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76~500)2021. 1. 8. 22:13

((No.498))—1993년 1월 첫째일요법회 (57분)



(1/3) 약 21분. (2/3) 약 16분. (3/3) 약 20분.

(1/3)----------------


사서순환난부한(四序循環暖復寒)한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暇)고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사서순환난부한(四序循環暖復寒)한디,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四時), 사서(四序) 네 계절이 돌고 돌아. 그래 가지고 따뜻한 봄이 더운 여름이 되고, 더운 여름이 서늘한 가을이 되고, 서늘한 가을이 다시 추운 겨울이 돌아오다.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잔나비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고 있다.

원숭이는 여름 가을에 여섯 가지 모다 고운 꽃이 피고, 꽃 핀 뒤에는 맛있는 열매가 맺어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그 맛있는 과일을 이것도 따먹고 저것도 따먹고 하면서 그렇게 즐기고 놀다가, 추위가 돌아와서 눈이 덮이고 따먹을 과일도 다 없으니까 그때 그 육화촌에 맛있는 과일을 항상 그리워하고 있더라 그 말이여.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暇)여,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 눈으로 보는 모든 색상, 보고 듣는 가운데 잠시도 겨를이 없어.

시시각각으로 생각 생각이 죽음의 문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 것을 어찌 알까 보냐?(念念那知是死門) 밤낮 맛있는 육화촌에 온갖 맛있는 과일만을 그리워하다가 그러는 동안에 시시각각으로 죽음을 향해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이 게송(偈頌)은 인생(人生)이 이 세상에 나와서 오욕락(五慾樂),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재산에 대한 거, 또 예쁜 사랑하는 사람, 명예(名譽), 권리(權利), 또 안락(安樂), 수면(睡眠)—그것을 향해서 어려서부터 공부할 때 목표를 거기에다 설정을 하고 있다 그 말이여.

좋은 학교 들어가고, 좋은 학교 졸업하면 거기에서 명예가 생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예쁘고 아리따운 이성과 결혼을 하고, 좋은 아들을 낳고, 또 차츰 좋은 자리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모든 사람이 그런 육화촌(六華村)을, 육화촌의 맛있는 과일을 그리워하는 원숭이처럼 일생 동안을 오욕락(五慾樂)에다가 목표를 설정을 하고 그것을 향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구경(究竟)에 목적이 될 수가 없고,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행복(幸福)을 갖다 주는 것들이 아니여.


마치 독일에 부쎄(Busse)라고 하는 시인(詩人)이 저 산 너메, 「산 너머 저쪽」이라고 하는 제목의 시(詩)를 읊기를,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남 따라 찾아갔다가

아! 눈물만을 흘리고 돌아왔도다

산 너머 저쪽 더 멀리에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이러한 시(詩)에 말하듯이, '무언가 내년에는 무엇이 잘되겠지. 다음에는 무엇이 잘되겠지. 뭣이 재수가 있어서 사업이 잘되겠지. 내년에는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겠지. 내년에는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겠지' 항상 저 산 너메 행복을 구하듯이, 그러면서 '설마'에 속고 그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이여.


물론 우선 무엇이 안되어도 장래에다 희망을 걸고 노력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현재에 우선 목적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면 좋은 학교에 들어가 보면 우선은 기쁘고 좋지마는, 학교를 졸업하고 또 좋은 직장에 들어갈 일이 걱정이여. 마음먹은 대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마는, 마음먹은 대로 못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여.

또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들어가서는 우선 좋지마는 또 얼마 안 가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를 바래고 더 많이 월급을 타기를 바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 사업이 잘되어서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래나,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 말이여.

그러한 일들이 평생 동안 쉴 사이 없이 자기가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늙어가고, 자기의 아들딸이 또 그러한 과정을 밟으면서 늙어가고, 또 그다음 손자손녀가 또 그다음 그렇게 그런 과정을 밟아서 늙어간다 그 말이여.


전인(前人)이, 앞사람이 농사(農事)를 짓다가 그 논밭을 자손에게 물려주고 죽어가고, 또 그 자손이 그 논밭을 또 갈고 벌어먹고 살다가 또 뒷사람한테 물려준 것이,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곰을 만났어. 곰이 다가오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마치 거기에 이렇게 아람드리 그 나무가 있으니까 나무 뒤로 우선 피했다 그 말이여. 곰이 나무를 가운데다 놓고 두 손으로 이렇게 사람을 잡을라고 하니까 자기도, 자기가 곰 손을 이렇게 탁! 잡고, 나무를 가운데다 놓고 곰과 사람이 이렇게 마주잡고 딱! 서 있다 그 말이여.

놓자니 돌아와서 자기를 잡아먹을 것이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있는 힘을 다하고 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떨고 있는데 마치 저기 사람이 지나간다 그 말이여.


"여보시오, 이리 좀 오시오. 여기 내가 곰을 한 마리 잡었는데, 이거 나 혼자는 힘이 모자라고 당신 이리 와서 요것 좀 잡으시오. 내가 마을에 가서 도끼나 밧줄을 가지고 와서 이놈을 잡어 가지고 둘이 잡어서 웅담(熊膽)을 팔아먹읍시다"

근께 그 사람이 '웅담'이란 말을 듣고 그 교대를 해 가지고 곰을 딱 잡고 있다 그 말이여. '옳다! 되었다' 하고 그 사람은 도망가 가지고 다시는 안 와버려.

그 사람도 가만히 이렇게 잡고 있다가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해도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 그 말이여. 그러자 마치 또 사람이 지내가니까 그 사람을 불러 가지고 자기가 당한 것처럼 또 그 사람한테 곰을 넘겨주고 또 도망갔어.


이것이 마치 이 지구 땅에, 이 지구상에 태어나 가지고 농사짓고 살고, 장사하고 살고, 또는 회사에 다니고 살다가 늙으면 후손한테 그런 모든 것들을 넘겨주고 죽어가고, 그러한 형상을—그러한 곰을 잡고, 아! 그 웅담은 욕심이 나지만 그놈을 잡고 놓기만 하면 그놈이 나를 죽일 테니 놓지도 못하고, 버리자니 아깝고 계속 붙잡고 있자니 힘든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그와 같다 그 말이여.


사람들이 큰 부자 되기를 다 바라지마는, 부자가 되고 보면 정말 그렇게 행복한 것도 아니여. 되기 전에는 큰 부자가 되면은 좋은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사고, 마음대로 세계에 유람도 댕기고, 얼마든지 참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 것 같지마는, 큰 부자가 되고 보면은 사실 그렇게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 말이여. 또 큰 부자가 되고자 욕심을 낸다 해서 저마다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인생으로 태어나서 목적으로 해야 할 행복(幸福)의 규정이 오욕락이 될 수가 없다 그 말이거든. 오욕락은 조끔도 영원성(永遠性)이 없고,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여.

그래서 일찍이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성현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획득해야 할 영원한 행복의 규정을 '밖에서 찾지 말아라.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설파(說破)를 하신 것입니다.



흉중하애부하증(胸中何愛復何憎)하면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제차현성공안외(除此現成公案外)에  차무불법계전등(且無佛法繼傳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흉중(胸中)에 하애부하증(何愛復何憎)이며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다.

가슴 가운데에 무엇을 사랑하며, 다시 무엇을 미워할까 보냐? 생각 생각이 죽음의 문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신세거든.


지금 새해를 맞이해서 오늘이 1월 3일인데, 어릴 때는 무척 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설이 돌아와서 때때옷을 입고 세뱃돈을 타고 하면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 나이가 차츰차츰 들어가서 세뱃돈도 타는 시기가 넘어가고, 나이만 자꾸 넘어가면 오히려 설 돌아온 것이 별로 기쁠 것도 없다 그 말이여.

죽음을 향해서, 한 해 한 살 더 먹으면은, 우리에게는 이미 죽을 날짜가 다 정해져 갖고 있고, 다맛 언제 죽을는지만 모르지 이미 죽을 날짜가 다 정해 있다고 봐도 틀림이 없어.


한 살 더 먹고 하루하루 지내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다가가는 것인데 무엇이 그렇게 설이라고 즐거울 것이 있으며, 그러한 마당에서 이미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누구를 이뻐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저 사람도 죽어 가고, 나도 죽어 가고 있는데.

죽을 날이 가까와지면 무엇인가 자기가 해야 할, 마무리 지을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신경을 쓰고 정돈을 하고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 낫지, 누구를 트집을 잡아서 미워하고 과거에 자기에게 조금 섭섭히 했다고 해서 그것을 미워하고 미운 생각을 품고 죽어 가면 될 것이냐 그 말이거든.


자괴인전(自愧人前)에 백불능(百不能)이여, 아무것도 남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할 뿐이다 그 말이여.

세속(世俗) 사람은 각기(各其) 자기의 장기(長技), 자기에 남이 가지고 있지 않는 특별히 참 잘한 것을, 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떠억 내놓고 으시대고 그것을 자랑삼아서 그 떳떳하고 보람 있게 이렇게 살아가는데, 사실은 박사 학위를 몇을 가졌건, 또는 높은 권리를 했건 많은 재산을 가졌건, 죽어 가는 입장에 뭐 그렇게 그놈을 코에다 걸고 으시대고 남을 업신여기고 할 만한 거리가 되지를 못하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참으로 허망한 것인 줄 깨달으면 그 사람이 인간 중에 상등인(上等人)이여.


죽어 갈 때, 일생을 그놈을 붙잡고 행세를 하다가 죽어 갈 때 그걸 한푼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냥 한(恨)을 품은 채 이렇게 죽어 가기 보다는, 죽기 전에 '그러한 것들이 무상(無常)하고 허망(虛妄)한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그런 권리를 설사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정의(正義)에 입각(立脚)해서 잘 행사를 하고, 큰 재산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절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중을 위해서 적절히 잘 쓰고 그러려니와,


그러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서 떠억 '정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정말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불법(佛法)이요, 참나를 찾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다. 오직 이것만이 참나를 찾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온 세계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드는 평화 사업(平和事業)이다'

이렇게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재산이 없어도, 학식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놓을 만한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상등인(上等人)이여. 정말 상등인(上等人)이다 그 말이거든.(처음~21분28초)





(2/3)----------------


오직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화두(話頭)를 받아서 그 화두 하나를 가지고 생사 없는 진리를 향해서 등불을 삼고 지팽이를 삼고 꾸준히 나아간다 그 말이여.

늙어 가는 것도 두려울 것 없고, 세월이 지내간 것도 두려울 것이 없고, 온 세상이 탐욕(貪欲)과 진심(瞋心)의 불바다가 되어서 훨훨 타더라도, 이 화두 하나만 가지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정진해 나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 먹고 사는 것은 형편대로, 넉넉하면 넉넉하게 살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간략하게 살고 그뿐이라 그 말이여.


이 공안(公案)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나간 외에는 불법(佛法)에 법(法)을 전하는 등(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그렇게 해 나가는 데에 그것이 불법(佛法)이고, 그것이 바로 법등(法燈)을 전해 나가는 가장 요긴(要緊)한 방법이다 이거거든.


요새 참 여러분의 자녀들이 대학 진학하기 위해서 시험을 치르고 모다 발표를 해서 합격해서 기쁨에 넘치는 가정도 있을 것이고, 또 마음먹은 대로 합격을 못해서 온통 우울한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또 후기도 있고, 또 전문대도 있고, 또 금년에 안 되면 내년도 있으니만큼, 너무 대학에 마음먹은 대로 안 들어갔다고 해서 그렇게 슬퍼하고 걱정하고 절망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전기에 안 된 것이 후기에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고, 또 금년에 안 되어서 내년(來年)에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고.

인생살이라 한 것이 우선 좋아도 나중에 안 좋을 수도 있고, 우선은 안 좋아도 나중에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수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그런 것 때문에 상심하실 것도 없고, 못 들어간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위안을 주고 잘 달래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차기에 대비해서 잘 계획을 세워서 공부하도록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려고 그러고 모다 그런 것이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거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큰 부자가 되고 한 것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 그러거든.

그러면 행복이라 하는 것이 코앞에 무엇이 자기 욕심껏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하는 것은 우선 좀 기쁜 것뿐이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여. 대학에 못 들어가면 당장 아주 인생이 거기서 끝이 난 것처럼 야단들이지만 전혀 그것은 생각이 그릇된 것이다 그 말이거든.


인생은 긴... 무량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미래를 향해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한평생 산다고 하는 것이 한평생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그 여행이 힘들고 고생스러운 여행도 있을 것이고, 힘이 들지만 행복, 기쁨을 느끼는 여행도 있을 것이고, 아주 모든 일이 수월하게 모든 것이 다 맞아 떨어져서 아주 편안한 여행을 할 수도 있으나, 잠깐이거든.


좋은 여관에 잠을 자나, 산에서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새나 생각 나름으로, 산속에 움막에 지냈어도 하룻밤을 즐겁게 지낼 수도 있고, 좋은 여관에 호텔에 들어가서 잠을 자도 하룻밤 자는 동안에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딱! 중심(中心)을 잡고 그 상황에 즉(卽)해서 그 시간을 바르게 보람 있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야지, 조금 무엇이 마음에 안 맞다고 그것이 바로 자기에 불행인 것처럼 절망을 하고 남을 원망하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본참공안몰심사(本參公案沒心思)하야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하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리라

나무~아미타불~


본참공안몰심사(本參公案沒心思)하야, '이뭣고' 화두를 탄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타신 분은 '판치생모?'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한 분은 '정전백수자?'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분은 '마삼근?'

각자 자기가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話頭)가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여.


본참공안에 몰심사(沒心思)여. 완전히 거기에 몰입(沒入)을 해 가지고 다른 일체 생각이 거기서 다 끊어져야 한다 그 말이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화장실을 가나, 세수를 하나, 차를 타나, 일체 일을 하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져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서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이 없어.


그렇게 해서,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이여. 의심(疑心), 의심해 가고 의심해 와 가지고, 의심과 의심이 끊어진 사이가 없어. 항상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그렇게 해 가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여. 마른 남긔(나무)에 꽃이 피어 가지고 마른 가지에 그 꽃이 가득차게 되듯이, 엄동설한에 잎이 다 지고 앙상한 가지가 마치 죽은 나무처럼 그러나, 입춘(立春) 우수(雨水)가 지내면은 물이 오르고 파릇파릇 잎이 돋우고 꽃이 만발(滿發)을 해서 환히 고운 꽃이 피고 향내를 풍기듯이.


우리가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간 때는 마치 부모 초상을 만난 사람처럼—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이뭣고?'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요, 그래서 아무 기쁨도 없고 다못 생각 생각이 화두만을 들고 나가니, 인생이 이래도 그것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슬픈 일을 당해도 슬퍼한 중도 모르고, 기쁜 일을 당해도 기쁜 중을 모르고, 인생에 사는 맛이 오욕락을 즐기는 맛으로 사는데 오욕락을 다 버려버렸어. 부모 형제도 다 버리고 세상에 흥망성쇠에도 다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다 버려버리고 사니, 마치 죽은 나무와 같고 나무토막과 같고 돌덩어리와 같다 그 말이여.


그러나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터억 들려.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의심이 깊을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게 되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고, 불조(佛祖)에 면목(面目)을 보게 되고, 우주의 진리(眞理)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은 부처님을 위시(爲始)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몸소 실천을 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도리라, 이것은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여.


선방(禪房)에 어떤 분이 '견성(見性)을 한 경지(境地)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질문해 왔습니다.

견성(見性)한 경지(境地)는 자기가 깨달라 봐야 아는 것이지, 그 물이 더웁고 차운 것은 자기가 마셔 봐야 얼마나 차웁고 얼마나 뜨거운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보고 물어봐서 '어떻다'고, '얼마만큼 뜨겁다'고 말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여.


깨달음의 경지도 정말 그렇게 궁금하고 알고 싶으면,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어쨌든지 간절히 간절히 정진(精進)을 해서 스스로 탁! 깨쳐 봐야 할 일이더라 그거거든. 궁금한 것을 나보고 물어봐서 어떻게 하냐 그 말이여.

정말로 궁금하거든, '깨달음의 경지가 얼마나 좋고 대관절 그 경지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면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 또 '깨닫기 위해서는 정말 이뭣고?만 하면 꼭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냐?' 또 '자기가 그러한 방법으로 하면 자기도 깨달을 수 있는가? 그러한 것들이 정말 의심이 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건 부처님에 말씀이나 역대조사에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있다'고 믿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또 자기의 근기(根機)라고 할까, 그릇이 '자기도 열심히만 하면 깨달을 수 있냐 없냐? 깨달을 수 없으면 아예 그만두고 인생을 달리 다른 길을 찾아보고, 꼭 깨달을 수 있다면 자기도 한바탕해 보겠다' 이런 말인데.


우리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또 지식(知識)의 유무(有無)를 막론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 자격은 누구나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거든.

다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바르게 열심히만 찾으면 꼭! 찾고 마는 것이여.


방법(方法)이 틀리면 안 되아. 또 방법이 바르더라도 열심히 하지 않고 조금 하다 말다 하면 그것도 안 돼. 또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방법이 잘못되어 있으면 또 안 된다 그 말이여.

그런데 방법이 바르고, 그리고 열심히만 한다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만 되는 것이여.(21분29초~37분46초)





(3/3)------------------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하고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허되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이여. 달이 돌고 은하를 하늘을 돌고 돌다 보면 점점 둥그러워져.

초생달이 하룻밤 지내면 조금 더 커지고 또 커지고 해서 보름이 되면은 완전히 둥글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여. 그 하얀 얼굴로 밝은 빛을 발산(發散)해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비추어.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이여. 그 밝은 달이 산중(山中) 옹달샘에도 그 비춰 가지고 원숭이가 달이 떨어졌다고 물속의 달을 건지자고, 원숭이끼리 팔에 팔을 연결을 해 가지고 그 물속에 떨어진 그 달을 건지려고 하는, 그 경전에 그런 설화(說話)가 있는데.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다. 그 하늘에 뜬 휘황창 밝은 달이 다맛 물 있는 곳마다 그 달 그림자가 비추는 것뿐이지, 청천(靑天)에서 그 달이 떨어져 버린 것이 아니더라.


이 세상에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사람도 태어났다 죽고 태어났다 죽고, 사람들이 하는 사업도 잘되다가 망(亡)하고 잘되다가 망하고 망하다가 잘되고, 나라도 생겨났다가 얼마 지내다가 나라가 없어지기도 하고, 또 새 나라가 생겨나기도 하고.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이 돌고 돌듯이 인생에 흥망성쇠도 또한 그렇더라.


그렇지만 달이 그믐에는 완전히 아주 칠야삼경(漆夜三更), 아주 새카매 깜깜하지만, 초하루 초이틀 나흘 하다 보면 다시 또 초생달이 생겨서 또 보름이 되고, 보름달이 열엿새, 열이레, 열여드레 되면 차츰차츰 또 작아져 가지고 또 그믐이 되면은 까맣게 없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그래서 완전히 달이 둥근달은 보름날 저녁 한 번뿐인 거여.

인생에 있어서 모든 사업이 번창하고 잘된 것도, 잘되면 한없이 영원히 잘될 것 같지만 또 차츰차츰 기울어져서 부도가 나기도 하고 임자가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그 말인데,

그래서 '달이 졌다'고 해서 절망할 것도 없어. 어두워지면은 불을 켜고 등불을 켜는 거고, 밤에 어디를 가려면 불을 들고 가면 되는 것이지, '어두워졌다'고 해서 아주 영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그만 둘 수는 없는 것이거든.


사업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그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업이 여의치 못하면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또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거고, 우리의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고, 우리 가정에 모든 일도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써 잘 처리해 나가면 반드시 또 좋은 길이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고 삶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학생이 성적이 떨어지고 대학에 떨어졌다고 해서 종종 자살을 하고 그런 문제들이 있는데, 그건 생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우리가 법문(法門)을 듣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바른길을 안다면 인간에 흥망성쇠에 그렇게 민감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어려우면 어려운 속에서 지혜와 자비로써 살아가고, 무엇이 잘되면 잘되었다고 해서 지나치게 우쭐대고 그럴 필요도 없는 거여. 그런대로 더욱 겸허하게 잘 살아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하늘에 달은 언제나 허공 속에 있는 것이지, 태양과 지구와 달과의 관계에 있어서 때로는 초생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보름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믐달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 달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우리도 인생에 행복(幸福) 불행(不幸)도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마음대로 되기도 하고, 내 뜻대로 안되기도 하고,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그런 것인데, 그런 상황에 내가 잘 적응을 하고.


여행을 할 때 높은 산고개를 넘어가고 절벽을 기어오를 때에는 거기에 맞춰서 아주 조심(操心)스럽게 넘어가야 또 다시 내리막길이 있을 수도 있고, 평탄(平坦)한 길도 만나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본지(本旨)가 굽히지 않고, 자기 본심(本心)이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상황이 되어 있을 때,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서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래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그것 때문에 내가 좌절이 되지를 안 해.


작년 그러께인가 「보왕삼매론십대애행(寶王三昧論十大碍行)」을 보시(布施)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매일 한 번씩을 읽어 보셔야 한다 그 말이여.

그렇다면 무슨 어려운 일을 당(當)하더라도 바로 중심(中心)을 잡을 수가 있어.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오히려 지혜(智慧)를 낼 수가 있고, 용기(勇氣)를 낼 수가 있고, 더욱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킬 수가 있더라 그거거든.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여러분이 함이 없는 진리를 알고자 할진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천차만별(千差萬別)의 가운데를 여의지 않느니라.


천차만별(千差萬別)이 무엇이냐?

인생에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바로 천차만별이요,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천차만별이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천차만별이요, 빈부귀천(貧富貴賤)이 천차만별이여.

천차만별 속에 영원한 진리(眞理)가 그 속에 들어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여의고 행복을 찾고, 그것을 여의고 진리를 찾지마는, 진리가 바로 천차만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소승(小乘)은 생사(生死)가 두려워서 죽음을 여의려면, '죽음이 싫고 두려워서 죽음을 안 당하려면은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태어나면 죽게 되니까 안 태어나야만 죽음을 면할 것이다' 해 가지고 태중(胎中)에 들어가기를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해. 태중에 안 들어가는 데에다가 목표를 설정하고 공부를 하는데, 대승(大乘)에서는 그게 아니거든.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와 성주괴공 하는 이 자체가,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제법(諸法)인데, 모든 법인데,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본래(本來)부터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여. 항상 그 자체가 스스로 열반(涅槃)의 상(相)이다 그 말이여. 생사(生死) 없는 상(相)이여.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불자가 도(道)를 행(行)해 마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다.

'이 몸뚱이 죽은 뒤에 내생에 부처가 된다' 그렇게 새겨서는 안 되고.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으로 바로 그 도리(道理)를 보아 버리면, 그것이 바로 부처를 짓는 것이다.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그거거든.


그래서 인생에 이 천차만별(千差萬別)—흥망성쇠(興亡盛衰), 희로애락(喜怒哀樂),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버리고 생사(生死) 없는 진리를 찾을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자나깨나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다 희로애락이요, 생로병사요, 흥망성쇠의 바로 그 속에 있거든.

거기에 즉(卽)해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 찰나찰나에 떠억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시라 그거거든. '이뭣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그것 밖에는 영원한 진리를 찾을 길이 없어.


영원한 진리가 저 땅속 깊이 어디 묻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진리가 로케트(rocket)를 타고 몇백만 리를 허공으로 올라가야, 날아 올라가야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 그 시간에 거기를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거거든.


'이뭣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거든. 무조건하고 '이뭣고?'

자꾸 하다 보면 망상을 버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진 때가 오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어진 때가 오는 거여. 열심히 몸부림을 치고 부시대고 애를 쓰는 데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럭저럭하다 말다 하고 그래 가지고는 안 되거든.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마음 길이 끊을라고 해서 끊어진 게 아니라, 자꾸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데에서 저절로 끊어지는 거다.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가지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참 어려운 일이 한없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럴수록에 우리는 더 이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을 하고, '이뭣고?'를 챙겨서 마음이 중심(中心)이 잡혀야 모든 어려운 일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모두 대학에 떨어진 자녀를 가지신 분은 또 후기에 잘 보고, 또 전문대학도 좋고 그러니까 잘 그렇게 하시고, 정 아들딸들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렇게 그러면 잘 달래서 절로 데리고 와서 부처님께 절도 시키고 또 스님네한테 좋은 말씀도 듣고, 또 가능하면 후원에 와서 벗어부치고 그릇도 씻고, 이러한 기간을 잠시 가져 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낮에는 일하고 또 밤에는 또 참선도 하고, 이렇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또 재수를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머지않아서 교육법이 개정이 되어서 정말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후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보람 있게 젊은 시절을 보냄으로 해서 행복한 장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오늘 1993년의 1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해에는 어쨌든지 '인생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그 목표를 향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37분51초~57분21초) (끝)





[법문 내용]


(게송)사서순환난부한~ / 오욕락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 / 부쎄(Busse)의 시, 「산 너머 저쪽」 / 부처님, 성현들의 영원한 행복의 규정 '밖에서 찾지 말아라. 자기 안에서 찾으라' / (게송)흉중하애부하증~ / 활구참선법만이 참나를 찾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이것이 바로 온 세계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드는 평화 사업. 상등인(上等人)


정진해 나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 형편대로 살면 그뿐이라 / 인생은 무량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미래를 향해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딱! 중심(中心)을 잡고 그 상황에 즉(卽)해서 그 시간을 바르게 보람 있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야 / (게송)본참공안몰심사~ / 은산철벽 의단독로 타성일편 확철대오 본래면목,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참으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 올바르게 열심히만 한다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만 되는 것이다.


(게송)월마은한전성원~ / 보왕삼매론십대애행(寶王三昧論十大碍行) / 무슨 어려운 일을 당(當)하더라도 바로 중심(中心)을 잡을 수가 있어야 / (게송)군금욕식무위리~ / 천차만별 속에 영원한 진리(眞理)가 그 속에 들어 있다 /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인생으로 태어나서 목적으로 해야 할 행복(幸福)의 규정이 오욕락이 될 수가 없다. 오욕락은 조끔도 영원성(永遠性)이 없고,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여. 그래서 일찍이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성현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획득해야 할 영원한 행복의 규정을 '밖에서 찾지 말아라.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설파(說破)를 하신 것입니다.


명예 권리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서 '정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정말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불법(佛法)이요, 참나를 찾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다. 오직 이것만이 참나를 찾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온 세계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드는 평화 사업(平和事業)이다'

이렇게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재산이 없어도, 학식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놓을 만한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상등인(上等人)이여. 정말 상등인(上等人)이다. 오직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화두(話頭)를 받아서 그 화두 하나를 가지고 생사 없는 진리를 향해서 등불을 삼고, 지팽이를 삼고 꾸준히 나아간다.


인생은 무량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미래를 향해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한평생 산다고 하는 것이 한평생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딱! 중심(中心)을 잡고 그 상황에 즉(卽)해서 그 시간을 바르게 보람 있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야지, 조금 무엇이 마음에 안 맞다고 그것이 바로 자기에 불행인 것처럼 절망을 하고 남을 원망하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들려.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의심이 깊을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게 되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고, 불조(佛祖)에 면목(面目)을 보게 되고, 우주의 진리(眞理)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위시(爲始)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몸소 실천을 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도리라, 이것은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여.


우리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또 지식(知識)의 유무(有無)를 막론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 자격은 누구나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거든.

다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바르게 열심히만 찾으면 꼭! 찾고 마는 것이여.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와 성주괴공 하는 이 자체가,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제법(諸法)인데, 모든 법인데,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본래(本來)부터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여. 항상 그 자체가 스스로 열반(涅槃)의 상(相)이다 그 말이여. 생사(生死) 없는 상(相)이여.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불자가 도(道)를 행(行)해 마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다. '이 몸뚱이 죽은 뒤에 내생에 부처가 된다' 그렇게 새겨서는 안 되고.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으로 바로 그 도리(道理)를 보아 버리면, 그것이 바로 부처를 짓는 것이다.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 이 천차만별(千差萬別)—흥망성쇠(興亡盛衰), 희로애락(喜怒哀樂),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버리고 생사(生死) 없는 진리를 찾을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자나깨나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다 희로애락이요, 생로병사요, 흥망성쇠의 바로 그 속에 있거든.

거기에 즉(卽)해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 찰나찰나에 떠억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시라 그거거든. '이뭣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그것 밖에는 영원한 진리를 찾을 길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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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76~500)2021. 1. 6. 16:30

 

 

((No.479))—1992년 하안거 해제(92.08.13) (73분) (용479)

 

479-1:4(1992년 하안거해제:약21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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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2:4(1992년 하안거해제:약17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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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3:4(1992년 하안거해제:약20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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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4:4(1992년 하안거해제:약15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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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약 21분. (2/4) 약 17분. (3/4) 약 20분. (4/4) 약 15분.

(1/4)----------------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타가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나무~아미타불~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야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 젊어서부터 주욱 저 먼 타관(他官)으로 타관으로 방황을 하는데 아주 익숙해졌어.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몇 번이나 형산(衡山)을 돌고, 몇 번이나 소상강(瀟湘江)을 건넜던가. 저 타관으로 타관으로 젊어서부터 타향살이로, 나그네로 방황을 하면서 몇 번이나 형산을 돌고 몇 번이나 소상강을 건넜더냐 이거거든.

 

'젊어서부터'라고 하는 말은 저 무량겁(無量劫)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자기 마음의 고향을 등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천상(天上)에 갔다가, 인간세(人間世)에 왔다가,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졌다가,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졌다, 지옥고(地獄苦)에 떨어져서 무량겁을 그렇게 육도를 돌고 돌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왔더냐 이거거든.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니, 하루아침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으니,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다. 비로소 그 타향살이로, 타향으로 돌고 도는 그 세월이 길고 긴 것을 알게 되었더라 그거거든.

 

무엇 때문에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가?

'좀 더 돈을 좀 벌어 볼까, 무슨 공부를 좀 해 볼까, 남부럽지 않게 좀 잘살아 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조그마한 이양(利養)을 구하기 위해서 부모가 계신 고향을 떠났더라 그거거든.

그래 가지고 타향으로 가니 낯설고 기반이 없어 놓으니 발붙일 곳이 마땅치 안 해. 그래서 또 다른 데로 가고, 가서 보니 또 마땅찮으면 또 다른 데로 가고, 이리 갔다 동서남북을 그렇게 해매면서 저 끝없는 타향살이로 타향살이를 하면서 수없는 고초를 겪은...

 

그러다가 문듯 좋은 친구를 만나. 어진 선배를 만나 가지고 직장도 구하고 살길을 얻어.

그것이 바로 무엇에다가 비유했냐 하면은 육도윤회를 하다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을 구하기 위해서 육도(六道)를 돌고 돌다가 다행히 어느 날 불법(佛法)을 만났더라 이거거든.

어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법문을 듣고, 어느 도반(道伴)을 만나서 소개를 받고, 그래 가지고 정법(正法)을 믿게 되어서 그래서 자성(自性)을 깨닫는 참선(參禪)을 하다가 보니 정말 그동안 생사고뇌(生死苦惱) 속에서 헛되이 많은 세월을 보낸 것을 깨닫게 되었더라.

 

 

오늘 임신년(壬申年) 7월 15일 백중날을 맞이해서 용화사 법보선원 대중, 보살선방 대중, 시민선방에 모다 대중과,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회룡사 의정부 회룡사선원 대중, 대전에 세등선원 대중, 저 전주에 위봉선원 대중들, 그리고 멀고 가까운 사암(寺庵) 토굴에서 정진하는 도반들, 각 가정에서 분 따라서 정진(精進)하는 노소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이 해제일(解制日), 백종일을 맞이해서 이 도량(道場)에 가뜩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그동안에 그 삼복성염(三伏盛炎)에 그 더위를 이기면서 등어리에는 참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고 그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느라 더운 줄도 모르고 석 달 구순안거(九旬安居)가 그렇게 석 달이지만 어떻게 지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정말 남이 억지로 시켜서는 못할 일이여. 이것은 스스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친 대신심(大信心)과 분심(憤心)이 아니고서는 이 삼복성염에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죽비를 치고 정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 달을 지내고 나면 휘청거리고—아무리 외호(外護)를 잘해서 대중공양(大衆供養)이 들어와서 잘 먹고 지냈다 해도 골(骨) 속이 비어서 휘청거리고, 앉었다 일어서면 앞이 캄캄하고, 오줌을 누면은 발등에 가서 떨어져.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다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다 면목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눈물 나는,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새카만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그러한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그러한 도반들을 위해서 몇 마디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해제(解制)를 하면 석 달 동안 정진하던 선원(禪院)을 모다 이 걸망을 지고 또 모다 떠나시게 됩니다. 어디를 가던지 또는 다시 그 선원에 머물러서 산철 결제를 하던지, 앞으로는 더위도 가시고 차츰 서늘해질 거이니 그동안에 더위 때문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정말 알뜰하게 착실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하여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한 부처님, 두 부처님 내지 천만 부처님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여. 부처님들이 모두 다 눈은 옆으로 백이고, 코는 바로 이렇게 백이셨드라 그거거든.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로, 석년(昔年)에 무량겁으로부터 오시면서 친(親)히 선근(善根)을 심어 왔어. 온갖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여. 금일(今日) 이와 같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으시게 되었더라.

그러한 선근(善根)을 심어 오지 안 했으면 어찌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추어서 스스로 깨닫고 무량(無量) 중생을 제도(濟度)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그런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부처님이 몸소 시범(示範)하신 바와 같이 그런 선근(善根)을 심지 않고서는 그런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출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육조(六祖)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천만 부처님 처소(處所)에서 일심(一心)으로 공양(供養)을 하고,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순(隨順)을 하고, 또 모든 보살(菩薩)이나 선지식 또는 스승님 · 부모 또는 연세가 많은 어른 존장(尊丈)의 처소에서는 항상 공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하고, 그 명령에 어기지 않고 그 뜻을 받들어서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어 왔고.

 

그런 부처님이나 보살님이나 또는 선지식 스승 부모뿐만이 아니라 육도(六道) 중생을 만나서는 살해(殺害)를 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중생을 속이지 않고, 천대하지 아니하고, 훼방하지 아니하고, 욕하지 아니하며, 그 축생(畜生)을 타지 아니하며 채찍질을 하지 아니하며 그 고기를 먹지 아니해. 항상 그 육도 중생을 '어떻게 하면은 좋게 해 줄까? 이익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상대해 왔더라 그말이여. 그렇게 해서 선근(善根)을 심어.

그리고 일체 빈고(貧苦),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할 때에는 자민심(慈愍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상대하고, 싫어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그 중생(衆生)이 요구하는 바는 자기의 힘 따라서 베풀고, 이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더라.

 

그러면 일체 악류(惡類), 악한 무리들—나를 해꼬자하고, 해꼬자하려는 그런 악한 무리를 상대할 때에는 유순(柔順)하고 화평(和平)한 마음으로 상대하고, 인욕(忍辱)하고 환희(歡喜)한 마음으로 이렇게 맞이하고.

나에게 좋게 해 준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악한 마음으로 나에게 피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그러한 상대를 만나서도 유순하고 인욕하고 환희한 마음으로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보살(菩薩)에 마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고, 고집 세고 비꼬인 생각을 쉬게 하는,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다 그거거든.

 

이것이, 그렇게 무량겁을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대표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우리의 교주(敎主)이시고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같은 그러한 성현 중에 대성현(大聖賢)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성현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 순종(順從)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1분17초)

 

 

 

 

(2/4)----------------

 

그래서 우리는 낱낱이 구체적으로 간략히 선근(善根)을 심는 법을 육조(六祖) 스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을 드렸거니와,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근기(下根機)로서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불보살과 스승과 어른 존장, 그리고 모든 육도 중생과 빈곤한 그런 중생들, 심지어는 우리를 해꼬자할 악한 무리들에까지도, 그러한 무리를 만나서도 우리의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고 선근을 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근기 약한 것만을 한탄하고 그러한 선근 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런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성색불애처(聲色不礙處)가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색(色)을 보되 색(色)에 관계치 아니하고, 관여(關與)하지 아니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어.

 

우리는 눈을 통해서 온갖 색상(色相)을 보는데, 그 색상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그것에 관여를 하게 됩니다.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크다 적다', '좋다 나쁘다' 그것이 바로 색에 관여하는 것이거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여. 무슨 소리든지 귀로 들으면, '아, 저건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애기 소리다. 저것은 개 짖는 소리다' 거기에서만 끝나지 아니하고, '저것은 나를 해롭게 하는 소리다. 나한테 욕하는 소리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다' 온갖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관여를 하고, 거기에서 싫어하는 생각을 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고, 다투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고, 원한심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色相). '저 사람은 이쁘다. 미웁게 생겼다. 뵈기 싫게 생겼다. 입맛 떨어지게 생겼다' '저 아무 점께 나한테 저렇게 욕한 인간이 또 오는구나'

하루 종일 · 날마다 · 달마다 · 일 년 내내 · 일생 동안을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을 보고 그렇게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업심(業心)이 발동(發動)을 하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를 통해서 시비를 일으키고 업이 발동을 해서, 얼굴에 그 표현(表現)이 되고 행동으로 표현이 돼.

그래서 한량(限量)없는 업(業)을 짓고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무슨 색상이 들어오거나, 처음에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들어오거나 말거나 거기에 걸리지를 안 해.

눈에 보이면 보인 대로 맺겨 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면은—내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거나, 나를 비방(誹謗)하는 소리를 듣거나 그냥 그런대로 놔두는 거여.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할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안 보려고 할 것도 없어. 보이면 보인 대로 놔두고 들으면 들린 대로 흘려보내는 거여.

 

부처님께서 어느 외도(外道)를 만나셨는데, 그 외도가 입에 못 담을 비방(誹謗)을 해. 온갖 비방을, 부처님 비방을 한다. 부처님 제자들에 관한 비방, 부처님에 관한 비방, 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로 갖은 고약한 소리를 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욕을 하고 비방을 하는데, 부처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그만하라는 말도 않고 다 들으셨다 그말이여.

 

다 듣고 난 다음에, "이제 말이 끝났습니까?"

"네, 끝났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한마디 묻겠는데, 내 집에 참 손님이 오셔서 그 주인이 참 갖은 음식을 많이 차려서 내놓고 손님한테 내놨는데, 손님이 그 음식을 안 먹고 가면 그 음식은 누가 먹어야 겠습니까?"

 

"그 손님이 안 먹으면 주인이 먹어야죠"

"그러면 되었다"고. 그리고서 부처님이 거기서 떠나셨습니다.

 

내게 당치않는 행동이나, 내게 당치않는 말로써 나를 비방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것을 취(取)하지 아니하면, 그것에 관여(關與)하지 아니하면, 그 욕과 악한 비방은 한 사람이 다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공연한 사람을 흔들어 놓을 흔들려고 그러고, 공연한 사람을 비방을 하고 욕하고 했으면, 상대방이 그놈을 받아들이면 그리 건너가겠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무심(無心)으로 상대(相對)해.

화두(話頭)를 떠억—그럴수록에 당치않는 소리를 하면 얼굴 하나 찌푸릴 것도 없이 화두를 떠억 들고 '이 뭣고?' 그러면 구태여 안 들을라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열심히 들은 것처럼 눈을 따악 뜨고 잘 들은 척하고, 들으면서 그냥 '이뭣고?'를 떠억 하란 말이여. 그러면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는 한 사람 입으로 도로 들어가는 거여.

그놈 지가 토해 낸 독(毒)을 잔뜩 들어마시고, 그 사람은 그 지은 죄업(罪業)으로 삼악도(三惡道)에 가서 고(苦)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 (욕하는) 말을 들으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뭣고?'를 하고, '판치생모'를 하고, '정전백수자'를 하고, '무자' 화두를 했기 때문에 그 공덕(功德)으로—(욕한 사람은) 한량없는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그 (욕한) 사람이 불법(佛法)을 믿게 될 것이다 이거거든.

같이 싸우고 그랬으면 다 같이 지옥에 떨어질 텐데, 내가 거기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시비(是非)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떠억 정심(正心)으로 상대를 하고 나는 화두를 들고 최상승법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욕한) 사람이 지은 죄 만큼은 받어야 되는 거고,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도 그놈을 받고 나서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했을 때에는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그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하고.

또 내가—그렇게 비방을 하고 욕을 한 데도—동심(動心)이 안 되고 떠억 화두를 들 수 있게끔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많은 부처님과 많은 선지식에게 공양(供養)을 하고 선근(善根)을 심어 온 그 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나를 비방하고 욕한 데 마음이 동요가 안 되고 화두를 거각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잘 길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한 그런 예를 들었거려니와,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팔풍(八風) 경계, 여덟 가지 종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러한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많은 일들,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많할 것입니다마는, 이 예(例)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를 무장(武裝)하고 그러한 '이뭣고?'에 철갑과 투구로써 무장을 하고 나간다면 그 앞에 이기지, 당해낼 수 있는...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천하 간단한 무기(武器)의 하나지마는 팔만사천 마구니를 퇴치(退治)할 수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에 그러한 좋은 무기를 우리는 지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여러 도반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팔만사천 마구니를 우리가 그것으로 이겨 낼 수가 있느냐 하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거든.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이 뭣고?' 하나만 탁! 챙기면 천하 없이 무서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도 그 앞에는 무릎을 꿇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들이 나를 보호하고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깨달라서 성불(成佛)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호위병(護衛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도반들은 앞으로 어데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화두(話頭)를 드는 그 정진력(精進力)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거나 무장무애(無障無礙)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역경계(逆境界)에 처(處)하더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화두(話頭)를 들고 나아간다면 무장무애하게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에 더 분심(憤心)이 나고,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21분18초~38분35초)

 

 

 

 

(3/4)----------------

 

오늘은 백종날, '일백 백(百)' 자, '가지 종(種)' 자, 백종(百種).

백 가지의 과일과 음식으로써 부처님과 오늘 해제를 맞이한 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림으로 해서, 그 공양을 받으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위해서 그 청정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축원(祝願)을 해 주시기 때문에, 또 공양을 올린 그 공덕으로 우리의 삼악도(三惡道)에 빠져서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에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 지옥도(地獄道)에 빠져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 청제부인(靑提夫人)을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애를 썼으나 워낙 그 업(業)이 중(重)하기 때문에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그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가르켜주시라'고 간청(懇請)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백 가지 과일과 백 가지 음식으로써 오늘 해제(解制)를 맞이한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리도록 권하셨던 것입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백 가지 음식과 과일, 맛있는 공양으로써 해제를 맞이한 스님네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공덕(功德)으로 청제부인은 무서운 지옥고로부터 벗어났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因緣)으로 해서 해마다 돌아오는 해제일, 7월 15일 백중날에는 지옥(地獄)에 문(門)이 열려서 오늘 이 법당(法堂)에도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들이, 선망부모에 그 영가(靈駕)들이 어데서 무슨 고통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법회(法會)에 귀빈(貴賓)으로 초청(招請)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의 영가들도 또 이 법보전(法寶殿)에 만년위패(萬年位牌) 법보영가들과 함께 법문(法門)을 듣고 또 여러분의 정성으로 올리는 많은 과일과 음식을 공양을 받고 그리고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고 받고 있는 우리의 부모들의 얼마나 그 고통스러운가를 우리는 우리의 육안(肉眼)으로는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마는, 경전이나 또는 드라마나 그런 영화 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실지로 본 바와 다름없을 만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전이나 그런 영화에 나오는 고통은 그 일부에 지내지 않고, 정말 그 팔만사천 감옥에서 고통 받는 모냥은 우리는 차마 볼 수가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왜 그러한 고통을 받게 되느냐? 순전히 탐심(貪心) 때문입니다. 탐심, 무엇이든지 자기 욕심(欲心)을 부리는 거여.

그다음에는 진심(瞋心)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안되면은 썽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의 버릇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주장을 하다가 자기 주장대로 안되면 썽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 번 해 보고 안되고, 두 번 해 봐도 안되고, 세 번 해 봐도 안되면, '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는 것은 내 욕심대로 무엇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로구나. 내 주장만 내세우다 보니까 상대방과 부딪치게 되고 결국은 싸우게 되고 서로 감정을 사게 되는구나. 그러지 말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尊重)하고, 내 주장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양보할 중도 알고, 이렇게 해야 서로 화합(和合)이 되고 서로 마음과 마음이 합하고 힘과 힘이 합해서 어떠한 어려운 일도 성공할 수가 있겠구나' 이렇게 지혜(智慧)로운 마음을 내야 할 텐데,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러한 지혜로운 마음을 낼 줄을 모르고 끝까지 점점 고집이 세어지고 심술이 궂어지고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이 조끔도 누그러지지 않아. 그러니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衆生)이더라 그 말이여.

탐내는 마음, 썽내는 마음, 그걸 빨리 깨달을 줄을 모르고 끝까지 버릇을 못 고치니 그것이 어리석더라 그거거든.

 

그래서 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자기도 지옥고로 가고, 남도 뒤흔들어서 남에게 해독(害毒)을 끼친 그런 악한 못된 독(毒)이더라 이거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거여. 삼악도에 근본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거든.

 

선방(禪房)에서도 자기의 욕심만 챙기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고, 그래 가지고 그 안되면은 썽내고, 간 곳 마다 그러한 성질을 쓰는 사람.

가정(家庭)에서도, 가정이라는 게 참 가장 가까운 식구끼린데, 어찌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고 자기의 욕심만을 챙기고 그래 가지고는 부모자식 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부부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고부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형제자매 간에도 화합이 안되는 거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여. 관공서나 회사에서나 어느 단체 어느 모임에 가서도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되는 일이 없어.

 

국회도 마찬가지요, 정부도 마찬가이요, 당(黨)도 마찬가지요, 어떠한 친목 단체도 마찬가지여.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 옳다 그러고, 상대방의 의사를 짓밟고 업신여겨 가지고서는 잘될 수가 없어요. 큰 기업체도 그렇게 해서 망(亡)하고 큰 국가도 그렇게 해서 망(亡)하는 거야.

잘못된 것은 전부 상대방한테 몰아붙여. 여당은 야당한테 몰아붙이고 야당은 여당한테 몰아붙이지만, 책임은 각자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 집안이 화목을 찾게 되고, 국회도 정상화되고 한 당내(黨內)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여.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실천한 사람이라야 '자기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의 마음을 돌릴 때, 상대방의 마음도 누그러지고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화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단한 원리를 모른 사람이 어떻게 큰 정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대통령 선거니 무슨 지방장 선거니 그런 게 있겠습니다마는,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상대방을 역적(逆賊)으로 몰아붙이는, 이조(李朝)에 노론(老論) 소론(少論) 그런 사색정당(四色政黨)과 같은 그런 사람에게는 표를 찍어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표를 던지면 또 이조와 같이 나라를 망해 먹고, 나라를 왜(倭)놈한테 팔아넘길 수밖에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허고  사의순환기요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나무~아미타불~

금일여군도할단(今日與君都割斷)하고  출신방호장부아(出身方號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여. 한 물결이 움직이자마자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 고요한 호수에 돌맹이나 낚싯대를 한번 던져 봐라 그 말이여. 그 찰나에 수천수만의 물결이 거기서 끝없이 일어나더라.

우리가 '한 생각' 딱! 돌이키면 될 일을,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탐진치 삼독으로 뻗어나갈 때에는 온 집안을 흔들어 놓고 온 세상을 꾸정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의순환기요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그러한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를 못하고 끝없이 되풀이를 하니, 마치 개미가 쳇바퀴를 돌듯이 돌고 돌고 또 돌고 해서 한량없이 도는데 언제 끝날 기약이 없더라.

 

금년에 이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선방 · 사무실 · 후원 · 보살선방 해서 이백 명 대중(大衆)이 이렇게 지내는데, 후원에서 행자들과 또 여러 보살님네들이 모다 참 그 더위 속에서 참 많은 애를 쓰셨는데, 그러한 속에서도 서로서로 말을 조심(操心)하고 행동을 조심(操心)하고, 그 가운데에 일을 잘한 사람도 있고 또 서투른 사람도 있고 그래서, 그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석 달 동안을 그렇게 애를 쓰는 가운데에 참 많은 애를 썼지만, 서로서로 충고하고 서로서로 잘 아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켜주고 이렇게 해서 화합(和合)한 가운데 일을 잘 추려 나갔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패당(牌黨)을 지어서, '니가 잘한다, 내가 잘한다' '내 시킨 대로 해라' 자기의 주장을 앞세우고 상대방을 짓누르고,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이 석 달 동안에 무장무애하게 이렇게 해제를 맞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기의 패당(牌黨)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직접 간접으로 압박을 주고 피해를 주는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면, 한 쪽으로는 공덕(功德)을 쌓고 또 한 쪽으로는 공덕을 소멸(消滅)하는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은 공덕(功德)은 좁쌀만큼 짓고 나쁜 업(業)은 산만큼 지어서 그 지은 공덕과 악한 업을 비교하면 비교가 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와서 일을 도운답시고 같이 일하는 대중에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주어서 모처럼 신심(信心)으로 와서 일하는 사람을 그렇게 흔들어 놓고 압박을 주고, 다시 와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한다면 그 한 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무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백 명 식구를 석 달 동안 이렇게 외호(外護)를 하고 한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 봉사하는 보살도(菩薩道)를 행(行)하는 그런 원력(願力)을 가진 신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 후원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어느 선방 어느 후원이라도, 후원에서 그 겨울에는 손이 꽁꽁 얼고 발이 꽁꽁 얼고, 여름에는 아무리 씻고 옷을 갈아입어도 금방 흠뿍 젖고 몸에는 땀띠가 돋고,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말없이 원주(院主) · 별좌(別座) · 공양주(供養主) · 채공(菜供), 그밖에 여러 후원 대중들의 그런 수고가 아니고서는 그 한 철 대중이 정진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38분35초~58분19초)

 

 

 

 

(4/4)----------------

 

그래서 불법(佛法)이 있는 동안 선방(禪房)이 안 없어질 것이고, 선방이 있는 동안에는 어느 선방이나 후원에서 애쓰는 보살화현(菩薩化現)들이 없이는 선방이 잘 운영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원에서 소임(所任)을 보는 원주 스님이나 도감, 별좌나 공양주나 채공, 또 그걸 돕는 여러 자원봉사(自願奉仕)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들도 그런 긍지를 가지고 신심으로써 잘 함으로써 한량없는—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화두(話頭)를 들어야 하거든. 일하면서도 화두를 열심히 들면 남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없고, 또 누가 자기한테 '잘하네 못하네' 말을 한다고 해도 조끔도 중심(中心)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분들이나, 외호(外護)하는 대중(大衆)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입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어야 그 속에서, 선방에서 정진하는 대중 가운데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분이 나올 것이고, 후원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툭! 터지는 대중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사(佛事)인 것입니다. 불사는 자기 하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를 위한 불사여. 일체 중생(衆生)을 위한 불사이기 때문에 불사는 아상(我相)이 없어야 하고,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아상과 자존심을 버릴 때, 저 사람이 바로 나요, 내가 바로 저 사람이어서 우리가 모두 한 몸뚱이가 되는 것이고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큰 불사(佛事)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용화사(龍華寺)가 전강 조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17년이 되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불사—법당이라든지 선방이라든지 또 이 각 기타 모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이렇게 볼 수 있는 불사가 이렇게 잘 이루어지고,

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 이렇게 신도님네들이 이렇게 많이 또 이 운집(雲集)을 하게 되는 것, 또 많은 분들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고 해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을 중심으로 해서 최상승법이 온 나라에 이렇게 자꾸 선양(宣揚)이 되고 외국에까지 이렇게 자꾸 선양이 되는 것은 이것이 온통 우리 법보제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精進)을 하신, 그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모든 불사(佛事)에 동참(同參)하신 그 공덕(功德)으로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산승(山僧)은 믿고 있습니다.

 

이 살아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모셔 있는 4만7천 위(位)의 이 법보영가, 우주법계(宇宙法界)에 수없는 우리의 선망부모들도 이 법회(法會)와 불사(佛事)에 모두가 다 동참을 하실 수 있도록 항상 이 법회 때마다 그러한 영가들을 이 법회에 청(請)하는 거량(擧揚)을 한 것입니다.

이 법당에 들어온, 또 이 법당에 들어오지 못한 밖에 있는 모든 영가들도 이 법문(法門)을 듣고서 이 불사에 동참을 한 그 공덕으로 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백종날, 이 해제(解制) 법회는 다른 법회보다도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또 비명액사한 모든 영가(靈駕)들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한 그러한 법회인 것입니다.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들께서도 이 법회의 그러한 특별한 의의(意義)가 있는 법회에 대해서 깊이 인식을 하시고 앞으로 이어지는 천도 법요식(薦度法要式)에 경건하게 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삼제구심심불견(三際求心心不見)호되  양안의전대양안(兩眼依前對兩眼)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수유검각주심(不須遺劍刻舟尋)하라  설월풍화상견면(雪月風花常見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제구심심불견(三際求心心不見)이여. 과거 · 현재 · 미래, 이게 삼제(三際)인데, 과거의 마음을 구(求)해도 구할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고, 미래의 마음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어.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한 번 찾어보시라 그 말이여. 어떻게 생겼나?

암만 찾어봐도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으로도 잡을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으로도 아무리 어떻게 생겼는가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양안의전대양안(兩眼依前對兩眼)이여. 두 눈은 예나 다름없이 두 눈을 대하고 있더라.

거울을 떠억 보시라 그말이여. 거울을 따악 들여다보면 자기의 그 두 눈이 거울 속에 따악 들어 있거든. 거울 속에 들어 있는 그 두 눈이 바로 자기 두 눈에 영상(影像)이거든.

자기 두 눈을 아무리 보려고 해도, 하늘땅을 다 찾어봐도 그것은 찾을 수가 없는데, 거울을 딱 보면 그 속에 자기 두 눈이 딱! 들어 있거든.

 

그러면 거울 속에 들어 있는 그 눈이 진짜 자기 눈이냐 하면 아니여. 자기 눈에 그림자이지, 영상(影像)이지 진짜 자기 두 눈은 아니거든.

진짜 자기 두 눈은 아니지만, 자기 눈을 보려면은 거울을 보는 수밖에는 없어. 거울을 통(通)해서 자기 눈을 보는 거여.

 

거울을 딱! 보면은 자기 눈에 눈꼽이 끼인 것도 볼 수가 있고, 자기 눈이 빨갛게 충혈한 것도 볼 수가 있고, 그 거울을 가자(假藉)해서 진짜 자기 눈을 딱! 인식을 할 수가 있는 거여.

거울을 가자(假藉)하지 않고 아무리 눈을 찾어도, 땅을 파고 들어가도 그 속에는 없고, 하늘을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도 그건 없는 거다 그 말이여.

 

불수유검각주심(不須遺劍刻舟尋)이다. 잃어버린 칼을 찾기 위해서 뱃전을 찍지를 말아라.

배를 타고 가다가, 배에서 일을 하다가 칼을 잃어버렸어. '바로 여기에서 칼을 잃어버렸다' 해 가지고 그것을 표(標)하기 위해서 뱃전을 찍어서 표(標)를 하지 말아라 이거거든. 칼은 물에 빠졌는데, 그 물에 빠졌는데 뱃전에다가 표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거거든.

 

설월풍화상견면(雪月風花常見面)이여. 칼은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기 손에 들고 있거든.

자기 손에 들고 있으면서 칼을 잃어버린 줄 알고 뱃전에다가 그 칼로 '탁탁' 흠집을 내서 칼 잃어버린 자리를 표(標)를 했다면 어떻게 된 것이냐.

 

겨울이면은 펑펑 쏟아지는 흰 눈, 가을이면 휘황창 밝은 달, 여름이면 시원하게 부는 바람, 봄이면은 청황적백(靑黃赤白)으로 피는 아름다운 꽃, 설월풍화(雪月風花)를 항상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더라 그거거든.

 

겨울에 나리는 눈과 가을에 밝은 달과 여름에 부는 바람, 봄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들을 볼 때에 무엇을 봐?

 

'아! 꽃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아! 시원한 바람이 불면 '아! 시원하다'

달이 밝으면, '아! 달도 밝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아! 눈도 참 잘 쏟아진다'

 

그것을 화가(畵家)는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을 것이고, 시인(詩人)은 그것을 보고 시를 읊을 것이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보고 무엇을 해? 춤을 출까?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느니라. (58분21초~1시간13분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자소내내관원방~ /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없다 / (게송)일불이불천만불~ /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인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게송)견색비간색~ / 팔풍(八風)이 휘몰아치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팔만사천 마구니를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마구니는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다.

 

백종(百種)법회로 선망부모(先亡父母)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 /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근본. 원인 / (게송)일파자동만파수~ / 선방(禪房) 대중이나, 외호(外護) 대중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사(佛事).

 

(게송)三際求心心不見 兩眼依前對兩眼 不須遺劍刻舟尋 雪月風花常見面 /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다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다 면목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눈물 나는,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새카만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자기도 지옥고로 가고, 남도 뒤흔들어서 남에게 해독(害毒)을 끼친 그런 악한 못된 독(毒)이더라 이거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거여. 삼악도에 근본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거든.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분들이나, 외호(外護)하는 대중(大衆)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입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어야 그 속에서, 선방에서 정진하는 대중 가운데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분이 나올 것이고, 후원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툭! 터지는 대중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겨울에 나리는 눈과 가을에 밝은 달과 여름에 부는 바람, 봄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들을 볼 때에 무엇을 봐?

'아! 꽃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아! 시원한 바람이 불면 '아! 시원하다' 달이 밝으면, '아! 달도 밝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아! 눈도 참 잘 쏟아진다'

 

그것을 화가(畵家)는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을 것이고, 시인(詩人)은 그것을 보고 시를 읊을 것이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보고 무엇을 해? 춤을 출까?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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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76~500)2021. 1. 1. 18:59

 

 

 

((No.482))—1992년 11월 첫째일요법회 (81분)

(1/4) 약 20분. (2/4) 약 21분. (3/4) 약 19분. (4/4) 약 21분.

(1/4)----------------

 

도재유아부재타(道在唯我不在他)하니  불수구원불구천(不須求遠不求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심정좌산창하(收心靜坐山窓下)하야  주야상참조주선(晝夜常參趙州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도재유아부재타(道在唯我不在他)요  불수구원우구천(須求遠又求天)이니라

도(道)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즉 내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멀리 구하지도 말고 또 하늘에서 구하지도 말아라.

도(道)라고 하면 깊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 그래서 저 경전 속에서 찾고 여러 가지 어려운 책 속에서 찾고 철학적으로 연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도(道)는 내게 있어.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향내를 맡을 때, 입으로 음식 맛을 볼 때,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낄 때,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바로 그때에 거기서 도를 찾는 것이지, 저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는 그 찰나, 귀로 들은 찰나(刹那)를 여의고 딴 데에서 도(道)를 찾지를 말아라.

 

수심정좌산창하(收心靜坐山窓下)에, 마음을 거두어 산창() 아래 고요히 앉아서,

주야상참조주선(晝夜常參趙州禪)이다. 밤낮으로 항상 조주선(趙州禪), 조사선(祖師禪)을 참구(參究)할지니라.

 

산창하(山窓下), 산창(山窓)이라 하니까 저 깊은 산중(山中)에, 산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여. 어디고 있는 그 자리가 마음을 거두어서 앉으면 그 자리가 바로 산창하(山窓下)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고 선불장(選佛場)이다. 밤낮, 밤이나 낮이나 항상 자기(自己)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할지니라.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하는 사람은 '이뭣고?'

무자(無字)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오늘 임신년(壬申年) 11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조실 스님의... 계축년(癸丑年)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갑인년(甲寅年) 11월에 열반(涅槃)에 드셨으니까, 열반하시기 1년 전에 설하신 법문(法門)입니다.

녹음(錄音)을 통해서 경청(敬聽)을 했습니다마는,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밖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이 없다.

 

우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발원(發願)한 분도 많고 그렇지만, 참선을 하는 사람은 옛날 선지식들이 모두가 다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기를 발원을 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은 도솔천 내원궁에는 장차 부처님으로 출세(出世)하실 성인(聖人)들이 거기에서 대기를 하고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도솔천 내원궁은 극락세계와 비교해서 조끔도 손색이 없는 곳이여.

삼계(三界)가 온통 수재(水災)와 화재(火災)와 병재(病災)와 온갖 그런 재난(災難)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도솔천 내원궁에는 미치지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모든 장차 성불(成佛)해서 출세하실 부처님이 거기에 계신 곳이기 때문에, 극락세계보다도 오히려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왕생(往生)하기를 모다 발원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우리의 바로 원각본궁(圓覺本宮)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이라고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기를 발원하려면 평소에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잘 지키면서 참선(參禪)을 해야 한다.

활구참선을 해서 자기의 본성, 자기(自己)의 본성(本性)을 깨달으면 살아서 벌써 도솔천 내원궁에 통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승에 인연이 다해서 숨을 거둔다면은 바로 도솔천 내원궁에 직행(直行)을 하게 된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심진오입시비단(尋眞誤入是非端)하야  불각다년작소단(不覺多年作笑端)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몽파시지신세환(夢罷始知身世幻)하니  서심종로백운단(誓心終老白雲端)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심진오입시비단(尋眞誤入是非端)하야  불각단연작소단(不覺多年作笑端)이다.

진리를 찾다가, 참나를 찾다가 그릇[誤] 시비(是非) 속에 들었어.

 

우리가 본래 저 무시겁(無始劫) 이전(以前)은 한 생각 동(動)해서 근본무명(根本無明), 지말무명(枝末無明)으로 떨어져서 이렇게 생사윤회를 해 왔지마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과 한 자리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지냈었다 그 말입니다.

 

진리 속에 있다가 한 생각 동한 탓으로 해서 무량겁을 이렇게 생사유전(生死流轉)을 해 왔어. 해 오다가 다행히 부처님 또는 부처님의 진리, 부처님의 법(法)을 만나 가지고 다시 우리 본고향(本故鄕)을 찾는 공부를 하다가, 또 한 생각 잘못해 가지고 다시 또 세월을 이렇게... 한 생각 자칫 미끄러지면 몇 생을 곤두박질을 친다 그 말이거든.

 

그래 가지고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많은 고통을 받고 많은 성현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웃음거리가 되어 오다가, 금생에 어쩌다가 그 꿈을 깼다 그 말이여. 꿈을 깨 가지고 보니, 세상은 말세(末世)가 되었고 이 몸은 늙었다 그 말이거든. 이리저리 모든, 부모와 처자와 권속, 애정(愛情)에 얽히고설켜서 이 마음은 있지마는 여러 가지 여건이 걸려서 뚝 끊기가 어렵고 몸은 병이 들고 이렇게 된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왕 꿈을 깨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환(幻)인 줄 알고 확실히 무상(無常)한 것을 요달(了達)했다면 서심종로백운단(誓心終老白雲端)이여.

'맹세코 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또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이 허망한 환상(幻相)에 속지 않고 진리로 돌아가고야만 말겠다. 우리의 본고향으로, 진리(眞理)의 본고향(故鄕)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그러한 서약(誓約)을 날마다 부처님 앞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각 동(動)해 가지고 미끄러진 탓으로 해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지금도 역시 생로병사 속에 있지마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중생(衆生)의 견지(見地)에서 볼 때 그런 것이고,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 삼계(三界)가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에 체(體)여! 몸뚱이다 그 말이여. 비로자나 법신불의 몸뚱이요,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전부가 법신불(法身佛)의 설법(說法)이요.

그러니 눈을 통해서 들어온 것, 귀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요 부처님에 설법(說法)이라고 한다면, 봄에 꽃이 피고 · 여름에 잎이 피고 · 가을에 단풍이 들고 · 겨울에 눈 내리는 것이 부처님 경전(經典) 아닌 것이 없고, 부처님 진신(眞身) 아닌 것이 없다 그 말이거든.

 

부처님께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보시는 세계(世界)나,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보신 세계나, 또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모든 세계가 세계 자체(自體)는 고대로지마는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 다 다르다 그 말이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을 하고, 어떻게 해야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뜩차 있는 경전을 바로 볼 수가 있느냐?

무엇을 보던지, 무슨 경계를 듣던지, 자기에게 와서—자기의 눈이나 · 귀나 · 코나 · 혀나 · 몸이나 · 생각에 와서 부딪치는 모든 것을 당(當)할 때에 자기를 향(向)해서, 그놈에 즉(卽)해서 자기로 돌아와야 한다 그거거든.

자기를 향(向)해서 돌아오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경전을 보고서 온갖 시비(是非)와 망상(妄想)을 일으켜 가지고 업(業)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과(果)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 그말이여.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금강경(金剛經)』, 우리가 마냥 많이 듣고 보고 하는 그런 좋은 경전도 그 경(經)을 보면서 바로 거기서 자기(自己)로 돌아오는... 그렇게 보지를 않고, 그 경으로 쫓아가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그렇게 본다면 팔만장경(八萬藏經)을 다 읽는다 해도 아무 이익이 없다 했습니다.

 

조사(祖師)들의 게송, 오도송(悟道頌)을 다 보면,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에 일어나는 경계(境界)에 즉(卽)해서 자신의 깨달은 경계를 읊은 것이 많습니다.(처음~20분13초)

 

 

 

 

(2/4)----------------

 

독좌심산만사경(獨坐深山萬事輕)하고  엄관종일학무생(掩關終日學無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생애점검무여사(生涯點檢無餘事)하야  일완신다일권경(一椀新茶一卷經)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독좌심산만사경(獨坐深山萬事輕)이여. 홀로 깊은 산에 앉았으니 만사가 다 가뿐하다 그 말이여.

엄관종일학무생(掩關終日學無生)이여. 종일토록 사립문을 닫고 무생(無生)을 배와.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배운다' 하는 것은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참선(參禪)을 한다는 말씀이여.

 

생애점검무여사(生涯點檢無餘事)여. 일평생 동안 자기의 모든 것을 떠억 이렇게 낱낱이 살펴보건데 남은 일이 없어. 아무 이렇다 할 일이 없어.

일완신다일권경(一椀新茶一卷經)이여. 한 잔에 새로운 차 한 잔이요, 한 권의 경이여.

 

참선하는 스님네는 옛날부터 엽차(葉茶)나 작설차(雀舌茶) 이런 차를 공양 끝에도 한 잔씩 드시고 또 졸리면은 또 차도 한 잔씩 드시기도 하고, 또 경을 보되 한 권의 경(經)이거던.

그 경은 무슨 경이냐 하면은 펴 봐도 한 글자도 없어. 그 경은 종이나 먹으로 만들어진 경이 아니여.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여. 그러되 항상 광명을 놓는 그러한 경전이여.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소소영령한, 우리의 육체로 앉고 · 서고 · 눕고 · 밥 먹고 · 옷 입고 · 눈으로 보고 · 귀로 듣는 모든 동작(動作)과, 우리의 생각으로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림이 없이 오고 가고 하는 이 소소영령한 놈.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 걸림이 없는 이 소소영령한 놈이 바로 한 권의 경(經)이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종이나 먹으로 글자로 된 그런 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펴 봐도 한 글자도 없어. 그런데 항상 소소영령한 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그 '이 뭣고?' 화두(話頭)를 들 때 그 경(經)을 읽는 거다 그 말이여.

창(窓) 밖에 달이 훤히 밝을 때, 귀뚜라미 소리가 울 때, 강변에는 서리가 내려서 모든 나뭇잎이 누렇고 뻘겋게 물들일 때, 기러기가 떼를 지어 울고 지나갈 때,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자기의 일생 동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경을 읽어라 그거거든.

 

아무리 이 세상이 성현이 가신 때가 오래되어서 말세(末世)가 되었다 하더라도, 온 세계가 시비(是非)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훨훨 타서 전쟁으로 피바다가 된다 하더라도, 종교(宗敎) 싸움 · 사상(思想) 싸움 · 경제 싸움 · 명예권리에 대한 싸움, 우리의 가까운 데로부터 온 나라가, 온 세계가 온통 그러한 싸움이 쉴 날이 없지마는,

그러한 속에서 우리는 달도 볼 수가 있고, 귀뚜라미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산에 새소리도 들을 수 있고, 서리가 내리면 단풍이 들고 기러기도 하늘에 날아갈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화두를 들고 떠억 참나를 찾는다면 부처님 생존해 계시던 정법시대(正法時代)나 지금이나 그점에 있어서는 조끔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낮에는 태양이 빛나고 밤에는 달이 밝았을 것이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졌을 것이고 기러기도 울며 지내갔을 것이다 그 말이여.

정법(正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정법시대나 말법시대나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마는, 정법을 아는 사람은 정말 우리가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이 정법을 만나게 된 그 복(福)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는 뼛속 깊이 감사하고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날로 혼탁(混濁)하고 탐진치(貪瞋癡)가 날로 치성해서 살아가기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 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려운 것도 우리에게는 채찍이 될 수가 있고, 온통 세상이 혼란하고 탐진치 불이 우리의 주변까지 타 들어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發心)에 좋은 계기가 되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과 또 출세간에 선악인과(善惡因果)가 다 자기의 한 생각으로 쫓아 일어난 것이지, 원인을 그 책임을 다른 사람한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다 내 자신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첫째,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이고, 내가 한 생각 최초(最初)에 일어난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일으키지 안 했다면 우리가 뭣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며 또 이 말세에,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또 태어났겠습니까?

모든 원인(原因)이 자기의 한 생각 동(動)함으로 인해서 행(幸)과 불행(不幸) · 흥망성쇠 · 생로병사, 이러한 선악인과(善惡因果)를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깨달은다면, 그 원인을 알기 때문에—무슨 병을 앓더라도 '이 병이 왜 생겼는가' 그 병의 원인을, 근원을 확실히 알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모르고서 아무리 좋다는 약을 이것저것 먹어 봤자 낫기가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명의(名醫)를 만나서 그 병의 근원을 알아야 그래야 그 병을 고칠 수가 있는 것이지.

 

그와 같이 우리 자신이 오늘날 여기에까지 이 말세에까지 온 원인을 안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여기에까지 온 것을 안다면, 한 생각을 돌이키면 바로 생사(生死) 없는 근원(根源)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돌이키는—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한 생각을 돌이켜서 우리의 '생사 없는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노력이 바로 활구참선(活句參禪)이요 정법(正法)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에 온갖 법문(法門)이 많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49년 동안 모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여러 가지 중생들을 위해서 많은 법문을 하신 것뿐이고, 그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다 보고 읽고 확연(確然)하게 부처님의 본뜻을 안다면, '이 뭣고?'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하다 보면 혹 어떠한 경계(境界)를 보고, 또는 조사 스님네의 게송(偈頌)을 보거나, 경전(經典)을 보거나 홀연히 나름대로 견처(見處)를 얻은 때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하기 때문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어떠한 뜻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잠깐 감동을 해서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거니와 그 경계에 빠져서 자기도 '한소식 했다' 해 가지고 그 경계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에게 속고, 자기를 속이고, 불조(佛祖)를 속이고, 불법(佛法)을 멸망(滅亡)하게까지 할 그러한 안타까운 그런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기지사(一期之事),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선지식(善知識)에 인가(印可)를 받아서 조사(祖師)와 똑같은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일기지사로 번뜩 어떠한 경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스스로 조사와 같은 경지가 아닌 것을 알고서 버리지 않고, 그런 경지(境地)에 집착(執著)해 가지고 그것을 자기의 살림살이로 알고 그럭저럭 지낸다면, 이것은 그동안 애써서 공부한 본의(本義)도 간곳없고 자기의 공부는 거기서 끝나 버려.

 

거기서 끝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체중현(體中玄)의 경계, 아무 공안(公案)이라도 닥치는 대로 눈에 띈 대로 경계를 잡아서 일르고, 동문서답하고, 무슨 물음을 물어도 할(喝)을 하고 방(棒)을 하고 손뼉을 치고, 이렇게 해서 자기는 그것으로써 쾌활하고 걸림이 없을 것 같지마는, 그것은 체중현의 경계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정말 현중현(玄中玄)의, 현중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참깨달음이라고 하는 조실 스님의 말씀을 우리는 명심을 하고, 정진(精進)을 하되 실(實)다웁게 정진을 하고, 공안을 참구(參究)하되 실(實)답게 참구를 해야 깨달을 때에는 실다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실답게 참구하고, 실답게 정진을 해서, 실다운 깨달음을 얻지 아니하면, 청춘을 버리고 인생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출가(出家)해서 도(道)를 닦는다 해도, 마침내는 허송세월하고 지옥(地獄)밖에는 갈 곳이 없는 것이 참으로 이 도(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약(補藥), 사람들은 몸을 건강하게 하고, 또 늙지 않고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쨌든지 좋은 약이라 하면은 닥치는 대로 먹으려고 그럽니다. 그러나 보약을 잘못 먹어 가지고 오히려 무서운 병을 유발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요새 약(藥)이라 하면 돈 있는 사람은 가리지 않고 곰에 쓸개다 · 독사다 · 황구렁이다 · 심지어는 송장 뼈도 다 고아 먹고 별별 약을 다 먹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수명을 연장할 수도 없는 거고, 어떠한 주사를 맞어 가지고 자기의 힘을 보강한답시고 계속 맞아 봤자 오히려 명(命)을 재촉하는 결과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20분19초~40분57초)

 

 

 

 

(3/4)----------------

 

입으로 먹는 약도 그렇지만, 도(道)를 닦는 것도 요새 '10년 20년 30년 닦어 봤자 견성성불(見性成佛)한 사람이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자기 시킨 대로 하면 견성은 문제없이 단시간 내에 할 수가 있다' 해 가지고 삿된 방법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그래 가지고 금방 인가(印可)를 해 가지고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도(道)는—금방 툭! 터져 가지고 견성(見性)했다고 그래 가지고 큰소리를 치고—목적이 큰소리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여.

 

10년 20년 30년을 닦아도 콱! 맥혀서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다 하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실(實)다웁게 정진(精進)을 하면 금생에 견성(見性)을 못했다 하더라도 조끔도 후회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마지막 살아서 어떠한 경계를 당해도 흔들린 바가 없고, 자기를 원망하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향(向)해서 철저하게 참구(參究)해 나갈지언정, 명예나 권리나 재산에 흔들림을 받지 않고, 마지막 숨이 딱! 끊어질 때까지도 떠억 화두(話頭)를 들고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절대로 그 사람은 허송세월한 사람이 아니여.

 

죽음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설사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하더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도 화두를 떠억 들고서 숨을 딱깍 마칠 수 있다면, 설사 그 사람이 '훌륭한 도인이다, 선지식이다, 견성을 했다' 그러한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마쳤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수행자(修行者)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렇게 일생을 지냈다면 금방 몸을 바꿔 나서, 바꿔서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 가지고 다시 불법(佛法)을 만나 가지고 또 정진을 하게 될 것이고, 또 그분이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을 했고 발원을 했다면 도솔천 내원궁에 틀림없이 가서 왕생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에서 계신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들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마을에는 사업도 해야 하고, 관공서 회사에 직장 생활도 해야 하고, 또 가정에서 살림도 해야 하고, 아들딸 손자손녀도 길러야 하고, 여러 가지 각자 처지에 따라서 하실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하실 일 속에서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항상 화두(話頭)를 들고 참구(參究)를 해 나가고, '이 뭣고?'거든.

 

앉어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소지를 하면서도 '이 뭣고?'

빨래를 하면서도 '이 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화두를 들고, 손님이 오면 영접(迎接)하고 이야기하고 담소(談笑)하면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속으로는 '이뭣고?' 하고, '이뭣고?' 하면서 이야기도 하고, '이뭣고?' 하면서 차(茶)도 마시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그때는 양치하고 세수하고서 떠억 30분, 또는 한 시간, 새벽에 일찍 일어나신 분은 두 시간, 정말 조용한 시간을 타서 정진(精進)을 하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지내신다면 그러한 생활이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쌓이고 보면 수행력이 몸에 배어서, 자기의 모든 성격도 개선이 되고 신심(信心)도 나날이 돈독(敦篤)해지고, 보고 듣는 모든 경계가 담담(淡淡)한 가운데에 거기서 다—사람 죽은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깨닫고 터억! 의단(疑團)이 돈독해지고, 세속에 흥망성쇠를 보고서 정말 더 깊이 발심(發心)을 하고, 울 일을 당하면 울면서, 웃을 일을 당하면은 웃으면서, 그 속에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분 계신 곳이 바로 선방(禪房)이여.

 

그러면서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면 흰머리도 더 불어나고 얼굴에 주름살도 불어나고 몸에 기운도 차츰 떨어지지만, 그 속에서 한 생각을 단속(團束)하고 자꾸 정진을 해서 수행력이 쌓이면, 봄에 꽃 필 때만 좋은 것이 아니라 가을에 단풍 질 때도 그런대로 흥취(興趣)가 있듯이,

중년(中年)이 말년(末年)이 되고, 말년 노년(老年)이 되어서 그런 속에서 떠억 화두를 들고 정진할 수 있다면 그러한 할머니 그러한 할아버지는 정말 그 얼굴에서, 그 눈에서, 그 한마디 한마디하시는 말씀 속에 풍기는 것이 저 절에 계시는 노스님이나 선지식 뵈운 거나 마찬가지로 그 풍기는—설사 머리는 안 깎고 세속(世俗)에 계시더라도 그 어른에서 풍기는 것이 참 마음,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시고,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는 정말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을 안 하시면, 연세가 많아지면 심술이 점점 불어나고, 짜증이 불어나고, 잔소리가 불어나고 그래 가지고 온 집안 식구, 아들딸 며느리 손자손녀가 '아휴, 저 할머니 빨리 돌아가셨으면, 저 할아버지 빨리 돌아가셨으면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에 어느 방에 계신 것이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못마땅하고, 말로는 차마 못해도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아까와 같은, 생활 속에서 항상 참선(參禪)을 하시고 모든 것을 보고 들을 때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시고, 그렇게 해서 일체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다 낱낱이 발심(發心)을 하게 하고, 분심(憤心)을 내게 하고,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주는 법문으로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셔.

그리고 온 집안 식구를 보실 때에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하시고,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해 주는 대로 한 숟갈 먹고 항상 화두를 들고 공부하시고.

 

며느리나 손자손녀가 일이 있어 나가면은 "조심해서 갔다 오너라"

'갔다 왔다' 하면 "응, 잘 갔다 왔느냐?"

비교적 낱낱이 꼬치꼬치 파고 묻고 간섭을 하려 하지 말고, 그저 무심(無心)히 상대(相對)해. 그저 건강하게 잘 살면 그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뭔 일로 갔느냐?" "뭣이 잘 되았냐 말았냐?" 연세가 많아지면 모든 것이 궁금해서 자꾸 알고 싶은 것이 병이거든.

그래서 옛날에 효자(孝子)는 그날 있었던 것을 저녁에면 그 늙으신 부모님 방에 가서 낱낱이 다 묻지 않으셔도 다 설명을 해 드린 그러한 효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세상이 온통 복잡하고 바뻐서, 옛날 농사지을 때와 달라서 낱낱이 보고 드리기가 어렵거던.

또 어른한테 말씀을 드려 봤자 소용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전혀 성의(誠意) 없이, "뭘 그런 걸 물어 쌓이냐?"고, “드리는 밥이나 잡숫고 가만히 계시라"고, 이렇게까지 세상이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도 자기도 머지않아서 곧 또 늙을 텐데, 자기 늙어서를 생각해서라도 늙으신 할아버지 · 할머니 · 부모님께는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보고를 드려서 기쁘게 해 드리고, 그렇게 해서 궁금증을 없애도록 해 드리는 것도 맛있는 것을 갖다가 잡숫게 하는 것이나 조끔도 다름이 없이 참 좋은 것인데,

그러나 자기가 젊은 사람은 그러려니와, 연세가 많으신 분은 알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 뭣고?'를 찾는 것이 좋다 그 말이여.

그거 알아 봤자 별 수도 없는 거 알아서... 말하기 귀찮은 사람들한테 왜 자꾸 물어봐 쌓냐 그말이여.

 

그래 묻지 말고 무엇이든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그거 알아봤자 소용도 없고, '이 뭣고?'를 알아야되거던! '이 뭣고?'

 

'이 뭣고?' 한 번씩 추켜들 때마다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깨달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데, 아! 그것을 안 하고 뭐 하려고 알아 봤자 소용없는 것을 알려고 쌓냐 그 말이여.

알려고 안 하고 자꾸 '이뭣고?'만 하고 그러면은 그냥 젊은 사람들이 빨리 죽기를 바래지도 안 할 텐데, 꼬치꼬치 물어봐 가지고 빨리 죽기를 바라면 그 원통하고 슬퍼서 어떻게 사냐 그 말이여.

 

그저 '이 뭣고?' 한 번 할 때마다 내 업장(業障)도 소멸(消滅)이 되고, 집안 식구 업장도 소멸된다고 믿어야 되어요. 집안 식구 업장이 자기로 인해서 생긴 거거던.

자기가 '이 뭣고?' 하면 자기 업장도 소멸이 되고, 집안에 모든 재앙도 소멸이 되는 거다 그 말이여. 집안이 자기로 인해서 집안이 존재하거던. 자기가 없으면 어떻게 아들이 태어났으며, 자기가 없으면은 무엇 때문에 며느리가 들어왔으며, 자기 할머니 · 자기가 없으면 어디서 손자가 나왔냐 그 말이여.

 

아들 · 며느리 · 손자손녀 전부가 자기를 뿌리로 해서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이뭣고?'를 하고 자기가 발심을 해서 자기가 열심히 정법(正法)을 닦으면 아들 · 며느리 · 손자손녀까지 다 좋아질 거다 그말이여. 이건 틀림없는 거여.

우리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면, 정말 그러한 노인(老人)은 오래 사실수록 좋다 그 말이여.

 

절에다가 백일기도 천일기도 붙여서 스님네가 날마다 기도를 하고 축원(祝願)을 해 주신 것 못지않게 그 집안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항상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이뭣고?'를 하신, 해 주신 그 공덕(功德)이 훨씬 수승(殊勝)하다고 나는 믿습니다.

물론 절에서 스님네도 열심히 기도를 하고 축원을 해 주셔서 좋지마는, 바짝 가까이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뭣고?'를 해 주신다면 그것은 곧바로 통(通)하거든. 왜그러냐?

그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 피를 이어받은—자기의 피가 그 할머니 피를 이어받고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바짝 가까이서 해 주신 게 더 좋다. 주먹은 가깝고 법(法)은 멀거든.

 

그래서 젊으신 청신사 · 청신녀 · 학생들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참선을 하시거든 어찟든지 조용하게 해 드리고 참선을 잘하시도록 어찟든지 잘 보호를 해 드려야 돼.

어찟든지 잘 잡숫고 기력을 챙기실 수 있도록 맛있고 영양 있는 것을 잘 해 드리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돼! 비위를 건들어 놓으면 화두가 달아나 버리면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가 그만큼 늦어지거든.

 

그러니까 참선(參禪)을 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에 계시거든, 또는 어머니 아버지 어머님이 계시거든, 어쨌든지 잘 음식도 잘해 드리고, 항상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공부하실 수 있도록 잘 받을어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그렇게 하게 되면 자연히 그것이 효도(孝道)가 되고 그 본을 어린 아들딸, 어린 손자들이 그 본을 또 보고서 그 애들도 또 자기 부모한테 효도를 할 것이여. 그러니 그 집안이 안될라야 안될 수가 있겠습니까?

 

전부가 효도로써 어른을 받들고, 그 어른이 젊은 사람들을 잘 이렇게 보살피되 잔소리로써 가리키려고 할 것이 없어요. '이뭣고?' 한 마음으로 보고 '이뭣고?' 한 마음으로 봐.

그 정성스런 마음으로 요렇게 눈으로 보살피기만 해도 자연히 그 애들이 다 업장(業障)이 소멸하고 잘될 것이거던. 한 가정이 '이뭣고?' 한 사람이 한 분만 있으면 그 집안이 그렇게 되는 것이여.

 

그리고 자연히 살다 보면 안사돈도 있고, 밭사돈도 있을 테니 사돈네한테도 그 정법(正法)을 소개를 해서 끌고오거든. 그럼 사돈네가 잘되니 좋지 않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 정법이 온 세상에 번져서 온 세계가, 온 나라가 정법을 믿는 사람으로 가득찬다면 거기에 무슨 불행이 있으며 무슨 싸움이 있겠느냐 그말이여.(40분58초~59분53초)

 

 

 

 

(4/4)----------------

 

운산종일무인도(雲山終日無人到)헌디  독와선창세미경(獨臥禪窓世味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기습송화금기일(飢拾松花今幾日)인고  고표일락과평생(孤瓢一衲過平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운산종일무인도(雲山終日無人到)요, 저 구름 깊은 산에 종일토록 온 사람이 없어. 아무도 올 사람이 없더라.

독와선창세미경(獨臥禪窓世味輕)이요, 홀로 선창(禪窓)에 누웠으니 '세상(世上)맛'이 가벼워.

 

저 구름 깊은 산에 아무도 오는 사람도 없고 올 사람도 없는데, 홀로 그 선창(禪窓) 가에 떠억 누웠으니 '세상맛이 가볍다' 한 말은 세상 흥망성쇠가 전혀 아무 그게 무심(無心)하다 그거거든.

 

도를 닦는 사람은 저 깊은 산중에, 이건 이 게송(偈頌)은 부휴선사(浮休禪師)라고 한 서산(西山) 스님 당시에 그 대도사의 게송인데, 그때 시대는 스님네가 깊은 산중에 그렇게 모다 사셨다.

이 깊은 산중 아니라도, 설사 도회지 자동차 소리가 나고 기차 소리가 나고 별별 소리가 다 난다 하더라도, 화두를 들고 정진하면 앉었거나 누웠거나 깊은 산중에 선창(禪窓)에 떠억 눕고 앉은 거나 똑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기습송화금기일(飢拾松花今幾日)이냐, 양식(糧食)이 떨어져서 배가 고프면 송화(松花), 소나무에 노란 꽃가루가 열리는데 그것을 털어서 수비(水飛)를 해 가지고 그놈을 이렇게 물에 타서 요렇게 먹는다 그 말이여.

그게 요기(療飢)가 되고, 솔잎도 요렇게 썰어서 먹기도 하고 하는데, 배고파서 송홧가루를 주워 모은 지가 며칠이나 되냐. 여러 날을 식량이 떨어져서 아마 산중(山中)에서 그렇게 송홧가루로 요기를 하셨던 모냥이지.

 

고표일납과평생(孤瓢一衲過平生)이다. 표주박 하나와 누데기 한 벌로 이렇게 평생을 지내는구나.

요새는 세상이 모다 발달이 되고 그래서 산중에 스님네들도 옛날처럼 그렇게 식량이 떨어지고 궁핍하고—물론 깊은 지리산이나 태백산에 깊은 산중에 토굴에 계신 스님네는 혹 그렇게 궁핍하게 지내신 스님도 혹 있을는지 모르나, 요새는 스님네 살기가 음식이나 의복이나 모든 것이 퍽 풍부해서 수행하기에는 대단히 별 불편함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먹는 것이 풍부하고 입을 것이 풍족해서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도(道)를 닦아가는 데에 꼭 좋으냐?

옛날에 먹을 것이 식량이 부족하고, 내복도 못 입고, 양말 한 켜레 생기면은 그것을 누덕누덕 이렇게 기워서 멍석처럼 만들어 가지고 한 켜레 가지고 밤에 빨아 널었다가 새벽에 신고, 이렇게 궁핍하게 사실 때가 오히려 더 수행에는 더 보탬이 되았는가? 이것은 관점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다 옛날은 옛날대로 그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배고프고 추운 데에서 오히려 신심(信心) 도심(道心)이 더 분발(奮發)되는 거라'고 말씀도 하셨습니다마는, 지나치게 못 먹고, 지나치게 못 입고, 지나치게 수면이 작으면 그것이 도를 닦아가는 데에 방해, 퇴타(退墮)하는 원인이 되는 수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긍게 너무 적게 먹어 가지고 영양실조가 된다던지, 너무 못 입어 가지고 감기 촉한(觸寒)이 되어서 냉병(冷病)이 생긴다던지, 또 너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해 가지고 잠을 너무 부족하게 해 가지고 그것이 쌓여 가지고 결국은 깨닫기 전에 몸에 죽을병이 걸린다던지, 이렇게까지는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잘 먹어 가지고 몸이 누룩되아지처럼 살이 찌고, 너무 두텁게 입고 너무 좋은 옷을 입어 가지고 사치에 빠지고, 잠이 부족하면 병이 난다니까 잠을 너무 많이 자고, 이러한 것도 수행자로서 삼가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설사 세상이, 옛날에는 백 리고 천 리고 걸어서 걸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렇게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도반(道伴)을 찾아서 그렇게 순전히 걸어서 다니는 그런 때도 있었고, 도토리와 보리쌀 꽁보리밥으로 간신히 그렇게 끼니를 이어오면서 수행을 한 때를 생각해서, 그런 때도 도인(道人)들도 많이 나왔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수행하신 분은 의식주(衣食住)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담박(淡泊)한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참선하시는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내가 참선을 하니까 잘 먹어야 한다' 해 가지고 지나치게 노상 잘 봉양(奉養)하라고만 하시지를 말고, 밥이 질면 진 대로 되면 된 대로 꼭꼭 씹어서 잡수면서 그저 어쨌든지 이만큼 건강할 때 어찟든지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열심히 하셔서,

오늘 눈을 감게 될는지 1년을 더 살게 될는지 또는 10년을 더 살게 될는지, 그것은 다 인연(因緣)에다 맽기고 그때까지 몸이 건강하면 앉어서 열심히 하시고 또 피곤하면 누워서도 하시고, 몸이 어디가 편찮으시면은 누워서 꿍꿍 앓면서도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잠시도 방심(放心)을 하지 말고 정진(精進)을 하셔서 마지막 눈 딱! 감을 때에도, '아이고 내 자식, 내 딸, 내 재산' 그런 생각하시지 말고, 화두 하나만을 떠억 들고 눈을 딱! 감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참 수행자다웁게 멋지게 여생(餘生)을 마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사시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 없는 영원(永遠)을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사(生死)를 여의고 도(道)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어야 하거든.

망상(妄想)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지 말고, 바로 망상 그놈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하거든.

 

그렇다면은 우리는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어가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흥망성쇠가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을 모시고 바로 진리(眞理)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되거던.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또 삼동(三冬) 임신년 동안거가 시작이 됩니다.

결제에 방부(房付)를 들이실 분은 들이시고, 또 가정에서 하실 분은 하시고, 또 스님네도 법보선원(法寶禪院)이나 또 어느 선방에 가서 방부를 들이시거나 또는 자기 절에서 또 지내는 분, 모두가 다 우리가 한 부처님, 한 선지식, 한 활구참선법에 의지해서 닦아 가는 한 가족(家族)이요, 한 도반(道伴)입니다. 어쨌든지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지금 이렇게 산승(山僧)이 간곡(懇曲)히 말씀드리는 이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후세에 마땅히 한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시고 법문을 마치심) (1시간 14분 24초)

 

 

한 가지 광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근자(近者)에 와서 이 용화선원은 대중스님네나 또는 선방에 방부들인 보살님네, 또 시민선원, 또 이래 법회에 오시는, 각종 법회에 오시는 신도님들, 모다 이 수효가 많이 불어나서 사무실이나 후원에 업무량이 굉장히 복잡해지고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스님네의 손, 스님네의 힘만 가지고서는 일을 추단(推斷)을 해 나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후원에도 신심 있는 보살님네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모다 그 오셔서 모다 도와주시고 해서 그동안에 참 그런대로 유지가 되어 왔습니다.

 

또 사무실에도 신심 있는 신도님네들이 모다 오셔서 모다 일도 거둘러 주시고, 모다 이 녹음테이프라든지, 사무실 모든 접수라든지, 또는 콤퓨타(computer)를 또 하시는 분은 또 그런 면에서 가지가지로 모다 봉사(奉仕)를 해 주셔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잘 그런대로 되어 왔습니다마는,

앞으로는 보다 더 체계적으로 질서 있게 일을 추진해 가기 위해서 후원에서 봉사하실 분을 약 칠십 명 가량 이렇게 자원봉사자(自願奉仕者)를 모집을 해서 하루에 몇 분씩 이렇게 교대하면서 이렇게 일을 봤으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또 봉사하실 분을, 지금 봉사하신 분이 한 열 분 가량 있습니다마는, 한 이십 분 가량을 더 신청을 받아 가지고 한 2개월간 일주일에 이틀씩 간단한 콤퓨타(computer) 교육을 받게 해 가지고 이렇게 또 이 자원봉사를 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절에 불사(佛事)에 '대웅전(大雄殿)을 짓는다, 부처님을 조성(造成)해서 모신다, 또는 종(鐘)을 범종불사(梵鐘佛事)에 동참하신다,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한다' 모다 이러한 참 물질적인 시주(施主) 화주(化主)하는 것도 대단히 공덕(功德)이 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몸으로, 몸으로 와서 자원봉사(自願奉仕)를 하는 것도 금전이나 물질로 시주하는 공덕보다도 훨씬 더 그 공덕(功德)이 수승(殊勝)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건 일거양득(一擧兩得)이거든. 몸으로 와서 봉사를 해서 이 사중(寺中)에 모든 불사(佛事)가 원만히 되어 가고, 또 여기에서 수행하시는 또는 법문을 듣는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편의를 제공을 하기 때문에 그것도 좋으려니와, 와서 직접 일을 하면서 스스로 더 신심(信心)이 돈독(敦篤)해지고 일을 하면서 화두(話頭)를 들기 때문에 더 공부에도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실공히 이것은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지혜(智慧)도 닦고 복(福)도 짓는 이런 일석이조(一石二鳥)에 공덕(功德)이 있는 것입니다.

 

뜻있는 분은 사무실에 이런 양식이 비치되어 있으니까, 여기에 이름과 여기에 빈칸에 적절히 기록을 해서 신청을 하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서로 그 사무실에 와서 문의를 하시고 또 서로 좋은 도반 있으면 서로 권고(勸告)해서 와서 이 자원봉사(自願奉仕)에 참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새는 회사나 가정이나 학교나 컴퓨타를 몰라 가지고는 이 세상 생활을 해 나가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원에 가서 배운 것도 좋겠지만 여기와서 배우시면, 물론 그 아주 전문적으로 프로그램까지 작성할 수 있을 만큼 배우려면 또 많이 배워야 하지만, 여기 와서 봉사하실 정도만 배우셔도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실 것이고 또 집에 아들딸들에게도 좋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60분4초~1시간21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도재유아부재타~ / 활구참선밖에는 확철대오해서 생사해탈하는 길이 없다 / 도솔천 내원궁 발원 /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살아서 벌써 도솔천 내원궁에 통하는 것 / (게송)심진오입시비단~ /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 삼계(三界)가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에 체(體) / 무슨 경계든 그놈에 즉(卽)해서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 비로자나불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하고, 우주법계에 가뜩차 있는 경전을 바로 보는 것.

 

(게송)독좌심산만사경~ /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배운다' 하는 것은 본참공안을 들고 참선을 한다는 말씀 / 항상 소소영령한 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그 '이 뭣고?' 화두(話頭)를 들 때 바로 한 권의 경(經)을 읽는 거다 / 선악인과(善惡因果)가 다 내 자신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된 것. 한 생각을 돌이켜서 우리의 '생사 없는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노력이 바로 활구참선이요 정법(正法) / 실답게 참구하고, 실다운 깨달음을 얻어야[實參實悟]

 

오직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실(實)다웁게 정진(精進)해야 /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항상 '이 뭣고?' 그곳이 바로 선방(禪房) / 자기가 '이 뭣고?' 하면 자기 업장도 소멸이 되고, 집안에 모든 재앙도 소멸이 되는 거다.

 

(게송)운산종일무인도~ / 화두를 들고 정진하면 바로 거기가 깊은 산중 / 수행자는 의식주(衣食住)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담박(淡泊)한 것이 좋다 / 우리가 생사(生死)를 여의고 도(道)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어야 하거든. 망상(妄想)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지 말고, 바로 망상 그놈에 즉(卽)해서 '이뭣고?' / 자원봉사(自願奉仕) 권고. 자원봉사는 지혜(智慧)도 닦고 복(福)도 짓는 일석이조(一石二鳥)에 공덕(功德)이 있는 것.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우리의 바로 원각본궁(圓覺本宮)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이라고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기를 발원하려면 평소에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잘 지키면서 참선(參禪)을 해야 한다.

활구참선을 해서 자기의 본성, 자기(自己)의 본성(本性)을 깨달으면 살아서 벌써 도솔천 내원궁에 통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승에 인연이 다해서 숨을 거둔다면은 바로 도솔천 내원궁에 직행(直行)을 하게 된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을 하고, 어떻게 해야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뜩차 있는 경전을 바로 볼 수가 있느냐?

무엇을 보던지, 무슨 경계를 듣던지, 자기에게 와서—자기의 눈이나 · 귀나 · 코나 · 혀나 · 몸이나 · 생각에 와서 부딪치는 모든 것을 당(當)할 때에 자기를 향(向)해서, 그놈에 즉(卽)해서 자기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종이나 먹으로 글자로 된 그런 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펴 봐도 한 글자도 없어. 그런데 항상 소소영령한 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그 '이 뭣고?' 화두(話頭)를 들 때 그 경(經)을 읽는 거다 그 말이여.

창(窓) 밖에 달이 훤히 밝을 때, 귀뚜라미 소리가 울 때, 강변에는 서리가 내려서 모든 나뭇잎이 누렇고 뻘겋게 물들일 때, 기러기가 떼를 지어 울고 지나갈 때,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자기의 일생 동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경을 읽어라.

 

한 생각 돌이키는—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한 생각을 돌이켜서 우리의 '생사 없는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노력이 바로 활구참선(活句參禪)이요 정법(正法)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에 온갖 법문(法門)이 많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49년 동안 모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여러 가지 중생들을 위해서 많은 법문을 하신 것뿐이고, 그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다 보고 읽고 확연(確然)하게 부처님의 본뜻을 안다면, '이 뭣고?'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현중현(玄中玄)의, 현중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참깨달음이라고 하는 조실 스님의 말씀을 우리는 명심을 하고, 정진(精進)을 하되 실(實)다웁게 정진을 하고, 공안을 참구(參究)하되 실(實)답게 참구를 해야 깨달을 때에는 실다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죽은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깨닫고 터억! 의단(疑團)이 돈독해지고, 세속에 흥망성쇠를 보고서 정말 더 깊이 발심(發心)을 하고, 울 일을 당하면 울면서, 웃을 일을 당하면은 웃으면서, 그 속에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분 계신 곳이 바로 선방(禪房)이여.

 

우리가 생사(生死)를 여의고 도(道)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어야 하거든. 망상(妄想)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지 말고, 바로 망상 그놈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하거든.

그렇다면은 우리는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어가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흥망성쇠가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을 모시고 바로 진리(眞理)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되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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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