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8)—1983(계해)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4.01.17) (31분)

 

약 31분.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리오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광겁무명구탕진(曠劫無明俱蕩盡)헌디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며, 악한 인연을 누가 지어서 그 죄과(罪果)를 또 누가 받느냐 그 말이여. 죄를 지은 것은 무엇이 죄를 지었으며, 죄를 받는 자는 또 누가 죄를 받는 것이냐?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참된 성품은 허공과 같애서 동요가 없더라.

광겁무명(曠劫無明)을 구탕진(俱蕩盡)하면, 광겁(曠劫)의 무명(無明)을 함께 다 탕진해 버리면,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니라. 선천(先天), 하늘이 생겨나기 이전, 이 땅이 또 없어진 뒤에—하늘이 생겨나기 저 무량겁 이전 무량억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이후, 한량없이 이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서 이 세계가 없어진 뒤까지 본래부터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적멸(寂滅)한 상(相)이더라.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정월 17일,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이 자리에는 세등선원 안거 대중(安居大衆)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 안거 대중과 그밖에 윤필암,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한 비구니 선객(禪客)들이 이 자리에 운집(雲集)을 했고, 또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을 해서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에 한량없이 많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와 은진 송씨 진영 영가와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이 자리에 이 법요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도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체적이고 자상하게 그 공부해 나가는 방법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는 그보다 더 자상하고 뼈에 사무치는 법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生死) 없는 그 본성(本性)에 입각해서 보면 닦을 것이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버려야 할 악(惡)도 없고 지어야 할 선(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사(生死)가 본래(本來) 없건마는 무슨 까닭으로 무량겁을 두고 우리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면서 갖은 고락(苦樂)을 겪으면서 금생에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왜 생사가 본래 없는데 이렇게 생사를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왜 본래 생사가 없는데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 수도(苦行修道)를 해야 하는 것이냐?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탄생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6년 고행을 하셨어.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49년 동안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미묘법(微妙法)을 설하셨습니다마는, 무슨 목적으로 하셨느냐?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출현을 하셨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를 하느냐?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거여.

우리가 당장에라도 벗어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다고 하는 도리에 계합(契合)해 버리면 장부(丈夫) 일대사를 요달(了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겁무명(曠劫無明)을 탕진(蕩盡)을 해 버리고 선천후지(先天後地)에 적요요(寂寥寥)한 도리인 것입니다.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하면  본래비불역비심(本來非佛亦非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라  자유영광요고금(自由靈光耀古今)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단전(單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깊은 밀의(密意)를 바로 봐 버리면,
본래비불(本來非佛)이요 역비심(亦非心)이니라. 본래 부처도 아니고 또한 마음도 아니니라.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불(燃燈佛)께 수기(授記)를 받아서 부처를 이룬 것이 아니라고 하는 도리를 분명히 안다면, 우리 모든 대중과 육도 법계(六途法界)의 모든 중생도, 금일 은진 송씨 진영 영가(靈駕)도,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스스로 신령스러운 광명, 스스로 갖춘 신령한 광명이 예[古]와 이제[今]에 빛날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이 원상(圓相)을 떠억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일러라!” 했습니다. 한 스님이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떠억 앉았어.

마조 스님이 주장자(柱杖子)로 여지없이 한 방맹이를 쳤습니다. 치니까 그 원상 안에 떠억 들어가서 앉은 스님이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입을 딱 다물고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

지난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용맹정진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행을 한 대중이 지혜의 눈을 뜬 자가 있거든, 이 원상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 승(僧)이 들어갔다. 마조 스님이 여지없이 방(棒)을 내리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왜 쳤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다’고 한 도리가 무엇이여? 눈을 갖춘 자가 있으면 한마디 일러.

이 많은 대중이 용맹정진을 그렇게 했으니 어찌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 둘 뿐이리요마는 체면을 너무 지키느라고 묵언(默言)으로써 이른 것을 나는 알겠습니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심)


오늘 해제(解制)를 하고 앞으로 석 달 동안 산철인데,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제(結制) 중이라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해제라고 해서 어찌 산만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석 달 동안 춥도 덥지도 않는 그런 좋은 정진하기 좋은 계절에 어쨌던지 시간을 아껴서 더욱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오늘 백일기도 회향(廻向)이며 또 이 세등선원에 천일기도가 오늘로써 회향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행도 해제를 했다고 해서 공부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듯이, 해제를 하고서 더욱 정진을 알뜰히 해야 함과 마찬가지로 다시 오늘부터 또 천일기도를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께서는 또 이 천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셔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소원이 낱낱이 다 성취가 되시고, 무량겁 업(業)이 다 소멸이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분 가정에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고,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다음날 이 자리에 만날 때까지 알뜰히 정진하시고 기도하시기를 부탁을 하고 해제 법어를 마칩니다.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한디  수봉창취접천하(數峰蒼翠接天霞)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중무한청의미(箇中無限淸意味)를  강상일구도설파(江上一鷗都說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해제를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도반(道伴)을 찾으며 행각(行脚)을 하다 보면, 비를 만나서 비가 지난 뒤에는 구름이 걷히고 강상(江上)에는 해가 넘어가고, 몇 봉우리 푸른 산봉우리는 안개가 끼어서 하늘에 접(接)한데, 그 가운데에 한없는 맑은 맛을 어떻게 표현을 할 것인가?
이 그림과 같은, 비가 갠 뒤에 구름이 걷히고 강 위에는 석양이 되어서, 그 푸른 봉우리는 안개에 끼어 가지고 하늘에 접했는데, 그 아름다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강상(江上)에 이리 나르고 저리 나르는 흰 백구(白鷗)의 울음소리가 그 아름다운 경계를 여지없이 일렀드라. (처음~30분49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 /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 부처님은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것.

(게송)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 / 마조(馬祖) 원상(圓相) 공안 /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 (게송)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5)—계해년 하안거 반산림 법어(83.06.02) (50분)

<녹음 가운데에 주변 소음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26분.

 

(2) 약 24분.



(1)------------------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하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허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하라
나무~아미타불~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이나, 천억 그 많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면 그 복(福)이 갓이 없을 것이나, 어찌 항상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부처님께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올리되, 한 부처님에게만 올리는 게 아니라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 그 복이 한량이 없어. 한량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항상 옛 가르침,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자체로써 말을 한다면은 ‘옛 부처에 능히 가르친 바 가르침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고, 이치로써 말을 한다면은 학인(學人)의 한 권의 경(經)을 가르치는 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한 권의 경(經)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서로 전한 그 법인(法印), 법의 도장을 갖다가 말하는 것이고,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를 고교(古敎)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그 일착자(一著子)는 그 비롯함이 없어. 언제부터서 있었던지 그 시작이 없어. 언제 그 가르침, 그 일착자를 언제부터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가 그 시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고교(古敎)라 그래. ‘옛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그래. 이 중생에게는—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이 있는데 그것을 갖다가 고교(古敎)라 그래.

그러면 어째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복보다도 그 공덕(功德)보다도,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經)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냐?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그 공덕보다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 대중이 계해년(癸亥年) 삼하 결제(三夏結制)를 해 가지고 이렇게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전심전력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항상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이다 그 말이여.
금년 여름철에는 유독 좋은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정진(精進)을 한다는 말을 와서 들으니, 그리고 이 여러 대중의 얼굴들을 보니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해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하는 모습이 그 살아 있는 눈동자 속에 내가 역력히 볼 수가 있어서 너무너무 대견스럽고, 너무너무 참 그 기쁜 바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를,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댄 그대들은 눈을 떠서 눈앞에를 관(觀)하라.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위 상변에다가 검은 글자를 쓴다’ 그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經),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에는 경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문채(文彩)가 있는데,
그 ‘흰 종이라 하는 ‘흰 백(白)’ 자, 흰 종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 자성(自性)에는 불변 수연(不變隨緣), 이 두 가지 면이 있는데, 그 자성이 가지고 있는 불변 수연에 두 가지 용(用)을 갖다가 ‘흰 빛’에다가 표현을 한 것이고. ‘검은 글자를 썼다’ 하는 그 ‘검을 흑(黑)’ 자는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그 적멸(寂滅)의 체(體)를 갖다가 가르치는 것이거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대 눈을 떠 가지고 그대의 눈앞을 봐라. 모든 납자(衲子)로 하여금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한 권의 경을 읽어라 그 말이여.
눈앞에 일용(日用), 날[日]로 쓰는 일용 생활—눈으로 모든 색상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로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 모든 맛을 보고, 몸으로 춥고 더웁고 한 것을 느끼고,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일용인데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한 권의 경(經)을 읽는다’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이 오직 이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본래 가지고 태어난 그 한 권의 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法)을 설하시고, 팔만사천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과 팔만사천 법(法)이 한 글자 한마디도 오직 이 한 권의 경(經)을 읽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 없어. 팔만대장경을 보고 배우되 옳게만 본다면, 마침내 이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본래 가지고 나온 이 한 권 경을 읽도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고 5년, 6년, 경을 배우고 평생 동안을 경을 손에서 놓지 아니하고 배우되, 본래 가지고 난 이 한 권의 경을 읽게 되어야지 그 경을 옳게 보고 옳게 배운 것이지, 이 본래 가지고 난 한 글자도 없는 이 경(經)을 볼려고 하는 신심(信心)을 내지 아니하고 이 경을 보게 까지 되지 아니한다면,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육두백판으로 다 외우고 쓴다고 한들 그 사람은 경을 바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을, 강원(講院)에서 이력(履歷)을 마치면 그 경을 놔 버리고 선방(禪房)에 들어와서 진짜 경을, 이 마음의 경을 읽는 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그래. 우리 대중이 과연 그 한 권의 경, 아무리 열어 봐도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여,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을 똑바로 잘 읽고 있는지 스스로 자기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입선(入禪)하는 시간만 떠억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한 그 찰나부터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시비에 얽혀서 말려들어 가고, ‘니가 잘하고 내가 잘하고 내가 옳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또 입선(入禪)을 하면 또 앉어서 정진하다가 방선(放禪)을 하면 그럭저럭 일용(日用)에 끄달려서 화두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정진을 해 가지고서는 10년, 20년 내지 30년, 평생을 선방에서 걸망을 지고 다니면서 정진을 한들 확철대오가 어디에 있어?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정진을 한들 무슨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금년 여름에 이 세등선원에 모인 대중은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한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정진을 하고, 금년 여름에 기어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을 하고, 불조(佛祖)의 면목을 꿰뚫어 보는 그러한 납자가 많이 배출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될 것을 기대를 합니다.


‘참선이 참 쉽기로 말하면 세수할 때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고, 어렵기로 말하면 이 세상에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없다’고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렵다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 없고, 쉽다고 섣불리 해서도 아니될 것이여.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앉어서 정진을 하다가 졸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 포행(布行)을 하면서 ‘이뭣고?’. 그러다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와서 정진하고. 조급한 생각을 조끔도 낼 것이 없어. 그러면서도 또 등한(等閑), 더군다나 등한히 할 생각을 왜 낼 것이냐 그 말이여.
일부러 묵언(默言)을 하지 아니해도 제절로 묵언이여, 전체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데 무슨 딴소리할 겨를이 있을까 보냐? 밥을 입에다 떠 넣고 저작(咀嚼)을 하면서, 저작을 하면서 그 속에 화두가 역력(歷歷)하고, 반찬을 집어 먹고 또 저작을 하면서 바로 거기에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전 대중이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하고, 세수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소제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운력을 할 때도 고대로 하고, 큰방에 있으나, 지대방에나, 마당에 나가나,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하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미 부모형제와 정든 가정을 버리고 출가해서 모든 인생 청춘을 다 포기하고, 그리고서도 이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한 이상, 기왕 하는 마당에 그렇게 철저히 해 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결정코 금생에, 금생도 길고 결정코 이 철에 확철대오를 해야 할 그러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달리고 있는 말에다가 채찍을 가한다’
채찍을 가하지 아니해도 그 말이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시 또 채찍을 가한다 그 말이여. 마치 우리 대중이 각자 자발적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내가 지금 법상에 올라와서 또 채찍을 가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서너 시간밖에 안 자던 사람이 이제는 인자 한 시간밖에 안 자고 정진을 하고 그렇게 까지는 할 것이 없어. 우리 몸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발심을 해서 정진을 해도 이 몸뚱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 물질로 이루어진 정밀한 기계라 최소한도 필요한 만큼은 잠을 재워 줘야 하고, 최소한 필요한 만큼은 멕여 줘야 하고 또 입혀 줘야 할 것입니다.(처음~26분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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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거의 잠을 안 주무시고, 거의 먹지 아니하시고 그 피나는 고행(苦行)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설산에 들어가셔서 여러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이 지도하는 대로 통달을 해서, 오히려 그 스승보다도 더 앞서갔다 말이여. 그러나 그 스승이 그렇게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또 그다음 스승의 밑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또 정진을 고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다도 더 낫게 해. 그 스승이 그렇게 간절히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그렇게 해서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훌륭한 스승은 다 찾아서 배우고 차례차례로 그 스승을 버리고 그렇게 해 가지고 더 이상 스승을 찾을 것이 없을 때,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혼자 정진을 했습니다.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을 받아 잡숫고 정신을 차리시고 흐르는 강물에 목욕을 하고 쇄락(灑落)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힘이 솟구쳐 오르는 그러한 상태에서 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했는데,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누구를 위해서 맨 먼저 법(法)을 설하실 것인가?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가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정진을 하는데—처음에 그 오비구는 정반왕(淨飯王)이 태자(太子)를 보호하라고 보내 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태자의 고행하는 것을 보고 발심을 해 가지고 같이 ‘성불(成佛)할 때까지 이 고행으로부터서 물러나지 말자’ 이렇게 서로 맹세를 하고 고행을 하다가, 태자는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잡수는 것을 보고, 그 다섯 비구들이 ‘고타마(Gotama)는 굶주림을 참지 못해 가지고 고행을 포기를 했다, 타락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저런 타락한 고타마와 같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녹야원으로 가자’ 그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 녹야원으로 간 그 다섯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께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위해서 녹야원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 교진여들은 먼빛으로 고타마 태자가 오신 것을 보고, ‘아 저기 타락한 태자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찾아오는가 모르겠다. 우리, 오드라도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말고, 발 씻을 물도 떠다 주지 말자’ 이렇게 다섯 사람이 꽉 짜고 있었습니다. 태자가 가까이 오니까 그 얼굴은 훤히 빛이 나는데,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짰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일어서서 영접(迎接)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태자가 뭐라고 여기를 왔소?” 물으니까,
태자가 “나를 이제는 태자라고 부르지를 말아라. 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으니 나를 부처님이라고 불러라”

“타락한 고타마가 어떻게 성불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나를 타락을 했다고 하느냐? 나를 봐라.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눈빛을 봐라. 나는 확철대오해서 성불을 한 성자가 됐느니라”
과연 우러러보니까 얼굴에는 빛이 나고 눈에서는 광명이 나는데, 옛날에 자기들이 보았던 그러한 구담 사문(瞿曇沙門)이 아니었더라 그 말이여.

거기에서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그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그 다섯 비구뿐만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인도(印度)에 모든 수행자들이 그렇게 몸을 불로 지지고, 가시덤불에 딩굴고,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하는 고행 위주(爲主)의 고행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 몸뚱이를 굴복을 받고 마침내 해탈도를 얻는다고 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진여를 위해서 최초에 설하신 법이 바로 고행을 위주로 하는 그러한 고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최초에 설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오비구(五比丘)로 하여금 바른 수행법을 갖도록 하고, 그다음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습니다.

그 다섯 비구로 하여금 한 사람을 보내서 탁발을 해 오게 맨들고, 나머지 네 사람을 위해서 법(法)을 설하고, 그 다음날은 또 다른 사람이 또 밥을 얻어 오고 나머지기 네 사람이 또 법문을 듣고, 이렇게 하면서 그 철에 이 다섯 사람이 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고, 다섯 사람이 각기 딴 길로 딴 방향으로 가서 이 법을 설해라’ 이렇게 해서 인도 각 지방에 보내 가지고 법을 설하게 했고, 그 철에 당장 1250인(人)이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셔서 삽시간에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불법(佛法)을 펴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 대중은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잘 입고 지나치게 많이 잘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될 수 있으면은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그렇게 공부를 할려고 애쓴 사람들만 모였어. 너무 그렇게 할까 걱정이, 그렇게 하다가 병이 날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니까.

최소한도로 필요한 잠, 아무리 적게 자도 서너 시간, 너댓 시간은 자 주어야 그래야 그 이튿날 정신이 맑은 법이여. 그 저녁에 잠을 안 자고 설쳐대 놓으면 안 자고 해 놓으면 그 이튿날 낮에 맑은 정신이 없어. 낮에 입선(入禪) 중에도 졸고 그저 그렇게 해서 맑은 정신이 없으니까, 차라리 그러기보다는 네 시간 내지 다섯 시간 푸욱 자 주고.
일반적으로 선방(禪房)에는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도록 여섯 시간을 설정한 것은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도 있고, 근기가 조끔 못한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어떠한 사람도 다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 시간을 자도록 그렇게 해 놓은 것인데, 그렇게 나이가 젊고 건강이 좋은 사람은 다섯 시간만 자도 좋고, 또 특수하게 또 좋은 사람은 네 시간 정도만 자도 좋으나, 대체적으로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자 주면 그 이튿날 정신이 깨끗해서 3시에 일어나서 그날 저녁 9시에 잘 때까지 정말 짬지게 정진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아 옆에서 잠을 안 자고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잠이 올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잠을 안 자고 하다 보면 그 이튿날 맑은 정신이 없어 가지고 입선(入禪) 중에 꾸벅꾸벅 조니, 그것은 실질적으로 이익이 없는 것이니까, 자기의 체질과 건강과 뭐 그런 것을 잘 참작해서 대중의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실질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가장 자기에게 알맞는 정진법을 스스로 개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럭저럭하다가 벌써 이 반 철이 지내갔는데, 앞으로 반 철은 초복 · 중복 · 말복, 이 삼복(三伏)이 들어서—지나간 반 철은 그럭저럭 과히 덥지 않고 지내갔지만 앞으로 참 더운 반 철이 남아 있는데, 그 더위 속에서도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실속 있는 정진을 해서 득력(得力)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알뜰한 정진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에 최초에 오비구(五比丘)에게 설하신 법문(法門)의 요지를 말을 했습니다.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헌디  갱무남북여서동(更無南北與西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차양화력(雖然不借陽和力)이라도  쟁내도화일양홍(爭奈桃花一樣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이다. 홀로 앉었어, 올연히 앉었는데 한 집이 공(空)했더라.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참 애를 써서 몸부림을 치면서 부셔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정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게 된 경계가 꼭 오는데,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처억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그 맑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기쁘다고 할 것인가, 슬프다고 할 것인가?

하늘을 봐도 화두(話頭)요, 땅을 봐도 새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차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무슨 옆에서 누가 잡담을 해도 그 소리는 나한테는 상관이 없고, 비행기 소리가 들려도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그러니 방안에 대중이 가득 있어도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고, 문 밖을 보면은 산천초목이 울긋불긋해도 그것은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오직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할 뿐이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무슨 망상이 혹 무슨 딴생각이 일어나도 그냥 스쳐간 것뿐이지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것이 ‘한 집이 공했다. 일실(一室)이 공(空)했다’ 하는 거여.

이 조그마한 큰방 하나만 공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다 공한 거여.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까지도 느낄 수가 없어. 몸뚱이가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도 인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 몸뚱이도 공(空)해 버렸고 이 방도 집도 공(空)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공(空)해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러니 거기에 무슨 동서남북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 몸이 공하고, 이 방이 공하고, 이 우주법계가 다 공했으니, 그 공한 곳에도 처백히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공한 그 경계에 따악 빠져 가지고 그놈을 집을 짓고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그것은 그러한 경계에 빠져 가지고 그놈을 맛보고 있다면 그것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거여. 절대로 그 사람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그러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되거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또 하나 조심할 것은 그러한 경계에서 ‘빨리 그냥 어서 터졌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한 생각을... (녹음 끊김) 조급한 생각도 갖지 말고 또 늘어지는 해태심(懈怠心)도 갖지를 말고 여법하게 정진을 해 가면 아무 장애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고, 결정코 깨닫고야만 말게 되는 거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에 맛있는 음식인데, 그러한 맛있는 음식을 맨들어 갖고도 그 관리를 잘못하면 그것이 변했다 하면은 무서운 독약으로 변하는 것이여. 맛있는 음식일수록에 변하면 고약한 독약으로 변하는 법이라, 맛있는 음식이 변했다고 해서 아깝다고 그놈을 먹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그 무량겁을 두고 어렵게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저 죽고 남 죽이는 외도(外道)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말이여. 이러한 말이 한량이 없지만...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26분5초~49분2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經)을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한다 /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라 /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오비구(五比丘)에게 하신 최초의 설법, 중도법(中道法) /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실속 있게 정진을 하라 / (게송)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 /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된다 /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한다.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3)—1982(임술)년 동안거 해제 법어(83.01.17) (43분)

 

약 43분.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종일토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토록 바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걸어다니고 손으로 일을 하고, 입으로 먹고 말하고, 앉고 서고 눕고 걸어 다니고, 잠시 잠깐도 쉴 사이가 없이 바쁘다 그 말여. 그렇게 바쁘건만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다. 해탈도 구하지 아니하고, 천당에 태어나는 것도 좋아하덜 않는다 그 말이여.

세상에 도(道)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명업식(無明業識)이 발동을 해 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설쳐대고 있지만,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역시 바쁘다 그 말이여. 그 바쁘지만 그 바쁜 것이 조끔도 방해로울 것이 없어.
정진(精進)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뻐서 참선(參禪)을 못한다. 시간이 없어서 참선을 못한다. 번뇌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그 묘한 관(觀)을 얻은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건 망상이 일어나건,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밥을 먹고 걸어가거나 앉거나 서거나 하나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경계는 갈 곳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복잡한 경계 속에 있으면서 그 복잡한 경계가 자기에게는 아무 방해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못 이렇게 정진을 지어가는 마당에 무슨 해탈(解脫)을 구할 것이 있으며, 무슨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못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무렴(無念)이라 하니까, 이 ‘생각 없는 데 돌아간다’고 표현을 했지만, 생각 없는 데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내면 그건 벌써 틀려 버린 것이고, 스스로 ‘내가 무렴(無念)의 경계에 들어갔다’고 생각을 가져도 이미 무렴이 아녀.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毘盧)의 이마 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갈 뿐 그밖에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정월 17일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일이고, 또 천일기도 가운데에 백일기도의 회향날입니다. 지난 삼동에는 50여 명의 수좌(首座)들이 모여서 참 알뜰하게 짬지게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석 달 동안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잘 정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독감이 들어서 거의 몇 분을 빼놓고는 전부 독감이 들어서 고생들을 했지만, 그 기침을 하고 열이 나고 몸이 아프고 그러면서도 한 분도 도중하차를 하지 아니하고, 이 좁은 방에서 기침을 하면서 그 병을 정진력으로 이겨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마침내 병을 이겨내 가지고 날이 지내갈수록 점점 정진을 모다 열심히 하고 여법하게 해서 끝을 그렇게 잘 마쳤어. 이렇게 알뜰하게 여법하게 정진(精進)해 간다면 무슨 도(道)를 성취하지 못할 것인가?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3년을 이렇게 해서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이러한 뼛속에 사무치는 가슴이 뭉클한 그러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정진(精進)은 누구를 위하는 정진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해결하기 위한 정진이여. 남을 보이기 위해서, 정진 잘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크게는 진리를 깨달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것을 궁극에 목적으로 삼지만, 도를 이룰 때까지는 일체중생이 어디에 있어? 깨달라야 할 진리가 어디가 있어?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가 코앞에 붙어 있는데.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그 생사(生死) 문제가 딱! 눈앞에 있어서 일분일초도 마음을 지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일으켜서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여. 제절로 무상(無常)과 생사에 대한 무상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오른다면 지켜야 할 계행(戒行)이 어디가 있으며, ‘화두를 들어야겄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어디가 있으며, 남을 보이기 위한 정진이 어디가 있으며, 대중규칙도 일부러 지킬려고 할 것이 어디가 있으며, 밥이 맛이 있고 없고, 수용(受用)이 좋고 나쁘고, 그러한 것에 관심 쓸 겨를이 어디가 있느냐? 누구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낱낱이 자기 자신이 저절로 규칙이 지켜져 버릴 것이며, 입승(立繩)이나 찰중(察衆)이나 주의나 간섭을 받을 것이 무엇이 있어? 저절로 50명이 되었건 백 명이 되었건, 옛날에 중국 총림에는 5백 명, 7백 명, 천 명, 천오백 명 이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지만 모두가 다 생사 문제에 분심(憤心) 발심(發心)되어 가지고 그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 간다면 무슨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무엇이 있어?

지난 삼동(三冬) 동안에 대중이 그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았지만 한 사람도 별 탈이 없이 그렇게 온전하게 여법하게 알차게 정진을 하고 이렇게 해제를 맞이한 것은 전원이 그야말로 이와 같이 정진을 해 왔고, 이와 같이 발심을 한 결과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 철만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앞으로 여름 결제가 있을 때까지 또 산철이 또 석 달이 있습니다마는, 산철 동안에 걸망을 지고 어느 산(山), 어느 도량(道場)에 가고, 어느 지방에 가드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이고, 또 여름 석 달 동안에 결제(結制)에 안거에도 그와 같이 정진을 해서,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그 간절한 마음이 지속이 되어야지 상속이 되어야지,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해제가 되면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흩어져 버리고 이리저리 설치다가, 또 다음 결제가 되면 조금 할 듯 할려고 하다가 또 해제가 되면 또 그 분위기가 깨져 버리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3년을 한들 어찌 정진이 궤도(軌道)에 들어가며, 10년을 한들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제 중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할 때에는 전원이 묵언(默言)을 하면서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하면 잡담을 하고, 이렇게 지내는 그런 것이 습관이 배이게 되면 그것이 온전한 정진이라 할 수가 없고. 이 결제 동안에는 정진을 열심히 하다가 해제가 되면 이리저리 산만하게 다니는 것이 그것이 어찌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하겠느냐.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고 한 말씀이 근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하야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허면  원래불허노호지(元來不許老胡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라. 선근(善根)이 성숙(成熟)하면, 선근(善根), 좋은 근기(根機)다 그 말이여. 좋은 근기는 처음부터 선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하근(下根)이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마침내 선근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여. 그렇게 알뜰히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서 선근으로 성숙이 되어 가는 것은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처음부터 ‘나는 하근기(下根機)라, 나는 참선을 못해. 참선을 해봤자 나같은 사람은 도를 이룰 수가 없어’ 자포자기를 해 가지고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선근(善根)이 될 기약이 없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봐서 하근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럴수록에 바른 스승을 찾아서 목숨 바쳐서 다른 사람 정진하는 것보단 3배 내지 10배 100배를 정진을 해 간다면 그 사람이 훨씬 더 빨리 선근으로 성숙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그 말이여.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다. 모냥을 취(取)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용맹정진 가행정진을 해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다’ 그랬지만, 취상구현(取相求玄)을 하라는 것이 아니여.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상(精進相)을 갖고, ‘나는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하는 상(相)을 내고, ‘나는 정진이 잘된다고 하는 그런 상(相)에 떨어지고, 취상구현(取相求玄)은 진실한 정진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거든.

스승을 구(求)하되 모냥을 보고 구하고, 정진을 하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정진상을 내고, 계율을 갖되 ‘나는 청정한 계율을 갖는다’ 하는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다른 사람 계행(戒行) 안 지킨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미워하고, 이러한 것은 전판 이 취상구현(取相求玄)이 되어서, 모냥을 취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는 것이 되어서 이것은 참다운 수행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율사(律師)가 견성(見性)을 못한다. 율사가 견성한 사람은 없다’
과거에 모다 문헌을 보면 율사가 견성한 도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율사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견성을 못했어.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율사를 하되, 율사라고 하는 상(相)이 떨어졌을 때 견성을 하지, ‘나는 율을 지킨다. 계행이 청정하다’ 그래 가지고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있는 동안에는 세상없이도 도(道)를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사람이 물론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음식도 조심하고, 잠도 좀 적게 자면서 그 정진할려고 애를 쓰는 것, 그렇게 애를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이루겠습니까마는 그러한 상(相)에 떨어져 가지고서는 안 된다.

알뜰히 정진을 하되 그러한 상(相)에 떨어지지 않고 정진한 사람과 그런 상(相)에 떨어져서 정진한 사람은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아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되 정말 철저하게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되, 계를 지키는 상(相)이 없는 분은 남이 보면 알어. 남이 보면 아는 것이고. 계를 지키되 ‘내가 계율을 지킨다’는 계상(戒相)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보면 또 남이 보면 알어.
기위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할라면 계(戒)를 청정히 지키되 계상에 떨어지지 말 것이며,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하면, 한 생각을 몰록, 한 생각 몰록 공겁(空劫) 밖에 뛰어나면,
원래(元來)로 불허노호지(不許老胡知)니라. 원래로 노호(老胡) 아는 것을, 노호 아는 것을 허락지 않을지라. 한 생각 공겁 밖에 뛰어난 소식(消息)은 노호도 이 도리를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호(老胡)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금일 대중은 이 해제일(解制日)을 맞이해서 부처님도 이 도리는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그 도리를 향해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새로 출가한 마음으로,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결제(結制)를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죽는 것이, 죽는 그 시간이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는 그 순간이 새로 태어나는 시간인 것이며, ‘해제(解制)다’ 이제 공부가 공부 기간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바로 동시에 새 결제가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참수행인이라 할 것이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그것이 죽을 사(死) 자, 죽음이라 하셨습니다. 그 한 생각 끊어진 그것이 죽음인 동시에 새로 태어나는 찰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生)이요 죽음[死]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느낀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라야 비로소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오느냐? 죽음이 우리에게 오는 그 시일을 시간을 각기 말해 봐라”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하루 동안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한 시간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공부를 못하겠다

그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죽음은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는 그 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죽음이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그리셨습니다.

지끔 40살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20년간은 정진을 할 수 있겠다 이리 생각하고, 한 50을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내가 빨리 죽는다 해도 환갑까지는 정진을 할 수 있겠다
30세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30년은 정진할 수 있겄다 20세 먹은 사람은 ‘30세까지는 경(經)을 보고, 30세부터서 참선을 해도 몇십 년간을 정진할 수 있으니까 충분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모두가 다 정진을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규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생각 하나가 철저하다면 입선(入禪) 방선(放禪) 시간이 어디에 있으며,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파해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정진을 해야 할 정진이 어디가 따로 있으며, 벌써 마음을 지어서 지키고, 마음을 지어서 정진을 하고, 마음을 지어서 잠을 안 자고 다 그르쳐 버린 것이고, 다 김이 벌써 다 새 버린 것입니다.
김새 가지고 정진을 하니 번뇌 때문에 정진을 못한다. 망상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혼침이 오기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수용(受用)이 박(薄)해서 정진을 못한다. 시끄러워서 정진을 못한다 이게 다 김이 벌써 다 빠져 버리고, 껍데기 송장이 송장 껍데기만 남아 가지고 정진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花笑山前)에 누천기(漏天機)요. 꽃이 웃는 산 앞에는 천기를 누설(漏泄)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새가 노래하는 수풀 밖에는 남[生]이 없는 말을 하고 있더라. 무생(無生)의 도리를 말하고 있더라. 산 앞에 빨갛게 피고 있는 그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을 하고 있고, 숲 밖에서 새가 노래하는 것은 무생(無生), 무생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더라 그 말이여.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로구나.
두두물물(頭頭物物)은,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은 제각기 스스로 영원무궁(永遠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더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라.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일체 삼라만상 그 자체가 전부 천기를 누설한 것이요, 남[生]이 없는 진리의 표현일진대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요, 구름을 보면 구름이요, 새를 보면 새요,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이 낱낱이 그대로 그놈을 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고대로가 법신(法身)이요, 진여(眞如)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더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입을 벽에다 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이 무슨 (기계음)... 기계가 녹음기가, 마이크가 산승(山僧)을 대신을 해서 끝을 맺어 주었습니다. (처음~42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 /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려라 /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달라야 한다.

생사에 대한 무상(無常)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 /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

(게송)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 /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 /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 / (게송)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無念)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이 독로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3. 4. 24. 21:27

 

 

(세등선원No.44)—계해년 하안거 결제 법어(83.04.17.음) (47분)


(1) 약 29분.

 

(2) 약 18분.


(1)------------------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나무~아미타불~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다.
은은히 다리가 들녘에 들 안개 속에 놓여져 있고, 강물에 잠겼다 나타났다 하는 돌이 놓여져 있는 서쪽 강변에서 고기잡이 배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무엇을 묻느냐 하면,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복사꽃이 종일토록 그 강물에 떨어져서 흐름을 따라서, 흐르는 물을 따라서 복사꽃이 흐르는데, 신선(神仙)이 사는 고을은,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이 맑은 강 시냇가 어느 곳에 있느냐?

무릉도원에서 그 도원(桃源)에 피어 있든 복숭아꽃이 떨어져 가지고 이렇게 강물을 따라서 계속 이렇게 흘르고 있는데, 반드시 여기에는 신선이 사는 고을이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신선 사는 곳이 어디가 있느냐 하고 어부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깨달은 경지를, 확철대오한 경지를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偈頌)입니다. 복숭아꽃이 떨어져서 그 흐르는 물에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무릉도원이 이 강변 가 어디엔가는 있을 텐데 어디가 있느냐.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여름 안거(安居)가 시작되는 4월 17일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오뉴월 삼복더위 속에서도 더위를 이기고, 나아가서 그 더위를 잊어버리고 정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너무 자상하게 잘 들었습니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그러는데 참선을 할 때 있어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거각을 하는데, 힘을 너무 써.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그것이 몸뚱이를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가행정진을 삼고, 잠을 안 잔다던지 말을 않는다던지 밥을 굶는다던지 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서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억지로 앉아서 배긴다던지, 이것은 그 육체를 조복(調伏) 받기 위한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진짜 참선은 육체를 억지로 억압을 하고 육체를 못살게 구는 것이 참정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일단 육체를 조복 받는 그러한 기간이 필요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서 제대로 정진이 잡혀가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여. 선지식의 법문을 듣지 아니하면 평생토록 공부에 바른 의관(疑觀)을 잡는 법을 몰라서 그저 어거지로 몸뚱이만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데, 그러한 정진은 지나치면은 병(病)만을 얻게 만들고 도(道)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늘 이 부처님 말씀대로 다른 도반(道伴)들보다 몇십 배를 애를 쓰고 정진을 해도 마침내 도를 얻지를 못하니까, 퇴타심(退墮心)이 나 가지고 퇴속(退俗)을 할려고 결심을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래 부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불러다 놓고, “니가 왜 퇴속을 할려고 그러느냐?”
“저로서는 목숨을 바쳐서 그렇게 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제 출가 이래로 계속해서 했지만, 다른 도반들은 모다 깨달라서 성과(聖果)를 얻는데 저는 도무지 소식이 없으니 저는 도(道)에 인연이 없는가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럴 바에는 속가로 내려가서 부모 봉양(奉養)하고 속가에서 살면서 불법을 그저 믿고 살겠습니다”

“좋다. 내가 니 어째서 도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을 말해 주리라.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슨 업(業)을 삼았느냐? 무슨 직업을 가졌느냐?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엇을 제일 좋아하고 했느냐?” 그걸 물으셨습니다.
“거문고를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탑니다”

“그래! 그러면은 그 거문고를 탈 때에 첫째, 그 줄을 고르는데, 그 줄을 너무 긴(緊)하게 졸라 매면 어떻게 되느냐?”
“자칫하면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드라도 소리가 너무 강하게 매면 제소리가 안 들립니다“

”그러면 끊어질까 두려워서 너무 느슨하게 매면 어쩠드냐?“
”줄이 끊어지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너무 느슨하게 매면 제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그것 보아라. 참선하는 데 있어서도 해태(懈怠)를 부리고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도를 이루지 못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급한 마음을 가지고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지나치게 힘을 써도 거문고 줄을 너무 강하게 맨 거와 같이, 그것도 도를 이루지를 못하고 거문고 줄이 끊어지듯이 몸에 병만 쳐지고 도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라“
하! 그 말씀을 듣고서 그때부터서 참 중도(中道)를 지켜서 수행을 해 가는데 머지않아서 확철대오를 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이러한 말씀은 대단히 좋은 귀감(龜鑑)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럭저럭 병이 날까 봐서 어제에나 오늘이나 마냥 그저 정진을 하는데 시지부지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자기만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그 육체를 갖다가 억제를 하고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지나치게 들볶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 그러한 자세도 지혜롭지 못한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팔도에서 다른 권속 다른 혈통이 모여 가지고 석 달 동안을 같이 산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불법을 믿는 목적이 같은 도반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비교적 잘 대중 화합이 이루어지지만, 그 가운데 혹 괴각(乖角)이 하나 둘은 있을 수가 있어서, 특수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회상(會上)을 가던지 그러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잘 대중이 대처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제자로 핀돌라[賓頭盧(빈두로)]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참 수행을 잘해서 성과(聖果)를 이뤘습니다.
그리고서 ‘내가 이렇게 성과(聖果)를 이루게 된 것은 첫째, 나를 낳아 주신 부모와 나를 길러준 나에 고향의 그 은혜다’ 이리 생각을 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 가지고 부모와 형제와 일가친척에도 법을 설해 주고, 또 마을 사람들 고향 사람들에게도 이 불법(佛法)의 종자를 심어 줘야 되겠다’ 이리 생각하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그 고향은 코삼비라고 하는 지방인데, 그 항하(恒河), 간지스 강(Ganges江)이 흘르고 있는 강변입니다.
이 모다 강물은 맑고 강변에는 야자수 나무가 늘어서서 그 서늘한 그늘이 져서 참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은 그러한 야자수 숲 아래 떠~억 앉아서 정진을 하며, 또 졸리면 포행도 하고, 그러다 때가 되면 걸식도 하고 이렇게 해서 야자수 나무에 쉬어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그때 그 지방에 성주 우다냐 왕과 그 왕비가 많은 모다 궁녀들을 거느리고 그 강가에 나와서 소풍을 하러 나왔었습니다.

그래 왕과 왕비는 여러 아름다운 궁녀들로 하여금 거문고도 타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춤도 추게 하고, 그러면서 한바탕 즐기다가 왕이 좀 피로했던지 그 서늘한 데에 좀 한숨을 낮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왕비와 궁녀들이 그 왕이 잠이 드니까 무료해서 자기네들도 그 강가에 거닐면서 놀다가, 보니까 그 야자수 그늘 밑에 참 성스럽게 생긴 한 수행인이 떠억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가까이 가서 보니까 너무너무 인물도 잘생기고, 그 얼굴과 몸매에는 너무너무 그 수행인으로서 성스러운 그 고상한 품격이 풍기니까, 그 앞에 가서 절을 하고서 “우리에게 좋은 법을 설해 주십시요” 이렇게 청을 했습니다.
그래 그 핀돌라 스님이 그 왕비와 궁녀들을 향해서 여러 가지 설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게 왕비와 궁녀들은 그 설하신 법문이 너무너무 훌륭해서 거기에서 법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있노라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 우다냐 왕은 눈을 떠서 보니, 자기 옆에 모다 있을 왕비와 궁녀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다 보니까 야자수 나무 그늘 밑에서 그 왕비와 궁녀들이 어떤 한가운데 스님 한 분을 놓고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질투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자마자 “명색이 수행한다는 놈이 이쁜 여자들을 모여 놓고 잡담이나 하고 희희닥거리고 있다”고, “네깐 놈이 무슨 수행을 하는 놈이냐?”고, 칼을 빼 가지고는 쳐들어서 한칼에 쳐죽일 듯이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핀돌라 스님은 눈을 따악 감고서 조끔도 동요를 하지 안 했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을 내지도 않고,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왕도 겁이 나 가지고 그 들었던 칼을 후려치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는 그 근처에 마치 개미가 그 집을 짓고 수천 마리 개미들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을 해 가지고 그 개미집을 파다가 그 핀돌라 스님 얼굴에다 갖다 개미와 개미집을 압량해서 갖다가 퍼붓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개미들이 얼굴로, 목으로, 품속으로, 그냥 전신으로 개미가 버글버글 하면서 물고 뜯고 그래도, 그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 우다냐 왕이 참 감복을 해 가지고 무릎을 꿇고서 참회(懺悔)를 했습니다.
그런 뒤로 그 우다냐 왕은 그 핀돌라 스님을 자주 찾아 뵈웁고 법문도 듣고 여러 가지 참 지도를 받고 해서 그 핀돌라 스님의 정진력을 통한 인욕행(忍辱行)과 그 자비(慈悲)를 보이심으로 해서 그 왕실을 중심해서 이 정법을 갖다가 크게 선양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나타난 한 일화(逸話)지만,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가 있느냐?

대중 가운데에 특별한 성격을 가진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어서, 대중스님네 공부해 나가는 데 또는 생활해 나가는 데 지장을 줄 만한 일이 있다 하드라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인욕(忍辱)을 하고 자기를 반성하고,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발심(發心)을 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그러한 괴각이나 그러한 성격을 가진 분이 조끔도 대중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경책(警策)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다냐 왕 그 포악(暴惡)한 언행이 결국은 핀돌라 스님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펴게 하는 좋은 계기를 맨들어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의 육근문두(六根門頭)에 항시 호시탐탐(虎視耽耽) 침입해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이 한 나라를 침범할 때에 덮어놓고 아무때나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안에 어떠한 헛점이 있을 때에, 그 헛점을 틈타서 침범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 나라가 상하(上下)가 전부 임금과 대신과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를 물샐틈없이 잘 지키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외적(外敵)은 침범해 올 수도 없고, 어떤 미친 마음을 가진 외적이 침범해 들어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패배를 하고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안에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일신의 영달(榮達)을 생각하고, 밤낮 당파 싸움만 하고 국가와 민족을 애끼는 마음이 없이 그렇게 되면, 몇해 전에 자유 월남(自由越南)처럼 그렇게 되어 버리면은 아무리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가 가서 그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싸워 주고 무기를 대준다 하드라도, 그 나라는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하는 사람도 첫째, 자기 마음 안에 외적(外敵)이 침범하기 좋은 그러한 상태가 되어 있으면 외적은 육근(六根)을 통해서 언제라도 침범해 들어오는 것입니다.(처음~29분11초)





(2)------------------

부처님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을 하시기를 “한 나무토막이 저 강(江) 상류에서 흘러내려 갈 때에 중간에 걸리지 않고, 또 양 강변에 걸리지 않고, 또 그 자체가 중간에 썩어버리지 않고서 계속 흘르기만 하면 그 나무토막은 마침내 바다에 도달하고 만다”

이 말씀은 수행하는 사람이 중간에 공부를 중단하지를 않고, 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나 오욕락(五欲樂)에 걸리지 아니하고, 또 자기 자체적으로 퇴타(退墮)하지 아니하고서 계속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공부를 하면, 반드시 깨달음의 바다에 도달한다고 하는 비유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과 바른 정신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깨달음을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선방에 다녀도 종래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고, 고민을 하는 그런 수행이나 그래 가지고 마침내는 퇴타해 가지고 공부를 포기를 하는 그러한 수행자가 있다면 그것은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항시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믿지를 못했거나 만나지를 못했을 것이고, 둘째는 설사 선지식을 만났다 하드라도,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부족해서 그렁저렁 정진을 했거나, 이러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오래가도 3년 아니면 10년이면 기어코 지혜의 눈을 뜨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과거 이미 무량겁(無量劫)이 지내갔고, 또 앞으로 무량겁토록 앞으로 우리 앞에 장래에도 무량겁이 있지만 언제나 그 한 생각이 흘러서 무량겁이 되었고, 앞으로 돌아올 무량겁도 언제나 그 기본 단위는 ‘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이고, 언제나 한 생각—앉아서 한 생각, 서서 한 생각, 밥 먹을 때 한 생각, 똥 눌 때의 한 생각, 입선 · 방선 · 소지 · 세수 이 그때 그때의 그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만을 단속을 하면, 앉아서도 상관이 없고 서서도 상관이 없고 누워서도 상관이 없고, 전혀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있느냐, 못하고 있느냐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생각만을, 언제나 한 생각이여. 하루 열두 시간, 스물네 시간도 결국은 1초 1초가 모여서 24시간도 되고, 1초 1초가 모여서 한 달도 되고, 석 달도 되고, 10년도 되고, 100년도 되기 때문에 그 1초 1초를 잘 단속을 해 나가면 100년도 단속을 잘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정진을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하고, 자기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해.
한 생각 단속을 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인이여. 한 생각 잘 단속하면 그 가운데 계율도 지켜지게 되고, 그 가운데에 모든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그 가운데 다 갖춰지는 것이여.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이요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방능정처사바하(方能靜處薩婆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법불원찰나간(無法不圓刹那間), 찰나간(刹那間)을 단속을 잘하면, 한 법(法)도 원만(圓滿)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 만법(萬法)이 다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 말이여.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여. 찰나, 찰나를 잘 단속해 버리면 어떠한 죄라도 다 소멸치 못할 죄가 없더라.
한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일만 재앙이 거기서 일어나고, 일만 죄가 거기서 또 일어나고, 한 생각 단속하면 천하 없는 큰 죄도 찰나간에 소멸이 되어 버린다 그 말이여.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눈앞에 모든 일을 헤아리되 한 법도 없음이요.
어떻게 하는 것이 눈앞에 모든 법을 헤아려서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느냐?
좋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궂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속상하는 일을 보아도 ‘이뭣고?’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이뭣고?’ 하는 사람은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타~악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거기에 따악 머무르도록.
숨을 들어마셔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이 약간 볼록해지고, 차츰차츰 볼록해지면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딱 정지를 해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조(觀照)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내쉰단 말이여. 숨을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등허리에 등허리 쪽으로 홀쪽해지도록.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실 때에도 아까 들었던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의 여운이 들어마시면서도 조옥 유지가 되도록, 그래 가지고 숨을 정지하는 그 시간에도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따악 그때까지도 고대로 있도록 한단 말이여. 그다음에 또 숨을 조용허니 내쉬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이뭣고?’를 한다 그 말씀이여. 그러면서 숨은 차츰차츰차츰 숨은 나가는데 따라서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래서 숨쉬는 것과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과 화두를 드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처음으로 하는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고 이렇게 화두를 들지만, 한 달 두 달 이렇게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그때마다 매번 화두를 들지 안 해도 괜찮아요. 한 서너번 쉬고 나서 또 화두를 한번씩 들고 이래도 되고.
화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들어져 있으면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괜찮은 거여.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면은 호흡을 열 번 스무 번 할 때까지도 화두 한번 드는 것으로써 조옥~ 고대로 그 의심이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해 가면 되는 거여. 그 의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석 달 동안 하루같이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제절로 대중은 화합이 될 것이고, 모든 장애는 일어날 까닭이 없는 거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안정이 되어서 하루하루 지내가는 것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보람을 느끼고, 법에 기쁨이 항시 가슴속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소화도 잘 될 것이니 몸도 건강하게 될 것이고, 호흡을 잘해 나가니 무슨 상기(上氣)가 거기에 걸릴 것이냐 그 말이여.


오늘은 여름 결제와 아울러서 또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은 오늘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각기 가정에서 이 백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시고, 여기에서 정진하는 스님네와 ‘같이 결제(結制)를 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정에서도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일이 정 바쁘더라도 최소한 30분씩이라도 꼭 좌선(坐禪)을 하셔서 석 달 동안을 ‘백일기도 겸 결제를 했다’ 이리 생각을 하고 정성스럽게 경건한 마음으로 지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되도록 축원(祝願)을 합니다. (29분12초~46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 /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 정진은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지혜로운 수행, 거문고 타는 것의 비유 / 핀돌라 스님의 인욕행 /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더라도 인욕(忍辱)하고 오히려 발심(發心)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아라.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 한 생각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
(게송)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 /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3. 4. 16. 10:34

 

 

(세등선원No.42)—임술년(壬戌年) 동안거 반산림 법어(1982.11.30.음) (63분)

 

(1) 약 26분.

 

(2) 약 37분.


(1)------------------

황앵(黃鶯)이 상수일지화(上樹一枝花)허고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임술년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반산림(半山林) 법회날입니다.
산승(山僧)이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주장자(柱丈子)를 들어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고서 게송(偈頌)을 읊기를,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다, 흰 해오라비가 들에 내리니 천점(千點)에 눈송이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특히 비구니 정인 복위(伏爲) 망모(亡母) 고성이씨 인화 영가(靈駕)와 망부(亡父) 진주강씨 화엄 영가와, 고영훈 복위(伏爲) 망(亡) 성주배씨 귀남 영가가 사십구재(四十九齋)를 기해서 이 자리에 모시고 이 법문을 듣고, 무량겁 죄업이 눈 녹듯이 다 녹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禪師)에 법을 이어받으신 천룡선사(天龍禪師)가 계셨는데, 그 천룡화상에 법을 이어받은 구지화상(俱胝和尙)이라 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그 도인은 처음에 금화산(金華山), 금화산에 암자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암자에서 지내시면서 준제주(准提呪)를, '옴 자례주례 준제 사바하' 하는 그 준제주를 어떻게 열심히 그 주력을 해서 얼마를 했는지 몇 해를 했는지 하여간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을 준제주를 해서 '나무칠구지불모(南無七俱胝佛母) 대준제보살(大准提菩薩)' 그 칠구지(七俱胝), 구지라고 해서 그 준제주를 어떻게 많이 했던지 그 스님의 별명이 구지(俱胝) 스님이 되었어.
본래 불명(佛名)도 있었고 그랬겠지만, 법명(法名)도 있었겠지만, 너무너무 그 준제주를 했기 때문에 구지화상이라,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 말이여.

그런데 하루는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比丘尼) 스님이여, 실제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억 갓을 삿갓을 쓰고, 방갓을 쓰고 턱 그 암자에 찾아와서, 그 구지 스님이 앉아 있는 승상(繩牀)을 한바꾸 삥 돌고서 떠억 그 앞에 뻣뻣허니 서 가지고서는, “한마디를 일러야, 스님이 한마디를 일러야 내가 이 머리에 쓴 삿갓을 벗겠습니다. 어서 한마디 일러주시죠”
구지 스님이 아 입이 딱! 붙어 갖고 뭐라고 답을 못했어. 또 빨리 이르라고 재촉을 해도 또 못 일르고. 세 번을 일르라고 재촉을 했지만, 종래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實際) 비구니가 팔을 흔들며 소매를 흔들면서 나가는데, 그 구지 스님이 “날도 저물고 그러니까 하루밤 쉬어 가지 그냥 가냐”고. “한마디를 일르면 내가 쉬어 가겠지만 이르지를 못하면은 가겠노라”고. 그래 또 구지 스님이 답을 못했어.

그래서 그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났는데, 그 비구니가 떠난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명색이 대장부(大丈夫)로서 여승(女僧)이 묻는 말에 한마디를 답을 못하고 이러한 분통 날 노릇이 있느냐, 내가 어찌 장부라고 누구 앞에 고개를 들을 수가 있겠는가’ 탄식을 하고, ‘이 암자를 불질러 버리고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나서서 도를, 행각(行脚)을 하면서 도를 닦을 수밖에는 없다’ 이리 마음을 먹고서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그 금화산 산신(山神)이 꿈에 떠억 나타나 가지고 ‘절대로 스님이 이 도량(道場)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며칠 안 있으면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찾아와서 법(法)을 설해 주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할테니까 이 절을 떠나지를 마시오’ 깜짝 놀래서 눈을 떠 보니 꿈이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며칠이 지난 다음 어떤 스님이 떠억 왔는데, 그 스님이 누구냐 하면 아까 말한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에 법을 이어받은 천룡화상(天龍和尙)이라 하는 큰스님이여. 그 스님이 와서 아 그 실제 비구니가 물어서 대답을 못한 그 말씀을 고대로 말씀을 드렸어.
그러니까 그 천룡 스님이 “그러면 그 실제 비구니가 물은 대로 그대가 나에게 물어라”

“도득(道得)하면 내가 이 삿갓을 벗겠으니 한마디를 일러주시지요” 그렇게 천룡 스님께 떠억 물으니까, 천룡 스님이 손가락만 이렇게 탁! 들어서 세웠어. 그 거기에서 이 구지 스님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평생 동안 어떤 사람이 와서 무슨 법을 묻든지—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를 묻던지, 어떤 것이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도(道)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생사(生死)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보리(菩提)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열반(涅槃)이냐고 묻던지, 무엇을 묻던지 간에 손가락만 한번 딱!—평생 동안 법문을 입으로 설하지 아니하고, 무슨 법을 묻던지 손가락만 한번 딱 들어.

그래 가지고 많은 사람이 그 구지(俱胝) 스님을 찾아와서 그 손가락 법문만을 듣고 가고, 듣고 가고 했는데, 하루는 그 구지 스님이 어디를 출타를 하고 안 계실 때에 어떤 스님이 왔어.
그런데 그 구지 스님을 시봉(侍奉)하던 어린 사미승(沙彌僧)이 하나 있었는데, 그 “큰스님이 어디 출타를 하고 안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그 큰스님께서 평소에 어떠한 법(法)을 설하셨는가? 그걸 큰스님 대신 그 법문을 좀 한마디 해 달라고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손가락을 요렇게 딱 들어 보였어.

그래서 그분이 갔는데, 얼마 있다가 그 구지 스님이 돌아오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오늘 무슨 일이 없었더냐?”
“어떤 객스님이 와서 법을 묻길래 제가 법을 스님 대신 설해 줬습니다”

“니가 무슨 법을 어떻게 설해 주었단 말이냐?”
“아, 내 그까짓 것 제가 모르겠습니까? 여러 해 동안을 내가 스님 밑에 있었는데 스님 법을 제가 잘 압니다“

”어떻게 설했느냐?“
”손가락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그러거든.

그 다음에도 어디서 누가 와서 법을 물으러만 오면 지가 손가락을 딱! 들어 보였던 거여. 그래서 그 구지 스님이 품에 잘 든 칼을 하나 따악 가지고 있다가 손가락 탁 드는 놈을 갖다가 탁! 쳐서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인제 중노릇 안 하고 나 간다‘고 막 달아나. 울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큰소리로 부르니까, 아 그래 울면서 그놈이 뒤를 요렇게 홱 돌아다본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거기에서 그 어린 사미승이 확철대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내서 그 구지 스님이 인자 열반(涅槃)에 드시게 되었습니다.
대중을 모아 놓고 마지막 열반 법문을 하시는데, “내가 천룡화상으로부터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었는데, 한 손가락 참선을 얻었는데 일생 동안을 이것을 받아 쓰되 이것이 다하지를 못했어” 아직도 일생 동안을 썼건마는 바닥이 안 났다 그 말이여. “일생 동안을 수용을 해서 다하지 못했노라” 그렇게 떠억 한마디를 하시고 고대로 앉아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로 인해서 대분심(大憤心)이 발(發)해 가지고 결국은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단(大疑團)이 돈발(頓發)을 해 가지고 일주일이 되었던지 열흘이 되었던지, 그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돈발한 상태에서 천룡 스님의 손가락 한번 탁! 드는데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또 관계(灌溪)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이 말산요연(末山了然) 비구니한테 맥혀 가지고 3년 동안을 그 비구 스님이 말산이라고 하는 비구니 시봉을 했습니다. 원두(園頭)를 보면서 그 비구니 밑에서 3년 동안을 시봉을 하면서 도를 닦아 가지고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인도에서도 부처님 당시에 연화색(蓮花色) 비구니라고 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비구니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광명을 발하고 대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佛法)을 빛낸 비구니가 있었고, 중국에도 이 말산요연이라든지 이 실제 비구니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비구니가 있었어.
한국에도 월명각시라든지, 또 근자에는 덕숭산에 법희 스님이라든지 또 범어사에서 일생을 지내던 만성 스님이라든지, 그밖에도 여러 비구니로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참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을 하고, 많은 이익을 후배들에게 끼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짓달 그믐날이 돌아와야 반산림(半山林)이 되겠습니다마는, 이 세등선원(世燈禪院)은 매년 동짓달 스무이튿날 반산림 법회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세등 스님이 그 생일이 바로 이 동짓달 스무이튿날이라, 당신 생일을 기해서 이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도 올리고 또 그 아울러서 법회를 갖는다면 참 좋겠다' 해서 그 문인(門人)들도 그렇게 원하고.
또 그래서, 참 대단히 좋은 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선원(禪院)을 창설을 해서 제방(諸方)에 선객(禪客) 스님네들을 이렇게 모시고, 이렇게 이 선원을 경영을 하고 정진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출가한 사람으로서 자기도 정진하고 다른 선객 스님네도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고, 사부대중이 모여서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을 수가 없고, 참 대단히 환희에 넘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처음~25분39초)





(2)------------------

이 금년에는 모다 여러 군데서 처음 오신 분들, 오신 수좌(首座)님네들이 많이 있어서...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하고, 셋째에는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자세, 호흡>

‘자세를 바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데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거나, 앞으로 숙거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몸이 일직선으로 수직으로 딱 하되 단정(端正)하게 앉되 목이나 어깨나 이런 데 힘을 너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인자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전호흡이 좋다’ 한 말은 다 듣고 알고 있지만, 실지로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기는 썩 어렵습니다. 덮어놓고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오래 참았다가 숨을 내쉬고 이렇게 무리하게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납니다.
부작용이 어떻게 나냐 하면, 가슴이 콱 맥혀서 답답하고 오히려 소화가 잘 안되고, 또 목이 뻣뻣하게 해져서 더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 따라서 이 단전호흡을 하되 정말 올바르게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러면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면, 숨을 들어마실 때에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 것. 또 들어마신 상태에서 호흡을 정지를 하는데, 딱 근치고 한참 동안 있는데, 그 정지하는 시간을 너무 오래하지 말 것. 또 정지를 한 다음에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내쉬는 시간도 너무 오랫동안 걸려서 내쉬지 말 것.

들어마시는 시간도 자기 호흡 형편에 적당하도록, 처음에는 한 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머무르는 시간도 약 3초 동안 그런 정도만 머무르고, 또 내쉬는 시간도 약 3~4초 동안, 그러니까 한번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때까지 한 그 호흡을 약 10초 정도로만 걸려서 하도록. 그러면 누구라도 별로 그렇게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에 별탈이 없습니다. 숨이 가쁘거나 답답하거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태 이렇게 해 가다 보면, 차츰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조끔씩 조끔씩 길어질 것입니다.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숨이 길어지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그런 정도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3초, 3초, 3초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러한 정도로 처음에 시작을 하면,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또 짧으면 짧은 대로, 꼭 길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니까 억지로 길게 하지 말어라 그 말이여.


그런데 이 단전호흡, 본격적으로 본(本)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호흡이 있어.
그 준비호흡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가는데, 그 준비호흡이라 하면, 처음에 이렇게 따악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이렇게 앉으면, 좌우로 서너 번 이렇게 몸을 끄떡끄떡 궁둥이가 뜰썩뜰썩 하도록 몸을 이렇게 서너 번 이렇게 흔드는 거여. 이렇게 서너번 흔들다가 한가운데다가 몸을 따악 안정을 하는 거여.

이렇게 안정이 되었으면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은 감지를 말고 평상(平常)으로 따악 떠요. 너무 눈을 이 코 끄터리를 본답시고 너무 가늘게 뜨면, 처음에는 좀 조용하니 좋은 것 같애도 머지않아서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가 있으니까, 그렇게 눈을 너무 절대로 감어서는 안되고, 또 감지는 안 해도 너무 가늘게 떠도 못써요.
눈을 평상으로 떠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부터 약 3m 지점에다 눈을 떨구면 되는 것이여. ‘떨군다’고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응시(凝視)를 하거나 주시(注視)를 하지 말고, 평상으로 뜨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 그렇게 하고,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고. 이게 인자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여.

준비호흡은 어떻게 하냐 하면, 숨을 될 수 있으면 가뜩 그리고 빨리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 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한참 동안 참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거여. 10초가 되었건, 20초가 되었건, 참었다가 더이상 못 참을 때, 입을 조끔 벌리고서 입으로 후~ 하고 이렇게 숨을 내뿜는 거여. 아까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던 가슴이 내쉬면서 차츰차츰차츰 가슴이 홀쪽해지면서 완전히 다 내뿜어 버려.

다 내뿜었으면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동안 참었다가 또 입을 조끔 벌리고 후~ 하고 내쉬는 거여. 다 내쉬었으면 또 세 번째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참은 뒤에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입으로 후~ 하고 내쉬는 거여. 이렇게 세 번을 하는 것이 이것이 준비호흡이라 하는 거여.
이렇게 준비호흡을 세 번 하고 나면, 가슴 구석구석에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가슴 안에 들어가 있는 거여.

그렇게 한 다음에 인자 본(本)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수르르르~ 허니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는데, 본호흡으로 들어가서는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하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이 준비호흡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뜩 들어마셨지만,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녀.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8부쯤만 들어마시되 아랫배 단전(丹田)이 볼록하도록 느끼면서 8부쯤만 들어마셔.

8부쯤 들어마셨으면, 하나 · 둘 · 셋 약 3초 동안을 정지를 했다가 내쉬는데,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입으로 후~ 하고 내쉬었는데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입으로 내쉬는 게 아녀.
입은 가만 놔두고 코로 내쉬는데, 내쉬면서 단전(丹田), 아까 볼록해졌던 단전이 차츰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하게 코로 내쉬어요. 내쉬되 너무 하나도 없이 완전히 내쉴라 하지 말고, 내쉴 때도 또한 8부 정도만 내쉬어.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데, 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물론 코로 들어가는 것은 틀림이 없어.
뭐 그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그러면 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그 호흡이 저 단전 밑에까지 들어간다고 억지로 할라고 하니까, 가슴에 꽉 맥혀 가지고 저 밑에까지 내려가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거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호흡은 허파까지 밖에는 안 들어가요. 허파 밑에 가서 또 횡격막(橫隔膜), 가로막이 있는데, 가로막에 딱 걸려 가지고 절대로 호흡이 저 단전(丹田) 밑에까지 내려가지 안 혀. 내려가지 않는데 억지로 그 내려 보낼라고 하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못 견디게 되는 거여. 꽈악 여가 맥혀 가지고 얼마를 애를 먹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들면서 가뜩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고 해서 이 가슴 속에 있는 공기를 소지[掃除]를 해야 하지만, 준비호흡이 끝난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갈 때에는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이렇게 내보낸다’고 그리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들어마셔 가지고, 뒤에 궁둥이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기분으로 그렇게 맨들어라 그 말이여. 바람이야 그리 들어가건 말건.
그러면은 의식적으로 배를 볼록이 하니까, 실지로 바람이 거기까지 들어간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들어마셨으면, 8부쯤 들어마셨으면 정지를 했다가, 정지하는 시간도 약 3초, 나중에 익숙해지면 뭐 3초 4초 5초 좀 늘궈도 상관이 없지만, 처음에는 약 3초 동안만 해요, 부담이 없이. 그래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하라 그 말이여. 그러면 조끔도 가슴이 답답한 게 없어.


<화두는 언제 드느냐>

그러면 화두는 언제 드느냐 하면,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질 때 그때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하면서 숨을, 배를 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숨을 내쉰단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라 그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또 3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하지만,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지면 숨 내쉴 때마다 화두를 안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두 번, 세 번 내쉴 때까지도 화두(話頭)는 한번만 드는 상태에서 숨을 그렇게 하고.
나중에 참으로 화두가 익숙해지면 아침에 떠억 한번 화두를 들고서, 계속해서 호흡은 하면서도 화두는 한번만 들고서, 그 한번만 들어 가지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들면 그 의단만을 관조(觀照)해 나가면 되는 거여.

자꾸 뭐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 아녀요. 드문드문 화두를 놓쳐버렸거나, 딴생각이 들어왔거나, 또는 화두를 놓치진 안 했건만 의단(疑團)이 희미해졌을 때 가끔 한번씩만 챙겨줘도 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따악 현전(現前)해 있으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갖고 있는 거여, 그게. 그러기 때문에 들어져 있는 데다 자꾸 덮치기로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된다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따악—앉아서도 그 의심이요, 서서도 그 의심이요, 밥을 먹으면서도 그 의심이요, 똥을 누면서도 그 의심이요,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그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들려져 있도록.

조끔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해태심(懈怠心)을 낼 것이 없어.
앉었거나 섰거나 누웠거나 밥을 먹거나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그 사람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억지로 잠을 안 자고 그냥 막 해댄다고—화두가 성성(惺惺)허니 들려져 있지 아니하면은 잠을 안 잔다고 공부 되는 것이 아니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앞으로 한 열흘이 지내면, 7~8일이 지내면 납월팔일(臘月八日),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는데,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면 옛날부터 선방(禪房)에서는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는 것이 한 준례가 되어 있는데.
참 이 출가(出家)한 분상(分上)에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그날을 기해서 우리도 밤잠을 안 자고 정진을 해보자는 생각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그날을 우리가 평범하게 지낼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만공(滿空) 큰스님이나 또 이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나, 여러 그 구참 선지식(善知識) 스님네들의 말씀을 들으면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그것이 일리가...(녹음 끊김) 바 있는 사람보단 오히려 상기병을 얻거나 무슨 정진상에 부작용이 일어나서 역효과를 내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거여. 이건 경험상으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거여.

그래서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잠을 안 자 놓으면 화두도 간 곳이 없고, 그저 잠만 안 잘라고 일주일 동안 그 경책(警策)을 안 맞을라고, 그저 잠 안 잘라고 하는 데 온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맑은 정신은 하나도 없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자기는 꾸벅꾸벅 이렇게 졸면서도 장군죽비(將軍竹篦)로 때리면은, ‘안 잤는데 왜 때리냐?’고, 이래 가지고 신경질을 내고 쌈을 하고.

뭐 선방에서 이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하면 가끔 그 쌈이 벌어지고, 정신이 없어 가지고는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고.
시계, 덜렁덜렁 하는 시계추를 갖다가 뜨윽 갖다가 빼 가지고는 부처님 탁자 앞에다 갖다 놓고 절을 하는 사람이 없는가, 옆에 사람보고 왜 때리냐고 그냥 쌈을 거는 사람이 없는가, 어떻게 잠이 오던지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옷을 벗고 오줌을 눈 채 한 시간 두 시간을 그냥 자버린 사람이 없는가, 그래서 많은 모다 그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세등선원에는 그전부터서 용맹정진보다는 가행정진을 하는 것이 좋다 해서 해마다 이 가행정진을 해 오고 있습니다. 시간은 인자 그 준례에 따라서 10시나 11시나 적당한 시간에 자서, 3시나 2시, 이렇게 해서 한 서너 시간 재워 주고, 그리고서 정진을 하되 그 7일 동안은 일체 묵언(默言)을 하도록.
이렇게 하고, 마지막날, 7일 날 저녁에는 그때는 정말 용맹정진해서 잠을 자지 않고 그 이튿날 예불할 때까지 떠억 정진하도록. 이렇게 해서 가행정진이지만 용맹정진이나 거의 같지요. 그렇지만 서너 시간 재워 주기 때문에 정말 참 알차게 정진을 하게 되죠.

혹 여러 대중이 모였으니까, ‘그 가행정진보다도 용맹정진하자,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가지신 분도 있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또 이 세등선원에 와서는 또 세등선원에 준례에 순응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수행인으로서 참 좋은 일이니 만큼 그렇게 모다 가행정진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그 사람은 별 장애가 없이 육체상으로나 정신상으로나 정진상에 아무 부작용과 장애가 없이 대도를 성취하고만 말 것입니다.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 채 중간에 몸에 병이 생긴다든지, 상기병이 생긴다든지, 무슨 위장병이 생긴다든지, 혈압병이 생긴다든지 이리 되면 가뜩이나 근기(根機)는 하열(下劣)하면서 그런 장애가 일어나면 여간해서 그러한 고비를 극복하기가 힘이 듭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상기병이 나거나, 위장병이 나거나, 뭐 피가 목구녁에서 넘어오거나 그까짓 것을 문제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것을 그 병(病)을 도반(道伴)으로 알고 선지식으로 알고 그저 앉아서 못 견디면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해서 못 견디면 또 앉아서 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조끔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계속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겨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면서 그 병까지도 굴복을 받아 버리는 그러한 예가 많습니다.

병이 났다고 해서 그까짓 것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기왕이면 처음부터서 올바른 수행법으로 수행을 해 가지고 그러한 장애에 걸리지 않도록 한다면은 그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이여. 상기병 무서워서 공부 못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을 알아서 한다면야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 말이여.


이 가운데 만성 스님이나, 법희 스님이나, 또 월명각시나 또는 말산요연 비구니나 또는 아까 말한 그 실제 비구니나 연화색 비구니와 같은 그러한 도인(道人)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어. 반드시 나는 이 가운데 많은 도인이 나오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 이 세등선원에서 수없는 도인(道人)이 나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도인이 얼마만큼 나오냐 하는 것은 여러 대중스님네들의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의단(疑團)으로 정진을 어떻게 하느냐 온전히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옥희라고 하는 보살님이 당신의 칠순일을 맞이해서 여러 대중스님네께 이렇게 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양을 여러 사부대중께서는 맛있게 공양을 하시고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고 아울러서 이 이옥희 보살의 수명장수하고 금생에 이 불법에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세세생생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서 내생에는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의 지혜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축원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이 고성이씨 인화 영가, 진주강씨 화엄 영가, 성주배씨 귀남 영가는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과 산승(山僧)에 설한 이 간곡한 말씀을 듣고, 무량 영겁(永劫)에 죄업이 다 소멸이 되어서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왕생을 하셔서 다시 이 사바세계에 환생(還生)을 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소  호리신분개소년(蒿裡新墳皆少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수행하는 것을 머리털, 귀밑털 희어지는 것을 희어지기를 기다리지를 말어라. ‘늙은 뒤에 하리라. 좀 더 있다 하리라’ 뒤로 미루지를 말어라.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니라. 저 쑥대밭 속에 무덤이 다 소년에 무덤이니라.
주검이 어찌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어려 뱃속에서 죽기도 하고, 나다가 죽기도 하고, 어려서 죽기도 하고, 소년 청년에 죽기도 하고, 젊어서 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꼭 늙은 70, 80 먹은 뒤에만 죽는 것이 아녀.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이것이여.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사람 몸 한번 잃어버리면 언제 돌아올 것이여? 사람 몸 받아 나기가 눈먼 거북이가 천 년만에 한번씩 바다 위에 올라와서 숨을 쉬는데, 그때 마치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야 그 나무토막에 의지해서 숨을 쉬고 들어가는데, 눈 뜬 거북이가 나와서도 그 나무토막 만나기가 어려울텐데, 더욱이 그 매일같이 올라와도 혹 모르는데, 천 년만에 한번씩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에 떠올라 가지고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기 만큼 어렵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몸 받아 나기가 어려운데, 이 몸뚱이 한번 잃어버리면,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잃어버리면 언제 사람 몸을 받아 날 것이냐 이 말이여.
그리고 지옥이라는 데는 한번 떨어지면은 나올 기약이 없어. 억만겁을 그 안에서 지내야 하는데 나올 기약이 없어. 그러니 사람 몸 받아 났을 때 그 정진을 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해야겄드라 이 말씀이여.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25분44초~6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황앵상수일지화~ / 어째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 구지(俱胝) 스님의 일지두선(一指頭禪).

참선 자세.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 단전호흡(준비호흡, 본호흡) / 화두는 언제 드느냐? / 무엇을 하건 화두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 /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게송) 수행막대빈모반~ /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호흡은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지도록)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1. 11. 9. 15:49

 

((세등선원No.35))—1981(신유)년 하안거 해제(81.07.17.음) (57분)

 

 

(1/3) 약 20분.

 

(2/3) 약 17분.

 

(3/3) 약 19분.

 


(1/3)----------------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하고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고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 젊어서부터 여태까지 오면서 고향을 떠나서 저 타방(他方)으로 돌고 돌면서 객지 생활(客地生活)만 해왔다 그 말이여.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이냐. 몇 번이나 중생(衆生)의 아상(我相), 인상(人相), 탐진치(貪瞋癡)의 산(山)을 돌고 돌아서 애정(愛情)에 얽힌 강(江)을 건너고 건넜더냐.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니, 하루아침에 고향 길을 밟으니, 하루아침에 어진 벗을 만나서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가지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보니,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비로소 생사(生死) 무대(舞臺)에서, 생사의 강(江)과 산(山)을 돌고 도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길었다 하는 것을 깨달랐다.


신유년(辛酉年)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제방(諸方)에서, 제방의 선방(禪房)에서 한철 정진(精進)을 잘 마치고 선배 후배를 서로 만나고 좋은 도반(道伴)들의 얼굴을 반가운 얼굴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동안 자기가 공부한 것 또 다른 도반이 어떻게 공부했는가를 타진(打診)하고 서로의 뜻을 교환하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서로 혈육을 나눈 형제간 만난 것이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혈육을 나눈 형제간은 애정으로 얽힌 것이라 윤회(輪廻)의 근본이 될 뿐이지만, 우리 사부대중 이 도반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서로 뜻을 같이한 불제자(佛弟子)로서, 도문(道門)에 있어서의 형제간으로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보다 더 뜻이 깊고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방금 우리는 고(故)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수행자는 마땅히 재색(財色)을 삼가해라. 재색은 도(道)를 가로막는 무서운 독사(毒蛇)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러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종단(宗團)이 아직도 분규가 수습이 되지 아니하고 여기저기서 관(官)의 개입을 받으면서 출가인(出家人)의 면목(面目)을 손상하고 부처님과 조사(祖師)의 얼굴에 구정물을 끼얹는, 얼굴을 들 수 없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용을 알고 보면 보다 더 종단을 바로잡고 불교를 정화(淨化)하기 위한 명분(名分)이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부처님의 참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러한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출가인으로서 부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한다면 나의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비워버리고 무슨 싸움이 있을 것이냐? 내 마음이 허공과 같고, 저 사람의 마음이 허공과 같다면 두 허공(虛空)이 서로 합(合)해진들 무슨 거리낌이 있을 것이냐 이 말씀이여.
내 주장(主張)이 옳고, 내 주장만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그르다고 주장할 때 상대방도 또한 그러한 입장으로 맞서게 된다면 아무리 세월이 지내간다 해도 두 의견은 합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내 새우 싸움이 고래의 등을 터지게 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비구(比丘) ‧ 비구니(比丘尼) ‧ 청신사(淸信士) ‧ 청신녀(淸信女)는 종단의 일각(一角)에서 그러한 분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신심(信心)을 돈발(頓發)해서 밤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왔습니다.

세 시간, 서너 시간밖에는 자지 아니하고 하루에 열 칠팔 시간을 가행정진을 한 사람, 한 도량에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이십사 시간을 붙배기로 앉어서 용맹정진을 한 사람, 밥 먹고 옷 입고 앉고 서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단 일분일초 한 생각도 소홀히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을 가하면서 이마빡에 '죽을 사(死)' 자를 써 붙이고 이를 악물고 용맹정진을 해 온 납자(衲子)들입니다.
이렇게 가행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에 비로소 정법(正法)에 싹은 무럭무럭 자라고 위없는 정각(正覺)에 열매는 무르익어 갈 것입니다. 불법(佛法) 정화(淨化)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꺾을려고 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히 가지고 용맹정진하는 데에서만이 정법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활구선(活句禪)을 해라'
활구선이 무엇이냐? '사구선(死句禪)을 하지 말고 활구선을 해라'

사구선은 화두(話頭)가 없이, 의단(疑團)이 없이 멍청하게 막연하게 고요히 무엇을 들여다보고 앉었는 거. 또는 화두를 들되 분별심(分別心) ‧ 사량심(思量心) ‧ 이로(理路) ‧ 어로(語路) 그래 가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이러한 참선(參禪), 이러한 참선은 가리켜서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공안(公案)도 따져보고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또 저 공안도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그래 가지고 이 공안과 저 공안을 비교하고.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실 때까지 참선을 한다하더라도 바른 깨달음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 해젯날 어떤 납자(衲子)가 찾아와서, "정진을 하다가 화두(話頭)가 의단(疑團)이 풀리고 어떠한 화두를, 자기가 알고 있는 공안(公案)을 들고 참구(參究)를 해봐도 다 의심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들고 있는 그 화두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 없고 일부러 의심을 좀 해보려고 해도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요?"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슨 화두든지 물어보면 다 여지없이 이를 수가 있다 그 말이냐?"
"예, 물어주십시오" 떠억 절을 석 자리[三拜]를 하고 꿇어앉으면서 물어달라고 그래.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을 그전에부터서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평상시에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이 너무 진실하고 여법(如法)해서 거짓말로 알았다고 할 사람이 아니여.
그래서 그렇게 일부러 해제(解制)를 기해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온 그 정성으로 보나, 그전부터서 잘 알고 있는 안면으로 보나, 또 용화선원에서 여러 철을 지낸 바도 있고 그래서, 마조원상(馬祖圓相)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칠 테니 한마디 일러봐라"
"원상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옛날 마조(馬祖) 스님 당시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하니 어떤 중[僧]이 그 안에 떡 들어갔다. 마조 스님이 그 사람을 탁! 치니까 그 중이 말하기를, '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지 못했다는 뜻이 무엇이냐?" 물어보니까,
"이 육신(肉身)은 쳤지만 영혼(靈魂)은 치지 못했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한다 그 말이여.

"그것 보라"고.
자기가 그 원상(圓相) 안에 들어가 놓고도 들어간 뜻을 바로 아지 못하고, 방맹이를 맞고도 어째서 맞은 중도 모르고, '저를 치지 못했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 참뜻을 아지 못하고 분별심으로 '이 육체는 쳤지만 육체를 끌고 다니는 이 마음은 치지 못했다' 이러한 귀신 같은, 도깨비 같은 소견(所見)을 가지고 '깨달랐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왔다 그 말이여.

이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공안을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거각(擧却)을 해서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깨닫고, 불조(佛祖)에 면목을 깨닫고,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그러한 관문(關門)이 되고.
종사(宗師)가 이 공안을 학자에게 물음으로써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여지없이 간택(揀擇)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문제가 된다. 공안을 물어보면 그 사람의 소견이 어디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20분10초)





(2/3)----------------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 지난 여름 석 달 동안 그렇게 간절히 철저하게 정진을 했으면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소견이 난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소견이 났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그것을 씻어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만 정진을 해야겠다' 한 그렇게 스스로, 물어볼 것도 없이 스스로 자기의 공부를 다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바른 스승의 지도(指導) 없이, 자기가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는, 믿어지는 스승의 지도 없이는 세상없이도 바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바르게 못한 한에는 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공안은 그러한 분별심(分別心) 사량심(思量心) 가지고서는 도저히 타파(打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간택(揀擇)하지 않고는 바른 공부를 할 수가 없고, 바른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바른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다. 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면은 정진을 바르게 해야 하고, 바른 정진을 하려면은 바른 스승의 지도가 있어야만 되겠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어떻게 하면 그 바른 스승을 간택(揀擇)할 수가 있느냐?'
얼굴이 잘 생긴 것으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설법(說法)을 잘한 것으로서 바른 스승을 가릴 것인가, 계행(戒行)이 청정한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학식(學識)이 많은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친절하고 온화한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기운이 센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는 "천하 간단한 방법이 있다. '스님이 견성(見性)을 하셨으면 어떠한 공안(公案)에 깨달랐습니까? 어떠한 공안에 깨달라 가지고 어느 스님께 인가(印可)를 받았습니까?' 이렇게 그것을 알아보면 그 스승이 바른 스승인가 아닌가를 알 수가 있다"고 하셨지만, 여지없이 이치에 합당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감히 어디에 가서 '무슨 공안에 깨달랐느냐?' 물어보기가 대단히 거북할 것입니다.

바른 스승 만날려면은 먼저 자기의 마음자세가 바르게 되는 것이 선행 조건(先行條件)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참으로 참다웁게 발심(發心)을 하고, 참다웁게 분심(憤心)을 낸다면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스승은 반드시 만나질 것입니다.
스승을 만나는 것도 인연법(因緣法)으로 만나지는 것이라, 자기가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가짐과 신행(信行)을 철저히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기가 바르게 발심을 못하고 바른 신심을 갖지 못하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스승을 찾으러 댕긴들 코앞에 스승이 있어도 바른 스승인 줄을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달마(達磨)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있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에게 무엇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바른 스승이 아니라면 나를 바르게 지도(指導)할 수가 없고 바른 지도가 없이는 세상없이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邪道), 삿된 스승을 스승으로 해서 공부를 한다면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열심히 한다고 한들 삿된 소견에 떨어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바른 스승 밑에, 바른 스승의 지도하(指導下)에서만 이룰 수가 있다.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공부하는 공부는—혼자 토굴(土窟)에 가서 하거나, 어디에 가서 하거나 열심히 할수록 빨리 미치게 되거나 삿된 소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처음에 소견이 나셔 가지고 혜봉(慧峰) 스님, 경허(鏡虛) 스님의 제자이신 혜봉 스님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혜봉 스님은 그때 마나님 한 분을 얻어 가지고 지남철(指南鐵)을 차고 풍수(風水)질을 하면서 보림(保任)을 하고 계실 때, 그때 그 혜봉 스님을 찾아가 뵈아가지고 법담(法談) 거량(擧揚)하신 것을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처음에 조실 스님께서 그 혜봉 스님을 찾아가서 뵈웁자마자, 조주(趙州)에 무자(無字),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無)' 했는데,
그 무자의 뜻, "무자(無字)의 뜻을 반(半)만 일러주십시오" 이렇게 혜봉 스님께 물었습니다.

혜봉 스님이 답하시기를, "무(無)" 하셨는데,
조실 스님께서 "어찌 그것이 무자(無字) 반(半)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혜봉 스님이 "그러면 수좌(首座)가 일르게. 어떤 것이 무자(無字) 반(半)인고?"
그러니 조실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무(無)"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끝에 혜봉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거년(去年) 가난이 비(非)가난이여. 거년에 가난은 가난이 아니여" '가난하다' 하는 것은 빈궁(貧窮)하다 그 말이여. 아주 가난해 빠졌다 그 말이여.
"거년(去年)에 가난한 것은 가난이 아니요[未是貧], 무입추지지(無立錐之地)여,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今年) 가난이 시(是) 가난이여[始是貧], 금년 가난이 참으로 가난해서 송곳마저도 없다.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렇게 대답한 것은 겨우 '여래선(如來禪) 도리(道理)밖에는 안 된다' 그랬으니 어떻게 하면 조사선(祖師禪)이 되도록 이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혜봉 스님이 전강 조실 스님께 물었습니다.

조실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능각첨첨첨사타(菱角尖尖尖似他)입니다. 뾰족허고 뾰족허기가" [일대기3호에는 '능각첨첨불사타(菱角尖尖不似他), 능각은 첨첨헌디 타와 같지 않다'로 나옴]
능각(菱角)이라 하는 것은 마램(마름)이라고 호수에 가면 세모꼴로 되어 가지고 송곳처럼 뿔이 세 개가 뾰쪽 뾰족이 나와서 까맣게 물에 떠 있는, 이파리는 물에 떠 있으면서 그것을 뿌리를 더듬어 들어가면 거기에 까만 세 뿔난 열매가 있는데 그것을 까서 먹으면 맛이 고스롬허니 그 '마름'이라 하는 것인데, "그 마램(마름)이의 뿔이 뾰족허고 뾰족하기가 저 송곳과 같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그때에 혜봉 스님이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래서 조실 스님 생각에, ‘아하, 내가 바로 일렀기 때문에 아무 말씀이 없으시구나. 그 내가 이른 것이 옳게 일렀구나. 그래 나를 인가(印可)해 주셨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흐뭇하게 생각하셨는데,
나중에 당신이 정진을 하셔서 나중에 떠억 그 공안을 살펴보니까, "그! 그것이 내가 잘못 일렀다. 만약에 그때에 내가 바로 일렀던들 혜봉 스님이 그 반갑게 손을 붙잡고 춤을 덩실덩실 추셨을 텐데 내가 바로 일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나중에사 깨달랐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대종사(大宗師)에 마음 경계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설사 그때에 당신이 잘 못 일렀다 하는 것을 후일(後日)에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 감히 다른 사람 앞에, 수십 년 뒤에 이것을 대중 앞에 폭로(暴露)를 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의 체모(體貌)를 생각해서 챙피해서라도, 그 사실을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대중 앞에 공포(公布)를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실 스님께서는 여지없이 그것을 대중 앞에 발로(發露)를 해서 공포(公布)를 하셨습니다.

조사(祖師)에 한마디, 이 공안에 내리신 한마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정법(正法)에 안목(眼目)을 가리워 버리는 것이 되고, 지혜(智慧)에 일월(日月)을 어둡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학자(學者)에 안목과 생명을 죽이고 마는 것이 되는 까닭에 조실 스님은 이것을 여지없이 만천하(滿天下)에 탁! 털어 내놓고 공포를 하신 것입니다.

안목(眼目)을 갖춘 사람은 지금이라도, 또는 앞으로 언젠가 바른 눈을 떴을 때에는 이 전강 조실 스님의 이 한 말씀이 과연 얼마나 중대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정말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한마디 말로 해서 소 배때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말 뱃속으로 들어가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마치 불 무데기와 같애서 가까이만 갔다하면 대번에 내 몸에 불이 붙어서 나의 생명을 앗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공안 하나만을 의지해서 목숨 바쳐서 참구(參究)할지언정, 이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저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러한 식으로 함부로 공안을 희롱(戲弄)하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공안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하면, 그래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면 결정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에 맥힘이 없게 될 날이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20분13초~37분24초)





(3/3)----------------

요사이 일본(日本)에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이 한국에 흘러 들어와 가지고 일부 거사(居士)들이 그러한 식에 참선을 하고, 그러한 식에 참선을 자꾸 학생들에게 모다 가리키고 해 가지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삿된, 못된 참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리선은 따질 것이 있고, 알아 들어갈 것이 있고, 더듬어볼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며칠 동안 이리저리 해보면 그럴싸한 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해보면 심심치 않고 무엇인가 공부가 나날이 되어간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어서 그 선생한테 가서 일르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 하나를 주어서 또 주면 그걸 가지고 이리저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서 그럴싸한 무슨 결론 얻어 가지고 가서 말을 하면 또 다른 화두를 일러주고 해서 다섯 개, 열 개, 스무 개, 이런 식으로 해서 자꾸 따져 들어간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와서, 가끔 와서 인가(印可)를 해 달라고 오는 학생 청년들이 있는데, 도저히 이것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옴 마니 반메 훔'을 하고 '고왕경(高王經)'을 읽을지언정, 이러한 죽은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위(旣爲) 참선을 할 바에는 철저한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참선(最上乘參禪)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게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 무엇고?' '이 무엇고? 하는 이놈이 무엇고?'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를 하는 사람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그 화두 하나만을 정말 간절한 의심으로 오직 한결같이, 분별심으로 따지지 말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가는 것입니다.

'따지는 것이 오히려 졸음도 안 오고 재미도 있고 해 보면 무엇인가 할 것이 있고 씹히는 것이 있어서 심심치 않은데 어째서 따지지 말라고 합니까?'
우리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根源)이 무엇이냐 하면은 무명(無明)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되고, 무명이라는 것이 다시 말을 바꿔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인데, 분별사량심이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根本)인데, 어찌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져 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
하나도 의심날 것도 없고 상식적인 얘기고 아무나 알 수 있는 얘긴데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따지고 있느냐 그 말이여.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그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가리켜줄 수 있는 것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배와서 아는 것이여?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으면 바르게 닦아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거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앞으로 나아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낭떠러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누워서도 '이 뭣고?'
밥을 먹을 때도 '이 뭣고?'
옷을 입을 때에도 '이 뭣고?'
똥을 눌 때도 '이 뭣고?'
일을 할 때도 '이 뭣고?'
산을 보아도 '이 뭣고?'
새소리, 물소리,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다못 그렇게만 해 가는 것이여.


견색비유색(見色非有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녹음 끊김)

.....알 수 없는 의단(疑團) 뿐이여.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라.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개 소리가 듣되 개 소리가 아니여. 어찌 '저것이 개 소리다' '저것은 새파트 소리다' '저것은 삽살이 소리다' '저것은 똥개 소리다' '저것은 기차 소리다' '기차 저것은 디젤 기관차다'
어찌 그러한 분별심(分別心)을 계속 내서 가지에 다시 가지가 뻗고, 잎에 다시 잎이 뻗고, 뿌리에 다시 뿌리가 뻗어서 끊임없이 생사(生死)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가냐.

산을 보되 산인 줄을 모르고, 꽃을 보되 꽃인 줄을 모르고, 개 소리를 듣되 개 소린 중을 모르고, 기차 소리를 듣되 기차 소린 줄을 모르고, 누가 나를 칭찬하되 좋아헐 중도 모르고, 누가 나를 비방(誹謗)하되 썽낼 줄도 모르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온갖 색상(色相), 온갖 소리에 걸리지 아니할 때[色聲不礙處],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라, 바로 법왕(法王)이 계시는 곳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게 정진을 해 갈 때 어찌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할 것인가?


오늘 해제를 맞이했습니다. 원래 해젯날은 그 회상(會上)에서 같이 정진한 사람이 전부 모이고, 그 근처에 숲속에서 모다 정전하던 사람도 전부 부처님 계신 곳으로 전부 모여서 14일 날 저녁, 또는 15일 날 저녁, 또는 16일 날 저녁에 모여 가지고 지난 석 달 동안 각자 잘한 일 못한 일을 그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서로 충고하고 경책을 하면서 반성하고 참회(懺悔)하고 새로운 발심(發心)에 계기가 되는 그러한 시간을 마련을 했던 것입니다.

맨 처음 부처님부터 한 무릎을 꿇고 한 무릎을 세우고 합장(合掌)을 하고서 대중을 향해서 "지난 석 달 동안 내가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그 말에 있어서, 그 행동에 있어서 잘못 된 점이 있으면 자비(慈悲)로써 기탄(忌憚)없이 일러주시오" 하고 대중을 향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부탁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가섭존자나 목련존자나 사리불 같은 수제자(首弟子)가 부처님 앞에 합장 공경하고 예배(禮拜)를 드리고서 부처님을 부축해 일으켜 드리면서 "세존(世尊)이시여, 세존은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데 무슨 허물이 있사오니까?"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일으켜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다음 제자가 또 한 무릎을 꿇고 한 무릎을 세우고 합장 공경을 하고 대중을 향해서 또 부처님이 하시듯 그렇게 대중을 향해서 자기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수효가 백 명, 이백 명, 천 명이 모일 때에는 그 밤이 다 새도록 그러한 엄숙한 의식(儀式)이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도가 오늘날 차츰 생략이 되어서 왔지만, 우리가 이렇게 해제의 법회(法會)를 거행하는 것도 역시 그때의 자자(自恣)의 법요식(法要式)이 오늘날 이러한 해제 법요식으로 시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깊은 해젯날을 맞이한 만큼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잘못을 반성을 하고, 다른 도반(道伴)이 자기에 잘못을 충고를 해주어도 그 말에 진심(瞋心)을 내지 말고 그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참회를 해서 앞으로 정진해 가는 데에 큰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10월 보름날,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될 때까지 석 달 동안 추웁도 더웁지도 않는 서늘한 산철입니다. 그 석 달 동안을 공연히 여기저기 구경 삼어서 돌아다니지 말고 어쨌든지 빨리, 어데서 어떻게 지내든지 간에 지난 석 달 동안보다도 훨씬 더 간절한 마음으로, 더 경건한 마음으로, 더 철저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지난 백 일 동안 이 세등선원에서는 백일기도(百日祈禱)를 봉행(奉行)을 했습니다.
설사 여기에 오셔서 정진은 못하고 각자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계셨을망정 정진하는 스님네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셨고, 생활 속에서 기도를 하셨다면 여기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참선(參禪)하는 스님네와 조끔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원래 공부에는 동중선(動中禪)과 요중선(鬧中禪), 또는 요중선과 정중선(靜中禪)이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하는 정진과 활동을 하면서 시끄러운 속에서 하는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고요한 가운데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죽비(竹篦)를 치고 정진을 하는 것은 시끄러운 가운데에, 활동하는 가운데에도 잘될 수 있도록 엄격한 훈련을 쌓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가운데에 또는 활동하는 가운데에 잘되어야만 그 공부는 정말 살아 있는 공부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요한 곳에서 규칙을 세우고 죽비를 치면서 그렇게 해야만 공부가 좀 되고, 오며가며 시끄러운 가운데 일하면서 활동하는 가운데에는 영 화두가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공부가 안될 그 공부는 아직 공부에 힘을 얻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열심히 하고, 그 고요한 가운데에 열심히 익힌 그 공부를 활동하는 가운데,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되도록 채찍을 가하면서 정진을 갖다가 밀고 나가야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시끄러운 가운데에나 조용한 가운데에나 조끔도 걸림이 없이 공부를 다잽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모든 색과 모든 소리에 걸림이 없어야만, 이것이 바로 법왕성에 이르르는 곳이다」 한 것입니다.
다시 우리가 또 만날 때까지 기어코 공안이 타파(打破)되도록 알뜰히 정진을 하기를 부탁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한 주먹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 매어두노라.(37분25초~56분24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자소내내관원방~ / 해제하고 도반(道伴)을 만나는 반가움 / 참선은 마땅히 활구선(活句禪)을 해라 /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관문(關門)이 되고, 또 종사(宗師)가 이 공안을 학자에게 물음으로써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여지없이 간택(揀擇)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문제가 된다.

바른 정진을 하려면은 바른 스승의 지도가 있어야만 한다 / 바른 스승 만날려면은 자기가 바르게 발심하고 바른 신심을 갖어야 / 전강 조실 스님과 경허(鏡虛) 스님의 제자이신 혜봉 스님과의 법거량, 훗날에 전강 스님께서 '당신이 잘 못 일렀다' 하는 것을 대중 앞에 공포.

참선을 할 바에는 철저한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참선(最上乘參禪)을 해야 /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은 무명(無明), 무명은 바꿔서 말하면 분별사량심인데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 그래서 참선을 한답시고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지는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을 해서 어찌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은산철벽(銀山鐵壁),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 자자(自恣)의 법요식(法要式) / 요중선(鬧中禪)과 정중선(靜中禪).


우리 사부대중 도반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서로 뜻을 같이한 불제자(佛弟子)로서, 도문(道門)에 있어서의 형제간으로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보다 더 뜻이 깊고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행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에 비로소 정법(正法)에 싹은 무럭무럭 자라고 위없는 정각(正覺)에 열매는 무르익어 갈 것입니다. 불법(佛法) 정화(淨化)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꺾을려고 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히 가지고 용맹정진하는 데에서만이 정법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사구선은 화두(話頭)가 없이, 의단(疑團)이 없이 멍청하게 막연하게 고요히 무엇을 들여다보고 앉었는 거. 또는 화두를 들되 분별심(分別心) ‧ 사량심(思量心) ‧ 이로(理路) ‧ 어로(語路) 그래 가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이러한 참선(參禪), 이러한 참선은 가리켜서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공안(公案)도 따져보고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또 저 공안도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그래 가지고 이 공안과 저 공안을 비교하고.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실 때까지 참선을 한다하더라도 바른 깨달음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공안을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거각(擧却)을 해서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깨닫고, 불조(佛祖)에 면목을 깨닫고,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그러한 관문(關門)이 되고.
종사(宗師)가 이 공안을 학자에게 물음으로써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여지없이 간택(揀擇)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문제가 된다. 공안을 물어보면 그 사람의 소견이 어디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바른 스승의 지도(指導) 없이, 자기가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는, 믿어지는 스승의 지도 없이는 세상없이도 바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바르게 못한 한에는 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 만날려면은 먼저 자기의 마음자세가 바르게 되는 것이 선행 조건(先行條件)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참으로 참다웁게 발심(發心)을 하고, 참다웁게 분심(憤心)을 낸다면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스승은 반드시 만나질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공안 하나만을 의지해서 목숨 바쳐서 참구(參究)할지언정, 이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저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러한 식으로 함부로 공안을 희롱(戲弄)하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공안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하면, 그래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면 결정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에 맥힘이 없게 될 날이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根源)이 무엇이냐 하면은 무명(無明)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되고, 무명이라는 것이 다시 말을 바꿔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인데, 분별사량심이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根本)인데, 어찌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져 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
하나도 의심날 것도 없고 상식적인 얘기고 아무나 알 수 있는 얘긴데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따지고 있느냐 그 말이여.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그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가리켜줄 수 있는 것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배와서 아는 것이여?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으면 바르게 닦아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거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앞으로 나아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낭떠러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공부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열심히 하고, 그 고요한 가운데에 열심히 익힌 그 공부를 활동하는 가운데,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되도록 채찍을 가하면서 정진을 갖다가 밀고 나가야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시끄러운 가운데에나 조용한 가운데에나 조끔도 걸림이 없이 공부를 다잽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모든 색과 모든 소리에 걸림이 없어야만, 이것이 바로 법왕성에 이르르는 곳이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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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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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2. 30. 20:07

 

 

((세등선원No.27))—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80.04.17.음) (83분)

(1/4) 약 21분. (2/4) 약 22분. (3/4) 약 19분. (4/4) 약 21분.

(1/4)----------------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이상으로써 경신년(庚申年)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 법어(法語)를 다 마쳤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중이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주장자(柱杖子)를 한 번 들어서 보이고, 그리고 법상을 한 번 치고 무슨 게송(偈頌)을 한 번 읊더니, 인자 이제 겨우 법문(法門)이 시작한가 보다 했는데 다 마쳤다고 하니, 공연히 여기를 왔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주장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쳐서 그 소리를 여러분께 들려드렸습니다.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서 그 이상 더 법을 설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모가지가, 머리가 목 위에 하나가 있는데 다른 데서 목을 하나 갖다가 그 머리 위에다가 하나를 더 포개 놓은 거와 같을 것이고, 닭다리를 떼어 버리고 오리다리를 갖다가 이어서 짬매 놓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대관절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보이는 것이, 무엇이 그것을 갖다가 법(法)이라고 할 것인가? 누구는 손이 있는 사람은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으며, 들었던 주장자로 책상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는가. 그러한 법이라면 나는 하루에 천 번이고 만 번이라도 설할 수가 있다. 구태여 바쁜 시간을 내서 절에 갈 필요가 무엇이 있나?

할머니 지팽이를 갖다가 자기도 한 번 들어서 한 번 쳐 보면, 그러면 그것으로써 그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묘법(妙法)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할진대는, 구태여 절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 있나?'

 

이러한 생각이 들어서, 이 자리에서 분연(奮然)히 일어서서 법상을 때려 엎고 그길로 활개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 한다면 과연 대장부(大丈夫)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과연 그러한 대장부는 없는가? 이 자리에 오신 분은 점잖하시고 자비(慈悲)가 있으셔서 참고 계시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금방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세등선원 조실 스님은 정 전강(鄭田岡) 선사(禪師)이십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은 다 알고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어떻게 6년 전에 열반(涅槃)하신 스님을 조실(祖室)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이미 돌아가셨을 때... 설사 돌아가시기 전에는 세등선원 조실로 계셨다 하더라도 돌아가신 뒤야 자동으로 조실(祖室) 책임을 벗으신 것이 아니냐?'

그렇게 혹 생각하신 분이 간혹 계신 것 같애서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탄생(誕生)하시되 오신 바가 없고, 설사 80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다고 해서 가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시고 가시고 한 것이 있다면 여래(如來)가 아닌 것입니다. 오시고 가신 바가 없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부르는 것입니다.

 

전강(田岡) 스님께서도 6년 전에 77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을 하셨지만, 우리는 전강 큰스님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생존해 계실 때와 똑같이 그렇게 분명하게, 성성(惺惺)하게 법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사 한마디 녹음을 해 놓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말씀도 생존시(生存時)에 육성(肉聲)을 들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오시고 가신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를 체달(體達)하신 스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실(祖室)로 모셔도, 모시고 생존해 계신 듯, 계신 것처럼 믿고 그 법(法)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스님을 조실로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법회(法會) 때마다, 일상(日常) 언제 어데서라도 그 육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조실로 모셨다고 해서 조끔도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그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듣고 우리의 공부를 바로 해 갈 수가 있고,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갈 수도 있고, 해태(懈怠)한 마음 분발(奮發) 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 용화사(龍華寺)나, 세등선원이나, 복전암이나 또 스님을 존경하는 많은 불자(佛子)들이 언제 어데서 공부를 할 때라도 살아계신 걸로 믿고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방방곡곡에서 정진(精進)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연히 세등선원에 용상방(龍象榜)에도 조실(祖室)에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라고 딱! 붙여 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시고 산승(山僧)을 갖다가 세등선원 조실이라고 착각(錯覺)을 하고 그렇게 말을 하시는 분이 가끔 있는 것을 듣습니다. 산승은 조실이 아니고 세등선원 선감(禪監)입니다.

 

전강 대종사를 조실로 모시고, 그 전강 대종사에 법을 받들어서 여러분이 정진(精進)하시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선감(禪監)이라고 하는 책임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확실히 말씀을 드리니 착오가 없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은 온전히 공안, 공안(公案)에 대한 법문(法門)을 해 주셨습니다.

공안이라 하는 것은—공립(公立) · 관공서(官公署), · 공립학교(公立學校), 그것 '공(公)' 자입니다. 그리고 '안(案)' 자는 안건(案件)이라 해서—공안(公案), 공안을 화두(話頭)라 그럽니다마는.

어째서 공안이라 하냐 하면, 공(公)이란 말은 '관가(官家)'라 그 말입니다. 관청(官廳), 관법(官法). 관청에 법안(法案), 관청에서 직원들이 어떠한 사무를 볼 때에,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그 법(法)에 의존해서 모든 사무를 처리하게 됩니다. 그 관청(官廳)에 법(法)과 같은 것이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해 나가자면 이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야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깨달랐는가 바로 깨닫지 못했는가를 점검(點檢)해 보려면 이 공안을 갖다가 들여대 가지고 그 공안에 대한 답(答)을 하는 것을 보면은 그 사람이 어떠한 경지(境地)에 도달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관청에서 어떠한 일을 처리했을 때에 그 일이 바로 되었나, 잘못 처리했는가를 보려면은 그 법률에 비추어서 제 몇 조 몇 항에 비추어서 '이것은 타당(妥當)하다' '이것은 부정(不正)이다' 그것을 아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 문헌(文獻)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나 됩니다. 하물며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까지 하면 수없이 많은 공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육법(六法)이 있고, 육법은 이미 성문화(成文化)—글로 된, 글로 표시된 법률은 성문, 성문화된 것을 보통 말합니다마는, 불문율(不文律)이라 해서 책에는 육법전서(六法全書)에는 올라 있지 안 해도 우리는 모두가 지켜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법률에, 법률(法律) 조항(條項)에 오르지 않다고 해서 그 밖에 일은 우리가 어떠한 일이라도 마구잽이 해도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영국 같은 데는 헌법(憲法)이 아주 몇백 년 전부터서 불문율로 되어 내려오는 법률이 참 많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불문율로 되어 있어도 워낙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실천한 지가 오래고, 민도(民度)가 높아서 모두가 다 법률을 잘 지켜 가지고, 온 백성에 질서가 유지되어 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문헌에 오른 천칠백 공안 외에도 수없이 많은 공안이 있어서 눈 밝은 대종사(大宗師)는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법(法)을 갖다가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말로써 설할 수 없는 최고에 법을 자유자재로 쓰시고, 또 그 법으로써 학자(學者), 모든 도(道)를 배우려는 수행자들을 눈을 뜨게 하고 경책(警策)을 하고 또 점검(點檢)을 해서 그렇게 교화(敎化)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안은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그 공안(公案)의 원리(原理)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높고 경전을,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해설을 한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공안의 도리(道理)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연구한 모든 이론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 공안을 분별(分別)을 하고, 천착(穿鑿)을 하고, 분석(分析)을 한다 하더라도 이 공안의 참뜻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질수록에 참 진리(眞理)로부터서는 멀어가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심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또는 '마조(馬祖)에 원상(圓相)'이라든지, 또는 서산(西山) 스님의 게송 가운데에 나오는 '어생일각(魚生一角)', 어생일각이라든지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세계불교도대회(世界佛敎徒大會)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그 불교도대회에 참석한 세계에 불교 지도자들에게 이 공안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세계 각국에 저명한 승려 · 거사(居士) · 불교학자(佛敎學者)들이 참석을 했지만 아무도 이 공안에 대해서 답을 한 사람이 없었고, 오직 말레이지아(Malaysia) 승정(僧正) 한 분이 '무답(無答)이 시답(是答)이다, 대답 없는 것이 이 답이다' 이렇게 글자 넉 자를 써 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 능히 이 공안(公案)에 대해서 답(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답을 안 했는지, 참으로 아지를 못해서 답을 안 했는지, 그것은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마는, 이 공안은 정말 깨닫지 못했다면 이르려고 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따져 갖고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척! 이 공안을 접(接)했을 때 바로 이를 수 없으면 다못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어떠한 공안을 큰 스님네로부터 물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되지 못한 소리를 이를 까닭도 없는 것이고, 다른 고인(古人)들이 답(答)한 흉내를 낸다든지, 어떠한 행동으로써 옛날 스님네가 한 흉을 내서 보인다든지, 이러한 것은 도저히 용납(容納)될 수 없는 대죄(大罪)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처음~21분25초)

 

 

 

 

(2/4)----------------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지금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의 분상(分上)으로서는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일으킬 따름인 것이고,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단을 일으킬 따름인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괴밥을,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한 공안(公案)에 대해서 일부러 의리(義理)로 따져서 설파(說破)를 해 주셨습니다.

따질 수 있는 것이고, 또 따져서 이해가 안 가는 데까지만 말씀을 하셨고, 설사 의리(義理)로 따져서 그 부분에 대해서 설파를 해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해(害)를 입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해 주신 걸로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 혹, 「쥐는 바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사니까 쥐는 바로 고양이 밥이다. 그런데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것은 '쥐가 쥐를 먹었다'는 말이다. 중생이 번뇌 망상 분별심(分別心)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생인데, 그 중생인 '나'가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졌으니까, 바로 번뇌(煩惱)가 번뇌를 다 잡아먹고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사람과 경계(境界)가 다 몰록 공(空)한 것이고 산이 다하고 물이 다했다는 그런 경계다」

이렇게 그런 식으로, 혹 다른 공안을 접했을 때에도 그러한 식으로 공안을 분석해서 알아맞추려는 그러한 생각을 낸다면, 이것은 조실 스님의 참뜻을 바로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삼근(麻三斤)이다'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가 무엇이냐?'

'마삼근(麻三斤)이다' 이렇게 대답했으니,

 

'불법(佛法)은 이 우주법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진신체(眞身體)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돌맹이도 비로자나불이요, 산도 비로자나불이요, 흘러가는 물도 비로자나불이요, 거지도 비로자나불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삼[麻]도, 삼 뭉탱이도 그것도 비로자나불이다. 그러니 그 마삼근(麻三斤)이라는 게 그것이 아니냐'

 

이러한 식으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자기도 '한소식 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그러한 사람은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한 죄(罪)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쏜살같이 떨어져 들어갈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공안은 절대로 그러한 의리(義理) · 분별심(分別心) · 이론(理論)으로 따져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안(公案)은 그렇게 따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대답하니까,

'미지(未知)하니 갱도(更道)하라. 틀렸으니 다시 일러라'

 

다시 대답하기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옳다, 옳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셨던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한 데에 대해서 인가를 아니하고, '밥그릇은 이미 깨졌다'고 대답한 데에 인가를 했습니다.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의리로 따져볼 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는데 무슨 밥그릇이 깨졌나?' '밥그릇이 깨졌다'고 하는 대목에 가서는 우리는 아무리 분별심으로 따져 보려고 해도 거기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가 받지도 못할 것을 따져 보면 무슨 소용이 있어? 따져서 공안을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바른 공부에 노선(路線)을 버리고 그릇된 데에 빠져서 허매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차라리 아니헐지언정—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무슨 경(經)이나 읽고 그럴지언정, 참선(參禪)을 한다고 할진대에는 결단코 분별심으로, 의리(義理)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삿된 그릇된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해 주시기 위해서 조실 스님께서는 '반기이파(飯器已破)'의 공안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거듭거듭 강조를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내가 해야 하고, 오직 내 공부는 내 자신이 함으로써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는 것이니 만큼, 남 봄에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것을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도 무슨 공부를 해서 한소식 했다고 하는 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전연(全然) 자기 일신상(一身上)의 문제일 따름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만이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고, 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교화(敎化)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철두철미(徹頭徹尾) 참되게 닦아서 참되게 깨닫지 않는 한은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아무리 학식(學識)이 높고, 아무리 언변(言辯)이 좋고, 아무리 많은 사람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남을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선전을 하고 과대 선전을 해 가지고 널리 사람에게 알려서, 그래 가지고 어떠한 효과를 또는 이익을 얻어낼 수가 있지만, 이 깨달음만은 자기가 참되게 깨닫고, 참되게 남[生]이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남이 따르고 남이 알아주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인(古人),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善知識)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기 전에는 스스로 조끔 공부를 해서 조끔 무슨 소견(所見)이 났다 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내가 조그만한 것을, 조그만한 무슨 경계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고,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인증(認證) 받기를 바래고 그러한 행위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위해서, 불법을 위해서 대단히 가련하고 불쌍한 신세(身世)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꽉 맥힌 바보와 같은 그러한 수행인(修行人)으로서 일생을 마칠지언정, 결정코 그러한 조그만한 경지를 가지고 만족함을 삼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거듭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경신년 여름 결제(結制)가 시작이 됩니다. 금년(今年)에 얼마나 또 더울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설사 아무리 덥다 하더라도 지옥에 화탕지옥(火湯地獄)보다는 덜 더울 것입니다. 화탕지옥에 더위라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내는 한에는 화탕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래도 여기는 이 남섬부주(南贍部洲), 여기가 아무리 덥다고 해도 화탕지옥에 백분의 일도, 천분의 일도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덥다고 해서 그럭저럭 지낼 분은 안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그 더우면 더운 그때를 향해서 오히려 더 분심(憤心)을 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서 하루하루를 정말 알차게 단속(團束)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옛날에 어떤 납자(衲子)가 산중(山中)에 토굴을 묵고 또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나물 캐는 부인이 해 저물게 들어왔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린 기억도 있습니다마는, 나물 캐는 부인이 와서 하루쯤만 자고 가자고 그럽니다. 자고 가자고 그래서 그걸 안 받을 수도 없고, 깊은 이 산중이라서—나물을 캐러 온 게 아니라 나무를 하러 왔다고 그럽니다. 나무를 하러 왔다가...

그래서 그 춥기는 하고 날은 저물고 그래서—도저히 더군다나 부인을 갖다가 한 방에서 자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렇다고 그냥 밖으로—거절할 수도 없고.

 

"그러면 여기서 오늘 저녁에 하룻밤 새고, 그리고 내일 날이 새거든 돌아가라"

그래 인자 부인을 앉혀 놓고 잘 수가 없어서 그냥 그 스님은 떠억 앉은 채, 그날 저녁을 앉은 채, '잘되었다, 부인 덕분에 하룻저녁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할 수밖에는 없다' 이래 가지고 떠억 정진하는데.

 

아! 부인 보고는, "아, 고달픈데 그리 좀 비끼라"고 그래도,

"스님이 안 주무시는데 어떻게 내가 자겠습니까? 나도 그냥 앉어서 밤을 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둘이 떠억 앉어서 정진(精進)하는데, 아! 그 이튿날 새벽부터서 눈개비가 내리더니 한 치 두 치 쌓여 가지고, 두 자 석 자 넉 자, 삽시간에 아! 눈이 질을 넘게 눈이 퍼붓었다 그 말이여.

아! 깊은 산중은 눈이 일찍 내리고 또 그 이듬해 늦게 또 그 까지 눈이 내리고 눈이 녹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 그 눈이 그렇게 기인한께 와 가지고, 아! 부인이 도저히 그 이튿날 가기로 했는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아! 스님, 그 앉어서 무슨 공부를, 앉어서 대강 오래 앉어 있으면 그것이 공부입니까?"

"아니요. 앉어서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따로 있다"고.

 

"그러면 나도 좀 가르켜 주십시오. 이렇게 눈이 와서 나도 가지도 못하고 그러니, 공부를 하면 어떻게 좋으냐?"고 이리저리 물어서,

"이 참선(參禪)을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그래 가지고 큰 도인(道人)이 되면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참, 생사(生死)에 윤회(輪廻)를 벗어난다" 그래 딱 하니, 그 스님이 아는 대로 잘 일러주고, '이 뭣고?' 그렇게 생각하라고 가리켜주니까.

 

"그러면 기왕이면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나도 스님 따라서 같이 하겠습니다. 근데 그렇게 가만히 어제저녁에 보니까 스님이 앉아서 밤낮 꾸벅꾸벅 조는데, 기왕이면 그게 조는 것은 공부가 아니고 안 졸고 성성(惺惺)하게 해야 한다고 할진대는, 그러면 스님이 졸면 내가 죽비(竹篦)로 스님 머리빡을 때리고 또 스님이 졸면 내가 때리고, 내가 졸면 스님이 나를 때려서 잠을 깨우게 그렇게 약속을 하고 공부를 합시다"

아! 그것, 같잔허게 보살이 죽비로 때린 것을 맞은 것도 챙피하고, 그거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그럼 한 번 그렇게 해 보자"고.

 

그래서 그 스님은 정신을 바짝 채려 가지고 '어쨌든지 이 보살한테 안 맞아야겄다' 이리 생각하고 죽비를 가운데다 떠억 놔 놓고는 마주앉아서 참선을 하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이 보살이 잘 조는지 꺼떡하면 탁! 쳐 버리면 그냥 번쩍 눈을 뜨고 또 하고 하고, 며칠날은 보살이 아주 그냥 맡어 놓고 죽비를 맞더니,

한 일주일이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보살이 잘 잠을 안 자는데, 이 스님은 긴장이 좀 풀렸던지 아! 영 졸다가 한 대 터지면 번쩍 눈을 뜨고, 불과 10분도 안 되면 또 졸다가 얻어맞고 해서, 한 철 내 어떻게 뚜드러 맞았던지 이마빡에 아주 혹이 아주 수십 개가 솟아나 가지고, 아니 인자는 뭐 챙피한 것도 뭣도 없고.

 

그렇게 하다가 한 달이 지내고 두 달이 지내고 석 달이 지내고, 그 산중은 늦게까지 눈이 녹질 안 해서 넉 달 동안을 뚜드러 맞으면서 정진을 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 보살이 법문(法門)을 하는데, 그 법문 한마디에 눈을 번쩍 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다. 하고서, 일어서서 그 보살한테 절을 하고서 말을 하려고 하니까, 얼굴을 들어보니까 보살이 간 곳이 없어졌다 그 말이여.

그 보살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그 스님이 그 계행(戒行)이 청정(淸淨)하고 생사(生死)를 바치고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을 갖다가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문수보살이 떠억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로 변장을, 화현(化現)으로 나타나 가지고 와서 그 한 해 겨울을 그렇게 경책(警策)을 하고 법문을 해 주셨다 이 말이여.

 

금년 여름에 우리 세등선원에서 40여 명이 모여서 정진을 하는데, 모두가 전국 각 사찰에서 대신심(大信心)을 낸 발심(發心)을 한 납자(衲子)들이 아주 이를 악물고 정진(精進)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지난 겨울철, 또 그 지난 여름철, 철철이 세등선원이 창설(創設)이 된 이후로 철을 거듭할수록 모다 발심한 비구니(比丘尼) 수좌(首座)님네들이 모여서 밤을 패가면서 이렇게 정진들을 하고 있어서, 참 이 세등선원을 창설한 원장(院長) 스님, 세등 스님은 몸은 이렇게 너무 과로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몸은 불편하지만, 다 이렇게 전국에서 좋은 수행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그것을 하나의 유일한 기쁨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외호(外護)를 잘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승이 출가해 가지고 30여 년 동안 경험을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어느 선방(禪房) 어느 회상(會上)을 가도 반드시 그 회상에는 그 대중에, 대중(大衆)을 소란케도 한다든지 신경을 쓰게 한다든지 그래 가지고 꼭 그 말썽을 부리는 괴각(乖角)이 하나둘 씩은 꼭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오면 그 사람이 뵈기 싫어서 방부(房付)를 안 들이고 가 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 괴각(乖角)이 어느 선방에 간다 하면은, '아이구, 나 거기 안 간다'고 그래 가지고 안 와 버리고 딴 데로 간 사람도 있고, 때로는 그 괴각 바람에 중간에 도망간 사람이 있고, 중간에 전 대중이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선방을 아주 문을 닫아 버리는 그런 데도 있었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 세등선원에 다행히 아까 그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와 같은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이 혹(或) 이 철에 우리 선원에도 와서 계셨으면' 내 속으로 그걸 지금 간절히 지금 축원(祝願)을 하고 있는데, 어디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고 어디 무슨 도민증(道民證)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던지, 신분증이 있으면 대번에 그 사무실에도 알텐데, 그런 것이 없고 그냥 아주 그 전혀 표가 없이 오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 스님이, 아까 산중에서 토굴에서 공부하던 스님이 발심해서 공부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안 했다면, 하나의 평범(平凡)한 나무하러 오는 아주머니에 지내지 안 했을 것이고, 또 그러한 보살화현이 와 주실 까닭도 없었을 것입니다.(21분26초~43분4초)

 

 

 

 

(3/4)----------------

 

우리 이 세등선원에 다행히 이 대중이 그렇게 정진을 하기 위해서 이를 갈아붙이고 '죽을 사(死)' 자를 갖다가 이마빡에 써 붙이고 가행정진 용맹정진한 대발심(大發心)한 납자(衲子)가 계신다면, 반드시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이 우리 대중 가운데에 숨어서 지금 계시지 않을란가, 반드시 그런 분이 와 주실 것이다 하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 보살화현으로 와 가지고, 꼭 그 아까 그 나물 캐러온 아주머니,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처럼 꼭 그러한 형태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듣기 싫은 소리를 얼마든지 해서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고, 괴각(乖角)을 부려 가지고 대중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계속 어떤 시비(是非)를 일으켜 가지고 옆에 사람하고 싸움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고, 자기가 이 대중에 규칙을 잘 지키지 아니하고 밤낮 대중을 갖다가 소란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거야 형태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다못 대중 각자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돈발(頓發)해 가지고 정말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할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괴각이 고대로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 줄 것이고, 발심을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공부 대중을 소란케 하는 하나의 마구니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똑같은 보살화현을, 발심한 사람은 보살화현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발심하지 못한 사람은 보살화현도 마구니의 종자(種子)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 대중들은 모두가 철저히 발심을 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여기에 공부하러 온 분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중 가운데에 보살화현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 생각 한 생각, 일 초 일 초...(녹음 끊김)

 

이 몸을 함부로 그럭저럭 보내다가 죽음의 문을 맞이하겠습니까?

부디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이 몸으로 대도(大道)를 성취(成就)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도, 설사 이 선방에서 결제를 아니하셨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은 공부를 안 하고 그럭저럭 지내도 된다고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세속(世俗)에 살면서 좀 더 잘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다 보면 본의(本意) 아니게 많은 죄(罪)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전생(前生)에 숙연(宿緣)이 있어서 이러한 불법(佛法)을 만나시게 된 것입니다. 금생에 어쨌든지 정법(正法)을 믿고 몸은 비록 세속에 담겨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스님네보다도 더 이를 갈아붙이고 생활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내생(來生)에 정법을 만나고, 내생에는 보다 더 큰 복(福)과 큰 지혜(智慧)를 받아 타고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세속에서도 유족하게 살고 좋은 환경에서 사시고, 불법을 만나서 이렇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보시(布施)를 하셔서 이렇게 선원(禪院)이 잘 유지되어 가도록 뒷받침을 하시면서 동시에 또 여러분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어쨋든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은 아무리 그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내생에 한푼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라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한푼을 가지고 가지 못하고, 관 속에다가 칠보(七寶)를 갖다가 가뜩 채워서 가지고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가(靈駕)가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체와 더불어 묻혀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일생 동안에 지은, 그러한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모이는 동안에 본의 아니게 지은—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업(罪業)만을 한 짐 짊어지고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갈 따름인 것입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 가지고 보시(布施)를 하리라'

'돈을 많이 번다면 내가 선방을 하나 지으리라'

'돈을 많이 벌면 내가 법당을 내가 단독으로 지으리라'

'돈을 많이 벌면 내가 양로원을 하나 하리라'

 

돈 많이 벌 때를 기다려서, 그때를 기다려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성의(誠意)껏 하고,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성의껏 보시를 하고 희사(喜捨)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유경(百喩經)』에 보면 어떤 사람이 집에 염소를 길렀는데, 날마다 그 염소의 젖을 짜 가지고 식구대로 한 공기씩을 먹고 먹고 해서 아주 그 잘살고 있었는데, 앞으로 한 일주일 있으면 큰, 그날 무슨 생일잔치가 있어서 손님들이 많이 오게 되었어.

그래서 '그때 그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위해서는 지금 양을 날마다 짜 먹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짜 먹지 말고 그동안 저장을, 염소 뱃속에다가 저장을 시키자' 그래 가지고 젖을 짜지 않고 며칠 동안을 그렇게 놔뒀습니다.

 

그래 가지고 손님이 온 날, 그날 새벽같이 큰 그릇을 준비를 해 가지고 아무리 젖을 주물러도 젖이 삘삘 쪼끔 나오다가 나오지는 않고, 염생이는 죽는다고 아프다고 펄쩍펄쩍 뛰고,

"아! 어떻게 젖을 짜 가지고 그렇게 젖은 안 나오고 염소가 죽을라고 하냐? 저리 지내라. 내가 짠다" 아버지가 달라들어서 되게 갖다가 주물러 짜도 나오질 안 해.

 

"아니 무슨 젖을 그렇게 짜느냐"고. 엄마가 달라들어서 짜도 나오지 않고, 식구대로 달라들어서 힘을 들여서 쥐어 짜는데 젖이 벌게져 갖고 나중엔 피만 삐죽삐죽 나오는데, 젖은 한 방울도 안 나온다 이 말씀이여.

젖이라 하는 것은 짤수록 매일 적당하게 짜 주어야 젖이 계속 나오는 것이지, 젖을 안 짜면 잔뜩 불었다가 결국은 밭아 버린 것입니다.

애기에게 젖을 먹여 봐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매일 매일 젖을 빨려야 그 젖이 적당히 불어서 잘 나오지, 젖을 안 먹이면 하루 이틀은 터지도록 불어 가지고 아프다가 나중에는 결국은 그 젖은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산도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성의(誠意)를 다해서 보시(布施)를 해야, 그래야 또 돈이 또 벌려서 사업도 잘되고 계속 또 재산이 윤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여. 지금은 한참 지금 장사를 한다, 무슨 사업을 하기 위해서 돈이 아쉬워서 빚을 내다 쓸 판인데, 단 한푼이라도 애껴야지 무슨 희사(喜捨)를 하고 보시를 하느냐. 거지에게도 못 주고 양로원 · 고아원 · 형무소 어림도 없다. 또 군인에게 위문 어림도 없다. 내 자신 들일 것도 없는데 어떻게 주느냐. 더군다나 절에 안 된다. 나중에 많이 벌어 가지고 하리라'

그러다 보면은 늙어 버리고, 그러다 보면 별로 사업도 별로 보잘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생기는 대로 먹고살고, 그 가운데에도 조끔씩 거기서 마련을 해서 성의껏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께도 보시를 하고, 스님네에도 보시를 하고, 양로원이나 고아원이나 또는 형무소, 또 그 우리의 아들딸들이 나라를 위해서 가서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에게도 겨울 철철이, 여름 더울 때, 명절에 모다 모두 정성을 모여서 희사(喜捨)를 하고.

이렇게 하면 자기가 천석꾼이 할 만한 복을 진 사람은 보시를 해도 천석꾼이고, 아무리 피가 나게 애껴도 천석꾼을 넘지를 못하고 결국은 천석꾼 받을 만큼 복 받으면 다 내 몸으로부터서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천석꾼 할 만큼 복(福)을 지어서 천석꾼을 하게 된 사람이, '금생에 그 돈이 전부가 자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 진리(眞理)가, 천주교(天主敎)나 유교(儒敎)의 말을 빌리면 '하느님이 자기에게 임시 맽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어쨌든지 나와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적당히 쓰지만, 그리고서도 이것은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또는 삼보(三寶)에 보시를 적당히 하고 이런 사람은 천석꾼이 복(福)을 누리면서 동시(同時)에 앞으로 복을 더 받을 수 있는 복(福)의 씨를 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福)을 받기만 하고, 전생에 쌓은 복을 금생에 받기만 하고 새로 복(福)을 심지 아니한 사람은 그 복이 다해 버리면 금생에 가난뱅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손 대에, 자손(子孫) 앞에 넘겨준다 하더라도 머지않아서 그 복이 바닥이 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금생에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복을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복을 심고, 넉넉한 사람은 넉넉한 대로 복을 심어야, 또 그 심은 복의 씨가 싹이 트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자가 보시(布施)를 아니하고 그렇게 해서 복을 짓지 아니한 사람은 당대(當代)에 망(亡)한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갖다가 자기 혼자만 쓰지 아니하고 온 마을 사람, 이웃, 불쌍한 사람, 거지, 절, 돈 없어서 공부 못한 사람, 또 사회 복지시설 그런 기관, 그런 데다가 막 풀어서 쓴 사람은 9대를, 만석꾼이로 9대를 내려간 사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대전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만석꾼이는 절대로 당대(當代)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석꾼이가 9대(代)를 내려간 사람이 있어. 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망하지 아니할 텐데 토지개혁으로 말미암아서, 자유당 때 토지개혁으로 만나서 그 논을 갖다가 다 뺏겼습니다.

그래서 어려워졌지, 그러지만 안 했으면 그 만석꾼이가 계속 그 선조(先祖)에 유언(遺言)을 따라서 그렇게 보시를 하면서 살았다면은 9대뿐만이 아니라 90대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는 나무지가 아니라 복의 씨를 심는 것이 되는 것이여.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요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니라

나무~아미타불~

 

백 년 동안 재물을, 불같은 욕심으로 재물(財物)을 탐(貪)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띠끌에 지내지 못하고, 3일 동안 발심(發心)을 해서 이 세상 인생(人生)이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3일 동안 도(道)를 닦은 것은 천년(千年)에 보배가 되는 것이다.

 

부디 금년 한 철 석 달을, '석 달 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 '오늘 하루 결제(結制)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 하루를 알뜰히 정진(精進)을 하고, 그리고 그날 저녁에 떠억 자리에 누워서, '내가 과연 오늘 하루를 얼마만큼 알뜰히 공부를 했는가?' 따악 하루를 간단하게 한번 점검(點檢)을 하고,

또 '그 이튿날,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알뜰히 공부를 해야겄다. 오늘은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가지고 시비(是非)를 했지. 오늘은 공연히 부질없이 오늘은 하루가 지내갔구나. 내일은 더 알뜰히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하루저녁을 하루를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 떠억 일어나서 '오늘 하루는 더 열심히 해야겄다'고 딱! 한 생각 각오를 하고서 하루 정진을 하고. 그날 저녁에 또 그날 하루 자기가 어떻게 공부를 했나. '이웃 사람과 잡담(雜談)을 하지 안 했나?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가지고 옆에 사람 신경을 건드리지 안 했나?'

 

참을성 없고 잡담하기 좋아하고 시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음 인자 되았어.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나를 문수보살로 생각해 줄 테니까' 이리 생각하고, 시비와 잡담으로 대중에 괴각(乖角)을 부린 사람은 진짜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문수보살이 아닌 사람이 공연히 문수보살인 척하고 대중에 시비를 일으키고 했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지옥에 갈 것은 분명할 것이여.

부디 열심히 공부를 하고 금년 한 철이 출가(出家)한 목적(目的)을 달성하는 그러한 중대한 한 철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입재(入齋) 결제일(結制日)인 만큼 처음으로 선방(禪房)에 나온 분, 또 처음으로 이 참선(參禪)을 앞으로 해 보고자 한 그러한 분들을 위해서 간략히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점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呼吸)'을 바르게 할 것이며, 셋째는 '생각'을 바르게 해.

 

자세와 호흡과 그리고 생각,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잘 알고 참선(參禪)을 해야지 이걸 잘 모르고 하면, 자기 딴은 애를 써서 한다는 것이 까딱하면 몸에 병이 생기기도 하고, 까딱하면은 정신이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사도(邪道)에 빠지게 되어 가지고, 본의 아니게 '참선을 하다가 그 사람은 잘못되었다. 그 참선이란 건 대단히 몹쓸 것이다' 그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많은 사람을 참선을 못 하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여.(43분5초~62분24초)

 

 

 

 

(4/4)----------------

 

자세(姿勢)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면 가부좌(跏趺坐).

가부좌는 처음에 오른다리를 꼬부리고 그 위에 왼다리를 딱 올려놔. 왼다리를 오른다리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그다음에 오른발을 갖다가 다시 들어서 왼 무릎 위에다가 이렇게 꼬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가부좌인데, 이렇게 안 앉아 버릇한 사람은 다리가 그 5분도 못 가서 다리가 저리고 아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가부좌. 왼발 하나만 오른 무릎 위에다 이렇게 올려놓는 것이여. 이렇게 딱 앉아서 하되, 이렇게 해도 다리가 저리면 또 그 왼다리는 내려놓고 오른다리를 갖다가 왼쪽 무릎 위에다가 이렇게 올려놓아도 됩니다.

 

그렇게 하고, 손은 그 올려놓은 복사뼈 위에다가 딱 오른손을 갖다가 오른손을 손바닥을 위로 해서 딱 올려놓고, 그 위에다가 왼손을 갖다가 이렇게 해서 딱 포갭니다. 포개서 놓고서 엄지손을, 엄지손 끝에 배를 서로 이렇게 맞대는 것입니다.

맞대되 이 (엄지)손이 너무 되게 눌러서 이렇게 위로 솟구쳐 올라도 안 되고, 또 이렇게 삐뚤어지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동그스름하니 보기 좋게 이렇게, 떨어지지도 말고 너무 되게 붙이지도 말고 아주 가볍게 이렇게, 이렇게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고.

 

고개는, 자세는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니 앉았다 하고 참선을 잘한 척하고 투기로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크게 잘못한 것이어요. 단정하게, 두 귀가 어깨 위에 놓이도록.

 

코끝은,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과 코가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조끔 앞으로 기울어도 수직이 아니고, 뒤로 자지바지해도 안 되고, 좌우로 이렇게 기울어져도 안 되고, 단정하게 하면서도 조끔도 전후좌우(前後左右)에 기울어지지 않고, 그러면서도 어깨에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어깨에다 힘을 이렇게 주면 안 되는 거여.

어깨에 힘을 다 빼고, 목에 힘도 다 빼고, 팔에 힘도 다 빼고, 전신(全身)에 힘은 다 빼는 것입니다. 다 빼되 아주 단정(端正)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되,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만 아주 가볍게 지그시 그렇게 힘을 배꼽 밑에 단전에다 힘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다 미어터지도록 거기다가 용을 써 힘을 주는 것이 아니어요. 아주 힘을 주는 둥 마는 둥 하게 가볍게 힘을 줘.

 

이렇게 하고서, 좌우로 이렇게 서너 번 흔들어요.

서너 번 이렇게 궁뎅이가 뜰썩뜰썩하도록 요렇게 해 가지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정도에 가서 저절로 한 중심(中心)에 가서 딱 안정(安定)이 되도록. 그것은 궁뎅이 밑에 옷 같은 것이 혹 요렇게 구겨진 채 이렇게 있는 수가 있고 그래서, 너댓 번 이렇게 흔들흔들하면 옷이 싹 펴지도록.

옷 그렇게 해서, 그러면서 저절로 딱 하면 전후좌우에 기울어짐이 없이 딱! 중심이 요렇게 딱 잽히도록.

 

그리고 턱은, 너무 요렇게 하지도 말고, 앞으로 빼서도 안 되고, 단정하게 딱! 이렇게 붙이고.

 

이는, 저 아금니부터서 지그시 물어요. 너무 콱 다물어서도 안 되고, 이가 이렇게 떨어져서도 안 되고, 지그시 아금니부터서 이렇게 문다 말이여.

 

혀는 위로 꼬부려서,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 안에다 갖다 딱 갖다 대.

될 수 있으면 꼬부려서 저 안에다 갖다 대. 대고.

 

눈은, 감아서는 아니 되어요. 그렇다고 눈을 뚝 부릅떠서도 안 되고, 평상(平常)으로 눈을 떠서 평지에 약, 거기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 약 3m 지점에다가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한 점(點)을 갖다가 주시(注視)하거나 응시(凝視)해서는 안 되고.

어떤 사람은 참선 할 때 콩알을 갖다가 떠억 3m 에다 갖다 놓고 계속 그것을 들여다보는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봤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3m 지점에다 떨구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본 바가 없이 그저 평상으로 떠억 뜨고서,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하는데, '호흡(呼吸)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냐?' 하면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한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는 시간이 3초, 머무는 시간이 3초, 내쉬는 시간이 약 5초 가량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한 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는, 한 번 하는 시간이 약 10초나 11초 이렇게 되도록.

 

들어마실 때에 코로 쑤욱 들어마시지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저 뒤에서 쭈우욱 이렇게 들어마셔 가지고,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 배꼽 밑에, 아랫배에 가서 이렇게 담기도록.

 

다 들어마셨으면 3초 동안을 딱 정지를 했다가, 내쉴 때 물론 코로 내쉬지만 우리의 생각으로는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 말고, 또 쑤욱 배를 차츰차츰 차츰차츰 뒤로 잡아당기면서 '그 호흡을 저 뒤에로 쭈욱 밀어버린다' 이러한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또 다 내쉬었으면 그때 배가 홀쪽해져 갖고 있을 테죠? 또 쑤욱 들어마시되 저 뒤에서 들어마시거든.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셔.

 

근데 주의할 것은, 볼록하게 들어마시라니까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는 사람이 있어 가지고 얼굴이 벌게져 가지고 한 번 두 번 하고는, "숨이 가뻐서 못 하겄다" 그래 가지고는 "후~ 이렇게 쉬어 갖고 다시 해야 하니 이렇게 해도 되냐?"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들어마실 때 100프로(%)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팔부(80%)쯤만 들어마십니다.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만 팔부쯤만 들어마셨다가 3초 정지했다가 내쉬는데, 내쉴 때도 아주 등어리가 완전히 배가 등어리에 붙도록 다 내쉬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은 숨이 가뻐서 안 되어요.

팔부, 다시 또 더 내쉴 수 있지만 팔부(80%)쯤만 내쉬는 거여.

 

팔부(八部)쯤만 내쉬고서 또 스르르 들어마셔. 팔부쯤만 또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에는 내쉬는 시간이 약 5초니까—들어마시는 시간은 그냥 수르르~ 하니 부담 없이 들어마시는데 약 3초가 걸려요. 내쉴 때는 의식적으로 조끔 애끼면서 조용하게 천천히 내쉬어 보라 그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 하는 것이여.

 

 

<준비호흡>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를 말고, 처음에 본(本) 단전호흡 들어가기 전에 준비호흡이 있습니다.

준비호흡은 어떻게 하냐? 하면, 숨을 가뜩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을 요렇게 위로 들어올리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셔 가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았다가, 입으로 '후~~' 이렇게 내쉬는 거야.

'후~~' 하고 이렇게 내쉬어. 다 내쉬되 가슴을 약간 이렇게 홀쪽하게 하는 듯하면서 다 쥐어짜면서 이렇게 내쉬는 거여. 다 내쉬어요. 이건 100프로(%) 다 내쉬는 거여.

 

다 내쉰 다음에 또 한 번 100프로(%) 들어마셔. 들어마셔 가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후~~' 이렇게 내쉬는 거여.

이렇게 두 번 또는 세 번을 이렇게 하는 것, 이것을 '준비호흡'이라 해서 허파 속에 가뜩—허파가 이 어깨 위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가슴에 요렇게 딱 있는데, 숨을 조끔 들어마셨다 내쉬고 조끔 들어마셨다 내쉬면 허파 가운데 부분만이 호흡이 이렇게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고,

지끔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가뜩 어깨를 들면서 이렇게 가뜩 들어마셨다가 다 내쉬면 허파의 구석구석까지, 허파의 그 뾰족한 부분까지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공기가 들어갔다가 완전히 허파 속을 소지[掃除]를 해 가지고 깨끗이 요렇게 소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한 다음에 허파 소지를 해 놓고서 떠억 정식으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야 호흡이 제대로 되고 아주 그 공부 잘되는 것입니다.

 

이 준비호흡을 하지 않고서 처음부터서 단전호흡을 하면, 얼마 안 가서 여기가 답답해지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여기가, 가슴이 앞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반드시 언제라도 딱 앉어서 좌선(坐禪)을 시작할 때는 준비호흡을 먼저 하고서 단전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 단전호흡은 참선을 하지 아니한 사람도 항시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 혈액순환이 잘되어서 몸안에 있는 모든 노폐물을 바로바로 배출을 시키기 때문에 피가 맑아지고, 피가 맑아짐으로 인해서 몸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몸만 건강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안정이 되고 깨끗해져서, 자연히 그 사람은 도(道)를 닦을 수 있게, 도를 닦는데 가장 좋은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나, 관공서나 회사에 다니는 사람, 요새는 너무너무 피로가 겹쳐서 견디기가 어려울 만큼 그렇게 세상이 일이 많고 복잡해졌습니다.

이럴 때 이 단전호흡을 항시 하면 그때그때 피로를 해소하게 되기 때문에 학생도 공부를 더욱 잘하게 될 것이고, 일반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도 그날그날 피로를 그때그때 풀어버렸기 때문에 건강하게 그렇게 능률 있게 일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하면 혈압도 내려가게 되고, 모든 노이로제 현상도 예방하고 치료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고, 그래도 해 보면 또 의심이 나는 것이 있으면 또 물어보시고 해서 어쨌든지 이것을 열심히 하시기를 권장합니다.

 

특히 참선(參禪) 하는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이 단전호흡을 잘 알아서 해야 상기병, 선객(禪客)에 있어서 사형언도나 마찬가지인 그 상기병(上氣病)을 예방(豫防)을 하고 또 그러한 기운이 있는 사람도 치료(治療)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단전호흡(丹田呼吸) 밖에는 없습니다.

 

한번 상기병이 걸려 놓으면 약을 맞고 뜸을 뜨고 침을 아무리 맞어도 좀체 낫지를 않습니다마는, 이 단전호흡 하는 법을 알아 가지고 잘하면 백발백중(百發百中)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미리 이 법을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면 그런 상기병에 걸리지 아니하고, 소화도 잘되고, 혈액순환도 잘되고, 그래서 마음도 안정이 되고, 화두(話頭)도 잘 들리게 되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成就)하게 될 것입니다.

 

 

<화두 의심>

 

그다음에는 '생각을 어떻게 가져 나가느냐? 화두(話頭)를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 문제인 것이여. 이것이야말로 진짜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 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숨이 다 나갔으면 또 숨을 들어마시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두 시간 이내에는 이 단전호흡을 아니하는 것이 좋습니다. 밥에다 숭늉에다 국에다 가뜩 먹고서 배가 부른 데다가, 숨을 들어마시고 아랫배에다 숨을 밀어넣으면 위가 늘어나고 위하수 같은 그런 병(病)이 생기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시간 정도 되면, 밥이 다 삭아서 배가 꺼지니까 두 시간 뒤부터서 하고, 그렇다고 해서 두 시간 이내에는 낮잠이나 자고 공부를 아니해도 되냐 하면은 그게 아니고, 단전호흡만을 하지 말고 그냥 호흡을 보통 호흡(呼吸)으로, 그냥 예사 호흡으로 하면서 화두(話頭)는 역력(歷歷)히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할 것,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할 것,

셋째, 화두를 바르게 드는데, 호흡을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써억~ 들어마실 때에도 지금 '이 뭣고?~~' 한 끄터리가 지금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꼬리가 지금도 지금 계속 요렇게 나가고 있는 거여.

3초 머무를 때에 까지도 그 아까 들었던 그 화두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여운(餘韻)이 그때까지 오는 거여.

 

그래 가지고 새로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머무를 때까지 그 여운이 갔다가, 내쉴 때 또 '이 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그러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만 하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고,

나중에는 숨 한 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또 한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세 번 할 때까지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여운'이 있으면은 새로 안 해도 괜찮어요.

 

아침에 들었던 화두(話頭)가 점심 먹을 때까지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눈앞에 있으면은 자꾸 거기다가 '이 뭣고? 이 뭣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익숙해지면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때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때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 가운데에는 반드시 그런 경지를 맛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에까지, 저녁에 들었던 화두가 아침에 그 이튿날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 몸이 가볍고 편안하고, 그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하고 그 경계는 뭐라고 이게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 편안하고 좋구나'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화두(話頭)만이 독로(獨露)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 누가 이런 때 누가 툭!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었으면...'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 천길만길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에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이여.

공부가 잘되어 갈수록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오직 화두(話頭)만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團束)해 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좀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되고, 가슴이 미어지고 시간이 지루하기를 5분이 한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때가 있고 몸부림이 쳐질 때가 있지만, 조끔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를 말고 허리를 쭉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 것입니다.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는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하지만, 가만히 일어서서 나가서 포행(布行)을 한 5분 내지 10분을 하고 정신이 깨끗해지면 또 자리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그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는 참 그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해서 그런 것도 지혜 있게 도반(道伴)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남에게 피해(被害) 가는 것이 대중처소에서는 제일 조심(操心)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말 간절(懇切)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62분25초~1시간22분48초) (끝)

 

 

 

 

[법문 내용]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인천 용화사(龍華寺)나, 세등선원 조실(祖室)은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 공안(公案) 화두(話頭)의 뜻. 천칠백 공안. 공안은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그 공안(公案)의 원리(原理)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다.

 

반기이파(飯器已破) 공안 / 깨달음은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러야 / 산중 납자(衲子)의 수행을 위해 아주머니로 화현하신 문수보살(文殊菩薩).

 

발심(發心)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준다 / 백유경(百喩經)의 염소 젖 이야기 / 보시, 희사(喜捨)로 복(福)의 씨를 심어라 /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 하루 결제(結制) / 자세, 단전호흡, 화두 드는 법에 대한 자세한 법문.

 

 

주장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쳐서 그 소리를 여러분께 들려드렸습니다.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서 그 이상 더 법을 설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모가지가, 머리가 목 위에 하나가 있는데 다른 데서 목을 하나 갖다가 그 머리 위에다가 하나를 더 포개 놓은 거와 같을 것이고, 닭다리를 떼어 버리고 오리다리를 갖다가 이어서 짬매 놓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전강(田岡) 스님께서도 6년 전에 77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을 하셨지만, 우리는 전강 큰스님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생존해 계실 때와 똑같이 그렇게 분명하게, 성성(惺惺)하게 법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사 한마디 녹음을 해 놓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말씀도 생존시(生存時)에 육성(肉聲)을 들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오시고 가신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를 체달(體達)하신 스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실(祖室)로 모셔도, 모시고 생존해 계신 듯, 계신 것처럼 믿고 그 법(法)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스님을 조실로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해 나가자면 이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야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깨달랐는가 바로 깨닫지 못했는가를 점검(點檢)해 보려면 이 공안을 갖다가 들여대 가지고 그 공안에 대한 답(答)을 하는 것을 보면은 그 사람이 어떠한 경지(境地)에 도달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공안을 접(接)했을 때 바로 이를 수 없으면 다못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반기이파(飯器已破)'의 공안에 대한 법문.

 

우리는 고인(古人),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善知識)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기 전에는 스스로 조끔 공부를 해서 조끔 무슨 소견(所見)이 났다 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산중 납자(衲子)의 수행을 위해 아주머니로 화현하신 문수보살(文殊菩薩).

 

다못 대중 각자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돈발(頓發)해 가지고 정말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할 그러한 사람에게는 괴각(乖角)이 고대로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 줄 것이고, 발심을 못한 사람에게는 공부 대중을 소란케 하는 하나의 마구니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백유경(百喩經)』의 염소 젖 이야기

 

백 년 동안 재물을, 불같은 욕심으로 재물(財物)을 탐(貪)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띠끌에 지내지 못하고, 3일 동안 발심(發心)을 해서 이 세상 인생(人生)이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3일 동안 도(道)를 닦은 것은 천년(千年)에 보배가 되는 것이다.

 

부디 금년 한 철 석 달을, '석 달 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 '오늘 하루 결제(結制)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 하루를 알뜰히 정진(精進)을 하라.

 

참선의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상세히 말씀하심.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呼吸)'을 바르게 할 것이며, 셋째는 '생각'을 바르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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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2. 24. 11:02

 

 

((세등선원No.28))—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결제 법문(80.05.30) (54분)

(1/3) 약 18분. (2/3) 약 18분. (3/3) 약 18분.

(1/3)----------------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한데  기조녹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쪼각 흰구름은 강(江) 위로 오는데,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가는고.

 

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낭기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2/3)----------------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락(苦樂)을 같이 하기 위해서 이 세등선원에 모인 사람은, 세상에 모든 인연(因緣)을 다 끊어 버리고 진실(眞實)로 오직 이 생사대사(生死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대중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順應)을 하면서, 인사(人事)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다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사(人事)를 다 닦아야 하는 것이지만,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원에 들어온 이상은 일체 인사를 다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사를 추리기로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환갑이라고 가야 하고, 결혼식 한다고 가야 하고, 누구 죽었다고 가야 하고, 사십구재라고 가야 하고, 백일이라고 가야 하고, 소상(小喪) · 대상(大喪)이라고 가야 하고, 이렇게 인사를 추리고 다니다 가서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이여.

 

주지(住持) 같은 것을 맡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없이 모다 그러한 인사로 오고 가고 하는 수가 있지만, 대중처소(大衆處所)에 한 번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온 이상에는 그러한 인사를 밖으로 다니지 아니해도 그것이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니여. 해제(解制)한 뒤에 얼마든지 인사를 닦을 수가 있는 것이여. 결제(結制) 중에 안 가는 것은 실례가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 가는 것이 인사를 잘 닦는 것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옛날부터 결제 중에는 자기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오더라도 그 부고장(訃告狀)을 본인에게 보여주지 아니하고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해제가 한 다음에사 '이러한 부고가 왔었다'고 하는 것을 알려드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사(人事)를 다 끊어 버리고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하되, '인연 따라서 수용한다'고 하는 것은, 죽이면 죽, 밥이면 밥, 보리밥이면 보리밥, 찰밥이면 찰밥, 반찬이 짠지면 짠지, 된장찌개면 된장찌개, 한 가지도 좋고 두 가지도 좋고 닥치는 대로 먹되, '이렇게 먹어 가지고 어떻게 영양이 보충이 안 되아서 이래 가지고 어떻게 공부를 할까?’ 그것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여. 왜 그러냐?

 

아무리 잘 먹어도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 오욕락(五欲樂) · 탐진치(貪瞋癡)로써 생활을 해 나간 사람은 그것이 살로 가지를 않는 것이고, 오히려 잘 먹는 것이 원인이 되아서 병(病)이 나는 것이고, 짠지나 된장찌개 한두 가지를 가지고 잡곡밥에 밥을 먹어도 탐진치 삼독(三毒)을 돌려서 참선(參禪)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것만 먹어도 충분히 몸을 유지해 나가게 되는 것이여.

이것은 삼천년을 두고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고인(古人)들이 다 실천으로써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어. 산중에 어느 선방, 또는 일본에 그 큰 선방을 가보더라도 짠무 김치, 닥꽝 김치 하나에 된장찌개만 가지고도 영양실종이 되어서 병이 났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어도 충분하게 건강을 유지해 나가고 다 도(道)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한다' 이것입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먹고 입고 이 의식주 문제에 관해서는 그때 형편에 따라서, 오직 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면서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잠은 9시부터 3시까지 그 때를 제외하고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내에 외출(外出)을 하지를 말며, 대중적으로 특별히 허락할 때가 아니면 일체 경(經)을 읽고 외우는 것도 허락을 하지 아니해.

'이렇게 해서 3년간을 한결같이 간절하게 알뜰하게 정진을 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서도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니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몽산(蒙山) 스님께서 대중(大衆)을 향해서 다짐을 하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공부해서 3년을 해 가지고 견성을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맹세(盟誓)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그렇게 3년을 하면 틀림없이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맹세를 하신 것이여.

과연 우리도 지나간 세월을 두고 그렇게 공부를 했던가! 냉정하게 반성(反省)을 해 보고, 그리 못한 사람은 그와 같이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하되 덮어놓고 말 아니한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잠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밥을 굶는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어떠한 그러한 행동에만 치우친, 치우친 행동으로써 공부를 삼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말을 많이 아니한다든지, 음식을 과식을 아니한다든지, 너무 잠을 많이 잔다든지, 이러한 것들이 분명 공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 아니한 것 자체를 궁극에 공부의 목적을 삼는다든지, 잠을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든지, 밥을 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근본(根本)을 망각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에 대오(大悟)를 해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셔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최초에 법문(法門)을 하실 때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지나친 호강을 하는 것도 성실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지만, 너무 지나치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로 공부를 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고 하면은 부처님을, 정반왕(淨飯王)의 명령을 받어서 '부처님을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기어코 모시고 오라. 태자를 모시고 오라' 한 당부를 받고 온 그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들이, 너무 부처님이 발심(發心)을 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도 따라서 출가(出家)해 가지고 도를 닦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도(大道)를 성취할 때까지는 결단코 밥을 먹지 말자,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말자' 이렇게 모다 맹세를 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하룻날, '내가 이렇게 밥을... 덮어놓고 음식을 굶고 육체만을 갖다가 들볶는 이러한 고행(苦行)만을 가지고서는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겠다. 그러니 어쨌튼지 이 몸에 필요한 만큼은 먹여주면서 기운을 챙겨 가지고 그 깨끗한 정신으로 공부를 해야만 이 도(道)는 이루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강으로 가셔서 목욕을 하고, 그때 마치 수자타(Sujātā)라고 하는 마을의 처녀가 유미죽(乳糜粥)을 써 가지고 오는 것을 보시고, 그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유미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교진여들은, '아하. 태자가 마음을 변했구나. 마음이 변해 가지고 도심(道心)이 약해져 가지고 저렇게 수자타가 갖다 바치는 죽을 받아 자셨구나. 그래 가지고서는 우리의 처음에 약속이 다르지 않는가. 싯달태자는 타락(墮落)을 했다. 변심(變心)을 했다. 타락하고 변심한 태자와 우리가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같이 있어 봤자 우리까지 타락을 하고 물들겠다. 그러니 우리는 태자를 버리고 딴 데로 가자'

이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서 녹야원(鹿野苑)이라고 하는 곳으로 떠나가서 자기네끼리 도를 닦고 있었던 것이여.

 

부처님께서 도(道)를 깨달라 가지고, '최초에 내가 누구를 향해서 최초(最初)에 법을(法)을 설(說)할 것인가?' 생각해 보신 결과, 녹야원으로 가서, '그래도 나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 교진여들 다섯 사람이다' 이리 생각을 하시고 교진여가 있는... (녹음 끊김)

 

육체를 갖다가 들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았기 때문에, 고행(苦行)으로써 공부의 목표(目標)를 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성(聖)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잘 먹고, 너무 잠을 많이 자고, 잘 입고, 호강에 빠진 공부가 또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中道)'—지나치게 호강에 빠지지, 편안, 안일(安逸)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게 육체를 들볶지도 아니하는, 적당한 선에서 자고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입되, 그 가운데에 어디에다가 우리에 정진(精進)의 핵심을 맞춰야 하느냐?

본참화두(本參話頭),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하라고 하냐 하면, 단전호흡을 하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만을 간절히 들어 나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머리로 모여서, 피가 머리로 모이고 기운이 머리로 모여 가지고 뒤통수가 뜨끈뜨끈 열이 오르고 모가지가 빳빳해지고, 그래 가지고 맑은 정신이 없어지고, 공부만 하려고 화두만 들려고 하면 골치부터 아파.

이래 가지고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먼저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수승화강(水昇火降), 시원한 물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머리가 시원해지고, 더운 불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서 단전(丹田) 부위 하복부(下腹部)가 따뜻해지도록.

이렇게 해서 시원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더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야 혈액순환이 잘되고 몸이 가볍고 머리가 깨끗하고, 이리해서 몸은 건강해지고 공부는 지장이 없이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직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들 뿐이지, 무슨 정신 헷갈리게 단전호흡을 하냐?' '단전호흡(丹田呼吸) 할라, 화두(話頭) 들라 하면은 정신이 두 갈래로 갈라져 가지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 화두만을 들어야지, 무슨 단전호흡이 필요 있느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화두만 들면, 다행히 그렇게 들어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잘 들리고 수승화강이 잘되어서 조끔도 상기병(上氣病)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좋지만, 까딱하면 상기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지면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안 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제절로 단전호흡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화두만 떠억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된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이 말이여.

그래서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허리만 쭉 펴도 저절로 그 가운데 단전호흡이 되고, 단전호흡이 되면서 화두도 떠억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정신이 헷갈리기 커녕은 오히려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18분45초~36분20초)

 

 

 

 

(3/3)----------------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잠깐 머물르는데—들어마실 때에 ‘코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차츰차츰 저 깊이 아랫배까지 밀어 넣는다’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숨을 저 뒤에, 저 궁딩이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를 말고 약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신다.

 

쭈욱- 저 뒤에서 일직선으로 잡아댕겨.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팔부쯤만 들어마셔.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꼭 3초가 아니라, 약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쉬는데,

이리 해서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로, 저 뒤에로 내밀어 버리는 기분으로 배를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이 하라.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들어마셔 가지고, 머무르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머무르는 호흡을, 머물렀다가 호흡을 쑤욱 뒤로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이 약 5초 동안, 4~5초 동안.

 

이렇게 해서 모두 한 번, 들어마셨다가 · 머물렀다가 · 내쉬는데 약 10초나 11초, 이런 정도가 걸리도록.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또 조끔씩 길게 해도 상관이 없는데, 억지로 그 시간을 늘리려고 무리를 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억지로 무리를 해서 하면 서너 번도 못해서 벌써 숨이 가빠지고 힘이 들어서 오히려 못쓰는 것이니까, 아주 그 30분 동안을 계속해도 조끔도 힘이 들지 않고, 한 시간을 그렇게 해도 힘이 들지 않도록 조끔도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그때 화두(話頭)를 들어라.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안 내고 그렇게 하라.

 

또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하되, 눈은 항상 평상(平常)으로 뜨고 해야 하는 것이여.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눈을 감고 하는 것이 공부가 더 잘된 것 같고, 더 마음이 편안한 것 같고 고요한 것 같은데,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만 절대로 눈을 감고해서는 아니 돼.

눈을 감고 하면 까딱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기 쉽고, 나중에는 이상한 것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해야 성성(惺惺)하고 그러한 잡된 것이 어리대거나 보이는 법이 없다 그 말이여.

 

눈을 평상으로 뜨고 호흡은 극히 자연스럽게 하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천천히 그렇게 하되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떠오르는 생각을 버리려고 하거나, 쫓아내려고 하거나, 그것을 누르려고 하지를 말고, 그냥 고대로 나두고 나는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화두만 딱! 들어버린다 그 말이여.

화두만 딱! 들어 버린 것이 그것이 가장 간단하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지난날 며칠 전에 삼일 동안에 가행정진(加行精進)을 대중들이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더울수록에 더욱 가행정진을 하고, 추울 때에는 추울수록에 가행정진을 하고, 몸에 상태가 안 좋으면 상태가 안 좋을수록에 오히려 정신을 가다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하고, 이리해야 이것이 참선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더운 때를 맞이해서 가행정진을 했다고 하는 사실은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위해서 한 것이지만, 대단히 기특하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까지 석 달 안거(安居) 중에 절반이 지내가고, 앞으로 한 달 반이 남았습니다. 지내간 한 달 반보다도 이제 정말 삼복(三伏)더위가 남아 있습니다. 삼복더위에 그 땀은 줄줄줄줄줄 흐르고 땀띠기는 등어리로 모다 궁뎅이로 땀띠가 나 가지고 긁을 수도 없고, 가렵고 쑤시고 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참 어려운 고비가 남았습니다.

 

그래도 지옥에 가서, '가사(袈裟)를 입은 사람이 정진(精進)을 제대로 못하면 까딱하면 그 가사를 다시 다음 생에 입지를 못하고 지옥(地獄)에 가기가 쉽다'고 하는 것을 고인(古人)들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대중들은 틀림없이 금생(今生)에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내생(來生)에 또다시 사람 몸을 받아서 다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밝히게 되리라고 생각은 되지마는, 만에 하나라도 내생에 지옥고(地獄苦)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금생에 궁딩이에 땀띠가 좀 나고 더운 것쯤이야 오히려 그것을 더 계기 삼아서, 동기 삼아서, 발판 삼아서 더 가행정진을 하되, 지혜스럽게 단속(團束)을 해야 한다.

가행정진을 한답시고 어리석게 공부를 하면, 공부는 성취되지 못하고 병만 나고 다른 사람에게 폐만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지만, 그 대신 지혜롭게 단속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단속한 것이냐?

여태까지 말씀드린 바로 그것이 지혜롭게 단속하는 것이다.

 

어리석게 단속을 하고 어리석게 공부하는 사람은 병(病)만 툭 터져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갖다가 걱정만 끼치고 공부에 큰 지장만 초래하는 것이고,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하는 사람은 그 힘을 얻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발심(發心)을 허것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하라. 굳게, 긴(緊)히 화두(話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할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되게 강추위를 한 뒤 끝에 핀 매화라야 그 향취가 코를 치도록 진동(振動)한 것이다.

그러니 가행정진 용맹정진,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말 알뜰히 단속하여서 철저하게 정진을 해야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경신년 하안거(夏安居) 반살림인 동시에, 수원 청룡사 영선 묘길 비구니 스님과 진주 대원사 총무로 있다가 너무 불사(佛事)에 골몰하다가 과로해서 돌아가신 성옥 행원 비구니 스님의 사십구재(四十九齋) 날입니다.

우리와 같이 출가수행인으로서 일생 동안을 참선을 하고, 또 불사를 하고, 교화(敎化)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위해서 일생 동안을 애를 쓰다가 너무 과로한 탓으로 해서 홀연히 이승을 하직(下直)을 했습니다.

 

일생을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위해서, 불사(佛事)를 위해서 애쓰던 분들이라 반드시 다시 또 새 몸을 받아나 가지고 우리와 같이 또 공부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 틀림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과거 전생(前生)에 지은 업(業)이 남아 있다면, 오늘 이 반살림 법문을 통해서 그러한 업이 춘설(春雪)같이 다 소멸(消滅)이 될 것이고, 도솔천내원궁이나 극락정토 또는 이 사바세계에 속히 돌아와서 일대사(一大事)를 밝혀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부처님께 축원(祝願)을 합니다.

 

생사(生死)는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가 없기 때문에 해탈할 것도 없고, 원래 우리의 불성(佛性)자리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조끔도 다름이 없어서 진묵겁(塵墨劫) 전에 깨달라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상태여 다시 깨달을 것도 없고, 지금 영가(靈駕)는 업(業)으로 뭉쳐진 사대육신(四大肉身)을 인연이 도래(到來)해서 다 버렸을 뿐이요, 오직 그 신령스러운 영각성(靈覺性)만이 이 법상 앞에 참석을 했습니다.

산승의 설법을 빌릴 것도 없이, 그 영각(靈覺), 원각대지(圓覺大智)만이 홀로 드러난 이 상태라, 누구보다도 잘 이 도리를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알 것입니다.

 

대중과 이 자리에 청혼(請魂)된 영선 묘길 영가, 성옥 행원 영가는 주장자를 통해서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보일 것이니,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이 도리와 계합(契合)이 될 것입니다.

 

쿵!(주장자로 법상을 내려치심)

 

남은 반살림 열심히 정진(精進)하셔서, 일생을 통해서 이 한 철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해결하는 중대한 계기(契機)가 되도록 힘써 줄 것을 당부하고 말을 마칩니다.(36분22초~54분1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린다 /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조사관(祖師關)은 곧 화두(공안)을 말함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화두를 관(觀)한다'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 공부는 근본을 망각하지 말고 지혜롭게 해야 / 정진(精進)의 핵심은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 /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된다.

 

단전호흡 방법 /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해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비구니 스님의 49재. 생사는 원래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나'이니,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도리(道理)는 너무나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래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의지하(大意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이 무엇고?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에는,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됩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무엇고?’ 하고 다시 한 번 화두를 드는 것이여.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부처님께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하신 최초의 법문은 '중도(中道)'의 수행을 말씀하심.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근본(根本)을 망각(妄覺)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해야 하는가.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까딱하면 상기병(上氣病) 같은 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져서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아니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저절로 단전호흡이 되고.

나중에 화두만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되고,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참선의 바른 자세(姿勢)와 호흡(呼吸)에 대한 상세한 말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해나가야 이것이 참선(參禪)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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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1. 15. 11:14

(세등선원No.31)—경신년 동안거 반결제 법어(80.11.22) (44분)

(1) 약 22분. (2) 약 22분.

(1)------------------


삼십년래반고향(三十年來返故鄕)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

청산불어춘천모(靑山不語春天暮)  두우일성래묘망(杜宇一聲來杳茫)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偈頌)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고향에 돌아가셔서, 고향에 가셔서 읊으신 게송입니다. 출가하셔 가지고 도를 닦아서 견성(見性)하신 뒤에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느끼신 바를 읊으신 게송입니다.

그런데 그 고향이 당신이 태어난, 육신이 태어난 그 고향에 돌아가서 그래 가지고 읊었다고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그 깨달음의 본고향(本故鄕)에 돌아가셔서 읊었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십년래반고향(三十年來返故鄕)하니,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니,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이라, 사람도 죽고 집도 다 허물어지고 마을도 또한 다 황폐해 버렸더라.


청산(靑山)은 불어춘천모(不語春天暮)헌데, 푸른 산은 말이 없고 봄 산은 저물었는데,

두우일성내묘망(杜宇一聲來杳茫)이라. 두견새, 두견이 한 소리가 아득히 오는구나.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은—이 게송, 도인(道人)이 읊으신 게송(偈頌)이라 하는 것은 중생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 가지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깨달은 참 경계는 설명해 줄 수도 없고 또 분별심으로 따져서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글의 그 뜻은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은, 중생의 온갖 분별심, 사량심 그런 것, 번뇌 망상 이런 것들이 다 끊어져 버린 경계를 읊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청산(靑山)은 불어춘천모(不語春天暮)헌데  두우일성내묘망(杜宇一聲來杳茫)은, 바로 그 깨달은 경지를 읊으신 것이다. 이런 정도는 우리가 얘기할 수가 있는 것이고.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언제나 말을 한 바와 같이,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도 누누이 말씀을 하신 바와 같이—아난존자(阿難尊者)가 30년을 부처님 시자(侍者)를 했는데,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한마디, 한 글귀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그것을 듣고 다 외우고 있었다 그말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깨닫지를 못했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시기를 「니가 천일 동안을, 여천일학혜(汝千日學慧)가 불여일일학도(不如一日學道)니라.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를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약불학도(若不學道)면, 만약 도를 배우지 아니하면, 적수(滴水)도 난소(難消)니라. 한 방울 물도 소화를 시키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난존자를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30년 동안을 시봉(侍奉)을 하면서 다 법문 한마디를 놓치지 아니하고 주르르허니 녹음해 놓은 것처럼 그렇게 다 외와 알고 있는데, 지금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은 어느 강원을 가거나, 어느 선방을 가거나 다 칭찬을 할 것이여. 그런데 왜 부처님은 꾸짖으셨습니까?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도(道)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가리킬 수 없고, 따져서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여.


요새 참선을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고 있는데, 특히 거사들, 청년들, 학생들, 굉장히 그 참선에 대한 열의가 있어서 모다 이 공부할려고 애를 쓰고 있고, 또 비구니 스님들이 그렇게 여기저기 선방이 꽉꽉 차 가지고 모다 정진을 할려고 애를 쓰고 있고,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고 모다 대단히 좋은 현상이나, 참선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제각기 바르게 한다고 생각하고 애를 쓰고 있지만, 공부하고 있는 내용을 잘 알아보면 썩 그렇게 올바르게 하고 있는 사람이 적더라. 어째서 그러냐?


'그 스승이 어떻게 참선을 지도를 하고 있느냐? 어떻게 지도하는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느냐? 어떠한 방법으로 참선을 하느냐?' 그것이 대단히 중대한 문제가 되아 가지고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법은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 이외의—화두에 대해서 사량심으로 따지고 분별심으로 더듬어서 그렇게 짐작해 가고 그러한 참선은 올바른 참선이 아니다.

그런데 간혹 들으면, 와서 자기 공부해 나가는 경계, 소증처(所證處)를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떠한 선지식(善知識)은 화두(話頭)를, 자기 본참화두를 놔두고 이 공안 저 공안을 힌트를 줘 가면서 설파(說破)를 해서 학자로 하여금 무슨 화두에 대한 알음알이로 해석을 하도록 은근히 그렇게 이끌어 가는 그러한 큰스님이 계시지 않은가?


내가 직접 그 선지식을 만나서 듣지는 안 했지만, 그 선지식 밑에서 공부를 해 가지고 거기서 '어떠한 공안을 어떻게 어떻게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보았다' 그래 가지고 나한테 와서 그것을 점검을 받으러 온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그렇게 와서 얘기한 것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나는 생각을 하나,

그 와서 말한 사람한테는 '니가 잘못 알아들었지 그 스님이 그렇게 지도를 할 까닭이 없다'고 그렇게 말을 막아 버리기는 했지만, 혹 여러분 가운데에도 그러한 식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결정코 그것이 바른 참선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공안을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또 분별심, 설파를 해 가지고 그 학자로 하여금 가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하는 이러한 참선은 백년을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하나도 걸림이 없이 환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마침내 분별심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하는 것이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앉았어도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 동안을 지혜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도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참으로 올바르게 도를 닦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신 바가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여.


천 인, 만 인이 공부를 해도, 이 문중에 들어와서 공부를 해도 겨우 세 개, 너댓 개, 3~4명—천 명 가운데에, 천만 명 가운데에 다못 세 사람이나 댓 사람 정도 밖에는 도를 얻은 사람이 없는 까닭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고 앉았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결국은 재앙(災殃)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금생에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그 재앙이 누겁(累劫)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벽 선사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삿된 방법으로 그릇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금생에 도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을 앙화(殃禍)를 누겁을 두고, 여러 겁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하기는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숨이 딱! 끊어질 때까지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화두를 들고 숨을 거두어야만, 내생에 다시 사람 몸을 받아서 금방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또 공부를 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젊어서, 이 금생에 공부한 그 뒤를 이어서 하게 되기 때문에, 바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금생에 마지막 죽을 때까지라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내생에 다시 정법(正法)을 만나게 될는지 기약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삿된 스승 밑에 가서 외도(外道)의 제자가 되기가 십상팔구(十常八九)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삿된 도를 만나서 삿되게 닦으면 결국은 무엇이 되는 것이냐 그말이여.



오늘이 동짓달 그믐날 가져야 할 법회를 땡겨서 오늘 스무 이튿날 반살림 법회를 갖게 되는데, 벌써 경신년 삼동안거(三冬安居)가 벌써 절반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나갔다.

하루하루, 그 1분 1분이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해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한 달이 지내고, 그렇게 해서 석 달 90일 동안이라고 하는 기간이 길다고 하면 길지만, 잠깐 새다 그말이여.


벌써 절반이 지내갔는데 과연 지나간 반살림 동안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을 했는가? 오늘 한번 각자 반성을 해 볼 것이며, 과연 지난 반살림 동안을 알뜰하게 철저하게 정진을 했나 못했나?

철저하게 정진을 한 사람은 앞으로 남은 반살림을 더욱 철저하게 정진을 할 것이고, 반성을 해 본 결과 '아무래도 내가 실다웁게 정진을 못했다, 알차게 공부를 못했다'고 반성이 된 사람은 그 부족한 점을 돌이켜서 정말 철저히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선지식들이 참 일생 동안을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 애써서 정진한 스님네도 마지막 열반하실 때에는 한결같이 '내가 일생 동안을 실컷 정진을 못하고 가는 것이 참 한스럽다'고 이러한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듣자하니 이 세등선원은 한철 한철, 철을 거듭할수록 좋은 수좌(首座) 스님네들이 모다 모여서 그 정진을 애써서 정진을 한단 말을 항시 듣고 흐뭇하게 생각한 바지만, 과연 이 정진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알뜰하게 공부를 하는 것인가?


앞으로 한 열흘이 지나면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 가행정진 하는 때가 오는데, 원래 인천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생존 시부터 납월팔일 용맹정진을 하지를 못하게 하시고, 평상시와 같이 사분정진(四分精進)으로 정진을 하되 방선(放禪) 시간이라 하더라도 잡담을 하지 말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일여하게 알뜰하게 정진을 하도록 이렇게 권장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에도 용화사에서는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마는, 여기 세등선원은 그전에부터 11시나 12시, 평상시보단 두서너 시간 늦게 자고 또 3시에 일어나고, 일어나서 정진을 하되 입방선(入放禪) 없이 죽 묵언하고 정진을 하도록 이렇게 죽 해왔는데,(처음~21분39초)





(2)------------------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그리고 앉아서만 배기는 것이 과연 그것이 가행정진이며, 용맹정진이냐? 또는 아주 무언(無言)을 하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일종(一種)을 하고 때로는 단식을 하고 그러한 것이 과연 용맹정진이냐?


잠을 안 자는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불면증(不眠症)이 걸린 사람은 참으로 용맹정진을 잘할 것이고, 옆구리를 땅에다 대지 아니한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서 용맹정진을 할 것이 아니냐?

말을 아니한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벙어리는 참으로 공부를 잘할 것이고, 밥을 한 끼니나 두 끼니를 굶는다든지 안 먹는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소화가 안되어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참으로 공부를 잘하게 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밥을 안 먹고, 말을 안 한 것이 절대로 그것이 그것만으로 용맹정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여.


먹을 때 먹고 잠을 잘 때는 자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시 간절한 마음으로 일여(一如)하게 본참화두를 들고 거각(擧却)을 하고,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이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암만 해도 화두가 의심이 안 난다' 이런 말들을 가끔 듣지만,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면 어째서 의심이 없을 것이냐 그말이여.


대관절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눈으로 온갖 것을 색상을 보고, 귀로 온갖 소리를 듣고, 코로 온갖 냄새를 맡고, 혀로 온갖 맛을 보고, 몸으로 온갖 촉감을 느끼는,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10년 전, 20년 전, 백 년 전도 왔다갔다하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는 놈, 이 소소영령한 놈!


일체 것은 다 눈을 통해서 보되 그 「한 물건」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일체 것을 다 만져 보고 잡을 수가 있으되 이 소소영령한 이놈은 잡을 수가 없는 거여. 어떻게 그렇게 소소영령하면서도 찾어보면 자취가 없는데, 왜 의심이 안 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이 「한 물건」

불법(佛法)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 중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서 이 공안(公案)은 주어져 있다 그말이여. 이 과제는 주어져 있어! 그런데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어?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앉고 서고 세수를 하고, 소제(掃除)를 하고 거닐면서도 '이뭣고?'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의심 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여.



여기 앉아서 서울을 생각하면 환해. 여기 앉아서 부산을 생각하면 환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0살이나 15살 때 일을 생각하면 환해. 그러한 정도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여.

간절하게 화두를 들으라 하니까는 잔뜩 육단심(肉團心)을 내 가지고 억지로 이마에다 '적을 소(小)'자나, '내 천(川)'자를 쓰고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여.


여기 앉아서 저 십 리 밖이나 백 리 밖에 서울이나 인천을 생각하면 환허는—그 인천 생각한다고 골치 아퍼지는 사람이 어디가 있고, 서울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골치 아퍼지는 사람이 어디가 있어.

서울도 생각하면 환한 그러한 정도의 생각으로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화두를 들고 있는 거여. '이뭣고?'

알 수 없으면 그게 화두를 들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뭣고?' 「이-하는 이놈이 뭣고?」

먹으면서도 '이뭣고?' 옷을 입으면서도 '이뭣고?' 세수를 하면서도 '이뭣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현전(現前)하도록.


누워 있다고 화두가 안 들려?

포행(布行)을 하기 위해서 일어서면 그 성성(惺惺)한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어!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고, 마루에서 밖으로 나가서 신을 신을 때, 왜 화두가 없어?


겨울에는 날씨가 추워서 문을 닫고 정진을 하니 방안 공기가 탁해지면 자연히 혼침(昏沈)이 오기가 쉬운 것이니, 가끔가끔 문을 열어서 방안 공기를 산산하게 하고. 불을 너무 뜨시게 때 가지고 방안 공기가 더웠다 하면 전체가 꾸벅꾸벅 졸으니까 방안 공기가 18도, 19도, 20도 이상 넘어서는 아니 되고.

불을 때는 사람은 그 불 조정을 잘 하고, 방안 공기가 항시 시원하고 산산하도록 그렇게 맑아야 이 혼침에 빠지지 아니하고 정진이 깨끗하게 잘되는 것이니, 그런 것도 지혜롭게 잘 조정을 하고.


앉어서 너무 혼침이 오면 조용히 나가서 밖에 가서 한 5분간 잠깐 포행을 해서 정신을 깨끗이 해 가지고 그래 또 들어와서 정진하고 하면 참 좋은데, 여럿이 이렇게 대중이 지내는 데에는 자기 혼자 자꾸 들랑달랑해 쌓아도 그것이 또 번폐스러운 것이니까, 그런 것도 잘 대중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잠 깨우러 나간다 해 가지고 어문간 다른 방에 들어가서 잡담을 한다든지, 또는 시내에 개별적으로 자꾸 무슨 이유를 붙여 가지고 시내를 출입을 자주 한다든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고.


정진을 해 보면 성성하게 화두가 잘 들릴 때는 시간이 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중을 모르게 휙 가는데, 영 화두가 잘 들리지 아니하고 혼침에 빠져 가지고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바로 또 혼침에 빠지고 빠지고 할 때는 영 시간이 지루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무릇 몸이 아주 이 개운치를 못하고 그러는데.

그러할 때에 참으로 알뜰하게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서 가다듬어서 화두를 잘 들어 가야 하는 것이여. 그렇게 공부를 지혜롭게 용심을 해서 지어 가다 보면, 또 화두가 순일하게 또 잘 들리는 때가 또 오는 거여.


앉아서나 서서나 행동을 할 때나 누웠을 때나, 화두가 순일하게 지내서 입선 시간이나 방선 시간이 관계가 없이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나타나는데, 마치 가을 하늘처럼 깨끗한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이 경계가 된다.

애써서 정진을 하면 누구에게나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하게 들리면서 그렇게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가 오기 마련인 것이여.


그러한 경지가 오거든, 그러한 경지를 잘 유지를 해 가면서 조금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이러한 경계가 오래오래 계속이 되기를 바래는 그러한 마음도 내지 말고 한결같이 정진을 해 가면, 적적성성(寂寂惺惺)하고 성성적적해서 이 생각이 왔다가 저 생각이 일어나고, 저 생각이 일면 저 생각이 나고 이러한 심로(心路)가, 마음길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 이 몸뚱이가 이 인간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까지도 느끼지를 못해. 그래 가지고 화두가 면면밀밀(綿綿密密)해서 끊어지지 않고.


그러한 때에 지각심(知覺心)을 내서는 안 돼. '이럴 때 툭!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나로 하여금 툭!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거여. 그러한 생각을 내면 그런 생각을 낼 때 벌써 화두 순일(純一)함을 상실하게 되는 거여.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잘 들려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이럴 때 빨리 깨닫기를 바래는 생각도 내지를 말고, 깨닫기를 기달지를 아니하면서 한결같이 공부를 잘 지어 나가면, 앉아서도 화두가 순일하고, 서서 거닐 때도 화두가 순일하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순일하게, 똥을 눌 때도 순일하고, 일을 하고 소지를 하고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화두가 순일하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도 고대로 화두를 든 고대로 잠이 들고,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리고, 그 이튿날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엊저녁에 들고 자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말이여.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고 잠이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가 있다.


마치 그때의 경계가 어떠냐 하면 밝은 하늘에 달이 맑은 물에 비추듯이, 물결이 쳐도 그 밝은 달빛이 그 활활발발(活活潑潑)하게 그 물결 속에—물결은 겉으로 물결은 쳐도 그 물을 뚫어서 저 밑바닥에 비친 그 달빛은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아무리 흔들어도 그 없어지지 아니한,

가운데도 적적(寂寂)해서 흔들림이 없고, 외부로부터 아무리 충격을 가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이렇게 되어 가면 머지않아서 의단(疑團)을 파(破)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하는 거여.


이러한 세 가지 단계를, 정진을 애써서 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여. 이 공부는 결정코 정진을 알뜰히 하는 데에서 이러한 경지를 만나게 되는 거여.


이 화두를 본참화두를 타파해야만 참으로 이 조사공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막연하게 이 의심을 내 가지고 망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해 봤자 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답이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주어 가지고 결국은 정신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이 화두법을 내놓지 않느냐?' 이러한 생각도 해 봤다 그말이여, 옛날에.


절대로 그것이 아니여!

반드시 이 화두를 타파(打破)하면은 이 공안법의 묘(妙)한—반드시 확철대오를 해야만! 이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그래서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오늘도 그 소당파(燒堂婆) 법문도 조실 스님이 해 주셨고, 여러 가지 공안에 대해서 그 말씀하셨지만, 절대로 이 공안이라는 것은 깨달라야만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거여.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알 수 없는 것이고, 알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여.

설사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공안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하더라도 우리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본참, 본참화두(本參話頭)에 충실해야 해. '어째서 무라 했는고?' 무(無)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요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생사해탈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라. 긴밀히 이 화두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에 매화가 피어야 그 매화꽃 향기가 천하를 진동을 하는 것처럼, 정진을 참으로 알뜰히 가행정진, 용맹정진 철저하게 정진을 해야만 확철대오를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반살림 동안 정말 정진을 잘해서 확철대오 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21분40초~43분37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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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십년래반고향~' ; 『청허당집(淸虛堂集)』 3권. '환향(還鄕)'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 : 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본고향(本故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난존자(阿難尊者) : [범] Ananda 음을 따라 아난타(阿難陀)로 쓰고, 줄여서 아난(阿難) 또는 아란이라 하며, 뜻으로 번역하여 환희(歡喜) 또는 경희(慶喜)라고 하니, 「기쁘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사촌이며 조달(調達)의 친 동생이다。부처님 성도하시던 날 밤에 났고, 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25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侍者)로 있었으며 십대제자 가운데서도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그 총명이 놀라웠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가섭존자의 주관으로 왕사성 밖에 있는 필발라굴(畢鉢羅窟 Vaibhara)에서 오백 성승(聖僧)이 모여 경전을 결집하는데 아난존자는 그 때까지 아직 성과(聖果)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섭존자에게 묻기를 『부처님께서 사형(師兄)에게 법을 전하실 때에 금란가사(金襴袈裟) 말고 따로 무엇을 전하신 것이 있읍니까?』


『아난아』

『예?』


『문 밖에 찰간(刹竿)대를 꺾어 버려라! 』하였다。그러나 아난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용맹정진 사흘 만에야 비로소 크게 깨치고 나서, 회의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다 외니 하나도 틀림없음을 대중이 증명하여 경의 결집이 완성된 것이다。그 후 가섭존자로부터 법통(法統)을 받았다가 상나화수(商那和修)에게 법을 전하였다.

*시자(侍者) ; ①시중(侍從)을 드는 사람. ②스승, 장로를 따라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승(高僧)의 가까이서 시중을 들고 명령에 따르며, 항상 용무를 다하는 제자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시기를 「니가 천일 동안을, 여천일학혜(汝千日學慧)가 불여일일학도(不如一日學道)니라.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를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약불학도(若不學道)면, 만약 도를 배우지 아니하면, 적수(滴水)도 난소(難消)니라. 한 방울 물도 소화를 시키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난존자를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선사(黃檗禪師).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71. (가로판 p179)

本分宗師의  全提此句는  如木人唱拍하며  紅爐點雪이요  亦如石火電光이니 學者實不可擬議也니라  故로  古人이  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이요 只重先師不爲我說破라 하시니라


본분 종사가 이 구를 온전히 들어 보이심이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 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니 배우는 자가 참으로 어떻다고 헤아리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씀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시니라.


[참고 ②]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80-181) (가로판 p171~172)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참고 ③]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에서.

학자(學者)에게, 참선(參禪)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


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구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일어나기가 틀린 것입니다.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57분59초~59분25초)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천 인, 만 인이 공부를 해도, 이 문중에 들어와서 공부를 해도 겨우 세 개, 너댓 개, 3,4명—천 명 가운데에, 천만 명 가운데에 다못 세 사람이나 댓 사람 정도 밖에는 도를 얻은 사람이 없는 까닭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고 앉았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결국은 재앙(災殃)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금생에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그 재앙이 누겁(累劫)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벽 선사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선사(黃檗禪師) 「此門中千人萬人 只得三箇五箇 若不將爲事 受殃有日在 故云 著力今生須了却 誰能累劫受餘殃」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인(千人)·만인(萬人)이 있지만 겨우 서너, 너댓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는다. 만약 이 도 닦는 일을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금생에 반드시 끝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오랜 세월(累劫) 남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누겁(累劫 묶을·포갤·쌓을 누/겁·오랜 세월 겁) ; 여러 겁이 쌓여서 이루어진 기간. 곧 한없이 길고 오랜 시간.

*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십상팔구(十常八九) ; 열[十]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사분정진(四分精進) ; 참선이나 기도를 하루 네 번(새벽, 오전, 오후, 저녁)씩 시간을 정해 정진하는 것.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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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오전에만 걸식(乞食)으로 공양하도록 하고, 오후에는 씹을 수 있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육단심(肉團心) : [범] Hrdaya  4심의 하나。 심장을 말함。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되었다 한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어문간 ; '애먼'의 사투리.

*애먼 ; ①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억울하게 느껴지는. ②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엉뚱하게 느껴지는.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지각심(知覺心) : ①바로 이 경계로구나 알았다 깨달았다 하는, 그런 마음。 ②빨리 깨달으려는 마음。누가 깨닫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활발발(活潑潑)하다 ; 더없이 활발하다(생기 있고 힘차며 시원스럽다).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의단(疑團)을 파(破)해 ; 화두(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를 타파(打破).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이러한 세 가지 단계를, 정진을 애써서 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여. 이 공부는 결정코 정진을 알뜰히 하는 데에서 이러한 경지를 만나게 되는 거여' ; 삼개정절(三箇程節). 세 개[三箇]의 정절(程節). 세 가지 단계.

*정절(程節) : ①길목. 길가는 데 종요로운 어귀. ②공부해 나가는 데 중요한 고비.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몽산화상이 총상인에게 보이심)」 p60~64. (가로판 p60~63)

趁逐工夫하야 始終에 不離靜淨二字호리니 靜極하얀 便覺하고 淨極엔 光이 通達하나니라


공부를 해나감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 정(靜)과 조촐할 정(淨) 두 자를 여의지 말지니, 고요함[靜]이 지극하면 곧 깨칠 것이요 조촐함[淨]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하나니라.


氣肅風淸하야 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가 是第一箇程節이니 便宜乘時進步이니라


기운(氣韻)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서 동정(動靜)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 같을 때, 이것이 첫번째 정절(程節)이니, 곧 마땅히 그 때를 타서 나아갈지니라.


如澄秋野水하며 如古廟裏香爐相似하야 寂寂惺惺하야 心路不行時에 亦不知有幻身이 在人間하고 但見箇話頭綿綿不絕하리니 到這裏하얀 塵將息而光將發하리니 是第二箇程節이니라 於斯에 若生*知覺心하면 則斷純一之妙하리니 大害也이니라


마치 맑은 가을 들물 같으며, 옛 사당 안의 향로 같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하야 마음길이 끊어졌을 때, 또한 이 육신이 인간에 있는 것도 모르고 다못 화두만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음을 보리니, 이 속에 이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광명은 장차 발하리니, 이것이 두 번째 정절이니라. 여기에서 만약 지각심(知覺心)을 내면 순일(純一)한 묘(妙)가 끊어지리니 크게 해로우니라.


無此過者는 動靜에 一如하고 寤寐에 惺惺하야 話頭가 現前호대 如透水月華하야 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하야도 不散하며 蕩하야도 不失時에 中寂不搖하며 外撼不動矣리니 是第三箇程節이니 疑團이 破하야 正眼開가 近矣리라


이러한 허물이 없는 사람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고, 자나깨나 성성하야 화두가 앞에 나타나되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 여울물결 가운데 있어 활발발(活潑潑)하야, 대질러도 흩어지지 않으며 헤쳐도 잃지 아니한 때, 중심이 고요하야 흔들리지 아니하며 밖으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세 번째 정절이니 의단이 파하야 정안(正眼)이 열림이 가까우리라.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조사공안(祖師公案) ; 조사가 시설(施說)한 선(禪)의 관문으로서의 공안.

*소당파(燒堂婆) 법문 ;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제30권 1463칙 ‘고목(枯木)’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拈頌說話) 10』 (혜심·각운 지음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428~429.

昔有婆子 供養一庵主 經二十年 常令女子 送飯給侍 一日令女子抱定云 正伊麽如何 庵主云 枯木倚寒嵓 三冬無暖氣 女子歸擧似婆 婆云我二十年 只供養得箇俗漢 遂發起燒却庵


옛날에 어떤 노파가 한 암주(庵主)를 20년 동안 공양하였는데, 항상 딸에게 밥을 보내 시봉(侍奉)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딸로 하여금 꼭 껴안고 물어 보게 하였다. “이럴 때, 어떠하십니까?”

암주가 말하였다.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 따사로운 기운이 없도다”

딸이 돌아와서 노파에게 이야기를 전하니, 노파가 말하였다. “내가 20년 동안 겨우 속한(俗漢)을 공양했구나”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암자를 불질러 버렸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45~47.

만공 스님 당시 각 회상(會上)에서 논란된 바 있는 ‘소당파(燒堂婆)’라고 하는 공안이 있는데, 어떤 암주(庵主)가 공부를 하는데 시주 노파 한 분이 그 스님을 20년간 양식을 정성껏 대어드렸다.

20년이 다된 어느 날, 그 노파는 암주 스님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자기의 예쁜 딸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네가 가서 그 스님을 꼭 껴안고, <스님!  이러한 때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아라” 하였다.


딸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하였더니 그 암주가 답하기를, “고목이 찬바위에 의지하니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枯木倚寒岩 三冬無暖氣)”라고 하였다.

딸은 그대로 어머니께 전했다.  노파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암주의 패궐(敗闕)을 알아차리고 토굴로 가서 “내가 저런 속한(俗漢)이한테 20년간 양식을 대었구나!” 하고는 암주를 쫓아내고 암자를 태워버렸다.


어째서 그 노파는 그렇게 청정하게 지내온 암주를 속한이라고 했을까?  암주는 어째서 속한이를 면치 못하고 쫓겨나야만 했겠는가, 이 무슨 연고인가?  이것이 공안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그 당시 큰스님들께서 모두 한마디씩 하셨지만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고 몇 개만 적어보면, “원앙이 녹수(綠水)를 만났다.” “직접 경계를 쓰겠다.” “배필이 되어 살겠다.” “할을 하겠다.” “방을 쓰겠다.” 등의 답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안에는 ‘할’도 ‘방’도 소용없는 것이다. ‘방’ 내릴 때 벌써 속인이 되어버린 것이고, ‘할(喝)’ 할 때 계행은 파한 것이다.  위에 적은 어떤 답도 속한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대승계는 부처님께서도 범하지 않고서는 설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 공안이 대승계를 판단하는 공안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답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며 찾다가는 벌써 파계승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 함부로 여기에 대해서 입을 열 수가 있을까?  이러한 공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서야 어찌 중생에게 대승계를 함부로 설하겠는가?


큰스님네께서 이르신 답이 많이 있었지만 나로서는 “아닙니다.” 라고만 하여 왔다.  여러 번 답을 이르라는 요청도 받았지만 답할 것이 따로 있지, 이와 같은 공안에 함부로 답을 할 것인가.  미래 학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늘날까지도 끝내 답을 이르지 않았다.

금봉 스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 일러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일러 드리지 않았다.  지금은 금봉 스님마저 돌아가셨으니 누구에게 일러 볼 것인가, 죽어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에게나 일러볼까?

공부하는 학자들이여!  확연(廓然)한 뒤에 한 번 찾아오면 그때는 산승이 더불어 탁마하리라.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긴밀히(緊密- 긴하다·꼭 필요하다·팽팽하다·급박하다 긴/빽빽하다·빈틈없다·자세하다·가깝다 밀) ; 서로의 관계가 틈이 없을 정도로 매우 가깝게.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법문 내용]


(게송)삼십년래반고향~ / 황벽선사 『전심법요』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 도(道)는 교리적으로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가리킬 수 없고, 따져서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했는가? /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신심 · 분심 · 의단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 삼개정절(三箇程節) / 조사공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 반드시 확철대오를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공안을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또 설파를 해 그 학자로 하여금 가늠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하는 이러한 참선은 백년을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걸림이 없이 환히 다 안다 하드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마침내 분별심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생사해탈을 못하는 것이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앉았어도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 동안을 지혜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도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참으로 올바르게 도를 닦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이렇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신 바가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여.


삿된 방법으로 그릇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금생에 도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을 누겁을 두고, 여러 겁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하기는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참 일생 동안을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 애써서 정진한 스님네도 마지막 열반(涅槃)하실 때에는 한결같이 '내가 일생 동안 실컷 정진을 못하고 가는 것이 참 한스럽다'고 이러한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밥을 안 먹고, 말을 안 한 것이 절대로 그것이 그것만으로 용맹정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여.

먹을 때 먹고 잠을 잘 때는 자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시 간절한 마음으로 일여(一如)하게 본참화두를 들고 거각(擧却)을 하고,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이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암만 해도 화두가 의심(疑心)이 안 난다' 이런 말들을 가끔 듣지만,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면 어째서 의심이 없을 것이냐 그말이여.


일체 것은 다 눈을 통해서 보되 그 「한 물건」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일체 것을 다 만져 보고 잡을 수가 있으되 이 소소영령한 이놈은 잡을 수가 없는 거여. 어떻게 그렇게 소소영령하면서도 찾어보면 자취가 없는데, 왜 의심이 안 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이 「한 물건」

불법(佛法)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서 이 공안(公案)은 주어져 있다 그말이여. 이 과제는 주어져 있어! 그런데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어?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앉고 서고 세수를 하고, 소제(掃除)를 하고 거닐면서도 '이뭣고?'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의심 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여.


여기 앉아서 서울을 생각하면 환해. 여기 앉아서 부산을 생각하면 환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0살이나 15살 때 일을 생각하면 환해. 그러한 정도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여. 간절하게 화두를 들으라 하니까는 잔뜩 육단심(肉團心)을 내 가지고 억지로 이마에다 '적을 소(小)'자나, '내 천(川)'자를 쓰고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화두를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해야만 참으로 이 조사공안(祖師公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막연하게 이 의심을 내 가지고 망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해 봤자 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답이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주어 가지고 결국은 정신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이 화두법을 내놓지 않느냐?' 이러한 생각도 해 봤다 그말이여, 옛날에.


절대로 그것이 아니여! 반드시 이 화두를 타파(打破)하면은 이 공안법의 묘(妙)한—반드시 확철대오를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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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1. 9. 07:01

(세등선원No.39)—1982(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7) (61분)

(1/3) 약 22분. (2/3) 약 21분. (3/3) 약 18분.

(1/3)----------------

 

황앵상수일지화(黃鶯上樹一枝花)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야래풍우(夜來風雨)를 객문선(客聞先)헌데  춘산의구초당전(春山依舊草堂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다. 흰 해오라기가 들에 내리니 천 점에 눈이더라.

 

야래풍우(夜來風雨)를 객문선(客聞先)인데, 밤새 오는 비바람 소리를 객(客)이 먼저 들었는데,

춘산의구초당전(春山依舊草堂前)이로구나. 봄 산은 옛을 의지해서 초당 앞에 서 있구나.

 

 

임술년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벌써 4월 17일 입하(入夏)가 지나서 뜰 앞, 뜰 뒤 산과 들은 바야흐로 연록(軟綠)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그 아름다운 꽃들도 지고 지금 모란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노란 꾀꼬리가 가지에 오르니 한 송이의 꽃이요, 흰 해오라기가 들에 내리니 천 점에 눈이다.

한 송이의 꽃,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떠억 나뭇가지에 오르니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다.

꾀꼬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오를 때 한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요. 산과 들과 방방곡곡 금수강산(錦繡江山)이 울긋불긋한 꽃과 잎이 비단에 수(繡)놓은 것처럼 이렇게 싱그럽고 아름답게 장엄(莊嚴)을 하고 있습니다.

 

범연(泛然)히 보면, 예사로 보면, 봄이 오니까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이 돌아오니까 이렇게 무성하게 잎이 모다 피어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평범한 일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 평범한 현실이 입으로 설할 수 없고,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에 진리를 남음이 없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눈을 통해서 보는 모든 색상, 귀를 통해서 듣는 모든 소리, 코를 통해서 맡는 모든 냄새, 혀를 통해서 맛보는 모든 맛, 몸을 통해서 느끼는 모든 감각, 뜻을 통해서 받아 들여지는 모든 의식이 바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무상설법(無上說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납월팔일(臘月八日) 새벽 동천(東天)에 떠오르는 샛별을 보시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셨고, 어떠한 도인(道人)은 복숭아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달으시기도 하고, 어떠한 도인은 물 흘러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어떠한 도인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기도 하고, 어떠한 도인은 시장에서 장사꾼들이 멱살을 거머쥐고 서로 다투고 욕을 하는 그 소리를 듣고 깨달은 분도 있고. 우리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확철대오를 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달을 때에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 가지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경계에 들어가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만 나가고 있으면 언제 어느 찰나에 의단이 타파(打破)될런지를 알 수가 없어.

 

예를 들자면, 어느날 중대한 뉴스가 발표가 된다. 확실한 시간은 모르지만 오늘 중으로 무슨 중대한 발표가 있다.

이럴 때에 아침부터 라디오나 TV 다이알을 딱 맞춰 놓고, 언제 중대한 발표가 돌연히 발표가 될는지 모를 때에 딱 다이알을 맞춰 놓고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벌써 다이알을 맞춰 놓지 아니한 채 있다가 지나가 버리면 중대한 발표를 듣지 못하는 거여.

 

언제 발표될지를 모를 때처럼 딱 다이알을 맞춰 놓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언제 어느 찰나에 깨달을런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떠억 거각(擧却)하고 성성적적한 상태로 정진을 해 가야 하는 것이여.

 

번갯불 번쩍할 때에 그 번쩍 하는 그 찰나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뀌듯이, 깨달음의 눈을 뜨는 그 장면은 마치 그와 같은 것이여.

점진적(漸進的)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인 것이기 때문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공부는 일분일초라도 등한히 놓아 지낼 수가 없는 것이여.

 

다른 공부는 시간을 맞춰서도 하고, 또 공부 아니할 때에는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즐겁게 놀기도 하고, 먹고 잠도 자기도 하고, 사업이나 무슨 사무나 모든 것을 다 놔 버리고 훌쩍 떠나서 저 산이나 바다로 쉬러 가기도 하고, 그렇지만 우리의 공부는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화두를 들고 먹어야 하고, 세수를 할 때에도 화두를 들고 세수를 해야 하고, 똥을 눌 때에도 화두를 들고 똥을 눠야 하고, 몸이 아플 때에도 화두를 들고 꿍꿍 앓아야 하고, 속이 상할 때에도 화두를 들고 속을 상해야 하고.

다정한 사람이 죽어서 슬플 때에도 화두를 들고 슬퍼해야 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속이 상할 때나 괴로울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단 1초 동안이라도, 찰나 동안이라도 화두를 놔 버리면 그 사람은 진실한 수행인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가 마냥 한결같이 잘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에는 순풍에 돛 달듯이 화두가 저절로 들리면서 성성하게 잘되어 가다가, 또 어떤 때에는 뚝 변해 가지고 영 답답하고 머리가 개운치를 못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어찌해 볼 수 없이 그렇게 애를 먹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끌고 깊은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는 것처럼, 되게 고삐를 땡겨서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면 할수록 나귀는 뒤로 버티고 안 들어올라고, 이렇게 공부하기가 어렵고 힘이 든 때도 있습니다.

 

수월하게 잘될 때 보다도 이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힘이 들고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질 때, 그때가 훨씬 중대한 중요한 고비라 하는 것을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서장(書狀)』에도 대혜(大慧) 스님께서 그 점에 대해서 누누히 강조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애를 먹을 때, 그때! 선용기심(善用其心), 잘 그 마음을 잡드리해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 나가면 그 고비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고비다 이 말씀이여.

공부가 한 걸음 나아갈라면은 그러한 그와 같은 경계를 만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고비를 잘 넘기고 나면 그다음부터서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고 '힘을 얻게 된다[得力]' 이것입니다.

 

흔히 화두가 성성하게 잘 들리면은 공부가 잘된다고 좋아하고, 그러다가 보면 또 공부가 영 답답하고 잘 안되면 그 안되어서 성화를 내고 거기에서 번뇌심을 내고, 짜증을 내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내고, 어쩔 줄을 몰라. '기도를 해 볼까? 주력을 해 볼까?'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허면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진수궁의무로(山盡水窮疑無路)터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허면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이라.

꽃다운 풀 우거진 길을 지나가지 아니하면, 꽃 떨어진 마을에 이르기 어렵다. 향기 나는 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가야 꽃이 활짝 피고 지고 한 아름다운 고장에 들어갈 수가 있다.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해서 이제 맥혀 가지고 인자 길이 없지 않나? 이렇게 의심했더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다. 버들은 그윽히 드리워져 있고,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또 한 마을이 있더라.(처음~21분37초)

 

 

 

 

(2/3)----------------

 

아무리 화두를 들고 정진할라고 애를 써도 가도가도 답답하기만 하고, 한 걸음도 공부가 더 나아가는 늘어나는 수가 없어. 작년에 마냥해도 그 택이요, 금년에도 마냥해도 그 택이요. 그것 또 몇 해냐?

몇 해를 자기 딴에는 밤잠을 안 자고, 남 구경하고 놀러가도 자기는 구경하고 놀 것을 그만두고 자나깨나 화두를 들고 애를 써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만(萬)날 해도 죽 떠먹은 자리여. 누구한테 내놓을래야 내놓을 것이 있나, 무슨 콱! 맥혀서 답답하기만 하고.

 

‘참으로 확철대오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연히 이렇게 화두만—꽉 아무 생각 못하게 하고 잡념 못하게 하기 위해서, 풀라야 풀 수도 없고 아무 답도 있을 수도 없는 그런 공안(公案)이라 하는 문제를 주어 가지고 이 사람 골때리는 지서리가 아닌가?’

‘무슨 이거 방편(方便)으로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게 만들어 가지고 마침내 번뇌 망상 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조사(祖師)가 방편으로 화두니, 공안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도 들드라 이 말씀이여.

 

3년, 5년, 10년 해봤자 무슨 소식이 있어야지?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혼침(昏沈)만 오고, 아무리 화두를 들라고 몸부림을 쳐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망상(妄想)뿐이고, 망상이 조금 잠잠해질라 하면 그때는 또 혼침이 와 가지고.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못 견뎠으면 웃옷을 벗어서 방바닥을 치면서 ‘이 조주(趙州)가 뭣 때문에 무자(無字) 화두를 내 가지고 이 사람을 이렇게 골탕을 먹이냐’고 다리를 뻗고 우는 스님도 있었고, 머리를 갖다가 벼람박에나 기둥에다 갖다가 이마를 수없이 들이받으면서 피가 나오도록 받으면서 죽어버리고 싶은 이러한 충동을 느끼는 수도 있고.

 

그러나 역대조사(歷代祖師)에 남기신 법어(法語)를 보면 결정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 사실을 우리는 인증할 수가 있습니다.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는 아무리 따져도 해결이 안 되지만, 선지식(善知識)의 바른 지도에 의해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그래 가지고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고,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봐도 산의 빛깔과 모냥에 대해서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걸어가되 걸어가는 줄을 모르고, 앉았으되 앉아있는 줄을 모르고, 천 명 만 명 사람이 있는 데에 서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오직 화두의 의단 하나만이 성성적적하게 독로하고.

 

이러한 경계에 들어가서도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누가 나로 하여금 이럴 때에 툭!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도 말고, 다못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가야 일주일이 가지 아니해서 반드시 의단이 타파가 되어서 확철대오를 할 것이다.

 

이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여. 역대조사가 다 그러한 과정을 다 겪으셨어.

 

‘이것이 만약에 거짓이라면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고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도 맹세를 하셨고, 몽산(蒙山) 스님도 맹세를 하셨고, 산승(山僧)도 이 도리를 믿고 여러분 앞에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여러분에게 선언을 합니다.

 

출가한 목적은 오직 이 한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해결하는 이 밖에는 다시 무엇이 있습니까?

부모와 정든 고향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인생의 모든 낙(樂)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한 우리들입니다. 정말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 칠십이라 하지만 누구나 칠십까지 다 사는 것도 아니고, 하루도 장담을 못하는 것이고, 한 시간도 믿을 수가 없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셔서 1초 1초를 금쪽같이 아껴서 공부하고,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화두를 거각해서 등한(等閒)히 지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진심(精進心)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오늘부터서는 내가 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리라. 내일부터서는 묵언을 하고 공부를 하리라. 내일부터서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리라. 그래 가지고 말을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정진을 애써서 할려고 하는 그러한 기특하고 갸륵한 수행인이 있습니다.

 

대단히 기특하고 갸륵하고 매일 같이 자기를 ‘오늘 하루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반성을 해 보고 ‘내일은 어제보다 더 알뜰히 공부를 하리라’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단속을 하고 또 단속을 하는 것, 참 좋습니다. 단 하루도 등한히 지낸 날이 없고, 하루하루 갈수록 더 알차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일으키는 그 생각마저도 화두를 간절히 든다면 어느 것이 더 낫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바라보고, 지금의 일찰나(一刹那)를 등한히 한다’ 그랬습니다.

 

진실한 수행인은 ‘앞으로 잘하리라’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당장 지금 이 찰나에 허리를 쭉 펴고 화두를 간절히 드는 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 학자의 수행 자세인 것입니다.

이렇게 1초 1초를 다져 나간다면 그 사람은 그날 하루도 알차게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물어볼 것도 없이 내일 하루도 충실하게 정진이 되어질 것입니다.

 

1초 1초가 모여서 1분이 되고, 1분 1분이 모여서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하루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모여서 1년이 되기 때문에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단속하는 사람이야말로 일생을 충실하게 정진할 사람이고, 나아가서는 억겁(億劫)의 생사 문제도 ‘한 생각’에서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이 바로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하는 법성게(法性偈)에 법문을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념 일념, 1초 1초를 등한히 한 사람은 무량겁 생사윤회가 끊어지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허고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태양을 금까마귀[金烏]라 그래. 금까마귀가 나왔다 졌다, 아침에는 동천에서 솟아올랐다가 저녁때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이렇게 하면서 세월을 재촉을 한다. 금까마귀는 솟았다 졌다 하면서 세월을 재촉을 하고.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라. 옥토끼[玉兎]는—달을 보고 옥토끼라 하는데, 옥토끼는 떴다 졌다 하면서 늙은 모양을 재촉한다.

하루해가 떴다 졌다, 내일도 또 하루해가 떴다 졌다 하면서 1년이 지내가고, 달이 떴다 졌다, 달이 또 떴다 졌다 하면서 우리를 늙게 만든다 이것이여.

 

하루해가 떴다 지고서 거울을 쳐다본다고 해서 별로 늙은 줄을 모릅니다마는, 그 하루 하루가 1년이 지나면 1년 동안에 벌써 흰머리가 많이 불어나고 주름살이 지나가고, 1년 사이에 많이 늙어 버리게 된다. 젊을 때에는 1년, 이태 지내도 잘 모르지만, 사십 오십이 넘어가면 1년이 무섭다 그말이여.

젊다고 해서 어찌 늙지 아니하리요마는 눈에 잘 띄지 아니한 것뿐이지 자라고 있는 것 자체가 늙어 가는 것이고, 늙어 가는 것이 바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인데, 어찌 등한히 할 수가 있나.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여,

우리의 인생살이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은 물웅덩이에 물이 그 삼복더위에 가뭄이 계속이 될 때에 물웅덩이에 물이 매일같이 바짝바짝 바짝바짝 밭아 들어가는데, 그 적은 물속에 송사리떼, 크고 작은 그 고기떼들이 펄떡펄떡 펄떡펄떡펄떡펄떡 뛰면서 물은 거의 다 잦아지고 곧 말라 오늘내일 사이에 완전히 말라버리게 생길 때,

송사리란 놈이 그 웅덩이 속에서 팔딱팔딱팔딱팔딱 정식으로 고기가 서지를 못하고 옆으로 이렇게 드러누워서 팔딱팔딱 뛰고 있다가 벌써 한쪽에서는 맥을 못추리고 늘핀하니 죽어가고 있는 그러한 상황이 바로 우리 인생살이다 이것이여.

 

세계 도처(到處)가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있고, 우리도 38선을 놔두고 호시탐탐 남침(南侵)을 노리고 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고 있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것이여.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여.

황야(荒野)를 여행을 하다가 성난 코끼리란 놈이 쫓아옴을 만났다. 도망을 치다가 마치 깊은 샘을 하나 만나. 그래서 그 샘으로 피신을 하는데, 저 깊이 들어가자니 저 밑에는 독룡(毒龍)과 독사(毒蛇)가 우글거리고 있고, 그래 마치 언덕에서 등넝쿨이 떠억 뿌리를 박고 거기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등넝쿨을 휘어잡고 매달려 갖고 있다 그말이여.

 

코끼리란 놈은 그 샘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밖에서 코를 내두르면서 위협을 하고 있고, 저 밑으로 들어가자니 독룡 독사가 있고, 그런데 팔은 아파 죽겠지만—그러자 그 칡덩쿨 뿌럭지 있는 데다가 벌이 벌집을 지어 놓고, 그런데 그 날씨가 더우니까 그 벌집에서 꿀이 넘쳐 가지고 꿀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처음에는 무엇이 입술에 톡 떨어져서 무의식 중에 혀로 입술을 핥으니까, 아! 다디달다 그말이여.

 

조금 있으니까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해서 그 꿀방울을 입을 벌리고 인자 정식으로 똑 똑 떨어지는 것을 받아 먹고 있는 것이 너무 달고 좋은 바람에 코끼리가 바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독룡 독사가 저 밑에 자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마저도 망각을 하고.(21분40초~42분49초)

 

 

 

 

(3/3)----------------

 

그런데 흰쥐와 검은쥐 두 마리가 나와 가지고, 칡넝쿨(등넝쿨)을 검은쥐가 한번 갉고 나면 흰쥐가 한번 또 갉고, 흰쥐가 한번 갉아먹고 나면 검은쥐가 한번 갉고.

 

쥐란 놈은 시간만 있으면 무엇을 긁어야 돼. 긁어서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 긁고 가만히 놔두면 송곳니가 길어나 가지고, 웃송곳니는 길어서 아랫턱을 뚫고 내려가고, 아랫 송곳니는 길어나 가지고 웃입바탕을 뚫고 나가가지고 자동으로 죽게 되기 때문에 시간만 있으면 딱딱딱딱 이를 갖다가 갈아야 된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집에서 보면 창고에 공연히 뭘 갉아 가지고 못쓰게 맨든 걸 보는데 그건 쥐의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또 이가 날카로워야 뭘 또 먹을 수도 있고, 그 본능적으로 그런 건데.

 

해필 그 칡넝쿨 하나에 매달려 가지고 지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그 칡넝쿨을 와서 긁고 있는 그런 못된 쥐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얼마 안 가면 뚝 떨어지면 죽게 되어 있는데 꿀 받아 먹는 재미로 그것마저도 모르고 있다 그말이여.

 

고대로 가만히 있자니 칡넝쿨이 뚝 떨어지면 죽고, 올라가자니 코끼리란 놈이 기다리고 있고, 내려가자니 독룡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어. 어떻게 하면은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것이 ‘안수정등(岸樹井藤) 기능장구(豈能長久)냐. 언덕 나무에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 있는, 이 등넝쿨이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

‘안수정등(岸樹井藤)’이라고 하는 공안(公案)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건 불가(佛家)에 뿐만이 아니라 세속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고, 동양뿐만이 아니라 서양에도 이러한 이와 똑같은 수수께끼와 같은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이 우물의 칡덩쿨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여러분도 심심하면 한번 이 수수께끼를 풀어 보시고, 가정에 돌아가시면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나 손자 딸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건 공안이라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너무 이 공안이 재미가 있는, 우리 인생을 고대로 표현한 공안이기 때문에 세속에서 수수께끼로 풀어 봐도 재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를—자꾸 이 죽음을 향해서 짧아져 가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독룡 독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숨이 끊어지자마자 염라대왕이, 저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축생 아니면 지옥, 육도(六途) 생사윤회(生死輪廻)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달콤한 꿀이 똑 똑 떨어진 것은 인생에 오욕락(五欲樂)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욕락은 재산에 대한 욕심, 그 다음에 이성 간에 색욕에 대한 욕심, 본능, 그 다음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식욕에 대한 즐거움, 그 다음에 명예와 권리에 대한 욕심, 다음에는 즐겁고 편안하게 놀고 쉬는 그러한 즐거움, 이것을 인생의 오욕락이라 하는데.

재(財) · 색(色) · 식(食) · 명(名) · 수(睡), 이 다섯 가지의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 세월이 지내가는 것을 망각(忘却)하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실도 망각하고, 무상살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고 하는 것도 망각하고, 이러다가 뚝 떨어지면은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삼악도(三惡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아무리 그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우리가 망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흰쥐 검은쥐는 계속해서 칡넝쿨을 쏠고 있기 때문에 칡넝쿨은 결정코 마침내 끊어져 버리고야만 말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여기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느냐?

 

 

앞으로 석달 동안 정진할라면, 삼복성념(三伏盛炎)에 앉았을라면 그 땀이 흐르고 흘러서 오금쟁이가 짓무르고 궁뎅이에 땀띠가 나서 피부병이 생기고, 앉았으면은 더워서 땀은 등허리에서 줄줄 흘르고,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릴라고 해도 혼침(昏沈)이 오고, 그러한 어려운 정진 기간입니다마는, 어렵다고 아니하면 누가 내 대신 공부를 해 줄 것이냐?

아무리 더워도 공부는 해야 하고, 아무리 추워도 공부는 해야 하고, 아무리 피로해도 공부는 해야 하고, 아무리 아파도 공부는 해야 하고.

 

어리석게 하지 말고 지혜롭게 공부를 해 가야 한다. 가행정진, 용맹정진 대단히 좋지만, 어리석게 하면 퇴태(退怠)의 인연이 된다.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마장(魔障)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반드시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살님들도 가정에서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마는, 여기 백일기도에 동참(同參)을 하시면 여러 보살님들도 이 안거(安居)에 방부(房付)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백일기도에 한 분도 빠지지 말고 동참을 하시고 법회가 있을 때엔 꼭 참석을 하시고.

집에서 가정일 돌보시면서 아들딸 가르키면서 살림하시면서 앉았을 때나, 섰을 때에나, 일을 하실 때에나, 공양을 하실 때에나, 또는 어디를 가실 때 차를 타실 때에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시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다그쳐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님 제자에는 머리 깎은 스님네만이 제자가 아니라, 재가제자(在家弟子) 우바새 · 우바이, 비구 · 비구니가 이것이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별을 지어 놓으셨지만 도업(道業)을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여.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스님네보다도 마을에 계신 여러분들이야말로 더 간절히 알뜰히 공부를 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스님네보다도 몇 배, 몇십 배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업(業)의 구렁텅이에서 해탈(解脫)하시게 되고, 생사윤회의 구렁텅이에서 해탈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스님네는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가 정성스럽게 바친 보시와 공양에 의해서 이 도(道)를 닦아가야 할 이 소중한 육체를 보전해 나가고, 그러한 여러분의 신심과 공양하는 공덕으로 도업을 잘 닦아서 스스로 깨닫고 나아가서는 많은 중생을 제도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질적으로 정성으로 부처님과 법과 스님네를 잘 공양하고 보호하고 받듬으로써 스님으로부터서는 법(法)의 보시(布施)를 받는 것입니다.

재물을 물질을 여러분은 스님네에게 보시하고, 스님네는 수행으로써 여러분에게 법보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밤낮 보시만 하고, 스님네는 우리한테 무엇을 보시를 해 주느냐?'

법을 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숙명통(宿命通)을 얻지를 못해서 전생사(前生事)를 잊어버려서 잘 모릅니다마는, 전생에 여러분이 스님이었었고 우리가 신도였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전생에) 우리가 신도가 되어서, 스님으로 공부하시는 여러분에게 보시를 해서 그 인연으로 금생에는 우리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고, 여러분은 세속에서 신도가 되어 가지고 교대해서 여러분이 우리를 또 이렇게 보시를 하고 우리를 잘 공양을 해서 우리를 이렇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가운데 혹 숙명통이 열린 분이 보면 틀림없이 그러한 인연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시기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야말로 그 공덕이 한량이 없이 크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무주상으로 보시를 하고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해서 스님네가 어쨌든지 영양보충을 충분히 해서 건강한 육체로 건전한 정신으로 정진을 잘해서 결정코 금생에 대도를 성취하도록 잘해 주시고.

그 공덕으로 여러분 가정에는 항시 신심과 기쁨이 넘쳐 흘러서 모든 재앙은 다 물러나가 버리고, 크고 작은 소원이 차례로 다 성취가 되어서 부처님 제자로서 만복(萬福)을 성취하고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을 갖추어 구족(具足)해서, 위로는 보리(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서 모든 사람이 자기로 인해서 부처님께 귀의(歸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인연이 되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오늘도 강영선 보살이라고 하는 신심 있는 보살이 대중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양을 기쁜 마음으로 받으시고 그 인연으로 ‘법(法)의 기쁨과 선(禪)의 기쁨’,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얻으셔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 강영선 보살님과 함께—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다시 만나서 대도를 성취할 인연이 되기를 부처님께 축원을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절히 일러드리는 말씀을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후생에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가서 ‘아! 내가 그때 송담 스님이 그렇게 목이 쇠도록 일러준 그 말할 때 공연히 아들 핑계, 딸 핑계, 살림 핑계, 무슨 핑계,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내가지고 내가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어째서 내가 그때 열심히 공부를 안 했던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저승에 가서 아무리 후회하고 한탄을 해봤자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참선해 나가는 구체적인 법문에 대해서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을 통해서 너무너무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생략을 하고 하좌하겠습니다.(42분50초~60분3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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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黃鶯上樹一枝花 白鷺下野千點雪’ ; 『오등회원(五燈會元)』 제15권 「奉先深禪師」 참고.

師曰 ‘古人道白鷺下田千點雪,黃鶯上樹一枝花’ 維那作麼生商量?

*(게송) ‘夜來風雨客聞先 春山依舊草堂前’ ; 『매천집』 (제3권) (매천 황현의 시문집) ‘復至文星齋’ 참고.

[참고] 『매천집(梅泉集)』 (제3권) - 시(詩) : 신축고(辛丑稿)

다시 문성재에 이르러〔復至文星齋〕 (한국고전번역원, 박헌순 역)

夜來風雨客聞先 隔嶺思家轉杳然 已過頭番摘茶候 將蕪一畝種蔘田 老懷慣與同庚話 詩訣勤從後輩傳 世事十年驚百變 春山依舊草堂前

 

밤에 부는 비바람 소리 나그네가 먼저 듣고, 고개 너머 고향 집이 더욱 아득히 생각나네. 첫 찻잎 딸 시기는 이미 제철 지나갔고, 한 뙈기 인삼 밭은 장차 묵밭이 되어 가리.

늙은이 회포를 익숙하게 동갑 벗과 주고받고, 시 짓는 비결은 부지런히 후배에게 전해 주네. 세상일은 십 년 동안 백번이나 변했지만, 봄 산은 예전처럼 초당 앞에 우뚝하네.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 전남 광양 출생. 한말의 시인, 문장가, 우국지사.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의 치욕을 당하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9월10일 음독 자결하였다.

*연록(軟綠 연할 연/초록빛 록) ; 연한 녹색. 연녹색. 연한 초록색(草綠色).

*금수강산(錦繡江山) ; 비단에 수를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천.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3,000리가 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범연(泛然)히 ; ①두드러진 데가 없이 평범하게. ②특별한 관심이 없어 데면데면하게.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무상설법(無上說法) ; 진리를 깨닫게 하는 최고의 가르침.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샛별 ; 새벽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어떠한 도인(道人)은 복숭아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달으시기도 하고' ;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1권) (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730.

福州靈雲志勤禪師本州長溪人也 初在潙山因桃華悟道 有偈曰 三十來年尋劍客 幾逢落葉幾抽枝 自從一見桃華後 直至如今更不疑 祐師覽偈詰其所悟與之符契 祐曰 從緣悟達永無退失 善自護持

 

복주(福州)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 그는 본주(本州 : 福州)의 장계(長溪) 사람이니, 처음에 위산에 있다가 복사꽃을 보고서는 도를 깨닫고 게송을 지었다.

 

30년 동안 검(劍)을 찾던 나그네여. 몇 차례나 잎이 지고 가지가 돋았나.

스스로 복사꽃을 한 차례 본 뒤로는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는 의심치 않네.

 

영우(靈祐)가 이 게송을 보고 그 깨달은 바를 따져서 서로 계합하였다. 영우가 말했다.

"인연 따라 깨달아 도달했으니, 영원히 물러나지 않으리니 잘 보호하여 간직하라"

 

*'어떠한 도인은 물 흘러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

[참고]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이두촉주(以頭觸柱 머리를 기둥에 부딪치다)’에서.

中峰本禪師 侍高峰死關 晝夜精勤 困則以頭觸柱 一日 誦金剛經 至荷擔如來處 恍然開解 自謂所證未極 彌益勤苦 咨決無怠 及觀流水 乃大悟

評曰 自謂所證未極 故終至極處 今之以途路 爲到家者 衆矣 嗟夫

 

중봉본(中峰本) 선사는 사관(死關)에서 고봉(高峰) 화상을 모시고 주야로 정진하며 지내는데, 곤(困)하면 머리를 기둥에 부딪치곤 했다. 하루는 금강경을 외우다가 '하담여래처(荷擔如來處)'라는 대목에 이르러 환하게 개해(開解)하더니 스스로 말하기를 "증한 바가 아직 구경(究竟)이 아니다"하고 더욱 힘써 정진하여 부지런히 법을 묻고 결택하더니, 어느 날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대오(大悟)하였다.

(평) 중봉선사는 스스로 '증한 바가 구경이 아니다'라 했으니, 그런 까닭으로 마침내 지극한 곳에 이르렀거늘 지금에 길위에 있으면서도 집에 이른 것으로 아는 자가 많으니 딱한 일이다.

 

*'어떠한 도인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기도 하고' ;

[참고]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 : 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 · 지리산 · 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祖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뀌다 ; ‘꿰다’의 사투리.

*점진적(漸進的 점점 점/나아갈 진/조사 적) ; ①점차로 조금씩 나아가는. ②점차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비약적(飛躍的 날 비/뛸 약/조사 적) ; ①단계를 껑충 뛰어 아주 빠르고 눈부시게 발전, 향상하는. 정상적인 단계를 차례로 밟지 않는. ②단계를 껑충 뛰어 아주 빠르고 눈부시게 발전, 향상하는 것. 정상적인 단계를 차례로 밟지 않는 것.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한 번 뛰어 여래(如來)의 경지에 바로 들어간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 범어 tathā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참고] 『증도가(證道歌)』 (영가永嘉 스님)에서.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깨닫고 나면 공(功)을 베풀지 않으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같지 않다. 상(相)에 머문 보시는 천상에 나는 복이나,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내생(來生)에 뜻과 같지 않음을 초래하게 되리라.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貪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것만 하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엽은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네. 내, 이제 여의주를 아나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그런데 이 공부가 마냥 한결같이 잘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에는 순풍에 돛 달듯이 화두가 저절로 들리면서 성성하게 잘되어 가다가, 또 어떤 때에는 뚝 변해 가지고 영 답답하고 머리가 개운치를 못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어찌해 볼 수 없이 그렇게 애를 먹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끌고 깊은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는 것처럼, 되게 고삐를 땡겨서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면 할수록 나귀는 뒤로 버티고 안 들어올라고, 이렇게 공부하기가 어렵고 힘이 든 때도 있습니다.

 

수월하게 잘될 때 보다도 이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힘이 들고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질 때, 그때가 훨씬 중대한 중요한 고비라 하는 것을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서장(書狀)』에도 대혜(大慧) 스님께서 그 점에 대해서 누누히 강조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고비’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 · 『대혜서(大慧書)』 · 『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그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애를 먹을 때, 그때! 선용기심(善用其心), 잘 그 마음을 잡드리해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 나가면 그 고비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고비다 이 말씀이여.공부가 한 걸음 나아갈라면은 그러한 그와 같은 경계를 만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고비를 잘 넘기고 나면 그다음부터서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고 '힘을 얻게 된다[得力]' 이것입니다 ; 득력(得力).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게송)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 ; ‘우거진 풀밭길 걷지 않으면 꽃이 지는 마을에 가긴 어려워.’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66 (가로판 p174)

*(게송)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 중국 남송 세대의 시인, 육유(陸遊)의 시 《遊山西村》 참고.

莫笑農家臘酒渾,豊年留客足鷄豚。山重水復疑無路,柳暗花明又一村。 簫鼓追隨春社近,衣冠簡樸古風存。從今若許閑乘月,拄杖無時夜叩門。

 

[참고] 송담스님(No.523)—93년(계유년)성도재 법회(93.12.08.음)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해. 목적지를 찾아서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데 이제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니 물도 다 끊어지고 산도 콱 막혀서 인자 더이상 갈 곳이 없구나. 내가 갈 곳은 어디냐? 이렇게 물도 끊어지고 산도 콱 막혀서 이제 길이 콱 끊어졌으니 ‘이제는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그러나 거기서 쉬지 않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서 한 고개를 넘어가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다. 파란 버들은 그윽히 휘늘어지고 밝은 꽃은 환하니 핀 또 한 마을이 거기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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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정도. 그 만큼. 그 수준.

*만날(萬-) ; ①어떤 경우든 한결같이. ②특정한 시간에 한정되지 않고 어느 때든. ③때를 가리지 않을 만큼 매우 자주.

*골때리다 ; 어이없고 터무니없다.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짓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지옥에 가겠다(떨어지리라) ;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602 ~ 675)

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참고 ②]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 (백운화상초록 白雲和尙抄錄) ‘승고선사(承古禪師 ? ~ 1045)’

承古禪師 常勸諸人 莫學佛法 但自無心去 利根人晝時解脫 鈍根人或三五年 遠不過十年 若不悟去 老僧 替你入拔舌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1231 ~ 1298 또는 1308) (용화선원刊) p97-99.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참고 ④] 「고봉화상선요·어록(高峰和尙禪要·語錄)」 ‘立限示衆(其九)—9. 기한을 정하고 대중에게 보임’ (고봉원묘 高峰原妙 1238 ~ 1295)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85, p88 참고.

參禪 若要剋日成功 如墮千尺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萬思量 單單只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工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西峰今日 犯大妄語 永墮拔舌犁耕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몽산 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등한(等閒)히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일찰나(一刹那) ; 극히 짧은 순간.

*억겁(億劫) ; 무한히 길고 오랜 세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7언 30구(210자)의 게송으로 지은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 法性偈」에 나오는 구절.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 한 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법성게(法性偈) ;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義湘 625 ~702) 스님이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지은 7언 30구(210자)의 게송. 210자를 54개의 각(角 굴절)이 있는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의 게송을 말한다.

*(게송) ‘금오출몰촉년광~’ ; 『관음예문(觀音禮文)』 (용화선원刊)에 있는 ‘무상게(無常偈)’ p35, p64 참고.

刹那生滅無常法 聚散循環有漏因 金烏出沒促年光 玉兎昇沈催老像

忍受井枯魚少水 寧容象逼鼠侵藤 覩玆脆境早修行 勤念彌陀生極樂

 

한 찰나에 생하고 멸하는 것이 무상한 법이며,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것은 번뇌[有漏]의 원인이네. 해[金烏]는 떳다 지면서 세월을 재촉하고, 달[玉兎]은 떳다 지면서 내 늙음 재촉하네.

우물이 말라 물이 적은 것 물고기는 어찌 참으며, 미친 코끼리에게 쫓기고 쥐는 등넝쿨을 갉나니, 이같이 위급함을 절실히 알아 속히 수행을 하고, 부지런히 아미타 부처님 염(念)하여 극락왕생하세.

*밭다 ; (무엇이) 바싹 졸아서 물기가 거의 없어지다.

*잦다 ; (액체가)졸아들어 밑바닥에 깔리다.

*늘핀하다 ; ‘늘펀하다(여기저기 널려있는 모양)’의 사투리.

*도처(到處 이를 도/곳 처) ; 여러 곳. 이르는 곳.

*38선(三八線) ;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1945년 8월15일 맥아더가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 미·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점령 군사분계선.

38선은 1953년 6 · 25 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현재의 군사분계선과 다르지만, 현재까지도 흔히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시탐탐(虎視眈眈 범 호/볼 시/노려볼 탐) ; 범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기회를 노리고 형세를 살피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황야(荒野 거칠 황/들 야) ; 버려진 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거칠게 된 들판.

*뿌럭지 ; ‘뿌리’의 사투리.

*다디달다 ; 매우 달다.

 

 

 

 

----------------(3/3)

 

*해필(奚必 어찌 해/반드시 필) ; ‘다른 경우도 있을 텐데 어찌하여 꼭’이라는 뜻으로 마음에 맞지 않거나 서운할 때 쓰는 말.

*안수정등 기능장구(岸樹井藤 豈能長久) ;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참고] 『치문경훈(緇門警訓)』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에서.

夫業繫受身 未免形累 稟父母之遺體 假衆緣而共成 雖乃四大扶持 常相違背 無常老病 不與人期 朝存夕亡 刹那異世 譬如春霜曉露 焂忽卽無 岸樹井藤 豈能長久 念念迅速 一刹那間 轉息 卽是來生 何乃晏然空過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의 더러움을 면치 못한다. 부모가 내려주신 유체(遺體, 父精母血)를 받아 여러 인연을 임시로 빌려 함께 이루었다. 비록 다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견디어내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져 무상(無常)한 노병(老病)이 사람으로 더불어 때를 정하여 약속하지 않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봄서리 새벽이슬과 같아 갑자기 없어지며,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순간 순간 빠르고 빨라서 일찰나 사이에 숨이 떨어지면 곧 내생이니, 어찌 편안히 헛되게 지내리요.

*위산(潙山) : (771 – 853) 법명은 영우(靈祐), 속성은 조(趙)씨。당나라(唐) 대종(代宗) 때에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장계(長鷄)에서 났다。열 다섯 살에 출가하고, 스물 셋에 백장선사(百丈禪師)의 법회에 가서 공부하였다.

추운 겨울에 밤늦도록 방장실(方丈室)에 올라가서 문법(問法)하는데, 화상이 『화로에 불이 있느냐?』고 묻기에, 대강 뒤져보다가 불이 없다고 대답하였다。화상은 친히 화로 속을 깊게 뒤져서 작은 불덩이 하나를 집어 들고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하는 데서 크게 깨쳤다.

 

그 뒤에 호남성(湖南省) 담주(潭州) 장사부(長沙府)에 있는 위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자, 그곳에 가서 사십여 년 교화하여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회중이 항상 일천 오백 명을 넘었고, 입실(入室)하여 법을 이은 제자가 사십 일 명이었다。당나라 선종(宣宗) 7년에 입적하니 나이 83세, 법랍이 64세。그의 제자 중에서 앙산(仰山) • 향엄(香嚴) • 영운(靈雲) 등이 뛰어났다。저술로는 「위산경책(潙山警策)」 그 밖에 「어록(語錄)」등이 많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육도 생사윤회(六途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삼복(三伏) ; ①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성염(盛炎 성할 성/불꽃·더울 염) ; 매우 심한 더위. 또는 최고조에 달한 더위.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 헤살 ;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 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재가제자(在家弟子) ; 집에 있으면서 스님처럼 도를 닦는 사람.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말=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善業)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구렁텅이 ; ①깊고 험하게 땅이 움푹 팬 곳. ②헤어나기 어려운 나쁜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법보시(法布施) ; 남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불서(佛書)를 베풂.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보시(布施) : [범] dana 음을 따라 단나(檀那)라고도 쓴다。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전생사(前生事) ; ①'전생(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에 있었던 일. ②'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05~106에서.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p141~145, 『금강경오가해 설의 - 육조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p101~104.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육조 스님 해의解義)

부차(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범부(凡夫)의 보시는 다만 아름다운 외모와 오욕의 쾌락을 구하는 고로, 그 과보가 다하면 곧 삼악도(三惡途 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지므로, 세존께서 크나큰 자비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행하도록 가르치시니, 아름다운 외모나 오욕(五欲)의 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色布施)’이니라.

 

무상(無相)의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相布施)'라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布施)를 행할 때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十方)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일설에 '보(布)'란 '普(넓다)'요, '시(施)'란 '散(사방에 흩어버린다)'이니, 가슴 가운데 있는 모든 망념·습기·번뇌를 널리 흩어버려 사상(四相)도 끊어지고 마음에 전혀 쌓여 있지 않는 것이 '참 보시(眞布施)'라 하며, 또 일설에는 '보(布)'란 '普'니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머물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분별도 하지 않아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함이니라.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않으면 오직 온갖 업(業)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밖이 상응하여야 무량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지 않아서 자성(自性)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이상(離相)'이 되느니라.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인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고, 능소심(能所心)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신)의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니 이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도다. 항상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보시)를 행하여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대중공양(大衆供養) ; ①수행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 ②대중이 함께 식사하는 일.

*만복(萬福) ; 온갖 복.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4분 42초)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 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 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빠짐없이 두루 갖춤.

*보리(菩提) ; ‘bodhi’의 음사(音寫). 각(覺)•지(智)•도(道)라고 번역. 모든 집착을 끊은 깨달음의 지혜.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법문 내용]

 

(게송)황앵상수일지화~ / 육근을 통해 받아 들여지는 육식이 바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무상설법(無上說法) / 부처님과 조사들의 오도 기연 / 깨달음은 비약적인 것, 일초직입여래지, 그러므로 이 공부는 일분일초도 등한히 할 수 없다 / 공부가 안될 때 선용기심(善用其心)하라 / (게송) 不行芳草路 難至落花村, 山盡水窮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참으로 확철대오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 오조(五祖) 홍인대사의 맹세, 몽산(蒙山) 스님도 맹세. 화두 의단타파 확철대오하는 이 도리를 산승(山僧)도 부처님을 모시고 증명합니다 /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다 /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바라보고, 지금의 일찰나(一刹那)를 등한히 한다.

 

(게송)금오출몰촉년광~ / 우리의 인생살이가 바짝 마른 물웅덩이 안에 있는 물고기 신세 / 안수정등(岸樹井藤) /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 생사해탈하는데 있어 신도는 스님네보다 몇십 배 간절히 정진을 해야 / 스님과 신도가 여러 생을 지내는 동안 서로 교대로, 공부하고 또 공부하게끔 공양을 해 주고 있다 /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핑계 안돼!

 

 

범연(泛然)히 보면, 예사로 보면, 봄이 오니까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이 돌아오니까 이렇게 무성하게 잎이 모다 피어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평범한 일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 평범한 현실이 입으로 설할 수 없고,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에 진리를 남음이 없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찰나에 깨달을런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거각(擧却)하고 성성적적한 상태로 정진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애를 먹을 때 그때, 선용기심(善用其心), 잘 그 마음을 잡드리해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 나가면 그 고비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고비다.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해서 이게 맥혀 가지고 인자 길이 없지 않나? 이렇게 의심했더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다. 버들은 그윽히 드리워져 있고,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또 한 마을이 있더라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셔서 1초 1초를 금쪽같이 아껴서 공부하고,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화두를 거각해서 등한(等閒)히 지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바른 지도에 의해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그래 가지고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고,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봐도 산의 빛깔과 모냥에 대해서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걸어가되 걸어가는 줄을 모르고, 앉았으되 앉아있는 줄을 모르고, 천 명 만 명 사람이 있는 데에 서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오직 화두의 의단 하나만이 성성적적하게 독로하고. 이러한 경계에 들어가서도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누가 나로 하여금 이럴 때에 툭!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도 말고, 다못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가야 일주일이 가지 아니해서 반드시 의단이 타파가 되어서 확철대오를 할 것이다. 이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여. 역대조사가 다 그러한 과정을 다 겪으셨어.

 

‘이것이 만약에 거짓이라면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고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도 맹세를 하셨고, 몽산(蒙山) 스님도 맹세를 하셨고, 산승(山僧)도 이 도리를 믿고 여러분 앞에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여러분에게 선언을 합니다.

출가한 목적은 오직 이 한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해결하는 이 밖에는 다시 무엇이 있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바라보고, 지금의 일찰나(一刹那)를 등한히 한다’ 그랬습니다.진실한 수행인은 ‘앞으로 잘하리라’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당장 지금 이 찰나에 허리를 쭉 펴고 화두를 간절히 드는 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 학자의 수행 자세인 것입니다.

 

오욕락은 재산에 대한 욕심, 이성 간에 색욕에 대한 욕심, 본능,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식욕에 대한 즐거움, 명예와 권리에 대한 욕심, 즐겁고 편안하게 놀고 쉬는 그러한 즐거움, 이것을 인생의 오욕락이라 하는데. 재(財) · 색(色) · 식(食) · 명(名) · 수(睡), 이 다섯 가지의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 세월이 지내가는 것을 망각(忘却)하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실도 망각하고, 무상살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고 하는 것도 망각하고, 이러다가 뚝 떨어지면은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삼악도(三惡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아무리 그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우리가 망각을 하고 있다 하드라도, 흰쥐 검은쥐는 계속해서 칡넝쿨을 쏠고 있기 때문에 칡넝쿨은 결정코 마침내 끊어져 버리고야만 말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여기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느냐?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마장(魔障)이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에는 머리 깎은 스님네만이 제자가 아니라, 우바새, 우바이, 비구 비구니가 이것이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별을 지어 놓으셨지만 도업(道業)을 닦아 가는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여.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스님네보다도 마을에 계신 여러분들이야말로 더 간절히 알뜰히 공부를 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스님네보다도 몇 배, 몇십 배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업(業)의 구렁텅이에서 해탈(解脫)하시게 되고, 생사윤회의 구렁텅이에서 해탈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숙명통(宿命通)을 얻지를 못해서 전생사(前生事)를 잊어버려서 잘 모릅니다마는, 전생에 여러분이 스님이었었고 우리가 신도였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전생에) 우리가 신도가 되어서, 스님으로 공부하시는 여러분에게 보시를 해서 그 인연으로 금생에는 우리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고, 여러분은 세속에서 신도가 되어 가지고 교대해서 여러분이 우리를 또 이렇게 보시를 하고 우리를 잘 공양을 해서 우리를 이렇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가운데 혹 숙명통이 열린 분이 보면 틀림없이 그러한 인연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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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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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