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01~425)2023. 4. 24. 10:10

(No.425)—1990년 9월 첫째 일요법회(화두·불명·십선계 법회) (80분)

 

(1) 약 40분.

 

(2) 약 40분.


(1)------------------

<육사청(六師請)>

경청 석가모니불 예위화상아사리(敬請 釋迦牟尼佛 詣爲和尙阿闍梨)
경청 문수대지사 예위갈마아사리(敬請 文殊大智士 詣爲羯磨阿闍梨)
경청 당래미륵불 예위교수아사리(敬請 當來彌勒佛 詣爲敎授阿闍梨)
경청 시방제여래 예위증계아사리(敬請 十方諸如來 詣爲證戒阿闍梨)
경청 시방제보살 예위동학반려중(敬請 十方諸菩薩 詣爲同學伴侶衆)
경청 석범제천중 예위옹호장엄중(敬請 釋梵諸天衆 詣爲擁護莊嚴衆)

수계(受戒) 받으실 분은 호궤합장(互跪合掌)하고 앉아 주십시오. 모두 앉아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드세요. 예, 그렇게 앉으세요.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허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다.
꽃다운 풀 우거지는 삼춘(三春)에는 비가 내리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드는 구월(九月)에는 서리가 내린다.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빈 마음으로 온갖 삼라만상 변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다. 일 없고 다맛 그것이 바로 평상(平常)이더라.

봄에 꽃이 피고 풀이 우거지며 또 비가 내리고, 가을에 단풍 지고 서리가 내린 것은 이 세상에 모든 물건(物件)이 인연 따라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없어져. 사람도 태어났다가 죽고, 모든 물건도 생겨났다 없어지고, 저 태양이나 이 지구도 몇억만 년 뒤에는 인연이 모아서 생겨난 것이라 언젠가는 파괴가 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우리 주변에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은 파괴와 생멸 · 생사 내놓고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러나 빈 마음으로,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할 수 있다면 그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요,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다 그 말이여. 생멸상(生滅相) 속에 열반상(涅槃相)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허겄더라.


오늘 경오년(庚午年) 9월 첫째일요법회를 기해서 십계(十戒)를 받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불명(佛名)을 신청한 분에게 계(戒)와 화두와 불명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신해년(辛亥年, 1971년)에 설하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미 계도 받고 화두도 다 탔습니다. 산승(山僧)이 다시 여기서 설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 더 간절하고, 그 이상 더 분명하고 감동적으로 설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로부터 화두도 탔고 또 계도 받았다고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일단 여러분이 새로 받기를 청했으므로 불보살(佛菩薩)을 증사(證師)로 모시고 간략히 십계를 설하겠습니다.


계(戒)는, 원래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갈라면 문(門)을 통해서 들어가고 또 그 방에서 나올 때에는 문을 통해서 나오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의 길이 있고, 불자(佛子)로서 불자에 길이 있어. 길을 놔두고 길로 다니지 않고 논으로 밭으로 가시덤불 속으로 다닐 수는 없거든.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길을 잘못 잡아 가지고 이리저리 위험한 데로 또 방향을 잘못 잡아서 간다면 애만 많이 쓰고 설사 목적지에 도달한다 해도 몇 배의 시간과 공력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불자로서 가져야 할 행실, 첫째, 몸[身]으로 지녀야 할 세 가지. 살생,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셋째는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다음에는 입[口]으로 지키는 네 가지.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또 기어(綺語), 기어라 하는 것은 이리저리 꾸며대고, 잡스럽고 잡탕스러운 말, 해서는 안 될 말 또 아무 뜻 없는 말, 이러한 말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양설(兩舌), 이간질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는 악구(惡口), 욕을 하지 말아라. 이것이 입으로 지켜야 할 네 가지여.

그다음에 뜻[意]으로 지키는 세 가지는, 탐욕(貪欲)을 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불진에(不瞋恚), 썽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어리석은 마음, 삿된 소견을 내지 말어라.
이 어리석고 삿된 소견이라는 것은 첫째, 불자(佛子)로서는 인과법(因果法)을 부정하는 거여, 인과를 믿지 아니하고 인과의 법칙을 믿지 않고 인과를 부정하는 거, 이것이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그래서 살생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 주어야 하고, 또 도둑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내 것을 남에게 보시를 하고,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행실을 청정하게 갖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말을 하고, 또 꾸며대는 말 또는 잡탕스러운 말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말을 신사답게 신사 숙녀에 어울리는 그러한 청정한 말을 해야 한다.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간질을 해 가지고 두 사람의 사이를 벙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합할 수 있도록 자비스러운 말로써 화합을 붙여야 한다.
악구(惡口)—‘호랭이 물어 갈 놈, 급살 맞을 놈, 벼락 맞을 놈, 오라를 질 놈’ 이런 입에 못 담을 말을 남에게도 해서는 아니되는데 이것이 습관이 되면은 자기 형제간에도 하고, 자식한테도 하고, 아무한테라도 그런 말이 풀풀 나온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말 한마디, 설사 꼭 미워서가 아니라 이뻐서 못 견디면 입에 못 담을 욕을 하는 수가 있거든. 이것도 불자로서는 해서는 아니된다 그 말이여.

입 밖에 한번 뚝 말이 떨어지면 그것이 한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낱낱이 언젠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면 그 말이 씨가 되어 가지고 그것이 현실화(現實化)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돈 드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말을 함부로 풀풀풀풀 해 버릇하면 망어(妄語)를 하고, 기어(綺語)를 하고, 양설(兩舌)을 하고, 악구(惡口)를 하면 그것이 낱낱이 다 그 과보(果報)로 나타나는 것이매, 참 말을 조심해야 해. 행동도 조심해야 하지만 말도 행동 못지않게 더 말조심을 해야만 불자(佛子)다운 불자다.

탐심(貪心)을 내는 거, 탐심을 내는 것은 남이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아휴, 저걸 내가 갖고 싶다. 어떻게 해야 저것을 내 것을 삼을까? 달라고 해서 안 주면 훔치기라도 허까?’ 이러한 탐심은 아마 어린애들 어린아이들이 내는 탐심일 거고.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대중에 이렇게 살아가고 세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이고, 제 생각대로만 하려고 밀어붙이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 되고 남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하면 썽을 내거든. 이것이 진심(瞋心)이여.
참! 지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한다고 썽을 내면 이것이 팔불출(八不出)도 못되고, 칠불출도 못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매 생각이 다른데,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을 것인데, 남의 말도 귀기울여 들을 줄 알고 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 말을 귀기울여서 들어보면 아 자기 말보다 ’저 사람 의견이 좋다’ 생각하면 아 대번에 그 사람의 의견을 또 찬동을 찬양을 해 주고, 이리해서 서로서로 지혜를 모아서 바른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가야지 제 주장만 내세워 가지고 둘 모이면 싸움하고, 셋 모이면 싸워. 집안에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회사에 가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물론 의견을 모이는 과정에서는 서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가 있지만, 이렇게 해서 여러 방면으로 토론을 하다가 그중에서 가장 좋은 의견으로 일단 모아지면, 그 의견에 모두가 다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행동을 통일해 나갈 때 사회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나라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또 온 세계도 평화가 올 때가 있을 것이다.

한 번 두 번은 몰라도 일생 동안을 탐욕(貪欲)과 진에심(瞋恚心)으로 일관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고 무엇이냐.
지끔 온 세상이 나날이 혼란하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되어 가는 일보단 참 앞날이 걱정스럽게 모든 일이 되어 가는 것은 이 사람들이 이 십선계(十善戒)를 믿고 지켜 나가지 아니하고, 그걸 지키지 아니하면 십악죄(十惡罪)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믿고 지키고 실천해 나가면 이것이 십선계가 되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戒)만을 믿고 고대로 실천해도 그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어느 곳에 무엇으로 태어나되 항상 왕(王)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 계를 철저하게 잘 지키면은 천상(天上)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날 것이다」
인자 이 경(經)에 보면 이렇게 말씀이 쓰여 있지만,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천상에 태어나 봤자 자기가 지은 복(福)만큼 다 받으면 또다시 떨어지니 계(戒)만을 집착해서 계만을 지킨다면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참다운 대승계(大乘戒)가 되지를 못한다.

오늘 이 열 가지 계(戒)를 설하되, 어떻게 하면 이 계(戒)를 영원히 타락이 없는 대승계로써에 차원 높은 계를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설할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참선법을 설하기 전에,

이상 설한 열 가지 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열 가지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편안하게 앉어요. 연비(燃臂) 먼저.

다시 호궤합장(互跪合掌).

참회진언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2분 20초 계속)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히 앉으셔요.

십계(十戒)를 받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따끔하게 그 연비를 한 찰나에 그렇게 무량겁 동안 지은 크고 작은 그 많은 죄가 소멸이 되느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이유가 있는 것이여.

나선 비구(那先比丘), 나가세나(Nāgasena). 나선이라고 하는 비구 스님한테 저 왕(王)이 묻기를, “평생 동안 지은 죄가 임종(臨終)할 때에 염불(念佛) 열 번만 하면 죄가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난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금생 백 년 동안 지은 죄뿐만 아니라 무량겁 동안 지은 죄가 어떻게 마지막 숨 딱 거둘 때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열 번만 불러도 죄가 없어진단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선 비구라고 하는 그 큰스님이 대답을 하기를, “큰 돌, 무거운 돌을 백 덩어리를 큰 배에다가 실으면 그 돌은 물속에 가라앉지를 않을 것이고, 조그마한 주먹텡이만한 돌 한 개도 배에다가 실지 않고 그냥 물에다가 던지면 그 돌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법을 믿고 일심(一心)으로 염불을 하면 그 부처님의 그 원력(願力)으로 마치 그 무겁고도 큰 돌만한 돌을 배에다가 실으면 안 가라앉듯이 반드시 그 사람은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날 것이고,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의 그 원력의 가피(加被)를 입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은 죄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또 이렇게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 그렇게 말씀이 있고.

또 『지론(智論)』에 보면 ‘어째서 보통 때 열 번 한 것보단 마지막 그 죽을려고 하는 그 임종시(臨終時)에 잠깐 염불한 것이 그렇게 무서운 힘이 있을까?’
보통 때는 아무래도 생각이 그렇게 가다듬어지지를 않고, 마지막 죽을 때는 이제 막바지라, 그러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 이제 내가 숨 거두면은 지옥에 갈지—반드시 자기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다. 다행히 열 번만 지극정성으로 불러도 극락에 간다니 일심(一心)으로 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면 ’내가 여기서 있는 힘을 다해서 목숨을 버리고 싸우지 아니하면 적한테 죽을 것이고, 여기서 인자 도망갈 곳도 없고 차라리 죽느니 한 사람이라도 더 적을 죽이고서 기어니 이 적을 다 몰아 다 쳐죽여야겄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나라도 살겄다‘ 이러한 마음을 내면 적은 군사로도 대적(大敵)을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고.
’아이고! 적이 저렇게 많으니 싸워 봤자 죽을 거 이것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도망쳐서 살꼬‘ 이런 생각을 먹으면은 눈 깜박할 새에 맞어 죽을 것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양(量)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금덩어리 한 냥과 꽃다발 백 개의 꽃다발을 처쟁여 놓으면 우선 꽃을 백 다발을 쌓아 놓으니 울긋불긋 보기도 좋고 잠시 향내도 나겠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면 그거 별것이 아니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숯불, 불꽃이 훨훨 타지도 않는 조그만한 숯불이 별로 보잘것없지만,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마른풀을 그 조그마한 숯불로 그것을 태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독사는 조그만한 독사 새끼라도 그 독사한테 물리면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여.

독사나 황금 덩어리는 조그만하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듯이,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난 그 간절한 한 생각은 능히 무량겁(無量劫) 죄(罪)도 소멸할 수가 있고, 억겁(億劫)의 생사윤회(生死輪廻)도 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끔 이 십계(十戒)를 받고 따끔하게 이 연비(燃臂)를 받은 그 찰나에 여러분의 죄가 소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거거든.

계를 지키면은 우선 우리의 양심(良心)이, 우리 사람 사람마다 다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 ·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의 부처님을 낱낱이 다 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여. 그 양심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은 우리의 그 불성(佛性)에서 나오는 거여.
그래서 항상 계행(戒行)을 여법(如法)하게 지키면 양심과 서로 계합(契合)이 되기 때문에 마음에 항상 편안하고, 마음에 항상 떳떳하고, 마음에 항상 기쁨이 있는 것이여.

계율을 파하고—살생을 헌다던지, 도둑질을 헌다던지, 사음을 헌다던지, 이간질을 헌다던지, 거짓말을 헌다던지, 또 탐욕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자기 마음의 양심에 가책을 받아 가지고 항상 얼굴이 어둡고 떳떳하지를 못하며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어둡고 불편하면 얼굴도 어둡고, 눈도 거뭇 껌껌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똑바로 남의 얼굴을 쳐다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바르지를 못하면 행동도 바르지를 못하고 밝지를 못하는 법이거든. 그러한 어둡고 바르지 못한 마음에서 어둡고 바르지 못한 행동이 나오고, 그러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안정을 얻지를 못하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한들 일이 제대로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를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하니,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어머니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아내로서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편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아무리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전생에 지은 복이 있어서 잘산다 하더라도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하면 어디다 쓸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세속에 사는 데 있어서도 이 계(戒)는 잘 가져야 할 것이고, 불자로서도 이 계는 잘 가져야 해. 계(戒)를 잘 가져야 그래야 정(定) 선정(禪定) 참선(參禪)을 올바르게 하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기 때문에 참선을 하더라도 올바른 참선을 할 수가 있어. 참선을 올바르게 해야 지혜의 눈을 떠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것이다.
견성성불을 할려면은 선정을 닦아야 하고, 선정을 올바르게 할려면은 계행(戒行)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삼학(三學), 세 가지 배움이여. 경(經) · 율(律) · 론(論), 삼장(三藏)을 분석을 하면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으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처음~40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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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받은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도 올바르게 참선을 해 나가시면 계는 그 가운데에 지켜져.
내가 계를—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하고—‘내가 계만을 청정하게 지켜야겄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파리 한 마리도 안 죽이고, 모기 한 마리도 안 죽이고, 그저 뭐 비린내 난 것도 안 먹고, 생선이고 뭐 고기 한 점도 먹지 않고 철저하게 아주 계를 지키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그렇게 실천을 하신 분이 스님 가운데도 있을 것이고, 신도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왕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계를 지킬 바에는 대승계(大乘戒)를 지켜야 하고, 최상승계(最上乘戒)를 지켜야 허겄더라.
형식으로 지키는 계(戒)는 그 잘 지킬려고 하는 그 마음은 참 갸륵하고 갸륵하나, 그러한 계는 계상(戒相)에 떨어지기 때문에 계상에 집착해 가지고 지킨 계는 기껏 지켜 봤자 천상(天上)에 태어나면 고작이여.

잘못해 가지고 길을 걸어가다가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으면 ’아! 내가 살생을 안 할라고 했는데 저 살생을 했으니 내가 인자 어떻게 할까? 틀림없이 내생에 저 벌레가 나를 밟아 죽일 것이고, 저 벌레를 죽였으니 천상에 올라가기는 틀렸다‘ 이래 가지고 그것 한 마리 때문에 벌벌벌벌 떨고 불안초조해서 그런다면, 그러한 마음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냐 그 말이여.

파리 모기 안 죽일려고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승화(昇華)시켜서 자꾸 화두를 들고 참선을 여법히 해 나가면, 모르는 가운데 혹 벌레가 밟혀 죽을 수도 있고, 농사를 짓다 보면 농약을 뿌리게 되고 수없는 벌레가 죽게 되고, 밥을 먹고 채소를 씻쳐서 국을 끓이다 보면 수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도 그 속에서 죽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계상(戒相)에 집착해서 산다면 밥도 못 먹을 것이고, 국도 못 끓여 먹을 것이고, 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계를 지키라는 것이 아녀요.

물론 그 눈에 보일락말락한 그런 벌레도 그 생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생명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셨지마는, 부처님께서 그러한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뜻이 그 참뜻이 무엇이냐? 자비심(慈悲心)을 가져라 이거거든.
살생을 하면은 자비심을 손상하게 되니까 자비심을 함양을 해라. 항상 자비심으로 살아라. 자비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 자비심을 가지라고 하는 그 참뜻을 우리가 깊이 명심을 해야지, 파리 한 마리 모기 한 마리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그거여.


시라(sīla, 尸羅)가 불청정(不淸淨)하면—시라(sīla)는, 계(戒)를 인도 말로 시라(sīla)라 그러는데, ‘시라가 청정(淸淨)하지 못하면은 삼매(三昧)가 현전하지 못할 것이다. 삼매가 청정하지 못하면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하셨어.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비유해서,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올바른 자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물론 참선은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할 수 있어야 정말 참선을 제대로 하는 것이지. 그러나 기본자세(基本姿勢)라고 하는 것이 있어, 기본자세. 기본자세는 바로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여.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기본자세를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말이여.

그리고 낮에도 쉬는 시간, 항상 바른 자세를 가지고 의자에 앉더라도 바르게 앉고, 섰을 때에도 바르게 서고, 걸어갈 때에도 항상 바르게—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든지, 너무 뒤에로 요렇게 제치고 걸어간다든지, 좌우로 삐뚤어지게 이렇게—앉을 때 걸어갈 때도 역시 그런 거여.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는 거여. 자세만 봐도 ‘아 저 사람이 인격자다, 아니다’ 또 ‘저 사람이 지금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느냐,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런 것도 알 수가 있는 거여.
아무리 속에 지식이 들어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세가 삐뚤어져 가지고 턱을 내고 입을 헤벌레하게 벌리고, 눈은 생선 눈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존경할 수가 없어.
비록 속에는 별로 지식이 든 것이 없고 그렇지만 자세만 단정(端正)하니 이렇게 앉었어도 그 사람을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여. 특히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는 어디를 가나 어디서나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하는 거여.


사리불(舍利弗)과 목련존자(目連尊者)는,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왼팔이고 좌면 제자(左面弟子)고, 사리불은 부처님의 오른팔 노릇을 한 수제자인데, 원래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외도(外道)의 제자로서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린 외도로서는 큰 사람이여.
큰 종장이였었는데 그 스승이 죽고, ‘우리가 바른 스승을 찾아가자’ 누구든지 먼저 바른 스승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 연락을 해 주기로 하고 계속해서 나름대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왕사성(王舍城)에를 들렸는데, 참 자세(姿勢)가 바르고 그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거룩해요.

그분[아설시(阿說示), Aśvajit, 마승(馬勝)]이 바로 이 오비구(五比丘) 중에 한 분이였었는데, 너무나 그 자세도 장부(丈夫)답고 흥건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눈매가 아주 바른, 아주 그 눈매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맑고 안정이 되고 한 모습이 너무너무 ‘야! 틀림없이 이분은 훌륭한 분이다, 이분은 과연 누굴까? 이분에 스승은 누굴까?’
그래 다가가 가지고 물어보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승이란 말을 듣고 바로 그길로 따라가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지혜의 눈을 얻었고 또 목련존자한테 알려서 같이 그 제자들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리고 부처님께 가서 제자랑 다 같이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부처님 왼팔—부처님께서 오비구(五比丘)를 제도하시고 머지않아서 삼가섭(三迦葉)을 제도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 그 1,250인의 제자를 그렇게 얻어 가지고 그렇게 참 불법(佛法)을 펴셨는데, 그렇게 펴게 된 그 동기의 하나가 부처님의 그 오비구 중에 한 사람인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훌륭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사리불과 목련존자라고 하는 훌륭한 제자를 얻은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속은 시커먼 도적(盜賊)의 마음을 가지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맑게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항상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信心)으로 정진을 해 나가면 자연히 자세가 바르게 되겠지만, 우선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바르게 정진하는 법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하니 우선적으로 자세부터 바르게 함으로써 차츰차츰 바른 정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를 이렇게 바르게 하는 것은 너무 몸을 자지바지하니 뒤로 하고 목에다 힘을 주고 그러라는 것이 아니여. 바르게 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고, 목의 힘을 빼고, 우리 뭐 조끔 자기가 권리가 좀 있고 돈을 좀 벌면 ‘아주 목에다 힘준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러한 것은 자세를 바르게 한 것이 아니여.
단정(端正)하게 몸을 갖되 힘을 빼야 하거든. 어깨의 힘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눈도 선명하게 평상(平常)으로 뜨되—눈알이 왔다갔다 눈이 깜빡깜빡깜빡하고, 눈알이 좌우로 전후좌우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게 못쓰는 거여. 눈은 따악 안정이 되고, 그러니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거든.


<올바른 호흡>

그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해야 해. 숨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은—보통 우리는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마는 단전으로 호흡을 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게—너무 터지도록 들어마시란 게 아니라,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까지 가도록 이렇게 눌러 대는 것이 아니고, 숨은 들어마시면 이 허파까지 밖에 안 들어가는 것이여. 안 들어가지만 의식적으로 배만 약간 볼록하게 만들면 되는 거여.
들어마신 호흡이 거까지 가도록 눌러 대면 못쓰는 거여. 그러면 여그 오목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나중에는 못쓰는 거여.

답답하고 소화도 안 되는 것이니까, 들어마신 호흡을 거까지 밀어넣을라고 하지 말고, 스르르르~ 하니 자연스럽게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丹田)만 약간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게만 하는 거여. 그것을 잘 알으셔야 돼.
그래 가지고 8부쯤 들어마셨으면 잠깐 정지했다가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만 하면 되어요.

그래서 들어마시면 차츰차츰차츰 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배가 나온다니까는 이만큼 나오도록 그렇게 맨들라고 하면 안 돼. 포태(胞胎)해서 열 달쯤 된 것처럼 그렇게 배를 맨들라는 게 아녀요. 조끔만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라는 거여. 그것을 착각하면 그 단전호흡을 하다가 병났다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고 약 2cm나 3cm만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2cm나 3cm만 조끔 홀쪽하게 맨드는 거여. 그래서 배가 나왔다 또 정지했다가 또 홀쪽했다 이거여. 그놈 따라서 숨이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게.

이것은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건강에도 좋고, 피로 회복하는 데에도 좋고 또 뭐 신경을 너무 써서 열이 오르거나 혈압이 오르거나, 기운이 위로 오른 것을 내리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것이여요.
또 학생들 공부하는 데에도 항상 공부 시작하기 전에도 하고, 공부하면서도 하고, 공부하고 나서 쉬는 시간에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것이여. 가정주부도 좋고 또 회사에 나가는 사람도 좋고, 운동선수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거여. 피로 회복이 되고 혈액 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안정이 되고 하니까 대단히 좋은 것이고.

그런데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요가에서 하는 법도 있고, 신선도(神仙道)에서 하는 법도 있고, 또 사회에는 여러 가지 단전호흡법을 전문으로 가르키는 도장도 있고 합니다마는, 다 그 나름대로 장점이 다 있습니다.
몸에 특별한 병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도장에 나가서 그런 전문가한테 배워서 그 병을 나수는데 그런 호흡을 하는 것은 혹 가(可)커니와—참선하는 사람은 그러한 호흡법을 하다가는 언제 화두(話頭)를 드냐 그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러한 호흡법보다는 지끔 산승(山僧)이 말한 간단하고도 쉬운,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아무리 해도 아무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이런 간단하고도 쉬운, 계속해서 해도 조끔도 부담스럽지 않는 이러한 호흡법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은 분은 알아듣지마는, 또 그걸 잘 못 알아들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이 테잎(tape), 녹음 테잎(錄音tape)이 있으니까 그 테이프를 구득(求得)을 해서 그래서 그걸 가지고 여러 번 들으면서 하면 호흡하는 법,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법, 또 화두를 바르게 드는 법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의심>

화두는,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들어마실 때도 ‘이뭣고?’요, 머무를 때도 ‘이뭣고?’요, 내쉴 때도 ‘이뭣고?’ 항상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항상 끊어지지 않고 독로(獨露)해야 하지만, 초학자는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해보시라 그 말이여. 한결 화두가 잘 들어져.

처음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 한 달 두 달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뭐 ‘이뭣고?~’ 한 번 해 놓고, 호흡이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섯 번이고 몇 번 쉴 동안에도 ‘이뭣고?’ 한 번 해서 있는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면 되는 거여.
꼭 3년 10년을 두고도 계속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뭣고?’ 한 번 딱! 든 화두로 하루 종일 그 화두만을, 알 수 없는 의심이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따~악 거기에 있도록 그렇게 관해 나가야 해.

관(觀)이라 하는 것은 그것도 일종에 생각인데,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생각 없는 생각, 생각하면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생각이 이렇게 이렇게 왔다갔다하는데 움직이는 것인데, 관(觀)은 움직임이 없는 생각, ‘이뭣고?’ 했을 때 전후좌우 앞뒤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따~악 있는 거여. ‘이뭣고?’ 한 뒤에 그 남은 그—그 생각이 앞뒷이 다 끊어졌거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면 의단만을 따~악 관조(觀照)해야지, 의단이 있는 데다가 ‘이뭣고? 이뭣고?’ 하고 자꾸 덮치기로 하는 것이 아니여.

참 수백 번 들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처음 오신 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잘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잘 들 수 있으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여.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허고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요
나무~아미타불~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허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니라
나무~아미타불~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
여러분께 권하노니 깊은 신심으로 이 묘한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의 화두(話頭)를 참(參)해서 얻기 어려운 이 감격스러운 이날을, 이 좋은 날을 어찌 헛되이 지내리요.

오늘 여러분은 계(戒)를 받고 또 최상승 활구참선의 화두(話頭)를 탔고 또 불명(佛名)을 타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죄가 소멸하는 날, 부처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난 날입니다. 오늘 이 시간과 같은 이 마음으로 앞으로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1초 1초를 그렇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량겁래(無量劫來)로부터 오면서 어찌 오늘날과 같은 날이 그렇게 흔했겠습니까. 물론 과거에도 이러한 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또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우리 사부대중이 같이 만났을 것입니다마는, 이런 날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닙니다.

이날에 이 마음이 바로 장부(丈夫)의 마음입니다. 비록 여자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이 시간을 기해서 여러분도 장부가 되었습니다. 최상승법을 믿고, 계를 받고, 화두를 타고, 불명을 받게 되었으니, 거기에는 남녀상(男女相)이 없어.
이름하여 그것을 대장부(大丈夫)라 하느니, 불자(佛子)로서의 대장부 해탈장부(解脫丈夫)가 되었으니 영겁을 두고 우리는 대장부로서 생사요달(生死了達)을 하고, 생사요달한 장부로서 일체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그 유래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까 말씀드린 목련존자(目連尊者), 목련존자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인데, 그 신통제일인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생전에 지은 죄로 아귀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고 있어. 목련존자가 신통을 얻어 가지고 어머니 계신 곳을 살펴보니 아귀도에서 그 배고프고 목마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어.

그래서 자기 신통술로 그것을 아무리 그 아귀도에 가 가지고 시원한 물을 드려도 불로 변해 가지고 목이 훨훨 타고, 밥을 갖다가 드려도 목이 콱 맺혀서 불이 나 가지고 더 고통을 받어. 도저히 자기 신통으로도 다 하지 못하니까 부처님께 여쭈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그 모친을 구제(救濟)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너의 신통술로도 안 되는 것이다. 백중날 모든 대중이 해제(解制)를 할 때에 그 대중은 청정한 몸과 마음으로 수행을 해서 다 도심(道心)이 맑고 청정해졌으니 부처님과 그 대중들께 대중공양(大衆供養)으로 백 가지 과일과 맛있는 음식으로 대중공양을 올리면 그 대중스님네 공양을 올린 공덕(功德)으로 너의 어머니가 그 아귀도에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것이다“

그래 가지고 목련존자는 그길로 가서 탁발(托鉢)을 해 가지고 많은 음식과 과일을 마련을 해 가지고 부처님과 대중께 백중날 대중공양을 올려 가지고 그 어머니를 그 고통으로부터 제도(濟度)를 했습니다.
그 뒤로 해마다 백중날은 그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대중공양을 올리고 또 그 남은 음식을 선망부모(先亡父母)에게 하는, 그런 부모를 천도(薦度)하는 그런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주욱 내려오고 있습니다.

요새 잘 모르는 분들은 ‘선망부모를 천도한다’ 해 가지고, 부처님께는 소홀히 올리고 대중스님께는 공양을 별로 안 올리고, 영단(靈壇)에다만 이렇게 쌓아 올린다. 그건 백중날의 그 근본 뜻을 잘 모르면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영단에도 올린 것도 좋지마는, 어쨌든지 부처님과 대중공양에 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정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는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법당(法堂) 가득히 이렇게 오시고 내일은 이 핑계 저 핑계하고 혹 안 오실라고 하신 분이 있을란가 모르지만, 정말 내일은 선망부모(先亡父母), 그 선망부모가 아니면 오늘날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까?
내일, 물론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다 모셨을 것이고 안 모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선망부모는 백중날 ‘어느 자손이 나를 천도해 줄 것인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친구 따라서 와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자손들이 와 있는데 내 아들 딸 며느리는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정성으로 그분도 역시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스님네의 정진하신 그 정진력과 신심으로 그분도 좀 얻어 잡숫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속으로 섭섭하시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니 오늘 오신 분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또 여러분의 가족이나 일가친척 사돈네까지라도 여기 뭐 준비할 것 걱정하시지 말고 어쩠든지 많이 오셔서 모다 참석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불명(佛名)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 노나 드릴 테니 신청만 해 놓고 안 찾아가시면 그것이 이렇게 쌓이게 되니까 반드시 그 불명을 찾아가시기를 부탁을 하고, 그전에 신청을 해 놓고 안 가져가신 분도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허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니라
나무~아미타불~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하고, 먹구름이 일어나 문득 우뢰가 천하에 진동하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라. 작달비 같은 비가 들로부터서 몰려오는구나.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라.
길 가는 나그네는 그 비를 맞고 그 더웁고 피로한 것을 비로 인해서 깨끗이 식혀 버리고, 돌아가는 길이 깨끗하게 씻어져서 문지(먼지)도 안 나고 좋구나.

지끔 온 세상은 이렇게 먹구름이 일고 우뢰가 치는 거와 같습니다. 세계 도처에는 온갖 무서운 무기를 장만하고 그것을 국경에다가 모다 하고 이웃나라를 침범하고 사람이 죽고, 지금 우리나라도 삼팔선(三八線) 모다 뭐 양쪽 뭐 총리 회의가 있다고 모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여전히 무력(武力) 대치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걱정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우리 국내에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온갖 일이 마치 먹구름이 일고, 모다 폭풍우가 일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나쁘게 보면 잠을 못 잘 지경이고 그렇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꼭 어둡게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고,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그것을 그렇게 우리가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먹구름이 일라면 일어라. 뇌성벽력이 일어날라면 일어나라. 작달비가 쏟아질라면 쏟아져라’ 더위를 식히는 것으로 우리는...
그럴 때에 우리는 신심(信心)을 가다듬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우리의 자성을 갖다가 반성하고 그래 가지고 더 무상(無常)을 깨닫고 신심을 더 돈독히 해서 정진을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서 우리의 앞길은 보다 더 밝게 열려 나갈 것이고, 집안도 보다 더 행복하게 나갈 것이고, 사회 · 국가 · 세계도 평화의 방향으로 열려 나갈 것입니다. (40분18초~1시간20분33초) (끝)





[법문 내용]

육사청(六師請) / (게송)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 / 화두·불명·십선계 법회 / 계(戒)라고 하는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우리 불자(佛子)의 목적지에 가는 안전하고, 빠른 길 / 십선계(十善戒) /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 / 대승계(大乘戒).

연비(燃臂)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 / 나선 비구의 ‘배에다 큰 돌을 싣는’ 비유 / 생사윤회의 원인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올바른 자세> <올바른 호흡> <올바른 화두 의심>을 잘하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다.

(게송)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 / (게송)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 / 모든 어둡고 걱정스러운 일을 참선 수행인은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비(燃臂)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가부좌나 반가부좌,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