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600/(501~525)2023. 4. 25. 13:45

 

 

(No.518)—1993년 11월 첫째일요법회 (73분)

 

(1) 약 43분.

 

(2) 약 30분.


(1)------------------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헌디  난봉상엽축풍비(亂峰霜葉逐風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계산갱호사양리(溪山更好斜陽裏)에  지대황혼월상귀(只待黃昏月上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헌데, 떨어진 해 가을빛이 산기슭에 가득찬데,
난봉상엽축풍비(亂峰霜葉逐風飛)로구나. 어지러운 봉아리에는 서리 맞은 이파리가 바람을 쫓아 나는구나.

계산갱호사양리(溪山更好斜陽裏)에, 시내 산에는 다시 기울은 해 속에, 석양(夕陽) 속에, 좋은 석양 속에,
지대황혼월상귀(只待黃昏月上歸)다. 다못 황혼(黃昏)에 달이 떠오른 것을 기다리드라.

요새 한참 삼천리 방방곡곡 산봉우리와 시내, 단풍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서 한참 찬란하게 가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가을에 그 울긋불긋한 단풍이 오전보다도 오후에 그 따가운 햇빛 속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찬란한 그 단풍으로 물들이고 장엄된 곳에 해가 지면 이윽고 밝은 달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람은 어피차 한번 태어나면 마침내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태어나 가지고 어려서 자라고, 소년기(少年期) · 청년기(靑年期)를 거쳐서 다 배울 것 배우고 익힐 것 익혀서 청년 · 장년기(壯年期)에 나아가서 자기에 역량과 기술을 십분 발휘하고 사십 · 오십 · 육십, 노년(老年)을 향하면서 마지막 자기 인생에 끝마무리를 멋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아무리 잘했어도 늙어가면서 끝을 야무지게 마무리짓지를 못하고 잘못하면, 젊어서 잘한 보람도 없고 일생 동안 애쓴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 ‘다 먹은 밥에 코 빠진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모든 제자들이 이마를 땅에다가 짓찧면서 완전히 실신 상태에 이르도록 너무너무 슬퍼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도 부처님의 사촌으로 부처님 성도(成道)하신 날 아란존자가 태어났고, 그래 가지고 마침내 출가해서 부처님의 시봉(侍奉)을 하게 됐는데 시봉한 사람으로서 더욱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했던 것입니다.

그때 한 노스님이 “그렇게 슬퍼만 할 게 아니라 시자로서 부처님 마지막 열반하시기 전에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여쭈어야 할 일이 있느니라” “무슨 말씀을 여쭐까요?”

“첫째는 모든 경전, 나중에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마당에 ‘모든 경전 앞에다가는 어떻게 시작을 할까요?’ 그것을 여쭙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 태자(太子)로 계실 때 부처님의 마부(馬夫)를 했고, 출가하실 때도 부처님의 말꼬삐를 잡고 모신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라고 하는 사람이 부처님이 출가하시니까 자기도 따라서 출가를 했는데, 평생 동안 자기가 부처님의 마부였다고 하는 것을 배경으로 그것을 코에다 걸고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마구잽이 행패를 부리고 오직 부처님 말씀만 쫌 듣고 일체 다른 사람 말은 듣지를 않고 제멋대로 구는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를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어떻게 대처를 할까요?’ 그걸 여쭤 보고,
셋째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넷째에 가서는 ‘무엇에 의지해서 닦아 갈까요?’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질문을 해라”

그래서 부처님께, (첫째) ‘경전 앞에는, 어떻게 경전 앞에 쓸까요?’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래 놓고 경전을 주욱 결집을 해라’ 그렇게 일러주시고.
(둘째)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에 대해서는 ‘묵빈대처(默檳對處)를 해라’ 묵빈대처라 하는 것은 ‘일체 상대를 하지 말라’ 그거거든. 잘하거나 못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말도 그 사람하고는 하지 말고 그렇게 상대를 해라 그랬어.

세 번째,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어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계위사(以戒爲師)하라, 계행(戒行)으로써 스승을 삼으라’
네 번째는 의지처(依支處), ‘무엇을 의지해서 공부를 할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네 가지 생각을 머무르는, 바르게 머무르는 관(觀)을 해라’

그런데 사렴주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몸뚱이[身]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외부 일을 요렇게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에다 받아들이는 것[受]과 또 일체 경계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心]과 또 이 몸과 받아들이는 것과 또 우리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거,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 이것이 법(法)이다 그 말이여. 제법(諸法)이라고도 그러고, 법이라 그러는데, 그 법.

그래서 ① 「몸뚱이[身]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고.
② 「받아들이는 것[受]은 괴로운 것[苦]이다」 저거는 ‘좋다, 나쁘다’ 척!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떤 사물을 대했을 때 딱 받아들이거든,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거거든.
③ 우리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마음[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하고.
④ 「이 세상에 모든 것[法]은 무아(無我)다」 아(我)라고 하는 주재(主宰)가 없는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이라 하는 것은—부처님 당시에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참선법(參禪法)이 그때 없었고, 그때는 모든 제자들에게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닦은 뒤에는 이 사렴주관을 통해서 정진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는데 그것이 차츰차츰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발전해서 성숙한 것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부정(不淨)하다」고 한 것은 중생들은 이 몸뚱이 속에 피와 오줌과 똥과 피고름 모다 그런 것이 가득차 있어서 아홉 구멍으로부터 아무리 씻고 닦고 향수를 발라도 금방 뀌역뀌역 기어나온다 그 말이여. 팔만사천 털구먹 땀구먹으로 나온 것이 다 오줌이요, 다 그게 다 똥물이다 그말이여.
며칠만 안 씻으면 거기서 쉰내 · 비린내 · 노랑내 · 구린내, 별별 냄새가 다 난 것을 보면 분명 이 몸뚱이 속에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틀림이 없고, 결국은—자기 어머니는 어린 자기 애기는 아무리 똥오줌을 싸서 뭉개도 더러운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럽지 아니한 것은 아니여—늙어가면서 점점 그 노쇠해 가면서 점점 그 추태(醜態)가 드러나게 되는 거고, 결국은 병이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기 마련인데, 숨이 끊어지자마자 10분도 못 가서 오장육부가 버글버글 버글버글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확실히 달관(達觀)을 해 버리면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질 것이 없고, 더군다나 남자가 여자를 볼 때에도 ‘더러운 것을 살짝 껍데기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에 그 마음이 동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인도나 중국에서는 공동묘지, 묘지에 거기는 풍장(風葬)이라 해서 시체를 땅에다 묻지도 않고 태우지도 않고 그냥 한데에다 이렇게 버려두는 그러한 그 장례법이 있는데, 그러면 모다 독수리나 새 매 그런 것들이 달라들어서 살은 다 뜯어먹기도 하고.
그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배가 고프면 가서 탁발(托鉢)을 해서 한 끼 먹고서 밤낮을 그 시체 옆에서 앉아서 그 모냥을 관(觀)하는 거여. 그러다 보면 확실히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하는 것을 깨닫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한 것을, 낱낱이 따로따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네 가지를 합해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러한 수행법이 부처님 당시에 원시불교 때 많은 수행승들이 그걸 해 왔다 그 말이여.
지금도 역시 남방에 가면 그런 그 사렴주관을—비파사나(vipassanā)라고 인도(印度) 말로 그러는데, 비파사나도 세월이 감에 따라서 차츰차츰 더 자상하고 구체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법이 개발되어서 지금까지도 전해 오고 있고 일부 스님네들이 거기 가서 배워 가지고 와서 한국에 와서 또 포교를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法)은 중생의 근기(根機)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개발되고 발전되어서 어떠한 근기의 중생도 다 이 정법(正法)과 인연을 맺어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하실 때에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사렴주관으로써 의지처를 삼으라」 하신 그러한 법문의 요지가 십선, 대승십선 중계(大乘十善重戒)를 받고 화두를 타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 바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최후에 교훈을 우리는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허고  송경팔만세(誦經八萬歲)하고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을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계율을 지키기를 삼천겁(三千劫)을 하고, 경을 외우기를 팔만세(八萬歲)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을, 밥 반 그릇 먹을 동안에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다. 단정히 앉어서 실상(實相)을 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부처님께서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는데, 어째서 ‘계 지키기를 삼천겁을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을 팔만세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반식경(半食頃) 동안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너무한 표현이 아니냐?

부처님께서 계율(戒律)을 지키고 경(經)을 외우라고 한 본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형식적으로 계율 지키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경을 외우면 공덕이 장하다 하니까 그저 경만을 주야로 읽고 여러 가지 경전을 많이 읽고 그러되, 경의 참뜻을 아지 못하고 공덕에만 떨어져서 어쨌던지 많이만 읽으면 좋다하는 거기에만 집착하기 때문에—정말 경을 외우는 참뜻과 계율을 가지라는 참뜻을 알고서 ‘이뭣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 참선한 것만 같지 못하다 그거거든.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조달(調達)이 제바달타(提婆達多)가 부처님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추셨는데 조달이는 30상을 갖췄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육만 장경을 다 외우고, 모든 계율을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엄격히 스스로도 지키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지키도록 권장을 했어.
부처님께서는 원칙적으로는 사시(巳時)에 공양(供養)을 한 번씩만 하되 나이가 많아서 병이 들거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배고픈 것을 너무 못 견디는 어린아이한테는 저녁에 약(藥)으로 조끔씩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허락을 하셨는데, 조달이는 ‘아무리 늙어서 병들거나, 아무리 어리더라도 하루 한 끼 이상은 안 된다’ 이렇게 엄격히 하거든. 그거 하나만 보더라도 어떠한 식으로 계율을 지키도록 했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그렇게 철저하게 제자들을 그렇게—자기가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거룩하고 훌륭하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선동하고 유혹해서 끌고 가고 그렇게 했지만, 결국은 조달(調達)이는 근본정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삿되어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마각(馬脚)이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사세(阿闍世) 태자를 시켜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가지고 부처님을 짓밟도록 그렇게 코끼리를 내몰게 했고, 부처님 행차하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바윗돌을 굴려서 부처님 다리를 다치게 했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현혹시켜서 끌고 가서 그런 대중을 파(破)하는 그런 죄를 범했고, 연화색 비구니를 주먹으로 쳐서 즉사하게 맨들었고, 손톱 속에다 독약을 묻혀 가지고 부처님 발에 엎드린 것처럼 해 가지고 부처님을 해코자했고 이런 오역무도(五逆無道)한 죄를 지어 가지고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한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율사(律師)다, 계행(戒行)이 청정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나를 갖다가 존경해라’ 이양(利養)을 받기 위해서 꾸며서 계율을 지키는 그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 올바르게 마음 씀과 말함과 행동을 바르게 갖는 것이고, 공부를 올바르게 하다 보면 제절로 살생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도둑질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모든 계율은 그 가운데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부처님께서는 80세를 일기(一期)로 이승을 하직을 하셔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중생의 세계에 마치 저 달이 호수에 비치듯이, 물 있는 곳마다 그 달이 비치듯이, 인연 따라서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투셨다가 또 인연이 다하니까 또 다시 그 그림자를 거두신 것이지, 참부처님은 오고가고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서 성도(成道)하셔 가지고 49년 동안 팔만대장경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80세 열반하신 그 부처님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잊지 않고 숭배하고 추모하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사찰마다 거룩한 상(像)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또 가정에도 신라 백제때는 고려 때는 가정에도 다 집집마다 다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역시 가정에 많은 분들이 불상(佛像)을 모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렇게 모시는 것은 ‘항상 우리집에 우리와 같이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투철한 신념을 항상 일깨우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죽어갔다고 해서 꼭 슬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못 인연 따라서 나타났다가 인연 따라서 사라진 것뿐이지 죽고 사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표현을 그렇게 할뿐이지,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분명히 있어 가지고 정말 우리를 기쁘게 했다가, 아프게 했다가, 슬프게 했다가 그러한 현상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예나 권리나 재산과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헌디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나무~아미타불~
조제화락진소식(鳥啼花落眞消息)을  지자희이설향수(只自熙怡說向誰)오
나무~아미타불~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헌디, 불법(佛法)이 유통해서 행해지는 것이 어찌 시대에 관계할까보냐. 시대에 관계하지 않는다.
‘정법시대다, 상법시대다, 말법시대다’ 해 가지고 정법시대(正法時代)에는 불법에 의지해서 깨달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사람이 있고. 깨달은 것으로써 법을 삼어.
상법시대(像法時代),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천 년 뒤에는 상법시대인데, 상법시대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경전을 찍어 내고, 탑을 세우고 하는 모다 그러한 것이 불법이고 그것을 열심히 성의껏 잘해야 불법을 잘 믿고 불법을 흥왕하게 맨든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 왔고,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투쟁견고(鬪諍堅固)시대여. 철저하게 도 닦은 사람도 드물고, 겨우 그저 상법시대에 그 끝으로 절이나 짓고, 불상이나 모시고, 탑이나 세우고 그렇게 하고. ‘그저 경을 읽고 열심히 염불하면 극락세계 간다’ 이렇게만 믿고 할 따름이지 정말 확철대오해서 부처님이나 조사처럼 된 분은 거의 구경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말법시대인데, 그러면 무엇을 주로 하냐 하면 투쟁견고시대여. 맨 싸움으로 일을 삼아. 승가(僧伽)라 하는 말은 화합중(和合衆)이란 말인데, 화합해서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맨 싸움 파벌싸움 싸움을 한다.
이러한 말이 옛날부터서 『멸의경(滅義經)』 같은 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이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이구나!’ 이렇게 수긍이 가나, 정말 참불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법시대라고 해서 깨달을 수 있고, 말법시대라고 해서 정법은 없어져 버리고 아무리 닦어 봤자 깨달을 수 없다’고 한 생각은 참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의 표현이 아니여.

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이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또 부정불구(不淨不垢)인데, 어찌 시대에 따라서 그것이 변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우리의 생각이 ‘아! 말세니까 말세에는 투쟁만 견고해지고 싸움만 모다 하고 닦어 봤자 견성성불도 못한다’ 그러한 말에 현혹되어 가지고 수행을 그러한 생각을 속에다 품고서 수행을 한 것과,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하는 것과는 영판 천지 차이(天地差異)가 있는 것이여.

부처님 당시에도 새는 숲속에서 노래하고, 꽃은 봄에 꽃은 피었다가 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었을 것입니다.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는 바로 거기에 진리에 참소식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자희이설향수(只自熙怡說向誰)오. ‘다못 이 새 노래하고 꽃이 피고 지고 하는 이 속에 참소식을[鳥啼花落眞消息] 다못 내 스스로 즐길지언정 누구를 향해서 이 도리를 말할까’ 하는 고조사(古祖師)에 게송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정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기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그 법에 의지해서 항상 열심히 닦아 가는 사람은 더욱 다행한 일이고.
‘이것밖에는 다시는 우리가 눈을 돌리고 마음을 쓸 곳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 받아 나기 어려운, 태어나기 어려운 몸을 받아 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그 정법에 의해서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보다도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숨이 지고 세세생생에 이 법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오직 이 한 일을 향해서 나에 모든 것을 바치리라’ 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해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는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은 그 사람에게는 따 논 당상(堂上)이여. 틀림없이 그 사람에게는 견성성불이 약속되어진 것입니다.(처음~43분15초)





(2)------------------

「삼천 겁(劫)을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팔만장경을 다 외운 것보다도 밥 반 그릇 먹은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이 더 낫다」고 한 그 말씀을 깊이 새겨서 음미를 해 본다면 우리는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참선을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 ‘정말 내가 이 말세에 어떻게 해서, 전생(前生)에 무슨 선업(善業)을 지었기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을까’ 세상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거나 말거나, 집안에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럴수록에 더 열심히 ‘이뭣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한 국토에 태어난 거, 함께 태어난 것은 일천 겁(劫) 동안을 함께 선근(善根)을 심은 결과고, 하루 동안 같이 어디를 동행을 하는 것은 이천 겁 동안을 같이 선근을 심은 그 결과고, 하룻밤을 같이 자는 것은 삼천 겁 동안을 선근을 같이 심은 인연이고, 한 고을에 같이 동족으로 태어난 것은 사천 겁 동안의 인연이고, 한 마을에 함께 살게 된 것은 오천 겁의 인연이고, 하룻밤을 한 벼개를 베고 동침을 하는 것은 육천 겁의 인연이고, 한 집안에서 한 식구로 같이 살게 된 것은 칠천 겁 인연이고, 부부간으로 사는 것은 팔천 겁 인연이고, 형제간으로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인연은 구천 겁 인연이다. 부모나 부모자식 간 또는 한 스님과 상좌로 태어난 것은 십천 겁, 만 겁 동안에 거쳐서 함께 선근을 심은 인연으로 그렇게 된다」 하셨어.
그러니 우리가 한 가정에 부부나 형제나 부모자식, 부부간 이렇게 태어난 인연이 얼마나 지중(至重)한가를 알 수가 있고, 이렇게 한 법당에서 사부대중이 같이 이렇게 법문을 듣는 것은 몇억천 겁 인연이다 그 말이여.

그런 깊은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같이 만났다면 우리는 그런 깊은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든지 좋게 생각하고, 다 풀어버리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내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풀어버림으로 해서 또 상대방도 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집안에도 화합 평화가 오고, 온 직장에도 서로 화합이 통하고, 사찰에도 스님네끼리 노소 · 선배 · 후배가 서로서로 다 화합하고, 신도들끼리도 서로 다 화합을 하고 스님네와 신도들까지라도 서로 마음과 마음이 합해져서 함께 불법을 믿고 닦아가는 좋은 인연으로 승화(昇華)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잡비유경(雜譬喩經)』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뱀이,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을 하기를 “내가 응당 내가 더 위고, 내가 더 크다” 그러니까 꼬리가 머리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더 크고, 내가 더 우선이고, 내가 더 어른이다”

머리가 “나는 귀가 있어서 뭔 소리를 들을 줄도 알고, 눈이 있어서 무엇을 볼 줄도 알고, 입이 있어서 모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또 어디를 갈 때는 항상 내가 앞서가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그러지도 못하고 하니, 너는 나를 의지해서 살아야 하고 나를 따라댕겨야지, 니가 무슨 나보다 더 크고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냐”
꼬리가 말하기를, “니가 생각을 잘못한 거다. 내가 너를 앞세우고 가는 것이지 내가 너를 따라간 것이 아니여. 내가 너를 가도록 해 주니까 니가 가지, 내가 만약 안 갈라고 마음을 먹고 딱! 마음을 먹으면 너는 못 가. 그 니가 멋대로 간 것 같지마는 내 허락이 있어야 가지, 내 허락 없이는 못 가니까 내가 더 어른이지 니가 더 어른이냐. 내가 한번 보여 줄 테니까 봐라“ 나무를 갖다가 칭칭 틀어 감고 ”어디 가보고 싶으면 가봐라”

3일 동안을 나무 틀어 감은 것을 풀어주지 아니하니까 뱀이 꼼짝을 못해. 배가 고파도 갈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결국은 개구리 한 마리도 못 잡어먹으니까 배가 고프단 말이여.
그래서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나 놔라. 날 풀어줘. 니 니가 정말 니가 크다. 니가 어른이니까 이거 좀 꼬리를 풀어 줘라. 풀어다오” 하니까, 꼬리가 그 말을 듣고서 즉시로 떠억 풀어 주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그래 내가 니 말이 옳다고 했으니 인자 어디 갈 때도 니가 앞서가라, 내가 뒤따라가마”

꼬리란 놈이 앞서 가지고 뿍뿍뿍뿍뿍 기어간다 그 말이여. 머리는 인제 꼬리 따라가는 대로 끌려서 꺼꿀로 가는데, 몇 걸음 못 가서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뱀이 결국은 죽었다 그 말이거든.
어리석은 중생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가 잘났다고 그러고, 인아상(人我相)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을 비유해서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도처가 싸움입니다. 정부도 정치도 여당 야당이 싸우고, 회사도 노사분규가 일어나서 싸우고, 가정도 그저 서로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고, 부부간에도 싸우고 도대체가—‘비 온 끝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 있어서 싸운 끝에 정이 더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 싸움이 한 번 두 번이라야지 사사건건이 의견 충돌해 가지고 되는 일이 없다면 그 문제가 있는 것이고.
여당 야당도 서로 건설적인 안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그렇게 하다가 좋은 쪽으로 가결을 봐 가지고 잘해 나기기 위한 것은 참 좋지마는, 싸움을 위한 싸움은 이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부간에도 처음에는 다 좋아서 결혼을 했겠지마는, 살다 보면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 맘대로 할라고 그러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그러다가 보면 싸움이 습관이 되고, 싸움 안 하면 밥맛이 없어.
부부간에 싸움은 속전속결, 간단하게 몇 마디하고서 서로 상대방의 말이 옳으면 ‘아! 당신 말이 옳소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되어야지, 그 싸움이 장기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냉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서로 부부간이 아주 지긋지긋하게 뵈기도 싫어지고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되고, 그 불행이 자녀들한테로 떨어지게 된다면, 뱀이 머리하고 꼬리가 서로 싸우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 말이여.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가정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 한번만 착! 돌이키고 보면 ‘하! 허허’ 웃고 말아 버릴 것이고, 상대방의 단점을 들어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아 직장에 나가서 여러 가지 복잡한데 하루 종일 일하고 오니 얼마나 피곤할까’ 좋게 생각하고, ‘처자를 위해서 저 애를 쓴다’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집에서 모다 살림하니라고 애쓴다‘고 생각하고, ‘어디 답답한데 어디 좀 나가 보라’고 하기도 하고.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그렇게 생각해서 서로서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보고보고 또 볼수록 더욱 좋지, 왜 그것이 지긋지긋한 웬수로 보일 것이냐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합을 해야 부모에게도 효도를 할 수가 있고,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되는 법이거든.

부모에게 불효(不孝)한 사람은 불효한 자식을 동시에 맨들게 돼요. 그 어린 자식이 부모한테 불효한 것을 봤기 때문에, 어려서 밤낮으로 그걸 봤기 때문에 그놈이 커서 오죽 불효를 잘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배운 것이 그것밖인데. 뭐라고 그런 법이 아니라고 하면 ‘엄마아빠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했냐?’고 대든 통에 꼼짝을 못하거든.
그래서 가정이 부부간에 화목을 해야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자기도 효자 효녀 효부를 만나게 되는 것이여. 그렇게 될 때 그 집안에 복(福)이 들어온 것이지, 집안이 화목을 못하고 무슨 복이 들어올 것이냐 그 말이여. 들어올려고 한 복(福)도 다 머리를 돌리고 다른 집으로 가 버릴 거다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목을 할려면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만심(我慢心)을 버려야 되거든. 내 마음을 비우게 돼, 그럼.
억지로 거 항아리 속에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은 자꾸 꺼꿀로 들고 흔들고 퍼내 버리면 비어지는데, 우리의 자존심은 병원에 가서 가슴을 열고 해부를 해도 소용이 없고, 뭔 독한 약을 먹고 헹궈 낼 수도 없고, 무슨 수가 있냐 하면 자꾸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하면 비워지는 거여, 이게. 다른 도리가 없어.
머우대로 쑤셔내도 그것은 안 없어지고 별짓을 다 해 봤자 안 비워져. 창자는 비워지는데 우리의 마음은 안 비워지거든.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심(貪心)도 없어지고, 썽내는 마음도 없어지고, 어리석은 마음도 없어지고 자꾸 맑아져서 결국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면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국토가 극락세계로 변하는 것이고, 정법시대가 되는 거여.
누구한테 미룰 일이 아녀, 이것은. 스님네한테 미룰 일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한테 이걸 미룰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하거든. 이 세계의 주인은 낱낱이 자기여. 낱낱이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거든.

하늘에 뜬 달이 그건 누구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는 사람이 주인인 거여. 해도 역시 그렇고 별도 그렇고, 요 허공에 모든 공기도 자기가 소유거든. 자기가 그것을 좋은 달로 맨들고, 좋은 공기로 맨들고.
산도 소유권은 국가가 소유권이 되는 산도 있고 개인이 소유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가다가 그 산에 가면은 그 산이 자기의 소유고, 흐르는 시냇물이 흘러가는 물이 주인이 있을까마는 자기가 그 시냇물을 보고 시냇물에 손을 씻고 발을 씻으면은 그 시냇물이 자기 소유여. 약수터에서 풍풍 쏟아지는 물이 임자가 없겠지마는, 그래도 그 물을 먹은 사람이 그이가 주인이라 그 말이여.

기차나, 자동차나, 비행기나, 도로나 모든 것이 자기가 그것을 보고 자기가 그것을 수용을 하는 동안에는, 돈을 내고 비행기를 타더라도 그 비행기는 자기가 타는 동안에는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걸어가면 그 도로가 자기의 도로거든. 우주 법계가 다 자기가 소유여.
우주 법계를 자기가 소유할려면은 ‘이것은 내 것이다’고 한 생각을 버리면은 제절로 다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소유로 되는 거여. 제일 부자가 되는 길은 어쨌든지 긁어 모아 가지고 몇백 억 재산가가 되고 갑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놔 버린 것이 법계(法界)에 대주인공(大主人公)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불법(佛法)에 철저하게 불법에 귀의(歸依)해서 이 최상승법을 닦으면 법률도 사실은 복잡한 법률도 필요 없어. 형무소도 필요가 없고, 큰 재산도 그렇게 필요가 없고, 명예 권리도 그렇게 필요가 없어.
뭐 요새 고속도로에서 휴지를 버리면 뭐 3만원, 가래침 뱉으면 얼마, 담배꽁초 버리면 얼마, 지금 법이 오직 사람들이 지각이 없어 가지고 그렇게 하니까 그러한 법까지 만들겠습니까. 다 담배꽁초 버린 사람이 없고, 휴지를 버린 사람이 없다면 뭐 할 일이 없어서 그런 법을 맨들겄냐 그 말이여. 그 법을 맨들게 한 사람이 바로 국민들이다 그거거든.
국민들이 다 자각을 하고 정말 정법을 믿고 전부 ‘이뭣고?’를 해서 자기의 삼업(三業)을 청정히 한다면 법률은 점점 간소화 될 것이다 그 말이여. 뭐 순경도 그렇게 많이 필요도 없고, 순경 경찰 안 하고 다른 생산직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한 마음 돌이켜서 우주 법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고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으로 변하는 것이여. 온 사회가 살기 좋고 간 곳마다 전부가 다 한집안 식구요, 간 곳마다 도반(道伴)이요, 간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보살화현(菩薩化現)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거거든. 이것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그것이 가능한 것이여.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중생심을 발동을 하고, 탐욕심(貪欲心) 진심(瞋心)을 발동을 하면 갈수록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가정이고 직장이고 간 곳마다 아귀(餓鬼)와 나찰귀신(羅刹鬼神)이 득실거릴 거다 그 말이여.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는 참 좋은 사람이고, 참 법이 없어도 살 그런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모다 못되어 갖고 이 세상이 이렇게 된다’ 생각하거든.
다 ‘자기가 나쁜 놈’이라고 한 사람은 술이나 먹으면 그런 소리할까, 바른 정신 가지고서는 자기 나쁜 놈이라고 생각 안 해. 술을 잔뜩 먹으면 울면서 ‘야 내가 나쁜 놈이여, 내가 나쁜 놈이여’ 술 깨면 ‘자네가 나뻐’ 이러거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술도 가끔은 그 필요한갑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이라는, 술 잔뜩 취해 가지고 부처님 계신 데 와 가지고 “나 스님이 되겄다”고 한 바라문이 와서, 부처님이 당장 제자를 시켜서 머리를 깎게 하고 그 입고 온 옷을 벳기고 가사(袈裟)를 딱 수(垂)해서 저 제일 말석에다 딱 앉혀 놓으니까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했기 때문에 아무 정신없이 픽 쓸어져서 잤다 그 말이여.
실컨 자고 일어나더니 눈을 떠서 자기 옷을 보더니 가사(袈裟)가 입혀져 갖고, 머리를 만져보니까 홀랑 깎아졌다 그 말이여. “나 중노릇 안 한다”고, “내 옷 내놓으라”고 해 가지고, 옷을 내주니까 그놈 입고 똥이 빠지게 도망쳤다 그 말이여.
그래 제자가 부처님께 “왜 그 술 취한 놈을 갖다가 머리를 깎아 갖고 저렇게 도망가게 만드셨습니까?” 항의를 했거든.
“그놈이 술 취한 그 시간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어 보겠느냐”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에는 누가 중이 된다고 하면은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해 가지고 ’이 사람이 확실히 출가해서 도 닦을 발심(發心)을 했냐 안 했느냐, 또 눈동자는 바로 백혔는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과연 이 사람은 출가했으면 좋겠다‘ 할 때, 그러면 행자(行者)로 받아들이고 꽤 엄격하게 그렇게 했었는데.
이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 법문을 경전에서 보고부터서는 누구든지 오겠다 하면 ‘그래 있어 봐라’ 있으면 한 일 년간 행자 생활을 하고—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소지도 하고 빨래하고, 대중스님네 시봉(侍奉)도 하고 운력(運力)도 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일을 다 겪으면서 일 년 이상을 참고 대중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않고 하면 그때 계(戒)를 주어 받도록 하고, 그 안에 참지 못하고 간다는 사람은 ‘그래 가거라. 가더라도 니가 그동안 절에 있는 그 공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또 가겠단 사람 또 억지로 붙잡지 않죠.

여러분들도 ‘내가 말세다, 여자다, 늙었다, 이렇게 몸이 아프다’ 그러한 것을 핑계 대고 참선(參禪)을 안 할려고 하지 말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만이라도 탁! 앉아서 하면 그 공덕(功德)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씨를 심어 논 것이거든, 그게.
그래서 그동안에 염불을 하신 분, 그동안에 경전을 외우고 천수경을 외우신 분들도 그거 한 만큼 공덕은 다 없어지지 않고 앞으로 참선하는 데 좋은 기초가 되고 밑거름이 될 것이니까, ’그동안에 했던 거 아까워서 이뭣고? 못 한다‘ 그러시지 말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술 취한 바라문이 ’술 취한 동안에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그 공덕으로 언젠가는 출가해서 성불을 할 것이다‘고 부처님께서는 수기(授記)를 주셨어. 하물며 멀쩡한 맑은 정신으로 불법(佛法)을 의지해서 수행을 한 공덕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산승(山僧)에 이런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셔. 그렇게 된다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정에 들어가면 지긋지긋하다’고, ‘마누라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안 들어간다’고, 왜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어서 집으로, 직장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쏜살같이 돌아오도록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억지로 소지를 해 놓고, 꽃을 갖다 꽂아 놓고, 구석구석이 카튼에다가 향수를 뿌려 놓고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보만 고치면 되거든. 마음보만 타악! 고쳐. 편안하거든. 자기도 편안하고 사람도 편안하면 그거야 돈 하나 안 들고도 가정을 편안하고 좋은 보금자리로 변하는 방법이 바로 그거거든.

책임은 각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은 다 불보살(佛菩薩) 화현(化現)이다’ 자기한테 잘해 줄 때만 ‘나 참 내가 시집 잘 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못해 줄 때 ‘야! 저 사람이, 불보살 화현이 나를 제도할려고 일부러 저런 역행법(逆行法)을 쓰는구나’ 그렇게도 생각하면서 항상 자기를 고칠라고 노력을 해야 되거든.

남을 고칠라고 자기가, 꽁지가 지가 어른이라고 내다가 불구덩이, 물구덩이 빠질라고 하지 말고, 항상 꼬리는 머리를 애껴주고, 머리는 꽁지를 억지로 억압할라 하지 말고, 서로 꽁지 없이 머리가 어떻게 존재하며, 머리 없이 어떻게 꽁지가 존재하냐 그 말이여. 내나 한 몸뚱이인 것을.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먹은 것이 그것이 바로 대승 사상(大乘思想)이거든, 대승! 소승적인 사상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자기 일신(一身)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차라리 오직하면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대승심은 자기도 좋고 남도 좋고 항상 남을 위하고,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극기추상(克己秋霜)이요 대인춘풍(對人春風)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환영을 할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모다 환희심을 낼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다 삐뚤어진 마음도 바로잡아 질 것이다 그거거든.

오늘이 입동(入冬)입니다. 오늘부터 이 겨울 계절이 시작된 날입니다. 앞으로 차츰차츰 날씨가 추워질 것이고, 눈이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 테니 모다 감기에 조심하시고.
‘모든 병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셨으니 마음보를 잘 쓰고 항상 흐뭇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살고, 다른 사람도 마음도 기쁘게 해 주고, 감사한 마음이 나도록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대한다면 우리의 질병도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다시 또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반(半)에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해서 우리는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결정코 금생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43분16초~1시간12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 /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여쭌 4가지 질문 ①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경전을 결집할 때 모든 경전 첫머리에 어떠한 말을 써야 합니까? ②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육군비구(六群比丘)나 차익(車匿)과 같이 악한 비구와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합니까? ③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까요? ④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를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비파사나(vipassanā).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사렴주관이 차츰차츰 발전해서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성숙하였고,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게송)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 /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 /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 /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

『잡비유경(雜譬喩經)』에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다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었다’라는 비유의 법문 /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그럴려면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의 출가 일화 /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시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 극기추상(克己秋霜) 대인춘풍(對人春風),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