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6)—계해년 하안거해제 법어(1983.07.17)(62분)
(1/3) 약 22분.
(2/3) 약 20분.
(3/3) 약 20분.
(1/3)----------------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헌디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묘봉정상일전신(妙峰頂上一轉身)하면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헌디, 바로 그 본체(本體)는 본래로부터 소리와 빛이 끊어졌다. 그 자리는 소리도 없고 색상이 없기 때문에,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요. 찾은즉 알거라, 그대는 그 자취를 보지 못할 것이다.
소리가 있어야만 귀로 들을 수가 있을 것이고, 색상(色相)이 있어야—빛깔이나 무슨 모양이 있다면 그 자취를 볼 수가 있건마는, 본래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려고 하거나, 귀로 들을려고 하면 벌써 틀려버린다 그 말이여.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묘고봉(妙高峰)은 수미산(須彌山)이란 말인데, 최고의 높은 산이여.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올라간 수미산 꼭대기 정상에서 한번 몸을 굴리면—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여, 백척(百尺)이나 되는 장대 위에서 한 걸음을 내디디면,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더라.
백척간두에서 행여나 떨어질세라 그놈을 붙잡고 벌벌 떨고 있는 동안에는 그를 만날 수가 없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을 내디디면—목숨을 버리고 한 걸음을 내디딜 때에, 온통 눈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 바로 그놈이요.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그것이 아닌 것이 없어.(5분5초)
오늘은 계해년 여름 안거를 마치는 해제날입니다. 이 자리에는 금년 삼하(三夏) 안거(安居)에 이 세등선원에서 지낸 대중과 전국 방방곡곡 선원에서 지낸 운수납자(雲水衲子)와 사부대중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중도 수백 명이려니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중—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모인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과거에 우리의 수없는 선망부모, 우주 법계에 가득찬 주인이 있고 없는 모든 영가(靈駕)까지도 현재 이 도량(道場)에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그 영가 가운데에는 수원 백씨 복순 영가도 여기에 초청이 되었습니다.
한 딸을 부처님께 바쳐서 도(道)를 닦게 한 그 영가는 그 공덕으로 해탈도를 증득할 것이며, 칠세(七世)의 부모가 다 천당에 태어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한 자식을 출가시키면, 칠보탑(七寶塔)을 시방세계에 가득차게 세운 공덕보다도 낫다' 하셨습니다.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을 통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화두(話頭)를 참상(參詳)해 갈 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소상하게 법문을 들었습니다.
우리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셔서 6년의 고행(苦行)과 다시 6년간의 낙행(樂行)을 통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시고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번갈아 출세(出世)를 하셔서 오늘날에까지 전해 내려오는 법(法)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도를 닦아야 하고 어떻게 수행을 해서 우리 자성(自性)을 깨달라야 할 것인가?’ 오직 그 일 하나만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성현(聖賢)이 출세를 하셔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생사대사(生死大事),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 생사대사를 위해서 출현을 하셨고 그렇게 법을 설하셨는데, 생사대사를 해결짓는 그 열쇠는 오직 이 화두(話頭) • 공안(公案)이다 그 말이여.
화두 하나만을 제대로 참구(參究)할 줄 알면, 그 속에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역대조사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법이 오직 그 화두 하나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 화두 하나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 알면 언제나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를 바로 우리의 이 한 생각 속에, 눈앞에 모시고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팔만겁(八萬劫)을 경(經)을 외우고 삼천세(三千歲)를 계율을 지키는 것보단,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것이 낫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팔만겁을 경을 외운다 하드라도 경만을 외우고 자기의 마음을 반조(返照)하지 아니한다면, 그 경의 뜻을 바로 실천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요. 삼천세를 계율을 지킨다 하드라도 바로 우리의 한 생각을 돌이켜서 우리의 본성(本性)을 반조(返照)하지 않는다면은, 계율을 지킨 본의(本意)를 모르는 까닭인 것입니다.
계율은 우리 출가인이 수행인이 반드시 지켜야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우리는 목숨과 같이 목숨 바쳐서 받들어야 하겠지만, 경을 바로 받들고 계율을 바로 지키는 방법이 입으로 경을 외우고 몸으로 형식으로 계율을 지키는데 그쳐 버리고 우리의 마음에서 ‘참나’를 깨닫는 반조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형식에만 얽매이고 근본을 잊어버린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은 무엇이냐? 참선이면 참선이지, 활구참선이란 게 대관절 무엇이냐?
화두를 어떠한 선지식(善知識)한테 받아 가지고 그 화두를 갖다가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고, 이리저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교리라든지 지식이라든지, 상식이라든지 그런 것으로 이렇게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그러면 그것이 바로 활구참선이 아닌 사구참선(死句參禪)이다.
알아 들어가는 참선은 아무리 깊이깊이 파고 들어가서 알아 들어간다 하드라도, 그래 가지고 그럴싸한 결론에 도달했다 하드라도 마침내 중생심, 분별심, 번뇌(煩惱) 망상심(妄想心)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번뇌 망상심 분별심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이다. 생사심으로 어찌 생사심이 끊어질 것이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찾아 들어가고, 따져 들어가고, 알아 들어간다 하드라도 그것은 종래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고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絕)이요. 묘한 깨달음은, 정말 참다운 실(實)다운 깨달음은 마음길([心路]이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음길을 어떻게 끊느냐?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하면 그것이 끊어지냐? 끊을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여.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를 하면—‘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앉아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무슨 소리를 들을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오직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다못 그렇게만 화두를 의심해 갈 따름이여. 그렇게 해 가면 망상심(妄想心)을 끊을려고 하지 안 해도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앞으로 부처님과 같은 대성현이 나오셔서 다시 어떠한 우리 중생들에게 맞는 새로운 법을 설하신다면 몰라도 현재까지는 이보다 더 우리의 중생의 번뇌 망상을 끊어서 ‘참나’를 깨닫게 하는 묘한 법은 없습니다. 활구참선이 아니고서는 세상없이 나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믿는 또 믿을 수 있는 바른 깨달음을 이룬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가지고 참선을 하되, 처음에는 잘된 것 같지만 얼마 해 보면 영 의심이 잘 안 나고 답답하기만 하고 공부가 잘 안되는 것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공부는 처음부터 그렇게 잘될 수도 없고, 해 갈수록 그렇게 점점 잘되어 갈 수도 없습니다.
『선요(禪要)』에 보면 이 참선하는 상황을 ‘흘러내려 오는 강물을 거슬러서 배를 밀어 올린 것’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물은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려 오는데, 배를 갖다가 물줄기를 거슬러서 거꾸로 저 상류(上流)를 향해서 계속 배를 밀어 올릴 때 얼마나 힘이 들 것이냐 그 말이여.
겨우 한 삿대쯤 밀어 올리면은 열 삿대쯤 흘러내려 가고, 열 삿대쯤 밀어 올리면 백 삿대쯤 흘러내려 가고, 흘러내려 오면 다시 또 거꾸로 밀어 올리고, 그 있는 힘을 다해서 밀어 올렸는데 다시 밑으로 십배나 흘러내려 간다.
그렇게 해서 밀어 올리면 올린 만큼 몇 배를 거꾸로 내려가고, 또 밀어 올리면 거꾸로 내려가고 해 가지고 그 배가 저 상류로 올라가기커녕은 결국은 그 배가 저 바다까지 떠내려갔다 그 말이여.
바다까지 떠내려갔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계속 강 상류를 향해서 끌어올릴라고 있는 힘을 다하고, 몸과 목숨을 다해서 끌어올릴라고 할 때에, 더이상 힘을 쓸래야 쓸 수 없고 기량이 다해서 기진맥진해서 기절을 해 버릴 지경에 이르르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 그랬어.
참선이라는 것이 누구나 제게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남녀노소(男女老少)도 상관이 없고, 빈부귀천(貧富貴賤)도 상관이 없고,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할려고만 하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다’ 이렇게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실지로 해 보면 이와같이 배를 물을 거슬러서 밀어 올릴라고 하는 만큼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 법(法)을 위해서는 몸과 목숨을 바쳐야 돼. 바쳐서 한번 죽었다 깨어나야만, 완전히 죽었다 깨어나야만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처음~21분49초)
(2/3)----------------
과거에 우리 선지식 고인 가운데에는 소시(少時)때 그렇게 일찍 깨달은 분도 가끔 있고,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한 분도 있지만, 그러한 분은 전생(前生)에 몸과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정진(精進)이 있은 그 인연으로 금생에 일찍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어느 생엔가는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정진이 없고서는 이 일대사(一大事)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생에 3년, 10년, 20년, 30년 내지 일생 동안을 그렇게 고행정진을 해도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가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일생 동안을 헛되이 보냈냐 하면 그것이 아니여.
올바른 방법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헛되이 일생을 보낸 것이 아니라, 숨을 마즈막 거둘 때에도 오직 화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이 독로한 그 가운데 숨을 딱 거둔다면, 그 사람은 숨을 거두자마자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다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젊어서 확철대오를 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올바르게 공부를 하되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른 스승을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 올바른 방법으로 공부를 했냐, 못 했느냐?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다하고 있지 않느냐?’ 오직 이것은 항시 자기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올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지도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되,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면 스스로 자기에게 매서운 채찍질을 가하면서 하루 하루를 그리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아니 1초 1초를 알뜰히 단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몸이 안정(安定)이 되고, 몸이 안정이 되면 눈알이 안정이 되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동자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눈껍데기가 깜박깜박 그러한 것은 눈이 안정이 되었다 할 수가 없는 것이여.
눈이 따악 안정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 앉아서나 서서나,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터억 의심이 독로하되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오직 그렇게만 다잽이를 해가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도 걱정할 것이 없고, 일어나되 억지로 보낼라고 하지도 말고 누를라고 하지도 말고, 성화를 댈 필요가 없어.
다만 화두(話頭)만을 거각(擧却)해 버리면, 일어났던 망상은 저절로 자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타성일편이 되어서 화두가 독로하되, 그래도 뭔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귀로 들어오고 눈으로 뭣을 보면 그 모양이 눈에 들어오지만, 거기에 내가 끄달리지만 안 하고 화두만 들어버리면 그런 소리나 모양은 나한테 별 장애를 주지 아니한 채 자취가 없어지기 때문에, ‘망상(妄想)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이러한 말은 아직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여. 일어나는 망상은 조금도 성화 댈 필요가 없거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딱 챙기면, 화두만을 들어버리면 그것이 가장 쉬웁게 번뇌와 망상을 처리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깨끗한 그러한 경계가 나면, 자칫하면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런 데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리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여.
벌써 ‘아! 고요하다, 아! 깨끗하다’ 너무너무 그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그 경계(境界)에 취해 버리면 화두를 놓치게 되는데, 화두를 들면 행여나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 묘한 경계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그 고요한 데에 빠지게 되면 이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여.
아무리 고요하고 깨끗하고 그럴지라도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떠억 챙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자님이 그 사서삼경 가운데에 『논어(論語)』라는 경(經)이 있는데, 그 경의 첫머리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하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나를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내가 이렇게 공부를 잘하고 도가 있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그것이 군자가 아니냐’ 이러한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고 하는 것은 ‘글을 배워 가지고 열심히 읽는다’ 그러한 뜻이 아니라, 내 마음 닦는 공부를 배워 가지고 그 공부를 열심히 하면 법희선열(法喜禪悅)! 정진을 해 가면은 거기에서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어. 그건 유교나 불교나 그 밖에 모든 예술이나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또 내가 공부를 잘하면 물론 깨달음을 얻었으면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하드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하면, 자연히 먼 데서 ‘아! 그분이 그렇게 정진을 잘한다니 우리도 그분하고 같이 정진을 하자’ ‘그분이 정진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니 우리도 그분한테 가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하자’ 이래가지고 먼 데로부터서 많은 도반(道伴)들이 찾아오면 그것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이건 유교나 우리 불교나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즈막에 가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라 하는 말은 불교에 있어서 보살(菩薩)이라고 하는 말로 대치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정진을 잘하고, 내가 법력(法力)이 있고 도력(道力)이 있으되,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해.
요새 무엇을 잘하면 그 알아주기를 바래서 신문에 내고, 무슨 책에다가 발표를 하고, 라디오나 TV에 방송을 하고 해서, 자꾸 요새는 자기의 잘하는 것을 만천하에 널리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알아주기를, 알아주도록 이렇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마는, 옛날 성현들은 구태여 자기를 알아 달라고 선전을 하지를 안 했습니다. 또 남이 알아주지 안 해도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를 안 했습니다.
성현들이 자기가 깨달은 그 진리법을 자꾸 설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양(宣揚)을 하는 것은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바른 길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려서 지혜의 눈을 떠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중생들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자기 자신을 알아 달라고 그러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 번을 청해야 법(法)을 설하되, 법을 설해 가지고 ‘그 사람이 잘 알아듣고 잘 받아들인다고 해서 기뻐하고, 또 잘 받아들이지 않고 깨닫지를 못한다고 해서 언짢게 생각하지를 말어라'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설(說)한 바 없이 설(說)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그 마음을 내기’ 때문에, 자기의 법(法)을 들은 사람이 잘 알아듣고 깨달았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또 잘 못 알아듣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또한 언짢이 생각할 것도 없다 그 말이여.
이게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한다’는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정진을 하되 자기가 정진을 잘한 척하고, 아주 의식적으로 자기 정진 잘하는 상(相)을 내 가지고 그러지를 말아라’ ‘여법(如法)히 정진을 하되 상(相)이 없이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말씀도 계셨습니다마는, 계행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계행(戒行)은 청정하게 지키되 ‘지킨다’는 상(相)이 없어야 참으로 그 사람이 율사(律師)가 될 것이고, 정진을 하되 정진하는 상(相)이 없이 다못 여법하게 정진을 하되 ‘내가 정진을 잘한다’고 아주 거만을 빼고 그래서는 그것이 실다웁게 정진을 한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도교나 또는 그 밖에 어떠한 도(道)라도 그것이 참다운 길일진댄,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비방하고 헐뜯고 그러지를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외도(外道)가 지은 어떠한 신당이나 무슨 탑이나 그러한 것을, 불자(佛子)는 그것을 헐거나 파괴를 하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헐고 뜯고 싸우고 그러지를 말아라’ 하신 까닭은, 큰 눈으로 보면 이 세계의 모든 법이 다 한 법 속에 다 포함이 되어 버린 것이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은 다 법신불(法身佛)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구태여 그것을 때려부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맛 정법(正法)을 우리가 믿고, 정법을 실천하고, 정법을 깨달라서, 그 정법을 선양(宣揚)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얼음을 깨고 부시고 그래 가지고 그것을 없앨려고 할 것이 아니라, 봄이 돌아와서 태양이 빛나서 날씨가 화창하면 얼음을 뿌시고 칼로 쫒고 불을 피워서 녹일라고 하지 않아도 제절로 얼음과 눈이 녹아 가지고 물이 되며 그것이 또 증발을 해서 온 천하에 잎이 피고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일어나는 것을 그놈을 물리칠려고 몸부림을 치고, 그놈을 없앨려고 이를 악물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터억 화두만을 거각(擧却)해 버리면은 번뇌와 망상은 자취가 없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하는 말씀이 「달마혈맥론(達磨血脈論)」에 있습니다마는, ‘마음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화한다. 포섭해 버린다’ 바로 이러한 뜻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이렇게 뿌리를 해결지음으로서 가지와 이파리는 제절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에 그 뿌리 닿는 곳에 좋은 흙이 닿도록 해 주고, 거기에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영양을 공급을 해 주면 제절로 줄기가 크고 가지가 번성을 하고, 거기에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뿌리에는 좋은 흙이 닿지를 못하고 뿌리에는 수분과 비료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그 이파리에만 매달리고 가지에만 매달려 가지고 아무리 그것을 잘 키우고 잘 할려고 한들, 뿌리가 썩어들어 간다든지 아무 영양이 없고 수분이 없다면은 잎에다가 아무리 약을 풍기고 손질을 한다 해도 그 나무는 결국은 시들어 죽고 좋은 꽃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좋은 열매도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21분50초~41분26초)
(3/3)----------------
우리 이 최상승법, 참선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달마 스님이 1300여년 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시기 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경전이 들어오고 불상도 들어오고, 스님네도 들어오고, 그래서 중국에 많은 절도 세워졌고, 많은 강사도 나와서 활발하게 경을 연구하고 했습니다마는, 달마 스님이 140세의 고령으로 중국에 건너오신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최상승법을 위해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이 오늘 우리 한국에 면면히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한국에 모든 불자,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이 최상승법으로 지혜의 눈을 뜨게 하고, 나아가서는 온 세계에 이 최상승법을 선양을 해서 부처님의 본뜻이 온누리에 가득차게 되도록 우리는 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1600년, 그 동안에 신라 · 고구려 · 백제 · 고려를 통해서 불교가 국교로서 숭앙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많은 불교문화재를 남기고 오다가, 이조 오백년 동안에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관계로 불교가 침체를 해서 내려오다가, 해방된 뒤 차츰차츰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불어나고, 지금 천삼백 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마는, 이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 가운데 불과 몇백 명을 넘지를 못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또 참선을 하되 참으로 올바르게 참선을 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드라도 올바르게 하지 아니하면, 차라리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한 것입니다.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털끝만큼의 차이로 하늘과 땅으로 차이가 벌어져 버린다’ 하는 것입니다.
지지리 옳게 해 가다가 마지막 중요한 고비에 가서 한 생각 삐끗 잘못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요’ 우유로 만든 음식 가운데에 가장 맛있고 좋은 것이 제호(醍醐)라는 것인데, 그 제호상미가 잘못 관리를 해 가지고 변해 버리면은 사람이 먹고 중독을 일으켜 가지고 죽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제호의 상미(上味)가 독약(毒藥)으로 변한 거와 마찬가지여.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실천하기 어려운 최상승법을 만나 가지고 실천을 하되 한 생각 삐끗하면 사마외도(邪魔外道)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를 해 가지고 화두가 순일(純一)해져 가지고 그럴 때에 한 생각 더디 의심하면, 거기서 ‘누가 나를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럴 때 누가 나를 탁! 깨닫게 해 주었으면, 어서 깨달랐으면, 또는 이러한 상태로 영원히 갔으면’ 이러한 생각으로..... (녹음이 끊김)
(게송 처음 두 구절 녹음이 끊김)
청군앙면간허공(請君仰面看虛空) 확락무변불견종(廓落無邊不見蹤)
나무~아미타불~
약해전신사자력(若解轉身些子力)하면 두두물물총가옹(頭頭物物總家翁)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몸을 돌이켜서 아래를 쳐다보면 거기에는 산도 있고 물도 있고, 나무도 있고 바위도 있고, 사람도 있고 짐승도 있고 벌레도 있고, 집도 있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없는 것이 없이 다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뜬 달은 하나지만, 땅에 있는 모든 강과 호수와 모든 물에는 그 달이 수억만 개로 떠 있습니다. 그 그릇에 있는 달은, 그 수억만 개의 달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거든. 하늘에 있는 달은 고대로 있으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강물과 호수와 모든 물에 그 달이 떠 있다 그 말이여.
그 달을 보고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달을 알 수가 있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알 수 있는 온갖 경계(境界)를 통해서 우리는 볼래야 볼 수 없고, 알래야 알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그놈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놈, 귀로 듣는 놈,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알 수 있는, 온갖 희로애락과 행주좌와와 생로병사를—심소(心所)를 통한 백법(百法)이, 그놈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윤회(輪廻)를 하고 있지만, 그놈을 여의고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학자는 여의고 찾지를 말아라. 여의고 찾을라고 한 데에서 길은 점점 멀어져 버리고, 짜증이 나고 시간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의고 찾지 않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를 돌이킨다면, 오늘 해제를 했다고 해서 조금도 마음 해이해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해제를 하면 인연 따라서 또 걸망을 지고 어느 산천, 어느 계곡, 어느 모퉁이를 가더라도 그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염염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거각해 나간다면, 차(車) 속이 바로 입선(入禪) 시간이 될 것이고, 걸음걸음이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돌아오는 석 달 동안, 지난 석 달 동안보다도 훨씬 더 알뜰하게 단속(團束)을 하고 화두를 거각해 나간다면, 지난 여름 동안 그 무더웠던 더위 속에서 닦고 닦은 그 힘이, 돌아오는 석 달 동안에 정말 잘 발휘가 되어서 반드시 지혜의 눈을 뜨게 될 납자(衲子)가 생겨날 것입니다.
올 여름은 다른 해에 비교해서 후반에 상당히 더웠던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 더위를 무릅쓰고 그렇게 모다 알뜰히 정진들을 하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한자리에 다시 모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무엇인가 깊은 뜻이 있음직한 그러한 얼굴로 이 자리에 다시 만나게 되니 그 기쁜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여기저기서 우절기에 결제(結制)를 하고 안거(安居)를 하고 해제(解制)를 하면 한자리에 모여서 자자(自恣)회를 거행을 하고, 그 동안에 공부한 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반성을 하고, 또 서로 충고를 하고, 또 마음에 깨달은 바를 점검을 하고 이러한 의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던 것입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은 열반하셨지마는 그 거룩한 법은 오늘도 여전히 이렇게 전해 내려와서, 이렇게 한자리에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만나서 최상승법을 설하고 듣고 이런 법요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이러한 다행스럽고 경행(慶幸)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 오늘도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증거며,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오늘도 살아계신 채 우리의 마음과 이 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을 우리는 확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마음으로 ‘항시 살아계신 부처님과 조사를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코앞에 항시 모시고 살고 있다’는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입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공부를 하시되 그러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 가시고 생활을 해 나가신다면, 이 법(法)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이 없는 법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은 세속에 오욕락(五欲樂) 속에 몸을 담아 있으면서 바로 오욕락을 초월해서 공부를 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요구하는 수행법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출가한 스님네보단 백 배(倍)의 노력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그 오욕락 속에서 자칫하면 죄를 의식적으로 짓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짓게 되기 때문에 백 배의 신심을 돈독히 갖지 아니하면 후회막급(後悔莫及)할 일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에 이 공부하는 스님네를 위해서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공양(供養)을 올리고 신심으로 받들어 모시고, 그러면서 여러분은 또 가정 생활을 하면서 또 공부를 해야 하시니 한 어깨에 두 짐, 석 짐 내지 열 짐의 짐을 지고 정진을 하시느라고, 그 수고를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분일초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생각 생각에 우리의 뒤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한 생각 늦추면 바로 그 무상살귀에 따라잡음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을 할 것이 없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할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다생(多生)에 숙연(宿緣)이 있어서 최상승법을 만났으므로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알뜰히 단속만 해 가면 지옥에 떨어져도 겁날 것이 없고, 불구덩이에 빠져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불이 훨훨 타는 가운데에서도 ‘이뭣고?’를 들 것이며, 지옥에 끌려가서도 ‘이뭣고?’를 든다면 마침내 이 최상승법은 모든 마귀(魔鬼)를 이겨내고야만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지기량(汝之伎倆)은 유진(有盡)이어니와 아지불채시무궁(我之不采是無窮)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여지기량(汝之伎倆)은 유진(有盡)이어니와, 너의 기량(伎倆)—너의 온갖 수단과 재주는 끝이 있거니와,
아지불채(我之不采)는 시무궁(是無窮)이다, 내가 취하지 아니한 것은—내가 너한테 끌려들어 가지 안 해. 너한테 말려들어 가지 아니한 것은 시무궁(是無窮)이다, 영원이다 그 말이여.
니 멋대로 한번 나를 유혹할라면 해 보고, 나를 갖다가 막을라면 막아 보고, 니 멋대로 해봐라 그 말이여.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팔만사천 모든 경계(境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니가 그럴수록에 나는 오히려 화두를 거각할 따름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해제 이후에 정진을 가다듬고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수원 백씨 복순 영가(靈駕)와 이 자리에 초청된 법계(法界)에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 고혼(孤魂)과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도 오늘 이 법회의 법문을 듣고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41분27초~61분32초)(끝)
[주요 내용]
(게송)정체종래절성색~ /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직 화두 / 화두 하나만을 제대로 참구하면 모든 부처님 법이 화두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 활구참선(活句參禪)이란? /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絕) / 활구참선은 참나를 깨닫게 하는 가장 묘한 법.
공부는 올바르게 최선을 다해야 / 상(相)없이 정진을 해야 / 다른 종교를 비방 말라 / 관심일법총섭제행 / (게송)청군앙면간허공~ / 여의고 찾지 않고 바로 그놈에 즉해서 화두 들어야/ 신도분들은 출가한 스님네보다 백 배의 노력을 더해야.
[주요 문구]
〇생사대사(生死大事),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 생사대사를 위해서 출현을 하셨고 그렇게 법을 설하셨는데, 생사대사를 해결짓는 그 열쇠는 오직 이 화두(話頭)•공안(公案)이다.
화두 하나만을 제대로 참구(參究)할 줄 알면, 그 속에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역대조사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법이 오직 그 화두 하나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 화두 하나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 알면 언제나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를 바로 우리의 이 한 생각 속에, 눈앞에 모시고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〇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絕)이요. 묘한 깨달음은, 정말 참다운 실(實)다운 깨달음은 마음길(心路)이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음길을 어떻게 끊느냐?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하면 그것이 끊어지냐? 끊을랴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여.
〇‘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앉아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무슨 소리를 들을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오직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다못 그렇게만 화두를 의심해 갈 따름이여. 그렇게 해 가면 망상심(妄想心)을 끊을랴고 하지 안 해도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〇앞으로 부처님과 같은 대성현이 나오셔서 다시 어떠한 우리 중생들에게 맞는 새로운 법을 설하신다면 몰라도 현재까지는 이보다 더 우리의 중생의 번뇌 망상을 끊어서 ‘참나’를 깨닫게 하는 묘한 법은 없습니다. 활구참선이 아니고서는 세상없이 나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〇과거에 우리 선지식 고인 가운데에는 소시(少時)때 그렇게 일찍 깨달은 분도 가끔 있고,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한 분도 있지만, 그러한 분은 전생(前生)에 몸과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정진(精進)이 있은 그 인연으로 금생에 일찍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어느 생엔가는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정진이 없고서는 이 일대사(一大事)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〇설사 바른 스승을 만나서 올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지도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되,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면 스스로 자기에게 매서운 채찍질을 가하면서 하루 하루를 그리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아니 1초 1초를 알뜰히 단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〇‘망상(妄想)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이러한 말은 아직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여. 일어나는 망상은 조금도 성화 댈 필요가 없거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딱 챙기면, 화두만을 들어버리면 그것이 가장 쉬웁게 번뇌와 망상을 처리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〇(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정진을 하되 자기가 정진을 잘한 척 하고, 아주 의식적으로 자기 정진 잘하는 상(相)을 내 가지고 그러지를 말아라.’ ‘여법(如法)히 정진을 하되 상(相)이 없이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말씀도 계셨습니다.
〇해제를 하면 인연 따라서 또 걸망을 지고 어느 산천, 어느 계곡, 어느 모퉁이를 가더라도 그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염염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거각해 나간다면, 차(車) 속이 바로 입선(入禪) 시간이 될 것이고, 걸음걸음이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입니다.
〇신도 여러분들이야말로 출가한 스님네 보단 백 배(倍)의 노력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그 오욕락 속에서 자칫하면 죄를 의식적으로 짓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짓게 되기 때문에 백 배의 신심을 돈독히 갖지 아니하면 후회막급(後悔莫及)할 일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〇일분일초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생각 생각에 우리의 뒤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한 생각 늦추면 바로 그 무상살귀에 따라잡음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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