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하고 하유청풍동유설(夏有淸風冬有雪)이다. 봄에는 온갖 꽃이 곱게 피고, 가을에는 휘황찬 밝은 달이 있다. 여름에는 맑은 바람이 솔솔 불고, 겨울에는 온 세계가 은빛으로 빛나는 눈이 내리는구나.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하면, 만약 부질없는 일, 쓸데없는 일을 마음에 걸어 두지만 않으면, 쓸데없는 일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다. 문듯 이 인간에 좋은 시절이더라.
이제 엄동설한도 지내고 새해를 맞이해서 신수(身數)기도도 끝나고, 입춘기도도 끝나고, 이제 2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했습니다. 머지않아서 버들에 푸른 생기가 돋아 올 것이고, 들과 산에는 온갖 꽃이 빨갛게 노랗게 곱게 곱게 단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복잡하고 어렵다 하드라도 그러한 속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지만 아니하면, 그런 속에서도 오히려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열심히 활구참선(活句參禪)만 한다면, 들과 산이 온통 노랗고 빨갛고 푸르게 비단처럼 장식이 된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축복의 장엄(莊嚴)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거거든. 아무리 이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내가 내 마음 하나를 돌이키지를 못하고 큰 일 작은 일로 흥망성쇠와 시비 속에 내가 얽혀 들어가서 거기에서 고민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몸부림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거거든.
중생의 어리석은 눈으로 보고, 어리석은 귀로 듣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온 세상을 보니까 온통 불바다요 지옥세계요, 그렇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진리의 눈으로 보면 온통 이 온 세계는 고대로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휘황찬 달이 밝고, 여름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춥다고 하나 하얀 눈이 온 세계를 뒤덮을 때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거거든.
인간에 생로병사(生老病死)도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온통 고통 아닌 것이 없고, 괴로움 아닌 것이 없고, 슬픔 아닌 것이 없고, 그렇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도 기쁜 일이요, 차츰 자라는 것도 기쁜 일이요, 커서 장가들고 자식 낳고 사는 것도 기쁜 일이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지마는 그런대로 떠억 자기 마음만 닦아 가 봐라 그 말이여. 그런대로 나이 들어간 대로 수행도 쌓이고 인생의 사는 맛도 알고 그러니 그런대로 좋고, 늙어서 주름살이 잡히고 기운은 좀 떨어지지만 세상을 떠~억 달관(達觀)한 분상이라면 6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어서 그러한 대로 좋지 않냐 그 말이여. 젊어서는 야망도 있고 그래서 한참 설쳐대다가 나이가 들어가며 과거를 회상해 볼 때 비긋이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 말이여.
늙어서 죽은 것이 무엇이 그렇게 괴로운 일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일생을 살다가 하직을 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꼭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죽으면 꼭 지옥에 간다고 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죽어서 이 지구 세계보다도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는 거고, 더 편안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물론 죽어 갈 때 편안하게 웃으면서 죽을려면은 젊어서부터, 아직 덜 늙어서부터 항상 ‘이뭣고?’를 하고 불법(佛法)에 의해서 열심히 수행을 쌓아야 하기는 하지만, 그거야 기왕 사람 몸으로 태어나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법문(法門) 듣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그렇게 어려울 일이 있느냐 그 말이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인생이 살다 보면은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고 언짢은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닥치면 그건 그 나름대로 적절히 처리해 나가면서 웃을 때는 웃고 울 때는 울고, 또 속이 좀 상할 때는 조금 상하다가 터억 돌이켜서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한번 해보란 말이여.
자기가 평소에 수행을 해서 참선을 해서 어떠한 역경(逆境)에 부딪쳤을 때, 그전 같으면은 그 고비를 못 넘기고 진심(瞋心)을 내고 탐심(貪心)을 내고 싸움을 하고, 한번 그런 충격을 받으면 몇 날 며칠을 속이 가라앉지를 않고 그러던 사람이 참선을 한 뒤부터서는, 정법(正法)을 믿고 활구선(活句禪)을 한 뒤부터서는 자기가 자기의 감정을 자유롭게 조종을 해서 금방 화두를 듦으로써 가슴속이 후련히 가라앉힌 것을 스스로 자기 증험을 해보시라 그 말이여. 수행을 하기 전과 수행을 열심히 한 뒤에 자기의 존재를 비교해 보고 한번 타산(打算)을 해본다면 그것도 또한 가끔 한번씩 그렇게 자기를 돌아보는 것도 미상불(未嘗不) 괜찮다 그 말이여.
세속에 명예를 구한다든지, 재산을 구한다든지, 권리를 구한다든지 이런 것은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안 해. 열 건에 두 가지나 세 가지나 되면 잘되는 거고, 대부분이 내 뜻대로 잘 안되어지고 좀 이루어졌다 해도 두고두고 믿을 수가 없고 금방 또 뒤집어져 버리고, 그런데 내가 나를 찾는 공부는 열심히만 하면 항상 거기에 있거든.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망상만 일어나고 자꾸 그렇게 호소를 하신 분이 많지만 그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 무량겁을 번뇌와 망상 속에서 얽매여서 금생에까지 왔는데 일조일석에 그것이 잘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나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될 수밖에 없고, 떠억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하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참선 공부거든. 그래서 ‘마음속에 부질없는 일만 두고 있지 아니하면[若無閑事掛心頭] 이것이 인간에 가장 좋은 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라고 하는 고인(古人)에 이 게송(偈頌)을 두고두고 음미를 해볼 만하다 그 말이여.
한 생각만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냥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는데, 그 한 생각을 돌리지를 못하고 속에다 탁! 꽁~한 생각을 가슴속에 두고 그것만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일어나거든. 비어 버리면 되거든, 딱 비어 버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은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고. 이 사바세계(裟婆世界)는 되는 것보다도 안 되는 재미로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바세계란 말이 ‘사바(裟婆)’란 말은 인도 말인데, ‘참고 견딘다’는 말이여.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계다’ 그래서 사바세계(裟婆世界)거든.
억지로 그걸 참을려고 하면 참을수록에 더 속에서 뽀글뽀글 괴아 오르거든. 억지로 참을려 하지 말라 거든. 심호흡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후~ 하고 내뿜으면서 ‘이뭣고?~~~’ 또 수르르르 숨을 들어마셨다가 가뜩 들어마셨다가 후~ 내쉬면서 ‘이뭣고?~’ 두 번, 세 번 그래도 안 가라앉으면 네 번, 다섯 번, 그래도 안 가라앉으면 열 번, 스무 번 하다 보면 완전히 내뿜는 그 호흡 따라서 속에 불덩어리같은 놈이, 불기운이 다 빠져나가 버리거든.
근데 처음에는 그렇게 여러 번 해야 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항상 정진(精進)하다 보면 전혀 시간이 안 걸려. 딱! 돌이키면 깨끗하게 되어 버리거든. 인과법(因果法)을 생각하고 ‘내가 전생에 지어서 이런 걸 받는다’ 그것 다 초학자(初學者)들이 억지로 마음을 돌릴려고 하는 방법이지, ‘이뭣고?’ 해 버리면 1초도 안 걸려. 백만사(百萬事)가 되풀이해서 자꾸자꾸 하다 보면 익달, 숙달되고 나중에는 제절로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어. 이걸 자꾸 하다 보면, 천하에 재미없고 맛없을 것 같은데 자꾸 하다 보면 자기가 자기 마음을—다른 사람들이 자기 말 한마디면 굽신굽신하고 ‘예 예 예’ 하고 손을 요렇게 비비면서 그것 좋은 것 같지만 대단히 불편한 거고, 자기가 자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 것보단 더 좋은 것은 없다 그 말이여.
생각 하나 돌이키면 온 세상이, 슬픔의 세상이 찰나간(刹那間)에 기쁨의 세상으로 맨들 수도 있고, 고통의 세계를 기쁨의 세계로 만들 수도 있고, 죽음의 세계를 열반(涅槃)의 세계로도 만들 수 있고, 지옥 경계를 극락 경계로 찰나간에 뒤집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캄캄한 방에 스위치 하나만 착! 누르면 찰나간에 환히 밝아지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자기가 쌓아 논 업(業)이 얽히고설키고 그렇게 된 상태에서 자꾸 세상만 원망하고 다른 사람만 원망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고 원망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고 더 괴롭고 더 슬퍼지고 더욱 원한과 미움만이 점점 불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자기가 자기 한 생각 탁! 돌리면은 온 세계가 별유천지(別有天地)로 변해 버린다 그 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 속에도 그런 요지에 말씀이 계셨지마는, 부처님이나 극락세계나 열반이나 깨달음이나 밖에서 찾으면, 밖에서 진리를 찾은 것은 그것은 외도(外道)다 그거거든. 자기 속에서 찾는 것이 그것이 정법(正法)이다 그러셨어.
행복을 보통 어리석은 사람들은 밖에서 찾거든. ‘돈이 많으면은 얼마나 좋으까?’ 하고 돈을 벌려고 야단이고, ‘무슨 높은 벼슬 권리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해서 그것을 구할라고 야단이고, 맘대로 구해지지도 않지마는 구해져 봤자 오래 가지도 못하는 거고, 얻어 놓고 보면 그것이 진짜 행복도 아닌 것이여. 근데 자기 속에서 구하면, 행복도 자기 속에서 구해야 반드시 구해지는 것이고, 구해지면은 영원히 그거 행복이 자기 것이고, 살아갈수록 해를 거듭할수록 그 행복이 점점 더 커지고 더 깊어지고 그런 것이고, 금생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금생에 수행을 쌓아서 정진력을 얻어 놓으면 그래서 거기서 얻어진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
자기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자기 속에서 부처를 찾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게 되면은 완전히 사람이 아주 정신이 개혁이 되는 거여. 개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지끔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참 한심스럽고 부끄럽고 참 그런 일들이 날마다 신문에 나고 참 가슴아픈 일이나, 이것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냐? ‘정치를 잘못해서 그런다’ 하고 서로 몰아대지마는, ‘대기업주들이 기업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다‘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런다‘ 물론 다방면으로 그 각계각층(各界各層)에서 각 방면으로 잘못된 점을 찾아서 그것을 고칠려고 노력을 해야 하지요. 해야 하기는 하지만, 백날 그래 봤자 그것은 마냥 그 모냥일 수밖에는 없다 그 말이여.
해방된 지가 50년, 많이 모다 다 애국자들이 나서서 정치를 하고, 애국자들이 나서서 사업도 하고, 애국자들이 나서서 교육도 하고 모다 그러니까, 다 자기네들이 애국자라 하니까 나는 그런다고 믿는데, 그렇다면은 나라 꼬라지가 좀 많이 좋아져야 할 텐데 별로 신통치 않거든.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 자기 속에서 자기의 정신 개혁(精神改革)이 일어나야 한다 그 말이여.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고쳐.
가정에서부터, 직장에서부터, 회사에서부터, 학교 · 경제 · 정치 할 것 없이 각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높은 사람대로, 밑에 있는 낮차운 사람은 낮차운 사람, 장사를 하는 사람이나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있는 그 자리에서 남 눈치볼 것도 없고, 남한테 미룰 것도 없고 ‘남이 하면 나도 하리라’ 그러지 말고 자기부터 일시에 시작을 해야 하거든. 정신 개혁을 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 터~억 ‘이뭣고?’를 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런다면 전혀 시간이 안 걸리고 하루 동안에 온 국민의 정신이 바뀌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그렇게 되면 공장은 공장대로 활기를 띠게 될 것이고, 회사는 회사대로 활기를 띨 것이고, 온통 여기서 저기서 마치 날씨가 뜨뜻하면은 땅속에서 땅이 제절로 녹으면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산과 들에서 요렇게 김이 무럭무럭 오르면서 생기가 나면서, 풀과 나무에는 새싹이 요렇게 물이 오르면서 새싹이 돋듯이 그렇게 될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우리는 88년도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릴 때 그 올림픽을 열기 위해서 전 국민이 잠시 동안이지만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준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그냥 그 기운이 가라앉어 버리고 계속 오늘날까지 이렇게 터덕거리고 있지마는, 새봄을 맞이해서 우리는 그때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이켜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사회와 국가를 한번 새롭게 일구어 나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놈을 돌이키는 거여. 그러면 당장 달라져 버리거든. ’이뭣고?‘ 그래서 이것이 여러분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들은 다 지금 산승(山僧)이 이렇게 주장하는 바를 충분히 경험을 통해서 느끼고 계신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철저하게 그걸 느끼지 못한 사람, 경험을 안 하신 분은 당장 이 자리부터서 ‘이뭣고?’를 하시고, 댁으로 가신 걸음걸음이, 차 중에서도 ‘이뭣고?’를 하시고, 가정에 가셔서 생활하면서 자꾸 ‘이뭣고?’, 참선을 생활 속에 살려 나가십시요.
참선(參禪)이 절에 와서만 하고, 절에다 방부(房付) 드릴 동안에만 하고, 입선(入禪) 중만 하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생활 속에서 이것을 살려 나가지 못한다면 그 참선은 진짜 참선이 아닙니다. 진짜 참선은 생활 속에서 그것이 살려 나가질 때 그것은 ‘산 참선’이거든. 그래서 그것을 ‘살 활(活)’ 자,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죽은 참선’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산 참선’이거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아(自我)를 자각(自覺)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법이 사구참선(死句參禪)해 가지고 하나마나 자기 자신이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자기에 정신 혁신을 가져오지 못하고 그런다면은 그건 참불법이 아니거든.
한 사람이 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마음이 깨끗해짐으로 해서 온 세계가 깨끗해지는 도리가 바로 이 정법(正法)이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것이거든.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다. 마음의 근원, 참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몰록 깨달라 보배의 창고를 확~ 열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여. 인연 따라서 이렇게 태어나고, 인연 따라서 왕래하는 이것이, 이것이 바로 본래신(本來身)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닫지를 못하고 보니까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고,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 이 더러운 것을 싸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가죽푸대에 지내지 못하지만,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마음의 근원,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온통 이것이 본래신(本來身)이여, 생사 없는 본래의 몸뚱이거든.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하니, 그 곱고 아름답고 향기롭게 피는 저 연꽃이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시커먼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어. 그러나 각소거진불염진(却笑居塵不染塵)이라. 그 더러운 티끌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 이파리와 그 꽃은 조끔도 더러운 것이 묻지 아니한 것을 보고 문듯 웃음이 나오더라 그거거든.
이 몸뚱이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지고, 더러운 것이 이 가죽푸대 속에 가뜩 들었지마는, 떠억 자기의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이뭣고?’ 자꾸 ‘되네, 안 되네’ 따지지도 말고, 안 된다고 탄식할 것도 없고, 잘된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자꾸 잊어 버렸다 하면은 냉큼 또 추켜들고 또 돌이키고, 자꾸자꾸 하면 결국은 안 될 수가 없어. 결국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은 ’정말 이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 나지 안 했으면 어떻게 이런 좋은 법을 만났으며, 어떻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정말 감사하고. 어려서 나를 잘 멕이고 잘 입히고 해 주시지 못하고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하더라도, 심지어는 나를 나 가지고 키울 형편이 못 되어 가지고 고아원이나 길갓에다 나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래도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오늘에 나가 있다. 그래서 이 정법을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몸뚱이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버지가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느낄 것이고. 아무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늙어서 냄새가 나고 대소변을 가리지를 못하고 앓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할머니 그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내 몸이 어디서 태어났겠는가. 내 사랑하는 자식이 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어떻게 내 사랑스런 자식과 딸이 태어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이 정법(正法)을 믿고 이 공부를 하고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자식을 봄과 동시에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효심(孝心)이 우러나게 되는 것이고, 생로병사 이러한 현상을 보고 발심(發心)을 하게 되는 것이고, 흥망성쇠 속에서 오히려 더 분심(憤心)을 내서 더욱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금년 계유년(癸酉年)에 봄이 바야흐로 하루하루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꽁꽁 얼었던 땅이 차츰 녹고 새싹이 돋아나고 여그저그 아름답게 꽃이 핌과 발맞춰서 우리의 자신의 마음속에도 정법을 믿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의 꽃이 피고, 가정에도 모든 어렵고 어두웠던 일들이 다 가시고 희망이 넘치는 그런 가정에 생기가 돌게 되기를 바라고 또 우리의 사회에 모든 방면에도 싹수가 자꾸 희망적으로 발전해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가 그렇게 맨들기를 바래지 말고 ‘내 자신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세계가 달라진다’고 하는 부처님 말씀을 깊이 명심을 하고 열심히 정진(精進)하시기를 바랍니다.
상풍괄지소고해(霜風刮地掃枯荄)한디, 매서운 서릿바람이 땅을 쓸고 마른 풀뿌리를 쓴 뒤, 수각동군금이회(誰覺東君今已廻)냐. 누가 봄소식이 이미 돌아온 줄을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유유영매선누설(唯有嶺梅先漏洩)하니, 오직 저 재 너머에 매화가 먼저 봄소식을 누설(漏洩)을 하니, 일지독향설중개(一枝獨向雪中開)로구나. 한 가지가 홀로 눈 속을 향해서 피었구나.
세상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하고 온 세계가 이렇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이뭣고?’를 하는 그 찰나찰나에 매화꽃 한 송이가 피어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고 있다. 그 향내가 잠시 피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 활짝 활짝 피어서 온 세계를 향내로 가득 채워서 온 세계에 더럽고 어두운 세계를 향내로 가득차게 되기를 바랍니다. (처음~39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 / 열심히 활구참선(活句參禪)만 한다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축복의 장엄(莊嚴)이 아니고 무엇이냐 / 죽어 갈 때 편안하게 웃으면서 죽을려면은 아직 덜 늙어서부터 항상 ‘이뭣고?’를 하고 불법(佛法)에 의해서 열심히 수행을 쌓아야 / 한 생각만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냥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된다 / 생각 하나 돌이키면 지옥 경계를 극락 경계로 찰나간에 뒤집을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극락세계나, 열반이나, 깨달음이나, 자기 속에서 찾는 것이 그것이 정법(正法)이다 / 수행해서 얻어진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자기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자기 속에서 부처를 찾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게 되면은 완전히 사람이 아주 정신이 개혁이 되는 것이다 /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 ‘이뭣고?’를 해야 한다 / 진짜 참선은 생활 속에서 그것이 살려 나가질 때 그것은 ‘산 참선’.
(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이 몸뚱이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버지가 얼마나 감사한가! / ‘내 자신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세계가 달라진다’고 하는 부처님 말씀을 깊이 명심을 하고 열심히 정진(精進)하시기를 바랍니다 / (게송) 상풍괄지소고해(霜風刮地掃枯荄)~.
〇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하면, 만약 부질없는 일, 쓸데없는 일을 마음에 걸어 두지만 않으면, 쓸데없는 일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다. 문듯 이 인간에 좋은 시절이더라.
〇한 생각만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냥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는데, 그 한 생각을 돌리지를 못하고 속에다 탁! 꽁~한 생각을 가슴속에 두고 그것만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일어나거든. 비어 버리면 되거든, 딱 비어 버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은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고. 이 사바세계(裟婆世界)는 되는 것보다도 안 되는 재미로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바세계란 말이 ‘사바(裟婆)’란 말은 인도 말인데, ‘참고 견딘다’는 말이여.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계다’ 그래서 사바세계(裟婆世界)거든.
〇행복을 보통 어리석은 사람들은 밖에서 찾거든. ‘돈이 많으면은 얼마나 좋으까?’ 하고 돈을 벌려고 야단이고, ‘무슨 높은 벼슬 권리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해서 그것을 구할라고 야단이고, 맘대로 구해지지도 않지마는 구해져 봤자 오래 가지도 못하는 거고, 얻어 놓고 보면 그것이 진짜 행복도 아닌 것이여. 근데 자기 속에서 구하면, 행복도 자기 속에서 구해야 반드시 구해지는 것이고, 구해지면은 영원히 그거 행복이 자기 것이고, 살아갈수록 해를 거듭할수록 그 행복이 점점 더 커지고 더 깊어지고 그런 것이고, 금생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금생에 수행을 쌓아서 정진력을 얻어 놓으면 그래서 거기서 얻어진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
〇참선(參禪)이 절에 와서만 하고, 절에다 방부(房付) 드릴 동안에만 하고, 입선(入禪) 중만 하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생활 속에서 이것을 살려 나가지 못한다면 그 참선은 진짜 참선이 아닙니다. 진짜 참선은 생활 속에서 그것이 살려 나가질 때 그것은 ‘산 참선’이거든. 그래서 그것을 ‘살 활(活)’ 자,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죽은 참선’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산 참선’이거든.
〇한 사람이 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마음이 깨끗해짐으로 해서 온 세계가 깨끗해지는 도리가 바로 이 정법(正法)이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것이거든.
〇깨닫지를 못하고 보니까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고,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 이 더러운 것을 싸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가죽푸대에 지내지 못하지만,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마음의 근원,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온통 이것이 본래신(本來身)이여, 생사 없는 본래의 몸뚱이거든.
〇’정말 이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 나지 안 했으면 어떻게 이런 좋은 법을 만났으며, 어떻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정말 감사하고. 어려서 나를 잘 멕이고 잘 입히고 해 주시지 못하고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하더라도, 심지어는 나를 나 가지고 키울 형편이 못 되어 가지고 고아원이나 길갓에다 나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래도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오늘에 나가 있다. 그래서 이 정법을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몸뚱이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버지가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느낄 것이고. 아무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늙어서 냄새가 나고 대소변을 가리지를 못하고 앓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할머니 그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내 몸이 어디서 태어났겠는가. 내 사랑하는 자식이 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어떻게 내 사랑스런 자식과 딸이 태어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이 정법(正法)을 믿고 이 공부를 하고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자식을 봄과 동시에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효심(孝心)이 우러나게 되는 것이고, 생로병사 이러한 현상을 보고 발심(發心)을 하게 되는 것이고, 흥망성쇠 속에서 오히려 더 분심(憤心)을 내서 더욱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세상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하고 온 세계가 이렇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이뭣고?’를 하는 그 찰나찰나에 매화꽃 한 송이가 피어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고 있다 거든. 그 향내가 잠시 피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 활짝 활짝 피어서 온 세계를 향내로 가득 채워서 온 세계에 더럽고 어두운 세계를 향내로 가득차게 되기를 바랍니다.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헌데, 떨어진 해 가을빛이 산기슭에 가득찬데, 난봉상엽축풍비(亂峰霜葉逐風飛)로구나. 어지러운 봉아리에는 서리 맞은 이파리가 바람을 쫓아 나는구나.
계산갱호사양리(溪山更好斜陽裏)에, 시내 산에는 다시 기울은 해 속에, 석양(夕陽) 속에, 좋은 석양 속에, 지대황혼월상귀(只待黃昏月上歸)다. 다못 황혼(黃昏)에 달이 떠오른 것을 기다리드라.
요새 한참 삼천리 방방곡곡 산봉우리와 시내, 단풍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서 한참 찬란하게 가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가을에 그 울긋불긋한 단풍이 오전보다도 오후에 그 따가운 햇빛 속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찬란한 그 단풍으로 물들이고 장엄된 곳에 해가 지면 이윽고 밝은 달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람은 어피차 한번 태어나면 마침내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태어나 가지고 어려서 자라고, 소년기(少年期) · 청년기(靑年期)를 거쳐서 다 배울 것 배우고 익힐 것 익혀서 청년 · 장년기(壯年期)에 나아가서 자기에 역량과 기술을 십분 발휘하고 사십 · 오십 · 육십, 노년(老年)을 향하면서 마지막 자기 인생에 끝마무리를 멋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아무리 잘했어도 늙어가면서 끝을 야무지게 마무리짓지를 못하고 잘못하면, 젊어서 잘한 보람도 없고 일생 동안 애쓴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 ‘다 먹은 밥에 코 빠진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모든 제자들이 이마를 땅에다가 짓찧면서 완전히 실신 상태에 이르도록 너무너무 슬퍼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도 부처님의 사촌으로 부처님 성도(成道)하신 날 아란존자가 태어났고, 그래 가지고 마침내 출가해서 부처님의 시봉(侍奉)을 하게 됐는데 시봉한 사람으로서 더욱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했던 것입니다.
그때 한 노스님이 “그렇게 슬퍼만 할 게 아니라 시자로서 부처님 마지막 열반하시기 전에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여쭈어야 할 일이 있느니라” “무슨 말씀을 여쭐까요?”
“첫째는 모든 경전, 나중에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마당에 ‘모든 경전 앞에다가는 어떻게 시작을 할까요?’ 그것을 여쭙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 태자(太子)로 계실 때 부처님의 마부(馬夫)를 했고, 출가하실 때도 부처님의 말꼬삐를 잡고 모신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라고 하는 사람이 부처님이 출가하시니까 자기도 따라서 출가를 했는데, 평생 동안 자기가 부처님의 마부였다고 하는 것을 배경으로 그것을 코에다 걸고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마구잽이 행패를 부리고 오직 부처님 말씀만 쫌 듣고 일체 다른 사람 말은 듣지를 않고 제멋대로 구는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를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어떻게 대처를 할까요?’ 그걸 여쭤 보고, 셋째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넷째에 가서는 ‘무엇에 의지해서 닦아 갈까요?’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질문을 해라”
그래서 부처님께, (첫째) ‘경전 앞에는, 어떻게 경전 앞에 쓸까요?’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래 놓고 경전을 주욱 결집을 해라’ 그렇게 일러주시고. (둘째)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에 대해서는 ‘묵빈대처(默檳對處)를 해라’ 묵빈대처라 하는 것은 ‘일체 상대를 하지 말라’ 그거거든. 잘하거나 못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말도 그 사람하고는 하지 말고 그렇게 상대를 해라 그랬어.
세 번째,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어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계위사(以戒爲師)하라, 계행(戒行)으로써 스승을 삼으라’ 네 번째는 의지처(依支處), ‘무엇을 의지해서 공부를 할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네 가지 생각을 머무르는, 바르게 머무르는 관(觀)을 해라’
그런데 사렴주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몸뚱이[身]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외부 일을 요렇게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에다 받아들이는 것[受]과 또 일체 경계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心]과 또 이 몸과 받아들이는 것과 또 우리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거,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 이것이 법(法)이다 그 말이여. 제법(諸法)이라고도 그러고, 법이라 그러는데, 그 법.
그래서 ① 「몸뚱이[身]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고. ② 「받아들이는 것[受]은 괴로운 것[苦]이다」 저거는 ‘좋다, 나쁘다’ 척!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떤 사물을 대했을 때 딱 받아들이거든,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거거든. ③ 우리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마음[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하고. ④ 「이 세상에 모든 것[法]은 무아(無我)다」 아(我)라고 하는 주재(主宰)가 없는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이라 하는 것은—부처님 당시에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참선법(參禪法)이 그때 없었고, 그때는 모든 제자들에게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닦은 뒤에는 이 사렴주관을 통해서 정진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는데 그것이 차츰차츰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발전해서 성숙한 것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부정(不淨)하다」고 한 것은 중생들은 이 몸뚱이 속에 피와 오줌과 똥과 피고름 모다 그런 것이 가득차 있어서 아홉 구멍으로부터 아무리 씻고 닦고 향수를 발라도 금방 뀌역뀌역 기어나온다 그 말이여. 팔만사천 털구먹 땀구먹으로 나온 것이 다 오줌이요, 다 그게 다 똥물이다 그말이여. 며칠만 안 씻으면 거기서 쉰내 · 비린내 · 노랑내 · 구린내, 별별 냄새가 다 난 것을 보면 분명 이 몸뚱이 속에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틀림이 없고, 결국은—자기 어머니는 어린 자기 애기는 아무리 똥오줌을 싸서 뭉개도 더러운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럽지 아니한 것은 아니여—늙어가면서 점점 그 노쇠해 가면서 점점 그 추태(醜態)가 드러나게 되는 거고, 결국은 병이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기 마련인데, 숨이 끊어지자마자 10분도 못 가서 오장육부가 버글버글 버글버글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확실히 달관(達觀)을 해 버리면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질 것이 없고, 더군다나 남자가 여자를 볼 때에도 ‘더러운 것을 살짝 껍데기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에 그 마음이 동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인도나 중국에서는 공동묘지, 묘지에 거기는 풍장(風葬)이라 해서 시체를 땅에다 묻지도 않고 태우지도 않고 그냥 한데에다 이렇게 버려두는 그러한 그 장례법이 있는데, 그러면 모다 독수리나 새 매 그런 것들이 달라들어서 살은 다 뜯어먹기도 하고. 그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배가 고프면 가서 탁발(托鉢)을 해서 한 끼 먹고서 밤낮을 그 시체 옆에서 앉아서 그 모냥을 관(觀)하는 거여. 그러다 보면 확실히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하는 것을 깨닫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한 것을, 낱낱이 따로따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네 가지를 합해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러한 수행법이 부처님 당시에 원시불교 때 많은 수행승들이 그걸 해 왔다 그 말이여. 지금도 역시 남방에 가면 그런 그 사렴주관을—비파사나(vipassanā)라고 인도(印度) 말로 그러는데, 비파사나도 세월이 감에 따라서 차츰차츰 더 자상하고 구체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법이 개발되어서 지금까지도 전해 오고 있고 일부 스님네들이 거기 가서 배워 가지고 와서 한국에 와서 또 포교를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法)은 중생의 근기(根機)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개발되고 발전되어서 어떠한 근기의 중생도 다 이 정법(正法)과 인연을 맺어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하실 때에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사렴주관으로써 의지처를 삼으라」 하신 그러한 법문의 요지가 십선, 대승십선 중계(大乘十善重戒)를 받고 화두를 타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 바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최후에 교훈을 우리는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기를 삼천겁(三千劫)을 하고, 경을 외우기를 팔만세(八萬歲)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을, 밥 반 그릇 먹을 동안에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다. 단정히 앉어서 실상(實相)을 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부처님께서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는데, 어째서 ‘계 지키기를 삼천겁을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을 팔만세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반식경(半食頃) 동안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너무한 표현이 아니냐?
부처님께서 계율(戒律)을 지키고 경(經)을 외우라고 한 본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형식적으로 계율 지키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경을 외우면 공덕이 장하다 하니까 그저 경만을 주야로 읽고 여러 가지 경전을 많이 읽고 그러되, 경의 참뜻을 아지 못하고 공덕에만 떨어져서 어쨌던지 많이만 읽으면 좋다하는 거기에만 집착하기 때문에—정말 경을 외우는 참뜻과 계율을 가지라는 참뜻을 알고서 ‘이뭣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 참선한 것만 같지 못하다 그거거든.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조달(調達)이 제바달타(提婆達多)가 부처님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추셨는데 조달이는 30상을 갖췄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육만 장경을 다 외우고, 모든 계율을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엄격히 스스로도 지키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지키도록 권장을 했어. 부처님께서는 원칙적으로는 사시(巳時)에 공양(供養)을 한 번씩만 하되 나이가 많아서 병이 들거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배고픈 것을 너무 못 견디는 어린아이한테는 저녁에 약(藥)으로 조끔씩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허락을 하셨는데, 조달이는 ‘아무리 늙어서 병들거나, 아무리 어리더라도 하루 한 끼 이상은 안 된다’ 이렇게 엄격히 하거든. 그거 하나만 보더라도 어떠한 식으로 계율을 지키도록 했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그렇게 철저하게 제자들을 그렇게—자기가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거룩하고 훌륭하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선동하고 유혹해서 끌고 가고 그렇게 했지만, 결국은 조달(調達)이는 근본정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삿되어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마각(馬脚)이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사세(阿闍世) 태자를 시켜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가지고 부처님을 짓밟도록 그렇게 코끼리를 내몰게 했고, 부처님 행차하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바윗돌을 굴려서 부처님 다리를 다치게 했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현혹시켜서 끌고 가서 그런 대중을 파(破)하는 그런 죄를 범했고, 연화색 비구니를 주먹으로 쳐서 즉사하게 맨들었고, 손톱 속에다 독약을 묻혀 가지고 부처님 발에 엎드린 것처럼 해 가지고 부처님을 해코자했고 이런 오역무도(五逆無道)한 죄를 지어 가지고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한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율사(律師)다, 계행(戒行)이 청정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나를 갖다가 존경해라’ 이양(利養)을 받기 위해서 꾸며서 계율을 지키는 그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 올바르게 마음 씀과 말함과 행동을 바르게 갖는 것이고, 공부를 올바르게 하다 보면 제절로 살생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도둑질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모든 계율은 그 가운데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부처님께서는 80세를 일기(一期)로 이승을 하직을 하셔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중생의 세계에 마치 저 달이 호수에 비치듯이, 물 있는 곳마다 그 달이 비치듯이, 인연 따라서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투셨다가 또 인연이 다하니까 또 다시 그 그림자를 거두신 것이지, 참부처님은 오고가고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서 성도(成道)하셔 가지고 49년 동안 팔만대장경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80세 열반하신 그 부처님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잊지 않고 숭배하고 추모하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사찰마다 거룩한 상(像)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또 가정에도 신라 백제때는 고려 때는 가정에도 다 집집마다 다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역시 가정에 많은 분들이 불상(佛像)을 모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렇게 모시는 것은 ‘항상 우리집에 우리와 같이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투철한 신념을 항상 일깨우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죽어갔다고 해서 꼭 슬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못 인연 따라서 나타났다가 인연 따라서 사라진 것뿐이지 죽고 사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표현을 그렇게 할뿐이지,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분명히 있어 가지고 정말 우리를 기쁘게 했다가, 아프게 했다가, 슬프게 했다가 그러한 현상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예나 권리나 재산과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헌디, 불법(佛法)이 유통해서 행해지는 것이 어찌 시대에 관계할까보냐. 시대에 관계하지 않는다. ‘정법시대다, 상법시대다, 말법시대다’ 해 가지고 정법시대(正法時代)에는 불법에 의지해서 깨달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사람이 있고. 깨달은 것으로써 법을 삼어. 상법시대(像法時代),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천 년 뒤에는 상법시대인데, 상법시대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경전을 찍어 내고, 탑을 세우고 하는 모다 그러한 것이 불법이고 그것을 열심히 성의껏 잘해야 불법을 잘 믿고 불법을 흥왕하게 맨든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 왔고,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투쟁견고(鬪諍堅固)시대여. 철저하게 도 닦은 사람도 드물고, 겨우 그저 상법시대에 그 끝으로 절이나 짓고, 불상이나 모시고, 탑이나 세우고 그렇게 하고. ‘그저 경을 읽고 열심히 염불하면 극락세계 간다’ 이렇게만 믿고 할 따름이지 정말 확철대오해서 부처님이나 조사처럼 된 분은 거의 구경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말법시대인데, 그러면 무엇을 주로 하냐 하면 투쟁견고시대여. 맨 싸움으로 일을 삼아. 승가(僧伽)라 하는 말은 화합중(和合衆)이란 말인데, 화합해서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맨 싸움 파벌싸움 싸움을 한다. 이러한 말이 옛날부터서 『멸의경(滅義經)』 같은 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이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이구나!’ 이렇게 수긍이 가나, 정말 참불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법시대라고 해서 깨달을 수 있고, 말법시대라고 해서 정법은 없어져 버리고 아무리 닦어 봤자 깨달을 수 없다’고 한 생각은 참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의 표현이 아니여.
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이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또 부정불구(不淨不垢)인데, 어찌 시대에 따라서 그것이 변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우리의 생각이 ‘아! 말세니까 말세에는 투쟁만 견고해지고 싸움만 모다 하고 닦어 봤자 견성성불도 못한다’ 그러한 말에 현혹되어 가지고 수행을 그러한 생각을 속에다 품고서 수행을 한 것과,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하는 것과는 영판 천지 차이(天地差異)가 있는 것이여.
부처님 당시에도 새는 숲속에서 노래하고, 꽃은 봄에 꽃은 피었다가 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었을 것입니다.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는 바로 거기에 진리에 참소식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자희이설향수(只自熙怡說向誰)오. ‘다못 이 새 노래하고 꽃이 피고 지고 하는 이 속에 참소식을[鳥啼花落眞消息] 다못 내 스스로 즐길지언정 누구를 향해서 이 도리를 말할까’ 하는 고조사(古祖師)에 게송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정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기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그 법에 의지해서 항상 열심히 닦아 가는 사람은 더욱 다행한 일이고. ‘이것밖에는 다시는 우리가 눈을 돌리고 마음을 쓸 곳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 받아 나기 어려운, 태어나기 어려운 몸을 받아 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그 정법에 의해서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보다도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숨이 지고 세세생생에 이 법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오직 이 한 일을 향해서 나에 모든 것을 바치리라’ 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해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는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은 그 사람에게는 따 논 당상(堂上)이여. 틀림없이 그 사람에게는 견성성불이 약속되어진 것입니다.(처음~43분1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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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겁(劫)을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팔만장경을 다 외운 것보다도 밥 반 그릇 먹은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이 더 낫다」고 한 그 말씀을 깊이 새겨서 음미를 해 본다면 우리는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참선을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 ‘정말 내가 이 말세에 어떻게 해서, 전생(前生)에 무슨 선업(善業)을 지었기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을까’ 세상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거나 말거나, 집안에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럴수록에 더 열심히 ‘이뭣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한 국토에 태어난 거, 함께 태어난 것은 일천 겁(劫) 동안을 함께 선근(善根)을 심은 결과고, 하루 동안 같이 어디를 동행을 하는 것은 이천 겁 동안을 같이 선근을 심은 그 결과고, 하룻밤을 같이 자는 것은 삼천 겁 동안을 선근을 같이 심은 인연이고, 한 고을에 같이 동족으로 태어난 것은 사천 겁 동안의 인연이고, 한 마을에 함께 살게 된 것은 오천 겁의 인연이고, 하룻밤을 한 벼개를 베고 동침을 하는 것은 육천 겁의 인연이고, 한 집안에서 한 식구로 같이 살게 된 것은 칠천 겁 인연이고, 부부간으로 사는 것은 팔천 겁 인연이고, 형제간으로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인연은 구천 겁 인연이다. 부모나 부모자식 간 또는 한 스님과 상좌로 태어난 것은 십천 겁, 만 겁 동안에 거쳐서 함께 선근을 심은 인연으로 그렇게 된다」 하셨어. 그러니 우리가 한 가정에 부부나 형제나 부모자식, 부부간 이렇게 태어난 인연이 얼마나 지중(至重)한가를 알 수가 있고, 이렇게 한 법당에서 사부대중이 같이 이렇게 법문을 듣는 것은 몇억천 겁 인연이다 그 말이여.
그런 깊은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같이 만났다면 우리는 그런 깊은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든지 좋게 생각하고, 다 풀어버리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내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풀어버림으로 해서 또 상대방도 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집안에도 화합 평화가 오고, 온 직장에도 서로 화합이 통하고, 사찰에도 스님네끼리 노소 · 선배 · 후배가 서로서로 다 화합하고, 신도들끼리도 서로 다 화합을 하고 스님네와 신도들까지라도 서로 마음과 마음이 합해져서 함께 불법을 믿고 닦아가는 좋은 인연으로 승화(昇華)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잡비유경(雜譬喩經)』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뱀이,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을 하기를 “내가 응당 내가 더 위고, 내가 더 크다” 그러니까 꼬리가 머리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더 크고, 내가 더 우선이고, 내가 더 어른이다”
머리가 “나는 귀가 있어서 뭔 소리를 들을 줄도 알고, 눈이 있어서 무엇을 볼 줄도 알고, 입이 있어서 모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또 어디를 갈 때는 항상 내가 앞서가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그러지도 못하고 하니, 너는 나를 의지해서 살아야 하고 나를 따라댕겨야지, 니가 무슨 나보다 더 크고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냐” 꼬리가 말하기를, “니가 생각을 잘못한 거다. 내가 너를 앞세우고 가는 것이지 내가 너를 따라간 것이 아니여. 내가 너를 가도록 해 주니까 니가 가지, 내가 만약 안 갈라고 마음을 먹고 딱! 마음을 먹으면 너는 못 가. 그 니가 멋대로 간 것 같지마는 내 허락이 있어야 가지, 내 허락 없이는 못 가니까 내가 더 어른이지 니가 더 어른이냐. 내가 한번 보여 줄 테니까 봐라“ 나무를 갖다가 칭칭 틀어 감고 ”어디 가보고 싶으면 가봐라”
3일 동안을 나무 틀어 감은 것을 풀어주지 아니하니까 뱀이 꼼짝을 못해. 배가 고파도 갈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결국은 개구리 한 마리도 못 잡어먹으니까 배가 고프단 말이여. 그래서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나 놔라. 날 풀어줘. 니 니가 정말 니가 크다. 니가 어른이니까 이거 좀 꼬리를 풀어 줘라. 풀어다오” 하니까, 꼬리가 그 말을 듣고서 즉시로 떠억 풀어 주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그래 내가 니 말이 옳다고 했으니 인자 어디 갈 때도 니가 앞서가라, 내가 뒤따라가마”
꼬리란 놈이 앞서 가지고 뿍뿍뿍뿍뿍 기어간다 그 말이여. 머리는 인제 꼬리 따라가는 대로 끌려서 꺼꿀로 가는데, 몇 걸음 못 가서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뱀이 결국은 죽었다 그 말이거든. 어리석은 중생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가 잘났다고 그러고, 인아상(人我相)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을 비유해서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도처가 싸움입니다. 정부도 정치도 여당 야당이 싸우고, 회사도 노사분규가 일어나서 싸우고, 가정도 그저 서로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고, 부부간에도 싸우고 도대체가—‘비 온 끝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 있어서 싸운 끝에 정이 더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 싸움이 한 번 두 번이라야지 사사건건이 의견 충돌해 가지고 되는 일이 없다면 그 문제가 있는 것이고. 여당 야당도 서로 건설적인 안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그렇게 하다가 좋은 쪽으로 가결을 봐 가지고 잘해 나기기 위한 것은 참 좋지마는, 싸움을 위한 싸움은 이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부간에도 처음에는 다 좋아서 결혼을 했겠지마는, 살다 보면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 맘대로 할라고 그러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그러다가 보면 싸움이 습관이 되고, 싸움 안 하면 밥맛이 없어. 부부간에 싸움은 속전속결, 간단하게 몇 마디하고서 서로 상대방의 말이 옳으면 ‘아! 당신 말이 옳소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되어야지, 그 싸움이 장기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냉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서로 부부간이 아주 지긋지긋하게 뵈기도 싫어지고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되고, 그 불행이 자녀들한테로 떨어지게 된다면, 뱀이 머리하고 꼬리가 서로 싸우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 말이여.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가정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 한번만 착! 돌이키고 보면 ‘하! 허허’ 웃고 말아 버릴 것이고, 상대방의 단점을 들어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아 직장에 나가서 여러 가지 복잡한데 하루 종일 일하고 오니 얼마나 피곤할까’ 좋게 생각하고, ‘처자를 위해서 저 애를 쓴다’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집에서 모다 살림하니라고 애쓴다‘고 생각하고, ‘어디 답답한데 어디 좀 나가 보라’고 하기도 하고.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그렇게 생각해서 서로서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보고보고 또 볼수록 더욱 좋지, 왜 그것이 지긋지긋한 웬수로 보일 것이냐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합을 해야 부모에게도 효도를 할 수가 있고,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되는 법이거든.
부모에게 불효(不孝)한 사람은 불효한 자식을 동시에 맨들게 돼요. 그 어린 자식이 부모한테 불효한 것을 봤기 때문에, 어려서 밤낮으로 그걸 봤기 때문에 그놈이 커서 오죽 불효를 잘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배운 것이 그것밖인데. 뭐라고 그런 법이 아니라고 하면 ‘엄마아빠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했냐?’고 대든 통에 꼼짝을 못하거든. 그래서 가정이 부부간에 화목을 해야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자기도 효자 효녀 효부를 만나게 되는 것이여. 그렇게 될 때 그 집안에 복(福)이 들어온 것이지, 집안이 화목을 못하고 무슨 복이 들어올 것이냐 그 말이여. 들어올려고 한 복(福)도 다 머리를 돌리고 다른 집으로 가 버릴 거다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목을 할려면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만심(我慢心)을 버려야 되거든. 내 마음을 비우게 돼, 그럼. 억지로 거 항아리 속에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은 자꾸 꺼꿀로 들고 흔들고 퍼내 버리면 비어지는데, 우리의 자존심은 병원에 가서 가슴을 열고 해부를 해도 소용이 없고, 뭔 독한 약을 먹고 헹궈 낼 수도 없고, 무슨 수가 있냐 하면 자꾸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하면 비워지는 거여, 이게. 다른 도리가 없어. 머우대로 쑤셔내도 그것은 안 없어지고 별짓을 다 해 봤자 안 비워져. 창자는 비워지는데 우리의 마음은 안 비워지거든.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심(貪心)도 없어지고, 썽내는 마음도 없어지고, 어리석은 마음도 없어지고 자꾸 맑아져서 결국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면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국토가 극락세계로 변하는 것이고, 정법시대가 되는 거여. 누구한테 미룰 일이 아녀, 이것은. 스님네한테 미룰 일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한테 이걸 미룰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하거든. 이 세계의 주인은 낱낱이 자기여. 낱낱이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거든.
하늘에 뜬 달이 그건 누구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는 사람이 주인인 거여. 해도 역시 그렇고 별도 그렇고, 요 허공에 모든 공기도 자기가 소유거든. 자기가 그것을 좋은 달로 맨들고, 좋은 공기로 맨들고. 산도 소유권은 국가가 소유권이 되는 산도 있고 개인이 소유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가다가 그 산에 가면은 그 산이 자기의 소유고, 흐르는 시냇물이 흘러가는 물이 주인이 있을까마는 자기가 그 시냇물을 보고 시냇물에 손을 씻고 발을 씻으면은 그 시냇물이 자기 소유여. 약수터에서 풍풍 쏟아지는 물이 임자가 없겠지마는, 그래도 그 물을 먹은 사람이 그이가 주인이라 그 말이여.
기차나, 자동차나, 비행기나, 도로나 모든 것이 자기가 그것을 보고 자기가 그것을 수용을 하는 동안에는, 돈을 내고 비행기를 타더라도 그 비행기는 자기가 타는 동안에는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걸어가면 그 도로가 자기의 도로거든. 우주 법계가 다 자기가 소유여. 우주 법계를 자기가 소유할려면은 ‘이것은 내 것이다’고 한 생각을 버리면은 제절로 다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소유로 되는 거여. 제일 부자가 되는 길은 어쨌든지 긁어 모아 가지고 몇백 억 재산가가 되고 갑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놔 버린 것이 법계(法界)에 대주인공(大主人公)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불법(佛法)에 철저하게 불법에 귀의(歸依)해서 이 최상승법을 닦으면 법률도 사실은 복잡한 법률도 필요 없어. 형무소도 필요가 없고, 큰 재산도 그렇게 필요가 없고, 명예 권리도 그렇게 필요가 없어. 뭐 요새 고속도로에서 휴지를 버리면 뭐 3만원, 가래침 뱉으면 얼마, 담배꽁초 버리면 얼마, 지금 법이 오직 사람들이 지각이 없어 가지고 그렇게 하니까 그러한 법까지 만들겠습니까. 다 담배꽁초 버린 사람이 없고, 휴지를 버린 사람이 없다면 뭐 할 일이 없어서 그런 법을 맨들겄냐 그 말이여. 그 법을 맨들게 한 사람이 바로 국민들이다 그거거든. 국민들이 다 자각을 하고 정말 정법을 믿고 전부 ‘이뭣고?’를 해서 자기의 삼업(三業)을 청정히 한다면 법률은 점점 간소화 될 것이다 그 말이여. 뭐 순경도 그렇게 많이 필요도 없고, 순경 경찰 안 하고 다른 생산직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한 마음 돌이켜서 우주 법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고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으로 변하는 것이여. 온 사회가 살기 좋고 간 곳마다 전부가 다 한집안 식구요, 간 곳마다 도반(道伴)이요, 간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보살화현(菩薩化現)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거거든. 이것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그것이 가능한 것이여.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중생심을 발동을 하고, 탐욕심(貪欲心) 진심(瞋心)을 발동을 하면 갈수록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가정이고 직장이고 간 곳마다 아귀(餓鬼)와 나찰귀신(羅刹鬼神)이 득실거릴 거다 그 말이여.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는 참 좋은 사람이고, 참 법이 없어도 살 그런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모다 못되어 갖고 이 세상이 이렇게 된다’ 생각하거든. 다 ‘자기가 나쁜 놈’이라고 한 사람은 술이나 먹으면 그런 소리할까, 바른 정신 가지고서는 자기 나쁜 놈이라고 생각 안 해. 술을 잔뜩 먹으면 울면서 ‘야 내가 나쁜 놈이여, 내가 나쁜 놈이여’ 술 깨면 ‘자네가 나뻐’ 이러거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술도 가끔은 그 필요한갑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이라는, 술 잔뜩 취해 가지고 부처님 계신 데 와 가지고 “나 스님이 되겄다”고 한 바라문이 와서, 부처님이 당장 제자를 시켜서 머리를 깎게 하고 그 입고 온 옷을 벳기고 가사(袈裟)를 딱 수(垂)해서 저 제일 말석에다 딱 앉혀 놓으니까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했기 때문에 아무 정신없이 픽 쓸어져서 잤다 그 말이여. 실컨 자고 일어나더니 눈을 떠서 자기 옷을 보더니 가사(袈裟)가 입혀져 갖고, 머리를 만져보니까 홀랑 깎아졌다 그 말이여. “나 중노릇 안 한다”고, “내 옷 내놓으라”고 해 가지고, 옷을 내주니까 그놈 입고 똥이 빠지게 도망쳤다 그 말이여. 그래 제자가 부처님께 “왜 그 술 취한 놈을 갖다가 머리를 깎아 갖고 저렇게 도망가게 만드셨습니까?” 항의를 했거든. “그놈이 술 취한 그 시간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어 보겠느냐”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에는 누가 중이 된다고 하면은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해 가지고 ’이 사람이 확실히 출가해서 도 닦을 발심(發心)을 했냐 안 했느냐, 또 눈동자는 바로 백혔는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과연 이 사람은 출가했으면 좋겠다‘ 할 때, 그러면 행자(行者)로 받아들이고 꽤 엄격하게 그렇게 했었는데. 이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 법문을 경전에서 보고부터서는 누구든지 오겠다 하면 ‘그래 있어 봐라’ 있으면 한 일 년간 행자 생활을 하고—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소지도 하고 빨래하고, 대중스님네 시봉(侍奉)도 하고 운력(運力)도 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일을 다 겪으면서 일 년 이상을 참고 대중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않고 하면 그때 계(戒)를 주어 받도록 하고, 그 안에 참지 못하고 간다는 사람은 ‘그래 가거라. 가더라도 니가 그동안 절에 있는 그 공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또 가겠단 사람 또 억지로 붙잡지 않죠.
여러분들도 ‘내가 말세다, 여자다, 늙었다, 이렇게 몸이 아프다’ 그러한 것을 핑계 대고 참선(參禪)을 안 할려고 하지 말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만이라도 탁! 앉아서 하면 그 공덕(功德)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씨를 심어 논 것이거든, 그게. 그래서 그동안에 염불을 하신 분, 그동안에 경전을 외우고 천수경을 외우신 분들도 그거 한 만큼 공덕은 다 없어지지 않고 앞으로 참선하는 데 좋은 기초가 되고 밑거름이 될 것이니까, ’그동안에 했던 거 아까워서 이뭣고? 못 한다‘ 그러시지 말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술 취한 바라문이 ’술 취한 동안에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그 공덕으로 언젠가는 출가해서 성불을 할 것이다‘고 부처님께서는 수기(授記)를 주셨어. 하물며 멀쩡한 맑은 정신으로 불법(佛法)을 의지해서 수행을 한 공덕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산승(山僧)에 이런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셔. 그렇게 된다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정에 들어가면 지긋지긋하다’고, ‘마누라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안 들어간다’고, 왜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어서 집으로, 직장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쏜살같이 돌아오도록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억지로 소지를 해 놓고, 꽃을 갖다 꽂아 놓고, 구석구석이 카튼에다가 향수를 뿌려 놓고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보만 고치면 되거든. 마음보만 타악! 고쳐. 편안하거든. 자기도 편안하고 사람도 편안하면 그거야 돈 하나 안 들고도 가정을 편안하고 좋은 보금자리로 변하는 방법이 바로 그거거든.
책임은 각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은 다 불보살(佛菩薩) 화현(化現)이다’ 자기한테 잘해 줄 때만 ‘나 참 내가 시집 잘 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못해 줄 때 ‘야! 저 사람이, 불보살 화현이 나를 제도할려고 일부러 저런 역행법(逆行法)을 쓰는구나’ 그렇게도 생각하면서 항상 자기를 고칠라고 노력을 해야 되거든.
남을 고칠라고 자기가, 꽁지가 지가 어른이라고 내다가 불구덩이, 물구덩이 빠질라고 하지 말고, 항상 꼬리는 머리를 애껴주고, 머리는 꽁지를 억지로 억압할라 하지 말고, 서로 꽁지 없이 머리가 어떻게 존재하며, 머리 없이 어떻게 꽁지가 존재하냐 그 말이여. 내나 한 몸뚱이인 것을.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먹은 것이 그것이 바로 대승 사상(大乘思想)이거든, 대승! 소승적인 사상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자기 일신(一身)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차라리 오직하면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대승심은 자기도 좋고 남도 좋고 항상 남을 위하고,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극기추상(克己秋霜)이요 대인춘풍(對人春風)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환영을 할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모다 환희심을 낼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다 삐뚤어진 마음도 바로잡아 질 것이다 그거거든.
오늘이 입동(入冬)입니다. 오늘부터 이 겨울 계절이 시작된 날입니다. 앞으로 차츰차츰 날씨가 추워질 것이고, 눈이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 테니 모다 감기에 조심하시고. ‘모든 병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셨으니 마음보를 잘 쓰고 항상 흐뭇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살고, 다른 사람도 마음도 기쁘게 해 주고, 감사한 마음이 나도록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대한다면 우리의 질병도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다시 또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반(半)에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해서 우리는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결정코 금생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43분16초~1시간12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 /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여쭌 4가지 질문 ①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경전을 결집할 때 모든 경전 첫머리에 어떠한 말을 써야 합니까? ②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육군비구(六群比丘)나 차익(車匿)과 같이 악한 비구와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합니까? ③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까요? ④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를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비파사나(vipassanā).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사렴주관이 차츰차츰 발전해서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성숙하였고,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게송)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 /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 /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 /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
『잡비유경(雜譬喩經)』에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다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었다’라는 비유의 법문 /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그럴려면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의 출가 일화 /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시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 극기추상(克己秋霜) 대인춘풍(對人春風),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〇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〇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〇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하지귀아시수(當下知歸我是誰)오, 당하(當下)에, 즉하(卽下)에 ‘내가 이 누군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의정거처요분명(疑情擧處要分明)이다. ‘이뭣고?’ 이 의정(疑情) 일어나는 곳에, 화두를 척! 들어 일으키는 곳에 분명(分明)함을 요하느니라.
막파심량중복탁(莫把心量重卜度)하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이리저리 점치고 따지고 그러지를 말아라 그 말입니다. 혜등호향풍전속(慧燈好向風前續)이니라. 지혜의 등불을 바람 앞을 향해서 잘, 꺼지지 않도록 이어갈지니라.
오늘은 계유년 음력 7월 15일 하안거 해제날이고 또 백중날입니다. 하안거 해제는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해서 오늘 해제를 하는데 용주사 · 위봉사 · 세등선원 각처(各處)에서 정진(精進)을 하던 도반들이 오늘 용화선원에 모여서 함께 이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석 달 동안 그 더위와 혼침(昏沈)과 산란(散亂)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정진을 한 그 도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해제 법요식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7월 15일 해제를 기해서 백중(百中) 천도재를 거행하는데, 백중날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 목련존자(目連尊者)가 그 어머니 청제부인이 생전에 지은 죄로 지옥에 떨어져서 만반고통(萬般苦痛)을 받고 있을 때 그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서 갖은 정성을 다했지만, 목련존자의 그 신통술로도 어찌하지 못해서 그래서 부처님께 간절히 “우리 어머니를 천도(薦度)해 주십시오. 저 무서운 지옥고로부터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간청을 했습니다.
“그 어머니를 구제하는, 아귀도 지옥고에서 백 가지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어머니를 구제하는 방법은 해제날 대중공양을—백 가지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해제에 모인 대중 스님들께 공양(供養)을 올려라. 그럼으로써 그 공덕으로 너의 어머니가 지옥고로부터 구제를 받을 수가 있느니라” 이렇게 해서 그때부터서 삼천년이 되도록 인도 · 동남아 · 중국 · 한국 · 일본, 이렇게 내려오면서 7월 15일 백중날, 지옥고에 신음하고 있는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선원 부처님 앞의 탁자에도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의 정성 어린 공양구(供養具)가 많이 쌓여져 있습니다. 모르는 분은 영가(靈駕) 위패(位牌) 앞에 많이 차려놓고 영가들을 위해서 '영가들 훈감하라'고 이렇게 많이 갖다 놓은 걸로 착각을 하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첫째, 부처님께 올리고 그다음에는 대중 스님네께 올리고 또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도 공양하고, 이러한 공양(供養)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7월에는 해제 때를 기해서 전국 각 사암(寺庵)에서 또 방생(放生) 법도 많이 행하는데, 이 방생이라 하는 것도 대단히 뜻이 깊은 것이어서 ‘죽어가는 생명을 놓아준다’ 그래서 방생이라 그러는데. 방생에는 흔히 자라나 잉어 등 어류(魚類)를 많이 사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강물이나 호수나 그런 데에다 모다 많이 놔주고 그러는데.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생존(生存) 시에 많은 방생을 하셨습니다. 차떼기로 엄청난 고기를 갖다가 사서 방생을 하시고 몇백 관(貫)씩 이렇게 하셨는데, 마땅히 조실 스님의 법을 신(信)하는 우리로서는 조실 스님의 그런 행하시던 좋은 일을 본받아서 우리 용화선원에서도 방생 법회를 갖음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전강 조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방생을 하지 안 하고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왜 그 방생을 하지 않았냐? 마땅히 그런 좋은 것을 왜 안 하고 있나?' 신도들로부터 종종 요청도 있었고 그런 질문도 받았습니다마는. 원래 방생의 뜻이 죽어 가는 사람, 죽어 가는 동물—비단 꼭 물고기뿐만이 아니라 육지에서 사는 동물, 하늘에 나르는 새, 무엇이고 죽어 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나아가서는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비심, 자비 종자(種子)를 잘 증장을 시키고, 그래서 어떠한 종류의 생명이라도 그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자기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어 가고 있는 그러한 생명을 그걸 놔주자, 죽지 않도록 해 주자’는 데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월 해제라든지, 7월 해제를 기해서 전국 사찰에서 방생을 한다 해 가지고 며칠 전부터서 고기 장수에게 부탁을 해 가지고 ‘자라를 이백 마리, 잉어를 몇백 마리 그리고 뭐 미꾸라지를 몇백 관, 이렇게 어김없이 그날 잡아다가 놔라’ 이렇게 미리 계약을 해 가지고, 그 고기 장수는 그날 그만한 양을 대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살로 자라를 찍고, 그물로 고기를 잡고 해 가지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전에 더러 보면 자라 등어리에 작살이 찍힌 자죽이 있는 자라도 보았습니다.
그 자라들이 입이 있어서 말을 한다면 또는 그런 잉어나 고기들이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방생 법회인가 뭐 그것 때문에 이렇게 등어리에 작살을 찍히고 우리는 이렇게 곤욕(困辱)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고 스님네한테 원정(原情)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연히 강변에를 갔다든지, 우연히 바닷가를 갔다든지 해서 ‘자라가 잡혀서 죽게 된다 또는 잉어가 죽어 가게 되었다’ 이럴 때에 자기에게 있는 돈을 털어서 사 가지고 그래 강에다도 놔주고, 바다에다도 놔준다면 그건 대단히 좋은 방생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흥부(興夫)가 우연히 제비 새끼가 떨어져서 발목이 부러져서 버르적거리고 있는데 그걸 가는 실로 잘 짬매서 약을 발라서 그걸 나꾸어 가지고 날려 주어서 그래서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어 가지고 그렇게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니까, 그 형 놀부는 멀쩡한 제비를 후려잡아 가지고 다리를 부질러 가지고 그놈을 짬매서 날려 주어 가지고, 그 참 엄청난... 그 재미있는 내용의 흥부전(興夫傳)을 여러분도 봐서 아시겠지만, 마치 전국 사찰에서 행하는 방생 법회라 하는 것이 놀부가 하는 그러한 식의 방생이 된다면, 방생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강 조실 스님 생존 시에 제가 조실 스님께도 말씀드렸는데 “그런 고기를 몇백 관씩 차떼기로 해서 방생을 하신 것도 참 좋은 일인데, 우선 대중 가운데에 병 있는 대중에게 약을 먹이고 병을 치료해 준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씀도 여쭈었는데, “누가 아프냐?” “아무개가 치질로 앓고 있습니다” “그럼 진즉 나한테 말하지, 말을 않으니 내가 치질을 앓는지, 치통을 앓는지 내가 알 수가 있냐? 왜 너는 나를 무자비한 사람을 만드느냐” 이렇게 해서 꾸지람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마는.
여러분들도 방생은 7월 백중이나 정월 보름을 기해서 정기적으로 행사로써 그렇게 방생하는 방생보다는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날짜를 정하지 않고서 언제라도 죽어 가는 그런 생명이 있으면 살려주고, 사람도 병들어서 돈이 없어서 죽게 된다든지 그런 사람이 있으면은 그럴 때에 우연히 자비심이 발동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행해져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기는 연전(年前)에 '외국 화물선을 타고 저 남미를 가는데, 갑판에 올라가서 그 선원이 바람을 쐬다가 발을 헛디뎌서 바다에 떨어져서 밤중에 영락없이 죽은 줄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 배가 짐을 풀고 다시 돌아오면서 보니까 저만큼 바다에 까마니 무엇이 떠다닌 것이 보여서 그래 망원경으로 보니까 그 전날 물에 빠져서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물에서 떠다닌다 그 말이여.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큰 거북이를 타고 해상에 이렇게 떠돌고 있어서 그래서 건져 냈다. 알고 보니 그 선원의 어머니가 신심이 있어서 항상 방생을 행했다. 자라도 많이 놔줬다' 이런 이야기도 신문에 난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어떤 사람은 음식점을 하는데 파리 한 마리도 안 죽였어. 그리고 음식에 혹 파리가 빠지더라도 그것을 좋게 건져서 습기를 제거해 가지고 날려 주고. 그 음식점을 하니 얼마나 많은 파리가 성가시게 했겠습니까마는, 될 수 있으면 한 마리의 파리도 죽이지 않고 그렇게 날려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죄에 혐의로 잡혀 들어가 가지고 영락없이 살인 혐의(嫌疑)를 받아 가지고 그렇게 죽게 되었는데, 판사가 '사형(死刑)'이라고 이렇게 판결문을 쓰려고 하면 붓 끄터리에 파리들이 모여들어서 글씨를 도저히 쓸 수가 없어. 그래서 그 파리를 내키고 다시 쓰려고 하면 또 모여들고 모여들고 그래서 그 사람 보고 “평소에 네가 파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저는 별거 없고 음식점을 하는데 약허약허했었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파리 한 마리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고 죽이지 않는 사람이 어찌 사람을 죽였겠느냐?' 다시 여러 가지로 심사를 해 가지고 알아본즉 모략에 의한 애매한 혐의로 잡혀왔다는 것을 알아서 석방이 된 그런 일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몸에—요새는 약이 많이 발달이 되어 가지고 '이[蝨]'를 구경할래야 할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몸에 '이'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가 드글드글했었습니다. 그럴 때에도 '이'를 죽이지 않고, ‘이[蝨]도 저도 살라고 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걸 뚝뚝 죽일 수가 있느냐’ 해서 '이'도 안 죽이고 항상 가려우면 슬슬 긁고 그렇게 살았는데, 어떤 원결(怨結) 관계가 있어 가지고 그 사람이 자고 있을 때 자객이 칼을 품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보니까, 가슴에 벌써 누가 한 걸음 먼저 와서 가슴을 찔러서 죽였다 그 말이여. 벌거니. 그래서 칼을 들고 찍을려다가 도로 가버렸어.
그런데 사실은 그 몸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스스로 부딪치고 해 가지고는 몸에 있는 피를 터뜨려 가지고 마치 칼에 찔린 것처럼 그렇게 보여서 '이'들이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했다. 그러한 설화도 전해오고.(처음~21분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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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큰 부자는 집안에 어떻게 쥐가 많던지 창고에도 몇백 마리가 드글드글 끓고, 온 집안에도 쥐 때문에 살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쥐덫을 놔라. 쥐약을 놔라’ 모다 그랬지만 “아니다. 저 쥐들도 나와 인연이 있어서 우리집에 와서 사니, 쥐가 아무리 많이 먹는다 해도 사람 먹을 것은 남겠지. 죽이지 말라” 해 가지고 살렸는데, 하루는 쥐들이 수백 마리가 마당에 모여 가지고 쥐들이 춤을 춘다는 거여. 그래서 온 집안 식구가 나와서 야단이여. 그래서 그 주인도 그걸 구경하러 마당에 나와서 그걸 구경을 하는데, 나오자마자 대들보가 부러져 가지고 집이 왕창 가라앉았다 그 말이여. 그 주인이 쥐들의 춤을 구경하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으면은 영락없이 대들보와 서까래에 깔려서 즉사(卽死)를 했을 것이다. 그런 쥐들도 자기네들의 생명을 그렇게 죽이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해서 은혜를 갚았다 이거거든.
이런 것으로 보면 쥐나 파리나 또는 몸의 피를 빨아먹는 '이'까지도, 하물며 영특한 자라라든지 용이 되어갈 잉어라든지 그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이' 같은 그런 작은 존재도 자기의 생명의 은혜를 알더라 그거거든.부처님 말씀에 「사람이나 동물이나 저 꿈적꿈적한 준동함령(蠢動含靈)까지라도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이러한 설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정말 믿어지는 것입니다.
사람 몸을 빨아먹는 '이'를 죽이고,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 또 변소에 가서 더러운 곳에 앉았다가 그 발에는 균이 드글드글할 텐데, 그 발로 밥상에 날아와서 앉고, 응당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도 인간에 해를 끼치는 그런 해충을 약을 써서 구제(驅除)해야 할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그러한 작은 벌레도 자기가 살라고 하는 그 생명력, 스스로 그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벌레까지도 차마 죽이지 못하는 그러한 마음이 어찌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법정 스님의 수필집에 보니까, 모기가 가면서 그 며느리 보고 ‘오늘 내가 나가면은 어떤 모진 사람의 손바닥에 맞아서 내가 죽을는지도 모르고, 다행히 그렇지 않은 분을 만나면 다시 살아올는지도 모르나, 하여튼 잘 있거라’ 그리고 나갔다고 그러는데. 모기가 와서 붙어 가지고 피를 빨아먹으면 무의식 중에 탁! 쳐 가지고 죽이기도 하고 또 모기가 날랜 놈은 또 피해서 도망가기도 하겠는데, 정말 요새처럼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당하는 세상은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교통사고로도 날이면 날마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무슨 공사장에서도 실수로 많이 죽고, 비행기가 떨어져서 죽고, 기차가 가라앉아서 죽고, 자동차가 접촉 사고로 죽고 또 강도로 죽고, 자식이 애비를 죽이고 일가족을 죽이고 해서 날마다 사람이 죽이고 죽는 그러한 생명을 경시하는 그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정말 깊이 반성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기 목숨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면 동물의 목숨도 소중합니다. 자기의 목숨이 참으로 소중한 줄 안 사람은 남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인간의 목숨이 소중한 줄 알면 동물의 목숨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나아가서는 동물뿐만이 아니라 식물, 더 나아가서는 자연환경까지라도 정말 소중히 할 줄 알아야 그것이 바로 문화인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성을 바로 지닌 사람의 행위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歸依)해서 정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법보재자(法寶弟子) 여러분! 정말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게송(偈頌) 속에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요,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기러기가 놀다 간 모래사장에는 발자죽만 남아 있고, 사람은 황천(黃泉)에 갔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더라’(人去黃泉名在家) 그런 게송을 읊으셨는데, 정말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명예나 권리나 재산이나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영원성이 없는 무상(無常)하고도 허망한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보다 더 자기가 많이 소유하고 갖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짓밟고,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고 이러한 풍조가 만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러면 다른 사람도 또 그렇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도 내 생명을 소중히 여겨 주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입니다. 산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면 메아리가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크게 돌아오고, 노래를 부르면 노래가 돌아오고, 좋은 말을 하면 그 메아리는 좋은 말로써 돌아오고, 산에다 대고 입에 못 담을 고약한 욕을 퍼부으면 메아리는 그런 무서운 욕으로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메아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서로서로 존중히 여기고 서로서로 따뜻하게 자비롭게 상대하면 상대방도 역시 또 나한테 그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살고 갈 이 세계를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우리만 살고 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손들이 살 이 세계를 보다 더 살기 좋은 세계로 만들어 놓고—자식들을 위해서 집은 좋은 집을 줄라고 하면서 정말 우리 모두가 살 이 세계는 어찌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修羅場)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집만 잘 단속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백중날 방생을 할 생각이 있으신 분은—자기 아들이 꼭 외항선을 타는 선원이 된다면 거북이를 사서 바다에다 혹 넣고 싶은 생각이 나실는지 모르나, 방생의 참뜻을 깊이 이해를 하셔서 마음속에 자비심을 가져서, 항상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생명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연에게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하면 그것이 벌써 방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죽어 가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어디 자라 잡아서 죽이는 데 없나? 잉어 잡아서 죽일라는 거 없나?’ 그걸 찾으러 다닐 게 아니라, 집안에서 직장에서 또는 회사에서 사회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하고, 자기 마음속에 자비심을 항상 이렇게 일으키고 자비로운 말, 자비로운 행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자라 천 마리, 만 마리를 사서 물에다 넣어준 것 못지않게 큰 공덕(功德)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금생에 태어나서 일생 동안 병치레만 하거나 또는 인생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단명(短命)하게 죽거나, 본의 아니게 불의(不意)의 어떤 사고로 비명액사(非命縊死)를 한 거나, 이런 것이 다 우연한 결과가 아니고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業)에 의해서 그러한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장래에 있어서 또는 저 영원한 내세에까지라도 항상 건강하고 수명이 장수하고 그럴러면, 그리고 그런 비명액사를 당하지 않고 자기의 명(命)대로 행복하게 잘 살라면 방생을—경우에 다라서는 자라나 잉어나 그런 죽어가는 동물을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식의 방생도 하지마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자비롭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꼭 몽둥이나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죽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이미 총칼보다도 무서운 살생(殺生)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가지고도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는 그런 악한 말을 하는 것도 역시 살생에 준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때리고 치고 찌른 것, 말로써 사람을 그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는, 근심과 고통과 공포를 주는 그런 말도 역시 마찬가지고, 행동으로는 안 나타냈어도 속으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죽일 생각을 하고, 저 사람이 오그라 죽기를 바라고 저주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우란분(盂蘭盆)의 역사에 최초의 근본은 목련존자로부터서 시작이 되었는데, 목련존자는 부부간에 금실(琴瑟)이 좋아서 참 재미있게 잘살았는데, 목련존자의 전생 얘기죠. 오백생 전생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 어머니가 ‘이놈이 결혼하기 전에는 어미한테도 곧잘 잘하고 그러더니 장가간 뒤로는 계집한테 빠져 가지고 아주 어미한테는 소홀히 하고’ 그렇게 느끼셨던지, 노상 ‘며느리 저년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 자식의 마음이 변했다. 그런 여우같은 며느리한테 빠져 가지고 어미를 우습게 본다’ 이래가지고 노상 사사건건이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며느리를 미워하고 들볶고 그랬다 말이여.
그러니까 목련이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참 자기 아내 보고 ‘어머니한테 잘해 드려. 어머니한테 잘해 드려’ 이렇게 마누라를 달래기도 하고 또 어머니를 위안을 시켜 드리고 했는데 세월이 가도 조금도 효과가 없고 점점 집안이 아주 대단히 두 고부간(姑婦間) 사이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래서 골이 나 가지고는 “어떤 기운 센 놈이 와서 저 늙은이 좀 때려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아! 이런 말을 툭 자기도 모르게 나왔다 그 말이여. 그 과보로 오백생 동안을 죽을 때는 꼭 맞아 죽었어. 마지막 오백생에 출가해 가지고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신통제일 목련존자가 되었는데, 그 효심이 지극해서 지옥에 빠진 어머니 청제부인을 지옥에서 구제를 해 드린 그리고 아라한과를 증득해서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증득한 대성현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에 외도들에 의해서 맞아서 돌아가셨다 그 말이여. 말 한마디가—어머니한테 한 말, 그 악한 한마디가 오백생 동안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다 이겁니다. 하물며 행동으로 마음으로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은 과연 어떠한 무서운 과보를 받게 될 것인가?
우리의 몸뚱이는 잘났건 못났건, 잘 배웠건 못 배웠건, 부모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건, 얼마나 많은 유산을 받았건 못 받았건, 부모가 아니면 이 몸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반드시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몸뚱이를 받아 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만큼 좋은 몸을 받아 났고 또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이 정법을 만난 그 근본은 부모님으로 인해서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과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들도 해제 법요식과 아울러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대천도의 법회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운집(雲集)을 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21분40초~41분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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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뒤에 선망부모를 정성을 다해서 천도해 드리는 것도 대단히 좋은 일이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 그러냐?
부모에게 불효를 하면 그 부모도 사람이요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 자식이 불효하면 다른 사람한테 몇십 배 구박을 받은 것보다도 더 가슴이 아프고 원통(冤痛)하고 절통(切痛)한 것입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저를 어려서부터 어떻게 낳아서 키웠는데 지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러한 생각이 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 부모가 좋은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미워해도 안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품어도 안 되는데,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숨을 거두었다면 그 부모는 좋은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냐 하면은 그 자식의 아들이나 손자로 태어나는 것이여.
엊그제 자식이 자기 부친을 죽이고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전생의 원수가 보복을 위해서 자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자식이 다 부모에게 은혜 갚기 위해서 태어난 것만이 아니여. 웬수가 보복을 하기 위해서 자식으로 태어나 가지고 일생 동안을 불효를 하고, 처음에는 지극히 효도를 하다가 막판에 가서는 부모 속을 갈기갈기 찢고 그런 예도 있습니다. 가문을 망치거나 재산을 망치거나 심지어는 부모를 살해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끼리 화목을 해야 하는 거고, 남에게도 생명과 재산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어쨌든지 남을 해롭게 해서는 안 돼.
석 달 동안 그 무덥고 힘드는데, 서늘한 데에서 목욕을 하고 선풍기 틀어 놓고 낮잠도 자고 그러지 않고서 그 방부(房付)를 들이고 더운 데 와서 그 등어리에 땀이 줄줄줄줄 흐르는데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앉아서 입선(入禪)을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고 하루 종일 그렇게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는 선방의 선객(禪客) 스님들 또 보살님네들, 또 시민선원의 모다 거사님네들, 참선(參禪)을 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생사 문제 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방생입니다. 맨 처음에 자기가 자기를 방생을 시켜야 남도 죽게 되는 사람을 살려내지, 자기가 쇠사슬에 콱! 묶여 갖고 다른 사람 쇠사슬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열심히 해서 우선 자기 방생을 하고, 자기 방생을 하면서도 항상 그 뜻은 보살심(菩薩心), 마음속에 탁! 뜨거운 보살심을 지니고서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고, 대중 속에서 정진을 하면서 행여나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하는 말 한마디라도 대중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대중 공부하는데 폐를 끼치지 않도록 그렇게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돌아가서도 또는 직장에 다니신 분은 직장에 나가서도 항상 말 한마디 조심하고, 발 한 걸음 옮길 때에도 조심을 해서 남에게 조그만한 피해도 가지 않고, 더군다나 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 기분만 언짢게 하는 그러한 정도의 일까지라도 조심을 해야 하는데, 마냥 조심을 하다 보면 살기가 대단히 불편할 것 같으나 항상 화두를 들고 정진하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고, 항상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으로 화두를 들고 생활을 하게 되면 저절로 살생은커녕 자비심이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거고, 남의 것을 훔치기커녕은 내 것을 남에게 보시하려는 그런 마음이 나오는 거고, 음행을 하기커녕은 항상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갖게 되고,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기커녕은 항상 진실한 마음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이것이 최상승법이고, 이것을 갖다가 불법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먹물 옷을 입고 삭발(削髮)을 한,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청춘을 다 버리고 출가(出家)해서 도를 닦는 데는 반드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고 깊은 뜻이 있는 것이어서, 막향청산공백두(莫向靑山空白頭)니라. 그런 깊은 원력(願力)과 그러한 뜻이 있어서 출가를 했는데, 어찌 청산 속에 공연히 머리가 희어 가고 있느냐.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해서 먹물 옷을 입고, 머리를 깎아서 수행자로서 나섰다면 정말 철저한 신심과 철저한 분심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용화선원 선방 스님네나 또 용주사 중앙선원이나 위봉사 선원, 세등선원 여러 모다 선방에서 정말 모다 열심히 정진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랬다'고 그렇게 알뜰히 열심히 하셨지만, 도반의 입장에서—정말 해제를 하고서도 풀어진 마음으로 살지 말고, 해제 기간일수록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결제 중보다도 더 알뜰히 잡드리를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십구년다소설(四十九年多少說)이 종횡위아지귀휴(縱橫爲我指歸休)여.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셨는데, 그 많은 법문(法門)이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종횡으로 팔만사천 가지 방편(方便)을 설하셨지만, 한마디로 '밖으로 치닫지 말고 한 생각 돌이켜서 바로 자기를 찾으라'는 그 한마디여.
그 한마디만을 철저하게 단속하고 철저하게 잡드리한다면 결제, 해제가 무슨 차등이 있겠느냐 그거거든. 산으로 가나, 들로 가나, 차를 타나 걷거나, 목욕탕에를 가거나 변소에를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옛날 도인은 장바닥에 가서 공부를 하신 분도 있었고, 노동판에 가서 정진하는 이도 있고, 곡천 선사(谷泉禪師)는 거짓으로 죄를 지어 가지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도를 닦으신 분도 있어.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이여. 정체(正體),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여. 어떤 말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떠한 모양도 거기에는 찾아 볼 길이 없는 것이여.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야. 아무리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귀로 들을라고 하고, 손으로 만지려고 하고, 생각으로 알라고 해도 그 자취를 볼 수가 없어. 그 자체는 성색(聲色)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여.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거기서 행여나 떨어질까 봐서 그걸 붙잡고 발발 발발 떨지 말고 거기서 턱! 손을 놔 몸을 굴리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을 것이다. 온 법계(法界)가 다 정체(正體)가 여여(如如)한 면목이더라 그거거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공안에 철저히 참(參)해서 사량복탁(思量卜度)을 하지 말고, 해 갈수록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거기에서 다시 그놈을 되집어서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하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이렇게 사량분별로 따지고, 알아지고 얻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 깨달음이 아니야.
우리의 선망부모가 오늘 이 백중날을 기해서 여러 석 달 동안 열심히 도를 닦은 청정한 수행자들의 간곡한 신심과 원력과 수행력에 의해서 우리의 선망부모가 오늘 천도가 잘되실 것입니다. 이어서 법요식(法要式)이 진행이 될 것입니다.(41분2초~58분41초) (끝)
[법문 내용]
(게송)당하지귀아시수~ / 백중날, 부처님께 대중스님께 공양(供養)을 올려서 지옥고에 신음하고 있는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하는 전통 / 방생(放生)의 뜻.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연에게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하면 그것이 벌써 방생을 하고 있는 것.
마음속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이미 총칼보다도 무서운 살생(殺生)을 하고 있는 것 / 목련존자가 전생에 어머니한테 한 악한 말 한마디가 오백생 동안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다.
참선(參禪)을 하는 뜻은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자기 방생입니다 / 참선, 화두를 들고 생활을 하면 저절로 자비심, 청정심, 진실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참선은 최상승법이고, 불법의 핵심 / (게송)피치삭발유래유~ /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은 한마디로 '밖으로 치닫지 말고 한 생각 돌이켜서 바로 자기를 찾으라' / (게송)정체종래절성색~ /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
〇원래 방생의 뜻이 죽어 가는 사람, 죽어 가는 동물—비단 꼭 물고기뿐만이 아니라 육지에서 사는 동물, 하늘에 나르는 새, 무엇이고 죽어 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나아가서는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비심, 자비 종자(種子)를 잘 증장을 시키고, 그래서 어떠한 종류의 생명이라도 그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자기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어 가고 있는 그러한 생명을 그걸 놔주자, 죽지 않도록 해 주자’는 데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〇바로 이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입니다. 산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면 메아리가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크게 돌아오고, 노래를 부르면 노래가 돌아오고, 좋은 말을 하면 그 메아리는 좋은 말로써 돌아오고, 산에다 대고 입에 못 담을 고약한 욕을 퍼부으면 메아리는 그런 무서운 욕으로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메아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서로서로 존중히 여기고 서로서로 따뜻하게 자비롭게 상대하면 상대방도 역시 또 나한테 그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〇꼭 몽둥이나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죽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이미 총칼보다도 무서운 살생(殺生)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가지고도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는 그런 악한 말을 하는 것도 역시 살생에 준하는 것입니다.
〇우리의 몸뚱이는 잘났건 못났건, 잘 배웠건 못 배웠건, 부모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건, 얼마나 많은 유산을 받았건 못 받았건, 부모가 아니면 이 몸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반드시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몸뚱이를 받아 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만큼 좋은 몸을 받아 났고 또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이 정법을 만난 그 근본은 부모님으로 인해서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과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〇참선(參禪)을 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생사 문제 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방생입니다. 맨 처음에 자기가 자기를 방생을 시켜야 남도 죽게 되는 사람을 살려내지, 자기가 쇠사슬에 콱! 묶여 갖고 다른 사람 쇠사슬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열심히 해서 우선 자기 방생을 하고, 자기 방생을 하면서도 항상 그 뜻은 보살심(菩薩心), 마음속에 탁! 뜨거운 보살심을 지니고서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고, 대중 속에서 정진을 하면서 행여나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하는 말 한마디라도 대중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대중 공부하는데 폐를 끼치지 않도록 그렇게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〇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이여. 정체(正體),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여. 어떤 말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떠한 모양도 거기에는 찾아 볼 길이 없는 것이여.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야. 아무리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귀로 들을라고 하고, 손으로 만지려고 하고, 생각으로 알라고 해도 그 자취를 볼 수가 없어. 그 자체는 성색(聲色)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여.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거기서 행여나 떨어질까 봐서 그걸 붙잡고 발발 발발 떨지 말고 거기서 턱! 손을 놔 몸을 굴리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을 것이다. 온 법계(法界)가 다 정체(正體)가 여여(如如)한 면목이더라 그거거든.
사서순환난부한(四序循環暖復寒)한데, 춘하추동 사서(四序)가 돌고 돌아서 더웠다가 다시 추워졌다 그말이여.
미후심연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여. 원숭이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더라.
육화촌은—원숭이란 놈은 여름, 가을에 산에는 온갖 맛있는 과일이 모다 익을 때 그 맛있는 과일이 익었을 그때의 일을 그렇게 그리워하더라 그말이여. 날씨가 추워져 가지고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그렇게 흔치 않으니까.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睱)여.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모든 색을 보는데, 생각 생각이 그 육화촌에 맛있는 과일 그 생각만을 하느라고 아무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어.
그래 가지고 행여나 이리 가면 맛있는 것이 있을까, 이리 가면 먹음직한 것이 있을까 하고.
염염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여. 생각 생각이 죽음의 문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춘하추동 사시절(四時節)이라는 게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되면 추워져. 소한 · 대한을 지나면은 다시 또 입춘 · 우수가 되어서 계속해서 춘하추동 춘하추동 끝없이 이게 돌아가는데.
'잔나비가 육화촌을 그리워한다' 그 말은 우리의 심의식, 우리의 마음을 갖다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우리의 심식(心識)을 잔나비에다가 비유해서 한 말인데,
우리의 심식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창(六窓)을 통해서 귀로는 좋은 소리를 듣기를 바래고, 눈으로는 곱고 이쁜 것을 보고 싶어 하고, 코로는 좋은 향내를 맡고자 하고, 혀로는 맛있는 맛을 추구하고, 우리의 몸으로는 따뜻하고 시원하고 부드럽고 그 좋은 것을 항상 찾는다 그말이여.
우리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모든 사람, 모든 일, 모든 것들을 그렇게 추구하는 것을 잔나비가 육화촌을 그리워한다고 비유해서 읊은 시(詩)다 그말이여.
우리 중생들은 항상 잔나비가 육화촌을 그리워하듯이, 우리는 육근(六根)을 통해서 끝없이 자기의 탐진치(貪瞋痴)와 오욕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어.
오욕락(五欲樂)이라 하는 것은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여.
재산이란 게 부(富)를 말하는 것이고, 색(色)이라 하는 것은 남녀 간에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식(食)은 맛있는 음식, 명(名)에는 명예와 권리, 수(壽)는 수명인데, 안락한 것을 추구한다 그말이여.
우리가 인간이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뭐 끝없이 밖으로부터 무엇을 추구하는데 대충 분리를 해 보면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오욕락이다 그말이여.
그 오욕락을 구하기 위해서 그 어려서부터서 참 열심히 공부를 하고 밤잠을 자지 않고 가정교사를 들이고 해서 좋은 학교를 가려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오욕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런 거고.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도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오욕락을 획득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다른 것이 없다 그 말이여.
물론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국가다, 사회다, 세계평화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하지만 오욕락을 벗어나지를 못한 거여, 그게 다.
정말 오욕락을 벗어나서 인류를 생각하고 중생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벌써 다른 거여, 그게. 얼굴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의 처신이 다 다르게 되어 있는 거여.
탐진치와 오욕락에 탁! 뿌리가 깊이 박혀 가지고, 오욕락과 탐진치에다 뿌리를 박고 아무리 입으로 거룩한 소리를 해봤자 중대한 일을 당하면 다 사리사욕에 다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여.
그래 놓으니 경제나 사회나 교육이나 사법이나 정치나 회사나 일체가, 그 오욕락을 추구하는 사리사욕과 탐진치 삼독(三毒) 때문에 형무소가 필요하고 사정(司正)이 필요하고, 나아가서는 온 국가가 이렇게 복잡하고, 온 세계가 싸움을 끝없는 전쟁을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오늘은 천구백구십사 년 1월 2일, 첫째 일요법회 날인데 양력으로는 새해가 되었습니다. 용화사에서는 구정을 쇠지마는 일반적으로는 금년 새해 1월 초이튿날인데, 금년도 최초의 일요법회 날이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만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렵고, 그것을 실다웁게 닦기도 어렵다'고 한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금년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참 어려운 그러한 과제를 우리는 안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를 하는 분이나, 또는 사업을 하는 분이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모든 국민이 정말 어려운 그런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잘 해 나가기 위한 뚜렷한 방책도 없습니다. 우리 한 나라 안에서만의 일이라면 또 모르는데 온 세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 일 년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로 머리를 쓰고 연구를 하고 해서 중지(衆智)를 모아가지고 국책을 세워 나가겠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가 나름대로 다 머리를 써야겠지만 문제는 생각할수록 어렵고 복잡할 것입니다.
우리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럴 때에 어떻게 해 가야 하느냐?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또 우주법계가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고 천 가지 만 가지 얼크러졌어도 그것이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여. 그 원인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말이여.
그 원인을 알지 않고서는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여. 자기 개인 일도 그렇고 가정 일도 그렇고, 사회나 모든 단체의 일도 그렇습니다. 원인을 모르고서는 세상 없이도 근복적으로 해결은 안 되는 거여.
가깝게 생각해서, 사람마다 살아가다 보면 병이 나고, 병이 깊어지면은 죽게 되는데 생로병사를 면틀 못하는데, 그 병 하나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뭐 어디가 아프다 하면 약국에 가서 ‘어디가 아픕니다’해 가지고 약 사다 먹고 그렇게 해 가지고는,
보통 조그만한 병 같으면 몰라도 정말 깊은 병은 원인을 알아가지고 근본 치료를 해야지,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어디가 아프다’하면 금방 뭣 사먹고 지멋대로 약국에 가서 되나깨나 사다 먹어 갖고는 임시는 조금 통증이 완화될는지는 모르지만 병의 뿌리는 다스릴 수가 없어.
점점 세월이 가면 병이 깊어질 수밖에 없고, 처음에는 한 번 약이 듣다가 두 번, 세 번, 네 번 먹으면 차츰차츰 약성(藥性)이 발휘가 잘 안되는 거여. 그것은 근본 치료를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건데.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믿어지는데,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서 이것이 나온 것이다’한 말은 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좀 믿어지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가 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온 거여.
내 한 몸에 관계되는 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와 직접 간접으로 전혀 관계없는 모든 상황도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우선 그렇게 믿어야 돼.
저 달도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서 그 달이 거가 있어 가지고 이렇게 지구를 돌면서 태양을 이렇게 돌고 있는데, 어찌 그 달이 내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느냐? ‘그건 좀 이치가 당치않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마는.
저 달도 우리의 마음에서 나왔고, 저 태양도 우리의 마음에서 나왔고, 이 지구도 우리의 마음에서 나왔고, 지구에 태어난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도 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온 거여.
왜 그러냐?
여러분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참선(參禪)을 하면, 가까운 장래에 또는 먼 장래에 언젠가는 『과연 그렇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스스로 보게 되고, 스스로 의심 없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휘황찬 밝은 달이 떠 있는데, 그 달은 사실은 아무도 주인이 없어. 아무도 주인이 없어!
각자, 저것은 소유권이 누구에게도 없지마는 보고 느낀 사람 것이여, 그게. 그 달을 보고 기뻐한 사람은 자기에게는 기쁜 달의 소유자가 되는 거고, 그 달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은 슬픈 달로써 자기가 그 달을 소유하고 있는 거여.
태양 뜨면은 환히 밝아지는데, 해가 떠서 좋은 사람은 밝은 태양으로써의 소유자가 되는 거고, 도둑놈이나 밤에 나쁜짓을 한 사람은 해가 뜨는 것을 대단히 싫어해. 그 사람은 밝은 해의 소유자가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왜 해도 하나고, 달도 하나인데, 보는 사람마다 다 그 달이나 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말이여.
어찌 해와 달 뿐이겠습니까?
곱게 핀 한 송이 꽃도 자기가 마음이 기쁨이 있는 사람이 그 꽃을 보면 그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 꽃에서 풍기는 향내도 좋다고 느낍니다. 그 아름다운 꽃을 보고 노래가 나오고 시가 나오고 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우선 어떠한 불상사(不祥事)가 있어서 슬픔에 잠기면 그 꽃이 조금도 곱고 아름답게 느껴지지 아니할 것이고, 오히려 그 꽃을 봄으로써 더 눈물이 나올 수도 있고. 잔뜩 성이 나 가지고 마음이 진심(瞋心)으로 가득차면 그 좋은 꽃도 막 짓밟아버리고, 그 꽃을 화병에다 담아놨거나 화분에다 담아놨으면 그것을 바닥에다가 메다쳐서 부셔버릴 것입니다.
이건 하나의 가까운 예들이지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집니다.(처음~20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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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 소유권을 자기 앞으로 등기 이전만을 해야 자기 것이 아니여. 아무리 자기 앞에 고층 건물이 몇십 개가 있고, 땅이 수백억만 평을 자기 앞으로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정말 자기 소유라고 허잘 것이 없어.
자기 앞으로 하나도 소유권이 없지만 마음에 탐욕심이 없고 마음이 넓고 넓어서, 무소유를 소유로 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산이 전부 자기의 소유가 되는 거고, 부는 바람도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이고, 산천초목과 모든 바위들도 다 자기 소유가 되는 거고,
자기가 이뻐하는 자식만 자기 자식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 유치원으로부터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교 모든 학생들도 다 자기 자식이 되는 것이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는 거여.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되지마는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고 넉넉한 거여.
자기 앞으로 법적으로 얼마만큼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자고, 그것 때문에 근심이 끊어지지를 않고, 그것 때문에 가족 형제끼리 싸움질을 하고, 재판질을 하고 하는 그러한 소유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아니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정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새해를 맞이해서 「밖에서 무엇을 구할려고 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러한 보물을 우리 몸 안에서 그것을 계발을 하는 사업에 우리의 몸과 목숨과 시간을 거기다 투자를 하자」 이런 말씀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Uruguay Round)니 뭣이니 해 가지고 아무리 우리가 개인적으로 근심 걱정을 해 봤자 아무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온 세상이 그럴수록에 우리는 우리의 자신 속에 영원한 보물을 계발을 하는 사업에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
우리 정법을 믿는 학자(學者)만이라도, 정법을 믿는 불자(佛子)만이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그래 가지고 자기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차츰차츰 그러한 사업에 그러한 행렬에 가담하게 되면 정말 우루과이라운드도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수년 전에 외국 담배가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 조금 뜻이 있는 사람은 잘 안 사 피웠고, 정 속아지 없는 사람들이 그걸 몇 사람씩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피더니 세월이 가면서 점점 외국 담배를 피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고, 외국 담배를 파는 가게가 장사가 잘 되어간다고 그럽니다.
담배 그것 안 필수록 좋은 것이지만 부득이해서 핀다면 국산 담배도 다 필만 하고 외국 담배 못지않게 좋은 담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외국 담배를 피워가지고 우리나라의 이익에 손상이 되는 것을 걱정하질 않는 사람, 외국 쌀이 싸고도 맛이 좋은 쌀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좀 눈치를 보다가 나중에는 값이 싸고 맛이 좋은데 그걸 안 먹고 국산 우리나라 쌀만 먹을려고 하는 사람은 차츰차츰 줄어져 갈 것입니다.
속담에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 그런 말이 있는데, 나는 이 자리에 계신 법보가족(法寶家族) 여러분은 나라를 생각하고, 우리의 농가(農家)를 생각해서 좀 비싸더라도 우리나라 쌀을 사 잡술는지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은 값이 싸고 맛도 나쁘지 아니하면 너도나도 다투어서 외국 쌀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아무도 막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농가에서도 맛도 좋고 값이 싼 그런 쌀을 경작하는 길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맛도 별로 좋지 않고 값이 4배나 비싼데 아무리 사먹으라고 해도 그것은 막을 길이 없어. 나라에서도 막을 길이 없고.
그러나 의류라든지 모든 것이 값도 비싸고 물건도 그렇게 썩 좋지 못한데 우리나라 물건에다가 가짜 외국 상표만 붙여 놓으면 그것이 비싸게 날개 돋친 듯 팔려가거든.
그러니 중생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허영심에 꽉 차 있는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물건이 우리나라 물건보다 훨씬 좋고 값도 싸면 더욱 좋지만, 값은 좀 비싸더라도 물건이 훨씬 좋다면 그것을 사지 말라고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내나 물건이 우리나라 물건 상품도 아니고 우리나라 물건에다가 상표만 외국 상표만 붙이면 그것이 비싸게 팔린다면 그것은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나는 외제를 쓰고 있다'고 하는 헛된 허영심, 남한테 뽐내고 싶어 하는 허영심, 삐뚤어진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여.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고치고, 정말 우리나라가 농사 지어봤자 아무도 우리나라 사람이 안 사먹는다면 그 농산물을 어디다 대고 팔겠습니까? 그러니 농사 안 짓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국내에서는 쌀이 생산이 안 되고 전부 미국이나 동남아나 중국이나 외국에서 들어온 쌀만 사먹게 됩니다. 우선은 쌉니다마는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안 짓게 되면 그 쌀값이 점점 올라갑니다. 해마다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올라가서 우리나라 쌀값보다 더 비싸게 값이 올라간다 해도 우리는 그 쌀을 안 사먹고는 못배깁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농사를 안 지으니까. 그래 가지고 전쟁이 나거나 어떠한 그럴 때에는 전 국가적으로 난리가 나고, 완전히 그 식량 때문에 외국에 노예가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농촌은 피폐가 되어 가지고 농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국민이 '우루과이라운드는 안 된다. 쌀은 절대로 수입해서는 안 된다'고 모다 아우성을 치지만, 이것은 누구의 힘으로도, 세계의 대세 때문에 우리는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마는 그것은 결국은 틀 수밖에는 없게 되었는데.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농촌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도회지 사람도 농촌을 살리는 마음으로 도회지 사람도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이 대단히 어려운 길이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우선 우리는 활구참선 최상승법을 의지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몸속에서 영원한 보물을 계발을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생활을 해 나가고 그렇게 살아가면 탐욕심이 없어지고, 허영심이 없어지고, 마음이 담박하고 청정해지면 그러한 문제들도 차츰차츰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하리라
나무~아미타불~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하니 각소거진불염진(卻笑居塵不染塵)하리라
나무~아미타불~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하리라.
우리의 마음자리를 몰록 깨달라서 우리의 몸속에 있는 영원히 써도 써도 끝이 없는 보물을 계발을 하면, 우리가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생로병사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끝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한데, 그 연꽃을 보라 그말이여. 그 연꽃이 그렇게 이파리도 때가 묻지 않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그 꽃도 그렇게 곱고 아름다운데, 대관절 그 연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차츰차츰 그 밑에로 줄기로 내려가 보면 더러운 흙탕물 흐리 속에다가 뿌리를 박고 있다 그말이여.
저 높은 산간에 깨끗한 석간수(石間水)에는 연꽃이 살들 못해.
연꽃은 저 들녘으로 내려가서 하수도 물이 내려가고 더러운 시커먼 흐리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말이여. 그 뿌리를 그렇게 더러운 데다가 박고 있으면서도 그 잎과 꽃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參禪)을 해서 내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다’고 말씀을 하셔.
‘아무개야!’ 그러면 ‘예’하고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추우면 더운 옷을 입을 줄 알고, 눈으로 모든 색상을 볼 줄 알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어린애로부터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지식이 있건 없건,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그럴 줄 안다 그거거든.
그놈이 온갖 성도 낼 줄도 알고, 탐심도 낼 줄 알고, 희로애락 모든 의식이 거기서 나오는데, 그럴 줄 아는 그놈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눈으로 꽃을 보고 '저게 곱다'하는데, 꽃을 보는 놈이 눈이 아니야. 눈으로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눈이 아무리 있어도 다 보는 것이 아니여.
속에서 눈으로 보는 놈이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다른 일에, 몹시 골똘하게 다른 일을 생각하는 데에 골몰하고 있을 때에는 앞에 사람이 왔다갔다해도 하나도 안 보이는 거여. 뭐라고 말을 하고 갔어도 그 소리도 잘 안 들리는 거여.
다른 일에 골몰하고 있을 때에는 무엇을 먹어도 맛을 잘 모르는 거여.
대답도 다 해놓고는 나중에 와서 말하면 ‘나 언제 그런 말 했냐?’고 완전히 아주 뚝 잡아떼는데, 들을 때에 듣는 놈이 딴 짓을 하고 있을 때에는 들어도 들리지 않어.
봐도 분명 보는 그놈이 딱! 봐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지, 생각은 딴 데에 있고 그냥 눈은 뜨고 있어도 하나도 안 보이는 거다 그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어도 제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니여. 뒤죽박죽으로 하루를 사는 거여.
봐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들어도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먹어도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을 해도 제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여.
마치 뱀, 여우, 악어, 새.. 그런 여러 가지 그런 다섯 마리의 짐승을 묶어서 한군데에다 묶어 놓은 거와 같아서, 이놈은 이리 갈라고, 저놈은 하늘로 날아갈라고, 한 놈은 땅구녁으로 들어갈라고, 한 놈은 물로 들어갈려고 그러고, 한 놈은 산으로 도망갈려고 하듯이 뒤죽박죽이거든.
우리는 그러한 상태에서 태어나 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가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그것을 인생을 바로 살았다고 할 수가 없고,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물론 그중에는 훌륭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인격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말인데.
「그 모든 사람들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그 주인공(主人公)은 부처님이나 우리나 다 똑같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어.(20분37초~40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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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똑같은 우리의 본래 주인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다.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살아가고 있어. 오욕락(五慾樂)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깨끗한 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어.
그러나 그런 더러운 곳에 때 묻지 않는 연꽃처럼, 우리 자신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항상 ‘이뭣고?’를 해.
무엇을 눈으로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어도 그 듣는 소리 쪽으로 따라가지 말고, 듣자마자 즉각 ‘이뭣고?’로 돌아오라.
할려고 마음을 먹어도 경계(境界)가 닥치면은 금방 깜박 잊어버리고 그리 따라가는데, 그런다고 해서 중단을 하지 말고, 그런다고 해서 짜증도 내지 말고 포기를 해서는 안 돼.
또 챙기고 또 챙기고 자꾸 챙기다보면, 차츰차츰 그것이 되풀이해서 똑같은 일을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은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질 때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
새해가 돌아오면 토정비결을 본다든지, 어디 또 만신이나 점쟁이한테 가서 신수도 보고 해서 금년 운수가 어떤가? 뭔 일이 좀 잘될란가?
답답해서 가시는 분도 있고, 누가 '족집게 점쟁이다, 잘 맞춘다' 하니까 호기심으로 따라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냥 '좋다'고 하면은 좋아가지고 복채도 많이 주고 돌아오지만, ‘대주(大住)가 금년에 대단히 안 좋다'고.. 굿을 몇 번을 해야 하고, 무슨 몇십만 원 짜리 부적(符籍)을 사서 몸에 지녀야 하고. 이거 참 겁나는 소리를 하면 그 말을 듣고는 속이 편틀 못하다 그말이여.
아무리 여기서는 이런 말을 들어도 집에 가서 어쩌고저쩌고 하면 금방 생각을 내신다 말이여. 이건 지식이 있건 없건 여자분은 여간해서 그런 데에 속지 않기가 어렵다 그말이여.
‘남편한테 해롭고 자식들한테 해롭다’하는 데에는 어떠한 일이라도 해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 나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그것이 별로 그렇게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그거 왜 그러냐?
점쟁이는 혹 지내간 일은 더러 맞추는데,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못 맞춰. 점쟁이한테는 삿된 귀신이 잠시 붙어가지고 그 삿된 귀신이 돌아다니면서 봐서 일러주면은 지내간 일은 잘 맞추는데, 귀신도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잡귀는 모르거든.
부처님처럼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나서 육신통(六神通)으로 보신다면은 과거 현재 미래를 손바닥 안에 보듯 환히 아시지만, 점쟁이는 육신통이 난 게 아니여.
잡신(雜神)이 잠시 붙어가지고 그 잡신의 힘으로 지내간 일 뭘 좀 아는 소리를 하는데, 그것 가지고 미래 일까지는 다 혹 맞추기도 하고 안 맞추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말을 믿고 우리가 중대한 일을 추진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거 정신병자가 운전하는 차를 탄 거와 같아서 그놈이 언제 어디다 끌박을지 모르거든.
우리는 아무리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해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만나고, 슬픈 일도 만나고, 괴로운 일도 만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한테도 3불능(三不能)이 있어. 3능(三能)과 3불능이 부처님한테 있다고 그러는데, 부처님께서 세 가지 능한 것은 무엇이냐?
일체 상(相)이 다 공(空)해서 그래 가지고 만법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이 부처님이 능하는 일이여.
두 번째는 모든 중생의 성품을 환히 다 알고, 억겁의 모든 일을 다 맥힘이 없이 다 아시는 거여.
셋째는 무량 중생을 제도하실 수가 있어. 이것이 부처님의 세가지 능하신 것인데,
그러한 삼명육통과 팔해탈(八解脫)을 증득하신 그러한 부처님도 세 가지 능(能)치 못한 것이 있는데, 당신이 무량겁으로부터서 오시면서 지으신 정업(定業)은 멸(滅)할 수가 없어.
그 모든 것을 환히 다 아시고 육신통이 자재(自在)하시고 팔해탈이 자재하신데, 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다 하실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정업을 멸할 수가 없다.
두 번째는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가 없어. 셋째는 중생계를 다하지 못혀.
이 세상에 한 중생도 없이 다 무량 중생을 제도하실 수는 있으나, 중생계가 완전히 다 없어지도록 하실 수는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한 법력(法力)과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으로서도 부처님의 고국인 가비라(迦毗羅) 왕국이 멸망할 때 그걸 번연히 알고 계셨고 보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으신 것이여.
과거의 삼천불, 현겁 삼천불, 미래 삼천불 삼천(三千)의 부처님이 계셔도 중생계는 다하지 못하는 거여.
부처님의 자비는 인연이 있고 없고 간에 다 똑같이 베풀어지지만, 인연(因緣) 있는 중생이라야 제도가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우리는 인연을 부처님과 맺음으로 해서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게 되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믿게 되고, 믿고서 실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부처님께도 그런 삼불능(三不能)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는, 부처님께서 능(能)치 못한 3가지도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그보다도 수수 백만 가지가 능치 못한 것이 너무너무 많은데, 우리가 과거에 지은 그런 정업(定業)을 우리가 점쟁이 말 듣고 그것이 면(免)해 질 수가 없어.
방법은, 이미 우리가 지어 가지고 받는 것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것이고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받아 넘기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여.
공자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중국을 이렇게 유행을 하시는데, 관리한테 붙잡혀 가지고 큰 난을 당했어.
그것은 양호(陽虎)라고 하는 악인이 있었는데, 공자님이 그 양호란 놈하고 얼굴이 비슷하게 생겨 가지고 양호인줄 알고 체포를 당해 가지고 참 억울한 어려운 일을 당하다가 간신히 풀려났는데, 그 제자가 묻기를 "성현(聖賢)도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그 제자들은,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을 숭배하듯이 공자님을 그렇게 숭배하는데, '어찌 공자님과 같은 성현이 이런 참 어려운 일을 당할 수가 있겠느냐?' 의심이 나서 여쭈어 본 건데.
성현이라고 해서 어려운 일을 안 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의 그 마음은 다를지언정—중생이나 범부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은 당황하고 겁을 내고, 마음이 동요가 되어서 겁에 질려서 자기의 마음을 지닐 수가 없어. 그런데 성현은 당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당할 때의 그 마음가짐이 다르다 그거여.
범부(凡夫) 같으면 당신의 고국이 그렇게 망할 때 신통력으로 그 적군을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때려 부수고 죽이고 물리치고 혹 그런 마음을 냈을런지도 모르는데, 부처님은 환히 알고 그 광경을 다 보시면서도 그런 적극적인 행동을 하시지 않았어.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그 고국의 사람들이 아주 멸종이 되게 생겼으니까 5천 명을 골라 가지고 발우대에다 담아 가지고 저 높은 하늘나라에다 갖다가 잠시 피신을 시켰어.
부처님께서는 『그래 봤자 뭔 소용이 되겠느냐? 한 번 해 봐라』 그래서 목련존자가 그렇게 했는데 다 난리가 가라앉은 다음에 가서 바리때 가지러 가니까 속에서 다 죽어 갖고 있어.
과거에 죽을 업(業)을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걸 받게 될 때에는 피할 길이 없어.
목련존자도 5백 생을 결국은 타살(打殺)을 당했는데 과거에 업연(業緣)으로 그랬는데,
마지막 5백 생도 결국은 당신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외도(外道)들이 자꾸 불법(佛法)이 흥왕을 하니까 ‘부처님의 왼팔, 오른팔을 끊어야만 되겠다’ 그래 가지고 목련존자가 숲속에서 터억 이렇게 좌선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수백 개의 돌팔매질을 해 가지고 결국은 몸이 부서지게 되었다 그말이여.
목련존자의 같은 고향에서 같이 출가한 도반인 사리불(舍利佛)존자가 『왜 그대는 신통이 제일인데 왜 신통술을 어디다 두고 그렇게 맞었냐?』 그러니까,
『신통의 신(神)자도 생각이 안 나더라』 그렇게 경전에 쓰여 있는 데도 있고, 『내가 불자(佛子)로서 인과법(因果法)을 아는 사람이 피해서 되겠느냐』 또 그렇게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두 가지가 다 맞는 말씀이고.
점쟁이 말 듣고 재앙을 면할려고 해서는 안 돼.
그런데 점쟁이가 가끔은 절에 가서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치성(致誠)을 드리라고 그렇게 보내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와서 절에 와서 천도재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런 분도 있습니다.
부처님께 시주(施主)도 하고, 치성도 드리고, 또 조상의 천도재(薦度齋)도 지내고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천도재를 지내 가지고 집안에 우환이 없어진 그런 경우도 나는 많이 봤습니다. 많이 보기는 했으나, 정업(定業)은 난면(難免)인 것입니다.
받되 정법(正法)으로써 마음이 딱! 기둥이 서면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바른 마음으로, 바른 정신으로, 신심과 원력으로, 지혜와 인내로써 그런 일을 잘 처리해 나가고 그 일을 소화를 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쓴 것>
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써 가지고 그 각본에 의해서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나 탤런트는 각본을 쓴 작가가 따로 있고, 그 각본에 의해서 감독이나 연출이 그것을 연출을 해 가지고 배우나 탤런트를 잘 선정을 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연극을 하게 하는데, 그것은 배우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
각본에 의해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길 밖에는 없는 것이고 배우, 지 맘대로 이리저리 못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무량겁이라고 해도 좋지만, 가깝게 금생 일생 이렇게 사는 것만을 우선 생각을 해 보자 이겁니다.
우리가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어렸을 때를 살고, 어떻게 유치원으로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을 다녀 가지고, 어떻게 누구와 결혼을 했고, 어떻게 이렇게 살아가고 어떤 자식을 낳냐? 그리고 일생 동안을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갔느냐?
생로병사, 일생만을 생각해 본다 하면 그것이 무슨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제석천왕(帝釋天王)이나, 또 어떤 뭐 염라대왕이나, 어떠한 다른 사람이 그렇게 시켜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여.
전부 우리 자신이 그러한 각본을 썼어. 각본을 써 가지고 자기가 그 각본에 의해서 지금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마지막 죽어갈 때까지 각본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여.
하나도 부모를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어. 선생을 원망할 것도 없고, 사회를 원망할 것도 없고, 국가를 원망할 것도 없어. 부부간에도 남편이 아내를 원망할 것도 없고, 아내가 남편을 원망할 것도 없어.
도둑질하다가 감옥을 가도 검사나 판사를 원망할 것이 없는 거여. 지가 그 죄를 지어 가지고 판결을 받아 가지고 징역을 사는데, 감옥에 들어가서 내나 자기를 잡아넣은 형사를 '내가 나가기만 하면은 그놈의 형사 가만 안 놔둔다'고 이를 갈아붙이는 죄수가 있다면, 그거 어떻게 된 것이냐.
자기를 무기 징역을 청구를 하고, 무기(無期)를 갖다가 판결을 내리는 검사와 판사를 원망하는 죄수가 있다면 그거 어떻게 된 거냐 그말이여.
가끔 전혀 자기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징역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자기를 억울하게 그 징역을 살게 하는 형사나 검사나 판사를 정말 중생으로서는 참 원망 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도 역시 원망할 것이 없어.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억울하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금생에 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과거가 없는 금생(今生)은 없어. 전부가 금생에는, 금생에 우리가 지은 업과 과거에 지은 업이 다 연관성 있게 우리의 모든 것이 전개되어 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래서 과거에 지은 업과 금생에 지어가는 업, 그런 것들이 합해 가지고 우리의 미래가 열려 나가는 것이니까, 우리는 이미 과거에 지어버린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나, 그 각본을 우리는 고쳐서 쓸 필요가 있다 그말이여.(40분57초~61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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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은 거기서 전개되어 가는 것을 보고 야단들이여.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은 작가한테 막 편지질을 하고 전화질 하고 방송국에다 그래가지고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된다, 살려야 한다’고 야단들인데, 그렇게 하두 전국에서 들어오면은 처음에 작가의 생각은 죽일라고 했다가도 하도 그래싸면 그거 바꾼다고 그래요. 근데 그까짓 TV에 나오는 거 죽이면 어떻고 살리면 어떻고 별 것이 아닌데.
우리 자신이 과거에 지은 업이 있어가지고 금생에 불행하게 이렇게 불행한 일만 당하게 되었다 하면, 그 각본이 다른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내가 썼기 때문에 금생에 각본을 달리 쓸 수는 있다 그말이여.
달리 써 가지고 어쨌든지 좋은 방향으로 요렇게 틀으면 좀 힘은 들랑가 모르지만, 자기가 쓴 각본을 자기가 방향을 바꿔 나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미래는 꼭 과거에 지은 그놈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우리가 해 가는 일까지 합해져 가지고 미래가 열리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운명론이다, 숙명론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 불교는.
인과법은 숙명론(宿命論)도 아니고 운명론(運命論)도 아니여.
과거에 지은 업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지만, 금생에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그것까지 합해져 가지고 미래가 열려지기 때문에 우리는 각본을 바꿔 쓰면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 어떻게 각본을 쓰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방향은 바꿀 수가 있다 그말이여.
이게 인과, 인과의 법칙을 정말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활용을 해 나가야 한다.
인과법을 잘못 믿으면 완전히 숙명론 · 운명론에 떨어져 가지고 그러고, 그렇지 않으면 까딱하면 인과법을 믿지 않고, 발무인과(撥無因果) '에잇! 그까짓 거 소용이 없다'고.
못된 짓을 하면 응당 잘 못살아야 하고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극악무도하고 못된 짓만 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러고 정직하고 착하고 참 그런데 사사건건이 불운(不運)을 당하고 못살고 억울하게 그렇게 일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 그런 걸 보면 '그것 인과법 소용 없다'고, 안 믿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아니거든.
금생에 것만 갖고 우리의 앞이 그것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과거에 지은 것까지 합해져서 되기 때문에 과거에 워낙 좋은 복을 지어놓으면 금생에 못된 짓을 해도 우선 괜찮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요.
금생에 나쁜 짓 한 건 또 언젠가는 꼭 받게 되지만, 우선 과거에 지어놓은 것이 워낙 많으면 그것이 금생에 좀 나쁜 짓 해도 그럭저럭 잘사는 사람도 있어. 그러나 그것 믿을 것이 못되는 거고.
금생(今生)에 착하고 부지런히 해도 못 당할 일 많이 당하는 것은 전생(前生)에 지은 나쁜 악업이 있기 때문에 금생에 좀 잘해도 별로 좋은 꼴을 못 보는 거여.
그래서 인과의 법칙에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바로 현실적으로 받는 경우가 있고, 금생에 지어 가지고 바로 이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금생에 지어가지고 다음 생, 저 다음 생, 몇 생을 건너뛰어 가지고 가서 받는 수가 있어.
현생보(現生報) · 순생보(順生報) · 순후보(順後報), 이것이 세 가지 차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이지 안 받는 것은 아니여, 언젠가는 다 받게 되는데.
그렇게 지어서 받는 것은 면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부 우리의 마음으로 지어서 이렇게 벌어지는 일들이라,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이라 하는 것은 만법(萬法)의 근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환상이요, 물거품 같은 것이다』 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래서 범부는 모든 것이 환(幻)인데 환인 줄을 모르고서 환(幻)의 업(業)에 집착을 해 가지고 거기에 끄달리는 거고.
성문(聲聞)은 모든 환(幻)을 그것을 굉장히 두려워 해. 생로병사를 굉장히 두려워 해가지고 어떻게 하면—죽음이 무서우니까, '죽음을 안 당할라면은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태어나기만 하면 늙어서 병들어서 결국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니까, 죽음이 없을라면은 태어나지 않아야겠다' 그래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방법으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
멸진정은 영원히 아주 정(定)에 들어가 버린 거여. 그러면 태어나지를 않기 때문에 죽음도 없다. 이게 소승(小乘)의 생각이다.
보살(菩薩)은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환(幻)의 경계여. 본래 없는 것이고 본래 남[生]이 없는 거여.
눈병 든 사람에게 이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우리는 눈동자를 옆에서 요렇게 눌루고 보면 해도 둘로 보이고, 달도 둘로 보이고, 뭔 물건도 둘로 보입니다. 여러분 댁에 가서 시험을 해 보세요.
그냥 보면 하나인데, 눈동자를 요렇게 눌러가지고 압력을 가해 가지고 보면 삐뚤어지게 보이고 둘로 보인다 말이여.
눈이 멀쩡한 사람에게는 허공 속에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 난 사람은 뭣이 이상한 것이 이리 왔다갔다 하고,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불이 켜진 것처럼도 보이고 모다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는 꽃이 안 보이거든.
눈병이 나기 전에도 없었던 거고, 눈병이 난 뒤에도 허공에는 꽃이 없는 거고.
그러다가 눈병이 나은 뒤에도—허공의 꽃은 원래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눈병 난 사람은 보이니까 그 눈병 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은 분명히 있다고 할거라 그말이여.
눈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허공의 꽃이 원래)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명상(名相), 이름이나 모양이나 그런 것은—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거,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은 명상(名相)이여 그게. 명상(名相).
명상(名相)이라는 것은 환(幻)으로 이루어진 거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여 그것이.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그말이여.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을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는 거여.
어린애들은 크레용이나 무슨 연필을 가지면 벼람박이고 어디고 마구잽이 막 그려 젖히거든.
철없는 중생이 우리의 마음으로 일체 경계(境界)를 당해서 온갖 것을 정말 미친 사람이 어떠한 연극에 각본을 쓰듯이 종잡을 수 없이 쓰거든.
죽일라고 했다가 살리고, 살릴라고 했다가 죽이고, 그저 도둑놈을 갖다가 착한 사람을 만들고, 착한 사람을 어떤 때는 또 도둑놈으로 만들고 해 가지고는 종잡을 수 없이 계속 끝이 없는 각본을 써 가는데.
우리 중생이 하는 짓이 바로 미친 아주 정신병자가 연극 각본을 쓴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우리의 무량겁을 그렇게 그런 각본을 써 왔고.
앞으로 정법(正法)을 믿고 바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해서 자기의 주인공(主人公)을 계발하고 그놈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간 사람은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는 사람은 착하나 악하나 그놈이 그놈이여. 언제 어떻게 변할는지 모르는 거여. 그래 가지고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해 갈 거다 그말이여.
조금 착한 짓 한 사람은 좋은 곳에 태어날 거고, 악한 짓 한 사람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것이고, 천당에 좋은 곳으로 가봤자 받을 만큼 복을 받으면 또 떨어지는 거고, 삼악도에 떨어지면 그 받는 기한이 길고 길어서 언제 나올 기약 있을런지 모르나, 나와 봤자 또 마찬가지여. 언제 무슨 짓을 또 하냐.
그래서 무슨 소리를 듣든지 '이뭣고?', 무슨 것을 눈으로 보든지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를 하시라 그말이여.
우선 당장 괴로운 일이 있는데 '이뭣고?'만 할 수 있느냐?
괴로운 일 자체가 꿈에 등창을 앓거나 어디 종기를 앓는 거와 같애. 꿈이라 하지마는 실지로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정말 아퍼. 무서운 걸 보면 무섭고, 괴로운 것을 보면 괴롭고, 아플 때는 정말 꿈에도 아퍼요.
아프다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그러다가, 누가 와서 꿈을 깨거나 잠을 깨주면 눈을 뜨고 보면, 깨고 나서도 한참 아퍼. 아퍼도 정신을 차려서 보면 진짜는 안 아픈 거여 그게.
정말 눈 딱 떠서 정신만 차려버리면 그렇게 아프던 종기가 깨끗이 낫어 버리는 거여. 몰록 낫어, 몰록.
세속의 사전에는 ‘몰록’이란 말이 있는가 어쩐가 모르는데, 이 불가(佛家)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 이래서 ‘몰록 깨닫고 몰록 닦는다’는 것이 전기 스위치를 탁! 올리면 찰나(刹那) 간에 탁 켜지고 탁 내리면은 찰나 간에 깜깜해지듯이, 그 꿈에 앓던 몸의 종기가 잠을 깨자마자 몰록 낫어버리는 거여. 차츰차츰 낫어가는 게 아니라.
그래서 방편(方便), 점차(漸次)가 없어. 점차(漸次)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거여.
차츰차츰 요렇게 낫아가는게 아니라, 찰나(刹那) 간에 탁! 몰록 낫아버리는 것이여. 이궁어시(理窮於是)다. 모든 이치가 여기에서 다해 버린 거여.
그래서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고 차츰차츰 깨달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뭣고?'를 해 가면,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계속 의심(疑心)으로 참구(參究)를 해 가면,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그 의심이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우리의 속도 의심으로 가득차고, 온 세계의 무엇을 보나 듣거나 산을 봐도 ‘이뭣고?’뿐이요, 꽃을 봐도 ‘이뭣고?’뿐이요.
‘이뭣고?’를 ‘이뭣고?’들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고 한 게 아니라, 들고 놓고 할 것이 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의심이 온 법계(法界)에 가득차게 되서 더이상 커질 수가 없을 때는 어떠한 찰나에 툭! 터지게 되는 거여.
그래 가지고 의단(疑團)을 갖다가 통 밑구녁 빠지듯이 의단이 탁! 터지는 거여. 그러면서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거여.
비록 석 달 만에 깨달은 사람, 3년 만에 깨달은 사람, 30년 만에 깨달은 사람, 마지막 죽을 때까지 못 깨달은 사람도 있을 수가 있으나,
다른 모든 것은 하다가 안 되면 그것은 실패고 소용이 없는데, 이 공부는 끝까지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도 깨닫지 못했어도 그것이 헛일이 아니여.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놓은 것은 고대로 그 공덕이 거기에 다 있어서 금방 새로운 몸을 받아가지고, 그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젊어서 정법을 만나게 되고, 그 믿어지게 되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면 젊어서 툭 3일 만에 깨닫고, 언하(言下)에 깨닫고, 한철 만에 깨닫는 것이 그 까닭이 있는 거여.
전생에 그렇게 하다가 몸을 바꿔났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툭 깨닫게 되는 거여.
그래서 ‘하! 내가 이렇게 아무리 할라고 해도 안 된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은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렇다’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결국은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해야 혀. 반신반의(半信半疑)를 하고, 허다가 말다가 하고, 그래 갖고는 언제 그것이 될 거냐 그말이여.
할 때는 정말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믿은 데에서 열심히 하면은 거기서 또 분심(憤心)이 나고, 분심 있는 곳에 신심이 더욱 깊어지고 해서, 그래 가지고 결국은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여. 의심이 크면은 크게 깨닫는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이것이 삼요소(三要素)인데, 이 삼요소로 나간다면 누가 못 깨닫게 되느냐 그말이여.
새해에 우리의 법보가족은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어떠한 종류의 일을 당하거나,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만나거나,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신분의(信憤疑) 삼요소로써 단속해 나가기를 우리는 1994년의 첫 번째 법회날을 맞이해서 다 같이 다짐을 합시다.(61분55초~1시간20분3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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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사서순환난부한~’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峯和尙廣錄卷第三十'에서 '警世二十二首' 게송 참고.
*육창일원(六窓一猿) ; 여섯 창문이 있는 집에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이리저리 여섯 개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다는 비유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육창(六窓)에 비유하고 심식(心識)을 한 마리의 원숭이에 비유한 것.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대증요법(對症療法) ; 병의 원인을 찾아 없애기 곤란한 상황에서, 겉으로 나타난 병의 증상에 대응하여 처치를 하는 치료법. 열이 높을 때에 얼음주머니를 대거나 해열제를 써서 열을 내리게 하는 따위가 이에 속한다.
*되나깨나 ; '도나캐나(하찮은 아무나)'의 사투리.
*약성(藥性) ; 약재나 약품의 성질.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것이 오직 마음으로 되었다, 마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당치않다 ; (무엇이)이치에 어그러져 합당하지 아니하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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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법보가족(法寶家族)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〇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無異元來禪師廣錄 第十九 에서 '示余愼爾居士'.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흐리 ; 수렁의 뜻을 가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있어 발을 디뎠을 때 푹푹 빠지는 논의 흙이나 방죽의 바닥에 오랫동안 쌓인 무른 흙을 의미하는 전라도 사투리.
*석간수(石間水) ;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골똘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온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다.
*골몰(汨沒)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정신을 다 기울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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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이뭣고?(이 무엇인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대주(大主) ; ①무당이, 굿하는 집이나 단골로 다니는 집의 바깥주인을 이르는 말. ②여자가 자기 집의 바깥주인을 이르는 말.
*삼명육통(三明六通)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와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삼명(三明)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
①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나와 남의 전생을 환히 아는 지혜.
②생사지증명(生死智證明) 중생의 미래의 생사와 과보를 환히 아는 지혜.
③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
*가비라국(迦毗羅國) ; kapila國(카필라).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아버님 정반왕(淨飯王)이 다스리던 나라. 실달다(悉達多) 태자(太子) 곧 석존(釋尊)이 태어난 곳.
*석가족의 멸망 ; BC 6세기에 코살라국(Kosals國) 사위성(舍衛城)의 왕인 파사닉왕(波斯匿王)이 석가족 사람과의 혼인을 청해 왔는데, 석가족은 파사닉왕이 낮은 신분 출신의 왕이어서, 왕의 청을 거만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파사닉왕의 세력이 워낙 강했으므로 왕족 하녀의 딸을 석가족의 처녀라 속여 파사닉왕에게 보냈다.
이 하녀의 딸과 파사닉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리(琉璃)태자가 8세 때 어머니의 나라인 석가족의 카필라국(Kapila國)을 방문했는데, 석가족의 사람들은 유리태자를 무시하고 ‘종년의 자식’이라 하며 천대하고 모욕을 주었다. 이에 태자는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 마음 먹었다.
한 신하의 계략으로 파사닉왕이 죽고 유리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지난날 석가족에게 당한 모욕을 보복하고자 출병을 하였는데,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는 유리왕(琉璃王)과 그 군사들이 카필라국으로 가는 길목에 말라 죽은 고목 밑에 앉아 계셨다.
유리왕은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왜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앉지 않으시고, 말라 죽은 고목 아래 계십니까?’하고 여쭙자 ‘친족의 그늘은 나무의 잎과 같이 시원하다’고 말씀하시니, 유리왕은 부처님의 뜻을 알고 군대를 돌렸다. 그러나 또다시 석가족에 당한 모욕을 기억하고 카필라국으로 향했다.
이런 중에 부처님의 제자인 목련존자는 석가족을 구하고자 부처님께 나아가 사뢰었다.
‘저의 신통력으로 유리왕의 군대를 타방 세계로 던져버리거나, 카필라국을 허공에다 옮겨 놓거나, 카필라국 위에 쇠그물을 덮을 수 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석가족의 전생 인연도 타방 세계에 던져 버릴 수 있겠느냐, 전생 인연도 허공에 옮겨 둘 수 있겠는가, 쇠그물로 전생 인연을 덮을 수 있겠는가’ 되물으시고, ‘지금 석가족들의 전생 인연이 이미 다 익었으므로, 이제는 그 갚음을 받아야 한다.’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곧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록 저 허공을 이 땅으로 만들고, 또 이 땅을 허공으로 만들려 해도, 그것은 다 본디 인연에 매었나니, 그 인연은 영원히 안 썩느니라.”
목련존자가 그 석가족 사람들이 아주 멸종이 되게 생겼으니까 5천 명을 골라가지고 바리때에다 담아 가지고 저 높은 하늘나라에다 갖다가 잠시 피신시키려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래 봤자 뭔 소용이 되겠느냐? 한 번 해 봐라.” 그래서 목련존자가 그렇게 했는데 다 난리가 지나고 나서 바리때 속을 보니 다 죽어 있었다.
이렇게 세 번을 거듭 진군하다 돌아오고 진군하다 돌아왔으나 네 번째에는 부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다. 이리하여 유리왕과 그 군대는 석가족을 잔인하게 짓밟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사위성(舍衛城)으로 되돌아 갔다.
부처님은 비구들과 함께 유리왕과 그 군대가 휩쓸고간 불태워진 카필라국을 보시고 곧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모든 현상은 덧없는 것이니, 한 번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네. 나지 않으면 곧 죽지 않나니, 이 열반이 가장 큰 즐거움이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으로 가셨다. 그 때에 비구들에게 말씁하셨다. “지금 저 유리왕과 그 군사들은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하고 지금부터 일주일 뒤에는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과연 유리왕과 그 군사들은 일주일 뒤에 강가에서 밤에 비바람이 몰아쳐 물에 떠내려가 죽어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또 하늘 불이 내려와 궁전을 모두 불살랐다.
부처님께서는 천안(天眼)으로 유리왕과 그 군사들이 지옥에 떨어진 것을 아시고 곧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악(惡)을 행하되 못내 심한 것, 그것은 모두 몸과 입의 행(行)이다. 지금의 몸으로도 고통 받지만, 타고 날 목숨도 짧을 것이다. 만일 집에서 살게 될 때는 그 집은 모두 불에 살리고, 만일 목숨을 마치게 되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부처님께서는 석가족과 유리왕의 전생 인연을 말씀하셨다.
“옛날 이 왕사성에 한 어촌이 있었다. 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은 풀뿌리를 먹었는데, 그 촌에 큰 못이 있었고 또 거기는 물고기가 많았다. 왕사성의 사람들은 그 못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 물고기중 하나가 `우리는 전에 이 사람들에게 아무 허물이 없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와서 우리를 잡아먹는다. 다음에 원수를 갚자.`하였다.
그 촌에는 어떤 어린애가 있었는데, 물고기를 잡지도 않고 또 목숨을 죽이지도 않았으나 물고기들이 죽는 것을 보고 매우 재밌어하였다.
비구들이여, 알라. 그 때의 그 왕사성의 사람들이 석가족이고, 그 물고기중 하나가 지금의 저 유리왕이요, 그 때에 죽는 물고기를 보고 웃던 어린애는 바로 나이니라.
그 물고기를 잡아먹은 과보로 무수한 겁을 걸쳐 지옥에 떨어졌고 또 지금에 그 갚음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 때에 물고기 죽는 것을 보고 웃었기 때문에 지금 머리가 아파 돌로 치는 것 같고 또 머리에 수미산을 인 것처럼 무겁다.
이것이 이른바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잘 단속하고 범행을 닦는 이를 생각하고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도록 하라.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번연하다 ; 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이 분명하다.
*삼천불(三千佛) ; 과거세(過去世)의 천불(千佛), 현재세(現在世)의 천불, 미래세(未來世)의 천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인연(因緣)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
*목건련(目犍連, 目連) ; 산스크리트어 maudgalyāyana의 음사. 대(大)목건련 또는 마하(摩訶)목건련이라고도 한다. 원명 꼴리따.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사리불(舍利弗)와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사리불이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리불한테 듣고는,
사리불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사리불과 함께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외도(外道)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입적함.
*목련존자의 과거 업연(業緣) ; 전생에 목건련은 앞을 보지 못하는 부모를 모시고 나이가 들도록 결혼도 미룬 채 살고 있었는데, 부모가 성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시집온 여인은 처음에는 별 불평없이 정성스럽게 앞을 못 보는 시부모를 모시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에게 괴로움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때 남편이 며칠간 지방에 일을 보러 간 사이에 며느리는 두 노인을 학대하고 일부러 대소변을 가져다 방 벽에 발라 두었다. 이렇게 해 놓고 돌아온 남편에게 자기는 이제 노망 든 시부모를 더이상 모시지 못하겠으니 이혼을 하든지 부모를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대들었다.
이에 남편은 대소변으로 더럽혀진 부모님 방을 보고, 아내의 말만 믿고 부모를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튿날 부모님께 바람 쐴 겸 놀러가자 하고 숲속에 들어가서, 도둑떼를 만나듯이 위장하여 비명을 지르니까, 부모는 놀라면서 자식 사랑하는 마음에 ‘너라도 어서 도망가라’고 하였다.
아들은 못 이긴 척하면서 도망치는 인기척을 내다가 이번에는 자기가 도적 행세를 하여 부모를 살해했다. 그러자 부모들은 자식이 무사히 도망친 것만을 다행으로 여길 뿐 자기들이 자식 손에 죽는 줄은 몰랐다.
이 악업으로 그는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과거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을 모시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서원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 그는 미래 세상에 고따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자기는 그 부처님 밑에서 으뜸가는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많은 공덕 바라밀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목련존자의 태어남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고, 결국 외도들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라한을 이룬 성자였기 때문에 중생처럼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적멸(寂滅)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같이 목련존자의 전생과 그에 따른 과보를 말씀하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읊으시었다.
“허물이 없고 악하지 않은 자에게, 무기를 사용하여 해를 끼치면, 다음 10가지 중 하나에 떨어지리라.
①심한 고통을 당함. ②아주 가난해짐. ③몸의 상해. ④중병이나 정신이상을 일으킴. ⑤왕의 노여움을 사 모든 재산을 빼앗김. ⑥재산과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고소를 당함. ⑦가족이 생명을 잃음. ⑧재산이 천재지변 등으로 파괴됨. ⑨집에 벼락이 내리거나 불에 탐. @그런 뒤 그 어리석은 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리.”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팎에 칠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라고도 한다.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인도 중부의 마가다왕국 수도 왕사성(王舍城) 근처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목건련과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목건련(目犍連) 및 250명의 산자야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경전 중에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한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10대 제자 중 수제자로,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칭송되었다고 전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1년 전, 목건련이 그렇게 외도들의 몰매를 맞고 열반에 들자, 사리불은 부처님께 자신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 것을 허락받기 위해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로 갔다.
사리불은 ‘부처님께서 곧 열반에 드실 것을 알기에, 차마 제 눈으로 부처님의 열반을 볼 수 없어 먼저 열반에 들고자 합니다’하고 간청을 하여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처님께 귀의하게 한 후 열반에 들었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치성(致誠 이룰 치/정성 성) ; 있는 정성을 다함. 또는 그 정성.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천도재(薦度齋)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각본(脚本) ; ①[연극][영화] 연극이나 영화, 방송극을 만들기 위해 배우의 대사나 동작, 장면 순서, 무대 장치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글. ②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사전에 꾸민 계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만일 유(有)를 없애고 무(無)로 돌아가 겹겹이 어둡고 아득하여 아무것도 없는 공적한 경계에 떨어져 인과의 도리를 부정한다면 영원토록 저 삼악도로부터 벗어날 인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진실하게 철저히 깨달아 참되고 청정하며 밝고 미묘한 실제 도리의 경지에 이른다면 사성과 육범, 삼세의 부처님과 천하의 조사, 그리고 유정과 무정이 모두 이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현생보(現生報) ; 현세(現世)에서 업(業)을 지어 현세에서 받는 과보(果報)를 이른다. 순현보(順現報). 현보(現報).
*순생보(順生報) ; 지금 세상에서 지은 선악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 받는 인과응보를 이른다. 생보(生報), 순차보(順次報).
*순후보(順後報) ; 지금 세상에서 지은 선악에 따라 삼생(三生) 이후에 받는 과보(果報)를 이른다. 후보(後報).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환(幻) : 또는 눈꽃(空眼花 • 空華)。근본 무명(根本無明)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초를 알길 없으므로 「본래부터(從本已來)」라기도 하고, 「시작도 없음(無始)」이라고도 한다.
무명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실상 자체(實相自體)도 없는 것이므로 곡두(환상)같다고도 하고, 눈이 어리어서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눈꽃 같다고도 하는 것이다。이처럼 허환된 무명에서 나온 바 온갖 것이 또한 모두 환상이며 공화(空華)인 것이다.
*성문(聲聞) ; 부처님의 음성(聲)을 들은(聞) 사람이라는 뜻.
① 산스크리트어 śrāvaka, 팔리어 sāvaka.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사제(四諦)의 이치를 깨달아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자.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자. ② 성문승(聲聞乘)의 준말.
*멸진정(滅盡定) ; ①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
②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聖者)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상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 · 각유정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 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육경(六境) ; (=육진六塵=육적六賊)[불교]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말한다.
*육식(六識) ; 육근(六根)에 의하여 대상을 깨닫는 여섯 가지 작용. 곧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여섯 가지이다.
*공(空) ; ①모든 존재는 여러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항상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無自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공은 전혀 없다는 무(無)나, 결국 사라져 덧없다는 허무(虛無)가 아니다. 또 공(空)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체 ·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무실체성 · 무자성 등을 자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표이다.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것은 공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참된 공[眞空]이 아니라 무기공(無記空) · 편공(偏空) · 악취공(惡取空) 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병[空病]에 대한 약으로 '공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②차별과 분별로써 인식된 대상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 가치나 감정이 부여된 인식 대상은 인식 주관이 조작한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 허구라는 뜻.
③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 ; '몰록(단박·문뜩·갑자기·곧바로) 깨닫고 몰록 닦는다' 오(悟)와 수(修)를 한순간에 모두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돈오돈수자는 상상지(上上智)의 사람을 말함이니 그 근성과 바라는 바가 함께 수승하여 하나를 듣고도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를 얻으며, 한 생각도 생함이 없고 전후가 모두 끊어진다 <장애를 끊음은 한 타래의 실을 끊음에 모든 실줄이 단박 절단되는 것과 같고 덕을 닦음에는 한 타래의 실을 물들임에 모든 실줄이 몰록 물들여 지는 것과 같다>
비록 돈오돈수가 최상근기가 들어가는 문이라 하지만 만약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다생에 걸쳐 오(悟)에 의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는 즉시 깨달아 일시에 단박 마치는 것이니 실로 말하면 이 또한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깨닫고 뒤에 닦음)의 근기인 것이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바로 모름지기 본분을 의지하야 법다이 하야사 비로소 옳으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를 아울러 한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사위의(四威儀)와 열두 때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법문 내용]
(게송) 사서순환난부한~ / 오욕락(五欲樂)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 내 안에 있는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러한 보물을 개발을 하는 사업에 투자하자.
(게송) 돈오심원개보장~ /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參禪)해서 내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다.’
부처님의 3능, 3불능 / 정업(定業)은 난면(難免) / 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쓴 것 / 찰나(刹那) 간에 몰록 / 신심, 분심, 의심(信憤疑) 삼요.
〇여러분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참선(參禪)을 하면, 가까운 장래에 또는 먼 장래에 언젠가는 『과연 그렇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스스로 보게 되고, 스스로 의심 없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〇밖에서 무엇을 구할려고 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써도써도 다함이 없는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러한 보물을 우리 몸 안에서 그것을 개발을 하는 사업에 우리의 몸과 목숨과 시간을 거기다 투자를 하자.
〇그 모든 사람들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그 주인공(主人公)은 부처님이나 우리나 다 똑같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어.
〇우리가 이 세상에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써가지고 그 각본에 의해서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도 부모를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어.
과거에 지은 업과 금생에 지어가는 업, 그런 것들이 합해 가지고 우리의 미래가 열려 나가는 것이니까, 우리는 이미 과거에 지어버린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나, 그 각본을 우리는 고쳐서 쓸 필요가 있다.
〇불교는, 인과법은 숙명론(宿命論)도 아니고 운명론(運命論)도 아니다.
과거에 지은 업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지만, 금생에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그것까지 합해져 가지고 미래가 열려지기 때문에 우리는 각본을 바꿔 쓰면 된다. 어떻게 각본을 쓰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방향은 바꿀 수가 있다.
이게 인과, 인과의 법칙을 정말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활용을 해 나가야 한다.
〇이 세상의 모든 명상(名相), 이름이나 모양이나 그런 것은—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거,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은 명상(名相)이여 그게. 명상(名相).
명상(名相), 이름이나 모양이라는 것은 환(幻)으로 이루어진 거여.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을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는 거여.
〇우리 중생이 하는 짓이 바로 미친 아주 정신병자가 연극 각본을 쓴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우리의 무량겁을 그렇게 그런 각본을 써 왔고,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해서 자기의 주인공(主人公)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은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는 사람은 착하나 악하나 그놈이 그놈이여.
언제 어떻게 변할른지 모르는 거여. 그래 가지고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해 갈 거다 그말이여.
〇우선 당장 괴로운 일이 있는데 「이뭣고?」만 할 수 있느냐?
괴로운 일 자체가 꿈에 어디 종기를 앓는 거와 같애. 꿈을 꾸는 동안에는 정말 아프지만 꿈을 깨자마자 꿈에 앓던 종기가 몰록 낫어버리는 거여. 차츰차츰 낫아가는게 아니라, 찰나(刹那)간에 몰록 낫아버리는 것이여.
〇참선 할 때는 정말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믿은 데에서 열심히 하면은 거기서 또 분심(憤心)이 나고, 분심 있는 곳에 신심이 더욱 깊어지고 해서, 그래 가지고 결국은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여. 의심이 크면은 크게 깨닫는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이것이 삼요소(三要素)인데, 이 삼요소로 나간다면 누가 못 깨닫게 되느냐 그말이여.
끝없이 넓은 바다에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파도가 일어났다 꺼졌다. 한 파도가 일어나서 꺼지기 전에 다음 파도가 일어나서 온 바다가 온통 파도로써 끊일 때가 없어. 이 지구상에 동서고금의 역사가 바로 그와 같다.
세계 방방곡곡에 나라와 나라끼리 싸우고, 한 나라에서도 종교가 달라서 싸우고, 사상이 달라서 싸우고, 이념이 달라서 싸우고.
진향자가심념생(盡向自家心念生)이여. 다 자기, 자가의 마음의 생각 일어나는 곳을 향해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 동(動)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그래 가지고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차츰차츰 그것이 번지고 번져서 결국은 이러한 양상이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기를 현재 세계 60억 인구가 다 그래 가지고 그놈이 서로 맞부딪쳐. 마치 바다에 파도가 쉴 새 없이 일어나듯이 그렇다. 그러다가 가끔 폭풍우가 간간이 일어나서 강탈을 하고,
그러니 이러한 세계를 만난 것, 이러한 시대를 만난 것, 이러한 지구상에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속에서 한 생각 망념(妄念)이 동(動)한, 무명(無明)이 동(動)한 탓으로 해서, 그 무명에 또 무명이 생기고, 무명에 또 무명이 발전을 해 가지고 이러한 세상을 만나게 되었고, 이러한 세계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니 일념불생도해탈(一念不生都解脫)이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이렇게 번졌으면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한 생각이 불생(不生)하도록, 한 생각 남[生]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면 억겁다생에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해탈하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거거든.
오늘 9월 5일, 9월 첫째 일요법회 날인데, 며칠 전에 전국 선원에서 모다 여름 안거 해제를 마치고 형제자매 도반들이 많이 오시고 또 일요법회를 기해서 청신사 청신녀들께서도 많이 오셨습니다.
여름 한 철 동안 비도 많이 오고 덥고 무더운 그러한 속에서 석 달을 무사히 성만(成滿)을 하고 이렇게 도반들이 모이니 참 오랫동안 헤어졌던 고향의 친구를 만난 것 같고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석 달 동안 그 더위와 싸우고 모기와 싸우고 비에 갇혀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입니까? 한 생각 남이 없는 곳을 철견(徹見)을 하기 위해서다 그거거든.
우리는 가만히 앉았어도 끝도 없이 생각이 일어나거든. 이 생각 저 생각,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두 번 세 번으로 자꾸 요렇게 번져 가. 그 생각이 가라앉을 만하면 또 일어나거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한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수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와 연결시켜 주는 그 도화선(導火線)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나, 한 회사에 사업의 흥망성쇠나, 한 가정에 흥망성쇠나, 일신상에 흥망성쇠가 근원은 다 같은 거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여.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흥망성쇠 속에 나부끼는 일엽편주(一葉片舟)의 신세를 면틀 못해. 언제 배가 훌떡 엎어져 버릴지 모른다 그말이여.
다행히 불법을 믿고 정법을 믿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고 평생 제창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믿고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만이 이 험악한, 괴로운 그리고 무상한 세계를 바르게 살아가고 그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길은 그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이 사바세계는—'사바(娑婆)'란 말이 감인(堪忍), '견딜 감(堪)’ '참을 인(忍)’—견디고 참는 참아야만 살 수가 있는 세계다 해서 사바세계(娑婆世界)거든.
부처님 당시에 빈두로(賓頭盧) 존자라고 하는 아라한(阿羅漢)이 있었는데, 그 빈두로 존자는 여러분들이 나한전(羅漢殿)에 가면 제일 첫자리에 앉아 있는 머리가 허옇고 하얀 눈썹이 긴, 눈썹이 요렇게 뻗쳐 있는 거룩한 나한님이 빈두로 존자여.
그 빈두로 존자는 원래 우전왕 밑에서 있는 참 충성스런 신하였었는데, 무슨 일을 하던지 열심히 하고 그런 가운데에도 충성심이 있고 그러면서 신심이 있어서 자기 밑에 있는 수족과 같은 왼팔 오른팔과 같은 신하인데도 그이를 권고해서 출가를 시켜 가지고 부처님 제자가 되게 했다.
출가해 가지고 워낙 신심이 돈독하고 용맹정진을 해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을 해서 대성현이 되었어. 그분은 신통술이 능해 가지고 그랬었는데.
어느 날 그 어느 바라문이 전단향(栴檀香)나무로 발우(鉢盂)를 잘 깎아 가지고 저 높이 그놈을 매달아 놨어. 자루에다 담아 가지고 높이 매달아 놓고.
'장대나 사다리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서 그 바리때를 가져간 사람에게 그 바리때를 준다'하고 현상(懸賞)을 붙였어.
온갖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신통을 부리고 기술을 부려 가지고 그걸 가져가려고 하다하다 못 가져갔다 그말이여.
그 소문을 이 빈두로 존자가 듣고서 목련 존자 보고 "그대는 신통이 십대제자(十大弟子) 중에 신통(神通)이 제일이니까 그 신통술로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얼마든지 그걸 가져갈 수가 있지 않느냐? 그 전단향나무로 만들었으니 향내가 풀풀 나고 참 좋으니 그걸 한번 해 봐라"하니까,
목련 존자는 "싫다. 부처님께서 계를 받지 않은 사람 앞에서 함부로 신통술을 보이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부처님한테 꾸지람을 듣기가 싫으니까 싫다" 그러니까.
그 빈두로 존자가 좀 장난기가 있었던지, 따악 손을 길게 뻗쳐 가지고는 발우를 딱 띠어 왔다 그말이여.
그래서 소문이 자자해 가지고 결국은 부처님 귀에까지 들어가서 부처님한테 크게 꾸지람을 듣고 "너는 이 남섬부주(南贍部洲)에 있지 말고 딴 데로 가거라" 그래 가지고 추방을 당했어.
그래서 서구야니(西瞿耶尼)라고 하는 저 먼 지방으로 쫓겨가 가지고 거기 있으되, '열반에 들지 말고 중생을 교화를 해라' 그렇게 특명을 붙여서 추방을 당했는데.
결국은 사부중(四部衆)들이 모두가 빈두로 존자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간청을 해서 다시 이 남섬부주로 불러오게 하되 조건을 붙였어. '너는 열반에 들지 말고 고대로 이 경계에서 불법을 영원히 전통해라'
인자 그런 당부를 받으셔서 지금도 나한전에는 빈두로 존자를 모셨는데, 그 빈두로 존자가 처음에 아라한이 되어 가지고 자기 고향에 가서 그 고향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방에 불법을 펴야겠다고 하는 원력을 세우고 그 고향에 가 가지고 산중에 가서, 산중에 그 어느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에 가서 딱 좌선하고 있는데, 어느 왕이 궁녀와 왕비와 모다 거느리고 와서 그 공원으로 놀러왔어.
놀러왔는데 그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히고 노래를 불리고 춤을 추고 모다 그러다가 왕이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그말이여.
그러니까 왕비를 비롯한 궁녀들이 같이 잘 수도 없고 무료하니까 슬슬 공원을 이렇게 거니는데 한 구석에 가니까 터억 어느 도인(道人)이 좌선을 하고 있다 그말이여. 그이가 바로 빈두로 존자여.
그런데, 가 가지고 절을 하고 "좋은 법문을 좀 해 주십시오"하고 공경하게 말하니까 빈두로 존자가 눈을 뜨고서 여러 가지 법문을, 갖은 방편설도 설해 주고 법문을 해서 그이들이 아주 너무너무 그 법문에 심취해 가지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
왕이 한참 자고서 눈을 떠 보니까 왕비도 간 곳이 없고 궁녀들도 간 곳이 없어.
'아, 이거 어디를 갔나?'하고 그걸 찾아서 이리저리 하다보니까 위~하니 모여 가지고, 그 가서 보니까 가운데 한 승려가 앉았는데 그 궁녀들이 빙 둘러앉아 가지고 그렇게 얘기 소리를 듣고 좋아하고 그러고 있다 그말이여.
그러니까 왕이 괘씸한 생각이 들어 가지고 호령을 하면서 '명색이 수행한다는 사람이 여자들을 모아 놓고 잡담이나 하고 히히덕거리고 한다'고, 그 칼을 가지고 빼 가지고는 목에다 대고 '이런 수행자는 가짜 수행자다' 해 가지고 그냥 죽이려고 하니까 빈두로 존자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고대로 가만히 있어.
두려운 생각을 내거나, 피하려고 하거나, 잘못했다고 빌거나 하면 모르겠는데, 너무 태연자약해 가지고 가만히 있으니까 칼로 칠 수는 없고 그래 가지고는 근처에 개미가 버글버글버글하는 개미집이 있으니까 그놈을 파다가 빈두로 존자 몸 위에다 갖다가 쏟아 버렸다.
그놈의 개미가 눈으로 코로 귀로 몸뚱이로 다니면서 물고 가려워서 도저히 못 견딜 정도인데, '제가 그래 못 견뎌서 움직일 거다' 해 가지고 한데, 눈 하나 깜짝 않고 몸뚱이 하나 깜짝 않고 가만히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거기서 왕이 '야! 이분이 보통 분이 아니로구나' 해 가지고 '참 내가 사람을 몰라봤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속으로 두려운 생각도 나고 또 참회심도 나고 그래 가지고 인자 물러갔는데.
며칠 있다가 빈두로 존자를 찾아와 가지고 여러 가지 법에 대해서 묻고 법문을 듣고 해 가지고, 그 빈두로 존자가 참고—그 왕의 무례하고 혹독한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고 정념을 흐트러트리지 아니한 그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인해서 크게 왕이 신심을 내고 그 고향 나라에 불법을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고 세속의 흥망성쇠가 무상한 이 세상에서 불법을 믿고 그리고서 바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만큼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또 정법에 의지해서 도를 닦아 가는데도 그러한 참을성이 있고 요지부동한 그러한 심성과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에 보시 지계 인욕, 세 번째에 인욕이라고 하는 과목이 있는 것도 반드시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인욕(忍辱)이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을 참고, 욕된 것을 참고, 부당한 핍박을 당하고 모략 중상을 당하고 그럴 때에도 정념을 잃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보복을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거거든.(처음~21분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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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두로 존자는 아라한과를 증득했기 때문에 삼명(三命)과 육통(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증득한 대성현이라 그까짓 왕이 칼 아니라 그보다 더 무서운 것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고, 그 팔을 끊어 버릴 수도 있고,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수도 있겠지마는 까딱도 않고 그걸 움직이지 안 했다 이거거든.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도 주변 여러 가지 환경이라든지 여러 가지 여건이 내 마음과 같지 못하는 수가 많고, 몸 밖에서 오는 것도 그러려니와 자기 몸안에서 일어나는 건강 문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의 번뇌 망상, 심지어는 전생에 지은 업연(業緣)으로 어떤 그러한 영가(靈駕)가 와서 또 장난을 치는 수도 있고, 삿된 마구니 같은 것들이 와서 우리 정진해 나가는 데에 방해를 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말이여.
그런 수많은 마음 밖에 또는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마구니들을 정념으로써 그것을 이겨 나가야 한다 그말이여.
한 생각 동(動)하면 벌써 그 올가미에 걸려들어 가는 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떠억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정념을 잃지 아니한다면은 이기지 못할 마구니가 없어.
마구니는 내 마음이 움직거리고, 내 마음이 동(動)한 틈을 타서 들어온 것이지,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면은 아무리 팔만사천 마구니가 주변에 엿보고 있다 하더라도 내게 어찌하지 못한 것이다 그말이여.
백년부환수중구(百年浮幻水中漚)요 부지종일위수망(不知終日爲誰忙)고
나무~아미타불~
약지망리진소식(若知忙裏眞消息)하면 일타연화생불탕(一朶蓮花生沸湯)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년부환수중구(百年浮幻水中漚)요. 백 년 동안에 모든 흥망성쇠의 사건이, 일신상이나 또는 사회 국가나 모든 것이 뜬구름과 같고, 실지는 있는 것 같지마는 헛것인 환상이여. 그리고 물 가운데서 일어나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여.
하나도 영원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여. 잠시 일어났다 얼마 동안 좋게 변천하건 나쁘게 변화하건 그러다가 또 꺼져 버리고.
부지종일위수망(不知終日爲誰忙)고. 아지 못거라, 종일토록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평생 동안을 바쁘게 몸부림을 치는가.
중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 몸뚱이 · 가정 · 사회 · 국가 · 세계 그밖의 빈부귀천 또는 재산 · 명예 · 권리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이고 실다운 것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인해서 크게 좌우가 된다 그말이여.
그것이 무상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요, 물거품 같은 것이고, 그림자와 같은 것인 줄 안다면 그리고 그 꿈과 같은 것이요, 환상과 같은 것인 줄 확실히 안다면 흥하면 흥한 대로 거기에 맞춰서 살고, 망하면 망한 대로 거기에 맞춰서 살고, 거기에 적절히 적응하면서 사는 거여.
6·25 때 전 국토가 공산당들에 의해서 짓밟힐 때는 그때는 그때대로 살 수밖에는 없는 것이요, 5·16이 일어나면 5·16이 일어난 대로 그대로 사는 것이고, 지금은 새로운 신한국 건설의 시대가 돌아오면 그때에 맞춰서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여법하게 열심히 살면 되는 거여.
설사 정책이 자기 마음에 안 맞더라도 자기도 이 대한민국에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국민으로써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법에 맞추어서 충실히 살아가는 거여.
혹 정책이 잘못될 수도 있고, 잘할라고 한 것이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있고, 최고 책임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밑에 사람들이 잘못 무엇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더라도 그런 대로 또 맞춰서 사는 거여.
입으로 그것을 불평하고 불만하고 그 반감을 가지고 이리저리 고통을 하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거여. 법이 그렇게 정해지면 그 법에 따라서 국민은 따라가야 하는 거고.
그러면서도 꼿꼿하게 지켜야 할 것이 하나가 있어.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일러 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신심(信心), 자기 몸 가운데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고, 자기 마음속에 진짜 부처님이 들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거야.
부처님은 십 생을 온갖 행하기 어려운 것을 다 행하셨다 그말이여.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행하기 어려운 것 당하기 어려운 것을 다 행하고 최선을 다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끝없는 진리를 위해서 바쳐 왔다 그말이여. 그래서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가 평범한 범부(凡夫)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고, 풀끝에 이슬과 같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서글프고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몸 가운데에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 주인공(主人公)은 삼세제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조금도 손색이 없는 존재라고 믿을 때 우리는 얼마나 든든하고 보람이 있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흥망성쇠가 하나도 마음에 걸릴 것이 없어.
바람이 좀 거센 바람이 지나갈 수도 있고, 시원한 바람이 지나갈 수도 있고, 조금 더운 바람이 지나갈 수도 있고, 차운 바람이 들어갈 수가 있어서 바람 부는데 따라서 더우면 시원한 옷을 입고 추우면 두터운 옷을 입는 거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말이여.
둘째는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오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모든 일들과,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일과, 누구를 미워하고 미움을 받는 일과, 우리가 익힌 모든 습성과 그런 것들이 전부가 다 한 생각 생사심(生死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들이라, 그 원인이 전혀 다른 사람한테 원인이 없어.
다 자기 자신이 지은 업(業)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자기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벌어진 모든 것들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아무도 미워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어. 한탄할 것도 없고.
다맛 당장 이 시간부터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세속에서 살라면은 돈도 벌어야 하고, 명예도 얻어야 하고, 권리도 있어야 하고, 예쁜 마누라도 있어야 하고, 자식도 있어야 하고, 별의 별별 호강도 해야 하고, 좋은 차도 좋은 집도 있어야 하고, 너무너무 근심 걱정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너무너무 많은데,
출가해서 떠억 계(戒)를 받고 중이 되면 아무것도 걱정이 없고, 비가 오면은 신발에 물 들어가나 고거 하나만 걱정하면 된다 이거여.
끼니때 되면 밥 지어주고, 아무것도 걱..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듣고 다 가정을 버리고 '에잇! 나도 중이 되어 버려야겠다' 그러면 안 되고.
여러분도 세속에 살면서 기왕 아버지면 아버지 책임을 해야 되아. 자기가 그렇게 업을 지었기 때문에. 어머니로 있다면은 어머니 책임을 해야 하고, 며느리면 며느리 책임을 해야 하고, 아들이면 아들 책임을 해야 하고,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여. 그러면서 '이뭣고?'만 하면 되어.
그러면 세속에서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가 피할 길이 없어. 그것이 전부 자기가 과거에 지어 놓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이요, 만난 일이기 때문에 다 해야 하는 거여.
그것만 열심히 하면 다 되냐 하면 그게 아니어. 살 수가 없어. 할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되기 때문에 살 수가 없는 거여.
그걸 이겨내는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 힘이 '이뭣고?'에서 나오는 거다 그말이여.
'이뭣고?'를 안 하고는 세속에서 아무리 잘살라고 마음을 먹고, 잘할라고 마음을 먹고, 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이를 악물고 결심을 해도 일에 딱! 부딪치면 안 되는 거여. 속에서 일어나서 안 되는 거여.
'이뭣고?'를 해야 자연히 봄이 돌아오면 반드시 눈이 녹고 얼음이 녹고 뜨뜻해서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나듯이, '이뭣고?'를 해야 맺힌 덩어리가 녹는 거고, '이뭣고?'를 해야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 생겨. 마구니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말이여.
세 번째는, 고인(古人)의, 고불(古佛)과 고조사(古祖師)의 일언반구(一言半句)의 법문이라 하는 것이 마치 긴 칼과 같아서 잘 갈아 논 칼과 같아서 함부로 만지고, 함부로 그놈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함부로 접근하다가는 손을 베고 몸을 베고 다치는 거다 그말이여. 함부로 그것을 내두르다 멋도 모르고 그놈을 내두르다 보면 여러 사람을 다치게 만들어.
그래서 이 참선을 하는 사람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어떻게 지혜가 있고 혜(慧)가 빠르던지 천칠백 공안을 맥힘이 없이 다 통달을 해 가지고 어느 선지식하고 가서 법담(法談)을 해도 다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말이여. 오직 원오극근(圜悟克勤) 선사 앞에 가서, 그런데 인가를 받지 못했어.
"내가 무슨 공안에 맥혔길래 인가를 안 하십니까?"
"공안에 맥히지 않았다. 네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공안을 알았기 때문에 너는 인가를 할 수가 없다. 너는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에 증험(證驗)을 해 봐라"
공안을 가지고 의리(義理)로 따져서 이렇다 저렇다 무슨 문제, 수학 문제 풀듯이 공안을 가지고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져 가지고 알아 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일본에서 나오는 선(禪)에 관한 많은 책들이 한국에도 많이 나오고 번역된 책도 있고 그런데, 행여나 그런 걸 보고 공안에 대해서—자기가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저하게 참(參)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분상에서 그러한 책 나부랭이 봐 가지고 공안을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말이여.
천칠백 공안을 다 알았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생사 문제 해결하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고, 그러헌 것을 자기가 깨달랐다고 착각을 하면 자기 신세도 망치고, 자기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도 그르치게 되고, 나아가서는 불법까지 망하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여러분들이 지금은 잘 못 보지만 옛날에 홍콩 영화에 이소룡이란 사람은 십팔계인가? 태권도인가? 뭘 해 가지고 어떻게 잘해 가지고 풀풀 나는 영화를 많이 찍어 내 가지고 엄청나게 흥행을 했다 그말이여.
영화를 찍을 때에 하는 그것 가지고 실지로 자기에게 그런 태권도 실력이 있는 걸로 착각해 가지고 진짜 태권도 잘하는 깡패하고 대결해 가지고는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사실이 있었는데, 영화는 얼마든지 풀풀 날으는 영화를 찍을 수가 있고 백 번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나게 찍을려면 찍는 거다 그말이여.
공안이라는 것을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라고 하지 말아라. 아무 소용없는 거야!
10년, 20년, 30년 내지 평생을 참선을 했어도 한 공안도 짐작이 안 가고 꽉 맥혔다 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확!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간다면 설사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설사 금생에 깨닫지 못하더라도 내생에라도 그 사람은 결정코 확철대오하고만 마는 거여.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한 것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이리저리 엉터리로 사량분별로 따져서 공안을 열 개, 아니 백 개를 알면 뭐 하는 거냐 말이여.
일본 선원에서는 백 개를 통달하면 조실 자격을 준다나 어쩐다나. 백 개 아니라 천칠백 개를 다 통달해서 조실 노릇하면 뭐 하는 거냐 그말이여.
그래서 고인의 일언반구를 마치 큰 칼과 같이 생각하라 이거여. 등한히 그것을 가까이하고 만지고 가지고 흔들다가는 자기 목숨 잃고 남 죽이고 불법을 망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일상생활 속에 항시 간단없이 화두를 챙겨라.
공부를 하되, 하다 보면 앉아서 하다 서면서 잊어버리고, 하다가 눈으로 무엇을 보면 잃어버리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놓쳐 버리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놓쳐 버리는데,
'놓쳤다 아휴! 이놈의 공부가 왜 안되냐, 좀 할라고 하면 시끄러워서 못 하겠다. 뭣 좀 할라고 하면 전화가 와서 못하겠다' 그러지 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나면 오히려 거기서 화두를 한번 더 챙기고, 눈으로 무슨 경계가 나타나면 그때 한번 다시 또 챙기고, 전화가 따르르릉 오면은 거기서 다시 정신을 챙기고, 아들 손자가 "어머니, 할머니"하고 달려들면 "오냐, 오냐"하면서 생각은 탁! 챙기고.
일체 경계가 바로 나의 공부를 방해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체 경계가 바로 나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하고, 화두를 들게 하고, 공부 단속하게 하는 채찍으로 생각하라 그거거든.
그렇게 해서 또 들고 또 들고 해서 중단하지 말고 생각 생각이 알뜰히 단속을 해 가시라 이거거든.
지금 해제, 가을 산철인데, 더운 여름도 참 정진할려면 힘드는 계절이고, 그런데 그 여름이 지나가서 인자 앞으로 서늘한 때가 되었으니 이러한 좋은 때를 잘 이용을 해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21분22초~42분5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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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우리의 생각이 생사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사도 또한 끝이 없어. 이 끝이 없는 이 생사가 적은 일이 아니다 그말이여.
다행히 금생에는 사람 몸을 받아서 불법을 만나 가지고 이만하기 천만다행이지만, 금생에 이 몸뚱이 놓쳐 버리면 내생에 어디 가서 무엇으로 태어날는지 모른다 그말이여.
비록 금생에 나쁜 일 안 했다고 해서 내생에 꼭 좋은 곳으로 태어나라는 보장은 없어.
금생 말고 전생, 저 전생에, 무량억겁에 무슨 짓을 했는가 한량이 없기 때문에 내생에 무엇으로 또 태어날란가, 어느 삼악도(三惡途)에 태어날란가 알 수가 없거든.
그래서 정말 분심을 내고 결정신(決定信)을 가져야 해. 금생에 이만한 환경 속에 태어나고, 이만한 여건 속에 태어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정법에, 활구참선에 철저한 뜻을 거기다 세워라 그거거든.
그래가지고 그렇지 아니하면 무서운 삼악도의 고통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철저한 신심을 가져야 한다 그거거든.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하여 사의순환기요기(似蟻循環豈了期)리요
나무~아미타불~
금일여군도할단(今日與君都割斷)이라 출신방호장부아(出身方號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여. 한 물결 일어나면 그 한 물결로 인해서 만 개의 파도가 따라서 일어나는 거여.
여러분이 호수에 가서 돌멩이 한 개를 던져 봐. 그 돌멩이 한 개로 처음에 한 물결이 일어나 가지고 거기에 또 두 개, 세 개, 네 개 해 가지고 저 호수 끄터리까지 몇천만 개의 물결이 일어나는 거여.
그런데 이 태평양, 동해 이쪽에서 파도를 던지면은 그 파도가 저만큼 가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없어지지 않고 저 태평양 저쪽에까지 그 물결이 영향이 간다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내가 확실히 시험을 해 봐서 알 수가 없으나 하여간 우리의 한 생각의 파도가 일어남으로 해서 몇억 겁의 인연이 거기서부터 이렇게 발전해 간다는 것은 그것은 내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실을 봐도 역시 그렇거든.
그래 가지고 한 물결로 인해서 만 개의 물결이 따라서, 그래 가지고 생사윤회 하는 것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개미가 이렇게 쳇바퀴를 돌듯이 이리저리 돌고 이리 가고 저리 돌고 이리 돌고 해서 끝도 없이 돌면 끝난 줄 아는데 또 돌고 또 돌고 하는 거와 같아서 끝이 없더라 그거거든.
그러니 금일여군도할단(今日與君都割斷), 오늘 여러분과 더불어 세속의 한 물결로 인해서 만 개의 물결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일체 경계에 끌려들어 가지 말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딱! 그 자리에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로 돌아오라 그거거든.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출신방호장부아(出身方號丈夫兒)다. 그래야 그것이 대장부(大丈夫)여.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대장부가 딴 게 아니여. 기운 세고 말 잘하고 수단 좋은 게 아니고, 어떠한 경계에서도 한 생각 딱! 돌이키는 거야. 그 사람은 팔만사천의 마구니도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고 이 세상의 흥망성쇠도 하나도 겁날 것이 없어.
화두를, 개별적으로 화두(話頭)를 신청하는 분이 있어서 시간 관계로 개별적으로 화두를 설해 주지 못하고 이 법상에 올라온 기회를 타서 간단하게 화두 드는 법을 일러드리겠습니다.
이미 화두를 타신 분은 화두를 들고서 떠억 들으시고, 화두를 안 타신 분은 이럴 때에 정식으로 화두 드는 법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참선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제여. 과제라고 하면 좀 어폐(語弊)가 있지만.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그냥 처음에 화두를 타기 전에는 다만 그렇게만 주욱 해 나가지만 본격적으로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자기기 믿는,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딱 지정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책에는 화두 드는 법이 얼마든지 있어서 책을 보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책을 보고 자기가 화두를 간택을 하면 문제가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고 하니 조금 하다 잘 안되면은 이거 화두가 자기한테 안 맞아서 그런가보다. 다른 화두를 또 가지고 하고. 이 화두 저 화두, 세 개, 네 개, 다섯 개, 몇 개를 자꾸 바꿔간다 그말이여.
그리고 공부가 잘 안될 때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화두를 잘못 드는지 스스로 자꾸 그런 것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서 공부를 순일하게 할 수가 없어.
그래서 화두는 자기가 스스로 간택하기보다는, 물론 스스로 간택해서도 잘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어요. 있을 수가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기보다는 믿는 선배한테 탁! 지적을 받아서 해야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간에 그 화두를 자꾸 바꾸려고 하는 그런 가벼운 생각이 안 나는 거다 그말이여.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면 누구나 처음부터 잘된 사람은 없어.
처음에는 곧잘 잘된 것 같은데 한 며칠 지나가나 몇 달 지나면 뚝 변해 갔고 영 안되고, 한 일 년 지나면 또 되다가 안되다가 자꾸 그런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법문을 자주 듣고 좋은 도반들과 같이 애를 써야 흔들림을 받지 않고 서로서로 울타리가 되어서 중단하거나 퇴태(退怠)하지 않게 되는 것이여.
천칠백 화두가 있지마는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설사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해도 궁극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여.
그것이 바로 자성불(自性佛)이기 때문에 그놈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시삼마(是甚麽)화두여. “시삼마”
“시삼마”를 우리말로는 '이 · 뭣 · 고?'거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이것이 무엇인고?'인데, 그것을 경상도 말로는 '이 뭣 고'거든.
'이 것 이 무 엇 인 고' 일곱 자인데, '이 뭣 고'하면 석 자로 간단해서 옛날부터 화두를 들 때에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래서 나쁠 것은 없으나 다 옛날부터 '이뭣고?' 선지식들이 다 그렇게 가르치셨어.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뭣고?' 그래도 괜찮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그래도 되고.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몸뚱이고 저 몸뚱이 따질 것 없고 그냥 '이뭣고?' 그렇게만 해도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뭣고?' 그 뜻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여. 그동안에 많이 했기 때문에.
'이뭣고?'
'이뭣고?'하는, 나중에 가서 또 한 걸음 더 다그쳐 들어가려면 지금 '이뭣고?'해 놓고 '지금 이뭣고?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다그쳐 들어가고.
'이뭣고?'할 때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으로 '이뭣고?~' 이렇게만 하는 거야.
처음에는 화두를 '이뭣고?'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을 동안에는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이뭣고?'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화두를 새로 안 들어도 되어요. 알 수 없는 의심을 따악 이렇게 관(觀)하거든.
그러다가 뭔 소리가 들리거나, 무엇이 눈에 띄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그 의심이 없어져 버리면 그때 다시 '이뭣고?~' 이렇게 챙기는 거여. 자꾸 챙기고 놓치면 챙기고, 놓치면 챙기고.
하도 잊어버려 싸니까, 이놈이 안 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이놈을 잠시 일초 동안도 틈을 안 주기 위해서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런 게 아니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어.
따악 반가부좌를 하고서 허리를 쭈욱 펴고, 허리를 펴라니까 너무 또 뒤에로 자지바지해서 이렇게 하면 못쓰는 거여. 단정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그리고서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
눈을 너무 잠이 오니까 눈을 뒤집어 까고 그래 못쓰는 거고. 또 눈을 뜨고 이것저것이 보여 싸니까 '아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 편하겠다' 해 가지고 눈을 감고 하면 안 돼.
눈을 감으면 좀 조용한 것 같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눈을 감고 하면은 나중에 차츰차츰 생각이 조용해 지다 보면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혼침에 떨어진 줄 모르게 혼침에 빠져 갔고 자기 딴에는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데 삼매하고 혼침하고는 다른 거여.
그래서 눈은 평상으로 뜨고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상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이놈을 다루어 나가야 하는 거여.
참선을 하려면, '집에서 참선을 하려면 뭔 전화가 오고 애들이 뭐라고 하니까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얼마든지 전화 오면 전화도 받고, 애들이 와서 응석을 하면 투덕투덕 하면서 그러면서도 자기가 흔들리지만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여.
봄에 시원할 때는 바람이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면 아 바람 분다고 공부를 못하며, 산중에서 하다 보면 시냇물이 줄줄줄 흘러가는데 그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공부 못한다고 그건 말이 안 돼.
시냇물 소리는 시냇물 소리대로 그것이 다 법문(法門)이고, 새 우는 소리는 새 우는 소리 고대로 그냥 법문으로 들어. 그 소리 들으면서 터억 화두를 챙겨보라 말이여.
그렇게 하다가 자동차 소리는 또 뭐냐 그말이여. 자동차 소리가 붕붕 뻥~ 하니, 붕붕 뻥~ '이뭣고?' 딱 하면 그만인 거란 말이여. 그것 때문에 공부 못한다 소리는 그거 참선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거여.
이제부터서는 자동차 소리는 자동차 소리대로 놔 둬. 기차 소리는 기차 소리대로 놔 둬. 비행기는 비행기, 연전에 용주사에서 들었는데 입선 시간에 그 젯트기가 무엇이 어떻게 머리 위로 지나가면서 부르릉~ 정말 그건 안 좋드만 안 좋아.
안 좋아도 그 처음에는 대단히 귀에 거슬리고 안 좋더니 그러거나 말거나 졸다가 그 소리 나서 깨니까 아주 그 소리가 고맙더라 그말이여.
그래서 가정에서 살라면은 가정에도 여러 가지 식구끼리 모다 마찰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이뭣고?'를 한 사람은 그런 소리를 무던히 그냥 적당히 받아들이고, '예, 예, 알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탁 '이뭣고?'
시천장 뭔 말하면 요리 돌아서 가지고 그러면 그건 골낸 것이 당장 드러나니 '저것이 배 째라고 저런다'고 그럴 거 아니냐 그말이여.
그러지 말고 뭔 말하면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화평한 얼굴로 속으로는 따악 '이뭣고?'하면서 '예,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을 왜 요리 둘러서고 모른 척하냐 그말이여.
'이뭣고?'라 하는 것은 참 최상승법(最上乘法)이기 때문에 보살의 육바라밀(六波羅蜜), 십바라밀, 팔만사천 묘방편(妙方便)이 다 '이뭣고?'하는데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다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뭣고?' 하나만 법문을 들으면서 열심히 하고, 법회에 한 달에 한두 번 갖고 안되면은 전강 조실 스님 녹음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가서 항상 틀어놓고 들으면서 공부를 해라 말이여. 잠도 안 오고 공부하는데 좋은 채찍질이 될 것이다.
앞으로 석 달, 또 산철 결제가 있으니까 산철에 방부(房付) 들이고 공부하실 분은 하고 또 가정에서 계실 분은 가정에서, 가정에서 자기가 떠억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해 보시면 참 좋을 것이다 그말이여.
직장에서 한 분은 직장에서 죽비는 못 치고 마음의 죽비를 딱! 치고, 쉬는 시간에도 떠억 일하면서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산다면은 세상이 살기가 힘이 드는 세상도 그런대로 살 만하는 거고.
세상이 살기가 어렵더라도 어려운 대로—보살이 수행해 나가는 데에 많은 어려운 지경에 일부러 들어가서 그 어려운 것을 이겨내면서 공부하려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자동으로 세속에서 이 일 저 일이 일어난다면야 아 그런대로 그놈을 잘 적응을 해서 살아간다면 신심이 저절로 솟구치고 환희심이 일어나고, 자기를 와서 예쁘다고 해 준 사람이나, 자기를 와서 몽둥이로 때린 사람이나, 얼굴에다 더러운 것을 발라 주거나 향수를 쳐 주거나 다 똑같은 거여, 그게.
받아들이는 마음에 달려서는 좋게 해 줘도 진심(瞋心)을 낼 수도 있고, 자기를 해롭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도 오히려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부가 자기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거여.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정치를 원망하기보다는 그런 여러 가지 상황 속에 자기가 적응할 수 있도록 자기를 단련을 하고 그러한 경험에서 더 신심(信心)을 내고 분심(憤心)을 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라.
그러면서도 이미 자기가 지은 빚은 갚아야 해.
남편에 대한 빚, 아내에 대한 빚, 자식에 대한 빚, 부모에 대한 빚, 사회에 대한 빚, 국가에 대한 빚, 모든 중생에 대한 빚, 불보살에 대한 은혜는 다 갚으면서 한평생을 이 짧은—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도.
인자 내일 모레 죽게 될는지 언젠지 모르지만 다 마찬가지입니다. 늙고 젊고가 없는 것이니까 어쨌든지 이 서늘한 가을을 정말 알뜰하게 잘 지내시기를 다짐하면서 법상에서 내려가겠습니다.(42분53초~63분8초)(끝)
[법문 내용]
(게송)삼계진로여해활~ / 빈두로 존자의 신통과 부처님의 꾸지람 / 빈두로 존자의 인욕 / 화두를 들고 정념을 잃지 아니하면 모든 마구니를 이긴다. (게송)백년부환수중구~ / 천목 중봉선사의 다섯 가지 신심[五種信心]. (게송)일파자동만파수~ / 화두 드는 법 / 설사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해도 궁극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여. '이뭣고?' / 모든 경계에 즉해서 '이뭣고?' / 이미 자기가 진 빚은 갚아야 해.
〇일념불생도해탈(一念不生都解脫)이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이렇게 번졌으면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한 생각이 불생(不生)하도록, 한 생각 남[生]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면 억겁다생에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해탈하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거거든.
〇우리는 가만히 앉았어도 끝도 없이 생각이 일어나거든. 이 생각 저 생각,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두 번 세 번으로 자꾸 요렇게 번져 가. 그 생각이 가라앉을 만하면 또 일어나거든. 수없는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한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수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와 연결시켜 주는 그 도화선(導火線)이다.
〇사바세계는—'사바(娑婆)'란 말이 감인(堪忍), '견딜 감(堪)’ '참을 인(忍)’—견디고 참는 참아야만 살 수가 있는 세계다 해서 사바세계(娑婆世界)거든.
〇한 생각 동(動)하면 벌써 그 마구니의 올가미에 걸려들어 가는 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떠억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정념을 잃지 아니한다면은 이기지 못할 마구니가 없어. 마구니는 내 마음이 움직거리고, 내 마음이 동(動)한 틈을 타서 들어온 것이지,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면은 아무리 팔만사천 마구니가 주변에 엿보고 있다 하더라도 내게 어찌하지 못한 것이다.
〇정법문중(正法門中)에 대장부가 딴 게 아니여. 기운 세고 말 잘하고 수단 좋은 게 아니고, 어떠한 경계에서도 한 생각 딱! 돌이키는 거야. 그 사람은 팔만사천의 마구니도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고 이 세상의 흥망성쇠도 하나도 겁날 것이 없어.
〇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면 누구나 처음부터 잘된 사람은 없어. 처음에는 곧잘 잘된 것 같은데 한 며칠 지나가나 몇 달 지나면 뚝 변해 갔고 영 안되고, 한 일 년 지나면 또 되다가 안되다가 자꾸 그런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법문을 자주 듣고 좋은 도반들과 같이 애를 써야 흔들림을 받지 않고 서로서로 울타리가 되어서 중단하거나 퇴태(退怠)하지 않게 되는 것이여.
〇천칠백 화두가 있지마는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설사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해도 궁극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여. 그것이 바로 자성불(自性佛)이기 때문에 그놈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시삼마(是甚麽)화두여. “시삼마”를 우리말로는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〇이미 자기가 지은 빚은 갚아야 해. 남편에 대한 빚, 아내에 대한 빚, 자식에 대한 빚, 부모에 대한 빚, 사회에 대한 빚, 국가에 대한 빚, 모든 중생에 대한 빚, 불보살에 대한 은혜는 다 갚으면서,
우리도 인자 언제 죽게 될는지 모르고, 늙고 젊고가 없는 것이니까 어쨌든지 이 서늘한 가을을 정말 알뜰하게 잘 지내기를 다짐합시다.
(No.524)—19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 (60분)
(1/3) 약 18분.
(2/3) 약 21분.
(3/3) 약 21분.
(1/3)----------------
편안히 앉으십시오.
계유년 동안거가 종말에 가까워 왔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의 신심과 원력으로 큰 탈없이 이렇게 정진(精進)을 해 오신 것에 대해서 치하(致賀)를 드립니다.
여러분들 낱낱이 다 개별적으로 만나면 나름대로 다 이야기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겠지만, 여러 가지 형편상 그러지를 못해서 이렇게 서면(書面)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요약을 해서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질문을 했어도 잘 들어 두시면 여러 가지로 정진하는 데 참작이 될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앉아 있을 때는 화두(話頭)가 잘 들리고 그러다가, 그런데 서서 돌아다니거나 일을 하면 앉았을 때 보단 산만해져서 화두가 순일하게 안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앉아서 정진을 하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초학자(初學者)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고, 설사 구참(久參)도 시간 있는 대로 앉아서 정진하신 것은 여러 가지로 효과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활해 나가는 데에는 종일토록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거고, 설 때도 있고 돌아다닐 때도 있고, 말할 때도 있고 무슨 일을 할 때도 있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화두를 아주 놔 버리고 그럭저럭 지내면 정진이 순일하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서 다니더라도 앉았을 때 같이 순일한 경계가 흩어지지 않느냐?
그것은 자기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 경계(境界)에 팔려 나가면은 화두를 놓치게 되는 거고.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바로 그때그때 화두를 챙기면은 나갈 뻔하다가 다시 자기로 돌아온 것이니까, 자기가 정성스럽게 챙기는 도리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섰을 때나 걸어갈 때도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앉았을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서서도 항상 단전(丹田)에다가 가볍게 힘을 주고서 걷기도 하고 일도 하고, 또 말을 할 때에도 그 단전을 중심으로 해서 거기다가 가볍게—힘을 너무 세게 주면 못쓰는 거고, 가볍게 단전에다 힘을 주어야 하는데, 가볍게 단전에다 힘을 줄라면 몸을 쭈욱 펴야 하는 것입니다. 펴면 자연히 단전에 힘이 들어가는 거고.
허리가 탁 꼬부라져 버리면 단전에 힘을 줄 수도 없고 그냥 경계에 팔리게 되는 것이니까, 행주좌와(行住坐臥) 간에 항상 화두가 흩어지지 않게 할라면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아랫배에다 가볍게 힘을 주도록 그렇게 한번 시도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선을 하다 보면 답답하고 벽처럼 딱딱해지고 굳어지는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단정히 한답시고 너무 긴장을 해 가지고 등에다가, 어깨에다, 목에다가 너무 힘을 주면 그렇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단정(端正)하게 몸을 가지면서도 어깨의 힘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그게 대단히 자세를 바르게 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단정히 한 것’과 ‘긴장을 해서 몸에다 힘을 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단정하게 몸을 가지면서도 어깨나 목이나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러면서 단전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면 갑갑하고 벽처럼 딱딱해지고 굳어지는 그러한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 입술이 퉁퉁 붓는 것도 입에다 너무 세게 힘을 주기 때문에 그런 거여.
그래서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가 참선을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 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와.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데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그다음에, 화두가 훨씬 그전 때보다도 잘 들리고, 잘되어 가는 그런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야! 공부가 잘되어서 좋다’ 그런 생각도 내지 말고, ‘이렇게 공부가 잘되어 가면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내지 말고.
벌써 정진이 잘된다고 기쁜 마음을 내면은 환희의 마구니가 거기에 붙게 되는 거고, 정진이 잘 안된다고 번뇌심을 내면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거기에 붙게 되는 거여.
그래서 안된다고 해서 너무 짜증을 내고 그러지도 말고, 정진이 잘되어서 화두가 순숙(純熟)해서 잘된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도 내지를 말아라.
잘되고 못되고 그건 그냥 그대로 놔둔 채, 자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꾸준히 해 나가면 그것이 정진을 올바르게 해 나가는 법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안되면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고, 또 조금 잘되면 잘된다고 좋은 생각을 내 가지고, 그 좋은 경계를 흩어버리게 되는 거다 말이여. 그것을 잘 이해를 하셔야 하고.
좌선 중에 주먹을 이렇게 딱! 쥐고서 양 무릎에다 놓고 하는—이게 금강권(金剛拳)이라 그러는 건데, 혼침(昏沈)이 오거나 생각이 너무 무력해져 가지고, 그럴 때에는 주먹을 이렇게 딱 쥐고 허리를 쭉 펴고서 이렇게 해서 그런 자세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잘되면 다시 근본자세로 이렇게 해서—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개고, 양 엄지손가락 끝을 살짝 맞대 가지고 배꼽 앞에다 따악 놓고, 이렇게 해 나가고.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빠지고 혼침이 오고 무력해졌을 때는 또 금강권을 쥐고 이렇게 해서 타악 정신을 차려서 해 나가고.
노상 처음부터서 이렇게 해서 잘되어 가고 그렇게 해서 아무 불편이 없다면 그렇게 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 금강권은 혼침이 와서 그러거나, 힘이 없어서 무력해지거나 할 때는 누구라도 이렇게 해서 허리를 주욱 펴고 이렇게 해서, 그 경계를 갖다 벗어나도록 그렇게 활용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주(四柱)를 옛날에 봤는데, 자기의 그동안에 살아온 모든 것이 사주대로 되어 갔는데 앞으로도 그 사주대로 되어 갈 것인가? 그러한 질문을 하신 분이 있는데, 사주를 아마 잘 보는 사람한테 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주나 관상이나 잘 보는 사람한테 보면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것이 맞았으니까 앞으로도 맞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그냥 사주대로 살 수 밖에는 없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고.
과거는 맞았어도—맞거나 안 맞거나 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은 바른 사상과 바른 신심(信心)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서 여법(如法)하게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항상 화두를 들고 살아가는 것이여.
사주에 뭐라고 써졌거나 간에—죽는다고 써졌건, 뭐 손재수(損財數)가 있다고 하건, 그걸 낱낱이 손재수가 있다고 했으니까 미리서부터 손재수 있을 것을 기다리고 있을 필요도 없는 거고, 그날 죽는다고 해서 죽을 폭을 대고 그럴 필요가 없어.
죽고 사는 것이나 흥하고 망한 것이나 모든 것은 그때그때 그냥 맡겨 두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거여.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을 오늘 해야 하는 거고 그렇지, 죽는다고 했다 해 가지고 자기의 할 일을 안 하고 놔 둘 수는 없는 거거든.
그래서 ‘배우는 데에는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워야 하는 거고, 또 살아가는 것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격언도 있는데.
죽고 사는 거, 흥하고 망하고 하는 것은 과거에 지은 업(業)과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 두 가지가 합해져 가지고 하루하루가 전개되는 거여.
전적으로 과거에 지은 대로만 다 되는 것은 아니여. 과거에 지은 것도 도저히 피할 수 없지마는,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노력을 하느냐 그것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여.
‘부처님도 그 지은 업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이 부처님 3불능(三不能) 중에 한 가지라고 하지마는, 우리도 역시 우리가 지은 것은 지은 대로 받지 안 받는 것은 아니나, 받을 때의 그 마음가짐이 다른 거여. 안 받을라고 피하는 것이 아니고 받을 때 받되, 받을 때의 그 마음가짐이 대단히 중요한 거야.
그것이 성현(聖賢)과 범부(凡夫)의 차이가 거기에 있는 거고,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가 거기에 있는 거여.
피하려고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여. 여법하게 수행을 쌓은 사람은 받되, 받을 때에 그 마음 경지가 다른 거다 그말이여.
수행을 안 쌓은 사람은 일을 당하면 당황하게 되고 겁을 먹고 삿된 방법으로 이렇게 억지로 피하려다가 오히려 큰 재앙을 만나게 되고 그런 것이다 그말이여.
받을 때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은 느긋한 마음으로 받되, 그 받을 때 본심이 변하지 아니하고 바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법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그냥 그것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이요 방법이다.
‘윤회(輪廻)라고 하는 것이 왜 생기냐’하는데, 윤회라고 하는 것은 우주 질서입니다.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 가지고 어떤 결과가 나타난 것은 우주 법계(法界)의 질서여, 법칙이여.
누가 그렇게 어떤 신이 있거나 어떤 절대자가 있어 가지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여법한 질서여 그게. 그래서 누구도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는 거라 말이여.
그래서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야. 팥을 심어 놓고 거기서 콩이 나기를 바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
착한 선(善)을 하면은 낙(樂)의 과보(果報)를 받고, 악한 짓을 하면은 고통의 과보를 받는 것은 우주의 질서여.
부처님이 그렇게 만들은 것도 아니고 무슨 하느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질서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거야. 물이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거와 마찬가지고, 봄이 오면 꽃이 핀 거와 마찬가지고.
겨울이 오면 추운 것이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여. 그냥 그렇게 자연의 질서여, 그것이.
그러기 때문에 우주 법계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 법칙을 잘 이해하면 자기가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고,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고, 모든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8분14초)
(2/3)----------------
정진(精進)을 하다 보면은 한없이 환희심이 나기도 하고, 한없이 슬픈 생각이 나기도 하고, 한없이 아주 죽어버리고 싶은 그런 생각이 날 때도 있고, 한없이 외로운 생각이 날 때도 있고, 밥을 먹다가도 하염없이 눈물이 출출 흐르는 수도 있습니다.
정진 하다가 보면 그러한 경지가 있을 수가 있어요, 사람에 따라서.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집착(執着)을 하면 안 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떠억 들어나가야 하는 거여.
그런 경지에 자기도 모르는 새에 빠져 들어가서 거기에 집착을 하면, 그 정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그말이여.
어떠한 경지가 나타나더라도 퍼떡 정신을 차려서 자세가 비틀어졌으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몸에 긴장이 들어서 굳어 있으면 그 긴장을 풀고, 단정한 자세와 단전호흡으로 바르게 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가면, 금방 그런 경지가 다 사라지고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여.
‘왜 이렇게 참선이 안되는지 답답하다. 도대체 될 건지 안될 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공부가 잘될까?’ 이건 정진하려고 애쓴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서 모든 것이 잘되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잘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안된다'고 답답하고 한심스럽고 원망스러운—공연히 부처님을 원망하고, 모다 조주 스님을 원망하고, 조사(祖師)를 원망하고, 심지어는 이 세상에 나를 낳아 준 부모가 원망스럽고, 이런 생각하다 보면 한이 없습니다.
안되는 것은 당연해.
왜 그러냐 하면 무량겁을 업(業)을 지어서 업을 받고 또 업을 지어서 업을 받으면서, 물 흘러가듯이 이렇게 생사윤회(生死輪迴)의 흐름 속에 살아오다가 ‘이뭣고?’를 챙긴 것은 그 흐름을 거스르는 거여. 거슬러 가지고 그 뿌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거든 이게. 그러니까 힘이 들 수 밖에 없어.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업(業)으로 인해서 새로운 과보를 받아서 또 그렇게 살아가면—울다가 웃다가, 좋아하다가 괴로워하다가 그렇게 그냥 살아가면 별일이 없어.
지옥에 가면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천당에 가면 천상락(天上樂)을 받고, 지은 업대로 받으면 그냥 별일이 아닌데.
이것을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해서 영원히 생사윤회를 해 가지고서는 끝이 없으니까 이 생사윤회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가지고 근본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로 돌아가려 하니까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여.
힘이 들고 어렵지마는, 이것을 해야만 영원한 생사윤회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믿고 조사의 법문을 믿고서 우리가 참선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그리고 여법하게 화두를 들고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계속해서 하다 보면 결국은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망상(妄想)을 물리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순일무잡하게 될 때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것은 본인이 그런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중단하지 않고 게으름부리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거거든.
'앞으로 잘될 거냐 안될 거냐? 내가 견성을 할 거냐 못 할 거냐? 확철대오를 하냐 안 하냐?' 그런 것을 지금 따지고 앉았을 시간이 없다 그말이여.
‘단전호흡이 잘 안된다’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그런 것은, 단전호흡도 하는 방법을 잘 알아 가지고 자연스럽게—무리하게 하려고 하지를 말어.
억지로 시간을 오래 끌어서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자기에게 가장 알맞고 적당한 길이로, 3초에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한 3~4초 동안에 조용히 내쉬고.
이 시간을 한번 들어마셨다가 내쉴 때까지 한 10초나 12초 이렇게 그런 정도로 하면 누구나 괜찮은데.
자꾸 하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그때 상황에 따라서 자기의 체질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해야지, '억지로 10초씩 해서 30초씩 하자, 억지로 25초씩 해 가지고 1분 동안에 하리라' 이렇게 무리하게 하면 안 되는 거여.
‘자식들이 전부 성당에 나가서 걱정이다’ 하는데.
기왕이면 부모님 종교를 따라서 불법(佛法)를 믿고 정법(正法)을 믿게 되면 천만다행한 일이나, 무슨 인연으로 성당에 나가게 된다면 참 그걸 억지로 못 가게 날마다 큰소리를 치고 그럴 수도 없는 거고. 성당에 나가되 바른 마음으로 잘 믿으면 다행한 일이고.
이것을 돌리는 방법은 ‘불교를 믿어라, 믿어라’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스스로 불교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이 정말 여법(如法)하게 정법을 믿고 여법하게 참선하셔서, 마음가짐이나 말씀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 자녀들의 눈에, ‘야! 우리 어머니는 정말 불교를 믿으시더니 정말 훌륭하시다!’ 또 어머니를 통해서 불교의 말씀을 듣고 ‘정말 불교는 참 좋은 종교로구나!’ 이렇게 스스로 느껴서 불교로 돌아와야 되는 것이지,
어머니가 자녀들이 봄에 여법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불교가 별로 좋은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면 돌아올 가망성은 없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강요하지 말고, 마음가짐으로 행동으로 불교의 좋은 것을 자녀들이 자연히 보고 느끼도록, 그러면 돌아오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돌아오게 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참선을 하니 몸이—등에서 일어나기 시작해 가지고 온 몸에서 열이 나고, 몸뚱이가 주먹만 하게 이렇게 조여진 것을 느낀다’ 그러는데.
단전호흡을 계속해서 하다 보면 이 단전에서 이렇게 열이 나 가지고 그 열이 차츰차츰 몸으로 번져서 등으로도 이렇게 열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주천화후(周天火候)라고, 단전호흡을 계속해서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은 순리이고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밤에도 모다 그 단전호흡을 주로 하는 그런 수행자들은 한데에서 밤을 지샐 때, 단전호흡을 하면 전신에 그렇게 열이 돌기 때문에 추움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닌데.
‘주먹만 하게 몸이 조여진다’고 한 것은 그 자기의 느낌이겠지요.
열이 나건, 그런 데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기의 본참화두를 항상 놓치지 않도록, 망각하지 않도록 그걸 잘 잡드리해 나가면 그런 것을 벗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앉아 있을 때 옆구리가 결린다’하는 것은 아마 그 부분이 내부에 좀 좋지 않은 대목이 있어 가지고 아마 그런 것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또 뭐 일을 조금 심하게 해 가지고 결릴 수도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주 심하면, 옆구리가 결려서 호흡하기도 어려우면, 파스 같은 것을 붙여 보시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병원에 가서 문의를 하실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보살님 질문) “원장 스님께 자꾸 물어보기... 말씀을 여쭤보겠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큰스님 계실 적에, 그 전에도 인제 어딜 가면은 산에 같은 데 가면은 무슨 글씨 같은 게 떠오르고 그러는데, 몰랐습니다. 그랬는데 이 근년에는 이게 마음이나 행동이 모두가 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아주 철모르는 어린네 행동이 되어 있어요 제가.
그리고 이 우주가 말이에요. 우주가 이 공 같은, 축구공 같은 그런 기분에서 이거 이렇게 놀리고 댕긴다는 그런 기분하에서 허황심(虛荒心)에 항상 기쁜 거예요. 그리고 이제 모든 행동이 아이들 같은 이거, 뭐 먹고 입고, 엄마가 걱정이 무슨 걱정이 있건 없건 그거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이거 그런 경지 이걸 어떻게 담아야 될까요?”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연세가 지금 일흔 셋 이지요”
보살님은, 아마 보살님 뿐만이 아니라 불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하면 점점 어린애가 되어갑니다. 그 세속에도 연세가 팔십, 구십이 되면 아주 어린애처럼 되어 가지고 그런 분을 더러 볼 수가 있는데.
참선을 열심히 하면 그냥 순수한, 아주 순진한 어린애처럼 마음이 그렇게 깨끗해지니까,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어린애처럼 된 것은 대단히 좋은 증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늙어가면서 심술이 뒤룩뒤룩하고 탐심(貪心)이 꽉 차 가지고, 행동과 언어에 남을 찍어서 삐틀어서 긁어 잡아당기는 그런 말이 입에서 튀겨져 나오고, 마음에는 탐심이 꽉 절어 가지고 닥치는 대로 긁어 담아 가지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르고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참선을 정말 올바르게 해 가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해져서 욕심도 없어지고, 탐심도 없어지고, 진심도 잘 안내고 어린애처럼 되어 가지고 그렇게 순진하게 된다면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도인(道人)의 81행(行)이 있는데, 81행 가운데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치는 것입니다. 영아행이라 한 것은, 인자 철없는 한두 살 어린애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성경에도 ‘어린애처럼 되어야 천당에 갈 수가 있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진한 어린애처럼 그렇게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해진다면 그건 대단히 좋은 증상이고 그건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가지고, 손에다 가지고 공 가지고 놀듯이 그런다는데.
사실 우주가 이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세계가 동서남북 시방(十方)으로 무한대(無限大)로 많습니다. 마치 이 공중에 먼지가 날으듯이 우리 현재 천문학에서 발견한 별이 수없이 많지마는 그 몇억만 배의 별들이 이 무한한 허공 속에는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진리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다 우리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고 그런 것입니다. 손으로 맘대로 가지고 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진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런 생각도 가질 필요가 없고, 평범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평범한 가운데에 화두를 들고 이렇게 모든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매(三昧)에 들 때에는 눈을 뜨고 드느냐, 감고 드느냐?’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는데.
우리가 참선 공부를 해 나갈 때에는 눈을 감고 하는 것 보단 눈을 평상(平常)으로 뜨는 것이 좋습니다.
초학자(初學者)는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보여 가지고 그리 정신을 빼앗기기 때문에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진이 잘된다고 그렇게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처음에 습관을 들일 때부터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해야 좋습니다.
눈을 감고 하면은 조용하니 공부가 잘된 것 같지마는 까딱하면 혼침에 빠질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안 좋으니까 눈을 평상으로 뜨게 하고.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어 보면 ‘판치생모(板齒生毛)’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이뭣고?' 화두를 타 가지고 하면 조실 스님 법문에 ‘판치생모’ 법문이 나오더라도 자기의 본참화두인 ‘이뭣고?’를 꾸준히 해 나가신 것이 좋습니다.
맨 처음에 ‘판치생모’ 화두를 타셨다면 아무리 ‘이뭣고?’ 법문을 듣더라도 자기의 본참공안인 ‘판치생모’를 들어야 하는 것이고.
또 어디서 ‘무자(無字)’ 화두를 타셨다면 아무리 어떤 큰스님네가 ‘이뭣고?’나 다른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 법문을 하시더라도 자기의 본참공안인 ‘무자' 화두를 쭈욱 들어 가야지, 이 법문 들었다고 해서 화두를 그리 바꾸고, 저 법문 들었다고 해서 그리 바꾸고, 자꾸 이렇게 바꿔싸면 안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라고 이렇게 제가 말씀을 했는데.
‘이뭣고?’한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여운이, 들어마셨다가 다음에 머꿀 때까지 그 여운이 그때까지 알 수 없는 의심이 그때까지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또 내쉴 때 ‘이뭣고?’
처음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는 꼭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상관이 없어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호흡은 몇 번을 하더라도 한번 화두 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을 관(觀)해 나가야 되는 것이여.
그러다가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화두가 없어져 버리면 다시 그때 또 내쉬면서 ‘이뭣고?’를 챙기고 이렇게 하는 거야.
아침에 새벽에 떠억 화두를 한번 들었는데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다면, 호흡이야 그동안에 수없이 하거나 말거나 그거 상관이 없고, 공양(供養)을 잡술 때도 공양을 이렇게 들면서도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게 되어야 하거든.
공양이 끝나고도 고대로 있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더라도 고대로 있어야 되서, 그래 가지고 성성적적하게 한번 든 화두가 종일토록 있다면 그건 아주 공부가 아주 순숙(純熟)해진 증거니까, 꼭 화두를 숨 내쉴 때마다 자꾸 안 해도 상관이 없다. 화두가 없어지면 다시 또 챙기는 거고.(18분20초~38분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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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력(呪力)을 하거나 기도를 하다 보면 의술(醫術)을 배우지 안 했는데 침도 놓고 또 손으로 요렇게 만져서 지압 같은 것도 하고 또 무슨 약처방 같은 것도 이렇게 일러주는 그런 능력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건 전생(前生)에 의술을 공부를 했거나 또는 ‘내생(來生)에는 내가 의술을 통달해 가지고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리라’하는 그런 원력(願力)을 세웠거나 그런 경우에 금생(今生)에 그렇게 주력을 하다 보면,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런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걸 꼭 나쁘다고 할 것은 없으나 이 선방(禪房)에 들어와서는 자기 공부할라고 들어왔지 여기 와서 사람들 병 고쳐 줄라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만약에 그런 능력이 있어서 이 사람 저 사람 하다 보면 '위~'하니 모여 들어가 가지고 이 선방이 완전히 병 치료하는 병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제(結制) 중에는 선방 내에서는 그걸 좀 삼가하시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도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좋고, 선방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 그런 좋은 능력이 있으면 해제(解制)하고 적당한 자리에서 만나서 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은 뭐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참선을 하는데 자꾸 이상스런 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난다 하면 그 경계가 좋은 경계가 되었건, 무슨 신비한 경계가 되었건 거기에 집착(執着)을 하면 안 돼. 그것은 그대로 놔둬 버리고 정신을 딱! 챙겨 가지고 화두를 계속해서 화두를 들어 나가야 돼.
천하 없는 신비하고도 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따라가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건 공부가 아냐. 그냥 고대로 물리치려고 하지도 말고 그대로 놔둔 채 똑바른 정신으로 화두만 떠억 들고 나가면 계속 그러면 결국은 그 경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여.
공부하는 가운데 환상이 나타나거나, 부처님이 나타나거나,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거나 별별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참 경계가 아니야.
그리고 참선하고 있으면 집에서 뭔 일 일어나는 것이 나타나서 미리 알게 되고, ‘집에 누가 죽었다’하면 가서 보면 죽어 갖고 있고, ‘누가 올 거다’하면—참선 중에 그것이 그냥 자연히 알아져서, 가서 보면 누가 와 있기도 하고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식(識)이 맑아지니까, 그 맑아진 식의 능력으로 그것이 알아지는 수도 있고 또 어떠한 잡신(雜神)이 이런 것을 와서 일러주기도 하고 그런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식(識)이 맑아져서 알아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도(道)를 통한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환히 알아지니까 ‘내가 도통(道通)을 했구나’ 그렇게 착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런 것이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도(道), 내가 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成成佛) 하는 것과는 영판 길이 다릅니다 그게.
그것은 공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거기에 집착하면 정말 사도(邪道)로 빠지게 되는 것이니까 집착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그걸 사용하려고 하지도 말고, 좋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없었던 걸로 놔 버려야 합니다.
놔 버리고 자꾸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꾸준히 들고 나가면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해로울 것도 없습니다.
화두를 놔 버리고 그런 데에 집착을 하고 그런 데에 빠져 가지고, 그런 거 아는 소리를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정도(正道) 하고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고, 잘되어 봤자 점쟁이 같은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니까,
모처럼 이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말해서 초능력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은—뭣한 사람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무척 노력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건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또 예불(禮佛)을 하러 올라가고 내려가고 또는 밤에 정진할 때, 환히 아주 백 촉짜리 불을 켠 것처럼 환히 모든 것이 비쳐.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데 자기 눈에는 환히 그렇게 광명(光明)이 보이는 수가 있어.
그런 것도 역시 그런 거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머지않아서 내가 도통하려고 이런가 보다’ 그러한 생각도 하지 말어. 집착하지 아니하면 아무 상관이 없어.
그것이 꼭 '나쁜 것이다. 좋은 것이다' 말할 것도 아니고, 문제는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거고, 집착하지 않고 놔둬 버리고 올바르게 정진을 해 나가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여. 그렇게 아시기 바라고.
그리고 ‘정진하다 보면 코로 향내가 난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향내가 날 수도 있고.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것이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향내가 정상적으로 나는 향내라면 다른 사람 코에도 다 그 향내가 나야 할 텐데 자기에만 느끼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자기가 그동안에 어떻게 어떠한 공부를 해 왔느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해 왔느냐? 과거에 어떠한 업을 지었느냐? 그런 것에 따라서 그렇게 향내가 날 수도 있고, 캄캄한 밤에도 환히 모든 것이 다 보일 수도 있고, 여기서 수백 리 떨어진 데에서 하는 소리를 여기서 들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50가지의 그런 여러 가지 경계에 대해서 소상(昭詳)하니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도(道)와는 별개의 것이여.
그런 경계가 나타났을 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우리 정법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의 주의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런 신기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가 일어나면, 그것에 집착을 했다 하면 거기서부터 정도(正道)에서는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시기를 바라고.
삼매(三昧)와 선정(禪定)은 다른 것이냐, 틀린 것이냐? 같은 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삼매(三昧)는 인도 말이고, 중국 말로는 정(定)이라 그러는 것인데, 같은 말이죠.
그런데 무엇이고 한 가지, 책을 읽는데 거기에 열중하고 골몰해 가지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밖에서 떠드는 소리도 안 들리고 한다면 그것은 ‘독서 삼매’가 될 것이고.
글씨를 쓰는데 열심히 글씨를 쓰다 보면 자기가 글씨를 쓴다는 생각도 없고, 잘 쓸라는 생각도 없고, 밖에서 아무리 시끄러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글씨 쓰는 데만 정신이 통일이 된다면 그것은 ‘글씨의 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도 마찬가지여. 일에도 열중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거기에 집중을 하게 되면은 그것은 ‘일의 삼매’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도 ‘이뭣고’가 되었건 또는 ‘옴 마니 반메 훔’이 되었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 되었건, 일심(一心)으로 하다 보면 그것도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것도 정에 들어가는 것인데,
정(定)에는 사(邪)의 정, 삿된 정과 바른 정이 있어. 삿된 정에 빠지면 삿된 결과가 오는 것이고 바른 정에 들어가야 바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삼매(三昧)는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바른 정신으로 바른 신심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해 나가야 더이상 의심이 커질라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라야 간절할 수 없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야 해.
그래 가지고 순일무잡해 가지고 나가면은 결국은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오직 그 길이다.
그리고 참선 하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라 가지고,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서도 화두에 대한 바른 의심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따악 유지가 되어 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면은 그것은 바른 참선이 아니여. 설사 모든 세상을 훤히 알고 신통술이 나와도 그것은 정법이 아니다 그말이여.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그러한 무기공에 떨어진 것을 '삼매에 들었다'고 좋아하고 착각을 하고 남에게 자랑을 하고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중이 모여서 선방에 와서 정진을 할 때에는 대중의 법도(法度)에 순응하면서 그 가운데 정진을 잘 잡드리를 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몇 시간을 꼼짝도 않고 앉을 수가 있다. 나야말로 이 가운데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 가지고 있고,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별 사람들이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들이 아니다’하고 낮잡아 보고 멸시하고 그런 것은 정신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여.
스물네 시간을 꼼짝도 않고 앉았다 하더라도 생각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여.
40년 동안을 꼼짝 안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 스님이 있었는데, 자기는 한국에서 제일 정진을 잘한 도인이라고 착각에 빠져 갖고 있었어. 마곡사에 그런 스님이 있었는데. 그게 40년이 아니라 억겁 동안을 앉아서 꼼짝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법이 아니여.
‘바른 정(定)’이라 하는 것은 밥 먹을 때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지 않고, 종일 걷되 한 조각의 땅도 밟음이 없고, 종일 말하되 한마디 말도 한 바가 없어야, 그래야 그것이 진짜 삼매고 바른 정이야.
여러분은 일단 이 용화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였으면 용화선원의 법도에 순응하면서 여법하게 정진하되, 다른 사람에게 이만큼도 방해를 주지 아니해야 해.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주지 아니하면서 자기 공부를 안으로 착실하게 해 나가야 한다. 자기 공부 잘한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법도(法度)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벌써 바른 마음가짐이 되어 있질 않거든.
그 점에 대해서 어느 선방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여. 그 선방에 가면은 그 선방의 법도를 지키면서 다른 분에게는 조금도 방해를 주지 아니하면서 자기 공부를 내부적으로 착실하게 다져 나갈 줄 알아야 해.
그러다 보면 말이 필요가 없는 거여. 말을 많이 하고 큰소리를 치고, 선방에 와서 자기가 잘났다고 큰소리 치고, 자기 이외에 누가 나만큼 공부한 사람이 없냐고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게 될 거냐 그말이여.
‘양반 못된 것이 장터에 가서 큰소리 치고, 개 못된 것이 들에 가서 짖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선방에 와서 자기가 잘난 체하고 큰소리 치고 남을 멸시하고 마구잡이 막 행동을 하고 한다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어. 그 점에 대해서 각별히 명심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살님 말씀) “용화사 정법문중에 선을 하러 오면은 어떻게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데, 우리 여러 보살님들이 너무 잡담이 많습니다. 풍기문란해 가지고 원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 법문에 한마디 한마디도 실행을 못하는 걸 보면 저 옥상에 가서 실컷 울고 내려옵니다. 왜 이렇게 어지럼하게 정법이 이렇게 문란하게 돼 가는지 이래야 되는가를 너무너무 기가 막혀서 숨이 막혀 제가 고자질을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건 고자질이 아니고 참, 조실 스님 때부터서 주욱 해 오신 선배 도반(道伴)으로서 여러 도반을 위하고 용화선원의 법도를 위해서 자비심(慈悲心)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전에도 항상 말씀을 드렸죠. '입선(入禪) 시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방선(放禪) 시간이라도 잡담을 하시지 말라'
방선 시간에 혹 허리가 아프면 지대방에서 허리를 좀 펴시는 것까지는 좋으나, 몸은 쭈욱 펴시되 마음은 항상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방선 시간이라고 해서 마구잡이 떠들다 보면 그것이 자기 공부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보살님네한테도 피해를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여기에 오면 가정 문제 뭐 사회 문제 뭐 이 소리 저 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오직 화두 하나만 가지고 잡드리를 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전에 어떤 스님을 입승(立繩)을 맡겼는데, 어떻게 엄격히 했던지 변소에 갈 때도 따라가고, 변소에 가고 올 때도 말을 못하게 잡드리를 한 입승이 있었습니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내가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소에 갈 때 올 때 잡담하지 말 것, 지대방에서도 잡담하지 말 것. 여기 와서 일분일초(一分一秒)가 새롭고 아까운데 어떻게 그렇게 잡담으로 세월을 보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그 점에 대해서는 오늘 대단히 좋은 의견을 말씀을 하셨고, 내가 그전부터 항상 주장하는 바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그것을 매우 강경하게 단속을 하셨습니다.
조실 스님은 그때에 계신 분은 아시겠지만, 종이로 이렇게 관(冠)을 만들어 가지고 잡담만 하면 그 관을 그 사람한테 이렇게 씌워 줍니다. 그러고 이렇게 지내다가 누가 잡담만 하면 그거 벗어서 잡담한 사람한테 머리에 이렇게 관을 씌워주고 해서, 그 관이 이 사람으로 갔다 저 사람으로 갔다 이렇게 까지 조실 스님은 엄격하게 단속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열반(涅槃)하신 조실 스님을 살아 계신 조실 스님처럼 우리는 그렇게 모시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정 잡담을 많이 하시면 그 관을 몇 개를 만들어 가지고 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잡담을 하실 것이고.
그래서 잡담을 안 하셔야 합니다. 정말 방선 시간에도 잡담을 하지 말고 조용하게, 이 큰방에서는 방선 시간에도 좌선(坐禪)을 하시고 싶으면 계속해서 하셔도 되고 또 지대방에 가시더라도 절대로 잡담만은 하시지 않도록.
앞으로 한 20일 남았나? 한 보름 남았는데, 보름 동안을 정말 자율적으로 입승 스님이 엄격하게 단속을 해서가 아니라 각자 자율적으로 보름 동안을 정말 여법하게 한번 모범적으로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38분54초~59분34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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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부지런히 힘씀. ②불법(佛法)을 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씀.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구참(久參 오랠 구/참구할·참여할 참)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것. 오랫동안 선(禪)을 닦은 것.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에 귀의한지 오래 되는 것. 초학(初學)의 상대어.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 걷기, 머물기, 앉기, 눕기 등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움직임.
*단정하다(端正-- 바를 단/바를 정) ; 옷차림새나 몸가짐 따위가 얌전하고 바르다.
*회광반조(廻光返照) :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사주(四柱) ;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의 네 간지(干支). 또는 이에 근거하여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아보는 방법.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삼불능(三不能) ;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가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을 세웠다.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해서 만법을 아는 지혜를 이루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알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막힘이 없이 다 아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무량겁으로부터서 지은 정업(定業)은 멸하지 못함. ②인연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무량중생을 제도하실 수는 있으나 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윤회(輪廻) ; ①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業)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生死)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②어떤 사물이 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함.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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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執着)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정심(正心) ; 바른 마음, 또는 마음을 가다듬음.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주천화후(周天火候) ; 단전에 모여 있는 신기(神氣)를 따뜻하게 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퍼지게 하고 그래서 온몸이 열기로 가득차게 하는 도가 수련법이다. 이러한 수련을 열 달간 계속하면 단전에 신태(神胎)가 생기고 더 계속하면 체내에 단(丹)이 형성되어 불로장생하는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북창비결 [北窓祕訣]에서.
*한데 ; ①사방, 상하를 덮거나 가리지 아니한 곳. 곧 집채의 바깥. 노천(露天). ②일정하게 정하여진 자리가 아닌 다른 곳.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삼척동자(三尺童子) ; 키가 석[三] 자[尺]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童子]. 철없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 한 자[尺]는 약 30.3Cm에 해당한다.
*허황심(虛荒心 헛될·공허할 허/허황할·황당무계할 황/뜻·생각 심) ; 헛되고[虛] 황당(荒唐)한 생각[心]. 현실성이 없고 근거가 없어 미덥지 못한 생각.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영아행(嬰兒行) ;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
*시방(十方) : 「십방」이라 발음하지 않는다。동 · 서 · 남 · 북의 사방(四方)과 각 중간 방위인 사유(四維)에 상 · 하까지 넣어서 열 가지 방향으로써 무한한 우주(宇宙)의 입체적 공간 전체를 말하게 된다.
*정진하는 분상(分上)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삼매(三昧) : 정(定)。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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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呪力) ;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의 효과.
*본원(本願) : 근본서원(根本誓願)의 준말. 모든 불보살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일으킨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결정코 이루려는 맹세(서원).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다.
①총원(總願)--모든 불보살님들의 공통원, 사홍서원(四弘誓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 가없는 중생을 맹세코 다 건지리이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 끝없는 번뇌를 맹세코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 한없는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우리이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다 이루리이다.
②별원(別願)--불보살님마다 중생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운 원(아미타불48원, 약사여래12원 등등). 별원은 사홍서원의 구체적 표현.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 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정도(正道) ; ①올바른 도. 올바른 실천법. ②팔정도(八正道)의 약칭.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세존과 아난(阿難)의 문답으로 시작하여 깨달음의 본성과 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하고 여래장(如來藏)이 무엇인가를 밝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음신앙이라 하고 능엄다라니(楞嚴陀羅尼)를 설한 다음, 보살의 수행 단계, 중생이 수행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번뇌에 대해 그 원인과 종류를 밝힘.
*소상(昭祥)하다 ; (이유나 설명이)자세하고 분명하다.
*불가사의(不可思議) ;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을 뜻하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일심(一心) ; ①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평등한 마음. ②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마음. 통일된 마음. ③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마음. ④아뢰야식(阿賴耶識).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무기공(無記空) ; ①의식이 깨어있지 않고 멍하거나 기억이 없으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상태 ②참선중에 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처음에 공부가 안되는 것은 당연. 삼요를 갖추어 정진해야 / 주천화후(周天火候) / 도인 81행 중에 영아행(嬰兒行) / 보살님들의 여러 가지 질문.
어떤 경계(境界)가 나타나건,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놔둬 버리고, 정신을 챙겨 화두를 들고 나가야 한다 /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을 '삼매에 들었다'고 착각하지 말라 / 잡담 말라.
[주요 문구]
〇어떻게 하면 서서 다니더라도 앉았을 때 같이 순일한 경계가 흩어지지 않느냐? 그것은 자기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 경계(境界)에 팔려 나가면은 화두를 놓치게 되는 거고.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바로 그때그때 화두를 챙기면은 나갈 뻔하다가 다시 자기로 돌아온 것이니까, 자기가 정성스럽게 챙기는 도리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〇‘단정히 한 것’과 ‘긴장을 해서 몸에다 힘을 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단정하게 몸을 가지면서도 어깨나 목이나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래서 온 몸에 힘을 다 빼고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가 참선을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〇‘배우는 데에는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배워야 하는 거고, 또 살아가는 것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격언도 있는데.
〇수행을 안 쌓은 사람은 일을 당하면 당황하게 되고 겁을 먹고 삿된 방법으로 이렇게 억지로 피하려다가 오히려 큰 재앙을 만나게 되고 그런 것이다.
여법하게 수행한 사람은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은 느긋한 마음으로 받되, 그 받을 때 본심이 변하지 아니하고 바른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이요 방법이다.
〇안되는 것은 당연해.
왜 그러냐 하면 무량겁을 업(業)을 지어서 업을 받고 또 업을 지어서 업을 받으면서, 물 흘러가듯이 이렇게 생사윤회(生死輪迴)의 흐름 속에 살아오다가 ‘이뭣고?’를 챙긴 것은 그 흐름을 거스르는 거여. 거슬러 가지고 그 뿌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거든 이게. 그러니까 힘이 들 수 밖에 없어.
〇참선을 정말 올바르게 해 가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해져서 욕심도 없어지고, 탐심도 없어지고, 진심도 잘 안내고 어린애처럼 되어 가지고 그렇게 순진하게 된다면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도인(道人)의 81행(行)이 있는데, 81행 가운데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치는 것입니다. 영아행이라 한 것은, 인자 철없는 한두 살 어린애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성경에도 ‘어린애처럼 되어야 천당에 갈 수가 있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진한 어린애처럼 그렇게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해진다면 그건 대단히 좋은 증상이고 그건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〇우리가 추구해야 할 삼매(三昧)는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바른 정신으로 바른 신심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해 나가야 더이상 의심이 커질라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라야 간절할 수 없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야 해. 그래 가지고 순일무잡해 가지고 나가면은 결국에는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오직 그 길이다.
그리고 참선 하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라 가지고,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서도 화두에 대한 바른 의심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따악 유지가 되어 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면은 그것은 바른 참선이 아니여. 설사 모든 세상을 훤히 알고 신통술이 나와도 그것은 정법이 아니다 그말이여.
〇‘바른 정(定)’이라 하는 것은 밥 먹을 때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지 않고, 종일 걷되 한 조각의 땅도 밟음이 없고, 종일 말하되 한마디 말도 한 바가 없어야, 그래야 그것이 진짜 삼매고 바른 정이야.
〇‘양반 못된 것이 장터에 가서 큰소리 치고, 개 못된 것이 들에 가서 짖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선방에 와서 자기가 잘난 체하고 큰소리 치고 남을 멸시하고 마구잡이 막 행동을 하고 한다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