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26~150)2021. 8. 2. 08:47

 

 

((No.128))—1980년(경신년) 칠석법회 법문(80.08.17) (80분)

 

 

(1/4) 약 21분.

 

 

(2/4) 약 18분.

 

 

(3/4) 약 20분.

 

 

(4/4) 약 21분.

 

 

 


(1/4)----------------

작일지두개란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이리요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어제는 가지 끝에 그렇게 아름답게 꽃이 피어 있더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오늘은 땅 위에 그 꽃송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구나.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니, 그 어제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찬란하게 피어 있던 나뭇가지에 피어 있던 그 꽃이 하룻밤 사이에 떨어져서 땅 위에 깔려 있는 그것을 보고 과연 사람으로 하여금 그 떨어진 꽃이 애석하기도 하고, 그 애석하고 아까운 생각이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운 생각을 내게 한다. 무슨 부끄러운 생각을 내게 하느냐?
세상의 영화(榮華)와 공명(功名), 그러한 것에 대해서 무심(無心)하덜 못한 내 자신이 그 꽃을 보고서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나더라.

그 꽃은 어제까지 그렇게 찬란하게 피어 있다가 하룻밤 사이에 떨어졌건만 꽃 자신은 조금도 아름다울 때라고 해서 뽐내는 법도 없고, 하룻밤 사이에 땅에 시들어 떨어졌다고 해서 무슨 거기에 실망하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을 갖지를 않은데,
사람은 너와 같들 못해서 명예와 권리를 누릴 때에는 이 세상에 오직 자기만이 잘나고 똑똑하고 행복한 것처럼 으시대다가 하룻밤 새에 그러한 영화와 권리와 명예가 자기로부터 떠나게 되면 기운이 없고 살아갈 맛을 잃고 그러한 것에 대해서 무심(無心)하기가 그러한 꽃보다 못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그 꽃 떨어진 것을 보고 스스로 꽃을 부러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느낌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칠월 칠일, 칠석(七夕)날입니다.
전설로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오작교(烏鵲橋), 가마구 떼와 까치 떼가 모여서 다리를 놔 주면 견우와 직녀가 오늘 저녁에 일 년에 한번 상봉하는 날이다. 이러한 전설이 있고 또 절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그 칠석날에 불공(佛供)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모든 소원을 성취한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칠석날에는 돈과 쌀과 과일을 이고 지고 그래 가지고 절로 절로 가서 공양(供養)을 올리는 그러한 풍속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칠성(七星)님, 칠성님이라 하면 북두칠성(北斗七星), 또 삼태육성(三台六星) · 이십팔수(二十八宿),  또 일월, 일광보살(日光菩薩) · 월광보살(月光菩薩), 해와 달, 그리고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 이러한 우주에 있는 이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하나의 성현(聖賢)으로 이렇게 받들어 모셔 가지고 거기다가 신앙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는 그러한 오래된 토속 신앙인 것입니다.
원래 이 신앙이 도교(道敎)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또 도교 이전에 자연을 하나의 신(神)으로 신격화해서 자연의 위력을 신앙하는 그런 원시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불교가 중국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일본에 이렇게 차츰 뻗어오면서 그 나라에 새로 들어갈 때마다 그 고장에 있는 토속 신앙을 다 흡수를 해 가지고 그 불교 안에 포섭을 한 다음 차츰 근기(根機) 따라서 정법(正法)을 설해서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그러한 방편(方便)을 옛날부터서 써 왔던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기 종교 이외의 종교는 다 외도다 또는 사탄이다' 이리 해 가지고 일단 그것을 배격을 하고 그리고 자기의 종교를 갖다가 선양하는 그러한 종교도 있습니다마는, 우리 불교는 신라 · 고구려 · 백제 쭉 내려오면서 일단 그 나라에 새로 종교가 불교가 들어가면 거기에 있었던 그런 토속 신앙을 다 포섭해서 그래 가지고는 포섭해서 다 들어온 다음에는 그대로 그것을 융화해서 완전히 소화를 시켜 가지고 그 사람 그러한 근기 맞춰서 법을 설해서 그래 가지고 마침내는 정법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아주 자비스러운 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그러한 방편을 써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 내에도 칠성각(七星閣)을 모시고 칠성님을 모시고, 지금 어느 사찰에 가나 다 큰 절, 작은 절 할 거 없이 대체적으로 칠성단(七星壇) · 산신단(山神壇) · 독성(獨聖) 등, 이러한 삼성각(三聖閣)이 모셔져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오직 부처님 한 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그리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팔만사천 방편을 하나로 녹여 뭉쳐서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최상승법은 오직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 한 마음을 관하는 이 법으로써 일체법(一切法)을 다 포섭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고기를 잡는 그물을 보면 그 벼리가 있습니다. 벼리는 그물의 그 손잡이입니다. 그것을 벼릿줄이라 그러는데 그 그물에 벼릿줄을 팍! 잡고 끌어 잡아당기든지 추켜들면 수십만의 그물코가 전부 다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벼릿줄만 탁! 추켜들면 그물이 아무리 크고 코가 많은 눈이 많은 그물이라 하더라도 한 번에 가지런히 탁! 들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최상승법은 그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입니다. 벼릿줄 하나만 들면 그 큰 그물이 대번에 가지런하게 탁! 추려지는 것입니다. 벼릿줄과 연결되지 아니한 그물은 없습니다. 모든 그물의 코는 전부가 벼릿줄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하나만을 선양을 하고 여러분들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해 옮기면 팔만사천 방편, 팔만사천 법문이 바로 그 속에 다 포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벼리를 버리고서 낱낱이 그 수십만이나 있는 그 그물의 코를 낱낱이 들려고 하면 그 그물은 흔틀어져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어질 것입니다.
옷을 들 때에도 옷깃을 들면 소매와 옷소매라든지 도련이라든지 모든 옷이 가지런하니 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소매 끝을 잡고 옷을 든다든지 또는 옷에 섶의 끝을 들고 추켜든다든지 하면 그 옷은 꺼꾸러져서 도대체가 옷인지 걸레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어도 이 최상승법을 믿어야 전체의 불법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믿는 그날부터 정말 올바르게 불법을 믿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고 저 팔만사천 방편 가운데에 저 어느 하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마치 그물을 들 때 있어서 저 그물의 어느 구석지 한 코를 추켜든 거와 같아서 아무리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고 이리 뒤집어 놓고 저리 뒤집어 놓고 해도 도대체 이 그물이 어떻게 생긴가를 모르고 뒤적거릴수록 점점 혼란해지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지금 이 칠석날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신 분은 정말 선택된 불자(佛子)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금방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통해서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법문과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을 하는 법에 대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오조 홍인대사는 부처님으로부터 서른두 번째, 32대 조사(祖師)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육조(六祖) 스님의 법사 스님이신 것입니다.

그 5조 스님은 원래 노인 노승(老僧)으로서 4조(四祖) 스님께 인가를 맞으러 갔는데, 그 4조 스님은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해서 날마다 그 자기, 당신의—이 부처님으로부터 서른한 번째, 31대까지 당신에게 이 법(法)이 전해 내려왔는데 당신의 법(法)을 전해 받을 제자를 만나지 못해서 날마다 제자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하룻날 어느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보니 당신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제자가 왔습니다.

법거량(法擧揚)을 해 보니 분명히 깨달았는데, 깨닫기는 깨달았지만 자기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법을 전해 봤자 법을 전하나 마나, 마치 장님 불 끄나 켜나 마찬가지로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서 먼저 죽을 사람한테 법을 전해 봤자 다리 뻗고 잘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니가 분명히 깨닫기는 깨달았지만 법을 전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가서 몸을 바꿔 가지고 오너라"
그래서 "그러면 제가 이 기념으로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 소나무, 조그마한 소나무 한 그루를 팔십 먹은 노승(老僧)이 캐다가 뜰 앞에다 딱 심어 놓고 그리고서 떠나는데 그 4조 스님이 "니가 소나무를 갖다가 심었으니 니 이름을 재송(栽松)이라고 해라. '재배한다' 해서 '재(栽)' 자 하고, '소나무 송(松)' 자, 재송(栽松)이라고 니 이름을 내가 지어주마"

그렇게 해서 그 재송은 거기서 하직을 하고 내려가다가 시내를 따라서 죽 내려가다 보니 시냇가에 어떤 이쁘게 생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승이 걸망을 처녀 옆에다가 부려 놓고 그 처녀한테 "내가 부탁할 말이 있소"

"무슨 말씀이요?"
"처녀 댁에서 하룻밤만 쉬어 갑시다"

이 5조 재송(栽松) 법문에 대해서는 이 가운데는 여러 번 듣고 잘 아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 오신 분도 계시고 또 금방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은 후반부만 말씀을 하셔서 조금 보충을 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재송 스님께서, 오조 홍인대사가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하는 참 불법의 최고의 법문을 설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오늘 전강 조실 스님께서 최상승법인 참선법,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설하시기 전에 간략히 재송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처녀가 "어른이 계시니 우리집에 가서 어른한테 허락을 맡으십시오"
그러니까 아니라고 "어른은 어른이고 처녀가 한마디만 허락을 하면 내가 가서 어른한테 말을 할 테니까 처녀는 처녀대로 한마디만 허락을 해달라"고. "하룻밤만 쉬어 가자"고.

"그러면 쉬어 가시라"고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참 고맙다"고 하고는 그 옆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고 앉았는데, 그 처녀는 '조금 쉬었다가 가실려나 보다' 이리 생각하고 한참 동안 빨래를 하고는 아! 이리 돌아다보니까 아 그 스님이 앉은 채 아조 열반(涅槃)에 드셨다 그 말이여. 앉은 채 딱! 숨을 거두어 버렸어.

아 그 흔들고 "스님, 스님" 하고 아무리 흔들어 봤자 까닥도 안 한다. 아 그래서 겁이 잔뜩 나고 그래서 주섬주섬 해 가지고 집으로 쫓아가서 부모님께 "아, 그 어떤 노스님이 우리집에서 하룻밤만 쉬어 가자고 하도 간청을 하셔서 그러라고 그랬더니 앉은 채 그냥 돌아가셔 버렸다"고. 그래서 어른들 모다 오셔서 장례를 치러 드렸는데 그 뒤로 그 처녀 배가 날을 거듭하면서 차츰차츰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처음~21분12초)





(2/4)----------------

그래서 그 집에서는 자기 딸을 갖다가 의심을 하고 '누구의 자식이냐?'고 아무리 힐책을 했지만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해봤자 아무도 곧이듣지를 않고, 결국은 '불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이래 가지고 그 처녀는 집안을 위해서,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감쪽같이 죽여 없앨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집안에 그러한 일이 나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참 깊은 소(沼)에다가 갖다가 넣어 버리기도 하고 또는 푸대로 싸서 수백 리 밖에 갖다가 버리기도 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요새는 그런 일들이 보통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으레히 결혼 전에 모다 그 먼저 그럴 수도 있고 모다 그래 오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러한 법이 대단히 엄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서 괴에다 넣어 가지고 참 깊은 소(沼)에다 갖다 넣어 버리기로 했는데, 다행히 그 모친 배려로 해서 많은 금품을 주어 가지고 하인들에게 부탁을 해서 소(沼)에다 넣지 말고 저 수백 리 밖에다 갖다가 버리고 다시는 고향 근처에 어리대지 말도록 이렇게 해 가지고 그 처녀는 수백 리 밖에 가서 풀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지로 돌아다니면서 얻어먹다가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달이 차서 남의 집 담 밑에서 해산(解産)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산을 해 가지고 그걸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까 그 애기를 갖다가 그 폭포수 밑에 강가에다 갖다가 가만히 넣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밤새 참 울고 울어 지새우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너무너무 불쌍하고 궁금하고 해서 다시 그 물 소 있는 데를 가보니까 물오리들이 수십 마리가 모여 가지고 그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를 등으로 모다 받치고 입으로 모다 어루만지면서 그 물위에 동동동동 이렇게 떠다니면서 오리들이 참 신비하게도 그렇게 애기를 갖다가 떠받치면서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애기는 물오리들의 날개와 등으로 떠받쳐진 채 거기서 죽지 아니하고 보송보송한 채 떠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쫓아가서 애기를 들어내 가지고 그 애기를 안고 다니면서 애기를 키웠던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참 거지의 신세지만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친절로 해서 그 애기를 키웠습니다마는 집도 절도 없는 그러한 신세로써 그 애기를 하나를 믿고 한 살, 두 살, 세 살 이렇게 키우는데 너무너무 애기가 잘 생기고 영리하고 귀엽고 똑똑해서 참 그러한 자기의 외로운 신세지만 그 애기 하나 길르는데 보람을 느끼면서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고 그 애기를 길르다가 애기가 십여 세가 되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믿고 오늘날까지 살았는데 니가 나를 두고 가다니 될 말이냐?" 아무리 울며 붙잡았지만 그 애기는 뿌리치고 바로 4조(四祖) 도신대사(道信大師)가 계신 곳으로 쫓아갔던 것입니다. 가자마자 "그 팔십 년 늙은 노인이 결국은 이렇게 몸을 바꿔서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도신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서 부처님으로부터 32대 조사(祖師)의 전법을 받게 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그 오조 홍인대사를 그 어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서 그 아들(오조)이 계신 황매산을 찾아갔다 이것입니다. 찾아갔는데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정(情)으로는 외로우신 어머니가 찾아왔으니 당연히 반갑게 맞이할 것 같은데, 그 어머니를 갖다가 저 뒷방에다가 갖다가 가두어서 굶어서 돌아가시게 했다. 그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되겠습니다마는, 인정(人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다, 인정머리가 없다—그 인정이 참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정은 바로 성현의 자비(慈悲)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정이 있는 사람을 그렇게 훌륭한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닙니다.

성현의 자비에는 따뜻한 인정도 있지만 동시에 참 서릿발보다도 더 차웁고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울 수도 있는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의 인정이라 하는 것은 정에 빠지면 이성(理性)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정(情)으로 남을 보살피고 정(情)으로 남을 사랑하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게 하는 그러한 역효과를 가져오는 수가 너무나 많고 그 정(情) 때문에 결국은 가슴이 쓰리고 아픈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 홍인대사(弘忍大師), 이 재송 도인, 이 홍인대사인들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없으리오마는 또 어머니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잘 받들어 모시려는 인간으로서의 정이야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참으로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의 영원한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 드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 밑에 모여 있는 칠백 명의 제자들로 하여금 수행자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도(道)를 닦아야 한다고 하는 표본을 보이시기 위한 뜻도 거기에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 그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또는 형제간 친구 일가 간 모두가 다 정과 정에 얽히고설켜서 서로 좋아하고, 그것이 한 생각 변하면 미워하고 그것이 더 나아가면 웬수가 되고 전부가 다 그 원인은 정으로부터 그러한 웬수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그러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어리석음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정(情)이 사람의 전부인 줄 알고 정에 떨어져서 정에 얽히고 그래 가지고 부부가 한 생각에 웬수가 되고, 형제가 웬수가 되고, 부모 자식 간에 웬수가 되고, 친구가 웬수가 되어서 어제에 가장 친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웬수가 되어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서로 해코자하고 서로 죽이고 그러다가 또 한 생각이 풀어지면은 또 가까워졌다 풀어졌다 가까워졌다 얽혔다 설켰다 이리해서 무량겁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윤회(輪廻)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갖다가 방에다 가둬서 굶어 돌아가시게 하는 것을 보고 칠백 명이 넘는 그 제자들은 '세상에 도인(道人)이 저럴 수가 있느냐? 저런 것이 어찌 도인이라 할 수가 있겠나? 우리는 이런 참 무도한 사람을 스승으로 알고 이 밑에서 우리가 있을 수는 없다' 그리해 가지고 모다 걸망을 싸가지고 전부 거기를 떠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여러분들은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이 오조 홍인대사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아들을 잘 두어서 그 덕택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좋은 아들을 두지 않았던들 나는 인간으로서 정(情)에 떨어져서 아들을, 도인인 아들을 도인으로 보지를 못하고 내 배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그 사실로 해서 '내 아들, 내 아들' 그러한 정(情)으로 아들을 보다가 일생을 외로움과 서글픔 속에서 인생을 살면서 아들에게, 중생교화를 하는 아들의 신경을 쓰게 만들어 주고 나아가서는 사찰에 피해를 끼치다가 내생에는 다시 어느 곳에 떨어졌을는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아들의 그러한 용감한 적극적으로 이 에미를 생각하는 그 뜨거운 자비, 뜨거운 자비로 해서 나는 모든 업(業)을 뿌리치고 선도(善道)에 태어나게 되었으니 여러분들은 이 도량을 떠나지 말고 여기서 철저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대도를 깨달으십시오" 이러한 우렁찬 목소리가 공중에서 울려 나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칠백 명은 일제히 감격해 가지고 다시 걸망을 내려놓고 그전보다도 훨씬 더 철저한 신심으로 도를 닦고 홍인대사를 정말 위대한 스승으로 신봉(信奉)을 했던 것입니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커나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색상(色相)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고 있음이라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금강경』에 있는 사구게(四句偈)입니다.
'내 모습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래서 참 성현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다' 하고 나를 보거나, 나의 음성은 원음(圓音)이라—한 말로 말하되 16군생(十六群生)이, 일체중생이 각기 자기 근기(根機) 따라서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벌레는 벌레대로, 성인은 성인대로 각기 열 가지의 모다 자기의 입장에 따라서 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래서 나의 목소리는 '뚜렷한 소리'다 해서 원음(圓音)이라 그러는데, '나는 원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음으로 설법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참 부처님이다' 이렇게 나를 찾은 사람, 이 사람은 바로 삿된 도를 행하고 있는 사람, 소견이 삿된 사람이라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여래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부처님을 찾을 때, 선지식을 찾을 때, 정법을 찾은 때 있어서 이 금강경에 사구게를 깊이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겉모양을 보고 음성을 듣고 그래 가지고 그 색상에 떨어져서 스승을 구하고 정법을 구하고 부처님을 구할 때에는 벌써 그 생각 자체가 그릇된 생각이여. 그릇된 소견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정법, 참나, 참 부처님은 만나지지 못할 것입니다.(21분13초~39분9초)





(3/4)----------------

오늘 칠석날, 여러분은 각기 크고 작은 소원들을 가슴에 품고 오셨을 줄 생각합니다. 다른 절에서는 오늘 칠석날 새벽부터 불공을 하고—독불공(獨佛供)을 하고, 동참 불공(同參佛供)을 하고 계속 하루 종일 목탁을 치면서 불공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또 축원을 하고 모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 절에도 많이 가보셨을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필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그 쏟아지는 빗속에 이 주안 용화사를 여러분들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빨리 불공을 했으면, 빨리 우리 아들 축원을 해 주었으면' 혹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용화사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을 하는 도량입니다.
여러분들이 오시자마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한 시간에 걸쳐서 들었습니다. 법문 내용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상승법, '어떻게 하면 참선을 바르게 하며 바로 깨닫을 수가 있느냐?' 이러한 아주 고준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 절에서는 불공과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하필 오늘 칠석날 이러한 참선 법문을 해 드리느냐? 이것이야말로 정말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낱낱이 축원을 안 해도 여러분이 접수만 해 놓으셔도 부처님께서는 환히 다 알고 계십니다. 낱낱이 이름을 불러야 알고, 부르지 아니하면 모른다면 그러한 부처님께 뭐 갖다가 올릴 것이 또 뭣이 있습니까? 벌써 여러분이 한 생각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오셨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또 이 법문(法門)이 끝난 다음에 또 간략하지만 정성스럽게 예경(禮敬)을 올리고 또 축원(祝願)을 해 드립니다. 축원은 낱낱이 여러분의 식구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만 '칠석법회 동참발원재자(同參發願齋者)' 이러면 여러분은 다 그 안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 이름을 1학년부터서 다 부르지 안 해도 '서울대학교 학생 일동' 그러면 그 학교에 학적이 있는 학생은 다 그 속에 다 포함이 된 것입니다. 낱낱이 이름을 부르다가 빠지면 그것은 큰 손해를 보겠지만 '서울대학교 학생 일동' 그러면 자기 이름을 특별히 불러 주지 안 해도 자기도 그 속에 여지없이 틀림없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동참발원재자(同參發願齋者) 각각등보체(各各等保體)' 하나도 빠짐없이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고 여러분들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합니다. 왜 소원을 성취하느냐?
불교의 최고의 법인 최상승 법문을 들었거든. 그리고 그 최상승 법문을 듣고 거기서 신심을 내고 그것을 실천을 할려고 결심을 다지시고 또 현재 실천을 하고 계시고 그러니 여러분들이 만약에 학생이라면 가장 최고의 점수를 가진 우등생과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무엇이 걱정이 되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 최고의 근본법이요, 최고로 높은 이 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을 하기 때문에 복을 빌고 소원을 빌고 한 것은 자연히 그 가운데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이라든지 재앙이라든지 이것이 하느님이 맥없이 우리한테 복을 주고 까닭 없이 우리한테 벌을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또는 재앙을 받을 수 있는 그 원인이 전부 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을 받을 만한 원인을 지었으면 내게 복이 돌아오는 것이고, 내가 재앙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원인을 지었으면 내게 재앙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공연히 나를 미워서 나에게 벌을 주고, 신장님이 아무 까닭도 없이 내가 미워서 나에게 급살(急煞)을 내리고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작자수(自作自受)인 것입니다.

무엇으로 짓느냐?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마음으로 짓습니다. 이것이 신(身) · 구(口) · 의(意), 삼업(三業)입니다. 삼업(三業)인데 근본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이 입을 통해서 표현이 되고 몸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업(業)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 근원을 잘 다스리면.... (녹음 끊김).... 파 뒤집으면 또는 독한 약을 뿌리에다가 치면 그 많은 가지와 잎은 저절로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큰 아름드리나무도 뿌리에다가 적당한 비료와 적당한 수분을 공급을 하면 그 수십만 수백만 개의 가지와 이파리는 저절로 싱싱하게 자랄 것입니다. 그 나무를 죽일 수 있는 것도 뿌리에 달려 있고, 그 나무를 살리는 데에도 뿌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악(善惡), 일체 재앙과 일체 복록이 그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복돋우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게도 할 수가 있고, 재앙이 돌아오게 할 수도 있고 재앙이 돌아오지 않게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부처님은 어떠한 불교를 믿는 불자(佛子)가 와서 공을 들이고 기도를 하고 주력을 하고 염불을 하고 할 때 부처님은 환히 다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절에 와서 하건, 자기집에서 하건, 직장에 가서 하건, 어디 기차간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하건, 어디서 · 언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부처님은, 우주의 가득차 계신 부처님께서는 환히 다 보고 계시고 불법를 옹호하는 제석천왕도 환히 다 보고 계시고, 복을 받을 사람, 복을 받지 못할 사람, 있는 복도 떠날 수밖에는 없을 사람, 지금은 가난하지마는 하는 싹수가 머지않아서 부자가 될 사람, 환히 다 보고 계시거든.

어떤 분은 절에 왔을 때만 목욕재계하고 아주 마음도 경건한 마음으로 오지만, 일단 집에 가면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마구 함부로 해서 아들과 손자, 며느리로부터 '불법(佛法)을 믿는 분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러한 공격을 받는 분이 적잖이 계시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만이 마음을 닦는 곳이 아니라 참으로 가정에서 살아 있는 수도원, 살아 있는 적극적인 참선방이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회인 것입니다.

자기가 불교 신자라고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아니한 타관에서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건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불제자는 항시 부처님이 자기 안에 계신 줄 믿고 항시 자기 머리 위에서 자기를 보고 계신 줄 믿고 한 생각, 한마디 말,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이르도록 언제 어디서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행동하고, 거룩한 어진 마음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상대하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복을 받을 사람이요, 부처님으로부터 우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항시 마정수기(摩頂受記), 마정수기는 우리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면서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 약속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나 손자가 착하고 귀여울 때에는 이마를 만져주면서 칭찬해주듯이, 우리는 언제나 우주에 꽉 차 있는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으면 일체 업장(業障)이 다 소멸이 되고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는 짓은 죄 받을 짓만 하면서 어쩌다 한 번씩 불공만 들이면 소원을 성취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조금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압니다.

불공(佛供)은 꼭 이 법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꽉 차 있는 부처님, 동서남북이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 그 부처님 그 법신불(法身佛)께 공양을 올리는 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를 한 번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인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절에 못 간다' '법회에 나오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가진 것이 없어서 못 간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분을 가끔 뵙니다마는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그러한 말이 입에서 나와서는 아니됩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또는 불사(佛事)에 바치는 시주금 이러한 것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많고 적고건 간에 정성이 다 꽉 차 있으면 그것으로써 족한 것입니다. 백 원이면 백 원, 만 원이면 만 원, 십만 원이면 십만 원, 백만 원이면 백만 원, 자기 형편껏 성의껏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돈 백 원도 없으면 경건한 마음으로 청수(淸水) 한 그릇을 올려도 족한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생각 경건한 마음으로 '이뭣고?' 화두 한 번 들면 되는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못낸 것을 부처님은 미워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시지를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그 사람에 정성스러운 마음, 경건한 마음, 청정한 마음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두선(口頭禪),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구두선이라 그런 말씀을 하셨고 '구두선은 사구선(死句禪)이다'

구두선이라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입으로 따져서 하는 것이다 이 말이여. 입으로 '그것은 이러쿵저러쿵, 체(體)다 용(用)이다, 법신이다, 여래다, 뭣이다' 해 가지고는 참선을 입으로 이래이래이래 따져 가지고 답을 알아맞히고, 또 제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기를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 있어서 힌트를 주는 것처럼 살살 가리켜서 힌트를 주어 가지고,
'아! 이것이 아닙니까?'
'오! 옳다 옳다. 아! 그것 참 어지간하다'

또 다른 공안을 내줘 가지고 '이걸 오늘 해 전에 이것을 알아 오너라'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따지고 그냥 골치가 아플 정도로 하루 종일 따져 가지고는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 가지고 쫓아가서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닙니까?'
'아니다. 그 조금 틀렸다'

다시 또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는 '이것이 아닙니까?'
'아! 인제 되았다'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가리키고,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배우는 것을 이것을 갖다가 구두선(口頭禪)이라, 이것을 의리(義理), 의리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그러고.

이렇게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은 아무리 그럴싸하게 따져서 모든 공안을 다 풀이를 했다 하더라도 마침내 중생의 분별심(分別心)을 여의지를 못하고, 따질수록에 중생의 분별심만 더욱 치성하게 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점점 생사(生死)의 불에 섶을 더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더욱 생사의 번뇌에 분별의 불은 치성하게 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참선은 생사윤회의 주검으로 떨어지는 참선이여. 그래서 이것을 '죽은 참선' 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 것이거든.

그러면 '어떠한 것이 활구선(活句禪)이요, 바른 참선이냐?' 하면 '분별심, 이론으로 따지는 버릇을 쓰지를 말아라. 이건 유(有)다, 무(無)다, 비유(非有)다, 비무(非無)다, 이것은 허공이다, 허공 같으되 허공도 아니다, 이러한 이론을 쓰지를 말아라 이 말이여'

'화두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여. 이론으로 따지지도 말고 이론으로 풀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그렇다면은 왜 화두를 드느냐? 아마 이것은 모든 번뇌와 망상을 싹 쓸어버리기 위해서 이 화두는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화두는 바로 쇠로 맨든 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일체 번뇌 망상을 다 쓸어버리는 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론으로 사용하지 말고 다맛 이뭣고? 만 하라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화두를 들면 번뇌와 망상이 해결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든다고 하는 생각은 갖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치 장님들이 모여 가지고 코끼리를 갖다가 생전 처음 코끼리를 만나서 '대관절 코끼리란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우리가'
그래서 각기 코끼리를 모다 달려들어서 만지는데, 코를 갖다가 이리저리 더듬어 본 장님은 '코끼리 코끼리 하더니 구렁이 같이 생긴 거로구나' 또 한 장님은 배를 갖다가 만져 보고 '아! 코끼리라는 게 벼람박 같이 생긴 것이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라는 게 기둥 같이 생긴 것이다' 각기 자기가 만져본 대로 얘기를 하고 자기가 코끼리의 전체를 파악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39분10초~59분21초)





(4/4)----------------

참선을 해 나가는 데, 화두를 자꾸 드는 데 있어서 모든 망상이 처음에는 더 치성하게 일어나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화두를 들고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날 겨를이 없게 되고, 일어나도 금방 화두를 들므로써 간 곳이 없어지니까 쇠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두를 갖다가 쇠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코끼리는 구렁이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장님과 같은 견해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또 '계려궐(繫驢橛), 나귀를 매는 말뚝이다' 나귀를 매놓지 않고 놔두면 그 나귀란 놈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왔다갔다해서 밭도 밟고 곡식도 밟고 막 함부로 할 텐데, 그 나귀의 고삐를 갖다가 말뚝에다 콱 매놓으니까 그 나귀가 먼 곳을 가지 못하고 그 말뚝 주변에만 뱅뱅 돌게 되니까,
화두만 자꾸 들므로 해서—화두를 안 들면 이 생각, 저 생각, 번뇌 망상, 희로애락 모다 그러한 생각으로 우주법계가 좁다하고 이리저리 돌아칠 텐데, '화두를 착 들므로써 잠깐 뭔 생각이 났다가도 금방 이뭣고? 이뭣고? 하니까 마치 나귀를 말뚝에다 매놓은 거와 같다. 화두란 게 바로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견해도 화두에는 혹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두가 바로 그런 것이다'고 하는 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 보고 기둥과 같다고 하는 견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러쿵저러쿵하는 분별심을 하지 말고, 다못 화두만을 들되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그 말은 '슬퍼한 놈이 무엇인고?', 기쁠 때는 '기뻐한 놈이 무엇인고?' 배가 아플 때는 '배가 아픈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배가 아플 때도 나는 '이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지, 배가 아플 때는 '배 아픈 놈이 무엇인고?' 똥 눌 때는 '똥 누는 놈이 무엇인고?' 세수할 때는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낱낱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수할 때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지금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라 이 말씀이에요.
낱낱이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저거 차 소리가 나면 '차 소리 나는 놈을 듣는 놈이 무엇인고?' 손님이 오면 '손님이 온 맞이한 이놈이 무엇인고?' 밤낮 그때그때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때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들어나가라 그런 말씀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처음에는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면 곧잘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해 가면 차츰차츰 계속해서 쭉 잘되어 가면 참 이거 뭐 어려울 것이 없고 참 좋겠는데, 얼마 동안 해 가다 보면 마치 나귀나 소를 갖다가 우물로 끌고 들어갈려고 한 것처럼 아무리 끌어 잡아당겨도 끌어 잡아당길수록 뒤로 버티고 뒤로 물러설라고 그러고, 뒤에서 억지로 몰아넣어서 우물로 밀어넣을려고 해도 그럴수록에 이놈이 더욱 뒤로 버텨서 안 들어갈려고.

화두를 들고 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좀 할려고 하면 그럴수록에 더 가슴이 먹먹하고 영 머리가 띵하고 망상이 더 퍼일어나고, 몸이 괴롭고 시간이 지루하고 이래서 때로는 냉랭하고, 때로는 열열하고, 때로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때로는 번뇌와 망상이 겨우 좀 가라앉을 만하면 자꾸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이렇게 해서 영 공부가 진취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래 가지고 내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공부를 옳게 하는 것인가? 공부를 잘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번민을 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공부를 꼭 잘 못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옳게 해 나가도 때에 따라서 그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간 좀 포행(布行)을 해서 정신을 깨끗이 한 다음 다시 또 자리에 떠억 앉아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가량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화두를 들면 한결 가슴이 시원하고 후련하면서 또 얼마 동안 공부가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가고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민(煩悶),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잘 안되어 갈 때,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그러한 중요한 고비가, 거기가 바로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지혜롭게 잘 넘기면 바로 공부가 한결 수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고비를, 좋은 중대한 고비인 줄을 모르고 거기서 번뇌심을 내 가지고 '에이! 이거 공부는 못할 것이다. 이거 차라리 아미타불이나 부르다가 죽어서 극락이나 가지, 근기가 약해서 참선은 도저히 안 된다고 하더니 정말 이거 안 될려나 보다' 이렇게 해서 포기를 하면 그 높은 태산준령을 걸어서 걸어서 올라가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개를 넘을 텐데 거기서 포기를 하고 내려와 버린 거와 마찬가지여.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칠석 법회 이렇게 아침부터 비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모다 참석을 해 주셨습니다. 그 정성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것입니다. 성취할 것을 나는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반드시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름 뒤에는 양력으로 8월 25일이고, 음력으로는 7월 보름날, 백중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해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라 하면 돌아가신 부모 또는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우리 족보에 올라 있는 그러한 조상만이 아니라 일가친척뿐만 아니고 어떠한 사람, 이 우주 간에 가뜩차 있는 모든 사람, 모든 동물, 모든 이 허공계에 가뜩차 있는 주인이 있는 그리고 주인이 없는 모든 영혼들, 심지어는 지옥에서 고(苦)를 받고 있는 수많은 중생들까지라도 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윤회를 하면서 올 때에 수수 천백만 번을 새 몸을 받았다가 또 한평생 살다가 또 죽고, 죽었다가 또 다시 새 몸을 받고 할 때에 사람도 되었다, 짐승도 되었다가—소도 되었다, 말도 되었다, 뱀도 되었다, 모기도 되었다, 지렁이도 되었다가, 지옥에도 갔다, 천당에도 갔다, 이러는 동안에 나의 부모 아니었었던 사람은 중생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땐가 한 번은 그 몸을 의지해서 내가 몸을 받아났기 때문에 전부가 다 우리의 선망부모다 이것입니다.

특히 좋은 곳에 계시는 선망부모는 좋지만, 그런 아귀도나 축생도나 지옥도, 이러한 삼악도(三惡途)에서 고(苦)를 받고 계시는 우리의 선망부모, 백중날에 한해서는 그 지옥의 문이 열려서 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가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이나 한국, 일본, 불교를 믿는 나라들에서는 이 백중날에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경건한 법요식을 거행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가 지옥에 빠져서 고생하고 계시는 어머니, 청제 부인을 그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해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감동을 하셔가지고 그 지옥에 고를 받고 계시는 어머니를 구제해 드리는 그것이 최초의 원인이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옥에서는 그날을 기해서 지옥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준례에 따라서 그날 우리의 선망부모를 경건한 마음으로 백 가지 과일과 곡식으로써 선망부모의 천도를 위해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네께 공양을 올리고 선망부모의 천도재(薦度齋)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날 지옥문, 삼악도의 문이 열려서 이 법문을 듣고 천도를 받기 위해서 자기와 인연이 깊은 절을 우리의 선망부모들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보니 아무리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자기의 아들, 자기의 며느리, 자기 딸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면 그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귀신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의 구별이—'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참으로 죽은 뒤에도 내생(來生)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굉장히 의심을 품고 질문을 하시는 분을 만납니다마는, '우리가 한평생 살다가 죽은 뒤에 우리의 상태가 어떠냐?' 한 것은 눈 뜨고 있다가 잠이 깊이 들어서 꿈을 꾸는 거와 같고 또 꿈꾸다가 잠을 깨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이 몸뚱이가 고장이 나면 그 몸뚱이를 버려 버리고 다시 또 새 몸을 받게 되는데 새 몸을 받을 때까지 그 중간의 시간을 갖다가 '귀신(鬼神)의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나 또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들이 이승을 하직을 하고 그분의 업(業)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데 49재만에 새 몸을 받기도 하고, 백 일만에 받기도 하고, 소상이나 대상을 지내고 받기도 하고, 또는 10년, 20년 동안 중음신(中陰身)으로, 이 귀신의 세계에서 영혼의 상태로 있다가 그때사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백 년 동안도 영혼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그때사 새로운 몸을 받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간 분들이 지금 새로운 몸을 받았는지 아직은 받지 아니하고 이 귀신의 세계에서 떠돌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로서는 참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비명(非命)에 가신 분들을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서 여기서 이 최상승법을 법회 때마다 들을 수 있도록 해 드리고, 그리고 법회 때마다 명절 때마다 천도를 해 드리고, 매년 음력 3월 16일에는 합동으로 대천도재(大薦度齋, 법보재法寶齋)를 봉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명(非命)에 돌아가시지 않는 그러한 조상들도 여기에 모시면 더욱 좋고, 특히 비명에 가신 그러한 영가들은 여기다가 모셔 놓으면 집안의 모든 재앙도 쉬어지고, 그러한 비명에 간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원한에 사무쳐서 자기와 가장 인연이 깊은 아들과 딸, 며느리 그러한 주변을 맴돌면서 '나를 좋은 곳으로 천도를 해 달라'고 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호소를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과 영혼과는 원칙적으로 언어가 통하지를 안 해서 가끔 꿈을 통해서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개를 통해서 뜻을 전하기도 하고 그럽니다마는.

그런 영혼은 그 해롭게 하기 위해서 그 집안에 떠나지 아니하고 맴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자기를 좋은 곳으로 천도해 달라'고 가서 한 번 해서 안 들으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 들으면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이렇게 하다 보면 자꾸 그 영혼이 자기 몸 주변에 와서 가까이하고 자기 집안에 이렇게 가까이하고 하면 그것이 인간과 영혼의 세계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도 아무 병도 없고, 신경성이라고 하는 진단을 받지만 사실은 그러한 원한에 사무친, 나와 인연이 있는 영혼 탓으로 해서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는 가정적으로 괴로움을 받게 되는 예가 참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런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서 좋은 법문을 듣고 원한을 다 풀고 여기에서 편안하게 계시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도록 이렇게 하기 위해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여기에 만년위패 법보단을 창설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 이렇게 여기에 참석을 하셔서 그 영혼의 탓으로 해서 최상승법을 만나고, 또 여러분과 같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을 인연해서 그 많은 원한에 사무친 영혼들이 원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가시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온전히 부처님의 은혜요, 전강 조실 스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백중날 우리의 선망부모를 위하고, 우리의 가정을 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크게는 전 인류를 위해서 다 같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백중 천도재에 참석을 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 여기에 위패를 모시지 아니한 분도 오셔서 임시위패를 모실 수도 있고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동참을 하셔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은 여름 경신년 삼하안거(三夏安居), 여름결제가 해제(解制)되는 날이면서 백일기도 회향일까지 겸한 날인 것입니다. 서로서로 권고해서 많이 참석을 해 주셔서 소원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59분21초~1시간20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작일지두개란만~ /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하나의 성현(聖賢)으로 받들어 모시는 토속 신앙을 포섭해서 정법으로 인도하는 자비스러운 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방편을 써왔다 / 용화사에서는 오직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다 / 이 최상승법은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 /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재송(栽松) 도인이 몸을 바꿔 온 법문.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니다 /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 / (게송)약이색견아~.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오늘 칠석날 참선 법문을 해 드린 것은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 자작자수(自作自受) / 모든 업(業)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 절만이 마음을 닦는 곳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 있는 적극적인 참선방이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회이다 / 마정수기(摩頂受記) /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경건한 마음으로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 /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 참선하는 것을 구두선(口頭禪)이라 그러고. 이것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한다. 구두선은 '죽은 참선'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다. 깨달음은 없고 생사윤회로 떨어지는 참선.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중요한 고비.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이다 /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해 드리는 날, 음력으로는 7월 보름날, 백중날 소개 안내 / 이 우주에 가뜩차 있는 모든 중생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이다 / 영혼, 영가의 하소연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만년위패 법보단을 창설하신 의의.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서 좋은 법문을 듣고 원한을 다 풀고 여기에서 편안하게 계시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도록 하기 위함.


우리 용화사에서는 오직 부처님 한 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그리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팔만사천 방편을 하나로 녹여 뭉쳐서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최상승법은 오직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 한 마음을 관하는 이 법으로써 일체법(一切法)을 다 포섭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최상승법은 그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입니다. 벼릿줄 하나만 들면 그 큰 그물이 대번에 가지런하게 탁! 추려지는 것입니다. 벼릿줄과 연결되지 아니한 그물은 없습니다. 모든 그물의 코는 전부가 벼릿줄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하나만을 선양을 하고 여러분들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해 옮기면 팔만사천 방편, 팔만사천 법문이 바로 그 속에 다 포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벼리를 버리고서 낱낱이 그 수십만이나 있는 그 그물의 코를 낱낱이 들려고 하면 그 그물은 흔틀어져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어질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어도 이 최상승법을 믿어야 전체의 불법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믿는 그날부터 정말 올바르게 불법을 믿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고 저 팔만사천 방편 가운데에 저 어느 하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마치 그물을 들 때 있어서 저 그물의 어느 구석지 한 코를 추켜든 거와 같아서 아무리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고 이리 뒤집어 놓고 저리 뒤집어 놓고 해도 도대체 이 그물이 어떻게 생긴가를 모르고 뒤적거릴수록 점점 혼란해지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지금 이 칠석날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신 분은 정말 선택된 불자(佛子)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재송(栽松) 도인이 4조(四祖) 도신대사(道信大師)의 지시로 몸을 바꿔 온 법문.

엄격하게 따지면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닙니다. 성현의 자비에는 따뜻한 인정도 있지만 동시에 참 서릿발보다도 더 차웁고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울 수도 있는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의 인정이라 하는 것은 정에 빠지면 이성(理性)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정(情)으로 남을 보살피고 정(情)으로 남을 사랑하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게 하는 그러한 역효과를 가져오는 수가 너무나 많고 그 정(情) 때문에 결국은 가슴이 쓰리고 아픈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 그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또는 형제간 친구 일가 간 모두가 다 정과 정에 얽히고설켜서 서로 좋아하고, 그것이 한 생각 변하면 미워하고 그것이 더 나아가면 웬수가 되고 전부가 다 그 원인은 정으로부터 그러한 웬수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그러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어리석음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악(善惡), 일체 재앙과 일체 복록이 그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복돋우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게도 할 수가 있고, 재앙이 돌아오게 할 수도 있고 재앙이 돌아오지 않게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불공(佛供)은 꼭 이 법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꽉 차 있는 부처님, 동서남북이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 그 부처님 그 법신불(法身佛)께 공양을 올리는 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를 한 번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인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