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76~200)2021. 1. 17. 17:20

((No.190))—1983년 입춘 법회(83.02.04) (69분)


(녹음상태가 좋지 않사오니 양해를 바랍니다)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4분. (4/4) 약 17분.

(1/4)----------------


해천공활월성륜(海天空濶月成輪)헌디  호호청파난사은(浩浩淸波爛似銀)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막괴편주능좌우(莫怪扁舟能左右)하라  행선유재파소인(行船由在把梢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해천공활월성륜(海天空濶月成輪)한디, 바다, 넓고 넓은 저 바다 위에  하늘이 툭 틔여서 한정 없이 넓은데, 거기에 둥근달이 밝게 떠 있다.

호호청파난사은(浩浩淸波爛似銀)이로구나. 그 넓고 넓은 바다에서 맑은 물결이 마치 은(銀)을 갖다가, 은가루를 뿌려놓은 거와 같다.

바닷물이 파도를 쳐서 찰랑거리는데 휘황창 밝은 달이 비추니까 그 물결마다 마다 마치 은가루와 은편(銀片)을 갖다가 흩어놓은 거와 같이 그렇게 찬란하다 그말이여.


막괴편주능좌우(莫怪扁舟能左右)하라. 그 바닷 가운데에 조각배가 가는데 그 배가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고, 왼쪽으로도 가고 오른쪽으로도 가고, 그 배 가는 것을 조끔도 괴이(怪異)하게 여기지 말어라.

행선(行船)이 유재파소인(由在把梢人)이니라. 배 가는 것은, 배가 이리가고 저리가고 하는 것은 오직 그 키를 잡은 사람에 달려 있느니라. 배 키를 잡은 사람이 키를 조정하기에 따라서 왼쪽으로도 가고 오른쪽으로도 가고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것이다.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입춘(入春)날인데, 날짜로는 아직도 임술년(壬戌年) 섣달 스무이튿날, 임술년 섣달 스무이튿날이지만, 입춘 · 우수 · 경첩 · 춘분하면 그 절후(節候)로 봐서는 오늘이 입춘날이기 때문에 '봄으로 들어서는 날'이여.

새해 계해년의 봄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날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 오후 6시 40분 정각부터서 계해년 첫 시간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그래서 음양가(陰陽家)에서는 사주(四柱)를 본다든지 그 음양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따지는데 있어서는 아직도 섣달이지만 오늘부터, 오늘 또 6시 40분부터 계해년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 8일이 지나야 계해년 정월 초하루가 되지만, 절후로는 오늘부터서 정식으로 계해년이 시작이 되는 것이여.


그래 입춘날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는 것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 지나간 한 해를 반성(反省)하고 새로 시작하는 이 해에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지기 위해서 입춘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는데, 보통 세속 사람들은 새해에 삼재(三災)가 뱀띠 · 닭띠 · 소띠, 이 사유축(巳酉丑), 이 해에 난 사람은 삼재(三災)가 시작이 된다.

금년에 시작이 되고 내년, 내후년까지 3년 동안 삼재(三災)가 드는데, 그 삼재를 면하기 위해서 절에 가서 불공(佛供)도 드리고 또 좋은 법문(法門)도 듣고, 또 어떤 절에 가면은 부작(符作)도 받고, 또 그 절에 가서 부작을 못 받으면 무당이나 만신집이나 사주 점쟁이 한 그런 데 가서라도 몇만 원, 몇십만 원씩을 주고 그 부작을 사 가지고 와서 몸에 지니기도 하고, 집안에 갖다 붙이기도 하고 해서 오늘 대단히 여러 군데 절을 다니기 위해서 바쁘신 분도 계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용화사(龍華寺)에서는 그러한 부작(符作)을 노놔 드리지 아니하고, 부작보다도 더 영험이 있는 그러한—삼재를 3년 동안만 막는 게 아니라, 일생 동안 내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 삼재(三災), 백재(百災), 천재(千災)를 다 소멸하는 그러한 불에다 넣어도 타지 않는 그러한 부작을 노놔 드리고자 합니다.


삼재를 없애려면 종이에다가 경면주사(鏡面朱砂)로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그래 가지고 그것이 참으로 삼재의 뿌리가 뽑아지냐 하면, 그것은 참 '그리하면 좋다니까' 해 보는 것이지, 참으로 그 삼재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통사고나 무슨 그런 일이 그런 사고(事故)를 났을 때 그 사고 난 사람의 호주머니를 뒤지니까 부작이 나왔다' 이런 신문에 그런 기사도 나오고 합니다마는, 그런 것을 볼 때에 부작을 가졌다고 해서 꼭 삼재가 멸해진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것을 우리는 또 알 수가 있습니다.


삼재(三災)를 참으로 면(免)하려면은 삼재의 원인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삼재의 원인이 무엇이냐?

삼재가 해필 뱀띠나 소띠나 닭띠에 난 사람에게만 삼재가 붙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당사주(唐四柱)를 볼 때에 포태양생(胞胎養生) 이걸 갖다가 붙여서 그래서 인자 삼재가 걸리면은 그걸 '삼재가 들었다' 해 가지고 대단히 그것은 '흉(凶)한 살(殺)이다' 이렇게 모다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그런 말을 듣고 지내 보면 정말 삼재 든 해에는 여러 가지가 어려운 일이 있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들삼재 · 앉을삼재 · 날삼재, 이 삼재 땜을 이렇게 금년에는 했다' 이렇게 해서 틀림없이 그 삼재가 들면은 과연 그러한 좋지 않게 넘어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삼재(三災)가 안 든 사람은 전혀 그러한 어려운 일이 없고, 흉한 일이 없느냐 하면은 또 그렇지도 않죠.

그래서 삼재는 포태양생(胞胎養生)을 붙여서 걸리는 것 그것으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삼재의 그 뿌리는 우리의 생각—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삼재가 일어난다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에 입각(立脚)해서 관찰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정확하고,

그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회향(回向)을 한다면 거기에서 참으로 그 삼재의 뿌리채 소멸을 하는 길이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 삼독(三毒)의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삼재가 생로병사... 삼재(三災)면은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 병들어서 죽어 가지고 장사 지내는 거, 그 포태양생(胞胎養生)이 내나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과 관련이 되는 것인데,

그 십이인연법이라는 것이 낳아 가지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의 그 과정을 갖다가 열두 가지 단계로 노놔놓은 것이 그것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고, 그것이 또 포(胞)는 '안을 포(胞)' 자거든. 남녀가 서로 안아 가지고 포태(胞胎), 입태(入胎)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낳아서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단계가 그 음양가에 있어서는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 이거란 말이여.


그러면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나 포태양생의 그 십이궁(十二宮)이 결국은 그 원인은 한 생각 무명(無明)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因)해서 태어나 가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탐심과 진심과 치심—탐내는 욕심, 내 욕심껏 내 마음대로 안되면은 썽을 내고,

그 한 번 두 번 해 보면, '아하,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내 욕심껏 안되는 것이로구나.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이 안되는 것이로구나. 바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는 곳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도 안되는 일이 더 많구나' 그런 것을 알고서 자기의 분(分) 따라서 노력을 해 나가고.


또 내 마음대로 안된다 하더라도 진심(瞋心)을 내기보다는 복(福)과 지혜(智慧)를 닦아서 과거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그럼으로써 업장이 소멸이 되면 자연히 내가 하고자 하는 원(願)이 장애 없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인과법(因果法)을 분명히 인식을 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의 모든 생활을 갖다가 여법(如法)하게 해 가도록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파도 속에서 생사 없는 참된 삶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밤낮 그것을 되풀이하거든.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렸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 이루어지면은 속이 상하고 썽을 내고, 그것을 평생 동안을 되풀이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그말이여.


아까 「배가, 그 달빛이 파도에 찬란하게 부서지면서 반짝거리는 그 파도 속에 배가 동서남북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것은 뱃사공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마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우리 중생들도 마치 찬란한 달빛이 반짝거리는 파도 위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느냐 서쪽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축생으로 가느냐 아귀도에 가느냐, 온전히 우리의 마음 하나에 달렸어. 천당(天堂)에 가려 하면은 천당에 갈 짓을 하면은 천당에 가는 게고, 지옥(地獄)이나 축생(畜生)으로 가려면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갈 짓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지끔 경면주사로 종이에다 쓰는 부작을 노놔 드리는 대신에, 여러분이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극락에 가고 싶으면 극락으로 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여러분에게 가리켜 드리는 것이 종이에다 쓴 부작 한 장 노놔 드린 것보단 훨씬 더 훌륭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들어보시면 알 것입니다.(처음~18분29초)





(2/4)----------------


여러분 가운데에는 '빨리 법문이 끝나야 뭘, 부작을 사러 갈 텐데' 이러한 생각을 혹 하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까짓 부작은 한 장뿐만이 아니라 백 장씩이라도 노놔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인쇄를 해다가 노놔 드린다면 백 장 천 장이라도 노놔 드릴 수가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가서 참으로 삼재를 면하고 업장을 소멸한다면은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삼재(三災)가 다른 것이 아니라—혼침(昏沈) 산란(散亂), 참선하려고 앉었으면은 혼침(昏沈)이 오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난다 그말이여.


잡담(雜談)을 하면은 눈이 초롱초롱해 가지고 조는 사람이 없는데, 죽비를 치고 참선을 하거나 또 이렇게 법문(法門)만 들으려고 하면은 눈껍데기가 천근만근 쪄 누르면서 잠이 퍼온다 그말이여.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세계는 불보살(佛菩薩)도 꽉 차 있지만, 팔만사천 마구니도 꽉 차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법문을 들으면, 법문(法門)을 바로 듣고 발심(發心)을 하면 마구니의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들이 발붙일 곳이 없고, 마왕 파순이의 궁전이 흔들려서 무너질 테니 어쨌든지 법문을 못 듣게 해야겠다 그 말이여. 법문만 바로 들었다 하면 그 사람은 발심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 마구니가 갈 곳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은 법문을 못 듣게 해.

애당초에,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나오시기까지도 대단히 신심(信心) 있는 분이 아니면 여기에 오시지를 못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못 온다 우리 아들 하나... 온갖 핑계를 대고... (녹음불량) ... 영판 핑계를 대고 못 나오는데, 그 핑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마구니들이 온갖 수단을 다 써 가지고 그렇게 해서 못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못 오는 사람은 벌써 마구니의 수단에 걸려 가지고 못 오는 것이고, 그러한 마구니의 온갖 수단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오는, 이 법회에 참석하신 것만도 대단히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참석을 해 가지고서도 아까 법문 시작하기 전에 옆에 사람하고 뭐라고 무슨 잡담을 한 동안에는 단 한 사람도 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 시작할 때부터 벌써 꾸벅꾸벅 졸다가, 지끔도 지금 내가 그렇게 눈을 감고 조는 꼴이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가끔 눈을 감아 버립니다마는, 그 마구니가 그 눈뚜껑 위에 딱! 붙어 가지고 막 눈뚜껑을 눌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 눈을 뜨려고 해도 마구니 힘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눈이 막 저절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눈을 뜨고 '누가 나 잠자는 것을 본가, 안 본가?' 이렇게 뚤레뚤레 살펴보지만, 그러자마자 또 자는 수가 있어. 아무리 안 자려고 해도 법문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히 그 마구니의 그 수단에 의해서 그렇게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마는.

혼침(昏沈) 산란(散亂), 공부를 해 본 사람이면 졸음이 오고, 졸음이 안 오면 온갖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이 좀 가라앉을만 하면 잠이 오고, 두 가지 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이렇게 까지 그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혼침과 산란을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주 가끔 그러한 질문을 하십니다마는, 참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그 이전에 혼침 산란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미 그것은 그르친 것입니다. 또 혼침 산란이 일어나는 것을 물리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도 또한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또 아무리 물리치려고 해도 물러가지를 아니해서 '어떻게 해야 이놈을 물리칠 수가 있을까?' 이렇게 근심을 하면 이건 다시 또 그르치는 것입니다.

또 설사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다든지, 용을 써 가지고 그놈이 그 혼침 산란이 물러가 가지고 다 물리쳐 버리고 성성(惺惺)해서 깨끗해졌다 할지라도 그것도 또한 이미 그르친 것이다 그 말이여.


생각을 내서 물리치려고 하면 그럴수록에 점점 그르쳐 버리는 것이여.


'그러면 대관절 그렇게 말하면, 아하 생각을 내서 혼침 산란을 물리치려고 하면 그르쳐 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은 생각을 내지 말고 혼침이 오거나 산란심이 오거나 내버려두고 그저 실컷 코가 땅에 닿도록 혼침에 빠져서 잠이 오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그저 죽비를 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방선(放禪)할 때까지 침을 지르르르 흘리면서 그저 실컷 졸고 있으면 그러면 괜찮으겄구나. 내가 왜 진즉 그것을 몰랐던고. 이제부터서는 참선하는 것을 그렇게 하나도 그 걱정할 것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된장(똥)을 똥(된장)인 줄 알고 상추를 싸 먹을 사람이거든.


분명히 말하자면, 유심(有心) 무심(無心)으로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그 다 그르친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생각을 내서 혼침 산란을 물리치려고 해도 그르치고, 또 물리치지 않으려고 해도 그르치고, 물리치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않고 실컷 자도 그르친다고 하니 이것을 내가 어떻게 해야겄냐? 참선을 하지 말라는 건가, 하라는 건가 큰일났다'

먼저 혼침 산란이... (녹음 불량) 스님들은 참선 하려고...


무량겁래(無量劫來)로,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 (녹음 불량) ...  수없이 많은 겁 동안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면서 번뇌 망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번뇌 망상과 혼침 속에서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물리치려고 해도 안 물리쳐져. 그래서 혼침과 산란이 퍼일어난 것이고, 그 혼침 산란의 뿌리는 무량겁으로 오면서 한 생각 염기(念起)해서 온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고.


또 그다음에는 지끔 우리가 눈으로 모든 색상(色相)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듣고서 생각 생각이 모든 각각 장소와 인연(因緣)이 되어 왔어.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온 거다. 이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고.

또 그래 가지고 내 마음을 마침내 보아서, 내 마음을 친견(親見)해서, 그러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려는 그러한 생각을 내는 것이 그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뿌리다.


또 하나는, 최초에 '생사(生死)... 생(生)을 갖다가 뛰어넘고, 죽음을 갖다가 초월(超越)하리라' 하는 '한 생각' 내기 때문에 혼침 산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참선을 해 가지고 도(道)를 이룬다' 한 그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조사(祖師)가 되고 성불(成佛)을 한다'고 한 그 생각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된다. 혼침 산란의 뿌리가 바로 성불작조(成佛作祖) 하려는 그 생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30분52초(여기부터 음질 조금 괜찮음)


'위없는 대보리(大菩提)를 얻어 가지고 대열반(大涅槃)에 들어가리라' 그러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지(乃至) '세간(世間) · 출세간(出世間)의 가지가지 법(法) 가운데에 터럭 끝만큼이라도 일어나는 어떠한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바로 혼침 산란의 근원(根源)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혼침 산란은 번뇌(煩惱) 망상(妄想)으로부터서 성불(成佛)하려는 생각, 열반(涅槃)에 들리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이 혼침 산란의 원인이 아닌 것이 없어.

그러니 그놈을 버리려고 한 것도 그르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놈을 버리려고 해서 물러가지 아니한다고 번뇌심을 내는 것도 그것이 그르쳐 버리는 것이고, 그놈 그 혼침 산란을 물리쳐서 깨끗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어떻게 해야 과연 우리는 올바르게 공부를 해 갈 것인가?



막장한학해(莫將閒學解)하야  매몰조사심(埋沒祖師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장한학해(莫將閒學解)하야  매몰조사심(埋沒祖師心)이니라.

한가한 알음알이 배우는 것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알음알이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를 가지고 조사(祖師)의 마음을 묻어 버리지를 말아라.


산승(山僧)이 오늘 입춘 법요식을 당해서 삼재(三災)를 면(免)할 수 있는 법... (녹음불량)... 산란과 혼침을 물리치는 법,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음으로써 영원히 삼재를 멸하는 법,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모두 엄격하게 말하면, 한가(閑暇)한 학해(學解)를 가지고 조사심(祖師心)을 매몰(埋沒), 묻어 버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산승이 말하는 것만이 조사심을 묻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산승의 말을 듣는 것도 또한 조사심을 매몰하는 데에 가담한 공범자(共犯者)를 면(免)틀 못할 것입니다.


왕왕(往往)이 자기의 한 생각이 진실하고 참으로 간절(懇切)하지 못한 것을 책망(責望)하지 아니하고, 간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절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지 아니하고—'혼침 산란이 장애가 되어서 도(道)를 닦을 수가 없다'고 걱정을 하는 사람은 마치 뭣과 같으냐 하면 컴컴한 방에 앉아서 '왜 모든 물상(物象)이 훤하게 보이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사람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깜깜한 방에 앉어서 모든 것이, '글자나 모든 물건이 훤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노망했거나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어째서 한 생각 참으로 간절하지 못해 가지고서 (간절하지) 못한 것은 책망을 하지 아니하고 혼침 산란만을 책망을 할까 보냐 이 말이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그말이여.(18분30초~37분50초)





(3/4)----------------


옛날에 도반(道伴)이 죽거나 하면 거기에서 무상(無常)을 느끼고 며칠간은 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며칠을 하고, 또 도반 가운데 누가 참선을 잘하거나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면 거기에서 분심(憤心)이 나 가지고 며칠 동안을 모다 온 대중이 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그러한 일화도 있습니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약해 가지고 혹 어떠한 법문을 듣고서 분심이 좀 나고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 분심이 좀 나도 며칠이 안 가서 비그르르르 허니 용맹심이 가라앉아 버리고, 다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태심(懈怠心)이 나고 방일(放逸)을 하게 된다 이말이여. 그래서 혼자 하기보다는 좋은 도반(道伴)들과 또 선지식(善知識)을 의지해서 우리가 모여서 공부를 하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여러 대중이 모여서 살면 그 가운데는 누군가 반드시 분심과 발심을 해서 가행정진을 하고 있는 분이 있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 그런 분이 한두 사람만 있어도 여러 대중이 그 좋은 영향을 받아서 따라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리란 놈은 아무리 그놈이 몸이 날래서 잘 나른다 하더라도 지가 하루에 천리(千里)를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千里馬) 꼬리에 딱! 들어붙어 갖고 있으면, 천리마 꼬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탁! 붙어만 있으면 그 파리도 천리를 하루에 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 힘으로, 지 날개로 날아가지 아니하고 천리마 꽁딩이에만 붙어 갖고 있어서 천리를 가는 것이 옳다면, 저는 공부는 아니하고 선지식이나 어느 도반 꽁딩이만 따라다니면 되겄구나' 이렇게 착각(錯覺)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셨습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는 생각하기를, '좋은 도반(道伴)을 만나는 것은 도(道)에 절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서 그 생각이 옳은가 그른가를 부처님께 가서 판단을 받으러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니 생각이 틀렸다. 좋은 도반을 만나는 것은 도에 절반을 이룬 거와 같은 것이 아니라 도(道) 전부(全部)를 이룬 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교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좋은 도반, '선우(善友)'라 하는 말은 도반과 선지식(善知識) · 선각자(先覺者)를 다 포함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여러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같이 법문을 들으러 오고 또 자주 만나서 공부에 관한 의논(議論)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에 관해서 의논하는 동창생이나 이웃 도반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집니다.

바른 사상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그러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인생을 바로 살아가고 법을 바로 믿어 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점쟁이나 좋아하고, 사주쟁이나 좋아하고, 무당이나 만신이를 좋아하는 그러한 친구들이...(녹음불량)...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한테 쫓아가 가지고 모든 일이 해결이 된다면 무엇이 걱정을 할 것이 있습니까? 돈 많은 사람은 무당을 차라리 자기집에다가 모셔다 놓고, 조실 스님으로 모셔 놓고 백만사(百萬事)를 의논한다면은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하고, 무슨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학 합격이나 무엇이 걱정이겠느냐 그말이여. 점쟁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재앙이나 복(福) · 불복(不福)은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으로 오면서 지은 우리의 업(業)에 의해서 받어지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짓는 대로 받는 것이여.


그 여러분 가운데에는 그 말이 잘 믿어지질 않고 '우리가 별로 죄(罪) 지은 것도 없는디 왜 이러한 액난(厄難)을 당해야 하느냐. 그것은 맞지 않는 소리다' 또 '아무개는 평생 동안 법이 없어도 살 그렇게 정직하고 그렇게 착하고 한데 왜 그러한 못 당할 일을 당하느냐. 그러니 그것도 맞지 않는 말이다' 또 '아무개는 그렇게 평생을 사기를 처묵고 살고 못된 짓만 하고 살아도 그렇게 잘사는 걸 보면 그거 다 인과(因果)라는 게 멀쩡한 소리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당장 받는 그런 현생보(現生報)가 있어요.

그런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받는 것을 현생보(現生報)라 그러고, 금생에 지어 가지고 이 다음 생에 받는 것을 순생보(順生報)라 그러고, 또 금생에 지어 가지고 저 몇 생을 가 가지고 훨씬 뒷 생에 가서 받는 그러한 것을 갖다가 순후보(順後報)라 그러는 거여.

현생보(現生報), 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 이렇게 세 가지로 지은 원인에 따라서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당장 받는 예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고 금생에 지어...(녹음 끊김).


삼생(三生)을 다 환히 보는 성현들의 말씀에 의지하면,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받게 되기 때문에 혹 금생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해도 금생에 그 과보를 안 받는 경우도 있고, 금생에 그렇게 착한 일을 하고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금생에 그 좋은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종류로 받을지언정 기어코 언제 받던지 자기가 지은 것은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받고, 악한 것은 악한 대로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터럭끝 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컴퓨타(computer)로 따지고, 전자계산기로 따진 것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것이 이 인과(因果)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 컴퓨타는 그 재료를 거기다가 넣는 그 범위 내에서만 나오는 것이지, 그 재료를 넣지 아니하면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과의 법칙은 자기가 지은 원인에 따라서, 이것은 행동[身]뿐만이 아니라—행동으로 살생을 하고, 행동으로 도둑질을 하고, 행동으로 음행을 하고, 행동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죄를 범하는 것뿐만이 아니라—말[口]로 짓는 죄 또 생각[意]으로 지은 것까지도 하나도 어김없이 다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죄는 소승적(小乘的)인 계율(戒律)로 보면, 속으로는 누구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행동으로만 죽이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또 현대의 모든 법률도 마음으로 온갖 도둑질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행동으로 범하지만 않으면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대승법(大乘法)에 있어서는, 우리의 인과의 법칙에 있어서는 속으로 생각을, 행동으론 옮기지 안 했어도 속생각으로만 한 생각 먹었다 하더라도 이미 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승법,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그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생각을 바르게 다스려 나가도록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남을 도울 생각, 좋은 생각을 하면 그 좋은 생각으로 인해서 우리는 천상(天上)에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또 생각으로 '누구를 죽이리라, 무엇을 훔치리라, 누구하고 무슨 음행을 하리라' 이러한 생각을 먹어도 이미 그 사람은 지옥(地獄)에도 갈 수가 있고, 축생(畜生)에 떨어질 수도 있고 그러한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우리는 천당(天堂)에도 갈 수가 있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서도 독사가 될 수도 있고, 소가 될 수도 있고 또 지옥에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에서는 지옥에 가기를 싫어하지도 아니하고 천당에 가기를 바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러냐?

지옥에 가면, 한 생각을 일으켜서 지옥에 가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내도 이미 한 생각이 움직였기 때문에 육도(六道) 중에 어느 곳엔가는 우리는 떨어지게 되는 것이고, 또 천당에 가기를 원하지를 않지만, 천당에를 가기를 원하나 원하지 않으나 이미 한 생각은 동(動)한 것이기 때문에 육도 중에 어느 곳엔가는 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 봤자 자기가 지은 공덕(功德) 만큼 다 받으면 다시 또 떨어지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천당에만 가면은, 천당에 가는 것이 모든 자기 종교를 믿는 구경(究竟)에 목적으로 삼고 있지만, 천당에 가는 것 별로 좋지 않습니다. 천당에 가 봤자 자기가 지은 만큼 다 복(福)을 받으면 다시 떨어지는 것입니다. 활을 하늘에다 대고 쏘면 그 힘이 다하면 다시 지상에 떨어지는 거와 똑같은 것입니다.(37분51초~52분6초)





(4/4)----------------


그런데 그 천상도 옅은 데로부터서 저 높은 데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습니다마는, 그 천상 가운데에 도솔천(兜率天)이라 하는 곳이 있어.

도솔천에도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외원궁(外院宮)에 가도 거기에는—이 지구가, 이 세계가 온통 불이 나 가지고 불로써 온 세계가 다 타 버리는 때가 언젠가는 옵니다마는, 그 불이 도솔천 외원궁까지는 그 불길이 닿아서 타 죽습니다. 그런데 그 내원궁(內院宮)에는 그 불길이 미치지를 못해요.

그래서 성현들이, 앞으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강림(降臨)하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이 그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도 인도(印度)에 가비라(迦毘羅 kapila) 왕국에 삼천년 전에 태어나시기 전에 그 도솔천 내원궁에 계시다가 이 사바세계에 오셨고, 앞으로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음 부처님으로 출현하실 미륵 부처님, 미륵불(彌勒佛)도 현재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지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 참선하는 수행인들은 내생(來生)에 몸을 받아나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기를 원(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가면 바로 미륵 부처님을 비롯한 많은 성현(聖賢)들을 친견(親見)할 수가 있고, 거기 가서 그러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빨리 이 사바세계에 내려와서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러한 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도솔천 내원궁을 제외하고는 다른 천상에 태어나 봤자 그것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천상에 태어난 것도 바래지 아니하고, 또 지옥에 태어나는 것도 싫어하지를 아니하고 무엇을 생각하느냐?


'이 무엇고?'


좋은 일을 봐도 '이 뭣고?',

궂은 일을 봐도 '이 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이 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몸에 병이 나도 '이 뭣고?',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 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일분일초를 등한(等閑)히 보내지 아니하고 '이 무엇고?' 우리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우리의 생각 생각을 돌이킬 때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들어붙을 틈을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들어붙지 못하는데 무슨 삼재(三災)가 우리에게 붙을 것이냐 그말이여.

설사 과거에 어떤 지은 업(業)에 의해서 삼재가 우리에 붙은다 하더라도 그 삼재는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할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에게 붙기 위해서 전후좌우에 엿보고 있다가도 '이 뭣고?'를 들면, 그 마구니가 찰나간에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로 변해질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이 잘 아신 바와 같이 부처님이 과거 인행(因行) 때에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고 계시는데, 잠잘 중도 잊어 버리고 밥 먹을 중도 잊어 버리고 그 설산 속에서 고행을 해 가지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境地)에 들어갔다.

어데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제행(諸行)이라는 것은 모든 행이,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존재와 모든 현상이 다 이것이 무상(無常)한 것이요, 무상하기 때문에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다 그말이여. 나 가지고는 없어지고, 나 가지고는 변해서 없어지고 다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다—그러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이여.


그 노랫소리가 너무너무 맑고 아름답다 그 말이여. 그래서 눈을 번쩍 뜨고 앞 뒤 옆을 다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다 살펴봐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훌륭한 노래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어.

그래서 잘 살펴보니까 저만큼 그 왕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은 세 개가 붙은 독수리 손가락을 한, 그리고 뿔이 돋힌, 사람을 생으로 막 잡어먹고 피를 빨아먹는 나찰(羅刹) 귀신이 금방 덮쳐 올 것 같이 무서운 형상을 하고 노려보고 있다 그 말이여.


저런 나찰 귀신의 입에서 그러한 아름다운 목소리, 그러한 훌륭한 법문이 울려 나올 것 같지는 않으나, 그 나찰 귀신 말고는 아무한테도 그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행여나 하고 나찰 귀신 보고 물어봤다 그 말이여.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하는 그 노래를 금방 니가 불렀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뭐라고요? 지금 나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시치미를 뚝 딴다 그 말이여.


"정말 니가 그 노래를 불렀다면 반드시 그 노래의 뒷 구(句)가 있을 테니 그 뒷 구를 한 번 나에게 일러다오" 간절히 청(請)을 했습니다.

그러니 나찰 귀신이 "나는 배가 고파 죽겄다. 나는 당장 너를 잡어먹어야겄어" 그러면서 달라들라고 그러니까,


"좋다! 니가 그 다음 구절만 일러준다면은 내 몸을 너한테 던지리라"

"내가 널 일러주면은 도망가려고 그러지?"


"아니다. 니가 그것이 의심스럽다면은 내 몸뚱이는 다 니 입에다 넣어놓고 내 귀만 내놓고 일러다오"

그러니까 나찰 귀신이,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낙(樂)이 되느니라, 아! 그 노래를 부르는데 그 설산동자(雪山童子)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어.


'내가 이러한 좋은 법문을 듣고 나만 깨달라 가지고 나찰 귀신의 밥이 된다면은 안될 일이다. 나 말고도 한량없는 중생(衆生)이 있는데 나만 알고 죽어서는 안되겄다'

이래 가지고 바위에다 나무에다 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그 법문(法門)을 갖다가 막 썼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로써 그 법문을 갖다가 써 놓고서 나찰 귀신의 입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찰나간(刹那間)에 온 하늘과 땅에서는 장엄(莊嚴)한 하늘나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그 무서운 나찰 귀신은 간 곳이 없고, 찰나간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모습으로 변해 가지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설산동자를 공경스럽게 두 손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이 말씀은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법문인데, 설산에서 설산동자만이 그러한 경계가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 진실한, 간절한 한 생각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의 불보살(佛菩薩)로 화현(化現)을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여지없이 이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재앙을 만나고 어떠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때 그 슬픔에 빠지지 말고 가슴 아픈 데에 빠지지 말고, 노여움에 빠지지 말고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한다면, 그 노여움과 슬픔과 괴로움은 찰나간에 나를 깨달음에 이끄는 불보살의 따뜻한 화현으로 변할 것입니다.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헌디  석양재오서(夕陽在吾西)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허니  석양(夕陽)이 재오서(在吾西)로구나.

돌아와서 빈 방에 앉었으니 석양은 이미, 태양은 내 서쪽에 있구나.

무량겁(無量劫)을 윤회(輪廻)하다가 금생에 겨우 불법을 만나 가지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이 최상승법을 만나서 이 참선 공부를 하려고 하니 벌써 나이가 육십, 칠십이 되었구나.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르고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어떠한 물이고 흘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는 거여.

왜 그러냐 하면, 저 달빛이 바다에 비춰, 호수나 물에 비추어서 분명히 물속을 보면 그 달이 물에 와 있지만—천만 개의 호수, 천만 개의 물에 달이 비치지만,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니여. 달은 하늘에 조끔도, 한 걸음도 하늘을 여읜 것이 아니더라.


혼침 산란이, 혼침 산란이 전체가 본래(本來) 본지풍광(本地風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본지풍광인데 그놈을 버리려고 하면 버려질 것이며, 쫓으려고 하면 쫓아질 것이냐 그 말이여.

물속에 있는 달을 그놈을 건지려고 하면 건질 거여? 무슨 놈의 달이 물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오늘부터 계해년 첫날이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생(衆生)의 업(業)이 지중해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아닙니다.

조끔도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이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52분7초~1시간8분36초) (끝)





[법문 내용]


(게송)해천공활월성륜~ / 용화사에서 나눠 드리는 무량겁 삼재를 소멸하는 부작, '이뭣고?' / 삼재의 원인인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회향(回向)해야 / 유심(有心) 무심(無心)으로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다 그르친 것 / 혼침 산란은 번뇌망상으로부터서 성불하려는 생각, 열반(涅槃)에 들리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이 혼침 산란의 원인 / (게송)막장한학해~ / 자기의 한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懇切)하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혼자 하기보다는 좋은 도반(道伴)들과 또 선지식(善知識)을 의지해서 우리가 모여서 공부를 해야 /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 현생보(現生報), 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 / 인과의 법칙은 어김이 없다.


참선 수행인들은 내생(來生)에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기를 원(願) /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한다 / 『열반경』에 있는 설산동자 법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진실한, 간절한 한 생각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의 불보살(佛菩薩)로 화현(化現)을 하는 것.


(게송)귀래좌허실~ /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른다 /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



아까 「배가, 그 달빛이 파도에 찬란하게 부서지면서 반짝거리는 그 파도 속에 배가 동서남북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것은 뱃사공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마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우리 중생들도 마치 찬란한 달빛이 반짝거리는 파도 위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느냐 서쪽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축생으로 가느냐 아귀도에 가느냐, 온전히 우리의 마음 하나에 달렸어. 천당(天堂)에 가려 하면은 천당에 갈 짓을 하면은 천당에 가는 게고, 지옥(地獄)이나 축생(畜生)으로 가려면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갈 짓을 하면 되는 것이다.


어째서 한 생각 참으로 간절하지 못해 가지고서 (간절하지) 못한 것은 책망을 하지 아니하고 혼침 산란만을 책망을 할까 보냐 이 말이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부처님 말씀에,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셨습니다.


설사 과거에 어떤 지은 업(業)에 의해서 삼재가 우리에 붙은다 하더라도 그 삼재는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할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에게 붙기 위해서 전후좌우에 엿보고 있다가도 '이 뭣고?'를 들면, 그 마구니가 찰나간에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로 변해질 것이다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르고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어떠한 물이고 흘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는 거여.

왜 그러냐 하면, 저 달빛이 바다에 비춰, 호수나 물에 비추어서 분명히 물속을 보면 그 달이 물에 와 있지만—천만 개의 호수, 천만 개의 물에 달이 비치지만,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니여. 달은 하늘에 조끔도, 한 걸음도 하늘을 여읜 것이 아니더라.


혼침 산란이, 혼침 산란이 전체가 본래(本來) 본지풍광(本地風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본지풍광인데 그놈을 버리려고 하면 버려질 것이며, 쫓으려고 하면 쫓아질 것이냐 그 말이여. 물속에 있는 달을 그놈을 건지려고 하면 건질 거여? 무슨 놈의 달이 물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아무리 중생(衆生)의 업(業)이 지중해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아닙니다.

조끔도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이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76~100)2021. 1. 10. 20:13

((No.100))—1979년 동안거 해제(79.02.11) (71분)



(1/4) 약 20분. (2/4) 약 18분. (3/4) 약 22분. (4/4) 약 11분.

(1/4)----------------


상월만공산(霜月滿空山)헌디  고안여천비(孤雁唳天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사왕비력(何事枉費力)고  월하대강류(月下大江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서리 친 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한디, 고안(孤雁)이 여천비(唳天飛)라. 외로운 기러기가 하늘에 울며 날아가는구나.

무슨 일로 공연히 힘을 허비했던가, 달 아래 큰 강이 흐르는구나.


오늘은 무오년 삼동결제(三冬結制)에 구순안거(九旬安居) 끝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5일에 시작한 백일기도가 오늘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결제 대중스님네와 또 결제에 입방(入房)한 보살님네들이 여러 가지 불편한 가운데에도 불구하시고 그런 어려운 부족한 여건을 극복하면서 정진을 열심히 하셔서 아무 사고 없이 오늘 해제를 맞이했고 백일기도를 원만하게 회향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대단히 흐뭇하게 생각하고, 이 백일기도에 입재(入齋)하신 법보제자 여러분은 석 달 동안 결제한 스님네와 보살님네가 사고 없이 정진 잘 마치시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백일기도 기도가 원만히 성취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백일기도를 목탁을 치면서 사분정근(四分精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스님네가 열심히 정진(精進)하시는 그 정진이 바로 기도를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목탁을 몇 개를 부서지도록 때리면서 염불을 한 것과 목탁을 치지 아니하지만, 죽비(竹篦)를 치고 묵묵히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시는 것과 이것은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정진을 잘하시면서 아침 예불(禮佛)할 때에 백일기도 동참재자(同參齋者)의 축원(祝願)을 엄숙히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축원 한마디가 목탁을 수만 번 뚜드리면서 염불한 공덕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러분의 기도 성취는 훌륭하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연꽃을 보면은 꽃이 필 때 이미 열매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꽃이 진 다음에 그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 피었을 때 이미 꽃 속에 열매가 이미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 끝난 뒤에 뒤에 어떤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고 여러분이 정성스러운 마음 한 생각 낼 때, 이미 여러분의 소원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신다면 기도 성취는 백발백중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은 견성(見性)하는, 진리를 깨닫는 데에 들어가서 대단히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경전에는 씌여 있지 아니한 오직 깨달으신 분만이 말 아닌 말로써 이를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극진지경(極盡之境)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한 법문을 한 시간여에 걸쳐서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수승한 근기(根機)를 갖으신 분은 충분히 이해하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오늘 설법하신 조실 스님 법문은 그 가운데에 공안(公案)에 관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공견(空見). 공(空)에 대한 이치. 이 공견이라 하는 것은 우리 불교뿐만이 아니라 도교나 그 밖에 유교에서도 이 공리(空理), 공에 대한 이치는 다 설하고 있고, 그 공 공리에 도달한 것으로써 도에 이른 것처럼 그렇게 모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문(禪門)에도 체중현(體中玄) 도리라든지, 이 여래선(如來禪) 도리라든지, 공견이라든지, 이것이 모다 말의 표현은 다르지마는, 그것이 도(道)에 들어가는 참 견성(見性)하는데 일단은 그러한 경지(境地)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흔히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그러한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르르면 '옳다! 이것이 바로 내가 깨달랐구나. 이 경계가 바로 거기로구나!' 이리 생각하고 그러한 공견(空見), 체중현(體中玄) 도리에 멈추어서 득소위족(得少爲足), 그 조그마한 조끔 얻은 것을 갖다가 만족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제불(諸佛)이 출세(出世)하셔도 그 사람은 구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견(空見)에 처해 가지고 그러한 공견으로 일체 공안을 보면은 그 나름대로 공안이 다 막힘이 없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가 정말 믿을 수 있는 훌륭한 선지식(善知識)이 없을 때에는 그 사람은 아주 못쓰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공부하다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정말 자기가 목숨 바쳐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바른 선지식이 계실 때에는 그 선지식에 가서 탁마(琢磨)를 해 가지고 한마디에 그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바로 그 선지식의 말을 믿을 수가 있지마는, 그런 믿는 선지식이 없을 때에는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고 차라리 참선을 아니하고 경을 읽는다든지, 염불을 하면서 일생을 마친 것보다도 더 못한 결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그러한 공리(空理)에 체(滯)해 가지고 그것이 자기가 구경(究竟)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하고, 일체 경이라든지 공안을 그 경지로써 보고 그러한 입장에서 법을 설하고, 그런 입장에서 후래(後來) 후인(後人)을 지도하기 때문에 자기와 소견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 때에는 다 인가(印可)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예를 들자면은 저 호남 지방에서 서울을 올 때에 수원이나 그렇지 아니하면 천안이나 그런 데에 와 가지고 서울에 다 온 것처럼 생각하고 말키 사람들에게 '여기가 서울이라고, 더이상 갈 필요가 없다' 여기가 바로 서울이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서울'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인물이 좋고, 구변(口辯)이 좋고, 학식이 많고, 그럴 때에 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몰려들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삿된 사람으로 인해서 수천만 명의 삿된 종자를 낳게 되는 까닭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부처님이라든지 조사들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지언정, 조그만큼 얻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족함을 삼지는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어째서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그 간곡(懇曲)하고 고준(高峻)한 법문을 우리는 듣게 되었느냐?


해제(解制)라고 하는 것은 석 달 동안 특별 수련 기간이 끝나는 날이지마는, 원래 결제(結制) 해제(解制)는 인도에서 우기(雨期), 비가 많이 쏟아져서 장마가 계속될 때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공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큰 정사(精舍), 선원(禪院)에 모여 가지고 그 비를 피하면서 단체적으로 수행을 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그 장마철이 끝나고 그래서 그 수련 안거(安居) 기간이 끝나면 그때부터서 각 지방으로 모다 흩어져서 인연 따라서 모다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 아세아(亞細亞) 동북 지방은 겨울이 추워서 여름 석 달과 겨울 석 달씩을 그 결제를 해 오고 있는데, 이제는 그 무섭던 추위도 다 가고 입춘이 지나서 이제 완연히 봄기운이 맴돌아 왔습니다.

해제를 하고는 모다 다시 걸망을 지고 다시 선지식을 찾기도 하고, 도반을 찾기도 해서 모다 흩어지는 것이 준례로 되어있습니다마는, 해제했다고 해서 행여나 결제 동안에 그 단속을 하던 그 마음이 풀어질까 봐 일부러 이런 고준한 중요한 법문을 우리는 추려서 듣게 된 것입니다.


그 법문 가운데에 모다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이니 모다 그런 어려운 말씀들이 나와서 잘 이해가 안 되실 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쥐가 괴밥을 먹었다. 또 밥그릇이 이미 깨졌다' 이런 것도 전부 이 공안에 해당된 말씀입니다.

여러 신도님들 가운데에 설사 이러한 뜻이 무슨 뜻인가 아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또는 뿐만 아니라 억지로 그것을 무슨 뜻인가 알려고 하실 것이 없습니다.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해서 열심히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할 따름인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그러한 공안 · 화두에 대해서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보려고 하고 이런 것은 우리의 공부를 지연시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조실 스님께서는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까? 이것은 이러한 공안을 우리 앞에 제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내서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언제나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공안상에 복탁(卜度)을 하지 말어라'


공안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나 있습니다. 문헌에 오른 것만 하더라도. 그 많은 공안에 대해서 우리는 어록(語錄)을 본다든지 어떤 큰스님네 법문을 들을 때에 가끔 그런 공안을 대중을 향해서 물으신 경우를 만납니다.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투철히 타파(打破)하지 못한 경우에는 결정코 다른 공안에 대해서 손을 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닫지 못한 분상에 이론적으로 그 공안을 이리 뛰적거리고, 저리 더듬어서 그럴싸한 답을 내려고 해 본댔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일호(一毫) 이익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어떤 공안에 대해서 그 대중을 향해서 '한마디 일르라'고 그렇게 그 고함을 치신다 하더라도 그러실수록에 우리는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으로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23초)





(2/4)----------------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상태에서 자기의 화두(話頭)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다못 그것뿐인 것입니다. 앞도 없고, 뒷도 없고 그동안에 자기가 경을 읽었다던지, 법문을 들었다던지,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라도 여기에 동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다른 화두와 비교하려 하지도 말고, 다른 데서 들은 말씀을 여기다 끌어대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려 하지도 말고 다못 바보처럼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다못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홑으로 홑으로 간절히 해 나감으로써만이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홀연히 통 밑구녁 빠진 경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간장독에다가 간장을 담아논 것을 그걸 갖다가 매갱이, 쇠 매갱이로 쳐서 그 항아리가 쩍 갈라지면서 항아리 속에 있는 장(醬)이 우르르르 한목 쏟아지듯이,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쌓였던 그 의심이 점점 커져 가지고, 그 의심덩어리가 우리의 가슴속과 이 허공계에 가뜩차서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풍선이 터지듯이 대의단(大疑團)이 타파(打破)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의 본참화두 하나에 충실함으로써만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천칠백 공안은 따져서 알려고 하지 안 해도 한눈에 환해져 버린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서 결단코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 갖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여. 중생심만 더욱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은 우리에 이르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경(經)을 보고 연구하고 어록(語錄)을 보고 이리저리 따져 봤자 중생심을 조장하고 시간을 낭비한 것뿐인 것입니다.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슬픈 생각도 중생(衆生)의 하나의 감정이요, 기쁜 생각도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요, 괴로운 생각도 역시 하나의 중생의 감정입니다. 그러한 슬프고 · 괴롭고 · 외롭고 · 쓸쓸하고 · 썽내고 하는 그러한 모든 중생심이 전부가 다 '한 생각'도 등한히 방치해서는 아니 될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중요한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슬프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기분이 나쁘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몸이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화두를 들 때가 과연 언제인 것입니까?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수없는 생각들 그것이 바로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중생(衆生)이 무변(無邊)이요,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그러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중생이 다할 날이 없는데, 중생계를 다할려면은 번뇌가 다해야 합니다. 그 번뇌는 다할 길이 없습니다.


다할 길이 없는 그 번뇌(煩惱)가 그러면 나쁜 것이냐?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 망상 · 중생심 그놈을 놓치지 아니하고 잘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 '이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觀照)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團束)해서 자기 본참화두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꿰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써 꿰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보리(菩提)의 과(果), 보리과(菩提果),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또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행여나 그럭저럭 지내실까 봐 아주 고준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아울러서 당부에 말씀을 전해 드린 것입니다.



앞으로 춥도 더웁지도 않는 아주 화창한 봄 날씨가 돌아옵니다. 묵었던 모든 업장(業障)과 재앙(災殃)은 백일기도 회향, 오늘 해제일을 기해서 봄눈 녹듯이—골짝에 모다 쌓였던 봄눈이 다 녹아가고 있습니다. 봄눈이 녹음과 따라서 우리의 업장(業障)도 따라서 다 소멸(消滅)이 될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새봄을 맞이해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의 모든 소망(所望)이 그렇게 돋아나고 그 새싹에서 또 꽃과 잎이 피고, 거기에 좋은 결실이 맺어질 것을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축원(祝願)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담(餘談)입니다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서 죽음을, 죽는 날을 이미 받아 가지고 나온다' 이러한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몸뚱이는 물질,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정밀한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기계는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쓰다가 보면은 고장이 나게 됩니다. 고장이 나면 또 수리해서 쓰고, 고장이 나면 또 수리해서 쓰다가 쓰다가 아주 고장이 나버리면 고칠 수가 없게 될 때 그 기계는 완전히 폐물이 되는 것입니다마는.

사람의 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쓰면은 기계는 아무리 좋은 기계도 쉽게 고장이 나듯이, 사람의 몸도 지혜롭게 관리를 하지 아니하면 고장이 자주 나게 되고, 자주 고장이 나게 되면 그 몸은 결국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이 몸뚱이는 허망(虛妄)한 것이다. 애착(執着)을 갖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지혜롭게 관리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몸을 어리석게 관리해. 어리석은 사람은 관리는 어리석게 하면서, 애착은 매우 애착은 가지면서 관리 면에 있어서는 아주 어리석게 관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애착은 없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게 관리를 해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한두 번, '첫째, 몸을 잘 관리를 하려면 음식물을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음식에 있어서는 요새 그 흰쌀밥 먹고 또 고기를 많이 먹고 또 백설탕을 많이 먹고 또 화학조미료 같은 걸 많이 먹고 이래서 또 우유나 계란 같은 걸 많이 먹고 해서, 옛날에는 없었던 당뇨병이나 또는 고혈압 · 중풍 · 동맥경화증 또 간경화증 또 각종 암, 모다 이런 병들이 점점 수효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어째서 이 근자에 그러한 환자들이 불어나냐 하면은 다른 게 아니라 옛날에 우리는 현미(玄米)밥을 먹었습니다. 50년 내지 백 년 전에 우리의 조상들은 현미밥에다 잡곡밥을 주로 많이 먹었어요. 그때는 이러한 무서운 병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한 30년 전만 해도 암이란 소리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근자에는 아는 사람, 이웃 사람, 신문, 많은 사람들이 이 암으로 인해서 많이 죽어가고 있고, 동맥경화증 그래서 고혈압, 중풍 또 당뇨병, 당뇨병이 어린애까지라도 이 당뇨병에 걸린 환자가 날로 불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흰쌀밥—잡곡밥을 싫어하고 흰쌀밥만을 먹고 또 현미밥, 쌀이 6분도 · 7분도 · 9분도 이리 있는데, 9분도는 여러 분이 잡숫고 있는 하얀 쌀이 그것이 9분도로써 아주 몸에 해로운 것입니다. 최소한도 7분도, 쌀이 좀 누루스름한 그러한 쌀. 아조 그 등겨 껍데기만 베껴 버린 그 현미가 제일 좋지마는 시중에서 사기가 어렵고, 그러나 그것도 여러분이 구할려고만 하시면 구할 수가 있습니다.

현미밥을 잡숫고, 될 수 있으면 고기를 적게 잡숫고 채식을 많이 하시고 잡곡, 보리쌀이나 율무쌀이나 또는 좁쌀 · 수수 이런 잡곡을 넣어서 또 콩 넣어서 잡숫도록 하시고.


참선 법문을 들으러 왔는데 먹는 얘기만 한다고 혹 그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마는 우리가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이 자연식(自然食)에 대해서 말씀을 하냐 하면은 우리 참선이 우리의 본래, 본래(本來) 갖추어 있는 우리의 본성(本性)을 찾는 정신적인 수행이라면은 자연식은 우리가 본래 우리 조상들이 먹어 내려온 우리의 본래의 식, 자연식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점점 사람들이 각박해지고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 자연 보호를 해서 우리의 환경을 아름답게 하고, 자연식을 해서 우리의 육체를 현대 문명병으로부터서 보호를 하고, 참선을 해서 우리의 본성을 찾는 것은 비록 형태는 다르지마는 근본이념은 모두가 다 하나인 것입니다. 참선을 잘하려면은 자연식을 해야 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20분24초~38분)





(3/4)----------------


모든 병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속을 되게 상하고 화를 끓이면 반드시 음식이 소화가 안되게 되고 머지않은 장래에 온갖 병이 육체로 표현이 됩니다. 심장병이 생긴다던지, 위장병이 생긴다던지, 간장병이 생긴다던지, 신경성 두통이 생긴다던지, 갖은 병이 꼭 우리의 마음에서 원인 뿌리를 두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법문을 열심히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해야만 앞으로 우리의 육체에 건강을 도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이 이제부터 그러한 점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병은 육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육체에 치료만 해 가지고 병을 근치(根治)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지끔 수준 높은 의사들은 눈뜨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약(藥)을 하나 선사하고자 합니다. 접때는 부작(符作)을 선사하고 또 했지마는 오늘은 또 약을 하나 선사하는데 '무슨 약을 줄라나?' 이리 생각하시겠지마는 이것은 돈을 받지 않고 드립니다.

돈을 받지 않고 드리는 만큼 또 이것은 여러분의 귀로만 들으시면 되어요. 손으로 받으려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무슨 약을 드리냐 하면은 이건 아주 그 우리 돈 안 들이고 우리의 무서운 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폐결핵이라든지, 자궁암이라든지, 이 근자에 부인들이 참 자궁암 또 자궁 내에 근종 모다 그러한 병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고, 우리 신도 가운데에도 그렇게 참 이쁘고 훌륭한 젊은 분이 그런 자궁암으로 몇 달 전에 돌아가신 분이 계십니다마는, 이 무서운 자궁암 그 밖에 간경화증이라든지 또 어깨 아프고, 허리 아프고, 삭신 아프고 또 관절염 류마치스 또 피부병 모다 이러한 병, 그 밖에도 수없는 많은 병들을 약을 쓰지 아니하고 낫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혹 알고 계신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입니다. 강변이나 바닷가에 모래 속에 몸을 묻는 것입니다.

6, 7월 더울 때, 5월이나 6월이나 7월 더운 날, 더운 계절에 가서 자기 키보단 좀 길게 파고, 광(廣)은 한 7~80㎝ 파고, 깊이는 한 50㎝ 삽 반 자루 가량 파고서 그 속에 가서 모가지만 내놓고 모래를 덮는데, 아주 두텁게 덮은 것이 아니라 한 6㎝ 내지 9㎝ 정도, 요 하나 덮을 만큼만 덮는 것입니다.


덮고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데, 그때 날씨가 더웁고 모다 그래서 텐트를 치고 텐트 밑에서 하거나, 우산으로 가리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몸이 약한 사람은 구름 낀 날을 택해서, 구름이 끼었다 해가 비추었다 한 별로 햇빛이 세지 아니한 그런 날을 택해서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보통 모래찜질하면은 '삭신이 아픈 데 좋다' 그런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모래가 뜨끈뜨끈한 그런 모래 속에서 해야 한다고 알고 계시지요? 그게 아닙니다. 모래는 우리가 그렇게 무섭게 뜨겁지 아니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잠깐 하고 나오고, 또 잠깐 하고 나오고 이렇게 해 오고 있지만, 참으로 그 병을 철저히 낫으려면은 오전 8시부터서 시작해 가지고 점심을 완전히 굶고 오후 4시까지 8시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더위에 8시간을 갖다가 뜨거운 모래로 덮어놓으면 그것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마는, 텐트를 가리우고 혹 우산을 가리우고 하고 그동안에 탈탈 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냉수를 떠다 놓고 자꾸 목을 한 모금씩 물을 계속 먹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장 · 소장 · 대장이 항시 물로 촉촉이 축여주기 때문에 설사 점심을 굶는다 해도 그렇게 탈기(奪氣)가 안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점심을 굶고 공복에 물만 먹고 해야 독기(毒氣)가 완전히 빠집니다.


이 방법은 이 모래찜질로 평생을 4~50년을 전문으로 이 모래찜질을 해 가지고 많은 사람의 병을 낫운 거여. 그 사람의 실지 경험을 써 논 책을 보고 제가 잘 알았고 또 의학박사가 그 모래찜질을 해 가지고 스스로 많은 효과를 보고, 그래 가지고 그 모래찜질을 현대 의학적인 면에서 과학적으로 이것을 풀이를 한 것을 내가 봤기 때문에 올여름에 삭신 아픈 분, 허리 아픈 분, 어깨 아픈 분, 오장육부 어디가 나쁘건 이 모래찜질하시면 독기가 완전히 빠져 가지고 몸이 건강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모래찜질이나 흙 찜질도 마찬가집니다. 복어를 먹어서 중독이 되어 가지고 뻐드러진 사람도 모래에다 묻거나, 흙에다가 흙 찜질을 하면은 살아납니다. 또 산에서 그 독버섯을 먹고 죽은 사람도 흙에다 묻거나 모래에다 묻어 놓으면 살아납니다.

저 아프리카 지방에 토인들은 모래를 '생명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병을 앓아 가지고 죽게 되면—혹 모기한테 물렸다든지, 독사한테 물렸다든지, 무슨 그래서 죽을병이 걸리면은 그 사람을 떼메다가 저 모래사장에다 묻어 놓고, 얼굴만 내 놓고 묻고서 그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이상한 주문을 외우면서 한바탕 굿을 하고는 집으로 그 환자만 놔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고 합니다. 몇 시간 뒤에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나 가지고 병이 나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모래를 생명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혹 연탄깨스 중독되었을 때 빨리 흙냄새를 맡게 하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먹이면은 정신을 채리는 경우를 왕왕이 보셨을 것입니다. 흙냄새라고 하는 것은 냄새만 맡아도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물며 흙을 파고 그 속에다가 몸을 흙속에다가 덮어놓고 놨을 때에는 몸에서 완전히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한 예로 어떤 사람이 그 과일나무 밑에다가 그 구뎅이를 파고 그 속에서 흙 찜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흙 찜질을 하는데 그 밭 가양에다 했는데, 거기는 숲 옆이 되어서 모기가 굉장히 흔한 곳이어서 풀모기가 많아서 한 번씩 쏘면은 툭툭 부르트는 모기가 드글드글하는데, 그날 아침 8시부터서 저녁 4시까지 8시간을 하게 되기 때문에 얼굴은 완전히 모기한테 맽기기로 작정을 하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모기가 한 마리도 자기 근처에 오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흙 찜질을 잘 마치고 2~3일 후에 가 보니까 그 흙 찜질하던 구뎅이 옆에 맛있는 그 뽀뽀나무라고 하는 과일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수백 개의 그 뽀뽀가 열려 갖고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과일이 몇십 개가 떨어졌다고 그럽니다. 그러더니 5일 후에는 그 많은 과일이 수백 개 과일이 모조리 다 떨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일을 뽀개 보니까 속이 완전히 먹물 칠해 논 것처럼 시커멓게 멍이 들어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일이 이태 후에도 안 열고, 5년 후에도 안 열고, 아주 그 과일나무는 완전히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면은 모기가 달라들지 아니한 것은 흙 찜질을 하고 있는 동안에 몸에 독기가 빠져 나가기 때문에 그 독 냄새가 지독해서 모기가 달라들지 못했다. 이것을 알 수가 있고.

왜 과일나무가 죽었느냐? 흙 찜질을 통해서 사람의 독이 흙속으로 다 흡수가 되었는데 그 흙속에 흡수된 독을 그 뽀뽀나무 뿌럭지가 빨아 먹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나무가 아주 골병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께서 흙 찜질이나 모래찜질하실 때에 주의할 것은, 반드시 그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구뎅이를 파 주고 모래를 묻어 주고 또 우산이나 텐트를 쳐 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잠깐 하는 것은 모르지만 여덟 시간 하니까 햇빛, 태양 방향이 바꿔지기 때문에 이리저리 우산을 잘 돌려 쳐 줘서 그늘을 막아주어 가지고 직사광선을 피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물을 가끔가끔 떠다가 축여 줘야 하고, 모래가 지나치게 뜨겁고 더울 때에는 조로에다가 찬물을 떠다가 위에서 화초에다 물 주듯이 적당히 줘 주어야 그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이 꼭 필요한데, 이 모래찜질이나 흙 찜질은 환자 자신에게는 백에 하나도 부작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중들어 준 사람이 까딱하면은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그 사람이 까딱하면 눈이 안 보이게 되거나 꺼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아까 조실 스님 법문하실 때는 모두 꾸벅꾸벅 졸더니 이런 얘기를 하니까 한 분도 졸지를 않으시구만요.


시중을 드는 사람이 왜 눈이 어두워지고 까딱하면은 비실비실 쓰러지느냐? 환자한테서 발산하는 독기(毒氣)를 들어마시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흙 찜질, 모래찜질을 해서 얼마만큼 무서운 독이 그 환자로부터 빠져나간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미신도 아니고 내가 여러분한테 약을 팔아먹으려고 선전한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도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여름에 혹 피서를 가신다던지 그러한 기회가 있을 때는 강변이나 해변에 가셔서 가족 단위로 가셔서 공연히 벗고 춤추고 그러시지를 말고, 찜질을 하시도록 내가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서운 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는 치료 방법이고, 여비만 가지고 가시면 모래 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그것을 하시고.


모래찜질하게 되면은 8시간이란 시간을 모래 속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모래가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백히게 됩니다. 그런데 등어리를 보면은 등어리가 모래가 백히게 되는데, 묘하게도 등어리 위나 또는 등어리 가운데나 허리 대목이나 모래가 붙지 않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대목이 콩팥이 있는 곳이면은 '콩팥에서 독기가 빠져나왔구나!' 그것을 알 수가 있고. 또 간장 있는 대목에 모래가 안 붙었으면 '아하! 간에서 독기가 빠져나왔구나!' 이걸 알 수가 있습니다. 땀이 빠져나오면서 독기도 같이 빠져나오는데 그놈이 줄줄줄줄줄줄 물 흘러가듯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모래가 거기에는 붙지를 못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찜질을 하고 등어리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이 찜질을 하고 댁에 돌아가셔서 피부병이 일어난 것처럼, 땀띠가 난 것처럼 혹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독기가 8시간 동안에도 덜 빠지고 남은 놈이 집이 가서 빠지느라고 뚫고 나오기 때문에 그러한 증상이 일어나니 그런 사람은 다시 모래찜질을 한 번이나 두 번, 더 해 버리면 완전히 빠져나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 모래찜질을 통해서 병 있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병 없는 사람도 하면 좋다 그럽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그 독기가 없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이고, 피가 맑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접때 김강남, 김성남 선수에게 부항기를 그 선사를 했는데 이 부항(附缸)도 몸안에 그러한 독기를 뽑아내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게 그 모래찜이나 흙 찜은 삼복더위에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부항은 엄동설한에도 따뜻한 방에서 그 몸에 독기를 뽑아낼 수가 있는 그러한 잇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래찜질은 모래 속에다가 8시간만 묻고 있으면 거의 독기를 전신에서 뽑아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계절을 이용해서 대단히 편리하고, 부항기는 전천후 전 계절을 통해서 어디가 어떻게 아프건 간에 계속해서 뜨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그러한 공부인 것입니다. 그동안에 우리들은 입으로 먹고 주사침으로 꽂아 넣고 해서, 많은 약을 우리 몸안에다 집어넣어줌으로 해서 병을 치료하려고 했고, 많은 것을 보고 읽고 듣고 해 가지고 지식을 속에다 넣을려고 해왔습니다.

무량겁을 그렇게 해 왔습니다마는 이제부터서는 공부는 참선 공부, 비우는 공부 또 치료법은 부항법이나 찜질을 해서 우리 몸에서 뽑아내는 치료법을 쓰신다고 하면은 우리는 물심양면으로 해탈도에 도달하는 시기를 단축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을 믿는 분은 자연식 또 부항법 또 모래찜질, 흙 찜질 이런 것을 해 보실 것이고, 믿지 않는 분은 '그까짓 것 뭐, 이뭣고? 좋다고 해도 해 봤자 별수없더라. 자연식이 좋다고 해서 채소 좀 먹어 봤자 별수없더라. 부항이 좋다고 해서 몇 번 떠 봤지만, 멍만 들지 소용이 없더라. 모래찜해 봤자 진기만 빠지고 소용이 없더라' 이렇게만 생각하실 분이 혹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제 말을 믿는 분은 정말 한 번 해서 안되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되면 세 번, 이렇게 하시다 보면은 '과연 그 중이 나를 속이지 아니했구나' 이렇게 고맙게 생각할 날이 있어서 여러분은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해탈경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게 될 것을 저는 믿고 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도) "한 말씀만 여쭤보겄습니다......."


해도 됩니다. 그런데 거름을 안 한 쌩흙이 좋습니다.

예, 파내 버리고, 겉거름 흙은 파내 버리고 그렇게 파서 흙을 부드럽게 해서 덮고, 돌이 섞여 있는 것은 돌을 잘 추려내 버리고 하면 됩니다.


한번 한 구뎅이에 다시 들어가면 안됩니다. 아버지가 들어가고 나온 구뎅이에 아들이 들어가….

그 구뎅이는 아무리 아버지가 들어갔던 구뎅이라도 지독한 구뎅이기 때문에 새로 새 구뎅이를 파서 해야 합니다. 옷은 빤스를 입고, 가리울 데를 가리고 하시는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 이것이 보통, 사람 몸에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걸쳐서 자세히 말씀드렸고, 여러분의 그 귀, 눈, 코, 입, 마음에 문을 이렇게 해서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에 아까 조실 스님께서 하시던 법문이 이제사 여러분 속에 쏙 들어갔을 줄 생각합니다. 열심히 해제 동안에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 주기시를 당부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38분2초~59분36초)





(4/4)----------------


그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첨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겨울철에 약 70명 가량의 보살님네가 방부(房付)를 들였습니다. 한목 70명이 다 계시지는 않고 노상 20명 내지 3, 40명 이렇게 계셔서 방안이 그뜩해 가지고 탁한 공기 속에서 대단히 참 고생들 많이 하시고, 앉을 자리가 없어서 이중 삼중으로 그렇게 앉아서 하시면서도 서로서로 양보를 하시고 이해를 하셔서 참 잘 정진이 되셨고, 강원도나 경상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모다 새로 오셔서 여러 분들이 오셔서 석 달을 그렇게 참 알뜰히 정진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동안에는 일주일 하실 분이나, 한 달 하실 분이나, 석 달 하실 분이나, 그저 단 하루도 좋으니까 오셔서 하루라도 하십소사 하고 이렇게 권고를 했고, 그러한 탓으로 해서 많은 분들이 잠깐만 시간이 있어도 오셔서 정진하시고 그래서 마음으로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노인도 70 노인이 되셨건, 80 노인이 되셨건, 90 노인까지라도 오셔서 하실 수만 있으면 오시기를 마음으로 고대하고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많이 오시고 나니까 새로운 문제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연세가 너무 많으신 분은 까딱하면 낙상(落傷)하실 우려도 있고, 음식 같은 것에 혹 체하실 염려도 있고 그래서 다른 병환이 나실 수도 있고 또 연세가 많으면 아무래도 마음은 다 고대로지마는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해서 젊은 사람들과 같이 단체 공동생활을 하기에 대단히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연세가 한 70세 이상 넘으신 분은 '방부를 안 받는다'가 아니라 자진해서 '나는 아무래도 내가 늙은 사람이 가서 다른 사람 폐를 끼치느니보다는 집에서 분(分) 따라서 하고, 내가 법회 때나 참석을 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조끔 양보를 해 주십소사 하는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건강이 여의치 못해서 노상 약을 잡순다던지, 노상 들랑달랑 하신다던지 해 가지고 다른 대중에게 피해를 끼칠 만한 그만큼 건강이 안 좋으신 분도 마음으로야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프니 아플지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아프고, 죽더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죽어야겄다. 똥을 싸서 뭉개더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내가 뭉개야겠다' 이런 정도의 신심을 내시는 것은 참 훌륭한 생각이지마는,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어야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조그만큼이라도 피해가 가서는 안 되겠다 하는 이러한 숙녀(淑女)다웁게 해 주셔야 할 걸로 생각합니다.


제 생각 같애서는, 저 개인의 생각 같애서는 '연세가 많은 분도 여기서 돌아가시면 여기서 초상을 치러 드릴 테니까 돌아가시게 될수록에 오셔서 좀 참선해 주십소사' 이런 생각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왜 그러냐?

나 자신도 지끔 생각 생각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지끔 50여 세지마는 머지않아서 곧 60이 되고, 머지 않아서 70이 되고, 그때까지 살게 될랑가 또 모릅니다마는 생각 생각이 늙어가고 있어서 노인이라고 해서 괄세해서는 아니 되고, 노인이라고 해서 푸대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끔 제가 말씀드린 것은 노인이라고 해서 괄세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노인의 대접을 해 드리는 것으로 그렇게 좋게 제 말씀을 이해를 하시고, 여름 결제 방부할 때에는 자진해서 잘 대중을 위하고, 용화선원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뜻으로 저의 말씀을 깊이 참작을 해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을 계속해서 정진하실 수 있는 분, 그분만 또 방부(房付)를 들여 주셨으면 그런 생각입니다. 한 달도 그전에는 한 달도 좋고, 일주일도 좋다고 이렇게 말씀드렸지마는 수효가 70명 정도 이렇게 방부를 들여 놓으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니 원래 선방(禪房)은 한 번 방부 들이면 부모가 돌아가셔도 가들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하 없이도 죽비, 입선(入禪) 죽비(竹篦)를 치면은 방선(放禪) 죽비 칠 때까지는 방안에 사람이 나가지를 못하고, 한 번 죽비를 입선 쳐 버리면 밖에 사람이 방안에를 들어가지를 못하고, 방선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격한 제도가 우리 용화사에서는 그 할머니들 공부 좀 해 보시다가 그 인연(因緣)이라도 맺고 정법(正法)에 씨를 심게 해 드리기 위해서 조끔 문을 널찌막하니 열어 놨었습니다. 그래 놓고 보니 너무 규칙이 문란해.

죽비를 치거나 말거나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옷을 벗어서 걸고 싶으면 걸고, 다락에도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고, 이렇게 해서 전혀 규칙이 없고, 심지어는 입선 중에도 떠억 드러누워서 코를 골고 조신 90 먹은 할머니도 계신 걸로 압니다마는 나는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맙고 감사하고 기특하고 이쁘고 그런 생각마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방은 선방인 만큼 최소한에 규칙이 있어야겠고, 제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 내가 늙었다고 나를 괄세하는구나. 나는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나는 여기 본토백인데 나를 괄세를 하다니 내가 누군데, 종 불사할 때 내가 돈을 얼마를 시주를 하고, 이 법당 지을 때 내가 얼마를 시주한 사람인데 나를 괄세를 하다니, 조실 스님 돌아가신께 인자 다 소용이 없구나' 혹 이렇게 노엽게 생각하실 분이 혹 계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그렇게 노엽게 생각하시지 말고,

그동안 5년 동안,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에 5년 동안 내가 어떻게 해 왔는가를 보시면은 그 저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신다면은 그렇게 노엽게는 아니 생각하실 줄 믿고.


이 선방을 운영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충이 있어서 이 선방을 위하는 뜻에서—또 와서 정진한답시고 다른 사람 정진하는 데 방해를 치게 되면은 자기 공부는 10원어치나 하고, 죄는 만 원어치나 짓게 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깊이 참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올 여름철에는 결제날은 5월 15일에 합니다. 방부를 들이실 분은 미리 방부를 들이시고, 결제날은 방부를 받지를 아니하고 결제 이후에도 방부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선착순으로 할 수밖에는 없지 않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렇다면은 오늘부로 방부가 다 들어와 버리고 한 20명 가량, 많해 봤자 스물다섯 이상이 넘어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넘게 되면 어떻게 하냐? 제비를 뽑자고 그런 말까지도 나왔습니다. 많이 오셔서 반갑고 좋지마는 방이 좁은 것이 한이올시다.


그래서 구참 보살님네들은 조실 스님 법문도 들을 만큼 들었고, 참선도 그만큼 하셨으니까 기초가 다 잡혀서 집에서 가만히 시원한 데서 누웠다 앉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정진하실 수 있을 줄 생각합니다.

법회 때 나오셔서 법문 듣고 정 또 돌아가시기, 바로 그날 가시기가 안 되었으면 며칠 쉬었다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 온 사람 또 먼 데서 오신 분들에게 어쨌든지 법문을 많이 듣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구참 보살님다웁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이 말씀을 듣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시면, 내생에 지옥에 또는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아무리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9분36초~1시간11분10초) (끝)





[법문 내용]


(게송)상월만공산~ / 용홧에서의 기도는 스님네가 열심히 정진(精進)하시는 그 정진이 바로 기도를 봉행하는 것 / 기도는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 / 공견(空見). 공(空)에 대한 이치, 공리(空理),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안된다 / 부처님, 조사들의 경지에 도달해야 / 고인(古人)의 공안상에 복탁(卜度)을 하지 말어라.


다못 화두 거각해서 의단독로하여 통 밑구녁 빠진듯이 의단타파 /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 망상 · 중생심 그놈을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 자연식(自然食) 권장.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하는 방법, 효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심 /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공부 / 연세가 많은 분들은 대중생활이 어렵고 또 보살선방의 방이 좁으니, 새로 온 사람 또 먼 데서 오신 분들에게 어쨌든지 법문을 많이 듣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끔 양보하시길.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연꽃을 보면은 꽃이 필 때 이미 열매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꽃이 진 다음에 그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 피었을 때 이미 꽃 속에 열매가 이미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 끝난 뒤에 뒤에 어떤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고 여러분이 정성스러운 마음 한 생각 낼 때, 이미 여러분의 소원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신다면 기도 성취는 백발백중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부처님이라든지 조사들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지언정, 조그만큼 얻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족함을 삼지는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 '이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觀照)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團束)해서 자기 본참화두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꿰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써 꿰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보리(菩提)의 과(果),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 몸뚱이는 허망(虛妄)한 것이다. 애착(執着)을 갖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지혜롭게 관리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몸뚱이를 매우 애착하면서 관리 면에 있어서는 아주 어리석게 관리를 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애착은 없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게 관리를 해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하는 방법, 효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심.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그러한 공부인 것입니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01~125)2021. 1. 10. 06:43

 

 

((No.101))—1979년 1월 관음재일 법문(79.01.24.음) (58분)

 

101-1:3(1979년 1월 관음재일:약21분).mp3
다운로드
101-2:3(1979년 1월 관음재일:약18분).mp3
다운로드
101-3:3(1979년 1월 관음재일:약19분).mp3
다운로드

 

(1/3) 약 21분. (2/3) 약 18분. (3/3) 약 19분.

(1/3)----------------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하라. 긴히, 긴밀히 꽉!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라. 승두(繩頭)는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話頭), 화두를 놓치지 말고 단단히 거각(擧却)을 해서 공부를 잡두리를 해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이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 향기가 진동을 하는 것입니다. 추운 강추위가 없이 겨울 날씨가 뜨뜻, 마냥 이상(異常) 기온으로 뜨뜻해서 매화꽃이 싱겁게 피어 놓으면 그 매화는 향기가 진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는데,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데 영 순일(純一)하지를 못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않고, 그래 어떻게 했으면 화두가 잘 들리며, 어떻게 했으면 이 발심(發心)이 되어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잘 들려서 공부를 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종종 문의를 받습니다.

 

화두를 타 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하려고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생각이 맹렬하지를 못하고, 들어도 한 번 두 번 들면 들을 때만 잠깐 있다가, 돌아서 일 분도 못 가서 또 화두가 안 들리고. 이리해서 '이거 공부를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냐? 화두가 나한테 맞지를 않아서 그런 것이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저 또 딴 큰스님네한테 가서 화두를 새로 타 가지고 또 해 보니, 새 화두를 가지고 해 보니 뜬금없이 그전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었던 화두가, 묵은 화두가 생각이 나고,

'이것 새 화두는 그만두고 또 묵은 화두를 들고 한바탕해 보까?' 그러니 또 새 화두가 또 생각이 나고.

 

이리해서 갈팡질팡 이 화두 조끔 들어보다 저 화두 좀 들어보다가, '아! 이것이 그 잘 안되는 것이 업장(業障)이 많아서 그러나? 이 업장소멸(業障消滅)하기 위해서 기도를 좀 해 보까?'

마치 어떤 사람이 월급만 받아 가지고는 살림이 도저히 꾸려 나갈 수가 없으니까 '무슨 계를 좀 해 보자. 계를 하려니 무슨 장사를 조끔 해 보까? 밀수 장사를 좀 해 보까? 화장품 장사를 좀 해 보까?' 이것 쫌 해 보다, 저것 쫌 해 보다, 마냥 집에 붙어 있는 겨를이 없이 밖으로 밖으로만 돌아댕기다가 살림도 엉망이고 곗돈도 띠이고, 화장품 장시하다가 들켜 가지고 들통이 나고 이리해서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하는 그러한 사람이 신문에도 가끔 납니다마는 참선(參禪) 공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팔지니라. 몇 자 파다가 물이 안 나온다고 또 저만큼 옮겨서 끌쩍끌쩍, 조끔 파보다 안 나오면 또 저그 가서 끌쩍끌쩍, 그 사람은 종래 물을, 좋은 우물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열 자를 팠는데, 나는 열 자를 파도 안 나오면 스무 자를 파고, 스무 자를 파서 안 나오면 삼십 자를 파고, 기어코 바위가 나오면 그 바위를 떨어내고 이리해서 다른 사람 집 우물보다도 훨씬 맛이 좋은, 가물 때나 장마 때나 변함이 없이 솟아오르는 진짜 생수를 지하수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물을 만날려면은 다른 사람보다도 몇 배를 더 파고 들어가고, 바위까지 뚫고 들어갈 만한 그러한 끈기와 용기와 참을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도 그만한 인내력 끈기가 있어야만 이 무량겁으로 얽히고 얽힌 생사업(生死業)을 뽑아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은 열 자 파는데, 자기는 겨우 서너 자 파고 그때부터서 물이 안 나온다고 짜증을 내고, '이것 우물 자리가 좋지 못해서 이러냐?'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해 가지고 자꾸 화두를 바꿔 쌓고, 그래 가지고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약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실지로 닦아 가는 실참실오(實參實悟)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법문을 해 주셨는데, 법당 공기가 너무 혼탁한 탓인지 모두 조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냥 보통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면은 멀쩡하니 눈이 반짝거리고 잠이 안 오다가, 참선 법문만 시작했다 하면은 또 죽비(竹篦) 치고 「이뭣고?」만 했다 하면 눈이 스르르르 감겨 가지고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웬수 만난 듯이 이를 갈아붙인다 해도 또 스르르르..

죽비를 안 치고 이야기를 하고 앉었으면 잠이 안 오는데, 왜 죽비를 치고 「이뭣고?」를 하면 잠이 오냐? 이것이 대단히 이건 참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어떤 노장님이 하루는 찾어와서 참선을, 출가하신 지가 그분도 근 20년이 된 분인데 비구니 스님인데, "참선을 새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조실 스님께 계를 받고 불명을 타고 그래서 중이 되었는데 인자 조실 스님 돌아가셨으니 천상 원장(院長) 스님을 의지해서 참선을 해야겄으니 공부를 새로 좀 가리켜 주십시요"

"아니 그동안에 20년이란 세월을 선방으로 다니시면서 했는데 무슨 공부를 새로 한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저기 경상도 어떤 큰스님을 만나 뵈옵고 어떻게 해야 도를 빨리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쭤봤더니 "어쨌든지 앉아서 많이 졸으라"고, "그저 많이 졸라야지 많이 졸라야 하느니라" 이리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앉아서 가만히 옆에 사람 모다 10년 20년 공부한 구참 스님네 가만히 보니까 전판 죽비를 치니, 치고 나서 5분도 못 되아서부터서 졸기 시작하는데 방선(放禪)할 때까지 그렇게 맛있게 자고 있단 말이여.

'아하! 저분들은 참 공부가 참 깊이든 분들이로구나. 에이! 나도 한바탕 자 봐야겄다' 앉아서 아무리 잠을 자려고, 기를 쓰고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애를 먹었다고 그럽니다. 한 달 두 달 어떻게 해야 이것이 잠이 오나 하고 아무리 공을 들여 봤자 점점 잠이 안 오거든.

 

그래 가지고 옆에 사람 '누가 저 공부를 잘하나?' 아하 확실히 금방 된 시작한 사람은 잠을 안 자고, 오래된 사람일수록 잠을 잘 자거든.

그것참, 그래서 그 일 년 이태 사오 년 내지 십 년을 걸려서 자오는 연습을 해 가지고 이제 겨우 잠을 나도 참 어디다 내놓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자랑삼아서 그 새로 된 사람 선배 후배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떠억 꺼내서 자랑을 했더니 "아! 노스님, 공부 그것이 아니에요. 잠자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 니가 모르는 소리다. 내가 큰스님한테 내가 들었는데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러니 그 옆에 있는 구참들도 모다 그렇지 않다고 그러거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 또 다른 스님네한테 가서 또 물어보니까 역시 '존 것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확실히 그 존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이제사 왔습니다. 입맛 나자 노수 떨어진다고 이제 겨우 질 나서 잘 좀 자게 되었는데 이제사 그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라 하니 이거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몸은 늙고 신경통으로 무릎은 쑤시고 하니 이거 큰일났습니다"

 

큰스님 한마디는 '그 많이 졸라야 한다'는 말씀은 농(弄)이 좀 들어 있는 말씀이지마는, '어쨌든지 앉아서 「이뭣고?」를 열심히 해라' 아마 이러한 뜻으로 하신 말씀을 조끔 농적으로 표현을 하셨던 모냥인데, 그 말을 아주 고지식하게 듣고서 조는 것이 참선인 줄 알고, 그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십 년 적공(積功)을 들여서 질을 냈다고 그럽니다.

 

그만큼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 산란 아니면 혼침, 중국에 고봉(高峰) 스님이라고 한 큰스님도 '내가 3년 동안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은 내가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으리라' 이래 3년 사한(死限)을 세우고서 참선을 시작했는데, 겨우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 있을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잠이 퍼일어났습니다.

잠이 퍼일어나면 일어서서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하다가 잠이 깨지면 다시 또 포단 위에 올라가서 정진을 하는데, 앉으면 이 생각 저 생각 산란심(散亂心)이 퍼일어나고 산란심이 조끔 가라앉을 만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고 이리해서,

그리고 화두를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어느 곳으로부터서 어데로부터서 내가 왔으며, 죽으면 내가 어느 곳으로 가는고?」 화두를 이렇게 하라고 그 지도를 받아 가지고 아! 그렇게 화두를 하는데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졌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데서 왔으며, 이 세상을 살고 죽으면은 어느 곳으로 가는고?' 아 이렇게 두 갈래 길로—생각도 이렇게 간추려 지지를 아니하고, 앉았다 하면은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 산란 아니면 혼침,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 지낸 것이 어느덧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가고 며칠 안 가면 마지막 3년 기한이 차서 그날이 지내가면 천상 자살을 해 버리려고 했던 그날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착잡하기가 말할 수 없고, 초조하고 불안하기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경황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하룻저녁에는 꿈에 단교(斷橋) 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이 화두를 해라' 아 꿈에 화두를 탔는데, 꿈을 깨서 보니 그 꿈속에서 탄 그 화두가 그렇게 성성(惺惺)하게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제절로 들려.

 

밥 먹을 때도 건성, 똥 눌 때도 건성, 대중생활 속에서 생활을 해 나가는데 일체 건성이고, 오직 「만법귀일(萬法歸一)이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리는데 기가 맥혀.

하루 이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저녁까지 밤새 잠 뭐,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해 볼려고 해도 딴생각이 나지를 않고 오직 화두만 독로(獨露)—하늘을 쳐다봐도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땅을 봐도 화두, 하늘을 봐도 화두, 사람을 뭐 수백 명 사람 모인 데에 있어도 그 화두뿐이라 그 말이여.

그렇게 해서 6일, 엿샛날이 돌아간, 엿샛날 채웠는데 그때 달마 스님 제삿날을 맞이해서 탑전(塔前)에 제사를 사시(巳時)에 마지(摩旨)를 올리러 갔다가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영탱화(影幀畵)에 그 찬(讚)이 있는데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백 년이면 삼만육천 일이죠. '백 년, 삼만육천 일에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그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로구나' 한 아! 그 게송을 보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3년 동안 사한(死限)을 해 가지고, 3년 해서 되지 아니하면 죽을 기한을 한 사람이 공부야 되건 안 되건 등한히 지내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안 들리고, 아무리 혼침에 떨어져도 단 일 분, 단 일 초도 등한히 지내지를 안 하고 계속 최선을 다해서, 앉아서 잠이 오면 서서 거닐면서 화두를 들고 쪼옥, 졸음이 나가면 다시 와서 앉고 하기를 3년을 되건 안 되건 한결같이 단속을 했던 것입니다.(처음~20분57초)

 

 

 

 

(2/3)----------------

 

이 공부는 '잘된다'고 생각이 된다고 해서 잘된 것도 아니고, '잘 못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그 공부가 잘 못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화두가 제법 잘 들리고 성성하다고 '아! 화두가 참 잘 들리는구나. 이런 상태로 주욱 나갔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공부가 잘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아! 화두가 잘 들리는구나. 참 이렇게 좀 쭉 나갔으면' 고 생각이 벌써 화두를 놓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게 공부 옳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여.

잘되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를 들고 나가는 것뿐인 것이여.

 

또 그렇게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그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그런 때가 또 옵니다. 그러나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야말로 내가 한 계단 힘을 얻을 수 있는, 올라서려고 하는 그러한 고비가, 바로 그 공부가 잘 안 되고 뒤틀리고 지루하고 몸부림쳐 지고 한 때가 그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것을 잘 아시고, 조끔도 짜증을 내지 말고 허리를 주욱 펴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이뭣고?」 하면서 이렇게 내쉬어.

 

참 앉아서 뒤틀리고, 답답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고 이럴 때에는 조용히 일어서서 밖에 나가 가지고 '한 일(一)' 자로 떠억 노선을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고, 가슴이 좀 시원해지고 혼침이 없어지면 다시 또 자리에 가서 하고.

 

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잘 지혜스럽게 그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조끔도 한 생각도 후퇴하지 말고 지혜롭게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하면은 한 걸음, 한 고동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로써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고비요 거기서 힘을 더는[省力]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간절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그 맛없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정말 잘 잡드리해서, 생각 생각이 잡드리해서 거각(擧却)해 나간다고 하면 결정코 그 한마디가 나에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참, 열쇠요 관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놈이 뭣고?~~」

 

처음에는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숨 내쉬는 것과 화두를 요렇게 합해서 해 들어가면 초학자(初學者)도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과 화두를 함께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초학자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방법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공부가 기초가 잡혀서 익숙해 들어가면 구태여 숨 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두 번 세 번마다 한 번씩 들다가, 나중에는 다섯 번 여섯 번 숨 쉴 동안에 한 번씩 들다가, 나중에 참으로 더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뜰 때—입선(入禪)할 때만 든 게 아니라—아침에 눈 딱! 뜨면 벌써 그때 화두를 턱! 챙길 줄 알아야 혀.

 

딱! 뜰 때 「이뭣고?」

떠서 화장실에 갈 때도 「이뭣고?」

세수하고 양치질할 때도 그때 「이뭣고?」를 한번 떡! 챙겨 보도록.

차 탈 때도 챙겨 보고, 시장바닥에 시장에 가서도 화두를 떠억 챙겨 보거든.

 

시장에 가서 조심할 것은 돈지갑을 잘 단속을 하고 「이뭣고?」를 해야지, 잘못하다가 그 쓰리꾼한테 떼껴 가지고 '시장에서 이뭣고? 하라 하더니 돈만 뺏겼다' 이러지 말고.

 

처음에는 화두를 들고 참선하게 되면, 화두 하는데 정신을 쏟다 보면 일상 그 생활하는 일에 혼란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밭을 매는데 가꾸어야 할 곡식은 뽑아 버리고 잡초는 남겨 두고 이러한 수도 혹 있을 수가 있고, 그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 화두에 전념을 하다 보면 하고 있는 일에 차질이 오는 수도 더러는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자꾸 찾고, 생활 속에서 공부를 익혀 놓으면 무심(無心) 속에—속으로는 항시 화두를 화두에 의심(疑心)을 관(觀)하고 있지마는, 무심 속에 소지가 제절로 되고 빨래가 제절로 되고 밥도 제절로 밥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운전사나 모다 그 운전사 운전하는 것을 보면 왼쪽 발 오른쪽 발, 왼손 오른손, 눈 귀, 전체를 다 활용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야기하면서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기아를 꺾고, 왼발 오른발은 그 악셀레다나 그놈 모다 맘대로 그놈 이놈 밟았다, 저놈 밟았다 자유자재로 하거든. 그것이 익숙해지면 그렇게 되는 것이여.

 

참선도 화두가 들려서 익숙해지면 생활하면서 화두가 되고, 화두 드는 가운데 생활이 제절로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주위 환경 모든 것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위를 요리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진을 하지 아니한 사람, 모든 주위에 노예 노릇을 하고, 밖에 것이 주인이 됩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바로 나의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살림을 하는 것이지, 살림이 주인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집 살림, 종으로부터서 일체 모든 기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참선을 한 사람이라야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나에 부하요, 나에 가구요, 나에 살림이 될 때에 바로 내가 이 우주법계(宇宙法界) 주인이 되는 것으로써 이 세계는 고대로 놔둔 채 불세계(佛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극락세계(極樂世界)요, 깨달음의 세계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겨울도 물러가고 완연히 봄기운이 돌아왔습니다. 어제가 우수(雨水)로써 '입춘 우수가 지내면 대동강 물이 녹는다'고 그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이 환절기가 되어서 몸조심하시고 이제 춥지도 더웁지도 않는 이러한 계절인 만큼 각별히 정진에 힘을 써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순경계(順境界), 우리의 뜻에 맞는, 우리 뜻대로 되는 그러한 일을 당하면은 좋아하고, 우리의 뜻에 어긋나는 역경계(逆境界)를 만나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당장 남을 원망하고 자기를 한탄하고 삽시간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순경계(順境界)라고 해서 그렇게 좋아서 날뛸 것도 없고 그럴수록에 더욱 근신하고 더욱 자중해서 일을 잘 수습해 나가야 할 것이고, 더욱이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 때 이것이 '이것이야말로 나에 인격과 나에 역량을 가름해 보는 좋은 관문이요 계기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허리를 쭉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터억 들고서 그 어려운 문제를 냉철하게 관찰을 해야 합니다.

그 역경계가 대인 관계가 되었건, 사업 문제가 되었건, 또는 재산 문제가 되었건, 또는 자손 문제가 되었건, 부부간에 문제가 되었건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내 뜻에 어긋나는 그러한 문제가 있을 때 더욱 마음을 안정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내 본심을 딱! 챙겨 가지고 관망을 한다고 하면은 거기에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덜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내 본심(本心)을 딱! 챙기지 못하면 감정(感情)이 먼저 발동(發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 발동을 했다 하면 이성은 숨어 버리게 되는 것이고, 이성은 숨어 버리고 감정이 발동된 상태에서 무엇을 보면 그 일이 절대로 옳게 보여지질 않고, 그러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했을 때는 반드시 실수를 이중 삼중으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만나되, 하나는 당장 그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상대방을 원망하고 감정이 발동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일을 처리한 것과, 한 사람은 '아! 이 좋은 때를 기회를 만났구나. 내 인격과 역량을 시험해 보는 좋은 시험 문제가 내 앞에 왔구나. 어디 한바탕 멋지게 한바탕 이것을 처리해 보자'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역경계를 다스린 사람과는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참선을 하는 법보제자는 이렇게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이렇게 처리해 나가신다고 하면은 이 세계는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나쁜 세계가 아니라, 도업을 성취할 수 있는 그러한 불보살(佛菩薩)이 계시는 우리에 수도원(修道院)이요 선방(禪房)이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대단히 자기의 마음을 돌리는데 아주 효과적인 마음가짐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에 도업(道業)을 시험할 수 있는, 나에 도(道)를 이룩하는 불무깐(대장간)이다. 여기에서 내가 꺼꾸러져서 되겠느냐, 이것에 내가 져서는 되겠느냐'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로 나간다고 하는 것은 보다 더 강력하고 용기와 지혜를 가져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써 아주 상식적인 말이기도 합니다마는, 여러분이 일상생활 속에 이러한 마음가짐을 활용을 해 나가시고 실천을 하신다면은 사람이 사람됨이 자타가 공인할 만큼 달라져 가는 것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20분58초~39분26초)

 

 

 

 

(3/3)----------------

 

벌써 정월 보름에 해제(解制)하고 열흘이 지내 가지고 정월 관음재(觀音齋)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물 흘러가듯이 세월이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있었던 사람이 오늘 없고, 오늘 같이 담소했던 사람이 내일은 황천객(黃泉客)이 되고. 그렇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기가 맥히게 무상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작년 겨울에는 한국에 큰스님네가 몇 분 또 열반하시고 그렇게 해서 해를 거듭할 때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차례차례 가시게 됩니다.

 

어쨌든지 금생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 만났을 때에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아직 죽을려면 멀었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 번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고, 다시 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 꺼지면 그것이 또 한 생(生)이 지내간 것입니다.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그 일념(一念), 한 생각 한 생각의 생사가 결국은 이 몸뚱이의 생사와 직결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을 누누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하고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그 기러기 발자취는 모래 위에 남아 있구나. 사람은 황천으로 떠나갔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 이러한 내용의 게송이었습니다.

 

기러기가 모래밭에 강변에 놀다가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아까 그 기러기가 놀던 모래 위에는 그 기러기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러기 발자취가 과연 얼마 동안 남아 있을 것인가? 바람 불고 비 오면은 금방 그 자취는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70년 내지 80년 살다가 저승으로 떠나갑니다. 떠나간 뒤에 얼마 동안 그 사람의 이름이 그 집에 남아 있습니다. '저건 아무개 집이다. 아무개 집이다. 아무개가 저 집에서 살았다' 이렇게 집에 이름만 남아 있지만 여간 훌륭한 인물이라야 역사적으로 아무개 아무개, 그것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이름을 기억한 사람이 줄어져 가는 것입니다. 보통 3년, 1년.

죽은 뒤에 며칠간 잠깐 있다가 일 년 지내면 잊어버리고, 삼 년 지내면 더 잊고, 십 년 지내면 거의 다 잊어버리고, 삼십 년 못 가서 그 사람의 이름을 물으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져.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물질적인 재산, 조끔 수준이 있는 사람은 권리나 명예를 대단히 존중을 합니다마는 그 명예라 하는 것도 모래밭에 남아 있는 기러기 발자취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하는 길, 이것밖에는 모래밭에 기러기 발자취에 지내지 못하고, 재산이라든지 권리라든지 이런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꼭 필요하다고 하지마는 이러한 것에 지나치게 욕심을 가지고 함부로 대들다가는 칼날, 멀금하게 든 칼날에 묻은 꿀과 같애서 그 단맛만을 생각하고 함부로 그 칼날 끝에 묻어 있는 꿀을 핥아먹다가는 혀에 상처를 입게 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재산이 필요해서 우리는 힘을 다해서 재산을 모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잘 알아서 재산을 모아야지 잘못 모이다가는 오히려 인생을 불행하게 맨드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칼날 끝에 묻은 꿀이나, 모래밭에 남아 있는 발자취,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필요하기는 하지마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고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십분 이해를 하시고,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공부에 대해서 정말 나에 온 정성을 쏟을 수 있을 때 인생으로서 태어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하루하루 이렇게 늙어가고 있어서 지끔 사십 오십이라 하더라도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육십 칠십이 금방 돌아오는 것입니다.

 

관(棺) 속에 들어갈, 우리는 기어코 한 번은 관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천하 없는 사람도 그걸 면할 길이 없습니다마는 그때 관 속에 들어가서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가지고 '아! 내가 그때 열심히 공부를 좀 젊었을 때 좀 할 것을...'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지금 이만끔 건강했을 때 우리 모두 다 같이 열심히 정진을 해서 노자(路資)를 많이 벌어 놔야 되겠습니다.

 

어떤 이는 죽을 때 쓸려고 돈을 많이 모여 가지고, 죽은 뒤에 49재도 지내고 제사도 지내고 하라고 돈을 모이는 할머니를 제가 봤습니다마는, 그것은 진짜 노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자기 화장(火葬)은 죽은 다음에는 누가 해 주던지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돈 한푼 남겨 놓지 안 해도 땅에 묻지 아니하면 불에다 태우게 되어 있습니다. 자손이 없어도 그것은 사실은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걱정할 것은 이 몸뚱이를 버리고 떠나는 '이 주인공, 그놈을 어떻게 닦어 놨느냐?' 그것이 진짜 노잣돈입니다. 돈을 황금으로 뭉쳐서 저승에 가기 위해서 뭉쳐 놔 봤자 그것은 염라대왕 앞에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관 속에다 넣어 주어도 그것은 관 속에 남아 있지, 그 영혼이 그것을 가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놓을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 뭣고?」 많이 해 놓은 것 그거라야 염라대왕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불법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믿되 참선을 했느냐 안 했느냐?'

여러 법보제자들은 어쨌든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이 '참선(參禪)을 했다'고 하는 그 한마디를 잊지 말고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수가 있느냐?

 

죽을 때에는 그 병 아픔을 자기가 이기지 못해서 죽게 됩니다. 이길 수만 있으면 더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그것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결국은 죽게 되는데, 그 고통이 너무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때 화두(話頭)가 잘 들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숨이 꼴딱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를 한 사람이라야 염라대왕 앞에서도 떠억 「이뭣고?」를 할 수가 있고, '니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했느냐?' 물어볼 때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때 너무너무 아프고, 딸 생각 외손자 생각하다가 화두를 놓쳤다 하면은 내생(來生)에 가서 자기가 무엇을 전생(前生)에 했는가를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많은 수백 명 법보제자 계십니다마는 '전생에 자기가 무엇을 했던가?' 아마 아신 분이 계신가? 아마 계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입태(入胎) 출태(出胎) 할 때에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생에 사람이 다시 또 사람이 되았나? 개가 사람이 되았나? 무엇이 되았나?'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전생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 모르듯이 내생(來生)에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도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 딱! 끊어질 때에도 화두를 턱! 역력(歷歷)하게 화두를 떠억 들고서 숨이 딸끄닥 끊어지도록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은 아까 중국에 고봉 스님처럼 공부가 되건 안 되건, 앉아서건 서서건 누어서건 아주 죽기로 이를 갈아붙이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야, 평상시에 그렇게 해 놔야만 마지막 숨 거둘 때에도 「이뭣고?」 딸깍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게 되겄습니까? 그때에도 「이뭣고?」를 할 수 있게 되려면은 밥 먹을 때도 「이뭣고?」

똥 눌 때도 「이뭣고?」

누가 나 억울한 소리를 해서 속을 박박 긁어줄 때에도 나는 「이뭣고?」

 

배가 아플 때도 「이뭣고?」

머리가 아플 때도 「이뭣고?」

누었을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 놔야 돼.

 

옆에서 조끔 문만 덜꺼덕 닫힌다고 짜증을 내고,

누가 좀 떠든다고 짜증을 내고,

밥을 빨리 안 가져 온다고 짜증을 내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고,

이래저래 화두는 다 놓쳐 버리고 이래 가지고서는 죽을 때에 화두가 들려질 까닭이 없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가 「이뭣고?」를 했단 말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스갯말 같지마는 댁에 가셔서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이 그 확실히 그럴 것이로구나' 분명 가남이 가실 줄 믿습니다.

 

하루 잠깐 소매만 스쳐 가는 인연도 5백 생의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한 법당에서 같이 법문을 듣고 또 법을 설하고 또 법을 듣고 이러한 인연은 몇억만 겁의, 몇억만 생의 무량겁의 인연이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이러한 모임을 만남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연이 해탈로를 걸어, 인연으로 해서 해탈로를 걸어서 마지막 목적지인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만날 때까지 한 사람도 한 분도 이탈한 분이 없도록.

 

기왕 이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르지만, 만나 가지고 여기서 물러서 가지고 '아! 참선해 봤자 되지도 않고 기도를 좀 해 보까?' 갈팡질팡하실 일이 아닙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뭔 일이 그 잘되더니 참선을 시작하면서부터서는 뭔 일이 잘 안된다' 그러한 분, 그래 가지고는 '참선을 하고 부터서는 그 장사가 잘 안된다' 이런 분을 접때 한번 봤는데,

참선을 한다고 해서 장사가 안되고, 참선을 시작했더니 장사가 잘된다고 또 좋아하시고—다 참선을 안 한 분도 장사가 잘될 수도 있고, 또 참선을 한 분도 잘될 수도 있고 또 안될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

그런 일이 조끔 잘된다고 해서 금방 거기에다 붙여 갖고 좋아하고, 조끔 안된다고 해서 '아! 그 참선을 했더니 안되는가?'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하실 일이 아닙니다.

 

잘되거나 못되거나 좀 든든하게 묵중하게 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가신다고 하면 조끔 안된 듯하다가도 잘되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올바른 진리를 향해서 나가는 데 어째서 뭔 일이 안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혹 '니가 정법을 믿는데 얼마만큼 철저히 믿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제석천왕(帝釋天王)이 그러한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럴 때에 시험에서 탈락이 되지 않도록—아들 대학이나 고등학교 시험 본 데만 신경을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의 이런 진리, 참선에 있어서의 시험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할머니가 자기 공부해 나가는데 멋지게 합격이 되도록 해야만 아들딸 손자손녀도 학교에 멋지게 합격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부디 열심히 공부하셔서 도업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39분30초~58분7초) (끝)

 

 

 

 

[법문 내용]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 우물을 팔지니라 / 왜 죽비 치고 「이뭣고?」를 하면 잠이 오냐? / 조는 것이 참선인 줄 착각한 스님 / 중국 고봉 스님의 3년 사한(死限) 수행.

 

화두는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열쇠요 관문 / 참선도 화두가 들려서 익숙해지면 생활하면서 화두가 되고, 화두 드는 가운데 생활이 제절로 되어지게 되는 것. 숙련된 운전사의 운전하는 비유 /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바로 나의 살림이 되는 것 / 순경계(順境界), 역경계(逆境界)를, 나의 도(道)를 이룩하는 불무깐으로 삼는 적극적인 마음가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것이 한 생(生)이 지내간 것.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 / (게송)안비천말적유사~ / 오직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하는 길, 이것밖에는 다 무상(無常)한 것 / 진짜 노잣돈은 지금 이만끔 건강했을 때 열심히 참선 정진한 것 / 「이뭣고?」 많이 해 놓은 것 그거라야 염라대왕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 한 법당에서 법을 설하고 또 같이 법을 듣고 이러한 인연은 몇억만 생의 무량겁의 인연. 모두 다 마지막 목적지인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만나야.

 

 

우물을 파되, 좋은 물을 만날려면은 다른 사람보다도 몇 배를 더 파고 들어가고, 바위까지 뚫고 들어갈 만한 그러한 끈기와 용기와 참을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도 그만한 인내력 끈기가 있어야만 이 무량겁으로 얽히고 얽힌 생사업(生死業)을 뽑아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도를 빨리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쭘에 '그 많이 졸라야 한다'는 큰스님 말씀을 아주 고지식하게 듣고서 조는 것이 참선인 줄 알았던 스님.

 

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잘 지혜스럽게 그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조끔도 한 생각도 후퇴하지 말고 지혜롭게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하면은 한 걸음, 한 고동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로써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고비요 거기서 힘을 더는[省力],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간절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그 맛없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정말 잘 잡드리해서, 생각 생각이 잡드리해서 거각(擧却)해 나간다고 하면 결정코 그 한마디가 나에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참, 열쇠요 관문인 것입니다.

 

참선도 화두가 들려서 익숙해지면 생활하면서 화두가 되고, 화두 드는 가운데 생활이 제절로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주위 환경 모든 것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위를 요리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진을 하지 아니한 사람, 모든 주위에 노예 노릇을 하고, 밖에 것이 주인이 됩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바로 나의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금생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 만났을 때에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아직 죽을려면 멀었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 번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고, 다시 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 꺼지면 그것이 또 한 생(生)이 지내간 것입니다.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그 일념(一念), 한 생각 한 생각의 생사가 결국은 이 몸뚱이의 생사와 직결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을 누누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죽을 때에는 그 병 아픔을 자기가 이기지 못해서 죽게 됩니다. 이길 수만 있으면 더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그것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결국은 죽게 되는데, 그 고통이 너무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때 화두(話頭)가 잘 들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숨이 꼴딱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를 한 사람이라야 염라대왕 앞에서도 떠억 「이뭣고?」를 할 수가 있고, '니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했느냐?' 물어볼 때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때 너무너무 아프고, 딸 생각 외손자 생각하다가 화두를 놓쳤다 하면은 내생(來生)에 가서 자기가 무엇을 전생(前生)에 했는가를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 딱! 끊어질 때에도 화두를 턱! 역력(歷歷)하게 화두를 떠억 들고서 숨이 딸끄닥 끊어지도록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은 아까 중국에 고봉 스님처럼 공부가 되건 안 되건, 앉아서건 서서건 누어서건 아주 죽기로 이를 갈아붙이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야, 평상시에 그렇게 해 놔야만 마지막 숨 거둘 때에도 「이뭣고?」 딸깍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