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51~75)2021. 5. 18. 05:44

 

 

(No.055)—1977년 동안거 결제 법문(77.11.25) (56분)

 

 

(1/3) 약 20분.

 

(2/3) 약 19분.

 

(3/3) 약 16분.

 


(1/3)------------------

오늘은 정사년(丁巳年) 겨울 결제날입니다. 음력 10월 15일부터 내년 정월 15일까지 석 달 동안 겨울 안거인데 그 처음 시작하는 결제(結制)날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입재(入齋)하는 날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참선, 특별 참선수행이 시작되는 날로써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법문을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 혁명(精神革命)」 사업입니다.

한 나라가 부정과 부패로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서 정부나 국민이나 온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나라를 자기네들이 지켜나갈 수 없게끔 혼란하게 되면은 반드시 외부로부터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할 때에 그 나라에 정신을 바로 가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분연히 일어서서 썩은 나무둥치를 베어 내고 새순을 가꾸어 가지고 다시 그 나무에서 뿌리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거와 같이, 그 나라 그 백성을 다 없애버리고 새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 국토 그 국민으로 하여금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썩은 마음가짐을 버리고, 새로운 정신으로 내 나라 내 민족을 우리 모두가 마음을 합해 가지고 다시 일으키자고 하는 그러한 혁명과 같이,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부처님과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낱낱이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오욕락(五欲樂)에 빠져 가지고, 내가 무량겁, 구원겁 이전부터서 낱낱이 가지고 있는 자성(自性)의, 자기의 청정한 부처를 개발을 하지 못한 채 죄업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썩어 문드러져 가지고 하는 일마다 앞으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면서 갖은 괴로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일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셔 가지고 일대 혁명(一大革命)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에 혁명을 일으켜서 성공을 한 다음 그 혁명하는 방법을 우리 모든 중생에게 가르켜 주셨습니다.
그 방법을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불보살이 화현(化現)을 해 가지고 삽삼조사(卅三祖師) 이래 많은 도인들이 계속해서 출현하셔 가지고 그 방법을 한 등(燈)에서 또 다른 등으로 불을 옮기듯이 등등상속(燈燈相續) 해 가지고, 오늘날에 이르도록 부처님의 그 정법(正法)의 등불이—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정신혁명을 완수하는 가장 바르고, 빠르고 훌륭한 방법을 오늘에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은 어떠한 특수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썩어 문드러진 국가일수록 혁명이 요구되듯이, 번뇌와 망상과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빠져서 걷잡지 못한 죄 많은 중생일수록에 정신혁명은 더욱 요구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고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낱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나의 부처, 자기의 부처는 조금도 때묻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한 채 고대로 다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 나라가 아무리 어지럽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혼란에 빠져 있다하더라도, 온 국민이 어떠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단합을 한다고 하면은 삽시간에 그 나라는 새 나라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조국에 있어서 근래에 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눈을 부릅뜨고 눈여겨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나라들은 부러워하고 어떠한 나라들은 오히려 우리들을 두려워하고 우리나라를 배울려고 하고 그러한 나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이 어디서 새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 삼천 오백만 국민이 옛날에 있던 그 국민이 아니고 없어지고 새로 어디서 생겨난 국민이 아니라, 내나 본래부터 단군 이전에부터서 있었던 그 나라고, 해방 전부터서 있었던 그 국민들입니다.
그 국민들이 정신을 바로 차리지 못할 때에는 자기를 멸망하고 국가를 멸망하고 그러한 보잘것없는 그러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서 새마을사업, 새마음사업으로 해서 모두가 나와 가정과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단합을 함으로 해서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을 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것입니다.


참선은 내가 이 몸 이대로 가지고 정신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 해서 영원히 생사(生死)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성현(聖賢)이 되는 그러한 길인 것입니다.
나 한 사람부터 먼저 이 사업에 착수를 하고 열심히 함으로 해서 이웃 · 가족 · 이웃친지들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사업에 나서도록 손을 이끌어주면서 자기가 앞장서서 나갈 때에 우리 모두는 다함께 불도(佛道)를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하신 법문은 이 자기 정신혁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느냐? 그 실지적인 실천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 나가야 한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선을 하려고 앉았으면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갖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이 한바탕 일어났다가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그런 것이 계속하다가 조금 조용해질만하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참 졸다가 눈을 뚝 뜨고 좌우를 둘러본 다음에 스스로 챙피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허리를 쭉 펴고 화두를 한번 들어봅니다. 들기가 무섭게 또 이 생각 저 생각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혼침(昏沈), 졸음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그것을 단속을 해 나가며,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그것을 단속해 나가야 하느냐?’ 한 문제에 관해서 조실 스님께서 30분여에 걸쳐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졸음이 일어날 때에는 허리를 쭈욱 펴고, 언제든지 졸음이 일어날 때는 허리가 꼬부라져 있는 것입니다. 허리가 쭉 폈던 허리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허리가 꾸부러지면서 앞으로 몸이 수그러지는 것입니다. 설사 윗몸은 수그러지지 아니하고 쭉 폈다 하더라도 허리가 딱 꼬부라지자마자 그때부터서 잠이 오는 것입니다. 잠이 올 때에는 언제든지 허리가 꼬부라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리를 쭉 펴고 참선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쭉 폄으로 해서 정신이 단정해지고, 정신이 깨어나면서 혼침이 침노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침이 올 때는 먼저 허리부터 쭉 펴야 하는 것입니다.

펴고서 자기 혼자 할 때에는 자기가 들고 있는 화두를 소리를 내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두 번을 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는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한 두어 번 화두를 소리를 내 가지고 들어라. 그러면은 졸음이 확 달아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입선(入禪)을 하고 있는 데에서 졸음이 온다고 해서 (소리를 내서) 「이뭣고?」「이뭣고?」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혹 이 말씀을 듣고서 죽비를 치고 여러분이 입선 중에 그렇게 하신다고 하면은 그것이 잘못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혼자 댁에서 할 때나 또는 산이나 숲 밑에서 혼자 하실 때에 그렇게 졸음이 오면 소리를 내서 한 두어번 그렇게 화두를 들면은 (졸음이) 달아난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도 졸음이 달아나지 아니할 때에는 가만히 조용히 일어나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일직선으로 왔다갔다하는 길을 정해 놓고서 한 30미터나 40미터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그 직선상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자연히 졸음은 도망가고 정신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 동안 왔다갔다하게 되면은 졸음이 달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자기 자리에 돌아와서 허리를 쭈욱 펴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졸음이 깨고 난 뒤에 화두를 떠억 들면은 온갖 생각이 또 일어나죠. 집안 생각, 남편 생각, 아들 생각, 아들 학교 문제, 학교 입학 문제, 딸 시집가는 문제, 외손자 생각, 온갖 생각이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그러한 생각 때문에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호소해 온 분이 가끔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 생각 때문에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그 생각 때문에 참선이 안 됩니다’ 하고 생각한 분은 생각을 고쳐 잡숴야 합니다.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참선을 할 자격이 있다. 그 생각, 그러한 번뇌와 망상 때문에 나는 참선을 통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왜 그러냐?
‘그 번뇌와 망상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해 가지고 생사고(生死苦)를 받는데, 왜 그 번뇌 망상 때문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고 번뇌와 망상 때문에, 그놈 때문에 우리는 견성성불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번뇌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망상도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혼침도 일어나지도 아니한다면은 그런 사람이 어디가 있다면 그것은 나무나 돌로 깎아서 만들어 논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나 돌로 깎아서 만들어 논 사람은 정말 석달 열흘을 잠을 안 자도 잠이 오지 아니할 것이며, 석달 열흘을 앉혀놔도 번뇌 망상 한번도 일어날 리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고단하면 잠이 오기 마련이고, 며칠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기 마련이고, 때리면 아프기 마련이고, 앉았다 보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혼침(昏沈) 산란(散亂)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이고, 살아 있는 사람이면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번뇌와 망상 일어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시거나 짜증을 내시지 말고, '이놈 때문에 내가 참선을 못한다'고 미워하시지를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 방법만을 잘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없애거나 누를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그 생각하던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일어나는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옮아가기 이전에 퍼뜩 「이뭣고?」 심호흡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기 시작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호흡과 화두를 함께 합쳐서 들어나간다고 하면은 백만 번 망상이 일어난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백만 번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그렇게 들어나가면, 일어났던 망상이 나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하게 하는 그러한 고약한 원인이 아니라, 그 망상은 바로 나로 하여금 견성성불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좋은 발판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이 뛴다든지 멀리 뛸려면은 좋은 발판이 있어야 합니다. 발판이 짱짱해야 그 발판을 의지해서 높이 뛸 수가 있고 멀리 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뛰는 그 순간에 마지막 그 발 디딘 곳이 미끄러지거나 또는 질펑거리거나 그래서는 높이 그리고 멀리 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발판이 좋아야 멀리 뛸 수도 있고 높이 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발판이 없으면 우리는 화두를 들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발판이냐?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느끼던지 간에 그것들이 좋은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좋은 발판이 지옥으로 가는 육도윤회하는 발판으로 사용이 되는 것이고,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 발판이 바로 견성성불할 수 있는 발판으로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1분15초)


 

 


(2/3)------------------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정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생사고(生死苦)의 원인이 되는 그러한 악세지만, 악하고 고약한 오탁악세(五濁惡世)가 되지마는, 정법을 믿는 우리 부처님 제자들에게는 이 시방세계의 어떤 나라보다도 제일 훌륭한 좋은 수도장(修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모든 도인들은 천상(天上)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안했습니다. 천상에 태어나면 아무 괴로움은 없다고 하지마는 너무 편안하고 즐겁기만 하기 때문에 그러한 즐거움과 편안함 속에 빠져서 도를 닦을 수가 없습니다. 혹 그 천상의 즐거움이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괜찮지만, 자기가 복을 지은 만큼 다 받고 난 다음에는 다시 인간 세상이나 축생이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면 그만큼 도 닦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기보다는 인간으로 태어나서—인간 세계에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어져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운 것을 만나고 시련을 받음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우리는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많은 과거의 도인(道人)들이 사바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정법을 만나 가지고,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어떠한 좋은 인연으로 해서, 훌륭한 수승한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에 사람으로 태어났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또 불법을 만났고, 불법을 만난 후에도 이 정법을 만나서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매일 무엇인가 보고, 무엇인가 듣고,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으면서 성도 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당하고 있는 그러한 외부로부터 충격,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어떠한 느낌, 그 한 가지 한 가지를 결단코 소홀히 지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그러한 것들이 한 생각 우리가 돌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수도 도장이요, 깨달을 수 있는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발판이기 때문에, ‘참선을 잘한다, 잘 못한다’ 또는 ‘그분은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한다, 못한다’고 하는 판가름 길이 바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어떻게 빨리 돌려서 단속(團束)하느냐, 오직 거기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일들은 나로 하여금 자칫 게으름 속에 무단(無斷)히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몰아넣기가 쉬웁고, 나의 육체와 정신을 괴롭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역경계(逆境界)는 나로 하여금 신심을 돈독히 하고 분심을 일으켜서 맹렬히 화두를 단속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좋은 그러한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경계(順境界)를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고 역경계(逆境界)를 멀리하고 싫어하지마는 정법을 만난 정법학자들은 순경계에 빠져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견뎌내기 어려운 역경계라 할지라도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돌이켜 단속하기만 한다면, 그 역경계가 우리에게는 순경계 몇십 배, 몇백 배 좋은 밑거름이요, 발판이요, 불보살의 설법이 되어 주는 것이며, 불보살을 모시고 수행해 나가는 좋은 선방이요, 수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결제에 들어갑니다마는 용화선원에 방부를 들여서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이나 또는 어떠한 형편에 의해서 또는 후배들을 위해서 자진해서 댁에서 공부를 하시는 그러한 노보살님이나 누구를 막론하시고, 오늘 아까 조실 스님께 들은 말씀 또 제가 부연해서 해 드리는 말씀을 명심을 하시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입으로 무엇을 말하시거나,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간에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알뜰히 단속을 해 나가심으로 해서 1초 1초가 합해서 1분, 1분이 합해서 한 시간, 한 시간 한 시간이 합해서 하루, 하루 하루가 모여서 석 달이 되는 것입니다.

석 달을 훌륭하게 공부를 하실 분은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고, ‘이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내가 금생에 결정코 도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요긴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뒤로 미룬다” 고인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직은 나는 아직 할 일이 많고, 나이가 젊기 때문에 아들딸들을 키워서 가리켜서 다 결혼을 시켜야 나는 그때사 비로소 참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신 분들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그래서 ‘나중에 좀 더 일 다하고 늙은 다음에 참선하리라' 이렇게 뒤로 참선하는 기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어리석냐?
그러한 일들을 다 마쳐 놓고 늙은 다음에 할려고 하는 생각은 결정코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편 · 아내 · 아들딸 · 부모 · 일가친척 · 사회 · 국가, 이러한 상황 속에 나도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특수한 사람, 그런 것을 다 청산해 버리고 출가하는 스님네 그런 특수한 스님네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러한 인연 속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갚지 않고서는 아니 될 그러한 빚을 지어 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어 논 빚은 갚아야 합니다. 갚지 않고 아무리 피할려고 해도 자기가 지어 놓은 빚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자기가 지어 놓은 빚은 어떠한 노력, 어떠한 괴로움을 무릅쓰고라도 기어코 갚아야만 됩니다.

그러면 일생 동안 그것만 갚다가 말면 언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빚만 갚고 말면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 빚 갚으면서 계속해서 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무량겁을 두고 빚만 갚다가 맙니다.

거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빚 갚으면서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인 것입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딸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열심히 완수해 나가는 그 가운데에 「이뭣고?」 「이뭣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면서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성이 날 때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할 수 없을 만큼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럴 때에도 그 찰나를 놓쳐선 안 됩니다.
심호흡을 ‘후~’ 심호흡을 터억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갈 때에 먼저 자기의 그 거센 파도가 일어나는 자기의 마음을 안정을 하면서 며느리 노릇, 아내 노릇, 엄마 노릇을 충실히 해 나가야 됩니다.만약에 잠깐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할 때에 사태는 더욱 고약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점점 자기만 자기의 디딜 땅이 좁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의 발 디딜 땅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호흡을 하므로 해서 혈액순환을 촉진을 시키고, 나아가서 피를 맑게 하므로 해서 정신이 맑아지고 안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떠한 정신적 또는 육체적 또는 주위 환경에 견디기 어려운 그러한 역경계를 만났다 하더라도, 잘 지혜스럽게 그러한 고비 고비를 잘 요리하고 극복해 나가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면서 그러면서 나의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업장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빚을 갚는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빚을 갚으면서 앞으로 새롭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저축을 해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천하 간단한 한마디요, 한 말씀에 지내지 못하지만, 이 말씀을 깊이 믿고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한 달, 두 달, 석 달 가지 못해서 과연 이 법이야말로 내가 무량겁을 두고 만나야 했었던 가장 훌륭한 위대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철 한철을 착실히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선방에서 제가 오늘 말씀해 드린 이 말씀을 잘 명심해서 들으신다면 비단 이 선방에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시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하시는 그 곳이 고대로 훌륭한 선방이 되어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사람에 따라서는 선방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하시는 가운데에 참선하신 분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실적을 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에 부설거사(浮雪居士)라고 하는 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 분의 스님 가운데에 한 사람입니다. 세 참선하는 스님이 태백산으로 참선을 하러 가시는 도중 김제 만경뜰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지나다가 어느 집에 들어가서 탁발(托鉢)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탁발하러 들어갔는데 어떤 예쁜 처녀가 탁발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처녀가 그 한 스님을 보자마자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말문이 툭 터졌습니다. 본래 그 처녀는 나면서부터서 말을 할 줄 모르는 벙어리였습니다.

그 벙어리 처녀가 그 탁발하러 온 스님 얼굴을 보고서 어떻게 큰 충격을 받아 가지고 말문이 툭 터져 가지고는, ‘이 스님하고 기어코 결혼을 시켜달라’고 그 스님을 붙잡고 사정을 하고, 부모가 나와서 그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열여덟이 되도록 말도 못한 벙어리가 말문이 터지면서 스님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기가 맥힌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설거사는 그 두 도반(道伴)이 극구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처녀하고 결혼할 것을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도반은 참 한 도반을 속가에다가 빼앗기고 둘이만 아픈 가슴을 안고서 태백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떠날 때 부설거사가 그 도반에게 하는 말이 "나는 부득이한 과거의 인연으로 해서, 이 처녀가 내가 결혼을 안 해 주면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하겠다고 하니, 내가 부득불 이 처녀 한 사람을 살릴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자네들과 같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속가에서나마 열심히 정진할 테니 부디 둘이만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해 가지고 10년 뒤에 다시 만나서 내가 더 공부를 많이 했으면 그대들이 나한테 배우고, 그대들이 더 공부가 나으면 내가 배우기로 하세" 그렇게 언약을 하고서 이별을 했던 것입니다.

그 처녀와 결혼한 분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부설거사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처녀의 이름은 묘화(妙花) 부인이고, 묘화라고 하는 처녀가 부설이라고 하는 분과 결혼을 해서 사는 가운데에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 묘화라고 하는 부인도 스님을 갖다가 자기로 인해서 퇴속(退俗)을 시켰으니 만큼 그 부설거사를 정말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받들면서 그 스님의 법문을 듣고서 열심히 참선을 했던 것입니다.

참선을 하면서 10년 세월을 지내는 동안, 등운(登雲)이라고 하는 아들 하나와 월명(月明)이라고 하는 예쁜 딸을 낳아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과 등운—등운조사는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고 또 월명이라고 하는 분도 참선을 해 가지고 네 가족이 전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도를 닦아서 다 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도를 닦던 장소가 어디냐 하면은 변산(邊山)에 가면은 변산에 월명암이라고 하는 절이 있고, 그 근처에 모다 등운암이라든지 모다 같이 (공부)하던 절터가 지금도 남아 있고, 월명암은 현재에 사찰로서 남아 있습니다.
대둔산 태고사, 장성 백양사의 운문암 또 변산의 월명암, 이 남한의 세 절이 수행하기 가장 좋은 옛날부터 이름나 있는 암자인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월명암인데, 그 월명암이 부설거사의 딸이 수행을 해서 도업을 성취한 그 도량인 것입니다.(21분16초~40분11초)





(3/3)----------------

세속(世俗)에 계신다고 해서 도를 못 닦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서는 오히려 세속이 더욱 발심(發心)을 할 수 있고, 더욱 분심(憤心)을 낼 수 있고, 더욱 용맹정진(勇猛精進)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행도량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십 년 후에 그 부설거사와 태백산에 들어갔던 두 도반, 세 분이 모여서 법담(法談)을 했고, 오늘날까지 법담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마는 전설로써 전해 내려오는 법의 도력의 시합이 있습니다.
병에다가 물을 담아 가지고 저 서까래 끄터리에다 매달아 놓고, 병 3개를 떠억 매달아 놓고서 태백산에 들어갔던 두 도반이 차례차례로 몽둥이로 그 물병을 뚜드려 부쉈습니다. 뚜드려 부수니까 그 물병이 깨져 가지고 물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부설거사가 몽둥이로 병을 깨니까, 병만 깨지고 물은 병 모양 고대로 뭉쳐 가지고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는 그러한 도력 시합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선을 해서 견성(見性)했다고 해서 물병만 깨지고 물은 허공에 매달려 있다고 하는 그렇게 되야 도인(道人)이다. 이렇게 생각하셔서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똥을 누면은 그 똥에서 구린내가 나지 아니하고 향내가 나고, 두 눈에서는 캄캄한 밤에도 자동차 불처럼 훤하게 불을 내뿜고,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이 육신으로 서울로 날아갔다 부산으로 날아갔다 미국으로 날아갔다 이러한 신통(神通)을 부려야만 그것이 도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은 정법을 잘못 인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통술이라 하는 것은 “성말변지사(聖末邊之事)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견성을 해 가지고 오래오래 보림(保任)을 하면은 구하지 아니해도 자연히 그러한 신통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마는, 견성했다고 해서 조만(早晩) 그러한 능력이 누구라도 다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 견성을 전혀 하지 아니한 사람도 어떠한 그 신통술 얻는 그러한 비법을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면은 그러한 신통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사람이 그러한 신통술 갖춘 사람은 외도(外道)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그러한 신통 부리는 것을 보면 혹(惑)하고 반해 가지고 그 사람이 큰 도인인줄 알고 미쳐서 무엇이라도 재산이고, 명예고, 권리고, 이 몸과 목숨 모든 것을 그 사람한테 다 바치려고 그럽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사람이 견성을 한 진짜 도인으로서 그러한 신통술을 갖춘 분이라면 절대로 중생을 해롭게 할 리가 없고, 중생을 그릇 인도할 리가 없겠지마는, 견성을 못한 사람이 어떠한 특수한 비방을 알아 가지고 용케 그러한 신통술만을 얻은 사람이라 하면 반드시 중생을 그릇 인도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정법을 믿는 신도들은 어떠한 것이 정법이고, 어떠한 것이 삿된 법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정법은 깨달은 진짜 도인은 설사 그러한 신통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가지고 있다 해도 중생 앞에 그러한 것을 함부로 남용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결제일을 맞이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함으로 해서 석 달 동안 안거가 정말 알찬 안거 기간이 되도록 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결제인 동시에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입재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참선을 해서 나를 깨달라야 하는 동시에 내가 몸담아 있는 나의 가정, 나의 남편, 나의 부모, 나의 아들딸, 사회 국가, 인류가 괴로움 속에서 괴로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의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언제나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기도하고 축원하는 마음을 동시에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뜻에서 우리 용화선원에는 삼동결제(三冬結制)와 아울러서 언제나 백일기도를 또 봉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이 한 분도 빠짐없이 성의껏 기도에 동참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여기에 참여하신 신도 분 가운데 한 분이 우리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5호로 지정된 박초선 여사께서 참석을 하셨습니다. 이 보살님은 예술에 있어서 참 뛰어난 분이심과 동시에 이렇게 불법에 참 철저한 돈독한 신심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기념으로—이 '판소리'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우리 대한민국만이 가지고 있는 희유한 불가사의한 음악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나라에 이러한 훌륭한 음악이 있다고 하는 것을 40, 50세 이상 된 분들은 인식한 분들이 많았었지마는 40 미만의 젊은 분들은 그것을 깊이 인식한 분들이 대단히 적었었습니다.

그러자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그 판소리 국악을 듣고서, '세상에 이러한 훌륭한 음악이 대한민국에 있었단 말이냐?' 이래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훨씬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찬양을 하고 그러므로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녹음 끊김) ...하고 잘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악은 그 음악을 들음으로 해서 들뜬 마음이 순화가 되고, 나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끔 하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음악은 산 사람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영혼들에게는 직접적으로 감동을 주고 정신을 순화시키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재(齋)를 지낼 때에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고 하는 그러한 음악을 다 연주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박초선 여사께서 올리시는 이 음악은 우리 부처님께 올리는 음성 공양(音聲供養)이 되고, 우리 스님네와 우리 법보 신도 여러분들에게도 공양이 되고, 또 돌아가신 영가를 위해서도 훌륭한 공양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부탁을 합니다.

 


< 박초선 명창 음성공양 >

좋은 인연으로 좋은 법문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찬불송(讚佛頌)으로 부처님께 올리겠습니다.

찬불송으로,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야, 온 우주세계에 모든 마음을 다 알고,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가, 큰 바닷물을 한입으로 다 마시고,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라도, 허공을 헤아려서 바람을 잡아매더라도,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라. 부처님의 공덕은 다 말하지 못한다. 다하지 못한다.

이 찬불송입니다.(‘찬불송’을 노래함)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허고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허면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라도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라

'조금 더 할까요, 그만 할까요?' 네, 이 찬불송입니다.

다음은 제가 말만 우리의 전통 음악하는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제부터는 용기를 내서 다행한 줄로 압니다. 우리나라 말, 우리나라 글, 우리나라 노래하는 박초선으로서 앞으로 부처님 심부름을 제가 성의껏 힘자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협조해서 좋은 음악을 많이 해서 여러 보살님들에게 참 많은 노래를 전하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박수)

 


말만 길게 하면 노래가 됩니다. 판소리 5바탕을 제가 독창회를 여러 번 가졌습니다마는 몇 시간을 제 시간을 다 해도 저는 얼마나 좋은지 기쁜지요.
이 기회를 제 노래로 다 메꿀 수 없고, 그저 말만 길게 하면 노래가 됩니다마는 간단한 노래로, 평생의 교육자로서 저에게 가사를 주시고 가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제목은 「그것도 멍텅구리」입니다. 이 4절만 먼저,
‘온 곳도 모르는 이 인간이 갈 곳을 어떻게 안단 말가, 갈 곳도 모르고 사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올 적에 빈 손에 온 인간이 갈 적에 무엇을 갖고 갈까, 공연한 욕심만 부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백 년도 다 못 산 이 인간이 영원히 죽지를 않을 처럼, 천만 년 준비를 허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세계적 학자라 하는 이들 무어나 모두 다 안다 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네, 진리에서 하는 말입니다.
아뭏튼 제가 전공이 판소리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전통 음악의 얼과 모든 우리 민족의 혼과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5바탕 중의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하는 것보다, 이 진리에서 나오는 이 가사를 보살님께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간단히 마치겠습니다.

하기도 쉽습니다. 곡도 아주 쉽게 붙였습니다. 그러니 자꾸 알고,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알고 자꾸 행하시고 그러면 좋습니다.


(‘멍텅구리’ 노래)
온 곳도 모르는 이 인간이 갈 곳을 어떻게 안단 말가, 갈 곳도 모르고 사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올 적에 빈 손에 온 인간이 갈 적에 무엇을 갖고 갈까, 공연한 욕심만 부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백 년도 다 못 산 이 인간이 영원히 죽지를 않을 처럼, 천만 년 준비를 허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세계적 학자라 하는 이들 무어나 모두 다 안다 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감사합니다.(끝)(40분13초~55분39초)





----------------(1/3)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하다 ; (생각이나 태도, 방법 따위가)발전하거나 진보되지 않고 예전의 묵은 모습 그대로이다.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전 교단(全敎團)의 어른을 한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 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그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법(法)을 전하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를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1.가섭존자, 2.아란존자, 3.상나화수....이렇게 전승되어 28대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가 되고, 그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로 내려왔는데, 위 33인의 조사를 삽삼조사라 한다.
6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15권 '大智度論釋初品中毘梨耶波羅蜜義第二十六(초품 중 비리야[精進]바라밀을 풀이함)' (용수 지음 | 구마라집 한역 |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 동국역경원)
欲成佛道凡有二門 一者福德 二者智慧 行施戒忍是爲福德門 知一切諸法實相摩訶般若波羅蜜 是爲智慧門 菩薩入福德門 除一切罪所願皆得 若不得願者 以罪垢遮故 入智慧門則不厭生死 不樂涅槃 二事一故

불도(佛道)를 이루고자 하는 데 무릇 두 문이 있으니, 하나는 복덕(福德)이요 둘은 지혜(智慧)의 문이다. 보시(施)와 지계(戒)와 인욕(忍)을 행하는 것은 복덕의 문이요, 모든 법의 실상인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아는 것은 지혜의 문이다.
보살은 복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죄업을 제거하고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업의 때[罪垢]에 차단 당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문에 들어가더라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즐기지 않게 된다. 두 일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今欲出生摩訶般若波羅蜜 般若波羅蜜 要因禪定門 禪定門必須大精進力 何以故散亂心 不能得見諸法實相 譬如風中然燈不能照物 燈在密屋明必能照

이제 마하반야바라밀을 출생시키고자 하는데,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선정문(禪定門)을 인하며, 선정문은 반드시 대정진(大精進)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산란한 마음[散亂心]으로는 모든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물건을 비출 수 없지만 밀실(密室)에다 등을 켜면 밝게 타올라 반드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2/3)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이십팔천(二十八天) : 삼계제천(三界諸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욕계(慾界)의 육천(六天)과 색계(色界)의 십팔천(十八天)에 무색계(無色界)의 사천(四天)을 합친 스물여덟 개의 하늘이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무단(無斷)히 ; 사전에 허락이 없이. 또는 아무 사유가 없이.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 ; ①‘들(평평하고 넓게 트인 땅, 논이나 밭으로 되어 있는 넓은 땅)’의 사투리. ②전북 김제 지역에서 하천이 실어온 토사가 쌓인 충적평야를 일컫는 말.
*탁발(托鉢 맡길 탁/바리때 발) ; 도를 닦는 스님이 경문(經文)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보시를 받음. 수행자의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동시에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이 있다고 하여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행하였다.

 

 

 



----------------(3/3)

*세속(世俗) ; 속세(俗世). 불가(佛家)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법담(法談) ; 선사(禪師)들이 서로 법문을 묻고 대답하는 것.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신통(神通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①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②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③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④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⑤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⑥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여기서는 누진통을 제외한 오통을 가리킨다.
*성말변지사(聖末邊之事) ; 신통(神通, 누진통을 제외한 5신통)은 ‘성인(聖人)의 분상에는 보잘것없는[末] 가장자리[邊]의 일이다.’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조만(早晩) ; 조만간(早晩間).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혹(惑)하다 ; (사람이 어떤 대상에)홀딱 반하거나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다.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영산회상(靈山會相) ;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는 속악(俗樂)의 하나로서,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의 불보살(佛菩薩)을 노래한 악곡.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
*박초선(朴招宣) ; (1931~2014) 전남 화순군 향천리 출생. 공대일 · 박록주 · 김소희 · 김여란 등을 사사했다.
1963년부터 12년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깔끔하고 정교한 소리로 한때 소리판을 주름잡았다. 70년 여성 최초로 박록주제 〈흥보가〉를, 75년 정정열제 〈춘향가〉 완창을 발표했다.
1975년 국립국악원에 입단한 박초선 명창은 1993년 미국 스토니부룩 대학교 한국학과 판소리 강의 및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시식(施食) ; ①죽은 이의 명복을 빌거나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을 베풀고 기원이나 독경 등을 하는의식. ②불사(佛事)나 법회 때 음식을 공양함.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문 내용]

참선(參禪)은 일종의 「정신 혁명(精神革命)」 사업 / 등등상속(燈燈相續) 한 참선법(參禪法) / 참선은 내가 이 몸 이대로 정신혁명을 성공해서 영원히 생사(生死)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성현(聖賢)이 되는 길 / 혼침(昏沈), 졸음이 일어날 때 단속하는 방법 / 번뇌와 망상 때문에 나는 참선을 통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라 /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없애거나 누를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그 생각하던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되는 것.

사바세계는 제일 좋은 수도장(修道場) / 순경계(順境界). 역경계(逆境界) /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내가 금생에 결정코 도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요긴한 문제가 되는 것 /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뒤로 미룬다 /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열심히 완수해 나가는 그 가운데에 「이뭣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의 한 생각을 단속하면서 화두를 들어라 / 부설거사(浮雪居士) 일화. 묘화(妙花) 부인.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신통술은 성말변지사(聖末邊之事) /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5호 박초선 명창의 음성공양. 찬불송과 「그것도 멍텅구리」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부처님과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낱낱이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오욕락(五欲樂)에 빠져 가지고, 내가 무량겁, 구원겁 이전부터서 낱낱이 가지고 있는 자성(自性)의, 자기의 청정한 부처를 개발을 하지 못한 채 죄업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썩어 문드러져 가지고 하는 일마다 앞으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면서 갖은 괴로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일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셔 가지고 일대 혁명(一大革命)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에 혁명을 일으켜서 성공을 한 다음 그 혁명하는 방법을 우리 모든 중생에게 가르켜 주셨습니다.

조금도 번뇌와 망상 일어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시거나 짜증을 내시지 말고, '이놈 때문에 내가 참선을 못한다'고 미워하시지를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 방법만을 잘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없애거나 누를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그 생각하던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일어나는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옮아가기 이전에 퍼뜩 「이뭣고?」 심호흡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기 시작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호흡과 화두를 함께 합쳐서 들어나간다고 하면은 백만 번 망상이 일어난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백만 번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그렇게 들어나가면, 일어났던 망상이 나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하게 하는 그러한 고약한 원인이 아니라, 그 망상은 바로 나로 하여금 견성성불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좋은 발판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일화. 묘화(妙花) 부인.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세속(世俗)에 계신다고 해서 도를 못 닦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서는 오히려 세속이 더욱 발심(發心)을 할 수 있고, 더욱 분심(憤心)을 낼 수 있고, 더욱 용맹정진(勇猛精進)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행도량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5호 박초선 명창의 음성공양. 찬불송과 「그것도 멍텅구리」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0. 12. 22. 13:09

((No.054))—1977년 9월 관음재일(77.09.24) (58분)

(1/3) 약 21분. (2/3) 약 18분. (3/3) 약 19분.

(1/3)----------------

 

지난 음력 8월 24일에 뵙고, 한 달 만에 참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됩니다. 다른 달에는 한 달에 두 번 내지 세 번씩 법회가 열리지마는 8월과 9월은 한 달에 한 번씩, 한 번 밖에는 법회가 들지 안 했습니다. 오랜만에 뵈니까 좀 반가운 거 같습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은 정법(正法), 여러분들이 잘 들으신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 정법이냐?

언필칭 말하기를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다. 어느 절에 간들 다 부처님을 모셨으니 부처님은 한 부처님인데' 이런 말씀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지마는, 그 부처님의 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에 따라서—한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한 법이 정법(正法)이 되기도 하고, 삿된 외도법(外道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은지 10년, 20년, 30년 내지 일생을 믿어도 스승을 잘 못 만나고, 믿기를 잘못 믿고, 행하기를 잘못 행하면 일생을 믿은 불법(佛法)이 정법을 믿지 못하고 사법(邪法)이 되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정말 일생을 그렇게 돈독하게 불법을 믿고, 그렇게 간절히 불법을 믿었지마는 스승을 잘못 만나, 잘못 행하므로 해서 일생을 삿된 불법을 믿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를 믿고 불법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는, 신앙을 하는 우리 불제자(佛弟子)들은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은 그 많은 시간을 그 많은 정성을 바쳐서 '부처님 신도다, 불교의 신도다' 하면서 일생을 헛되게 보내고. 삿된—'불법을 믿는다'고, 이름은 불법이지마는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삿된 외도법을 믿고 행하므로 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영혼이 과연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생각해 보면 한심스럽고 가련하기 이루 다 형언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우리 절에 구십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여름 한 철을 참선을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을 그 부처님을 믿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 불교 신자 노릇을 했습니다.

 

허나 '참선(參禪)이 좋다, 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을 하면 그렇게 좋다' 이런 말씀을 어디서 듣고, 참선을 한 데를 한번 가서 같이 앉아서 참선을 해 보니까 아무 재미도 없고 졸음만 와 쌓어 그래서 '아! 이것 참선이라는 게 졸음이 와서 아무 맛이 없고, 그 할 것이 아니로구나. 참선이라는 게 천하 못쓸 것이로구나' 이리 생각하고서 다시는 참선을 할 생각을 아니하고, 그저 염불하고 경을 외우고, 천수경을 읽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돈과 쌀을 가지고 가서 불공을 드리고 이렇게만 일생을 사시다가,

어떻게 해서 그 다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다. 참선을 잘 가르켜 주신 스님이 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 이 용화사에 와서 한 번 '구십이 넘었지마는 한 철을, 한 철만이라도 그 참선을 한번 해 보고 죽는 것이 한이 없겠다' 이렇게 해서 신청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그 처지와 그 말씀이 하도 참 고맙고, 기특하고 또 한편 우습고 그래서 "그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십 노인이 어떻게 이 대중선방(大衆禪房)에 와 가지고 석 달 동안을 새벽 세 시에서부터서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염려가 됩니다마는 그 마음만큼은 참 그렇게 고맙고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은 좋으시다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다른 할머니들도 모다 하시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방부(房付)를 받아 가지고 한 철을 나셨습니다.

 

절에 다니셨다 해도 대처승 절에 그 불공이나 드리러 다니셨기 때문에 전연 선방에 규칙이나, 선방 생활에 대해서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신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착하고, 어질고, 점잖하고 그리고서 너무나도 천진난만하신 할머니였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선방에 처음 나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무리가 없이 여러 수십 명 대중 보살님네들이 친어머니 받들듯이 그렇게 모다 친절한 마음으로 돌봐주시고 해서 한 철을 아무 무리가 없이 한 철을 지내시고서 참 기쁜 마음으로 환희심으로 해제(解制)를 마치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할머니가 한 일주일 전에 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아무 병환도 없이 앉아서 떠억 참선을 하시다가 고대로 허리를 구부린 채 임종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평생에 신심이 돈독하고, 마음씨가 착하고 그러셨기 때문에 이렇게 열반(涅槃)을, 정말 보통 말하기를, 병 없이 이렇게 앉아서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을 하신 것을 '조사(祖師) 열반이다'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마는,

어찌 조사라고 해서 꼭 병환이 없이 돌아가시란 법도 없는 것이고, 또 조사가 아닌 일반 세속 사람도 돌아가실 때 참 병환 없이 아주 임종을 잘하신 분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어서 돌아가실 때 꼭 병환이 있고 없는 것 가지고, 그분이 도(道)가 있고 없는 것을 가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마는, 그렇지마는 기왕이면은 임종할 때에 그렇게 무서운 견디기 어려운 병환을 겪지 아니하고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고 하는 것은 인생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할머니께서 일생을 착하고 정직하고, 남 적악(積惡)한 일 없이 어떻게 믿었던지 간에 부처님을 돈독히 믿으셨고, 마지막 판에 가서 이 용화사 선방에 와 가지고 한 철을—화두를 새로 타고, 앉는 법을 새로 배우고, 발우(鉢盂) 펴는 법을 새로 배우고 이렇게 해서 한 철을 잘 지내신 그 공덕으로 해서 이 할머니는 결정코 내생에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해 가지고 다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귀의하셔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셔 가지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의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과연 정법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가까운 데 있으면서도 정법에 귀의(歸依)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구십 평생을 불법을 믿고 사셨지마는 일생 동안을 그 무당과 비슷한 대처승 절에 다니시면서 불공이나 드리고 복이나 빌고, 그렇게 일생을 지내시다가 구십 평생의 마지막 해에 가서 참선법을 믿고 몸소 선방에서 참선을 하시다가 끝을 마치신, 그렇게 정법 만나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중생,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문중에 귀의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한 과거에 숙연(宿緣)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정법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일러주어도 좀해 그것이 좋다고 하는 생각까지는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편설(方便說) · 외도(外道) · 사법(邪法)에는 그 귀가 솔깃하고 그래 가지고 거기에는 물심양면으로 거기서 시키는 대로 아주 죽은 형용까지도 하면서 미쳐서 혹(惑)해 반해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면서 정법문중에 들어와서는 한 번 두 번 들어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는 안 와 버리거나 그러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사람은 나무를 볼 때에 파랗게 잎이 피고, 빨갛고 누렇게 꽃이 핀 그리에만 눈을 주기가 쉽고, 땅속에 묻혀 있는 나무에 뿌리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 몸뚱이나, 가지나, 잎이나, 꽃이나, 열매가 전부 그 뿌리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데에는 도저히 가지가 뻗을 수가 없고, 잎도 필 수가 없고, 꽃도,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사법에 의지한 사람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얻어진 것 같고, 재미가 있고 곧 크게 소원을 성취할 것 같지마는 해가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허망한 삿된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법에 빠진 사람은 곧, 당장 무슨 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자기도 혹해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고,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이웃 · 친구 · 일가친척을 전부 끌어들여 가지고, 거기 장에 사람이 모이듯 사람을 끌고 들어가서 미쳐서 어쩔 줄 모르지마는 머지아니해서 거기에는 실망과 낙망과 후회의 눈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법문중, 불법문중에 있어서 선방편(善方便)과 그러한 외도에 사법(邪法)과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한 점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서 전연 방편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고 대뜸 첫걸음부터서 정법문중에 귀의한 사람도 가끔 있기는 하지마는, 그러한 사람은 극소수,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있을 정도고, 대부분은 방편문에 의지해서 걸려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4년 절에 다니고 법문을 듣고 하다가 차츰차츰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 정법을 믿고 정법에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방편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방편에 의지해서 일단 불법문중에 들어왔다가 그래 가지고 차츰 좋은 도반(道伴), 좋은 스승을 의지해서 정법으로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서 49년 동안을 꼭! 이 정법만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법문이 방편설이 참 많은 것입니다. 방편이 아니면은 중생을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전부가 방편에 의해서 전부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46초)

 

 

 

 

(2/3)----------------

 

방편 자체가 악(惡)하고 선(善)하다고 하기보다는 그 방편을 쓰는 법사, 스승, 선배에 첫째 문제가 있고, 둘째에 가서는 그 방편에 걸려든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성이 삿되고 바르지를 못해 가지고 그러한 악방편만 솔깃하게 생겨 가지고 혹해서 미쳐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러한 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 방편을 쓰는 편에서 그 법사나, 승려나, 선배가 일시적으로 그러한 방편을 사용하되, 적당한 기회에 그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지를 못하고, 계속 어떠한 이권에 욕심을 가지고 그 방편을 계속 사용해 가지고 신도를 꼼짝 못하게 방편으로 얽어매 두는 그러한 스승을 만나 가지고 일생을 정법을 만나지 못한 채 그런 방편법, 악방편에 얽매여 가지고 불교 신도 노릇을 하다가 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동안에 어떻게 불법을 믿었던지 간에 또는 과거에 어떠한 숙연이 있던지 간에 오늘날 우리는 이 법보선원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정법에 관한 법문을 설하신 것을 녹음을 통해서 듣고, 그 설법에 의지해서 참선 수행을 할 수 있게 된 우리의 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다행할 길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고서 그리고서 실천에 옮기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좋은, 아주 좋은 약을 만병통치(萬病通治)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좋은 약을 만나 가지고서도 그 약을 먹지 아니하고 팽가친 채 병고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겨서 열심히 시간을 아끼고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일초일초, 일분일분을 철저히 실천 수행하므로 해서 우리의 무량겁으로부터서 걸려 가지고 신음해 오던 그 중생의 고질병을 금생에 뿌럭지를 뽑아서 근치(根治)를 해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살 활(活)' 자, 활구참선. '죽을 사(死)' 자, 죽은 사구참선, 활구참선은—이론과 어떠한 이로(理路), 어로(語路),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러한 참선은 이것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한다 해도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이 아니고 사구참선입니다.

사구참선은 죽을 때까지 무량겁을 해도,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세하실 때까지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다 해도 그것은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단 일 분을 하고, 단 한 시간을 하더라도 참선을 할 바에는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자기가 아무리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모든 경전을 종횡으로 육두 백판으로 외우고 교리적으로 환히 안다 해도 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그 알고 있는 교리적인 지식, 상식 그러한 것을 이 참선에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이용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것을 동원해 가지고 이 화두를 이리저리 분석해 보고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래가지고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러한 뜻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 이론 따지는 그것을 놔 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 받은 화두 '이뭣고?'

'이뭣고?'면 '이뭣고?' 또는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 화두, 또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화두로 타신 분은 그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무슨 화두가 되었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가운데에 한 가지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화두 하나만을 다못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비단 앉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걸어 다닐 때, 밥 먹을 때, 똥 눌 때, 소지할 때, 빨래할 때, 또는 차를 탈 때,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일어나는 어떠한 생각,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슬픈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기쁜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불같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올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눈으로 어떤 꽃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또는 사람이 지나간 것을 보거나, 산을 보거나, 구름을 보거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거나 또는 귀를 통해서 새가 우는 소리를 듣거나,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거나, 어린아이가 고함을 지르고 우는 소리를 듣거나, 어떠한 것을 보건 듣던 간에 그때 그때마다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참선 수행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면은 당장 그 보는 데에 따라갑니다. 그래가지고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귀로 뭣을 들으면은 그 듣는 일로 해서 바로 나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듣는 그 건으로 해서 이 생각, 저 생각, 10년 전으로 올라갔다가, 5년 전으로 내려왔다가 그러다가 공연히 속이 활딱 뒤집어졌다가, 혼자 웃었다가, 썽났다가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그러한 식으로 망상(妄想) 위에다가 또 망상의 가지를 피우고 그 망상 위에 또 망상의 꽃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그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골냈다가 웃었다가 그러다가 그 지나간 일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생각 한 생각했던 그것이 하나도 딴 데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차곡차곡 우리의 마음자리, 제팔식(第八識) 속에 고대로 녹음(錄音)이 되는 것입니다.

 

녹음이 되고, 그 저장이 되어가지고 그것이 종자(種子)가 되고 원인(原因)이 되어서 앞으로 무량겁 윤회가 그 종자로부터서 그 원인으로부터서 윤회(輪廻)가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한 행동으로 표현이 되고, 한 행동으로 해서 다시 또 생각이 거기에 이어지고, 생각과 행동이 서로—새끼가 왼손에 쥐었던 짚이 오른손으로 건너가고, 오른손에 잡았던 짚이 왼손으로 건너가고 그래서 이렇게 그 손이 움직여짐에 따라서 새끼가 꽈지듯이,

한 생각이 행동으로, 행동에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하지 아니한, 참선을 하지 아니한 범부 중생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무엇인가 봐야 하고, 귀를 통해서 무엇인가 듣기 마련이고, 보고 들음으로 해서 무엇인가 느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사람은 그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이 법을 충실히 이 법을 본업(本業)으로 해서 열심히 살아간 사람에게는 계율을 지키는 일, 또는 염불을 하는 일 또는 주문(呪文)을 외우든, 또는 기도를 하건, 어떤 경전을 반야심경을 외우건 또는 천수를 하건, 그 밖에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건, 또는 오후불식이나 일종을 하건, 또는 방생을 하건, 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시 공덕을 하건, 또는 노인이나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가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좋은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닦는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정법을 닦지 아니하고 계행(戒行)만을 위주해서 닦음으로써 일생 수행을 삼는다던지, 염불을 해 가지고 극락 가기만을 바래 가지고 일생을 염불만을 한다던지, 또는 어떤 주문을 외워 가지고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기 위해서, 주문에 의지해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전전긍긍을 한다던지, 기도를 해 가지고 아들딸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래고 그러한 물질적인 것, 모냥이 있는 것에 얽매어 가지고 계속 기도에 미쳐 가지고 돌아댕기는 그런 분.

 

절을 많이 하면은 업장이 소멸하고, 소원이 성취된다 해 가지고 삼천배, 사천배 절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하루에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면은 세세생생에 부자로 살고, 업장이 소멸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니까 평생에 오후불식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일종(一種)을 하면 좋다니까 일종을 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이렇게 해서 그러한 모냥이 있는 착상구불(着相求佛), 착상 수행, 상(相)에 착(着)해 가지고, 모냥에 착해 가지고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그러한 불법을 믿는 사람, 이것은 모두가 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방편의 올개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러한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 불법(佛法)은 설사 그 사람이 삿된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이 정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일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점잖하고, 그 말할 수 없이 착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은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에 의지한 사람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일체 선법(善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선법이 그 사람에게는 다 선방편(善方便)이요, 정법의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 수단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똑같이 계율을 지키고, 똑같이 염불을 하고, 똑같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보시 공덕을 쌓고 방생을 한다 하더라도 정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 사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는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염불을 하지 말아라. 천수를 외우지 말아라. 『반야심경』을 외우지 말아라. 『금강경』을 독송하지 말아라. 방생을 하지 말아라.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하지 말아라. 또는 노인에 보시 공덕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형편 닿는 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하시라는 겁니다.

하되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서 하는 그 마음으로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가운데에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뻑뻑이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이것이 바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일체 보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하는 그 자체는 남이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마는, 그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다 같이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20분47초~38분35초)

 

 

 

 

(3/3)----------------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활구참선은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론적으로 따지고, 경전에 있는 교리를 등용을 해서 따지고, 자기가 어떤 스님한테 들은 법문을 듣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따져서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렇구나! 아!'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마침내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 죽은 참선이기 때문에 영원히 해 봤자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 가운데 '화두(話頭)는 어떠한 책이나 잡지나 신문, 그러한 데에서 보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화두를 선택하지 말고 반드시 선지식에게 딱! 하나를 받아 가지고 해야 한다'

 

자기 나름대로 어디서 지내가는 말로 듣거나, 책에서 봐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선택을 한 화두는 해 나가다가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이 화두가 좋은가, 나쁜가?' 자꾸 스스로 그것을 혐의를 하고 의심을 해 가지고 중간에 갈팡질팡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공부가 크게 장애를 받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화두를 딱! 지정을 받아 가지고 한 번 받았으면은 다시는 그것을 변경을 하지 말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때까지 일여(一如)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어떠한 화두라도 처음부터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곧 잘될 것 같다가 얼마 동안 해 가면 영 답답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점점 화두가 들리지 아니하면서 그 애를 먹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딴생각을 내지 말고, 잘 그 마음을 써서 한 생각 한 생각, 일 분 일 분을 법(法)답게 간절히 공부를 지어 나간다고 하면은 반드시 그렇게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치도록 애를 먹혔던 그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정말 제절로 화두가 들리면서 순일무잡하게 정진이 되어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간다 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생각 '아! 인자 되었다. 참! 좋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되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되기 마련입니다마는 그 생각이 고약한 망상 중에는 최고 가는 고약한 망상인 것입니다.

 

보통 때,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른 것은 뿌리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절로 없어지지마는, 공부가 한참 잘되어 갈 고비에 이르러서 '아! 참 좋다. 아! 이렇게 계속 잘되었으면' 아, 이러한 생각을 낸 것은 고비를 넘을려고 한 판에 뒷걸음질을 쳐서 천길만길 구렁텅이로 빠져 버린 것과 같애서 그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갈 때에 그러한 생각 내는 것은 아주 타당한 것 같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최고로 고약한 망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 둬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되어도 짜증을 내지 말고, 공부가 잘되어 가도 좋아하는 기쁜 마음을 내지 말고, 계속 한결같이 이 화두를 들고 나가되, 잘 안되어갈 때—가슴이 답답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몸이 뒤틀리도록 괴롭고 지루하고 이럴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그 길을 왔다갔다하면서 포행(布行)을 하는 가운데에 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고요해지고 깨끗해지면 다시 또 방석에 가서 또 정진을 하시는데.

 

이 화두를,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그 환성지안 도사 당시에 월봉 스님이라고 하는 대강사인데 그분이 『원각경』에 있는 말씀 한마디를 법문하신 가운데 잘못 설(說)해 가지고 그 과보로 해서 환성지안 선사에 그 한마디 고함 소리에 금강역사(金剛力士)에, 금강신장(金剛神將)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철퇴를 맞고, 피를 토하고 꺼꾸러진 내용에 법문을 들으셨습니다.

법문(法門)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고, 설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그 법문 한 시간 동안에 걸친 가운데에 여러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충 그 말씀 가운데에 중요한 것을 간추려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생활하시면서, 아내 노릇 하시면서, 남편 노릇 하시면서, 엄마 노릇 하시면서 그 생활 속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질 것이 없습니다. 되건 안 되건 따질 것 없이 자꾸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시면서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일상생활이 마냥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화두를 들 줄 알고 여법(如法)하게 공부를 지어 나가면서 하시면은 사회생활도 썩! 괴롭지마는 아니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도 한량없는 기쁨이 있는 것이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아니한 사람에게는 기쁜 것도 그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六途輪廻)에 윤회의 원인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더군다나 괴로운 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면서 하는 사회생활은 사회생활 그 자체가.... (녹음 끊김)

 

 

돌아오는 10월 보름날이, 음력 10월 보름날이 백일기도 입재 날이면서 동시에 용화사 법보선원 결제 날입니다. 그날도 법회가 있으니 만큼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서로 권고해서 그날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결제에도 동참을 하시고 백일기도에도 동참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2시에 인천시민회관에서 불교도들의 새마을운동에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스님네와 많은 신도님네들이 참여해 주기를 바래고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도 몇 분의 스님이 참석을 하실 것이고 또 여러 신도님 가운데에도 될 수 있는 한 여기서 멀지 아니한 곳에 있으니깐 거기에 잠깐 참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기독교 단체나, 천주교 단체에서는 그러한 모임에 많이 성의를 가지고 참여를 하시는데 불교 단체 특히 우리 용화사에서는 한 분도 참석을 아니하신다고 이러한 그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것은 아닙니다마는 될 수 있으면 참여를 하셔서, 지끔 우리나라가 선진 대열에 서기 위한 비약을 하기 위해서 온갖 면에 있어서 그 활발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운동의 하나가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입니다.

특히 이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선구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불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불교 대한불교 조계종의 한 방침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래고.

 

그다음에 말씀드릴 것은 우리나라 그 조경—조경(造景)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 문화 주택을 가서 보시면은 마당에 돌과 모다 나무, 그런 것을 잘 심어서 보기 좋게 만든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는 고궁 같은 데나 그런 데를 가서도 보시겠고 그런데 그것을 조경이라고 그럽니다.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 마당에다가 돈 들여서 좋은 돌이나 나무를 심어 놓고 사치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조경의 근원이 그러한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화엄경』 도리가—불경(佛經) 중에 최고의 경전이 바로 화엄경인데, 그 화엄경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은 일월성진(日月星辰), 해와 달 · 별 · 산천초목, 이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님의 몸뚱이요, 바람 불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하는 이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의 설법이라고 하는 내용의 진리가 바로 『화엄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경』의 진리, 진리인 우주 자연을 그것을 내 조그마한 뜨락에 구현을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뜰에다가 바위 뾰족하고 둥글고 모나고 삐뜰어지고 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바위를 적재적소에다가 갖다가 배치를 하고, 거기에 어울리게 조화가 되게 나무를 적당히 심음으로 해서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내 뜰안에서 우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우주 자연에 신비스러운 진리를 그 하나의 돌을 보고 하나의 나무를 봄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조경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새 아무나 시켜 가지고 정원사들을 시켜서 이러쿵저러쿵 묘하게 정원을 꾸민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볼 때에, 아는 사람이 볼 때는 퍽 가소롭기 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조경 학계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에 권위자이신 90세가 넘으신 운정 한도 박사께서 그전에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실 때부터서 여기를 여러 차례 왕래하셨고, 조실 스님도 그 한도 선생, 한도 박사가 계신 그 토굴에 왕림을 하셔서 서로 친한 교분이 계시고 또 조실 스님이 열반하신 뒤에도 저도 그 한도 선생 계신 데를 여러 차례 갔고 또 그 한도 선생도 우리 법보선원에 여러 차례를 오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유교 · 불교 · 도교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조경을 그러한 불교에 『화엄경』의 진리를 그러한 조경을 통해서 표현을 하자. 사찰에 조경도 그렇고, 일반 불교 신도에 가정도 역시 그렇게 하고, 고궁도 그렇게 표현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그 조그마한 뜰안에서 바위 하나 나무 하나를 봄으로 해서 거기에서 진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참, 오늘날에 불교의 진리를 펴는 가장 좋은 방편이 된다고 하는 것을 항시 역설을 해 오셨습니다.

 

그 선생님 밑에는 각 대학교수, 사회에 저명인사들이 모다 그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서 제자의 입장에서 그 자연취미회라고 하는 것을 조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취지로 해서 자연취미회에 여러분들도 가입을 하셔서 좋은 조경을 구경도 하시고 또 여러분 가정에 그러한 조경을 하시게 될 경우 이러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하시게 되면은 같은 힘을 들여 가지고도 부처님의 진리에 부합이 되도록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이 자연취미회에 가입을 하셔서 그러한 선생님 높은 선생님들의 좋은 강의도 들으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우리의 정신을 순화하고 그러한 조경 자연취미를 통해서 천진무구한 비로자나 법신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자연취미회에 발기회에 그 회원께서 여러분에게 가입하시도록 말씀을 하시면은 될 수 있으면은 그런 데에 가입을 하시도록 권고를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계속해서 법요식을 진행하겠습니다. (38분37초~57분13초) (끝)

 

 

 

 

[법문 내용]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 90 넘은 노보살님의 한 철 참선수행.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 / 조사(祖師) 열반 / 정법은 근본적인 것, 나무뿌리, 실다운 것. 사법은 지엽적인 것, 끝 가지, 허망한 것.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 모두가 다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 선방편(善方便)과 악방편(惡方便).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면 선방편. 방편에 얽어매 두면 악방편 /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 수행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정법(正法),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사법(邪法). 사구참선은 깨달을 기약이 없다 /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 / 착상구불(着相求佛),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상(相)에 착(着)한 수행은 방편에 얽매인 것 /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다 /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공부해야지, 늙어서 기운 없을 때는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다 / 조경(造景)은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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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0. 12. 20. 18:41

((No.066))—1978년(무오년) 신수기도 회향(78.01.09.음) (52분)

(1/3) 약 19분. (2/3) 약 17분. (3/3) 약 16분.

(1/3)----------------


무오년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사대부중(四部大衆), 법보제자 여러분들께서 더욱 몸 건강하시고, 모든 크고 작은 소원 차례로 성취하시고, 정법문중(正法門中)에 신심견고(信心堅固)하셔서 참선 공부 잘해 가지고 결정코 이 몸으로 견성해탈(見性解脫)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러한 뜻으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초삼일부터 초아흐레 날까지 7일 동안을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연례행사로 신수(身數)기도를 봉행해 내려왔습니다. 금년도 역시 날씨가 그렇게 강추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께서 이 7일 기도에 참여하셔서 정말 성심성의껏 기도를 봉행했습니다. 이 공덕으로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을 저는 간절히 바라고 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기도라든지, 염불이라든지 또는 경을 읽는다든지, 주력을 한다든지 이러한 것이 전부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正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의 하나입니다. 염불 · 독경 · 기도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정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는 정법에 들어가서 나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가지나 되는 많은 법(法)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중생이 각기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어느 문으로 들어오든지 걸려들기만 하면은 드디어 정법 문안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차례차례 층계를 놔 놓으셨습니다.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는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문에 들어오셔 가지고 들어오시자마자 금방 정법에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듣고 참선을 하실 수 있는 그러한 선택된 부처님 제자가 되신 것을 나는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법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그 방편문에만 걸려 가지고 3년, 5년, 10년 내지 일생을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그 방편의 단계에서 머물러서 계속 눈앞에 조그마한 복(福), 오욕(五慾)을 충족시키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충족시키는 그러한 데에 머물러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그러한 가엾은 그러한 신도들이 아직도 한량없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설한 이 법은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떼배와 같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떼배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는 데 꼭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소중한 기구입니다. 그 배가 없으면은 그 넓은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필요한 것이지마는 일단 그 강을 건너고서는 그 배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그 배를 계속 버리지를 못하고, '그 배로 인해서 내가 이 강물을 건넜으니까 얼마나 고마웁고 소중한 것이냐, 그러니 나는...' 이 배를 버리지를 못하고 계속 육지를 다니면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돌아댕기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은 우습고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어느 불자(佛子)라도 전부 오늘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는 그러한 작은 배, 조끔 더 큰 배, 한량없이 여러 개의 배를 타고 또 물을 건너고 또 타고 물을 건너고 해서, 오늘 이 자리에 까지 오셨습니다. 이 자리는 배를 짊어지고 걸어 다니는 그러한 장소가 아니라, 그 많은 배들을 깨끗이 그 강가에다가 버리고서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이 맨몸으로 이 자리에 나오셔야 됩니다.


그릇 속에 물건을 담을 때, 그 그릇 속에 어떠한 물건이라도 그릇 속에 채워져 있으면 그 그릇은 다른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릇은 담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필요할 때 담고 또 그것을 바로 비워 놓아야 그다음에 더 좋은 것을 또 담을 수가 있는 거와 같습니다.


참선은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모든 살림살이 모든 얻은 바를 깨끗이 버림으로써 바른 참선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수십 권, 수백 권의 경(經)을 다 읽어서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힘을, 그러한 능력을 속에다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은 바른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육두 백판으로 다 외우고 다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심(衆生心)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나의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금가루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 금가루를 눈에다 집어넣었을 때에는 그 눈은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밥이 아무리 소중하다 하더라도 있을 자리 가 있어야지, 밥이 기도(氣道)로 콧구먹으로 들어간다든지 눈 속에다 집어넣어 가지고서는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한 말씀 한 말씀 다 참된 말씀이고 소중한 말씀이지마는, 그것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잠깐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고 바로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古人)이 말씀하신 사교입선(捨敎入禪)입니다. '교(敎)를 버리고서 선(禪)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아까 순치황제가 중국에 천자(天子)로 19년 동안이라고 하는 세월을 참 훌륭하게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한 천자가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 순치황제의 출가하셔가지고 읊으신 시(詩)를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 일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순치황제는 전생에 인도(印度)에서 도를 닦던 한 참선하는 스님이 어쩌다가 '한 생각' 잘못 먹어가지고 중국에 천자로 태어났습니다.


도를 닦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라도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 생각 자칫 잘못 먹어가지고 일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한 생각 잘 먹어가지고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한 한 생각을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 그렇게 해서 일생을 지내가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중생의 생애이지마는 제일 소중하고 무서운 것은 이 '한 생각'인 것입니다.


금은보화,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을 해 나가느냐? 하는 그 문제야말로 우리의 무량겁을 두고 윤회(輪廻)해 내려오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가깝게 봐서 일생 동안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는 그러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출을 했다가 여러 날 만에 집에를 돌아왔습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등잔불이 어슴프레 켜진 가운데에 자기 아내가 어떤 스님하고 한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대번에 분이 나가지고 부엌에 쫓아가서 식칼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두 사람을 칼로 요절을 내려고 하다가 잠깐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생각을 했습니다.


오다가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보따리를 피어 놓고 떠억 사주(四柱) 관상(觀相)을 보고 있는데, 자꾸 그 사람이 “여보시오, 여 사주 하나 보고 가시오”

“아, 나, 사주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도 한 번만 보고 가시오”

“에! 안 본다”고.


“거저 봐줄 테니 한 번만 보고 가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러면 좀 봐주시오”


"당신..."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별말 안 하고 ‘참을 인(忍)’ 자, 하나를 손바닥에다가 떠억 먹으로 써줬습니다. “이것을 절대로 물로 씻지 말고 닦이지 않도록 가서, 어떠한 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이 손바닥을 반드시 펴 보시오"


아, 그런 일이 문득 생각이 나가지고 ‘우선 칼로 목을 먼저 찌를 것이 아니라, 대관절 어떠한 사연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번 알아보고 죽여야지, 자고 있는 놈을 다짜고짜로 목을 찌를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칼을 한 손에다 쥐고서 이불을 걷어 제끼니까, 깜짝 놀래 가지고 두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른대로 말해라, 너는 이놈 어떤 놈이냐?”

그러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남자 스님이 아니라, 친정 사촌동생이 과부가 되어가지고 출가를 해서 중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여기를 지내다가 내 집에 들려서 이야기하다 오늘 하루저녁 자게 되었다”고.


아! 그래서 그 손에다가 써진 ‘참을 인(忍)’ 자를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그걸 보고, 평생토록 그 ‘참을 인(忍)’ 자를 손바닥에 써진 그 ‘참을 인(忍)’ 자를 마음속에다 새기고, 다시는 그러한 경솔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 가지고 그렇게 신경질을 잘 내고 그렇게 경거망동을 하던 그 사람이 일생 동안을 참 신중하고 아량이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은 아내 죽이고, 그 스님을 죽이고, 자기도 사형을 당해가지고 그 집안이 쑥대밭이 될 그러한 중대한 문제, 그것이 바로 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 그 사주는 보아야 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그것은 생각을 잘못 생각하신 것이고.


신수기도를 일주일 동안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습니다마는 이 신수기도를 우리 절에서 안 하면은 이 가운데에 계신 대부분 보살님네들은 모다 무당절, 또 가서 법문도 듣지도 못할 그러한 절에 가서 별별 이상스런 그 부작(符作) 같은 것을 많은 돈을 주고 사야 하고,

그리고 겁나는 협박적인 그러한 말을 한마디씩 듣고서 돈은 빼앗기면서 일 년 동안을 전전긍긍 불안에 떨면서 살지 아니하면 안 될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질까 두려워서, 신수기도를 우리 법보선원에서도 봉행을 하고 그리고서 입재(入齋) 때와 회향(廻向) 때에 정말 부처님의 정법을 여러분들에게 설(說)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러한 삿된 구렁텅이에 빠질 것을 미리 방비하고, 나아가서 일 년 동안을 정말 바른 신심으로 안심하고, 장애 없이 잘 사시는 길을 여러분들에게 열어드리기 위해서 신수기도를 봉행한 것입니다.(처음~18분30초)





(2/3)----------------


'선방에서 무슨 기도를 한가? 기도는 참선하면은 그만이지 무슨 기도를 한가?'

여러분 가운데는 오래전부터서 참선을 하셔서 어떤 것은 방편(方便)이고, 어떠한 것은 정법(正法)인가를 잘 아시는 분들은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어떠한 방편이라도 바른 법을 가지신 분이 쓰면은 그 방편이 바로 정법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라 하더라도 삿된 사람이 쓰면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칼이라도 정의를 가진 사람이 들면은 사람을 살리고, 국가와 민족을 살리고 할 수 있지마는, 도적이 삿된 도적이 그 칼을 가지면은 선한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큰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법(法)도 또한 그러해서 바르게 쓰면은 좋은 법이 되지만, 악한 사람이 잘못 쓰면은 많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7일 동안 정성스럽게 잘 마쳐서 과거에 여러분들께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또는 많은 허물이라도 있으신 분은 이 기도를 통해서 깨끗하게 소멸(消滅)이 되었을 것이 틀림이 없고, 그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서 기도를 하시고 다시 일 년 동안을 정법에 의해서 수행을 잘하실 것을 다짐하셨기 때문에 새로 죄를 짓지 않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동안 십악참회(十惡懺悔)도 아울러서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저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랗게 트인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청정하고 깨끗한 그러한 마음자리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그 마음자리가 앞으로 흐려지지 않도록,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단속만 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인 것입니다.


달마스님 『혈맥론(血脈論)』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참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하면은 일체 행(行)이 그 가운데 다 제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대승(大乘)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것이 대승보살의 과제입니다마는 그 육바라밀이 첫째, 보시(布施)를 할 것, 둘째, 계율(戒律)을 지킬 것, 셋째에 인욕(忍辱)을 할 것, 넷째에 정진(精進)을 할 것, 다섯째에 선정(禪定), 마음을 고요히 할 것, 여섯째, 지혜(智慧)를 닦을 것. 이렇게 육바라밀, 여섯 가지 저 언덕에 건너가는 좋은 법입니다.

그 여섯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소중하냐? 전부가 다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맨 끝에 있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시라야 그 보시는 옳은 보시가 되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계율이라야 그 계율은 참으로 옳은 계율이 되는 것이여.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욕이라야 그 인욕이 참 바른 인욕이며, 지혜를 바탕으로 한 정진이라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선정이라야 다 옳은 법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시를 했댔자 그것은 유루복(有漏福)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계율을 지켜도 지혜가 없이 지킨 계율은 천상에는 태어날 수 있지마는 금방 복(福) 다 받으면 다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욕도 지혜 있는 인욕이라야지, 어리석게 억지로 참기만 위주로 해서 한다면 단박 가슴이 아프고 목이 아프고, 골치가 아프고, 가슴앓이 속병이 생겨가지고 결국은 병만 쳐주고, 그 억지로 참은 것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일생 동안을 억지로 참다 보면 나중에 여러 번 참다가 그놈이 축적이 되어가지고 터질 때는 무서운 위력을 내가지고 자기 신세 망치고, 집안을 쑥대밭을 맨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환자가 되어가지고 늙발에 한숨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에게 급(急)한 것은 그 지혜가 제일 급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지식의 유무(有無)도 상관이 없고,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면은 '꼭 절에 와서 그래가지고 조용하니 죽비(竹篦)를 치고 앉아야만 참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일이 많아서 참선은 못 합니다' 이렇게 노상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참선은 일이 많고 적고 그것도 상관이 없고, 차 속이나 또는 시장 바닥이나 가정이나 또는 절이나 어디서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참선은 앉고 눕고 또는 서서 걸어 다니고 그러한 위의(威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누웠어도 생각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앉었을 때에도 생각은 이 생각 저 생각이 번갈아 드나들고, 걸어 갈 때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만큼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악한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무슨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무슨 생각 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 그놈을,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괴로운 생각, 억울한 생각, 슬픈 생각 그러한 생각이 속에 꽉 차 가지고 그 생각을 없애야만 참선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못한다' 이리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아직 참선하는 법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슬픈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무엇이 들어서 그 슬픈 생각을 하는가? 「이뭣고?」

몸이 아파도—'몸이 아파서 공부를 못합니다'—몸이 아픈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무엇이 그렇게 아픈 줄을 아는가? 그 아픈 줄 아는 생각만 있으면은 그 사람은 참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노여움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참선을 잘할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을 합니다.

슬픈 생각도 없고, 괴로운 생각도 없고, 억울하고 분한 생각도 없는 목석(木石)처럼 그러한 사람은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가지고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이나 갖다 놓을까, 아무 쓸데가 없죠?


그러나 욕하면 썽낼 줄 알고, 신경질도 잘 내고, 슬픔에 가슴이 꽉 차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행복이 무엇인 중을 모르고, 육체적으로 온갖 병이 들어 있고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아가지고 정말 정신과 육체가 한목 병들어서 죽을 길밖에는 없다고 이렇게 인생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일수록에 이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서 바른 스승을 만나가지고 죽을 셈 치고 대들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사람이 훨씬 더 도(道)를 깨닫기가 쉬웁고 좋은 것입니다.

그만한 인생을 전부를 아주 포기할 그러한 막바지에 도달한 그 사람은 한번 이 문에 들어와서 정법을 만났다 하면 다시는 다른 데에 정신을 빼앗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누구라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마는 정말 이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다시는 딴 데 한눈을 팔지 아니할 만큼 그만큼 절실한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 점이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할려면은 첫째, 나도 하면, 나도 옳은 법을 배워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금생에 결정코 깨달을 수가 있다. 내가 지금 울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괴로워할 줄도 아는 바로 이놈이 나의 불성(佛性)이요, 나의 마음자리다. 이것은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조끔도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날까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것은 그 법을 바로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더라도 열심히 도를 닦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생사(生死)에 윤회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다행히 이 법을 알았으니 이제 어디에 이 몸과 목숨을 바칠 곳이 있는가? 오직 나는 이 한 법을 위해서 이 목숨과 이 몸을 다 바칠 수가 있다. 나는 금생에 결정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굳센 신념(信念)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도 그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분은 이 자리를 기해서 철석(鐵石)같이 그 신념을 가지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신념을 가지시기를 저는 간곡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 신념이 있은 위에라야 우리의 공부는 바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둘째로 필요한 것은 분심(憤心)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 과거에 부처님과 많은 성현들은 진즉 이 법에 의지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하셔가지고 중생 교화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어찌 그러한 불보살과 성현들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맴돌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분심을 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도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은 분이 나서 집에 와가지고 울면서 숙제를 하고 그래가지고 밤잠을 안 자면서 공부를 해가지고 그다음에 시험 볼 때는 더 잘할려고 발버둥을 치거든, 벌써 아들과 딸을 둘씩, 셋씩, 다섯씩, 여섯씩 나서 키워 가지고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내가 내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만나가지고 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돈, 이웃집은 돈을 잘 벌고 자기는 잘 못 버는 그런 것을 보고는 입을 삐쭉빼쭉하고 시기를 낼 줄 알면서 내가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는 이 참선에 대해서 그러한 분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이것은 가엾기 그지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 참선은 언제나 저는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공부하시는 보살님네들, 한 분이 잠을 조끔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려고 애를 쓴 분이 있으면 자기도 따라서 공부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데에서 반드시 공부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 생활하시는 여러분들도 자기의 친구, 이웃, 아는 분들이 시간을 아껴서 그 시간을 쪼개서 정진하려고 애쓰는 분이 있으면 그이를 헐고 뜯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샘을 좀 내서 '나도 그 사람에게 지지 않고 더 공부를 잘하리라' 하는 이러한 선의의 경쟁심을 내고, 서로 충고하면서 보다 더 공부에 유익하도록 충고하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18분31초~35분40초)





(3/3)----------------


첫째, 신념. 둘째, 분심. 그리고 셋째에 가서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話頭), 화두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간절하고 철저한 의심 덩이[疑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는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두 가지로 노나서 가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보고, 설교를 많이 듣고 하는 또 다른 또 학식이 있고 그런 사람은 노상 어떠한 문제를 당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을 총동원해 가지고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따져서 결론을 내려야만 결론을 얻어야만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활구참선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참선을 다른, 사회의 어떤 수수께끼나 어떠한 문제들과 같이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지을려고 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참선을 해 나가고 있는 사람은 활구참선이 아니라 사구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훌륭한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衆生)의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의 알음알이는 아무리 좋은 그럴싸한 알음알이라 하더라도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뿐인 것입니다.


참선은 쉬웁게 말해서 무엇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서 많이 속에다가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다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깨끗이 내쏟아 버려야 됩니다. 내쏟아 버려야만 그 마음이 정말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금가루도 눈에 집어넣으면 안질(眼疾) 병이 생기는 것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속에다 넣고 이리저리 중생심으로 그것을 따둑거리고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중생의 경지, 중생심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를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그러한 사람은 두고두고 육도윤회를 할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루빨리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해탈(解脫)하고자 하시는 분은 이론적으로 따지는 버릇을 놔야 합니다.


다못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몸이 아플 때도 「이뭣고?」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웠을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슬픈 그 마음도 나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이고, 썽내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그 찰나에 바로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갈 때 불같이 일어났던 그 썽내는 그 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해탈도로 들어가는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차츰차츰 마음이 착해지고 마음이 비워져서, 바로 속에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이 가뜩 들어있는 채, 불보살의 경지에 가까와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꾸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라고 하는 것을 보통 내게 있는 돈과 물질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보시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참보시'가 아닙니다. 참보시에 들어가는 껍데기 보시, 초보적인 보시에 지내지 않은 것입니다.

참보시는 물질적인 것보다도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잘 말을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편안함을 얻게 하고,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아는 대로 일러주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할 수 있는 동기가 되도록 해주는 그런 것도 역시 보시가 됩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보시는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일체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한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 또한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호수에 물결이 일어나는 물결을 고요하게 만들려면 그 일어나는 물결을 없애려고 손을 대서는 아니 됩니다. 손대면은 다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모든 물결을 빨리 없애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성현들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에 의지해서 닦고 닦아서 오늘에 전해진 가장 훌륭한 법인 것입니다.

이 법(法), 한 법에 충실히 철저히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 간다면 육바라밀도 그 속에 갖추어 있는 것이고, 팔만대장경을 독파한 읽고 또 읽고 한 그 공덕도 그 속에 바로 갖추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나가지고서도 믿지 아니하고 계속 여러 가지 방편, 크고 작은 낡아빠진 배들을 짊어지고 팔도를 돌아다니고 60, 70년 동안을 그 썩어 낡아진 배를 짊어지고 돌아다니는 분이 계시다면은 당장 이 자리에서 그 배를,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놓으십시오. 벗어 놓고 간단한 「이뭣고?」 하나를 터억 마음에 간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 보십시오.

이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맨들아서 우리는 이 육신으로 대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부처님과 많은 성현과 전강 조실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단호히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마는 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긴 기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기다릴 때 30분 내지 10분이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지루한가를 느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일 년, 이태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빠른 것인가를 또 느끼게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는 것입니다.


7일 동안을 하루같이 성심으로 기도를 잘해서 마쳤습니다. 기도 법사스님께서도 정말 일심으로 기도를 봉행을 하셨고 여기에 동참하신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도 정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기도를 잘 봉행을 해서 오늘 회향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소원을 마음속에 간직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건 간에 그 일들이 가장 긴박한 것부터서 차례차례 다 성취되실 것을 저는 다시 한번 빌고 또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이 초아흐레니까 앞으로 6일 후에는 정월 대보름날입니다. 그날도 사시(巳時)에 법회가 열리게 되겠습니다마는, 그날은 작년 10월 15일부터서 시작한 겨울철 결제가 그날 정월 보름날, 90일 마지막 해제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5일에 시작한 백일기도가 또 정월 15일에 또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또 정월 대보름날은 우리나라 저 신라 때부터서 대보름날에는 그 찰밥, 오곡밥을 해서 천지신명과 조상과 모다 선영들에 다례를 올리는 날이고, 일체 재앙을 그래서 일체 재앙을 소멸을 하고, 소원을 또 성취하기 위한 발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 권고해서 법회에 참여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친 그러한 골에 들어가서 영원히 생사 없는 대해탈도를 증득하는 참선을 하고자 하노라. 이러한 내용에 게송(偈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게송을 들으시고 '아하! 참선을 하려면은 저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그런 데에 들어가야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은 이 게송의 뜻을 정말 똑바로 아신 것이 되지 못합니다.

시장바닥에서라도, 아들과 손자가 울고 똥을 싸서 뭉게는 그 속에서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 되는 것입니다.


심산유곡이라야만 된다면 산중에서 사는 화전민(火田民)들은 다 도인(道人)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살아도 신념이 없고, 분심이 없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백 년을 두고 산중에서 산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시장바닥에서, 사회 가정에서, 자기 있는 일터에서, 어데서 언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35분43초~51분56초) (끝)





[법문 내용]


염불 · 독경 · 기도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정법(正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 / 강을 건넜으면 배[방편]는 버려라 / 사교입선(捨敎入禪) / '한 생각' 단속이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 / ‘참을 인(忍)’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 /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 /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 그 지혜를 바탕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야 / 참선은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지식 유무(有無),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이—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 /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공부에 몸과 목숨을 다 바칠 만큼 절실해야 한다 / 삼요(三要), 신념, 분심, 의심 /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라.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 빨리 버리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 /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만든다 /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



부처님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한 말씀 한 말씀 다 참된 말씀이고 소중한 말씀이지마는, 그것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잠깐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고 바로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古人)이 말씀하신 사교입선(捨敎入禪)입니다. '교(敎)를 버리고서 선(禪)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을 해 나가느냐? 하는 그 문제야말로 우리의 무량겁을 두고 윤회(輪廻)해 내려오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가깝게 봐서 일생 동안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는 그러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 『혈맥론(血脈論)』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참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하면은 일체 행(行)이 그 가운데 다 제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여섯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소중하냐? 전부가 다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맨 끝에 있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시라야 그 보시는 옳은 보시가 되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계율이라야 그 계율은 참으로 옳은 계율이 되는 것이여.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욕이라야 그 인욕이 참 바른 인욕이며, 지혜를 바탕으로 한 정진이라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선정이라야 다 옳은 법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에게 급(急)한 것은 그 지혜가 제일 급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지식의 유무(有無)도 상관이 없고,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참선은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지식 유무(有無),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이—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에 몸과 목숨을 다 바칠 만큼 절실해야 합니다.


이 공부를 할려면은 첫째, 나도 하면, 나도 옳은 법을 배워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금생에 결정코 깨달을 수가 있다. 나는 금생에 결정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굳센 신념(信念)을 가져야 됩니다.


참선은 쉬웁게 말해서 무엇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서 많이 속에다가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다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깨끗이 내쏟아 버려야 됩니다. 내쏟아 버려야만 그 마음이 정말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맨들아서 우리는 이 육신으로 대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부처님과 많은 성현과 전강 조실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단호히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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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0. 11. 4. 12:07

 

 

(No.062)—1977년(정사년) 성도재 법문(77.12.08.음) (54분)

(1/3) 약 20분. (2/3) 약 21분. (3/3) 약 13분.

(1/3)----------------

 

오늘은 섣달 초여드레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그토록 존경하고 의지하고 믿고 그리고 말씀하신 법문에 의지해서 이렇게 숭배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정반왕 임금님에 아들이라서, 귀한 몸이라고 해서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한 것도 아닙니다. 또 96종 철학을 다 통달하신, 그러한 학문이 높다고 해서 부처님을 숭배한 것도 아닙니다. 신통력이 장하시다고 해서 부처님을 숭배한 것도 아닙니다.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갖춘 그러한 훌륭한 거동을 갖으셨다고 해서 우리가 존경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위대한 분들이 역사 이래로 많이 출현하셨습니다.

신라 때 김춘추라든지, 김유신 장군 같은 분, 그분을 우리 민족들은 역사상 위인으로 오늘날도 그분을 존경합니다마는, 그분은 신라 무렵에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갈라져 가지고 마냥 한 핏줄을 가진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땅을 빼앗고 빼앗기고 하는 그러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을 때에 신라 삼국통일을 함으로 해서 민족끼리 서로 싸우는 싸움을 그치게 했던 것입니다. 응당 이 대한민국에 국민으로서는 우리 민족의 위인으로 존경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창제하시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업적이 많으셔서 우리 겨레에 많은 이익을 끼쳐주신 성인과 같은 그런 임금님이었습니다. 응당 우리 민족은 존경하고 숭배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충무공 같은 장군은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우리나라에 침범해 들어와 가지고 선조 대왕이 의주까지 파천을 가시고 삼천리강토는 그야말로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피바다를 이루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서 나라에 운명과 민족에 운명이 눈앞에 멸망 지경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서 왜군의 함대를 함몰을 시키고 막음으로 해서 그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왜군의 모든 공급로를 차단을 하고, 육지에서는 정기룡 장군과 같은 위대한 장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뇌묵대사, 기허대사와 같은 스님으로서 위대한 정신을 발휘해 가지고, 육지에서 싸워서 막고 이래가지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왜군의 무서운 침략으로부터 막아냈습니다.

응당 우리 민족으로서는 숭배하고 존경하고 받들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 생각합니다.

 

근자에 1945년 을유년에 해방이 되어 가지고, 우리는 그 해방의 기쁨으로 해서 너무 좋아하고 날뛰기만 했지, 어떻게 해서 이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은 이 기쁨을 돌이켜서 차분한 마음으로 새 나라를 가꾸어 나가야 하느냐?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세계 양대 사상의 조류에 휩쓸려 가지고 양대, 좌익 우익이 갈라져 가지고 서로 싸우고 하는 바람에 민족끼리 분열이 생겨 가지고, 결국은 본의 아닌 삼팔선(38線)을 가로 그어 가지고 나라에 재건(再建)하는 힘을 쓰지 못한 채 거듭 악순환이 계속되다가 겨우 대한민국을 남반부만 독립을 하고.

 

그래가지고도 계속 국론이 통일이 되지 못한 채 6·25 동란이 일어나고, 6·25 동란이 수습되었지마는 계속 혼란이 계속되어 오던 차에 학생 의거로 말미암아서 이박사가 하와이로 망명을 가고 그래 가지고 제2공화국이 섰지마는,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 나갈 만한 그러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데모를 하고 온 민족이 학생은 책을 팽개치고 공장의 직공들은 일자리를 떠나고 심지어 학교 선생님까지 전부 다 동원해 가지고 거리에서 깃발을 날리면서 데모를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일부에서는 지성인들까지도 남북 대화를 부르짖고 이래 가지고 도대체 나라가 꼴이 아니고 그 틈을 타서 완전히 공산의 마수에 삼켜지기 그러한 직전에 이르렀을 때에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군사 혁명치고는 정말 사람 하나 목숨 다친 일이 없이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성을 했던 것입니다.

서양에 유명한 사람들이 한국의 5·16 혁명을 평하기를, '극약의 적당량'이라고 이렇게 평한 바도 있습니다마는, 하여간 5·16 혁명을 계기로 해서 초기에는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고, 많은 비판도 받았지마는 차츰차츰 우리 겨레들이 마음을 합하고 지도자의 역량이 훌륭한 탓으로 해서 각기 자기의 일자리를 찾고, 나라를 위하고 겨레를 위하고 그리고 각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의 위치에서 노력을 하고 그것이 한 뭉텅이가 되어 가지고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선진 대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그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그만큼 우리 민족의 혈맥 속에 위대한 피가 잠재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마는 그 잠재해 있는 우리 민족의 그 위대한 정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준 그러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 데에도 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응당 그러한 지도자를 우리는 숭배하고 존경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5천년 이래로, 단군(檀君) 성군께서 우리나라를 최초로 세우신 이래로 많은 위대한 임금님과 위대한 장군과 위대한 학자들을 우리는 위로 모시고 받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분들은 우리 민족에 국한(局限)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훌륭한 분들입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한 민족에게만 존경을 받을 만한 그러한 지도자가 아니신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이 싸움을 잘하거나, 정치를 잘하시거나, 무슨 특수한 민족에게 그러한 혜택을 주셨거나, 그러한 것도 아니시면서 무엇 때문에 온 세계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허공계에 모든 중생들의, 그리고 영원을 통해서 영원한 무량겁을 통해서 존경받을 수밖에는 없고 숭배할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성인(聖人)이시냐?

우리는 그 원인을 분명히 알고서 존경을 해야 되겠습니다.

 

겨우 선영(先塋)의 제사를 지내면서 ‘좋은 곳으로 극락세계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 아들 학교에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남편이 사업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이러한 정도로 와서 복을 빌기 위한 그러한 상대로서의 존경에 그친다면은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신 부처님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고, 저 머리카락 끄터리나 새끼발구락 끄터리 하나가 잘 생겼으니까 거기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그러한 정도에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온 세계에, 온 법계에 모든 중생이 다 한마음으로 존경할 수가 있다. 그리고 백 년이나 이백 년 일시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그런 분이 아니라, 영원토록 존경을 하고도 모자랄 만큼 위대한 분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우리 중생들은 과거 무량겁 이래로 오늘날까지, 오늘로부터서 영원한 미래까지 생사(生死)의 괴로움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요,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그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시고 열어 주신데에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만 주어서 요기(療飢)를 시켜주어도 그 사람은 대단히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일생 동안에 그 고마움을 간직할 경우가 많습니다. 옷 한 벌, 돈 몇만 원에도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물며 이 목숨, 꼭 죽게 될 수밖에는 없을 때 나를 구제해 준 분, 그때 병으로 도저히 병을 치료할 수 없을 때 그 병을 낫어 준 의원이나, 나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그런 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일시적으로 잠깐 갈증을 면하게 해 준다든지, 배고픔을 면하게 해 준다든지 또는 몸에 아픔을 면해 준다든지 그러한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고해(苦海) 속에서 빠져서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우리들을, 무량 중생을 그 괴로움으로부터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데 대해서 우리는 이 목숨을 몇억만 번을 바꾸어 나면서 그 은혜에 감사드린다 해도 그 천만 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것을 ‘중생을 제도(濟度)해 주셨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제도, 제도’하지마는 부처님이 마치 큰물이 져서 떠내려가는 사람을 이렇게 건져 주듯이, 그렇게 건져 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그러한 법력(法力)과 도력(道力)이 있으시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셔서 마음대로 고해에 빠진 중생을 다 건져 주실 수 있다면 지금 이 법계(法界)에 한 중생도 남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건져 주신 것이 아니라, 다못 부처님의 힘으로도 건져 주실 수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 부처님이 직접 건져 주실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우리 자신이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서 해결지어야만 내가 나 자신을 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가 나를 제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단,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만이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 선지식의 지도하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정진, 정진, 가행 · 용맹정진(加行·勇猛精進) 함으로써만이 내가 나를 괴로움으로부터서 해탈(解脫)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무량 중생을 제도하신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닦지 아니하고, 내가 선지식을 믿지 아니하고, 법문을 들으면서도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하고서 부처님께서 나를 제도해 주시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은 영원토록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참선 공부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17초)

 

 

 

 

(2/3)----------------

 

이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면은 모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모든 웬수가 은인(恩人)으로 변하고 다정한 벗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조그마한 일로 해서 두고두고 큰 웬수를 맺게 되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큰 웬수도 나의 잊지 못할 은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멀고 가까운 데에 웬수가 많은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방법으로 해서 웬수를 착한 벗을 만들고 은인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해서 가장 가까운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을 영원한 웬수로 만들고 있지 않겠습니까?

활구참선(活句參禪), 이 활구참선에 철저하게 참(參)함으로 해서 나를 죽일려고 하는 웬수도 착한 벗을 만들 수가 있다고 한다면은 이 법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끼쳐 주신 위대한 법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기원전 55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기원전 479년에 80세를 일기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열반(涅槃)을 보이셨습니다.

 

기원전 55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시고, 35세에 대도(大道)를 깨달으셨습니다. 일설에는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 동안 고행 수도하신 끝에 30세에 대도를 성취했다고 그렇게 전해지기도 합니다마는, 대도를 성취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3년 뒤에 고향에 돌아가셔서 아버님을 가서 뵈옵고, 아버님과 계모이신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야수다라' 아내와 '라후라'라고 하는 아드님 그리고 궁중의 모든 일가친척을 두루 다 만나셨습니다.

 

그리시고서 법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생 동안을 이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는 위대한 위없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그 어머니이신 마야 부인(摩耶夫人)께서—그때 인도의 풍속은 여인이 포태를 해 가지고 해산기가 되면은 친정으로 돌아가서 해산(解産)을 하는 풍속이 있었으므로—친정으로 가는 도중에 룸비니(Lumbinī) 동산이라고 하는 동산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실 때에 부처님께서는 탄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친정으로 가시는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2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일생 동안을 길에서 사시면서 모든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시고, 마지막에 열반하실 때에도 길에서—'구시나가라(kuśinagara 拘尸那伽羅)'라고 하는 나라에 사라쌍수(沙羅雙樹) 간에서, 결국 거기도 길이였습니다. 길에서 최후의 임종을 맞으셨던 것입니다.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사시다가, 길에서 사시면서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마지막에 길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해 가지고, 그 일생 동안 설하신 법문을 결집(結集)을 해서 목판에다 조각한 그 경판(經板)이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경전들은 무엇 때문에—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간단하건마는, 간단하게 그 참선법만을 말씀을 하시지 왜 그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법을 설하셨느냐?

그것은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각도에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말씀을 49년 동안에 걸쳐서 설하시다 보니 그렇게 방대한 법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스승으로부터 지도 받아서 도를 닦고, 또 자신이 체험을 통해서 또 다음 제자에게 전수하고, 이렇게 해서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수행하는 방법이 세련(洗練)되고 다듬어져서, 오늘날에는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읽지 않고서도 바른 스승만 만나서 직접적으로 지도만 받을 수 있다면, 간단한 방법으로 나 자신을 깨달아서 고해(苦海)로부터 해탈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고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는 역량(力量)까지도 갖출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도저히,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일생을 도만 닦은 스님네들도 어렵거든 하물며 세속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도를 닦아서 목적을 달성한다고 하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다. 그러니 옴마니반메홈 이나 아미타불, 그런 염불(念佛) · 주력(呪力)을 함으로 해서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아미타불의 48대원(四十八大願)에 의해서 숨지자마자 극락세계 가는 그러한 우리에게 알맞은 길이 있다’고,

이렇게 믿고 그렇게 주장하는 그러한 종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하나의 방편(方便)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구경법(究竟法)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지마는, 방편은 일시적으로 이용할지언정 그 방편을 어떠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버릴 줄 알고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을 방편에만 걸려 가지고 몸부림친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지혜 있는 수행인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에,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달음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에 착(着)해서는 아니되거든, 하물며 깨달음에 이르는 중간에 어떠한 방편 또는 중간의 어떤 과정에서 딱! 얽매이고 착(着)해 가지고 나아갈 줄을 모른다면은 그것은 안타깝고 가련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믿는 마음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때까지 그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 하지마는, 닦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나날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해서 답보(踏步)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매일 한결같이 공부를 해 나가되 언제나 새롭게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선을 경전에 있는 말씀이나 또는 어떠한 스님네한테 들은 법문이나 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교리적인 철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계속 추구하고, 따지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해서 차츰차츰 파고들어 가고 알아들어 가고 이렇게 공부하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참선은 다른 학문과 달라서—다른 모든 학문은 점진적으로 차츰차츰 쌓아올려 가야 하고, 차츰차츰 알아들어 가야 하고, 점점 깊이 파고들어 가야 되지마는 이 참선은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부터 다못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계속 정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스님 앞에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라고 하는 스님이 젊었을 때 육조 스님 앞에 떠억 나왔습니다.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육조 스님이 물으시기를,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옛날부터 소소영령(昭昭靈靈)해서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라,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일찍이 멸한 때도 없다. 밝기는 태양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어. 항상 일상생활 속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에 그놈이 있건마는 찾아봤자 도저히 잡히지를 않는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하택신회 선사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요, 하택신회의 본마음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는 나중에 공부를 열심히 해봤자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겠구나" 지해종사란 말은 알음알이로 따져서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 밖에는 안되겠다 이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남악회양 선사는 그 한 말씀, 육조 스님의 물음에 꽉! 막혀 가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길로 물러나와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꽉 막혀 가지고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옷을 입으나, 일을 하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섯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마음, ‘무슨 물건인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꽉 막혀서 알 수가 없고, 이렇게 해서 8년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의심이 깊고 간절해서 꽉! 막힐수록에 터질 때는 무섭게 터지는 것입니다.

의심이 시원치 않고, 꽉 막히지 못하고 자꾸 이리저리 따지고, 알음알이가 거기에 계제가 되고 이러한 식으로 참선 공부를 해봤자 깨달음에 이르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해도 지극히 미약한 그런 깨달음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오(大悟), 확철대오를 얻을려면은 의심이 깊고 · 간절하고 · 커야 하는 것입니다.

「깊고 · 간절하고 · 커야 한다」고 하는 것은 꽉!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이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아래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참선 공부를 잘할려면은 첫째, 몸을 바르게 골라야 합니다. 바르게 가지고, 바르게 단속을 해야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쉬어야 합니다. 호흡을 바로 하지 못하면 참선 공부의 중간에 큰 지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셋째에 가서는, 우리의 생각을 잘 단속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첫째, 몸이 있어야겠고, 몸이 있는 한에는 숨을 쉬어야 하고, 숨을 쉬고 있는 한에는 생각을 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긴(緊)히 몸을 가질 바에는 바르게 가져야 되겠고, 긴히 호흡을 할 바에는 바르게 호흡을 해야 하고, 긴히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고는 안될 바에는 바른 생각을 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바르게 몸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허리를 쭉 펴고, 코끝이 배꼽 밑에 단전(丹田)과 수직으로 놓이게 하고, 두 귀가 두 어깨에 수직으로 놓이도록. 그렇게 몸을 가지면은 그 몸이 전후좌우로 기울어짐이 없이 단정하게 앉아지는 것입니다.

단정하게 앉되, 어깨와 목과 몸에 긴장은 완전히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긴장은 다 풀면서도 몸은 단정하게 가지고.

 

이는 어금니부터 지그시 물고, 입은 '한 일(一)'자로 딱 다물고, 눈은 자기 앉은자리로부터 3미터 지점에다 떨구고. 이렇게 앉으면은 몸이 단정하게 몸을 갖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이냐?』

우리 보통 사람들은 가슴으로 호흡을 하고,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숨이 짧고 빠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호흡은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까지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들어마셔. 쑥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5~6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이렇게 내쉬도록.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입니다.

 

복식 심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가벼워지고, 오장육부가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깨끗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 생각을, 바른 생각을 단속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20분18초~41분33초)

 

 

 

 

(3/3)----------------

 

『바른 생각이라는 게 무엇이냐?』

 

아까 육조 스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물으신 문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우리는 '나'라고 하면은 이 몸뚱이 육체가 '나'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 육체는 ‘참나’가 아닙니다. ‘참나’는 이 몸뚱이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물질이라 자기 멋대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은 이 몸뚱이의 주인인, 주인공(主人公)의 명령에 따라서 이 몸뚱이는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놈이 들어서 이 몸뚱이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지마는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은 나의 주인인 것이고, 듣는 것도 그렇고, 웃고 울고 성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아무리 잡을라야 잡히지는 않지마는 그것이 나의 주인이지, 이 몸뚱이는 그 주인이 살고 있는 임시로 살고 있는 집에 지나지 못하고, 임시로 입고 있는 옷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집이나 옷은 얼마 동안 살다가 낡고 못 쓰게 되면은 버리고 또 새집으로 이사 가거나 새집을 짓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옷이 낡고 더러워지면 그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몸뚱이도 어떠한 단계에까지는 입고 있지마는 단계가 지나면은 이 몸뚱이는 언젠가는 기어코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입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그 주인공이 무엇인가?

그놈을 깨달아 버려야 영원한 생사윤회(生死輪廻)로부터 해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몸뚱이가 자기인 줄 알고, 이놈에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향수를 발라서 이 몸뚱이는 이쁘게 이쁘게 단속하고 가꿀 줄 알면서,

이 몸뚱이 안에 있는 ‘참나’, 나의 주인공은 밥 한 숟갈 먹일 줄도 모르고, 약 한 모금 먹일 줄도 모르고, 그놈이 어디가 있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채 일생을 살고 또 다음 생에 또 그렇게 해서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 깨달음, 깨닫는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원을 두고 생사(生死)의 그 괴로운 윤회(輪廻)를 계속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스승을 만나서 그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고 위대한 그러한 정법(正法)을 금생에 만났습니다.

 

만나 가지고서도 열심히 닦지 않는다면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열심히 닦느냐, 닦지 않느냐’에 우리는 문제가 거기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가만히 있어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도 무엇인가 과거 일이 생각이 나고, 괴로운 일이 생각이 나고, 슬픈 일이 생각이 나고, 기뻤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그것이 바로 우리를 괴롭히는 고민이요, 망상이요 번뇌입니다마는 그놈 일어나는 그...(녹음 끊김)

 

버스에서나, 절에서나 언제라도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단 일분일초도 틈이 없이 우리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장소와 때가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한번 버리면 다시 또 사람 몸을 받을지, 지옥에 갈지, 축생이 될지, 천당에 갈지, 아귀(餓鬼)가 될지, 수라(修羅)가 될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몸 있을 때 열심히 참선을 해놔야 내생에 다시 사람 몸을 받는 것이고, 다행히 금생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자유자재(自由自在)할 수 있다면은 그때는 중생 교화하기 위해서 지옥에를 가건, 축생이 되건, 다시 사람이 되건 그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이고.

 

문제는 어쨌든지 이 몸은 시시때때로 늙어 가고 있고, 시시때때로 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낡아지고, 이틀 밤 자고 나면 낡아지고.

철없는 어린 아이들은 설이 되면 좋다고 춤을 추고 야단이지마는 설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사형 무대 앞에 한 해 성큼 다가선 것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몸이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걸음걸음이 시시때때로 수명이 단축이 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단 1초도, 단 한 생각도 범연(泛然)히 그럭저럭 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1초 1초가 쌓이고 쌓여서 1년 10년이 되고, 금방 이 몸을 버려야만 할 죽음의 문이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상(無常)함을—이 몸뚱이가 정말 허망하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정말 허망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도를 닦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 있다, 모래가 있다. 이 일만 끝나고 다음에 하지. 금년, 이삼 년만 더 기다리고 삼사 년 뒤에 하리라’ 이러한 생각은 가장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참으로 발심(發心)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건 그것은 가릴 것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때 그때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나가게 되면은 이것이 바로 무량겁 생사를 끊어 나가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요,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나간 사람에게는 어떠한 어려운 일도 그 사람 앞에는 다 풀려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해서 지혜로운 생각은 간 곳 없고, 계속 자기를 해롭게 하고, 괴롭게 하고, 일을 그르치게 하는 생각만이 계속 퍼일어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이뭣고?’ 이렇게 한번 들 때에 그 사람에게는 온갖 쓸데없는 생각이 거기서 끊어지는 것이며, 당황하는 생각이 거기에서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거기에서는 일어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됨으로 해서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진 데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지혜로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생각으로 어려운 일을 처리해야 그 일이 풀려나가는 것이지 당황한 마음, 어리석은 마음, 삿된 마음으로 어려운 일이 풀려날 리가 있겠습니까?

점점 복잡하게 만들 뿐이고, 그럴수록에 자기만 점점 괴로워지고 점점 주변을 불행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찾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한량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는 녹아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죄가 녹아질 때에 불보살(佛菩薩)이 그 사람을 돌봐 주시지 아니할 리가 없습니다. 일체 선신(善神)이 계시다면은 그 사람을 옹호(擁護)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삿된 마음을 일으킬 때에 잡신(雜神)과 악귀(惡鬼)들이 그 사람을 맴돌면서 따라다니는 것이고, 맑고 깨끗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가졌을 때에 불보살과 일체 선신들은 그 사람을 돌보아 주시고, 옹호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믿고,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어떠한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 괴로운 일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그러한 괴로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서 몸을 바로잡고 깊은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가다듬어 보십시오.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쌓아 나갈 때에 여러분들은 정말 여러분 자신이 어디로부터서 이러한 위대한 힘이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놀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팔만대장경을 한덩어리로 뭉쳐서 여러분 앞에, 낱낱이 여러분의 가슴속에다가 선사(膳賜)드리는 새해의 선물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오늘, 정사년 납월팔일(臘月八日)을 기념해서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제가 자신 있는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이 법을 진즉부터 알고 닦으신 분, 새로 오신 분, 누구를 막론하시고 희망과 자신과 용기를 가지시고 열심히 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우리의 목적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성취하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드리고 말씀을 맺습니다.(41분34초~53분56초)(끝)

 

 

 

 

[법문 내용]

부처님은 온 법계에 모든 중생이 다 한마음으로, 영원토록 존경을 하고도 모자랄 만큼 위대한 분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시고 열어 주신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제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만이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면은 모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모든 웬수가 은인(恩人)으로 변하고 다정한 벗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각도에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말씀을 49년 동안에 걸쳐서 설하시다 보니 그렇게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법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선은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부터 다못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계속 정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스님,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의 문답.

참선 공부는 바른 자세, 바른 호흡(단전호흡, 복식 심호흡), 바른 생각.

이 몸뚱이가 정말 허망하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정말 허망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도를 닦을 수 있다.
참으로 발심(發心)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건 그것은 가릴 것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때 그때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를 찾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한량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는 녹아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죄가 녹아질 때에 불보살(佛菩薩)이 그 사람을 돌봐 주시지 아니할 리가 없습니다. 일체 선신(善神)이 계시다면은 그 사람을 옹호(擁護)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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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0. 3. 2. 12:23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35분)

(1) 약 20분. (2) 약 15분.

(1)------------------


이쪽으로 둘르고 앉으십시오. 그리고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동지(冬至)를 다다라서 날씨가 몹시 추움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법회에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금방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잘 들었습니다.

법문(法門)이 고준(高峻)할 때에는 저 도솔천내원궁보다도 더 높은 법문이요. 법문이 깊을 때에는 태평양 바다보다도 더 깊으며, 쉬웁고 평탄할 때에는 대지와 같이 누구라도 삼척동자라도, 나무하는 무식한 일꾼도 들으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쉬웁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각기 자기 근기(根機) 따라서 잘 이해를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짓날로써 이 우주 삼라만상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음(陰)과 양(陽), 두 가지 기운으로써 운행이 되고 있는데 오늘은 양의 기운이 하나 생겨나는, 비로소 처음 생겨나는 날입니다.

오늘부터서 한 양(陽)이 생겨나고 또 내일은 조금 더 생겨나고 그래서 오늘은 해가 제일 일 년 중에 짧고 밤이 제일 긴 날입니다.


내일부터서는 1분이 더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고, 모레는 2분이 길어지고 해서 1년 중에서 오늘이 낮이 제일 짧고 밤이 긴 날이지마는,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서 낮이 1분 길어지고 밤은 1분 짧아지고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내년엔 춘분(春分)에 가서 낮과 밤이 같아집니다.

그래 가지고 내년 여름 하지(夏至)에 가서는 오늘의 정반대로 낮이 제일 길고 밤이 제일 짧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길어져 가지고 더이상 길어지지 못하면 그다음 날부터서 또 짧아지기 시작하고, 짧아지다 짧아지다 더이상 짧아지지 못할 때에는, 못한 날이 되면은 그 이튿날부터서 또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초생달이 차츰차츰 하루하루 지내감에 따라서 커지다가 보름달이 되면 최고로 둥글어집니다. 열엿새 날부터서는 차츰차츰 작아지기 시작해 가지고 그믐이 돌아오면 깜깜해질 것입니다.


해와 달, 이러한 날과 밤과 낮뿐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 명예와 권리 재산 모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는 부자가 되어 가지고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고,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고 싶지마는, 자기의 분(分)이 있어서 분만큼 부자가 되면은 더이상 부자가 될 수 없을 때부터서 차츰차츰 얼마동안 유지해 나가다가 차츰차츰 줄어져서 또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다 가난해지다 더이상 가난해지지 못하면은 그다음부터서는 또 차츰차츰 부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현들이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자만하지 말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자기도 물론 필요한 만큼 사용해야 되겠지마는, 그 남은 재산을 이웃 · 사회 · 국가 · 인류를 위해서 보람 있게 쓸 줄 알아야 그 사람이 우주 자연으로부터 자기에게 보관한 임시로 맡긴 재산을 가장 보람 있게 훌륭하게 잘 보관을 하면서 유용하게 쓰다 가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좋은 재산을 맡겨도 그것을 한푼 올바르게 쓰지 못하고 자기 혼자 그놈을 꽉! 오그라 쥐고서 벌벌 떨다가 한푼도 쓰지 못한 채 애착만 꽉! 돈에 애착만 쏟고 있다가 죽어갈 때는 눈을 감고 죽지 못하고.

설사 자손에게 그 재산을 물려준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그 재산을 수용할 만한 복(福)이 없으면은 그 재산으로 인해서 큰 불행으로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가난해지다가 가난해지다가 더이상 가난해질 수 없으면 부자 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기 싫어도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바른길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면은 차츰차츰 부자가 되는 것이니 만큼 가난하다고 해서 신세와 팔자를 한탄하고 저주하고 한숨 속에서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자로서 죄지은 사람이 더 많지, 가난한 사람이 죄지은 경우는 적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루하루 벌어먹기 위해서 땀 흘려 일하는 것뿐이고, 부자는 그 많은 돈을 억지로 모으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될 그러한 일을 범하게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니 만큼,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해가 낮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이러한 우주 일월성신의 기상 변화, 이러한 것을 보고서도 항시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살아나갈 희망과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것을 이러한 기회에 각오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법(正法)을 믿고 열심히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參禪)을 하는 것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올바르게 그리고 희망과 행복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는 동지에 대한 말씀과 또 참선, 참선법에 대한 말씀 그리고 불공(佛供)을 드리는 법에 관한 말씀, 그리고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을 때에 법담(法談)하신 내용, 그리고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라야만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하는 것이지 간혜(乾慧), 영리해서 이리저리 발라 맞추고 따져서 말 잘하고 그러한 재주 기운 가지고 생사는 면(免)할 수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참선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탁자(卓子) 위에 모셔 놓은 부처님, 또는 삼천년 전에 정반왕에 탄생하셨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신 싯다르타(siddhartha), 석가모니 그 부처님만이 부처님인 줄 알고.

바로 지금 산승(山僧)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은 지금 산승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는 '참 부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그놈을 항시 놓치지 말고 그놈에서 자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있길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입을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 없는 모든 일은 다 할 수가 있어도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의 몸으로부터서 부처님을 밖으로 내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만 번 뛰었다 엎쳤다 온갖 짓을 다하고 한다 하더라도 나로부터서 나의 부처님을 밖으로 내몰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부처님을 안 볼려고 하고 내몰려고 할수록 나의 부처님은 더욱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나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너무 분명하고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가 아닌 줄 알고 그놈을 내놓고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의 자성(自性)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뜰 앞에 있는 나무, 누가 못 보는 것입니까?

누구라도 장님이 아닌 도막에는 문을 열면은 뜰 앞에 있는, 뜰에 있는 나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무만 보고, 나무(나)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평범한 것은 우리는 그것이 위대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국왕의 은혜, 국가 민족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다 우리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갚을려고 해도 갚기가 어렵지마는 정말 고마운 것은 공기(空氣)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무의식중(無意識中)에도 언제라도 우리는 제절로 이 공기가 우리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탄광, 장성에서 탄광에 화재가 나가지고 이번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마는, 그러한 일을 당해 봐야 공기가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없을 때에는 공기가 얼마나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있는가를 아무도 느끼지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해?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이 무엇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그동안에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해서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지식, 상식, 교리 그러한 것을 고대로 놔버리고 다못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 무엇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각기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가 같은 분도 있고 다른 분도 계시겠지마는, 다른 분이야 무슨 화두를 받았건 말았건 자기가 받은 그 화두 그것을 이론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저 바보처럼,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길이 빠른 것이고,

영리하고 똑똑해서 자꾸 이리저리 그것을 사량복탁(思量卜度), 중생심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파고들고 비교하고 이러는 동안에 점점 시간만 굴러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나쁜 버릇만 자꾸 생겨 가지고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동이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가 끌고 가서 대주면 그저 소는 꿀꺽꿀꺽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듯이 선지식이 '이렇게 하라'하면은 그렇게만 바보처럼 고지식하게 계속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한결같이 그렇게 들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빨리 그리고 크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그 말이 아무래도 곧이가 들리지 않아서 이 책도 떠들어 보고 저 책도 떠들어 보고, 이리도 따져 보고 저리도 따져 보고 갈팡질팡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뭐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10년 20년 세월이 속절없이 지내가고 남는 것은 지해(知解), 사량심(思量心)만 더해 가지고 생사를 면하기는 썩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지총명(世智總眀)은 득도(得道)하기가 어렵다'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말한 영리하고 지능지수가 높고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은 이 정법,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하기가 썩 어렵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선지식들도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서 불보살(佛菩薩)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해도 깨닫자 생각지도 아니하고, 나찰귀신이 와서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 콱! 맥힌 아주 쑥맥 바보가 된다면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너에게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고 인가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도 계시는 것입니다.(처음~20분28초)




(2)------------------


활구참선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내고 슬퍼하고 걸어 다니고 하는 이놈. 분명히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건마는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찾아보면 간 곳이 없어. 「이놈이 대관절 무엇인고?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걸어갈 때에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산을 보아도 「이뭣고?」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다못 그렇게 일념 일념을 단속해 나가.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결국은 「이뭣고?」를 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시 눈앞에 나타나게.

이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못 가서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스승 없이 독학할 수도 있고 자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여러 가지 경전을 사다 놓고, 조사어록을 사다 놓고, 참선에 관한 일본 서적 · 한국 서적 · 중국 서적을 사다 놓고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 가면서 혼자 자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명 만 명 속에도 제대로 공부가 되질 못하는 것이고, 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몰라도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음왕불은 부처님 가운데에 최초의 부처님이십니다.

땅속에서 땅을 파 가지고 금을 찾는다든지, 바닷속을 뒤져 가지고 보석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혹 눈에 띄기도 하겠지마는,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그렇게 하면은 곧 잘될 것 같지마는 얼마 해 가다 보면은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마음의 눈 박을 곳을 얻지를 못한 채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몸이 뒤틀리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영 이것이 공부가 되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못 무조건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 해 나감으로 해서 언젠가는 차츰차츰 번뇌와 망상은 이 알 수 없는 의심 앞에 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줄어지면서 화두 들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번뇌심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심한 분은 '아휴, 내가 참선은 내가 인연이 없나 보다' '나는 나이가 먹고, 여자고, 말세중생이라 참선은 안되나 보다' 이래 해 가지고 다시 염불을 한다든지.

'내가 업장(業障)이 많으니까 기도를 해 갖고 업장을 소멸한 다음에 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선방에서 몇 철씩 하다가도 기도하러 돌아다니고 이런 분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동지를 기해서 다른 절에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낱낱이 모다 독불공(獨佛供)을 하고 목탁을  치고 계속 이 불공을 하고 축원(祝願)을 하느라고 야단들인데,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여태까지 듣고 또 참선에 관한 말씀을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말씀을 듣고 계십니다.


참선 공부 열심히 함으로써만이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윤회로, 고해(苦海) 속에서 헤매고 내려오는 그것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지, 독불공해서 축원을 아무리 오래오래 한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서는 우리 인간에 조그마한 소원은 성취할는지 모르지마는 영원한 생사해탈은 기약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회가 법문이 끝나자마자 우리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불공을 올리고 또 축원을 합니다. 낱낱이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안 하고, '법보제자(法寶齋者) 각각등보체(各各等保體)' 이러기만 해도 부처님은 다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학교 학생이 수천 명 되는데, 그 많은 사람을 낱낱이 이름을 부를 때에 혹 이름을 잘못 부를 수도 있고 혹 빠뜨릴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상업고등학교 학생' 그러면 눈먼 학생도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보제자 각각등보체'할 때에는 안심하고 마음으로 축원을 하세요. 이것이 우리 법보선원에 불공법입니다.

법문을 잘 듣고서 여러분의 정성스럽게 이 동지에 참석하신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서 그리고서 오늘 법회를 마치는 것입니다.


'오늘 불공 동참(同參)을 했으니까 앞으로 이 일이 잘 성취되리라' 이렇게 생각하시지 말고, '이미 참석하려고 하는 마음을 냈을 때, 또 이 자리에 앉았을 때 성취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성취했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취하기를 바라지 말고, '이미 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성공할, 성취되는 잘되는 것입니다.


'이랬으니까 장차 되리라' 되기를 바라는 동안에는 '혹 안 될지도 모르겠다'하는 생각이 거기에 붙어 있기 때문에 '될까 말까? 될까 말까?'

다리를,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때 '떨어지면 어쩔꼬? 떨어지면 어쩔꼬?' 그러다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 있게 쑤욱 걸어가면은 무난히 건너갈 것도, 가다가 중간쯤 가다가 '떨어지면 어쩔꼬? 떨어지면 어쩔고?'하면서 계곡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한다'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길어지면 팥죽이 퍼지니까 말씀을 그만하고,

오늘 이 동참법회에 참석하신 사부대중은 지난 과거로부터 일 년 동안 모든 업장이 다 소멸이 되셨고, 앞으로 새해를 맞이해서 일 년 동안 몸 건강하시고 정법문중(正法門中)에 신심이 더욱 돈독해서 도업(道業)이 날로 진취가 있으실 것을 빌고, 집안에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차츰차츰 다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빌면서 말씀을 마칩니다.(20분32초~35분6초)(끝)





[법문 내용]


참선도 그렇고, 또한 깨달음도 그렇고,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 /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 /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다 /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활구참선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해가 낮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이러한 우주 일월성신의 기상 변화, 이러한 것을 보고서도 항시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살아나갈 희망과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것을 이러한 기회에 각오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법(正法)을 믿고 열심히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參禪)을 하는 것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올바르게 그리고 희망과 행복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참선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해?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이 무엇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그동안에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해서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지식, 상식, 교리 그러한 것을 고대로 놔버리고 다못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 무엇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각기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가 같은 분도 있고 다른 분도 계시겠지마는, 다른 분이야 무슨 화두를 받았건 말았건 자기가 받은 그 화두 그것을 이론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저 바보처럼,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길이 빠른 것이고,

영리하고 똑똑해서 자꾸 이리저리 그것을 사량복탁(思量卜度), 중생심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파고들고 비교하고 이러는 동안에 점점 시간만 굴러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나쁜 버릇만 자꾸 생겨 가지고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속에서 땅을 파 가지고 금을 찾는다든지, 바닷속을 뒤져 가지고 보석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혹 눈에 띄기도 하겠지마는,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오늘 불공 동참(同參)을 했으니까 앞으로 이 일이 잘 성취되리라' 이렇게 생각하시지 말고, '이미 참석하려고 하는 마음을 냈을 때, 또 이 자리에 앉았을 때 성취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성취했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취하기를 바라지 말고, '이미 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성공할, 성취되는 잘되는 것입니다.


'이랬으니까 장차 되리라' 되기를 바라는 동안에는 '혹 안 될지도 모르겠다'하는 생각이 거기에 붙어 있기 때문에 '될까 말까? 될까 말까?'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때 '떨어지면 어쩔꼬? 떨어지면 어쩔꼬?' 그러다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 있게 쑤욱 걸어가면은 무난히 건너갈 것도, 가다가 중간쯤 가다가 '떨어지면 어쩔꼬? 떨어지면 어쩔고?'하면서 계곡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한다'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