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1~73)/(26~50)2020. 12. 24. 11:02

 

 

((세등선원No.28))—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결제 법문(80.05.30) (54분)

(1/3) 약 18분. (2/3) 약 18분. (3/3) 약 18분.

(1/3)----------------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한데  기조녹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쪼각 흰구름은 강(江) 위로 오는데,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가는고.

 

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낭기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2/3)----------------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락(苦樂)을 같이 하기 위해서 이 세등선원에 모인 사람은, 세상에 모든 인연(因緣)을 다 끊어 버리고 진실(眞實)로 오직 이 생사대사(生死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대중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順應)을 하면서, 인사(人事)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다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사(人事)를 다 닦아야 하는 것이지만,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원에 들어온 이상은 일체 인사를 다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사를 추리기로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환갑이라고 가야 하고, 결혼식 한다고 가야 하고, 누구 죽었다고 가야 하고, 사십구재라고 가야 하고, 백일이라고 가야 하고, 소상(小喪) · 대상(大喪)이라고 가야 하고, 이렇게 인사를 추리고 다니다 가서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이여.

 

주지(住持) 같은 것을 맡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없이 모다 그러한 인사로 오고 가고 하는 수가 있지만, 대중처소(大衆處所)에 한 번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온 이상에는 그러한 인사를 밖으로 다니지 아니해도 그것이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니여. 해제(解制)한 뒤에 얼마든지 인사를 닦을 수가 있는 것이여. 결제(結制) 중에 안 가는 것은 실례가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 가는 것이 인사를 잘 닦는 것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옛날부터 결제 중에는 자기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오더라도 그 부고장(訃告狀)을 본인에게 보여주지 아니하고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해제가 한 다음에사 '이러한 부고가 왔었다'고 하는 것을 알려드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사(人事)를 다 끊어 버리고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하되, '인연 따라서 수용한다'고 하는 것은, 죽이면 죽, 밥이면 밥, 보리밥이면 보리밥, 찰밥이면 찰밥, 반찬이 짠지면 짠지, 된장찌개면 된장찌개, 한 가지도 좋고 두 가지도 좋고 닥치는 대로 먹되, '이렇게 먹어 가지고 어떻게 영양이 보충이 안 되아서 이래 가지고 어떻게 공부를 할까?’ 그것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여. 왜 그러냐?

 

아무리 잘 먹어도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 오욕락(五欲樂) · 탐진치(貪瞋癡)로써 생활을 해 나간 사람은 그것이 살로 가지를 않는 것이고, 오히려 잘 먹는 것이 원인이 되아서 병(病)이 나는 것이고, 짠지나 된장찌개 한두 가지를 가지고 잡곡밥에 밥을 먹어도 탐진치 삼독(三毒)을 돌려서 참선(參禪)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것만 먹어도 충분히 몸을 유지해 나가게 되는 것이여.

이것은 삼천년을 두고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고인(古人)들이 다 실천으로써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어. 산중에 어느 선방, 또는 일본에 그 큰 선방을 가보더라도 짠무 김치, 닥꽝 김치 하나에 된장찌개만 가지고도 영양실종이 되어서 병이 났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어도 충분하게 건강을 유지해 나가고 다 도(道)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한다' 이것입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먹고 입고 이 의식주 문제에 관해서는 그때 형편에 따라서, 오직 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면서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잠은 9시부터 3시까지 그 때를 제외하고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내에 외출(外出)을 하지를 말며, 대중적으로 특별히 허락할 때가 아니면 일체 경(經)을 읽고 외우는 것도 허락을 하지 아니해.

'이렇게 해서 3년간을 한결같이 간절하게 알뜰하게 정진을 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서도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니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몽산(蒙山) 스님께서 대중(大衆)을 향해서 다짐을 하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공부해서 3년을 해 가지고 견성을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맹세(盟誓)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그렇게 3년을 하면 틀림없이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맹세를 하신 것이여.

과연 우리도 지나간 세월을 두고 그렇게 공부를 했던가! 냉정하게 반성(反省)을 해 보고, 그리 못한 사람은 그와 같이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하되 덮어놓고 말 아니한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잠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밥을 굶는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어떠한 그러한 행동에만 치우친, 치우친 행동으로써 공부를 삼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말을 많이 아니한다든지, 음식을 과식을 아니한다든지, 너무 잠을 많이 잔다든지, 이러한 것들이 분명 공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 아니한 것 자체를 궁극에 공부의 목적을 삼는다든지, 잠을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든지, 밥을 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근본(根本)을 망각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에 대오(大悟)를 해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셔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최초에 법문(法門)을 하실 때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지나친 호강을 하는 것도 성실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지만, 너무 지나치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로 공부를 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고 하면은 부처님을, 정반왕(淨飯王)의 명령을 받어서 '부처님을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기어코 모시고 오라. 태자를 모시고 오라' 한 당부를 받고 온 그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들이, 너무 부처님이 발심(發心)을 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도 따라서 출가(出家)해 가지고 도를 닦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도(大道)를 성취할 때까지는 결단코 밥을 먹지 말자,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말자' 이렇게 모다 맹세를 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하룻날, '내가 이렇게 밥을... 덮어놓고 음식을 굶고 육체만을 갖다가 들볶는 이러한 고행(苦行)만을 가지고서는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겠다. 그러니 어쨌튼지 이 몸에 필요한 만큼은 먹여주면서 기운을 챙겨 가지고 그 깨끗한 정신으로 공부를 해야만 이 도(道)는 이루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강으로 가셔서 목욕을 하고, 그때 마치 수자타(Sujātā)라고 하는 마을의 처녀가 유미죽(乳糜粥)을 써 가지고 오는 것을 보시고, 그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유미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교진여들은, '아하. 태자가 마음을 변했구나. 마음이 변해 가지고 도심(道心)이 약해져 가지고 저렇게 수자타가 갖다 바치는 죽을 받아 자셨구나. 그래 가지고서는 우리의 처음에 약속이 다르지 않는가. 싯달태자는 타락(墮落)을 했다. 변심(變心)을 했다. 타락하고 변심한 태자와 우리가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같이 있어 봤자 우리까지 타락을 하고 물들겠다. 그러니 우리는 태자를 버리고 딴 데로 가자'

이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서 녹야원(鹿野苑)이라고 하는 곳으로 떠나가서 자기네끼리 도를 닦고 있었던 것이여.

 

부처님께서 도(道)를 깨달라 가지고, '최초에 내가 누구를 향해서 최초(最初)에 법을(法)을 설(說)할 것인가?' 생각해 보신 결과, 녹야원으로 가서, '그래도 나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 교진여들 다섯 사람이다' 이리 생각을 하시고 교진여가 있는... (녹음 끊김)

 

육체를 갖다가 들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았기 때문에, 고행(苦行)으로써 공부의 목표(目標)를 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성(聖)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잘 먹고, 너무 잠을 많이 자고, 잘 입고, 호강에 빠진 공부가 또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中道)'—지나치게 호강에 빠지지, 편안, 안일(安逸)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게 육체를 들볶지도 아니하는, 적당한 선에서 자고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입되, 그 가운데에 어디에다가 우리에 정진(精進)의 핵심을 맞춰야 하느냐?

본참화두(本參話頭),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하라고 하냐 하면, 단전호흡을 하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만을 간절히 들어 나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머리로 모여서, 피가 머리로 모이고 기운이 머리로 모여 가지고 뒤통수가 뜨끈뜨끈 열이 오르고 모가지가 빳빳해지고, 그래 가지고 맑은 정신이 없어지고, 공부만 하려고 화두만 들려고 하면 골치부터 아파.

이래 가지고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먼저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수승화강(水昇火降), 시원한 물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머리가 시원해지고, 더운 불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서 단전(丹田) 부위 하복부(下腹部)가 따뜻해지도록.

이렇게 해서 시원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더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야 혈액순환이 잘되고 몸이 가볍고 머리가 깨끗하고, 이리해서 몸은 건강해지고 공부는 지장이 없이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직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들 뿐이지, 무슨 정신 헷갈리게 단전호흡을 하냐?' '단전호흡(丹田呼吸) 할라, 화두(話頭) 들라 하면은 정신이 두 갈래로 갈라져 가지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 화두만을 들어야지, 무슨 단전호흡이 필요 있느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화두만 들면, 다행히 그렇게 들어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잘 들리고 수승화강이 잘되어서 조끔도 상기병(上氣病)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좋지만, 까딱하면 상기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지면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안 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제절로 단전호흡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화두만 떠억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된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이 말이여.

그래서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허리만 쭉 펴도 저절로 그 가운데 단전호흡이 되고, 단전호흡이 되면서 화두도 떠억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정신이 헷갈리기 커녕은 오히려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18분45초~36분20초)

 

 

 

 

(3/3)----------------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잠깐 머물르는데—들어마실 때에 ‘코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차츰차츰 저 깊이 아랫배까지 밀어 넣는다’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숨을 저 뒤에, 저 궁딩이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를 말고 약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신다.

 

쭈욱- 저 뒤에서 일직선으로 잡아댕겨.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팔부쯤만 들어마셔.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꼭 3초가 아니라, 약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쉬는데,

이리 해서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로, 저 뒤에로 내밀어 버리는 기분으로 배를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이 하라.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들어마셔 가지고, 머무르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머무르는 호흡을, 머물렀다가 호흡을 쑤욱 뒤로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이 약 5초 동안, 4~5초 동안.

 

이렇게 해서 모두 한 번, 들어마셨다가 · 머물렀다가 · 내쉬는데 약 10초나 11초, 이런 정도가 걸리도록.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또 조끔씩 길게 해도 상관이 없는데, 억지로 그 시간을 늘리려고 무리를 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억지로 무리를 해서 하면 서너 번도 못해서 벌써 숨이 가빠지고 힘이 들어서 오히려 못쓰는 것이니까, 아주 그 30분 동안을 계속해도 조끔도 힘이 들지 않고, 한 시간을 그렇게 해도 힘이 들지 않도록 조끔도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그때 화두(話頭)를 들어라.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안 내고 그렇게 하라.

 

또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하되, 눈은 항상 평상(平常)으로 뜨고 해야 하는 것이여.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눈을 감고 하는 것이 공부가 더 잘된 것 같고, 더 마음이 편안한 것 같고 고요한 것 같은데,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만 절대로 눈을 감고해서는 아니 돼.

눈을 감고 하면 까딱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기 쉽고, 나중에는 이상한 것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해야 성성(惺惺)하고 그러한 잡된 것이 어리대거나 보이는 법이 없다 그 말이여.

 

눈을 평상으로 뜨고 호흡은 극히 자연스럽게 하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천천히 그렇게 하되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떠오르는 생각을 버리려고 하거나, 쫓아내려고 하거나, 그것을 누르려고 하지를 말고, 그냥 고대로 나두고 나는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화두만 딱! 들어버린다 그 말이여.

화두만 딱! 들어 버린 것이 그것이 가장 간단하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지난날 며칠 전에 삼일 동안에 가행정진(加行精進)을 대중들이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더울수록에 더욱 가행정진을 하고, 추울 때에는 추울수록에 가행정진을 하고, 몸에 상태가 안 좋으면 상태가 안 좋을수록에 오히려 정신을 가다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하고, 이리해야 이것이 참선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더운 때를 맞이해서 가행정진을 했다고 하는 사실은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위해서 한 것이지만, 대단히 기특하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까지 석 달 안거(安居) 중에 절반이 지내가고, 앞으로 한 달 반이 남았습니다. 지내간 한 달 반보다도 이제 정말 삼복(三伏)더위가 남아 있습니다. 삼복더위에 그 땀은 줄줄줄줄줄 흐르고 땀띠기는 등어리로 모다 궁뎅이로 땀띠가 나 가지고 긁을 수도 없고, 가렵고 쑤시고 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참 어려운 고비가 남았습니다.

 

그래도 지옥에 가서, '가사(袈裟)를 입은 사람이 정진(精進)을 제대로 못하면 까딱하면 그 가사를 다시 다음 생에 입지를 못하고 지옥(地獄)에 가기가 쉽다'고 하는 것을 고인(古人)들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대중들은 틀림없이 금생(今生)에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내생(來生)에 또다시 사람 몸을 받아서 다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밝히게 되리라고 생각은 되지마는, 만에 하나라도 내생에 지옥고(地獄苦)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금생에 궁딩이에 땀띠가 좀 나고 더운 것쯤이야 오히려 그것을 더 계기 삼아서, 동기 삼아서, 발판 삼아서 더 가행정진을 하되, 지혜스럽게 단속(團束)을 해야 한다.

가행정진을 한답시고 어리석게 공부를 하면, 공부는 성취되지 못하고 병만 나고 다른 사람에게 폐만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지만, 그 대신 지혜롭게 단속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단속한 것이냐?

여태까지 말씀드린 바로 그것이 지혜롭게 단속하는 것이다.

 

어리석게 단속을 하고 어리석게 공부하는 사람은 병(病)만 툭 터져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갖다가 걱정만 끼치고 공부에 큰 지장만 초래하는 것이고,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하는 사람은 그 힘을 얻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발심(發心)을 허것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하라. 굳게, 긴(緊)히 화두(話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할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되게 강추위를 한 뒤 끝에 핀 매화라야 그 향취가 코를 치도록 진동(振動)한 것이다.

그러니 가행정진 용맹정진,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말 알뜰히 단속하여서 철저하게 정진을 해야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경신년 하안거(夏安居) 반살림인 동시에, 수원 청룡사 영선 묘길 비구니 스님과 진주 대원사 총무로 있다가 너무 불사(佛事)에 골몰하다가 과로해서 돌아가신 성옥 행원 비구니 스님의 사십구재(四十九齋) 날입니다.

우리와 같이 출가수행인으로서 일생 동안을 참선을 하고, 또 불사를 하고, 교화(敎化)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위해서 일생 동안을 애를 쓰다가 너무 과로한 탓으로 해서 홀연히 이승을 하직(下直)을 했습니다.

 

일생을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위해서, 불사(佛事)를 위해서 애쓰던 분들이라 반드시 다시 또 새 몸을 받아나 가지고 우리와 같이 또 공부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 틀림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과거 전생(前生)에 지은 업(業)이 남아 있다면, 오늘 이 반살림 법문을 통해서 그러한 업이 춘설(春雪)같이 다 소멸(消滅)이 될 것이고, 도솔천내원궁이나 극락정토 또는 이 사바세계에 속히 돌아와서 일대사(一大事)를 밝혀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부처님께 축원(祝願)을 합니다.

 

생사(生死)는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가 없기 때문에 해탈할 것도 없고, 원래 우리의 불성(佛性)자리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조끔도 다름이 없어서 진묵겁(塵墨劫) 전에 깨달라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상태여 다시 깨달을 것도 없고, 지금 영가(靈駕)는 업(業)으로 뭉쳐진 사대육신(四大肉身)을 인연이 도래(到來)해서 다 버렸을 뿐이요, 오직 그 신령스러운 영각성(靈覺性)만이 이 법상 앞에 참석을 했습니다.

산승의 설법을 빌릴 것도 없이, 그 영각(靈覺), 원각대지(圓覺大智)만이 홀로 드러난 이 상태라, 누구보다도 잘 이 도리를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알 것입니다.

 

대중과 이 자리에 청혼(請魂)된 영선 묘길 영가, 성옥 행원 영가는 주장자를 통해서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보일 것이니,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이 도리와 계합(契合)이 될 것입니다.

 

쿵!(주장자로 법상을 내려치심)

 

남은 반살림 열심히 정진(精進)하셔서, 일생을 통해서 이 한 철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해결하는 중대한 계기(契機)가 되도록 힘써 줄 것을 당부하고 말을 마칩니다.(36분22초~54분1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린다 /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조사관(祖師關)은 곧 화두(공안)을 말함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화두를 관(觀)한다'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 공부는 근본을 망각하지 말고 지혜롭게 해야 / 정진(精進)의 핵심은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 /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된다.

 

단전호흡 방법 /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해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비구니 스님의 49재. 생사는 원래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나'이니,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도리(道理)는 너무나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래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의지하(大意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이 무엇고?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에는,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됩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무엇고?’ 하고 다시 한 번 화두를 드는 것이여.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부처님께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하신 최초의 법문은 '중도(中道)'의 수행을 말씀하심.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근본(根本)을 망각(妄覺)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해야 하는가.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까딱하면 상기병(上氣病) 같은 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져서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아니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저절로 단전호흡이 되고.

나중에 화두만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되고,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참선의 바른 자세(姿勢)와 호흡(呼吸)에 대한 상세한 말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해나가야 이것이 참선(參禪)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