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01~425)2017. 3. 9.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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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423)—90년(경오년) 하안거해제 및 8월 첫째일요법회(90.08.05) (73분)


(1/4) 약 21분. (2/4) 약 20분. (3/4) 약 19분. (4/4) 약 13분.


(1/4)----------------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한데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이라. 당당(堂堂)한 대도가 밝고 분명(分明)하거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한 그 밝고 밝은 그 대도가 사람 사람마다 본래부터 원만(圓滿)하게 갖추고 있더라.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진 탓으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여, 영겁토록 만 가지 모양을 나투더라.


아미타불(阿彌陀佛), 서방정토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교주이신 아미타불이나,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현재 이 법당에 운집(雲集)해 계시는 사부대중 여러분이나, 당당한 그 분명한 대도(大道)는 조금도 차등이 없어. 다 똑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 한 생각 어긋진 그 탓으로 해서 서방세계(西方世界) 아미타불은—그 이전에는 법장(法藏)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 스님이 서방세계의 교주 아미타불이 되어 계시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과거에 어느 때는 선혜선인(善慧仙人)이라고 하는 신선으로 계신 때도 있었고, 설산의 수행자로 그런 때도 계셨고, 또 그 이전에는 사슴의 왕이 되시기도 하고, 코끼리의 왕이 되시기도 하고, 기러기 떼의 왕이 되시기도 하고, 그러한 다생(多生)의 여행을 거쳐서 마침내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 사바세계의 교주(敎主)로 하강을 하시게 되었더라.


우리 이 법당에 운집한 사부대중도 언젠가는 우리의 이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는 아미타불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이 되실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그런 보살이 될 수도 있고, 가섭존자나 달마대사와 같은 그러한 조사(祖師)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정진을 게을리하고 해태(懈怠)에 빠져서 탐진치 삼독의 바람에 휘날려서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그럭저럭 지낸다면 영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할 것이다.



오늘 경오년 음력 6월 15일, 하안거 해제일을 맞이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양력 8월 5일 첫째 일요법회날인데, 원래 일요법회는 오후 2시부터 시작이 되는데 오늘 해제 법요식과 한날이 되기 때문에 땡겨서 해제 법요식과 일요법회 법요식을 아울러서 갖게 되었습니다.


혹 그런 줄 모르시고 오후 2시에 늦게 참석하실 분도 계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앞에 써 붙이는 안내문을 자세히 보신 분은 빠지지 안 했을 것이고, 또 안내기(案內記)을 노나서 드렸는데 그것을 자세히 보신 분은 착오가 없으시겠으나, 그걸 건성으로 보신 분은 틀림없이 오후 두 시에 일요법회가 있는 줄 알고 늦게 참석하신 분은 착오가 있을 줄 압니다.


금년은 5월에 윤달이 들어서 7월 15일에 해제 법회를 할 텐데 이렇게 6월 보름에 해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월복(越伏)을 하고 윤달이 들고 그래서 금년 4월 안거는 무척 비도 많이 오고, 더웁기도 하고 정진하시기에 참 어려웠을 줄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용화사에 방부 들이신 선방 스님네나 보살선방 보살님네, 그리고 용주사 중앙선원에 방부를 들인 스님네, 또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에 정진하신 스님네라든지 또 회룡사 비구니 선객 스님네 또 전주 위봉사 선방 스님네가 지금 모두 오늘 이 해제 법요식에 여기에 모다 오셨습니다

비록 장소는 몇백 리씩 이렇게 떨어져서 각각 그 처소에서 정진을 하셨지만 모두가 다 전강(田岡) 대종사의, 조실 스님의 법에 의지해서 그 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신 대중이라, 네나 비록 장소는 떨어졌어도 언제나 한 회상(會上)에서, 한 화합대중(和合大衆)으로 정진을 해 왔습니다.


그동안에 그렇게 더웁고, 비가 많이 오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분의 낙오자도 없이 무장무애하게 원만히 안거(安居)를 성취하고, 모다 신심과 수행력이 넘쳐흘러서 그 눈은 샛별처럼 초롱초롱하고 광채가 넘치는 그러한 모습으로 이 한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운집을 해서 원장으로서 그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말세(末世)가 되어서 온 세계가 전쟁이 일어나서 피비린내 나는 그런 전쟁을 현재 하고 있고, 또 언제 터질런지 모르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버티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비록 국가와 국가 간의 전장뿐만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정치적인 싸움, 경제적인 싸움, 온갖 종류의 경쟁 속에서 말세의 투쟁견고(鬪諍堅固) 시대의 양상을 여지없이 노출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전쟁의 투쟁의 견고 시대에 우리 정법을 믿는 법보제자(法寶弟子) 여러분은 그 전쟁이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에서 우러나는 다른 사람과의 투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투쟁,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육적(六賊), 또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의 번뇌의 적(敵)과 싸움을 해서 그 싸움에서 지지 아니하고 삼하안거를 성취한 것은 우리 수행자로서는 훈장이 있다면 어떠한 훈장이라도 받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비록 세속의 싸움은 나라를 뺏거나 또는 땅을 뺏거나 어떤 뜻을 이루면은 그 전쟁이 잠시 또 가라앉고 또 다시 몇 해가 지나면은 또 싸움이 일어나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의 싸움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야만 자신과의 싸움은 끝날 것입니다마는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을 못하면 우리의 자신과의 싸움도 영원히 계속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의 싸움은 원결(怨結)을 맺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설사 이겼다 하더라도 때와 시대가 바뀌면은 또 싸움이 일어나서, 그 싸움은 새로운 싸움을 또 유발시키고 끝없는 원결을 맺게 될 것입니다마는,

자신과의 싸움은 싸움을 열심히 할수록에 보람 있는 싸움이 되고, 정말 마침내는 그 싸움에 자기가 지지 않고 몸과 목숨을 바칠 때 영원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미오이도단재아(迷悟二途端在我)하고  시비이자막수인(是非二字莫隨人)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은 수시용심진(須是用心眞)하라. 수행해 나가는 데는 모름지기 그 마음씀[用心]을 참되게 해라. 진실하게 해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마음이 만약 참되다면 도는 친하기 쉬우니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나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하셨습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어.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한다’

간택(揀擇), 간택은 이리저리 가리는 거여. 가리고 이것저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리는 것이 간택인데, “그 '간택을 혐의한다'고 한 말이 무서운 간택이라”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 도를 수행을 해 나가는데 그 마음씀을 참되게 해라. 그 마음씀이 참되면은 도는 친하기가 가깝다. 바로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마음 쓴다’고 하는 표현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화두를 들어 나갈 때에—그 화두(話頭), 화두는 다른 말로 하면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그 공안은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고 분석하고 더듬어 들어가고 이런 것이 제일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데에 주의할 것이 바로 이 따지는 것이거든.


공안을 분석하고 따져서 아무리 따지고 따져서 들어가 봤자, 그렇게 따져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천하 없는 그럴싸한 결론을 얻어서 수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으로써 얻어지는 결론이라, 그것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어쨌든지 화두는 ‘이 뭣고?’ 화두를 하던지,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던지, 조주의 무자(無字)를 하던지,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길이 끊어져야 되는 거여.

‘이뭣고?’ 다못 ‘이뭣고?’ 그 의심뿐이여. 앞 생각도 끊어지고 뒷 생각도 끊어지고, ‘이것이 옳게 하는가 그르게 하는가?’ 그런 생각까지도 끊어져버리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또 조주(趙州) 무자(無字), 무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뿐이지, ‘어째서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은가, 어째서 무라고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한 생각도 거기에는 붙어서는 안돼.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런데 무자(無字) 화두는 자고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화두여. 논란이 많지마는 그 무자 화두에 옳게 참해 가지고 참구를 바르게만 하면 그 무자 화두를 타파함으로써 많은 큰 깨달음을 얻은 도인들이 배출을 한 것입니다.(처음~21분2초)



(2/4)----------------


몽산 스님께서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이라고 하는 법어도 설하시고 또 『몽산법어(蒙山法語)』에는 무자 화두가 많이 거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무자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는 분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 무자 화두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몽산 스님의 그 ‘무자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단제(單提)와 전제(全提)가 있는데, (단제는) 그냥 ‘무(無)~~’ 거기는 전혀 의심을 붙이지 않고 ‘무(無)~~’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한테 ‘저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여쭈어 보니까, 조주 스님이 ‘무(無)’ 그러셨단 말이여』


조주 스님이 ‘무(無)’라 그랬으니 ‘무(無)’~, 그냥 ‘무(無)~’하고.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거나 ‘무(無)~~’ 항상 무자(無字)가 끊어지지 않도록. 앉아서도 ‘무(無)’, 서서도 '무(無)’, 밥 먹으면서도 ‘무(無)’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러지 않는 거여, 단제(單提)는 그냥 ‘무(無)~’하고 무자(無字)만을 항상 생각하고, 무자(無字)만을 들어서 ‘무(無)~’ 해 가지고 그 ‘무(無)~’를 관하는 거여. 이것이 단제인데.


전제(全提)는 조주의 뜻, ‘조주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하고 그 조주의 뜻을 의심하는 거여.


그러면 단제(單提)는 어떠한 이익이 있느냐 하면은 항상 ‘무(無)~’하는 무자에다가만 자꾸 정신집중을 하기 때문에 생각이 뭐 복잡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 없어. 그리고 비교적 ‘무(無)~’에 정신집중을 하기가 무난해 그저, 초학자(初學者)로서.

그런데 그 무자(無字)를 하는데 생각을 한 군데다 딱 집중하는 데에는 참 좋은 이익이 있는데, 까딱하면 그 ‘무(無)~~’ 그놈만 들여다보다가 스르르르하니 혼침(昏沈)에 빠지기가 쉽다 그말이여.


왜 혼침에 빠지기 쉽냐 하면은 정신집중이 잘된 반면에 생각이 조용한 데에 이렇게 빠져 가지고 스르르하니 잠이 들어버려. 계속 또 잠이 들다가 또 일어나서 또 ‘무(無)~’

평생 동안 ‘무(無)’하면 정신집중은 비교적 잘되고,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무(無)’ 하나만을 생각하니까 조금도 어려움이 없고 이 생각 저 생각이 안 일어나고 좋은데,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분(分)이 없어.


그저 조용하니 조용한 데에만 집중만 해서 혹 오신통(五神通)까지도 날 수가 있어.

조용하고 고요하고 고요한 데에 집중을 하다보면 저절로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주 무심(無心)경계에 들어가서 혹 오신통은 날른지는 모르나, 확철대오는 할 수가 없다. 누진통(漏盡通)은 할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런데 전제(全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간절히 간절히 의심을 들다보면 의심을 들어서 정신을 성성(惺惺)하게 하는데에는 대단히 좋아.

그런데 성성(惺惺)한 가운데에도 적적(寂寂)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하도록 참구(參究)하는 묘리(妙理)를 얻지 못하면은 공연히 생각이 어지러워. 적적하게 들어가지를 못하고 비교적 성성하기는 하는데 생각이 이렇게 고요해지지를 못하는 흠집이 있어.


그래 가지고 좀 성질이 급하고 그런 양성(陽性)을 가진,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하고 의심을 아주 힘을 써서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 상기(上氣)가 되는 폐단이 있고, 골치가 아파지는 폐단도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몽산 스님은 이 단제(單提)와 전제(全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말씀을 하셨나 하면은, 초학자(初學者)는 단제로써 공부를 지어 나가라. 다맛 ‘무(無)~’하고 단제로 공부를 해 나가면, 그걸 일구월심(日久月深)해 나가면 생각도 가라앉고 망상도 가라앉고, 좀 자리가 잡혀.


더군다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무(無)~~~’ 무(無)를 길게 이렇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 말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무~~~’ 이렇게 단제로 그렇게 일구월심 얼마동안 정진을 해 나가면 순숙(純熟)해져서 망상도 다 가라앉아 버리고 이렇게 된 다음에 전제(全提)로 들어가라 이거여.


단제로 계속하다 보면 너무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맑고 좋으니까 계속해서 단제로만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망상도 가라앉고 그래서 순숙해지면 그때 가서 전제(全提)로 들어라.

‘무(無), 무(無)~~~’가 아니라 ‘무(無)? 어째서 무(無)?’ 그때 가서 ‘어째서?’에다가 의심의 초점을 두어 가지고 의심으로 들어가라 이거거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까지 처음에는 다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무(無)’라고 한 소리까지 안 하고 ‘어째서?’ 그렇게만 해도 벌써 의단(疑團)이 딱 나중에는 드러나게 된다 그말이여.

의단이 드러나면—‘어째서?’ 소리도 안 해도 떠억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한 그 의단이 드러나게 된다면, 뭐 자꾸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런 소리를 자꾸 뜰먹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나 처음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해서 자꾸 의심이 끊어지면 또 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그렇게 길게 여러 글자를 안 하더라도 의심이 들리면은 다못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만 해나가도 된다.


이 초학자가 단제로써 기초를 다져 가지고, 단전호흡과 아울러서 단제로 기초를 다진 뒤에는 ‘무(無)?’ ‘무(無)라니?’ 이렇게만 해도 될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초학자의 단계에서는 단제로 해 가지고, 기초가 이루어져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된 다음에는 전제(全提)로써 화두를 잘 거각(擧却)해 나가면 ‘어째서?’하고 용을 쓰고 이마에다가 힘을 들여서 할 필요가 없다 그말이여.


기초도 되지도 않고,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어째서?’하고 어거지로 힘을 쓰고 한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해 가지고 상기가 일어나고 골치 아픈 병이 생기고, 화두도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할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몽산법어집을 낸 그 몽산 스님의 무자 화두를 관하는 법에는 이렇게까지 참 자상하게 말씀을 해놓으셨고,

또 그렇게 해 나가되 그래도 정진하다 보면 이렇게 겨울에 문을 닫고 정진을 하면은 30분만 지나면은 사람 콧구멍에서 나오는 모다 탄산가스로 인해서 공기가 탁해지고 방안 온도가 높아지면 아무리 성성하게 잡드리를 해도 혼침에 들기가 쉽고, 또 요새처럼 여름에 날씨가 더웁고 그러면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꺼벅꺼벅 졸음이 온다 그말이여.


그럴 때에는 전제(全提)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전제(全提)로 단속을 하고 또 그렇게 하다가도 워낙 산란심(散亂心)이 많으면 그때에는 또 단제로 화두를 들어보라 그말이여. ‘무(無)’ 단제로 한 번 해보고.


화두가 의심이 자꾸 끊어져. 잠깐 들으면 있다가 또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자꾸 이렇게 단절이 되면, 그때는 근제(勤提)를 하라. ‘부지런할 근(勤)’자, 자주자주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라.


그래서 혼침 올 때는 전제(全提)로 들어 보고, 산란심이 일어날 때에는 단제로 한번 대체를 해 보고, 자꾸 화두가 끊어져싸면 근제, ‘부지런할 근(勤)’자 근제로 단속을 하고,

이렇게 해서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서 혼침과 산란과 간단(間斷)을 단절되는 것을 대처해 나가는, 스스로 그걸 잘 방편을 써서 단속을 해 나가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인(古人)이 이 정진(精進)하는 것을 말씀하시기를 마치 깨 한 말을 큰 나무 밑에다가 놓고, 깨알 하나를 들어서 나무 몸퉁이에다가 이렇게 굴려서, 굴려서 올라가 가지고 저 나무 위에다가 빈 그릇을 하나 놔두고, 굴려 올려가 가지고 그 그릇에다가 그 한 말의 깨를 다 올리는 정성.


그냥 평지에서 이렇게 굴린다면은 하기가 쉽겠지만, 서 있는 나무에다가 이렇게 발판을 놓고 또는 사다리를 걸치던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 깨알을 굴려서 올리다가 뚝! 땅에 떨어지면은 다시 또 그 깨를 줏어서 다시 또 올리고,

그래서 간신히 하나를 갖다 올려놓은 다음에는 또 깨알 하나를 다시 또 들어서 올리고 해서, 한 말의 깨를 저 위에 있는 꼭대기에 있는 빈 그릇에다가 다 옮기는 거와 같은 그러한 정도의 정신을 가지고 공안을 참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아마 한 주먹 깨를 올린다 해도 몇 날 며칠이 걸릴 것입니다. 그것이 하다 보면 떨어져 버릴테니까요. 좀 굵은 것 같으면은—굵은 팥알 정도만 되어도 굴리기가 쉬울 텐데, 참깨 알이나 들깨 알 그 쬐끄만 것을 갖다가 굴리다 보면 그것이 한 자도 못 올라가서 떨어지고, 한 치도 못 올라가서는 몇십 번을 떨쿨거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 한 말의 깨를 올릴라면은 3년 갖고도 안되고, 10년 갖고도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지은 그 삼세육추(三細六麤)의 그 미세한 망념과 거칠은 망념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눈으로 들어오는 망념(妄念)으로 인해서 또 화두를 놓치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망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식(六識)이 일어나는데, 그 참 앞으로 컴퓨터가 발달이 되면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그 망상 일어나는 것을 아마 기록할 수 있는 때도 아마 머지않아서 오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을 기록을 해 놓고 보면 참 기구절창할 것입니다.


그러한 망상, 마치 저 호수나 바다에 가면 끝없이 크고 작은 물결이 일어나고, 일어나는 자리에서 또 다시 새로 일어나고 그러듯이, 우리의 진여(眞如)의, 불성(佛性)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끝없는 물결, 망상의 물결이, 그놈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오늘날까지 왔고 영겁을 두고 윤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의 물결을 생각 생각이 돌이키고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그래서 처음 뭐 1년 2년 3년에 그것이...

과거에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하기도 하고, 칠 일 만에 되기도 하고, 구순(九旬) 석 달 만에 되기도 하고, 3년 안에 되기도 하고 하는, 그런 조사 스님네의 일화도 많이 전해옵니다마는 사실 그러한 분들은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가 있고, 우리도 그만큼만 참 몸과 목숨을 바쳐서 한다면 우리도 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연히 욕심을 내서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인다고 해서 이 정진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순서가 있고, 자기의 힘에 따라서 알맞게 해야지, ‘뱁새가 황새 흉을 내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과거에 도인들, 과거에 모다 선각자(先覺者)들이 하신 일도 우리가 그 정신은 어디까지나 본받아야 하지만 그 선지식들이 하신 고대로 우리가 흉내낼 일도 있고, 흉내는 내서는 아니되고 정신만을 본받아서 해야 할 점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조급한 생각을 내서도 아니되고, 그렇다고 해서 미리 겁을 집어먹고 늘어져 쳐져가지고 그렇게 해서도 아니될 것입니다. 이 공부는 지극히 간단하지만 간단하면서도 참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21분3초~40분30초)



(3/4)----------------


『우리 범부(凡夫)도 이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잘 들으면서 열심히 하면 올바른 방법을 터득할 것이고, 올바른 방법을 터득해 가지고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나가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항상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그건 틀림이 없지만 그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용맹심과 또 철저히 믿는 신심과 화두를 거각하는데 있어서 불급불완(不急不緩)한 참 올바른 참구(參究), 대의단이라고 했습니다마는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는 그런 무모한 그러한 참구를 그것을 갖다가 대의단(大疑團)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대의단이어야 합니다마는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하고, 큰 의심 밑에 크게 깨닫고, 작은 의심 밑에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고 이렇게 이 활구참선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고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큰 의심이라고 하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처음부터서 막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하고 억지로 막 몰아붙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잘 익히고, 그리고 단제(單提)로 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 어느 정도 기초를 이루어가지고 그래 가지고 전제(全提)로 들어가서 그 ‘간절하면서도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그러한 간절한 의심, 이건 참 말로써 간단하게 표현하기가 어렵고,

그런 단계를 거쳐서 본인이 꾸준히 일구월심 해 나가면 그 전제(全提),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하는 그 의심, 간절하고도 그 간절한 의심을 거각해 나가는 그것을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의심을 터득을 해야 어디 가서 정진을 하던지 정진하다가 병나는 법이 없습니다.


원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력하게 잘 타고난 근기(根機)는 처음부터서 전제로 몰아붙이고, 단전호흡이고 뭣이고 그까짓 것도 소용없이 한마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 한마디만 듣고 막 몰아붙여도 석 달 안에 또는 일주일 안에, 길어봤자 3년 안에 툭 터져버릴 그러한 근기도 있습니다.


있으나, 하근기(下根機)는 그렇게 몰아붙이면 흔히 상기병이 일어나기도 하고, 골치 아픈 병이 일어나기도 하고, 바른 정진의 힘을 얻기도 전에 병이 먼저 나 가지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그런 분을 종종 저는 만나게 됩니다마는. 그래서 저는 오늘 이런 몽산 스님의 무자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지금 자상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화두 드는 법을 잘 알아서 전제로 잘해 나가시는 분에게는 군더더기 말이 될는지 모릅니다마는, 아직도 이 화두를 드는 요령에 대해서 확연히 모르시는 분, 이제 새로 시작한 초학자들은 오늘 이 산승의 말씀을 잘 듣고 정진하는 데에 어긋짐이 없도록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 이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정진을 해 가지고 결정코 금생에 이 몸으로 확철대오를 하시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상찰나실난측(無常刹那實難測)인데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인고

나무~아미타불~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다.

꿈속에서 한 알갱이 쌀을 탐착하다가 저 천상(天上) 금대(金臺)의 만겁량(萬劫糧), 만겁토록 먹고도 남을 양식을 잃어버리게 되는구나.


이 ‘꿈속의 한 알갱이 쌀’이라 하는 것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우리가 이렇게 몸 받아서 한평생을 사는 것이 이것이 꿈속에서 지금 몸을 받아난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식(業識)으로, 그 업식으로 지은 선악(善惡)의 업연(業緣)으로 지금 이 꿈속에 지금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나 가지고 꿈속에서 살면서도 꿈속인 줄을 모르고 지금 살고—시집 장가들고, 아들딸 낳고 모다 이렇게 또 사업을 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만나는 사람도 꿈속에서 지금 만난 거고, 지금 이렇게 돈을 벌고 살림을 하고 산 것도 그래 가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한 것도 꿈속에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꿈속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은 또 재판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가서 복역을 하고 있고, 또 전생에 지은 복이 있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사람도 그것도 역시 꿈속에서 지금 그러고 있는데,

자기 양에 안 차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돈을 벌어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높은 벼슬을 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고 보면 하나도 실다운 것이 아니고 그것이 다 꿈속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이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그것이 꿈인 줄을 아셨어. 아셨기 때문에 그러한 탐착심(貪着心)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출가 사문(沙門)으로서 도를 닦고 계신 분들이여.

또 인연이 지중(至重)해서 출가는 안했지만 또 출가는 못했지만 세속에 몸담아 계시면서도 그런 데에 퐁 빠지지 아니하고 그저 인연을 어쩔 수가 없어서 인연 속에 있으면서도 정법을 믿고 불법을 믿고 참선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고 계신 거여.


여러분들은 참 그런 분들이라, 그러한 데에 집착해 가지고 만겁량(萬劫糧)을 잃어버리고 다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 빠지시지는 아니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업이 지중해서 업(業) 속에서 살다 보니 아무래도 정진에 지장이 있을 것은 사실입니다.


결제 때 이렇게 방부(房付)를 들이고 와서 계시기도 하고, 부득이해서 가정을 아주 떠날 수가 없는 분은 출퇴근하시기도 하고, 또 출퇴근 할 형편도 못되시는 분은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을 하신 그런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의 처지 속에서 그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하시니 그 참 얼마나 다행하고 얼마나 감사한지를 모릅니다마는,


무상찰나(無常刹那)라 실난측(實難測)이여. 그 무상(無常)하기가 잠깐이여. 헤아릴 수가 없어.

하루에도 몇천 명, 몇만 명씩이 죽어가고 또 몇천 명, 몇만 명이 이렇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태어나도 언제 죽을런지—태어나면서 죽기도 하고, 한 달 만에 죽기도 하고, 10세 이내에 죽기도 하고, 20세 이내에 죽기도 하고, 그 고통을 겪어서 공부하고 이제 살 만큼 되면은 터끄덕 교통사고로 죽고.

그 무상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데,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냐. 어찌 이 무상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한 생각을 돌이켜서 철저하게 자기 생사 문제를 향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안 할까 보냐.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는 세속의 오욕락(五欲樂)에다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우리 이미 세속의 오욕락이 허망한 것인 줄 알고, 발심해서 출가해 가지고 정진한 분상(分上)에는 무엇이 ‘한 알갱이 쌀’이냐?


3년 내지 10년, 20년, 30년 정진을 하다보면 자기 나름대로 소견(所見)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소견이 나는 수가 있고, 자기 나름대로 수행력이 생겨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득력처(得力處)가 있을 수가 있는데,

정진하다가 어떤 그런 확철대오가 아닌 자기 나름대로 얻어지는 득력처—그것이 체중현(體中玄) 도리가 되었건, 어떤 공(空) 도리가 되었건 자기 나름대로 그 득력처, 그것이 바로 이 ‘한 알갱이 쌀’이다.


세속의 명예, 권리, 지위 그런 오욕락에 대한 ‘한 알갱이 쌀’은 그까짓 것 버리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진하다가 자기 나름대로 얻어진 공 도리, 체중현 도리 이런 것은 정말 버리기가 어려워. 따악 그 자기가 얻은 그 견처(見處)를 따악 속에다 간직해 가지고 도저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


여지없이 그것을 버려 버리고 자기 맥히는 공안에 대해서 정진을 다잽이 나가야 정진이 옳게 되고 반드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분(分)이 있지, 조그만한 견처 그놈을 속으로 간직해 가지고 자기도 ‘한소식했다’하는 그러한 생각을 떠억 지니고서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그 사람은 세상없이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어.


이 대중 도반 가운데에 혹 그러한 견처가 있으면 탁! 털어 내놓고 여지없이 털어버리고, 정말 새로 발심(發心)한 순수한 초학자(初學者)가 되어가지고 정말 알뜰히 완전히 초학자의 자세로써 그렇게 정진을 다잽이 할 것을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이 무슨 큰스님이라 하고 그렇게 되어 가지고 남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지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해 가지고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그런 대승심을 가지고 정진하는데,

그까짓 조그마한 소견을 아까워서 버리지를 못하고 그놈을 떠억 간직해 가지고 자기도 한소식했다 하는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남 앞에 으시대봤자 그것 어디다 쓰겠습니까?


이 가운데는 그러한 분이 없으시겠지만 행여나 앞으로라도 어떤 견처가 나오면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이나 선배 앞에 탁! 털어 내놓고 깨끗이 털어버리고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바라고,

또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정진하다가 어떠한 견처가 있으면—청신사 청신녀라고 해서 그런 견처가 없으라는 법도 없고.


부처님 당시의 유마거사(維摩居士)라든지, 중국의 방거사(龐居士)라든지, 우리나라에는 부설거사(浮雪居士)와 같은 그러한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네에 못지않은 그러한 대도사들도 있었고, 또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그러한 훌륭한 도인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비록 머리는 안 깎았지만 그 정법을 믿는 신심과 분심과 대의심에 있어서는 스님네 못지않도록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40분31초~59분45초)



(4/4)----------------


오늘 삼하안거 해제와 또 백일기도 회향과 또 8월 첫째 일요법회, 세 가지 법요식을 아울러서 갖게 되었습니다마는.

대중이 운집해서 정진을 하다 보니 결제(結制)가 필요하고 또 이렇게 해제(解制)가 필요한 것뿐입니다. ‘해제했다’고 해서 우리의 정진에 조금도 해이(解弛)해져서는 아니 될 줄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또 7월 백중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를 천도(薦度)하는 법요식이 있습니다마는 그때 산철 결제 방부를 받게 됩니다. 산철 결제에도 방부를 들이고 또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해제했다’고 해서 해이하시지 말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또 스님네들도 산철 결제에 방부 들이실 분은 들이고, 들일지라도 어쨌든지 해제 동안에 알뜰하게—어느 산중을 가시건, 어느 바닷가를 가시건, 어디를 가시거나 산철 동안에 요중선(鬧中禪) 동중선(動中禪)을 알뜰히 다잽이를 해서,

‘지난 석 달 결제 중에 한 스스로 수행력이 과연 얼마만한가? 과연 요중(鬧中)에서도 동중(動中)에서도 여법(如法)하게 알뜰하게 정진이 되는가?’를 잘 가늠하면서 정진을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결제 중에는 말 많이 하실 필요가 없었겠으나, 인자 해제 했으니까 말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누가 말할 사람도 없고, ‘인자 해제 했으니까 우리 마음껏 그동안에 못한 말을 실컷 한번 해 보자’ 그런 생각을 갖지 마시고, 어쨌든지 말을 많이 하시지 말고, 어느 사찰을 가시던지 말을 많이 하시지 말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산승(山僧)이 과거에 한 10년간 말을 안 해 본 경험이 있어서 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그 일가지견(一家之見)이 있어서 말씀을 드린 건데, 입을 많이 벌리고 떠들고 난 뒤끝에는 아무래도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

말을 많이 하면 기운이 또 빠져 나가고, 말을 많이 하다보면 쓸데없는 말이 본의 아니게 또 튀겨져 나오게 되고, 그러면 스스로도 손해가 되거니와 듣는 사람에게도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또 시비가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고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말을 적게 하고, 그렇다고 해서 다 묵언을 하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꼭 필요한 말은 하시되 간단하게 한두 마디로 끝내버리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신다면 해제했다고 해서 무슨 정진하기에 불편할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생각 생각이 화두를 들고, 또 금강과 같은 그 금강지(金剛志), 견고한 뜻을 분(奮)내서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항상 행주좌와 간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고, 살피고 또 살펴서,


혼침(昏沈)이 오면은 전제(全提)를 하고,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나면 단제(單提)를 하고, 간단(間斷) 자꾸 생각이 끊어지고 화두가 순일하게 연속이 안 될 때에는 부지런히 화두를 들어서[勤提],

일구월심해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고 면면밀밀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질 때까지.


화두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떠억 들어지면 그때의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고 고요하고 깨끗한 그 경지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그러나 그 쾌락안연(快樂安然)한 상태에 맛들여서 그놈을 탐착하다가 화두를 놓쳐버리면 안 되아.

그런 가운데에도 화두를 잘 거각(擧却)을 해서 그 순수무잡(純粹無雜)한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면 수질각차(手跌脚蹉) 해서, 어떠한 찰나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많은 도인들이 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도업(道業)을 성취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잡드리 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만 명이면 만 명 다 틀림이 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사람을 만나 보면은 얘기를 하고, 얘기를 하다 보면 시비가 일어나고, 시비가 일어나다 보면 공부에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니, 옳고 그른 것은 상대방한테다 맡겨버리고.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붙어 있어. 자기가 잘 단속해 나가면 깨달음으로 나가는 것이고, 한 생각 단속을 게을리하면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여.

그래서 깨닫고, 못 깨닫고 한 양단(兩端)의 기로(岐路)는 자기한테 있는 것이고, 시비에 끌려가냐, 안 끌려가냐 하는 것은 사람을 따라주지 말어. 그 사람한테 맡겨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산화사금수여람(山花似錦水如藍)하니  막문전삼여후삼(莫問前三與後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심경확연망피차(心境廓然忘彼此)하면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화사금수여람(山花似錦水如藍)이여. 산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어 비단과 같고, 물은 푸르기가 쪽빛과 같구나.

막문전삼여후삼(莫問前三與後三)이다. 전삼(前三)과 후삼(後三)을 묻지를 말아라.


중국의 무착(無着) 스님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기 위해서 오대산을 찾아갔는데, 허름한 나무하는 영감님을 만났어. 그래서 그 영감님과—문수보살인 줄도 모르고 영감님을 만나 “뭣하러 왔느냐?”하니까,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다”


“어디서 왔느냐?” “저 아무데서 왔다”


“거기는 대중이 몇 분이나 되느냐?”하니까, “몇백 명이 이렇게 된다”


(무착 스님이) 영감 보고 “대중이 몇이나 되냐?” 그러니까, “전삼삼 후삼삼이다”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 이건 공안(公案)이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숫자로 알 수 있는 말이 아니여.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을 묻지를 말아라.


심경확연망피차(心境廓然忘彼此)하면, 내 마음 경(境)이나 저 바깥 경계가 확연해서 저 경계라든지, 내라든지 그런 것을 잊어버리면—심경(心境)이 확연(廓然)해서 피차(彼此)를 잊어버리면,

대천사계(大千沙界)가 총포함(總包含)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항하사수(恒河沙數)와 같은 그런 세계가 다 포함되어 있다.


해제를 해서 어디를 가시거나, 가정으로 가시거나 어느 사찰을 가시거나, 어떠한 경계를 만나고 어떠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 경계(境界)에 시비심(是非心)을 내지 말고, 분별심을 내지 말고, 다맛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나아가면 반드시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것이다.(58분46초~73분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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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당당하다(堂堂-- 집·당당할 당) ; ①(모습이나 태도가)남 앞에서 내세울 만큼 떳떳하다. ②(형세가) 위엄 있고 훌륭하다.

*분명(分明 명백할 분, 밝을 명) : ①틀림없이 확실하게. ②모습이나 소리 따위가 흐릿함이 없이 똑똑하고(分) 뚜렷하다(明).

*원만(圓滿) : 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서방세계(西方世界) ; 서방 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교주(敎主) ; 어떤 종교나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해태(懈怠 게으를 해, 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오욕락(五欲樂,五慾,五欲)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월복(越伏) ; 중복(中伏)과 말복(末伏)의 사이가 보통 10일인데, 20일로 늘어나는 일.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화합대중(和合大衆) ; 서로 경애하고, 서로에게 행위·견해를 같게 하여 화합하는 대중.

*안거(安居 편안할 안, 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〇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육적(六賊) ;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도둑에 비유한 말.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원결(怨結 원망할 원/맺을·번뇌 결) ; 원망(怨望)의 마음이 얽혀 풀리지 않는 것을 말함.

*(게송) ‘수행수시용심진~’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二十九 ‘寄同參十首’ 게송 참고.

*간택(揀擇 가릴 간, 가릴 택) ; 사물이나 사람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와 그 정체를 구별하거나 가려서 알아 선택함.

*혐의(嫌疑 싫어할 혐/의심할·괴이히 여길·두려워할·의심스러울 의) ; 꺼리고 싫어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망상(妄想 망녕될 망, 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이뭣고?’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 조주의 무자(無字) ;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화두(공안)’ 참고.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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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 [몽산법어 蒙山法語]의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을 말함.

‘몽산화상무자십절목(蒙山和尙無字十節目)’은 조주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참선 수행에 있어서 본참공안에 대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을 일으켜 화두 참구를 하지 않고, 사량분별·알음알이로 공부를 삼는 잘못된 병폐를 10가지로 정리하여 그 병폐를 알고 극복해 올바른 활구참선을 하기 위한 몽산 스님의 법문.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

〇“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적적(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상기(上氣) ; ①[한의] 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 발한, 두통, 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 ; [주로 ‘용을 쓰다’의 구성으로 쓰여]무리하게 어떤 일을 해내려고 마음을 몰아 애써서 한꺼번에 내는 힘.

*육단심(肉團心) : [범] Hrdaya  4심의 하나。 심장을 말함。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되었다 한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산란심(散亂心 흩을 산/어지러울 란/마음 심)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간단(間斷 틈·사이 간/끊을 단) ; 계속되던 것이 잠시 그치거나 끊어짐.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망념(妄念) ; 망상(妄想).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 ; ‘흉내(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옮기는 짓)’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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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불급불완(不急不緩) ;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當於本叅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에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에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를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叅上(어본참상)에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가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와  二六時中(이륙시중)에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바로 모름지기 본분을 의지하야 법다이 하야사 비로소 옳으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를 아울러 한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사위의(四威儀)와 열두 때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게송) ‘탐착몽중일립미~’ ; 성철스님 ‘납자십게(衲子十偈)’—'회두(回頭)' 게송 참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와 말과 생각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말=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탐착(貪着) ; ①만족할 줄 모르고 탐하고 집착함. 탐하고 구하는 것. 욕심부려 집착하는 것. 집착하는 것. 욕심부리는 것. 욕심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대상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②깊이 마음에 두는 것. 갈애(渴愛), 애착(愛著 愛着), 염착(染著), 집착(執着), 탐애(貪愛),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출가(出家) : [범] Pravrajita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32~133.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사문(沙門) ; 슈라마나(산스크리트어: śramaṇa, 팔리어: samaṇa)의 음역. 식(息)·근식(勤息)·정지(淨志) 등으로 번역. 여러 선법(善法)을 근수(勤修)하고, 악법(惡法)을 행하지 않으며, 심신을 조어(調御)하여 청정(淸淨)한 깨달음의 길을 지향(志向)하고 노력함을 뜻함.

①인도에서 바라문교의 「베다」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제종교 수행자의 총칭. ②출가하여 불문(佛門)에 들어 도를 닦는 사람.

*지중하다(至重-- 이를 지/무거울·소중할 중) ; ①(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무겁다. ②(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견처(見處) ; ①(틀린) 견해가 생긴 곳이라는 뜻. 집견(執見,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집하는 견해. 여러 종류의 망견妄見)이 일어나는 장소. 유루법(有漏法)의 다른 이름. ②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견(見)은 견해, 세계관이라는 뜻. 특수한 세계관의 입장.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으시대다 ; 으스대다. (사람이)어울리지 않게 우쭐거리며 뽐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유마거사(維摩居士) ; 유마힐(維摩詰). [범] Vimalakirti  음대로 써서 유마라힐(維摩羅詰) • 비마라힐(毘摩羅詰)이라 하고, 줄여서 유마힐 또는 유마(維摩)라고만 한다。뜻으로 번역하면 정명(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이 되는데, 우리 말로는 「깨끗한 이름」이란 뜻이다.

인도 비사리(毘舍利  Vaisali)성에서 거사(居士)로 지내면서 보살행업을 닦아 크게 교화하였다。그 수행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제자들도 미칠 수 없었다.

그가 병들어 누우매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가서 문병하는데, 둘 아닌 이치(不二法)에 대하여 여럿이 돌려 가면서 말하게 되었다。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은 『말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유마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그리하여 모두 『유마거사가 가장 둘 아닌 법을 잘 연설한다』고 칭찬하였다。이것은 <유마경>의 주요한 내용이다.

*방거사(龐居士) ; 당나라 형주(衡州) 형양(衡陽) 사람. 자는 도현(道玄)이다. 성은 방씨고, 이름은 온(蘊)이다.

당나라 정원(貞元) 때 석두(石頭)에게 선지(禪旨)를 짐작(斟酌)함. 탐욕스럽고 속된 것을 싫어해 재산을 모두 동정호(洞庭湖)에 던져 버리고 죽기(竹器)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

뒤에 마조(馬祖)에게 가서 묻기를 “온갖 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묻자 마조는 “네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마셔버린 뒤면 일러주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2년 동안 정진하여 깨달음.

죽으려 할 때 딸 영조를 시켜 그늘을 보아 오시(午時)가 되거든 말하라고 부탁했다. 영조가 “지금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日蝕)이 일어납니다.”하자, 그는 평상에서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서 보는 동안, 영조가 그의 평상으로 올라가 죽어버렸다. 이를 본 그는 웃으면서 “내 딸의 솜씨가 나보다 빠르구나!”하고는 7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서울(王都, 慶州)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광세(陳光世). 법명(法名)은 부설(浮雪). 자(字)는 천상(天祥).

어려서 불국사에 출가하였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도반과 함께 두륜산 등지에서 10년간 정진한 뒤, 오대산 문수보살의 도량을 참배하러 북으로 향하여 가던 길에 두릉(杜陵 : 전북 만경)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신도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구무원에게 딸 묘화(妙花)가 있었는데, 부설을 흠모하여 부설과 부부가 되길 원하고, 만일 버림을 당하면 목숨을 끊겠다고 하니, 묘화의 부모도 부설에게 딸을 버리지 말고 제도하여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부설은 출가의 뜻이 견고하여 굽히지 않았으나, 또 돌이켜 보살의 자비로운 뜻을 생각하여 마침내 묘화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록 재가(在家)에 있었으나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정진을 계속하여 도를 이루었다. 등운과 월명도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다.

묘화부인은 백 십세를  살았는데, 말년에 집을 내놓아 사원으로 삼아 부설원(浮雪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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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해이하다(解弛-- 풀 해/느슨할 이) ; (마음가짐이나 태도 따위가)긴장이 풀어져서 느슨한 상태이다.

*요중선(鬧中禪 시끄러울 뇨/가운데 중/참선 선) ; 시끄러운 가운데 하는 참선. 동중선(動中禪)라고도 한다. 조용한 가운데 하는 참선은 정중선(靜中禪)이라 한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일가지견(一家之見) ; 일가견(一家見). 어떤 일에 관하여 일정한 경지에 오른 안목이나 견해.

*금강지(金剛志) : 금강석과 같이 견고한 뜻。 일체 번뇌를 쳐부술 수 있는 굳센 의지.

*분(奮) ; 떨치다. 분발(奮發)함(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운을 내어 떨쳐 일어남). 힘쓰다. 분격하다(憤激--). 일으킴.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단제(單提) ;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단제(單提)는 그냥 ‘무~’하고 아무 일체 다른 말은 없이 ‘무~’를 관하는 것.

*간단(間斷) ; 계속되던 것이 잠시 그치거나 끊어짐.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밀밀면면(密密綿綿) :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길게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것。 정밀하게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는 모습.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惺惺]한 상태.

*쾌락안연(快樂安然) ; 쾌락하고 편안함.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수질각차(手跌脚蹉 손 수/거꾸러질·넘어질 질/다리 각/미끄러질·넘어질 차) ; 각차수질(脚蹉手跌). (몸이 균형을 잃고) 손과 발이 미끄러지다.

[참고] 『고봉화상 선요(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50~52, 『선요』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40~42 참고.

若要的實明證인댄  須開特達懷하며  發丈夫志하야  將從前惡知惡解와  奇言妙句와  禪道佛法과  盡平生眼裏所見底와  耳裏所聞底하야  莫顧危亡得失과  人我是非와  到與不到와  徹與不徹하고

만일 이 일을 적실하고 분명하게 증득하려면 특별한 포부를 품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종전의 나쁜 알음알이와 기묘한 언구(言句)와 선도(禪道)와 불법(佛法)과 평생동안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들에서 위태로움과 죽음, 얻음과 잃음, 남과 나, 옳음과 그름, 도달함과 도달치 못함, 사무침과 사무치지 못함 따위를 돌아보지 말고,


發大忿怒하며  奮金剛利刃하야  如斬一握絲에  一斬에  一切斷이라  一斷之後에  更不相續하야  直得胸次中이  空勞勞地와  虛豁豁地가  蕩蕩然 無絲毫許滯碍하야  更無一法可當情이  與初生으로  無異니라

크게 분발심을 내어 마치 금강 같은 날카로운 칼로 한줌의 실을 벨 때, 한 번 베면 모두 다 끊어져서 그 후에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당장 가슴속이 텅 비어 호호탕탕(浩浩蕩蕩)해서 실끝만치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며 다시 한 법도 정식(情識)에 매이지 않음이 마치 갓난아기와 같을 것이다.


喫茶不知茶하고  喫飯不知飯하며  行不知行하고  坐不知坐하야  情識이  頓淨하고  計較都忘이  恰如箇有氣底死人相似하며  又如泥塑木雕底相似리라

차를 마셔도 차 마시는 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줄 모르고,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몰라 정식(情識)이 단박 깨끗해지고 계교(計較)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흡사 숨만 남은 시체와 같으며 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 같이 될 것이다.


到者裏하야  驀然脚蹉手跌하면  心華頓發하야  洞照十方이  如杲日麗天하고  又如明鏡當臺하야  不越一念하고  頓成正覺이라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갑자기 손과 발이 미끄러져서 마음꽃이 단박에 피어 시방세계를 훤히 비춤이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뜬 것 같으며, 맑은 거울이 경대에 놓인 것 같아서 찰나에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非惟明此一大事라  從上若佛若祖의  一切差別因緣을  悉皆透頂透底하며  佛法世法을  打成一片하야  騰騰任運하고  任運騰騰하며  灑灑落落하고  乾乾淨淨하야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라  恁麼出世一番하야사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이 일대사만을 밝힐 뿐 아니라, 위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온갖 차별된 인연(因緣)을 몽땅 아래 위로 꿰뚫어 알며 불법과 세간법을 한 조각으로 만들어 무심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물 뿌린 듯 쇄락하고, 씻어 말린 듯 정결하여 하나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없는 참 도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세상을 뛰어나와야 비로서 ‘평생동안 참선하려는 뜻과 원력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원문에 있는 '驀然 脚蹉手跌'은 몸의 균형을 읽고 자기도 모르게 문득 발이 미끄러지고 손이 미끄러지는 것이니, 아차! 하는 순간을 말한다. 轉身移步 懸崖撒手. (원순 스님 주)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양단(兩端 두 량, 끝 단) ; 두 끝.

*기로(岐路 갈림길 기, 길 로) ; ①길 방향이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는 지점. ②갈림길(둘 이상의 갈래로 나누어진 길).

*(게송) ‘산화사금수여람~’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예장종경 게송 참고.

*무착 문희(無着文喜) : (820 – 899) 가화(嘉禾)땅 주(朱)씨 집에서 나서 7살에 출가하였다。처음엔 계율을 숭상하였고, 그 때 서울의 운화사(雲華寺)에 가서 징관(澄觀)법사에게서 화엄(華嚴)의 교리를 배웠고, 그 다음으로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오대산(五台山)에 들어갔는데, 보살의 화현(化現)이 여러 번 있었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선지(禪旨)가 밝은 뒤에 죽 솥에서 보살이 나타나므로 『문수는 문수요, 무착은 무착이다。무슨 상관 있느냐!』하고 죽을 젓던 주걱으로 때려 주었다.

홍주(洪州) 관음원에서 앙산의 말 한 마디에 크게 깨치고 그의 법을 이었다。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2년에 80세로써 입적하였다。무착이란 것은 나라에서 지어 드린 법호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이다.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룬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확연(廓然 큰·넓을·텅 빌 확/그럴 연) ; 넓고 텅 빈 모양.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항하사수(恒河沙數) ; 인도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와 같은 수(數)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시비(是非) ; ①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 ②이러니저러니 좋지 않게 트집을 잡아서 말함. ③옳고 그름.



[주요 내용]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자기 자신과의 싸움, 자신 속에 일어나는 번뇌와의 싸움은 원결을 맺지 않는다 / (게송)수행수시용심진~ /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길이 끊어져야 / 무자화두 드는 법, 단제(單提) 전제(全提) 근제(勤提) / 불급불완(不急不緩)한 올바른 정진.

(게송)탐착몽중일립미~ / 초학자(初學者)의 자세로 정진 / 산철 때 요중선(鬧中禪)을 알뜰히 해야 / 수행인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 / (게송)산화사금수여람~.



[주요 문구]


우리 이 법당에 운집한 사부대중도 언젠가는 우리의 이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는 아미타불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이 되실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그런 보살이 될 수도 있고, 가섭존자나 달마대사와 같은 그러한 조사(祖師)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정진을 게을리하고 해태(懈怠)에 빠져서 탐진치 삼독의 바람에 휘날려서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그럭저럭 지낸다면 영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할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은 원결(怨結)을 맺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설사 이겼다 하더라도 때와 시대가 바뀌면은 또 싸움이 일어나서, 그 싸움은 새로운 싸움을 또 유발시키고 끝없는 원결을 맺게 될 것입니다마는,

자신과의 싸움은 싸움을 열심히 할수록에 보람 있는 싸움이 되고, 정말 마침내는 그 싸움에 자기가 지지 않고 몸과 목숨을 바칠 때 영원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공안을 분석하고 따져서 아무리 따지고 따져서 들어가 봤자, 그렇게 따져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천하 없는 그럴싸한 결론을 얻어서 수긍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으로써 얻어지는 결론이라, 그것은 망상(妄想)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어쨌든지 화두는 ‘이 무엇고?’ 화두를 하던지,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던지, 조주의 무자(無字)를 하던지, 화두를 드는 그 찰나에 마음길이 끊어져야 되는 거여.

다못 ‘이뭣고?’ 그 의심뿐이여. 앞 생각도 끊어지고 뒷 생각도 끊어지고, ‘이것이 옳게 하는가 그르게 하는가?’ 그런 생각까지도 끊어져버리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혼침 올 때는 전제(全提)로 들어 보고, 산란심이 일어날 때에는 단제로 한번 대체를 해 보고, 자꾸 화두가 끊어져싸면 근제, ‘부지런할 근(勤)’자 근제로 단속을 하고,

이렇게 해서 전제(全提)와 단제(單提)와 근제(勤提)를 적절하게 운용을 해서 혼침과 산란과 간단(間斷)을, 단절되는 것을 대처해 나가는—스스로 그걸 잘 방편을 써서 단속을 해 나가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는 세속의 오욕락(五欲樂)에다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우리 이미 세속의 오욕락이 허망한 것인 줄 알고, 발심해서 출가해 가지고 정진한 분상(分上)에는 무엇이 ‘한 알갱이 쌀’이냐?

정진하다가 어떤 그런 확철대오가 아닌 자기 나름대로 얻어지는 득력처—그것이 체중현(體中玄) 도리가 되었건, 어떤 공(空) 도리가 되었건 자기 나름대로 그 득력처, 그것이 바로 이 ‘한 알갱이 쌀’이다. 여지없이 그것을 버려 버리고 자기 맥히는 공안에 대해서 정진을 다잽이 나가야 정진이 옳게 되고 반드시 확철대오할 수 있는 분(分)이 있다.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붙어 있어. 자기가 잘 단속해 나가면 깨달음으로 나가는 것이고, 한 생각 단속을 게을리하면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여.

그래서 깨닫고, 못 깨닫고 한 양단(兩端)의 기로(岐路)는 자기한테 있는 것이고, 시비에 끌려가냐, 안 끌려가냐 하는 것은 사람을 따라주지 말어. 그 사람한테 맡겨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해제를 해서 어디를 가시거나, 가정으로 가시거나 어느 사찰을 가시거나, 어떠한 경계를 만나고 어떠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 경계(境界)에 시비심(是非心)을 내지 말고, 분별심을 내지 말고, 다맛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나아가면 반드시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