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76~300)2023. 4. 16. 21:06

(No.286)—1985년(을축년) 성도재법회(85.12.08.음) (43분)

 

약 43분.


약문여래본기인(若問如來本起因)인댄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여래(如來)가 본래 일어나는 인연을 물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본래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여래가 본래 일어나는 것, 여래(如來)는 부처님인데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부처님이 아니라, 본래 오시되 오신 바가 없고 가시되 가신 바가 없는 그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이여.
그 '본래 법신으로서의 그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그 도리를 물을 거 같으면,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여. 그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면 벌써 천진(天眞)을 상실(喪失)한다.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원상이다. 원래 둥그런 것이다.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이요, 모든 부처도 서로 보지를 못하고 가섭도 전할 수가 없다.
원상(圓相)이니 비원상(非圓相)이니 벌써 그것을 표하면, 그렇게 해서 표적을 하면 벌써 무명(無明)의 함정에 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여. 벌써 그것을 깨달랐느니 못 깨달랐느니, 무엇을 일러서 깨달랐다. 깨달라서 부처가 되고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나왔다느니 벌써 깨달랐다고 이르면 벌써 누진(漏塵)에 떨어진 것을 면치를 못할 것이다.


오늘은 을축년(乙丑年)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입니다.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어떻게 하면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느냐?' 그 생사해탈하는 그 길을 깨닫기 위해서 훌륭하다는 여러 스승을 찾았습니다.
찾아가서 그 스승 밑에 수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단 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의 인가를 받고 그 스승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법을 이어받을 것을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으로써 만족하시지 않고 그것이 구경(究竟)에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더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또 그 스승 밑에 가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또 도를 수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많은 스승을 찾았고 수없이 많은 스승을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히말라야 산속에 찾어볼 만한 모든 스승을 다 찾어보고 다 해봤지만 그것으로써 마침내 만족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 앉아서 「내가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에는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한 그런 서약을 하고서, 결심을 하고서 스스로 도(道) 닦는 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욕개지식문전로(欲開只識門前路)인대는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인디  고금의쇄기다인(古今疑殺幾多人)고
나무~아미타불~

문 앞에 길, 문 앞에 길. 집집마다 자기 집 문 앞에서 시작한 길이 모두가 다 장안(長安)으로 통하는 것이여. 서울로 다 통해.
어느 깊은 산골짜구, 어느 촌에 있는 조그만한 오두막살이라 하더라도 문밖에 나가면 그 길이 결국은 상감마마가 계신 서울로 통하는 길인데, 그 길이 결국은 어디로 가던지 통하지만 가장 바로 가는 길,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른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돌아서 가기로 하면 북쪽에 있는 서울을 가는데 남쪽으로 가더라도 저리 저리 돌고 돌아서 간다면 못 갈 배는 아니지만,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좋은 길은 그 많은 길 가운데에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여. 온 몸뚱이가 전신이 다 이 병(病)이요, 전체가 다 이 약(藥)이다 그 말이여.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이여. 온 세계가 전부가 참[眞]이요, 온 세계가 바로 띠끌[塵]이더라.
길, 길이 다—서울을 바로 안다면 어디를 어느 곳을 향해서 가거나 서울로 통하는 것이고, 잘못 가면 어디를 가나 그 길이 전부가 다 잘못된 길이여.

이 바른길을 알기 위해서 깨달음을 향해서 수많은 남녀노소가 이 깨달음을 향해서 길을 찾고 있는데, 그 자기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하고 고생을 하고—말을 아니한다든지, 밥을 굶는다던지, 잠을 안 잔다던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한다던지, 참 그 애쓰는 모습도 가지가지고 방법도 천 가지 만 가지지만, 이것이 모다 그 바른길을 찾기 위한 한 몸부림이고 애쓰는 것이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또는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 때문에 깨달음을 찾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걸 의심하다가 죽었느냐?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면 더 나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을까?' 이래 가지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한량없는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불(佛), 부처님과 조사의 편안한 집이요, 모든 성현에 걸어가는 길이요, 한량없는 중생이 떠받드는 바고, 만세(萬世)에 향해 나갈 길이고, 삼계(三界)에 근본이여.
근본이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그것 때문에 출세(出世)하셨고, 그것 때문에 법(法)을 전하고 받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그 한 일을 위해서 출가도 했고, 그 한 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이 추위에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또 법회에 참석을 하시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그랬어. 꼭두각시의 근원이다.
어째서 ‘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꼭둑각시, 몽환(夢幻)의 근원이냐 하면 그 여읠 것을 여의어 버리면, 그 환상이라 하는 것을 여의어 버리면, 참으로 바로 여의어 버리면 환(幻) 위에다가 무슨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세울 것이냐? 또 그 보내 버릴 것을 보내 버리면 공(空) 가운데에 다시 공(空)을 용납할 것이 있겠느냐?

우리가 번뇌와 망상, 모든 그런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버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 버릴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새로운 번뇌가 일어나고 새로운 몽환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여. 또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그런 번뇌와 망상을 보내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진공(眞空)으로 맨들려고 비울려고 하기 때문에 그 비울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오히려 비지를 못해.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망상을 버릴려고 하다가 새로운 망상을 일으키게 되고, 우리의 마음을 비게 할라다가 오히려 공(空) 가운데에 새로운 공(空)이라고 하는 소견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은 애써서 도를 닦고 애써서 정진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바른길을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버릴려고 애쓰다가 새로운 번뇌 속에 파묻히게 되고, 마음을 비울려고 하다가 오히려 마음은 비기 커녕은 점점 무서운 망상을 생각 속에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을 깨끗이 할려고 하다가 깨끗이 할려고 하면서 그 흙탕물이 빨리 말가지게 하기를 바랜 사람이 자꾸 진흙을 타면서 내휘저은 거와 같애. 차라리 가만 놔두면 그 제절로 말개질 텐데 빨리 말개지기를 바래 가지고 자꾸 손을 넣어서 휘저으면 점점 흙탕물만 더 일어나고 마는 것이여.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그러다 보면 온갖 망상도 일어나고 혼침도 오고 그러지만, 그 망상이니 혼침이니 그런 것을 애써서 없앨려고 하지 말고 자꾸 화두(話頭)만을 들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꾸 화두만을 들어.

앉아서도 화두(話頭)를 들고 서서도 화두를 들고, 포행(布行)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앉아서 하다가 혼침이 오면 포행을 하면서 하고, 포행을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아서 하고.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들 줄 알면 무슨 깨달음을 빨리 얻기를 바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성화댈 필요도 없고, 망상을 버릴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하는 것이여.

번뇌가 일어나도 그 번뇌를 '일어난다'고 짜증을 낸다든지, '이 망상 번뇌 때문에 이거 공부를 못한다' 그런 생각을 추호도 낼 필요가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처꺽 거각(擧却)하면 일어났던 망상이 뿌리가 없는 것이라 찰나간에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거여.
없앨려고 하면은 무장 일어나고, 없앨라고 하는 생각 없이 화두(話頭)만을 들면 망상은 제절로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온갖 방편을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 오히려 몸만 쇠약하게 맨들고, 정신만 무장 이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점점 조급해지고, 조급해질수록 마음은 더 안정이 안 되고, 마음이 안정이 안 되니 몸은 점점 쇠약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한 철, 두 철, 세 철, 네 철 하다 보면 아무 까닭도 없이 몸이 차츰차츰 쇠약해지고 그래 가지고 정진을 하는 데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이여. 이것이 정진을 바로 해 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

모든 방편, 또 모든 망상 이런 것들을 그 처리할 줄만 안다면 그 일어나거나 말거나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망상이 일어나고 주변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을 한다 하더라도, 크고 작은 시비(是非)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내가 그것을 잘 처리만 할 수 있다면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여.
바람 부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나, 나의 주변에 시비가 일어난 것이나 조끔도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바람 부는 소리에 퍼뜩 깨달라 화두를 들고, 새 우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들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챙긴다면 그런 바람 불고 새 울고 물 흘러가고, 주변에서 '잘했네 못했네' 시비가 일어난 것이 안 일어난 것보단 오히려 더 무방하다 그 말이여.
혼침에 빠져서 그렇게 지낼 것을, 그런 시비(是非)와 사건이 좀 일어남으로 해서 거기서 정신을 가다듬고 또 정진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없는 것보단 낫다.

이렇게 해서 밝은 일을 당하면은 바로 밝은 놈으로 돌이키고, 어두운 일을 당하면 어두운 놈에서 바로 돌이키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간다면 마침내는 모든 번뇌와 망상, 일체 시비 사건이 제절로 다 자취가 없어.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하셨는데,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돌을 가리켜서 이것이 옥이다 하면 바로 그것이 옥이 되는 것[指石爲玉]‘이고, '쇠를 점쳐서 금을 이룬다[點鐵成金]', 무쇠 덩어리를 보고 이것이 금이다 하면 그것이 황금덩어리가 되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계제(階梯)가 없어. 차례차례 일 계단, 이 계단 올라가는 그 계제가 없는 가운데에 계제가 있고, 점차(漸次)가 없는 가운데에 점차가 있는 것입니다.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정말 간절히 알뜰하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

닦을 것이 있고,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리킬 수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지만, 부처님과 조사들은 그렇게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중생(衆生)을 가리키셨고, 모든 우리의 선배들은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곳을 향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습니다.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을축년 납월팔일(臘月八日)에 맞이해서 우리 사부대중은 다시 새로운 분심(憤心)과 발심(發心)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갈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돌아오는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우리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법회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동안에 어린이 법회를 해서 처음에 삼사십 명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칠팔십 명, 백 명, 백오십 명 이렇게 해서 나날이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불어나서 참 그 어린이들이 환희심을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고,
어린이 법회를 갖기 전에는 '부모님이 절에 그렇게 다니시는데 뭣 하러 다니는가? 왜 가는가?' 아무 뜻도 모르고 '불교라 하면은 미신'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종교를 믿는 학생들이 '불교는 미신이다, 사탄이다' 이렇게 해서 놀려대니까 거기에 말 한마디 대답을 못하고 어디 가서 '부처님 믿는다' 소리 하는 것을 매우 챙피하게 그렇게 생각을 해 왔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린이 법회를 시작해서 일 년, 이태 이렇게 되니까 어린이들이 우리 부모님이 불교를 믿고 자기도 불교를 믿게 된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학년이 높아져 가지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또 이렇게 올라가게 됩니다.
중학생이 되어 가지고 또 어린이 법회에 나와서 그 어린이들하고 같이 그 참석하기가 좀 계면쩍고, 그렇다고 해서 가고 싶은데 적당한 데가 없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여러 신도님으로부터서 말씀을 듣고 진즉부터 생각해 오다가 금년 새해부터서는 그래서 그 중고등학생 법회를 용화사에서도 갖기로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해 가지고 다음 달 2월부터서는 중고등학생 법회를 창설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니 그동안에 그 어린이 법회에 나오다가 이제 중학생으로 올라간 사람, 또 진즉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러한 자녀분을 가지신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께서는 법회에 그 자녀들로 하여금 참석을 해서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는 왜 훌륭한 종교며, 불교를 믿으면 결국 어떠한 목적에 이를 수가 있는가?' 이런 것을 알고, 어릴 때부터서 알면서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 훌륭한 청신사(淸信士)가 청신녀(淸信女)가 되도록 한다면—그 자녀들에게 재산이나 모다 그런 것을 많이 물려준 것으로써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재산은 별로 물려준 것이 없지만 「바로 사는 길」을 가리켜 주고,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준다면 돈 몇 억, 뭐 재산 준 것에다 대겠습니까? 재산이라 한 것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단시일 내에 그걸 참 없애 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재산이 많다고만 해서 꼭 행복하다고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자식이 불행해진 예도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게 할려면 입으로 "불교 믿으라, 불교 믿으라. 불교를 믿어야 한다" 자꾸 입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다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불교를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해서 '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불교를 믿으시더니 저렇게 참 행복해지시고 저렇게 훌륭해지셨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께서 불교를 믿으시더니 어느 누구의 부모보다도 더 훌륭하시고 참 좋으시다.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버지처럼 불교를 믿고 나도 바른길을 알아서 정말 행복한 삶을 영위해야겠다' 그러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해 주시라 이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금생에, 금생—‘금생’이라 하니까 '앞으로 20년 30년 내지 50년 60년 살다가 죽은, 죽은 그때까지를 금생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당일념(當一念)을 단속하지 아니하면은 바로 그 당념(當念) 일초 후에는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지금 일념을 단속하지 아니하면 다음 일념이 무엇이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
이 몸뚱이 죽은 뒤에 지옥에 간 것은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건 내생 일이니까 지금 알 수가 없고, 당장 지금 이 한 생각 단속하지 아니하면 일 초 훗일이 참 삼악도(三惡途) 갈 것밖에는 더 있느냐 그 말이여.

그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4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약문여래본기인~ /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신,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게송) 욕개지식문전로~ / 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깨달음 때문에 출세(出世)하셨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 정진(精進)은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다 /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해야.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야 /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3. 4. 16. 10:34

(세등선원No.42)—임술년(壬戌年) 동안거 반산림 법어(1982.11.30.음) (63분)

 

(1) 약 26분.

 

(2) 약 37분.


(1)------------------

황앵(黃鶯)이 상수일지화(上樹一枝花)허고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임술년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반산림(半山林) 법회날입니다.
산승(山僧)이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주장자(柱丈子)를 들어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고서 게송(偈頌)을 읊기를,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다, 흰 해오라비가 들에 내리니 천점(千點)에 눈송이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특히 비구니 정인 복위(伏爲) 망모(亡母) 고성이씨 인화 영가(靈駕)와 망부(亡父) 진주강씨 화엄 영가와, 고영훈 복위(伏爲) 망(亡) 성주배씨 귀남 영가가 사십구재(四十九齋)를 기해서 이 자리에 모시고 이 법문을 듣고, 무량겁 죄업이 눈 녹듯이 다 녹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禪師)에 법을 이어받으신 천룡선사(天龍禪師)가 계셨는데, 그 천룡화상에 법을 이어받은 구지화상(俱胝和尙)이라 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그 도인은 처음에 금화산(金華山), 금화산에 암자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암자에서 지내시면서 준제주(准提呪)를, '옴 자례주례 준제 사바하' 하는 그 준제주를 어떻게 열심히 그 주력을 해서 얼마를 했는지 몇 해를 했는지 하여간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을 준제주를 해서 '나무칠구지불모(南無七俱胝佛母) 대준제보살(大准提菩薩)' 그 칠구지(七俱胝), 구지라고 해서 그 준제주를 어떻게 많이 했던지 그 스님의 별명이 구지(俱胝) 스님이 되었어.
본래 불명(佛名)도 있었고 그랬겠지만, 법명(法名)도 있었겠지만, 너무너무 그 준제주를 했기 때문에 구지화상이라,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 말이여.

그런데 하루는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比丘尼) 스님이여, 실제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억 갓을 삿갓을 쓰고, 방갓을 쓰고 턱 그 암자에 찾아와서, 그 구지 스님이 앉아 있는 승상(繩牀)을 한바꾸 삥 돌고서 떠억 그 앞에 뻣뻣허니 서 가지고서는, “한마디를 일러야, 스님이 한마디를 일러야 내가 이 머리에 쓴 삿갓을 벗겠습니다. 어서 한마디 일러주시죠”
구지 스님이 아 입이 딱! 붙어 갖고 뭐라고 답을 못했어. 또 빨리 이르라고 재촉을 해도 또 못 일르고. 세 번을 일르라고 재촉을 했지만, 종래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實際) 비구니가 팔을 흔들며 소매를 흔들면서 나가는데, 그 구지 스님이 “날도 저물고 그러니까 하루밤 쉬어 가지 그냥 가냐”고. “한마디를 일르면 내가 쉬어 가겠지만 이르지를 못하면은 가겠노라”고. 그래 또 구지 스님이 답을 못했어.

그래서 그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났는데, 그 비구니가 떠난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명색이 대장부(大丈夫)로서 여승(女僧)이 묻는 말에 한마디를 답을 못하고 이러한 분통 날 노릇이 있느냐, 내가 어찌 장부라고 누구 앞에 고개를 들을 수가 있겠는가’ 탄식을 하고, ‘이 암자를 불질러 버리고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나서서 도를, 행각(行脚)을 하면서 도를 닦을 수밖에는 없다’ 이리 마음을 먹고서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그 금화산 산신(山神)이 꿈에 떠억 나타나 가지고 ‘절대로 스님이 이 도량(道場)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며칠 안 있으면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찾아와서 법(法)을 설해 주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할테니까 이 절을 떠나지를 마시오’ 깜짝 놀래서 눈을 떠 보니 꿈이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며칠이 지난 다음 어떤 스님이 떠억 왔는데, 그 스님이 누구냐 하면 아까 말한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에 법을 이어받은 천룡화상(天龍和尙)이라 하는 큰스님이여. 그 스님이 와서 아 그 실제 비구니가 물어서 대답을 못한 그 말씀을 고대로 말씀을 드렸어.
그러니까 그 천룡 스님이 “그러면 그 실제 비구니가 물은 대로 그대가 나에게 물어라”

“도득(道得)하면 내가 이 삿갓을 벗겠으니 한마디를 일러주시지요” 그렇게 천룡 스님께 떠억 물으니까, 천룡 스님이 손가락만 이렇게 탁! 들어서 세웠어. 그 거기에서 이 구지 스님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평생 동안 어떤 사람이 와서 무슨 법을 묻든지—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를 묻던지, 어떤 것이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도(道)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생사(生死)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보리(菩提)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열반(涅槃)이냐고 묻던지, 무엇을 묻던지 간에 손가락만 한번 딱!—평생 동안 법문을 입으로 설하지 아니하고, 무슨 법을 묻던지 손가락만 한번 딱 들어.

그래 가지고 많은 사람이 그 구지(俱胝) 스님을 찾아와서 그 손가락 법문만을 듣고 가고, 듣고 가고 했는데, 하루는 그 구지 스님이 어디를 출타를 하고 안 계실 때에 어떤 스님이 왔어.
그런데 그 구지 스님을 시봉(侍奉)하던 어린 사미승(沙彌僧)이 하나 있었는데, 그 “큰스님이 어디 출타를 하고 안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그 큰스님께서 평소에 어떠한 법(法)을 설하셨는가? 그걸 큰스님 대신 그 법문을 좀 한마디 해 달라고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손가락을 요렇게 딱 들어 보였어.

그래서 그분이 갔는데, 얼마 있다가 그 구지 스님이 돌아오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오늘 무슨 일이 없었더냐?”
“어떤 객스님이 와서 법을 묻길래 제가 법을 스님 대신 설해 줬습니다”

“니가 무슨 법을 어떻게 설해 주었단 말이냐?”
“아, 내 그까짓 것 제가 모르겠습니까? 여러 해 동안을 내가 스님 밑에 있었는데 스님 법을 제가 잘 압니다“

”어떻게 설했느냐?“
”손가락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그러거든.

그 다음에도 어디서 누가 와서 법을 물으러만 오면 지가 손가락을 딱! 들어 보였던 거여. 그래서 그 구지 스님이 품에 잘 든 칼을 하나 따악 가지고 있다가 손가락 탁 드는 놈을 갖다가 탁! 쳐서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인제 중노릇 안 하고 나 간다‘고 막 달아나. 울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큰소리로 부르니까, 아 그래 울면서 그놈이 뒤를 요렇게 홱 돌아다본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거기에서 그 어린 사미승이 확철대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내서 그 구지 스님이 인자 열반(涅槃)에 드시게 되었습니다.
대중을 모아 놓고 마지막 열반 법문을 하시는데, “내가 천룡화상으로부터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었는데, 한 손가락 참선을 얻었는데 일생 동안을 이것을 받아 쓰되 이것이 다하지를 못했어” 아직도 일생 동안을 썼건마는 바닥이 안 났다 그 말이여. “일생 동안을 수용을 해서 다하지 못했노라” 그렇게 떠억 한마디를 하시고 고대로 앉아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로 인해서 대분심(大憤心)이 발(發)해 가지고 결국은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단(大疑團)이 돈발(頓發)을 해 가지고 일주일이 되었던지 열흘이 되었던지, 그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돈발한 상태에서 천룡 스님의 손가락 한번 탁! 드는데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또 관계(灌溪)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이 말산요연(末山了然) 비구니한테 맥혀 가지고 3년 동안을 그 비구 스님이 말산이라고 하는 비구니 시봉을 했습니다. 원두(園頭)를 보면서 그 비구니 밑에서 3년 동안을 시봉을 하면서 도를 닦아 가지고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인도에서도 부처님 당시에 연화색(蓮花色) 비구니라고 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비구니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광명을 발하고 대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佛法)을 빛낸 비구니가 있었고, 중국에도 이 말산요연이라든지 이 실제 비구니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비구니가 있었어.
한국에도 월명각시라든지, 또 근자에는 덕숭산에 법희 스님이라든지 또 범어사에서 일생을 지내던 만성 스님이라든지, 그밖에도 여러 비구니로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참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을 하고, 많은 이익을 후배들에게 끼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짓달 그믐날이 돌아와야 반산림(半山林)이 되겠습니다마는, 이 세등선원(世燈禪院)은 매년 동짓달 스무이튿날 반산림 법회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세등 스님이 그 생일이 바로 이 동짓달 스무이튿날이라, 당신 생일을 기해서 이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도 올리고 또 그 아울러서 법회를 갖는다면 참 좋겠다' 해서 그 문인(門人)들도 그렇게 원하고.
또 그래서, 참 대단히 좋은 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선원(禪院)을 창설을 해서 제방(諸方)에 선객(禪客) 스님네들을 이렇게 모시고, 이렇게 이 선원을 경영을 하고 정진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출가한 사람으로서 자기도 정진하고 다른 선객 스님네도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고, 사부대중이 모여서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을 수가 없고, 참 대단히 환희에 넘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처음~25분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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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금년에는 모다 여러 군데서 처음 오신 분들, 오신 수좌(首座)님네들이 많이 있어서...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하고, 셋째에는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자세, 호흡>

‘자세를 바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데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거나, 앞으로 숙거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몸이 일직선으로 수직으로 딱 하되 단정(端正)하게 앉되 목이나 어깨나 이런 데 힘을 너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인자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전호흡이 좋다’ 한 말은 다 듣고 알고 있지만, 실지로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기는 썩 어렵습니다. 덮어놓고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오래 참았다가 숨을 내쉬고 이렇게 무리하게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납니다.
부작용이 어떻게 나냐 하면, 가슴이 콱 맥혀서 답답하고 오히려 소화가 잘 안되고, 또 목이 뻣뻣하게 해져서 더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 따라서 이 단전호흡을 하되 정말 올바르게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러면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면, 숨을 들어마실 때에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 것. 또 들어마신 상태에서 호흡을 정지를 하는데, 딱 근치고 한참 동안 있는데, 그 정지하는 시간을 너무 오래하지 말 것. 또 정지를 한 다음에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내쉬는 시간도 너무 오랫동안 걸려서 내쉬지 말 것.

들어마시는 시간도 자기 호흡 형편에 적당하도록, 처음에는 한 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머무르는 시간도 약 3초 동안 그런 정도만 머무르고, 또 내쉬는 시간도 약 3~4초 동안, 그러니까 한번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때까지 한 그 호흡을 약 10초 정도로만 걸려서 하도록. 그러면 누구라도 별로 그렇게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에 별탈이 없습니다. 숨이 가쁘거나 답답하거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태 이렇게 해 가다 보면, 차츰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조끔씩 조끔씩 길어질 것입니다.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숨이 길어지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그런 정도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3초, 3초, 3초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러한 정도로 처음에 시작을 하면,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또 짧으면 짧은 대로, 꼭 길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니까 억지로 길게 하지 말어라 그 말이여.


그런데 이 단전호흡, 본격적으로 본(本)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호흡이 있어.
그 준비호흡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가는데, 그 준비호흡이라 하면, 처음에 이렇게 따악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이렇게 앉으면, 좌우로 서너 번 이렇게 몸을 끄떡끄떡 궁둥이가 뜰썩뜰썩 하도록 몸을 이렇게 서너 번 이렇게 흔드는 거여. 이렇게 서너번 흔들다가 한가운데다가 몸을 따악 안정을 하는 거여.

이렇게 안정이 되었으면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은 감지를 말고 평상(平常)으로 따악 떠요. 너무 눈을 이 코 끄터리를 본답시고 너무 가늘게 뜨면, 처음에는 좀 조용하니 좋은 것 같애도 머지않아서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가 있으니까, 그렇게 눈을 너무 절대로 감어서는 안되고, 또 감지는 안 해도 너무 가늘게 떠도 못써요.
눈을 평상으로 떠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부터 약 3m 지점에다 눈을 떨구면 되는 것이여. ‘떨군다’고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응시(凝視)를 하거나 주시(注視)를 하지 말고, 평상으로 뜨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 그렇게 하고,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고. 이게 인자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여.

준비호흡은 어떻게 하냐 하면, 숨을 될 수 있으면 가뜩 그리고 빨리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 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한참 동안 참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거여. 10초가 되었건, 20초가 되었건, 참었다가 더이상 못 참을 때, 입을 조끔 벌리고서 입으로 후~ 하고 이렇게 숨을 내뿜는 거여. 아까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던 가슴이 내쉬면서 차츰차츰차츰 가슴이 홀쪽해지면서 완전히 다 내뿜어 버려.

다 내뿜었으면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동안 참었다가 또 입을 조끔 벌리고 후~ 하고 내쉬는 거여. 다 내쉬었으면 또 세 번째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참은 뒤에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입으로 후~ 하고 내쉬는 거여. 이렇게 세 번을 하는 것이 이것이 준비호흡이라 하는 거여.
이렇게 준비호흡을 세 번 하고 나면, 가슴 구석구석에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가슴 안에 들어가 있는 거여.

그렇게 한 다음에 인자 본(本)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수르르르~ 허니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는데, 본호흡으로 들어가서는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하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이 준비호흡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뜩 들어마셨지만,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녀.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8부쯤만 들어마시되 아랫배 단전(丹田)이 볼록하도록 느끼면서 8부쯤만 들어마셔.

8부쯤 들어마셨으면, 하나 · 둘 · 셋 약 3초 동안을 정지를 했다가 내쉬는데,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입으로 후~ 하고 내쉬었는데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입으로 내쉬는 게 아녀.
입은 가만 놔두고 코로 내쉬는데, 내쉬면서 단전(丹田), 아까 볼록해졌던 단전이 차츰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하게 코로 내쉬어요. 내쉬되 너무 하나도 없이 완전히 내쉴라 하지 말고, 내쉴 때도 또한 8부 정도만 내쉬어.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데, 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물론 코로 들어가는 것은 틀림이 없어.
뭐 그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그러면 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그 호흡이 저 단전 밑에까지 들어간다고 억지로 할라고 하니까, 가슴에 꽉 맥혀 가지고 저 밑에까지 내려가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거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호흡은 허파까지 밖에는 안 들어가요. 허파 밑에 가서 또 횡격막(橫隔膜), 가로막이 있는데, 가로막에 딱 걸려 가지고 절대로 호흡이 저 단전(丹田) 밑에까지 내려가지 안 혀. 내려가지 않는데 억지로 그 내려 보낼라고 하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못 견디게 되는 거여. 꽈악 여가 맥혀 가지고 얼마를 애를 먹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들면서 가뜩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고 해서 이 가슴 속에 있는 공기를 소지[掃除]를 해야 하지만, 준비호흡이 끝난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갈 때에는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이렇게 내보낸다’고 그리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들어마셔 가지고, 뒤에 궁둥이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기분으로 그렇게 맨들어라 그 말이여. 바람이야 그리 들어가건 말건.
그러면은 의식적으로 배를 볼록이 하니까, 실지로 바람이 거기까지 들어간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들어마셨으면, 8부쯤 들어마셨으면 정지를 했다가, 정지하는 시간도 약 3초, 나중에 익숙해지면 뭐 3초 4초 5초 좀 늘궈도 상관이 없지만, 처음에는 약 3초 동안만 해요, 부담이 없이. 그래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하라 그 말이여. 그러면 조끔도 가슴이 답답한 게 없어.


<화두는 언제 드느냐>

그러면 화두는 언제 드느냐 하면,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질 때 그때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하면서 숨을, 배를 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숨을 내쉰단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라 그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또 3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하지만,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지면 숨 내쉴 때마다 화두를 안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두 번, 세 번 내쉴 때까지도 화두(話頭)는 한번만 드는 상태에서 숨을 그렇게 하고.
나중에 참으로 화두가 익숙해지면 아침에 떠억 한번 화두를 들고서, 계속해서 호흡은 하면서도 화두는 한번만 들고서, 그 한번만 들어 가지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들면 그 의단만을 관조(觀照)해 나가면 되는 거여.

자꾸 뭐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 아녀요. 드문드문 화두를 놓쳐버렸거나, 딴생각이 들어왔거나, 또는 화두를 놓치진 안 했건만 의단(疑團)이 희미해졌을 때 가끔 한번씩만 챙겨줘도 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따악 현전(現前)해 있으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갖고 있는 거여, 그게. 그러기 때문에 들어져 있는 데다 자꾸 덮치기로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된다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따악—앉아서도 그 의심이요, 서서도 그 의심이요, 밥을 먹으면서도 그 의심이요, 똥을 누면서도 그 의심이요,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그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들려져 있도록.

조끔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해태심(懈怠心)을 낼 것이 없어.
앉었거나 섰거나 누웠거나 밥을 먹거나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그 사람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억지로 잠을 안 자고 그냥 막 해댄다고—화두가 성성(惺惺)허니 들려져 있지 아니하면은 잠을 안 잔다고 공부 되는 것이 아니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앞으로 한 열흘이 지내면, 7~8일이 지내면 납월팔일(臘月八日),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는데,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면 옛날부터 선방(禪房)에서는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는 것이 한 준례가 되어 있는데.
참 이 출가(出家)한 분상(分上)에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그날을 기해서 우리도 밤잠을 안 자고 정진을 해보자는 생각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그날을 우리가 평범하게 지낼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만공(滿空) 큰스님이나 또 이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나, 여러 그 구참 선지식(善知識) 스님네들의 말씀을 들으면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그것이 일리가...(녹음 끊김) 바 있는 사람보단 오히려 상기병을 얻거나 무슨 정진상에 부작용이 일어나서 역효과를 내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거여. 이건 경험상으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거여.

그래서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잠을 안 자 놓으면 화두도 간 곳이 없고, 그저 잠만 안 잘라고 일주일 동안 그 경책(警策)을 안 맞을라고, 그저 잠 안 잘라고 하는 데 온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맑은 정신은 하나도 없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자기는 꾸벅꾸벅 이렇게 졸면서도 장군죽비(將軍竹篦)로 때리면은, ‘안 잤는데 왜 때리냐?’고, 이래 가지고 신경질을 내고 쌈을 하고.

뭐 선방에서 이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하면 가끔 그 쌈이 벌어지고, 정신이 없어 가지고는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고.
시계, 덜렁덜렁 하는 시계추를 갖다가 뜨윽 갖다가 빼 가지고는 부처님 탁자 앞에다 갖다 놓고 절을 하는 사람이 없는가, 옆에 사람보고 왜 때리냐고 그냥 쌈을 거는 사람이 없는가, 어떻게 잠이 오던지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옷을 벗고 오줌을 눈 채 한 시간 두 시간을 그냥 자버린 사람이 없는가, 그래서 많은 모다 그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세등선원에는 그전부터서 용맹정진보다는 가행정진을 하는 것이 좋다 해서 해마다 이 가행정진을 해 오고 있습니다. 시간은 인자 그 준례에 따라서 10시나 11시나 적당한 시간에 자서, 3시나 2시, 이렇게 해서 한 서너 시간 재워 주고, 그리고서 정진을 하되 그 7일 동안은 일체 묵언(默言)을 하도록.
이렇게 하고, 마지막날, 7일 날 저녁에는 그때는 정말 용맹정진해서 잠을 자지 않고 그 이튿날 예불할 때까지 떠억 정진하도록. 이렇게 해서 가행정진이지만 용맹정진이나 거의 같지요. 그렇지만 서너 시간 재워 주기 때문에 정말 참 알차게 정진을 하게 되죠.

혹 여러 대중이 모였으니까, ‘그 가행정진보다도 용맹정진하자,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가지신 분도 있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또 이 세등선원에 와서는 또 세등선원에 준례에 순응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수행인으로서 참 좋은 일이니 만큼 그렇게 모다 가행정진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그 사람은 별 장애가 없이 육체상으로나 정신상으로나 정진상에 아무 부작용과 장애가 없이 대도를 성취하고만 말 것입니다.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 채 중간에 몸에 병이 생긴다든지, 상기병이 생긴다든지, 무슨 위장병이 생긴다든지, 혈압병이 생긴다든지 이리 되면 가뜩이나 근기(根機)는 하열(下劣)하면서 그런 장애가 일어나면 여간해서 그러한 고비를 극복하기가 힘이 듭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상기병이 나거나, 위장병이 나거나, 뭐 피가 목구녁에서 넘어오거나 그까짓 것을 문제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것을 그 병(病)을 도반(道伴)으로 알고 선지식으로 알고 그저 앉아서 못 견디면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해서 못 견디면 또 앉아서 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조끔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계속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겨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면서 그 병까지도 굴복을 받아 버리는 그러한 예가 많습니다.

병이 났다고 해서 그까짓 것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기왕이면 처음부터서 올바른 수행법으로 수행을 해 가지고 그러한 장애에 걸리지 않도록 한다면은 그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이여. 상기병 무서워서 공부 못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을 알아서 한다면야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 말이여.


이 가운데 만성 스님이나, 법희 스님이나, 또 월명각시나 또는 말산요연 비구니나 또는 아까 말한 그 실제 비구니나 연화색 비구니와 같은 그러한 도인(道人)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어. 반드시 나는 이 가운데 많은 도인이 나오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 이 세등선원에서 수없는 도인(道人)이 나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도인이 얼마만큼 나오냐 하는 것은 여러 대중스님네들의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의단(疑團)으로 정진을 어떻게 하느냐 온전히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옥희라고 하는 보살님이 당신의 칠순일을 맞이해서 여러 대중스님네께 이렇게 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양을 여러 사부대중께서는 맛있게 공양을 하시고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고 아울러서 이 이옥희 보살의 수명장수하고 금생에 이 불법에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세세생생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서 내생에는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의 지혜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축원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이 고성이씨 인화 영가, 진주강씨 화엄 영가, 성주배씨 귀남 영가는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과 산승(山僧)에 설한 이 간곡한 말씀을 듣고, 무량 영겁(永劫)에 죄업이 다 소멸이 되어서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왕생을 하셔서 다시 이 사바세계에 환생(還生)을 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소  호리신분개소년(蒿裡新墳皆少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수행하는 것을 머리털, 귀밑털 희어지는 것을 희어지기를 기다리지를 말어라. ‘늙은 뒤에 하리라. 좀 더 있다 하리라’ 뒤로 미루지를 말어라.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니라. 저 쑥대밭 속에 무덤이 다 소년에 무덤이니라.
주검이 어찌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어려 뱃속에서 죽기도 하고, 나다가 죽기도 하고, 어려서 죽기도 하고, 소년 청년에 죽기도 하고, 젊어서 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꼭 늙은 70, 80 먹은 뒤에만 죽는 것이 아녀.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이것이여.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사람 몸 한번 잃어버리면 언제 돌아올 것이여? 사람 몸 받아 나기가 눈먼 거북이가 천 년만에 한번씩 바다 위에 올라와서 숨을 쉬는데, 그때 마치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야 그 나무토막에 의지해서 숨을 쉬고 들어가는데, 눈 뜬 거북이가 나와서도 그 나무토막 만나기가 어려울텐데, 더욱이 그 매일같이 올라와도 혹 모르는데, 천 년만에 한번씩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에 떠올라 가지고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기 만큼 어렵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몸 받아 나기가 어려운데, 이 몸뚱이 한번 잃어버리면,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잃어버리면 언제 사람 몸을 받아 날 것이냐 이 말이여.
그리고 지옥이라는 데는 한번 떨어지면은 나올 기약이 없어. 억만겁을 그 안에서 지내야 하는데 나올 기약이 없어. 그러니 사람 몸 받아 났을 때 그 정진을 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해야겄드라 이 말씀이여.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25분44초~6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황앵상수일지화~ / 어째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 구지(俱胝) 스님의 일지두선(一指頭禪).

참선 자세.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 단전호흡(준비호흡, 본호흡) / 화두는 언제 드느냐? / 무엇을 하건 화두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 /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게송) 수행막대빈모반~ /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호흡은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지도록)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51~375)2023. 4. 10. 06:39

(No.358)—1988년 부처님오신날(88.05.23) (58분)

 

(1) 약 32분.

 

(2) 약 26분.


(1)------------------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하면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하고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한 등(燈)에 등불이 능히 백천(百千)의 등불에 불을 붙일 수가 있다.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마음에 인(印)이, 마음 인(印)의 그 빛이 널리 통하면 부처님의 정법(正法)의 법령(法令)이 널리 행하리라.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한디, 천성(千聖)이 전할 수 없는 이 등불을 아무리 불어도,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더라도 이 등불은 꺼칠 수가 없을 것이다.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다. 한 등(燈)으로 인해서 백천 등(燈)에 그 불이 옮겨져 가지고 그 등불이 온 세계에 환히 밝아지면 우주법계 구석구석이 어두운 구석이 없이 다 환히 다 밝아질 것이다.


오늘 불기(佛紀) 2532년 부처님오신날을 기해서, 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람마다 정성스러운 등(燈)을 켜 가지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키었지마는 그것이 백천 등(燈)이 되고, 십만 등(燈)이 되고, 백만 등, 천만 등이 되어서 그 등불이 환히 다 밝아져 가지고 삼천리 강토(疆土)뿐만이 아니라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오대주(五大洲) 육대양(六大洋)이 환히 밝고, 이 지구만 밝아질 것이 아니라 이 태양계가 다 밝아지고, 이 태양계와 같은 수백억만 개의 태양계가 이 우주법계에는 있는데, 끝없는 이 세계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 환히 밝아질 것이다.

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훨씬 이전에 옛적에 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장재왕(長災王)이라 한 왕,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 장재왕은 참 불법을 믿는 아주 어질고 착한 그런 성인의 풍도를 가진 임금이었습니다. 이웃나라에 아주 싸움을 좋아하고 그런 범달왕(梵達王)이라 하는 고약한 아주 강력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 범달왕은 호시탐탐 그 장재왕에 왕국을 침범할 것을 노리다가 어느 날 대군사를 일으켜 가지고 그 장재왕에 나라를 침범을 해서 순식간에 그 나라를 집어삼켰습니다. 그 장재왕과 그 왕비와 그 왕자는 어떻게 손도 써보지도 못하고 뒷문으로 해서 저 산중 깊은 골짜구니로 숨었습니다.
그러나 이 범달왕은 군사를 풀어 가지고 방방곡곡이 뒤져 가지고 결국은 이 장재왕과 왕비와 왕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만인이 모이는 장터에서 그 왕과 왕비와 왕자를 살해하게 되었습니다. 용케도 어느 틈을 타 가지고 오직 그 왕자 한 사람만이 도망을 했습니다. 도망을 해 가지고 드디어 그 사형(死刑), 왕과 왕비를 그 사형에 처하는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왕자는 도저히 혼자만 숨어서 있을 수가 없어서 이상한 옷을 입고 얼굴에다가 모다 변장을 해 가지고 그 수많은 군중 속에 뚫고 들어가 가지고 자기의 부왕(父王)과 그 왕비, 어머니가 살해된 광경을 지켜보지 아니하면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살해될 마당에 그 많은 군중을 둘러보니까 그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알아 가지고 혼자소리로 독백을 했습니다.

"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이런 세 마디 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 뜻이 무슨 소린지를 모르고 ‘그 왕이 죽게 되니까 간경(肝經)이 둘쒀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이쯤 모다 생각하고 결국은 그 왕과 왕비는 무참하게도 목을 짤려서 죽었습니다.

그 왕자는 그 자기 부왕(父王)이 한 이해할 수 없는 세 마디 말만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빠져나와 가지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를 갈아붙이고 여러 해 동안을 갖은 기술과 칼 쓰는 법, 창 쓰는 법, 활 쓰는 법을 비롯해서 무술을 다 익히고 나아가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 요리를 하는 법, 옷을 짓는 법,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기술을 다 연마를 해 가지고서 차츰차츰 그 범달왕(梵達王)이 있는 도시에 잠입을 해 가지고 차츰차츰 인증을 받고. 그래 갖고 대신(大臣)의 집에 또 고용이 되었다가 거기서 또 훌륭하니까 결국은 왕궁에까지 고용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해서 임금, 그 범달왕의 눈에 들어 가지고 가장 신임(信任)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아주 그 범달왕을 가깝게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도 그 범달왕은 그 장재왕의 왕자를 띠어 놓고는 살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눈에 마음에 쏘옥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범달왕은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왕자는 그 왕을 모시고 사냥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왕이 아조 말을 달려서 사냥을 한바탕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피로해서 좀 쉬어야겠다 그 말여.
그래서 모든 신하와 궁녀들을 다 물리치고 오직 그 왕자 하나만을 데리고 조용한 물가에 경치도 좋고 고요한 데로 가서 단둘이 푸욱 쉬게 되었습니다. 그 왕자는 온갖 무술을 다 익혔기 때문에 혼자만 옆에 있어 주어도 왕은 마음이 놓였기 때문에 여러 신하를 데리고 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고요한 데에 가서 그 왕자의 무릎을 비고서 누웠는데 금방 잠이 깊이 들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왕자는 ‘이제사 비로소 복수를 할 때가 왔구나’ 이래 가지고 품안에 깊이 간직했던 그 멀금하게 간 칼을 빼 가지고 범달왕의 목에다 갖다가 터억 틀어 댔습니다.
그래 가지고 아주 일격을 가할려고 하다가 불현듯 그 부왕(父王)이, 장재왕이 그 처형(處刑) 당할 때 한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원한은 보복을 함으로써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 마디 말 가운데 마지막 끝에 한 그 말이 퍼뜩 생각이 나 가지고 찌를까 말까 한 판에 아! 범달왕이 눈을 번쩍 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온몸에 아주 그냥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눈을 번쩍 떴는데, 아 그 목에다 틀어 대 갖고 있는 칼을 미차 숨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칼을 갖다가 번쩍 들면서 “너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 웬수다”
그런데 그 왕이 눈을 뜨면서 하는 말이, “내가 장재왕의 그 왕자가 나를 내 목에다 칼을 대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눈을 뜨는데, 진짜 눈을 뜨고 보니까 칼날이 자기 목에 와서 떡 닿아 있다 그 말이여.

“바로 내가 그 장재왕의 왕자다. 이놈, 너 이놈 오늘 죽어봐라” 그러면서 칼을 번쩍 해가 들고서 찌를려고 하다가 그 아버지가, 부왕이 마지막한 그 말이 다시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 이를 악물고 몸을 부르르 떨었지마는 차마 그 칼을 목에다가 꽂지를 못하고 그 칼을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그리고서 통곡을 하면서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사죄를 했습니다.

범달왕도 몸을 털고 일어나서 “좋다! 느그 부왕이 그렇게 착한 임금인줄을 나는 몰랐다. 네가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가 남긴 그 마지막 한마디를 마음속에 간직해 가지고 나의 목숨을 다시 살려주었으니 어찌 내가 너를 죽일 수가 있겠느냐” 피차 각자 자기의 잘못을 참회를 하고 뜨거운 악수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왕자에게 옛날의 자기 고국을 다시 돌려주고 두 나라는 아주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가지고 오래오래 친목을 하고 화평하게 지냈다고 하는 설화가 부처님의 경전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왕이, 장재왕이 죽을 때, 첫 번째 ’길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웬수 원한에 마음을 오래오래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함께 이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그러한 원한이라 하더라도 오래오래 그 웬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고.
’급히 서둘러서도 안 된다‘ 그 말은, 우정, 한번 서로 알게 된 맺게 된 우정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원한은 원한으로써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 부왕(父王)에 유언을 갖다가 깊이 간직해서—만약에 그 왕자가 그 범달왕을 자기의 그 보복을 했다면 그 왕자인들 거기서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다고 해도 수백 명의 무사들에 둘러싸였으니 어느 칼에 맞어 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지끔 우리나라는 삼팔선(三八線)이 가로맥혀서 이북(以北), 이러한 참,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6 · 25 동란(動亂) 또 (미얀마) 아웅산에서 일어났던 우리나라 각료들을 모다 폭파시킨 그러한 일들 생각하고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칼기(KAL機)를 폭파해 가지고 백여 명의 참 무모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 하며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웃나라 일본을 생각해도,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 서해를 왜구(倭寇)들이 침범을 해 가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해 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400년 전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또 와 가지고 무수한 생명을 죽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삼천리를 피로써 물을 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를, 일본 여론조사를 해 보면, 국민들을 해 보면 ‘세계에서 제일 미웁고 보기 싫은 나라가 어디냐?’ 하면 한국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인해서 일본이 그 완전히 야만한 야만족(野蠻族)이 사람노릇을 할 수 있도록 저 가야국 이래로 고구려 · 신라 · 백제 때를 통해서 계속 우리나라에서 가서 글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유교 · 불교를 가르키고, 농업과 모든, 나라 다스려 가는 법을 다 가르키고 해서 일본 나라가 영원토록 우리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사람된 길을 가리켜 주는 문명(文明)의 은인으로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미워하고 우리를 그렇게 하냐?
그런 일을 생각하면 일 생 · 이 생 · 삼 생이라도, 성불(成佛)을 더디 연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놈들을 갖다가 응징을 하고 씨를 말려야 할 그러한 민족적 울분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칼기(KAL機) 폭파 사건 일으키는 소련, 6 · 25 때 그 우리가 그 통일을 눈앞에 놔두고 백두산까지 처올라갔는데 인해전술로써 우리나라를 다시 이렇게 분단되게 맨든 그런 일을 생각한다든지, 이조 때, 고려 때 중국이 대국이라 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그렇게 못살게 굴게 하고 속국을 만들어 가지고 짓이기고 약탈해 나가는 역사적인 일을 생각한다면은 세세생생에 중공을 중국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간 그러한 일을 생각해서 자손만대(子孫萬代)토록 보복을 할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렇게 당한 일들이 까닭 없이 우리가 당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러한 인과(因果)의 관계에 의해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미워한 나라가 일본인데, ‘그 어째서 우리의 은혜를 받은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한단 말인가? 우리나라에 세세생생에 자손만대토록 은혜를 갚아야 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굴고 우리를 죽일려고 했는가?’
내가 숙명통(宿命通)이 열리지는 안 했지만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서 떠억 깊이 관찰을 해 보니까 나는 그 원인을 짐작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생긴 이래로 삼국(三國)이 벌어졌고, 삼국이 벌어져 가지고 계속 싸워서 자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나고, 삼국이 싸워서 멸망하고, 저 나라가 자꾸 망하면서—고구려도 망하면 그 왕과 모다 대신들이 전부 일본으로 도망을 가고, 가야국이 망하면서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신라가 망해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백제가 망해도 모다 그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그 말이여.
도망을 가 가지고 거기다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거기다가 이 문명을 일으키면서 대대손손이 내려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그 말이여. ‘언제라도 반드시 권토중래(捲土重來)하리라. 힘을 길러 가지고 나의 고국에 돌아가서 웬수를 갚고 다시 내가 그 나라를 세우리라’ 이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이여.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일본은 본래 저 아이누 족[Ainu族]이니 뭐이네 해 가지고 아주 야만족들이 조끔 살고 있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그냥 그 야만족들이 살아서 그저 도둑질이나 해먹고, 해적질이나 해먹고, 노략질 해먹으면서 그럭저럭 그렇게 짐승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고구려 · 가야 · 신라 · 백제 · 고려, 이런 데서 자꾸 우리나라에서 가 가지고 사람 되는 길을 맨들었는데, 그 나라에다가 최초에 나라를 세운 사람이 한국 사람이 세웠고, 일본에 그 황족이 혈통이 사실을 알고 보면 한국 사람이 일본 황실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것들이 다 밝혀질 것이고 지금 많이 밝혀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기 때문에 일본은 아무 까닭도 없이—모릅니다 자기네들은, 모르면서도 천 년을 수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한국을 갖다가 어쨌든지 다시 이것 자기가 차지해 가지고, 이걸 짓밟고 차지해 가지고 다시 나라를 세우리라 한 것은 ‘자기의 조국을 찾으리라’ 한 그 인과적인 그러한 원인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가장 우리나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조끔도 그 은혜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하고 빼앗아 갈려고 하는 까닭을 나는 인과(因果)의 법칙에 입각해서 내 나름대로 풀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공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하고, 또 삼팔선이 갈라져서 하고, 모다 이러한 것들도 반드시 풀 수 있는 원인이 있을 것이고.

이번에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뭐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가 모다 갈라져 가지고, ‘참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지역감정(地域感情)으로 이럴 수가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염려되는 그런 상황이 일어났었는데,
이것도 생각해 보면 고구려 · 신라 · 백제 이런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그때의 원한 관계가 삼국은 없어졌지마는 오늘날까지도 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핏속에는 그런 우리의 업(業), 잠재의식 속에는 그러한 것이 아직까지도 흘러 내려오고 있는 그러한 잠재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행여나 그러한 보복을 할려고 하는 마음, 오래된 그러한 원한 관계, 이러한 것을 다 풀어버려야 우리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고 스스로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원한에 마음을 품고 있어 가지고서는 절대로 앞길이 열리는 법이 없고,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적개심(敵愾心)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도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사상적 교육과 고취가 뜻이 있겠습니다마는, 먼 안목으로 볼 때에는 적절한 시절이 돌아올 때에는 그러한 악심(惡心), 개인적인 또는 민족적인 그런 악에 사무치는, 원한에 사무치는 적개심은 좋은 방향으로 승화(昇華)시켜 나가는, 승화시켜 가지고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공통점을 찾아서 화해를 하고 이래 나가야만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림픽이 있고, 올림픽이 끝난 다음에는 이념을 초월해서 모다 경제적인 교류를 맺고 그래 가지고 앞으로 우리나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큰 발전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31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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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를 맞이해서 첫째, 우리 불자(佛子)는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서로 미움이 있다면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야겠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어떠한 본의 아닌 좋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오늘을 기해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잘못된 허물을 상대방에 미루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이렇게 해서 참회(懺悔)를 하고 화합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간(兄弟間)에 동서 간에도 마찬가지고,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회사와 회사 관계, 단체와 단체 관계 또 지역감정도 그렇게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당(黨)과 당(黨) 사이에도 역시 그것을 풀고 근본적 민족 한겨레라고 하는 데에 돌아가서 서로 과거를 용서하고 그래 가지고 손에 손을 맞잡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단합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원한심을 깊이 품고서는 그 사람은 올바른 행복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단합하지 않고서 참다운 통일은 오지 아니할 것이고, 참다운 통일 없이 세계에 평화를 이바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라크과 이란의 관계를 보십시요. 이웃지간에 살면서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지금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 나라는 결국 두 나라가 다 망하고 말 것입니다.
황새가 저 해변가에서 큰 조개를 갖다가 탁! 찍었습니다. 그 조개는 황새의 입을 콱! 물었습니다. 어부지리(漁夫之利)란 말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황새도 잡히고 그 조개도 어부한테 잡혀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 남한에서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지역끼리 싸우고, 당이 다르다고 해서 당끼리 서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가 기반이 흔들리게 되면 이북(以北)에서는 언제 밀고 내려올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이 통일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에 결국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제공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미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고 용서할 수가 있느냐?
아무리 며느리가 ‘내가 그러지 말아야겄다’, 시어머니는 ‘내가 며느리를 미워하지 말아야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마는, 하는 꼴을 보고 얼굴을 보면은 다시 속에서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리왕(歌利王)이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토막토막 짤라 냈지마는 터럭끝만큼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성불(成佛)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미워하는 생각, 이 내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단전호흡(丹田呼吸), 깊이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생각 생각이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 일어날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이렇게 ‘이뭣고?’를 하면 처음에는 ‘이뭣고?’는 하지마는, 속으로 미운 생각은 아주 잘 가시지를 않을 것입니다마는, 한 달을 그렇게 해, 석 달을 그렇게 해, 일 년을 그렇게 하다 보면 저절로 ‘이뭣고?’를 안 할려고 해도 저절로 ‘이뭣고?’가 되면서 아! 그 미운 생각이 언제 어느 때 스르르르 담박해져.

부처님께 절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 배, 삼천 배, 사천 배, 오천 배, 이렇게 하고 나면 그냥 속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면서 그렇게 미웠던 시어머니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미웠던 며느리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아주 복수에 치가 떨린 웬수가 조끔도 미운 생각이 없고, ‘전부가 다 내가 잘못했구나! 그 잘못한 것이 상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어!’ 아 그렇게 참회가 되면서 그 하염없이 흐른 눈물을 쏟아 버리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후련해지고 편안해지면서 미운 생각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속에서 일어난다 그 말이여.

예배(禮拜)를 해도 그러한 경지가 오고, 경(經)을 읽어도 그런 경지가 오고, 기도를 해도 그런 경지가 오고, 염불을 해도, ‘옴마니반메훔’을 해도 그런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도 다 좋지마는 ‘이뭣고?’를 하면 그런 경지가 더 빨리 오는 수가 있거든.
그러한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되니 이 참선법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 속에는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기도가 다 들었고, 삼천 배 내지 억만 배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오늘 전장학, 전고경월 복위(伏爲), 망부(亡父) 전홍익 영가(靈駕)의 49재입니다. 그 재자(齋者)가 오늘 49재를 맞이한 전홍익 영가를 위해서 그 ‘이뭣고?’ 법문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법문을 좀 해 달라고 한 달 전부터서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어찌 산승(山僧)이 그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수만에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지금 가슴 뜨거운 마음으로 이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져 있는 만년위패(萬年位牌) 여러 영가들을 위해서도 저는 간곡히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전부 그 영가들이 우리들의 선망부모(先亡父母)입니다마는, 그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 그다음에 이 송담(松潭)이 설해 드리는 이 법문을 그 영가(靈駕)들이 다 듣고 그 영가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이뭣고?’의 등불이 켜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선망부모에 못지않게 ‘이뭣고?’가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단속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해탈을 해서 그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허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淸風拂)이다.
우리 낱낱이 얼굴 앞에는 밝은 달빛이 휘황창 희고, 사람사람의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 사람 앞이라고 특별히 달빛이 밝고, 어느 사람 앞이라고 차별을 해서 달이 비추지 않겠느냐 이거거든. 어느 사람 앞에나 다 바람이 불면 다 시원한 바람이 불지, 누구라고 안 불고 누구라고 잘 불어줄 것인가 이 말이여.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우리의 업경대(業鏡臺)에, 우리 자신의 업경대를 갖다가 타파(打破)해 버려서 자취가 없어져 버리면—자기가 그 달빛을 싫다 하고 껌껌한 굴속으로 들어가서 ‘달이 자기한테 (안) 비춘다’고 하는 것이고, 자기가 문을 꼭꼭 처닫고 앉아서 더웁다고 찬바람,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온다고 해서 그런 것이지,
자기가 굴속에서 터억 나와서 달빛 있는 데로 몸을 나투고, 꼭꼭 닫았던 문을 활짝 열어제낀다면 어느 사람 얼굴에 달빛이 비치지 아니하며, 어느 사람 방에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갈 것이냐 이거거든.

자기가 마음에 문을 처닫고 그리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원망하고 스스로 자포자기를 해서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못 깨닫는 것이지, 마음에 문을 훨쩍 열어버리고 자기도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깊이 신심을 갖고 자기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이뭣고?’만 하면 결정코 확철대오할 수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수행을 해 나가면—꼭 절에만 들어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여. 집에서 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살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살면서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언제나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단속해 나가면서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해 나가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화창한 봄날에 아름답게 핀 꽃가지 위에 그 예쁜 꽃에 새가 올라가서 아름다운 소리로 한 곡조 자연의 노래를 읊으더라.


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부처님께서 춘다(Cunda)라고 하는 사람이 바친 독버섯을—그것이 독버섯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학자들은 해석이 있지마는 하여간 독(毒)이 있는 버섯이여.
독버섯을 드릴 리는 없고, 맛있는 버섯의 요리를 해 드렸는데 그것이 어떻게 변질이 된 음식이였었던지, 부처님의 체질에 안 맞았던지, 그것이 부처님께서는 요새말로 식중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너무너무 고통이 심하셔 가지고 피를 쏟으시면서 그렇게 아프신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를 향해서 계속해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행을 하셨습니다.

조끔 가다가 쉬시고, 조끔 가다가 쉬시고 그러시면서 결국은 구시나가라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사라쌍수간(沙羅雙樹間), 사라수가 2개씩 2개씩 요렇게 서 있는 그 나무 사이에다가 자리를 펴고, 그때 자리라고 해 봤자 웃옷이니까 그때는 가사(袈裟), 가사지요. 가사를 떠억 펴서 깔고서 누우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 상업 도시인 베살리(Vaiśālī) 도시를 터억 바라다보시면서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느냐? “아!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원시경전(原始經典) 저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피가 넘어오도록 괴로우셨겠지마는 부처님은 조끔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를 안 했고 마음에 추호도 동요가 없었습니다.
춘다가, 그 금속공(金屬工)의 직업을 가진 그 춘다(Cunda)가 바친 그 공양의 공덕이나, 부처님께서 최초에 그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이나—부처님께서는 그 춘다(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잡숫고 기력을 회복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견성성불을 하셨는데,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을 잡수고 열반에 드시게 한 그 춘다에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그 부처님의 그 깨달으신 심경이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높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맑고 고상한 그 뜻은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31분56초~57분54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일등능속백천등~ /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 장재왕(長災王)의 아들과 범달왕(梵達王)의 설화 /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과의 인과(因果) 관계 /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의 지역감정(地域感情)의 우리의 업(業), 인과(因果) / 개인,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 모두 원한에 마음을 풀어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

우리는 중생(衆生)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 미운 생각을 원한심을 없애는 근원적인 방법이 바로 ‘이뭣고?’이다.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된다 /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마음속에다 환허니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 산승(山僧)의 법문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고 있는 것.

(게송) 개개면전명월백~ /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이나,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 / 첫째,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 · 이웃 · 온 겨레 ·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자.


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