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3)—1982(임술)년 동안거 해제 법어(83.01.17) (43분)
약 43분.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종일토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토록 바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걸어다니고 손으로 일을 하고, 입으로 먹고 말하고, 앉고 서고 눕고 걸어 다니고, 잠시 잠깐도 쉴 사이가 없이 바쁘다 그 말여. 그렇게 바쁘건만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다. 해탈도 구하지 아니하고, 천당에 태어나는 것도 좋아하덜 않는다 그 말이여.
세상에 도(道)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명업식(無明業識)이 발동을 해 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설쳐대고 있지만,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역시 바쁘다 그 말이여. 그 바쁘지만 그 바쁜 것이 조끔도 방해로울 것이 없어.
정진(精進)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뻐서 참선(參禪)을 못한다. 시간이 없어서 참선을 못한다. 번뇌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그 묘한 관(觀)을 얻은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건 망상이 일어나건,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밥을 먹고 걸어가거나 앉거나 서거나 하나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경계는 갈 곳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복잡한 경계 속에 있으면서 그 복잡한 경계가 자기에게는 아무 방해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못 이렇게 정진을 지어가는 마당에 무슨 해탈(解脫)을 구할 것이 있으며, 무슨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못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무렴(無念)이라 하니까, 이 ‘생각 없는 데 돌아간다’고 표현을 했지만, 생각 없는 데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내면 그건 벌써 틀려 버린 것이고, 스스로 ‘내가 무렴(無念)의 경계에 들어갔다’고 생각을 가져도 이미 무렴이 아녀.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毘盧)의 이마 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갈 뿐 그밖에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정월 17일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일이고, 또 천일기도 가운데에 백일기도의 회향날입니다. 지난 삼동에는 50여 명의 수좌(首座)들이 모여서 참 알뜰하게 짬지게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석 달 동안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잘 정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독감이 들어서 거의 몇 분을 빼놓고는 전부 독감이 들어서 고생들을 했지만, 그 기침을 하고 열이 나고 몸이 아프고 그러면서도 한 분도 도중하차를 하지 아니하고, 이 좁은 방에서 기침을 하면서 그 병을 정진력으로 이겨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마침내 병을 이겨내 가지고 날이 지내갈수록 점점 정진을 모다 열심히 하고 여법하게 해서 끝을 그렇게 잘 마쳤어. 이렇게 알뜰하게 여법하게 정진(精進)해 간다면 무슨 도(道)를 성취하지 못할 것인가?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3년을 이렇게 해서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이러한 뼛속에 사무치는 가슴이 뭉클한 그러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정진(精進)은 누구를 위하는 정진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해결하기 위한 정진이여. 남을 보이기 위해서, 정진 잘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크게는 진리를 깨달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것을 궁극에 목적으로 삼지만, 도를 이룰 때까지는 일체중생이 어디에 있어? 깨달라야 할 진리가 어디가 있어?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가 코앞에 붙어 있는데.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그 생사(生死) 문제가 딱! 눈앞에 있어서 일분일초도 마음을 지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일으켜서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여. 제절로 무상(無常)과 생사에 대한 무상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오른다면 지켜야 할 계행(戒行)이 어디가 있으며, ‘화두를 들어야겄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어디가 있으며, 남을 보이기 위한 정진이 어디가 있으며, 대중규칙도 일부러 지킬려고 할 것이 어디가 있으며, 밥이 맛이 있고 없고, 수용(受用)이 좋고 나쁘고, 그러한 것에 관심 쓸 겨를이 어디가 있느냐? 누구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낱낱이 자기 자신이 저절로 규칙이 지켜져 버릴 것이며, 입승(立繩)이나 찰중(察衆)이나 주의나 간섭을 받을 것이 무엇이 있어? 저절로 50명이 되었건 백 명이 되었건, 옛날에 중국 총림에는 5백 명, 7백 명, 천 명, 천오백 명 이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지만 모두가 다 생사 문제에 분심(憤心) 발심(發心)되어 가지고 그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 간다면 무슨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무엇이 있어?
지난 삼동(三冬) 동안에 대중이 그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았지만 한 사람도 별 탈이 없이 그렇게 온전하게 여법하게 알차게 정진을 하고 이렇게 해제를 맞이한 것은 전원이 그야말로 이와 같이 정진을 해 왔고, 이와 같이 발심을 한 결과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 철만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앞으로 여름 결제가 있을 때까지 또 산철이 또 석 달이 있습니다마는, 산철 동안에 걸망을 지고 어느 산(山), 어느 도량(道場)에 가고, 어느 지방에 가드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이고, 또 여름 석 달 동안에 결제(結制)에 안거에도 그와 같이 정진을 해서,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그 간절한 마음이 지속이 되어야지 상속이 되어야지,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해제가 되면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흩어져 버리고 이리저리 설치다가, 또 다음 결제가 되면 조금 할 듯 할려고 하다가 또 해제가 되면 또 그 분위기가 깨져 버리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3년을 한들 어찌 정진이 궤도(軌道)에 들어가며, 10년을 한들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제 중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할 때에는 전원이 묵언(默言)을 하면서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하면 잡담을 하고, 이렇게 지내는 그런 것이 습관이 배이게 되면 그것이 온전한 정진이라 할 수가 없고. 이 결제 동안에는 정진을 열심히 하다가 해제가 되면 이리저리 산만하게 다니는 것이 그것이 어찌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하겠느냐.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고 한 말씀이 근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하야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허면 원래불허노호지(元來不許老胡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라. 선근(善根)이 성숙(成熟)하면, 선근(善根), 좋은 근기(根機)다 그 말이여. 좋은 근기는 처음부터 선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하근(下根)이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마침내 선근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여. 그렇게 알뜰히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서 선근으로 성숙이 되어 가는 것은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처음부터 ‘나는 하근기(下根機)라, 나는 참선을 못해. 참선을 해봤자 나같은 사람은 도를 이룰 수가 없어’ 자포자기를 해 가지고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선근(善根)이 될 기약이 없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봐서 하근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럴수록에 바른 스승을 찾아서 목숨 바쳐서 다른 사람 정진하는 것보단 3배 내지 10배 100배를 정진을 해 간다면 그 사람이 훨씬 더 빨리 선근으로 성숙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그 말이여.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다. 모냥을 취(取)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용맹정진 가행정진을 해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다’ 그랬지만, 취상구현(取相求玄)을 하라는 것이 아니여.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상(精進相)을 갖고, ‘나는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하는 상(相)을 내고, ‘나는 정진이 잘된다’고 하는 그런 상(相)에 떨어지고, 취상구현(取相求玄)은 진실한 정진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거든.
스승을 구(求)하되 모냥을 보고 구하고, 정진을 하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정진상을 내고, 계율을 갖되 ‘나는 청정한 계율을 갖는다’ 하는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다른 사람 계행(戒行) 안 지킨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미워하고, 이러한 것은 전판 이 취상구현(取相求玄)이 되어서, 모냥을 취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는 것이 되어서 이것은 참다운 수행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율사(律師)가 견성(見性)을 못한다. 율사가 견성한 사람은 없다’
과거에 모다 문헌을 보면 율사가 견성한 도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율사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견성을 못했어.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율사를 하되, 율사라고 하는 상(相)이 떨어졌을 때 견성을 하지, ‘나는 율을 지킨다. 계행이 청정하다’ 그래 가지고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있는 동안에는 세상없이도 도(道)를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사람이 물론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음식도 조심하고, 잠도 좀 적게 자면서 그 정진할려고 애를 쓰는 것, 그렇게 애를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이루겠습니까마는 그러한 상(相)에 떨어져 가지고서는 안 된다.
알뜰히 정진을 하되 그러한 상(相)에 떨어지지 않고 정진한 사람과 그런 상(相)에 떨어져서 정진한 사람은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아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되 정말 철저하게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되, 계를 지키는 상(相)이 없는 분은 남이 보면 알어. 남이 보면 아는 것이고. 계를 지키되 ‘내가 계율을 지킨다’는 계상(戒相)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보면 또 남이 보면 알어.
기위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할라면 계(戒)를 청정히 지키되 계상에 떨어지지 말 것이며,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하면, 한 생각을 몰록, 한 생각 몰록 공겁(空劫) 밖에 뛰어나면,
원래(元來)로 불허노호지(不許老胡知)니라. 원래로 노호(老胡) 아는 것을, 노호 아는 것을 허락지 않을지라. 한 생각 공겁 밖에 뛰어난 소식(消息)은 노호도 이 도리를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호(老胡)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금일 대중은 이 해제일(解制日)을 맞이해서 부처님도 이 도리는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그 도리를 향해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새로 출가한 마음으로,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결제(結制)를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죽는 것이, 죽는 그 시간이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는 그 순간이 새로 태어나는 시간인 것이며, ‘해제(解制)다’ 이제 공부가 공부 기간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바로 동시에 새 결제가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참수행인이라 할 것이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그것이 ‘죽을 사(死)’ 자, 죽음이라 하셨습니다. 그 한 생각 끊어진 그것이 죽음인 동시에 새로 태어나는 찰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生)이요 죽음[死]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느낀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라야 비로소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오느냐? 죽음이 우리에게 오는 그 시일을 시간을 각기 말해 봐라”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하루 동안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한 시간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공부를 못하겠다”
그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죽음은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는 그 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죽음이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그리셨습니다.
지끔 40살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20년간은 정진을 할 수 있겠다’ 이리 생각하고, 한 50을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내가 빨리 죽는다 해도 환갑까지는 정진을 할 수 있겠다’
30세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30년은 정진할 수 있겄다’ 20세 먹은 사람은 ‘30세까지는 경(經)을 보고, 30세부터서 참선을 해도 몇십 년간을 정진할 수 있으니까 충분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모두가 다 정진을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규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생각 하나가 철저하다면 입선(入禪) 방선(放禪) 시간이 어디에 있으며,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파해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정진을 해야 할 정진이 어디가 따로 있으며, 벌써 마음을 지어서 지키고, 마음을 지어서 정진을 하고, 마음을 지어서 잠을 안 자고 다 그르쳐 버린 것이고, 다 김이 벌써 다 새 버린 것입니다.
김새 가지고 정진을 하니 ‘번뇌 때문에 정진을 못한다. 망상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혼침이 오기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수용(受用)이 박(薄)해서 정진을 못한다. 시끄러워서 정진을 못한다’ 이게 다 김이 벌써 다 빠져 버리고, 껍데기 송장이 송장 껍데기만 남아 가지고 정진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花笑山前)에 누천기(漏天機)요. 꽃이 웃는 산 앞에는 천기를 누설(漏泄)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새가 노래하는 수풀 밖에는 남[生]이 없는 말을 하고 있더라. 무생(無生)의 도리를 말하고 있더라. 산 앞에 빨갛게 피고 있는 그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을 하고 있고, 숲 밖에서 새가 노래하는 것은 무생(無生), 무생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더라 그 말이여.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로구나.
두두물물(頭頭物物)은,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은 제각기 스스로 영원무궁(永遠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더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라.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일체 삼라만상 그 자체가 전부 천기를 누설한 것이요, 남[生]이 없는 진리의 표현일진대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요, 구름을 보면 구름이요, 새를 보면 새요,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이 낱낱이 그대로 그놈을 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고대로가 법신(法身)이요, 진여(眞如)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더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입을 벽에다 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이 무슨 (기계음)... 기계가 녹음기가, 마이크가 산승(山僧)을 대신을 해서 끝을 맺어 주었습니다. (처음~42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 /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려라 /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달라야 한다.
생사에 대한 무상(無常)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 /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
(게송)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 /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 /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 / (게송)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
〇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〇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無念)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이 독로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〇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〇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〇‘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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