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56)—1985(을축)년 하안거 해제 법어(1985.07.17.음)(40분)

 

(1) 약 22분.

 

(2) 약 19분.

 

(1)------------------

(게송 첫 구절 녹음이 없음)
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요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리계산수지고(千里溪山隨指顧)헌디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요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이다
사람은 배 가운데 타고 있는데, 그 배는 다시 물속에 있다. 배를 띄워서 가는 곳마다 물이 없는 곳이 없어. 물이 있는 곳에는 배가 어디라도 다 갈 수가 있드라 그 말이여.

우리의 자성(自性)은 우리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있는데, 그 몸뚱이는 삼라만상 두두물물 우주법계 속에 이 몸뚱이가 담겨져 있는데, 그 몸뚱이 속에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 한 물건이 그 속에 들었드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눈으로 볼 수가 없지만, 잠시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 망상이 어디서 일어나냐 하면은 그 마음자리로부터서 온갖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다 거기서 일어나고, 슬픔도 거기서 일어나고, 기쁨도 거기서 일어나고, 희로애락이, 천 사상(千思想) 만 사량(萬思量)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그 마음자리이다.
그 마음자리는 볼 수가 없지마는, 그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천 가지 만 가지 번뇌 망상 온갖 생각을 보면은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그 말이여.

물 있는 데 배가 있고, 배가 있으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야 그 배를 동서남북 자유대로 그 배를 운전을 하는 거와 같다. 
배를 찾는데 산에 가서 찾어봐야 배가 없을 것이고, 사공을 찾는데 배 없는 데 가서 찾을 수가 없어. 사공을 찾고자 하면은 배 있는 데에 배를 찾어야 하고, 배를 찾을라면은 물로 가야 하는 거여.
마음자리를 찾을려면은 우리의 번뇌 망상을 여의고 그 마음자리를 찾아서는 영겁을 두고 찾아도 찾을 길이 없는 거여. 

천리계산수지고(千里溪山隨指顧)하니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이다.
천리 시내와 산, 천리강산, 천리강산에 손가락 가리키는 곳을 따라서 보아라 그 말이여. 한 내, 시내 한 강, 한 내에 바람이 불고 그 바람부는 물결 위에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거기에 찬란히 비추어 부서지고 있어. 하늘에 달 하나가 떠 있지마는 어디고 물 있는 데를 보면은 거기에는 달빛이 번쩍거리고 있는 것이여.

이것은 자연에다가 붙여서, 자연의 경계에다가 붙여서 우리의 면목(面目)을 드러내는 게송(偈頌)입니다.


오늘 을축년(乙丑年) 7월 17일 세등선원 하안거 해제(解制)일을 맞이해서 사부대중이 모여서 그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해제날에는 부처님 당시부터 멀고 가까운 모든 대중들, 공부하던 대중들이 한데 모여서 마지막 그 해산식(解散式)을 거행하는 요샛말로 해산하는, 한데 모여서 공부를 하다가 석 달 3개월 만기(滿期)가 되니까 마지막 날을 맞이해서 그동안에 공부한 것을 부처님께 여쭙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또 서로 도반(道伴)끼리도 잘못된 점을 지적을 하고 지적을 받고, 그게 다 자자회(自恣會)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공부를 해 나가기 위해서, 우기(雨期)에 비 오는 계절에 나다니지를 못하니까 한데 모여서 공부를 하다가 인제 이 해제날을 맞이해서 동서 사방으로 인연 따라서 선지식을 찾고, 도반을 찾고, 스승을 찾아서, 다시 또 헤어지는 날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요샛말로 해산식이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부득이해서 그 더위에 나댕길 수가 없으니까 석 달을 모여서 왕래와 출입을 금하고 엄격한 법도하에서 열심히 정진을 하고, 해제를 맞이해서 걸망을 지고 또 인연 따라서 떠나게 되는데, 비록 떠난다 하드라도 헤어진다 하드라도 우리의 그 정진은 석 달 동안 법도하에 정진한 그 마음! 그 마음이 흩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거나, 산을 가거나, 들녘를 가거나 어디를 가든지 그 결제 중에 엄격한 법도하에 정진할 때 그 마음을 더욱 단속을 해서, 정중(靜中)에 공부를 하는 것은 동중(動中)에 잘하기 위해서 특별 수련을 쌓는 것이니까, 인자 앞으로 동중에서 자기의 공부를 다져 나가는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는 공부가 잘되고, 나가서 여행을 하거나 행동하는 가운데에서는 화두(話頭)가 달아나 버리고 공부가 안 된다면 그 공부는 발심(發心)을 했다 할 수도 없고, 공부에 힘을 얻었다 할 수도 없고, 그건 반쪼가리 죽은 공부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공부가 옳게 되었다면 움직이는 가운데에, 생활하는 가운데에, 시끄럽고 복잡한 가운데에서도 화두가 순일하게 되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혼침(昏沈)이 오고 또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이 혼침과 망상 때문에 공부를 잘 못한다. 그놈만 없으면 공부가 참 잘될 것 같고 마음껏 하겠는데, 번뇌 망상이 퍼일어나고 화두가 잘 잡히지 아니해서 공부를 못하고 또 조금 조용할 만하면 졸음이 오고 그래서 안 된다’ 그러는데.
그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번뇌 망상이, 아까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번뇌 망상 일어나는 곳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일어남으로써 오히려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본래 내가 이 부처거든’ 중생이 참선을 해 갖고 부처가 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부처였던 것이여.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어.
자꾸 부처를 찾으면은 물로 물을 씻을려고 하는 거와 같고, 머리 위에다가, 머리 두고 두상(頭上) 하나를 더 얹어놓은 거와 같다. 물기를 닦을려면 마른 수건으로 마른 걸레로 닦어야 물기가 닦어지지, 물로는 아무리 물을 닦아도 그 습기는 없어지지 아니하는 거여. 그와 같이 본래 내가 부처인데 다시 또 거기서 부처를 찾으면은 있는 부처도 달아나 버리게 된 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우리가 ‘내가 본래부터 내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어야 돼. 그러기 때문에 그 본래 내가 부처라고 한 것을 철저히 믿는 사람은 부처를 찾는 법이 없어.

그러면 번뇌(煩惱)는 어떠냐? 번뇌가 바로 이 보리(菩提)거든. 번뇌가 바로 이 보리기 때문에 그 번뇌를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번뇌가 바로 우리 깨달음인데 그 번뇌를 버릴려고 하면은 깨달음이 달아나 버린 거 아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 곡식이 나오는데, 곡식이 바로 돈이여. 곡식을 팔면 바로 그것이 돈이고, 곡식을 살려면 돈 주고 사야 하고, 돈을 만들라면 곡식이 있어야 돈을 만질 수가 있는 것인데, ‘나는 돈이 필요하지 곡식은 소용없다’고 곡식을 버리면은 돈이 어디서 나올 것이냐. 곡식을 잘 애끼고 잘 보관을 해야 언제라도 그것이 바로 돈이거든.

우리의 번뇌 망상 그놈을 버릴려고 애를 쓰고, 그놈이 일어나면은 신경질을 내고 ‘아, 이 번뇌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사람 사람이 모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번뇌를 버릴려고 하면은 안 되는 거여. 버릴려고 하면은 그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바로 새로운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도 찾을려고 하지 말고, 번뇌도 버릴려고 하지 말아라. 그럴 줄 아는 사람은 공부를 비로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우리가 참선하고 도를 닦는 것은 부처를 찾기 위해서 하는데, ‘부처를 찾지 말아라’. 번뇌 때문에 우리는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온갖 죄를 짓게 되는데, ‘번뇌도 버리지 말아라’. 그러면 부처도 찾지 말고 번뇌도 버리지 아니하면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여. 아무것도 않고 우두커니 목석처럼, 그냥 마구잽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그러란 말인가? 그게 아녀.
다못 부처도 찾지 말고, 부처도 구할려고 하지 말고, 번뇌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서 오직 화두만을 들어라 그거거든. ‘이뭣고?~~~’ ‘이뭣고?~~~’

번뇌는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놔두고 화두만을 터억, 속이 상하드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을 억지로 참을라고 할 필요가 없어. ‘이뭣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슬픔을 억지고 참을라고 하지 말고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어도 그 근심 걱정을 떼어내 버릴라고 하지 말고 당장 바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야 번뇌도 다스려지고, 자기가 참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승속(僧俗)이 없어. 출가한 스님이나 세속에서 장사를 하고 살림을 하는 사람이나 누구라도 그렇게만 해 가면 목적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이 좋고 참선을 하고 싶어서 갈망을 하면서도 이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쓸 줄을 모르고, 바르게 공부를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애는 많이 쓰고도 힘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헌대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이라  유화유월유루대(有花有月有樓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이요, 한 거듭 산이 다하면, 한 산을 넘어가면 또 산이 있어.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이더라. 말을, 가슴속에 있는 말을 하고 나면 또 할 말이 있고, 그 말이 끝나면 또 할 말이 있고 해서 아무리 말을 해도 끝없이 산에 구름처럼 일어나고,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달빛처럼 한량이 없어. 한량이 없는 정이 넘쳐흐른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을 위해서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부처님이 다 말씀을 하셨냐 하면은 무량겁을 두고 이 도리를 설해도 다 설하지를 못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본래 진리이시고, 진리의 법신(法身)이시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화신(化身)으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앉은자리 더울 겨를이 없이 무량묘법을 설하셨습니다마는, 다 설하지를 못해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무량겁을 두고 법을 설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법신설법(法身說法)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화신으로 설하신 법은 80세를 일기로 마치셨지만, 화신이 열반에 드신 뒤에는 법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셔.

태양이 빛나는 것도 법신설법(法身說法)이요, 달이 밝은 것도 법신설법이요, 바람이 부는 소리도 법신설법이요, 춘하추동 사시절에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단풍이 지고, 눈이 내리는 것도 법신설법입니다.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한마디 말도 한 글자도 설할 것이 없지만, 입을 열기로 하면은 한도 끝도 없고, 바닷물을 먹을 삼아서 글씨를 쓰고, 이 허공을 종이로 삼아서 글씨를 쓴다 해도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처음~21분34초)





(2)------------------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이여. 한 글자도 설할 것이 없고, 한마디도 설할 것이 없지마는 한량없는 법을 설하셨듯이, 한 물건도 우리는 없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여. 한 물건도 없지마는, 그 한 물건도 없는 도리를 깨달으면 무진장(無盡藏)이여. 한량없어. 쓰고 또 쓰고, 쓰고 또 남고, 남어서 또 쓰고.
참선하는 데 있어서는 경을 보지 아니하고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없지만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남기신 법어는 산더미 같이 많이 있습니다.


화두(話頭)를 들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완전히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들어갑니다. 무념무상에 들어가되 무념무상, 아무 생각도 없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도 완전히 없습니다. 찾어야 할 깨달러야 할 부처도 없고,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 오직 홀로 의단만이 독로해.
그러한 경지에서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완전히 그 공(空)한 경지에 빠지면 이것을 무기공(無記空)이라 해. 무기공에 빠지면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여.
그 한 물건도 없는 곳에서 오직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해. 이것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여.

어떻게 깨끗하고, 어떻게 편안하고 맑던지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맑고 깨끗한 경계가 흩어질까봐 화두도 들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다 그 말이여. 그렇지마는 화두를 들어야 하는 거여. 화두를 들어서 그 의단이 독로해야지 의심이 없으면은 그것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여.

그러면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

처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허리를 쭉 펴고 호흡을 하면서 아주 간절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뭣고?’ 그냥 가만히 ‘이뭣고?’ 하면은 공부한 것 같지를 않거든. 그러니까 그 의심이 간절한 의심이 나게 하기 위해서 이마를 찡그리면서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야 겨우 조금 의심이 일어난 것 같고 그러니까 그렇게 힘을 쓰는데.
사실 이 참선은, 그 간절히 헌답시고 허리에다가 힘을 주고, 목에다가 힘을 주고, 눈에다가 힘을 주고, 그러고도 부족하니까 눈썹 미간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이뭣고?’ 그러다 못하니까 또 고개를 숙이면서 ‘이뭣고?’, 이렇게 막 파고든다 그 말이여.
간절히 의심을 헌답시고 그렇게 그 힘을 들여서 한 뜻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공연히 몸뚱이를 갖다가 힘을 주고, 몸뚱이를 갖다가 구박을 하고, 억지로 힘을 써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녀. ‘가행정진을 해라, 용맹정진을 해라’ 하니까, 그 몸뚱이를 들볶고 이마 눈썹에다 힘을 줘 가지고 막 우격다짐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미상불(未嘗不) 처음하는 사람은 그렇게라도 해야 좀 화두가 들리고 공부한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한다 하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나가는 가운데에 그 공부해 나가는 그 묘한 의심관(疑心觀)을 터득을 해야 하는 거여.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중생들은 ‘생각 있는 생각’을 생각이라 해.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하는 것이여.

‘이뭣고?~~~’ 탁! 벌써 ‘이-’ 할 때에 의심(疑心)이 타악 드러나 버리거든. ‘이- 뭣고?~~~’
‘뭣고’는 그냥 후렴으로 붙어. ‘이-’만 해도 벌써 화두가 탁 드러나지 않냐 그 말이여. 나중에는 ‘이뭣고’ 한 말, 글자가 소용이 없는 거여. 딱! 챙기면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타악 드러나거든. 현전(現前)해 버리거든.
스윗치 탁! 누르면은 불이 탁! 동시에 켜지면서 방안이 환하듯이, 벌써 딱 ‘이-’ 할 때 벌써 의심이 따악 드러나 버리거든.

‘그 의심(疑心)이 머리로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 생각하면 기운이 위로 올라가니까 상기(上氣)가 되니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觀)해라’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단전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그냥 의심이 전체가 의심이 환한 거여.
산을 봐도 의심이요, 강을 봐도 의심이요, 뭐 땅을 봐도 의심이요, 사람을 만나도 의심이요, 밥을 만나도 그냥 의심이, 의단이 따악, 하늘에 달이 뜨면 전체가 환하듯이 전체가 그냥 의심 덩어리인 거여. 이 몸뚱이 안이나 밖이나 세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낱낱이 그냥 의심 속에 것이라 그 말이여.

그러니 무슨 화두를 새로 들을 것이 있냐 그 말이여, 있는데 바로. 들지 안 해도 전체가 의심 덩어리인데 무슨 화두를 들고, 화두가 들을 것이 있으며 챙길 것이 어디가 있냐 그 말이여.
화두를 놓쳐 버리고 화두가 희미하니까 화두를 그때 딱 한번 챙기면 고대로 있는 거여 그냥. 다맛 무심 속에서 단전호흡을 하면은 그 가운데 화두가 있어 그냥. 화두와 호흡이 둘이 아니여.


그 올 금년, 예년에 비해서 금년은 결제 후반기에 좀 더웠지만 더운 중도 모르고 정진을 애써서 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낙오자가 없이 오롯이 이렇게 전원이 해제를 맞이해서 전부 얼굴 얼굴을 다 보니 모두가 다 정말 한철 동안을 알차게 짬지게 정진을 한 모습이 그 모두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것으로 봐서 모두가 다 정진을 알뜰히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해제를 해서 걸망을 지고 나간다 하드라도 일분일초도 등한히 해서는 아니되고, 어느 다른 회상에 가서 반살림에 참례를 하던지, 또는 반살림에 참석을 안 하고 은사 스님한테로 가던지, 어디를 가더라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화두 일념을 놓치지 않고 정진을 단속을 할 것이며 다음 겨울 결제 때까지 고대로, 오히려 동용(動用) 활동하는 가운데에 더 공부가 알차게 되도록 이렇게 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에 다함이 없는 보물이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 생각도 없고 모든 생각이 다 끊어져서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하면, 이렇게 너무 다 비어버리고 한 물건도 없으면 이러다가 미치지 않을랑가?’ 오히려 공연히 공포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번뇌 망상이 있을 때에는 그 바람에 그냥 외로운 중도 모르고 심심헌 중도 모르고 두려운 중도 모르고 지내다가, 정말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에 화두만이 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맑고 깨끗하다가 돌아버리면 어쩌나 하고 공연한 근심을 하고 두려운 생각을 내게 되는데, 그럴 것이 없어.
‘살지 못할까 걱정을 하지 말고, 죽지 못할까 걱정을 해라’ 고인(古人)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바로 그 말이 이 도리를 일컬은 것입니다.

의단만이 독로한 그 가운데 버려야 할 번뇌도 없고, 깨달러야 할 부처도 없는 가운데 오직 의단만이 독로하면 급할 것이 없어. 깨달을라고 ‘빨리 깨달렀으면’ 그런 생각도 필요가 없고, ‘이럴 때 누가 탁 깨닫게 좀 해줬으면’ 그런 생각도 없어.
그러한 생각, ‘빨리 깨달았으면’ ‘깨달을 것이 어디가 있어? 바로 이 경계가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냐’ 또 이러한 망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런 것이 다 지각심(知覺心)이여, 지각심. 지각심이라 하는 것은 도 닦는 데 비상(砒霜)이여.

유화유월유루대(有花有月有樓臺)로구나.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 다함이 없는 한량없는 것이 있는데(無一物中無盡藏), 꽃도 있고, 달도 있고, 또한 화려한 누각도 있더라.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물도 다하고 산도 다해서 이제 길이 꽉 맥히고 길이 없는가 의심했더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로구나. 버들은 푸르고 꽃은 밝게 피어 있는 한 마을이 있구나.
고인(古人)은 이러한 게송을 읊었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랬다고, 열심히 정진을 한 사람에게 더욱 채찍을 가한 것은 우리가 모두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었고, 시주에 큰 빚을 진 동문수학(同門修學)여, 우리는. 한 문(門)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수학이기 때문에 이렇게 노바심(老婆心)을 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신 자신이 그 한량없는 겁(劫) 동안을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수행을 쌓아 가지고, 마침내 그런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부처님으로 출세를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무량겁을 닦아 온 그 고행한 것을 생각해서 중생을 지나치게 가엾게 생각을 하셔서 횡설수설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술을 많이 먹고 술주정뱅이 노릇을 한 사람은, 나중에 술 먹은 사람을 보면 훨씬 더 가엾게 생각하고 그 술 먹은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듯이, 부처님도 역시 당신이 무량겁을 그렇게 많은 겁 동안을 고생하셨기 때문에 중생을 그렇게 가엾이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한 법(法)도 설할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한량없는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오늘 산승(山僧)도 불조(佛祖)에 그러한 뜻을 받들어서 도반(道伴)을 위해서 도반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간곡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한(限)이 있는 것이어서 머지않아서 늙고 병들고 그리고 이 몸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젊다고 해서 앞이 아직 넉넉하다고 등한히 세월을 보내지 말고, 일분일초, 1초 1초가 모여서 1분이 되고, 1분 1분이 모여서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여서 하로가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내지 평생이 되고 무량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는 1초 1초를 단속하는 것,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하는 데에서 결정코 도(道)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반들을 위해서 게송을 하나 읊고자 합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생사진로(生死塵勞), 생사해탈하는 것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꽉 승두(繩頭)를 잡고, 세게 긴하게 승두를 잡고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번 이 추위가 뼈 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이 코를 치는 향내를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에라사 그 매화꽃이 향내가 진동하는 법이다. 알뜰하게 간절하게 목숨 바쳐서 도를 닦아야 정진을 해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가 있다.

황벽(黃蘗) 선사가 우리 후래(後來)를 위해서 평생토록 이 게송으로써 채찍을 삼고 공부를 해라, 하셨습니다.(21분37초~40분3초)(끝)





[법문 내용]

(게송)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 천리계산수지고(千里溪山隨指顧)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 / 안거해서 정중(靜中)에 공부를 하는 것은 동중(動中)에 잘하기 위해서 특별 수련을 쌓는 것 / 다못 부처도 찾지 말고, 부처도 구할려고 하지 말고, 번뇌도 버릴려고 하지 말고서 오직 화두만을 들어라 그거거든. ‘이뭣고?~~~’ 그렇게 해 나가야 번뇌도 다스려지고, 자기가 참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게송)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 / 법신설법(法身說法). 법신 상주설법(常住說法) /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면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다 / 화두를 들고 정진할 때 그 공부해 나가는 묘한 의심관(疑心觀)을 터득을 해야 / 다맛 무심 속에서 단전호흡을 하면은 그 가운데 화두가 있어 그냥. 화두와 호흡이 둘이 아니여 / ‘살지 못할까 걱정을 하지 말고, 죽지 못할까 걱정을 해라’ 고인(古人)의 말씀 / (게송)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황벽 스님 게송.


조용한 가운데는 공부가 잘되고, 나가서 여행을 하거나 행동하는 가운데에서는 화두(話頭)가 달아나 버리고 공부가 안 된다면 그 공부는 발심(發心)을 했다 할 수도 없고, 공부에 힘을 얻었다 할 수도 없고, 그건 반쪼가리 죽은 공부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공부가 옳게 되었다면 움직이는 가운데에, 생활하는 가운데에, 시끄럽고 복잡한 가운데에서도 화두가 순일하게 되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번뇌는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놔두고 화두만을 터억, 속이 상하드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을 억지로 참을라고 할 필요가 없어. ‘이뭣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슬픔을 억지고 참을라고 하지 말고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어도 그 근심 걱정을 떼어내 버릴라고 하지 말고 당장 바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야 번뇌도 다스려지고, 자기가 참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이뭣고?~~~’ 탁! 벌써 ‘이-’ 할 때에 의심(疑心)이 타악 드러나 버리거든. ‘이- 뭣고?~~~’
‘뭣고’는 그냥 후렴으로 붙어. ‘이-’만 해도 벌써 화두가 탁 드러나지 않냐 그 말이여. 나중에는 ‘이뭣고’ 한 말, 글자가 소용이 없는 거여. 딱! 챙기면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타악 드러나거든. 현전(現前)해 버리거든.
스윗치 탁! 누르면은 불이 탁! 동시에 켜지면서 방안이 환하듯이, 벌써 딱 ‘이-’ 할 때 벌써 의심이 따악 드러나 버리거든.

‘그 의심(疑心)이 머리로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 생각하면 기운이 위로 올라가니까 상기(上氣)가 되니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觀)해라’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단전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그냥 의심이 전체가 의심이 환한 거여.
산을 봐도 의심이요, 강을 봐도 의심이요, 뭐 땅을 봐도 의심이요, 사람을 만나도 의심이요, 밥을 만나도 그냥 의심이, 의단이 따악, 하늘에 달이 뜨면 전체가 환하듯이 전체가 그냥 의심 덩어리인 거여. 이 몸뚱이 안이나 밖이나 세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낱낱이 그냥 의심 속에 것이라 그 말이여.

그러니 무슨 화두를 새로 들을 것이 있냐 그 말이여, 있는데 바로. 들지 안 해도 전체가 의심 덩어리인데 무슨 화두를 들고, 화두가 들을 것이 있으며 챙길 것이 어디가 있냐 그 말이여.
화두를 놓쳐 버리고 화두가 희미하니까 화두를 그때 딱 한번 챙기면 고대로 있는 거여 그냥. 다맛 무심 속에서 단전호흡을 하면은 그 가운데 화두가 있어 그냥. 화두와 호흡이 둘이 아니여.

 ‘이렇게 한 생각도 없고 모든 생각이 다 끊어져서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하면, 이렇게 너무 다 비어버리고 한 물건도 없으면 이러다가 미치지 않을랑가?’ 오히려 공연히 공포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번뇌 망상이 있을 때에는 그 바람에 그냥 외로운 중도 모르고 심심헌 중도 모르고 두려운 중도 모르고 지내다가, 정말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에 화두만이 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맑고 깨끗하다가 돌아버리면 어쩌나 하고 공연한 근심을 하고 두려운 생각을 내게 되는데, 그럴 것이 없어.
‘살지 못할까 걱정을 하지 말고, 죽지 못할까 걱정을 해라’ 고인(古人)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바로 그 말이 이 도리를 일컬은 것입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랬다고, 열심히 정진을 한 사람에게 더욱 채찍을 가한 것은 우리가 모두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었고, 시주에 큰 빚을 진 동문수학(同門修學)여, 우리는. 한 문(門)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수학이기 때문에 이렇게 노바심(老婆心)을 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신 자신이 그 한량없는 겁(劫) 동안을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수행을 쌓아 가지고, 마침내 그런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부처님으로 출세를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무량겁을 닦아 온 그 고행한 것을 생각해서 중생을 지나치게 가엾게 생각을 하셔서 횡설수설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술을 많이 먹고 술주정뱅이 노릇을 한 사람은, 나중에 술 먹은 사람을 보면 훨씬 더 가엾게 생각하고 그 술 먹은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듯이, 부처님도 역시 당신이 무량겁을 그렇게 많은 겁 동안을 고생하셨기 때문에 중생을 그렇게 가엾이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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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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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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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55)—1985(을축)년 하안거 결제 법어(1985.04.17.음)(86분)

 

(1/5) 약 20분.

 

(2/5) 약 19분.

 

(3/5) 약 17분.

 

(4/5) 약 17분.

 

(5/5) 약 15분.

 

(1/5)----------------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한디  본래비불역비심(本來非佛亦非心)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밀의원성갱무구(密意圓成更無求)하니  자유영광요고금(自有靈光耀古今)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하되, 바로 가리켜서 홑으로 전해 온 이 밀밀한 뜻이 한량이 없이 깊지마는,
본래비불역비심(本來非佛亦非心)이여. 본래 부처도 아니요 또한 마음도 아니더라.

밀의원성갱무구(密意圓成更無求)하니, 그 밀밀한 뜻이 본래 뚜렷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다시 구할 것이 없어.
자유영광요고금(自有靈光耀古今)이니라. 제절로 그 신령스러운 빛이 있어서 옛과 이제를 비추더라.


우리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탄생을 하셔 가지고, 29세에 출가하셔서 히말라야 설산 속에 들어가셔서 6년 동안 고행 수도를 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35세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성불(成佛)을 하셔 가지고 80세에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그 확철대오해서 성불하신 그 도리를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전하시고, 그 가섭존자는 아난(阿難)존자에게 전하시고, 아난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존자에게 전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28대 달마조사(達摩祖師)에게 전해졌는데, 그 달마조사는 오천축국(五天竺國)을 두루 유행하시면서 정법을 선양하시다가, 140세에 중국으로 건너오셨습니다.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혜가대사(慧可大師)에게 그 법을 전하시고, 혜가대사는 승찬(僧璨)대사에게 전하시고, 3조(三祖) 승찬은 4조 도신(道信)에게 전하시고, 4조 도신은 5조 홍인(弘忍)대사에게 전하시고, 5조 홍인대사는 6조 혜능(慧能)대사에게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으로부터 6조 혜능선사까지는 33대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33대를 삽삼조사(卅三祖師)라 그러는데 삽삼조사, 혜능대사까지는 단전(單傳), 홑으로 홑으로 이렇게 단전으로 전해 오시다가 6조 스님 이후로는 누구든지 그 밑에서 도를 성취하면은 낱낱이 다 법을 전해서, 누구라도 법의 이익을 얻은 사람은 그 법등(法燈)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홑으로 홑으로 전할 때에는 가사와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발우(鉢盂)를 신표(信標)로 전해 왔는데, 그것이 서로 그것을 전해 받기 위해서 서로 투쟁을 하게 되고 본의 아니게 그러한 폐단이 생기게 되니까 그때부터서는 가사와 발우를 전하는 법이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사와 발우를 전하는 그러한 외표적인 것은 중단을 했지마는, 누구든지 이 정법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법을 전하는 법, 그 자체가 끊어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전(傳)해 온 그 깊은 뜻이 무엇이 전할 것이 있고 전해 받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해 받기 전에 우리 중생들에게 낱낱이 그 신령스러운 빛이 옛과 이제를 통틀어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비추고 있는 그 깊은 뜻이 우리 자신 속에 낱낱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법을 전한다’ 하니까 전할 것이 있고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전했는데 그다음 사람은 그 거짓말이 참말인 줄 알고 또 그다음 사람한테 전하고, 또 그다음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해 가지고, 맨 처음에 한 사람이 전할 때에는 거짓을 전했는데 그 둘째 번 사람부터서는 말키 그것이 참말인 것처럼 전하고 전하고 해 가지고 온 천하에 거짓말이 참말로 번져 나가는 것입니다.
속담에 「관청에 없는 말이 항간(巷間)에 퍼진다」고, 맨 처음에 누군가 한 사람은 거짓말을 살짝 했는데 나중에는 온 나라에 참말로써 전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다 유언비어니 모다 해 가지고 허무맹랑한 소리가 온 세상에 퍼져 가지고 나라가 시끄럽게 되고 그런 예가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하나의 예고.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했다. 가섭존자는 아난존자, 아난존자는 상나화수, 그래서 28대 달마조사로 6조 혜능 33대 조사에까지 이르러, 지금은 경허(鏡虛) 스님, 만공(滿空) 큰스님까지가 76대까지 이렇게 대(代)를 이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공 스님 밑에 고봉 스님, 금봉 스님 또 이 전강 스님 그밖에도 여러 큰스님네들이 나오셨습니다마는 대(代)를 대자니 이렇지 그밖에 수없는 무수 도인, 여마사숙(如麻似菽)입니다. 삼대와 같고, 서숙대와 같이 그 도인(道人)의 수는 한량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도인, 알려지지 아니한 도인, 한량없는 도인이 계셨지마는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도 정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수행을 해 가지고 그 도리를 깨달으면은 낱낱이 다 그 법등(法燈)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것이고, 이어받아야 하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그 신령스러운 빛을 발하는 그 법(法)의 등(燈)이 온 세상 육도법계에 조그만한 땅도 남음이 없이 다 환하게 밝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상징해서 초파일에 또 연등과 주름등과 팔모등, 형형색색의 등불을 모든 신남신녀의 정성으로 절마다 거리마다 다 밝히는 뜻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등불 하나를 켜 가지고 복을 받자’ 그것은 참 근기(根機)가 하열한 중생들의 조그마한 정성의 표식이 되겠지만, 그 등불 하나 켜는 속에는 금방 말씀드린 바와 같은 한량없는 깊은 뜻이 그 속에 내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그 복을 빌고 수명장수를 빌고 소원성취를 비는 그 마음으로 킨  등(燈)이 마침내는 온 세계를 부처님의 진리의 그 법(法)의 등으로써 온 세계를 밝히는 그러한 데에까지 연결이 되어서 그래서 그 공덕이 장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 법등이 어떻게 해서 밝혀지냐 하면은 이렇게 세등선원(世燈禪院)을 지어서 팔도에 청풍납자(淸風衲子)가 모여서 도를 닦고 또 신남신녀(信男信女)가 이렇게 모여서 법을 듣고 또 백일기도에 동참을 해서 여러분 가정에서도 이 선방에서 정진하시는 스님네와 똑같은 마음으로 조석으로 정진을 하고, 생활 속에서 정진을 하고, ‘이뭣고?~~~’ 하면서,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해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 돌이키고 또 잡드리를 하는 가운데에 등불은 차츰차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을축(乙丑)년 4월 17일 세등선원 법요식을 맞이해서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모두 다 경청을 했습니다. 오늘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여러 선객(禪客)들의 얼굴을 보니 낯익은 분도 있고, 처음 이 자리에 방부를 들이고 정진하는 수좌(首座)님네들도 상당히 많이 눈에 띕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참선(參禪)하는 법에 대해서 그 가장 요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방부를 들이고 이렇게 안거(安居)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세상에 인연, 세속 인연, 인간으로서의 여러 가지 인연을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착(執着)과 전도(顚倒)를 갖다가 제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자기가 알고 있는 거, 배워서 알고, 들어서 알고, 생각해서 알고, 보고 알고, 그러한 모든 알고 있는 그것을 다 놔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자기가 경을 배왔다든지, 또는 참선을 해서 무엇인가 속에 본 바가 있다든지, 그러한 것들을 다 놔버리고 완전히 백지상태(白紙狀態)가 되는 것입니다.

항아리에 무엇을 담을려면 그 항아리 속에 있던 먼저 담어져 있던 것을 다 비워버리고, 그리고 그 냄새가 나면은 그것을 몇 번을 씻고 물을 담가서 울구고 해서, 깨끗이 다 해서 마른 수건으로 다 닦고 그래 가지고 거기다가 어떤 새로운 것을 담어야 그 새로 담은 물건이라든지 음식이 변질이 되지 아니하고 맛이 고대로 유지가 되는 것처럼,
이 세등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정진을 할라면 그동안에 다른 선방에서 공부를 한, 여러 철을 했건 한 철을 했건 다른 선방에서 보고 듣고 알고 한 것 다 깨끗이 비워버려야 하고, 또 다른 강원에서 그동안에 보고 배우고 느끼고 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완전히 다 버려야 하고, 세속 학교에서 뭘 배우고 듣고 알고 한 것이 있다 하드라도 그것을 깨끗이 다 비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세등선원에다 방부를 들이면은 그러한 백지상태(白紙狀態)가 되어 가지고 세등선원의 규칙과 법도와 전통에 따르면서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등선원에 규칙은 무엇이냐? 여기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취침할 때까지 그 시간표에 의해서 진행되는 모든 것을 고대로 순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또 전강(田岡) 선사에—열반하셨지마는 이 선원에 조실(祖室)로 모시고 있으니 만큼, 전강 선사의 녹음 법문을 정해진 시간에 들을 때에는 설사 자기 마음속에 신(信)하는 선지식(善知識)이 따로 계신다 하드라도, 이 세등선원에 지내는 동안에는 전강 스님의 법문을 정성스럽게 진실한 마음으로 이 법문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에 조백(糟魄)인 것입니다. 다른 신(信)하는 선지식이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해서 여기 와서 전강 선사에 녹음 법문을 듣기를 거부하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버린다든지 또 내가 신하지 않는 법문은 나는 듣기가 싫은데,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하고 밖으로 휙 나가고, 이것은 참 그건 조백이 틀린 것입니다.(처음~18분58초)





(2/5)----------------

마치 세속에서 어느 규수(閨秀)가 시집을 갔는데, 자기집에서 보고 듣고 한 그러한 제사 지내는 범절(凡節)이라든지, 음식 만드는 범절이라든지, 모든 생활하는 범절이 자기 친정과 다르다고 해서 무엇이던지 자기 친정에서 배운 대로만 할려고 하다가 시어머니하고 밤낮 의견이 상충이 되고 그렇다면 그 새댁은 옳게 배워 가지고 간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법도가 다르고—생활과 반찬 요리와 제사 지내는 법도와 모든 법도가 자기 친정에서 배운 것과는 다르드라도, 시집에 가면은 시집의 법도에 따르면서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시집의 법도에 따르면서 최선을 다해야 그 새댁은 얌전하다고 시댁으로부터서 모두 귀여움을 받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되고, 이 새댁 한 사람으로 인해서 친정 부모가 모두 다 빛이 나고 그러는 것입니다.

가서 사사건건이 ‘우리 친정은 이러지 않는데 참 이상하다, 참 고약하다’ 그래 가지고 자꾸 불평불만을 하면서 말을 안 듣고 시부모한테 맞서서 말대답, 말대꾸를 하고 이러면 그 사람 때문에 친정 부모가 수없는 욕을 얻어먹고, 결국은 거기서 ‘못된 며느리가 들어와서 집구석 망하게 되었다’고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信)하는 선지식이 계신 것은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인연 따라서 선지식을 믿는 것이니까. 그렇다 하드라도 어느 다른 회중(會中)에 가면 또 자기가 신하지 않는 어떤 선지식의 법문을 실지로 듣게 되거나 녹음을 통해서 듣게 된다 하드라도, 담담한 마음으로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대중과 같이 조용하니 들을 줄 안다면 그렇게 되어야 자기가 믿는 선지식을 욕되게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당장 얼굴빛이 변하면서 불평을 하고 툭 퉁명스럽게 일어나 가지고 나가버리고 ‘그 녹음 꺼버리라’고, 이렇다면 그 사람이 믿는 선지식이 그렇게 가리킨 것밖에는 안되거든.

그래서 참으로 ‘진실한 수행자냐, 아니냐?’의 구별은 무엇으로 하냐 하면 ‘평소에 그 사람이 마음이 비어 있느냐, 안 하냐?’
비어 있단 말은 ‘겸허하냐, 안 하냐?’ 하는, 바로 마음이 비어 있냐 안 하냐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수행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우리는 간단하게 알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선방에 걸망을 싸 짊어지고 가서 방부를 들이면 그 선방의 법도대로 따라서 한철을 지내는 것입니다.
설사 자기 마음에 안 맞는 점이 있을 수도 있고, 도저히 자기는 그렇게 하기 싫은 그러한 어떠한 법도가 있다 하드라도 그 선방에 지내는 한까지는, 해제날까지는 묵묵히 아주 겸허한 마음으로 그걸 따르고 적응을 할려고 노력을 하면서 지내면, 그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조금도 싫어한 마음 없이 겸허하게 따를려고 노력한 그 자체가 자기 마음속에 있는 마음에 그 뿔을 꺾는 것이고 모서리를 갖다가 둥글게 맨드는 작업이 된지라, 거기에서 자기의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며 자기의 수행력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이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마음에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다가 둥글게 맨드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 목적인데, 일체 중생을 제도할려면은 일체 중생을 내 품안에 안을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품안에 안을 수 없어 가지고 어떻게 그 중생을 제도를 하겠습니까?

유치원 선생이 유치원 어린이들을 잘 가리킬라면은 그 유치원 어린이 전체를 그 선생님이 다 마음, 가슴으로 이렇게 포섭을 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특별히 이뻐하고 또 어느 어린이는 미워서 아주 그냥 못견디고, 그러한 생각이 있어 가지고서는 훌륭한 유치원 선생님이 될 수가 없는 것처럼 일체 중생을 제도할려면은—일체 중생은 낱낱이 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업(業)이 있어서 한결같지를 않습니다.
마치 요리사가 훌륭한 요리사가 될라면 다섯 가지 맛을 다 다룰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짜고 맵고 시고 달고 한 그 여러 가지 종류의 조미료를 그 요리의 품목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구사를 해서 잘 맞춰야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자기의 생사(生死) 하나만 끊고서 편안하게 세세생생에 그러고만 말라고 하는 것은 소승(小乘)에 지나지 못하고, 참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할려면은 대승심(大乘心)을 발해야 하는데 그럴려면은 어느 회상(會上)에 가든지 그 회상의 법도(法度)에 적응하면서 원만하게 다 소화를 하고 한철을 아무 잡음이 없이 대중의 모범이 되도록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서 정진을 한.
또 그다음에 해제를 하고는 또 다른 회상에 가면은 또 그 회상에 가서도 자기 마음에 맞건 안 맞건 그 회상의 법도에 적응하면서 정말 대중의 모범이 되도록 이렇게 딱 하고.

그 회상에 모든 것이 마음에 맞으면 한철 더 지내서 더욱 좋은 것이고, 안 맞으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날지언정 그 회상에 몸담아 있는 동안에는 그 회상의 법도에 적응하고, 억지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기쁨으로 그것을 소화를 하면서 잘 정진을 하고 딱 해제를 하면 걸망을 싸 짊어지고 ‘참 한철, 내가 뜻깊게 한철을 잘 지냈다’ 이러한 보람을 느끼면서 떠나는 그것이 얼마나 참 거룩하고 훌륭한 수행자의 한 모습이냐 그 말이여.

그러한 것 하나를 못하는 그러한 사람이 어찌 그것이 수행자라 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자기가 안 믿는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이 나온다고 해서 그 얼굴빛에 울그락푸르락 불평을 터트리면서 풀쑥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버리고.
세상에 무슨 종자(種子)가, 그 사람은 자기의 은사(恩師)만을 욕먹게 할 뿐만이 아니고 자기가 믿는 선지식의 얼굴에다 똥칠을 하는 것이며 자기의 부모까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가 온당한 부모한테 그것을 교육을 받았으면 세상에 그럴 것이냐?’ 그 사람의 성씨와 족보까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행동 잘못해 가지고 부모 욕 얻어먹히고, 은사 스님 욕 얻어먹히고, 수계 스님 욕 얻어먹히고, 자기가 믿는 선지식까지 욕을 얻어먹히고, 심지어는 부처님까지 욕을 얻어먹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지나치게 말한 것 같지마는, 전국 선방에서 이러한 폐단이 곳곳이 있다고 하는 말을 내가 들었기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 편벽된 그 생각이 자기의 도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그러한 요소가 되고, 나중에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백 년 전에 이 몽산(蒙山) 스님도 간곡히 말씀을 하시기를, ‘이 회상에 와서 같이 참선을 하고자 방부를 들였거든, 세상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그 동안에 자기가 다른 데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다 버려버리고서 진실(眞實)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 그 선방의 규칙을 순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맨 먼저 강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 선방의 규칙을 다 같이 따라야만 그 대중의 마음이 통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철 같이 지내는 대중의 마음이 합심이 되지 않고서는 석 달 동안 온전히 장애 없이 지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에 가서는 인사(人事)로 왕래하는 것을 끊어버려라.
그 인사란 것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인사라 하는데, 세상에 살면서는 그 인사에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시부모에 대한 도리, 친정어머니에 대한 도리, 일가친척 대소가에 대한 도리, 또는 친구간에 대한 인사, 전부 그 크고 작은 인사를 다 상당히 그 인사를 다 닦을려면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또 육체의 건강상으로나 굉장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안 해 버리면 영판 그 사람은 사람 대접을 못 받습니다. ‘인사도 모른 것, 짐승만도 못한 것’ 이렇게 하고. 인사를 잘 알아서 그 적절하게 인사를 닦으면 가는 곳마다 그 사람은 대접을 받습니다. ‘참 저 사람은 예의가 바르고 참 훌륭하다. 참 얼마나 잘 배웠으면 저렇게 인사가 분명할까’ 인사만 잘 닦으면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도문(道門)에 들어와서 방부를 들이고 결제(結制)를 하면 그 인사를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초심(初心)』에서도 배웠겠지만은 ‘인사왕래를 끊어라’ 하는 구절이 있을 것입니다.
결제 중에 인사를 닦기로 하면 선방이 깨져버리다시피 되는 것입니다. ‘스님 생신이다, 노스님 제사다, 사숙님 뭐다, 누가 돌아가셨다’ 해 가지고 그 인사를 낱낱이—금년에 30명 대중이 지금 방부를 들였다 하는데, 그 30명 대중이 각기 인사 추리러 날마다 들랑거리기 시작하면 이거 선방이 아니라 이건 아사리판이 되고, 오합지졸이 되고, 이것은 선방이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옛날부터 결제 중에는 ‘부모나 누가 돌아가셨다’ 해서 전보(電報)나 부고(訃告)가 오드라도, 사무실에서 따악 사무실 스님만 알고서 딱 덮어놓고 해제날 그 부고장을 보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 그렇게 법도(法度)가 엄했는데, 이 근자에는 그 법도가 많이 완화가 되어 가지고 결제 중에도 부모나 은사 스님 돌아가시면 잠깐 다녀오기도 하고 모다 그렇게 허용이 되고는 있습니다마는, 그 원칙은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인생까지도 다 버려버리고 들어온 이 마당에 생사대사를 해결하기 전에는 어찌 그러한 인사를 닦을 수가 있으랴’ 이리해서 고인(古人)네들은 인사를 끊도록 그렇게 엄격히 규율을 정해 놨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먹고 입고 하는 일상 수용(受用)은 인연 따라서 하라’ 이랬습니다.
잘 먹으면 잘 먹고, 못 먹으면 못 먹고, 보리밥이면 보리밥, 좁쌀밥이면 좁쌀밥, 흰쌀밥이면 흰쌀밥, 찰밥이면 찰밥, 또 죽이면 죽, 그 절 형편 따라서 잘 먹으면 잘 먹은 대로 감사하게 먹고, 못 먹으면 못 먹은 대로 감사하게 먹고.
우리가 모든 것이 우리가 농사를 짓는 사람도 아니고 장사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모두가 다 신도의 피땀어린 그 시주(施主)의 물건으로 우리는 먹고 입고 이렇게 살고 있는데, 잘 먹으나 못 먹으나 전부가 다 그런 무섭고도 무서운 시주것인데, 어찌 꼭 끼니마다 잘 먹기를 바랠 수가 있으랴 이것입니다.

옛날 도인이 말씀하시기를 ‘확철대오를 하지 못하면은 한 방울의 물도 녹이기가 어려우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은 검박하게 먹고 검박하게 입고 사는 것이 시주에 은혜를 적게 입은 것이 되어서 나중에 갚기가 좋다 이것입니다. 너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그만큼 은혜가 깊어서, ‘은혜가 깊다’ 하는 말은 그만큼 부담이 크다 이것입니다. 부담이라 하는 것은 빚이라 말을 바꿔도 될 것입니다. 빚이 많으면 나중에 갚을려면은 참 힘이 들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검박하게 먹고 살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석 달 동안을 지내는 동안에, 뭐 하루에 세 때씩 공양(供養)을 해야 하고 때로는 간식도 들게 될 것입니다마는, 그런 것은 다 인연 따라서 하지 그러한 것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라. 신경을 쓰다 보면 화두를 놓치게 되고 쓸데없는 데에 정신을 쏟게 되면, 소모를 하게 되면은 공부하는 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잠자는 것은 이 사중의 규칙에 정해진 대로 그 수면 시간에 한해서만 자라.
그 수면 시간도 자기가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싶으면은—9시가 취침 시간이면 9시에, 10시가 취침 시간이면 10시에 다른 분과 같이 떠억 자리에 누웠다가 한 시간을 덜 자고 공부를 하고 싶으면, 옆에 분 잠들만 할 때 가만히 일어나서 앉아서 1시간이면 1시간, 30분이면 30분, 조용하게 정진을 하고 그리고서 또 졸음이 오면 가만히 누워서 잠을 자고, 이렇게 해서 수면 시간은 지정된 시간에 한해서 잠을 자라 이것입니다.(18분59초~37분54초)





(3/5)----------------

그리고 외출은 자기 멋대로 하지 말아라.
여기는 아마 목욕날에는 (대전) 유성(儒城)에 가서 목욕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럴 때 특별히 대중적으로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개인적으로 외출을 하지 말아라.
개인적으로 외출을 하면은 대중의 법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첫째는 자기의 정진에 크게 손해가 있을 것이고, 다른 분 정진하는 데 마음을 헷갈리게 하기 때문에 손해도 이중 삼중으로 손해고, 거기에다가 다른 스님네 정진하는 것을 공연히 방해치는 결과를 본의 아니게 가져오기 때문에 큰 죄까지 짓게 되기 때문에 외출은 대중의 허락 없이는, 대중적으로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하지 말아라. 조금 아프다고 약국에 가고 조금 아프다고 병원에 간다, 들랑달랑 들랑달랑.
여기에 모이신 분 가운데는 한 분도 그러신 분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여기 몽산 스님이 그렇게 이 말씀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한 조목, 한 조목을 이렇게 말씀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데 딴 데서 ‘공양을 하시러 오시라’ 한다고 해서 개별적으로 살짝 갔다오고 그러한 짓을 하지 말아라.


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하게 전에는 어떠한 경전이고 보지를 말아라.
경책을 보면 볼 때는 조금 시원한 것같이 느껴지지만 덮어버리면 또 마찬가지여. 아무리 답답하고 그러드라도 자기 그 본참공안 하나를 가지고 끝장을 보기로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한 공안을 참구(參究)해 나가야지, 조금 답답하다고 무슨 경전을 떠들어보고, 무슨 어록을 떠들어보고, 이렇게 습관을 들이면 영판 그 고비를 넘지 못하고 공부는 지지부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답답한 것이 그것이 공부가 한번 한 계단 올라가려고 하는 중요한 고비인데 그것을 참지를 못하고 그걸 그냥 얼른 무슨 책이나 뭘 봐 가지고 그 답답한 것을 좀 면할려고 하는 이러한 얍삽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해서는 큰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대중에서 이렇게 지내면은 큰 재(齋) 같은 것이 혹 들을 때가 있어서 대중적으로 『금강경』 같은 것을 독송하는 그러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혹 여기도 있을란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한 때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한 때는 같이 『금강경』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나, 그러한 때가 아니고서는 『금강경』이고 『화엄경』이고 『법화경』이고 일체 그런 경을 봐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참선하다가 조금 잘 공부가 안되고 산만하면 저 한쪽 구텡이 어디가 숨어서 자기가 평소에 읽던 경전을 갖다가 읽고 있고 그런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참선한 사람이 공부가 잘 안되면 또 기도를 해서 업장(業障)을 소멸한다 해 가지고 여러 철 선방으로 다니던 사람이 또 기도하러 쫓아다니는 또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참선이 처음부터서 그렇게 꿀물 마시듯이 그렇게 수월수월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해 나가다 보면은 답답하고 도저히 참고 견디기가 어려울 만큼 몸도 괴롭고, 마음도 괴롭고, 답답하고 터질라고 하고 이러한 때를 느낄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은 사실 대단히 중요한 고비이며 놓쳐서는 안 될, 버려버려서는 안 될 참 요긴한 고비인 것입니다. 그러한 고비를 선용기심(善用其心)해서, 그 마음을 잘 써서 그 고비를 지혜롭게 넘겨야 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우냐?

때로는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서 그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때로는 포행(布行)을 해서 그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그러면서도 그 자기의 화두(話頭)는 일분일초도 놓치지 아니하면서 포행과 단전호흡으로 잘 그 고비를 넘기면, 그 고비를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은 한결 정진이 수월하다 그 말이여.

어린아이를 기를 때에 어린아이가 그 머리가 따끈따끈하고 뭘 잘 안 먹고 설사를 하고 보채고 이런데,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풀쑥 그냥 한 치쯤 푹 커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안 하든 또 재롱도 피우게 되고, 애기를 길러 본 보살님네들은 아마 가늠이 가실 것입니다.
이 도(道)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산란하고 복잡하고 화두가 순일치 못하고 이러한 고비는 대단히 좋은 고비인 것입니다. 그 고비를 잘 넘겨야지 그렇다고 해서 그만둬 버리고 경을 본다든지 그만둬 버리고 기도를 한다든지 이래 가지고서는 종내 그 사람은 도를 이루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비를 잘 넘겨야 되는 것이여.


‘이렇게 법다웁게 3년을 여법(如法)하게 공부를 해서 만약 견성(見性)을 못한다면은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몽산 스님은 대중에게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이 뭉클한 말씀입니까, 얼마나 자신이 넘치는 말씀입니까, 여법하게 이렇게 3년을 해 가지고 안될 리가 없다고 하는 확실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출가해서 선방에 다니시기를 이 자리에 3년이 넘으신 분도 참 많고, 10년이 넘으신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아직도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했다면 이렇게 여법(如法)하게 안 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리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렇게 철저하게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오직 이렇게 한결같이 이를 갈아붙이고 하셨다면 반드시 견성통종을 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대기만성(大器晚成)으로 그렇게 해도 늦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 육조 스님의 다음 대를 이어받으신 남악회양 선사는 8년 만에 깨치셨거든요. 그러한 분이 이렇게 여법하게 안 하실 리가 없거든. 그래도 그분은 8년이 걸렸어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육조 스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남악회양 선사가 콱! 맥혀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조금 있다가 하택신회(荷澤神會)라는 스님이 육조 스님 앞에 와서 절을 하니까, 육조 스님이 물으시기를,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으며 밝기로는 해보다도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위로는 하늘을 괴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며,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으니 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물으니까, 하택신회 스님이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이 하택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주 참 그렇게 잘 대답할 수가 없는 것 같죠.
그런데 육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앞으로 공부를 해서 깨친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자(知解種子) 밖에는 못되겠구나』 지해종자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지는 그런 강사나 학자 밖에는 못되겄다 이것입니다. 큰 도인은 되기는 벌써 틀렸구나,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악회양 스님은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 육조 스님이 물은데 대해서 콱! 맥혀 가지고 뭐라고 대답할 바를 모르고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물러 나와서,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그 중치가 아주 맥히다시피 콱! 맥힌 그 생각이, 밥을 먹어도 그 생각이 안 없어지고, 똥을 눠도 그 생각이 안 없어지고, 일을 해도 그 생각이 안 없어지고, 앉으나 서나 눈을 감으나 뜨나 ‘도대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육조 스님이 물은 그 물음이 탁! 와서 가슴에 착 백혀 가지고는 떨어지지를 안 해.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사흘을 그렇게 지내고,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두 달을 그렇게 지내고, 1년 이태 3년, 8년 만에사 툭 터지는데, 확철대오를 해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를 갔습니다. 『스님 제가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어디 확철대오를 했으면 일러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설사 일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하고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남악회양 선사가 대답하기를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입니다마는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할 것이 있느냐?’ 하고 육조 스님이 물으니까, ‘닦아 증할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더럽혀진 것은 없습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오역여시(吾亦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고 그렇게 쾌히 인가(印可)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活句參禪) 도리입니다.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 제불(諸佛)의 본원(本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들어 가는 공부가 아니여. 이것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해서 아무짝에도 못쓰는 것입니다. 강원(講院)에서 경을 배우되 그러한 사구(死句)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부득이해서 초학자들에게 불법(佛法)이 무엇이며, 불교의 교리가 무엇인가? 그 윤곽이나마 가리켜 주어야, ‘아하, 불법이라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이로구나. 그렇게 깊고 깊은 것이로구나’
그렇게 껍데기라도 좀 알으켜 줘야, 그래 가지고 참선을 해야 참선을 하는 데에 신심이 나고 신명이 나고, 참 큰 포부를 가지고 목숨을 바치고 도를 닦을 그러한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 부득이 강원에서 경을 가리켜야만 되고, 그렇기는 그렇습니다마는 그 강원에서 글만 배우고 자기가 인자 불법을 잘 알았다고 그것으로써 자기의 살림을 살고 말아 버린다면 그것은 참 옳게 불법을 배운 것이 아니고, 깨달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배웠으면은 그 사교입선(捨敎入禪), 경을 다 버려버리고 완전히 빈 마음이 되어 가지고 선방에 들어와서 진짜 활구참선으로 들어가서 확철대오를 해야만 참 옳게 불법을 배워서 닦아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에 보니까, 그 강원을 졸업하고 또 그렇게 사교입선한 그러한 수좌들이 많은 것으로 봐서 또 그 동안에 이 세등선원에는 각 선원에서 금방 나온 아주 어린 선객들이 모다 와 가지고 방부를 들이고, 수없이 많은 선객 그 수좌들이 지내갔는데 대단히 참 기특하고 갸륵하고 고마울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구참(久參) 스님네들이 와서 공부를 하신 것도 그 감사하고 좋고, 어간(御間)에 구참 스님네가 앉아서 모범을 보여주고 대단히 참 든든하고 좋지만, 금방 강원에서 나온 젊은 어린 수좌들이 와서 하는 것도 너무너무 기특하고 귀엽고 고마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37분55초~54분17초)





(4/5)----------------

그러기 위해서 이 세등 스님은 평생에 그 탑골승방에서 그 은사 스님이 그 어렵게 불공(佛供)도 하고 재(齋)도 지내고 해서 모인 돈과, 당신이 또 그렇게 해서 또 여러 상좌(上佐)들과 그렇게 모인 그 돈을 한푼도 딴 데 쓰지 아니하고 모였다가 이러한 선방을 여기다 지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팔도에 청풍납자(淸風衲子)들이 여기 와서 공부하도록 이렇게 했습니다.
너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신경을 써 가지고 참 본의 아니게 병환이 나서 여러 해째 고생을 하고 계십니다마는 또 그 상좌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서 스님이 직접 하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이렇게 외호(外護)를 잘하고 있어서 참 그렇게 고마울 도리가 없습니다. 그 공덕이 얼마나 장한지 바닷물로 먹을 갈아서 그 글을 다 쓴다고 해도 바닷물이 마를 때까지 그 공덕을 찬양해서 책으로 맨든다 해도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력(願力)으로 해서 우리 선객들이 이렇게 참 10년 이상 내려오면서 결제를 겨울 결제, 여름 결제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해마다 좋은 선객들이 이렇게 나오고, 또 다른 데로 가고 또 새로 오고, 여기서 지낸 분들이 다른 데 가서 공부하다 또 와서 공부하고, 이게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하는 것입니다.
삼천년 전에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다고 하지만, 중생 발심시키기 위해서 열반상을 보이신 것뿐이지, 부처님은 오시고 가시고 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상주불멸(常住不滅)인 것입니다.

신심 있는 원력 있는 이 스님이나 보살이나 불제자가 이렇게 절을 짓고 선방을 지으면 바로—여기에 등상불(等像佛)이 모셔져 있지마는, 등상불은 어리석은 근기에 맞추어서 등상불을 모셔놨을 뿐, 실제로 살아 계신 분이 살아 계신 관세음보살, 살아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이 도량에 항상 상주(常住)해 계신 것입니다.
위패(位牌)를 종이나 나무로 깎아서 모셔 놓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혼이 분명히 거기에 깃들여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신주(神主)라 그러고 위패라 그러듯이 이 도량에는 살아 계신 우리 불보살(佛菩薩)이 상주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량에 들어오면 모두가 다 엄숙해지고 경건해지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선방(禪房)은 설사 이 건물이 오래 되어서 낡아서 부서지드라도, 또 어떠한 천지재변(天地災變)이 일어나서 눈에 볼 수 있는 물질로 된 이 건물은 부서진다 하드라도, 금방 현재 있는 건물보다도 훨씬 더 좋은 선방이 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최초에 이 절을 지은 세등(世燈) 스님의 원력(願力)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상좌와 제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점점 더 좋은 선방을 짓고 또 운영해 나갈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도량에서 한철만이라도 정진을 하고 가신 분은 설사 이 도량에서 확철대오를 못했다 하드라도, 어느 회상에 가서 어떻게 가서라도 기어코 대도를 성취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절을 지은 세등 스님의 원력이 ‘이 절에 와서 단 한철이라도 지내신 분은 반드시 대도(大道) 성취를 하게 되옵소사’ 하는 그러한 원력으로 이 절을 지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에 와서 공부하신 여러 청풍납자들은 이를 악물고 밤잠을 패서 정진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세등 스님은 지금 여러 해 병고와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 같으면 벌써 저 세상에 갔을 것입니다마는, 본래 선객이고 그렇게 몸이 아프면서도 일분일초도 화두를 놓치지 않고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우리가 등한히 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디 앞으로 삼복성염(三伏盛炎)이 돌아와서 참 더운 날이 올 것입니다마는 더위가 문제겠습니까? 생사가 우리의 코앞에 와서 와 있는데.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일분일초도 우리를 놓치지 않고 계속 뒤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무상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를 이루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오직해야 ‘생사(生死)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생사는 하루 동안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허, 너는 아직 발심을 못했구나”

그다음 제자가 “생사는 한 끼니, 밥 한 그릇 먹는 사이에도 올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너는 공부를 발심을 못했구나”

다음 제자가 대답하기를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는 데에도 있습니다”
“너는 공부를 할 만하구나” 이러셨습니다.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숨 들어마시면서 ‘이-’ 해 가지고, 내쉬면서 ‘뭣고?~~~’
이 호흡과 화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호흡을 잘해야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호흡을 옳게 못하면 몸이 안정이 안 되고,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몸이 가볍지를 못하고, 정신이 맑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잘해야 하는데, 호흡은 별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가 볼록하게 맨들기만 하면 됩니다. 바람이 거기까지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들어마실 때 배를 볼록하게만 맨들어요, 그냥 무조건하고.
그러고 숨을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차츰 홀쪽하게, 뱃가죽이 등허리에 가 닿도록 배를 뒤로 잡아다닙니다. 홀쪽하게 맨들어요.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서 홀쪽했던 배가 차츰차츰차츰 이렇게 살아나게 맨드는 것입니다.

그거 뭐 국민학교 학생도 하라고 하면 배 운동하듯이, 숨을 들어마시면서 배를 쑤욱 내밀고, 숨을 내쉬면서 배를 홀쪽하게 맨들고. 그거 국민학교 학생도 할 수 있고, 유치원 어린이도 할 수 있고, 팔십 먹은 할머니도 할 수 있고, 누구라도 할 수가 있어. 그것이 왜 어렵다고 생각하냐 그 말이여. 당장 그렇게 해 보시라 그 말이여.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쑤욱 들어마시면서 배가 불룩하니 이렇게 배를 부르게 맨들아. 또 숨을 내쉴 때에는 배를 차츰차츰 홀쪽해서 등허리가 딱 붙게 맨들어라 그 말이여.

그렇게 하지 않고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이리해서 차츰차츰 해서 그놈을 저 배꼽 밑에까지 밀어넣을려고 하니까, 오목가슴에서 딱! 걸려 갖고는 안 내려가거든. 그러니까 그놈을 억지로 할라 하니까 가슴은 답답하고 나중에는 숨이 맥혀가지고 들어마시지도 못하고 내쉬지도 못하고, 답답해 가지고는 가슴에 멍우리가 생겨 갖고 밥도 먹어도 소화도 안 된다 그 말이여. 그러니 잘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왜 코로 들어마셔 갖고 아랫배까지 밀어넣을려고 하냐 그 말이여. 절대로 안 내려갑니다. 왜 그러냐?
허파는 윗가슴에가 있고, 허파 밑에는 가로막 횡경막이 있어 가지고 그 밑에까지는 세상없이 밀어넣을려고 해도 안 내려 갑니다. 그 밑에는 소장 대장이 있어 똥만 들어 있는데, 어떻게 들어마신 호흡이 허파를 뚫고 똥창자로 들어가겠습니까? 그 잘못하기 때문에 그러거든.

‘들어마신 호흡을 아랫배까지 밀어넣는다’ 생각하지 말고, 숨이야 코로 들어마시니까 허파까지 밖에 안 가니까 그런 것은 생각지도 말고, 들어마시면서 배만 볼록하게만 맨들아, 그냥 무조건하고. 배를 볼록하게 아랫배를 맨들으라 말이여. 가슴은 고대로 놔둔 채.
그리고 볼록해졌으면 내쉴 때는 무조건하고 배를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서 등허리가 붙겄게만 맨들으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볼록해지고 내쉬면 홀쪽해지고, 배만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그렇게만 하라 그 말이여.

그러면은 뱃속에 뭉쳤던 똥뭉텡이도 풀려져서 술술 똥도 다 잘 내려가게 되고, 또 이 아랫배에 모여 있던 몸안에 있는 피의 삼분의 일 가량의 피가 배 안에 창자 사이사이에 모다 우두커니 잠자고 있는데, 배를 불룩하게 맨드니까 그때 그 피가 쫓겨나가 가지고 심장으로 돌아가서 폐를 거쳐서 나오면서 말간 피, 영양가를 잔뜩 싣고 돌아온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신체 각 부(腑)에 다 배급을 해 주고, 산소와 영양을 공급을 해 주고.

그리고 배를 홀쪽하니 맨들면 압력이 풀리니까 쏵 피가 모였다가, 또 배를 불룩하니 맨들면 또 압력이 가해지니까 또 쏵 쫓겨 들어가서 심장으로 들어가고 해서, 돌아갈 때에는 노폐물을 거두어 가지고 가서 허파를 지나는 과정에서 밖으로 다 배설해 버리고, 또 다시 압력을 풀어지면 쏵 모이고, 모여 올 때에는 산소와 영양가를 또 싣고 와서 배급을 해주고 그러니까 몸안에 노폐물이 잠시도 멎구어 있을 겨를이 없어. 그래서 항시 배 안과 사지백체(四肢百體), 오장육부가 항시 깨끗해.

집안 구석구석이 소지를 하고 쓰레기를 갖다 치운 집안은 이리 봐도 깨끗하고 저리 봐도 깨끗한데, 소지를 안 하고 가만히 몇 날 며칠을 놔두면은 부엌을 봐도 쓰레기가 담뿍, 뜰에를 나가도 쓰레기가 잔뜩, 뒤안을 돌아가도 쓰레기가 잔뜩, 집안이 온통 쓰레기가 쌓여 가지고는 볼 수가 없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안 하는 사람의 오장육부는 쓰레기 청소를 안 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폐물이 구석구석이 쌓여 가지고 그래서 그놈이 오래되면은 혈액순환이 잘 안되니까 거기에서 혈압도 올라가고, 중풍도 걸리고, 그리고 신경통도 생기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전호흡을 항상 평생 하는 사람은 몸이 항상 깨끗하지요.

‘그래 단전호흡이 좋다니까 나도 이제 해야겠다’ 해 가지고, 배가 터지라고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얼굴이 벌걸 때까지 참았다가, 숨을 오래 쉬면 좋다고 어디서 들었던지 그래 가지고는 해서 나중에는 더 큰 병이 생깁니다.
그래 가지고는 가만 놔두면은 쓰레기가 쌓이거나 말거나 70세까지는 살텐데, 단전호흡 잘못해 가지고 50도 못 되어 가지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욕득장생(欲得長生)이라가 반치요절(反致夭折)이라’ 하는 말이 도가(道家)의 서적에 있습니다. 욕득장생(欲得長生) 장생을 얻고자 하다가 반치요절(反致夭折)—요절(夭折)은 일찍 죽는단 말이여, 요절이라는 게—요절을 이룬다 그럽니다. 반치요절이다.

이 단전호흡이 참 좋은 것이지만, 그렇게 억지로 갑작스럽게—서서히 해서 해 나가야 할텐데, 그 좋다 하니까는 그냥 막 앉은자리에서 바닥을 볼라고 억지로 하다가 그냥 뭣이 핏대가 툭 터져 갖고는 큰일나거든.

인삼 녹용이 좋다니까, 어떤 사람이 돈을 좀 벌었던지 인삼 녹용이 좋다니까 인삼 녹용을 몇 냥을 떠다가 그냥 한목 진하게 대려 가지고 그놈을 그냥 매일 잔뜩 먹고 혈압이 그냥 머리끝까지 올라가 가지고는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죽어버린 사람 많습니다.
그 ‘보약이 좋다’ 한 것은 사실이나 체질과 연령과 그 여러 가지를 다 그 훌륭한 의사한테 가서 진맥을 해 가지고, 혈압도 조사하고 또 그 사람의 체질도 조사하고, 그래 가지고는 그놈에 맞추어서 다른 약과 잘 배합을 해서 가미를 해 가지고, 차츰차츰 이렇게 해서 시험을 하면서 혈압이 오른가 안 오른가 증하며 이렇게 먹어야 할텐데, 그 좋다고 해서 그냥 녹용하고 인삼하고 넣어서 한 솥 다려 가지고는 그냥 막 뜨끈뜨끈한 놈을 바가지로 떠서 막 마셔, 그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단전호흡이 좋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서는 ‘에잇, 그것 단전호흡 아무짝에도 못쓸 것이라’고. 가는 곳마다 그 소리를 선전하고 다니거든, ‘단전호흡하면 못쓴다’고. ‘내가 그것 해 가지고 골치 아퍼서 혼났다. 또 소화가 안 되어 가지고 혼났다’ 이러고 돌아다니거든.

뭣을 하든지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지혜롭게 해야 하고, 약도 지혜롭게 먹어야 하고, 사업도 역시 지혜롭게 해야지, 뭣이 좋다 하니까는 어리석게 해 가지고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소가 뒷발로 쥐 잡는 수가 혹 있다고는 하나, 그러한 것을 보고 소를 시켜서 날마다 뒷발로 쥐 잡으라고 한다고 잡어지겠습니까 그게.(54분18초~1시간10분52초)





(5/5)----------------

참선이라 하는 것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되는 것이 아니어요. 기초부터서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법, 또 호흡을 바르게 하는 법, 그것을 기초를 잘 익혀 가지고 화두를 들되, 화두도 옳게 들어 가야 하거든.

초발심(初發心)에 말뚝신심이 나 가지고 ‘화두는 어쨌던지 의심을 간절히 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간절히 한번 해서 내가 세상에 그놈의 거, 기어코 내가 하고야만 말겠다’ 해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 이마빡을 찡그리면서, 옛날 어떤 사람은 ‘죽을 사(死)’ 자를 이마빡에다 써놓고 했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도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철에 아주 바닥을 보리라’ 그래 가지고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마빡에다 어떻게 힘을 주고 했던지, 나중에는 며칠 안 가서 얼굴이 뻘겋고 골이 떠럭떠럭해 가지고 나중에는 요리 해도 골이 빠질라고 하고, 요리 해도 골이 빠질라고 하고, 모가지가 뻣뻣해 가지고는 눈이 벌게. 세상에 그러한 어리석은 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달마(達摩) 스님이 『혈맥론(血脈論)』에 말씀을 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다’

참선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급하냐 하면은 스승을 찾는 것이 제일 급한 것이다. 나를 정말 바르게 가리켜 줄 수 있는 바른 스승을 찾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그러한 바른 스승을 만나기만 해서 목숨 바쳐서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은 영낙없이 깨닫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밤잠 안 자는 게 아니라, 밥을 안 먹고, 밤잠을 안 자고, 말도 안 하고, 그래 가지고 옆구리 땅에 대지 아니하고, 막 ‘죽을 사(死)’ 자를 이마빡에다 쓸 게 아니라 몸뚱이 전체에다 ‘죽을 사(死)’ 자를 붙여 가지고 용맹정진을 한다 해도 마치 그 사람은 미치거나 병들어 죽거나,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해야, 그래 가지고 그렇게 발심(發心)을 했다면은 그 사람은 영낙없지만, 스승을 찾지 못하고 그렇게 분심만 앞섰다면은 그건 갈 곳이 없어요. 병밖엔 날 것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은 미치고, 그 두 가지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달마혈맥론(達摩血脈論)』에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도 있기가 어렵다’ 이것입니다.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은 없으나, 바른 스승을 만나야 바르게 공부하는 법을 가리켜 주기 때문에—여기서 서울을 갈라면은 길을 바로 알고 가야지, 어디가 서울이 붙은 중도 모르고 개나리 봇짐만 싸고 죽으라고 달음박질을 하면 지가 마지막 가다보면 어딘가 바닷가에 도착하겠지요. 저 남해나 서해 아니면은 동해에 도달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장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첫째, 서울을 갈라면 서울이 어디가 붙어 있는 것부텀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럴라면은 그 서울을 잘 아는, 그 서울 길을 잘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서울 어디로 가요?’ 그러면 ‘저리 가시오’ 아지도 못하면서 저 동쪽을 가르켜 줬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서울 잘 아는 사람의, 길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서울을 가장 빨리 바르게 갈 수가 있듯이, 도(道)를 통하기 위해서 참선(參禪)을 할라면 첫째, 참선 잘 아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올바르게 지도를 받어야 그 사람은 미치지도 아니하고, 무서운 병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대도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등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신 분은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잘 들으시고, 정성껏 잘 들으시면 반드시 공부 잘해 나가는 그 요령을 터득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학자가 이 절에 처음 와서 방부를 들인 것은 대단히 뜻이 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구참 스님네라도 정말 올바른 선지식을 아직 만나지 못하셨다면은 녹음 법문을 잘 들으시면 그동안에 자기 자신이 공부해 나온 것과 비교를 해 보면 ‘아하, 이 점이 내가 잘못되었구나. 이 점은 내가 이렇게 해 나가야겠구나’ 그래서 마음으로 참으로 깨달은 바가 많고 공부를 바로잡아 나갈 수가 있어서, 그동안에 참 이리저리 애도 많이 써봤지마는 이 절에서 한철 지내는 동안에 확고한 공부에 요령을 터득을 하고, 득력(得力)을 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해서 구참 스님이 오신 것도 참 환영을 하고 대단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임간무사납몽두(林間無事衲蒙頭)하고  영야청소만무휴(永夜淸霄萬務休)로다
나무~아미타불~
강월명명자상조(江月明明自相照)헌디  송풍부단냉표표(松風不斷冷飄飄)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임간무사납몽두(林間無事衲蒙頭)하고  영야청소만무휴(永夜淸霄萬務休)라.
숲속에 임간(林間)에 일이 없이, 임간이란 게 꼭 저 설악산이나 지리산, 태백산 거기만 임간이 아니라, 화두 들고 참선하면 도회지 한가운데도 임간(林間)이 되는 것입니다. 장바닥도 임간이 되는 것입니다.
임간에 일이 없으니, 아까 모든 세속 인연과 인사를 끊어버렸으니 무슨 일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일이 없이 납몽두(衲蒙頭)여. 누데기, 회색 먹물 누데기와 법복을 몸에 걸쳤다 그 말이여.

영야청소만무휴(永夜淸霄萬務休)여. 긴 밤 맑은 밤하늘에 만 가지 일이 다 쉬어져버렸다 그 말이여. 모든 세속 인연과 오욕락과 탐진치 삼독심과 명예, 권리 백만 가지가 다 쉬어버렸어. 할 일이 무엇이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뿐이다 그 말이여. ‘이뭣고?~~~’ 마당에 나가서 왔다갔다 포행을 해도 무슨 일이 있느냐 그 말이여.

강월명명자상조(江月明明自相照)헌디, 저 강에 비치는 달은 밝고 밝아서 스스로 비추는데, 하늘에 뜬 달빛이 강에 비추고, 강물 속에 있는 달빛이 다시 허공으로 반사해서 서로 비추고 비추는데,
송풍부단냉표표(松風不斷冷飄飄)로구나. 소나무 가지를 스쳐 가는 그 솔바람은 끊임없이 차웁고 표표(飄飄)하구나.

밤 공기 속에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한다든지, 떠억 방석을 펴고 정진을 할 때 귓가에 들리는 것은 솔가지에 스쳐 가는 바람소리뿐인데, 그 정진한 사람만이—그거 쓸쓸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 할까, 편안하다고 할까, 성성하다고 할까,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디,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고 이 상쾌하고 쓸쓸하고 편안하고 그 뭐라고 그러한 뜻이 전부가 포함된 그러한 기분이, 기상, 기분, 그러한 상태에서 터억 정진을 한 그 경지는 말로서도 표현할 수가 없고, 그런 경계는 돈으로도 살 수가 없어.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고, 인간 세상에 자기 몸뚱이가 있는 것조차도 느끼지도 못하고, 이렇게 한철을 잘 단속을 해서 석 달이 언제 어떻게 지내간 중 모르게 더워도 더운 중도 모르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보살님네들도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정진에 노력을 해 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아이고, 집에선 애들 떠들어 쌓고 일이 복잡하고 언제 그런 앉을 겨를이 있나요’
그러시겠지만 일하면서, 차 타고 가면서, 걸어가면서, 일 보고 오시면서, 걸음걸음이 생각 생각이 돌이켜서 화두를 드신다면 내나 마찬가집니다. 앉아 있을 때만 고렇게 되고, 서서 일할 때는 간 곳이 없고 그런 것은 참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앉았거나 섰거나 마찬가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일여(一如)해야만 하는데 처음부터 일여한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놓치고, 놓치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린 것은 전혀 탓할 것이 없고 챙기기만 부지런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해 가다 보면은 어느 날엔가는 챙기지 안 해도 저절로 터억 되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묘(妙)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하는 것이지, 누가 처음부터서 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안 되는 놈을 되도록 할라고 애쓰는 것, 그 자체가 수행이고 고행이고 그것이 훌륭한 것이지, 처음부터서 누구나 된다면은 그걸 뭘 고행이라 하고, 수행이라 하고, 뭐 도 닦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안 되어도 보통 안 되는 게 아니라 되게 안 되어야, 그놈을 되도록 맨들어야 거기에서 도력이 생기고, 거기에서 깨달라야 참으로 큰 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자포자기하시지 말고, 안 될수록에 ‘아! 내가 크게 한번 큰 몫을 볼라고 그런가 보구나’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말이 많지마는 진즉부터 그만하라고 이 기계가 울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만 끝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한철이 일생 동안에 제일 인상이 깊고 잊을 수 없는 좋은 한철이 되시기를 빌며 말씀을 마치고, 내가 꼭 하고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내가 입으로 못하고 이 주장자(柱杖子)에게 당부를 하고자 합니다.(1시간10분52초~1시간25분59초)(끝)





[법문 내용]

(게송)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 / 부처님으로부터 33대 중국 혜능선사까지 전한 법등(法燈), 그리고 한국에 경허, 만공, 전강 스님까지 77대를 이어받았다 /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 공부가 잘 안될때 그고비를 잘 넘겨야, 선용기심(善用其心) / 육조 스님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의 물음에 남악회양 선사가 8년 만에 깨침 / 사교입선(捨敎入禪).

세등선원 창건에 대한 말씀. 창건주 세등 스님의 원력 ‘이 절에 와서 단 한철이라도 지내신 분은 반드시 대도(大道) 성취를 하게 되옵소사’ / 부처님 말씀 “생사(生死)가 어디에 있느냐?” / 단전호흡(丹田呼吸) 요령 /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 (게송)임간무사납몽두(林間無事衲蒙頭)~.


부처님의 그 신령스러운 빛을 발하는 그 법(法)의 등(燈)이 온 세상 육도법계에 조그만한 땅도 남음이 없이 다 환하게 밝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상징해서 초파일에 또 연등과 주름등과 팔모등, 형형색색의 등불을 모든 신남신녀의 정성으로 절마다 거리마다 다 밝히는 뜻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 법등이 어떻게 해서 밝혀지냐 하면은 이렇게 세등선원(世燈禪院)을 지어서 팔도에 청풍납자(淸風衲子)가 모여서 도를 닦고 또 신남신녀(信男信女)가 이렇게 모여서 법을 듣고 또 백일기도에 동참을 해서 여러분 가정에서도 이 선방에서 정진하시는 스님네와 똑같은 마음으로 조석으로 정진을 하고, 생활 속에서 정진을 하고, ‘이뭣고?~~~’ 하면서,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해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 돌이키고 또 잡드리를 하는 가운데에 등불은 차츰차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이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마음에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다가 둥글게 맨드는 것입니다.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하게 전에는 어떠한 경전이고 보지를 말아라.
경책을 보면 볼 때는 조금 시원한 것같이 느껴지지만 덮어버리면 또 마찬가지여. 아무리 답답하고 그러드라도 자기 그 본참공안 하나를 가지고 끝장을 보기로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한 공안을 참구(參究)해 나가야지, 조금 답답하다고 무슨 경전을 떠들어보고, 무슨 어록을 떠들어보고, 이렇게 습관을 들이면 영판 그 고비를 넘지 못하고 공부는 지지부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답답한 것이 그것이 공부가 한번 한 계단 올라가려고 하는 중요한 고비인데 그것을 참지를 못하고 그걸 그냥 얼른 무슨 책이나 뭘 봐 가지고 그 답답한 것을 좀 면할려고 하는 이러한 얍삽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해서는 큰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참선한 사람이 공부가 영 안되는 때를 느낄 수가 있는데, 그러한 고비를 선용기심(善用其心)해서, 그 마음을 잘 써서 그 고비를 지혜롭게 넘겨야 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우냐?
때로는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서 그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때로는 포행(布行)을 해서 그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그러면서도 그 자기의 화두(話頭)는 일분일초도 놓치지 아니하면서 포행과 단전호흡으로 잘 그 고비를 넘기면, 그 고비를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은 한결 정진이 수월하다 그 말이여.

이 세등선원 도량에서 한철만이라도 정진을 하고 가신 분은 설사 이 도량에서 확철대오를 못했다 하드라도, 어느 회상에 가서 어떻게 가서라도 기어코 대도를 성취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절을 지은 세등 스님의 원력이 ‘이 절에 와서 단 한철이라도 지내신 분은 반드시 대도(大道) 성취를 하게 되옵소사’ 하는 그러한 원력으로 이 절을 지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에 와서 공부하신 여러 청풍납자들은 이를 악물고 밤잠을 패서 정진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참선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급하냐 하면은 스승을 찾는 것이 제일 급한 것이다. 나를 정말 바르게 가리켜 줄 수 있는 바른 스승을 찾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그러한 바른 스승을 만나기만 해서 목숨 바쳐서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은 영낙없이 깨닫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 세등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신 분은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잘 들으시고, 정성껏 잘 들으시면 반드시 공부 잘해 나가는 그 요령을 터득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 처음부터서 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안 되는 놈을 되도록 할라고 애쓰는 것, 그 자체가 수행이고 고행이고 그것이 훌륭한 것이지, 처음부터서 누구나 된다면은 그걸 뭘 고행이라 하고, 수행이라 하고, 뭐 도 닦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안 되어도 보통 안 되는 게 아니라 되게 안 되어야, 그놈을 되도록 맨들어야 거기에서 도력이 생기고, 거기에서 깨달라야 참으로 큰 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자포자기하시지 말고, 안 될수록에 ‘아! 내가 크게 한번 큰 몫을 볼라고 그런가 보구나’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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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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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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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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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52)—1984(갑자)년 동안거 결제 법어(1984.10.17.음)(62분)

 

(1/3) 약 22분.

 

(2/3) 약 19분.

 

(3/3) 약 22분.


(1/3)----------------

안광삭파삼천계(眼光爍破三千界)헌디  이유동정벽모한(裏有瞳睛碧眸寒)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흉차쇄락혼망세(胸次洒落渾忘世)헌디  중유뇌정기우신(中有雷霆氣宇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안광삭파삼천계(眼光爍破三千界)헌디  이유동정벽모한(裏有瞳睛碧眸寒)이로구나
눈빛이 빛나서 삼천계를 비추었는데 그 가운데에 눈동자가 푸르고 차웁구나.

흉차쇄락혼망세(胸次洒落渾忘世)한데, 가슴속은 물 뿌려서 쓸어 놓은 것처럼 쇠락헌디, 온 세상을 다 잊어버렸어.
중유뇌정기우신(中有雷霆氣宇新)이여. 그 가운데에는 우레처럼, 하늘에 우레가 울린 뒤에 그 기상이 새롭고 새롭다.

갑자년 윤10월 17일, 이 세등선원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 대중과 대전 인근에 여러 사찰에 납자(衲子)들이 그리고 사부대중이 동안거 결제 법요식을 위해서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산승(山僧)이 이 법상에 올라와서 주장자를 들고 이 운집한 사부대중에 그 모습과 눈매를 살펴보니 그 눈빛이 살아서 삼천세계를 비추고 있다 그 말이여. 그 눈동자는 사못 푸르다 못해서 차운 기운이 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슴속에는 쇄락(灑落)해서 온 세상에 영욕득실(榮辱得失)과 우비고뇌(憂悲苦惱)와 인간에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온통 다 잊어버렸어. 먹구름 속에 번개가 치고 벼락 친 뒤에 한바탕 장마비가 쏟아진 뒤처럼 산천초목은 생기가 발랄하고 그 공기는 맑고 신선한 그러한 모습이다 그 말이여.

삼천년 전에 우리 부처님께서 출세(出世)하셔 가지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백만억 대중을 앞에 놓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하신 그때 그 분위기가 이 도량에 엄숙하고 경건하게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나는 느끼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대선사(田岡大禪師)에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우리는 경청했습니다. 10년 전에 열반(涅槃)하셨지만 우리는 전강선사의 법문을 살아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 육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무상(無常)한 이 몸뚱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얇은 가죽 속에는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으로 가득차 있건마는, 그 무상하고 추악한 이 몸뚱이 속에 영원히 생사(生死)가 없는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도 견성성불하시기 이전에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중생(衆生)에 불과했습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진즉 발심(發心) 수행해서 이 도리를 깨달라서 열반의 세계를 살고 계십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의 인연이 깊어서 이 오탁악세(五濁惡世) 말세(末世)에 태어났건마는 위없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몸뚱이가 정말 무상한 줄 뼈아프게 느낀다면 우리는 일분일초도 방일(放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망상(妄想) 퍼일어나는 것과 혼침(昏沈), 졸음이 오는 거, 이 두 가지를 들 수가 있는데 입선(入禪)하고 정진하지 아니할 때는, 방선(放禪) 중에 그저 잡담을 하거나 옆에 사람하고 뭐 이야기를 하며 그럭저럭 지낼 때에는 별로 그렇게 망상이 난 중도 모르고 졸음이 온 중도 모르는데, 입선 죽비(竹篦)만 치면 5분도 못 되어서 꾸벅꾸벅 졸음이 온다.

참선을 하지 아니할 때에는 망상이 일어난지 안 일어난지 별로 그 망상 때문에 괴로움을 받거나 그런 걸 모르는데, 참선만 시작하면 뭔 놈의 망상이, 지내간 얘기로부터서 현재 닥치고 있는 일부터서 미래의 일까지 뒤범벅이 들어 가지고 번갈라 퍼일어나는데 걷잡을 수가 없어.
겨우 망상이 퍼일어나다가 가라앉을만 하면은 혼침이 오고, 실컷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 좀 채릴만 하면 또 망상이 일어나고 두 놈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넘나들면서 괴롭히는데, 그놈만 없으면 얼마나 정진하기가 좋겠냐 그 말이여.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다면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지내가면서 그렇게 성성하고 그 몸도 가볍고 조금도 괴로울 것이 없고 힘이 안 드는데.
번뇌와 망상과 혼침이 뒤범벅이 되어 가지고 아무리 정신을 좀 채릴려고 해도 눈 뚜껑은 천근(千斤)이나 되게 무겁게 내려 누르고, 허리를 펴면 도로 탁 꼬부라지고, 허리를 펴면 탁 꼬부라지고.
무량겁을 그 혼침과 산란(散亂) 그놈 때문에 우리는 정진을 정진다웁게 해보지 못하고,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다겁장도(多劫障道)에 수마막대(睡魔莫大)다. 다겁에 도를 가로막는 것이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수마(睡魔), 그놈은 실컷 자 주면 인자는 안 올랑가 해서 실컷 며칠을 자고 보니까 나중에는 밥 먹을 때도 잠 속에서 밥을 먹고, 그놈을 굴복을 받기 위해서 잠을 안 자고 며칠을 버텨 놓으면 그래도 소용이 없고. 마음껏 자도록 실컷 맡겨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안 자고 이놈을 오기로 두드려 잡을려고 해도 안되고,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보편적인 시간을 짤 때에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도록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서 도량석(道場釋)을 하고 예불(禮佛)을 젓숫고 정진을 하도록 해 놓으셨지만, 자기가 분심(憤心)이 나서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할 생각이 있으면 대중은 9시에 자더라도 가만히 일어나서 한 시간씩을 더 정진할 수 있고, 또 두 시간씩을 정진을 하고서 10시 11시쯤 또 누울 수도 있고.

그리고 대중적으로는 3시에 일어나지만, 자기는 한 2시쯤 일어나 가지고 한 시간씩을 더 정진할 수도 있고 그런데 옆에 자는 분들에 방해가 되도록 해서는 아니되고, 어쨌든지 자기가 덜 자고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정진할라면 조용하게 해야 한다 그 말이여.
정진한답시고 상(相)을 내고 그런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어쨌든지 상이 없이 하되 속으로 알차게 정진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입선(入禪) 시간을 정할 때는 일반적인 상근기(上根機)로부터 중근기 하근기까지라도 전부가 다 따라서 할 수 있도록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되 두 시간씩만 딱 정해 놓고, 그렇게 하고서 그리고서 더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역량 따라서 얼마든지 더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묵언 구역을 정해 놓고, 방선(放禪) 시간이라 하드라도 대중적인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언제나 큰방은 묵언을 하도록 이렇게 정해 놓고서 방선 시간이라도 큰방에만 들어오면 자기 자리에서 얼마든지 정진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식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그렇게 하도록 지도를 하신 것입니다.

조실 스님 법을 믿고 수행하는 선방에서는, 이 세등선원이나 또는 저 인천 용화사나, 용주사나, 회룡사, 또 원효암, 또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이나 시간은 항시 두 시간씩 그렇게 사분정진 하도록 딱 정해 놓고, 큰방은 묵언 구역으로 정해 놓고 방선 시간이라도 얼마든지 정진할 수 있도록 이렇게 분위기를 따악 만들어 놓으면, 참 실질적으로 공부를 그렇게 해 놓고 해보면 참 알차게 정진이 됩니다.

시간은 3시간씩 때로는 4시간씩 딱! 해서 입방선(入放禪)을 하면 겉으로 보기는 참 정진을 아주 무섭게 정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3시간 4시간이 되면은 무슨 폐단이 있는고 하니, 입선을 해 가지고 특히 겨울에는 날씨가 추우니까 문을 모다 닫아 놓고 하거든.
30분까지는 다 허리를 쭉 펴고 정진을 그런 대로 성성하게 하는데, 30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꾸벅꾸벅 하는 분이 불어나거든. 3~40명 가운데에 불과 몇 사람 내놓고는 전부 꾸벅거린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문을 닫아 놓고 하기 때문에 방안 공기가 점점점점 탁해져서 그런다.
3~40명이 앉아서 두 콧구멍으로 탄산가스(炭酸gas)를 불어 내고 팔만사천 모공(毛空)으로 가스를 발산을 하니, 밑바닥 방바닥은 뜨끈뜨끈한 데다가 사람 몸에서 불어 내는 독한 그 가스가 방에 가득차니까 그래서 그 가스에 취해 가지고 졸음이 오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아무리 정신을 채릴려고 해도 소용이 없거든.

그렇다고 해서 입선 시간에 들랑달랑 드나들면서 밖에 바람 쐬고 들어온다고 그러면은 영판 소란해서 안되고, 그러니 한 시간마다 포행(布行) 시간을 두되 2시간 후에는 2시간만 딱 하고 방선을 해서 방안 공기를 확 빼고, 밖에 나가서 마음껏 찬바람도 쐬고 포행도 하고 그리고 들어와서 자유정진을 한 시간을 하든지 두 시간을 이렇게 하면 참 실다운 정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비(竹篦)만 안 치고 2시간 3시간 있으면 잠이 안 오는데, 죽비만 치고 앉으면 잠이 오는 그런 그 이상한 노이로제 같은 것이 있게 됩니다. 선방에 여러 철을 다니면 죽비 치고 입선하면 조는 그 습관이 잠재의식 속에 따악 있어 가지고, 그 죽비 소리만 들으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이 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12시가 되면은 그 사이렌을 울려 주는 때가 있었는데, 그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개밥을 주는 집이 있었습니다. 개는 아침밥은 잘 안 주고 점심을 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개밥 주는 시간을 12시 사이렌이 불면은 개밥을 줬는데 나중에 반공 연습을 한다고 12시도 아닌 다른 시간에 사이렌이 울리니까 개가 혀를 빼물고 침을 지르르르 흘립니다. 이것은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은 밥을 주던 그 습관에, 따악 그것이 잠재의식 속에 잠겨 있어서 12시가 아니라도 다른 때에도 사이렌만 불면 벌써 자기에게 밥을 줄줄 알고 그래 가지고 침을 지르르르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원리로 해서 죽비만 치면 졸으는 그렇게 습관이 된 구참(久參) 스님네가 많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죽비를 안 치고 정진을 하면 별로 졸지를 않고 정신이 깨끗한데, 죽비만 치면 5분도 안 되어서 허리가 딱 꼬부라져 가지고 심한 분은 코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리고 엎져 있는 그러한 참 이름 있는 구참 스님 가운데 그런 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적으로 정진을 하는데 죽비를 안 칠 수도 없고, 죽비는 치되 한 시간 만큼씩 포행 시간을 두고, 두 시간이면 방선을 하고 그리고 남은 시간은 자유정진을 하되, 큰방에서는 묵언을 하도록 그렇게 내가 부탁을 드립니다.(처음~21분42초)





(2/3)----------------

정진(精進)은 억지로 앉어 있기만 한다고 해서 그 정진이 잘되는 것이 아니여.
정진은 앉어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차 타면서도 하고, 울력을 하면서도 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언제나 한 생각 단속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면 그것이 정진이지, 앉아 있는 것만 가지고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는 태어날 때부터서 정진을 할 것이고, 일평생(一平生) 서 보지를 못한 앉은뱅이는 견성성불은 뽑아 논 당상(堂上)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를 못해서 앉아 있다고 정진의 전부가 아니여.

앉아서 반가부좌(半跏趺坐)나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정진의 기본자세(基本姿勢)여. 기본자세여서 하루에 네 차례씩 사분정진을 두 시간씩 하는 것은 기본자세이기 때문에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하는 것은 참 기본자세로써 두 시간씩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나머지기 시간에는 포행을 하면서도 하고, 죽비를 치지 않고서도 하고, 거닐면서도 하고, 또 어떠한 대중을 위해서나 자기를 위해서 울력을 하던지—봄여름 같으면은 채소를 가꾸던지, 잡초를 뽑던지, 마당에 잔디를 베던지, 무엇인가 몸을 움직이면서 그럴 때 화두(話頭)가 순일(純一)하도록 그렇게 정진을 잡드리를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가끔 수행하는 수좌(首座)들이 와서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정진을 좀 애써서 할려고 해도 간절(懇切)하지를 못합니다. 간절한 의심(疑心)이 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간절한 의심이 나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말을 의논해 온 분이 적지 아니 있었습니다.
“간절한 의심이 나야 하겠는데 화두는 들면은 들을 때뿐이고 금방 끊어져 버리고, 의심을 들어도 그냥 염화두(念話頭)로 「이뭣고」 하면 「이뭣고」 그것뿐이지, 「이뭣고」 한 뒤에도 그 간절한 의단이 이렇게 독로를 해야겠는데 그 간절한 의심이 안 나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참 그 말을 듣고 장군죽비(將軍竹篦)로 등어리를 몇 번을 처대 줘야 할는지, 뺨다구를 몇 대를 왼뺨 오른뺨을 쳐서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 할 것인지, 엎드려뻗쳐를 해서 궁뎅이를 주장자로 몇 대를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는지, 달음박질을 한 10리쯤 달음박질을 해보라고 할 것인지, 참 그러한 말을 문의(問議)를 해오면 자신으로서는 오직 답답하고 이렇게 흐리멍덩하니 허송세월하기가 너무너무 안되어서 일부러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와서 의논을 하는 말이겠지만, 내가 듣기에는 안타깝기가 그지없는 말이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왜 안 나냐 그 말이여. 간절한 마음 하나만 나면 거기에서 신심(信心)도 돈발(頓發)하게 되고, 거기에서 분심(憤心)도 돈발하게 되고, 거기에서 의심(疑心)도 돈발하게 될텐데 그 간절한 마음이 왜 안 나냐 그 말이여.
무상(無常)한 줄도 알고 있고 참선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는데, 저절로 간절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야 할텐데, 무상한 줄도 알고 참선도 해야 하는 줄 알아서 화두를 들라고 애는 쓰는데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고인(古人)네는 그래서 공동묘지에 가서, 중국이나 인도에 공동묘지는 땅속에다가 묻지를 않고 시체를 그냥 노출시켜서 그것이 비바람에 살이 썩고 난 다음에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서 뼈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대부분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래서 처음부터서 생송장 놔둔 것부터서 매일 그 옆에서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놈이 썩어서 해골이 드러나 가지고 앙상하게 될 때까지 그놈을 보며 계속 정진을 하는데, 그것을 백골관(白骨觀)이라 그러는데, 그렇게 수행을 해 나가는 그러한 수행승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그 무상한 그 시체를 앞에다 놓고 정진을 하는데 어떻게 편안하게 잠을 자며, 일분일초도 방심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전(年前)에 도살장(屠殺場)에를 한번 관람을 간 일이 있습니다. 종정(宗正)을 지내신 고암 대선사와 또 열반하신 (전강) 조실 스님 두 큰스님을 모시고 제가 도살장에를 한번 간 일이 있었는데, 그 소를 갖다가 수백 마리가 늘어섰는데 그 소를 끌고 들어가는데 그 소가 눈을 끔벅끔벅 눈을 감었다 떴다 하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끌려 들어가는데, 끌려 들어가 가지고 그 도끼로 뿔과 뿔 사이 그 뇌를 갖다가 뒤통수를 갖다가 치니까 그냥 비명을 지르면서 툭 쓰러지고 툭 쓰러지고 하는데, 그 쓰러진 소를 갖다가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살을 갖다가 도려내는데, 번개같이 그 살이 뼉다구로부터서 분리되는 광경을 봤습니다.

그것을 보니 참 저런 소들이 과거에 소 전신(前身)은 대부분 다 출가한 스님네들이 시주것을 먹고 그것을 그 값어치를 못하고, 도(道)를 철저히 닦아서 도를 이루지 못해서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소가 되어 가지고 평생 동안 일을 해 가지고 그 노동력으로써 보답을 하고, 똥을 눠 가지고서는 비료로써 보답을 하고, 죽어 가지고서는 피도 살코기도 거기서 나온 지방도 껍데기도 그 또 껍데기 위에 붙은 털까지라도 소는 한 가지도 버릴 것이 없이 다 사람들을 위해서 그 빚으로써 그것을 제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몇백 근 나가는 그 큰 몸뚱이가 뭘 먹고 사느냐 하면 영양가가 풍부한 식물성 동물성을 많이 섭취하고 그렇게 살이 쪄 가지고 그 힘을 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풀만 먹고서 그렇게 그 큰 몸뚱이를 지탱을 하고, 그 무서운 노동을 하고 그 살과 모든 것을 갖다, 전신(全身)을 갖다가 사람들을 위해서 제공을 하는 것입니다.

비싼 영양가 있는 것을 잔뜩 먹게 되면 그것도 수지가 안 맞는 일이기 때문에 풀만 먹고, 제일 헐값이요 아무데나 있는 그 풀만 먹어야 자기는 먹는 것은 값이 적게 들고 제공하는 힘과 살코기는 비싸게 팔려야 빚을 빨리 갚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 그래서 이 소를 보면은, 어디를 가다가 소만 보면은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스님네는 지나가다가 소를 보면은 옛날 도반(道伴)을 만난 것처럼 “어서 발보리심(發菩提心)해라. 발보리심해라” 이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발보리심해라” 그러면은, 소가 우두커니 그 스님을 쳐다보면서 “너도” 그렇다는군요.

참 이 말을 하고 있는 자신도—이 말이 여기에 모이신 스님네와 사부대중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 송담이 자신에게도 지금, 자신에게 하는 말이 좀 커지다 보니 여러분 귀에 들리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해태심(懈怠心)을 부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지 밥이 되거나 질거나, 반찬이 짜거나 싱겁거나, 소가 그 제일 헐한 풀만 먹고 그 무서운 힘을 쓰듯이, 어쨌든지 시주(施主) 은혜가 적은 방향으로 먹고 그리고서 철저하게 무상한 마음을 발해서, 분심 신심을 발해서 대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어쨌든지 금생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한 분위기 속에서 최대한의 힘을 발휘해 가지고 도업(道業)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지 스님이나 총무 스님이나 재무 스님이나 원주 스님은 ‘옳다 되었다, 이제부터서는 꼽쌂이 밥에다가 반찬은 그저 김치 하나에 그저 된장국만 가지고 해도 스님네가 꼼짝을 못하겠다. 아무 소리 안 하고 도를 잘 닦겠다. 그러면 이 외호하는 비용이 적게 들겠다’
만에 하나도 그런 생각은 안 가지시겠지만, 스님네야 아무렇게 해줘도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것도 무서운 시주것이라 생각하고 정진을 잘 하시겠지만, 외호(外護)하는 입장에서는 최대한에 성의를 가지고 봉양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치문(緇門)』에 보면 그 소임장(所任章)에 보면은 「소임 하는 사람은 이렇게 외호하는 데에 주식비와 부식비에 이렇게 많이 들다가 보면 기둥뿌리도 안 남겠다. 이 다음 철에는 살림을 못하겠다. 이렇게 이러한 것을 걱정하지 말아라. 아무리 잘 먹이고 잘 봉양을 하고 잘 대접을 한다 해도 부처님의 미간백호(眉間白毫) 하나 값도 다 못 먹는다」 이랬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때 삼천년 전이니까, 인수(人壽) 정명(定命)이 100세고 부처님과 같은 복과 지혜가 많으신 성현은 120세까지는 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40년이라고 하는 당신의 수명을 덜 사시고, 그 40년 당신이 수용할 복(福)을 우리 말세의 제자들에게 유산(遺産)으로 남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부터 속담이 ‘흉년이 들어서 세 고을 원님이 굶어서 죽게 되어도, 박복(薄福)한 눈먼 중이 그때에사 저녁 끓일 양식을 걱정하게 된다’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흉년이 들어서 온 백성이 다 굶어 죽고 심지어 원이 굶어 죽게 되더라도 아무리 박복한 스님네도 굶어 죽진 않는다. 왜 그러냐?
부처님이 남겨 주신 유산, 40년 당신이 받으실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이 있어서,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책임을 지고 도(道) 닦는 스님네의 먹고 입고 살 의식주 문제를 책임을 맡고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만 열심히 닦으면 굶어 죽고 얼어죽는 법이 없어. 저 태백산이나 지리산 그 깊은 바위굴 속에 토굴에서 정진을 해도 굶어 죽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지 스님이나 원주 스님은 어디서 도둑질해다가 공양을 할 수는 없으나, 그 절에 있는 것이면 또 어떠한 정성과 힘을 들여서라도 할려고 신심만 내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탁! 떨어서 그 철에 다 쓴다 하더라도, 다음 철은 더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윤필암(潤筆庵) 같은 데는 김용사(金龍寺) 산내 말사(末寺)로 아무것도 재산이라고는 없는 곳이지만, 순전히 수좌들만  모여서 4~50명이 지낸다 하드라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철을 실컷 살고도 또 남았어. 남는 것입니다.
탁! 떨어서 먹고산다 하드라도 그러면 그 다음 철에 아무도 지내지 못하느냐 하면은 다음 철 또 지냅니다. 지내고 또 남습니다. 그러한 예를 이 자리에 정진하신 분 가운데에는 직접 거기서 지내고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참선을 하면은 참선만 열심히 하면 그 절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호하는 입장에서는 있는 성의를 다해서 어쨌든지 스님네 잘 잡숫고, 공양 잘 잡숫도록 공양을 할 것이고, 정진하는 입장에 있는 스님네는 너무 잘해주는 것을 항시 ‘내가 이렇게 잘 먹다가 소가 되면 어떻게 하나’ 너무 잘해주는 것도 과분하게 생각하고, 김치에 된장찌개에 보리밥을 줘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고 정진을 알뜰히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한다면은 외호 대중(外護大衆)과 정진 대중(精進大衆)이 항시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아, 이 절에 와서 정진해 주시니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항시 마음속으로 백 배 천 배를 하면서 외호를 하고, 정진하는 분은 ‘우리를 위해서 저렇게 외호를 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가’ 이리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이렇게 해 간다면, 그 도량은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과 선신(善神)이 항시 외호를 해서 아무 장애가 없을 것이고, 모두가 다 신심이 돈발(頓發)해서 자타(自他)가 일시(一時)에 성불(成佛)하시게 될 것입니다.(21분45초~40분13초)





(3/3)----------------

간절(懇切)한 마음은 무상(無常)한 마음을 느낀 데에서 간절한 마음이 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생각생각에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아니한다면 간절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몸뚱이가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고, 10년도 살고 앞으로 20년 30년도 더 살리라’ 그렇게 뒷날 살날을 생각하기 때문에 무상을 느끼지를 못하고, 무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이 안 난 것입니다.


옛날에 그 누구냐, 아육왕(阿育王). 아쇼카(aśoka)왕이라고 하는, 부처님 때 그 수기(授記)를 받아 가지고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었는데 그 아육왕한테 동생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동생은 신심이 전혀 없어 가지고 그 형이 불법(佛法)을 그렇게 위하고 스님네를 그렇게 받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은근히 불평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니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스님네는 그 젊은 나이에 결혼도 아니하고, 우리는 마누라를 둘씩 셋씩 열씩을 가지고 살아도 그 부족한데, 스님네는 어떻게 해서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고서도 그렇게 독신으로 사는가 모르겠다. 아무래도 뒤에다가 다 처자가 있고, 이 기둥서방이 다 있어 가지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우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 말은 은근히 스님네를 비방하는 뜻으로 그 형한테 그걸 물어본 것입니다.

아육왕이 그 말을 듣고 ‘저놈을 어떻게 해야 저놈을 갖다가 저런 괘씸하고 이 불량한 불사스러운 저런 마음을 고쳐 줄까?’ 가만히 며칠을 두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영의정을 불러다가 ‘내가 이러이러한 뜻이 있어서 내가 좀 내 동생한테 왕위를 물려줘야겠다. 그러니 내 뜻을 절대 복종을 해라’ 그렇게 영의정한테만 따악 짜고서, 하룻날은 만조백관을 다 모여 놓고 그래 가지고 그 동생도 참석을 시켜 가지고 중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내가 나이 먹고 힘이 없어서 잠시 쉬어야겠으니 왕위를 동생한테 물려줘야겠다” 그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그 까닭을 모르는 만조백관들은 울며불며 통곡을 하면서 그러실 수가 없다고, 아직도 기력이 왕성하신데 왜 그러실 수가 있냐고 막 반대를 했지만, 영의정하고 딱 짜놓은 이후로 그래서 딱 해서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조건부(條件附)로 물려주었습니다.

무슨 조건이냐 하면 ‘7일 동안만 너에게 전륜성왕의 지위를 물려주겠다. 7일 동안에 너는 마음껏 먹고, 마음껏 궁녀들을 춤을 추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마음껏 하고, 이 궁녀 가운데 제일 아름다운 여성을 가지고 마음껏 즐겨라. 그 대신 7일 후에는 7일 지낸 뒤에는 너를 사형(死刑)을 하겠다. 그러니 그 7일 동안에는 온 천하는 네것이고, 이 온 궁중에 모든 궁녀며 재산이며 모든 것은 네것이니까 마음대로 해라’ 하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면류관(冕旒冠)을 갖다가 동생한테 씌워 주고 옥새도 다 인계를 하고, 다 했습니다.

그래 놓으니 참 좋기는 좋은데 7일 후에 죽을 일을 생각하니까.... (녹음 끊김) ....하고 그 예쁜 궁녀를 갖다가 옆에다 끌어안고 밤에는 자고, 저녁마다 미인을 갈아 들여서 잠을 자는데 아무 재미가 없어. 그 산해진미(山海珍味)로 음식을 차려놓고 먹어도 암 맛도 모르고, 술이 잔뜩 취하면 술김에나 잠시 잊을런가 해도 그래도 7일 뒤에 죽을 일을 생각하니까 아무 재미가 없다 그 말이여.
옆에다가 미인을 안고 자도 아무 재미가 없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재미가 없고 그럭저럭하다가, 그런데 하루 지나면 ‘이제 하루가 지났으니 엿새가 남았다’ 아육왕이 동생한테 딱 엿새 남았다 하는 것을 일깨워 줘. 또 이틀이 지나면 ‘이제 이틀이 지나갔으니 앞으로 닷새 남았다’ ‘나흘 남았다’ ‘사흘 남았다’ 그러니 뭔 재미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7일 만에 인자 죽을 날이 닥쳐왔습니다. 만조백관을 불러서 앉히고 동생을 터억 갖다가 놓고는 “7일 동안에 어떻더냐? 음식이 맛이 있더냐?”
“맛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궁녀, 이 아름다운 미녀를 너한테 다 맡겨 주었는데 어찌 색심(色心)은 동(動)하드냐?”
“전혀 동하지 않았습니다”

“거 봐라. ‘죽을 사(死)’ 자를 이마에다 쓰고 무상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꽉 차 가지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무상한 마음,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데 어느 겨를에 색심이 동할 까닭이 있느냐? 더군다나 오계(五戒)를 받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예불 젓숫고 그리고서 십악참회(十惡懺悔)를 하고 사분정진을 하고, 그 청정한 도량에서 한 생각도 잡념할 겨를도 없는데 무슨 색심이 동할 까닭이 있느냐? 인자 잘 알겠느냐?”
“예, 잘 알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동생이 대발심을 해 가지고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무상을 철저히 깨달으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어디에 붙으며,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이 어디에 어리대겠습니까? 무상한 마음을 잊어버리면 거기에서 탐진치 삼독심도 일어나고, 오욕락도 일어나고, 문틈에 틈이 생기면은 거기에 햇빛이 들이비치듯이, 틈이 없다면 어느 곳에 잡념이 일어나며 해태심이 일어나느냐 그 말이여. 혼침인들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느냐.
간절한 마음 한 생각이 팔만사천 마구니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고, 일체 해태심도 일어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황벽 선사(黃蘗禪師)가 납자(衲子)들을 위해서 읊으신 게송이 있습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진로(塵勞), 생사진로(生死塵勞). 생사진로를 멀리 해탈해 버리는 것이 실로 보통 일이 아니여. 범연한 일이 아니다 그 말이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밀히 확 승두를 잡어서, 화두를 잡어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바탕 뒤쳐서 그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피는 매화라야 그 향취가 진동을 해서 코를 치는 법이여. 겨울에 이상난동으로 날씨가 뜨뜻하고, 강추위를 하지 아니하고 날씨가 뜨뜻한 뒤에 매화꽃이 피면 그 매화에 향취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년 삼동(三冬)에 이번 첫 철인 것처럼, 신참 구참을 막론하고 이번 첫 철 정진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야무지게 단속을 해서 정말 알차고 짬진 정진을 해서 확철대오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백일기도에 신남신녀 여러분은 같이 스님네와 정진하는 뜻으로 백일기도에 모두 동참들을 하시고, 여기에 매일 출퇴근하시면서 정진하신 보살님도 계시겠습니다마는, 설사 가정에서 생활을 하시드라도 대중스님네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가정에서 생활하시면서 열심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이 사시공양(巳時供養)은 옛날에 박고봉 대선사 시봉하시면서 정진하시던 상경 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여러 대중스님네, 후배 되신 여러 대중스님네 이렇게 알뜰히 정진하시고, 그 상경 스님은 이 절 세등선원 원장스님 세등 스님과 복전암 주지 스님과 이 세 분이 참 한마음 한뜻으로 모다, 이 복전암 원주 스님이라든지 다 고봉 스님을 신(信)하고 또 조실스님 전강 스님을 참 친부모처럼 친아버지처럼 그렇게 신(信)하고 하시던 그러한 도반이십니다.
그래서 그 도반이신 세등 스님이 이렇게 세등선원을 짓고, 이렇게 팔도에 좋은 선객 스님네들이 와서 정진하시는 것을 알고서 주머니돈을 털어 가지고 오늘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하시러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뵈옵게 되었습니다. 공양을 잘 잡숫고 모다 환희심으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비구니 법춘 스님이라고—풍어 스님이라고 하는 만공 스님 제자 풍어 스님의 동생이신데, 그 언니도 스님으로 있다가 작고하신 지 얼마 안 되고—이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불교대학 대정대학 대학원에서 또 불교학을 전공하고 그래 가지고 천안에 대불(大佛)이라고 여러분 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큰 부처님을 일본 교포한테 화주(化主)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원력을 세워서 천안 대불을 그렇게 세웠습니다.

그리고서 1978년도 지금부터 6년 전에 미국에 들어가서 미국 시카고, 세계에 두 번째 큰 도시죠. 그 시카고에 불심사(佛心寺)란 절을 짓고 미국에 그 교포들에게 불교 포교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거기 나이아가라 폭포 하류 미시시피강 호숫가에다가 약 5~6만평 땅을 잡어 놓고 그것을 사서 거기다가 한국 문화원을 지어 가지고 불교도 포교하고, 한국에 문화 예술과 역사와 전통 모든 것을 다 미국 시민들에게 모두 다 널리 선양을 하고, 또 미국에 교포들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 교육이라든지 여러 가지 그 다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4억 내지 5억의, 한국 돈으로 5억원 정도에 예산을 가지고 문화원을 건립을 할려고 대원력을 세웠습니다.

이 한국에서 시간 시간이 익힌 서예와 사군자, 본인이 직접 그리기도 하고 또 한국에 불교 이 참선법을 선양하신 경허 선사에 제자이신 만공(滿空) 선사께서 친히 쓰신 글씨와 청담 선사 그밖에 또 송광사 구산 방장 큰스님 글씨, 모다 그런 큰 스님네의 글씨라든지 그런 것도 있고 또 도자기 모다 그런 것도 해서, 지금 시내 은행동 라이카 예식장 앞에 여인 미술관이라 하는 데에서 지금 전시회를 그저께부터서 앞으로 이틀 뒤까지 전시회를 갖는다 그럽니다.

내가 법상에 올라와서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젊은 나이로 미국에 가서 한국 불교를 선양을 해서, 널리 불교도 선양할 뿐만 아니라 한국도 널리 선양을 해서 불교와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 하도 기특하고 갸륵해서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 주변에 있는 사찰에서 오신 스님네들도 뜻이 있는 신도들을 인솔을 해서 그 전시회 관람도 하고, 그 도자기라든지 모다 작품 혹 그 만오천 원, 이만 원으로부터서 몇백만 원, 천만 원까지 나가는 작품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불사(佛事)에 수희(隨喜) 찬탄(讚歎)하는 뜻으로 가서 구경만 하셔도 좋고, 기왕이면 힘껏 조그만한 작품 하나라도 사시고, 형편이 되신 분은 좀 거기에 시주한 셈치고 협력을 하시면 이것이 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나도 좋고 미국에 불법을 펴서 미국 사람들이 이 불법을 믿게 된다면은 내 이 조그만한 정성이 큰 불사를 이룩하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신남신녀 여러분 널리 널리 이 불사에 동참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한 움큼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여.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매어 두노라.(40분15초~61분44초)(끝)





[법문 내용]

(게송)안광삭파삼천계(眼光爍破三千界)~ / 망상과 혼침, 수마(睡魔) / 입선 시간은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되 두 시간씩만 딱 정해 놓고, 방선 시간이라도 얼마든지 정진할 수 있도록 큰방은 묵언 구역으로 / 죽비만 치면 조는 습관 경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언제나 한 생각 단속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면 그것이 정진 / 수좌의 고민, ‘간절한 의심이 안 나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 백골관(白骨觀) / 고암 대선사와 또 열반하신 전강 조실 스님 두 큰스님을 모시고 송담스님께서 도살장에를 간 일 / 소 전신(前身)은 대부분 도(道)를 철저히 닦아서 도를 이루지 못해서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소가 됐다는 말씀 / 외호 대중(外護大衆)과 정진 대중(精進大衆)이 항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간절(懇切)한 마음은 무상(無常)한 마음을 느낀 데에서 간절한 마음이 나는 것 / 아육왕(阿育王) 동생의 출가 인연 / (게송)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 비구니 법춘 스님의 미국 포교를 위한 불사 동참 권유 / (게송)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


무상(無常)한 이 몸뚱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얇은 가죽 속에는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으로 가득차 있건마는, 그 무상하고 추악한 이 몸뚱이 속에 영원히 생사(生死)가 없는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도 견성성불하시기 이전에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중생(衆生)에 불과했습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진즉 발심(發心) 수행해서 이 도리를 깨달라서 열반의 세계를 살고 계십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의 인연이 깊어서 이 오탁악세(五濁惡世) 말세(末世)에 태어났건마는 위없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몸뚱이가 정말 무상한 줄 뼈아프게 느낀다면 우리는 일분일초도 방일(放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입선 시간은 항시 두 시간씩 그렇게 사분정진 하도록 딱 정해 놓고, 큰방은 묵언 구역으로 정해 놓고 방선 시간이라도 얼마든지 정진할 수 있도록 이렇게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참 실질적으로 공부를 그렇게 해 놓고 해보면 참 알차게 정진이 됩니다.

철저하게 무상한 마음을 발해서, 분심 신심을 발해서 대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어쨌든지 금생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한 분위기 속에서 최대한의 힘을 발휘해 가지고 도업(道業)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속담이 ‘흉년이 들어서 세 고을 원님이 굶어서 죽게 되어도, 박복(薄福)한 눈먼 중이 그때에사 저녁 끓일 양식을 걱정하게 된다’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흉년이 들어서 온 백성이 다 굶어 죽고 심지어 원이 굶어 죽게 되더라도 아무리 박복한 스님네도 굶어 죽진 않는다. 왜 그러냐?
부처님이 남겨 주신 유산, 40년 당신이 받으실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이 있어서,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책임을 지고 도(道) 닦는 스님네의 먹고 입고 살 의식주 문제를 책임을 맡고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만 열심히 닦으면 굶어 죽고 얼어죽는 법이 없어. 저 태백산이나 지리산 그 깊은 바위굴 속에 토굴에서 정진을 해도 굶어 죽는 법이 없습니다.

간절(懇切)한 마음은 무상(無常)한 마음을 느낀 데에서 간절한 마음이 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생각생각에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아니한다면 간절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몸뚱이가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고, 10년도 살고 앞으로 20년 30년도 더 살리라’ 그렇게 뒷날 살날을 생각하기 때문에 무상을 느끼지를 못하고, 무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이 안 난 것입니다.

무상을 철저히 깨달으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어디에 붙으며,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이 어디에 어리대겠습니까? 무상한 마음을 잊어버리면 거기에서 탐진치 삼독심도 일어나고, 오욕락도 일어나고, 문틈에 틈이 생기면은 거기에 햇빛이 들이비치듯이, 틈이 없다면 어느 곳에 잡념이 일어나며 해태심이 일어나느냐 그 말이여. 혼침인들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느냐.
간절한 마음 한 생각이 팔만사천 마구니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고, 일체 해태심도 일어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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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 다운로드.

>>> 『선가귀감(禪家龜鑑)』 전자책(PDF)을 여기에서 다운로드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몽산법어(蒙山法語)』 전자책(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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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 전자책(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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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