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8)—1983(계해)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4.01.17) (31분)

 

약 31분.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리오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광겁무명구탕진(曠劫無明俱蕩盡)헌디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며, 악한 인연을 누가 지어서 그 죄과(罪果)를 또 누가 받느냐 그 말이여. 죄를 지은 것은 무엇이 죄를 지었으며, 죄를 받는 자는 또 누가 죄를 받는 것이냐?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참된 성품은 허공과 같애서 동요가 없더라.

광겁무명(曠劫無明)을 구탕진(俱蕩盡)하면, 광겁(曠劫)의 무명(無明)을 함께 다 탕진해 버리면,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니라. 선천(先天), 하늘이 생겨나기 이전, 이 땅이 또 없어진 뒤에—하늘이 생겨나기 저 무량겁 이전 무량억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이후, 한량없이 이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서 이 세계가 없어진 뒤까지 본래부터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적멸(寂滅)한 상(相)이더라.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정월 17일,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이 자리에는 세등선원 안거 대중(安居大衆)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 안거 대중과 그밖에 윤필암,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한 비구니 선객(禪客)들이 이 자리에 운집(雲集)을 했고, 또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을 해서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에 한량없이 많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와 은진 송씨 진영 영가와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이 자리에 이 법요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도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체적이고 자상하게 그 공부해 나가는 방법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는 그보다 더 자상하고 뼈에 사무치는 법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生死) 없는 그 본성(本性)에 입각해서 보면 닦을 것이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버려야 할 악(惡)도 없고 지어야 할 선(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사(生死)가 본래(本來) 없건마는 무슨 까닭으로 무량겁을 두고 우리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면서 갖은 고락(苦樂)을 겪으면서 금생에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왜 생사가 본래 없는데 이렇게 생사를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왜 본래 생사가 없는데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 수도(苦行修道)를 해야 하는 것이냐?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탄생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6년 고행을 하셨어.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49년 동안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미묘법(微妙法)을 설하셨습니다마는, 무슨 목적으로 하셨느냐?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출현을 하셨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를 하느냐?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거여.

우리가 당장에라도 벗어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다고 하는 도리에 계합(契合)해 버리면 장부(丈夫) 일대사를 요달(了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겁무명(曠劫無明)을 탕진(蕩盡)을 해 버리고 선천후지(先天後地)에 적요요(寂寥寥)한 도리인 것입니다.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하면  본래비불역비심(本來非佛亦非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라  자유영광요고금(自由靈光耀古今)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단전(單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깊은 밀의(密意)를 바로 봐 버리면,
본래비불(本來非佛)이요 역비심(亦非心)이니라. 본래 부처도 아니고 또한 마음도 아니니라.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불(燃燈佛)께 수기(授記)를 받아서 부처를 이룬 것이 아니라고 하는 도리를 분명히 안다면, 우리 모든 대중과 육도 법계(六途法界)의 모든 중생도, 금일 은진 송씨 진영 영가(靈駕)도,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스스로 신령스러운 광명, 스스로 갖춘 신령한 광명이 예[古]와 이제[今]에 빛날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이 원상(圓相)을 떠억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일러라!” 했습니다. 한 스님이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떠억 앉았어.

마조 스님이 주장자(柱杖子)로 여지없이 한 방맹이를 쳤습니다. 치니까 그 원상 안에 떠억 들어가서 앉은 스님이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입을 딱 다물고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

지난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용맹정진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행을 한 대중이 지혜의 눈을 뜬 자가 있거든, 이 원상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 승(僧)이 들어갔다. 마조 스님이 여지없이 방(棒)을 내리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왜 쳤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다’고 한 도리가 무엇이여? 눈을 갖춘 자가 있으면 한마디 일러.

이 많은 대중이 용맹정진을 그렇게 했으니 어찌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 둘 뿐이리요마는 체면을 너무 지키느라고 묵언(默言)으로써 이른 것을 나는 알겠습니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심)


오늘 해제(解制)를 하고 앞으로 석 달 동안 산철인데,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제(結制) 중이라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해제라고 해서 어찌 산만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석 달 동안 춥도 덥지도 않는 그런 좋은 정진하기 좋은 계절에 어쨌던지 시간을 아껴서 더욱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오늘 백일기도 회향(廻向)이며 또 이 세등선원에 천일기도가 오늘로써 회향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행도 해제를 했다고 해서 공부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듯이, 해제를 하고서 더욱 정진을 알뜰히 해야 함과 마찬가지로 다시 오늘부터 또 천일기도를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께서는 또 이 천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셔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소원이 낱낱이 다 성취가 되시고, 무량겁 업(業)이 다 소멸이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분 가정에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고,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다음날 이 자리에 만날 때까지 알뜰히 정진하시고 기도하시기를 부탁을 하고 해제 법어를 마칩니다.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한디  수봉창취접천하(數峰蒼翠接天霞)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중무한청의미(箇中無限淸意味)를  강상일구도설파(江上一鷗都說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해제를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도반(道伴)을 찾으며 행각(行脚)을 하다 보면, 비를 만나서 비가 지난 뒤에는 구름이 걷히고 강상(江上)에는 해가 넘어가고, 몇 봉우리 푸른 산봉우리는 안개가 끼어서 하늘에 접(接)한데, 그 가운데에 한없는 맑은 맛을 어떻게 표현을 할 것인가?
이 그림과 같은, 비가 갠 뒤에 구름이 걷히고 강 위에는 석양이 되어서, 그 푸른 봉우리는 안개에 끼어 가지고 하늘에 접했는데, 그 아름다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강상(江上)에 이리 나르고 저리 나르는 흰 백구(白鷗)의 울음소리가 그 아름다운 경계를 여지없이 일렀드라. (처음~30분49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 /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 부처님은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것.

(게송)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 / 마조(馬祖) 원상(圓相) 공안 /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 (게송)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