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01~325)2020. 9. 27. 20:11

(No.306)—19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어(86.08.03) (62분)

(1/3) 약 20분. (2/3) 약 21분. (3/3) 약 19분.

(1/3)----------------


[호궤합장(胡跪合掌)을 하시고 앉아 주십시오. 그러니까 무릎만 붙이시고 궁둥이는 드십시오. 무릎만 마루에 붙이시고 궁둥이는 들으시고]


지금부터 여러분께서는 불명(佛名)과 오계(五戒)와 또 화두(話頭)를 타시게 되겠습니다.


첫째, 오계(五戒)를 먼저 설하게 되겠습니다. 아까 법상에서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가 될 때에는 오계를 받고 또 불명을 타고 또 공부해 나가는 바른 법을 배워서 마음을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를 한마디로 말해서 삼학(三學)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중생은 탐진치(貪瞋癡)—탐내는 마음, 또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탐 · 진 · 치 3가지의 옳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삼학(三學)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삼학은 계 · 정 · 혜(戒定慧) 이것을 삼학이라,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삼학(三學)이라 그러고. 탐 · 진 · 치를 삼독(三毒)이라 그러는데, 삼독을 돌이켜서 바꾸어 가지고 삼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삼학(三學)의 첫째는 계(戒)입니다. 계(戒). 계율(戒律).

5계와 10계 또는 비구 250계 또는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 이런 계가 있는데, 이 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와 '마음으로 지키는 계'가 있습니다.


이 계(戒)를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을 올바르게 가져나감으로 해서 계를 지키고, 그다음에 정(定)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그 탐진치 삼독으로 훨훨 불이 타 가지고 안정을 얻지 못하고 노상 둥둥 떠다니고, 노상 치닫고 잠시도 고요히 안정되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한곳에 안정을 시킴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정(定)을 닦음으로 해서 그래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데,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계(戒)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定), 선정(禪定)은 그 그릇에 물을 담는 거와 같고.

그래서 계기(戒器)요, 계의 그릇이요, 정(定)의 수(水)요, 선정(禪定)의 물이다 그말이죠. 그리고 혜월(慧月)이여, 지혜는 달과 같은 것입니다.


계의 그릇이, 계를 잘 닦음으로써 그 그릇이 깨끗하고 딱 바로 놓여져야 거기에 맑은 참선의 물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맑은 물을 담음으로 해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 그릇 안에 물속에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달이 물속에 잘 나타나기를 바래거든 그 물이 맑고 고요해야 하고, 물이 맑고 고요하게 잘 담기게 할라면은 그릇이 깨끗하고 그릇이 바로 놓여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항상 셋이 같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戒)만 있고 정(定)이 없어서는 혜가 이룰 수가 없고, 혜(慧)만을 바라면서 선정을 닦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계와 정과 혜, 삼학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인 것입니다. 3가지가 한 체(一體)인 것입니다. 계 있는 곳에는 정과 혜가 있고, 정이 있는 곳에는 계와 혜가 있고, 혜 있는 곳에는 정과 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3가지는 항상 동시요, 한 뭉텅이인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올바른 부처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지혜를 얻어서 영원한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자 하거든, 맨 먼저 부처님의 계를 잘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저 산에 나무에 올라가 가지고 물속에서 사는 고기를 구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모래를 쪄 가지고 밥을 만들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모래를 솥에다 넣고 불을 지핀다 하더라도 그 모래는 밥이 되지 아니한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 좋은 집을 지을라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나 질컥벌컥한 그 굳지 않는 땅에다가 아무리 설계를 잘해서 훌륭한 집을 지은다 해도 그 집은 얼마 가지 못해서 기둥이 가라앉고 벽이 갈라지고 집이 쓰러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타시는 계율이 얼마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불살생(不殺生).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 불투도(不偸盜),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자기 물건 아닌 것을 취하지 말아라.


셋째,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나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방사(房事)를 하지 말아라.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아닌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면은 그것은 피차에 괴로움과 불행을 가져오고 가정을 파탄시키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그래서 마침내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행하고 사회도 시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음을 하지 말아라.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하면은 진실성을 잊어버려서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직업을 갖건 진실하지 못하면 자기는 설 곳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게 되면은 차츰 과음을 하게 되고 술 취한 상태에서 말을 하게 되면 실수를 하게 되고 아무도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믿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술을 많이 먹게 되면 머리가 나빠지고 결국은 중독이 걸리게 되면은 폐인(廢人)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는 이상 말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지 말아라, 망어(妄語)를 하지 말아라, 술을 먹지 말아라,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왜 죽이지 말아야 하냐? 산목숨을 죽이게 되면 자기 자비심(慈悲心)을 손상하게 되어.


아까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스스로 자기가 깨닫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깨달은 사람으로 온 법계가 가득차게 하려는 이런 3가지의 큰 목적이 우리 불법(佛法)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달성할라면 첫째, 자비심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살생을 하게 되면은 그 자비심이 없어져 버려. 그러니 도를 이룰 수도 없고, 도를 이룬다고 해도 무엇을 위한 도냐 이말이여. 그래서 불자(佛子)는 마땅히 살생을 하지 말고 자비심을 길러야 한다.


또 불자는 마땅히 도둑질하지 말아라. 불자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고, 각만(覺滿)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데 남의 것을 훔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남의 것을 훔치는 이 도둑질을 하면은 복덕(福德)을 손상을 해.

복력(福力)이 있어야, 내 복덕이 있어야 나의 모든 좋은 영향력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서 배고픈 사람은 배부르게 해주고, 옷이 없는 사람은 옷을 주어서 따뜻하게 하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약이 되어주고, 이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까지도 다 바치면서 베풀면서, 그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인데,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것이냐.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것을 남에게 보시하는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에 사음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가져서, 청정하게 가져야 자기도 도를 이룰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도 제도를 할 수가 있지, 내 몸과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더러운 상태에서 어떻게 남을 청정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은 도(道)는 자비와 복덕과 이 청정한 마음이 모두가 도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고, 그것이 도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데 어찌 몸과 마음을 부정(不淨)하게 가질 수가 있느냐. 그래서 셋째에 가서는 사음을 하지 말아라 그것이여.


넷째에 가서 망어(妄語)를 왜 하지 말아야 하냐. 망어를 하면 진실(眞實)한 마음을 손상하게 되어.

도를 이루려면 앞에 말한 3가지에다가 또 이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서 도를 이루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거짓말을 풀풀 해 가지고 스스로 진실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자기도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실치 못한 사람의 말을 누가 믿어주며 어디 가서 중생을 제도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행동과 진실한 말과 진실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에 가서 술을 먹지 말아라. 세속에서 살라면은 남녀 간에 다 술을 마시게 되고 술을 권하게 되고 이러는데, "아, 이 5계를 받어서 '술을 먹지 말아라'하는 계를 받게 되면 이제 술은 입에다도 못 대겠다. 이거 참! 그 5계 중에 고놈 하나는 뺐으면 좋겠다" 그러한 말을 하는 분도 있는데.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술을 먹지 말아라’한 계율을 다섯 가지의 계(戒) 속에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 조목을 넣으신 데에는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지혜(智慧)를 손상을 해.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또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거꾸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다 제정신으로 술을 먹고 권하고 그러지만, 차츰 주기(酒氣)가 돌게 되면 자기도 막 먹고 남도 무리하게 권하고 해 가지고 술이 술을 먹게 되고, 나중에는 제정신을 완전히 잃게 되면 그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게 되어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이 되면 나중에는 중독이 걸리고 술을 안 먹고는 배기지를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서 마시고, 그 술이 주기(酒氣)가 가시기 전에 또 마시고, 가실라 하면 또 목이 조금 마를라 하면 또 홀짝 마시고 홀짝 마시고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하루종일 아주 술이 취해 가지고.

그렇게 되어 가지고 혀는 꼬부라지고 두 다리는 헛발질을 하고, 하는 말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말을 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장사를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사업을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무슨 정치를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결국은 이 '술'이라 하는 것은 세속에서 참 아주 끊기 어려우면서도, 이 술 때문에 눈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심장이 나빠지고, 제일 두려운 것이 술 때문에 간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사람이 자기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우리 하근기(下根機) 중생들에게는 ‘술을 먹지 말아라’한 계율은 대단히 중요한 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지금 사람을 죽이며, 도둑질을 하며, 사음을 하며, 누가 거짓말을 쓸데없이 풀풀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그러한 앞에 말한 4가지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설사 계를 받지 안 해도 산목숨을 죽이기를 다 싫어하고 또 이 도둑질하라고 해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사음도 역시 마찬가지고 거짓말도 누가 쓸데없이 거짓말 풀풀 하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술은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그걸 먹은 것이 별로 죄가 안 되리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은 이 술을 참 삼가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율은 형식적으로 지키는, 몸뚱이 형식적으로 지키는 계가 있고, 마음으로 지키는 계, 두 가지로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지키는 계’는 소승계(小乘戒)고, 대승계(大乘戒)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인 것입니다.

‘실지로 저 놈을 내가 죽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실지로 죽이지만 아니하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안됩니다. 그러나 대승계는 이미 마음속에 ‘그를 죽이리라’하고 마음먹었다 하면 이미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사음이나 그런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지로 도둑질을 안 하고 속으로 마음으로 ‘저걸 내가 기어코 훔치고야만 말리라’하고 마음을 먹었어도 기회가 안 닿던지, 중간에 마음이 ‘에이, 내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하고 안 했다면 그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마는 대승계는 이미 한 생각 도둑질할 마음을 냈을 때 대승계는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승계는 차라리 지키기가 쉬웁습니다. 허나 대승계는 '한 생각' 탁! 일어나면 이미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지키기가 어렵고 또 차원이 높은 계인 것입니다.


우리 하근기, 중근기, 말법(末法)에 우리 초학자(初學者)들에 있어서는 첫째 이 소승계, 몸뚱이로 지키는 계부터서 철저히 지키고 나아가서는 마음으로 지키는 대승계까지도 잘 지킬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승계와 소승계를 우리는 아울러서 잘 지키는 그러한 최상승(最上乘) 정법학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20분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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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말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그러한 소중한 것인데 이것을 파(破)하게 되면, 이것을 범(犯)하게 되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살생(殺生)을 범한 사람은 평생 동안 병치레를 하거나 또 오래오래 살지를 못하고 단명(短命)을 하거나 이렇게 되고.

또 도둑질을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평생 동안 가난뱅이가 되고 남의 것을 훔친 그 죄로 항상 가난뱅이 보(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돈을 빌려 줘도 갚지를 않게 되고, 무엇을 해도 재수가 없어서 사업도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사음(邪淫)을 한 사람은 사음을 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부정(不淨)한 남편, 부정한 아내와 짝지어지게 되어서 항상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고민을 하는 사람, 또 아내가 부정하다고 밤낮 가정에 불화(不和)가 일어나는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자기가 부정한 행실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바람피는 남편 꼴을 보게 되고 부정한 아내를 맞아서 속을 썩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생에 혹 그러한 일을 당하고 있거나 당하더라도 이것이 전부 전생에 자기가 지은 죄값으로 이런 일을 당한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을 하고 그것을 상대를 용서하고, 자기를 앞으로 그러한 일이 없도록 스스로 청정한 행을 갖도록 노력을 한다면 복잡했던 가정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다시 화목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술! 술을 많이 먹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옥에 가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여간해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렵게 어렵게 사람이 된다하더라도 돌대가리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지능지수가 50도 못되게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바보 천치로 태어나서 먹을 것 밖에는 모르고, 무엇이 좋고 하는 선악을 분별을 못하고, 본말(本末)을 가리지를 못하고, 사람은 분명히 사람인데 아주 바보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그렇게 폐인이 되지만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속에 몸담아 살면서 그렇지 않아도 살기가 어려운데, 이 5계를 받아 가지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다 보면 꼼짝을 못하겠다. 정말 자유 없는 그러한 참 구속된 부자유한 그런 생활을 살게 될 것이 아닌가. 에이, 차라리 받지를 말까?' 이런 망설임을 가지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만큼 어렵지만, 그것을 부처님의 법을 믿고 그것을 잘 지켜나감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비심이 넘쳐 흐르고, 복덕이 풍족하고,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그리고 진실하고, 그리고 지혜가 넘친다면, 우리는 금생에 인격을 완성을 하고, 어디를 가나 모든 사람의 신망을 받고 존경을 받고, 어디 가서 무슨 말을 한마디를 하고 뭣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나를 따라 주고,

그렇게 해서 내가 모든 사회에 등불이 되어주고, 나침반이 되어주고, 소금이 되어서 사회를 가는 곳마다 다 정화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된다면, 그것이 우리 불자가 부처님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참선을 열심히 해서 도를 닦은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율은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자진해서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그래.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지키겠습니다"


여러분은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키겠다고 맹세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향불로써 여러분의 팔에 연비(燃臂)를 받게 됩니다.

연비를 받는 뜻은 우리가 이 시간 이전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범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참회하고, 참회함으로써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그리고 새로 태어난, 새로 불자(佛子)로 태어나서 새사람이 되어서 살기를 맹세하는 뜻으로 연비를 받게 되겠습니다.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우리는 오계를 받고 연비를 하고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고 참회를 함으로써 우리의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봄눈 녹듯이 다 녹아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해졌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에 대해서는 여러분 이 시간을 기해서 다 깨끗해졌습니다.


그것을 다시는 생각해내지도 말고 그것을 돌아보지도 말고 오직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부처님 아들로 딸로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부처님 제자로서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서 그 오계(五戒)를 지키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기 위해서 닦아 가는 화두(話頭) 법문을 설하겠습니다. 불명(佛名)을 이제 타신 분이나, 또 화두를 타신 분이나, 오계를 받고자 하신 분도 다 같이 들으시면 좋습니다.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그런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을 하는 그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은 파르르르 성을 내는데 그 성낼 줄 아는 놈.

칭찬하면 기뻐하는데 그 기뻐할 줄 아는 놈.

다치면은 아픈데 그 아플 줄 아는 놈.

배가 고프면 배고픈, 밥먹을 줄 아는 놈.


한 생각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독사와 같은 마음이 나는데, 나찰귀(羅刹鬼)와 같고 독사와 같이 되는데, 또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 또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말이여.

찰나(刹那)간에 독사도 되기도 하고, 찰나간에 천사도 되기도 하는 그러한 그 신기하고도 묘하고 소소영령한 놈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있어.


그놈을 성이 날 때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


중생들은 뭐 하나가 기분이 나쁘면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생각에 생각을 더 펴 가지고 점점 속이 상해 나가고, 또 누가 미우면 조금 잘못한 점이 있으면 과거에 몇해 전에 있었던 일까지 이 생각 저 생각 기억을 더듬어 가지고 점점 그 사람을 미워하고 그러는 법이고.

도(道)를 닦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은 언짢은 일을 당하더라도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냉큼 ‘이뭣고?’ 이래 버리거든.

누가 미운 짓을 해도 냉큼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해 버리면, 구태여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고 때리고 속상하는 소리를 해 가지고 그 사람과 다툴 필요도 없는 것이여.


그래서 도를 안 닦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해서 점점 죄를 짓게 되고 웬수를 만들고 시끄럽게 만들고 남과 웬수를 맺게 되는 거고, 집안을 결국은 수라장(修羅場)으로 만드는 거고.

이 도를 닦는 사람은 여간해서 그런 환경에 휩쓸리지를 아니하고 냉큼 돌이켜서 ‘이뭣고?’를 하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어.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고 언제나 마음속은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또 귀빈을 맞이해서 사는 그런 마음, 항상 천당이나 극락(極樂)에서 사는 그런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를 젓고 갈 때에 노 젓는 사람이 노 젓기에 따라서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도 닦는 사람은 자기의 한 생각을 잘 조정함으로써 자꾸자꾸 승화되어 가고 도가 깊어지는 것이고, 도를 안 닦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눈을 보면 봄으로 해서 죄를 짓고, 뭣을 들으면 들음으로 해서 점점 번뇌(煩惱)의 불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한마디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그 팔만대장경판이 있는데 그놈을 목판에다 찍어 놓으면 수천 권이 되는데 그놈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어도 다 해석도 못하죠. 그러나 ‘이뭣고~?’ 한마디를 하면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거와 똑같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공덕이 다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할라면은 백일 동안을 계속 불러야 하는데, ‘이뭣고?’ 한번 하는데 1초도 안 걸립니다. 그만큼 ‘이뭣고?’는 공덕이 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 가지고, 그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한다' 그렇게 적혀 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거든.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이여, ‘이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20분31초~41분23초)




(3/3)----------------


우리 자신이 농사짓는 법을 잘 연구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농사를 짓는 법도 있지만, 이미 농사 잘 짓는 법 아는 사람과 같이 그 사람과 같이 농사를 짓고, 이미 다른 사람이 농사지어 논 놈을 갖다가 밥을 해서 딱! 놔주면 입에다 떠 넣어준 것입니다.


‘이뭣고?’하라고 가르켜 준 것은 밥을 여러분 입에다 떠 넣어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기만 하면 되는 거여.

입에다 이렇게 떠 넣어 주어도 뱉어 버리고 씹지도 않고 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 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할 때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는 거와 같애. 그래서 ‘이뭣고?’ 이것이 법(法)의 양식(糧食)입니다. 법의 양(糧)이여, 도(道)의 양식이거든.

그래서 이 법의 양식을 부지런히 먹고 잘 씹어서 삼키면 여러분은 도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심(心)’자, ‘농사 농(農)’자, 심농(心農)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수행하실 때에 들녘을 지나는데, 어느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이 부처님이 탁발(托鉢)을 하시니까, "밥을 못 주겠다"

"왜 못 주느냐?"


"우리는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가지고 이렇게 먹지만, 당신네들은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밤낮 서늘한 그늘 속에 앉아서 있다가 때만 되면 거저 밥을 얻어먹으러 오니 우리는 공밥 먹는 사람에게는 밥을 줄 수가 없다. 이 피땀 흘려서 농사지은 것을 어찌 당신들한테 줄 수가 있겠느냐"


부처님 말씀이 "당신만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나도 농사를 지었소. 당신보다도 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소"

"어찌 도를 닦는 사문(沙門)이 거짓말을 허요"


"아하, 거짓말이 아니요. 당신네들은 몸뚱이를 가지고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을 해탈케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 양식(糧食)으로는 먹어봤자 하루밖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의 농사는 금생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두고 배부르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 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보리심(菩提心)을 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농사는 ‘마음의 농사’야!


농사는 짓는 때가 있고 그 때를 타서 열심히 해야지, 씨만 심어 놓고 가꾸지를 안 하면 그 농사는 폐농(廢農)을 하게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때맞춰서 땅을 갈고, 모자리를 해서 그놈을 때맞춰서 심고, 그래 가지고 농약을 주고 비료를 주고 그래 가지고 그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걸 등한히 해 보십시오.

벌레가 다 먹어버리고 물을 맞춰서 주지 않으면 말라 죽거나 물에 너무 오랫동안 잠기면은 병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수확을 거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가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농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농사짓는 모자리의 씨를 심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어서 때맞춰서 잘 가꾸어 나가야지, 일시라도 등한히 해 버리면 벌레가 와서 침식을 하게 되고 말라 죽거나 떠 죽거나 그렇게 해서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道)도 잠시도 등한히 하면 그렇게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도를 이루지 못하도록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왜 우리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치냐’하면 도인(道人)이 생겨나면 자기네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흔들리게 되고 마구니가 소탕이 되어서 마구니 살 곳이 없기 때문에 마구니가 자기 설 땅을 지키고 자기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도 닦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를 항상 우리는 잘 대항해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심왕(心王) 국토를 잘 지켜나가야만 우리는 도를 성취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는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올라고 하는 그 찰나에—이미 들어와 버리면 쫓아내기가 어려워—들어올라고 할 때 딱! 그놈을 문을 닫아 걸어야 되거든.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날 때, 무엇이 눈을 통해서 들어올 때, 어떠한 사물이 귀를 통해서 들릴 때,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뚱이를 통해서 들어올 때에 바로 그 즉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 마구니가 우리의 국토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에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날의 자기가 아닌 딴 사람으로 성장 또 향상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해탈도를 향해서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세속에 다 직업이 있지만, 이 ‘이뭣고?’ 내가 나를 닦는, 나의 영혼을 갖다가 해탈케 하는 이 직업이 정말 우리의 본업(本業)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저 몸뚱이를 살찌게 하고 또 의식주를 위해서 다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까짓 것들이 우리의 영원한 영혼을 위하는 직업에다 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정이나 개인이나 사회 국가에 있어서 정말 충실하고자 하면 이 ‘이뭣고?’ 사업을 잘해야 그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정말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루어져 봤자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정말 우리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바칠 것은 오직 이것뿐인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

한번 앉아 보세요. 가부좌 또는 반가부좌.


가부좌를 할 때는 몸을 단정히 하되 너무 힘을 주어 가지고 뒤로 자지바지하거나 어깨에다 힘을 주거나 목에다 힘을 주어서는 아니됩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어금니는 지긋이 물고. 또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에다 꼬부려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은 평상으로 뜨되 자기 자리에서 약 3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는 것입니다.

'눈을 떨군다'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한 점을 응시(凝視)하거나 주시(注視)하는 것이 아니고, 본다면 그 점이 보이되 의식적으로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상으로 뜨되 뜨고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좌우나 전후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두 어깨 위에 두 귀가 따악 수직으로 놓이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몸을 단정히 한 다음에,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丹田), 배꼽 밑에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하고, 숨을 내쉴 때는 그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들어마신 호흡이 그까지 가도록 몰아부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숨은 코로 들어가지만 우리의 생각은 배가 볼록하게만 만들면 되어요. 그냥 배를 요렇게 내밀면 되어요.

들어마실 때는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배를 홀쪽하게 잡아당기면 되는 것입니다.


들어마셔 보세요. 배를 볼록하니 내밀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은 하나·둘·셋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숨을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를 등쪽으로 홀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하니 들어마셔.


그래서 들어마시는 시간은 약 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들어마셨다가 또 딱! 정지를 하는데 정지하는 시간이 약 3초, 또 정지했다 내쉬는 시간이 약 3~4초, 조금 긴 듯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 들어마실 때 너무 배가 가뜩 이렇게 들어마시면 안 되어요. 8부(80%) 정도만 들어마시고. 또 딱! 정지하는 것도 약 3초 정도만 해야지 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으면 그것도 안되고.

또 내쉴 때에도 약 8부 정도만 내쉬어야지, 뱃속에 하나도 없을 때까지 완전히 뱃가죽이 등어리가 닿을 때까지 다 내쉴려고 하면 그것도 힘이 들고 무리가 가니까 그래도 안 되고.


그래서 들어마신 호흡도 8부 정도 들어마시고, 내쉬는 호흡도 약 8부 정도 내쉬어서, 호흡을 하는데 조금도 무리가 안 가도록, 힘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마셨다가 3초 정지했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할 때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숨을 또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에 주욱 하셔 나가면 나중에는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보면 ‘이뭣고?’를 숨 내쉴 때마다 안 해도 괜찮게 되어요.

숨은 서너 번 할 때에—‘이뭣고?’ 한번 해 놓고서 숨은 서너 번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해도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참으로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뭣고?’ 한번 하고, 점심 때까지 ‘이뭣고?’는 들지 안 해도 항상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면은 그만 그것이 화두를 이미 들어...(녹음 불량)


‘이뭣고?’ 따악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챙겨 가지고 또 금방 또 망상에 들면 그때 또 ‘이뭣고?’

망상이 들어오지 않고 ‘이뭣고?’한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딱 있으면, 뭐 구태여 ‘이뭣고?’ ‘이뭣고?’ 자꾸 되풀이해서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은 하루에 십만 독(讀), 이십만 독 해서 횟수를 채우기 위해서 염주(念珠)를 부지런히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데 ‘이뭣고?’는 그게 아니어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부른 것이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 공덕에 해당이 된다 그러니까, '이놈을 하루에 오만 독을 하면은 육백만에다 오만을 곱하면 얼마냐? 진짜 이렇게만 하면은 며칠 안 가서 툭 터질 거다!'


절대로 ‘이뭣고?’는 횟수가 문제가 아니고 그 간절(懇切)한 간절한 그 의심, 의심(疑心)이 나중에는 의단(疑團)이에요.


한번 화두를 들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 뭉탱이'가 고대로 있어 가지고 무엇을 봐도 그 의단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무엇을 들어도 흔들림이 없이, 알 수 없는 의단이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차를 타거나, 누가 옆에서 나한테 욕을 하거나 억울한 소리를 해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화두만이 떠억 드러나게 된다면 그게 공부가 자리가 잡혀가는 거여. 익숙해지는 거여.


그렇게 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새벽까지, 잠을 자면 꿈에서도 그 의단이 없어지지 않고, 새벽에 눈을 떠도 엊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게 된다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는 건데, 그 공부가 아주 익숙하게 되어서 그렇게 되어야 머지않아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열심히 해야 그런 타성일편 지경이 오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아니하고 하다 말다가 그저 그래 놓고서, ‘아이고, 참선해봤자 되지도 않고 우리는 근기(根機)가 얕아서 염불이나 해야지, 참선은 좋은 줄을 알지마는 죄 많은 중생이라 못한다’고. 이런 자포자기를 하신 분이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해서, 발심(發心)하고 분심(憤心)을 가지고 의심(疑心)을 내서,

대신심과 대분심—‘어째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선지식은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해탈도를 증득했는데 나는 왜, 같은 사람으로서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했는가' 속에서 분한 생각이 나고 그래 가지고 도를 아니 닦을라야 아니 닦을 수 없는 그런 분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의단. 대의심,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하는 그 간절한 의심.

이 3가지 요소가 동시에 일어날 때에 우리는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는 것입니다. 계를 지킬라고 안 해도 저절로 계가 지켜지는 것이고, 참선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는 그 가운데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오계를 받고 또 화두를 타고 또 불명(佛名)을 받게 되겠습니다. 앞으로 스님네가 부르는대로 차례차례 나오셔서 이 불명을 받아 타셔서, 자기의 불명이 무엇인가를 잘 아셔야 합니다.

속에 이와 똑같이 생긴 계문(戒文)이 들어 있고 거기에 여러분의 불명이 쓰여 있습니다. 한문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받은 봉투에는 한글로 쓰여 있으니까 자기의 불명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아시고.


가정에서도 내외간에 서로 불명을 부르시면 더욱 좋고, 형제자매 간에도 불명을 부르고, ‘아무개 엄마, 아무개 엄마’하지 말고 ‘아무개 보살’ 이렇게 해서 불명을 서로 부르면 불명을 부른 사람도 공덕이 되고, 부름을 받는 사람도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피차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불명 한번 부를 때마다 ‘이뭣고?’를 하는 데에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되는 것이니만큼, 불명을 잘 스스로 잊지 말고 남의 불명도 잘 알아서 서로서로 불러주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또 부처님의 아들로서 도반으로서 좋은 인연이 깊어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41분24초~60분3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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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내용]


오계(五戒) / 계 · 정 · 혜(戒定慧), 삼학(三學) / 불법의 목적 :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 /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 / 연비(燃臂)와 참회.


화두 게문 : 示[佛名] 有一物於此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是甚麼 / ‘이뭣고?’ 효과와 공덕 / 팔만대장경은 노정기(路程記) / 법(法)의 양식(糧食), 심농(心農) / 법의 기쁨.


참선은 우리의 본업(本業), 그 밖에 모든 것은 부업 / 참선 자세, 단전호흡 / 신심 분심 의심을 동시에 발해야 / 가족 간에 서로서로 불명을 불러주면 공덕이 된다.



삼학은 계·정·혜(戒·定·慧) 이것을 삼학(三學)이라 그러고, 탐진치를 삼독(三毒)이라 그러는데, 삼독을 돌이켜서 바꾸어 가지고 삼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항상 셋이 같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戒)만 있고 정(定)이 없어서는 혜가 이룰 수가 없고, 혜(慧)만을 바라면서 선정을 닦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하고자 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올바른 부처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지혜를 얻어서 영원한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자 하거든, 맨 먼저 부처님의 계를 잘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지키는 계’는 소승계(小乘戒)고, 대승계(大乘戒)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인 것입니다. ‘실지로 저 놈을 내가 죽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실지로 죽이지만 아니하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안됩니다. 그러나 대승계는 이미 마음속에 ‘그를 죽이리라’하고 마음먹었다 하면 이미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향불로써 여러분의 팔에 연비(燃臂)를 받게 됩니다. 연비를 받는 뜻은 우리가 이 시간 이전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범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참회하고, 참회함으로써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뜻.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그런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


‘이뭣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번하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 만번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이뭣고?’는 ‘이뭣고?’할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되는 것이여.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면은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 가지고, 그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한다' 그렇게 적혀 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런 것을 다 알아 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거든.


밤낮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 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 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이여, ‘이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어 먹으면은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 가지고 농사짓는 법만 연구해 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


당신네들은 몸뚱이를 가지고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을 해탈케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 양식(糧食)으로는 먹어봤자 하루밖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의 농사는 금생 뿐만이 아니라 영원을 두고 배부르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 밖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의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르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케하는 해탈도를 증득하는 마음의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뭣고?’는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의 기쁨'이 있어. 해 본 사람만이 느낄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하는 학자는 이 참선을 갖다가 본업으로 알고, 그 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내외간에 서로 불명을 부르시면 더욱 좋고, 형제자매 간에도 불명을 부르고, ‘아무개 엄마, 아무개 엄마’하지 말고 ‘아무개 보살’ 이렇게 해서 불명을 서로 부르면 불명을 부른 사람도 공덕이 되고, 부름을 받는 사람도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피차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불명 한번 부를 때마다 ‘이뭣고?’를 하는 데에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되는 것이니만큼, 불명을 잘 스스로 잊지 말고 남의 불명도 잘 알아서 서로서로 불러주게 된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또 부처님의 아들로서 도반으로서 좋은 인연이 깊어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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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01~125)2020. 9. 26. 16:46

 

 

(No.115)—1979년 12월 관음재일 법어(79.12.24.음) (59분)

(1/3) 약 22분. (2/3) 약 20분. (3/3) 약 17분.

(1/3)----------------

 

상월만공산(霜月滿空山)한데  고안여천비(孤雁唳天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비즉향하수(鼻直向下垂)한데  안횡재상방(眼橫在上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상월(霜月)이 만공산(滿空山)한데  고안(孤雁)이 여천비(唳天飛)라.

서릿달이 빈산에 가득한데, 서리 친 밤에 밝은 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한데, 외로운 기러기는 하늘에 울며 나르는구나.

 

비즉향하수(鼻直向下垂)하고, 사람 얼굴에 있는 코는 세로, 바로 박혀 가지고 아래를 향해서 드리워져 있는데, 안횡재상방(眼橫在上方)이다. 두 눈은 옆으로 가로 위에 붙어 있구나.

 

고인(古人) 언구에 ‘안횡비즉(眼橫鼻直)’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 ‘눈은 가로 박혔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미년 섣달 스무나흗 날, 기미년 마지막 관음재일(觀音齋日)입니다.

1년이 365일인데 엄벙덤벙하다가 한 달, 두 달이 지나가고 그래가지고 열두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 결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1년을 잠깐 살펴보건대 국내외적으로 무척 복잡하고 다단한 그러한 해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그리고 석유 값이 오르는 바람에 온갖 물가가 다 뛰어오르고, 국제적으로도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들이 연거푸 일어나서 그러한 영향이 결국은 또 우리나라에도 미쳐 오고. 우리 불교 종단도 분열이 되어 가지고 아직도 이렇다 할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또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우리 종단적으로 이렇게 파란만장하고 복잡다단한 이러할 때에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법보제자는 어떻게 행동을 하며, 어떻게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가?

다른 때보다도 몇 배 정신을 차려서 신심을 더욱 돈독히 하고 우리의 수행을 더욱 채찍질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주변이 어수선하고 복잡하다고 해서 나 자신까지 거기에 휩쓸려 가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렁저렁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신심 있는 정법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변이 복잡하고 여러 가지 조건이 좋지 못할 때, 그럴 때에 바짝 정신을 차려서 자기의 가야 할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정법을 믿고 불법을 믿는 불자(佛子)로서만이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가정도 이러한 어려운 때를 만나서 여러 가지가 참 물심양면으로 어려운 점이 많으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우리 정법을 믿는 여러분은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서 신심을 돈독히 해서 안으로는 착실히 수행을 다져 나가고, 밖으로는 그 수행력을 발휘해서 어른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이끌면서 인화(人和) 단결해 나간다면 시일이 지난 뒤에 오히려 그런 어려운 고비를 잘 극복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보다 더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경일난장일지(經一難長一智)다. 한 어려움을 겪으면 한 지혜가 길어난다, 성장이 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요  사난방견장부지(事難方見丈夫志)니라

나무~아미타불~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라. 눈 내린 뒤에야사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가 있고.

사난방견장부지(事難方見丈夫志)라. 일이 난관(難關)에 다달라 봐야 바야흐로 장부(丈夫)에 인격을 볼 수가 있다.

 

눈과 서리가 내리기 전에는 소나무나 잣나무나 보통 다른 모든 초목이 모두가 다 푸르러서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서리와 눈이 내린 뒤에야사 모든 나무와 풀은 단풍이 들고 다 시들어서 떨어져 버리는데 오직 송백(松柏)만이 그 푸르름을 더욱 자랑하는 거와 같이,

보통 일이 없을 때는 김 가나, 박 가나 모두가 다 마찬가지 남자들로 보통 다 똑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정말 난관을 만나서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에 비로소 장부의 인격을 알아볼 수가 있다 이런 말입니다.

 

세상이 살기 좋고 아무 일 없을 때는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수행을 열심히 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별것이 없습니다. 다 너도나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일신상으로 물심양면에 어려운 고비를 만나 봐야만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만큼 철저한 신심을 가진 사람이었던가? 얼마만큼 골똘하게 참되게 수행을 한 사람이었던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굳이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지혜롭게 그리고 씩씩하게 참을성 있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두려워하고, 자기가 어피차 가야 할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굳이 구태여 피할려고만 한다고 해서 자기 앞에 주어진 숙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더욱 신심을 돈독히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신심으로 그러한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착실히 밟아서 극복해 나간다면 그 어려운 일은 나에게 좋은 채찍이 되어줄 것이며, 불보살(佛菩薩)에 법문이 되어줄 것이며, 우리가 도업(道業)이 성장해 나가는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입니다.

 

지나간 1년을 오늘 댁에 가시면 고요히 반성을 해 보시고 잘못된 점은 잘못된 대로 그것을 반성을 해 가지고 새해에는 그러한 점을 더욱 보완해서 나아갈 것이며, 잘된 점은 더욱 채찍을 가해서 더욱 정진을 하셔야 할 줄 생각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첫째, 우리의 중생심, 번뇌 망상심—별념(別念)이라고 조실 스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의 범부(凡夫) 중생의 마음은 마치 바다 위에 파도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높은 파도가 일다 작은 파도가 일다가 언제나 고요한 때가 없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잠시도 가만히 있는 시간이 없이 천사량(千思量) 만사상(萬思想)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잠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번지다가 결국은 그 생각이 꺼지고, 꺼지자마자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른 생각으로 변해가지고 또 꺼지고.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많은 겁(劫) 동안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금생도 역시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습니다.

 

바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양상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맛 그 생각의 내용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주이멸(生住異滅)—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렀다가 딴 생각으로 바뀌어져 가지고 그 생각이 꺼지는, 그 생주이멸의 양상에는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무심 속에, 무의식 속에 그러한 생주이멸의 우리의 정신작용이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천당으로도 가게 하고, 지옥으로도 가게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게 하고, 아귀로도 되게 하는 원인이 될 줄이야! 그것을 철저히 인식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정신작용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한다고 하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이해한다고 하면은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아니 단 1분 동안도 무심코 생각 일어난 데에다 맡겨 버리고 세월을 보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참선한다 또는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하면 어떠한 장소가 꼭 필요하고, 어떤 시간이 꼭 필요하고, 특별한 그러한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물론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 공부하기에 편리한 여건을 갖춘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한 좋은 조건만을 기다려 가지고 공부를 할려고 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금생에 공부 잘하기는 썩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을 가진 사람은 가정의 일이 있고, 사회에 직장을 가진 사람은 그 직장의 일이 있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자식으로서 며느리로서 각기 한 몸에 여러 가지의 해야 할 일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도저히 우리가 피할라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의 책임을 완수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제쳐놓고 공부를 좀 잘해 볼까?' 이것은 조금 무리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일을 제쳐놓고 할려고 하는 기회를 계속 엿보면서 하루하루를 그렁저렁 지내기보다는,

그러한 일하는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관조(觀照)해 간다면 오히려 그 일도 괴로운 줄 모르고 재미스럽게 그 일을 보람 있게 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의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좋은 환경이 되어 주고, 오히려 그러한 복잡한 일 때문에 더욱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고,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좋은 채찍이 되겄게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행이 가정에 모든 사정이 허락이 되어서 이런 선원(禪院)에 오셔서 만사를 제쳐놓고 공부하실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가지셨다면 그것은 전생에부터서 많은 복을 쌓으신 분이고 또 금생에도 대단히 정법을 믿는 마음이 돈독하고 나아가서는 용기가 있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 와서 공부하신 분이라고 해서 가정에 꼭 일이 없어서만 오신 것이 아니고, 그만큼 머리를 쓰고 용기와 지혜로써 일을 처리함으로써 와서 공부하실 수 있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에 일이 도저히 자기 몸이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분이라 할지라도 가정에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일을 하는 그 속에서—일 하면서도 계속 우리는 무슨 생각이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니까,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분은 벌써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것입니다.

 

무슨 병이 났건, 바보 천치가 되었건, 넋이 나가서 전혀 생각이 일어나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고 속이 상할 일도 없고 슬플 일도 없고 목석처럼 되어 버린 사람이 있다면,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은 ‘아! 그런 사람은 공부하기가 대단히 편리하겠다’ 혹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공부할 자격을 이미 상실한 사람입니다.

욕을 하면 성낼 줄 알고, 바가지도 긁을 줄 알고, 속도 상할 줄 알고, 고민도 할 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러한 생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처음~21분44초)

 

 

 

(2/3)----------------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일어나는 그 생각 그 찰나를 탁!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않고 딴생각만 자꾸 일어납니다”

‘딴생각 일어난다’고 생각한 그 생각을 가지고 바로 ‘이뭣고?’를 하실 일입니다.

 

‘이뭣고?’는 아무 뜻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파고들어 봤자 거기에서 어떤 재미있는 뜻이 전개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맛없는 하나의 말이기 때문에 아무리 되씹어 봤자 여기에서는 별맛이 없습니다.

 

(별맛이) 없지만, 자꾸 돌이켜서 관조하고, 돌이켜서 관조하고 해 나가면—처음에는 ‘이뭣고~?’해도 그 속에 벌써 지나간 생각이 떠오르고, 닥쳐올 일이 떠오르고, 이 생각 저 생각이 뿌리도 없이 퍼일어납니다.

그렇지만 그 퍼일어나는 생각을 귀찮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것을 억누를려고 생각하지도 말고, 다못 거기서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고?’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딴생각이 일어납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을 없앨라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이렇게 다구쳐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야무지게 단속해 나가면, 한 달 두 달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들려고 애를 써도 깜빡하면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화두는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화두는 입으로는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딴생각이 바글바글바글 하고 그러던 것이, 애를 쓰고 또 애를 쓰다가 보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이뭣고~?’한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가슴속이라고 할까, 눈앞이라고 할까, 알 수 없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거든.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똥을 눌 때도 알 수 없는 생각, 걸어갈 때도 알 수 없는 생각, 시장에를 가도 알 수 없는 생각,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다 보면은 알 수 없는 그 생각 때문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버리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그런 상태에 이르러도 조금도 ‘아! 내가 공부가 잘되나 보다, 아! 인자 얼마 안 가면 내가 힘을 얻을려나 보다’ 그런 생각마저도 하지를 말고 계속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중 모르게 지나가고, 그렇게 그전에는 발과 무릎이 그렇게 저리고 했던 것이 저린 것도 없어져 버리고, 몸이 괴로운 것도 없어져 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싱그러울 정도로 정신이 깨끗한 상태에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수행하는 사람은 ‘아! 참 좋다. 이러한 상태로 계속 나갔으면, 영원히 이런 상태에 있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흔아홉 길까지 올라가 가지고 마지막 한 길을 남겨 놓고 천길만길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그 장면인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여일(如一)하게 잘 들리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맑다 하더라도 조끔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수행하는 사람 앞에는 팔만사천 마구니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와서 탁! 엿을 보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코를 통해서, 입을 통해서, 몸을 통해서, 우리의 뜻을 통해서, 그 여섯 문밖에서 기회만 있으면 들어와 가지고 우리의 심왕(心王), 마음의 왕을 갖다가 낚아채 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 딴생각 먹으면 그때 이미 마왕(魔王)의 올개미에 걸리는 것입니다. ‘아! 좋다. 기쁘다’ 이런 생각내면 벌써 마왕의 올개미에 걸려 들어갈려고 하는 그 찰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잘된다고 기뻐하는 생각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내서도 아니됩니다. 짜증을 내도 올개미, 기뻐하는 생각을 내도 올개미인 것입니다.

 

화두가 여일하게 들리고 잘 되어갈 때, 그때 조금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아침부터 점심까지, 점심부터 저녁까지, 저녁에도 잠이 들 때까지 계속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녁에 이부자리에 들어가서도 계속 화두를 들면서 언제 잠이든 중 모르게 잠이 드는 것입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눈을 딱! 뜨면 화두를 새로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저절로 따악 들어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뻐하는 마음을 내며, 어서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무엇이냐 그말이여.

 

 

홀득자가저(忽得自家底)하니, 문득 자기집, 자가저(自家底) 자기집을 얻으니,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라. 모든 것이 다못 이것일래라.

 

육근문두(六根門頭)에—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문두(六根門頭)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면목(本面目)을 깨닫게 되면 육근문두에 어리대고 있던 팔만사천 마구니가 마구니가 아니라 전부가 자기의 종이요, 자기의 식구요, 자기의 살림인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의 위대한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미(迷)하면 팔만사천 마구니였던 것이 ‘한 생각’ 돌이켜 깨달으면 팔만사천 묘법(妙法)이 되는 것이고, 팔만사천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 번뇌망상 하지만 한 생각 깨달으면 그 번뇌망상이 전부가 다 보리심(菩提心)이 되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르는.... ‘이뭣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성이 날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은 너무 우리와 가까운 거여. 너무 쉬운 것이며 너무 가까운 것이여.

 

 

경(經), 팔만사천경(八萬四千經)이 한량없이 많고 어렵지마는 그것을 다 읽으려고 해봤자 죽을 때까지 십분의 일도, 백분의 일도 다 읽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책으로 된 경만이 부처님의 법문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 산이나 나무나 돌이나 구름이나 새나,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 입으로 맛볼 수 있는 모든 시고 짜고 달고 하는 모든 맛,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모든 물건, 우리의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이 전부가 다 화엄경(華嚴經)인 것입니다. 부처님에 최고의 설법이요 경전인 것입니다.

 

이 진짜 경(經)을 읽는 것이 바로 이 참선(參禪)입니다.

 

종이에 씌여져 있는 경은 팔만사천경이라 합니다마는 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읽을 수 있는 경에다가 비교하면 억만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경책(經冊)을 한 장도—이 종이로 된 경을 한 장도 읽지도 아니하고서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부처님의 ‘참 경’을 다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뭣고?’ 한 생각 돌이킬 때에, ‘이뭣고?’ 한 번 할 때, 우주에 가득차 있는 경을 한번 읽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자신 있게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번 할 때에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 한 공덕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한 번 다 읽은 공덕이 있다」

이렇게 고조사(古祖師)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이 말씀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뼛골에 사무치도록 감사하고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서 보증을 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우리의 일심(一心)으로부터 전부가 다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생각을 돌이킨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을 통해서 너무나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물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물에게는 너무나도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은 자기의 자성을 지키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고정된 어떠한 모습을 가질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영하의 추운 기온을 만나면 얼음이 되기도 하고, 그것이 또 기온에 따라서 증기가 되어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면 구름이 되기도 하고, 그 구름이 다시 차운 공기를 만나면 엉켜서 빗방울이 되기도 합니다.

공기에 떠 있는 수증기가 차운 공기를 만나면 우박이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합니다. 눈이 되었다, 물이 되었다, 증기가 되었다, 얼음이 되었다, 여러 가지 모양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변해 갑니다.

 

그런데 얼음이 되었건, 물이 되었건, 눈이 되었건, 수증기가 되었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라도 변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물에 습성(濕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습성(濕性), 젖은 성질, 습성, 출렁거리는 물도 젖은 성품은 가지고 있고, 꽁꽁 어는 얼음이 되었을 때에도 젖은 성품은 가지고 있고, 휘날리는 눈이 되었다 할지라도 습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수증기일 때도 역시 습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온과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도 마침내 변하지 아니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도 때에 따라서 기뻐할 줄도 알고, 때에 따라서 슬퍼할 줄도 알고, 때에 따라서 성낼 줄도 알고, 때에 따라서 즐거워할 줄도 압니다. 그렇게 별별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우리는 생각을 발휘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낼 때도 진여불성은 그 속에 있는 것이며, 슬퍼할 때에도 진여불성은 그 속에 있는 거여. 괴로워할 때에도 진여불성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성내는 생각, 괴로운 생각, 슬퍼하는 생각, 기뻐하는 생각들이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들인 것입니다.

얼음이나 물이나 수증기나 어떠한 모양으로 되어 있건 그 속에 습성은 있는 것처럼 중생의 팔만사천 가지 온갖 생각들 속에도 진여불성은 있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서 그런 것들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망상, 중생의 온갖 괴로움과 슬픔과 기쁨, 그러한 생각 생각들을 한 생각도 방치하지 말고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불성을—뱃속에 똥과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어 갖고 있는 채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성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났다, 여자의 몸을 받아 났다’ 그런 것이 전혀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에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또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근기(根機)를 하열(下劣)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또는 정법(正法)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보다도 십 배, 백 배 더 노력을 해야겠다고 하는 이러한 강인한 결심을 다질지언정,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참선을 해봤자 안된다더라.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아무리 해봤자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못하고, 어쨌던지 인연이나 맺고 하는 척이라도 해야 나중에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할 때 구제 받는다더라’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불쌍한 생각을 우리는 가져서는 안되겠습니다.(21분45초~41분22초)

 

 

 

(3/3)----------------

 

금년 기미년(己未年)은 앞으로 일주일이면 끝납니다. 이름을 붙여서 기미년입니다.

기미년이 되었건, 경신년(庚申年)이 되었건, 해는 동쪽에서 떠 가지고 서쪽으로 집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나 가지고 기미년 365일이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경신년이 되어도 역시 해는 동쪽에서 떠 가지고 또 서쪽으로 지나갑니다. 꼬박꼬박 하루에 24시간씩이 지나가면 또 그 다음날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경신년 1년이 또 그렇게 지나갈 것입니다. 경신년이 지나면 신유년(辛酉年)이 또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금생에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 나 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왔고 금년부터서 또 내년, 내후년(來後年) 해서 우리는 금생에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또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갈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불보살(佛菩薩)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해 가지고 스스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하루하루를 지내 가지고 금년까지 왔습니다. 아직도 이 정법을 믿는 신심(信心)이 철저하지 못해 가지고 또 내년에 또 내명년(來明年)으로 간다면 우리는 금생 일생도 또한 이렇다한 진취가 없이 일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내생에 다시 또 사람 몸을 받느냐? 축생이 되느냐? 지옥을 가느냐? 천당을 가느냐? 아무도 보장한 사람이 없습니다.

 

보장한 사람이 없습니다마는 저는 여러분이 정법을 믿고 이렇게 법회에 참석해서 한 말씀이라도 듣고서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려는 그 신심 그것만으로 내생에 또다시 불회상(佛會上)에서 만날 것을 축원(祝願)하고 또 간절히 축원을 합니다마는,

여러분이 과거에 어떻게 닦아 왔으며, 금생 일년 동안을 정말 어떻게 닦았느냐에 따라서 내생에 분명 우리가 다같이 한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게 될 것인가? 여러분 자신들이 정말 깊이깊이 반성을 해보실 필요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이뭣고?’

 

그럭저럭 하루를 지나면 그것이 쌓이면 한 달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 1년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밥도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고, 몸도 씻어야 하고 또 일도 해야 하고, 누구하고 얘기도 해야 하고, 어디 외출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일 하다가 그럭저럭 방치를 하고 하루를 하는 일 없이 지낸다면 나의 생사 문제는 내 대신 아무도 해결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 일이 바뻐서 못한다’ 이런 핑계를 대신 분은 혹 없으십니까? 그러한 핑계가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가서는 듣지를 않습니다.

절에 와서는 “바뻐서 못 왔습니다. 바뻐서 참선을 잘 못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해도 “아! 그러셨느냐”고, 이렇게 내가 인사로 받기는 합니다. 그러나 염라대왕 앞에 가서는 그런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일은 자기가 과거에 지어 놓은 빚—자기가 과거에 지은 원에 의해서 그러한 숙제를 금생에 가뜩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인간으로서의 숙제 문제고, 영원한 자기의 마음, 자기의 영혼에 숙제는 그러한 일에 핑계 대 가지고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사바세계, 이 말세(末世)라고는 하지마는 천상(天上)보다도 더 공부하기에 좋고, 육도(六途)의 어느 세계보다도 가장 공부하기에 적당하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세입니다.

 

정법을 믿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사바세계가 온통 불구덩이고, 고해(苦海)이고, 그렇게 여겨지겠지만 정법을 믿는 사람은 차라리 천당보다도 더 좋고, 지옥보다 더 좋은 것은 설명할 여지가 없겠습니다.

 

어째서 천당보다 더 좋으냐?

천당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가 내 마음대로 되고, 하나도 내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이 모든 일이 즐겁고 편안하고 좋기만 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좋으면 참 공부하기는 대단히 좋겠구나.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입고, 마음껏 즐기면서 하나도 공부에 방해될 것이 없으니 누워서 떡 먹듯이 공부가 잘될 것이 아니냐’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거기는 너무 좋기만 하고, 너무 내 뜻에 맞는 일만이 있기 때문에 발심(發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역경계(逆境界)를 만나야만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역경계를 만나야만 정신을 차리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을 내고, 각오를 새롭게 해서 다시 새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천당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의 충격적인 일은 없고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좋기만 하니 발심할 필요도 없고, 도를 닦을 필요도 없고, 거기에는 오직 즐거움과 편안함과 안일(安逸)만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이라도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또한 무방하겠으나 자기가 복(福)을 지은 만큼 다 받아 버리면 다시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통장에 예금을 많이 해 놓은 사람이 당분간 돈을 벌지 않고 그놈만 곶감 빼먹듯이 인출을 해다가 잘 먹고 잘 입고 쓰는 동안에는 좋지만 아무리 많은 액수를 예금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쓰기에 따라서는 금방 바닥이 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어떤 복을 지어서 천당에 간다 하더라도 천당의 복을 누릴 만큼 다 누리면 결국은 바닥이 나서 지옥이나 축생이나 인간에 다시 되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 없는 진리,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우리는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자유(大自由)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전히 일어나는 생각을 그때 그때 단속함으로써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바로 정법이요 불법인 것입니다. ‘이뭣고?’

 

 

삿된 말, 마구니의 말은 즐겨 받아 듣고, 성인의 가르침과 이 정법의 말을 하면은 짐짓 들을려고 하지를 않는다.

 

‘어디를 가면 병이 낳는다. 어디를 가서 기도를 하면은 재수가 대통한다. 어디가서 무슨 부적을 사 가지고 하면은 삼재가 면한다’ 이러한 삿된 소리는 대번에 귀를 기울이고 솔깃하고 무슨 거짓말, 핑계를 대 가지고라도 빠져나가 가지고 거기는 잘들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참선법, 정법을 설하는 법회에는 핑계가 굉장히 많습니다. ‘무슨 날이라 못 오고, 어째서 못 오고, 어째서 못 오고’ 이것은 웃을 일도 아니고.

 

예수교에서는 일요일마다 가게문을 닫고 전부 다 교회를 가고, 그 중간에도 무슨 설교가 있다 또는 부흥회가 있다 하면은 밤이고 새벽이고 노상 아주 제백사(除百事)하고 온 가족이 참여를 합니다.

거기에 비교하면 불교를 믿는 신자들은 겨우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없는 법회인데 너무 핑계가 많고, 그 핑계가 결국은 자기 수행하는 데에까지 핑계를 대서 그 아까운 시간이 하루하루 무료하게 지나감으로써 또 한 해를 넘기게 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도 이렇다한 투철한 결의와 각오가 없이 맞이했다 또 보내고, 맞이했다 보내고 해서 세월만 흘러갑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지 벌써 6년째 접어들었습니다. 법회 때마다 조실 스님의 간곡한 법문을 듣고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많은 감명을 받고 신심이 돈독해져 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해에는 그러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보다 더 혁명적인 정신, 정신에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각오로 일 년을, 새해를 맞이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앞으로 해제(解制)도 한 20여 일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해제가 있을 수 없지만 우리는 편의상 정월 보름날을 해제날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20여 일 간을 여태까지 결제 동안에 지나온 그러한 정도에 그치지 말고, 보다 더 알뜰하게 한 시간 한 시간,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결제 중에 보살님네 선방에서 크고 작은 일들, 어린이와 같은 철이 안 든 일들, 철철이 같은 내용의 비슷한 일들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과 같은 그러한 사건들이 한 건, 두 건 이렇게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보다 더 공부를 잘할 수 있게는 못할지언정,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 공부에 지장(支障)이 있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이라면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과거에 불보살은 어느 손바닥 만한 땅도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수많은 몸을 중생을 위해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성현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그 뜻을 받들어 행한다고 하는 불자(佛子)로서 어찌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보다 더 채찍을 가하고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만약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 간곡한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내생에 지옥에 떨어져서 ‘그때 그 말을 내가 어째서 깊이 듣고 실천을 안했던가’ 아무리 후회를 하고 한탄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41분23초~58분54초)(끝)

 

 

 

[법문 내용]

 

(게송)상월만공산~ / 경일난장일지(經一難長一智) / (게송)설후시지송백조~ / 어려운 일 속에서도 신심으로 공부해 나가야 / 화두 의심 외에 잠깐 딴생각 먹으면 그때 마왕(魔王)의 올가미에 걸리는 것 / 忽得自家底 頭頭只此爾 /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은 너무 우리와 가까운 거여. 너무 쉬운 것이다

 

팔만대장경과 참선 / ‘이뭣고?’ 한번 하는 공덕은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공덕이 있다 / 물의 습성(濕性), 중생의 온갖 생각 속에 진여불성 /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하근기이니까 더 노력을 해야.

 

하루하루가 쌓여 무량겁 / 나의 생사 문제는 내 대신 아무도 해결해 주지를 않습니다 / 염라대왕 앞에서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핑계를 말고 투철한 각오로 수행해야 / 공부하기에 이 사바세계가 적당, 복진타락(福盡墮落) / 다른 사람 공부에 지장을 준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경일난장일지(經一難長一智)다. 한 어려움을 겪으면 한 지혜가 길어난다, 성장이 된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더욱 신심을 돈독히 해서 화두를 들고 신심으로 그러한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착실히 밟아서 극복해 나간다면 그 어려운 일은 나에게 좋은 채찍이 되어줄 것이며, 불보살의 법문이 되어줄 것이며, 우리가 도업(道業)이 성장해 나가는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정신작용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아니 단 1분 동안도 무심코 생각 일어난 데에다 맡겨 버리고 세월을 보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욕을 하면 성낼 줄 알고, 바가지도 긁을 줄 알고, 속도 상할 줄 알고, 고민도 할 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러한 생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면 누구라도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일어나는 그 생각 그 찰나를 탁!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않고 딴생각만 자꾸 일어납니다” ‘딴생각 일어난다’고 생각한 그 생각을 가지고 바로 ‘이뭣고?’를 하실 일입니다.

 

‘한 생각’ 미(迷)하면 팔만사천 마구니였던 것이 ‘한 생각’ 돌이켜 깨달으면 팔만사천 묘법(妙法)이 되는 것이고, 팔만사천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 번뇌망상 하지만 한 생각 깨달으면 번뇌망상이 전부가 다 보리심(菩提心)이 되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책으로 된 경만이 부처님의 법문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 산이나 나무나 돌이나 구름이나 새나,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 입으로 맛볼 수 있는 모든 시고 짜고 달고 하는 모든 맛,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모든 물건, 우리의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이 전부가 다 화엄경(華嚴經)인 것입니다. 부처님에 최고의 설법이요 경전인 것입니다. 이 진짜 경(經)을 읽는 것이 바로 이 참선(參禪)입니다.

 

「‘이뭣고?’ 한번 할 때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 한 공덕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공덕이 있다」 이렇게 고조사(古祖師) 스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이 말씀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뼛골에 사무치도록 감사하고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서 보증을 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우리의 일심(一心)으로부터 전부가 다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생각을 돌이킨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망상, 중생의 온갖 괴로움과 슬픔과 기쁨, 그러한 생각 생각들을 한 생각도 방치하지 말고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우리는 한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불성을—뱃속에 똥과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어 갖고 있는 채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성인 것입니다.

 

절에 와서는 “바뻐서 못 왔습니다. 바뻐서 참선을 잘 못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해도 “아! 그러셨느냐”고, 이렇게 내가 인사로 받기는 합니다. 그러나 염라대왕 앞에 가서는 그런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 없는 진리,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우리는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자유(大自由)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전히 일어나는 생각을 그때 그때 단속함으로써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바로 정법이요 불법인 것입니다.

 

과거에 불보살은 어느 손바닥 만한 땅도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수많은 몸을 중생을 위해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성현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그 뜻을 받들어 행한다고 하는 불자로서 어찌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20. 9. 23. 07:57

 

 

((No.178))—1982년(임술년) 하안거 해제(82.08.04) (52분)

(1/3) 약 20분. (2/3) 약 18분. (3/3) 약 14분.

(1/3)----------------

 

작야강남우(昨夜江南雨)에  동정추수심(洞庭秋水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엽고주객(一葉孤舟客)이  월중천리심(月中千里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작야강남우(昨夜江南雨)에, 어젯밤 강남 비에,

동정추수심(洞庭秋水深)이로구나. 동정(洞庭)에 가을 물이 깊구나.

 

일엽고주객(一葉孤舟客)이 월중천리심(月中千里心)이라.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가는 손[客]이 달 가운데에 천리(千里)의 마음이더라.

 

 

오늘은 임술년 여름 안거 해제일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회향(廻向)날이기도 합니다.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해제를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금년은 4월에 윤달이 들어서 그래서 6월 15일에 해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여름 결제를 한 비구 · 비구니 수행 납자(衲子)들이 망월사 또 도봉산에 원효사, 의정부 회룡사, 저 전라도 맨 끄터리 강진 만덕산 백련사, 또 부산에서는 대성암 이런 모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하다가 해제를 맞이해서 이렇게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도 각기 자기 인연 따라서 여기저기에서 정진을 하고서 오늘 해제일에 몇십 리, 몇백 리를 걸어서 부처님 회상(會上)에 모여 가지고 자자(自恣)라 해서 빙 둘러서 앉아 가지고 자자의 의식을 거행을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물을 자(恣)자, '자자(自恣)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묻느냐?’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던가?’하고 각자 자기의 허물을 대중에게 물어 가지고, 자진해서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직접 지적해 주실 것을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이 법요식(法要式)은 맨 먼저 부처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지난 석 달 안거(安居) 동안에 나에게 수행에 방해가 될 만한 법도에 어긋난 일이 있으면 대중은 자비심으로 그것을 지적을 해 주시오" 이렇게 대중을 향해서 부처님께서 몸소 제일 먼저 자자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대중이 아무 말이 없으면 그 허물이 없었던 걸로 인정을 하고 또 그 다음 목련존자, 또 사리불존자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차례대로 그러한 법요식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는 무슨 허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법(法)을 존중하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맨 먼저 그렇게 대중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물었을 때에 맨 위에 첫자리에 앉았던 목련존자나 또는 가섭존자나 사리불 그러한 수제자가 부처님 곁으로 경건하게 가까이 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그 자자(自恣)를 할 때에는 왼쪽 무릎은 땅에 대고 오른쪽 무릎은 세우고서 합장을 하고 대중에게 묻는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에 그 옆에 있던 맨 윗자리 제자가 부처님께 다가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시고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부처님께 무슨 허물이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해서 공경스럽게 부처님을 일으켜드림으로써 다음 사람으로 그 법요식은 진행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그때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설법을 하시고 제자들을 이끌으시고 하는 그 생생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승불교(小乘佛敎)라 해서 수천 년간을 푸대접을 받아왔었지만 근자에 이 소승불교 『아함경(阿含經)』과 같은 이러한 경전이 새롭게 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자자를 행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해서 '석 달 동안 어떻게 수행을 했는가? 수행을 하는 동안 행여나 자기에게 어떤 잘못이 없었던가? 다른 대중에게 어떠한 피해는 끼친 바가 없었던가? 자기로 인해서 불법(佛法)에 누명(陋名)은 끼치지 않했던가?' 이렇게 해서 반성을 하고, 자기 혼자 반성을 할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그것을 지적해 달라고 스스로 간청하는 그러한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해인사나 그 밖에 총림(叢林)에서는 이러한 법요식이 거행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대단히 좋은 법도(法度)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해제 법요식을 맞이해서 여기에 모이신 비구 스님 또는 비구니 스님 또 여러 청신사 · 청신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낱낱이 부처님 당시에 행해졌던 그 자자(自恣) 법요식을 경건한 마음으로 상기하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어떠한 수행상에 잘못은 없었던가? 부처님 법도에 어긋나는 그러한 일은 없었던가? 나로 인해서 다른 대중에게 피해를 입힌 바는 없었던가?'

고요히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을 해서 행여나 잘못이 있으면 그러한 잘못은 이 자리에서 참회를 하시고, 앞으로 수행해 나가는 데에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청정하게 원만하게 수행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가 한 철, 한 철을 거듭해 나갈 때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바로잡아 나가고 자신의 수행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 나간다면, 결정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말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를 하면 걸망을 짊어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오대산을 가느냐, 설악산을 가느냐 또는 남해를 가느냐?' 이렇게 걸망 귀신이, 벌써 반살림 지나면 걸망 귀신이 들썩들썩한다고 옛날부터 그런 말이 전해 내려오고.

겨울철에는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勇猛精進)이 끝나면 벌써 그때부터서는 걸망 귀신이 동요가 되아 가지고 정진할 마음은 벌써 들떠버린다고 그런 말이 있어 왔습니다마는.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반살림이 지내면서부터 더 열심히 정진들을 하시고 해제에 임박해서는 더 모다 가행정진(加行精進)들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회룡사나 망월사, 원효사 그 밖에 강진 백련사 그런 데서도 여러 대중들이 많이 오셨습니다마는 거기서도 각각 못지않게 정진들을 잘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다른 사람을, 물론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일체 중생을 참으로 위하려면은 우선 자기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사해탈,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이것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고행 정진을 하게 된 만큼, 오늘 해제한 뒤에 참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동안에 석 달 동안은 삼복더위 중이라 대단히 정진하기가 어려웠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한 더위 속에서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하셨거든 하물며 앞으로 넉 달 반이라고 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겨울 결제를 할 때까지는 넉 달—다른 해에는 석 달밖에 없었는데 금년은 윤달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넉 달 반이라고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기간은 춥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 그러한 좋은 계절입니다. 어쨌든지 그 긴 좋은 기간을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동안에 여기서 저기서 모다 정진하고 오신 스님네들로부터서 여러 가지 그 정진에 관한 문의를 해 왔는데, 정진이란 게 '화두(話頭)를 어떻게 단속(團束)해 나가느냐?' 한마디로 말해서 화두 하나만을 잘 잡드리할 줄 안다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다 따라오는 것인데.

사실 정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 그러면 서서 종일 일을 하고, 종일 말을 하고, 종일 서성거려도 상관이 없느냐 하면, 앉은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또한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이것입니다.

 

참으로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참뜻을 안다면, 종일 앉아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요, 종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정진은 여일(如一)하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한 이 뜻을 잘 못 이해한 사람은 ‘좌(坐)에 있지 않다’ 그 말에만 잘못 집착을 하면, 공연히 서서—정진은 진짜 속으로는 되지도 아니하면서 공연히 미친 사람처럼 나부대고 설쳐 대는 데에 가까웁게 될 것이고.

또 ‘좌(坐)를 여의지 않는다’한 그 말에만 집착을 한다면, 너무 앉은뱅이처럼 앉아서만 하는 것만이 공부라고 해서 좌에 국집(局執)하는 그러한 잘못된 정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좌(坐)에 국집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공연히 설쳐 대서도 아니 될 것이고, 또 ‘좌를 여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너무 좌(坐)에만 국집하는 것도, 그것도 올바른 정진이 아닐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좌에 국집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좌를 여의지도 아니한다’고 하는 이 두 가지 뜻을 참으로 올바르게 인식을 한다면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가 다 좌(坐) 아님이 없을 것이고.

이 도리를, 이 두 가지 뜻을 잘 이해를 못한다면 비록 좌(坐)를 여의지 아니한다 해도 참다웁게 좌선(坐禪)을 못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넉 달 반에, 그 긴 좋은 기간 동안에 좌(坐)에 국집하지도 말고 또한 좌(坐)를 여의지도 아니하면서 정진을 알뜰히 해 주실 것을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처음~20분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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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혹 어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러 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좋은 도반(道伴)을 찾아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성지(聖地) 도량에 순례차 떠날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건강상 휴양차, 건강을 위해서 어느 의원을 찾아가거나 또는 약을 먹기 위해서 어느 장소를 찾아가거나 또는 모래찜을 하기 위해서 강변이나 해변을 찾아가시는 도반도 계실 줄 생각을 합니다.

 

어디를 가시건, 누구를 만나러 가시건, 어데 가서 무엇을 하건,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은 가야 할 데도 있고, 만나야 할 곳도 있을 것이고, 만나 해야 할 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때 그 장소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여의지 아니한다면 어데 간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누구를 만난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어데를 가서 강에 몸을 담그거나 모래 속에 몸을 묻거나,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거나 또는 어느 계곡 어느 봉우리를 발로 등산을 하고 거닌다 하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한 마음, 한 생각에 있을 것입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한데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러니,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분명하게 육도(六道)가 있더니—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귀도 있고, 희로애락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고.

분명히 그 꿈속에서는 그러한 육도가 있더니, 각후(覺後)에는 공공무대천(空空無大千)이로구나. 깬 뒤에는 비고 비어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없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꿈속에 돈 뭉탱이를 주섰다. 하! 이런 보배 뭉탱이를 주섰다.

'이러한 좋은 보배를 평생에 갖고 싶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내가 얻었던가!' 그렇게 기쁘고 흐뭇하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꿈을 딱! 깨고 보니까 그렇게 좋아하고 만지작거렸던 그 보물이 간 곳이 없더라.

꿈속에 그 독사란 놈이 물려고 쫓아와서 그 진땀을 흘리고 두려운 공포에 떨었었는데 탁! 눈을 뜨고 보니까 그 혀를 널름거리고 달라들었던 독사가 간 곳이 없더라.

 

천당과 지옥도 중생의 환몽(幻夢)—환상(幻想)의, 환각(幻覺)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천당이 있었고 지옥이 있었고 축생이 있었지만, 중생의 그 환몽을 깨버린다면 천당도 간 곳이 없고 지옥도 간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출세(出世)하셔 가지고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6년의 그 피나는 고행을 하셔서, 마침내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확철대오를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을 설하셨는데, 깨달으신 것이 무엇을 깨달렀냐?

환몽(幻夢)을 깨신 것이고, 설하신 것이 무엇을 설하셨냐 하면 그 환몽을 깨는 방법을 설하신 것이여.

 

처음에는 바로 그 환몽(幻夢)을 깨는 법을 설하셨지만, 중생의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해서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알아듣기 쉬운, 행하기 쉬운 방편(方便)을 설하시다가 마지막에 가서 바로 이 깨는 법을 여지없이 설하셨다 그말이여.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여.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한데 뭉쳐서 삶아서, 거기에 아주 그걸 농축을 해 가지고 뽑아낸 거여.

 

바로 이 활구참선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어요. 물론 깨달은 분이 보면은 글자마다, 한 말씀마다 바로 활구참선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은 깨달은 눈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활구참선법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는 것이고.

 

용궁(龍宮)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이 한 자(字)도 빠짐이 없이, 한마디도 빠짐이 없이 전부 다 용궁에는 그것이 다 용왕에 의해서 그것이 다 보관이 되어 있지만, 그 용궁에 있는 경전 속에도 이 활구참선법은 없다 이것입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것은 교외별전이기 때문에 경전에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그 교(敎), 경(經) 중 가운데에는 없는 이 활구참선법이 달마대사(達摩大師)에 의해서 천오백 년 전에 중국에 전해졌고, 이조 혜가(二祖慧可), 삼조 승찬(三祖僧璨), 사조 도신(四祖道信), 오조 홍인(五祖弘忍), 육조 혜능(六祖慧能) 선사를 거쳐서 오늘날에까지 그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이 활구참선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활구참선법이라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여.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는니라"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묻는데,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無)" 했으니, ‘어째서 조주는 무(無)라고 했는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문헌에 오른 공안(公案)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공안이여. 천칠백 화두인데, 어느 공안이나 좋고 나쁘고 한 것이 없어.

그러나 자기가 믿는,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따지지 말고, 그 한 공안상에 대의단(大疑團)을 일으켜서 그 의단 하나만을 간절히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결국은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어진 단계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쉬웁고 너무 가까와서 그래서 하기가 어렵고, 잘되어도 잘된 줄을 모르고 이미 화두가 들어져 갖고 있어... (녹음끊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로 가르켜 줄 수 있는 스승을 자주 만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애써서 공부를 해 가지고 중대한 고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비를 잘 단속해 나갈 줄을 모르고, 공연히 거기서 스스로 분별심을 내 가지고 공연히 주저하고 망설이고 갈팡질팡하고 스스로 혐의심(嫌疑心)을 내 가지고 아까운 고비를 헛되이 지내버리는 예가 종종 있습니다.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의 법문을 보면,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아니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부림이 처지고, 나귀를 끌고 우물로 들어가는 거와 같고, 앞도 맥히고 뒤도 맥히고 좌우도 끊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고비, 이러한 경계에 도달한 것이 이것이 공부가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앞으로 크게 깨닫게 될 그 이전의 경계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경계에 도달했을 때에 번뇌심을 내지를 말고 짜증을 내지 말고, 두려워서 ‘이것이 내가 이거 잘못 될라고 그런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물러서지를 말고 그러한 고비에서 지혜스럽게 잘 단속을 해서 그 고비를 넘겨라.

‘절대로 물러서거나 공부를 놓아버리지 말고, 잘 그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누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그 고비를 잘 넘기는 것이냐?’하면,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쩌 눌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고, 이 오목가슴에 무슨 뭉텅이가 생겨 가지고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소화도 잘 안되고, 화두를 들어도 머리는 먹먹해 가지고 영 애를 먹을 때에,

그럴 때에는 앉아서 억지로 바울라고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적당한 장소에 일직선으로 딱 정해 놓고서, 한 4~50미터를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단전호흡을 하면서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이 말씀이여.

 

그러면은 그 답답하고 복잡하고 하는 것이 스르르르~ 하니 그것이 없어지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말이여.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을 그렇게 포행을 하고서 시원해지거든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허리를 쭈욱 펴고 극히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이 말씀이여. 아주 개운하고 시원하게 화두가 들릴 것이다 그말이여.

 

또 얼마 동안 잘되어 가다가 다시 또 답답해지면 또 그 앉아서 단전호흡을 몇 번을 하면 또 시원해지면 고대로 시간을 끌고 나가고, 그렇게 해도 또 공부가 안 되면은 또 조용하게 나가서 포행을 하고.

하기는, 여러 대중이 꽈악 짜고 정진하고 있는데 그렇게 들랑날랑하면 옆에 분들이 미안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지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억지로 앉아서 그 죽비(竹篦) 칠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참 대단히 거북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옆에 분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허리가 아프던지, 그렇게 정진이 답답해서 가슴이 미어질라고 하면 조용하게 나가서 지혜롭게 정진을 해 가지고 이 고비를 넘긴다면, 그러고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결 정진이 수월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공부가 한 단계 힘을 덜게 되는데, ‘그 힘을 덜게 되는 것[省力]이 바로 정진에 힘을 얻는 것[得力]이 된다’ 이 말씀입니다.

 

앞으로 산철 동안에는 그러한 규칙에 그렇게 크게 얽매이지 않는 계절인 만큼, 지금 산승(山僧)이 일러드린 말씀을 십분 참작해서 그 여름 더운 동안에 못다 한 공부를 이 산철 동안에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해서 그 봉을 빼도록 노력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20분16초~38분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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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진(精進)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방일(不放逸)인 것입니다. 불방일(不放逸). '아니 불(不)'자, '놓을 방(放)'자, '편안할 일(逸)'자. ‘방일(放逸)하지 않는다’

‘방일한다’고 하는 것은 ‘놓아 지낸다’ 그말이여. ‘그럭저럭 놓아 지낸다’ 그말인데, 그럭저럭 놓아 지내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참정진'이다 이 말씀이여.

 

‘정진을 한다’하면은 꼭 아주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 그 정진상(精進相)을 지어서 막! 이 몸을 갖다가 얽어매고 알날신심(遏捺身心)한 것을 갖다가, 몸과 마음을 억지로 구속하고 얽어매 가지고 몸을 못살게 구는 것을 갖다가 가행정진이다 또는 용맹정진이라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진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참다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은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글자 석 자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불방일만 한다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바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화두가 들린다면 앉아서도 정진이요 서서도 정진이요, 24시간 간단없이.

장차(將次)는 참으로 정진이 익숙해지면 꿈속에서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릴 것이고, 꿈도 없고 그 깊은 잠에 들었을 때에도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떠억 들린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용맹정진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이 말씀이여.

 

그렇게 될라면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우리 수행인은 거기에다 목표를 두고 계속해서 정진을 다져 나가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정진을 다져 간다면 무슨 파(破)해야 할 계율이 있으며, 다시 또 무슨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무슨 따져야 할 시비가 있으며,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죽이면 죽, 밥이면 밥, 떡이면 떡, 국수면 국수 그때그때 공양 시간이 되면 공양하고, 잘 시간이 되면 자고, 울력 시간이 되면 울력을 하고, 소지(掃地) 시간이 되면 소지를 하고, 또 빨래를 할 시간에는 빨래를 하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만을 알뜰하고 간절하게 단속해 나간다면, 비구 250계(戒), 비구니 348계, 또는 보살의 십중대계(十重大戒)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의식적으로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근본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면, 계(戒)의 지키는 상(相)이 없이 저절로 모든 계가 지켜져 버리면 이것을 바로 최상승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六祖) 스님께서는 『법보단경(法寶壇經)』에 자심(自心), 그 마음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마음 어지러운 것 · 산란한 것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정(定)이요, 마음에 그름 · 허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 자성(自性)의 혜(慧)라, 이렇게 설파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백일기도 회향일인데,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들은 바로 용화사 법보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하는 보살님과 그 근본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백일기도에 들었기 때문에, 그 백일기도에 들은 그 정성에 의해서 이 용화선원이 잘 운영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 스님네들이 정진을 잘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으로 이 선원이 잘 운영되어 가는데 여러분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에 살았겠느냐 그말이여.

법회 때 나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법문을 듣고 가셔서 댁에서 이 활구참선법, 참선을 댁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참선을 하셨으니 어찌 그것이 이 용화선원에 방부를 들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말이여.

 

바로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닦으신 분들이다 그말이여. 복을 지어서 선원을 잘 운영해 나갔으니 한량없는 무루복(無漏福)을 닦은 것이고, 또 여러분도 가정에서 참선을 열심히 했으니 최상승법을 닦아서 무루혜(無漏慧)를 닦은 것이 된다 그말이여.

 

‘이 세상에서 어느 분이 복(福)과 혜(慧)를 가장 원만히 구족하신 분이냐?’하면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과 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이다.

 

그래서 삼귀의(三歸依)를 할 때에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두 가지가 족[兩足]한 최고의 높으신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하다'하는 것은 바로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구족하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에 의해서 닦아 가는 불제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한다면 우리의 정진은 결단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백일기도 회향이 바로 오늘입니다.

 

‘백일기도가 끝났으니까 인자 나는 뭐 닦아야 할 복도 없고, 닦아야 할 혜도 없다’ 그리 생각하지를 말고 산철 동안 열심히 정진을 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고, 상(相)에 떨어지지 않는 정진을 해 나가시면, 또 다시 음력 10월 15일이 들면 그때 또 백일기도에 동참을 하시고, 또 가정 형편이 허락이 되면 또 여기에 정식으로 방부를 들여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셔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그 공덕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크고 작은 소원이 반드시 성취가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진로형탈(塵勞逈脫)—티끌 수고로운 거, 생사진로(生死塵勞) 생사해탈하는 것이 이 일이 조그만한 보통 일이 아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밀하게 승두(繩頭)를 잡아서—화두를 놓치지 말고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바탕 이 추위가 뼛골 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냐.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을 것이냐.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핀 매화라야 코를 치는 그러한 향내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겨울 날씨가 이상(異常) 기온이 되어가지고 뜨뜻해서 강추위를 아니하면 그런 끝에 핀 매화는 향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매화꽃이 그러듯이 우리가 정말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뼛골에 사무치는 그러한 간절하고도 알뜰한 정진을 하지 않고서 어찌 고불조(古佛祖)와 같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을까 보냐 이 말씀이여.

 

이 게송은 황벽 스님께서 우리 후래(後來) 불자를 위해서 일러주신 게송입니다. 수행 납자(衲子)가 하루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좋은 좌우명(座右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38분8초~51분49초)(끝)

 

 

 

 

[법문 내용]

 

(게송)작야강남우~ / 자자(自恣) 법요식 / 자기의 생사해탈,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정진하는 것 / 정진이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하는 것 / 참선은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게송)몽리명명유육취~ /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를 하셔 가지고 환몽(幻夢)을 깨신 것이고, 49년 동안 설하신 것은 그 환몽을 깨는 방법을 설하신 것이다 /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 / 화두를 들어도 아주 안될 때, 지혜스럽게 잘 단속을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 한결 정진이 수월하고 공부가 한 단계 힘을 덜게 되는데, ‘그 힘을 덜게 되는 것[省力]이 바로 정진에 힘을 얻는 것[得力]이다.

 

불방일(不放逸)하는 것이 참다운 용맹정진 / 한 생각 돌이켜 화두를 들어나가면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는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 /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과 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 우리도 불제자(佛弟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해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황벽 스님께서 우리 후래(後來) 불자를 위해서 일러주신 게송. 수행인이 하루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좋은 좌우명(座右銘).

 

 

스스로 자(自)자, 물을 자(恣)자, '자자(自恣)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묻느냐? 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던가?’하고 각자 자기의 허물을 대중에게 물어 가지고, 자진해서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직접 지적해 주실 것을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참선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참뜻을 안다면, 종일 앉아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요, 종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정진은 여일(如一)하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여.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한데 뭉쳐서 삶아서, 거기에 아주 그걸 농축을 해 가지고 뽑아낸 거여.

바로 이 활구참선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어요. 물론 깨달은 분이 보면은 글자마다, 한 말씀마다 바로 활구참선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은 깨달은 눈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활구참선법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는 것이고.

 

문헌에 오른 공안(公案)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공안이여. 천칠백 화두인데, 어느 공안이나 좋고 나쁘고 한 것이 없어.

그러나 자기가 믿는,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따지지 말고, 그 한 공안상에 대의단(大疑團)을 일으켜서 그 의단 하나만을 간절히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결국은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어진 단계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쩌 눌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고, 이 오목가슴에 무슨 뭉텅이가 생겨 가지고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소화도 잘 안되고, 화두를 들어도 머리는 먹먹해 가지고 영 애를 먹을 때에, 그럴 때에는 앉아서 억지로 견뎌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적당한 장소에 한 4~50미터를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그러면은 그 답답하고 복잡하고 하는 것이 스르르르~ 하니 그것이 없어지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을 그렇게 포행을 하고서 시원해지거든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허리를 쭈욱 펴고 극히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아주 개운하고 시원하게 화두가 들릴 것이다.

 

정진(精進)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방일(不放逸)인 것입니다. 불방일(不放逸). '아니 불(不)'자, '놓을 방(放)'자, '편안할 일(逸)'자. ‘방일(放逸)하지 않는다’

‘방일한다’고 하는 것은 ‘그럭저럭 놓아 지낸다’ 그말인데, 그럭저럭 놓아 지내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참정진'이다.

 

‘정진을 한다’하면은 아주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 그 정진상(精進相)을 지어서 막! 이 몸을 갖다가 알날신심(遏捺身心), 몸과 마음을 억지로 구속하고 얽어매 가지고 몸을 못살게 구는 것을 갖다가 가행정진이다 또는 용맹정진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진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참다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은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글자 석 자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만을 알뜰하고 간절하게 단속해 나간다면, 계율을 의식적으로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근본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면, 계(戒)의 지키는 상(相)이 없이 저절로 모든 계가 지켜져 버리면 이것을 바로 최상승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六祖) 스님께서는 『법보단경(法寶壇經)』에 그 마음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마음 어지러운 것 · 산란한 것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정(定)이요, 마음에 그름 · 허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 자성(自性)의 혜(慧)라, 이렇게 설파를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분이 복(福)과 혜(慧)를 가장 원만히 구족하신 분이냐?’하면은 바로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이다.

그래서 삼귀의(三歸依)를 할 때에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두 가지가 족[兩足]한 최고의 높으신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하다'하는 것은 바로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구족하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에 의해서 닦아 가는 불제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한다면 우리의 정진은 결단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