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26~150)2021. 8. 2. 08:47

 

 

((No.128))—1980년(경신년) 칠석법회 법문(80.08.17) (80분)

 

 

(1/4) 약 21분.

 

 

(2/4) 약 18분.

 

 

(3/4) 약 20분.

 

 

(4/4) 약 21분.

 

 

 


(1/4)----------------

작일지두개란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이리요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어제는 가지 끝에 그렇게 아름답게 꽃이 피어 있더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오늘은 땅 위에 그 꽃송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구나.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니, 그 어제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찬란하게 피어 있던 나뭇가지에 피어 있던 그 꽃이 하룻밤 사이에 떨어져서 땅 위에 깔려 있는 그것을 보고 과연 사람으로 하여금 그 떨어진 꽃이 애석하기도 하고, 그 애석하고 아까운 생각이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운 생각을 내게 한다. 무슨 부끄러운 생각을 내게 하느냐?
세상의 영화(榮華)와 공명(功名), 그러한 것에 대해서 무심(無心)하덜 못한 내 자신이 그 꽃을 보고서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나더라.

그 꽃은 어제까지 그렇게 찬란하게 피어 있다가 하룻밤 사이에 떨어졌건만 꽃 자신은 조금도 아름다울 때라고 해서 뽐내는 법도 없고, 하룻밤 사이에 땅에 시들어 떨어졌다고 해서 무슨 거기에 실망하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을 갖지를 않은데,
사람은 너와 같들 못해서 명예와 권리를 누릴 때에는 이 세상에 오직 자기만이 잘나고 똑똑하고 행복한 것처럼 으시대다가 하룻밤 새에 그러한 영화와 권리와 명예가 자기로부터 떠나게 되면 기운이 없고 살아갈 맛을 잃고 그러한 것에 대해서 무심(無心)하기가 그러한 꽃보다 못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그 꽃 떨어진 것을 보고 스스로 꽃을 부러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느낌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칠월 칠일, 칠석(七夕)날입니다.
전설로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오작교(烏鵲橋), 가마구 떼와 까치 떼가 모여서 다리를 놔 주면 견우와 직녀가 오늘 저녁에 일 년에 한번 상봉하는 날이다. 이러한 전설이 있고 또 절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그 칠석날에 불공(佛供)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모든 소원을 성취한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칠석날에는 돈과 쌀과 과일을 이고 지고 그래 가지고 절로 절로 가서 공양(供養)을 올리는 그러한 풍속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칠성(七星)님, 칠성님이라 하면 북두칠성(北斗七星), 또 삼태육성(三台六星) · 이십팔수(二十八宿),  또 일월, 일광보살(日光菩薩) · 월광보살(月光菩薩), 해와 달, 그리고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 이러한 우주에 있는 이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하나의 성현(聖賢)으로 이렇게 받들어 모셔 가지고 거기다가 신앙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는 그러한 오래된 토속 신앙인 것입니다.
원래 이 신앙이 도교(道敎)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또 도교 이전에 자연을 하나의 신(神)으로 신격화해서 자연의 위력을 신앙하는 그런 원시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불교가 중국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일본에 이렇게 차츰 뻗어오면서 그 나라에 새로 들어갈 때마다 그 고장에 있는 토속 신앙을 다 흡수를 해 가지고 그 불교 안에 포섭을 한 다음 차츰 근기(根機) 따라서 정법(正法)을 설해서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그러한 방편(方便)을 옛날부터서 써 왔던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기 종교 이외의 종교는 다 외도다 또는 사탄이다' 이리 해 가지고 일단 그것을 배격을 하고 그리고 자기의 종교를 갖다가 선양하는 그러한 종교도 있습니다마는, 우리 불교는 신라 · 고구려 · 백제 쭉 내려오면서 일단 그 나라에 새로 종교가 불교가 들어가면 거기에 있었던 그런 토속 신앙을 다 포섭해서 그래 가지고는 포섭해서 다 들어온 다음에는 그대로 그것을 융화해서 완전히 소화를 시켜 가지고 그 사람 그러한 근기 맞춰서 법을 설해서 그래 가지고 마침내는 정법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아주 자비스러운 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그러한 방편을 써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 내에도 칠성각(七星閣)을 모시고 칠성님을 모시고, 지금 어느 사찰에 가나 다 큰 절, 작은 절 할 거 없이 대체적으로 칠성단(七星壇) · 산신단(山神壇) · 독성(獨聖) 등, 이러한 삼성각(三聖閣)이 모셔져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오직 부처님 한 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그리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팔만사천 방편을 하나로 녹여 뭉쳐서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최상승법은 오직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 한 마음을 관하는 이 법으로써 일체법(一切法)을 다 포섭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고기를 잡는 그물을 보면 그 벼리가 있습니다. 벼리는 그물의 그 손잡이입니다. 그것을 벼릿줄이라 그러는데 그 그물에 벼릿줄을 팍! 잡고 끌어 잡아당기든지 추켜들면 수십만의 그물코가 전부 다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벼릿줄만 탁! 추켜들면 그물이 아무리 크고 코가 많은 눈이 많은 그물이라 하더라도 한 번에 가지런히 탁! 들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최상승법은 그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입니다. 벼릿줄 하나만 들면 그 큰 그물이 대번에 가지런하게 탁! 추려지는 것입니다. 벼릿줄과 연결되지 아니한 그물은 없습니다. 모든 그물의 코는 전부가 벼릿줄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하나만을 선양을 하고 여러분들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해 옮기면 팔만사천 방편, 팔만사천 법문이 바로 그 속에 다 포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벼리를 버리고서 낱낱이 그 수십만이나 있는 그 그물의 코를 낱낱이 들려고 하면 그 그물은 흔틀어져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어질 것입니다.
옷을 들 때에도 옷깃을 들면 소매와 옷소매라든지 도련이라든지 모든 옷이 가지런하니 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소매 끝을 잡고 옷을 든다든지 또는 옷에 섶의 끝을 들고 추켜든다든지 하면 그 옷은 꺼꾸러져서 도대체가 옷인지 걸레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어도 이 최상승법을 믿어야 전체의 불법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믿는 그날부터 정말 올바르게 불법을 믿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고 저 팔만사천 방편 가운데에 저 어느 하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마치 그물을 들 때 있어서 저 그물의 어느 구석지 한 코를 추켜든 거와 같아서 아무리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고 이리 뒤집어 놓고 저리 뒤집어 놓고 해도 도대체 이 그물이 어떻게 생긴가를 모르고 뒤적거릴수록 점점 혼란해지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지금 이 칠석날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신 분은 정말 선택된 불자(佛子)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금방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통해서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법문과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을 하는 법에 대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오조 홍인대사는 부처님으로부터 서른두 번째, 32대 조사(祖師)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육조(六祖) 스님의 법사 스님이신 것입니다.

그 5조 스님은 원래 노인 노승(老僧)으로서 4조(四祖) 스님께 인가를 맞으러 갔는데, 그 4조 스님은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해서 날마다 그 자기, 당신의—이 부처님으로부터 서른한 번째, 31대까지 당신에게 이 법(法)이 전해 내려왔는데 당신의 법(法)을 전해 받을 제자를 만나지 못해서 날마다 제자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하룻날 어느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보니 당신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제자가 왔습니다.

법거량(法擧揚)을 해 보니 분명히 깨달았는데, 깨닫기는 깨달았지만 자기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법을 전해 봤자 법을 전하나 마나, 마치 장님 불 끄나 켜나 마찬가지로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서 먼저 죽을 사람한테 법을 전해 봤자 다리 뻗고 잘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니가 분명히 깨닫기는 깨달았지만 법을 전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가서 몸을 바꿔 가지고 오너라"
그래서 "그러면 제가 이 기념으로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 소나무, 조그마한 소나무 한 그루를 팔십 먹은 노승(老僧)이 캐다가 뜰 앞에다 딱 심어 놓고 그리고서 떠나는데 그 4조 스님이 "니가 소나무를 갖다가 심었으니 니 이름을 재송(栽松)이라고 해라. '재배한다' 해서 '재(栽)' 자 하고, '소나무 송(松)' 자, 재송(栽松)이라고 니 이름을 내가 지어주마"

그렇게 해서 그 재송은 거기서 하직을 하고 내려가다가 시내를 따라서 죽 내려가다 보니 시냇가에 어떤 이쁘게 생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승이 걸망을 처녀 옆에다가 부려 놓고 그 처녀한테 "내가 부탁할 말이 있소"

"무슨 말씀이요?"
"처녀 댁에서 하룻밤만 쉬어 갑시다"

이 5조 재송(栽松) 법문에 대해서는 이 가운데는 여러 번 듣고 잘 아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 오신 분도 계시고 또 금방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은 후반부만 말씀을 하셔서 조금 보충을 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재송 스님께서, 오조 홍인대사가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하는 참 불법의 최고의 법문을 설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오늘 전강 조실 스님께서 최상승법인 참선법,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설하시기 전에 간략히 재송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처녀가 "어른이 계시니 우리집에 가서 어른한테 허락을 맡으십시오"
그러니까 아니라고 "어른은 어른이고 처녀가 한마디만 허락을 하면 내가 가서 어른한테 말을 할 테니까 처녀는 처녀대로 한마디만 허락을 해달라"고. "하룻밤만 쉬어 가자"고.

"그러면 쉬어 가시라"고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참 고맙다"고 하고는 그 옆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고 앉았는데, 그 처녀는 '조금 쉬었다가 가실려나 보다' 이리 생각하고 한참 동안 빨래를 하고는 아! 이리 돌아다보니까 아 그 스님이 앉은 채 아조 열반(涅槃)에 드셨다 그 말이여. 앉은 채 딱! 숨을 거두어 버렸어.

아 그 흔들고 "스님, 스님" 하고 아무리 흔들어 봤자 까닥도 안 한다. 아 그래서 겁이 잔뜩 나고 그래서 주섬주섬 해 가지고 집으로 쫓아가서 부모님께 "아, 그 어떤 노스님이 우리집에서 하룻밤만 쉬어 가자고 하도 간청을 하셔서 그러라고 그랬더니 앉은 채 그냥 돌아가셔 버렸다"고. 그래서 어른들 모다 오셔서 장례를 치러 드렸는데 그 뒤로 그 처녀 배가 날을 거듭하면서 차츰차츰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처음~21분12초)





(2/4)----------------

그래서 그 집에서는 자기 딸을 갖다가 의심을 하고 '누구의 자식이냐?'고 아무리 힐책을 했지만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해봤자 아무도 곧이듣지를 않고, 결국은 '불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이래 가지고 그 처녀는 집안을 위해서,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감쪽같이 죽여 없앨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집안에 그러한 일이 나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참 깊은 소(沼)에다가 갖다가 넣어 버리기도 하고 또는 푸대로 싸서 수백 리 밖에 갖다가 버리기도 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요새는 그런 일들이 보통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으레히 결혼 전에 모다 그 먼저 그럴 수도 있고 모다 그래 오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러한 법이 대단히 엄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서 괴에다 넣어 가지고 참 깊은 소(沼)에다 갖다 넣어 버리기로 했는데, 다행히 그 모친 배려로 해서 많은 금품을 주어 가지고 하인들에게 부탁을 해서 소(沼)에다 넣지 말고 저 수백 리 밖에다 갖다가 버리고 다시는 고향 근처에 어리대지 말도록 이렇게 해 가지고 그 처녀는 수백 리 밖에 가서 풀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지로 돌아다니면서 얻어먹다가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달이 차서 남의 집 담 밑에서 해산(解産)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산을 해 가지고 그걸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까 그 애기를 갖다가 그 폭포수 밑에 강가에다 갖다가 가만히 넣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밤새 참 울고 울어 지새우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너무너무 불쌍하고 궁금하고 해서 다시 그 물 소 있는 데를 가보니까 물오리들이 수십 마리가 모여 가지고 그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를 등으로 모다 받치고 입으로 모다 어루만지면서 그 물위에 동동동동 이렇게 떠다니면서 오리들이 참 신비하게도 그렇게 애기를 갖다가 떠받치면서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애기는 물오리들의 날개와 등으로 떠받쳐진 채 거기서 죽지 아니하고 보송보송한 채 떠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쫓아가서 애기를 들어내 가지고 그 애기를 안고 다니면서 애기를 키웠던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참 거지의 신세지만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친절로 해서 그 애기를 키웠습니다마는 집도 절도 없는 그러한 신세로써 그 애기를 하나를 믿고 한 살, 두 살, 세 살 이렇게 키우는데 너무너무 애기가 잘 생기고 영리하고 귀엽고 똑똑해서 참 그러한 자기의 외로운 신세지만 그 애기 하나 길르는데 보람을 느끼면서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고 그 애기를 길르다가 애기가 십여 세가 되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믿고 오늘날까지 살았는데 니가 나를 두고 가다니 될 말이냐?" 아무리 울며 붙잡았지만 그 애기는 뿌리치고 바로 4조(四祖) 도신대사(道信大師)가 계신 곳으로 쫓아갔던 것입니다. 가자마자 "그 팔십 년 늙은 노인이 결국은 이렇게 몸을 바꿔서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도신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서 부처님으로부터 32대 조사(祖師)의 전법을 받게 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그 오조 홍인대사를 그 어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서 그 아들(오조)이 계신 황매산을 찾아갔다 이것입니다. 찾아갔는데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정(情)으로는 외로우신 어머니가 찾아왔으니 당연히 반갑게 맞이할 것 같은데, 그 어머니를 갖다가 저 뒷방에다가 갖다가 가두어서 굶어서 돌아가시게 했다. 그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되겠습니다마는, 인정(人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다, 인정머리가 없다—그 인정이 참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정은 바로 성현의 자비(慈悲)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정이 있는 사람을 그렇게 훌륭한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닙니다.

성현의 자비에는 따뜻한 인정도 있지만 동시에 참 서릿발보다도 더 차웁고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울 수도 있는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의 인정이라 하는 것은 정에 빠지면 이성(理性)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정(情)으로 남을 보살피고 정(情)으로 남을 사랑하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게 하는 그러한 역효과를 가져오는 수가 너무나 많고 그 정(情) 때문에 결국은 가슴이 쓰리고 아픈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 홍인대사(弘忍大師), 이 재송 도인, 이 홍인대사인들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없으리오마는 또 어머니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잘 받들어 모시려는 인간으로서의 정이야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참으로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의 영원한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 드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 밑에 모여 있는 칠백 명의 제자들로 하여금 수행자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도(道)를 닦아야 한다고 하는 표본을 보이시기 위한 뜻도 거기에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 그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또는 형제간 친구 일가 간 모두가 다 정과 정에 얽히고설켜서 서로 좋아하고, 그것이 한 생각 변하면 미워하고 그것이 더 나아가면 웬수가 되고 전부가 다 그 원인은 정으로부터 그러한 웬수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그러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어리석음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정(情)이 사람의 전부인 줄 알고 정에 떨어져서 정에 얽히고 그래 가지고 부부가 한 생각에 웬수가 되고, 형제가 웬수가 되고, 부모 자식 간에 웬수가 되고, 친구가 웬수가 되어서 어제에 가장 친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웬수가 되어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서로 해코자하고 서로 죽이고 그러다가 또 한 생각이 풀어지면은 또 가까워졌다 풀어졌다 가까워졌다 얽혔다 설켰다 이리해서 무량겁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윤회(輪廻)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갖다가 방에다 가둬서 굶어 돌아가시게 하는 것을 보고 칠백 명이 넘는 그 제자들은 '세상에 도인(道人)이 저럴 수가 있느냐? 저런 것이 어찌 도인이라 할 수가 있겠나? 우리는 이런 참 무도한 사람을 스승으로 알고 이 밑에서 우리가 있을 수는 없다' 그리해 가지고 모다 걸망을 싸가지고 전부 거기를 떠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여러분들은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이 오조 홍인대사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아들을 잘 두어서 그 덕택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좋은 아들을 두지 않았던들 나는 인간으로서 정(情)에 떨어져서 아들을, 도인인 아들을 도인으로 보지를 못하고 내 배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그 사실로 해서 '내 아들, 내 아들' 그러한 정(情)으로 아들을 보다가 일생을 외로움과 서글픔 속에서 인생을 살면서 아들에게, 중생교화를 하는 아들의 신경을 쓰게 만들어 주고 나아가서는 사찰에 피해를 끼치다가 내생에는 다시 어느 곳에 떨어졌을는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아들의 그러한 용감한 적극적으로 이 에미를 생각하는 그 뜨거운 자비, 뜨거운 자비로 해서 나는 모든 업(業)을 뿌리치고 선도(善道)에 태어나게 되었으니 여러분들은 이 도량을 떠나지 말고 여기서 철저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대도를 깨달으십시오" 이러한 우렁찬 목소리가 공중에서 울려 나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칠백 명은 일제히 감격해 가지고 다시 걸망을 내려놓고 그전보다도 훨씬 더 철저한 신심으로 도를 닦고 홍인대사를 정말 위대한 스승으로 신봉(信奉)을 했던 것입니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커나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색상(色相)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고 있음이라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금강경』에 있는 사구게(四句偈)입니다.
'내 모습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래서 참 성현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다' 하고 나를 보거나, 나의 음성은 원음(圓音)이라—한 말로 말하되 16군생(十六群生)이, 일체중생이 각기 자기 근기(根機) 따라서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벌레는 벌레대로, 성인은 성인대로 각기 열 가지의 모다 자기의 입장에 따라서 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래서 나의 목소리는 '뚜렷한 소리'다 해서 원음(圓音)이라 그러는데, '나는 원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음으로 설법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참 부처님이다' 이렇게 나를 찾은 사람, 이 사람은 바로 삿된 도를 행하고 있는 사람, 소견이 삿된 사람이라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여래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부처님을 찾을 때, 선지식을 찾을 때, 정법을 찾은 때 있어서 이 금강경에 사구게를 깊이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겉모양을 보고 음성을 듣고 그래 가지고 그 색상에 떨어져서 스승을 구하고 정법을 구하고 부처님을 구할 때에는 벌써 그 생각 자체가 그릇된 생각이여. 그릇된 소견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정법, 참나, 참 부처님은 만나지지 못할 것입니다.(21분13초~39분9초)





(3/4)----------------

오늘 칠석날, 여러분은 각기 크고 작은 소원들을 가슴에 품고 오셨을 줄 생각합니다. 다른 절에서는 오늘 칠석날 새벽부터 불공을 하고—독불공(獨佛供)을 하고, 동참 불공(同參佛供)을 하고 계속 하루 종일 목탁을 치면서 불공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또 축원을 하고 모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 절에도 많이 가보셨을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필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그 쏟아지는 빗속에 이 주안 용화사를 여러분들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빨리 불공을 했으면, 빨리 우리 아들 축원을 해 주었으면' 혹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용화사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을 하는 도량입니다.
여러분들이 오시자마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한 시간에 걸쳐서 들었습니다. 법문 내용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상승법, '어떻게 하면 참선을 바르게 하며 바로 깨닫을 수가 있느냐?' 이러한 아주 고준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 절에서는 불공과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하필 오늘 칠석날 이러한 참선 법문을 해 드리느냐? 이것이야말로 정말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낱낱이 축원을 안 해도 여러분이 접수만 해 놓으셔도 부처님께서는 환히 다 알고 계십니다. 낱낱이 이름을 불러야 알고, 부르지 아니하면 모른다면 그러한 부처님께 뭐 갖다가 올릴 것이 또 뭣이 있습니까? 벌써 여러분이 한 생각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오셨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또 이 법문(法門)이 끝난 다음에 또 간략하지만 정성스럽게 예경(禮敬)을 올리고 또 축원(祝願)을 해 드립니다. 축원은 낱낱이 여러분의 식구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만 '칠석법회 동참발원재자(同參發願齋者)' 이러면 여러분은 다 그 안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 이름을 1학년부터서 다 부르지 안 해도 '서울대학교 학생 일동' 그러면 그 학교에 학적이 있는 학생은 다 그 속에 다 포함이 된 것입니다. 낱낱이 이름을 부르다가 빠지면 그것은 큰 손해를 보겠지만 '서울대학교 학생 일동' 그러면 자기 이름을 특별히 불러 주지 안 해도 자기도 그 속에 여지없이 틀림없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동참발원재자(同參發願齋者) 각각등보체(各各等保體)' 하나도 빠짐없이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고 여러분들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합니다. 왜 소원을 성취하느냐?
불교의 최고의 법인 최상승 법문을 들었거든. 그리고 그 최상승 법문을 듣고 거기서 신심을 내고 그것을 실천을 할려고 결심을 다지시고 또 현재 실천을 하고 계시고 그러니 여러분들이 만약에 학생이라면 가장 최고의 점수를 가진 우등생과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무엇이 걱정이 되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 최고의 근본법이요, 최고로 높은 이 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을 하기 때문에 복을 빌고 소원을 빌고 한 것은 자연히 그 가운데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이라든지 재앙이라든지 이것이 하느님이 맥없이 우리한테 복을 주고 까닭 없이 우리한테 벌을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또는 재앙을 받을 수 있는 그 원인이 전부 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을 받을 만한 원인을 지었으면 내게 복이 돌아오는 것이고, 내가 재앙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원인을 지었으면 내게 재앙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공연히 나를 미워서 나에게 벌을 주고, 신장님이 아무 까닭도 없이 내가 미워서 나에게 급살(急煞)을 내리고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작자수(自作自受)인 것입니다.

무엇으로 짓느냐?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마음으로 짓습니다. 이것이 신(身) · 구(口) · 의(意), 삼업(三業)입니다. 삼업(三業)인데 근본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이 입을 통해서 표현이 되고 몸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업(業)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 근원을 잘 다스리면.... (녹음 끊김).... 파 뒤집으면 또는 독한 약을 뿌리에다가 치면 그 많은 가지와 잎은 저절로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큰 아름드리나무도 뿌리에다가 적당한 비료와 적당한 수분을 공급을 하면 그 수십만 수백만 개의 가지와 이파리는 저절로 싱싱하게 자랄 것입니다. 그 나무를 죽일 수 있는 것도 뿌리에 달려 있고, 그 나무를 살리는 데에도 뿌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악(善惡), 일체 재앙과 일체 복록이 그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복돋우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게도 할 수가 있고, 재앙이 돌아오게 할 수도 있고 재앙이 돌아오지 않게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부처님은 어떠한 불교를 믿는 불자(佛子)가 와서 공을 들이고 기도를 하고 주력을 하고 염불을 하고 할 때 부처님은 환히 다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절에 와서 하건, 자기집에서 하건, 직장에 가서 하건, 어디 기차간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하건, 어디서 · 언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부처님은, 우주의 가득차 계신 부처님께서는 환히 다 보고 계시고 불법를 옹호하는 제석천왕도 환히 다 보고 계시고, 복을 받을 사람, 복을 받지 못할 사람, 있는 복도 떠날 수밖에는 없을 사람, 지금은 가난하지마는 하는 싹수가 머지않아서 부자가 될 사람, 환히 다 보고 계시거든.

어떤 분은 절에 왔을 때만 목욕재계하고 아주 마음도 경건한 마음으로 오지만, 일단 집에 가면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마구 함부로 해서 아들과 손자, 며느리로부터 '불법(佛法)을 믿는 분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러한 공격을 받는 분이 적잖이 계시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만이 마음을 닦는 곳이 아니라 참으로 가정에서 살아 있는 수도원, 살아 있는 적극적인 참선방이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회인 것입니다.

자기가 불교 신자라고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아니한 타관에서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건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불제자는 항시 부처님이 자기 안에 계신 줄 믿고 항시 자기 머리 위에서 자기를 보고 계신 줄 믿고 한 생각, 한마디 말,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이르도록 언제 어디서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행동하고, 거룩한 어진 마음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상대하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복을 받을 사람이요, 부처님으로부터 우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항시 마정수기(摩頂受記), 마정수기는 우리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면서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 약속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나 손자가 착하고 귀여울 때에는 이마를 만져주면서 칭찬해주듯이, 우리는 언제나 우주에 꽉 차 있는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으면 일체 업장(業障)이 다 소멸이 되고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는 짓은 죄 받을 짓만 하면서 어쩌다 한 번씩 불공만 들이면 소원을 성취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조금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압니다.

불공(佛供)은 꼭 이 법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꽉 차 있는 부처님, 동서남북이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 그 부처님 그 법신불(法身佛)께 공양을 올리는 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를 한 번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인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절에 못 간다' '법회에 나오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가진 것이 없어서 못 간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분을 가끔 뵙니다마는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그러한 말이 입에서 나와서는 아니됩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또는 불사(佛事)에 바치는 시주금 이러한 것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많고 적고건 간에 정성이 다 꽉 차 있으면 그것으로써 족한 것입니다. 백 원이면 백 원, 만 원이면 만 원, 십만 원이면 십만 원, 백만 원이면 백만 원, 자기 형편껏 성의껏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돈 백 원도 없으면 경건한 마음으로 청수(淸水) 한 그릇을 올려도 족한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생각 경건한 마음으로 '이뭣고?' 화두 한 번 들면 되는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못낸 것을 부처님은 미워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시지를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그 사람에 정성스러운 마음, 경건한 마음, 청정한 마음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두선(口頭禪),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구두선이라 그런 말씀을 하셨고 '구두선은 사구선(死句禪)이다'

구두선이라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입으로 따져서 하는 것이다 이 말이여. 입으로 '그것은 이러쿵저러쿵, 체(體)다 용(用)이다, 법신이다, 여래다, 뭣이다' 해 가지고는 참선을 입으로 이래이래이래 따져 가지고 답을 알아맞히고, 또 제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기를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 있어서 힌트를 주는 것처럼 살살 가리켜서 힌트를 주어 가지고,
'아! 이것이 아닙니까?'
'오! 옳다 옳다. 아! 그것 참 어지간하다'

또 다른 공안을 내줘 가지고 '이걸 오늘 해 전에 이것을 알아 오너라'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따지고 그냥 골치가 아플 정도로 하루 종일 따져 가지고는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 가지고 쫓아가서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닙니까?'
'아니다. 그 조금 틀렸다'

다시 또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는 '이것이 아닙니까?'
'아! 인제 되았다'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가리키고,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배우는 것을 이것을 갖다가 구두선(口頭禪)이라, 이것을 의리(義理), 의리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그러고.

이렇게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은 아무리 그럴싸하게 따져서 모든 공안을 다 풀이를 했다 하더라도 마침내 중생의 분별심(分別心)을 여의지를 못하고, 따질수록에 중생의 분별심만 더욱 치성하게 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점점 생사(生死)의 불에 섶을 더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더욱 생사의 번뇌에 분별의 불은 치성하게 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참선은 생사윤회의 주검으로 떨어지는 참선이여. 그래서 이것을 '죽은 참선' 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 것이거든.

그러면 '어떠한 것이 활구선(活句禪)이요, 바른 참선이냐?' 하면 '분별심, 이론으로 따지는 버릇을 쓰지를 말아라. 이건 유(有)다, 무(無)다, 비유(非有)다, 비무(非無)다, 이것은 허공이다, 허공 같으되 허공도 아니다, 이러한 이론을 쓰지를 말아라 이 말이여'

'화두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여. 이론으로 따지지도 말고 이론으로 풀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그렇다면은 왜 화두를 드느냐? 아마 이것은 모든 번뇌와 망상을 싹 쓸어버리기 위해서 이 화두는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화두는 바로 쇠로 맨든 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일체 번뇌 망상을 다 쓸어버리는 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론으로 사용하지 말고 다맛 이뭣고? 만 하라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화두를 들면 번뇌와 망상이 해결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든다고 하는 생각은 갖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치 장님들이 모여 가지고 코끼리를 갖다가 생전 처음 코끼리를 만나서 '대관절 코끼리란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우리가'
그래서 각기 코끼리를 모다 달려들어서 만지는데, 코를 갖다가 이리저리 더듬어 본 장님은 '코끼리 코끼리 하더니 구렁이 같이 생긴 거로구나' 또 한 장님은 배를 갖다가 만져 보고 '아! 코끼리라는 게 벼람박 같이 생긴 것이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라는 게 기둥 같이 생긴 것이다' 각기 자기가 만져본 대로 얘기를 하고 자기가 코끼리의 전체를 파악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39분10초~59분21초)





(4/4)----------------

참선을 해 나가는 데, 화두를 자꾸 드는 데 있어서 모든 망상이 처음에는 더 치성하게 일어나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화두를 들고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날 겨를이 없게 되고, 일어나도 금방 화두를 들므로써 간 곳이 없어지니까 쇠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두를 갖다가 쇠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코끼리는 구렁이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장님과 같은 견해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또 '계려궐(繫驢橛), 나귀를 매는 말뚝이다' 나귀를 매놓지 않고 놔두면 그 나귀란 놈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왔다갔다해서 밭도 밟고 곡식도 밟고 막 함부로 할 텐데, 그 나귀의 고삐를 갖다가 말뚝에다 콱 매놓으니까 그 나귀가 먼 곳을 가지 못하고 그 말뚝 주변에만 뱅뱅 돌게 되니까,
화두만 자꾸 들므로 해서—화두를 안 들면 이 생각, 저 생각, 번뇌 망상, 희로애락 모다 그러한 생각으로 우주법계가 좁다하고 이리저리 돌아칠 텐데, '화두를 착 들므로써 잠깐 뭔 생각이 났다가도 금방 이뭣고? 이뭣고? 하니까 마치 나귀를 말뚝에다 매놓은 거와 같다. 화두란 게 바로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견해도 화두에는 혹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두가 바로 그런 것이다'고 하는 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 보고 기둥과 같다고 하는 견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러쿵저러쿵하는 분별심을 하지 말고, 다못 화두만을 들되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그 말은 '슬퍼한 놈이 무엇인고?', 기쁠 때는 '기뻐한 놈이 무엇인고?' 배가 아플 때는 '배가 아픈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배가 아플 때도 나는 '이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지, 배가 아플 때는 '배 아픈 놈이 무엇인고?' 똥 눌 때는 '똥 누는 놈이 무엇인고?' 세수할 때는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낱낱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수할 때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지금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라 이 말씀이에요.
낱낱이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저거 차 소리가 나면 '차 소리 나는 놈을 듣는 놈이 무엇인고?' 손님이 오면 '손님이 온 맞이한 이놈이 무엇인고?' 밤낮 그때그때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때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들어나가라 그런 말씀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처음에는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면 곧잘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해 가면 차츰차츰 계속해서 쭉 잘되어 가면 참 이거 뭐 어려울 것이 없고 참 좋겠는데, 얼마 동안 해 가다 보면 마치 나귀나 소를 갖다가 우물로 끌고 들어갈려고 한 것처럼 아무리 끌어 잡아당겨도 끌어 잡아당길수록 뒤로 버티고 뒤로 물러설라고 그러고, 뒤에서 억지로 몰아넣어서 우물로 밀어넣을려고 해도 그럴수록에 이놈이 더욱 뒤로 버텨서 안 들어갈려고.

화두를 들고 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좀 할려고 하면 그럴수록에 더 가슴이 먹먹하고 영 머리가 띵하고 망상이 더 퍼일어나고, 몸이 괴롭고 시간이 지루하고 이래서 때로는 냉랭하고, 때로는 열열하고, 때로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때로는 번뇌와 망상이 겨우 좀 가라앉을 만하면 자꾸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이렇게 해서 영 공부가 진취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래 가지고 내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공부를 옳게 하는 것인가? 공부를 잘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번민을 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공부를 꼭 잘 못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옳게 해 나가도 때에 따라서 그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간 좀 포행(布行)을 해서 정신을 깨끗이 한 다음 다시 또 자리에 떠억 앉아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가량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화두를 들면 한결 가슴이 시원하고 후련하면서 또 얼마 동안 공부가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가고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민(煩悶),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잘 안되어 갈 때,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그러한 중요한 고비가, 거기가 바로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지혜롭게 잘 넘기면 바로 공부가 한결 수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고비를, 좋은 중대한 고비인 줄을 모르고 거기서 번뇌심을 내 가지고 '에이! 이거 공부는 못할 것이다. 이거 차라리 아미타불이나 부르다가 죽어서 극락이나 가지, 근기가 약해서 참선은 도저히 안 된다고 하더니 정말 이거 안 될려나 보다' 이렇게 해서 포기를 하면 그 높은 태산준령을 걸어서 걸어서 올라가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개를 넘을 텐데 거기서 포기를 하고 내려와 버린 거와 마찬가지여.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칠석 법회 이렇게 아침부터 비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모다 참석을 해 주셨습니다. 그 정성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것입니다. 성취할 것을 나는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반드시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름 뒤에는 양력으로 8월 25일이고, 음력으로는 7월 보름날, 백중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해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라 하면 돌아가신 부모 또는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우리 족보에 올라 있는 그러한 조상만이 아니라 일가친척뿐만 아니고 어떠한 사람, 이 우주 간에 가뜩차 있는 모든 사람, 모든 동물, 모든 이 허공계에 가뜩차 있는 주인이 있는 그리고 주인이 없는 모든 영혼들, 심지어는 지옥에서 고(苦)를 받고 있는 수많은 중생들까지라도 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윤회를 하면서 올 때에 수수 천백만 번을 새 몸을 받았다가 또 한평생 살다가 또 죽고, 죽었다가 또 다시 새 몸을 받고 할 때에 사람도 되었다, 짐승도 되었다가—소도 되었다, 말도 되었다, 뱀도 되었다, 모기도 되었다, 지렁이도 되었다가, 지옥에도 갔다, 천당에도 갔다, 이러는 동안에 나의 부모 아니었었던 사람은 중생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땐가 한 번은 그 몸을 의지해서 내가 몸을 받아났기 때문에 전부가 다 우리의 선망부모다 이것입니다.

특히 좋은 곳에 계시는 선망부모는 좋지만, 그런 아귀도나 축생도나 지옥도, 이러한 삼악도(三惡途)에서 고(苦)를 받고 계시는 우리의 선망부모, 백중날에 한해서는 그 지옥의 문이 열려서 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가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이나 한국, 일본, 불교를 믿는 나라들에서는 이 백중날에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경건한 법요식을 거행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가 지옥에 빠져서 고생하고 계시는 어머니, 청제 부인을 그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해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감동을 하셔가지고 그 지옥에 고를 받고 계시는 어머니를 구제해 드리는 그것이 최초의 원인이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옥에서는 그날을 기해서 지옥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준례에 따라서 그날 우리의 선망부모를 경건한 마음으로 백 가지 과일과 곡식으로써 선망부모의 천도를 위해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네께 공양을 올리고 선망부모의 천도재(薦度齋)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날 지옥문, 삼악도의 문이 열려서 이 법문을 듣고 천도를 받기 위해서 자기와 인연이 깊은 절을 우리의 선망부모들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보니 아무리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자기의 아들, 자기의 며느리, 자기 딸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면 그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귀신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의 구별이—'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참으로 죽은 뒤에도 내생(來生)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굉장히 의심을 품고 질문을 하시는 분을 만납니다마는, '우리가 한평생 살다가 죽은 뒤에 우리의 상태가 어떠냐?' 한 것은 눈 뜨고 있다가 잠이 깊이 들어서 꿈을 꾸는 거와 같고 또 꿈꾸다가 잠을 깨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이 몸뚱이가 고장이 나면 그 몸뚱이를 버려 버리고 다시 또 새 몸을 받게 되는데 새 몸을 받을 때까지 그 중간의 시간을 갖다가 '귀신(鬼神)의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나 또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들이 이승을 하직을 하고 그분의 업(業)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데 49재만에 새 몸을 받기도 하고, 백 일만에 받기도 하고, 소상이나 대상을 지내고 받기도 하고, 또는 10년, 20년 동안 중음신(中陰身)으로, 이 귀신의 세계에서 영혼의 상태로 있다가 그때사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백 년 동안도 영혼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그때사 새로운 몸을 받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간 분들이 지금 새로운 몸을 받았는지 아직은 받지 아니하고 이 귀신의 세계에서 떠돌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로서는 참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비명(非命)에 가신 분들을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서 여기서 이 최상승법을 법회 때마다 들을 수 있도록 해 드리고, 그리고 법회 때마다 명절 때마다 천도를 해 드리고, 매년 음력 3월 16일에는 합동으로 대천도재(大薦度齋, 법보재法寶齋)를 봉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명(非命)에 돌아가시지 않는 그러한 조상들도 여기에 모시면 더욱 좋고, 특히 비명에 가신 그러한 영가들은 여기다가 모셔 놓으면 집안의 모든 재앙도 쉬어지고, 그러한 비명에 간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원한에 사무쳐서 자기와 가장 인연이 깊은 아들과 딸, 며느리 그러한 주변을 맴돌면서 '나를 좋은 곳으로 천도를 해 달라'고 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호소를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과 영혼과는 원칙적으로 언어가 통하지를 안 해서 가끔 꿈을 통해서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개를 통해서 뜻을 전하기도 하고 그럽니다마는.

그런 영혼은 그 해롭게 하기 위해서 그 집안에 떠나지 아니하고 맴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자기를 좋은 곳으로 천도해 달라'고 가서 한 번 해서 안 들으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 들으면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이렇게 하다 보면 자꾸 그 영혼이 자기 몸 주변에 와서 가까이하고 자기 집안에 이렇게 가까이하고 하면 그것이 인간과 영혼의 세계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도 아무 병도 없고, 신경성이라고 하는 진단을 받지만 사실은 그러한 원한에 사무친, 나와 인연이 있는 영혼 탓으로 해서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는 가정적으로 괴로움을 받게 되는 예가 참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런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서 좋은 법문을 듣고 원한을 다 풀고 여기에서 편안하게 계시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도록 이렇게 하기 위해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여기에 만년위패 법보단을 창설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 이렇게 여기에 참석을 하셔서 그 영혼의 탓으로 해서 최상승법을 만나고, 또 여러분과 같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을 인연해서 그 많은 원한에 사무친 영혼들이 원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가시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온전히 부처님의 은혜요, 전강 조실 스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백중날 우리의 선망부모를 위하고, 우리의 가정을 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크게는 전 인류를 위해서 다 같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백중 천도재에 참석을 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 여기에 위패를 모시지 아니한 분도 오셔서 임시위패를 모실 수도 있고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동참을 하셔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은 여름 경신년 삼하안거(三夏安居), 여름결제가 해제(解制)되는 날이면서 백일기도 회향일까지 겸한 날인 것입니다. 서로서로 권고해서 많이 참석을 해 주셔서 소원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59분21초~1시간20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작일지두개란만~ /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하나의 성현(聖賢)으로 받들어 모시는 토속 신앙을 포섭해서 정법으로 인도하는 자비스러운 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방편을 써왔다 / 용화사에서는 오직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다 / 이 최상승법은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 /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재송(栽松) 도인이 몸을 바꿔 온 법문.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니다 /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 / (게송)약이색견아~.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오늘 칠석날 참선 법문을 해 드린 것은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 자작자수(自作自受) / 모든 업(業)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 절만이 마음을 닦는 곳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 있는 적극적인 참선방이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회이다 / 마정수기(摩頂受記) /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경건한 마음으로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 /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 참선하는 것을 구두선(口頭禪)이라 그러고. 이것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한다. 구두선은 '죽은 참선'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다. 깨달음은 없고 생사윤회로 떨어지는 참선.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중요한 고비.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이다 /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해 드리는 날, 음력으로는 7월 보름날, 백중날 소개 안내 / 이 우주에 가뜩차 있는 모든 중생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이다 / 영혼, 영가의 하소연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만년위패 법보단을 창설하신 의의.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서 좋은 법문을 듣고 원한을 다 풀고 여기에서 편안하게 계시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도록 하기 위함.


우리 용화사에서는 오직 부처님 한 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그리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팔만사천 방편을 하나로 녹여 뭉쳐서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최상승법은 오직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 한 마음을 관하는 이 법으로써 일체법(一切法)을 다 포섭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최상승법은 그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입니다. 벼릿줄 하나만 들면 그 큰 그물이 대번에 가지런하게 탁! 추려지는 것입니다. 벼릿줄과 연결되지 아니한 그물은 없습니다. 모든 그물의 코는 전부가 벼릿줄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하나만을 선양을 하고 여러분들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해 옮기면 팔만사천 방편, 팔만사천 법문이 바로 그 속에 다 포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벼리를 버리고서 낱낱이 그 수십만이나 있는 그 그물의 코를 낱낱이 들려고 하면 그 그물은 흔틀어져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어질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어도 이 최상승법을 믿어야 전체의 불법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믿는 그날부터 정말 올바르게 불법을 믿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고 저 팔만사천 방편 가운데에 저 어느 하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마치 그물을 들 때 있어서 저 그물의 어느 구석지 한 코를 추켜든 거와 같아서 아무리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고 이리 뒤집어 놓고 저리 뒤집어 놓고 해도 도대체 이 그물이 어떻게 생긴가를 모르고 뒤적거릴수록 점점 혼란해지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지금 이 칠석날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신 분은 정말 선택된 불자(佛子)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재송(栽松) 도인이 4조(四祖) 도신대사(道信大師)의 지시로 몸을 바꿔 온 법문.

엄격하게 따지면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닙니다. 성현의 자비에는 따뜻한 인정도 있지만 동시에 참 서릿발보다도 더 차웁고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울 수도 있는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의 인정이라 하는 것은 정에 빠지면 이성(理性)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정(情)으로 남을 보살피고 정(情)으로 남을 사랑하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게 하는 그러한 역효과를 가져오는 수가 너무나 많고 그 정(情) 때문에 결국은 가슴이 쓰리고 아픈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 그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또는 형제간 친구 일가 간 모두가 다 정과 정에 얽히고설켜서 서로 좋아하고, 그것이 한 생각 변하면 미워하고 그것이 더 나아가면 웬수가 되고 전부가 다 그 원인은 정으로부터 그러한 웬수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그러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어리석음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악(善惡), 일체 재앙과 일체 복록이 그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복돋우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게도 할 수가 있고, 재앙이 돌아오게 할 수도 있고 재앙이 돌아오지 않게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불공(佛供)은 꼭 이 법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꽉 차 있는 부처님, 동서남북이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 그 부처님 그 법신불(法身佛)께 공양을 올리는 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를 한 번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인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21. 2. 4. 17:21

((No.139))—1981년 동안거 해제 법문(81.02.19) (44분)

 

(1/3) 약 14분.

 

(2/3) 약 14분.

 

(3/3) 약 16분.

 

(1/3)----------------

이상으로써 해제 법문(解制法門)을 다 설(說)해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전강 조실 스님의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통해서 잘 들으셨고, 그 위에 조실 스님께서 여러분께 직접 보여드리지 못한 부분만을 금방 송담(松潭)이 올라와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쳐서 그 소리를 들려 드림으로써 경신년 삼동결제(三冬結制) 해제 법문을 다 설해 마쳤습니다.
'빨리 법문이 끝나서 점심을 오늘 빨리 먹겠다' 하고 기대를 하실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 분을 위해서 말씀을 좀 더 해야겠습니다.


오늘은 백일기도 회향에다가 삼동결제 해제를, 해제 법회를 겸한 뜻깊은 법회입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결제요, 결제 때마다 되풀이되는 백일기도입니다. 사람은 같은 일이 되풀이될 때에 그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여겨져 가지고 그러한 행사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만 좀 관심을 새롭게 하고, 별로 새로운 것이 없고 마냥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때에는 아무 느낌도 없이 범연(泛然)하게 지나쳐 버리는 그러한 수가 허다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몇억만 년을 두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또 그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이렇게 똑같은 일이 되풀이됨으로 해서 아무도 해가 동쪽에서 떠 가지고 서쪽으로 진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은 서쪽에서 떠 가지고 동쪽으로 지는 수가 있으면 그때는 야단법석을 하겠지만, 어김없이 똑같은 일이 일어날 때에는 설사 그 일이 굉장히 어마어마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무슨 일이 크고 무슨 일이 엄청난다 하더라도, 설사 그 일이 세계적으로 세계를 깜짝 놀랄만한 그러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해가 동쪽에서 떠 가지고 서쪽에서 진 일에다가 비교하면 큰 바다 속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넘어진 거기에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일에 지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 이 일이야말로 지극히 평범하고 하나도 조금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보다도 더 엄청나고 무섭고 큰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서 숨을 쉬고 있지만,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허공 속에 공기, 이 공기를 한푼도 돈도 요금도 지불하지 아니하고 아무도 방해한 사람도 없고 시비한 사람도 없이 제절로 숨을 들어마시고, 들어마셔 가지고 산소는 흡수하고 그리고서 탄산가스를 배출하면서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공기야말로 이 공기 속에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일만큼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 중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대한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중대시하고 중대한 큰 일로 생각한 사람은 또 별로 없습니다.
만약에 이 찰나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공기가 없어져 버린다면 그보다도 더 무섭고 중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해제(解制)가 오늘 돌아왔는데, 사실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하고 오늘 해제를 하게 되고, 백일 동안 기도를 하고 오늘 회향을 맞이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늘도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고, 오늘도 우리는 아무 부담 없이 숨을 들어마셨다가 또 내쉬고 계속해서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하고 있습니다.
이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에서 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고 있는 이 사실이 정말 이 우주 법계(法界)에 있어서 또 우리의 인생 일대에 있어서 정말 엄청나고 위대한 사건이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잠깐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봐야 할 그 시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정반왕궁(淨飯王宮)을 하직하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12년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자발적으로 목숨 바쳐 고행하신 끝에 드디어 납월팔일(臘月八日) 샛별 반짝거린 것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아침마다 새벽마다 그 샛별은 번쩍거리고 있었겠지만, 그 평범한 그 사실을 보시자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는다, 확철대오를 한다, 견성성불을 한다' 한 것은 무슨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특별한 어떠한 그러한 사건을 만나야 깨닫게 되고, 그러한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러한 데에서 깨닫게 된다고 생각을 하신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다맛 그 반짝거리는 그 샛별을 보신 것입니다.

'깨달랐다' 하니까 무슨 굉장한 것처럼, 여러분들은, '현재 이 현실을 떠나서 무엇을 깨달랐을까?' 굉장히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하시겠지만, 그 깨달은 사실을 깨달은 그 현황을 말씀을 드리자면 부처님께서는 다못 그 별을 보신 보셨던 그것뿐인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포대화상(布袋和尙) 법문 가운데에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다못 이 말하는 이 말소리 이놈이니라' 하신 법문을 들었습니다.

눈으로 청황적백(靑黃赤白), 산과 나무, 물과 물소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귀로 듣는 것,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빛깔과 모든 소리와 육식(六識)을 통해서 접하는 모든 상황이 그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낱낱이 우리로 하여금 눈뜰 수 있는, 깨닫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던지, 귀로 무엇을 듣던지, 손으로 무엇을 만지던지, 우리의 생각에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던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느끼던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낱낱이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요,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契機)인 것입니다.(처음~13분50초)




(2/3)----------------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모든 조사(祖師), 선지식(善知識)들은 그렇게 해서 다 일대사(一大事)를 해결을 하고, 일대사를 요달(了達)을 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를 하고 계십니다. 법(法)에 수레바퀴를 끊임없이 굴리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이 시간까지도 깜깜한 채 나를 보지 못하고,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하고, 진리와 계합(契合)이 못한 채 지금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하루하루를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어서 지끔은 참선을 해봤자 깨닫기가 어렵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약해서 해봤자 소용이 없다. 과거에 업(業)이 많아서 우리는 금생에 아무리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자포자기한 말 외에는 아무 뜻이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지끔도 삼천년 전이나 다름없이 하늘에서는 별이 반짝거리고 산은 높고 물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도 다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밥을 먹을 수 있고 발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이 우주 법계에 삼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있으시다면 우리도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끔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해서 우리는 여태껏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쓸데없는 일에는 자존심을 가지고, 중대한 일대사(一大事) 문제에 있어서는 자포자기를 하고 있는 까닭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에 온갖 아만(我慢)과 자존심(自尊心)을 다 버릴 때에 참으로 가장 중대한 위대한 일에 있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집착(執着)을 해 가지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있는 동안에, 큰 중대한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하게 되고 망각(忘却)을 하게 되는 까닭에, 우리는 할 말이 없으니까 말세(末世)를 내세우고 근기(根機) 약함을 핑계하는 그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부처님, 부처님 간 곳이 어데냐? 다못 이 말하는 이놈이다'
조끔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를 설파(說破)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계합하지 못한다면 『화엄경』 『법화경』을 천만 번을 읽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간단한, 너무나도 당연하고 쉬운 이 단적(端的)인 한 말씀에 계합할 수가 있느냐?'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 우리가 들어서 이해하고 있는 모든 이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사량심(思量心)을 가지고 이러한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인 것입니다.
이 말은 중생의 사량심으로 이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량심으로 '아하, 그런 뜻이다' 하고 알았다면 이미 천만리(千萬里) 멀리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소리 이놈이라' 한 그 말씀 자체는 조끔도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가 무엇입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에 꽈악 맥혔을 때, 꽈악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할 때, 바로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에 계합(契合)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56억 7천만 년 뒤에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석가여래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출세하실 미륵(彌勒) 부처님께서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 한 어찌 보면 거지 같고, 어찌 보면 미친 사람 같고 그러한 모습으로 화현(化現)으로 출세(出世)하신 그러한 선지식(善知識), 그러한 선지식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세계에도 수없이 많이 출현을 하고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선지식, 그러한 화신불(化身佛)이 출현하신 것을 그때 사람들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러한 화신불, 그러한 선지식이 우리 주변에 우리 가정에 수없이 많이 계실는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눈뜨지 못한 탓으로 그러한 선지식과 화신불을 매일같이 친견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남편이 부처님의 화신일는지도 모르고,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아내가 그런 화신일는지도 모르고, 이웃에 사는 고약한 사람이 화신불일는지도 모르고, 일가친척 친구 가운데에 화신불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화신불은 누가 보던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모습이 거룩하고, 행동이 거룩하고 그렇게만 꼭 출현을 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도인(道人)이 출현할 때에 81가지, 81가지의 행동 행실 모습으로 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누구나 보면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렇게 거룩하고 훌륭하고 점잖하게만 출현하셨으면 참 좋겠지만, 그러한 모습으로만 출현을 하시지 않고, 오히려 중생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믿음이 가지 않게, 오히려 중생의 마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출현한 경우가 90프로(%)가 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원(醫員)은 중생이 병이 날 때 그 병을 고치는 데 목적이 있듯이 선지식과 불보살이 화현하실 때에는 중생의 사견(邪見), 중생의 삿된 소견(所見)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병을 낫을라면 침으로 찌르고 불로 지지고 칼로 수술을 하고 쓴 약을 먹여서 치료하듯이—어린애들이 쓴 약은 먹기 싫어하고, 달고 맛있는 그런 과자만을 좋아한다고 해서 마냥 단 과자만 먹일 수가 없는 것처럼—중생의 못된 버릇, 삿된 소견을 고칠려면 중생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크고 작은 온갖 충격을 가하지 않고서는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척사현정(斥邪顯正),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소견을 깨뜨려버리고 바른 소견을 나타나게 하는 데에 바로 불보살과 선지식의 화현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불 역경계(逆境界)로써 채찍을 가하지 아니하고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자기를 좀 칭찬해 주고 부드럽게 해 주면 '좋다' 그러고, 조끔 자기의 뜻에 거슬리고 까끄랍고 하면 '싫다'고 토라지고, 이래가지고서는 무량겁 생사업장(生死業障)이 녹을 까닭이 없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탈(解脫)할 가망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13분54초~27분42초)




(3/3)----------------

벌써 신유년을 맞이해서 15일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가 흐르는 물같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금년도 온 세계가 또 우리 국내도 여러 가지로 큰 일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온통 큰 일들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큰일을 맞이해서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그럴수록에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발심(發心)만 한 사람이면 어렵고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공부하는 데에 힘을 얻게 되는 법입니다. 편안하고 무사(無事)하고 모든 여건이 좋기만 하면 대단히 공부가 잘될 것 같지만, 우리는 중생이요 우리는 너무 편안하고 좋으면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져서 진취가 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나라들이 외부로부터 침공해 들어올려고 하는 적이 없고, 국내에서는 계속 충간(忠諫)하는 그러한—왕과 국가정책에 대해서 계속 힐난한 충고를 하고 자극을 주는 그러한 사람이 없을 때 그 나라는...(녹음 끊김) 나라에 대해서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상감마마에 소장을 올리고 진정서를 올리고 이럴 때에 그 나라는 더욱 발전을 하고 개선되어 가고 그런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일신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또는 직장 · 회사 · 국가 · 사회 모든 면에 있어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정신차려서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이 과학 문명이 발달이 되어서 여러 가지로 잘 먹고 잘 입고, 편리하게 왕래하고 참 살기가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 반면 우리는 많은 것을 망각하고 많은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차만 타고 다니기 때문에 다릿심이 없어지고, 사람 건강은 발로 걸어 댕겨야만 오장육부가 튼튼해지게 되어 있는데 걷지를 아니하니까 점점점점 오장육부가 퇴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잡곡 채소 모다 그런 것을 잘 먹어야 하는데, 우유다 계란이다 고기다 또 무슨 종합비타민이다, 좋다고 한 것은 다 고루고루 잘 먹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 때문에 또 그렇게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이 자연은 오염이 되고, 그러한 안일한 자세에서 그런 것을 자꾸 섭취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우리의 혈액도 오염이 되고, 몸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속으로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우리의 몸은 고혈압이다, 중풍이다, 동맥경화증이다, 간암이다, 자궁암이다, 이러한 당뇨병이다, 온갖 현대 의학으로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러한 무서운 병들이 우리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갈 길은 첫째,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정진을 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될 수 있으면 많이 걷고 음식도 너무 호의호식에 빠지지 말고 잡곡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고, 이렇게 생활을 개선해 나간다면 반드시 건강한 육체로 건전한 정신으로 이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 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반드시 우리의 소원,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성취할 것입니다.
우리 불자(佛子)로서 해 나갈 길은 식생활 개선 또 우리의 정신자세를 바로잡고 그래가지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건강이 안 좋을 때도 '이뭣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이렇게 살아가고, 하루하루를 이렇게 단속을 해 나가기를 당부해 마지않습니다.

앞으로 석 달간 춥도 덥지도 않는 그러한 좋은 계절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좋은 계절을 십분 활용을 해서 아침에는 조끔 일찍 일어나서 30분 동안, 1시간 정진은 참선하시고, 낮에도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계시던지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밤에 주무시기 전에도 떠억 앉아서 30분, 한 시간 정진을 하시다가 자리에 들어가시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누운 채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하면서 언제 잠든 중 모르게 잠이 들도록 이렇게 석 달 동안을 열심히 공부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제 동안에 절에 오셔서 석 달 동안을 규칙 생활을 하시면서 정진을 하신 것은 산철에 공부를 잘하기 위한 특별 수련 기간인 것입니다. 결제 때는 공부하고 산철에는 여기저기 구경이나 다니고 그럭저럭 지내도 괜찮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부는 때와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데서 불보살(佛菩薩)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어데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치 언제 중대한 뉴스가 나올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시 라디오나 TV 그 다이얼을 꼭 거기다가 맞추어 놓고 있어야 한 것처럼, 중대한 국가적으로 중대한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어떠한 중대한 뉴스가 있을는지 모를 때에는 다이알을 항시 맞춰 놓고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 어데서 불(佛), 진신불(眞身佛)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무엇하다가 툭! 터질는지를 모르니까, 항시 우리는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거기에다가 다이알을 딱!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이알을 맞추고 있지 않다가 중대한 뉴스가 지내가 버리면 듣지를 못한 것처럼,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깨달음은 오지를 아니한 것이고,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불보살이 수없이 우리의 눈앞에 지내가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좌간백운청수성(坐看白雲聽水聲)허고 도로성색본가풍(徒勞聲色本家風)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륜상월만공산(一輪霜月滿空山)헌디 한안여천향북비(寒雁唳天向北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좌간백운청수성(坐看白雲聽水聲), 앉아서 흰구름을 보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도로성색(徒勞聲色)이 본가풍(本家風)이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귀로 듣는 물소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흰구름이나 온갖 것이 다 본가풍(本家風)이더라.

일륜상월(一輪霜月)이 만공산(滿空山)헌디, 한 바퀴 서릿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헌디,
한안(寒雁)이 여천향북비(唳天向北飛)로구나, 차운 기러기는 하늘에 울면서 북(北)으로 날아가는구나. (27분50초~43분50초) (끝)




[법문 내용]

사람은 같은 일이 되풀이될 때에 그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 이 일이야말로 지극히 평범하고 하나도 조금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보다도 더 엄청나고 무섭고 큰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 공기 속에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일만큼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 중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다맛 그 반짝거리는 그 샛별을 보신 것입니다 /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낱낱이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요,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아만(我慢)과 자존심(自尊心)을 다 버리고, 쓸데없는 일에 집착(執着)하지 말고, 중대한 일대사(一大事) 문제에 목숨을 바쳐라 / '부처님 간 곳이 어데냐? 다못 이 말하는 이놈이다'
조끔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를 설파(說破)하신 것 / 꽈악 맥혀서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할 때, 바로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에 계합(契合)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 / 도인 81가지의 행동 모습 / 척사현정(斥邪顯正), 파사현정(破邪顯正), 불가불 역경계(逆境界)로써 채찍을 가하는 것.

중생은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지기 쉽다 / 모든 면에 있어서 어렵고 복잡한 때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정신차려서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 / 우리의 공부는 때와 장소가 없는 것, 항상 화두(話頭)를 들라 / (게송)좌간백운청수성(坐看白雲聽水聲) 도로성색본가풍(徒勞聲色本家風) 일륜상월만공산(一輪霜月滿空山) 한안여천향북비(寒雁唳天向北飛).


여러분은 전강 조실 스님의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통해서 잘 들으셨고, 그 위에 조실 스님께서 여러분께 직접 보여드리지 못한 부분만을 금방 송담(松潭)이 올라와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쳐서 그 소리를 들려 드림으로써 경신년 삼동결제(三冬結制) 해제 법문을 다 설해 마쳤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에서 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고 있는 이 사실이 정말 이 우주 법계(法界)에 있어서 또 우리의 인생 일대에 있어서 정말 엄청나고 위대한 사건이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잠깐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봐야 할 그 시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정반왕궁(淨飯王宮)을 하직하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12년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자발적으로 목숨 바쳐 고행하신 끝에 드디어 납월팔일(臘月八日) 샛별 반짝거린 것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아침마다 새벽마다 그 샛별은 번쩍거리고 있었겠지만, 그 평범한 그 사실을 보시자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는다, 확철대오를 한다, 견성성불을 한다' 한 것은 무슨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특별한 어떠한 그러한 사건을 만나야 깨닫게 되고, 그러한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러한 데에서 깨닫게 된다고 생각을 하신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다맛 그 반짝거리는 그 샛별을 보신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던지, 귀로 무엇을 듣던지, 손으로 무엇을 만지던지, 우리의 생각에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던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느끼던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낱낱이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요,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해서 우리는 여태껏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쓸데없는 일에는 자존심을 가지고, 중대한 일대사(一大事) 문제에 있어서는 자포자기를 하고 있는 까닭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에 온갖 아만(我慢)과 자존심(自尊心)을 다 버릴 때에 참으로 가장 중대한 위대한 일에 있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집착(執着)을 해 가지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있는 동안에, 큰 중대한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하게 되고 망각(忘却)을 하게 되는 까닭에, 우리는 할 말이 없으니까 말세(末世)를 내세우고 근기(根機) 약함을 핑계하는 그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척사현정(斥邪顯正),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소견을 깨뜨려버리고 바른 소견을 나타나게 하는 데에 바로 불보살과 선지식의 화현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불 역경계(逆境界)로써 채찍을 가하지 아니하고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자기를 좀 칭찬해 주고 부드럽게 해 주면 '좋다' 그러고, 조끔 자기의 뜻에 거슬리고 까끄랍고 하면 '싫다'고 토라지고, 이래가지고서는 무량겁 생사업장(生死業障)이 녹을 까닭이 없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탈(解脫)할 가망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는 때와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데서 불보살(佛菩薩)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어데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치 언제 극가적으로 중대한 뉴스가 나올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시 라디오나 TV 그 다이얼을 꼭 거기다가 맞추어 놓고 있어야 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 어데서 불(佛), 진신불(眞身佛)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무엇하다가 툭! 터질는지를 모르니까, 항시 우리는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거기에다가 다이알을 딱!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이알을 맞추고 있지 않다가 중대한 뉴스가 지내가 버리면 듣지를 못한 것처럼,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깨달음은 오지를 아니한 것이고,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불보살이 수없이 우리의 눈앞에 지내가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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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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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20. 12. 28. 10:11

((No.144))—1981년(신유년) 부처님오신날(81.05.11) (62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20분.

(1/3)----------------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요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요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불기(佛紀) 2525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80세를 일기(一期)로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열반에 드신 해를 1년으로, 원년(元年)으로 해 가지고 금년이 2525년이니까, 80세에 열반하신 그 해가 불기(佛紀) 1년이니까 2525에다가 79를 보태면 오늘이 부처님 탄생하신 그 햇수가 되는 것입니다.

2525에다가 79를 보태면은 2604년이 됩니다. 2604회 「부처님 오신 날」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는 마땅히 부처님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西紀)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을 일 년으로 해서 금년이 1981년이 되지만, 불기(佛紀)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를 일 년으로 해 가지고 불기(佛紀)를 지금 따지고 있으니까, 부처님 나신 생신으로 따진다면 2604년이라 하는 것을 우리 불자(佛子)들은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불기에 대해서 경전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현재 세계 불교학자(佛敎學者)들이 여러 가지로 깊이 연구한 결과 2525년으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2600년 전 인도(印度) 가비라 왕국(迦毘羅王國)에 태자(太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가비라 왕국이 어디냐 하면 지금의 네팔(Nepal) 나라인 것입니다. 네팔 나라에 있는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은 탄생을 하셨습니다.

태자로 태어나셔서 그 태자의 모든 영광과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온갖 고행(苦行)을 다 겪으시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그 모진 고행(苦行)을 하셨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 석가(釋迦)로 볼 때에는 당신의 생사(生死) 문제, '인간은 왜 태어났으며, 왜 늙어서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인가?'

어릴 때부터서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항시 마음속 깊이 그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러시다가 마침내 출가(出家)를 하셔서 '이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출가를 하셔서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 그 많은 무서운 고통을 견디시면서 도(道)를 닦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석가(釋迦)로 보지 아니하고, 저 구원겁(久遠劫) 이래로 진묵겁(塵墨劫) 전에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중생(衆生)들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태어나셔 가지고, 일부러 출가하셔서 고행을 하셔서 대도를 성취한 그 모습을 우리 중생들에게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이렇게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역사, 『팔상록(八相錄)』 또는 여러 가지 부처님에 대한 전기(傳記)를 읽어 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부처님의 역사에 대해서도 진리(眞理)의 몸으로서의 부처님 또는 일단 사바세계에 사람의 몸을 받아서 태어나신 이상은 인간 석가(釋迦)로서 보는 그러한 부처님의 역사,

각도에 따라서는, '부처님은 저 허공에 오색구름 위에 계시고 한 걸음 옮기실 때마다 그 발자죽에서는 연꽃이 피어나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위대하고 신성하고 거룩하신, 우리 중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그러한 훌륭하신 부처님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마는,

각도를 바꿔서, '인간 석가(釋迦)다. 일단 인간의 세계에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신 부처님은 설사 대도(大道)를 성취한 성현(聖賢)이시지만, 우리가 언제라도 가까이 모실 수 있고 가까이 가서 무엇이라도 여쭈어 볼 수 있고 무슨 괴로움이라도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는 따뜻하고 자애로우신 할아버지와 같은 그러한 성현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그러한 것도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부처님' 하면 굉장히 우리하고 거리가 멀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의 할아버지시다. 언제라도 가까이 가서 여쭈어보면 무슨 일이라도 자상하게 인자하게 일러주실 수 있는 그러한 어른이다. 사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우리의 할아버지다’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것이 훨씬 우리들에게 더 가깝고 고마우신 성현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리키고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하고 우리하고는 아주 바탕이 달라서 도저히, 전혀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부처님은 그 본바탕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다.

 

옛날에 ‘양반이다’ ‘상놈이다’ 이러한 계급(階級) 의식이 강할 때, 특히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인도 나라는 네 가지 계급이 있어서 인종(人種)의 차별(差別)이 대단히 심했습니다마는—바라문 계급이라든지, 또는 왕족 계급이라든지, 또는 일반 농민 서민 계급이나, 또는 노예 계급, 이러한 사(四) 계급이 있어서 노예들은 바라문이나 왕족의 옆을 지내가지를 못하고 옷만 스쳐가도 큰 벌을 받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맨 먼저 계급(階級) 타파(打破)를 부르짖어서 부처님의 제자를 만들 때는 농민(農民)도 출가(出家)를 허락을 하셨고, 백정(白丁)도 출가를 허락을 하셨고, 또는 왕족(王族)이나 바라문(婆羅門)도 허락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한 것에 구애(拘礙) 없이 허락을 하셨냐 하면, 동쪽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나 서쪽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나 또는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나 일단 물이 바다에 흘러들어 오면, 바다는 깨끗하다고 해서 받아들이고 더럽다고 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고 모든 종류에 물을 추호도 차별 없이 다 받아들였습니다.

일단 받아들이면 어떠한 종류의 물이라도 바다에 도달하면 짠맛! 짠맛으로 변하고 마는 것처럼, 어떠한 계급(階級)의 인종, 어떠한 죄(罪) 많은 사람이라도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해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다 부처님의 혈통을,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부처님의 진리(眞理),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해서 불제자(佛弟子)가 되었습니다. 불자(佛子)가 된 이상 우리도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입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죄 많은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부처님과 같은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옛날에 어떤 큰 부자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들을 하나를 낳아 놓고 그 아들이 말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렸을 때 그 장자 부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에 가장 훌륭한 보배 구슬, 그 보배 구슬 하나만 있으면 평생을 먹고 쓰고도 남을 만한 그러한 훌륭한 보배 구슬을 그 어린애기한테 전해 봤자 소용이 없어서 자기가 가장 믿는,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그 보배 구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것입니다.

 

그 보배 구슬을 어린아이의 옷 속에다가 넣고 잘 꿰매 놓았습니다. 그리고서 그 자기 친구에게, "이 간난애기 품 안에다가 보배 구슬을 넣고 잘 꿰매 놨으니 이 아이가 크거든 자네가 ‘이 보배 구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일러주어 가지고 그 어린아이로 하여금 먹고 입고 사는데 궁(窮)함이 없이 잘 살도록 일러주기를 바라네" 이렇게 부탁을 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서 많은 세월(歲月)이 흘렀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자기 몸에 간직한 보배 구슬, 그 보배 구슬이 자기 몸안에 있는 것을 전연 인식(認識)하지를 못하고, 부모 없는 자식이 되어서 고향(故鄕)을 떠나 가지고 천하를 얻어먹고 돌아다니면서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자 어느 날 자기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하다가 바로 그 소년이 자기의 친구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친구의 유언(遺言)에 따라서 그 어린 거지 아이의 몸안에 구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는 자기 몸안에 있는 보배 구슬을 꺼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집도 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식량도 사고 또 부릴 사람도 사고, 이래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하는 옷 안에 구슬, 「옷 안에 구슬」이라고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처음~20분46초)

 

 

 

 

(2/3)----------------

 

이 비유는, 우리 안에, 우리는 이 지수화풍(地水火風)—흙으로, 흙 또 물 또 불기운, 바람기운, 이 네 가지의 원소(元素)가 모여 가지고 이 육체(肉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네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는 일단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 죽을 수 밖에는 없는 그러한 무상(無常)한 존재에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상(無常)한 몸뚱이 속에 영원히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에게 주고 그래도 끊임없이 바닥이 날 줄 모르는 그러한 보물이 이 몸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우리 몸안에 그러한 훌륭한 보배가 있다고 한 사실을 우리에게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일러주시기 위해서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탄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보배 구슬이 우리 안에 있는 증거가 무엇이냐?

 

몸을, 오장육부(五臟六腑)를 해부(解剖)를 해 보아도 그 구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몸뚱이를 빨가벗겨 놓고 온 몸을 두루두루 다 살펴보고 눈, 코, 입, 귀, 아홉 구멍을 다 뒤져도 그 보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해부를 해도 나오지 아니하고 아홉 구멍을 다 두루 살펴봐도 없다면 대관절 어떻게 해서 우리 몸안에 그러한 위대한 보배 구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보배 구슬!

여러분들은 ‘다이아몬드’라든지 무슨 그러한 오색(五色)이 찬란한 그러한 보석을 보면 굉장히 기뻐하고 부러워하고 갖고자 원하시지만, 그러한 물질로 된 보배는 언젠가는 내 몸으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이고, 아무리 잘 간직한다 하더라도 도둑을 맞거나 불에 넣으면 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부서지거나 또 형편이 어려워지면 내 몸으로부터 떠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일생 동안 잘, 복(福)이 있어서 잘 간직한다 하더라도 칠십 년 팔십 년 이승을 다 살고 갈 때에는 그것은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왜? 죽을 때 관 속에 넣어 가지고 가면 되지 않느냐!'

관 속에 그 보배, 보석을 가지고 가 본들 썩어 가는 육체와 함께 묻어 놓은 뿐이지 내가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몸뚱이는 목숨이 끓어지자마자 십 분이 되면 벌써 내장부터 버글버글 썩어 들어 갑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몸으로부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영혼은 이미 떠나가고 없기 때문에 시체와 함께 그 보석을 묻어서 같이 묻어 놓아 봤자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질로 된 보물을 욕심내고 간직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말 금생 일생 동안 실컷 쓰고 남고 또 이승을 하직(下直)하고 다시 새 몸을 받을 때에도 그 가지고 갈 수 있는 그러한,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않고, 땅에 묻어도 썩지 않는, 그리고 다른 사람이 훔쳐갈 수도 없고 도둑맞을 수도 없는 그러한, 그러한 보배를 우리는 찾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몸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해부를 해도 나오지 아니하고 화장(火葬)을 해도 타지 않는 것이냐?'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안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가 있으며, 있는 증거를 내 보여라'

지금 이 송담(松潭)이 여러분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송담의 말을 귀를 기울이고 지금 듣고 계십니다. '그 듣고 있는 놈이 무엇이냐?'

'귀가 듣지 무엇이 듣느냐?'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있습니다. 귀를 통해서 듣는 놈!

지금 이 법상에 올라와서 지금 말을 하고 있는데, 저의 모습을 여러분들은 보고 있습니다. 눈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이 있습니다.

 

그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놈! 그놈이 바로 여러분이 찾어야 할, 개발해야 할, 여러분이 깨달러야 할 여러분의 영원한 보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 찾는 공부밖에는 인생으로서 태어나서 할 일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공부를 하는 목적, 돈을 버는 목적, 정치를 하는 목적, 모든 목적이 '보다 더 잘 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보다 더 행복(幸福)하게 살기 위해서 돈도 벌어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하고, 예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돈 많이 번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정치가가 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술을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궁극에 행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더라.

 

내가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이다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불교(佛敎)를 30년, 40년, 평생토록 절에를 다니면서 아들이나 손자나 손녀가 "불교가 무엇이냐?", "뭣 하러 절에 다니느냐?" (녹음 끊김) ...고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說)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 속에서 많은 경전(經典)을 읽고 연구하고 해서 교리적으로 밝은 지식을 쌓으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전혀 교리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그저 소박한 신앙심으로 그저 절에 와서 공양을 올리고 절을 많이 하고 '어쨋든지 우리 아들 명 길고 잘살게 해 주십시오' '우리 딸 좋은 데로 시집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 신랑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손이 발이 되도록 10년 20년 30년을 한결같이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다니신 분, 참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감사하고 기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거기에서만 근쳐서는 아니되겠다 이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소박(素朴)한 신앙(信仰)도 대단히 좋고, 어떠한 참선을 하신 분도 또한 그러한 소박한 신심도 가지고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래야 종교인다웁고, 또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또 겸허(謙虛)한 자세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시골 할머니와 같은 소박한 신심도 가져야 하고.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지 말고 참나를 깨닫는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진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요새 과학 문명(科學文明)이 발달이 되어서, 물질문명(物質文明)이 발달이 되어 가지고 젊은 사람들, 지식층에서는 그러한 소박한 신앙을 강요해 봤자 잘 먹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참나를 깨닫는 참선법(參禪法)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것이 불법(佛法)이라면 나도 한 번 해보겠다. 나의 인간성을 개조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고 우리의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는 그러한 수행법이라면 나도 한 번 해보겠다'

한마디에 탁! 인식을 하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한 분을 나는 많이 만났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최상승법을 널리, 그리고 높이 선양할 때가 바야흐로 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서양사람들이 불교에, 이 참선법(參禪法)에 뜨거운 관심을 나날이 가져가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한국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고 학생들이, 젊은 분들이 이 참선을 들으려고 그러고, 알려고 그러고 또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옛날에는 절에 오신 분이 대부분 오십 · 육십이 넘은 할머니들만이 절에 오시고, 혹 젊은 부인들은 집안 모다 남편이나 시어른 몰래 친정어머니하고 같이 생남불공(生男佛供)하기 위해서 극히 비밀리에 살짝 왔다가, 와서 공(功)만 들이고 가시던 그러한 때가 불과 십여 년 전에까지도 그래 했었던 것을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보면 거의 90%가 젊은 분들이고,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는 겨우 1할 정도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자체는 남녀노소가 없지만 이 시국이, 이 시대가 불법,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야만 이 시대를 건지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때가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40억 인구 속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적극 실천한 사람이 과연 몇 프로나 될 것인가?' 생각할 때에, 아직도 우리 불자(佛子)들이 더 신심을 내서 이 불법을 선양(宣揚)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입으로만 '불법', '참선' 하고 떠들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실천을 해서 나날이 새로와지고 나날이 향상되어 가는 우리 자신을 가족들에게 보이고, 일가친척들에게 보여주고,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이웃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따라오도록 이러한 수행, 이러한 수행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포교(布敎)의 방법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면서 인연(因緣) 있는 사람에게 권고한다면 따라오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다, 소리를 듣는 그때가 바로 참나로 돌아가야 할 때다.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던지 나무를 보던지 또는 사람을 보던지 어떠한 색상(色相)을 본 바로 그때가, 그곳이 참나로 돌아가야 한, 돌아가는 그 곳이다 이것입니다.

 

'참나는 어떻게 찾는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야만 있느냐, 부처님을 모신 절에만 가야만 찾느냐?'

그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든지 또는 들에서든지 또는 직장에서든지 기차나 버스 속에서든지, 어디에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릴 때 그때 '이 무엇고?'

눈으로 무엇을—산을 보고 새를 보고 기차를 보고 사람을 보고, 무슨 빛깔, 청황적백(靑黃赤白) 무슨 빛깔을 보던지, 무슨 모냥을 보던지 볼 그 찰나가 바로 '이 무엇고?'

이것이 바로 참나, 자성불(自性佛), 내 몸안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는 그 찰나(刹那)더라 이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일 분 일 분, 한 시간 한 시간을 살아가고 닦아가고 공부해 간다면,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더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만 출세하신 것이 아니라,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무엇고?’ 할 그 찰나(刹那)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라.(20분47초~41분9초)

 

 

 

 

(3/3)----------------

 

부처님께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말씀하시기를,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염부제(閻浮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다음 부처님으로, 다음 교주(敎主)로 탄생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는 한 생각 한 생각,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에도 '이 무엇고?'를 놓치지 아니할 때, '이 무엇고?'를 관조(觀照)할 때, 그때 그때가 바로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때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것을 듣고서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하! 내가 여태 불교를 믿어도 헛믿었구나.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태어나신 줄 알았는데,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부처님이 탄생하시고 그 부처님을 뵈올 수가 있다니, 당장 이 자리에서 부터서라도 내가 이 최상승법, 이 참선(參禪)을 하리라'

가만히 내가 눈을 감고 살펴보니까, 이를 악물고 그렇게 결심하신 분이 지금 상당히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말씀을 듣고서도, '그 소리가 뭔 소리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

전혀 믿지 아니하고, '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야지, 다 그런 거 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고집을 부린 분도 개중(個中)에는 또 몇 분이 계신다 이 말씀입니다.

 

좋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미타불만 불러야지 다른 것은 나는 안 하겠다' 그러한 철저한 결심이 있는 분은 계속해서 '아미타불'을 불러도 좋습니다. 또 '나는 부처님한테 맹세하기를, 죽을 때까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겠다'고 맹세하신 분이 계시다면 좋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죽을 때까지 열심히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최상승법은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부른 만큼의 공덕(功德)이 있다고 한 사실을 나는 이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서 여러분께 말씀을 아니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컷 부르세요. 부르다가, 맨 끝에 가서 떠억 마음을 가다듬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번 해 보시라 그 말이여. 대관절 여태까지 '관세음보살'을 내가 실컷 불렀는데, '이 관세음보살 부르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한 번 돌이켜서 생각을 해 보시라 이 말씀입니다.

 

백팔 염주(百八念珠)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 한 번 부를 때마다 염주알을 이렇게 이렇게 굴리시는데, 다 백팔 번을 굴리면 마지막에 가서 제일 큰 염주알이 딸크닥 걸립니다.

그 염주알 걸릴 때, 그때 떡!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이 무엇고?~~~' 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렇게만 해 보신다면, 백팔 번 염불하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 백팔 번 염불하는 그 공덕을 탁! 합쳐 가지고 그 공덕을 야무지게 뭉쳐서 성불할 수 있는 단계로 비약하는 것이 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하시다가 나중에, 나중에는 '관세음보살'보다도 '이 뭣고?'가 더 하고 싶은 때가 꼭 올 것입니다. 그때는 여지없이 뒤도 돌아보지도 말고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은 고대로 놔 버리고—버리려고 할 것도 없어. 그냥 고대로 놔 버린 채 '이 뭣고?'만 열심히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열심히 한 그 공덕이 완전히 푸욱 썩어 가지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가지고 머지않아서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때가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을 여러분께 설해 드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많고도 많은 법문(法門)을 설하셨습니다. 삼천년 동안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나오셔서 설하신 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 '이 뭣고?' 이 법 하나를 설(說)하시고 전(傳)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지끔 이 용화사, 용화사를, 용화선원(龍華禪院)을 창설(創設)하신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이 주안에다가 자리를 잡으신 목적도, 바로 우리들에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계속해서 이 최상승법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진리의 부처님이 누구시냐 하면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십니다. 지금 우리 용화사 법당 이 탁자에 모셔진 부처님입니다.

다른 절 부처님은 전부 손을 이러한 모습으로 하시던지, 또는 이러한 모습으로 하시던지, 이런 모습으로 하든지, 모다 손 모습이 다른데, 용화사 부처님 모습은 딱 이렇게 손이 되어 가지고 있거든! 이 부처님의 모습은 바로 비로자나불,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이다 그 말이여.

 

말하자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여.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화신(化身)으로,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나신 부처님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너희들은 이 육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32상(三十二相)을 받아서 태어난 이 육체의 석가모니불을 믿지를 말아라. 진리, 여래(如來), 진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너희들 자신 속에 있는 부처님을 믿어라. 그것을 깨달라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진리의 표상(表象)이 바로 우리 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 진리의 부처님, 참나, 아트만, 그 부처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이여. 이 법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이 돈과 쌀과 떡과 꽃, 온갖 공양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뜩차도록 공양(供養)을 올린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오늘 들으심으로 해서 여러분들은 가장 훌륭한 공양(供養)을 올리신 것이고, 그것을 실천을 하신다면 여러분의 소원은 거기에서 성취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많은 절을 합니다마는, 예배(禮拜)라고 하는 것은 공경진성(恭敬眞性)이요 굴복무명(屈伏無明)이다. 참된 성품, 참된 나 자신의 성품(性品)을 공경하는 것이 이것이 부처님께 예배드린 가장 가까운 예배다.

나무나 쇠나 흙으로 빚어서 만든 부처님께 절하는 공덕도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내 몸안에 있는 참부처님을 공경하고 그것을 닦기 위해서 '이 무엇고?'를 하는 이 공부야말로, 억만 배, 백억만 배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된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굴복무명(屈伏無明)이다', 무명(無明)을 굴복(屈伏)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다. 예배(禮拜)의 의의는, 바로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하는 이상의 예배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따라서 '이 무엇고?'를 하면서 기도도 하고, '이 뭣고?'를 하면서 공양도 올리고, '이 뭣고?'를 하면서 예배를 올린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소원을 달성을 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화사를 여기에다 창건한 목적이 그것이요, 이렇게 법당(法堂)을 크게 지어 가지고 법회 때마다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바도 바로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은 입을 통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법(法)을 설(說)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연중무휴로 전파를 발송을 해 가지고 계속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언제라도 우리 자신이 다이알만 딱! 맞추면 그 방송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듯이, 끊임없이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 최상승법, 위대한 진리의 법문을 설하시고 계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 비로자나 부처님의 사신(使臣)으로서, 사신으로서 사바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역대조사(歷代祖師)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반하신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도 부처님으로부터 77대의 법맥(法脈)을 이으신 도인(道人)이십니다마는, 그 도인만이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누구라도 부처님의 진리법(眞理法)을 전해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법을 이어받으려면,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함으로써 그 다이알을 비로자나 부처님과 다이알을 맞추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해야만 진리법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구현(具現)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604회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기어코 실천해서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각오를 튼튼히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아울러서 이 자리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사부대중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을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축원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들었기 때문에, 듣고 실천을 하려고 각오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소원은 보다 더 빨리 성취가 되실 것으로 나는 믿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소원을, 다 소원을 갖지만 성취되는 사람, 안 되는 사람, 더디 되는 사람, 빨리 되는 사람, 왜 그 차이가 있느냐 하면 과거에 지은 업(業)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업(福業)을 많이 지은 사람,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뜻대로 잘됩니다. 부자도 되고, 높은 벼슬도 되고, 아들딸도 낳고, 오복을 다 겸비하지만, 과거에 복(福) 지은 것은 적고 죄(罪) 지은 것은 많으면, 그 지은 죄의 장애(障礙)로 인해서 우리의 소원은 그렇게 목마르게 바래지만 잘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지은 업(業)에 장애물을 녹여 없애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한 방법보다도 훨씬 수승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언제 어데서라도 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도 쉬운 방법,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를 드립니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원컨댄 법계(法界)에 모든 중생들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다.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일시(一時)에 성불(成佛)하여지이다.

 

앞으로 일주일 뒤, 음력 사월 보름날은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여름 석 달, 여름 음력 4월 15부터 7월 15일까지 석 달은 하안거(夏居)라 해 가지고 특별 수련 기간입니다.

사정이 허락하신 분은 이 특별 수련에 동참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직접 오셔서 공부를 못 하신 분도 참례를 하시면 좋고, 또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또 법회가 있고,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천도(薦度)를 하는 법요... (녹음 끊김) (41분10초~61분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문성시증시~ / 서기(西紀)와 불기(佛紀) / 부처님의 역사. 진리(眞理)의 몸으로서의 부처님과 인간 석가(釋迦)로서의 부처님 /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 /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차별 없이 다 부처님의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

 

『법화경(法華經)』에 '옷 안에 보배 구슬'의 비유. 우리 몸안에도 그 보배가 있다 / 그 보배를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이다. 궁극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 / 내가 나를 찾는,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 / 소리를 듣는 그때, 눈으로 무엇을 볼 그때 '이뭣고?' 이것이 내 몸안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는 그 찰나(刹那)더라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컷 부르다가, 맨 끝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번 해 보시라 /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우리들에게 최상승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 예배(禮拜)는 공경진성(恭敬眞性)이요 굴복무명(屈伏無明) / 업장소멸을 해야 소원성취가 된다. 가장 수승한 업장소멸 방법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리키고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하고 우리하고는 아주 바탕이 달라서 도저히, 전혀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부처님은 그 본바탕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다.

 

어떠한 종류의 물이라도 바다에 도달하면 짠맛! 짠맛으로 변하고 마는 것처럼, 어떠한 계급(階級)의 인종, 어떠한 죄(罪) 많은 사람이라도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해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다 부처님의 혈통을,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부처님의 진리(眞理),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해서 불제자(佛弟子)가 되었습니다. 불자(佛子)가 된 이상 우리도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입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죄 많은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부처님과 같은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놈! 그놈이 바로 여러분이 찾어야 할, 개발해야 할, 여러분이 깨달러야 할 여러분의 영원한 보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 찾는 공부밖에는 인생으로서 태어나서 할 일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이다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최상승법을 여러분께 설해 드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많고도 많은 법문(法門)을 설하셨습니다. 삼천년 동안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나오셔서 설하신 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 '이 뭣고?' 이 법 하나를 설하시고 전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지끔 이 용화선원을 창설하신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이 주안에다가 자리를 잡으신 목적도, 바로 우리들에게 이 최상승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은 입을 통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법(法)을 설(說)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연중무휴로 전파를 발송을 해 가지고 계속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언제라도 우리 자신이 다이알만 딱! 맞추면 그 방송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듯이, 끊임없이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 최상승법, 위대한 진리의 법문을 설하시고 계십니다.

 

그 진리법을 이어받으려면,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함으로써 그 다이알을 비로자나 부처님과 다이알을 맞추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해야만 진리법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구현(具現)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기어코 실천해서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각오를 튼튼히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아울러서 이 자리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사부대중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을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축원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들었기 때문에, 듣고 실천을 하려고 각오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소원은 보다 더 빨리 성취가 되실 것으로 나는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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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20. 12. 18. 09:21

 

 

((No.145))—1981년(신유년) 하안거 결제(81.05.18) (48분)

(1/3) 약 19분. (2/3) 약 17분. (3/3) 약 12분.

(1/3)----------------

 

창출무생일곡가(唱出無生一曲歌)헌데  대천사계용금파(大千沙界涌金波)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황앵상수일지화(黃鶯上樹一枝花)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창출무생일곡가(唱出無生一曲歌)하니, 무생곡(無生曲) 한 곡을 불러내니. 한 곡에 무생곡, 생사 없는 도리를 읊은 무생곡을 한바탕 읊으니,

대천사계용금파(大千沙界涌金波)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금물결이 출렁이는구나.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아름다운 꽃이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다. 흰 해오라비가 논에 내리니 천 점에 눈송이더라.

 

때는 바야흐로 첫 여름에 접어들었습니다.

산천(山川)에 모든 나무에 잎은 피어서 나날이 푸르러 가고 있고, 그 푸른 나뭇가지에 노란 꾀꼬리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저 가지에서 이 가지로 노래를 부르며 날아가는데, 그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떠억 올라앉으니까 그게 바로 한 가지에 노란 꽃송이더라.

하얀 해오라비, 백로(白鷺)가 논에 내려앉으니까 천 송이의 눈이 내린 거와 같다.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고 하얀 백로(白鷺) 떼가 논에 내려앉는 거, 이것이 바로 무생곡(無生曲)을 읊어서 대천세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금물결이 일어나는 도리입니다.

 

 

오늘은 신유년(辛酉年) 4월 15일,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날입니다. 해마다 4월 15일이 되면 여름 결제를 합니다마는, 과연 그 결제가 연례행사(年例行事)로 끝나 버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4월 15일이 되면 결제(結制)하고 7월 15일이 되면 해제(解制)를 하고, 하루하루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이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문을 향해서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이여.

해는 어제도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오늘도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져 가지만, 그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 그 24시간 동안이 다름 아닌 우리가 죽음에 문을 향해서 하루씩을 다가서 가는 것이다.

 

물론 참나를 깨달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契合)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진리(眞理)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화엄경(華嚴經)』에 도리(道理)요 부처님 열반(涅槃)의 경지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사형장(死刑場)을 향해서 하루를 다가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어찌 하루를 그럭저럭 한만히 지낼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하루 죽도록 정진(精進)을 하고 해가 넘어가면 다리를 뻗고 통곡(痛哭)을 한 분도 계시고, 그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쫓고 공부를 하려고 애를 쓴 스님도 계시고, 저녁에 잘 때에는 나무를 동글동글하니 깎어서 둥글둥글한 목침(木枕)을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져서 깜짝 놀랜 바람에 눈을 떠 가지고 다시 또 정진을 하고, 밤에 잠을 안 자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밤새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저 산봉우리에서 이 산봉(山峰)으로 걸어다니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 스님도 계셨습니다.

 

오늘부터 90일간, 석 달 동안 하안거(夏安居)를 하는데, 아직 요새는 추웁도 덥지도 않고 참 좋지만, 불과 한두 달이 지내면 오뉴월 삼복(三伏)이 돌아와서 앉아 있으면 오금쟁이에 땀이 줄줄줄줄 흘르고 땀띠가 솟고, 등어리에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소금물이 줄줄 흐르고, 그렇게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위가 돌아옵니다마는,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來生)이요,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고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면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축생(畜生)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 무간지옥에 떨어졌을 때를 생각해.

 

무간지옥에 그 펄펄 끓는 가마솥에 하루에 만 번 들어갔다 만 번 나오고, 구리쇠 물을 먹고, 무거운 돌로 눌러서 죽이기도 하고, 톱으로 위에서 밑으로 썰기도 하고, 칼이 삐쭉삐쭉한 산에 굴림을 당하기도하고,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지옥고(地獄苦), 그것이 금생에 몸뚱이 받았을 때 도(道)를 닦지 아니하고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 지옥고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러한 지옥고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단 한 시간도, 단 일 분도, 일 초도 등한(等閑)히 시간을 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방일(不放逸), 방일을 하지 않는다.

 

방일(放逸)이라 하는 것은 '놓아 지내지 않는다' '해태(懈怠)를 하지 않는다'

정진,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행정진(加行精進)하면 꼭 송곳으로 무릎을 찔러야만 하느냐, 꼭 똥글똥글한 목침을 비어야만 하느냐, 꼭 해가 넘어가면 다리를 뻗고 울어야만 하느냐, 꼭 무거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밤새 왔다갔다해야만 하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정진은, 방일(放逸)하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정진(精進)이더라.

 

어떤 것이 방일하지 않는 것인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 무엇고?’ 세수를 할 때에도 ‘이 무엇고?’ 앉았을 때에도 ‘이 무엇고?’ 섰을 때에도 ‘이 무엇고?’ 눈으로 파랗고 노란 색상을 볼 때에도 ‘이 무엇고?’ 다맛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것 그것이 바로 방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묘(妙)한 이치가 떠오르고 교리와 부합되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법견(法見) 불견(佛見)에 떨어지면 그 찰나에 벌써 그것은 마섭(魔攝)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바로 방일(放逸)이다 그 말이여. 한 생각 삐끗해 가지고 벌써 몇 겁(劫)의 과보(果報)가 거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제일 두려워할 것이 '한 생각'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생각. 그 한 생각이 삐끗하면 바로 그 삐끗한 그 자리가 천만 길 떨어지는 무간지옥(無間地獄),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불방일이 있고, 가행정진이 있고, 용맹정진이 있는 것이여.

 

밤에 잠을 덜 자고 한다고 애를 쓰면서 낮에는 그럭저럭 잡담(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밤잠을 안 자고 애를 쓰면서 낮에는 온통 입선(入禪) 시간이고 할 것 없이 꾸벅꾸벅 맑은 정신은 하나도 없이 졸기만 하고, 목에 묵언패(默言牌)는 찼으면서도 온갖 의사 표시는 손으로 몸짓으로 다하고,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을 하고 '니가 잘했다 내가 잘했다' 시비를 가리고, 이렇게 수행을 해 가지고서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 까지 정진을 한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네, 특히 선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하는 분상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에서 백까지 오직 해야 할 일은 이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채찍질하는 일 밖에는 없는 것이여.

오직 그 한 일 충실하면 그 가운데 온갖 계율(戒律)도 그 가운데 다 지켜질 것이고,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지혜(智慧)와 모든 복(福)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根源的)인 일 하나에 충실하면 지엽적(枝葉的)인 것은 제절로 그 가운데에 다 따라온 것이요, 다 갖추어진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방편(方便)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지엽적(枝葉的)인 것에 집착(執著)을 해가지고 자기 딴은 애를 써서 한다고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뿌리는 썩어간 줄 모르고 저 잔가지나 이파리에 매달려 가지고 그러고 있다 그 말이여.(처음~18분22초)

 

 

 

 

(2/3)----------------

 

올 여름 결제에 여러 보살님네들이 방부를 들이셨는데, 해마다 결제 때는 말씀을 드린 바지만, 편안한 가정을 놔두고 절에 오셔서 새벽 3시에면 일어나서,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자고 싶어도 마음대로 자지 못하고, 눕고 싶어도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고, 그러한 대단히 구속(拘束)된 생활을 자진해서 선택을 하셔 가지고 절에 와서 안거를 하시는데 그만한 결심, 그만한 신심을 가지고 고생을 자초(自招)해서 들어오셨다면 정말 단 일 분도 일 초도 잡담할 시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니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니가 옳다 내가 옳다’, ‘저 사람은 어떻고 이 사람은 어떻고’, ‘반찬이 어떻고 밥이 어떻고’, ‘이 스님네가 어떻고 저 스님네가 어떻고’, ‘집안이 어떻고 뭐 손자가 어떻고 며느리가 어떻고’, 그러한 시비를 할 겨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환갑 잔치에 무슨 놀러가셨다던지, 어디 무슨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 관광을 가셨다던지, 놀러가셨다면은 잡담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저 뭐 춤도 추고 그저 그러시겠지만, 여기 절에 참선을 하시기 위해서 이 결제(結制)에 오셨다면 잡담할 겨를이 있을 수가 없고, 시비를 할 겨를이 없는 것이여.

 

겨우 입선(入禪) 시간에는 죽비를 치고 앉었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망상(妄想)을 끓이다가, 방선(放禪) 죽비(竹篦)만 치면 그저 지대방에 모여서 그저 이러쿵저러쿵 잡담하고, 심한 분은 큰방에 앉아서까지 그저 잡담을 하고, 둘씩 셋씩 넷씩 모여서 잡담을 하고 무슨 남의 시비를 하고. 여러 신도님이 그러신다는 게 아니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말씀이여.

지난 겨울, 저 지난 여름, 이 참, 해를 거듭할수록 이 선방에 오셔서 공부하신 보살님네들이 점점 모다 규칙을 잘 지키시고 정진을 잘하시고 해서 우리 용화사 선원은 참 잘해 오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결제 때는 으레이 더 그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랐다고 이렇게 이 경책(警策)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 잡담도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저런 말을 한다' 하고 속으로 그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지난철에 또는 저지난철에 스스로 ‘내가 얼마만큼 정진을 열심히 했던가?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히 단속을 하고 정말 알뜰하게 공부를 했던가?’ 반성(反省)을 해 보시고, ‘금년 여름은 정말 법(法)다웁게, 간절하게, 알차게 공부를 하리라’ 이렇게 결심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댁에서는 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가 있고, 누구가 이래라 저래라 말을 들으실 분들이 아니지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으니 정말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공부를 열심히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여기에 오셔서 즉접 참선을 못하시고 댁에서 공부를 하시는 분들, 설사 절에 와서 하시지는 못하더라도 댁에서 하신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러신 분일수록에 더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해서, 일하시면서 손자를 보면서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누워서도 ‘이 뭣고?’, 어디 출행(出行)을 하실 때 차를 타면서도 ‘이 뭣고?’, 차를 타고 오면서도 ‘이 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걸어다닐 때나 머물러 있을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말할 때나 말을 아니할 때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이 뭣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한 생각 일어나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 다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바로 돌이켜서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숨을 조용하게 깊이 들어마십니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丹田), 아랫배가 약간 볼록해짐을 느끼면서 들어마셔. 다 들어마셨으면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보시라 그 말이여.

물론 여러 철을 공부를 해서 이러한 자세한 말씀을 하지 안 해도 잘하신 분이 계시겠지만, 처음으로 선방에 나오신 분, 또는 처음으로 들으신 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만 잘 들면 그만이지 무슨 호흡(呼吸)은, 그까짓 거 호흡하다 보면 화두가 헷갈리는데 호흡은 할 것이 뭐 있느냐'

물론 화두만 여법(如法)하게 잘 들기만 한다면 호흡은 그까짓 거 상관이 없습니다마는, 이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간절(懇切)하게 의심(疑心)을 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니까, ‘간절하다’고 하는 그 뜻을 잘못 이해해 가지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온전히 이 이마에다가 화두를 모아 가지고 그 이마로 화두를 든다 이 말이여. 너무 힘을 써 가지고 억지로 화두를 막 들고서 밀고 나간다.

 

그렇게 한즉슨은 기운이 전부 머리로 올라가게 되고, 따라서 몸안에 있는 피도 머리로 모이게 되어서 얼굴이 붉어지고 골이 아파지고 목이 뻣뻣해지고 참선만 할라고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 말이여.

이러한 병이 바로 상기병(上氣病)이라 하는 것인데, 어리석게 공부를 하면 이러한 약(藥)으로 곤칠 수 없는 이러한 고약한 병이 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공부를 해라.

 

지혜롭게 공부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해서 혈액순환이 잘되게 하고, 생각이 안정이 되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기운은 머리로 올라가지 않고 저 배꼽 밑에 단전으로 기운이 다 내려가게, 그러한 상태에서 화두(話頭)를 들어야 머리도 개운하고 혈액순환이 잘되니까 몸안에 노폐물도 쌓이지 아니하고 밖으로 다 배출이 되고,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가행정진(加行精進)한다 해도 지치지를 아니하고, 부작용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소화도 잘되고, 공부가 지장이 없이 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하도록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잘 모르고 어리석게 공부를 해 가다가 까딱하면은 이 건강이 악화가 되어 가지고 엉뚱한 병이 생기게 되면, 그때에사 ‘어떻게 해야 이 병을 고칠 수가 있는가?’ 이렇게 호소를 해 옵니다마는, 물론 병을 못 고치는 것은 아니로되 상당히 힘이 들고, 이런 상기병 때문에 일생 동안을 정진을 정진답게 해 보지를 못하고 고생을 하고 있는 스님네도 상당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반드시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스승을 잘 만나지 못해 가지고 잘못 공부를 하면 공부는 성취도 되기도 전에 병 먼저 나게 되고, 까딱하면 삿된 경계에 떨어진다던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깨달랐다고 착각(錯覺)을 해서 그 착각 속에 집착을 해가지고 일생을 허송세월하고, 그러한 사람이 구변(口辯)이 좋다던지 학식(學識)이 많다던지 그렇게 되면 삿된 소견(所見)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리켜서 다른 사람까지도 삿된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의 죄가 얼마나 되며,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그르치게 되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먼저 바른 스승을 찾는 것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남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은 마왕(魔王)이고, 바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 법을 듣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마왕(魔王)에 백성(百姓)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혈맥론』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간절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름 석 달 동안이 하루와 같이, 처음 마음먹은 그 결심이 날이 거듭할수록 더욱 견고해지면서 더욱 간절해지면서 하루하루를 알뜰히 공부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은 동시에 백일기도(百日祈禱) 입재(入齋)일입니다.

이 백일기도에 동참(同參)을 하셔서 집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시고 선방에 방부 들인 선객(禪客)이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사신다면, 복(福)과 지혜(智慧)를 겸해서 닦는 것이 되어서, 복과 혜를 쌍(雙)으로 닦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성인 가운데 성현(聖賢)이신 부처님께서는 이 복(福)과 지혜(智慧), 두 가지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대성현(大聖賢)입니다. 그래서 삼귀의례(三歸依禮)를 할 때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두 가지가 족(足)하신 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그 두 가지가 바로 복과 지혜여. 복과 지혜를 다 같이 갖추신 대성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우리도 공부를 할 때, 지혜만을 닦을 것이 아니라 복을 아울러서, 지혜와 복을 겸해서 쌍(雙)으로 닦으면 우리는 복과 지혜를 구족한 성현(聖賢)이 되는 것입니다.(18분23초~35분20초)

 

 

 

 

(3/3)----------------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하야  산중채락기년간(山中採藥幾年間)인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심심송라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 세상에 명예와 권리와 재산, 그러한 세간(世間)에 공명(功名)을 원하지를 아니하고 오직 산에, 산중 청산(靑山)만을 바래가지고 산중(山中)에 살기를 바래서,

산중채락기년간(山中採藥幾年間)인가. 산중에서 약(藥)을 캐기 그 몇 해나 되었던가. 산중에 산다니까 약도 캐서 먹어야 하고 솔이파리도 썰어서 먹어야 하고 그러니까, 산중(山中)에서 약(藥)을 캐서 살기를 몇 해 동안이나 되었던가.

 

심심송라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깊고 깊은 솔바람 불고 안개가 자욱한 속에,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라. 한 곡조 지초 노래, 지초(芝草) 캐는 노래 한 곡조(曲調)에 일만경계(一萬境界)가 한가하더라.

 

이 ‘세상을 버리고 산중에서 약을 캔다’ 이 말은, 약(藥)이라 하는 것은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약이거든. 장생불사. 어떤 것이 장생불사인가?

참나를 깨달라서 생사 없는 도리 깨달른 것,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 이것이 영생(永生)하는 법(法)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이여.

이것이 바로 영원히 죽지 않는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 참선(參禪)하는 것이 장생불사하기 위해서 약(藥)을 캐 먹는 거와 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뭣고?'

 

솔바람 불고 안개가 자욱한 그 깊고 깊은 산중(山中). 지리산이나 태백산, 오대산이나 설악산, 이런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야만 이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회지(都會地) 자동차 소리가 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온갖 소음 잡음이 나고, 공해로 인해서 공장에서 나오는 이 시커먼 연기가 자욱한 그러한 곳이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솔바람 불고 그 안개가 자욱한 깊은 산중이나 조끔도 다른 것이 없는 것이여.

 

아무리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앉었어도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드는 참선(參禪)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서, 산중 속에서 물소리 바람소리가 귀에 듣기 싫고 그 속에 앉어서 아들 생각 손자 생각, 명예 권리 재산 생각한다면 그 산중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느냐, 화두를 들지 아니했느냐에 따라서 지옥(地獄)이 천당(天堂)이 되기도 하고, 천당이 지옥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最上乘)에 있어서 이 세간(世間)을 보는 눈이다 그 말이여.

 

이 최상승(最上乘)을 닦은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은 육도(六道)를 자기가 육도윤회(六道輪廻)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옥을 천당으로 만들 수도 있고 천당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당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지옥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이 한 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육바라밀(六波羅蜜) · 십중대계(十重大戒) · 삼천위의(三千威儀) · 팔만세행(八萬細行) 일체법(一切法), 일체 좋은 법을 한 생각 돌이켜 닦는 데에서 다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다. 한 곡조 지초(芝草) 캐는 노래에 일만 경계가 한가하다.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 한 번 드는 곳에 무량겁(無量劫) 죄(罪)가 거기에서 다 녹아져.

 

인간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없고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 재산에 대한 걱정, 남편에 대한 걱정, 자식에 대한 걱정, 딸에 대한 걱정, 외손자에 대한 걱정, 그 많은 걱정 근심 일체장애(一切障礙)가 어디에서부터 일어난 것이냐 하면, 과거(過去)에 우리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다 생긴 것이다 그 말이여.

그 업을 녹이지 아니하고 잘살기를 아무리 바래고 아무리 재앙(災殃)이 없기를 바랜다고 해서 그것이 잘 살아진 것도 아니고 그 재앙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그 재앙을 없애고 내 소원을 성취하려면 내가 지은 업(業)을 소멸(消滅)하는 것이 가장 첩경(捷徑)이다.

 

그 업을 어떻게 소멸하느냐? '이 무엇고?'

 

기도(祈禱)를 하는 것도 대단히 좋은 방법이죠.

기도도 그 이치를 분석을 해 보면, 일심(一心)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른다던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른다던지 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부른다던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부른다던지, 일심(一心)으로 부름으로 해서 내 마음이 청정(淸淨)해져서 부처님 마음과 같이 깨끗해질 때 그때 우리의 소원(所願)을 성취(成就)하는데, 어째서 소원을 성취하냐 하면은 내 마음이 깨끗해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내려져 있는 업(業)이 녹아지기 때문에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그 말이여.

 

무슨 병이 있건, 무슨 근심 걱정이 있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른다든지, 고왕경(高王經)을 독송(讀誦)한다든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합니다.

아주 목숨 바쳐서 죽을 것을 각오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중풍과 같은 그러한 무서운 병도 낫는 것입니다. 꼭 죽을 수 밖에는 없는 그러한 사람도 살아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것을 열심히 한다면 더 말할 것이 없어.

 

'이 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功德)에 해당이 된다. 오히려 육백만 번 '관세음보살' 부르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것은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그리고 근원(根源)에서 다스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디 시간을 아껴서 정말 무상(無常)을 뼛속 깊이 깨달라서 열심히 공부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35분24초~47분4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창출무생일곡가~ /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문을 향해서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 / 무서운 지옥고(地獄苦)를 생각해 등한히 시간 보내지 말아라 / 정말 훌륭한 정진은 불방일(不放逸), 불방일은 바로 '한 생각' 단속해 의단독로 하도록 하는 것.

 

방부 들인 보살님네들도 간절하게, 알차게 공부하시라 / 단전호흡은 상기병 예방 /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 / 복과 혜를 쌍(雙)으로 닦아야.

 

(게송)불원공명단원산~ /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 영생(永生)하는 법(法)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법 /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깊은 산중, 천당 /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 / 소원성취는 내가 지은 업(業)을 소멸(消滅)하는 것이 가장 첩경(捷徑), 업을 어떻게 소멸하느냐? '이 무엇고?' /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참나를 깨달아 확철대오(廓徹大悟) 해서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契合)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眞理)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 열반(涅槃)의 경지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사형장(死刑場)을 향해서 하루하루 다가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루를 그럭저럭 한만(閑漫)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것은, ‘놓아 지내지 않는다’ ‘해태(懈怠)하지 않는다’

오직 '한 생각' 단속해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그것이 바로 방일하지 않는 것[不放逸]이요, 가장 훌륭한 정진(精進)인 것입니다.

 

아무리 묘(妙)한 이치가 떠오르고 교리와 부합되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법견(法見) 불견(佛見)에 떨어지면 그 찰나에 벌써 그것은 마섭(魔攝)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바로 방일(放逸)이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제일 두려워해야 할 것이 그 한 생각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한 생각이 삐끗하면 바로 그 삐끗한 그 자리가 천만 길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불방일이 있고 가행정진과 용맹정진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먼저 바른 스승을 찾는 것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남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은 마왕(魔王)이고, 바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 법을 듣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마왕(魔王)에 백성(百姓)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간절한 말씀인 것입니다.

 

참나를 깨달라서 생사 없는 도리 깨달른 것,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 이것이 영생(永生)하는 법(法)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느냐, 화두를 들지 아니했느냐에 따라서 지옥(地獄)이 천당(天堂)이 되기도 하고, 천당이 지옥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最上乘)에 있어서 이 세간(世間)을 보는 눈이다.

이 최상승(最上乘)을 닦은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가 육도윤회(六道輪廻)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옥을 천당으로 만들 수도 있고 천당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당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지옥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달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이 한 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육바라밀(六波羅蜜) · 십중대계(十重大戒) · 삼천위의(三千威儀) · 팔만세행(八萬細行) 일체법(一切法), 일체 좋은 법을 한 생각 돌이켜 닦는 데에서 다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기도(祈禱)를 해서 소원성취하는 까닭은, 일심(一心)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부름으로 해서 내 마음이 청정(淸淨)해져서 부처님 마음과 같이 깨끗해질 때, 우리의 마음속에 내려져 있는 업(業)이 녹아지기 때문에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하물며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것을 열심히 한다면 더 말할 것이 없어.

 

'이 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功德)에 해당이 된다. 오히려 육백만 번 '관세음보살' 부르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것은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그리고 근원(根源)에서 다스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디 시간을 아껴서 정말 무상(無常)을 뼛속 깊이 깨달라서 열심히 공부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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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20. 12. 15. 11:09

 

 

((No.137))—1981년(신유년) 신수기도 입재(81.02.07) (용137) (39분)

(1) 약 21분. (2) 약 18분.

(1)------------------

 

동풍취일과(東風吹一過)한디  화란만계홍(花爛滿溪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산출백운외(山出白雲外)한디  송월만창시(松月滿窓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동풍(東風)이 취일과(吹一過)하니  화란만계홍(花爛滿溪紅)이로구나.

봄바람이 한번 불어 지내가니 꽃이 난만(爛漫)히 피어서 시내에 가득히 붉구나.

 

산출백운외(山出白雲外)하니 송월(松月)이 만창시(滿窓時)로다.

산이 백운(白雲) 밖에 우뚝 솟으니, 솔 달이 창(窓)에 가득한 때로다.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한번 쳤습니다. 그리고서 이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 보이신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범부(凡夫)는 그 주장자의 겉모양을 보고, 도인(道人)은 그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도(道)를 닦지 아니하고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주장자를 들어서 법상을 칠 때에, '어째서 저 주장자는 왜 들어서 보이며 또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것이 무엇인가? 저 중이 설법(說法)을 할 때마다 주장자를 떠억 들어서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쿵! 하고 치는데 저게 무슨 짓인가?'

다맛 주장자를—들어 보이는 그 주장자를 볼 뿐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만을 들었을 뿐인 것입니다.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이 도리는 조실 스님의 법문에서는 '도인은 그 주장자를 들어 보는... 주장자를 보는 그놈을 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듣는 놈을, 들을 줄 아는 놈을 본다' 하셨습니다.

 

주장자를 눈을 통해서 보는 놈, 그놈을 과연 어떻게 보며,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마음을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

오직 화두(話頭), 공안(公案), '이 무엇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중생의 사량분별심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를 관조(觀照)할 때에 자기의 면목(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신유년(辛酉年) 정월 초삼일, 신수기도(身數祈禱) 입재일(入齋日)을 당해서 사부대중이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은 이 신수기도 입재에 동참(同參)함으로써 마음속에 크고 작은 간절한 소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동참을 하셨을 것입니다.

 

과거에 한량없는 겁(劫)을 통해서 우리가 지어온 업(業)으로 인해서, 또는 원력(願力)으로 인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났습니다.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喜怒哀樂) 속에서 무엇인가 소원(所願)이 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소원이 없다고 하면 그 인간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거나 희망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람 있게 살고자 하고 소망이... 의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소원이 부자가 되는 소원이건, 좋은 배필을 만나는 소원이건, 명예와 권리를 구하는 소원이건, 일생 동안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래는 소원이건 또는 그러한 유루(有漏)에, 인간 오욕락(五欲樂)에 관계되는 소원을 벗어난 넘어선 무루지혜(無漏智慧)를 얻고자 하는 인간에 지극히 높은 고상한 소원이건 간에, 인간으로서 반드시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려면 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두 가지 중 어느 하나건 또는 두 가지 다 소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조끔도 잘못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려면 반드시 그것이 갖추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법(佛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무루복(無漏福), 생사해탈(生死解脫)한 대지혜(大智慧)를 얻는 그러한 길이 있는 줄을 모르고 인간에 오욕락(五欲樂)이—재산이나 이성이나 명예 권리나 편안하게 사는 거, 오직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만을 바래고 그것만을 얻기 위해서 일생 동안을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그 원을 다 성취하지도 못한 채 한(恨)을 품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행히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한 무루복(유루복)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르지 아니하고 '참나'를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있는 것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분들입니다. 일단 최상승법에 눈을 뜨고 그것을 믿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무루복은 그 가운데 갖추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어서 전강 조실스님께서는 매년 정월 초삼일부터 아흐레까지 7일 동안을 특별히 신수기도를 봉행(奉行)하도록 준례를 만드셨습니다.

일 년 동안을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고, 관재구설(官災口舌)과 삼재팔난(三災八難)이 다 소멸(消滅)이 되고, 동서사방에 출입왕래(出入往來)하는데 항상 길(吉)한 일만을 만나고, 흉한 일은 멀리해서 우리가 하고자 한 모든 일이 뜻대로 되도록 간절한 소망으로 기도(祈禱)를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기도를 원만히 성취할 것인가?

그 기도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흉한 일을 원하면 흉한 일이 다가오고, 슬픈 일을 원하면 슬픈 일이 다가오고, 기쁘고 길한 일을 원하면 반드시 기쁘고 길한 일이 자기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죄 많은 중생이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바로 비로자나,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일부분(一部分)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법신불(法身佛)이요, 보신불(報身佛)이요, 화신불(化身佛)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이 몸 이대로 청정한 비로자나 법신불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면 여러분 가운데에는, ‘우리는 죄(罪) 많은 업(業)에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어찌 우리 몸이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이겠는가?’

이해가 안 되실는지 모르지만,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초목(山川草木)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청정법신불,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인 것입니다.

 

푸른 산, 흐르는 물, 우는 새, 날으는 구름, 하늘에 태양과 달과 별, 지상에 길가에 굴르는 조그만한 잡석(雜石)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몸뚱이 아닌 것이 없거늘, 하물며 만물(萬物)에 영장(靈長)인 우리의 몸이 부처님 몸이 아닐 까닭이 없습니다.

 

다맛 우리의 믿음이 바르고 철저하지를 못하고 참나에 눈을 뜨지 못해서 우리가 스스로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분명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고대로 다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말은 부처님의 설법(說法)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은 반드시 성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일 년에, 신년(新年) 초(初)에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원을 세우고 간절히 소망하는데 있어서 목적을 소원을 달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비근한 한 예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여학교 학생들이 몇 사람이 친구를 삼았습니다. 일곱 명이, 아주 다정한 일곱 명이 회원을 맨들아 가지고 아주 다정하게 놀고, 같이 공부도 하고, 같이 어디 등산도 가고, 특히 생일날에는 서로 그 친구의 생일 집에 모여서 파티를 열고 그리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아주 집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 어머니는 바느질 품삯을 팔아서 그 자기 딸에게 의복이며 소지품이며 학용품이며 모든 것을 어떠한 부잣집 딸 못지않게 아주 잘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그 애가 굉장히 부잣집 딸인 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본인도 친구들에게 자기집이 대단히 큰 부자인 것처럼 그렇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어느 날 그 아이의 생일날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집에서 친구들을 초청을 해가지고 파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날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생일날이 돌아오기 일주일 전부터서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고민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생일날에 그 다른 여섯 명의 친구들이 자기집에 오면 자기집 가난한 것이 폭로가 될 것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서 고민을 하다가 무슨 생각을 먹었느냐 하면 '우리집이 생일날 전날 불이 나서 다 타버렸으면' 이렇게 원을 세웠습니다. ‘불이 나서 없어져 버리면 친구들이 와서 볼 수가 없고, 우리집 가난한 것이 애들에게 폭로가 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집이 불이 나서 홀딱 타 버렸으면’ 이러한 생각을 밤낮으로 간절하게 간절하게 축원을 했습니다.

마치 생일 전날 애들은, '내일이 너의 생일이다. 너희 집에 갈 테니 맛있는 것 장만해서 우리를 기쁘게 먹고 놀게 해 달라'고 모다 참새처럼 모다 뛰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처음~21분5초)

 

 

 

 

(2)------------------

 

생일날 전날 저녁에 불이 나가지고—그 어머니는 떡을 찌고 모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피우고 하다가 그 불이 번져서 그 집이 불이 났습니다. 타 가지고 오두막집이 홀랑 타 버렸습니다. 그 어머니는 펄펄 뛰고 울었지만 그 딸은 속으로 너무너무 흡족해 했습니다.

 

이러한 어린 소녀에, 철부지 어린 소녀에 간절한 생각, 터무니없는 생각도 간절하게 바래는 데에서 그 원하는 대로 된 것을 보면, 정말 우리가 바른 원(願)을 세우고 간절히 원할 때에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칠 일 동안 여러분들 가장 중요한 원을 하나씩 세우고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하시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간절히 소원을 할 수가 있으며,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가 있겠는가?

 

간절(懇切)하다고 하는 내용, 간절히 하는 방법,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일체 다른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이 오직 청정(淸淨)한 마음, 간절한 마음.

마음을 비워야만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한 그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만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이 무엇고?’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쓸데없는 생각, 쓸데 있는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부질없는 생각, 무슨 생각이 되었건 항시 '한 생각'은 일어나 있기 마련인데,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무엇고?'

‘이 무엇고?’로 돌아옴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은 청정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그렇게 공부를 하고 마음을 닦아 놓은 사람이라야 이러한 기도 때에 정말 간절히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고, 설사 이런 신수기도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평상시에 그렇게 마음을 닦아 놓은 사람은 생활 속에 무엇인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즉각 즉각 그 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러한 일을 즉접 경험하고 확실히 그렇다고 하는 것을 여지없이 믿고 알고 계신분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우리의 원(願), 우리의 소원은 그 사람의 얼마만큼 간절하며, 얼마만큼 그 마음이 청정한가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을 단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원이 있어도 간절하지 못하고, 설사 간절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 그 원이 이루어지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 그것은 오직 간절(懇切)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청정(淸淨)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용화선원은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선양(宣揚)하는 정법도량(正法道場)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월 초에 일주일간 신수기도를 봉행하게 법을 만드신 조실스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인생이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복만 있고 혜가 없어도 안 되고, 혜만 있고 복이 없어도 아니된 것입니다.

혜(慧)가 밝아서 도인(道人)이 되어도 복이 없으면 불사(佛事)를 이룩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떠한 조실스님이 대도를 성취해서 큰 도인(道人)이지만, 전생부터서 너무너무 복을 닦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 도인을 믿고 그 도인에게 법(法)을 배우러 제방(諸方)에서 많은 제자들, 선객(禪客)들이 모였지만 식량이 없고 그 선원(禪院)을 운영해 나갈 만한 재정이 없어서 많은 선객들을 수용을 못했던 것입니다.

식량이 부족하고 그 선원을 운영해 나갈 만한 재정이 없어서 왔다가는 다 가고 왔다가는 다 가고, 단 열 사람도 지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福)을 닦지 아니하고 혜(慧)만을 닦으면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세속(世俗)에서 사는 사람 가운데에도 전생에 지혜(智慧)를 닦아서 머리는 천재이지만, 그렇게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지만 복(福)을 전생에 닦아 놓지 않기 때문에 너무너무 가난에 쪼들러서 자기의 그 유능한 두뇌와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러한 사람들을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에 여러분 이웃에서 그러한 사람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福)을 닦아 놓지 아니하고 오직 지식 지혜만 닦은 까닭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혜(智慧)는 닦지 아니하고 복(福)만을 닦아 놓은 사람은 머리는 바보이면서,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된 셈인지 돈은 많아 가지고 재산은 아주 불꽃 일어나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산은 많지마는 머리는 돌대가리여, 바보여.

부모덕에 돈은 많고 좋은 옷은 입고 그렇지만 머리가 나빠서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한 그러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福)만을 닦아서 갖추었지 지혜를 닦지 아니한 결과인 것입니다.

 

복도 필요하고 지혜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도 닦으면서도 복을 닦아야만 복과 지혜를 다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주법계(宇宙法界)에서 최고에 지혜(智慧)를 성취하시고, 최고에 복(福)을 성취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복과 지혜를 갖추신, 두 가지를 원만(圓滿)히 구족(具足)하신 성현(聖賢)이다. 그래서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다. 양족, '두 양(兩)'자, '족할 족(足)'자. 두 가지를 원만히 족하게 구족하신 성현이신 부처님이라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복과 지혜를 원만히 갖추신 대성현이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제자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 지혜와 부처님의 그 복을 본받아서 우리도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닦아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복혜쌍수(福慧雙修).

 

그동안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대지혜(大智慧)를 성취하고, 또 대복(大福)을 성취하기 위해서 또 이렇게 신수기도를 봉행하고, 보시를...

그 복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보시(布施)를 닦아야 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에 보시가 맨 꼭대기에 있습니다. 보시는 바로 희사(喜捨)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보시, 정신적인 보시, 법보시(法布施),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간탐심(慳貪心), 원망(怨望)하는 마음,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도 다 버려 버리는 이것도 또한 희사이고,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남에게 희사(喜捨)하는 것도 보시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온갖 것을 다 깨끗이 버려 버리는 것도 하나의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알려주어 가지고 정법(正法)을 믿게 하는 거, 이것도 보시요 희사인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신수기도를 열심히 수행을 해서 금년 일 년 동안 여러분의 모든 재앙이 다 소멸(消滅)이 되고, 여러분 마음 가운데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소원(所願)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반드시 소원이 성취되실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비록 천만산 구름처럼 구름 일어나듯 그렇게 많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해천명월(海天明月)은 본무언(本無言)이니라, 저 한없는 바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은 본래 말이 없는 법이다.

 

새해 신유년(辛酉年)은 여러분의 소원성취(所願成就)하는 해입니다.

그 소원이 틀림없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분 각기 마음보를 고쳐야 합니다.

 

'내가 왜 마음이 어때서 나보고 마음보를 고치라고 하느냐?'

그 마음보만 하나 탁! 고쳐 버리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무엇이 나뻐서 그래?' 내 마음이 좋다고 하는 고 마음보가 꼭 고쳐야 할 마음보인 것입니다.

 

조용히 가슴에다 손을 대고 정말 자기의 마음을 반성(反省)을 하고 참회(懺悔)를 하십시오.

남편과의 관계, 시부모와의 관계, 자식 며느리와의 관계, 형제간과의 관계, 일가친척 이웃과의 관계, 상관과 부하의 관계, 모든 관계에 있어서 '나는 잘하고 저 사람은 못하고, 나는 잘못이 없는데 저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다' 그 생각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 마음보가 좋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을 바다와 같이 넓게 깊게, 허공과 같이 높고 넓게 크게 그리고 맑게 가진다면, 내가 옳고 저 사람이 그르고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벌써 자기 마음이 깨끗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다.

'새해에는 마음보 고치는 해다. 마음보 고침으로 해서 소원을 성취하는 해다' 이 한마디를 명심(銘心)을 하시고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열심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21분6초~39분21초) (끝)

 

 

 

 

[법문 내용]

 

(게송)동풍취일과~ /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 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 우리는 비로자나불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소원성취한다 / 어느 철부지 어린 소녀의 간절한 소원 / '이뭣고?'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깨끗해져서 소원을 성취 / 용화선원에서 신수기도를 봉행하는 뜻 /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닦아 나가야 / 보시는 바로 희사(喜捨) / 소원성취를 하려면 마음보를 고쳐야.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이 도리는 조실 스님의 법문에서는 '도인은 그 주장자를 들어 보는... 주장자를 보는 그놈을 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듣는 놈을, 들을 줄 아는 놈을 본다' 하셨습니다.

 

주장자를 눈을 통해서 보는 놈, 그놈을 과연 어떻게 보며,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마음을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

오직 화두(話頭), 공안(公案), '이 무엇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중생의 사량분별심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를 관조(觀照)할 때에 자기의 면목(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한 유루복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르지 아니하고 '참나'를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있는 것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분들입니다. 일단 최상승법에 눈을 뜨고 그것을 믿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무루복은 그 가운데 갖추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원만히 성취할 것인가?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흉한 일을 원하면 흉한 일이 다가오고, 슬픈 일을 원하면 슬픈 일이 다가오고, 기쁘고 길한 일을 원하면 반드시 기쁘고 길한 일이 자기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죄 많은 중생이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바로 비로자나,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일부분(一部分)인 것입니다.

 

다맛 우리의 믿음이 바르고 철저하지를 못하고 참나에 눈을 뜨지 못해서 우리가 스스로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분명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고대로 다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말은 부처님의 설법(說法)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은 반드시 성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간절히 소원을 할 수가 있으며,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가 있는가?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야만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한 그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해야만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항시 '한 생각'은 일어나 있기 마련인데,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무엇고?’로 돌아옴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은 청정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그 사람이 ‘얼마만큼 간절(懇切)하며 얼마만큼 그 마음이 청정(淸淨)한가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은 단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용화선원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선양(宣揚)하는 정법도량(正法道場)인데, 신수기도를 봉행하는 법을 만드신 조실스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선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복만 있고 혜가 없어도 안 되고, 혜만 있고 복이 없어도 아니된 것입니다.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대지혜(大智慧)를 성취하고, 또 대복(大福)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신수기도를 봉행하고, 보시(布施)를 닦아야 한다.

 

물질적인 보시, 정신적인 보시, 법보시(法布施),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간탐심(慳貪心), 원망(怨望)하는 마음,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도 다 버려 버리는 이것도 또한 희사이고,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남에게 희사(喜捨)하는 것도 보시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온갖 것을 다 깨끗이 버려 버리는 것도 하나의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알려주어 가지고 정법(正法)을 믿게 하는 거, 이것도 보시요 희사인 것입니다.

 

소원이 틀림없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각기의 마음보를 고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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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19. 11. 25. 14:19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133)—1981년 1월 첫째일요법회 (75분) (용133)

(1/4) 약 22분. (2/4) 약 21분. (3/4) 약 22분. (4/4) 약 11분.

(1/4)----------------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한디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신유년, 양력으로 1월 4일 첫째번 일요법회날입니다.

그동안에는 모든 법회를 아침 오전 11시에 시작을 했었는데 오늘부터서는 첫째번 일요법회에 한해서 오후 2시에 시작하기로 했는데, 날씨도 매우 춥고 그런데 이렇게 많이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법당이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아서 좀 춥습니다.


산승(山僧)이 연전(年前)에 해남 대흥사에서 있을 때, 그때 고려대학 학생들, 모다 서울대 학생들, 연세대 학생들, 대학생들이 모다 고등고시 준비하기 위해서 대흥사 절에 방을 빌려 가지고 와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이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건대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 자기집에서는 부모 밑에서 다 호강하고 그런 학생들인데, 그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그 절에 그 씁씁할 우거지 된장찌게에다가 김치 한 가지 놓고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도 반찬이 없단 말 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밤에면 밤을 패서 공부를 하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이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오면 밖에 나가서 달음박질도 하고 그 얼음을 깨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그래 가지고 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 또 잠이 오면 또 나가서 찬바람을 쐬고 들어오고 이렇게 무섭게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세속에 아직 철이 안 든 어린 학생들이 '고시 합격해서 판검사가 됨으로써 자기의 인생으로써의 출세 성공이다' 이리 생각하고 거의 목숨을 바치다시피 하면서 그렇게 공부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부모와 형제와 고향과 청춘을 버리고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한 승려가 어찌 수행에 일분일초라도 등한히 할 수가 있겠는가? 참선(參禪)하는 사람이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저 학생보다도 더 못해 가지고 어디에다 쓸 것인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거기에서 참, 이 분심(憤心)이 나고 느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같이 있는 젊은 모다 행자(行者)들에게도 "저 학생들을 보아라. 저 학생들이 그 밤잠을 안 자고 공부할려고 애를 쓰는 저 모습을 봐라. 도(道)를 닦는 출가인이 저 학생에 비교해서 저만 못해서 되겠느냐?" 이렇게 서로 경책을 하면서 지낸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공부할 때에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아니할려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하룻밤에 백 리 이상 길을 산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정진을 한 스님네들도 있었고.

밤에 잠시 잘 때에는 목침(木枕)을, 공과 같이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고 잤던 것입니다. 물씬물씬한 목침이나 네모진 목침을 베면 편안하게 몇 시간을 자게 되니까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면 잠깐 잠이 들어서 조끔만 움직거려도 두그르르 굴러서 머리가 방바닥에 툭! 떨어지면 깜짝 놀래가지고 다시 일어나서 공부하기 위해서 그런 둥글둥글한 목침을 깎아서 베었고.


어떤 이는 평생 동안을 목침을 베지 아니하고 자기 팔을 꾸부려서 팔꿈치를 베고 일생을 지내는 그런 침굉 선사와 같은 도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법당은 난방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밑에서는 찬기가 올라오고 윗 공기는 차와서 조금 춥습니다마는 아까 말한 그런 학생들 공부할려고 애쓰는 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과거에 도인들이 어떻게 수행을 하셨는가를 생각한다면 이 법당 이러한 정도의 추위쯤은 능히 참을 수 있고 오히려 뜨뜻한 난방이 잘되어 있는 법당에서는 훈훈한 공기 속에서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마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엄동설한에 일선(一線)에서 우리 후방 국민들의 무사안일(無事安逸)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국토를 지켜 주기 위해서 일선 장병들은 여러분들의 아들, 동생들은 이 혹한 속에서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먹을 것도 충분하지 못한 속에서 목숨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방위(防衛)에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당에 난방 시설을 해 놓지 아니하고 그러한 변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여  취산순환유루인(聚散循環有漏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하고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 우리의 생사가 찰나간(刹那間)에 있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한 것이 이것이 생멸심(生滅心)인데, 이 생멸이 바로 생사(生死)다 이거여.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비로서 죽음이고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바로 그때가 내생(來生)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때가 바로 내생이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또 실질적으로도 어제 멀쩡한 사람이 하룻밤 새에 저승 사람이 되고, 한 시간 전에 멀쩡했던 사람이 금방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이고, 1초 전에 멀쩡했던 사람도 1초 후에 저승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모았다 흩어지고,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고 이러한 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유루(有漏)의 인연(因緣)으로 그리된 것이다 이 말씀이여.[聚散循環有漏因]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쇠 금(金)'자, '까마귀 오(烏)'자, 금오(金烏)는 태양을 금오(金烏)라 하는데, 금까마귀라 하는데 금까마귀가 동쪽에서 솟아 가지고 서쪽으로 지고 또 그 이튿날 동쪽에서 떠 가지고 또 서산으로 지고 이것이 우리의 생명을 재촉하는 것이 된다. 하루해가 지나가면 하루 우리의 죽음을 향해서 다가가는 것이여.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다. 옥토끼는 달을 옥토끼라 하는데, 달이 떠 가지고 지고 또 떠 가지고 지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늙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하고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도자위경조수행(覩玆危境早修行)하여  근념미타생극락(勤念彌陀生極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 여름에 가물 때 웅덩이에 큰 고기, 작은 고기, 송사리가 더글더글더글더글 팔딱팔딱팔딱 뛰는데 물은 하루하루 물이 줄어져서 이제 거의 물이 다 바닥이 다 보이게 되었어.

물은 거의가 다 마르게 되고, 고기는 물이 마르니까 그런 데다 물은 햇볕에 데워져서 뜨겁고 고기가 우물우물우물하면서 곧 빨딱거리다 곧 죽게 된 그러한 형상을 농촌에서 혹 구경을 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세계 40억이라고 하는 인류가 각 나라마다 자기나라 잘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한 나라 안에서는 각기 자기만, 자기가 보다 더 좀 잘살겠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여름 뜨겁고 가문 날에 거의 말라가는 웅덩이 속에 송사리 떼가 몸부림친 거와 같은 현상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라. 큰 광야에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지나가는데 코끼리란 놈이, 성난 코끼리가 자기를 쫓아온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코끼리한테 잡혀서 짓밟히면 죽게 되니까 그걸 피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치다가 마치 큰 샘을 하나 만났다.


그 샘으로 피난을, 피하기 위해서 마치 그 샘 언덕에 등넝쿨이 있어서 그 등넝쿨을 잡고서 샘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말이여. 저 밑에 샘 밑바닥을 내려다보니까 거기에는 독룡 독사가 바닥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그래서 저 밑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위에로 올라가자니 코끼리란 놈이 코를 내두르면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런데 가만히 고개를 들어보니까 그 절벽에다가 벌이 집을 지어 놨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똑똑 떨어진다. 아무리 죽게 되었지만 아! 꿀이 똑똑 이 콧등어리로 떨어지니까 할 수 없이 그놈을 받아서 쪽쪽 빨아먹는다 말이여.

그런데 그때 흰 쥐와 검은 쥐가 나와 가지고 등넝쿨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대. 얼마 안 있으면 흰 쥐가 한바탕 갉고, 조금 있으면 또 검은 쥐가 갉고 흰 쥐가 갉고 그래서 그 등넝쿨 뿌럭지가 똑 떨어지면 샘 밑바닥에 떨어져 가지고 독사의 밥이 되게 되았다 그말이여.


그러면서도 똑똑 떨어지는 꿀 받아먹는 재미로 코끼리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두려움도 잊어버리고, 밑으로 떨어지면 독룡 독사에게 잡혀 먹는다고 하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등넝쿨을 갉아 대고 있다고 하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다 그말이여.

꿀 받아먹는 재미로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을지언정 이 사람의 죽음은 시간 문제다 말이여.


「어떻게 했으면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 문제가 공안(公案)의 하나입니다.(처음~21분39초)




(2/4)----------------


「어떻게 했으면 이 꿀을 받아먹고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우리의 중생, 우리 중생의 운명이, 신세가 마치 이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말씀이여.


광야(曠野)는 생사의 광야요, 인생의 광야요. 우리는 그 한도 끝도 없는 무상(無常)한 생사의 광야를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데 무상살귀(無常殺鬼),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무상살귀로부터 쫓김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그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고, 흰 쥐 검은 쥐는 낮과 밤이고, 그리고 그 등넝쿨은 우리의 생명줄이고, 생명이 수명이 뚝 끊어지면 죽어서 무간(無間), 저승이 기다리고 있다 그말이여.


똑똑 떨어지는 꿀은 무엇이냐 하면은 인간에 오욕락이다 그말이여. 오욕락(五慾樂), 재산 · 색욕 · 명예욕 · 명예 · 권리, 또 수면 · 안락 이런 것이 다 다섯 가지 인생의 즐거움인데.

이 인생에 다섯 가지 즐거움, 그 오욕락에 팔려서 그 재미 보느라고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망각한 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칡넝쿨에 매달려 있는,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여름 웅뎅이에 물 마른 데 퍼드덕거리고 있는 우글대고 있는 송사리 떼와 같은 신세, 칡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서, 도자위경조수행(賭玆危境早修行)이라. 이러한 위경(危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어서 속히 수행을 해라.

그래 가지고 근념미타생극락(勤念彌陀生極樂)이다. 부지런히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얻을지니라.



인생이 과거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세계 40억 인구가 다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오장육부가 다 있지만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비슷하게 닮은 사람은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각기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각기 생각한 바가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받음이 또한 다르다 이 말씀이여.


누구는 부자로 살고, 누구는 명예와 권리가 있고, 누구는 힘이 세고,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병약하고, 누구는 정직하고, 누구는 불량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차(差)가 있지만 이것이 다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그렇게 된 것이다.

일신상만 그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형과 동생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이지, 우연히 아무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이 그러한 관계가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여.


옛날에 정승(政丞)이, 아주 학식도 높고 경륜도 있고 인격도 훌륭하고 한 정승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의 부인도 남편 못지않게 어질고 착하고 모든 부덕(婦德)을 원만히 갖추었드라.

아들도 여러 형제 두고 살림도 풍족하고 그러한 아주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부인이 간 곳이 없어졌다. 혹 친정에를 갔는가, 이웃을 갔는가, 갈만한 곳을 다 연락을 해서 알아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래서 그 정승이 정승을 내놓고 그 아내를 찾으러 나섰다. 팔도를 다니면서 아내를 찾으러 다니는데, 마치 강원도 지방을 가 가지고 어느 산중을 지내다가 보니 자기 아내와 비슷한 사람이 가마니를 이고 어느 영감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 쫓아가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틀림없이 자기 아내여.


"여보, 당신이 아무개 아니요?"

"예, 기요"


그런데 왜 "어찌된 일이냐?"하고 물어보니까, 아무 이유도 없고 "그냥 나가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고.


"저 앞에 간 사람은 누구냐?"고.

"새로 만나 영감"이라고.


"그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무엇이요?"

"숯 가마니요"


"당신이 미쳤느냐"고 붙들고 낙루(落淚)를 하는데, 부인은 별로 울지도 않고 멀쩡해 갖고 섰다 그말이여. 저만큼 숯쟁이 영감이 가다가 암만 기다려도 안 오니까 지게를 거기다 받쳐 놓고.


"올라가자"

"싫다"


"자식도 보고 싶지 않냐?"

"안 보고 싶다"


"저 숯쟁이 영감이 무엇이 좋아서 나를 싫다 하느냐?"

"나도 모르겠소"


아! 이래 가지고 영감은 울고불고해도 할멈은 별로 그렇게 슬퍼한 기색도 없이 자꾸 숯쟁이 영감만 따라갈려고 한다 그말이여. 기가 맥혀서. 강제로 끌고갈 수도 없고, 본인이 싫다는데야 별도리가 없어.

그래서 참 그 영감은 그 숯쟁이 영감한테 마누라를 꼼짝없이 뺏기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건 도대체 어디에다 하소연할 수도 없고, 자기 권리로 숯쟁이 영감을 권력으로 눌러서 뺏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길로 한 발 두 발 걸어서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들어 갔어. 찾아들어 가 가지고 큰스님을 만나 가지고 일장 설화(一場說話)를 다 얘기를 했어.

"어째서 나와 반평생을 같이 사는 동안에 싸워 본 일도 없고, 피차 서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바도 없고, 이 세상에 임금님 내 놓고는 내가 이 세상에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나 이상 좋은 영감이 없을 텐데 남편이 없을 텐데, 어째서 나를 버리고 그 숯쟁이 영감을 갔는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으면 참선을 해라"


그래 가지고 참선(參禪)을 시작을 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이뭣고?'를 하는데 밥도 먹게 되면 먹고 말게 되면 말고, 잠도 자게 되면 정 고단하면 조금 자고 벌떡 일어나서 공부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정말 그 큰스님의 지도하에 목숨을 바쳐서 도를, 참선을 했습니다.


참선이란 것이 꼭—'내가 마누라와의 관계가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되었는가?' 참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승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해 볼 건 다해 보고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고, 오직 생짜로 마누라한테 내소박을 맞고, 숯쟁이 영감한테 가버린 그 이유가 자기 목숨보다도 더 궁금하고 기가 맥혀서 '이것은 기어코 내가 이것은 알고야만 말겠다!' 그래 가지고 죽기로 맹세를 하고 정진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밥을 먹어도 짜고 싱겁고 매운 중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중도 모르고 제절로 속에서 의심이 나는데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소지를 하면서도 '이뭣고?'

누가 자기 보고 '잘하네, 못하네' 무슨 그런 시비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속에서 자동으로 분심(憤心)이 나고 의심이 나는데, 옆에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했어. 간절한 의심이 속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데 '이뭣고?' 뿐이다.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하다가, 잠도 안 오고 배고픈 중도 모르고 의단이 독로해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해 가지고 툭 터졌는데 아! 자기 전생(前生)이 환히 다 보인다 그말이여.


이 말을 듣고서 '옳지! 참선을 하면 전생을 환히 아는구나'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아니됩니다.

이것은 인과(因果)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속에서부터 자동으로 의단이 독로해야 한다고 하는 것만을 얘기한 것이지, '아! 견성(見性)을 하면 전생 일을 훤히 안다, 전생 일을 아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다' 이렇게 비약을, 비약적으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전생에 과연 어떻게 해서 마누라를 만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니까 환하니 보이는데, 전생에 자기는 내나 그 오대산에서 공부하던 선객(禪客) 스님인데.

그 마누라는 누구인고 하고 보니까, 선방에 스님네들은 겨울에는 그 어한(禦寒)을 하기 위해서 솜을 넣어서 누벼 가지고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그것이 또 떨어지면 헝겊을 거듭거듭 대 가지고 마치 따오기를 새를 갖다가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처럼 그렇게 더덩캥이 누데기를 입고 사는데, 겨울에는 추워서 빨 수도 없고 한 해 겨울을 입고 그 이듬해사 그 누데기를 빨게 됩니다.


요새는 이[蝨]가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약을 할려고 해도 구경을 할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이가 아주 자주자주 옷을 갈아입고 그런다 해도 이가 전혀 없을 수가 없고, 더군다나 누데기 같은 것을 한 해 겨울을 입고 보면 누데기 안에 이가 뚱실뚱실한 황소만씩한 이로부터서 서카래까지 수없이 더글더글합니다.

그 누데기 속에 이가 한 마리가 크기 시작하는데 주먹탱이 만큼 컸는가, 가려우면 그놈을 잡아내 가지고 손바닥에다가 이렇게 굴려 보기도 하고 또 씨름도 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집어넣고.


그놈을 잡아서 버리면은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것 같고, 차마 그래서 도로 집어넣다가 심심하면 꺼내서 같이 또 놀고 집어넣고 그렇게 한 해 겨울을 지냈는데, 그래가지고 해동(解冬)이 되아서 이제 누데기를 빨게 되았다.

그냥 마구잽이 빨면 툭 터져서 죽으면 안돼았고, 그래도 한 해 겨울을 같이 지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아! 그 이를 어떻게 처리를 할까?

옷을 갈아입고 다시 또 몸에다 넣자니 그렇고, 그러던 차에 마치 개를 만났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그 개한테 이를 갖다가 개 몸뚱이에다 요렇게 살짝 넣어 주었다 그말이여.


그 이가 누구냐 하면은 자기 할머니(부인)였었다. 한 해 겨울을 따뜻한 자기 몸에서 함께 지냈으니 그 인연으로 그다음 생에 마누라가 되어가지고 자기와 일심동체가 되어가지고 반평생을 같이 살았어. 그러면 그 개가 누구냐 하면은 숯쟁이 영감이다.


이를 잡어서 개한테 넣어 줬는데, 그 자기 몸에서 잡아가지고 개한테 넘겨줄 그때가 돌아오니까 자기를 버리고—부인도 모르지, 모르고서 그 개한테 건너간 그 도수가 딱 돌아오니까 정승 영감을 버리고 정처 없이 가출을 해가지고 걸어가고 걸어가다 얻어먹고 얻어먹다 걸어가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그 숯쟁이 영감, 개가 숯쟁이 영감으로 태어났는데 그 숯쟁이 영감을 만나자 처음 만났는데 그냥 첫눈에 눈이 딱! 맞어 버렸다. 아무 이유도 모르고 까닭도 없이 그 숯쟁이 영감을 한눈에 딱! 보자마자 '이게 바로 내 영감이다'(21분40초~42분1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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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쟁이 영감, 매일 숯을 과서, 숯을 갖다가 구워가지고 그놈을 팔아서 30리 50리를 걸어서 강릉장에 가서 팔고 그놈을 팔아 가지고 또 잡곡을 사가지고 들어와서 그놈을 끓여 먹고 사는 홀애비 신세인데 옷도 참 말로 할 수가 없고, 숯쟁이 영감이 숯가루로 화장을 하고 사는데 수염허며 무엇이 볼 것이 있겠느냐 그말이여. 볼수락 정 떨어지게 생겼겠지만 전생의 인연으로 정승 영감 백보다 낫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숯쟁이 영감이야 정승 부인이 자기를 찾아왔는데, 자기가 정승 부인이라고는 안 하지만 벌써 정승 부인이면 밖으로 풍기는 그 귀인의 자태가 자르르 하고.


"여기서 영감님하고 영감님 밥도 해 드리고 여기서 같이 살 수 없을까요?"

"아이구, 그 말씀을, 어디 그런 말씀을 다 하시느냐?"고, "여기서 어떻게 사실 것이냐?"고, "안 된다"


"아니 상관이 없다"고, "여기서 같이 살게만 해 달라"고.

너무 자기하고 그 부인하고 비교를 해 보니 비교가 되지를 않고, 도대체 황감(惶感)하고 죄송해서 '아! 그러시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렇지만 호박이 넝쿨째 떨어져서 속으로야 기가 맥히게 좋지만 '안 된다'해도 뭐 자기가 탁 걷어붙이고 나아가서 밥을 하고.

그날 저녁에, 방은 쪼그만한 됫박만한 방 하나 밖인데 부인이 몇백 리를 걸어서 걸어서 와가지고 꾸벅꾸벅 졸다가 쓰러져 자는데, 영감은 그 옆에 잘 수도 없고 윗목에 가서 혼자 쪼그리고 앉았다가 '에이, 나도 모르겠다'해 같이 자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부부간이 되었는데.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부부간에 만나는 인연이 반드시 과거에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만나고, 금생에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고 이런 것이여.


여러분 가운데는 부부간에 정분이 기가맥히게 좋은 분도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좋다가 중간에 쪼금 그 냉각기가 있다가 또 나중에 또다시 좋기도 하고 또 중간에 헤어지기도 하고. 영화 같은 데 보면 헤어졌다 또 다시 만나기도 하고.

참,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기구한 것인데, 그것이 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여. 반드시 아까 숯쟁이 영감과 같은, 그보다도 더 이상한 묘한 그러한 인연이 얽히고설켜서 금생에 이렇게 만나는 것이여.


일생 동안을 잘 살아도 한마당 꿈에 지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잘 못산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한바탕 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꿈에 주먹탱이 만한 보석을 얻어 봤댔자 꿈 깨 버리면 간 곳이 없고, 꿈에 무서운 호랭이나 독사한테 쫓겨서 진일 켜 봤댔자 눈만 딱! 떠 버리면 호랭이도 간 곳이 없고 독사도 간 곳이 없습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꿈에 그런 호랭이한테 쫓긴다던지 독사한테 쫓길 때 그 무섭고 겁이 난 것이 말로 할 수 없는데, 아무리 도망갈려고 해도 발은 제자리에서만 동동거리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큰소리가 나지를 않고 그리하다가, 얼마 동안을 그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눈을 떠 보면 전신이 땀이 젖어 갖고 있고 이러한 꿈을 꾸는 수가 있었는데,

참선을 한 뒤로는 그런 어려운 그런 무서운 경지를 딱 닥치면 금방 탁! 화두(話頭)를 들면서 눈이 뚝 떠져 버린다 말이여. 그래서 그런 무서운 꿈을 잘 꾸지도 않지만 혹 꾸더라도 금방 내가 '에이, 이까짓 것'하고 탁! 정신을 차려버리면 눈이 뚝 떠져 버리는 그런 경험을 가끔 하게 되는데.


우리의 인생살이가 무섭건 괴롭건, 기쁘건 행복하건 간에 엄격히 말하면 인생 칠십이라고 해 봤자 잠깐 동안 꾸는 봄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이여.

행복하게 산다 하더라도 눈떠 버리면 허망한 것이고, 괴롭다 하더라도 무섭다 하더라도 딱! 눈떠 버리면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무서울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우리는 인생 어피차 과거의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에 의탁을 해서 이 몸을 받아 낳고 일평생을 길건 짧건 좋건 궂건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꿈은 꿈이로되 분명 현실은 또 있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꿈이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호랭이를 만나면 무섭고 독사를 만나면 무섭고, 보석이나 금덩어리를 주으면 기쁘고 그것을 빼앗기면 아깝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문제가 하나도 아니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인생에 명예와 권리와 지위와 부귀공명이 그것이 허망한 것이고 꿈이라 하지만, 인생으로써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되고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현실을 내놓고 꿈이 따로 없고, 꿈을 내놓고 현실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허망한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세상은 무상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다. 다 소용없는 것이다, 다 버려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그 가운데 그것이 허망한 줄을 알아야지, '허망한 것이니까 다 소용없다' 이러한 방향으로 이러한 태도는 올바른 불자(佛子)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충실하다고 해서 허망한 줄을 모르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거기에 얽매이면 그 사람은 또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허망한 줄만 알지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아빠로서 엄마로서 국민으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하지 아니한다든지, 그것에 충실한답시고 거기에 완전히 얽매어 가지고 참으로 이것이 허망한 줄을 모른다던지, 이 사람은 정반대의 입장이지만 두 사람이 다 바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 별, 그리고 산과 흐르는 물, 꽃과 잎, 모든 동물,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온갖 것이 이 두두물물이—이것을 불교의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하는데, 제법(諸法)이라고도 하고 일체법이라 하는데, 이 삼라만상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생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이것 자체가 어데서 왔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의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여의고 우리의 자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떠나서 우리의 참마음을 찾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번뇌와 망상이 우리의 진여자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우리의 자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저 출렁거리는 산더미 같은 바다에 파도, 크고 작은 파도가 물을 떠나서 파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는 물이 움직여서 파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파도가 바로 물인 것입니다. 파도를 버리고서 물을 찾는다면 우리는 물을 앞에다 두고 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웬수 같은 자식, 웬수 같은 남편, 웬수 같은 아내, 웬수 같은 형, 웬수 같은 동생, 웬수 같은 친구, 웬수 같은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어째서 훌륭한 부모, 좋은 자식, 좋은 형, 좋은 동생, 진정한 사랑할 수 있는 아내와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웬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야 하는가? 원망과 한탄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가? 온전히 이유는 그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


한 번 지어 놓은 인연(因緣)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기가 지어 놓은 인과(因果)는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나, 온갖 인과에 근원을 깨달라서 체달(體達)을 하면 제절로 모든 일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자기에게 자기가 지어서 받은 인과, 윤회 생사윤회를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녹음 끊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병 난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전거 구사리 같은 것이 이리저리 올라갔다 내려갔다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눈병을 깨끗이 치료를 한 뒤에 보면 아무것도 허공에는 원래로 없었던 것이여.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만 보였지 눈병이 나 있을 때나, 눈병을 나은 뒤에나 허공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보인 생사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생사해탈, 생사해탈' 말을 했지만,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어디까지나 중생의 입장에서 중생의 언어를 빌려서 그러한 표현을 방편(方便)으로 쓰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42분19초~63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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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리가 높고, 아무리 학문이 높고, 아무리 기운이 세고,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이 참나를 깨닫는 일만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모든 재산과 모든 힘과 모든 학식과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정승이라 하드라도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내, 얌전한 아내, 일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백년을 해로(偕老)할 줄 알았다가 뜻밖에 간 곳이 없으니, 삼천리 강토를 한 손에 움켜쥐고 호령을 했던 정승도 사랑하는 아내가 간 곳이 없어지자 살맛이 없어지고 정승도 다 팽개치고 그 아내를 찾어 나섰습니다.


거지와 마찬가지인 숯쟁이 홀애비 영감한테 정승에 부인을 빼앗길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재산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명예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하라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라.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두상광음(頭上光陰)이 전두비(轉頭飛)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이때를 향해서 자기를 밝히라. 이때, 이때란 어느 때냐?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건강할 때—바쁘다 핑계 대지 말고, 아직은 시간이 있다 뒤로 미루지 말고, 아들딸 키워 놓고 장가 보내 놓고 이러한 등등 핑계를 대지 말고. '몸이 건강치 못하니까 병을 낫은 다음에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좀 더 부자가 되어가지고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이만한 처지에서 바쁘면 바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당장 내일 일을 모르고 밤새 일을 모르고 한 시간 뒷일을 모르는 백지 한 장 밖을 내다보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 무엇을 믿고 뒤로 미루겠는가 이 말씀이여.


머리 위에 광음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시간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장소는 앉아 있을 때는 바로 그 자리가, 서 있을 때는 그 자리가, 걸어갈 때는 그곳이, 차를 탈 때는 바로 그 차 안이, 변소에 앉았을 때는 변소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감옥이, 병원에 있는 사람은 병원이 바로 그때 그 자리가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바로 부처님 품안이요, 부처님 손바닥인 것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은 어디나 법당이요, 우주법계가 부처님이 꽉 차 계신다면 우주법계 · 허공계 · 육도법계는 온전히 바로 거기가 법당이요, 불회상(佛會上)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대화엄경이요, 대열반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입니다.

날아가는 새 소리, 비행기 소리,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까마귀 소리, 개 짖는 소리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고대로 전부 부처님에 설법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 나에게 억울하게 욕하는 소리, 부처님에 설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여러분은 최상승법을 믿는 최상승 수행인이요, 불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제부터서는 원망할 남편도 없고, 원망할 아내도 없고, 미워할 이웃도 없고 웬수도 없습니다. 어제까지 미웠던 사람도 이제부터서는 미워할 거리가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는 누구도 부처님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웬수도 이제부터서는 나로 하여금 참나를 깨닫게 해 주는 도반(道伴)이요, 관세음보살이요, 문수보살이요, 부처님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의 묘한 진리가 위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이 말씀을 믿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후생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입니다.(63분56초~1시간14분3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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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연비산산공착영~' ; 『관음예문(觀音禮文)』에 나오는 게송.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연전(年前) ; 여러 해 전.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공부할 때에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고' ;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인추자자(引錐自刺 송곳으로 제 몸을 찌르다)'에서.

昔 大愚 慈明 谷泉 琅瑯四人 結伴 參汾陽 時 河東 苦寒 衆人 憚之 唯慈明 志在於道 曉夕不怠 夜坐欲睡 引錐自刺 嘆曰 故人 爲生死事大 不食不寢 我又何人哉 而縱荒逸 生無益於時 死無聞於後 是自棄也 後嗣汾陽 道風 大振 號 西河師子


저 옛날, 대우(大愚), 자명(慈明), 곡천(谷泉), 낭야(琅瑯)등 4인이 도반을 맺고 분양(汾陽) 화상 회상에 지내는데 그때 하동(河東)은 매우 추운 때라 대중은 망설이는데 오직 자명은 뜻이 도에 있어 밤낮으로 힘써 정진하되,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제 몸을 찌르며 탄식하기를 "고인은 생사의 큰일을 위하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거늘 나는 또한 어떤 놈이기에 게으르고 방종하여 살아서는 때에 보탬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이름이 없으니 이것은 내가 나를 버림에서라"하며 정진하더니 후에 분양 화상을 이어 도풍(道風)을 크게 떨쳐 '서하(西河)의 사자(獅子)'라고 불렸다.

*'밤에 잠시 잘 때에는 목침(木枕)을, 공과 같이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고 잤던 것입니다' ;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원침경수(圓枕警睡 둥근 목침으로 잠을 쫓다)'에서.

喆侍者 睡以圓木 爲枕 小睡則枕轉 覺而復起 率以爲常 或謂用心太過 答云我於般若 緣分 素薄 若不如此 恐爲妄習所牽


철(喆) 시자는 잠잘 때엔 둥근 나무토막을 베개로 자다가 좀 잠들면 곧 목침이 구르므로 잠을 깨고는 다시 일어나기를 일상으로 하였다. 혹 사람이 말하기를 "용심이 너무 지나치다"하면 답하기를 "나는 본래 반야에 연분이 박하니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망습(妄習, 虛妄習氣 거짓되고 망령된 습기)에 끄달리까 두려워한다"하였다.

*'어떤 이는 평생 동안을 목침을 베지 아니하고 자기 팔을 꾸부려서 팔꿈치를 베고 일생을 지내는 그런 침굉 선사와 같은 도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 조선 후기 침굉 현변(枕肱懸辯) 스님(1616~1684)을 말한다. '침굉(枕肱 팔뚝을 베고 잠)'이란 법호가 말해주듯 일생동안 팔꿈치를 베고 잠을 잔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님은 전라도 나주 사람이다. 자는 이눌(而訥)이고 법휘()는 현변(懸辯)이요, 속성(俗姓)은 윤씨(尹氏)이다. 12세 때에 보광(葆光) 법사를 따라 출가하여 장흥 천관산에 가서 불전을 공부하였다. 13세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소요태능(逍遙太能) 선사를 방문하였는데 한번 보고서 탄복하였다.

지리산 연곡사, 조계산의 송광사와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교화를 펼쳤고 말년에는 금화산 징광사에서 지내다가 입적하였다. 장례를 행할 때 다비(茶毘)하지 말고 들판에 버리라는 것이 임종할 때의 유촉(遺囑)이었는데, 제자들은 금화산 둘째 봉우리 바위틈에 봉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5년에 간행한 시문집 『침굉집(枕肱集)』이 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무사안일(無事安逸 없을 무/일 사/편안할 안/한가할 일) ; 어떤 일[事]에도 해결하려 하지 않고[無] 편안(便安)하고 한가하게[逸]만 지내려는 태도.

*주야불철(晝夜不撤 낮 주/밤 야/아닐 불/거둘·철수할·그만둘 철) ; 불철주야(不撤晝夜). ①어떤 일을 함에 있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않음[不]. ②밤낮없이.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비로서 죽음이고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바로 그때가 내생(來生)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때가 바로 내생이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p103-104. (가로판 p101~103)

念起念滅(염기염멸)을 謂之生死(위지생사)니 當生死之際(당생사지제)하야 須盡力提起話頭(수진력제기화두)호리니 話頭(화두)가 純一(순일)하면 起滅(기멸)이 卽盡(즉진)하리라

起滅卽盡處(기멸즉진처)를 謂之寂(위지적)이라하니 寂中(적중)에 無話頭(무화두)하면 謂之無記(위지무기)요 寂中(적중)에 不昧話頭(불매화두)하면 謂之靈(위지령)이라하나니 卽此空寂(즉차공적)과 靈知(영지)가 無壞無雜(무괴무잡)하야 如是用功(여시용공)하면 不日成之(불일성지)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고.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유위법(有爲法) ; 위(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고, 유위(有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을 가지는 것.

①여러 인연(因緣)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또는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및 존재(사물).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계의 일체의 사물. 인과 관계 위에 있는 존재.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에 의하여 화합생성된 것이므로 생(生)도 있고 멸(滅)도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하고, 무위법(無爲法)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절대적인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유루(有漏) ; ①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②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더글더글 ; (물체 따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마구 모이거나 겹쳐 있다.

*우물우물하다 ; 큰 벌레나 물고기 따위가 한군데에 많이 모여 자꾸 굼뜨게 움직이다.

*가물다 ; 땅에 물기가 바싹 마를 정도로 오랫동안 계속하여 비가 오지 않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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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했으면 이 꿀을 받아먹고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 이 물음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달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할지어다.


*안수정등 기능장구(岸樹井藤 豈能長久) ;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참고] 『치문경훈(緇門警訓)』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에서.

夫業繫受身 未免形累  稟父母之遺體 假衆緣而共成 雖乃四大扶持 常相違背 無常老病 不與人期  朝存夕亡 刹那異世 譬如春霜曉露 焂忽卽無 岸樹井藤 豈能長久 念念迅速  一刹那間 轉息 卽是來生 何乃晏然空過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의 근심을 면치 못한다. 부모가 내려주신 유체(遺體, 父精母血)를 받아 여러 인연을 임시로 빌려 함께 이루었다.

비록 다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견디어내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져 무상(無常)하게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이 사람으로 더불어 때를 정하여 약속하지 않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봄날의 서리, 새벽이슬과 같아 갑자기 없어지니,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순간 순간 빠르고 빨라서 일찰나 사이에 숨이 떨어지면 곧 내생이니, 어찌 편안히 헛되게 지내리요.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무간(無間) ; ①곧. 즉시. 끊임없이. 끊어짐이 없음. 또는 중간에 끼이는 것이 없음. '무간'은 시간적으로 계속된다는 뜻이고, 공간적으로는 끼일 틈이 없다는 뜻. ②무간업(無間業)의 준말. ③무간지옥(無間地獄)의 준말.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위경(危境) ; 위태로운 처지나 지경.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정승(政丞 정사 정/도울·정승 승) ;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 행정부의 최고 기관)의 수반(首班 행정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통틀어 이르는 말.

*부덕(婦德 아내·여자 부/덕·은혜·선행·행위 덕) ; 부녀자(婦女子 결혼한 여자와 성숙한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아름다운 덕행(德行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

*낙루(落淚 떨어질 낙/눈물 루) ; 눈물을 흘림. 또는 그 눈물.

*일장 설화(一場說話) ; 한바탕(크게 벌어진 한판)의 이야기.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생짜(生-) ; 아무런 근거나 조건도 없이 억지를 부리거나 강다짐을 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

*내소박(內疏薄 안·부녀자·아내 내/멀어질 소/야박할 박) ; 아내가 남편을 박대(薄待)함.

*박대(薄待 엷을·야박할 박/대접할·대우할 대) ; 남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野薄] 대접(待接)함. 푸대접. 인정 없이 모질게 대함.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적적성성(寂寂惺惺) ; 성성적적(惺惺寂寂).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내나 ; ①다름이 아니라. ②결국에 가서는.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어한(禦寒 막을 어/찰 한) ; 추위를 막음. 또는 추위에 언 몸을 녹임.

*더덩캥이 ; 더뎅이(부스럼 딱지나 때 따위가 거듭 붙어서 된 조각).

*누데기 ; ‘누더기(누덕누덕 기운 헌 옷)’의 사투리.

*이[蝨] ; 몸길이 1~4밀리미터이고, 몸은 보통 편평한 방추형이다. 사람의 불결한 머리나 옷, 동물의 털 등에 붙어 살면서 번식하여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해충이다. 피를 빨아 먹어서 몸을 가렵게 하는 외에 발진티푸스, 재귀열 등의 질병을 옮긴다.

*서카래 ; '서캐(이[蝨]의 알)'의 사투리. 서까래, 써까리, 서카리, 쌔기 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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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감하다(惶感-- 두려워하다·당황하다·어찌할 바를 모르다 황/느끼다·감동하다·고맙게 여기다 감) ; 황송하고 감격스럽다.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주먹탱이 ; 주먹(다섯 손가락을 모두 오무려 쥔 손)같이 둥글고 단단하게 한데 뭉쳐진 어떤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봄꿈 ; ①봄날에 꾸는 꿈. ②한때의 덧없는 일이나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생사대해(生死大海) ; '생사의 큰 바다[大海]' 중생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말.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공화(空花, 空華).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구사리 ; 일본어 'くさり(쿠사리)'이며, '쇠사슬'이라는 뜻. 자전거 체인을 말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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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偕老 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며 늙음.

*(게송)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 ;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 (가로판 p169) 게송 참고.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

‘당장 이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광음(光陰 빛 광/응달 음) ; 햇빛[光]과 그늘[陰],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영산회상(靈山會上) ; ①석가모니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②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花微笑)의 회좌(會座).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불회상(佛會上) ; 부처님(佛)의 회상(會上). 부처님 계시는 곳.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만단(萬端) ; 수없이 많은 갈래.




[법문 내용]


(게송)연비산산공착영~ / 대흥사 고시생의 공부 모습 / 과거 도인(道人)들의 정진 모습[선관책진(禪關策進)].

(게송)찰나생멸무상법 ~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생사 / 안수정등 기능장구 /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

자작자수(自作自受) / 숯쟁이 영감. 인간의 인연에 우연은 없다 / 우리 인생은 꿈이로되 현실.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 / 삼라만상(일체법)은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 생사는 본래 없다.

지금 이만할 때 자기를 밝히라. 이런저런 핑계 대고 미루지 말라 /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팔만대장경,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



오욕락(五慾樂), 재산 · 색욕 · 식욕 · 명예 · 권리, 또 수면 · 안락 이런 것이 다섯 가지 인생의 즐거움인데, 그 오욕락에 팔려서 그 재미 보느라고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망각한 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칡넝쿨에 매달려 있는,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 사람이 살아 갈수가 있느냐?


여름 웅뎅이에 물 마른 데 퍼드덕거리고 있는 우글대고 있는 송사리 떼와 같은 신세, 칡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서 이러한 위경(危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어서 속히 부지런히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얻을지니라.


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은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바로 부처님 품안이요, 부처님 손바닥인 것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은 어디나 법당이요, 우주법계가 부처님이 꽉 차 계신다면 우주법계 · 허공계 · 육도법계는 온전히 바로 거기가 법당이요, 불회상(佛會上)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대화엄경이요, 대열반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15. 12. 30. 14:16

 

 

(No.134)—전강 조실스님 6주기 추모재(81.01.07) (13)

 

 

약 13분.

 

 

무술년 11 16일에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셔서, 17세에 해인사로 출가를 하셔 가지고 제산(霽山) 스님을 은사(恩師) () 받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23세에 견성오도(見性悟道) 하셔 가지고 만공(滿空) 큰스님 법맥(法脈) 이으셨습니다.

 

33세의 젊으신 나이로 불보종찰(佛寶宗刹) 양산 통도사 보광선원에 조실(祖室) 취임을 하셨습니다. 이후 77세를 일기로 열반(涅槃) 드실 때까지 44년간을 밑바닥 없는 배를 타시고 팔도강산에 걸림이 없이 다니시면서 최상승법(最上乘法) 선양을 하셨습니다.

 

여기 용화사에 십여 간을 주석(駐錫) 하시면서 정법(正法) 씨앗을 뿌려 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신 바와 같이 여기는 주안 염전 갯벌 가에 너무 땅이 토박(土薄)해서 어떠한 곡식도 심어서 잘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정법의 씨앗을, 가꾸기 어려운 정법의 씨앗을 이곳에 뿌리신 나날이 청신사 청신녀가 모여서 씨앗의 결과가 열반하신 이렇게 나날이 영글어 가고 있는 것을 새삼 큰스님의 법력(法力) 도력(道力) 위대함을 가슴 뿌듯이 느끼는 바입니다.

 

큰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내가 여기서 이렇게 목이 아프도록 법을 설하고, 늙은 몸을 이끌고 법상에 오르내리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일이냐? 이것이 네가 일을 내가 생각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네가 애쓰는 일은 누구를 위함이겠느냐? 이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겠느냐!

 

내가 네가 자리를 다듬고 마련을 해서너만 공부하는 것이 불법(佛法) 아니라, 너도 공부하면서 다른 사람도 공부할 있도록 주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공부 잘하는 방법이 아니겠느냐!

그러고 있노라면 내가 돌아오면 내가 공부할 자리가 아니겠느냐! 서로서로 교대하면서 자기도 공부하고 다른 사람도 공부할 있도록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지, 자꾸 산중으로 숨을려고 그러고 저만 공부할려고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실 스님은 법력에 있어서나, 도력에 있어서나, 덕행에 있어서나 종통(宗通) 설통(說通) 구비하시고 심지어는 건강까지도 그렇게도 타고 나오신 거룩한 스승이시고 선지식이셨습니다.

 

송담이 조실 스님 열반하신 유지(遺旨) 받들어서 원장(院長) 책임을 맡아 가지고 여러분과 더불어 용화사 법보선원을 건립하게 것은 온전히 큰스님의 유지를 차마 어길 수가 없어서 이러한 중책을 띠고 오늘날까지 도량을 떠나지 않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다행이 여러 청신사 청신녀 사부대중 여러분들은 조실 스님의 그러한 뜻을 이해하시고, 부족한 송담을 음으로 양으로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주신 덕으로 이러한 도량(道場)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조실 스님 계실 이러한 도량이 진즉 마련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러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해서 열심히 도를 닦고 참선을 한다면 불보살의 가피(加被) 머지않은 장래에 조실 스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시 출세(出世)하실 것으로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법신(法身) 불멸(不滅)입니다.

삼천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80세를 일기로 열반상(涅槃相) 보이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법계(法界) 몸으로 삼고, 끊임없이 상주설법(常住說法)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조실 스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선원은 조실 스님께서 열반을 하셨지만 계속해서 조실 스님으로 추대해 모시고 우리는 정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삼천 전에 열반하셨지만 우리는 부처님을 항시 교주로 받들어 모시고, 신행해 나가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다행히 과학이 발달해서 조실 스님의 육성(肉聲) 녹음 테이프(tape) 통해서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삼천 동안 많은 선지식, 조사 스님네가 계셨지만, 이렇게 육성으로 법문을 들을 있도록 남겨 주신 유일한 선지식이라고 생각할 ,

오래오래 사시지 못한 아쉬움을 우리는 녹음을 통해서 달랠 있고, 오히려 녹음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신심을 돈독히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녹음 법문을 남겨주신 조실 스님의 고구정녕(苦口叮嚀) 뜻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실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정법에 더욱 신심을 돈독히 해서 금생에 결정코 참나를 깨달아서 부처님의 혜명(慧命) 이어받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엄동설한에 경향 각지에서 이렇게 많이 참석해 주신 대해서 문도(門徒) 사람으로서 심심(深甚)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처음~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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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恩師) ; ①가르침을 받은 은혜로운 스승. ②자기를 출가시켜 길러 스승.

*견성오도(見性悟道) : ‘성품() 보아() 진리() 깨친다()’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 일치하는 정각(正覺)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 견성오도라 한다.

*만공 스님 ; 분류역대 스님 약력참고.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법통(法統)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불보종찰(佛寶宗刹) ;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 중요한 요소부처님(佛寶) 부처님의 가르침(法寶)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하여삼보(三寶)’ 하는데,

한국에서는 보통 부처님의 법신(法身)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통도사를 불보종찰(佛寶宗刹, 또는 佛寶寺刹),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모두 모아 놓은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해인사를 법보종찰(法寶宗刹, 또는 法寶寺刹), 그리고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 스님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국사(國師)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종찰(僧寶宗刹, 또는 僧寶寺刹)이라 한다. 사찰을 삼보사찰(三寶寺刹), 또는 삼대사찰이라고 부른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 집착(執着)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

*밑바닥 없는 ; 무저선(無底船). ①몰저선(沒底船), 무영수(無影樹), 몰현금(沒絃琴), 무공적(無孔笛) 같은 말로 진여(眞如)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 경지.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주석(駐錫 머무를 /석장 ) ; ①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석장(錫杖)이라 하는데, ‘석장(錫杖) 머무르게 한다()’ 뜻으로, 스님이 곳에 머무름을 일컫는 . ②스님이 한때 어떤 지역에 포교(布敎) 하기 위하여 머무는 .

*토박하다(土薄-- /엷을·메마를 ) ;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다.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 . ②가르침의 . 불법의 공덕. 보살의 위신력(威神力)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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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

*종통(宗通) ; 교리나 종지(宗旨, 근본이 되는 중요한 ) 알아서 통함.

*설통(說通) ; 대중 앞에서 막힘이 없이 유창하고 당당하게 설법을 잘함.

*유지(遺旨 남길 /·의의·내용 ) ;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가졌던 생각.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도량으로 읽음.

*가피(加被 더할·베풀 /입을·두를 )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 받는 .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 가호(加護) 같음.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 ②태어나는 .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 ③세간을 초월하는 . 출세간(出世間) 준말. 삼계(三界) 나오는 .

*법신(法身) : []  dharma - kaya ‘ 이란 말인데, 실불(實佛) • 법성신(法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다. 진리 자체.

진여의 바탕(眞如本體)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있으되, 가지 말로도 설명할 없고(離四句)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없으며(絕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열반상(涅槃相) ; 부처님의 성도(成道) 중심으로, 부처님의 일생에 있어서의 8가지의 중요한 사항인 팔상성도(八相成道) 또는 팔상(八相) 하나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말한다. 쿠시나가라성 밖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최후의 설법을 마치고 열반에 드는 모습.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상주설법(常住說法) ; 우주 대자연의 운행 그대로가 설법이라는 .

흐르는 물소리, 노래하는 새소리, 세월이 흘러가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아가는 모두 그대로가 부처님이 출세하신 모습이요, 사이 없이 하는 설법이다.

*녹음 테이프(tape) ;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 말한다.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말할 /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간곡할 )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말씀하심().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 ②법신(法身)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

 

*심심하다(深甚--, 깊을·심히·크게 /심할·진실로·두터울·깊을 | 甚深--) ; (주로심심한꼴로 쓰여)마음의 표현이 매우 깊고 간절하다.

 

 

[주요 내용]

 

전강선사 7주기 추모재 / 법신(法身) 불멸(不滅) / 조실 스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금생에 참나를 깨달아서 부처님의 혜명(慧命) 이어받아야.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