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76~400)2023. 8. 17. 16:55

(No.387)—1989년 법보재(89.4.21) (65분)

 

(1) 약 33분.

 

(2) 약 32분.



(1)------------------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야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堂堂)한 대도(大道)가 밝고 밝아서 분명해. 사람사람마다 본래 갖추어서 낱낱이 뚜렷하게 다 이루었더라.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다.
그렇게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대도를 낱낱이 가지고 있건마는 다못 한 생각 어긋지는 바람에 이렇게 영겁(永劫)토록 만 가지 얼굴을 나투더라.

본래는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이나 우리 모두가 똑같은 존재였어. 그런데 비로자나 법신불은 한 생각을 어긋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영원히 법신불로서 온 우주 법계에 두루하고 계신 겁니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바로 그 도리를 깨달아서 비로자나 법신과 한마음, 한 몸이 되셨건만 우리 중생은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업상(業相) ・ 전상(轉相) ・ 현상(現相), 삼세(三細)의 세 가지 그 미세한 망념이 동(動)해 가지고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六麤]을 일으켜서 육도 법계(六道法界)를 이렇게 생사(生死) 속에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여.


오늘 기사년(己巳年) 3월 16일(음력) 용화선원의 법보단(法寶壇) 만년위패(萬年位牌) 각 열위 영가(各列位靈駕)를 천도(薦度)하는 법보재(法寶齋) 대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이 법보단에 봉안되어 있는 만년위패 각 열위 영가는 숙세(宿世)로부터 많은 인연을 맺어서 그래서 이렇게 법보단에 만년위패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 우주 법계에 그 영가(靈駕)가 몇 백억만의 영가, 천문학적 숫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 많은 영가 가운데에,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 만년위패에 현재 모셔 있는 위패(位牌)가 대략 1만6천 이상 올라가고, 그 한 위패에 두 분 내지 세 분씩 모신 위패도 있어서 2만2천여의 영가가 지금 모셔져 있습니다.
그 우주 법계에 빼어 난 틈없이 가득차 있는 영가 가운데에 어떻게 해서 이 법보단의 만년위패에 모시게 되었는가? 이것은 결단코 우연한 인연(因緣)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불법(佛法), 정법(正法)의 인연을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맺어 왔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영가로서 이렇게 모시게 된 것입니다.

모시게 된 그 인연은 효심(孝心)이 있는 아들이나 딸이나 며느리가 있었고, 또 인연 깊은 아내가 있고, 또는 인연이 있는 자비(慈悲)한 일가친척이 있어서 그러한 연분(緣分)으로 해서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고, 또 본인이 스스로 이렇게 모시고 간 분도 계시지만, 그거야 어떻게 되었든 여기 만년위패에 모시게 된 것은 그러한 깊은 불법의 인연이 있어. 그래서 여기에 모시게 된 것이여.
한 생각 어긋짐으로 해서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결국은 영가로서 여기에 따악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그 ‘한 생각 어긋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목련존자(目連尊者)라고 하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대성현이 계시는데, 부처님의 왼팔이요, 사리불존자(舍利弗尊者)는 부처님의 오른팔이라고 할 만큼 그러한 부처님의 아주 대제자인데, (목련존자) 그분이 5백 생 동안을 그렇게 물매를 맞아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저 5백 생 이전에, 몇 겁 이전에—결혼을 해 가지고 아내와 너무 가깝게 지내고,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한테 썩 효심이 있고 그랬었는데 결혼한 뒤로는 아내한테 빠져 가지고 부모한테 등한히 하니까 그 어머니가 ‘그놈이 계집을 얻더니 미쳐 가지고 에미를 본체만체한다’고 밤낮 그런 꾸지람을 하시니까, 처음에는 한두 번 그냥 들었었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말씀을 하니까 그냥 신경질을 내면서 ‘어떤 기운 센 놈이 그냥 저 늙은이 좀 뚜드려 팼으면 좋겠다’고 이런 입에 못 담을, 부애 김에 푹 해 버렸다 그 말이여. 그 과보(果報)로 5백 생 동안을 죽을 때는 맞어 죽었어.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부처님의 십대제자의 한 분이 되어 가지고도 마침내 돌아갈 때에는 맞어 죽어. 외도에, 집장 외도(執杖外道)한테 맞어서 돌아갔어.
물론 뭔 잘못이 있어서 맞어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그 외도들이 그전에는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모두 부처님한테 다 개종을 하고 귀의를 하니까, 그 신도를 다 빼앗기게 되니까 ‘어떻게 하면은 이걸 막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가장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에 훌륭한 제자를, 왼팔 오른팔을 꺾어 버리면 되겄다 싶어서 목련존자를 그렇게 죽였는데, 그래도 그 과보(果報)는 전생에 그런 한 생각 푹 신경질을 내 가지고 어머니한테 욕을 퍼부은 그 관계로 5백 생을 그렇게 맞아서 돌아가셨다 그 말이여.


회한당초일념차(悔恨當初一念差)로  황포환각자가사(黃袍換却紫袈裟)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아본서방일납자(我本西方一衲子)로  연하유락제왕가(緣何流落帝王家)ㄴ고
나무~아미타불~

회한당초일념차(悔恨當初一念差)로  황포환각자가사(黃袍換却紫袈裟)다.
참! 한탄스럽고 한탄스럽구나, 당초에 한 생각을 어긴 탓으로 가사(袈裟)를 황포(黃袍), 곤룡포(衮龍袍)로 바꾸어 입었구나.

아본서방일납자(我本西方一衲子)로  연하유락제왕가(緣何流落帝王家)냐.
내가 본래 저 서방(西方), 인도 천축(天竺)의 한 수행 납자(衲子)로서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던가.

이건 중국 청나라 순치황제(順治皇帝)가 18년 동안을 황제로 잘 나라를 다스리다가 18년만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온 나라를 다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순치황제는 황제의 지위를 헌신짝같이 버려 버리고 어느 절로 들어가서 부목 노릇을 했습니다. 부목 노릇을 하면서 이 시를 읊은 것입니다.
수행승으로 도를 닦다가 어느 제왕의 행차를 보고 ‘하! 나도 한번 저렇게 황제가 되어 가지고 한번 정치를 잘해 볼까’ 그러한 잠깐 한 생각 낸 그 과보로 제왕가에 태어나서 천자가 되어 가지고 18년 동안을 그렇게 황제 노릇을 하다가 이렇게 출가를 한 거여.


또 운문(雲門) 선사라고 대도사가 계셨는데 그분은 두 분의 다른 도반(道伴)과 서이 도반이 되어 가지고 도를 닦는데, 그때 마치 임금님 행차하는 것을 보고 또 잠깐 한 생각을 냈어. ‘아, 나도 임금 노릇이나 한번 해 볼까’ 그런 생각을 잠깐 낸 그 과보로 3생 동안을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다른 도반은 목주(睦州)와 영수(靈樹) 선사, 이 두 분은 진즉 3생 동안에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대도인이 되어서 조실(祖室)로서 천 명, 천오백 명 모다 제자를 거느리고 선지식이 되어 가지고 있는데, 이 운문 선사는 한 생각 잘못 먹은 관계로 임금 노릇을 한 생하고, 또 그다음 생에 다시 또 임금 노릇을 하고 그래서 3생 동안을 임금 노릇을 했어. 그리고서 겨우 출가를 했어.

홍도 비구란 스님은 다겁 동안을 수행을 잘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견성성불을 하게 되었는데, 정진 중에 병이 나서 문을 열어 놓고 문턱에 손을 놓고서 떠억 앞산을 바라보면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가지고 문이 닫혀졌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문이 닫혀지면서 손가락이 깨졌어. 그 바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폴쏙 진심(瞋心)을 냈다 그 말이여.
‘아, 못된 바람이 이렇게 불었다’고 하고, 아픈 손을 움켜잡으면서 가벼운 진심을 냈는데, 아! 그 과보로 뱀의 몸을 받아 뱀이 되어 가지고, 그 절에 나타나 가지고 그 모래를 요렇게 꼬리로 골라 가지고 꼬리로써 글씨를 썼어.

아석비구주차암(我昔比丘住此庵), 내가 옛날에 비구로서 이 암자에 머물러서, 다겁근수근성불(多劫勤修近成佛)터니, 다겁 동안을 부지런히 수행을 해서 성불이 가까왔었는데,
송풍취타병중좌(松風吹打病中座)요, 솔바람이 불어 쳐 가지고 병중에 자리에 냅다 쳤다. 일기진심수사신(一起嗔心受蛇身)이다. 한번 진심을 낸 바람에 이렇게 뱀 몸뚱이를 받았다.

그 꼬리로써 글씨를 써. 이러한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건 전부 역사적인 실화입니다.

한 생각 망령된 생각을 낸다던지, 탐심 진심을 낸다던지, 어리석은 생각을 내면 그 한 생각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것이 과보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누구를 꼭 죽여야만 그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누구 죽일 생각을 낸다던지 미워하는 생각하면 그것도 한데에 떨어지지 않어. 결국은 한 생각, 번갯불 치듯한 그 사이에 일어나는 한 생각이 결국은 그러한 무량겁으로 끼치는 윤회(輪廻)의 과보(果報)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해야 하느냐? 한 생각을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공부를 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열반경』에 말씀이 25리, 25리면 우리나라 이수(里數)로는 250리여. 250리 동안 그 넓은 광장에 수십만 명이 거기에 꽉 차 있게 해 놓고, 마치 여의도광장보다도 그 몇십 배 되는 그 광장에 몇 수십만 명이 꽉 찼다 그 말이여.
그런데 왕이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려 가지고, 바리때에다가 기름을 가득 넘실넘실하니 부은 바리때를 들고 그 250 리 동안을 그 바리때를 들고 그 사이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서 갔다오도록. ‘바리때를 엎질러서 기름을 엎지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삐끗 기울어져 가지고 기름이 한 방울이라도 한데에 떨어지면 안 된다’
그래 가지고 또 한 장군에게 명령을 해서 잘 든 큰 칼을 빼서 떠억 들고서 그 뒤을 따라. 따라가면서 기름만 엎지르기만 하면 한 칼로 목을 치도록 그렇게 딱 명령을 내렸어.

그 신하는 왕명을 받고, 있는 정성을 다해서 넘실넘실 넘치는 바리때를 들고서 250리를 가는데, 가는 도중에 별별 일을 다 당해.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 가운데는 모다 금은 목걸이 장식을 하고 참 양귀비와 같이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도 있고 별별 참 유혹 당할만한 그런 일들이 있지만 그런 데에 한눈도 팔 겨를이 없어. 어떻게 전신(全身)이 긴장을 했던지 땀이 비오듯 하는데 그 바리때를 들고 그걸 갔다가 돌아온다 그 말이여.
얼마나 조심을 하면은 한 방울도 엎지르지 않고 250리를 갔다올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더군다나 삐긋해서 한 방울만 엎질러도 장군의 잘 드는 칼로써 모가지가 달아날 텐데.

이 말씀은 무엇에다가 비유한 말씀이냐 하면은 수행자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기를 가득 든 기름이 넘실거리는 바리때를 들고 250리를 갔다올 때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해라 이거거든.
오욕(五欲), 재산 ・ 보물 ・ 명예 ・ 권리 ・ 색, 일체 오욕락이 전후좌우에 꽉 차 있다 하더라도 기름이 가득찬 바리때를 들고 250리를 갔다올 때 그런 것이 눈에 띨 리도 없고, 한 생각도 생각이 거기에 흩어질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불보살, 조사(祖師)들은 한 생각 방일(放逸)하지 않기를 마치 그와 같이 하셨다 이거거든.

오욕락(五欲樂)은 막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마지막 숨질 때까지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특히 그저 바르게 살려고 할수록에 그런 유혹은 더 심하고, 특히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열심히 닦을라고 할수록에 그러한 유혹은 더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의 손길이 뻗쳐 오는 것입니다.

또 『열반경』에 한 말씀이 있는데 그 잔나비, 원숭이를 잡아서 파는 엽사(獵師)가 무슨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느냐 하면은 끈끈이, 딱 들어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끈끈이를 떠억 넙덕한 상(床) 위에다가 떠억 발라 논다 말이여.
원숭이란 놈이 보고 먹음직스럽게 이렇게 꾸며 가지고 따악 이렇게 해 놓으면 원숭이란 놈이 그놈을 보고 쫓아와서 그놈을 손으로 턱 움켜잡어. 손이 거기에 닿자마자 두 손이 딱 들어붙어 버려. 두 손이 딱 들어붙으니까 암만 띨라고 해도 안 떨어지니까 그걸 띠기 위해서 두 발을 거기다가 버티고서 막 띨라고 하니까 두 발까지 거기에 딱 들어붙어 버려.
두 손이 들어붙고 두 발이 들어붙으니까 이제는 최후 수단으로 입으로 막 그놈을 물어뜯어서 띨라고 하니까 주둥이까지 거기에 딱 들어붙어 버렸다. 그러니 옴싹달싹도 하도 못하고 딱 들어붙어 버리니까 엽사가 와 가지고 그놈을 작대기로 떠억 뀌어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어.

우리가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도(道)를 닦을라고 마음을 먹으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오욕락으로써 떠억 우리 기회를 봐 가지고 낚시밥을 던진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잠깐 눈을 거기다가 한눈을 팔던지 거기에 집착심을 내면 간단하게 마왕 파순이의 낚시밥에 걸려 가지고 마구니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구니는 무슨 원수가 져서 발심한 수행인을 그렇게 끌어가는가? 발심을 해서 도를 닦아 가지고 도를 통한 도인(道人)이 생겨나고 부처님이 생겨나면, 마구니 궁전이 흔들리고 마구니 설 땅이 없어져 버려.
마치 경찰이 타락하고 무능하면 그 틈을 타서 온갖 범죄가 날뛰듯이, 경찰이 애국심을 가지고 자기의 임무를 철저히 하고 그러면 치안이 잘 유지가 되고 하면 크고 작은 범인이 날뛰지를 못하는데, 경찰이 타락하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부정과 야합을 하거나 하면 날뛰는 것은 온갖 강도 절도 사기가 범람을 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그러한 범죄자들은 어쨌든지 나라의 법이 확립 질서가 잡히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여.
그래서 마왕 파순이는 갖은 수단을 써 가지고 어쨌든지 발심한 수행자를 현혹시키고 발심한 신도, 불제자(佛弟子)를 갖다가 갖은 수단으로 현혹하고 유혹을 하고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오욕락(五欲樂)은 마치 원숭이 잡는 끈끈이와 같은 것이고, 그래 끈끈이는 탐진치(貪瞋癡) 오욕이고, 엽사 사냥꾼은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에다 비교하고, 모든 수행하는 사람은 잔나비에다가 비유한 말씀인데, 우리가 바르게 살고 발심을 해서 불법(佛法) 정법(正法)에 귀의해 가지고 도를 닦을라고 하면 크고 작은 많은 그런 마왕 파순이의 유혹이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 빠지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럴라면은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서 살아 나가기를 기름이 가득찬 바리때를 들고 가는 그러한 경건하고 엄숙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도를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하기를 그렇게 무섭게 단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처음~33분27초)





(2)------------------

강호춘진낙화풍(江湖春盡落花風)한데  일모한운과벽공(日暮閑雲過碧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빙거요득인간환(憑渠料得人間幻)하니  만사도망일소중(萬事都忘一笑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강호춘진낙화풍(江湖春盡落花風)한데  일모한운과벽공(日暮閑雲過碧空)이로구나.
강호에 강산에 봄이 다하니 꽃 떨어진 바람이야. 봄바람이 부니 활짝 만발했던 꽃이 바람에 휘날리는구나.
일모한운과벽공(日暮閑雲過碧空)이여. 해가 저무니 한가한 구름이 푸른 하늘을 지나는구나. 바람이 부니 곱게 피었던 꽃도 떨어지고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 있던 그 구름도 모양이 변하면서 저리 휘날려 없어지는구나.

빙거요득인간환(憑渠料得人間幻), 그것을 보고 인간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게 되는구나. 그 청황적백으로 오색이 찬란하게 그렇게 아름답게 피었던 꽃이 부는 바람에 허망하게 져 버리고, 새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보기 좋게 피어 있던 그 구름도 금방 모양새가 바뀌면서 저리 흩어져 없어지는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인간의 오욕, 명예 ・ 권리 ・ 재산 ・ 권리 이런 것들이 정말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정말 분명히 알 수 있구나.
만사도망일소중(萬事都忘一笑中)이여. 정말 비긋이 웃는 웃음 속에 인간 만사(萬事)를 다 잊어버리게 되는구나.

인간의 무상(無常)한 것을 정말 확실히 깨달아 버린다면 어찌 그까짓 재산이라든지, 명예라든지, 권리라든지, 색이라든지 그까짓 것 때문에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그것을 위해서 싸울 수가 있겠는가.
그것을 좀 많이 차지할라고 국법을 어기고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망하도록 인류가 망하는 데도 그것을 불구하고 자기만 부자가 될라고, 자기만 부자가 되기 위해서 공장 폐수를 막 강물에 흘려보내 가지고 강에 있는 고기들이 다 죽고, 거기에 날아오는 모든 학과 철새들이 다 죽고, 그 물을 마시고 사람들이 다 병들어 죽게 만드는 그러한 짓을 할 수가 있겠느냐?
자기가 정권을 잡고, 자기가 권리를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한 짓을 해 가지고 동서고금의 모든 권리 좋아하는 사람들 다 쓸쓸하게 죽어가고, 우리 눈으로 지옥에 간 곳은 우리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마는 그 사람들의 말로(末路)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현실적으로 보면서 그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기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막 자기가 나라야 망하거나 말거나, 회사야 망하거나 말거나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불법을 믿은 사람은 정말 철저하게 오욕(五欲)이 정말 무상(無常)하고 허망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은 우리 불법을 믿는, 정법을 믿는 우리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정말 숙세(宿世)에 얼마나 선근(善根)을 심어 왔으면 우리는 그런 데에 얽혀 들어가지 아니하고 이렇게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해서 영원한 해탈도를 향해서 이렇게 정진(精進)을 하고 한 회상(會上)에서 법문을 듣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이 법보단에 모셔 있는 2만 수천의 영가들도 참 숙세에 깊은 선근을 심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시면 과연 어떠한 공덕(功德)이 있을 것인가?

첫째, (영가가) 마음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편안한 거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조상을 정성스럽게 받드는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이 점점 흔들리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돌아가신 영가(靈駕) 조상을 잘 받드는, 집집마다 옛날에는 사당(祠堂)이 있었는데 이제 사당 있는 집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가가 계실 곳이 없어져 버렸어. 그런데 이렇게 편안하게 이렇게 만년위패로 모시게 되었으니 영가가 얼마나 흐뭇하고 편안하시겠느냐 이거거든.

더군다나 그냥 막연하게 모셔 놓은 데에 그치지 아니하고 아침마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을 올리고, 법회가 있을 때마다 축원을 해 드리고 이렇게 좋은 법문을 들을 수가 있으니 무량겁으로부터 오는 모든 업장(業障)이 봄눈처럼 소멸이 되고, 설사 과거에 그 얽히고설킨 원한(怨恨) 관계가 있다손 치더라고 자꾸 법문을 듣고 듣다 보면 스르르르 하니 다 풀어져 버려. 그러니 마음속에 맺히고 맺힌 원한과 미움이 풀어져 버리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누구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서 풀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망(怨望)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먼저 풀어 버려야 해. 부부간에, 형제간에, 일가친척간에 어쨌든지 원망 원한이 있으면 내가 자진해서 풀어 버려야 하는 거여. 그것을 어찌 오래오래 끌고가고 내생에까지 끌고간다면 그것은 큰 일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좋은 도반(道伴)들을 만나. 이 만년위패에 2만 수천의 영가들이 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해서 좋은 도반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의 세계는 항상 배고프고 목마르며 그렇게 외롭고 괴로운 것인데, 이 법보단에 모심으로 해서 많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서, 많은 영가들과 한 도반이 됐고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외롭지를 안 해.

다섯 번째는 항상 이렇게 어떠한 크고 작은 재사(祭祀)나 천도재(薦度齋)가 있어도 이 법보단에 모신 모든 영가들이 정식으로 초빙이 되어 가지고 같이 운감(殞感)을 하시고, 그렇게 천도를 받을 수가 있게 되기 때문에 배고프고 굶주린 것이 없어져.

여섯째는 자손과 그 가족들이 모두가 다 편안하고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가 있게 되어.
그 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나, 그 영가가 원한을 품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 영가가 갈 곳이 없고 거리 중천(重泉)을 헤매다가 항상 그 집안을 맴돌면서 하소연을 하기 때문에 집안이 편틀 못하고 자꾸 마장과 장애가 일어나고 자꾸 비명(非命)에 횡사(橫死)하는 그런 사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수가 있는데, 그 영가를 편안히 이렇게 모셔 드리니 집안에 그런 우환(憂患)이 끊어지고, 또 그 영가를 여기다 모셨으니 자연히 여기 신도가 되어서 와서 법문을 듣고 그러니 발심을 해서 그러니 또 그러한 좋은 공덕(功德)을 얻게 되는 것이여.

그리고 여덟 번째는 이 영가와 우리 모두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천상 극락(極樂)에 왕생(往生)을 하고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않게 되어. 이렇게 보리심을 발해 가지고 정법에 귀의해 가지고 참선 수행을 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삼악도에 떨어질 수가 있느냐 이거거든.
그래서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렇게 법보단을 창설을 하셔서 우리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하여금 이렇게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인연 있는 영가를 모심으로 해서 이런 여덟 가지 공덕을 얻도록 자비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겨우 열 분, 스무 분, 일 년 내 들어온 분이 겨우 이렇게 몇십 분밖에 안되었는데, 해마다 가속도가 붙어서 이제는 이 법당이 거의 얼마 안 가서 위패가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득차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이 법보전을 증축을 할 수밖에는 없어서 금년에 양쪽으로 세 칸을 밑으로부터 위에까지 3층으로 이렇게 증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도분들도 법회 때마다 이 법당에 다 들어오시지를 못하고 저 앞뜰에 잔디밭에, 여름에 그 뙤약볕에도 그 밖에서 들으시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미안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양쪽으로 법당을 늘키면은 신도님네들도 와서 법회에 참석하시기 좋고, 영가들도 몇 해 동안 잊어버리고 이렇게 또 모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어올 뿐만 아니라 외국에 가 계신 모든 교포들도 서로 다투어서 여기 위패를 모시는 바람에 이렇게 많은 법보가족(法寶家族)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법보단에 위패(位牌)를 모신 분, 또 생축(生祝)으로 올리신 분, 우리는 모두가 남녀노소와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한 형제간이 된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세세생생에 여읠 수 없는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고 또 만나서 기어코 우리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다 제도(濟度)할 때까지 우리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한 목적지를 향해서 우리는 가야 할 그러한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세속에 인연은 혈통으로 맺고, 무슨 은혜로 맺고 원수로 맺고 이래 가지고 설사 어떤 좋은 인연으로 선연(善緣)으로 은혜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거든. 끝없이 얽히고설켜서 삼악도(三惡途)로 가는 인연인데, 우리 법보가족은 영원히 삼악도를 여의고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향해서 가는 그러한 청정한 인연인 것입니다.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한번 자신의 본마음 왕, 본심왕(本心王)을 위배(違背)하고 나와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이냐. 몇 번이나 삼악도에 빠졌다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을 거쳐 왔던가.

태(胎)로 들어갔다가, 알[卵]로 들어갔다가, 습(濕)으로 들어갔다가, 화(化)로 들어갔다가, 태란습화 사생의 몸뚱이를 받아 나면서 삼악도를 돌고 돌아 오늘 여기에까지 와서, 법보제자로서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을 듣고 무량겁으로부터 쌓아 온 그 번뇌를 깨끗이 씻어 버리게 되었습니다.(今日滌除煩惱染)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받았지마는, 거꾸로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영원한 해탈도로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고!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하고 죄를 많이 지었으니, 어떻게 우리 같은 죄 많은 중생이 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을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한 생각 삐끗 어겨 가지고 지옥에도 갈 수 있지만, 한 생각 자성(自性)으로 탁! 돌이킴으로 해서 해탈도로 들어갈 수가 있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부처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여. 거기에 이 최상승법의 고마움이 있고, 최상승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에 한 생각 돌이키면은 더 빨리 천상(天上)에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 한마디 바로 알아듣고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바로 마음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심왕(本心王), 우리의 자성(自性)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기사년(己巳年) 법보재 법요식을 맞이해서 경향(京鄕) 각지에서 저 일본과 미국에서 사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법보가족이 이렇게 모이셨습니다.
부디 금년에 동참하신 이 인연 공덕으로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消滅)이 되고, 가정도 태평하고 여러분이 경영하는 모든 일이 장애 없이 잘 풀려서 뜻과 같이 성취되시기를 바라고, 거기에서 더 정법에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주인공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키는 방법입니다.

‘이뭣고?’ 이것이 시심마(是甚麼),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다 그 나름대로 참 공덕이 많지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고 온갖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다 닦고 그러한 공덕 다 합친 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여.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프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업장이 팍팍 녹아져 버려. 지옥고를 받다가도 ‘이뭣고?’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은 찰나간에 거기서 벗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뭣고?’ 한마디는 정말 우리가 목숨 바쳐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서 다 같이 ‘이뭣고?’를 한번 하십시오.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제 소리를 내지 말고 속으로 ‘이뭣고?’

‘이뭣고’가 좋다니까 남 자고 있는데 ‘이뭣고? 이뭣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것도 안 되고, 기차간에서나 어디서나 속으로 해야지 거기 앉아서 ‘이뭣고? 이뭣고?’ 해싸면 그거 안 된다 그 말이여.
때와 장소를 가려서, 가끔 혼자 있을 때에는 잠이 오고 망상이 일어나면 소리를 한번씩 내서 ‘이뭣고?’ 해도 좋습니다마는 여러 인원이 있는 데서는 속으로 하셔야 되어.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분통이 나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억울하고 속이 상할 때 그렇게 한 여나무 번 속으로 하시라 말이여. 사람이 없는 데에 가서 소리를 내서 “이뭣고?~~~~” 아주 속에 아주 이런 놈이 다 녹아 빠지도록 “이뭣고?~~~~” 이렇게 몇 번만 하면 그렇게 가슴이 미어질라고 한 것이 스르르르 하니 다 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그리고 일요법회, 매달 첫째 일요법회 오후 2시 꼭 빠지지 말고 오시고 또 부득이해서 못 오실 때라도 못 오신 분은 녹음 법문 테이프(錄音法門tape)를 구해 가지고 가셔서 항상 녹음 법문이라도 자주 들으시고.
결제 ・ 해제 ・ 초파일 ・ 칠석 그런 때도 꼭 참석을 하셔서 법문을 듣고 그렇게 해서 자꾸, 까딱하면 풀리기가 쉬운 것, 아무리 가다듬고 할려고 해도 사흘 못 가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푸르르 스르르르 풀어지거든. 그래서 또 법문을 듣고 가면 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고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게송을 한마디 읊고 법보재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하니  공재인간주일회(空在人間走一回)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여불래역불거(不如不來亦不去)하고  야무환희야무비(也無歡喜也無悲)를
나무~아미타불~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가 다 축복을 하고 모두가 기뻐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면은 모두가 다 슬퍼한다 그 말이여.
공재인간주일회(空在人間走一回)라. 공연히 인간으로 태어나 가지고 쓸데없이 한바탕 울고 웃다가 그렇게 한바탕 돌아치고 가는구나.

불여불래역불거(不如不來亦不去)요  야무환희야무비(也無歡喜也無悲)다.
차라리 오지를 말고 또 이렇게 가지를 말 것을, 공연히 오고 공연히 가 가지고 기뻐할 필요도 없고 또 슬퍼할 것을 없을 것을.

이것은 순치 황제가 출가해 가지고 읊은 시인데, 산승(山僧)의 생각은 이 세상에 이렇게 태어난 것을 저는 괜히 왔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생(來生)에도 천당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냐?
인간으로 태어나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다시 이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이고, 인간으로 태어나야 다시 여러분과 또 만나게 되어서 같은 불회상(佛會上)에서 이 최상승법을 닦게 되기 때문에 저는 다시 인간으로 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지만 그 괴로운 일로 인해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고, 슬픈 일을 많이 만나게 되지마는 그 슬픈 일로 인해서 우리는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괴로운 일, 슬픈 일을 어찌 일양(一樣)으로 나쁘다고만 하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가 발심을 하고 정법을 믿고 해탈도를 닦을 수가 있게 된다면 괴로운 일, 슬픈 일 모든 원한 관계가 다 불보살(佛菩薩)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화신(化身)이요, 법문(法門)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좋은 일을 만나면은 그런 대로, 나쁜 일을 만나더라도 그 나쁜 일로 인해서 진심(瞋心)을 내고 슬픈 데에 빠지지 말고 철저하게 무상을 느끼면서 발심을 해서 다 같이 최상승법을 향해서 박차를 가합시다. (33분33초~65분1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 / 용화선원의 법보단(法寶壇)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시게 된 것은 깊은 불법의 인연이 있기 때문 / 목련존자가 5백 생 동안을 죽을 때는 맞어 죽었다 / (게송) 회한당초일념차(悔恨當初一念差)~ / 한 생각 낸 과보—순치황제의 출가, 운문(雲門) 선사의 3생 동안의 임금 노릇, 홍도 비구가 뱀의 몸을 받은 것.

한 생각을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공부를 할 줄을 아는 사람 / 『열반경』의 비유. 수행자가 그 한 생각을 단속하기를, 기름이 가득한 바리때를 들고, 한 방울 기름도 떨어지지 않게 250리를 갔다오라. 한 방울만 엎질러도 모가지가 달아난다. 한 생각 방일(放逸)하지 않기를 마치 그와 같이 해야 / 『열반경』의 비유. 엽사(獵師)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놓고 끈끈이로 원숭이를 잡는다.

(게송) 강호춘진낙화풍(江湖春盡落花風)~ / 불법을 믿은 사람은 정말 철저하게 오욕(五欲)이 정말 무상(無常)하고 허망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신 공덕(功德) / 법보단에 위패(位牌)를 모신 분, 또 생축(生祝)으로 올리신 분, 우리 법보가족은 영원히 삼악도를 여의고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향해서 가는 그러한 청정한 인연을 맺었다.

(게송)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받았지마는, 거꾸로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영원한 해탈도로 갈 수도 있다. 거기에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가 있는 것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고 온갖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다 닦고 그러한 공덕 다 합친 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뭣고?’ / ‘이뭣고?’ 한마디에 업장이 팍팍 녹아진다 / (게송)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 / 괴로운 일로 인해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다.


우주 법계에 빼어 난 틈없이 가득차 있는 영가 가운데에 어떻게 해서 이 법보단의 만년위패에 모시게 되었는가? 이것은 결단코 우연한 인연(因緣)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불법(佛法), 정법(正法)의 인연을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맺어 왔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영가로서 이렇게 모시게 된 것입니다.

한 생각 망령된 생각을 낸다던지, 탐심 진심을 낸다던지, 어리석은 생각을 내면 그 한 생각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것이 과보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누구를 꼭 죽여야만 그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누구 죽일 생각을 낸다던지 미워하는 생각하면 그것도 한데에 떨어지지 않어. 결국은 한 생각, 번갯불 치듯한 그 사이에 일어나는 한 생각이 결국은 그러한 무량겁으로 끼치는 윤회(輪廻)의 과보(果報)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해야 하느냐? 한 생각을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공부를 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렇게 용화선원에 법보단을 창설을 하셔서 우리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하여금 이렇게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인연 있는 영가를 모심으로 해서 이런 여덟 가지 공덕을 얻도록 자비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법보단에 위패(位牌)를 모신 분, 또 생축(生祝)으로 올리신 분, 우리는 모두가 남녀노소와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한 형제간이 된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세세생생에 여읠 수 없는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고 또 만나서 기어코 우리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다 제도(濟度)할 때까지 우리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한 목적지를 향해서 우리는 가야 할 그러한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세속에 인연은 혈통으로 맺고, 무슨 은혜로 맺고 원수로 맺고 이래 가지고 설사 어떤 좋은 인연으로 선연(善緣)으로 은혜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거든. 끝없이 얽히고설켜서 삼악도(三惡途)로 가는 인연인데, 우리 법보가족은 영원히 삼악도를 여의고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향해서 가는 그러한 청정한 인연인 것입니다.

한 생각 삐끗 어겨 가지고 지옥에도 갈 수 있지만, 한 생각 자성(自性)으로 탁! 돌이킴으로 해서 해탈도로 들어갈 수가 있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부처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여. 거기에 이 최상승법의 고마움이 있고, 최상승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에 한 생각 돌이키면은 더 빨리 천상(天上)에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 한마디 바로 알아듣고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바로 마음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심왕(本心王), 우리의 자성(自性)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다 그 나름대로 참 공덕이 많지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고 온갖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다 닦고 그러한 공덕 다 합친 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여.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프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업장이 팍팍 녹아져 버려. 지옥고를 받다가도 ‘이뭣고?’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은 찰나간에 거기서 벗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뭣고?’ 한마디는 정말 우리가 목숨 바쳐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山僧)의 생각은 이 세상에 이렇게 태어난 것을 저는 괜히 왔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생(來生)에도 천당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냐?
인간으로 태어나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다시 이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이고, 인간으로 태어나야 다시 여러분과 또 만나게 되어서 같은 불회상(佛會上)에서 이 최상승법을 닦게 되기 때문에 저는 다시 인간으로 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지만 그 괴로운 일로 인해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고, 슬픈 일을 많이 만나게 되지마는 그 슬픈 일로 인해서 우리는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괴로운 일, 슬픈 일을 어찌 일양(一樣)으로 나쁘다고만 하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가 발심을 하고 정법을 믿고 해탈도를 닦을 수가 있게 된다면 괴로운 일, 슬픈 일 모든 원한 관계가 다 불보살(佛菩薩)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화신(化身)이요, 법문(法門)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좋은 일을 만나면은 그런 대로, 나쁜 일을 만나더라도 그 나쁜 일로 인해서 진심(瞋心)을 내고 슬픈 데에 빠지지 말고 철저하게 무상을 느끼면서 발심을 해서 다 같이 최상승법을 향해서 박차를 가합시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3. 7. 14. 15:56

 

 

(No.341)—1987년 11월 첫째일요법회(87.11.01) (74분)

 

(1) 약 41분.

 

(2) 약 33분.



(1)------------------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이여  나유미후도육창(那有獼猴跳六窓)고
나무~아미타불~
소지진공무면목(笑指眞空無面目)헌디  연운퇴월하천강(連雲推月下千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이시여. 높고 높은 동(動)함이 없는 법(法) 가운데 왕(王)이시여.
나유미후조육창(那有獼猴跳六窓)이리요. 어찌 잔나비, 원숭이 같은 건데, 원숭이 떼들이 어찌 육창(六窓)으로 드나들면서 놀아나리오.

소지진공무면목(笑指眞空無面目)헌디, 웃고 진공(眞空)을 가리키되 면목(面目)이 없어. 웃고서, “허허” 하고 웃고서 진공을 가리키는 데 면목이 없더라.
면목이 없는데, 연운퇴월하천강(連雲推月下千江)이로구나. 구름이 꽉 연(連)해 있는데 달을 밀추어서 천 강(千江)에 내리게 하더라. 구름이 꽉! 찌어서 달이 안 보이다가 그 구름 사이로 달을 밀추어 가지고 일천 강에 그 달빛이 찬란히 빛나게 되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1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통해서 감명 깊게 우리 사부대중이 경청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涅槃)하시기 한 5, 6년 전부터서 『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를 비롯해 『몽산법어』, 그밖에 『초발심자경』 그밖에 불교의 여러 조사(祖師) 스님네의 기연(機緣)과 불조의 기연,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수없는 설법을 하신 것을 녹음을 해 놓은 것이 큰 릴(reel)로 100개, 또 작은 릴로 50개 이렇게 해서 150개나 되는 릴에다가 몇백 시간을 연거푸 틀어도 다 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방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해서 소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그 한 편씩을 듣고, 또 대중들도 결제(結制) 중에 그 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고, 전국 모다 여러 선방에서도 이 법문을 듣고, 또 여러 사부대중도 그 테이프(tape)를 구득해서 다 듣고, 외국에 가 계신 분들도 테이프를 구해서 모다 듣고, 이렇게 해서 천하에 이 최상승 법문을 두루두루 듣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정법(正法)이 무엇인가를 알고 거기에 차츰 신심(信心)을 내서 참선(參禪)을 할려고 이렇게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법문 가운데에 어느 법문이 더욱 좋고, 좋지 못하고 한 것이 있으리오마는 언제나 들을 때마다 법문마다 새롭고 참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도 더욱이 오늘 들은 법문은 참 감명 깊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참 누누이 말씀이 계셨지마는 이 사바세계에 오욕락(五欲樂)—재산이다, 명예다, 권리다, 색(色)이다, 안락이다, 이러한 오욕락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목숨까지라도 거기에 바치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말세 중생(末世衆生)들이 어떻게 해서 최상승법, 이 생사(生死) 없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최상승법을 믿게 되며 또 그걸 믿고 실천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온 세상은 온통 명예와 권리와 부귀영화, 모다 색(色), 모다 이러한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갖다가 보다 더 많이 획득을 하고, 그것을 수용을 하기 위해서 참 부자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모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고 있는 이 속에서 어떻게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러한 것을 비유해서 「화리생련(火裏生蓮)이다. 불 속에서 연꽃이 났다」
그 연꽃이라 하는 것은 진흙과 물속에서 뿌리를 박고 피는 것인데, 훨훨 타고 있는 불 속에서 연꽃이 어떻게 필 수가 있겠습니까? 그 필 수 없는, 도저히 상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에다가 그렇게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달마대사(達摩大師)께서도 150세의 고령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양무제(梁武帝)를 만나 가지고—양무제가 중국 천자(天子) 중에서는 제일 불법에 대한 신심이 돈독한 천자인데, 그분은 천자이면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정사(政事)를 볼 만큼 그렇게 신심이 돈독을 했습니다.
절을 짓는다든지, 경을 판각을 해서 모다 편다든지, 스님네를 모다 도 잘 닦아가도록 많은 스님네를 외호를 한다든지, 탑을 세운다든지, 불상을 조성한다든지 그러한 상(相)이 있는 그러한 불사(佛事)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불법(佛法)을 여의고는 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불사 밖에는 모르고.

그러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칙사(勅使)를 보내서, 저 남해로 보내 가지고 달마 스님을 영접을 해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짐(朕)이 이렇게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많은 스님네를 이렇게 도승(度僧)을 하고 그랬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이렇게 달마 스님께 자기가 그동안에 한 불사에 대한 공덕도 자랑 겸해서 또 달마 스님한테 칭찬도 받기 아울러서 그렇게 해서 떠억 물으니까, 달마 스님이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달마 스님이 ‘아! 참 장하시다’고, ‘천자로서 그렇게 불법을 숭앙하고, 이렇게 불사를 많이 하니 그 공덕이 참 한량이 없어서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터억 찬양을 해 주었으면 양무제가 신심을 더욱 발해 가지고 온통 중국 천지를 아주 불법으로 장엄을 하고 그럴 텐데, 아 그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그러니까 양무제가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그렇게 물어보니까,
“확연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그러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보니까,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양무제와 달마 대사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을 푸대접을 해서 달마 스님은 그길로 돌아서서 양자강을 건너 가지고, 위나라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묵언을 하면서 면벽(面壁)을 하고 계시다가, 혜가 대사(慧可大師)가 나타나 가지고 팔을 끊어서 올리고 신심을 보여 가지고, 드디어 달마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마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달마 스님이 그때, 양무제를 만났을 때 양무제를 찬양을 해서 그렇게 해서 양무제의 절대적인 외호(外護)를 받으면서 법을 설하고 참선법을 선양을 할려고 했다면은 중국 천지에 최상승법을 그렇게 널리 펼 수도 없고, 융숭하게 선양할 수도 없었고, 오늘날까지 참선법이 전해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확연무성(廓然無聖)입니다”

“짐을 대한 그대는 누구냐?”
“모르겠소”

탁! 이렇게 함으로써 여지없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그 면목을 바로 거기서 드러내 버린 것입니다.


양무제는 본래 옹주, 중국에 옹주(雍州)라는 데가 있는데, 천자가 되기 전에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었습니다. 옹주자사로 있었는데, 치(郗)씨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황후(皇后)가 아니고 치씨 부인인데, 참 얼굴이 예쁘고 그런데 성질이 어떻게 표독하고 질투심이 강했어.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한 꼴을 보지를 못하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오직 자기만을 위해 주고, 자기만을 사랑해 주고, 자기만을 갖다가 알아주기를 그렇게 바랬어. 조금만 한눈을 팔거나 그러면은 어떻게 강짜가 심하고 투기가 심하던지 도저히 용납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때 당시 임금이라든지 또는 원님이라든지... 옹주자사라 하면은 아마 원님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고관을 지내면은 다 첩실(妾室)도 있고 다 기생과 놀기도 하고 술도 먹고 그러기 마련인데, 치씨 부인은 그러한 꼴을 못 봐 가지고 나중에는 어떻게 독기(毒氣)를 피우다가 자기가 자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가지고 집 앞에 있는 우물에 빠져 가지고 자살을, 투신(投身)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쫓아와 가지고 우물 속에 들어가 가지고 간신히 건지려고 가니까 어느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큰 무서운 독사, 아주 오색이 찬란한 금색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는 혀를 널름널름. 그래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사람들이 접근을 못했어.
눈은 번쩍거리면서 오색이 찬란한 비늘이 번쩍거리면서 그냥 무서운 독사의 어금니를 갖다가 벌리고서 혀를 널름거리는 통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구제하지를 못하고 기절초풍을 해 가지고 우물에서 다 기어나와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런데 꿈에면 그 무제(武帝) 자고 있는 후궁(後宮)으로 무서운 독룡이 기어 들어와 가지고는—본래 처음에 들어올 때에는 구렁이로 들어와 가지고는 스르르르 깜짝할 사이에 본래의 그 치씨 부인의 모습이 되어 가지고 아양을 떨면서 품안으로 파고들어. 깜짝 놀래 가지고 양무제가 눈을 떠 보면은 간 곳이 없다 그 말이여.
아, 후궁에만 들어가면 그놈이 나타나 가지고 독사가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그런 통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꼬치꼬치 말라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그 연못에서 그냥 꼬리를 치면서 물을 치면은 거기서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할 수 없이 그 우물 위에다가 치씨 부인의 사당(祠堂)을 짓고, 인자 초상화를 그려서 딱 모시고.
그래 가지고 『자비도량참(慈悲道場懺)』이라 하는 십 권에 달한 참회하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이라고 하는 십 권의 책을 저술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도량참법에 의해서 치씨 부인을 갖다가 원한을 풀고 그래 가지고 천도(薦度)하는 의식을 거행을 했는데.

그 치씨 부인이 결국은 그 공덕으로 그러한 업(業)의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면서 공중에서 소리를 치기를 “양무제한테 내가 그동안에 옹졸한 생각으로 그런 독을 품다가 결국은 투신 자살해서 이런 흉악한 몸을 받아 가지고, 결국은 아주 복수를 해서 당신도 죽이고, 당신을 가까이 한 모든 여자를 갖다가 다 말려서 죽이려고 내가 작정을 했는데, 『도량참법』을 만들고 사당을 지어서 나를 고승을 청해다가 이렇게 천도를 해 주니, 내가 모든 원한을 풀고서 내가 천상에 올라가니 참 감사하다”고.
이렇게 올라간 뒤로는 다시는 꿈에 나타나서 괴롭히는 일도 없고, 그 우물에서 갖다가 꼬리를 치고 모다 그런 일도 없고 조용해 졌는데, 그 뒤로 양무제가 지은 『도량참법』이라고 하는 참회법이 널리 세상에 행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무슨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색(色)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명예 ・ 권리에 대한 그런 일어나는 욕심을 이기는 것도 그것도 모두가 어려운 일이고 중대하지만, 그 여러 가지 가운데에 가장 수행하는 데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고, 자기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쌓아 온 모든 공덕을 한 생각에 멸진(滅盡)을 시켜 버리는 그 무서운 것이 바로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고 하는 것은—우리가 사바세계에 살아가는 데에 정말 진심을 내지 않고는 살기가 어렵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진심, 아마 이 세상에 사람이 지금 현재 40억이니 50억이니 하고 또 세계 역사가 생긴 이래로 몇 천만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진심(瞋心)을 한 번도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몇 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왕으로 계실 때에 어떤 문둥병보다도 더 무서운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무서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무서운 창병(瘡病)이 걸린 거지를 나수기 위해서, 결국은 환자를 갖다가 치료해 주기 위해서 어명(御命)으로 치료하게 되는데 도저히 그 병이 하도 무서운 병이라 치료할 수가 없어.
그래서 “오직 이 사람의 병은 한 번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진심(瞋心)을 내지 아니한 사람의 피를 뽑아 가지고 약을 제조해야만 이 병을 낫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임금님께 그 의사가 “그러니 이 세상에 성 안 낸 사람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약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자신이 한 번도 진심을 낸 기억이 안 나. 그러나 철이 들기 전 어렸을 때는 혹 몰라서 유모한테 가서 물어봤습니다. “내가 혹 철난 뒤에는 진심을 낸 기억이 없지만, 철이 나기 전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혹 진심을 냈느냐?”고 물어보니까, “정말 갓난아기 때부터서 진심을 내신 일도 없고, 철이 난 뒤로도 오늘날까지 진심 내시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어.
그래서 임금님은 의원에게 “내 피를 뽑아서 만들어라” 하니까 “어떻게 감히 상감마마의 옥체에서 피를 뽑을 수가 있습니까?” “괜찮다. 어명이니까 피를 뽑아서 해라” 그래 가지고 피를 뽑아 가지고 무서운 그 병을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환자가 병을 낫고서 그래 가지고는 10생(十生)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을 갖다가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괴롭힌 바로 조달(調達)이의 전신(前身)이고, 그 어진 상감마마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인 것입니다.

어째서 상감마마로서 자기의 피를 뽑아서 무서운 병을 고쳐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부처님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이생에는 부처님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로 태어나시니까 저도 사촌으로 태어나 가지고 가지가지 못된 방법으로 부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결국은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마는.

참, 소승불교에서는 ‘그런 죄를 지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부처님 몸에 피를 나게 한 죄로 생함지옥을 했다’ 이렇게 보지마는,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정말 조달이야말로 10생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께 그렇게 큰 은혜를 갚았다. 조달이의 공덕이 아니면 어떻게 부처님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크게 대도를 성취를 하셨겠느냐. 조달이야말로 정말 부처님보다 먼저 깨달으신 선불(先佛)이시고 그렇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마는.
순행(順行)으로 항상 뜻을 맞추어 주고, 따라 주고, 부드럽게 대해 주고 그런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역행(逆行)으로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충격을 주면서 고통을 주면서 그래야만 보다 더 큰 발심(發心)과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도문(道門)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좋은 얘기만 해 주고 그러한 친구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로 삼지 말아라.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고, 충고해 주고 그러한 친구를 고맙게 생각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조달(調達)이가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갖은 악한 행동으로써 고통을 주었을 때, 그것을 갖다가 원수로 생각하고 미워하고 진심을 내고 복수를 하셨다면 부처님은 마침내 성불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고통을 주어 왔지만 부처님께서는 한 번도 진심을 내거나 원한심을 내서 복수할 마음을 내지 않고, 보다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래 가지고 더욱 정진(精進)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방금 양무제, 그 치씨 부인이 그러한 악독을 품고서 투신 자살을 해 가지고 독사가 되어서 그렇게 했지만, 양무제는 그것을 독한 마음으로 구렁이를 잡아 가지고 태워서 죽일 수도 있고 그러겠지마는, 그것을 자비심으로써 사당을 짓고 또 『도량참법』을 지어서 큰스님네를 청해 가지고 천도를 잘 해주었으므로 해서 그 악독한 치씨 부인을 천상에 태어나게 했어.
비록 양무제가 그 당시 최상승법을 믿지를 못하고 달마 스님을 알아보지를 못했다고는 하지만, 양무제는 역사적으로 길이 잊지 못할 신심이 돈독한 천자였습니다.

이 진심(瞋心)!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여러 경전에 진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련존자(目連尊者)도 오백 생을 두고 타살(他殺)을 당하고, 금생에 와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부처님의 오른팔과 같은 그러한 성현이 되어 가지고도 그렇게 결국은 외도(外道)한테 타살을 당했습니다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백 생을 두고 그러한 성현이, 거룩한 수행자가 그렇게 아무 허물도 없이 그렇게 맞아서 돌아가셨느냐? 저 전생에 진심(瞋心)을 냈어.
자기 어머니가 자식 내외의 정분 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좋게 보지를 않고, 자식 며느리를 미워하고 못살게 구니까, ‘어떤 기운 센 장사가 나와 가지고 저 늙은이 때려죽일 사람이 없겠느냐?’고 이렇게 진심을 내고, 참 자식으로서 해서는 안 될 그러한 욕설을 퍼부은 그 과보(果報)로 오백 생을 두고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습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神通)이 제일인데, 과거에 지은 업으로 금생에 맞아 죽기 때문에 그렇게 참혹하게 외도한테 맞아서 돌아가시게 되면서도 신통을 부릴 여유가 없었어.
그 도반인 사리불존자가 “자네가 신통이 제일인데 신통술로 피하던지, 외도를 갖다가 방어를 하던지 그러지, 어찌 자네가 신통을 어디다 두고 쓸라고 그렇게 참혹하게 맞았나?” 하니까, “내가 과거에 지은 업(業)이기 때문에 신통이란 ‘신’ 자도 생각이 안 났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진심(瞋心)!

그리고 또 홍도 비구(弘道比丘)라고 하는 스님은 다겁(多劫)으로 수행을 잘 쌓아 가지고 머지않아서 곧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단계에까지 왔는데, 문턱에다가 손을 거기다 걸치고서 터억 정진을 하다가 삼매(三昧)에 들었어. 그래 가지고 시간이 흐르는 중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가지고 문이 탁! 닫혀지는 바람에 손가락이 깨져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까닭없이 진심을 폭! 냈다 그 말이여.
그 바람을 보고 성을 냈는지, 문짝을 보고 성을 냈는지 갑자기—삼매에 들었다가 그 삼매를 깨게 하고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고 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이 폭! 났는데, 그 진심(瞋心) 한 번 낸 그 과보로 바로 뱀이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독사가 되기는 했지만 워낙 다겁을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견성성불할 단계에까지 왔기 때문에 독사는 되었지마는 환하니 다 의식을 매(昧)하지를 안 해 가지고, 재를 갖다가 꼬리로 잘 요렇게 골라 놓고서 꼬리로써 글을 지었어.
‘다생에 내가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성불을 하게 되었는데,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蛇身)이다. 한 번 진심을 낸 그 과보로 이렇게 뱀 몸뚱이를 받았다’ 한 그런 게송(偈頌)을 써서 그래서 ‘모든 수행자들은 이 게송을 벽에다 붙여 놓고, 크고 작은 모든 진심을 내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뜻의 게송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홍도 비구나, 목련존자나, 치씨 부인이나 그밖에도 경전에 나타난 진심(瞋心)의 무서운 것에 대한 말씀이 참 많지마는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고.(처음~40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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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바세계는 진심(瞋心)을 참! 안 내고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천상(天上)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여. ‘무엇이 먹고 싶다’ 하면은 벌써 배가 불러져 있고, ‘어디 가고 싶다’ 하면 이미 그 자리에 와 있고, 무엇이고 내 마음먹은 대로 다 되고, 내게 조금도 해로울 일이라고는 일어나지를 않고 나타나지를 않어. 다 내 마음에 편안하고 즐겁고 좋은 일만 있는 곳이 천상입니다. 그러니까 천상에서는 진심(瞋心)을 낼 필요가 없죠.
지옥(地獄)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없어. 사사건건이 나를 괴롭히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일만이 있어.

그런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즐거움도 있는가 하면은 괴로움도 있고, 슬픔도 있는가 하면은 기쁨도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섞여 있어서 다행히 내 뜻대로 뭔 일이 잘 되는가 싶으면은 금방 꼬리를 이어서 속상한 일이 또 일어나고, 금방 이만하면 참 좋다 싶으면 뜻밖에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슬픔이 닥쳐오고.
형제간에도 정이 서로 의합(意合)이 되는가 하면은 서로 싸우고, 부자간에도 싸우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싸우고, 회사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정치도 싸우고, 맨 싸움, 더군다나 이 말세(末世)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인데, 투쟁이 치성하는 시대, 무엇이든지 그저.

서로 대화로써 해결하고, 타협으로써 해결하고, 양보로써 한다면 피차가 다 좋고 모든 일이 순리로 잘 풀려 갈 텐데, 사사건건이 한마디 두 마디 간 뒤로는 벌써 말이 거칠어지고, 제 욕심 챙기느라고 싸움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나라도 시끄럽고, 회사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가정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부부간에도 그걸로 인해서 원수가 되어서 생이별 사이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인은 비교적 수행에 열중을 하다 보니 언제 성낼 겨를이 없겠지만, 그래도 한철을 지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크고 작은 속상한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거거든.

밖으로 확! 진심(瞋心)을 내서 표현을 하는 것도 물론 나쁘지만,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 진심을 내는 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꽉 참고—겉으로 목구멍까지 욕설이 나오고, 주먹이 쥐어지고, 곧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격분을 해도 꽉 참을성 있는 사람은 그놈을 참고서 속으로—표현을 하지 아니한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다 참 그만큼 참을성 있는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대승법(大乘法)에 있어서는 밖으로 표현한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만 일어나도 이미 범(犯)한 것이 돼. 그래서 속으로 일어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어. 오히려 밖으로 표현해 버리고 그냥 바로 깨끗이 잊어버리는 편이 속으로 참고 은근히 오랫동안 간직을 하고 속상한 것이 더욱 나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표현을 해 버리면 사람들은 보고 ‘저 사람 진심(瞋心)을 잘 내는 사람이다. 저 사람 수양이 덜 된 사람이다’ 할는지 모르지만, 한마디 욕설 퍼부어 버리고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오히려 육체적으로도 좋고, 정신 위생상으로도 괜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 안 하고, 속으로 참고 참고 억지로 눌러 놓은 것은 나중에 위장병도 생기고, 신장병도 생기고, 고혈압도 생기고, 천식도 생기고, 기관지도 나빠지고 해 가지고 골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오목가슴 밑에 주먹같은 적(積)이 생겨 가지고 일생 동안 그놈이 풀리지를 않고 화병(火病)이 나 가지고 결국은 죽게 되고 그러는데, 그 속으로 참는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참는 것이 그렇게 썩 훌륭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은 진심(瞋心),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릴 수가 있느냐?
이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다든지 모다 그러한 것, 평상시에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지혜(智慧), 이러한 육바라밀을 항상 평상시에 닦아 가면 차츰차츰 자비심(慈悲心)이 충만하고, 또 모든 마음이 안정이 되고 또 남을 잘 용서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수행을 쌓아 나가면 그런 속상한 일이 당하더라도 상대방 입장이 되어서 잘 이해를 해 주고서 바로 용서를 하고 풀어 버리고 이렇게 되어 갑니다마는, 이런 것도 하나의 좋은 방편(方便)이 될 수가 있겠죠.

그러나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여러 경전에 진심을 갖다가 진화(瞋火), ‘성낼 진(瞋)’ 자, ‘불 화(火)’ 자, 진화(瞋火)라고 이렇게 표현도 하셨습니다.
왜 진화(瞋火)라고 하냐 하면은, 그 성내는 열뇌(熱惱)가 마치 불과 같다. 왜 불과 같으냐 하면은 그 성을 내면은 무량겁에 지은 모든 공덕(功德)을 일시에 다 태워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진화(瞋火)라 그러고.
성을 내면은 벌써 눈도 붉어지고, 얼굴도 붉어지고, 몸뚱이도 뜨거워지고 그러고 마음도 갖다가 뜨거워져 가지고는 혈압도 오르고 그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기 때문에 진화(瞋火)라 그러거든.

진심을 많이 낸 사람은 열(熱)이 항상 위로 쳐 올라가 가지고 그래서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눈이 붉어지고, 눈이 빨리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은 진화(瞋火)가 일어나지 않게 하느냐?
항상 자비심(慈悲心), 자비심으로써 자기 마음을 윤택하게 만들어. 부드럽고 서늘하고 윤택하게 만들면 자연히 진심의 불이 자취 없이 식어 버리고 사그라져 버린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탐심(貪心)도 나쁜 것이고 치심(癡心)도 나쁜 것이지마는, 차라리 백천만 번을 탐심을 낼지언정 한 번의 진심(瞋心)을 내지 말어라. 한 번 진심을 냄으로써 무량겁 쌓은 공덕이 일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탐심을 내면은 그걸 안 내면 그만이고, 욕심을 냈다가도 다시 버려 버리면 그만이지만, 진심을 한번 내면은 저 지은 몸과 마음, 저 죽이고 남을 죽여. 한 사람이 집안에서 진심(瞋心)을 내 갖고 있으면 전 집안 식구가 그 독(毒)으로 인해서 모두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진심을 내서 누구를 뚜드려 패고 욕설을 안 해도, 혼자 진심을 내 가지고 미간을 찌푸리고 진심을 내고 있으면은 공연히 옆에 있는 사람도 모두가 다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더군다나 집안 어른일 때에는 더 그렇고, 회사에 사장이나 과장이나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은 더 한 사람이 그렇게 공연히 진심을 내면 전 부하 직원들이 모두 기분이 나뻐. 그래서 모다 의욕을 상실을 하고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나라에서도 웃어른이 진심을 내고 그러면은 전 밑에 각료, 백성들이 모다 다 그 해독(害毒)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하고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ㄴ고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이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원래 조금도 맥히지 않는다, 간격이 없더라. 눈으로 여러 가지 색상을 보는 것이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는 것이 원래 간격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주장자(柱杖子)를 터억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고, 그리고서 그 주장자로써 법상(法床)을 탕! 한번 치시고서,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다. 흰 해오라기가 밭에 내리니 천 점의 눈송이다.

이런 게송을 읊으셨는데, 눈으로 주장자 들은 것을 보건, 눈으로 꽃이 피고 잎이 지는 청황적백의 모든 것을 보건, 또 귀로 주장자 치는 소리를 듣거나, 자동차 소리나 개 짓는 소리를 듣거나 원래로 조금도 막힌 것이 아니다,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이다.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에 상량(商量)을 끊어 버려라. 일체 분별 ・ 시비 ・ 비교 ・ 사량 그런 걸 끊어 버려라 그 말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듣고, 그 듣는 그 소리에 대해서 그리 쫓아가 가지고 온갖 분별 사량심을 내고, 눈으로 무슨 사람을 보거나 모든 사물을 보고서 거기에 대한 온갖 사량분별을 내고 시비심을 내. 그것이 바로 경계(境界)에 속는 것이여.

이쁜 사람을 보면은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든 사람을 보면은 미운 생각을 내고,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은 좋아서 환영을 하고, 자기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면 진심을 내고 미워하고.
그 한마디 자기 비방하는 소리를 듣고서 속에 ‘요놈 가만 놔둬서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갖은 악한 방법으로써 끝내 그 사람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모가지를 띠어 버리고 그러한 일이 동서고금의 역사에 참 많습니다마는.

우리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칭찬한다고 해서 또 내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기에 빠져서 집착할 것도 없고, 나를 좀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나를 좀 해롭게 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확! 진심을 내 가지고 보복을 하고 미워하고 끝끝내 그 사람을 못살게 하고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거기에 떨어지지 않고 화두를 들고, 나를 비방하는 말을 듣더라도 거기에 동요가 되지 말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냐, 본래, 본래 다 이뤄져. 우리가 본래, 새로 도(道)를 닦아서 성불(成佛)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맛 깨닫지 못할 뿐이지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부처님이거든, 우리가. 그러기 때문에 견성성불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어.
‘그걸 저 부처님이나 닦고, 최상근기나 닦고 그러지 우리는 참선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렇게 세속에서 살기 바쁘고 일이 복잡한데 무슨 참선을 하냐?’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보지도 아니하고 미리서부터서 자포자기하고 그러지를 말라 그 말이여.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이여. 모든 기틀을 당해서, 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천 가지 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있지만 그러한 방편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되는 거여. 방편은 잠깐 거기 디디고서 저 건너로 건너가야지,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 부처님의 참다운 뜻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면은 통살을 버려 버려야 하고, 물을 건너가면 배는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야지, 육지에 가서도 배를 짊어지고 다니고 끌고 다니려고 한다든지, 고기를 잡은 뒤에도 계속 통살을 메고 다닌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여.

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이 정법을 믿지 않고 최상승법을 믿지 않고 그러한 사람에게는 정말 이 세상은 오탁악세(五濁惡世)요, 말법시대(末法時代)인 것입니다. 투쟁으로 자기도 멸망하고 남도 멸망하는 이러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악독한 세계를 불법이 아니고서는 막을 길이 없고 제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온통 투쟁의 세계가 되었고, 우리나라도 지금 민주화(民主化)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믿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그러한 마음으로 해 나가지 아니하면 아무리 입으로 민주화를 떠들어 봤자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민주화는 모두가 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과 명리(名利)를 떠나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인류 평화를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이 아니고서는 민주화는 오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정치가(政治家)와 정객(政客), 때로는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정말 민족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생각해서 경륜을 가지고 정치를 한 사람은 정치가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라 그러는 거고.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불타고, 자기의 한 당략(黨略)에 빠져 가지고 설쳐대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꾼인 것입니다. 그런 정치꾼들이 날뛰어 가지고서는 이 나라에 민주화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인류의 평화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참 노력을 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온 세계가 눈에 불을 켜고 사리사욕과 당략에 떨어져서 날뛴다 하더라도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로써 속살림을 해 나가고, 자비와 지혜로써 갑옷을 삼고 등불을 삼고, 정말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 돼. 그 수십 층 건물도 벽돌 한 장 한 장이 바로 놓임으로써 건물이 준공이 되는 것입니다.
천하없이 많은 벽돌을 갖다 놨어도 바로 쌓지 아니하면 그것이 집이 되지를 않고, 설사 쌓는다 하더라도 이리 삐딱 저리 삐딱 해서 중심을 잃어버리고 100층을 쌓은들 그것은 그 건물은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 100층을 쌓은들 기초가 튼튼히 되지 아니하면 그 건물은 언젠가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로써 탁! 마음을 가다듬고서 보면 어느 사람이 정치꾼인가, 어느 사람이 진정한 정치가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하노니  광음막허도(光陰莫虛度)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하면  적수야난소(滴水也難消)니라
나무~아미타불~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하노니, 삼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 사룁나니,
광음(光陰)을 막허도(莫虛度)어다. 광음(光陰), 시간, 세월을 헛되어 보내지 마십시오.

금생(今生)에 미명심(未明心)하면, 금생에 이 마음을 깨닫지를 못하면,
적수(滴水)도 야난소(也難消)니다.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려우니라. (40분31초~1시간13분5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 / 법문을 듣고서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법문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 화리생련(火裏生蓮).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만남과 대화 / 양무제가 옹주자사로 있을 때 치(郗) 부인의 진심(瞋心) / 치씨 부인의 천도를 위해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을 저술 /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 부처님과 조달과의 인연.
진심(瞋心), 목련존자의 전생, 홍도 비구 이야기 /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다 /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가운데에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 /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

(게송)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 /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 모든 경계에,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이뭣고~~~?’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다.

천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된다 /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 (게송)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 광음막허도(光陰莫虛度)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 적수야난소(滴水也難消).


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일어나는 진심(瞋心)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51~375)2023. 4. 10. 06:39

(No.358)—1988년 부처님오신날(88.05.23) (58분)

 

(1) 약 32분.

 

(2) 약 26분.


(1)------------------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하면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하고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한 등(燈)에 등불이 능히 백천(百千)의 등불에 불을 붙일 수가 있다.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마음에 인(印)이, 마음 인(印)의 그 빛이 널리 통하면 부처님의 정법(正法)의 법령(法令)이 널리 행하리라.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한디, 천성(千聖)이 전할 수 없는 이 등불을 아무리 불어도,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더라도 이 등불은 꺼칠 수가 없을 것이다.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다. 한 등(燈)으로 인해서 백천 등(燈)에 그 불이 옮겨져 가지고 그 등불이 온 세계에 환히 밝아지면 우주법계 구석구석이 어두운 구석이 없이 다 환히 다 밝아질 것이다.


오늘 불기(佛紀) 2532년 부처님오신날을 기해서, 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람마다 정성스러운 등(燈)을 켜 가지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키었지마는 그것이 백천 등(燈)이 되고, 십만 등(燈)이 되고, 백만 등, 천만 등이 되어서 그 등불이 환히 다 밝아져 가지고 삼천리 강토(疆土)뿐만이 아니라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오대주(五大洲) 육대양(六大洋)이 환히 밝고, 이 지구만 밝아질 것이 아니라 이 태양계가 다 밝아지고, 이 태양계와 같은 수백억만 개의 태양계가 이 우주법계에는 있는데, 끝없는 이 세계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 환히 밝아질 것이다.

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훨씬 이전에 옛적에 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장재왕(長災王)이라 한 왕,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 장재왕은 참 불법을 믿는 아주 어질고 착한 그런 성인의 풍도를 가진 임금이었습니다. 이웃나라에 아주 싸움을 좋아하고 그런 범달왕(梵達王)이라 하는 고약한 아주 강력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 범달왕은 호시탐탐 그 장재왕에 왕국을 침범할 것을 노리다가 어느 날 대군사를 일으켜 가지고 그 장재왕에 나라를 침범을 해서 순식간에 그 나라를 집어삼켰습니다. 그 장재왕과 그 왕비와 그 왕자는 어떻게 손도 써보지도 못하고 뒷문으로 해서 저 산중 깊은 골짜구니로 숨었습니다.
그러나 이 범달왕은 군사를 풀어 가지고 방방곡곡이 뒤져 가지고 결국은 이 장재왕과 왕비와 왕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만인이 모이는 장터에서 그 왕과 왕비와 왕자를 살해하게 되었습니다. 용케도 어느 틈을 타 가지고 오직 그 왕자 한 사람만이 도망을 했습니다. 도망을 해 가지고 드디어 그 사형(死刑), 왕과 왕비를 그 사형에 처하는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왕자는 도저히 혼자만 숨어서 있을 수가 없어서 이상한 옷을 입고 얼굴에다가 모다 변장을 해 가지고 그 수많은 군중 속에 뚫고 들어가 가지고 자기의 부왕(父王)과 그 왕비, 어머니가 살해된 광경을 지켜보지 아니하면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살해될 마당에 그 많은 군중을 둘러보니까 그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알아 가지고 혼자소리로 독백을 했습니다.

"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이런 세 마디 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 뜻이 무슨 소린지를 모르고 ‘그 왕이 죽게 되니까 간경(肝經)이 둘쒀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이쯤 모다 생각하고 결국은 그 왕과 왕비는 무참하게도 목을 짤려서 죽었습니다.

그 왕자는 그 자기 부왕(父王)이 한 이해할 수 없는 세 마디 말만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빠져나와 가지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를 갈아붙이고 여러 해 동안을 갖은 기술과 칼 쓰는 법, 창 쓰는 법, 활 쓰는 법을 비롯해서 무술을 다 익히고 나아가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 요리를 하는 법, 옷을 짓는 법,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기술을 다 연마를 해 가지고서 차츰차츰 그 범달왕(梵達王)이 있는 도시에 잠입을 해 가지고 차츰차츰 인증을 받고. 그래 갖고 대신(大臣)의 집에 또 고용이 되었다가 거기서 또 훌륭하니까 결국은 왕궁에까지 고용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해서 임금, 그 범달왕의 눈에 들어 가지고 가장 신임(信任)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아주 그 범달왕을 가깝게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도 그 범달왕은 그 장재왕의 왕자를 띠어 놓고는 살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눈에 마음에 쏘옥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범달왕은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왕자는 그 왕을 모시고 사냥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왕이 아조 말을 달려서 사냥을 한바탕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피로해서 좀 쉬어야겠다 그 말여.
그래서 모든 신하와 궁녀들을 다 물리치고 오직 그 왕자 하나만을 데리고 조용한 물가에 경치도 좋고 고요한 데로 가서 단둘이 푸욱 쉬게 되었습니다. 그 왕자는 온갖 무술을 다 익혔기 때문에 혼자만 옆에 있어 주어도 왕은 마음이 놓였기 때문에 여러 신하를 데리고 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고요한 데에 가서 그 왕자의 무릎을 비고서 누웠는데 금방 잠이 깊이 들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왕자는 ‘이제사 비로소 복수를 할 때가 왔구나’ 이래 가지고 품안에 깊이 간직했던 그 멀금하게 간 칼을 빼 가지고 범달왕의 목에다 갖다가 터억 틀어 댔습니다.
그래 가지고 아주 일격을 가할려고 하다가 불현듯 그 부왕(父王)이, 장재왕이 그 처형(處刑) 당할 때 한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원한은 보복을 함으로써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 마디 말 가운데 마지막 끝에 한 그 말이 퍼뜩 생각이 나 가지고 찌를까 말까 한 판에 아! 범달왕이 눈을 번쩍 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온몸에 아주 그냥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눈을 번쩍 떴는데, 아 그 목에다 틀어 대 갖고 있는 칼을 미차 숨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칼을 갖다가 번쩍 들면서 “너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 웬수다”
그런데 그 왕이 눈을 뜨면서 하는 말이, “내가 장재왕의 그 왕자가 나를 내 목에다 칼을 대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눈을 뜨는데, 진짜 눈을 뜨고 보니까 칼날이 자기 목에 와서 떡 닿아 있다 그 말이여.

“바로 내가 그 장재왕의 왕자다. 이놈, 너 이놈 오늘 죽어봐라” 그러면서 칼을 번쩍 해가 들고서 찌를려고 하다가 그 아버지가, 부왕이 마지막한 그 말이 다시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 이를 악물고 몸을 부르르 떨었지마는 차마 그 칼을 목에다가 꽂지를 못하고 그 칼을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그리고서 통곡을 하면서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사죄를 했습니다.

범달왕도 몸을 털고 일어나서 “좋다! 느그 부왕이 그렇게 착한 임금인줄을 나는 몰랐다. 네가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가 남긴 그 마지막 한마디를 마음속에 간직해 가지고 나의 목숨을 다시 살려주었으니 어찌 내가 너를 죽일 수가 있겠느냐” 피차 각자 자기의 잘못을 참회를 하고 뜨거운 악수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왕자에게 옛날의 자기 고국을 다시 돌려주고 두 나라는 아주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가지고 오래오래 친목을 하고 화평하게 지냈다고 하는 설화가 부처님의 경전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왕이, 장재왕이 죽을 때, 첫 번째 ’길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웬수 원한에 마음을 오래오래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함께 이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그러한 원한이라 하더라도 오래오래 그 웬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고.
’급히 서둘러서도 안 된다‘ 그 말은, 우정, 한번 서로 알게 된 맺게 된 우정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원한은 원한으로써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 부왕(父王)에 유언을 갖다가 깊이 간직해서—만약에 그 왕자가 그 범달왕을 자기의 그 보복을 했다면 그 왕자인들 거기서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다고 해도 수백 명의 무사들에 둘러싸였으니 어느 칼에 맞어 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지끔 우리나라는 삼팔선(三八線)이 가로맥혀서 이북(以北), 이러한 참,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6 · 25 동란(動亂) 또 (미얀마) 아웅산에서 일어났던 우리나라 각료들을 모다 폭파시킨 그러한 일들 생각하고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칼기(KAL機)를 폭파해 가지고 백여 명의 참 무모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 하며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웃나라 일본을 생각해도,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 서해를 왜구(倭寇)들이 침범을 해 가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해 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400년 전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또 와 가지고 무수한 생명을 죽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삼천리를 피로써 물을 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를, 일본 여론조사를 해 보면, 국민들을 해 보면 ‘세계에서 제일 미웁고 보기 싫은 나라가 어디냐?’ 하면 한국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인해서 일본이 그 완전히 야만한 야만족(野蠻族)이 사람노릇을 할 수 있도록 저 가야국 이래로 고구려 · 신라 · 백제 때를 통해서 계속 우리나라에서 가서 글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유교 · 불교를 가르키고, 농업과 모든, 나라 다스려 가는 법을 다 가르키고 해서 일본 나라가 영원토록 우리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사람된 길을 가리켜 주는 문명(文明)의 은인으로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미워하고 우리를 그렇게 하냐?
그런 일을 생각하면 일 생 · 이 생 · 삼 생이라도, 성불(成佛)을 더디 연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놈들을 갖다가 응징을 하고 씨를 말려야 할 그러한 민족적 울분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칼기(KAL機) 폭파 사건 일으키는 소련, 6 · 25 때 그 우리가 그 통일을 눈앞에 놔두고 백두산까지 처올라갔는데 인해전술로써 우리나라를 다시 이렇게 분단되게 맨든 그런 일을 생각한다든지, 이조 때, 고려 때 중국이 대국이라 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그렇게 못살게 굴게 하고 속국을 만들어 가지고 짓이기고 약탈해 나가는 역사적인 일을 생각한다면은 세세생생에 중공을 중국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간 그러한 일을 생각해서 자손만대(子孫萬代)토록 보복을 할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렇게 당한 일들이 까닭 없이 우리가 당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러한 인과(因果)의 관계에 의해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미워한 나라가 일본인데, ‘그 어째서 우리의 은혜를 받은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한단 말인가? 우리나라에 세세생생에 자손만대토록 은혜를 갚아야 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굴고 우리를 죽일려고 했는가?’
내가 숙명통(宿命通)이 열리지는 안 했지만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서 떠억 깊이 관찰을 해 보니까 나는 그 원인을 짐작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생긴 이래로 삼국(三國)이 벌어졌고, 삼국이 벌어져 가지고 계속 싸워서 자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나고, 삼국이 싸워서 멸망하고, 저 나라가 자꾸 망하면서—고구려도 망하면 그 왕과 모다 대신들이 전부 일본으로 도망을 가고, 가야국이 망하면서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신라가 망해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백제가 망해도 모다 그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그 말이여.
도망을 가 가지고 거기다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거기다가 이 문명을 일으키면서 대대손손이 내려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그 말이여. ‘언제라도 반드시 권토중래(捲土重來)하리라. 힘을 길러 가지고 나의 고국에 돌아가서 웬수를 갚고 다시 내가 그 나라를 세우리라’ 이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이여.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일본은 본래 저 아이누 족[Ainu族]이니 뭐이네 해 가지고 아주 야만족들이 조끔 살고 있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그냥 그 야만족들이 살아서 그저 도둑질이나 해먹고, 해적질이나 해먹고, 노략질 해먹으면서 그럭저럭 그렇게 짐승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고구려 · 가야 · 신라 · 백제 · 고려, 이런 데서 자꾸 우리나라에서 가 가지고 사람 되는 길을 맨들었는데, 그 나라에다가 최초에 나라를 세운 사람이 한국 사람이 세웠고, 일본에 그 황족이 혈통이 사실을 알고 보면 한국 사람이 일본 황실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것들이 다 밝혀질 것이고 지금 많이 밝혀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기 때문에 일본은 아무 까닭도 없이—모릅니다 자기네들은, 모르면서도 천 년을 수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한국을 갖다가 어쨌든지 다시 이것 자기가 차지해 가지고, 이걸 짓밟고 차지해 가지고 다시 나라를 세우리라 한 것은 ‘자기의 조국을 찾으리라’ 한 그 인과적인 그러한 원인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가장 우리나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조끔도 그 은혜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하고 빼앗아 갈려고 하는 까닭을 나는 인과(因果)의 법칙에 입각해서 내 나름대로 풀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공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하고, 또 삼팔선이 갈라져서 하고, 모다 이러한 것들도 반드시 풀 수 있는 원인이 있을 것이고.

이번에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뭐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가 모다 갈라져 가지고, ‘참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지역감정(地域感情)으로 이럴 수가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염려되는 그런 상황이 일어났었는데,
이것도 생각해 보면 고구려 · 신라 · 백제 이런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그때의 원한 관계가 삼국은 없어졌지마는 오늘날까지도 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핏속에는 그런 우리의 업(業), 잠재의식 속에는 그러한 것이 아직까지도 흘러 내려오고 있는 그러한 잠재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행여나 그러한 보복을 할려고 하는 마음, 오래된 그러한 원한 관계, 이러한 것을 다 풀어버려야 우리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고 스스로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원한에 마음을 품고 있어 가지고서는 절대로 앞길이 열리는 법이 없고,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적개심(敵愾心)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도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사상적 교육과 고취가 뜻이 있겠습니다마는, 먼 안목으로 볼 때에는 적절한 시절이 돌아올 때에는 그러한 악심(惡心), 개인적인 또는 민족적인 그런 악에 사무치는, 원한에 사무치는 적개심은 좋은 방향으로 승화(昇華)시켜 나가는, 승화시켜 가지고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공통점을 찾아서 화해를 하고 이래 나가야만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림픽이 있고, 올림픽이 끝난 다음에는 이념을 초월해서 모다 경제적인 교류를 맺고 그래 가지고 앞으로 우리나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큰 발전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31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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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를 맞이해서 첫째, 우리 불자(佛子)는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서로 미움이 있다면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야겠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어떠한 본의 아닌 좋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오늘을 기해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잘못된 허물을 상대방에 미루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이렇게 해서 참회(懺悔)를 하고 화합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간(兄弟間)에 동서 간에도 마찬가지고,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회사와 회사 관계, 단체와 단체 관계 또 지역감정도 그렇게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당(黨)과 당(黨) 사이에도 역시 그것을 풀고 근본적 민족 한겨레라고 하는 데에 돌아가서 서로 과거를 용서하고 그래 가지고 손에 손을 맞잡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단합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원한심을 깊이 품고서는 그 사람은 올바른 행복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단합하지 않고서 참다운 통일은 오지 아니할 것이고, 참다운 통일 없이 세계에 평화를 이바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라크과 이란의 관계를 보십시요. 이웃지간에 살면서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지금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 나라는 결국 두 나라가 다 망하고 말 것입니다.
황새가 저 해변가에서 큰 조개를 갖다가 탁! 찍었습니다. 그 조개는 황새의 입을 콱! 물었습니다. 어부지리(漁夫之利)란 말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황새도 잡히고 그 조개도 어부한테 잡혀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 남한에서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지역끼리 싸우고, 당이 다르다고 해서 당끼리 서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가 기반이 흔들리게 되면 이북(以北)에서는 언제 밀고 내려올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이 통일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에 결국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제공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미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고 용서할 수가 있느냐?
아무리 며느리가 ‘내가 그러지 말아야겄다’, 시어머니는 ‘내가 며느리를 미워하지 말아야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마는, 하는 꼴을 보고 얼굴을 보면은 다시 속에서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리왕(歌利王)이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토막토막 짤라 냈지마는 터럭끝만큼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성불(成佛)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미워하는 생각, 이 내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단전호흡(丹田呼吸), 깊이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생각 생각이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 일어날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이렇게 ‘이뭣고?’를 하면 처음에는 ‘이뭣고?’는 하지마는, 속으로 미운 생각은 아주 잘 가시지를 않을 것입니다마는, 한 달을 그렇게 해, 석 달을 그렇게 해, 일 년을 그렇게 하다 보면 저절로 ‘이뭣고?’를 안 할려고 해도 저절로 ‘이뭣고?’가 되면서 아! 그 미운 생각이 언제 어느 때 스르르르 담박해져.

부처님께 절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 배, 삼천 배, 사천 배, 오천 배, 이렇게 하고 나면 그냥 속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면서 그렇게 미웠던 시어머니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미웠던 며느리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아주 복수에 치가 떨린 웬수가 조끔도 미운 생각이 없고, ‘전부가 다 내가 잘못했구나! 그 잘못한 것이 상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어!’ 아 그렇게 참회가 되면서 그 하염없이 흐른 눈물을 쏟아 버리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후련해지고 편안해지면서 미운 생각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속에서 일어난다 그 말이여.

예배(禮拜)를 해도 그러한 경지가 오고, 경(經)을 읽어도 그런 경지가 오고, 기도를 해도 그런 경지가 오고, 염불을 해도, ‘옴마니반메훔’을 해도 그런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도 다 좋지마는 ‘이뭣고?’를 하면 그런 경지가 더 빨리 오는 수가 있거든.
그러한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되니 이 참선법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 속에는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기도가 다 들었고, 삼천 배 내지 억만 배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오늘 전장학, 전고경월 복위(伏爲), 망부(亡父) 전홍익 영가(靈駕)의 49재입니다. 그 재자(齋者)가 오늘 49재를 맞이한 전홍익 영가를 위해서 그 ‘이뭣고?’ 법문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법문을 좀 해 달라고 한 달 전부터서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어찌 산승(山僧)이 그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수만에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지금 가슴 뜨거운 마음으로 이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져 있는 만년위패(萬年位牌) 여러 영가들을 위해서도 저는 간곡히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전부 그 영가들이 우리들의 선망부모(先亡父母)입니다마는, 그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 그다음에 이 송담(松潭)이 설해 드리는 이 법문을 그 영가(靈駕)들이 다 듣고 그 영가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이뭣고?’의 등불이 켜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선망부모에 못지않게 ‘이뭣고?’가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단속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해탈을 해서 그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허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淸風拂)이다.
우리 낱낱이 얼굴 앞에는 밝은 달빛이 휘황창 희고, 사람사람의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 사람 앞이라고 특별히 달빛이 밝고, 어느 사람 앞이라고 차별을 해서 달이 비추지 않겠느냐 이거거든. 어느 사람 앞에나 다 바람이 불면 다 시원한 바람이 불지, 누구라고 안 불고 누구라고 잘 불어줄 것인가 이 말이여.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우리의 업경대(業鏡臺)에, 우리 자신의 업경대를 갖다가 타파(打破)해 버려서 자취가 없어져 버리면—자기가 그 달빛을 싫다 하고 껌껌한 굴속으로 들어가서 ‘달이 자기한테 (안) 비춘다’고 하는 것이고, 자기가 문을 꼭꼭 처닫고 앉아서 더웁다고 찬바람,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온다고 해서 그런 것이지,
자기가 굴속에서 터억 나와서 달빛 있는 데로 몸을 나투고, 꼭꼭 닫았던 문을 활짝 열어제낀다면 어느 사람 얼굴에 달빛이 비치지 아니하며, 어느 사람 방에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갈 것이냐 이거거든.

자기가 마음에 문을 처닫고 그리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원망하고 스스로 자포자기를 해서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못 깨닫는 것이지, 마음에 문을 훨쩍 열어버리고 자기도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깊이 신심을 갖고 자기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이뭣고?’만 하면 결정코 확철대오할 수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수행을 해 나가면—꼭 절에만 들어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여. 집에서 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살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살면서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언제나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단속해 나가면서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해 나가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화창한 봄날에 아름답게 핀 꽃가지 위에 그 예쁜 꽃에 새가 올라가서 아름다운 소리로 한 곡조 자연의 노래를 읊으더라.


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부처님께서 춘다(Cunda)라고 하는 사람이 바친 독버섯을—그것이 독버섯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학자들은 해석이 있지마는 하여간 독(毒)이 있는 버섯이여.
독버섯을 드릴 리는 없고, 맛있는 버섯의 요리를 해 드렸는데 그것이 어떻게 변질이 된 음식이였었던지, 부처님의 체질에 안 맞았던지, 그것이 부처님께서는 요새말로 식중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너무너무 고통이 심하셔 가지고 피를 쏟으시면서 그렇게 아프신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를 향해서 계속해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행을 하셨습니다.

조끔 가다가 쉬시고, 조끔 가다가 쉬시고 그러시면서 결국은 구시나가라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사라쌍수간(沙羅雙樹間), 사라수가 2개씩 2개씩 요렇게 서 있는 그 나무 사이에다가 자리를 펴고, 그때 자리라고 해 봤자 웃옷이니까 그때는 가사(袈裟), 가사지요. 가사를 떠억 펴서 깔고서 누우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 상업 도시인 베살리(Vaiśālī) 도시를 터억 바라다보시면서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느냐? “아!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원시경전(原始經典) 저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피가 넘어오도록 괴로우셨겠지마는 부처님은 조끔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를 안 했고 마음에 추호도 동요가 없었습니다.
춘다가, 그 금속공(金屬工)의 직업을 가진 그 춘다(Cunda)가 바친 그 공양의 공덕이나, 부처님께서 최초에 그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이나—부처님께서는 그 춘다(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잡숫고 기력을 회복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견성성불을 하셨는데,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을 잡수고 열반에 드시게 한 그 춘다에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그 부처님의 그 깨달으신 심경이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높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맑고 고상한 그 뜻은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31분56초~57분54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일등능속백천등~ /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 장재왕(長災王)의 아들과 범달왕(梵達王)의 설화 /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과의 인과(因果) 관계 /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의 지역감정(地域感情)의 우리의 업(業), 인과(因果) / 개인,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 모두 원한에 마음을 풀어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

우리는 중생(衆生)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 미운 생각을 원한심을 없애는 근원적인 방법이 바로 ‘이뭣고?’이다.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된다 /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마음속에다 환허니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 산승(山僧)의 법문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고 있는 것.

(게송) 개개면전명월백~ /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이나,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 / 첫째,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 · 이웃 · 온 겨레 ·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자.


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51~375)2022. 11. 9. 21:10

 

 

((No.354))—1988년 동안거 해제(88.01.15.음) (51분)

 

(1) 약 27분.

 

(2) 약 24분.


(1)------------------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호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호되, 억천(億千)의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이 그 복(福)이 갓이 없으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어찌 항상 고교(古敎),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본 것만 같으리오.

이 옛 가르침, 고불(古佛)에 가르침, 고불에 경전(經典). 이 고불에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항상 전(傳)하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에 인(印)’을 가리키는 말이고,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여. 이것을 '예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하는 것이여.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공덕을 무슨 말로써 다 그 공덕(功德)을 다 표현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무량무변(無量無邊)이여. 그렇지마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이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그 마음에 인(印)을, 그것을 가져서 보는 것만 어찌 같을 것이냐.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다. 그대에게 청(請)하노니, 여러분께 청하노니 눈을 떠서 눈앞에 터억 관(觀)하라.

이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물건. 종이에다가 먹으로 쓴 글자가 아니여. 한 글자도 없건마는 그 글자를 우리 일용중(日用中)에—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생각하고 썽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하는, 우리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하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소소영령(昭昭靈靈)하는 바로 그것이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그 가운데에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터억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白紙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이 경전을 읽어야 참으로 부처님께서 전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傳)해 내려오는 그 심인(心印)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삼세(三世)에 모든 부처님을 친견(親見)해서 거기에 공양(供養)을 올리는 공덕도 말로 할 수 없이 장하고,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화엄경(華嚴經) · 법화경(法華經) · 금강경(金剛經) · 원각경(圓覺經) 이러한 경전(經典)을 항시 손에서 놓지 않고 그것을 독송(讀誦)을 하는 거, 그것도 참 공덕이 한량이 없지마는, 우리 최상승학자(最上乘學者)는 벌써 종이로 된 경전을, 또 먹으로 된 경전을 그것을 읽는 데에 그쳐서 될 것이냐.
진짜 경전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거기에서 찾아야, 거기에서 찾아야 참부처도 거기에서 친견할 수 있고 참경전도 거기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이여.
그 경전, 그 참부처님을 친견하고 독송하게 하기 위해서 부득이해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불(化身佛)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出現)을 하신 것이고, 이 문자(文字)로 된, 언어문자로 된 경전을 부득이해서 설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계축년(癸丑年)에 설(說)하신, 그 계축년 해제(解制) 때 설하신 그 법문(法門), 오늘 이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마치고 온 대중(大衆),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에서 삼동안거를 마치고 온 대중, 그리고 이 경기도 일원(一圓)에 모다 회룡사라든지, 저 충청도, 옛날에 만공(滿空) 스님, 보월(寶月) 스님을 모시고 여기 전강(田岡) 조실 스님, 한국에 근대에 모다 여러 큰스님네들이 거기서 모다 정진을 하신 보덕사(報德寺) 거기 선원에서 난 대중까지도 여기에 오늘 해제에 참석을 했는데, 여기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하고 오늘 이 자리에, 이 용화사(龍華寺) 법보선원(法寶禪院)에 한자리에 모여서 해제 법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도 들으니 각기 그 선원들에서 삼동 석 달 동안을 정말 여법(如法)하게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알뜰하게 모다 정진(精進)들을 하고, 모다 눈에는 정진을 해서 그 샛별같이 반짝거리는 그 참, 신심과 지혜로써 그 석 달 동안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놨으니 모다 업장(業障)이 소멸을 하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러한 정진 뒤끝이라 모다 몸에서는 향내가 진동을 하고 눈에서는 그 날카로운 빛이 아주 번쩍거린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참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그거거든.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여기(인천 주안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창설하시고, (수원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시고 그러한 뜻이 오직 이 일대사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 부처님과 역대조사와 근대에 여러 선지식(善知識)들의 그러한 자비(慈悲)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이 말세(末世)에 우리가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을 어디서 들으며, 참선을 하는 방법(方法)을 어떻게 잘 알 수가 있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걱정 없이 이렇게 정진(精進)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면, 불조와 선지식들의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신 지 삼천년이 지낸 이 말세(末世)입니다. 온 세계는 말세의 여러 가지 현상(現狀)이 도처에서 일어나 가지고 서로 죽이는 일만을 연구하고, 서로 죽이고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마치 파리 목숨만도 못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우리가 목숨 바쳐서 일대사를 위해서 도(道)를 닦을 수 있는 이, 과거에 우리가 무슨 숙연(宿緣)을 심어 가지고 우리는 이러한 법(法)을 만나게 되었는가. 참 뜨거운 것이 속에서 참 솟구쳐 올라올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이러한 정법을 만나 가지고 이렇게 이 중앙선원에서, 또 법보선원에서, 태화선원에서, 도처 선원에서 이렇게 옛날 부처님 때에부터서 내려오는 이 동안거 하안거, 이 안거(安居)의 법도(法度)에 따라서 한 철 한 철을 지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엄격하고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겨울살림 여름살림을 이렇게 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그 생활 법도(法度)도 대단히 중요하지마는 그 내부에, 대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신심(信心), 정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아무리 공부가 잘 안되어도 끈질긴 인내력으로써,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가 나타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계축년(癸丑年) 녹음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중국에 천목산(天目山) 고봉 선사(高峰禪師). 3년 사한(死限)하고 그 정진하신 말씀이 잠깐 나왔습니다마는, 우리는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할 때까지, 또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 신참(新參) 구참(久參)을 막론하고,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스님네나 또는 이 거사(居士)님이나 또는 이 청신녀(淸信女)를 막론하고 오직 이 고봉 스님께서 도를 닦으신 바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도 그러한 대오(大悟)를 할 수가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오(無悟)라. 큰 의심, 크고 간절한 큰 의심을 가지고 그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달음도 없다'
이 말씀은 어쨌든지 우리는 큰 깨달음을 목표로 삼는데,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疑心)이 커야 한다. ‘의심이 크다’는 말은 무엇이냐?
들다가 말다가, 좀 하다가 말다가, 환경에 끄달려서 시비(是非)에 빠지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큰 의심이 날 수가 없습니다. 큰 의심(疑心)이 날라면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이 일어날라면은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 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내가 여자니까, 나는 몸이 건강틀 못하니까, 또는 나는 무식하니까' 등등 자꾸 부정적(否定的)인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의 근기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해봤자 어피차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까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고 이렇게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해서,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앉어서 흉내만 내고 있어 봤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여자가 되었건, 근기가 하열(下劣)했건, 나이가 먹었건 그럴수록에 백배 천배 더 분심(憤心)을 내서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을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경허(鏡虛) 큰스님께서 어려서부터 그렇게 총명(聰明)하시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그러한 참 총명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공부를 하실 때에, 처음에 경(經)을 배우실 때 다른 사람이 한 번 읽으면 당신은 열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열 번을 읽으면 당신은 백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백 번을 읽으면 당신은 천 번을 읽었어. 한 번만 쑤욱 보기만 해도 외어버릴 수 있었지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經) 한마디 한마디를 뼛속에 새기고자 해서 백 번, 천 번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셔 가지고 이십여 세의 아주 새파란 젊은 나이에 참 대강사(大講師)에 전강(傳講)을 받아 가지고 팔도에서 모여든 학인(學人)들에게 경(經)을 설하시다가, 참 퇴속한 은사 덕택으로 자신이 이렇게 대강사가 된 것이 너무너무 고마와서 인사차 그 은사를 찾아가다가 전염병이, 요새 같으면 장티부스 같은, 지금은 여러 가지 예방주사도 있고 모다 치료하는 방법이 있지마는, 옛날에는 그러한 전염병을 방지할 방책(方策)이 없어 가지고 걸렸다 하면은 온 마을이 다 모조리 다 죽었습니다. 그러한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서 차례차례 죽어가는 그런 마을에서 그러한 것을 보고서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

그래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보고 대강사가 되어서 그 경(經)을 강(講)하고 있지마는 이것이, 이러한 그 사람이 막 죽어가는 꼴을 보고 공포심이 난 것으로 봐서, 이것이 경을 육두로 다 외우고 종횡(縱橫)으로 설한들 이것이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대발심(大發心)을 해 가지고 동학사(東鶴寺)로 돌아가서 학인들을 다 흩어버렸어. “각자 너희들 인연 따라서 다 흩어져라” 보내버리고서, 그 동학사 실상사(實相寺, 지금 동학사 실상선원實相禪院) 그 지금 암자는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는데 그때는 거기에 암자가 있었어. 그 암자에서 문을 처닫고 그 구멍으로 밥을 넣어달라고 해 가지고는 아주 죽기로 각오를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나라 이조(李朝) 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얼마 동안 침체를 하고 경을 숭상하는 시대가 있었는데, 이 경허 스님께서는 그러한 침체된 선풍(禪風)을 갖다가 부흥(復興)을 했어. 그래 가지고 한국에 침체했던 선풍을 갖다가 이렇게 진작(振作)을 해 가지고 오늘날에 참 이 최상승법이 이렇게 참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경허 스님 밑에 모다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모다 나오시고, 그 선지식 밑에 오늘날 이렇게 전국에 선풍이 이렇게 진작하게 된 것은 경허 큰스님의 그러한 참 출현(出現)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到處)에 참선법(參禪法)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일본에서 모다 소개가 된 탓으로 모다 의리선(義理禪)—의리로 따지는, 의리로 따져서 공안(公案)을 통과하는 그러한 참선법이 모다 소개가 되어 있지마는, 우리 한국에 남아있는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이 경허 스님, 만공 스님으로 해서 이렇게 내려오는 이 법이 아직 남아있는 한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을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다시 진작을 시켜서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이 활구참선법을 선양(宣揚)을 해서 불일(佛日)이 재휘(再輝)하도록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부대중(四部大衆)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뚱이 있을 때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고인(古人)의 전지(田地)에 이르러서 스스로도 생사해탈을 하고 이 정법(正法)을 세계에 선양을 함으로써 우리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을 실천을 해야 할 때가 바야흐로 온 거 같습니다.(처음~26분56초)





(2)------------------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허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백육순장요요(三百六旬長擾擾)호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 봄에는 동해(東海)로 좇아 남(南)으로 주장자(柱杖子)를 날리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가을에는 서산(西山)을 향하다가 또한 북방(北方)으로 가는구나.
저 남방(南方)에서 해제를 하고 북방(北方)으로 가고, 북방에서 해제를 하고 저 남방으로 가고, 철철이 여기서 해제(解制)했다 저그 가서 결제하고, 저기서 결제(結制)했다 이리 오고 오고가고, 동서사방(東西四方)으로 춘하추동(春夏秋冬) 계절 따라서 걸망을 짊어지고 왔다갔다한다 그 말이여.

삼백육순(三百六旬)을 장요요(長擾擾)허되, 삼백육십 일을 마냥 부산하게 왔다갔다하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여. 어느 날에 고향에 이르를까 알 수가 없구나.

인생(人生)으로 태어나서 인생에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禪房)으로 이렇게 돌아다녀. 주지(住持)도 안 하고, 무슨 일체 것을 다 버려버리고 이렇게 걸망을 지고 선방에 나온 것만 해도 참 장하고 기특하고 훌륭하지.
그러나 결제하고 해제하고 걸망을 지고 동쪽 서쪽으로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 보면 장하고 또한 멋진 인생이라 할 수가 있지마는, 어찌 그것만으로써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정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인생의 오욕락까지 다 버려버리고 출가해 가지고도 명예와 이익, 명리(名利)를 다 버려버리고 탁 걸망을 짊어지고 나왔다면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더라. 정말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나오는 천목산 고봉 스님처럼 정말 한번 목숨 바쳐서 한바탕 해봐야 할 것이다 그거거든.

여기서 한 철 지내보고는 또 그저 또 저리 걸망지고 가고, 또 다른 선방에 가서 쪼끔 해보다가 또 해제하면 이 선방에 오고, 철새처럼—저 오리, 기러기나 저 두루미 또 황새처럼 그냥 무의미하게 철 따라서 저 시베리아로 갔다가 저 한강(漢江)으로 왔다 낙동강으로 갔다가, 저 중국 양자강으로 갔다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하나의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는 멋지게 사는 납자(衲子)일런지는 모르나 그렇게 참 철새처럼 살아서 또 뭣 할 것이여?
그렇게 살다보면 내생(來生)에는 그런 황새 같은 것이 되어가지고 또 세계를 계절 따라서 날아다니는 황새 밖에는 더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출가(出家)한 목적, 부처님께서 이 출가 제도를 만들아 논 이 목적은 황새처럼 떠돌아다니라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여. 정말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더라.
어느 곳이고 한곳에서, 기왕 이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왔으면 이 법보선원에서 그 간절한—녹음법문일망정,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살아계신 조사(祖師)의 법문으로 알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정말 한바탕 아주 뿌리를 뽑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닦아 주었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이 송담(松潭)이 원력(願力)을 세우고 참 잘 외호(外護)를 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한철 겨우 나고 또 걸망지고 갔다가 이럴 것이 아니거든. 한번 들어왔다 하면은 여기서 아주 뿌리를 뽑아버려야 돼, 아주. '죽어서 송장으로 나갈지언정 이 자리를 뜨지 아니하리라'
부처님께서도 정각산(正覺山)에 들어가서 ‘내가 여기서 성불(成佛)하지 아니하면 이 자리에 뜨지 않으리라. 일어서지 아니하리라’

고봉 스님도 ‘내가 여기에서 확철대오를 못하면은 여기서 내가 살아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는 이런 3년 사한(死限)을 하고. 이러한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이 아니고서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3년을 사한(死限)을 하고 그 자나깨나 화두(話頭)를 들고 했지만 조끔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들어지지도 않고 망상(妄想) 아니면 혼침(昏沈), 혼침 아니면 망상으로 3년을 그렇게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안 된다고 한탄을 하고 다른 데로 떠날 생각을 하시지 안 했습니다. 고봉 스님이 만약에 한 철 해보고 안 되어서 다른 절로 가고, 또 거기서 안 된다고 이리 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떠돌아다니고 말았다면 그러한 대각(大覺)을 성취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보살선방에 여러 보살님네들도, 이 정묘년 삼동안거(三冬安居)에 133명이라고 하는 많은 대중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이렇게 정진(精進)을 했습니다. 방이 상당히 크고 저쪽 별당까지 모다 선실(禪室)을 했지마는, 그래도 모다 중좌(重座)를 하고 빡빡허니—그 공기도 나쁘고, 이 자동차 소음 소리는 밤낮을 끊이지 않고 그렇게 소란스럽고, 여러 가지가 시설도 불충분하고 하지마는, 그런 불평 한마디 없이 참 애써서 모다 정진들을 하셔서 원장(院長)으로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었다’ 한 그러한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잘 들리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린다 해도, ‘하! 참 공부가 잘된다. 참 기쁘다’ 그 생각 내면 벌써 정진이 아닌데, 어떻게 되어야 ‘이만했으면 공부가 잘된다’고 만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多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 이런 사과(四果)에 성현(聖賢)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한 생각을 내면 수다원이 아니요,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하면 아라한이 아니요, 내가 보살과(菩薩果)를 증득(證得)했다 하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는 그 법문이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씌여 있습니다.

정진을 하다가 좀 화두가 순일하고 성성한 경계(境界)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찌 그까짓 경계를 가지고 족(足)한 마음을 내서야 어찌 그것을 참 납자(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그만한 경계쯤이야.
무슨,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그 경계요,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봐도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고 모두가 그 소식(消息) 같지마는, 그까짓 것을 어찌 이사(理事)에 맥힘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境地)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거든, 정진하다가 조끔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까짓 것을 족(足)한 줄을 알고. 체, 한 생각에 천만 길 지옥구뎅이로 떨어지는 결과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가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서는 안 되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지를 않고, 들을 때뿐이지 금방 일 분도 안 되어서 딴생각이 일어나고, 딴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그런다고 해서 '아 이거...' 퇴태심(退怠心)을 내고 자포자기를 할 수야 더군다나 없는 일이여. 그럴수록에 악착같이 대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자가 새끼를 낳아 가지고 그놈을 따뜻하게 품안에 안고 젖을 먹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려서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려버리면 그놈이 떨어져 내려가지고 죽지 않고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에 한해서 젖을 먹여서 키운다 그 말이여. 그 떨어져 갖고 맥을 못 추리고 죽어버린 것은 그건 버려버린 거고. 올라오지도 못하고 뻐르적거린 것도 그런 것도 돌아보지도 안 해. 그놈이 애미 있는 데를 찾아서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이라야 되거든.

옛날,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선방(禪房)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먹는 거 입는 거 처소(處所)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만한 그렇게 박(薄)한 상태에서 그래도 거기에서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 가지고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를 한 것입니다. 아무리 용화사가 공기가 나쁘고 주변이 시끄럽고, 공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용(受用)이 박하다 해도 부처님께서 겪으신 그런 고행(苦行) 정진에다 비교하면 이것은 만 분에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도 참 무던히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여건에서 참 정진하니라고 애들 쓰셨지만 앞으로는 여건이 나쁠수록에, 수용이 박할수록에 더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서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를 해서 여러 단월(檀越)들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의 몸뚱이를 낳아주신 부모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방과 전통을 남겨주신 우리의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부처님에 은혜를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解制)를 하고 계속해서 눌러서 정진을 하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부득이한 인연으로 다른 처소로 가시더라도 어쨌든지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말씀과 산승(山僧)에 이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시고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을 합니다. 게송 한마디를 읊고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뚧어버리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비로소 산하대지(山河大地) 너그러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상두관(上頭關), 우리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철(了徹)해 버리면 이것이 상두관을 투득(透得)하는 것이여. 그래버려야 산하대지가 너그러운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대, 인간에 모든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어찌 녹수청산(綠水靑山)에 걸릴 것이 있느냐? 인간의 시비와 분별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녹수청산에 걸리게 된다 이거거든.

여기 이 법보선원이 공기가 좀 나쁘고, 자동차 공장 모다 소음이 있고, 또 공양 모다 그런 수용이 박하고, 여러 가지 시설이 불충분하다고 한들,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분별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좀 시끄러운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좀 박한 것이 오히려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좋은 채찍이 될 수도 있고,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에 발심(發心)한 사람도 있고 발심이 덜 된 사람도 있고, 또 괴각(乖角)이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발심만 제대로 하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자기 밖에의 어떠한 경계(境界)에, 다른 사람에, 그런 허물을 돌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한은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를 간들 어찌 내게 맞는, 도업(道業) 성취할 수 있는 도량(道場)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허물을 밖에서 찾는 한은 천당(天堂)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를 못할 것이여.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흡족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님 여러분들도 해제를 하고 오늘 다 댁으로 모다 돌아가시게 되는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선방(禪房)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하시지 말고, 바로 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시끄럽게 떠들고 모든 것이 내 마음과 같지 못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나간다면, 그 복잡한 세속(世俗),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세속, 가정, 사회가 온통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남편은 부처님이요, 아들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며느리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손자손녀는 남순동자(南巡童子)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을 지내다가 다음 또 여름철에 오셔서 방부를 들이고 또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정진하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법상(法床)을 내려가고자 합니다. (26분59초~51분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
고교(古敎), 고불(古佛)에 가르침이라는 것은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에 인(印)’을 가리키는 말,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다 /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白紙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3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진정한 신심(信心),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끈질긴 인내력으로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가 나타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오(無悟)라.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달음도 없다'

큰 의심(疑心)이 날라면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이 일어날라면은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된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 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허(鏡虛) 스님의 포구발심 기연(機緣), 경허 스님께서 우리나라 침체된 선풍(禪風)을 부흥(復興)했다.

(게송)춘종동해남비석~ / 진발심(眞發心)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었다’ 한 그러한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발심만 제대로 하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2. 11. 8. 19:21

 

 

((No.340))—1987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71분)

 

(1) 약 37분.

 

(2) 약 35분.


(1)------------------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하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꽃이 산전(山前)에 웃으니, 꽃이 산 앞에 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無生)을 말함이로다.

봄이 오면 울긋불긋 꽃이 피고, 또 가을에 오면 가을꽃들이 산에 모다 피는데, 그 울긋불긋 그 피는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그 진리(眞理)를 바로 누설(漏洩)한 것이다.
새가 숲속, 숲 밖에서 그 갖은 목소리로 모다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生]이 없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낱낱이—꽃이 피는 것, 온갖 색깔의 꽃이 피는 그 낱낱이 그 그것이, 크고 작고 노랗고 빨간 온갖 새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들이 낱낱이 스스로 무궁(無窮)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어.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무엇을 잡아 오건—꽃을 한 송이의 꽃을 들거나, 한 곡조(曲調)의 새의 노래를 붙잡거나 무엇을 얻어 오더라도 다 그 근본진리(根本眞理) 아닌 것이 없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0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심우송(尋牛頌) 법문(法門)을 경청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앞부분만을 들었습니다마는, 바닷물을, 그 넓고 끝없는 그 바닷물을 다 마시지 않고 바닷가에서 조끔만 손고락으로 찍어서 맛보더라도 ‘바닷물이 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부분만을 한 30분간에 걸쳐서 들었지마는, 그 30분 동안에 설(說)하신 조실 스님의 법문 속에 ‘우리가 참나를 어떻게 닦으며, 어디에서 찾으며, 왜 그것을 찾어야 한가’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으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인데 참나, 나의 불성(佛性), 그 ‘참나’ 그것을—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그놈은 생겨난 때가 없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윤회(輪廻)하면서 항상 그와 더불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와 더불어 같이 윤회를 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통을 받고, 같이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놈을 자각(自覺)을 하지 못하고 전혀 그것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렸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놈을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려 봤자 코밑에서, 콧속에서 뱅뱅 돈다’ 이러한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알기 쉽고 평범한 표현을 하셨지만,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씀을 하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코밑에서 뱅뱅 돌아’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낯, 얼굴을 통해서 낯바닥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그랬습니다.
눈 · 코 ‧ 입 ‧ 귀 모다 이런 것들이 붙어 있는 부분이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가장 그 중심이 코지요? 그 면문(面門)을 통해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위(位) 없는 참사람이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이렇게 임제 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전강 조실 스님은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오면서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증거로써 가장 뚜렷한 것은 ‘숨쉬는 것’입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알아볼려면 콧속에 콧김이 들랑날랑한가 안 한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콧속에 숨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숨이 딱 끊어지면 벌써 그것은 죽었다고 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도는 그 들랑거리는, ‘그렇게 말하면 그러면 콧속에 콧구녁으로 들랑날랑하는 그 공기가 그러면은 참나냐?’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참, 말도 안되지만.

하여간 눈을 통해서 모든 색깔을 판단하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알아보고, 코를 통해서 온갖 냄새를 알아보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분별하고, 몸뚱이를 통해서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느끼고, 생각을 통해서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분별(分別)하고, 그러한 놈.
그러한 놈인데, 설사 눈으로는 아주 의식(意識)을 잃어서 빛깔을 판단하지를 못하고, 귀를 통해서도 누구 말인지 뭣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생각이 몽롱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래도 콧구멍으로 쪼끔이라도 가는 숨이 드나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그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은 오계(五戒)와 불명(佛名)과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서 불명과 오계와 화두를 설(說)해 드리는 날입니다. 그전에는 이 일요법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그 의식(儀式)을 거행했습니다마는, 내나 같은 말을 한 날에 이중으로 중복을 해서 바쁜 세상에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아주 법회(法會) 때 오계와 화두를 설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혜월(慧月), 혜(慧)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계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고자 하고 지혜의 눈을 뜨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부처님의 계를 받아서 그것을 잘 가짐으로 해서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계는 오계(五戒), 십계(十戒)가 있고, 비구 250계(二百五十戒)가 있고, 비구니 500계(五百戒)가 있고, 또 대승계(大乘戒)에 있어서는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가 있고, 더 미세하게 나아가서는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있지만, 오늘 설(說)하고자 한 이 오계(五戒)는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오계를 잘 가지면 그밖에 어떠한 계도 다 잘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에는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가 있는데, 소승계는 몸으로 지켜. 몸으로 지키는 계고, 또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다.

예를 들어서 첫째 번에, ‘살생(殺生)을 하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했는데, 소승계에 있어서는 아무리 그 사람이 미워서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또 칼을 가지고 가서 죽일려고 아주 쫓아갔지만, 마지막 단계에 가서 딱 참고 죽이지 아니했으면 이건 소승계는 범(犯)한 것이 아닙니다. 실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안 했으니까. 그러나 대승계는 실지로 죽이지는 안 했어도 이미 마음속에 죽일려고 하는 마음을 냈으면 이미 살생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욕심을 내고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에 먹었다 하더라도 실지로 도둑질을 안 했으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아니여. 그러나 벌써 마음속에 훔칠 마음을 냈다면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어떠한 종류에 계목(戒目)이라 하더라도 다 이와 같아서, 소승계와 대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것과 마음으로 지키는 그 계(戒)의 차원(次元)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소승계를 설하시고 또 대승계를 설하셨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는 소승계(小乘戒)만 지키면 그것으로서 훌륭하게 계를 지킨다고 생각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고, 근기(根機)에 따라서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게 하고 나아가서는 대승계(大乘戒)까지도 아울러서 원만(圓滿)하게 지킬 수 있도록 구경(究竟)에 목적을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계를 받는, 또 이 계(戒) 설(說)함을 듣는 모든 형제자매들은 몸으로는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고, 마음으로는 대승계를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그렇게 받아서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오늘 계를 받으실 분은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는 것을 호궤합장(胡跪合掌)이라 그런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을 비롯해 모든 동물, 모든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그 모든 산목숨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윤회(輪廻)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오면서 어느 벌레, 어느 동물, 어느 사람 뱃속에 한 번 이상 다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다 우리의 선망부모고, 그 모든 중생 낱낱이 다 우리와 똑같은 귀중한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고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찌 차마 그 산목숨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방방곡곡에 모든 대소 사찰(寺刹)에서 일 년에 몇 번씩 그렇게 방생법회(放生法會)를 갖고, 또 전강(田岡) 조실 스님께서도 생존시(生存時)에 수백 관 수천 관의 모다 고기를 사서 한강에 모다 방생(放生)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면 그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限量)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내생(來生)에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평생에 병(病)을 앓고 또 단명보(短命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남에 물건을 주인의 승낙(承諾) 없이 갖지 말아라. 내 물건을 남에게 보시(布施)를 할지언정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남의 물건을 훔치면 한량없는 지옥고(地獄苦)를 받다가 내생에 다시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가난뱅이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왕궁(王宮)에 부귀(富貴)도 다 버리시고, 인행(因行) 때에는 당신의 처자권속까지라도 굶주린 호랑이에게 다 보시를 하시고 당신의 수없는 목숨도 배고픈 중생(衆生)에게 버리셨거든, 나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어찌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관계를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은 몸과 마음을 더럽혀. 그래서 사음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행히 사람 몸을 받게 되더라도 부정(不貞)한 아내,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가정의 파탄을 가져올 것이다.
금생(今生)에 부정한 아내나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그 하루도 편할 날을 살지 못한 그런 사람은 모다 과거 전생(前生)에 자기 자신이 그런 부정한 행실(行實)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금생에 그러한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에 행복을 잃고 파탄을 초래한 것이다.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하면, 당장 금생에 거짓말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면, 부부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형제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자식들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거여. 하물며 친구간이나 이웃이 어찌 그 사람 말을 믿을 것인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 몸을 받더라도 그 사람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를 안 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면은 당장 한 번 마시고 두 번 마시고 차츰차츰 그 중독(中毒)이 되면 안 마시고는 못 배겨.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침내는 그 술이 사람을 먹게 되아. 그래서 완전히 폐인(廢人)이 되어가지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해.
금생에도 그러려니와 그 술 마신 과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의 과보, 사람 몸뚱이를 받았다 하더라도 천치, 백치, 바보로 태어나서 사람이면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

이 다섯 가지 계.

첫째 번에 산목숨을 죽이면 왜 못쓰냐?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도를,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도(道)를 닦는 것은, 첫째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살생(殺生)을 하면은 자비심(慈悲心)을 끊어 버려. 자비종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까닭은 일체중생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재산을 다 보시(布施)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도 보시를 하고, 내가 도를 닦아서 얻은 모든 지혜(智慧)도 일체중생에게 베풀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데, 지금 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서야 어떻게 그런 복덕심(福德心)을 기를 수가 있겠는가. 복덕종자(福德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여.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도를 닦은 것은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그래서 지혜의 눈을 떠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는데, 사음을 해 가지고 몸과 마음을 더럽힌다면 나의 청정심(淸淨心)을 손상(損傷)해. 청정종자(淸淨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사음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고.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우리가 도를 닦아서 진리를 펴서 일체중생을 제도헐라면 진실(眞實)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해 버릇하면은 나의 진실종자(眞實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진실종자를 끊어 가지고 어떻게 도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불명(佛名)을 받고 불제자(佛弟子)가 되어서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어서 속히 지혜의 눈을 떠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一切衆生)으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데, 밤낮 술을 마셔 가지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겠느냐.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 사람은 마땅히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게 되면은 술이 취하게 되고, 술이 취하게 되면은 거짓말도 하게 되고, 사음도 하게 되고, 도둑질도 하게 되고, 살생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술도 하나의 음식물이지만 그것을 어리석게 먹으면, 그것을 먹어서 중독(中毒)이 되면 자기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고,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자기를 멸망(滅亡)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상 설(說)한 다섯 가지 부처님의 계(戒)는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바니 능(能)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聖)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켜 가질 바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연비(燃臂).

참회진언(懺悔眞言)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연비가 끝날 때까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안히 앉으세요.

오계(五戒)를 받고 그리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그 향(香)으로써 팔을 따끔하게 지진 그 순간 과거 무량겁에 지은 죄(罪)를 그 따끔한 그 찰나에 소멸(消滅)을 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앞으로는 다시는 범(犯)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벌 밀(蜜)에다가 실을 묻혀 가지고 크게 만들어서 팔에다가 세워 놓고 거기다 불을 질러서 훨훨훨 타들어 가 가지고 큰 흉터가 나도록 그렇게 뜨겁게 팔을 지졌습니다마는, 지금 오늘은 향불로 간단하게 지졌지만 각자 당인(當人)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처가 크게 나야만 죄가 소멸이 되고 또 맹세를 굳게 한다고만 생각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처음~36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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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계를 받았으니 이제 정식(正式)으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었습니다. 아까 몸으로 지키는 이 소승계(小乘戒)와 마음으로 지키는 그 대승계(大乘戒)를 우리는 다 같이 지켜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은 이 두 가지 계를 원만하게 잘 지킬 수가 있느냐?
참, 마음으로 지키는 계는 대단히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잘 지킬려고 해도 지킬려고 하는 생각 낼 때 벌써 범하게 되는 것이 이것이 대승계이기 때문에 참 지키기가 어려우나, 그래도 잘 지킬 수 있는 묘(妙)한 방법이 있어. 그것은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는 것이여.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이 무엇고?’ 한문(漢文)으로는 ‘시심마(是甚麽)’ 그러는데, 중국음(中國音)으로는 ‘씨 씀마’인데, 씨씀마, 시삼마란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 뭣고?’거든, ‘이 무엇고?’
'이 무엇고?'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사람들은 ‘이뭣고?’ 이렇게 간단하게 말을 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참선해 나가는 데에 화두(話頭)로써 ‘이뭣고?’라고 하는 경상도 말을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경상도 분이 아니라도 이 화두를 들으실 때는 ‘이뭣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것’이 무엇이냐? 그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가리켜서 ‘이것’이라고 하냐?”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알 수 없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항상 참구(參究)를 하는 것인데, 이 참구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지식과 따져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여.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世俗的)인 지식, 또 불교에 교리, 뭐 일체 철학적인 이론,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것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다 놔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그건 놔버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가 없지만 재미가 있건 없건, 또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 끌고... 사람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거든. 아까 ‘잃어버린 소[牛]를 찾는데, 잃어버렸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이 우리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 한, 바로 그 코밑에 뱅뱅 도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거여.
그걸 뭐 고인(古人)들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식(識)’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고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뭐 ‘진여(眞如)’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뭐 불교 그 경전 안에도 경(經)마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다르지만, 그러한 이름이 문제가 아니여. 그 실체(實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 볼라야 볼 수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는, 또 아무리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항상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우리와 같이 살고 있거던. 그놈.

이론(理論)도 그만두고 이름과 상(相)도 따질라고 하지 말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걸어가면서도 ‘이 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억울할 때에도 ‘이 뭣고?’

이렇게 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이 ‘이놈이 뭐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입으로는 ‘이 뭣고?’ 해도 속으로는 온갖 딴생각[別念]이 들끓고, ‘이 뭣고?’ 할 그 잠깐 동안은 ‘이 뭣고?’ 생각이 있지마는 일 분도 못 가서 잃어버리고 딴생각을 하게 되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아니면은 먹먹허고 그렇지 아니하면은 혼침(昏沈)이 오고, 혼침이 좀 없어질 만하면 또 호사난상(胡思亂想)이 일어나고.
참 참선(參禪)을 할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 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생 동안을 번뇌 아니면 망상, 잡념 속에 시달리고 살면서도 무엇이 잡념인 줄을 모르고 삽니다. 다행히 참선을 해봐야 ‘아, 우리의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고 마치 저 바다에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구나’ 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밤낮 번뇌망상과 희로애락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풍파(風波) 속에 놀아나고 있는 한은 우리의 죄업(罪業)은 끊임없이 지어지게 되고, 끊임없이 짓는 업(業)으로 말미암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를 끊고자 하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이 참 많고,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집안을 위해서 또는 이웃을 위해서 사회 국가를 위해서, 크게는 인류를 위해서 많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갑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많은 공헌을 세우기도 하고, 또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일을 하고 갔지만 진정 어느 일이 정말 자기(自己)를 위하는 일이고 진정으로 이 인류(人類)를 위하는 일이냐?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과학자가 어떤 연구를 해서 박사가 되고 그 연구 결과로 인해서 인류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하지만, 그게 다 별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데 조끔 편리하게 살도록 공헌을 한 것 뿐이지, 근본적(根本的)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편리하게만 할뿐 행복하지를 못했다.
행복하게 못하고 만 것쯤은 또 괜찮은데, 정말 그 많은 박사들이 연구한 그 과학이 인류를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과학을 발전을 시키지 않고 옛날식으로 농사짓고 채소 심어서 먹고 살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무서운 공포 속에 떨지 안 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세계가 언제 어떻게 찰나간에 잿더미가 되고 인류가 다 멸망하느냐? 하루 지내면 하루 지낸 만큼 그 위험도는 점점 증가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위기(危機) 속에서 이 위기를 막고, 막을 수 있고 또 설사 그런 위기가 도래(到來)한다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공포심 없이 이 몸뚱이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참선(參禪)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간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염라대왕이 자리에 일어나서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염라대왕이 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현신(化現身)이고, 다 불보살의 화현신으로서 나타난 보살 화현(化現)이기 때문에,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머지않아서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불종자(佛種子)인데 염라대왕이 그 앞에 합장배례를 아니할 리가 없거든.

그래서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아무리 해 갈수록 어렵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수활산요노전심(水闊山遙路轉深)이라’ 이 심우송(尋牛頌)에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끝없는 물, 멀고먼 그러고 험악한 산길,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가도 가도 한이 없을지언정, 갈수록 길이 더 험하고 어려웁다 하더라도 기어코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하는 방법은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그다음에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보통 가슴으로 다 호흡을 하는데—숨을 들어마실 때에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이, 하복부가 약간 볼록하게 나오도록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그 볼록했던 그 단전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또 숨이 다 나가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면 배가 차츰차츰차츰 볼록해지고 내쉬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고, 그저 호흡에 따라서 배가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한 것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면서 호흡을 하는데.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역시 코로 내쉬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또 머물렀다가, 또 한 3~4초에 걸쳐서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쉴 때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 ‘이 뭣고?~~~’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안 해도 되어.
알 수 없는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없어지지 아니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고대로 거각한 채로 호흡만을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그러다가, 몇 번이고 숨을 내쉬었다 들어마셨다 하는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렇게 하다가 그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別念]이 들어왔다 하면, 그때 다시 또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한번 또 그렇게 챙기는 거여.
나중에는 한 번 아침에 들은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딴생각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이 뭣고?~~~’ 그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탁 있으면, 뭐 점심 먹을 때까지도 새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상관이 없어.

그렇게까지 될라면 상당히 노력을 해야 그렇게 되고,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뭐 망상(妄想) 때문에 못하느니, 무슨 혼침(昏沈)이, 잠이 와서 못하느니 한 것은 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충분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심, 이 세 가지 이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하고 마는 것입니다.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호되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이여. 위(位) 없는 참사람. 계급(階級)이 없는,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이런 위(位), 계급이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다 사람이면 사람 사람마다 그 얼굴이 있고 모냥이 있는데, 이 계급이 없는 이 참사람은 형단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형단이 없기 때문에 볼라야 볼 수가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가 없고 알라야 알 수가 없어.
심상출입면문전(尋常出入面門前)이여. 평상시(平常時)에 항상 우리의 면문(面門)을 통해서, 얼굴을 통해서 출입(出入)을 하더라.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能)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버리면, 그 형단(形段)이 없는, 면문으로 출입하는 그 형단이 없는 그놈을 깨쳐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그 번쩍하는 그 번갯불과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을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번갯불을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흐르는 물소리를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밟을 수 없는 그 번갯불과 그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버릴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 또 진즉 오계를 받았으되 본의 아니게 오계를 파(破)하신 분은 오늘 다시 새로 받았으니 새로 태어난—연세야 몇 살이 되셨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 새로 부처님 제자로,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몸으로 이 순간부터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서 금생(今生)에 결정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요달(了達)하시기를 바랍니다.

불명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로 모다 받아 가시고, 지난번, 저지난번, 모다 작년, 진즉 불명을 모다 신청을 하고 또 화두도 신청을 하고 그래놓고도 아직까지도 그 찾아가지 아니하신 분은 오늘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시절이 이렇게 어느덧 가을이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더웁지도 춥지도 않는 아주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국(時局)은 매우, 모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불자(佛子)는 오계(五戒)를 잘 받아서 실천을 하시고, 어쨌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어려운 처지를 당하더라도 항상 불자라고 하는 긍지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벗 삼고, 화두를 스승 삼고, 화두를 나침판을 삼고, 화두를 등불 삼아서 하루하루를, 또 일초 일초를,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해서 풍파(風波)가 심할수록에 그 배를 탄 사람은 정신을 차리듯이, 그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서로 화합(和合)을 해서 일치단결해 가지고 각자 자기의 부서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면서 그 풍랑(風浪)을 이겨내듯이,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모두가 다 단합하고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애끼고 서로 도우며 서로 용서(容恕)하며, 이러한 난국(亂局)을 기해서 이 어려운 때를 잘 이용을 해서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얻고, 나아가서는 모두가 그렇게 화합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전 국민이 단합이 되고, 전 국민이 단합이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가 되어가지고 인류를 갖다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역군(役軍)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그 제자(弟子)로서, 불교의 진리의 사도(使徒)로서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로되  호리유차유천리(毫釐有差謬千里)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요, 저 삼거리 마을 속에 서로 ‘형님, 형님’ 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다. 저 시끄러운 장바닥에 그 가게 앞에서 그 ‘아자씨, 아자씨’, ‘아부지, 아부지’ 하고 서로 알고 인사하는데.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다. 한 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곧 여기에 있더라.
아무, 불법(佛法)이 뭣인지, 참선(參禪)이 뭣인지, 뭐 깨달음이 뭣인지 그런 것도 모르는 저 거리에 사람들. ‘형님, 형님’ ‘아우, 아우’ 하고는 아주 평범한 그 무식한 그런 사람들 서로 인사할 줄 아는 그놈, 또 시끄러운 장바닥에 모다 가게 앞에서 모다 서로 주고받고 서로 그러한 사람들도 서로 다 안다 그 말이여.
근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모르지마는 다 그 사람들이 낱낱이 다 가지고 있고, 날로 그놈을 쓰고 있고 그놈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꿈에도 아지를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36분36초~1시간11분12초) (끝)





[법문 내용]

(게송)화소산전설천기~ /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 /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계(戒)는 계기(戒器), 정(定)은 정수(定水), 혜(慧)는 혜월(慧月)에 비유 /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 /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 소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고,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

산목숨을 죽이면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지고, 도둑질을 하면 복덕종자(福德種子)가 끊어지고, 사음(邪淫)하면 청정종자(淸淨種子)가 끊어지고, 거짓말을 하면 진실종자(眞實種子)가 끊어지고,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智慧種子)가 끊어진다.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모두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된다 / 화두 드는 방법은—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는데—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생사해탈을 하려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참나를 찾는 일 /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다 /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만다 / 신심과 분심과 의심,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한다.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은 오늘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난 것.
(게송)삼가촌리형형례~ /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하지 말라.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전강 조실 스님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혜(慧)는 혜월(慧月)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계(戒)의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참선(參禪)을 하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방법(자세와 단전호흡과 화두 거각)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22. 3. 3. 12:24

 

 

(No.377)—1989년 2월 첫째일요법회(89.2.5) (66분)

 

(1) 약 35분.

 

(2) 약 31분.


(1)-------------------

삼라만상동귀환(森羅萬像同歸幻)한디  조과장공멱몰종(鳥過長空覓沒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공불시장신처(虛空不是藏身處)라  간취풍전대우송(看取風前帶雨松)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라만상(森羅萬像)이 동귀환(同歸幻)이다.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환(幻)으로, 모두 다 똑같이 환(幻)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도 결국은 한줌의 흙이 되고 나중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은 어디로 갔는지 볼 수가 없고.

집도 오래되면 허물어져 버리고, 나무도 오래되면은 죽어서 없어져 버리고, 저 태양도 오래오래 저렇게 발광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마는 일 초 일 초 열이 식어가고 있고 모양이 변해가서 언젠가는 저 태양과 달과 모든 별들도 결국은 다 부서져서 없어져 버릴 때가 오는 거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일 초 일 초 쉼 없이 모양이 변해 가지고 결국은 언젠가는 이것이 없어져 버릴 때가 오는 것이여.

조과장공멱몰종(鳥過長空覓沒蹤)이다. 저 새가 저 긴 하늘을 날아가매 날아간 자취가 없어.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듯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겨났다 없어진 자취도 또한 찾을 길이 없더라.

그러면 모든 것이 생겨났다 없어져 버리면 결국은 허공으로 돌아가 버리고, 자취가 없으니까 허공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그러면 그 허공이라는 것이 과연 이 몸뚱이, 나 자신을 거기다가 감출만 하냐?(虛空不是藏身處)
그 허공이라는 곳에 이 몸뚱이와 우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거기다가 떠억 안신(安身)할 만한 곳이 못 되더라 그 말이여.

그러면 어디다가 우리의 이 몸뚱이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놈을 어디다가 갖다가 붙일 것인가?
간취풍전대우송(看取風前帶雨松)이다. 저 바람 앞에 비에 흔들리는 저 소나무, 그놈을 똑바로 들어라. 바람이 불며 비가 그 소나무에 뿌릴 때, 비 뿌리는 가운데에 바람이 소나무에 지나갈 때, 그 소나무에 그 솔바람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솔바람 부는 거기를 똑바로 보고 알아차려라 이거거든.


오늘, 무진년(戊辰年)이 마지막 끝나는 섣달 스무아흐레 그믐날입니다. 그리고 양력으로는 2월 5일 첫째 일요법회 날인데, 어제는 입춘법회가 있었습니다마는, 오늘 또 이 무진년 마지막 끝나는 날이 하필 또 일요법회와 이렇게 맞섰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퍽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그러한 해였습니다. 세계가 그렇고 나라가 그렇고, 그러한 커다란 대해(大海)에 파도가 치는 속에 우리는 낱낱이 조그마한 조각배를 그 파도 속에 띄우면서 용케도 엎어지지 아니하고 이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 드시고 억센 파도 속에 그놈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그 파도에 덮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어 버리는 그러한 나라도 있고, 그러한 회사도 있고, 또 그러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용케도 그 억센 파도를 잘 견디고 극복해서 다시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부처님의 따스한 자비의 가피(加被)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 무한히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해서 한 해가 저물었으니, 지난 1년 동안에 있었던 모든 몸 아프고 마음 아팠던 그리고 괴롭고 쓰리던 모든 일들, 원망스럽고 미웠던 일들, 다 깨끗이 자취없이 사라져 가는 한 해와 더불어 그런 언짢은 생각, 언짢은 일들도 함께 다 흘려보내 버리는 것이 참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릇 속에 담겨 있었던 좋지 못한 음식, 변질된 음식, 독한 음식, 먹을 수 없는 음식들, 그런 것은 깨끗이 비워 버리고 깨끗이 씻어서 아주 더운물에 끓여서, 그래서 그릇을 비워 놔야 거기에 다른 음식을 담을 수가 있듯이, 지난 1년 동안에 우리의 주변에 일어났던 일, 또 우리 일신상에 일어났던 일, 우리의 마음속에 스쳐간 모든 일들을 깨끗이 다 버려 버리고,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게 떠억 하고서 새해 첫날을 맞이해야 또 새해는 싱그럽고 희망찬 한 해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났지마는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 금생에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시고 절절한 그런 법문을 다 같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돌아올 때 새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분 1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초 1초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참 축복받을 만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최웅식 동자(童子)가 오늘 백일(百日)을 맞이하는 날로, 그 백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고 하는 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골수가 똘똘 뭉쳐서 수록되어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저술하시고, 우리 용화사에서 84년도에 번역을 해서 간행한 이래로 이번까지 16판을 간행을 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은 바로 팔만대장경이 바로 이 한 권 속에 축약(縮約)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경을 여러분께 법공양(法供養)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자가 새로 태어난, 정말 어느 집에 어느 아들이라도 새로 태어났을 때에는 집안 식구뿐만이 아니라, 온 이웃사람 일가친척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들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宇宙法界)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왜 새로 태어난 동자와 어린 애기를 축복하느냐’ 하면은 원래 생(生)과 사(死)가 없는 것이고 또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지만, 생(生)하고 또 한평생을 살다가 인연 따라서 다시 또 몸을 바꾸고 하는 이러한 일들이, 낱낱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우주의 진리 체(體)인 진여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써 새로운 생을 받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애기가 태어난 것은 바로 한 부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은 바로 그것이 죽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생(生)은 바로 고통이다,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 이외에 뭣이 있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진리를 깨달은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도 진리요, 늙음도 진리요, 앓는 것도 진리요, 이승을 하직하는 죽음도 진리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마치 봄에 잎이 피고 꽃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있듯이, 인생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고, 이런 것이 전부가 다 진리 체(體)의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갓난애기가 태어나는 것은 온 우주법계로부터서 축복을 받고, 저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저 하늘나라의 선신(善神)들도 축복을 하고, 저 축생이나 미물(微物)까지라도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개나 호랭이 같은 그러한 축생도 갓난애기는 절대로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 어른은 보고 왕왕 짓고 물려고 하면서도 갓난애기는 보고 그렇게 저런 개들도 사랑을 하고, 사람이나 돼지를 막 잡아먹는 호랭이도 갓난애기는 그렇게 애끼고 사랑하는 뜻을 표하는 것입니다.

갓난애기는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청정무구(淸淨無垢)해서 조끔도 물들지를 안 해서, 그래서 그 갓난애기의 마음가짐은 바로 도인(道人)의 경지와 거의 흡사하는 것입니다.
도인의 여러 가지 그 도인의 행에, 도행(道行)에 있어서 81행(八十一行)이 있는데,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좋고 궂은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습니다. 광행(狂行) 미친 행도 있고, 승행(僧行)도 있고, 속행(俗行)도 있고, 남자행, 여자행, 뭐 심지어 화엄경에는 창녀, 53선지식 속에는 창녀도 있습니다. 마을의 장자(長者)도 있고.
그 창녀(娼女)라 하면은 세속에 빈축을 받는 상대지마는 53선지식 속에 창녀가 있다 그 말이여. 그 창녀는, 사람이 그 창녀 얼굴만 봐도 마음이 맑아지고, 그 창녀의 손만 한번 잡아도 업장(業障)이 소멸하고, 그 창녀하고 한번 잠만 자도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는 그러한 창녀도 있다 그 말이여.

그런 81행 가운데에 어떠한 행(行)을 최고로 치느냐 하면,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치거든.

갓난애기,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갓난애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다못 배고프면 울 줄만 알고, 뜨거워도 울 줄 알고, 너무 추워도 울고, 또 목이 말라도 울고, 다쳐서 아퍼도 울고. 어린 아기의 언어(言語)는 우는 것이 언어여. 어린 아기 우는 것은 그것이 바로 언어이면서 그것이 바로 설법이요,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그것이 바로 진리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어린 아이에는 아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없거든. 완전히 깨끗하고 순수무잡해서 거의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는 도인(道人)의 심경(心境)과 같더라.
그래서 그 어린 아이는 우리집 애기가 아니고, 남의 집 애기라도 애기가 났다고 하면 모두가 다 축복을 하거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천국에도 간다’고 하는 그런 말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까닭이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동자의 백일을 맞이해서 오늘 이 『선가귀감』을 공양(供養)을 올리니까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이 책을 받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손에 드신 분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계(三界)에 떨어지지 아니하실 것이고 언제나 부처님 불법 문중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한 권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깨달은 경지에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法門)의 골수(骨髓)가 이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선가귀감』 속에서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데 대단히 요긴한 점 몇 군데를 설해 드리겠습니다.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세 가지 요긴한 것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첫째는 대신근(大信根)이요, 둘째는 대분지(大憤志)요, 셋째는 대의정(大疑情)이니라. 만약 그 한 가지만 궐(闕)하드라도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마침내 폐기(癈器)를 이룰 것이다.(20분34초)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대신근(大信根), 큰 신심이 있어야 돼. 무슨 신심(信心)이냐?
‘나도 바로 부처다. 중생이 바로 부처고,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요,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바로 부처다. 나라고 하는 놈을 내놓고는 부처를 찾을 수가 없다. 부처는 반드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 그놈을 갖다가 철견(徹見)함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무슨 경전 속에 문자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을 하나 밥을 먹으나,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나, 진심(瞋心)을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몸뚱이의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 그 신념이 여지없이 꽉 박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분심(大憤心).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현과 모든 도인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가지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중생의 탈을 쓰고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어찌 이래 가지고 잠을 편안히 자며, 편안히 밥을 먹으며, 무슨 한담(閑談)으로써 세월을 보내며,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그럭저럭 이 아까운 목숨을 보낼 것인가?'
아! 속에서부터 넘쳐흐르는 그 대분심(大憤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좋은 줄 알면서도 분심(憤心)이 없으면, 일체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이 몸과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셋째, 대의정(大疑情)이 있어야 하느니라. 무슨 의정(疑情)인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어떤 분은 진즉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고 어떤 중생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느냐?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기에.. 이 무엇이여?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이, 지어서 ‘이뭣고, 이뭣고’ 하는 게 아니라, 저 속에서부터 자동으로 의심이 나와서 항상 눈을 뜨나 감으나 눈앞에 환히 현전(現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 이것은 셋이 동시에, 세 가지의 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야 해.
신심만 있고 분심이 없다든지, 분심만 있고 의심이 없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 의심과 분심과 신심이 이 세 가지가 항상 함께 일어나면 화두를 일부러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안 들립니다” “자꾸 들면 그냥 이뭣고 뿐이지 정말 간절(懇切)한 의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간절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이러한 하소연을 하신 분을 간혹 만납니다.
그건 다름이 아닙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한목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주작(做作)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아야지, 그냥 의식적으로 일부러 들면 그때 잠깐 있다가, 들지 아니하면 그냥 달아나 버리고, 이것은 삼요(三要)를 동시에 갖추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 일용(日用)에 인연을 응(應)하는 곳.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고, 냄새 맡고, 맛보고,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이러한 일상생활 하는 곳에서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신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앞도 생각하지 말고, 뒤도 생각하지 말고, 잘되고 못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다못 그렇게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고 그렇게 화두를 들어오고 들어가란 말이여.
그렇게 애써서 들다 보면, 이치 길[理路]이 딱! 끊어져 버려. 뜻 길[義路]이 딱! 끊어져 버려. 그래 가지고 아무 자미(滋味)가 없어져 버려.

그래 가지고 심두(心頭)가 열민(熱悶)해. 마음이 열민해. 다맛 가슴이 답답할 뿐이라 그 말이여. 이것을 공부가 잘된다고 할 수도 없고, 못된다고 할 수도 없고, 도대체가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리면서 가슴이 답답하기만하다 그 말이여. 바로 그때가, 당인(當人)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내던질 곳이여.

가슴이 답답허면 그 답답한 것을 이기지 못해 가지고 ‘아이구, 이거 공부를 잘못해 가지고 이런 것인가? 이러다가 이거 내가 상기증(上氣症)이 생길라고 이런 것인가? 이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이것이 무슨 공부를 잘못해 가지고 잘못될라고 이런 것이 아니여. 그런 의심을 하지 말어.

알 수가 없어.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지고, 일체 그동안에 보고 듣고 배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재미도 없어. 그러는 가운데 가슴만 답답… 바로 그 경지가 몸과 마음을 갖다 놔버릴 곳이여. 이것이 바로 성불(成佛)하고 조사(祖師)가 될 수 있는 기본이여! 그것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이 일은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쇠로 지어 붓어서 만든 소, 소 등어리를 향해서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불문(不問)하고 몸뚱이 채, 입부리를 갖다가 소 등어리를 향해서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소 등어리에 앉어 가지고, 입부리를 거기다가 들어간가 안 들어간가 이렇게 박어 보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 채 압량해서 아주 그냥 그 소 등어리로 아주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마치 수영선수가 높은 데에서 물을 향해서 다이빙을 하듯이 그렇게 소 등어리... ‘쇠로 맨들었나 말았나, 쇠로 되았으니 안 들어갈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야.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몸뚱이 채 뚫고 들어가. 그래 가지고 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탁! 거기다 갖다 내던지면서 뚫고 들어갈 때, 바로 그 몸뚱이 압량해서 소 속으로 풍 들어가는 거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중으로 검술을 배우러 들어갔어. 그 산중에 정말 아주 검술을 통달한 큰 도사가 있단 말을 듣고, 어렵게 어렵게 찾아가서 간신히 그 분을 만났어. 만났는데,
“검술을 배우러 왔습니다”
“니까짓 놈이 무슨 검술을 배워?”

“그래도 내가, 선생님이 정말 검술에 통달한 도사란 것을 나는 알고 왔습니다. 절대로 선생님이 아무리 가라고 해도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안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은 장작이나 패라”

날마다 나무를 비어다가 하루에 아주 수십 짐씩 장작을 팼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열흘, 한 달, 두 달… 한 삼 년을 두고 장작을 팼어.
처음에는 헛 찍기도 하고 잘 못했지마는, 한 3년을 하니까 아무리 큰 나무도 한번 탁! 치면 쩍쩍 갈라졌습니다. 아무리 질긴 뿌럭지 끌통도 그 어디를 찍으면은 이 장작이 쩍 갈라진다고 하는 것을 다 터득을 했습니다. 소나무가 되었건, 참나무가 되었건, 귀목나무가 되었건, 아주 장작 패는데 아주 도가 텄습니다.

하루는 장작을 패기 위해서 저 도끼를 쳐들고 탁! 찍을라고 할 때에, 그 선생이 살짝 뒤에서 숨어 서 있다가 냉큼 그 장작 위에다가 크막한 돌멩이를 갖다가 척! 놨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일심(一心)으로 그 도끼를 갖다가 내리쳤는데, 탁! 깨진 데 보니까 장작이 아니라 차돌멩이가 쩍 갈라졌다 그 말이여. 깜짝 놀래 가지고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로 눈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돌멩이를 하나 놓고 다시 쪼개봤습니다. 도끼날만 뭉그러졌지 돌멩이가 쪼개지질 않았습니다. 몇 번을 해봐도 돌멩이가 쪼개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왜 선생님이 턱! 갖다 놓은 돌멩이는 쩍 갈라졌는데, 자기가 그 돌멩이를 쪼갤라고 하니까 안 쪼개졌겠습니까? 처음에 내리칠 때에는 그것이 돌멩이라고 하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못, ‘안 뽀개질 것이다. 쪼개질 것이다’, ‘쪼개진가, 안 뽀개진가 한번 해보자’ 그러한 망상(妄想), 그러한 사량심(思量心)이 전혀 붙어 있질 않았습니다.

다맛 내리치는 자신이나, 내리치는 도끼나, 거기에 놓여진 돌이나, 그 삼자(三者)가 하나가 되었어. 그것을 무심(無心)이라 그래. 무심 속에서 갖다 내려치니까 돌멩이 아니라 쇳덩어리를 놨어도 쩍! 갈라졌을 것이다 그 말이여.
두 번째, 세 번째 시험 삼아서 할 때에는 벌써 이것이 돌멩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마음속에 먹고 있었고, ‘돌멩인데 또 한번 쪼개진가 한번 해보자’ 하는 그런 번뇌심(煩惱心)이 발동을 했기 때문에 몇 번을 찍어도 쪼개지질 않했습니다.(처음~35분29초)





(2)------------------

또 어떤 사람은 활을 가지고 사냥을 나갔는데, 그 사람도 활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사냥을 나갔는데, 저만큼 큰 호랭이란 놈이 떡! 버티고 섰다 그 말이여. 그래서 “너 이놈, 저리 비키지 못할까” 몇 번 소리를 쳤지마는 그 누런 얼룩얼룩한 호랭이가 꿈쩍도 안 해.

그래서 활을 댕겨 가지고는, 저놈을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죽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내가 죽느냐 니가 죽느냐' 아주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활을 땡겨 가지고 팍! 쐈는데 화살이 쏙 들어갔다 그 말이여. 그런데도 그 호랭이가 넘어지질 않고 턱 있다 그 말이여.
살살 가까이... '지가 심장에 아주 정통으로 맞아서 화살이 갖다가 쏙 들어갔으니 지가 안 죽고 베길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서 가 봤더니 호랭이가 아니라 바윗돌이였었다.

‘참, 이상하다. 뭔 놈의 바윗돌 속에 화살이 들어갈까?’ 다시 그 자리에 되돌아와 가지고 몇 번 활을 쏴 봤지마는, 탁탁 되받아 버리고 화살이 그 바위 속에 백히질 안 했다 그 말이여. 이것도 역시 도끼로 차돌을 깬 것과 마찬가지 이치여.

우리의 정신력, 우리의 이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정신작용,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동하면 그것이 바로 번뇌요, 망상이요, 생사심이요, 아주 그건 그런 것인데,
앞뒤가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끊어지고, 무모색(無摸索)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다맛 이 몸과 목숨을 바쳐서 들어갈 때에는 바위가 되었건, 쇳덩어리가 되었건, 호랭이가 되었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속가(俗家)의 문구에 ‘정신일도(精神一到)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화두를 들을 때에 바로! 이렇게 해야 된다 그거여.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이뭣고?’

‘내가 중생이다, 내가 여자다, 남자다’ ‘내가 나이가 먹어서 늙어서 인자 해봤자 안될 것이다’ ‘그동안에 내가 참선을 안 해보고 염불만 했기 때문에 갑자기 참선을 한들 언제 될까?’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여.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이뭣고?’ 화두를 탔으면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지지 말어. 다못 무조건하고 ‘이뭣고?’ 뿐이거든.

요새 일본서 나오는 모다 이 참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번역해 나옵니다. 모다 지식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참선이 좋다'고 말은 듣고 또 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는 싶은데, 우리 한국에 모다 큰스님네들이 그 참선에 대한 내논 책은 그렇게 구해 보기가 어렵고, 그러니 일본 책을 많이 사다 보고.
그래 가지고 '뭣인가 도대체 참선에 대해서 알아야 또 할 맛이 날 것이다' 그래서 일본 책을 많이 보면, 그 공안(公案)에 대해서 『무문관(無門關)』이라든지 뭐 『벽암록(碧巖錄)』이라든지 모다 참선에 대한 많은 책들이 일본에서는 번역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참선을 갖다가 널리 보급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참선을 하도록 권장하기 위해서 하는 그 뜻은 좋았지마는,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공안을 풀이를 하고 그래 가지고 그렇게 많이 『염송(拈頌)』이나 또는 『벽암록』이나 『무문관』이나 이러한 책을 갖다가 많이 읽고 풀어서 재미있게 얘기처럼 모다 풀어서 해석을 해놨는데, 그걸 읽었다고 해서 절대로 참선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닥치는 대로 다 읽어서 다 해석할 줄 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하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한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하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가귀감』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이 일어나고 분심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용화사에서는 16판토록 이렇게 간행을 해서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42분10초)


그런데 '이 모기가 쇠로 맨든 소 등어리에 몸뚱이 채 처박고 들어가듯이 하라, 그렇게 간절히 허라' 하니까, ‘그렇다면 나도 한번 그렇게 해봐야겠다. 이거 과거에 모든 불조(佛祖)가 다 하고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이 하는데 어찌 나라고 못할 것인가?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을 한목 발(發)해 가지고 이것을 나도 한번 해볼 수 밖에 없다’
그래 가지고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 그래 가지고 미간(眉間)에다가 '내 천(川) 자'를 아주 탁! 써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내가 금생에 결정코 이놈을 기어코 아주 해결하고야만 말겠다’ ‘이뭣고?’를 막 해 가지고는, ‘까짓거 뭐 난들 왜 못하냐?’
참 그런 용기와 신심을 내는 거, 그런 분심을 내는 건 대단히 좋은데, 이것이 문제가 있다 그 말이여.

'이 공부를 하는 데에는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해라'
거문고 줄을, 기타 줄도 마찬가지죠. 거문고 줄을 너무 팽팽하게 되게 갖다가 졸라매면, 까딱하면 그 줄이 끊어져 버리거나 또 타다가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더라도 제 음가(音價)가 나오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팅팅해 가지고.
또 '너무 되게 매면은 또 끊어진다' 해 가지고 겁을 먹고 또 너무 느슨하게 매면, 둥둥둥 해 가지고 또 제 음가가 안 난다 그 말이여. 너무 세게 매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매도 안 되고, 반드시 그 음가에 맞춰서 적당하니 그놈을 맞춰야 훌륭한 곡을 갖다가 연주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바른 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를 떠억 하고 허리를 쭉 펴고 턱을 갖다가 이렇게 잡아당기고 그래서 머리는 너무 뒤로 자지바지해도 안 되고 앞으로 숙어도 안 되고 또 옆으로 이렇게 기울어지지도 않게, 단정하니 하면서도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또 눈에 힘도 빼고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고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 말이여.

아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 저 안에다 갖다가 혀를 꼬부려 오그린다.
눈은 편안하게 평상으로 뜨되, 이 평지에서 약 2m 지점에 눈을 떨구라. 2m 지점에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凝視)해서는 안 돼.

어떤 사람은 2m 지점에다 눈을 떨구라 하니까, 2m 지점에다가 까만 콩을 하나 갖다 놓고 참선할 땐 그놈을 갖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 말이여. 그런 것이 아니여요.
눈을 평상으로 뜨되, 2m 지점에 떨구되, 의식적으로 본 바는 없어야 한다 그 말이여. 평상으로 뜨되 아무것도 보는 바는 없어. 다맛 이 코 끄터리와 단전(丹田)이 일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따악 그렇게 하고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 부위가 약간 볼록하게 느끼고 또 숨을 내쉴 때에는 배가 약간 홀쪽하게 해서, 숨을 내쉬고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해졌다가 홀쪽해졌다 그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여.
그래서 숨을 들어마실 때는 수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함을 느끼고, 또 그렇게 들어마셨으면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쉴 때에는 조용하게 길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게 하되, 너무 홀쪽히 해 가지고 뱃가죽이 등어리에 가서 딱 붙으도록 얼굴이 벌게져서 숨이 가쁠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게 아녀요. 7부나 8부 쯤만 내쉬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그렇게 쉬는….

이 호흡,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고, 건강에도 좋고 피로회복도 되고 또 피도 맑아지고 혈압도 내려가고 또 정신도 안정이 되고 여러 가지가 좋습니다.
그렇게 좋은데, 이것도 무리하게 억지로 잔뜩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셔 가지고, '참으라' 하니까는 아주 얼굴이 벌게지도록 맹꽁이 배처럼 해 가지고 억지로 그냥 참고, 또 '천천히 길게 내쉬라' 하니까 30초, 1분, 2분이 되도록 막 그냥 눈알이 튀겨져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했다 하면은 참으로 큰일나는 것입니다. 병이 생겨도 큰 병이 생기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첫째, 무리가 없이 해야 돼요. 30분, 1시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그러한 일이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또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또 내쉬면서 ‘이뭣고~?’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하라 하니까, 계속해서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하는데, 처음 시작하신 분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지만, 한 달 · 두 달 · 석 달 또는 1년 이렇게 하다 보면 ‘이뭣고?’ 한번만 들고서 숨을 몇 번을 쉬어도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있으면, 그 고대로 있는 그 의심을 관(觀)할지언정, 떠억 그 의심만을 이렇게 관조할지언정 자꾸 거기다, 있는 의심(疑心)에다가 ‘이뭣고?’를 덮쳐서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할 필요가 없거든.
심지에다 불을 댕겨서 불이 딱 붙어 있으면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호하면 그만이지, 심지에 불이 붙었는데도 자꾸 성냥불을 켜서 자꾸 거기다 불을 붙일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여.

불이 꺼져 버리면 다시 또 불을 켜듯이, 화두(話頭)가 없어졌거나 딴 망상(妄想)이 들어오면 그때 다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이뭣고?’가 고대로 있으면, 그 있는 그 ‘이뭣고?’를 묵묵히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그것을 갖다가 잘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돼.

덮어놓고 ‘이뭣고?’ 하라니까는,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해 가지고 ‘오늘 내가 5만 번을 이뭣고를 했다’ 이 참선은 그런 것이 아니여.
염불(念佛)은 하루에 5만 독(讀) 내지 10만 독씩 이렇게 정해 놓고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백일기도를 한다든지 천일기도를 한다든지 또 그런 분이 있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염불도 사실은 횟수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거든. 염도염궁무념처.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신고?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이다. 마음을 부딪쳐 가지고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아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이르러, 생각이 생각 없는데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에 항상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부처님한테서 자금광이 나오거든. 부처님 몸뚱이는 자금색(紫金色) 색상이기 때문에 부처님 몸뚱이, 아미타불한테서는 항상 자금광이 빛나는데, 바로 우리가 염불을 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에 이르면은 바로 눈 ‧ 코 ‧ 입 ‧ 귀... 육문(六門)에 자금광(紫金光)이 나오리라.
염불(念佛)도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가 되도록 하는 것이지, 온갖 망상 잡담하면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아미타불아미타불아미타불…’ 어쨌든지 십만 독만 채울려고 작정을 하거든.

또 부처님께 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천 배를 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에 삼천 배.. 구천 배를 하리라’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한 자리, 두 자리, 석 자리, 넉 자리 해 가지고 그냥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해 가지고, 1초 동안에 한 자리씩 해서, 1초에 한 자리면은 1분이면 육십 자리요, 한 시간이면 뭐 삼천육백 자리... 횟수로—물론 초학자는 횟수로라도 그렇게 많이 하다보면 차츰차츰 참다운 예배(禮拜)의 뜻을 터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횟수 위주로의 예배보단 그 예배(禮拜)의 참뜻을 알고 해야 해. 예배의 뜻은 굴복무명(屈伏無明)하고 공경진성(恭敬眞性)이거든. 무명을 굴복 받어. 무명을 굴복하고 참된 성품을 공경하는 것이 그것이 예배의 참다운 뜻인 것입니다.

황벽 선사(黃蘗禪師)라고, 육조 스님 밑에 남악회양 선사,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 밑에 마조도일(馬祖道一), 마조도일 밑에 백장회해(百丈懷海), 백장회해 밑에 황벽선사(黃蘗禪師), 아주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아주 정통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대도인이신데, 그 황벽 선사는 평생을 시간만 있으면 법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했습니다.
뭐 그분은 천 배가 되었건 삼천 배가 되었건 그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깨달음의 경지여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예배를 하고, 예배가 곧 참선이요, 참선이 곧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지, 바로 그냥 그것이 보림(保任)이고, 바로 그것이 설법이고, 그것이 중생교화여. 어떻게 평생 동안을 예배를 했던지 황벽 스님의 이마에는 주먹탱이만 혹이 붙었습니다. 여기 아주 혹이 생겼어.

그래서 예배에도 그러한 황벽 선사가 하신 바와 같은 바로 그러한 예배를 해야 할 것이고, 염불을 하시는 분도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해서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는 그러한 염불을 하셔야 해.

참선을 하는 사람도 정말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간택 받아 가지고,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독로해서, 의심을 해 가고 의심을 해 와서, 들어가고 들어와.
처음에는 자꾸 반복을 해서 되풀이해서 하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돼. 습관이 되면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그냥 산을 봐도 ‘이뭣고?’요, 해를 봐도 ‘이뭣고?’요, 물을 봐도 ‘이뭣고?’요, 나무를 봐도 ‘이뭣고?’요, 사람을 봐도 ‘이뭣고?’요, 앉아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를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항상 화두(話頭)가 독로(獨露)해서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는 거여. 그래 가지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가지고 성성적적한 가운데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줄 몰라. 시간 가는 줄도 몰라. 그러면서도 성성적적해서 의단(疑團)이 터억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 그 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해, 이틀을 그렇게 해.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고대로, 의단(疑團)이 고대로 독로(獨露)해.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딱 뜨면은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어제 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 말이여. 세수를 해도 고대로 있고, 양치질을 해도 그대로 있고, 목욕을 해도 그대로 있어.
그러다가 하루 · 이틀 · 사흘 · 닷새 · 엿새 · 이레 일주일을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떠한 찰나에 문을 텅! 닫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누가 무슨 물건을 턱 내부치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자기가 걸어가다가 발을 턱! 무슨 돌뿌리에 채였다든지, 어떠한 그러한 특별한 기연(機緣)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바로 타파(打破) 공안(公案)이여.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거여. 그렇게 깜깜하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던 화두가 환해. 이럴 때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여.
자기 나름대로 환하지마는 그것이 바른 것인가 옳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바른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날 때에 선지식한테 가서 그것을 간택을 받아야 하는 거여.

그래서 모든 공안에 다 맥힘이 없고 그러면, 깨달은 뒤에 보림(保任)하는 법을 다시 지시를 받어 가지고 그때에 비로서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토굴 살림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서 이 장양성태(長養聖胎) 해 가지고, 고인(古人)의 모든 어록(語錄)도 한번 보고, 또 나아가서는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의 서적도 한번 보고, 제자백가지설(諸子百家之說)도 한번 훑어보고, 그래서 안팎으로 힘을 충족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밑 없는 배’를 타고 나가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참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 같지마는 천하에 쉬운 것입니다.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어 가지고 ‘이뭣고?’ 하라고 하면 그냥 ‘이뭣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오늘 무진년 마지막 날이요, 또 새해를 맞이하는 이 즈음에, 그동안에 누누이 이런 말씀을 일러드렸지마는 오늘 좀더 간곡히 말씀을 드린 것은 정말 이번에 백일을 맞이한 최웅식 동자와 같이 우리도 그런 순일무잡하고 청정무구한 그런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새해에는 초하루날부터서 365일을 하루와 같이 오늘 지금 이 법문을 듣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정말 간절히 그리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할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61분40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인데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은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하셨는데 그것을 대장경을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합니다.
그 일체경을 설하신 것을 무슨 목적으로 설하셨느냐? 일체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나의 이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일체법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물에 빠진 거 건져내듯이 막 건져내고, 부자되게 해 달라니까 다 부자로 만들어 주고 그런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정말 참다운 뜻은 우리 중생 낱낱이, 우리 자신의 일체 마음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일체 마음이 없으면,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이면, 내게 모든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공(空)해 버리면,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일체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냐?
내 마음이 온갖 생각이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와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와 팔만사천 번뇌 망상이 들끓으니까 그 팔만사천 번뇌 망상을 제도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내가 그런 마음이 딱! 끊어져 버려. 공(空)해 버렸다면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필요한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병이 있으니까 여러 가지 약이 필요한 것인데, 내가 모든 병이 다 나아버렸다면은 뭐하러 그렇게 쓰고 고약한 약을 계속 먹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다운 불법(佛法)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실천하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고 끝을 맺고자 합니다.(35분30초~65분5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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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라만상동귀환~’ ; 『소요당집 外』 (한글대장경 169, 동국대학교 역경원) p71 소요 스님 게송 ‘賽義玄法師(의현법사에게 답함)’ 참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환(幻) : 또는 눈꽃(空眼花 • 空華)。근본 무명(根本無明)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초를 알 길 없으므로 「본래부터(從本已來)」라기도 하고, 「시작도 없음(無始)」이라고도 한다。무명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실상 자체(實相自體)도 없는 것이므로 곡두(환상)같다고도 하고, 눈이 어리어서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눈꽃 같다고도 하는 것이다。이처럼 허환된 무명에서 나온 바 온갖 것이 또한 모두 환상이며 공화(空華)인 것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다사다난(多事多難) ; 여러 가지로 일이나 어려움이 많음.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苦]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절절한 --> 절절(切切)하다 ; 매우 간절하다.
*선가귀감(禪家龜鑑) ; 조선 서산대사(휴정, 1520-1604)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될—선종(禪宗)을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선가귀감』이 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공양(法供養)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베풂. ②불서(佛書)를 사람들에게 베풂.
*‘왜 새로 태어난 동자와 어린 애기를 축복하느냐’ 하면은 원래 생(生)과 사(死)가 없는 것이고 또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지만,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미물(微物) ; 벌레 따위의 하찮은 동물.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청정무구(淸淨無垢 맑다·깨끗하다·탐욕이 없다 청/깨끗하다·맑다·사념이 없다 정/없을 무/때·티끌·수치·부끄러움 구) ; 맑고 깨끗하여 더럽거나 속된 데가 없음.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도인(道人)의 81행(行) ;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81행 가운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인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 등암화상에게 주다)'에서.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又云 栴多羅見性成佛 不論作殺生業 縱作業 不同他人 業拘不能 白衣見性成佛 不論淫欲 縱有餘習 亦不相妨 洪州云 善亦是心 不可將心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還斷於心 牛頭禪師云 心無異心 不斷貪淫

또 "전다라가 견성성불함에 살생업을 지은 것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업에 구애되지 않으며, 속인이 견성성불함에 음욕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또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마조도일) 스님은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닦을 수 없고, 악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우두 선사는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탐심과 음욕을 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故善知識牧牛 有八十一行 自佛行梵行 乃至有殺盜淫酒等行 而道眼明白 亦無所碍 故潙山禪師云 只貴正眼 不貴行李處 故此法門逈出三乘 汎學者 實不可思議 古有習小乘戒律者 皆誹謗禪師 而如蟷螂捍轍 斥鷃笑鵬 置之莫論

그러므로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에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 이르기까지 도안(道眼)이 명백하면 아무 구애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산선사는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문은 삼승을 멀리 벗어났으니, 범범하게 배우는 사람은 실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승의 계율을 익힌 이들은 모두 선사를 비방했으나 이는 버마재비(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고 뱁새가 대붕(大鵬)를 비웃는 격이니,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 ;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 동자(善財童子)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사라림에서, 최초로 문수 보살의 법문을 듣고 남방으로 향하여 차례차례 찾아가서 법문을 들은 53위의 선지식(스승).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영아행(嬰兒行) ;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 도인(道人)의 81행(行)이 있는데, 81행 가운데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체모(體貌 몸 체/얼굴 모) ; 체면(體面). 남을 대하기에 번듯하고 떳떳한 입장이나 면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삼계(三界) : [범] trayo-dhā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궐(闕) ; ①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빠뜨림. ②여러 자리 가운데 일부 자리가 비거나 차례가 빠짐.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열반(涅槃) : [범] nirvana [파] nibbana 음을 따라 니반나(泥畔那) • 니원(泥洹) • 열반나(涅槃那)라 쓰고, 뜻으로 번역하여 멸(滅) • 적멸(寂滅) • 멸도(滅度) • 원적(圓寂) • 안락(安樂) • 해탈(解脫) 등이라 한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를 말함이니,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자성불(自性佛)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불교]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한담(閑談) ; 심심풀이로 이야기를 나눔. 또는 그러한 이야기.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 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주작(做作 지을 주/지을 작)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
화두를 들 때 무상(無常)을 느껴 발심(發心)을 해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한 것이어서 주작이라고 한다.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이뭣고(시심마)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화두(공안)’ 참고.
*당인(當人) ;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있는 그 사람.
*상기증(上氣症 오를 상/기운 기/증세 증)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증세.
상기증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증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여하약하(如何若何) ; 이러쿵저러쿵.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자꾸 말을 늘어놓는 모양.
*입부리 ; 새의 부리나 동물의 입을 말하는 ‘주둥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
*압량해서 ; ‘합(合)해서’의 사투리.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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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의단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발하다(發-- 일어날 발) ; 생기게 하거나 일어나게 하다. 생기거나 일어나다.
*음가(音價 소리 음/값 가) ; 낱자가 지니고 있는 본바탕 소리의 측정치.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자지바지 ; 좌선(坐禪)할 때 몸에 너무 힘을 주어, 몸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할 때는 몸을 단정(端正)히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응시(凝視 엉기다·집중하다·머무르다 응/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의심을 관(觀)할지언정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게송) ‘아미타불재하방~’ ; 『한가로운 도인의 길 - 나옹화상법어집』 (김달진역주, 세계사刊).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보임(示諸念佛人/8首) 게송 참고. p166.
*육문(六門) ; 육근(六根,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을 말한다. 육식(六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는 경우, 그 입구가 되므로 문(門) 또는 뿌리(根)라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범] Amitabha Buddha : Amitayus Buddha 대승불교의 중요한 부처님。 줄여서 미타。범본경전(梵本經典)에는 아미타바불타 • 아미타유사불타의 두 이름이 있다. 한역(漢譯)한 여러 경전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거니와 보통으로는 아미타불 무량수불이라 한다.
정토삼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2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 또 48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을 하여 성불하였으니 이가 아미타불이다. 구원한 옛적에 성불한 아미타불[本佛]에 대하여 이 부처님을 10겁 전에 성불한 아미타불[迹佛]이라 한다.
*육조 스님,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을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온,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의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예배(禮拜) ; 거룩하고 성스러운 대상에 대하여 존경하는 뜻을 가지고 절을 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 (가로판 p116)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 身口意가 淸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때 기/인연·이유·연줄 연) ; ①시기인연(時機因緣)의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것.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된 스승과 제자의 인연.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장양성태(長養聖胎) ; 성인의 태(胎)를 길러 양성함.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眞]부처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比喩)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어 가지고 ‘이뭣고?’ 하라고 하면 그냥 ‘이뭣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 썩은 나무둥치. 산에 버글버글 아주 썩은 나무둥치는 아무 쓸모가 없어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수행인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러한 거짓 바보가 되어야만 일분일초도 딴 데에 정신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정진만을 할 수가 있어서 가장 도를 닦는데 효과적이다.

 


[참고] **송담스님(No.214)—1983년 추계산철 결제법회(계해년 음 8.1) (용214)
오조 홍인대사(五祖弘忍大師)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法)을 설하셨는데 그 최상승론에 보면,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을 안으로부터 발(發)하지 아니하면 삼세(三世)에 비록 모든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부처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무소능(無所能)이니라. 능히 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다,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삼세의 부처님을 친견한다 하더라도 속으로부터 안으로부터 진정한 발심(發心)을 하지 못한다면은 도(道)는 이루지를 못할 것이다 이말이여.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정(大疑情)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참선의 삼요(三要)인데 세 가지 요긴한 것인데, 신심과 분심과 대의정이 한목 속에서부터서 자발적으로 폭발을 하지 아니하면, 억지로 신심을 내고 억지로 분심을 내고 억지로 의심을 낸다 하더라도 잠시 뿐이고 금방 비그르르 하니 식어 버리고, 아무리 의심을 내서 화두(話頭)를 들려고 해도 들 때 뿐이지 1분도 못 가서 의심이 없어져 버리고 이러한 것은 그 정성이 안으로부터 발하지 아니하고, 지어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말 안으로부터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돈발(頓發)을 해야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도(道)를 이룰 수가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을 하시기를 ‘다만 능히 떨어진 옷과 거치른 밥을 먹으면서’, 이것은 떨어진 옷과 거치른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검박한 생활을, 잘 먹을라고 하지도 아니하고 잘 입을라 하지도 아니하고, '다못 근본 참마음을 지켜서 말귀도 못 알아들은 거짓 바보가 되라' 바보는 뭔 말을 일러줘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만공 스님께서도 학자들에게 항시 말씀을 하시기를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공부를 할 수가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썩은 나무둥치’는 왜 그러냐 하면, 산에 좋은 나무가 있으면 목수가 비어 가고 또 나쁜 나무도 다 쓸데가 있어서 비어 가는데 그리고 나무 비어 간 나뭇등걸도 썩지 않은 나무는 그걸 패다가 짜개서 화목(火木)으로 쓰기 위해서 그것도 파 가지만, 그 썩어서 버글버글버글한 아주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할 것이며 또 땔나무로 연료를 할 것도 못 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은 캐 가는 사람이 없어.
이것이 바로 말귀도 못 알아들은 그런 바보 천치(天癡)와 같이—진짜 속속들이 바보 천치가 아니라, 사리(事理)가 분명한 다 발심한 수행인(修行人)이니 그렇게 바보가 분명 아니지만 정말 그런 말귀도 못 알아들은 바보 천치가 되어라 이거거든.

거짓 바보 천치가 되어 가지고, 남이 보면은 진짜 바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러한 바보가 되어야만 가장 도를 닦는데 효과적이다.
쓸모가 있고 똑똑하고 그러면은 자기 공부해 나가는 데 여러 가지로 시간적으로 이리저리 불림을 받게 되고 이용을 당하게 되고 그러니까, 썩어빠진 나뭇등걸이나, 완전히 바보 천치가 되어 버려야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비(是非)를 걸어올 까닭도 없고, 그 사람보고 이 일을 해라 저 일을 해라 할 까닭도 없고, 그렇게 되어 버려야만 정말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도 딴 데에 정신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정진만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능히 이렇게 공부를 해 가야만 비로소 '대정진인(大精進人), 대정진, 크게 정진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오늘부터 두 달간 용화선원이나 또는 원효사나 회룡사 봉래사 선원에서 정진하는 납자(衲子)들은 이 두 달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철저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신도 여러분들도 각기 가정에서—그 바보가 되어 가지고 계속 그렇게 해서는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할 일은 하고 처리할 것은 처리하면서, 꼭 필요한 데에는 모두 여법(如法)하게 일을 처리해야겠지만, 그밖에 쓸데없는 잡담, 친구끼리 만나서 남의 흉이나 보고, 시부모 흉이나 보고, 남편 흉이나 보고, 이러한 쓸데없는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정말 이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을 항시 생각하면서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11분2초~19분58초)

*(게송) '불설일체법~' ; 『완릉록(宛陵錄)』 황벽(黃檗) 선사 말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일체경(一切經) ; 대장경(大藏經)과 같음.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법문 내용]

(게송)삼라만상동귀환~ /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1분마다 1초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은 팔만대장경의 골수 / 한 애기가 태어난 것은 바로 한 부처님이 태어난 것 / 갓난애기는 순수무잡하고 청정무구해서 바로 도인(道人)의 경지와 거의 흡사 / 도인(道人)의 81행(八十一行) 중에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 / 검술 배우는 사람의 비유.

바윗돌을 뚫는 화살. 정신작용, 정신력 / 화두를 들을 때에, 다못 무조건하고 ‘이뭣고?’ 뿐이다 / 공부를 하는 데에는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해라 / 참선 자세, 호흡법 / 참다운 염불(念佛), 참다운 예배(禮拜)의 뜻 / 황벽 선사의 예배 / 화두순숙 의단독로 타성일편 의단타파 오후보림 중생제도 / (게송)불설일체법~.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돌아올 때 새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분 1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초 1초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참 축복받을 만한 일인 것입니다.

‘왜 새로 태어난 동자와 어린 애기를 축복하느냐’ 하면은 원래 생(生)과 사(死)가 없는 것이고 또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지만, 생(生)하고 또 한평생을 살다가 인연 따라서 다시 또 몸을 바꾸고 하는 이러한 일들이, 낱낱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우주의 진리 체(體)인 진여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써 새로운 생을 받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애기가 태어난 것은 바로 한 부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은 바로 그것이 죽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생(生)은 바로 고통이다,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 이외에 뭣이 있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진리를 깨달은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도 진리요, 늙음도 진리요, 앓는 것도 진리요, 이승을 하직하는 죽음도 진리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마치 봄에 잎이 피고 꽃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있듯이, 인생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고, 이런 것이 전부가 다 진리 체(體)의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인 것입니다.

『선가귀감』을 공양(供養)을 올리니까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이 책을 받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손에 드신 분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계(三界)에 떨어지지 아니하실 것이고 언제나 부처님 불법 문중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한 권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깨달은 경지에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法門)의 골수(骨髓)가 이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대신근(大信根), 큰 신심이 있어야 돼. 무슨 신심(信心)이냐?
‘나도 바로 부처다. 중생이 바로 부처고,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요,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바로 부처다. 나라고 하는 놈을 내놓고는 부처를 찾을 수가 없다. 부처는 반드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 그놈을 갖다가 철견(徹見)함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무슨 경전 속에 문자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을 하나 밥을 먹으나,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나, 진심(瞋心)을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몸뚱이의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 그 신념이 여지없이 꽉 박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이 일은 마치 모기가 쇠로 지어 붓어서 만든 소 등어리를 향해서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불문(不問)하고 몸뚱이 채, 입부리를 갖다가 소 등어리를 향해서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소 등어리에 앉어 가지고, 입부리를 거기다가 들어간가 안 들어간가 이렇게 박어 보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 채 압량해서 아주 그냥 그 소 등어리로 아주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마치 수영선수가 높은 데에서 물을 향해서 다이빙을 하듯이 그렇게 소 등어리... ‘쇠로 맨들었나 말았나, 쇠로 되았으니 안 들어갈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야.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몸뚱이 채 뚫고 들어가. 그래 가지고 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탁! 거기다 갖다 내던지면서 뚫고 들어갈 때, 바로 그 몸뚱이 압량해서 소 속으로 풍 들어가는 거라.

우리의 정신력, 우리의 이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정신작용,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동하면 그것이 바로 번뇌요, 망상이요, 생사심이요, 아주 그건 그런 것인데,
앞뒤가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끊어지고, 무모색(無摸索)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다맛 이 몸과 목숨을 바쳐서 들어갈 때에는 바위가 되었건, 쇳덩어리가 되었건, 호랭이가 되었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속가(俗家)의 문구에 ‘정신일도(精神一到)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화두를 들을 때에 바로! 이렇게 해야 된다 그거여.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이뭣고?’
‘내가 중생이다, 내가 여자다, 남자다’ ‘내가 나이가 먹어서 늙어서 인자 해봤자 안될 것이다’ ‘그동안에 내가 참선을 안 해보고 염불만 했기 때문에 갑자기 참선을 한들 언제 될까?’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여.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이뭣고?’ 화두를 탔으면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지지 말어. 다못 무조건하고 ‘이뭣고?’ 뿐이거든.

참선이라 하는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하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한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하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가귀감』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이 일어나고 분심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용화사에서는 16판토록 이렇게 간행을 해서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해, 이틀을 그렇게 해.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고대로, 의단(疑團)이 고대로 독로(獨露)해.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딱 뜨면은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어제 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 말이여. 세수를 해도 고대로 있고, 양치질을 해도 그대로 있고, 목욕을 해도 그대로 있어.
그러다가 하루 · 이틀 · 사흘 · 닷새 · 엿새 · 이레 일주일을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떠한 찰나에 문을 텅! 닫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누가 무슨 물건을 턱 내부치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자기가 걸어가다가 발을 턱! 무슨 돌뿌리에 채였다든지, 어떠한 그러한 특별한 기연(機緣)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바로 타파(打破) 공안(公案)이여.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거여. 그렇게 깜깜하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던 화두가 환해. 이럴 때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여. 자기 나름대로 환하지마는 그것이 바른 것인가 옳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바른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날 때에 선지식한테 가서 그것을 간택을 받아야 하는 거여.

아무렇게나 참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 같지마는 천하에 쉬운 것입니다.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어 가지고 ‘이뭣고?’ 하라고 하면 그냥 ‘이뭣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22. 2. 23. 21:30

 

(No.308)—86년 칠석법회(86.08.12) (51분)

 

(1) 약 28분.

(2) 약 23분.



(1)------------------

생애여몽약부운(生涯如夢若浮雲)한데  활계도무절육친(活計都無絶六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득일쌍청백안(留得一雙靑白眼)이라  소간무한왕래인(笑看無限往來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생애여몽약부운(生涯如夢若浮雲)이라, 인간 생애가 꿈과 같고 또한 뜬구름과 같다.
활계도무절육친(活計都無絶六親)이여. 살아가는 계책(計策), 활계(活計)가 도무지 없고 육친(六親)이 다 끊어져 버렸어.

유득일쌍청백안(留得一雙靑白眼)이라, 오직 가지고 있는 것은 한 쌍의 푸르고 흰 눈 뿐이여.
소간무한왕래인(笑看無限往來人)이라. 한없이 왔다갔다하는 사람을 웃고 볼 뿐이더라.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부모를 의탁해서 이 몸을 받아 나고, 부모의 그늘에서 음덕(蔭德)으로 자라 가지고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고, 이렇게 해서 돈을 벌고, 세속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고, 모든 과거에 지은 인연으로 해서 일촌, 이촌, 삼촌, 사촌, 오촌 이렇게 해서 원근(遠近) 친척과 가문과 이웃이 모다 얼크러져 가지고 이렇게 사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 생애(生涯)라고 하는 것은 정말 꿈과 같은 것이고, 뜬구름과 같아.
좋을 때는 '형제간이다, 친구간이다' 모다 그렇지만 내가 높은 벼슬자리에서도 떨어지고, 재산도 없어지고 병들어 비참하게 되면 그전에 그렇게 드나들고 '형님, 동생' 하던 처지도 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다 인연(因緣)이 멀어져 버린 것이여.

그리고 부귀(富貴)와 영화(榮華), 공명(功名)이 아무리 하늘을 찌를 듯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 없이 다 흩어지게 되고, 일생 동안 또는 영원히 그렇게 잘살으란 법도 없어.
그러니 그것이 모두 지내놓고 보면 한바탕 춘몽(春夢)에 지내지 못하고, 저 여름 하늘에 흰구름 뭉텅이와 같아서 그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보면은 그 호랑이 같기도 하고, 사자 같은 놈도 있고, 코끼리 같은 놈도 있고 또 누각 같은 것도 있고, 사람같이 생긴 것도 있고, 별별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모양이 있지마는, 잠시 지나면은 그 구름이 이리저리 변형이 되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흩어져서 간 곳이 없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인생에 부귀영화라고 하는 것이, 빈부귀천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인생살이가 그러한 구름덩어리와 같다. 꿈속에 아무리 천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재상이 되는 꿈을 꾸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런 꿈을 꿨다 해도 잠을 깨 버리면 자취가 없어져 버려.
그러니 인생살이를 꿈에다가 비유하고 또 구름에다가 비유한 것은 우리는 너무나 타당(妥當) 있는 그러한 비유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활계도무절육친(活計都無絶六親)이여.
그러한 인생살이가 허망한 줄 알고 의지하고 믿을 것이 못 된 줄 알면, 그러한 세속 그 뜬구름과 같은 인연을 한칼로 다 비어버리고 출가해서 도를 닦으니 모든 직업도 다 놔 버리고, 인생의 빈부귀천도 다 내버리고, 오직 일대사(一大事) 문제만을 위해서 남은 목숨을 거기다 바치니, 활계(活計)가 무엇이여? 생활해 나가는 대책을 무엇으로 세울 것이냐 그 말이여? 아무 계책(計策)이 없어. 그리고 세속의 육친, 일가친척 부모형제 그런 육친의 인연이 다 끊어져 버렸어.

오직 가지고 있는 것은—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과 빈부귀천과 부귀영화 모든 것을 갖다가, 그런 것을 실다운 것으로 믿고 그런 것을 가지고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러니 그러한 속에서 얽매어 가지고 끌려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을, 부귀와 영화에 얽매어 가지고 모다 그러한 것들에 노예가 되어 가지고 제 잘난 맛으로 살고 있는 그러한 인간들을 비긋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청백안(靑白眼)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병인년 칠월 칠석(七夕)날입니다.
저 옛날부터서 칠석날에는 돌아가신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원근 친척과 모다 그러한 영가들을 위해서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해(苦海)를 벗어나서 업장(業障)을 소멸해 가지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축원을 하고,
또 살아 있는 부모 형제 자손들의 수명장수하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하고, 자손이 창성하도록 그리고 나라와 민족, 국가 민족이 모두가 다 우순풍조(雨順風調)해서 모든 사람이 모다 화합해서 잘살기를 빌고 하는, 이러한 부처님께 칠성님께 공양을 올리고, 기도를 하고 축원을 하는 그러한 성스러운 날로 여겨 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칠석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대소 사찰에서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구름처럼 모여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고 축원을 하는 그러한 의식과 풍속이 지금도 변함없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선원의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도 많은 신남신녀들이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마는, 선망부모, 현존 사친을 위해서 이 칠석날을 기해서 그러한 소박한 신앙심으로 이렇게 오신 것은 너무나도 그 아름다운 참 좋은 풍속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새 모다 과학 문명(科學文明)이 발달하고 모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을 해서 ‘뭐 그까짓 것 미신이다. 그까짓 것 다 기복불교(祈福佛敎)고, 다 미신에 가까운 그런 것이다’ 이렇게 여겨버리고 그러한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냥 옛날부터서 내려오는, 천여 년을 두고 내려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그런 소박한 신앙을 고대로 전통을 해 오고 그러면서도 최상승(最上乘) 불법을 믿는 신심은 오히려 더 돈독해지고, 이런 것은 참 어떠한 면에서 생각해 보면 대단히 참 아름다운 한 신앙의 면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속담에도 ‘공든 탑이 무너지랴’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부처님께 발원하고,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이러한 정성스런 신심은, 그러한 공덕은 결단코 헛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내가 그만한 간절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공을 들이고 축원을 하면 반드시 거기에 감응(感應)이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에다가 맑은 물을 떠 놓고 그 그릇을 고요하게 유지를 하면 반드시 그 그릇에는 하늘에 떠있는 달이 거기에 비추는 것입니다.
하늘에 뜬 달이야, 물그릇에 떠 놓거나 말거나 언제나 모든 곳에 한결같이 비추고 있는 것이지만, 물이 없는 데에는 그 하늘에 뜬 달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비추지 아니한 것은 아니되, 물을 떠 놨을 때 비로소 그 하늘의 달이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온 법계에 두루 다 미치고 비추고 있지마는, 내 자신이 정성스러운 마음, 청정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축원을 하고 기도를 할 때에 비로소 자기 마음에 부처님의 감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해가 아무리 밝게 비추고 있어도 자기 스스로 캄캄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고 앉았다든지 또는 껌껌한 지하실이나 굴속에 들어가서 앉았다면 아무리 저 허공에 태양이 그렇게 밝게 비추고 있은들 자기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두운 방에서 커튼을 걷고, 문을 활짝 열어제낄 때 방안에 광명이 비출 것이며, 지하실에서 용감하게 뛰쳐나와서 태양이 비추고 있는 넓은 광장으로 나올 때에 온통 그 햇빛을 다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칠석날을 맞이해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청정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모다 쌀과 꽃과 과일과 여러 가지 폐백(幣帛)을 가지고 부처님께 나와서 올리고, 경건하게 향을 사르고 절하고 또 이렇게 법문을 들을 때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와 광명을, 그리고 모든 공덕을 우리는 흠뻑 가슴에 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16분5초)


대지산하시아가(大地山河是我家)인대  갱어하처멱향가(更於何處覓鄕家)오
나무~아미타불~
견산망도광미객(見山忘道狂迷客)이  종일행행부도가(終日行行不到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대지산하(大地山河)가 이 나의 집이여.
갱어하처멱향가(更於何處覓鄕家)오. 다시 어느 곳에서 내 고향집을 찾을 것인가.

견산망도광미객(見山忘道狂迷客)이, 눈앞에 나타난 그 산을 보다가 자기의 길을 잃어버리는 그런 길 잃은 손이, 종일행행부도가(終日行行不到家)로구나. 종일토록 가고도 가도 집에는 이르지를 못하는구나.

대지산하(大地山河),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대지산하가 온통 이것이 다 나의 집이요 나의 고향인데, 그것이 자기 고향인 줄을 모르고 자기 고향을 평생토록 찾으러 다녀.
왜 자기 고향에 발을 디디고 자기 고향에서 살면서 왜 고향을 찾고 있느냐? 눈에 보이는 산을 기웃기웃 산을 보다가 자기의 갈 곳을 잊어버려, 길을 잊어버린다 그 말이여.

현실에 자기 발 디디고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자기의 고향이요, 자기가 설 곳이요, 자기의 바로 살아 갈 곳인데, 그 자리를 놔두고 저 눈에 보이는 저 먼산을 갖다가 '행여나 저기에 내 고향이 있는가? 저 산너머에 내 고향이 있는가?' 하고 멀리 찾다가 자기의 진짜 고향을 잊어버리더라 그 말이여.

우리 도 닦는 사람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위해서 온갖 고행을 극복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데,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이러한 현실 경계를 내놓고 따로 도(道)의 경지를 찾고, 따로 견성(見性)할 것을 구하고, 따로 성불(成佛)할 어떠한 특수한 경지를 구하는 한은 참다운 견성은 이르러 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현재 우리가 발로 걸을 때, 춥고 더운 것을 느낄 때, 좋고 나쁜 것을 생각할 때, 바로 그때, 그곳을 여의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곳에 즉(卽)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관조(觀照)할 때에 거기에서 견성성불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닥치고 있는 그 일이 자기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좋건 나쁘건, 기쁘건 슬프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여. 그놈을 여의고 찾지도 말 것이며, 그놈에 집착해서 구하지도 말 것이여. 일체처 일체시에 그렇게 다그쳐 가야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의 땅[如來地]에 이르는 소식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법회 때마다 “불법(佛法)을 먼 데에서 구하지 말아라. 불법은 너의 마음속에 있고 지금 이 자리, 이때를 버리고 찾지 말아라”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방편(方便)이 아니라 그 말이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너무 적절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바르게 도를 닦아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이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그것이 지금 목판(木版)으로 새겨져서 해인사 장경각(藏經閣)에 봉안이 되어있는데, 그 목판에 새겨진 부처님의 법문은 그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문 가운데에 천만분의 일, 백만분의 일도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법문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세(出世)하시기 전 또는 부처님이 80세 동안 이 세상에 머무르시다가 열반하신 뒤,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무량겁으로부터 영원한 미래가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부처님의 살아 있는 법문이 설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육도법계(六道法界), 이 갓없는 우주법계(宇宙法界)가 전판 다 부처님의 법문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고, 부처님의 법신(法身)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 모래알 하나, 풀 이파리 하나, 꽃 이파리 하나, 구름 한 조각,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낱낱이 다 끊임없는 부처님의 몸이요, 그 부처님 몸뚱이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모래알 속에 다 머물러 계시면서 끝없는 법문을 설하시고, 조그마한 풀 이파리 하나에서도 삼세제불이 그 속에서 다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삼라만상 그런 현상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뚱이, 언필칭(言必稱) 우리는 '중생(衆生)'이라 그러는데 남녀노소 우리 자신들도, 물론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들이 일체가 다 전부 다 부처님의 화현신(化現身)이요, 바로 우리 몸뚱이 속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머물러 계셔서 지금도 법문을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문을 듣고 있는 우리는 무엇이냐?
법문을 설(說)하면서 동시에 그 법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는 것과 법문을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설(說)하고 듣고 있고, 여러분도 들으면서 동시에 또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승이 설한 것이 아니요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설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이 설하시고 부처님이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설(說)하고 듣는 것이 동시(同時)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묘(妙)하다고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시에 설하고 듣고 있는 이것을 어찌 중생의 생각으로 이것을 구할 수 있으며, 어찌 범부(凡夫)의 알음알이로 이것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하는 것입니다.(처음~27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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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석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이 돌아가신 선망부모와 형제자매와 원근(遠近) 친척의 영가(靈駕)를 명복을 빌고, 천도(薦度)해 드리고 또 살아계신 부모 형제자매와 자녀들의 수명장수를 빌고, 복덕구족을 빌고,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 자리에 모다 운집을 하시고 아울러서 칠석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은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들은 바 없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설할 것이 있다면은 그 법문은 바른 법문이 아니요. 들은 바가 있다면, 들을 것이 있다면 그 법문은 옳게 들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 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렇게 법(法)을 설하고 이렇게 법을 들을 때에, 그 법은 우주법계에 가득차신 법신불(法身佛)과 우주 법계에 가득찬 일체 중생이 동시에 설하고 동시에 듣게 되므로 온 세계는 불보살(佛菩薩)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보살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온 세계에 퍼졌다 해도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꽃대로 붉게 피어서 아름답고, 풀은 풀대로 파랗게 너울거리고, 김 서방, 이 서방은 각각 아들딸 낳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그렇게 사는 것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관공리는 관공리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승려는 승려대로, 신도는 신도대로, 각각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분상(分上)에 맞추어서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책무를 완수할 때에 전부가 다 한마음이 되고, 한 불사(佛事)를 이룩하고, 한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춧돌과 기둥과 서까래와 대들보, 흙과 종이와 철근과 기왓장,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여러 가지 재료가 합해져서 하나의 훌륭한 집을 짓듯이, 우리 김가, 이가, 박가, 고가, 성(姓)도 다르고, 피도 다르고, 모양도 다 다르지만 각각 다른대로 저 나름대로의 생애가 있고, 저 나름대로 취미가 있고, 저 나름대로의 희망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마는,
바른 불법, 정법(正法)을 믿고 ‘참나’를 찾는다고 하는 점에서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닦는 것을 우리 모두의 본업(本業)으로 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때, 절에 오면은 훌륭한 신도요 법보제자요, 가정에 돌아가면 훌륭한 아내요, 어머니요, 아들이요, 딸이요, 아버지요, 형이요, 동생이요, 자식이 될 것입니다.(33분30초)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원수가 되고, 한 생각을 바로 먹으면 우리 모두가 형제간이요, 한 살붙이가 되고, 한 핏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이렇게 동서남북이 많은 나라들이 있고 인종도 다르고 하지만, 생각을 잘못 먹고 원수가 되어서 싸우기로 하면 이 세계는 정말 불구덩이가 되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그런 지옥세계와 같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른 마음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근본이 모든 사람의 근본과 둘이 아닌 도리를 깨닫게 되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싸울 것이 있겠습니까? 먼 다른 나라하고도 싸울 것이 없거늘, 어찌 한 피에 한 민족끼리 싸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형제간이 아무리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싸우다가도 자기 동생이나 자기 형이 다른 사람하고 싸우게 되면 자기 동생 편을 들고, 자기 형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동생이 누구한테 얻어맞으면 그렇게 미워했던 형이지만 동생을 갖다가 편을 들어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남북이 갈라진지 사십 년이 되는데 우리가 통일을 못하고, 언제 큰 싸움이 벌어질런지, 언제 이북에서 밀고 내려올는지 모르는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대단히 중대하고도 어려운 고비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佛子)들은 이 나라에 태어난 이 민족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어쨌든지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항상 명심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석가세존(釋迦世尊)께서, 세존의 조국이 이웃나라에 의해서 침범을 받게 되었을 때에 부처님께서는 그 국경에 가서 떠억 좌선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나라에서 임금이 많은 군대를 통솔해 가지고 부처님 나라를 쳐들어오다가 부처님이 떠억 국경선(國境線)에 죽은 고목나무 밑에 앉아서 참선을 하고 계시니까 가서,
“세존께서는 어찌 하필 이 죽은 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계십니까?”
“내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은 내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군대를 회군(回軍)을 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두 번째 또 얼마 안 있다가 또 부처님의 나라를 침범하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
부처님이 또 국경선에 가서 좌선을 하셨습니다. 그때 또 왕이 그걸 보고 되돌아갔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도저히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세 번째는 '부처님이 아무리 거기 와서 막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걸 무시해 버리고 이번에는 아주 그 나라를 침범해 가지고 뺏어버리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다시 출군(出軍)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세 번째는 이미 그 왕이 그러한 독한 결심을 한 것을 아시고서 세 번째는 국경선에 나아가지를 않았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전해 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태어나고 당신의 조국이나 또는 다른 외국이나 일체 이 법계(法界)에 있는 모든 나라나 중생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태어나신 그 조국을 위해서 외국의 침범을 두 번이나 몸소 나가셔서 막아 주신 그 마음을 생각한다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뇌묵대사와 같은 그러한 큰스님네들이 수도하시는 여러 승군(僧軍)들을 거느리고 왜적을 갖다가 물리치고 하신, 그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그 성스러운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거 같습니다.

우리 법보제자 사부대중들도 부처님과 서산 · 사명 · 뇌묵대사와 같은 그런 큰스님네의 뜻을 잘 마음에 새겨서 ‘우리가 지금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참선하시는 도 닦는 스님네들은 어쨌든지 이런 국가의 위기 또 민족의 위기 또 세계 인류의 위기를 당해서 어쨌든지 몸과 목숨을 바쳐서 철저하게 수행을 하셔야 할 것이고, 신남신녀 여러분도 역시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하시면서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실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소한 일 같지만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사치풍조에 빠지시지 말고 어쨌든지 국산품을 애용을 해서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내 한 사람이 이런 외제 물건을 사 쓴들 무슨 상관이 있느냐?
'국산 사 써봤자 얼마 안 가서 망가지니 좀 비싸게 주더라도 일제를 사서 쓰면 내가 더 이익인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너도나도 일제 물품을 쓰게 되면 결국은 온 여성들이 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경제 수지의 적자(赤字)는 더욱 늘어나고, 우리나라 경제는 점점 나빠지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일본은 '외제 물건을 좀 사라'고 나까소네 수상이 백성들에게 모다 연설을 한 기사를 봤습니다마는, ‘외제 물건 쓰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외제 물건을 쓰라’고 할 정도로 되었다면 얼마나 일본 사람들이 외제 물건을 쓰지 아니하고, 순 자기나라 국산품을 철저하게 애용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을유년(乙酉年) 해방 이후로 벌써 42년이나 되었습니다. 정신차릴 때가 충분히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무엇이 품귀(品貴)하다’ 하면은 너도나도 살려고 해 가지고 점점 값을 올리고, 점점 품귀 현상을 빚었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품귀하다’ 하면, 예를 들어서 ‘소고기가 귀하다’ 하면 너도나도 살려고 하면 더욱 귀해지고 더욱 비싸지는 거고, 귀하다고 하면 안 사버리면 그냥 살 사람은 적어지고 물건은 남아돌기 때문에 저절로 물가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양 사람들은 ‘무엇이 품귀하다’ 하면 너도나도 안 사. 안 사고 다른 걸로 대용을 하기 때문에 일반 수요자들이 물가 올라가는 것을 막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귀하다’ 하면은 너도나도 살라고 그러고, 미리부터 나중에 쓸 것까지 사 모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물가가 올라가고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그 민도(民度) 수준이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건 참 부끄러운 일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佛子)는 서양 사람들이 선진 문화민족이니 일등국민이니 하지만 그건 물질적으로 본 것이고, 정말 정신적으로 볼 때에는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천상에 사는 사람보다도 훨씬 더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세계뿐만이 아니라 무한대의 우주 세계에 있어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만큼 고도의 수준을 가진 백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만한 긍지를 갖는다면 그까짓 외제 물건 좀 사서 쓰고, 몸에 걸친다고 해서 무엇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뽐낼만한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물건, 우리나라 사람이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길 때에, 외국 사람들도 우리나라 물건을 서로서로 살라고 할 것이고, 우리나라 국산품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써 줌으로 해서 좋은 품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경제 계통에 문외한이 되어서 여러 가지 말을 무식한 소리같이 하고 있습니다마는 제 말하는 뜻을 여러분은 충분히 이해를 하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당장 오늘부터 쓰고 있는 외제 물건을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고, 이미 사신 것은 소중히 잘 쓰시되 앞으로 사시려고 할 때는 어쨌든지 국산품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서 쓰시도록 그렇게 하신다면 그것이 불자로서 참 긍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또 우리나라 고유의 국악,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 예술, 다 세계적인 것입니다. 세계에다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조금도 서구에 손색이 없는 것이고, 대단히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긍지를 가지고 사소한 생활에서부터서 최상승을 믿는 법보재자(法寶弟子)답게 늠름하게, 여유 있게 그리고 밝게, 그렇게 우리 모두 살아갈 것을 기약을 합시다.


화소계전우(花笑階前雨)요  송명난외풍(松鳴外風)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수궁묘지(何須窮妙旨)리요  자개시원통(這箇是圓通)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계전우(花笑階前雨)요. 꽃은 층계(層階) 앞에 빗속에 웃고, 돌층계 앞에 비가 내리는데 그 빗속에서 활짝 피어 웃고 있고,
송명난외풍(松鳴欄外風)이로구나. 솔바람은 난간 밖에 바람에서 울고 있구나. 난간 밖에 바람 속에서 소나무가 자연의 비파(琵琶)를 불고 있구나.

하수궁묘지(何須窮妙旨)리요. 어찌 모름지기 달리 묘한 뜻을 찾을 것인가.
자개(這箇)가 시원통(是圓通)이라. 바로 이것이 온 세계에 가득차 있는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냐.(27분59초~50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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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생애여몽약부운~’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뜬구름 ; ①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②덧없는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육친(六親) ; 부모(父母), 형제(兄弟), 처자(妻子)를 통틀어 이르는 말.
*청백안(靑白眼) ; 지혜의 눈. 잘 능히 상대방의 근기(根機)의 천심(淺深)을 분별하는 안목(眼目).
*음덕(蔭德 덕택 음/ 덕 덕) ; ①조상의 덕. ②부모나 다른 사람이 돌보아 주는 보호나 혜택.
*생애(生涯 날 생/ 끝 애) ; 살아 있는 한평생의 기간.
*처지(處地) ; ①서로 사귀어 지내는 관계. ②지위나 신분.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부귀(富貴 재물이 넉넉할 부/귀할 귀) ;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
*영화(榮華 영화·영달 영/빛날 화) ;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고 빛남.
*공명(功名 공로 공/이름 명) ; 공을 세워 이름이 세상에 떨쳐짐. 또는 그 이름.
*'모두 지내놓고 보면 한바탕 춘몽(春夢)에 지내지 못하고~' ; 일장춘몽(一場春夢).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기기묘묘하다(奇奇妙妙--) ; 몹시 기이(奇異)하고 묘(妙)하다(일이나 이야기의 내용 따위가 기이하여 표현하거나 규정하기 어렵다).
*부귀영화(富貴榮華) ;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로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럽고 호화로운 생활.
*타당(妥當 평온할 타/마땅할 당) ; 일의 이치로 보아 옳음.
*한칼 ; 한 번 휘둘러서 베는 칼질.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활계(活計) ; 살아갈 계책(計策). 또는 살릴 계책.
*계책(計策 헤아릴·꾀할 계/꾀 책) ;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꾀나 방법을 생각해 냄. 또는 그 꾀나 방법.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비긋이 ; 남이 느끼지 못하게 슬그머니.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이고득락(離苦得樂) ; 괴로움을 벗어나서 즐거움을 누림.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障礙)가 사라져 없어짐.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복덕(福德) ; ①착하고 어진 행실에 대한 보답으로 받는 행복과 이익. ②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착한 일.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우순풍조(雨順風調) ; 비가 때맞추어 알맞게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붊. 주로 농사짓기에 알맞게 기후가 순조롭고 좋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과학 문명(科學文明) ; 과학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명.
*기복불교(祈福佛敎) ; 복을 구하거나 비는 불교의 한 모습. 복을 구하는 행위나 생각은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기복'이라는 말을 종교 앞에 붙인 경우에는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지극정성(至極精誠) ;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감응(感應) ; 감응도교(感應道交). 부처님과 수행자의 마음이 교류하는 것. 중생의 신심, 선근(善根)이 모든 부처님•보살에게 통해서 그 힘이 나타나는 것. 중생의 신심이 진실하게 느껴져, 부처님과 보살이 답하는 것.
중생 기감(機感,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뜨거우면 부처님의 응(應)하는 마음도 또한 깊다. 그쪽과 이쪽이 사이를 두지 않음을 도교(道交)라 한다.
*목욕재계(沐浴齋戒) ; 제사나 중요한 일 따위를 앞두고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을 피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일.
*폐백(幣帛 예물 폐/비단 백) ; ①일반적인 모든 예물(禮物). ②임금에게 바치거나 제사 때 신에게 바치는 물건. 또는 그런 일. ③신부가 처음으로 시부모를 뵐 때 큰절을 하고 올리는 물건. 또는 그런 일.
*(게송) ‘대지산하시아가~’ ; 『소요당집(逍遙堂集)』 게송 참고.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9분10초)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여래지(如來地) ; 불지(佛地). 부처의 지위(地位)·경지(境地). '부처의 상태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成佛)과도 같은 뜻.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진진찰찰(塵塵刹刹) ; ①티끌 수와 같이 무수한 국토를 말한다. ②미세한 티끌 가운데에도 국토가 있다는 것.
진진찰토(塵塵刹土), 찰찰진진(刹刹塵塵)이라고도 한다. 진진(塵塵)은 티끌. 찰(刹)은 산스크리트어 kṣetra의 음사. 토(土), 국(國), 처(處)라고 번역. 국토. 세계. 땅. 장소. 영역.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실불(實佛) • 법성신(法性身)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다.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絕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언필칭(言必稱) ; 말을 할 때면 항상 일컫기를.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것. 목숨이 있는 것. 산것. 살아있는 것.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함.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③부처가 될 수 있는 요소. 본질.
*화현신(化現身)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대총상(大總相法門) ; 진여(眞如)를 가르켜 말함. 진여의 실체.
진여가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섭한 것을 대(大)라 하고, 일미 평등(一味平等)하여 차별의 모양을 여읜 것을 총상(總相), 수행하는 이의 모범이 되는 것을 법(法), 관하는 지혜가 드나드는 것을 문(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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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 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 ‘眞佛無口, 不解說法. 眞聽無耳, 其誰聞乎.’
[참고] 황벽(黃檗) 스님의 『완릉록(宛陵錄)』에서.
此性縱汝迷時亦不失, 悟時亦不得. 天眞自性, 本無迷悟. 盡十方虛空界, 元來是我一心體. 縱汝動用造作, 豈離虛空. 虛空本來無大無小, 無漏無爲, 無迷無悟. 了了見, 無一物, 亦無人, 亦無佛,

이 본성은 비록 네가 미혹해 있을 때라도 결코 잃지 않으며, 또 깨달았을 때라도 역시 얻는 것이 아니다. 천진스런 이 자성(自性)은 본래 미혹함도 깨달음도 없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원래 나의 한마음의 본체이다. 비록 그대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할지라도 어찌 허공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허공은 본래 크지도 않도 작지도 않으며, 번뇌도 없고 유위도 없으며, 미혹함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아 한 물건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絶纖毫的量, 是無依倚無粘綴一道淸流, 是自性無生法忍. 何有擬議. 眞佛無口, 不解說法. 眞聽無耳, 其誰聞乎. 珍重.

거기에는 털끝만큼도 계량(計量)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의지하여 기댈만한 것도 없고 달라붙을 것도 없는 한 줄기의 맑은 흐름인 것이며, 이것이 곧 자성(自性)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인 것이다. 어찌 무슨 의론의 여지가 있겠는가?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자신을 소중히 하여라.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부처님의 조국인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유리왕과의 악연. 석가족의 멸망 인과. 가비라왕국과 사위국의 멸망.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
*삼계도사(三界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세존(世尊) : [범]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로가나타(路迦那他)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민도(民度) ; 국민의 생활, 문화, 의식 수준.
*(게송) ‘화소계전우~’ ; 《벽송당야로송(碧松堂埜老頌)》(벽송 지엄) ‘示眞一禪子’ 게송 참고.
*원통(圓通 온전하다·원만하다 원/통하다 통) ; 걸림 없이 일체에 원만하게 통함. 원통무애(圓通無礙) 원통자재(圓通自在) 등이라고도 한다. 성자가 미묘한 지혜로 증득한 실상의 이치 또는 불보살의 깨달음의 경계를 나타낸다.
체성(體性)이 일체에 두루 미치기 때문에 원(圓)이라 하고, 묘용(妙用)이 자재하여 장애가 없기 때문에 통(通)이라 한다. 또한 지혜에 의해 진여를 깨닫는 실천 수행을 가리키기도 한다.





[법문 내용]

(게송)생애여몽약부운~ / 인생살이를 꿈에다가 비유하고 또 구름에다가 비유 / 칠석날의 소박한 신앙. 돌아가신 선망부모의 극락세계 왕생, 살아 있는 부모 형제 자손들의 수명장수하고, 복덕구족하고, 자손창성을 기도하고 축원하는 날 / (게송)대지산하시아가~ / 현실에 자기 발 디디고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자기의 고향 / “불법(佛法)을 먼 데에서 구하지 말아라. 불법은 너의 마음속에 있고 지금 이 자리, 이때를 버리고 찾지 말아라” / 갓없는 우주법계(宇宙法界)가 전판 다 부처님의 법문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고, 부처님의 법신(法身)으로 가득차 있다 / 법문을 설(說)하면서 동시에 그 법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는 것과 법문을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 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참고] 황벽(黃檗) 스님의 『완릉록(宛陵錄)』 / 부처님의 조국인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유리왕과의 악연. 석가족의 멸망 인과. 가비라왕국과 사위국의 멸망.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 / (게송)화소계전우~.


오늘은 병인년 칠월 칠석(七夕)날입니다. 저 옛날부터서 칠석날에는 돌아가신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원근 친척과 모다 그러한 영가들을 위해서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해(苦海)를 벗어나서 업장(業障)을 소멸해 가지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축원을 하고,
또 살아 있는 부모 형제 자손들의 수명장수하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하고, 자손이 창성하도록 그리고 나라와 민족, 국가 민족이 모두가 다 우순풍조(雨順風調)해서 모든 사람이 모다 화합해서 잘살기를 빌고 하는, 이러한 부처님께 칠성님께 공양을 올리고, 기도를 하고 축원을 하는 그러한 성스러운 날로 여겨 왔던 것입니다.

대지산하(大地山河),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대지산하가 온통 이것이 다 나의 집이요 나의 고향인데, 그것이 자기 고향인 줄을 모르고 자기 고향을 평생토록 찾으러 다녀. 왜 자기 고향에 발을 디디고 자기 고향에서 살면서 왜 고향을 찾고 있느냐? 눈에 보이는 산을 기웃기웃 산을 보다가 자기의 갈 곳을 잊어버려, 길을 잊어버린다 그 말이여.
현실에 자기 발 디디고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자기의 고향이요, 자기가 설 곳이요, 자기의 바로 살아 갈 곳인데, 그 자리를 놔두고 저 눈에 보이는 저 먼산을 갖다가 '행여나 저기에 내 고향이 있는가? 저 산너머에 내 고향이 있는가?' 하고 멀리 찾다가 자기의 진짜 고향을 잊어버리더라 그 말이여.

우리 도 닦는 사람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위해서 온갖 고행을 극복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데,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이러한 현실 경계를 내놓고 따로 도(道)의 경지를 찾고, 따로 견성(見性)할 것을 구하고, 따로 성불(成佛)할 어떠한 특수한 경지를 구하는 한은 참다운 견성은 이르러 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현재 우리가 발로 걸을 때, 춥고 더운 것을 느낄 때, 좋고 나쁜 것을 생각할 때, 바로 그때, 그곳을 여의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곳에 즉(卽)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관조(觀照)할 때에 거기에서 견성성불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닥치고 있는 그 일이 자기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좋건 나쁘건, 기쁘건 슬프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여. 그놈을 여의고 찾지도 말 것이며, 그놈에 집착해서 구하지도 말 것이여. 일체처 일체시에 그렇게 다그쳐 가야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의 땅[如來地]에 이르는 소식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법회 때마다 “불법(佛法)을 먼 데에서 구하지 말아라. 불법은 너의 마음속에 있고 지금 이 자리, 이때를 버리고 찾지 말아라”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방편(方便)이 아니라 그 말이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너무 적절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바르게 도를 닦아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법문을 설(說)하면서 동시에 그 법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는 것과 법문을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산승(山僧)도 역시 설(說)하고 듣고 있고, 여러분도 들으면서 동시에 또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승이 설한 것이 아니요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설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이 설하시고 부처님이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설(說)하고 듣는 것이 동시(同時)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묘(妙)하다고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동시에 설하고 듣고 있는 이것을 어찌 중생의 생각으로 이것을 구할 수 있으며, 어찌 범부(凡夫)의 알음알이로 이것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은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들은 바 없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설할 것이 있다면은 그 법문은 바른 법문이 아니요. 들은 바가 있다면, 들을 것이 있다면 그 법문은 옳게 들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참 부처는 입이 없어서 설법할 줄을 모르고, 참으로 듣는 것 참다운 들음은 귀가 없거늘 누가 들을 것인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렇게 법(法)을 설하고 이렇게 법을 들을 때에, 그 법은 우주법계에 가득차신 법신불(法身佛)과 우주 법계에 가득찬 일체 중생이 동시에 설하고 동시에 듣게 되므로 온 세계는 불보살(佛菩薩)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보살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온 세계에 퍼졌다 해도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21. 11. 11. 18:15

 

(No.324)—1987년 신수기도 회향(87.02.06) (50분)

 

 

(1/3) 약 21분.

 

(2/3) 약 16분.

 

(3/3) 약 12분.

 


(1/3)----------------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장단대소재목전(長短大小在目前)한데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자연의 조화, 천지의 조화가 사사로움이 없어. 사사로움이 없는 그 부사의력(不思議力)이다 그 말이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알 수 없는 그런 위대한 힘이,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다. 낱낱이 푸르고 푸러서 세한(歲寒)의 빛이여. 누가 사람의 인조(人造)로 인력(人力)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무도 인공(人工)으로 손을 대지 아니하는데, 자연의 이법(理法)에 의해서, 그 불가사의한 그 힘에 의해서 소나무는 푸르고, 대나무도 푸르고, 산천에 초목이 각자 그 종류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빛깔을 나투는데.

장단대소(長短大小)가 재목전(在目前)컨만,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아서 형형색색으로 우리의 눈앞에 조금도 숨김없이 펼쳐져 있건마는,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다. 우습다, 때 사람이, 모든 사람들이 그 숨김없는 적나라(赤裸裸)한 그 도리를 아지를 못하는구나.

오늘은 정묘년 정월 초아흐레 신수기도(身數祈禱) 회향(廻向)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에 여러분께서는 7일 동안을 정말 정성껏 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직접 기도에 참석을 하셔서 정성을 다해서 목이 쇠도록 정근(精勤)을 하셨습니다.

기도 입재(入齋)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도는 정성(精誠)이 제일인데, 참 정성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이러 이렇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구태여 말하자면은 첫째,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그리고 한결같아야 하고, 그리고 참된 그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청정하고 정성스러우면 시작할 때 이미 목적은 달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3일이라든지 7일이라든지 또는 백일(百日)이라든지 천일기도(千日祈禱), 만일기도(萬日祈禱) 그렇게 기도 날짜를 많이 잡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억지로라도 참고 견디면서 노력을 하다보면 그 어느 땐가는 청정하고 일여(一如)하고, 참된 생각에 부합이, 계합(契合)이 되는 것입니다.
자고(自古)로 기도를 정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간절히 해서 성취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어려운 일을 당해서, 중대한 일을 당해서 많은 분들이 기도를 여기서 저기서 모다 하시지만, 기도했다고 해서 '자기가 바라는 만큼 그때에 바로 성취되냐?' 하면은 혹 된 사람도 있고, 안 된 사람도 있고 혹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그 사람과 그 성취하고자 하는 그 목적과 모다 그런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한결같이 다 되지를 않는 것을 우리는 보고 또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는데 기도가 성취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느냐?
첫째는 자기의 정성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냐,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또 정성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차라리 안 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자기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오히려 안 된 것보단 더 해로울 때에는 그 기도 성취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 또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기커녕은 생각지도 않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고통이 한목 몰아닥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금생, 또 내생, 저 내생까지 계속해서 그 좋지 못한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전생에 그러한 업(業)으로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되어 있는 삼생(三生)에 걸쳐서 받을 죄를, 금생에 신심껏 기도를 하고 그 공덕으로, 기도를 한 공덕으로 삼생에 걸쳐서 받을 것을 금생 일생 동안에 다 몰아서 다 받아 버리고, 그리고서 이 다음 생에는 정말 큰 원을 성취하도록 그렇게 될 경우에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코앞에 조그만한 원(願)을 세워서 목이 쉬도록 기도를 했다가 그것이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그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다. 나도 기도해 봤지만 그거 이루지도 못하더라’
이러한 반감심(反感心)을 갖고 불신을 하고 퇴태심(退怠心)을 낸다면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정성스러운 그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였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만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원했다가 큰 것을 바라지도 안 했는데 성취되는 수도 있고, 큰 것을 원했는데 조그만한 것이 우선 코앞에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코앞에 전혀 이루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니 별로 소원을 이룬 것 같지도 않은데, 살아가면서 점점 신심이 돈독하고 모든 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 풀려나가고 그러한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서,

그래서 이 기도라 하는 것은 청정한 몸과 마음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가 회향(廻向)을 했다고 해서 인자 빨리 자기 목적한 것이 돌아오기만을 급급하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스러운 행동,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정성스러운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 성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로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牡丹一日紅)한대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하되,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요, 세상 사람들의 뜻에는 들지를 안 해. 별로 그렇게 소나무, 잣나무 그렇게 뭐 '좋다'고 '아름답다'고 별로 안 그런다 그 말이여.

목단(牧丹), 모란(牡丹)은 하루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는 하루 동안밖에는 붉지를 않는데,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요.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이 꽃 가운데 왕이라고 그렇게 모다 좋아하고 칭찬을 하고 거기에 모다 반하더라 그 말이지.

송백은 무루법(無漏法), 무루복(無漏福), 영원한 복에다가 비유한 것이고, 모란은 유루복(有漏福)에다가 비유한 게송(偈頌)입니다.영원한 우리 생사해탈법은 한번 깊이 믿고 실천을 하면 당장 금생에부터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참 좋은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지를 안 해.

물론 특수한 신심이 있는 사람은 모르되,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그것에 관심이 없고, 유루복(有漏福)—당장 부자가 된다든지, 높은 벼슬자리 벼슬을 한다든지, 부귀영화, 모다 이런 해봤자 별수 없고 또 뜻대로 얻어진다고 해도 영원성이 없는 그러한 재산이나 명예, 권리 모다 그런 것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못 얻어서 야단이고 그것을 얻으면은 거기에 빠져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과연 무루(無漏)의 복(福)을 원하셨는가? 또는 영원성이 없는 유루복만을 목적에다 두고 기도를 하셨는가? 또는 저 궁극적 목표는 무루복에다 두되, 우선 당장 급해서 그래서 유루복에 원(願)도 세우시고 하시는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데에는 우선 당장 급한 것은 재산이요, 명예요, 권리요, 가족의 행복이요, 아들딸의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요. 아무리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참선을 한다 해도 당장 코앞에 그 문제가 절박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을 절대로 나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1년에 한 번 있는 신수기도에 동참을 해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 것도 참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할머니는 참선 밖에는 모르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못한 것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고, 또 할머니 · 어머니 ·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의 학교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고, 우선 나중에야 어떻게 될망정 우선 대학에는 들어가 놓고 봐야 하는 것이고, 그놈이 대학엘 못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기도를 참 일주일 동안 목이 쇠도록 그렇게—그 날씨가 상당히 강추위 했는데 그 눈을 뒤집어쓰면서 새벽기도부터서 모다 참석을 하시고, 대단히 참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이 신수기도 때와 같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 열렬한 마음, 그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고 싶은 잠을 깨고 새벽에 날마다 이렇게 참석하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성이면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에도 응당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처음~21분13초)





(2/3)----------------

부디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태함이 없이 방심(放心)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동안에 일주일 간은 기도 참선을 하셨는데 앞으로 1년 간은 참선 기도—참선하면서 바로 그 참선이 기도가 되도록, 그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그 말이여. 그러면은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거든. 절대로 참선과 기도가 둘일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하는 데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한결같은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선도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그런 말이 있듯이, 참선 하나 제대로 할 줄 알면 기도고, 주력(呪力)이고, 경을 읽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참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일륜명월영청휘(一輪明月映淸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한데  득견항하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저 만 리나 된 넓고도 긴 저 하늘에 비가 갰어.
일륜명월(一輪明月)이 영청휘(映淸輝)다. 한 바퀴 밝은 달이 밝고 맑게 빛나는데, 비가 오고 운무(雲霧)가 끼었을 때에는 그 달이 떠도 보이지를 않고 컴컴하니 그러다가 비가 쫙 개 가지고 그 새파란 하늘에 밝은 달이 휘영청 밝았다 그 말이여.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이여. 뜬구름이 한덩어리가 날아와 가지고 달을 가리워 버리니까, 모든 사람의 눈에 그 밝고 맑은 달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 구름이 가리워 버리니까 그 달을 보기가 어렵더라.

사실은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둘이 아니어.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願)하고 원해도 잘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일념(一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참된 마음이 그 어두운 부정적인 생각에 가로막혀서 장애를 받아가지고 원(願)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로막는 것만 없으면 바로 원하는 대로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장벽만 없다면 몇백 미터고 저 앞을 다 볼 수가 있지만, 앞에 종이 한 장만 가로막혀 있어도 밖이 보이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기도와 참선 공부가 내나 서로 상통(相通)한 것이고 둘이 아니라’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기도를 목이 쇠도록 큰 소리로 정근(精勤)만 하면 그것이 정성을 다한 것이냐? 참, 이 기도가 쉬운 거 같아도 정말 이 기도가 참선과 똑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목청을 돋아서 한 시간, 두 시간 내지 네 시간을 막 불러 대면은 되냐? 어떻게 해야 기도를 참 정말 훌륭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냐?
‘관세음보살’ 부르면서도,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부르고 목이 터지도록 부르면서, 아 그렇게 부르는 속에도 우리의 생각은 계속 집안일도 생각하고, 과거 일도 생각하고, 어릴 적 일도 생각하고, 이 일 저 일 할 것은 다 합니다.


그 ‘관세음보살’ 부를 때는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불러야 되겠는데,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온갖 잡념 망상이 조금도 거침없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거든.
기도를 해 보면서 가만히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관조해 보면 알 수가 있고, 다 그것을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도를 하면서 탁자 위에 촛불이라든지, 향이라든지 또는 청수 그릇이라든지 또는 탁자 위에 모신 부처님 눈, 코, 입이라든지 이런 걸 보면서 입으로는 외치면서도 그 눈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에 계속 우리의 생각이 그런 데로 다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촛불이 크게도 보였다, 작게도 보였다, 자기 앞으로 가까이도 보였다, 멀리도 보였다, 부처님 얼굴도 이렇게 우러러보면서 정근을 하면 부처님 얼굴이 이리 변했다, 저리 변했다, 가까워 왔다, 멀어졌다 야단이거든. 단 일분일초도 정말 망상이 없이, 번뇌가 없이 깨끗하게 정진이 되어 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눈으로 보이는 부처님 얼굴에다가 집중을 하는 것이 좋으냐? 훨훨훨 타고 있는 촛불에다가 눈을 대고 하는 것이 옳으냐? 무엇을 어디다가 우리의 눈을 고정하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대단히 이것도 참선할 때에 덮어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을 그 참선을 잘한다고 할 것이냐?

‘참선을 어떻게 해 나가야 올바르게 하느냐?’ 한 것과 똑같이, ‘기도도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은 그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아주 그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를 계속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찾고 또 찾고—물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고 그렇다고 하되,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가면서는 그렇게 화두를 염불하듯이 그렇게 자꾸 들먹여 쌓는 것이 아니에요.

‘이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이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있을 때에는 그 의심을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그 의심을 관(觀)해 나가야지, 거기다 대고 이미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떠억 있는데도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래 쌓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린애, 애기 잠재울 때 잠 막 잘라고 한 놈을 더 잘 자라고 가슴을 턱! 턱! 때려 쌓는 거와 마찬가지거든 그게.

그놈이,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거를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 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그래서 그 관(觀)이, 의심관(疑心觀)이 그것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여.

이 '관세음보살'도 목이 터지도록 막 부를 것이 아니라 적당한 음성으로—물론 여기서 목탁을 치면서 여러 사람이 정근할 때는 자기도 소리를 내서 같이 그 음성과 음성이, 내 음성과 다른 사람의 음성이 혼연일치(渾然一致)가 되어서 전체 그 동참(同參) 대중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거든.
자기 혼자 어디 가서 한 것 보단 여러 사람이 모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 정성도 하나요, 그 정근하는 음성도 그 목탁에 맞춰서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

뭣헌 사람은 (음을 아주 낮게)‘관세음보살’ 하는데, 뭔 사람은 (음을 고음으로)‘관세음보살’ 이래 가지고 한 사람은 크게 하고 작게 하고, 한 사람은 더디게 하는데, 한 사람은 늘어져 쳐지게 하고 도저히 그래서는 안되거든. 목탁을 치면은 그 목탁 소리에 저 법당에 가득한 그 동참재자(同參齋者)가 한마음 한뜻이 되고, 음성도 같이 이렇게 나가야 되거든.
우리가 남북통일을 바라는데, 한 사람이 바란 것보단 전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통일을 염원하고, 그 통일을 위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혼연일치가 될 때에 우리의 생활도 달라지고 나라에 대한 충성도 달라지고 모든 면에서 다 나날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마침내 통일 성업(成業)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칠일 동안의 기도도 모든 점에 있어서 전 동참재자(同參齋者)가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마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재(入齋) 법요식(法要式)도 하고. 또 시간도 맞추고 또 병법(秉法) 스님이 나서서 목탁도 치면서 같이 하고, 이것이 바로 전 동참재자로 하여금 한결같은 마음, 한덩어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구태여 추운 새벽같이 오시지 않고 집에서 해도 기도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근에서 그 바쁘고, 춥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나오신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 마음을 합해서 하는 데에서 몇백 배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21분14초~37분26초)





(3/3)----------------

그래서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생각은 딴 데 가 있고, 눈은 눈앞으로 보는 데에 제멋대로 요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목소리만 크게 불렀지 조금도 그것이 경건성이 없이 부른 것은 그 목만 쇠었지 정말 기도의 그 참된 경계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목소리를 참 경건하고 엄숙한, 저 뱃속에서부터서 울려 나오는 그 정성스러운 음성 소리로 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자기의 목소리를 자기가 관(觀) 해.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고 ‘아이고, 저 사람 목소리도 되게 크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지 말고, 자기의 음성을 들어야 되요. 자기의 음성을 들으면서 ‘관세음보살’ 하면 눈을 떴으되 딴것이 보이지를 않고, 귀가 열렸으되 다른 소리가 들리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한결같이 한다면 가장 여법(如法)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탁은 너무 늘어지게 쳐도 힘이 들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빨리 쳐도 숨이 가빠서 따라갈 수가 없고, 그런데 처음에는 느릿느릿 쳐도 점점 10분, 20분, 30분 이렇게 해 가다보면 열기가 올라가지고 약간은 빨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빨리 하는 것은 너무 숨이 가쁘고 그러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이 대체적으로 한결같은 것이 좋은데, 하다보면 좀 빨라져요.

그렇게 해서 하여간 일주일 동안을 내가 법당에 올라와서 참석은 안 했지만, 계속해서 나도 그 기도에 참석을 했고, 기도 정근하는 소리와 목탁 소리를 계속 나도 거기에 마음을 합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에 기도가 얼마만큼 정성스럽게 잘 진행이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반드시 크고 작은 여러분 각자의 소원이 성취가 되실 것이고, 또 그런 유루(有漏)의 복(福)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무루(無漏)의 대원(大願)까지 연결이 되어서 기도 성취는 정말 원만히 성취가 되시리라고 나는 확신(確信)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확신을 하십시오. 그 원이 빨리 이루어지고 더디 이루어지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목적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또 정월 대보름이 한 5~6일 남았습니다. 대보름에 해제 법요식과 백일기도 회향 법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는 분은 기도를 하시고 또 참선 기도 하시는 분은 참선을 열심히 하셔서 백일기도 회향 때 또 해제 법회도 참석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정월에 접어들어서 일요법회, 입춘법회 또 기도 입재, 회향 아주 불과 며칠간에 여러 차례 법요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법회가 많이 있은 것이 좋은가?' 많이 있어서, '아이고! 참 몇 번은 뺐으면 좋겠다' 또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계신가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난한 사람 제사(祭祀) 돌아오듯이 법회가 이틀거리, 사흘거리로 자꾸 있어서 집안 모다 비워 놓고 참석하시기가 힘이 들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 또 댁에 계시는 거사님이나 가족들은 ‘참 뭔 놈의 법회를 갖다가 이틀 사흘거리로 날마다 쫓아다니고, 집은 비워놓는다’고 또 그러한 핀잔을 하신 분도 계셨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무엇을 뺄라야 뺄 수가 없습니다.

이틀, 사흘 있어도 일요법회를 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입재(入齋)를 또 뺄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입춘기도를 뺄 수도 없고 그래서 계속 참 여러 차례 했는데, 신심이 있는 분은 많을수록 더 신심을 내고 참 더 좋게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억지로 오기 싫은 것을 끌려서 오신 분은 좀 불만이 있으셨을런지도 모릅니다마는, 모든 것이 다 자기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너무 법회가 자주 있어서 나는 법상(法床)에 몇 번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마는, 오늘은 게송을 하나만 읊고 내려가겠습니다.

 


불구명리불구영(不求名利不求榮)하고  지마수연도차생(只麽隨緣度此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촌기소수시주(三寸氣消誰是主)오  백년신후만허명(百年身後謾虛名)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구명리불구영(不求名利不求榮)하라. 명예와 이끗도 구하지 말고, 부귀영화도 구하지 말아라.
지마수연도차생(只麽隨緣度此生)하라. 다못 인연 따라서 이 생(生)을 지낼지어다. 부자면 부자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잘 먹으면 잘 먹은 대로, 못 먹으면 못 먹은 대로, 각자 자기의 현재 주어진 그 인연, 그 정도에 따라서 그렇게 인연 따라서 지내라 그거거든.


삼촌기소수시주(三寸氣消誰是主)오. 세 마디[三寸] 이 숨이 끊어져 버리면 누가 이 몸뚱이의 주인이냐? 지금은 숨이 들랑달랑 하고 이럴 때에는 ‘지금 내가 살아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이 들랑달랑 하는 숨이 딱! 끊어져 버리면 주인이 누구여?
백년신후만허명(百年身後謾虛名)이니라. 백 년 뒤에 공연히 헛된 이름만 남아 있더라.

금생에 살아서 아무리 부귀공명을 누리고 그 권리가 하늘에 닿도록 높은 권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또 문장(文章)이 온 세상을 갖다가 놀라게 한다 하더라도 숨 한번 딱! 끊어지면 내생(來生)이고, 또 죽은 뒤에 백 년 못 가서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더라’ 하고 사람들 기억에 조금 남는 것 외에는 무엇이 남을 것이 있느냐 그거거든.


우리는 어쨌든지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숨 한번 내쉬면 바로 그것이 내생」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을 해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숨 한번 내쉴 때마다 자기(自己)를 찾는 정진에 등한(等閒)히 해서는 아니될 줄 생각합니다.(37분27초~49분1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조화무사부사력~ / 기도는 정성(精誠)이 제일인데, 정성이라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한결같이, 그리고 참된 마음으로 해야 한다 /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가야 / (게송)송백천년취~ / 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신수기도 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다 /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 (게송)만리장공우제시~ /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거를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 (게송)불구명리불구영~ / 「숨 한번 내쉬면 바로 그것이 내생」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을 해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숨 한번 내쉴 때마다 자기(自己)를 찾는 정진, '이뭣고?'


기도라 하는 것은 청정한 몸과 마음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가 회향(廻向)을 했다고 해서 인자 빨리 자기 목적한 것이 돌아오기만을 급급하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스러운 행동,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정성스러운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 성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신수기도 때와 같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 열렬한 마음, 그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고 싶은 잠을 깨고 새벽에 날마다 이렇게 참석하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성이면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에도 응당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신수기도 동안에 일주일 간은 기도 참선을 하셨는데 앞으로 1년 간은 참선 기도—참선하면서 바로 그 참선이 기도가 되도록, 그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그 말이여. 그러면은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거든. 절대로 참선과 기도가 둘일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그런 말이 있듯이, 참선 하나 제대로 할 줄 알면 기도고, 주력(呪力)이고, 경을 읽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참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둘이 아니어.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願)하고 원해도 잘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일념(一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참된 마음이 그 어두운 부정적인 생각에 가로막혀서 장애를 받아가지고 원(願)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로막는 것만 없으면 바로 원하는 대로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거를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 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그래서 그 관(觀)이, 의심관(疑心觀)이 그것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여.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생각은 딴 데 가 있고, 눈은 눈앞으로 보는 데에 제멋대로 요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목소리만 크게 불렀지 조금도 그것이 경건성이 없이 부른 것은 그 목만 쇠었지 정말 기도의 그 참된 경계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반드시 크고 작은 여러분 각자의 소원이 성취가 되실 것이고, 또 그런 유루(有漏)의 복(福)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무루(無漏)의 대원(大願)까지 연결이 되어서 기도 성취는 정말 원만히 성취가 되시리라고 나는 확신(確信)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확신을 하십시오. 그 원이 빨리 이루어지고 더디 이루어지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목적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1. 8. 9. 20:43

 

 

((No.335))—1987년 7월 첫째일요법회(87.07.05) (55분)

 

 

 

(1/3) 약 14분.

 

 

(2/3) 약 21분.

 

 

(3/3) 약 20분.

 

 


(1/3)------------------

작야시우치(昨夜是愚痴)가  금조성준걸(今朝成俊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호개해탈문(好箇解脫門)이여  석무인맹렬(惜無人猛烈)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작야시우치(昨夜是愚痴)가, 어젯밤에 깜깜한 어리석은 멍청이가,
금조성준걸(今朝成俊傑)이로구나. 오늘 아침에 갑자기 준걸(俊傑)이 되어 버렸구나.

호개해탈문(好箇解脫門)이여. 좋고 좋구나 이 해탈문이여.
맹렬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깝구나.(惜無人猛烈)

깨달음은 오래오래 닦아서, 그래 가지고 깨달음에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젯밤까지는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있던 사람이 하룻밤 새에 툭 터져 버리면 바로 해탈도를 증득을 하는 것입니다.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70년도에 성도재 법문으로, 조실 스님의 일대기 법문 속에서 만공 큰스님, 용성 큰스님 그리고 보월 큰스님 이 말세에 대선지식(大善知識)들, 그런 선지식들과 함께 최상승법 제일구(第一句) 도리를 가지고 염롱(拈弄)하시는, 한바탕 거량(擧量)을 해 가지고 그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두르면서 맞부딪치는 그러한 장면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법문 한 구절밖에 다시 무슨 법문을 더 들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 법문을 듣고 뼈에 사무치고 온 몸에 털이 거꾸로 떨어 서며, 칼날을 목에다 대고 용맹정진(勇猛精進) 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수좌(首座)가 아닐 것입니다.

법문(法門)이라는 게 무슨 경전을 해설을 하고 강의를 하고, 무슨 이론에 대해서 천착(穿鑿)을 하고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리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의 중생 상량심(商量心)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듣고 우리가 앞 생각이 끊어지고 뒷 생각이 끊어지며, 다맛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이 현전(現前)해서 다시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다시 일으켜야 할 화두도 없으면서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다맛 의단이 독로한 채 찰나(刹那)가 끊어져 버려야 할 것이여.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잃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당념에 생사심(生死心)이 끊을려고 하지 안 해도 당념에 끊어져버려야,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여.

보고 듣고 하는 것도—산을 보아도 산이 보이지를 않고, 물을 보아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수백 만 명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아니하고, 별별 소음과 잡음이 있어도 한 소리도 귀에 들리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누가 옆에서 잡담을 하거나, 누가 나를 칭찬을 하거나, 누가 나를 험담을 하거나, 일체 시비 우여곡절이 내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거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내 몸뚱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조차도 모르거늘, 무슨 시비와 흥망성쇠가 내게 무슨 상관이 있어.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대사자후(大獅子吼)로 설하신 제일구(第一句) 도리는 술수(術數)가 아닙니다. 배울라야 배울 수 없고 가르칠라야 가르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리는 팔만대장경을 뒤적거려도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96종 철학을 통달을 해도 그러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
이 도리는 엄격히 말해서 불조(佛祖)도 엿볼 수가 없는 것이고 귀신도 들여다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고요할 때에는 수미산(須彌山)과 같고, 한번 움직였다 하면은 큰 불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수미산과 같아서 아무리 움직일라고 해도 꺼떡도 아니한 것이며,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한 생각 움직거리면 그 불덩어리에 타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할 수가 없는 것이여.

온 세계에 하나도 감춘 바가 없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틀의 땅에서 찾으면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여. 이론적으로 더듬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 망상을 쉴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서 참선을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호소를 합니다마는, 망상을 쉴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참선을 잘못 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상을 끊을려고 하는 생각이 벌써 틀린 것이고, 망상을 쉬고 또 쉬고 해서 망상이 하나도 없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면 참선이 참 잘될 것 같지마는 참선은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를 애당초부터 문제시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과거 생각이 일어나거나, 미래 생각이 일어나거나, 일체 선악 · 시비 · 원한 · 애정 천하 없는 생각도 내가 관계할 일이 아닙니다. 그냥 고대로 놔버려. 다만 내가 정신 차릴 것은 본참공안을 드는 것 뿐이여. 거기에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지, 망상도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고.
일체처 일체시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이, 내가 그것을 참견을 하고 취하고 버릴려고 하는 데에서 공부가 그릇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만을 자꾸 챙겨서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더우면 더운 대로 챙겨 나가면 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추워도 이놈을 추켜들고 비벼대면 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배가 고파도 이놈이요, 배가 불러도 이놈이요,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이 한 의단(疑團)을 가지고 나아갈 뿐인 것입니다.(처음~13분53초)





(2/3)---------------

옛날에 대단히 성미가 급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은 자기 비위에 조금만 틀린 소리만 해도 당장 엄벌을 내리고 귀양을 보내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고 추방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신하나 백성이나 그 앞에만 가면은 벌벌벌 떠느라고 말을 못했습니다. 무슨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은 목숨을 잃어 버리게 되고.

하루는 그 왕자가 있었는데, 왕자가 무슨 왕의 비위를 건드려 가지고 사소한 일에 불같은 호령을 내리고 당장 그 왕자 내외를 국외로 추방을 했습니다. 잡아 죽여 버릴려고 하는 것을 대신들이 말려 가지고 간청을 해서 간신히 국외로 추방을 했습니다.
국외로 추방된 왕자 내외는—추방하면서 그 왕비가 금은 보물을 얼마 정도 그 임금님 몰래 좀 싸 주어 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저 국외로 추방을 당해 갔는데, 처음에는 가지고 간 그 금패물을 조금씩 팔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상 살 수가 없어서, 인가가 없는 산중에 들어가서 거기 그렇게 숨어서 아주 검박하게 겨우겨우—그래 추방된 왕자가 사치스럽게 살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 인자 검박하게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렇게 살다 보니 1달 2달이 가고 1년 이태가 가서, 가지고 간 것도 한도가 있어서 다 양식도 떨어져 버리고 금패물도 다 떨어져 버리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냥을 해 가지고 토끼도 잡고, 노루도 잡고, 새도 잡고 그저 그래 가지고 그렇게 먹고사는데,
하루는 간신히 토끼 한 마리밖에는 잡히지를 않아서 그래서 토끼를 갖다가 가죽을 벗겨 가지고 솥에다 넣어서 끓이는데, 어떻게 물은 조금 붓고 불을 너무 과열로 땠던지 물은 다 달아져 버렸는데 탄내가 나서 소댕을 열어보니까 고기는 반도 안 익었다 그 말이여.

반도 안 익고 물은 떨어져 버려서 그래서 그 왕자비(王子妃) 보고 ‘물을 저 개천에 가서 물을 좀 떠오라’고. 그래서 인자 물을 뜨러 갔는데 암만 기달려도 안 와. 안 오니까 배는 고프고 그러니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냥 반도 안 익은 고기를 그냥 먹어버렸습니다.
조금 다 익었나, 안 익었나 맛본다는 것이 한 점 띠어먹고 두 번 띠어먹고 하다 본 것이 차츰차츰 배는 고프고 하니까는 피는 조금 덜 익었지마는 그냥 다 먹어버렸어.

그래서 아내가 그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소댕을 열고 물을 부을려고 하니까 고기가 없어졌습니다.
'아이! 고기가 어떻게 되었냐?'고, '없다!'고 그러니까, ‘아! 고기가 그놈이 내가 열어 보니까 훌떡 솥 밖으로 뛰어나오더니 막 뛰어 가지고 저 산으로 도망가 버렸다’고. ‘잡을려고 쫓아갔지마는 어떻게 이놈이 빨리 도망가던지 놓쳐 버렸다’고 그러니까.

‘가죽을 벗겨서 불을 때 가지고 반쯤 익은 놈의 고기가 어떻게 도망가야?’
‘참! 나도 알 수가 없다’고 왕자가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논다'고.

그래 아내가 그 왕자를 떠억 보니까 이상하다 그 말이여. 사람이 시치미를 아무리 뗀다 해도 거짓말을 어지간히 해야지, 당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면 약간 눈가시라든지 코가 약간 벌심거린다든지 그 눈치를 보면 알 수가 있거든.
그래서 그때부터서 그 왕자비가 매우 괘씸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쫓겨나 가지고, 자기 때문에 상감한테 미움을 사 가지고 나까지 이렇게 산중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토끼고기를 잡아서 삶았으면 익거나 안 익거나 같이 먹을 일이지, 물 떠오라고 보내 놓고 저만 혼자 먹어?'

괘씸하게 생각을 하니까 그동안에 지내온 모든 일들이 새록새록 괘씸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그때부터서 '이런 작자를 내가 믿고 살 수가 없구나'
그래 가지고는 그때부터서 웃지도 아니하고, 여간해서 말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걸 버리고 일반 사람처럼 백성들처럼 싫다고 도망가 가지고 개가(改嫁)할 수도 없는 거고, 그냥 같이는 살되 아무 재미가 없어.

그동안에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살다 보면 그 임금이 언젠가는 노여움을 풀면은 다시 자기네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이리라’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러한 괘씸한 인간이라!’ 하고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멸시를 하니까 도저히 사람이 사람같지 않고,
‘저런 것이 나중에 임금이 되어봤자 무슨 나라를 바로 다스릴 것인가?’ ‘이러한 인간을 믿고 어떻게 내가 그 밑에서 왕비 노릇을 하며, 어떻게 정사(政事)를 할 것인가?’ 이것저것 생각하니까 생각할수록 왕의 자격이 없어 보이고, 저런 것 사람답지 않게 보이니까 도저히 얘기할 재미도 없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살맛이 전혀 없어졌다.

속에 확! 괘씸한 생각이 뭉쳐 가지고 도저히 풀 길이 없어. 그러한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 것이 몇 해를 지냈습니다. 그렇게 지내니까 고생도 막심한데다가, 의식주 문제가 전부가 막심한데다가, 마음까지 그렇게 괘씸한 생각으로 꽉 뭉쳐 가지고 그 남편이라고 하는 것이 천하에 몹쓸 놈으로 보이니까 도저히 희망이 없어. 그래도 하루하루 지낸 것이 한 해, 두 해가 가고 5년 10년이 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왕이 승하(昇遐)하자 대신들이 용케 찾아 가지고 그 왕자를 모셔 갔습니다. 가 가지고 새 왕으로 모셨는데. 그래 가지고 이 왕자가 새 왕이 되어 가지고, 좋은 옷에다가 머리에 목에 팔에 그 칠보로 장엄을 해서 왕비를 위해서 다 해 주었습니다.
10여 년간을 산중에서 자기의 잘못으로 해서 고생한 그 죄과(罪過)를 보상하는 뜻으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치와 호강과 영화를 갖다가 다 시켜 줄라고 마음을 먹고 물심양면으로 다해 주는데, 왕비는 조금도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산중에서 그렇게 한 그 노여움이 왕비가 되어 가지고서도 풀어지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러요? 어디가 아픈 데가 있소? 무슨 근심있소?"
"아니요. 아무 아픈 데가 없어요"

"무슨 걱정이 있소?"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러면 어째서 그러요. 나는 나의 모든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당신을 잘해 주고 싶고, 호강을 시켜 주고 싶고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이렇게 성의를 다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그럴 수가 있소" 하니까,
"당신은 저 산중의 움막에서 우리가 고생하고 살 때에, 그때 내가 개천으로 물을 뜨러 갔을 때에 그 반쯤 익은 토끼가 솥 밖으로 뛰어나와 가지고 도망쳐 버린 일을 잊어버렸습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왕이 깜짝 놀랬습니다. 입이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벌써 20년이 되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사과할 수도 없고, 자기는 그때 잠깐 장난끼로 그런 것뿐인데 그 한 사실을 20년간이나 마음속에 간직을 하고 그 노여움을 풀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왜 산승(山僧)이 오늘 이러한 동화같은 설화를 말씀을 드리냐 하면, ‘여자의 그 원한심은 오뉴월에 서리가 친다’ 그러한 속담도 있습니다.
사소한 한 생각으로 해서 그 왕비의 부귀영화도 기쁘지를 않고, 왕을 갖다가 인격적으로 멸시하고, 자기의 왕비로서의 모든 영화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국모로서의 모든 것도 아무 그런 이 부귀영화가 마음에 와서 닿지를 않아. 생각 생각이 토끼가 산으로 도망한 것만을 염두에다 두고 일평생을 남편을 원망하면서 미워하면서 그렇게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든지, 인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원한을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일이고, 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한마디한 것이 상대방에서는 대단히 크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는 오백 생 내지 천 생의 과거에 숙세의 인연으로 부부간이 되고 그러는데 그래서 만났는데, 순 남남끼리 만나 가지고 일심동체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을 낳고 그렇게 해서 가정을 이뤄 나가고 그 가정이 모여서 사회가 되고, 그 가정이 모여서 국가가 되고, 그 가정이 모여서 또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촌수(寸數)가 부모 자식 간에도 1촌 간(間)인데, 부부간에는 무촌(無寸)입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한 생각 어긋나면 완전히 원수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다정할수록에 자주 다투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고 잠시도 떨어져서는 못 살만큼 그렇게 애정이 두터워서 결혼을 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참 많이 싸우는 수가 있습니다.

부부간에 한번도 싸우지도 안 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 탈을 타고났으면서도 사람이 아니라 천상에서 잠시 인간 세상에 유희(遊戱)를 하러 나왔거나, 그렇지 않으면 참 그건 상상이 미치지 못할 그러한 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부간에 크고 작고 간에 참 싸우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렇게 싸우면서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살림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또 참선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싸우면서도 참선을 잘하고, 싸우면서도 가정의 화목을 유지해 나가고, 일생 동안 같이 살면서도 질리지 아니하고 또 항상 새롭고 잘 살 수가 있느냐?
싸움을 하되 속전속결(速戰速決), 병아리 싸움하듯이 후닥닥 싸우고 금방 화해를 해 버리는 그런 속전속결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싸움을 하되 과거 일을 들춰내지 말아라.
싸움을 하면은 지나간 일을 들춰내 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면 상대방이 오장(五臟)이 뒤집어질까?’ 그것을 용케도 연구를 해 두었다가 싸울 때면 그놈을 끄집어 내 가지고 박박 긁어대거든. 그래서 과거를 들춰내지 말아라.

또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들춰내지 말아라.
친정 문제라든지 또는 과거의 문제라든지 그 사람의 약점을 용케 찾아내 가지고는 일침을 가해 가지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만든다 그 말이여. 이러한 일은 대단히 졸렬하고 비열한 전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싸움을 하되 그러한 과거를 들춰내고 또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쑤셔서 그래 가지고 한 싸움은 이것은 신사도에 어긋나는 것이여. 페어 플레이(fair play)가 되지를 못합니다. 싸움하고 나서도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일이고 인격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존경받지를 못합니다.

배가 고파서, 아내가 물을 뜨러 간 사이에 토끼고기를 먹은 것은 그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 익지도 않은 것을 자셨구료’ ‘아, 조금만 참았다가 잘 끓여서 자시면 할 텐데 그 익지도 않은 것을 그걸 잡숫느라고 애썼구료’ 하면서 웃어 버렸으면 그것으로 말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속에다가 콱! 넣어 두고서 상대방을 갖다가 괘씸하게 생각하고, 고생을 하면서 그 괘씸한 생각으로 여러 해를 지낼 때 얼마나 마음속으로 괴로웠겠느냐 그 말이여.
또 귀양이 풀려서 다시 왕이 되고 왕비가 되어 가지고서도 그 노여움을 풀지를 못했다니 세상에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그 토끼고기 한 마리 먹어 버렸다고 해서도 10년, 20년을 원한을 품고 괘씸하게 생각하고 노여움을 풀지 안 하거든, 하물며 상대방의 약점 또는 과거를 들춰내 가지고 아무리 부애가 난다고 그러한 식으로 싸움을 해서는 참 그것은 용서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자가 아내에 대해서 해도 그렇고, 아내가 남자의 과거를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낸다 하더라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속이 상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가지고 한번 싸워 보는 것이 그것 참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계속 공격을 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갖고 한바탕 신나게 싸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가지고 싸울려고 마음을 먹은다면, 아무리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아붙인다 해도 싸움이 되지 아니할 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13분53초~35분2초)





(3/3)---------------

그리고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 말아라.
부부싸움이라는 게 둘이 싸워야 그것이 재미가 있는 것이지, 이웃 사람이 그 싸움 구경을 해도 창피한 일이고, 아무리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 하더라도 자식 앞에서 싸우는 것은 차라리 이웃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것보다도 더 챙피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은 싸움 구경을 하고 가서 모다 흉을 보고, 안 보는 데 가서 싸움하는 얘기를 모다 하면서 웃고 그러고 말겠지만, 자식이 부모 싸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를 말아라.
또 애가 아직 돌이 안 지나갔건, 돌이 지나서 한 살 두 살 서너 살이 되었건, 그렇더라도 잠이 들었을 때라도 그 애기 있는 데서는 싸우지를 말아라. 잠은 들어서 의식은 잠을 자고 있지만, 잠재의식(潛在意識)은 고대로 다 싸우는 것을 다 듣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귀로 통해서 듣고 눈을 통해서 의식을 하겠지만, 잠이 들었을 때에는 눈도 감고 귀로는 잘 못 알아듣지만, 잠재의식은 우리의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고대로 다 듣고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잠재의식 속에 다 녹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존경하지 않게 되고, 그 입은 마음의 상처가 일생 동안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는 눈을 뜨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싸우지를 말고.

이러한 몇 가지의 규칙을 ‘부부싸움 법규’라 제목을 딱 써 놓고 방금 말씀드린 조항을 적어 놓고서, 싸움을 할 때에는 둘이 서로 그 조항을 한번 낭독을 하고 그리고서 한바탕 싸우도록 한다면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편의 한 말, 아내가 한 말 한마디를 그렇게 깊이 새겨 가지고 두고두고 일생 동안 괘씸하게 생각하고 일생 동안을 울거 먹는 그러한 무서운 그 결심과 기억력을 참선하는 데에 이용을 한다면 참선은 극일(克日) 성공을 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분심(大憤心), 대신심(大信心), 대의단(大疑團).

대신심(大信心), ‘내가 부처다’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원래 부처라고 하는 깊은 믿음, 본래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새로 부처를 이룰 것이 없어. 다맛 화두가 독로해서 의단(疑團)만 타파(打破)해 버리면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여. 바로 자기가 부처고, 말하고 옷 입고 밥 먹고 울고 웃고 성내고 근심 걱정하는 바로 이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믿어야 하고.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이렇게 캄캄해 가지고 있는가?' 도저히 그 분심이 속에서부터서 끓어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무서운 그 집념, 훨씬 여성이 남성보다도 더 독하고 모질다고 하는 것입니다. 6.25 동란 때 남자들은 도저히 그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고생을 이기지 못할 그런 처지에서도 여성들은 다 그것을 참고 견디고 이겨낸 것입니다.
'남자는 뭐 사흘만 굶어도 죽고 여자는 석달을 굶어도 안 죽는다'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그건 왜 그러냐? 자식을 위하는 생각, 남편을 위하는 생각, 그런 무서운 집념이 콱 쩔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나 부모나 남편이나 재산에 대한 애착도 훨씬 여성이 더 강합니다. 그러한 무서운, 쇠심줄보다도 더 강인한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참선하는 데 동원을 한다면, 남자보다도 훨씬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본래 남성 여성의 그 성품 자리에 있어서는, 불성(佛性) 자리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고 남녀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남성이 따로 있고 여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업(業)에 따라서 여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오면 여자고 또 다음 생에 남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오면 남자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장부(丈夫)의 마음을 가지고 장부의 성격을 쓰고 장부의 행실을 하면은 내생에 장부가 되는 것이고, 여자의 성격을 쓰고 여자의 행위를 하면은 여자의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금생에는 남자가 되어 버렸고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 껍데기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 남녀가 구별이 없는 그 본성(本性) 자리에 있어서는 자기가 여자라고 해서 뒷걸음질칠 필요도 없고 자포자기할 필요도 없고, 다 같이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법(正法)을 믿는 최상승 학자로서 당당하게 선의(善意)의 경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공부에 있어서는 승속(僧俗)도, 남녀도, 빈부와 노소와 귀천도 없는 것이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선의의 경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도 언젠가는 선의의 경쟁을 해 가지고 모든 면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사람이 결국은 그이 쪽으로 통일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또 경제적으로도 모든 문화 · 예술 · 교육 일체 면에서 앞장서서 나아가면 그것이 바로 통일을 앞당기고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자분도 그러한 남성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그러한 집념(執念)을 갖다가 발심(發心)하고 도 닦는 데에 돌이킨다면 참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거사(居士)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선원이 아직 마련되지 안 해서 와서 정진하시는 분들이 없습니다마는 그런 선원이 열리게 된다면 거사님네 선방도 잘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
물론 직장을 가지고 계신 분은 와서 석달 동안을 정진하시기에는 어렵겠습니다마는, 이 보살님네들은 금년에도 7~80명, 해마다 100여 명을 넘어서 방부를 들이고 모다 정진을 하시고 그러는데, 다 가정의 일이 바쁘시고 모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면은 금생에 이 불법을 만났을 때 다만 조금이라도, 어쨌든지 이 몸뚱이 받았을 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야겠다’ 하는 그 신심이 돈독(敦篤)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보살님네들이 와서 이렇게 정진을 하시게 된다고 그렇게 믿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거사님네보단 보살님네들이 이 법을 믿고 공부하시는 면에서 앞장서 가고 계시지 않는가 이리 생각을 합니다. 내생에 몸을 바꿔서 남자로 태어나시면 그러한 보살님네들은 금방 출가해서 참 큰스님이 되어 가지고 불법을 갖다가 재흥(再興)하는 그러한 역군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하고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하고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이여, 그대와 더불어 함께 걷고 함께 행하며,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로구나. 함께 일어나고 함께 앉고 같이 이렇게 지내오기를 세월이 길었다. 몇십 년, 몇백 년, 몇 억겁다생(億劫多生)을 그렇게 같이 걷고, 같이 행하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살아왔다 그 말이여.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그렇게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항상 같이 해 왔다.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모름지기 머리를 돌이켜서 다시 생각하지를 말어라.
바로 여읠라야 여읠 수 없고, 앉았을 때는 같이 앉았고, 누울 때도 같이 눕고, 섰을 때도 같이 서고, 걸어갈 때도 같이 걸어가고, 일 할 때 같이 일하고, 일분일초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그대를, 어디를 머리를 돌이켜서 생각을 해? 머리를 돌이켜서 찾으면 어디가 있을 거여, 그게.

오늘 정묘년 7월 첫째 일요일을 맞이해서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전강 조실 스님의 그 감동적인 법문, ‘어묵동정(語黙動靜)을 여의고 일러라’ 한 공안(公案)과, 경허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야인(野人)이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라 한 구절에 대해서 그 전강 조실 스님 소년 시절에—20여세 된 그 아주 새파란 청년 시대에 그 만공 대선사와 보월 선사와 그 기라성 같은 여러 구참납자(久參衲子)들 앞에서 그 경허 큰스님의 오도송을 그렇게, 참 멋들어지다고 할까? 상쾌하다고 할까? 참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영원히 우리가 도업(道業)을 성취할 때까지 잊지 못할 그런 감동적인 법문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위가 본격적으로 닥쳐올 것입니다. 여러 선방에 계신 스님네 또 가정에서 정진하시고 또 직장에 나가시는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때,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 앉았을 때는 바로 앉은 그 시각, 섰을 때는 서 있는 그 시각,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시각, 속이 상할 때는 속이 상한 바로 그 시각을 여의고 따로 내가 도를 닦아서 깨달을 시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古人)은 장터에서 '이 자식, 저 자식' 하고 싸우는 그 소리를 들은 그 찰나에 확철대오를 한 분도 있고, 복숭아꽃이 활짝 핀 바로 그것을 보고 깨달은 분도 있고, 빗자루로 뜰을 쓸다가 거기서 튀긴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분도 있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여름에 발을 갖다가 이렇게 걷어올리다가 깨달은 분도 있고, 자다가 뚝! 목침(木枕)에서 머리빡이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에 확철대오하신 분도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경계(境界)에 휩싸여서 있다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보다가 터지고, 듣다가 터지고, 앉다가 터지고, 넘어지다 터지는 것입니다.

더웁다고 한 생각 늦추지 마시고, 더위를 정진으로 이겨 나가도록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 법상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35분3초~55분4초)(끝)





[법문 내용]

(게송)작야시우치~ / 법문이란? /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끊어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정신 차릴 것은 본참공안을 드는 것 뿐 /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잡드리를 해 가야.

'토끼고기'로 인한 왕자비의 노여움 / 부부싸움 법규(속전속결, 후닥닥 싸우고 금방 화해를 하라. 싸움을 하되 과거 일을 들춰내지 말아라.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들춰내지 말아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갖고 싸워 보아라.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 말아라)

대신심(大信心), ‘내가 부처다’ 대분심(大憤心), 대의단(大疑團) / 불성(佛性) 자리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이, 남녀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다 / 이 공부에 있어서는 승속(僧俗)도, 남녀도, 빈부와 노소와 귀천도 없다 / (게송)여군동보우동행~ /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오래오래 닦아서, 그래 가지고 깨달음에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젯밤까지는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있던 사람이 하룻밤 새에 툭 터져 버리면 바로 해탈도를 증득을 하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이라는 게 무슨 경전을 해설을 하고 강의를 하고, 무슨 이론에 대해서 천착(穿鑿)을 하고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리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의 중생 상량심(商量心)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듣고 우리가 앞 생각이 끊어지고 뒷 생각이 끊어지며, 다맛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이 현전(現前)해서 다시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다시 일으켜야 할 화두도 없으면서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다맛 의단이 독로한 채 찰나(刹那)가 끊어져 버려야 할 것이여.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잃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당념에 생사심(生死心)이 끊을려고 하지 안 해도 당념에 끊어져버려야,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여.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만을 자꾸 챙겨서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더우면 더운 대로 챙겨 나가면 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추워도 이놈을 추켜들고 비벼대면 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배가 고파도 이놈이요, 배가 불러도 이놈이요,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이 한 의단(疑團)을 가지고 나아갈 뿐인 것입니다.

남편의 한 말, 아내가 한 말 한마디를 그렇게 깊이 새겨 가지고 두고두고 일생 동안 괘씸하게 생각하고 일생 동안을 울거 먹는 그러한 무서운 그 결심과 기억력을 참선하는 데에 이용을 한다면 참선은 극일(克日) 성공을 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신심(大信心), ‘내가 부처다’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원래 부처라고 하는 깊은 믿음, 본래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새로 부처를 이룰 것이 없어. 다맛 화두가 독로해서 의단(疑團)만 타파(打破)해 버리면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여. 바로 자기가 부처고, 말하고 옷 입고 밥 먹고 울고 웃고 성내고 근심 걱정하는 바로 이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믿어야 하고.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이렇게 캄캄해 가지고 있는가?' 도저히 그 분심이 속에서부터서 끓어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위가 본격적으로 닥쳐올 것입니다. 여러 선방에 계신 스님네 또 가정에서 정진하시고 또 직장에 나가시는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때,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 앉았을 때는 바로 앉은 그 시각, 섰을 때는 서 있는 그 시각,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시각, 속이 상할 때는 속이 상한 바로 그 시각을 여의고 따로 내가 도를 닦아서 깨달을 시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古人)은 장터에서 '이 자식, 저 자식' 하고 싸우는 그 소리를 들은 그 찰나에 확철대오를 한 분도 있고, 복숭아꽃이 활짝 핀 바로 그것을 보고 깨달은 분도 있고, 빗자루로 뜰을 쓸다가 거기서 튀긴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분도 있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여름에 발을 갖다가 이렇게 걷어올리다가 깨달은 분도 있고, 자다가 뚝! 목침(木枕)에서 머리빡이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에 확철대오하신 분도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경계(境界)에 휩싸여서 있다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보다가 터지고, 듣다가 터지고, 앉다가 터지고, 넘어지다 터지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1. 5. 29. 11:32

 

 

(No.330)—1987년 5월 첫째일요법회(87.05.03) (75분)

 

 

(1/4) 약 17분.

 

(2/4) 약 20분.

 

(3/4) 약 20분.

 

(4/4) 약 19분.

 


(1/4)----------------

허공경계기사량(虛空境界豈思量)고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인댄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공경계(虛空境界)를 기사량(豈思量)고, 허공의 경계를 어찌 사량(思量)할고?
이 허공이, 허공세계가 동서남북 사유(四維) 사방으로 끝없이 높고 끝없이 넓은데 그 허공의 경계를 어찌 우리 사량분별로써 가늠을 할 수가 있겠느냐.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다. 대도(大道), 큰 도의 맑고 그 깊은 도리는 그 허공만큼 그렇게 멀고도 높고도 길더라. 저 허공도 그 갓을 알 수가 없고, 얼마나 넓고 높은 그것을 알 수가 없거든 하물며 대도의 그 깊고 넓은 이치를 그거 어떻게 사량분별로 알 수가 있겠느냐 이거거든.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인댄, 다맛 오호(五湖)의 그 풍월(風月)이 있음을 얻는다면—동서남북의 그 호수가 있고 거기에 풍월이 있으면,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니라. 봄이 오면 옛을 의지해서 백 가지 꽃이 향기롭다. 산이 있고 들이 있고 호수가 있고 그러면 봄이 오면은 방방곡곡에 빨갛고 노랗고 온갖 백화(百花)가 그 향그럽게 필 것이다.


오늘은 정묘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경청을 했는데,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원효(元曉) 스님 당시 그 야운(野雲) 비구라고 하는 그 스님이 도를 깨닫는 그 기연(機緣)에 대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영랑신선이라고 하는 신선(神仙)이 저 동해가 몇 번 말랐다 다시 또 물이 찼다 하도록—그러니까 몇 겁(劫) 동안을 죽지 않고 신선으로써 그것을 다 겪고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인자 그러한 신선이 다 이 오신통(五神通)이 자재해서 천안통과 천이통, 숙명통, 타심통 모다 이런 신족통, 이 다섯 가지 신통을 얻은 영랑신선이 아주 신선도 사뭇 몇 겁이 되어 가지고 늙으니까, 아주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인자 초췌해져 가지고 추워서 못 견디니까,
원효 스님 토굴에 와 가지고 그 불씨를 찾아 가지고 그 불을 쬐고 그렇게 하다가 원효 스님한테 붙들려서 그래 가지고 결국은 원효 스님의 언하(言下)에 대도를 성취했다고 하는 그런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여기서 이 설화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신선도를 닦아 가지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그러한 도리를 터득을 하면 오신통이 다 나고 해서, 중국의 팽조(彭祖) 같은 사람도 칠백 세(歲)를 살았다고 전해 오고 그 이후에도 많은 신선도를 닦은 사람들이 뭐 오백 세, 삼백 세는 보통 다 살고 그런데.
신선도의 도 닦아 가는 그 요령이 무엇이냐 하면은 순전히 이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 가지고 단전호흡에 통달을 하면 그렇게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아주 참 계행(戒行)을 지키면서 잘하면 오신통이 난 걸로 그렇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은 그런 신통 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또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를 않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을 하면서 단전호흡을 하기는 합니다마는, 단전호흡을 하기는 하되 신선들이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고 신통이 나기 위해서 하는 그러한 목적으로 단전호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선도를 잘 닦아 가지고 오신통이 나 가지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몇 겁을 살았어도 결국 초췌해져 가지고 나중에는 그러한 그 영랑신선처럼 비참한 양상으로 타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원효 스님과 같은 그러한 도인(道人)을 만났기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결국은 참 가련하게 비참하게 처량한 종말을 맞이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물며 인간 세상에 있어서 부귀영화나 그 오욕락을 자기의 뜻대로 얻어서 그것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70년—높은 벼슬도 해 보고, 큰 부자도 되어 보고, 큰 권리도 써 보고, 예쁜 아내를 얻고, 좋은 아들들을 갖고, 그래 가지고 참 남부럽지 않게 부귀공명을 이룬다 하더라도 잠깐 꿈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오신통과 불로장생법을 얻었어도 결국 끄터리 가서는 그렇거든, 하물며 이 허망한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오욕락(五欲樂)—재산이라든지, 색(色)이라든지, 명예 권리나 안락 그런 것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봄날 뜨뜻한 양지에서 잠깐 낮잠을 졸다가 꿈속에서 부귀를 누리다가 퍼뜩 낮잠을 깨고 보니 참!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하다’ 이렇게 인간의 부귀영화와 흥망성쇠를 춘몽에다가 고인(古人)들은 다 비유를 했습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지(實地)가 그런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 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 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현들은 그러한 인간 세상에 부귀영화를 달팽이 뿔에다가도 비교를 했습니다.
달팽이의 그 뿔이라는 것이 잠깐 푹 길게 나왔다가 또 그냥 쑥! 속으로 들어갔다가, 또 가만 놔두면 또 쑤욱 길게 뻗었다가 또 살짝 건들면 또 쑥! 들어갔다—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해졌다가, 무슨 권리를 누렸다가 또 권리가 없어졌다가, 이러한 것이 달팽이 뿔따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사람들은 그 달팽이 뿔따구보다도 더 허망한 부귀공명을 위해서, 그 받기 어려운 사람 몸, 만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나 가지고 그 달팽이 뿔따구와 같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 몸과 목숨과 시간을 거기다 다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추구한 만큼 마음대로 얻어지기도 어렵지만, 얻어 놓고 보면 ‘아! 이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얻어 놓고 보면 참다운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겪은 뒤에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한 번 두 번 겪어보면 퍼뜩 그것을 깨닫게 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일생 동안에 수없이 그러한 부귀공명이라든지 흥망성쇠가 허망하다고 한 것을 수십 번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 해보고 겪어보고 그래 가지고 마지막 죽을 때에사 ‘하! 인생이라고 한 것은 참 허망한 것이었구나’ 죽을 때에사 겨우 깨닫게 되고,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숨 끊어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미련과 원망과 한을 품고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비사왕(鞞肆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있었는데, 그때 가섭(迦葉)이라고 하는 큰 도인이 계셨습니다.
그 비사왕이 그 가섭존자를 만나 가지고 묻기를, "불교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천상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하면 내생에 지옥에 간다고 모다 그래 쌓는데, 나는 그 소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가 내생이 있고, 어디가 무슨 지옥 천당이 있겠습니까? 그건 허무맹랑한 소리고 사람들을 속이는 소리고, 괜히 악한 짓하지 말고 착한 일하라고 그렇게 그 권선징악을 하기 위해서 공연히 사람들을 겁을 주는 소리지, 어디가 그 뭐 내생이 어디가 있고, 숨 한 번 끊어져서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무슨 내생이 있겠느냐"고. "그런 명색이 도인이고 성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멀쩡한 소리를 가지고 혹세무민을 한다, 세상을 속이고 모다 그런다 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머리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은 그러면 금세(今世)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내생(來生)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하고 가섭존자가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비사왕이 "그런 소리 물어봤자 나는 내생은 도저히 있다고 믿을 수가 없다"고, "해야 오늘을 위해서 떴건, 내일을 위해서 떴건 그것은 가만 놔둬도 떴다 졌다 하는 것이지 무슨 거기다 대고 금생 내생을 따지느냐? 나 그래도 그런 것은 내생은 나는 안 믿는다"고. "인과(因果)도 안 믿고 내생도 그런 것도 안 믿는다" 그러니까,(처음~17분9초)





(2/4)----------------

〇가섭존자의 천당, 지옥 비유.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안 믿소?" 그러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 아주 일생 동안을 착한 일만 하고 그런 사람보고 그 사람이 죽을라고 할 때 '당신은 일생 동안을 좋은 일만 하고, 마음씨를 착하게 하고, 행동을 착하게 하고 그랬으니 당신은 틀림없이 천당에 갈 거요. 만약에 천당이라고 하는 곳이 사실 있다면 당신은 천당에 갈 것이니, 천당에 가걸랑 바로 와 가지고 나한테 천당이 이렇게 이렇게 생겼고, 실지로 있다고 한 것을 나한테 보고를 해 주시오' 하고 신신부탁(申申付託)을 했는데, 그 사람이 한번 죽어가더니 천당에를 갔는지 어디로 꼬꾸라졌는지 다시는 와서 말을 안 하더라 이거지요"

또 자기가 안 사람 가운데 천하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기협잡에다가 사람을 많이 죽이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참!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는 짐승만도 못한 그런 못된 놈이 내가 잘 아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래도 마지막 죽게 된다고 그래서 그 문병을 안 갈 수가 없어서 가 가지고, '참, 죽어갈라고 하는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당신은 틀림없이 죽으면 지옥에 갈 거요. 지옥에 갈 건데 제발 지옥에 가거든, 나한테 와서 그 지옥이 사실로 있는 고대로 그 본대로 와서 얘기를 해 달라'고, 그러면서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사람이 한번 죽더니 다시는 오지 않더라. 그러니 어찌 그 지옥도 있다고 내가 믿을 수가 없고, 천당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안 믿는다" 그러니까.

그 가섭존자가 "참, 그 대왕 말씀을 들으니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을 한번 들어보시오. 어떤 사람이 똥구덩이에 빠졌다가 겨우 거기서 나와 가지고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몸에다 향수를 치르고 그랬던 사람이 어찌 다시 똥항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겠소?
그와 같아서 인간 세상에 모다 그 죄 많은 이 고해(苦海)에 있다가 착한 일을 한 그 공덕으로 천당에 한번 갔으면 거기 가서 보니깐 너무너무 좋고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이 인간 세상에 당신한테 그 소리 할라고 여기를 오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이 대왕이 역적을 한 놈을 잡아가지고 취조를 하는데 그 죄인이 ‘내가 마지막 이렇게 죽어가니 내 부모형제와 고향을 한번 가서 다 둘러보고 하직 인사라도 하고 그러고 올 테니 나를 좀 놔 주시오’ 하면은 당신이 놔 주겠습니까?"
"나 안 놔 주지요"

"그와 같습니다. 죄 지어 가지고 지옥에 한번 갔으면 저는 쇠사슬에 묶여서 고문 받느라고 볼 일을 못 볼 텐데, 누가 당신한테 가서 지옥고 구경한 것 얘기하라고 지옥에서 놔 주겠습니까? 그러니 천당에 한번 올라가면은 갔다 왔다고 보고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지옥에 한번 떨어진 사람이 지가 무슨 그 권리가 있어서 와서 그것을 보고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천당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존자가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으나 그런 소리 쯤 가지고 내가 인과(因果)를 믿을 사람이 아니여"

그래 가지고 아주 인과를 막 부인을 하고. "그런 소리는 하나의 비유는 될지 모르지마는 나는 그래도 지옥이니 천당이니 그따위 소리를 나는 믿을 수가 없다"


〇새끼 타래와 은전, 금전의 비유.

그러면 내가 또 하나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둘이 여행을 가는데, 둘이 다 가는데 좋은 새끼를 꽌 타래가 있으니까 둘이 그놈을 짊어질 만큼 가득 짊어졌다 이것입니다.
‘이건 참, 집에 가지고 가면은 농사짓는 데도 필요하고, 뭘 묶는 데도 필요하고 그러니 우리 이것 임자도 없고 버린 것이니까 우리가 짊어지고 가자’

그래서 짊어지고 가다가 얼마쯤 땀을 흘리다 가니까, 아! 뭔 주머니가 하나 있는데 그 주머니를 열어보니까 은이 가득 주머니 속에 들었다 그 말이여.
묵직한 은전(銀錢)이 들어있어서 그 앞서간 사람이 그 은전을 자기가 딱 짊어지고 그 은전이 무거우니까 ‘에이, 이까짓 거’ 새끼 짐은 갖다가 벗어 내동댕이쳐 버리고 얼마만큼 가니까, 또 무슨 주머니가 있어서 그 주머니를 보니까 아! 그 속에는 황금이 번쩍번쩍한 황금전이, 황금이 그냥 그 속에 가득 들었다 그 말이여.

이것 자기가 갖고 싶지만 자기는 이미 은전 뭉텅이를 줏었으니까 뒤에 온 사람보고 ‘여기에 금전(金錢)이 있으니 당신 그 새끼 뭉텅이 버려버리고 이 금전 뭉텅이를 당신 가지시오’ 하니까,
‘아니 나 그것 싫소. 내가 이 새끼 뭉텅이가 이걸 얼마나 필요해서 이것을 여기까지 참! 수십 리를 이놈을 짊어지고 애써서 왔는데, 이것 고향에 가지고 가면 농사짓는데 꼭 필요한데, 이렇게 애써서 짊어지고 온 것을 내가 버리고 그 금전 뭉텅이를 내가 가지고 가겠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고 기어이 그 사람이 금전 뭉텅이를 안 가지고 새끼 뭉텅이를 가지고 간다고 고집을 하니까.

아! 이 사람은 할 수 없이 그 사람이 안 갖는다 하니까, 은전 뭉텅이를 둘 다 가지고 가면 좋겠는데 너무 무거워서 은전 뭉텅이는 그냥 버려버리고 금전 뭉텅이만 갖다 한 짐 짊어지고 인자 고향에로 오니까, 그 가족들이 모두 그 금전을 그놈을 갖다가 한 닢만 팔아도 논이 몇 마지기요, 두 닢만 팔아도 그냥 고대광실(高臺廣室) 좋은 집을 짓고 아주 그냥 양식도 사고, 종도 들이고.
또 그 돈이 그리고도 한량없이 남으니까 절에 시주도 하고, 양로원 고아원에다가 또 보시도 하고, 뭐 일가친척 가난한 사람도 노나주고, 돈 없어서 학교 못 다니는 사람, 돈 없어서 병 앓고 있는 사람, 그런 데다 아주 적절히 써서 참 그 사람은 잘살게 되었는데.

아! 새끼 뭉텅이만 잔뜩 짊어지고 간 사람은 짊어지고 가자 집안 식구들한테 ‘아무개는 금전을 가지고 와서 저렇게 잘사는데, 병신 같은 것이 새끼 뭉텅이만 짊어지고 와 가지고 그까짓 것 무엇에 쓰냐’고 막 혼구녕만 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집안 식구한테도 대접을 못 받고 아! 계속해서 가난뱅이 신세를 못 면하는데.
마치 대왕은 그 ‘내생이 없다’ 하고, 「무슨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간다.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하는 이런 인과법을 믿지 않는 것으로써 자기의 고집을 삼고, 끝까지 내가 이 성현의 말씀을 해 준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은 마치 새끼 뭉텅이 그놈 그것 땀 흘리면서 짊어지고 온 것이 아까워서 그 은전 뭉텅이나 금전 뭉텅이를 보고도 그놈을 취하지 아니하고, 새끼 뭉텅이만 잔뜩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대왕님과는 너무나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왕님이 말이 꽉 막혔습니다. 한참을 말이 막혀서, 이것 내가 이 고집을 꺾자니 이 존자 앞에 참 창피하기도 하고, 또 가섭존자의 말씀이 절대로 들어보니 그럴싸하기는 하고.

그래서 "사실은 내가 여태까지 임금 노릇을 하면서 입만 벌렸다 하면은 ‘내생이라는 것은 없다’ 입만 벌렸다 하면은 인과를 부인을 하고 이래 왔는데, 이런 것을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존자 말을 듣고서 그 여러 해 동안을 내가 그 주장을 해 오고 고집을 해 온 이것을 존자한테 설복(說伏)을 당했다 한다면 내 임금의 채신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참! 딱해서 그럽니다. 그거 그 문제만 아니면은 내가 그냥 그것 참! 존자 말씀이 그것 참! 틀림없는 말인데, 임금으로서, 내가 평민만 같아도 모르겠는데 임금으로서 참 존자한테 내가 설복을 당했다고 해서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고집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까.


〇맷돼지 왕의 똥 갑옷 비유.

참! 딱합니다. 내가 비유를 하나 더 들어서 얘기를 하지요.

참 아주 큰 멧돼지가 있었는데, 그놈은 많은 그 작은 멧돼지를 거느리고 사는 멧돼지의 왕인데 왕초인데, 그놈이 그 자기네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주 큰소리를 치고, 쪽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은 그 나발대로 받아 가지고 그냥 막 혼구녕을 내고 해 가지고, 누구고 그 멧돼지 왕초한테는 수백 마리의 멧돼지들이 꼼짝을 못하고 그러는데, 아!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치다가 호랭이를 만났습니다.
호랭이를 만났는데 인자 그 부하들 보는 데에서 호랭이한테 참 항복할 수도 없고, 정면상대해서 싸우자니 호랭이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한번 할퀴어서 쥐어 뜯어버리면 꽥 소리도 못하고 죽을 것 같고.

참 딱해서 그 멧돼지 왕이 한참 동안을 꾀를 내다가 호랭이 보고 "내가 잠깐 우리 선조 때부터서 내려오는 그 갑옷이 있으니 내가 그 갑옷을 입고 나와 가지고 내가 한바탕 당신하고 해볼 양이니, 내 갑옷 입은 것이 무서우면 당신이 먼저 길을 비켜서 먼저 가고, 나하고 기어코 한바탕 해볼 생각이 있으면 내가 갑옷 입을 때까지 잠깐 기달려 주오" 그러니까,
호랭이가 지까짓 놈이 갑옷 아니라 별것을 입고 온들 그까짓 것 문제가 없으니까 "갑옷 입고 나올테면 입고 나와 보라"고 하니까.

멧돼지란 놈이 꿀꿀거리면서 어디를 가더니 사람 똥항 속에 풍 들어가서 허우적허우적하면서 온 몸뚱이에다가 똥을 잔뜩 쳐바르고 나와 가지고는 "자 덤빌라면 한번 덤벼보라"
그러니까 호랭이란 놈이 저놈이 갑옷이라더니 어디서 똥을 뒤집어쓰고 나와 가지고 "야! 그것이 네 선조 때부터서 내려오는 갑옷이냐? 에이, 더러운 놈의 자석. 나 너하고 싸움 안 할 테니까 빨리 꺼져라 이 자식아!"

그래 가지고 그 멧돼지가 그 꾀는 참 비루하고 추잡한 꾀를 냈지만 영락없이 호랭이를 싸우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저는 그리고서 부하 앞에서 "아! 내가 나의 이 지혜로써 저 건방진 놈을 내가 물리쳤다"고 아주 뻐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번연히 대왕님의 생각이 틀리고, 그 성현의 말씀이 옳고 내 말이 옳은데도, 그 신하들이 창피하다고 해서 그 자기의 잘못된 소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똥을 뒤집어쓰고 나와 가지고 호랭이 보고 물러서라고 한 것과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임금님이 참 너무 부끄럽게 생각을 하고 이 동곳을 빼고 그 존자 앞에 항복을 했습니다.

이것은 참, 한 설화(說話)입니다마는 이게 중아함경(中阿含經)에 나오는 부처님의 설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선입관(先入觀)이 있습니다.
정치가나 법률가나 학자나 또는 실업가나 또는 뭐 무역이나 장사하는 사람, 모든 사람, 심지어 구두를 닦는 사람은 구두를 닦는 사람, 또 구들을 놓는 사람은 구들 놓는 사람, 목수, 미쟁이 무엇을 하든지, 남 보면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마는 자기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의 일가지견(一家之見)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 사부대중이 모다 모이셨습니다마는 당신 나름대로 다 경도 보고, 기도도 해 보고, 염불도 해 보고, 또 주력도 해 보고, 또 참선도 해 보고, 그래 가지고 각기 일가지견이 자기 나름대로 있습니다.
다 해 봐 가지고 '참선은 이러한 것이다' '염불은 이런 것이다' '불법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다 자기 소견(所見)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비사왕처럼 딱 자기 소견이 있어 가지고 여간해서 그것을 버리지를 않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러한 선입관에 국집(局執)이 되어 가지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불법은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서도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한 생각만 가져도 벌써 그것이 미(迷)한 것인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거나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 이런 성과(聖果)를 얻어 가지고서도 ‘내가 이러한 성과를 얻었다’ 하는 생각을 내면, 벌써 그것이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어서 그것이 참다운 도에 들어간 것이 아닌데, 깨달음에 들어간 것도 아닌 그밖에 다른 생각에 국집을 한다면 그것은 참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것입니다.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그러한 국집을 버리는 것이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이여.
우리 중생은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치(我癡), 이것이 우리 중생 그 제7식(七識)의 본업(本業)인데, 그놈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잘한다’ ‘내가 옳다’ 이러한 아애 · 아만 · 아치, 이것 때문에 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기의 국집을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을 ‘자기의 주관을 버리라’ ‘자기의 주체의식을 버리라’ 이러한 말과 혼동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한국 국민은 한국 국민으로서의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고, 내가 어떠한 사업을 하니 무엇을 하는 데 있어서도 확고한 주관이 서야지요.

하지만 도(道)에 있어서의 그 선입관, 선입관이 딱 가로막고 있으면 어떠한 선지식(善知識)의 말을 들어도 먹혀 들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까 이 비사왕이 그러한 삿된 소견을 국집을 해 가지고 그렇게 존자가 알아듣겄게 얘기를 해 주어도 거기에 항복을 하지 아니하고 믿지 않을려고 한 것처럼, 다행이 이런 가섭존자와 같은 그러한 참 그 변재(辯才)가 무궁무진한 그리고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이런 훌륭한 도인을 만나서 결국은 항복은 해서 다행입니다마는, 우리도 어쨌든지 그러한 사견(邪見)에 빠져 가지고 정법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17분9초~37분13초)





(3/4)----------------

동풍취락행화지(東風吹落杏花枝)한데  천리홍향재하처(千里紅香在何處)인고
나무~아미타불~
태양문하무성월(太陽門下無星月)이요  천자전리무빈아(天子殿裏無貧兒)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동풍취락행화지(東風吹落杏花枝)하니, 동풍, 봄바람을 동풍(東風)이라고 그러지요. 동풍이 불어서 은행나무 은행꽃을 다 떨어트렸다 그 말이여.
천리홍향(千里紅香)이 재하처(在何處)냐? 천리에 붉은 꽃향기가 어디에 있겠느냐?

동풍이 잘 불었을 때는 그 백화가 피고 모다 향기를 풍기고 그러다가 아주 심한 강한 동풍이 냅다 불어대니까 행화(杏花)도 복숭아꽃도 떨어져버리고 온갖 울긋불긋한 좋은 꽃도 다 떨어져버렸다 그 말이여.

태양문하(太陽門下)에 무성월(無星月)이요. 태양이 없을 때 밤에는 별도 반짝거리고 달도 밝고 그랬었는데, 동천에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니까 번쩍거리던 별도 간 곳이 없고, 그렇게 휘황찬 달빛도 무색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천자전리(天子殿裏)에 무빈아(無貧兒)로구나. 천자(天子)의 궁전 속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더라. 거지가 없더라.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여. 그 얼굴 생긴 것이 천 명이 모이면 천 명이 다 다르고, 만 명이 모이면 만 명이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어.
그만큼 중생의 근기도 또 차이가 있어서 성격도 다르고, 근기도 다르고, 지혜 있고 어리석은 것도 다르고, 복이 있고 없는 것도 다르고 그렇게 다른데.

그래서 우리가 지은 업(業)도 천차만별이여. 그래서 소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그래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모다 잘난 맛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잘난 맛이 없고, '나는 참 못났다' '나는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다' 이렇게 비관을 하기 시작하면 참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리고, 뭐 그냥 자살할 생각밖에 안 날 것입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그래도 자기 잘난 맛으로 그 재미로 그래도 이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는 중생이 그리고 이 생활 의욕을 가지고 또 이렇게 자기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모다 그 살아볼라고 애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참 다행한 일이지요.
쓰레기를 줍건, 똥을 푸건, 짐을 나르건, 무슨 직업을 가지건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충실히 하면서, 그 직업이 힘만 들고 돈은 많이 못 벌지라도 그래도 그 자기의 직업을 참 소중히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서 충실히 하고 그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밤하늘에 온 창공에 수천 수백만의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에다가 비유할 수가 있지요. 그 별 나름대로 다 속삭임이 있고, 별 나름대로의 그거 자체를 유지해 나가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 밤하늘에 그렇게 크고 작은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한번 터억 동천(東天)에 홰를 치고 떠오르는 날에는 그 별들이 간 곳이 없어.

이것은 각기 자기의 업에 따라서, 자기의 전생에 지은 분복(分福)에 따라서 그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한 일이나 거기에서 정법(正法)을 믿는, 그 정법이 한번 그 자기의 마음속에 탁! 파고들어 가면—큰 별이나 작은 별이나 무슨 별을 막론하고, 또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정법을 한번 탁! 접해 가지고 딱! 믿게 되면 마치 온 허공에 태양이 뜬 것과 같다 이거거든.
가난한 사람도 이 정법을 철저히 믿고 난 때부터서는 가난한 것이 아니요. 악한 짓을 많이 한 죄인도 정법을 듣고 믿고 실천하게 된 바로 그 시간부터서는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정법은 이 태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천자의 궁궐 안에는, 거지가 어떻게 천자의 궁궐 안에 거지가 가난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아서 정법을 한번 믿어버리면, 믿고 그것을 실천한 바로 그 시간부터서 그 사람은 바로 천자의 궁궐 속에서 살고 있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법문에는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의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그 팔만사천 가지의 방편법(方便法)인데, 부득이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부득이해서 그런 방편설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마디 한마디가 다 주옥(珠玉) 같은 말씀이고 주옥 같은 법이기는 하지만, 그 방편은 궁극에 가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알아듣게 하기 위한, 최상승법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는 그 방편으로 인해서 불법을 믿게 되었고 불법에 인연을 걸게 되었으나, 일단 불법에 인연을 걸었으면은 하루빨리 그 방편법에서 그 방편법을 발판으로 해서 최상승법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이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참선법은 이것은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점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모든 학문은 차례차례 해 가지고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차츰차츰 깊은 데에까지 들어가는 것인데, 이 최상승법은 그런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신(信)이 투철하고 그 용맹이 투철하면 3일, 일언지하(一言之下)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영랑신선은 3일 만에 견성(見性)을 했어. 역대조사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언하(言下)에 확철대오한 분이 수없이 많습니다.

물론 저 긴 눈으로 보면 언하에 대오한 분은 숙세(宿世)에 그만큼 닦았기 때문에 금생에 또 그렇게 3일에도 깨닫고, 7일에도 깨닫고, 뭐 언하에도 깨닫게도 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과거 전생 일을 모르니 전생에 우리가 얼마만큼 닦았는가 확실한 것은 모르지요? 모르나, 금생에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그래 가지고 이렇게 최상승 법문을 듣게 된 걸로 보면, 천하 없이도 우리는 저 전생 저 전생부터서 이 정법에 깊은 인연을 맺고 씨를 심어놨던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정말 투철한 신심과 투철한 용맹으로 바르게 공부만 한다면 우리도 언하에 진리의 눈을 뜰 수도 있고, 3일이나 7일이나 석 달에도 확철대오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시작한 지 3년이 넘고, 10년이 넘고, 20년, 30년이 되어도 별 뾰족한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은 반드시 그 신심(信心)이 약하거나 분심(憤心)이 약하거나 또는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거나, 방법은 틀리지 않았어도 신심과 분심이 약해 가지고 그렇다면 그러니 끝장이 안 나겠지요?

솥에다가 무슨 아주 그 뭐 질기고 굳은 어떤 음식을 넣어놓고 불을 때는데, 그 장작을 갖다가 잘 지펴서 뜨끈뜨끈하게 지펴야 그놈이 인자 솥에 물이 끓고 속에 음식이 무를 텐데, 계속 앉아서 성냥개비 같은 것을 놓고 볼볼볼볼 태운다든지, 솔 이파리를 갖다가 하나씩 하나씩 태우고 앉았다면—그것은 틀림없이 솔 이파리나 성냥개비도 그것이 목질(木質)이니까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고, 누가 보든지 그 불 땐다고 하지 '불 안 땐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그 솔 이파리 하나씩 하나씩 때 가지고 그것이 솥에 것이 끓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참선을 하면서도 분명이 이렇게 앉아서, 떠억 버티고 앉아서 ‘이뭣고?’ 하고, 그거 남 보면 분명히 참선이지 그거 참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이 그 신심이 간절하고 그 용맹심(勇猛心)이 투철하고 그러지 아니하면, 그냥 ‘이뭣고?’
‘이뭣고?’ 한 번만 해도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것보다 낫다니까, ‘이뭣고?’(하면서) 거 생각할 것 다 생각하고, 먹을 것 다 먹고, 시비할 것 다 시비하고, 욕심 챙길 것 다 욕심 챙기고, 할 것은 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가끔 한 번씩 ‘이뭣고?’ 그래 갖고 '나 참선을 30년이나 했는데 별 소식이 없다'고.
그거 솔 이파리 하나씩 둘씩 꼬실라 갖고 솥에 것이 안 무른다는 사람과 그것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어쨌든지 기왕 불법을 만났고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신다면, 그 솔잎도 그냥 한아름씩 갖다가 막 계속해서 요령 있게 부지깽이로 잘 하면서 불을 지피면 상당히 화력(火力)이 나고, 모다 성냥개비 같은 것도 그냥 짐으로 갖다가 막 싸지른다면 그것도 화력이 날 것입니다.

인자 이 말을 듣고 혹 어떤 분은 '그래! 아주 참 투철(透徹)한 신심과 아주 투철한 용맹심을 가져야 참선을 빨리 깨닫는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해볼 일이다' 해 가지고, 이를 악물고 막 그냥 눈을 까뒤집고서, 꽉! 눈썹을 갖다 찡그리면서 ‘이뭣고?’ 그래 가지고 막 허리를 펴고 어깨에다 힘을 주고서, 목에다가 그냥 힘을 주고 오기를 내 가지고 막 해 제끼는... 그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면은 며칠 못 가서 골이 뽀개질라고 아플 것이고, 눈이 생꼬막 까놓은 것처럼 벌게지면서 큰일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이 그렇게 참 좋은 것이지만, 참 이건 선지식의 바른 법문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해 가야지, 잘못하면은 참 이거 하다가 병 걸리기도 쉽고, 사견에 떨어지기도 쉽고, 까딱하면 미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삼 녹용이 참 비싸고 좋다니까 막 삶아먹고 혈압이 터져서 중풍 걸리고. 대부분 부자가 그 참! 바둑 문자에 '부자 몸조심 한다' 그러는데, 부자는 인자 돈도 많겠다. 첫째는 몸이 건강해야 되겠다 그 말이여. 그래야 그 피땀 흘려서 번 재산 참 마음껏 즐기고 그래야겠는데, 이 몸을 만들려고 이거 보약을 막 먹다가 병을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 몸을 건강히 하려면은 정력을 갖다가 왕성하게 만들어야겠다' 그래 가지고 문의를 하니까, 무슨 해구신(海狗腎)이니 뭣이니 해 가지고 무슨 아주 돈을 갖다가 몇백만 원씩 줘 가지고 그 환약을 만들어 가지고 먹었는데, 처음에는 무슨 소식이 있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그냥 막 아퍼 가지고는 그 후유증이 막 생기고 해 가지고 막 혈압이 오르고.
그리고 또 이거 녹용이 좋다니까 저 외국에서 모다 밀수해 놓은 놈을 갖다가 막 갖다 잔뜩 집어넣고 고아먹고 그래 가지고는 그냥 혈압이 뻣질러 올라 가지고 대번에 그냥 중풍이 걸려 가지고 대소변을... 그게 다 어리석은 것이거든.
보약이라 하는 것도 다 자기의 체질을 분류를 해 가지고 자기 체질에 맞는 약을 또 그 연령과 모든 오장육부를 잘 알아 가지고 적절히 써야 그것이 좋은 것이지, 덮어놓고 비싼 약 많이 먹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거든.

참선도 사람이 상기(上氣)가 잘되고, 위에로 상기가 잘 오를 체질을 가진 사람이 있고, 항상 기운이 밑으로 잘 내려가서 여간해서 기운이 오르지 아니한 체질이 있습니다.
특히 조금 뭐 한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고, 누가 말 한마디만 해도 금방 얼굴이 빨개지고 이러한 사람, 조금 뭐 충격을 받거나, 뭘 조금 연구를 하거나 하면은 금방 골이 아파지고 얼굴이 붉어지고 이런 사람은 상기(上氣)의 증상이 일어날 우려성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은 특별히 이 단전호흡(丹田呼吸)부터서 기초부터서 착실히 다져 가지고 본격적으로 참선에 들어가는 것이 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37분14초~56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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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 뭔 소리 들어봤자 뭐 상기도 되지도 않고, 뭐 며칠씩 잠을 안 자도 조금도 머리가 아프거나 그러지도 않고, 그러한 체질을 가진 사람은 단전호흡이고 뭣도 상관없이 마구잽이 처음부터서 화두를 들고 막 며칠씩 잠을 안 자고 해 제껴도 까딱도 않는 그러한 체질을 타고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뭐 단전호흡이고 뭣이고 소용이 없습니다. 막 해 제껴도 괜찮은 그런 사람은 아주 몸을 잘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런 그 본(本)을 보고서 그러한 훌륭한 체질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도 그 본 보고 막 하다가는 큰일나는 거지요.

단식 같은 것도 좋다 하니까 뭣한 사람은 한 열흘씩 굶다가도 맛있는 찰밥이나 인절미를 보고 그냥 한 사발씩 막 집어먹어 버리고도 그냥 아무렇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을 보고서 '그까짓 거 나도 한번 해 본다'고, 며칠 굶고서 식욕이 당기니까 그냥 인절미 시루떡을 갖다가 그냥 막 침도 안 바르고, 막 그냥 잔뜩 먹고는 그냥 속이 쓰리고 생트림이 올라오면서 위가 늘어져 가지고는 그래 가지고는 아주 종신(終身) 병신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단식도 잘하면은 위장병도 낫고 여러 가지 병에 참 좋은 것이지만 어리석게 하면 그거 못쓰는 거고.

참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할 최상승법이지만 이것도 참 잘못하면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하고 까딱하면 사견(邪見)에 떨어지고, 그 말만 듣고서 '아이구! 그거 참선 함부로 할 거 아니다. 좋게 그저 관세음보살이나 슬슬 부르다가 말지. 그것 잘못하다가 미치면 그거 어떻게 해'

그런 사람은 계란 짐 짊어지고 성 밑에 못 가고, 그런 사람은 배 뒤집어질까봐 평생 배 한 번 못 타보고, 비행기 떨어질까 봐서 평생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외국 한 번도 못 가고, 자동차 위험하다고 자동차 안 타고, 그렇다면 그것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비행기가 가끔 심심찮게 여기서 저기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타야 할 때는 타야 하는 거고, 그러면 비행기 안 타고 집안에 가만히 엎졌으면 그 사람이 천세 만세 살겠습니까? 평지낙상(平地落傷)도 있고, 밥 먹고 체해서 죽기도 하고, 저녁밥 잘 먹고 자다가 죽기도 하고 그런데 뭐.


어쨌든지 세상이 이렇게 국내적으로나 또는 국제적으로나 자꾸 이렇게 과학문명은 발달을 하고, 또 사람 살기는 참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편리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편리하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되었냐 하면은 참 솔직하게 말해서 이렇게 문명이 발달되기 이전에다가 비교해서 그렇게 행복해졌다고는 좀 말하기가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 뒤숭숭하고, 참 어찌 생각하면 대단히 위험스러운 그러한 감이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이 정법에 귀의해서 정법으로써 무장을 해야겠습니다.
정법으로써 탁! 정신무장을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개인적인 일신상의 문제도 반드시 해결이 나고, 가정 문제도 해결이 나고, 국가 사회 문제도 해결이 나고, 궁극에 가서는 온 세계의 문제도 최상승법에 귀의해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써만이 궁극적인 해결이 되리라고 나는 그렇게 굳게 믿습니다. 이것은 참 어디에 가서라도 장담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틀림이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다져서 뒤로 미루지 말고, 앉았을 때, 섰을 때, 일할 때, 빨래할 때, 밥 지을 때, 차 탈 때, 속상할 때, 괴로울 때, 슬플 때,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이 한마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팔만사천 지옥을 때려 부수는 일이고, 팔만사천 마구니를 당적(當敵)해서 이겨내는 일이고, 바로 이 지상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기본인 것입니다.

행여나 그 호랭이가 무섭다고 똥항에 들어가서 똥 묻혀 갖고 나올 생각을 마시고, 정법으로 무장을 하시면 호랭이 아니라 염라대왕, 무슨 마왕(魔王) 파순(波旬)이도 이 ‘이뭣고?’ 화두 한마디로써 다 항복받을 수가 있고, 다 그러한 항복이라기보다는 전부 나한테 돌아와서 합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모레는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사월초파일.
이 법당에도 등(燈)이 가득 달려 있고, 법당 밖에도 달려 있고, 「부처님 오신 날」이 국경일로 이렇게 지정이 된 뒤로는 도회지나 산간이나 방방곡곡에 이 초파일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등(燈)이 모다 매달리고, 사람사람의 가슴에 부처님의 진리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업장(業障)을 소멸을 해서 새로운 진리의 부처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파일에 어쨌든지 모두모두 식구들이 다 손을 잡고 나오시고, 또 일가친척 가족들 또 모두모두 권고해서 다 부처님 앞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법문도 듣고, 부처님의 탄생을 축복하는 그 자체가 자기의 업장을 소멸하고 자기의 앞길을 축복받는 일이 되고, 그럼으로써 진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태자로 탄생을 하셨는데 바로 그날이 내일모레 다가오는데, 그날 막연하게 등불만을 켜고 복을 빌고, 그것도 참 소박한 의미에서 참 소박한 한 신앙으로 참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자신도 내일모레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그날을 맞이하는 것이 참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부처님이나 다름없는 구원겁(久遠劫) 전에 다 성불(成佛)한 그런 법신(法身)인 것입니다마는, 까닭없이 우리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떠한 원인으로 해서 그냥 무명(無明)으로 덮여 가지고 그냥 이렇게 까막눈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렇게 참 범부(凡夫)로서 이렇게 노릇을 하고 있는데, 내일모레를 기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하루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 오신 날」을 욕불일(浴佛日)이라 그럽니다. 목욕, 목욕탕 이래서 '목욕 욕(浴)' 자, '부처 불(佛)' 자,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날이다' 그래서 욕불일이라 그러는데.
‘부처님이 탄생을 하셔서 그날 그 아홉 용(龍)이 입으로 물을 이렇게 청정한 물을 토해 가지고 목욕을 시켰다’ 인자 그렇게 설화적으로 전해 내려옵니다마는.

‘부처님이 태어나 가지고 목욕하신 날이다’ 해서 철불(鐵佛)을—쇠로 조성한 불상(佛像)을 따악 갖다가 안치해 놓고, 전 대중이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바가지로 물을 퍼 가지고 부처님께 물을 퍼 붓는 그런 행사도 옛날에는 거행했고, 지금도 또 거행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그런 행사를 안 갖습니다마는.

그 부처님께 물을 요렇게 부어서 목욕을 시켜드리는 그 행사가 부처님이 태어난 그것을 우리의 마음속에 확실히 이렇게 새겨서, 그 부처님이 바로 자기와 동일시(同一視)를 해서 자기의 몸에 자기가 그날, 부처님 탄생한 날 자기도 새로 태어나서 그 부처님 목욕시킨 그 물로 자기의 몸에 물을 부어서 목욕을 함으로써,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할 수 있는 그러한 부처가 될 것을 마음에 다지는 그러한 뜻이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철불(鐵佛)에다가 물을 붓는 행사는 안 갖지마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과 또 산승(山僧)의 말을 들음으로 해서 눈에 보이는 물로 목욕을 한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법수(法水)로써 목욕을 해 가지고, 업장을 소멸하고 청정한 몸과 청정한 마음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기약을 하는 그러한 의미로 초파일에 모두 등(燈)도 모다 잘 다시고 또 법문도 들으시고 그래서 초파일에 꼭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하고  산중채약기년간(山中採藥幾年間)고
나무~아미타불~
심심송뢰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 세속의 공명, 부귀공명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산을 원해서,
산중(山中)에 채약기년간(採藥幾年間)고, 그 산중에서 약을 캐기 그 몇 년이나 되었던가?

심심송뢰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깊고 깊은 그 솔바람 부는 안개가 자욱한 그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로구나. 한 곡 지초(芝草) 캐는 이 노래에 일만 경계가 한가롭구나.

이건 산중에 들어가서 처사(處士)가 되어 가지고 그 온갖 약초를 캐면서 그 약초를 캐서 달여 먹고, 약초를 캐 가지고 연명(延命)해 나가는 이런 약초를 캐면서 지초 캐는 노래를 갖다가 부르면서 그 한가한 거동을 읊은 시입니다.

세속이 이렇게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흥망성쇠와 빈부귀천 모다 이런 것을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 대세가 전부 그 원인을 따져보면 탐진치, 탐진치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싸움이고 전쟁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데에서 턱 벗어나 가지고 정법에 귀의(歸依)해서 도를 닦는 것, 그것을 갖다가 산중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는 데에다가 비유를 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으면 비록 세속(世俗)에서 살아도 그 세속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또 형제 간에 우애하고, 이웃지간에 화목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그러고 모든 사람을 상대할 때 사랑으로써 상대하고,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아가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생활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할라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안 되어도 세속에 살아도 바로 그것이 산중에서 도를 닦은 거와 마찬가지고, 그냥 세속에서 살아도 그 솔바람 부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시냇물 가에서 약초를 캐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그것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56분58초~1시간15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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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허공경계기사량~’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야부 게송 참고.
*풍월(風月) ; ①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②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읊거나 노래함. 또는 그 시나 노래.
*백화(百花) ; 온갖 꽃.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때 기/인연·이유·연줄 연) ; ①시기인연(時機因緣)의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것.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된 스승과 제자의 인연.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끄터리 ; '끄트머리'의 사투리.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실지(實地) ; ①실제의 처지나 경우. ②실제의 땅이나 장소.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삼생(三生) ;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하는, 전생(前生), 현생(現生), 후생(後生,來生)을 아울러 이르는 말.
*비사왕과 가섭존자의 설화 ; 『중아함경』 제16권 6.왕상응품 (71) 비사경(鞞肆經) 참고.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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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부탁(申申付託) ;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간곡하게 하는 부탁.
*똥항(똥缸 항아리 항) : 재래식 화장실(칙간)의 바닥을 파고 이를 묻어 분뇨를 저장하던 것으로 이 항아리에 분뇨가 가득 차면 똥장군 등에 퍼담아 밭에 내다 거름으로 이용하였다.
*고대광실(高臺廣室) ; '높은 누대(樓臺)와 넓은 집'이라는 뜻으로, 크고 좋은 집을 이르는 말.
*혼구녕 ; 혼꾸멍나다(魂---- '혼나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
*만조백관(滿朝百官) ;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
*설복(說伏) ; ①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아듣도록 말하거나 타일러서 수긍하게 함. ②남의 주장이나 이론을 깨뜨려 굴복하게 함.
*채신 ; ‘처신(處身, 세상살이나 대인 관계에 대해서 가지는 몸가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
*호랭이 ; ‘호랑이(虎狼-)’의 사투리.
*자석 ; 자식(子息, 남자를 욕할 때 '놈'보다 낮추어 이르는 말)의 사투리.
*뻐개다 ; 뻐기다. 얄미울 정도로 매우 우쭐대며 뽐내다.
*번연히 ; ‘번히(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이 뚜렷하고 분명하게)’의 본말.
*동곳(을) 빼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힘에) 머리를 풀어 항복을 표시한다는 뜻으로, 주장이나 뜻을 굽히고 복종하다.
*동곳 ; 상투를 튼 후에 상투가 풀어지지 않게 꽂는 물건. 금, 은, 호박, 비취 따위로 만드는데, 길이는 약 4센티미터 정도이다.
*설화(說話) ; ①어느 민족이나 집단에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 등이 있다. ②실제 있었던 일이나 만들어 낸 내용을 재미있게 꾸며서 하는 말.
*중아함경(中阿含經) ; 아함경(阿含經)의 하나. 아함(阿含)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āgama의 음사로, 전해 온 가르침이라는 뜻. 초기 불교시대에 성립된 수천의 경전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팔리(pāli) 어로 된 니카야(nikāya)가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sanskrit) 본(本)이 아가마(āgama)임.
이 아가마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아함경으로 여기에는 ①장아함경(長阿含經) ②중아함경(中阿含經) ③잡아함경(雜阿含經) ④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네 가지가 있다.
(1)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 30경. 문장의 길이가 긴 경전을 모은 것.
(2)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 222경. 문장의 길이가 중간 정도인 것을 모은 것.
(3)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 1,362경. 짧은 경전을 모은 것.
(4)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51권 471경. 사제(四諦)·육도(六度)·팔정도(八正道) 등과 같이 법수(法數)를 순서대로 분류하여 엮은 것. 이에 해당하는 니카야는 다음과 같음.

(1) 디가 니카야(dīgha-nikāya, 長部). 내용이 긴 34경을 모은 것으로 3편으로 분류되어 있음. 한역(漢譯) 장아함경에 해당함.
(2)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āya, 中部). 중간 정도 길이의 152경을 모은 것으로 약 50경씩 3편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다시 각 편은 5품으로, 각 품은 대개 10경 단위로 구성되어 있음. 한역(漢譯) 중아함경에 해당함.
(3) 상윳타 니카야(saṃyutta-nikāya, 相應部). 짧은 경전 2,875경을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배열한 것으로 전체가 5품으로 되어 있음. 한역(漢譯) 잡아함경에 해당함.
(4) 앙굿타라 니카야(aṅguttara-nikāya, 增支部). 2,198경이 법수(法數)에 따라 1법에서 11법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음. 한역(漢譯) 증일아함경에 해당함.
(5) 쿳다카 니카야(khuddaka-nikāya, 小部). 법구경·경집·본생담 등 15경으로 구성되어 있음.
*선입관(先入觀) ;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고정 관념이나 견해.
*일가지견(一家之見) ; 일가견(一家見). 어떤 일에 관하여 일정한 경지에 오른 안목이나 견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의 음사(音寫). 예류(預流) · 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 · 입류하고 함.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 · 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 · 예류향(預流向)이라 함.
초기불교에서 성문(聲聞)으로서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견혹(見惑)—①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급취견(戒禁取見)·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사다함(斯陀含) ; 산스크리트어 sakṛd-āgāmin 팔리어 sakad-āgāmin의 음사(音寫). 일래(一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성자. 그러나 이 성자는 그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인간계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래(一來)라고 함.
이 경지를 사다함과(斯陀含果)·일래과(一來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사다함향(斯陀含向)·일래향(一來向)이라 함.
[수혹(修惑)—① 수도(修道)에서 끊는 번뇌라는 뜻.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는 욕계에 탐(貪)·진(瞋)·치(癡)·만(慢), 색계와 무색계에 각각 탐(貪)·치(癡)·만(慢)의 열 가지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번뇌, 곧 구생기(俱生起)를 말함.]
*아나함(阿那含)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anāgāmin의 음사(音寫). 불환(不還)·불래(不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완전히 끊은 성자. 이 성자는 색계·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환(不還)이라 함.
이 경지를 아나함과(阿那含果)·불환과(不還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나함향(阿那含向)·불환향(不還向)이라 함.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어 arhat의 주격 arhan의 음사(音寫).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賊)·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하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賊),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① 성문(聲聞)들 가운데 최고의 성자. 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하였으며, 해야 할 바를 다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② 존경받을 만한 불제자.
③ 고대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를 일컫는 말.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자의식.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인상(人相) ; 산스크리트어 pudgala-saṃjñā 인간이라는 관념·생각.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생각. 생명체라는 관념·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아애(我愛) ; 자아에 대한 애착심.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스스로를 높여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①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신체에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 자신을 과대 평가함.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자아(自我)를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로, 의(意)라고 번역.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意)라 하지 않고 말나(末那)라고 한다.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으로, 항상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함께 일어남.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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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東風吹落杏花枝 千里紅香在何處’ ; 『선원몽구요림(禪苑蒙求瑤林)』 설당간공(雪堂諫公) 게송 참고.
*(게송) ‘太陽門下無星月 天子殿裏無貧兒’ ; 『전등록』 권16 ‘홍주건창봉서산(洪州建昌鳳棲山) 동안(同安) 화상’ 참고.
*냅다 ; 몹시 빠르고 세찬 모양.
*천자(天子) ;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제국의 군주를 이르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또는 왕(王)이라고 하였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천차만별(千差萬別) ; 여러 가지 사물이 모두 차이가 있고 구별이 있음. 세상 사물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각각 모습ㆍ모양이 다름을 이르는 말. ‘온갖 차별이 있는 모양·경계’의 뜻. 모든 경계.
*분복(分福 운명 분/복 복) ; 선천적으로 타고난 복.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주옥(珠玉) ; ①구슬과 옥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아름답고 귀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꼬실르다 ; 그슬다. (사람이 불에 물건을)겉만 조금 타게 하다.
*부지깽이 ; 아궁이 따위에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거두어 넣거나 끌어내는 데 쓰이는 가느다란 막대기.
*화력(火力) ; 불의 힘. 또는 불에서 얻은 열의 힘.
*투철하다(透徹--) ; ①(정신이나 자세가)매우 철저하다. ②(주장이나 판단이)사리에 맞고 정확하다.
*부자 몸조심 한다 ; 바둑에서 쓰는 용어로 바둑을 두면서 형세판단을 해 보니 내가 유리하여 상대방의 싸움을 피하면서 소극적으로 물러나면서 조심하다가 결국에는 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형편이 좋은 것을 유지할려는 것이 도리어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해구신(海狗腎) ; 수컷 물개의 생식기. 강정제로 쓰인다.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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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다(本--) ; (사람이 대상을)모범으로 삼아 그대로 따라 하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심심찮다 ; (흔히 ‘심심찮게’ 꼴로 쓰여) 드물지 않고 꽤 잦다.
*평지낙상(平地落傷) ; '평지에서 넘어져 다친다'는 뜻으로 뜻밖에 불행한 일을 겪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당적(當敵)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청정한 국토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있는데, 괴로움이 없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도 한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구원겁(久遠劫) ; 아득하게 멀고 오랜 옛날.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신(法身)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기신론(起信論)>에 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수(法水) ; 중생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 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물에 비유한 말.
*(게송) ‘불원공명단원산~’ ; [경허집(鏡虛集)] ‘次採藥商趙氏韻(채약상 조씨 차운)’ 참고.
*처사(處士) ; ①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② 속인(俗人)으로서 임시로 절에 머무는 남자.
*연명(延命)하다 ; (사람이)목숨을 근근이 이어 가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세속(世俗) ; 속세(俗世). 불가(佛家)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법문 내용]

(게송)허공경계기사량~ / 영랑신선을 제도한 원효스님 / 불법(佛法)은 신통 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는 것을 근본으로 안 삼는다 / 일장춘몽(一場春夢) / 유루복(有漏福) / 인간 세상에 부귀영화는 달팽이 뿔 / 비사왕과 가섭존자의 설화 ; 『중아함경』 제16권 6.왕상응품 (71) 비사경(鞞肆經).

가섭존자의 천당, 지옥 비유 / 새끼 타래와 은전, 금전의 비유 / 맷돼지 왕의 똥 갑옷 비유 / 중생은 선입관에 국집(局執)이 되어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한다 /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국집을 버리는 것.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

(게송)동풍취락행화지~ /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 그래서 우리가 지은 업(業)도 천차만별 / 정법을 한번 접해 믿게 되면 마치 온 허공에 태양이 뜬 것과 같다. 바로 천자의 궁궐 속에서 살고 있게 되는 거와 같다 / 방편설인 팔만대장경을 발판으로 해서 최상승법, 참선법(參禪法)으로 들어와야 한다 / 참선법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투철한 신심과 투철한 용맹으로 선지식의 바른 법문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공부만 한다면 우리도 언하에 진리의 눈을 뜰 수도 있고, 3일이나 7일이나 석 달에도 확철대오할 수가 있을 것이다 / 솥에 불 때는 비유 / 상기(上氣)와 단전호흡.

참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할 최상승법이지만 이것도 잘못하면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 정법으로써 정신무장을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 ‘이뭣고∼?’ 이 한마디가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팔만사천 지옥을 때려 부수는 일이고, 팔만사천 마구니를 당적(當敵)해서 이겨내는 일이고, 바로 이 지상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기본 / 「부처님 오신 날」, 사월초파일 안내 / 「부처님 오신 날」,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하루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 / (게송)불원공명단원산~ /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다.


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 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현들은 그러한 인간 세상에 부귀영화를 달팽이 뿔에다가도 비교를 했습니다.

비사왕과 가섭존자의 설화 ; 『중아함경』 제16권 6.왕상응품 (71) 비사경(鞞肆經)에서 가섭존자의 천당, 지옥 비유. 새끼 타래와 은전, 금전의 비유. 맷돼지 왕의 똥 갑옷 비유.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그러한 국집을 버리는 것이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이여.
우리 중생은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치(我癡), 이것이 우리 중생 그 제7식(七識)의 본업(本業)인데, 그놈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잘한다’ ‘내가 옳다’ 이러한 아애 · 아만 · 아치, 이것 때문에 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기의 국집을 버려야 합니다.

각기 자기의 업에 따라서, 자기의 전생에 지은 분복(分福)에 따라서 그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한 일이나 거기에서 정법(正法)을 믿는, 그 정법이 한번 그 자기의 마음속에 탁! 파고들어 가면—큰 별이나 작은 별이나 무슨 별을 막론하고, 또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정법을 한번 탁! 접해 가지고 딱! 믿게 되면 마치 온 허공에 태양이 뜬 것과 같다 이거거든.
가난한 사람도 이 정법을 철저히 믿고 난 때부터서는 가난한 것이 아니요. 악한 짓을 많이 한 죄인도 정법을 듣고 믿고 실천하게 된 바로 그 시간부터서는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정법은 이 태양과 같은 것입니다.

참선법은 이것은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점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모든 학문은 차례차례 해 가지고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차츰차츰 깊은 데에까지 들어가는 것인데, 이 최상승법은 그런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신(信)이 투철하고 그 용맹이 투철하면 3일, 일언지하(一言之下)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영랑신선은 3일 만에 견성(見性)을 했어. 역대조사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언하(言下)에 확철대오한 분이 수없이 많습니다.

솥에다가 무슨 아주 그 뭐 질기고 굳은 어떤 음식을 넣어놓고 불을 때는데, 그 장작을 갖다가 잘 지펴서 뜨끈뜨끈하게 지펴야 그놈이 인자 솥에 물이 끓고 속에 음식이 무를 텐데, 계속 앉아서 성냥개비 같은 것을 놓고 볼볼볼볼 태운다든지, 솔 이파리를 갖다가 하나씩 하나씩 태우고 앉았다면—그것은 틀림없이 솔 이파리나 성냥개비도 그것이 목질(木質)이니까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고, 누가 보든지 그 불 땐다고 하지 '불 안 땐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그 솔 이파리 하나씩 하나씩 때 가지고 그것이 솥에 것이 끓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참선을 하면서도 분명이 이렇게 앉아서, 떠억 버티고 앉아서 ‘이뭣고?’ 하고, 그거 남 보면 분명히 참선이지 그거 참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이 그 신심이 간절하고 그 용맹심(勇猛心)이 투철하고 그러지 아니하면, 그냥 ‘이뭣고?’
‘이뭣고?’ 한 번만 해도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것보다 낫다니까, ‘이뭣고?’(하면서) 거 생각할 것 다 생각하고, 먹을 것 다 먹고, 시비할 것 다 시비하고, 욕심 챙길 것 다 욕심 챙기고, 할 것은 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가끔 한 번씩 ‘이뭣고?’ 그래 갖고 '나 참선을 30년이나 했는데 별 소식이 없다'고. 그거 솔 이파리 하나씩 둘씩 꼬실라 갖고 솥에 것이 안 무른다는 사람과 그것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어쨌든지 기왕 불법을 만났고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신다면, 그 솔잎도 그냥 한아름씩 갖다가 막 계속해서 요령 있게 부지깽이로 잘 하면서 불을 지피면 상당히 화력(火力)이 나고, 모다 성냥개비 같은 것도 그냥 짐으로 갖다가 막 싸지른다면 그것도 화력이 날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다져서 뒤로 미루지 말고, 앉았을 때, 섰을 때, 일할 때, 빨래할 때, 밥 지을 때, 차 탈 때, 속상할 때, 괴로울 때, 슬플 때,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이 한마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팔만사천 지옥을 때려 부수는 일이고, 팔만사천 마구니를 당적(當敵)해서 이겨내는 일이고, 바로 이 지상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기본인 것입니다.
행여나 그 호랭이가 무섭다고 똥항에 들어가서 똥 묻혀 갖고 나올 생각을 마시고, 정법으로 무장을 하시면 호랭이 아니라 염라대왕, 무슨 마왕(魔王) 파순(波旬)이도 이 ‘이뭣고?’ 화두 한마디로써 다 항복받을 수가 있고, 다 그러한 항복이라기보다는 전부 나한테 돌아와서 합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이나 다름없는 구원겁(久遠劫) 전에 다 성불(成佛)한 그런 법신(法身)인 것입니다마는, 까닭없이 우리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떠한 원인으로 해서 그냥 무명(無明)으로 덮여 가지고 그냥 이렇게 까막눈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렇게 참 범부(凡夫)로서 이렇게 노릇을 하고 있는데, 내일모레 「부처님 오신 날」, 사월초파일을 기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하루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으면 비록 세속(世俗)에서 살아도 그 세속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또 형제 간에 우애하고, 이웃지간에 화목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그러고 모든 사람을 상대할 때 사랑으로써 상대하고,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아가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생활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할라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안 되어도 세속에 살아도 바로 그것이 산중에서 도를 닦은 거와 마찬가지고, 그냥 세속에서 살아도 그 솔바람 부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시냇물 가에서 약초를 캐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그것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