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76~200)2023. 7. 15. 08:40

 

 

(No.196)—1983년 부처님 개금불사 점안식(83.03.10) (62분)

 

(1) 약 32분.

 

(2) 약 30분.



(1)------------------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법신청정광무변(法身淸淨廣無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요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부처님께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 이 삼신이, 삼신불(三身佛)이 계시는데. 보신과 화신은 참부처가 아니여. 마침내 망령된 인연밖에는 아니더라.
법신(法身)이 청정광무변(淸淨廣無邊)이라. 오직 법신불이 청정해서 넓고 갓이 없다.

삼천년 전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에 들어가서 12년 동안에 고행(苦行)과 낙행(樂行) 끝에 대도를 성취하셔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는데,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다 그 말이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그 말이여. 중생! 이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부처님은 천백억(千百億)의 화신(化身)을 동시에 나투실 수가 있어. 그 화신불을 통해서 법신불을 우리는 친견하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법신불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으로서 이 사바세계에 하강(下降)을 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여.
부처님께서는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하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에 대성현이시지만,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화신불이시다 그 말이여.

화신불(化身佛)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냐?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여의지 아니하시고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신 그러한 성현이시다. 마치 하늘에 하나의 밝은 달이 떠 있건만, 땅에 있는 모든 바다와 호수와 강물과 시내, 심지어는 조그마한 그릇의 접시에 떠놓은 물 한 그릇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모든 물에 비추어 나타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다나, 강이나, 그릇이나, 호수나, 물 있는 곳에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고대로 나타납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있는 달이 없어지고 땅 위에 있는 물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치도 일 분 사이도 그 달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하늘에 떠 있으면서 동시에 물 있는 곳에는 어디나 그 달이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절절이 법당에 법신 ・ 보신 ・ 화신 삼신불을 모신 법당도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도 있고, 아미타불 불상을 모신 법당도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 하면 법당에다가 모셔진—쇠로 모셨거나, 또는 나무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돌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흙으로 빚어서 모셨거나 한 그러한 부처님을 다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불교가 무엇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하면 법당에 모셔진 쇠나 나무나 돌이나 흙으로 조성해 모신 그 부처님이 참부처님으로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절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공양과 모든 음식과 과일이나 꽃과 청수를 올리고 거기다 공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그러한 것을 보고서 ‘우상숭배하는 종교다’ 그렇게 힐난(詰難)하게 비난을 하고 헐뜯고 하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서 비방을 하는 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거룩하시고, 너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알지 못하고 불교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법과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들, 이 삼보(三寶)를 비방(誹謗)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비방하는 공덕으로 마침내는 성불(成佛)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비방하는 죄(罪)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서 비방한 만큼의 과보를 받게는 됩니다. 비방하는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게는 되지만, 다른 것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공덕으로 그 인연(因緣)으로 마침내는 대도를 성취해서 성불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시면 그 비방하는 그 인연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그 인연으로 마침내는 성불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비방하는 인연으로도 성불을 하거든, 하물며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을 나무나 쇠나 돌이나 흙으로 빚어서 조성을 하고, 거기에 정성을 다해서 새로 금(金)으로 옷을 입혀 드리는 그리고 그 방석을 해 드리고 그 좌대(座臺)를, 연화대(蓮花臺)를 이렇게 조성해 앉혀 드리고, 그리고 그 불상을 모실 수 있는 이런 법당을 창건하는 데 동참하는 그러한 인연이야 얼마나 장하고 거룩하고, 그 공덕으로 삼악도에 떨어질 모든 과보가 있다 할지라도 봄눈처럼 녹아지고 머지않은 장래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영원한 진리(眞理)의 몸을 성취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데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처님의 법에 의지해서,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인 참선을 실천 수행해서 견성성불한 그러한 바른 법을 의지하고 닦아 가는 그 공덕이야 입으로 무어라고 표현해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받아나기 어려운 이 몸을 받아났으며,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며, 불법 가운데에도 불법을 믿는다 해도 방편설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구경법(究竟法)이요, 최상승법인 이 정법에 귀의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수승한 인연을 만난 것을 깊이 느끼고, 무상(無常)한 이 몸뚱이가 이만큼 유지될 때에 대용기와 대분심과 대신심을 일으켜서 가행,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대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분심과 신심을 돈발(頓發)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미련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당도 필요하고, 불상도 필요하고, 또 이러한 개금불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처럼 옷이 없어서 추워하시는 그러한 분도 아니요, 공양을 못 잡수어서 배가 고프신 어른도 아니며, 이런 집이 없다고 해서 풍마(風磨)와 우습(雨濕)을 두려워하는 그러한 어른도 아닙니다. 그러한 어른도 아니지만 우리 중생은 너무나 위대하고 거룩한 스승이요 성현이신지라 우리의 정성으로 이런 법당을 마련해 드리고 이런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해서 가끔 이런 좋은 옷을 입혀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 동남아에 여러 나라들에서는 해마다 개금불사를 해서 새로 옷을 입혀 드린다고 합니다마는, 우리 한국은 개금불사를 해서 오래되어서 투색(渝色)을 하고 그을르고 벗겨질 때에 여러 해 만에 이렇게 가끔 이렇게 개금불사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정성으로 해마다 모신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금불사만 자주자주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참뜻을 받들어서 우리의 마음을 깨닫는 수행(修行)을 보다 더 알뜰히 그리고 실답게 열심히 하는 것을 부처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요, 부처님의 뜻을 우리는 참으로 옳게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로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라.
전단향(栴檀香)은 어떻게 향내가 진동하던지 이 법당에서 전단향을 피면은 십리 밖에까지도 그 향내가 풍긴다고 하는 그러한 좋은 향나무인 것입니다. 그러한 전단향으로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하고, 중생의 우리 김가나 이가나 박가나 우리 보통 사람의 중생의 모양을 떠억 조성을 한다 그 말이여.

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러한 성현의 모습을 떠억 이렇게 조각을 해서 딱 모시게 될 때에 그 모양이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여.
부처님 모습도 천 부처님이면 천 부처님이 다 모습이 각각 다르고, 관세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지장보살 이러한 보살님의 모습을 조성해 모셔도 그 모습이 크고 작고 길고 또는 둥글고 모나고, 보살님의 모습도 그렇게 각각 다르고, 우리 중생의 모습이 40억 인구나 되는데 그 40억 인구에 김가, 이가, 박가, 서양 사람, 동양 사람 그 각각 다른 모습을 전단향으로 조각을 해서 따악 놔났다 그 말이여.

부처님 모습은 부처님 모습대로 다르고, 보살의 모습은 보살의 모습대로 다르고, 중생의 모습은 중생의 모습대로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르다 할지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여. 그 냄새를, 그 향내를 맡아 보면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그 불상의 냄새를 맡아 봐도 내나 그 훌륭한 좋은 전단향 냄새가 날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모습을 조각을 해서 모셔 놨다 하더라도 그 향내를 가서 맡아 보면 내나 전단향의 향내가 날 것이요, 눈이 째지고 코가 삐틀어지고 입이 샐쭉한 뵈기 싫게 생긴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해 놨다 하더라도 내나 가까이 가서 맡아 보면은 전단향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내가 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처음~31분40초)





(2)------------------

그러면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최초에 부처님을,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이 어떻게 된 것이냐?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당연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부처님 당시에는 처음부터 이 불상을 모신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어느 해 여름에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 마야부인이 그때 어디에 계셨느냐 하면은 저 도리천(忉利天)! 도리천에 거기에 태어나셔서 도리천에 계셨습니다.
그 도리천에 계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야부인께 석 달 동안을 설법(說法)을 해 드리기 위해서 도리천에 올라가 계셨습니다.

그때에 구익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우전왕(優塡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 우전왕은 부처님을 너무너무 신(信)하고 존경하는 나머지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매일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그래야만 그날 하루의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잡혀서 정사(政事)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을 따르고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돌연히 도리천에 올라가고 안 계시게 되니 견딜 수가 없어. 너무너무 그립고 뵈옵고 싶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전단향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실 때에 우전왕이 부처님께 허락을 맡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시게 되면은 저는 부처님을 하루라도 뵙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고 도저히 정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러니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고, 살아계신 부처님이 계신듯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올리고 친견을 하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그렇게 하라” 이렇게 허락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막상 부처님을 조성을 할려고 하는데 도저히 똑같이 모시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어.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를 청해다가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데—어쩔 수 없어서 신통(神通)이 제일인,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에게 의탁을 해서 목련존자가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에 접해 가지고, 말하자면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 그 제일가는 조각가로 하여금 도리천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을 친견하면서 그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을 해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당에다가 딱 모셔 놓고, 우전왕이 매일같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0일 동안에 도리천에 있어서의 마야부인께 설법을 다 마치시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셔서 그 전단향으로 모셔 논 부처님이 계신 대로 오시게 되니, 전단향으로 모셔진 부처님이 연화대에서 떠벅떠벅 걸어 내려오셔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영접을 하시는데, 어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고, 어느 부처님이 전단향인가를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전단향으로 조성한 부처님께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도리천에 가 있는 동안 중생을 교화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이렇게 수고한 위로 인사를 떠억 하시고서 ‘말세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이것으로써 거룩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등상불(等像佛)을 모시게 된 최초의 동기고.

그다음에는 파사익왕(波斯匿王)이, 파사익왕이라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분도 신심이 돈독했어. 그래서 ‘우전왕이 그렇게 전단향으로 불상(佛像)을 조성을 해 모셨다’ 그 말을 듣고 자기는 순금으로, 자마순금(紫磨純金)으로 부처님을 조성을 하기로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 파사익왕은 어째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냐 하면, 우전왕이 모셨으니까 샘이 나서 모신 것이 아니고, ‘아! 부처님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이다’ 한 것을 철저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불상을 모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 원(願)을 가졌느냐 하면, 그 부처님이 계신 도량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떠억 운집(雲集)을 해서 있으면 부처님이 그 도량에 계실 때와 부처님이 저 십 리 밖이나, 수백 리 밖에 계시고 직접 자기가 있는 도량에 안 계실 때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 온 대중이 엄숙하고 숙연하고 엄정하고 제절로 그 도량(道場)에 있는 모든 사부대중이 경건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부처님이 저 먼 데 계시고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만 이렇게 있으면 암만해도 그렇게 엄숙하지를 못하고 경건하지를 못하고 공부를 해도 공부가 그렇게 잘 안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고서 ‘황금으로 순금으로 불상을 이 법당에다가 모시고자 하니 허락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께서도 역시 ‘참! 네 말이 옳은 말이다. 과연 그렇게 하도록 하라’ 이렇게 허락을 하시게 되어서 순금으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하는 『금강경』을 설하신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순금으로 모신 부처님을 갖다가 봉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바세계에 두 번째 등상불을 모신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 나아가서는 이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불교가 들어가서 절이 서고 이런 불상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동기(動機)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目的)과 불상을 모시게 된 여러 연기(緣起)에 대해서 대충 잘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도(外道)들이, 불교를 믿지 아니한 외도들이 불교를 잘 이해를 못하고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러한 말은 전연 비방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껍데기, 외부로 나타난 일부만을 잘못 보고서 불교의 참진리와 참뜻을 이해를 못하고 비방을 하는 것이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 것입니다.
비방하는 공덕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고(苦)는 잠깐만 받고, 될 수 있으면 고(苦)는 받지 않고 다시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게 되기를 바래지만 인과법은 역연(歷然)해서 고를 면치 못할 것이나, 우리 불자(佛子)의 입장에서는 될 수 있으면 가볍게 받고 조끔만 받고 빨리 이 정법에 귀의하게 되기를 바랠 뿐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 오직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요,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도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와 지혜로써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는 목적도 구경(究竟)에는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자비를 증득허겄게 하는 그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개금불사에 동참(同參)하신 설판재자(說辦齋者)와 동참하신 모든 불자와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 그리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까지라도 이 개금불사를 봉행하는 이 공덕으로 하루라도 빨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정법에 귀의해서 대도를 성취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이 불상(佛像)을 하는데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대들보를 시주하고, 누가 기둥을 시주하고, 누가 주춧돌을 시주하고, 누가 이 계단을 시주를 하고, 누가 이 종을 시주했다고 크게 돌에다 새겨서 그 층계마다 이름을 새겨 논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는 불사를 성취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이름을 새기는 뜻을 잘 이해하고도 남습니다마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러한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그러한 방편은 일찌감치 졸업을 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학생에게는 유치원 학생에게 알아듣게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치원 학생에게는 그렇게 말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에게도 유치원 학생에게 일러주는 말과 같은 말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따라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무(無)라 설하게 되고,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유(有)를 설하게 되고,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요, 비유비무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유시무(是有是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때로는 유(有)라 설하고, 때로는 무(無)라 설하고, 때로는 비유비무(非有非無)라 설하고, 때로는 시유시무(是有是無)라 설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법(法)의 진리(眞理)를 확연히 깨달은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유, 때에 따라서는 무, 때에 따라서는 비유비무, 때에 따라서는 시유시무라,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설하게 될 것이요, 어떻게 법(法)을 설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유나 무 또는 그 중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말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相)을 통해서 상 없는 도리에 눈뜨게 하고, 말을 통해서 말 없는 경지에 계합하게 하는 이것이 불사(佛事)요, 법(法)인 것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팔만사천 법문이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무주상이라야 그 공덕이 영원한 것이요, 한량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는 어떠한 큰 불사를 하더라도 그 불사에 많은 시주(施主)를 한 사람이나, 정성으로 조끔 시주를 한 사람이나, 그렇게 시주를 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나 그 간절한 정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천만 원도 하고, 백만 원도 하고, 십만 원도 하고, 만 원도 하고, 오천 원도 하고, 천 원도 하고, 오백 원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서 부처님께 간절히 절 한 자리만 하더라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다 똑같이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사를 해도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아무개 보체’ 하고 그렇게 낱낱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축원(祝願)을 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름을 어디다 써서 붙이거나, 이름을 대중 앞에 공개를 하게 되면 이미 한 상(相)이 나타난지라 무주상(無住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 무주상의 뜻을 여러분께 깊이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면 그때 당시에, ‘아! 아무개가 그렇게 했구나. 아! 내가 한 것을 모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구나’ 그때 찰나는 조끔 흐뭇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잠깐 지나고 나면 그것으로써 화면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듯이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듯이 아무 실다운 것이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것을 여러분은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하야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하노라
나무~아미타불~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하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니다
나무~아미타불~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내 이제 이 길상수(吉祥水), 이 감로수(甘露水)를 가지고,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이다. 일체중생,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여러분 이마에 전부 뿌려 드렸습니다.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 이 물방울, 감로수를 여러분께 뿌려서 여러분의 무량겁으로 지어 온 모든 생사(生死)의 진로(塵勞)와 모든 업(業)과 뜨거운 번뇌(煩惱)와 이런 것들이 눈 녹듯이 다 녹아져 없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이라. 이 불사(佛事)에 동참하신 분이나 설판재자(說辦齋者)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부대중과 이 육도 법계(六途法界)에 있는 모든 중생 한 사람 남김없이 모두가 다 법왕(法王)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되어지이다.

이번 불사에 불모(佛母)는 수원 용주사 포교당, 수원 포교당의 정락 스님, 주감 스님을 청해다가 이번에 이 개금불사를 모셨습니다. 개금불사를 너무너무 정성스럽게 그렇게 잘해서 참 그렇게 이 32상(三十二相)이 뚜렷하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신심 있는 불자가 거룩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사진을 찍어서 여러분께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 사진은 어떻게 한 관세음보살의 상(像)이냐 하면, 어느 화가(畫家)가 강화 보문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백일기도 회향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을 했는데, 그 관세음보살로부터 붓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꿈에 친견한 그 관세음보살과 똑같이 정성을 들여서 몇 날 며칠 정성을 들여서 관세음보살을 그렸습니다. 그려 놓고 보니 너무너무 거룩하고 훌륭해... (31분41초~61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 /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게송)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 최초에 부처님의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 부처님의 자비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 무주상(無住相)!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 (게송)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3. 7. 14. 15:56

 

 

(No.341)—1987년 11월 첫째일요법회(87.11.01) (74분)

 

(1) 약 41분.

 

(2) 약 33분.



(1)------------------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이여  나유미후도육창(那有獼猴跳六窓)고
나무~아미타불~
소지진공무면목(笑指眞空無面目)헌디  연운퇴월하천강(連雲推月下千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이시여. 높고 높은 동(動)함이 없는 법(法) 가운데 왕(王)이시여.
나유미후조육창(那有獼猴跳六窓)이리요. 어찌 잔나비, 원숭이 같은 건데, 원숭이 떼들이 어찌 육창(六窓)으로 드나들면서 놀아나리오.

소지진공무면목(笑指眞空無面目)헌디, 웃고 진공(眞空)을 가리키되 면목(面目)이 없어. 웃고서, “허허” 하고 웃고서 진공을 가리키는 데 면목이 없더라.
면목이 없는데, 연운퇴월하천강(連雲推月下千江)이로구나. 구름이 꽉 연(連)해 있는데 달을 밀추어서 천 강(千江)에 내리게 하더라. 구름이 꽉! 찌어서 달이 안 보이다가 그 구름 사이로 달을 밀추어 가지고 일천 강에 그 달빛이 찬란히 빛나게 되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1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통해서 감명 깊게 우리 사부대중이 경청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涅槃)하시기 한 5, 6년 전부터서 『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를 비롯해 『몽산법어』, 그밖에 『초발심자경』 그밖에 불교의 여러 조사(祖師) 스님네의 기연(機緣)과 불조의 기연,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수없는 설법을 하신 것을 녹음을 해 놓은 것이 큰 릴(reel)로 100개, 또 작은 릴로 50개 이렇게 해서 150개나 되는 릴에다가 몇백 시간을 연거푸 틀어도 다 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방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해서 소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그 한 편씩을 듣고, 또 대중들도 결제(結制) 중에 그 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고, 전국 모다 여러 선방에서도 이 법문을 듣고, 또 여러 사부대중도 그 테이프(tape)를 구득해서 다 듣고, 외국에 가 계신 분들도 테이프를 구해서 모다 듣고, 이렇게 해서 천하에 이 최상승 법문을 두루두루 듣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정법(正法)이 무엇인가를 알고 거기에 차츰 신심(信心)을 내서 참선(參禪)을 할려고 이렇게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법문 가운데에 어느 법문이 더욱 좋고, 좋지 못하고 한 것이 있으리오마는 언제나 들을 때마다 법문마다 새롭고 참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도 더욱이 오늘 들은 법문은 참 감명 깊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참 누누이 말씀이 계셨지마는 이 사바세계에 오욕락(五欲樂)—재산이다, 명예다, 권리다, 색(色)이다, 안락이다, 이러한 오욕락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목숨까지라도 거기에 바치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말세 중생(末世衆生)들이 어떻게 해서 최상승법, 이 생사(生死) 없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최상승법을 믿게 되며 또 그걸 믿고 실천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온 세상은 온통 명예와 권리와 부귀영화, 모다 색(色), 모다 이러한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갖다가 보다 더 많이 획득을 하고, 그것을 수용을 하기 위해서 참 부자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모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고 있는 이 속에서 어떻게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러한 것을 비유해서 「화리생련(火裏生蓮)이다. 불 속에서 연꽃이 났다」
그 연꽃이라 하는 것은 진흙과 물속에서 뿌리를 박고 피는 것인데, 훨훨 타고 있는 불 속에서 연꽃이 어떻게 필 수가 있겠습니까? 그 필 수 없는, 도저히 상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에다가 그렇게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달마대사(達摩大師)께서도 150세의 고령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양무제(梁武帝)를 만나 가지고—양무제가 중국 천자(天子) 중에서는 제일 불법에 대한 신심이 돈독한 천자인데, 그분은 천자이면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정사(政事)를 볼 만큼 그렇게 신심이 돈독을 했습니다.
절을 짓는다든지, 경을 판각을 해서 모다 편다든지, 스님네를 모다 도 잘 닦아가도록 많은 스님네를 외호를 한다든지, 탑을 세운다든지, 불상을 조성한다든지 그러한 상(相)이 있는 그러한 불사(佛事)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불법(佛法)을 여의고는 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불사 밖에는 모르고.

그러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칙사(勅使)를 보내서, 저 남해로 보내 가지고 달마 스님을 영접을 해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짐(朕)이 이렇게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많은 스님네를 이렇게 도승(度僧)을 하고 그랬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이렇게 달마 스님께 자기가 그동안에 한 불사에 대한 공덕도 자랑 겸해서 또 달마 스님한테 칭찬도 받기 아울러서 그렇게 해서 떠억 물으니까, 달마 스님이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달마 스님이 ‘아! 참 장하시다’고, ‘천자로서 그렇게 불법을 숭앙하고, 이렇게 불사를 많이 하니 그 공덕이 참 한량이 없어서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터억 찬양을 해 주었으면 양무제가 신심을 더욱 발해 가지고 온통 중국 천지를 아주 불법으로 장엄을 하고 그럴 텐데, 아 그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그러니까 양무제가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그렇게 물어보니까,
“확연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그러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보니까,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양무제와 달마 대사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을 푸대접을 해서 달마 스님은 그길로 돌아서서 양자강을 건너 가지고, 위나라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묵언을 하면서 면벽(面壁)을 하고 계시다가, 혜가 대사(慧可大師)가 나타나 가지고 팔을 끊어서 올리고 신심을 보여 가지고, 드디어 달마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마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달마 스님이 그때, 양무제를 만났을 때 양무제를 찬양을 해서 그렇게 해서 양무제의 절대적인 외호(外護)를 받으면서 법을 설하고 참선법을 선양을 할려고 했다면은 중국 천지에 최상승법을 그렇게 널리 펼 수도 없고, 융숭하게 선양할 수도 없었고, 오늘날까지 참선법이 전해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확연무성(廓然無聖)입니다”

“짐을 대한 그대는 누구냐?”
“모르겠소”

탁! 이렇게 함으로써 여지없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그 면목을 바로 거기서 드러내 버린 것입니다.


양무제는 본래 옹주, 중국에 옹주(雍州)라는 데가 있는데, 천자가 되기 전에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었습니다. 옹주자사로 있었는데, 치(郗)씨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황후(皇后)가 아니고 치씨 부인인데, 참 얼굴이 예쁘고 그런데 성질이 어떻게 표독하고 질투심이 강했어.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한 꼴을 보지를 못하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오직 자기만을 위해 주고, 자기만을 사랑해 주고, 자기만을 갖다가 알아주기를 그렇게 바랬어. 조금만 한눈을 팔거나 그러면은 어떻게 강짜가 심하고 투기가 심하던지 도저히 용납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때 당시 임금이라든지 또는 원님이라든지... 옹주자사라 하면은 아마 원님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고관을 지내면은 다 첩실(妾室)도 있고 다 기생과 놀기도 하고 술도 먹고 그러기 마련인데, 치씨 부인은 그러한 꼴을 못 봐 가지고 나중에는 어떻게 독기(毒氣)를 피우다가 자기가 자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가지고 집 앞에 있는 우물에 빠져 가지고 자살을, 투신(投身)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쫓아와 가지고 우물 속에 들어가 가지고 간신히 건지려고 가니까 어느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큰 무서운 독사, 아주 오색이 찬란한 금색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는 혀를 널름널름. 그래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사람들이 접근을 못했어.
눈은 번쩍거리면서 오색이 찬란한 비늘이 번쩍거리면서 그냥 무서운 독사의 어금니를 갖다가 벌리고서 혀를 널름거리는 통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구제하지를 못하고 기절초풍을 해 가지고 우물에서 다 기어나와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런데 꿈에면 그 무제(武帝) 자고 있는 후궁(後宮)으로 무서운 독룡이 기어 들어와 가지고는—본래 처음에 들어올 때에는 구렁이로 들어와 가지고는 스르르르 깜짝할 사이에 본래의 그 치씨 부인의 모습이 되어 가지고 아양을 떨면서 품안으로 파고들어. 깜짝 놀래 가지고 양무제가 눈을 떠 보면은 간 곳이 없다 그 말이여.
아, 후궁에만 들어가면 그놈이 나타나 가지고 독사가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그런 통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꼬치꼬치 말라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그 연못에서 그냥 꼬리를 치면서 물을 치면은 거기서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할 수 없이 그 우물 위에다가 치씨 부인의 사당(祠堂)을 짓고, 인자 초상화를 그려서 딱 모시고.
그래 가지고 『자비도량참(慈悲道場懺)』이라 하는 십 권에 달한 참회하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이라고 하는 십 권의 책을 저술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도량참법에 의해서 치씨 부인을 갖다가 원한을 풀고 그래 가지고 천도(薦度)하는 의식을 거행을 했는데.

그 치씨 부인이 결국은 그 공덕으로 그러한 업(業)의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면서 공중에서 소리를 치기를 “양무제한테 내가 그동안에 옹졸한 생각으로 그런 독을 품다가 결국은 투신 자살해서 이런 흉악한 몸을 받아 가지고, 결국은 아주 복수를 해서 당신도 죽이고, 당신을 가까이 한 모든 여자를 갖다가 다 말려서 죽이려고 내가 작정을 했는데, 『도량참법』을 만들고 사당을 지어서 나를 고승을 청해다가 이렇게 천도를 해 주니, 내가 모든 원한을 풀고서 내가 천상에 올라가니 참 감사하다”고.
이렇게 올라간 뒤로는 다시는 꿈에 나타나서 괴롭히는 일도 없고, 그 우물에서 갖다가 꼬리를 치고 모다 그런 일도 없고 조용해 졌는데, 그 뒤로 양무제가 지은 『도량참법』이라고 하는 참회법이 널리 세상에 행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무슨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색(色)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명예 ・ 권리에 대한 그런 일어나는 욕심을 이기는 것도 그것도 모두가 어려운 일이고 중대하지만, 그 여러 가지 가운데에 가장 수행하는 데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고, 자기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쌓아 온 모든 공덕을 한 생각에 멸진(滅盡)을 시켜 버리는 그 무서운 것이 바로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고 하는 것은—우리가 사바세계에 살아가는 데에 정말 진심을 내지 않고는 살기가 어렵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진심, 아마 이 세상에 사람이 지금 현재 40억이니 50억이니 하고 또 세계 역사가 생긴 이래로 몇 천만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진심(瞋心)을 한 번도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몇 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왕으로 계실 때에 어떤 문둥병보다도 더 무서운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무서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무서운 창병(瘡病)이 걸린 거지를 나수기 위해서, 결국은 환자를 갖다가 치료해 주기 위해서 어명(御命)으로 치료하게 되는데 도저히 그 병이 하도 무서운 병이라 치료할 수가 없어.
그래서 “오직 이 사람의 병은 한 번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진심(瞋心)을 내지 아니한 사람의 피를 뽑아 가지고 약을 제조해야만 이 병을 낫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임금님께 그 의사가 “그러니 이 세상에 성 안 낸 사람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약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자신이 한 번도 진심을 낸 기억이 안 나. 그러나 철이 들기 전 어렸을 때는 혹 몰라서 유모한테 가서 물어봤습니다. “내가 혹 철난 뒤에는 진심을 낸 기억이 없지만, 철이 나기 전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혹 진심을 냈느냐?”고 물어보니까, “정말 갓난아기 때부터서 진심을 내신 일도 없고, 철이 난 뒤로도 오늘날까지 진심 내시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어.
그래서 임금님은 의원에게 “내 피를 뽑아서 만들어라” 하니까 “어떻게 감히 상감마마의 옥체에서 피를 뽑을 수가 있습니까?” “괜찮다. 어명이니까 피를 뽑아서 해라” 그래 가지고 피를 뽑아 가지고 무서운 그 병을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환자가 병을 낫고서 그래 가지고는 10생(十生)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을 갖다가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괴롭힌 바로 조달(調達)이의 전신(前身)이고, 그 어진 상감마마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인 것입니다.

어째서 상감마마로서 자기의 피를 뽑아서 무서운 병을 고쳐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부처님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이생에는 부처님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로 태어나시니까 저도 사촌으로 태어나 가지고 가지가지 못된 방법으로 부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결국은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마는.

참, 소승불교에서는 ‘그런 죄를 지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부처님 몸에 피를 나게 한 죄로 생함지옥을 했다’ 이렇게 보지마는,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정말 조달이야말로 10생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께 그렇게 큰 은혜를 갚았다. 조달이의 공덕이 아니면 어떻게 부처님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크게 대도를 성취를 하셨겠느냐. 조달이야말로 정말 부처님보다 먼저 깨달으신 선불(先佛)이시고 그렇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마는.
순행(順行)으로 항상 뜻을 맞추어 주고, 따라 주고, 부드럽게 대해 주고 그런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역행(逆行)으로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충격을 주면서 고통을 주면서 그래야만 보다 더 큰 발심(發心)과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도문(道門)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좋은 얘기만 해 주고 그러한 친구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로 삼지 말아라.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고, 충고해 주고 그러한 친구를 고맙게 생각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조달(調達)이가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갖은 악한 행동으로써 고통을 주었을 때, 그것을 갖다가 원수로 생각하고 미워하고 진심을 내고 복수를 하셨다면 부처님은 마침내 성불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고통을 주어 왔지만 부처님께서는 한 번도 진심을 내거나 원한심을 내서 복수할 마음을 내지 않고, 보다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래 가지고 더욱 정진(精進)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방금 양무제, 그 치씨 부인이 그러한 악독을 품고서 투신 자살을 해 가지고 독사가 되어서 그렇게 했지만, 양무제는 그것을 독한 마음으로 구렁이를 잡아 가지고 태워서 죽일 수도 있고 그러겠지마는, 그것을 자비심으로써 사당을 짓고 또 『도량참법』을 지어서 큰스님네를 청해 가지고 천도를 잘 해주었으므로 해서 그 악독한 치씨 부인을 천상에 태어나게 했어.
비록 양무제가 그 당시 최상승법을 믿지를 못하고 달마 스님을 알아보지를 못했다고는 하지만, 양무제는 역사적으로 길이 잊지 못할 신심이 돈독한 천자였습니다.

이 진심(瞋心)!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여러 경전에 진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련존자(目連尊者)도 오백 생을 두고 타살(他殺)을 당하고, 금생에 와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부처님의 오른팔과 같은 그러한 성현이 되어 가지고도 그렇게 결국은 외도(外道)한테 타살을 당했습니다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백 생을 두고 그러한 성현이, 거룩한 수행자가 그렇게 아무 허물도 없이 그렇게 맞아서 돌아가셨느냐? 저 전생에 진심(瞋心)을 냈어.
자기 어머니가 자식 내외의 정분 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좋게 보지를 않고, 자식 며느리를 미워하고 못살게 구니까, ‘어떤 기운 센 장사가 나와 가지고 저 늙은이 때려죽일 사람이 없겠느냐?’고 이렇게 진심을 내고, 참 자식으로서 해서는 안 될 그러한 욕설을 퍼부은 그 과보(果報)로 오백 생을 두고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습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神通)이 제일인데, 과거에 지은 업으로 금생에 맞아 죽기 때문에 그렇게 참혹하게 외도한테 맞아서 돌아가시게 되면서도 신통을 부릴 여유가 없었어.
그 도반인 사리불존자가 “자네가 신통이 제일인데 신통술로 피하던지, 외도를 갖다가 방어를 하던지 그러지, 어찌 자네가 신통을 어디다 두고 쓸라고 그렇게 참혹하게 맞았나?” 하니까, “내가 과거에 지은 업(業)이기 때문에 신통이란 ‘신’ 자도 생각이 안 났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진심(瞋心)!

그리고 또 홍도 비구(弘道比丘)라고 하는 스님은 다겁(多劫)으로 수행을 잘 쌓아 가지고 머지않아서 곧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단계에까지 왔는데, 문턱에다가 손을 거기다 걸치고서 터억 정진을 하다가 삼매(三昧)에 들었어. 그래 가지고 시간이 흐르는 중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가지고 문이 탁! 닫혀지는 바람에 손가락이 깨져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까닭없이 진심을 폭! 냈다 그 말이여.
그 바람을 보고 성을 냈는지, 문짝을 보고 성을 냈는지 갑자기—삼매에 들었다가 그 삼매를 깨게 하고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고 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이 폭! 났는데, 그 진심(瞋心) 한 번 낸 그 과보로 바로 뱀이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독사가 되기는 했지만 워낙 다겁을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견성성불할 단계에까지 왔기 때문에 독사는 되었지마는 환하니 다 의식을 매(昧)하지를 안 해 가지고, 재를 갖다가 꼬리로 잘 요렇게 골라 놓고서 꼬리로써 글을 지었어.
‘다생에 내가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성불을 하게 되었는데,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蛇身)이다. 한 번 진심을 낸 그 과보로 이렇게 뱀 몸뚱이를 받았다’ 한 그런 게송(偈頌)을 써서 그래서 ‘모든 수행자들은 이 게송을 벽에다 붙여 놓고, 크고 작은 모든 진심을 내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뜻의 게송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홍도 비구나, 목련존자나, 치씨 부인이나 그밖에도 경전에 나타난 진심(瞋心)의 무서운 것에 대한 말씀이 참 많지마는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고.(처음~40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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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바세계는 진심(瞋心)을 참! 안 내고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천상(天上)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여. ‘무엇이 먹고 싶다’ 하면은 벌써 배가 불러져 있고, ‘어디 가고 싶다’ 하면 이미 그 자리에 와 있고, 무엇이고 내 마음먹은 대로 다 되고, 내게 조금도 해로울 일이라고는 일어나지를 않고 나타나지를 않어. 다 내 마음에 편안하고 즐겁고 좋은 일만 있는 곳이 천상입니다. 그러니까 천상에서는 진심(瞋心)을 낼 필요가 없죠.
지옥(地獄)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없어. 사사건건이 나를 괴롭히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일만이 있어.

그런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즐거움도 있는가 하면은 괴로움도 있고, 슬픔도 있는가 하면은 기쁨도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섞여 있어서 다행히 내 뜻대로 뭔 일이 잘 되는가 싶으면은 금방 꼬리를 이어서 속상한 일이 또 일어나고, 금방 이만하면 참 좋다 싶으면 뜻밖에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슬픔이 닥쳐오고.
형제간에도 정이 서로 의합(意合)이 되는가 하면은 서로 싸우고, 부자간에도 싸우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싸우고, 회사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정치도 싸우고, 맨 싸움, 더군다나 이 말세(末世)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인데, 투쟁이 치성하는 시대, 무엇이든지 그저.

서로 대화로써 해결하고, 타협으로써 해결하고, 양보로써 한다면 피차가 다 좋고 모든 일이 순리로 잘 풀려 갈 텐데, 사사건건이 한마디 두 마디 간 뒤로는 벌써 말이 거칠어지고, 제 욕심 챙기느라고 싸움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나라도 시끄럽고, 회사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가정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부부간에도 그걸로 인해서 원수가 되어서 생이별 사이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인은 비교적 수행에 열중을 하다 보니 언제 성낼 겨를이 없겠지만, 그래도 한철을 지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크고 작은 속상한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거거든.

밖으로 확! 진심(瞋心)을 내서 표현을 하는 것도 물론 나쁘지만,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 진심을 내는 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꽉 참고—겉으로 목구멍까지 욕설이 나오고, 주먹이 쥐어지고, 곧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격분을 해도 꽉 참을성 있는 사람은 그놈을 참고서 속으로—표현을 하지 아니한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다 참 그만큼 참을성 있는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대승법(大乘法)에 있어서는 밖으로 표현한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만 일어나도 이미 범(犯)한 것이 돼. 그래서 속으로 일어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어. 오히려 밖으로 표현해 버리고 그냥 바로 깨끗이 잊어버리는 편이 속으로 참고 은근히 오랫동안 간직을 하고 속상한 것이 더욱 나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표현을 해 버리면 사람들은 보고 ‘저 사람 진심(瞋心)을 잘 내는 사람이다. 저 사람 수양이 덜 된 사람이다’ 할는지 모르지만, 한마디 욕설 퍼부어 버리고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오히려 육체적으로도 좋고, 정신 위생상으로도 괜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 안 하고, 속으로 참고 참고 억지로 눌러 놓은 것은 나중에 위장병도 생기고, 신장병도 생기고, 고혈압도 생기고, 천식도 생기고, 기관지도 나빠지고 해 가지고 골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오목가슴 밑에 주먹같은 적(積)이 생겨 가지고 일생 동안 그놈이 풀리지를 않고 화병(火病)이 나 가지고 결국은 죽게 되고 그러는데, 그 속으로 참는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참는 것이 그렇게 썩 훌륭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은 진심(瞋心),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릴 수가 있느냐?
이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다든지 모다 그러한 것, 평상시에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지혜(智慧), 이러한 육바라밀을 항상 평상시에 닦아 가면 차츰차츰 자비심(慈悲心)이 충만하고, 또 모든 마음이 안정이 되고 또 남을 잘 용서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수행을 쌓아 나가면 그런 속상한 일이 당하더라도 상대방 입장이 되어서 잘 이해를 해 주고서 바로 용서를 하고 풀어 버리고 이렇게 되어 갑니다마는, 이런 것도 하나의 좋은 방편(方便)이 될 수가 있겠죠.

그러나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여러 경전에 진심을 갖다가 진화(瞋火), ‘성낼 진(瞋)’ 자, ‘불 화(火)’ 자, 진화(瞋火)라고 이렇게 표현도 하셨습니다.
왜 진화(瞋火)라고 하냐 하면은, 그 성내는 열뇌(熱惱)가 마치 불과 같다. 왜 불과 같으냐 하면은 그 성을 내면은 무량겁에 지은 모든 공덕(功德)을 일시에 다 태워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진화(瞋火)라 그러고.
성을 내면은 벌써 눈도 붉어지고, 얼굴도 붉어지고, 몸뚱이도 뜨거워지고 그러고 마음도 갖다가 뜨거워져 가지고는 혈압도 오르고 그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기 때문에 진화(瞋火)라 그러거든.

진심을 많이 낸 사람은 열(熱)이 항상 위로 쳐 올라가 가지고 그래서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눈이 붉어지고, 눈이 빨리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은 진화(瞋火)가 일어나지 않게 하느냐?
항상 자비심(慈悲心), 자비심으로써 자기 마음을 윤택하게 만들어. 부드럽고 서늘하고 윤택하게 만들면 자연히 진심의 불이 자취 없이 식어 버리고 사그라져 버린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탐심(貪心)도 나쁜 것이고 치심(癡心)도 나쁜 것이지마는, 차라리 백천만 번을 탐심을 낼지언정 한 번의 진심(瞋心)을 내지 말어라. 한 번 진심을 냄으로써 무량겁 쌓은 공덕이 일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탐심을 내면은 그걸 안 내면 그만이고, 욕심을 냈다가도 다시 버려 버리면 그만이지만, 진심을 한번 내면은 저 지은 몸과 마음, 저 죽이고 남을 죽여. 한 사람이 집안에서 진심(瞋心)을 내 갖고 있으면 전 집안 식구가 그 독(毒)으로 인해서 모두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진심을 내서 누구를 뚜드려 패고 욕설을 안 해도, 혼자 진심을 내 가지고 미간을 찌푸리고 진심을 내고 있으면은 공연히 옆에 있는 사람도 모두가 다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더군다나 집안 어른일 때에는 더 그렇고, 회사에 사장이나 과장이나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은 더 한 사람이 그렇게 공연히 진심을 내면 전 부하 직원들이 모두 기분이 나뻐. 그래서 모다 의욕을 상실을 하고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나라에서도 웃어른이 진심을 내고 그러면은 전 밑에 각료, 백성들이 모다 다 그 해독(害毒)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하고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ㄴ고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이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원래 조금도 맥히지 않는다, 간격이 없더라. 눈으로 여러 가지 색상을 보는 것이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는 것이 원래 간격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주장자(柱杖子)를 터억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고, 그리고서 그 주장자로써 법상(法床)을 탕! 한번 치시고서,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다. 흰 해오라기가 밭에 내리니 천 점의 눈송이다.

이런 게송을 읊으셨는데, 눈으로 주장자 들은 것을 보건, 눈으로 꽃이 피고 잎이 지는 청황적백의 모든 것을 보건, 또 귀로 주장자 치는 소리를 듣거나, 자동차 소리나 개 짓는 소리를 듣거나 원래로 조금도 막힌 것이 아니다,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이다.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에 상량(商量)을 끊어 버려라. 일체 분별 ・ 시비 ・ 비교 ・ 사량 그런 걸 끊어 버려라 그 말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듣고, 그 듣는 그 소리에 대해서 그리 쫓아가 가지고 온갖 분별 사량심을 내고, 눈으로 무슨 사람을 보거나 모든 사물을 보고서 거기에 대한 온갖 사량분별을 내고 시비심을 내. 그것이 바로 경계(境界)에 속는 것이여.

이쁜 사람을 보면은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든 사람을 보면은 미운 생각을 내고,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은 좋아서 환영을 하고, 자기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면 진심을 내고 미워하고.
그 한마디 자기 비방하는 소리를 듣고서 속에 ‘요놈 가만 놔둬서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갖은 악한 방법으로써 끝내 그 사람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모가지를 띠어 버리고 그러한 일이 동서고금의 역사에 참 많습니다마는.

우리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칭찬한다고 해서 또 내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기에 빠져서 집착할 것도 없고, 나를 좀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나를 좀 해롭게 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확! 진심을 내 가지고 보복을 하고 미워하고 끝끝내 그 사람을 못살게 하고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거기에 떨어지지 않고 화두를 들고, 나를 비방하는 말을 듣더라도 거기에 동요가 되지 말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냐, 본래, 본래 다 이뤄져. 우리가 본래, 새로 도(道)를 닦아서 성불(成佛)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맛 깨닫지 못할 뿐이지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부처님이거든, 우리가. 그러기 때문에 견성성불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어.
‘그걸 저 부처님이나 닦고, 최상근기나 닦고 그러지 우리는 참선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렇게 세속에서 살기 바쁘고 일이 복잡한데 무슨 참선을 하냐?’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보지도 아니하고 미리서부터서 자포자기하고 그러지를 말라 그 말이여.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이여. 모든 기틀을 당해서, 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천 가지 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있지만 그러한 방편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되는 거여. 방편은 잠깐 거기 디디고서 저 건너로 건너가야지,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 부처님의 참다운 뜻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면은 통살을 버려 버려야 하고, 물을 건너가면 배는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야지, 육지에 가서도 배를 짊어지고 다니고 끌고 다니려고 한다든지, 고기를 잡은 뒤에도 계속 통살을 메고 다닌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여.

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이 정법을 믿지 않고 최상승법을 믿지 않고 그러한 사람에게는 정말 이 세상은 오탁악세(五濁惡世)요, 말법시대(末法時代)인 것입니다. 투쟁으로 자기도 멸망하고 남도 멸망하는 이러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악독한 세계를 불법이 아니고서는 막을 길이 없고 제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온통 투쟁의 세계가 되었고, 우리나라도 지금 민주화(民主化)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믿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그러한 마음으로 해 나가지 아니하면 아무리 입으로 민주화를 떠들어 봤자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민주화는 모두가 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과 명리(名利)를 떠나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인류 평화를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이 아니고서는 민주화는 오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정치가(政治家)와 정객(政客), 때로는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정말 민족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생각해서 경륜을 가지고 정치를 한 사람은 정치가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라 그러는 거고.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불타고, 자기의 한 당략(黨略)에 빠져 가지고 설쳐대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꾼인 것입니다. 그런 정치꾼들이 날뛰어 가지고서는 이 나라에 민주화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인류의 평화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참 노력을 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온 세계가 눈에 불을 켜고 사리사욕과 당략에 떨어져서 날뛴다 하더라도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로써 속살림을 해 나가고, 자비와 지혜로써 갑옷을 삼고 등불을 삼고, 정말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 돼. 그 수십 층 건물도 벽돌 한 장 한 장이 바로 놓임으로써 건물이 준공이 되는 것입니다.
천하없이 많은 벽돌을 갖다 놨어도 바로 쌓지 아니하면 그것이 집이 되지를 않고, 설사 쌓는다 하더라도 이리 삐딱 저리 삐딱 해서 중심을 잃어버리고 100층을 쌓은들 그것은 그 건물은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 100층을 쌓은들 기초가 튼튼히 되지 아니하면 그 건물은 언젠가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로써 탁! 마음을 가다듬고서 보면 어느 사람이 정치꾼인가, 어느 사람이 진정한 정치가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하노니  광음막허도(光陰莫虛度)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하면  적수야난소(滴水也難消)니라
나무~아미타불~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하노니, 삼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 사룁나니,
광음(光陰)을 막허도(莫虛度)어다. 광음(光陰), 시간, 세월을 헛되어 보내지 마십시오.

금생(今生)에 미명심(未明心)하면, 금생에 이 마음을 깨닫지를 못하면,
적수(滴水)도 야난소(也難消)니다.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려우니라. (40분31초~1시간13분5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 / 법문을 듣고서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법문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 화리생련(火裏生蓮).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만남과 대화 / 양무제가 옹주자사로 있을 때 치(郗) 부인의 진심(瞋心) / 치씨 부인의 천도를 위해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을 저술 /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 부처님과 조달과의 인연.
진심(瞋心), 목련존자의 전생, 홍도 비구 이야기 /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다 /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가운데에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 /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

(게송)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 /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 모든 경계에,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이뭣고~~~?’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다.

천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된다 /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 (게송)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 광음막허도(光陰莫虛度)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 적수야난소(滴水也難消).


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일어나는 진심(瞋心)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8)—1983(계해)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4.01.17) (31분)

 

약 31분.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리오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광겁무명구탕진(曠劫無明俱蕩盡)헌디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며, 악한 인연을 누가 지어서 그 죄과(罪果)를 또 누가 받느냐 그 말이여. 죄를 지은 것은 무엇이 죄를 지었으며, 죄를 받는 자는 또 누가 죄를 받는 것이냐?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참된 성품은 허공과 같애서 동요가 없더라.

광겁무명(曠劫無明)을 구탕진(俱蕩盡)하면, 광겁(曠劫)의 무명(無明)을 함께 다 탕진해 버리면,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니라. 선천(先天), 하늘이 생겨나기 이전, 이 땅이 또 없어진 뒤에—하늘이 생겨나기 저 무량겁 이전 무량억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이후, 한량없이 이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서 이 세계가 없어진 뒤까지 본래부터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적멸(寂滅)한 상(相)이더라.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정월 17일,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이 자리에는 세등선원 안거 대중(安居大衆)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 안거 대중과 그밖에 윤필암,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한 비구니 선객(禪客)들이 이 자리에 운집(雲集)을 했고, 또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을 해서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에 한량없이 많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와 은진 송씨 진영 영가와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이 자리에 이 법요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도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체적이고 자상하게 그 공부해 나가는 방법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는 그보다 더 자상하고 뼈에 사무치는 법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生死) 없는 그 본성(本性)에 입각해서 보면 닦을 것이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버려야 할 악(惡)도 없고 지어야 할 선(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사(生死)가 본래(本來) 없건마는 무슨 까닭으로 무량겁을 두고 우리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면서 갖은 고락(苦樂)을 겪으면서 금생에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왜 생사가 본래 없는데 이렇게 생사를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왜 본래 생사가 없는데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 수도(苦行修道)를 해야 하는 것이냐?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탄생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6년 고행을 하셨어.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49년 동안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미묘법(微妙法)을 설하셨습니다마는, 무슨 목적으로 하셨느냐?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출현을 하셨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를 하느냐?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거여.

우리가 당장에라도 벗어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다고 하는 도리에 계합(契合)해 버리면 장부(丈夫) 일대사를 요달(了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겁무명(曠劫無明)을 탕진(蕩盡)을 해 버리고 선천후지(先天後地)에 적요요(寂寥寥)한 도리인 것입니다.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하면  본래비불역비심(本來非佛亦非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라  자유영광요고금(自由靈光耀古今)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단전(單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깊은 밀의(密意)를 바로 봐 버리면,
본래비불(本來非佛)이요 역비심(亦非心)이니라. 본래 부처도 아니고 또한 마음도 아니니라.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불(燃燈佛)께 수기(授記)를 받아서 부처를 이룬 것이 아니라고 하는 도리를 분명히 안다면, 우리 모든 대중과 육도 법계(六途法界)의 모든 중생도, 금일 은진 송씨 진영 영가(靈駕)도,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스스로 신령스러운 광명, 스스로 갖춘 신령한 광명이 예[古]와 이제[今]에 빛날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이 원상(圓相)을 떠억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일러라!” 했습니다. 한 스님이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떠억 앉았어.

마조 스님이 주장자(柱杖子)로 여지없이 한 방맹이를 쳤습니다. 치니까 그 원상 안에 떠억 들어가서 앉은 스님이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입을 딱 다물고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

지난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용맹정진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행을 한 대중이 지혜의 눈을 뜬 자가 있거든, 이 원상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 승(僧)이 들어갔다. 마조 스님이 여지없이 방(棒)을 내리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왜 쳤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다’고 한 도리가 무엇이여? 눈을 갖춘 자가 있으면 한마디 일러.

이 많은 대중이 용맹정진을 그렇게 했으니 어찌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 둘 뿐이리요마는 체면을 너무 지키느라고 묵언(默言)으로써 이른 것을 나는 알겠습니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심)


오늘 해제(解制)를 하고 앞으로 석 달 동안 산철인데,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제(結制) 중이라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해제라고 해서 어찌 산만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석 달 동안 춥도 덥지도 않는 그런 좋은 정진하기 좋은 계절에 어쨌던지 시간을 아껴서 더욱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오늘 백일기도 회향(廻向)이며 또 이 세등선원에 천일기도가 오늘로써 회향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행도 해제를 했다고 해서 공부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듯이, 해제를 하고서 더욱 정진을 알뜰히 해야 함과 마찬가지로 다시 오늘부터 또 천일기도를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께서는 또 이 천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셔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소원이 낱낱이 다 성취가 되시고, 무량겁 업(業)이 다 소멸이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분 가정에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고,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다음날 이 자리에 만날 때까지 알뜰히 정진하시고 기도하시기를 부탁을 하고 해제 법어를 마칩니다.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한디  수봉창취접천하(數峰蒼翠接天霞)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중무한청의미(箇中無限淸意味)를  강상일구도설파(江上一鷗都說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해제를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도반(道伴)을 찾으며 행각(行脚)을 하다 보면, 비를 만나서 비가 지난 뒤에는 구름이 걷히고 강상(江上)에는 해가 넘어가고, 몇 봉우리 푸른 산봉우리는 안개가 끼어서 하늘에 접(接)한데, 그 가운데에 한없는 맑은 맛을 어떻게 표현을 할 것인가?
이 그림과 같은, 비가 갠 뒤에 구름이 걷히고 강 위에는 석양이 되어서, 그 푸른 봉우리는 안개에 끼어 가지고 하늘에 접했는데, 그 아름다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강상(江上)에 이리 나르고 저리 나르는 흰 백구(白鷗)의 울음소리가 그 아름다운 경계를 여지없이 일렀드라. (처음~30분49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 /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 부처님은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것.

(게송)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 / 마조(馬祖) 원상(圓相) 공안 /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 (게송)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