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01~125)2020. 12. 25. 22:13

((No.123))—1980년(경신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0.05.21) (42분)

(1) 약 21분. (2) 약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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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왕사일륜월(誰知王舍一輪月)이 만고광명장불멸(萬古光明長不滅)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오늘은 경신년(庚申年)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입니다.

불기(佛紀) 2524년이라고 합니다마는, 2524년은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해를 불기(佛紀) 일 년으로 쳐서 금년(今年)이 2524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탄생(誕生)하신 해부터서 금년까지 몇 해가 되었느냐 그것을 알아보려면 부처님께서는 80세까지 생존(生存)하셨으니까, 2524에다가 79를 보태면 부처님께서 오늘 탄생하신 해부터서 금년까지 2603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불교도대회(世界佛敎徒大會)에서 열반하신, 돌아가신 해를 일 년으로 쳐서 불기(佛紀)를 결정을 했기 때문에 보통 '불기 2524년' 그렇게 얘기들 합니다마는, 앞으로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햇수를 알고자 하면 부처님은 80세까지 사셨으니까 한 살을 빼서 79를 보태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해가 나온다고 하는 것을 잘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불기(佛紀)도 2900년대를 그동안에는 오래 전부터서 그렇게 사용을 해 오다가 2500년대를 사용하게 된 것은 불과 십여 년 밖에는 안 됩니다. 2900년대는 중국으로 해서 우리나라 이 북방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전(北傳)으로 통해서 볼 때에는 2900년대가 되고, 남방으로 전해 내려오는 햇수로는 2500년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400년이라고 하는 차이가 나느냐 하면 워낙 오래된, 역사가 오래되어서 경전에 따라서 이렇게 쓰여진 데도 있고 저렇게 쓰여진 데도 있고 그런 것입니다.


보통 불기(佛紀)를 따질 때,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아쇼카왕이 즉위(卽位)한 해에 기념탑(記念塔)을 세웠는데, 그 아쇼카왕이 즉위한 해가 바로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 백 년 뒤다' 또는 '이백십팔 년이다' 이렇게 설(說)이 그것도 차이가 있어서 학자마다 연대(年代)가 다 일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중성점기(衆聖點記)라고 하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부터서 손으로 쓴 경책에다가 해마다 점(點) 하나를 찍어서 쭈-욱 내려오는 중성점기라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그 점을 찍어 내려오는 그것으로 따져서 보는 것과 이렇게 남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불기에도 또 차이가 있어서 여러 학자들 간에 불기(佛紀)에 대한 설이 다릅니다.


그러나 십여 년 전에 세계불교도대회에서 2524년, 금년(今年)이 2524년으로 따지는 불기를 사용하기로 서로 결의(決意)를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것에 따라서 금년을 2524년으로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불기가 2900년대가 옳으냐? 2500년대가 옳으냐? 그러한 것들은 학자들이, 사학가(史學家)들이 연구할 문제고, 우리 불자(佛子)들로서는 그러한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할 줄 생각합니다.


불교의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으신 분이라, 생사가 없기 때문에 태어나신 때도 없고 또한 돌아가신 때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가 없는데 무슨 '불기가 몇 년이다' 그런 것 가지고 논란을 할 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급하고 중대한 것이지, '부처님께서 몇 년도에 태어나셨다' 이런 것은 저 학자들이 연구해도, 학자에게 미루어도 충분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셨는가?' 그것이 우리에게는 당장 급한 일이요 중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느냐?

우리 중생들도 부처님과 조끔도 다름없는 만고(萬古)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등(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등(燈)에 부처님께서는 불을, 불을 켜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반왕(淨飯王), 정반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태자(太子)로 태어나셨습니다. 태자로 태어나셔서 이 세상에 영화와 부귀 그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6일 만에 부처님을 낳아 주신 어머니 마야부인은 이 세상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부처님의 이모, 이모이신 대애도(大愛道) 부인께서 부처님의 계모(繼母)로 들어오셔서 당신 형이 낳아 놓으신 실달태자(悉達太子)를 잘 양육을 해서 19세에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래가지고 온갖 정성을 다해서 그 태자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기 위해서 노력을 하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서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거기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시고, 언제나 시간만 있으면 고요한 데, 숲속 이런 데를 찾아서 고요히 앉아서 묵상(默想)에 잠기시기를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그럴수록에 부왕(父王)이나 왕궁(王宮)에서는 그 태자로 하여금 보다 더 기쁘게, 그러한 무상한 그런 마음을 갖지 않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춘하추동에 지내기 편리하도록 삼시전(三時殿)을 짓고, 온 나라에 미인들을 모여서 춤과 노래로써 기쁘게 해 드렸지만, 그런 것에도 아랑곳없이 해가 거듭할수록 실달태자(悉達太子)는 점점 무상함을 느끼고 드디어 29세 되던 해에 '라후라(羅睺羅)'라고 하는 당신의 아들을 낳으시고 그리고서 성(城)을 넘어서 설산(雪山)으로 들어가셔서 6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하루같이 목숨 바쳐서 수도(修道)를 하셨습니다.


설산 안에 있는 모든 훌륭한 성자(聖者)들을 찾아서 그 성자의 지도에 따라서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그 고행(苦行)을 해서 그 스승보다도 더 월등한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그 스승의 귀여움과 붙잡음을 받았지만 거기에도 만족이 안 되어서 차례차례로 스승을 버리고 또 더 위대한 스승을 찾고, 이렇게 하기를 6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지낸 끝에 드디어 붓다가야의 그 보리수 나무 밑에서 거기에 딱!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서 “내가 이 자리에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아니하면 죽어도 이 자리로부터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맹세를 하시고 정진(精進)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임오년(壬午年) 12월 초여드렛날, 그때가 부처님으로서는 35세 때입니다. 35세 때 동천(東天)에서 빛나는 샛별을 보시고 대도를 성취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서 깨닫고 나서 일체 중생(衆生)을 살펴보니 저 죄 많고 어리석은 모든 중생들도 당신과 똑같은 본성(本性)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간파(看破)를 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자리에서부터서 80세를 일기로 열반(涅槃)에 드실 때까지 앉은 자리 더워질 겨를 없이 인도(印度)에 동서남북을 유행(遊行)을 하시면서 한량없는 중생을 위해서 법(法)을 설하셨습니다. 일생 동안 설하신 그 법이 바로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에 봉안(奉安)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 우리가 어떻게 닦아 가야 한다고 하는 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그 일부에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일부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팔만대장경인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법은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그것만이 아니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태양과 달과 별, 이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중생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암흑(暗黑)을 비추기 위해서 켜 놓으신 부처님에 등(燈)불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소리는 중생의 때를 씻쳐 주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법으로 설해 주신 경전(經典)인 것입니다.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바람소리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소리를 언제 어디서라도 들을 수 있고 그 소리를 들음으로 해서 참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영원히 끊임없이 들을 수 있는, 연주하고 있는 아름다운 음악(音樂)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푸른 하늘, 푸른 산, 봄에 아름답게 피는 노랗고 빨간 모든 꽃들, 이런 것들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그 보는 그 찰나(刹那)에 그 보는 자신을 돌이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오색이 찬란한 빛깔로 부처님의 경전을 써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코로 맡을 수 있는 냄새, 혀로 맛볼 수 있는 짜고 달고 쓰고 시고 한 이러한 맛,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부드럽고 까끄럽고 따뜻하고 차가운 모든 이러한 것들도 우리의 몸뚱이와 감각을 통해서 느끼는 찰나(刹那)에 우리의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모양으로 경전을 설해 놓으신 것입니다.


종이로 쓰여 있는 경전만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의 전부(全部)라고 생각하신 것은 부처님의 진리를 잘 이해를 못하신 사람에 보는 바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참으로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그 소리 가운데에는 성현(聖賢)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착하고 아름다운 소리뿐만이 아니라 욕을 하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요새 공해(公害)로 공장에서 울려 퍼지는 그런 소리까지도 전부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고에 진리의 일면(一面)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 갈 때, 우리는 온 육도법계(六道法界)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살아 있는 설법(說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이로 된 경전만이 경전인 줄 알고 그 경전(經典)에 집착(執著)하고 밤낮 그것을 뒤적거리고 그것을 읽고 외우는 것만이 부처님의 경전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본 장님이 '코끼리는 구렁이같이 생긴 것이다' 하고 집착을 하고 우기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몸소 저 도솔천(兜率天)에서 계시다가 지금으로부터 2603년 전에 인도(印度)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에 태자(太子)로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나실 때 여섯 개의 아금니를 가진 하얀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摩耶夫人)의 태중(胎中)으로 들어오셨다고 하는 말씀이 고대(古代) 경전(經典)에 쓰여 있습니다.


부처님 자신으로 볼 때에는 이미 진묵겁(塵墨劫) 전에 대각(大覺)을 성취하셔서 다시는 영원히 생사 문제에 떨어질 이유가 없으시지만, 우리 불쌍한 생사 속에서 헤매고 있는 가엾은 중생들을 건져 주시기 위해서 몸소 왕궁에 태자(太子)로 태어나셔 가지고 무상(無常)을 느끼시고 그래 가지고 귀여운 아내와 아들과 왕궁에 부귀를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이 세상에 어떠한 성현도 겪지 못한 그러한 무서운, 견디기 어려운 고행(苦行)을 몸소 다 겪으시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을 위해서 일부러 그러한 모냥을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처음~20분4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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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왕(往往)이 '도(道)를 통하려면 그런 고행(苦行)을 해야 한다' 이렇게 혹 생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리고 과거에 많은 수행자들도 그렇게 고행을 위주로 해서 도를 닦은 분들도 있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대도를 성취하신 뒤 최초에 당신을 모시러 왔다가 결국은 당신과 더불어 같이 수행을 하고 있었던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비구들을 위해서 최초(最初)에 무슨 법문(法門)을 하셨느냐 하면은 지나치게 편안하고 사치에 빠져서 도를 닦는 것도 지혜로운 수행법이 아니지만, 동시에 지나친 고행(苦行) 위주에 수행도 지혜롭고 성스러운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맨 처음에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는 너무 사치에 빠지고 편안한 데 빠져서 도를 닦아도 그 도는 올바른 수행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써 위주를 삼는 그러한 수행법도 지혜로운 수행법이 아닌 것입니다.

적당하게 먹여 주고, 적당하게 재워 주고, 적당하게 입혀 주는, 그러면서 우리가 정신(精神)을 차려야 할 곳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는 우리의 그 생각,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야무지게 잘 단속(團束)을 하느냐’ 거기에다가 우리의 모든 정성을 집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 없이는 결단코 건전한 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건전한 정신이 없고서 올바르게 수행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6년이라고 하는 긴 뼈아픈 고행 끝에 결국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흘러가는 강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목욕을 하고 나오자 마치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에 처녀가 수행인을 위해서 바치기 위해서 끓여 가지고 온 유미죽(乳糜粥) 한 그릇을 얻어 잡숫고, 그래 가지고 거기서 새 정신을 차려 가지고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서 정진을, 그 건강한 몸과 상쾌한 정신으로 도를 닦아서 드디어 대도(大道)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때 아까 말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의 비구들은 ‘대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단식(斷食)을 하고 그렇게 고행(苦行)을 하기로 해 놓고서 떠억 처녀가 갖다 바친 유미죽을 잡순 것으로 봐서 타락(墮落)을 했다. 벌써 변심(變心)을 했다. 그래 가지고 무슨 대도를 성취하겠느냐?’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러한 타락한 변절(變節)한 태자(太子)하고 우리는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이래 가지고 그이들은 태자 있는 데로부터 떠나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네끼리 공부를 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다섯 비구들을 떠나보낸 뒤 계속해서 정진을 해 가지고 드디어 대도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 부처님 오신날은 정말 우리가 어떠한 최고의 방법으로 그날을 축복을 해 드리고 경축(慶祝)을 한다고 해도 모지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을 안 하셨다면 우리는 계속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五欲樂)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이다.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들이 전부다'고 하는 이런 데에 빠져 가지고 그것을 구하면 구할수록 탐진치에 불은 왕성히 타올라 가지고 계속 탐진치의 괴로운 불더미 속에서 헤매다가 죄(罪)를 짓고 그 죄 지은 죄로 인해서 다시 또 내생(來生)에 삼악도(三惡道), 육도(六道)를 윤회(輪廻)를 하면서 영겁(永劫)을 두고 고해(苦海)에서 헤맬 것을, 부처님께서 탄생을 하셔 가지고 그러한 위대한 묘법(妙法)을 설하셔서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백천만 겁에 몸을 바꾸어 나면서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이러한 행복의 씨를, 행복의 불을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나에게 목숨을 바쳐라’ 이렇게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못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가르쳐 주신 그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도를 닦으면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며, 그렇게 열심히 닦아 가지고 참나를 깨닫게 된다면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참아들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께서 바라신 것은 오직 그것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오신날을 기해서 이렇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등불을 모다 켜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복(福)을 받기를 소원을 하고, 소원성취하기를, 소원을 모두 하셨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빌기보다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그날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날인가에 대해서 그것을 봉축하고 축하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실 것이며,

나아가서는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진리법, 그 진리법도 팔만대장경 팔만사천법(八萬四千法)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법인 참선법(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참선법을 깊이 믿고 이것을 옳게 지도 받아서 열심히 실천을 하심으로써 우리의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완성을 해서, 영원히 생사 없는 진리를 이 몸으로 구현(具現)해서, 부처님의 등불을 이어 받아서 나 자신도 영원히 생사 없는 진리 속에서 하나가 되고, 일체 중생을 이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자가 되는 것만이 오늘을 참되게 축복하고, 참되게 복을 받는 가장 올바르고 지혜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 우리는 정말 크고 작은 모든 소원(所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을 바래가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옹졸한 원(願)을 세울 것이 아니라, 크고 두렷하고 원만하고 위대한 원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한다면 조그마한 원은 그 가운데 저절로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대승불교,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불공(佛供)하는 법이요, 기도(祈禱)하는 법이요, 축원(祝願)하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불자(佛子) 여러분! 사부대중 여러분!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이 몸을 새로 바꾸지 아니하면서 새로 태어날 날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생사는 육체 태어난 것으로써 생(生)을 삼고 육체 죽은 것으로써 죽음[死]을 삼는 이러한 생사관은 표면적(表面的)인 생사관(生死觀)에 지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사는 우리의...(녹음 끊김)


생사를 생사인 줄 알고 그 생사가 무섭고 중요한 것이라고 알고, 한 생각 일어날 때 퍼뜩 정신을 채려서 ‘이뭣고?’ 그 한 생각이 꺼질 때 퍼뜩 정신을 채려서 ‘이뭣고?’를 하고 이렇게 단속(團束)을 해 나간 사람에게는, 그이에게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아니한 것입니다.


생사를 이 육체의 생사로만 생각하고 ‘앞으로 내가, 지금 한 이십 삼십이니까 앞으로 내가 적어도 사오십 년은 살 것이다’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하고 생사가 두려운 줄 모르고 그럭저럭 살다가는, 정말 생사는 눈 한번 감었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아무리 후회를 하고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질 때 그때 생사의 두려움을 느끼시고 생사의 무상(無常)함을 느끼시고 ‘이뭣고?’ 그때마다 ‘이뭣고’를 간절히 챙겨서 관조(觀照)를 하신다면 우리는 바로 그때그때 생사(生死)의 업(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생사(生死)의 인(因)을 짓지 않고 진리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한 생각을 단속하고 불법을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참불법을 만난 사람이요,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진짜 부처님 제자(弟子)요, 대복(大福) 무량(無量)한 복(福)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 진리를 믿고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아직도 참선이 좋다고 한 말만 듣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천을 아니하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경신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 날을 기(期)해서 누구 못지않게 철저한 최상승(最上乘) 불자가 되어서 자기가 자기를 돌이켜 깨달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도록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부탁을 드리고자 한 말씀은, 앞으로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양력으로 6월 1일 날이...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결제(結制)날이 됩니다. 결제는 여름 석 달 동안 특별 수련을 하는 참선(參禪) 기간입니다.

도로계획으로 이 절이 철거가 언제 될는지를 몰라서 여름결제를 망설였습니다마는, 우리는 단 한 달이라도 두 달이라도 또는 석 달이라도 우리가 모여서 열심히 정진해야만 하기 때문에 여름결제를 갖기로 결의(決意)를 했습니다.


신도 여러분들은 인연 따라서, 아마 전강 조실 스님께서 지으신 이 아래 선방(禪房)에서 결제(結制)를 갖는 안거(安居)는 금년 여름이 마지막이 되지 아니할까 생각을 합니다.

조실 스님의 법(法)을 추모(追慕)하는 불제자(佛弟子) 여러분들은 좁지마는, 좁고 어둡고 답답하지만 조실 스님의 입김이 서려 있는 그 소박한 선방에서 금년 안거를 가짐으로 해서 조실 스님의 위대한 법(法)에 은혜를 마음껏 받아서 그 가피(加被)로 대도를 성취하시게 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매년, 매월 음력 24일에 법회(法會)를 가졌었습니다. 그 관음재(觀音齋) 법회를 가져 왔었는데 지난달부터는 양력 첫째번 일요일에 법회를 갖기로 변경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공서(官公署)나 직장에 다니신 불자님들도 법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機會)를 드리기 위해서 여러 신도분들의 여망(輿望)에 따라서 그렇게 변경을 하게 되았습니다. 그래서 아빠 엄마 누나 동생들 전부 손에 손을 맞잡고 이 법회에 첫째번 일요법회에 참석하셔서 온 식구가 고루고루 정법의 광명을 받아 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혹 ‘일주일 동안 공사(公私) 간에 너무 신경을 쓰고 피로한데 나는 오늘 집에서 편안하니 쉬고 싶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렇다면 나도 법회에 못 가겠다' 이래 가지고 아빠 때문에 보살님까지 법회에 참석을 못 하신 분도 상당수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어떠한 방법을 쓰든지 어떠한 아양을 떨던지 잘 달래고 꾀수고 해 가지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법회에 같이 참석을 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남편을 최선을 다해서 정성스럽게 받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

집에서 쉰다 해도 혹 몸은 좀 쉬어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절에 경건한 마음으로 같이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거기에서 좋은 말씀을 귀담아듣고서, 거기서 어떠한 인연에 맞는 감명 깊은 말씀을 듣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처(安息處)를 찾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루, 집에서 억지로 좀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뭐 책 좀 봤다 그러면서 쉰다면 그것이야말로 잠깐 동안 쉬는 것이 될 것이지만, 법문을 듣고 참선하는 법을 알아서 일생 동안 옳은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참나를 찾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무량겁(無量劫)을 편안하게 사는 길을 배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부인의 공덕이야말로 이 세상에 현모양처는 그 이상의 현모양처(賢母良妻)가 없을 줄 생각합니다. 남편을, 공사(公事)는 벼개공사가 제일이라는데, 법회에 모시고 나올만한 수단이 없어서 가지고야 무슨 지혜로운 주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주일 후에 결제 때는 동시에 백일기도(百日祈禱)를 봉행(奉行)을 합니다. 백일기도에도 참석하시고 또 결제도 하시고 하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많이 오셔서 동참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등(燈)을 모다가 켜셨을텐데 연등을 켜신 분도 계시고, 또 이 주름등을 켜신 분도 계시고 합니다마는 무슨 등(燈)을 켜시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각기 인연(因緣) 따라서, 무슨 연등을 켰다고 해서 복(福)을 더 많이 받으신 것도 아니고, 주름등을 켰다고 해서 복을 적게 받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각기 성의(誠意)를 다해서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우리의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하고 부처님의 광명을 우리 가정에, 내 가슴에 켠다고 하는 그러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등불을 켜시는 것이니까, 문제는 정성(精誠)이 중대하지 등(燈)의 모냥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 경건한 마음으로, 유쾌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지냄으로 해서 무량겁(無量劫) 업장(業障)이 다 오늘로 다 소멸이 되시고, 영겁을 두고 꺼지지 않는 등불을 오늘 여러분의 가슴속에 켜신 채 오늘 하루를 뜻있게 보내시고 오늘부로 최상승(最上乘) 불자(佛子)가 되셔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20분45초~42분3초) (끝)





[법문 내용]


(게송)수지왕사일륜월~ / 불기(佛紀)에 대한 학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의 모습.

지나치게 편안한 데 빠지거나, 지나친 고행의 양 극단이 아닌 지혜로운 수행 / 적당한 의식주와 '일어났다 꺼지는 우리의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團束)하느냐’ 거기에다가 우리의 모든 정성을 집중해야.


부처님의 은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참나를 깨달아라' / 자신도 영원히 생사 없는 진리 속에서 하나가 되고, 일체 중생을 이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자가 되는 것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불공 기도 축원하는 법이다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질 때가 생사(生死), 그때마다 ‘이뭣고’를 간절히 챙겨라 / 법회 참석의 중요성.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셨는가?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느냐? 우리 중생들도 부처님과 조끔도 다름없는 만고(萬古)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등(燈)을 가지고 있으니, 부처님께서는 그 등에 불을 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법은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그것만이 아니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의 모습인 것입니다.


종이로 쓰여 있는 경전만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의 전부(全部)라고 생각하신 것은 부처님의 진리를 잘 이해를 못하신 사람의 보는 바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참으로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그 소리 가운데에는 성현(聖賢)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착하고 아름다운 소리뿐만이 아니라 욕을 하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요새 공해(公害)로 공장에서 울려 퍼지는 그런 소리까지도 전부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고의 진리의 일면(一面)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 갈 때 우리는 온 육도법계(六道法界)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살아 있는 설법(說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이로 된 경전만이 경전인 줄 알고 그 경전(經典)에 집착(執著)하고 밤낮 그것을 뒤적거리고 그것을 읽고 외우는 것만이 부처님의 경전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본 장님이 ‘코끼리는 구렁이같이 생긴 것이다’ 하고 집착을 하고 우기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도(道)는 너무 사치에 빠지고 편안한 데 빠져서 도를 닦아도 그 도는 올바른 수행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써 위주를 삼는 그러한 수행법도 지혜로운 수행법이 아닌 것입니다.

적당하게 먹여주고, 적당하게 재와주고, 적당하게 입혀주는, 그러면서 우리가 정신(精神)을 차려야 할 것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는 우리의 그 생각,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야무지게 잘 단속(團束)을 하느냐’ 거기에다가 우리의 모든 정성을 집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질 때 그때 생사의 두려움을 느끼시고 생사의 무상(無常)함을 느끼시고 ‘이뭣고?’ 그때마다 ‘이뭣고’를 간절히 챙겨서 관조(觀照)를 하신다면 우리는 바로 그때그때 생사(生死)의 업(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생사(生死)의 인(因)을 짓지 않고 진리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한 생각을 단속하고 불법을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참불법을 만난 사람이요,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진짜 부처님 제자(弟子)요, 대복(大福) 무량(無量)한 복(福)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말에 집에서 쉬는 것은, 혹 몸은 좀 쉬어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법회 때, 경건한 마음으로 같이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거기에서 좋은 말씀을 귀담아 듣고서 거기서 어떠한 인연에 맞는 감명 깊은 말씀을 듣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처(安息處)를 찾는 것’이 될 것입니다.


법회에 참석을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하는 법을 알아서 일생 동안 옳은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참나를 찾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무량겁(無量劫)을 편안하게 사는 길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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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2. 24. 11:02

 

 

((세등선원No.28))—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결제 법문(80.05.30) (54분)

(1/3) 약 18분. (2/3) 약 18분. (3/3) 약 18분.

(1/3)----------------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한데  기조녹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쪼각 흰구름은 강(江) 위로 오는데,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가는고.

 

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낭기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2/3)----------------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락(苦樂)을 같이 하기 위해서 이 세등선원에 모인 사람은, 세상에 모든 인연(因緣)을 다 끊어 버리고 진실(眞實)로 오직 이 생사대사(生死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대중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順應)을 하면서, 인사(人事)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다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사(人事)를 다 닦아야 하는 것이지만,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원에 들어온 이상은 일체 인사를 다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사를 추리기로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환갑이라고 가야 하고, 결혼식 한다고 가야 하고, 누구 죽었다고 가야 하고, 사십구재라고 가야 하고, 백일이라고 가야 하고, 소상(小喪) · 대상(大喪)이라고 가야 하고, 이렇게 인사를 추리고 다니다 가서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이여.

 

주지(住持) 같은 것을 맡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없이 모다 그러한 인사로 오고 가고 하는 수가 있지만, 대중처소(大衆處所)에 한 번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온 이상에는 그러한 인사를 밖으로 다니지 아니해도 그것이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니여. 해제(解制)한 뒤에 얼마든지 인사를 닦을 수가 있는 것이여. 결제(結制) 중에 안 가는 것은 실례가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 가는 것이 인사를 잘 닦는 것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옛날부터 결제 중에는 자기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오더라도 그 부고장(訃告狀)을 본인에게 보여주지 아니하고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해제가 한 다음에사 '이러한 부고가 왔었다'고 하는 것을 알려드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사(人事)를 다 끊어 버리고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하되, '인연 따라서 수용한다'고 하는 것은, 죽이면 죽, 밥이면 밥, 보리밥이면 보리밥, 찰밥이면 찰밥, 반찬이 짠지면 짠지, 된장찌개면 된장찌개, 한 가지도 좋고 두 가지도 좋고 닥치는 대로 먹되, '이렇게 먹어 가지고 어떻게 영양이 보충이 안 되아서 이래 가지고 어떻게 공부를 할까?’ 그것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여. 왜 그러냐?

 

아무리 잘 먹어도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 오욕락(五欲樂) · 탐진치(貪瞋癡)로써 생활을 해 나간 사람은 그것이 살로 가지를 않는 것이고, 오히려 잘 먹는 것이 원인이 되아서 병(病)이 나는 것이고, 짠지나 된장찌개 한두 가지를 가지고 잡곡밥에 밥을 먹어도 탐진치 삼독(三毒)을 돌려서 참선(參禪)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것만 먹어도 충분히 몸을 유지해 나가게 되는 것이여.

이것은 삼천년을 두고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고인(古人)들이 다 실천으로써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어. 산중에 어느 선방, 또는 일본에 그 큰 선방을 가보더라도 짠무 김치, 닥꽝 김치 하나에 된장찌개만 가지고도 영양실종이 되어서 병이 났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어도 충분하게 건강을 유지해 나가고 다 도(道)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한다' 이것입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먹고 입고 이 의식주 문제에 관해서는 그때 형편에 따라서, 오직 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면서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잠은 9시부터 3시까지 그 때를 제외하고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내에 외출(外出)을 하지를 말며, 대중적으로 특별히 허락할 때가 아니면 일체 경(經)을 읽고 외우는 것도 허락을 하지 아니해.

'이렇게 해서 3년간을 한결같이 간절하게 알뜰하게 정진을 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서도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니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몽산(蒙山) 스님께서 대중(大衆)을 향해서 다짐을 하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공부해서 3년을 해 가지고 견성을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맹세(盟誓)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그렇게 3년을 하면 틀림없이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맹세를 하신 것이여.

과연 우리도 지나간 세월을 두고 그렇게 공부를 했던가! 냉정하게 반성(反省)을 해 보고, 그리 못한 사람은 그와 같이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하되 덮어놓고 말 아니한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잠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밥을 굶는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어떠한 그러한 행동에만 치우친, 치우친 행동으로써 공부를 삼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말을 많이 아니한다든지, 음식을 과식을 아니한다든지, 너무 잠을 많이 잔다든지, 이러한 것들이 분명 공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 아니한 것 자체를 궁극에 공부의 목적을 삼는다든지, 잠을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든지, 밥을 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근본(根本)을 망각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에 대오(大悟)를 해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셔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최초에 법문(法門)을 하실 때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지나친 호강을 하는 것도 성실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지만, 너무 지나치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로 공부를 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고 하면은 부처님을, 정반왕(淨飯王)의 명령을 받어서 '부처님을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기어코 모시고 오라. 태자를 모시고 오라' 한 당부를 받고 온 그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들이, 너무 부처님이 발심(發心)을 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도 따라서 출가(出家)해 가지고 도를 닦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도(大道)를 성취할 때까지는 결단코 밥을 먹지 말자,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말자' 이렇게 모다 맹세를 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하룻날, '내가 이렇게 밥을... 덮어놓고 음식을 굶고 육체만을 갖다가 들볶는 이러한 고행(苦行)만을 가지고서는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겠다. 그러니 어쨌튼지 이 몸에 필요한 만큼은 먹여주면서 기운을 챙겨 가지고 그 깨끗한 정신으로 공부를 해야만 이 도(道)는 이루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강으로 가셔서 목욕을 하고, 그때 마치 수자타(Sujātā)라고 하는 마을의 처녀가 유미죽(乳糜粥)을 써 가지고 오는 것을 보시고, 그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유미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교진여들은, '아하. 태자가 마음을 변했구나. 마음이 변해 가지고 도심(道心)이 약해져 가지고 저렇게 수자타가 갖다 바치는 죽을 받아 자셨구나. 그래 가지고서는 우리의 처음에 약속이 다르지 않는가. 싯달태자는 타락(墮落)을 했다. 변심(變心)을 했다. 타락하고 변심한 태자와 우리가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같이 있어 봤자 우리까지 타락을 하고 물들겠다. 그러니 우리는 태자를 버리고 딴 데로 가자'

이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서 녹야원(鹿野苑)이라고 하는 곳으로 떠나가서 자기네끼리 도를 닦고 있었던 것이여.

 

부처님께서 도(道)를 깨달라 가지고, '최초에 내가 누구를 향해서 최초(最初)에 법을(法)을 설(說)할 것인가?' 생각해 보신 결과, 녹야원으로 가서, '그래도 나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 교진여들 다섯 사람이다' 이리 생각을 하시고 교진여가 있는... (녹음 끊김)

 

육체를 갖다가 들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았기 때문에, 고행(苦行)으로써 공부의 목표(目標)를 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성(聖)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잘 먹고, 너무 잠을 많이 자고, 잘 입고, 호강에 빠진 공부가 또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中道)'—지나치게 호강에 빠지지, 편안, 안일(安逸)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게 육체를 들볶지도 아니하는, 적당한 선에서 자고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입되, 그 가운데에 어디에다가 우리에 정진(精進)의 핵심을 맞춰야 하느냐?

본참화두(本參話頭),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하라고 하냐 하면, 단전호흡을 하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만을 간절히 들어 나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머리로 모여서, 피가 머리로 모이고 기운이 머리로 모여 가지고 뒤통수가 뜨끈뜨끈 열이 오르고 모가지가 빳빳해지고, 그래 가지고 맑은 정신이 없어지고, 공부만 하려고 화두만 들려고 하면 골치부터 아파.

이래 가지고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먼저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수승화강(水昇火降), 시원한 물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머리가 시원해지고, 더운 불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서 단전(丹田) 부위 하복부(下腹部)가 따뜻해지도록.

이렇게 해서 시원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더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야 혈액순환이 잘되고 몸이 가볍고 머리가 깨끗하고, 이리해서 몸은 건강해지고 공부는 지장이 없이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직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들 뿐이지, 무슨 정신 헷갈리게 단전호흡을 하냐?' '단전호흡(丹田呼吸) 할라, 화두(話頭) 들라 하면은 정신이 두 갈래로 갈라져 가지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 화두만을 들어야지, 무슨 단전호흡이 필요 있느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화두만 들면, 다행히 그렇게 들어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잘 들리고 수승화강이 잘되어서 조끔도 상기병(上氣病)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좋지만, 까딱하면 상기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지면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안 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제절로 단전호흡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화두만 떠억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된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이 말이여.

그래서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허리만 쭉 펴도 저절로 그 가운데 단전호흡이 되고, 단전호흡이 되면서 화두도 떠억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정신이 헷갈리기 커녕은 오히려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18분45초~36분20초)

 

 

 

 

(3/3)----------------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잠깐 머물르는데—들어마실 때에 ‘코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차츰차츰 저 깊이 아랫배까지 밀어 넣는다’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숨을 저 뒤에, 저 궁딩이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를 말고 약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신다.

 

쭈욱- 저 뒤에서 일직선으로 잡아댕겨.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팔부쯤만 들어마셔.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꼭 3초가 아니라, 약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쉬는데,

이리 해서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로, 저 뒤에로 내밀어 버리는 기분으로 배를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이 하라.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들어마셔 가지고, 머무르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머무르는 호흡을, 머물렀다가 호흡을 쑤욱 뒤로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이 약 5초 동안, 4~5초 동안.

 

이렇게 해서 모두 한 번, 들어마셨다가 · 머물렀다가 · 내쉬는데 약 10초나 11초, 이런 정도가 걸리도록.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또 조끔씩 길게 해도 상관이 없는데, 억지로 그 시간을 늘리려고 무리를 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억지로 무리를 해서 하면 서너 번도 못해서 벌써 숨이 가빠지고 힘이 들어서 오히려 못쓰는 것이니까, 아주 그 30분 동안을 계속해도 조끔도 힘이 들지 않고, 한 시간을 그렇게 해도 힘이 들지 않도록 조끔도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그때 화두(話頭)를 들어라.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안 내고 그렇게 하라.

 

또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하되, 눈은 항상 평상(平常)으로 뜨고 해야 하는 것이여.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눈을 감고 하는 것이 공부가 더 잘된 것 같고, 더 마음이 편안한 것 같고 고요한 것 같은데,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만 절대로 눈을 감고해서는 아니 돼.

눈을 감고 하면 까딱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기 쉽고, 나중에는 이상한 것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해야 성성(惺惺)하고 그러한 잡된 것이 어리대거나 보이는 법이 없다 그 말이여.

 

눈을 평상으로 뜨고 호흡은 극히 자연스럽게 하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천천히 그렇게 하되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떠오르는 생각을 버리려고 하거나, 쫓아내려고 하거나, 그것을 누르려고 하지를 말고, 그냥 고대로 나두고 나는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화두만 딱! 들어버린다 그 말이여.

화두만 딱! 들어 버린 것이 그것이 가장 간단하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지난날 며칠 전에 삼일 동안에 가행정진(加行精進)을 대중들이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더울수록에 더욱 가행정진을 하고, 추울 때에는 추울수록에 가행정진을 하고, 몸에 상태가 안 좋으면 상태가 안 좋을수록에 오히려 정신을 가다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하고, 이리해야 이것이 참선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더운 때를 맞이해서 가행정진을 했다고 하는 사실은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위해서 한 것이지만, 대단히 기특하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까지 석 달 안거(安居) 중에 절반이 지내가고, 앞으로 한 달 반이 남았습니다. 지내간 한 달 반보다도 이제 정말 삼복(三伏)더위가 남아 있습니다. 삼복더위에 그 땀은 줄줄줄줄줄 흐르고 땀띠기는 등어리로 모다 궁뎅이로 땀띠가 나 가지고 긁을 수도 없고, 가렵고 쑤시고 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참 어려운 고비가 남았습니다.

 

그래도 지옥에 가서, '가사(袈裟)를 입은 사람이 정진(精進)을 제대로 못하면 까딱하면 그 가사를 다시 다음 생에 입지를 못하고 지옥(地獄)에 가기가 쉽다'고 하는 것을 고인(古人)들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대중들은 틀림없이 금생(今生)에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내생(來生)에 또다시 사람 몸을 받아서 다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밝히게 되리라고 생각은 되지마는, 만에 하나라도 내생에 지옥고(地獄苦)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금생에 궁딩이에 땀띠가 좀 나고 더운 것쯤이야 오히려 그것을 더 계기 삼아서, 동기 삼아서, 발판 삼아서 더 가행정진을 하되, 지혜스럽게 단속(團束)을 해야 한다.

가행정진을 한답시고 어리석게 공부를 하면, 공부는 성취되지 못하고 병만 나고 다른 사람에게 폐만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지만, 그 대신 지혜롭게 단속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단속한 것이냐?

여태까지 말씀드린 바로 그것이 지혜롭게 단속하는 것이다.

 

어리석게 단속을 하고 어리석게 공부하는 사람은 병(病)만 툭 터져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갖다가 걱정만 끼치고 공부에 큰 지장만 초래하는 것이고,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하는 사람은 그 힘을 얻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발심(發心)을 허것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하라. 굳게, 긴(緊)히 화두(話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할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되게 강추위를 한 뒤 끝에 핀 매화라야 그 향취가 코를 치도록 진동(振動)한 것이다.

그러니 가행정진 용맹정진,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말 알뜰히 단속하여서 철저하게 정진을 해야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경신년 하안거(夏安居) 반살림인 동시에, 수원 청룡사 영선 묘길 비구니 스님과 진주 대원사 총무로 있다가 너무 불사(佛事)에 골몰하다가 과로해서 돌아가신 성옥 행원 비구니 스님의 사십구재(四十九齋) 날입니다.

우리와 같이 출가수행인으로서 일생 동안을 참선을 하고, 또 불사를 하고, 교화(敎化)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위해서 일생 동안을 애를 쓰다가 너무 과로한 탓으로 해서 홀연히 이승을 하직(下直)을 했습니다.

 

일생을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위해서, 불사(佛事)를 위해서 애쓰던 분들이라 반드시 다시 또 새 몸을 받아나 가지고 우리와 같이 또 공부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 틀림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과거 전생(前生)에 지은 업(業)이 남아 있다면, 오늘 이 반살림 법문을 통해서 그러한 업이 춘설(春雪)같이 다 소멸(消滅)이 될 것이고, 도솔천내원궁이나 극락정토 또는 이 사바세계에 속히 돌아와서 일대사(一大事)를 밝혀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부처님께 축원(祝願)을 합니다.

 

생사(生死)는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가 없기 때문에 해탈할 것도 없고, 원래 우리의 불성(佛性)자리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조끔도 다름이 없어서 진묵겁(塵墨劫) 전에 깨달라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상태여 다시 깨달을 것도 없고, 지금 영가(靈駕)는 업(業)으로 뭉쳐진 사대육신(四大肉身)을 인연이 도래(到來)해서 다 버렸을 뿐이요, 오직 그 신령스러운 영각성(靈覺性)만이 이 법상 앞에 참석을 했습니다.

산승의 설법을 빌릴 것도 없이, 그 영각(靈覺), 원각대지(圓覺大智)만이 홀로 드러난 이 상태라, 누구보다도 잘 이 도리를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알 것입니다.

 

대중과 이 자리에 청혼(請魂)된 영선 묘길 영가, 성옥 행원 영가는 주장자를 통해서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보일 것이니,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이 도리와 계합(契合)이 될 것입니다.

 

쿵!(주장자로 법상을 내려치심)

 

남은 반살림 열심히 정진(精進)하셔서, 일생을 통해서 이 한 철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해결하는 중대한 계기(契機)가 되도록 힘써 줄 것을 당부하고 말을 마칩니다.(36분22초~54분1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린다 /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조사관(祖師關)은 곧 화두(공안)을 말함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화두를 관(觀)한다'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 공부는 근본을 망각하지 말고 지혜롭게 해야 / 정진(精進)의 핵심은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 /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된다.

 

단전호흡 방법 /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해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비구니 스님의 49재. 생사는 원래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나'이니,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도리(道理)는 너무나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래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의지하(大意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이 무엇고?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에는,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됩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무엇고?’ 하고 다시 한 번 화두를 드는 것이여.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부처님께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하신 최초의 법문은 '중도(中道)'의 수행을 말씀하심.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근본(根本)을 망각(妄覺)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해야 하는가.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까딱하면 상기병(上氣病) 같은 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져서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아니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저절로 단전호흡이 되고.

나중에 화두만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되고,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참선의 바른 자세(姿勢)와 호흡(呼吸)에 대한 상세한 말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해나가야 이것이 참선(參禪)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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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0. 12. 22. 13:09

((No.054))—1977년 9월 관음재일(77.09.24) (58분)

(1/3) 약 21분. (2/3) 약 18분. (3/3) 약 19분.

(1/3)----------------

 

지난 음력 8월 24일에 뵙고, 한 달 만에 참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됩니다. 다른 달에는 한 달에 두 번 내지 세 번씩 법회가 열리지마는 8월과 9월은 한 달에 한 번씩, 한 번 밖에는 법회가 들지 안 했습니다. 오랜만에 뵈니까 좀 반가운 거 같습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은 정법(正法), 여러분들이 잘 들으신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 정법이냐?

언필칭 말하기를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다. 어느 절에 간들 다 부처님을 모셨으니 부처님은 한 부처님인데' 이런 말씀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지마는, 그 부처님의 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에 따라서—한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한 법이 정법(正法)이 되기도 하고, 삿된 외도법(外道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은지 10년, 20년, 30년 내지 일생을 믿어도 스승을 잘 못 만나고, 믿기를 잘못 믿고, 행하기를 잘못 행하면 일생을 믿은 불법(佛法)이 정법을 믿지 못하고 사법(邪法)이 되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정말 일생을 그렇게 돈독하게 불법을 믿고, 그렇게 간절히 불법을 믿었지마는 스승을 잘못 만나, 잘못 행하므로 해서 일생을 삿된 불법을 믿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를 믿고 불법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는, 신앙을 하는 우리 불제자(佛弟子)들은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은 그 많은 시간을 그 많은 정성을 바쳐서 '부처님 신도다, 불교의 신도다' 하면서 일생을 헛되게 보내고. 삿된—'불법을 믿는다'고, 이름은 불법이지마는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삿된 외도법을 믿고 행하므로 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영혼이 과연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생각해 보면 한심스럽고 가련하기 이루 다 형언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우리 절에 구십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여름 한 철을 참선을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을 그 부처님을 믿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 불교 신자 노릇을 했습니다.

 

허나 '참선(參禪)이 좋다, 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을 하면 그렇게 좋다' 이런 말씀을 어디서 듣고, 참선을 한 데를 한번 가서 같이 앉아서 참선을 해 보니까 아무 재미도 없고 졸음만 와 쌓어 그래서 '아! 이것 참선이라는 게 졸음이 와서 아무 맛이 없고, 그 할 것이 아니로구나. 참선이라는 게 천하 못쓸 것이로구나' 이리 생각하고서 다시는 참선을 할 생각을 아니하고, 그저 염불하고 경을 외우고, 천수경을 읽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돈과 쌀을 가지고 가서 불공을 드리고 이렇게만 일생을 사시다가,

어떻게 해서 그 다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다. 참선을 잘 가르켜 주신 스님이 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 이 용화사에 와서 한 번 '구십이 넘었지마는 한 철을, 한 철만이라도 그 참선을 한번 해 보고 죽는 것이 한이 없겠다' 이렇게 해서 신청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그 처지와 그 말씀이 하도 참 고맙고, 기특하고 또 한편 우습고 그래서 "그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십 노인이 어떻게 이 대중선방(大衆禪房)에 와 가지고 석 달 동안을 새벽 세 시에서부터서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염려가 됩니다마는 그 마음만큼은 참 그렇게 고맙고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은 좋으시다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다른 할머니들도 모다 하시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방부(房付)를 받아 가지고 한 철을 나셨습니다.

 

절에 다니셨다 해도 대처승 절에 그 불공이나 드리러 다니셨기 때문에 전연 선방에 규칙이나, 선방 생활에 대해서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신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착하고, 어질고, 점잖하고 그리고서 너무나도 천진난만하신 할머니였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선방에 처음 나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무리가 없이 여러 수십 명 대중 보살님네들이 친어머니 받들듯이 그렇게 모다 친절한 마음으로 돌봐주시고 해서 한 철을 아무 무리가 없이 한 철을 지내시고서 참 기쁜 마음으로 환희심으로 해제(解制)를 마치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할머니가 한 일주일 전에 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아무 병환도 없이 앉아서 떠억 참선을 하시다가 고대로 허리를 구부린 채 임종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평생에 신심이 돈독하고, 마음씨가 착하고 그러셨기 때문에 이렇게 열반(涅槃)을, 정말 보통 말하기를, 병 없이 이렇게 앉아서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을 하신 것을 '조사(祖師) 열반이다'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마는,

어찌 조사라고 해서 꼭 병환이 없이 돌아가시란 법도 없는 것이고, 또 조사가 아닌 일반 세속 사람도 돌아가실 때 참 병환 없이 아주 임종을 잘하신 분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어서 돌아가실 때 꼭 병환이 있고 없는 것 가지고, 그분이 도(道)가 있고 없는 것을 가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마는, 그렇지마는 기왕이면은 임종할 때에 그렇게 무서운 견디기 어려운 병환을 겪지 아니하고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고 하는 것은 인생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할머니께서 일생을 착하고 정직하고, 남 적악(積惡)한 일 없이 어떻게 믿었던지 간에 부처님을 돈독히 믿으셨고, 마지막 판에 가서 이 용화사 선방에 와 가지고 한 철을—화두를 새로 타고, 앉는 법을 새로 배우고, 발우(鉢盂) 펴는 법을 새로 배우고 이렇게 해서 한 철을 잘 지내신 그 공덕으로 해서 이 할머니는 결정코 내생에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해 가지고 다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귀의하셔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셔 가지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의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과연 정법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가까운 데 있으면서도 정법에 귀의(歸依)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구십 평생을 불법을 믿고 사셨지마는 일생 동안을 그 무당과 비슷한 대처승 절에 다니시면서 불공이나 드리고 복이나 빌고, 그렇게 일생을 지내시다가 구십 평생의 마지막 해에 가서 참선법을 믿고 몸소 선방에서 참선을 하시다가 끝을 마치신, 그렇게 정법 만나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중생,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문중에 귀의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한 과거에 숙연(宿緣)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정법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일러주어도 좀해 그것이 좋다고 하는 생각까지는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편설(方便說) · 외도(外道) · 사법(邪法)에는 그 귀가 솔깃하고 그래 가지고 거기에는 물심양면으로 거기서 시키는 대로 아주 죽은 형용까지도 하면서 미쳐서 혹(惑)해 반해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면서 정법문중에 들어와서는 한 번 두 번 들어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는 안 와 버리거나 그러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사람은 나무를 볼 때에 파랗게 잎이 피고, 빨갛고 누렇게 꽃이 핀 그리에만 눈을 주기가 쉽고, 땅속에 묻혀 있는 나무에 뿌리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 몸뚱이나, 가지나, 잎이나, 꽃이나, 열매가 전부 그 뿌리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데에는 도저히 가지가 뻗을 수가 없고, 잎도 필 수가 없고, 꽃도,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사법에 의지한 사람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얻어진 것 같고, 재미가 있고 곧 크게 소원을 성취할 것 같지마는 해가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허망한 삿된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법에 빠진 사람은 곧, 당장 무슨 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자기도 혹해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고,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이웃 · 친구 · 일가친척을 전부 끌어들여 가지고, 거기 장에 사람이 모이듯 사람을 끌고 들어가서 미쳐서 어쩔 줄 모르지마는 머지아니해서 거기에는 실망과 낙망과 후회의 눈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법문중, 불법문중에 있어서 선방편(善方便)과 그러한 외도에 사법(邪法)과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한 점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서 전연 방편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고 대뜸 첫걸음부터서 정법문중에 귀의한 사람도 가끔 있기는 하지마는, 그러한 사람은 극소수,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있을 정도고, 대부분은 방편문에 의지해서 걸려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4년 절에 다니고 법문을 듣고 하다가 차츰차츰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 정법을 믿고 정법에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방편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방편에 의지해서 일단 불법문중에 들어왔다가 그래 가지고 차츰 좋은 도반(道伴), 좋은 스승을 의지해서 정법으로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서 49년 동안을 꼭! 이 정법만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법문이 방편설이 참 많은 것입니다. 방편이 아니면은 중생을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전부가 방편에 의해서 전부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46초)

 

 

 

 

(2/3)----------------

 

방편 자체가 악(惡)하고 선(善)하다고 하기보다는 그 방편을 쓰는 법사, 스승, 선배에 첫째 문제가 있고, 둘째에 가서는 그 방편에 걸려든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성이 삿되고 바르지를 못해 가지고 그러한 악방편만 솔깃하게 생겨 가지고 혹해서 미쳐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러한 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 방편을 쓰는 편에서 그 법사나, 승려나, 선배가 일시적으로 그러한 방편을 사용하되, 적당한 기회에 그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지를 못하고, 계속 어떠한 이권에 욕심을 가지고 그 방편을 계속 사용해 가지고 신도를 꼼짝 못하게 방편으로 얽어매 두는 그러한 스승을 만나 가지고 일생을 정법을 만나지 못한 채 그런 방편법, 악방편에 얽매여 가지고 불교 신도 노릇을 하다가 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동안에 어떻게 불법을 믿었던지 간에 또는 과거에 어떠한 숙연이 있던지 간에 오늘날 우리는 이 법보선원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정법에 관한 법문을 설하신 것을 녹음을 통해서 듣고, 그 설법에 의지해서 참선 수행을 할 수 있게 된 우리의 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다행할 길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고서 그리고서 실천에 옮기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좋은, 아주 좋은 약을 만병통치(萬病通治)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좋은 약을 만나 가지고서도 그 약을 먹지 아니하고 팽가친 채 병고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겨서 열심히 시간을 아끼고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일초일초, 일분일분을 철저히 실천 수행하므로 해서 우리의 무량겁으로부터서 걸려 가지고 신음해 오던 그 중생의 고질병을 금생에 뿌럭지를 뽑아서 근치(根治)를 해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살 활(活)' 자, 활구참선. '죽을 사(死)' 자, 죽은 사구참선, 활구참선은—이론과 어떠한 이로(理路), 어로(語路),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러한 참선은 이것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한다 해도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이 아니고 사구참선입니다.

사구참선은 죽을 때까지 무량겁을 해도,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세하실 때까지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다 해도 그것은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단 일 분을 하고, 단 한 시간을 하더라도 참선을 할 바에는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자기가 아무리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모든 경전을 종횡으로 육두 백판으로 외우고 교리적으로 환히 안다 해도 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그 알고 있는 교리적인 지식, 상식 그러한 것을 이 참선에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이용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것을 동원해 가지고 이 화두를 이리저리 분석해 보고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래가지고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러한 뜻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 이론 따지는 그것을 놔 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 받은 화두 '이뭣고?'

'이뭣고?'면 '이뭣고?' 또는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 화두, 또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화두로 타신 분은 그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무슨 화두가 되었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가운데에 한 가지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화두 하나만을 다못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비단 앉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걸어 다닐 때, 밥 먹을 때, 똥 눌 때, 소지할 때, 빨래할 때, 또는 차를 탈 때,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일어나는 어떠한 생각,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슬픈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기쁜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불같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올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눈으로 어떤 꽃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또는 사람이 지나간 것을 보거나, 산을 보거나, 구름을 보거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거나 또는 귀를 통해서 새가 우는 소리를 듣거나,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거나, 어린아이가 고함을 지르고 우는 소리를 듣거나, 어떠한 것을 보건 듣던 간에 그때 그때마다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참선 수행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면은 당장 그 보는 데에 따라갑니다. 그래가지고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귀로 뭣을 들으면은 그 듣는 일로 해서 바로 나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듣는 그 건으로 해서 이 생각, 저 생각, 10년 전으로 올라갔다가, 5년 전으로 내려왔다가 그러다가 공연히 속이 활딱 뒤집어졌다가, 혼자 웃었다가, 썽났다가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그러한 식으로 망상(妄想) 위에다가 또 망상의 가지를 피우고 그 망상 위에 또 망상의 꽃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그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골냈다가 웃었다가 그러다가 그 지나간 일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생각 한 생각했던 그것이 하나도 딴 데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차곡차곡 우리의 마음자리, 제팔식(第八識) 속에 고대로 녹음(錄音)이 되는 것입니다.

 

녹음이 되고, 그 저장이 되어가지고 그것이 종자(種子)가 되고 원인(原因)이 되어서 앞으로 무량겁 윤회가 그 종자로부터서 그 원인으로부터서 윤회(輪廻)가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한 행동으로 표현이 되고, 한 행동으로 해서 다시 또 생각이 거기에 이어지고, 생각과 행동이 서로—새끼가 왼손에 쥐었던 짚이 오른손으로 건너가고, 오른손에 잡았던 짚이 왼손으로 건너가고 그래서 이렇게 그 손이 움직여짐에 따라서 새끼가 꽈지듯이,

한 생각이 행동으로, 행동에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하지 아니한, 참선을 하지 아니한 범부 중생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무엇인가 봐야 하고, 귀를 통해서 무엇인가 듣기 마련이고, 보고 들음으로 해서 무엇인가 느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사람은 그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이 법을 충실히 이 법을 본업(本業)으로 해서 열심히 살아간 사람에게는 계율을 지키는 일, 또는 염불을 하는 일 또는 주문(呪文)을 외우든, 또는 기도를 하건, 어떤 경전을 반야심경을 외우건 또는 천수를 하건, 그 밖에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건, 또는 오후불식이나 일종을 하건, 또는 방생을 하건, 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시 공덕을 하건, 또는 노인이나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가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좋은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닦는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정법을 닦지 아니하고 계행(戒行)만을 위주해서 닦음으로써 일생 수행을 삼는다던지, 염불을 해 가지고 극락 가기만을 바래 가지고 일생을 염불만을 한다던지, 또는 어떤 주문을 외워 가지고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기 위해서, 주문에 의지해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전전긍긍을 한다던지, 기도를 해 가지고 아들딸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래고 그러한 물질적인 것, 모냥이 있는 것에 얽매어 가지고 계속 기도에 미쳐 가지고 돌아댕기는 그런 분.

 

절을 많이 하면은 업장이 소멸하고, 소원이 성취된다 해 가지고 삼천배, 사천배 절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하루에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면은 세세생생에 부자로 살고, 업장이 소멸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니까 평생에 오후불식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일종(一種)을 하면 좋다니까 일종을 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이렇게 해서 그러한 모냥이 있는 착상구불(着相求佛), 착상 수행, 상(相)에 착(着)해 가지고, 모냥에 착해 가지고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그러한 불법을 믿는 사람, 이것은 모두가 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방편의 올개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러한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 불법(佛法)은 설사 그 사람이 삿된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이 정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일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점잖하고, 그 말할 수 없이 착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은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에 의지한 사람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일체 선법(善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선법이 그 사람에게는 다 선방편(善方便)이요, 정법의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 수단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똑같이 계율을 지키고, 똑같이 염불을 하고, 똑같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보시 공덕을 쌓고 방생을 한다 하더라도 정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 사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는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염불을 하지 말아라. 천수를 외우지 말아라. 『반야심경』을 외우지 말아라. 『금강경』을 독송하지 말아라. 방생을 하지 말아라.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하지 말아라. 또는 노인에 보시 공덕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형편 닿는 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하시라는 겁니다.

하되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서 하는 그 마음으로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가운데에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뻑뻑이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이것이 바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일체 보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하는 그 자체는 남이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마는, 그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다 같이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20분47초~38분35초)

 

 

 

 

(3/3)----------------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활구참선은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론적으로 따지고, 경전에 있는 교리를 등용을 해서 따지고, 자기가 어떤 스님한테 들은 법문을 듣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따져서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렇구나! 아!'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마침내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 죽은 참선이기 때문에 영원히 해 봤자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 가운데 '화두(話頭)는 어떠한 책이나 잡지나 신문, 그러한 데에서 보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화두를 선택하지 말고 반드시 선지식에게 딱! 하나를 받아 가지고 해야 한다'

 

자기 나름대로 어디서 지내가는 말로 듣거나, 책에서 봐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선택을 한 화두는 해 나가다가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이 화두가 좋은가, 나쁜가?' 자꾸 스스로 그것을 혐의를 하고 의심을 해 가지고 중간에 갈팡질팡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공부가 크게 장애를 받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화두를 딱! 지정을 받아 가지고 한 번 받았으면은 다시는 그것을 변경을 하지 말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때까지 일여(一如)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어떠한 화두라도 처음부터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곧 잘될 것 같다가 얼마 동안 해 가면 영 답답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점점 화두가 들리지 아니하면서 그 애를 먹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딴생각을 내지 말고, 잘 그 마음을 써서 한 생각 한 생각, 일 분 일 분을 법(法)답게 간절히 공부를 지어 나간다고 하면은 반드시 그렇게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치도록 애를 먹혔던 그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정말 제절로 화두가 들리면서 순일무잡하게 정진이 되어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간다 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생각 '아! 인자 되었다. 참! 좋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되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되기 마련입니다마는 그 생각이 고약한 망상 중에는 최고 가는 고약한 망상인 것입니다.

 

보통 때,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른 것은 뿌리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절로 없어지지마는, 공부가 한참 잘되어 갈 고비에 이르러서 '아! 참 좋다. 아! 이렇게 계속 잘되었으면' 아, 이러한 생각을 낸 것은 고비를 넘을려고 한 판에 뒷걸음질을 쳐서 천길만길 구렁텅이로 빠져 버린 것과 같애서 그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갈 때에 그러한 생각 내는 것은 아주 타당한 것 같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최고로 고약한 망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 둬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되어도 짜증을 내지 말고, 공부가 잘되어 가도 좋아하는 기쁜 마음을 내지 말고, 계속 한결같이 이 화두를 들고 나가되, 잘 안되어갈 때—가슴이 답답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몸이 뒤틀리도록 괴롭고 지루하고 이럴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그 길을 왔다갔다하면서 포행(布行)을 하는 가운데에 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고요해지고 깨끗해지면 다시 또 방석에 가서 또 정진을 하시는데.

 

이 화두를,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그 환성지안 도사 당시에 월봉 스님이라고 하는 대강사인데 그분이 『원각경』에 있는 말씀 한마디를 법문하신 가운데 잘못 설(說)해 가지고 그 과보로 해서 환성지안 선사에 그 한마디 고함 소리에 금강역사(金剛力士)에, 금강신장(金剛神將)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철퇴를 맞고, 피를 토하고 꺼꾸러진 내용에 법문을 들으셨습니다.

법문(法門)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고, 설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그 법문 한 시간 동안에 걸친 가운데에 여러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충 그 말씀 가운데에 중요한 것을 간추려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생활하시면서, 아내 노릇 하시면서, 남편 노릇 하시면서, 엄마 노릇 하시면서 그 생활 속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질 것이 없습니다. 되건 안 되건 따질 것 없이 자꾸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시면서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일상생활이 마냥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화두를 들 줄 알고 여법(如法)하게 공부를 지어 나가면서 하시면은 사회생활도 썩! 괴롭지마는 아니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도 한량없는 기쁨이 있는 것이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아니한 사람에게는 기쁜 것도 그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六途輪廻)에 윤회의 원인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더군다나 괴로운 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면서 하는 사회생활은 사회생활 그 자체가.... (녹음 끊김)

 

 

돌아오는 10월 보름날이, 음력 10월 보름날이 백일기도 입재 날이면서 동시에 용화사 법보선원 결제 날입니다. 그날도 법회가 있으니 만큼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서로 권고해서 그날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결제에도 동참을 하시고 백일기도에도 동참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2시에 인천시민회관에서 불교도들의 새마을운동에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스님네와 많은 신도님네들이 참여해 주기를 바래고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도 몇 분의 스님이 참석을 하실 것이고 또 여러 신도님 가운데에도 될 수 있는 한 여기서 멀지 아니한 곳에 있으니깐 거기에 잠깐 참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기독교 단체나, 천주교 단체에서는 그러한 모임에 많이 성의를 가지고 참여를 하시는데 불교 단체 특히 우리 용화사에서는 한 분도 참석을 아니하신다고 이러한 그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것은 아닙니다마는 될 수 있으면 참여를 하셔서, 지끔 우리나라가 선진 대열에 서기 위한 비약을 하기 위해서 온갖 면에 있어서 그 활발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운동의 하나가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입니다.

특히 이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선구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불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불교 대한불교 조계종의 한 방침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래고.

 

그다음에 말씀드릴 것은 우리나라 그 조경—조경(造景)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 문화 주택을 가서 보시면은 마당에 돌과 모다 나무, 그런 것을 잘 심어서 보기 좋게 만든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는 고궁 같은 데나 그런 데를 가서도 보시겠고 그런데 그것을 조경이라고 그럽니다.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 마당에다가 돈 들여서 좋은 돌이나 나무를 심어 놓고 사치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조경의 근원이 그러한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화엄경』 도리가—불경(佛經) 중에 최고의 경전이 바로 화엄경인데, 그 화엄경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은 일월성진(日月星辰), 해와 달 · 별 · 산천초목, 이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님의 몸뚱이요, 바람 불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하는 이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의 설법이라고 하는 내용의 진리가 바로 『화엄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경』의 진리, 진리인 우주 자연을 그것을 내 조그마한 뜨락에 구현을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뜰에다가 바위 뾰족하고 둥글고 모나고 삐뜰어지고 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바위를 적재적소에다가 갖다가 배치를 하고, 거기에 어울리게 조화가 되게 나무를 적당히 심음으로 해서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내 뜰안에서 우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우주 자연에 신비스러운 진리를 그 하나의 돌을 보고 하나의 나무를 봄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조경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새 아무나 시켜 가지고 정원사들을 시켜서 이러쿵저러쿵 묘하게 정원을 꾸민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볼 때에, 아는 사람이 볼 때는 퍽 가소롭기 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조경 학계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에 권위자이신 90세가 넘으신 운정 한도 박사께서 그전에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실 때부터서 여기를 여러 차례 왕래하셨고, 조실 스님도 그 한도 선생, 한도 박사가 계신 그 토굴에 왕림을 하셔서 서로 친한 교분이 계시고 또 조실 스님이 열반하신 뒤에도 저도 그 한도 선생 계신 데를 여러 차례 갔고 또 그 한도 선생도 우리 법보선원에 여러 차례를 오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유교 · 불교 · 도교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조경을 그러한 불교에 『화엄경』의 진리를 그러한 조경을 통해서 표현을 하자. 사찰에 조경도 그렇고, 일반 불교 신도에 가정도 역시 그렇게 하고, 고궁도 그렇게 표현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그 조그마한 뜰안에서 바위 하나 나무 하나를 봄으로 해서 거기에서 진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참, 오늘날에 불교의 진리를 펴는 가장 좋은 방편이 된다고 하는 것을 항시 역설을 해 오셨습니다.

 

그 선생님 밑에는 각 대학교수, 사회에 저명인사들이 모다 그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서 제자의 입장에서 그 자연취미회라고 하는 것을 조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취지로 해서 자연취미회에 여러분들도 가입을 하셔서 좋은 조경을 구경도 하시고 또 여러분 가정에 그러한 조경을 하시게 될 경우 이러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하시게 되면은 같은 힘을 들여 가지고도 부처님의 진리에 부합이 되도록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이 자연취미회에 가입을 하셔서 그러한 선생님 높은 선생님들의 좋은 강의도 들으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우리의 정신을 순화하고 그러한 조경 자연취미를 통해서 천진무구한 비로자나 법신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자연취미회에 발기회에 그 회원께서 여러분에게 가입하시도록 말씀을 하시면은 될 수 있으면은 그런 데에 가입을 하시도록 권고를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계속해서 법요식을 진행하겠습니다. (38분37초~57분13초) (끝)

 

 

 

 

[법문 내용]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 90 넘은 노보살님의 한 철 참선수행.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 / 조사(祖師) 열반 / 정법은 근본적인 것, 나무뿌리, 실다운 것. 사법은 지엽적인 것, 끝 가지, 허망한 것.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 모두가 다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 선방편(善方便)과 악방편(惡方便).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면 선방편. 방편에 얽어매 두면 악방편 /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 수행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정법(正法),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사법(邪法). 사구참선은 깨달을 기약이 없다 /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 / 착상구불(着相求佛),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상(相)에 착(着)한 수행은 방편에 얽매인 것 /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다 /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공부해야지, 늙어서 기운 없을 때는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다 / 조경(造景)은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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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