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01~225)2023. 7. 28. 17:37

(No.215)—1983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64분)

 

(1) 약 34분.

 

(2) 약 30분.



(1)------------------

신세등공화(身世等空華)하고   이명여분토(利名如糞土)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도자합여사(道者合如斯)하면  기시과능소(豈是誇能所)리요
나무~아미타불~

신세(身世)는 등공화(等空華)요, 이 몸뚱이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공의 꽃과 같고,
이명(利名)은 여분토(如糞土)로구나. 이끗, 재산과 명예 이러한 것은 똥 묻은 똥 덩어리와 같다.

공화(空華)라 하는 것은, 허공의 꽃이라 하는 것은 실지로는 없는 것인데, 안질병(眼疾病)이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을 보면 그 허공 속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실지는 없는 것인데 눈병이 걸린 사람에게는 꼭 무엇이 실지로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허공 속에 보이는 거 그것이 공화(空華)인데, 이 몸뚱이와 이 세계도 역시 공화(空華)다 그 말이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가합(假合)해서 임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깨닫지 못한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볼 때에는 이 몸뚱이가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 세계도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상(實相)이 아니라 허공 속에 피어 있는 꽃처럼, 안질병(眼疾病) 환자가 볼 때에 허공 속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무명(無明)으로 보니까 이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가 참자기, 참자기라고 느껴지고 이 세계도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지 실지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도자(道者)가 합여사(合如斯)하면, 도 닦는 사람이, 정법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이 합당(合當)이 이와 같이 볼 것 같으면, 자기의 몸뚱이와 이 세계 그리고 명예와 재산 이런 것들을 공화(空華)와 같이 보고 흙덩어리나 똥 무더기처럼 본다면,
기시과능소(豈是誇能所)리요. 어찌 능소(能所)를 자랑하리요. 능소(能所)라 하는 것은, 능(能)이라 하는 것은 주관을 말하는 것이요, 소(所)라 하는 것은 객관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모다 능소라 하는 것은 인아상(人我相)이거든.

‘내’라 하는 생각, ‘이것은 나다’ 하는 생각, ‘내 것이다’ 하는 생각, ‘나는 잘한다’ 하는 이러한 주관적인 생각, 그리고 ‘남이다, 내가 아니고 저것은 남이다’ 하는 그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것은 내 것은 소중하고 내가 옳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헐뜯고, 내가 남을 디디고 올라서서 나만 잘살려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내 가지고 남과 다투고 이러한 생각을 어찌 가질 것이냐.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로 얽혀진 허망한 것이라 하지만 먹여 주어야 하고, 입혀 주어야 하고, 춥고 더운 곳에서 이 몸을 잘 보호를 해야 하고, 병이 나면 치료를 해 줘야 하고, 또 내가 사는 집도 비가 새지 않고 차운 바람을 막아 주고 이렇게 집도 단속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명예나 재산 같은 것도 그것이 똥 덩어리와 같고, 흙덩어리와 같이 허망한 것이요 영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마는 당장 명예가 없으면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고, 재산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먹고 입고 거주하는 것이 온통 다 재산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아들딸을 낳아서 길러서 가리키는 데에도 재산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허공의 꽃처럼 보고, 똥 덩어리나 흙덩어리처럼 그렇게 달관을 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니 병이 들어도 내싸두어 버리고, 춥거나 덥거나 얼어 죽거나 더위를 먹어서 쓰러지거나 방치를 해 버리고, 집이 쓰러져서 무너져도 내비두어 버리고, 재산을 갖다가 남이 다 가져가 버리거나 재산이 다 없어져도 관리를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살 것인가?
부처님 법문을 잘못 이해하면 그러한 단상견(斷常見)에 떨어져서 중도(中道)의 뜻을 이해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어도 단견(斷見)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상견에 떨어지지 말도록 법문을 하면 당장 찰나간에 단견에 떨어지고, 이래 가지고 단견 아니면 상견, 상견 아니면 단견, 양두(兩頭)에 걸려 가지고 중도의 뜻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중생견(衆生見)이라 하는 것입니다.

방에서 파리를 날리면,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천장에 가서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은 동쪽 벽에 가서 붙고, 동쪽 벽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서쪽에 가 붙고, 그 파리를 종일토록 날려도 동서남북 벽 아니면 천장에나 방바닥 어딘가는 기어코 붙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무명업식(無明業識)을 여의지 못한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설해 주어도 유무(有無) 아니면 중간에 떨어져서 중도의 뜻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으면, ‘몸과 이 세계가 허공꽃과 같다’ 해도 그 말에서 깨달아 얻을 것이요, ‘명예와 재산이 똥 무더기요, 흙덩어리와 같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의 그릇된 애착과 집착과 소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부처님 법문에 깊은 산중에 다섯 신선(神仙)이 도(道)를 닦고 있었는데, 각기 책임이 있어서 그 다섯 신선 가운데 한 신선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밥을 짓는 부목과 공양주의 책임을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너무 피곤해 가지고 뜨뜻한 양지 바른 언덕에 잠깐 쉰다고 하는 것이 깊은 잠이 들어 가지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식사 시간이 다 지나 버리고 늦게 늦게사 돌아오니까 그 다른 네 분의 신선들한테 호되게 걱정을 들었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을 지키지를 못하고 자기 멋대로 실컷 자고 때가 지내서사 이렇게 돌아오면 그러한 게으른 생각을 가지고 무슨 도를 이룰 것이냐?’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니까 거기에서 참 미안한 생각과 자책감이 나서 강으로 가 가지고는 한 발을 딛고, 몇 시간을 한 발로 딛고 손을 들고서 발을 들고서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벌을 주기로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이렇게 한 발만 딛고 발을 들고 그렇게 벌을 서고 있는데, 그러다가 너무 지쳐 가지고 신발, 발에 신었던 칠보로 잘 만들어진 신이 강물에 떨어져서 흘러 내려가고 또 그러다가 몸이 쓰러져 가지고 결국은 그 사람은 물에 떠내려 가지고 기진맥진했기 때문에 헤엄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길로 물에 빠져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 신선이 그렇게 해서 죽은 뒤에 오랜 세월이 걸려 가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한 여나므 살 이렇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 소년이 신선이 죽어 가지고 태어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마을 아이들과 같이 어울려서 놀고 장난하고 그렇게 하면서—별로 부잣집이나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지를 못하고, 가난하고 천한 그런 집에 태어나 가지고 마을 아이들하고 섞여서 놀고 있는데, 어느 도사(道士)가 그 마을을 지나다가 놀고 있는 아이들을 이렇게 주욱 살펴보더니, 그 신선이 (다시) 태어난 그 아이를 보고서 찬찬히 그 아이를 보니 설사 옷은 남루하게 입었지만, 그 얼굴 생김새라든지 눈매라든지 모든 것이 여러 아이들에게 비교해서 특출하게 준수하게 생겼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아이를 “너 이리 좀 오너라” 하고 부르니까 다른 애들도 ‘와~’ 하니 삥 둘러섰다.

“너는 지금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너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 나라 왕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천한 집 아이가 무슨 왕이 된다고 그러십니까? 점잖은 어른이 왜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러한 장난 말을 하십니까?”

“아니다, 후일에 반드시 네가 왕이 될 터이니 그때 왕이 되거든 나를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만일 제가 왕이 된다면 내가 도사님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왕이 될 까닭도 없지만, 만일에 된다 하더라도 제가 도사님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잊겠습니까?”

그래서 마을 애들도 ‘미친 영감이, 미친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한다’ 해 가지고 모두 곧이듣지 않고 웃어 버리고 말았는데, 몇 해 안 가서 그 나라 임금님이 병을 앓다가 승하(昇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밑에, 왕 밑에 왕자가 없어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를 왕으로 모시느냐?’ 대신(大臣)들이 모여서 여러 날을 두고 토의를 한 결과, ‘이 나라 방방곡곡을 뒤져서 임금님으로 모실 만한 그런 어진 분을 우리가 찾기로 하자’ 그래 가지고 각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 가지고 임금님이 될 만한 그런 어진 현자(賢者)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치 그 신선이 죽어서 태어난 그 애가 사람들의 눈에 띄어 가지고 추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궁에서는 칠보로 장엄한 가마를 보내 가지고 그 청년을 모셔 갔습니다. 가서 보니 만조백관이 전부 다 ‘과연 이만하면 우리가 임금님으로 모실 만하다’ 해 가지고 임금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딱 되던 날, 몇 해 전에 자기가 임금이 되리라고 수기를 준 그 도사가 찾아왔습니다.
“상감이 저 얼굴을 기억을 하시겠습니까?”
“아! 제가 기억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도사님 말대로 임금이 되었으니 내가 도사님의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던지 다 원(願)대로 해 드리려니와 우선 당장 이 나라를 절반으로 갈라서 드릴 테니까 그 나라 임금이 되십시오” 그러니까.

“저는 그런 것도 다 싫습니다. 싫고, 임금님이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모든 것은 내가 임금님으로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둘째는 모든 크고 작은 정사(政事)를 하는데 있어서 나의 자문(諮問)을 받아서 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 두 가지만 해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 그것이야 내가 어찌 못하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왕궁에 특실을 만들어서 임금님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고, 똑같이 잘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시설을 다 마련을 하고, 크고 작은 모든 정사에 전부 다 문의를 해서 자문을 받아 가지고 하게 되었습니다.
몇 해 안 가서 어떻게 정치를 잘하고 잘 다스리던지 온 나라가 온통 질서가 잘 잡히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사가 차츰차츰 교만(驕慢)이 생겨 가지고 모든 대신들을 너무 짓밟고,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래 가지고 그 나라 모든 정치는 그 도사의 한 주먹 속에 다 들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대신이 수십 명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니까 대신들이 여기서저기서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평을 해도 임금님은 다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그 도사(道士) 말에만 전적으로 의존을 하게 되어서 모든 대신들은 ‘저 요망한 저 도사를, 거라지놈 같은 정체를 모르는 저 도사놈을 갖다가 내쫓아야 한다’고 모다 주장을 했습니다.
임금님은 여러 차례 그것을 거절을 하고 물리치고 그랬지만, 하도 대신들이 물러가지 아니하고 연일 연좌데모(連坐demo)를 하고 그러니까 하다하다 못해서 임금님도 ’그 도사를 한번 시험해 볼 수밖에는 없다‘ 이래 가지고 그 도사가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그전 같으면 도사가 돌아올 때까지 상감이 식사를 아니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도사가 오거든 항시 같이 했었는데, 그날은 도사가 오기 전에 더 이상 기다리지를 아니하고 임금님이 먼저 식사를 해 버렸습니다. 도사가 돌아와 보니 벌써 먼저 임금이 수라(水剌)를 다 들어 버렸다 그 말이여.

“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고 임금만 먼저 식사를 했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내가 먼저 했습니다”

“벌써 상감은 나와 최초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을 언제나 함께 하고, 똑같이 하기로 그렇게 철통같은 약속을 해놓고 조끔 배고프다고 해서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나 먼저 먹다니, 당신은 의리를 배반한 사람이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 개새끼같은 놈이다” 이렇게 상감을 향해서 입에 못 담을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신들이 ‘와~’ 일어나 가지고 ‘상감님을 향해서 저러한 무례한 소리를 할 수가 있느냐? 저러한 불경스런 놈을 가만히 둘 수가 없다’ 해 가지고 ‘저놈은 귀도 짜르고, 코도 짜르고, 혀도 짜르고 해 가지고 그리고 팔다리를 다 짤라서 항아리 속에 담아 가지고 태워 죽여야 옳다’ 이래 가지고 대신들이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임금님은 (도사의) 소퉁이를 생각하면 마땅히 그렇게 엄벌에 처할 일이로되, 자기와의 오랜 의리가 있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이 사람을 먹고 입고 살만한 돈과 곡식을 주어 가지고 저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해라” 이래 가지고 대신들의 연좌 항의를 갖다가 물리치고 귀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도사(道士)는 할 수 없이 왕실에서 쫓겨나 가지고 저 먼 지방으로 추방을 당했는데, 할 수 없이 자기 받았던 돈과 곡식이 다 떨어지니까 옛날에 자기 다정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들은 그 사람을 갖다가 농토를 주어 가지고, 소와 농토를 주어 가지고 농사를 짓도록 상당한 많은 토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여러 종들을, 일꾼과 머슴을 들여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는데, 어떻게 머슴과 종들을 갖다가 혹독하게 부리던지 그 일꾼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갖다가 소 돼지처럼 그렇게 혹독하게 부리던지 살 수가 없어서 그 머슴 가운데 한 사람이 거기서 도망쳐 가지고 ‘물에 빠져서 차라리 자살을 해 버려야겠다’ 이래 가지고 강가로 가서, 자살하려고 강가로 갔더니 거기에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것이 있어서 가까이 가 보니까 칠보로 장엄한 신짝 한 개가 있더라 그 말이여. 그래서 그것을 주워 가지고 이모저모로 보니까 기가 막힌 보물이여.
그래서 ‘이것을 갖다가 우리 주인한테 갖다 바치면 나와 우리 모다 동료들을 혹독하게 부리지 아니하고 잘 따뜻하게 해 줄 거다’ 해 가지고 그 신을 갖다가 바치니까, 그 도사가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 신을 갖다가 상감한테 바치면은 상감이 나의 잘못을 용서하고 귀양을 풀어주지 않을까?’ 이래 가지고 그 신발을 갖다 상감한테 바쳤습니다.

상감이 대단히 기뻐서 귀양을 풀어줄려고 했는데 대신들이 ‘와~’ 하니 일어나 가지고 모두가 반대를 했습니다. ‘그까짓 신발 한 짝을 가져왔다고 해서 그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차라리 신발 두 짝, 한 켤레를 다 가져온다면은 혹 몰라도 한 짝 가지고 어떻게 용서를 해 줄 수가 있느냐?’
그래서 상감은 ‘그러면 가서 어떻게 찾던지 마지막 한 짝을 더 찾아서 한 켤레를 채운다면 용서를 해 주겠다’ 이리해서 그 도사는 다시 추방을 당해 가지고 자기 농토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 일꾼과 종을 거느리고 그 강가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 신발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 강을 거슬러서 거슬러서 저 산중 깊이 들어가니까, 아! 신선들 네 분이 바둑을 두면서 그렇게 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신선들한테 인사를 하면서 “내가 신발 한 짝만 더 주운다면 내가 모든 이런 고생으로부터 풀려나고, 다시 임금님의 스승이 되어 가지고 호강을 할 수가 있겠는데, 이 신발 한 짝을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것을 어떻게 찾게 좀 해 주십시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선이 “너의 상감은 옛날에 우리와 같이 도를 닦던 우리의 친구다. 친구가 조그만한 실수가 있어 가지고 스스로 그 조그만한 실수를 깊이 뉘우치고 참회하다가 마침내 몸까지 버리게 되었어. 조그마한 허물을 깊이 뉘우친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 상감의 복록을 누리게 되었는데, 너는 큰 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을 모르니 너 같은 사람을 어디다 쓸 것이냐?” 이렇게 꾸짖으니까,
“과연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임금님이 나하고 약속을 잘 지켜서 나를 그렇게 임금님과 똑같이 그렇게 명예와 권리와 모든 복록을 그렇게 잘 해 주었는데, 내가 그것에 너무 놀아나 가지고 교만심을 내 가지고 그렇게 함부로 하다가 이러한 벌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무런 참회를 할 줄 모르고 오히려 대신들과 임금님을 원망했으니 참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깊이 뉘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선이 ‘그러면 그 신발 한 짝은 저리 아무 데를 가면은 거기에 신발이 한 짝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러주어 가지고 그 도사가 거기를 찾아 가지고 신발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짝을 채워서 한 켤레를 상감한테 바치니까 상감이 그렇게 좋아하고, 대신들도 차츰 미워하는 생각이 없어져서 다시 상감의 자문에 응하면서 아주 바르게 그리고 겸허하게 그렇게 위로는 상감을 받들고, 아래로는 만조백관의 의사를 들어서 아주 정치를 잘해 가지고 그 나라가 번창을 했다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이 있습니다.(처음~33분38초)





(2)------------------

사람은 명예와 재산과 권리를 누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게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벼슬이 높을수록에 그 뜻을 겸허하게 갖고, 도가 높을수록에 하심(下心)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 원효 스님의 법문도 있습니다.
작은 허물이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큰 저수지의 둑도 모래 구녁 하나로 인해서 물이 졸졸졸졸 그리 새 가지고 차츰차츰 구멍이 커져 가지고 열 길, 스무 길 되는 무서운 저수지 댐이 무너져 가지고 큰 물난리가 나듯이, 우리가 세속(世俗)에 살건 또는 도를 닦는 도문(道門)에서건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설사 자기에게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驕慢)한 생각을 갖지 아니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조그만한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뉘우치는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용서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큰 공(功)이 있어도 그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교만심이 나지 아니하면, 그럴수록에 자기의 공이 더욱 빛날 것이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큰 지탄을 받게 되고, 아무리 큰 공이 있어도 교만심을 낼 때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의 인격이 인증을 받게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공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는 큰 재앙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장양(張良)이는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그 큰 공이 있었지만 스스로 자기가 세운 그 공로에 자만심을 갖지 아니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았기 때문에 재앙을 면했고, 한신(韓信)이도 역시 그러한 큰 공을 세웠지만 천자(天子)로부터 자기의 공로에 대한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포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해 항시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참형(慘刑)을, 참혹한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또는 회사에서나 또는 국가에서나 또는 이런 도문(道門)에서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이러한 작은 허물이 있으면 크게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새로운 발전을 해 나가도록 마음을 쓸 것이고, 설사 어떠한 공(功), 작은 공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큰 공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공로에 대해서 자만심을 갖지 아니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우리가 몸담아 있는 회사나 직장, 어디서라도 존경을 받게 되고 자기에게 모든 재앙이 닥쳐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흔히 가정에서 싸움도 자기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를 하고, 상대방의 잘못은 추상(秋霜)같이 다루려고 하는 데에서 큰소리가 나고 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간, 형과 아우와의 관계에 있어서까지 자기의 잘못은 뉘우칠 줄 모르고 상대의 잘못은 조그만한 것도 용서를 아니하고 크게 문제를 삼으려고 하는 데에서 시비가 일어나고 큰소리가 나고 마침내는 불화(不和)가 이루어지게 되고, 부부간에도 그러한 조그만한 문제가 원인이 되어 가지고 이혼을 하게 되고, 불행한 때에는 한쪽에서 가출을 하고 자살을 하고 이러한 참 참담한 사건이 일어나는 예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을 하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한다면 우리의 가정, 우리가 몸담아 있는 회사, 우리가 몸담아 있는 고장과 나라, 그리고 수행하는 스님네는 그 사찰이 모든 재앙은 눈 녹듯이 다 녹아 버리고, 정말 부처님께서 그 육화(六和), 여섯 가지의 육화의 법이 실천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정법문중(正法門中)은 영원히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 ‘햇볕이 문틈이나 그런 틈으로 햇볕이 스며들 때 방안에 있는 그 수많은 먼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햇볕이 스며들지 아니할 때, 문을 닫고 방안에 있으면 그 방안에 먼지 있는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마는, 햇볕이 문틈으로 스며들 때에 보면 그 방안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먼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환하니 보입니다. 그리고 못에, 맑은 못 그리고 조용한 못가에 섰으면, 그 못 속에 자기의 모습과 근처 산과 나무나 하늘에 떠 있는 달에 모든 것들이 그 물속에 소소(昭昭)하게 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열심히 공부를 하면 우리 자신의 모든 크고 작은 모습이 우리의 몸가짐에 있어서나, 말씨에 있어서나, 마음가짐에 있어서 모든 것이 소상하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햇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스러운 마음으로 비추어 본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고요한 연못」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화두를 들고 정진(精進)함으로써 번뇌와 망상이 다 가라앉아서 맑고 고요한 상태에 들어간다고 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진을 하지 아니하고 도(道)를 닦지 아니하면, 호수의 물이 흙탕물이 그나마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상태와 같고, 방안에 있으되 햇볕이 들어오지를 않는 껌껌한 방에 있는 거와 같아서 그런 상태에서는 먼지도 보이지 아니하고 모든 영상(映像)도 보이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그런 껌껌한 방이나 물결치는 흙탕물 속과 같은 그러한 마음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기의 허물은 보지 아니하고 밤낮 남의 잘못한 것만 살펴 가지고 그것을 피차 서로 시비(是非)를 하다가 결국은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옷을 찢고 저 사람은 내 옷을 찢으며, 나는 저 사람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고 상대방은 내 얼굴을 갖다가 할켜 가지고, 결국은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곳은 바로 그 세계가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이고, 도 닦는 마음이 없는 그래 가지고 자기의 이끗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명예와 권리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남을 거리낌없이 짓밟고 해롭게 하는 그러한 세계는 바로 아수라(阿修羅)의 세계다 그 말이여. 지옥(地獄) 세계다 그 말이여.


어느 이상한 곳이 있어서 거기를 찾아 들어가 가지고 보니까, 원숭이를 몇십 마리를 잡아넣어 논 것처럼 뭔 사람 소리도 같고 이상한 소리가 나서 괴이한 소리가 나서 이리 가 봤더니 사람들이 꼬치꼬치 말라서 뼈만 남은 앙상한 그런 꼭 귀신같은, 아직 죽지 아니한 해골같은 그러한 무리들이 그 안에 버글버글버글 하고 있다 그 말이여.
또 한쪽을 저리 갔더니 희망에 찬 노래소리가 나고,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얼굴이 포동포동하니 모다 살이 찌고 얼굴이 환히 아주 신선도골(神仙道骨)이 되어 가지고 모다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조금 있으니까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식사가 주욱 가운데 식탁이 있고 그런데 그 식탁에 바짝 가서 먹게 되어 있지를 않고 멀찌감치 앉아서, 숟가락이 기다란 해 가지고 국자같이 만들어져 가지고 먼 데서 음식을 떠먹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러고 가운데다가 밥통을 주욱 갖다 놨기 때문에 같이 이쪽에서도 떠먹고 또 저쪽에서도 마주 앉아서 이렇게 떠먹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런데 이렇게 뜰라고 하면 저쪽에 앉은 사람이 긴 숟가락을 탁! 때려 버리고 못 퍼가게 하고, 자기가 퍼 먹으려고 하면 또 이쪽에 앉은 사람이 또 그 숟가락을 탁! 때려 버리고는 못 떠먹게 하고 그래 가지고 또 저만 떠먹으려고 하고, 그러다가 피차 한 숟갈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음식물은 밖으로 다 쏟아지고.
그리 못 먹고 상대방이 못 떠먹게 하니까, 그 숟갈로 상대방의 얼굴이고 머리빡이고 사정없이 때리고 후려갈겨 가지고 모다 상처가 나고, 그래서 상처가 난 데다가 못 먹고 하니까 뼈만 앙상하니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 또 한쪽에를 갔더니 아까 그 살이 찌고 신선도골과 같이 생긴 데에 식사가 나왔는데, 그 긴 숟갈로 밥을 떠 가지고 제 입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입에다가 따악 떠 넣어 주더라 그 말이여. 또 상대방에 앉은 사람은 또 긴 숟갈로 음식을 떠 가지고 또 자기 앞에 있는 상대방 입에 다 떠 주고 해서 피차(彼此) 떠먹여 주니까, 그렇게 밥은 음식물은 엎지러지지 아니하고 다 같이 살이 포동포동하니 쪘어. 얼굴도 하나도 상처가 나지 아니하고 그렇게 살이 쪄서 그렇게 참 화목한 가운데에 살고 있더라 그 말이여.

이 세계도 서로 도우면서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에 해(害)가 가지 않도록 항시 자기의 어떤 일을 하면서 ‘이 일을 하면 상대방에 어떠한 해(害)가 있을 것인가? 이 일을 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에는 어떠한 해가 있을 것인가?’ 항시 남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살 길을 찾아나가고, 자기의 사업을 해 나가는 그러한 세계가 된다면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정말 살지고 살기 좋은 그러한 세계가 될 것이고.
자기만 잘살고 자기만 배불리 먹고 또 상대방을 못 먹게 훼방을 놓고, 그것도 상대방을 갖다가 숟갈로 사정없이 후려갈겨서 상처를 내게 하면 상대방도 역시 가만히 안 있고 나로 하여금 못 먹게 할 것이고,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겨서 상처를 내게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어리석은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실지로 그러한 일을 당하면—지금 법당에서 이렇게 말을 듣고 있을 때는 ‘아! 과연 그렇구나. 그래야 하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다 하시겠지만, 가정으로 돌아가고 사회에 나가면서 어떠한 명예나 권리나 이끗을 만나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졌던 그러한 생각은 간 곳이 없고 확! 눈이 뒤집혀 가지고 다시 그 숟갈로 상대방 얼굴을 후려갈기게 되지 않을란가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한 분도 그런 분이 계시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되고, 그러한 참 신심(信心)을 갖으신 분이기 때문에 참 여기에 이렇게—연휴가 있어서 모두 여기저기 명승고지(名勝故址)로 모다 유쾌한 여행을 떠나실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그러한 것을 다 그만두고 이렇게 이 법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정말 갸륵하고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들이야 여러분 입에 넣기 위해서 상대방을 숟갈로 후려갈기거나 그런 일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너무너무 살기가 어렵습니다. ‘밤낮 남의 입에만 떠 넣고 누가 내 입에 떠 넣어 주기를 기다려봤자 동서남북을 다녀봤자 아무도 내 입에다가 떠 넣어 줄 사람을 만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이 세상은 나쁜 사람도 많이 있지만, 내 마음이 착하고 보면 참 좋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어질고 착하고 항시 남을 사랑하고 애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멀고 가까운 데에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 나쁘다, 저 사람이 나쁘다’ 하지만, 내가 나쁘면 좋은 사람도 다 나쁜 사람으로 변하고, 내가 어질고 착하고 좋으면 모두가 ‘나쁘다’고 지탄을 받는 그 사람도 나한테는 참 좋게 상대해 주는 경우를 많이 겪게 됩니다. 좋고 나쁜 것은 객관적이기보다는 나한테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바로잡고, 내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지면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 마음 하나가 잘못되어 가지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한집안 내에도 모두가 미운 사람뿐이고, 이웃간에도 전부가 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념근본미(一念根本迷)하면  만사상상축(萬死常相逐)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진로옥(打破塵勞獄)하면  공창환향곡(共唱還鄕曲)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념근본미(一念根本迷)하면  만사상상축(萬死常相逐)이다.
한 생각 근본을 미(迷)해 버리면, 만 가지 생사(生死) 문제, 생사가 항상 뒷을 따르더라. 한 생각 삐끗 잘못 먹은 데에서 온갖 재앙이 따르고 생사의 윤회(輪廻)가 끊임없이 쫓아오더라.

타파진로옥(打破塵勞獄)하면, 진뇌(塵牢), 생사 진뇌의 감옥을 때려 부셔 버리면,
공창환향곡(共唱還鄕曲)이라. 함께, 우리 모두가 함께 본고향(本故鄕)으로 돌아가는 노래를 합창하게 될 것이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이렇게 서늘한 가을철이 돌아왔습니다. 머지않아서 또 엄동(嚴冬)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세월은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서 우리의 생사를 재촉을 합니다.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59분5초)


입선(入禪). (입선 죽비 3타)

<약 4분 동안 정진>

죽비 쳐. (방선 죽비 3타)


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라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촬토시황금(撮土是黃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요. ‘옛날에는 참선을 하면 모다 깨칠 수가 있고, 지금은 말세가 되어서 참선해 봤자 근기(根機)가 얕아서 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한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나, 참선에는 예[古]와 이제[今]가 없어.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라도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다 깨칠 수가 있다.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다못 밖을 향해서 찾지를 말어라.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觀照)할 뿐이지 문자상에서 책에서 찾는다든지, 귀로 듣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눈으로 보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다함이 없는 보배를 자기 속에서 타개(打開)를 하면 개발을 하면,
촬토(撮土)가 시황금(是黃金)이니라. 흙을 움켜쥐어도 그것이 곧 황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눈으로 보는데,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만 봐 버리면 눈으로 보는 것이 전판 다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손으로 잡는 것이 흙덩이 건 돌덩어리 건 손에 쥐었다 하면 전부가 그것이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더라. (33분39초~63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신세등공화(身世等空華)~ /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어야 한다 / 전생에 신선인 왕과 교만한 도사의 이야기 /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이라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驕慢)한 생각을 갖지 아니해야.

육화(六和) /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곳은 바로 그 세계가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이고, 도 닦는 마음이 없는 세계는 바로 아수라(阿修羅)의 세계, 지옥(地獄) 세계 / 긴 식탁의 가운데에 음식을 두고 양쪽에 긴 숟가락을 들고 식사하려는 사람들, ①서로 못 먹게 하려고 음식을 뜬 상대방의 숟가락을 치는 경우, ②음식을 떠서 상대방에게 떠 먹여 주는 경우. ‘똑같은 환경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모두가 좋겠는가?’의 비유 설화 /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게송) 일념근본미(一念根本迷) 만사상상축(萬死常相逐) 타파진로옥(打破塵勞獄) 공창환향곡(共唱還鄕曲) / 대중 정진 / (게송) 참선무고금(參禪無古今)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 촬토시황금(撮土是黃金) /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방에서 파리를 날리면,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천장에 가서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은 동쪽 벽에 가서 붙고, 동쪽 벽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서쪽에 가 붙고, 그 파리를 종일토록 날려도 동서남북 벽 아니면 천장에나 방바닥 어딘가는 기어코 붙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무명업식(無明業識)을 여의지 못한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설해 주어도 유무(有無) 아니면 중간에 떨어져서 중도의 뜻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으면, ‘몸과 이 세계가 허공꽃과 같다’ 해도 그 말에서 깨달아 얻을 것이요, ‘명예와 재산이 똥무더기요, 흙덩어리와 같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의 그릇된 애착과 집착과 소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허물이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큰 저수지의 둑도 모래 구녁 하나로 인해서 물이 졸졸졸졸 그리 새 가지고 차츰차츰 구멍이 커져 가지고 열 길, 스무 길 되는 무서운 저수지 댐이 무너져 가지고 큰 물난리가 나듯이, 우리가 세속(世俗)에 살건 또는 도를 닦는 도문(道門)에서 건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설사 자기에게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한 생각을 갖지 아니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바로잡고, 내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지면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 마음 하나가 잘못되어 가지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한 집안 내에도 모두가 미운 사람뿐이고, 이웃간에도 전부가 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요. ‘옛날에는 참선을 하면 모다 깨칠 수가 있고, 지금은 말세가 되어서 참선해 봤자 근기(根機)가 얕아서 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한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나, 참선에는 예[古]와 이제[今]가 없어.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라도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다 깨칠 수가 있다.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다못 밖을 향해서 찾지를 말어라.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觀照)할 뿐이지 문자상에서 책에서 찾는다든지, 귀로 듣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눈으로 보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다함이 없는 보배를 자기 속에서 타개(打開)를 하면 개발을 하면,
촬토(撮土)가 시황금(是黃金)이니라. 흙을 움켜쥐어도 그것이 곧 황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눈으로 보는데,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만 봐 버리면 눈으로 보는 것이 전판 다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손으로 잡는 것이 흙덩이 건 돌덩어리 건 손에 쥐었다 하면 전부가 그것이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더라.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26~450)2023. 7. 26. 13:55

 

 

(No.443)—1991년 4월 첫째일요법회(91.01.07) (72분)

 

(1) 약 39분.

 

(2) 약 33분.



(1)------------------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하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욕계 ・ 색계 ・ 무색계, 이 삼계 가운데에 분요요(紛擾擾)여. 수없이 윤회를 하고 돌고 도는 것은,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라. 다못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해 끊지 못한 탓이다.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하면, 한 생각 남[生]이 없어서, 한 생각이 나지 아니해서 마음이 깨끗해 버리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다. 갈 것도 없고, 옴도 없고, 생사도 없는 것이다.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다.

이 게송(偈頌)은 한산(寒山), 습득(拾得), 그 습득의 게송입니다.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수없는 삼계(三界), 육도(六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은 그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를 못한 까닭이다 이거거든. 한 생각 남[生]이 없는 도리를 바로 봐 버리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다.
우리 한 몸뚱이의 생사윤회도 그렇거니와 온 나라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고, 온 세계가 이렇게 전쟁, 경제적인 전쟁 또는 사상적인 전쟁, 종교적인 전쟁, 이러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편안할 날이 없는 것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개인의 생사윤회도 끊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전쟁도 끊어지질 않고, 한 나라의 평화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온 세계를 이루고,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우주 법계’ 하면 굉장히 커서 원래부터 다 존재한 것인 줄 알고 영원한 것인 줄 알지만,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문제 ・ 세계 문제 ・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책이다, 외교다’ 그런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마는 진정한 궁극적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고, 거기에서 요달을 해야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도 해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면 믿지를 않고 ‘그건 관념론적인 희론(戲論)에 지내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 사람은 한 생각 속에 무량겁이 들어 있고, 한 생각 속에 우주 법계가 거기에 들어 있고 한 이치를 확연히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 신미년(辛未年) 4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그 엄동설한(嚴冬雪寒)도 지나고 이제 입춘(入春) ・ 우수(雨水) ・ 청명(淸明)을 엊그제 지냈습니다. 벌써 여기저기 개나리가 피고 또 진달래가 여기저기 산언덕에는 피기 시작했습니다. 엄동설한이 계속이 되면 추워서 못살 것 갖지만 또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은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지나고 이렇게 또 청명을 보냈습니다.

계절도 이렇게 돌고 돌지마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이렇게 지나가고 흥망성쇠(興亡盛衰)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오래오래 살기를 다 바래고, 집안이 형편이 부자가 되고 풍요로우면 영원히 그렇게 잘살기를 바래지만, 때가 지나면 부자가 또 가난해지기도 하고, 부자가 영원히 부자로만 산다면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해지고 따라서 가난했던 사람이 또 부자가 되는 것은 겨울이 봄이 되고, 봄이 또 여름을 거쳐서 가을이 되고 또 겨울이 오듯이, 이렇게 인연(因緣) 따라서 순환하고, 업(業) 따라서 흥망성쇠가 있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우주의 섭리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인연(因緣) 따라서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또 오늘부터 영겁을 통해서 계속이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필 자기에게만 모든 좋은 여건이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욕심이요 이상일 것입니다. 그렇게 바란다고 해서 되지도 않고, 면할려고 한다고 해서 면해지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바르게 살아가는 법, 보람 있게 살아가는 길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엄동설한이 돌아오면 두터운 솜옷이나 털옷을 입고, 또 입춘 ・ 우수가 지나고 청명 ・ 곡우 이 따뜻한 봄이 오면 두터운 옷을 벗고 가볍고 엷은 옷을 입는 것처럼, 그때그때 따라서 내가 어떻게 지혜롭게 처신을 해 나가야 하느냐? 반드시 그 길이 있을 것이고.

또 살림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움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살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려움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는 법도(法度)가 있을 것입니다. 넉넉할 때에는 자기 혼자만 쌓아 놓고 자기 혼자만 쓸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이웃과 노누고,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를 하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소득이 있으면 일부는 자기가 사용하고, 일부는 보시를 하고, 일부는 후일을 위해서 저축을 하도록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마는.

사업을 잘 경영을 해서 부자가 되었건 또는 불보살께 기도를 하고 주력(呪力)을 해서 그 공덕으로 사업이 번창해 가지고 부자가 되었건, 그 자기의 수입 재산이 전부 자기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임시 관리를 하도록 주어진 것들이라 그것을 관리를 잘 함으로써 자기도 좋고 많은 공덕을 쌓아서 여러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관리를 잘 못해 가지고 탐심(貪心)으로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 혼자만 그것을 쓰고, 잔뜩 쌓아 놓고 그걸 갖다가 다 쓰지도 못하고 죽게 되면 그런 탐착으로 인해서 구렁이 같은 그런 무서운 과보를 받게 된 예는 옛날부터서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명예 권리도 자기 혼자 맘대로 하라고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그러한 명예나 권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도록 자기에게 위촉(委囑)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권리를 남용을 하고, 자기 사욕(私慾)을 챙기는 도구로 삼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면 그런 권리가 오히려 자기를 해치는, 자기의 몸과 명예와 가문을 더럽히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치(理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끊임없이 시끄럽고 복잡하고 투쟁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형제 가족끼리 싸우고, 이웃끼리 싸우고, 한 국민끼리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 이런 것들이 그런 부처님께서 설하신, 성현네들이 말씀하신 그러한 이치를 잘 알고 그대로 적절히 살아가고 처신해 간다면은 이렇게 세상이 어렵게만 되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산업 사회(産業社會)가 발달함으로 해서 모두 생활이 넉넉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좀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온통 인심(人心)은 각박해지고 범죄는 날로 늘어가고, 자연계는 오염이 되어 가지고 이대로 무슨 온 국민이나 인류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계속 나간다면 백 년, 몇백 년 안 가서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편리한 것은 정말 진정으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정말 다른 이를 해롭게 하지 아니한 그런 방도를 취해야지, 자기 일신의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요새 낙동강을 비롯한 한국의 온갖 하천이 오염이 되어서 상수도가 오염이 되어 가지고, 그 물을 먹으면은 병이 나고 사람이 살 수 없고, 우리가 먹고 사는 곡식 쌀 속에도, 채소 속에도 인체를 해롭게 하는 무서운 독성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을 낱낱이 다 예를 들어서 말할 것도 없이 정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이상 우리는 지금부터 새로운 각오(覺悟)를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몸도 마음도 자연계도 다 같이 병들어 시들어서 죽고만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학자들은 그런 과학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고 정책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러한 방향을 좀 달리해서 정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가 일어나는 우리의 수없는 그 생각들,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고 다스리지 않고—일어나는 생각, 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전부가 무명이요, 번뇌요, 망상이요, 탐심이요, 진심이요, 어리석은 마음인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놈을 방종(放縱), 놔 먹여 가지고 그것을 현실화(現實化)할 때에 거기에는 죄악 범죄를 이루는 그러한 결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무엇을 한들 그 결과는 나를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고, 자연계를 해롭게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해롭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현대 학교의 모든 교육이 전연(全然) 참인간을 만드는 교육에는 전혀 마음을 쓰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서 백까지 배우고 가리키고 연구하는 것이, 조금 과격한 표현을 한다면 인류를 멸망하는 그러한 교육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항상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에 거기에 선행(先行)해서 더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을 닦는 우리 참선법(參禪法), 참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한데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산정상(寒山頂上)에 월륜고(月輪孤)한데, 저 차운 산 봉다리, 봉아리 위에는 밝은 달이 외로이 밝았는데,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라. 그 맑은 하늘에 환히 비치니 한 물건도 없구나.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가, 하! 귀중하고도 귀중한 이 천연의 값없는 보배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오음(五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으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속에 파묻혀 있구나.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을 천연의 무가보(無價寶)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 한 물건, 눈으로 볼라야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데,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이 소소영령한 놈, 주인공.
바로 이놈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었고, 우주가 없어진 뒤에도 이것은 없어지질 안 해. 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는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어.

비록 우리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 속에 육도윤회를 이렇게 계속하고 있지만,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그러한 생겨난 때가 없이 존재해 온 바로 그러한 무가(無價)의 보배가 우리의 남녀노소 우리 모두의 몸속에 그놈이 타악 있다 그 말이여. 그놈이 들어서 탐심도 내고, 진심도 내고, 어리석은 생각도 내고, 오욕락을 즐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도 그놈에는 증감(增減)도 없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자기에게 그런 자기 집안에 그러한 훌륭한 보배가 있다면 그 보배를 통해서 얼마든지 평생 먹고도 남을 텐데 이 보배는, 어느 집안에 세계적으로 보배가 될 만한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몸안에 있는 이 소소영령한 값없는 보배와는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천하 없는 세계적인 보물 국가적인 보물도 생겨난 때가 있고, 생겨난 때가 있는 물건은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값비싼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없어진 때가 있어. 언젠가는 불이 타거나 또는 자연히 괴멸이 되거나, 어떠한 충격을 통해서 파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뚱이 속에 가지고 있는, 오음(五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 오음 속에 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은 누가 훔쳐갈 수도 없고, 이것은 이 몸뚱이가 천만 번을 죽었다 살았다 한다 해도 이것에는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오늘 화두(話頭), 회룡사에서 참선하는 수좌(首座)나 또 보살선방에서 정진하는 보살님, 또 이 화두를 타고자 신청한 분들, 아직까지 화두를 타지 아니하고 그냥 그럭저럭 지내신 그런 분을 위해서 특별히 오늘 이 법상(法床)에서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설하고자 합니다.
개별적으로 이렇게 받기를 원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런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서 이 법상에 올라온 기회를 타서 화두를 설하게 되니 개별적으로 화두를 탄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마음을 기울여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화두(話頭)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여.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그런데 이 천칠백 공안이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없지만, 그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로 나온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우리말로는 ‘이뭣고’고, 한문으로는 ‘시삼마’, 중국 발음으로는 ‘시씀마’ 그런데.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이 ‘시삼마’ 화두도 많이 설하셨지만, 특별히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많이 설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은 이미 전강 조실 스님께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판치생모’를 하시고, 오늘 새로 화두를 받고자 하신 분은 ‘시삼마’ ‘이뭣고?’—화두 중에, 천칠백 공안 중에 가장 최초의 화두고, 어느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해도 구경(究竟)에 가서 깨달을 때에는 이 ‘시삼마’ 화두를 깨닫게 되는 거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그놈을 봐야 그것이 견성(見性)이고, 그놈을 깨달라야 그것이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지.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이뭣고?’다 그 말이여. ‘이뭣고?’
‘이・것・이・무・엇・인・고?’ 표준어로 말하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거든.
‘이뭣고?’ 글자는 석 자밖에 안 되지마는 그 뜻은 ‘이것이 무엇인고?’

근데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지칭(指稱) 대명사(代名詞), 이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냐 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놈, 부르면 대답할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다정한 사람과 생이별 사이별을 하면은 슬퍼할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그러한 놈이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어.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이뭣고?~~~’

처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발 더 다그쳐 들어가면 더욱 좋다 그 말이여.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다가,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가 더 간곡하게 다그쳐 들어가려면 ‘이뭣고?’ 할 때 ‘이-’ 하는데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한 뜻으로 또 다그쳐 들어가고, 거기서 다그쳐 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이- 뭣고?’거든. ‘이- 뭣고?~~~’

글자는 ‘이뭣고’지만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이- 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되는 것이지,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이렇게 이론적으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어. 이리저리 자기가 그동안에 불경(佛經)을 읽고 또 법문(法門)을 듣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고 한 그런 지식과 교리적인 이론적인 것을 통해서 ‘아하, 그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따라서 이 공부는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벌써 잘못된 공부여.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잘못된 결과밖에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여. 그래서 공부를 바로 바르게 해 가야 혀.
이론을 떠나서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앞뒷이 끊어져야 하거든. 거두절미(去頭截尾), 앞뒤를 끊어 버리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해 갈수록, 성이 날 때도 ‘이뭣고?’ 하면은 성났던 생각이 찰나간에 끊어져 버리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존하도록. 슬플 때에도 무조건하고 ‘이뭣고?’ 하면 슬픈 생각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무조건하고 ‘이뭣고?’ 하면 번뇌 망상이 찰나간에 끊어져 버리거든.
그래서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데 있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그거거든.

자꾸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은 마음 길이 끊어져. 마음 길이 끊어짐으로 해서 공부가 제대로 되어가고 마침내는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참선한다고 앉아서 자꾸 이리저리 생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나가면 마음 길이 점점 끊어지기커녕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점점 더 치성하게 되니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뭣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성화 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놈을 물리치거나 끊을라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또 일어나면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처음~38분42초)





(2)-----------------

그래서 이것이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화두인데, 이 화두를 바로 해 나가려면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해.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은, 보통 사람은 호흡을 하는데 아주 짧게 하거든. 짧게 들어마시고 짧게 내쉬고 하니까, 허파가 있는데 허파의 윗부분 기도(氣道), 기도에서 가까운 부분에만 호흡이 들어갔다 나왔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넓은 허파 속이 묵은 공기로 속은 가득차 있어. 마치 큰 창고를 소지(掃地)하는데 들어가는 입구만 싹싹 쓸고 말고, 저 창고 깊은 속까지 구석구석이 소지를 안 하면 안 된다.

호흡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다 내쉬고 그런 호흡을 해야 산소를 많이 몸안에 섭취를 하고, 몸안에 있는 그 오염된 탄산가스나 이산화탄소 같은 것을 깨끗이 다 청소해 내는데, 그럼으로 해서 피도 맑아지고 몸도 깨끗해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따라서 피로 회복도 되고 정신도 깨끗해지는 것이여.
그래서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자상하게 잘 알아 가지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화두(話頭)를 급(急)하지도 않고, 너무 긴(緊)하고 급해서는 안 되고, 적절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부작용도 없고 상기병(上氣病)과 같은 그러한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 단전호흡법이라든지 화두 드는 법은 사무실에서 「참선법」이라고 하는 녹음(錄音)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가 있으니까, 처음으로 참선을 하시고자 하는 분은 그것을 구해 가지고 여러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별로 어려운 말로 된 것이 아니나, 한 번 들어도 알 분은 알겠지만 그래도 여러 번 틀어 놓고 들으면서 하면, 한 번 들어서 모르는 거 두 번째 알게 되고, 두 번 들어서 모르는 거 열 번 들어서 차츰차츰 참선하는 요령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한마디지만, 이 한마디 ‘이뭣고?’ 이 한마디가 무량겁 생사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서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여.
이놈 하나를 가지고 거래거거(擧來擧去), 이놈을 들고 가고 들고 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한마디 화두를 간단(間斷)없이,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 화두가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간다면,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때가 많고 다른 번뇌 망상에 휩쓸려 넘어갈 때가 많겠지만, 자꾸 끈질기게 해 나감으로 해서 차츰차츰 화두 들어진 때가 불어나고, 번뇌 망상 속에 그냥 끌려다니는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도 개선이 되어 갈 것이고 또 건강이 안 좋으신 분은 건강도 좋아지실 것이고, 혈압이 높은 분은 혈압도 조정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거나 또 어떠한 일을 하거나 간에 벌써 그러한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기 자신이 옛날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많이 달라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도 ‘야! 저분이 어떻게 해서 참 달라졌다. 저분이 절에 다니시고 참선을 하신다더니 저렇게 인품이 달라질 수가 있을 것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데에도 ‘참! 내가 왜 진즉 이 참선을 하지 않았던가. 좀 더 젊었을 때 이것을 했었으면 내가 훨씬 더 행복하게 보람 있게 살 것이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을’ 이렇게 생각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늦었다고 한탄하시지 말고 지금 시작하는 것이 이른 때입니다. 설사 연세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고 칠십이 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육칠십 년 살고 그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앞으로 몇 해를 못 사시고 이승을 하직하신다 하더라도 금생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마지막 숨 끊어질 때까지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는 가운데 숨을 딱 거두게 되면, 저승에 가셔도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장을 할 것이고, 금방 몸을 새로 좋은 몸을 받아나셔서 또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으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늙다고 해서 포기를 하거나, 어떠한 이유로 해서도 이 공부는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어떠한 여건하에서도 오직 할 것은 이 공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화두 법문을 들으신 분은 오늘 화두를 새로 탔다고 그렇게 믿고 고대로 해 나가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이 공부해 나가는 데 주의할 점은 급한 생각도 내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느즈러진 생각도 갖지 말아라. 마치 거문고나 기타(guitar), 그런 줄을 고를 때에 너무 팽팽하게 강하게 조여 매면 끊어지거나 끊어지지 않더라도 소리가 제 음가(音價)가 나오지 아니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느슨하게 해 놓으면 그런 악기 가지고는 연주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참선도 너무 그렇게 되게 급(急)하게, 긴(緊)하게 이렇게 몰아붙여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불급불완(不急不緩), 그 중도(中道)를, 적절한 중도를 취해서 해 나가야만 이 공부를 부작용 없이 공부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도록 항상 고인(古人)네들도 말씀을 하시고 산승(山僧)도 그런 말씀을 자주합니다마는, 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이 덮어놓고 몸뚱이를 못살게 군다든지, 생각을 너무 긴하게 몰아붙여 가지고 미간(眉間)에다가 ‘내 천(川)’ 자를 쓰고 막 그냥 우격다짐으로 무리하게 막 몰아대라는 그런 것이 용맹정진이 아닙니다.
앉아서나 서서나 한 생각도 헛되이 놔 버리지 아니하고 항상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는 것을 말한 것이지, 무리하게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疑心)을 간절하게 하라’고,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 이 삼요(三要)로써 공부를 하라’고 『선요(禪要)』에서 고봉 스님도 말씀하셨지만, 이것도 역시 해석을 잘못하면 도(道)는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고 병만 얻게 될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한 분은 항상 법문(法門)을 자주 듣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으면서 이렇게 해 나가야만 바르게 공부를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 정월 일요법회 때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사분율(四分律)』에 말씀하신 바도 있고, 또 동양 의학에서도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에 대해서 자상하게 말한 바가 있고, 또 인도에서나 중국, 한국에서도 옛날부터서 뇨요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걸 시행을 해 오고 있습니다.

요새 이렇게 대기가 오염이 되고 또 우리 식수라든지 온갖 우리의 음식물이 다 이렇게 오염이 되어 가지고 나날이 환자가 늘어가는 것은—간염이라든지, 간경화증이라든지, 고혈압, 중풍, 각종 암 이런 난치병(難治病)들이 날로 치성을 하고, 그런 난치병으로 인해서 수없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때에 아직도 그러한 병을 완치시킬만한 좋은 약은 끊임없이 많은 의학 박사들이 연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특효약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수술을 한다든지 또는 주사를 맞는다든지 또는 광선 치료를 한다든지 모다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아직까지는 그 방법 외에는 별 적절한 방법이 없는 채 많은 사람들은 결국은 머리가 다 빠지고 그래 가지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삼천년 전에 이미 부처님께서도 비구(比丘)들로 하여금 뇨(尿)를 먹도록 말씀하신 바도 있고, 인도에는 부처님 탄생하시기 이전부터 뇨요법이 힌두교 성전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이것은 뇨(尿)는 배설물이라 대변과 비슷한 그런 불결한 물로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인식해 왔습니다마는, 사실은 전혀 그 본질이 다른 것이어서 뇨는 혈액이 시간이 오래되면 새로운 피가 생겨나면서 묵은 피는 신장으로, 신장에서 방광으로 거쳐서 이렇게 소변으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소변은 대변 속에 국물이 걸러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혈액이 시간이 좀 지나면 오줌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병이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오줌은 지극히 무균(無菌)이요 청결한 것이라고 그렇게 박사들의 조사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약간 비린내가 난 것은 사실이나 분석을 해보면 사람이 먹어도 조금도 그것으로 인해서 병이 나기커녕은 오래오래 먹으면은 그 무서운 난치병들이 다 나아가고 있는 그러한 청량 음료수요, 우리의 몸뚱이 속에 우리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령스러운 약(藥)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졌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뚱이 속에는 영원불멸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담아 있고, 또 이 몸뚱이에서 배설하는 뇨(尿)는 우리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또 그러한 병을 예방할 수 있는 그런 불가사의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저는 부처님의 경전이나 동양 의학이나 또는 많은 경험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들을 통해서 스스로 이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30년, 40년 경험을 통해서 많은 병을 나은 그런 사례를 적은 책도 보았습니다마는.

아마 돈도 많고 그런 분들은 ‘이걸 어떻게 그런 것을 먹을 수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시지만, 돈이 많아도 스스로 돈이 많다고 하는 생각이 없는 그러한 분, 또 실지로 돈이 없는 분, 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五陰)의 이 몸뚱이 속에 자성(自性)이 들어 있는, 영원불멸한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법을 믿는 분은 이 산승(山僧)의 말을 믿고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을 실천을 해서 몸뚱이가 살아계시는 동안 건강하고, 돌아가실 때 오래 앓지 않고, 오래 앓아 봤자 3일 이상을 앓지 않다고 그럽니다. 한 3일 조금 그러다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좋다고 하니까 또 하루 종일 나온 것을 전부 받아서 배가 부르도록 복용을 하실 것은 없고, 조석으로 두 번 정도 이렇게 복용을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첨부해서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이걸 복용을 하시면 반드시 치유 반응이라고 할까, 효과 반응이라고 할까, 이것을 의학적 술어로는 명현 현상(瞑眩現象)이라고 합니다마는 반드시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팠던 부위가 이렇게 가려움증이 생긴다던지 또 몸에서 열이 난다던지 또는 몸살을 앓는다든지, 아주 구미(口味)가 뚝 끊어져서 밥이 먹기 싫어진다든지, 자꾸 졸음증이 막 며칠을 두고 졸음이 온다든지, 또는 설사가 난다든지 이런 등등 또 아주 무기력해 가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천근(千斤)이나 된 것처럼 무거움을 느낀다든지 이런 등등 여러 가지 현상이 그 사람의 체질과 증상에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물어볼 곳이 어디냐? 한국에 뇨요법(尿療法)에 전문박사가 계신다면 그리 전화라도 해보시겠지만, 가장 가까운 것이 자기가 잘 아는 의사나 병원에 가서 물어볼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의사는 백이면 백 명이 다 ‘그 오줌, 먹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그 몸안에 불결한 것을 배설하는 것인데 그것을 다시 입에다가 먹다니. 그 큰일난다‘고. ’그것 먹어서 부작용이 일어난 거라‘고 천 명이면 천 명 그렇게 의사로서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뇨요법을 하신 분은 어떠한 부작용이 나더라도 의사한테 가서는 물어보지를 말아야 합니다.

의사는 왜 그렇게 말하냐 하면, 첫째는 그분이 ‘뇨는 대변, 소변, 땀 이런 것은 몸안에 불결한 것을 밖으로 배설하는 물질이다’ 이렇게 인식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런 것은 어쨌든지 자주 배설을 하고 버려 버려야 하고 자주 씻어서 깨끗이 해야지, 그것을 먹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의사로서는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현미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해 가지고 별로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의사로서는 오줌을 권장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환자들이 오줌 먹고 병원에를 안 찾아오면 그 병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아들이나 사돈네 가운데 훌륭한 박사가 있더라도 거기 가서는 물어보실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정 물어보고 싶으시거든 뇨요법(尿療法)에 대해서 좋은 책을 간행한 분이 있습니다. 김정희씨라고 하는 서울대학 생물학과를 나오시고 교수를 지내신 그런 분이 그 좋은 책을 발간을 했습니다. 그분을 알아서 그리 문의를 하시면 아주 친절하게 일러주실 것이고, 또 그런 책을 구해서 읽으시면 또 자상하게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조끔 해 보면 삭신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또 그리고 상기가 된다, 소화가 안 된다 여러 가지 그런 작용이 초(初) 단계에 있어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을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여법하게 화두를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 잘 해서 자꾸자꾸 되풀이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감으로 해서 차츰차츰 그 요령을 체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끔 해 보고는 뭣이 꿈자리가 고약하고, 무슨 무엇이 어쩌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거 할 거 아니라고 이렇게 간단하게 이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자포자기를 하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마는.

뇨요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명현 현상, 치유 반응이 나타나도 조금도 겁내시지 말고 꾸준히 해 나가면 한 달, 두 달, 석 달 내지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나가면 어떠한 난치병도, 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앓고 있던 병까지 결국은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믿으시고 꾸준히 이렇게 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평생 동안 무병(無病)하게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해가 심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공해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체질,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을 길르는 데에는 뇨요법(尿療法)과 참선법(參禪法)밖에는 아직까지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요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리라
나무~아미타불~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요. 향기로운 꽃다운 풀에는 삼춘(三春)에 비가 있고, 삼춘에 비가 옴으로 해서 꽃다운 풀이 파랗게 돋아날 것이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다. 붉고 붉은 아름다운 단풍을 위해서는 구월에 서리가 내려야 한다 이거거든. 삼춘에 비가 오면은 꽃다운 풀이 향그롭고, 구월에 서리가 내리면은 붉은 단풍이 아름답더라.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빈 마음으로 온갖 이러한 사물의 변화를 관(觀)한다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다. 모두가 다 무사(無事)하고 다못 평상(平常)일 뿐이다.

국가 사회나 온 세계가 이렇게 참 온갖 종류의 전쟁이 끊일 날이 없고 이렇게 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의 이런 변화를 빈 마음으로—빈 마음이 이 무엇이냐? 떠억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마음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가장 빈 마음에 가까운 것이여. 빈 마음으로 모든 사물의 변화를 보면 그것이 바로 평상(平常)이여.

봄에 비가 와서 푸른 꽃이 돋아나는 것이나, 서리가 내려서 붉은 단풍이 지는 것이나, 여기서 저기서 좋은 일을 한 소식도 있고, 나쁜 범죄 사실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고 흥망성쇠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화두(話頭)를 드는 마음으로 이것을 보아 나가고, 화두를 드는 마음으로 처신해 나가고 처리해 나가야지, 화두를 잠시 놓치고 중생심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 그 흥망성쇠 속에 자기도 휩쓸려 말려 들어가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 우리도 끌려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를 아까 말씀을 드렸는데, 이미 다른 큰스님으로부터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혹 타 가지고 공부를 한 분도 계실 것이고, 또 기타 분도 있겠으나,
‘정전백수자,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으면 됩니다.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지 말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어야 돼.
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가 무엇인가?’ 이렇게 참구(參究)를 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어떻게 드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것이 화두의 초점이고, 우리 의심(疑心)의 눈을 박을 곳이 바로 거기여.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가 무엇인가?’ 해 가지고 정전백수자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의심(疑心), 이게 중요한 거, 그것이 초점이니까 그렇게 화두를 참구하기를 바랍니다. (38분43초~1시간11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 /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 사회 국가 온 세계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룬다 /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 /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 속에서 지혜롭게 처신을 해 나가야 / 산업 사회(産業社會)의 발달로 인한 지구의 황폐, 불자(佛子)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야.

(게송)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 / 우리 몸안에 있는 이 소소영령한 값없는 보배, 이놈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로 나온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 어느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해도 구경(究竟)에 가서 깨달을 때에는 이 ‘시삼마’ 화두를 깨닫게 되는 거여 / 화두 드는 법.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앞뒷이 끊어져야 하거든. 거두절미(去頭截尾), 앞뒤를 끊어 버리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화두를 바로 해 나가려면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 화두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한마디지만, 이 한마디 ‘이뭣고?’ 이 한마디가 무량겁 생사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서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가지고 있다 /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 / 공부해 나가는 데 주의할 점은 불급불완(不急不緩).

뇨요법(尿療法 요료법) / (게송)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 /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 드는 법.


우리 한 몸뚱이의 생사윤회도 그렇거니와 온 나라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고, 온 세계가 이렇게 전쟁, 경제적인 전쟁 또는 사상적인 전쟁, 종교적인 전쟁, 이러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편안할 날이 없는 것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개인의 생사윤회도 끊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전쟁도 끊어지질 않고, 한 나라의 평화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온 세계를 이루고,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우주 법계’ 하면 굉장히 커서 원래부터 다 존재한 것인 줄 알고 영원한 것인 줄 알지만,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문제 ・ 세계 문제 ・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책이다, 외교다’ 그런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마는 진정한 궁극적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고, 거기에서 요달을 해야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도 해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면 믿지를 않고 ‘그건 관념론적인 희론(戲論)에 지내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 사람은 한 생각 속에 무량겁이 들어 있고, 한 생각 속에 우주 법계가 거기에 들어 있고 한 이치를 확연히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산업 사회(産業社會)가 발달함으로 해서 모두 생활이 넉넉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좀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온통 인심(人心)은 각박해지고 범죄는 날로 늘어가고, 자연계는 오염이 되어 가지고 이대로 무슨 온 국민이나 인류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계속 나간다면 백 년, 몇백 년 안 가서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학자들은 그런 과학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고 정책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러한 방향을 좀 달리해서 정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가 일어나는 우리의 수없는 그 생각들,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고 다스리지 않고—일어나는 생각, 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전부가 무명이요, 번뇌요, 망상이요, 탐심이요, 진심이요, 어리석은 마음인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놈을 방종(放縱), 놔 먹여 가지고 그것을 현실화(現實化)할 때에 거기에는 죄악 범죄를 이루는 그러한 결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무엇을 한들 그 결과는 나를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고, 자연계를 해롭게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해롭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항상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에 거기에 선행(先行)해서 더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을 닦는 우리 참선법(參禪法), 참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는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어. 비록 우리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 속에 육도윤회를 이렇게 계속하고 있지만,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그러한 생겨난 때가 없이 존재해 온 바로 그러한 무가(無價)의 보배가 우리의 남녀노소 우리 모두의 몸속에 그놈이 타악 있다 그 말이여. 그놈이 들어서 탐심도 내고, 진심도 내고, 어리석은 생각도 내고, 오욕락을 즐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도 그놈에는 증감(增減)도 없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처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발 더 다그쳐 들어가면 더욱 좋다 그 말이여.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다가,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가 더 간곡하게 다그쳐 들어가려면 ‘이뭣고?’ 할 때 ‘이-’ 하는데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한 뜻으로 또 다그쳐 들어가고, 거기서 다그쳐 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이- 뭣고?’거든. ‘이- 뭣고?~~~’
글자는 ‘이뭣고’지만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이- 뭣고?’

뇨요법(尿療法 요료법) ; 요료법(尿療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23. 7. 15. 08:40

 

 

(No.196)—1983년 부처님 개금불사 점안식(83.03.10) (62분)

 

(1) 약 32분.

 

(2) 약 30분.



(1)------------------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법신청정광무변(法身淸淨廣無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요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부처님께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 이 삼신이, 삼신불(三身佛)이 계시는데. 보신과 화신은 참부처가 아니여. 마침내 망령된 인연밖에는 아니더라.
법신(法身)이 청정광무변(淸淨廣無邊)이라. 오직 법신불이 청정해서 넓고 갓이 없다.

삼천년 전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에 들어가서 12년 동안에 고행(苦行)과 낙행(樂行) 끝에 대도를 성취하셔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는데,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다 그 말이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그 말이여. 중생! 이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부처님은 천백억(千百億)의 화신(化身)을 동시에 나투실 수가 있어. 그 화신불을 통해서 법신불을 우리는 친견하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법신불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으로서 이 사바세계에 하강(下降)을 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여.
부처님께서는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하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에 대성현이시지만,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화신불이시다 그 말이여.

화신불(化身佛)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냐?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여의지 아니하시고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신 그러한 성현이시다. 마치 하늘에 하나의 밝은 달이 떠 있건만, 땅에 있는 모든 바다와 호수와 강물과 시내, 심지어는 조그마한 그릇의 접시에 떠놓은 물 한 그릇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모든 물에 비추어 나타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다나, 강이나, 그릇이나, 호수나, 물 있는 곳에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고대로 나타납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있는 달이 없어지고 땅 위에 있는 물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치도 일 분 사이도 그 달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하늘에 떠 있으면서 동시에 물 있는 곳에는 어디나 그 달이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절절이 법당에 법신 ・ 보신 ・ 화신 삼신불을 모신 법당도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도 있고, 아미타불 불상을 모신 법당도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 하면 법당에다가 모셔진—쇠로 모셨거나, 또는 나무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돌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흙으로 빚어서 모셨거나 한 그러한 부처님을 다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불교가 무엇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하면 법당에 모셔진 쇠나 나무나 돌이나 흙으로 조성해 모신 그 부처님이 참부처님으로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절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공양과 모든 음식과 과일이나 꽃과 청수를 올리고 거기다 공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그러한 것을 보고서 ‘우상숭배하는 종교다’ 그렇게 힐난(詰難)하게 비난을 하고 헐뜯고 하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서 비방을 하는 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거룩하시고, 너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알지 못하고 불교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법과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들, 이 삼보(三寶)를 비방(誹謗)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비방하는 공덕으로 마침내는 성불(成佛)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비방하는 죄(罪)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서 비방한 만큼의 과보를 받게는 됩니다. 비방하는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게는 되지만, 다른 것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공덕으로 그 인연(因緣)으로 마침내는 대도를 성취해서 성불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시면 그 비방하는 그 인연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그 인연으로 마침내는 성불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비방하는 인연으로도 성불을 하거든, 하물며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을 나무나 쇠나 돌이나 흙으로 빚어서 조성을 하고, 거기에 정성을 다해서 새로 금(金)으로 옷을 입혀 드리는 그리고 그 방석을 해 드리고 그 좌대(座臺)를, 연화대(蓮花臺)를 이렇게 조성해 앉혀 드리고, 그리고 그 불상을 모실 수 있는 이런 법당을 창건하는 데 동참하는 그러한 인연이야 얼마나 장하고 거룩하고, 그 공덕으로 삼악도에 떨어질 모든 과보가 있다 할지라도 봄눈처럼 녹아지고 머지않은 장래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영원한 진리(眞理)의 몸을 성취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데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처님의 법에 의지해서,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인 참선을 실천 수행해서 견성성불한 그러한 바른 법을 의지하고 닦아 가는 그 공덕이야 입으로 무어라고 표현해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받아나기 어려운 이 몸을 받아났으며,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며, 불법 가운데에도 불법을 믿는다 해도 방편설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구경법(究竟法)이요, 최상승법인 이 정법에 귀의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수승한 인연을 만난 것을 깊이 느끼고, 무상(無常)한 이 몸뚱이가 이만큼 유지될 때에 대용기와 대분심과 대신심을 일으켜서 가행,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대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분심과 신심을 돈발(頓發)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미련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당도 필요하고, 불상도 필요하고, 또 이러한 개금불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처럼 옷이 없어서 추워하시는 그러한 분도 아니요, 공양을 못 잡수어서 배가 고프신 어른도 아니며, 이런 집이 없다고 해서 풍마(風磨)와 우습(雨濕)을 두려워하는 그러한 어른도 아닙니다. 그러한 어른도 아니지만 우리 중생은 너무나 위대하고 거룩한 스승이요 성현이신지라 우리의 정성으로 이런 법당을 마련해 드리고 이런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해서 가끔 이런 좋은 옷을 입혀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 동남아에 여러 나라들에서는 해마다 개금불사를 해서 새로 옷을 입혀 드린다고 합니다마는, 우리 한국은 개금불사를 해서 오래되어서 투색(渝色)을 하고 그을르고 벗겨질 때에 여러 해 만에 이렇게 가끔 이렇게 개금불사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정성으로 해마다 모신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금불사만 자주자주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참뜻을 받들어서 우리의 마음을 깨닫는 수행(修行)을 보다 더 알뜰히 그리고 실답게 열심히 하는 것을 부처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요, 부처님의 뜻을 우리는 참으로 옳게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로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라.
전단향(栴檀香)은 어떻게 향내가 진동하던지 이 법당에서 전단향을 피면은 십리 밖에까지도 그 향내가 풍긴다고 하는 그러한 좋은 향나무인 것입니다. 그러한 전단향으로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하고, 중생의 우리 김가나 이가나 박가나 우리 보통 사람의 중생의 모양을 떠억 조성을 한다 그 말이여.

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러한 성현의 모습을 떠억 이렇게 조각을 해서 딱 모시게 될 때에 그 모양이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여.
부처님 모습도 천 부처님이면 천 부처님이 다 모습이 각각 다르고, 관세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지장보살 이러한 보살님의 모습을 조성해 모셔도 그 모습이 크고 작고 길고 또는 둥글고 모나고, 보살님의 모습도 그렇게 각각 다르고, 우리 중생의 모습이 40억 인구나 되는데 그 40억 인구에 김가, 이가, 박가, 서양 사람, 동양 사람 그 각각 다른 모습을 전단향으로 조각을 해서 따악 놔났다 그 말이여.

부처님 모습은 부처님 모습대로 다르고, 보살의 모습은 보살의 모습대로 다르고, 중생의 모습은 중생의 모습대로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르다 할지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여. 그 냄새를, 그 향내를 맡아 보면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그 불상의 냄새를 맡아 봐도 내나 그 훌륭한 좋은 전단향 냄새가 날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모습을 조각을 해서 모셔 놨다 하더라도 그 향내를 가서 맡아 보면 내나 전단향의 향내가 날 것이요, 눈이 째지고 코가 삐틀어지고 입이 샐쭉한 뵈기 싫게 생긴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해 놨다 하더라도 내나 가까이 가서 맡아 보면은 전단향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내가 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처음~31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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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최초에 부처님을,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이 어떻게 된 것이냐?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당연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부처님 당시에는 처음부터 이 불상을 모신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어느 해 여름에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 마야부인이 그때 어디에 계셨느냐 하면은 저 도리천(忉利天)! 도리천에 거기에 태어나셔서 도리천에 계셨습니다.
그 도리천에 계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야부인께 석 달 동안을 설법(說法)을 해 드리기 위해서 도리천에 올라가 계셨습니다.

그때에 구익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우전왕(優塡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 우전왕은 부처님을 너무너무 신(信)하고 존경하는 나머지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매일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그래야만 그날 하루의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잡혀서 정사(政事)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을 따르고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돌연히 도리천에 올라가고 안 계시게 되니 견딜 수가 없어. 너무너무 그립고 뵈옵고 싶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전단향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실 때에 우전왕이 부처님께 허락을 맡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시게 되면은 저는 부처님을 하루라도 뵙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고 도저히 정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러니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고, 살아계신 부처님이 계신듯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올리고 친견을 하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그렇게 하라” 이렇게 허락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막상 부처님을 조성을 할려고 하는데 도저히 똑같이 모시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어.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를 청해다가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데—어쩔 수 없어서 신통(神通)이 제일인,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에게 의탁을 해서 목련존자가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에 접해 가지고, 말하자면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 그 제일가는 조각가로 하여금 도리천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을 친견하면서 그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을 해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당에다가 딱 모셔 놓고, 우전왕이 매일같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0일 동안에 도리천에 있어서의 마야부인께 설법을 다 마치시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셔서 그 전단향으로 모셔 논 부처님이 계신 대로 오시게 되니, 전단향으로 모셔진 부처님이 연화대에서 떠벅떠벅 걸어 내려오셔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영접을 하시는데, 어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고, 어느 부처님이 전단향인가를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전단향으로 조성한 부처님께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도리천에 가 있는 동안 중생을 교화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이렇게 수고한 위로 인사를 떠억 하시고서 ‘말세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이것으로써 거룩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등상불(等像佛)을 모시게 된 최초의 동기고.

그다음에는 파사익왕(波斯匿王)이, 파사익왕이라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분도 신심이 돈독했어. 그래서 ‘우전왕이 그렇게 전단향으로 불상(佛像)을 조성을 해 모셨다’ 그 말을 듣고 자기는 순금으로, 자마순금(紫磨純金)으로 부처님을 조성을 하기로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 파사익왕은 어째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냐 하면, 우전왕이 모셨으니까 샘이 나서 모신 것이 아니고, ‘아! 부처님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이다’ 한 것을 철저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불상을 모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 원(願)을 가졌느냐 하면, 그 부처님이 계신 도량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떠억 운집(雲集)을 해서 있으면 부처님이 그 도량에 계실 때와 부처님이 저 십 리 밖이나, 수백 리 밖에 계시고 직접 자기가 있는 도량에 안 계실 때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 온 대중이 엄숙하고 숙연하고 엄정하고 제절로 그 도량(道場)에 있는 모든 사부대중이 경건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부처님이 저 먼 데 계시고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만 이렇게 있으면 암만해도 그렇게 엄숙하지를 못하고 경건하지를 못하고 공부를 해도 공부가 그렇게 잘 안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고서 ‘황금으로 순금으로 불상을 이 법당에다가 모시고자 하니 허락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께서도 역시 ‘참! 네 말이 옳은 말이다. 과연 그렇게 하도록 하라’ 이렇게 허락을 하시게 되어서 순금으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하는 『금강경』을 설하신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순금으로 모신 부처님을 갖다가 봉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바세계에 두 번째 등상불을 모신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 나아가서는 이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불교가 들어가서 절이 서고 이런 불상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동기(動機)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目的)과 불상을 모시게 된 여러 연기(緣起)에 대해서 대충 잘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도(外道)들이, 불교를 믿지 아니한 외도들이 불교를 잘 이해를 못하고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러한 말은 전연 비방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껍데기, 외부로 나타난 일부만을 잘못 보고서 불교의 참진리와 참뜻을 이해를 못하고 비방을 하는 것이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 것입니다.
비방하는 공덕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고(苦)는 잠깐만 받고, 될 수 있으면 고(苦)는 받지 않고 다시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게 되기를 바래지만 인과법은 역연(歷然)해서 고를 면치 못할 것이나, 우리 불자(佛子)의 입장에서는 될 수 있으면 가볍게 받고 조끔만 받고 빨리 이 정법에 귀의하게 되기를 바랠 뿐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 오직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요,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도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와 지혜로써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는 목적도 구경(究竟)에는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자비를 증득허겄게 하는 그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개금불사에 동참(同參)하신 설판재자(說辦齋者)와 동참하신 모든 불자와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 그리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까지라도 이 개금불사를 봉행하는 이 공덕으로 하루라도 빨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정법에 귀의해서 대도를 성취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이 불상(佛像)을 하는데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대들보를 시주하고, 누가 기둥을 시주하고, 누가 주춧돌을 시주하고, 누가 이 계단을 시주를 하고, 누가 이 종을 시주했다고 크게 돌에다 새겨서 그 층계마다 이름을 새겨 논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는 불사를 성취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이름을 새기는 뜻을 잘 이해하고도 남습니다마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러한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그러한 방편은 일찌감치 졸업을 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학생에게는 유치원 학생에게 알아듣게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치원 학생에게는 그렇게 말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에게도 유치원 학생에게 일러주는 말과 같은 말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따라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무(無)라 설하게 되고,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유(有)를 설하게 되고,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요, 비유비무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유시무(是有是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때로는 유(有)라 설하고, 때로는 무(無)라 설하고, 때로는 비유비무(非有非無)라 설하고, 때로는 시유시무(是有是無)라 설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법(法)의 진리(眞理)를 확연히 깨달은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유, 때에 따라서는 무, 때에 따라서는 비유비무, 때에 따라서는 시유시무라,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설하게 될 것이요, 어떻게 법(法)을 설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유나 무 또는 그 중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말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相)을 통해서 상 없는 도리에 눈뜨게 하고, 말을 통해서 말 없는 경지에 계합하게 하는 이것이 불사(佛事)요, 법(法)인 것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팔만사천 법문이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무주상이라야 그 공덕이 영원한 것이요, 한량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는 어떠한 큰 불사를 하더라도 그 불사에 많은 시주(施主)를 한 사람이나, 정성으로 조끔 시주를 한 사람이나, 그렇게 시주를 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나 그 간절한 정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천만 원도 하고, 백만 원도 하고, 십만 원도 하고, 만 원도 하고, 오천 원도 하고, 천 원도 하고, 오백 원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서 부처님께 간절히 절 한 자리만 하더라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다 똑같이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사를 해도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아무개 보체’ 하고 그렇게 낱낱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축원(祝願)을 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름을 어디다 써서 붙이거나, 이름을 대중 앞에 공개를 하게 되면 이미 한 상(相)이 나타난지라 무주상(無住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 무주상의 뜻을 여러분께 깊이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면 그때 당시에, ‘아! 아무개가 그렇게 했구나. 아! 내가 한 것을 모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구나’ 그때 찰나는 조끔 흐뭇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잠깐 지나고 나면 그것으로써 화면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듯이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듯이 아무 실다운 것이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것을 여러분은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하야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하노라
나무~아미타불~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하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니다
나무~아미타불~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내 이제 이 길상수(吉祥水), 이 감로수(甘露水)를 가지고,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이다. 일체중생,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여러분 이마에 전부 뿌려 드렸습니다.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 이 물방울, 감로수를 여러분께 뿌려서 여러분의 무량겁으로 지어 온 모든 생사(生死)의 진로(塵勞)와 모든 업(業)과 뜨거운 번뇌(煩惱)와 이런 것들이 눈 녹듯이 다 녹아져 없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이라. 이 불사(佛事)에 동참하신 분이나 설판재자(說辦齋者)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부대중과 이 육도 법계(六途法界)에 있는 모든 중생 한 사람 남김없이 모두가 다 법왕(法王)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되어지이다.

이번 불사에 불모(佛母)는 수원 용주사 포교당, 수원 포교당의 정락 스님, 주감 스님을 청해다가 이번에 이 개금불사를 모셨습니다. 개금불사를 너무너무 정성스럽게 그렇게 잘해서 참 그렇게 이 32상(三十二相)이 뚜렷하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신심 있는 불자가 거룩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사진을 찍어서 여러분께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 사진은 어떻게 한 관세음보살의 상(像)이냐 하면, 어느 화가(畫家)가 강화 보문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백일기도 회향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을 했는데, 그 관세음보살로부터 붓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꿈에 친견한 그 관세음보살과 똑같이 정성을 들여서 몇 날 며칠 정성을 들여서 관세음보살을 그렸습니다. 그려 놓고 보니 너무너무 거룩하고 훌륭해... (31분41초~61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 /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게송)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 최초에 부처님의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 부처님의 자비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 무주상(無住相)!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 (게송)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