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01~325)2021. 4. 14. 08:11

((No.325))—1987년 동안거 해제 법회(87.02.12) (37분)

 

 

(1) 약 19분.

 

(2) 약 18분.

 


(1)------------------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동념무비생사근(動念無非生死根)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인댄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마음 일으키면,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면 무슨 생각이건 다 윤회(輪廻)의 업(業)에 속하고.
착한 생각이나 악한 생각이나, 과거 · 현재 · 미래 · 선악(善惡) · 시비(是非) 일체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모두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근본이 되고.
동념(動念)이 무비생사근(無非生死根)이다. 생각이 동(動)하면 다 생사(生死)의 근원이 아닌 것이 없더라.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인댄, 태허(太虛), 저 허공과 같이, 저 허공과 더불어 향배(向背)가 없고자 하거든—향배는 향(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고, 배(背)는 서로 등지는 것인데, 허공과 더불어 향하고 등지고 할 것이 없고자 하면,
일체처(一切處)에 걸림이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기를 바래거든,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다. 항상 한덩어리 쇠 뭉텅이를 통채 삼킨 것처럼 할지니라.

음식을 먹다가 조그만한 덩어리 하나만 넘어가도 그놈이 목에 딱 걸리면 끌끌하고 종일토록 생트림이 나고 속이 답답하고 거북한데, 쇠 뭉텅이를 꿀떡 삼켜 놨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냐 그 말이여.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하고 트림을 해도 불편하고, 그것이 삭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매우 거북하고 불편한 것이여.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것처럼 하라. 그래야 마침내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수행자가 본참공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항상 놓치지 아니하고 앉아서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요, 일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체처 일체시 희로애락(喜怒哀樂),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알 수가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병인년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解制)를 맞이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산승(山僧)이 더 거기에 덧붙여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하면 여기 용화선원 선방에 스님네나 보살님네, 그리고 또 용주사 중앙선원, 또 저기 태화산 봉곡사 태화선원, 모다 인근에 모다 선원에서 온 비구니 선객들, 여기에 모두가 다 참석을 했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하면 다시 또 걸망을 지고 또 어느 선방 또 어느 회상(會上), 어느 선지식(善知識), 어느 도반(道伴)을 찾아서 또 행각(行脚)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행각을 하는 그 걸음걸음,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그 거북한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겠느냐?
고인(古人)은 '부모상(父母喪)을 당한 상자(喪者)처럼, 깨닫기 전에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고, 깨달은 뒤에 수행도 또 부모상을 당한 초상(初喪) 그 상인(喪人)처럼, 상제(喪制)처럼 그런 마음으로 하라' 이런 말씀도 있는데, 지금 '쇠 뭉텅이, 쇳덩어리를 삼킨 사람처럼 하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지 않고서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쇠 뭉텅이를 어쩌다 꿀떡 삼켜 놨으니 무엇이 딴생각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맛 거북해서, 앉으나 서나 거북하고 불안하고 하듯이, 앞도 맥히고 뒤도 맥히고 언제 전후좌우(前後左右)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고, 딴생각을 잠시도 할 겨를이 없이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 그 의단(疑團)만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러한 자세,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일분일초를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라 이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 나가다가 또 얼마 안 지내면은 또 산철 결제를 하게 되고 그런데, 결제(結制) 중에는 모두 여러 도반들이 모여서 규칙적으로 시간 생활을 하니까 개인적인 일체 자유행동이 허락이 되지 아니하므로 정진(精進)을 열심히 할 수밖에는 없으나, 해제를 하면 각자 자유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 이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 도반(道伴)들에게 이 게송, 고인(古人)의 게송 한마디를 읊어드렸습니다.


'공부를,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사 금생에 정진을 해서 그 깨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여간한 큰 참! 이 도력, 법력(法力)과 도력(道力), 그 정진 수행력을 갖지 않고서는 '입(入)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 또 태에서 나올 때 그렇게 참 매(昧)하기가 쉽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입태 · 출태라 하는 게 우리의 현실, 꼭 이 생사(生死)를 갖다가 이 육체가 죽으면, 이 육체에다가 기준을 두어가지고 육체가 움직이지 않게 되고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 하고, 새로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하는 것을 생(生)이라고 보통은 그렇게 얘기하지만.
더 정밀하게 이 생사를 논(論)하자면,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난 것이 바로 생(生)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 생각도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멸(生滅)이 있으니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生死)인데.
이 몸뚱이 죽을 때 숨 딱! 끊어진 것을 '입적(入寂)을 했다' 그러고, 그 바로 그때를 갖다가 임종(臨終)이라 그러는데, 우리가 이 몸뚱이는 아직 죽지 않고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생각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 생각에 있어서의 기멸(起滅), 염기염멸(念起念滅) 이것을 생사(生死)라고 본다면, 그러면 그 입태(入胎) · 출태(出胎)를 어떻게 볼 것이냐?

우리가 눈으로 어떠한 색상을 봄으로 해서 우리가 안식(眼識)이 생기고, 귀, 이근(耳根)으로 그 성진(聲塵), 어떠한 밖에 소리를 들으면 거기서 '아, 저게 무슨 소리다' 이렇게 해서 이식(耳識)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한 생각이 육근을 통해서, 육근 중에 어느 한 기관을 통해서 딱! 한 생각 일어나면[念起] 그것이 새로 태어난 거고,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이 염멸(念滅)이고, 그것이 죽음인데.

그 어떠한 경우를 만나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려고 한—탁! 대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접해 가지고 거기에 어떠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경과해 가지고 결국은 구체적인 생각이 동(動)하고, 또 생각이 동한 다음에는 그것이 육체적으로, 그 육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겠는데.

그 미세한 아주 정미(精微)로운 그 생각이,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 가지고 육식(六識)이 날 그 쫌(짬)이 바로 입태(入胎)고, 그것이 그 생각이 또 없어지면 인자 구체적으로 발표가 되면 그것이 인자 출태(出胎)고.
태(胎)에 나와 가지고 한평생을 사는 것은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했다가 그것이 꺼지게 되면은 다시 인자 또 입적(入寂)을 해 가지고 입태 · 출태 이렇게 되는데.

그 우리의 육체가 한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몸을 받기 이전까지의 상태가 우리 '중음신(中陰身)이라', 또는 인자 '영혼(靈魂)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다가,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는 시간이 사람에 따라서 죽자마자 태어나기도 하고, 49재를 지나 가지고 또 다른 데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백일 동안 중음신으로 있다가 또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소상(小祥) · 대상(大祥)을 지나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50년 내지 백 년까지도 새로운 몸을 받아나지 못하고 중음신으로 자기 집이나 일가 친척으로 이렇게 전전해 가면서 이 허공 속에 왕래(往來)하면서 이렇게 인자 중음신으로 그렇게 있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다니다가 인연 따라서 새로운 그 숙주(宿主), 자기가 잉태할 그 모태를 찾아 가지고 거기 인자 태중(胎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태 · 출태라고 하는 것은, 그때에 입태 · 출태하기 전까지는 자기의 정신이, 이를테면은 수행한, 수행해서 깨달은 그 경지가 고대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수행력이 있는 사람은.
있는데, 그 출태할 그 찰나에 미(迷)해 버리고, 또 출태할 때까지도 안 미(迷)했던 사람이... 아, 입태할 때까지도 미(迷)하지 않은 사람이 출태하다가 탁 매(昧)해 버리고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앉아 있는 동안에는 다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하는데, 화두가 그렇게 고대로 의단(疑團)이 있는데, 일어서다가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또 뭔 소리가, 큰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면 그 소리 때문에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내동 여태까지 정진을 잘하다가 그렇게 해서 새로운 어떠한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새로운 육진(六塵)이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가해 오면 그 육식(六識)이 일어나면서 그 화두를 놓쳐버리는 것을 우리는 항상 느낄 수가 있습니다.(처음~18분29초)




(2)------------------

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인 그런 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그래 가지고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그래 가지고 더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그 의단이 커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 결국은 통 밑구녘 빠지듯이 그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결국은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는데.

그 새로운 어떠한 경지, 사건이 일어날 때 흔히 우리는 화두(話頭)를 놓쳐버리는데, 그렇지 않게 되고, 앉았을 때 들었던 화두가 서도 상관이 없고, 무엇을 눈으로 보아도 그 화두가 달아나지 않고, 무엇을 들어도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생각 생각이 걸음걸음이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간다면,
이 몸뚱이를 설사 버리고 죽게 되더라도, 마지막 끙끙 앓다가 결국은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은 인자 죽게 되는데,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러한 혹독하고도 심한 그런 고통,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터억 그 화두가 독로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지 않고서는 참 어렵다고 그럽니다.
내가 그러한 경지, 수없이 많이 죽었다 태어났다 했겠지만 전생사(前生事)는 그저 잊어버리고 우리는 기억을 해내지를 못해서 그럽니다마는, 정말 그 마지막 숨 끊어질라고 할 때의 그 고통은 그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이라든지 몸부림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 임종(臨終)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임종을, 마지막 임종을 잘하기 위해서, 정말 그때 참 잘하기 위해서 일생 동안을 공부를 한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스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종할 때에 그 수망각란(手忙脚亂)하고, 그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정신을 채리지를 못한 채 숨을 거두게 되면, 그건 물어볼 것도 없이 입태(入胎)에도 매(昧)하게 되고 입태에 매한 사람이 출태(出胎)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래서 옛날부터 다 훌륭한 그 수행인들도 임종할 때에 선지식(善知識)의 보살핌 속에서 숨을 거두기를 바래고, 또 선지식은 바래지 못하더라도 참 그 수행력(修行力) 있는 도반이 옆에서 임종을 지켜주고, 또 정신을 차리도록 일깨워 줄 수 있는 그러한 도반 만나기를 그렇게 원(願)을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무량겁을 그런 미몽(迷夢) 속에서 자기 본성(本性)을 미(迷)해 버린 상태에서 윤회를 거듭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해제를 해 가지고 산문(山門)을 나가셔서 어디 어느 산, 어느 골짜구니, 어느 도량(道場)을 가시더라도 걸음걸음이 그러한 자세, 쇠 뭉텅이를 꿀떡 삼킨 그러한 마음가짐, 그러한 그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신다면, 바로 옮기신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도반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선지식(善知識)이 항상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치 해제 날에 49재 천도를 맞이한 영가(靈駕)도 몇 분이 계십니다마는, 그 영가가 일평생 동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 공부도 잘하고, 또 좋은 직장도 가지고, 한평생 악한 일 하지 아니하고, 가족을 위해서 또 자기가 소속한 회사나 직장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은 사바(娑婆)의 인연이 다해서 이승을 하직한 영가들입니다.
영가는 다행히 이 용화선원에, 법보선원에 인연이 있어서 여기에서 이 해제 날, 정진(精進)을 하시던 여러 선원(禪院)에 참 청정한 수행한 스님네들의 그 해제(解制) 법회(法會)에 49재 천도식(薦度式)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필시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법회에 그 영가의 몸으로 이 49재에 참석을 했다 할지라도 살아 있는 몸으로 참가하나 조끔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업(業)의 몸뚱이를 벗어버린, 참 걸림이 없는 그 영혼으로 참석을 했음으로 해서, 이 법문(法門)을 몸을 가진 사람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참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가(靈駕)는 자기가 이 생에 못다 한 한(恨)도 있을 것이고, 또 부모나 처자권속에 대한 미련도 응당 있을 터이나, 그러한 생각—자기가 못다 한 한(恨) 또는 부모자식이나 가족, 유족(遺族)에 대한 미련 이런 것은 현재 영가의 몸으로서는 추호(秋毫)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미련을 가졌다고 해서 자기의 미결(未決)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 처자권속이 영가가 염려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니 만큼.

깨끗하게 다—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이 자리에 49재 법요식(法要式)을 받게 됨으로 해서 다 놔버리고,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이 법보단(法寶壇)에서 새로운 몸을 받아날 때까지 안주(安住)를 하시다가, 그동안에 많은 축원과 많은 법문을 듣고서 정말 무량겁 업(業)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청정한 몸으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또는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유족들은 정말 그 영가가 생존시에 그분 한 분을 의지해서 다 처자권속이 다 생활을 영위해 나오다가, 그 가장(家長)을 잃어버린 슬픔을 무엇에다 비유할 수가 없겠지만, 숙세에 지은 인연이 그렇게 밖에 되지 아니한 것이라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한탄할 것도 없고, 슬퍼한다고 해도 그것이 영가를 위해서 아무 이익이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 이익이 없고, 또 자녀를 위해서도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그 유족은 참으로 영가를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믿는, 이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집안일이라든지 또는 직장에 대한 일이라든지 자녀를 키우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반드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잘살 수 있게 될 것이고, 영가도 모든 미련을 놓아버리고 좋은 곳에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유족이 너무 슬픔에 잠겨 가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러면 영가가 어떻게 그것을 보고 차마 떠날 수가 있으며, 또 주부가 그렇게 되면은 자기에 따르는 어린 자식들이 아버지 잃고 엄마까지 그런다면은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불법을 믿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정신을 차리고 부처님, 불법을 믿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더욱 철저하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참 우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고해(苦海) 중생을 위해서 감로수(甘露水)요, 희망이요, 등불로써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영원한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을—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또 인간적인 고통, 이런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굳세게 만들고 더욱 우리를 훌륭하게 만드는 좋은 채찍이요, 계기요, 관문(關門)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인(修行人)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부가 처음부터서 수월하게 화두 탄 날부터서 점점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들려 가지고 그렇게 해서 얼마 안 가면 툭 터진, 그러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 진묵겁(塵墨劫) 전에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그래 가지고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구족하신 그러한 부처님이시지만, 출가해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6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을 겪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새벽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마는.
그러한 꼭 고행(苦行)을 해야만, 고행 자체, 고행을 위한 고행은 아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면 많은 장애를 우리는 만나게 되고 많은 고통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장애를 우리가 슬기롭게, 인내심 있게 극복을 하고 해결해 나감으로 해서 우리는 더욱 신심이 굳건해지고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수행에 도(道)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가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도처에 스승이 있고, 도처에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이 계시는 것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를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나무~아미타불~

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한 가지를 더 입어.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여. 그것은,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두터운 옷을 입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말이여.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이 한 개의 화두가 명역력(明歷歷)하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이 화두가 현전(現前)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어떻게 눈을 번하니 뜨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 한 게송(偈頌)은 우리 수행인에게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간절한 게송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병인년(丙寅年) 삼동안거 해제와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게송으로써 말을 맺고자 합니다. (18분30초~36분44초) (끝)





[법문 내용]

(게송)거심진속윤회업~ /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야 /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하기 쉽다 /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사(生死)가 있다'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지 않고서는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기가 참 어렵다 / 유족은 참으로 영가를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믿는, 이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해야 /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굳세게 만들고 더욱 우리를 훌륭하게 만드는 좋은 채찍이요, 계기요, 관문(關門) / (게송)기래긱반냉첨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기를 바래거든,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다. 항상 한덩어리 쇠 뭉텅이를 통채 삼킨 것처럼 할지니라.

음식을 먹다가 조그만한 덩어리 하나만 넘어가도 그놈이 목에 딱 걸리면 끌끌하고 종일토록 생트림이 나고 속이 답답하고 거북한데, 쇠 뭉텅이를 꿀떡 삼켜 놨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냐 그 말이여.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하고 트림을 해도 불편하고, 그것이 삭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매우 거북하고 불편한 것이여.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것처럼 하라. 그래야 마침내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수행자가 본참공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항상 놓치지 아니하고 앉아서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요, 일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체처 일체시 희로애락(喜怒哀樂),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알 수가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할 것이다.

'공부를,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사 금생에 정진을 해서 그 깨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여간한 큰 참! 이 도력, 법력(法力)과 도력(道力), 그 정진 수행력을 갖지 않고서는 '입(入)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 또 태에서 나올 때 그렇게 참 매(昧)하기가 쉽다' 이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설사 버리고 죽게 되더라도, 마지막 끙끙 앓다가 결국은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은 인자 죽게 되는데,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러한 혹독하고도 심한 그런 고통,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터억 그 화두가 독로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지 않고서는 참 어렵다고 그럽니다.

해제를 해 가지고 산문(山門)을 나가셔서 어디 어느 산, 어느 골짜구니, 어느 도량(道場)을 가시더라도 걸음걸음이 그러한 자세, 쇠 뭉텅이를 꿀떡 삼킨 그러한 마음가짐, 그러한 그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신다면, 바로 옮기신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도반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선지식(善知識)이 항상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자기가 이 생에 못다 한 한(恨)도 있을 것이고, 또 부모나 처자권속에 대한 미련도 응당 있을 터이나, 그러한 생각—자기가 못다 한 한(恨) 또는 부모자식이나 가족, 유족(遺族)에 대한 미련 이런 것은 현재 영가의 몸으로서는 추호(秋毫)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미련을 가졌다고 해서 자기의 미결(未決)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 처자권속이 영가가 염려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니 만큼.

깨끗하게 다—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이 자리에 49재 법요식(法要式)을 받게 됨으로 해서 다 놔버리고,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이 법보단(法寶壇)에서 새로운 몸을 받아날 때까지 안주(安住)를 하시다가, 그동안에 많은 축원과 많은 법문을 듣고서 정말 무량겁 업(業)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청정한 몸으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또는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유족은 참으로 영가를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믿는, 이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집안일이라든지 또는 직장에 대한 일이라든지 자녀를 키우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반드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잘살 수 있게 될 것이고, 영가도 모든 미련을 놓아버리고 좋은 곳에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21. 3. 28. 08:11

((No.301))—1986년(병인년) 하안거 결제 (42분)

 

 

(1) 약 21분.

 

(2) 약 21분.

 


(1)------------------

원제상야월(猿啼霜夜月)하고  화소심원춘(花笑沁園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호호홍진리(浩浩紅塵裏)에  두두시고인(頭頭是故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제상야월(猿啼霜夜月)이요, 원숭이는 서리 친 달밤에 울고,
화소심원춘(花笑沁園春)이로구나. 꽃은 깊은 동산에 웃는구나. 꽃은 봄 동산에서 웃는구나.

호호홍진리(浩浩紅塵裏)에, 넓고 넓은 이 띠끌 속에,
두두시고인(頭頭是故人)이다. 낱낱이 이 모두가 이 고향 사람이더라.

원숭이는 서리 친 달밤에 울고, 꽃은 봄 동산에서 웃어.
이 넓고 넓은 이 홍진(紅塵) 속에, 붉은 띠끌 속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속에,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고향(故鄕) 사람이요 고향 소식(消息)이더라 그건데.


오늘 병인년(丙寅年) 하안거(夏安居) 결제일을 맞이해서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활구참선,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대한 간절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결제 날이니까 화두(話頭)를 드는 법(法), '어떻게 화두를 들어야 하나?'
화두 하나만 바로 들을 줄 알면 어디서나 공부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늘 조실 스님의 법문을 그 활구참선, 화두를 드는 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화두는 각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시삼마(是甚麽), 이 뭣고?' 화두나, 무자(無字) 화두나,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나, 무슨 화두를 들던지 그 화두를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의리(義理)로 따져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져, 다만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해야 하는데.
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나, 어느 곳 어느 때에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바로 그 곳, 그 때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은 들으면 듣는 데에 쫓아가고, 무엇을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는데, 이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무슨 색상(色相)이 눈에 보이면 보이자마자 바로 거기에서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들으면 듣는 데에 쫓아가지 말고, 그 듣는 것을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바로 그 듣는 그곳에 즉(卽)해서 자기의 공안(公案)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선방(禪房) 스님네와 또 보살선방(菩薩禪房) 보살님네, 이 안거(安居)를 하시게 되고, 또 가정에서 정진을 하신 보살님네도 계시겠습니다마는, 아직은 지금 조석(朝夕)으로는 쌀랑거리는 기운도 있고 그러나, 5월 6월로 들어가면 삼복성염(三伏盛炎)이 되어서 무척 더울 때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있고 없는 줄을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르고, 다못 화두를 들어 가고 들어 오며, 화두를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서, 석 달 동안이 어떻게 지낸 줄 모르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정(大疑情)이 돈발(頓發)한다면,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고, 밥을 먹어도 한 알도 씹은 바가 없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것입니다. 이렇게 정진(精進)을 해 가야 과연 참선을 한다고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우면 더워서 못하고 추우면 추워서 못하고, 밥이 되면 되아서 못 먹고 밥이 질면 질어서 못 먹고, 반찬이 짜면 짜다 못 먹고, 싱거우면 싱거워서 못 먹고, 낱낱이 그러한 주변 경계(境界)에 끄달리게 되고 흔들림을 받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몰록 발(發)하지를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모든 경계가 눈에 들어오고 귀로 들어오고 몸으로 들어오고 마음으로 들어와서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석 달을 지낸들, 또 30년을 지낸들, 내지 일생을 지낸들 어떻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그 시자(侍者)를 지낸 아란존자(阿難尊者)는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 태어나서, 아란존자가 스물다섯에 출가(出家)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시운다섯(55세)이시고 아란존자는 스물다섯에 출가했는데, 그 아란존자는 속가(俗家)로는 부처님 사촌동생이시고, 출가해 가지고서는 부처님 제자가 되셨는데,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설하신 모든 법문(法門)을 한 귀절도 빠짐없이 조르르르 다 기억을 해서 부처님 열반(涅槃)하신 뒤 제일회(第一會) 결집(結集)을 할 때, 아란존자가 그 부처님의 법문을 전부 외어서 그래 가지고 그 결집을 했던 것입니다.

그 아란존자(阿難尊者)는 과연 어떻게 해서 그렇게 기억력(記憶力)이 좋아 가지고 부처님 일대(一代) 소설(所說)을 다 그렇게 외워 바칠 수가 있느냐 하면,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실 때에 얼마만큼 골똘하게 정성스럽게 청법(聽法)을 했냐?' 좋은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아란존자가 등창이 났었는데 기파(耆婆) 대감이 그 등창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술을 하기 위해서 아란존자를 기둥에다가 묶어 매고 여러 사람이 팔다리를 잡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란존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그 묶지 말고 그냥 수술을 해도 좋다고 하니까, 기파 대감은, "도저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칼로 등을 째는데 아무리 참을라고 한다고 해서 그 아픈 것을 참을 수가 없고, 몸을 움직이게 되면은 수술하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으니까 묶어 매야 합니다" 헌게,
"묶어 매지 말고, 내가 부처님 설법하실 때, 부처님 설법(說法)을 들을 때에 그때 내 등을 수술을 하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파 대감이 부처님 설법할 때에 아란존자 등으로 가서 그 등 수술을 마쳤습니다.
법문이 다 끝난 다음에 아란존자가 기파 대감을 향해서, "아, 내가 법문 들을 때 수술을 하라고 했는데 왜 수술을 안 했소?" 하고 물어보니까, "수술은 이미 해 마쳤습니다" 헌게, "아, 그래야" 하고.
얼마나 골똘하게 부처님 법문을 들었으면, 칼로 등을 째고 수술을 하고 고름을 짜낸대도 그 아픈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만큼 골똘히 들었기에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설하신 법문을 한 귀절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다 기억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 아란존자와 또 부처님과의 전생(前生)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저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 전에는 아란존자와 부처님과는 도반(道伴)이었었습니다.
함께 도(道) 닦는 아주 다정한 도반이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정말 아주 철저하게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셔서 온전히 아주 활구참선만을 하셨는데, 아란존자는 자꾸 경(經)을 좋아했습니다. 경 보기를 좋아하고 경 외우기를 좋아하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이랬습니다.

그것이 생(生)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아란존자와 부처님은, 부처님 태어나실 때마다 아란존자도 항시 같이 이렇게 태어나서 또 도를 닦고 그렇게 여러 생을 그렇게 내려오셨는데,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하시게 되었는데 아란존자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설법하신 것을 기억을 해 가지고 결집(結集)을 하는 그러한 소임을 맡으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크게 보면 십대제자(十大弟子)와 삽삼조사(卅三祖師)가 전부 다 과거에 다 불보살이 부처님의 불법(佛法)을 갖다가 조불양화(助佛揚化)하기 위해서 짐짓 그 제자의 탈을 쓰고 제자로서 나타나서 부처님의 법(法)을 전통하신 것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지마는,
같은 도반으로서 같이 공부를 시작했어도 '그 사람이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을 하느냐? 활구참선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철저히 하느냐?'

여기 가서 이 법문 듣고 저기 가서 저 법문 듣고, '금강경(金剛經)이 좋다' 하면 금강경을 독송(讀誦)하고, '법화경(法華經)이 좋다' 하면 법화경을 독송하고, '유마경(維摩經)이 좋다' 하면 유마경을 독송하고, '무엇이 좋다' 하면 이것도 저것도 하니까, 이 고루고루 하면 다 참 좋은 걸로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이 도(道)는, 특히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이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는 외골수로 한 길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옴막 다 바쳐서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열한 근기로 짧은 인생에 있어서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들었습니다마는,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다, 큰 의심 아래 크게 깨닫는다. 적게 의심하면,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큰 의심을 가지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을 전혀 아니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러한 법문이 있습니다.

지끔 참선이 매우 널리 그 관심을 받게 되어서 승속(僧俗) 간에 이 참선에 대해서 모다 관심을 갖고 모다 하려고 하고 있고 거기에 따른 많은 책도 나오고 그랬습니다마는, 이 활구참선은 정말 제일 간단하고 하기가 쉬운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천칠백 공안을, 전부 다 이 공안(公案)이 생겨날 때에는 부처님과 조사(祖師) 간에 그 법(法)을 거량(擧揚)해서 그 법을 거량하는 그 기연(機緣)이, 어떠한 기회(機會)에 그 공안이 생겨났으므로, 그러한 기연을 잘 알고 또 그 공안을 이리저리 따지고 그렇게 해서 그럴싸한 어떤 해답을 얻으면 썩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재미에 팔려서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수수께끼 풀듯이 그것을 풀고, 그것을 뭐라고 대답하면 '옳다' 하고 일러주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주어서 그 공안을 가지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그 애를 써서 궁리를 하고 따져서 그럴싸한 답을 얻어서 '이것이다' 하고 그러면, '그러면 옳다' 그렇게 해서 또 한 공안을 통과를 하고, 또 그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해서 열 개, 스무 개, 오십 개, 백 개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참 '누구는 오십 개가 통과했다, 누구는 백 개가 통과했다' 이래 가지고 그것 많이 통과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그걸 많이 통과함으로써 많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본인도 착각을 하고 남에게 과시를 하고, 이러한 참선이 일본에 진즉부터서 수십 년, 백여 년, 몇백 년 전부터서 일본에서는 그러한 참선이 유행을 해 가지고 헌데, 그러한 참선이 우리나라로 역수입(逆輸入)이 되어 가지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참선을 가리키고 배우고 하는 그러한 경향이 지금 유행을 하고 있는데.

이 임제종(臨濟宗) 조사문중(祖師門中)에 있어서는 차라리 아니할지언정 그러한 참선은 해서는 아니 되고, 차라리 깨닫지 아니할지언정 그러한 식에 깨달음을 요구(要求)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처음~21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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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그러냐?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리(義理)로 따지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다' 하고 아는 것이라면 구태여 애써서 알 것이 없고, 수십 명 수백 명을 모아 놓고 계속 공안(公案)을 해설하는 강의(講義)를 한다면 그 강의를 들은 사람은 전부가 다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라면 뭣 하러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하시며,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떻게, 조사 밑에 이미 다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전부 다 깨달라 마쳐 버렸을 것입니다.

근데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여.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나 조사가 깨달음을 그런 식으로 가리켜서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 도가 어렵다고 하며 깨달음이 귀하다고 하겠습니까? 깨달음은 가리킬 수 없는 것이고,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러면 부처님과 조사는 무엇을 하셨냐 하면 깨닫는 방법, '어떻게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렇게 도를 닦아라'
깨닫는 것은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 가지고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육신통(六神通)이 자재(自在)하신 부처님의 힘으로도 중생에게 가리켜서 깨닫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고 깨달음을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많이 들으셨고 또 이 용화(龍華) 이 법보전(法寶殿)에서 많은 법문을 들으신 분은 이미 그러한 사상이 철저해서 누가 뭐라 해도 그런 데에 흔들림을 받으시지는 않겠지만, 행여나 누가 그러한 말로써 유혹을 한다 하더라도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한 생각이라도 바로 돌이켜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거각(擧却)해 나가도록. 거기에서 업장(業障)이 저절로 소멸(消滅)이 되고 거기에서 확철대오할 수 있는 인연(因緣)이 성숙(成熟)되어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을 인제 한솥밥을 먹고, 이 한 도량(道場)에서 수행을 하시게 되는데, 모다 팔도(八道)에서 성(姓)도 다르고 피도 다르고 한, 그리고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여러 가지 생활 습관도 다르고, 그런 이 그렇게 다른 그러한 도반(道伴)들이 한 방에서 같이 생활을 하시게 되는데,
내 뱃속으로 난 자식,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간도 성격이 각각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습관이 다른데, 하물며 이렇게 성이 다르고 혈통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으니 무엇이 그렇게 다 마음이 잘 맞겠습니까?
그러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쳐서 수행을 해 나가는 일불제자(一佛弟子)여. 그러기 때문에 모든 그러한 다른 것을 다 이해할 수가 있고, 그런 것을 다 초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같다고 해서 그릇된 생각을 낸 것이 탐심(貪心)이요, 내 마음에 안 맞는 일을 당해 가지고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진심(瞋心)이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모르는 생각을 어리석은 마음이라 했습니다마는,
한 방에서 거처(居處)할 때, 자기와 좀 뭣이 맞으면 그 사람하고 지나치게 가까워서 남 보기에 눈꼴 사납게 그렇게 지내고, 조끔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그 사람을 허물을 잡아서 이리저리 아주 눈을 흘기면서 '그 사람을 어떻게 하면 몰아낼까?' 이러한 아름답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석 달 동안을 지내게 된다면, 그것은 수행인(修行人)으로서 대단히 부끄러운 마음가짐이고,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석 달 아니라 삼십 년을 지낸들 도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도(道)는 어쨌든지 평등심(平等心)을 가져야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도 좋게 하고, 내 마음에 안 맞은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도 좋게 하고, 그래서 모두 평등한 마음, 미워하고 이뻐하고 하는 그러한 차별심(差別心)을 갖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마음으로 서로 도반을 상대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심(合心)이 되고, 화합이 되고 자연히 한 대중이 견성성불한—한 사람도 낙오자(落伍者)가 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그래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그래서 도업(道業)을 성취할 그러한 도반(道伴)이 되고 그러한 도량(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도반(道伴)은—내가 좋은 도반이, 좋은 수행인이 되어야 자연히 좋은 도반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투철하지 못하고서 그리고서 맨 '도반, 좋은 도반이 없다. 좋은 도반을 만날 수가 없다' 좋은 도반 만나지 못한 것을 그렇게 한탄을 해 봤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할 때까지 지내도 좋은 도반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신심(信心)이 철저하고, 자기가 분심(憤心)이 철저하고, 자기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한다면 간 곳마다 좋은 도반이 전후좌우로 모다 모이게 될 것입니다.

좋은 도반을 만나야 공부는 자연히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습기(習氣)가 동(動)해서 타락을 하거나, 해태굴(懈怠窟)에 빠질 뻔, 그러한 위기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좋은 도반이 앞에 뒤에 옆에 많이 있으면 그 도반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대번에 충고해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끌고가지 나를 버리고 가겠습니까?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아란존자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좋은 도반(道伴)을 만나서 공부한 것은 도(道) 절반(折半)은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그것을 여쭈어서 그것을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부처님께 가서 여쭈어보니, "니 생각이 잘못이다"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래 아란존자는 깜짝 놀랬습니다. '좋은 도반을 얻어서 같이 수행한 것은 절반은 도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과했구나' 그리 생각했는데,
부처님께서는 "너의 생각이 잘못이다. 좋은 도반을 얻은 것은, 좋은 도반을 만나서 같이 도를 닦은 것은, 절반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도(道) 전부(全部)를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시고서 대중(大衆)을 운집(雲集)을 해서 그 「좋은 도반(道伴)」에 대한 법문(法門)을 하시면서, "너희들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나와 같은 도반을 가졌으니 너희들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이러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좋은 도반은 자기한테 있습니다. 좋은 도반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며, 언제라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발심(發心)을 못하고, 자기가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 눈에 도반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발심하고 분심 내서 공부를 한다면, 도반은 도처(到處)에 있는 것이고 선지식(善知識)도 도처에 계시는 것입니다.

서리 치는 달밤에 우는 잔나비 소리나, 봄 동산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이 전부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이요 보살화현(菩薩化現)이며, 온 사바세계에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에 이 무상(無常)한 모든 기멸(起滅) 현상이 전부가 다 나에 도반이요, 나에 선지식이요, 나에 살아계신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병인년 이 석 달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하셔서 다른 도반들을 위해서 내 자신이 좋은 도반이 되어 주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말 내 마음을 비우고서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고 대중을 위해서 항상 이 봉사하는 마음, 보시하는 마음, 불공(佛供) 드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시봉(侍奉)하는 마음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정말 금년 이 병인년 여름 안거야말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할 수 있는 그러한 뜻깊은 한철이 되어 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학자(學者)가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되, 활구(活句)—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알아들어 갈 것이 끊어져서, 그 공안(公案)을 마치 불덩어리와 같이 생각을 해.
큰 불덩어리는 가까이 가면은 내 몸이 순식간에 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덩어리라 하는 것은, 큰 무서운 큰 불덩어리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어. 가까이만 갔다 하면은 찰나간에 옷에 불이 붙고 얼굴이 확 타버릴 테니까.

그래서 이 공안 앞에는 무불법조착지처(無佛法措着之處)여. '부처다, 법이다' 그러한 소견(所見)을 거기다 갖다가 붙일 수가 없는 것이여.
다만 알 수 없는 큰 의심!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심이 어떻게 간절(懇切)하던지 하늘에 뻗질러.

이렇게 하루하루를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해 나가면, 그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그렇게 간절하게 간절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떠억 현전(現前)하게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境地)가 온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중단함이 없이 딴생각 내지 말고 계속해서 알뜰히 잘 단속을 해 나가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통 밑구녘 빠진 것처럼 의단을 타파하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구(求)하지 아니해도 일찰나(一刹那) 간에 확연(廓然) 터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그렇게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증거가 낱낱이 다 분명(分明)한 것이니, 조급한 생각을 먹지 말고, 두려운 지루한 생각도 먹지 말고, '공부가 잘된다, 못 된다' 이러한 생각도 내지 말고,
조끔 잘된다고 좋아하는 마음도 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답답하고 영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그렇다 하더라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단속해 나가서 석 달 동안이 아주 하루같이 이렇게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인댄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다.
구름 가에는 천첩(千疊), 천 겹이나 쌓인 산이요, 울타리 밖에는 한 소리 시냇물이더라.
구름이, 구름이 자욱이 낀 밖에는 천첩(千疊)이나 쌓이고 쌓인 산이 둘러싸여 있고, 담장, 울타리 담장 밖에는 한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더라.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하면, 만약 열흘이 넘도록, 열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아니했다면,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어찌 비 개인 뒤에 저 새파란 하늘을 볼 수가 있겠는가.
열흘 동안이나 지루한 장마가 계속이 되어서 비가 와서 구름이 꽉 끼었다가 그 구름이 쏵 벗거지니까 정말 새파랗게 트인 하늘을 이렇게 감상 깊게 볼 수가 있더라.

더운 여름, 정말 애써서 정진을 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정말 알뜰히 알뜰히 정진을 하면, 석 달이 지난 뒤 7월 해제(解制)가 되어서 정말 새파란 고운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21분16초~42분10초) (끝)




[법문 내용]

(게송)원제상야월~ / 모든 경계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야 /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정(大疑情)이 돈발(頓發)해야 / 아란존자는 부처님 법문을 들을 때에 등 수술을 했는데, 골똘히 듣느라 수술하는 줄 몰랐다 / 이 도는 몸과 목숨을 옴막 다 바쳐서 정진을 해야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 아는 것이라면 공안(公案)을 해설하는 강의(講義)를 한다면 전부가 다 깨달음을 얻게 될 것 / 깨달음은 가리킬 수 없는 것이고,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 부처님과 조사는 깨닫는 방법을 가리키셨다 / 도(道)는 평등심(平等心)을 가져야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내가 좋은 수행인이 되어야 자연히 좋은 도반이 모이게 되는 것 / 부처님의 「좋은 도반(道伴)」에 대한 법문(法門), "좋은 도반을 만나서 같이 도를 닦은 것은, 절반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도(道) 전부(全部)를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느니라" / 발심하고 분심 내서 공부를 한다면, 도반 선지식(善知識)은 도처에 계시는 것 /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 (게송)운변천첩장~.


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나, 어느 곳 어느 때에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바로 그 곳, 그 때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은 들으면 듣는 데에 쫓아가고, 무엇을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는데, 이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무슨 색상(色相)이 눈에 보이면 보이자마자 바로 거기에서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들으면 듣는 데에 쫓아가지 말고, 그 듣는 것을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바로 그 듣는 그곳에 즉(卽)해서 자기의 공안(公案)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더우면 더워서 못하고 추우면 추워서 못하고, 밥이 되면 되아서 못 먹고 밥이 질면 질어서 못 먹고, 반찬이 짜면 짜다 못 먹고, 싱거우면 싱거워서 못 먹고, 낱낱이 그러한 주변 경계(境界)에 끄달리게 되고 흔들림을 받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몰록 발(發)하지를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모든 경계가 눈에 들어오고 귀로 들어오고 몸으로 들어오고 마음으로 들어와서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석 달을 지낸들, 또 30년을 지낸들, 내지 일생을 지낸들 어떻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란존자는 부처님 법문을 들을 때에 등 수술을 했는데, 골똘히 듣느라 수술하는 줄 몰랐습니다. 그만큼 법문을 골똘히 들었기에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설하신 법문을 한 구절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다 기억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다, 큰 의심 아래 크게 깨닫는다. 적게 의심하면,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큰 의심을 가지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을 전혀 아니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義理)로 따지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다' 하고 아는 것이라면 구태여 애써서 알 것이 없고, 수십 명 수백 명을 모아 놓고 계속 공안(公案)을 해설하는 강의(講義)를 한다면 그 강의를 들은 사람은 전부가 다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라면 뭣 하러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하시며,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떻게, 조사 밑에 이미 다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전부 다 깨달라 마쳐 버렸을 것입니다.

근데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여.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나 조사가 깨달음을 그런 식으로 가리켜서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 도가 어렵다고 하며 깨달음이 귀하다고 하겠습니까? 깨달음은 가리킬 수 없는 것이고,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러면 부처님과 조사는 무엇을 하셨냐 하면 깨닫는 방법, '어떻게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렇게 도를 닦아라'

깨닫는 것은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 가지고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육신통(六神通)이 자재(自在)하신 부처님의 힘으로도 중생에게 가리켜서 깨닫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고 깨달음을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온 것입니다.

내 마음과 같다고 해서 그릇된 생각을 낸 것이 탐심(貪心)이요, 내 마음에 안 맞는 일을 당해 가지고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진심(瞋心)이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모르는 생각을 어리석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도(道)는 어쨌든지 평등심(平等心)을 가져야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 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도 좋게 하고, 내 마음에 안 맞은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도 좋게 하고, 그래서 모두 평등한 마음, 미워하고 이뻐하고 하는 그러한 차별심(差別心)을 갖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마음으로 서로 도반을 상대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심(合心)이 되고, 화합이 되고 자연히 한 사람도 낙오자(落伍者)가 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그래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그래서 도업(道業)을 성취할 그러한 도반(道伴)이 되고 그러한 도량(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도반(道伴)은—내가 좋은 수행인이 되어야 자연히 좋은 도반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투철하지 못하고서 그리고서 맨 '도반, 좋은 도반이 없다. 좋은 도반을 만날 수가 없다' 좋은 도반 만나지 못한 것을 그렇게 한탄을 해 봤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할 때까지 지내도 좋은 도반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신심(信心)이 철저하고, 자기가 분심(憤心)이 철저하고, 자기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한다면 간 곳마다 좋은 도반이 전후좌우로 모다 모이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좋은 도반(道伴)」에 대한 법문(法門), "좋은 도반을 만나서 같이 도를 닦은 것은, 절반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도(道) 전부(全部)를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느니라"
"너희들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나와 같은 도반을 가졌으니 너희들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좋은 도반은 자기한테 있습니다. 좋은 도반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며, 언제라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발심(發心)을 못하고, 자기가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 눈에 도반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발심하고 분심 내서 공부를 한다면, 도반은 도처(到處)에 있는 것이고 선지식(善知識)도 도처에 계시는 것입니다.
서리 치는 달밤에 우는 잔나비 소리나, 봄 동산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이 전부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이요 보살화현(菩薩化現)이며, 온 사바세계에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에 이 무상(無常)한 모든 기멸(起滅) 현상이 전부가 다 나에 도반이요, 나에 선지식이요, 나에 살아계신 부처님인 것입니다.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着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학자의 참구하는 활구(活句)는 마치 한덩어리의 불을 가까이하면 곧 얼굴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불법(佛法)을 둘 곳이 없는 것이니('부처다, 법이다' 그러한 소견을 거기다 갖다가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니), 다만 뜨거운 불꽃이 하늘에 뻗치는 것과 같은 큰 의심이 있어서 문득 칠통(漆桶)을 깨뜨려 버리면 백천(百千)의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는 구하지 않아도 원만히 얻어질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21. 2. 6. 10:33

((No.379))—1989년(기사년) 신수기도 입재(89.02.08) (15분)

 

 

약 15분.

 


기사년(己巳年) 정월 초삼일, 신수기도(身數祈禱) 입재일(入齋日)을 맞이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우리 불자(佛子)의 궁극(窮極)의 목적(目的)은 어서 속히 내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가 어떻게 해서 금생(今生)에 이렇게 태어났는가? 금생에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또 가정을 갖고, 또 아들과 딸을 낳고, 또 그 밑에 손자와 손녀를 낳고 외손자 외손녀를 낳고, 이러한 원인을 생각해 보면, 저 무량겁(無量劫) 이전으로부터 수많은 생(生)을 받아 오면서 얽히고설킨 인연(因緣)이 콤퓨타(computer)로도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법문을 들으면,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요, 온 세계(世界)도 허망한 인연(因緣)들이 이루어진 것이요, 가정도 다 숙세(宿世)의 업연(業緣)으로 뭉쳐서 얽혀서 이루어졌지, 하나도 믿을 것이 못된다.

우리 몸뚱이 생로병사(生老病死),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져 가는 우리 생각의 생주이멸(生住異滅), 온 우주 법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면(免)틀 못한 그런 허망(虛妄)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너무너무 많이 듣고 잘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무리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런 것을 버리려고 그러고, 생각을 안 쓰려고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아주 끊어서 버리지를 못한 형편입니다.

발심(發心)을 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선방(禪房)에 들어와서 석 달 동안을 열심히 정진을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죽비(竹篦)를 치고 떠억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화두(話頭)를 들고 있으면 어느새 집안 생각이 나고, 아들 생각이 나고, 손자 생각이 나고, 생각을 안 하면 안 하려고 할수록 점점 더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께서는,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중생들의 어찌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에, 자비(慈悲)의 방편문(方便門)을 열어서 이렇게 기도! 기도(祈禱)를 함으로 해서 그 기도하는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이,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하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의 힘에 미쳐 가지고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의 힘으로서 중생(衆生)의 그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도록 하는 그러한 특별한 은전(恩典)을 우리는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감응(感應).

'기도를 하면은 부처님의 감응(感應)을 받아서, 그 가피(加被)를 입어서 소원을 성취한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대관절 그 감응(感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불보살(佛菩薩)과 기도하는 사람과의 마음이 서로 교류(交流)해 가지고 하나가 되는 그 현상을 감응(感應)이라 그럽니다.
중생(衆生)의 신심(信心), 선근(善根)이 불보살(佛菩薩)에 통(通)해 가지고 그 힘이 나타나는 현상.

감응(感應), 감응의 '감(感)' 자는 우리 기도하는 중생(衆生) 쪽에서 하는 것을 '감(感)'이라고 그러고, '응(應)'이라고 하는 말은 불보살(佛菩薩) 쪽에서 보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이 감(感)이고, 부처님께서 그 감(感)에 응해서 부처님의 힘이 우리한테 이렇게 미쳐 오는 것을 ‘응(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를 보면, 중생(衆生)에 기연(機緣)이 있으면 부처님의 힘이 자연히 이에 응(應)하여 중생의 감(感)과 부처님의 응(應)이 서로 교융(交融)하는 거여.
그래 응(應)해 가지고 왼손과 오른손을 치면은 소리가 나고, 산중(山中)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골짜구니를 향해서 고함을 지르면은 그 산꼴짜구에 그 소리가 울려 가지고 메아리가 되어서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감응(感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감응(感應)의 현상(現象)은, 모르는 사람은 '그 다 미신(迷信)이다', 뭐 '기복불교(祈福佛敎)다' 해 가지고 이것을 아주 무시하거나 이것을 하차잖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절대로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헛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해 본 분이면 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 현상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불보살의 자비(慈悲)의 힘이, 대자대비(大慈大悲)한 힘이 중생에게 가(加)해져서, 또 중생의 그 신심(信心)에 부처님이 응(應)해 가지고 서로 그 신심과 부처님의 자비의 그 힘이 서로 이렇게 교류(交流)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나타난 그 현상은 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중국(中國)이나 한국(韓國) 일본(日本), 그밖에 동남아(東南亞), 다 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해 가지고, 그 기도 성취를 해 가지고 중생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러한 기도 성취를 한 그런 예는, 참 그 영험(靈驗) 기록은 한량없이 많습니다.

주력(呪力), 천수(千手) 주력이라던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이러한 염불(念佛)이라던지 또는 다라니(陀羅尼)를 외어 가지고 하는 주력(呪力)이나, 성지(聖地)에 가서 기도를 한다던지, 가정생활 속에서 아침에 눈뜰 때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염불(念佛)하거나 경(經)을 외우거나 하는 그러한 정성(精誠)으로 해서, 꼭 죽어갈 목숨이 살아나기도 하고 여지없이 법에 끌려 들어가서 감옥살이를 하고 큰 벌을 받을 만한 그런 경우에도 지극정성으로 기도해 가지고 참 기적적으로 일이 잘 풀려서 면(免)하는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부처님의 '참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이 넓고도 툭 트여서 한량없이 청정(淸淨)합니다마는, 모든 사물에 응(應)해서 형상(形象)이 나타납니다.
허공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마는, 마치 허공에 달이 뜨면 고요한 호수에 그 달빛 그림자가 비추고, 새가 날아가면은 새의 그림자가 호수에 비치고, 구름이 날아가면은 구름의 모습이 그 호수에 비치듯이, 참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지마는, 중생들의 지극정성한 그 신심(信心)으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그 허공과 같은 불보살의 마음에 그 신심의 그 힘이, 정성(精誠)이 부처님께 이렇게 전달이 되어 가지고, 부처님으로부터 그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자비의 부사의력(不思議力)이 중생에게 다시 이렇게 미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는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해야 합니다. 앞으로 새벽에, 또 예불 끝나고 하고, 또 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 또 저녁에 2시간 이렇게 해서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게 됩니다마는, 염불을 하거나 경을 독송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주력을 하거나 지극정성으로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하면은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가면 무일법가혐(無一法可嫌)이여, 한 법도 싫어할 것이 없고,무변(無邊)의 이 선정(禪定), 정문(定門)에 들어가면은, 정문(定門)을 증득(證得)하면은 무일법가기(無一法可棄)여,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어. [入法性三昧 無一法可嫌 證無邊定門 無一法可棄]

세속 일이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높은 명예와 권리를 누리고, 자손이 아무리 많고 잘되고 인간의 오복(五福)을 다 갖추었다 해도, 엄격히 보자면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않습니다.
일장춘몽에 지내지 않고 잠깐이면 다 꿈결같이 다 지나가 버릴 허망(虛妄)한 일들이지만, 우리가 과거에 끊을라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해서 이루어진 가정이고, 이루어진 남편이요 아들이요 딸이요 손자들인 것입니다. 분명히 따지고 보면 허망한 것이지마는, 허망한 가운데에도 또 어쩔 수가 없는 인연(因緣)이 얽혀 있습니다.

이 몸뚱이, 자기 몸뚱이도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虛妄)한 것이지만, 그렇지마는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먹여줘야 하고 입혀줘야 하고 병나면 고쳐줘야 하고,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하는 가운데에도 자식 생각이 나고 집안 생각이 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일 년 내내 가족 생각만 하고 참선을 등한(等閑)히 철저히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특별히 이 새해 초사흘부터 9일까지 7일 간을 신수기도(身數祈禱) 기간으로 정해 가지고, 이 7일 동안 만큼은 정말 철저하게 정성(精誠)스럽게 칠일기도를 봉행(奉行)을 하도록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7일 동안은 정말 열심히 기도를 해서 아주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서 나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서 소원한 바가,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다 성취가 되도록 그렇게 기도를 잘해 주시길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이어서 법요식(法要式)이 진행이 되겠습니다.(처음~15분3초) (끝)




[법문 내용]

불자(佛子)의 궁극(窮極)의 목적은 어서 속히 견성성불(見性成佛)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부처님의 자비(慈悲)의 방편문(方便門), 기도!

감응(感應). 우리가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이 감(感)이고, 부처님께서 그 감(感)에 응해서 부처님의 힘이 우리한테 이렇게 미쳐 오는 것을 ‘응(應)’이라 하는 것.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 /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기도해야.
세속 일은 다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지만, 또 끊을라야 끊을 수 없는, 어쩔 수가 없는 인연(因緣)이 얽혀 있습니다.


감응(感應), 감응의 '감(感)' 자는 우리 기도하는 중생(衆生) 쪽에서 하는 것을 '감(感)'이라고 그러고, '응(應)'이라고 하는 말은 불보살(佛菩薩) 쪽에서 보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이 감(感)이고, 부처님께서 그 감(感)에 응해서 부처님의 힘이 우리한테 이렇게 미쳐 오는 것을 ‘응(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를 보면, 중생(衆生)에 기연(機緣)이 있으면 부처님의 힘이 자연히 이에 응(應)하여 중생의 감(感)과 부처님의 응(應)이 서로 교융(交融)하는 거여.
그래 응(應)해 가지고 왼손과 오른손을 치면은 소리가 나고, 산중(山中)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골짜구니를 향해서 고함을 지르면은 그 산꼴짜구에 그 소리가 울려 가지고 메아리가 되어서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감응(感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참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이 넓고도 툭 트여서 한량없이 청정(淸淨)합니다마는, 모든 사물에 응(應)해서 형상(形象)이 나타납니다.
허공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마는, 마치 허공에 달이 뜨면 고요한 호수에 그 달빛 그림자가 비추고, 새가 날아가면은 새의 그림자가 호수에 비치고, 구름이 날아가면은 구름의 모습이 그 호수에 비치듯이, 참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지마는, 중생들의 지극정성한 그 신심(信心)으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그 허공과 같은 불보살의 마음에 그 신심의 그 힘이, 정성(精誠)이 부처님께 이렇게 전달이 되어 가지고, 부처님으로부터 그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자비의 부사의력(不思議力)이 중생에게 다시 이렇게 미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는 지극정성으로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하면은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가면 무일법가혐(無一法可嫌)이여, 한 법도 싫어할 것이 없고,무변(無邊)의 이 선정(禪定), 정문(定門)에 들어가면은, 정문(定門)을 증득(證得)하면은 무일법가기(無一法可棄)여,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어. [入法性三昧 無一法可嫌 證無邊定門 無一法可棄]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일 년 내내 가족 생각만 하고 참선을 등한(等閑)히 철저히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특별히 이 새해 초사흘부터 9일까지 7일 간을 신수기도(身數祈禱) 기간으로 정해 가지고, 이 7일 동안 만큼은 정말 철저하게 정성(精誠)스럽게 칠일기도를 봉행(奉行)을 하도록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7일 동안은 정말 열심히 기도를 해서 아주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서 나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서 소원한 바가,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다 성취가 되도록 그렇게 기도를 잘해 주시길 부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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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20. 12. 29. 20:42

((No.314))—1986년(병인년) 동안거 결제(86.11.16) (71분)

(1/4) 약 19분. (2/4) 약 16분. (3/4) 약 20분. (4/4) 약 16분.

(1/4)----------------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헌디 뢰진풍치해악경(雷震風馳海岳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디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법왕권실(法王權實)이 영쌍행(令雙行)이여. 법왕(法王)에 권(權)과 실(實)이,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이 하여금 쌍(雙)으로 행(行)해. 권실(權實)을 다 갖추어서 행(行)하더라.

뢰진풍치해악경(雷震風馳海岳傾)이여. 법왕(法王)이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으로써 그 법령(法令)이 행(行)하면 번개가 우레가 치고 바람이 불어 가지고 바다가 뒤집어지고 태산이 무너지더라 그 말이여.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데, 벽력, 벼락이, 벼락치는 한 소리에 구름이 다 흩어져 버렸는데,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라. 집에 이르른 것이 원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고향에 도달하더라.


부처님께서 출현(出現)을 하셔 가지고 중생(衆生) 교화(敎化)를 하시는데,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실법(實法)만을 가지고는, 실상법(實相法), 실법만 가지고서는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법(權法), 방편법(方便法)을, 아주 좋은 방편법을 잘 쓰면서 그래 가지고 실법(實法)을 나투어야 그래야 중생 교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 없는 가운데에 교해(敎海), 교법(敎法)의 바다가 파도를 치고, 그 교해, 교법(敎法)의 바다 속을 향해서, 바로 그 속에서 말 없는 진리법(眞理法)을 나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은 부처님의 무언(無言) 가운데에, 말 없는 가운데에서 교법(敎法)을 설(說)하시고, 그 교법 설하신 그 속에서 무언(無言)의 진리를 보이신 도리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방편법(方便法)에 떨어져 가지고 부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그 실법(實法)을 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병인년(丙寅年) 동안거(冬安居) 결제일을 맞이해서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 법문을 경청(敬聽)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 법사(法師)스님이신 만공(滿空) 큰스님께 인가(印可)를 받으신 그 한 대문(大文)을 잠깐 들었습니다마는, 오늘 이 결제(結制)와 또 백일기도 입재(入齋)를 맞이해서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방부(房付)를 들이신 23명에 비구(比丘) 스님과 또 보살선방에 방부를 들인 108명, 그리고 용주사 중앙선원에 방부를 들이신 17명, 그리고 도봉산 원효사라든지 또 회룡사라든지 근처에 모다 비구니(比丘尼) 수좌(首座)들도 모다 참석을 했습니다.


한 철 동안 정진(精進)을 해 가는데, 언제나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 부처님의 법은 세법(世法)을,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을 여의고 참선(參禪)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생사법(生死法)을 여의고 진리법(眞理法)을 따로 찾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진리(眞理)가—진리 그 자체(自體)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용(用)으로써 발(發)한 것이 바로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요, 일월성진(日月星辰)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인 것입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그러한 신령스러운 묘체(妙體)가, 그것이 나타나면 바로 태양이요, 달이요, 그 무수한 별이요, 산이요 바다요, 나무요 돌이요, 일체 중생이요, 모든 짐승이며 그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전부 진리(眞理)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진리가 나타난 그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그림자 있는 곳에 그 반드시 실상(實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물의 그 본성(本性), 물의 본성은 바로 습성(濕性)인데, 그 물의 본성은 볼 수가 없으나 그 물의 본성이 때로는 액체(液體)가 되어서 흐르기도 하고, 바다에 잠기기도 하고, 호수에 잠기기도 하고, 시내로 흐르기도 하고, 폭포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영하로, 섭씨 영하로 내려가면은 고체(固體)가 되어서 얼음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백 도(度) 이상으로 끓으면은 그것이 기체(氣體)가 되어 가지고 수증기로써 증발을 하게 됩니다.


수증기로, 기체가 되어 가지고 있을 때도 그 물의 본성(本性)인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그것이 액체로써 물이 되어 가지고 흐르고 떨어지고 잠겨 있다 하더라도 그 물의 본성(本性)인 그 습성(濕性)에 있어서는 증감(增減)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서 꽁꽁 얼은 얼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 물의 습성(濕性)인 그 본성(本性)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짐승으로 태어났거나, 곤충으로 태어났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미생물로 태어났거나, 또는 복(福)을 지어서 천상(天上)에 태어났거나, 악(惡)을 행해 가지고 지옥(地獄)에 떨어졌거나, 이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실상(實相), 진리(眞理)의 체(體)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제(結制)를 해서 석 달 동안을 출입을 금(禁)하고 엄격한 법도(法度)하에서 이 안거(安居)를 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도리(道理)를 깨닫고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잠을 덜 자고,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하고자 한 말을 삼가하고, 나가고 싶은 데가 있어도 출입을 금(禁)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원해 가지고 엄격한 법도에 묶여서 석 달 동안을 마치 부모의 초상(初喪)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러한 경건한 마음으로 정진(精進)을 하고자 해서 오늘 이렇게 결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공부는 자기 스스로 자발적(自發的)으로 원해 가지고 되는 일이지, 남이 시켜서 강요해 가지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속(世俗)에 모든 공부는 하면 얻은 바가 있고, 노력을 하면 그 진취하는 결과가 자기 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고 또 남이 보아도 인증을 할 수가 있는데, 이 공부는 그러한 차례차례 계단을 밟아서 올라가 가지고, '나는 한 달 했으니까 이만큼 했다' '석 달 동안에는 이만큼 되었다' '이렇게 삼 년 동안 정진을 했으니까 나는 이만큼 얻은 바가 있다' 무슨 바둑이나, 태권도나 모다 그런 것은 급수(級數)가 있고 단(段)이 있어 가지고 얼마만큼 하면 그 자기의 자격증을 얻어서 누구든지 인증을 할 수가 있지마는, 이 참선(參禪)은 암만 해도 스스로 '나는 이만큼 했다' 한 얻은 바가 없어. 내보일 것도 없어.


물론 해제(解制)를 하면, 석 달 동안을 잘 지내면은 안거증(安居證)은 드리지만, 그것은 석 달 동안 여기서 잘 지냈다고 하는 증서(證書)지,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하는 그러한 자격증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얻은 바가 없고 다못 의심(疑心) 뿐인데, 거기에 어떠한 무슨 재미가 있느냐 그 말이여.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남에게 보일 것도 없고, 그러한 공부입니다.

그러한 공부를 자발적으로—편한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잘 먹는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뜨뜻한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오직 이 생사(生死) 문제, 자아를 깨닫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우리 스님네와 보살님네들이 이렇게 안거(安居), 결제(結制)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고 얻은 바가 없다'고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하루하루를, 또 한 시간 한 시간을, 또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하게 알뜰하게 다져 나가면, 맛없는 가운데에 맛이 있고, 아무 재미없는 가운데에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참, 이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재미'라고 하니까 무슨 세속에 어떠한 물질을 얻었을 때, 또는 명예나 권리를 얻었을 때, 누구한테 칭찬을 얻었을 때에 느끼는 그러한 재미가 아니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생 동안을 자기의 그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다 바치고서도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어도 원망이 없고 부러울 것도 없고 그러한 것입니다.


일생 동안을 이 참 독신(獨身)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누데기를 입고서 보잘것없는 그런 허술한, 초췌한 그런 모습을 가지고 걸망을 지고서 이렇게 선방(禪房)으로 다니지만, 이 세상에 천국(天國)도 부러울 것이 없고, 지옥(地獄)도 두려울 것이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선객(禪客)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함으로써 마침내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처음~18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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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世俗)에 모든 공부는 차츰차츰 한 걸음 한 걸음 단계적(段階的)으로 향상(向上)을 해 가지고 박사도 되고 모다 판사도 되고 하지만, 이 공부는 처음 출가(出家)할 때부터서 마지막 도(道)를 이룰 때까지 하는 일이 한결같이 그 한 생각을 돌이키고 또 한 생각을 돌이켜서 계속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계속 그 초점(焦點)을 여의지 아니하고 관(觀)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구(參究), 참선(參禪)인데.


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대의단(大疑團)이, 큰 의심덩어리, 가슴속에도 콱! 차고 이 나의 주변에도 콱! 차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뜩 그 의단(疑團)이, 의심덩어리가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봐도 그 의심(疑心)이요, 땅을 봐도 그 의심이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요,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의심이요, 썽이 나도 의심이요, 슬픔이 일어나도 의심이요,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다못 그 의심덩어리로 가뜩차 버려.


의심(疑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생각할 것이 없어. 보았다 하면 바로 그 의심이요, 귀에 무슨 소리 들렸다 하면은 동시에 의심이요,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그 생각 따라갈 겨를이 없어. 나는 바로 의심(疑心)이다 그 말이여.

이렇게 다구치고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갈 때에, 모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도 발붙일 곳이 없어. 일체 차별(差別)이 거기에서는 다 떨어져 버려. 미웁고 고운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그래서 결국은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의단(疑團)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그 의단이 독로(獨露)했을 때에 망상을,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버리려고 하고, 물리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하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의심이요, 똥을 눌 때도 의심이요, 포행(布行)을 할 때에도 의심이요, 법당(法堂)에 와서 부처님께 절을 할 때에도 그 의심이요, 옆에서 누가 말을 해도 나는 의심이요,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할 때의 그 마음 경계는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고 쇄락(灑落)하고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화두(話頭)를, 화두를 드는 것까지도 망각(忘却)하게 될 수가 있어. 그때에 나아가서 화두에 대한 의심을 놔 버리면 안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니까,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은 그곳에 따악 착(著)해 가지고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의관(疑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부러 힘을 써 가지고 '이뭣고!' 힘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아무 힘을 쓰지 아니하고 그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 의심(疑心)의 관(觀)이—관(觀)은 관만이 있어야지, 일부러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힘을 써서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러한, 그렇게 이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려고 애를 써도 들 때뿐이지 금방 딴생각이 오고 그러지만, 그 딴생각 났다고 해서 신경질을 내고, '하이고, 이놈의 공부가 언제나 될 것인고? 내가 아마도 이 참선법에, 참선(參禪)에 인연(因緣)이 없은가? 업(業)이 두터워서 그런가?' 이 생각 저 생각해서 짜증을 내고 그래선 아니된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일어난 대로 놔두어 버리고 나는 화두(話頭)만을 터억 들거든. '이 뭣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또 화두(話頭)를 들고, 번뇌(煩惱)가 일어나면 나는 화두(話頭)만을 들거든. 화두만을 들어요. 들면은 망상은 저절로 자최가 없어지는 것이거든. 화두를 들어도 그 망상이 안 없어지면 또 화두를 드는 것뿐이지, 망상이 안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떠억 챙겨. 숨을 터억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그것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했을 때 그 여운(餘韻)으로 남은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이여.


'이 뭣고?' 자꾸 챙기라고 하니까—뭣헌 분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를 뭐 한 시간에 이천 번을 했느니 삼천 번 했느니—그 횟수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은 그 하루에 오만 번이나 또는 십만 번 이렇게 염주(念珠)를 가지고 세면서 하루에 일과를 정해 놓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이 화두는 그런 횟수를 많이 하고 작게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가끔 가끔 챙길 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을 때에는 '알 수 없는 의심'만을 터억 관(觀)해야지,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뭣고 이뭣고' 자꾸 그렇게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그 의심이 없어졌을 때나, 또는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 그때 화두를 한 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疑心)만을 묵묵히 관(觀)하는 거여. 그래서 그것을 '의관(疑觀)'이라 그래요. 의심(疑心)의 관(觀)이다. 알 수 없어.


'아하 이것이로구나' 그런, 그 그런 생각이 있으면 안 돼.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지는 것이 있고, 떠억 요렇게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으면 아니 된 것입니다.



오욕해자갈(五欲海自渴)이요  아인산자도(我人山自倒)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음낙처운자산(圓音落處雲自散)하면  부증대보변환가(不曾擡步便還家)니라

나무~아미타불~


오욕해자갈(五欲海自渴)이요  아인산자도(我人山自倒).

이렇게 정진(精進)을 알뜰히 짬지게 해 나가면 거기에 무슨 오욕(五欲)이 일어날 것인가? 무슨 탐심(貪心)이 있으며 무슨 진심(瞋心)이 있어?

탐심이 없으면은 오욕(五欲)은 거기에서 오욕의 바다는 말라 버리는 것이고, 진심이 없으면 아인(我人)의—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그 아인(我人), 인아상(人我相), 인아(人我)에 그 높은 산(山)이 스스로 넘어져 버린 것이다.


석 달 동안을 스님네나 이 보살님네들이 이렇게 결제(結制)를 하시는데, 중간에 어떠한 장애(障礙)가 일어나는 것은 그 오욕(五欲)의 바다에 파도가 치고, 아인(我人)의 산이 우쭐대기 때문에 거기에서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욕의 근본인 그 탐심이 없어. 화두(話頭)를 들고 그 열심히 정진을 해 나가는데 무슨 탐심(貪心)이 거기에 있으며, 무슨 거기에 진심(瞋心)이 일어날 것이냐 그 말이여.


한 사람 한사람이 정말 이 일대사(一大事)를 향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가면, 거기에는 불평불만도 있을 것이 없고, 니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뭣이 좋고 나쁘고 한 일체 시비(是非)가 거기에 붙들 못하는 것입니다.

시비(是非)가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발동(發動)을 한 것이고, 모든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무명(無明)에 그 탐심(貪心)을 안고 살기 때문에 그런 시비와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음낙처운자산(圓音落處雲自散)이요. 원음(圓音) 떨어진 곳에 구름이 스스로 흩어져 버리면,

원음(圓音)은, 아까 부처님께서 무언(無言) 속에 한량없는 법문의 바다에 파도가 치고, 그 부처님의 끝없는 설법 교해(敎海) 속에 말 없는 진리가 드러난 도리, 바로 그것이 부처님에 원음(圓音)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원음은, 보살(菩薩)이 들으면은 보살도(菩薩道)요, 연각(緣覺)이 들으면은 인연법(因緣法)이요, 성문(聲聞)이 들으면은 사제법(四諦法)이요, 중생(衆生)이 들으면은 중생에 차별(差別)이요, 일체 축생(畜生)과 산천초목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들으면은 자기 나름대로 다 가서 계합(契合)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음(圓音) 설법(說法)이, 현재 우리 눈으로써 볼 수 있는 모든 현상, 귀로써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 코로 맡을 수 있는 온갖 냄새, 혀로 맛볼 수 있는 온갖 맛,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모든 그 촉감, 우리 생각으로써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이 다 부처님 원음(圓音)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어.

그래서 그 원음(圓音)의 그 본성(本性)을 바로 봐 버리면 무명(無明)의 구름이 다 흩어져 없어져 버려서, 부증대보변환가(不曾擡步便還家)여.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우리의 진리의 고향(故鄕), 우리의 마음에 고향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18분55초~34분39초)





(3/4)----------------


한 철, 백 일이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데, 인생이 많이 살면 칠팔십 사는데, 사실 우리의 생명은 오늘 하루를 모르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무상한 이 생사 속에 이미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와 마찬가지여.

언제 죽을는지 모른 그런 무상(無常)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무상한 속에서 이 석 달이라고 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석 달 동안에 우리의 이 생명이 유지가 될는지, 그 안에 이 세상을 뜰런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무상한 이 석 달 동안에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결제(結制)를 하게 되는데, 그 각오가, 그 석 달 결제에 들어가는 우리의 그 마음의 가짐이 경건하고 그 엄숙하고, 마치 어떠한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는 그러한 그 병사(兵士)와 같은 마음, 그것에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참, 그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사(死)' 자를 터억! 이마 미간(眉間)에다가 써 붙이고,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러한 생활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모(父母)가 돌아가셨다고 부고(訃告)가 와도 해제(解制)할 때까지는 본인에게 알려주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그 각오(覺悟)가 비장했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어도 본인에게 알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스님네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보살선방에 여러분들도 석 달 동안을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 원근(遠近)에 있는 여러 비구니 수좌(首座)님네들도, 항상 이 도량(道場)에서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리고 이 한 회상(會上)에서 지낸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 또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정진을 하신 여러 스님네들도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계신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렇게 산다고 하는, 정진한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 철을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예불 젓숩고, 그리고 정진하고 또 아침 공양을 하시고, 또 오전 정진을 하고 또 사시공양을 하시고, 오후 정진 그리고 저녁공양을 하고, 밤 정진 그리고 취침을 하시고, 그 하나하나가 스스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그 선방에 어떤, '일주문(一柱門) 밖에 나가지 말자, 특별한 허가(許可)가 없이는 외출을 하지 말자, 큰방에서 잡담을 하지 말자' 뭐 그 여러 가지 선방(禪房)에 규칙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런 규칙에 얽매어 가지고 그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뭐 얼마든지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그런다 하더라도, 스스로 턱! 자기가 자기 규칙(規則)을 세워서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


그래서 나갈 겨를도 없고, 떠들 일도 없고, 시비(是非)할 건덕지도 없고, 저절로 한 분 한 분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할 때에 규칙을 특별히 만들지 안 해도 제절로 규칙이 서서, 한 철을 정말 일생일대(一生一大)에, '그때 참! 정진(精進)다웁게 했다, 그 한 철이야말로 나에 일생을 결정짓는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적인 그런 한 철이었었다' 그러한 한 철이 되도록 그렇게 정진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이 지낼 때에 그 가운데 정진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부처님 당시에는 사시공양(巳時供養) 한 번만 했지마는, 지금은 다 특별한 분을 제외하고는 다 삼시(三時)를 공양(供養)을 하시게 되는데, 공양 문제는 대단히 평범한 생활 가운데에 일부지만 대단히,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인 것보다도 그것 못지않게 중대한 정진인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전국 선방이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시게 되면 너무 시간이 빨러서 그저 뭐 금방 5분도 안 되어서 뚝딱 공양이 끝나버리는데, 이건 대단히 잘못된 흐름인 것입니다. 어쨌든지 느긋한 마음으로 충분히 시간을 가져서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供養)을 하셔야 합니다.

저작을 잘 하시면은 공양한 그 모든 것이 잘 소화(消化)가 되어 가지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營養)을 완전히 흡수를 하게 되지만, 저작을 잘 아니한 채 침도 섞지도 아니하고 우물우물해서 그냥 막 꿀떡꿀떡 삼키게 되면, 뱃속이 공양하고 난 뒤에도 뱃속이 더부룩하니 편틀 못하고, 또 소화가 잘 안되고, 따라서 흡수가 되지 아니한 채 다 배설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놈을 그 아까운 음식을 먹느라고 애쓰고, 그러고 그놈이 입을 통해서 위장으로 소장 대장을 거치는 동안에 애만 썼지,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애만 썼지 실지로 영양 흡수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건 건강에 좋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정진(精進)에도 대단히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소화가 잘되서 위장이 편하고 흡수가 잘 되어야 정신(精神)도 맑고, 배도 편안해야만 정진이 잘되지, 자꾸 더부룩해 가지고 트림만 해 쌓고 소화가 잘 안되고 흡수가 안되면, 영판 정신도 안정이 안되고 호흡(呼吸)도 잘 안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죽비를 치는 스님은 잘 맞춰서 넉넉하게 죽비를 쳐서 공양을 진행을 하시도록 부탁을 드리고.


수면(睡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다리를 뻗고 실컷 잠을 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最小限)도 5시간 정도는 푹 자 주고, 그 대신 새벽에 눈 떠서 취침할 때까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죽비를 치는 입선(入禪) 시간이나 또 방선(放禪) 시간이나 그날 하루 무엇을 하거나 간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터억 추켜들어 단속(團束)을 해서 화두(話頭)가 독로(獨露) 하도록 그렇게 알뜰히 잡드리를 해 가면,

저녁에 잘 때에 터억 누워서 잠이 탁 언제 들었는가는 모르지만 들을 때까지 그 화두를 떠억 들고서 잠이 들도록. 그러면 잠 속에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도록.


새벽에 목탁 소리 ‘딱 딱’ 목탁을 칠 때 눈을 딱 떠도, 떴을 때 바로 엊저녁에 그 잘 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도록. 새로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던 화두가 고대로 터억 들려져 있도록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알뜰히 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몸도 건강하고, 정진을 애써서 할수록에 더욱 신심(信心)이 나고, 정말 참, 도(道) 닦아가는 그 참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게 정진을 하면 공부에 바른 길은 얻지 못하고서 몸에 병(病) 먼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처음에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말뚝 신심이 나 가지고, 공부하는 길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뭐 잠을 안 잔다, 말을 아니하고 묵언(默言)을 한다, 또 무슨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무슨 생식(生食)을 하고, 무슨 단식(斷食)을 하고, 뭐 이래 가지고 자꾸 몸뚱이 들볶는 것을 위주로 정진을 해 가게 됩니다. 이것은 바른 수행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6년간을 그렇게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와 같이 그렇게 무서운 고행(苦行)을 하셨어. 잡숫는 것을 아주 제한해 버리고, 잠도 제한해 버리고, 그래 가지고는 그 몸뚱이 들볶는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그래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을 해 가지고 그렇게 6년을 고행을 하셨는데, 마침내는 그 강(江)에 가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에 처녀가 갖다가 바치는 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절대로 뭘 먹지를 말자' 그렇게 약속을 교진여들 오비구와 같이 약속을 해 놓고는 아! 죽을 떠억 받아 잡수니까,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들이 '고따마(Gotama)가 배고픔을 참지를 못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결심이 무너져 가지고 그렇게 타락(墮落)을 했다.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떠나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떠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것이 없고, 당신은 목욕을 하고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죽을 받아 잡수니까 그렇게 새로운 정신이 나며 기운이 나. 기운이 나며 새로운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때 다시 떠억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 가서 정좌를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정신으로 정진을 해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내가 누구를 먼저 제도(濟度)를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맨 처음에 설법(說法)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신 결과 그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교진여들 그 다섯 비구—같이 수행을 하다가 버리고 떠났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서 먼저 제도를 해야겠다' 그래 가지고 거기를 가셨습니다.

가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 사제법을 설하시기 전에 맨 먼저 하신 법문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해서는 그것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 지나치게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는 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또 지나치게 안락을 위하고 호강을 하는 그러한 생활도 그것도 올바른 수행이 아니니라. 수행은 으레히 고행(苦行)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편하고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호화롭게 사는 것도 옳지를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행을 위한 고행, 쓸데없이 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해 가지고 육체를 들볶는, 그러한 수행도 올바르지 못하느니라"

그러한 말씀을 하셔서 그 교진여들로 하여금, 자기는 타락했다고 그래 가지고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먼저 그 말씀을 해서 그러한 오해(誤解)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신이 깨달라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인식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교진여들 다섯 사람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고,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 누구라도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이 중도법은 적용이 되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에도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 동안을 건강을 망쳐서 도를 닦지 못하게 된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34분50초~54분32초)





(4/4)----------------


입해산사도비력(入海算沙徒費力)이요  구구미면주홍진(區區未免走紅塵)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쟁여운출가진보(爭如運出家珍寶)하면  고목생화별시춘(枯木生花別是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입해산사도비력(入海算沙徒費力)이요,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세는 것은 공연히 쓸데없이 힘만 허비한 것이요.

구구미면주홍진(區區未免走紅塵)이다. 구구(區區)히 그 띠끌 속을 향해서 이리저리 치닫는 것을 면치를 못한다.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센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의 근기(根機) 따라서 설하신 그 방편법(方便法), 그러한 방편법에 집착(執著)을 해 가지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편(方便)이라 하는 것은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상대에게 해당이 되는 임시적(臨時的)인 편법(便法)을 방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거나, 장소가 옮겨지거나, 또는 그 상대의 그 사람이 바뀌어지면 그것은 이미 적당한 법이 아니라 그것은 해당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이미 해당이 되지 아니한 것을, 그것을 끝까지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고 거기에 집착을 해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바다 속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세는 거와 같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그 팔만사천 묘법(妙法),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말씀이 하나도 버려야 할 법은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한 자, 한 토가 다 소중한 법문(法門)이지만, 그 법에 뜻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 글에 집착을 하면 바로 그것이 바다 속에 가서 모래알을 세고 있는 거와 같은 것이거든.

죽을 때까지 세어도 끝이 없는 것이고, 몇억만 개, 그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도록 세고 있었던들 거기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만날 세어 봤자 거기는 모래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佛法)을 밖에서 구(求)해. 밖에서 어떤 것을 구하고, 밖에서 무엇을 얻고, 밖에서 무엇을 알려고 하는 그러한 그 수행을 지양(止揚)을 하고, 자기 안에서 쟁여운출가진보(爭如運出家珍寶)여. 자기 안에 있는 보배를 끌어내는 것이여. 그놈을 끌어내 가지고 그놈을 활용(活用)을 해야 하거든.

그러면은 그것이 고목생화별시춘(枯木生花別是春)이여, 고목(枯木)에서, 다 말라서 죽은 그 고목에서 꽃이 피어. 그래 가지고 새 봄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이 몸뚱이는 무량겁(無量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 금생에 와 가지고, 벌써 금생에 와서 십 년 · 이십 년 또 삼십 세 · 사십 세 · 오십 · 육십 · 칠십 세, 이렇게 해 가지고 벌써 반평생(半平生)을 살고, 얼마 안 가면은 이승을 하직(下直)할 나이에 이르렀다 그 말이여.

그러니 나무에다가 비유를 한다면은 이미 이 고목, 고목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 이 고목이 되었지만 정말 이 얼마 안 가면 썩어 문드러질 이 고목 속에 영원히 쓰고도 남을 보배가 들어 있어. 그 보배를 찾는 것이 바로 '이 뭣고?'거든.


'이 뭣고?'


정말 뒤로 미룰 수 없고, 정말 일분일초도 미룰 수가 없는 이 정진(精進)이거든.

한 생각 탁! 터지면은 바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니, 연세가 많다고 해서 그럭저럭 지내실 일이 아니고, 또 아직은 젊다고 해서 뒤로 미룰 일도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남녀(男女)와 노소(老少)가 없어. 마지막 숨이 딱! 떨어진 그 찰나(刹那)에도 이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 깨달라도 그것도 늦은 것이 아니고, 마지막 죽을 때 정말 이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바로 깨닫고 죽었다 하면, 이 숨을 거뒀다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기 때문에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여.

금방 새 몸을 받아서 또 태어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극락(極樂)에 가기를 원한다면 극락, 천당(天堂)에 가기를 원한다면 천당, 바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이 생(生)에 못다한 정진을 더 철저히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수 있게 까지 되어 가지고 한량없는 인연(因緣) 있는 중생을 제도(濟度)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한 스님네나 방부를 들이지 아니한 신도님네들도, 각기 자기가 있는 처소(處所)에서 꼭 방부 들인 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알뜰히 그리고 경건(敬虔)하게 생활을 하시면서 분(分) 따라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백일기도에 동참(同參)하신 여러 신남신녀들도 바로 이 결제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이 삼독심(三毒心)을 삼가하고, 그 세속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탐심도 나고 진심도 나고 또 어리석은 생각도 나겠지만,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탁! 발판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화두를 챙기고 해서, 방부를 들인 분들 못지않게 그 가정에서, 그 생활 속에서 정진(精進)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이 궁극(窮極)에 가서는 이 참선(參禪)은 생활, 생활 속에서 이 참선이 되어야 그것이 참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활을 여의고 저 깊은 산중에 선방(禪房)에서만 그 죽비를 치고 참선을 해야만 그것이 참선이고, 세속에 나오면 정진이 안 된다면 그건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아까 처음에, '불법(佛法)은 세간(世間) 속에, 세속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불법이 있다'고 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이 생활 속에서 정진이 되어 가도록 잡드리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활발(活潑)하게 살아 있는 정진이라야 정말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진 속에서 참으로 깨달라야 그 깨달음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는 되고, 조끔 시끄럽고 복잡하면 안 되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고 이래 해 가지고는, 그러한 정진은 그건 썩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실 때, 백일기도에 그 기도도 정말 성취가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가운데에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들께서는 여러 가지 종류에 소원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분의 그 학교 합격 문제라든지, 취직 문제라든지, 또는 결혼 문제라든지, 사업에 문제라든지, 또는 그 관공서나 회사에 모다 여러 가지 문제들, 사회 국가 문제, 여러 가지의 크고 작은 소원이 있으실 것입니다마는, 그러한 소원도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에 그 참마음 찾는 수행이 밑받침이 되어야, 그래야 그러한 소원들도 결국은 성취가 되고 우리의 목적도 달성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추워지게 됩니다. 모다 몸조심하시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병도 마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중심(中心)을 잃고 감정에 흐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모든 병(病)에 원인(原因)이 되는 것입니다.

당뇨병도 되게 속을 썩은 뒤에 흔히 터지고, 모든 무서운 그 암 병도 너무너무 속을 썩고 신경을 쓰므로 해서 그래서 그런 무서운 암 병도 생기게 되고, 혈압이 올라가는 중풍이라든지 온갖 심장병이라든지 모든 병이, 심지어는 눈병, 또 기관지 병, 모든 사지백체와 오장육부에 갖은 병이 그 마음이 중심을 잃고 속을 끓인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순경계(順境界)와 역경계(逆境界)를 당해서 화두(話頭)를 챙겨서 자기(自己) 근본(根本)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병(病)을 미연에 방지(防止)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심을 내서 철저히 정진을 해 보신 분이면 다 경험을 하실 수 있는 일이니만치, 부디 이 공부, 한 생각 잘 챙겨서 몸이 건강하고, 가정이 화평(和平)하고, 여러분의 모든 크고 작은 원(願)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할 수 있다면, 이 사업(事業)보다도 더 급하고도 중요한 사업은 다시는 없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내가 여쭙고 싶은 말씀, 당부하고자 하는 말이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54분45초~1시간10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부처님의 법은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 물의 본성은 바로 습성(濕性).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실상(實相), 진리(眞理)의 체(體)는 변함이 없는 것 / 참선은 아무 재미도 없고 얻은 바가 없다.


화두순숙 의단독로 성성적적 /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챙겨 /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 의관(疑觀). 의심(疑心)의 관(觀) / (게송)오욕해자갈~ / 원음(圓音) 설법(說法).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 /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라 /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천천히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하셔야 / 수면은 최소한도 5시간 정도는 푹 자야 / 부처님께서 오비구에게 설하신 '중도법(中道法)' /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게송)입해산사도비력~ / 이 공부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 궁극(窮極)에 가서는 생활 속에서 참선이 되어야 그것이 참 올바른 정진(精進) / 마음이 중심(中心)을 잃고 감정에 흐르면, 그것이 모든 병(病)의 원인(原因). 모든 순경계(順境界)와 역경계(逆境界)를 당해서 화두를 챙겨서 자기 근본(根本)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병(病)을 미연에 방지(防止)할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 출현(出現)을 하셔 가지고 중생(衆生) 교화(敎化)를 하시는데,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실법(實法)만을 가지고는, 실상법(實相法), 실법만 가지고서는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법(權法), 방편법(方便法)을, 아주 좋은 방편법을 잘 쓰면서 그래 가지고 실법(實法)을 나투어야 그래야 중생 교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철 동안 정진(精進)을 해 가는데, 언제나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 부처님의 법은 세법(世法)을,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을 여의고 참선(參禪)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생사법(生死法)을 여의고 진리법(眞理法)을 따로 찾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진리(眞理)가—진리 그 자체(自體)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용(用)으로써 발(發)한 것이 바로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요, 일월성진(日月星辰)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인 것입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그러한 신령스러운 묘체(妙體)가, 그것이 나타나면 바로 태양이요, 달이요, 그 무수한 별이요, 산이요 바다요, 나무요 돌이요, 일체 중생이요, 모든 짐승이며 그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전부 진리(眞理)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진리가 나타난 그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그림자 있는 곳에 그 반드시 실상(實相)이 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또 화두(話頭)를 들고, 번뇌(煩惱)가 일어나면 나는 화두(話頭)만을 들거든. 화두만을 들어요. 들면은 망상은 저절로 자최가 없어지는 것이거든. 화두를 들어도 그 망상이 안 없어지면 또 화두를 드는 것뿐이지, 망상이 안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떠억 챙겨. 숨을 터억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그것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했을 때 그 여운(餘韻)으로 남은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이여. 그래서 그것을 '의관(疑觀)'이라 그래요. 의심(疑心)의 관(觀)이다. 알 수 없어.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아까 처음에, '불법(佛法)은 세간(世間) 속에, 세속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불법이 있다'고 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이 생활 속에서 정진이 되어 가도록 잡드리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활발(活潑)하게 살아 있는 정진이라야 정말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진 속에서 참으로 깨달라야 그 깨달음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는 되고, 조끔 시끄럽고 복잡하면 안 되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고 이래 해 가지고는, 그러한 정진은 그건 썩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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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20. 9. 27. 20:11

(No.306)—19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어(86.08.03) (62분)

(1/3) 약 20분. (2/3) 약 21분. (3/3) 약 19분.

(1/3)----------------


[호궤합장(胡跪合掌)을 하시고 앉아 주십시오. 그러니까 무릎만 붙이시고 궁둥이는 드십시오. 무릎만 마루에 붙이시고 궁둥이는 들으시고]


지금부터 여러분께서는 불명(佛名)과 오계(五戒)와 또 화두(話頭)를 타시게 되겠습니다.


첫째, 오계(五戒)를 먼저 설하게 되겠습니다. 아까 법상에서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가 될 때에는 오계를 받고 또 불명을 타고 또 공부해 나가는 바른 법을 배워서 마음을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를 한마디로 말해서 삼학(三學)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중생은 탐진치(貪瞋癡)—탐내는 마음, 또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탐 · 진 · 치 3가지의 옳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삼학(三學)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삼학은 계 · 정 · 혜(戒定慧) 이것을 삼학이라,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삼학(三學)이라 그러고. 탐 · 진 · 치를 삼독(三毒)이라 그러는데, 삼독을 돌이켜서 바꾸어 가지고 삼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삼학(三學)의 첫째는 계(戒)입니다. 계(戒). 계율(戒律).

5계와 10계 또는 비구 250계 또는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 이런 계가 있는데, 이 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와 '마음으로 지키는 계'가 있습니다.


이 계(戒)를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을 올바르게 가져나감으로 해서 계를 지키고, 그다음에 정(定)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그 탐진치 삼독으로 훨훨 불이 타 가지고 안정을 얻지 못하고 노상 둥둥 떠다니고, 노상 치닫고 잠시도 고요히 안정되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한곳에 안정을 시킴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정(定)을 닦음으로 해서 그래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데,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계(戒)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定), 선정(禪定)은 그 그릇에 물을 담는 거와 같고.

그래서 계기(戒器)요, 계의 그릇이요, 정(定)의 수(水)요, 선정(禪定)의 물이다 그말이죠. 그리고 혜월(慧月)이여, 지혜는 달과 같은 것입니다.


계의 그릇이, 계를 잘 닦음으로써 그 그릇이 깨끗하고 딱 바로 놓여져야 거기에 맑은 참선의 물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맑은 물을 담음으로 해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 그릇 안에 물속에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달이 물속에 잘 나타나기를 바래거든 그 물이 맑고 고요해야 하고, 물이 맑고 고요하게 잘 담기게 할라면은 그릇이 깨끗하고 그릇이 바로 놓여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항상 셋이 같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戒)만 있고 정(定)이 없어서는 혜가 이룰 수가 없고, 혜(慧)만을 바라면서 선정을 닦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계와 정과 혜, 삼학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인 것입니다. 3가지가 한 체(一體)인 것입니다. 계 있는 곳에는 정과 혜가 있고, 정이 있는 곳에는 계와 혜가 있고, 혜 있는 곳에는 정과 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3가지는 항상 동시요, 한 뭉텅이인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올바른 부처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지혜를 얻어서 영원한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자 하거든, 맨 먼저 부처님의 계를 잘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저 산에 나무에 올라가 가지고 물속에서 사는 고기를 구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모래를 쪄 가지고 밥을 만들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모래를 솥에다 넣고 불을 지핀다 하더라도 그 모래는 밥이 되지 아니한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좋은 집을 지을라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나 질컥벌컥한 그 굳지 않는 땅에다가 아무리 설계를 잘해서 훌륭한 집을 지은다 해도 그 집은 얼마 가지 못해서 기둥이 가라앉고 벽이 갈라지고 집이 쓰러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타시는 계율이 얼마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불살생(不殺生).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 불투도(不偸盜),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자기 물건 아닌 것을 취하지 말아라.


셋째,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나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방사(房事)를 하지 말아라.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아닌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면은 그것은 피차에 괴로움과 불행을 가져오고 가정을 파탄시키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그래서 마침내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행하고 사회도 시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음을 하지 말아라.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하면은 진실성을 잊어버려서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직업을 갖건 진실하지 못하면 자기는 설 곳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게 되면은 차츰 과음을 하게 되고 술 취한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면 실수를 하게 되고 아무도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믿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술을 많이 먹게 되면 머리가 나빠지고 결국은 중독이 걸리게 되면은 폐인(廢人)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는 이상 말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지 말아라, 망어(妄語)를 하지 말아라, 술을 먹지 말아라,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왜 죽이지 말아야 하냐? 산목숨을 죽이게 되면 자기 자비심(慈悲心)을 손상하게 되어.


아까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스스로 자기가 깨닫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깨달은 사람으로 온 법계가 가득차게 하려는 이런 3가지의 큰 목적이 우리 불법(佛法)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달성할라면 첫째, 자비심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살생을 하게 되면은 그 자비심이 없어져 버려. 그러니 도를 이룰 수도 없고, 도를 이룬다고 해도 무엇을 위한 도냐 이말이여. 그래서 불자(佛子)는 마땅히 살생을 하지 말고 자비심을 길러야 한다.


또 불자는 마땅히 도둑질하지 말아라. 불자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고, 각만(覺滿)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데 남의 것을 훔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남의 것을 훔치는 이 도둑질을 하면은 복덕(福德)을 손상을 해.

복력(福力)이 있어야, 내 복덕이 있어야 나의 모든 좋은 영향력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서 배고픈 사람은 배부르게 해주고, 옷이 없는 사람은 옷을 주어서 따뜻하게 하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약이 되어주고, 이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까지도 다 바치면서 베풀면서, 그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인데,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것이냐.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것을 남에게 보시하는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에 사음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가져서, 청정하게 가져야 자기도 도를 이룰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도 제도를 할 수가 있지, 내 몸과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더러운 상태에서 어떻게 남을 청정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은 도(道)는 자비와 복덕과 이 청정한 마음이 모두가 도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고, 그것이 도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데 어찌 몸과 마음을 부정(不淨)하게 가질 수가 있느냐. 그래서 셋째에 가서는 사음을 하지 말아라 그것이여.


넷째에 가서 망어(妄語)를 왜 하지 말아야 하냐. 망어를 하면 진실(眞實)한 마음을 손상하게 되어.

도를 이루려면 앞에 말한 3가지에다가 또 이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서 도를 이루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거짓말을 풀풀 해 가지고 스스로 진실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자기도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실치 못한 사람의 말을 누가 믿어주며 어디 가서 중생을 제도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행동과 진실한 말과 진실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에 가서 술을 먹지 말아라. 세속에서 살라면은 남녀 간에 다 술을 마시게 되고 술을 권하게 되고 이러는데, "아, 이 5계를 받어서 '술을 먹지 말아라'하는 계를 받게 되면 이제 술은 입에다도 못 대겠다. 이거 참! 그 5계 중에 고놈 하나는 뺐으면 좋겠다" 그러한 말을 하는 분도 있는데.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술을 먹지 말아라’한 계율을 다섯 가지의 계(戒) 속에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 조목을 넣으신 데에는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지혜(智慧)를 손상을 해.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또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거꾸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다 제정신으로 술을 먹고 권하고 그러지만, 차츰 주기(酒氣)가 돌게 되면 자기도 막 먹고 남도 무리하게 권하고 해 가지고 술이 술을 먹게 되고, 나중에는 제정신을 완전히 잃게 되면 그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게 되어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이 되면 나중에는 중독이 걸리고 술을 안 먹고는 배기지를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서 마시고, 그 술이 주기(酒氣)가 가시기 전에 또 마시고, 가실라 하면 또 목이 조금 마를라 하면 또 홀짝 마시고 홀짝 마시고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하루종일 아주 술이 취해 가지고.

그렇게 되어 가지고 혀는 꼬부라지고 두 다리는 헛발질을 하고, 하는 말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말을 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장사를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사업을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무슨 정치를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결국은 이 '술'이라 하는 것은 세속에서 참 아주 끊기 어려우면서도, 이 술 때문에 눈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심장이 나빠지고, 제일 두려운 것이 술 때문에 간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사람이 자기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우리 하근기(下根機) 중생들에게는 ‘술을 먹지 말아라’한 계율은 대단히 중요한 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지금 사람을 죽이며, 도둑질을 하며, 사음을 하며, 누가 거짓말을 쓸데없이 풀풀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그러한 앞에 말한 4가지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설사 계를 받지 안 해도 산목숨을 죽이기를 다 싫어하고 또 이 도둑질하라고 해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사음도 역시 마찬가지고 거짓말도 누가 쓸데없이 거짓말 풀풀 하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술은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그걸 먹은 것이 별로 죄가 안 되리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은 이 술을 참 삼가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율은 형식적으로 지키는, 몸뚱이 형식적으로 지키는 계가 있고, 마음으로 지키는 계, 두 가지로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지키는 계’는 소승계(小乘戒)고, 대승계(大乘戒)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인 것입니다.

‘실지로 저 놈을 내가 죽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실지로 죽이지만 아니하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안됩니다. 그러나 대승계는 이미 마음속에 ‘그를 죽이리라’하고 마음먹었다 하면 이미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사음이나 그런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지로 도둑질을 안 하고 속으로 마음으로 ‘저걸 내가 기어코 훔치고야만 말리라’하고 마음을 먹었어도 기회가 안 닿던지, 중간에 마음이 ‘에이, 내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하고 안 했다면 그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마는 대승계는 이미 한 생각 도둑질할 마음을 냈을 때 대승계는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승계는 차라리 지키기가 쉬웁습니다. 허나 대승계는 '한 생각' 탁! 일어나면 이미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지키기가 어렵고 또 차원이 높은 계인 것입니다.


우리 하근기, 중근기, 말법(末法)에 우리 초학자(初學者)들에 있어서는 첫째 이 소승계, 몸뚱이로 지키는 계부터서 철저히 지키고 나아가서는 마음으로 지키는 대승계까지도 잘 지킬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승계와 소승계를 우리는 아울러서 잘 지키는 그러한 최상승(最上乘) 정법학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20분29초)




(2/3)----------------


이상 말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그러한 소중한 것인데 이것을 파(破)하게 되면, 이것을 범(犯)하게 되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살생(殺生)을 범한 사람은 평생 동안 병치레를 하거나 또 오래오래 살지를 못하고 단명(短命)을 하거나 이렇게 되고.

또 도둑질을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평생 동안 가난뱅이가 되고 남의 것을 훔친 그 죄로 항상 가난뱅이 보(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돈을 빌려 줘도 갚지를 않게 되고, 무엇을 해도 재수가 없어서 사업도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음(邪淫)을 한 사람은 사음을 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부정(不淨)한 남편, 부정한 아내와 짝지어지게 되어서 항상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고민을 하는 사람, 또 아내가 부정하다고 밤낮 가정에 불화(不和)가 일어나는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자기가 부정한 행실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바람피는 남편 꼴을 보게 되고 부정한 아내를 맞아서 속을 썩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생에 혹 그러한 일을 당하고 있거나 당하더라도 이것이 전부 전생에 자기가 지은 죄값으로 이런 일을 당한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을 하고 그것을 상대를 용서하고, 자기를 앞으로 그러한 일이 없도록 스스로 청정한 행을 갖도록 노력을 한다면 복잡했던 가정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다시 화목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술! 술을 많이 먹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옥에 가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여간해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렵게 어렵게 사람이 된다하더라도 돌대가리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지능지수가 50도 못되게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바보 천치로 태어나서 먹을 것 밖에는 모르고, 무엇이 좋고 하는 선악을 분별을 못하고, 본말(本末)을 가리지를 못하고, 사람은 분명히 사람인데 아주 바보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그렇게 폐인이 되지만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속에 몸담아 살면서 그렇지 않아도 살기가 어려운데, 이 5계를 받아 가지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다 보면 꼼짝을 못하겠다. 정말 자유 없는 그러한 참 구속된 부자유한 그런 생활을 살게 될 것이 아닌가. 에이, 차라리 받지를 말까?' 이런 망설임을 가지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만큼 어렵지만, 그것을 부처님의 법을 믿고 그것을 잘 지켜나감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비심이 넘쳐 흐르고, 복덕이 풍족하고,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그리고 진실하고, 그리고 지혜가 넘친다면, 우리는 금생에 인격을 완성을 하고,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의 신망을 받고 존경을 받고, 어디 가서 무슨 말을 한마디를 하고 뭣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나를 따라 주고,

그렇게 해서 내가 모든 사회에 등불이 되어주고, 나침반이 되어주고, 소금이 되어서 사회를 가는 곳마다 다 정화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된다면, 그것이 우리 불자가 부처님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참선을 열심히 해서 도를 닦은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자진해서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그래.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여러분은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키겠다고 맹세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향불로써 여러분의 팔에 연비(燃臂)를 받게 됩니다.

연비를 받는 뜻은 우리가 이 시간 이전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범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참회하고, 참회함으로써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그리고 새로 태어난, 새로 불자(佛子)로 태어나서 새사람이 되어서 살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연비를 받게 되겠습니다.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우리는 오계를 받고 연비를 하고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고 참회를 함으로써 우리의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봄눈 녹듯이 다 녹아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해졌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에 대해서는 여러분 이 시간을 기해서 다 깨끗해졌습니다.


그것을 다시는 생각해내지도 말고 그것을 돌아보지도 말고 오직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부처님 아들로 딸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부처님 제자로서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서 그 오계(五戒)를 지키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기 위해서 닦아 가는 화두(話頭) 법문을 설하겠습니다. 불명(佛名)을 이제 타신 분이나, 또 화두를 타신 분이나, 오계를 받고자 하신 분도 다 같이 들으시면 좋습니다.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그런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을 하는 그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은 파르르르 성을 내는데 그 성낼 줄 아는 놈.

칭찬하면 기뻐하는데 그 기뻐할 줄 아는 놈.

다치면은 아픈데 그 아플 줄 아는 놈.

배가 고프면 배고픈, 밥먹을 줄 아는 놈.


한 생각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독사와 같은 마음이 나는데, 나찰귀(羅刹鬼)와 같고 독사와 같이 되는데, 또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 또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말이여.

찰나(刹那)간에 독사도 되기도 하고, 찰나간에 천사도 되기도 하는 그러한 그 신기하고도 묘하고 소소영령한 놈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있어.


그놈을 성이 날 때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중생들은 뭐 하나가 기분이 나쁘면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생각에 생각을 더 펴 가지고 점점 속이 상해 나가고, 또 누가 미우면 조금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과거에 몇해 전에 있었던 일까지 이 생각 저 생각 기억을 더듬어 가지고 점점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러는 법이고.

도(道)를 닦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은 언짢은 일을 당하더라도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냉큼 ‘이뭣고?’ 이래 버리거든.

누가 미운 짓을 해도 냉큼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해 버리면, 구태여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고 때리고 속상하는 소리를 해 가지고 그 사람과 다툴 필요도 없는 것이여.


그래서 도를 안 닦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해서 점점 죄를 짓게 되고 웬수를 만들고 시끄럽게 만들고 남과 웬수를 맺게 되는 거고, 집안을 결국은 수라장(修羅場)으로 만드는 거고.

이 도를 닦는 사람은 여간해서 그런 환경에 휩쓸리지를 아니하고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를 하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어.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고 언제나 마음속은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또 귀빈을 맞이해서 사는 그런 마음, 항상 천당이나 극락(極樂)에서 사는 그런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를 젓고 갈 때에 노 젓는 사람이 노 젓기에 따라서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도 닦는 사람은 자기의 한 생각을 잘 조정함으로써 자꾸자꾸 승화되어 가고 도가 깊어지는 것이고, 도를 안 닦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눈을 보면 봄으로 해서 죄를 짓고, 뭣을 들으면 들음으로 해서 점점 번뇌(煩惱)의 불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한마디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그 팔만대장경판이 있는데 그놈을 목판에다 찍어 놓으면 수천 권이 되는데 그놈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어도 다 해석도 못하죠. 그러나 ‘이뭣고~?’ 한마디를 하면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거와 똑같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공덕이 다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할라면은 백일 동안을 계속 불러야 하는데, ‘이뭣고?’ 한번 하는데 1초도 안 걸립니다. 그만큼 ‘이뭣고?’는 공덕이 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 가지고, 그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한다' 그렇게 적혀 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거든.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이여, ‘이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20분31초~41분23초)




(3/3)----------------


우리 자신이 농사짓는 법을 잘 연구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농사를 짓는 법도 있지만, 이미 농사 잘 짓는 법 아는 사람과 같이 그 사람과 같이 농사를 짓고, 이미 다른 사람이 농사지어 논 놈을 갖다가 밥을 해서 딱! 놔주면 입에다 떠 넣어준 것입니다.


‘이뭣고?’하라고 가르켜 준 것은 밥을 여러분 입에다 떠 넣어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기만 하면 되는 거여.

입에다 이렇게 떠 넣어 주어도 뱉어 버리고 씹지도 않고 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 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할 때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는 거와 같애. 그래서 ‘이뭣고?’ 이것이 법(法)의 양식(糧食)입니다. 법의 양(糧)이여, 도(道)의 양식이거든.

그래서 이 법의 양식을 부지런히 먹고 잘 씹어서 삼키면 여러분은 도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심(心)’자, ‘농사 농(農)’자, 심농(心農)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수행하실 때에 들녘을 지나는데, 어느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이 부처님이 탁발(托鉢)을 하시니까, "밥을 못 주겠다"

"왜 못 주느냐?"


"우리는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가지고 이렇게 먹지만, 당신네들은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밤낮 서늘한 그늘 속에 앉아서 있다가 때만 되면 거저 밥을 얻어먹으러 오니 우리는 공밥 먹는 사람에게는 밥을 줄 수가 없다. 이 피땀 흘려서 농사지은 것을 어찌 당신들한테 줄 수가 있겠느냐"


부처님 말씀이 "당신만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나도 농사를 지었소. 당신보다도 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소"

"어찌 도를 닦는 사문(沙門)이 거짓말을 허요"


"아하, 거짓말이 아니요. 당신네들은 몸뚱이를 가지고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을 해탈케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 양식(糧食)으로는 먹어봤자 하루밖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의 농사는 금생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두고 배부르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 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보리심(菩提心)을 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농사는 ‘마음의 농사’야!


농사는 짓는 때가 있고 그 때를 타서 열심히 해야지, 씨만 심어 놓고 가꾸지를 안 하면 그 농사는 폐농(廢農)을 하게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때맞춰서 땅을 갈고, 모자리를 해서 그놈을 때맞춰서 심고, 그래 가지고 농약을 주고 비료를 주고 그래 가지고 그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걸 등한히 해 보십시오.

벌레가 다 먹어버리고 물을 맞춰서 주지 않으면 말라 죽거나 물에 너무 오랫동안 잠기면은 병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수확을 거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가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농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농사짓는 모자리의 씨를 심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어서 때맞춰서 잘 가꾸어 나가야지, 일시라도 등한히 해 버리면 벌레가 와서 침식을 하게 되고 말라 죽거나 떠 죽거나 그렇게 해서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道)도 잠시도 등한히 하면 그렇게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도를 이루지 못하도록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왜 우리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치냐’하면 도인(道人)이 생겨나면 자기네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흔들리게 되고 마구니가 소탕이 되어서 마구니 살 곳이 없기 때문에 마구니가 자기 설 땅을 지키고 자기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도 닦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를 항상 우리는 잘 대항해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심왕(心王) 국토를 잘 지켜나가야만 우리는 도를 성취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는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올라고 하는 그 찰나에—이미 들어와 버리면 쫓아내기가 어려워—들어올라고 할 때 딱! 그놈을 문을 닫아 걸어야 되거든.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날 때, 무엇이 눈을 통해서 들어올 때, 어떠한 사물이 귀를 통해서 들릴 때,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올 때에 바로 그 즉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 마구니가 우리의 국토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에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날의 자기가 아닌 딴 사람으로 성장 또 향상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해탈도를 향해서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세속에 다 직업이 있지만, 이 ‘이뭣고?’ 내가 나를 닦는, 나의 영혼을 갖다가 해탈케 하는 이 직업이 정말 우리의 본업(本業)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또 의식주를 위해서 다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까짓 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영혼을 위하는 직업에다 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정이나 개인이나 사회 국가에 있어서 정말 충실하고자 하면 이 ‘이뭣고?’ 사업을 잘해야 그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정말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루어져 봤자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정말 우리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바칠 것은 오직 이것뿐인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

한번 앉아 보세요. 가부좌 또는 반가부좌.


가부좌를 할 때는 몸을 단정히 하되 너무 힘을 주어 가지고 뒤로 자지바지하거나 어깨에다 힘을 주거나 목에다 힘을 주어서는 아니됩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어금니는 지긋이 물고. 또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에다 꼬부려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은 평상으로 뜨되 자기 자리에서 약 3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는 것입니다.

'눈을 떨군다'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한 점을 응시(凝視)하거나 주시(注視)하는 것이 아니고, 본다면 그 점이 보이되 의식적으로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상으로 뜨되 뜨고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좌우나 전후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두 어깨 위에 두 귀가 따악 수직으로 놓이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몸을 단정히 한 다음에,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丹田), 배꼽 밑에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하고, 숨을 내쉴 때는 그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들어마신 호흡이 그까지 가도록 몰아부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숨은 코로 들어가지만 우리의 생각은 배가 볼록하게만 만들면 되어요. 그냥 배를 요렇게 내밀면 되어요.

들어마실 때는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배를 홀쪽하게 잡아당기면 되는 것입니다.


들어마셔 보세요. 배를 볼록하니 내밀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은 하나·둘·셋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숨을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를 등쪽으로 홀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하니 들어마셔.


그래서 들어마시는 시간은 약 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들어마셨다가 또 딱! 정지를 하는데 정지하는 시간이 약 3초, 또 정지했다 내쉬는 시간이 약 3~4초, 조금 긴 듯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 들어마실 때 너무 배가 가뜩 이렇게 들어마시면 안 되어요. 8부(80%) 정도만 들어마시고. 또 딱! 정지하는 것도 약 3초 정도만 해야지 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으면 그것도 안되고.

또 내쉴 때에도 약 8부 정도만 내쉬어야지, 뱃속에 하나도 없을 때까지 완전히 뱃가죽이 등어리가 닿을 때까지 다 내쉴려고 하면 그것도 힘이 들고 무리가 가니까 그래도 안 되고.


그래서 들어마신 호흡도 8부 정도 들어마시고, 내쉬는 호흡도 약 8부 정도 내쉬어서, 호흡을 하는데 조금도 무리가 안 가도록, 힘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마셨다가 3초 정지했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할 때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숨을 또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에 주욱 하셔 나가면 나중에는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보면 ‘이뭣고?’를 숨 내쉴 때마다 안 해도 괜찮게 되어요.

숨은 서너 번 할 때에—‘이뭣고?’ 한번 해 놓고서 숨은 서너 번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해도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참으로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뭣고?’ 한번 하고, 점심 때까지 ‘이뭣고?’는 들지 안 해도 항상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면은 그만 그것이 화두를 이미 들어...(녹음 불량)


‘이뭣고?’ 따악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챙겨 가지고 또 금방 또 망상에 들면 그때 또 ‘이뭣고?’

망상이 들어오지 않고 ‘이뭣고?’한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딱 있으면, 뭐 구태여 ‘이뭣고?’ ‘이뭣고?’ 자꾸 되풀이해서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은 하루에 십만 독(讀), 이십만 독 해서 횟수를 채우기 위해서 염주(念珠)를 부지런히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데 ‘이뭣고?’는 그게 아니어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부른 것이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 공덕에 해당이 된다 그러니까, '이놈을 하루에 오만 독을 하면은 육백만에다 오만을 곱하면 얼마냐? 진짜 이렇게만 하면은 며칠 안 가서 툭 터질 거다!'


절대로 ‘이뭣고?’는 횟수가 문제가 아니고 그 간절(懇切)한 간절한 그 의심, 의심(疑心)이 나중에는 의단(疑團)이에요.


한번 화두를 들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 뭉탱이'가 고대로 있어 가지고 무엇을 봐도 그 의단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무엇을 들어도 흔들림이 없이, 알 수 없는 의단이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차를 타거나, 누가 옆에서 나한테 욕을 하거나 억울한 소리를 해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화두만이 떠억 드러나게 된다면 그게 공부가 자리가 잡혀가는 거여. 익숙해지는 거여.


그렇게 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새벽까지, 잠을 자면 꿈에서도 그 의단이 없어지지 않고, 새벽에 눈을 떠도 엊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게 된다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는 건데, 그 공부가 아주 익숙하게 되어서 그렇게 되어야 머지않아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열심히 해야 그런 타성일편 지경이 오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아니하고 하다 말다가 그저 그래 놓고서, ‘아이고, 참선해봤자 되지도 않고 우리는 근기(根機)가 얕아서 염불이나 해야지, 참선은 좋은 줄을 알지마는 죄 많은 중생이라 못한다’고. 이런 자포자기를 하신 분이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해서, 발심(發心)하고 분심(憤心)을 가지고 의심(疑心)을 내서,

대신심과 대분심—‘어째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선지식은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해탈도를 증득했는데 나는 왜, 같은 사람으로서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했는가' 속에서 분한 생각이 나고 그래 가지고 도를 아니 닦을라야 아니 닦을 수 없는 그런 분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의단. 대의심,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하는 그 간절한 의심.

이 3가지 요소가 동시에 일어날 때에 우리는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는 것입니다. 계를 지킬라고 안 해도 저절로 계가 지켜지는 것이고, 참선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는 그 가운데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오계를 받고 또 화두를 타고 또 불명(佛名)을 받게 되겠습니다. 앞으로 스님네가 부르는대로 차례차례 나오셔서 이 불명을 받아 타셔서, 자기의 불명이 무엇인가를 잘 아셔야 합니다.

속에 이와 똑같이 생긴 계문(戒文)이 들어 있고 거기에 여러분의 불명이 쓰여 있습니다. 한문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받은 봉투에는 한글로 쓰여 있으니까 자기의 불명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아시고.


가정에서도 내외간에 서로 불명을 부르시면 더욱 좋고, 형제자매 간에도 불명을 부르고, ‘아무개 엄마, 아무개 엄마’하지 말고 ‘아무개 보살’ 이렇게 해서 불명을 서로 부르면 불명을 부른 사람도 공덕이 되고, 부름을 받는 사람도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피차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불명 한번 부를 때마다 ‘이뭣고?’를 하는 데에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되는 것이니만큼, 불명을 잘 스스로 잊지 말고 남의 불명도 잘 알아서 서로서로 불러주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또 부처님의 아들로서 도반으로서 좋은 인연이 깊어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41분24초~60분3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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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내용]


오계(五戒) / 계 · 정 · 혜(戒定慧), 삼학(三學) / 불법의 목적 :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 /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 / 연비(燃臂)와 참회.


화두 게문 : 示[佛名] 有一物於此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是甚麼 / ‘이뭣고?’ 효과와 공덕 / 팔만대장경은 노정기(路程記) / 법(法)의 양식(糧食), 심농(心農) / 법의 기쁨.


참선은 우리의 본업(本業), 그 밖에 모든 것은 부업 / 참선 자세, 단전호흡 / 신심 분심 의심을 동시에 발해야 / 가족 간에 서로서로 불명을 불러주면 공덕이 된다.



삼학은 계·정·혜(戒·定·慧) 이것을 삼학(三學)이라 그러고, 탐진치를 삼독(三毒)이라 그러는데, 삼독을 돌이켜서 바꾸어 가지고 삼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항상 셋이 같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戒)만 있고 정(定)이 없어서는 혜가 이룰 수가 없고, 혜(慧)만을 바라면서 선정을 닦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올바른 부처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지혜를 얻어서 영원한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자 하거든, 맨 먼저 부처님의 계를 잘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지키는 계’는 소승계(小乘戒)고, 대승계(大乘戒)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인 것입니다. ‘실지로 저 놈을 내가 죽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실지로 죽이지만 아니하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안됩니다. 그러나 대승계는 이미 마음속에 ‘그를 죽이리라’하고 마음먹었다 하면 이미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향불로써 여러분의 팔에 연비(燃臂)를 받게 됩니다. 연비를 받는 뜻은 우리가 이 시간 이전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범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참회하고, 참회함으로써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뜻.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그런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 만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 가지고, 그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한다' 그렇게 적혀 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거든.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이여, ‘이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


당신네들은 몸뚱이를 가지고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을 해탈케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 양식(糧食)으로는 먹어봤자 하루밖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의 농사는 금생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두고 배부르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 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뭣고?’는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의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내외간에 서로 불명을 부르시면 더욱 좋고, 형제자매 간에도 불명을 부르고, ‘아무개 엄마, 아무개 엄마’하지 말고 ‘아무개 보살’ 이렇게 해서 불명을 서로 부르면 불명을 부른 사람도 공덕이 되고, 부름을 받는 사람도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피차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불명 한번 부를 때마다 ‘이뭣고?’를 하는 데에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되는 것이니만큼, 불명을 잘 스스로 잊지 말고 남의 불명도 잘 알아서 서로서로 불러주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또 부처님의 아들로서 도반으로서 좋은 인연이 깊어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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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0. 3. 9. 21:31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86분)

(1/4) 약 21분. (2/4) 약 22분. (3/4) 약 21분. (4/4) 약 22분.

(1/4)----------------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정묘년(丁卯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신남신녀와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부처님으로부터 오늘까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부처님 정법(正法)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조에 와서, 이조 말엽에 와서 이 불법(佛法)이, 이 참선법(參禪法)이 잠시 침체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에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께서 출현(出現)을 하셔가지고 처음에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시고, 어떻게 참 두뇌가 명석하시고 또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공부를 하셨던지 일찌감치 그 전강(傳講)을 받아가지고 대강사(大講師)가 되어서 천하에 학인(學人)을 모다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무서운 전염병(傳染病)에 무데기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시고, '경(經)을 아무리 종횡으로 맥힘이 없이 알고 설(說)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아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다' 한 것을 깨달으시고서 학인을 다 흩어버리고 이래가지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리해서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침체(沈滯)한 한국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을 하셔서 경허 큰스님 밑에 만공(滿空) 스님, 혜월(慧月) 스님, 수월(水月) 스님, 여러 도인(道人)들이 나오셨습니다.


그래가지고 한국에 선풍이 크게 융성을 해가지고 만공 스님 밑에 고봉(高峰) 스님, 전강(田岡) 스님, 보월(寶月) 스님, 또 여러 도인들이 나오셔서 오늘날 한국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도처에 선방(禪房)이 있어서 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정진(精進)을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정법이 오늘날 한국에 이렇게 전통해 내려온 것은 오직 경허 스님께서 대강사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확철대오해서 선풍을 진작한 그 공덕(功德)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종가풍(五宗家風)이 있고 그 종파(宗派)에 따라서 가풍이 모다 다르고, 현재도 일본에는 일본식 참선이 전해 내려와서 그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서구에 참선이 소개 되어서 서구 사람들이 많은 일본 참선에 대해서 모다 듣고 배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 한국에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하고는 하늘과 땅에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모두가 다 참선이고 다 좋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참선법은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만큼만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어.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은, 한 말로 말해서 의리선(義理禪)입니다. 공안(公案)을 의리(義理)로, 의리로 따져서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화두(話頭)를 받어가지고 며칠 이마를 찡그리고 애써서 이리저리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 그럴싸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가지고 그 조실 스님한테 가서 자기 본 바를 말하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줍니다.


또 새로 공안을 하나, 화두를 타가지고 또 며칠간 끙끙 앓으면서 그래가지고 뭐라고 그럴싸한 답을 하면, 안 맞으면 "안 맞다! 또 다시 더해라"

또 며칠 애써서 가서 뭐라고 대답하면 "되았다!" 그러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그래서 영리한 사람은 금방 이르기도 하고, 이삼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사오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또 오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대체적으로 백 개 이상의 화두를 통과하면 조실(祖室) 자격을 준다.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니까, 그때에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에 근원(根源)이며 이 하택 저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고,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없어진 때도 없으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어. 머리도 없고 꽁무니도 없으니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이냐?"

"모든 부처님에 근원이며 이 신회의 불성입니다"

아, 그럴싸하니 대답을 하지 안했습니까. 이론적으로 말할 때 뭐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그 맞는 말이지.


육조 스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시기를,

"내가 내동 말하기를,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다고 그러는데 너는 어찌 '모든 부처님에 본원(本源)'이니, '하택신회의 불성(佛性)'이니 하고 왜 이름을 붙이는고? 너는 나중에 애써서 공부를 해가지고 일가(一家)를 이룬다 해도 너는 얼자(孼子)가 되고,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겄구나"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강사(講師)같은 거,

참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하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교리적으로 연구하는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되겄구나' 이렇게 평을 하셨습니다.


얼마 있다가 남악회양(南嶽懷讓)이라고 하는 수좌가 왔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셨습니다.

아! 남악회양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데 대해서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꽈악 맥힌 체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 8년 동안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인고?...' 도저히 꽉 맥혀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그러한 그 콰악 맥혀서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으로, 그 의단(疑團)으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육조 스님의 법(法)을 이어받았습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의리선(義理禪), 일본 사람들이 화두를 뭐 백 개를 통과(通過)하고, 오백 개를 통과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 동안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가지고 "이것이 아닙니까!"그러면 "옳다"하고 또 하고,

천칠백 공안을 다 통과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선이 아니고 활구참선이 아니고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닌 것입니다.


백 개를 통과해봤자 중생심(衆生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지, 이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처음~21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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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슨 지식(知識)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몇 개 통과했는가? 많이 통과했다고 해서 무슨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닌 바에는 확철대오를 하고, 안 하고 한 것은 놔두고 '바르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 공부는 한 만큼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공부지만, 바르게 하지 못한 공부는 벌써 방향을 잘못 잡고 가는 길이라 서울을 간다며, 저 호남에서 서울을 간다면서 북쪽을 향해서 가지 아니하고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으로 향해 가는 거와 같애서, 바르지 못한 길을 아무리 쉬지 않고 열심히 간다고 해도 바르게 목적지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살부살모(殺父殺母)하는 죄(罪)는 불전참회(佛前懺悔)어니와,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거니와, 미득(未得)을 위증(謂證)하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는 죄는 참회무로(懺悔無路)다, 참회할 길이 없다"하셨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인 죄를 어디 가서 참회를 해.


정법(正法)을 설(說)하고 또 그 정법을 의지해서 수행(修行)을 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이 아닌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

이 의리선을 의리로 이론으로 이렇게 따져서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분석해 들어가는 이런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죽은 구(句)의 참선이다, 죽은 참선이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요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알 수 없는,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 생사심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의리선(義理禪)으로 참선을 하면 그것이 이미 바르지 못한 수행이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떠한 그 나름대로 의리선도 열심히 하다보면 무엇인가 스스로 느낀 바가 있고 그 어떤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른 깨달음이 아니여.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그것이 바른 깨달음인줄 착각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그런 삿된 참선을 지도하고.

또 그런 삿된 참선을 배워가지고 그 사람이 또 그런 삿된 수행을 해가지고 또 삿된 어떤 것을 깨달라 가지고 그걸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전하고 해서 영영 부처님의 정법은 다 믿는 사람이 없고 실천한 사람이 없어지고 삿된 참선만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가득차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법이, 정법(正法)이 멸망(滅亡)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나 어떠한 국법(國法)으로 불법(佛法)이 멸망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탄압을 하고 아무리 파괴를 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나타난 어떠한 그러한 것은 탄압을 할 수가 있고 그 파괴를 할 수가 있겠지만—사찰(寺刹)이라든지 또는 불상(佛像)이라든지 경전(經典)이라든지 그런 상(相)이 있는 그러한 것들은 파괴할 수가 있겠지마는, 정법(正法)은 그것으로서 멸망이 되지 않습니다.


정법은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제자들이 우리 불법을 삿되게 믿고 삿되게 행할 때에 정법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그 사위국(舍衛國)에 파사익왕(波斯匿王)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부인을 얻었는데, 그 말리부인(末利夫人)이라 한 왕후(王侯)를 얻었습니다.

그 말리부인은 원래—부처님의 고국(故國)이신 그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에 마하남(摩訶男)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에 종의 아들입니다.


그 부처님 나라는 가비라왕국이라 해서 나라가 조그만하고, 파사익왕이 있는 그 사위국은 대단히 인도에서도 참 큰 나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비라왕국에 그 공주를 자기 왕후로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비라왕국은 나라는 적지마는 양반의 나라고, 또 이 사위국은 나라는 워낙 크고 했지만 가비라왕국에서 볼 때에는 '나라만 크고 모다 그래서 그러기는 허되 참 양반의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지, 공주를 왕비로 달라고 하니까 차마 공주를 줄 수가 없으니까 그 궁녀(宮女), 종 가운데에 잘 생기고 비슷한 사람을 골라서 공주로 속여가지고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시집간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그 말리부인인데, 그 말리부인은 평소에 항상 마음속으로 자기는 신분이 종이지만 '왕비가 한번 되었으면...' 하고 항시 마음속으로 축원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러면서 참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고 그러면서 그렇게 인자 왕비가 되기를 서원을 하다가 결국은 그 왕비로, 이상스럽게 그 공주 대신 자기가 왕비로 시집을 가게 되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고 일심으로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서원(誓願)을 세우고 원(願)을 세우면 반드시 우리 누구라도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러한 위신력(威神力)이 있어서, 지극정성으로 기구(祈求)하고 축원을 하고 빌면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바르고 좋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 말리부인이 파사익왕한테 시집을 가가지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이 ‘유리태자(瑠璃太子)’입니다. 아주 영특하고 잘나고 그랬는데, 여덟 살이 되어서 그래서 인자 그 왕이 그 아들을 여덟 살이 되었으니 자기 외가로 보내서 거기서 모든 것을 잘 배우고 그러라고 외갓집으로 외할아버지한테 보냈습니다.


그 외가댁에서 그 외손자가 왔으니 그걸 참 잘 가리켜야겄는데, 활 쏘는 법도 가리키고 말 타는 법도 가리키고 모든 학문도 가리키고 그런데, '혼자만 가리키기보단 기왕이면 오백 명의 그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든지, 양반의 집 아들들 뽑아가지고 같이 공부를 시켰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내가지고 큰 수련도장(修鍊道場)을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맨 처음에 부처님을 모셔다가 설법(說法)을 먼저 듣고, 그리고 나서 인자 활 쏘는 법과 그 밖에 모든 공부를 시키리라 해가지고 새로 집을 짓고, 인자 오백 명의 동자(童子)들과 함께 요렇게 해서 했는데,

그 유리태자는 자기로 인해서 그렇게 참 외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참 오백 명의 동자를 모다 모아가지고 같이 공부하게 하고 새로 집을 짓고 하니까 너무너무 기뻐서, 그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가지고는 거기서 막 너무너무 기뻐서 그냥 활발하게 거동을 하고 막 그냥 자기가 일인자가 되어가지고 그러니까, 그 사람, 거기에 모인 동자들이 수근덕 수근덕거리면서 "종놈의 자식이 까분다"고, 아!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그 애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내용을 갖다가, 그러니까 "왜 나보고 욕하냐"고 막 하다가 그 위~하니 달라들어서 아주 치고받고 해서 욕설을 퍼붓고 해서 큰 망신을 하고 사위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같이 모시고 간 바라문(婆羅門) 하나가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내가 나중에 부왕마마가 승하(昇遐)하시고 임금이 되거든, 오늘 내가 당한 이 치욕과 이 봉변을 나한테 일깨워다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결국은 그 왕이 승하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에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그 대신이 그때 그 봉변 당했던 일을 또 이 기억을 개득(이해)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많은 병사를 갖다가 이끌고 가비라왕국을 갖다가 쳐부시러 갔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서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그 중간 경계 국경지대에 가가지고 큰 고목나무가 하나 죽어 갖고 있었는데 그 고목나무 그늘에 가서 떠억 이렇게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자 그 유리왕이 대군을 통솔을 해가지고 국경을 넘어서려고 하는데 고목(枯木)나무 밑에 부처님이 터억 앉아 계시거든.


"아니 부처님께서 왠 이리 고목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앉아 계십니까?"헌께,

"비록 고목은 되었으나 나에 고국(故國)의 그늘이 아니냐. 말라 죽은 고목일망정 조국(祖國)의 그늘이 좋아서 이렇게 그늘 밑에가 있노라"

아! 그 말씀을 듣고서 유리왕이 회군(回軍)을 했습니다. 군사를 몰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이 호고(好苦)라고 하는 대신이 또 유리왕을 충동(衝動)이를 쳐가지고,
"먼저는 부처님 때문에 못했지마는, 아! 어찌 그 참 치욕을 당하고서도 그 가비라왕국을 그냥 둘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또 충동이를 치니까, 대군을 몰아가지고 또 쳐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부처님이 설사 거기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걸 무시해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래가지고 가기로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어봤자 소용이 없는 줄 짐작을 하시고 그냥 안 가셨는데.


가비라왕국에 쳐들어갔는데 성문을 갖다가 탁 때려 잠그고 그래 있는데, 큰 소리를 치면서 성문을 갖다가 열고 결국은 들어갔는데, 그때 그 유리왕의 외할아버지인 마하남(摩訶男)이,

"좋다! 니가 이 나라를 치는 것을 내 힘으로 어찌 막겠냐마는 내가 한 가지 소원이 있다. 내가 이 궁정(宮廷) 뜰에 있는 연못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성문을 열어놓고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도망가게 해라. 내가 물속에 들어가서 참고 있은들 얼마 동안을 있겠느냐? 그 소원 한번만 들어다오"


"그것 그렇게 하지요"

마하남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도망갈 사람은 도망가라' 해가지고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문(四門)을 다 열어놓고 도망가라 그러는데, 서로 앞을 다투어서 도망가는데 벌집 건드려 놓은 것처럼 와- 허니 쏟아져 나가는데, 남문(南門)으로 나갔던 사람이 계속 도망가지를 않고 동문(東門)으로 도로 들어오고, 북문(北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서문(西門)으로 들어오고, 서문(西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남문(南門)으로 들어오고,

아! 계속 줄달음질쳐서 도망가면 다 살아갈텐디 어쩐 셈인지 다시 다른 문으로 들어오고 들어왔다 나가고 나가고 해가지고는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과거에 업(業)이 있어서 결국은 죽을 수 밖에는 없구나'

하여간 한참 있어도 연못 속에 들어갔던 그 마하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연못 속에 들어가서 보라니까, 머리를 그 연못 속에 있는 나무 등걸에다가 칭칭 틀어 감고서 그래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하남은 자기 한 몸을 죽여서 많은 사람들을 피난을 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참 희생적인 방편을 썼는데, 결국은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하고 모두 다, 참 이 경전에는 '9천9백9십만 명이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을 모두 다 잡어서 땅에다가 묻고, 흙으로 다 덮어서 포개서 다 묻고서 많은 코끼리를 동원을 해가지고는 밟아서 다 죽였는데, 거기서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렇게 죽일라고 할 때에 목련존자가, 내나 부처님의 제자고 신통이 제일인데 부처님의 그 가슴 아파하신 것을 알고서,

"제가 가서 그 가비라(迦毘羅) 성중(城中)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저 허공계(虛空界)로 데려다가 피신을 시킬까요?" 이렇게 여쭈어봤습니다.


"니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글쎄요. 참 어렵겠습니다마는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궁중에 왕족과 모다 거기 사람들을 오천 명을 갖다가 뽑아가지고 바리때에다 담았습니다. 담아가지고 저 공중으로 갖다가 놓았습니다.(21분18초~42분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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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는데, 그리고 그 가비라왕국에 다 사람들을 죽이고 다 인자 가버렸는데, 그때 목련존자가 그 허공중에 올라가가지고 그 오천 명 피난시킨 그걸 보니까 바리때 안에 다 고스란히 죽어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피차 그 전생(前生)에 과보(果報)로 죽게 된 그런 경우는 억지로 어떤 신통술로 그것을 억지로 그것을 살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살상(殺傷)이 난 뒤에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그 현장에를 가셨습니다.

당신의 고국이고, 당신의 모다 친척이고 사촌들이고 모다 그래서 안 가볼 수가 없죠. 그래서 제자를 거느리고 가서 보시니까 참 그 비참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내가 그전에 여기에 와서 설법을 해가지고 참 수천만 중(衆)을 갖다가 득도(得道)케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참 비참한 현장이 되고 말았구나. 내가 이제부터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디디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유리왕과 여기 와서 이렇게 참 참혹한 행동을 한 저 군사들은 오래 살지를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 7일 후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멸종(滅種)을 하고 말 것이다" 하고 부처님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유리왕이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을 듣고서 너무너무 공포에 떨고 그래가지고 그 군사를 이끌고 강변에 가가지고 거기서 풍악을 잽히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가만히 있자니 두렵기만 하고 그러니까 강변에 가가지고는 날을 새서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래가지고 궁중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그렇게 지새는데, 갑자기 밤중에 비구름이 일어가지고 폭풍이 불어서 아주 큰 폭우가 쏟아져가지고는 강변이 넘쳐서 왕과 그 병사들이 수십만 명이 다 큰물이 져서 다 떠내려 가가지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위국에 궁전에는 벼락을 쳐가지고,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져서 벼락을 쳐가지고는 삽시간에 불이 타서 재가 다 되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무참하게 많은 사람을 죽여서—코끼리를 시켜서 밟아 죽이고 그래가지고 그 과보가 워낙—부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것을 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조국이요 부처님의 친척이요 사촌들이고 부처님의 조국에 백성들을 갖다가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아서 죽였으니, 마땅히 큰물이 져서 죽을 수밖에는 없고 또 하늘에서 벼락을 쳐서 그 악당들이 살던 궁은 잿더미가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때에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저 자들이 모다 죽어서는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구들이 부처님께, "무엇 때문에 저 유리왕이 저렇게 이 가비라왕국에 부처님의 그 권속과 왕과 병, 백성을 저렇게 참혹하게 죽이게 되았을까요? 전생(前生)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저렇게 되았을까요?" 하고 여쭤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거 구원겁(久遠劫)에 이 사위국(舍衛國)에 강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었는데, 그때 이 큰 못에 그때 인자 많은 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나라에 가뭄이 들어서 농사가 잘 안되고 흉년이 들어가지고 모다 배가 고프니까 그 못에서 많은 고기를 잡아먹었어"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그 많은 고기를 다 잡아서 먹었었는데, 그때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가 하나 있었고 양설(兩舌)이라 하는 두 고기가 있었는데, 그 고기 중에는 제일 참 큰 왕이었었는데, '우리들이 아무 인간을 해롭게 한 일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씨를 말리고 다 죽이니 우리가 언젠가는 내세(來世)에 사람이 되면은 우리가 이 원한(怨恨)을 갚자' 하고 그렇게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사위국에 그 고기를 잡아먹고 모다 그런 그 사이에 어린 소년이 하나가 있었는데, 고기를 잡아서 이 언덕으로 잡아 올리면은 그 막대기를 가지고 고기 그 머리빡을 탁! 치고 그러면서 고기가 잡혀 올라올 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고, 또 잡아 올리면은 막대기로 탁! 치고 이 탁! 치고 해서 아 그렇게 참 뭣도 모르고 그렇게 좋아서 그랬던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고기를 잡아먹던 사람들이 바로 이 가비라왕국에 마하남(摩訶男)을 위시(爲始)한 많은 가비라 모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가친척 그 백성들이고,

그 잡아먹힌 고기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는 이 유리태자(瑠璃太子)고, 또 이 양설(兩舌)이라고 하는 고기는 아까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 임금으로 하여금 자꾸 충둥이를 쳐서 그 가비라왕국을 공격하라고 충둥이 친 그 바라문이고.

그때 소년이 고기를 갖다가 탁 탁 막대기로 때리면서 좋아하던 그 소년이 누구냐하면 바로 석가세존(釋迦世尊)이다 이거거든.


과거에 그러한 그 못에 수천 마리, 수만 마리 고기를 그렇게 참 잡아서 회쳐 먹고 삶아 먹고 지저 먹고 볶아 먹고 그 이렇게 했다 그말이여.

그러한 과보(果報)로 해서 금생에 그 무서운 참 이 살생(殺生)을 당하게 되았습니다.


금생의 인연(因緣)으로만 본다면, 종을 갖다가 공주로 속여가지고 왕비로 시집을 보낸 그 잘못이 있고. 또 거기서 태어난 그 유리태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놀려대고 모다 그러한 원인을 찾을 수가 있지만.

설사 그렇기로서니 자기 외조부—사실은 뭐 종의 자식이니까 외조부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 입장에서 보면은 그러한 자기를 갖다가, 일국에 태자(太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놀린 그 말을 듣고 그만큼 참 분(憤)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무참(無慘)하게 살생을 하고 그럴 수는 없어.


웬수를 갚을라면 거기에 관계되는 사람만 허지, 그렇다고해서 아주 그 많은 사람을 갖다가 생(生)으로 매장을 해가지고 코끼리로 밟혀서 죽이고. 그 살생을 하되 그런 방법이 그렇게 참혹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그러는 법이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웬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요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오늘날 이 세계가 이렇게 서로 이 사상(思想)이 다르고 이념(理念)이 다르고 또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다르면 서로 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싸우는데, 그렇게 싸와가지고 자기나라가 행복해질 수도 없는 거고, 싸와가지고 이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 이 살생(殺生), 예수교에서는 '모든 동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잡어먹으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놨으니까 소고 돼지고 닥치는 대로 동물은 잡어먹어야 옳다'고 그런 말들을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래서 그러면 지금은 사람 몸뚱이에 이나 벼룩이 없어졌지만 참 해방 직후 굉장히 이가 참 많고, 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런데 "그러면 사람 몸뚱이를 이나 벼룩이, 벼룩이나 빈대가 그 (피를) 빨아 먹고 사는데, 그러면 사람은 이나 벼룩 빈대가 (피) 빨아 먹으라고 이 세상에 태어났겠느냐?"고 이렇게 반박을 하고 웃은 일도 있습니다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짐승이 태어났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되아가지고 힘 강한 놈이 약한 놈을 갖다가 먹고 살고 이렇게 하고 있으나 이것은 떳떳한, 마땅히 그렇게 되아라고 누가 만들어 놨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그 미물(微物)의 고기를 잡아먹은 그 과보(果報)로도 그렇게 참 무참한 과보를 받게 되거든,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여가지고 그 무서운 과보를 어떻게 면할 길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죽인 죄도 그렇게 무섭거든, 하물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정법(正法)을 멸망하게 하는 죄는 또한 무엇에다가 비유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법(邪法)을 믿고, 바른 정법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먼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삿된 법을 남에게 가리키면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정법을 실천을 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영원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사 화두(話頭) 하나를 타가지고 일심(一心)으로 참구(參究)를 해서 '이뭣고?'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알아진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그러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참을성 있게, 끈기 있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철저히 믿기를,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자기도 도(道)를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그런 긍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려고 하고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잠시도 일으켜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물론 그 '번뇌(煩惱)다' '망상(妄想)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되아.

버릴려고 한다고 버려지지도 않고,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또한 하나의 망상(妄想)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진심(瞋心)이 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슬픔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넘어져도 '이뭣고?'

뒤집어져도 '이뭣고?'


사업이 잘되아도 '이뭣고?'

사업이 실패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하고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립두수지(直立頭垂地)하고  횡면각지천(橫眠脚指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42분59초~64분11초)





(4/4)----------------


우중(雨中)에 간호월(看好月)하고  화리(火裏)에 급청량(汲淸凉)이다.

비 가운데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가운데에서 그 밝은 달을 보고, 불이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시원한 맑은 물을 길을지니라.


밝은 달은 비가 안 올 때에 볼 수가 있고, 맑은 물은 맑은 샘에서 퍼야지,

어떻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구름 덮인 하늘에서 그 밝은 달을 찾으며,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어떻게 맑은 물을 길러낼 수가 있을까?


진리(眞理)에 입각해서 보면, 남(南)과 북(北)이 같은 것입니다.

북쪽의 반대가 남쪽일 것 같지만, 북쪽이 바로 남쪽이고 남쪽이 바로 북쪽이여.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남쪽이 돌아오고만 마는 것입니다.


콜롬버스가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다보니까 결국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는 일을 항상 만나고 항상 보기를 바래지만,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남으로써 행복(幸福)을 삼지만, 사실은 마음에 맞는 일만을 추구하다 보면 머지않아서 불행(不幸)이 돌아오는 거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自己)를 단속(團束)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욱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도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많고, 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에 맞는 사람만 찾을라고 하면 어디에 그렇게 만나겠습니까? 내 마음에 꼭 든 일만 만나고자하나 그런 일은 만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혹 만났다 하더라도 잠시지 다시 또 그것은 나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음에 맞지 않는 역경(逆境)에서 거기서 부딪히고, 거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고 용감하게 지혜롭게 끈기 있게 헤치고 나가면, 거기에서 이 사바세계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 닦는 것도, 의리선(義理禪)은 따져 들어가면 알아진 것이 있고, 얻어진 것이 있고, 재미가 있고, 맛이 있으니까, 공안(公案) 하나 얻어서 이리저리 해가지고 통과하고, 또 공안 하나를 타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아!’ 알아맞추고 하면 그것 곧 그냥 깨달음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것같이 느껴지고, 재미가 있고 얻은 바가 있고, 남에게 '나는 공안 몇 개를 알았다' 이렇게 자랑할 것이 있고, 썩 할만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공부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서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이여.


한 가정, 한 가족, 일가친척, 우리 마음에 맞은 사람 엄격히 말하자면 사실은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어렵다고해서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아니고 형제가 아니고 일가친척이 아니고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각각 숙세(宿世)로부터 지어 내려오는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고 그러기 때문에 얼굴을 각각 다르게 태어났고, 생각도 성격도 각각 다르고, 따라서 본 바가 다르고 생각한 바가 다르니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여.


서로 지은 바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그 근원은 모르고서 내 마음에 맞기만을 바래고 내 마음에 안 맞으면 미워하고 그 사람을 갖다가 짓밟고 쫓아내고 멀리하고 망하기를 바래고 이런다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너무 참 어렵고,

정말 스스로 고통과 불행의 보금자리를 자기가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기가 고통을 받게 되는 거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생(生)을 거듭함에 따라서 점점 고통스러운 생을 만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유리태자가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전생에 살생을 당했다고 해서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그렇게 해가지고 살생을 해서 무슨 좋은 꼴을 자기는 봅니까?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고, 불이 나서 자기 궁실이 다 타 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전생에 우물 못 속에서 사람들로부터서 잡아먹히더니, 금생에 다시 와서 보복을 하고서 자기도 다시 멸망을 했습니다. 내생에 다시 원한심을 품고 또 보복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쳤던지,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를, 인과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前生)에 코끼리의 왕이 되어 계실 때에 어떠한 포수(砲手)가 위경(危境)에 처해서 죽게 될 때 그 포수를 살려주었는데—포수가 가가지고 돌아갔는데, 그 광고를 보니까 '아금니가 여섯 개가 달린 코끼리를 잡어 온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소원을, 소원대로 해준다'하고 광고가 붙었어.


그 광고를 보고서 '내가 연전에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가지고 죽게 되었을 때 나를 살려준 코끼리가 바로 이 상아(象牙)가 여섯 개가 붙었다' 한 것을 깨닫고서 "내가 그 코끼리를 잡어 오겠습니다"하고 자원을 했습니다.

"그래, 니가 잡어오너라"


그 코끼리는 스님네를 좋아하고 불법(佛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반 보통 사람한테는 도저히 잡혀서 죽질 않는데, 스님네는 살생(殺生)을 아니하기 때문에 그 스님네가 가까이 온 것은 경계(警戒)를 아니해.
그래서 그 포수(砲手)는 머리를 깎고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스님으로 가장(假裝)해가지고 들어가 가지고 독 묻은 창으로 그 코끼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코끼리의 그 군사들이, 모다 백성들이 오백 마리가 달라들어서 그 포수를 갖다가 밟아서 죽일려고 하니까 그 코끼리의 왕이 그 포수를 갖다가 자기 네 다리 사이에다가 이렇게 숨겨놓고,
"너희들, 이 죽이지 말아라. 이 포수는 내가 저를 살려준 그 생명의 은혜를 갖다가 이렇게 나를 독 묻은 창으로 쑤셔서 나를 죽이니, 나는 이 포수에게 어떻게 이 보복을 할 것인가?

너희들 식으로 이렇게 밟아서 죽이면 내생에 또 이러한 보복을 당할 것이니, 내가 이 다음 생에 도(道)를 성취해서 성불(成佛)을 하게 되면은 저 포수는 나의 여섯 개의 이 아금니를 뽑아가기 위해서 나를 죽였지만, 내생에 내가 성불하게 되면 이 포수의 여섯 도둑놈을, 이 삼독(三毒)과 육적(六賊)의 마음을 내가 뽑아 주리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내 아금니 여섯 개를 어서 뽑아다가 너의 임금님에게 바쳐서 영광(榮光)을 누릴지니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그 코끼리는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생(生), 생(生)을 두고 그러한 식으로 해서 수행을 쌓고 또 새 몸을 받아서 또 그렇게 수행을 쌓고 해가지고 마침내는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을 얻어서 성불(成佛)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부처님의 그러한 이 높고 거룩한 뜻을 본받아서, 부처님과 같이 다는 실천을 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 보복하는 마음,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보복할 마음을 갖지 말자'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굳게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가족을 상대하고 친구를 상대하고 이웃을 상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이 될 때가 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법회(法會)가 끝난 다음에 불명(佛名)을 타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오계(五戒)를 받는 법요식(法要式)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그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고 또 『천수경(千手經)』을 외우는 그런 독경(讀經) 대회를 열어서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상(賞)을 주고 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부처님의 그 교리가 담겨있는 동화(童話)를 구연(口演)을 해가지고 그래서 거기서 뽑힌 어린이들을 오늘 시상(施賞)을 하고, 또 거기에서 최우수상을 탄 어린이의 구연을, 동화 구연을 다 같이 듣기로 합시다.




어린이 동화(童話) 구연(口演)



제가 여러분께 해 드릴 이야기는, 전라북도 김제군 용진면 효정리에서 내려오는 금산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옛날 한 노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어요.

총각은 병에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지 구해 어머니께 드렸으나 그 병은 효과가 없었어요.


겨울, 어느 추운 겨울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갑자기 잉어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어요.

항상 굶기만 하시던 어머니께서 무엇이 잡수시고 싶다는 말을 하셨으니 총각은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추운 겨울날 잉어가 있겠어요?

그래도 낚싯대를 들고 연못으로 가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어 낚싯대를 넣었어요. 한참 있으니 무엇이 잡히는 듯해서 들어올려보니 그것은 잉어가 아닌 큰 자라였어요.


총각은 그것이라도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져갔는데, 어머니께서는 그것은 드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총각은 그것을 큰 물항아리에다 넣어두고 다시 잉어를 잡으러 나왔어요.

밤새도록 잉어를 잡으려 했지만 잉어는 잡히지 않고 날은 점점 밝아졌어요.


어머니께 아침밥을 지어드리려는 생각으로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게 왠 일까요?

부엌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어요.

그것도 잉어를 끓인 고깃국도 있었구요.

어머니께선 아침밥을 맛있게 드셨어요.


총각은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몰랐어요.

누가 차려놓은 밥상인지 몰랐기 때문이죠.


이렇게 삼일이 지난 후 총각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누가 그러는지 보기로 하였어요.

낚시질을 하러 나가는 척하다가 부엌 문틈으로 살며시 보았어요.

그랬더니 자라를 넣어둔 물항아리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나와 밥을 하는 것이었어요.

총각은 그 처녀를 붙들었어요.

마침내는 그 처녀와 결혼도 하게 되었어요.


아내의 간호로 어머니의 병환은 다 낳았어요.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아내는 갑자기 총각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였어요.

그 부탁은 열 달만 밖에 나갔다 오라는 것이었어요.


총각은 예쁜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짐을 싸 밖으로 나갔어요.

겨우 십일을 돌아다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아내의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랬더니 총각은 깜짝 놀랬어요.

방 안에서는 끔찍스런 광경이 일어났어요.

아내는 보이지 않고 큰 용 한 마리와 새끼 용 일곱 마리로 얽혀 있는 것이었어요.


원래 아내는 용궁에 살던 용왕의 딸이었데요.

총각이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용왕님께서 감동하시어 딸을 자라의 몸으로 바꾸어 세상에 나가게 하였고 그 총각에게 잡히어 그 총각을 도와주라고 하였데요.


총각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나가 열 달을 지내고 오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이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일곱 마리 새끼 용도 모두 다 죽어버렸어요.


일곱 마리 새끼 용은 연못가 언덕 위에 묻어주고 총각은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어요. 이 스님이 바로 진표국사(眞表國師)랍니다.

진표국사는 금산사(金山寺)를 짓고 산속으로 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데요.

(어린이가 내용을 잊자 대중들 격려 박수)


아직도, 현재도, 지금도 전라북도 효정리에 가면 일곱 마리 새끼 용의 무덤이 있고, 그 마을을 효자가 난 마을이라 하여 효정리라 부르고 있답니다. (동화 구연 끝)




그 금산사(金山寺) 진평(진표)율사의 그 설화(說話)를 참 그 잘 엮어서 얘기를 했는데, 여러분께서도 잘 들으신 바와 같이 너무 참 잘했는데, 조끔 말이 쫌 빨라서 조끔 그런 점이 있습니다마는, 말만 조끔 천천히 하면서 그렇게 했으면 훨씬 더 알아듣기가 좋을뻔 봤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서 그런 불교에 인과설(因果說)이라든지, 불교의 진리(眞理)가 담겨있는 그러한 동화를 그 책을 읽고 또 그것을 구연(口演)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하면, 자기도 공부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가 있어서 참 뜻이 깊은 일이고,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계속해서 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 훌륭한 포교사(布敎師)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등 · 2등 · 3등 모다 입상한 분들이 다 모두 잘하리라고 생각하고, 다 들어봤으면 참 좋겠는데 시간 관계상 한 사람만을 듣고 생략하기로 하고, 다음 기회가 있으면 또 들을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 움큼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매어 두노라.(64분11초~1시간 25분42초)(끝)





[법문 내용]


(게송)행주좌와일체처~ / 이조 말엽 한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선사 / 육조 스님의 '이뭣고?' 화두, 하택신회와 남악회양 / 한국의 활구참선은 조사선 /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하고,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한다.


부처님의 조국인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유리왕과의 악연. 가비라왕국과 사위국의 멸망. 『증일아함경』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에 있는 석가족의 멸망 인과.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게송)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 /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를 단속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 / 어린이 동화(童話)구연(口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 일체시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이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 죽은 구句의 참선. 죽은 참선)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웬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요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20. 3. 6. 17:16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88)—1989년 5월 첫째일요법회(89.05.07) (용388) (69분)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8분. (4/4) 약 13분.

(1/4)----------------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디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으면 뻑뻑이 손에 응하게 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다. 겨울에는 눈이 휘날리는 날 밤, 달이 휘황찬 밝고, 봄에면 봄바람이 불면 꽃이 휘날려. 그러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되었다. 무량억겁(無量億劫) 전 이전부터서 무량억겁 미래를 향해서 생겨난 때가 없고 없어진 때가 없을 것이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아침 아침마다 닭은 오경에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다. 봄이 오면 곳곳마다 산에 꽃이 아름답게 피더라.



방금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활구참선 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고 40여 년간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나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통해서 중생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고 한 말씀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고 금쪽보다도 더 소중한 말씀들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 때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존자(阿難尊者), 그 아난존자는 조달(調達)이의 동생이며 또 부처님의 사촌동생입니다.

출가해 가지고 주욱 부처님을 시봉을 했는데 스승으로서 정말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시봉을 하면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을 한마디, 한 구절도 놓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조옥 고대로 기억을 해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결집(結集)을 할 때에 아난존자가 법상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외워서 오백 성승(聖僧)이 증명함으로써 제1회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아난존자가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얼마나 비통하던지 몸을 들어서 통곡을 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리는 느낌, 캄캄한 밤에 등불을 놓쳐 버린 데다가 비교를 할까—보통 세속에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사랑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 이렇게 슬픔을 표현을 하지만.

여러 제자 가운데에서도 유독히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앉었다 섰다, 이마를 땅에다 부딪쳤다, 고대로 놔뒀다가는 아주 그냥 죽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몹시도 슬퍼했습니다.


그때 그 곁에 있던 한 구참(久參) 제자가 아난존자를 달래서 "지금 부처님께서는 곧 아주 열반에 드실 텐데 그렇게 슬퍼하기만 해서 되겠느냐? 곧 아주 열반에 드시기 전에 꼭 여쭈어보아야 할 일에 대해서 여쭈어 봐라"

첫째는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처치를 해야겠습니까?"


차익(車匿 Chandaka 찬다카)이란 사람은 부처님 처음에 출가하실 때에 마부(馬夫)였습니다. 말고삐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던 마부여.

상전(上典)이 출가를 하시니까 저도 따라서 출가할 원을 세워서 출가를 했는데, '부처님 최초에 출가하실 때 자기가 말고삐를 잡고 출가했다' 그것을 아주 코에다 걸고서 아주 행패가 심했습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대중의 법규도 지키지 않고, 겨우 부처님만 조금 무서워하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누구도 무서워하지를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대단히 처치 곤란한 존재였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그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그걸 여쭈어봤어.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묵빈대처(默擯對處)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거여. 잘하거나 못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일체 상관하지 않는 거여. 대중 전체가 그 사람하고는 첫째, 말을 주고받고 하지 않고, 일체 잘잘못을 얘기하지 않고, 없는 것이나 있는 것이나 상관 말고 내버려둬 버리는 거여.

그것이 묵빈대처(默擯對處)라고 해서 대중생활 속에서는 대단히 엄중한 대치법(對治法)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둘째 번에는 무슨 말씀을 여쭈어봤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것을 여쭈어봐라. 그래서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라" 계(戒)—5계, 10계, 비구 250계, 비구니 오백계, 또 보살십중대계, 48경계, 이러한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세 번째 질문은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저희들은 어디에 머무를까요? 저희들의 마음을 어디에다가 머무를까요?"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념주,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머무르는 것이 주로 어떠한 장소에 대해서—형식적으로는 두 번째 질문은 '어떠한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일 훌륭한 어느 제자에게 의지할까요?' 이렇게 아난존자가 형식상으로는 그렇게 질문한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제자를 지칭하시지 않고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어디에 머무를까요?" 어떠한 특수한 도 닦기에 가장 좋은 어떤 장소에 대해서 여쭈어본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장소를 지적을 하시지 않고 "사념처관(四念處觀), 사념주관(四念住觀)에 머물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러면 사념주(四念住),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라.

네 가지 마음이 무엇이냐? '네 가지 곳이라는 생각을 머무르는 곳'이 무엇이냐 하면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여.


(첫 번째) 이 몸뚱이에 관한 것.

그다음에 우리가 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어떠한 경계에 부딪쳤을 때에 최초에 탁! 감수작용, 그 감수(感受)하는 작용.


세 번째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렀다가 그 생각이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없어지자마자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이 생주이멸(生住異滅), 끊임없는 이 정신의 그 생주이멸, 이 마음.


네 번째는 법(法), 일체법.

삼라만상 두두물물—앞에 말한 몸뚱이에 관한 거, 그다음에 감수작용에 관한 거, 우리의 마음에 관한 거, 그 세 가지를 제외한 이 세상에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두두물물이요, 불교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그러는 거여. 그 일체법에 관한 거.



그러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을 해.


'왜 몸뚱이가 부정하냐?'하면은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이 가득차 있으니까 그것은 부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고. 아홉 구멍에서는 나오느니 더러운 것만 꾸역꾸역 기어나온다. 아무리 날이면 날마다 씻어도 계속 기어나와.

그러니 속에 더러운 것이 가득 들었으니 구녁구녁이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밖에 더 나올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다.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 이거거든.


두 번째 수(受), 감수작용(感受作用). '감수작용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척! 본다든지, 귀로 무슨 소리를 척 듣고 받아들인다든지,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뚱이로 느끼고, 생각으로 어떤 것을 탁! 받아들이는 그것 자체는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결국 생각이 일어나서 받아들임으로 해서 그것이 온갖 고통으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벌어지기 때문에 '감수작용은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것이여.


세 번째 '우리의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는 거여.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 그 생각이 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 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없어지자마자 생각이 일어나면 또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또 없어지고. 그러니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마지막에 그 법, '일체법(一切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 산이나 강이나, 돌이나 풀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늘에 태양이나 별이나 달이나, '일체가 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그래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그래 부처님 생존시에도 많은 제자들이 이 사념주관에 의해서 수행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습니다.(처음~18분57초)




(2/4)----------------


물론 이것은 삼현위(三賢位)에 있어서 오정심관(五停心觀) 다음으로 닦아가는 수행과정이지만, 그 제자의 근기(根機)와 현재 공부해 나가는 단계에 따라서 백골관(白骨觀)을 관하게 하기도 하고, 수식관(數息觀)을 하게 하기도 하고,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지(十地), 55위(位) 점차(漸次)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관해 나가는 관법이 다 단계적으로 차제(次第)가 있지마는 그래도 그 많은 여러 가지 관(觀) 가운데 이 사념주관은 관(觀)의 아주 중요한 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이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신 데에 큰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경전이든지, 이 관법(觀法)에 관한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전부 이 관법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삼관(天台三觀)이 있고, 또 화엄경에는 법계삼관(法界三觀)이 있고, 원각경에는 원각삼관(圓覺三觀)이 있고, 또 유식삼관(唯識三觀)이 있습니다.


그래 옛 조사의 말씀에도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다'

마음을 반조(返照)해서 관(觀)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다 종으로 횡으로 육두로 외우고 해석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觀)도 이렇게 여러 가지 관(觀)이 있지만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어떠한 관법을 해 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 사념주관(四念住觀) '아!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 모든 감수작용(感受作用)은 괴로운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일체 삼라만상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계속 그것을 열심히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대관절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이렇게 더러운 거를 가지고 살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괴로운 것을 가지고 괴로운데 살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데 우리가 살아서 뭐할 것인가?'

이래 가지고 바른 정관(正觀)을 버리고서 점점 삿된 데로 치우쳐 생각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여.


그래 가지고 집장범지(執杖梵志)라고—목련존자를 패서 죽인 그 집장범지, 그 외도(外道)가 있었는데—이 사념주관을 닦던 부처님 제자들이 그 범지 외도를 찾아가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리때와 모다 그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그 범지 외도한테다 바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빌었습니다.


"제발 바라문이시여. 위대한 바라문이시여.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총재산을 다 드릴 테니까 자비로써 나를 때려 죽여주시오" 막 사정을 해 가지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집장외도가—집장외도는 작대기, 주장자 가지고 다닌다 해서 집장외도인데—그 몽둥이로써 여지없이 쳐 죽이고 쳐 죽이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한 해 여름에 60명 대중이 없어졌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 이렇게 어찌 대중이 이렇게 많이 비었느냐?” 물어보시니까 “집장외도한테 가서 모다 맞아 죽었습니다"

한 해 여름에 60명이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다가 집장범지한테 가서 자진해서 맞아죽었다 이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잠시 그러한 아직 사념주관에 대한 바른 법을 닦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을 가르키셨던 것이여.


그러면 이 사념주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여.

하는 사람이 잘못하면—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사념주(四念住)에 머물러라.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실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불자들의 의지처가 될만한 이런 성스러운 수행 방법이지만, 잘못하면 얼토당토않은 그런 사견(邪見)에 얽매여서 사견에 빠져서 정도(正道)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도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관법이 많은 도인들, 조사(祖師)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관법이 자꾸 개발이 되고 발전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든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이든지, 남산 율종에 삼관이든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이나, 유식삼관(唯識三觀), 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관법(觀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법을 전부 다 합해서, 그것을 합해서 한 가마솥에다 넣어 가지고 푹 고아 가지고 탁! 그 골수를 추출해 놓은 것, 추출해 가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관법(觀法)이 무엇이냐 하면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면 어떤 점에서 앞에 든 여러 가지 관법(觀法)보다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 그렇게 수승하냐 하면은 앞에 말한 사념주관이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이 전부 이로(理路) 말길이 있고, 이치길이 있고, 문해사상(聞解思想)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


지금 내가 여기서 그러한 여러 가지 경에 나타난 관법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 좋은 관법이고, 소중한 관법이여.

어떠한 근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관법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스승이 계시다면, 그 관법을 통해서 견성성불한 대도사가 계시다면 그 관법을 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법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의 지도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고 그런 관법을 한 번 해 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한 해 여름에 60명이라는 사람이 그런 참 엄청난 본의 아닌 길에 빠졌거든, 하물며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관법 한답시고 이런 관법도 해 보고, 저런 관법 해 보고,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왜 오늘 일요법회에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냐 하면은 근자에 와서 많은 사람이 산승한테 와서 그 관법에 대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 남방에 세일론이라든지, 버마라든지, 태국이라든지 모다 그런 데 남방에서는 아직도 그러한 관법을 통해서 많은 스님네들이 수행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유학을 온 스님네에 의해서 이 관법이 사람들에게 그 선전이 된 모양입니다.

그 관법 자체가 나쁘다고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관법은 꼭 할려면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서 해야 할 것이고.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이 법보재자는 그러한 관법보단, 그러한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득이해서 알라야 알 수도 없고, 도저히 무슨 뜻인 줄도 알 수 없는 이러한 맛없는 한마디 말을 주어서 참구(參究)하되, 말길 이치길 어떠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하고 거두절미하고 '이뭣고~?' 이렇게 해라 이거거든.


'이뭣고?' 한마디에 거기에서 말길이 끊어져 버리고, 이치길이 끊어져 버리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끊어져 버리고, 일체 번뇌와 망상,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이 거기서 다 끊어져 버리는 거여. '부처다, 중생이다, 마음이다'하는 것도 다 거기서 다 끊어져 버려.


'이뭣고?'

그래서 이것을 경절문(徑截門)이라,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 이 활구참선은 육조 스님, 육조 스님께서 '이뭣고?'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고,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벌써 그게 시심마(是甚麽) 화두거든.

화두라는 이름은 붙이지 안했지만 제자들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벌써 화두를 주셨어.


그 제자이신 신수(신회)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육조 스님께서 "뭐라고 이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가 없다고 했는데 왜 불성이니, 본원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일가를 이룬다 해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론으로 교리를 분석하고 따지는 그런 불교학자밖에는 못되겠구나.


나중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와서 절을 하니까 "십마물(什麽物)이 이마래(伊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남악회양 선사는 콱!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랐어. 그길로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육조 스님을 찾아가 가지고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염(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은 없지는 않지마는 오염(汚染)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아역여시(我亦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 와서 활구참선이 언하대오, 확철대오 구체화된 한 장면인 것이여.(18분58초~37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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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로 육조 스님 밑에 5대 법손(法孫)—육조 스님 밑에가 남악회양 선사, 그 밑에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 그 밑에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그 밑에가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고, 그 황벽희운 선사 밑에 임제의현(臨濟義玄) 스님인데.


육조 스님은 서기 63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713년에 열반하셨고. 그러니까 그때가 8세기 경이고.

임제 스님은 태어나신 연조는 잘 모르고 열반하신 해는 867년이니까 9세기 중엽에 열반하셨는데, 그 임제의현 선사 때 와서 이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도록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제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송(唐宋)시대에 이 활구참선이 대단히 중국 천지에 널리 선양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경산종고(徑山宗杲) 선사—임제 스님의 11세 법손이신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는 서기 1087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1163년에 열반하셨는데, 12세기 경에 이 경산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서 활구참선이 완성을 보았습니다.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어.


간화선(看話禪)!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을 아주 적극 선양을 하고, 임제종(臨濟宗)에서는 이 간화선을 제창을 해서 조동종에 묵조선과 임제종에 이 간화선이 그 종사끼리 대단히 서로 공박을 하고, 힐난한 비평을 하고 그랬었습니다마는.


이 간화선은 조동종에서 비방한 거와 같은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그것을 빨리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그것은 삿된 참선이다'하고 조동종에서는 이 간화선을 비방을 하고.

임제종에서는 조동종의 묵조선을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 흑산 밑에 귀신 굴속에서 작활계(作活計)라. 거기서 살림살이를 하는. 캄캄한 데 앉아 가지고 이 묵조사선(默照邪禪)을 하고 있다고 힐난하게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조동종에서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역시 육조 스님의 제자이신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 밑으로 많은 도인들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도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법은 우리 말세 우리 중생들에게 상근기(上根機)는 말할 것도 없고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라도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떻게 아무 생각도 없이,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라'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묵조선에 조동종에서는 그렇게 가르키는데,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어떻게 생각한 것이 그런 거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초학자가 어떻게 거기다가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인지 참 어렵거든.


그런데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자꾸 하다보면 그 속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이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일체 팔만대장경에 있는 모든 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거거든. 일체 관법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기로서니 팔만대장경을 죽을 때까지 다 읽어서 거기에 그 속에 쓰여 있는 요점을 추려서 그것을 실천할려고 해 보십시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여.

불보살 화현(化現)이신 육조 스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들, 다 그러한 조사들에 의해서 개발된 이 활구참선을 우리는 무조건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하게 단속을 해 갈뿐인 것입니다.



관법, 관법하는데 그 관(觀)이라는 게 대관절 무엇이냐?

관(觀)이라는 게 우리 생각 일어나는 그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거든. 관조(觀照)하는 것이거든.


중생 생각, 중생이 가만히 앉아서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은 그것은 망념(妄念)이여. 그 망념 일어나는 그 뿌리는 진리요, 진여(眞如)인 그 본체에서 나오지만 이미 거기서 한 생각 폭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망념인 거여.

천하 없이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은 망념이여. 부처님 경전 속에 쓰여 있는 생각이 일어났다 해도 중생의 생각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망념인 거여.


그 망념을 탁! 관조해 가지고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관(觀)'이라 이거거든.

'관심(觀心)'이라고도 하고 '관법(觀法)'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관(觀)한다' 그러는데 마음이 무엇인 줄을 알아야지, 우리가.


'마음, 마음' 그렇게 누구나 말하지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망념은 우리가 알 수가 있지만,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마음, 망념의 그 본체는 우리 생각으로 알 수가 없고,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우리 손으로 붙잡을 수가 없어.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것을 바로 보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사량분별한 망념 자꾸 일어나 가지고 우리 모든 생사(生死)도 거기서 일어나고, 모든 죄도 거기서 일어나고 그런데,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그놈을 알려고 한다고 보여질 것이냐 그말이여.


마치 물은 때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그 기후와 그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물 형태는 변하지마는 그 변하지 않는 그 본체는, 본성은 무엇이냐 하면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거여.

그것 습성(濕性), 얼음으로 있을 때도 습성은 변함이 없고, 기체로 김 기체로 있을 때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액체인 물로 있을 때에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눈으로 되었거나 우박으로 되었거나 폭포수로 되었거나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물의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거여.


그런데 그 습성(濕性)은 우리가 볼 수가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아무리 헤집고 봐도 습성은 보이지 아니하고, 얼음을 아무리 가루로 부숴도 그 물 가지고 있는 그 본성은 볼 수가 없는 거여.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본체는 거기에 있으며 변함이 없지마는 중생의 소견으로는 볼 수가 없는 거여.


그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이뭣고?'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는 의심, 의단(疑團)뿐이어야 해. 그래야 그것이 옳게 되어 가는 거여.


처음에는 자꾸 하면 잊어버리고 '이뭣고?'해도 망상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망상이 일어나도 따라가지 아니하면 그만인 거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따라 주지를 말어' 무슨 망상이 일어나면 그놈을 따라가지 말어. 따라가다 보면은 안 되는 거여.

따라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좋은 생각이 나도 '이뭣고?'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뿐인 거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는 바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이 그 속에 다 들어있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이 화두 한 번 들은 속에 다 들어 있다.



활구참선법, 활구참선법은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이 용궁에 다 보관이 되어 있는데 그 용궁에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이러한 것은 없다. 고조사(古祖師)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이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것이다.


염화미소(拈花微笑)와 곽시쌍부(槨示雙趺)와 다자탑전에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이게 다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이거거든.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뭔 말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저가서 무슨 다른 말을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염불 아미타불을 불러야 극락세계에 가지, 말세 중생은 죄가 많고 근기가 하열해서 참선 화두 해봤자 되지도 않어. 관법을 해야 한다. 염불을 해야 한다. 법화경을 읽어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듣고 중심이 흔들려서 이것 조금 해보다 그것도 또 잘 안되면 저기 가서 저것 좀 해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거든.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이뭣고~?'(37분41초~55분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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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하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우리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는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사람사람이 다리 아래는 청풍이 불더라. 지금 봄이 되어서 밤이 되면 환히 달이 밝고, 우리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분다 이거거든.


누구라고 해서 특별히 그 사람 앞에만 달빛이 비치고, 특별한 사람 앞에만 청풍이 불어주는 것이 아니여.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달빛은 한결같이 비치고, 맑은 바람은 한결같이 불어오더라 이거거든.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거울,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그 거울은 무슨 거울이냐?

흰 것이 오면 흰 것이 나타나고,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나타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이 나타나고, 짐승이 오면 짐승이 나타나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 거울 앞에 오면은 다 조금도 숨김없이 있는 고대로 그 거울 앞에 나타난다 그말이여.


그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 우리 중생은 '희다, 검다, 누르다' 온갖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 분별 망상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서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의 마음이 동요되어 가지고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번뇌 망상이 벌어져 가지고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를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비추는 그 거울을 갖다가 때려 부셔 버려.

그래 가지고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림자도 없어져 버리고, 그 거울 자체도 자취가 없도록 다 없애버리면, 일성제조(一聲啼鳥)가 상화지(上花枝)더라.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가더라.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 하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어떤 분이 산승(山僧)에게 "『선가귀감』이나 그밖에 어떤 그 어록(語錄)이나 경서(經書)를 의지해서 차례차례 설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한 일정한 그 경책이나 어록이나 그런 거를 의지하지 않고 올라와서 내키는 대로 말을 하니까 밤낮 한 얘기 도로 하고, 도로 하고 해서 그러니 그거 보단 어느 한 경책에 의지해서 주욱 하면 중복되지 않고 좋지 않겠느냐?" 그러한 충고를 간접적으로 해 왔습니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와서 설해야 할 어떠한 법이 있어서 설한 것이 아니여.

법(法)은 우리 법보선원에 조실(祖室) 스님이신 전강(田岡) 대선사의 법문 한 편 들으면 그 이상 더 법문 들을 것이 없고, 그 이상 더 설할 법이 없습니다.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간혹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 있는 어떤 설화나 그런 것을 가끔 인용하기는 하지만, 듣고 보면 내나 '이뭣고? 열심히 하라' 그 말이거든.


'에이, 그 백번 가야 그 소리할 바에는 가지 말자' 그래 갖고 오지 않고 여행 가고, 골프 치러 가고, 수영장에 가고, 등산에 가고, 철철이 기후 따라서 해수욕 가고, 그런 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산승은 다 알고 있습니다.

'가봤자 밤낮 한 생각 단속하고 밤낮 이뭣고? 하라는 거, 그 소리는 용화사까지 이 교통지옥 속에 어렵게 갈 것이 없이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있으면 되는 거, 뭐하러 또 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또 안 오셔도 또한 무방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추우나 더우나 그 어려운 교통 혼잡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서 쉬지 않고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시고, 이 서울 인천뿐만이 아니라 저 지방에서도 이렇게 오시고.

그 괴로운 것을 무릅쓰고 오시는 그 신심, 그 신심 속에 그분은 반드시 대도(大道)를 성취할 아주 그 씨를 심었다고 할까, 아주 그 표(票)를 이미 끊어 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분이 '이뭣고?'를 열심히 아니할 수가 없고, 그래도 와서 조실 스님 법문 듣고 또 산승의 말도 들어보면 그래도 한마디쯤은 마음에 와서 닿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리해서 또 한 달 동안을 그 힘으로 또 열심히 공부를 해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같이 또 법문을 듣고 또 산승의 경책해 드리는 말씀을 듣고, 같이 부처님께 삼정례(三頂禮)를 올리고 또 발원을 하고, 이리함으로써 자칫하면 풀어지고 해태하려다가도 그놈을 채찍을 가하는 좋은 계기를 삼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달이 법회를 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인들 어찌 산이나 바다나 그밖에 재미있게 놀고, 푹 일요일을 쉬고 싶은 생각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오시는 그 뜻은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고행하신 뜻, 삼세제불과 팔만사천의 모든 보살과 역대조사들이 인생에 오욕락(五慾樂)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출가하신 거룩한 뜻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일 전에 입하(入夏)가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더워지겠습니다.

몸조심하시면서 그 더위와 이 나의 신심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나가면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55분47초~69분12초)(끝)




[법문 내용]


(게송)득지재심응재수~ / 부처님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존자가 여쭈어본 것, ①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②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해야 할까요?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③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까요?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 / 잘못하는 수행의 위험(집장범지) / 수식관(數息觀) / 천태삼관(天台三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 남산 율종에 삼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 유식삼관(唯識三觀) 등의 관법(觀法)의 골수가 다 들어 있고 한 걸음 더 발전시킨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가장 수승한 관법, 그래서 경절문(徑截門),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한다.


육조 스님(638~713)에서 내려와 임제 스님(?~867)을 거쳐서 대혜종고 선사(1087~1163)에 의해서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는 간화선(看話禪),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습니다 /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간화선은 모든 근기의 중생이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 그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다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분은 그러한 여러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26~350)2020. 2. 28. 19:54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45)—1988년 1월 첫째일요법회(88.01.03) (74분)

(1/4) 약 21분. (2/4) 약 18분. (3/4) 약 21분. (4/4) 약 13분.

(1/4)----------------


정종소식(正宗消息)은 몰자미(沒滋味)헌디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하면  차시방도사생하(此時方渡死生河)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종소식(正宗消息)이 몰자미(沒滋味)헌디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라.

정종(正宗) 소식(消息)! 불법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확철대오하는 이 정법 소식은 몰자미(沒滋味)여. 아무 자미(滋味)가 없다 그말이여.


왜 자미가 없냐?

알아 들어가는 것이 없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고, 이로(理路) 어로(語路)가 끊어졌고. 이렇게 공부를 해 가니 보이는 것도 없고 알아지는 것도 없고 나타나는 것이 없어. 그래서 얻은 바가 없어. 그러니 자미가 없을 수밖에는 없다 그말이여.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다. 여하약하(如何若何)를 쓰지를 안 해.

'공부가 되느니 안되느니, 이렇게 해서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인가, 참으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이 공안(公案)을,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데, '이 화두라 하는 것이 과연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면은 그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그 공안에 참 도리를 깨닫는다' 그러는데,


이거 이론으로 따져서 알 수가 없는 것이고, 가르켜 줄라야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도 없는 것인데, 이것 이 문제 자체가 이론으로 따져서 알 수가 없는 것이라면, 따져서 알 수 없는 이 영원히 풀 수 없는, 이 본래 대답이 있을 수가 없는 이러한 공안,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은 거기에서 망상이 끊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져서 그러라고 이것을, 이 풀 수 없는, 원래 대답이 없는, 그 해답이 없는 그런 문제를 주어가지고 우리를 골탕먹이는 것이 아니냐? 이것 공연히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래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스스로 번뇌심(煩惱心)을 내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내. 이런 것이 그러지를 말아라 그거거든.

여하약하에 생각을 쓰지를 말고 다못 아주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써 붙이고, 되고 안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깨닫고 못 깨달은 것도 따지지 말고서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다. 은(銀)! 은으로 된 산과 쇠로 된 벽, 은산철벽을 갖다가 타파해 버려라 그거거든.


은산철벽이 주먹으로 쳐서 무너질 것이냐? 발로 차서 무너질 것이냐? 메겡이로 쳐서 그것이 무너질 것이냐?

무너지고 안 무너지고 한 것을 따지지 말고 온 몸을 갖다가 몸과 목숨을 갖다가 거기다가 다 들어서 부딪쳐라. 아주 죽기를 각오하고 갖다가 이 전신을 거기다가 던져라 그거거든.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 공부가 잘되고 안된 것과 내 힘이 과연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못 깨달을 것인가?

내가 이 정말 깨달을 만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면은 내가 목숨을 바치고 청춘을 바쳐서 공부를 한다 하지만, 내의 숙세(宿世)에 닦은 그 근기(根機)가 해 봤자 안될 그러한 그릇 밖에는 안된다면 차라리 참선을 하지 말고, 경을 읽던지 염불을 하던지 차라리 그런 것이 낫지 않겠느냐?'


목숨 바쳐 해 보지도 않고서 스스로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친 사람이 어찌 그럴만한 힘이 있은들 목적을 달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공부는 되고 안되고, 여하약하를 따지는 것이 아니여.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원래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 나도 원래 본각(本覺)이다, 본래 깨달라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확신을 하고서 목숨 바쳐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버림으로써 은산철벽이 무너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생사(生死)의 큰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이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잘 들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그 스승은 대강사(大講師)로 일생을 경(經)을 보고 경 공부만 하는 스승이고, 그 상좌(上佐)는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에 나가서 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서 은사(恩師) 스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스님이 고령 신찬선사(古靈神贊禪師)인데, 여러분께서 방금 들으신 바와 같이 그 상좌로 인해서 그 스승이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법(法)을 청(請)해 가지고 상좌의 법문을 듣고서 스승이 깨달은 그러한 법문입니다. 끄터리 부분을 조금 마치지 못하고 녹음이 끊겼습니다마는.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학식이 많고, 경을 많이 보고 뭣을 많이 안다고 해서 깨달을 수가 있고 또 경을 보지 아니하고 무식하다고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은 학식, 지식에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많이 배우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에 지내지 못하고, 알음알이에 지내지 못하고,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알음알이,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든지 올바르게 공부하면,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뭘 밖에서 보물을 찾는다던지, 돈을 재산을 구한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구한다던지 이런 것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혹 되기도 하고 혹 안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내게 있는 나의 자성(自性)을 찾는 이 참선은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되고야만 만다」 이러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비단 조실 스님의 법문뿐만이 아니라 삼세(三世)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한결같이 이것을 증명을 하시고 모범을 보여주시고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해서 3년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 이렇게 맹서를 하신 조사(祖師) 스님도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을 너희들은 이 말을 믿지 아니하면 바른 말씀을 믿지 않는 죄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물려갈 것이고, 내가 만약에 추호라도 거짓말을 했다면은 나는 세세생생에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참 무서운 말씀을 하신 조사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열심히 해야 한다'

열심히 하되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고, 또 올바르게 하기는 하되 열심히 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꼭 깨달을 수 있다고 보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첫째 올바르게 하고, 둘째에 목숨 바쳐서 열심히 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야만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선바국(瞻婆國)이라는 나라에 가셨습니다. 그 선바국 나라에 가라지(迦羅池)라고 하는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못가에서 여러 대중을 향해서 법문(法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못 가운데에 살고 있는 큰 조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조개가 부처님께서 법문하시는 그 소리를 듣고서 그 연못 밖으로 기어나왔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원음(圓音)이라, 한 말씀으로 설하시되 모든 중생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그 부처님의 설법을 다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보살(菩薩)은 보살대로 듣고, 아라한(阿羅漢)은 아라한대로 듣고, 중생은 중생대로 듣고, 축생은 축생대로 다 듣고, 하늘나라 사람들은 하늘나라 사람대로 다 듣는 것입니다. 시방세계(十方世界)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을 원음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 가라지라고 하는 못 속에 살고 있는 큰 조개도 그 부처님의 음성소리가 못 속에 울리니까 거기서 못 밖으로 기어나와 가지고 그 못 밖에 풀밭에 풀섶에 그늘에 딱 멈추어서 입을 떡 벌리고서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목동이, 그 소를 치는 목동이 작대기를 들고서 소를 몰다가 그 목동도 그 부처님 법문, 많은 신도들이 운집(雲集)을 해가지고 앉아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으니까 아! 자기도 가까이 가서 그 법문을 들어야겠다.


이래 가지고 가 가지고 그 풀섶에다 자기가 들고 있는 그 지팽이를 탁! 꽂아 놓고 그리고서 법석(法席)에 나아갈려고 했는데, 그 작대기를 탁! 풀섶에 꽂은 것이 하필 법문을 듣기 위해서 나와 있는 조개, 그 조개가 입을 떡 벌리고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는 그 조개 벌리고 있는 데다가 그 작대기를 탁! 꽂았다 그말이여.

그래 놓으니 그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여간 작대기를 꽂아도 그 깨지들 않을 텐데 입을 벌리고 있는 데다가 탁 꽂으니까 그 조개가 깩 소리도 못하고 그냥 죽고 말았습니다.


그 조개는 그 부처님의 법문을 듣다가 죽었습니다. 그 법문을 듣다가 죽은 그 공덕(功德)으로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습니다.

도리천에 태어나 가지고 그 한량없는 복을 받고 그 도리천에 12유순(由旬)이나 되는 큰 궁전, 가로 세로가 12유순이나 되어. 그 12유순은 굉장히 큰 아주 그 거리의 단위인데, 그 12유순이나 되는 그 넓고 큰 궁전에서 천녀들과 그 노래를, 천녀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 잘 먹고 잘 입고 그 낙(樂)을 받고 있는데.


그러면서 그 천안(天眼)으로써 자기가 과거에 어떠한 연(緣)으로 해서 이렇게 도리천에 태어나 가지고 이런 천당의 낙을 받고 있는가 하고 전생에 자기 몸뚱이를 따악 관(觀)을 해 보니까,

전생에 자기가 한 마리의 조개로써 이 선파국의 가라지라고 하는 못에서 살고 있다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나왔다가 그 목동에 작대기에 꽂혀서 죽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부처님의 법문을 듣다가 죽기는 했지만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그 공덕으로 내가 이런 도리천에 태어나서 이러한 참 이 한량없는 낙(樂)의 보(報)를 받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그 궁전에서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 회상(會上)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공양(供養)을 올리니까 부처님께서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그 조개의 후신(後身)인, 천당에서 내려온 그 조개를 향해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니까 바로 언하(言下)에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환희용약(歡喜踊躍) 해 가지고 다시 도리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희(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라고 하는 경(經)에 이러한 설화가 있습니다.


이 설화를 통해서 그러한 조개도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그 공덕(功德)으로—보통 부처님의 설법을 듣다가 죽지 않고 그냥 어떠한 사람의 작대기에 꽂혀서 죽었다면 원한심을 품고 세세생생에 서로 원수를 갚고 원수를 또 받고 하면서 악도(惡途)를 윤회(輪廻)할 텐데,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던 그 인연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났고, 다시 또 천상에서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그 너무너무 감사하니까 부처님께 그 감사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내려와서 예배를 드리고 공양을 올리고서 부처님께서 법문을 해 주셔 가지고 성인(聖人)의 그 수다원과를 증득을 하게 되었어.


한 마리의 조개도 법문을 의지해서 그렇게 깨달랐거든, 하물며 우리 사람!

우리 사람은 다른 중생들, 다른 짐승들보다는 훨씬 여러 가지 여건이 도(道)를 닦기 좋게 우리는 타고난 것입니다.


천상에 태어났던 이 조개는 다행히 참,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또 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지만, 다른 어떠한 유루복(有漏福)을 지어서 천상에 올라가면 계속해서 천상에서 복을 받느라고 여간해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불법에 귀의(歸依)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처음~21분26초)




(2/4)----------------


다행히 우리는 숙세의 깊은 인연이 있어서 사람 몸을 받아 가지고 금생에 또 이 불법(佛法)에 귀의해서 이렇게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 몸을 받아서 정법(正法)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참 희유(稀有)한 것입니다. 저 천상에서 바늘 하나를 떨구어 가지고, 이 지상에 겨자씨를 향해서 바늘을 떨구어 가지고 그 바늘이 겨자씨에 딱 꽂힌 만큼 그만큼 이 불법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또 눈먼 거북이가 천년 만에 한 번씩 바다 위에 떠올라 가지고 그때 마치 구멍이 뚫린 큰 고목나무 등걸을 만나 가지고 거기에 몸을 의탁해 가지고 숨을 쉬고서 들어가는데, 그 천년 만에 떠올라 가지고 하필 떠오른 그곳에 구멍 뚫린 고목나무 둥치를 만난 만큼 그만큼, 그보다도 더 어렵다 이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거북이는 눈먼 거북이입니다. 눈이 떠 있는 거북이도 그 고목나무를 만나기가 어려울 텐디, 눈먼 거북이가 더군다나 어떻게 그 나무를, 지척(咫尺) 간에 나무가 있은들 어떻게 그것을 붙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만큼 사람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으로서 불법을 만났으니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도(道)를 열심히 닦지 아니하고 또 도를 깨닫지를 못하고 그렁저렁하다가 이 몸뚱이를 잃게 되면 천당 아니면은 지옥이요, 그렇지 않으면 축생에 떨어지고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또 불법을 만나게 될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하고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하면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이요. 빛과 그림자는 등불로 인해서 나타난다. 등불을 켬으로써 밝은 광명도 나오고 밝은 광명이 있음으로 해서 또 그림자도 나타난다 그말이여.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다. 파도는 물을 의지해서 일어나지, 물 없는 곳에는 파도도 일어나지를 않는다. 이러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요, 다 말하는 바다 이것입니다.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이요. 등불이 꺼지고 물이 잠잠해지면 그림자도 없어지고 또 파도도 없어진다.

등불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고 물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는데, 등불이 꺼져버리고 물이 없은다면은 그림자도 파도도 없어질 것이다.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다. 그래야사 감히 문밖에 오등(烏藤)을 먹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등이라 하는 것은 참 향기로운 약초인데.


'내'라고 하는 아상(我相) · 아만(我慢) · 아애(我愛) · 아치(我癡) 이러한 것이 내게 있기 때문에 모든 거기에서 탐진치(貪瞋癡)가 일어나고, 삼악도(三惡途)가 일어나고,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공(空)해 버린다면, 능(能), 주관이 공한다면 객관은 따라서 공해지는 것입니다.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이 속담에 「잘되는 것은 지가 잘나서 잘되고, 못되는 것은 다 조상 탓」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속담이 있는데.

잘되고 못되고 한 것이 전부 다른 사람한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등불을 계속 켜 놓고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한탄을 하고. 물을 놔두고서, 물이 있는데 물은 그냥 놔두고서 '물결 일어난다'고 탓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군다나 이 말세(末世)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인데, 항상 남을 원망하고 남을 미워하고 또 남을 이뻐하고 집착을 하고 이래가지고 그 서로 은혜가 있고 서로 사랑하고 이뻐하면은 그것이 또 이후에 미움과 원망으로 또 바뀌는 것입니다.


원래 원수는 다 친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여.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이여. 다생(多生)에 원수 빚이 다 친한 데로부터 인연해서 일어나는 것이여. 막약다생(莫若多生)에 불식인(不識人)이다. 원수가 없을라면은 다생에 사람을 아지 못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을 알게 되면은 친해지고, 친해지면 그것이 원수가 거기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원수가 없고자 하면은 사람과 친하지를 말아라' 이런 뜻인데.


이 사바세계, 우리가 다생에 온갖 인연(因緣)으로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숙세에 심은 맺은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자식으로 형제간으로 부부간으로 친구 간으로 이웃으로 이렇게 태어나고,

전생에 지은 공업(共業)으로 해서 한 나라의 국민으로도 태어나고 또 인류로 이렇게 태어나서 그래가지고 흥망성쇠와 희로애락과 빈부귀천으로 우리가 이렇게 솜털 얽히듯이 이렇게 얽혀서 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나는 일체 사람을 사귀지 말으리라. 일체 원수 맺기가 싫으니까 누구하고도 친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해서 사람을 피하고 산중 굴속으로 들어가서 혼자 그렇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맺어진 인연, 이미 내가 진 빚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갚아야만 되고, 갚지 않으면은 그 빚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따라다니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佛子)로서 올바르게 이 한 생을 살고, 올바르게 해탈로를 가기 위해서는 아는 사람을 끊어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도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고, 있는 고대로 놔두고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지혜롭게 단속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자기를 단속한다'고 하는 것은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방편(方便)이 있습니다마는 그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훌륭하고 좋은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을 한데 뭉쳐서 그놈을 완전히 아주 고아가지고 그래가지고 가장 아주 이 간결하고도 요긴한 법으로 추출한 것이 바로 참선법이다.


이 참선법 속에는 팔만사천에 묘법(妙法), 묘(妙)한 방편이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경(經)도 갖추어져 있고, 염불(念佛)도 갖추어져 있고, 주력(呪力)도 갖추어져 있고,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그 속에 갖추어 있고, 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도 그 속에 갖추어져 있고,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갖추어져 있고, 법이란 법은 이 활구참선법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온갖 종류의 풀을 모두 뜯어서 그래가지고 한데 싸 가지고 그놈을 쌓아서 놓으면은 그놈이 거기서 열이 나가지고 푹 썩으면 본래 그 풀이 가지고 있던 그 모양은 다 분해가 되어 가지고 보이지 않지만, 그 여러 가지 풀이 쌓여서 거기서 썩어서 없어짐으로 해서 거기에서 다른 곡식을 잘 자라게 할 수 있는 비료성분이 거기서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낱낱이 그 풀의 모양이 썩지 않고 생으로 그냥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훌륭한 퇴비가 아닌 것입니다. 썩지 아니한 풀을 갖다가 곡식 뿌리 가까이 묻어 놓으면 그 곡식은 결국은 뿌리가 썩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을 본 사람이나 또는 어떠한 주력을 했거나 염불을 했거나 기도를 했거나 자기가 10년 20년 열심히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얻은 바가 있다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다 썩쿼서 그것을 갖다가 그 상(相)이 썩어서 없어져 버려야 진정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나아갈 수가 있고 최상승법을 닦고 실천해 나가는 데에 좋은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주력이나 또는 어떤 기도 같은 것을 열심히 하면 무슨 오신통(五神通)—남의 마음을 환히 안다던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사에 대해서 알게 된다든지,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다든지 또 남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든지,

그러한 신통력(神通力), 그런 그 초능력을 한 가지 내지 몇 가지를 얻었다 할 때에, 그런 것을 자기가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은 이 최상승법 정법을 닦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 해서 장애가 되어 가지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갖 종류의 풀이 자기의 모양을 고대로 유지하는 동안에는 곡식을 위한 참으로 훌륭한 비료가 거름이 될 수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지식이나 학식이나 또는 권력이나 명예나 또는 자기가 부귀 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기술이라든지 힘이라든지 심지어는 신통력까지라도 그러한 것을 속에 지니고 거기에 집착해 가지고서는 정법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공부하는 사람은 다 놔 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야 해.

그래서 만공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참선하는 사람은 완전히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또 바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무가 바르고, 곧고 좋은 나무는 목수들이 집을 짓기 위해서 다 비어 가는 것이고, 요새는 이리저리 이상하게 생긴 나무 뿌럭지는 모다 조각하는 사람들이 다 캐 가고, 또 비뚤어진 나무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기 위해서 다 비어 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썩은 나무둥치, 몇십 년 되어 가지고 그놈이 버글버글하니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나무꾼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무슨 조각하는 사람도 돌아다보지를 않는다. 그러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정말 몸과 목숨을 이 정법에 바쳐서 활구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가 있다.(21분27초~39분3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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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일요법회 때 오계(五戒)를 설하고, 또 불명(佛名)을 타고, 또 화두를 타고, 또 어린이 독경대회에서 뽑힌 사람의 수상식도 하고 그랬는데 시간이 없어서 이 화두(話頭)를 타신 분들에게 화두에 대한 법문을 자상하게 일러 드리지를 못했습니다.

앞으로 불명을 타고 화두를 받는 것은 3월 일요법회 때 하게 되는데, 그동안에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고 싶다. 그러니 지난 일요법회 때 그 화두 법문에 대해서 자세히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것을 좀 들려 달라고 여러분이 간청을 했습니다.


일요법회는 원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 특히 청신사 · 청신녀들 또 직장에 나가시는 분들, 학생들, 모다 그런 분들이 일요일이라야 이 법회에 나오실 수가 있기 때문에 관음재(觀音齋), 음력 매월 24일 관음재법회를 일요일로 돌렸습니다. 그분들로 하여금 이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시게 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참선은 법회 때마다 항상 이 법문(法門)의 그 요지(要旨)라고 할까, 초점을 항상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에 두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이 산승(山僧)도 거기에 대해서 항상 말씀을 해 오고 있습니다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그 첫째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하고, 셋째는 화두를 잘 간택을 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한다'하는 것은—물론 참선은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어다니면서도 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면서도 하고, 차를 타면서도 하고 일을 하면서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지를 않습니다.

언제 어데서라도 되어져 있도록 노력을 해야만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해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만 할 수가 있고 또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만 해야 되고, 시끄러운 데서는 안되고, 또 서서도 안되고, 일할 때는 안되고, 이렇다면 그 사람의 공부는 아직 초단계에 있어서 공부하는 법이 아직 익숙하지 못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순일하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되겠지만, 아직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기본자세를 잘 익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본자세는 가부좌나 또는 반가부좌—이 가부좌를 할 수 있으면 참 좋고, 가부좌는 다리가 굳었거나 짧거나 모다 그 사람의 체질상 연습을 안 하면 처음부터 이 가부좌가 잘 안되는 수가 있습니다.

자꾸 연습을 하면, 처음 한 1분씩도 하고 2분씩도 하고 3분씩도 하고 5분 10분도 하고, 하다 보면 30분씩 할 수도 있고, 또 1시간씩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부좌는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모두가 다 이 가부좌를 많이 하셨고, 지금 우리가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 모든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도 다 가부좌를 하고 계시게 그렇게 조성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가부좌가 잘 안되면 반가부좌만 해도 됩니다. 반가부좌만 해도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반가부좌를 하고서 오른손을 놓고 왼손을 위에다 요렇게 포개고, 엄지손(가락)을 이렇게 딱 이렇게 맞되대 너무 힘을 주지 말고 또 이렇게 떨어지지 않도록, 이 엄지손과 엄지손이 예쁜 그 다리처럼 되도록, 무지개 다리처럼 이렇게 되도록 이렇게 해서, 딱 해서 배꼽 앞에 배에다가 이렇게 해서 놓고서.


허리를 죽 펴되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지도 말고, 앞으로 숙지도 말고, 좌우로 기울지 않도록 단정하면서도 어깨에 힘을 빼고 목에 힘도 빼야 하는 것입니다.

단정히 한답시고 너무 허리에다 힘을 주고 목에다 힘을 주고 어깨에다 힘을 주어 가지고 뒤로 자지바지하니 너무 그렇게 하면 오래 앉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정하니 앉되 힘은 다 빼라.



그리고 눈은 너무 뚝! 부릅뜨지도 말고 또 너무 감거나 가늘게 뜨지도 말고 평상(平常)으로 떠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에도 '그 눈을 법문을 들을 때에나 또는 참선을 할 때에도 눈을 평상으로 따악 떠야지 눈을 감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말씀이 나왔습니다마는.


눈을 감으면, 처음 참선한 사람은 눈을 뜨면 자꾸 뭣이 눈에 보이고 마음이 산란하고, 눈을 감고 하면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해져서 공부가 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서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계속해서 눈을 감아야만 공부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면 눈을 감고 하면 못쓰냐 하면은 망상이 차츰 잠잠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스르르르 하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혼침(昏沈)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해도 이 참선을 하다 보면 망상(妄想)이 가라앉고 조용해지면 까딱하면 이 혼침에 빠지기가 쉬운 것인데, 더군다나 거기다가 눈을 감고서 공부를 익혀나가면 더욱 혼침이나 무기(無記)에 연결이 되어 가지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공부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눈을 감고 하면 스르르르르 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명 잔 것은 아닌데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뭣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꾸뻑, 이렇게 꾸뻑꾸뻑 졸고 있는데, 본인은 전혀 자지 안 했다고 생각을 하고 그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사람이 보면은 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졸고 있으면서, 졸음에 들자마자 화두에 대한 의심은 스르르르 하니 없어지게 되고, 그래 가지고 그 혼침과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져 가지고,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 적적한 데에 체해 가지고 그 맛을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량겁(無量劫)을 그 혼침에 빠져 있어도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적적(寂寂)하면서도 성성(惺惺)해야지, 적적하기만 하고 성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바른 참선이 아니된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한 때에는 항상 눈을 평상으로 떠라. 단정하니 이렇게 앉아서 약 3미터, 2미터 내지 3미터 지점에 눈을 떨궈라 하거든.

'눈을 떨군다'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어떠한 점을 주시(注視)하거나 응시(凝視)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


그래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평상으로 뜨고, 이는 아금니부터 지그시 감고서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에다 혀 끄터리를 갖다가 말아서 대라 이거거든.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참선하는 데 있어서 기본자세야.


기본자세를 항상 잘 해야 합니다. 시간과 장소가 허락이 되면 언제라도 기본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공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이것이여.



기본자세를 잘하고 그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해라.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보통 사람은 다 허파로, 가슴으로 호흡을 하는데 참선을 한 사람은 배꼽 밑에 단전(丹田)으로 호흡을 해라 이거거든.


가슴은 고대로 놔 두고서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쉴 때는 아랫배가 홀쪽해지도록 호흡함에 따라서 아랫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까 배로 호흡을 한다, '단전으로 호흡을 하라' 그래서 이것을 단전호흡이라 그러는데.


이 화두만을 올바르게 참구를 해 나가면 자세도 둘째 문제고, 호흡도 둘째 문제라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으로 바르게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화두를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자꾸 간절히 간절히 화두를 참구, 화두를 이렇게 의심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점점 이 골똘하고 간절히 하다 보면 이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게 되는 그러한 경우가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물론 체질이 아무리 화두를 가지고 열심히 참구를 해도 기운이 올라가지 아니한 특수하게 잘 타고 난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체질에 따라서 조금 신경을 쓰면 열이 올라가고 눈이 붉어지고 얼굴이 붉어지고 하는 그러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한답시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지 않고서 열심히 화두만 하다 보면 그렇게 상기(上氣)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에 참선을 시작할 때부터 바른 자세와 단전호흡을 기본으로 해서 그러면서 화두를 참구하면 백무일실(百無一失)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다 이 부작용 없이 상기병(上氣病)같은 그런 무서운 병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 숨을 다 내뱉어버리고 그리고서 스르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아랫배가 약 3센치 가량 볼록하게 하라 그말이여.

들어마실 때 너무 가득 들어마시면 힘이 드니까 8부(八部)쯤만 들어마셔. 조금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만 완전히 뱃속이 가득차도록 들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어마셔.


8부쯤 들어마셨거든 일단 정지를 해. 딱 정지를 하되 약 3초 가량 딱 정지를 했다가 또 조용하게 숨을 인자 코로 내쉬되 그 볼록했던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이렇게 해서 숨을 내쉬고.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되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8부쯤 들어마셨으면 또 일단 정지했다가 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데.


그러면 화두는 언제 드느냐 하면은 내쉴 때, 들어마셨다가 3초 쉬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화두를 이렇게 하는 거여.


또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이런 화두를 하신 분은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무르면서 '어째서?'해 가지고, 내쉬면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또는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가지고 또 3초 동안 정지하면서 '어째서?'해 가지고, 내쉬면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처음 최초로 초학자는 이렇게 숨을 내쉴 때마다 이렇게 화두를 한번씩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지고 안정이 되어가면 숨쉴 때마다 화두를 들을 필요가 없어.

숨은 몇 번을 쉬되, 그 알 수 없는—'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했을 때 하고 남은, 한 뒤 끝에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묵묵히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숨을 두 번을 쉬거나, 세 번을 쉬거나, 네 번을 쉬거나, 숨이야 그때그때 계속 쉬면서도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데다가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뭐꼬, 이뭐꼬' 계속 그렇게 덮치기로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없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거든 그때 화두를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참으로 공부가 순숙(純熟)해지면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들고, 아침공양 할 때까지 한번 들어서 고대로 그 화두에 의심이 있으면은 계속해서 화두를 새로 안 들어도 된다 그말이여.

밥을 먹으면서도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순수무잡한 의단이 고대로 독로해 있으면은 화두를 거기다가 덮치기로 뭐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할 필요가 없다 그말이여. 오히려 잔잔한 물에다가 막대기를 휘저어서 물결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여.


한번 든 화두가 하루 종일 있고, 저녁에 자기 위해서 자리에 누워서도 고대로 화두가 성성하고,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고, 새벽에 일어나서도 고대로 화두가 들려져 있다면 그건 참, 공부가 정말 순숙해진 경계다.

그러한 상태로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정말 내가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이것을 내 놓고는 내가 할 일이 없다!'

오직 여기에 나의 인생을 다 여기다 바치고, 나의 목숨을 다 여기다 바치고, 그러한 마음으로 알뜰히 해나가면 누구라도 다 이렇게 적적하고 성성해서 한번 든 화두가 하루도 가고 이틀도 가고 사흘도 가고, 이런 경지에 이런 순수무잡(純粹無雜)한 경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도달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면 그럴 때에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누가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 말고, 한결같이 그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의단을 갖다가 잘 거각(擧却)해 나가, 관조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수무잡한 경지에 들어가서 깨닫기를 바랜다던지, 누가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랜다던지, 빨리 깨달을려고 생각을 일으킨다던지 이런 것은 모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까지 와 가지고 자기의 그것을 갖다가 망가뜨려 버리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한번 모처럼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모처럼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 났을 때 계속해서 몰아붙이지 못하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가 식어 버리면 다시 그런 경계가 오도록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39분39초~60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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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다. 능(能)을 인연해서 소(所)가 생겨나. 능(能)은 주관을 말한 것이고, 소(所)는 객관을 말한 것이여. 주관으로 인해서 모든 객관이 생겨난 것이여.

소생능(所生能)이다. 또 그 객관으로 인해서 또 능(能)이 주관이 움직이게 된다. 능(能)과 소(所)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어.


능소구망(能所俱忘)에 생불생(生不生)이다. 능(能)과 소(所), 주관과 객관이 함께 주관과 객관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것이 없어지게 되면 생불생(生不生)이다. 생(生)하되 생(生)이 아니다.


화두(話頭)를 들어서 처음에부터 잘되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무량겁을 두고 우리가 익혀온 것이 주관과 객관 속에 서로 굴림을 받고 얽히고설켜서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온 것인데, 어떻게 처음부터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꾸 한곳을 향해서 끈질기게 도전을 하면, 계속해서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안될수록에 더욱 열심히 하고, 되어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 내지 말고, 안되아도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서 더욱 신심(信心)을 내고 더욱 인내심과 지혜심으로써, 신심으로부터서 신심으로 계속해서 해 나가면 어느 날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들어지지 않던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턱! 들리게 된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을 물리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끊어지고,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와. 그것이 능소(能所)가 구망(俱忘)이거든.

그러면 생불생(生不生)이여. 눈으로 하늘을 보되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보되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땅을 보되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어. 밥 맛을 몰라. 밥이 된지 진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도 모르고, 그렇게 순일무잡하게 공부가 되아 가는 것입니다.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늙은 조개가 저 고래가 살고 있는 그 넓고 넓은 바다의 물을 다 둘러 마셔.

마셔 버리면은 산호지상(珊瑚枝上)에 월삼경(月三更)이다. 저 바다 밑바닥에 있던 그 산호가 빠알간 산호 가지에 휘황찬 삼경(三更) 달이 찬란히 빛날 것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이 늙은 조개가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 넓고 넓은 그 깊은 바닷물을 다 둘러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 '이뭣고?'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이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는—'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큰 소원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지장보살을 불러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또는 '고왕경을 읽어라' 또는 '금강경을 읽어라' 이러한 방편(方便)을 설해 드리기도 합니다마는,

그러한 혹 하고 많은 방편이 다 뭉친들 다 합한들 어찌 이 한마디의 화두! 공안에다 댈 수야 있겠습니까?


어쨌든지 이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우리가 목숨 다할 때까지 가능하면 금생에 결정코, 금생 아니라 무량겁을 두고도 이 한마디로써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리라.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은 내가 문제삼을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목숨 바쳐서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이것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외골수로 나가고,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듯이 외골수로 오직 이것 하나만을 향해서 전부를 바칠 때에 우리는 그 늙은 조개가 그 대해수(大海水)를 둘러 마시듯이 우리는 결정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적은 일이 아니여.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말 알뜰히 정진해야만 고인전지(古人田地), 고인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60분47초~1시간13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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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정종소식몰자미~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6) '贈淳長老' 사명대사(1544-1610) 게송 참고.

*정종(正宗) ; 석가세존으로부터 대대로 조사(祖師)들이 연면(連綿)하여 바르게 전해온 바른 종지(宗旨,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 올바른 가르침. 선종에서 자기의 종지(宗旨)를 가리켜 말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자미(滋味 불을·증가할·맛있을 자/맛 미) ; ①좋은 맛[味]을 불어나게 함[滋]. ②맛. ③재미. ④기분. 심정. 감정.

*여하약하(如何若何) ; 이러쿵저러쿵.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자꾸 말을 늘어놓는 모양.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7~158 에서.(가로판 p150~151)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메겡이 ; ‘메(묵직하고 둥그스름한 나무토막이나 쇠토막에 자루를 박아 무엇을 치거나 박을 때 쓰는 방망이)’의 사투리.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본각(本覺) : 본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 부처님의 본래의 깨달음.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강사(講師) ; 경론(經論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그 가르침을 주석·연구·정리·요약한 논論)을 가르치는 스님.

*상좌(上佐 윗 상/도울 좌) ;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 곧, 한 스승의 제자를 일컬음.

*은사(恩師) ; ①가르침을 받은 은혜로운 스승. ②자기를 출가시켜 길러 준 스승.

*'스승이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법(法)을 청(請)해 가지고 상좌의 법문을 듣고서 스승이 깨달은 그러한 법문입니다' ;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130~131 역주. (가로판 p126~127) 『전등록』 제9권, 『오등회원(五燈會元)』 제4권, 복주고령신찬선사(福州古靈神贊禪師).

고령 신찬선사(古靈神贊禪師)가 행각을 하던 중 백장(百丈) 선사를 만나서 깨달은 후에 본사로 돌아왔다.

은사 스님이 목욕하며 때를 밀게 하니, 신찬 선사가 등을 만지며 이르되 「좋은 불당(佛堂)에 부처가 성스럽지 못하다」하거늘 스승이 돌아보니, 신찬 선사가 이르되 「부처 비록 성스럽지 못하나 능히 방광(放光)은 할 줄 아는구나」하였다.


또 은사 스님이 경을 볼 때에 벌이 창에 와 나가려 하거늘, 신찬 선사가 보고 송(頌)을 읊되,

空門不肯出  投窓也大痴 百年鑚故紙  何日出頭期

'빈 문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창문에 부딪히니 어리석구나. 백 년을 옛 종이(故紙 경전)를 비벼댄들 어느 날에 나갈 기약이 있으리오?'


은사 스님이 경을 놓고 묻되 「네 행각하야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

신찬 선사가 이르되 「백장화상(百丈和尙)의 가르치심을 받아 이제 스님의 은덕을 갚고저 하옵니다」


스승이 재계(齋戒)하고 신찬 선사를 청하야 설법하라 하거늘, 신찬 선사가 법좌(法座)에 올라 이르되,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眞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영광(靈光)이 홀로 비취어 근진(根塵)을 멀리 벗어나며 체(體)는 진상(眞常)이 드러나 문자에 걸리지 아니하고, 진성(眞性)은 물듦이 없어 본래 스스로 원성(圓成)하니 다만 망연(妄緣)을 여의면  곧 여여불(如如佛)이라'하니, 스승이 그 말에 깨달았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삼세(三世) : 과거와 현재와 미래. 또는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와 내세(來世).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지옥에 가겠다(떨어지리라)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六O二 ~ 六七五)

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참고 ②]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 (백운화상초록 白雲和尙抄錄) ‘승고선사(承古禪師 ? ~ 一O四五)’

承古禪師 常勸諸人 莫學佛法 但自無心去 利根人晝時解脫 鈍根人或三五年 遠不過十年 若不悟去 老僧 替你入拔舌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一二三一 ~ 一二九八 또는 一三O八) (용화선원刊) p97-99. (가로판 p95-96)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참고 ④] 「고봉화상선요·어록(高峰和尙禪要·語錄)」 ‘立限示衆(其九)—9. 기한을 정하고 대중에게 보임’ (고봉원묘 高峰原妙 一二三八 ~ 一二九五)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85, p88 참고.

參禪 若要剋日成功 如墮千尺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萬思量 單單只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工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西峰今日 犯大妄語 永墮拔舌犁耕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법문을 듣다가 죽은 그 공덕으로 도리천에 태어난 조개 이야기

[참고]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제4권.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한역(漢譯) | 동국역경원.


물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요, 축생의 스승은 아닙니까? 옛날 여래가 세상에 계시면서도 축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라 합니까?"


수다라경(修多羅經)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부처님은 첨파국(瞻婆國)에 계시면서 가라(迦羅) 못가에서 첨파국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이때 못 안에 무명조개[蛤 대합조개] 하나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를 듣고는 기뻐하여 곧 못에서 나와 풀뿌리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에 어떤 한 소를 치는 사람[牧牛人]은 대중들이 둘러서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있음을 보고는 부처님에게 가서 법을 들으려고 하여 지팡이로 땅을 찌른 것이 무명조개 머리에 잘못 닿았습니다. 무명조개는 곧 목숨이 끊어져서 도리천에 나아 도리천왕이 되었으니, 그 복의 과보 때문이었습니다. 궁전의 세로와 너비는 바로 12유순이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기녀들의 오락 소리를 보고 깨달은 뒤에 곧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앞서 축생이었는데 무슨 인연 때문에 이 하늘 궁전에 태어났을까?'

곧 하늘 눈[天眼]으로 자세히 살피니, 앞서 못가에 부처님 설법을 들은 이 공덕 때문에 이 과보를 얻었기에 무명조개 천인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에게 가서 닿아 땅에 엎드려 발아래 예배하였습니다.


問曰 佛何以獨爲天人師 不爲畜生師耶 昔如來在世亦爲畜生說法 何以獨稱爲天人師

修多羅經說 爾時佛在瞻婆國 於迦羅池邊 爲瞻婆人說法 是時池中有一蛤 聞佛說法聲歡喜 卽從池出入草根下 是時有一牧牛人 見大衆圍遶聽佛說法 卽往到佛所 欲聞法故以杖刺地 誤著蛤頭 蛤卽命終生忉利天 爲忉利天王 以其福報故 宮殿縱廣正十二由旬

於是蛤天人 霍然而悟 見諸妓女娛樂音聲 悟已尋卽思惟 我先爲畜生 何因緣故生此天宮 卽以天眼觀 先於池邊聽佛說法 以此功德得此果報 蛤天人卽乘宮殿 往至佛所頭頂禮足


부처님은 아시면서 일부러 '너는 어떤 사람인데 갑자기 나의 발에 예배하고 신통ㆍ광명ㆍ상호가 견줄 데 없이 여기를 환히 비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명조개 천인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옛날에 무명조개 몸이 되어

물속에서 먹이를 찾다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 듣고

나와서 풀뿌리 밑에 있었습니다.


어떤 소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팡이를 가져와서 법을 듣다가

지팡이로 저의 머리를 찔렀으므로

목숨을 마쳐서 천상에 났습니다.


부처님은 무명조개 천인이 말한 게송으로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법하셨습니다. 이때에 대중 가운데 팔만사천 인은 다 불도의 자취를 얻었고, 무명조개 천인은 수다원 과위를 얻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이 도의 과위를 얻고 기뻐하며 웃음을 머금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천인사라 합니다.


佛知故問 汝是何人 忽禮我足 神通光明相好無比 照徹此間

蛤天人以偈而答 往昔爲蛤身 於水中覓食 聞佛說法聲 出至草根下 有一牧牛人 持杖來聽法 杖攙刺我頭 命終生天上

佛以蛤天人所說偈 爲四衆說法 是時衆中八萬四千人 皆得道跡 蛤天人得須陀洹果 於是蛤天人得道果已 歡喜含笑而去 故稱爲天人師


[참고] 『법원주림(法苑珠林)』 제17권 「제7 경법편(敬法篇)」 ’제3 청법부(聽法部)‘ 서명사(西明寺) 사문(沙門) 석도세(釋道世) 지음 | 동국역경원.


『선견율론(善見律論)』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첨바라국(瞻婆羅國)의 가라못[迦羅池] 가에 가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못에 있던 대합조개 한 마리가 부처님께서 못가에서 설법하시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가 법을 듣고 있었다.

그때 또 어떤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소를 놓아 먹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앉아 대중을 위해 설법하시는 것을 보고 곧 부처님에게로 나아가 설법을 들으려고 지팡이를 땅에 꽂다가 잘못해 조개의 머리를 찔렀다. 조개는 곧 그 자리에서 죽어 도리천에 났다. 그 복의 과보로 그 궁전의 가로 세로가 12유순이 되었다. 그는 여러 천녀들과 향락하다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께로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했다.


善見律論云 昔佛在世時 到瞻婆羅國迦羅池邊 爲衆說法 時彼池中有其一蛤 聞佛池邊說法之聲 卽從池出 入草根下 聽佛說法 時有一人持杖放牛 見佛在坐爲衆說法 卽往佛所 欲聞法故 以杖刺地誤著蛤頭 卽便命終 生忉利天 以福報故 宮殿縱廣十二由旬 與諸天女 娛樂受樂 卽乘宮殿 往至佛所 頭頂禮足


부처님께서는 아시면서 짐짓 물으셨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갑자기 와서 내 발에 예배하며 신통과 광명과 상호가 비할 데 없어 이 세간을 환히 비추느냐?"

조개였던 하늘 사람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저는 지난 세상에 대합조개로서

물 속에서 먹이 찾고 살다가

부처님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를 먹이는 어떤 사람이

지팡이 들고 법을 들었는데

지팡이 꽂다 저의 머리 찔러

저는 죽어서 천상에 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조개였던 하늘 사람의 게송으로 사중(四衆)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대중 가운데 팔만사천 인은 다 도의 자취를 보았으며, 그 조개였던 하늘 사람은 수다원과(須陁洹果)를 얻어 합장하고 떠났다.


佛知故問 汝是何人 忽禮我足 神通光明相好無比照徹此間

蛤天人以偈而答 往昔爲蛤身 於水中覓食 聞佛說法聲 出至草根下 有一牧牛人 持杖來聽法 杖劖刺我頭 命終生天上

佛以蛤天人所說偈 爲四衆說法 是時衆中八萬四千人 皆得道跡 蛤天人得須陀洹果 合掌而去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부처님 ; 불(佛).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 각자(覺者)·각(覺)이라 번역.

①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우주의 본성이나 참모습을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 청정한 성품을 깨달은 주체. ② 진리 그 자체. 우주 그 자체. ③ 석가모니.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어 arhat의 주격 arhan의 음사.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賊)·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하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賊),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풀섶 ; '풀숲(풀이 무성하게 꽉 들어찬 곳)'의 사투리.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법석(法席) ; 대중이 둘러앉아서 설법, 독경, 강경, 법화(法話) 따위를 행하는 자리.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도리천(忉利天) ; 욕계에 있는 육욕천(六欲天)의 하나. 도리(忉利)는 33이라는 뜻, 천(天)은 신(神)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 33신(神)들이 사는 곳.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이 수미산인데, 이 수미산 정상에 있으며, 중앙에 왕인 제석(帝釋)이 있고 사방의 봉우리에 각각 8신(神)이 있어 33신.

*유순(由旬) ; 산스크리트어 yojana(요자나)의 음사. 고대 인도의 거리의 단위.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소유순은 40리, 중유순은 60리, 대유순은 80리인 세 가지가 있다.

*연(緣) ;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보(報) ; 과보(果報),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의 음사(音寫). 예류(預流) · 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 · 입류라고 함.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 · 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 · 예류향(預流向)이라 함.

초기불교에서 - 성문(聲聞)으로서 -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견혹(見惑) ; ①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 계급취견(戒禁取見) ·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환희용약(歡喜踊躍 기쁠 환/기쁠 희/뛸·춤출 용/뛸 약) ; 기뻐서 뛰는(춤추는) 것. 마음속에서 기뻐하는 것이 환희(歡喜)이고, 그것이 형태나 동작으로 나타나는 것이 용약(踊躍)이다. 수행 또는 문법(聞法)에 동반되는 기쁨. 기뻐서 힘이 솟음. 대단히 기뻐하고 있는 모양.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 남제(南齊)의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한역. 18권 『선견론(善見論)』 · 『비바사율(毘婆沙律)』 · 『선견비바사율(善見毘婆沙律)』이라고도 한다. 소승 율부(律部) 5대 논서 중 하나로서 스리랑카 상좌부에서 전수된 율장에 대한 주석서이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4분 51초)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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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우리는 이 사람 몸을 받아서 정법(正法)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참 희유(稀有)한 것입니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희유(稀有 드물 희/있을 유) ; 드물게[稀] 있음[有].

*등걸 ;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고 남은 밑동(나무줄기에서 뿌리에 가까운 부분).

*지척(咫尺 여덟 치·가깝다·길이 지/자·길이 척) ; 길이가 8치[咫 3.03cm]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 아주 가까운 거리.

*(게송) ‘공지광영인등현~’ ; 『신심명(信心銘)』(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能隨境滅 境逐能沈’ p107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①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②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애(我愛) ; 아(我)에 대한 깊은 애착심. 아탐(我貪).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아(我)에 대한 무지(無知).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일으키는 번뇌. 네 가지 근본번뇌(四根本煩惱, 四惑) 중 나머지 세 가지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다.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공(空) ; ①모든 존재는 여러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항상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無自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공은 전혀 없다는 무(無)나, 결국 사라져 덧없다는 허무(虛無)가 아니다. 또 공(空)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체 ·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무실체성 · 무자성 등을 자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표이다.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것은 공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참된 공[眞空]이 아니라 무기공(無記空) · 편공(偏空) · 악취공(惡取空) 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병[空病]에 대한 약으로 '공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②차별과 분별로써 인식된 대상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 가치나 감정이 부여된 인식 대상은 인식 주관이 조작한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 허구라는 뜻.

③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다생원채기어친(多生怨債起於親)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 ; '다생, 무량겁 원수 빚이 친한 데에서 일어나니, 다생에 사람 알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다'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大愚集述) 제13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 게송 참고(한국불교전서 제11권).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공업(共業) ; 모든 중생에게 공통(共通)되는 업(業)이라는 뜻. 모든 중생에게 공통된, 중생에게 한 가지로 나타나는 업. 공동(共同) 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원인이 되는 선악의 행위. 모든 중생이 함께 사용하는 기세간(器世間 중생이 의지하고 있는 세간, 산하대지 등의 세계)의 과(果)에 감응하는 원인이 되는 것.

예를 들면, 같은 공간에 있는 행(行)은 공업(共業)으로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각각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별업(別業)이라 한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무용지물(無用之物 없을 무/쓸 용/어조사 지/물건·만물·사물·일·사람 물) ; 아무짝에도 쓸데[用]없는[無] 물건이나 사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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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五戒) ; (산스크리트어 pañca-śīla) 재가(在家)의 신도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②불투도(不偸盜).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라.

③불사음(不邪婬).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불음주(不飮酒). 취기(醉氣)가 있는 것에 취(醉)하지 말라.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관음재일(觀音齋日) ;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자지바지 ; 좌선(坐禪)할 때 몸에 너무 힘을 주어, 몸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할 때는 몸을 단정(端正)히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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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무기공(無記空) ; ①의식이 깨어있지 않고 멍하거나 기억이 없으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상태 ②참선중에 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주시(注視 물을 대다·마음을 쏟음 주/볼 시) ; ①어떤 일에 정신을 모아 자세히 살핌. ②어떤 목표물을 주의깊게 잘 살펴봄.

*응시(凝視 엉길 응/보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1분 32초)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상기(上氣) ; ①[한의] 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 발한, 두통, 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했을 때 하고 남은, 한 뒤 끝에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묵묵히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5분 59초)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5분 57초)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딴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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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능생소구생능~’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境由能境 能由境能’ p11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참고]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제4권.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한역(漢譯) | 동국역경원.


[참고] 『법원주림(法苑珠林)』 제17권 「제7 경법편(敬法篇)」 ’제3 청법부(聽法部)‘ 서명사(西明寺) 사문(沙門) 석도세(釋道世) 지음 | 동국역경원.

*소승사과(小乘四果) ; 성문사과(聲門四果).

*사향사과(四向四果) ;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네 단계의 수행목표[向]와 그 도달경지[果]를 가리키는 말.

수다원(須陀洹 : 預流), 사다함(斯陀含 : 一來), 아나함(阿那含 : 不還), 아라한(阿羅漢 : 無學道)의 넷에 각각 향(向)과 과(果)를 배정하여 「수다원향 · 수다원과」 「사다함향 · 사다함과」 「아나함향 · 아나함과」 「아라한향 · 아라한과」의 여덟이 된다.


수다원향은 일체의 견혹(見惑 : 이론적인 번뇌)을 끊으며, 사다함향 · 아나함향에 의해 일체의 욕계(欲界)의 사혹(思惑 : 情意에 의한 습관적 번뇌)을 끊고, 아라한향에서는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의 사혹을 끊는다.

따라서 삼계의 일체의 견혹 · 사혹의 번뇌가 모두 끊어지면, 이 때에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달성된다.


아라한과는 이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도(無學道 아라한)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일곱은 아직도 상위(上位)가 있어서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경지이므로 칠종유학(七種有學)이라고 한다.

예류(預流 수다원)에서 불환(不還 아나함)까지는 개울의 흐름이나 외갈래길로 상정(想定)하여, 흐름을 타고 있는 자가 예류(預流 수다원), 한 번 뒤로 돌아갈 상태에 있는 자가 일래(一來 사다함), 다시 되돌아가는 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상태를 불환(不還 아나함)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외골수 ; 외곬. ①단 한곳으로만 트인 길. ②단 한 가지의 방법이나 방향.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고인전지(古人田地) ; 고인의 경지(境地). 고인의 깨달음.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법문 내용]


(게송)정종소식몰자미~ / 나도 본래 깨달라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 / 누구든지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법문은 원음(圓音) / 법문을 듣다가 죽은 그 공덕으로 도리천에 태어난 조개 이야기[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 사람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 다행이 이렇게 불법을 만났으니 이러한 절호의 기회에 도(道)를 열심히 닦아야.


(게송)공지광영인등현~ / 지혜롭게 자기를 단속하는 최고의 방법은 참선법 / 부처님 법 가운데에 최고의 법이 활구참선 / 참선하는 사람은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 바보가 되어야 한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올바른 자세, 둘째, 올바른 호흡, 셋째, 올바른 화두 참구(參究) / 단정하니 앉되 힘은 다 빼라 / 참선은 적적(寂寂)하면서도 성성(惺惺)해야 /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몰아붙여 해야 한다.

(게송)인능생소소생능~ / 한마디 화두 속에 팔만대장경이 들어있고,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설법을 하고 계신 것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이 공부는 되고 안되고, 여하약하를 따지는 것이 아니여.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원래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 나도 원래 본각(本覺)이다, 본래 깨달라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확신을 하고서 목숨 바쳐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버림으로써 은산철벽이 무너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생사(生死)의 큰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학식, 지식에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많이 배우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에 지내지 못하고, 알음알이에 지내지 못하고,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알음알이,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든지 올바르게 공부하면,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뭘 밖에서 보물을 찾는다던지, 돈을 재산을 구한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구한다던지 이런 것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혹 되기도 하고 혹 안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내게 있는 나의 자성(自性)을 찾는 이 참선은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되고야만 만다」 이러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열심히 해야 한다'

열심히 하되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고, 또 올바르게 하기는 하되 열심히 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꼭 깨달을 수 있다고 보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첫째 올바르게 하고, 둘째에 목숨 바쳐서 열심히 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만 되는 것이다


이 사람 몸을 받아서 정법(正法)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참 희유(稀有)한 것입니다. 저 천상에서 이 지상에 겨자씨를 향해서 바늘 하나를 떨구어 가지고 그 바늘이 겨자씨에 딱 꽂힌 만큼 그만큼 이 불법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으로서 불법을 만났으니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도(道)를 열심히 닦지 아니하고 또 도를 깨닫지를 못하고 그렁저렁하다가 이 몸뚱이를 잃게 되면 천당 아니면은 지옥이요, 그렇지 않으면 축생에 떨어지고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또 불법을 만나게 될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방편(方便)이 있습니다마는 그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훌륭하고 좋은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을 한데 뭉쳐서 그놈을 완전히 아주 고아가지고 그래가지고 가장 아주 이 간결하고도 요긴한 법으로 추출한 것이 바로 참선법이다.


이 참선법 속에는 팔만사천에 묘법(妙法), 묘(妙)한 방편이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경(經)도 갖추어져 있고, 염불(念佛)도 갖추어져 있고, 주력(呪力)도 갖추어져 있고,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그 속에 갖추어 있고, 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도 그 속에 갖추어져 있고,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갖추어져 있고, 법이란 법은 이 활구참선법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공부하는 사람은 다 놔 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야 해. 그래서 만공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참선하는 사람은 완전히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또 바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무가 바르고, 곧고 좋은 나무는 목수들이 집을 짓기 위해서 다 비어 가는 것이고, 요새는 이리저리 이상하게 생긴 나무 뿌럭지는 모다 조각하는 사람들이 다 캐 가고, 또 비뚤어진 나무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기 위해서 다 비어 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썩은 나무둥치, 몇십 년 되어 가지고 그놈이 버글버글하니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나무꾼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무슨 조각하는 사람도 돌아다보지를 않는다. 그러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정말 몸과 목숨을 이 정법에 바쳐서 활구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가 있다.


공부하는 법이 익숙해지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순일하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되겠지만, 아직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기본자세를 잘 익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본자세를 항상 잘 해야 합니다. 시간과 장소가 허락이 되면 언제라도 기본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공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온가부좌(결가부좌)가 잘 안되면 반가부좌만 해도 됩니다. 반가부좌만 해도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단정하니 앉되 힘은 다 빼라.


눈은 감어서는 안되고 평상으로 떠라. 처음 참선한 사람은 눈을 뜨면 자꾸 뭣이 눈에 보이고 마음이 산란하고, 눈을 감고 하면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해져서 공부가 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서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계속해서 눈을 감아야만 공부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면 눈을 감고 하면 못쓰냐 하면은 망상이 차츰 잠잠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스르르르 하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혼침(昏沈 졸음. 정신이 흐리멍덩함)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해도 이 참선을 하다 보면, 망상이 가라앉고 조용해지면 까딱하면 이 혼침에 빠지기가 쉬운 것인데, 더군다나 거기다가 눈을 감고서 공부를 익혀나가면 더욱 혼침이나 무기(無記)에 연결이 되어 가지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공부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번 든 화두가 하루 종일 있고, 저녁에 자기 위해서 자리에 누워서도 고대로 화두가 성성하고,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고, 새벽에 일어나서도 고대로 화두가 들려져 있다면 그건 참, 공부가 정말 순숙해진 경계다.

그러한 상태로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정말 내가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이것을 내 놓고는 내가 할 일이 없다!' 오직 여기에 나의 인생을 다 여기다 바치고, 나의 목숨을 다 여기다 바치고, 그러한 마음으로 알뜰히 해나가면 누구라도 다 이렇게 적적하고 성성해서 한번 든 화두가 하루도 가고 이틀도 가고 사흘도 가고, 이런 경지에 이런 순수무잡(純粹無雜)한 경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도달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한번 모처럼 불법(佛法) · 정법을 만나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 났을 때 계속해서 몰아붙이지 못하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가 식어 버리면 다시 그런 경계가 오도록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이뭣고?' 이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적은 일이 아니여.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말 알뜰히 정진해야만 고인전지(古人田地), 고인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19. 11. 8. 18:24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21) — 1987년 2월 첫째 일요법회(87.02.01) (용321) (59분)

(1/3) 약 21분. (2/3) 약 19분. (3/3) 약 18분.

(1/3)----------------

 

면문출입견환난(面門出入見還難)한데  무위진인지척간(無位眞人咫尺間)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거로일신경사엽(去路一身輕似葉)한데  고명천고중여산(高名千古重如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 정묘년 2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한 가운데에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 법문을 들었습니다. 오늘 녹음 법문(錄音法門)은 음질이 명확해서 한 분도 빠짐없이 잘 들으셨을 줄로 생각을 합니다.

‘이뭣고?’,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 이 참선을 아주 구체적으로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그렇게 분명하게 그리고 간략하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뭣고?’

 

보통 참선(參禪)하지 아니할 때에는 망상(妄想)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내는데 떠억 앉아서 화두(話頭)를 들려고 하면 유별나게도 이 생각 저 생각이 퍼일어나는 것을 아주 느끼게 됩니다.

그 끝없이 퍼일어나는 그 망상 번뇌, 그 일어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말고, 일어나는 것을 탓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 일어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둬 버리고 거기에 신경도 쓰지 말고 그 일어나는 망상을 따라가지를 말아라.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걱정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따라가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자꾸 챙기라. ‘이뭣고?’

뿌리 없는 데로부터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냥 내가 따라가지만 안 하고 화두만 들어버리면 그 망상은 저절로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없앨라고 한다든지, 일어난다고 짜증을 낸다든지, 그 일어나는 데를 내가 참견을 하면 그 망상은 점점 더 가지가 뻗고 잎이 피어서 더 커지는데.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놔둬 버리고 나는 처꺽 화두를 들고 ‘이뭣고?’ ‘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한결같이 간절히 거각(擧却)을 해 나가면 그것이 일어나는 망상을 처치하는 가장 지혜스러운 방법인 것입니다. 망상 처치하는 방법만 안다면 망상 일어나는 것을 겁낼 필요도 없고 짜증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망상이라 하는 것이 어디서 일어나냐 하면은 내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부터서 일어난 것이거든.

우리는 진여불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가 있는지, 도저히 알 수도 없고 그 불성을 볼 수도 없지만, 그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망상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우리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여불성이 없다면 망상도 일어날 필요가 없겠지만, 진여불성이 있는데 과거로부터 한량없는 업(業)을 지었기 때문에 그 지어 놓은 업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그 망상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어.

그 일어나는 물결을, 그 일어나는 망상을 계기로 해서 화두를 들어버리면 그 일어나는 망상이 발판이 되어서 나로, 나의 자성자리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최상승법은 일어나는 망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그놈을 발판으로 해서 나로 돌아올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서워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짜증을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세간(世間)에 살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인간 세상에 모든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서 바로 그 생활 속에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요중선(鬧中禪)이고 적극적 임운선(任運禪)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상근인이 할 수 있는 참선이다. 그 적극적(積極的) 요중선(鬧中禪)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참선이다' 이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전부가 상근인(上根人)이냐 하면은, 상근인도 더러는 있지마는 대부분은 중근, 하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중근, 하근이라도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화두를 들고 일체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일을 당했을 때 그리 따라가지 아니하고, 그리 말려들어 가지 아니하고 바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이렇게 해 나가서 그런 세간의 흥망성쇠에 내가 끌려 들어가지만 않으면 그것이 바로 상근인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상근이 따로 있고 하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근인다웁게 모든 일에 임해서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그놈을 디디고 극복을 하고 자기로 돌아오는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상근의 가풍(家風)인 것입니다.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 가지고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이 공부를 위해서 고향과 부모형제를 다 버리고서 오직 이 하나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는 그러한 특별한 생각을 발심(發心)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하근이냐 하면 상근도 그러한 철저한 신심이 있다면 할 수가 있는 것이고,

하근(下根)도 그렇게 출가해 가지고 일대사(一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다면 하근도 자기를 깨달라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상근도 닦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고, 하근・중근, 하근도 공부해서 도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도(道) 자체에 가서는 조금도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근기(根機) 따라서 취향하는 방법에 가서 차이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고 보면은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해마다 새해가 돌아오면 무엇인가 그 일 년 동안 항상 마음에 명심하고 그것을 하나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서 자기에 그 채찍을 삼고 자기를 다스려 나가는 말씀을 한마디씩을 했었습니다.

저지난해에는 ‘스스로 성내지 말아라’ 이런 말씀도 했고, 또 그다음에는 ‘남을 성나게 하지 말아라’ 이런 말도 했고.

 

그런데 금년에는 '속지 말아라. 경계(境界)에 속지 말아라'

우리는 항상 명심을 해서 도(道)를 닦을라고 그러고 부처님을 믿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깜박한 사이에 경계에 속고 마는 것입니다.

 

경계라고 하는 것은 외경(外境)도 있고 내경(內境)도 있는데, 밖에 모든 사람이나 사물에 그것에 내가 속는 것입니다. 그 속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기도 하고 또 원망하기도 하고 또 미워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성을 내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 밖에 있는 모든 경계는 그 원인이 까닭 없이 밖에서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 관찰을 해 보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기와 관계되는 사건이, 인연이 전부 자기로부터서 자기라고 하는 뿌리로부터서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자기한테 있는 것이지, 나타나기는 밖에 나타났지마는 그 원인의 뿌리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중심을 잃어버리면 항상 속는 것입니다.

 

우리 도(道)를 닦는 사람이 '중심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화두(話頭)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놓쳐버리면 보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듣는 것이 제대로 들리지를 않고,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생각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 하나를 바로 거각(擧却)을 하고 바로 관조(觀照)를 할 줄 안다면 언제나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밖에 어떠한 사태가 벌어지고 어떠한 일이 자기에게 충격을 준다 하더라도 그 경계에 속지를 않는 것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 가장 경계(警戒)하고 두려워할 것은 속지 않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속지 않는 것은 그래도 쉬운데, 정말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거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열심히 수행을 하다보면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獨露)하게 되고, 망상(妄想)을 없앨라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없어져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화두가 독로하는 그런 경계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밖에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시끄러운 줄을 모르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전혀 느끼지를 않는,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신기로운 그러한 경지를 맛보게 되는 것인데, 그럴 때에 자기에게 속는 것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참 경계로구나. 이러한 상태로 영원히 있었으면. 이럴 때 누가 나를 깨닫게 해 주지 아니할까. 어서 여기서 툭 터졌으면’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경계에 속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독로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서 순일무잡한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물론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가슴이 답답하고 모다 그래도 짜증을 내서는 아니된 것처럼, 경계가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순일무잡한 경지가 온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빨리 깨닫기를 바래거나, '하!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낸 것, 이것도 또한 경계에 속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희로애락(喜怒哀樂)—기뻐하지 아니하면 성내고, 성내지 아니하면은 슬퍼하고, 슬퍼하지 아니하면 즐거워하고, 희로애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또 흥망성쇠(興亡盛衰), 지금 한참 모든 일이 잘 되어가지 아니하면은, 또 모든 일이 또 여의치 못하고, 흥망성쇠 이게 잠시도 고대로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모다 이러한 상황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러한 상황에 나도 계속해서 마음이 말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워했다가, 때로는 원망했다가, 때로는 저주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하고, 때로는 근심 걱정을 하고, 이러는 가운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일평생 동안을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한(恨)을 남긴 채 숨을 거두게 되는데, 다행히 이 불법을 만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참선법을 아는 사람은 뭔 일이 내 뜻대로 되어도 우쭐대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뭔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을 당해도 근심을 하고 성내기 대신 바로 화두를 들고.

바로 흥망성쇠와 희로애락 그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요,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이요, 그것이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수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을 믿는 도학자는 산중에서 도를 닦건, 세간에서 도를 닦건, 슬픈 일을 당하면 바로 그 슬픈 일 자체가 나로 돌아오는 발판이요,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기분 나쁜 그 일로 해서 오랫동안 그러한 경계에 묶여 있지를 않고 퍼뜩 화두를 들고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처음~21분17초)

 

 

 

(2/3)----------------

 

어제 어떤 손님이 오셔서 변비증이 심하고, 또 삼백육십 골절이 마디마디 아프고, 또 기억력이 다 없어지고 그런다는 말씀을 호소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드렸습니다.

 

몸에 육체는 나서 늙어서 병들어 가는 그 생로병사의 단계를 거쳐서 결국은 백년 미만에 이 몸뚱이를 버리고서 다시 새 몸을 받기 위해서 떠나는데, 그동안에라도 우리는 몸이 건강하기를 다 바랩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거두어도 그래서 건강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백년을 못 넘기고 다 가게 되는데, 그래도 사는 동안에는 건강을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건강하냐 하면, 첫째는 대소변을 잘 배설을 해야 합니다. 잘 먹어야 한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배설을 잘하는 것은 먹는 것보단 몇십 배가 더 중요합니다.

 

먹기만 잘 먹고 배설을 못하면 그 건강이 유지가 되지 않고, 그건 참 집안에서도 하수구가 맥혀서 고장이 난다든지, 또 화장실의 변기가 막혀서 안 나간다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뭐 밥 한 끼니 두 끼니 굶어서는 별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수구가 막혀서 주방에 구정물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변기가 막혀서 안 나간다면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대소변리(大小便利)가 잘 배설이 되지 아니하면 건강에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게 인자 의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것이 다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여러분은 설명을 하지 아니해도 잘 아실 것입니다.

대변을 눌 때 매일매일 배설을 하지 아니하고 이틀 삼일 이렇게 못 누게 되면, 그 처음에 영양을 섭취하고 그다음에는 그래도 안 나가면은 수분을 섭취하고, 그래도 안 나가면 대소변 속에 있는 독소까지 계속해서 흡입을 해 가지고 그 흡입된 그 독소는 혈관으로 몸으로 해서 전부 몸을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비가 있는 분은 결국은 몸이 무겁고 골치가 아프고 삭신이 아프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삭신만 아픈 게 아니라 오장육부에 독소가 다 돌고 돌기 때문에 오장육부에 전부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진대사(新陳代謝)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데, 활발하게 유지해 나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음식물, 그런 육체적인 물질적인 신진대사만 필요하냐 하면 우리 정신적인 것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기쁜 생각이 되었건, 성내는 생각이 되었건, 슬픈 생각이 되었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생각에 오래 묶여 있으면, 그런 생각이 오랫동안 우리 마음속에 있어 가지고 없어지지 아니하면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성을 내고 있으면 그거 심장도 나빠지고 소화도 안 되고, 계속 아침부터서 성내는 일만 당하고 속에서 그 성내는 마음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얼굴빛이 대번에 아무리 원래 이쁘게 생긴 얼굴도 매일매일 성내 갖고 있다면 그 얼굴은 주름살이 생기고, 눈과 눈 사이에 ‘내 천(川)’자가 생기고, 눈에는 독사와 같은 독기(毒氣)와 살기(殺氣)가 풍기게 될 것입니다.

슬픈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슬픔에 잠겨 있다면 혈액순환도 잘 안될 것이고, 몸의 건강도 나빠질 것이고, 정신적인 것도 의기(意氣)가 소침(消沈)이 되고, 백병(百病)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기쁜 것, 세속에도 기쁘면 참 좋은 것같이 생각이 되지만, 기쁨도 적당하니 기뻐야지 기쁜 것이 지나치면은 그것도 사람이 기절을 해서 죽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영양이 있는 거라고 해서 많이 먹으면 좋을 거 같지마는 그것도 과잉섭취를 하면 당뇨병이 생기고 여러 가지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쁨도 역시 슬픔이나 성내는 것이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파랑 불이나 노랑 불이나 빨강 불이나 다 전깃불인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감정 그런 것은 지나치게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것은 우리의 정신위생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 성내고 있다든지, 밤낮 슬퍼하고 있다든지 감정에 오랫동안 언짢은, 특히 그 원망하는 마음이 속에 항상 마음속에 있다든지,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항상 가슴속에 있어 가지고 없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러면 결국은 남을 저주하게 됩니다.

남을 저주하게 되면 물론 상대방에게도 안 좋지마는, 상대방을 망하기를 바라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하면 먼저 자기 먼저 안 좋은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안 좋기 때문에 그런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잠깐 일어난다 하더라도 바로 그 생각을 돌려서 없애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선 자기가 그 독에 중독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대변 소변이 오랫동안 체내에 머물러서 배설이 아니되면 병이 난 것 몇백 배 해로운 것이 성내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슬픈 마음, 저주하는 마음, 불평불만하는 마음, 이런 부정적인 이러한 생각들이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선 자기의 정신 상태도 안 좋지마는, 자기 건강을 해롭게 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운명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러한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들어오는 어떠한 경계를 보고 속지를 말어.

속지를 말고서 바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터억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일 초 동안에 그것을 흩어 버려야 돼.

 

음식은 어느 시간만큼 위장에서 십이지장으로 소장으로 대장으로 그리 내려가면서 적당한 시간 동안 체내에 머물러 있어야 영양을 섭취하지요. 먹자마자 밑으로 흘러 내려간다면은 밤낮 설사만 하다가 영양실조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화두를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생각으로 돌이켜야지, 좋은 생각이나 기쁜 생각이나 슬픈 생각이나 성나는 생각, 심지어 원망하고 저주하는 생각은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사 좋지만, 우리는 무량겁을 지어온 업(業)이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육창(六窓)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를 말고 바로 화두로 돌이켜라 그거거든.

 

미운 생각을 억지로 참고, 성내는 마음을 억지로 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억지로 참으면 임시 그 자리는 보류가 되겠지만 그 속에서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해 가지고 오랫동안 쌓이게 되면 결국은 그놈이 일시에 폭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소! 참어! 참는 것이 약이네'

그리 나는 참기를 별로 권하지를 않고 돌리라고 그럽니다.

 

탁! 돌이켜. 돌이켜서 화두로 돌이켜 버리고 그래서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없도록 그때그때 돌려서 풀어서 어떠한 종류의 생각도 바로 이 화두를 드는 밑거름으로 삼어라 이거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어렵지만 자꾸 해 버릇하면 그것도 길이 나서 습관이 되어 가지고,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탁!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해 버리면 스르르르르 녹아져서 없어져 버리거든. 이건 경험을 해 보신 분은 누구든 아실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불행한 자기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고, 고약한 성격을 아주 훌륭한 성격으로 개선을 하신 분도 참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경계에 속지 말고 바로 자기로 돌아오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염기불파(念起不怕)하고 유공각지(唯恐覺遲)라. 생각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각(覺) 더딘 것을 두려워하라'

이 각(覺) 더디다고 하는—'각(覺), 빨리 깨닫도록 해라'하는 게 ‘빨리 화두로 돌이켜라’ 그말이거든.

 

깨달은 사람은 대원각지(大圓覺智), 크고 뚜렷하게 깨달은 그 지혜가 낭연독존(朗然獨存)을 하도록 항상 그렇게 인자 다스려 나가겠지만.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것이 깨달은 경계인가를 모르는 우리로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첩경이니까 그렇게 화두를 자꾸 들면, 하근(下根)이 자꾸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상근(上根)이 되어 가는 거고.

 

서커스단에 그 묘기라든지, 올림픽 때에 체조하는 그 선수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렵게 어렵게 부축을 받으면서 스폰지 위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을 되풀이해서 하면서 결국은 그러한 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뭣고?’야 무슨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고.

자꾸 생각은, 끊임없이 참선할 수 있는 계기는 자동으로 우리는 무진장 타고났으니까 그 계기를 놓치지 말고 그때그때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든다 말이여.

 

해 보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것이 어디가 있는가?'

해 보기 전에는 ‘아이구! 그거 어려워서 상근대지(上根大智)나 하지 우리 업보중생(業報衆生)은 그런 거 해 봤자 어려울 거다’ 전부 다 해 보지도 않고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해 보면 '이렇게 간단하고, 이렇게 쉬웁고, 정말 이렇게 신기하고도 묘한 것은 없구나' 그런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활을 해 나가는 데 항상 모든 것을 밝은 면을 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습니다. 똑같은 일 하나를 놔 놓고도 어떤 사람은 '잘했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못했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좋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밝은 면을 볼려고 노력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운명을 밝게 운명을 열어가고자 하면 모든 것을—사람이 되었건, 어떠한 사건이 되었건, 어떤 물건이 되었건 무엇이든지 밝은 면으로 보도록 그렇게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러면 자기 운명이 밝아지는 것이여.

똑같은 일을 가지고 놓고도 그것을 어두운 쪽으로만 보고 비관적으로만 보고 그러면 점점 그 사람 운수 팔자는 점점 어두운 데로만 열려 나가는 것입니다.

 

밝은 쪽으로 볼려고 노력을 하고, 낙관적으로 모든 것을 볼려고 노력을 하고, 그러면 성격도 차츰 밝아지고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기고, 자기 마음도 편안하고 또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밝아짐으로 해서 얼굴도 밝아지고, 모든 생각이 밝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모두가 밝고 명랑하고 희망적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고, 행동도 역시 보람을 느끼게 되고.

남에게 그 사람을 보면은 용기가 나고, 부애 났던 생각도 그 사람하고 얘기를 좀 하다보면 그 부애 나는 것이 다 없어지게 되고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서는 항상 향내가 풍기게 되고 앞뒤에서 봐도 멋이 줄줄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정신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불행과 암흑으로 나를 끌고 가느냐, 행복과 희망으로 우리를 끌고 가느냐는 그 한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밝게 시원하게, 그리고 보람 있게 지혜롭게 우리의 생각을 가져 나가면서 어떠한 일을 보거나 어떠한 소리를 듣거나 무슨 생각을 느낄 때라도 항상 화두 ‘이뭣고?’ 이리 돌이키면서 산다면,

우리는 너무너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다행스럽고, 나에게는 얼마든지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끼게 될 것입니다.(21분18초~40분25초)

 

 

 

(3/3)----------------

 

산횡석애의무로(山橫石碍疑無路)터니  지전계사별유촌(地轉溪斜別有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영상일성횡적향(嶺上一聲橫笛響)한데  명연사일우황혼(暝煙斜日又黃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산횡석애의무로(山橫石碍疑無路)터니, 산이 가로막고 돌이 맥혀서 바위가 맥혀서 이제 길이 없을까 의심했더니, '아! 인자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고 여기서 아주 길이 꽉 맥혀서 갈 곳이 없구나'하고 의심을 했더니,

지전계사별유촌(地轉溪斜別有村)이로구나. 땅이 돌고 시내가 비껴, 시내가 흘러가면서 따로 한 마을이 나타났구나.

 

우리 인생은 운수(運數)가 비색(否塞)할 때에는 하나의 어려운 일만 당한 것이 아니라, 연거푸 참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운 그런 재난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비관을 하고 중단하지 말고, 계속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계속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버티고 나가면서 노력을 하면, 뜻밖에 환히 밝은 빛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이 나거나 어떠한 사고가 나거나 한다 하더라도 정신을 차려서 보면 반드시 도피할 길이 있는 것이고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 속담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닌 것입니다.

 

영상일성횡적향(嶺上一聲橫笛響)한데, 재 너머에 한 소리, 저 산꼭대기 재 너머에서 한 소리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데,

명연사일우황혼(暝煙斜日又黃昏)이로구나. 구름과 연기가 자욱해서 해가 저물어서 또 황혼이 돌아오는구나.

 

겨우 그 어려운 고비를 넘겨 가지고 한 마을을 저 아득히 보았는데, 그러자 어디서 그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말이여. 희망적인 그런 서광을 보았는데 벌써 해는 여울여울 서산으로 넘어갈려고 하는구나.

무량겁(無量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가 금생에 와서 이 정법을 만나서 이제 참선(參禪)을 할려고 그러는데, 벌써 우리가 나이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고 칠십이 넘어가는구나.

 

언제나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지금 '나이가 이렇게 많이 먹었다'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금생에 육칠십 먹은 거 이것만을 꼭 나이 많이 먹었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도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생각한다면 몇억만 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사 정법(正法)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늘그막에사 만났다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칠팔십 먹은 분은 금방 몸을 바꿔서 새로 태어나면 그분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보다도 또 더 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道)에는 노소가 없습니다. 또 남녀도 없습니다.

늙다고, 나이가 많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금생에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 놓으면,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고 이승을 하직을 하시더라도 금방 몸을 바꿔 나와 가지고 또 이 공부를 하시게 됩니다.

 

금생에 해 놓은 만큼 내생에는 또 거기에서 다시 하게 되기 때문에 금생에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해 놓으신 분은 내생에는 일찍 도문(道門)에 들어와서 도를 일찍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샘이 저 깊은 산중에 있는 샘에서 흐르는 물은 바다에까지 도달할라면은 시간이 좀 걸릴 것이고, 바다 가까이에서 나오는 샘물은 얼마 안 가서 곧 바다로 도달한 거와 같습니다.

 

우리가 모두 전생에 어떻게 닦았느냐, 그리고 금생에 얼마만큼 노력했느냐에 따라서 우리 자신의 그 샘이 바다에서 얼마만큼 떨어져 있느냐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무리 멀어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은 지가 결국은 바다에 도달하고야만 마는 것이지, 절대로 물이 산꼭대기로 거꾸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물처럼, 물이라 하는 것은 흐르고 흘러서 계속 물은 밑을 향해서 내려가는데, 웅덩이를 만나면은 웅덩이 저 밑바닥에서부터서 요렇게 차츰차츰 차올라 가지고 결국은 웅덩이에 가득차면 또 넘어서 또 흘러 내려가고, 가다가 웅덩이를 만나면 또 밑바닥에서부터서 차츰차츰 차올라 가지고 가득차면 또 넘어가고 해서,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흘러 내려가 가지고 기어코 바다에까지 도달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우리 도를 닦는 수행자도 그러한 끈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깨닫고 안 깨닫는 것은 우리가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한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고상하고 거룩하고 훌륭한 것입니다.

 

일찍 깨달랐다고 해서 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찍 깨달랐다고 해도 계속 또 오후보림(悟後保任)를 해서 부처님처럼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갖추어서 복(福)과 혜(慧)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할 때까지 우리는 닦고 닦아야 하고, 또 그렇게 닦은 뒤에도 또 끝나냐 하면은 끝이 없습니다.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을 때까지 끊임없이 중생교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도를 깨닫고, 깨달은 뒤에 복(福)과 혜(慧)가 원만구족하고, 또 복과 혜가 원만구족해 가지고도 무량중생을 제도(濟度)해 마칠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이 없고, 그러기 때문에 뭐 일찌감치 우둑둑 우뚝딱! 그냥 빨리 깨달으면 그것이 다 된 것 같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도 없고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한(限)도 없고 끝도 없지마는, 우리는 그 끝없는 길을 향해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나 자신을 닦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이 해 주지를 못하고, 이 문제를 하기 전에는 끊임없는 고해(苦海)에서 무서운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은 이 활구참선을 체계화한 대도사이십니다. 달마 스님으로부터 육조 스님, 육조 스님으로부터 이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화두를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이 활구참선을 체계화한 대도인인데.

 

임제 스님께서 대중에서 법을 설하시기를, "유일무위진인(有一無位眞人)하니, 한 위가 없는—지위(地位)! 지위가 없는, 계급이 없는—지위가 없는 참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상종여등제인(常從汝等諸人) 면문출입(面門出入)하되, 항상 너희들 여러 사람의 면문(面門)으로조차 출입을 해" 들랑거린다 그말이여.

면문(面門)이라 하는 게, 너희들 눈 ・ 코 ・ 입 ・ 귀 이게 면문(面門)이거든. 너희들 얼굴 면문으로부터 그 무위진인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그말이여.

 

그러니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을 확실히 증거(證據)치 못한 자는, 확실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간간(看看)하라. 잘 살펴볼지니라. 어떠한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인가 잘 살펴보란 말이야.

여러 대중 낱낱이 무위진인이 있는데, 그 무위진인이 어디로 드나드냐 하면은 각자의 얼굴 문으로부터 면문(面門)으로부터 드나든다 이거거든.

 

그렇게 설법을 하시니까, 그때 한 승(僧)이 나와서 묻기를 "여하시무위진인(如何是無位眞人)잇꼬? 어떤 것이 무위진인입니까?"하고 그 (임제) 스님한테 터억 질문을 했습니다.

임제 스님께서 법상에서 터억 내려와 가지고, 그 질문한 스님의 멱사리를 턱! 거머쥐고서 "도도(道道)하라. 일러라" 그러니까.

 

그 스님이 뭐라고 이를려고 머뭇머뭇 그러니까, 냅다 갖다가 멱사리를 놓으면서 미트러 처내버리면서 이르기를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시심마(是甚麽)오? 무위진인이 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물으시고서 "간시궐(乾屎橛)이니라. 마른 똥막대기니라"

 

이 마른 똥막대기, 이것도 하나의 공안입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나, 무자(無字)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마찬가지로, 이 마른 똥막대기니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고? 마른 똥막대기니라" 이렇게 자문자답을 하셨습니다.

 

그 게송에 대해서 고인(古人)이 게송을 읊으시기를,

면문출입견환난(面門出入見還難)이요, 면문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기가 어렵다. 면문으로 출입하는데 면문으로 출입한 그 무위진인을 보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말이여.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지척간(咫尺間)이니라. 그렇게 볼라야 볼 수 없지마는 그 무위진인이 지척간(咫尺間)이여. 바로 거기에 있다 그말이여.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말이여.

 

거로일신경사엽(去路一身輕似葉)이요, 가는 길에는 한 몸뚱이가 이파리처럼 가벼운데,

고명천고중여산(高名千古重如山)이다. 그 높은 이름은 천고(千古)에 무겁기가 산과 같도다.

 

이렇게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법상에 올라와서 맨 처음에 읊은 게송(偈頌)이 바로 이 게송입니다.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 간시궐(乾屎橛)이다’ 이것은 무서운 공안으로써 오늘 여러분께 말씀을 드린 것은 이 공안을 가지고 천착(穿鑿)을 하고 분별심으로 따지라는 것이 아니고, 이 공안에 콱 맥혀서 알 수가 없거든 이 공안은 그냥 놔두고.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계신 ‘이뭣고?’ 또는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계신 그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서 간절히 거각을 하고 의심을 해서 공부에 박차를 가해 간다면, 어느 때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될 때에 이 공안도 의심 없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이 법회가 끝난 다음에 화두 타실 분, 또 불명(佛名)을 타실 분, 또 오계(五戒)를 받으실 분에 대한 간단한 법요식(法要式)이 있게 되겠습니다. 화두와 불명과 계를 신청하신 분은 이 법회가 끝난 다음에 이 법당에 질서 있게 남아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은 ‘경계(境界)에 속지 말아라’

한 생각 경계에 속아 가지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지 말고, 그 한 경계로 인해서 퍼뜩 화두로 돌이켜 가지고 해탈도(解脫道)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불자(佛子)가 마땅히 가야할 최상승(最上乘)의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해에는 그러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시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시고, 그렇게 해서 365일을 그렇게 단속하고 그렇게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일 년 동안에 무량겁 윤회하던 윤회의 길이 거기에서 녹아 없어질 것이며, 영원히 누리고 남을 행복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신수기도 중입니다마는 기도 성취는 내년 신수기도 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모든 소원을 다 성취하시고 말 것입니다.(40분26초~58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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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면문출입견환난~' ;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617칙 '무위(無位)'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세(世)는 파괴·변화·흐른다는 시간의 뜻이 있고, 간(間)은 가운데·간격·틈새라는 공간의 뜻이 있다.

①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 생물들의 세계. ③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 세상. 이 세상. 세속.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 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요중선(鬧中禪 시끄러울 뇨/가운데 중/참선 선) ; 시끄러운 가운데 하는 참선. 동중선(動中禪)라고도 한다. 조용한 가운데 하는 참선은 정중선(靜中禪)이라 한다.

*임운(任運 맡길·마음대로 할 임/옮길·움직일·운수 운) ;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일어남. 아무런 조작이나 인위적인 힘을 첨가하지 않고, 법이(法爾), 여연(如然), 자연(自然), 으레히라는 뜻.

*상근(上根 위 상/뿌리 근) ; 상근기(上根機).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 매우 뛰어난 소질과 능력, 또는 그러한 소질과 능력을 지닌 사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좌우명(座右銘 자리 좌/오른쪽 우/새길 명) ; 늘 자리[座] 옆[右]에 새겨[銘]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삼라만상의 사상인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세계의 생성소멸 과정을 나타내는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동일한 형식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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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변리(大小便利 큰 대/작을 소/똥오줌 변/편리할 리) ; 대변(大便 '똥'을 점잖게 이르는 말)과 소변(小便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 *便利(변리) : 똥, 오줌 따위를 무의식중에 배설함.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신진대사(新陳代謝 새 신/묵을 진/대신할·교체할 대/물러날 사) ; 생물체가 몸 밖으로부터 섭취한 영양물질을 몸 안에서 분해하고, 합성하여 생체 성분이나 생명 활동에 쓰는 물질이나 에너지를 생성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질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용. 물질대사(物質代謝)라고도 함.

*의기소침(意氣銷沈, 意氣消沈 뜻 의/기운 기/사라질 소/잠길·가라앉을·잃을 침) ; 의기(意氣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 마음이나 기개)가 사라지고[銷] 가라앉음[沈]. 기운이 없어지고 풀이 죽음.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육창(六窓 여섯 육/창문 창) ; '육근(六根)'을 여섯 개의 창으로 비유한 것.

*육창일원(六窓一猿) ; 여섯 창문이 있는 집에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이리저리 여섯 개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다는 비유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육창(六窓)에 비유하고 심식(心識)을 한 마리의 원숭이에 비유한 것.

*불파염기(不怕念起) 유공각지(唯恐覺遲) ;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참고]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14.  『수심결』 (지유선사 현토역해 | 도서출판 窓) p83~88 참고.

或者 不知善惡性空 堅坐不動 捺伏身心 如石壓草 以爲修心 是大惑矣 故云 聲聞 心心斷惑 能斷之心 是賊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하셨다.

 

但諦觀殺盜淫妄 從性而起 起卽無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所以云  不怕念起 唯恐覺遲 又云 念起卽覺 覺之卽無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라, 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하셨고 또 ‘생각이 일어나거던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셨다.

 

故 悟人分上 雖有客塵煩惱 俱成醍醐 但照惑無本 空華三界 如風卷煙 幻化六塵 如湯消氷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다 제호를 이룬다. 다만 미혹(迷惑)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과 같은 삼계(三界)가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은 육진(六塵)이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 것이다.

 

若能如是念念修習 不忘照顧 定慧等持 則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 自然斷除 功行 自然增進 煩惱盡時 生死卽絶

 

만일 이처럼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근본 무명, 근본 번뇌)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快樂)해 근심이 없으리니, 이름하여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一O入九 ~ 一一六三) ‘答 汪內翰‘

先聖云 ’瞥起是病 不續是藥‘ ’不怕念起 唯恐覺遲‘

옛 성인이 이르시되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병이요, 계속되지 않는 것이 약이다’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참고] 『종경록(宗鏡錄)』 제38권 (영명연수 九O四 ~九七五)

禪門中云 不怕念起 唯慮覺遲 又云瞥起是病 不續是藥 以心生卽是罪生時故 是以初心攝念爲先 是入道之階漸 如諸經要集云 攝心一處 便是功德叢林 散慮片時 卽名煩惱羅刹 所以曇光釋子 降猛虎於膝前 螺髻仙人 宿巢禽於頂上

 

선문 가운데 이르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닫기가 더딜까 염려할 따름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되 “갑자기 일어남은 병이요 계속되지 않음은 약이니, 마음을 낸즉 죄가 생기는 때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처음 마음이 났을 때 생각을 거두어들임이 으뜸이 되나니, 이것이 도에 들어가는 단계점차이다. 마치 제경요집경에서 이르되 “마음을 한곳으로 거두어들임은 공덕의 총림이요, 생각이 조각조각 흩어질 때를 곧 번뇌의 나찰이라고 한다”고 함과 같다.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業,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고락苦樂). 업과(業果)라고도 하며, 업인(業因)과 과보(果報)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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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횡석애의무로~' ;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편찬) 제10권 408칙 '만법(萬法)' 심문분(心聞賁) 게송 참고.

*운수(運數) ;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天運 하늘이 정한 운수)과 기수(氣數 저절로 오가고 한다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비색(否塞 막힐 비/막힐 색) ; 운수가 꽉 막힘.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도문(道門) ; ①도에 이르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 ②불문(佛門). 부처님의 법문(法門). 불교(佛敎)라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서는 문.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것.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에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순정리론』 권32(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 권60(대정장11, p.346c3)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달마스님, 육조스님, 임제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무위진인(無位眞人) ; '무위(無位)'란 상하 · 귀천 · 범성 · 미오 등 어떤 지위나 차별도 없다는 말. 또는 지위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오간다는 뜻. 곧 '무위진인'이란 궁극적인 경지를 깨달아 모든 지위에 얽매이지 않게 된 참사람(절대자유인)을 가리킨다.

*미틀다 ; ‘밀뜨리다(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갑자기 세차고 힘있게 밀어 버리다)’의 사투리.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參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위산(潙山) 선사가 향엄(香嚴)에게 이르기를 『평생에 듣고 본 것을 떠나서, 네가 세상에 나오기 전 너의 본래면목에 대하여 한마디 말하여 보라』하는데, 이리 생각하고 저리 따져서 몇 마디 대답하여 보았으나 모두 아니라고만 하는 것이다.

 

자기 방에 가서 가지고 다니던 여러 가지 책들을 내어놓고 아무리 찾아보았으나, 듣고 본 것을 여의고는 말할 수가 없으므로 탄식하기를 『그림의 떡으로는 배를 불릴 수 없다』하고 다시 위산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였으나,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소견이지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하기에 모든 서적을 다 불살라 버리고, 다시는 불법도 배우려 할 것 없이 되는 대로 지내기로 하고, 울면서 위산을 하직하여 남양(南陽)에 가서 혜충(慧忠)국사의 유적을 보고 거기에 있었다.

 

하루는 그 산중에서 큰 역사가 있어서 그도 같이 일하는데, 돌멩이를 주워 던진 것이 대숲에 맞아서 「딱」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치고 나서, 목욕하고 향을 사르고 멀리 위산을 바라보면서 절하고 게송을 지었다.

『한 번 치는데 모두 잊었네。더 다시 애써 닦을 것 없네......(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그리고 곧 위산에 가서 법을 받고는, 등주(鄧州)의 향엄사에서 교화하였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오계(五戒) ; (산스크리트어 pañca-śīla) 재가(在家)의 신도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②불투도(不偸盜).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라.

③불사음(不邪婬).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불음주(不飮酒). 취기(醉氣)가 있는 것에 취(醉)하지 말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법문 내용]

 

(게송)면문출입견환난~ / 망상에 따라가지 말고, 망상을 발판으로 화두를 들어라 / 적극적 요중선(鬧中禪) / 상근 중근 하근 / 경계에 속지 말아라.

몸과 마음의 어떠한 경계(境界)에도 속지 말고 바로 화두로 돌이켜라 / 흥망성쇠, 희로애락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로 부처님과 선지식의 법문 /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한 생각에 달려있다.

(게송)산횡석애의무로~ / 깨닫고 안 깨닫는 것은 우리가 따질 문제가 아니고, 올바르게 최선을 다할 뿐 / 우리가 할 일은 한 중생도 남음 없이 제도해야.

 

 

우리에게 진여불성이 없다면 망상도 일어날 필요가 없겠지만, 진여불성이 있는데 과거로부터 한량없는 업(業)을 지었기 때문에 그 지어 놓은 업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그 망상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어.

그 일어나는 물결을, 그 일어나는 망상을 계기로 해서 화두를 들어버리면 그 일어나는 망상이 발판이 되어서 나로, 나의 자성자리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세간(世間)에 살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인간 세상에 모든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서 바로 그 생활 속에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요중선(鬧中禪)이고 적극적 임운선(任運禪)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상근인이 할 수 있는 참선이다. 그 적극적(積極的) 요중선(鬧中禪)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참선이다' 이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상근도 닦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고, 하근・중근, 하근도 공부해서 도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도(道) 자체에 가서는 조금도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근기(根機) 따라서 취향하는 방법에 가서 차이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고 보면은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도 닦는 사람이 가장 경계(警戒)하고 두려워할 것은 속지 않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속지 않는 것은 그래도 쉬운데, 정말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거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도학자는 산중에서 도를 닦건, 세간에서 도를 닦건, 슬픈 일을 당하면 바로 그 슬픈 일 자체가 나로 돌아오는 발판이요,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기분 나쁜 그 일로 해서 오랫동안 그러한 경계에 묶여 있지를 않고 퍼뜩 화두를 들고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염기불파(念起不怕)하고 유공각지(唯恐覺遲)라. 생각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각(覺) 더딘 것을 두려워하라' '각(覺), 빨리 깨닫도록 해라'하는 게 ‘빨리 화두로 돌이켜라’ 그말이거든.

깨달은 사람은 대원각지(大圓覺智), 크고 뚜렷하게 깨달은 그 지혜가 낭연독존(朗然獨存)을 하도록 항상 그렇게 인자 다스려 나가겠지만.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것이 깨달은 경계인가를 모르는 우리로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첩경이니까 그렇게 화두를 자꾸 들면, 하근(下根)이 자꾸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상근(上根)이 되어 가는 거고.

 

서커스단에 그 묘기라든지, 올림픽 때에 체조하는 그 선수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렵게 어렵게 부축을 받으면서 스폰지 위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을 되풀이해서 하면서 결국은 그러한 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뭣고?’야 무슨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고. 자꾸 생각은, 끊임없이 참선할 수 있는 계기는 자동으로 우리는 무진장 타고났으니까 그 계기를 놓치지 말고 그때그때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어라.

 

도를 닦는 수행자는 깨닫고 안 깨닫는 것은 우리가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끈기를 가지고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고상하고 거룩하고 훌륭한 것입니다.

 

오후보림, 복혜 원만구족해서 무량중생을 제도(濟度)해 마칠 때까지 우리는 그 끝없는 길을 향해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나 자신을 닦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19. 6. 3. 21:23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94)—89년 7월 첫째일요법회 (56분)

(1/3) 약 22분. (2/3) 약 19분. (3/3) 약 16분.

(1/3)----------------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니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고

나무~아미타불~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어제 가지 끝에 그렇게도 곱게 피어 있던 꽃이 오늘 아침에는 벌써 땅바닥에 송이송이 떨어져 있구나.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떨어진 꽃을 아까워하다가 도리어 부끄러운 생각을 나게 하는구나.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고. 흥망성쇠에 무심(無心)하지 못해. 흥망성쇠에, 그 화려하게 피었다가 떨어져 버려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 어찌 그대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누가 그대와 같이 무심할 수가 있겠는가.


꽃은 그렇게 화려하게 아름답게 향그럽게 곱게 피어 있으면서도 ‘나는 지금 곱게 화려하게 피어 있다’하고 조금도 자랑하는 마음도 없고,

그렇게 화려한 꽃이 하룻밤 새에 그렇게도 떨어져 버려도 조금도 꽃 그 자신은 꽃이 떨어졌다고 해서 조금도 가슴 아파하거나 아까워하는 생각이 없어. 피어 있을 때도 무심하고, 꽃이 진 뒤에도 무심하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꽃을 감상하는 사람은 피어 있을 때는 '곱다'고 '아름답다'고 야단하다가, 그 꽃이 져 버리면 그렇게도 애석하게 생각해.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돈이 잘 벌리거나 높은 자리에 영전을 하거나 하면 온통 집안에 경사가 났다고 좋아하고 참 야단이다가, 재수가 없어서 살림이 망하거나 높은 자리에서 떨어져서 파면을 당하거나 하면 그냥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고 그렇게 속을 상한다.

그러니 사람이 만물 가운데 영장(靈長)이라고 하지마는 식물인 저 꽃만도 못하구나. 이러한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



방금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법에 대한 간곡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 그 한 대목만 들으면 다시 오늘 무슨 더한 법문을 들으실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 수승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에도 활구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이다 그말이여.


활구참선을 해 나가는 데는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 가지고 공안을 타파(打破)해 버려. 의단(疑團)을 타파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의 마음자리를 깨달라 버리는 것인데.

화두 하나만을 제대로 참구할 줄 알면 그것이 바로 참선을 바르게 하는 길이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그 화두를 참구하는 법에 대해서 항상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이론이나 지식이나 분별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여.

그러기 때문에 화두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슨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또는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교리로 온갖 지식과 상식을 동원을 해서 이렇게도 따져 보고 저렇게 따져 보고 그래 가지고서는 깨달음,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을 타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않고 그 공안을 참구해.

그것이 참 아까 조실 스님 말씀과 같이 천하에 간단하고도 쉬운데, 실지로 해 나가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을 하고 있고 따지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무슨 그럴싸한 해답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착각을 하고 그러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죽비(竹篦)를 치고서 입선(入禪)을 들이고 떠억 결제 때에는 선방에서 그렇게 정진을 하지만, 참선이 꼭 죽비 치고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여.


물론 그것은 기본자세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따악 가부좌를 하고, 반가부좌를 하고 하는 것이 참 좋기는 좋지만,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의자에 걸터앉아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심지어는 진심(瞋心), 속이 상할 때도 하고, 슬플 때도 하고, 기쁠 때도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고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온갖 울긋불긋한 온갖 색상을 보되 그 색(色)에 간여하지 아니해. 간섭하지 아니하고. 그 색에 집착하거나 그 색상으로 인해서 분별심을 내지 않는다.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온갖 소리를 듣되—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비행기 소리,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 이웃에서 모다 떠들고 잡담하는 소리, 어린아이들이 소리소리 지르는 소리, 음악 소리, 새 우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온갖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그 소리에도 끄달리지 않는다 그말이여.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에, 온갖 색성(色聲), 색상과 온갖 소리에 의심 없는 곳이면 바로 그것이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다. 법왕(法王)이 계신 궁성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 중생은 눈으로 온갖 색상을 보면 거기에 끄달려 끌려가서 온갖 분별심이 거기서 일어나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든.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로 인해서—칭찬하는 소리, 욕하는 소리, 새소리, 음악 소리, 차 소리, 시끄러운 소리, 그 소리로 인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고 짜증을 내고, 때로는 기쁜 마음을 내고 슬픈 마음을 낸다 그말이여.


참선하는 사람은, 수행하는 사람은 색상을 보되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이뭣고?’ 온갖 소리를 듣되 거기에 분별심을 내거나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뭣고?’ 화두를 거각(擧却)한다.



황벽(黃檗) 스님께 여쭙기를 “어떤 것이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입니까?”


계급. 그 계급이라 하는 것은 소리를 귀로 듣거나, 온갖 색상을 눈으로 보거나,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을 상대할 때에 좋은 소리, 나쁜 소리, 고운 빛깔, 보기 싫은 빛깔, 온갖 그 차별 경계 그것을 여기서는 계급이라 그러는 거여.


“일체 차별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거기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여쭈니까,

황벽 스님께서 이르시기를 “다맛 종일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고, 종일 행하되 종일 걸어가되 한 조각 땅도 밟은 바가 없어”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지 않는다’ 그 말은, 밥을 먹되 '맛이 있다 없다, 밥이 질다 되다’ 이러한 그런 생각이 벌써 일어나면 벌써 쌀을 씹고 있는 거여.

그런데 밥을 먹되 '질다 되다' 그런 생각도 없고, 맛이 있고 없는 분별심도 생기지 아니하고 다못 이 깨닫지 못한 경지에서는 화두의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종일 걸어가되 한 쪽, 조그만 한 쪽의 땅도 밟지를 안 해.

어떻게 걸어가는데 땅을 밟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땅을 밟고 걸어가되 ‘땅이 평편하다 울퉁불퉁하다’ 그러한 일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러면 그것이 '종일 걸어가되 한 조각 땅도 밟지 않는다' 그말이여.


이러할 때에 무인아상(無人我相)이여.

‘내’라 하는 생각, '내가 지금 걸어간다'는 생각도 없고,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다'는 생각도 없어. 이것이 인아상(人我相)이 없어.


종일불리일체사(終日不離一切事)하되  불피재경혹(不被諸境惑)이여.

종일토록 일체 사물을 여의지 아니해. 일체사를 여의지 안 하되 일체 경계에 현혹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해서 「자재인(自在人)」이라고 한다 그말이여.


소리가 시끄럽다고 해서 귀를 막고, 모든 모양이 뵈기 싫다 해서 눈을 막고 그런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다 보고 귀를 막지 않고 귀를 열어 놓되, 보되 본 바가 없고 듣되 들은 바가 없어. 다맛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하도록 자꾸 잡드리를 해 나가는 거여.

종일토록 일체 일을 여의지 아니하되 일체 경계에 현혹된 바가 없어. 이렇게 되어야 이것을 바로 「자재인(自在人)」이라고 한다 그말이여.


우리는 완전한 자재인이 될 수는 없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완전한 자재인은 될 수 없지만 자꾸 화두를 거각하고 또 화두를 거각하고, 깜박 잊어 버리면 또 챙기고, 놓쳐 버리면 또 챙기고, 자꾸 챙기고 챙겨서 챙기다 보면 나중에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게 된다 그말이여.


이렇게 하면 이것이 바로 일체, 밥을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똥을 누게 되면 똥을 누고, 어디를 가야할 일이 있으면은 걸어가기도 하고 차를 타고, 일이 있으면 밭도 매고 빨래도 하고 이러되, 그러한 가운데에도 화두가 독로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면 경계에 흔들림을 받지 않게 된다.


시시때때로 생각 생각이 일체상(一切相)을 보지 마라. 일체상을 보지 말고 과거 · 현재 · 미래, 이 삼제(三際)를 인증하지 말아라.

앞으로 지나간 과거도 가는 것이 없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현재에 대해서도 주착(住着)함이 없고, 미래에 대해서도 오는 것을 생각하지 마.


뭐하러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당겨서 생각하고, 현재 닥쳐 있는 일에 무엇을 거기에다가 집착을 해서 생각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지나간 일도 생각할 것 없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현재 닥쳐 있는 모든, 닥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거기에 생각을 두지 말고, 오직 화두만을 거각해라 이거여.


그래 가지고 안연단좌(安然端坐), 편안히 단정하니 앉아서 임운불구(任運不拘)여. 일체 것을 터억 다 놔 버려. 긴장도 다 풀어.

마음의 긴장도 다 풀어 버리고, 몸뚱이의 긴장—어깨의 긴장도 다 풀어 버리고,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눈에도 힘을 주지 말고, 다못 지긋이 어금니를 물고 입을 ‘한 일(一)’자로 따악 다물고, 눈은 평상으로 뜨고. 그리고서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생각 생각이 단속을 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걸어갈 때나, 머물러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어묵동정(語默動靜), 무슨 필요가 있어서 말을 할 때나, 또 말을 안 할 때나, 몸뚱이를 움직일 때나, 또는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있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간절히 간절히 단속을 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1분 1분을 그렇게 단속을 하고 노력을 해 갈 것이다.(처음~21분22초)




(2/3)----------------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 사람 만 사람이 참선을 한다고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그 천 명, 만 명 가운데 겨우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 서너 사람, 그런 정도 밖에는 도(道)를 깨달은 사람이 없다. 왜 그러냐?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기는 하되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노력을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조금 하다가 말다가 그렇기 때문에 한다고 해도 정말 도를 이룬 사람은 그렇게 극소수에 지내지 못한다 이거여.


이 공부가 어려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공부가 복잡해서 그런 것도 아니여. 또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여.

다못 그 한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말이여.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다가 말다가, 조금 할라고 마음먹었다가도 금방 딴 생각[別念]이 나면 그리 끄달려 가 버리고, 조금 무슨 일이 있으면 그리 끄달려 버리고,

앉어서 ‘이뭣고?’하다가 서면서 잊어 버리고, 금방 화두를 들고 있다 무슨 소리 들으면 거기에서 화두가 놓쳐 버리고.

놓치자마자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해야 할 텐데 놓치면은 놓친 데에서 그냥 그리 끌려가 버리고, 경계에 끄달려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말이여.


황벽 스님은 정말 이 공부를 할려고 마음을 먹으면 정말 여기에다가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말 간절하게 그렇게 해야지, 공부한답시고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없이 그렁저렁하면은 수앙(受殃)이 유일재(有日在)다. 재앙이, 곧 재앙이 닥쳐온다.


어떻게 닥쳐오냐?

지금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할 때 철저히 해 놓지 아니하면 금방 늙어서 병들어서 곧 죽게 된다 그말이여.


죽게 되었을 때, 그때 그 생사(生死)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여?

눈 한번 감으면 내생(來生)인데,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인데, 그때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서 ‘내가 참선을 했습니다’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그렇게 했으면은 그 깨달은 도리를 일러 봐라. 생사 없는 도리를 한번 일러 봐라’할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이냐?

그러기 때문에 금생에 이 생사 문제를 결정코 요달(了達)을 할 것이니라.


금생에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누가 대신해서 그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을 대신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진즉 이 문제를, 이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해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시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 '생사, 생사, 생사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어쨌든지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시간을 아껴서 정진을 하도록 간곡히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생사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면 우리의 생각,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데에서 우리의 생사윤회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사윤회를 해결 짓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견색시증시(見色時證時)요  문성시증처(聞聲時證處)니라

나무~아미타불~

염념석가출세시(念念釋迦出世時)요  보보미륵하생처(步步彌勒下生處)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시증시(見色時證時)요. 모든 색상을 보는 그때가 그것이 바로 생사 없는 참나를 증득하는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時證處)다.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를 듣는 그 찰나가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을 곳이다.


그래서 눈으로 무슨 색상을 볼 때 그 찰나가 바로 생사 없는 진리를 증득하는 때이기 때문에 공부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참선(參禪) 안 한 사람은 그 무슨 색상을 보는 그 찰나가 벌써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에게 딱! 쇠고랑에 채여서 끌려가는 그 찰나고,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바로 무슨 색상이 눈에 띄자마자 ‘이뭣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바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바로 그 시간이다 그말이여.


일체 소리가 귀에 들릴 때에도, 귀를 통해서 일체 소리를 듣더라도 바로 그 듣는 그 찰나에 거기에 그 소리로 따라가지 말고, 그 소리로 인해서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말고 그 소리가 귀에 이르자마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다그쳐 가면 생각 생각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곳이고, 걸음걸음이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신 곳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탄생하셨지만 이와 같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 생각 생각 그 찰나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고,

비록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출생하신다고 경전에는 쓰여 있지마는, 진짜 살아 있는 미륵 부처님은 우리가 걸음걸음이 ‘이뭣고?’ 딱! 챙기는 그 찰나에 바로 미륵불이 탄생하신 곳이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실천해 나간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목전(目前)에 모든 경계 속에,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경계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얼굴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쳐다볼 때에 자기의 얼굴이 보이죠.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 분명한 그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얼굴에 화장을 하면은 거울 속에 얼굴도 화장을 했고, 얼굴을 찌뿌리면은 거울 속에 얼굴도 찌뿌리고, 얼굴을 슬프게 우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에 있는 얼굴도 슬피 울고 있을 것입니다. 웃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서면은 거울 속에 영상도 웃고 있을 것입니다.


거울만 거울이 아니라, 이 허공계, 동서남북 사방 사유 상하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끝없이 펼쳐 있는 이 허공이 하나의 커다란 거울인 것입니다. 이 거울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거울인 것입니다.

그 거울 속에는 태양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고 지구도 있고, 사람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가지가지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비춰져 있습니다.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돌도 있고 짐승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양들이 실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지만 그것은 실(實)다운 상(相)이 아니고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비추어져 있는 허망한 영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영상을 실지로 있는 실(實)다운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울을 하나 사다가 부인에게 선사를 했습니다. 그 부인이 좋은 것을 가지고 왔으니까, “정말 당신을 위해서 비싼 돈을 주고 아주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그러면서 주길래 그걸 쳐다봤더니 아! 그 속에서는 그 거울 속에 아주 예쁜 여자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남편한테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더니 중국에 가서 무슨 여자를 하나 꿰차고 왔다”고 막 신경질을 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시어머니가 하도 시끄러워서 “아니 왜 그러냐? 만리 타국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왜 오자마자 싸움질을 하냐?” 며느리를 대단히 꾸짖었습니다.

그 며느리가 울면서 “아니에요, 어머니. 중국에 갔더니 어디서 계집년을 뀌어차고 왔지 않습니까?”


“기집이 어디가 있냐?”

“여기 있습니다” 거울을 주니까 시어머니가 그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아, '젊은 년을 뀌어찼다'고 하더니 늙은 년을 데리고 왔구나”


시아버지가 “아니, 뭘 그렇게 시끄럽게 하는고?”

“아, 중국에 갔다 왔더니 늙은 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시아버지한테 보이니까 “아! 뭔 늙은 년을 데리고 와. 늙은 영감탱이를 데리고 왔구만”


거울이란 것을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은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얼굴이 비친 줄을 모르고, 예쁜 여자를 데리고 왔다니, 늙은 망탕구를 데리고 왔다니, 또는 영감을 데리고 왔다니,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깨면 깨뜨릴 수 있는 그 거울만 거울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마는, 그까짓 거울은 별로고 진짜 우리가 눈 여겨서 잘 알아야 할 거울은 무변(無邊) 허공계(虛空界), 이 허공계가 하나의 큰 거울인 것입니다.

그 거울을 바로 볼 줄 알고, 바로 사용할 줄 알아야 정말 이 우주법계에 펼쳐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을 바로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 거울을 바로 볼 줄 알아야 자기의 참나, 참나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게에서 사 오는 그런 거울은 우리 이 껍데기밖에는 보이질 안해.

그러나 이 허공계, 무변 허공계를 체(體)로 하는 그 거울을 바로 보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참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거울을 어떻게 보느냐?

참으로 옳게 보는 법은 가르켜 줄 수가 없지만 우선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을 가르켜 드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큰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비춘 달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그 달도 바로 자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허공 속에 비춰 있는 꽃도 하나의 식물로써 존재하는 꽃이 아니라 그 꽃도 자기의 모습이 그 거울 속에 비춰져 자기에게 반사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달이나 해나 별 저런 꽃 나무 그런 것만이 꼭 그 허공계에는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도 거기에는 비춰. 아내의 얼굴도 거기에 비추고, 남편의 얼굴도 거기에 비추고, 애인의 얼굴도 비추고, 미운 사람의 얼굴도 비추고, 친구의 얼굴도 비춰.

그런데 그 아내의 얼굴이나 남편의 얼굴이 남편의 얼굴이요 아내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얼굴이 자기의 마음의 모습이 아내의 얼굴로 이렇게 비추어서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 달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이 없어. 그 자체가 밝되 밝다는 생각도 없고, 그 달이 가리워지되 가리워져서 안 좋다고 하는 생각도 그 달 자체는 없는 거여.

그런데 그 달을 보는 내가 기쁜 마음으로 차 있을 때에는 그 달을 보면은 기쁘고 저절로 노래가 나와. 내 마음이 슬프면, 그 슬픈 눈으로 보면, 슬픈 마음으로 그 달을 보면 그 달이 그렇게도 하염없이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말이여.


그러니 기쁜 사람의 눈에는 그 달이 밝고 좋은 달로 비출 것이고, 슬픈 처지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달을 보면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러니 그 달이 어찌 나의 마음이 아니고 나의 모습이 아니겠느냐.(21분23초~40분24초)




(3/3)----------------


그러면 어떤 내 집에 손님이 오셨을 때도 내 집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오시는 손님 반갑고 그냥 잘 대접을 하고 싶은데, 내 집에 걱정스러운 일이 있거나 언짢은 일이 있어서 속이 상할 때에는 좀 반가운 손님이 와도 별로 반갑지 않다 그말이여.

그러니 어찌 그 손님에게 반갑고 반갑지 않는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볼 때에도 아내의 마음이 기쁘고 흐뭇할 때에는 남편을 보면은 그냥 반갑고 음식도 맛있게 해 드리고 싶다 그말이여.

그런데 속에 짜증이 나고 부화가 날 때에는 남편이 와도 반갑지도 않고 맛있는 음식도 잘 채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안 난다 그말이여.


그러면 남편은 아무 속도 모르고 하루종일 직장에서 종일토록 일하고 아주 피로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아무 까닭 없이 아내가 반가워하지도 않고 저녁도 그냥 그럭저럭 있는 반찬 갖다가, 먹거나 말거나 갖다가 놔두고 만다 그말이여. 남편은 까닭을 몰라.


그런데 지혜 있는 남편 같으면 ‘아하! 아내가 무슨 속상한 일이 있구나’ 이리 생각하고 우선 밥부터 먹고 그리고 아내에게 ‘무엇이 속상한 일이 있었소?’ 그렇게 묻고서 좀 잘 그 원인을 알아서 말을 듣고서 잘 위안을 하고, ‘아!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종일 일하고 온 사람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대번에 또 그냥 막 욕을 퍼붓고 싸움을 걸면 그냥 큰 싸움이 될 거다 그말이여.


친구 간에도 그렇고, 형제간 남매간에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래.

요새는 집안 각 가정마다 아들딸들의 교육 문제, 공부 문제, 대학 고등학교 모다 입학 문제로 해서 모두 신경을 쓰고 걱정이 태산 같지만,


이러한 문제도 허공에 자기의 마음의 모습이 비춘 도리를 알고서 지혜롭게 처리하고 딸과도 터놓고 얘기를 하고, 아들과도 터놓고 대화를 해서 그 아들딸 마음속에 있는 문제점을 부모가 관심 깊게 파고들어서 그것을 정말 지혜롭게 처리를 해 나가면 문제아도 발생을 아니할 것이고,

또 아들딸 보고 '공부해라, 해라' 안 해도 차츰차츰 공부를 잘하게 될 거고, 나쁜 친구들하고 사귀지도 아니할 것이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일찍 돌아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공부를, 보살님네나 거사님네나 모다 이 참선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가정 문제가 복잡하고 걱정 근심이 많으면 아무래도 이 공부에 지장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모든 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이 비추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특히 상대방에 모든 허물이 나의 허물의 그림자다' 이렇게 볼 줄 알면 많은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고 풀라야 풀 수 없는 대단히 언짢은 관계도 아주 수월하게 풀어 버리고 해결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불법의 인과(因果)의 법칙을 잘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그 사람의 허물로써 미워하고 원망하고 몰아대지 아니하고,

모든 다른 사람의 허물이 바로 그 허물이, '나의 허물이 그 아내를 통해서 나에게 되돌아온 영상이다. 나의 모습이다'고 하는 도리를 믿고 그렇게 해결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법만을 철저히 믿기만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퍽 수월할 것입니다.

인과법만 철저히 믿으면 법률도 필요 없게 됩니다. 경찰 형사도 필요 없게 되고, 모든 사람이 다 이 인과의 법칙만을 믿게 되면 재판도 필요 없고 형무소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먼저 인과의 법칙 먼저 철저히 믿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게 되면 참 우리의 남을 원망할 일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일도 없고, 부모를 원망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바로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상대방과 원결(怨結)을 맺게 되고 자기 자신을 점점 괴롭게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지옥, 다 사람들은 지옥을 꺼려 하지만 자기 마음이 편안칠 못하면 이 몸뚱이 살아 있으면서 이미 지옥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지옥을 없애야 앞으로 이 몸뚱이를 버리고 저승에 가더라도 지옥에 안 가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자꾸 지옥에 들어가서 사는 연습을 많이 해 논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익힌 데로 가거든. 우리 육도윤회(六道輪廻)는 익힌 데로 가는 것입니다.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도,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자기집은 어지간하면 다 찾아옵니다. 왜 그러냐?

날이면 날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도 집에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 지옥 연습을 많이 해 논 사람은 지옥에 가기가 아주 수월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천당이나 극락에 생활을 익힌 사람은 숨이 떨어지자마자 극락세계나 천국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인 것입니다.


앞으로 날씨가 삼복에 접어들면서 장마철을 맞이하게 됩니다. 더웁고 무덥고 불쾌지수가 높아가겠지만 그러한 불쾌지수로 인해서 언짢은 생활을 하시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이뭣고?’를 열심히 하십시오.

몸을 단정하니 척추를 펴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속이 상하고 답답하고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이것을 더 열심히 박차를 가해서 더 하시라 그말이여.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이 공부를 하십시오. 그러면 그 어려운 일로 인해서 더 신심이 돈독해지고 더 불법을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는 훈련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괴로움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모든 성현들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로 오셨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에 이 불법에 인연을 심어서 이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났습니다. 이 사바세계는 도(道)를 성취하기 좋은 곳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면은 하나의 지혜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쇠가 불 속에 들어가고 물 속에 들어가서 쇠망치를 얻어맞지를 않으면 그 쇠는 훌륭한 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원망하지 말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신심을 가다듬고 공부를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내세당연한만단(來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今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곡히 일러드린 말씀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내세(來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내생에 그 펄펄 끓는 지옥에 빠져서 ‘하! 내가 그때, 용화사에서 송담 스님 법문을 들을 때, 그때 왜 열심히 참선을 안 했던가?’ 그때 가서 후회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두 가지 광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앞으로 7월 25일부터서 28일까지 3박4일 동안 중고등부 학생들, 김제 금산사로 수련대회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8월 7일부터 8월 9일까지 2박3일간 어린이 학생부는 여주 신륵사로 수련대회를 떠납니다. 회비는 중고등부나 어린이부나 칠천 원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학생들이 그 수련대회 참석을 하도록 주선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거기에 가서 3박4일 또는 2박3일간 스님네와 같이 그 청정도량에 가서 예불도 하고, 법문도 듣고, 참선도 하고 또 서로서로 반 활동도 하고, 그런 물 좋고 산 좋고 또 경치 좋은, 좋은 공기 청정도량에 가서 잠시 동안 생활을 하고 오면 그동안에 쌓였던 알고 모르는 사이에 쌓였던 온갖 스트레스도 다 풀어 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집에서 공부하라고 억지로 붙잡기보단 한 번씩 그렇게 보내 놓으면 좋은 친구도 사귀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공부를 해야 공부도 잘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광고 말씀 드릴 것은 여기 일주문 밖에 큰길이 있는데, 그 길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데 중간에 산이 있어서 경사가 져 가지고 저쪽에서 요쪽이 안 보이고 이쪽에서 저쪽이 안 보입니다. 그래 가지고 차 사고도 여러 번 있고 또 사람도 다쳐서 교통사고가 일 년에 여러 건이 발생을 합니다.

그래서 그걸 시(市)에다가 그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달라고 진정서를 넣을려고 그럽니다. 그 진정서를 넣어야 시에서도 그것을 알고 조만간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 신도님네들이 절에 왔다갔다 하시는 길에도 교통의 위험성이 없고, 또 우리 신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시민들과 다니는 차량들도 절 앞에서 그런 사고가 나니까 참 가슴 아픈 일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정서를 내는데 여러 신남신녀, 여러 거사님네들 보살님네들 서명 날인이 필요합니다. 성함과 주소를 적고 거기에 도장이나 지장을 찍어주시면 그것이 이 도로를 평탄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양식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서류에 서명 날인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40분25초~55분5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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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작일지두개난만~' ;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진각혜심) '낙화(落花)' 참고.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영장(靈長) ; 영묘(靈妙)한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長]. 인간을 다른 생물과 대비하여 이른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게송) '견색비간색~' ; 『금강경오가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야부 게송 참고.

*법왕(法王) : [범]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배휴와 황벽 스님의 문답 ; 『전심법요(傳心法要)』 (당唐의 배휴가 황벽 스님의 법문을 편집한 책)

問, 如何得不落階級.

師云, 但終日喫飯, 未曾咬著一粒米. 終日行, 未曾踏著一片地. 與麼時, 無人我等相, 終日不離一切事, 不被諸境惑, 方名自在人.


“어떻게 하여야 계급(階級 : 차별 경계)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다맛 하루 종일 밥을 먹되 한 톨의 쌀알도 씹은 바가 없고, 하루 종일 걷되 한 조각의 땅도 밟은 바가 없다. 이러한 때에 아상(我相)·인상(人相)등의 견해(相)는 없고, 하루 종일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 경계에 현혹(眩惑)되지 않아야 비로소 ‘자재한 사람(自在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更時時念念不見一切相, 莫認前後三際. 前際無去, 今際無住, 後際無來. 安然端坐, 任運不拘, 方名解脫. 努力努力.


다시는 때마다 생각 생각에 일체상(一切相)을 보지 말고, 앞뒤의 삼제(三際 과거·현재·미래)를 인정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는 머물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편안하고 단정하게 앉아 주어진 상황에 되는 대로 맡겨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해탈(解脫)’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하라.


此門中千人萬人, 祇得三箇五箇. 若不將爲事, 受殃有日在. 故云, 著力今生須了却, 誰能累劫受餘殃.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인(千人)·만인(萬人)이 있지만 겨우 서너, 너댓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는다. 만약 이 도 닦는 일을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금생에 반드시 끝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오랜 세월(累劫) 남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계급(階級) ; ①사물을 대립적으로 분별하는 망상. 인·아(人我), 유·무(有無), 선·악(善惡) 등으로 분별하는 의식을 말한다. ②수행의 점차적 단계. 선종에서는 점수(漸修)를 뜻하며, 반대로 계급이 없음은 돈오(頓悟)를 말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인아상(人我相) ; 나와 남을 갈라놓고,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남을 경시하는 마음.

*자재인(自在人) ; ①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은 8대자재(八大自在 : 8종의 부처님의 신비한 힘)의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 ②아미타불.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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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허공계(虛空界) ; ①진여(眞如)를 말함. 무색무형이고 일체 만유를 포괄하는 것이 허공같기 때문. ②허공의 영역[界]이라는 의미.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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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원결(怨結 원망할 원/맺을·번뇌 결) ; 원망(怨望)의 마음이 얽혀 풀리지 않는 것을 말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법문 내용]


(게송)작일지두개난만~ /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 수승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에도 활구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이다 / (게송)견색비간색~ / 황벽스님의 법문. '어떤 것이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입니까?'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시간을 아껴서 정진하라 /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사윤회를 해결 짓는 유일한 방법.


(게송)견색시증시~ /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경계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얼굴 /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비추어져 있는 허망한 영상 / 무변 허공계를 체(體)로 하는 그 거울을 바로 보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참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이 비추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특히 상대방에 모든 허물이 나의 허물의 그림자다 / 천당이나 극락이나 지옥이나 살아 있는 동안에 익힌 데로 태어난다.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 수승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에도 활구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수행하는 사람은 색상을 보되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이뭣고?’ 온갖 소리를 듣되 거기에 분별심을 내거나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뭣고?’ 화두를 거각(擧却)한다.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 사람 만 사람이 참선을 한다고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 서너 사람, 그런 정도 밖에는 도(道)를 깨달은 사람이 없다. 왜 그러냐?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기는 하되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노력을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조금 하다가 말다가, 그렇기 때문에 한다고 해도 정말 도를 이룬 사람은 그렇게 극소수에 지내지 못한다.


이 공부가 어려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공부가 복잡해서 그런 것도 아니여. 또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여. 다못 그 한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생각,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데에서 우리의 생사윤회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사윤회를 해결 짓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일체 소리가 귀에 들릴 때에도, 귀를 통해서 일체 소리를 듣더라도 바로 그 듣는 그 찰나에 거기에 그 소리로 따라가지 말고, 그 소리로 인해서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말고 그 소리가 귀에 이르자마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다그쳐 가면 생각 생각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곳이고, 걸음걸음이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신 곳이다.


'정말 모든 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이 비추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특히 상대방에 모든 허물이 나의 허물의 그림자다' 이렇게 볼 줄 알면 많은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고 풀라야 풀 수 없는 대단히 언짢은 관계도 아주 수월하게 풀어 버리고 해결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