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600/(526~550)2020. 3. 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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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33)—1994년(갑술년) 하안거결제 법어(94.05.25) (39분)

(1) 약 21분. (2) 약 18분.

(1)------------------


만법유래공리화(萬法由來空裏花)헌디  기의도산해중사(豈宜徒算海中沙)리오

나무~아미타불~

단종철벽은산거(但從鐵壁銀山去)호되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법(萬法)이 원래로 허공(虛空) 속에 꽃이다.

온 법계(法界)에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과 산천초목과 일체(一切) 만법(萬法)이 다 허공 속에 핀 꽃이여.


허공 속에 무슨 꽃이 있는가?

눈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볼 때에는 허공은 맑아서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난 사람의 눈에는 허공 속에 온갖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여.

실지는 없는 것인데, 눈병 난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허공 속의 꽃이다.


기의도산해중사(豈宜徒算海中沙)리오. 어찌 쓸데없이 모래, 바다 가운데 모래를 세고 있느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몸뚱이 자체도 지 · 수 · 화 · 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고, 이 가죽 주머니 속에는 피와 똥과 오줌과 고름이 가득차 있는 더럽고도 추하고, 허망하고도 보잘 것 없는 그런 몸뚱이로 태어났으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눈으로 보고 · 귀로 듣고 · 코로 냄새 맡고 · 혀로 맛보고 · 몸으로 느끼고 · 생각으로 온갖 것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는.

그런 것들이 다 바다 가운데 있는 모래를 얼마나 되는가 세어 보고, 모래 속에 있는 이쁘게 생긴 조개껍질 같은 것을 주워가지고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서로 그것을 취(取)할려고 싸우고, 일평생 동안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가지고 오욕락(五慾樂)에 빠져서 그것을 자기가 취(取)할려고 싸우는 것들이 허공 속에 있는 꽃인 줄 모르고, 바다 가운데에 있는 모래를 세고 있는 것에다가 비유를 하신 것이여.


확실히 그것이 영원성(永遠性)이 없는 것이고 허망(虛妄)한 것인 줄 알고, 쓸데없는 것인 줄 확실히 안다면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을, 그놈을 찾는 일밖에는 인생(人生)으로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단종철벽은산거(但從鐵壁銀山去)여. 은산철벽(銀山鐵壁),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하되 다맛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앞이 콱 맥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이 은산철벽처럼 그렇게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 지어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이거여.


'이 공부를 해서 내가 정말 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을 수 없을까?' '정말 내가 깨달을 만한 그러한 근기(根機)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도 따질 것이 없어.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여.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묻지를 말아라.


이 몸뚱이는 비록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조끔도 다름이 없는 거여. 진여불성(眞如佛性)은.

그래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나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해 나갈 뿐이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오늘 갑술년(甲戌年) 4월 15일 결제법문(結制法門)을 우리는 다 같이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더이상 여러 도반(道伴)들과 형제자매를 위해서 더이상 결제에 법문을 해 드릴 것은 없지만, 기왕 이렇게 여러 선원에서 도반들이 많이 왔고, 또 용화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공부하시는 스님네와 보살님 그리고 시민선원의 거사님네들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으니 불가불(不可不) 이 갑술년 여름안거 구순(九旬), 90일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精進)을 하기 위해서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살자(菩薩子) 보살자(菩薩子)여.

우리 진각국사는 후래(後來)의 우리 모든 불자(佛子)들을 보살자(菩薩子), '자(子)' 자는 어조사로도 볼 수가 있고, 우리가 '새끼 보살'이다 그런 뜻으로도 해석을 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보살자(菩薩子) 보살자(菩薩子)여.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다. 항상 스스로 자기의 머리를 이렇게 만지면서 깊이,

마두인득심사량(摩頭因得審思量)이라, 머리를 만지면서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오. 출가(出家)한—부모를 여의고, 형제자매와 가정을 여의고, 청춘(靑春)을 버리고, 온 세상을 다 버리고 출가한 그 본의(本意)가 무엇이었던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던가?

자기가 자기 머리를 만지면서 항상 그것을 생각하라.


승기상모속기심(僧其相貌俗其心) 가불참천이괴지(可不慚天而愧地)라.

겉모양은 승려(僧侶)의 모양을 하고 그 마음은 속심(俗心)을 가지고 있다면, 하늘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땅에 부끄럽지 않느냐.


추행광언임여위(麤行狂言任汝爲) 확탕노탄하회피(鑊湯爐炭何廻避)리오.

행동은 머트럽고 말은 뻘소리, 미친 소리를 니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펄펄 구리쇠물이 끓고 쇠물이 펄펄 끓는 그런 지옥을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느냐.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우리 후배들, 모든 불자(佛子)들에게...

이것은 자기 자신의 일생동안 따악 자기 거처하는 방 앞에다가 써 붙여 놓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채찍하는 좌우명이었습니다마는, 오늘날 우리는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다 앞에다 써 붙여 놓고 날마다 이 좌우명(右銘)을 읽으면서 우리의 머리를 만져 볼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맛 능히 떨어진 옷을 입고 거칠은 음식을 먹으면서, 출가본의(出家本意), 자기의 본래의 그 참된 마음을 잘 지켜가면서, 겉으로는 어리석어서 바보가 되아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인간의 무엇이 옳고 그른 시비(是非)와, 어떻게 하면 유익(有益)하고 어떻게 하면 해(害)롭고, 흥망성쇠(興亡盛衰) 시비곡절(是非曲折)의 그런 것도 전혀 판단할 줄도 모르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거짓 바보가 되아가지고 그렇게 살면서 오직 속으로는 '이뭣고?' 하나만을 철저히 해 나가라 이거거든.


이렇게 살아가야 외부로부터의 모든 경계(境界)에 끄달리지 않게 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 공부해 나가는데 방해를 받지를 안해. 가장 공부에 열중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리고서도 공부에는 가장 효과적이다 이거거든.

이렇게 살아가야 바로 이것이 대정진인(大精進人)이다 그거여. 크게 정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거거든.


잘난 체하고 똑똑헌 체하고 무슨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선방(禪房)에 걸망을 지고 댕겨도 자기 공부해 나가는데 많은 시간을 뺏기고, 정신을 뺏기고 공부하는 데는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모든 것을 잘한 척할라면 세속(世俗)에서 살지, 뭣하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아가지고—오직 일대사(一大事) 그 하나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다 바치려고 들어온 것이 바로 승단(僧團)이요 그 가운데에서도 선방(禪房)이다 그말이여.

부모형제를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모든 인생을 다 버리고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거거든.


오늘날처럼 우리가, 우리 출가인(出家人)이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정말 우리의 좌우명으로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형제자매 모든 도반들은, '갑술년(甲戌年) 하안거(夏安居)는 다시는 두 번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주질 않는 것입니다'


형식적(形式的)으로 결제(結制)하고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지내다보면 또 여름 석 달이 지내갈 것입니다.

그러나 갑술년 여름철은 다시는 돌아오는 법이 아닙니다. 영원(永遠)을 두고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년에 다시 여름은 돌아오지마는 내년 여름은 갑술년의 여름이 아니고 을해년(乙亥年)의 여름이여.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헌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暇)헌디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이여.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四時)가 돌고 돌아서 더웠다 추워지고 추웠다가 또 더워지고, 이렇게 세월(歲月)이 돌아가는데.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여. 잔나비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는구나.


우리의 심 · 의 · 식(心意識), 마음 · 뜻 · 식.

제8 아뢰야식(第八 阿賴耶識)은 '마음'이고, 제칠 말라식(第七 末那識)은 '뜻'이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은 '의식(意識)'인데, 우리의 의식을 갖다가 심의식(心意識)을 원숭이에다가 비교해, 잔나비에다 비교했는데.


그 원숭이란 놈이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눈[眼]으로 보고 뭐 좋은 거 있으면 그것 그리 쫓아가고, 귀[耳]로 뭔 소리가 나면 그리 쫓아가고, 코[鼻]로 뭔 좋은 냄새가 나면 그리 쫓아가고, 혀[舌]로 무슨 맛있는 것을 만나면 그리 쫓아가고, 몸뚱이[身]로 부드럽고 좋고 시원하고 그러면 그리 쫓아가고, 생각[意]으로 이 좋은 것을 쫓아가고 이래가지고,

원숭이가 육화촌(六華村)에 좋은 맛있는 음식을 탐내서 그걸 쫓아다니고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의식(意識)도 항상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한다 그말이여.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마음대로 구해봤자 잘 구해지기도 어렵지마는 설사 구해졌다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그걸 구하다가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죄업(罪業)을 지어서 끝없는 육도윤회(六道輪廻)가 거듭될 뿐이다 그 말이거든.


끝없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그걸 추구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짐으로 해서—그 한 생각 한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은 죽음의 문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것이더라 이거거든.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바로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바깥 경계로 나가면 아무, 그 생각이 옳건 그르건, 좋건 나쁘건 그것은 '죽음의 문으로 가는 길'이더라 이거거든.(처음~21분24초)





(2)------------------


이 지구가, 지구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통해서 결국은 언젠가는 이 세계도 무너져서 없어질 때가 돌아오는 것이여.

이 몸뚱이가 생로병사를 통해서 결국은 죽어서 없어지듯이 이 세계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어.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현재현겁(現在賢劫),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이 있는데, 그 장엄겁(莊嚴劫)에도 성주괴공이 있고, 현겁(賢劫)에도 성주괴공이 있고, 미래 성숙겁(星宿劫)에도 성주괴공이 있는데,


이 겁(劫)이라 하는 것은 소겁(小劫)이 있고 중겁(中劫)이 있고 대겁(大劫)이 있는데, 사람의 목숨이 제일 많이 살 때가 팔만사천 세(歲)고, 제일 수명이 짧을 때가, 인수(人壽) 정명(定命)이 짧을 때가 십 세인데,


팔만사천 세에서 백년 지나면은 한 살 씩이 줄어져. 또 백년이 지내면 한 살이 줄어지고 또 백년이 지내면 한 살이 줄어지고 해가지고 열 살 때까지 내려와. 그것을 '감겁(減劫)'이라 그러고.

열 살까지 내려오면 그다음의 백년이 지내면은 사람 목숨이 한 살씩이 더 불어나. 또 백년이 지내면 열두 살, 또 백년이 지내면 열세 살, 해서 십 세로부터 팔만사천 세까지 올라가는 거여. 그것을 '증겁(增劫)'이라 그러는데.


한 번 감해져가지고 십 세까지 갔다가 또 다시 백년만에 한 살씩 불어나서 팔만사천 세까지 가는 것을 증겁(增劫).

감겁(減劫), 증겁(增劫) 합해서 이것을 '일소겁(一小劫)'이라 하는데, 일소겁(一小劫)이 스무 번을 되풀이를 하면 이것을 '(일)중겁(一中劫)’이라 하는 거여.


그러면 성주괴공(成住壞空)에 있어서 성(成), 이 세계가 이루어지는데 20소겁(小劫)이 걸리게 되는 거고.

또 20소겁이 되면은 주겁(住劫)이 되는 거여. 머무르는, 세계가 이루어져가지고 그러한 상태로 이렇게 머물렀다가, 그다음 20소겁 동안에 차츰차츰 무너지고[壞], 그다음 20겁은 완전히 텅 빈 상태[空]에서 20겁이 지내는 거여.


그래서 성주괴공(成住壞空), 20겁이 네 번이 되면은 이것이 80소겁인데, 이것을 '일대겁(一大劫)'이라 그러는 건데.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동안에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했는데 주겁 동안에, 성주괴공에 주겁(住劫) 동안에 출세를 하셨어.

그리고 현재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겁천불(賢劫千佛)에—주겁(住劫) 동안인데, 현겁천불에 네 번째 부처님으로 태어나신 거여.

이다음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彌勒佛)이 하강(下降)을 하시는데, 그리고 그다음에 차츰차츰 해서 마지막 부처님이 누지(樓至) 부처님이 출현을 하신다 그말이여.


이렇게 해서 현겁천불(賢劫千佛)이 출현하신 다음에는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 부처님이 또 천불(千佛)이 출세하셔.

미래성숙겁 천불도 성주괴공의 이 사기(四期)에 걸쳐서 해 가지고 이렇게 출현을 하시는데.


우리는 다행히 이 현재현겁(現在賢劫) 제4 부처님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을 하신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수(人壽) 백세(百歲) 정명(定命) 때 출현을 하셨는데, 지금 2천5백34년이 되아, 이천육백년 대 지금이 되었으니까 지금은 인수(人壽) 정명(定命)이 약 74세 정도야.


지금 사람의 평균수명이 70세 남짓 되니까 얼추 맞아 들어가는데, 앞으로 태어난 사람은 차츰차츰 사람 목숨이 짧아진다고 이 추측이 되는데.

과학이 발달함으로써 요새 사람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전쟁이 나고 그래가지고 원자탄이니 수소탄이니 화학무기가 발달하면 사람이 어떻게 죽어갈는지 몰라.

그래서 평균수명이 꼭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길어)진다고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꼭 육체(肉體)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정말 사람의 생사(生死) 문제는 육체에다 기준을 둘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이,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새로 태어나고 그 생각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거쳐서 꺼지면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핍진(逼眞)한 생각이다 그말이여.


이 육체도 역시 뱃속에서 태어나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수백억만 번의 변화를 거쳐서 이렇게 오고 있으니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여.

다 '아무개가 몇 해에 몇 년도에 태어나가지고 몇 년도에 죽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닌 거여. 완전히 딴 사람이 되아가지고 있는 거여.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여.


예를 들어서 촛불을 하나 켰을 때, 그 촛불이 처음에 탁 불을 댕길 때 그때의 초가, 그때의 그 불이 한 시간 쯤 있다가 그 타고 있는 그 '불'과 한 시간 전의 '불'이 같은 불이 아니여. 초도 그 초가 아닌 거여.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몸뚱이도 변(變)해 가고 우리의 생각도 변해 가고 있어서,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항상 그때의 그것이 아니여. 태양도 계속 불이 타고 있는 불덩어리인데, 어제의 불덩어리가 오늘의 불덩어리가 아닌 거여.


그래서 확실히 그렇게 '변(變)해 가고 있고 고대로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다면, 우리도 마음 놓고 '아직도 내가 젊으니까 앞으로 몇 해는 더 살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공부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각각 자기의 생각을 말해보라"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우리가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 공부 못하겠다"


"한 식경(食頃)에도 죽음이, 밥 먹을 동안에도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도 공부 못하겠다"


"한 생각(호흡)에도 죽음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이러한 말씀이 아마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우리는 '그 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生死解脫)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어쨌든지 그 한 생각을 알뜰하게 야무지게 단속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거니와 갑술년, 2538년의 갑술년은 다시 오지 않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명심(銘心)을 하시고,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알뜰하게 이 한 여름을 잘 정진(精進)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보살선방(菩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신 보살님들이나 시민선방(市民禪房)에 방부를 들이는 거사님들이나 또 가정에서 정진을 하시는 백일기도에 동참(同參)하신 분, 전국 여러 선방에서 정진하시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들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흉중하애부하증(胸中何愛復何憎)이리오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제차현성공안외(除此現成公案外)에  차무불법계전등(且無佛法繼傳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흉중(胸中)에 하애부하증(何愛復何憎)이리오. 마음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할까 보냐.

미워하고 이뻐하고 하는 것도 잠깐 동안이고, 잠깐 동안에 꿈에 일어난 일들인데 무엇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집착하고, 무엇을 그렇게 미워하는데 집착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다 놓아 버려. 다 석방(釋放)해 버려.


미웁다고 그놈을 웬수를 맺고 꼭꼭 묶어매 놓고 그놈을 가둬 놓고, 마음속에다 가둬 놓고 산들 무엇이 그렇게 좋을 것이 있어. 마음속에서 다 놔 보네.

이쁘다고 그놈을 붙잡고 늘어져 본들 그것이 무엇이 거기서 나오며, 몇 조금 갈 것이냐 그말이여.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여.

'나는 바보다. 아무것도 제대로 남 앞에 내놓을 것이 없다'고 하는 바보라고 생각하고, 똑똑한 체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바보가 되어서 산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자기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어서 좋으냐.


어리석은 사람은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그러니 거기에서 남의 지탄(指彈)을 받고 남에게 오히려 미움을 받고 경계(警戒)를 당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탁! 까놓고 바보로 해버리면 그날부터 다리를 뻗고 자. 온전히 자기 시간을 가지고 공부를 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제차현성공안외(除此現成公案外)에,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 자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또 들고 이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이것 외(外)에는,

차무불법계전등(且無佛法繼傳燈)이여.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계승(繼承)해 나가는 이것밖에는 불법(佛法)이 없다 그 말이거든.



개혁운동(改革運動)도 좋고, 다 이 총무원에서 잘못된 종법(宗法)을 고치고 어쨌든지 새로 개혁을 해가지고 잘하자고, 잘 해 나가자고 하는 그런 원력보살(願力菩薩)도 좋지. 또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道伴)들은 바보가 되아가지고, '철저한 바보'가 되아가지고 오직 자기의 본참공안에 몰두(沒頭)해서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나간다면,

서울에서 개혁운동하는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과 바보가 되아가지고 선방(禪房)에서 '이뭣고?'하는 그러한 나한(羅漢)들과 서로 하나가 장단을 치면은 그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도 좋지 않느냐 이거여.


우리까지 나서서 거가서 떠들기보다는 바보로서, 탁! 바보로서 '이뭣고?'를 해야만, 서울에서 개혁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나선 보살화현들의 그 애쓴 보람에 보답(報答)하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는가.


나는 바보이기 때문에 바보 같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또 그러한 생각을 여러 도반들에게 말을 하니까,

그 바보의 말도 정말 '나 같은 바보한테는 그게 좋겠다' 이렇게 생각이 드신다면은 올 금년 한 여름을 그렇게 한번 살아보시고, 그것이 좋으면 또 다음 겨울철도 그렇게 살아가서 바보 속에, 개천에서 용 나듯이 '바보 속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그러한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을 사람이 나오리라고 나는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21분29초~39분21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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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법유래공리화(萬法由來空裏花)~'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제5권. 「선게(禪偈)」 '贈圓沙彌求頌' 게송 참고.

*만법(萬法 일만 만/법 법) ; 모든 존재 · 사상(事象 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현상). 여기에서의 법은 사상 · 사물의 뜻이다. 일체법(一切法) · 제법(諸法)이라고도 한다.

*'허공(虛空) 속에 꽃' ; 공리화(空裏花). 공화(空花).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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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❸]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7~158 에서.(가로판 p150~151)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다맛 능히 떨어진 옷을 입고 거칠은 음식을 먹으면서, 출가본의(出家本意), 자기의 본래의 그 참된 마음을 잘 지켜가면서, 겉으로는 어리석어서 바보가 되아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것처럼' ; 오조 홍인(五祖弘忍) 스님의 『최상승론(最上乘論)』에서.

經云衆生若情誠不內發者 於三世縱値恒沙諸佛無所能爲 經云衆生識心自度 佛不能度衆生 若佛能度衆生者 過去諸佛恒沙無量 何故我等不成佛也


경(經)에 이르되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스러운 마음이 안으로부터 돈발(頓發)하지 아니한 자는 삼세(三世)에 비록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무소득(無所得)이니라. 어찌할 바가 없느니라.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서 자기가 자기를 제도(濟度)해야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항하사 무량의 수없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무슨 연고로 우리들은 아직도 성불(成佛)을 못했을 것이냐.


只是情誠不自內發 是故沈沒苦海 努力努力 勤求本心勿令妄漏 過去不知已過未來亦不及 今身現在有遇得聞妙去 分明相勸決解此語 了知守心是第一道

不肯發至誠心求願成佛受無量自在快樂 乃始轟轟隨俗貪求名利 當來墮大地獄中受種種苦惱 將何所及 奈何奈何 努力努力


다못 이것은 정성이 안으로부터서 돈발하지 못한 연고로 생사고해에 침몰한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해서 부지런히 본심을 깨달라서 잠깐 동안도 한눈을 팔지 말지니라.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했어. 다못 지금 우리가 현재 이 묘법(妙法)을 만났으니 분명히 서로 권고해서 결정코 내가 이제 말한 이 법을 깊이 이해해 가지고 확실하게 자기의 본심을 지킬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일의 도(道)니라.


지극한 정성스런 마음을 발하지 못해 가지고 막연하게 성불하기를 바라고 자재해탈(自在解脫)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될 일이 아니고, 그럭저럭 속심(俗心)을 버리지를 못하고 명예나 이끗을 탐구해서 그렇게 그럭저럭 지낸다면은 당래(當來)에 대지옥에 떨어져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但能着破衣飱麤飱 了然守本眞心 佯癡不解語 最省氣力而能有功 是大精進人也 世間迷人不解此理 於無明心中 多涉艱辛廣修相善 望得解脫 乃歸生死苦 了然不失正念而度衆生者 是大力菩薩


다만 능히 해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요연히 근본 참마음을 지키면서 거짓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처럼 하는 것이 가장 힘은 적게 들이면서 공부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대정진인이니라.

세간(世間) 사람은 이러한 이치를 아지를 못하고서 무명심(無明心) 가운데에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널리 상(相)에 나타나는 그러한 선(善)을 닦음으로 해서 해탈도(解脫道)를 바래니, 그러다가 결국은 생사고(生死苦)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느니라.

요연히 바른 생각을 잃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만이 이것이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게송) ‘사시순환난부한~’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卷第三十' '警世二十二首' 게송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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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定命) ; ①날 때부터 정하여진 운명. ②전생의 인연에 의하여 정하여진 목숨. 증겁(增劫)과 감겁(減劫)에 의하여 수명에 차이가 있는데, 나이가 팔만 살부터 100년마다 한 살씩 줄어 열 살 까지 줄었다가[減劫], 다시 100년마다 한 살 씩 늘어 팔만 살까지 이른다[增劫]고 한다.

*핍진하다(逼眞-- 가까이하다 핍/참 진) ; ①실물[眞]과 아주 가깝고[逼] 비슷하다. ②(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게송) ‘흉중하애부하증~’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二十九 ‘山居十首’ 게송 참고.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원력보살(願力菩薩) ; 중생구제의 원력으로 실천행을 하는 보살(수행자).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법문 내용]


(게송)만법유래공리화~ /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 /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던가? / (게송)사시순환난부한~ / 한 생각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 생사(生死) /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게송)흉중하애부하증~.



'이 공부를 해서 내가 정말 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을 수 없을까?' '정말 내가 깨달을 만한 그러한 근기(根機)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도 따질 것이 없어.


이 몸뚱이는 비록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조끔도 다름이 없는 거여. 그래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나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해 나갈 뿐이다.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모든 것을 잘한 척할라면 세속(世俗)에서 살지, 뭣하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아가지고—오직 일대사(一大事) 그 하나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다 바치려고 들어온 것이 바로 승단(僧團)이요 그 가운데에서도 선방(禪房)이다—부모형제를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모든 인생을 다 버리고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오늘날 우리 출가인(出家人)이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左右銘)」을 정말 우리의 좌우명으로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마음대로 구해봤자 잘 구해지기도 어렵지마는 설사 구해졌다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그걸 구하다가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죄업(罪業)을 지어서 끝없는 육도윤회(六道輪廻)가 거듭될 뿐이다. 그런데 끝없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그 오욕락을 추구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바로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바깥 경계로 나가면 아무, 그 생각이 옳건 그르건, 좋건 나쁘건 그것은 '죽음의 문으로 가는 길'이더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꼭 육체(肉體)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정말 사람의 생사(生死) 문제는 육체에다 기준을 둘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이,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새로 태어나고[生] 그 생각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거쳐서 꺼지면은 그것을 죽음[死]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핍진(逼眞)한 생각이다.


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生死解脫)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자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또 들고 이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이것이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계승(繼承)해 나가는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0. 3. 9. 21:31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86분)

(1/4) 약 21분. (2/4) 약 22분. (3/4) 약 21분. (4/4) 약 22분.

(1/4)----------------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정묘년(丁卯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신남신녀와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부처님으로부터 오늘까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부처님 정법(正法)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조에 와서, 이조 말엽에 와서 이 불법(佛法)이, 이 참선법(參禪法)이 잠시 침체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에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께서 출현(出現)을 하셔가지고 처음에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시고, 어떻게 참 두뇌가 명석하시고 또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공부를 하셨던지 일찌감치 그 전강(傳講)을 받아가지고 대강사(大講師)가 되어서 천하에 학인(學人)을 모다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무서운 전염병(傳染病)에 무데기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시고, '경(經)을 아무리 종횡으로 맥힘이 없이 알고 설(說)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아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다' 한 것을 깨달으시고서 학인을 다 흩어버리고 이래가지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리해서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침체(沈滯)한 한국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을 하셔서 경허 큰스님 밑에 만공(滿空) 스님, 혜월(慧月) 스님, 수월(水月) 스님, 여러 도인(道人)들이 나오셨습니다.


그래가지고 한국에 선풍이 크게 융성을 해가지고 만공 스님 밑에 고봉(高峰) 스님, 전강(田岡) 스님, 보월(寶月) 스님, 또 여러 도인들이 나오셔서 오늘날 한국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도처에 선방(禪房)이 있어서 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정진(精進)을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정법이 오늘날 한국에 이렇게 전통해 내려온 것은 오직 경허 스님께서 대강사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확철대오해서 선풍을 진작한 그 공덕(功德)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종가풍(五宗家風)이 있고 그 종파(宗派)에 따라서 가풍이 모다 다르고, 현재도 일본에는 일본식 참선이 전해 내려와서 그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서구에 참선이 소개 되어서 서구 사람들이 많은 일본 참선에 대해서 모다 듣고 배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 한국에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하고는 하늘과 땅에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모두가 다 참선이고 다 좋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참선법은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만큼만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어.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은, 한 말로 말해서 의리선(義理禪)입니다. 공안(公案)을 의리(義理)로, 의리로 따져서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화두(話頭)를 받어가지고 며칠 이마를 찡그리고 애써서 이리저리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 그럴싸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가지고 그 조실 스님한테 가서 자기 본 바를 말하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줍니다.


또 새로 공안을 하나, 화두를 타가지고 또 며칠간 끙끙 앓으면서 그래가지고 뭐라고 그럴싸한 답을 하면, 안 맞으면 "안 맞다! 또 다시 더해라"

또 며칠 애써서 가서 뭐라고 대답하면 "되았다!" 그러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그래서 영리한 사람은 금방 이르기도 하고, 이삼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사오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또 오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대체적으로 백 개 이상의 화두를 통과하면 조실(祖室) 자격을 준다.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니까, 그때에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에 근원(根源)이며 이 하택 저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고,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없어진 때도 없으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어. 머리도 없고 꽁무니도 없으니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이냐?"

"모든 부처님에 근원이며 이 신회의 불성입니다"

아, 그럴싸하니 대답을 하지 안했습니까. 이론적으로 말할 때 뭐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그 맞는 말이지.


육조 스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시기를,

"내가 내동 말하기를,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다고 그러는데 너는 어찌 '모든 부처님에 본원(本源)'이니, '하택신회의 불성(佛性)'이니 하고 왜 이름을 붙이는고? 너는 나중에 애써서 공부를 해가지고 일가(一家)를 이룬다 해도 너는 얼자(孼子)가 되고,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겄구나"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강사(講師)같은 거,

참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하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교리적으로 연구하는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되겄구나' 이렇게 평을 하셨습니다.


얼마 있다가 남악회양(南嶽懷讓)이라고 하는 수좌가 왔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셨습니다.

아! 남악회양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데 대해서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꽈악 맥힌 체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 8년 동안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인고?...' 도저히 꽉 맥혀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그러한 그 콰악 맥혀서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으로, 그 의단(疑團)으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육조 스님의 법(法)을 이어받았습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의리선(義理禪), 일본 사람들이 화두를 뭐 백 개를 통과(通過)하고, 오백 개를 통과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 동안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가지고 "이것이 아닙니까!"그러면 "옳다"하고 또 하고,

천칠백 공안을 다 통과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선이 아니고 활구참선이 아니고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닌 것입니다.


백 개를 통과해봤자 중생심(衆生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지, 이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처음~21분16초)





(2/4)----------------


우리가 무슨 지식(知識)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몇 개 통과했는가? 많이 통과했다고 해서 무슨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닌 바에는 확철대오를 하고, 안 하고 한 것은 놔두고 '바르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 공부는 한 만큼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공부지만, 바르게 하지 못한 공부는 벌써 방향을 잘못 잡고 가는 길이라 서울을 간다며, 저 호남에서 서울을 간다면서 북쪽을 향해서 가지 아니하고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으로 향해 가는 거와 같애서, 바르지 못한 길을 아무리 쉬지 않고 열심히 간다고 해도 바르게 목적지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살부살모(殺父殺母)하는 죄(罪)는 불전참회(佛前懺悔)어니와,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거니와, 미득(未得)을 위증(謂證)하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는 죄는 참회무로(懺悔無路)다, 참회할 길이 없다"하셨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인 죄를 어디 가서 참회를 해.


정법(正法)을 설(說)하고 또 그 정법을 의지해서 수행(修行)을 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이 아닌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

이 의리선을 의리로 이론으로 이렇게 따져서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분석해 들어가는 이런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죽은 구(句)의 참선이다, 죽은 참선이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요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알 수 없는,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 생사심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의리선(義理禪)으로 참선을 하면 그것이 이미 바르지 못한 수행이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떠한 그 나름대로 의리선도 열심히 하다보면 무엇인가 스스로 느낀 바가 있고 그 어떤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른 깨달음이 아니여.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그것이 바른 깨달음인줄 착각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그런 삿된 참선을 지도하고.

또 그런 삿된 참선을 배워가지고 그 사람이 또 그런 삿된 수행을 해가지고 또 삿된 어떤 것을 깨달라 가지고 그걸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전하고 해서 영영 부처님의 정법은 다 믿는 사람이 없고 실천한 사람이 없어지고 삿된 참선만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가득차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법이, 정법(正法)이 멸망(滅亡)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나 어떠한 국법(國法)으로 불법(佛法)이 멸망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탄압을 하고 아무리 파괴를 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나타난 어떠한 그러한 것은 탄압을 할 수가 있고 그 파괴를 할 수가 있겠지만—사찰(寺刹)이라든지 또는 불상(佛像)이라든지 경전(經典)이라든지 그런 상(相)이 있는 그러한 것들은 파괴할 수가 있겠지마는, 정법(正法)은 그것으로서 멸망이 되지 않습니다.


정법은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제자들이 우리 불법을 삿되게 믿고 삿되게 행할 때에 정법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그 사위국(舍衛國)에 파사익왕(波斯匿王)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부인을 얻었는데, 그 말리부인(末利夫人)이라 한 왕후(王侯)를 얻었습니다.

그 말리부인은 원래—부처님의 고국(故國)이신 그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에 마하남(摩訶男)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에 종의 아들입니다.


그 부처님 나라는 가비라왕국이라 해서 나라가 조그만하고, 파사익왕이 있는 그 사위국은 대단히 인도에서도 참 큰 나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비라왕국에 그 공주를 자기 왕후로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비라왕국은 나라는 적지마는 양반의 나라고, 또 이 사위국은 나라는 워낙 크고 했지만 가비라왕국에서 볼 때에는 '나라만 크고 모다 그래서 그러기는 허되 참 양반의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지, 공주를 왕비로 달라고 하니까 차마 공주를 줄 수가 없으니까 그 궁녀(宮女), 종 가운데에 잘 생기고 비슷한 사람을 골라서 공주로 속여가지고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시집간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그 말리부인인데, 그 말리부인은 평소에 항상 마음속으로 자기는 신분이 종이지만 '왕비가 한번 되었으면...' 하고 항시 마음속으로 축원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러면서 참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고 그러면서 그렇게 인자 왕비가 되기를 서원을 하다가 결국은 그 왕비로, 이상스럽게 그 공주 대신 자기가 왕비로 시집을 가게 되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고 일심으로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서원(誓願)을 세우고 원(願)을 세우면 반드시 우리 누구라도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러한 위신력(威神力)이 있어서, 지극정성으로 기구(祈求)하고 축원을 하고 빌면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바르고 좋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 말리부인이 파사익왕한테 시집을 가가지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이 ‘유리태자(瑠璃太子)’입니다. 아주 영특하고 잘나고 그랬는데, 여덟 살이 되어서 그래서 인자 그 왕이 그 아들을 여덟 살이 되었으니 자기 외가로 보내서 거기서 모든 것을 잘 배우고 그러라고 외갓집으로 외할아버지한테 보냈습니다.


그 외가댁에서 그 외손자가 왔으니 그걸 참 잘 가리켜야겄는데, 활 쏘는 법도 가리키고 말 타는 법도 가리키고 모든 학문도 가리키고 그런데, '혼자만 가리키기보단 기왕이면 오백 명의 그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든지, 양반의 집 아들들 뽑아가지고 같이 공부를 시켰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내가지고 큰 수련도장(修鍊道場)을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맨 처음에 부처님을 모셔다가 설법(說法)을 먼저 듣고, 그리고 나서 인자 활 쏘는 법과 그 밖에 모든 공부를 시키리라 해가지고 새로 집을 짓고, 인자 오백 명의 동자(童子)들과 함께 요렇게 해서 했는데,

그 유리태자는 자기로 인해서 그렇게 참 외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참 오백 명의 동자를 모다 모아가지고 같이 공부하게 하고 새로 집을 짓고 하니까 너무너무 기뻐서, 그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가지고는 거기서 막 너무너무 기뻐서 그냥 활발하게 거동을 하고 막 그냥 자기가 일인자가 되어가지고 그러니까, 그 사람, 거기에 모인 동자들이 수근덕 수근덕거리면서 "종놈의 자식이 까분다"고, 아!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그 애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내용을 갖다가, 그러니까 "왜 나보고 욕하냐"고 막 하다가 그 위~하니 달라들어서 아주 치고받고 해서 욕설을 퍼붓고 해서 큰 망신을 하고 사위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같이 모시고 간 바라문(婆羅門) 하나가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내가 나중에 부왕마마가 승하(昇遐)하시고 임금이 되거든, 오늘 내가 당한 이 치욕과 이 봉변을 나한테 일깨워다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결국은 그 왕이 승하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에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그 대신이 그때 그 봉변 당했던 일을 또 이 기억을 개득(이해)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많은 병사를 갖다가 이끌고 가비라왕국을 갖다가 쳐부시러 갔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서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그 중간 경계 국경지대에 가가지고 큰 고목나무가 하나 죽어 갖고 있었는데 그 고목나무 그늘에 가서 떠억 이렇게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자 그 유리왕이 대군을 통솔을 해가지고 국경을 넘어서려고 하는데 고목(枯木)나무 밑에 부처님이 터억 앉아 계시거든.


"아니 부처님께서 왠 이리 고목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앉아 계십니까?"헌께,

"비록 고목은 되었으나 나에 고국(故國)의 그늘이 아니냐. 말라 죽은 고목일망정 조국(祖國)의 그늘이 좋아서 이렇게 그늘 밑에가 있노라"

아! 그 말씀을 듣고서 유리왕이 회군(回軍)을 했습니다. 군사를 몰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이 호고(好苦)라고 하는 대신이 또 유리왕을 충동(衝動)이를 쳐가지고,
"먼저는 부처님 때문에 못했지마는, 아! 어찌 그 참 치욕을 당하고서도 그 가비라왕국을 그냥 둘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또 충동이를 치니까, 대군을 몰아가지고 또 쳐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부처님이 설사 거기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걸 무시해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래가지고 가기로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어봤자 소용이 없는 줄 짐작을 하시고 그냥 안 가셨는데.


가비라왕국에 쳐들어갔는데 성문을 갖다가 탁 때려 잠그고 그래 있는데, 큰 소리를 치면서 성문을 갖다가 열고 결국은 들어갔는데, 그때 그 유리왕의 외할아버지인 마하남(摩訶男)이,

"좋다! 니가 이 나라를 치는 것을 내 힘으로 어찌 막겠냐마는 내가 한 가지 소원이 있다. 내가 이 궁정(宮廷) 뜰에 있는 연못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성문을 열어놓고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도망가게 해라. 내가 물속에 들어가서 참고 있은들 얼마 동안을 있겠느냐? 그 소원 한번만 들어다오"


"그것 그렇게 하지요"

마하남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도망갈 사람은 도망가라' 해가지고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문(四門)을 다 열어놓고 도망가라 그러는데, 서로 앞을 다투어서 도망가는데 벌집 건드려 놓은 것처럼 와- 허니 쏟아져 나가는데, 남문(南門)으로 나갔던 사람이 계속 도망가지를 않고 동문(東門)으로 도로 들어오고, 북문(北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서문(西門)으로 들어오고, 서문(西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남문(南門)으로 들어오고,

아! 계속 줄달음질쳐서 도망가면 다 살아갈텐디 어쩐 셈인지 다시 다른 문으로 들어오고 들어왔다 나가고 나가고 해가지고는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과거에 업(業)이 있어서 결국은 죽을 수 밖에는 없구나'

하여간 한참 있어도 연못 속에 들어갔던 그 마하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연못 속에 들어가서 보라니까, 머리를 그 연못 속에 있는 나무 등걸에다가 칭칭 틀어 감고서 그래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하남은 자기 한 몸을 죽여서 많은 사람들을 피난을 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참 희생적인 방편을 썼는데, 결국은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하고 모두 다, 참 이 경전에는 '9천9백9십만 명이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을 모두 다 잡어서 땅에다가 묻고, 흙으로 다 덮어서 포개서 다 묻고서 많은 코끼리를 동원을 해가지고는 밟아서 다 죽였는데, 거기서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렇게 죽일라고 할 때에 목련존자가, 내나 부처님의 제자고 신통이 제일인데 부처님의 그 가슴 아파하신 것을 알고서,

"제가 가서 그 가비라(迦毘羅) 성중(城中)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저 허공계(虛空界)로 데려다가 피신을 시킬까요?" 이렇게 여쭈어봤습니다.


"니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글쎄요. 참 어렵겠습니다마는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궁중에 왕족과 모다 거기 사람들을 오천 명을 갖다가 뽑아가지고 바리때에다 담았습니다. 담아가지고 저 공중으로 갖다가 놓았습니다.(21분18초~42분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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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는데, 그리고 그 가비라왕국에 다 사람들을 죽이고 다 인자 가버렸는데, 그때 목련존자가 그 허공중에 올라가가지고 그 오천 명 피난시킨 그걸 보니까 바리때 안에 다 고스란히 죽어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피차 그 전생(前生)에 과보(果報)로 죽게 된 그런 경우는 억지로 어떤 신통술로 그것을 억지로 그것을 살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살상(殺傷)이 난 뒤에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그 현장에를 가셨습니다.

당신의 고국이고, 당신의 모다 친척이고 사촌들이고 모다 그래서 안 가볼 수가 없죠. 그래서 제자를 거느리고 가서 보시니까 참 그 비참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내가 그전에 여기에 와서 설법을 해가지고 참 수천만 중(衆)을 갖다가 득도(得道)케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참 비참한 현장이 되고 말았구나. 내가 이제부터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디디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유리왕과 여기 와서 이렇게 참 참혹한 행동을 한 저 군사들은 오래 살지를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 7일 후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멸종(滅種)을 하고 말 것이다" 하고 부처님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유리왕이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을 듣고서 너무너무 공포에 떨고 그래가지고 그 군사를 이끌고 강변에 가가지고 거기서 풍악을 잽히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가만히 있자니 두렵기만 하고 그러니까 강변에 가가지고는 날을 새서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래가지고 궁중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그렇게 지새는데, 갑자기 밤중에 비구름이 일어가지고 폭풍이 불어서 아주 큰 폭우가 쏟아져가지고는 강변이 넘쳐서 왕과 그 병사들이 수십만 명이 다 큰물이 져서 다 떠내려 가가지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위국에 궁전에는 벼락을 쳐가지고,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져서 벼락을 쳐가지고는 삽시간에 불이 타서 재가 다 되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무참하게 많은 사람을 죽여서—코끼리를 시켜서 밟아 죽이고 그래가지고 그 과보가 워낙—부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것을 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조국이요 부처님의 친척이요 사촌들이고 부처님의 조국에 백성들을 갖다가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아서 죽였으니, 마땅히 큰물이 져서 죽을 수밖에는 없고 또 하늘에서 벼락을 쳐서 그 악당들이 살던 궁은 잿더미가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때에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저 자들이 모다 죽어서는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구들이 부처님께, "무엇 때문에 저 유리왕이 저렇게 이 가비라왕국에 부처님의 그 권속과 왕과 병, 백성을 저렇게 참혹하게 죽이게 되았을까요? 전생(前生)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저렇게 되았을까요?" 하고 여쭤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거 구원겁(久遠劫)에 이 사위국(舍衛國)에 강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었는데, 그때 이 큰 못에 그때 인자 많은 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나라에 가뭄이 들어서 농사가 잘 안되고 흉년이 들어가지고 모다 배가 고프니까 그 못에서 많은 고기를 잡아먹었어"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그 많은 고기를 다 잡아서 먹었었는데, 그때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가 하나 있었고 양설(兩舌)이라 하는 두 고기가 있었는데, 그 고기 중에는 제일 참 큰 왕이었었는데, '우리들이 아무 인간을 해롭게 한 일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씨를 말리고 다 죽이니 우리가 언젠가는 내세(來世)에 사람이 되면은 우리가 이 원한(怨恨)을 갚자' 하고 그렇게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사위국에 그 고기를 잡아먹고 모다 그런 그 사이에 어린 소년이 하나가 있었는데, 고기를 잡아서 이 언덕으로 잡아 올리면은 그 막대기를 가지고 고기 그 머리빡을 탁! 치고 그러면서 고기가 잡혀 올라올 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고, 또 잡아 올리면은 막대기로 탁! 치고 이 탁! 치고 해서 아 그렇게 참 뭣도 모르고 그렇게 좋아서 그랬던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고기를 잡아먹던 사람들이 바로 이 가비라왕국에 마하남(摩訶男)을 위시(爲始)한 많은 가비라 모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가친척 그 백성들이고,

그 잡아먹힌 고기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는 이 유리태자(瑠璃太子)고, 또 이 양설(兩舌)이라고 하는 고기는 아까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 임금으로 하여금 자꾸 충둥이를 쳐서 그 가비라왕국을 공격하라고 충둥이 친 그 바라문이고.

그때 소년이 고기를 갖다가 탁 탁 막대기로 때리면서 좋아하던 그 소년이 누구냐하면 바로 석가세존(釋迦世尊)이다 이거거든.


과거에 그러한 그 못에 수천 마리, 수만 마리 고기를 그렇게 참 잡아서 회쳐 먹고 삶아 먹고 지저 먹고 볶아 먹고 그 이렇게 했다 그말이여.

그러한 과보(果報)로 해서 금생에 그 무서운 참 이 살생(殺生)을 당하게 되았습니다.


금생의 인연(因緣)으로만 본다면, 종을 갖다가 공주로 속여가지고 왕비로 시집을 보낸 그 잘못이 있고. 또 거기서 태어난 그 유리태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놀려대고 모다 그러한 원인을 찾을 수가 있지만.

설사 그렇기로서니 자기 외조부—사실은 뭐 종의 자식이니까 외조부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 입장에서 보면은 그러한 자기를 갖다가, 일국에 태자(太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놀린 그 말을 듣고 그만큼 참 분(憤)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무참(無慘)하게 살생을 하고 그럴 수는 없어.


웬수를 갚을라면 거기에 관계되는 사람만 허지, 그렇다고해서 아주 그 많은 사람을 갖다가 생(生)으로 매장을 해가지고 코끼리로 밟혀서 죽이고. 그 살생을 하되 그런 방법이 그렇게 참혹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그러는 법이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웬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요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오늘날 이 세계가 이렇게 서로 이 사상(思想)이 다르고 이념(理念)이 다르고 또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다르면 서로 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싸우는데, 그렇게 싸와가지고 자기나라가 행복해질 수도 없는 거고, 싸와가지고 이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 이 살생(殺生), 예수교에서는 '모든 동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잡어먹으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놨으니까 소고 돼지고 닥치는 대로 동물은 잡어먹어야 옳다'고 그런 말들을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래서 그러면 지금은 사람 몸뚱이에 이나 벼룩이 없어졌지만 참 해방 직후 굉장히 이가 참 많고, 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런데 "그러면 사람 몸뚱이를 이나 벼룩이, 벼룩이나 빈대가 그 (피를) 빨아 먹고 사는데, 그러면 사람은 이나 벼룩 빈대가 (피) 빨아 먹으라고 이 세상에 태어났겠느냐?"고 이렇게 반박을 하고 웃은 일도 있습니다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짐승이 태어났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되아가지고 힘 강한 놈이 약한 놈을 갖다가 먹고 살고 이렇게 하고 있으나 이것은 떳떳한, 마땅히 그렇게 되아라고 누가 만들어 놨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그 미물(微物)의 고기를 잡아먹은 그 과보(果報)로도 그렇게 참 무참한 과보를 받게 되거든,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여가지고 그 무서운 과보를 어떻게 면할 길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죽인 죄도 그렇게 무섭거든, 하물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정법(正法)을 멸망하게 하는 죄는 또한 무엇에다가 비유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법(邪法)을 믿고, 바른 정법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먼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삿된 법을 남에게 가리키면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정법을 실천을 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영원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사 화두(話頭) 하나를 타가지고 일심(一心)으로 참구(參究)를 해서 '이뭣고?'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알아진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그러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참을성 있게, 끈기 있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철저히 믿기를,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자기도 도(道)를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그런 긍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려고 하고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잠시도 일으켜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물론 그 '번뇌(煩惱)다' '망상(妄想)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되아.

버릴려고 한다고 버려지지도 않고,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또한 하나의 망상(妄想)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진심(瞋心)이 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슬픔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넘어져도 '이뭣고?'

뒤집어져도 '이뭣고?'


사업이 잘되아도 '이뭣고?'

사업이 실패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하고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립두수지(直立頭垂地)하고  횡면각지천(橫眠脚指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42분59초~64분1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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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雨中)에 간호월(看好月)하고  화리(火裏)에 급청량(汲淸凉)이다.

비 가운데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가운데에서 그 밝은 달을 보고, 불이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시원한 맑은 물을 길을지니라.


밝은 달은 비가 안 올 때에 볼 수가 있고, 맑은 물은 맑은 샘에서 퍼야지,

어떻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구름 덮인 하늘에서 그 밝은 달을 찾으며,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어떻게 맑은 물을 길러낼 수가 있을까?


진리(眞理)에 입각해서 보면, 남(南)과 북(北)이 같은 것입니다.

북쪽의 반대가 남쪽일 것 같지만, 북쪽이 바로 남쪽이고 남쪽이 바로 북쪽이여.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남쪽이 돌아오고만 마는 것입니다.


콜롬버스가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다보니까 결국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는 일을 항상 만나고 항상 보기를 바래지만,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남으로써 행복(幸福)을 삼지만, 사실은 마음에 맞는 일만을 추구하다 보면 머지않아서 불행(不幸)이 돌아오는 거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自己)를 단속(團束)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욱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도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많고, 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에 맞는 사람만 찾을라고 하면 어디에 그렇게 만나겠습니까? 내 마음에 꼭 든 일만 만나고자하나 그런 일은 만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혹 만났다 하더라도 잠시지 다시 또 그것은 나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음에 맞지 않는 역경(逆境)에서 거기서 부딪히고, 거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고 용감하게 지혜롭게 끈기 있게 헤치고 나가면, 거기에서 이 사바세계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 닦는 것도, 의리선(義理禪)은 따져 들어가면 알아진 것이 있고, 얻어진 것이 있고, 재미가 있고, 맛이 있으니까, 공안(公案) 하나 얻어서 이리저리 해가지고 통과하고, 또 공안 하나를 타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아!’ 알아맞추고 하면 그것 곧 그냥 깨달음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것같이 느껴지고, 재미가 있고 얻은 바가 있고, 남에게 '나는 공안 몇 개를 알았다' 이렇게 자랑할 것이 있고, 썩 할만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공부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서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이여.


한 가정, 한 가족, 일가친척, 우리 마음에 맞은 사람 엄격히 말하자면 사실은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어렵다고해서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아니고 형제가 아니고 일가친척이 아니고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각각 숙세(宿世)로부터 지어 내려오는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고 그러기 때문에 얼굴을 각각 다르게 태어났고, 생각도 성격도 각각 다르고, 따라서 본 바가 다르고 생각한 바가 다르니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여.


서로 지은 바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그 근원은 모르고서 내 마음에 맞기만을 바래고 내 마음에 안 맞으면 미워하고 그 사람을 갖다가 짓밟고 쫓아내고 멀리하고 망하기를 바래고 이런다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너무 참 어렵고,

정말 스스로 고통과 불행의 보금자리를 자기가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기가 고통을 받게 되는 거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생(生)을 거듭함에 따라서 점점 고통스러운 생을 만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유리태자가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전생에 살생을 당했다고 해서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그렇게 해가지고 살생을 해서 무슨 좋은 꼴을 자기는 봅니까?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고, 불이 나서 자기 궁실이 다 타 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전생에 우물 못 속에서 사람들로부터서 잡아먹히더니, 금생에 다시 와서 보복을 하고서 자기도 다시 멸망을 했습니다. 내생에 다시 원한심을 품고 또 보복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쳤던지,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를, 인과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前生)에 코끼리의 왕이 되어 계실 때에 어떠한 포수(砲手)가 위경(危境)에 처해서 죽게 될 때 그 포수를 살려주었는데—포수가 가가지고 돌아갔는데, 그 광고를 보니까 '아금니가 여섯 개가 달린 코끼리를 잡어 온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소원을, 소원대로 해준다'하고 광고가 붙었어.


그 광고를 보고서 '내가 연전에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가지고 죽게 되었을 때 나를 살려준 코끼리가 바로 이 상아(象牙)가 여섯 개가 붙었다' 한 것을 깨닫고서 "내가 그 코끼리를 잡어 오겠습니다"하고 자원을 했습니다.

"그래, 니가 잡어오너라"


그 코끼리는 스님네를 좋아하고 불법(佛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반 보통 사람한테는 도저히 잡혀서 죽질 않는데, 스님네는 살생(殺生)을 아니하기 때문에 그 스님네가 가까이 온 것은 경계(警戒)를 아니해.
그래서 그 포수(砲手)는 머리를 깎고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스님으로 가장(假裝)해가지고 들어가 가지고 독 묻은 창으로 그 코끼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코끼리의 그 군사들이, 모다 백성들이 오백 마리가 달라들어서 그 포수를 갖다가 밟아서 죽일려고 하니까 그 코끼리의 왕이 그 포수를 갖다가 자기 네 다리 사이에다가 이렇게 숨겨놓고,
"너희들, 이 죽이지 말아라. 이 포수는 내가 저를 살려준 그 생명의 은혜를 갖다가 이렇게 나를 독 묻은 창으로 쑤셔서 나를 죽이니, 나는 이 포수에게 어떻게 이 보복을 할 것인가?

너희들 식으로 이렇게 밟아서 죽이면 내생에 또 이러한 보복을 당할 것이니, 내가 이 다음 생에 도(道)를 성취해서 성불(成佛)을 하게 되면은 저 포수는 나의 여섯 개의 이 아금니를 뽑아가기 위해서 나를 죽였지만, 내생에 내가 성불하게 되면 이 포수의 여섯 도둑놈을, 이 삼독(三毒)과 육적(六賊)의 마음을 내가 뽑아 주리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내 아금니 여섯 개를 어서 뽑아다가 너의 임금님에게 바쳐서 영광(榮光)을 누릴지니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그 코끼리는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생(生), 생(生)을 두고 그러한 식으로 해서 수행을 쌓고 또 새 몸을 받아서 또 그렇게 수행을 쌓고 해가지고 마침내는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을 얻어서 성불(成佛)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부처님의 그러한 이 높고 거룩한 뜻을 본받아서, 부처님과 같이 다는 실천을 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 보복하는 마음,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보복할 마음을 갖지 말자'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굳게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가족을 상대하고 친구를 상대하고 이웃을 상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이 될 때가 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법회(法會)가 끝난 다음에 불명(佛名)을 타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오계(五戒)를 받는 법요식(法要式)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그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고 또 『천수경(千手經)』을 외우는 그런 독경(讀經) 대회를 열어서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상(賞)을 주고 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부처님의 그 교리가 담겨있는 동화(童話)를 구연(口演)을 해가지고 그래서 거기서 뽑힌 어린이들을 오늘 시상(施賞)을 하고, 또 거기에서 최우수상을 탄 어린이의 구연을, 동화 구연을 다 같이 듣기로 합시다.




어린이 동화(童話) 구연(口演)



제가 여러분께 해 드릴 이야기는, 전라북도 김제군 용진면 효정리에서 내려오는 금산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옛날 한 노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어요.

총각은 병에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지 구해 어머니께 드렸으나 그 병은 효과가 없었어요.


겨울, 어느 추운 겨울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갑자기 잉어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어요.

항상 굶기만 하시던 어머니께서 무엇이 잡수시고 싶다는 말을 하셨으니 총각은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추운 겨울날 잉어가 있겠어요?

그래도 낚싯대를 들고 연못으로 가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어 낚싯대를 넣었어요. 한참 있으니 무엇이 잡히는 듯해서 들어올려보니 그것은 잉어가 아닌 큰 자라였어요.


총각은 그것이라도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져갔는데, 어머니께서는 그것은 드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총각은 그것을 큰 물항아리에다 넣어두고 다시 잉어를 잡으러 나왔어요.

밤새도록 잉어를 잡으려 했지만 잉어는 잡히지 않고 날은 점점 밝아졌어요.


어머니께 아침밥을 지어드리려는 생각으로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게 왠 일까요?

부엌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어요.

그것도 잉어를 끓인 고깃국도 있었구요.

어머니께선 아침밥을 맛있게 드셨어요.


총각은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몰랐어요.

누가 차려놓은 밥상인지 몰랐기 때문이죠.


이렇게 삼일이 지난 후 총각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누가 그러는지 보기로 하였어요.

낚시질을 하러 나가는 척하다가 부엌 문틈으로 살며시 보았어요.

그랬더니 자라를 넣어둔 물항아리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나와 밥을 하는 것이었어요.

총각은 그 처녀를 붙들었어요.

마침내는 그 처녀와 결혼도 하게 되었어요.


아내의 간호로 어머니의 병환은 다 낳았어요.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아내는 갑자기 총각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였어요.

그 부탁은 열 달만 밖에 나갔다 오라는 것이었어요.


총각은 예쁜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짐을 싸 밖으로 나갔어요.

겨우 십일을 돌아다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아내의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랬더니 총각은 깜짝 놀랬어요.

방 안에서는 끔찍스런 광경이 일어났어요.

아내는 보이지 않고 큰 용 한 마리와 새끼 용 일곱 마리로 얽혀 있는 것이었어요.


원래 아내는 용궁에 살던 용왕의 딸이었데요.

총각이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용왕님께서 감동하시어 딸을 자라의 몸으로 바꾸어 세상에 나가게 하였고 그 총각에게 잡히어 그 총각을 도와주라고 하였데요.


총각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나가 열 달을 지내고 오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이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일곱 마리 새끼 용도 모두 다 죽어버렸어요.


일곱 마리 새끼 용은 연못가 언덕 위에 묻어주고 총각은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어요. 이 스님이 바로 진표국사(眞表國師)랍니다.

진표국사는 금산사(金山寺)를 짓고 산속으로 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데요.

(어린이가 내용을 잊자 대중들 격려 박수)


아직도, 현재도, 지금도 전라북도 효정리에 가면 일곱 마리 새끼 용의 무덤이 있고, 그 마을을 효자가 난 마을이라 하여 효정리라 부르고 있답니다. (동화 구연 끝)




그 금산사(金山寺) 진평(진표)율사의 그 설화(說話)를 참 그 잘 엮어서 얘기를 했는데, 여러분께서도 잘 들으신 바와 같이 너무 참 잘했는데, 조끔 말이 쫌 빨라서 조끔 그런 점이 있습니다마는, 말만 조끔 천천히 하면서 그렇게 했으면 훨씬 더 알아듣기가 좋을뻔 봤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서 그런 불교에 인과설(因果說)이라든지, 불교의 진리(眞理)가 담겨있는 그러한 동화를 그 책을 읽고 또 그것을 구연(口演)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하면, 자기도 공부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가 있어서 참 뜻이 깊은 일이고,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계속해서 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 훌륭한 포교사(布敎師)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등 · 2등 · 3등 모다 입상한 분들이 다 모두 잘하리라고 생각하고, 다 들어봤으면 참 좋겠는데 시간 관계상 한 사람만을 듣고 생략하기로 하고, 다음 기회가 있으면 또 들을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 움큼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매어 두노라.(64분11초~1시간 25분42초)(끝)





[법문 내용]


(게송)행주좌와일체처~ / 이조 말엽 한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선사 / 육조 스님의 '이뭣고?' 화두, 하택신회와 남악회양 / 한국의 활구참선은 조사선 /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하고,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한다.


부처님의 조국인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유리왕과의 악연. 가비라왕국과 사위국의 멸망. 『증일아함경』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에 있는 석가족의 멸망 인과.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게송)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 /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를 단속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 / 어린이 동화(童話)구연(口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 일체시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이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 죽은 구句의 참선. 죽은 참선)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웬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요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20. 3. 6. 17:16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88)—1989년 5월 첫째일요법회(89.05.07) (용388) (69분)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8분. (4/4) 약 13분.

(1/4)----------------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디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으면 뻑뻑이 손에 응하게 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다. 겨울에는 눈이 휘날리는 날 밤, 달이 휘황찬 밝고, 봄에면 봄바람이 불면 꽃이 휘날려. 그러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되었다. 무량억겁(無量億劫) 전 이전부터서 무량억겁 미래를 향해서 생겨난 때가 없고 없어진 때가 없을 것이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아침 아침마다 닭은 오경에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다. 봄이 오면 곳곳마다 산에 꽃이 아름답게 피더라.



방금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활구참선 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고 40여 년간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나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통해서 중생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고 한 말씀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고 금쪽보다도 더 소중한 말씀들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 때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존자(阿難尊者), 그 아난존자는 조달(調達)이의 동생이며 또 부처님의 사촌동생입니다.

출가해 가지고 주욱 부처님을 시봉을 했는데 스승으로서 정말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시봉을 하면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을 한마디, 한 구절도 놓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조옥 고대로 기억을 해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결집(結集)을 할 때에 아난존자가 법상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외워서 오백 성승(聖僧)이 증명함으로써 제1회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아난존자가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얼마나 비통하던지 몸을 들어서 통곡을 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리는 느낌, 캄캄한 밤에 등불을 놓쳐 버린 데다가 비교를 할까—보통 세속에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사랑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 이렇게 슬픔을 표현을 하지만.

여러 제자 가운데에서도 유독히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앉었다 섰다, 이마를 땅에다 부딪쳤다, 고대로 놔뒀다가는 아주 그냥 죽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몹시도 슬퍼했습니다.


그때 그 곁에 있던 한 구참(久參) 제자가 아난존자를 달래서 "지금 부처님께서는 곧 아주 열반에 드실 텐데 그렇게 슬퍼하기만 해서 되겠느냐? 곧 아주 열반에 드시기 전에 꼭 여쭈어보아야 할 일에 대해서 여쭈어 봐라"

첫째는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처치를 해야겠습니까?"


차익(車匿 Chandaka 찬다카)이란 사람은 부처님 처음에 출가하실 때에 마부(馬夫)였습니다. 말고삐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던 마부여.

상전(上典)이 출가를 하시니까 저도 따라서 출가할 원을 세워서 출가를 했는데, '부처님 최초에 출가하실 때 자기가 말고삐를 잡고 출가했다' 그것을 아주 코에다 걸고서 아주 행패가 심했습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대중의 법규도 지키지 않고, 겨우 부처님만 조금 무서워하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누구도 무서워하지를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대단히 처치 곤란한 존재였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그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그걸 여쭈어봤어.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묵빈대처(默擯對處)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거여. 잘하거나 못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일체 상관하지 않는 거여. 대중 전체가 그 사람하고는 첫째, 말을 주고받고 하지 않고, 일체 잘잘못을 얘기하지 않고, 없는 것이나 있는 것이나 상관 말고 내버려둬 버리는 거여.

그것이 묵빈대처(默擯對處)라고 해서 대중생활 속에서는 대단히 엄중한 대치법(對治法)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둘째 번에는 무슨 말씀을 여쭈어봤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것을 여쭈어봐라. 그래서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라" 계(戒)—5계, 10계, 비구 250계, 비구니 오백계, 또 보살십중대계, 48경계, 이러한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세 번째 질문은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저희들은 어디에 머무를까요? 저희들의 마음을 어디에다가 머무를까요?"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념주,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머무르는 것이 주로 어떠한 장소에 대해서—형식적으로는 두 번째 질문은 '어떠한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일 훌륭한 어느 제자에게 의지할까요?' 이렇게 아난존자가 형식상으로는 그렇게 질문한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제자를 지칭하시지 않고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어디에 머무를까요?" 어떠한 특수한 도 닦기에 가장 좋은 어떤 장소에 대해서 여쭈어본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장소를 지적을 하시지 않고 "사념처관(四念處觀), 사념주관(四念住觀)에 머물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러면 사념주(四念住),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라.

네 가지 마음이 무엇이냐? '네 가지 곳이라는 생각을 머무르는 곳'이 무엇이냐 하면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여.


(첫 번째) 이 몸뚱이에 관한 것.

그다음에 우리가 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어떠한 경계에 부딪쳤을 때에 최초에 탁! 감수작용, 그 감수(感受)하는 작용.


세 번째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렀다가 그 생각이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없어지자마자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이 생주이멸(生住異滅), 끊임없는 이 정신의 그 생주이멸, 이 마음.


네 번째는 법(法), 일체법.

삼라만상 두두물물—앞에 말한 몸뚱이에 관한 거, 그다음에 감수작용에 관한 거, 우리의 마음에 관한 거, 그 세 가지를 제외한 이 세상에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두두물물이요, 불교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그러는 거여. 그 일체법에 관한 거.



그러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을 해.


'왜 몸뚱이가 부정하냐?'하면은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이 가득차 있으니까 그것은 부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고. 아홉 구멍에서는 나오느니 더러운 것만 꾸역꾸역 기어나온다. 아무리 날이면 날마다 씻어도 계속 기어나와.

그러니 속에 더러운 것이 가득 들었으니 구녁구녁이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밖에 더 나올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다.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 이거거든.


두 번째 수(受), 감수작용(感受作用). '감수작용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척! 본다든지, 귀로 무슨 소리를 척 듣고 받아들인다든지,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뚱이로 느끼고, 생각으로 어떤 것을 탁! 받아들이는 그것 자체는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결국 생각이 일어나서 받아들임으로 해서 그것이 온갖 고통으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벌어지기 때문에 '감수작용은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것이여.


세 번째 '우리의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는 거여.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 그 생각이 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 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없어지자마자 생각이 일어나면 또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또 없어지고. 그러니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마지막에 그 법, '일체법(一切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 산이나 강이나, 돌이나 풀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늘에 태양이나 별이나 달이나, '일체가 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그래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그래 부처님 생존시에도 많은 제자들이 이 사념주관에 의해서 수행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습니다.(처음~18분57초)




(2/4)----------------


물론 이것은 삼현위(三賢位)에 있어서 오정심관(五停心觀) 다음으로 닦아가는 수행과정이지만, 그 제자의 근기(根機)와 현재 공부해 나가는 단계에 따라서 백골관(白骨觀)을 관하게 하기도 하고, 수식관(數息觀)을 하게 하기도 하고,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지(十地), 55위(位) 점차(漸次)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관해 나가는 관법이 다 단계적으로 차제(次第)가 있지마는 그래도 그 많은 여러 가지 관(觀) 가운데 이 사념주관은 관(觀)의 아주 중요한 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이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신 데에 큰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경전이든지, 이 관법(觀法)에 관한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전부 이 관법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삼관(天台三觀)이 있고, 또 화엄경에는 법계삼관(法界三觀)이 있고, 원각경에는 원각삼관(圓覺三觀)이 있고, 또 유식삼관(唯識三觀)이 있습니다.


그래 옛 조사의 말씀에도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다'

마음을 반조(返照)해서 관(觀)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다 종으로 횡으로 육두로 외우고 해석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觀)도 이렇게 여러 가지 관(觀)이 있지만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어떠한 관법을 해 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 사념주관(四念住觀) '아!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 모든 감수작용(感受作用)은 괴로운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일체 삼라만상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계속 그것을 열심히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대관절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이렇게 더러운 거를 가지고 살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괴로운 것을 가지고 괴로운데 살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데 우리가 살아서 뭐할 것인가?'

이래 가지고 바른 정관(正觀)을 버리고서 점점 삿된 데로 치우쳐 생각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여.


그래 가지고 집장범지(執杖梵志)라고—목련존자를 패서 죽인 그 집장범지, 그 외도(外道)가 있었는데—이 사념주관을 닦던 부처님 제자들이 그 범지 외도를 찾아가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리때와 모다 그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그 범지 외도한테다 바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빌었습니다.


"제발 바라문이시여. 위대한 바라문이시여.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총재산을 다 드릴 테니까 자비로써 나를 때려 죽여주시오" 막 사정을 해 가지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집장외도가—집장외도는 작대기, 주장자 가지고 다닌다 해서 집장외도인데—그 몽둥이로써 여지없이 쳐 죽이고 쳐 죽이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한 해 여름에 60명 대중이 없어졌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 이렇게 어찌 대중이 이렇게 많이 비었느냐?” 물어보시니까 “집장외도한테 가서 모다 맞아 죽었습니다"

한 해 여름에 60명이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다가 집장범지한테 가서 자진해서 맞아죽었다 이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잠시 그러한 아직 사념주관에 대한 바른 법을 닦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을 가르키셨던 것이여.


그러면 이 사념주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여.

하는 사람이 잘못하면—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사념주(四念住)에 머물러라.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실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불자들의 의지처가 될만한 이런 성스러운 수행 방법이지만, 잘못하면 얼토당토않은 그런 사견(邪見)에 얽매여서 사견에 빠져서 정도(正道)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도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관법이 많은 도인들, 조사(祖師)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관법이 자꾸 개발이 되고 발전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든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이든지, 남산 율종에 삼관이든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이나, 유식삼관(唯識三觀), 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관법(觀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법을 전부 다 합해서, 그것을 합해서 한 가마솥에다 넣어 가지고 푹 고아 가지고 탁! 그 골수를 추출해 놓은 것, 추출해 가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관법(觀法)이 무엇이냐 하면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면 어떤 점에서 앞에 든 여러 가지 관법(觀法)보다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 그렇게 수승하냐 하면은 앞에 말한 사념주관이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이 전부 이로(理路) 말길이 있고, 이치길이 있고, 문해사상(聞解思想)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


지금 내가 여기서 그러한 여러 가지 경에 나타난 관법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 좋은 관법이고, 소중한 관법이여.

어떠한 근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관법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스승이 계시다면, 그 관법을 통해서 견성성불한 대도사가 계시다면 그 관법을 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법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의 지도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고 그런 관법을 한 번 해 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한 해 여름에 60명이라는 사람이 그런 참 엄청난 본의 아닌 길에 빠졌거든, 하물며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관법 한답시고 이런 관법도 해 보고, 저런 관법 해 보고,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왜 오늘 일요법회에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냐 하면은 근자에 와서 많은 사람이 산승한테 와서 그 관법에 대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 남방에 세일론이라든지, 버마라든지, 태국이라든지 모다 그런 데 남방에서는 아직도 그러한 관법을 통해서 많은 스님네들이 수행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유학을 온 스님네에 의해서 이 관법이 사람들에게 그 선전이 된 모양입니다.

그 관법 자체가 나쁘다고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관법은 꼭 할려면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서 해야 할 것이고.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이 법보재자는 그러한 관법보단, 그러한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득이해서 알라야 알 수도 없고, 도저히 무슨 뜻인 줄도 알 수 없는 이러한 맛없는 한마디 말을 주어서 참구(參究)하되, 말길 이치길 어떠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하고 거두절미하고 '이뭣고~?' 이렇게 해라 이거거든.


'이뭣고?' 한마디에 거기에서 말길이 끊어져 버리고, 이치길이 끊어져 버리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끊어져 버리고, 일체 번뇌와 망상,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이 거기서 다 끊어져 버리는 거여. '부처다, 중생이다, 마음이다'하는 것도 다 거기서 다 끊어져 버려.


'이뭣고?'

그래서 이것을 경절문(徑截門)이라,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 이 활구참선은 육조 스님, 육조 스님께서 '이뭣고?'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고,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벌써 그게 시심마(是甚麽) 화두거든.

화두라는 이름은 붙이지 안했지만 제자들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벌써 화두를 주셨어.


그 제자이신 신수(신회)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육조 스님께서 "뭐라고 이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가 없다고 했는데 왜 불성이니, 본원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일가를 이룬다 해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론으로 교리를 분석하고 따지는 그런 불교학자밖에는 못되겠구나.


나중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와서 절을 하니까 "십마물(什麽物)이 이마래(伊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남악회양 선사는 콱!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랐어. 그길로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육조 스님을 찾아가 가지고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염(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은 없지는 않지마는 오염(汚染)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아역여시(我亦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 와서 활구참선이 언하대오, 확철대오 구체화된 한 장면인 것이여.(18분58초~37분40초)




(3/4)----------------


그뒤로 육조 스님 밑에 5대 법손(法孫)—육조 스님 밑에가 남악회양 선사, 그 밑에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 그 밑에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그 밑에가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고, 그 황벽희운 선사 밑에 임제의현(臨濟義玄) 스님인데.


육조 스님은 서기 63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713년에 열반하셨고. 그러니까 그때가 8세기 경이고.

임제 스님은 태어나신 연조는 잘 모르고 열반하신 해는 867년이니까 9세기 중엽에 열반하셨는데, 그 임제의현 선사 때 와서 이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도록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제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송(唐宋)시대에 이 활구참선이 대단히 중국 천지에 널리 선양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경산종고(徑山宗杲) 선사—임제 스님의 11세 법손이신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는 서기 1087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1163년에 열반하셨는데, 12세기 경에 이 경산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서 활구참선이 완성을 보았습니다.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어.


간화선(看話禪)!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을 아주 적극 선양을 하고, 임제종(臨濟宗)에서는 이 간화선을 제창을 해서 조동종에 묵조선과 임제종에 이 간화선이 그 종사끼리 대단히 서로 공박을 하고, 힐난한 비평을 하고 그랬었습니다마는.


이 간화선은 조동종에서 비방한 거와 같은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그것을 빨리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그것은 삿된 참선이다'하고 조동종에서는 이 간화선을 비방을 하고.

임제종에서는 조동종의 묵조선을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 흑산 밑에 귀신 굴속에서 작활계(作活計)라. 거기서 살림살이를 하는. 캄캄한 데 앉아 가지고 이 묵조사선(默照邪禪)을 하고 있다고 힐난하게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조동종에서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역시 육조 스님의 제자이신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 밑으로 많은 도인들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도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법은 우리 말세 우리 중생들에게 상근기(上根機)는 말할 것도 없고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라도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떻게 아무 생각도 없이,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라'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묵조선에 조동종에서는 그렇게 가르키는데,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어떻게 생각한 것이 그런 거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초학자가 어떻게 거기다가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인지 참 어렵거든.


그런데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자꾸 하다보면 그 속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이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일체 팔만대장경에 있는 모든 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거거든. 일체 관법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기로서니 팔만대장경을 죽을 때까지 다 읽어서 거기에 그 속에 쓰여 있는 요점을 추려서 그것을 실천할려고 해 보십시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여.

불보살 화현(化現)이신 육조 스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들, 다 그러한 조사들에 의해서 개발된 이 활구참선을 우리는 무조건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하게 단속을 해 갈뿐인 것입니다.



관법, 관법하는데 그 관(觀)이라는 게 대관절 무엇이냐?

관(觀)이라는 게 우리 생각 일어나는 그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거든. 관조(觀照)하는 것이거든.


중생 생각, 중생이 가만히 앉아서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은 그것은 망념(妄念)이여. 그 망념 일어나는 그 뿌리는 진리요, 진여(眞如)인 그 본체에서 나오지만 이미 거기서 한 생각 폭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망념인 거여.

천하 없이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은 망념이여. 부처님 경전 속에 쓰여 있는 생각이 일어났다 해도 중생의 생각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망념인 거여.


그 망념을 탁! 관조해 가지고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관(觀)'이라 이거거든.

'관심(觀心)'이라고도 하고 '관법(觀法)'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관(觀)한다' 그러는데 마음이 무엇인 줄을 알아야지, 우리가.


'마음, 마음' 그렇게 누구나 말하지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망념은 우리가 알 수가 있지만,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마음, 망념의 그 본체는 우리 생각으로 알 수가 없고,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우리 손으로 붙잡을 수가 없어.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것을 바로 보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사량분별한 망념 자꾸 일어나 가지고 우리 모든 생사(生死)도 거기서 일어나고, 모든 죄도 거기서 일어나고 그런데,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그놈을 알려고 한다고 보여질 것이냐 그말이여.


마치 물은 때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그 기후와 그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물 형태는 변하지마는 그 변하지 않는 그 본체는, 본성은 무엇이냐 하면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거여.

그것 습성(濕性), 얼음으로 있을 때도 습성은 변함이 없고, 기체로 김 기체로 있을 때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액체인 물로 있을 때에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눈으로 되었거나 우박으로 되었거나 폭포수로 되었거나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물의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거여.


그런데 그 습성(濕性)은 우리가 볼 수가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아무리 헤집고 봐도 습성은 보이지 아니하고, 얼음을 아무리 가루로 부숴도 그 물 가지고 있는 그 본성은 볼 수가 없는 거여.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본체는 거기에 있으며 변함이 없지마는 중생의 소견으로는 볼 수가 없는 거여.


그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이뭣고?'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는 의심, 의단(疑團)뿐이어야 해. 그래야 그것이 옳게 되어 가는 거여.


처음에는 자꾸 하면 잊어버리고 '이뭣고?'해도 망상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망상이 일어나도 따라가지 아니하면 그만인 거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따라 주지를 말어' 무슨 망상이 일어나면 그놈을 따라가지 말어. 따라가다 보면은 안 되는 거여.

따라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좋은 생각이 나도 '이뭣고?'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뿐인 거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는 바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이 그 속에 다 들어있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이 화두 한 번 들은 속에 다 들어 있다.



활구참선법, 활구참선법은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이 용궁에 다 보관이 되어 있는데 그 용궁에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이러한 것은 없다. 고조사(古祖師)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이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것이다.


염화미소(拈花微笑)와 곽시쌍부(槨示雙趺)와 다자탑전에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이게 다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이거거든.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뭔 말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저가서 무슨 다른 말을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염불 아미타불을 불러야 극락세계에 가지, 말세 중생은 죄가 많고 근기가 하열해서 참선 화두 해봤자 되지도 않어. 관법을 해야 한다. 염불을 해야 한다. 법화경을 읽어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듣고 중심이 흔들려서 이것 조금 해보다 그것도 또 잘 안되면 저기 가서 저것 좀 해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거든.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이뭣고~?'(37분41초~55분39초)




(4/4)----------------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하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우리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는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사람사람이 다리 아래는 청풍이 불더라. 지금 봄이 되어서 밤이 되면 환히 달이 밝고, 우리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분다 이거거든.


누구라고 해서 특별히 그 사람 앞에만 달빛이 비치고, 특별한 사람 앞에만 청풍이 불어주는 것이 아니여.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달빛은 한결같이 비치고, 맑은 바람은 한결같이 불어오더라 이거거든.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거울,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그 거울은 무슨 거울이냐?

흰 것이 오면 흰 것이 나타나고,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나타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이 나타나고, 짐승이 오면 짐승이 나타나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 거울 앞에 오면은 다 조금도 숨김없이 있는 고대로 그 거울 앞에 나타난다 그말이여.


그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 우리 중생은 '희다, 검다, 누르다' 온갖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 분별 망상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서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의 마음이 동요되어 가지고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번뇌 망상이 벌어져 가지고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를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비추는 그 거울을 갖다가 때려 부셔 버려.

그래 가지고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림자도 없어져 버리고, 그 거울 자체도 자취가 없도록 다 없애버리면, 일성제조(一聲啼鳥)가 상화지(上花枝)더라.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가더라.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 하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어떤 분이 산승(山僧)에게 "『선가귀감』이나 그밖에 어떤 그 어록(語錄)이나 경서(經書)를 의지해서 차례차례 설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한 일정한 그 경책이나 어록이나 그런 거를 의지하지 않고 올라와서 내키는 대로 말을 하니까 밤낮 한 얘기 도로 하고, 도로 하고 해서 그러니 그거 보단 어느 한 경책에 의지해서 주욱 하면 중복되지 않고 좋지 않겠느냐?" 그러한 충고를 간접적으로 해 왔습니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와서 설해야 할 어떠한 법이 있어서 설한 것이 아니여.

법(法)은 우리 법보선원에 조실(祖室) 스님이신 전강(田岡) 대선사의 법문 한 편 들으면 그 이상 더 법문 들을 것이 없고, 그 이상 더 설할 법이 없습니다.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간혹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 있는 어떤 설화나 그런 것을 가끔 인용하기는 하지만, 듣고 보면 내나 '이뭣고? 열심히 하라' 그 말이거든.


'에이, 그 백번 가야 그 소리할 바에는 가지 말자' 그래 갖고 오지 않고 여행 가고, 골프 치러 가고, 수영장에 가고, 등산에 가고, 철철이 기후 따라서 해수욕 가고, 그런 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산승은 다 알고 있습니다.

'가봤자 밤낮 한 생각 단속하고 밤낮 이뭣고? 하라는 거, 그 소리는 용화사까지 이 교통지옥 속에 어렵게 갈 것이 없이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있으면 되는 거, 뭐하러 또 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또 안 오셔도 또한 무방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추우나 더우나 그 어려운 교통 혼잡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서 쉬지 않고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시고, 이 서울 인천뿐만이 아니라 저 지방에서도 이렇게 오시고.

그 괴로운 것을 무릅쓰고 오시는 그 신심, 그 신심 속에 그분은 반드시 대도(大道)를 성취할 아주 그 씨를 심었다고 할까, 아주 그 표(票)를 이미 끊어 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분이 '이뭣고?'를 열심히 아니할 수가 없고, 그래도 와서 조실 스님 법문 듣고 또 산승의 말도 들어보면 그래도 한마디쯤은 마음에 와서 닿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리해서 또 한 달 동안을 그 힘으로 또 열심히 공부를 해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같이 또 법문을 듣고 또 산승의 경책해 드리는 말씀을 듣고, 같이 부처님께 삼정례(三頂禮)를 올리고 또 발원을 하고, 이리함으로써 자칫하면 풀어지고 해태하려다가도 그놈을 채찍을 가하는 좋은 계기를 삼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달이 법회를 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인들 어찌 산이나 바다나 그밖에 재미있게 놀고, 푹 일요일을 쉬고 싶은 생각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오시는 그 뜻은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고행하신 뜻, 삼세제불과 팔만사천의 모든 보살과 역대조사들이 인생에 오욕락(五慾樂)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출가하신 거룩한 뜻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일 전에 입하(入夏)가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더워지겠습니다.

몸조심하시면서 그 더위와 이 나의 신심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나가면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55분47초~69분12초)(끝)




[법문 내용]


(게송)득지재심응재수~ / 부처님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존자가 여쭈어본 것, ①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②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해야 할까요?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③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까요?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 / 잘못하는 수행의 위험(집장범지) / 수식관(數息觀) / 천태삼관(天台三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 남산 율종에 삼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 유식삼관(唯識三觀) 등의 관법(觀法)의 골수가 다 들어 있고 한 걸음 더 발전시킨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가장 수승한 관법, 그래서 경절문(徑截門),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한다.


육조 스님(638~713)에서 내려와 임제 스님(?~867)을 거쳐서 대혜종고 선사(1087~1163)에 의해서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는 간화선(看話禪),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습니다 /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간화선은 모든 근기의 중생이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 그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다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분은 그러한 여러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