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1~73)/(26~50)2020. 11. 15. 11:14

(세등선원No.31)—경신년 동안거 반결제 법어(80.11.22) (44분)

(1) 약 22분. (2) 약 22분.

(1)------------------


삼십년래반고향(三十年來返故鄕)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

청산불어춘천모(靑山不語春天暮)  두우일성래묘망(杜宇一聲來杳茫)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偈頌)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고향에 돌아가셔서, 고향에 가셔서 읊으신 게송입니다. 출가하셔 가지고 도를 닦아서 견성(見性)하신 뒤에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느끼신 바를 읊으신 게송입니다.

그런데 그 고향이 당신이 태어난, 육신이 태어난 그 고향에 돌아가서 그래 가지고 읊었다고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그 깨달음의 본고향(本故鄕)에 돌아가셔서 읊었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십년래반고향(三十年來返故鄕)하니,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니,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이라, 사람도 죽고 집도 다 허물어지고 마을도 또한 다 황폐해 버렸더라.


청산(靑山)은 불어춘천모(不語春天暮)헌데, 푸른 산은 말이 없고 봄 산은 저물었는데,

두우일성내묘망(杜宇一聲來杳茫)이라. 두견새, 두견이 한 소리가 아득히 오는구나.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은—이 게송, 도인(道人)이 읊으신 게송(偈頌)이라 하는 것은 중생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 가지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깨달은 참 경계는 설명해 줄 수도 없고 또 분별심으로 따져서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글의 그 뜻은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은, 중생의 온갖 분별심, 사량심 그런 것, 번뇌 망상 이런 것들이 다 끊어져 버린 경계를 읊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청산(靑山)은 불어춘천모(不語春天暮)헌데  두우일성내묘망(杜宇一聲來杳茫)은, 바로 그 깨달은 경지를 읊으신 것이다. 이런 정도는 우리가 얘기할 수가 있는 것이고.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언제나 말을 한 바와 같이,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도 누누이 말씀을 하신 바와 같이—아난존자(阿難尊者)가 30년을 부처님 시자(侍者)를 했는데,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한마디, 한 글귀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그것을 듣고 다 외우고 있었다 그말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깨닫지를 못했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시기를 「니가 천일 동안을, 여천일학혜(汝千日學慧)가 불여일일학도(不如一日學道)니라.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를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약불학도(若不學道)면, 만약 도를 배우지 아니하면, 적수(滴水)도 난소(難消)니라. 한 방울 물도 소화를 시키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난존자를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30년 동안을 시봉(侍奉)을 하면서 다 법문 한마디를 놓치지 아니하고 주르르허니 녹음해 놓은 것처럼 그렇게 다 외와 알고 있는데, 지금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은 어느 강원을 가거나, 어느 선방을 가거나 다 칭찬을 할 것이여. 그런데 왜 부처님은 꾸짖으셨습니까?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도(道)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가리킬 수 없고, 따져서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여.


요새 참선을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고 있는데, 특히 거사들, 청년들, 학생들, 굉장히 그 참선에 대한 열의가 있어서 모다 이 공부할려고 애를 쓰고 있고, 또 비구니 스님들이 그렇게 여기저기 선방이 꽉꽉 차 가지고 모다 정진을 할려고 애를 쓰고 있고,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고 모다 대단히 좋은 현상이나, 참선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제각기 바르게 한다고 생각하고 애를 쓰고 있지만, 공부하고 있는 내용을 잘 알아보면 썩 그렇게 올바르게 하고 있는 사람이 적더라. 어째서 그러냐?


'그 스승이 어떻게 참선을 지도를 하고 있느냐? 어떻게 지도하는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느냐? 어떠한 방법으로 참선을 하느냐?' 그것이 대단히 중대한 문제가 되아 가지고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법은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 이외의—화두에 대해서 사량심으로 따지고 분별심으로 더듬어서 그렇게 짐작해 가고 그러한 참선은 올바른 참선이 아니다.

그런데 간혹 들으면, 와서 자기 공부해 나가는 경계, 소증처(所證處)를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떠한 선지식(善知識)은 화두(話頭)를, 자기 본참화두를 놔두고 이 공안 저 공안을 힌트를 줘 가면서 설파(說破)를 해서 학자로 하여금 무슨 화두에 대한 알음알이로 해석을 하도록 은근히 그렇게 이끌어 가는 그러한 큰스님이 계시지 않은가?


내가 직접 그 선지식을 만나서 듣지는 안 했지만, 그 선지식 밑에서 공부를 해 가지고 거기서 '어떠한 공안을 어떻게 어떻게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보았다' 그래 가지고 나한테 와서 그것을 점검을 받으러 온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그렇게 와서 얘기한 것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나는 생각을 하나,

그 와서 말한 사람한테는 '니가 잘못 알아들었지 그 스님이 그렇게 지도를 할 까닭이 없다'고 그렇게 말을 막아 버리기는 했지만, 혹 여러분 가운데에도 그러한 식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결정코 그것이 바른 참선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공안을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또 분별심, 설파를 해 가지고 그 학자로 하여금 가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하는 이러한 참선은 백년을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하나도 걸림이 없이 환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마침내 분별심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하는 것이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앉았어도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 동안을 지혜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도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참으로 올바르게 도를 닦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신 바가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여.


천 인, 만 인이 공부를 해도, 이 문중에 들어와서 공부를 해도 겨우 세 개, 너댓 개, 3~4명—천 명 가운데에, 천만 명 가운데에 다못 세 사람이나 댓 사람 정도 밖에는 도를 얻은 사람이 없는 까닭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고 앉았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결국은 재앙(災殃)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금생에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그 재앙이 누겁(累劫)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벽 선사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삿된 방법으로 그릇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금생에 도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을 앙화(殃禍)를 누겁을 두고, 여러 겁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하기는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숨이 딱! 끊어질 때까지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화두를 들고 숨을 거두어야만, 내생에 다시 사람 몸을 받아서 금방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또 공부를 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젊어서, 이 금생에 공부한 그 뒤를 이어서 하게 되기 때문에, 바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금생에 마지막 죽을 때까지라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내생에 다시 정법(正法)을 만나게 될는지 기약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삿된 스승 밑에 가서 외도(外道)의 제자가 되기가 십상팔구(十常八九)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삿된 도를 만나서 삿되게 닦으면 결국은 무엇이 되는 것이냐 그말이여.



오늘이 동짓달 그믐날 가져야 할 법회를 땡겨서 오늘 스무 이튿날 반살림 법회를 갖게 되는데, 벌써 경신년 삼동안거(三冬安居)가 벌써 절반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나갔다.

하루하루, 그 1분 1분이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해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한 달이 지내고, 그렇게 해서 석 달 90일 동안이라고 하는 기간이 길다고 하면 길지만, 잠깐 새다 그말이여.


벌써 절반이 지내갔는데 과연 지나간 반살림 동안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을 했는가? 오늘 한번 각자 반성을 해 볼 것이며, 과연 지난 반살림 동안을 알뜰하게 철저하게 정진을 했나 못했나?

철저하게 정진을 한 사람은 앞으로 남은 반살림을 더욱 철저하게 정진을 할 것이고, 반성을 해 본 결과 '아무래도 내가 실다웁게 정진을 못했다, 알차게 공부를 못했다'고 반성이 된 사람은 그 부족한 점을 돌이켜서 정말 철저히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선지식들이 참 일생 동안을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 애써서 정진한 스님네도 마지막 열반하실 때에는 한결같이 '내가 일생 동안을 실컷 정진을 못하고 가는 것이 참 한스럽다'고 이러한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듣자하니 이 세등선원은 한철 한철, 철을 거듭할수록 좋은 수좌(首座) 스님네들이 모다 모여서 그 정진을 애써서 정진을 한단 말을 항시 듣고 흐뭇하게 생각한 바지만, 과연 이 정진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알뜰하게 공부를 하는 것인가?


앞으로 한 열흘이 지나면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 가행정진 하는 때가 오는데, 원래 인천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생존 시부터 납월팔일 용맹정진을 하지를 못하게 하시고, 평상시와 같이 사분정진(四分精進)으로 정진을 하되 방선(放禪) 시간이라 하더라도 잡담을 하지 말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일여하게 알뜰하게 정진을 하도록 이렇게 권장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에도 용화사에서는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마는, 여기 세등선원은 그전에부터 11시나 12시, 평상시보단 두서너 시간 늦게 자고 또 3시에 일어나고, 일어나서 정진을 하되 입방선(入放禪) 없이 죽 묵언하고 정진을 하도록 이렇게 죽 해왔는데,(처음~21분39초)





(2)------------------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그리고 앉아서만 배기는 것이 과연 그것이 가행정진이며, 용맹정진이냐? 또는 아주 무언(無言)을 하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일종(一種)을 하고 때로는 단식을 하고 그러한 것이 과연 용맹정진이냐?


잠을 안 자는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불면증(不眠症)이 걸린 사람은 참으로 용맹정진을 잘할 것이고, 옆구리를 땅에다 대지 아니한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서 용맹정진을 할 것이 아니냐?

말을 아니한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벙어리는 참으로 공부를 잘할 것이고, 밥을 한 끼니나 두 끼니를 굶는다든지 안 먹는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소화가 안되어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참으로 공부를 잘하게 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밥을 안 먹고, 말을 안 한 것이 절대로 그것이 그것만으로 용맹정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여.


먹을 때 먹고 잠을 잘 때는 자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시 간절한 마음으로 일여(一如)하게 본참화두를 들고 거각(擧却)을 하고,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이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암만 해도 화두가 의심이 안 난다' 이런 말들을 가끔 듣지만,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면 어째서 의심이 없을 것이냐 그말이여.


대관절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눈으로 온갖 것을 색상을 보고, 귀로 온갖 소리를 듣고, 코로 온갖 냄새를 맡고, 혀로 온갖 맛을 보고, 몸으로 온갖 촉감을 느끼는,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10년 전, 20년 전, 백 년 전도 왔다갔다하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는 놈, 이 소소영령한 놈!


일체 것은 다 눈을 통해서 보되 그 「한 물건」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일체 것을 다 만져 보고 잡을 수가 있으되 이 소소영령한 이놈은 잡을 수가 없는 거여. 어떻게 그렇게 소소영령하면서도 찾어보면 자취가 없는데, 왜 의심이 안 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이 「한 물건」

불법(佛法)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 중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서 이 공안(公案)은 주어져 있다 그말이여. 이 과제는 주어져 있어! 그런데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어?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앉고 서고 세수를 하고, 소제(掃除)를 하고 거닐면서도 '이뭣고?'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의심 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여.



여기 앉아서 서울을 생각하면 환해. 여기 앉아서 부산을 생각하면 환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0살이나 15살 때 일을 생각하면 환해. 그러한 정도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여.

간절하게 화두를 들으라 하니까는 잔뜩 육단심(肉團心)을 내 가지고 억지로 이마에다 '적을 소(小)'자나, '내 천(川)'자를 쓰고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여.


여기 앉아서 저 십 리 밖이나 백 리 밖에 서울이나 인천을 생각하면 환허는—그 인천 생각한다고 골치 아퍼지는 사람이 어디가 있고, 서울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골치 아퍼지는 사람이 어디가 있어.

서울도 생각하면 환한 그러한 정도의 생각으로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화두를 들고 있는 거여. '이뭣고?'

알 수 없으면 그게 화두를 들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뭣고?' 「이-하는 이놈이 뭣고?」

먹으면서도 '이뭣고?' 옷을 입으면서도 '이뭣고?' 세수를 하면서도 '이뭣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현전(現前)하도록.


누워 있다고 화두가 안 들려?

포행(布行)을 하기 위해서 일어서면 그 성성(惺惺)한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어!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고, 마루에서 밖으로 나가서 신을 신을 때, 왜 화두가 없어?


겨울에는 날씨가 추워서 문을 닫고 정진을 하니 방안 공기가 탁해지면 자연히 혼침(昏沈)이 오기가 쉬운 것이니, 가끔가끔 문을 열어서 방안 공기를 산산하게 하고. 불을 너무 뜨시게 때 가지고 방안 공기가 더웠다 하면 전체가 꾸벅꾸벅 졸으니까 방안 공기가 18도, 19도, 20도 이상 넘어서는 아니 되고.

불을 때는 사람은 그 불 조정을 잘 하고, 방안 공기가 항시 시원하고 산산하도록 그렇게 맑아야 이 혼침에 빠지지 아니하고 정진이 깨끗하게 잘되는 것이니, 그런 것도 지혜롭게 잘 조정을 하고.


앉어서 너무 혼침이 오면 조용히 나가서 밖에 가서 한 5분간 잠깐 포행을 해서 정신을 깨끗이 해 가지고 그래 또 들어와서 정진하고 하면 참 좋은데, 여럿이 이렇게 대중이 지내는 데에는 자기 혼자 자꾸 들랑달랑해 쌓아도 그것이 또 번폐스러운 것이니까, 그런 것도 잘 대중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잠 깨우러 나간다 해 가지고 어문간 다른 방에 들어가서 잡담을 한다든지, 또는 시내에 개별적으로 자꾸 무슨 이유를 붙여 가지고 시내를 출입을 자주 한다든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고.


정진을 해 보면 성성하게 화두가 잘 들릴 때는 시간이 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중을 모르게 휙 가는데, 영 화두가 잘 들리지 아니하고 혼침에 빠져 가지고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바로 또 혼침에 빠지고 빠지고 할 때는 영 시간이 지루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무릇 몸이 아주 이 개운치를 못하고 그러는데.

그러할 때에 참으로 알뜰하게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서 가다듬어서 화두를 잘 들어 가야 하는 것이여. 그렇게 공부를 지혜롭게 용심을 해서 지어 가다 보면, 또 화두가 순일하게 또 잘 들리는 때가 또 오는 거여.


앉아서나 서서나 행동을 할 때나 누웠을 때나, 화두가 순일하게 지내서 입선 시간이나 방선 시간이 관계가 없이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나타나는데, 마치 가을 하늘처럼 깨끗한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이 경계가 된다.

애써서 정진을 하면 누구에게나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하게 들리면서 그렇게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가 오기 마련인 것이여.


그러한 경지가 오거든, 그러한 경지를 잘 유지를 해 가면서 조금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이러한 경계가 오래오래 계속이 되기를 바래는 그러한 마음도 내지 말고 한결같이 정진을 해 가면, 적적성성(寂寂惺惺)하고 성성적적해서 이 생각이 왔다가 저 생각이 일어나고, 저 생각이 일면 저 생각이 나고 이러한 심로(心路)가, 마음길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 이 몸뚱이가 이 인간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까지도 느끼지를 못해. 그래 가지고 화두가 면면밀밀(綿綿密密)해서 끊어지지 않고.


그러한 때에 지각심(知覺心)을 내서는 안 돼. '이럴 때 툭!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나로 하여금 툭!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거여. 그러한 생각을 내면 그런 생각을 낼 때 벌써 화두 순일(純一)함을 상실하게 되는 거여.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잘 들려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이럴 때 빨리 깨닫기를 바래는 생각도 내지를 말고, 깨닫기를 기달지를 아니하면서 한결같이 공부를 잘 지어 나가면, 앉아서도 화두가 순일하고, 서서 거닐 때도 화두가 순일하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순일하게, 똥을 눌 때도 순일하고, 일을 하고 소지를 하고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화두가 순일하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도 고대로 화두를 든 고대로 잠이 들고,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리고, 그 이튿날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엊저녁에 들고 자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말이여.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고 잠이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가 있다.


마치 그때의 경계가 어떠냐 하면 밝은 하늘에 달이 맑은 물에 비추듯이, 물결이 쳐도 그 밝은 달빛이 그 활활발발(活活潑潑)하게 그 물결 속에—물결은 겉으로 물결은 쳐도 그 물을 뚫어서 저 밑바닥에 비친 그 달빛은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아무리 흔들어도 그 없어지지 아니한,

가운데도 적적(寂寂)해서 흔들림이 없고, 외부로부터 아무리 충격을 가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이렇게 되어 가면 머지않아서 의단(疑團)을 파(破)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하는 거여.


이러한 세 가지 단계를, 정진을 애써서 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여. 이 공부는 결정코 정진을 알뜰히 하는 데에서 이러한 경지를 만나게 되는 거여.


이 화두를 본참화두를 타파해야만 참으로 이 조사공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막연하게 이 의심을 내 가지고 망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해 봤자 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답이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주어 가지고 결국은 정신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이 화두법을 내놓지 않느냐?' 이러한 생각도 해 봤다 그말이여, 옛날에.


절대로 그것이 아니여!

반드시 이 화두를 타파(打破)하면은 이 공안법의 묘(妙)한—반드시 확철대오를 해야만! 이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그래서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오늘도 그 소당파(燒堂婆) 법문도 조실 스님이 해 주셨고, 여러 가지 공안에 대해서 그 말씀하셨지만, 절대로 이 공안이라는 것은 깨달라야만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거여.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알 수 없는 것이고, 알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여.

설사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공안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하더라도 우리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본참, 본참화두(本參話頭)에 충실해야 해. '어째서 무라 했는고?' 무(無)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요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생사해탈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라. 긴밀히 이 화두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에 매화가 피어야 그 매화꽃 향기가 천하를 진동을 하는 것처럼, 정진을 참으로 알뜰히 가행정진, 용맹정진 철저하게 정진을 해야만 확철대오를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반살림 동안 정말 정진을 잘해서 확철대오 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21분40초~43분37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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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십년래반고향~' ; 『청허당집(淸虛堂集)』 3권. '환향(還鄕)'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 : 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본고향(本故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난존자(阿難尊者) : [범] Ananda 음을 따라 아난타(阿難陀)로 쓰고, 줄여서 아난(阿難) 또는 아란이라 하며, 뜻으로 번역하여 환희(歡喜) 또는 경희(慶喜)라고 하니, 「기쁘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사촌이며 조달(調達)의 친 동생이다。부처님 성도하시던 날 밤에 났고, 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25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侍者)로 있었으며 십대제자 가운데서도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그 총명이 놀라웠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가섭존자의 주관으로 왕사성 밖에 있는 필발라굴(畢鉢羅窟 Vaibhara)에서 오백 성승(聖僧)이 모여 경전을 결집하는데 아난존자는 그 때까지 아직 성과(聖果)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섭존자에게 묻기를 『부처님께서 사형(師兄)에게 법을 전하실 때에 금란가사(金襴袈裟) 말고 따로 무엇을 전하신 것이 있읍니까?』


『아난아』

『예?』


『문 밖에 찰간(刹竿)대를 꺾어 버려라! 』하였다。그러나 아난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용맹정진 사흘 만에야 비로소 크게 깨치고 나서, 회의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다 외니 하나도 틀림없음을 대중이 증명하여 경의 결집이 완성된 것이다。그 후 가섭존자로부터 법통(法統)을 받았다가 상나화수(商那和修)에게 법을 전하였다.

*시자(侍者) ; ①시중(侍從)을 드는 사람. ②스승, 장로를 따라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승(高僧)의 가까이서 시중을 들고 명령에 따르며, 항상 용무를 다하는 제자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시기를 「니가 천일 동안을, 여천일학혜(汝千日學慧)가 불여일일학도(不如一日學道)니라.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를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약불학도(若不學道)면, 만약 도를 배우지 아니하면, 적수(滴水)도 난소(難消)니라. 한 방울 물도 소화를 시키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난존자를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선사(黃檗禪師).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71. (가로판 p179)

本分宗師의  全提此句는  如木人唱拍하며  紅爐點雪이요  亦如石火電光이니 學者實不可擬議也니라  故로  古人이  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이요 只重先師不爲我說破라 하시니라


본분 종사가 이 구를 온전히 들어 보이심이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 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니 배우는 자가 참으로 어떻다고 헤아리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씀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시니라.


[참고 ②]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80-181) (가로판 p171~172)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참고 ③]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에서.

학자(學者)에게, 참선(參禪)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


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구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일어나기가 틀린 것입니다.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57분59초~59분25초)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천 인, 만 인이 공부를 해도, 이 문중에 들어와서 공부를 해도 겨우 세 개, 너댓 개, 3,4명—천 명 가운데에, 천만 명 가운데에 다못 세 사람이나 댓 사람 정도 밖에는 도를 얻은 사람이 없는 까닭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고 앉았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결국은 재앙(災殃)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금생에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그 재앙이 누겁(累劫)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벽 선사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선사(黃檗禪師) 「此門中千人萬人 只得三箇五箇 若不將爲事 受殃有日在 故云 著力今生須了却 誰能累劫受餘殃」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인(千人)·만인(萬人)이 있지만 겨우 서너, 너댓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는다. 만약 이 도 닦는 일을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금생에 반드시 끝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오랜 세월(累劫) 남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누겁(累劫 묶을·포갤·쌓을 누/겁·오랜 세월 겁) ; 여러 겁이 쌓여서 이루어진 기간. 곧 한없이 길고 오랜 시간.

*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십상팔구(十常八九) ; 열[十]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사분정진(四分精進) ; 참선이나 기도를 하루 네 번(새벽, 오전, 오후, 저녁)씩 시간을 정해 정진하는 것.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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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오전에만 걸식(乞食)으로 공양하도록 하고, 오후에는 씹을 수 있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육단심(肉團心) : [범] Hrdaya  4심의 하나。 심장을 말함。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되었다 한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어문간 ; '애먼'의 사투리.

*애먼 ; ①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억울하게 느껴지는. ②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엉뚱하게 느껴지는.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지각심(知覺心) : ①바로 이 경계로구나 알았다 깨달았다 하는, 그런 마음。 ②빨리 깨달으려는 마음。누가 깨닫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활발발(活潑潑)하다 ; 더없이 활발하다(생기 있고 힘차며 시원스럽다).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의단(疑團)을 파(破)해 ; 화두(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를 타파(打破).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이러한 세 가지 단계를, 정진을 애써서 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여. 이 공부는 결정코 정진을 알뜰히 하는 데에서 이러한 경지를 만나게 되는 거여' ; 삼개정절(三箇程節). 세 개[三箇]의 정절(程節). 세 가지 단계.

*정절(程節) : ①길목. 길가는 데 종요로운 어귀. ②공부해 나가는 데 중요한 고비.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몽산화상이 총상인에게 보이심)」 p60~64. (가로판 p60~63)

趁逐工夫하야 始終에 不離靜淨二字호리니 靜極하얀 便覺하고 淨極엔 光이 通達하나니라


공부를 해나감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 정(靜)과 조촐할 정(淨) 두 자를 여의지 말지니, 고요함[靜]이 지극하면 곧 깨칠 것이요 조촐함[淨]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하나니라.


氣肅風淸하야 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가 是第一箇程節이니 便宜乘時進步이니라


기운(氣韻)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서 동정(動靜)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 같을 때, 이것이 첫번째 정절(程節)이니, 곧 마땅히 그 때를 타서 나아갈지니라.


如澄秋野水하며 如古廟裏香爐相似하야 寂寂惺惺하야 心路不行時에 亦不知有幻身이 在人間하고 但見箇話頭綿綿不絕하리니 到這裏하얀 塵將息而光將發하리니 是第二箇程節이니라 於斯에 若生*知覺心하면 則斷純一之妙하리니 大害也이니라


마치 맑은 가을 들물 같으며, 옛 사당 안의 향로 같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하야 마음길이 끊어졌을 때, 또한 이 육신이 인간에 있는 것도 모르고 다못 화두만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음을 보리니, 이 속에 이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광명은 장차 발하리니, 이것이 두 번째 정절이니라. 여기에서 만약 지각심(知覺心)을 내면 순일(純一)한 묘(妙)가 끊어지리니 크게 해로우니라.


無此過者는 動靜에 一如하고 寤寐에 惺惺하야 話頭가 現前호대 如透水月華하야 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하야도 不散하며 蕩하야도 不失時에 中寂不搖하며 外撼不動矣리니 是第三箇程節이니 疑團이 破하야 正眼開가 近矣리라


이러한 허물이 없는 사람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고, 자나깨나 성성하야 화두가 앞에 나타나되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 여울물결 가운데 있어 활발발(活潑潑)하야, 대질러도 흩어지지 않으며 헤쳐도 잃지 아니한 때, 중심이 고요하야 흔들리지 아니하며 밖으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세 번째 정절이니 의단이 파하야 정안(正眼)이 열림이 가까우리라.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조사공안(祖師公案) ; 조사가 시설(施說)한 선(禪)의 관문으로서의 공안.

*소당파(燒堂婆) 법문 ;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제30권 1463칙 ‘고목(枯木)’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拈頌說話) 10』 (혜심·각운 지음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428~429.

昔有婆子 供養一庵主 經二十年 常令女子 送飯給侍 一日令女子抱定云 正伊麽如何 庵主云 枯木倚寒嵓 三冬無暖氣 女子歸擧似婆 婆云我二十年 只供養得箇俗漢 遂發起燒却庵


옛날에 어떤 노파가 한 암주(庵主)를 20년 동안 공양하였는데, 항상 딸에게 밥을 보내 시봉(侍奉)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딸로 하여금 꼭 껴안고 물어 보게 하였다. “이럴 때, 어떠하십니까?”

암주가 말하였다.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 따사로운 기운이 없도다”

딸이 돌아와서 노파에게 이야기를 전하니, 노파가 말하였다. “내가 20년 동안 겨우 속한(俗漢)을 공양했구나”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암자를 불질러 버렸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45~47.

만공 스님 당시 각 회상(會上)에서 논란된 바 있는 ‘소당파(燒堂婆)’라고 하는 공안이 있는데, 어떤 암주(庵主)가 공부를 하는데 시주 노파 한 분이 그 스님을 20년간 양식을 정성껏 대어드렸다.

20년이 다된 어느 날, 그 노파는 암주 스님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자기의 예쁜 딸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네가 가서 그 스님을 꼭 껴안고, <스님!  이러한 때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아라” 하였다.


딸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하였더니 그 암주가 답하기를, “고목이 찬바위에 의지하니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枯木倚寒岩 三冬無暖氣)”라고 하였다.

딸은 그대로 어머니께 전했다.  노파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암주의 패궐(敗闕)을 알아차리고 토굴로 가서 “내가 저런 속한(俗漢)이한테 20년간 양식을 대었구나!” 하고는 암주를 쫓아내고 암자를 태워버렸다.


어째서 그 노파는 그렇게 청정하게 지내온 암주를 속한이라고 했을까?  암주는 어째서 속한이를 면치 못하고 쫓겨나야만 했겠는가, 이 무슨 연고인가?  이것이 공안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그 당시 큰스님들께서 모두 한마디씩 하셨지만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고 몇 개만 적어보면, “원앙이 녹수(綠水)를 만났다.” “직접 경계를 쓰겠다.” “배필이 되어 살겠다.” “할을 하겠다.” “방을 쓰겠다.” 등의 답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안에는 ‘할’도 ‘방’도 소용없는 것이다. ‘방’ 내릴 때 벌써 속인이 되어버린 것이고, ‘할(喝)’ 할 때 계행은 파한 것이다.  위에 적은 어떤 답도 속한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대승계는 부처님께서도 범하지 않고서는 설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 공안이 대승계를 판단하는 공안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답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며 찾다가는 벌써 파계승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 함부로 여기에 대해서 입을 열 수가 있을까?  이러한 공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서야 어찌 중생에게 대승계를 함부로 설하겠는가?


큰스님네께서 이르신 답이 많이 있었지만 나로서는 “아닙니다.” 라고만 하여 왔다.  여러 번 답을 이르라는 요청도 받았지만 답할 것이 따로 있지, 이와 같은 공안에 함부로 답을 할 것인가.  미래 학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늘날까지도 끝내 답을 이르지 않았다.

금봉 스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 일러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일러 드리지 않았다.  지금은 금봉 스님마저 돌아가셨으니 누구에게 일러 볼 것인가, 죽어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에게나 일러볼까?

공부하는 학자들이여!  확연(廓然)한 뒤에 한 번 찾아오면 그때는 산승이 더불어 탁마하리라.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긴밀히(緊密- 긴하다·꼭 필요하다·팽팽하다·급박하다 긴/빽빽하다·빈틈없다·자세하다·가깝다 밀) ; 서로의 관계가 틈이 없을 정도로 매우 가깝게.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법문 내용]


(게송)삼십년래반고향~ / 황벽선사 『전심법요』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 도(道)는 교리적으로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가리킬 수 없고, 따져서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했는가? /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신심 · 분심 · 의단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 삼개정절(三箇程節) / 조사공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 반드시 확철대오를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공안을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또 설파를 해 그 학자로 하여금 가늠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하는 이러한 참선은 백년을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걸림이 없이 환히 다 안다 하드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마침내 분별심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생사해탈을 못하는 것이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앉았어도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 동안을 지혜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도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참으로 올바르게 도를 닦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이렇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신 바가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여.


삿된 방법으로 그릇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금생에 도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을 누겁을 두고, 여러 겁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하기는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참 일생 동안을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 애써서 정진한 스님네도 마지막 열반(涅槃)하실 때에는 한결같이 '내가 일생 동안 실컷 정진을 못하고 가는 것이 참 한스럽다'고 이러한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밥을 안 먹고, 말을 안 한 것이 절대로 그것이 그것만으로 용맹정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여.

먹을 때 먹고 잠을 잘 때는 자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시 간절한 마음으로 일여(一如)하게 본참화두를 들고 거각(擧却)을 하고,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이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암만 해도 화두가 의심(疑心)이 안 난다' 이런 말들을 가끔 듣지만,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면 어째서 의심이 없을 것이냐 그말이여.


일체 것은 다 눈을 통해서 보되 그 「한 물건」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일체 것을 다 만져 보고 잡을 수가 있으되 이 소소영령한 이놈은 잡을 수가 없는 거여. 어떻게 그렇게 소소영령하면서도 찾어보면 자취가 없는데, 왜 의심이 안 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이 「한 물건」

불법(佛法)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서 이 공안(公案)은 주어져 있다 그말이여. 이 과제는 주어져 있어! 그런데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어?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앉고 서고 세수를 하고, 소제(掃除)를 하고 거닐면서도 '이뭣고?'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의심 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여.


여기 앉아서 서울을 생각하면 환해. 여기 앉아서 부산을 생각하면 환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0살이나 15살 때 일을 생각하면 환해. 그러한 정도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여. 간절하게 화두를 들으라 하니까는 잔뜩 육단심(肉團心)을 내 가지고 억지로 이마에다 '적을 소(小)'자나, '내 천(川)'자를 쓰고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화두를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해야만 참으로 이 조사공안(祖師公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막연하게 이 의심을 내 가지고 망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해 봤자 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답이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주어 가지고 결국은 정신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이 화두법을 내놓지 않느냐?' 이러한 생각도 해 봤다 그말이여, 옛날에.


절대로 그것이 아니여! 반드시 이 화두를 타파(打破)하면은 이 공안법의 묘(妙)한—반드시 확철대오를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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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