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01~425)2023. 4. 24. 10:10

 

 

(No.425)—1990년 9월 첫째 일요법회(화두·불명·십선계 법회) (80분)

 

(1) 약 40분.

 

(2) 약 40분.


(1)------------------

<육사청(六師請)>

경청 석가모니불 예위화상아사리(敬請 釋迦牟尼佛 詣爲和尙阿闍梨)
경청 문수대지사 예위갈마아사리(敬請 文殊大智士 詣爲羯磨阿闍梨)
경청 당래미륵불 예위교수아사리(敬請 當來彌勒佛 詣爲敎授阿闍梨)
경청 시방제여래 예위증계아사리(敬請 十方諸如來 詣爲證戒阿闍梨)
경청 시방제보살 예위동학반려중(敬請 十方諸菩薩 詣爲同學伴侶衆)
경청 석범제천중 예위옹호장엄중(敬請 釋梵諸天衆 詣爲擁護莊嚴衆)

수계(受戒) 받으실 분은 호궤합장(互跪合掌)하고 앉아 주십시오. 모두 앉아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드세요. 예, 그렇게 앉으세요.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허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다.
꽃다운 풀 우거지는 삼춘(三春)에는 비가 내리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드는 구월(九月)에는 서리가 내린다.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빈 마음으로 온갖 삼라만상 변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다. 일 없고 다맛 그것이 바로 평상(平常)이더라.

봄에 꽃이 피고 풀이 우거지며 또 비가 내리고, 가을에 단풍 지고 서리가 내린 것은 이 세상에 모든 물건(物件)이 인연 따라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없어져. 사람도 태어났다가 죽고, 모든 물건도 생겨났다 없어지고, 저 태양이나 이 지구도 몇억만 년 뒤에는 인연이 모아서 생겨난 것이라 언젠가는 파괴가 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우리 주변에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은 파괴와 생멸 · 생사 내놓고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러나 빈 마음으로,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할 수 있다면 그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요,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다 그 말이여. 생멸상(生滅相) 속에 열반상(涅槃相)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허겄더라.


오늘 경오년(庚午年) 9월 첫째일요법회를 기해서 십계(十戒)를 받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불명(佛名)을 신청한 분에게 계(戒)와 화두와 불명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신해년(辛亥年, 1971년)에 설하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미 계도 받고 화두도 다 탔습니다. 산승(山僧)이 다시 여기서 설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 더 간절하고, 그 이상 더 분명하고 감동적으로 설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로부터 화두도 탔고 또 계도 받았다고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일단 여러분이 새로 받기를 청했으므로 불보살(佛菩薩)을 증사(證師)로 모시고 간략히 십계를 설하겠습니다.


계(戒)는, 원래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갈라면 문(門)을 통해서 들어가고 또 그 방에서 나올 때에는 문을 통해서 나오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의 길이 있고, 불자(佛子)로서 불자에 길이 있어. 길을 놔두고 길로 다니지 않고 논으로 밭으로 가시덤불 속으로 다닐 수는 없거든.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길을 잘못 잡아 가지고 이리저리 위험한 데로 또 방향을 잘못 잡아서 간다면 애만 많이 쓰고 설사 목적지에 도달한다 해도 몇 배의 시간과 공력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불자로서 가져야 할 행실, 첫째, 몸[身]으로 지녀야 할 세 가지. 살생,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셋째는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다음에는 입[口]으로 지키는 네 가지.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또 기어(綺語), 기어라 하는 것은 이리저리 꾸며대고, 잡스럽고 잡탕스러운 말, 해서는 안 될 말 또 아무 뜻 없는 말, 이러한 말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양설(兩舌), 이간질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는 악구(惡口), 욕을 하지 말아라. 이것이 입으로 지켜야 할 네 가지여.

그다음에 뜻[意]으로 지키는 세 가지는, 탐욕(貪欲)을 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불진에(不瞋恚), 썽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어리석은 마음, 삿된 소견을 내지 말어라.
이 어리석고 삿된 소견이라는 것은 첫째, 불자(佛子)로서는 인과법(因果法)을 부정하는 거여, 인과를 믿지 아니하고 인과의 법칙을 믿지 않고 인과를 부정하는 거, 이것이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그래서 살생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 주어야 하고, 또 도둑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내 것을 남에게 보시를 하고,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행실을 청정하게 갖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말을 하고, 또 꾸며대는 말 또는 잡탕스러운 말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말을 신사답게 신사 숙녀에 어울리는 그러한 청정한 말을 해야 한다.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간질을 해 가지고 두 사람의 사이를 벙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합할 수 있도록 자비스러운 말로써 화합을 붙여야 한다.
악구(惡口)—‘호랭이 물어 갈 놈, 급살 맞을 놈, 벼락 맞을 놈, 오라를 질 놈’ 이런 입에 못 담을 말을 남에게도 해서는 아니되는데 이것이 습관이 되면은 자기 형제간에도 하고, 자식한테도 하고, 아무한테라도 그런 말이 풀풀 나온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말 한마디, 설사 꼭 미워서가 아니라 이뻐서 못 견디면 입에 못 담을 욕을 하는 수가 있거든. 이것도 불자로서는 해서는 아니된다 그 말이여.

입 밖에 한번 뚝 말이 떨어지면 그것이 한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낱낱이 언젠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면 그 말이 씨가 되어 가지고 그것이 현실화(現實化)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돈 드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말을 함부로 풀풀풀풀 해 버릇하면 망어(妄語)를 하고, 기어(綺語)를 하고, 양설(兩舌)을 하고, 악구(惡口)를 하면 그것이 낱낱이 다 그 과보(果報)로 나타나는 것이매, 참 말을 조심해야 해. 행동도 조심해야 하지만 말도 행동 못지않게 더 말조심을 해야만 불자(佛子)다운 불자다.

탐심(貪心)을 내는 거, 탐심을 내는 것은 남이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아휴, 저걸 내가 갖고 싶다. 어떻게 해야 저것을 내 것을 삼을까? 달라고 해서 안 주면 훔치기라도 허까?’ 이러한 탐심은 아마 어린애들 어린아이들이 내는 탐심일 거고.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대중에 이렇게 살아가고 세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이고, 제 생각대로만 하려고 밀어붙이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 되고 남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하면 썽을 내거든. 이것이 진심(瞋心)이여.
참! 지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한다고 썽을 내면 이것이 팔불출(八不出)도 못되고, 칠불출도 못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매 생각이 다른데,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을 것인데, 남의 말도 귀기울여 들을 줄 알고 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 말을 귀기울여서 들어보면 아 자기 말보다 ’저 사람 의견이 좋다’ 생각하면 아 대번에 그 사람의 의견을 또 찬동을 찬양을 해 주고, 이리해서 서로서로 지혜를 모아서 바른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가야지 제 주장만 내세워 가지고 둘 모이면 싸움하고, 셋 모이면 싸워. 집안에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회사에 가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물론 의견을 모이는 과정에서는 서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가 있지만, 이렇게 해서 여러 방면으로 토론을 하다가 그중에서 가장 좋은 의견으로 일단 모아지면, 그 의견에 모두가 다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행동을 통일해 나갈 때 사회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나라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또 온 세계도 평화가 올 때가 있을 것이다.

한 번 두 번은 몰라도 일생 동안을 탐욕(貪欲)과 진에심(瞋恚心)으로 일관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고 무엇이냐.
지끔 온 세상이 나날이 혼란하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되어 가는 일보단 참 앞날이 걱정스럽게 모든 일이 되어 가는 것은 이 사람들이 이 십선계(十善戒)를 믿고 지켜 나가지 아니하고, 그걸 지키지 아니하면 십악죄(十惡罪)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믿고 지키고 실천해 나가면 이것이 십선계가 되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戒)만을 믿고 고대로 실천해도 그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어느 곳에 무엇으로 태어나되 항상 왕(王)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 계를 철저하게 잘 지키면은 천상(天上)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날 것이다」
인자 이 경(經)에 보면 이렇게 말씀이 쓰여 있지만,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천상에 태어나 봤자 자기가 지은 복(福)만큼 다 받으면 또다시 떨어지니 계(戒)만을 집착해서 계만을 지킨다면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참다운 대승계(大乘戒)가 되지를 못한다.

오늘 이 열 가지 계(戒)를 설하되, 어떻게 하면 이 계(戒)를 영원히 타락이 없는 대승계로써에 차원 높은 계를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설할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참선법을 설하기 전에,

이상 설한 열 가지 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열 가지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편안하게 앉어요. 연비(燃臂) 먼저.

다시 호궤합장(互跪合掌).

참회진언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2분 20초 계속)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히 앉으셔요.

십계(十戒)를 받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따끔하게 그 연비를 한 찰나에 그렇게 무량겁 동안 지은 크고 작은 그 많은 죄가 소멸이 되느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이유가 있는 것이여.

나선 비구(那先比丘), 나가세나(Nāgasena). 나선이라고 하는 비구 스님한테 저 왕(王)이 묻기를, “평생 동안 지은 죄가 임종(臨終)할 때에 염불(念佛) 열 번만 하면 죄가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난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금생 백 년 동안 지은 죄뿐만 아니라 무량겁 동안 지은 죄가 어떻게 마지막 숨 딱 거둘 때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열 번만 불러도 죄가 없어진단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선 비구라고 하는 그 큰스님이 대답을 하기를, “큰 돌, 무거운 돌을 백 덩어리를 큰 배에다가 실으면 그 돌은 물속에 가라앉지를 않을 것이고, 조그마한 주먹텡이만한 돌 한 개도 배에다가 실지 않고 그냥 물에다가 던지면 그 돌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법을 믿고 일심(一心)으로 염불을 하면 그 부처님의 그 원력(願力)으로 마치 그 무겁고도 큰 돌만한 돌을 배에다가 실으면 안 가라앉듯이 반드시 그 사람은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날 것이고,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의 그 원력의 가피(加被)를 입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은 죄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또 이렇게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 그렇게 말씀이 있고.

또 『지론(智論)』에 보면 ‘어째서 보통 때 열 번 한 것보단 마지막 그 죽을려고 하는 그 임종시(臨終時)에 잠깐 염불한 것이 그렇게 무서운 힘이 있을까?’
보통 때는 아무래도 생각이 그렇게 가다듬어지지를 않고, 마지막 죽을 때는 이제 막바지라, 그러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 이제 내가 숨 거두면은 지옥에 갈지—반드시 자기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다. 다행히 열 번만 지극정성으로 불러도 극락에 간다니 일심(一心)으로 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면 ’내가 여기서 있는 힘을 다해서 목숨을 버리고 싸우지 아니하면 적한테 죽을 것이고, 여기서 인자 도망갈 곳도 없고 차라리 죽느니 한 사람이라도 더 적을 죽이고서 기어니 이 적을 다 몰아 다 쳐죽여야겄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나라도 살겄다‘ 이러한 마음을 내면 적은 군사로도 대적(大敵)을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고.
’아이고! 적이 저렇게 많으니 싸워 봤자 죽을 거 이것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도망쳐서 살꼬‘ 이런 생각을 먹으면은 눈 깜박할 새에 맞어 죽을 것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양(量)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금덩어리 한 냥과 꽃다발 백 개의 꽃다발을 처쟁여 놓으면 우선 꽃을 백 다발을 쌓아 놓으니 울긋불긋 보기도 좋고 잠시 향내도 나겠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면 그거 별것이 아니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숯불, 불꽃이 훨훨 타지도 않는 조그만한 숯불이 별로 보잘것없지만,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마른풀을 그 조그마한 숯불로 그것을 태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독사는 조그만한 독사 새끼라도 그 독사한테 물리면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여.

독사나 황금 덩어리는 조그만하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듯이,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난 그 간절한 한 생각은 능히 무량겁(無量劫) 죄(罪)도 소멸할 수가 있고, 억겁(億劫)의 생사윤회(生死輪廻)도 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끔 이 십계(十戒)를 받고 따끔하게 이 연비(燃臂)를 받은 그 찰나에 여러분의 죄가 소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거거든.

계를 지키면은 우선 우리의 양심(良心)이, 우리 사람 사람마다 다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 ·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의 부처님을 낱낱이 다 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여. 그 양심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은 우리의 그 불성(佛性)에서 나오는 거여.
그래서 항상 계행(戒行)을 여법(如法)하게 지키면 양심과 서로 계합(契合)이 되기 때문에 마음에 항상 편안하고, 마음에 항상 떳떳하고, 마음에 항상 기쁨이 있는 것이여.

계율을 파하고—살생을 헌다던지, 도둑질을 헌다던지, 사음을 헌다던지, 이간질을 헌다던지, 거짓말을 헌다던지, 또 탐욕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자기 마음의 양심에 가책을 받아 가지고 항상 얼굴이 어둡고 떳떳하지를 못하며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어둡고 불편하면 얼굴도 어둡고, 눈도 거뭇 껌껌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똑바로 남의 얼굴을 쳐다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바르지를 못하면 행동도 바르지를 못하고 밝지를 못하는 법이거든. 그러한 어둡고 바르지 못한 마음에서 어둡고 바르지 못한 행동이 나오고, 그러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안정을 얻지를 못하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한들 일이 제대로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를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하니,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어머니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아내로서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편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아무리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전생에 지은 복이 있어서 잘산다 하더라도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하면 어디다 쓸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세속에 사는 데 있어서도 이 계(戒)는 잘 가져야 할 것이고, 불자로서도 이 계는 잘 가져야 해. 계(戒)를 잘 가져야 그래야 정(定) 선정(禪定) 참선(參禪)을 올바르게 하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기 때문에 참선을 하더라도 올바른 참선을 할 수가 있어. 참선을 올바르게 해야 지혜의 눈을 떠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것이다.
견성성불을 할려면은 선정을 닦아야 하고, 선정을 올바르게 할려면은 계행(戒行)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삼학(三學), 세 가지 배움이여. 경(經) · 율(律) · 론(論), 삼장(三藏)을 분석을 하면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으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처음~40분17초)





(2)------------------

근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받은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도 올바르게 참선을 해 나가시면 계는 그 가운데에 지켜져.
내가 계를—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하고—‘내가 계만을 청정하게 지켜야겄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파리 한 마리도 안 죽이고, 모기 한 마리도 안 죽이고, 그저 뭐 비린내 난 것도 안 먹고, 생선이고 뭐 고기 한 점도 먹지 않고 철저하게 아주 계를 지키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그렇게 실천을 하신 분이 스님 가운데도 있을 것이고, 신도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왕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계를 지킬 바에는 대승계(大乘戒)를 지켜야 하고, 최상승계(最上乘戒)를 지켜야 허겄더라.
형식으로 지키는 계(戒)는 그 잘 지킬려고 하는 그 마음은 참 갸륵하고 갸륵하나, 그러한 계는 계상(戒相)에 떨어지기 때문에 계상에 집착해 가지고 지킨 계는 기껏 지켜 봤자 천상(天上)에 태어나면 고작이여.

잘못해 가지고 길을 걸어가다가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으면 ’아! 내가 살생을 안 할라고 했는데 저 살생을 했으니 내가 인자 어떻게 할까? 틀림없이 내생에 저 벌레가 나를 밟아 죽일 것이고, 저 벌레를 죽였으니 천상에 올라가기는 틀렸다‘ 이래 가지고 그것 한 마리 때문에 벌벌벌벌 떨고 불안초조해서 그런다면, 그러한 마음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냐 그 말이여.

파리 모기 안 죽일려고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승화(昇華)시켜서 자꾸 화두를 들고 참선을 여법히 해 나가면, 모르는 가운데 혹 벌레가 밟혀 죽을 수도 있고, 농사를 짓다 보면 농약을 뿌리게 되고 수없는 벌레가 죽게 되고, 밥을 먹고 채소를 씻쳐서 국을 끓이다 보면 수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도 그 속에서 죽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계상(戒相)에 집착해서 산다면 밥도 못 먹을 것이고, 국도 못 끓여 먹을 것이고, 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계를 지키라는 것이 아녀요.

물론 그 눈에 보일락말락한 그런 벌레도 그 생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생명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셨지마는, 부처님께서 그러한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뜻이 그 참뜻이 무엇이냐? 자비심(慈悲心)을 가져라 이거거든.
살생을 하면은 자비심을 손상하게 되니까 자비심을 함양을 해라. 항상 자비심으로 살아라. 자비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 자비심을 가지라고 하는 그 참뜻을 우리가 깊이 명심을 해야지, 파리 한 마리 모기 한 마리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그거여.


시라(sīla, 尸羅)가 불청정(不淸淨)하면—시라(sīla)는, 계(戒)를 인도 말로 시라(sīla)라 그러는데, ‘시라가 청정(淸淨)하지 못하면은 삼매(三昧)가 현전하지 못할 것이다. 삼매가 청정하지 못하면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하셨어.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비유해서,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올바른 자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물론 참선은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할 수 있어야 정말 참선을 제대로 하는 것이지. 그러나 기본자세(基本姿勢)라고 하는 것이 있어, 기본자세. 기본자세는 바로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여.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기본자세를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말이여.

그리고 낮에도 쉬는 시간, 항상 바른 자세를 가지고 의자에 앉더라도 바르게 앉고, 섰을 때에도 바르게 서고, 걸어갈 때에도 항상 바르게—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든지, 너무 뒤에로 요렇게 제치고 걸어간다든지, 좌우로 삐뚤어지게 이렇게—앉을 때 걸어갈 때도 역시 그런 거여.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는 거여. 자세만 봐도 ‘아 저 사람이 인격자다, 아니다’ 또 ‘저 사람이 지금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느냐,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런 것도 알 수가 있는 거여.
아무리 속에 지식이 들어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세가 삐뚤어져 가지고 턱을 내고 입을 헤벌레하게 벌리고, 눈은 생선 눈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존경할 수가 없어.
비록 속에는 별로 지식이 든 것이 없고 그렇지만 자세만 단정(端正)하니 이렇게 앉었어도 그 사람을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여. 특히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는 어디를 가나 어디서나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하는 거여.


사리불(舍利弗)과 목련존자(目連尊者)는,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왼팔이고 좌면 제자(左面弟子)고, 사리불은 부처님의 오른팔 노릇을 한 수제자인데, 원래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외도(外道)의 제자로서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린 외도로서는 큰 사람이여.
큰 종장이였었는데 그 스승이 죽고, ‘우리가 바른 스승을 찾아가자’ 누구든지 먼저 바른 스승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 연락을 해 주기로 하고 계속해서 나름대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왕사성(王舍城)에를 들렸는데, 참 자세(姿勢)가 바르고 그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거룩해요.

그분[아설시(阿說示), Aśvajit, 마승(馬勝)]이 바로 이 오비구(五比丘) 중에 한 분이였었는데, 너무나 그 자세도 장부(丈夫)답고 흥건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눈매가 아주 바른, 아주 그 눈매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맑고 안정이 되고 한 모습이 너무너무 ‘야! 틀림없이 이분은 훌륭한 분이다, 이분은 과연 누굴까? 이분에 스승은 누굴까?’
그래 다가가 가지고 물어보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승이란 말을 듣고 바로 그길로 따라가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지혜의 눈을 얻었고 또 목련존자한테 알려서 같이 그 제자들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리고 부처님께 가서 제자랑 다 같이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부처님 왼팔—부처님께서 오비구(五比丘)를 제도하시고 머지않아서 삼가섭(三迦葉)을 제도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 그 1,250인의 제자를 그렇게 얻어 가지고 그렇게 참 불법(佛法)을 펴셨는데, 그렇게 펴게 된 그 동기의 하나가 부처님의 그 오비구 중에 한 사람인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훌륭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사리불과 목련존자라고 하는 훌륭한 제자를 얻은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속은 시커먼 도적(盜賊)의 마음을 가지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맑게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항상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信心)으로 정진을 해 나가면 자연히 자세가 바르게 되겠지만, 우선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바르게 정진하는 법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하니 우선적으로 자세부터 바르게 함으로써 차츰차츰 바른 정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를 이렇게 바르게 하는 것은 너무 몸을 자지바지하니 뒤로 하고 목에다 힘을 주고 그러라는 것이 아니여. 바르게 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고, 목의 힘을 빼고, 우리 뭐 조끔 자기가 권리가 좀 있고 돈을 좀 벌면 ‘아주 목에다 힘준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러한 것은 자세를 바르게 한 것이 아니여.
단정(端正)하게 몸을 갖되 힘을 빼야 하거든. 어깨의 힘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눈도 선명하게 평상(平常)으로 뜨되—눈알이 왔다갔다 눈이 깜빡깜빡깜빡하고, 눈알이 좌우로 전후좌우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게 못쓰는 거여. 눈은 따악 안정이 되고, 그러니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거든.


<올바른 호흡>

그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해야 해. 숨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은—보통 우리는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마는 단전으로 호흡을 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게—너무 터지도록 들어마시란 게 아니라,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까지 가도록 이렇게 눌러 대는 것이 아니고, 숨은 들어마시면 이 허파까지 밖에 안 들어가는 것이여. 안 들어가지만 의식적으로 배만 약간 볼록하게 만들면 되는 거여.
들어마신 호흡이 거까지 가도록 눌러 대면 못쓰는 거여. 그러면 여그 오목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나중에는 못쓰는 거여.

답답하고 소화도 안 되는 것이니까, 들어마신 호흡을 거까지 밀어넣을라고 하지 말고, 스르르르~ 하니 자연스럽게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丹田)만 약간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게만 하는 거여. 그것을 잘 알으셔야 돼.
그래 가지고 8부쯤 들어마셨으면 잠깐 정지했다가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만 하면 되어요.

그래서 들어마시면 차츰차츰차츰 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배가 나온다니까는 이만큼 나오도록 그렇게 맨들라고 하면 안 돼. 포태(胞胎)해서 열 달쯤 된 것처럼 그렇게 배를 맨들라는 게 아녀요. 조끔만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라는 거여. 그것을 착각하면 그 단전호흡을 하다가 병났다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고 약 2cm나 3cm만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2cm나 3cm만 조끔 홀쪽하게 맨드는 거여. 그래서 배가 나왔다 또 정지했다가 또 홀쪽했다 이거여. 그놈 따라서 숨이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게.

이것은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건강에도 좋고, 피로 회복하는 데에도 좋고 또 뭐 신경을 너무 써서 열이 오르거나 혈압이 오르거나, 기운이 위로 오른 것을 내리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것이여요.
또 학생들 공부하는 데에도 항상 공부 시작하기 전에도 하고, 공부하면서도 하고, 공부하고 나서 쉬는 시간에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것이여. 가정주부도 좋고 또 회사에 나가는 사람도 좋고, 운동선수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거여. 피로 회복이 되고 혈액 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안정이 되고 하니까 대단히 좋은 것이고.

그런데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요가에서 하는 법도 있고, 신선도(神仙道)에서 하는 법도 있고, 또 사회에는 여러 가지 단전호흡법을 전문으로 가르키는 도장도 있고 합니다마는, 다 그 나름대로 장점이 다 있습니다.
몸에 특별한 병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도장에 나가서 그런 전문가한테 배워서 그 병을 나수는데 그런 호흡을 하는 것은 혹 가(可)커니와—참선하는 사람은 그러한 호흡법을 하다가는 언제 화두(話頭)를 드냐 그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러한 호흡법보다는 지끔 산승(山僧)이 말한 간단하고도 쉬운,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아무리 해도 아무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이런 간단하고도 쉬운, 계속해서 해도 조끔도 부담스럽지 않는 이러한 호흡법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은 분은 알아듣지마는, 또 그걸 잘 못 알아들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이 테잎(tape), 녹음 테잎(錄音tape)이 있으니까 그 테이프를 구득(求得)을 해서 그래서 그걸 가지고 여러 번 들으면서 하면 호흡하는 법,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법, 또 화두를 바르게 드는 법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의심>

화두는,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들어마실 때도 ‘이뭣고?’요, 머무를 때도 ‘이뭣고?’요, 내쉴 때도 ‘이뭣고?’ 항상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항상 끊어지지 않고 독로(獨露)해야 하지만, 초학자는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해보시라 그 말이여. 한결 화두가 잘 들어져.

처음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 한 달 두 달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뭐 ‘이뭣고?~’ 한 번 해 놓고, 호흡이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섯 번이고 몇 번 쉴 동안에도 ‘이뭣고?’ 한 번 해서 있는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면 되는 거여.
꼭 3년 10년을 두고도 계속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뭣고?’ 한 번 딱! 든 화두로 하루 종일 그 화두만을, 알 수 없는 의심이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따~악 거기에 있도록 그렇게 관해 나가야 해.

관(觀)이라 하는 것은 그것도 일종에 생각인데,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생각 없는 생각, 생각하면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생각이 이렇게 이렇게 왔다갔다하는데 움직이는 것인데, 관(觀)은 움직임이 없는 생각, ‘이뭣고?’ 했을 때 전후좌우 앞뒤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따~악 있는 거여. ‘이뭣고?’ 한 뒤에 그 남은 그—그 생각이 앞뒷이 다 끊어졌거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면 의단만을 따~악 관조(觀照)해야지, 의단이 있는 데다가 ‘이뭣고? 이뭣고?’ 하고 자꾸 덮치기로 하는 것이 아니여.

참 수백 번 들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처음 오신 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잘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잘 들 수 있으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여.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허고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요
나무~아미타불~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허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니라
나무~아미타불~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
여러분께 권하노니 깊은 신심으로 이 묘한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의 화두(話頭)를 참(參)해서 얻기 어려운 이 감격스러운 이날을, 이 좋은 날을 어찌 헛되이 지내리요.

오늘 여러분은 계(戒)를 받고 또 최상승 활구참선의 화두(話頭)를 탔고 또 불명(佛名)을 타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죄가 소멸하는 날, 부처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난 날입니다. 오늘 이 시간과 같은 이 마음으로 앞으로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1초 1초를 그렇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량겁래(無量劫來)로부터 오면서 어찌 오늘날과 같은 날이 그렇게 흔했겠습니까. 물론 과거에도 이러한 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또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우리 사부대중이 같이 만났을 것입니다마는, 이런 날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닙니다.

이날에 이 마음이 바로 장부(丈夫)의 마음입니다. 비록 여자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이 시간을 기해서 여러분도 장부가 되었습니다. 최상승법을 믿고, 계를 받고, 화두를 타고, 불명을 받게 되었으니, 거기에는 남녀상(男女相)이 없어.
이름하여 그것을 대장부(大丈夫)라 하느니, 불자(佛子)로서의 대장부 해탈장부(解脫丈夫)가 되었으니 영겁을 두고 우리는 대장부로서 생사요달(生死了達)을 하고, 생사요달한 장부로서 일체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그 유래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까 말씀드린 목련존자(目連尊者), 목련존자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인데, 그 신통제일인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생전에 지은 죄로 아귀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고 있어. 목련존자가 신통을 얻어 가지고 어머니 계신 곳을 살펴보니 아귀도에서 그 배고프고 목마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어.

그래서 자기 신통술로 그것을 아무리 그 아귀도에 가 가지고 시원한 물을 드려도 불로 변해 가지고 목이 훨훨 타고, 밥을 갖다가 드려도 목이 콱 맺혀서 불이 나 가지고 더 고통을 받어. 도저히 자기 신통으로도 다 하지 못하니까 부처님께 여쭈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그 모친을 구제(救濟)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너의 신통술로도 안 되는 것이다. 백중날 모든 대중이 해제(解制)를 할 때에 그 대중은 청정한 몸과 마음으로 수행을 해서 다 도심(道心)이 맑고 청정해졌으니 부처님과 그 대중들께 대중공양(大衆供養)으로 백 가지 과일과 맛있는 음식으로 대중공양을 올리면 그 대중스님네 공양을 올린 공덕(功德)으로 너의 어머니가 그 아귀도에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것이다“

그래 가지고 목련존자는 그길로 가서 탁발(托鉢)을 해 가지고 많은 음식과 과일을 마련을 해 가지고 부처님과 대중께 백중날 대중공양을 올려 가지고 그 어머니를 그 고통으로부터 제도(濟度)를 했습니다.
그 뒤로 해마다 백중날은 그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대중공양을 올리고 또 그 남은 음식을 선망부모(先亡父母)에게 하는, 그런 부모를 천도(薦度)하는 그런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주욱 내려오고 있습니다.

요새 잘 모르는 분들은 ‘선망부모를 천도한다’ 해 가지고, 부처님께는 소홀히 올리고 대중스님께는 공양을 별로 안 올리고, 영단(靈壇)에다만 이렇게 쌓아 올린다. 그건 백중날의 그 근본 뜻을 잘 모르면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영단에도 올린 것도 좋지마는, 어쨌든지 부처님과 대중공양에 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정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는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법당(法堂) 가득히 이렇게 오시고 내일은 이 핑계 저 핑계하고 혹 안 오실라고 하신 분이 있을란가 모르지만, 정말 내일은 선망부모(先亡父母), 그 선망부모가 아니면 오늘날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까?
내일, 물론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다 모셨을 것이고 안 모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선망부모는 백중날 ‘어느 자손이 나를 천도해 줄 것인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친구 따라서 와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자손들이 와 있는데 내 아들 딸 며느리는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정성으로 그분도 역시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스님네의 정진하신 그 정진력과 신심으로 그분도 좀 얻어 잡숫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속으로 섭섭하시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니 오늘 오신 분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또 여러분의 가족이나 일가친척 사돈네까지라도 여기 뭐 준비할 것 걱정하시지 말고 어쩠든지 많이 오셔서 모다 참석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불명(佛名)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 노나 드릴 테니 신청만 해 놓고 안 찾아가시면 그것이 이렇게 쌓이게 되니까 반드시 그 불명을 찾아가시기를 부탁을 하고, 그전에 신청을 해 놓고 안 가져가신 분도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허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니라
나무~아미타불~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하고, 먹구름이 일어나 문득 우뢰가 천하에 진동하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라. 작달비 같은 비가 들로부터서 몰려오는구나.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라.
길 가는 나그네는 그 비를 맞고 그 더웁고 피로한 것을 비로 인해서 깨끗이 식혀 버리고, 돌아가는 길이 깨끗하게 씻어져서 문지(먼지)도 안 나고 좋구나.

지끔 온 세상은 이렇게 먹구름이 일고 우뢰가 치는 거와 같습니다. 세계 도처에는 온갖 무서운 무기를 장만하고 그것을 국경에다가 모다 하고 이웃나라를 침범하고 사람이 죽고, 지금 우리나라도 삼팔선(三八線) 모다 뭐 양쪽 뭐 총리 회의가 있다고 모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여전히 무력(武力) 대치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걱정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우리 국내에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온갖 일이 마치 먹구름이 일고, 모다 폭풍우가 일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나쁘게 보면 잠을 못 잘 지경이고 그렇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꼭 어둡게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고,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그것을 그렇게 우리가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먹구름이 일라면 일어라. 뇌성벽력이 일어날라면 일어나라. 작달비가 쏟아질라면 쏟아져라’ 더위를 식히는 것으로 우리는...
그럴 때에 우리는 신심(信心)을 가다듬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우리의 자성을 갖다가 반성하고 그래 가지고 더 무상(無常)을 깨닫고 신심을 더 돈독히 해서 정진을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서 우리의 앞길은 보다 더 밝게 열려 나갈 것이고, 집안도 보다 더 행복하게 나갈 것이고, 사회 · 국가 · 세계도 평화의 방향으로 열려 나갈 것입니다. (40분18초~1시간20분33초) (끝)





[법문 내용]

육사청(六師請) / (게송)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 / 화두·불명·십선계 법회 / 계(戒)라고 하는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우리 불자(佛子)의 목적지에 가는 안전하고, 빠른 길 / 십선계(十善戒) /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 / 대승계(大乘戒).

연비(燃臂)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 / 나선 비구의 ‘배에다 큰 돌을 싣는’ 비유 / 생사윤회의 원인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올바른 자세> <올바른 호흡> <올바른 화두 의심>을 잘하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다.

(게송)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 / (게송)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 / 모든 어둡고 걱정스러운 일을 참선 수행인은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비(燃臂)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가부좌나 반가부좌,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76~300)2023. 4. 16. 21:06

 

 

(No.286)—1985년(을축년) 성도재법회(85.12.08.음) (43분)

 

약 43분.


약문여래본기인(若問如來本起因)인댄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여래(如來)가 본래 일어나는 인연을 물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본래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여래가 본래 일어나는 것, 여래(如來)는 부처님인데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부처님이 아니라, 본래 오시되 오신 바가 없고 가시되 가신 바가 없는 그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이여.
그 '본래 법신으로서의 그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그 도리를 물을 거 같으면,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여. 그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면 벌써 천진(天眞)을 상실(喪失)한다.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원상이다. 원래 둥그런 것이다.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이요, 모든 부처도 서로 보지를 못하고 가섭도 전할 수가 없다.
원상(圓相)이니 비원상(非圓相)이니 벌써 그것을 표하면, 그렇게 해서 표적을 하면 벌써 무명(無明)의 함정에 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여. 벌써 그것을 깨달랐느니 못 깨달랐느니, 무엇을 일러서 깨달랐다. 깨달라서 부처가 되고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나왔다느니 벌써 깨달랐다고 이르면 벌써 누진(漏塵)에 떨어진 것을 면치를 못할 것이다.


오늘은 을축년(乙丑年)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입니다.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어떻게 하면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느냐?' 그 생사해탈하는 그 길을 깨닫기 위해서 훌륭하다는 여러 스승을 찾았습니다.
찾아가서 그 스승 밑에 수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단 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의 인가를 받고 그 스승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법을 이어받을 것을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으로써 만족하시지 않고 그것이 구경(究竟)에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더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또 그 스승 밑에 가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또 도를 수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많은 스승을 찾았고 수없이 많은 스승을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히말라야 산속에 찾어볼 만한 모든 스승을 다 찾어보고 다 해봤지만 그것으로써 마침내 만족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 앉아서 「내가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에는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한 그런 서약을 하고서, 결심을 하고서 스스로 도(道) 닦는 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욕개지식문전로(欲開只識門前路)인대는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인디  고금의쇄기다인(古今疑殺幾多人)고
나무~아미타불~

문 앞에 길, 문 앞에 길. 집집마다 자기 집 문 앞에서 시작한 길이 모두가 다 장안(長安)으로 통하는 것이여. 서울로 다 통해.
어느 깊은 산골짜구, 어느 촌에 있는 조그만한 오두막살이라 하더라도 문밖에 나가면 그 길이 결국은 상감마마가 계신 서울로 통하는 길인데, 그 길이 결국은 어디로 가던지 통하지만 가장 바로 가는 길,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른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돌아서 가기로 하면 북쪽에 있는 서울을 가는데 남쪽으로 가더라도 저리 저리 돌고 돌아서 간다면 못 갈 배는 아니지만,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좋은 길은 그 많은 길 가운데에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여. 온 몸뚱이가 전신이 다 이 병(病)이요, 전체가 다 이 약(藥)이다 그 말이여.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이여. 온 세계가 전부가 참[眞]이요, 온 세계가 바로 띠끌[塵]이더라.
길, 길이 다—서울을 바로 안다면 어디를 어느 곳을 향해서 가거나 서울로 통하는 것이고, 잘못 가면 어디를 가나 그 길이 전부가 다 잘못된 길이여.

이 바른길을 알기 위해서 깨달음을 향해서 수많은 남녀노소가 이 깨달음을 향해서 길을 찾고 있는데, 그 자기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하고 고생을 하고—말을 아니한다든지, 밥을 굶는다던지, 잠을 안 잔다던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한다던지, 참 그 애쓰는 모습도 가지가지고 방법도 천 가지 만 가지지만, 이것이 모다 그 바른길을 찾기 위한 한 몸부림이고 애쓰는 것이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또는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 때문에 깨달음을 찾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걸 의심하다가 죽었느냐?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면 더 나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을까?' 이래 가지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한량없는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불(佛), 부처님과 조사의 편안한 집이요, 모든 성현에 걸어가는 길이요, 한량없는 중생이 떠받드는 바고, 만세(萬世)에 향해 나갈 길이고, 삼계(三界)에 근본이여.
근본이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그것 때문에 출세(出世)하셨고, 그것 때문에 법(法)을 전하고 받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그 한 일을 위해서 출가도 했고, 그 한 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이 추위에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또 법회에 참석을 하시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그랬어. 꼭두각시의 근원이다.
어째서 ‘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꼭둑각시, 몽환(夢幻)의 근원이냐 하면 그 여읠 것을 여의어 버리면, 그 환상이라 하는 것을 여의어 버리면, 참으로 바로 여의어 버리면 환(幻) 위에다가 무슨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세울 것이냐? 또 그 보내 버릴 것을 보내 버리면 공(空) 가운데에 다시 공(空)을 용납할 것이 있겠느냐?

우리가 번뇌와 망상, 모든 그런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버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 버릴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새로운 번뇌가 일어나고 새로운 몽환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여. 또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그런 번뇌와 망상을 보내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진공(眞空)으로 맨들려고 비울려고 하기 때문에 그 비울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오히려 비지를 못해.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망상을 버릴려고 하다가 새로운 망상을 일으키게 되고, 우리의 마음을 비게 할라다가 오히려 공(空) 가운데에 새로운 공(空)이라고 하는 소견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은 애써서 도를 닦고 애써서 정진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바른길을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버릴려고 애쓰다가 새로운 번뇌 속에 파묻히게 되고, 마음을 비울려고 하다가 오히려 마음은 비기 커녕은 점점 무서운 망상을 생각 속에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을 깨끗이 할려고 하다가 깨끗이 할려고 하면서 그 흙탕물이 빨리 말가지게 하기를 바랜 사람이 자꾸 진흙을 타면서 내휘저은 거와 같애. 차라리 가만 놔두면 그 제절로 말개질 텐데 빨리 말개지기를 바래 가지고 자꾸 손을 넣어서 휘저으면 점점 흙탕물만 더 일어나고 마는 것이여.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그러다 보면 온갖 망상도 일어나고 혼침도 오고 그러지만, 그 망상이니 혼침이니 그런 것을 애써서 없앨려고 하지 말고 자꾸 화두(話頭)만을 들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꾸 화두만을 들어.

앉아서도 화두(話頭)를 들고 서서도 화두를 들고, 포행(布行)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앉아서 하다가 혼침이 오면 포행을 하면서 하고, 포행을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아서 하고.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들 줄 알면 무슨 깨달음을 빨리 얻기를 바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성화댈 필요도 없고, 망상을 버릴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하는 것이여.

번뇌가 일어나도 그 번뇌를 '일어난다'고 짜증을 낸다든지, '이 망상 번뇌 때문에 이거 공부를 못한다' 그런 생각을 추호도 낼 필요가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처꺽 거각(擧却)하면 일어났던 망상이 뿌리가 없는 것이라 찰나간에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거여.
없앨려고 하면은 무장 일어나고, 없앨라고 하는 생각 없이 화두(話頭)만을 들면 망상은 제절로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온갖 방편을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 오히려 몸만 쇠약하게 맨들고, 정신만 무장 이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점점 조급해지고, 조급해질수록 마음은 더 안정이 안 되고, 마음이 안정이 안 되니 몸은 점점 쇠약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한 철, 두 철, 세 철, 네 철 하다 보면 아무 까닭도 없이 몸이 차츰차츰 쇠약해지고 그래 가지고 정진을 하는 데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이여. 이것이 정진을 바로 해 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

모든 방편, 또 모든 망상 이런 것들을 그 처리할 줄만 안다면 그 일어나거나 말거나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망상이 일어나고 주변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을 한다 하더라도, 크고 작은 시비(是非)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내가 그것을 잘 처리만 할 수 있다면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여.
바람 부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나, 나의 주변에 시비가 일어난 것이나 조끔도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바람 부는 소리에 퍼뜩 깨달라 화두를 들고, 새 우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들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챙긴다면 그런 바람 불고 새 울고 물 흘러가고, 주변에서 '잘했네 못했네' 시비가 일어난 것이 안 일어난 것보단 오히려 더 무방하다 그 말이여.
혼침에 빠져서 그렇게 지낼 것을, 그런 시비(是非)와 사건이 좀 일어남으로 해서 거기서 정신을 가다듬고 또 정진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없는 것보단 낫다.

이렇게 해서 밝은 일을 당하면은 바로 밝은 놈으로 돌이키고, 어두운 일을 당하면 어두운 놈에서 바로 돌이키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간다면 마침내는 모든 번뇌와 망상, 일체 시비 사건이 제절로 다 자취가 없어.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하셨는데,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돌을 가리켜서 이것이 옥이다 하면 바로 그것이 옥이 되는 것[指石爲玉]‘이고, '쇠를 점쳐서 금을 이룬다[點鐵成金]', 무쇠 덩어리를 보고 이것이 금이다 하면 그것이 황금덩어리가 되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계제(階梯)가 없어. 차례차례 일 계단, 이 계단 올라가는 그 계제가 없는 가운데에 계제가 있고, 점차(漸次)가 없는 가운데에 점차가 있는 것입니다.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정말 간절히 알뜰하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

닦을 것이 있고,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리킬 수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지만, 부처님과 조사들은 그렇게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중생(衆生)을 가리키셨고, 모든 우리의 선배들은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곳을 향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습니다.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을축년 납월팔일(臘月八日)에 맞이해서 우리 사부대중은 다시 새로운 분심(憤心)과 발심(發心)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갈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돌아오는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우리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법회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동안에 어린이 법회를 해서 처음에 삼사십 명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칠팔십 명, 백 명, 백오십 명 이렇게 해서 나날이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불어나서 참 그 어린이들이 환희심을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고,
어린이 법회를 갖기 전에는 '부모님이 절에 그렇게 다니시는데 뭣 하러 다니는가? 왜 가는가?' 아무 뜻도 모르고 '불교라 하면은 미신'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종교를 믿는 학생들이 '불교는 미신이다, 사탄이다' 이렇게 해서 놀려대니까 거기에 말 한마디 대답을 못하고 어디 가서 '부처님 믿는다' 소리 하는 것을 매우 챙피하게 그렇게 생각을 해 왔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린이 법회를 시작해서 일 년, 이태 이렇게 되니까 어린이들이 우리 부모님이 불교를 믿고 자기도 불교를 믿게 된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학년이 높아져 가지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또 이렇게 올라가게 됩니다.
중학생이 되어 가지고 또 어린이 법회에 나와서 그 어린이들하고 같이 그 참석하기가 좀 계면쩍고, 그렇다고 해서 가고 싶은데 적당한 데가 없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여러 신도님으로부터서 말씀을 듣고 진즉부터 생각해 오다가 금년 새해부터서는 그래서 그 중고등학생 법회를 용화사에서도 갖기로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해 가지고 다음 달 2월부터서는 중고등학생 법회를 창설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니 그동안에 그 어린이 법회에 나오다가 이제 중학생으로 올라간 사람, 또 진즉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러한 자녀분을 가지신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께서는 법회에 그 자녀들로 하여금 참석을 해서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는 왜 훌륭한 종교며, 불교를 믿으면 결국 어떠한 목적에 이를 수가 있는가?' 이런 것을 알고, 어릴 때부터서 알면서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 훌륭한 청신사(淸信士)가 청신녀(淸信女)가 되도록 한다면—그 자녀들에게 재산이나 모다 그런 것을 많이 물려준 것으로써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재산은 별로 물려준 것이 없지만 「바로 사는 길」을 가리켜 주고,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준다면 돈 몇 억, 뭐 재산 준 것에다 대겠습니까? 재산이라 한 것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단시일 내에 그걸 참 없애 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재산이 많다고만 해서 꼭 행복하다고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자식이 불행해진 예도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게 할려면 입으로 "불교 믿으라, 불교 믿으라. 불교를 믿어야 한다" 자꾸 입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다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불교를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해서 '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불교를 믿으시더니 저렇게 참 행복해지시고 저렇게 훌륭해지셨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께서 불교를 믿으시더니 어느 누구의 부모보다도 더 훌륭하시고 참 좋으시다.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버지처럼 불교를 믿고 나도 바른길을 알아서 정말 행복한 삶을 영위해야겠다' 그러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해 주시라 이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금생에, 금생—‘금생’이라 하니까 '앞으로 20년 30년 내지 50년 60년 살다가 죽은, 죽은 그때까지를 금생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당일념(當一念)을 단속하지 아니하면은 바로 그 당념(當念) 일초 후에는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지금 일념을 단속하지 아니하면 다음 일념이 무엇이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
이 몸뚱이 죽은 뒤에 지옥에 간 것은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건 내생 일이니까 지금 알 수가 없고, 당장 지금 이 한 생각 단속하지 아니하면 일 초 훗일이 참 삼악도(三惡途) 갈 것밖에는 더 있느냐 그 말이여.

그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4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약문여래본기인~ /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신,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게송) 욕개지식문전로~ / 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깨달음 때문에 출세(出世)하셨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 정진(精進)은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다 /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해야.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야 /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3. 4. 16. 10:34

 

 

(세등선원No.42)—임술년(壬戌年) 동안거 반산림 법어(1982.11.30.음) (63분)

 

(1) 약 26분.

 

(2) 약 37분.


(1)------------------

황앵(黃鶯)이 상수일지화(上樹一枝花)허고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임술년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반산림(半山林) 법회날입니다.
산승(山僧)이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주장자(柱丈子)를 들어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고서 게송(偈頌)을 읊기를,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다, 흰 해오라비가 들에 내리니 천점(千點)에 눈송이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특히 비구니 정인 복위(伏爲) 망모(亡母) 고성이씨 인화 영가(靈駕)와 망부(亡父) 진주강씨 화엄 영가와, 고영훈 복위(伏爲) 망(亡) 성주배씨 귀남 영가가 사십구재(四十九齋)를 기해서 이 자리에 모시고 이 법문을 듣고, 무량겁 죄업이 눈 녹듯이 다 녹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禪師)에 법을 이어받으신 천룡선사(天龍禪師)가 계셨는데, 그 천룡화상에 법을 이어받은 구지화상(俱胝和尙)이라 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그 도인은 처음에 금화산(金華山), 금화산에 암자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암자에서 지내시면서 준제주(准提呪)를, '옴 자례주례 준제 사바하' 하는 그 준제주를 어떻게 열심히 그 주력을 해서 얼마를 했는지 몇 해를 했는지 하여간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을 준제주를 해서 '나무칠구지불모(南無七俱胝佛母) 대준제보살(大准提菩薩)' 그 칠구지(七俱胝), 구지라고 해서 그 준제주를 어떻게 많이 했던지 그 스님의 별명이 구지(俱胝) 스님이 되었어.
본래 불명(佛名)도 있었고 그랬겠지만, 법명(法名)도 있었겠지만, 너무너무 그 준제주를 했기 때문에 구지화상이라,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 말이여.

그런데 하루는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比丘尼) 스님이여, 실제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억 갓을 삿갓을 쓰고, 방갓을 쓰고 턱 그 암자에 찾아와서, 그 구지 스님이 앉아 있는 승상(繩牀)을 한바꾸 삥 돌고서 떠억 그 앞에 뻣뻣허니 서 가지고서는, “한마디를 일러야, 스님이 한마디를 일러야 내가 이 머리에 쓴 삿갓을 벗겠습니다. 어서 한마디 일러주시죠”
구지 스님이 아 입이 딱! 붙어 갖고 뭐라고 답을 못했어. 또 빨리 이르라고 재촉을 해도 또 못 일르고. 세 번을 일르라고 재촉을 했지만, 종래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實際) 비구니가 팔을 흔들며 소매를 흔들면서 나가는데, 그 구지 스님이 “날도 저물고 그러니까 하루밤 쉬어 가지 그냥 가냐”고. “한마디를 일르면 내가 쉬어 가겠지만 이르지를 못하면은 가겠노라”고. 그래 또 구지 스님이 답을 못했어.

그래서 그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났는데, 그 비구니가 떠난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명색이 대장부(大丈夫)로서 여승(女僧)이 묻는 말에 한마디를 답을 못하고 이러한 분통 날 노릇이 있느냐, 내가 어찌 장부라고 누구 앞에 고개를 들을 수가 있겠는가’ 탄식을 하고, ‘이 암자를 불질러 버리고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나서서 도를, 행각(行脚)을 하면서 도를 닦을 수밖에는 없다’ 이리 마음을 먹고서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그 금화산 산신(山神)이 꿈에 떠억 나타나 가지고 ‘절대로 스님이 이 도량(道場)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며칠 안 있으면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찾아와서 법(法)을 설해 주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할테니까 이 절을 떠나지를 마시오’ 깜짝 놀래서 눈을 떠 보니 꿈이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며칠이 지난 다음 어떤 스님이 떠억 왔는데, 그 스님이 누구냐 하면 아까 말한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에 법을 이어받은 천룡화상(天龍和尙)이라 하는 큰스님이여. 그 스님이 와서 아 그 실제 비구니가 물어서 대답을 못한 그 말씀을 고대로 말씀을 드렸어.
그러니까 그 천룡 스님이 “그러면 그 실제 비구니가 물은 대로 그대가 나에게 물어라”

“도득(道得)하면 내가 이 삿갓을 벗겠으니 한마디를 일러주시지요” 그렇게 천룡 스님께 떠억 물으니까, 천룡 스님이 손가락만 이렇게 탁! 들어서 세웠어. 그 거기에서 이 구지 스님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평생 동안 어떤 사람이 와서 무슨 법을 묻든지—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를 묻던지, 어떤 것이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도(道)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생사(生死)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보리(菩提)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열반(涅槃)이냐고 묻던지, 무엇을 묻던지 간에 손가락만 한번 딱!—평생 동안 법문을 입으로 설하지 아니하고, 무슨 법을 묻던지 손가락만 한번 딱 들어.

그래 가지고 많은 사람이 그 구지(俱胝) 스님을 찾아와서 그 손가락 법문만을 듣고 가고, 듣고 가고 했는데, 하루는 그 구지 스님이 어디를 출타를 하고 안 계실 때에 어떤 스님이 왔어.
그런데 그 구지 스님을 시봉(侍奉)하던 어린 사미승(沙彌僧)이 하나 있었는데, 그 “큰스님이 어디 출타를 하고 안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그 큰스님께서 평소에 어떠한 법(法)을 설하셨는가? 그걸 큰스님 대신 그 법문을 좀 한마디 해 달라고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손가락을 요렇게 딱 들어 보였어.

그래서 그분이 갔는데, 얼마 있다가 그 구지 스님이 돌아오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오늘 무슨 일이 없었더냐?”
“어떤 객스님이 와서 법을 묻길래 제가 법을 스님 대신 설해 줬습니다”

“니가 무슨 법을 어떻게 설해 주었단 말이냐?”
“아, 내 그까짓 것 제가 모르겠습니까? 여러 해 동안을 내가 스님 밑에 있었는데 스님 법을 제가 잘 압니다“

”어떻게 설했느냐?“
”손가락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그러거든.

그 다음에도 어디서 누가 와서 법을 물으러만 오면 지가 손가락을 딱! 들어 보였던 거여. 그래서 그 구지 스님이 품에 잘 든 칼을 하나 따악 가지고 있다가 손가락 탁 드는 놈을 갖다가 탁! 쳐서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인제 중노릇 안 하고 나 간다‘고 막 달아나. 울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큰소리로 부르니까, 아 그래 울면서 그놈이 뒤를 요렇게 홱 돌아다본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거기에서 그 어린 사미승이 확철대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내서 그 구지 스님이 인자 열반(涅槃)에 드시게 되었습니다.
대중을 모아 놓고 마지막 열반 법문을 하시는데, “내가 천룡화상으로부터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었는데, 한 손가락 참선을 얻었는데 일생 동안을 이것을 받아 쓰되 이것이 다하지를 못했어” 아직도 일생 동안을 썼건마는 바닥이 안 났다 그 말이여. “일생 동안을 수용을 해서 다하지 못했노라” 그렇게 떠억 한마디를 하시고 고대로 앉아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로 인해서 대분심(大憤心)이 발(發)해 가지고 결국은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단(大疑團)이 돈발(頓發)을 해 가지고 일주일이 되었던지 열흘이 되었던지, 그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돈발한 상태에서 천룡 스님의 손가락 한번 탁! 드는데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또 관계(灌溪)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이 말산요연(末山了然) 비구니한테 맥혀 가지고 3년 동안을 그 비구 스님이 말산이라고 하는 비구니 시봉을 했습니다. 원두(園頭)를 보면서 그 비구니 밑에서 3년 동안을 시봉을 하면서 도를 닦아 가지고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인도에서도 부처님 당시에 연화색(蓮花色) 비구니라고 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비구니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광명을 발하고 대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佛法)을 빛낸 비구니가 있었고, 중국에도 이 말산요연이라든지 이 실제 비구니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비구니가 있었어.
한국에도 월명각시라든지, 또 근자에는 덕숭산에 법희 스님이라든지 또 범어사에서 일생을 지내던 만성 스님이라든지, 그밖에도 여러 비구니로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참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을 하고, 많은 이익을 후배들에게 끼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짓달 그믐날이 돌아와야 반산림(半山林)이 되겠습니다마는, 이 세등선원(世燈禪院)은 매년 동짓달 스무이튿날 반산림 법회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세등 스님이 그 생일이 바로 이 동짓달 스무이튿날이라, 당신 생일을 기해서 이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도 올리고 또 그 아울러서 법회를 갖는다면 참 좋겠다' 해서 그 문인(門人)들도 그렇게 원하고.
또 그래서, 참 대단히 좋은 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선원(禪院)을 창설을 해서 제방(諸方)에 선객(禪客) 스님네들을 이렇게 모시고, 이렇게 이 선원을 경영을 하고 정진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출가한 사람으로서 자기도 정진하고 다른 선객 스님네도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고, 사부대중이 모여서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을 수가 없고, 참 대단히 환희에 넘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처음~25분39초)





(2)------------------

이 금년에는 모다 여러 군데서 처음 오신 분들, 오신 수좌(首座)님네들이 많이 있어서...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하고, 셋째에는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자세, 호흡>

‘자세를 바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데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거나, 앞으로 숙거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몸이 일직선으로 수직으로 딱 하되 단정(端正)하게 앉되 목이나 어깨나 이런 데 힘을 너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인자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전호흡이 좋다’ 한 말은 다 듣고 알고 있지만, 실지로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기는 썩 어렵습니다. 덮어놓고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오래 참았다가 숨을 내쉬고 이렇게 무리하게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납니다.
부작용이 어떻게 나냐 하면, 가슴이 콱 맥혀서 답답하고 오히려 소화가 잘 안되고, 또 목이 뻣뻣하게 해져서 더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 따라서 이 단전호흡을 하되 정말 올바르게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러면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면, 숨을 들어마실 때에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 것. 또 들어마신 상태에서 호흡을 정지를 하는데, 딱 근치고 한참 동안 있는데, 그 정지하는 시간을 너무 오래하지 말 것. 또 정지를 한 다음에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내쉬는 시간도 너무 오랫동안 걸려서 내쉬지 말 것.

들어마시는 시간도 자기 호흡 형편에 적당하도록, 처음에는 한 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머무르는 시간도 약 3초 동안 그런 정도만 머무르고, 또 내쉬는 시간도 약 3~4초 동안, 그러니까 한번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때까지 한 그 호흡을 약 10초 정도로만 걸려서 하도록. 그러면 누구라도 별로 그렇게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에 별탈이 없습니다. 숨이 가쁘거나 답답하거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태 이렇게 해 가다 보면, 차츰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조끔씩 조끔씩 길어질 것입니다.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숨이 길어지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그런 정도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3초, 3초, 3초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러한 정도로 처음에 시작을 하면,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또 짧으면 짧은 대로, 꼭 길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니까 억지로 길게 하지 말어라 그 말이여.


그런데 이 단전호흡, 본격적으로 본(本)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호흡이 있어.
그 준비호흡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가는데, 그 준비호흡이라 하면, 처음에 이렇게 따악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이렇게 앉으면, 좌우로 서너 번 이렇게 몸을 끄떡끄떡 궁둥이가 뜰썩뜰썩 하도록 몸을 이렇게 서너 번 이렇게 흔드는 거여. 이렇게 서너번 흔들다가 한가운데다가 몸을 따악 안정을 하는 거여.

이렇게 안정이 되었으면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은 감지를 말고 평상(平常)으로 따악 떠요. 너무 눈을 이 코 끄터리를 본답시고 너무 가늘게 뜨면, 처음에는 좀 조용하니 좋은 것 같애도 머지않아서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가 있으니까, 그렇게 눈을 너무 절대로 감어서는 안되고, 또 감지는 안 해도 너무 가늘게 떠도 못써요.
눈을 평상으로 떠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부터 약 3m 지점에다 눈을 떨구면 되는 것이여. ‘떨군다’고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응시(凝視)를 하거나 주시(注視)를 하지 말고, 평상으로 뜨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 그렇게 하고,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고. 이게 인자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여.

준비호흡은 어떻게 하냐 하면, 숨을 될 수 있으면 가뜩 그리고 빨리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 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한참 동안 참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거여. 10초가 되었건, 20초가 되었건, 참었다가 더이상 못 참을 때, 입을 조끔 벌리고서 입으로 후~ 하고 이렇게 숨을 내뿜는 거여. 아까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던 가슴이 내쉬면서 차츰차츰차츰 가슴이 홀쪽해지면서 완전히 다 내뿜어 버려.

다 내뿜었으면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동안 참었다가 또 입을 조끔 벌리고 후~ 하고 내쉬는 거여. 다 내쉬었으면 또 세 번째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참은 뒤에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입으로 후~ 하고 내쉬는 거여. 이렇게 세 번을 하는 것이 이것이 준비호흡이라 하는 거여.
이렇게 준비호흡을 세 번 하고 나면, 가슴 구석구석에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가슴 안에 들어가 있는 거여.

그렇게 한 다음에 인자 본(本)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수르르르~ 허니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는데, 본호흡으로 들어가서는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하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이 준비호흡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뜩 들어마셨지만,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녀.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8부쯤만 들어마시되 아랫배 단전(丹田)이 볼록하도록 느끼면서 8부쯤만 들어마셔.

8부쯤 들어마셨으면, 하나 · 둘 · 셋 약 3초 동안을 정지를 했다가 내쉬는데,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입으로 후~ 하고 내쉬었는데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입으로 내쉬는 게 아녀.
입은 가만 놔두고 코로 내쉬는데, 내쉬면서 단전(丹田), 아까 볼록해졌던 단전이 차츰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하게 코로 내쉬어요. 내쉬되 너무 하나도 없이 완전히 내쉴라 하지 말고, 내쉴 때도 또한 8부 정도만 내쉬어.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데, 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물론 코로 들어가는 것은 틀림이 없어.
뭐 그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그러면 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그 호흡이 저 단전 밑에까지 들어간다고 억지로 할라고 하니까, 가슴에 꽉 맥혀 가지고 저 밑에까지 내려가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거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호흡은 허파까지 밖에는 안 들어가요. 허파 밑에 가서 또 횡격막(橫隔膜), 가로막이 있는데, 가로막에 딱 걸려 가지고 절대로 호흡이 저 단전(丹田) 밑에까지 내려가지 안 혀. 내려가지 않는데 억지로 그 내려 보낼라고 하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못 견디게 되는 거여. 꽈악 여가 맥혀 가지고 얼마를 애를 먹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들면서 가뜩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고 해서 이 가슴 속에 있는 공기를 소지[掃除]를 해야 하지만, 준비호흡이 끝난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갈 때에는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이렇게 내보낸다’고 그리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들어마셔 가지고, 뒤에 궁둥이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기분으로 그렇게 맨들어라 그 말이여. 바람이야 그리 들어가건 말건.
그러면은 의식적으로 배를 볼록이 하니까, 실지로 바람이 거기까지 들어간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들어마셨으면, 8부쯤 들어마셨으면 정지를 했다가, 정지하는 시간도 약 3초, 나중에 익숙해지면 뭐 3초 4초 5초 좀 늘궈도 상관이 없지만, 처음에는 약 3초 동안만 해요, 부담이 없이. 그래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하라 그 말이여. 그러면 조끔도 가슴이 답답한 게 없어.


<화두는 언제 드느냐>

그러면 화두는 언제 드느냐 하면,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질 때 그때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하면서 숨을, 배를 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숨을 내쉰단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라 그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또 3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하지만,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지면 숨 내쉴 때마다 화두를 안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두 번, 세 번 내쉴 때까지도 화두(話頭)는 한번만 드는 상태에서 숨을 그렇게 하고.
나중에 참으로 화두가 익숙해지면 아침에 떠억 한번 화두를 들고서, 계속해서 호흡은 하면서도 화두는 한번만 들고서, 그 한번만 들어 가지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들면 그 의단만을 관조(觀照)해 나가면 되는 거여.

자꾸 뭐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 아녀요. 드문드문 화두를 놓쳐버렸거나, 딴생각이 들어왔거나, 또는 화두를 놓치진 안 했건만 의단(疑團)이 희미해졌을 때 가끔 한번씩만 챙겨줘도 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따악 현전(現前)해 있으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갖고 있는 거여, 그게. 그러기 때문에 들어져 있는 데다 자꾸 덮치기로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된다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따악—앉아서도 그 의심이요, 서서도 그 의심이요, 밥을 먹으면서도 그 의심이요, 똥을 누면서도 그 의심이요,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그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들려져 있도록.

조끔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해태심(懈怠心)을 낼 것이 없어.
앉었거나 섰거나 누웠거나 밥을 먹거나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그 사람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억지로 잠을 안 자고 그냥 막 해댄다고—화두가 성성(惺惺)허니 들려져 있지 아니하면은 잠을 안 잔다고 공부 되는 것이 아니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앞으로 한 열흘이 지내면, 7~8일이 지내면 납월팔일(臘月八日),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는데,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면 옛날부터 선방(禪房)에서는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는 것이 한 준례가 되어 있는데.
참 이 출가(出家)한 분상(分上)에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그날을 기해서 우리도 밤잠을 안 자고 정진을 해보자는 생각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그날을 우리가 평범하게 지낼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만공(滿空) 큰스님이나 또 이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나, 여러 그 구참 선지식(善知識) 스님네들의 말씀을 들으면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그것이 일리가...(녹음 끊김) 바 있는 사람보단 오히려 상기병을 얻거나 무슨 정진상에 부작용이 일어나서 역효과를 내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거여. 이건 경험상으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거여.

그래서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잠을 안 자 놓으면 화두도 간 곳이 없고, 그저 잠만 안 잘라고 일주일 동안 그 경책(警策)을 안 맞을라고, 그저 잠 안 잘라고 하는 데 온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맑은 정신은 하나도 없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자기는 꾸벅꾸벅 이렇게 졸면서도 장군죽비(將軍竹篦)로 때리면은, ‘안 잤는데 왜 때리냐?’고, 이래 가지고 신경질을 내고 쌈을 하고.

뭐 선방에서 이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하면 가끔 그 쌈이 벌어지고, 정신이 없어 가지고는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고.
시계, 덜렁덜렁 하는 시계추를 갖다가 뜨윽 갖다가 빼 가지고는 부처님 탁자 앞에다 갖다 놓고 절을 하는 사람이 없는가, 옆에 사람보고 왜 때리냐고 그냥 쌈을 거는 사람이 없는가, 어떻게 잠이 오던지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옷을 벗고 오줌을 눈 채 한 시간 두 시간을 그냥 자버린 사람이 없는가, 그래서 많은 모다 그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세등선원에는 그전부터서 용맹정진보다는 가행정진을 하는 것이 좋다 해서 해마다 이 가행정진을 해 오고 있습니다. 시간은 인자 그 준례에 따라서 10시나 11시나 적당한 시간에 자서, 3시나 2시, 이렇게 해서 한 서너 시간 재워 주고, 그리고서 정진을 하되 그 7일 동안은 일체 묵언(默言)을 하도록.
이렇게 하고, 마지막날, 7일 날 저녁에는 그때는 정말 용맹정진해서 잠을 자지 않고 그 이튿날 예불할 때까지 떠억 정진하도록. 이렇게 해서 가행정진이지만 용맹정진이나 거의 같지요. 그렇지만 서너 시간 재워 주기 때문에 정말 참 알차게 정진을 하게 되죠.

혹 여러 대중이 모였으니까, ‘그 가행정진보다도 용맹정진하자,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가지신 분도 있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또 이 세등선원에 와서는 또 세등선원에 준례에 순응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수행인으로서 참 좋은 일이니 만큼 그렇게 모다 가행정진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그 사람은 별 장애가 없이 육체상으로나 정신상으로나 정진상에 아무 부작용과 장애가 없이 대도를 성취하고만 말 것입니다.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 채 중간에 몸에 병이 생긴다든지, 상기병이 생긴다든지, 무슨 위장병이 생긴다든지, 혈압병이 생긴다든지 이리 되면 가뜩이나 근기(根機)는 하열(下劣)하면서 그런 장애가 일어나면 여간해서 그러한 고비를 극복하기가 힘이 듭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상기병이 나거나, 위장병이 나거나, 뭐 피가 목구녁에서 넘어오거나 그까짓 것을 문제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것을 그 병(病)을 도반(道伴)으로 알고 선지식으로 알고 그저 앉아서 못 견디면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해서 못 견디면 또 앉아서 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조끔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계속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겨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면서 그 병까지도 굴복을 받아 버리는 그러한 예가 많습니다.

병이 났다고 해서 그까짓 것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기왕이면 처음부터서 올바른 수행법으로 수행을 해 가지고 그러한 장애에 걸리지 않도록 한다면은 그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이여. 상기병 무서워서 공부 못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을 알아서 한다면야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 말이여.


이 가운데 만성 스님이나, 법희 스님이나, 또 월명각시나 또는 말산요연 비구니나 또는 아까 말한 그 실제 비구니나 연화색 비구니와 같은 그러한 도인(道人)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어. 반드시 나는 이 가운데 많은 도인이 나오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 이 세등선원에서 수없는 도인(道人)이 나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도인이 얼마만큼 나오냐 하는 것은 여러 대중스님네들의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의단(疑團)으로 정진을 어떻게 하느냐 온전히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옥희라고 하는 보살님이 당신의 칠순일을 맞이해서 여러 대중스님네께 이렇게 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양을 여러 사부대중께서는 맛있게 공양을 하시고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고 아울러서 이 이옥희 보살의 수명장수하고 금생에 이 불법에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세세생생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서 내생에는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의 지혜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축원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이 고성이씨 인화 영가, 진주강씨 화엄 영가, 성주배씨 귀남 영가는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과 산승(山僧)에 설한 이 간곡한 말씀을 듣고, 무량 영겁(永劫)에 죄업이 다 소멸이 되어서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왕생을 하셔서 다시 이 사바세계에 환생(還生)을 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소  호리신분개소년(蒿裡新墳皆少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수행하는 것을 머리털, 귀밑털 희어지는 것을 희어지기를 기다리지를 말어라. ‘늙은 뒤에 하리라. 좀 더 있다 하리라’ 뒤로 미루지를 말어라.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니라. 저 쑥대밭 속에 무덤이 다 소년에 무덤이니라.
주검이 어찌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어려 뱃속에서 죽기도 하고, 나다가 죽기도 하고, 어려서 죽기도 하고, 소년 청년에 죽기도 하고, 젊어서 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꼭 늙은 70, 80 먹은 뒤에만 죽는 것이 아녀.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이것이여.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사람 몸 한번 잃어버리면 언제 돌아올 것이여? 사람 몸 받아 나기가 눈먼 거북이가 천 년만에 한번씩 바다 위에 올라와서 숨을 쉬는데, 그때 마치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야 그 나무토막에 의지해서 숨을 쉬고 들어가는데, 눈 뜬 거북이가 나와서도 그 나무토막 만나기가 어려울텐데, 더욱이 그 매일같이 올라와도 혹 모르는데, 천 년만에 한번씩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에 떠올라 가지고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기 만큼 어렵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몸 받아 나기가 어려운데, 이 몸뚱이 한번 잃어버리면,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잃어버리면 언제 사람 몸을 받아 날 것이냐 이 말이여.
그리고 지옥이라는 데는 한번 떨어지면은 나올 기약이 없어. 억만겁을 그 안에서 지내야 하는데 나올 기약이 없어. 그러니 사람 몸 받아 났을 때 그 정진을 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해야겄드라 이 말씀이여.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25분44초~6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황앵상수일지화~ / 어째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 구지(俱胝) 스님의 일지두선(一指頭禪).

참선 자세.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 단전호흡(준비호흡, 본호흡) / 화두는 언제 드느냐? / 무엇을 하건 화두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 /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게송) 수행막대빈모반~ /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호흡은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지도록)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