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465)—92년 2월 첫째일요법회(92.02.02) (6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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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사효잉환석(光陰乍曉仍還夕)한데 초목자춘즉도추(草木纔春卽到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재세약무호말선(在世若無毫末善)하면 사장하물답명후(死將何物答冥侯)오
나무~아미타불~
광음사효잉환석(光陰乍曉仍還夕), 광음(光陰)이 잠깐 새벽이자 다시 저녁이 되더라. 새벽.. 잠깐 새벽에 벌써 해가 동이 텄는가 하면은 어느새 시간이 지나 가지고 벌써 해가 저물게 된다 그거거든.
초목자춘즉도추(草木纔春卽到秋)여. 초목도 봄이 되어서 파릇파릇 싹이 튼가 하자 어느새 가을이 되어서 단풍이 지게 되어.
인생도 엊그제 ‘출생했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 어느덧 커 가지고 학교에 들어가고 국민학교 들어간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대학시험을 본다고 그러고. 그러한 세월이 너무너무 빠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놀랜 적이 하도 많은데.
그렇게 무상한, 흐르는 물과 같고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그렇게 세월이 빠르고 그렇게 세월이 빠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생도 그렇게 늙어가기를 덧없이 늙어가기를 그렇게 빨리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지금 살고 있지만 그럭저럭 하다보면 흰머리가 나고 눈이 침침해지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그래가지고 그렁저렁 하다보면 죽음을 맞게 되는데.
재세약무호말선(在世若無毫末善)이면, 이 세상에 있을 때 생존 시에 터럭끝만 한 선업(善業)을 닦아 놓지 아니하면,
사장하물답명후(死將何物答冥侯)냐. 죽어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가서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무엇을 내놓을 것이 있겠느냐.
인생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그저 뭘 배우려고 그러고, 배우는 기간이 지나면은 무엇인가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그러고, 그렇지 않으면 높은 벼슬을 하려고 그러고, 그렇지 않으면 명예나 권리를 누리려고 그러고.
세상에서는 그런 재산, 색, 명예, 권리 또 오래 살려고 그러고, 좀 편안하게 살려고 그러고, 전부 그런 오욕락(五欲樂)을 위주로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애를 쓴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런 아무리 많은 재산, 아무리 높은 명예 권리, 그것은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못되어. 오히려 그러한 것을 얻어서 유지하고 그런 것을 위해서 지은 죄만이 그 앞에서는 심판을 받을 뿐이지,
그런 거 많이, 이 세상에서는 돈이 많고 명예나 권리가 많으면 어디를 가나 다 그 사람을 다 우러러보고 그 사람한테 함부로 못하고 그러지만, 염라대왕 앞에 가서는 영 사정이 달라가지고 그것은 전혀 염라대왕 앞에 가서 끗발이 안 올라.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놓을 것은 ‘마음을 얼마나 닦았느냐, 도를 얼마나 닦았느냐’ 그것이 가장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착한 일 ‘남을 위해서 얼마만큼 착한 일을 했느냐’ 그 착한 일 한 거.
그런데 그 착한 일이라 하는 것은 착한 일 한 만큼 복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 복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다 대고 활을 쏘면 한참 올라가다가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으로 떨어지듯이,
좋은 일 해가지고 복 받는 것도 그와 같아서 좋은 일 한 만큼 복을 받다가 그 복을 다 받아버리면 다시 떨어지는 것이라 영원성이 없는 것이여.
그렇다고 해서 착한 일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기왕 무엇인가 하려면은 착한 일을 해야 하되 그 착한 일 하는 가운데에도 항상 자기 마음 닦는 공부를 해서, 자기 마음이 바로 진여(眞如)고 불성(佛性)인데 진여불성이 자기에게 있어도 그것을 닦지 않고 그냥 놔두면 효과를 발휘를 못하는 거여.
마치 자기집에 좋은 보물을 가지고 있어도 깊이깊이 숨겨 놓고 가만 놔두면 거기서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다 그말이여.
그런 보물이 있으면 그걸 활용을 해서 자기에게도 유리하게 쓰고 남을 위해서도 유리하게 쓰고 사회를 위해서도 활용을 해야지 가만 놔두면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여.
전기를 가설해서 방방이 전기가 들어와 있어도 스위치를 눌러서 불을 켜야 빛이 나는 것이지 가설만 해 두었다고 해서 집안이 밝아진 것이 아니거든.
사람마다 다 불성을 가지고 있으되 그놈을 닦아서 그놈을 깨달아서 생활 속에 활용이 되어야 하지 그냥 가지고 있는 채 가만 놔두고, 하는 일이라고는 맨 오욕락이나 즐기고 그럭저럭 하면 그것이 소용이 없다 그말이여.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무상(無常)한 것인가,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나를 깨닫는 일이고, 그 나를 깨달을라면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간곡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임신년 양력으로 2월 첫째 일요법회 날인데, 1월 첫째 일요법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신미년 섣달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내일 모래면 또 임신년 정월 초하루가 돌아오는데.
일 년이 정말 어떻게 빨리 지나가는지, 지난 일 년 동안 나라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챙겨보면 굵직굵직한 일이 있지마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 1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으며 어떠한 발전이 있는가?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시는 것도 새해를 설계하는데 좋은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건 인식을 안 하건, 느끼건 느끼지 않건 시간은 착실히 1초 1초 지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1초 1초 지내가는 그 시간을 범연(泛然)히 지내면 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에 하루해가 벌떡 넘어가고 또 하루해가 벌떡 넘어가서 그래가지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내서 머지않아서 임신년 섣달그믐이 또 돌아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시간 지내간 것을 고인(古人)네들은 그렇게 아끼라고 그랬지만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을 아끼기 위한 한 방편으로 ‘우리의 1초 1초 지내가고 하루하루 지내가는 것이 우리의 죽음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고 또 그렇게 생각하라고 고인네들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몇 살을 살다가 며칟날 숨을 거두리라’고 하는 사형(死刑) 언도(言渡)를 받아가지고 태어났다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맛 우리는 언도(言渡)는 받았으되 집행(執行) 일시를 아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집행하는 날과 시간을 모르지만 틀림없이 온다고 하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하루하루 지내간 것을 그럭저럭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럭저럭 지내서는 안되니까 일 초 일 초를 정말 알뜰히 뜻있게 살아가야 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이뭣고?’거든. ‘이뭣고?’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내가고, 가만 있어도 무슨 생각인가는 떠오르고 있습니다.
과거 일이 아니면은 현재 일 그렇지 않으면 미래 일 또 기쁜 일, 슬픈 일, 언짢은 일, 내 일 아니면 가족 일, 그렇지 않으면 친구 일, 그렇지 않으면 나라 일, 사회 일, 세계 일, 무엇인가 종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데,
그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 생각에 나도 말려들어가서 그럭저럭 지내가고 있는 것이 세계 60억 인구가 현재 다 그렇게 살고 있고 과거에 무량중생(無量衆生)이 다 그렇게 살아왔거든.
그런데 우리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거기에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이렇게 하자는 것이여.
이것이 바로 시간을 아끼는 도리이고, 한 시간 한 시간 1분 1초를 뜻있게 보람있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단속하고 그렇게 시간을 아껴 쓰고 뜻있게 지내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좋은 생각이나 나쁜 생각이나,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자기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다 나로 하여금 한 치, 한 치 향상하게 해 주는 법문(法門)이요, 불보살 화현(化現)이요, 도량(道場)이요, 선원(禪院)이요, 선불장(選佛場)인 것입니다.(처음~16분1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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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부용산(芙蓉山) 영훈(靈訓) 선사라고 하는 큰 선지식이 옛날에 계셨는데, 그 선사가 최초에 귀종(歸宗)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을 찾아가서 친견을 했습니다.
떠억 찾아가서 그 귀종 선사에게 묻기를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잇고?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매우 엄숙하고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귀종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향해서 일러주되 네가 믿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말하기를 “큰스님께서는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학자를 위해서 정말 성실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감히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귀종 선사가 가로되 “네가 곧 부처니라”
그러니까 영훈 선사가 “어떻게 보림(保任)을 해 가야 되겠습니까?”
귀종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空華)가 난타(亂墮)니라.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공화가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이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영훈 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가지고 보림하는 길까지 눈을 떴습니다.
한 장애가 한 티끌이 눈에 있으니, 공화(空華)라고 하는 것은 눈병든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슨 꽃이 피어서 이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서물서물 서물서물 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거든.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일러주기는 어렵지 않지만 네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까,
“큰스님께서 어찌 거짓말 하시는 분이 아니고 성실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하니까, “네가 곧 부처니라” 거기서 확철대오를 했거든.
부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도 “부처님, 부처가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나름대로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 실달(悉達) 태자 뭐 그런 등등 나름대로 다 말씀하실 수 있고,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한 바로 진리를 깨달으신 진리와 하나가 된 성현이다’ 아마 그렇게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네가 곧 부처다. 영훈이 네가 곧 부처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묻는 바로 그놈이 부처다”
이러한 이것은 이론적으로 대답한 것이 아니고 또 영훈 선사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수긍을 해서 ‘아하, 바로 내가 부처구나’하고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어.
“네가 곧 부처다”고 하는 데에서 이론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거기에서 툭! 깨달아 버린 거여.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 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그래서 법문(法門)을 듣되 그 법문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상식 모다 그런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만,
이 자리에 모이신 법보제자(法寶弟子)는 무슨 법문을 듣던지 바로—법문이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저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문자 그런 것만이 아니고,
일상 생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평범한 이야기, 무슨 내용의 말이라도 그 말을 그 법문을 즉(卽)해서 떠억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을 하고, 그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드러난 거기에서 모든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참으로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거든.
보통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은 귀가 번쩍해서 눈알이 초롱초롱하고 조끔 재미없는 얘기를 하면 꾸벅꾸벅 한 시간 내 졸다가 뚝 일어나 가지고 누가 나 잔 것을 봤나 안 봤나 뚤래뚤래.
그런데 참 그래서 섣달그믐께 모다 신도님들은 모다 바쁘고 여러 가지로 새해를 맞기 위한 여러 가지 가정사, 회사 공장 모다 여러 가지로 모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다 많이 참석을 하셨는데,
사실 바쁜 것은 생사(生死) 문제보다 더 바쁜 것이 없고, 우리가 일 초 일 초 죽음을 향해서 계속 가고 있는데 자기의 생사 문제보단 더 바쁜 것은 없거든.
집에서도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참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법회에 이렇게 한번 떠억 나와서 부처님께 예배도 올리고 축원도 하고 그러고 도반(道伴)들도 만나고 이렇게 또 다 아는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도반들이 같이 모여서 또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이다.
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하고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辯我)하라 평생천착불상관(平生穿鑿不相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우리에게는 네 가지 얻을 수가 없는 것이 있는데,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있어.
(첫 번째) 항상 젊고자 해도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여. 별별 그 미용원에 가서 다듬고 뭘 치르고 바르고 얼굴에다 뭐 마사지를 하고 해도 세월이 지내가면 어쩔 수 없이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에는 흰머리가 생기고.
심지어는 주름살이 생기면 갓을 칼로 자르고 땡겨서 해봤자 잠시는 괜찮은 거 같아도 별 수가 없어. 무엇을 먹으면 좋다 해가지고 안 늙고 젊고 힘이 좋다고 해가지고 살아있는 곰 배를 째가지고 웅담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
또 두 번째는 아무리 병이 없고자 약을 먹는다, 운동을 한다, 좋다고 한 것은 다 해도 언젠가는 병들기 마련이고.
(세 번째) 영원히 죽지 않고 몇백 년 살고 싶어도 결국은 죽을 때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 장수(長壽)하고 싶어도 장수를 맘대로 못하고 저마다 다 오래 살고 싶지마는 누가 마음대로 되냐 그말이여. 건강하다고 해서 꼭 오래 살고 뭐 돈이 많다고 잘 먹고 산다고 해서 꼭 오래 사는 것도 아니어.
네 번째는 아무리 안 죽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어. 별별 좋은 주사를 들여다가 매일 맞아도 별수(別數)가 없어.
항상 젊고자 해도 마음대로 안 되고, 항상 병이 없고자 해도 마음대로 안 되고, 오래오래 살고 싶어도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영원히 안 죽고 싶어도 안 된다 그말이여.
그러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는 없는데, 금년 임신년에도 선거가 네 번인가 있다고 그러고 온통 모든 사업 경제난이다 뭣이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시험지를 또 도둑맞아 가지고 야단이고 이 구석 저 구석 날이면 날마다 일 없는 때가 없어. 그것이 직접 간접으로 다 우리 자신들에게 다 영향을 미치는 일이고.
그런데 시비해리(是非海裏)에 횡신입(橫身入)이여. 시비(是非)의 바다 속에 몸을 옆으로 비껴서 들어간다 그말이여.
사람들이 길이 툭 터진 데는 이렇게 번듯하니 이렇게 활발하게 걸어가지만 사람이 입추(立錐)의 여지(餘地)없이 꽉 차 있는 데는 그 사이를 뚫고 나갈라면은 옆으로 몸을 요렇게 비껴가지고 이렇게 막 뚫고 들어가야 하거든.
근데 이 세상은 온통 시비(是非)여. 옳은 것 아니면 그른 것이요, 그른 것 아니면 옳은 거여. 시비의 바다 속이여. 시비의 바다요, 시비의 숲속을 우리는 몸을 비껴서 들어가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다. 호랑이와 범의 떼 속에서 거기서 자재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말이여. 그러면 표호군중(豹虎群中)이 무엇이냐?
시비해리(是非海裏)라 하는 것은 세상에 옳고 그른 모든 일들이 다 포함된 것이고, 표호군중은 모든 사람이요 모든 일이거든. 경쟁 경쟁을 통해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세상이다 그말이여.
옛날에는 누구하고 다툴 것도 없고 경쟁할 것도 없고 자기 논밭 갈아서 심어서 그저 먹고 살면 그만이고 나물 캐서 먹고 그저, 물론 그것도 알고 보면 농사를 지려면 땅이 있어야 하고 땅을 마련하려면은 남하고 경쟁해서 부(富)를 재력을 얻어야 땅을 사는 것이니까,
다맛 옛날과 지금과는 그 전쟁이 전쟁의 그 치열한 도가 달라졌을 뿐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그렇게 경쟁하고 하는데, 경쟁하는 방법 방법이 나날이 잔혹해져 가고 있다.
잠시도, 어떠한 기업체를 운영하더라도 멍청하니 하다가는 언제 어떻게 망한지 망한 줄 모르고 망한다 그말이여. 세계가 다 마찬가지여. 무서운 마치 저 호랑이와 범과 사자, 곰, 늑대 이러한 무서운 짐승들이 우글대는 속을 여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그말이여.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이 표호군중 속에 무사히 지나갈 수가 있느냐?
막파시비(莫把是非)를 내변아(來辯我)하라. 시비(是非), 옳고 그른 것을 가지고 와서 나한테 와서 가릴려고 하지 말아라.
평생천착불상관(平生穿鑿不相關)이다. 평생에 그런 것 따지는 것은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 나 그까짓 거 상관 않는다는 고인(古人)의 시(詩)인데.
그러면은 옳고 그른 것도 따지지도 않고, 흥망성쇠도 따지지도 않고 일체를 다 피해 버리고 자기 혼자 문 닫고 집안에 앉아 그렇게는 이 세상은 살 수가 없어.
무엇인가 자기가 해야 할 일거리를 찾아서 자기를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또 그것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무슨 일인가는 해야지 우두커니 앉아서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아주 병들어서 수족이 오그라져가지고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 일거리를 찾아서 해야 되거든. 꼼질꼼질이라도 해야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무엇인가 일을 찾아서 해야 돼.
자기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또 자기 자신의 수입을 위해서 또 가정을 위해서 무엇인가 일을 찾아서 함으로써 살아가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몸도 건강이 유지가 되고 그런 것인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도 시비에 말려들지 않고 표범이나 늑대에 잡혀 먹지도 않고 그러면서 자기의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길이 ‘이뭣고?’거든. ‘이뭣고?’
일하면서 ‘이뭣고?’ 무엇인가 하면서도 항상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항상 그놈을 앞세우고 그놈으로써 살아가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좋은 일을 당하면 좋은 일. 궂은일을 당하면 궂은일,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기쁜 일을 당하면 기쁜 일,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가정 일이나 회사 일이나 직장 일이나 국가 일이나 세계 문제나,
무슨 문제를 보거나 듣거나 또는 직면(直面)을 하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탁! 그놈으로 기둥을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라. 딱! 그놈으로 자기의 핵심을 따악 잡은 거기에서 모든 일을 보고 듣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해보라 그거거든.
이건 대단히 말은 쉬워도 사실은 어려운 것이여. 어려운 것이 방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라면은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고 하는 확실한 신심(信心)이 있어야 해.
신심 하나만 철저하게 서 버리면 이 공부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고, 누가 못하게 해도 막무가내거든.
문제는 신(信)—‘믿을 신(信)’자, 신(信)이거든.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고.
아까 말씀드린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가서 탁! 자신 있게 내놓을 것은 이것 밖에는 없어. 내가 내놓기 전에 ‘이뭣고?’ 평생 열심히 한 사람은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염라대왕이 먼저 알고 터억 자리에 일어나서 합장을 한다 그랬어.(16분28초~37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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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동자(善財童子)가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법문을 듣고 발심을 해가지고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서 저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면서 일백십성(一百十城)을 찾아갔어.
그 일백십성을 넘고 넘어서 가면서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친견을 했는데, 그 선지식(善知識)마다—한 선지식을 친견하고 법문을 듣고 그다음에는 그 선지식이 또 “아무데 성을 가면 아무 이러이러한 선지식이 계시니 거기를 가거라” 그렇게 지시를 하면은 그 지시를 받고 또 그다음 선지식 또 그다음 선지식한테 법문을 듣고 또 그 선지식의 지시에 따라서 그다음 선지식,
이렇게 해서 53선지식을 친견하면서 그 들었던 법문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고대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 환희심을 가지고 그렇게 53선지식을 친견하는데 마지막에 가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을 했어.
그 미륵보살의 법문을 듣고서 “다시 문수보살을 가서 친견을 하라” 그렇게 지시를 받고 인자 문수보살을 친견을 하려고 마음속으로 탁 마음을 먹으니까 문수보살이 일백십성을, 오른손을 쭉 펴서 일백십성을 건너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떠억 이렇게 만져주신 거여. 그 찰나에 53선지식한테 들었던 모든 법문을 일시에 다 잊어버린 거여.
법문은, 듣고 환히 주렁주렁주렁 다 외우고 그 이야기를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다 알고 있는 거, 참 기억력이 좋고 한눈을 전혀 팔지 않고 그래가지고 온전히 정성을 다해서 잡념 없이 졸음도 없이 법문을 들으면 또 영리한 사람은 다 환희 다 아실 것입니다. 또 그 일부를 알고 일부를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법문을 듣고서 들을 때는 그 정성을 다해서 듣되 듣고 나서는 하나도 속에 남은 것이 없고 오직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탁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되어야 그 법문을 잘 들은 분이거든.
그 선재동자가 일백십성을 건너면서 53선지식을 친견할 때 그 선지식이—보면 터억 생김새가 거룩하고 누가 보든지 아! 훌륭하고 참 그런 게 아니고,
그 선지식 가운데에는 별별 종류의 선지식, 도대체가 신심이 아니고서는 먼저 선지식이 지시를 해주지 않았다면은 봐도 선지식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고 ‘저런 것이 도인(道人)인가?’ 꿈에도 생각지도 못할 그런 사람들이거든.
그 가운데는 귀신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승려도 있고 또 창녀도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거든. 신심으로 신심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그 선지식을 친견해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신심이 철저해야.
가지가지 공부를 하다보면 온갖 장애를 만날 수가 있거든. 가정적으로도 장애가 있을 수도 있고, 일신상에 건강상에도 장애가 있을 수도 있고, 선방에 나와도 이리저리 걸리고 속상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보면은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 수가 있어. 혼침(昏沈)이라든지 망상(妄想)이라든지 몸에 병이라든지 또 능엄경(楞嚴經)에는 53가지의 여러 가지 마경(魔境)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말이여.
그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만나더라도 조끔도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그럴수록에 더 철저한 신심으로 화두를 들고 정진을 꾸준히 알뜰히 해 나갈수 있어야 그래야만 비로소 도(道)를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는 첫째, 발원(發願)을 철저하게 해야 해. 입지발원(立志發願).
입지발원이 철저해야 하는데 ‘어떻게 입지발원을 해야 하냐?’하면은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와 같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르겠다’고 하는 철저한 입지와 발원을 가져야 한다.
공부하다 쪼끔 뭐..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계(境界)가 나타나면 또는 어떤 보통 말한 지견(知見)이 나면 그것이 자기 구경의 깨달음에 이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거기에서 주저앉고 그건 ‘득소위족(得少爲足)이라.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 만족을 삼는 거라’ 이것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는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여.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은 이상한 경계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나름대로 어떤 지견이 나타날 수가 있다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이 확철대오한 고조사의 구경각(究竟覺)이 아니면, 불조(佛祖)의 구경각이 아니면 언제라도 스스로 인증을 안 해야 돼. 누구 보고 물어볼 것도 말 것도 없이 스스로 부정을 해버려야 하거든.
그리고서 항상 초발심, 초발심자(初發心者)와 같은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 물들지 않는, 초발심(初發心)은 대체적으로 다 뜨겁고 깨끗하고 삿된 견해가 안 붙거든.
차츰차츰 하다보면 그 순수성을 잃고 나름대로 자기의 별로 내놓을 만한 것도 못된 그런 것을 살림을 삼고 그러한 것은 대단히 공부 도학자(道學者)에게는 무서운 것입니다.
필경(畢竟)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정말 자기 자신의 생사(生死) 문제이기 때문에 이건 철저한 발심과 철저한 신심으로 대의정(大疑情), 의단으로 이 삼요소(三要素)로써 나아갈 때 결국은 우리는 허송세월을 아니 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변화가 심하고 그렇지만 그러한 속에서 정말 우리는 발심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발심할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37분58초~48분2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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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진로여해활(三界塵勞如海闊)하고 무고무금요괄괄(無古無今閙聒聒)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진향자가심념생(盡向自家心念生)이니 일념불생도해탈(一念不生都解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계진로(三界塵勞)가 여해활(如海闊)이다.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三界). 삼계의 진로(塵勞), 진로 망상(妄想), 생사 변화, 희로애락, 흥망성쇠 이런 것이 전부 다 삼계진로(三界塵勞)인데, 그 삼계진로의 모양이 마치 저 바다처럼 넓고 넓어. 끝없다. 끝이 없고 한이 없다 그말이여.
무고무금요괄괄(無古無今閙聒聒)이여. 옛도 없고 이제도 없어. 옛이나 이제나 마냥 복잡하고 시끄럽고 그렇다 그말이여.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해 간다 그말이여.
그러면 이 삼계진로와 흥망성쇠가 어디서부터서 온 것이냐? 누구 때문에 온 것이냐?
다 사람들은 옛날에는 임금이 임금 노릇을 잘못해서 그렇다. 지금은 대통령이 잘못해서 그렇다. 무슨 정부가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다. 전부 다른 사람한테 그 원인을 돌리고 세상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진향자가심념생(盡向自家心念生)이여. 다 자기의 마음, 심념(心念)에서 다 나온 것이다 그거거든.
‘왜 나는 뭐 잘못할 게 없는데 왜 나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겠느냐?’
물론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무슨 야당이나 당수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해서 그랬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겠지만, 우리 일반 서민들은 자기야 뭐 국가 정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월급 타 먹고 살고, 농사꾼은 농사지어 먹고 사는데 자기가 뭘 잘못해서 나라가 시끄러워?
도대체 납득(納得)이 안 가고 곧이가 안 들리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세상을 만날 수밖에 없도록 자기가 업(業)을 그렇게 지어서 만난 것이여.
자기가 업을 잘 지어 가지고 저 천상(天上)에 갈 복(福)을 지었다면은 천상에 가서 나지, 뭐하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복잡한 데에 태어났냐 그말이여.
어떤 사람은 그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왜 나를 낳냐?’고, ‘나를 낳아가지고 이렇게 잘 먹이고 입히지도 못하고 대학도 보내지도 못하고 유학도 보낼 자신도 없으면서 왜 나를 낳았느냐?’고 부모한테 따지는 학생이 요새 있다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찌 보면은 부모가 대답할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건 그 학생이 전혀 모르는 말이거든.
무엇 때문에 자기가 그러한 부모 속에 자기가 태어났냐 그말이여.
자기가 영혼이—그걸 보통 숙주(宿主)라고 그러는데, 여인숙(旅人宿)이라서 ‘숙(宿)’자와 ‘주인 주(主)’자 숙주라고 그러는데,
숙주는 이제 어떠한 태중(胎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 영혼이 인자 요렇게 숙주를 찾는데, 자기가 태어나기에 적당한 데에 인연(因緣)이 있는 데에 결국은 태어나기 마련인데.
자기가 그런 인연을 지었고 거기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인연을 스스로 지었기 때문에 거기에 태어난 것이거든.
부모가 가난하고 무식하고 해도 자기가 고학(苦學)을 하고 열심히 해가지고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뭐 사회적으로 참 훌륭한 사람이 된 사람도 얼마든지 있어요. 부잣집에 좋은 집에 태어났어도 별 볼일 없이 또 헌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어떻게 짓느냐? 짓는 데에는 한 생각이 동(動)하고 심념(心念)이 동하기 때문에 그 심념이 나 가지고 그 심념이 행동화됨으로 해서 업을 지어가지고 그 업으로 인해서 태어나고 업으로 인해서 모든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일념불생도해탈(一念不生都解脫)이여. 한 생각 나지 아니하면은 그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다 그말이여.
우리가 비록 이 사바세계 복잡하고도 다난(多難)한 세상에 시대에 이렇게 태어나서 살고 있지만 터억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들고 터억 정진(精進)을 해 나가면 세상 시끄럽거나 말거나, 망하거나 흥하거나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렇게 해 나가므로 해서 우선 자기가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타 죽지 않는 길이 거기서 열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다 일념불생(一念不生) 참선(參禪)을 해 나가므로 해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이 차츰차츰 다 적광토(寂光土)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말이여.
자기의 마음을 단속하지 않고 자꾸 밖에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탓하고 해봤자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한 회사가 노사 분규(勞使粉糾)가 일어났을 때 노동자는 기업주를 원망하고 탓하고, 기업주는 노동자를 탓하고 해가지고 계속 싸워봤자 누가 이익을 볼 것이냐?
노동자는 그 공장이 ‘자기 공장이다’ 생각하고 ‘자기 회사다’ 생각하고 자기에게 주워진 일을 착실히 열심히 하고, 기업주는 저 노동자들이 바로 ‘자기 가족이다’ 생각하고 다 자기 친자식처럼 자기 가족처럼 생각하고, 원하기 바라기 전에 데모하기 전에 잘해 주고 이렇게 될 때에 만이 그 회사가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는 회사도 잘될 길이 없는 것이고, 사회도 잘될 길이 없는 것이고, 나라도 잘되어 갈 길이 없고, 세계도 잘되어 갈 길이 없어.
그걸 거꾸로 생각하고 모든 책임과 원인은 다른 사람 밖에서다가 돌리고, 자기는 다 옳고 자기 잘못은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의 향상도 없고 가정에 화목도 없고, 회사나 기업체도 잘되어 갈 수가 없고 결국은 너도나도 다 망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여.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시끄러울수록에 ‘이뭣고?’ 참나를 찾는 이 공부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것이여.
‘그 뭐 이뭣고?만 하고 밤낮 앉아서 눈만 감고 앉아 있으면 무엇이 될까?’ 신심(信心)이 없는 사람,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또 그렇게도 생각할 것입니다.
항상 ‘이뭣고?’를 챙기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를 가나 차를 타나 일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그렇게 한 사람에게는 하루하루 향상이 있을 것이며 가정이 화평할 것이며 회사가 잘되어 갈 것이며 국가가 잘되어 갈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마는 우리나라 앞으로 경제 문제, 통일을 앞두고 경제 문제가 가장 중요한데 그 경제 문제도 이렇게 노사간(勞使間)에 이렇게 해가지 않고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고 정치도 역시 마찬가지고 학원 교육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부가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서 찾아야만 모든 일이 풀릴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사부대중(四部大衆)도 정치하고는 관계가 없을 분도 많이 계실 것이고 지금 말한 여러 가지 문제에 직접 관여는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안 하신 분도 계실 것이나, 어떠한 분이라도 원인을 분명히 알면 해결책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원인을 파악을 하면 반드시 해결책은 있는 것이지 해결책이 전혀 없는 어려운 일이란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급한 일부터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뭣고?’입니다.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약인(若人)이 투득상두관(透得上頭關)하면,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뚫어버리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비로소 산하대지가 넓은 것을 깨달으리라.
상두관(上頭關)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것을 말하는 거여. 참선을 해서 참나를 깨닫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아를 깨닫는 것이 상두관을 투득(透得)한 것인데.
참나, 참나를 깨달아 버리면 산하대지가 넓고 넓어. 어디를 간들 다 그것이 내 집이요, 부처님 나라요, 극락세계요, 적광토다 이거거든.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인간의 시비, 인간의 온갖 시비, 흥망성쇠, 선악, 빈부귀천 이런 것이 전부 인간의 분별계(分別界)인데 그 분별계에 떨어지지 아니 해.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면 부자, 흥하면 흥한 대로, 망하면 망한 대로 일체처 일체시에 그 시비에 빠지지 아니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냐. 푸른 물이나 청산이나 무엇에 걸릴 것이 있느냐 그거거든.
춘하추동 계절에도 걸릴 것이 없고 녹수청산에도 걸릴 것이 없고 흥망성쇠와 빈부귀천에도 걸릴 것이 없어. 모든 것은 인연대로 닥치는 대로.
떠억 깨달으면 깨달은 경계에서, ‘이뭣고?’를 한 사람은 ‘이뭣고?’를 하는 그 경계에서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면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고 혼잡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 속에 다 희망이 있어.
새해에는 ‘이뭣고?’로써, 그리고 이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원망이 많고 불평이 많은데, 이 공부를 하고 이렇게 이런 신심으로 살아가면 원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멀고 가까운 자기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고, 자기를 그렇게 시비를 걸고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까지라도 자기에게 잘 해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에게 여러 가지로 고통을 준 사람까지라도 다 고마운 사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상대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어떠한 일이나, 어떠한 경계나, 어떠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상대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기를 우리 다 같이 다짐합시다. 원망은 원망을 낳고 감사에는 화목이 오기 때문인 것입니다.(48분23초~65분4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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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광음사효잉환석~’ ; 『경허집(鏡虛集)』 (경허성우 스님)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함께 정혜를 닦아 도솔천에 나서 성불하기 위한 결사문)’에서 고덕(古德)의 시(詩)로 인용.
〇又古德歎世詩云 細推今舊事堪愁 貴賤同歸一古邱 漢武玉堂塵已沒 石崇金谷水空流 光陰乍曉仍還夕 草木纔春卽到秋 在世若無毫末善 死將何物答冥侯
또 고덕이 세상을 탄식한 시에 이르기를 “자세히 이제와 옛일 생각하니 근심이 그지없네. 귀한 이든 친한 이든 한가지 오로지 옛 무덤이로세. 한무제의 옥당은 티끌에 묻혀지고 석숭의 금곡에는 물만 헛되이 흐르누나. 광음은 새벽인듯 어느새 저녁이요 초목은 봄이러니 잠깐뒤 가을일세. 살았을 때 만일 털끝만한 착한 일 없으면 죽은뒤 무엇으로 명부에 보답하랴”
[참고] ①『전당시(全唐詩)』에 있는 설봉(薛逢)의 ‘도고(悼古)’ — 細推今古事堪愁 貴賤同歸土一丘 漢武玉堂人豈在 石家金谷水空流 光陰自旦還將暮 草木從春又到秋 閒事與時俱不了 且將身暫醉鄕游
②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청허5대손(淸虛五代孫) 동파홍해(東坡弘解, 18세기 활동) 선사 진영(眞影)의 영찬(影讚) — 人生如幻又如夢 八十年來換舊顔 在世若無毫末善 死將何物答冥官(무위자無爲子 임종게)
*광음(光陰) ; 햇빛과 그늘,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터럭끝 ; ‘털의 끝’이란 뜻으로, 아주 작거나 사소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업(善業) ; ①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착한 일. ②탐진치(貪瞋癡)를 감소시켜 없애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끗발 ; 끝발. ①화투 따위의 노름에서, 가지고 있는 패(牌)에서 좋은 끗수가 잇따라 나오는 기세. 땡이 가장 높고 족보가 뒤를 이으며 나머지는 끗수를 가지고 승부를 가린다. ②아주 당당한 기세나 권세.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방방이(房房이) ; 하나하나의 방마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범연(泛然)히 ; ①두드러진 데가 없이 평범하게. ②특별한 관심이 없어 데면데면하게.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언도(言渡) ; 선고(宣告).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의 결과를 알리는 일. 이로써 재판의 효력이 생김.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무량중생(無量衆生) ;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〇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즉해서(卽해서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부처님을 만들어 내는 장소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승당(僧堂). 선방(禪房).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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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실달(悉達) ; 싯다르타(siddhartha)의 음역어.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실달다(悉達多)’이라고도 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게송) ‘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 ; [선문염송] (혜심 지음) ‘제1권 1칙 도솔(兜率)’ 죽암규(竹庵珪) 게송 참고.
*별수(別數 나누다·구별·따로 달리 별/세다·방법·운수 수) ; ①별다른 방법. ②특별히 좋은 운수. ③갖은 방법.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다 ; ‘송곳[錐] 하나 세울[立] 만한 빈[餘] 데[地]도 없다’는 뜻으로, 발 들여놓을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꽉 들어찬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자가철주(自家鐵柱) ; 자기 스스로 정한 규칙을 쇠기둥(鐵柱)을 세워 놓은 것과 같이, 움직임없이 지켜나감을 이르는 말.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막무가내(莫無可奈) ; ①한번 굳게 고집하면 도무지 융통성이 없음. ②달리 어찌할 수 없음.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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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그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을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 · 묘덕(妙德) · 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 ; <화엄경>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사라림에서, 문수 보살의 법문을 듣고 남방으로 향하여 차례차례 찾아가서 법문을 들은 선지식.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미륵보살(彌勒菩薩)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능엄경(楞嚴經) ; 본이름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세존과 아난(阿難)의 문답으로 시작하여 깨달음의 본성과 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하고 여래장(如來藏)이 무엇인가를 밝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음신앙이라 하고 능엄다라니(楞嚴陀羅尼)를 설한 다음, 보살의 수행 단계, 중생이 수행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번뇌에 대해 그 원인과 종류를 밝힘.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 :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발원(發願) ; 원(願)하는 마음을 냄. 원을 세움.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입지(立志) ; 뜻을 세움.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구경각(究竟覺) ; 깨달음의 극치. 무명(無眀)이 사라지고 깨달음의 본체가 나타나는 경지. 마음의 본원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결코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구경각(究竟覺)은 여래지(如來地) 또는 불지(佛地)를 가리킨다.
*초발심(初發心) ; 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처음으로 일으킴.
*도학자(道學者) ; 도(道)를 닦는 사람. 수행자(修行者).
*필경(畢竟 마칠·끝낼 필/마칠·마침내 경) ; 끝장에 이르러. 결국에는.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의정(疑情) ; 의심(疑心).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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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계진로여해활~’ ; 중봉명본(中峰明本) 스님의 「天目中峰和尚廣錄」 제27권(上) ‘경책가(警策歌)’ 참고.
*삼계(三界) : [범] trayo-dha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amadha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upadha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arupadha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납득(納得 받아들임 납/얻을·만족할 득) ; 다른 사람의 말이나 형편 따위를 잘 이해하고 긍정함.
*곧이 ; 바로 그대로.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 · 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숙주(宿主 묵을 숙/주인 주) ; ①기생 생물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생물. ②전적으로 기대어 이익을 취하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③조직편(組織片)이나 기관(器官)의 이식(移植)에서 그 이식체를 받는 쪽의 개체.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고학(苦學) ; 학비(學費)를 자기의 힘으로 벌어 고생하며 배움.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다난(多難)하다 ;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정진(精進) : [범]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일념불생(一念不生) ;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 불생(不生).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84, p103 참고.
〇斷煩惱가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이 名大涅槃이니라. (註解) 斷者는 能所也요 不生者는 無能所也니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이요, 번뇌가 나지 않는 것이 대열반(大涅槃)이니라.
(주해) 끊는 것은 주체와 객체가 벌어짐이요, ‘나지 않는(不生) 것’은 주체도 객체도 없느니라.
〇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註解) 戒也定也慧也가 擧一具三이요 不是單相이니라.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을 ‘나지 않는다(不生)’고 이름하고, ‘나지 않는 것(不生)’을 무념(無念)이라 하며, 무념을 해탈(解脫)이라 하느니라.
(주해)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가, 하나를 들면 셋이 갖추어 있는 것이요, 홑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
[참고] 송담스님(No.410)—90년 2월 첫째일요법회, 신수기도회향, 입춘법회(90.02.04)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난 이후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도와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에 들어가서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三途)는 지옥·아귀·축생 삼도요. 사생(四生)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이요.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에사 모든 번뇌의 생각을 씻어 버리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스스로 본고향(本故鄕)에 돌아가게 되었구나.
우리 모든 중생들이 원래는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한 몸뚱이, 한 마음이여. 그런데 그 본심왕을 위배(違背)하고 거기서 배반을 하고 물러나왔다.
'한 생각' 동(動)하지 않았다면 영원토록 법왕(法王)과 같이 살 수가 있을 텐데 한 생각 동(動)해 가지고, 한 생각 삐끗 어긋져 가지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가지고 육도윤회(六途輪廻)—지옥, 아귀, 삼악도(三惡途)를 몇 번이나 들어갔으며 태란습화 사생을 몇 번이나 겪었든가.
경오년 초삼일부터 오늘까지 칠일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입춘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의 법회가 오늘 겹쳤습니다.
그동안 칠 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기도(祈禱)를 봉행하는 가운데 우리 사부대중의 마음은 참회(懺悔)를 하고, 기도를 하고, 발원(發願)을 하고 그래 가지고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이 되고, 번뇌의 생각—그 훨훨 타오르던 탐진치 삼독(三毒)의 번뇌염(煩惱染)이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번뇌(煩惱)가 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념(無念)이고, 무념이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여.
불생이면, 일념불생(一念不生) '한 생각 남이 없는 도리'를 봐 버리면 그것이 바로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소식이더라.(처음~6분27초)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常] 변하지 않는[寂] 광명[光]의 세계[土]. 부처님의 거처나 빛나는 마음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속수무책(束手無策 묶을·잡아맬 속/손 수/없을 무/꾀 책) ; 손이 묶인 것처럼 어찌할 도리나 방책(方策 일을 하는 방법과 꾀)이 없어 꼼짝 못 함.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게송) ‘약인투득상두관~’ ; ①『석문의범(釋門儀範)』 다비문(茶毘文)—쇄골편(碎骨篇) 참고. ②卍新纂續藏經 제65책 《高峰龍泉院因師集賢語錄》 제13권 ‘涅槃法語門—散灰’ 참고.
*상두관(上頭關) ; 조사관(祖師關).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공안(公案 : 화두 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분별계(分別界) ; 분별 경계(分別境界).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
[참고] 송담스님(No.336)—87년 8월 첫째일요법회(87.08.02)에서.
〇인간의 분별계(分別界)란 게 무엇이냐? 탐진치 삼독이 인간의 분별계요. 오욕락이 인간의 분별계요. 희로애락이 인간의 분별계요. 생로병사가 인간의 분별계요. 빈부귀천이 인간의 분별계여.
어디에 떨어지거나 인간의 분별계에 떨어졌다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인 것입니다.
[주요 내용]
(게송)광음사효잉환석~ /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놓을 것은 ‘마음을 얼마나 닦았느냐’ / 착한 일 하되 그 가운데에도 항상 자기 마음 닦는 공부를 해야 / 우리는 집행 일시는 모르지만 사형 언도를 받은 처지 /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영훈선사와 귀종선사. “네가 곧 부처니라”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난타(空華亂墮) /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 / 자기의 생사 문제보단 더 바쁜 것은 없다 / (게송)시비해리횡신입~ / 선재동자 / 항상 ‘이뭣고?'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라.그럴러면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신심이 있어야 한다 / 立志發願—‘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와 같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르겠다’
(게송)삼계진로여해활~ / 자기의 인연, 자기의 업(業) / ‘이뭣고?’ 참선만이 모든 일의 근본적인 해결책 /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감사하는 마음.
[주요 문구]
〇이 세상에서는 돈이 많고 명예나 권리가 많으면 어디를 가나 다 그 사람을 다 우러러보고 그 사람한테 함부로 못하고 그러지만, 염라대왕 앞에 가서는 영 사정이 달라가지고 그것은 전혀 염라대왕 앞에 가서 끗발이 안 올라.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놓을 것은 ‘마음을 얼마나 닦았느냐, 도를 얼마나 닦았느냐’ 그것이 가장 높이 평가를 받는다.
〇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몇 살을 살다가 며칟날 숨을 거두리라’고 하는 사형(死刑) 언도(言渡)를 받아가지고 태어났다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집행하는 날과 시간을 모르지만 틀림없이 온다고 하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하루하루 지내간 것을 그럭저럭 지낼 수는 없습니다.
〇그래서 우리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거기에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이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아끼는 도리이고, 한 시간 한 시간 1분 1초를 뜻있게 보람있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〇“네가 곧 부처다”고 하는 데에서 이론을 거치지 아니하고 바로 거기에서 툭! 깨달아 버린 거여. 깨달은 것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여.
아는 것은 설명을 해 줄 수가 있고, 설명을 해 주면 ‘아하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이해하고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어. 이론을 통해서 이해를 해가지고 수긍한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는 것이거든.
〇문제는 ‘믿을 신(信)’자, 신(信)이거든. 오직 참선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
염라대왕 앞에 가서 탁! 자신 있게 내놓을 것은 이것 밖에는 없어. 내가 내놓기 전에 ‘이뭣고?’ 평생 열심히 한 사람은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염라대왕이 먼저 알고 자리에 일어나서 합장을 한다 그랬어.
〇법문을 듣고서 들을 때는 그 정성을 다해서 듣되 듣고 나서는 하나도 속에 남은 것이 없고 오직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되어야 그 법문을 잘 들은 분이거든.
〇이 공부는 첫째,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고조사(古祖師)와 같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르겠다’고 하는 철저한 입지발원(立志發願)을 가져야 한다.
〇필경(畢竟)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정말 자기 자신의 생사(生死) 문제이기 때문에 이건 철저한 발심과 철저한 신심으로, 대의단(大疑團)으로 이 삼요소(三要素)로써 나아갈때 결국은 우리는 허송세월을 아니 하게 될 것입니다.
〇이 삼계진로와 흥망성쇠가 어디서부터서 온 것이냐? 누구 때문에 온 것이냐? 다 자기의 마음, 심념(心念)에서 다 나온 것이다 그거거든.
〇결국은 자기가 어떻게 짓느냐? 짓는 데에는 한 생각이 동(動)하고 심념(心念)이 동하기 때문에 그 심념이 나 가지고 그 심념이 행동화됨으로 해서 업을 지어가지고 그 업으로 인해서 태어나고 업으로 인해서 모든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〇일념불생도해탈(一念不生都解脫)이여. 한 생각 나지 아니하면은 그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다. 자기의 마음을 단속하지 않고 자꾸 밖에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탓하고 해봤자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냐.
〇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시끄러울수록에 ‘이뭣고?’ 참나를 찾는 이 공부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것이여. 전부가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서 찾아야만 모든 일이 풀릴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원인을 파악을 하면 반드시 해결책은 있는 것이지 해결책이 전혀 없는 어려운 일이란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급한 일부터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뭣고?’입니다.
〇참나를 깨달아 버리면 산하대지가 넓고 넓어. 어디를 간들 다 그것이 내 집이요, 부처님 나라요, 극락세계요, 적광토다 이거거든.
〇새해에는 ‘이뭣고?’ 이 공부를 하고 이렇게 이런 신심으로 살아가면 원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멀고 가까운 자기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고, 자기를 그렇게 시비를 걸고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까지라도 자기에게 잘 해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에게 여러 가지로 고통을 준 사람까지라도 다 고마운 사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상대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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