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1~73)/(26~50)2020. 12. 30. 20:07

 

 

((세등선원No.27))—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80.04.17.음) (83분)

(1/4) 약 21분. (2/4) 약 22분. (3/4) 약 19분. (4/4) 약 21분.

(1/4)----------------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이상으로써 경신년(庚申年)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 법어(法語)를 다 마쳤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중이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주장자(柱杖子)를 한 번 들어서 보이고, 그리고 법상을 한 번 치고 무슨 게송(偈頌)을 한 번 읊더니, 인자 이제 겨우 법문(法門)이 시작한가 보다 했는데 다 마쳤다고 하니, 공연히 여기를 왔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주장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쳐서 그 소리를 여러분께 들려드렸습니다.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서 그 이상 더 법을 설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모가지가, 머리가 목 위에 하나가 있는데 다른 데서 목을 하나 갖다가 그 머리 위에다가 하나를 더 포개 놓은 거와 같을 것이고, 닭다리를 떼어 버리고 오리다리를 갖다가 이어서 짬매 놓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대관절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보이는 것이, 무엇이 그것을 갖다가 법(法)이라고 할 것인가? 누구는 손이 있는 사람은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으며, 들었던 주장자로 책상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는가. 그러한 법이라면 나는 하루에 천 번이고 만 번이라도 설할 수가 있다. 구태여 바쁜 시간을 내서 절에 갈 필요가 무엇이 있나?

할머니 지팽이를 갖다가 자기도 한 번 들어서 한 번 쳐 보면, 그러면 그것으로써 그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묘법(妙法)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할진대는, 구태여 절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 있나?'

 

이러한 생각이 들어서, 이 자리에서 분연(奮然)히 일어서서 법상을 때려 엎고 그길로 활개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 한다면 과연 대장부(大丈夫)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과연 그러한 대장부는 없는가? 이 자리에 오신 분은 점잖하시고 자비(慈悲)가 있으셔서 참고 계시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금방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세등선원 조실 스님은 정 전강(鄭田岡) 선사(禪師)이십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은 다 알고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어떻게 6년 전에 열반(涅槃)하신 스님을 조실(祖室)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이미 돌아가셨을 때... 설사 돌아가시기 전에는 세등선원 조실로 계셨다 하더라도 돌아가신 뒤야 자동으로 조실(祖室) 책임을 벗으신 것이 아니냐?'

그렇게 혹 생각하신 분이 간혹 계신 것 같애서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탄생(誕生)하시되 오신 바가 없고, 설사 80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다고 해서 가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시고 가시고 한 것이 있다면 여래(如來)가 아닌 것입니다. 오시고 가신 바가 없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부르는 것입니다.

 

전강(田岡) 스님께서도 6년 전에 77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을 하셨지만, 우리는 전강 큰스님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생존해 계실 때와 똑같이 그렇게 분명하게, 성성(惺惺)하게 법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사 한마디 녹음을 해 놓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말씀도 생존시(生存時)에 육성(肉聲)을 들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오시고 가신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를 체달(體達)하신 스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실(祖室)로 모셔도, 모시고 생존해 계신 듯, 계신 것처럼 믿고 그 법(法)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스님을 조실로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법회(法會) 때마다, 일상(日常) 언제 어데서라도 그 육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조실로 모셨다고 해서 조끔도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그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듣고 우리의 공부를 바로 해 갈 수가 있고,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갈 수도 있고, 해태(懈怠)한 마음 분발(奮發) 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 용화사(龍華寺)나, 세등선원이나, 복전암이나 또 스님을 존경하는 많은 불자(佛子)들이 언제 어데서 공부를 할 때라도 살아계신 걸로 믿고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방방곡곡에서 정진(精進)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연히 세등선원에 용상방(龍象榜)에도 조실(祖室)에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라고 딱! 붙여 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시고 산승(山僧)을 갖다가 세등선원 조실이라고 착각(錯覺)을 하고 그렇게 말을 하시는 분이 가끔 있는 것을 듣습니다. 산승은 조실이 아니고 세등선원 선감(禪監)입니다.

 

전강 대종사를 조실로 모시고, 그 전강 대종사에 법을 받들어서 여러분이 정진(精進)하시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선감(禪監)이라고 하는 책임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확실히 말씀을 드리니 착오가 없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은 온전히 공안, 공안(公案)에 대한 법문(法門)을 해 주셨습니다.

공안이라 하는 것은—공립(公立) · 관공서(官公署), · 공립학교(公立學校), 그것 '공(公)' 자입니다. 그리고 '안(案)' 자는 안건(案件)이라 해서—공안(公案), 공안을 화두(話頭)라 그럽니다마는.

어째서 공안이라 하냐 하면, 공(公)이란 말은 '관가(官家)'라 그 말입니다. 관청(官廳), 관법(官法). 관청에 법안(法案), 관청에서 직원들이 어떠한 사무를 볼 때에,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그 법(法)에 의존해서 모든 사무를 처리하게 됩니다. 그 관청(官廳)에 법(法)과 같은 것이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해 나가자면 이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야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깨달랐는가 바로 깨닫지 못했는가를 점검(點檢)해 보려면 이 공안을 갖다가 들여대 가지고 그 공안에 대한 답(答)을 하는 것을 보면은 그 사람이 어떠한 경지(境地)에 도달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관청에서 어떠한 일을 처리했을 때에 그 일이 바로 되었나, 잘못 처리했는가를 보려면은 그 법률에 비추어서 제 몇 조 몇 항에 비추어서 '이것은 타당(妥當)하다' '이것은 부정(不正)이다' 그것을 아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 문헌(文獻)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나 됩니다. 하물며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까지 하면 수없이 많은 공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육법(六法)이 있고, 육법은 이미 성문화(成文化)—글로 된, 글로 표시된 법률은 성문, 성문화된 것을 보통 말합니다마는, 불문율(不文律)이라 해서 책에는 육법전서(六法全書)에는 올라 있지 안 해도 우리는 모두가 지켜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법률에, 법률(法律) 조항(條項)에 오르지 않다고 해서 그 밖에 일은 우리가 어떠한 일이라도 마구잽이 해도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영국 같은 데는 헌법(憲法)이 아주 몇백 년 전부터서 불문율로 되어 내려오는 법률이 참 많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불문율로 되어 있어도 워낙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실천한 지가 오래고, 민도(民度)가 높아서 모두가 다 법률을 잘 지켜 가지고, 온 백성에 질서가 유지되어 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문헌에 오른 천칠백 공안 외에도 수없이 많은 공안이 있어서 눈 밝은 대종사(大宗師)는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법(法)을 갖다가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말로써 설할 수 없는 최고에 법을 자유자재로 쓰시고, 또 그 법으로써 학자(學者), 모든 도(道)를 배우려는 수행자들을 눈을 뜨게 하고 경책(警策)을 하고 또 점검(點檢)을 해서 그렇게 교화(敎化)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안은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그 공안(公案)의 원리(原理)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높고 경전을,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해설을 한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공안의 도리(道理)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연구한 모든 이론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 공안을 분별(分別)을 하고, 천착(穿鑿)을 하고, 분석(分析)을 한다 하더라도 이 공안의 참뜻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질수록에 참 진리(眞理)로부터서는 멀어가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심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또는 '마조(馬祖)에 원상(圓相)'이라든지, 또는 서산(西山) 스님의 게송 가운데에 나오는 '어생일각(魚生一角)', 어생일각이라든지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세계불교도대회(世界佛敎徒大會)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그 불교도대회에 참석한 세계에 불교 지도자들에게 이 공안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세계 각국에 저명한 승려 · 거사(居士) · 불교학자(佛敎學者)들이 참석을 했지만 아무도 이 공안에 대해서 답을 한 사람이 없었고, 오직 말레이지아(Malaysia) 승정(僧正) 한 분이 '무답(無答)이 시답(是答)이다, 대답 없는 것이 이 답이다' 이렇게 글자 넉 자를 써 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 능히 이 공안(公案)에 대해서 답(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답을 안 했는지, 참으로 아지를 못해서 답을 안 했는지, 그것은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마는, 이 공안은 정말 깨닫지 못했다면 이르려고 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따져 갖고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척! 이 공안을 접(接)했을 때 바로 이를 수 없으면 다못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어떠한 공안을 큰 스님네로부터 물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되지 못한 소리를 이를 까닭도 없는 것이고, 다른 고인(古人)들이 답(答)한 흉내를 낸다든지, 어떠한 행동으로써 옛날 스님네가 한 흉을 내서 보인다든지, 이러한 것은 도저히 용납(容納)될 수 없는 대죄(大罪)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처음~21분25초)

 

 

 

 

(2/4)----------------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지금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의 분상(分上)으로서는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일으킬 따름인 것이고,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단을 일으킬 따름인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괴밥을,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한 공안(公案)에 대해서 일부러 의리(義理)로 따져서 설파(說破)를 해 주셨습니다.

따질 수 있는 것이고, 또 따져서 이해가 안 가는 데까지만 말씀을 하셨고, 설사 의리(義理)로 따져서 그 부분에 대해서 설파를 해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해(害)를 입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해 주신 걸로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 혹, 「쥐는 바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사니까 쥐는 바로 고양이 밥이다. 그런데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것은 '쥐가 쥐를 먹었다'는 말이다. 중생이 번뇌 망상 분별심(分別心)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생인데, 그 중생인 '나'가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졌으니까, 바로 번뇌(煩惱)가 번뇌를 다 잡아먹고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사람과 경계(境界)가 다 몰록 공(空)한 것이고 산이 다하고 물이 다했다는 그런 경계다」

이렇게 그런 식으로, 혹 다른 공안을 접했을 때에도 그러한 식으로 공안을 분석해서 알아맞추려는 그러한 생각을 낸다면, 이것은 조실 스님의 참뜻을 바로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삼근(麻三斤)이다'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가 무엇이냐?'

'마삼근(麻三斤)이다' 이렇게 대답했으니,

 

'불법(佛法)은 이 우주법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진신체(眞身體)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돌맹이도 비로자나불이요, 산도 비로자나불이요, 흘러가는 물도 비로자나불이요, 거지도 비로자나불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삼[麻]도, 삼 뭉탱이도 그것도 비로자나불이다. 그러니 그 마삼근(麻三斤)이라는 게 그것이 아니냐'

 

이러한 식으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자기도 '한소식 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그러한 사람은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한 죄(罪)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쏜살같이 떨어져 들어갈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공안은 절대로 그러한 의리(義理) · 분별심(分別心) · 이론(理論)으로 따져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안(公案)은 그렇게 따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대답하니까,

'미지(未知)하니 갱도(更道)하라. 틀렸으니 다시 일러라'

 

다시 대답하기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옳다, 옳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셨던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한 데에 대해서 인가를 아니하고, '밥그릇은 이미 깨졌다'고 대답한 데에 인가를 했습니다.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의리로 따져볼 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는데 무슨 밥그릇이 깨졌나?' '밥그릇이 깨졌다'고 하는 대목에 가서는 우리는 아무리 분별심으로 따져 보려고 해도 거기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가 받지도 못할 것을 따져 보면 무슨 소용이 있어? 따져서 공안을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바른 공부에 노선(路線)을 버리고 그릇된 데에 빠져서 허매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차라리 아니헐지언정—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무슨 경(經)이나 읽고 그럴지언정, 참선(參禪)을 한다고 할진대에는 결단코 분별심으로, 의리(義理)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삿된 그릇된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해 주시기 위해서 조실 스님께서는 '반기이파(飯器已破)'의 공안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거듭거듭 강조를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내가 해야 하고, 오직 내 공부는 내 자신이 함으로써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는 것이니 만큼, 남 봄에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것을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도 무슨 공부를 해서 한소식 했다고 하는 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전연(全然) 자기 일신상(一身上)의 문제일 따름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만이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고, 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교화(敎化)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철두철미(徹頭徹尾) 참되게 닦아서 참되게 깨닫지 않는 한은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아무리 학식(學識)이 높고, 아무리 언변(言辯)이 좋고, 아무리 많은 사람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남을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선전을 하고 과대 선전을 해 가지고 널리 사람에게 알려서, 그래 가지고 어떠한 효과를 또는 이익을 얻어낼 수가 있지만, 이 깨달음만은 자기가 참되게 깨닫고, 참되게 남[生]이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남이 따르고 남이 알아주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인(古人),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善知識)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기 전에는 스스로 조끔 공부를 해서 조끔 무슨 소견(所見)이 났다 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내가 조그만한 것을, 조그만한 무슨 경계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고,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인증(認證) 받기를 바래고 그러한 행위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위해서, 불법을 위해서 대단히 가련하고 불쌍한 신세(身世)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꽉 맥힌 바보와 같은 그러한 수행인(修行人)으로서 일생을 마칠지언정, 결정코 그러한 조그만한 경지를 가지고 만족함을 삼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거듭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경신년 여름 결제(結制)가 시작이 됩니다. 금년(今年)에 얼마나 또 더울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설사 아무리 덥다 하더라도 지옥에 화탕지옥(火湯地獄)보다는 덜 더울 것입니다. 화탕지옥에 더위라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내는 한에는 화탕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래도 여기는 이 남섬부주(南贍部洲), 여기가 아무리 덥다고 해도 화탕지옥에 백분의 일도, 천분의 일도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덥다고 해서 그럭저럭 지낼 분은 안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그 더우면 더운 그때를 향해서 오히려 더 분심(憤心)을 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서 하루하루를 정말 알차게 단속(團束)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옛날에 어떤 납자(衲子)가 산중(山中)에 토굴을 묵고 또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나물 캐는 부인이 해 저물게 들어왔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린 기억도 있습니다마는, 나물 캐는 부인이 와서 하루쯤만 자고 가자고 그럽니다. 자고 가자고 그래서 그걸 안 받을 수도 없고, 깊은 이 산중이라서—나물을 캐러 온 게 아니라 나무를 하러 왔다고 그럽니다. 나무를 하러 왔다가...

그래서 그 춥기는 하고 날은 저물고 그래서—도저히 더군다나 부인을 갖다가 한 방에서 자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렇다고 그냥 밖으로—거절할 수도 없고.

 

"그러면 여기서 오늘 저녁에 하룻밤 새고, 그리고 내일 날이 새거든 돌아가라"

그래 인자 부인을 앉혀 놓고 잘 수가 없어서 그냥 그 스님은 떠억 앉은 채, 그날 저녁을 앉은 채, '잘되었다, 부인 덕분에 하룻저녁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할 수밖에는 없다' 이래 가지고 떠억 정진하는데.

 

아! 부인 보고는, "아, 고달픈데 그리 좀 비끼라"고 그래도,

"스님이 안 주무시는데 어떻게 내가 자겠습니까? 나도 그냥 앉어서 밤을 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둘이 떠억 앉어서 정진(精進)하는데, 아! 그 이튿날 새벽부터서 눈개비가 내리더니 한 치 두 치 쌓여 가지고, 두 자 석 자 넉 자, 삽시간에 아! 눈이 질을 넘게 눈이 퍼붓었다 그 말이여.

아! 깊은 산중은 눈이 일찍 내리고 또 그 이듬해 늦게 또 그 까지 눈이 내리고 눈이 녹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 그 눈이 그렇게 기인한께 와 가지고, 아! 부인이 도저히 그 이튿날 가기로 했는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아! 스님, 그 앉어서 무슨 공부를, 앉어서 대강 오래 앉어 있으면 그것이 공부입니까?"

"아니요. 앉어서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따로 있다"고.

 

"그러면 나도 좀 가르켜 주십시오. 이렇게 눈이 와서 나도 가지도 못하고 그러니, 공부를 하면 어떻게 좋으냐?"고 이리저리 물어서,

"이 참선(參禪)을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그래 가지고 큰 도인(道人)이 되면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참, 생사(生死)에 윤회(輪廻)를 벗어난다" 그래 딱 하니, 그 스님이 아는 대로 잘 일러주고, '이 뭣고?' 그렇게 생각하라고 가리켜주니까.

 

"그러면 기왕이면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나도 스님 따라서 같이 하겠습니다. 근데 그렇게 가만히 어제저녁에 보니까 스님이 앉아서 밤낮 꾸벅꾸벅 조는데, 기왕이면 그게 조는 것은 공부가 아니고 안 졸고 성성(惺惺)하게 해야 한다고 할진대는, 그러면 스님이 졸면 내가 죽비(竹篦)로 스님 머리빡을 때리고 또 스님이 졸면 내가 때리고, 내가 졸면 스님이 나를 때려서 잠을 깨우게 그렇게 약속을 하고 공부를 합시다"

아! 그것, 같잔허게 보살이 죽비로 때린 것을 맞은 것도 챙피하고, 그거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그럼 한 번 그렇게 해 보자"고.

 

그래서 그 스님은 정신을 바짝 채려 가지고 '어쨌든지 이 보살한테 안 맞아야겄다' 이리 생각하고 죽비를 가운데다 떠억 놔 놓고는 마주앉아서 참선을 하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이 보살이 잘 조는지 꺼떡하면 탁! 쳐 버리면 그냥 번쩍 눈을 뜨고 또 하고 하고, 며칠날은 보살이 아주 그냥 맡어 놓고 죽비를 맞더니,

한 일주일이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보살이 잘 잠을 안 자는데, 이 스님은 긴장이 좀 풀렸던지 아! 영 졸다가 한 대 터지면 번쩍 눈을 뜨고, 불과 10분도 안 되면 또 졸다가 얻어맞고 해서, 한 철 내 어떻게 뚜드러 맞았던지 이마빡에 아주 혹이 아주 수십 개가 솟아나 가지고, 아니 인자는 뭐 챙피한 것도 뭣도 없고.

 

그렇게 하다가 한 달이 지내고 두 달이 지내고 석 달이 지내고, 그 산중은 늦게까지 눈이 녹질 안 해서 넉 달 동안을 뚜드러 맞으면서 정진을 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 보살이 법문(法門)을 하는데, 그 법문 한마디에 눈을 번쩍 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다. 하고서, 일어서서 그 보살한테 절을 하고서 말을 하려고 하니까, 얼굴을 들어보니까 보살이 간 곳이 없어졌다 그 말이여.

그 보살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그 스님이 그 계행(戒行)이 청정(淸淨)하고 생사(生死)를 바치고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을 갖다가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문수보살이 떠억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로 변장을, 화현(化現)으로 나타나 가지고 와서 그 한 해 겨울을 그렇게 경책(警策)을 하고 법문을 해 주셨다 이 말이여.

 

금년 여름에 우리 세등선원에서 40여 명이 모여서 정진을 하는데, 모두가 전국 각 사찰에서 대신심(大信心)을 낸 발심(發心)을 한 납자(衲子)들이 아주 이를 악물고 정진(精進)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지난 겨울철, 또 그 지난 여름철, 철철이 세등선원이 창설(創設)이 된 이후로 철을 거듭할수록 모다 발심한 비구니(比丘尼) 수좌(首座)님네들이 모여서 밤을 패가면서 이렇게 정진들을 하고 있어서, 참 이 세등선원을 창설한 원장(院長) 스님, 세등 스님은 몸은 이렇게 너무 과로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몸은 불편하지만, 다 이렇게 전국에서 좋은 수행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그것을 하나의 유일한 기쁨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외호(外護)를 잘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승이 출가해 가지고 30여 년 동안 경험을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어느 선방(禪房) 어느 회상(會上)을 가도 반드시 그 회상에는 그 대중에, 대중(大衆)을 소란케도 한다든지 신경을 쓰게 한다든지 그래 가지고 꼭 그 말썽을 부리는 괴각(乖角)이 하나둘 씩은 꼭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오면 그 사람이 뵈기 싫어서 방부(房付)를 안 들이고 가 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 괴각(乖角)이 어느 선방에 간다 하면은, '아이구, 나 거기 안 간다'고 그래 가지고 안 와 버리고 딴 데로 간 사람도 있고, 때로는 그 괴각 바람에 중간에 도망간 사람이 있고, 중간에 전 대중이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선방을 아주 문을 닫아 버리는 그런 데도 있었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 세등선원에 다행히 아까 그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와 같은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이 혹(或) 이 철에 우리 선원에도 와서 계셨으면' 내 속으로 그걸 지금 간절히 지금 축원(祝願)을 하고 있는데, 어디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고 어디 무슨 도민증(道民證)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던지, 신분증이 있으면 대번에 그 사무실에도 알텐데, 그런 것이 없고 그냥 아주 그 전혀 표가 없이 오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 스님이, 아까 산중에서 토굴에서 공부하던 스님이 발심해서 공부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안 했다면, 하나의 평범(平凡)한 나무하러 오는 아주머니에 지내지 안 했을 것이고, 또 그러한 보살화현이 와 주실 까닭도 없었을 것입니다.(21분26초~43분4초)

 

 

 

 

(3/4)----------------

 

우리 이 세등선원에 다행히 이 대중이 그렇게 정진을 하기 위해서 이를 갈아붙이고 '죽을 사(死)' 자를 갖다가 이마빡에 써 붙이고 가행정진 용맹정진한 대발심(大發心)한 납자(衲子)가 계신다면, 반드시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이 우리 대중 가운데에 숨어서 지금 계시지 않을란가, 반드시 그런 분이 와 주실 것이다 하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 보살화현으로 와 가지고, 꼭 그 아까 그 나물 캐러온 아주머니,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처럼 꼭 그러한 형태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듣기 싫은 소리를 얼마든지 해서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고, 괴각(乖角)을 부려 가지고 대중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계속 어떤 시비(是非)를 일으켜 가지고 옆에 사람하고 싸움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고, 자기가 이 대중에 규칙을 잘 지키지 아니하고 밤낮 대중을 갖다가 소란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거야 형태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다못 대중 각자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돈발(頓發)해 가지고 정말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할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괴각이 고대로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 줄 것이고, 발심을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공부 대중을 소란케 하는 하나의 마구니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똑같은 보살화현을, 발심한 사람은 보살화현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발심하지 못한 사람은 보살화현도 마구니의 종자(種子)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 대중들은 모두가 철저히 발심을 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여기에 공부하러 온 분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중 가운데에 보살화현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 생각 한 생각, 일 초 일 초...(녹음 끊김)

 

이 몸을 함부로 그럭저럭 보내다가 죽음의 문을 맞이하겠습니까?

부디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이 몸으로 대도(大道)를 성취(成就)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도, 설사 이 선방에서 결제를 아니하셨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은 공부를 안 하고 그럭저럭 지내도 된다고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세속(世俗)에 살면서 좀 더 잘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다 보면 본의(本意) 아니게 많은 죄(罪)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전생(前生)에 숙연(宿緣)이 있어서 이러한 불법(佛法)을 만나시게 된 것입니다. 금생에 어쨌든지 정법(正法)을 믿고 몸은 비록 세속에 담겨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스님네보다도 더 이를 갈아붙이고 생활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내생(來生)에 정법을 만나고, 내생에는 보다 더 큰 복(福)과 큰 지혜(智慧)를 받아 타고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세속에서도 유족하게 살고 좋은 환경에서 사시고, 불법을 만나서 이렇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보시(布施)를 하셔서 이렇게 선원(禪院)이 잘 유지되어 가도록 뒷받침을 하시면서 동시에 또 여러분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어쨋든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은 아무리 그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내생에 한푼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라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한푼을 가지고 가지 못하고, 관 속에다가 칠보(七寶)를 갖다가 가뜩 채워서 가지고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가(靈駕)가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체와 더불어 묻혀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일생 동안에 지은, 그러한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모이는 동안에 본의 아니게 지은—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업(罪業)만을 한 짐 짊어지고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갈 따름인 것입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 가지고 보시(布施)를 하리라'

'돈을 많이 번다면 내가 선방을 하나 지으리라'

'돈을 많이 벌면 내가 법당을 내가 단독으로 지으리라'

'돈을 많이 벌면 내가 양로원을 하나 하리라'

 

돈 많이 벌 때를 기다려서, 그때를 기다려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성의(誠意)껏 하고,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성의껏 보시를 하고 희사(喜捨)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유경(百喩經)』에 보면 어떤 사람이 집에 염소를 길렀는데, 날마다 그 염소의 젖을 짜 가지고 식구대로 한 공기씩을 먹고 먹고 해서 아주 그 잘살고 있었는데, 앞으로 한 일주일 있으면 큰, 그날 무슨 생일잔치가 있어서 손님들이 많이 오게 되었어.

그래서 '그때 그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위해서는 지금 양을 날마다 짜 먹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짜 먹지 말고 그동안 저장을, 염소 뱃속에다가 저장을 시키자' 그래 가지고 젖을 짜지 않고 며칠 동안을 그렇게 놔뒀습니다.

 

그래 가지고 손님이 온 날, 그날 새벽같이 큰 그릇을 준비를 해 가지고 아무리 젖을 주물러도 젖이 삘삘 쪼끔 나오다가 나오지는 않고, 염생이는 죽는다고 아프다고 펄쩍펄쩍 뛰고,

"아! 어떻게 젖을 짜 가지고 그렇게 젖은 안 나오고 염소가 죽을라고 하냐? 저리 지내라. 내가 짠다" 아버지가 달라들어서 되게 갖다가 주물러 짜도 나오질 안 해.

 

"아니 무슨 젖을 그렇게 짜느냐"고. 엄마가 달라들어서 짜도 나오지 않고, 식구대로 달라들어서 힘을 들여서 쥐어 짜는데 젖이 벌게져 갖고 나중엔 피만 삐죽삐죽 나오는데, 젖은 한 방울도 안 나온다 이 말씀이여.

젖이라 하는 것은 짤수록 매일 적당하게 짜 주어야 젖이 계속 나오는 것이지, 젖을 안 짜면 잔뜩 불었다가 결국은 밭아 버린 것입니다.

애기에게 젖을 먹여 봐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매일 매일 젖을 빨려야 그 젖이 적당히 불어서 잘 나오지, 젖을 안 먹이면 하루 이틀은 터지도록 불어 가지고 아프다가 나중에는 결국은 그 젖은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산도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성의(誠意)를 다해서 보시(布施)를 해야, 그래야 또 돈이 또 벌려서 사업도 잘되고 계속 또 재산이 윤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여. 지금은 한참 지금 장사를 한다, 무슨 사업을 하기 위해서 돈이 아쉬워서 빚을 내다 쓸 판인데, 단 한푼이라도 애껴야지 무슨 희사(喜捨)를 하고 보시를 하느냐. 거지에게도 못 주고 양로원 · 고아원 · 형무소 어림도 없다. 또 군인에게 위문 어림도 없다. 내 자신 들일 것도 없는데 어떻게 주느냐. 더군다나 절에 안 된다. 나중에 많이 벌어 가지고 하리라'

그러다 보면은 늙어 버리고, 그러다 보면 별로 사업도 별로 보잘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생기는 대로 먹고살고, 그 가운데에도 조끔씩 거기서 마련을 해서 성의껏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께도 보시를 하고, 스님네에도 보시를 하고, 양로원이나 고아원이나 또는 형무소, 또 그 우리의 아들딸들이 나라를 위해서 가서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에게도 겨울 철철이, 여름 더울 때, 명절에 모다 모두 정성을 모여서 희사(喜捨)를 하고.

이렇게 하면 자기가 천석꾼이 할 만한 복을 진 사람은 보시를 해도 천석꾼이고, 아무리 피가 나게 애껴도 천석꾼을 넘지를 못하고 결국은 천석꾼 받을 만큼 복 받으면 다 내 몸으로부터서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천석꾼 할 만큼 복(福)을 지어서 천석꾼을 하게 된 사람이, '금생에 그 돈이 전부가 자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 진리(眞理)가, 천주교(天主敎)나 유교(儒敎)의 말을 빌리면 '하느님이 자기에게 임시 맽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어쨌든지 나와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적당히 쓰지만, 그리고서도 이것은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또는 삼보(三寶)에 보시를 적당히 하고 이런 사람은 천석꾼이 복(福)을 누리면서 동시(同時)에 앞으로 복을 더 받을 수 있는 복(福)의 씨를 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福)을 받기만 하고, 전생에 쌓은 복을 금생에 받기만 하고 새로 복(福)을 심지 아니한 사람은 그 복이 다해 버리면 금생에 가난뱅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손 대에, 자손(子孫) 앞에 넘겨준다 하더라도 머지않아서 그 복이 바닥이 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금생에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복을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복을 심고, 넉넉한 사람은 넉넉한 대로 복을 심어야, 또 그 심은 복의 씨가 싹이 트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자가 보시(布施)를 아니하고 그렇게 해서 복을 짓지 아니한 사람은 당대(當代)에 망(亡)한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갖다가 자기 혼자만 쓰지 아니하고 온 마을 사람, 이웃, 불쌍한 사람, 거지, 절, 돈 없어서 공부 못한 사람, 또 사회 복지시설 그런 기관, 그런 데다가 막 풀어서 쓴 사람은 9대를, 만석꾼이로 9대를 내려간 사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대전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만석꾼이는 절대로 당대(當代)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석꾼이가 9대(代)를 내려간 사람이 있어. 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망하지 아니할 텐데 토지개혁으로 말미암아서, 자유당 때 토지개혁으로 만나서 그 논을 갖다가 다 뺏겼습니다.

그래서 어려워졌지, 그러지만 안 했으면 그 만석꾼이가 계속 그 선조(先祖)에 유언(遺言)을 따라서 그렇게 보시를 하면서 살았다면은 9대뿐만이 아니라 90대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는 나무지가 아니라 복의 씨를 심는 것이 되는 것이여.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요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니라

나무~아미타불~

 

백 년 동안 재물을, 불같은 욕심으로 재물(財物)을 탐(貪)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띠끌에 지내지 못하고, 3일 동안 발심(發心)을 해서 이 세상 인생(人生)이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3일 동안 도(道)를 닦은 것은 천년(千年)에 보배가 되는 것이다.

 

부디 금년 한 철 석 달을, '석 달 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 '오늘 하루 결제(結制)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 하루를 알뜰히 정진(精進)을 하고, 그리고 그날 저녁에 떠억 자리에 누워서, '내가 과연 오늘 하루를 얼마만큼 알뜰히 공부를 했는가?' 따악 하루를 간단하게 한번 점검(點檢)을 하고,

또 '그 이튿날,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알뜰히 공부를 해야겄다. 오늘은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가지고 시비(是非)를 했지. 오늘은 공연히 부질없이 오늘은 하루가 지내갔구나. 내일은 더 알뜰히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하루저녁을 하루를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 떠억 일어나서 '오늘 하루는 더 열심히 해야겄다'고 딱! 한 생각 각오를 하고서 하루 정진을 하고. 그날 저녁에 또 그날 하루 자기가 어떻게 공부를 했나. '이웃 사람과 잡담(雜談)을 하지 안 했나?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가지고 옆에 사람 신경을 건드리지 안 했나?'

 

참을성 없고 잡담하기 좋아하고 시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음 인자 되았어.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나를 문수보살로 생각해 줄 테니까' 이리 생각하고, 시비와 잡담으로 대중에 괴각(乖角)을 부린 사람은 진짜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문수보살이 아닌 사람이 공연히 문수보살인 척하고 대중에 시비를 일으키고 했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지옥에 갈 것은 분명할 것이여.

부디 열심히 공부를 하고 금년 한 철이 출가(出家)한 목적(目的)을 달성하는 그러한 중대한 한 철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입재(入齋) 결제일(結制日)인 만큼 처음으로 선방(禪房)에 나온 분, 또 처음으로 이 참선(參禪)을 앞으로 해 보고자 한 그러한 분들을 위해서 간략히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점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呼吸)'을 바르게 할 것이며, 셋째는 '생각'을 바르게 해.

 

자세와 호흡과 그리고 생각,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잘 알고 참선(參禪)을 해야지 이걸 잘 모르고 하면, 자기 딴은 애를 써서 한다는 것이 까딱하면 몸에 병이 생기기도 하고, 까딱하면은 정신이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사도(邪道)에 빠지게 되어 가지고, 본의 아니게 '참선을 하다가 그 사람은 잘못되었다. 그 참선이란 건 대단히 몹쓸 것이다' 그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많은 사람을 참선을 못 하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여.(43분5초~62분24초)

 

 

 

 

(4/4)----------------

 

자세(姿勢)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면 가부좌(跏趺坐).

가부좌는 처음에 오른다리를 꼬부리고 그 위에 왼다리를 딱 올려놔. 왼다리를 오른다리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그다음에 오른발을 갖다가 다시 들어서 왼 무릎 위에다가 이렇게 꼬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가부좌인데, 이렇게 안 앉아 버릇한 사람은 다리가 그 5분도 못 가서 다리가 저리고 아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가부좌. 왼발 하나만 오른 무릎 위에다 이렇게 올려놓는 것이여. 이렇게 딱 앉아서 하되, 이렇게 해도 다리가 저리면 또 그 왼다리는 내려놓고 오른다리를 갖다가 왼쪽 무릎 위에다가 이렇게 올려놓아도 됩니다.

 

그렇게 하고, 손은 그 올려놓은 복사뼈 위에다가 딱 오른손을 갖다가 오른손을 손바닥을 위로 해서 딱 올려놓고, 그 위에다가 왼손을 갖다가 이렇게 해서 딱 포갭니다. 포개서 놓고서 엄지손을, 엄지손 끝에 배를 서로 이렇게 맞대는 것입니다.

맞대되 이 (엄지)손이 너무 되게 눌러서 이렇게 위로 솟구쳐 올라도 안 되고, 또 이렇게 삐뚤어지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동그스름하니 보기 좋게 이렇게, 떨어지지도 말고 너무 되게 붙이지도 말고 아주 가볍게 이렇게, 이렇게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고.

 

고개는, 자세는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니 앉았다 하고 참선을 잘한 척하고 투기로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크게 잘못한 것이어요. 단정하게, 두 귀가 어깨 위에 놓이도록.

 

코끝은,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과 코가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조끔 앞으로 기울어도 수직이 아니고, 뒤로 자지바지해도 안 되고, 좌우로 이렇게 기울어져도 안 되고, 단정하게 하면서도 조끔도 전후좌우(前後左右)에 기울어지지 않고, 그러면서도 어깨에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어깨에다 힘을 이렇게 주면 안 되는 거여.

어깨에 힘을 다 빼고, 목에 힘도 다 빼고, 팔에 힘도 다 빼고, 전신(全身)에 힘은 다 빼는 것입니다. 다 빼되 아주 단정(端正)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되,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만 아주 가볍게 지그시 그렇게 힘을 배꼽 밑에 단전에다 힘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다 미어터지도록 거기다가 용을 써 힘을 주는 것이 아니어요. 아주 힘을 주는 둥 마는 둥 하게 가볍게 힘을 줘.

 

이렇게 하고서, 좌우로 이렇게 서너 번 흔들어요.

서너 번 이렇게 궁뎅이가 뜰썩뜰썩하도록 요렇게 해 가지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정도에 가서 저절로 한 중심(中心)에 가서 딱 안정(安定)이 되도록. 그것은 궁뎅이 밑에 옷 같은 것이 혹 요렇게 구겨진 채 이렇게 있는 수가 있고 그래서, 너댓 번 이렇게 흔들흔들하면 옷이 싹 펴지도록.

옷 그렇게 해서, 그러면서 저절로 딱 하면 전후좌우에 기울어짐이 없이 딱! 중심이 요렇게 딱 잽히도록.

 

그리고 턱은, 너무 요렇게 하지도 말고, 앞으로 빼서도 안 되고, 단정하게 딱! 이렇게 붙이고.

 

이는, 저 아금니부터서 지그시 물어요. 너무 콱 다물어서도 안 되고, 이가 이렇게 떨어져서도 안 되고, 지그시 아금니부터서 이렇게 문다 말이여.

 

혀는 위로 꼬부려서,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 안에다 갖다 딱 갖다 대.

될 수 있으면 꼬부려서 저 안에다 갖다 대. 대고.

 

눈은, 감아서는 아니 되어요. 그렇다고 눈을 뚝 부릅떠서도 안 되고, 평상(平常)으로 눈을 떠서 평지에 약, 거기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 약 3m 지점에다가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한 점(點)을 갖다가 주시(注視)하거나 응시(凝視)해서는 안 되고.

어떤 사람은 참선 할 때 콩알을 갖다가 떠억 3m 에다 갖다 놓고 계속 그것을 들여다보는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봤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3m 지점에다 떨구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본 바가 없이 그저 평상으로 떠억 뜨고서,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하는데, '호흡(呼吸)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냐?' 하면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한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는 시간이 3초, 머무는 시간이 3초, 내쉬는 시간이 약 5초 가량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한 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는, 한 번 하는 시간이 약 10초나 11초 이렇게 되도록.

 

들어마실 때에 코로 쑤욱 들어마시지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저 뒤에서 쭈우욱 이렇게 들어마셔 가지고,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 배꼽 밑에, 아랫배에 가서 이렇게 담기도록.

 

다 들어마셨으면 3초 동안을 딱 정지를 했다가, 내쉴 때 물론 코로 내쉬지만 우리의 생각으로는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 말고, 또 쑤욱 배를 차츰차츰 차츰차츰 뒤로 잡아당기면서 '그 호흡을 저 뒤에로 쭈욱 밀어버린다' 이러한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또 다 내쉬었으면 그때 배가 홀쪽해져 갖고 있을 테죠? 또 쑤욱 들어마시되 저 뒤에서 들어마시거든.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셔.

 

근데 주의할 것은, 볼록하게 들어마시라니까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는 사람이 있어 가지고 얼굴이 벌게져 가지고 한 번 두 번 하고는, "숨이 가뻐서 못 하겄다" 그래 가지고는 "후~ 이렇게 쉬어 갖고 다시 해야 하니 이렇게 해도 되냐?"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들어마실 때 100프로(%)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팔부(80%)쯤만 들어마십니다.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만 팔부쯤만 들어마셨다가 3초 정지했다가 내쉬는데, 내쉴 때도 아주 등어리가 완전히 배가 등어리에 붙도록 다 내쉬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은 숨이 가뻐서 안 되어요.

팔부, 다시 또 더 내쉴 수 있지만 팔부(80%)쯤만 내쉬는 거여.

 

팔부(八部)쯤만 내쉬고서 또 스르르 들어마셔. 팔부쯤만 또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에는 내쉬는 시간이 약 5초니까—들어마시는 시간은 그냥 수르르~ 하니 부담 없이 들어마시는데 약 3초가 걸려요. 내쉴 때는 의식적으로 조끔 애끼면서 조용하게 천천히 내쉬어 보라 그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 하는 것이여.

 

 

<준비호흡>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를 말고, 처음에 본(本) 단전호흡 들어가기 전에 준비호흡이 있습니다.

준비호흡은 어떻게 하냐? 하면, 숨을 가뜩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을 요렇게 위로 들어올리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셔 가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았다가, 입으로 '후~~' 이렇게 내쉬는 거야.

'후~~' 하고 이렇게 내쉬어. 다 내쉬되 가슴을 약간 이렇게 홀쪽하게 하는 듯하면서 다 쥐어짜면서 이렇게 내쉬는 거여. 다 내쉬어요. 이건 100프로(%) 다 내쉬는 거여.

 

다 내쉰 다음에 또 한 번 100프로(%) 들어마셔. 들어마셔 가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후~~' 이렇게 내쉬는 거여.

이렇게 두 번 또는 세 번을 이렇게 하는 것, 이것을 '준비호흡'이라 해서 허파 속에 가뜩—허파가 이 어깨 위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가슴에 요렇게 딱 있는데, 숨을 조끔 들어마셨다 내쉬고 조끔 들어마셨다 내쉬면 허파 가운데 부분만이 호흡이 이렇게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고,

지끔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가뜩 어깨를 들면서 이렇게 가뜩 들어마셨다가 다 내쉬면 허파의 구석구석까지, 허파의 그 뾰족한 부분까지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공기가 들어갔다가 완전히 허파 속을 소지[掃除]를 해 가지고 깨끗이 요렇게 소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한 다음에 허파 소지를 해 놓고서 떠억 정식으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야 호흡이 제대로 되고 아주 그 공부 잘되는 것입니다.

 

이 준비호흡을 하지 않고서 처음부터서 단전호흡을 하면, 얼마 안 가서 여기가 답답해지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여기가, 가슴이 앞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반드시 언제라도 딱 앉어서 좌선(坐禪)을 시작할 때는 준비호흡을 먼저 하고서 단전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 단전호흡은 참선을 하지 아니한 사람도 항시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 혈액순환이 잘되어서 몸안에 있는 모든 노폐물을 바로바로 배출을 시키기 때문에 피가 맑아지고, 피가 맑아짐으로 인해서 몸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몸만 건강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안정이 되고 깨끗해져서, 자연히 그 사람은 도(道)를 닦을 수 있게, 도를 닦는데 가장 좋은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나, 관공서나 회사에 다니는 사람, 요새는 너무너무 피로가 겹쳐서 견디기가 어려울 만큼 그렇게 세상이 일이 많고 복잡해졌습니다.

이럴 때 이 단전호흡을 항시 하면 그때그때 피로를 해소하게 되기 때문에 학생도 공부를 더욱 잘하게 될 것이고, 일반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도 그날그날 피로를 그때그때 풀어버렸기 때문에 건강하게 그렇게 능률 있게 일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하면 혈압도 내려가게 되고, 모든 노이로제 현상도 예방하고 치료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고, 그래도 해 보면 또 의심이 나는 것이 있으면 또 물어보시고 해서 어쨌든지 이것을 열심히 하시기를 권장합니다.

 

특히 참선(參禪) 하는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이 단전호흡을 잘 알아서 해야 상기병, 선객(禪客)에 있어서 사형언도나 마찬가지인 그 상기병(上氣病)을 예방(豫防)을 하고 또 그러한 기운이 있는 사람도 치료(治療)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단전호흡(丹田呼吸) 밖에는 없습니다.

 

한번 상기병이 걸려 놓으면 약을 맞고 뜸을 뜨고 침을 아무리 맞어도 좀체 낫지를 않습니다마는, 이 단전호흡 하는 법을 알아 가지고 잘하면 백발백중(百發百中)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미리 이 법을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면 그런 상기병에 걸리지 아니하고, 소화도 잘되고, 혈액순환도 잘되고, 그래서 마음도 안정이 되고, 화두(話頭)도 잘 들리게 되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成就)하게 될 것입니다.

 

 

<화두 의심>

 

그다음에는 '생각을 어떻게 가져 나가느냐? 화두(話頭)를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 문제인 것이여. 이것이야말로 진짜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 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숨이 다 나갔으면 또 숨을 들어마시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두 시간 이내에는 이 단전호흡을 아니하는 것이 좋습니다. 밥에다 숭늉에다 국에다 가뜩 먹고서 배가 부른 데다가, 숨을 들어마시고 아랫배에다 숨을 밀어넣으면 위가 늘어나고 위하수 같은 그런 병(病)이 생기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시간 정도 되면, 밥이 다 삭아서 배가 꺼지니까 두 시간 뒤부터서 하고, 그렇다고 해서 두 시간 이내에는 낮잠이나 자고 공부를 아니해도 되냐 하면은 그게 아니고, 단전호흡만을 하지 말고 그냥 호흡을 보통 호흡(呼吸)으로, 그냥 예사 호흡으로 하면서 화두(話頭)는 역력(歷歷)히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할 것,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할 것,

셋째, 화두를 바르게 드는데, 호흡을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써억~ 들어마실 때에도 지금 '이 뭣고?~~' 한 끄터리가 지금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꼬리가 지금도 지금 계속 요렇게 나가고 있는 거여.

3초 머무를 때에 까지도 그 아까 들었던 그 화두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여운(餘韻)이 그때까지 오는 거여.

 

그래 가지고 새로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머무를 때까지 그 여운이 갔다가, 내쉴 때 또 '이 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그러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만 하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고,

나중에는 숨 한 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또 한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세 번 할 때까지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여운'이 있으면은 새로 안 해도 괜찮어요.

 

아침에 들었던 화두(話頭)가 점심 먹을 때까지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눈앞에 있으면은 자꾸 거기다가 '이 뭣고? 이 뭣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익숙해지면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때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때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 가운데에는 반드시 그런 경지를 맛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에까지, 저녁에 들었던 화두가 아침에 그 이튿날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 몸이 가볍고 편안하고, 그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하고 그 경계는 뭐라고 이게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 편안하고 좋구나'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화두(話頭)만이 독로(獨露)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 누가 이런 때 누가 툭!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었으면...'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 천길만길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에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이여.

공부가 잘되어 갈수록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오직 화두(話頭)만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團束)해 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좀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되고, 가슴이 미어지고 시간이 지루하기를 5분이 한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때가 있고 몸부림이 쳐질 때가 있지만, 조끔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를 말고 허리를 쭉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 것입니다.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는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하지만, 가만히 일어서서 나가서 포행(布行)을 한 5분 내지 10분을 하고 정신이 깨끗해지면 또 자리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그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는 참 그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해서 그런 것도 지혜 있게 도반(道伴)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남에게 피해(被害) 가는 것이 대중처소에서는 제일 조심(操心)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말 간절(懇切)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62분25초~1시간22분48초) (끝)

 

 

 

 

[법문 내용]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인천 용화사(龍華寺)나, 세등선원 조실(祖室)은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 공안(公案) 화두(話頭)의 뜻. 천칠백 공안. 공안은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그 공안(公案)의 원리(原理)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다.

 

반기이파(飯器已破) 공안 / 깨달음은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러야 / 산중 납자(衲子)의 수행을 위해 아주머니로 화현하신 문수보살(文殊菩薩).

 

발심(發心)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준다 / 백유경(百喩經)의 염소 젖 이야기 / 보시, 희사(喜捨)로 복(福)의 씨를 심어라 /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 하루 결제(結制) / 자세, 단전호흡, 화두 드는 법에 대한 자세한 법문.

 

 

주장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쳐서 그 소리를 여러분께 들려드렸습니다.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서 그 이상 더 법을 설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모가지가, 머리가 목 위에 하나가 있는데 다른 데서 목을 하나 갖다가 그 머리 위에다가 하나를 더 포개 놓은 거와 같을 것이고, 닭다리를 떼어 버리고 오리다리를 갖다가 이어서 짬매 놓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전강(田岡) 스님께서도 6년 전에 77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을 하셨지만, 우리는 전강 큰스님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생존해 계실 때와 똑같이 그렇게 분명하게, 성성(惺惺)하게 법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사 한마디 녹음을 해 놓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말씀도 생존시(生存時)에 육성(肉聲)을 들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오시고 가신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를 체달(體達)하신 스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실(祖室)로 모셔도, 모시고 생존해 계신 듯, 계신 것처럼 믿고 그 법(法)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스님을 조실로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해 나가자면 이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야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깨달랐는가 바로 깨닫지 못했는가를 점검(點檢)해 보려면 이 공안을 갖다가 들여대 가지고 그 공안에 대한 답(答)을 하는 것을 보면은 그 사람이 어떠한 경지(境地)에 도달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공안을 접(接)했을 때 바로 이를 수 없으면 다못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반기이파(飯器已破)'의 공안에 대한 법문.

 

우리는 고인(古人),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善知識)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기 전에는 스스로 조끔 공부를 해서 조끔 무슨 소견(所見)이 났다 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산중 납자(衲子)의 수행을 위해 아주머니로 화현하신 문수보살(文殊菩薩).

 

다못 대중 각자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돈발(頓發)해 가지고 정말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할 그러한 사람에게는 괴각(乖角)이 고대로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 줄 것이고, 발심을 못한 사람에게는 공부 대중을 소란케 하는 하나의 마구니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백유경(百喩經)』의 염소 젖 이야기

 

백 년 동안 재물을, 불같은 욕심으로 재물(財物)을 탐(貪)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띠끌에 지내지 못하고, 3일 동안 발심(發心)을 해서 이 세상 인생(人生)이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3일 동안 도(道)를 닦은 것은 천년(千年)에 보배가 되는 것이다.

 

부디 금년 한 철 석 달을, '석 달 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 '오늘 하루 결제(結制)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 하루를 알뜰히 정진(精進)을 하라.

 

참선의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상세히 말씀하심.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呼吸)'을 바르게 할 것이며, 셋째는 '생각'을 바르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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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20. 12. 29. 20:42

((No.314))—1986년(병인년) 동안거 결제(86.11.16) (71분)

(1/4) 약 19분. (2/4) 약 16분. (3/4) 약 20분. (4/4) 약 16분.

(1/4)----------------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헌디 뢰진풍치해악경(雷震風馳海岳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디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법왕권실(法王權實)이 영쌍행(令雙行)이여. 법왕(法王)에 권(權)과 실(實)이,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이 하여금 쌍(雙)으로 행(行)해. 권실(權實)을 다 갖추어서 행(行)하더라.

뢰진풍치해악경(雷震風馳海岳傾)이여. 법왕(法王)이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으로써 그 법령(法令)이 행(行)하면 번개가 우레가 치고 바람이 불어 가지고 바다가 뒤집어지고 태산이 무너지더라 그 말이여.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데, 벽력, 벼락이, 벼락치는 한 소리에 구름이 다 흩어져 버렸는데,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라. 집에 이르른 것이 원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고향에 도달하더라.


부처님께서 출현(出現)을 하셔 가지고 중생(衆生) 교화(敎化)를 하시는데,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실법(實法)만을 가지고는, 실상법(實相法), 실법만 가지고서는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법(權法), 방편법(方便法)을, 아주 좋은 방편법을 잘 쓰면서 그래 가지고 실법(實法)을 나투어야 그래야 중생 교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 없는 가운데에 교해(敎海), 교법(敎法)의 바다가 파도를 치고, 그 교해, 교법(敎法)의 바다 속을 향해서, 바로 그 속에서 말 없는 진리법(眞理法)을 나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은 부처님의 무언(無言) 가운데에, 말 없는 가운데에서 교법(敎法)을 설(說)하시고, 그 교법 설하신 그 속에서 무언(無言)의 진리를 보이신 도리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방편법(方便法)에 떨어져 가지고 부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그 실법(實法)을 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병인년(丙寅年) 동안거(冬安居) 결제일을 맞이해서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 법문을 경청(敬聽)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 법사(法師)스님이신 만공(滿空) 큰스님께 인가(印可)를 받으신 그 한 대문(大文)을 잠깐 들었습니다마는, 오늘 이 결제(結制)와 또 백일기도 입재(入齋)를 맞이해서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방부(房付)를 들이신 23명에 비구(比丘) 스님과 또 보살선방에 방부를 들인 108명, 그리고 용주사 중앙선원에 방부를 들이신 17명, 그리고 도봉산 원효사라든지 또 회룡사라든지 근처에 모다 비구니(比丘尼) 수좌(首座)들도 모다 참석을 했습니다.


한 철 동안 정진(精進)을 해 가는데, 언제나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 부처님의 법은 세법(世法)을,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을 여의고 참선(參禪)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생사법(生死法)을 여의고 진리법(眞理法)을 따로 찾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진리(眞理)가—진리 그 자체(自體)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용(用)으로써 발(發)한 것이 바로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요, 일월성진(日月星辰)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인 것입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그러한 신령스러운 묘체(妙體)가, 그것이 나타나면 바로 태양이요, 달이요, 그 무수한 별이요, 산이요 바다요, 나무요 돌이요, 일체 중생이요, 모든 짐승이며 그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전부 진리(眞理)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진리가 나타난 그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그림자 있는 곳에 그 반드시 실상(實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물의 그 본성(本性), 물의 본성은 바로 습성(濕性)인데, 그 물의 본성은 볼 수가 없으나 그 물의 본성이 때로는 액체(液體)가 되어서 흐르기도 하고, 바다에 잠기기도 하고, 호수에 잠기기도 하고, 시내로 흐르기도 하고, 폭포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영하로, 섭씨 영하로 내려가면은 고체(固體)가 되어서 얼음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백 도(度) 이상으로 끓으면은 그것이 기체(氣體)가 되어 가지고 수증기로써 증발을 하게 됩니다.


수증기로, 기체가 되어 가지고 있을 때도 그 물의 본성(本性)인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그것이 액체로써 물이 되어 가지고 흐르고 떨어지고 잠겨 있다 하더라도 그 물의 본성(本性)인 그 습성(濕性)에 있어서는 증감(增減)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서 꽁꽁 얼은 얼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 물의 습성(濕性)인 그 본성(本性)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짐승으로 태어났거나, 곤충으로 태어났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미생물로 태어났거나, 또는 복(福)을 지어서 천상(天上)에 태어났거나, 악(惡)을 행해 가지고 지옥(地獄)에 떨어졌거나, 이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실상(實相), 진리(眞理)의 체(體)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제(結制)를 해서 석 달 동안을 출입을 금(禁)하고 엄격한 법도(法度)하에서 이 안거(安居)를 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도리(道理)를 깨닫고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잠을 덜 자고,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하고자 한 말을 삼가하고, 나가고 싶은 데가 있어도 출입을 금(禁)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원해 가지고 엄격한 법도에 묶여서 석 달 동안을 마치 부모의 초상(初喪)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러한 경건한 마음으로 정진(精進)을 하고자 해서 오늘 이렇게 결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공부는 자기 스스로 자발적(自發的)으로 원해 가지고 되는 일이지, 남이 시켜서 강요해 가지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속(世俗)에 모든 공부는 하면 얻은 바가 있고, 노력을 하면 그 진취하는 결과가 자기 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고 또 남이 보아도 인증을 할 수가 있는데, 이 공부는 그러한 차례차례 계단을 밟아서 올라가 가지고, '나는 한 달 했으니까 이만큼 했다' '석 달 동안에는 이만큼 되었다' '이렇게 삼 년 동안 정진을 했으니까 나는 이만큼 얻은 바가 있다' 무슨 바둑이나, 태권도나 모다 그런 것은 급수(級數)가 있고 단(段)이 있어 가지고 얼마만큼 하면 그 자기의 자격증을 얻어서 누구든지 인증을 할 수가 있지마는, 이 참선(參禪)은 암만 해도 스스로 '나는 이만큼 했다' 한 얻은 바가 없어. 내보일 것도 없어.


물론 해제(解制)를 하면, 석 달 동안을 잘 지내면은 안거증(安居證)은 드리지만, 그것은 석 달 동안 여기서 잘 지냈다고 하는 증서(證書)지,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하는 그러한 자격증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얻은 바가 없고 다못 의심(疑心) 뿐인데, 거기에 어떠한 무슨 재미가 있느냐 그 말이여.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남에게 보일 것도 없고, 그러한 공부입니다.

그러한 공부를 자발적으로—편한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잘 먹는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뜨뜻한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오직 이 생사(生死) 문제, 자아를 깨닫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우리 스님네와 보살님네들이 이렇게 안거(安居), 결제(結制)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고 얻은 바가 없다'고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하루하루를, 또 한 시간 한 시간을, 또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하게 알뜰하게 다져 나가면, 맛없는 가운데에 맛이 있고, 아무 재미없는 가운데에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참, 이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재미'라고 하니까 무슨 세속에 어떠한 물질을 얻었을 때, 또는 명예나 권리를 얻었을 때, 누구한테 칭찬을 얻었을 때에 느끼는 그러한 재미가 아니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생 동안을 자기의 그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다 바치고서도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어도 원망이 없고 부러울 것도 없고 그러한 것입니다.


일생 동안을 이 참 독신(獨身)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누데기를 입고서 보잘것없는 그런 허술한, 초췌한 그런 모습을 가지고 걸망을 지고서 이렇게 선방(禪房)으로 다니지만, 이 세상에 천국(天國)도 부러울 것이 없고, 지옥(地獄)도 두려울 것이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선객(禪客)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함으로써 마침내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처음~18분54초)





(2/4)----------------


세속(世俗)에 모든 공부는 차츰차츰 한 걸음 한 걸음 단계적(段階的)으로 향상(向上)을 해 가지고 박사도 되고 모다 판사도 되고 하지만, 이 공부는 처음 출가(出家)할 때부터서 마지막 도(道)를 이룰 때까지 하는 일이 한결같이 그 한 생각을 돌이키고 또 한 생각을 돌이켜서 계속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계속 그 초점(焦點)을 여의지 아니하고 관(觀)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구(參究), 참선(參禪)인데.


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대의단(大疑團)이, 큰 의심덩어리, 가슴속에도 콱! 차고 이 나의 주변에도 콱! 차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뜩 그 의단(疑團)이, 의심덩어리가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봐도 그 의심(疑心)이요, 땅을 봐도 그 의심이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요,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의심이요, 썽이 나도 의심이요, 슬픔이 일어나도 의심이요,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다못 그 의심덩어리로 가뜩차 버려.


의심(疑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생각할 것이 없어. 보았다 하면 바로 그 의심이요, 귀에 무슨 소리 들렸다 하면은 동시에 의심이요,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그 생각 따라갈 겨를이 없어. 나는 바로 의심(疑心)이다 그 말이여.

이렇게 다구치고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갈 때에, 모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도 발붙일 곳이 없어. 일체 차별(差別)이 거기에서는 다 떨어져 버려. 미웁고 고운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그래서 결국은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의단(疑團)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그 의단이 독로(獨露)했을 때에 망상을,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버리려고 하고, 물리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하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의심이요, 똥을 눌 때도 의심이요, 포행(布行)을 할 때에도 의심이요, 법당(法堂)에 와서 부처님께 절을 할 때에도 그 의심이요, 옆에서 누가 말을 해도 나는 의심이요,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할 때의 그 마음 경계는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고 쇄락(灑落)하고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화두(話頭)를, 화두를 드는 것까지도 망각(忘却)하게 될 수가 있어. 그때에 나아가서 화두에 대한 의심을 놔 버리면 안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니까,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은 그곳에 따악 착(著)해 가지고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의관(疑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부러 힘을 써 가지고 '이뭣고!' 힘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아무 힘을 쓰지 아니하고 그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 의심(疑心)의 관(觀)이—관(觀)은 관만이 있어야지, 일부러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힘을 써서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러한, 그렇게 이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려고 애를 써도 들 때뿐이지 금방 딴생각이 오고 그러지만, 그 딴생각 났다고 해서 신경질을 내고, '하이고, 이놈의 공부가 언제나 될 것인고? 내가 아마도 이 참선법에, 참선(參禪)에 인연(因緣)이 없은가? 업(業)이 두터워서 그런가?' 이 생각 저 생각해서 짜증을 내고 그래선 아니된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일어난 대로 놔두어 버리고 나는 화두(話頭)만을 터억 들거든. '이 뭣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또 화두(話頭)를 들고, 번뇌(煩惱)가 일어나면 나는 화두(話頭)만을 들거든. 화두만을 들어요. 들면은 망상은 저절로 자최가 없어지는 것이거든. 화두를 들어도 그 망상이 안 없어지면 또 화두를 드는 것뿐이지, 망상이 안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떠억 챙겨. 숨을 터억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그것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했을 때 그 여운(餘韻)으로 남은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이여.


'이 뭣고?' 자꾸 챙기라고 하니까—뭣헌 분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를 뭐 한 시간에 이천 번을 했느니 삼천 번 했느니—그 횟수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은 그 하루에 오만 번이나 또는 십만 번 이렇게 염주(念珠)를 가지고 세면서 하루에 일과를 정해 놓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이 화두는 그런 횟수를 많이 하고 작게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가끔 가끔 챙길 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을 때에는 '알 수 없는 의심'만을 터억 관(觀)해야지,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뭣고 이뭣고' 자꾸 그렇게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그 의심이 없어졌을 때나, 또는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 그때 화두를 한 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疑心)만을 묵묵히 관(觀)하는 거여. 그래서 그것을 '의관(疑觀)'이라 그래요. 의심(疑心)의 관(觀)이다. 알 수 없어.


'아하 이것이로구나' 그런, 그 그런 생각이 있으면 안 돼.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지는 것이 있고, 떠억 요렇게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으면 아니 된 것입니다.



오욕해자갈(五欲海自渴)이요  아인산자도(我人山自倒)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음낙처운자산(圓音落處雲自散)하면  부증대보변환가(不曾擡步便還家)니라

나무~아미타불~


오욕해자갈(五欲海自渴)이요  아인산자도(我人山自倒).

이렇게 정진(精進)을 알뜰히 짬지게 해 나가면 거기에 무슨 오욕(五欲)이 일어날 것인가? 무슨 탐심(貪心)이 있으며 무슨 진심(瞋心)이 있어?

탐심이 없으면은 오욕(五欲)은 거기에서 오욕의 바다는 말라 버리는 것이고, 진심이 없으면 아인(我人)의—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그 아인(我人), 인아상(人我相), 인아(人我)에 그 높은 산(山)이 스스로 넘어져 버린 것이다.


석 달 동안을 스님네나 이 보살님네들이 이렇게 결제(結制)를 하시는데, 중간에 어떠한 장애(障礙)가 일어나는 것은 그 오욕(五欲)의 바다에 파도가 치고, 아인(我人)의 산이 우쭐대기 때문에 거기에서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욕의 근본인 그 탐심이 없어. 화두(話頭)를 들고 그 열심히 정진을 해 나가는데 무슨 탐심(貪心)이 거기에 있으며, 무슨 거기에 진심(瞋心)이 일어날 것이냐 그 말이여.


한 사람 한사람이 정말 이 일대사(一大事)를 향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가면, 거기에는 불평불만도 있을 것이 없고, 니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뭣이 좋고 나쁘고 한 일체 시비(是非)가 거기에 붙들 못하는 것입니다.

시비(是非)가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발동(發動)을 한 것이고, 모든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무명(無明)에 그 탐심(貪心)을 안고 살기 때문에 그런 시비와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음낙처운자산(圓音落處雲自散)이요. 원음(圓音) 떨어진 곳에 구름이 스스로 흩어져 버리면,

원음(圓音)은, 아까 부처님께서 무언(無言) 속에 한량없는 법문의 바다에 파도가 치고, 그 부처님의 끝없는 설법 교해(敎海) 속에 말 없는 진리가 드러난 도리, 바로 그것이 부처님에 원음(圓音)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원음은, 보살(菩薩)이 들으면은 보살도(菩薩道)요, 연각(緣覺)이 들으면은 인연법(因緣法)이요, 성문(聲聞)이 들으면은 사제법(四諦法)이요, 중생(衆生)이 들으면은 중생에 차별(差別)이요, 일체 축생(畜生)과 산천초목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들으면은 자기 나름대로 다 가서 계합(契合)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음(圓音) 설법(說法)이, 현재 우리 눈으로써 볼 수 있는 모든 현상, 귀로써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 코로 맡을 수 있는 온갖 냄새, 혀로 맛볼 수 있는 온갖 맛,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모든 그 촉감, 우리 생각으로써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이 다 부처님 원음(圓音)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어.

그래서 그 원음(圓音)의 그 본성(本性)을 바로 봐 버리면 무명(無明)의 구름이 다 흩어져 없어져 버려서, 부증대보변환가(不曾擡步便還家)여.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우리의 진리의 고향(故鄕), 우리의 마음에 고향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18분55초~34분39초)





(3/4)----------------


한 철, 백 일이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데, 인생이 많이 살면 칠팔십 사는데, 사실 우리의 생명은 오늘 하루를 모르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무상한 이 생사 속에 이미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와 마찬가지여.

언제 죽을는지 모른 그런 무상(無常)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무상한 속에서 이 석 달이라고 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석 달 동안에 우리의 이 생명이 유지가 될는지, 그 안에 이 세상을 뜰런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무상한 이 석 달 동안에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결제(結制)를 하게 되는데, 그 각오가, 그 석 달 결제에 들어가는 우리의 그 마음의 가짐이 경건하고 그 엄숙하고, 마치 어떠한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는 그러한 그 병사(兵士)와 같은 마음, 그것에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참, 그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사(死)' 자를 터억! 이마 미간(眉間)에다가 써 붙이고,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러한 생활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모(父母)가 돌아가셨다고 부고(訃告)가 와도 해제(解制)할 때까지는 본인에게 알려주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그 각오(覺悟)가 비장했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어도 본인에게 알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스님네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보살선방에 여러분들도 석 달 동안을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 원근(遠近)에 있는 여러 비구니 수좌(首座)님네들도, 항상 이 도량(道場)에서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리고 이 한 회상(會上)에서 지낸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 또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정진을 하신 여러 스님네들도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계신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렇게 산다고 하는, 정진한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 철을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예불 젓숩고, 그리고 정진하고 또 아침 공양을 하시고, 또 오전 정진을 하고 또 사시공양을 하시고, 오후 정진 그리고 저녁공양을 하고, 밤 정진 그리고 취침을 하시고, 그 하나하나가 스스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그 선방에 어떤, '일주문(一柱門) 밖에 나가지 말자, 특별한 허가(許可)가 없이는 외출을 하지 말자, 큰방에서 잡담을 하지 말자' 뭐 그 여러 가지 선방(禪房)에 규칙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런 규칙에 얽매어 가지고 그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뭐 얼마든지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그런다 하더라도, 스스로 턱! 자기가 자기 규칙(規則)을 세워서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


그래서 나갈 겨를도 없고, 떠들 일도 없고, 시비(是非)할 건덕지도 없고, 저절로 한 분 한 분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할 때에 규칙을 특별히 만들지 안 해도 제절로 규칙이 서서, 한 철을 정말 일생일대(一生一大)에, '그때 참! 정진(精進)다웁게 했다, 그 한 철이야말로 나에 일생을 결정짓는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적인 그런 한 철이었었다' 그러한 한 철이 되도록 그렇게 정진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이 지낼 때에 그 가운데 정진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부처님 당시에는 사시공양(巳時供養) 한 번만 했지마는, 지금은 다 특별한 분을 제외하고는 다 삼시(三時)를 공양(供養)을 하시게 되는데, 공양 문제는 대단히 평범한 생활 가운데에 일부지만 대단히,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인 것보다도 그것 못지않게 중대한 정진인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전국 선방이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시게 되면 너무 시간이 빨러서 그저 뭐 금방 5분도 안 되어서 뚝딱 공양이 끝나버리는데, 이건 대단히 잘못된 흐름인 것입니다. 어쨌든지 느긋한 마음으로 충분히 시간을 가져서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供養)을 하셔야 합니다.

저작을 잘 하시면은 공양한 그 모든 것이 잘 소화(消化)가 되어 가지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營養)을 완전히 흡수를 하게 되지만, 저작을 잘 아니한 채 침도 섞지도 아니하고 우물우물해서 그냥 막 꿀떡꿀떡 삼키게 되면, 뱃속이 공양하고 난 뒤에도 뱃속이 더부룩하니 편틀 못하고, 또 소화가 잘 안되고, 따라서 흡수가 되지 아니한 채 다 배설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놈을 그 아까운 음식을 먹느라고 애쓰고, 그러고 그놈이 입을 통해서 위장으로 소장 대장을 거치는 동안에 애만 썼지,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애만 썼지 실지로 영양 흡수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건 건강에 좋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정진(精進)에도 대단히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소화가 잘되서 위장이 편하고 흡수가 잘 되어야 정신(精神)도 맑고, 배도 편안해야만 정진이 잘되지, 자꾸 더부룩해 가지고 트림만 해 쌓고 소화가 잘 안되고 흡수가 안되면, 영판 정신도 안정이 안되고 호흡(呼吸)도 잘 안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죽비를 치는 스님은 잘 맞춰서 넉넉하게 죽비를 쳐서 공양을 진행을 하시도록 부탁을 드리고.


수면(睡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다리를 뻗고 실컷 잠을 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最小限)도 5시간 정도는 푹 자 주고, 그 대신 새벽에 눈 떠서 취침할 때까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죽비를 치는 입선(入禪) 시간이나 또 방선(放禪) 시간이나 그날 하루 무엇을 하거나 간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터억 추켜들어 단속(團束)을 해서 화두(話頭)가 독로(獨露) 하도록 그렇게 알뜰히 잡드리를 해 가면,

저녁에 잘 때에 터억 누워서 잠이 탁 언제 들었는가는 모르지만 들을 때까지 그 화두를 떠억 들고서 잠이 들도록. 그러면 잠 속에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도록.


새벽에 목탁 소리 ‘딱 딱’ 목탁을 칠 때 눈을 딱 떠도, 떴을 때 바로 엊저녁에 그 잘 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도록. 새로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던 화두가 고대로 터억 들려져 있도록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알뜰히 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몸도 건강하고, 정진을 애써서 할수록에 더욱 신심(信心)이 나고, 정말 참, 도(道) 닦아가는 그 참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게 정진을 하면 공부에 바른 길은 얻지 못하고서 몸에 병(病) 먼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처음에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말뚝 신심이 나 가지고, 공부하는 길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뭐 잠을 안 잔다, 말을 아니하고 묵언(默言)을 한다, 또 무슨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무슨 생식(生食)을 하고, 무슨 단식(斷食)을 하고, 뭐 이래 가지고 자꾸 몸뚱이 들볶는 것을 위주로 정진을 해 가게 됩니다. 이것은 바른 수행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6년간을 그렇게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와 같이 그렇게 무서운 고행(苦行)을 하셨어. 잡숫는 것을 아주 제한해 버리고, 잠도 제한해 버리고, 그래 가지고는 그 몸뚱이 들볶는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그래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을 해 가지고 그렇게 6년을 고행을 하셨는데, 마침내는 그 강(江)에 가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에 처녀가 갖다가 바치는 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절대로 뭘 먹지를 말자' 그렇게 약속을 교진여들 오비구와 같이 약속을 해 놓고는 아! 죽을 떠억 받아 잡수니까,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들이 '고따마(Gotama)가 배고픔을 참지를 못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결심이 무너져 가지고 그렇게 타락(墮落)을 했다.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떠나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떠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것이 없고, 당신은 목욕을 하고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죽을 받아 잡수니까 그렇게 새로운 정신이 나며 기운이 나. 기운이 나며 새로운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때 다시 떠억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 가서 정좌를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정신으로 정진을 해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내가 누구를 먼저 제도(濟度)를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맨 처음에 설법(說法)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신 결과 그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교진여들 그 다섯 비구—같이 수행을 하다가 버리고 떠났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서 먼저 제도를 해야겠다' 그래 가지고 거기를 가셨습니다.

가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 사제법을 설하시기 전에 맨 먼저 하신 법문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해서는 그것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 지나치게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는 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또 지나치게 안락을 위하고 호강을 하는 그러한 생활도 그것도 올바른 수행이 아니니라. 수행은 으레히 고행(苦行)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편하고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호화롭게 사는 것도 옳지를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행을 위한 고행, 쓸데없이 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해 가지고 육체를 들볶는, 그러한 수행도 올바르지 못하느니라"

그러한 말씀을 하셔서 그 교진여들로 하여금, 자기는 타락했다고 그래 가지고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먼저 그 말씀을 해서 그러한 오해(誤解)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신이 깨달라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인식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교진여들 다섯 사람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고,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 누구라도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이 중도법은 적용이 되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에도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 동안을 건강을 망쳐서 도를 닦지 못하게 된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34분50초~54분32초)





(4/4)----------------


입해산사도비력(入海算沙徒費力)이요  구구미면주홍진(區區未免走紅塵)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쟁여운출가진보(爭如運出家珍寶)하면  고목생화별시춘(枯木生花別是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입해산사도비력(入海算沙徒費力)이요,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세는 것은 공연히 쓸데없이 힘만 허비한 것이요.

구구미면주홍진(區區未免走紅塵)이다. 구구(區區)히 그 띠끌 속을 향해서 이리저리 치닫는 것을 면치를 못한다.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센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의 근기(根機) 따라서 설하신 그 방편법(方便法), 그러한 방편법에 집착(執著)을 해 가지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편(方便)이라 하는 것은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상대에게 해당이 되는 임시적(臨時的)인 편법(便法)을 방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거나, 장소가 옮겨지거나, 또는 그 상대의 그 사람이 바뀌어지면 그것은 이미 적당한 법이 아니라 그것은 해당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이미 해당이 되지 아니한 것을, 그것을 끝까지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고 거기에 집착을 해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바다 속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세는 거와 같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그 팔만사천 묘법(妙法),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말씀이 하나도 버려야 할 법은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한 자, 한 토가 다 소중한 법문(法門)이지만, 그 법에 뜻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 글에 집착을 하면 바로 그것이 바다 속에 가서 모래알을 세고 있는 거와 같은 것이거든.

죽을 때까지 세어도 끝이 없는 것이고, 몇억만 개, 그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도록 세고 있었던들 거기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만날 세어 봤자 거기는 모래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佛法)을 밖에서 구(求)해. 밖에서 어떤 것을 구하고, 밖에서 무엇을 얻고, 밖에서 무엇을 알려고 하는 그러한 그 수행을 지양(止揚)을 하고, 자기 안에서 쟁여운출가진보(爭如運出家珍寶)여. 자기 안에 있는 보배를 끌어내는 것이여. 그놈을 끌어내 가지고 그놈을 활용(活用)을 해야 하거든.

그러면은 그것이 고목생화별시춘(枯木生花別是春)이여, 고목(枯木)에서, 다 말라서 죽은 그 고목에서 꽃이 피어. 그래 가지고 새 봄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이 몸뚱이는 무량겁(無量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 금생에 와 가지고, 벌써 금생에 와서 십 년 · 이십 년 또 삼십 세 · 사십 세 · 오십 · 육십 · 칠십 세, 이렇게 해 가지고 벌써 반평생(半平生)을 살고, 얼마 안 가면은 이승을 하직(下直)할 나이에 이르렀다 그 말이여.

그러니 나무에다가 비유를 한다면은 이미 이 고목, 고목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 이 고목이 되었지만 정말 이 얼마 안 가면 썩어 문드러질 이 고목 속에 영원히 쓰고도 남을 보배가 들어 있어. 그 보배를 찾는 것이 바로 '이 뭣고?'거든.


'이 뭣고?'


정말 뒤로 미룰 수 없고, 정말 일분일초도 미룰 수가 없는 이 정진(精進)이거든.

한 생각 탁! 터지면은 바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니, 연세가 많다고 해서 그럭저럭 지내실 일이 아니고, 또 아직은 젊다고 해서 뒤로 미룰 일도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남녀(男女)와 노소(老少)가 없어. 마지막 숨이 딱! 떨어진 그 찰나(刹那)에도 이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 깨달라도 그것도 늦은 것이 아니고, 마지막 죽을 때 정말 이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바로 깨닫고 죽었다 하면, 이 숨을 거뒀다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기 때문에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여.

금방 새 몸을 받아서 또 태어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극락(極樂)에 가기를 원한다면 극락, 천당(天堂)에 가기를 원한다면 천당, 바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이 생(生)에 못다한 정진을 더 철저히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수 있게 까지 되어 가지고 한량없는 인연(因緣) 있는 중생을 제도(濟度)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한 스님네나 방부를 들이지 아니한 신도님네들도, 각기 자기가 있는 처소(處所)에서 꼭 방부 들인 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알뜰히 그리고 경건(敬虔)하게 생활을 하시면서 분(分) 따라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백일기도에 동참(同參)하신 여러 신남신녀들도 바로 이 결제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이 삼독심(三毒心)을 삼가하고, 그 세속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탐심도 나고 진심도 나고 또 어리석은 생각도 나겠지만,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탁! 발판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화두를 챙기고 해서, 방부를 들인 분들 못지않게 그 가정에서, 그 생활 속에서 정진(精進)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이 궁극(窮極)에 가서는 이 참선(參禪)은 생활, 생활 속에서 이 참선이 되어야 그것이 참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활을 여의고 저 깊은 산중에 선방(禪房)에서만 그 죽비를 치고 참선을 해야만 그것이 참선이고, 세속에 나오면 정진이 안 된다면 그건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아까 처음에, '불법(佛法)은 세간(世間) 속에, 세속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불법이 있다'고 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이 생활 속에서 정진이 되어 가도록 잡드리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활발(活潑)하게 살아 있는 정진이라야 정말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진 속에서 참으로 깨달라야 그 깨달음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는 되고, 조끔 시끄럽고 복잡하면 안 되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고 이래 해 가지고는, 그러한 정진은 그건 썩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실 때, 백일기도에 그 기도도 정말 성취가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가운데에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들께서는 여러 가지 종류에 소원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분의 그 학교 합격 문제라든지, 취직 문제라든지, 또는 결혼 문제라든지, 사업에 문제라든지, 또는 그 관공서나 회사에 모다 여러 가지 문제들, 사회 국가 문제, 여러 가지의 크고 작은 소원이 있으실 것입니다마는, 그러한 소원도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에 그 참마음 찾는 수행이 밑받침이 되어야, 그래야 그러한 소원들도 결국은 성취가 되고 우리의 목적도 달성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추워지게 됩니다. 모다 몸조심하시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병도 마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중심(中心)을 잃고 감정에 흐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모든 병(病)에 원인(原因)이 되는 것입니다.

당뇨병도 되게 속을 썩은 뒤에 흔히 터지고, 모든 무서운 그 암 병도 너무너무 속을 썩고 신경을 쓰므로 해서 그래서 그런 무서운 암 병도 생기게 되고, 혈압이 올라가는 중풍이라든지 온갖 심장병이라든지 모든 병이, 심지어는 눈병, 또 기관지 병, 모든 사지백체와 오장육부에 갖은 병이 그 마음이 중심을 잃고 속을 끓인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순경계(順境界)와 역경계(逆境界)를 당해서 화두(話頭)를 챙겨서 자기(自己) 근본(根本)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병(病)을 미연에 방지(防止)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심을 내서 철저히 정진을 해 보신 분이면 다 경험을 하실 수 있는 일이니만치, 부디 이 공부, 한 생각 잘 챙겨서 몸이 건강하고, 가정이 화평(和平)하고, 여러분의 모든 크고 작은 원(願)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할 수 있다면, 이 사업(事業)보다도 더 급하고도 중요한 사업은 다시는 없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내가 여쭙고 싶은 말씀, 당부하고자 하는 말이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54분45초~1시간10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부처님의 법은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 물의 본성은 바로 습성(濕性).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실상(實相), 진리(眞理)의 체(體)는 변함이 없는 것 / 참선은 아무 재미도 없고 얻은 바가 없다.


화두순숙 의단독로 성성적적 /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챙겨 /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 의관(疑觀). 의심(疑心)의 관(觀) / (게송)오욕해자갈~ / 원음(圓音) 설법(說法).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 /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라 /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천천히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하셔야 / 수면은 최소한도 5시간 정도는 푹 자야 / 부처님께서 오비구에게 설하신 '중도법(中道法)' /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게송)입해산사도비력~ / 이 공부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 궁극(窮極)에 가서는 생활 속에서 참선이 되어야 그것이 참 올바른 정진(精進) / 마음이 중심(中心)을 잃고 감정에 흐르면, 그것이 모든 병(病)의 원인(原因). 모든 순경계(順境界)와 역경계(逆境界)를 당해서 화두를 챙겨서 자기 근본(根本)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병(病)을 미연에 방지(防止)할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 출현(出現)을 하셔 가지고 중생(衆生) 교화(敎化)를 하시는데,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실법(實法)만을 가지고는, 실상법(實相法), 실법만 가지고서는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법(權法), 방편법(方便法)을, 아주 좋은 방편법을 잘 쓰면서 그래 가지고 실법(實法)을 나투어야 그래야 중생 교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철 동안 정진(精進)을 해 가는데, 언제나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 부처님의 법은 세법(世法)을,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을 여의고 참선(參禪)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생사법(生死法)을 여의고 진리법(眞理法)을 따로 찾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진리(眞理)가—진리 그 자체(自體)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용(用)으로써 발(發)한 것이 바로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요, 일월성진(日月星辰)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인 것입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그러한 신령스러운 묘체(妙體)가, 그것이 나타나면 바로 태양이요, 달이요, 그 무수한 별이요, 산이요 바다요, 나무요 돌이요, 일체 중생이요, 모든 짐승이며 그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전부 진리(眞理)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진리가 나타난 그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그림자 있는 곳에 그 반드시 실상(實相)이 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또 화두(話頭)를 들고, 번뇌(煩惱)가 일어나면 나는 화두(話頭)만을 들거든. 화두만을 들어요. 들면은 망상은 저절로 자최가 없어지는 것이거든. 화두를 들어도 그 망상이 안 없어지면 또 화두를 드는 것뿐이지, 망상이 안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떠억 챙겨. 숨을 터억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그것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했을 때 그 여운(餘韻)으로 남은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이여. 그래서 그것을 '의관(疑觀)'이라 그래요. 의심(疑心)의 관(觀)이다. 알 수 없어.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아까 처음에, '불법(佛法)은 세간(世間) 속에, 세속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불법이 있다'고 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이 생활 속에서 정진이 되어 가도록 잡드리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활발(活潑)하게 살아 있는 정진이라야 정말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진 속에서 참으로 깨달라야 그 깨달음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는 되고, 조끔 시끄럽고 복잡하면 안 되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고 이래 해 가지고는, 그러한 정진은 그건 썩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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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20. 12. 28. 10:11

((No.144))—1981년(신유년) 부처님오신날(81.05.11) (62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20분.

(1/3)----------------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요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요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불기(佛紀) 2525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80세를 일기(一期)로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열반에 드신 해를 1년으로, 원년(元年)으로 해 가지고 금년이 2525년이니까, 80세에 열반하신 그 해가 불기(佛紀) 1년이니까 2525에다가 79를 보태면 오늘이 부처님 탄생하신 그 햇수가 되는 것입니다.

2525에다가 79를 보태면은 2604년이 됩니다. 2604회 「부처님 오신 날」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는 마땅히 부처님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西紀)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을 일 년으로 해서 금년이 1981년이 되지만, 불기(佛紀)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를 일 년으로 해 가지고 불기(佛紀)를 지금 따지고 있으니까, 부처님 나신 생신으로 따진다면 2604년이라 하는 것을 우리 불자(佛子)들은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불기에 대해서 경전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현재 세계 불교학자(佛敎學者)들이 여러 가지로 깊이 연구한 결과 2525년으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2600년 전 인도(印度) 가비라 왕국(迦毘羅王國)에 태자(太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가비라 왕국이 어디냐 하면 지금의 네팔(Nepal) 나라인 것입니다. 네팔 나라에 있는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은 탄생을 하셨습니다.

태자로 태어나셔서 그 태자의 모든 영광과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온갖 고행(苦行)을 다 겪으시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그 모진 고행(苦行)을 하셨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 석가(釋迦)로 볼 때에는 당신의 생사(生死) 문제, '인간은 왜 태어났으며, 왜 늙어서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인가?'

어릴 때부터서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항시 마음속 깊이 그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러시다가 마침내 출가(出家)를 하셔서 '이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출가를 하셔서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 그 많은 무서운 고통을 견디시면서 도(道)를 닦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석가(釋迦)로 보지 아니하고, 저 구원겁(久遠劫) 이래로 진묵겁(塵墨劫) 전에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중생(衆生)들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태어나셔 가지고, 일부러 출가하셔서 고행을 하셔서 대도를 성취한 그 모습을 우리 중생들에게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이렇게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역사, 『팔상록(八相錄)』 또는 여러 가지 부처님에 대한 전기(傳記)를 읽어 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부처님의 역사에 대해서도 진리(眞理)의 몸으로서의 부처님 또는 일단 사바세계에 사람의 몸을 받아서 태어나신 이상은 인간 석가(釋迦)로서 보는 그러한 부처님의 역사,

각도에 따라서는, '부처님은 저 허공에 오색구름 위에 계시고 한 걸음 옮기실 때마다 그 발자죽에서는 연꽃이 피어나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위대하고 신성하고 거룩하신, 우리 중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그러한 훌륭하신 부처님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마는,

각도를 바꿔서, '인간 석가(釋迦)다. 일단 인간의 세계에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신 부처님은 설사 대도(大道)를 성취한 성현(聖賢)이시지만, 우리가 언제라도 가까이 모실 수 있고 가까이 가서 무엇이라도 여쭈어 볼 수 있고 무슨 괴로움이라도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는 따뜻하고 자애로우신 할아버지와 같은 그러한 성현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그러한 것도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부처님' 하면 굉장히 우리하고 거리가 멀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의 할아버지시다. 언제라도 가까이 가서 여쭈어보면 무슨 일이라도 자상하게 인자하게 일러주실 수 있는 그러한 어른이다. 사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우리의 할아버지다’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것이 훨씬 우리들에게 더 가깝고 고마우신 성현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리키고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하고 우리하고는 아주 바탕이 달라서 도저히, 전혀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부처님은 그 본바탕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다.

 

옛날에 ‘양반이다’ ‘상놈이다’ 이러한 계급(階級) 의식이 강할 때, 특히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인도 나라는 네 가지 계급이 있어서 인종(人種)의 차별(差別)이 대단히 심했습니다마는—바라문 계급이라든지, 또는 왕족 계급이라든지, 또는 일반 농민 서민 계급이나, 또는 노예 계급, 이러한 사(四) 계급이 있어서 노예들은 바라문이나 왕족의 옆을 지내가지를 못하고 옷만 스쳐가도 큰 벌을 받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맨 먼저 계급(階級) 타파(打破)를 부르짖어서 부처님의 제자를 만들 때는 농민(農民)도 출가(出家)를 허락을 하셨고, 백정(白丁)도 출가를 허락을 하셨고, 또는 왕족(王族)이나 바라문(婆羅門)도 허락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한 것에 구애(拘礙) 없이 허락을 하셨냐 하면, 동쪽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나 서쪽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나 또는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나 일단 물이 바다에 흘러들어 오면, 바다는 깨끗하다고 해서 받아들이고 더럽다고 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고 모든 종류에 물을 추호도 차별 없이 다 받아들였습니다.

일단 받아들이면 어떠한 종류의 물이라도 바다에 도달하면 짠맛! 짠맛으로 변하고 마는 것처럼, 어떠한 계급(階級)의 인종, 어떠한 죄(罪) 많은 사람이라도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해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다 부처님의 혈통을,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부처님의 진리(眞理),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해서 불제자(佛弟子)가 되었습니다. 불자(佛子)가 된 이상 우리도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입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죄 많은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부처님과 같은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옛날에 어떤 큰 부자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들을 하나를 낳아 놓고 그 아들이 말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렸을 때 그 장자 부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에 가장 훌륭한 보배 구슬, 그 보배 구슬 하나만 있으면 평생을 먹고 쓰고도 남을 만한 그러한 훌륭한 보배 구슬을 그 어린애기한테 전해 봤자 소용이 없어서 자기가 가장 믿는,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그 보배 구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것입니다.

 

그 보배 구슬을 어린아이의 옷 속에다가 넣고 잘 꿰매 놓았습니다. 그리고서 그 자기 친구에게, "이 간난애기 품 안에다가 보배 구슬을 넣고 잘 꿰매 놨으니 이 아이가 크거든 자네가 ‘이 보배 구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일러주어 가지고 그 어린아이로 하여금 먹고 입고 사는데 궁(窮)함이 없이 잘 살도록 일러주기를 바라네" 이렇게 부탁을 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서 많은 세월(歲月)이 흘렀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자기 몸에 간직한 보배 구슬, 그 보배 구슬이 자기 몸안에 있는 것을 전연 인식(認識)하지를 못하고, 부모 없는 자식이 되어서 고향(故鄕)을 떠나 가지고 천하를 얻어먹고 돌아다니면서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자 어느 날 자기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하다가 바로 그 소년이 자기의 친구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친구의 유언(遺言)에 따라서 그 어린 거지 아이의 몸안에 구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는 자기 몸안에 있는 보배 구슬을 꺼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집도 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식량도 사고 또 부릴 사람도 사고, 이래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하는 옷 안에 구슬, 「옷 안에 구슬」이라고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처음~20분46초)

 

 

 

 

(2/3)----------------

 

이 비유는, 우리 안에, 우리는 이 지수화풍(地水火風)—흙으로, 흙 또 물 또 불기운, 바람기운, 이 네 가지의 원소(元素)가 모여 가지고 이 육체(肉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네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는 일단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 죽을 수 밖에는 없는 그러한 무상(無常)한 존재에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상(無常)한 몸뚱이 속에 영원히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에게 주고 그래도 끊임없이 바닥이 날 줄 모르는 그러한 보물이 이 몸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우리 몸안에 그러한 훌륭한 보배가 있다고 한 사실을 우리에게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일러주시기 위해서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탄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보배 구슬이 우리 안에 있는 증거가 무엇이냐?

 

몸을, 오장육부(五臟六腑)를 해부(解剖)를 해 보아도 그 구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몸뚱이를 빨가벗겨 놓고 온 몸을 두루두루 다 살펴보고 눈, 코, 입, 귀, 아홉 구멍을 다 뒤져도 그 보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해부를 해도 나오지 아니하고 아홉 구멍을 다 두루 살펴봐도 없다면 대관절 어떻게 해서 우리 몸안에 그러한 위대한 보배 구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보배 구슬!

여러분들은 ‘다이아몬드’라든지 무슨 그러한 오색(五色)이 찬란한 그러한 보석을 보면 굉장히 기뻐하고 부러워하고 갖고자 원하시지만, 그러한 물질로 된 보배는 언젠가는 내 몸으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이고, 아무리 잘 간직한다 하더라도 도둑을 맞거나 불에 넣으면 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부서지거나 또 형편이 어려워지면 내 몸으로부터 떠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일생 동안 잘, 복(福)이 있어서 잘 간직한다 하더라도 칠십 년 팔십 년 이승을 다 살고 갈 때에는 그것은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왜? 죽을 때 관 속에 넣어 가지고 가면 되지 않느냐!'

관 속에 그 보배, 보석을 가지고 가 본들 썩어 가는 육체와 함께 묻어 놓은 뿐이지 내가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몸뚱이는 목숨이 끓어지자마자 십 분이 되면 벌써 내장부터 버글버글 썩어 들어 갑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몸으로부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영혼은 이미 떠나가고 없기 때문에 시체와 함께 그 보석을 묻어서 같이 묻어 놓아 봤자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질로 된 보물을 욕심내고 간직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말 금생 일생 동안 실컷 쓰고 남고 또 이승을 하직(下直)하고 다시 새 몸을 받을 때에도 그 가지고 갈 수 있는 그러한,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않고, 땅에 묻어도 썩지 않는, 그리고 다른 사람이 훔쳐갈 수도 없고 도둑맞을 수도 없는 그러한, 그러한 보배를 우리는 찾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몸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해부를 해도 나오지 아니하고 화장(火葬)을 해도 타지 않는 것이냐?'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안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가 있으며, 있는 증거를 내 보여라'

지금 이 송담(松潭)이 여러분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송담의 말을 귀를 기울이고 지금 듣고 계십니다. '그 듣고 있는 놈이 무엇이냐?'

'귀가 듣지 무엇이 듣느냐?'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있습니다. 귀를 통해서 듣는 놈!

지금 이 법상에 올라와서 지금 말을 하고 있는데, 저의 모습을 여러분들은 보고 있습니다. 눈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이 있습니다.

 

그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놈! 그놈이 바로 여러분이 찾어야 할, 개발해야 할, 여러분이 깨달러야 할 여러분의 영원한 보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 찾는 공부밖에는 인생으로서 태어나서 할 일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공부를 하는 목적, 돈을 버는 목적, 정치를 하는 목적, 모든 목적이 '보다 더 잘 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보다 더 행복(幸福)하게 살기 위해서 돈도 벌어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하고, 예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돈 많이 번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정치가가 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술을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궁극에 행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더라.

 

내가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이다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불교(佛敎)를 30년, 40년, 평생토록 절에를 다니면서 아들이나 손자나 손녀가 "불교가 무엇이냐?", "뭣 하러 절에 다니느냐?" (녹음 끊김) ...고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說)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 속에서 많은 경전(經典)을 읽고 연구하고 해서 교리적으로 밝은 지식을 쌓으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전혀 교리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그저 소박한 신앙심으로 그저 절에 와서 공양을 올리고 절을 많이 하고 '어쨋든지 우리 아들 명 길고 잘살게 해 주십시오' '우리 딸 좋은 데로 시집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 신랑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손이 발이 되도록 10년 20년 30년을 한결같이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다니신 분, 참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감사하고 기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거기에서만 근쳐서는 아니되겠다 이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소박(素朴)한 신앙(信仰)도 대단히 좋고, 어떠한 참선을 하신 분도 또한 그러한 소박한 신심도 가지고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래야 종교인다웁고, 또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또 겸허(謙虛)한 자세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시골 할머니와 같은 소박한 신심도 가져야 하고.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지 말고 참나를 깨닫는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진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요새 과학 문명(科學文明)이 발달이 되어서, 물질문명(物質文明)이 발달이 되어 가지고 젊은 사람들, 지식층에서는 그러한 소박한 신앙을 강요해 봤자 잘 먹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참나를 깨닫는 참선법(參禪法)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것이 불법(佛法)이라면 나도 한 번 해보겠다. 나의 인간성을 개조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고 우리의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는 그러한 수행법이라면 나도 한 번 해보겠다'

한마디에 탁! 인식을 하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한 분을 나는 많이 만났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최상승법을 널리, 그리고 높이 선양할 때가 바야흐로 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서양사람들이 불교에, 이 참선법(參禪法)에 뜨거운 관심을 나날이 가져가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한국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고 학생들이, 젊은 분들이 이 참선을 들으려고 그러고, 알려고 그러고 또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옛날에는 절에 오신 분이 대부분 오십 · 육십이 넘은 할머니들만이 절에 오시고, 혹 젊은 부인들은 집안 모다 남편이나 시어른 몰래 친정어머니하고 같이 생남불공(生男佛供)하기 위해서 극히 비밀리에 살짝 왔다가, 와서 공(功)만 들이고 가시던 그러한 때가 불과 십여 년 전에까지도 그래 했었던 것을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보면 거의 90%가 젊은 분들이고,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는 겨우 1할 정도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자체는 남녀노소가 없지만 이 시국이, 이 시대가 불법,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야만 이 시대를 건지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때가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40억 인구 속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적극 실천한 사람이 과연 몇 프로나 될 것인가?' 생각할 때에, 아직도 우리 불자(佛子)들이 더 신심을 내서 이 불법을 선양(宣揚)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입으로만 '불법', '참선' 하고 떠들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실천을 해서 나날이 새로와지고 나날이 향상되어 가는 우리 자신을 가족들에게 보이고, 일가친척들에게 보여주고,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이웃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따라오도록 이러한 수행, 이러한 수행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포교(布敎)의 방법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면서 인연(因緣) 있는 사람에게 권고한다면 따라오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다, 소리를 듣는 그때가 바로 참나로 돌아가야 할 때다.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던지 나무를 보던지 또는 사람을 보던지 어떠한 색상(色相)을 본 바로 그때가, 그곳이 참나로 돌아가야 한, 돌아가는 그 곳이다 이것입니다.

 

'참나는 어떻게 찾는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야만 있느냐, 부처님을 모신 절에만 가야만 찾느냐?'

그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든지 또는 들에서든지 또는 직장에서든지 기차나 버스 속에서든지, 어디에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릴 때 그때 '이 무엇고?'

눈으로 무엇을—산을 보고 새를 보고 기차를 보고 사람을 보고, 무슨 빛깔, 청황적백(靑黃赤白) 무슨 빛깔을 보던지, 무슨 모냥을 보던지 볼 그 찰나가 바로 '이 무엇고?'

이것이 바로 참나, 자성불(自性佛), 내 몸안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는 그 찰나(刹那)더라 이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일 분 일 분, 한 시간 한 시간을 살아가고 닦아가고 공부해 간다면,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더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만 출세하신 것이 아니라,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무엇고?’ 할 그 찰나(刹那)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라.(20분47초~41분9초)

 

 

 

 

(3/3)----------------

 

부처님께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말씀하시기를,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염부제(閻浮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다음 부처님으로, 다음 교주(敎主)로 탄생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는 한 생각 한 생각,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에도 '이 무엇고?'를 놓치지 아니할 때, '이 무엇고?'를 관조(觀照)할 때, 그때 그때가 바로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때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것을 듣고서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하! 내가 여태 불교를 믿어도 헛믿었구나.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태어나신 줄 알았는데,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부처님이 탄생하시고 그 부처님을 뵈올 수가 있다니, 당장 이 자리에서 부터서라도 내가 이 최상승법, 이 참선(參禪)을 하리라'

가만히 내가 눈을 감고 살펴보니까, 이를 악물고 그렇게 결심하신 분이 지금 상당히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말씀을 듣고서도, '그 소리가 뭔 소리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

전혀 믿지 아니하고, '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야지, 다 그런 거 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고집을 부린 분도 개중(個中)에는 또 몇 분이 계신다 이 말씀입니다.

 

좋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미타불만 불러야지 다른 것은 나는 안 하겠다' 그러한 철저한 결심이 있는 분은 계속해서 '아미타불'을 불러도 좋습니다. 또 '나는 부처님한테 맹세하기를, 죽을 때까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겠다'고 맹세하신 분이 계시다면 좋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죽을 때까지 열심히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최상승법은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부른 만큼의 공덕(功德)이 있다고 한 사실을 나는 이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서 여러분께 말씀을 아니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컷 부르세요. 부르다가, 맨 끝에 가서 떠억 마음을 가다듬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번 해 보시라 그 말이여. 대관절 여태까지 '관세음보살'을 내가 실컷 불렀는데, '이 관세음보살 부르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한 번 돌이켜서 생각을 해 보시라 이 말씀입니다.

 

백팔 염주(百八念珠)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 한 번 부를 때마다 염주알을 이렇게 이렇게 굴리시는데, 다 백팔 번을 굴리면 마지막에 가서 제일 큰 염주알이 딸크닥 걸립니다.

그 염주알 걸릴 때, 그때 떡!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이 무엇고?~~~' 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렇게만 해 보신다면, 백팔 번 염불하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 백팔 번 염불하는 그 공덕을 탁! 합쳐 가지고 그 공덕을 야무지게 뭉쳐서 성불할 수 있는 단계로 비약하는 것이 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하시다가 나중에, 나중에는 '관세음보살'보다도 '이 뭣고?'가 더 하고 싶은 때가 꼭 올 것입니다. 그때는 여지없이 뒤도 돌아보지도 말고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은 고대로 놔 버리고—버리려고 할 것도 없어. 그냥 고대로 놔 버린 채 '이 뭣고?'만 열심히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열심히 한 그 공덕이 완전히 푸욱 썩어 가지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가지고 머지않아서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때가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을 여러분께 설해 드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많고도 많은 법문(法門)을 설하셨습니다. 삼천년 동안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나오셔서 설하신 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 '이 뭣고?' 이 법 하나를 설(說)하시고 전(傳)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지끔 이 용화사, 용화사를, 용화선원(龍華禪院)을 창설(創設)하신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이 주안에다가 자리를 잡으신 목적도, 바로 우리들에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계속해서 이 최상승법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진리의 부처님이 누구시냐 하면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십니다. 지금 우리 용화사 법당 이 탁자에 모셔진 부처님입니다.

다른 절 부처님은 전부 손을 이러한 모습으로 하시던지, 또는 이러한 모습으로 하시던지, 이런 모습으로 하든지, 모다 손 모습이 다른데, 용화사 부처님 모습은 딱 이렇게 손이 되어 가지고 있거든! 이 부처님의 모습은 바로 비로자나불,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이다 그 말이여.

 

말하자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여.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화신(化身)으로,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나신 부처님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너희들은 이 육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32상(三十二相)을 받아서 태어난 이 육체의 석가모니불을 믿지를 말아라. 진리, 여래(如來), 진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너희들 자신 속에 있는 부처님을 믿어라. 그것을 깨달라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진리의 표상(表象)이 바로 우리 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 진리의 부처님, 참나, 아트만, 그 부처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이여. 이 법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이 돈과 쌀과 떡과 꽃, 온갖 공양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뜩차도록 공양(供養)을 올린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오늘 들으심으로 해서 여러분들은 가장 훌륭한 공양(供養)을 올리신 것이고, 그것을 실천을 하신다면 여러분의 소원은 거기에서 성취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많은 절을 합니다마는, 예배(禮拜)라고 하는 것은 공경진성(恭敬眞性)이요 굴복무명(屈伏無明)이다. 참된 성품, 참된 나 자신의 성품(性品)을 공경하는 것이 이것이 부처님께 예배드린 가장 가까운 예배다.

나무나 쇠나 흙으로 빚어서 만든 부처님께 절하는 공덕도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내 몸안에 있는 참부처님을 공경하고 그것을 닦기 위해서 '이 무엇고?'를 하는 이 공부야말로, 억만 배, 백억만 배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된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굴복무명(屈伏無明)이다', 무명(無明)을 굴복(屈伏)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다. 예배(禮拜)의 의의는, 바로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하는 이상의 예배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따라서 '이 무엇고?'를 하면서 기도도 하고, '이 뭣고?'를 하면서 공양도 올리고, '이 뭣고?'를 하면서 예배를 올린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소원을 달성을 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화사를 여기에다 창건한 목적이 그것이요, 이렇게 법당(法堂)을 크게 지어 가지고 법회 때마다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바도 바로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은 입을 통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법(法)을 설(說)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연중무휴로 전파를 발송을 해 가지고 계속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언제라도 우리 자신이 다이알만 딱! 맞추면 그 방송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듯이, 끊임없이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 최상승법, 위대한 진리의 법문을 설하시고 계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 비로자나 부처님의 사신(使臣)으로서, 사신으로서 사바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역대조사(歷代祖師)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반하신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도 부처님으로부터 77대의 법맥(法脈)을 이으신 도인(道人)이십니다마는, 그 도인만이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누구라도 부처님의 진리법(眞理法)을 전해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법을 이어받으려면,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함으로써 그 다이알을 비로자나 부처님과 다이알을 맞추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해야만 진리법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구현(具現)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604회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기어코 실천해서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각오를 튼튼히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아울러서 이 자리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사부대중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을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축원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들었기 때문에, 듣고 실천을 하려고 각오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소원은 보다 더 빨리 성취가 되실 것으로 나는 믿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소원을, 다 소원을 갖지만 성취되는 사람, 안 되는 사람, 더디 되는 사람, 빨리 되는 사람, 왜 그 차이가 있느냐 하면 과거에 지은 업(業)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업(福業)을 많이 지은 사람,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뜻대로 잘됩니다. 부자도 되고, 높은 벼슬도 되고, 아들딸도 낳고, 오복을 다 겸비하지만, 과거에 복(福) 지은 것은 적고 죄(罪) 지은 것은 많으면, 그 지은 죄의 장애(障礙)로 인해서 우리의 소원은 그렇게 목마르게 바래지만 잘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지은 업(業)에 장애물을 녹여 없애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한 방법보다도 훨씬 수승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언제 어데서라도 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도 쉬운 방법,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를 드립니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원컨댄 법계(法界)에 모든 중생들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다.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일시(一時)에 성불(成佛)하여지이다.

 

앞으로 일주일 뒤, 음력 사월 보름날은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여름 석 달, 여름 음력 4월 15부터 7월 15일까지 석 달은 하안거(夏居)라 해 가지고 특별 수련 기간입니다.

사정이 허락하신 분은 이 특별 수련에 동참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직접 오셔서 공부를 못 하신 분도 참례를 하시면 좋고, 또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또 법회가 있고,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천도(薦度)를 하는 법요... (녹음 끊김) (41분10초~61분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문성시증시~ / 서기(西紀)와 불기(佛紀) / 부처님의 역사. 진리(眞理)의 몸으로서의 부처님과 인간 석가(釋迦)로서의 부처님 /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 /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차별 없이 다 부처님의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

 

『법화경(法華經)』에 '옷 안에 보배 구슬'의 비유. 우리 몸안에도 그 보배가 있다 / 그 보배를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이다. 궁극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 / 내가 나를 찾는,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 / 소리를 듣는 그때, 눈으로 무엇을 볼 그때 '이뭣고?' 이것이 내 몸안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는 그 찰나(刹那)더라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컷 부르다가, 맨 끝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번 해 보시라 /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우리들에게 최상승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 예배(禮拜)는 공경진성(恭敬眞性)이요 굴복무명(屈伏無明) / 업장소멸을 해야 소원성취가 된다. 가장 수승한 업장소멸 방법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리키고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하고 우리하고는 아주 바탕이 달라서 도저히, 전혀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부처님은 그 본바탕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다.

 

어떠한 종류의 물이라도 바다에 도달하면 짠맛! 짠맛으로 변하고 마는 것처럼, 어떠한 계급(階級)의 인종, 어떠한 죄(罪) 많은 사람이라도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해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다 부처님의 혈통을,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부처님의 진리(眞理),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해서 불제자(佛弟子)가 되었습니다. 불자(佛子)가 된 이상 우리도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입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죄 많은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부처님과 같은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놈! 그놈이 바로 여러분이 찾어야 할, 개발해야 할, 여러분이 깨달러야 할 여러분의 영원한 보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 찾는 공부밖에는 인생으로서 태어나서 할 일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이다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최상승법을 여러분께 설해 드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많고도 많은 법문(法門)을 설하셨습니다. 삼천년 동안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나오셔서 설하신 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 '이 뭣고?' 이 법 하나를 설하시고 전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지끔 이 용화선원을 창설하신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이 주안에다가 자리를 잡으신 목적도, 바로 우리들에게 이 최상승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은 입을 통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법(法)을 설(說)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연중무휴로 전파를 발송을 해 가지고 계속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언제라도 우리 자신이 다이알만 딱! 맞추면 그 방송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듯이, 끊임없이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 최상승법, 위대한 진리의 법문을 설하시고 계십니다.

 

그 진리법을 이어받으려면,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함으로써 그 다이알을 비로자나 부처님과 다이알을 맞추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해야만 진리법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구현(具現)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기어코 실천해서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각오를 튼튼히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아울러서 이 자리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사부대중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을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축원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들었기 때문에, 듣고 실천을 하려고 각오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소원은 보다 더 빨리 성취가 되실 것으로 나는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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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