 우리를 속일 리가 있겠는가,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 왜 우리를 속일 리가 있겠는가, 송담(松潭) 스님이 왜 우리에게 거짓말할 것인가 확실히 믿고서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이뭣고?

밤낮 이뭣고?, 법문 인자 그 소리 벌써 수백 번 들었으니까 그만하고 법상에서 내려가 주었으면, 빨리 가서 밥을 먹어야 할 텐데그런 생각을 하지를 말고, 지금 이 법문을 들으면서도 ‘이뭣고?’ 이렇게 하시라 그 말이여.
아들딸 모다 대학 졸업시키고 장가보내 논 다음에 그다음에 참선을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끔 이 자리에서부터 이뭣고?~ 이뭣고?~’ 하면서 법문을 들으시라 이 말이여.

그러면 법문이 끝난 다음에 또 밥상을 향해서 가면서도 ‘이뭣고?’를 하라 그 말이여. 또 밥상을 따악 만나서 한 숟갈 떠먹으면서도 ‘이뭣고?하라 그 말이여.
법문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저 뒤안에 가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 지끔 있다 그 말이여. 지끔 이 자리에 따악 앉어서 법문 듣고 계신 것만 해도 지금 저 뒷채에 가서 법문이고 뭣이고 밥부텀 먹고 보자 틀림없이 지금 뒤안에 가면 몇 명인가는 지금 밥을 먹고 계신다 그 말이여. 나 여기서도 환히 다 보여.

그러면 이 자리에 계신 분은 그분보다는 조끔 나은데, 법문이 끝나기가 바쁘게 똥이 빠지게 지금 뒤로 쫓아갈 판인데, 그냥 그 밥상을 보고서 이뭣고?가 어디 벌써 도망가 버리고, 그저 그냥 밥이 그냥 숟가락 잡기가 무섭게 밥을 입에다 떠놓고 씹기도 전에 반찬 막 집어넣고 꿀떡꿀떡 샘킨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가슴이 체해 가지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어째서 그렇게 서둘지 안 하고 ‘이뭣고?’를 하면서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어도 다 그 밥 다 먹을 수가 있고, 그렇게 부리나케 쫓아가지 안 해도 다 넉넉히 밥을 다 지어 놨습니다.

밥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집을 향해서 걸어갈 때나, 집에 가서 옷을 벗을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이뭣고?’를 챙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도 어려울 일이 아닙니다. 그게 뭐 머리가 좋다고만 해서 할 수가 있고, 지식이 있다고만 할 수가 있고, 뭐 젊다고만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바보처럼 ‘이뭣고?’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 그러지만, 망상 일어난 거 겁낼 거 없습니다. 망상이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그 망상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그 우리 그 마음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로부터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망상이 일어난 것은 천만다행인 것입니다. 그놈이 안 일어나면 도(道)를 못 닦습니다.
그러니 그 일어나는 놈을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냥 그 일어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합니다. 그 망상 일어나는 그 근본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일어나는 망상을 가지고 그 망상 일어나는 그 뿌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뭣고?이 망상 일어나는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일어나는 거 갖고 일어나는 놈을 생각하는 거여. 그러니까 그 뭐 못할 거 없어요. 바보도 망상은 일어나고, 천재도 망상은 일어나.(녹음 끊김)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이뭣고?인지 망상인지 뒤범벅이 되어 가지고, 되다가 말다가, 엎어졌다가 뒤집어졌다 야단이지만, 그까짓 거 상관없어요.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아!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될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말이여.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태, 3년, 지극히 하다 보면 할려고 안 해도 떠억 되어져 버려. 그냥 제절로 되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되어질 때는 기가 맥히거든. 아! 그때는 누가 뭐 욕 좀 해도 썽도 안 나게 되어 버리고, 뭐 누가 좀 내 것 좀 가져갔다 해도 뭐 그렇게 그냥 억울할 것도 없고. 그냥 옛날에 자기와는 영 딴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별로 썽도 안 내고, 별로 그렇게 내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심도 없고, 그전에는 자식이라 하면은 벌벌 떠는데 자식에 대해서도 담담해져. ‘저는 지 복(福) 있으면 잘살겠지, 부모니까 부모 도리로써 가리킬 만큼, 키울 만큼 키워서 가리킬 만큼 가리켜 놓으면 지가 지 복 있으면 잘살지, 뭐 내가 저를 위해서 내가 구태여 종노릇 할 것 없어’ 아주 자식이지만 담담해.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사랑스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식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혀.

지금 여러분들은 ‘내 자식, 내 새끼’ 하면 벌벌 떨지마는, 실지는 자식을 참되게 사랑할 줄 모릅니다. 중생심으로 잔뜩 애착심만 갖고 벌벌 떨지, 참으로 자식을 옳게 기를 줄도 모르고, 자식을 옳게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식을 옳게 사랑하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자식 밖에는 모르고, 키워 놓으면 그 자식이 웬수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놈이 커서 장가들면 지 지집밖에 모르고, 저도 자식새끼 낳아 놓으면 지 자식새끼만 이뻐한 줄 알지, 부모는 뭐 행랑(行廊) 할머니 정도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늙으면 공원으로 가서 갖다 버려 버리고, 양로원 앞에다 데리고 가서 내버리고 오는 자식이 지금 수없이 많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은 옳게 가르킬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거든요.
그거 뭐 이뻐서 맛있는 것은 자식 멕일라 그러고, 좋은 것은 자식 입힐라 그러고, 논밭 팔아서 자식만 가리키면 되는 줄 알지만, 어리석은 마음으로 자식을 키워 놓으면 그 자식은 웬수를 길러 논 것이거든.

여러분이 참으로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법문을 옳게 들어야 자식도 옳게 기를 줄을 압니다. 옳게 길러 놔야 저도 옳은 사람이 되고, 지가 장가를 가던가 자식을 낳고 나중에 크게 훌륭하게 될수록에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태까지 자식을 옳게 기를 줄을 모르고 오늘날까지 살아오신 것입니다. 다 그것 탁! 털어서 없애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식,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애착심(愛着心) 그것 털어 없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자식을 옳게 기를라면 ‘이뭣고?’를 하셔야 합니다.
‘이뭣고?’를—진짜 자식은 인자 저만큼 놔두고, ‘이뭣고?’를 지극정성으로 하시면 자식을 옳게 사랑할 줄도 알고, 옳게 기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재산도 옳게 벌 줄도 알고, 옳게 관리할 줄을 압니다.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이 ‘이뭣고?’를 해야 옳은 장관 노릇도 하고, 옳은 대통령을 합니다. ‘이뭣고?’를 하는 대통령, ‘이뭣고?’를 하는 장관 같으면 저렇게 하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참 옳은 대통령을 했다면 대통령하고 내놓으면 국부(國父)가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하고 난 뒤에도 호위병도 필요 없고, 경비병도 필요가 없습니다. 맨 손으로 맨 몸뚱이로 팔도강산을 돌아다녀도 간 곳마다 ‘우리 국부님 오셨다’고 남녀노소가 모다 떠받들고 받들 것입니다. 서로서로 이리 오셔서 하룻밤 쉬고 가라고 할 것입니다.
왜 대통령을 하면 그렇게 못합니까? 그런 대통령을 해버려야 바로 그 대통령이 세계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는 것입니다. 아쇼카(aśoka)왕, 아육왕(阿育王) 같은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아육왕도 처음에는 백 명이나 되는 그 태자(太子)를 죽이고 자기가 왕자가 되었고, 그 궁중에 있는 모든 왕족들 백 명을 다 때려죽였습니다. 그리고서 이웃나라 수십만 명을 다 때려죽이고 이웃나라를 모다 뺏으고 그렇게 무서운 왕이었었지마는, 불법(佛法),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고서 깊이 참회(懺悔)하고부터서 그리고 믿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어 가지고, 팔만사천 탑(塔)을 세우고 불법(佛法)으로써 정치를 해 가지고 전륜성왕이 되었습니다.

아사세(阿闍世)왕도 자기 아버지 빈바사라(頻婆娑羅)왕을 굶겨 죽여 가지고 자기가 왕이 되었지마는 그래 가지고 왕이 된 뒤에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 가지고 잠도 못 자고 밥을 못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께 참회하고서 그 병이 낫고, 그래 가지고 전륜성왕이 되어 가지고 평생토록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받들고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는 칠엽굴(七葉窟)에서 제1회 결집(結集)을 할 때에 모든 잡술 것, 입을 것, 약(藥)과 모든 것을 그 오백성승(五百聖僧)에 모든 것을 시봉(侍奉)을 해 가지고 제1회 결집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평생토록 전륜성왕으로서 정치를 잘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인도를 싸움을 하지 아니하고 인도를 통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왕과 이러한 대통령이 우리 금수강산(錦繡江山), 이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태어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의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우리 대한민국에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에는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전륜성왕과 같은 그러한 훌륭한 대통령이 태어날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 가지고 반드시 세계를 통일하게 될 것입니다. 원자탄, 수소탄, 그러한 무서운 무기로써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으로써 평화로써 진리로써 세계를 통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서해(西海)가 육지가 될 것입니다. 그때는 일본은 바닷속에 잠겨 버리고 이 서해가 육지가 되어 가지고 그때 거기에는 전륜성왕이 왕이 되어 가지고 세계평화를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나는 그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끔 우리 대한민국에 태어난 우리 모든 백성들이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너도나도 ‘이뭣고?’를 해서 확철대오한 불보살(佛菩薩)들이, 살아 있는 불보살이 태어날 때에 우리의 후손들에 그러한 평화로 전륜성왕이 될 그러한 자손들이 대대손손(代代孫孫)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뭣고?를 아니하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재산을 모이고, 명예와 권리를 위해서 악법을 맨들아 가지고 남을 죽이고 그래 가지고 될 것입니까?


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하고  천지인정몰양반(天地人情沒兩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긍신순궁환역지(肯信順窮還逆至)하고  안개휴파자심만(眼開休把自心瞞)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이다. 내 마음에 거슬리면 썽을 내고, 내 마음에 순(順)하면 기뻐한다 그 말이여.
천하인정(天下人情)이 몰양반(沒兩般)이여. 온 천하 사람이 다 이 두 가지에 다 빠져 있드라 그 말이여.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고 사는 사람은 제 마음에 안 들면 썽내고, 제 마음에 합당하고 자기를 칭찬해 주고 자기의 모든 좋은 것을 주면 좋아한다 그 말이여.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누구가 있냐 그 말이여.

그러나 긍신순궁환역지(肯信順窮還逆至)여, 정말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이 있다 그 말이여. 내 마음에 들고, 내 마음에 순(順)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것이 머지않아서 다시 그것이 내 마음에 거슬러진 것으로 변해 버리고 말더라 그 말이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명예나 권리나 할 것 없이, 인간적으로나, 내 마음에 들었고 내 마음에 합당하고 좋다 하더라도 몇 조금 못 가서 다시 변해 버려. 확실히 영원성이 없고, 허망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믿어 버려라.
안개휴파자심만(眼開休把自心瞞)이여, 똑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바로 뜨고서 스스로 자기의 마음, 자기 스스로 속고 있고, 속이고 있는 것을 분명히 깨달라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만 깨달라 버리면 우리는 그날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 밖에는 없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7일간 정성스럽게 7일 기도를 봉행하게 되는데, 여기에 날마다 절에 오셔서 하실 분은 하시고 일이 바뻐서 사정상 못 나오시는 분은 댁에서 일을 하시면서 열심히 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다 자기 정성들인 만큼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크고 작은 소원, 멀고 가까운 소원, 반드시 소원은 정성들인 만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일 날에는 불명(佛名)을 아직 타시지 아니하신 분은 불명을 타시고, 5계(五戒)를 받게 되십니다. 불명을 이미 조실 스님께 탔거나, 산승한테 타신 분은 다시 또 타실 필요가 없습니다. 해마다 보면 불명을 드리면 거저 준다 해 가지고는 불명 타신 분이 너도나도 해 가지고 봉투를 둘, 셋, 넷씩 받어 가지고 자기 불명이 뭣인 중도 모르고 농 속에다 넣어 놓고. “불명이 뭣입니까?” 하면 “모릅니다”

“아! 왜 안 탔습니까?”
“예, 그것 다섯 장이나 있어요”

“다섯 장이나 있으면서 불명을 모릅니까?”
“그것이 뭣이던가? 문수심이던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미 타신 분은 오늘 가셔서 댁에 가서 봉투를 꺼내 보시고 ‘아하 이것이로구나’ 그것을 염불하듯이 오늘 수백 번 해 갖고 확실히 자기 불명(佛名)을 알고, 그래 가지고 도반(道伴)들이나 친구들이나 딸이나 며느리한테,

“내 불명은 약허약허한데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아무개할머니’ 부르지 말고 불명을 불러라. 불명을 불러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니 불명을 불러라. 너도 좋고 나도 좋은데 불명을 부르지 왜 ‘아무개 엄마 그것은 세속의 이름이니 세속적인 것은 불러 봤자 업(業)밖에는 안 되는 거고, 불명을 불러야 업장이 소멸이 되고 공덕이 된다고 하니, 우리야 그 말을 믿고 그렇게 부르자이렇게 하시라 그 말씀이여.

그래서 불명이 없는 분에 한해서 불명을 타시고자 하는 분은 오늘 이 주소, 성명(姓名)을 적어서 사무실에다가 내놓고 가십시요.
그렇게 신청도 안 하고 막 하니까 공것은 양잿물도 먹는다고, 막 그러니까는 두서(頭緖)가 없고 이 존엄성이 없어. 그래서 반드시 신청을 한 분에 한해서 계첩(戒牒)을 노나드릴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행여나 돈 받을라고 저런가보다?
돈은 안 내도 좋습니다. 돈 안 내도 좋으니까 분명히 신청을 하고 소중하게 받아 가셔서, 그리고 불명을 타신 분은 또 5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타시고 그렇게 해서 화두(話頭)까지 타서 이제 금년부터서는 정말 이 복전암 칠성회원 여러분들은 불명도 타고, 5계도 받고, 또 화두도 탄 최상승 보살(最上乘菩薩)이 된다 그 말이여. 이렇게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참석하신 분은 7일간을 열심히 정진, 정근을 해서 기도를 해서 반드시 소원성취하시게 될 것을 저는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제가 보증을 서겠습니다.
그 대신 열심히 하십시요.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하십시요. 7일간 오대산이나, 저 설악산이나, 저 남해 보리암, 그런 데 간 것처럼 이 복전암도 그렇게 아시고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게송을 읊고 내려가겠습니다.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하고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하고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이요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한 등불이 능히 백천 등(燈)에다가 불을 댕겨서,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한 등불만 있으면 다른 등에도 계속 그 등불을 댕기고 또 댕기고 하면 백천 등이 다 환히 밝을 수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이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탄생하셔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더니, 그 부처님이 출세하셔 가지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출현하시고, 이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그 불법(佛法)의 등이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와 그 등(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환히 밝게 된다 그 말이여.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일구(一句)가 결국 오늘 이 복전선원 7일 기도 입재일에 낱낱이 여러분께 이 법을 설해 드리게 된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한 등불을 여러분의 마음의 등불에 불을 댕겨 드리는 소식이드라.

한번 깊이 바로 믿어버리고 믿어버리면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여, 모든 성현도 전할 수 없는 그 등(燈)—우리가 초파일에 켜는 등은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수 있고, 전깃불이 나가버리면 꺼져버릴 수 있는데, 모든 성현이 전할 수 없는 등(燈)이 있어.
폭풍우가 불어도 꺼지지 않는 그 등이 그 불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놈을 봐 버리면 그 불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환하니 비춰. 그 불은 저 태양보다도 더 밝은 등불인 것입니다. 그 등불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등불 바로 밝은 도리를 ‘이뭣고?’를 하면 그것을 바로 봐 버리게 되는 것이여. 바로 그 등불에 그 심지에 불을 댕기는 것이여.

이 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이렇게 7일 기도를 해마다 하는 것은 형식 껍데기로는, 가장 가까웁게 쉽게 우리의 눈에 보이기에는 우리의 중생으로서에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는 목적으로 이 기도를 한 것처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근본 뜻은 여러분의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허망한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마음의 등불에 불을 댕겨 드리기 위해서 칠성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35분43초~1시간8분1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 / 이 무상한 세계에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나서 숙세(宿世)의 수승한 인연으로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만났습니다 / 똑같은 세계를 보고서 근기에 따라서 그 관점이 다르다 / ‘물’을 보고 고기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아귀(餓鬼)는 물을 보고 불인 줄 알고 겁을 냅니다. 하늘나라에 신(神)들은 지상(地上)의 물을 보고 유리(琉璃)라고 생각을 해.

범부(凡夫)는 오욕락(五欲樂)을 보고 좋은 것인 줄 알고, 오욕락이 진짜 괴로움에 원인인 줄 깨닫지를 못합니다 / 성문(聲聞) 연각(緣覺), 이승(二乘)들은 ‘이 삼계는 괴로운 것이다 ‘이 삼계는 불집이다(三界火宅)’ 이렇게 생각을 해 / 보살(菩薩)은 이 삼계(三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삼계는 공(空)한 것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도 본래 없건마는, 본래 공한 것이지만 중생의 망령된 무명 번뇌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생사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지는 모두가 다 공(空)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 삼계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묘(妙)한 것이다. 다 묘하게 밝은 마음이다. 오직 한마음이다’ ‘묘(妙)하게 밝은 한마음이다’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따로 없다’ 이렇게 보는 거여.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하신 12부 경전, 팔만사천 경전이 모두가 다 방편설(方便說)이다 / 궁극에 가서는 부처님은 무슨 법을 설하셨냐 하면은 「나는 한 법(法)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법을 설하셨어.
귀종(歸宗) 선사와 영훈(靈訓) 선사의 법담 / 믿음 하나가 철저해 버리면 긴 법문이 필요 없고, 많은 경전이 필요가 없어.

재산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다 /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정말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달라야 되겄습니다 / 아상(我相)이 무너져 버려야 도(道)의 제일 관문(關門)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 아는 것과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깨닫는 것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

아상(我相)을 없애는 가장 수승한 방법이 ‘이뭣고?’다 / 밥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집을 향해서 걸어갈 때나, 집에 가서 옷을 벗을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이뭣고?’를 챙기는 것입니다 / 망상이 일어나면 그 일어나는 놈을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냥 그 일어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합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법문을 옳게 들어야 자식도 옳게 기를 줄을 압니다. 진짜 자식을 옳게 기를라면 ‘이뭣고?’를 하셔야 합니다 / 아쇼카(aśoka)왕, 아육왕(阿育王)과 아사세(阿闍世)왕 이야기.

(게송) 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 / 서로서로 불명(佛名)을 불러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공덕이 된다 / (게송)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니,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그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지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아름답게 핀 꽃가지에 새가 올라가 울더라.

무슨 거울을 타파(打破)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졌냐? 그 거울이라 하는 것은 모든 반연(攀緣)을 따라서, 반연 따라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가지고 육식(六識)의 무명(無明) 망상(妄想)이 동요하는데, 그 경계(境界) 따라서 경계를 반연해 가지고 육식이 발동하는 것이 마치 거울 앞에 나타난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과 같다 그 말이여.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비추이는 그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거울도 없어져 버리고 또 거기에 비추던 청황적백(靑黃赤白) 삼라만상 모든 밖에 경계도 다 없어져 버리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이 말이여.

저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보살(菩薩)과 일체중생(一切衆生) 내지는 짐승과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그 본 성품은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어. 다 똑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불성(佛性)이여. 그러건만 경계에 반연해서 번뇌망상으로 인해서 그 원만구족한 불성이 가리워져 가지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이여.

모든 부처님은 이 삼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 삼계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묘(妙)한 것이다. 다 묘하게 밝은 마음이다. 오직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묘(妙)하게 밝은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우리 중생들은 ‘마음’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뭘 보면 눈을 통해서 뭣을 볼 줄도 알고, 귀를 통해서 무슨 소리도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냄새도 맡을 줄도 알고, 혀를 통해서 모든 맛을 볼 줄도 알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느낄 줄을 알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것, 이놈이 마음인 줄 안다 그 말이여.
그러나 부처님이 보실 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댕기는 그놈 뿐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도 마음이요, 이 하늘도 마음이요, 태양도, 별도, 달도,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전부가 오직 한마음 뿐이다 이것이여.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따로 없다’ 이렇게 부처님은 보시는 것이여.

아상(我相) · 아만(我慢) · 아애(我愛), 이것을 갖다가 버려 버리면 거기서 비로소 도(道)의 제일 계단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아상! 아상이 무너져 버려야 도(道)의 제일 관문(關門)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상(我相)이 있어 가지고서는 세상없는 짓을 해도 도(道)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놈을 없애 버려야 ‘니가 바로 부처다’ 해도 그 말이 탁! 와서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어 버려. 아는 것이 아녀. 아는 것과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깨닫는 것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인 것입니다.
‘꿀을 먹으면 달다’ 하고 아는 것과 꿀을 직접 입에다가 한 숟갈 탁! 넣어 놓고 먹은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좋다하고 아는 것과 실지로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아는 것과 실지로 아상(我相)이 무너져 가지고 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그 뜻을 확실히 그 뜻을 깨달라서 계합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我相)을 없앨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안 없어져. 어떻게 해야 그것이 아상이 없어지냐 그 말이여. 그 아상 없애는 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수백만 번을 불러. 부르다 보면은 제절로 번뇌 망상이 끊어지면서 아상이 무너지면서 마음이 허공과 같이 비어진다 그 말이여. 그런 염불(念佛)하는 방법도 있고, 그보다 더 수승한 방법이 ‘이뭣고?’다 그 말이여.

한번 깊이 바로 믿어버리고 믿어버리면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여, 모든 성현도 전할 수 없는 그 등(燈)—우리가 초파일에 켜는 등은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수 있고, 전깃불이 나가버리면 꺼져버릴 수 있는데, 모든 성현이 전할 수 없는 등(燈)이 있어.
폭풍우가 불어도 꺼지지 않는 그 등이 그 불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놈을 봐 버리면 그 불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환하니 비춰. 그 불은 저 태양보다도 더 밝은 등불인 것입니다. 그 등불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등불 바로 밝은 도리를 ‘이뭣고?’를 하면 그것을 바로 봐 버리게 되는 것이여. 바로 그 등불에 그 심지에 불을 댕기는 것이여.

이 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이렇게 7일 기도를 해마다 하는 것은 형식 껍데기로는, 가장 가까웁게 쉽게 우리의 눈에 보이기에는 우리의 중생으로서에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는 목적으로 이 기도를 한 것처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근본 뜻은 여러분의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우리 허망한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마음의 등불에 불을 댕겨 드리기 위해서 칠성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복전암(1~73)/(1~25)2023. 6. 6. 21:20

 

 

(복전암No.05)—1981년 관음칠성회 기도 회향(81.10.07) (80분)

 

(1) 약 43분.

 

(2) 약 37분.

 

(1)------------------


역겁전전무진등(歷劫傳傳無盡燈)이요  부증도별진장명(不曾挑別鎭長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임타우쇄겸풍란(任他雨灑兼風亂)헌데  누옥허공영자청(漏屋虛空影自淸)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역겁전전무진등(歷劫傳傳無盡燈)이요. 무량억겁(無量億劫)을 두고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 다함이 없는 등불이여.
부증도별진장명(不曾挑別鎭長明)이로구나. 일찍이 등(燈)에 심지를 돋구지 아니해도 항상 밝아 있구나.

임타우쇄겸풍란(任他雨灑兼風亂)인데, 비 뿌리고 바람이 냅대 불고, 비가 뿌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내버려 두건마는,
누옥허공(漏屋虛空)에 영자청(影自淸)이로구나. 북쪽 하늘에는 그 그림자가 스스로 맑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등불은 기름을 붓고 심지를 자주자주 돋구어 주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뿌리지 못하도록 잘 가리워 주어야만 그 등불은 꺼지지를 않고 광명을 발산할 수가 있건만, 억천만 겁을 두고 전해 내려오는 이 등불은 기름을 치지 아니하고 심지를 돋구지 아니해도 항상 그 등불은 계속해서 밝아 있고, 아무리 비가 뿌리고 폭풍이 불어도 이 등불은 까딱도 않고 꺼지지를 안 혀.
과연 이 등불이 어디에 켜져 있을까? 이 등불은 여러분의 가슴속에, 낱낱이 한 분도 빠짐없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이 등불이 켜 있습니다. 등불이 켜 있는데 왜 스스로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그 등불이 켜져 있는 증거를 내가 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등불은 어떠한 등불이냐 하면,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아는 놈, 욕을 하면 썽을 낼 줄 아는 놈, 칭찬하면 기뻐할 줄 아는 놈,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알고, 그때가 바로 그때 그 장면이 그 등불이 켜져 있는 증거입니다.

이 등불,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켜져 있었던 그 등불, 이 몸뚱이가 죽어서 땅에 묻거나 화장을 해서 자취가 없어져도 이 등불은 꺼지지 않는 등불,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밝아 있었고, 이 우주가 앞으로 몇억만 년 뒤에는 이 지구도 가루도 남지 않게 없어질 때가 옵니다마는, 설사 이 세계가 없어져 버리더라도 우리 낱낱이 가슴속에 켜져 있는 이 등불은 꺼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스스로 등불이 켜져 있는 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이요, 성불(成佛)이요, 생사 없는 진리와 내가 합해지는 곳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바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을 하신 분인 것입니다.


복전암(福田庵) 주지 스님이 일곱 살에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 가지고 서울에서 살다가 6·25 동란(動亂)을 맞이해서 대구로 피난을 가서 고생을 하다가 서울이 회복(回復)이 되자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서 대전까지 왔었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서울이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하니까 이 복전암에 들어와서 방 한 칸 얻어 가지고 동냥을 해 먹고살면서 여그서 붙여서 살다가 여러분과 인연이 깊어서인지 아주 여기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32년간을 오늘에 이르도록 온갖 고생을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어 예경(禮敬)하고, 기도하고, 여러 신도님들을 위해서 소원을 성취하도록 그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면서 매월 초이렛날에는 법회(法會)를 열어서 처음에는 큰스님네를 초청을 해다가 설법을 들려 드리다가 큰스님을 매월 초청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서 그래서 주지 스님 자신이 여러분을 향해서 어릴 때부터서 보고 듣고 배운 바를 여러분에게 정성스럽게 말씀을 해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정성에 감동이 되어 가지고 신도가 해마다 불어서 이렇게 수천 명의 신도를 모이게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목적으로 그 고생을 하면서 이 복전암을 이렇게 확장을 시켰느냐?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것이냐? 명예와 권리를 위해서 그런 것이냐?
오직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부처님의 뜻을 전해 드려 가지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깨달라서 그 고해(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해 드리려는 그 뜨거운 마음 하나 뿐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정성이 이토록 큰 힘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그 무서운 고행을 하신 끝에 대도(大道)를 성취해 가지고 팔십 평생을 오직 이 하나의 일을 위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묘법(妙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 부처님의 거룩한 뜻이 삼천여 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꺼지지 아니하고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동남아 · 중국 · 한국 · 일본으로, 20세기가 된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불교가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것을 가지고 고해(苦海)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고, 아무리 명예와 권리가 높아도 그것을 가지고 영원한 행복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선진국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이제사 참행복을 찾기 위해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불교를 갈망을 하고 있습니다. 근자에는 한국에 스님들이 미국으로 몇 분이 건너가서 그 사람들을 교화를 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마른 땅에는 비가 오면 잘 배어 들어가듯이—그 사람들은 예수교를 믿고, 물질문명(物質文明)만이 행복에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오든 사람들이 물질문명의 최첨단에 이르고 봐도 그것이 참행복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그렇게 불교를 잘 받아들이고, 열성을 가지고 불법을 믿고 알고 행할려고 한다고 그럽니다.

우리는 천육백 년 전에 불교가 한국에 전해 온 이후로 신라 · 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로 숭배를 받았고, 이조(李朝)에 와서는 유교를 숭배한 탓으로 탄압을 받았지만, 그 탄압을 받으면서도 온갖 수모를 받고 고생을 하면서도 부처님 믿는 마음을 변치 아니하고 죽음으로써 실천 수행해 가지고 부처님의 법(法)에 등불이 전전(傳傳)이 계승해서 오늘날에까지 이르러 왔습니다.

해방 후에 불교에 대한 탄압이 없어지고, 차츰 불교가 생기를 타서 오늘날에는 불교 신도가 천오백만에 이르고 있습니다. 숫자는 그렇게 많이 불어났지마는 참으로 올바른 불법(佛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느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복을 빌고 소원성취를 비는 그러한 불법을 불교의 전부인 줄 알고 믿고 있는 신도는 얼마나 되느냐? 불교의 정법(正法)을 올바르게 믿고 실천할 줄 아는 신도는 과연 몇천 분의 일이요, 몇만 분의 일인가? 엄격히 생각하면 정말 정신차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예수교 교회는 100m 거리마다 세워지고, 나날이 예수교가 번창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교도 나쁜 종교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지마는, 그이들은 입만 벌리면 불교를 우상 숭배(偶像崇拜)라고 비난을 하고, 헐뜯고, 그러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나날이 교세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예수교 확장하는 것이 겁나고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우상 숭배라고 비난을 하는 통에 아직 어린 학생들, 젊은 사람들은 그러한 말을 곧이 듣고 그리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과연 우상 숭배냐? 절대로 우상 숭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불교 신자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무나, 흙이나, 돌이나, 쇠붙이로 부처님 모습을 조성(造成)을 해 가지고 거기다 금물을 입혀서 모셔 놓고 있으니 정말 잘못 이해하면 우상(偶像)을, 그리고 그 앞에다가 돈을 바치고, 떡을 바치고, 과일을 올리고, 거기다 절을 하고 잘살게 해달라고 공을 들이고 하니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를 참으로 옳게 이해한다면 절대로 이 불교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원래 불법(佛法)은 아까 말한 우리에 마음자리, 본성자리, 천성자리 깨닫는 것이 불교(佛敎)에 전부인 것입니다.

불교(佛敎)에 '불(佛)'이라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깨닫는다'는 뜻이여.
'부처님' 하면 ‘깨달은 어른’이라 그 말이고,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이란 말이고, 불법(佛法)이라 하면 ‘깨닫는 법’이라 이 말씀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저 높은 하늘에 별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태양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무슨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런 것을 깨닫는 게 아니라,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여기 앉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20년 30년 어릴 적을 생각해도 시대가 환한 우리에 마음자리를 깨닫는 길이라 이 말이여.
우리는 ‘마음, 마음’ 듣고 마음이란 말은 알지만, 과연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겨 있는가를 깨달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것을 깨달라야만,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불교를 믿고 실천해야만 불교를 옳게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란 말이 나왔습니다마는, 우상(偶像)이라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는 거.
부처님 하면 그 ‘깨달은 어른’이란 말인데, 깨달음을 깨닫는 어른의 말씀을 믿고, 깨닫는 법을 실천해야만 불교(佛敎), 불법(佛法)을 옳게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여. 우리가 불법을 옳게 믿고 옳게 실천한다면 누가 불교를 우상 숭배라 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부처님과 같은 모습, 등상불(等像佛)을 모셔 놓고, 왜 거기다가 치성(致誠)을 드리느냐? 최초에 어떻게 해서 불상(佛像)을 모시게 되었느냐?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부처님께서—돌아가신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저 도리천(忉利天)에 계셨는데, 그 도리천에 올라가서 부처님의 어머님께 설법을 해 드리기 위해서 석 달 동안을 도리천에 올라가 계시고 이 지상에는 안 계셨습니다.
그때 부처님을 너무너무 간절하게 믿고 존경하던 우전왕(優塡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날마다 빠짐없이 부처님께 와서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에 법문을 듣고 그리고 가고, 그래야만 그날 하루에 마음이 편안하고, 그날 하루에 정치를 잘 다스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부처님이 안 계시니까 너무너무 허전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천하에 광고를 내 가지고 가장 훌륭한 조각가를 초빙을 해 가지고 전단향(栴檀香)이라 하는 향나무로—그 전단향은 그 향을 피면은 10리, 20리 밖에까지도 그 향냄새가 풍기는 그러한 훌륭한 향나무를 구해 가지고 부처님과 크기도 똑같고, 모냥도 똑같이 부처님을 조성을 할려고 그러는데, 아! 그 훌륭한 조각가지만 너무너무 부처님의 모습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어서 도저히 똑같이 조성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목련존자(目連尊者), 신통(神通)이 제일가는 목련존자한테 부탁을 해 가지고 신통력으로 도리천에 올라가서, 그 조각가를 끼고서 도리천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의 모습을 고대로 그려 가지고 눈여겨보고 그래 가지고 와서 고대로 그리고. 또 하다 보면 또 뜻과 같이 안 되면 또 가고 해서 여러 차례를 올라가 가지고 뵙고 와서 조각을 하고, 뵙고 와서 조각하고 그래 가지고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을 떠억 했습니다.
그래 모셔 놓고 보니, 도저히 살아계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같어. 그래서 거기다가 공양을 올리고, 참배를 드리고 그러면서 부처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를 기다렸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석 달 어머님을 위해서 설법을 마치고 떠억 돌아오셨는데, 아! 전단향(栴檀香)으로 깎아 모신 그 등상불(等像佛)이 불단(佛壇)에서 떠억 내려와 가지고 진짜 살아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영접(迎接)을 하는데, “무사히 설법을 하시고 돌아오셨습니까” 하고 절을 하니까, 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동안에 내 대신 중생교화를 하시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하셨습니까” 인사를 하는데, 부처님의 제자를 비롯한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보아도 어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인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말이여.

그때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를 「이 후(後)에도 나와 똑같이 생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모시거나, 또는 흙이나 나무나 돌이나 금속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알고 거기에 예배를 드리고 그 앞에서 경을 읽고, 그 앞에서 참선을 하고 그렇게 하드라도 살아 있는 나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에게 법문을 들은 것과 똑같은 공덕(功德)을 받으리라」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을 한낱 우리 범부(凡夫)와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지로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마야부인의 배를 빌려서 이 세상에 탄생을 하신 하나의 범부다. 범부가 설산에 들어가서 깨달라 가지고 그래서 참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되었으니, 아무리 위대해 봤자 사람이지 별수가 있겠느냐? 예수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로서 하느님의 명을 받아서 중생을 고해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태어났지,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났지 진짜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이요, 범부는 인간은 아니다 이러한 식으로 생각을 하고 부처님을 별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佛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이 훌륭하지 아니하다고 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분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오히려 부처님이야말로 위대하게 보면 하느님보다도 몇천만 배 위대하고, 자비(慈悲)스러운 면으로 본다면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우리가 무릎 우에라도 앉어서 어리광이라도 부릴 수 있을 만큼 인자하시고 따뜻하신 할아버지와 같은 그렇게 느껴지는 참으로 위대하신 성현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부처님은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셨고,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시고, 하늘나라에 모든 왕(王) 가운데에도 최고에 왕이라 그렇게 사실이 그렇고, 그렇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하신 부처님이시면서도 부처님은 「나를 부처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설하는 이 법, 법신불(法身佛), 법신불을 참부처라고 너희들은 믿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부처님은 백천만 겁(劫)에 우리의 목숨을 다 바쳐도 한(限)이 없는 그러한 위대한 부처님이십니다.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지만,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신 그 길을 열어 주신 부처님이야말로 우리는 정말 목숨 바쳐서 은혜를 갚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 은혜를 갚는 길은 무엇이냐?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법(法)을, 그 위대한 법을 실천할려고 노력한 데에 은혜 갚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는 길이 그렇게 어렵고 먼 것이냐? 꼭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그 경(經)을 보면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어서 여간 공부해 가지고서는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이 삼천년을 두고 그 경을 읽고 연구하고 해 왔습니다.
또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의 경(經)을 한 글자 한 토도 어김없이 조로로록 외울 수 있는 부처님의 제자에 아란존자(阿難尊者)가 있었습니다. 그 아란존자를 비롯한 오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께서 평생 동안 설하신 법(法)을 다 결집(結集)을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한문(漢文)으로 번역을 해 가지고 봉안(奉安)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해인사에 가시면 그 팔만대장경을 경판(經板)을 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시기 전에 그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법(法)에 등(燈)을 누구에게 전하셨냐 하면은 그 경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우는 아란존자(阿難尊者)에게 전해야 할 텐데, 전법(傳法)을 아란존자에 하시지 아니하고 한마디도 법을 설할 중도 모르는, 그리고 평생을 누데기를 입고 거지처럼 두타행(頭陀行)을 하는, 거지처럼 얻어먹고 다니면서 당신 공부만을 철저히 하는 가섭(迦葉)이라고 하는 제자에게 법을 전하셨습니다.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해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당에도 왔다갔다하고 수천리 밖에도 왔다갔다하는 신통제일(神通第一)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있었고, 법을 설하기를 부처님 못지않게 그렇게 법을 잘 설하는 제자도 있었고, 십대제자(十大弟子)가 각각 그 장기가 있어서 훌륭한 제자가 많았지마는 거지로 다니면서 평생 누데기를 입고 사는 정말 저런 사람이 도인(道人)일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생긴 가섭존자한테 그 법을 전하셨다. 왜 그러냐?

불법(佛法)은 지식이 많은 데에 있는 것도 아니요, 경을 잘 읽고 외우고 해석할 줄 아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신통이 자재하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연설을 잘하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여.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계율만을 지키는 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여. 오직 참나를 깨닫는 데 있는 것이다.

그 가섭존자에게 법을 설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부처님께서도 내 대신, 내가 기운이 없고 그러니 니가 내 대신 법을 설해라 그렇게 가끔 권고를 하시면, 가섭존자는 아니올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법을 설하기보단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듣기를 더 좋아합니다. 법을 설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섭존자가 팔십에 이르러서 무거운 누데기를, 누덕누덕 기운 누데기를 입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아, 네도 나이가 팔십이 넘었는데, 젊었을 때는 누데기를 입었다 하지만 팔십이 넘어서 기운이 없는데 그렇게 무거운 옷을 입을 게 아니라, 내게 비단으로 맞는 가벼운 가사(袈裟)가 있으니 이것을 입으면 가볍고 뜨시니 이제는 누데기를 그만 입고 이것을 입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섭존자가 말씀을 하시기를 “아니올시다. 저는 이 누데기를 입는 것이 편안합니다. 조금도 무거움을 느끼지 아니하니 염려 마시옵소서. 저는 이 누데기를 입겠습니다” 이렇게 사양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열반(涅槃)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사방팔방에서 신통력으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날아서 신통력으로 날아서 모다 참예를 했습니다.
가섭존자는 저 수백 리 밖에 숲속에서 떠억 정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물론 가섭존자도 대나한과(大羅漢果)를 증득을 했기 때문에 물론 신통으로 날아올 수가 있었지만 너무너무 부처님을 존경하는 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일주일이나 한, 긴 여러 날을 걸려서 걸어서 부처님의 열반하신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가섭존자가 떠억 부처님 발밑에 절을 했습니다. 절을 하자 일주일 전에 열반하신 부처님, 관(棺) 속에 떠억 모셔 놨는데 관 밖으로 두 발을 주~욱 뻗으셨습니다. 일주일 전에 열반(涅槃)하신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떠억 뻗으신 뜻이 무엇인가?
이 도리(道理)를 깨달라야만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깨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법, 불교의 진리, 그 진리가 경(經) 속에 담아 있건마는, 경을 아무리 읽고 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이 깨닫는 법, 참선법(參禪法)은 교(敎) 밖에 전한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법을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교 밖에 따로 전한 법이다’

만약에 교(敎)가—경(經)을 잘 읽고 외우고 쓰고, 잘 해석하고 하는 것이 불법(佛法)이라면 응당 부처님께서는 아란존자에게 법(法)을 전하셨으련마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섭존자에게 이 법을 전하셨다 이 말이여. 그 가섭존자에게 전한 불법(佛法)이 그다음에는 누구에게 전해졌냐 하면 아란존자에게 전해졌다 그 말이여.

아란존자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백 일만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결집(結集)을 하는데 그때 아란존자가 ‘아, 이제 결집을 하면 응당 나를 중심으로 해서 결집을 하게 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오직 나만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법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외우고 있으니까 이제사 내가 참 대접을 받을 때다, 알아줄 때가 왔다’ 이리 생각했고 많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가섭존자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안 했습니다.

아란존자가 떠억 가섭존자 앞에 나와서 “부처님께서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부처님께서 남기신 발우(鉢盂)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섭존자가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著)하라. 문 앞에 찰간대(刹竿臺)를 꺾어 버려라”

찰간대(刹竿臺)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저 갑사(甲寺)나 마곡사(麻谷寺)나 해인사(海印寺)나 큰 절에 가면 법당 앞에 큰 돌을 나란히 이렇게 세워 놓고 구녁, 구녁을 뚫어서 세워 논 것이 양쪽에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 갑사에 가면 거기에 쇠로 높은 기둥을 세워 놨습니다. 그 꼭대기에다가 깃발을 달았습니다. 그 깃발을 달면 먼 데에서도 ‘아, 지금 절에 법회가 열리는구나’ 그것을 알고 그 법회에 참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무슨 큰 법회가 있던지, 법요식이 있거나 행사가 있으면 그 찰간대에 깃발을 달았던 것입니다.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著)하라. 저 문 앞에 찰간대를 꺾어 버려라’ 아란존자가 그 뜻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니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육두백판으로 다 외운다하더라도 이 뜻을 모르면 너는 이 오백 명의 성승(聖僧) 가운데 너는 끼지 못한다, 당장 나가거라!’ 내쫓아 버렸습니다.
아란존자가 가섭존자에 방(棒)을 맞고 쫓겨나 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 가지고 뒤꿈치를 들고 교족(翹足) 공부를 했습니다. 발 끄터리, 발가락만 땅에 닿게 선 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용맹정진을 어떻게 했던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대분심(大憤心)과 기상(氣像)이 나 가지고 가섭존자 있는 데를 쫓아가서 문을 뚜들었습니다. “어서 문 열어라” 고함을 치면서 문짝을 두드리니까 “니가 참으로 깨달랐으면 문을 열지 말고 들어오너라”
터~억 거기에서 아란존자가 그 문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가섭존자는 아란존자를 인가(印可)를 했습니다.(처음~42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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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성중(五百聖衆)의 한 사람으로 인증을 해 가지고 그때 비로소 아란존자가 ‘어느 때 어디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출출출출... 외우는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른 오백 명의 성승(聖僧)들이 ‘과연 그렇게 틀림없이 그렇게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셨다’ 그러면 한 구절이 따악 결집(結集)이 되고, 또 그다음에 출출출출... 외우면 또 오백 명의 성승들이 ‘그때 과연 틀림없이 그렇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또 그 구절이 결집이 되고 해서 부처님의 경전이 결집이 된 것이 제1회 칠엽굴(七葉窟)에서 그렇게 결집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불경(佛經)을 잘 외었어도 부처님의 진리, 참나를 깨닫지 못한, 견성(見性)을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법(法)을 전해 받았다고 할 수가 없어. 확철대오한 뒤에사 가섭존자가 아란존자에게 제2대 조사(祖師)로 법을 전하셨다 그 말이여.
그다음에 아란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존자에게... (녹음 끊김) ...안에 도착을 해 가지고 중국에 오셔서 법을 전하셨어. 그래 가지고 77대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까지 법이 전해 왔다 그 말이여.

여러분 가운데에는 그 전강 스님을 직접 친견하시고, 불명(佛名)도 타시고, 화두(話頭)도 타시고, 설법(說法)을 들으신 분이 이 가운데는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얼마나 인자(仁慈)하시고, 그 음성과 그 설법하신 것과 그 게송을 읊으신 것을 아까 녹음을 통해서도 들으셨겠지마는, 그 설법을 듣고 신심(信心)을 내지 못하고, 발심(發心)을 얻지 못하고, 참나를 깨닫기 위한 참선(參禪)을 하지 아니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병(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병을 신기하게도 잘 낫을 수 있는 명의(名醫)를 만나 보고도 그 병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 명의가 주는 약을 먹지 아니하고, 그 명의가 주는 침 맞기를 거부한다면, 살기를 싫어한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병을 낫기를 바래고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명의가 주는 약과 침을 잘 맞고 그 사람이 일르는 대로 병 조리(調理)를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바라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확철대오한 선지식(善知識)의 법을 믿고 그것을 실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법이 옳은 줄 알고, 그 스님이 바른 선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돈 벌기 걱정, 자식 걱정, 살림 걱정, 좋은 옷을 입고, 좋은 패물을 갖기를 원하는 그러한 사치스러운 마음 때문에 인정(人情)에 끄달려서, 오욕락(五欲樂)에 끄달려서 이 생사해탈하는 법을 뒤로 미루고 등한히 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냐 이 말씀이여.

사람은 절대로 목구멍에 거미줄 치는 법이 없습니다. 굶어서 죽은 사람은,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굶어서 죽는다 하지만 굶어서는 여간해서 죽지 않습니다. 결국은 며칠 굶다가 죽을 때는 굶어서 죽은 게 아니라, 밥을 보거나 먹을 것을 보면 잔뜩 먹기 때문에 결국은 죽을 때는 먹어서 죽는 것입니다.
‘부황(浮黃)났다’ 그러는데, 굶어 가지고 부황난 게 아니라, 굶은 뒤끝에 잔뜩 먹어 가지고 먹어서 병나서 죽는 것이 그것이 부황나는 것이어요.
일주일을 설사 밥이 없어서 굶드라도 물을 마시면서 미음을 식혀서 먹으면서 잘 조리를 했으면 굶는 덕택으로 위장병도 낫고, 혈압병도 낫고, 당뇨병도 나을 텐데, 굶고 난 뒤끝에 잔뜩 먹고 위장이 터져 가지고 죽거나 부어 가지고, 얼굴 띵띵 붓거든, 부은 것은 굶을수록 살이 빠지게 되어 있지 절대로 붓게 되어 있지 않어. 잔뜩 처먹고 위장이 고장이 나니까 얼굴이 띵띵 부어 가지고는 헐근헐근하다 죽는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은 병이 나면 될 수 있으면 굶는 것이 좋습니다. 굶고 물만 마시면 어지간한 병은 다 낫습니다. 감기도 사흘만 굶으면 낫고, 배탈 난 것도 사흘까지도 안 갑니다. 하루만 굶어도 배탈 난 것은 낫습니다. 굶고 물만 마시면 99%는 병이 낫게 되어 있습니다.
이 참선도 무엇을 잔뜩 많이 읽고 외우고 알려고 하지를 말고, 될 수 있으면 마음 비우는 공부를 하면 참선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마음도 편안하고, 마음도 깨끗하고, 나를 깨달을 수 있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단 일분일초도 뺀한 틈이 없이 뭘 생각하고 분이 나고, 이 생각 저 생각 뭔 한 생각만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부르르르 타오르고, 타올랐다 꺼지면은 또 딴생각에 불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그러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그 끊임없이 타오르던 마음에 불이 꺼진다 그 말이여. 마음에 불이 꺼지고 지혜(智慧)의 등불이 환하니 밝아질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입니다. 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이 공부를 믿는 것이 불법을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 인제는 불공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고 집에서 그 공부만 해야겄다’ 그렇게 되면 절은 큰일이 납니다. 이 절이 있어야 스님네도 도(道)를 닦고, 절이 있어야 포교(布敎)도 할 수가 있고, 포교를 해야 여러분들이 불법이 무엇인가를 알고, 정법이 무엇인가를 알고, 모든 마음에 번뇌와 괴로움을 극복하는 법도 배우게 되고 생사해탈(生死解脫)도 할 수가 있고, 영원한 행복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네 자신만 먹고 입는 것이라면, 동냥해 먹고살면 실컷 먹고삽니다. 하루만 나가서 탁발(托鉢)을 해도 석 달 먹을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절을 지어야 하고, 법당을 크게 지어야 하고, 그 포교를 해야 하느냐?
불교는 자기만을 위하는 종교가 아니여. 나도 생사해탈을 해야 하고, 모든 사람도 생사해탈을 하도록 해야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해야만 할 그러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중노릇 하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고 쉬운 것이 아니여. 참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입고 싶은 것도 안 입고, 물론 이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지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보통 그러고 ‘스님네는 얼마나 편할까. 자식 걱정을 할 것이 있느냐, 집안 걱정이 있느냐, 얼마나 편안하고 좋을까?

사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이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3시 이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씻고, 그리고 나가서 도량석(道場釋)을 하고, 종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그리고 예경(禮敬)을 하면서 ‘모든 신도들이 모든 재난(災難)과 액(厄)이 소멸이 되고 모든 소원을 성취해서 정법(正法)을 믿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그러한 진실한 불자(佛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축원을 하고, 그리고 나서는 염불하고, 참선을 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 때에 설사 이름나는 대도인(大道人)이 아니라도 정말 그 앞에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할 만한 그러한 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석천왕(帝釋天王), 온 이 사천하(四天下)에 모든 중생들의 복과 죄를 관장하는 제석천왕이 원(願)을 세우기를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제자로서 출가해 가지고 도를 닦는 부처님 제자들이 어떠한 죄를 짓고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보지 않고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서약을 하고 원을 세우신 것입니다.

설사 물론 스님이라고 해서 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부처님과 똑같이 그렇게 모든 점에 있어서 훌륭하기는 어렵습니다. 잘못이 있어도 또 참회(懺悔)하고, 또 결심을 다져서 새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그래서 새벽마다 참회를 하고 원(願)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도 본의 아니게 어떠한 또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눈물을 흘리면서 팔에 향불로 팔을 지지면서 또 새로운 참회를 하고 서약(誓約)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평생을 부처님 앞에 먹물옷을 입고 도(道)를 닦은 것입니다. 그러한 스님네들이 있었기에 삼천년이 되도록 불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한 스님이 아니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러한 스님네가 잘 잡숫고, 잘 입고, 잘 거처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러면서 도를 닦고, 그 도를 닦은 그 결과로 얻어지는 도(道)의 힘으로 여러분에게 훌륭한 법을 설해 주십시요. 이렇게 해서 절이 필요하고, 법당이 필요하고, 부처님이 필요한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 돈 몇천 원 갖다 바치고, 쌀 몇 되 갖다 바치고, 그리고서 스님네들이 자기 앞에 굽신굽신하기를 바래고, ‘내가 이렇게 절에다 시주(施主)를 했는데, 나를 잘 받들어 모셔라, 나를 알아라’ 그래 가지고 아주 스님네 보기를 우습게 보고, 조끔 뭐 잘못이 있으면은 아주 ‘스님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막 눈 아래로 깔고, 우아래로 훑어보고.

보시(布施) 가운데에는 무주상(無住相)이 제일입니다. 돈을 몇천만 원을 갖다 바쳤건, 몇백만 원을 바쳤건, 쌀을 몇 가마니를 바쳤건, 불량답(佛糧畓)을 몇백 마지기를 바쳤다 하더라도 ‘바쳤다’는 생각이 없고 그럴수록에 겸손하고, 조끔도 내로라하는 생각이 없고.
설사 마을[사회]에서 대통령 부인이 되고, 장관의 부인이 되고, 장군의 부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조끔도 아만(我慢)과 교만(驕慢)이 없이 수수하도록, 겸손한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때 그분이야말로 큰 복을 받게 되고, 정말 부처님으로부터 ‘이마를 만져 주심[摩頂]’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큰 복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 상(相)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하는 그러한 자만(自慢)하는 마음이 없는 그러한 보시를 하면은 그 보시 공덕(功德)은 위대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돌아가게 되느냐?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대관절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 마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뭣고?’ 한마디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보다도 수승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 말을 듣고 참선(參禪)이 불교의 근본이요, 최고라 한 것을 아심과 동시에 그럴수록에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성의를 다해서 스님네를 잘 받들고, 절을 잘 받들어야겄다’ 그러한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주지 스님이 아까 ‘비가 온다’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도 그만 듣고, 나보고 빨리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쬐게만 이야기하라고 나한테 귀뗌을 했는데, 내 말이 끝나야 비가 오지 절대로 비는 안 올 것입니다. 또 비를 좀 맞으시면 어떻습니까? 좀 배가 고파도 좀 참으셔야 하고, 평생 잡수는 밥을 조끔 늦게 잡숴야 점심이 맛있는 것입니다.

옛날이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 아! 그 가만히 놀고 있으니까 어디서 떡 한 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그 말이여. 아 그래 집어서 보니까 그 맛있게 생긴 떡인데, 아 그 집을라고 하니까 훌떡 뛰어서 저리 도망간다 그 말이여. 또 쫓아가면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해서 걸음걸음이 해서 계속 그 점점 이상해서 그 떡을 따라가니까 숲속으로 떡이 굴러 들어가.
그래서 계속 또 따라 들어가니까 바위 밑에 무슨 굴이 하나가 있는데, 아! 굴속으로 그 떡 덩어리가 훌떡 뛰어들어간다 그 말이여. 아 그래서 ‘그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소년이 또 굴속으로 따라 들어가니까, 들어가는 입구는 조그만한데 들어가서 보니까 큰 광장이 있는데 그 안에 부처님이 떠~억 모셔져 있다 그 말이여. 참 신기하고 묘하다 말이여.

아! 그런데, 부처님을 보고는 ‘참 이상하다, 웬 이런 데에 부처님이 계신가?’ 하고, 아 그 떡을 거기 가서 떡을 요렇게 집을라고 하니까 딱 집어지니까, 떡을 요리 보니까 흙이 묻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흙 묻은 데를 살살 띠어서 옆에다 놓고, 흙 안 묻은 속을 따악 부처님 앞에다 놓고, ‘여까지 왔으니까, 부처님 앞에는 떡도 올리더라. 천상 이것이라도 올리고 절을 해야지, 내가 맨 입으로 할 수가 없다’ 떠억 올리고 절을 하고는, 부처님한테 절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석 자리를 떠~억 하고 부처님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부처님이 삥긋이 웃으시면서 “너 잘 왔다, 내가 너를 이리 불러들였다. 너 이리 올라오너라”
“부처님, 어떻게 부처님이 있는 데를 나보고 올라가라 합니까? 그건 함부로 올라가다는 ‘지벌 맞는다’는데

괜찮다, 이리 올라오너라 간신히 탁자 위로 기어 올라가 가지고는, 내 무릎 위로 올라오너라 또 부득이 무릎 위로 올라갔습니다.

“내 어깨 위로 올라오너라”
“허! 거그는 못 올라가겄습니다”

“괜찮다, 이리 올라오너라” 그래서 간신히 팔을 듣고[딛고] 해서 어깨 위로 올라가니까, “내 이 모가지 뒤로 올라오너라
부채를 떠억 뭣이 그 불을 끄는 그 부채를 요리 주면서 “이걸 니가 가지고 있거라. 가지고 있다가, 조금 있다 어두워지면 도깨비란 놈들이 잔뜩 와서, 어디 칠보를 잔뜩 갖다가 이 내 앞에 마당에다 놓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럴 거다. 그러면 그때 이 부채를 가지고 탁탁 치면서 ‘꼬끼오’ 하고 닭 우는 소리를 해라. 그러면 도깨비란 놈이 혼비백산해 가지고 도망갈 거다”
“예, 알겄습니다”

그 숨을 죽이고 있으니까, 밤중쯤 되니까 도깨비란 놈이 뿔이 둘 달린 놈, 하나 달린 놈, 눈이 쭉 째진 놈, 송곳니가 두 개가 나와 가지고는 그런 도깨비들이 몇십 명이 와 가지고는, 아 과연 잔뜩 칠보를 갖다가 금 · 은 · 유리 · 호박 모다 그런 보물을 갖다가 마당에다가 가뜩 갖다 놓고는 춤을 추고 노는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옳다, 이때로구나’ 해 가지고는 그 부채를 가지고 탁탁 치면서 “꼬끼오” 하고 세 번 우니까, “아따, 이거 날 샜다”고 그냥 그놈들이 그냥 겁이 나 가지고 보물도 가지도 않고 그냥 똥이 빠지게 도망갔다 그 말이여.

도망간 뒤에 “이 보물은 니 것이다. 그 니가 이놈을 갖다가 한목 내놓으면은 공연히 니가 어디서 훔쳐 왔다고 모함을 받을 테니, 딱 갖다 깊이 단속을 해서 놓고, 이걸 가지고 논도 사고, 또 집도 새로 짓고, 곡식도 많이 해서, 가난한 사람이 오면 밥도 주고 할 것이고 또 병든 사람이 오면 약도 주고, 돈이 없어 공부 못 한 사람 있으면 돈도 주고 그렇게 해서 너도 필요한 만큼 쓰고, 많은 사람에게 이 재산을 풀어 주고, 너도 불법(佛法)을 공부해서 많은 사람에게 불법을 갖다가 펴라”
그렇게 부처님한테 부촉(咐囑)을 받고 떠억 왔는데. 그래 가지고 살살 논도 사고 집도 짓고 하니까는 아! 이웃집 놈이 “너, 어디서 그렇게 도독질해 왔냐? 너, 나 좀 다오. 너 안 주면 너 도독놈이라고 내가 고발을 하겠다”고.

“나보고 달라 하지 말고 이것은 함부로 주는 것이 아니고. 너 저 숲속에 가면 거기 굴이 있어. 너, 떡 한 덩어리 어디서 굴러 들어와 가지고 떡을 따라갔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그 얘기를 조로록 얘기했다 그 말이여.
“그래! 나도 그러면 한번 그렇게 해봐야겄다”

아! 그 사람 앞에 떡이 한 덩어리 어디서 굴러 떨어졌다 그 말이여. 잡을라고 하니까 계속 떡이 홀딱 홀딱 홀딱 뛰어서 그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아 되었다. 나도 인자 큰 부자가 되었다’ 좋아서 따라가니까, 아 굴속으로 들어가서 보니까 과연 부처님이 있다. 부처님 앞에 가니까 그 떡이 도망가질 않거든.
그래서 그 떡을 줏어 가지고 요리 보니까 흙이 묻었거든. 요리 흙 묻은 데를 그 띠어서 부처님 앞에다 놓고, 안 묻은 놈은 지 입에다 넣었다 그 말이여. “나도 배고프네”
아! 그래 놓고는 절을 떠억 저도 형식적으로 절을 석 자리하고 “나에게 좋은 보물을 나도 좀 많이 주십시요 안 들려? 나에게도 좋은 보물을 주십시요, 부처님. 아무개만 주고 나는 안 줄 수가 있습니까, 나도 많이 좀 주십시오. 나도 좀 잘 먹고 살아야겠습니다. 부처님은 평등하시고 일체중생에 자비로우시다는데, 왜 아무개만 주고 나는 안 주십니까?

이리 올라오너라 올라왔어. ‘올라오라’ 하기가 무섭게 막 모가지 뒤로 올라가. 올라가서 “그 부채, 나도 좀 집어 주시오”
“여기 있다” 부처님이.

가만히 있으니까 밤중에 도깨비들이 모여드는데, 정말 마당 가운데다 칠보를 번쩍번쩍 번쩍번쩍한 찬란한 보물을 갖다 놓고 춤을 추는데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녀. ‘옳다, 저놈들 빨리 쫓아 버려야 되겠다’ 부채를 가지고 탁탁 치고 “꼬끼오”
“저놈의 자식이 엊저녁에 아직 날도 새지도 않았는데 닭 울음소리를 하고 내 보물 쫓아 다 뺏어가더니, 저런 나쁜 놈의 자식” 도깨비들이 달라들어서 그놈을 끌어내려 가지고 뒤지게 뚜드러 패 놓고 보물을 다 짊어지고 가버렸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뻐르적 뻐르적 뻐르적.


여러분, 이것은 조그마한 간단한 동화(童話)에 지내지 못하지만, 여러분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것 사 가지고, 나를 낳아 주시고 나를 키워 주신 부모님은 뒤로 미루고 자기들 내외만 오붓하니 잡수지는 않습니까?
내 자식, 내 딸만 귀엽게 생각하고 부모 지리(至理) 못해서 고생하는, 고아원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자식 잘못 두어서 늙발에 고생하는, 양로원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고생하고 있는 부모를 생각해 보신 이 있습니까?

아무리 자기가 피땀 흘려서 큰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건 자기 돈이 아닙니다. 재산(財産)이라 하는 것은 크고 작고 간에 자기는 관리인(管理人)으로서 그 재산을 맡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면 죽을 때 다 가지고 가야 할 텐데, 아무리 억만금(億萬金)도 죽어갈 때는 한푼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지고 있을 때, 자기도 물론 먹고 입어야 하고, 자손도 가리켜야 하고, 필요할 때 써야겠지만 항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그것을 적절하게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와서 못 쓰고 있어 봤자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할 거, 자손에게 전해 줘 봤자 자손이 복(福)이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요긴하게 쓰고 행복하게 살지, 아무리 많은 재산을 주어 봤댔자 복이 없는 사람은 그 재산 때문에 오히려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고, 비명에 죽기도 하고, 오히려 불행하게 된 예가 참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에게는 재산을 많이 전해 주기보다는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가리켜 놓는 거,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을 전해 주는 것이 참으로 부모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관리인(管理人)이라 나는 재산을 임시(臨時) 맡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을 해야겠다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불법(佛法)을 위해서 불사(佛事)를 위해서 적절히 쓴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참으로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거, 재산으로 인해서 재앙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관리인이란 생각을 모르고 욕심만 부리고 자기만 생각하면 그 재산은 자기에 오래 붙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편의상 제석천왕(帝釋天王)이란 이름을 여기서 씁니다마는, 제석천왕이 나한테 재산을 관리하라고 맽겨 놨다가 그 사람의 관리 상태가 바르지 못하면 ‘안되겄다. 너한테 맽겨 놔 봤자 소용이 없다. 다른 사람한테 주어야겠다’ 당장 그 사람한테 뺏어다가 다른 사람한테 맽기는 것입니다.
정말 그 제석천왕에 뜻을 옳게 알아 가지고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그 재산이 자기 평생 동안 점점 불어날지언정 줄어지지 않고, 그 자손에게 전해서 자손도 관리를 잘하면 그 자손 대(代)에도 그 재산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3대도 가고, 4대도 가고, 5대도 가고, 9대도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자손이 관리를 잘못하면 슬쩍 뺏어다가 딴 사람 주어 버리고, 그 뒷끝이 비참하기를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것을 잘 보고 알고 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 대전 충남 지방에도 큰 부자가—이 대전 천지 그 사람 땅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만큼 그 큰 부자가 그이 죽자마자 자손들이 재판질을 하고 싸움하고 날거지가 될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비참한 사람 예가 현실에도 있습니다. 지방마다 있습니다.

산승(山僧)이 일러 드리는 말씀, 참선에 대한 말씀, 재산에 대한 말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말씀, 사회 국가를 위하는 말씀, 이 말씀 말씀을 깊이 뼛속에 새겨서 어떠한 일이 닥칠 때마다 그 복전암에서 그 말하던 송담(松潭) 스님 얼굴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생각하고, 주지 스님 얼굴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칫 잘못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때그때 바른길을 찾아서 실천하고 행해 가신다면 금생 일생 동안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행복한 삶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 법회가 끝나면 오늘 이 부처님 앞에서 법(法)을 설하고, 법문(法門)을 들은 그 인연을 길이길이 기념하고,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 아직 불명(佛名)을 타시지 아니한 분에게는 불명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작년에 또는 재작년에 또는 오래 8년 전에 전강 조실 스님이나 저에게 불명을 타신 분이 많이 계실줄 생각합니다.

불명을 타 가지고도 남이 받으니까 뭣도 모르고 자기도 받아 가지고, ‘그것이 무슨 좋은 것인가 보다 싶어서 너도나도 앞을 다퉈 받어 가지고 열어 보니까 글씨가 써졌고 도장이 찍어 있어. 이까짓 거 뭐
무당한테서 얻은 부작(符作) 한 장은 몇십만 원씩 주고 사다가 소중히 갖다 간직하면서 여기서 드리는 불명은 요리 떠들어 보고 울긋불긋하지 아니하니까 그냥 갖다가 어디 서랍에다 넣어 놓고.

“불명이 무엇 입니까?”
“아 그 불명을 받았는데, 보현심이던가, 문수궁이던가? 모르겠습니다. 또 주십시요”

불명(佛名)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부처님[佛]의 이름[名]입니다. 이 불명 하나 탐으로 해서 그분은 정식으로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 되었다고 하는 증서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표구를 해서 집에다 떠억 붙여 놓고, 그걸 한번 볼 때마다 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분이 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눈에 뜨일 때마다 ‘이뭣고?’ 한 번씩 할 때에 그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녹아질 텐데, 책상 서랍에다 넣어 놓고 불명(佛名)도 모르고,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불명은 불러 주고, 내가 부른 사람도 좋고, 부름을 받는 사람도 좋고, 불명을 ‘아무개’ 하고 부를 때마다 공덕(功德)이 그렇게 있는데, 그러니 오늘 드린다니까 ‘아이고, 그렇다면 나도 또 받아야겄다’ 그전에 받으신 분은 그전에 받으신 것을 찾으시면 되고, 또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눈 한번 감었다 다시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來生)입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뒤로 미루시지 말고, ‘나중에 돈 벌거든 부모한테 잘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돈 벌거던 시주(施主)를 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지끔 이만큼 살 때 부모한테도 잘하고, 부처님과 스님네에게도 잘하고, 이웃 형제간에도 잘하고. 많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여. 가직허면 작어도 좋고, 많으면 많은 대로 좋은 것이여.

뒤로 미루지 말고 어쨌든지 시간을 다퉈서 ‘이뭣고?’ 하십시요.(42분46초~1시간19분27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역겁전전무진등(歷劫傳傳無盡燈)~ / 우리 낱낱이 가슴속에 켜져 있는 꺼지지 않는 등불 / 복전암(福田庵)이 있는 목적 / 참으로 올바른 불법(佛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느냐?

불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자리, 본성자리, 천성자리 깨닫는 것이 불교(佛敎)의 전부이다 / 최초에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 우전왕(優塡王) / 부처님은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시다 /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그 길을 열어 주신 부처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지만,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위대한 법을 실천할려고 노력한 데에 은혜 갚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法)에 등(燈)을 가섭존자한테 전하셨다. 왜 그러냐? 불법(佛法)은 오직 참나를 깨닫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뻗으신 이 도리(道理)를 깨달라야만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깨닫는 것이 되는 것 / 참선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교 밖에 따로 전한 법이다 / 아란존자의 교족(翹足) 공부.

부처님의 법(法)이 가섭존자, 아란존자, 상나화수존자... 이렇게 전하여 77대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까지 법이 전해 왔다 /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바라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확철대오한 선지식(善知識)의 법을 믿고 실천을 해야 한다 / ‘이뭣고?’ 한마디에 그 끊임없이 타오르던 마음에 불이 꺼지고 지혜(智慧)의 등불이 환하니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보시(布施) 가운데에는 무주상(無住相)이 제일 /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 마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뭣고?’ 한마디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보다도 수승하다 / 참선(參禪)이 불교의 근본이요, 최고.
굴속으로 들어간 떡 한 덩어리를 따라 들어가 집어서 부처님께 공양한 소년 / 재산(財産)이라 하는 것은 크고 작고 간에 자기는 관리인(管理人)으로서 그 재산을 임시(臨時) 맡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을 해야 한다.

불명(佛名)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佛]의 이름[名]입니다. 이 불명 하나 받음으로 해서 그분은 정식으로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 된 것입니다 / 서로서로 불명은 불러 주면 둘 다 공덕(功德)이 있다.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켜져 있었던 그 등불, 이 몸뚱이가 죽어서 땅에 묻거나 화장을 해서 자취가 없어져도 이 등불은 꺼지지 않는 등불,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밝아 있었고, 이 우주가 앞으로 몇억만 년 뒤에는 이 지구도 가루도 남지 않게 없어질 때가 옵니다마는, 설사 이 세계가 없어져 버리더라도 우리 낱낱이 가슴속에 켜져 있는 이 등불은 꺼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스스로 등불이 켜져 있는 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이요, 성불(成佛)이요, 생사 없는 진리와 내가 합해지는 곳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바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을 하신 분인 것입니다.

원래 불법(佛法)은 아까 말한 우리에 마음자리, 본성자리, 천성자리 깨닫는 것이 불교(佛敎)에 전부인 것입니다.
불교(佛敎)에 '불(佛)'이라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깨닫는다'는 뜻이여. '부처님' 하면 ‘깨달은 어른’이라 그 말이고,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이란 말이고, 불법(佛法)이라 하면 ‘깨닫는 법’이라 이 말씀이여.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저 높은 하늘에 별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태양을 깨닫는 것도 아니요, 무슨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런 것을 깨닫는 게 아니라,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여기 앉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20년 30년 어릴 적을 생각해도 시대가 환한 우리에 마음자리를 깨닫는 길이라 이 말이여.
우리는 ‘마음, 마음’ 듣고 마음이란 말은 알지만, 과연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겨 있는가를 깨달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것을 깨달라야만,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불교를 믿고 실천해야만 불교를 옳게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를 「이 후(後)에도 나와 똑같이 생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모시거나, 또는 흙이나 나무나 돌이나 금속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알고 예배를 드리고 거기에 그 앞에서 경을 읽고, 그 앞에서 참선을 하고 그렇게 하드라도 살아 있는 나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에게 법문을 들은 것과 똑같은 공덕(功德)을 받으리라」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참선도 무엇을 잔뜩 많이 읽고 외우고 알려고 하지를 말고, 될 수 있으면 마음 비우는 공부를 하면 참선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마음도 편안하고, 마음도 깨끗하고, 나를 깨달을 수 있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단 일분일초도 뺀한 틈이 없이 뭘 생각하고 분이 나고, 이 생각 저 생각 뭔 한 생각만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부르르르 타오르고, 타올랐다 꺼지면은 또 딴생각에 불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그러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그 끊임없이 타오르던 마음에 불이 꺼진다 그 말이여. 마음에 불이 꺼지고 지혜(智慧)의 등불이 환하니 밝아질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입니다. 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이 공부를 믿는 것이 불법을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피땀 흘려서 큰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건 자기 돈이 아닙니다. 재산(財産)이라 하는 것은 크고 작고 간에 자기는 관리인(管理人)으로서 그 재산을 맡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면 죽을 때 다 가지고 가야 할 텐데, 아무리 억만금(億萬金)도 죽어갈 때는 한푼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지고 있을 때, 자기도 물론 먹고 입어야 하고, 자손도 가리켜야 하고, 필요할 때 써야겠지만 항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그것을 적절하게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 한번 감었다 다시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來生)입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뒤로 미루시지 말고, ‘나중에 돈 벌거든 부모한테 잘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돈 벌거던 시주(施主)를 하리라’ 생각하지 말고, 지끔 이만큼 살 때 부모한테도 잘하고, 부처님과 스님네에게도 잘하고, 이웃 형제간에도 잘하고. 많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여. 가직허면 작어도 좋고, 많으면 많은 대로 좋은 것이여.

뒤로 미루지 말고 어쨌든지 시간을 다퉈서 ‘이뭣고?’ 하십시요.

 

Posted by 닥공닥정
복전암(1~73)/(1~25)2020. 4. 7. 14:16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복전암No.22)—1990년 관음칠성회 기도회향 법문(90.10.07) (복전암22) (54분)

(1/3) 약 21분. (2/3) 약 17분. (3/3) 약 15분.

(1/3)----------------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기회환(我人山下幾回還)고

나무~아미타불~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我人山下)에 기회환(幾回還)고.

저 하늘갓으로 고향(故鄕)을 떠나서 방랑객이 되어서 몇 번이나 돌고 돌다가 '내다', '사람이다'한 아인(我人)의 산하(山下)를 또 몇 번을 돌고 돌았던가.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타가, 은애(恩愛)를 입고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하고 사랑을 주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생사윤회의 강(江) 속에서 문득 스승을 만났어. 생사 없는 도리를 설해주는 부처님, 조사스님, 선지식을 만났더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다. 생사 없는, 그리고 나의 마음의 고향길을 밟게 되었더라.



오늘 경오년(庚午年) 시월 초이레, 관음칠성회(觀音七星會) 칠일기도 회향(廻向) 법요식을 맞이해서 이렇게 신남신녀(信男信女)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많이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기도 회향 법요식을 즈음해서 불명(佛名)도 타고 또 십선계(十善戒)도 받고 또 참선(參禪)을 하실 분은 또 화두(話頭)를 타는, 그러한 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권'을 받게 됩니다.

화두와 불명과 십선계는 바로 무량겁(無量劫)을 생사윤회를 하다가 부처님이 계시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끊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라고 하는 것은 불명(佛名)을 받을 때 그 종이 한 장, 계(戒)를 받는 그 계첩(戒牒) 하나, 화두(話頭)를 탈 때에 그 문(偈文) 한 장, 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그 한 장의 종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찾는 화두 한마디를 철저하게 마음에 새겨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그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항상 끊이지 않고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할 때에 바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몸에 간직한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 표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가 있고 비행기가 있고 차가 있다 하더라도 그 표를 놓쳐버리면 탈 수가 없어.

한번 그 표를 탔으면은 그것을 깊이 잘 간직을 해야지 함부로 해서 어디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든지 놓쳐버리면 못 가거든.



오늘 십선계를, 불명을 타고 또 화두를 타고 십선계를 받을 분은 호궤합장(胡跪合掌)을 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합장을.

그렇지 않는 분은 그냥 가만히 앉어서 법문(法門)만 들으시면 됩니다.


이 십선계(十善戒)는 살(殺) · 도(盜) · 음(淫) · 망(妄).... 몸, 마음으로—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와 입[口]으로 짓는 네 가지와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그래서 몸으로 짓는 세 가지는 (첫째) 살생(殺生),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둘째,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不偸盜]. 셋째, 사음(邪淫)을 하지 말라[不邪淫].

이것이 살생을 하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사음을 하지 말라. 이것은 몸으로 짓는 세 가지고.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不妄語]. 다섯째는 음탕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지 말아라[不綺語]. 여섯째는 이간(離間)질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不兩舌]. 일곱째는 악(惡)한 말을 하지 말아라[不惡口].

이것은 입으로 짓는 네 가지고.
그다음에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는, 탐욕심(貪欲心)을 내지 말라[不貪欲]. 또 진심(瞋心)을 내지 말라[不瞋恚]. 사견(邪見)을 갖지 말라[不邪見].

이 사견은, 어리석고 삿된 견해를 갖지 말아라 그건데, 이 '어리석고 삿된 견해'는 무엇이냐 하면은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는 거여.


대승법(大乘法)을 신(信)하는 불자(佛子)는 첫째, 자비심(慈悲心)이 있어야 하니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해야 하고. 둘째, 내 것을 남에게 보시(布施)를 할지언정 어찌 남의 것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세째)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는 항상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가져야하거든, 하물며 자기 남편과 자기 아내가 아닌 사람과 관계를 할 수가 있겠는가.


넷째, 정법(正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하거든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다섯째) 불자는 마땅히 항상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음탕한 말과 상스러운 말이 입 밖에 나올 수가 있겠는가.

(여섯째) 불자는 마땅히 서로 화합을 시킬지언정 어찌 이간질을 해가지고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서로 싸우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일곱째) 정법을 믿는 불자는 항상 그 입에서는 부드럽고 사랑하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입에 못 담을 욕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불자는 내 것을 항상 보시(布施)를 하고 항상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탐욕심(貪欲心)을 낼 수가 있으며,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어떻게 진심(瞋心)을 낼 수가 있겠는가.

어른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내 몸같이 아끼고 돌보아야하거늘,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해서 진심을 내고 진심 낸 끝에는 미워하고 그럴 수가 없거든.


불법을 믿는 사람은 맨 처음에 인과법(因果法)을 믿어야 하는 거여. 인과법을 안 믿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이여.

인과라 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여.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인데.

무엇이든지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마구잽이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낸 사람은 인과법을 안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여.


인과법을 믿는 사람은—내가 말 한마디 하는 거, 한 생각 일으키는 거, 발 한번 디디고, 내디딘 것이 전부가 다 어떠한 그 결과적으로 자기가 지은 대로 그 과(果)를 받게 되는 것이여.

욕 한마디하는 그 과보(果報)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예는 우리의 현실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고 경전에서도 얼마든지 그 예가 있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통제일(神通第一) 목련존자는 결혼을 해가지고 내외간에 참 정답게 잘 살고 있는데,

그 모친이—결혼하기 전에는 애미 밖에 모르고 애미한테 그렇게 효성을 다하고 그러더니, 결혼한 뒤에는 그 아내한테 빠져가지고 아내하고만 가깝게 친근히 지내고 애미한테는 등한히 하니까, 그 어머니 마음에 굉장히 섭섭했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사사건건이 '저놈은 장가간 뒤에는 계집한테 빠져가지고 애미를 우습게 안다'고 이래가지고 자꾸 날이면 날마다 그래 쌓으니까, 그 아들이 화를 내가지고 "어떤 장사(壯士)가 있어서 저 늙은이를 뚜드러 팼으면 좋겠다"고, 아! 이런 말을 했다 그말이여.

그 과보로 오백생 동안을 죽을 때는 뭇매를 맞어서 죽었다 그말이여. 부처님 제자로 신통이 나고, 육신통(六神通)이 다 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음에도 불구하고 목련존자는 집장외도(執杖外道)의 패거리로부터 물매를 맞어서 죽었습니다.


육신통이 난 그런 아라한의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기가 지은 과보를 면치를 못했어. 이렇게 인과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맨 처음에 인과법부터 철저하게 믿어야 해.

인과만 철저히 믿는다면은 살생도 할 리가 없고, 도둑질도 할 리가 없고, 사음도 할 리가 없고, 거짓말도 할 리가 없고, 음탕하고 상스러운 말을 할 일도 없고, 이간질도 할 리가 없고, 악한 욕을 할 리도 없고, 탐욕심을 낼 일도 없고, 진심을 낼 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불법을 얼마만큼 철저히 믿느냐'를 가늠해 볼라면, 인과법을 얼마만큼 철저히 믿느냐 그것을 보면 알 수가 있어.


그런데 이 인과법도 차등(差等)이 있어.


실지로 살생을 하지 아니하고, 도둑질을 하지 아니하고,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산목숨 죽일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도둑질 할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사음을 할 마음을 내지 아니해야해.

몸으로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잘 지켜야 해.


몸으로 지키는 것은 소승계(小乘戒)고, 마음으로도 잘 지키는 것은 이것은 대승계(大乘戒)여.

소승계는 어지간하면 지키기가 쉬운데, 대승계는 참 지키기가 어려운 거여.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을 낸다 하더라도 실지로 죽이지만 않으면 소승계는 지킨 것이 되나, 대승계는 죽일려고 마음을 낼 때 이미 대승계는 범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대승계는 훨씬 차원이 높은 계(戒)고, 소승계는 초보적인 차원이 좀 낮은 계(戒)지만, 우리는 소승계도 잘 지키고 동시에 대승계도 잘 지킬 수 있도록 까지 끝없는 수행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저 물건이 좋다. 저걸 내가 훔쳤으면'한 생각 낼 때 이미 대승계는 도둑질을 범한 것이고, 그러니 이 대승계를 잘 지킬려면은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여.

그래서 이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먼저 받고 그 계를 철저하게 잘 지킬려면 참선을 열심히 해야 하거든.


그러면 오늘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받을 분은 합장을 하고,

"이 열 가지 계는 대승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불자로서 나를 깨닫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할 원력(願力)과 신심(信心)을 가진 사람이니, 능(能)히 이 열 가지 계를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잘 지키겠습니다"


"이상 십선대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


"이상 십선대계는 대승불자로서 마땅히 잘 가져야 할 바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능지"


편안히 앉으세요.


부처님 앞에 이 십선대계를 잘 지키겠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면 연비(燃臂)를—연비는 다음에 요 계첩(戒牒)을 드리면서 그때 연비를 받도록.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았으니 우리는 대승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불자가 되었습니다.

이 대승 십선대계를 낱낱이 지킬려고 하면은 참 어려운 것이여.


지킬려고 마음을 낼 때 벌써 범(犯)하게 된 도리가 있어.


그래서 이 대승십선대계는 몸으로 지키기는 쉽지만 마음으로 지키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여.

어떻게 하면 이 지키기 어려운 대승계를 잘 지킬 수 있느냐 하면은, 항상 화두를 들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는 거여.(처음~21분4초)





(2/3)----------------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내 마음을 찾는 방법이여.


불법(佛法)은 '내가 내 마음을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내 마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이라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마조(馬祖) 스님의 제자인 혜해(慧海) 스님의 지으신 법문이여.

그런데 그 스님은 중국에 월주(越州) 땅에 있는 대운사(大雲寺) 스님이었었는데, 마조 스님이라고 한 큰 도인(道人)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 마조(馬祖)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떠억 절을 하니까 마조 스님이 묻기를, "어디서 왔는고?"하고 물으니까, "저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왔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러 왔는고?"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집 보배창고는 놓아두고서 뭣 하러 사방을 이렇게 돌아다니는고? 나한테는 아무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나한테 구하러 왔단 말인가?"

그러니까 그 혜해 스님이 일어서서 떠억 절을 하고서 묻기를, "어떤 것이 혜해의 자기집 보배창고입니까?" 그렇게 여쭈었어.


오늘 십선대계도 받고 불명도 받고 화두도 받지마는, 진짜 이 산승(山僧)이 여러분께 꼭 간절히 일러드리고 싶은 말을 할라고 마음을 먹고 있으니까 전기가 딱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만큼 신심(信心)이 돈독(敦篤)해서 진짜 마음에 보배를 찾아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갈 표를, 진짜 표를 타게 될 이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인연(因緣)과 복(福)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 시간 맞춰서 전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하고 여쭈어봤어.


마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이 혜해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바로 그 보장(寶藏) 속에는 일체가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으며 조끔도 부족함이 없으며, 영원히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보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보장을 놔두고 어찌 밖에서 그 보장을 찾는단 말인고?"


그 말 한말씀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이것을 ‘언하대오(言下大悟)’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혜해 스님은 지적 이론(知的理論)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처님과 똑같이 확철대오를 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여. 안 것과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도 언하에 대오한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사 이 찰나 동안에 언하대오를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 법문을 들은 그 인연으로 여러분은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금생(今生)에 못하면은 내생(來生)에라도 하게 되겠지만, 같은 값이면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확철대오 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지끔 이 법문을 듣고 있는—그 듣는 것이 귀가 듣는 것이 아니어요. 듣는 놈은 속에 있고 다못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거든. 그 귀를 통해서 듣는 놈,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항상 그 의심(疑心)을 관(觀)해.


속이 상할 때도, 불끈 속에서 속상하는 놈이 요렇게 주먹탱이 같은 놈이 일어날 때, 바로 '이 일어난 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슬플 때 '이 슬퍼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 '괴로워 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가끔씩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플 때도 '이 아플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속이 상할 때마다, 원망스러울 때 괴로울 때, 그 찰나 찰나가 바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바로 그 기회(機會)다.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하고  청산산중백운다(靑山山中白雲多)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여운산장작반(日與雲山長作伴)하면  안신무처불위가(安身無處不爲家)니라

나무~아미타불~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이요  청산산중백운다(靑山山中白雲多)로구나.

흰구름 뭉게뭉게 속에 청산(靑山)이 중중(重重)하고, 청산 산 가운데에 백운(白雲)이 많구나.


일여운산장작반(日與雲山長作伴)하면, 날이면 날마다 첩첩산중에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곳에 청산이 첩첩한, 구름과 그 청산을 길이길이 도반(道伴)을 삼고 살아갈 때에,

안신무처불위가(安身無處不爲家)로구나. 구름 뭉게뭉게 일어나는 곳, 청산이 첩첩한 바로 그곳이 내 몸 편안히 할 나의 집 아닌 곳이 없구나.


이건, 구름은 객관 세계(客觀世界)를 비유한 것이고, 청산은 주관(主觀)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객관(客觀)은, 주관(主觀)은 무엇이냐?

내가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를 통해서 온갖 내음을 맡고, 입을 통해서 온갖 맛을 보고, 몸을 통해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이 육근을 통해서 모든 것을 느끼는 이 육근(六根), 느낄 줄 아는 놈이 그것이 주관(主觀)이고.

육경(六境),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모든 빛깔과 모냥, 모든 형형색색의 소리, 모든 냄새, 모든 맛, 몸뚱이를 통해서 느끼는 모든 색진(色塵), 촉(觸), 그리고 우리의 생각으로 하는 모든 법(法)이 다 그것이 객관 세계(客觀世界)인데,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이것이 객관(客觀)이여.


그런데, 모든 객관은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인식(認識)되는 것이고, 또 모든 객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관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여.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그 육진(六塵)이 없으면, 우리에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식(識)이, 육근(六根)을 통해서 식(識)이 일어나는 것이여.


그래서 육진(六塵, 육경六境)과 육근(六根)과 육식(六識)은 항상 이것이 삼위가 연관이 되어서 우리가 생활을 하고 온 세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여.


그래서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은 우리의 제팔(第八) 아뢰야식(阿賴耶識), 우리에게 그 여래장(如來藏)이 있기 때문에 그 여래장이 나가서 전개(展開)된 것이 요 삼라만상 두두물물 우주법계(宇宙法界)다.

우주법계가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여래장(如來藏)이 나가서 벌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요 법계(法界). 법계를 거두면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여.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두 개가 따로따로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여.

그래서 우리 참선(參禪) 하는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이뭣고?’로 돌아올 줄 아는 것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그 소리가 좋은 소리가 되었건 나쁜 소리가 되었건, 법문이 되었건 개 짖는 소리가 되었건, 무슨 소리든지 듣자마자 '이뭣고?'로 돌아와야 해.


이 법을 믿는 사람이 세계 60억 가운데 몇 사람이 되나 그말이여.

최상승, 불법(佛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법문(法門)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이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거여.


이 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밤낮 육진 세계(六塵世界), 외부 세계(外部世界)에만 팔려서 사는 거여.

그것을 비유해서 말하기를, 고향을 떠나서 타관(他官) 객지(客地)로 떠돌아다니면서 그 자기 딴은 참 좀 잘살아 볼려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나그네 신세(身世), 방랑객 신세로 일생을, 무량겁(無量劫)을 그렇게 살아가는 거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법문을 듣고 믿는 사람은 바로 자기의 쓰고 쓰고 써도 다함이 없는 보배창고에 보배가 가득—실컷 쓰고 온 사람들한테 다 노놔 주어도 끝이 없는, 편히 살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밖에서 그 보물을 찾고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지마는, 지혜(智慧) 있는 사람은 내게서 찾어야 하는 거여.


만석꾼이가 되아도, 실제로 만석꾼이 갑부도 정법(正法)을 안 믿는 사람은 천하에 불쌍한 가난뱅이인 것이고, 별로 큰 재산이 없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최상승법을 믿고 내 마음 속에서 영원을 찾는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어.

보리밥에 나물밥을 먹고 살아도, 된장찌개 하나로 먹고 살아도 조끔도 부족함이 없는 거여.


자기가 지은 대로 잘살면 잘사는 대로 좋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좋고,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이 부러운 것 없이 충족(充足)하다 그말이여.(21분5초~38분28초)





(3/3)----------------


십선계를 받고 '이뭣고?'—지금 이 법문을 들은 사람은 다 '이뭣고?' 화두를 탄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 하나는 잘 지녀야 하는 거여.


속상할 때도 그 속상한 데에 오래오래 빠져있지 말고 얼른 '이뭣고?' 화두를 들으라 그말이여. 이 속상한 생각이, 속상하던 마음이 스르르르 가라앉어 버리거든.

누가 원망스럽고 미웁더라도 냉큼 숨을 떠억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미운 생각이 쏴악 없어져버리거든.


십선계(十善戒)를 받고, 또 이렇게 화두(話頭)를 받고, 불명(佛名)을 진즉 받은 분은 그 불명을 가지고, 오늘 불명을 새로 타신 분은 새로 탄 그 불명으로써 서로 친구간에도 부르고, 내외간에도 부르고, 가족끼리도 부르고 이렇게 불명을 부름으로써, 서로 불명을 불러줌으로써 그 공덕(功德)이 되고 부름을 받을 때에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또 불명을 부르고 부름을 받을 때에 화두를 들게 되니까, 그렇게 해서 고향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돌아가는 것입니다.


숙세(宿世)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금생에 또 그 참 목숨 바쳐서 열심히 한 사람은 어느 찰나에 툭 터질는지 모르거든.


이 혜해 스님은 숙세에 많이 닦었고, 마조 스님을 신(信)하기를 정말 추호(秋毫)도 의심 없이 목숨 바쳐서 신(信)해서 떠억 신(信)했기 때문에,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그 묻는 그놈이 바로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그 언하(言下)에 툭! 터져버렸어.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가운데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어.

언제 터질런지 모르니까, 항상 간절(懇切)한 의심(疑心), '이뭣고?' 잠시도 놓지 말아야 해.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뭣고?'

똥 누면서도 '이뭣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의심(疑心)이 간절(懇切)히 안 난다'고 그런 생각할 것 없고, '공부가 잘 안된다'고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이뭣고?' 그렇게 하라.


언제 되고 안되고 한 생각 낼 겨를이 있느냐 그말이여.

자꾸 하다보면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져. 그냥 들어져 있다 그말이여.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 먹을 때까지 고대로 들어져 있고, 점심 먹으면서 한 숟갈 떠억 떠넣고 저작(咀嚼)을 하면서도 고대로 화두가 있게 되는 거여. 될 때가 꼭 오는 거여.

저녁에 잘 때에도 떠억 누워서 '이뭣고?' 그 의심을 들고서 터억~,

빨리 잘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들고 있다보면 언제 잠이 온 중 모르게 잠이 와.


나중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어져 있고, 아침에 눈 딱 뜨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그 화두가 딱, 엊저녁에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는 거여.

양치질하면서도 고대로 들어져 있고, 세수를 하면서도 고대로 있고, 법당에 가서 예불을 하면서도 고대로, 그러한 지경에까지 되면 머지않아서 툭 터져버리거든.


지끔 돈이 있는 사람이 제일이고, 돈이 있어야 양반이고, 돈이 있어야 사람노릇한다 그러지만,

그 돈, 부자 될려고 다 하지만 저마다 부자 된 거 아니고, 전생(前生)에 복(福)을 많이 지어논 사람이라야 큰 부자가 되는 거고, 또 큰 복은 안 지어 놨어도 부지런히 일하면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 거여.


밖에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말고 자가보장(自家寶藏), 자기 속에 있는 자기의 보물을 캐는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해야 정말 남부럽지 않게 금생에도 잘살고, 세세생생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도솔천 내원궁에서 참 온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께 부자 되는 법을 어떤 사람이 물으니까, "버는 것보단, 쓰는 것이 작으면 부자가 되느니라"


좀 말 같지 않은 소리 같지마는, 아무리 많이 벌어도 번 것보단 더 많이 쓴 사람은 항상 가난한 거고, 조끔 벌어도 버는 것보단 조끔씩 쪼끔 적게 쓰면 그 사람은 저축이 될 것입니다.

쓰고 남으면 그건 모아놓았다가 또 큰 일이 있으면 쓰는 거고, 보시(布施)도 하고 그러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백만장자라도 죽어갈 때 한푼 못 가지고 갑니다.


널 속에다가 금덩어리를 가뜩 담어서 가지고 가봤자 염라대왕한테 그거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염라대왕이 그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참 영원히 쓰고 남을 재산은 자가보장을 개발을 해. 자가보장(自家寶藏), '이뭣고?'


'이뭣고?'헌 사람은 살생을 안 하게 되니 죄 지을 것이 없고, 도둑질을 안 하게 되고, 사음을 안 하게 되고, 망어 · 기어 · 양설 · 악구를 안 하게 되고, 탐진치 삼독(三毒)을 범하지 않게 되니, 지옥은 암만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혹 지옥에,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있다면 지옥에도 가고 싶은 사람이 혹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이 십선계(十善戒)를 지키는 사람, 또 '이뭣고?'를 하는 사람은 아무리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가.숨 딱! 끊어지자마자 도솔천 내원궁에 가게 되고, 또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더라도 참 잘 인물 좋게 태어나서 바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될 테니 '이뭣고?'밖에는 없습니다.

백번 천번 말을 해도 '이뭣고?' 하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도 '이뭣고?' 속에 다 들어있어.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참 좋은 염불(念佛)이지만, '이뭣고?'한 사람은 '이뭣고?' 속에 그 아미타불이 다 들어있어. 얼마 만큼 들어있느냐?


육백만 번,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을 부른 공덕이 '이뭣고?' 한 번 하는 속에 들어있어.

그러면 '아미타불' 육백만 번을 부를랴면은 백일 동안을 잠자는 시간 .....(녹음 끊어짐) ...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불명과 십선계를 받으신 그 계첩(戒牒)은 내가 법상(法床)에 내려간 뒤에 질서있게 다 노놔 드리겠습니다. 또 이 계첩을 받을 때에 또 이 연비(燃臂)를 하시도록.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하니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오

나무~아미타불~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하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오

나무~아미타불~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하니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오.

여러분께 권하노니, 이 깊고도 깊은 이 자가보장(自家寶藏)의 화두법(話頭法)을 권하노니,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오. 이 얻기 어려운 이 좋은 보배를 가지고 어찌 헛되이 시간을 보내리오.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하니,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과 같은 이 소중한 이 좋은 시간이 없으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리오. 장부의, 여러분은 이 불명을 타고 십선계를 받고 화두를 탔어. 이 최상승법문을 들었으니 여러분은 그냥 이 몸 고대로 대장부(大丈夫)여. 머리가 있거나 없거나, 치마를 입었거나 안 입었거나 그냥 대장부여.


장부(丈夫)의 마음과 뜻을 가지고 그럭저럭 세상을 보내고 말 것인가?

아무리 남자라도 째째한 심보를 쓰면은 여자만도 못하는 것이고, 설사 여자의 몸을 받아났다 하더라도 정법(正法)을 믿고 장부의 뜻을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가면 바로 그 사람이 대장부다.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아무리 가정사가 바쁘고 사회 일이 바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 생사 문제,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 왔는데, 금생 이후로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최상승법을 들었으니 철저하게 믿고—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한문으로 되어서 읽기도 어렵고 읽어봤자 뜻도 잘 모르지만, '이뭣고?' 하나만 하면, 그렇게 해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이 자가보장(自家寶藏)을 확철대오 해버리면, 팔만대장경 환한 것입니다. 한문 글자를 못해도 그 이치는 환한 거여.


'이뭣고?'


합장을 하세요.

손을 드세요. 오른 손을.


정법을 믿고, 그동안에 <금강경>을 독송하던 분, 아미타불을 부르신 분, 관세음보살을 부른 분, '옴 마니 반메 훔'을 하신 분, 여러 가지 다 나름대로 신심을 가지고 다 하셨겠습니다마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정말 이 최상승법을 믿고 '이뭣고?'를 합시다.


(큰스님) '이뭣고?'

(대중) '이뭣고?'


(큰스님) '이뭣고?'

(대중) '이뭣고?'


(큰스님) '이뭣고?'

(대중) '이뭣고?'


성불합시다.(38분30초~53분34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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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 ; 『금강경오가해』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함허 득통 스님의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因小利養 捨父逃逝 流落天涯 幾度往返我人山下 幾度出沒恩愛河中 忽逢良友 指示 踏得常樂家鄕 始知昔年生死路 虛送百千閑日月

작은 이익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도망가서 하늘가를 떠도니, 몇 번이나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산하(山下)를 오고갔으며, 몇 번이나 은혜(恩惠)와 애욕(愛欲)의 강물 속에 출몰(出沒)했던가.
홀연히 좋은 친구의 가리킴[指示]을 만나서 즐거운(생사 없는) (마음의) 고향을 밟으니, 비로소 옛날 생사의 길에서 오랜 동안 허송세월했음을 알겠음이로다.
*'내다', '사람이다'한 아인(我人)의 산하(山下)를   번을 돌고 돌았던가 ; 아상(我相), 인상(人相).
*사상(四相) ;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된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분별심.
①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나라는 관념 · 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 · 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 · 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②인상(人相) ; 산스크리트어 pudgala-saṃjñā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③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 · 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④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 · 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 · 생각. 생명체라는 관념 · 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육조구결(六祖口訣).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 p135~136) (『육조 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 p98~99) 참고.

衆生佛性 本無有異 緣有四相 不入無餘涅槃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迷 卽佛是衆生 悟 卽衆生是佛
중생과 불성이 본래 다름이 없건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미(迷)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불(佛)입니다.

迷人 恃有財寶學問族姓 輕慢一切人 名我相 雖行仁義禮智信 而意高自負 不行普敬 言我解行仁義禮智信 不合敬爾 名人相 好事歸己 惡事施人 名衆生相 對境取捨分別 名壽者相 是謂凡夫四相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이나 학문 또는 출신[族姓]이 있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비록 인의예지신을 행하나 뜻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져서 널리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인의예지신을 행할 줄 안다’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음을 인상(人相)이라 합니다.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리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하고,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분별하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하니 이것들을 범부(凡夫)의 사상(四相)이라 합니다.

修行人 亦有四相 心有能所 輕慢衆生 名我相 自恃持戒 輕破戒者 名人相 厭三塗故 願生諸天 是衆生相 心愛長年 而勤修福業 諸執不忘 是壽者相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수행인도 또한 사상(四相)이 있으니,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자신은 계를 지킨다고 파계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인상(人相)이라 합니다.
삼악도의 고통을 싫어하여 천상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요, 오래 살고자 부지런히 복업을 닦으면서도 온갖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 수자상(壽者相)이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 없는 도리를 설해주는~'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부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십선계(十善戒) ; 몸[身]과 입[口]과 뜻[意 생각]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십악(十惡) ; 몸[身]과 입[口]과 뜻[意 생각]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몸[身]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입[口]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뜻[意 생각]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계첩(戒牒 삼가할 계/증명서 첩) ; 계(戒)를 받았다는 증명서(證明書). 츨가한 스님이나 재가 신도들이 계를 받은 다음 계를 받았다는 신표(信表)로서 주는 증서.
*문(偈文)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경 · 론 · 석(經論釋) 중에 나오는 게송(偈頌)을 말한다. 게구(偈句), 게송(偈頌)의 글귀.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연비(燃臂 불이 타다·불사르다·불을 붙이다 연/팔·팔뚝 비) ; ①불교에서 수행자가 계(戒)를 받을 때, 팔뚝에 향이나 심지로 불을 놓아 뜨는 의식 또는 그 자국. ②팔[臂]을 태우는[燃] 고행. 고행의 한 방법으로 팔뚝을 향불로 지지는 일.
연비(然臂 · 煉臂)로도 쓴다. 발원(發願) · 입서(入誓) · 고행(苦行) · 희사(喜捨)의 등의 뜻으로 행한다.
*계첩(戒牒 삼가할 계/증명서 첩) ; 계(戒)를 받았다는 증명서(證明書). 츨가한 스님이나 재가 신도들이 계를 받은 다음 계를 받았다는 신표(信表)로서 주는 증서.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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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馬祖) : (709 – 788) 법명은 도일(道一), 속성은 마(馬)씨。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 십방(什放)에서 나서 어려서 출가하였다.
남악(南嶽)에 가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회양선사(懷讓禪師)가 묻기를,
『무엇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는가?』
『부처 되려고 좌선하지요』

그 이튿날 회양선사가 도일의 앞에 가서 벽돌을 돌에 갈고 있었다.
도일이 묻기를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하렵니까?』
『거울을 만들려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읍니까?』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줄 아는가?』

『......그러면 어찌 하오리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상관없는 것이며, 부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집착이 없고 취사(取捨)가 없는 것이 선이다!』하는 말 끝에 크게 깨쳤다.

그의 법을 받아 가지고, 강서성 남강(南康)의 공공산(龔公山)과 강서성 남창부(南昌府) 종릉(鍾陵) 개원사(開元寺)에서 교화하니, 그의 법을 받은 제자가 139인이나 되었다.

그의 제자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서 신라의 도균(道均)선사와 철감(哲鑑)국사가 나왔고, 염관 제안(鹽官齊安)에게서 범일(梵日) • 진감(眞鑑)의 두 국사가, 귀종 지상(歸宗知常)에게서 대모(大茅)화상이, 대매 법상(大梅法常)에게서 가지(迦智)선사와 충언(忠彥)선사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에게서 무염(無染)국사가,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도의(道義)국사와 혜철(惠哲)국사와 홍척(洪陟)선사가, 장경 회운(章敬懷暉)에게서 현욱(玄昱)국사와 각체(覺體)선사 같은 신라의 큰스님들이 나왔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4년에 80세로써 입적하였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자가보장(自家寶藏) ; '자기집[自家] 보배 창고[寶藏]' 중생이 각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가리킴.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〇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했다. 선남자야,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밖에서 찾지 말라 ; 나이가 많건 적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열심히만 참선 정진 가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니까,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루 속에  자라는, 자기 아무리 종일토록 버르적거려도 자루 속에 들어있는 자라는 거기에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아무개야!” “ 바로 거기에 있거든. 그놈을 내놓고 찾는 것이 아니거든.(송담스님 No.577—96 11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스님)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뜻을 구하지 아니 하여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幻化, 幻과 같은 變化)가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부터 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마음을 밝힌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음을 닦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마땅히 이러한 법(法)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마음의 성품은 물듦이 없어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 있는 것이니 다만 망령된 생각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님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〇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지끔 이 법문을 듣고 있는—그 듣는 것이 귀가 듣는 것이 아니어요. 듣는 놈은 속에 있고 다못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거든. 그 귀를 통해서 듣는 놈,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항상 그 의심(疑心)을 관(觀)해'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백운운리청산중(白雲雲裏靑山重)~'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운산(雲山)'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아뢰야식(阿賴耶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참고]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여래장(如來藏) ;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 중생의 마음 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씨앗.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여래의 성품. 모태(母胎)의 태아(胎兒)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부처의 성품.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지혜(智慧) ; ①모든 현상의 이치와 선악 등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추리하는 마음 작용.
②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마음 작용.
③미혹을 끊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마음 작용.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분별을 떠난 경지에서 온갖 차별을 명료하게 아는 마음 작용.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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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 혜해 스님은 숙세에 많이 닦었고, 마조 스님을 신(信)하기를 정말 추호(秋毫)도 의심 없이 목숨 바쳐서 신(信)해서 떠억 신(信)했기 때문에,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물었을 , 묻는 그놈이 바로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언하(言下)에 ! 터져버렸어' ;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6권. 마조(馬祖)의 법손(法孫), 월주(越州) 대주사(大珠寺) 혜해(慧海) 선사.
越州大珠慧海禪師者建州人也 姓朱氏 依越州大雲寺道智和尙受業 初至江西參馬祖 祖問曰 從何處來 曰越州大雲寺來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拋家散走作什麼 我遮裏一物也無 求什麼佛法

그는 건주(建州) 사람으로서 성은 주(朱)씨인데,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 도지(道智) 화상에게 업을 받았다. 처음에 강서(江西)로 가서 마조(馬祖)를 뵈었는데,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린 채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불법을 구하겠는가?"

師遂禮拜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更無欠少 使用自在 何假向外求覓 師於言下自識本心不由知覺 踊躍禮謝 師事六載

대사가 드디어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떤 것이 혜해(慧海)의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具足)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대사가 그 말끝에 근본 마음[本心]은 지각(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바로 알아채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6년 동안 시봉하였다.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자가보장(自家寶藏) ; '자기집[自家] 보배 창고[寶藏]' 중생이 각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가리킴.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비어 있는 부처님의 자리[處]를 메운다[補]고 해서 이름에 보처(補處)라는 말이 들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受記)를 받아 미래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을 이른다. 부처님 생존시에 아일다(阿逸多, Ajita)가 도를 열심히 닦아 도솔천에 왕생하여 이 보살의 위치에 올랐다. 석가모니도 태어나기 전에 호명(護明)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이 보살의 위치에 올라 도솔천 내원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도솔천보다 낮은 사천왕천이나 도리천·야마천에는 게으름과 욕정이 남아 있고, 도솔천보다 상위의 천들은 고요한 선정에 들어 있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시(布施) : [범] dāna 음을 따라 단나(檀那) · 다나(柁那) · 단(檀) 등으로 음사(音寫)한다. 물질 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 ; 시체를 넣는 관(棺)이나 곽(槨)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영감(靈龕)이라고도 한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게송) '권군심심참묘화~'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下) ‘送寧宏二禪師歸山 - 산으로 돌아가는 영(寧)·굉(宏) 두 선사를 보내며’ 참고.
[참고] 『태고집(太古集)』 (설서雪栖 編, 김달진 역주 | 세계사) p219.
'送寧宏二禪師歸山'
君不見  悉達多之碧山行  警汝呼吸棄人生 勸君深心參妙話  難得良晨可虛過  無量劫來無此日  丈夫心志只恁麽

'산으로 돌아가는 영(寧)·굉(宏) 두 선사를 보내며'
그대들은 실달다(悉達多)가 푸른 산으로 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잠깐인 인생을 버리라고 그대들을 일깨우신 것이다.
그대들에게 권하나니, 깊은 마음으로 묘한 화두 참구하라. 얻기 어려운 좋은 때를 어찌 허송하겠는가. 한량없는 세월에 이 날이 또 없나니, 대장부의 마음은 그저 이러해야 하네.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문 내용]


(게송)유락천애기도왕~ / 화두를 의단독로하도록 잡드리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여행권) / 불자는 인과법을 철저히 믿어야 / 소승계, 대승계 /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을 찾는 방법' / 불법(佛法)은 '내가 내 마음을 깨닫는 것'이 목적 /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 / (게송)백운운리청산중~ / 주관과 객관은 원래 하나 / 여래장이 나가서 전개(展開)된 것이 삼라만상 두두물물 우주법계다 / (게송)권군심심참묘화~



오늘은 기도 회향 법요식을 즈음해서 불명(佛名)도 타고 또 십선계(十善戒)도 받고 또 참선(參禪)을 하실 분은 또 화두(話頭)를 타는, 그러한 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권'을 받게 됩니다.

화두와 불명과 십선계는 바로 무량겁(無量劫)을 생사윤회를 하다가 부처님이 계시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끊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라고  것은 불명(佛名)을 받을   종이  , 계(戒)를 받는  계첩(戒牒) 하나, 화두(話頭)를  때에  문(偈文)  ,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있는  장의 종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찾는 화두 한마디를 철저하게 마음에 새겨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항상 끊이지 않고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할 때에 바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표를 몸에 간직한 거와 마찬가집니다.

불법을 믿는 사람은 맨 처음에 인과법(因果法)을 믿어야 하는 거여. 인과법을 안 믿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이여.

인과라 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여.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인데. 무엇이든지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마구잽이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낸 사람은 인과법을 안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여.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았으니 우리는 대승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불자가 되었습니다. 이 대승 십선대계를 낱낱이 지킬려고 하면은 참 어려운 것이여.

지킬려고 마음을 낼 때 벌써 범(犯)하게 된 도리가 있어.

어떻게 하면 이 지키기 어려운 대승계를 잘 지킬 수 있느냐 하면은, 항상 화두를 들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는 거여.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하고 여쭈어봤어.


마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끔 내게 묻는, '어떤 것이 이 혜해의 자가보장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너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니라. 바로 그 보장(寶藏) 속에는 일체가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으며 조끔도 부족함이 없으며, 영원히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보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보장을 놔두고 어찌 밖에서 그 보장을 찾는단 말인고?"

그 말 한말씀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이것을 ‘언하대오(言下大悟)’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혜해 스님은 지적 이론(知的理論)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처님과 똑같이 확철대오를 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여. 안 것과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은 우리의 제팔(第八) 아뢰야식(阿賴耶識), 우리에게 그 여래장(如來藏)이 있기 때문에 그 여래장이 나가서 전개(展開)된 것이 요 삼라만상 두두물물 우주법계(宇宙法界)다.

우주법계가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여래장(如來藏)이 나가서 벌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요 법계(法界). 법계를 거두면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여.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두 개가 따로따로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여.

그래서 우리 참선(參禪) 하는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바로 ‘이뭣고?’로 돌아올 줄 아는 것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그 소리가 좋은 소리가 되었건 나쁜 소리가 되었건, 법문이 되었건 개 짖는 소리가 되었건, 무슨 소리든지 듣자마자 '이뭣고?'로 돌아와야 해.


지끔 돈이 있는 사람이 제일이고, 돈이 있어야 양반이고, 돈이 있어야 사람노릇한다 그러지만, 부자 될려고 다 하지만 저마다 부자 된 거 아니고, 전생(前生)에 복(福)을 많이 지어논 사람이라야 큰 부자가 되는 거고, 또 큰 복은 안 지어 놨어도 부지런히 일하면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 거여.

밖에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말고 자가보장(自家寶藏), 자기 속에 있는 자기의 보물을 캐는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해야 정말 남부럽지 않게 금생에도 잘살고, 세세생생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도솔천 내원궁에서 참 온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백만장자라도 죽어갈 때 한푼 못 가지고 갑니다. 널 속에다가 금덩어리를 가뜩 담어서 가지고 가봤자 염라대왕한테 그거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염라대왕이 그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참 영원히 쓰고 남을 재산은 자가보장을 개발을 해. 자가보장(自家寶藏), '이뭣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도 '이뭣고?' 속에 다 들어있어.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참 좋은 염불(念佛)이지만, '이뭣고?'한 사람은 '이뭣고?' 속에 그 아미타불이 다 들어있어. 얼마 만큼 들어있느냐?

육백만 번,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을 부른 공덕이 '이뭣고?' 한 번 하는 속에 들어있어.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아무리 가정사가 바쁘고 사회 일이 바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 생사 문제,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 왔는데, 금생 이후로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최상승법을 들었으니 철저하게 믿고—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한문으로 되어서 읽기도 어렵고 읽어봤자 뜻도 잘 모르지만, '이뭣고?' 하나만 하면, 그렇게 해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이 자가보장(自家寶藏)을 확철대오 해버리면, 팔만대장경 환한 것입니다. 한문 글자를 못해도 그 이치는 환한 거여.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