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600/(501~525)2023. 4. 25. 13:45

 

 

(No.518)—1993년 11월 첫째일요법회 (73분)

 

(1) 약 43분.

 

(2) 약 30분.


(1)------------------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헌디  난봉상엽축풍비(亂峰霜葉逐風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계산갱호사양리(溪山更好斜陽裏)에  지대황혼월상귀(只待黃昏月上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헌데, 떨어진 해 가을빛이 산기슭에 가득찬데,
난봉상엽축풍비(亂峰霜葉逐風飛)로구나. 어지러운 봉아리에는 서리 맞은 이파리가 바람을 쫓아 나는구나.

계산갱호사양리(溪山更好斜陽裏)에, 시내 산에는 다시 기울은 해 속에, 석양(夕陽) 속에, 좋은 석양 속에,
지대황혼월상귀(只待黃昏月上歸)다. 다못 황혼(黃昏)에 달이 떠오른 것을 기다리드라.

요새 한참 삼천리 방방곡곡 산봉우리와 시내, 단풍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서 한참 찬란하게 가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가을에 그 울긋불긋한 단풍이 오전보다도 오후에 그 따가운 햇빛 속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찬란한 그 단풍으로 물들이고 장엄된 곳에 해가 지면 이윽고 밝은 달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람은 어피차 한번 태어나면 마침내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태어나 가지고 어려서 자라고, 소년기(少年期) · 청년기(靑年期)를 거쳐서 다 배울 것 배우고 익힐 것 익혀서 청년 · 장년기(壯年期)에 나아가서 자기에 역량과 기술을 십분 발휘하고 사십 · 오십 · 육십, 노년(老年)을 향하면서 마지막 자기 인생에 끝마무리를 멋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아무리 잘했어도 늙어가면서 끝을 야무지게 마무리짓지를 못하고 잘못하면, 젊어서 잘한 보람도 없고 일생 동안 애쓴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 ‘다 먹은 밥에 코 빠진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모든 제자들이 이마를 땅에다가 짓찧면서 완전히 실신 상태에 이르도록 너무너무 슬퍼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도 부처님의 사촌으로 부처님 성도(成道)하신 날 아란존자가 태어났고, 그래 가지고 마침내 출가해서 부처님의 시봉(侍奉)을 하게 됐는데 시봉한 사람으로서 더욱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했던 것입니다.

그때 한 노스님이 “그렇게 슬퍼만 할 게 아니라 시자로서 부처님 마지막 열반하시기 전에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여쭈어야 할 일이 있느니라” “무슨 말씀을 여쭐까요?”

“첫째는 모든 경전, 나중에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마당에 ‘모든 경전 앞에다가는 어떻게 시작을 할까요?’ 그것을 여쭙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 태자(太子)로 계실 때 부처님의 마부(馬夫)를 했고, 출가하실 때도 부처님의 말꼬삐를 잡고 모신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라고 하는 사람이 부처님이 출가하시니까 자기도 따라서 출가를 했는데, 평생 동안 자기가 부처님의 마부였다고 하는 것을 배경으로 그것을 코에다 걸고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마구잽이 행패를 부리고 오직 부처님 말씀만 쫌 듣고 일체 다른 사람 말은 듣지를 않고 제멋대로 구는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를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어떻게 대처를 할까요?’ 그걸 여쭤 보고,
셋째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넷째에 가서는 ‘무엇에 의지해서 닦아 갈까요?’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질문을 해라”

그래서 부처님께, (첫째) ‘경전 앞에는, 어떻게 경전 앞에 쓸까요?’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래 놓고 경전을 주욱 결집을 해라’ 그렇게 일러주시고.
(둘째)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에 대해서는 ‘묵빈대처(默檳對處)를 해라’ 묵빈대처라 하는 것은 ‘일체 상대를 하지 말라’ 그거거든. 잘하거나 못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말도 그 사람하고는 하지 말고 그렇게 상대를 해라 그랬어.

세 번째,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어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계위사(以戒爲師)하라, 계행(戒行)으로써 스승을 삼으라’
네 번째는 의지처(依支處), ‘무엇을 의지해서 공부를 할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네 가지 생각을 머무르는, 바르게 머무르는 관(觀)을 해라’

그런데 사렴주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몸뚱이[身]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외부 일을 요렇게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에다 받아들이는 것[受]과 또 일체 경계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心]과 또 이 몸과 받아들이는 것과 또 우리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거,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 이것이 법(法)이다 그 말이여. 제법(諸法)이라고도 그러고, 법이라 그러는데, 그 법.

그래서 ① 「몸뚱이[身]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고.
② 「받아들이는 것[受]은 괴로운 것[苦]이다」 저거는 ‘좋다, 나쁘다’ 척!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떤 사물을 대했을 때 딱 받아들이거든,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거거든.
③ 우리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마음[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하고.
④ 「이 세상에 모든 것[法]은 무아(無我)다」 아(我)라고 하는 주재(主宰)가 없는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이라 하는 것은—부처님 당시에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참선법(參禪法)이 그때 없었고, 그때는 모든 제자들에게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닦은 뒤에는 이 사렴주관을 통해서 정진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는데 그것이 차츰차츰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발전해서 성숙한 것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부정(不淨)하다」고 한 것은 중생들은 이 몸뚱이 속에 피와 오줌과 똥과 피고름 모다 그런 것이 가득차 있어서 아홉 구멍으로부터 아무리 씻고 닦고 향수를 발라도 금방 뀌역뀌역 기어나온다 그 말이여. 팔만사천 털구먹 땀구먹으로 나온 것이 다 오줌이요, 다 그게 다 똥물이다 그말이여.
며칠만 안 씻으면 거기서 쉰내 · 비린내 · 노랑내 · 구린내, 별별 냄새가 다 난 것을 보면 분명 이 몸뚱이 속에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틀림이 없고, 결국은—자기 어머니는 어린 자기 애기는 아무리 똥오줌을 싸서 뭉개도 더러운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럽지 아니한 것은 아니여—늙어가면서 점점 그 노쇠해 가면서 점점 그 추태(醜態)가 드러나게 되는 거고, 결국은 병이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기 마련인데, 숨이 끊어지자마자 10분도 못 가서 오장육부가 버글버글 버글버글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확실히 달관(達觀)을 해 버리면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질 것이 없고, 더군다나 남자가 여자를 볼 때에도 ‘더러운 것을 살짝 껍데기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에 그 마음이 동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인도나 중국에서는 공동묘지, 묘지에 거기는 풍장(風葬)이라 해서 시체를 땅에다 묻지도 않고 태우지도 않고 그냥 한데에다 이렇게 버려두는 그러한 그 장례법이 있는데, 그러면 모다 독수리나 새 매 그런 것들이 달라들어서 살은 다 뜯어먹기도 하고.
그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배가 고프면 가서 탁발(托鉢)을 해서 한 끼 먹고서 밤낮을 그 시체 옆에서 앉아서 그 모냥을 관(觀)하는 거여. 그러다 보면 확실히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하는 것을 깨닫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한 것을, 낱낱이 따로따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네 가지를 합해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러한 수행법이 부처님 당시에 원시불교 때 많은 수행승들이 그걸 해 왔다 그 말이여.
지금도 역시 남방에 가면 그런 그 사렴주관을—비파사나(vipassanā)라고 인도(印度) 말로 그러는데, 비파사나도 세월이 감에 따라서 차츰차츰 더 자상하고 구체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법이 개발되어서 지금까지도 전해 오고 있고 일부 스님네들이 거기 가서 배워 가지고 와서 한국에 와서 또 포교를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法)은 중생의 근기(根機)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개발되고 발전되어서 어떠한 근기의 중생도 다 이 정법(正法)과 인연을 맺어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하실 때에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사렴주관으로써 의지처를 삼으라」 하신 그러한 법문의 요지가 십선, 대승십선 중계(大乘十善重戒)를 받고 화두를 타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 바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최후에 교훈을 우리는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허고  송경팔만세(誦經八萬歲)하고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을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계율을 지키기를 삼천겁(三千劫)을 하고, 경을 외우기를 팔만세(八萬歲)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을, 밥 반 그릇 먹을 동안에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다. 단정히 앉어서 실상(實相)을 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부처님께서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는데, 어째서 ‘계 지키기를 삼천겁을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을 팔만세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반식경(半食頃) 동안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너무한 표현이 아니냐?

부처님께서 계율(戒律)을 지키고 경(經)을 외우라고 한 본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형식적으로 계율 지키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경을 외우면 공덕이 장하다 하니까 그저 경만을 주야로 읽고 여러 가지 경전을 많이 읽고 그러되, 경의 참뜻을 아지 못하고 공덕에만 떨어져서 어쨌던지 많이만 읽으면 좋다하는 거기에만 집착하기 때문에—정말 경을 외우는 참뜻과 계율을 가지라는 참뜻을 알고서 ‘이뭣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 참선한 것만 같지 못하다 그거거든.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조달(調達)이 제바달타(提婆達多)가 부처님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추셨는데 조달이는 30상을 갖췄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육만 장경을 다 외우고, 모든 계율을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엄격히 스스로도 지키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지키도록 권장을 했어.
부처님께서는 원칙적으로는 사시(巳時)에 공양(供養)을 한 번씩만 하되 나이가 많아서 병이 들거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배고픈 것을 너무 못 견디는 어린아이한테는 저녁에 약(藥)으로 조끔씩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허락을 하셨는데, 조달이는 ‘아무리 늙어서 병들거나, 아무리 어리더라도 하루 한 끼 이상은 안 된다’ 이렇게 엄격히 하거든. 그거 하나만 보더라도 어떠한 식으로 계율을 지키도록 했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그렇게 철저하게 제자들을 그렇게—자기가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거룩하고 훌륭하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선동하고 유혹해서 끌고 가고 그렇게 했지만, 결국은 조달(調達)이는 근본정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삿되어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마각(馬脚)이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사세(阿闍世) 태자를 시켜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가지고 부처님을 짓밟도록 그렇게 코끼리를 내몰게 했고, 부처님 행차하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바윗돌을 굴려서 부처님 다리를 다치게 했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현혹시켜서 끌고 가서 그런 대중을 파(破)하는 그런 죄를 범했고, 연화색 비구니를 주먹으로 쳐서 즉사하게 맨들었고, 손톱 속에다 독약을 묻혀 가지고 부처님 발에 엎드린 것처럼 해 가지고 부처님을 해코자했고 이런 오역무도(五逆無道)한 죄를 지어 가지고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한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율사(律師)다, 계행(戒行)이 청정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나를 갖다가 존경해라’ 이양(利養)을 받기 위해서 꾸며서 계율을 지키는 그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 올바르게 마음 씀과 말함과 행동을 바르게 갖는 것이고, 공부를 올바르게 하다 보면 제절로 살생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도둑질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모든 계율은 그 가운데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부처님께서는 80세를 일기(一期)로 이승을 하직을 하셔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중생의 세계에 마치 저 달이 호수에 비치듯이, 물 있는 곳마다 그 달이 비치듯이, 인연 따라서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투셨다가 또 인연이 다하니까 또 다시 그 그림자를 거두신 것이지, 참부처님은 오고가고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서 성도(成道)하셔 가지고 49년 동안 팔만대장경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80세 열반하신 그 부처님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잊지 않고 숭배하고 추모하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사찰마다 거룩한 상(像)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또 가정에도 신라 백제때는 고려 때는 가정에도 다 집집마다 다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역시 가정에 많은 분들이 불상(佛像)을 모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렇게 모시는 것은 ‘항상 우리집에 우리와 같이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투철한 신념을 항상 일깨우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죽어갔다고 해서 꼭 슬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못 인연 따라서 나타났다가 인연 따라서 사라진 것뿐이지 죽고 사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표현을 그렇게 할뿐이지,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분명히 있어 가지고 정말 우리를 기쁘게 했다가, 아프게 했다가, 슬프게 했다가 그러한 현상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예나 권리나 재산과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헌디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나무~아미타불~
조제화락진소식(鳥啼花落眞消息)을  지자희이설향수(只自熙怡說向誰)오
나무~아미타불~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헌디, 불법(佛法)이 유통해서 행해지는 것이 어찌 시대에 관계할까보냐. 시대에 관계하지 않는다.
‘정법시대다, 상법시대다, 말법시대다’ 해 가지고 정법시대(正法時代)에는 불법에 의지해서 깨달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사람이 있고. 깨달은 것으로써 법을 삼어.
상법시대(像法時代),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천 년 뒤에는 상법시대인데, 상법시대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경전을 찍어 내고, 탑을 세우고 하는 모다 그러한 것이 불법이고 그것을 열심히 성의껏 잘해야 불법을 잘 믿고 불법을 흥왕하게 맨든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 왔고,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투쟁견고(鬪諍堅固)시대여. 철저하게 도 닦은 사람도 드물고, 겨우 그저 상법시대에 그 끝으로 절이나 짓고, 불상이나 모시고, 탑이나 세우고 그렇게 하고. ‘그저 경을 읽고 열심히 염불하면 극락세계 간다’ 이렇게만 믿고 할 따름이지 정말 확철대오해서 부처님이나 조사처럼 된 분은 거의 구경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말법시대인데, 그러면 무엇을 주로 하냐 하면 투쟁견고시대여. 맨 싸움으로 일을 삼아. 승가(僧伽)라 하는 말은 화합중(和合衆)이란 말인데, 화합해서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맨 싸움 파벌싸움 싸움을 한다.
이러한 말이 옛날부터서 『멸의경(滅義經)』 같은 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이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이구나!’ 이렇게 수긍이 가나, 정말 참불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법시대라고 해서 깨달을 수 있고, 말법시대라고 해서 정법은 없어져 버리고 아무리 닦어 봤자 깨달을 수 없다’고 한 생각은 참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의 표현이 아니여.

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이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또 부정불구(不淨不垢)인데, 어찌 시대에 따라서 그것이 변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우리의 생각이 ‘아! 말세니까 말세에는 투쟁만 견고해지고 싸움만 모다 하고 닦어 봤자 견성성불도 못한다’ 그러한 말에 현혹되어 가지고 수행을 그러한 생각을 속에다 품고서 수행을 한 것과,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하는 것과는 영판 천지 차이(天地差異)가 있는 것이여.

부처님 당시에도 새는 숲속에서 노래하고, 꽃은 봄에 꽃은 피었다가 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었을 것입니다.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는 바로 거기에 진리에 참소식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자희이설향수(只自熙怡說向誰)오. ‘다못 이 새 노래하고 꽃이 피고 지고 하는 이 속에 참소식을[鳥啼花落眞消息] 다못 내 스스로 즐길지언정 누구를 향해서 이 도리를 말할까’ 하는 고조사(古祖師)에 게송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정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기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그 법에 의지해서 항상 열심히 닦아 가는 사람은 더욱 다행한 일이고.
‘이것밖에는 다시는 우리가 눈을 돌리고 마음을 쓸 곳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 받아 나기 어려운, 태어나기 어려운 몸을 받아 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그 정법에 의해서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보다도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숨이 지고 세세생생에 이 법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오직 이 한 일을 향해서 나에 모든 것을 바치리라’ 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해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는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은 그 사람에게는 따 논 당상(堂上)이여. 틀림없이 그 사람에게는 견성성불이 약속되어진 것입니다.(처음~43분15초)





(2)------------------

「삼천 겁(劫)을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팔만장경을 다 외운 것보다도 밥 반 그릇 먹은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이 더 낫다」고 한 그 말씀을 깊이 새겨서 음미를 해 본다면 우리는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참선을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 ‘정말 내가 이 말세에 어떻게 해서, 전생(前生)에 무슨 선업(善業)을 지었기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을까’ 세상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거나 말거나, 집안에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럴수록에 더 열심히 ‘이뭣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한 국토에 태어난 거, 함께 태어난 것은 일천 겁(劫) 동안을 함께 선근(善根)을 심은 결과고, 하루 동안 같이 어디를 동행을 하는 것은 이천 겁 동안을 같이 선근을 심은 그 결과고, 하룻밤을 같이 자는 것은 삼천 겁 동안을 선근을 같이 심은 인연이고, 한 고을에 같이 동족으로 태어난 것은 사천 겁 동안의 인연이고, 한 마을에 함께 살게 된 것은 오천 겁의 인연이고, 하룻밤을 한 벼개를 베고 동침을 하는 것은 육천 겁의 인연이고, 한 집안에서 한 식구로 같이 살게 된 것은 칠천 겁 인연이고, 부부간으로 사는 것은 팔천 겁 인연이고, 형제간으로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인연은 구천 겁 인연이다. 부모나 부모자식 간 또는 한 스님과 상좌로 태어난 것은 십천 겁, 만 겁 동안에 거쳐서 함께 선근을 심은 인연으로 그렇게 된다」 하셨어.
그러니 우리가 한 가정에 부부나 형제나 부모자식, 부부간 이렇게 태어난 인연이 얼마나 지중(至重)한가를 알 수가 있고, 이렇게 한 법당에서 사부대중이 같이 이렇게 법문을 듣는 것은 몇억천 겁 인연이다 그 말이여.

그런 깊은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같이 만났다면 우리는 그런 깊은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든지 좋게 생각하고, 다 풀어버리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내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풀어버림으로 해서 또 상대방도 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집안에도 화합 평화가 오고, 온 직장에도 서로 화합이 통하고, 사찰에도 스님네끼리 노소 · 선배 · 후배가 서로서로 다 화합하고, 신도들끼리도 서로 다 화합을 하고 스님네와 신도들까지라도 서로 마음과 마음이 합해져서 함께 불법을 믿고 닦아가는 좋은 인연으로 승화(昇華)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잡비유경(雜譬喩經)』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뱀이,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을 하기를 “내가 응당 내가 더 위고, 내가 더 크다” 그러니까 꼬리가 머리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더 크고, 내가 더 우선이고, 내가 더 어른이다”

머리가 “나는 귀가 있어서 뭔 소리를 들을 줄도 알고, 눈이 있어서 무엇을 볼 줄도 알고, 입이 있어서 모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또 어디를 갈 때는 항상 내가 앞서가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그러지도 못하고 하니, 너는 나를 의지해서 살아야 하고 나를 따라댕겨야지, 니가 무슨 나보다 더 크고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냐”
꼬리가 말하기를, “니가 생각을 잘못한 거다. 내가 너를 앞세우고 가는 것이지 내가 너를 따라간 것이 아니여. 내가 너를 가도록 해 주니까 니가 가지, 내가 만약 안 갈라고 마음을 먹고 딱! 마음을 먹으면 너는 못 가. 그 니가 멋대로 간 것 같지마는 내 허락이 있어야 가지, 내 허락 없이는 못 가니까 내가 더 어른이지 니가 더 어른이냐. 내가 한번 보여 줄 테니까 봐라“ 나무를 갖다가 칭칭 틀어 감고 ”어디 가보고 싶으면 가봐라”

3일 동안을 나무 틀어 감은 것을 풀어주지 아니하니까 뱀이 꼼짝을 못해. 배가 고파도 갈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결국은 개구리 한 마리도 못 잡어먹으니까 배가 고프단 말이여.
그래서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나 놔라. 날 풀어줘. 니 니가 정말 니가 크다. 니가 어른이니까 이거 좀 꼬리를 풀어 줘라. 풀어다오” 하니까, 꼬리가 그 말을 듣고서 즉시로 떠억 풀어 주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그래 내가 니 말이 옳다고 했으니 인자 어디 갈 때도 니가 앞서가라, 내가 뒤따라가마”

꼬리란 놈이 앞서 가지고 뿍뿍뿍뿍뿍 기어간다 그 말이여. 머리는 인제 꼬리 따라가는 대로 끌려서 꺼꿀로 가는데, 몇 걸음 못 가서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뱀이 결국은 죽었다 그 말이거든.
어리석은 중생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가 잘났다고 그러고, 인아상(人我相)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을 비유해서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도처가 싸움입니다. 정부도 정치도 여당 야당이 싸우고, 회사도 노사분규가 일어나서 싸우고, 가정도 그저 서로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고, 부부간에도 싸우고 도대체가—‘비 온 끝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 있어서 싸운 끝에 정이 더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 싸움이 한 번 두 번이라야지 사사건건이 의견 충돌해 가지고 되는 일이 없다면 그 문제가 있는 것이고.
여당 야당도 서로 건설적인 안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그렇게 하다가 좋은 쪽으로 가결을 봐 가지고 잘해 나기기 위한 것은 참 좋지마는, 싸움을 위한 싸움은 이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부간에도 처음에는 다 좋아서 결혼을 했겠지마는, 살다 보면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 맘대로 할라고 그러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그러다가 보면 싸움이 습관이 되고, 싸움 안 하면 밥맛이 없어.
부부간에 싸움은 속전속결, 간단하게 몇 마디하고서 서로 상대방의 말이 옳으면 ‘아! 당신 말이 옳소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되어야지, 그 싸움이 장기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냉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서로 부부간이 아주 지긋지긋하게 뵈기도 싫어지고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되고, 그 불행이 자녀들한테로 떨어지게 된다면, 뱀이 머리하고 꼬리가 서로 싸우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 말이여.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가정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 한번만 착! 돌이키고 보면 ‘하! 허허’ 웃고 말아 버릴 것이고, 상대방의 단점을 들어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아 직장에 나가서 여러 가지 복잡한데 하루 종일 일하고 오니 얼마나 피곤할까’ 좋게 생각하고, ‘처자를 위해서 저 애를 쓴다’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집에서 모다 살림하니라고 애쓴다‘고 생각하고, ‘어디 답답한데 어디 좀 나가 보라’고 하기도 하고.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그렇게 생각해서 서로서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보고보고 또 볼수록 더욱 좋지, 왜 그것이 지긋지긋한 웬수로 보일 것이냐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합을 해야 부모에게도 효도를 할 수가 있고,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되는 법이거든.

부모에게 불효(不孝)한 사람은 불효한 자식을 동시에 맨들게 돼요. 그 어린 자식이 부모한테 불효한 것을 봤기 때문에, 어려서 밤낮으로 그걸 봤기 때문에 그놈이 커서 오죽 불효를 잘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배운 것이 그것밖인데. 뭐라고 그런 법이 아니라고 하면 ‘엄마아빠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했냐?’고 대든 통에 꼼짝을 못하거든.
그래서 가정이 부부간에 화목을 해야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자기도 효자 효녀 효부를 만나게 되는 것이여. 그렇게 될 때 그 집안에 복(福)이 들어온 것이지, 집안이 화목을 못하고 무슨 복이 들어올 것이냐 그 말이여. 들어올려고 한 복(福)도 다 머리를 돌리고 다른 집으로 가 버릴 거다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목을 할려면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만심(我慢心)을 버려야 되거든. 내 마음을 비우게 돼, 그럼.
억지로 거 항아리 속에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은 자꾸 꺼꿀로 들고 흔들고 퍼내 버리면 비어지는데, 우리의 자존심은 병원에 가서 가슴을 열고 해부를 해도 소용이 없고, 뭔 독한 약을 먹고 헹궈 낼 수도 없고, 무슨 수가 있냐 하면 자꾸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하면 비워지는 거여, 이게. 다른 도리가 없어.
머우대로 쑤셔내도 그것은 안 없어지고 별짓을 다 해 봤자 안 비워져. 창자는 비워지는데 우리의 마음은 안 비워지거든.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심(貪心)도 없어지고, 썽내는 마음도 없어지고, 어리석은 마음도 없어지고 자꾸 맑아져서 결국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면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국토가 극락세계로 변하는 것이고, 정법시대가 되는 거여.
누구한테 미룰 일이 아녀, 이것은. 스님네한테 미룰 일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한테 이걸 미룰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하거든. 이 세계의 주인은 낱낱이 자기여. 낱낱이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거든.

하늘에 뜬 달이 그건 누구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는 사람이 주인인 거여. 해도 역시 그렇고 별도 그렇고, 요 허공에 모든 공기도 자기가 소유거든. 자기가 그것을 좋은 달로 맨들고, 좋은 공기로 맨들고.
산도 소유권은 국가가 소유권이 되는 산도 있고 개인이 소유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가다가 그 산에 가면은 그 산이 자기의 소유고, 흐르는 시냇물이 흘러가는 물이 주인이 있을까마는 자기가 그 시냇물을 보고 시냇물에 손을 씻고 발을 씻으면은 그 시냇물이 자기 소유여. 약수터에서 풍풍 쏟아지는 물이 임자가 없겠지마는, 그래도 그 물을 먹은 사람이 그이가 주인이라 그 말이여.

기차나, 자동차나, 비행기나, 도로나 모든 것이 자기가 그것을 보고 자기가 그것을 수용을 하는 동안에는, 돈을 내고 비행기를 타더라도 그 비행기는 자기가 타는 동안에는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걸어가면 그 도로가 자기의 도로거든. 우주 법계가 다 자기가 소유여.
우주 법계를 자기가 소유할려면은 ‘이것은 내 것이다’고 한 생각을 버리면은 제절로 다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소유로 되는 거여. 제일 부자가 되는 길은 어쨌든지 긁어 모아 가지고 몇백 억 재산가가 되고 갑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놔 버린 것이 법계(法界)에 대주인공(大主人公)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불법(佛法)에 철저하게 불법에 귀의(歸依)해서 이 최상승법을 닦으면 법률도 사실은 복잡한 법률도 필요 없어. 형무소도 필요가 없고, 큰 재산도 그렇게 필요가 없고, 명예 권리도 그렇게 필요가 없어.
뭐 요새 고속도로에서 휴지를 버리면 뭐 3만원, 가래침 뱉으면 얼마, 담배꽁초 버리면 얼마, 지금 법이 오직 사람들이 지각이 없어 가지고 그렇게 하니까 그러한 법까지 만들겠습니까. 다 담배꽁초 버린 사람이 없고, 휴지를 버린 사람이 없다면 뭐 할 일이 없어서 그런 법을 맨들겄냐 그 말이여. 그 법을 맨들게 한 사람이 바로 국민들이다 그거거든.
국민들이 다 자각을 하고 정말 정법을 믿고 전부 ‘이뭣고?’를 해서 자기의 삼업(三業)을 청정히 한다면 법률은 점점 간소화 될 것이다 그 말이여. 뭐 순경도 그렇게 많이 필요도 없고, 순경 경찰 안 하고 다른 생산직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한 마음 돌이켜서 우주 법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고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으로 변하는 것이여. 온 사회가 살기 좋고 간 곳마다 전부가 다 한집안 식구요, 간 곳마다 도반(道伴)이요, 간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보살화현(菩薩化現)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거거든. 이것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그것이 가능한 것이여.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중생심을 발동을 하고, 탐욕심(貪欲心) 진심(瞋心)을 발동을 하면 갈수록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가정이고 직장이고 간 곳마다 아귀(餓鬼)와 나찰귀신(羅刹鬼神)이 득실거릴 거다 그 말이여.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는 참 좋은 사람이고, 참 법이 없어도 살 그런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모다 못되어 갖고 이 세상이 이렇게 된다’ 생각하거든.
다 ‘자기가 나쁜 놈’이라고 한 사람은 술이나 먹으면 그런 소리할까, 바른 정신 가지고서는 자기 나쁜 놈이라고 생각 안 해. 술을 잔뜩 먹으면 울면서 ‘야 내가 나쁜 놈이여, 내가 나쁜 놈이여’ 술 깨면 ‘자네가 나뻐’ 이러거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술도 가끔은 그 필요한갑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이라는, 술 잔뜩 취해 가지고 부처님 계신 데 와 가지고 “나 스님이 되겄다”고 한 바라문이 와서, 부처님이 당장 제자를 시켜서 머리를 깎게 하고 그 입고 온 옷을 벳기고 가사(袈裟)를 딱 수(垂)해서 저 제일 말석에다 딱 앉혀 놓으니까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했기 때문에 아무 정신없이 픽 쓸어져서 잤다 그 말이여.
실컨 자고 일어나더니 눈을 떠서 자기 옷을 보더니 가사(袈裟)가 입혀져 갖고, 머리를 만져보니까 홀랑 깎아졌다 그 말이여. “나 중노릇 안 한다”고, “내 옷 내놓으라”고 해 가지고, 옷을 내주니까 그놈 입고 똥이 빠지게 도망쳤다 그 말이여.
그래 제자가 부처님께 “왜 그 술 취한 놈을 갖다가 머리를 깎아 갖고 저렇게 도망가게 만드셨습니까?” 항의를 했거든.
“그놈이 술 취한 그 시간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어 보겠느냐”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에는 누가 중이 된다고 하면은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해 가지고 ’이 사람이 확실히 출가해서 도 닦을 발심(發心)을 했냐 안 했느냐, 또 눈동자는 바로 백혔는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과연 이 사람은 출가했으면 좋겠다‘ 할 때, 그러면 행자(行者)로 받아들이고 꽤 엄격하게 그렇게 했었는데.
이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 법문을 경전에서 보고부터서는 누구든지 오겠다 하면 ‘그래 있어 봐라’ 있으면 한 일 년간 행자 생활을 하고—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소지도 하고 빨래하고, 대중스님네 시봉(侍奉)도 하고 운력(運力)도 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일을 다 겪으면서 일 년 이상을 참고 대중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않고 하면 그때 계(戒)를 주어 받도록 하고, 그 안에 참지 못하고 간다는 사람은 ‘그래 가거라. 가더라도 니가 그동안 절에 있는 그 공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또 가겠단 사람 또 억지로 붙잡지 않죠.

여러분들도 ‘내가 말세다, 여자다, 늙었다, 이렇게 몸이 아프다’ 그러한 것을 핑계 대고 참선(參禪)을 안 할려고 하지 말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만이라도 탁! 앉아서 하면 그 공덕(功德)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씨를 심어 논 것이거든, 그게.
그래서 그동안에 염불을 하신 분, 그동안에 경전을 외우고 천수경을 외우신 분들도 그거 한 만큼 공덕은 다 없어지지 않고 앞으로 참선하는 데 좋은 기초가 되고 밑거름이 될 것이니까, ’그동안에 했던 거 아까워서 이뭣고? 못 한다‘ 그러시지 말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술 취한 바라문이 ’술 취한 동안에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그 공덕으로 언젠가는 출가해서 성불을 할 것이다‘고 부처님께서는 수기(授記)를 주셨어. 하물며 멀쩡한 맑은 정신으로 불법(佛法)을 의지해서 수행을 한 공덕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산승(山僧)에 이런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셔. 그렇게 된다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정에 들어가면 지긋지긋하다’고, ‘마누라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안 들어간다’고, 왜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어서 집으로, 직장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쏜살같이 돌아오도록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억지로 소지를 해 놓고, 꽃을 갖다 꽂아 놓고, 구석구석이 카튼에다가 향수를 뿌려 놓고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보만 고치면 되거든. 마음보만 타악! 고쳐. 편안하거든. 자기도 편안하고 사람도 편안하면 그거야 돈 하나 안 들고도 가정을 편안하고 좋은 보금자리로 변하는 방법이 바로 그거거든.

책임은 각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은 다 불보살(佛菩薩) 화현(化現)이다’ 자기한테 잘해 줄 때만 ‘나 참 내가 시집 잘 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못해 줄 때 ‘야! 저 사람이, 불보살 화현이 나를 제도할려고 일부러 저런 역행법(逆行法)을 쓰는구나’ 그렇게도 생각하면서 항상 자기를 고칠라고 노력을 해야 되거든.

남을 고칠라고 자기가, 꽁지가 지가 어른이라고 내다가 불구덩이, 물구덩이 빠질라고 하지 말고, 항상 꼬리는 머리를 애껴주고, 머리는 꽁지를 억지로 억압할라 하지 말고, 서로 꽁지 없이 머리가 어떻게 존재하며, 머리 없이 어떻게 꽁지가 존재하냐 그 말이여. 내나 한 몸뚱이인 것을.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먹은 것이 그것이 바로 대승 사상(大乘思想)이거든, 대승! 소승적인 사상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자기 일신(一身)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차라리 오직하면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대승심은 자기도 좋고 남도 좋고 항상 남을 위하고,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극기추상(克己秋霜)이요 대인춘풍(對人春風)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환영을 할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모다 환희심을 낼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다 삐뚤어진 마음도 바로잡아 질 것이다 그거거든.

오늘이 입동(入冬)입니다. 오늘부터 이 겨울 계절이 시작된 날입니다. 앞으로 차츰차츰 날씨가 추워질 것이고, 눈이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 테니 모다 감기에 조심하시고.
‘모든 병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셨으니 마음보를 잘 쓰고 항상 흐뭇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살고, 다른 사람도 마음도 기쁘게 해 주고, 감사한 마음이 나도록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대한다면 우리의 질병도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다시 또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반(半)에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해서 우리는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결정코 금생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43분16초~1시간12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 /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여쭌 4가지 질문 ①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경전을 결집할 때 모든 경전 첫머리에 어떠한 말을 써야 합니까? ②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육군비구(六群比丘)나 차익(車匿)과 같이 악한 비구와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합니까? ③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까요? ④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를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비파사나(vipassanā).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사렴주관이 차츰차츰 발전해서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성숙하였고,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게송)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 /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 /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 /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

『잡비유경(雜譬喩經)』에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다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었다’라는 비유의 법문 /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그럴려면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의 출가 일화 /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시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 극기추상(克己秋霜) 대인춘풍(對人春風),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3. 4. 24. 21:27

 

 

(세등선원No.44)—계해년 하안거 결제 법어(83.04.17.음) (47분)


(1) 약 29분.

 

(2) 약 18분.


(1)------------------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나무~아미타불~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다.
은은히 다리가 들녘에 들 안개 속에 놓여져 있고, 강물에 잠겼다 나타났다 하는 돌이 놓여져 있는 서쪽 강변에서 고기잡이 배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무엇을 묻느냐 하면,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복사꽃이 종일토록 그 강물에 떨어져서 흐름을 따라서, 흐르는 물을 따라서 복사꽃이 흐르는데, 신선(神仙)이 사는 고을은,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이 맑은 강 시냇가 어느 곳에 있느냐?

무릉도원에서 그 도원(桃源)에 피어 있든 복숭아꽃이 떨어져 가지고 이렇게 강물을 따라서 계속 이렇게 흘르고 있는데, 반드시 여기에는 신선이 사는 고을이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신선 사는 곳이 어디가 있느냐 하고 어부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깨달은 경지를, 확철대오한 경지를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偈頌)입니다. 복숭아꽃이 떨어져서 그 흐르는 물에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무릉도원이 이 강변 가 어디엔가는 있을 텐데 어디가 있느냐.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여름 안거(安居)가 시작되는 4월 17일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오뉴월 삼복더위 속에서도 더위를 이기고, 나아가서 그 더위를 잊어버리고 정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너무 자상하게 잘 들었습니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그러는데 참선을 할 때 있어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거각을 하는데, 힘을 너무 써.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그것이 몸뚱이를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가행정진을 삼고, 잠을 안 잔다던지 말을 않는다던지 밥을 굶는다던지 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서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억지로 앉아서 배긴다던지, 이것은 그 육체를 조복(調伏) 받기 위한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진짜 참선은 육체를 억지로 억압을 하고 육체를 못살게 구는 것이 참정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일단 육체를 조복 받는 그러한 기간이 필요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서 제대로 정진이 잡혀가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여. 선지식의 법문을 듣지 아니하면 평생토록 공부에 바른 의관(疑觀)을 잡는 법을 몰라서 그저 어거지로 몸뚱이만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데, 그러한 정진은 지나치면은 병(病)만을 얻게 만들고 도(道)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늘 이 부처님 말씀대로 다른 도반(道伴)들보다 몇십 배를 애를 쓰고 정진을 해도 마침내 도를 얻지를 못하니까, 퇴타심(退墮心)이 나 가지고 퇴속(退俗)을 할려고 결심을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래 부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불러다 놓고, “니가 왜 퇴속을 할려고 그러느냐?”
“저로서는 목숨을 바쳐서 그렇게 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제 출가 이래로 계속해서 했지만, 다른 도반들은 모다 깨달라서 성과(聖果)를 얻는데 저는 도무지 소식이 없으니 저는 도(道)에 인연이 없는가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럴 바에는 속가로 내려가서 부모 봉양(奉養)하고 속가에서 살면서 불법을 그저 믿고 살겠습니다”

“좋다. 내가 니 어째서 도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을 말해 주리라.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슨 업(業)을 삼았느냐? 무슨 직업을 가졌느냐?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엇을 제일 좋아하고 했느냐?” 그걸 물으셨습니다.
“거문고를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탑니다”

“그래! 그러면은 그 거문고를 탈 때에 첫째, 그 줄을 고르는데, 그 줄을 너무 긴(緊)하게 졸라 매면 어떻게 되느냐?”
“자칫하면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드라도 소리가 너무 강하게 매면 제소리가 안 들립니다“

”그러면 끊어질까 두려워서 너무 느슨하게 매면 어쩠드냐?“
”줄이 끊어지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너무 느슨하게 매면 제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그것 보아라. 참선하는 데 있어서도 해태(懈怠)를 부리고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도를 이루지 못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급한 마음을 가지고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지나치게 힘을 써도 거문고 줄을 너무 강하게 맨 거와 같이, 그것도 도를 이루지를 못하고 거문고 줄이 끊어지듯이 몸에 병만 쳐지고 도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라“
하! 그 말씀을 듣고서 그때부터서 참 중도(中道)를 지켜서 수행을 해 가는데 머지않아서 확철대오를 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이러한 말씀은 대단히 좋은 귀감(龜鑑)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럭저럭 병이 날까 봐서 어제에나 오늘이나 마냥 그저 정진을 하는데 시지부지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자기만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그 육체를 갖다가 억제를 하고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지나치게 들볶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 그러한 자세도 지혜롭지 못한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팔도에서 다른 권속 다른 혈통이 모여 가지고 석 달 동안을 같이 산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불법을 믿는 목적이 같은 도반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비교적 잘 대중 화합이 이루어지지만, 그 가운데 혹 괴각(乖角)이 하나 둘은 있을 수가 있어서, 특수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회상(會上)을 가던지 그러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잘 대중이 대처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제자로 핀돌라[賓頭盧(빈두로)]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참 수행을 잘해서 성과(聖果)를 이뤘습니다.
그리고서 ‘내가 이렇게 성과(聖果)를 이루게 된 것은 첫째, 나를 낳아 주신 부모와 나를 길러준 나에 고향의 그 은혜다’ 이리 생각을 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 가지고 부모와 형제와 일가친척에도 법을 설해 주고, 또 마을 사람들 고향 사람들에게도 이 불법(佛法)의 종자를 심어 줘야 되겠다’ 이리 생각하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그 고향은 코삼비라고 하는 지방인데, 그 항하(恒河), 간지스 강(Ganges江)이 흘르고 있는 강변입니다.
이 모다 강물은 맑고 강변에는 야자수 나무가 늘어서서 그 서늘한 그늘이 져서 참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은 그러한 야자수 숲 아래 떠~억 앉아서 정진을 하며, 또 졸리면 포행도 하고, 그러다 때가 되면 걸식도 하고 이렇게 해서 야자수 나무에 쉬어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그때 그 지방에 성주 우다냐 왕과 그 왕비가 많은 모다 궁녀들을 거느리고 그 강가에 나와서 소풍을 하러 나왔었습니다.

그래 왕과 왕비는 여러 아름다운 궁녀들로 하여금 거문고도 타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춤도 추게 하고, 그러면서 한바탕 즐기다가 왕이 좀 피로했던지 그 서늘한 데에 좀 한숨을 낮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왕비와 궁녀들이 그 왕이 잠이 드니까 무료해서 자기네들도 그 강가에 거닐면서 놀다가, 보니까 그 야자수 그늘 밑에 참 성스럽게 생긴 한 수행인이 떠억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가까이 가서 보니까 너무너무 인물도 잘생기고, 그 얼굴과 몸매에는 너무너무 그 수행인으로서 성스러운 그 고상한 품격이 풍기니까, 그 앞에 가서 절을 하고서 “우리에게 좋은 법을 설해 주십시요” 이렇게 청을 했습니다.
그래 그 핀돌라 스님이 그 왕비와 궁녀들을 향해서 여러 가지 설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게 왕비와 궁녀들은 그 설하신 법문이 너무너무 훌륭해서 거기에서 법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있노라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 우다냐 왕은 눈을 떠서 보니, 자기 옆에 모다 있을 왕비와 궁녀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다 보니까 야자수 나무 그늘 밑에서 그 왕비와 궁녀들이 어떤 한가운데 스님 한 분을 놓고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질투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자마자 “명색이 수행한다는 놈이 이쁜 여자들을 모여 놓고 잡담이나 하고 희희닥거리고 있다”고, “네깐 놈이 무슨 수행을 하는 놈이냐?”고, 칼을 빼 가지고는 쳐들어서 한칼에 쳐죽일 듯이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핀돌라 스님은 눈을 따악 감고서 조끔도 동요를 하지 안 했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을 내지도 않고,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왕도 겁이 나 가지고 그 들었던 칼을 후려치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는 그 근처에 마치 개미가 그 집을 짓고 수천 마리 개미들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을 해 가지고 그 개미집을 파다가 그 핀돌라 스님 얼굴에다 갖다 개미와 개미집을 압량해서 갖다가 퍼붓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개미들이 얼굴로, 목으로, 품속으로, 그냥 전신으로 개미가 버글버글 하면서 물고 뜯고 그래도, 그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 우다냐 왕이 참 감복을 해 가지고 무릎을 꿇고서 참회(懺悔)를 했습니다.
그런 뒤로 그 우다냐 왕은 그 핀돌라 스님을 자주 찾아 뵈웁고 법문도 듣고 여러 가지 참 지도를 받고 해서 그 핀돌라 스님의 정진력을 통한 인욕행(忍辱行)과 그 자비(慈悲)를 보이심으로 해서 그 왕실을 중심해서 이 정법을 갖다가 크게 선양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나타난 한 일화(逸話)지만,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가 있느냐?

대중 가운데에 특별한 성격을 가진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어서, 대중스님네 공부해 나가는 데 또는 생활해 나가는 데 지장을 줄 만한 일이 있다 하드라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인욕(忍辱)을 하고 자기를 반성하고,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발심(發心)을 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그러한 괴각이나 그러한 성격을 가진 분이 조끔도 대중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경책(警策)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다냐 왕 그 포악(暴惡)한 언행이 결국은 핀돌라 스님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펴게 하는 좋은 계기를 맨들어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의 육근문두(六根門頭)에 항시 호시탐탐(虎視耽耽) 침입해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이 한 나라를 침범할 때에 덮어놓고 아무때나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안에 어떠한 헛점이 있을 때에, 그 헛점을 틈타서 침범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 나라가 상하(上下)가 전부 임금과 대신과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를 물샐틈없이 잘 지키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외적(外敵)은 침범해 올 수도 없고, 어떤 미친 마음을 가진 외적이 침범해 들어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패배를 하고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안에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일신의 영달(榮達)을 생각하고, 밤낮 당파 싸움만 하고 국가와 민족을 애끼는 마음이 없이 그렇게 되면, 몇해 전에 자유 월남(自由越南)처럼 그렇게 되어 버리면은 아무리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가 가서 그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싸워 주고 무기를 대준다 하드라도, 그 나라는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하는 사람도 첫째, 자기 마음 안에 외적(外敵)이 침범하기 좋은 그러한 상태가 되어 있으면 외적은 육근(六根)을 통해서 언제라도 침범해 들어오는 것입니다.(처음~29분11초)





(2)------------------

부처님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을 하시기를 “한 나무토막이 저 강(江) 상류에서 흘러내려 갈 때에 중간에 걸리지 않고, 또 양 강변에 걸리지 않고, 또 그 자체가 중간에 썩어버리지 않고서 계속 흘르기만 하면 그 나무토막은 마침내 바다에 도달하고 만다”

이 말씀은 수행하는 사람이 중간에 공부를 중단하지를 않고, 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나 오욕락(五欲樂)에 걸리지 아니하고, 또 자기 자체적으로 퇴타(退墮)하지 아니하고서 계속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공부를 하면, 반드시 깨달음의 바다에 도달한다고 하는 비유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과 바른 정신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깨달음을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선방에 다녀도 종래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고, 고민을 하는 그런 수행이나 그래 가지고 마침내는 퇴타해 가지고 공부를 포기를 하는 그러한 수행자가 있다면 그것은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항시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믿지를 못했거나 만나지를 못했을 것이고, 둘째는 설사 선지식을 만났다 하드라도,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부족해서 그렁저렁 정진을 했거나, 이러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오래가도 3년 아니면 10년이면 기어코 지혜의 눈을 뜨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과거 이미 무량겁(無量劫)이 지내갔고, 또 앞으로 무량겁토록 앞으로 우리 앞에 장래에도 무량겁이 있지만 언제나 그 한 생각이 흘러서 무량겁이 되었고, 앞으로 돌아올 무량겁도 언제나 그 기본 단위는 ‘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이고, 언제나 한 생각—앉아서 한 생각, 서서 한 생각, 밥 먹을 때 한 생각, 똥 눌 때의 한 생각, 입선 · 방선 · 소지 · 세수 이 그때 그때의 그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만을 단속을 하면, 앉아서도 상관이 없고 서서도 상관이 없고 누워서도 상관이 없고, 전혀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있느냐, 못하고 있느냐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생각만을, 언제나 한 생각이여. 하루 열두 시간, 스물네 시간도 결국은 1초 1초가 모여서 24시간도 되고, 1초 1초가 모여서 한 달도 되고, 석 달도 되고, 10년도 되고, 100년도 되기 때문에 그 1초 1초를 잘 단속을 해 나가면 100년도 단속을 잘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정진을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하고, 자기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해.
한 생각 단속을 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인이여. 한 생각 잘 단속하면 그 가운데 계율도 지켜지게 되고, 그 가운데에 모든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그 가운데 다 갖춰지는 것이여.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이요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방능정처사바하(方能靜處薩婆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법불원찰나간(無法不圓刹那間), 찰나간(刹那間)을 단속을 잘하면, 한 법(法)도 원만(圓滿)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 만법(萬法)이 다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 말이여.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여. 찰나, 찰나를 잘 단속해 버리면 어떠한 죄라도 다 소멸치 못할 죄가 없더라.
한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일만 재앙이 거기서 일어나고, 일만 죄가 거기서 또 일어나고, 한 생각 단속하면 천하 없는 큰 죄도 찰나간에 소멸이 되어 버린다 그 말이여.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눈앞에 모든 일을 헤아리되 한 법도 없음이요.
어떻게 하는 것이 눈앞에 모든 법을 헤아려서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느냐?
좋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궂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속상하는 일을 보아도 ‘이뭣고?’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이뭣고?’ 하는 사람은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타~악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거기에 따악 머무르도록.
숨을 들어마셔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이 약간 볼록해지고, 차츰차츰 볼록해지면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딱 정지를 해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조(觀照)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내쉰단 말이여. 숨을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등허리에 등허리 쪽으로 홀쪽해지도록.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실 때에도 아까 들었던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의 여운이 들어마시면서도 조옥 유지가 되도록, 그래 가지고 숨을 정지하는 그 시간에도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따악 그때까지도 고대로 있도록 한단 말이여. 그다음에 또 숨을 조용허니 내쉬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이뭣고?’를 한다 그 말씀이여. 그러면서 숨은 차츰차츰차츰 숨은 나가는데 따라서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래서 숨쉬는 것과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과 화두를 드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처음으로 하는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고 이렇게 화두를 들지만, 한 달 두 달 이렇게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그때마다 매번 화두를 들지 안 해도 괜찮아요. 한 서너번 쉬고 나서 또 화두를 한번씩 들고 이래도 되고.
화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들어져 있으면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괜찮은 거여.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면은 호흡을 열 번 스무 번 할 때까지도 화두 한번 드는 것으로써 조옥~ 고대로 그 의심이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해 가면 되는 거여. 그 의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석 달 동안 하루같이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제절로 대중은 화합이 될 것이고, 모든 장애는 일어날 까닭이 없는 거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안정이 되어서 하루하루 지내가는 것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보람을 느끼고, 법에 기쁨이 항시 가슴속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소화도 잘 될 것이니 몸도 건강하게 될 것이고, 호흡을 잘해 나가니 무슨 상기(上氣)가 거기에 걸릴 것이냐 그 말이여.


오늘은 여름 결제와 아울러서 또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은 오늘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각기 가정에서 이 백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시고, 여기에서 정진하는 스님네와 ‘같이 결제(結制)를 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정에서도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일이 정 바쁘더라도 최소한 30분씩이라도 꼭 좌선(坐禪)을 하셔서 석 달 동안을 ‘백일기도 겸 결제를 했다’ 이리 생각을 하고 정성스럽게 경건한 마음으로 지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되도록 축원(祝願)을 합니다. (29분12초~46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 /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 정진은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지혜로운 수행, 거문고 타는 것의 비유 / 핀돌라 스님의 인욕행 /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더라도 인욕(忍辱)하고 오히려 발심(發心)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아라.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 한 생각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
(게송)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 /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01~425)2023. 4. 24. 10:10

(No.425)—1990년 9월 첫째 일요법회(화두·불명·십선계 법회) (80분)

 

(1) 약 40분.

 

(2) 약 40분.


(1)------------------

<육사청(六師請)>

경청 석가모니불 예위화상아사리(敬請 釋迦牟尼佛 詣爲和尙阿闍梨)
경청 문수대지사 예위갈마아사리(敬請 文殊大智士 詣爲羯磨阿闍梨)
경청 당래미륵불 예위교수아사리(敬請 當來彌勒佛 詣爲敎授阿闍梨)
경청 시방제여래 예위증계아사리(敬請 十方諸如來 詣爲證戒阿闍梨)
경청 시방제보살 예위동학반려중(敬請 十方諸菩薩 詣爲同學伴侶衆)
경청 석범제천중 예위옹호장엄중(敬請 釋梵諸天衆 詣爲擁護莊嚴衆)

수계(受戒) 받으실 분은 호궤합장(互跪合掌)하고 앉아 주십시오. 모두 앉아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드세요. 예, 그렇게 앉으세요.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허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다.
꽃다운 풀 우거지는 삼춘(三春)에는 비가 내리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드는 구월(九月)에는 서리가 내린다.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빈 마음으로 온갖 삼라만상 변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다. 일 없고 다맛 그것이 바로 평상(平常)이더라.

봄에 꽃이 피고 풀이 우거지며 또 비가 내리고, 가을에 단풍 지고 서리가 내린 것은 이 세상에 모든 물건(物件)이 인연 따라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없어져. 사람도 태어났다가 죽고, 모든 물건도 생겨났다 없어지고, 저 태양이나 이 지구도 몇억만 년 뒤에는 인연이 모아서 생겨난 것이라 언젠가는 파괴가 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우리 주변에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은 파괴와 생멸 · 생사 내놓고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러나 빈 마음으로,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할 수 있다면 그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요,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다 그 말이여. 생멸상(生滅相) 속에 열반상(涅槃相)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허겄더라.


오늘 경오년(庚午年) 9월 첫째일요법회를 기해서 십계(十戒)를 받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불명(佛名)을 신청한 분에게 계(戒)와 화두와 불명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신해년(辛亥年, 1971년)에 설하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미 계도 받고 화두도 다 탔습니다. 산승(山僧)이 다시 여기서 설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 더 간절하고, 그 이상 더 분명하고 감동적으로 설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로부터 화두도 탔고 또 계도 받았다고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일단 여러분이 새로 받기를 청했으므로 불보살(佛菩薩)을 증사(證師)로 모시고 간략히 십계를 설하겠습니다.


계(戒)는, 원래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갈라면 문(門)을 통해서 들어가고 또 그 방에서 나올 때에는 문을 통해서 나오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의 길이 있고, 불자(佛子)로서 불자에 길이 있어. 길을 놔두고 길로 다니지 않고 논으로 밭으로 가시덤불 속으로 다닐 수는 없거든.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길을 잘못 잡아 가지고 이리저리 위험한 데로 또 방향을 잘못 잡아서 간다면 애만 많이 쓰고 설사 목적지에 도달한다 해도 몇 배의 시간과 공력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불자로서 가져야 할 행실, 첫째, 몸[身]으로 지녀야 할 세 가지. 살생,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셋째는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다음에는 입[口]으로 지키는 네 가지.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또 기어(綺語), 기어라 하는 것은 이리저리 꾸며대고, 잡스럽고 잡탕스러운 말, 해서는 안 될 말 또 아무 뜻 없는 말, 이러한 말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양설(兩舌), 이간질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는 악구(惡口), 욕을 하지 말아라. 이것이 입으로 지켜야 할 네 가지여.

그다음에 뜻[意]으로 지키는 세 가지는, 탐욕(貪欲)을 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불진에(不瞋恚), 썽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어리석은 마음, 삿된 소견을 내지 말어라.
이 어리석고 삿된 소견이라는 것은 첫째, 불자(佛子)로서는 인과법(因果法)을 부정하는 거여, 인과를 믿지 아니하고 인과의 법칙을 믿지 않고 인과를 부정하는 거, 이것이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그래서 살생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 주어야 하고, 또 도둑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내 것을 남에게 보시를 하고,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행실을 청정하게 갖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말을 하고, 또 꾸며대는 말 또는 잡탕스러운 말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말을 신사답게 신사 숙녀에 어울리는 그러한 청정한 말을 해야 한다.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간질을 해 가지고 두 사람의 사이를 벙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합할 수 있도록 자비스러운 말로써 화합을 붙여야 한다.
악구(惡口)—‘호랭이 물어 갈 놈, 급살 맞을 놈, 벼락 맞을 놈, 오라를 질 놈’ 이런 입에 못 담을 말을 남에게도 해서는 아니되는데 이것이 습관이 되면은 자기 형제간에도 하고, 자식한테도 하고, 아무한테라도 그런 말이 풀풀 나온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말 한마디, 설사 꼭 미워서가 아니라 이뻐서 못 견디면 입에 못 담을 욕을 하는 수가 있거든. 이것도 불자로서는 해서는 아니된다 그 말이여.

입 밖에 한번 뚝 말이 떨어지면 그것이 한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낱낱이 언젠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면 그 말이 씨가 되어 가지고 그것이 현실화(現實化)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돈 드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말을 함부로 풀풀풀풀 해 버릇하면 망어(妄語)를 하고, 기어(綺語)를 하고, 양설(兩舌)을 하고, 악구(惡口)를 하면 그것이 낱낱이 다 그 과보(果報)로 나타나는 것이매, 참 말을 조심해야 해. 행동도 조심해야 하지만 말도 행동 못지않게 더 말조심을 해야만 불자(佛子)다운 불자다.

탐심(貪心)을 내는 거, 탐심을 내는 것은 남이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아휴, 저걸 내가 갖고 싶다. 어떻게 해야 저것을 내 것을 삼을까? 달라고 해서 안 주면 훔치기라도 허까?’ 이러한 탐심은 아마 어린애들 어린아이들이 내는 탐심일 거고.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대중에 이렇게 살아가고 세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이고, 제 생각대로만 하려고 밀어붙이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 되고 남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하면 썽을 내거든. 이것이 진심(瞋心)이여.
참! 지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한다고 썽을 내면 이것이 팔불출(八不出)도 못되고, 칠불출도 못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매 생각이 다른데,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을 것인데, 남의 말도 귀기울여 들을 줄 알고 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 말을 귀기울여서 들어보면 아 자기 말보다 ’저 사람 의견이 좋다’ 생각하면 아 대번에 그 사람의 의견을 또 찬동을 찬양을 해 주고, 이리해서 서로서로 지혜를 모아서 바른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가야지 제 주장만 내세워 가지고 둘 모이면 싸움하고, 셋 모이면 싸워. 집안에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회사에 가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물론 의견을 모이는 과정에서는 서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가 있지만, 이렇게 해서 여러 방면으로 토론을 하다가 그중에서 가장 좋은 의견으로 일단 모아지면, 그 의견에 모두가 다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행동을 통일해 나갈 때 사회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나라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또 온 세계도 평화가 올 때가 있을 것이다.

한 번 두 번은 몰라도 일생 동안을 탐욕(貪欲)과 진에심(瞋恚心)으로 일관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고 무엇이냐.
지끔 온 세상이 나날이 혼란하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되어 가는 일보단 참 앞날이 걱정스럽게 모든 일이 되어 가는 것은 이 사람들이 이 십선계(十善戒)를 믿고 지켜 나가지 아니하고, 그걸 지키지 아니하면 십악죄(十惡罪)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믿고 지키고 실천해 나가면 이것이 십선계가 되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戒)만을 믿고 고대로 실천해도 그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어느 곳에 무엇으로 태어나되 항상 왕(王)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 계를 철저하게 잘 지키면은 천상(天上)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날 것이다」
인자 이 경(經)에 보면 이렇게 말씀이 쓰여 있지만,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천상에 태어나 봤자 자기가 지은 복(福)만큼 다 받으면 또다시 떨어지니 계(戒)만을 집착해서 계만을 지킨다면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참다운 대승계(大乘戒)가 되지를 못한다.

오늘 이 열 가지 계(戒)를 설하되, 어떻게 하면 이 계(戒)를 영원히 타락이 없는 대승계로써에 차원 높은 계를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설할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참선법을 설하기 전에,

이상 설한 열 가지 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열 가지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편안하게 앉어요. 연비(燃臂) 먼저.

다시 호궤합장(互跪合掌).

참회진언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2분 20초 계속)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히 앉으셔요.

십계(十戒)를 받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따끔하게 그 연비를 한 찰나에 그렇게 무량겁 동안 지은 크고 작은 그 많은 죄가 소멸이 되느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이유가 있는 것이여.

나선 비구(那先比丘), 나가세나(Nāgasena). 나선이라고 하는 비구 스님한테 저 왕(王)이 묻기를, “평생 동안 지은 죄가 임종(臨終)할 때에 염불(念佛) 열 번만 하면 죄가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난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금생 백 년 동안 지은 죄뿐만 아니라 무량겁 동안 지은 죄가 어떻게 마지막 숨 딱 거둘 때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열 번만 불러도 죄가 없어진단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선 비구라고 하는 그 큰스님이 대답을 하기를, “큰 돌, 무거운 돌을 백 덩어리를 큰 배에다가 실으면 그 돌은 물속에 가라앉지를 않을 것이고, 조그마한 주먹텡이만한 돌 한 개도 배에다가 실지 않고 그냥 물에다가 던지면 그 돌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법을 믿고 일심(一心)으로 염불을 하면 그 부처님의 그 원력(願力)으로 마치 그 무겁고도 큰 돌만한 돌을 배에다가 실으면 안 가라앉듯이 반드시 그 사람은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날 것이고,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의 그 원력의 가피(加被)를 입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은 죄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또 이렇게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 그렇게 말씀이 있고.

또 『지론(智論)』에 보면 ‘어째서 보통 때 열 번 한 것보단 마지막 그 죽을려고 하는 그 임종시(臨終時)에 잠깐 염불한 것이 그렇게 무서운 힘이 있을까?’
보통 때는 아무래도 생각이 그렇게 가다듬어지지를 않고, 마지막 죽을 때는 이제 막바지라, 그러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 이제 내가 숨 거두면은 지옥에 갈지—반드시 자기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다. 다행히 열 번만 지극정성으로 불러도 극락에 간다니 일심(一心)으로 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면 ’내가 여기서 있는 힘을 다해서 목숨을 버리고 싸우지 아니하면 적한테 죽을 것이고, 여기서 인자 도망갈 곳도 없고 차라리 죽느니 한 사람이라도 더 적을 죽이고서 기어니 이 적을 다 몰아 다 쳐죽여야겄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나라도 살겄다‘ 이러한 마음을 내면 적은 군사로도 대적(大敵)을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고.
’아이고! 적이 저렇게 많으니 싸워 봤자 죽을 거 이것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도망쳐서 살꼬‘ 이런 생각을 먹으면은 눈 깜박할 새에 맞어 죽을 것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양(量)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금덩어리 한 냥과 꽃다발 백 개의 꽃다발을 처쟁여 놓으면 우선 꽃을 백 다발을 쌓아 놓으니 울긋불긋 보기도 좋고 잠시 향내도 나겠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면 그거 별것이 아니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숯불, 불꽃이 훨훨 타지도 않는 조그만한 숯불이 별로 보잘것없지만,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마른풀을 그 조그마한 숯불로 그것을 태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독사는 조그만한 독사 새끼라도 그 독사한테 물리면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여.

독사나 황금 덩어리는 조그만하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듯이,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난 그 간절한 한 생각은 능히 무량겁(無量劫) 죄(罪)도 소멸할 수가 있고, 억겁(億劫)의 생사윤회(生死輪廻)도 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끔 이 십계(十戒)를 받고 따끔하게 이 연비(燃臂)를 받은 그 찰나에 여러분의 죄가 소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거거든.

계를 지키면은 우선 우리의 양심(良心)이, 우리 사람 사람마다 다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 ·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의 부처님을 낱낱이 다 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여. 그 양심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은 우리의 그 불성(佛性)에서 나오는 거여.
그래서 항상 계행(戒行)을 여법(如法)하게 지키면 양심과 서로 계합(契合)이 되기 때문에 마음에 항상 편안하고, 마음에 항상 떳떳하고, 마음에 항상 기쁨이 있는 것이여.

계율을 파하고—살생을 헌다던지, 도둑질을 헌다던지, 사음을 헌다던지, 이간질을 헌다던지, 거짓말을 헌다던지, 또 탐욕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자기 마음의 양심에 가책을 받아 가지고 항상 얼굴이 어둡고 떳떳하지를 못하며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어둡고 불편하면 얼굴도 어둡고, 눈도 거뭇 껌껌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똑바로 남의 얼굴을 쳐다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바르지를 못하면 행동도 바르지를 못하고 밝지를 못하는 법이거든. 그러한 어둡고 바르지 못한 마음에서 어둡고 바르지 못한 행동이 나오고, 그러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안정을 얻지를 못하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한들 일이 제대로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를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하니,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어머니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아내로서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편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아무리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전생에 지은 복이 있어서 잘산다 하더라도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하면 어디다 쓸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세속에 사는 데 있어서도 이 계(戒)는 잘 가져야 할 것이고, 불자로서도 이 계는 잘 가져야 해. 계(戒)를 잘 가져야 그래야 정(定) 선정(禪定) 참선(參禪)을 올바르게 하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기 때문에 참선을 하더라도 올바른 참선을 할 수가 있어. 참선을 올바르게 해야 지혜의 눈을 떠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것이다.
견성성불을 할려면은 선정을 닦아야 하고, 선정을 올바르게 할려면은 계행(戒行)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삼학(三學), 세 가지 배움이여. 경(經) · 율(律) · 론(論), 삼장(三藏)을 분석을 하면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으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처음~40분17초)





(2)------------------

근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받은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도 올바르게 참선을 해 나가시면 계는 그 가운데에 지켜져.
내가 계를—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하고—‘내가 계만을 청정하게 지켜야겄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파리 한 마리도 안 죽이고, 모기 한 마리도 안 죽이고, 그저 뭐 비린내 난 것도 안 먹고, 생선이고 뭐 고기 한 점도 먹지 않고 철저하게 아주 계를 지키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그렇게 실천을 하신 분이 스님 가운데도 있을 것이고, 신도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왕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계를 지킬 바에는 대승계(大乘戒)를 지켜야 하고, 최상승계(最上乘戒)를 지켜야 허겄더라.
형식으로 지키는 계(戒)는 그 잘 지킬려고 하는 그 마음은 참 갸륵하고 갸륵하나, 그러한 계는 계상(戒相)에 떨어지기 때문에 계상에 집착해 가지고 지킨 계는 기껏 지켜 봤자 천상(天上)에 태어나면 고작이여.

잘못해 가지고 길을 걸어가다가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으면 ’아! 내가 살생을 안 할라고 했는데 저 살생을 했으니 내가 인자 어떻게 할까? 틀림없이 내생에 저 벌레가 나를 밟아 죽일 것이고, 저 벌레를 죽였으니 천상에 올라가기는 틀렸다‘ 이래 가지고 그것 한 마리 때문에 벌벌벌벌 떨고 불안초조해서 그런다면, 그러한 마음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냐 그 말이여.

파리 모기 안 죽일려고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승화(昇華)시켜서 자꾸 화두를 들고 참선을 여법히 해 나가면, 모르는 가운데 혹 벌레가 밟혀 죽을 수도 있고, 농사를 짓다 보면 농약을 뿌리게 되고 수없는 벌레가 죽게 되고, 밥을 먹고 채소를 씻쳐서 국을 끓이다 보면 수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도 그 속에서 죽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계상(戒相)에 집착해서 산다면 밥도 못 먹을 것이고, 국도 못 끓여 먹을 것이고, 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계를 지키라는 것이 아녀요.

물론 그 눈에 보일락말락한 그런 벌레도 그 생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생명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셨지마는, 부처님께서 그러한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뜻이 그 참뜻이 무엇이냐? 자비심(慈悲心)을 가져라 이거거든.
살생을 하면은 자비심을 손상하게 되니까 자비심을 함양을 해라. 항상 자비심으로 살아라. 자비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 자비심을 가지라고 하는 그 참뜻을 우리가 깊이 명심을 해야지, 파리 한 마리 모기 한 마리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그거여.


시라(sīla, 尸羅)가 불청정(不淸淨)하면—시라(sīla)는, 계(戒)를 인도 말로 시라(sīla)라 그러는데, ‘시라가 청정(淸淨)하지 못하면은 삼매(三昧)가 현전하지 못할 것이다. 삼매가 청정하지 못하면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하셨어.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비유해서,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올바른 자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물론 참선은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할 수 있어야 정말 참선을 제대로 하는 것이지. 그러나 기본자세(基本姿勢)라고 하는 것이 있어, 기본자세. 기본자세는 바로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여.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기본자세를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말이여.

그리고 낮에도 쉬는 시간, 항상 바른 자세를 가지고 의자에 앉더라도 바르게 앉고, 섰을 때에도 바르게 서고, 걸어갈 때에도 항상 바르게—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든지, 너무 뒤에로 요렇게 제치고 걸어간다든지, 좌우로 삐뚤어지게 이렇게—앉을 때 걸어갈 때도 역시 그런 거여.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는 거여. 자세만 봐도 ‘아 저 사람이 인격자다, 아니다’ 또 ‘저 사람이 지금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느냐,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런 것도 알 수가 있는 거여.
아무리 속에 지식이 들어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세가 삐뚤어져 가지고 턱을 내고 입을 헤벌레하게 벌리고, 눈은 생선 눈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존경할 수가 없어.
비록 속에는 별로 지식이 든 것이 없고 그렇지만 자세만 단정(端正)하니 이렇게 앉었어도 그 사람을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여. 특히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는 어디를 가나 어디서나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하는 거여.


사리불(舍利弗)과 목련존자(目連尊者)는,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왼팔이고 좌면 제자(左面弟子)고, 사리불은 부처님의 오른팔 노릇을 한 수제자인데, 원래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외도(外道)의 제자로서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린 외도로서는 큰 사람이여.
큰 종장이였었는데 그 스승이 죽고, ‘우리가 바른 스승을 찾아가자’ 누구든지 먼저 바른 스승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 연락을 해 주기로 하고 계속해서 나름대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왕사성(王舍城)에를 들렸는데, 참 자세(姿勢)가 바르고 그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거룩해요.

그분[아설시(阿說示), Aśvajit, 마승(馬勝)]이 바로 이 오비구(五比丘) 중에 한 분이였었는데, 너무나 그 자세도 장부(丈夫)답고 흥건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눈매가 아주 바른, 아주 그 눈매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맑고 안정이 되고 한 모습이 너무너무 ‘야! 틀림없이 이분은 훌륭한 분이다, 이분은 과연 누굴까? 이분에 스승은 누굴까?’
그래 다가가 가지고 물어보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승이란 말을 듣고 바로 그길로 따라가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지혜의 눈을 얻었고 또 목련존자한테 알려서 같이 그 제자들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리고 부처님께 가서 제자랑 다 같이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부처님 왼팔—부처님께서 오비구(五比丘)를 제도하시고 머지않아서 삼가섭(三迦葉)을 제도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 그 1,250인의 제자를 그렇게 얻어 가지고 그렇게 참 불법(佛法)을 펴셨는데, 그렇게 펴게 된 그 동기의 하나가 부처님의 그 오비구 중에 한 사람인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훌륭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사리불과 목련존자라고 하는 훌륭한 제자를 얻은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속은 시커먼 도적(盜賊)의 마음을 가지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맑게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항상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信心)으로 정진을 해 나가면 자연히 자세가 바르게 되겠지만, 우선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바르게 정진하는 법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하니 우선적으로 자세부터 바르게 함으로써 차츰차츰 바른 정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를 이렇게 바르게 하는 것은 너무 몸을 자지바지하니 뒤로 하고 목에다 힘을 주고 그러라는 것이 아니여. 바르게 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고, 목의 힘을 빼고, 우리 뭐 조끔 자기가 권리가 좀 있고 돈을 좀 벌면 ‘아주 목에다 힘준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러한 것은 자세를 바르게 한 것이 아니여.
단정(端正)하게 몸을 갖되 힘을 빼야 하거든. 어깨의 힘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눈도 선명하게 평상(平常)으로 뜨되—눈알이 왔다갔다 눈이 깜빡깜빡깜빡하고, 눈알이 좌우로 전후좌우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게 못쓰는 거여. 눈은 따악 안정이 되고, 그러니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거든.


<올바른 호흡>

그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해야 해. 숨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은—보통 우리는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마는 단전으로 호흡을 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게—너무 터지도록 들어마시란 게 아니라,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까지 가도록 이렇게 눌러 대는 것이 아니고, 숨은 들어마시면 이 허파까지 밖에 안 들어가는 것이여. 안 들어가지만 의식적으로 배만 약간 볼록하게 만들면 되는 거여.
들어마신 호흡이 거까지 가도록 눌러 대면 못쓰는 거여. 그러면 여그 오목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나중에는 못쓰는 거여.

답답하고 소화도 안 되는 것이니까, 들어마신 호흡을 거까지 밀어넣을라고 하지 말고, 스르르르~ 하니 자연스럽게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丹田)만 약간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게만 하는 거여. 그것을 잘 알으셔야 돼.
그래 가지고 8부쯤 들어마셨으면 잠깐 정지했다가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만 하면 되어요.

그래서 들어마시면 차츰차츰차츰 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배가 나온다니까는 이만큼 나오도록 그렇게 맨들라고 하면 안 돼. 포태(胞胎)해서 열 달쯤 된 것처럼 그렇게 배를 맨들라는 게 아녀요. 조끔만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라는 거여. 그것을 착각하면 그 단전호흡을 하다가 병났다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고 약 2cm나 3cm만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2cm나 3cm만 조끔 홀쪽하게 맨드는 거여. 그래서 배가 나왔다 또 정지했다가 또 홀쪽했다 이거여. 그놈 따라서 숨이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게.

이것은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건강에도 좋고, 피로 회복하는 데에도 좋고 또 뭐 신경을 너무 써서 열이 오르거나 혈압이 오르거나, 기운이 위로 오른 것을 내리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것이여요.
또 학생들 공부하는 데에도 항상 공부 시작하기 전에도 하고, 공부하면서도 하고, 공부하고 나서 쉬는 시간에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것이여. 가정주부도 좋고 또 회사에 나가는 사람도 좋고, 운동선수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거여. 피로 회복이 되고 혈액 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안정이 되고 하니까 대단히 좋은 것이고.

그런데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요가에서 하는 법도 있고, 신선도(神仙道)에서 하는 법도 있고, 또 사회에는 여러 가지 단전호흡법을 전문으로 가르키는 도장도 있고 합니다마는, 다 그 나름대로 장점이 다 있습니다.
몸에 특별한 병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도장에 나가서 그런 전문가한테 배워서 그 병을 나수는데 그런 호흡을 하는 것은 혹 가(可)커니와—참선하는 사람은 그러한 호흡법을 하다가는 언제 화두(話頭)를 드냐 그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러한 호흡법보다는 지끔 산승(山僧)이 말한 간단하고도 쉬운,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아무리 해도 아무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이런 간단하고도 쉬운, 계속해서 해도 조끔도 부담스럽지 않는 이러한 호흡법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은 분은 알아듣지마는, 또 그걸 잘 못 알아들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이 테잎(tape), 녹음 테잎(錄音tape)이 있으니까 그 테이프를 구득(求得)을 해서 그래서 그걸 가지고 여러 번 들으면서 하면 호흡하는 법,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법, 또 화두를 바르게 드는 법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의심>

화두는,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들어마실 때도 ‘이뭣고?’요, 머무를 때도 ‘이뭣고?’요, 내쉴 때도 ‘이뭣고?’ 항상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항상 끊어지지 않고 독로(獨露)해야 하지만, 초학자는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해보시라 그 말이여. 한결 화두가 잘 들어져.

처음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 한 달 두 달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뭐 ‘이뭣고?~’ 한 번 해 놓고, 호흡이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섯 번이고 몇 번 쉴 동안에도 ‘이뭣고?’ 한 번 해서 있는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면 되는 거여.
꼭 3년 10년을 두고도 계속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뭣고?’ 한 번 딱! 든 화두로 하루 종일 그 화두만을, 알 수 없는 의심이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따~악 거기에 있도록 그렇게 관해 나가야 해.

관(觀)이라 하는 것은 그것도 일종에 생각인데,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생각 없는 생각, 생각하면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생각이 이렇게 이렇게 왔다갔다하는데 움직이는 것인데, 관(觀)은 움직임이 없는 생각, ‘이뭣고?’ 했을 때 전후좌우 앞뒤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따~악 있는 거여. ‘이뭣고?’ 한 뒤에 그 남은 그—그 생각이 앞뒷이 다 끊어졌거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면 의단만을 따~악 관조(觀照)해야지, 의단이 있는 데다가 ‘이뭣고? 이뭣고?’ 하고 자꾸 덮치기로 하는 것이 아니여.

참 수백 번 들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처음 오신 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잘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잘 들 수 있으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여.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허고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요
나무~아미타불~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허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니라
나무~아미타불~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
여러분께 권하노니 깊은 신심으로 이 묘한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의 화두(話頭)를 참(參)해서 얻기 어려운 이 감격스러운 이날을, 이 좋은 날을 어찌 헛되이 지내리요.

오늘 여러분은 계(戒)를 받고 또 최상승 활구참선의 화두(話頭)를 탔고 또 불명(佛名)을 타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죄가 소멸하는 날, 부처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난 날입니다. 오늘 이 시간과 같은 이 마음으로 앞으로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1초 1초를 그렇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량겁래(無量劫來)로부터 오면서 어찌 오늘날과 같은 날이 그렇게 흔했겠습니까. 물론 과거에도 이러한 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또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우리 사부대중이 같이 만났을 것입니다마는, 이런 날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닙니다.

이날에 이 마음이 바로 장부(丈夫)의 마음입니다. 비록 여자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이 시간을 기해서 여러분도 장부가 되었습니다. 최상승법을 믿고, 계를 받고, 화두를 타고, 불명을 받게 되었으니, 거기에는 남녀상(男女相)이 없어.
이름하여 그것을 대장부(大丈夫)라 하느니, 불자(佛子)로서의 대장부 해탈장부(解脫丈夫)가 되었으니 영겁을 두고 우리는 대장부로서 생사요달(生死了達)을 하고, 생사요달한 장부로서 일체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그 유래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까 말씀드린 목련존자(目連尊者), 목련존자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인데, 그 신통제일인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생전에 지은 죄로 아귀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고 있어. 목련존자가 신통을 얻어 가지고 어머니 계신 곳을 살펴보니 아귀도에서 그 배고프고 목마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어.

그래서 자기 신통술로 그것을 아무리 그 아귀도에 가 가지고 시원한 물을 드려도 불로 변해 가지고 목이 훨훨 타고, 밥을 갖다가 드려도 목이 콱 맺혀서 불이 나 가지고 더 고통을 받어. 도저히 자기 신통으로도 다 하지 못하니까 부처님께 여쭈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그 모친을 구제(救濟)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너의 신통술로도 안 되는 것이다. 백중날 모든 대중이 해제(解制)를 할 때에 그 대중은 청정한 몸과 마음으로 수행을 해서 다 도심(道心)이 맑고 청정해졌으니 부처님과 그 대중들께 대중공양(大衆供養)으로 백 가지 과일과 맛있는 음식으로 대중공양을 올리면 그 대중스님네 공양을 올린 공덕(功德)으로 너의 어머니가 그 아귀도에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것이다“

그래 가지고 목련존자는 그길로 가서 탁발(托鉢)을 해 가지고 많은 음식과 과일을 마련을 해 가지고 부처님과 대중께 백중날 대중공양을 올려 가지고 그 어머니를 그 고통으로부터 제도(濟度)를 했습니다.
그 뒤로 해마다 백중날은 그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대중공양을 올리고 또 그 남은 음식을 선망부모(先亡父母)에게 하는, 그런 부모를 천도(薦度)하는 그런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주욱 내려오고 있습니다.

요새 잘 모르는 분들은 ‘선망부모를 천도한다’ 해 가지고, 부처님께는 소홀히 올리고 대중스님께는 공양을 별로 안 올리고, 영단(靈壇)에다만 이렇게 쌓아 올린다. 그건 백중날의 그 근본 뜻을 잘 모르면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영단에도 올린 것도 좋지마는, 어쨌든지 부처님과 대중공양에 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정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는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법당(法堂) 가득히 이렇게 오시고 내일은 이 핑계 저 핑계하고 혹 안 오실라고 하신 분이 있을란가 모르지만, 정말 내일은 선망부모(先亡父母), 그 선망부모가 아니면 오늘날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까?
내일, 물론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다 모셨을 것이고 안 모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선망부모는 백중날 ‘어느 자손이 나를 천도해 줄 것인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친구 따라서 와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자손들이 와 있는데 내 아들 딸 며느리는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정성으로 그분도 역시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스님네의 정진하신 그 정진력과 신심으로 그분도 좀 얻어 잡숫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속으로 섭섭하시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니 오늘 오신 분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또 여러분의 가족이나 일가친척 사돈네까지라도 여기 뭐 준비할 것 걱정하시지 말고 어쩠든지 많이 오셔서 모다 참석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불명(佛名)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 노나 드릴 테니 신청만 해 놓고 안 찾아가시면 그것이 이렇게 쌓이게 되니까 반드시 그 불명을 찾아가시기를 부탁을 하고, 그전에 신청을 해 놓고 안 가져가신 분도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허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니라
나무~아미타불~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하고, 먹구름이 일어나 문득 우뢰가 천하에 진동하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라. 작달비 같은 비가 들로부터서 몰려오는구나.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라.
길 가는 나그네는 그 비를 맞고 그 더웁고 피로한 것을 비로 인해서 깨끗이 식혀 버리고, 돌아가는 길이 깨끗하게 씻어져서 문지(먼지)도 안 나고 좋구나.

지끔 온 세상은 이렇게 먹구름이 일고 우뢰가 치는 거와 같습니다. 세계 도처에는 온갖 무서운 무기를 장만하고 그것을 국경에다가 모다 하고 이웃나라를 침범하고 사람이 죽고, 지금 우리나라도 삼팔선(三八線) 모다 뭐 양쪽 뭐 총리 회의가 있다고 모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여전히 무력(武力) 대치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걱정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우리 국내에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온갖 일이 마치 먹구름이 일고, 모다 폭풍우가 일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나쁘게 보면 잠을 못 잘 지경이고 그렇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꼭 어둡게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고,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그것을 그렇게 우리가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먹구름이 일라면 일어라. 뇌성벽력이 일어날라면 일어나라. 작달비가 쏟아질라면 쏟아져라’ 더위를 식히는 것으로 우리는...
그럴 때에 우리는 신심(信心)을 가다듬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우리의 자성을 갖다가 반성하고 그래 가지고 더 무상(無常)을 깨닫고 신심을 더 돈독히 해서 정진을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서 우리의 앞길은 보다 더 밝게 열려 나갈 것이고, 집안도 보다 더 행복하게 나갈 것이고, 사회 · 국가 · 세계도 평화의 방향으로 열려 나갈 것입니다. (40분18초~1시간20분33초) (끝)





[법문 내용]

육사청(六師請) / (게송)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 / 화두·불명·십선계 법회 / 계(戒)라고 하는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우리 불자(佛子)의 목적지에 가는 안전하고, 빠른 길 / 십선계(十善戒) /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 / 대승계(大乘戒).

연비(燃臂)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 / 나선 비구의 ‘배에다 큰 돌을 싣는’ 비유 / 생사윤회의 원인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올바른 자세> <올바른 호흡> <올바른 화두 의심>을 잘하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다.

(게송)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 / (게송)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 / 모든 어둡고 걱정스러운 일을 참선 수행인은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비(燃臂)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가부좌나 반가부좌,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