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56)—1985(을축)년 하안거 해제 법어(1985.07.17.음)(40분)
(1) 약 22분.
(2) 약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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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첫 구절 녹음이 없음)
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요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리계산수지고(千里溪山隨指顧)헌디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요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이다
사람은 배 가운데 타고 있는데, 그 배는 다시 물속에 있다. 배를 띄워서 가는 곳마다 물이 없는 곳이 없어. 물이 있는 곳에는 배가 어디라도 다 갈 수가 있드라 그 말이여.
우리의 자성(自性)은 우리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있는데, 그 몸뚱이는 삼라만상 두두물물 우주법계 속에 이 몸뚱이가 담겨져 있는데, 그 몸뚱이 속에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 한 물건이 그 속에 들었드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눈으로 볼 수가 없지만, 잠시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 망상이 어디서 일어나냐 하면은 그 마음자리로부터서 온갖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다 거기서 일어나고, 슬픔도 거기서 일어나고, 기쁨도 거기서 일어나고, 희로애락이, 천 사상(千思想) 만 사량(萬思量)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그 마음자리이다.
그 마음자리는 볼 수가 없지마는, 그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천 가지 만 가지 번뇌 망상 온갖 생각을 보면은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그 말이여.
물 있는 데 배가 있고, 배가 있으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야 그 배를 동서남북 자유대로 그 배를 운전을 하는 거와 같다.
배를 찾는데 산에 가서 찾어봐야 배가 없을 것이고, 사공을 찾는데 배 없는 데 가서 찾을 수가 없어. 사공을 찾고자 하면은 배 있는 데에 배를 찾어야 하고, 배를 찾을라면은 물로 가야 하는 거여.
마음자리를 찾을려면은 우리의 번뇌 망상을 여의고 그 마음자리를 찾아서는 영겁을 두고 찾아도 찾을 길이 없는 거여.
천리계산수지고(千里溪山隨指顧)하니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이다.
천리 시내와 산, 천리강산, 천리강산에 손가락 가리키는 곳을 따라서 보아라 그 말이여. 한 내, 시내 한 강, 한 내에 바람이 불고 그 바람부는 물결 위에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거기에 찬란히 비추어 부서지고 있어. 하늘에 달 하나가 떠 있지마는 어디고 물 있는 데를 보면은 거기에는 달빛이 번쩍거리고 있는 것이여.
이것은 자연에다가 붙여서, 자연의 경계에다가 붙여서 우리의 면목(面目)을 드러내는 게송(偈頌)입니다.
오늘 을축년(乙丑年) 7월 17일 세등선원 하안거 해제(解制)일을 맞이해서 사부대중이 모여서 그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해제날에는 부처님 당시부터 멀고 가까운 모든 대중들, 공부하던 대중들이 한데 모여서 마지막 그 해산식(解散式)을 거행하는 요샛말로 해산하는, 한데 모여서 공부를 하다가 석 달 3개월 만기(滿期)가 되니까 마지막 날을 맞이해서 그동안에 공부한 것을 부처님께 여쭙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또 서로 도반(道伴)끼리도 잘못된 점을 지적을 하고 지적을 받고, 그게 다 자자회(自恣會)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공부를 해 나가기 위해서, 우기(雨期)에 비 오는 계절에 나다니지를 못하니까 한데 모여서 공부를 하다가 인제 이 해제날을 맞이해서 동서 사방으로 인연 따라서 선지식을 찾고, 도반을 찾고, 스승을 찾아서, 다시 또 헤어지는 날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요샛말로 해산식이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부득이해서 그 더위에 나댕길 수가 없으니까 석 달을 모여서 왕래와 출입을 금하고 엄격한 법도하에서 열심히 정진을 하고, 해제를 맞이해서 걸망을 지고 또 인연 따라서 떠나게 되는데, 비록 떠난다 하드라도 헤어진다 하드라도 우리의 그 정진은 석 달 동안 법도하에 정진한 그 마음! 그 마음이 흩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거나, 산을 가거나, 들녘를 가거나 어디를 가든지 그 결제 중에 엄격한 법도하에 정진할 때 그 마음을 더욱 단속을 해서, 정중(靜中)에 공부를 하는 것은 동중(動中)에 잘하기 위해서 특별 수련을 쌓는 것이니까, 인자 앞으로 동중에서 자기의 공부를 다져 나가는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는 공부가 잘되고, 나가서 여행을 하거나 행동하는 가운데에서는 화두(話頭)가 달아나 버리고 공부가 안 된다면 그 공부는 발심(發心)을 했다 할 수도 없고, 공부에 힘을 얻었다 할 수도 없고, 그건 반쪼가리 죽은 공부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공부가 옳게 되었다면 움직이는 가운데에, 생활하는 가운데에, 시끄럽고 복잡한 가운데에서도 화두가 순일하게 되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혼침(昏沈)이 오고 또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이 혼침과 망상 때문에 공부를 잘 못한다. 그놈만 없으면 공부가 참 잘될 것 같고 마음껏 하겠는데, 번뇌 망상이 퍼일어나고 화두가 잘 잡히지 아니해서 공부를 못하고 또 조금 조용할 만하면 졸음이 오고 그래서 안 된다’ 그러는데.
그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번뇌 망상이, 아까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번뇌 망상 일어나는 곳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일어남으로써 오히려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본래 내가 이 부처거든’ 중생이 참선을 해 갖고 부처가 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부처였던 것이여.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어.
자꾸 부처를 찾으면은 물로 물을 씻을려고 하는 거와 같고, 머리 위에다가, 머리 두고 두상(頭上) 하나를 더 얹어놓은 거와 같다. 물기를 닦을려면 마른 수건으로 마른 걸레로 닦어야 물기가 닦어지지, 물로는 아무리 물을 닦아도 그 습기는 없어지지 아니하는 거여. 그와 같이 본래 내가 부처인데 다시 또 거기서 부처를 찾으면은 있는 부처도 달아나 버리게 된 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우리가 ‘내가 본래부터 내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어야 돼. 그러기 때문에 그 본래 내가 부처라고 한 것을 철저히 믿는 사람은 부처를 찾는 법이 없어.
그러면 번뇌(煩惱)는 어떠냐? 번뇌가 바로 이 보리(菩提)거든. 번뇌가 바로 이 보리기 때문에 그 번뇌를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번뇌가 바로 우리 깨달음인데 그 번뇌를 버릴려고 하면은 깨달음이 달아나 버린 거 아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 곡식이 나오는데, 곡식이 바로 돈이여. 곡식을 팔면 바로 그것이 돈이고, 곡식을 살려면 돈 주고 사야 하고, 돈을 만들라면 곡식이 있어야 돈을 만질 수가 있는 것인데, ‘나는 돈이 필요하지 곡식은 소용없다’고 곡식을 버리면은 돈이 어디서 나올 것이냐. 곡식을 잘 애끼고 잘 보관을 해야 언제라도 그것이 바로 돈이거든.
우리의 번뇌 망상 그놈을 버릴려고 애를 쓰고, 그놈이 일어나면은 신경질을 내고 ‘아, 이 번뇌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사람 사람이 모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번뇌를 버릴려고 하면은 안 되는 거여. 버릴려고 하면은 그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바로 새로운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도 찾을려고 하지 말고, 번뇌도 버릴려고 하지 말아라. 그럴 줄 아는 사람은 공부를 비로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우리가 참선하고 도를 닦는 것은 부처를 찾기 위해서 하는데, ‘부처를 찾지 말아라’. 번뇌 때문에 우리는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온갖 죄를 짓게 되는데, ‘번뇌도 버리지 말아라’. 그러면 부처도 찾지 말고 번뇌도 버리지 아니하면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여. 아무것도 않고 우두커니 목석처럼, 그냥 마구잽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그러란 말인가? 그게 아녀.
다못 부처도 찾지 말고, 부처도 구할려고 하지 말고, 번뇌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서 오직 화두만을 들어라 그거거든. ‘이뭣고?~~~’ ‘이뭣고?~~~’
번뇌는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놔두고 화두만을 터억, 속이 상하드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을 억지로 참을라고 할 필요가 없어. ‘이뭣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슬픔을 억지고 참을라고 하지 말고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어도 그 근심 걱정을 떼어내 버릴라고 하지 말고 당장 바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야 번뇌도 다스려지고, 자기가 참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승속(僧俗)이 없어. 출가한 스님이나 세속에서 장사를 하고 살림을 하는 사람이나 누구라도 그렇게만 해 가면 목적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이 좋고 참선을 하고 싶어서 갈망을 하면서도 이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쓸 줄을 모르고, 바르게 공부를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애는 많이 쓰고도 힘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헌대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이라 유화유월유루대(有花有月有樓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이요, 한 거듭 산이 다하면, 한 산을 넘어가면 또 산이 있어.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이더라. 말을, 가슴속에 있는 말을 하고 나면 또 할 말이 있고, 그 말이 끝나면 또 할 말이 있고 해서 아무리 말을 해도 끝없이 산에 구름처럼 일어나고,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달빛처럼 한량이 없어. 한량이 없는 정이 넘쳐흐른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을 위해서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부처님이 다 말씀을 하셨냐 하면은 무량겁을 두고 이 도리를 설해도 다 설하지를 못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본래 진리이시고, 진리의 법신(法身)이시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화신(化身)으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앉은자리 더울 겨를이 없이 무량묘법을 설하셨습니다마는, 다 설하지를 못해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무량겁을 두고 법을 설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법신설법(法身說法)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화신으로 설하신 법은 80세를 일기로 마치셨지만, 화신이 열반에 드신 뒤에는 법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셔.
태양이 빛나는 것도 법신설법(法身說法)이요, 달이 밝은 것도 법신설법이요, 바람이 부는 소리도 법신설법이요, 춘하추동 사시절에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단풍이 지고, 눈이 내리는 것도 법신설법입니다.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한마디 말도 한 글자도 설할 것이 없지만, 입을 열기로 하면은 한도 끝도 없고, 바닷물을 먹을 삼아서 글씨를 쓰고, 이 허공을 종이로 삼아서 글씨를 쓴다 해도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처음~21분3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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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이여. 한 글자도 설할 것이 없고, 한마디도 설할 것이 없지마는 한량없는 법을 설하셨듯이, 한 물건도 우리는 없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여. 한 물건도 없지마는, 그 한 물건도 없는 도리를 깨달으면 무진장(無盡藏)이여. 한량없어. 쓰고 또 쓰고, 쓰고 또 남고, 남어서 또 쓰고.
참선하는 데 있어서는 경을 보지 아니하고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없지만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남기신 법어는 산더미 같이 많이 있습니다.
화두(話頭)를 들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완전히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들어갑니다. 무념무상에 들어가되 무념무상, 아무 생각도 없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도 완전히 없습니다. 찾어야 할 깨달러야 할 부처도 없고,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 오직 홀로 의단만이 독로해.
그러한 경지에서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완전히 그 공(空)한 경지에 빠지면 이것을 무기공(無記空)이라 해. 무기공에 빠지면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여.
그 한 물건도 없는 곳에서 오직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해. 이것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여.
어떻게 깨끗하고, 어떻게 편안하고 맑던지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맑고 깨끗한 경계가 흩어질까봐 화두도 들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다 그 말이여. 그렇지마는 화두를 들어야 하는 거여. 화두를 들어서 그 의단이 독로해야지 의심이 없으면은 그것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여.
그러면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
처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허리를 쭉 펴고 호흡을 하면서 아주 간절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뭣고?’ 그냥 가만히 ‘이뭣고?’ 하면은 공부한 것 같지를 않거든. 그러니까 그 의심이 간절한 의심이 나게 하기 위해서 이마를 찡그리면서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야 겨우 조금 의심이 일어난 것 같고 그러니까 그렇게 힘을 쓰는데.
사실 이 참선은, 그 간절히 헌답시고 허리에다가 힘을 주고, 목에다가 힘을 주고, 눈에다가 힘을 주고, 그러고도 부족하니까 눈썹 미간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이뭣고?’ 그러다 못하니까 또 고개를 숙이면서 ‘이뭣고?’, 이렇게 막 파고든다 그 말이여.
간절히 의심을 헌답시고 그렇게 그 힘을 들여서 한 뜻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공연히 몸뚱이를 갖다가 힘을 주고, 몸뚱이를 갖다가 구박을 하고, 억지로 힘을 써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녀. ‘가행정진을 해라, 용맹정진을 해라’ 하니까, 그 몸뚱이를 들볶고 이마 눈썹에다 힘을 줘 가지고 막 우격다짐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미상불(未嘗不) 처음하는 사람은 그렇게라도 해야 좀 화두가 들리고 공부한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한다 하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나가는 가운데에 그 공부해 나가는 그 묘한 의심관(疑心觀)을 터득을 해야 하는 거여.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중생들은 ‘생각 있는 생각’을 생각이라 해.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하는 것이여.
‘이뭣고?~~~’ 탁! 벌써 ‘이-’ 할 때에 의심(疑心)이 타악 드러나 버리거든. ‘이- 뭣고?~~~’
‘뭣고’는 그냥 후렴으로 붙어. ‘이-’만 해도 벌써 화두가 탁 드러나지 않냐 그 말이여. 나중에는 ‘이뭣고’ 한 말, 글자가 소용이 없는 거여. 딱! 챙기면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타악 드러나거든. 현전(現前)해 버리거든.
스윗치 탁! 누르면은 불이 탁! 동시에 켜지면서 방안이 환하듯이, 벌써 딱 ‘이-’ 할 때 벌써 의심이 따악 드러나 버리거든.
‘그 의심(疑心)이 머리로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 생각하면 기운이 위로 올라가니까 상기(上氣)가 되니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觀)해라’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단전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그냥 의심이 전체가 의심이 환한 거여.
산을 봐도 의심이요, 강을 봐도 의심이요, 뭐 땅을 봐도 의심이요, 사람을 만나도 의심이요, 밥을 만나도 그냥 의심이, 의단이 따악, 하늘에 달이 뜨면 전체가 환하듯이 전체가 그냥 의심 덩어리인 거여. 이 몸뚱이 안이나 밖이나 세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낱낱이 그냥 의심 속에 것이라 그 말이여.
그러니 무슨 화두를 새로 들을 것이 있냐 그 말이여, 있는데 바로. 들지 안 해도 전체가 의심 덩어리인데 무슨 화두를 들고, 화두가 들을 것이 있으며 챙길 것이 어디가 있냐 그 말이여.
화두를 놓쳐 버리고 화두가 희미하니까 화두를 그때 딱 한번 챙기면 고대로 있는 거여 그냥. 다맛 무심 속에서 단전호흡을 하면은 그 가운데 화두가 있어 그냥. 화두와 호흡이 둘이 아니여.
그 올 금년, 예년에 비해서 금년은 결제 후반기에 좀 더웠지만 더운 중도 모르고 정진을 애써서 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낙오자가 없이 오롯이 이렇게 전원이 해제를 맞이해서 전부 얼굴 얼굴을 다 보니 모두가 다 정말 한철 동안을 알차게 짬지게 정진을 한 모습이 그 모두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것으로 봐서 모두가 다 정진을 알뜰히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해제를 해서 걸망을 지고 나간다 하드라도 일분일초도 등한히 해서는 아니되고, 어느 다른 회상에 가서 반살림에 참례를 하던지, 또는 반살림에 참석을 안 하고 은사 스님한테로 가던지, 어디를 가더라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화두 일념을 놓치지 않고 정진을 단속을 할 것이며 다음 겨울 결제 때까지 고대로, 오히려 동용(動用) 활동하는 가운데에 더 공부가 알차게 되도록 이렇게 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에 다함이 없는 보물이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 생각도 없고 모든 생각이 다 끊어져서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하면, 이렇게 너무 다 비어버리고 한 물건도 없으면 이러다가 미치지 않을랑가?’ 오히려 공연히 공포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번뇌 망상이 있을 때에는 그 바람에 그냥 외로운 중도 모르고 심심헌 중도 모르고 두려운 중도 모르고 지내다가, 정말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에 화두만이 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맑고 깨끗하다가 돌아버리면 어쩌나 하고 공연한 근심을 하고 두려운 생각을 내게 되는데, 그럴 것이 없어.
‘살지 못할까 걱정을 하지 말고, 죽지 못할까 걱정을 해라’ 고인(古人)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바로 그 말이 이 도리를 일컬은 것입니다.
의단만이 독로한 그 가운데 버려야 할 번뇌도 없고, 깨달러야 할 부처도 없는 가운데 오직 의단만이 독로하면 급할 것이 없어. 깨달을라고 ‘빨리 깨달렀으면’ 그런 생각도 필요가 없고, ‘이럴 때 누가 탁 깨닫게 좀 해줬으면’ 그런 생각도 없어.
그러한 생각, ‘빨리 깨달았으면’ ‘깨달을 것이 어디가 있어? 바로 이 경계가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냐’ 또 이러한 망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런 것이 다 지각심(知覺心)이여, 지각심. 지각심이라 하는 것은 도 닦는 데 비상(砒霜)이여.
유화유월유루대(有花有月有樓臺)로구나.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 다함이 없는 한량없는 것이 있는데(無一物中無盡藏), 꽃도 있고, 달도 있고, 또한 화려한 누각도 있더라.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물도 다하고 산도 다해서 이제 길이 꽉 맥히고 길이 없는가 의심했더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로구나. 버들은 푸르고 꽃은 밝게 피어 있는 한 마을이 있구나.
고인(古人)은 이러한 게송을 읊었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랬다고, 열심히 정진을 한 사람에게 더욱 채찍을 가한 것은 우리가 모두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었고, 시주에 큰 빚을 진 동문수학(同門修學)여, 우리는. 한 문(門)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수학이기 때문에 이렇게 노바심(老婆心)을 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신 자신이 그 한량없는 겁(劫) 동안을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수행을 쌓아 가지고, 마침내 그런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부처님으로 출세를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무량겁을 닦아 온 그 고행한 것을 생각해서 중생을 지나치게 가엾게 생각을 하셔서 횡설수설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술을 많이 먹고 술주정뱅이 노릇을 한 사람은, 나중에 술 먹은 사람을 보면 훨씬 더 가엾게 생각하고 그 술 먹은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듯이, 부처님도 역시 당신이 무량겁을 그렇게 많은 겁 동안을 고생하셨기 때문에 중생을 그렇게 가엾이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한 법(法)도 설할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한량없는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오늘 산승(山僧)도 불조(佛祖)에 그러한 뜻을 받들어서 도반(道伴)을 위해서 도반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간곡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한(限)이 있는 것이어서 머지않아서 늙고 병들고 그리고 이 몸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젊다고 해서 앞이 아직 넉넉하다고 등한히 세월을 보내지 말고, 일분일초, 1초 1초가 모여서 1분이 되고, 1분 1분이 모여서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여서 하로가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내지 평생이 되고 무량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는 1초 1초를 단속하는 것,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하는 데에서 결정코 도(道)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반들을 위해서 게송을 하나 읊고자 합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생사진로(生死塵勞), 생사해탈하는 것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꽉 승두(繩頭)를 잡고, 세게 긴하게 승두를 잡고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번 이 추위가 뼈 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이 코를 치는 향내를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에라사 그 매화꽃이 향내가 진동하는 법이다. 알뜰하게 간절하게 목숨 바쳐서 도를 닦아야 정진을 해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가 있다.
황벽(黃蘗) 선사가 우리 후래(後來)를 위해서 평생토록 이 게송으로써 채찍을 삼고 공부를 해라, 하셨습니다.(21분37초~40분3초)(끝)
[법문 내용]
(게송)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 천리계산수지고(千里溪山隨指顧)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 / 안거해서 정중(靜中)에 공부를 하는 것은 동중(動中)에 잘하기 위해서 특별 수련을 쌓는 것 / 다못 부처도 찾지 말고, 부처도 구할려고 하지 말고, 번뇌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서 오직 화두만을 들어라 그거거든. ‘이뭣고?~~~’ 그렇게 해 나가야 번뇌도 다스려지고, 자기가 참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게송)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 / 법신설법(法身說法). 법신 상주설법(常住說法) /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면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다 / 화두를 들고 정진할 때 그 공부해 나가는 묘한 의심관(疑心觀)을 터득을 해야 / 다맛 무심 속에서 단전호흡을 하면은 그 가운데 화두가 있어 그냥. 화두와 호흡이 둘이 아니여 / ‘살지 못할까 걱정을 하지 말고, 죽지 못할까 걱정을 해라’ 고인(古人)의 말씀 / (게송)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황벽 스님 게송.
〇조용한 가운데는 공부가 잘되고, 나가서 여행을 하거나 행동하는 가운데에서는 화두(話頭)가 달아나 버리고 공부가 안 된다면 그 공부는 발심(發心)을 했다 할 수도 없고, 공부에 힘을 얻었다 할 수도 없고, 그건 반쪼가리 죽은 공부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공부가 옳게 되었다면 움직이는 가운데에, 생활하는 가운데에, 시끄럽고 복잡한 가운데에서도 화두가 순일하게 되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〇번뇌는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놔두고 화두만을 터억, 속이 상하드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을 억지로 참을라고 할 필요가 없어. ‘이뭣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슬픔을 억지고 참을라고 하지 말고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어도 그 근심 걱정을 떼어내 버릴라고 하지 말고 당장 바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야 번뇌도 다스려지고, 자기가 참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〇 ‘이뭣고?~~~’ 탁! 벌써 ‘이-’ 할 때에 의심(疑心)이 타악 드러나 버리거든. ‘이- 뭣고?~~~’
‘뭣고’는 그냥 후렴으로 붙어. ‘이-’만 해도 벌써 화두가 탁 드러나지 않냐 그 말이여. 나중에는 ‘이뭣고’ 한 말, 글자가 소용이 없는 거여. 딱! 챙기면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타악 드러나거든. 현전(現前)해 버리거든.
스윗치 탁! 누르면은 불이 탁! 동시에 켜지면서 방안이 환하듯이, 벌써 딱 ‘이-’ 할 때 벌써 의심이 따악 드러나 버리거든.
‘그 의심(疑心)이 머리로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 생각하면 기운이 위로 올라가니까 상기(上氣)가 되니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觀)해라’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단전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그냥 의심이 전체가 의심이 환한 거여.
산을 봐도 의심이요, 강을 봐도 의심이요, 뭐 땅을 봐도 의심이요, 사람을 만나도 의심이요, 밥을 만나도 그냥 의심이, 의단이 따악, 하늘에 달이 뜨면 전체가 환하듯이 전체가 그냥 의심 덩어리인 거여. 이 몸뚱이 안이나 밖이나 세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낱낱이 그냥 의심 속에 것이라 그 말이여.
그러니 무슨 화두를 새로 들을 것이 있냐 그 말이여, 있는데 바로. 들지 안 해도 전체가 의심 덩어리인데 무슨 화두를 들고, 화두가 들을 것이 있으며 챙길 것이 어디가 있냐 그 말이여.
화두를 놓쳐 버리고 화두가 희미하니까 화두를 그때 딱 한번 챙기면 고대로 있는 거여 그냥. 다맛 무심 속에서 단전호흡을 하면은 그 가운데 화두가 있어 그냥. 화두와 호흡이 둘이 아니여.
〇 ‘이렇게 한 생각도 없고 모든 생각이 다 끊어져서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하면, 이렇게 너무 다 비어버리고 한 물건도 없으면 이러다가 미치지 않을랑가?’ 오히려 공연히 공포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번뇌 망상이 있을 때에는 그 바람에 그냥 외로운 중도 모르고 심심헌 중도 모르고 두려운 중도 모르고 지내다가, 정말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에 화두만이 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맑고 깨끗하다가 돌아버리면 어쩌나 하고 공연한 근심을 하고 두려운 생각을 내게 되는데, 그럴 것이 없어.
‘살지 못할까 걱정을 하지 말고, 죽지 못할까 걱정을 해라’ 고인(古人)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바로 그 말이 이 도리를 일컬은 것입니다.
〇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랬다고, 열심히 정진을 한 사람에게 더욱 채찍을 가한 것은 우리가 모두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었고, 시주에 큰 빚을 진 동문수학(同門修學)여, 우리는. 한 문(門)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수학이기 때문에 이렇게 노바심(老婆心)을 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신 자신이 그 한량없는 겁(劫) 동안을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수행을 쌓아 가지고, 마침내 그런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부처님으로 출세를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무량겁을 닦아 온 그 고행한 것을 생각해서 중생을 지나치게 가엾게 생각을 하셔서 횡설수설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술을 많이 먹고 술주정뱅이 노릇을 한 사람은, 나중에 술 먹은 사람을 보면 훨씬 더 가엾게 생각하고 그 술 먹은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듯이, 부처님도 역시 당신이 무량겁을 그렇게 많은 겁 동안을 고생하셨기 때문에 중생을 그렇게 가엾이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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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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