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411)—1990년 동안거 해제(90.02.10) (45분)
(1/3) 약 20분.
(2/3) 약 15분.
(3/3) 약 10분.
(1/3)----------------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기회환(我人山下幾回還)고
나무~아미타불~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상(我人山上)에 기회환(幾回還)고.
저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한 생각 법왕(法王)을 어긴 죄(罪)로 끝없는 하늘가에 떨어져 나와 가지고 몇 번이나 돌아쳤으며,
아인산하(我人山下)에,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그 높고 높은 산 아래로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고, 사랑하고, 부모자식 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는 깊고 깊은 그 강 가운데에 유랑(流浪), 떠돌아다니다가 문듯 스승을 만났어.
그 스승을 만난 그 덕으로,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다. 생사(生死) 없는 상락(常樂)에 고향(故鄕) 길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게 되었구나.
오늘 경오년(庚午年) 정월(正月) 대보름날, 삼동안거(三冬安居) 회향 해제일과 백일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용화선원 대중과 또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또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 대중, 저 의정부 회룡사 선원 대중, 그리고 전주 위봉사 대중들, 기타 저 목포 · 여수 · 광주, 원근 경향(京鄕) 각지(各地)에서 이렇게 해제(解制) 법요식(法要式)을 기해서 이렇게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지난 갑인년(甲寅年) 정월 보름 해제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敬聽)을 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가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금생에 다시 이 자아를 자각(自覺)하는, 내가 나의 자성(自性)을 깨닫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는 정법(正法)을 만났습니다.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이 최상법(最上法)을 만났으니, 그 인연만 하더라도 그 경행(慶幸)하기가 한량(限量)이 없으나, 기왕 이러한 불법을 만났을진대는 정말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겄더라.
한 철, 두 철 내지 세 철, 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소견(所見)이 날 수가 있습니다.
5년 1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있을 뿐, 전혀 소견(所見)이 안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인가 소견이 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5년 10년 해도 소견이 안 난 사람은 공부를 잘 못하고, 한 철 두 철 해서 무엇인가 그 소견이 나면 그것이 좋으냐 하면 그것이 아니여.
'10년 3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소견이 안 나도 공부를 옳게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바르게 공부를 한 거고, 한 철 두 철에 무슨 소견이 났으되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 나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달포 전에 어떤 젊은 수좌(首座) 한 사람이 왔습니다. 그 수좌는 여기서 행자노릇도 하던 사람인데, 어디 가서 중이 되어 가지고 선방(禪房)에도 다니고 여기도 와서도 한 철 지내고 그러던 사람인데, 중간에 쪼끄만한 토굴살이를 하다가, 토굴에 들어가서 정진을 하다가 연탄 불인지, 무슨 숯불인지 피워 놓고 그 가스에 중독이 되어 가지고 기절을 했다가 깨어났는데, 깨고 보니 '깨달랐다'고.
와서 '공안(公案)을 물으라?' 했습니다.
정진(精進)을 알뜰히 해서 소견(所見)이 났다면 당연히 참 물어볼 만도 하고, 또 바른 소견이 났다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면은 우리 이 문중에서,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얼마나 환희(歡喜) 스럽고 얼마나 경행(慶幸)한 일이겠습니까.
'가스에 중독되어서 일어나서 보니 뭐 소견이 났다' 그러니, 물어볼 가치도 없고. 하도 기가 차서.
가스 중독해서 죽었다가 깨어나서 소견이 났다면 선방에다 연탄불 잔뜩 피워 놓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진을 하다가 한 철 두 철 알뜰히 하면 무엇인가 무슨 공안도 이를 것 같고, 공안을 보면은 환희 막힘이 없고, 자기 나름대로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진공(眞空)의 이치(理致), 공(空) 도리, 공의 이치를—일체(一切)가 다 공(空)하고, 돌이나 나무나 그 나름대로 '내가 돌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것이 공(空)한 것이고, 저 해도 '내가 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 해는 해 그대로 그 자체가 공(空)한 것이다.
부처나 중생(衆生)이 둘이 아니고, 사람과 축생이 둘이 아니고, 악(惡)과 선(善)이 둘이 아니요, 밤과 낮이 둘이 아니요, 일체가 다 둘이 아닌 이것이 바로 공(空)이 아니고 무엇이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일러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입니다"
"조주(趙州) 무자(無字)를 일러라"
"무(無)"
'무엇이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놈이 공(空)했으니 거기에 무슨 딴 답(答)이 있을 것이냐' 이래 가지고 무슨 공안(公案)이든지 그렇게 이르기로 하면 천칠백(千七百) 공안이 무엇이 맥힐 것이 있으며, 참구(參究)할 것이 무엇이 더 있느냐?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오면, "참, 공부를 애써서 하다 보면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가지고 본인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여. 착각이니,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 현중현 도리를 바로 봐야지 그런 공(空) 도리,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것 가지고서는 도저히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초견성을 했느니, 한 소식을 했느니' 이러한 스스로 그런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앉었고, 꺼뜻하면은 다른 도반이나 신도들한테 자기는 '초견성을 했다'고 이런 소리하고.
이러한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살림을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그런 소견을 가지고 있는 한(限)은 바른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서장(書狀)』을 배우신 분은 다 아시겠지마는, 증시랑(曾侍郞)이 대혜선사(大慧禪師)한테 묻는 편지(便紙)입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선지식(善知識)에 참(參)해 가지고 이 참선법(參禪法)을 들었는데, 이십에 결혼을 하고 또 벼슬을 하는 중에 이 공부를 철저하게 하지를 못하고 그럭저럭 이렇게 늙었습니다.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입지(立志), 뜻을 세우고 기어코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해야겠다고 하는 이 발원(發願)은 실로 그럭저럭한 생각이 아니고, 깨닫지 못하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고인친증처(古人親證處)에 이르러야만 휴헐지지(休歇之地)를, 큰 휴헐지지를 삼을까 하나이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삼을까 하나이다' 이러한, 그 편지 가운데에 이런 마디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차라리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구경각(究竟覺)을 얻어서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境地)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저는 깨달음을 삼지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증시랑(曾侍郞)은 속가(俗家)에 선비요, 벼슬아치로서 이렇게 철저한 발원(發願)을 했습니다.
하물며 정법(正法)을 믿는 납자(衲子)가, 최상승(最上乘)을 믿는 불자(佛子)로서 정진하다가 잠깐 무슨 소견(所見) 난 거, 공안(公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구경(究竟)의 깨달음도 얻지 못한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어찌 '초견성'이니, '한소식'이니 하고 '알았다'는 생각을 속에 둘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은 사람은 결단코 이러한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삼어서 되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도,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나 소승사과(小乘四果) 중에 최고의 지위(地位)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다 하더라도 '내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이미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라, 어찌 그것이 참 아라한(阿羅漢)이겠느냐.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가를 하겠느냐.
실지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하더라도 '내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될 텐데, 하물며 바른 깨달음을 얻지도 못하고 정진하다가 슬쩍 지내가는 지나쳐 버리는 그러한 일시적(一時的)인 소견을 어찌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감히 이름을 붙일 것이냐 그 말이거든.
우리가 얻지도 못한 것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 자랑하고, 증(證)하지도 못한 것을 '증했다'고 스스로 착각을 하고 남에게 뽐낸다면, 어찌 그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목표로 하고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라 하겠습니까?
이 세상은 온통 사기로써 업(業)을 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불법문중에서, 이 최상승(最上乘) 정법문중(正法門中)에 학자(學者)는 결단코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이며, 불조를 속이지 말 것이며, 중생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어떠한 소견이, 설사 자기도 기약하지 못한 가운데에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否定)을 해 버리고 언제나 백지(白紙)의 초학자(初學者)의 입장에서 알뜰하게 짬지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처음~19분40초)
(2/3)----------------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하고 거래생사일진상(去來生死一眞常)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요, 청정법신(淸淨法身)에는 안과 밖이 없고,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진상(一眞常)이다. 가고 오고, 생(生)하고 사(死)하는,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죽어가는,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이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一) 진상(眞常)이여, 한 참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진리(眞理)다.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만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정상(毘盧頂上)을 걸어가는 것이다.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들어보면, '일념(一念)이 무념(無念)하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요, 불생(不生)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 해탈(解脫)이 곧 열반(涅槃)이다' 경전(經典)에는 다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념(無念)이 불생(不生)이요, 불생이 무심(無心)이요, 무심이 해탈(解脫)이다' 말로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 무념(無念)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번뇌(煩惱)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이 고대로 무기(無記) 속에 요렇게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내가 지금...' 흔히 한참 동안 멍청하게 시간 가는 중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중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한참 그렇게 그런 경지에 있다가 나와서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나왔다'고 보통 그렇게 얘기들 합니다.
그런데 그 '삼매(三昧 samādhi)'를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 '정(定)'인데, 그 정(定)도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이 있어서, 중생이 아무 생각 없이 멍청허게 정(定)에 들어간 그런 것은 다 사정(邪定)이거든.
뱀 같은 거, 구랭이 같은 것도 가을에 개구리 잔뜩 잡아먹고, 초겨울에 잡아먹고 그리고 굴속에 들어가서 삼동내 물 한 방울 안 먹고, 개구리 한 마리, 쥐 한 마리 안 잡아먹고 고대로 삼동(三冬)을 지냈다가 그 이듬해 해동(解冬)이 되고 경첩이 지나고 그러면은 그 속에서 땅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이 삼동내 아무것도 안 먹고, 물 한 모금도 안 먹고 가만 있다 나오니까 그것이 '삼매(三昧)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꺼떡하면 혼침(昏沈)에 빠져서 있다 나와 가지고 '삼매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그러한 착각을 합니다.
무념(無念).
삼세육추(三細六麤), 세 가지 미세한 생각과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이 다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잠기는 것이고, 그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우리 학자(學者)는 선지식으로부터 그 공안 하나를 간택 받아 가지고 그놈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그걸 참구(參究)를 해 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고, 말 길이 있고, 이치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이 그렇게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알 수 없어!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 그 공부가 옳게 해 가는 것이지, '이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저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아!' 이렇게 해서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면 그건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도 참 깨달음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수에서 여까지 와서 화두(話頭)를 타려고 여러분이 오셨는데, 또 앞으로 선방(禪房)에 가기 위해서 또 화두를 타려고 온 수좌(首座)도 있는데, 개별적으로 화두를 일러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법상(法床)에 올라온 김에 새로 화두를 타려고 하는 분, 또 화두를 타서 하되 아직도 어떻게 화두를 참구해야 옳게 한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치 못한 분을 위해서 간단히 화두 참구(參究)하는 법을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엇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무엇인고?' 그래서 '이 무엇고?' 이렇게 하다가,
'지금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구쳐 나가.
그러다 나중에 가서는,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더 다구쳐 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뿐이여!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이렇게만 말해도 벌써 알아듣는 분은 알아듣지만,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또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의 그 녹음법문(錄音法門), 녹음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가셔서 10번, 20번, 백 번, 천 번을 들으면서 자꾸 하다 보면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일체 화두를 자꾸 들어도, 들고 있으면서도 온갖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거든. 일어나되, 그 일어난다고 성화도 대지 말고, 짜증도 내지 말고, 그놈을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못 일어나게 할 것도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들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이여.
그 번뇌(煩惱)가 일어나면은 '그놈이 또 일어난다'고 성화를 대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놈을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을 치신 분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여. 그냥 놔둬 뭐. 놔 두고 '이 뭣고?' 화두(話頭)만 딱! 챙겨 버리면 그만인 것이여.
그놈이 어디서 일어나 간데.
내나 자성(自性)자리에서 그놈이 일어나거든. 그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난 것이니까, 그냥 놔둬 버리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고, 화두를 들어버리면은 저절로 없어질 것을, 그놈을 없애려고 생각을 내니까, 없애려고 하는 그 또 한 새로운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뭣고?'
자꾸 놓치면은 또 '이 뭣고?' 딴생각[別念]이 일어나도 또 '이 뭣고?'
'이 뭣고?' 만 챙겨버리면 그만인 거거던.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렇게 해 나가면 차츰차츰 번뇌 망상은 줄어지고 화두를 드는 시간이 많아져.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질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아! 인자 공부가 잘되는구나. 아! 이것이 바로 무심(無心), 무념(無念)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내면, 그것이 벌써 무념(無念)이 아니고 벌써 망상(妄想)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지지리 애써서 공부해서 공부가 좀 익숙해질만 하면은, '하! 참 좋다. 툭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내면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애석하고 어리석은 짓이 어디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무심(無心). 무심도 오히려 벌써 무심(無心)이라고 할 때 천만리(千萬里) 멀리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
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맞히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다못 꽉 맥힌 의심으로 정말 실(實)답게 참구(參究)해 나가고, 실(實)답게 정진(精進)을 해 나간 데에서 어떠한 찰나에 탁! 터지는 것이지, 정진하면서 그 공안을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렇게 따지면 맞을랑가, 저렇게 일르면 될랑가?' 이렇게 따져 가지고 공안을 보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그렇게 해서... 그것은 알아지는 것이지, 알아진 것이 어찌...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진 것이 어찌 그것이 참 깨달음이 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19분42초~34분28초)
(3/3)----------------
처음에는 생사 없는 도리를 믿다가—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그 말이여.
생사 없는 도리가 있는 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선(參禪)을 하지도 않을 것이여. 경(經)이나 보고, 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그러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있다고 한 것을 믿지 못한 사람은 참선 안 합니다. 아무리 참선이 제일이라고 해도 절대로 하질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정진을 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믿기 까지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마는, 일단 믿었을진대는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 하거던. 여법(如法)하게 해야 하거던.
큰 깨달음으로써 기약을 삼어야지, 조끔 뭔 소견난 거 그런 것은 챙피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없었던 걸로 여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알뜰히 해 나가다 보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아.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다고 해서 그 공부가 거기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가 있는 것이여. 그것이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精進)을 한 것이여.
그렇게 해서 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 증(證)해야만 다시는 퇴전(退轉)을 않는 것이여.
증(證)한 다음에 거기서 공부가 또 끝나냐 하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참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겨우 조끔 공부하다가 스쳐가는 그러한 경계를 가지고 '깨달랐다'고 착각하고, 또 공안을 깨달랐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공부가 다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되겄습니까.
하물며 공안을 타파하지도 못하고, 생사 없는 도리를 바로 깨닫지도 못하고서, 함부래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입을 함부로 벌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망하고, 불법(佛法)을 망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눈을 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해제날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 한마디, 한 구절 만 들어도, 한 편 만을 들어도 해제 법문은 그것으로써 충분합니다마는, 이렇게 여러 선원(禪院)에서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도반을 위해서 제가 이러한 노바심(老婆心)으로 이런 말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앞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할, 또 틀림없이 얻게 될 여러 도반들을 위해서 정말 눈물을 머금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게만 해 가면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것인데, 조그마한 그런 스쳐가는 소견을 가지고 '알았다'는 생각을 가짐으로 해서 공부가 거기서 사견(邪見)에 빠지고, 중도에서 중단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을 정말 가슴 깊이 명심(銘心)해 주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하야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요, 꽃이 피니, 꽃이 산전(山前)에, 산 앞에 활짝 피어 웃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법(無生法)을 설(說)함이로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꽃이 웃는 것이나, 새가 노래하는 것이 낱낱이 스스로 다 무궁(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으니,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그 무궁한 뜻을 바로 봐 버리면, 어디를 가나 무엇을 보나 근본도리(根本道理) 아님이 없도다. 이런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입니다.
바로 깨닫고 보면 무엇이 부처님이 아니며, 무엇이 부처님의 법(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자기의 면목(面目)을 바로 보지 못했으니,
꽃을 봐도 '이 뭣고?'요,
새 우는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산을 봐도 '이 뭣고?'요,
물을 흐르는 것을 봐도 알 수 없는 '이 뭣고?' 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만 나간다면 그 올바르게,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알뜰히만 공부를 지어 간다면 결정코 조사(祖師) 스님들이 우리를 속이지 안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운집하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와 용무생사(用無生死)에 구경(究竟)에 이를 때까지는, 어떠한 소견(所見)이 나더라도 스스로 부정해 버리고, 정말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강조에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34분35초~44분43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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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 ; 『금강경오가해』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함허 득통 스님의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因小利養 捨父逃逝 流落天涯 幾度往返我人山下 幾度出沒恩愛河中 忽逢良友 指示 踏得常樂家鄕 始知昔年生死路 虛送百千閑日月
작은 이익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도망가서 하늘가를 떠도니, 몇 번이나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산하(山下)를 오고갔으며, 몇 번이나 은혜(恩惠)와 애욕(愛欲)의 강물 속에 출몰(出沒)했던가.
홀연히 좋은 친구의 가리킴[指示]을 만나서 즐거운(생사 없는) (마음의) 고향을 밟으니, 비로소 옛날 생사의 길에서 오랜 동안 허송세월했음을 알겠음이로다.
*법왕(法王) : [산스크리트어]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어] dharma, [팔리어]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유랑(流浪 흐를·떠돌 류/물결·떠돌아다닐 랑) ; 일정(一定)한 거처가(목적이) 없이 떠돌아다님. 정처(定處) 없이 떠돌아다님.
*상락(常樂) ; 상락아정(常樂我淨).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 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無爲安樂)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8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경오년(庚午年) ; 1990년.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갑인년(甲寅年) ; 1974년.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 ;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참고 ❶] 『서장(書狀)』 '답탕승상(答湯丞相)' 참고.
人身難得 佛法難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참고 ❷] 『선관책진(禪關策進)』 「제1 제조법어절요(諸祖法語節要 : 여러 조사의 법어 중에서 오직 공부 지어 가는 데에 요긴한 대목만을 뽑아 요약함)」 '황룡사심신선사소참(黃龍死心新禪師小參)' 참고.
諸上座 人身難得 佛法難聞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상좌들이여!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듣기 어려우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인신난득(人身難得) ;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❶]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❷]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경행(慶幸) ; 경사스럽고 다행(多幸)한 일.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소견(所見 도리道理·사리事理 소/생각·견해 견)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달포 ;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공안(화두)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현중현(玄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전강 스님께서는 <일대기 13호> 법문에서 <현중현은 용무생사다>라고 하심.
그리고 <체중현 도리는 자구불요(自救不了), 구중현(句中玄)은 인천위사(人天爲師), 현중현(玄中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된다>라고 하심. 삼현(三玄 현중현, 구중현, 체중현)을 『임제록』의 삼구(三句 1구, 2구, 3구)에 배대함.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가로판 p215, p219)
[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역주(譯註)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❷]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206~207. (가로판 p213~214. p219)
[ 別明臨濟宗旨(별명임제종지) ]
大凡一句中에 具三玄하고 一玄中에 具三要하니 一句는 *無文綵印이요 三玄三要는 有文綵印이라 權實은 玄이요 照用은 要라.
따로 임제종지를 밝힘 : 일구(一句) 가운데 삼현(三玄)이 갖추어 있고, 일현(一玄) 가운데 삼요(三要)가 갖추어 있는데, 일구는 글발이 없는 인(印)이고, 삼현과 삼요는 글발이 있는 인이다. 권도와 실상은 현(玄)이며, 비침과 씀은 요(要)가 된다.
역주(譯註)
무문채인(無文綵印) 또는 무문인(無文印) : 선법(禪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는 수가 있다.
①의리선(義理禪)이란 것은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을 이름이니, 마치 인장으로써 진흙에 찍으면(印泥) 인발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같다.
②여래선(如來禪)이란 것은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어서, 마치 인장을 물에 찍은(印水) 것 같다.
③조사선(祖師禪)이란 것은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이치나 일에 다 걸림 없는 것이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印空) 것과 같은 것이다.
[참고 ❸]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207. (가로판 p214)
[ 三句 ]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라.
삼구 : 첫째 구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세째 구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참고 ❹] 『임제록(臨濟錄)』
師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麼生會 下座
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한 구절[一句]에는 반드시 3현(三玄)의 문이 갖춰져 있고, 한 현[一玄]의 문에는 반드시 3요(三要)가 갖추어 있어서 방편[權]도 있고 활용[用]도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참고 ❺]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1분57초)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참고 ❻]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2분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한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No.282)—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 · 구중현(句中玄) · 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No.466)—1992년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2분26초)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어떤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가려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No.112)—19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36초)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❺]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에서.(4분18초)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미륵불(彌勒佛) :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성불하여 중생을 구제할 것이 예정된 부처님. 현재 도솔천 내원궁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미륵(彌勒) : 대승보살. [범어] Maitreya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등이라고 음사하고, 한역하여 자씨(慈氏).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부처님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현재는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고도 하고, 미래에 성불할 것이 예정된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대혜종고(大慧宗杲) : (1089 – 1163) 경산 종고(徑山宗杲). 법명은 종고, 자는 대혜(大慧), 법호는 묘희(妙喜)이며, 속성은 해(奚)씨. 안휘성(安徽省)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에서 났다.
17세에 출가하여 선주의 명교(明敎)선사에게 가서, 깨친 바가 있은 뒤, 조동종의 장로들께 많이 찾아다니다가 변경(汴京)의 천녕사(天寧寺)에 가서 원오선사의 법을 받아 가지고, 경산의 능인사(能仁寺)에서 크게 교화하였다.
그 때 나라의 정사를 비평하였다는 혐의로, 형주(衡州)에 귀양갔다가 또 얼마 뒤에 매주(梅州)로 옮기게 되었다. 그를 따라갔던 백여 명의 제자 가운데 반수 이상이 그 지방의 풍토병으로 죽었다.
17년 만에 석방되어 다시 경산과 아육왕산 광리사(阿育王山廣利寺)와 전당(錢塘)의 영지사(靈芝寺), 건강(建康)의 보령사(保寧寺) 같은 여러 곳에 있다가, 송나라 효종(孝宗) 융흥(隆興) 1년에 75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 6권, <대혜어록(大慧語錄)> 30권, <법어(法語)> 3권, <대혜보각 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5권, <종문무고(宗門武庫)> 1권, <서장(書狀)> 2권 등이 있고, 법을 이은 제자가 90여 명이 있었다.
그가 교화한 가운데 특히 애쓴 것은 천동 정각(天童正覺)이 주장한 묵조선(默照禪)을 부수어 버리고 활구(活句) 참선을 강조한 것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參) ; ①수행자가 친밀하게 사가(師家, 깨달음의 인가를 받은 지도자, 선禪의 지도자)에 접하여 수행하는 것.
②선문(禪門)에서 사람을 모아, 좌선·설법·염송하는 것을 말함. 이른 아침 하는 것을 조참(早參), 해질 녘에 하는 것을 만참(晚參), 수시로 하는 것을 소참(小參)이라고 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발원(發願) ; 원(願)하는 마음을 냄. 원을 세움.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숭고한 뜻을 성취하려는 결의.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친증처(親證處) ; 친히 증(證,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다)한 곳.
*증(證) ; 산스크리트어 adhigama 또는 adhisajbodha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을 말한다. 증오(證悟) 또는 증득(證得).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를 증과(證果)라고 하며, 최종의 증과는 성불(成佛: 부처가 됨)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10권. (慧遠法師 撰) 同相三道義兩門分別(釋名一 辨體二)
證是知得契會之義 心冥實性亡於分別契會平等 名之爲證
증(證)은 지득계회(知得契會) 즉 앎 · 증득 · 계합 · 깨침을 뜻하는데, 마음이 실성(實性)에 그윽히 잠겨서[冥] 분별을 잊고 실성(實性)에 계합하고 실성(實性)을 깨쳐서 실성(實性)과 평등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휴헐지지(休歇之地 쉬다·그치다 휴/쉬다·그치다 헐/~의 지/장소·자리 지) ; 모든 사량분별을 끊어 불성(佛性)을 깨닫고 생사의 속박을 벗어난 자리.
*안신입명(安身立命) ; 몸을 편안히 하고 명(命)을 세우다.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하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 생사를 벗어나 심신(心身)이 편안해졌음을 표현한 말이다.
*구경각(究竟覺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깨달음 각) ; 깨달음의 극치. 무명(無眀)이 사라지고 깨달음의 본체가 나타나는 경지. 마음의 본원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결코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구경각(究竟覺)은 여래지(如來地) 또는 불지(佛地)를 가리킨다.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최상승(最上乘) ; 최상승법(最上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577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의 음사(音寫). 예류(預流) · 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 · 입류라고 함.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 · 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 · 예류향(預流向)이라 함.
초기불교에서 - 성문(聲聞)으로서 -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견혹(見惑) ; ①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 계급취견(戒禁取見) ·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사다함(斯陀含) ; 산스크리트어 sakṛd-āgāmin 팔리어 sakad-āgāmin의 음사(音寫). 일래(一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성자. 그러나 이 성자는 그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인간계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래(一來)라고 함.
이 경지를 사다함과(斯陀含果) · 일래과(一來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사다함향(斯陀含向) · 일래향(一來向)이라 함.
[수혹(修惑)—① 수도(修道)에서 끊는 번뇌라는 뜻.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는 욕계에 탐(貪)·진(瞋)·치(癡)·만(慢), 색계와 무색계에 각각 탐(貪)·치(癡)·만(慢)의 열 가지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번뇌, 곧 구생기(俱生起)를 말함.]
*아나함(阿那含)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anāgāmin의 음사(音寫). 불환(不還) · 불래(不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완전히 끊은 성자. 이 성자는 색계 · 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환(不還)이라 함.
이 경지를 아나함과(阿那含果) · 불환과(不還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나함향(阿那含向) · 불환향(不還向)이라 함.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어 arhat의 주격 arhan의 음사(音寫). 응공(應供) · 응진(應眞) · 무학(無學) · 이악(離惡) · 살적(殺賊) · 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하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賊),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① 성문(聲聞)들 가운데 최고의 성자. 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하였으며, 해야 할 바를 다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② 존경받을 만한 불제자.
③ 고대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를 일컫는 말.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나 소승사과(小乘四果) 중에 최고의 지위(地位)인 아라한과(阿羅漢果)’ ; 사향사과(四向四果).
*사향사과(四向四果) ;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네 단계의 수행목표[向]와 그 도달경지[果]를 가리키는 말.
수다원(須陀洹 : 預流), 사다함(斯陀含 : 一來), 아나함(阿那含 : 不還), 아라한(阿羅漢 : 無學道)의 넷에 각각 향(向)과 과(果)를 배정하여 「수다원향 · 수다원과」 「사다함향 · 사다함과」 「아나함향 · 아나함과」 「아라한향 · 아라한과」의 여덟이 된다.
수다원향은 일체의 견혹(見惑 : 이론적인 번뇌)을 끊으며, 사다함향 · 아나함향에 의해 일체의 욕계(欲界)의 사혹(思惑 : 情意에 의한 습관적 번뇌)을 끊고, 아라한향에서는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의 사혹을 끊는다.
따라서 삼계의 일체의 견혹 · 사혹의 번뇌가 모두 끊어지면, 이 때에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달성된다.
아라한과는 이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도(無學道 아라한)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일곱은 아직도 상위(上位)가 있어서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경지이므로 칠종유학(七種有學)이라고 한다.
예류(預流 수다원)에서 불환(不還 아나함)까지는 개울의 흐름이나 외갈래길로 상정(想定)하여, 흐름을 타고 있는 자가 예류(預流 수다원), 한 번 뒤로 돌아갈 상태에 있는 자가 일래(一來 사다함), 다시 되돌아가는 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상태를 불환(不還 아나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 ; 사상(四相).
*사상(四相) ;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전도(顚倒)된 생각에서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 분별심.
①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나라는 관념 · 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 · 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 · 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②인상(人相) ; 산스크리트어 pudgala-saṃjñā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③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 · 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④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 · 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 · 생각. 생명체라는 관념 · 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육조구결(六祖口訣).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 p135~136) (『육조 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 p98~99) 참고.
衆生佛性 本無有異 緣有四相 不入無餘涅槃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迷 卽佛是衆生 悟 卽衆生是佛
중생과 불성이 본래 다름이 없건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미(迷)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불(佛)입니다.
迷人 恃有財寶學問族姓 輕慢一切人 名我相 雖行仁義禮智信 而意高自負 不行普敬 言我解行仁義禮智信 不合敬爾 名人相 好事歸己 惡事施人 名衆生相 對境取捨分別 名壽者相 是謂凡夫四相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이나 학문 또는 출신[族姓]이 있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비록 인의예지신을 행하나 뜻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져서 널리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인의예지신을 행할 줄 안다’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음을 인상(人相)이라 합니다.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리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하고,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분별하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하니 이것들을 범부(凡夫)의 사상(四相)이라 합니다.
修行人 亦有四相 心有能所 輕慢衆生 名我相 自恃持戒 輕破戒者 名人相 厭三塗故 願生諸天 是衆生相 心愛長年 而勤修福業 諸執不忘 是壽者相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수행인도 또한 사상(四相)이 있으니,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자신은 계를 지킨다고 파계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인상(人相)이라 합니다.
삼악도의 고통을 싫어하여 천상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요, 오래 살고자 부지런히 복업을 닦으면서도 온갖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 수자상(壽者相)이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생사대사(生死大事) ; 생사사대(生死事大).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가장 중요한 일[一大事].
[참고 ❶]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 德異本) (심재열 역주 | 불국선원) '제6 참청기연(參請機緣 청법의 기연)'에서. p252~253.
현각 : 생사의 일이 크며 무상이 신속합니다.[生死事大 無常迅速]
육조 :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사무쳐 깨닫지 않으며 신속한 무상이 없음을 요달하지 않는가?[何不體取無生 了無速乎]
현각 : 사무쳐 깨달으면 남(生)이 없고, 요달함에 본래로 빠름이 없나이다.[體卽無生 了本無速]
육조 : 그렇도다.[如是如是]
[참고 ❷]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제18권 대혜보각선사보설」 '정성충이 청한 보설(鄭成忠請普說)'에서.
無常迅速 生死事大 彈指便是來生到來 但虛却心 子細推窮 窮來窮去 善念旣相續 惡念自然不生 但如實修行 時節因緣到來 自然悟去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은 크다.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곧 내생(來生)이 도래 하니, 다만 마음을 비우고 자세하게 궁구하라. 궁구하면서 오고 궁구하면서 가다 보면 좋은 생각이 이어지고 나쁜 생각은 자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맛 여실하게 수행하다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 ❸]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宋 온문蘊聞 編) 제19권 ‘示妙證居士(묘증거사에게 보임)(聶寺丞)’에서.
無常迅速 生死事大 衆生界中順生死底事 如麻似粟 撥整了一番 又一番到來 若不把生死兩字貼在鼻尖兒上作對治 則直待臘月三十日 手忙脚亂 如落湯螃蟹時 方始知悔則遲也 若要直截 請從而今便截斷
무상(無常)은 매우 빠르고 생사(生死)의 일은 큽니다. 중생계 속에서 생사에 따르는 일은 삼대나 좁쌀처럼 많아서, 한번 마치고 나면 또 한 차례 닥쳐옵니다.
만약 생사(生死) 이 두 글자를 잡아 코 끝에 붙여놓고 번뇌를 끊지[對治] 않는다면, 곧 납월삼십일 죽음을 맞이해서는 손발을 어지럽고 분주히 떠는 것이 마치 끓는 물에 게를 집어넣을 때와 같으니, 비로소 후회해야 이미 늦은 것입니다. 만약 곧장 끊고자 한다면, 청컨대 지금 곧 절단하십시오.
[참고 ❹]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시진선인(示眞禪人)'
汝旣出家 須立丈夫之志 發勇猛心 深信無常迅速 生死事大 行住坐臥 一切時中 單單不昧此事 切切參詳 如人墮在千尺井中 千思萬想 只是箇單單求出之心 不日內必有相應分 如是用功 若未成辦 佛法無靈驗矣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으니 반드시 대장부의 뜻을 세우고 용맹하게 정진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큰 것을 깊이 믿고, 행주좌와 모든 때에 오로지 이 일을 잊지 말고 절실하게 참상(참구)하여야 한다. 마치 천 길 깊이의 우물에 떨어진 사람이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오로지 빠져나갈 마음만 가진다면 멀지 않은 날에 반드시 그 생각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공을 들이고도 이루지 못한다면 불법에 영험함이 없는 것이리라.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 ; 삼각(三覺).
*삼각(三覺) ; 부처님의 깨침[覺]이 갖는 세 가지 양상[三相]으로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 : 覺滿) 등을 말한다.
[참고 ❶] 『묘법연화경현찬(妙法蓮華經玄贊)』 제1권 (末). (窺基 撰)
梵云佛陀 此略云佛 有慧之主 唐言覺者 覺有三義 一 自覺 勝凡夫 凡夫不自覺故 二 覺他 勝二乘 彼不覺他故 三 覺行圓滿 勝諸菩薩 菩薩雖復修於二 覺行未滿故
범어 불타(佛陀)의 줄임말이 불(佛)이니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고, 각자(覺者)라고 한역한다. 각(覺)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자각(自覺)으로 범부중생보다 뛰어남을 말하는데 범부중생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각타(覺他)로 이승(二乘)보다 뛰어남을 일컫는데 이승은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각행원만(覺行圓滿)으로 여러 보살보다 뛰어남을 뜻하는데 보살이 비록 자각과 각타를 행하지만 그것이 원만구족하지 못하기 떼문이다.
[참고 ❷] 『월인석보(月印釋譜)』 권제9, 12장 앞쪽~뒤쪽.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각(覺 : 佛陀)에 갖춘 세 가지의 뜻으로 삼각(三覺)이라 한다. 자각(自覺)은 스스로 미망(迷妄)을 끊고 정법(正法)을 깨닫는 일이고, 각타(覺他)는 스스로 깨달음과 동시에 법을 설하여 남을 개오(開悟)시켜 생사의 괴로움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며, 각행원만(覺行圓滿)은 근원(根源)을 다 하며 밑에 다달아 수행이 차서 과(果)가 원만한 것임.
*자각(自覺) ; ①자신의 형편이나 처지, 본분 따위를 스스로 깨달음. ②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상태. ③자신의 생각과 언행에 대하여 그것이 진리성과 성실성이 있는지 자신을 반성하는 일. ④[불교] 삼각(三覺)의 하나. 스스로 깨달아 증득(證得)해 알지 못함이 없는 것 또는 중생이 자신의 미망(迷忘)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리를 깨달음을 이른다.
*각타(覺他) ; 부처님의 3각(三覺 : 自覺 · 覺他 · 覺滿) 중의 하나. 자각(自覺)의 상대어. 다른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8권. (담무참曇無讖 역) 「범행품(梵行品)」 第八之四.
云何爲佛 佛者名覺 旣自覺悟 復能覺他
무엇을 불(佛)이라고 하는가. 불(佛)이란 각(覺)이라고 이름한다. 이미 스스로 깨달았으니, 다시 능히 타인을 깨닫게 한다.
*각만(覺滿) ; 깨달음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 곧 자기자신과 중생이 모두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 각행원만(覺行圓滿) 또는 각행궁만(覺行窮滿) 등이라고도 한다.
[참고 ❶] 『대승의장(大乘義章)』 제20권(末) (遠法師 撰) 『십호의(十號義)』
旣能自覺 復能覺他 覺行窮滿 故名爲佛
이미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고 다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과 행위가 궁극적이고 원만하니 그러므로 부처님이라 한다.
[참고 ❷] 송담스님(No.196)—1983년 부처님 개금불사 점안식(83.03.10)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自覺],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覺他], 그래 가지고 이 우주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覺滿]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佛事) 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46분30초~48분47초)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백지(白紙) ; ①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②어떠한 일을 하기 이전의 상태. ③잡념이나 선입관 따위가 없는 상태.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짬지다 ; 일하는 솜씨가 여물고 깐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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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 거래생사일진상(去來生死一眞常)’ ; 불가(佛家) 장의의례(葬儀儀禮) <시다림(尸陀林)>에서 염습(殮襲)의 목욕(沐浴)에 나오는 게송.
*(게송)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야부도천(冶父道川) 스님의 게송 참고.
*청정법신(淸淨法身) ;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진상(眞常) ; 진여상주(眞如常住)라는 뜻으로, 깨달음(열반)의 경지라는 뜻.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 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無爲安樂)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8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 팔자재(八自在)라고도 함. 열반(깨달음)의 4덕(四德, 常樂我淨) 중 아(我)에 8종의 대자재(大自在)의 뜻이 있는 것을 말함.
[참고] 『열반경(涅槃經)』 제 21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③(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之三)' (이운허 옮김 | 동국역경원) p514-516.
善男子 大 名不可思議 若不可思議 一切衆生所不能信 是則名爲大般涅槃 唯佛 菩薩之所見故 名大涅槃 以何因緣復名爲大 以無量因緣然後乃得 故名爲大
선남자여, 크다[大]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음[不可思議]을 말함이니, 만일 헤아릴 수 없어서 일체 중생들이 믿을 수 없으면 대반열반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슨 인연으로 대(大)라 하는가? 한량없는 인연으로써 얻을 수 있으므로 대라 하느니라.
善男子 如世間人 以多因緣之所得者 則名爲大 涅槃亦爾 以多因緣之所得故 故名爲大
云何復名爲大涅槃 有大我故 名大涅槃 涅槃無我 大自在故 名爲大我
선남자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大)라 하나니, 열반도 그러하여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는 것이므로 대(大)라 하느니라.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열반에는 내[我]가 없지만 대자재(大自在)하므로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云何名爲大自在耶 有八自在則名爲我 何等爲八
一者、能示一身以爲多身 身數大小猶如微塵 充滿十方無量世界 如來之身實非微塵 以自在故現微塵身 如是自在則爲大我 <①능시일신위다신(能示一身爲多身)>
어떤 것을 대자재(大自在)하다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八自在]가 있으므로 나[我]라 하나니, 무엇이 여덟인가?
첫째는 한 몸으로 많은 몸을 능히 보이는 것이니, 몸의 수는 마치 미진수와 같아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하며, 여래의 몸은 실재로는 미진수가 아니나 자재로써 미진수의 몸을 나타낸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二者、示一塵身滿於三千大千世界 如來之身實不滿於三千大千世界 何以故 以無礙故 直以自在故 滿三千大千世界 如是自在名爲大我 <②시일진신만대천계(示一塵身滿大千界)>
둘째는 한 티끌 같은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나니, 여래의 몸은 실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 아니지만 걸림이 없는 까닭이며, 자재함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는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三者、能以滿此三千大千世界之身輕擧飛空 過於二十恒河沙等 諸佛世界而無障礙 如來之身實無輕重 以自在故 能爲輕重 如是自在名爲大我 <③대신경거원도(大身輕擧遠到)>
셋째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몸으로 훨훨 날아서 이십 항하사 등의 많은 부처님 세계를 지나가도 장애가 없느니라. 여래의 몸은 가볍고 무거움이 없건만 자재한 연고로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四者、以自在故而得自在 云何自在 如來一心安住不動 所可示化無量形類各令有心 如來有時或造一事 而令衆生各各成辦 如來之身常住一土 而令他土一切悉見 如是自在名爲大我 <④현무량류상거일토(現無量類常居一土)>
넷째는 자재한 연고로 자재를 얻는 것이다. 어떻게 자재한가? 여래의 일심은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지만 , 무량한 형상을 드러내어 각각에 마음이 있게 한다. 여래는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짓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마련하게 하며, 여래의 몸은 언제나 한 세계에 있지만 다른 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五者、根自在故 云何名爲根自在耶 如來一根亦能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如來六根亦不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以自在故 令根自在 如是自在名爲大我 <⑤제근호유(諸根互有)>
다섯째는 근(根, 감관)이 자재한 까닭이니,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변별하고 감촉을 느끼고 법을 인식한다. 여래의 육근(六根)은 또한 색을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 않으며 냄새를 맡지 않고 맛을 구별하지 않으며 감촉을 느끼지 않고 법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재하는 까닭으로 근으로 하여금 자재케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고 하느니라.
六者、以自在故 得一切法 如來之心亦無得想 何以故 無所得故 若是有者 可名爲得 實無所有 云何名得 若使如來計有得想 是則諸佛不得涅槃 以無得故 名得涅槃 以自在故 得一切法 得諸法故 名爲大我 <⑥득일체법무득상(得一切法無得想)>
여섯째는 자재한 까닭으로 일체 법을 얻거니와,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나니, 왜 그런가? 얻을 바가 없는 연고니라.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이름하려니와 실제로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얻었다 하겠는가. 만일 여래께서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모든 부처님들이 열반을 얻는다 할 수가 없지만, 얻음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었다 하느니라. 자재함으로써 일체 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었으므로 대아라 이름하느니라.
七者、說自在故 如來演說一偈之義 經無量劫義亦不盡 所謂若戒 若定 若施 若慧 如來爾時都不生念 我說 彼聽 亦復不生一偈之想 世間之人四句爲偈 隨世俗故 說名爲偈 一切法性亦無有說 以自在故 如來演說 以演說故 名爲大我 <⑦설일게의경무량겁(說一偈義經無量劫)>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므로,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할 때에 무량겁을 지내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니, 계행이거나 선정이거나 보시이거나 지혜 따위니라. 그러나 여래는 조금도 내가 설하고 저가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한 게송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글귀를 한 게송이라 하므로 세상을 따라서 게송이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할 곳이 없지만 자재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八者、如來遍滿一切諸處 猶如虛空 虛空之性不可得見 如來亦爾 實不可見 以自在故 令一切見 如是自在名爲大我 如是大我名大涅槃 以是義故 名大涅槃 <⑧신변제처유여허공(身遍諸處猶如虛空)>
여덟째는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아 볼 수 없지만 자재로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자재를 대아라 이름하는 것이요, 이와 같은 대아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이런 이치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념(無念) ; ①망념이 없는 것. 정념(正念)을 말한다. ②모든 법을 보면서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德異本) ‘제1 오법전의(悟法傳衣, 법을 깨닫고 가사를 전해 받다)’에서.
善知識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팎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일 본심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며, 만일 해탈을 얻는다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또는 이것이 무념(無念)이니라.
何名無念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爲無念 用卽徧一切處 亦不著一切處 但淨本心 使六識 出六門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어찌하여 무념이라 이름하는가? 만일 모든 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무념이니, 작용을 일으킨 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여섯문(六門)을 나오더라도 육진(六塵) 가운데 물들고 뒤섞임이 없어서, 오고 감에 자유롭고 널리 쓰되 걸림이 없으므로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고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若百物 不思 當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善知識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그러나 만일 백가지를 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주 생각을 끊는 이것은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邊見]이라 이름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無念)의 법(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걸림없이 통하며,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느니라.
*비로정상(毘盧頂上) ;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경지.
*비로(毘盧) ;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약칭.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의인화하여 형상화한 부처님.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로, 해석하면 변일체처(遍一切處), 광명변조(光明遍照),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
진리는 어떤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므로, 진리가 곧 부처라고 하는 비로자나불의 관점에 서면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두(頭頭)가 비로(毘盧)다”는 말은 삼라만상 일체가 다 부처 아님이 없고 진리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정상(頂上) ; ①산 따위의 맨 꼭대기. ②그 이상 더없는 최고의 상태.
*'일념(一念)이 무념(無念)하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요, 불생(不生)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 해탈(解脫)이 곧 열반(涅槃)이다' 경전(經典)에는 다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념(無念)이 불생(不生)이요, 불생이 무심(無心)이요, 무심이 해탈(解脫)이다' ; 일념불생(一念不生).
*일념불생(一念不生) ;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 불생(不生).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84, p103 참고.(가로판 p88. 107~108)
斷煩惱가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이 名大涅槃이니라. (註解) 斷者는 能所也요 不生者는 無能所也니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이요, 번뇌가 나지 않는 것이 대열반(大涅槃)이니라.
(주해) 끊는 것은 주체와 객체가 벌어짐이요, ‘나지 않는(不生) 것’은 주체도 객체도 없느니라.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註解) 戒也定也慧也가 擧一具三이요 不是單相이니라.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을 ‘나지 않는다(不生)’고 이름하고, ‘나지 않는 것(不生)’을 무념(無念)이라 하며, 무념을 해탈(解脫)이라 하느니라.
(주해)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가, 하나를 들면 셋이 갖추어 있는 것이요, 홑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410)—1990년 2월 첫째일요법회, 신수기도회향, 입춘법회(90.02.04)(6분10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난 이후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도와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에 들어가서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三途)는 지옥·아귀·축생 삼도요. 사생(四生)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이요.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에사 모든 번뇌의 생각을 씻어 버리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스스로 본고향(本故鄕)에 돌아가게 되었구나.
우리 모든 중생들이 원래는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한 몸뚱이, 한 마음이여. 그런데 그 본심왕을 위배(違背)하고 거기서 배반을 하고 물러나왔다.
'한 생각' 동(動)하지 않았다면 영원토록 법왕(法王)과 같이 살 수가 있을 텐데 한 생각 동(動)해 가지고, 한 생각 삐끗 어긋져 가지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가지고 육도윤회(六途輪廻)—지옥, 아귀, 삼악도(三惡途)를 몇 번이나 들어갔으며 태란습화 사생을 몇 번이나 겪었든가.
경오년 초삼일부터 오늘까지 칠일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입춘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의 법회가 오늘 겹쳤습니다.
그동안 칠 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기도(祈禱)를 봉행하는 가운데 우리 사부대중의 마음은 참회(懺悔)를 하고, 기도를 하고, 발원(發願)을 하고 그래 가지고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이 되고, 번뇌의 생각—그 훨훨 타오르던 탐진치 삼독(三毒)의 번뇌염(煩惱染)이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번뇌(煩惱)가 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념(無念)이고, 무념이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여.
불생이면, 일념불생(一念不生) '한 생각 남이 없는 도리'를 봐 버리면 그것이 바로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소식이더라.(처음~6분27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aksita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삼매(三昧) : 정(定).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 ②[산스크리트어]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을 집중 · 통일시키는 수행, 또는 그 수행으로 이르게 된 평온한 마음 상태.
*정정(正定, 바른 집중) ; 선(善)한 면에서, 마음을 더 높은 보다 더 순수한 알아차림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적인 시도의 결과로 생겨난 ‘마음이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근본무명(根本無明) ; 모든 번뇌(煩惱)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리킨다. 곧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한 생각으로 가장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사윤회의 근본이 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대어. 무시무명(無始無明), 근본혹(根本惑), 근본불각(根本不覺), 근본번뇌(根本煩惱), 원품무명(元品無明) 등과 같은 뜻이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참선(死句參禪)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공안(화두)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
[참고]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12.22)(3분40초)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 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 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 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 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24분20초~28분)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간택(揀擇 가릴 간/가릴 택) ; 사물이나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와 그 정체를 구별하거나 가려서 알아 선택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〇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〇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〇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성화(成火 이룰 성/불·화 화) ; ①매우 귀찮게 졸라 댐. ②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고 속이 탐. 또는 그런 증세.
*묘방(妙方) ; ①기묘한 방법. ②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딴생각[別念] ;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〇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〇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〇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지지리 ; ‘기껏(정도나 힘이 미치는 데까지)’의 사투리.
*지지리 애써서 공부해서 공부가 좀 익숙해질만 하면은, '하! 참 좋다. 툭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내면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애석하고 어리석은 짓이 어디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20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실답게(實-- 열매·본질·참됨·정성스러움·참으로 실) ; 다부지고 알차게. 실속 있게. 빈틈이 없이 착실하게.
----------------(3/3)
*‘생사 없는 도리’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p137~139. (가로판 p133~135)
迷雲이 散盡하면 萬里靑天에 中秋寶月이 湛徹澄源하리니 虛空에 發焰하며 海底에 生煙하야 驀然磕着에 打破重玄하리니 祖師公案을 一串에 都穿하며 諸佛妙理가 無不周圓하리라
미혹의 구름이 다 흩어지면 만리청천(靑天)에 가을달이 깊이 맑은 근원에 사무치리니, 허공에서 불이 나며 바다 밑에서 연기가 나면 문득 맷돌 맞듯 하야 깊은 현관(玄關)을 타파하리니, 조사의 공안을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으며 모든 부처님의 묘한 진리가 두루 원만치 않음이 없으리라.
到伊麼時하얀 早訪高玄하야 機味를 完轉하야 無正無偏하야 明師가 許爾어든 再入林巒하야 茅庵土洞에 苦樂을 隨緣하야 無爲蕩蕩하야 性若白蓮호리니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덕 높은 선지식을 찾아서, 기미(機味)를 완전히 돌려서 바름[正]도 치우침[偏]도 없게 하야, 밝은 스승이 허락하거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서 띳집과 동굴에서 고락을 인연에 따르되 하염없이 탕탕(蕩蕩)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게 할지니.
*퇴전(退轉 물러날 퇴/회전하다·바꾸다·넘어지다 전)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을 다른 데로 옮겨 처음보다 더 밑으로 전락(轉落)함. 퇴타(退墮), 퇴태(退怠)라고도 한다.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
전강 스님께서는 <일대기 13호> 법문에서 <용무생사가 현중현이다>라고 하심.
그리고 <체중현 도리는 자구불요(自救不了), 구중현(句中玄)은 인천위사(人天爲師), 현중현(玄中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된다>라고 하심. 삼현(三玄 현중현, 구중현, 체중현)을 『임제록』의 삼구(三句 1구, 2구, 3구)에 배대함.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修德寺 能仁禪院) 「법훈(法訓)」 '나를 찾는 법—참선법(參禪法)' p262. p264~265.
*공부의 과정(課程)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 •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 • 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체달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 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참고 ❸]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1분57초)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玄中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참고 ❹]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참고 ❺]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가로판 p215, p219)
[ 三玄(삼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역주(譯註)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스스로·저절로 자/말미암을 유/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인 것.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노바심(老婆心) ; 노파(老婆)가 자식 · 손자를 애지중지(愛之重之)하듯이, 스승이 수행자에게 나타내는 자비심. 친절심(親切心). 파심(婆心)이라고도 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게송)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설의(說誼 말씀 설/도리道理·옳다 의) ; 이치를 설함.
*천기(天機 하늘·자연 천/틀·자연·조화·비밀 기) ; ①매우 중대한 기밀. ②만물을 주관하는 하늘이나 대자연의 비밀. 또는 신비.
*누설(漏泄·漏洩 샐 루/샐 설) ; ①비밀이 남에게 은밀히 알려짐. ②기체나 액체 따위가 밖으로 새어 나감.
*무생(無生) ; ①생멸(生滅)을 벗어난 절대의 진리. 생멸(生滅)이 없는 도리. 곧 불생불멸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알고 거기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함. 무생법인(無生法忍).
②성문사과(聲聞四果)의 하나인 아라한(阿羅漢 arhat)의 한역어. 삼계의 번뇌를 여의어 다시 삼계에 목숨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무생이라고 한다. 열반(涅槃)의 번역어.
*무궁(無窮 없을 무/다할·끝날 궁) ; 끝이 없음.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문 내용]
(게송)유락천애기도왕~ / 어떤 젊은 수좌(首座)의 소견 /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인가(印可)를 할 수 있다 / 『서장(書狀)』에 증시랑(曾侍郞)의 철저한 발원(發願) /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
(게송)청정법신무내외~ / '삼매(三昧 samādhi)'는 한문으로 '정(定)' / 정정(正定)과 사정(邪定) /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 /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드는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 / 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음--->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증(證)한 다음에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 / (게송)화소산전누천기~.
〇『서장(書狀)』에서 증시랑(曾侍郞)이 대혜선사(大慧禪師)한테 묻는 편지(便紙).
'차라리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구경각(究竟覺)을 얻어서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境地)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저는 깨달음을 삼지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〇삼세육추(三細六麤), 세 가지 미세한 생각과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이 다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잠기는 것이고, 그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우리 학자(學者)는 선지식으로부터 그 공안 하나를 간택 받아 가지고 그놈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그걸 참구(參究)를 해 가는 것입니다.
〇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〇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맞히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다못 꽉 맥힌 의심으로 정말 실(實)답게 참구(參究)해 나가고, 실(實)답게 정진(精進)을 해 나간 데에서 어떠한 찰나에 탁! 터지는 것이지, 정진하면서 그 공안을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렇게 따지면 맞을랑가, 저렇게 일르면 될랑가?' 이렇게 따져 가지고 공안을 보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알아지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진 것이 어찌 그것이 참 깨달음이 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〇알뜰히 정진해 나가다 보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아.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다고 해서 그 공부가 거기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가 있는 것이여. 그것이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精進)을 한 것이여.
그렇게 해서 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 증(證)해야만 다시는 퇴전(退轉)을 않는 것이여.
증(證)한 다음에 거기서 공부가 또 끝나냐 하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참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
〇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만 나간다면 그 올바르게,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알뜰히만 공부를 지어 간다면 결정코 조사(祖師) 스님들이 우리를 속이지 안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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