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5)—계해년 하안거 반산림 법어(83.06.02) (50분)

<녹음 가운데에 주변 소음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26분.

 

(2) 약 24분.



(1)------------------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하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허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하라
나무~아미타불~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이나, 천억 그 많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면 그 복(福)이 갓이 없을 것이나, 어찌 항상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부처님께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올리되, 한 부처님에게만 올리는 게 아니라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 그 복이 한량이 없어. 한량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항상 옛 가르침,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자체로써 말을 한다면은 ‘옛 부처에 능히 가르친 바 가르침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고, 이치로써 말을 한다면은 학인(學人)의 한 권의 경(經)을 가르치는 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한 권의 경(經)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서로 전한 그 법인(法印), 법의 도장을 갖다가 말하는 것이고,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를 고교(古敎)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그 일착자(一著子)는 그 비롯함이 없어. 언제부터서 있었던지 그 시작이 없어. 언제 그 가르침, 그 일착자를 언제부터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가 그 시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고교(古敎)라 그래. ‘옛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그래. 이 중생에게는—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이 있는데 그것을 갖다가 고교(古敎)라 그래.

그러면 어째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복보다도 그 공덕(功德)보다도,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經)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냐?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그 공덕보다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 대중이 계해년(癸亥年) 삼하 결제(三夏結制)를 해 가지고 이렇게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전심전력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항상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이다 그 말이여.
금년 여름철에는 유독 좋은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정진(精進)을 한다는 말을 와서 들으니, 그리고 이 여러 대중의 얼굴들을 보니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해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하는 모습이 그 살아 있는 눈동자 속에 내가 역력히 볼 수가 있어서 너무너무 대견스럽고, 너무너무 참 그 기쁜 바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를,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댄 그대들은 눈을 떠서 눈앞에를 관(觀)하라.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위 상변에다가 검은 글자를 쓴다’ 그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經),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에는 경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문채(文彩)가 있는데,
그 ‘흰 종이라 하는 ‘흰 백(白)’ 자, 흰 종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 자성(自性)에는 불변 수연(不變隨緣), 이 두 가지 면이 있는데, 그 자성이 가지고 있는 불변 수연에 두 가지 용(用)을 갖다가 ‘흰 빛’에다가 표현을 한 것이고. ‘검은 글자를 썼다’ 하는 그 ‘검을 흑(黑)’ 자는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그 적멸(寂滅)의 체(體)를 갖다가 가르치는 것이거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대 눈을 떠 가지고 그대의 눈앞을 봐라. 모든 납자(衲子)로 하여금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한 권의 경을 읽어라 그 말이여.
눈앞에 일용(日用), 날[日]로 쓰는 일용 생활—눈으로 모든 색상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로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 모든 맛을 보고, 몸으로 춥고 더웁고 한 것을 느끼고,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일용인데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한 권의 경(經)을 읽는다’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이 오직 이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본래 가지고 태어난 그 한 권의 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法)을 설하시고, 팔만사천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과 팔만사천 법(法)이 한 글자 한마디도 오직 이 한 권의 경(經)을 읽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 없어. 팔만대장경을 보고 배우되 옳게만 본다면, 마침내 이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본래 가지고 나온 이 한 권 경을 읽도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고 5년, 6년, 경을 배우고 평생 동안을 경을 손에서 놓지 아니하고 배우되, 본래 가지고 난 이 한 권의 경을 읽게 되어야지 그 경을 옳게 보고 옳게 배운 것이지, 이 본래 가지고 난 한 글자도 없는 이 경(經)을 볼려고 하는 신심(信心)을 내지 아니하고 이 경을 보게 까지 되지 아니한다면,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육두백판으로 다 외우고 쓴다고 한들 그 사람은 경을 바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을, 강원(講院)에서 이력(履歷)을 마치면 그 경을 놔 버리고 선방(禪房)에 들어와서 진짜 경을, 이 마음의 경을 읽는 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그래. 우리 대중이 과연 그 한 권의 경, 아무리 열어 봐도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여,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을 똑바로 잘 읽고 있는지 스스로 자기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입선(入禪)하는 시간만 떠억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한 그 찰나부터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시비에 얽혀서 말려들어 가고, ‘니가 잘하고 내가 잘하고 내가 옳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또 입선(入禪)을 하면 또 앉어서 정진하다가 방선(放禪)을 하면 그럭저럭 일용(日用)에 끄달려서 화두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정진을 해 가지고서는 10년, 20년 내지 30년, 평생을 선방에서 걸망을 지고 다니면서 정진을 한들 확철대오가 어디에 있어?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정진을 한들 무슨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금년 여름에 이 세등선원에 모인 대중은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한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정진을 하고, 금년 여름에 기어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을 하고, 불조(佛祖)의 면목을 꿰뚫어 보는 그러한 납자가 많이 배출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될 것을 기대를 합니다.


‘참선이 참 쉽기로 말하면 세수할 때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고, 어렵기로 말하면 이 세상에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없다’고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렵다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 없고, 쉽다고 섣불리 해서도 아니될 것이여.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앉어서 정진을 하다가 졸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 포행(布行)을 하면서 ‘이뭣고?’. 그러다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와서 정진하고. 조급한 생각을 조끔도 낼 것이 없어. 그러면서도 또 등한(等閑), 더군다나 등한히 할 생각을 왜 낼 것이냐 그 말이여.
일부러 묵언(默言)을 하지 아니해도 제절로 묵언이여, 전체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데 무슨 딴소리할 겨를이 있을까 보냐? 밥을 입에다 떠 넣고 저작(咀嚼)을 하면서, 저작을 하면서 그 속에 화두가 역력(歷歷)하고, 반찬을 집어 먹고 또 저작을 하면서 바로 거기에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전 대중이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하고, 세수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소제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운력을 할 때도 고대로 하고, 큰방에 있으나, 지대방에나, 마당에 나가나,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하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미 부모형제와 정든 가정을 버리고 출가해서 모든 인생 청춘을 다 포기하고, 그리고서도 이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한 이상, 기왕 하는 마당에 그렇게 철저히 해 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결정코 금생에, 금생도 길고 결정코 이 철에 확철대오를 해야 할 그러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달리고 있는 말에다가 채찍을 가한다’
채찍을 가하지 아니해도 그 말이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시 또 채찍을 가한다 그 말이여. 마치 우리 대중이 각자 자발적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내가 지금 법상에 올라와서 또 채찍을 가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서너 시간밖에 안 자던 사람이 이제는 인자 한 시간밖에 안 자고 정진을 하고 그렇게 까지는 할 것이 없어. 우리 몸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발심을 해서 정진을 해도 이 몸뚱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 물질로 이루어진 정밀한 기계라 최소한도 필요한 만큼은 잠을 재워 줘야 하고, 최소한 필요한 만큼은 멕여 줘야 하고 또 입혀 줘야 할 것입니다.(처음~26분3초)





(2)------------------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거의 잠을 안 주무시고, 거의 먹지 아니하시고 그 피나는 고행(苦行)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설산에 들어가셔서 여러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이 지도하는 대로 통달을 해서, 오히려 그 스승보다도 더 앞서갔다 말이여. 그러나 그 스승이 그렇게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또 그다음 스승의 밑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또 정진을 고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다도 더 낫게 해. 그 스승이 그렇게 간절히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그렇게 해서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훌륭한 스승은 다 찾아서 배우고 차례차례로 그 스승을 버리고 그렇게 해 가지고 더 이상 스승을 찾을 것이 없을 때,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혼자 정진을 했습니다.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을 받아 잡숫고 정신을 차리시고 흐르는 강물에 목욕을 하고 쇄락(灑落)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힘이 솟구쳐 오르는 그러한 상태에서 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했는데,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누구를 위해서 맨 먼저 법(法)을 설하실 것인가?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가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정진을 하는데—처음에 그 오비구는 정반왕(淨飯王)이 태자(太子)를 보호하라고 보내 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태자의 고행하는 것을 보고 발심을 해 가지고 같이 ‘성불(成佛)할 때까지 이 고행으로부터서 물러나지 말자’ 이렇게 서로 맹세를 하고 고행을 하다가, 태자는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잡수는 것을 보고, 그 다섯 비구들이 ‘고타마(Gotama)는 굶주림을 참지 못해 가지고 고행을 포기를 했다, 타락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저런 타락한 고타마와 같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녹야원으로 가자’ 그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 녹야원으로 간 그 다섯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께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위해서 녹야원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 교진여들은 먼빛으로 고타마 태자가 오신 것을 보고, ‘아 저기 타락한 태자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찾아오는가 모르겠다. 우리, 오드라도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말고, 발 씻을 물도 떠다 주지 말자’ 이렇게 다섯 사람이 꽉 짜고 있었습니다. 태자가 가까이 오니까 그 얼굴은 훤히 빛이 나는데,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짰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일어서서 영접(迎接)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태자가 뭐라고 여기를 왔소?” 물으니까,
태자가 “나를 이제는 태자라고 부르지를 말아라. 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으니 나를 부처님이라고 불러라”

“타락한 고타마가 어떻게 성불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나를 타락을 했다고 하느냐? 나를 봐라.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눈빛을 봐라. 나는 확철대오해서 성불을 한 성자가 됐느니라”
과연 우러러보니까 얼굴에는 빛이 나고 눈에서는 광명이 나는데, 옛날에 자기들이 보았던 그러한 구담 사문(瞿曇沙門)이 아니었더라 그 말이여.

거기에서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그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그 다섯 비구뿐만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인도(印度)에 모든 수행자들이 그렇게 몸을 불로 지지고, 가시덤불에 딩굴고,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하는 고행 위주(爲主)의 고행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 몸뚱이를 굴복을 받고 마침내 해탈도를 얻는다고 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진여를 위해서 최초에 설하신 법이 바로 고행을 위주로 하는 그러한 고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최초에 설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오비구(五比丘)로 하여금 바른 수행법을 갖도록 하고, 그다음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습니다.

그 다섯 비구로 하여금 한 사람을 보내서 탁발을 해 오게 맨들고, 나머지 네 사람을 위해서 법(法)을 설하고, 그 다음날은 또 다른 사람이 또 밥을 얻어 오고 나머지기 네 사람이 또 법문을 듣고, 이렇게 하면서 그 철에 이 다섯 사람이 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고, 다섯 사람이 각기 딴 길로 딴 방향으로 가서 이 법을 설해라’ 이렇게 해서 인도 각 지방에 보내 가지고 법을 설하게 했고, 그 철에 당장 1250인(人)이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셔서 삽시간에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불법(佛法)을 펴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 대중은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잘 입고 지나치게 많이 잘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될 수 있으면은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그렇게 공부를 할려고 애쓴 사람들만 모였어. 너무 그렇게 할까 걱정이, 그렇게 하다가 병이 날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니까.

최소한도로 필요한 잠, 아무리 적게 자도 서너 시간, 너댓 시간은 자 주어야 그래야 그 이튿날 정신이 맑은 법이여. 그 저녁에 잠을 안 자고 설쳐대 놓으면 안 자고 해 놓으면 그 이튿날 낮에 맑은 정신이 없어. 낮에 입선(入禪) 중에도 졸고 그저 그렇게 해서 맑은 정신이 없으니까, 차라리 그러기보다는 네 시간 내지 다섯 시간 푸욱 자 주고.
일반적으로 선방(禪房)에는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도록 여섯 시간을 설정한 것은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도 있고, 근기가 조끔 못한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어떠한 사람도 다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 시간을 자도록 그렇게 해 놓은 것인데, 그렇게 나이가 젊고 건강이 좋은 사람은 다섯 시간만 자도 좋고, 또 특수하게 또 좋은 사람은 네 시간 정도만 자도 좋으나, 대체적으로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자 주면 그 이튿날 정신이 깨끗해서 3시에 일어나서 그날 저녁 9시에 잘 때까지 정말 짬지게 정진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아 옆에서 잠을 안 자고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잠이 올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잠을 안 자고 하다 보면 그 이튿날 맑은 정신이 없어 가지고 입선(入禪) 중에 꾸벅꾸벅 조니, 그것은 실질적으로 이익이 없는 것이니까, 자기의 체질과 건강과 뭐 그런 것을 잘 참작해서 대중의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실질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가장 자기에게 알맞는 정진법을 스스로 개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럭저럭하다가 벌써 이 반 철이 지내갔는데, 앞으로 반 철은 초복 · 중복 · 말복, 이 삼복(三伏)이 들어서—지나간 반 철은 그럭저럭 과히 덥지 않고 지내갔지만 앞으로 참 더운 반 철이 남아 있는데, 그 더위 속에서도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실속 있는 정진을 해서 득력(得力)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알뜰한 정진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에 최초에 오비구(五比丘)에게 설하신 법문(法門)의 요지를 말을 했습니다.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헌디  갱무남북여서동(更無南北與西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차양화력(雖然不借陽和力)이라도  쟁내도화일양홍(爭奈桃花一樣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이다. 홀로 앉었어, 올연히 앉었는데 한 집이 공(空)했더라.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참 애를 써서 몸부림을 치면서 부셔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정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게 된 경계가 꼭 오는데,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처억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그 맑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기쁘다고 할 것인가, 슬프다고 할 것인가?

하늘을 봐도 화두(話頭)요, 땅을 봐도 새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차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무슨 옆에서 누가 잡담을 해도 그 소리는 나한테는 상관이 없고, 비행기 소리가 들려도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그러니 방안에 대중이 가득 있어도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고, 문 밖을 보면은 산천초목이 울긋불긋해도 그것은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오직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할 뿐이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무슨 망상이 혹 무슨 딴생각이 일어나도 그냥 스쳐간 것뿐이지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것이 ‘한 집이 공했다. 일실(一室)이 공(空)했다’ 하는 거여.

이 조그마한 큰방 하나만 공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다 공한 거여.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까지도 느낄 수가 없어. 몸뚱이가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도 인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 몸뚱이도 공(空)해 버렸고 이 방도 집도 공(空)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공(空)해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러니 거기에 무슨 동서남북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 몸이 공하고, 이 방이 공하고, 이 우주법계가 다 공했으니, 그 공한 곳에도 처백히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공한 그 경계에 따악 빠져 가지고 그놈을 집을 짓고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그것은 그러한 경계에 빠져 가지고 그놈을 맛보고 있다면 그것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거여. 절대로 그 사람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그러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되거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또 하나 조심할 것은 그러한 경계에서 ‘빨리 그냥 어서 터졌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한 생각을... (녹음 끊김) 조급한 생각도 갖지 말고 또 늘어지는 해태심(懈怠心)도 갖지를 말고 여법하게 정진을 해 가면 아무 장애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고, 결정코 깨닫고야만 말게 되는 거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에 맛있는 음식인데, 그러한 맛있는 음식을 맨들어 갖고도 그 관리를 잘못하면 그것이 변했다 하면은 무서운 독약으로 변하는 것이여. 맛있는 음식일수록에 변하면 고약한 독약으로 변하는 법이라, 맛있는 음식이 변했다고 해서 아깝다고 그놈을 먹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그 무량겁을 두고 어렵게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저 죽고 남 죽이는 외도(外道)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말이여. 이러한 말이 한량이 없지만...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26분5초~49분2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經)을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한다 /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라 /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오비구(五比丘)에게 하신 최초의 설법, 중도법(中道法) /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실속 있게 정진을 하라 / (게송)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 /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된다 /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한다.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3)—1982(임술)년 동안거 해제 법어(83.01.17) (43분)

 

약 43분.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종일토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토록 바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걸어다니고 손으로 일을 하고, 입으로 먹고 말하고, 앉고 서고 눕고 걸어 다니고, 잠시 잠깐도 쉴 사이가 없이 바쁘다 그 말여. 그렇게 바쁘건만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다. 해탈도 구하지 아니하고, 천당에 태어나는 것도 좋아하덜 않는다 그 말이여.

세상에 도(道)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명업식(無明業識)이 발동을 해 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설쳐대고 있지만,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역시 바쁘다 그 말이여. 그 바쁘지만 그 바쁜 것이 조끔도 방해로울 것이 없어.
정진(精進)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뻐서 참선(參禪)을 못한다. 시간이 없어서 참선을 못한다. 번뇌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그 묘한 관(觀)을 얻은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건 망상이 일어나건,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밥을 먹고 걸어가거나 앉거나 서거나 하나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경계는 갈 곳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복잡한 경계 속에 있으면서 그 복잡한 경계가 자기에게는 아무 방해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못 이렇게 정진을 지어가는 마당에 무슨 해탈(解脫)을 구할 것이 있으며, 무슨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못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무렴(無念)이라 하니까, 이 ‘생각 없는 데 돌아간다’고 표현을 했지만, 생각 없는 데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내면 그건 벌써 틀려 버린 것이고, 스스로 ‘내가 무렴(無念)의 경계에 들어갔다’고 생각을 가져도 이미 무렴이 아녀.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毘盧)의 이마 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갈 뿐 그밖에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정월 17일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일이고, 또 천일기도 가운데에 백일기도의 회향날입니다. 지난 삼동에는 50여 명의 수좌(首座)들이 모여서 참 알뜰하게 짬지게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석 달 동안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잘 정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독감이 들어서 거의 몇 분을 빼놓고는 전부 독감이 들어서 고생들을 했지만, 그 기침을 하고 열이 나고 몸이 아프고 그러면서도 한 분도 도중하차를 하지 아니하고, 이 좁은 방에서 기침을 하면서 그 병을 정진력으로 이겨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마침내 병을 이겨내 가지고 날이 지내갈수록 점점 정진을 모다 열심히 하고 여법하게 해서 끝을 그렇게 잘 마쳤어. 이렇게 알뜰하게 여법하게 정진(精進)해 간다면 무슨 도(道)를 성취하지 못할 것인가?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3년을 이렇게 해서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이러한 뼛속에 사무치는 가슴이 뭉클한 그러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정진(精進)은 누구를 위하는 정진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해결하기 위한 정진이여. 남을 보이기 위해서, 정진 잘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크게는 진리를 깨달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것을 궁극에 목적으로 삼지만, 도를 이룰 때까지는 일체중생이 어디에 있어? 깨달라야 할 진리가 어디가 있어?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가 코앞에 붙어 있는데.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그 생사(生死) 문제가 딱! 눈앞에 있어서 일분일초도 마음을 지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일으켜서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여. 제절로 무상(無常)과 생사에 대한 무상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오른다면 지켜야 할 계행(戒行)이 어디가 있으며, ‘화두를 들어야겄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어디가 있으며, 남을 보이기 위한 정진이 어디가 있으며, 대중규칙도 일부러 지킬려고 할 것이 어디가 있으며, 밥이 맛이 있고 없고, 수용(受用)이 좋고 나쁘고, 그러한 것에 관심 쓸 겨를이 어디가 있느냐? 누구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낱낱이 자기 자신이 저절로 규칙이 지켜져 버릴 것이며, 입승(立繩)이나 찰중(察衆)이나 주의나 간섭을 받을 것이 무엇이 있어? 저절로 50명이 되었건 백 명이 되었건, 옛날에 중국 총림에는 5백 명, 7백 명, 천 명, 천오백 명 이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지만 모두가 다 생사 문제에 분심(憤心) 발심(發心)되어 가지고 그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 간다면 무슨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무엇이 있어?

지난 삼동(三冬) 동안에 대중이 그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았지만 한 사람도 별 탈이 없이 그렇게 온전하게 여법하게 알차게 정진을 하고 이렇게 해제를 맞이한 것은 전원이 그야말로 이와 같이 정진을 해 왔고, 이와 같이 발심을 한 결과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 철만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앞으로 여름 결제가 있을 때까지 또 산철이 또 석 달이 있습니다마는, 산철 동안에 걸망을 지고 어느 산(山), 어느 도량(道場)에 가고, 어느 지방에 가드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이고, 또 여름 석 달 동안에 결제(結制)에 안거에도 그와 같이 정진을 해서,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그 간절한 마음이 지속이 되어야지 상속이 되어야지,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해제가 되면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흩어져 버리고 이리저리 설치다가, 또 다음 결제가 되면 조금 할 듯 할려고 하다가 또 해제가 되면 또 그 분위기가 깨져 버리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3년을 한들 어찌 정진이 궤도(軌道)에 들어가며, 10년을 한들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제 중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할 때에는 전원이 묵언(默言)을 하면서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하면 잡담을 하고, 이렇게 지내는 그런 것이 습관이 배이게 되면 그것이 온전한 정진이라 할 수가 없고. 이 결제 동안에는 정진을 열심히 하다가 해제가 되면 이리저리 산만하게 다니는 것이 그것이 어찌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하겠느냐.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고 한 말씀이 근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하야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허면  원래불허노호지(元來不許老胡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라. 선근(善根)이 성숙(成熟)하면, 선근(善根), 좋은 근기(根機)다 그 말이여. 좋은 근기는 처음부터 선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하근(下根)이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마침내 선근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여. 그렇게 알뜰히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서 선근으로 성숙이 되어 가는 것은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처음부터 ‘나는 하근기(下根機)라, 나는 참선을 못해. 참선을 해봤자 나같은 사람은 도를 이룰 수가 없어’ 자포자기를 해 가지고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선근(善根)이 될 기약이 없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봐서 하근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럴수록에 바른 스승을 찾아서 목숨 바쳐서 다른 사람 정진하는 것보단 3배 내지 10배 100배를 정진을 해 간다면 그 사람이 훨씬 더 빨리 선근으로 성숙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그 말이여.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다. 모냥을 취(取)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용맹정진 가행정진을 해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다’ 그랬지만, 취상구현(取相求玄)을 하라는 것이 아니여.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상(精進相)을 갖고, ‘나는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하는 상(相)을 내고, ‘나는 정진이 잘된다고 하는 그런 상(相)에 떨어지고, 취상구현(取相求玄)은 진실한 정진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거든.

스승을 구(求)하되 모냥을 보고 구하고, 정진을 하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정진상을 내고, 계율을 갖되 ‘나는 청정한 계율을 갖는다’ 하는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다른 사람 계행(戒行) 안 지킨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미워하고, 이러한 것은 전판 이 취상구현(取相求玄)이 되어서, 모냥을 취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는 것이 되어서 이것은 참다운 수행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율사(律師)가 견성(見性)을 못한다. 율사가 견성한 사람은 없다’
과거에 모다 문헌을 보면 율사가 견성한 도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율사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견성을 못했어.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율사를 하되, 율사라고 하는 상(相)이 떨어졌을 때 견성을 하지, ‘나는 율을 지킨다. 계행이 청정하다’ 그래 가지고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있는 동안에는 세상없이도 도(道)를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사람이 물론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음식도 조심하고, 잠도 좀 적게 자면서 그 정진할려고 애를 쓰는 것, 그렇게 애를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이루겠습니까마는 그러한 상(相)에 떨어져 가지고서는 안 된다.

알뜰히 정진을 하되 그러한 상(相)에 떨어지지 않고 정진한 사람과 그런 상(相)에 떨어져서 정진한 사람은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아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되 정말 철저하게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되, 계를 지키는 상(相)이 없는 분은 남이 보면 알어. 남이 보면 아는 것이고. 계를 지키되 ‘내가 계율을 지킨다’는 계상(戒相)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보면 또 남이 보면 알어.
기위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할라면 계(戒)를 청정히 지키되 계상에 떨어지지 말 것이며,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하면, 한 생각을 몰록, 한 생각 몰록 공겁(空劫) 밖에 뛰어나면,
원래(元來)로 불허노호지(不許老胡知)니라. 원래로 노호(老胡) 아는 것을, 노호 아는 것을 허락지 않을지라. 한 생각 공겁 밖에 뛰어난 소식(消息)은 노호도 이 도리를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호(老胡)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금일 대중은 이 해제일(解制日)을 맞이해서 부처님도 이 도리는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그 도리를 향해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새로 출가한 마음으로,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결제(結制)를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죽는 것이, 죽는 그 시간이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는 그 순간이 새로 태어나는 시간인 것이며, ‘해제(解制)다’ 이제 공부가 공부 기간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바로 동시에 새 결제가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참수행인이라 할 것이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그것이 죽을 사(死) 자, 죽음이라 하셨습니다. 그 한 생각 끊어진 그것이 죽음인 동시에 새로 태어나는 찰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生)이요 죽음[死]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느낀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라야 비로소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오느냐? 죽음이 우리에게 오는 그 시일을 시간을 각기 말해 봐라”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하루 동안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한 시간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공부를 못하겠다

그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죽음은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는 그 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죽음이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그리셨습니다.

지끔 40살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20년간은 정진을 할 수 있겠다 이리 생각하고, 한 50을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내가 빨리 죽는다 해도 환갑까지는 정진을 할 수 있겠다
30세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30년은 정진할 수 있겄다 20세 먹은 사람은 ‘30세까지는 경(經)을 보고, 30세부터서 참선을 해도 몇십 년간을 정진할 수 있으니까 충분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모두가 다 정진을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규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생각 하나가 철저하다면 입선(入禪) 방선(放禪) 시간이 어디에 있으며,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파해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정진을 해야 할 정진이 어디가 따로 있으며, 벌써 마음을 지어서 지키고, 마음을 지어서 정진을 하고, 마음을 지어서 잠을 안 자고 다 그르쳐 버린 것이고, 다 김이 벌써 다 새 버린 것입니다.
김새 가지고 정진을 하니 번뇌 때문에 정진을 못한다. 망상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혼침이 오기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수용(受用)이 박(薄)해서 정진을 못한다. 시끄러워서 정진을 못한다 이게 다 김이 벌써 다 빠져 버리고, 껍데기 송장이 송장 껍데기만 남아 가지고 정진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花笑山前)에 누천기(漏天機)요. 꽃이 웃는 산 앞에는 천기를 누설(漏泄)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새가 노래하는 수풀 밖에는 남[生]이 없는 말을 하고 있더라. 무생(無生)의 도리를 말하고 있더라. 산 앞에 빨갛게 피고 있는 그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을 하고 있고, 숲 밖에서 새가 노래하는 것은 무생(無生), 무생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더라 그 말이여.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로구나.
두두물물(頭頭物物)은,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은 제각기 스스로 영원무궁(永遠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더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라.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일체 삼라만상 그 자체가 전부 천기를 누설한 것이요, 남[生]이 없는 진리의 표현일진대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요, 구름을 보면 구름이요, 새를 보면 새요,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이 낱낱이 그대로 그놈을 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고대로가 법신(法身)이요, 진여(眞如)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더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입을 벽에다 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이 무슨 (기계음)... 기계가 녹음기가, 마이크가 산승(山僧)을 대신을 해서 끝을 맺어 주었습니다. (처음~42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 /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려라 /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달라야 한다.

생사에 대한 무상(無常)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 /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

(게송)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 /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 /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 / (게송)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無念)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이 독로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복전암(1~73)/(1~25)2023. 6. 7. 10:07

 

 

(복전암No.21)—1990년 관음칠성회 기도 입재 법문(1990.10.01) (58분)

 

(1) 약 31분.

 

(2) 약 27분.

 

(1)------------------

편안하게 앉아서 법상을 향해서 눈을 딱 뜨고 그리고 법문을 들으십시요.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연화근발유니리(蓮花根發游泥裏)하면  각소거진불염진(却笑居塵不染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다.
마음자리, 마음에 근원을 몰록 깨달라서 자기 몸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보배를 개발을 하면 모든 중생들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사대 오온(五蘊)으로 이룩된 이 무상한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한 본래신(本來身)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화근발유니리(蓮花根發游泥裏)하면, 저 연꽃이, 그 깨끗하고 향그럽고 아름다운 그 연꽃이 그 뿌리는 더러운 흙탕물 속에 박고 핀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청정법신(淸淨法身) 자성불(自性佛), 자성불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이 청정법신이 들어 있는 것과 연꽃이 그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 뿌리를 박고 그렇게 아름답게 핀 도리와 똑같은 것을 알고 보면 정말 비긋이 웃음이 나올 것이다.


오늘은 경오년(庚午年) 음력 시월 초하루 관음칠성회 법요식입니다. 관음칠성회가 6 · 25 동란 직후에 발족이 되어 가지고 오늘날까지 40년의 역사가 쌓였습니다. 주지 스님의 원력으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청신남 청신녀가 해마다 수효가 불고 불어서, 처음에는 불과 몇십 명에 지내지 못하고 회원이 오늘은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칠성회 축원 명단을 보면 수천 명에 이릅니다.
관음회도 있고 칠성회도 있고 절절이 다 회원이 있지마는, 이 복전암은 관음칠성회라 그래. 시월 초하루부터 7일간 기도를 봉행하고 그리고서 동짓달, 섣달 또 내년 정월, 2월해서 내년 시월까지 열두 달 동안 다달이 초이렛날 법회가 있습니다. 기도법회가 있어. 기도도 하고 법회도 열고.

무슨 목적으로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기도법회를 열어 오고 있느냐?
첫째는 이 험난한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어떻게 하면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살아가며, 가정의 평온을 유지하며, 나아가서는 사회 국가를 위해서 항상 불자(佛子)로서의 기도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험난한 세상을 무사히 지내가기가 어려워.

그리고 둘째는 이 말세(未世)에 한 사람이라도 더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불법(佛法)을 믿고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이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한 것이다. 해마다 저 고봉 큰스님, 열반하신 고봉 큰스님 생존 시에는 고봉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고봉 큰스님 열반하신 뒤에는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를 초빙을 해서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40년의 한 해도 궐(闕)한 바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칠성회에 가입한 분은 신심(信心)이 안 날라야 안 날 수가 없고 또 정법(正法)을 안 믿을라야 안 믿을 수가 없어. 무엇이 정법이던가?

불교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세 가지 보물이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이요, 둘째는 법보(法寶)요, 셋째는 승보(僧寶)인데, 불보(佛寶)는 이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불상. 더 들어가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실달 태자(悉達太子)로 탄생하셔 가지고 출가하셔서 성불(成佛)하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더 확대해서 보자면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계시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여.
거기서 우리에서 가깝게 부처님을 찾자면 이 사대(四大) 오온(五蘊)으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자성불(自性佛), 이것이 바로 불보(佛寶)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목적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셔 가지고 중생 한 사람 한 사람 중생의 몸뚱이 속에, 각자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자기의 부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하신 것이다.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하셨는데 그 대장경의 뜻이 ’너의 자성(自性)을 깨달라라. 너의 자성을 어떻게 공부를 해 가지고 어떻게 수행을 해서 어떻게 깨달러라‘ 이것을 고구정녕(苦口叮寜)하게 중생의 천차만별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설해 놓으신 것이 바로 법보(法寶)다.

승보(僧寶)는 무엇이냐?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法)에 의지해서 법답게 수행을 해 가지고 그 부처님의 법을 끊이지 않도록 영원히 유통해 가는 그런 부처님의 제자를 승보(僧寶)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그 일부가 나무에 조각을 해서 해인사(海印寺)에 봉안이 되어 있지마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요 우주법계에 가뜩 차 있어. 나무에 조각해 놓은 것은 그 일부에 지내지 못한다.
낮에면 빛나는 저 태양, 밤에는 빛나는 달, 그 높은 하늘에 무수히 반짝거리고 있는 별들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이요, 봄에는 꽃이 피고 잎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이것들이 다 부처님의 상주설법에 하나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은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그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며, 푸른 풀 잎사귀 하나도 부처님의 몸뚱이가 아닌 것이 없어. 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체(體)여. 그러건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그저 평범한 해요, 달이요,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그 말이여.

어떻게 하면은 부처님의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법신불(法身佛)을 친견하며, 어떻게 하면 잠시도 끊이지 않고 설하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까?
언제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언제나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질라야 떨어질 수가 없고, 해태(懈怠)할라야 해태할 수가 없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빠질라야 빠질 수가 없어.

오늘 이 법요식에 참석한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를 뵈니 전부가 다 경건하고 엄숙하고, 이 법희선열(法喜禪悅)이 그 얼굴에 넘쳐흐르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바로 여러분의 눈동자를 통해서 역력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단 법회가 끝나서 댁으로 돌아가셔서 세속생활에 시비와 흥망성쇠 속에 휩쓸려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瞋心)을 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심(貪心)을 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절에 오실 때 뿐만 아니라 댁에 가셔도 또는 어느 직장에서도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부처님이 바로 자기 눈앞에 계시고, 자기의 몸속에 계신 것을 역력히 깨닫고 친견한다면 어느 겨를에 감히 부처님 앞에서 진심을 내며 탐심을 내며 어리석은 마음을 내겠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法)에 의해서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부처님의 법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지만 가장 우리가 알기 쉽고, 실천하기 좋고, 어디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여.

한문(漢文)을 몰라도 참선은 할 수가 있고, 설사 대학을 나오지 안 해도 참선은 할 수가 있고, 이 참선법은 남녀노소가 상관이 없고,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고, 아픈 사람은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성질이 고약해서 노상 진심을 낸 사람도 이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시작하면 차츰차츰 그러한 나쁜 성격도 순화가 되어 간다.
연꽃은 절대로 저 고산(高山)에 석간수, 그 맑고 깨끗한 석간수에서는 연꽃이 피지를 못합니다. 저 밑으로 내려가서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 만이 연꽃은 뿌리를 박고 그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청정하시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만덕(萬德)을 다 갖추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이시지만 그 부처님도 원래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가 법(法)에 의지해서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니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탐심(貪心)이 많고, 진심(瞋心)이 많고,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법의 배에만 타게 되면 부처님이 운전하시는 그 배에 의해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가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다, 소승(小乘)이다’ 승(乘) 자가 ‘탈 승(乘)’ 자입니다. 탈 것. 수레. 그 수레에만 타면 그 수레의 운전은 부처님이 하시니까 부처님 나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대승법이다 또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하는 것이여.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요  만로피대긱신산(謾勞皮袋喫辛酸)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하야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여. ‘부처다, 마음이다, 또는 한 물건이다’ 여러 가지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여. 그러한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하고 신령스러운 물건을 우리가 다 낱낱이 다 가지고 있어.
무량억겁(無量億劫)부터서 그놈이 천 가지 만 가지 탈을 쓰고 여기에 났다가 저기에서 죽고, 저기에서 났다 여기 와서 죽고. 그래 가지고 지은 업(業)에 따라서 천상에도 태어났다, 인간으로 태어났다, 축생에도 태어났다, 지옥에도 갔다, 그래 가지고 무수억겁(無數億劫) 동안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 왔더라.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며,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흰 눈이 펄펄 나려서 온 세계가 은색(銀色) 세계로 된다.
이러한 사계절을 따라서 나타나는 모든 경색이 경치가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여. 낱낱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서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 중생들에게 설해 주신 고구정녕(苦口叮嚀)한 설법이요 경전이더라.

세종대왕이 한문(漢文)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한글을 창제를 하셨다고 우리는 굉장히 그 세종대왕을 숭배하고 찬양을 하는데, 한글을 통해서 우리가 다 우리의 의사를 글로 표현할 수 있고, 남이 써 논 것을 읽을 수가 있고, 어린아이들도 금방 배우기가 쉽고 참 편리한 글자요, 세계에서도 으뜸가는 참 좋은 글이라고 찬양을 받고 있지만,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께서 설해 주신—사계절을 통해서 오색찬란한 꽃을 피워 주시고 나무, 풀, 가지가지 모냥으로 잎을 피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을에는 온갖 곡식 과일을 여물게 하고, 그 설악산이나 내장산에 가 보면 그 단풍이 꽃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 말이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곱다고 야단들이지만 고와 봤자 서리 한 번 오고, 두 번 오면 참 볼상 사납게 시들어서 떨어져버린다. 고운 것에 탐착해 가지고 그것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 단풍이 노랗고 빨갛고 한 그 단풍이 법신불(法身佛)이 설하신 경전이요, 법문(法門)이라고 한 것을 바로 봐 버린다면 빨간 단풍은 빨가서 좋고, 노란 단풍은 노래서 좋고, 서리가 와서 시들으면 시들어서 좋다 그 말이여.
단풍이 지나간 뒤에는 겨울이 다가와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아무 뜻도 모르고 눈이 오면 모다 좋다고 그런다 그 말이여. 눈이 와서 좋다고 한 사람은 좋지마는, 운전하는 사람은 영 안 좋아한다 그 말이여. 미끄러지면 사고 나고 사람 죽고 차가 뿌서지고 하니까 안 좋아한다 그 말이여.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어야, 눈을 통해서 법신불(法身佛)의 법문을 듣는다면 무엇이 그렇게 좋을 것은 또 무엇이며, 무엇이 그렇게 싫을 것이 또 무엇인가?

세계에 60억 인구가 있지마는 전부 다 자기의 지은 업(業)이 다른 만큼 생긴 모습이 다 다르다 그 말이여. 비슷한 사람은 있지마는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쌍둥이가 많이 닮았지마는 똑같지는 안 해. 왜 그렇게 다르냐 하면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달라. 한 부모 뱃속에서 나왔지마는 달라.
지은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빈부귀천도 다르고 일생 동안 흥망성쇠도 다르다 그 말이여. 잘나 봤자 거기서 거기고 권리가 높아 봤자 거기서 거기여. 좋아할 것도 없어.
그 자기가 왕이 될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권리를 쥐었으며,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세계 각국이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갖은 모략과 중상과 수단을 부려 가지고 그것을 서로 할라고 그러냐 그 말이여. 그래 봤자 평생하는 것도 못 되고, 하다가 잘못되면 쫓겨나고 죽고.

우리가 정말 목숨 바칠 곳이 어디냐 그 말이여. 명예냐, 권리냐, 재산이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인들 하루에 밥 세 그릇 이상 못 먹고, 죽어 봤자 한 평 이상 차지를 못해. 그런데 그 욕심이 한도 끝도 없이 그놈을 자기 것을 만들려고 야단이다. 형제간에 싸우고 부자간에 싸우고 재판하고 죽이고 이것이 무슨 짓이냐 그 말이여.

불법(佛法)을 믿은 사람은, 정법(正法)을 믿은 사람은 오욕락(五欲樂)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알게 될 것이다.(처음~31분2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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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0월 7일 날에는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원하는 사람에게 설해지게 되는데, 그 십선계는 재가 신도들이 가져야 할 가장 좋은 계(戒)—계는 오계가 있고, 십계가 있고, 또 250계 또 500계 또 보살십중대계와 사십팔경계가 있지마는 그 여러 가지 종류의 계 가운데에 지금 7일 날 설해지게 되는 십선대계(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그 말이여.
그걸 받아서 잘 지킴으로 해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최고로 잘 지키면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같이 거기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다가 미륵불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실 때 같이 이곳에 하강(下降)을 해서 중생교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쯤, 썩 그렇게 잘 닦지 못하고 중간쯤만 지키고 실천을 해도 어디에 태어나되 어느 세계에 태어나되 항상 훌륭한 가문에 좋은 몸뚱이에 왕(王)으로 태어나거나,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중생의 지도자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정법(正法)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성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제일 하급으로 닦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된다 하더라도 축생 중에 왕이 되어 가고, 그러다가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지옥에 왕(王)이다. 혹 귀신의 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귀신의 왕(王)이 되는 거여. 왕이 되어 가지고 있다가 머지않아서 다시 이 불법을 만나게 되어 가지고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여.

그러니 작년에 받으신 분은 금년에 또 안 받으셔도 좋고, 아직 받지 못하신 분은 사무실에 성명을 등록 신청을 해서 7일에는 꼭 참석을 해서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고 그 계첩(戒牒)을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해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 이것이 불법(佛法)의 궁극에 목적이고 최고에 정법(正法)이지만, 우리가 설사 법문을 듣고 정법을 믿는다 해도 우리의 수행력이 알차지 못해서 생각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하리라’ 해도 실지 생활 속에서는 많이 일에 끄달리고 파묻혀서 그렇게 철저히 못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달이 7일 동안에 법회(法會)를 열어서 부처님께 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또 법문을 듣고, 마치 차(車)가 가끔 보링(boring)을 한 것처럼 이렇게 최소한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법회에 꼭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이렇게 해서 또 한 달을 지내고 지내고 하다가 시월이 돌아오면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이 법요식(法要式)에 참석을 해서 아주 대법요식을 통해서 일 년 동안에 쌓인 죄를 다 참회(懺悔)하고 새로 태어나서 새로 일 년 동안을 기약을 하고 또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매월 7일에는 처음에 한 50명, 80명, 100명 하다가 지금은 한 3백여 명씩 이렇게 참석을 하신다고 하는데, 칠성회 회원이 수천 명인데 겨우 3~4백 명 정도 오신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적어도 천 명은 오셔야 하거든.
스님네가 모다 준비를 해서 공양을 해 드리고 할라면 힘이 드시겠지만, 스님네는 어떻게 하면 여러분으로 하여금 모든 죄업(罪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해탈도를 증득하도록 해 드릴까 하는 그 불보살(佛菩薩)의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써 아주 이 주지 스님을 비롯한 삼직(三職) 스님과 전 대중스님네가 발을 벗고, 선방에 가는 것도 뒤로 미루고 원력을 세워서 하시는데 스님네 준비하실 것 걱정해서 안 오실 것은 없습니다. 칠성회날 오시면은 그 음식을 정성스럽게 장만을 해서 공양을 준비를 하니까 마음놓고 오셔서 법요식에는 꼭 참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가게문을 다 닫고 전부 다 교회마다 새벽부터서 하루에 몇 축씩을 교회를 가뜩가뜩 채우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는 ‘집 볼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가게 볼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겨우 특수한 신심 있는 분만이 몇 분만 참석을 하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인 것입니다.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그 돈 조끔 더 벌어 봤자 백 석(百石) 밖에 못할 복(福)밖에 안 타고난 사람이 천석(千石)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라는 것도 한도가 있어. 아무리 안 입고 아주 피가 나오게 애껴도 다 천석군이 만석(萬石)군이 되는 거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 함부로 그렇다고 해서 낭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애낀다고 큰 부자 되는 것이 아니여.

큰 부자는 전생에 큰 복을 지은 사람이 큰 부자 되는 것이지, 애껴 가지고 보시도 안 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지도 않고, 쓸 데가 있어도 쓰지 않고 아주 구두쇠가 되어 가지고 아조 딱! 한번 그 손에 돈 들어가면은 곰팡이가 슬도록 애낀다고 해서 부자 되는 거 아녀. 버는 것은 쓸 데 쓰자고 버는 것이지, 애껴서 항아리에다 담어 가지고 땅속에 묻어놓고 굶어서 죽으면 뭣이 되냐 그 말이여. 죽었다 하면은 구랭이가 되어 가지고 그 항아리 옆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집 뜯으면은 ‘업’이라고 해서 구렁이가 대들보 있는 데서 나오는 예가 흔히 있는데. 쌀 곳간에도 있고, 장작 쌓아 논 데 속에서도 있고. 그게 ‘업’이라고 야단들입니다마는, 그 업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생(前生)에 자기가 못 먹고 안 쓰고 모아 논 재산, 그 재산에 탐착심(貪着心)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지 못하고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그걸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긍께 그것이 ‘업’이거든.
그것이 ‘업’이란 말을 좋게 해석해 가지고 ‘그 구랭이 쫓아내면 가난해진다’고 해 가지고 구랭이를 갖다가 못 나가게 살살 다시...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거 잘 몰라서 그러거든. 그래서 검박하게 잘 소중하게 재산을 아껴 쓰는 것은 좋으나 덮어놓고 탐착심을 가져서는 안 돼.

이 칠성 이 법요식을 맞이해서 기도를 성취하는데—부자 되기 위한 원(願)을, 무슨 장사 사업이 잘되기를 비는 그러한 분도 계실 것이고, 아들딸 대학에 꼭 합격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원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아들을 못 나신 분은 아들 낳기를 소원하신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병고에 시달린 분은 병고를 빨리 쾌차해서 건강한 사람 되기를 빌 것이고, 또 바람난 사람이 있는 사람은 바람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또 그런 원이 있을 것이고. 천 가지 만 가지 소원이 있으시겠으나, 그런 크고 작은 모든 소원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시면 반드시 성현(聖賢)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그 소원성취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그러한 중생의 탐심(貪心)을 충족시키는 데 그친다면 그 사람은 그 불법에 조끄마한 방편(方便)으로 설하신 그것밖에는 모르는 것이고, 정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철저하게 ‘이뭣고?’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꼭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만이 하는 것이 아니여. 선방에 들어가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하실 분은 모든 여건이 허락이 되신다면 아 그 이상 더 좋을 수가 없으나, 여러 가지 형편이 그러지 못한 분은 그냥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앉아서 ‘이뭣고?’
서서 ‘이뭣고?’ 걸어가면서 ‘이뭣고?’ 일하면서 ‘이뭣고?’
속상할 때 ‘이뭣고?’ 괴로울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기쁠 때 ‘이뭣고?’
자꾸 챙겨. 깜빡 잊어버리면 턱! 챙겨서 ‘이뭣고?’

자꾸... (녹음 끊김) 여러 가지 춤도 추게 맨들고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게 맨드는데, 곰이 귀는 물론 뚫려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그대로 하면은, 먹을 것을 주고 하면은 곰도 몇 가지 말은 알아듣고 북을 ‘둥둥 둥둥 두둥 둥둥’ 치면은 곰도 그 장단에 맞춰서 영락없이 춤을 춥니다. 코끼리도 추고, 곰도 추고 하는데.

그 미련한 곰을 어떻게 길을 들이냐 하면은 큰 깡통에다 따악 곰을 태워서 매달아 놓고 깡통 밑에다가 불을 핍니다. 처음에는 불을 약하게 피어. 약하게 피면서 북을 천천히 치거든. ‘둥~닥 둥~닥 둥닥쿵 쿵닥쿵’ 천천히 하다가, 그러면은 곰이 발이 뜨거우니까 이쪽 발을 들었다 저쪽 발을 들었다 그러거던.
그러면 불을, 화력을 돋구면은 이놈이 뜨거우니까 빨리빨리 들었다 놨다, 그놈에 따라서 북을 그때는 빨리빨리 쳐 주거던. 그래서 불을 아주 세게 피면서 북을 빨리빨리 치면 이놈이 ‘뚱딱뚱딱뚝딱뚝딱’ 이러다가, 또 화력을 차츰차츰 줄이면서 북을 천천히 치면 그때는 또 천천히 하다가, 아주 화력을 줄이면 그때는 아주 천천히 이러거던.
그렇게 해서 몇 번을 훈련을 시킨 다음에는 불을 피지 않고 그냥 북만 천천히 치면 천천히 하다가, 빨리빨리 치면은 빨리빨리 발을 옮기고, 인자 북만 치면 아무 때라도 북만 치면 북 맞춰서 그 장단에 맞춰서 춤을 영락없이 춘다 그 말이여. 이렇게 해서 곰을 가리킵니다.

그 미련한 곰도 그러한 북과 도라무통[drum桶]과 그 화력(火力)으로 해서 그런 방편(方便)을 써 가지고 영락없이 장단 맞춰서 멋지게 춤을 춰 가지고 써커스단에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할 수가 있거든, 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사람이 어찌 ‘이뭣고?’를 못할 리가 있느냐 그 말이여.
처음에는 안 돼. 그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되게 되어 있다 그 말이여. 개도 산수를 가르키면은 산수를 하고, 짐승도 영락없이 다 가리키면 다 하는데 사람이 못할 리가 없거든.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데 왜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재미가 없어. 인과설(因果說)을 얘기하면 재미가 나서 눈이 초롱초롱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하면은 처음에는 떠억 눈 감고 잘 들은 척하다가 꾸벅꾸벅 하거든. 최상승법을 설하면은 왜 잠이 오냐?
최상승법을 설하면은, 만약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그 최상승법을 잘 듣고 너 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참선(參禪)을 해서 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궁전이 흔들려 가지고 팍싹 주저앉어 가지고 마왕 파순이가 발 디딜 곳이 없어져. 그러니까 어쨌든지 마왕 파순이란 놈이 눈뚜껑을 막 처누르는 거여. 그러니깐 눈뚜껑이 천근만근(千斤萬斤)이 되어 가지고 아무리 눈을 뜰라고 해도 눈이 안 떠져. 자꾸 눈이 갬겨 가지고는 꾸벅꾸벅 졸고. 그 못 듣게 하는 거여.

‘졸음이 오는 것은 내가 어제 저녁,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더니 법문 듣느라고 잠이 왔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거든. 마구니란 놈이 눈뚜겅에 올라타 가지고 막 누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 마구니에게 지느냐, 마구니에게 지지 않느냐는 그 사람의 신심(信心)에 달려 있어.

내일 법문을 들으러 올라면은 저녁에 좀 일찍 자서 잠을 푹 자 놓고 오면은 괜찮은데, 밤에 그럭저럭 늦잠을 자 갖고 그 이튿날 와 가지고는 처음부터서 법문만 시작했다 하면 처음부터서 꾸벅꾸벅.
마구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그래서 선방에도 죽비만 치면 5분도 못 되어서 꾸벅꾸벅 졸거든. 마구니란 놈이 눈뚜겅이에 올라타 가지고 쪄누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중을 모르고.
그래서 그 마구니는 다 마구니지만 오신통(五神通)을 다 갖추어져 갖고 있거든. 수단과 방법—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실라고 할 때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도(道) 성취한 것을 방해를 한 것을 『팔상록(八相錄)』을 보면은 그 항마상(降魔相), 『팔상록』에 항마상을 보시면은 가지가지 마구니의 그 하는 수단을 아실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여. 법문 들을 이 법요식에 참석할라면 뭔 일이 그렇게 요리 ‘여기서 오라, 저기서 오라, 누구누구 결혼식한다, 누가 돌아가셨다, 누구 환갑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거든. 그것이 다 마구니가 들어서 어쨌든지 법회에 참석 못하게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진실로 이 신심이 있고 마구니를 이겨 낼 용기가 있는 분은 어지간한 것은 다 뒤로 미뤄 버리고 법회에 참석하셔야 하고, 될 수 있으면 미리미리 약속을 그 법회날을 피해서 약속을 하시고 이렇게 하신다면은 법요식에 아주 이 마당이 가뜩차고, 저 일주문 밖에 마당에까지 가뜩차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러면 마지막으로 게송(偈頌) 하나를 읊고 내려가고자 합니다. 이 법요식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기도성취하시고 업장소멸(業障消滅)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해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회상(佛會上)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을 하고 다짐을 합니다.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헌디  법성해중친인득(法性海中親認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하야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이다. 지혜 반야, 반야(般若)의 그 신령스러운 구슬이 그 조화가 무궁무진하다.
법성해중(法性海中)에 친인득(親認得)이다. 법성(法性)의 바다 가운데, 법성은 우리의 몸뚱이와 우주법계가 다 법성해(法性海), 법성의 바다여. 법성해 가운데에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반야의 영주(珠妙)를 우리는 캐야 할 것이다.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이요. 그 반야의 신령스러운 보배 구슬, 용지불갈(用之不竭)이요 취지무궁(取之無窮)이다. 취해도 취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써도 끝이 없는 그 반야의 영주가 우리의 오온색신(五蘊色身) 가운데에 그 보배 구슬이 있다 그 말이여.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여. 안으로 밖으로, 낮이나 밤이나 그 광명이 그 신기하고 묘한 힘이 반짝거리고 있다. 어떻게 반짝거리느냐?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빛나는,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바로 그때가 반야영주의 작용이 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탐심(貪心)을 낼 때도 그 탐심이 어디서부터서 나왔는가? 반야영주로부터서 나오는 한 모습이여. 그러기 때문에 탐심이 나자마자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은 찰나간에 났던 그 탐심도 정말 반야영주의 신령스러운 작용이요, 법신불(法身佛)의 한 법문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이렇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직장이 발 디디고 발을 들고 내리는 그 찰나찰나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순간순간이,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며, 무슨 업장이 소멸하지 못하며, 무슨 웬수가 용서하지 못할 웬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대승법(大乘法)이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31분26초~58분26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무슨 목적으로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기도법회를 열어 오고 있느냐? 이 험난한 세상을 무사히 지내고, 이 말세(未世)에 한 사람이라도 더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불법(佛法)을 믿고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불교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세 가지 보물이 있다 / 어떻게 하면은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법신불(法身佛)을 친견하며, 잠시도 끊이지 않고 설하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까? 자기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法), 바로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깨달라야만 된다. 참선법은 남녀노소,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게송)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 /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께서 설해 주신 법문 / 우리가 정말 목숨 바칠 곳이 어디냐? / 대승 십선대계(大乘 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 법회(法會)에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

‘이뭣고?’는 꼭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 곰을 춤추게 길을 들이는 법 / ‘이뭣고?’도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되게 되어 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데 왜 못할 것이냐? /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우리 도(道) 성취한 것을 방해. 신심(信心)으로 이겨 낼 용기가 있어야.

(게송)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 /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그 일부가 나무에 조각을 해서 해인사(海印寺)에 봉안이 되어 있지마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요 우주법계에 가뜩 차 있어. 나무에 조각해 놓은 것은 그 일부에 지내지 못한다.
낮에면 빛나는 저 태양, 밤에는 빛나는 달, 그 높은 하늘에 무수히 반짝거리고 있는 별들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이요, 봄에는 꽃이 피고 잎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이것들이 다 부처님의 상주설법에 하나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은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그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며, 푸른 풀 잎사귀 하나도 부처님의 몸뚱이가 아닌 것이 없어. 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체(體)여. 그러건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그저 평범한 해요, 달이요,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그 말이여.

부처님은 청정하시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만덕(萬德)을 다 갖추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이시지만 그 부처님도 원래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가 법(法)에 의지해서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니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탐심(貪心)이 많고, 진심(瞋心)이 많고,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법의 배에만 타게 되면 부처님이 운전하시는 그 배에 의해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가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다, 소승(小乘)이다’ 승(乘) 자가 ‘탈 승(乘)’ 자입니다. 탈 것. 수레. 그 수레에만 타면 그 수레의 운전은 부처님이 하시니까 부처님 나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대승법이다 또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하는 것이여.

십선대계(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그 말이여. 그걸 받아서 잘 지킴으로 해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최고로 잘 지키면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같이 거기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다가 미륵불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실 때 같이 이곳에 하강(下降)을 해서 중생교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쯤, 썩 그렇게 잘 닦지 못하고 중간쯤만 지키고 실천을 해도 어디에 태어나되 어느 세계에 태어나되 항상 훌륭한 가문에 좋은 몸뚱이에 왕(王)으로 태어나거나,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중생의 지도자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정법(正法)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성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제일 하급으로 닦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된다 하더라도 축생 중에 왕이 되어 가고, 그러다가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지옥에 왕(王)이다. 혹 귀신의 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귀신의 왕(王)이 되는 거여. 왕이 되어 가지고 있다가 머지않아서 다시 이 불법을 만나게 되어 가지고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해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 이것이 불법(佛法)의 궁극에 목적이고 최고에 정법(正法)이지만, 우리가 설사 법문을 듣고 정법을 믿는다 해도 우리의 수행력이 알차지 못해서 생각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하리라’ 해도 실지 생활 속에서는 많이 일에 끄달리고 파묻혀서 그렇게 철저히 못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달이 7일 동안에 법회(法會)를 열어서 부처님께 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또 법문을 듣고, 마치 차(車)가 가끔 보링(boring)을 한 것처럼 이렇게 최소한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법회에 꼭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이렇게 해서 또 한 달을 지내고 지내고 하다가 시월이 돌아오면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이 법요식(法要式)에 참석을 해서 아주 대법요식을 통해서 일 년 동안에 쌓인 죄를 다 참회(懺悔)하고 새로 태어나서 새로 일 년 동안을 기약을 하고 또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이다. 지혜 반야, 반야(般若)의 그 신령스러운 구슬이 그 조화가 무궁무진하다.
법성해중(法性海中)에 친인득(親認得)이다. 법성(法性)의 바다 가운데, 법성은 우리의 몸뚱이와 우주법계가 다 법성해(法性海), 법성의 바다여. 법성해 가운데에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반야의 영주(珠妙)를 우리는 캐야 할 것이다.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이요. 그 반야의 신령스러운 보배 구슬, 용지불갈(用之不竭)이요 취지무궁(取之無窮)이다. 취해도 취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써도 끝이 없는 그 반야의 영주가 우리의 오온색신(五蘊色身) 가운데에 그 보배 구슬이 있다 그 말이여.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여. 안으로 밖으로, 낮이나 밤이나 그 광명이 그 신기하고 묘한 힘이 반짝거리고 있다. 어떻게 반짝거리느냐?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빛나는,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바로 그때가 반야영주의 작용이 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탐심(貪心)을 낼 때도 그 탐심이 어디서부터서 나왔는가? 반야영주로부터서 나오는 한 모습이여. 그러기 때문에 탐심이 나자마자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은 찰나간에 났던 그 탐심도 정말 반야영주의 신령스러운 작용이요, 법신불(法身佛)의 한 법문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