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51~375)2022. 11. 9. 21:10

 

 

((No.354))—1988년 동안거 해제(88.01.15.음) (51분)

 

(1) 약 27분.

 

(2) 약 24분.


(1)------------------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호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호되, 억천(億千)의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이 그 복(福)이 갓이 없으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어찌 항상 고교(古敎),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본 것만 같으리오.

이 옛 가르침, 고불(古佛)에 가르침, 고불에 경전(經典). 이 고불에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항상 전(傳)하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에 인(印)’을 가리키는 말이고,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여. 이것을 '예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하는 것이여.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공덕을 무슨 말로써 다 그 공덕(功德)을 다 표현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무량무변(無量無邊)이여. 그렇지마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이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그 마음에 인(印)을, 그것을 가져서 보는 것만 어찌 같을 것이냐.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다. 그대에게 청(請)하노니, 여러분께 청하노니 눈을 떠서 눈앞에 터억 관(觀)하라.

이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물건. 종이에다가 먹으로 쓴 글자가 아니여. 한 글자도 없건마는 그 글자를 우리 일용중(日用中)에—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생각하고 썽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하는, 우리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하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소소영령(昭昭靈靈)하는 바로 그것이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그 가운데에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터억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白紙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이 경전을 읽어야 참으로 부처님께서 전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傳)해 내려오는 그 심인(心印)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삼세(三世)에 모든 부처님을 친견(親見)해서 거기에 공양(供養)을 올리는 공덕도 말로 할 수 없이 장하고,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화엄경(華嚴經) · 법화경(法華經) · 금강경(金剛經) · 원각경(圓覺經) 이러한 경전(經典)을 항시 손에서 놓지 않고 그것을 독송(讀誦)을 하는 거, 그것도 참 공덕이 한량이 없지마는, 우리 최상승학자(最上乘學者)는 벌써 종이로 된 경전을, 또 먹으로 된 경전을 그것을 읽는 데에 그쳐서 될 것이냐.
진짜 경전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거기에서 찾아야, 거기에서 찾아야 참부처도 거기에서 친견할 수 있고 참경전도 거기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이여.
그 경전, 그 참부처님을 친견하고 독송하게 하기 위해서 부득이해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불(化身佛)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出現)을 하신 것이고, 이 문자(文字)로 된, 언어문자로 된 경전을 부득이해서 설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계축년(癸丑年)에 설(說)하신, 그 계축년 해제(解制) 때 설하신 그 법문(法門), 오늘 이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마치고 온 대중(大衆),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에서 삼동안거를 마치고 온 대중, 그리고 이 경기도 일원(一圓)에 모다 회룡사라든지, 저 충청도, 옛날에 만공(滿空) 스님, 보월(寶月) 스님을 모시고 여기 전강(田岡) 조실 스님, 한국에 근대에 모다 여러 큰스님네들이 거기서 모다 정진을 하신 보덕사(報德寺) 거기 선원에서 난 대중까지도 여기에 오늘 해제에 참석을 했는데, 여기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하고 오늘 이 자리에, 이 용화사(龍華寺) 법보선원(法寶禪院)에 한자리에 모여서 해제 법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도 들으니 각기 그 선원들에서 삼동 석 달 동안을 정말 여법(如法)하게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알뜰하게 모다 정진(精進)들을 하고, 모다 눈에는 정진을 해서 그 샛별같이 반짝거리는 그 참, 신심과 지혜로써 그 석 달 동안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놨으니 모다 업장(業障)이 소멸을 하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러한 정진 뒤끝이라 모다 몸에서는 향내가 진동을 하고 눈에서는 그 날카로운 빛이 아주 번쩍거린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참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그거거든.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여기(인천 주안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창설하시고, (수원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시고 그러한 뜻이 오직 이 일대사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 부처님과 역대조사와 근대에 여러 선지식(善知識)들의 그러한 자비(慈悲)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이 말세(末世)에 우리가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을 어디서 들으며, 참선을 하는 방법(方法)을 어떻게 잘 알 수가 있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걱정 없이 이렇게 정진(精進)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면, 불조와 선지식들의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신 지 삼천년이 지낸 이 말세(末世)입니다. 온 세계는 말세의 여러 가지 현상(現狀)이 도처에서 일어나 가지고 서로 죽이는 일만을 연구하고, 서로 죽이고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마치 파리 목숨만도 못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우리가 목숨 바쳐서 일대사를 위해서 도(道)를 닦을 수 있는 이, 과거에 우리가 무슨 숙연(宿緣)을 심어 가지고 우리는 이러한 법(法)을 만나게 되었는가. 참 뜨거운 것이 속에서 참 솟구쳐 올라올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이러한 정법을 만나 가지고 이렇게 이 중앙선원에서, 또 법보선원에서, 태화선원에서, 도처 선원에서 이렇게 옛날 부처님 때에부터서 내려오는 이 동안거 하안거, 이 안거(安居)의 법도(法度)에 따라서 한 철 한 철을 지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엄격하고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겨울살림 여름살림을 이렇게 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그 생활 법도(法度)도 대단히 중요하지마는 그 내부에, 대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신심(信心), 정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아무리 공부가 잘 안되어도 끈질긴 인내력으로써,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가 나타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계축년(癸丑年) 녹음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중국에 천목산(天目山) 고봉 선사(高峰禪師). 3년 사한(死限)하고 그 정진하신 말씀이 잠깐 나왔습니다마는, 우리는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할 때까지, 또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 신참(新參) 구참(久參)을 막론하고,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스님네나 또는 이 거사(居士)님이나 또는 이 청신녀(淸信女)를 막론하고 오직 이 고봉 스님께서 도를 닦으신 바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도 그러한 대오(大悟)를 할 수가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오(無悟)라. 큰 의심, 크고 간절한 큰 의심을 가지고 그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달음도 없다'
이 말씀은 어쨌든지 우리는 큰 깨달음을 목표로 삼는데,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疑心)이 커야 한다. ‘의심이 크다’는 말은 무엇이냐?
들다가 말다가, 좀 하다가 말다가, 환경에 끄달려서 시비(是非)에 빠지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큰 의심이 날 수가 없습니다. 큰 의심(疑心)이 날라면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이 일어날라면은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 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내가 여자니까, 나는 몸이 건강틀 못하니까, 또는 나는 무식하니까' 등등 자꾸 부정적(否定的)인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의 근기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해봤자 어피차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까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고 이렇게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해서,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앉어서 흉내만 내고 있어 봤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여자가 되었건, 근기가 하열(下劣)했건, 나이가 먹었건 그럴수록에 백배 천배 더 분심(憤心)을 내서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을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경허(鏡虛) 큰스님께서 어려서부터 그렇게 총명(聰明)하시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그러한 참 총명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공부를 하실 때에, 처음에 경(經)을 배우실 때 다른 사람이 한 번 읽으면 당신은 열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열 번을 읽으면 당신은 백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백 번을 읽으면 당신은 천 번을 읽었어. 한 번만 쑤욱 보기만 해도 외어버릴 수 있었지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經) 한마디 한마디를 뼛속에 새기고자 해서 백 번, 천 번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셔 가지고 이십여 세의 아주 새파란 젊은 나이에 참 대강사(大講師)에 전강(傳講)을 받아 가지고 팔도에서 모여든 학인(學人)들에게 경(經)을 설하시다가, 참 퇴속한 은사 덕택으로 자신이 이렇게 대강사가 된 것이 너무너무 고마와서 인사차 그 은사를 찾아가다가 전염병이, 요새 같으면 장티부스 같은, 지금은 여러 가지 예방주사도 있고 모다 치료하는 방법이 있지마는, 옛날에는 그러한 전염병을 방지할 방책(方策)이 없어 가지고 걸렸다 하면은 온 마을이 다 모조리 다 죽었습니다. 그러한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서 차례차례 죽어가는 그런 마을에서 그러한 것을 보고서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

그래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보고 대강사가 되어서 그 경(經)을 강(講)하고 있지마는 이것이, 이러한 그 사람이 막 죽어가는 꼴을 보고 공포심이 난 것으로 봐서, 이것이 경을 육두로 다 외우고 종횡(縱橫)으로 설한들 이것이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대발심(大發心)을 해 가지고 동학사(東鶴寺)로 돌아가서 학인들을 다 흩어버렸어. “각자 너희들 인연 따라서 다 흩어져라” 보내버리고서, 그 동학사 실상사(實相寺, 지금 동학사 실상선원實相禪院) 그 지금 암자는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는데 그때는 거기에 암자가 있었어. 그 암자에서 문을 처닫고 그 구멍으로 밥을 넣어달라고 해 가지고는 아주 죽기로 각오를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나라 이조(李朝) 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얼마 동안 침체를 하고 경을 숭상하는 시대가 있었는데, 이 경허 스님께서는 그러한 침체된 선풍(禪風)을 갖다가 부흥(復興)을 했어. 그래 가지고 한국에 침체했던 선풍을 갖다가 이렇게 진작(振作)을 해 가지고 오늘날에 참 이 최상승법이 이렇게 참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경허 스님 밑에 모다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모다 나오시고, 그 선지식 밑에 오늘날 이렇게 전국에 선풍이 이렇게 진작하게 된 것은 경허 큰스님의 그러한 참 출현(出現)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到處)에 참선법(參禪法)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일본에서 모다 소개가 된 탓으로 모다 의리선(義理禪)—의리로 따지는, 의리로 따져서 공안(公案)을 통과하는 그러한 참선법이 모다 소개가 되어 있지마는, 우리 한국에 남아있는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이 경허 스님, 만공 스님으로 해서 이렇게 내려오는 이 법이 아직 남아있는 한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을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다시 진작을 시켜서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이 활구참선법을 선양(宣揚)을 해서 불일(佛日)이 재휘(再輝)하도록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부대중(四部大衆)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뚱이 있을 때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고인(古人)의 전지(田地)에 이르러서 스스로도 생사해탈을 하고 이 정법(正法)을 세계에 선양을 함으로써 우리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을 실천을 해야 할 때가 바야흐로 온 거 같습니다.(처음~26분56초)





(2)------------------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허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백육순장요요(三百六旬長擾擾)호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 봄에는 동해(東海)로 좇아 남(南)으로 주장자(柱杖子)를 날리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가을에는 서산(西山)을 향하다가 또한 북방(北方)으로 가는구나.
저 남방(南方)에서 해제를 하고 북방(北方)으로 가고, 북방에서 해제를 하고 저 남방으로 가고, 철철이 여기서 해제(解制)했다 저그 가서 결제하고, 저기서 결제(結制)했다 이리 오고 오고가고, 동서사방(東西四方)으로 춘하추동(春夏秋冬) 계절 따라서 걸망을 짊어지고 왔다갔다한다 그 말이여.

삼백육순(三百六旬)을 장요요(長擾擾)허되, 삼백육십 일을 마냥 부산하게 왔다갔다하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여. 어느 날에 고향에 이르를까 알 수가 없구나.

인생(人生)으로 태어나서 인생에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禪房)으로 이렇게 돌아다녀. 주지(住持)도 안 하고, 무슨 일체 것을 다 버려버리고 이렇게 걸망을 지고 선방에 나온 것만 해도 참 장하고 기특하고 훌륭하지.
그러나 결제하고 해제하고 걸망을 지고 동쪽 서쪽으로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 보면 장하고 또한 멋진 인생이라 할 수가 있지마는, 어찌 그것만으로써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정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인생의 오욕락까지 다 버려버리고 출가해 가지고도 명예와 이익, 명리(名利)를 다 버려버리고 탁 걸망을 짊어지고 나왔다면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더라. 정말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나오는 천목산 고봉 스님처럼 정말 한번 목숨 바쳐서 한바탕 해봐야 할 것이다 그거거든.

여기서 한 철 지내보고는 또 그저 또 저리 걸망지고 가고, 또 다른 선방에 가서 쪼끔 해보다가 또 해제하면 이 선방에 오고, 철새처럼—저 오리, 기러기나 저 두루미 또 황새처럼 그냥 무의미하게 철 따라서 저 시베리아로 갔다가 저 한강(漢江)으로 왔다 낙동강으로 갔다가, 저 중국 양자강으로 갔다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하나의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는 멋지게 사는 납자(衲子)일런지는 모르나 그렇게 참 철새처럼 살아서 또 뭣 할 것이여?
그렇게 살다보면 내생(來生)에는 그런 황새 같은 것이 되어가지고 또 세계를 계절 따라서 날아다니는 황새 밖에는 더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출가(出家)한 목적, 부처님께서 이 출가 제도를 만들아 논 이 목적은 황새처럼 떠돌아다니라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여. 정말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더라.
어느 곳이고 한곳에서, 기왕 이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왔으면 이 법보선원에서 그 간절한—녹음법문일망정,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살아계신 조사(祖師)의 법문으로 알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정말 한바탕 아주 뿌리를 뽑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닦아 주었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이 송담(松潭)이 원력(願力)을 세우고 참 잘 외호(外護)를 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한철 겨우 나고 또 걸망지고 갔다가 이럴 것이 아니거든. 한번 들어왔다 하면은 여기서 아주 뿌리를 뽑아버려야 돼, 아주. '죽어서 송장으로 나갈지언정 이 자리를 뜨지 아니하리라'
부처님께서도 정각산(正覺山)에 들어가서 ‘내가 여기서 성불(成佛)하지 아니하면 이 자리에 뜨지 않으리라. 일어서지 아니하리라’

고봉 스님도 ‘내가 여기에서 확철대오를 못하면은 여기서 내가 살아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는 이런 3년 사한(死限)을 하고. 이러한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이 아니고서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3년을 사한(死限)을 하고 그 자나깨나 화두(話頭)를 들고 했지만 조끔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들어지지도 않고 망상(妄想) 아니면 혼침(昏沈), 혼침 아니면 망상으로 3년을 그렇게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안 된다고 한탄을 하고 다른 데로 떠날 생각을 하시지 안 했습니다. 고봉 스님이 만약에 한 철 해보고 안 되어서 다른 절로 가고, 또 거기서 안 된다고 이리 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떠돌아다니고 말았다면 그러한 대각(大覺)을 성취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보살선방에 여러 보살님네들도, 이 정묘년 삼동안거(三冬安居)에 133명이라고 하는 많은 대중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이렇게 정진(精進)을 했습니다. 방이 상당히 크고 저쪽 별당까지 모다 선실(禪室)을 했지마는, 그래도 모다 중좌(重座)를 하고 빡빡허니—그 공기도 나쁘고, 이 자동차 소음 소리는 밤낮을 끊이지 않고 그렇게 소란스럽고, 여러 가지가 시설도 불충분하고 하지마는, 그런 불평 한마디 없이 참 애써서 모다 정진들을 하셔서 원장(院長)으로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었다’ 한 그러한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잘 들리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린다 해도, ‘하! 참 공부가 잘된다. 참 기쁘다’ 그 생각 내면 벌써 정진이 아닌데, 어떻게 되어야 ‘이만했으면 공부가 잘된다’고 만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多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 이런 사과(四果)에 성현(聖賢)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한 생각을 내면 수다원이 아니요,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하면 아라한이 아니요, 내가 보살과(菩薩果)를 증득(證得)했다 하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는 그 법문이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씌여 있습니다.

정진을 하다가 좀 화두가 순일하고 성성한 경계(境界)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찌 그까짓 경계를 가지고 족(足)한 마음을 내서야 어찌 그것을 참 납자(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그만한 경계쯤이야.
무슨,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그 경계요,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봐도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고 모두가 그 소식(消息) 같지마는, 그까짓 것을 어찌 이사(理事)에 맥힘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境地)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거든, 정진하다가 조끔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까짓 것을 족(足)한 줄을 알고. 체, 한 생각에 천만 길 지옥구뎅이로 떨어지는 결과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가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서는 안 되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지를 않고, 들을 때뿐이지 금방 일 분도 안 되어서 딴생각이 일어나고, 딴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그런다고 해서 '아 이거...' 퇴태심(退怠心)을 내고 자포자기를 할 수야 더군다나 없는 일이여. 그럴수록에 악착같이 대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자가 새끼를 낳아 가지고 그놈을 따뜻하게 품안에 안고 젖을 먹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려서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려버리면 그놈이 떨어져 내려가지고 죽지 않고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에 한해서 젖을 먹여서 키운다 그 말이여. 그 떨어져 갖고 맥을 못 추리고 죽어버린 것은 그건 버려버린 거고. 올라오지도 못하고 뻐르적거린 것도 그런 것도 돌아보지도 안 해. 그놈이 애미 있는 데를 찾아서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이라야 되거든.

옛날,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선방(禪房)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먹는 거 입는 거 처소(處所)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만한 그렇게 박(薄)한 상태에서 그래도 거기에서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 가지고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를 한 것입니다. 아무리 용화사가 공기가 나쁘고 주변이 시끄럽고, 공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용(受用)이 박하다 해도 부처님께서 겪으신 그런 고행(苦行) 정진에다 비교하면 이것은 만 분에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도 참 무던히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여건에서 참 정진하니라고 애들 쓰셨지만 앞으로는 여건이 나쁠수록에, 수용이 박할수록에 더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서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를 해서 여러 단월(檀越)들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의 몸뚱이를 낳아주신 부모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방과 전통을 남겨주신 우리의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부처님에 은혜를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解制)를 하고 계속해서 눌러서 정진을 하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부득이한 인연으로 다른 처소로 가시더라도 어쨌든지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말씀과 산승(山僧)에 이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시고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을 합니다. 게송 한마디를 읊고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뚧어버리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비로소 산하대지(山河大地) 너그러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상두관(上頭關), 우리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철(了徹)해 버리면 이것이 상두관을 투득(透得)하는 것이여. 그래버려야 산하대지가 너그러운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대, 인간에 모든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어찌 녹수청산(綠水靑山)에 걸릴 것이 있느냐? 인간의 시비와 분별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녹수청산에 걸리게 된다 이거거든.

여기 이 법보선원이 공기가 좀 나쁘고, 자동차 공장 모다 소음이 있고, 또 공양 모다 그런 수용이 박하고, 여러 가지 시설이 불충분하다고 한들,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분별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좀 시끄러운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좀 박한 것이 오히려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좋은 채찍이 될 수도 있고,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에 발심(發心)한 사람도 있고 발심이 덜 된 사람도 있고, 또 괴각(乖角)이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발심만 제대로 하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자기 밖에의 어떠한 경계(境界)에, 다른 사람에, 그런 허물을 돌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한은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를 간들 어찌 내게 맞는, 도업(道業) 성취할 수 있는 도량(道場)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허물을 밖에서 찾는 한은 천당(天堂)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를 못할 것이여.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흡족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님 여러분들도 해제를 하고 오늘 다 댁으로 모다 돌아가시게 되는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선방(禪房)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하시지 말고, 바로 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시끄럽게 떠들고 모든 것이 내 마음과 같지 못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나간다면, 그 복잡한 세속(世俗),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세속, 가정, 사회가 온통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남편은 부처님이요, 아들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며느리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손자손녀는 남순동자(南巡童子)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을 지내다가 다음 또 여름철에 오셔서 방부를 들이고 또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정진하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법상(法床)을 내려가고자 합니다. (26분59초~51분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
고교(古敎), 고불(古佛)에 가르침이라는 것은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에 인(印)’을 가리키는 말,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다 /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白紙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3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진정한 신심(信心),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끈질긴 인내력으로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가 나타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오(無悟)라.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달음도 없다'

큰 의심(疑心)이 날라면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이 일어날라면은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된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 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허(鏡虛) 스님의 포구발심 기연(機緣), 경허 스님께서 우리나라 침체된 선풍(禪風)을 부흥(復興)했다.

(게송)춘종동해남비석~ / 진발심(眞發心)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었다’ 한 그러한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발심만 제대로 하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2. 11. 8. 19:21

 

 

((No.340))—1987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71분)

 

(1) 약 37분.

 

(2) 약 35분.


(1)------------------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하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꽃이 산전(山前)에 웃으니, 꽃이 산 앞에 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無生)을 말함이로다.

봄이 오면 울긋불긋 꽃이 피고, 또 가을에 오면 가을꽃들이 산에 모다 피는데, 그 울긋불긋 그 피는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그 진리(眞理)를 바로 누설(漏洩)한 것이다.
새가 숲속, 숲 밖에서 그 갖은 목소리로 모다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生]이 없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낱낱이—꽃이 피는 것, 온갖 색깔의 꽃이 피는 그 낱낱이 그 그것이, 크고 작고 노랗고 빨간 온갖 새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들이 낱낱이 스스로 무궁(無窮)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어.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무엇을 잡아 오건—꽃을 한 송이의 꽃을 들거나, 한 곡조(曲調)의 새의 노래를 붙잡거나 무엇을 얻어 오더라도 다 그 근본진리(根本眞理) 아닌 것이 없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0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심우송(尋牛頌) 법문(法門)을 경청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앞부분만을 들었습니다마는, 바닷물을, 그 넓고 끝없는 그 바닷물을 다 마시지 않고 바닷가에서 조끔만 손고락으로 찍어서 맛보더라도 ‘바닷물이 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부분만을 한 30분간에 걸쳐서 들었지마는, 그 30분 동안에 설(說)하신 조실 스님의 법문 속에 ‘우리가 참나를 어떻게 닦으며, 어디에서 찾으며, 왜 그것을 찾어야 한가’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으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인데 참나, 나의 불성(佛性), 그 ‘참나’ 그것을—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그놈은 생겨난 때가 없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윤회(輪廻)하면서 항상 그와 더불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와 더불어 같이 윤회를 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통을 받고, 같이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놈을 자각(自覺)을 하지 못하고 전혀 그것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렸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놈을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려 봤자 코밑에서, 콧속에서 뱅뱅 돈다’ 이러한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알기 쉽고 평범한 표현을 하셨지만,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씀을 하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코밑에서 뱅뱅 돌아’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낯, 얼굴을 통해서 낯바닥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그랬습니다.
눈 · 코 ‧ 입 ‧ 귀 모다 이런 것들이 붙어 있는 부분이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가장 그 중심이 코지요? 그 면문(面門)을 통해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위(位) 없는 참사람이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이렇게 임제 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전강 조실 스님은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오면서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증거로써 가장 뚜렷한 것은 ‘숨쉬는 것’입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알아볼려면 콧속에 콧김이 들랑날랑한가 안 한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콧속에 숨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숨이 딱 끊어지면 벌써 그것은 죽었다고 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도는 그 들랑거리는, ‘그렇게 말하면 그러면 콧속에 콧구녁으로 들랑날랑하는 그 공기가 그러면은 참나냐?’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참, 말도 안되지만.

하여간 눈을 통해서 모든 색깔을 판단하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알아보고, 코를 통해서 온갖 냄새를 알아보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분별하고, 몸뚱이를 통해서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느끼고, 생각을 통해서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분별(分別)하고, 그러한 놈.
그러한 놈인데, 설사 눈으로는 아주 의식(意識)을 잃어서 빛깔을 판단하지를 못하고, 귀를 통해서도 누구 말인지 뭣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생각이 몽롱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래도 콧구멍으로 쪼끔이라도 가는 숨이 드나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그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은 오계(五戒)와 불명(佛名)과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서 불명과 오계와 화두를 설(說)해 드리는 날입니다. 그전에는 이 일요법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그 의식(儀式)을 거행했습니다마는, 내나 같은 말을 한 날에 이중으로 중복을 해서 바쁜 세상에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아주 법회(法會) 때 오계와 화두를 설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혜월(慧月), 혜(慧)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계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고자 하고 지혜의 눈을 뜨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부처님의 계를 받아서 그것을 잘 가짐으로 해서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계는 오계(五戒), 십계(十戒)가 있고, 비구 250계(二百五十戒)가 있고, 비구니 500계(五百戒)가 있고, 또 대승계(大乘戒)에 있어서는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가 있고, 더 미세하게 나아가서는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있지만, 오늘 설(說)하고자 한 이 오계(五戒)는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오계를 잘 가지면 그밖에 어떠한 계도 다 잘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에는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가 있는데, 소승계는 몸으로 지켜. 몸으로 지키는 계고, 또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다.

예를 들어서 첫째 번에, ‘살생(殺生)을 하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했는데, 소승계에 있어서는 아무리 그 사람이 미워서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또 칼을 가지고 가서 죽일려고 아주 쫓아갔지만, 마지막 단계에 가서 딱 참고 죽이지 아니했으면 이건 소승계는 범(犯)한 것이 아닙니다. 실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안 했으니까. 그러나 대승계는 실지로 죽이지는 안 했어도 이미 마음속에 죽일려고 하는 마음을 냈으면 이미 살생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욕심을 내고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에 먹었다 하더라도 실지로 도둑질을 안 했으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아니여. 그러나 벌써 마음속에 훔칠 마음을 냈다면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어떠한 종류에 계목(戒目)이라 하더라도 다 이와 같아서, 소승계와 대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것과 마음으로 지키는 그 계(戒)의 차원(次元)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소승계를 설하시고 또 대승계를 설하셨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는 소승계(小乘戒)만 지키면 그것으로서 훌륭하게 계를 지킨다고 생각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고, 근기(根機)에 따라서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게 하고 나아가서는 대승계(大乘戒)까지도 아울러서 원만(圓滿)하게 지킬 수 있도록 구경(究竟)에 목적을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계를 받는, 또 이 계(戒) 설(說)함을 듣는 모든 형제자매들은 몸으로는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고, 마음으로는 대승계를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그렇게 받아서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오늘 계를 받으실 분은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는 것을 호궤합장(胡跪合掌)이라 그런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을 비롯해 모든 동물, 모든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그 모든 산목숨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윤회(輪廻)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오면서 어느 벌레, 어느 동물, 어느 사람 뱃속에 한 번 이상 다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다 우리의 선망부모고, 그 모든 중생 낱낱이 다 우리와 똑같은 귀중한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고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찌 차마 그 산목숨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방방곡곡에 모든 대소 사찰(寺刹)에서 일 년에 몇 번씩 그렇게 방생법회(放生法會)를 갖고, 또 전강(田岡) 조실 스님께서도 생존시(生存時)에 수백 관 수천 관의 모다 고기를 사서 한강에 모다 방생(放生)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면 그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限量)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내생(來生)에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평생에 병(病)을 앓고 또 단명보(短命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남에 물건을 주인의 승낙(承諾) 없이 갖지 말아라. 내 물건을 남에게 보시(布施)를 할지언정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남의 물건을 훔치면 한량없는 지옥고(地獄苦)를 받다가 내생에 다시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가난뱅이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왕궁(王宮)에 부귀(富貴)도 다 버리시고, 인행(因行) 때에는 당신의 처자권속까지라도 굶주린 호랑이에게 다 보시를 하시고 당신의 수없는 목숨도 배고픈 중생(衆生)에게 버리셨거든, 나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어찌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관계를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은 몸과 마음을 더럽혀. 그래서 사음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행히 사람 몸을 받게 되더라도 부정(不貞)한 아내,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가정의 파탄을 가져올 것이다.
금생(今生)에 부정한 아내나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그 하루도 편할 날을 살지 못한 그런 사람은 모다 과거 전생(前生)에 자기 자신이 그런 부정한 행실(行實)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금생에 그러한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에 행복을 잃고 파탄을 초래한 것이다.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하면, 당장 금생에 거짓말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면, 부부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형제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자식들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거여. 하물며 친구간이나 이웃이 어찌 그 사람 말을 믿을 것인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 몸을 받더라도 그 사람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를 안 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면은 당장 한 번 마시고 두 번 마시고 차츰차츰 그 중독(中毒)이 되면 안 마시고는 못 배겨.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침내는 그 술이 사람을 먹게 되아. 그래서 완전히 폐인(廢人)이 되어가지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해.
금생에도 그러려니와 그 술 마신 과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의 과보, 사람 몸뚱이를 받았다 하더라도 천치, 백치, 바보로 태어나서 사람이면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

이 다섯 가지 계.

첫째 번에 산목숨을 죽이면 왜 못쓰냐?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도를,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도(道)를 닦는 것은, 첫째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살생(殺生)을 하면은 자비심(慈悲心)을 끊어 버려. 자비종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까닭은 일체중생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재산을 다 보시(布施)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도 보시를 하고, 내가 도를 닦아서 얻은 모든 지혜(智慧)도 일체중생에게 베풀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데, 지금 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서야 어떻게 그런 복덕심(福德心)을 기를 수가 있겠는가. 복덕종자(福德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여.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도를 닦은 것은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그래서 지혜의 눈을 떠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는데, 사음을 해 가지고 몸과 마음을 더럽힌다면 나의 청정심(淸淨心)을 손상(損傷)해. 청정종자(淸淨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사음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고.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우리가 도를 닦아서 진리를 펴서 일체중생을 제도헐라면 진실(眞實)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해 버릇하면은 나의 진실종자(眞實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진실종자를 끊어 가지고 어떻게 도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불명(佛名)을 받고 불제자(佛弟子)가 되어서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어서 속히 지혜의 눈을 떠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一切衆生)으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데, 밤낮 술을 마셔 가지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겠느냐.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 사람은 마땅히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게 되면은 술이 취하게 되고, 술이 취하게 되면은 거짓말도 하게 되고, 사음도 하게 되고, 도둑질도 하게 되고, 살생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술도 하나의 음식물이지만 그것을 어리석게 먹으면, 그것을 먹어서 중독(中毒)이 되면 자기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고,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자기를 멸망(滅亡)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상 설(說)한 다섯 가지 부처님의 계(戒)는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바니 능(能)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聖)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켜 가질 바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연비(燃臂).

참회진언(懺悔眞言)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연비가 끝날 때까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안히 앉으세요.

오계(五戒)를 받고 그리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그 향(香)으로써 팔을 따끔하게 지진 그 순간 과거 무량겁에 지은 죄(罪)를 그 따끔한 그 찰나에 소멸(消滅)을 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앞으로는 다시는 범(犯)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벌 밀(蜜)에다가 실을 묻혀 가지고 크게 만들어서 팔에다가 세워 놓고 거기다 불을 질러서 훨훨훨 타들어 가 가지고 큰 흉터가 나도록 그렇게 뜨겁게 팔을 지졌습니다마는, 지금 오늘은 향불로 간단하게 지졌지만 각자 당인(當人)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처가 크게 나야만 죄가 소멸이 되고 또 맹세를 굳게 한다고만 생각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처음~36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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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계를 받았으니 이제 정식(正式)으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었습니다. 아까 몸으로 지키는 이 소승계(小乘戒)와 마음으로 지키는 그 대승계(大乘戒)를 우리는 다 같이 지켜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은 이 두 가지 계를 원만하게 잘 지킬 수가 있느냐?
참, 마음으로 지키는 계는 대단히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잘 지킬려고 해도 지킬려고 하는 생각 낼 때 벌써 범하게 되는 것이 이것이 대승계이기 때문에 참 지키기가 어려우나, 그래도 잘 지킬 수 있는 묘(妙)한 방법이 있어. 그것은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는 것이여.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이 무엇고?’ 한문(漢文)으로는 ‘시심마(是甚麽)’ 그러는데, 중국음(中國音)으로는 ‘씨 씀마’인데, 씨씀마, 시삼마란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 뭣고?’거든, ‘이 무엇고?’
'이 무엇고?'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사람들은 ‘이뭣고?’ 이렇게 간단하게 말을 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참선해 나가는 데에 화두(話頭)로써 ‘이뭣고?’라고 하는 경상도 말을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경상도 분이 아니라도 이 화두를 들으실 때는 ‘이뭣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것’이 무엇이냐? 그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가리켜서 ‘이것’이라고 하냐?”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알 수 없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항상 참구(參究)를 하는 것인데, 이 참구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지식과 따져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여.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世俗的)인 지식, 또 불교에 교리, 뭐 일체 철학적인 이론,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것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다 놔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그건 놔버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가 없지만 재미가 있건 없건, 또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 끌고... 사람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거든. 아까 ‘잃어버린 소[牛]를 찾는데, 잃어버렸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이 우리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 한, 바로 그 코밑에 뱅뱅 도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거여.
그걸 뭐 고인(古人)들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식(識)’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고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뭐 ‘진여(眞如)’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뭐 불교 그 경전 안에도 경(經)마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다르지만, 그러한 이름이 문제가 아니여. 그 실체(實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 볼라야 볼 수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는, 또 아무리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항상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우리와 같이 살고 있거던. 그놈.

이론(理論)도 그만두고 이름과 상(相)도 따질라고 하지 말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걸어가면서도 ‘이 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억울할 때에도 ‘이 뭣고?’

이렇게 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이 ‘이놈이 뭐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입으로는 ‘이 뭣고?’ 해도 속으로는 온갖 딴생각[別念]이 들끓고, ‘이 뭣고?’ 할 그 잠깐 동안은 ‘이 뭣고?’ 생각이 있지마는 일 분도 못 가서 잃어버리고 딴생각을 하게 되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아니면은 먹먹허고 그렇지 아니하면은 혼침(昏沈)이 오고, 혼침이 좀 없어질 만하면 또 호사난상(胡思亂想)이 일어나고.
참 참선(參禪)을 할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 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생 동안을 번뇌 아니면 망상, 잡념 속에 시달리고 살면서도 무엇이 잡념인 줄을 모르고 삽니다. 다행히 참선을 해봐야 ‘아, 우리의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고 마치 저 바다에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구나’ 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밤낮 번뇌망상과 희로애락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풍파(風波) 속에 놀아나고 있는 한은 우리의 죄업(罪業)은 끊임없이 지어지게 되고, 끊임없이 짓는 업(業)으로 말미암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를 끊고자 하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이 참 많고,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집안을 위해서 또는 이웃을 위해서 사회 국가를 위해서, 크게는 인류를 위해서 많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갑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많은 공헌을 세우기도 하고, 또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일을 하고 갔지만 진정 어느 일이 정말 자기(自己)를 위하는 일이고 진정으로 이 인류(人類)를 위하는 일이냐?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과학자가 어떤 연구를 해서 박사가 되고 그 연구 결과로 인해서 인류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하지만, 그게 다 별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데 조끔 편리하게 살도록 공헌을 한 것 뿐이지, 근본적(根本的)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편리하게만 할뿐 행복하지를 못했다.
행복하게 못하고 만 것쯤은 또 괜찮은데, 정말 그 많은 박사들이 연구한 그 과학이 인류를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과학을 발전을 시키지 않고 옛날식으로 농사짓고 채소 심어서 먹고 살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무서운 공포 속에 떨지 안 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세계가 언제 어떻게 찰나간에 잿더미가 되고 인류가 다 멸망하느냐? 하루 지내면 하루 지낸 만큼 그 위험도는 점점 증가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위기(危機) 속에서 이 위기를 막고, 막을 수 있고 또 설사 그런 위기가 도래(到來)한다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공포심 없이 이 몸뚱이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참선(參禪)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간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염라대왕이 자리에 일어나서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염라대왕이 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현신(化現身)이고, 다 불보살의 화현신으로서 나타난 보살 화현(化現)이기 때문에,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머지않아서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불종자(佛種子)인데 염라대왕이 그 앞에 합장배례를 아니할 리가 없거든.

그래서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아무리 해 갈수록 어렵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수활산요노전심(水闊山遙路轉深)이라’ 이 심우송(尋牛頌)에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끝없는 물, 멀고먼 그러고 험악한 산길,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가도 가도 한이 없을지언정, 갈수록 길이 더 험하고 어려웁다 하더라도 기어코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하는 방법은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그다음에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보통 가슴으로 다 호흡을 하는데—숨을 들어마실 때에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이, 하복부가 약간 볼록하게 나오도록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그 볼록했던 그 단전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또 숨이 다 나가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면 배가 차츰차츰차츰 볼록해지고 내쉬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고, 그저 호흡에 따라서 배가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한 것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면서 호흡을 하는데.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역시 코로 내쉬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또 머물렀다가, 또 한 3~4초에 걸쳐서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쉴 때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 ‘이 뭣고?~~~’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안 해도 되어.
알 수 없는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없어지지 아니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고대로 거각한 채로 호흡만을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그러다가, 몇 번이고 숨을 내쉬었다 들어마셨다 하는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렇게 하다가 그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別念]이 들어왔다 하면, 그때 다시 또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한번 또 그렇게 챙기는 거여.
나중에는 한 번 아침에 들은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딴생각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이 뭣고?~~~’ 그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탁 있으면, 뭐 점심 먹을 때까지도 새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상관이 없어.

그렇게까지 될라면 상당히 노력을 해야 그렇게 되고,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뭐 망상(妄想) 때문에 못하느니, 무슨 혼침(昏沈)이, 잠이 와서 못하느니 한 것은 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충분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심, 이 세 가지 이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하고 마는 것입니다.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호되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이여. 위(位) 없는 참사람. 계급(階級)이 없는,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이런 위(位), 계급이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다 사람이면 사람 사람마다 그 얼굴이 있고 모냥이 있는데, 이 계급이 없는 이 참사람은 형단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형단이 없기 때문에 볼라야 볼 수가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가 없고 알라야 알 수가 없어.
심상출입면문전(尋常出入面門前)이여. 평상시(平常時)에 항상 우리의 면문(面門)을 통해서, 얼굴을 통해서 출입(出入)을 하더라.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能)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버리면, 그 형단(形段)이 없는, 면문으로 출입하는 그 형단이 없는 그놈을 깨쳐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그 번쩍하는 그 번갯불과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을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번갯불을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흐르는 물소리를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밟을 수 없는 그 번갯불과 그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버릴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 또 진즉 오계를 받았으되 본의 아니게 오계를 파(破)하신 분은 오늘 다시 새로 받았으니 새로 태어난—연세야 몇 살이 되셨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 새로 부처님 제자로,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몸으로 이 순간부터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서 금생(今生)에 결정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요달(了達)하시기를 바랍니다.

불명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로 모다 받아 가시고, 지난번, 저지난번, 모다 작년, 진즉 불명을 모다 신청을 하고 또 화두도 신청을 하고 그래놓고도 아직까지도 그 찾아가지 아니하신 분은 오늘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시절이 이렇게 어느덧 가을이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더웁지도 춥지도 않는 아주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국(時局)은 매우, 모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불자(佛子)는 오계(五戒)를 잘 받아서 실천을 하시고, 어쨌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어려운 처지를 당하더라도 항상 불자라고 하는 긍지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벗 삼고, 화두를 스승 삼고, 화두를 나침판을 삼고, 화두를 등불 삼아서 하루하루를, 또 일초 일초를,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해서 풍파(風波)가 심할수록에 그 배를 탄 사람은 정신을 차리듯이, 그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서로 화합(和合)을 해서 일치단결해 가지고 각자 자기의 부서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면서 그 풍랑(風浪)을 이겨내듯이,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모두가 다 단합하고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애끼고 서로 도우며 서로 용서(容恕)하며, 이러한 난국(亂局)을 기해서 이 어려운 때를 잘 이용을 해서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얻고, 나아가서는 모두가 그렇게 화합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전 국민이 단합이 되고, 전 국민이 단합이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가 되어가지고 인류를 갖다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역군(役軍)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그 제자(弟子)로서, 불교의 진리의 사도(使徒)로서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로되  호리유차유천리(毫釐有差謬千里)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요, 저 삼거리 마을 속에 서로 ‘형님, 형님’ 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다. 저 시끄러운 장바닥에 그 가게 앞에서 그 ‘아자씨, 아자씨’, ‘아부지, 아부지’ 하고 서로 알고 인사하는데.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다. 한 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곧 여기에 있더라.
아무, 불법(佛法)이 뭣인지, 참선(參禪)이 뭣인지, 뭐 깨달음이 뭣인지 그런 것도 모르는 저 거리에 사람들. ‘형님, 형님’ ‘아우, 아우’ 하고는 아주 평범한 그 무식한 그런 사람들 서로 인사할 줄 아는 그놈, 또 시끄러운 장바닥에 모다 가게 앞에서 모다 서로 주고받고 서로 그러한 사람들도 서로 다 안다 그 말이여.
근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모르지마는 다 그 사람들이 낱낱이 다 가지고 있고, 날로 그놈을 쓰고 있고 그놈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꿈에도 아지를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36분36초~1시간11분12초) (끝)





[법문 내용]

(게송)화소산전설천기~ /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 /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계(戒)는 계기(戒器), 정(定)은 정수(定水), 혜(慧)는 혜월(慧月)에 비유 /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 /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 소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고,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

산목숨을 죽이면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지고, 도둑질을 하면 복덕종자(福德種子)가 끊어지고, 사음(邪淫)하면 청정종자(淸淨種子)가 끊어지고, 거짓말을 하면 진실종자(眞實種子)가 끊어지고,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智慧種子)가 끊어진다.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모두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된다 / 화두 드는 방법은—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는데—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생사해탈을 하려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참나를 찾는 일 /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다 /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만다 / 신심과 분심과 의심,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한다.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은 오늘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난 것.
(게송)삼가촌리형형례~ /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하지 말라.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전강 조실 스님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혜(慧)는 혜월(慧月)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계(戒)의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참선(參禪)을 하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방법(자세와 단전호흡과 화두 거각)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2. 3. 7. 11:13

 

 

(No.227)—1983년(계해년) 성도재 법회(82.12.08.음) (51분)

 

(1) 약 27분.

 

(2) 약 25분.


(1)------------------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한데  천년도핵장청매(千年桃核長靑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하니, 한 번 밝은 별을 보고 꿈이 문득 돌아오니,
천년도핵(千年桃核)이 장청매(長靑梅)로구나. 천 년 묵은 복숭아씨에서 푸른 매화가 자랐구나.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비록 이 매화가 국의 맛을 고르지는 못하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로구나. 일찍이 장군(將軍)에게 주어서 목마름을 그치게 했느니라.


오늘은 계해년 섣달 초여드레,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통하셔서 성도(成道)를 하신 날입니다. 불교의 사대명절(四大名節) 가운데에 제일 의(義) 깊은 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사월 초파일(四月初八日), 그리고 부처님께서 왕궁을 버리시고 출가하신 2월 17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도통(道通)하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신 오늘 섣달 초여드레, 그리고 부처님께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신 2월 15일, 이렇게 해서 사대명절이라 하는데,
사월 초파일은 남녀노소와 승속과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사월 초파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작 부처님께서 도(道)를 통해 가지고 성불(成佛)을 하신 납월팔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또 출가를 하셨다 하더라도 납월팔일 이 성불을 하시지 못했다면, 성불하신 날이 없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불(成佛)을 하셨기에 부처님의 탄생이 참으로 뜻이 있는 것이며, 출가하신 것도 뜻이 있는 것이며, 열반하신 것도 또한 뜻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을 하셔 가지고 ‘19세에 출가를 하셨다’ 어떤 경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 데도 있고, 또 경전에 따라서는 ‘29세에 출가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1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12년 동안을 고행(苦行) 정진을 하신 끝에 30세에 성도(成道)를 하셔서 80세에 열반하셨다’ 『반니원경(般泥洹經)』 이런 경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고, 팔리어 『열반경(涅槃經)』이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나 『유부잡사(有部雜事)』 같은 경전에는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 동안을 고행하시다가 35세에 성도하셔 가지고 80세에 열반에 드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북전(北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계통에서는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 고행하셔 가지고 30세에 성도하셨다’고 이렇게 옛날 우리나라 옛날 스님네는 죽 그렇게 믿고 내려왔는데,
근세에 와서 많은 불교학자들이 여러 경전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이렇게 해서 연구한 결과, ‘29세에 출가해 가지고 6년 동안 고행을 하셔서, 35세에 성도하셔 가지고 80세에 열반했다’고 하는 그 경전의 말씀이 여러 가지 경전과 여러 가지 점으로 비추어 볼 때에 더 타당성이 있다고 그렇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을 고행을 하셨건, 2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6년을 고행하셨건, 35세에 성도(成道)를 하셨느냐 30세에 성도하셨느냐, 그것은 경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꼭 어느 것이 옳다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논란을 하고 시비를 할 것이 못됩니다.
이것은 불교학자나 사학가들이 연구할 문제고, 우리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 35세 설(說)이나 30세 설에 너무 지나치게 시비를 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서 수행을 하셨으며, 무엇을 깨달으셨으며, 깨달으신 결과 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셨느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점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소중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그때 당시 널리 알려진 선인(仙人)을 찾아갔습니다. 지금 말이면 큰 도사(道士)를 찾아갔는데, '알라말라'라고 하는 도인을 찾아가서, 그 도인 밑에 제자가 되어 가지고 그 알라말라 도사의 지시에 따라서 정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수행을 해서 그 도인이 이르른 무소유(無所有)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도인은 쾌히 인가를 하고 길이 자기의 제자가 되어 주기를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스승보다도 더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마음에 만족을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 스승은 '우타카'라고 하는 도사인데 그이를 찾아가니까 그 도인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서 수행을 쌓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 우타카 도사 밑에서 위법망구적으로 도를 닦아서 그 스승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은 매우 훌륭한 제자를 만났다고 흡족하게 생각했고, 또 자기 밑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지만 부처님은 거기에서도 당신의 마음에 흡족함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 두 선인(仙人), 두 스승이 당신의 궁극의 목적이 아니냐’ 하고 판단을 내렸냐 하면, 그 두 신선이 참으로 종교적 진리,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체득치 못했다’고 부처님께서는 판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무소유(無所有)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지 않고 무심(無心)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게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는 것은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가 가지고, 그것도 역시 자기의 모든 생각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이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의식을 완전히 초월해 버리는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무심한 경계에 들어가서 그러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그것 자체만으로서는 이것을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판정이 되셨기 때문에 또 그 우타카라고 하는 두 번째 스승도 버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지금의 붓다가야(buddhagayā) 근처에 니련선하(尼連禪河) 가까이에 있는 숲속에 들어가서 가장 도 닦기에 알맞는 장소를 선택해 가지고 한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서, 떠억 동쪽을 향해서 자리를 잡고서,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고 도를 닦기 시작하는데 마왕(魔王) 파순(波旬)이, 악마의 무리들이 갖은 방법을 써 가지고 부처님의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쳤습니다.

처음에는 무력으로써 그것을 방해를 치고, 차크라라고 하는 그 뿔이 돋친 쇠뭉텅이 그런 것을 던져 가지고 그놈에 맞으면 아주 박살이 나는 그러한 것을 모다 부처님한테 던지기도 하고, 큰 바위산을 무너뜨려 가지고는 그냥 바위산을 부처님한테로 미틀어 버리기도 하고, 온갖 미친 코끼리를 몰아 가지고는 부처님을 갖다가 막 해꼬자할려고 하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했지만,
차크라는 부처님 머리 위에 와서는 꽃송이가 되어 가지고, 꽃송이로 얽어진 일산(日傘)대가 되어 가지고 부처님을 받들어 드리게 되고, 큰 바위산을 갖다가 미틀어서 부처님한테 미틀은 것이 그것이 또 꽃이 되어 가지고 아름다운 꽃이 되어서 떨어지고, 도저히 완력(腕力)으로서는 어찌 해 볼 수가 없게 되자, 그 자기의 아름다운 딸 셋을 갖다가 이쁘게 단장을 해 가지고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부처님을 현혹(眩惑)할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 부처님을 갖다가 방해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세 딸이 가서 갖은 아양을 떨고 유혹을 했지만, 그러한 짓은 마침내 연꽃 줄기로 산을 부술려고 한 거와 같았으며, 손톱으로 바위산을 파내려고 하는 거와 같았으며, 이빨로 쇠를 씹어서 가루를 만들려고 한 거와 같아서, 자기의 힘만 소모가 되었을 뿐 조금도 부처님을 해롭게 하고 방해를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왕 파순이의 무력과 완력으로 당신을 온갖 방법으로 해롭게 해 왔지만, 내가 이러한 마구니와의 싸움에서 져 가지고 사는 것 보단 차라리 이 마구니와 싸워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러한 무력의 침범과 그러한 미녀들의 유혹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것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실로 수도(修道)의 마음을,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내면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악마(惡魔)와 투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비단 삼천년 전의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출가해서 도(道)를 닦으려는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속가에서 도를 닦으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발심을 해서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날부터 직접 간접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나의 도(道)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와 투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사람이 도(道)를 닦아서 도를 이루게 되면 마구니의 무리가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들썩들썩해서 넘어질려고 하기 때문에 마왕(魔王)들은 자기의 영토가 무너지고, 자기의 궁전이 무너지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들까지 설 땅이 없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 도 이루는 것을 방해 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20분15초)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마구니와 싸워서, 그 마구니는 무력(武力)으로 오는 마구니와 그 미인(美人)이 되어 가지고, 미인이라고 하는 표현은 순경계(順境界), 부드러운 그러한 방법으로 나를 갖다가 현혹해 오는 그러한 마구니, 실지는 무력으로 닥쳐오는 마구니보다도 이러한 부드러운 방법을 써서 나를 가장 위하고 나를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마구니는 참으로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무력의 마구니나, 부드러운 마구니와 싸워서 지면 그대로 그 마구니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마구니와 끝끝내 싸워 가지고 내가 이기면 출세간(出世間)의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마구니가 도리어 귀화해 가지고 나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며, 나를 방해 치던 모든 마구니의 권속들은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나의 동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나를 방해 치고 못살게 굴고 잠시도 나의 마음 편안해질 기회를 주지 않던 그런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가지고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라 가지고 도를 깨달으신 날인데,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대단히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깨닫고 나면 그 경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사해탈한다. 생사 속에서 생사가 없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막연하게 이렇게들 말을 하고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치(理致)와 지혜(智慧), 이지(理智)가 둘이 아닌 세계다. 또는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 생각할 뿐이다. 또는 자수용(自受用)하는 스스로 당신만이 맛볼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법락(法樂)이다. 또는 해인삼매(海印三昧)다, 여여실실(如如實實)이다' 그 깨달음의 경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마는.

'무진평등(無盡平等)한 그 진리가 자기 육신에 가득차 가지고 가없는 다함이 없는 적멸(寂滅)의 선(禪)의 낙(樂)이 넘쳐흐른다. 그 적멸한 채로 그냥 일체가 다 그 적멸한 경계 속에 다 돌아가는 것이며, 그 침묵한 채 더할 나위 없는 그 훌륭한 정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입을 벌려서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그 적멸의 법락 속에 있는 바로 그 침묵의 그 상태에서 최고의 법(法)이 여지없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적적(寂寂)한 그 침묵 속에서 대웅변이며, 대설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26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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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그러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신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최고의 진리, 영원한 진리, 영원히 생사 없는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일러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사유(思惟)를 하실 때에 마왕(魔王)들이 나와서 "당신이 혼자 깨달랐으면 그만이지, 그것은 누구에게 말해봤자 아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공연히 입을 벌려서 그 법을 설해봤자 입만 아프고 피로할 뿐이지 아무 성과를 거둘 수가 없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마구니들이 부처님을 갖다가 행여나 법을 설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깨달은 사람이 나올까봐 그렇게 방해를 쳤습니다.

그때 천상에서 또 부처님께 여쭙기를, "이 많은 중생 가운데에는 정법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방편(方便) 따라서 법을 설하시면 차츰 근기(根機)가 수승해지면 반드시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다 중생의 근기 따라서 방편을 설하셔서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소승법으로부터 중승법, 대승법, 그래 가지고 최상승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설해 가지고 마침내는 위없는 법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방편문을 열어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 가지고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셨습니다.

'화엄경은 입을 열어서 설하신 경전이 아니고, 최초에 부처님이 성불하시자마자 침묵한 가운데에 설해진 경전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들으라고 설하시기 보다는 중생의 근기(根機) 맞춰서 설해진 경전이 아니고, 오직 자내증(自內證)의 경전, 당신이 깨달은 바를 고대로 침묵 속에서 설해졌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셔 가지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으되, 실지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그 적멸하신 채 그 침묵 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일부분(極一部分)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根機) 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 따라서 조금 열어 보여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것은 그 일부 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그 위대한 법(法)은 온 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달 ·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이며,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돌아오면 다시 뿌리로 다 돌아가는 이러한 자연 현상(自然現象)과, 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고 구름이 모았다가 흩어지는 모든 현상, 또 이 사람과 동물들이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런 현상 모든 것이, 모든 이 천상계가 이루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또 변질이 되어 가지고 무너져버리는 모든 현상이, 있는 고대로 이것이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로병사요, 성주괴공이요, 무상하고 의지할 것 없는 꿈이요,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헤매는 중생은 바로 그것들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현장이지만,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진리를 깨닫고 보면 1초 전의 생사요, 지옥이요, 고해(苦海)가 바로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부처님의 끝없는 진리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숙세에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기에, 깊은 숙연을 맺었기에 이 무상(無常)한 오탁악세(五濁惡世)요, 생사의 윤회의 바다 속에서 최고의 위없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정말 이 세계는 사방에서 불이 훨훨 타고 있고, 지금 타 들어오고 있고, 우리도 그 불에 의해서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위경(危境)에 놓여 있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 사람에게는 훨훨 타는 불은 나로 하여금 해태(懈怠)를 부릴 수 없게 해주는 스승의 불보살(佛菩薩)의 채찍이요, 인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핍박해 오는 모든 괴로운 조건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해태를 부릴 수 없고, 한 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의 거룩한 채찍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발심(發心)을 한 사람과 발심을 못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든 것들이—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찰나간(刹那間)에 어제의 마구니는 정법을 수호하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하고,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원수는 나의 도반(道伴)이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영원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해서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일전(一轉)해서 무상대각(無上大覺)으로 변함에 있어서이겠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견성성불하신, 불교 4대명절 가운데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이해서 재발심(再發心)하고 새로운 각오로써 자기의 오늘날까지의 모든 것을 재검토하고, 자기의 신앙과 자기의 신심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해서 진정한 신심으로 새 출발을 해야 할 줄 생각을 합니다.(39분19초)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모든 현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심(發心)을 해서 진정한 수행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함으로써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끝없이 방황을 하고, 깨달은 사람은 맑게 닦아 놓은 거울과 같아서 일체 경계가 여지없이 그 거울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빨간 것이 오면 빨간 상(像)이 거울 속에 비추고, 노란 것이 나타나면 노란 것이 그 거울 속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지없이 청황적백(靑黃赤白)이 나타나건만 거울 자체가 빨개지는 것도 아니고, 한번 노란 것이 거기에 비추어졌다고 해서 거울 자체가 노란 거울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어느 전법게(傳法偈)에도, 『경계 따라서 마음이 전(轉)하지만[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그 굴르는 곳에 실로 그윽하다. 일체 경계를 만나되, 바로 거기에서 성품을 인득(認得)한다면[隨流認得性], 기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無喜亦無憂]』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소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있으면서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처음으로 정법을 믿는 단계인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현실적으로 볼 때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 생사 없는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우리는 올바른 수행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올바르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 생사 없는 진리를,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생사 없는 이치를 일단은 보아야 마침내는 그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때에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믿기도 대단히 어려웁고, 또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는 또 어렵고, 또 그 이치를 깨달라 가지고서도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까지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놓고는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성도재(成道齋)를 맞이해서 이러한 말세(末世)에 태어났으면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행하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날을 기해서 다시 한번 자기를 재검토하고, 이 시간 이후로 진정으로 명실공히 참된 수행인이 되어서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생사 없는 진리의 세계에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약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니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천상천하(天上天下), 하늘 위 하늘 아래 부처님 같은 분이 없어.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시방세계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과 견줄 사람이 없더라.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바를 내가 다 보아도, 모든 것이 부처님과 같은 분이 없더라.(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은 저 창공에 수천만 개의 별 속에 휘황찬(輝煌燦) 밝은 달과 같은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달은 어떠한 별과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크고 뚜렷하고 밝듯이, 부처님의 존재는 하늘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하늘이며, 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이며, 왕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왕이라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들은 그 다행하고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26분46초~51분2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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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견명성몽변회~’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권 3칙 '오도(悟道)' 취암종(翠嵓宗) 게송 참고.
[참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있는 내용으로,
조조(曺操)가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 행군 도중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고통이 아주 심했는데, 이때 조조가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며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저 앞에는 넓은 매실나무 숲이 있는데, 그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잠시만 참고 힘을 내자.”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고 입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게 되었다 한다.

육조 시대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있는 내용으로,
진(晉)을 세운 사마 염(司馬炎)이 오(吳)나라를 공격할 때 길을 잘못 들어 헤매어 식수가 바닥이 났고,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병사들은 갈증이 심하여 더 이상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염은 문득 꾀를 내어 말하기를 “여러분 조금만 참고 가면 저 언덕 너머에 매화 숲이 있소. 그 곳에 가면 매실이 가지가 휠 정도로 매달려 있소.”
매실이란 말을 들은 병사들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여 갈증을 잊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반니원경(般泥洹經) ; 2권. 역자 미상.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과 같은 것으로 다른 번역본.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은 서진의 백법조(白法祖) 번역으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일을 기록한 것. 『장아함유행경(長阿含遊行經)』과 같다.
*설(說) ; 견해나 주의, 학설 따위를 이르는 말.
*선인(仙人) ; 도를 닦는 사람.
*도사(道士) ; ①불도(佛道 :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닦아 깨달은 사람. ②불도를 닦는 사람. ③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④어떤 일에 아주 익숙하여 썩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선정(禪定) ;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āna), 팔리어 자나(jhāna)의 음역(音譯)인 선(禪)과 그 의역(意譯)인 정(定)이 합하여 생긴 말. 선(禪)은 정(定) · 정려(靜慮) · 기악(棄惡) · 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한다.
6바라밀의 하나. 마음 고요한 내관(內觀). 마음의 번뇌를 가라 앉히는 것. 정신 집중의 수련. 좌선에 의해 몸과 마음이 깊게 통일 된 상태.
*멸진정(滅盡定) ; ①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
②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聖者)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상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붓다가야(buddhagayā) ;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네란자라(nerañjarā) 강변에 있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니련선하(尼連禪河) ; 네란자라(nerañjarā) 강. 중인도 마갈타국 가야성의 동쪽에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항하(恒河, 갠지스 강)의 한 지류. 석가모니께서 6년 고행하던 끝에, 이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Sujata)가 바치는 유미죽(乳糜粥)을 드시고 붓다가야(Buddha-Gayā)로 가서 보리수 아래에서 49일 동안을 정진을 하셔 성도하였다.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미틀다 ; ‘밀뜨리다(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갑자기 세차고 힘있게 밀어 버리다)’의 사투리.
*해꼬자 ; 해꼬지. 해코지(害코지)—남을 해치고자 하는 짓.
*현혹(眩惑 아찔할·어두울 현/미혹할·어두워질 혹) ; 마음이 흐려지도록 무엇에 홀림. 또는 그렇게 되게 함.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출세간(出世間) ; 세속의 번뇌를 떠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름.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시킨 깨달음의 심리 상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일전(一轉) ; 마음이나 사태가 아주 달라지거나 바뀜.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식(唯識) ; 모든 차별 현상은 오직 인식하는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일체는 오직 마음 작용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뜻.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 전식득지(轉識得智).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열반)의 청정한 지혜—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에서.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 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지(智) ; ①산스크리트어 jñāna 팔리어 ñāṇa 모든 현상의 이치를 명료하게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이해. 지식. ②산스크리트어 jñāna 깨달음. 깨달은 부분의 지혜. 완전히 아는 것. ③팔리어 paññā 지혜. 혜(慧).
*자수용(自受用) ; 깨달음의 경지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즐김.
*법락(法樂) ; 불법(佛法)으로 말미암아 얻는 즐거움. 법열(法悅), 법희(法喜)라고도 한다. 불법을 들음으로써, 알아감으로써, 실천함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 진리[法]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즐거움[樂].
*해인삼매(海印三昧) ;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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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큰 깨달음.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다.

[참고]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자내증(自內證) ;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 자신이 직접 체득한 깨달음. 스스로 체득한 내면의 깨달음. 자내소증(自內所證), 자심내증(自心內證).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 ;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법문.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 : 寂)과 동(動 : 光)의 본래(本來 : 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絶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경(危境 위태하다·위태롭다·불안하다·두려워하다 위/지경·경계·경우·처지 경) ; 위태로운 처지(虛地)나 지경(地境).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전법게(傳法偈) ; 선가(禪家)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法)을 전(傳)하는 내용의 시[偈].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게송) ‘천상천하무여불~’ ; 찬불게(讚佛偈).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본생경(本生經)』에서 말하기를, 아주 먼 과거에 저사(底沙)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 두 사람의 보살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석가(釋迦) 보살이라 했고 또한 한 사람은 미륵(彌勒) 보살이라 했다.

어느날 저사불께서 두 보살을 관찰해 보시니, 지혜의 면에서는 미륵 보살이 앞서 있으나 중생 교화의 면에서는 석가 보살이 앞서 있어서, 저사불은 석가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이루게[成佛] 하기 위하여 설산에 올라가 보굴(寶窟) 속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 火定)에 드셨다.

이때 석가 보살이 산에 올라가 약을 캐고 있었는데, 저사불께서 보굴 속에 앉아 화광삼매에 들어 밝은 광명을 내뿜는 것을 보자, 그 거룩한 모습에 어찌 할 수 없어, 들었던 발을 내려놓고 또 다른 발을 들어서 걸어가지를 못하고 한 발을 들은 채로 합장하고, 환희하며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우러러 뵙되 잠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7일 낮과 7일 밤을 있었다.
여기에서 그 칠일칠야(七日七夜) 시일이 지나가면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으신 이 없으시고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서도 견줄 이 없도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존재하는 것, 내 모두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그 어느 것도 부처님에 비할 바 아니네.

이 게송을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다해서 찬불게(讚佛偈)라 하는데, 7일 7야 동안 세존(世尊)을 자세히 관하되[諦觀] 조금도 눈을 깜박이지 않으시니, 이로 인해 아홉 겁(九劫)을 뛰어넘어 91겁 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를 얻으셨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4권) '初品中菩薩釋論第八' 참고. 『전등록 2』 (동국역경원) p133 참고.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법문 내용]

(게송)일견명성몽변회~ / 섣달 초여드레,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통하셔서 성도(成道)를 하신 날. 불교의 사대명절(四大名節) 가운데에 제일 의(義) 깊은 날 / '알라말라', '우타카' 부처님 깨닫기 전의 두 스승 / 붓다가야(buddhagayā) 근처에 니련선하(尼連禪河) 가까이에 있는 숲속에서 수행 /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 /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그렇게 해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다 / 불법(佛法)의 위대성 /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

①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있으면서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처음으로 정법을 믿는 단계 / ②올바르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 생사 없는 진리를,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 ③생사 없는 이치를 일단은 보아야 마침내는 그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때에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게 되는 것.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다.

(게송)천상천하무여불~ /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서 수행을 하셨으며, 무엇을 깨달으셨으며, 깨달으신 결과 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셨느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점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소중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실로 수도(修道)의 마음을,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내면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악마(惡魔)와 투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무력의 마구니나, 부드러운 마구니와 싸워서 지면 그대로 그 마구니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마구니와 끝끝내 싸워 가지고 내가 이기면 출세간(出世間)의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마구니가 도리어 귀화해 가지고 나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며, 나를 방해 치던 모든 마구니의 권속들은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나의 동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나를 방해 치고 못살게 굴고 잠시도 나의 마음 편안해질 기회를 주지 않던 그런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가지고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라 가지고 도를 깨달으신 날인데,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대단히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깨닫고 나면 그 경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사해탈한다. 생사 속에서 생사가 없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막연하게 이렇게들 말을 하고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셔 가지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으되, 실지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그 적멸하신 채 그 침묵 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일부분(極一部分)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根機) 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 따라서 조금 열어 보여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것은 그 일부 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그 위대한 법(法)은 온 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달 ·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이며,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돌아오면 다시 뿌리로 다 돌아가는 이러한 자연 현상(自然現象)과, 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고 구름이 모았다가 흩어지는 모든 현상, 또 이 사람과 동물들이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런 현상 모든 것이, 모든 이 천상계가 이루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또 변질이 되어 가지고 무너져버리는 모든 현상이, 있는 고대로 이것이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로병사요, 성주괴공이요, 무상하고 의지할 것 없는 꿈이요,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헤매는 중생은 바로 그것들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현장이지만,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진리를 깨닫고 보면 1초 전의 생사요, 지옥이요, 고해(苦海)가 바로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부처님의 끝없는 진리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정말 이 세계는 사방에서 불이 훨훨 타고 있고, 지금 타 들어오고 있고, 우리도 그 불에 의해서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위경(危境)에 놓여 있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 사람에게는 훨훨 타는 불은 나로 하여금 해태(懈怠)를 부릴 수 없게 해주는 스승의 불보살(佛菩薩)의 채찍이요, 인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핍박해 오는 모든 괴로운 조건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해태를 부릴 수 없고, 한 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의 거룩한 채찍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발심(發心)을 한 사람과 발심을 못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든 것들이—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찰나간(刹那間)에 어제의 마구니는 정법을 수호하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하고,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원수는 나의 도반(道伴)이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영원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해서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일전(一轉)해서 무상대각(無上大覺)으로 변함에 있어서이겠습니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모든 현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심(發心)을 해서 진정한 수행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함으로써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믿기도 대단히 어려웁고, 또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는 또 어렵고, 또 그 이치를 깨달라 가지고서도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까지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놓고는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부처님 같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