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600/(501~525)2023. 5. 5. 04:18

 

 

(No.501)—1993년 2월 첫째 일요법회 (40분)

 

약 40분.


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하고  하유청풍동유설(夏有淸風冬有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하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하고  하유청풍동유설(夏有淸風冬有雪)이다.
봄에는 온갖 꽃이 곱게 피고, 가을에는 휘황찬 밝은 달이 있다. 여름에는 맑은 바람이 솔솔 불고, 겨울에는 온 세계가 은빛으로 빛나는 눈이 내리는구나.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하면, 만약 부질없는 일, 쓸데없는 일을 마음에 걸어 두지만 않으면, 쓸데없는 일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다. 문듯 이 인간에 좋은 시절이더라.


이제 엄동설한도 지내고 새해를 맞이해서 신수(身數)기도도 끝나고, 입춘기도도 끝나고, 이제 2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했습니다. 머지않아서 버들에 푸른 생기가 돋아 올 것이고, 들과 산에는 온갖 꽃이 빨갛게 노랗게 곱게 곱게 단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복잡하고 어렵다 하드라도 그러한 속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지만 아니하면, 그런 속에서도 오히려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열심히 활구참선(活句參禪)만 한다면, 들과 산이 온통 노랗고 빨갛고 푸르게 비단처럼 장식이 된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축복의 장엄(莊嚴)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거거든.
아무리 이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내가 내 마음 하나를 돌이키지를 못하고 큰 일 작은 일로 흥망성쇠와 시비 속에 내가 얽혀 들어가서 거기에서 고민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몸부림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거거든.

중생의 어리석은 눈으로 보고, 어리석은 귀로 듣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온 세상을 보니까 온통 불바다요 지옥세계요, 그렇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진리의 눈으로 보면 온통 이 온 세계는 고대로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휘황찬 달이 밝고, 여름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춥다고 하나 하얀 눈이 온 세계를 뒤덮을 때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거거든.

인간에 생로병사(生老病死)도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온통 고통 아닌 것이 없고, 괴로움 아닌 것이 없고, 슬픔 아닌 것이 없고, 그렇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도 기쁜 일이요, 차츰 자라는 것도 기쁜 일이요, 커서 장가들고 자식 낳고 사는 것도 기쁜 일이요, 머리가 희끗희끗해지지마는 그런대로 떠억 자기 마음만 닦아 가 봐라 그 말이여.
그런대로 나이 들어간 대로 수행도 쌓이고 인생의 사는 맛도 알고 그러니 그런대로 좋고, 늙어서 주름살이 잡히고 기운은 좀 떨어지지만 세상을 떠~억 달관(達觀)한 분상이라면 6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어서 그러한 대로 좋지 않냐 그 말이여.
젊어서는 야망도 있고 그래서 한참 설쳐대다가 나이가 들어가며 과거를 회상해 볼 때 비긋이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 말이여.

늙어서 죽은 것이 무엇이 그렇게 괴로운 일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일생을 살다가 하직을 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꼭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죽으면 꼭 지옥에 간다고 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죽어서 이 지구 세계보다도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는 거고, 더 편안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물론 죽어 갈 때 편안하게 웃으면서 죽을려면은 젊어서부터, 아직 덜 늙어서부터 항상 ‘이뭣고?’를 하고 불법(佛法)에 의해서 열심히 수행을 쌓아야 하기는 하지만, 그거야 기왕 사람 몸으로 태어나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법문(法門) 듣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그렇게 어려울 일이 있느냐 그 말이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인생이 살다 보면은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고 언짢은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닥치면 그건 그 나름대로 적절히 처리해 나가면서 웃을 때는 웃고 울 때는 울고, 또 속이 좀 상할 때는 조금 상하다가 터억 돌이켜서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한번 해보란 말이여.

자기가 평소에 수행을 해서 참선을 해서 어떠한 역경(逆境)에 부딪쳤을 때, 그전 같으면은 그 고비를 못 넘기고 진심(瞋心)을 내고 탐심(貪心)을 내고 싸움을 하고, 한번 그런 충격을 받으면 몇 날 며칠을 속이 가라앉지를 않고 그러던 사람이 참선을 한 뒤부터서는, 정법(正法)을 믿고 활구선(活句禪)을 한 뒤부터서는 자기가 자기의 감정을 자유롭게 조종을 해서 금방 화두를 듦으로써 가슴속이 후련히 가라앉힌 것을 스스로 자기 증험을 해보시라 그 말이여.
수행을 하기 전과 수행을 열심히 한 뒤에 자기의 존재를 비교해 보고 한번 타산(打算)을 해본다면 그것도 또한 가끔 한번씩 그렇게 자기를 돌아보는 것도 미상불(未嘗不) 괜찮다 그 말이여.


세속에 명예를 구한다든지, 재산을 구한다든지, 권리를 구한다든지 이런 것은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안 해. 열 건에 두 가지나 세 가지나 되면 잘되는 거고, 대부분이 내 뜻대로 잘 안되어지고 좀 이루어졌다 해도 두고두고 믿을 수가 없고 금방 또 뒤집어져 버리고, 그런데 내가 나를 찾는 공부는 열심히만 하면 항상 거기에 있거든.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망상만 일어나고 자꾸 그렇게 호소를 하신 분이 많지만 그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 무량겁을 번뇌와 망상 속에서 얽매여서 금생에까지 왔는데 일조일석에 그것이 잘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나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될 수밖에 없고, 떠억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하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참선 공부거든. 그래서 ‘마음속에 부질없는 일만 두고 있지 아니하면[若無閑事掛心頭] 이것이 인간에 가장 좋은 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라고 하는 고인(古人)에 이 게송(偈頌)을 두고두고 음미를 해볼 만하다 그 말이여.

한 생각만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냥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는데, 그 한 생각을 돌리지를 못하고 속에다 탁! 꽁~한 생각을 가슴속에 두고 그것만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일어나거든. 비어 버리면 되거든, 딱 비어 버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은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고. 이 사바세계(裟婆世界)는 되는 것보다도 안 되는 재미로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바세계란 말이 ‘사바(裟婆)’란 말은 인도 말인데, ‘참고 견딘다’는 말이여.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계다’ 그래서 사바세계(裟婆世界)거든.

억지로 그걸 참을려고 하면 참을수록에 더 속에서 뽀글뽀글 괴아 오르거든. 억지로 참을려 하지 말라 거든.
심호흡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후~ 하고 내뿜으면서 ‘이뭣고?~~~’ 또 수르르르 숨을 들어마셨다가 가뜩 들어마셨다가 후~ 내쉬면서 ‘이뭣고?~’
두 번, 세 번 그래도 안 가라앉으면 네 번, 다섯 번, 그래도 안 가라앉으면 열 번, 스무 번 하다 보면 완전히 내뿜는 그 호흡 따라서 속에 불덩어리같은 놈이, 불기운이 다 빠져나가 버리거든.

근데 처음에는 그렇게 여러 번 해야 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항상 정진(精進)하다 보면 전혀 시간이 안 걸려. 딱! 돌이키면 깨끗하게 되어 버리거든.
인과법(因果法)을 생각하고 ‘내가 전생에 지어서 이런 걸 받는다’ 그것 다 초학자(初學者)들이 억지로 마음을 돌릴려고 하는 방법이지, ‘이뭣고?’ 해 버리면 1초도 안 걸려. 백만사(百萬事)가 되풀이해서 자꾸자꾸 하다 보면 익달, 숙달되고 나중에는 제절로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어. 이걸 자꾸 하다 보면, 천하에 재미없고 맛없을 것 같은데 자꾸 하다 보면 자기가 자기 마음을—다른 사람들이 자기 말 한마디면 굽신굽신하고 ‘예 예 예’ 하고 손을 요렇게 비비면서 그것 좋은 것 같지만 대단히 불편한 거고, 자기가 자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 것보단 더 좋은 것은 없다 그 말이여.

생각 하나 돌이키면 온 세상이, 슬픔의 세상이 찰나간(刹那間)에 기쁨의 세상으로 맨들 수도 있고, 고통의 세계를 기쁨의 세계로 만들 수도 있고, 죽음의 세계를 열반(涅槃)의 세계로도 만들 수 있고, 지옥 경계를 극락 경계로 찰나간에 뒤집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캄캄한 방에 스위치 하나만 착! 누르면 찰나간에 환히 밝아지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자기가 쌓아 논 업(業)이 얽히고설키고 그렇게 된 상태에서 자꾸 세상만 원망하고 다른 사람만 원망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고 원망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고 더 괴롭고 더 슬퍼지고 더욱 원한과 미움만이 점점 불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자기가 자기 한 생각 탁! 돌리면은 온 세계가 별유천지(別有天地)로 변해 버린다 그 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 속에도 그런 요지에 말씀이 계셨지마는, 부처님이나 극락세계나 열반이나 깨달음이나 밖에서 찾으면, 밖에서 진리를 찾은 것은 그것은 외도(外道)다 그거거든. 자기 속에서 찾는 것이 그것이 정법(正法)이다 그러셨어.

행복을 보통 어리석은 사람들은 밖에서 찾거든. ‘돈이 많으면은 얼마나 좋으까?’ 하고 돈을 벌려고 야단이고, ‘무슨 높은 벼슬 권리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해서 그것을 구할라고 야단이고, 맘대로 구해지지도 않지마는 구해져 봤자 오래 가지도 못하는 거고, 얻어 놓고 보면 그것이 진짜 행복도 아닌 것이여.
근데 자기 속에서 구하면, 행복도 자기 속에서 구해야 반드시 구해지는 것이고, 구해지면은 영원히 그거 행복이 자기 것이고, 살아갈수록 해를 거듭할수록 그 행복이 점점 더 커지고 더 깊어지고 그런 것이고, 금생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금생에 수행을 쌓아서 정진력을 얻어 놓으면 그래서 거기서 얻어진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

자기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자기 속에서 부처를 찾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게 되면은 완전히 사람이 아주 정신이 개혁이 되는 거여. 개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지끔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참 한심스럽고 부끄럽고 참 그런 일들이 날마다 신문에 나고 참 가슴아픈 일이나, 이것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냐?
‘정치를 잘못해서 그런다’ 하고 서로 몰아대지마는, ‘대기업주들이 기업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다‘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런다‘ 물론 다방면으로 그 각계각층(各界各層)에서 각 방면으로 잘못된 점을 찾아서 그것을 고칠려고 노력을 해야 하지요. 해야 하기는 하지만, 백날 그래 봤자 그것은 마냥 그 모냥일 수밖에는 없다 그 말이여.

해방된 지가 50년, 많이 모다 다 애국자들이 나서서 정치를 하고, 애국자들이 나서서 사업도 하고, 애국자들이 나서서 교육도 하고 모다 그러니까, 다 자기네들이 애국자라 하니까 나는 그런다고 믿는데, 그렇다면은 나라 꼬라지가 좀 많이 좋아져야 할 텐데 별로 신통치 않거든.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 자기 속에서 자기의 정신 개혁(精神改革)이 일어나야 한다 그 말이여.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고쳐.

가정에서부터, 직장에서부터, 회사에서부터, 학교 · 경제 · 정치 할 것 없이 각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높은 사람대로, 밑에 있는 낮차운 사람은 낮차운 사람, 장사를 하는 사람이나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있는 그 자리에서 남 눈치볼 것도 없고, 남한테 미룰 것도 없고 ‘남이 하면 나도 하리라’ 그러지 말고 자기부터 일시에 시작을 해야 하거든. 정신 개혁을 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 터~억 ‘이뭣고?’를 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런다면 전혀 시간이 안 걸리고 하루 동안에 온 국민의 정신이 바뀌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그렇게 되면 공장은 공장대로 활기를 띠게 될 것이고, 회사는 회사대로 활기를 띨 것이고, 온통 여기서 저기서 마치 날씨가 뜨뜻하면은 땅속에서 땅이 제절로 녹으면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산과 들에서 요렇게 김이 무럭무럭 오르면서 생기가 나면서, 풀과 나무에는 새싹이 요렇게 물이 오르면서 새싹이 돋듯이 그렇게 될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우리는 88년도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릴 때 그 올림픽을 열기 위해서 전 국민이 잠시 동안이지만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준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그냥 그 기운이 가라앉어 버리고 계속 오늘날까지 이렇게 터덕거리고 있지마는, 새봄을 맞이해서 우리는 그때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이켜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사회와 국가를 한번 새롭게 일구어 나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놈을 돌이키는 거여. 그러면 당장 달라져 버리거든. ’이뭣고?‘
그래서 이것이 여러분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들은 다 지금 산승(山僧)이 이렇게 주장하는 바를 충분히 경험을 통해서 느끼고 계신 분도 많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철저하게 그걸 느끼지 못한 사람, 경험을 안 하신 분은 당장 이 자리부터서 ‘이뭣고?’를 하시고, 댁으로 가신 걸음걸음이, 차 중에서도 ‘이뭣고?’를 하시고, 가정에 가셔서 생활하면서 자꾸 ‘이뭣고?’, 참선을 생활 속에 살려 나가십시요.

참선(參禪)이 절에 와서만 하고, 절에다 방부(房付) 드릴 동안에만 하고, 입선(入禪) 중만 하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생활 속에서 이것을 살려 나가지 못한다면 그 참선은 진짜 참선이 아닙니다.
진짜 참선은 생활 속에서 그것이 살려 나가질 때 그것은 ‘산 참선’이거든. 그래서 그것을 ‘살 활(活)’ 자,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죽은 참선’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산 참선’이거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아(自我)를 자각(自覺)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법이 사구참선(死句參禪)해 가지고 하나마나 자기 자신이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자기에 정신 혁신을 가져오지 못하고 그런다면은 그건 참불법이 아니거든.

한 사람이 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마음이 깨끗해짐으로 해서 온 세계가 깨끗해지는 도리가 바로 이 정법(正法)이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것이거든.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리라
나무~아미타불~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하니  각소거진불염진(却笑居塵不染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다.
마음의 근원, 참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몰록 깨달라 보배의 창고를 확~ 열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여. 인연 따라서 이렇게 태어나고, 인연 따라서 왕래하는 이것이, 이것이 바로 본래신(本來身)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닫지를 못하고 보니까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고,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 이 더러운 것을 싸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가죽푸대에 지내지 못하지만,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마음의 근원,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온통 이것이 본래신(本來身)이여, 생사 없는 본래의 몸뚱이거든.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하니, 그 곱고 아름답고 향기롭게 피는 저 연꽃이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시커먼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어.
그러나 각소거진불염진(却笑居塵不染塵)이라. 그 더러운 티끌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 이파리와 그 꽃은 조끔도 더러운 것이 묻지 아니한 것을 보고 문듯 웃음이 나오더라 그거거든.

이 몸뚱이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지고, 더러운 것이 이 가죽푸대 속에 가뜩 들었지마는, 떠억 자기의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이뭣고?’ 자꾸 ‘되네, 안 되네’ 따지지도 말고, 안 된다고 탄식할 것도 없고, 잘된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자꾸 잊어 버렸다 하면은 냉큼 또 추켜들고 또 돌이키고, 자꾸자꾸 하면 결국은 안 될 수가 없어. 결국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은 ’정말 이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 나지 안 했으면 어떻게 이런 좋은 법을 만났으며, 어떻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정말 감사하고.
어려서 나를 잘 멕이고 잘 입히고 해 주시지 못하고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하더라도, 심지어는 나를 나 가지고 키울 형편이 못 되어 가지고 고아원이나 길갓에다 나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래도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오늘에 나가 있다. 그래서 이 정법을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몸뚱이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버지가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느낄 것이고.
아무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늙어서 냄새가 나고 대소변을 가리지를 못하고 앓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할머니 그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내 몸이 어디서 태어났겠는가. 내 사랑하는 자식이 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어떻게 내 사랑스런 자식과 딸이 태어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이 정법(正法)을 믿고 이 공부를 하고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자식을 봄과 동시에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효심(孝心)이 우러나게 되는 것이고, 생로병사 이러한 현상을 보고 발심(發心)을 하게 되는 것이고, 흥망성쇠 속에서 오히려 더 분심(憤心)을 내서 더욱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금년 계유년(癸酉年)에 봄이 바야흐로 하루하루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꽁꽁 얼었던 땅이 차츰 녹고 새싹이 돋아나고 여그저그 아름답게 꽃이 핌과 발맞춰서 우리의 자신의 마음속에도 정법을 믿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의 꽃이 피고, 가정에도 모든 어렵고 어두웠던 일들이 다 가시고 희망이 넘치는 그런 가정에 생기가 돌게 되기를 바라고 또 우리의 사회에 모든 방면에도 싹수가 자꾸 희망적으로 발전해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가 그렇게 맨들기를 바래지 말고 ‘내 자신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세계가 달라진다’고 하는 부처님 말씀을 깊이 명심을 하고 열심히 정진(精進)하시기를 바랍니다.


상풍괄지소고해(霜風刮地掃枯荄)한디  수각동군금이회(誰覺東君今已廻)리요
나무~아미타불~
유유영매선누설(唯有嶺梅先漏洩)하야  일지독향설중개(一枝獨向雪中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상풍괄지소고해(霜風刮地掃枯荄)한디, 매서운 서릿바람이 땅을 쓸고 마른 풀뿌리를 쓴 뒤,
수각동군금이회(誰覺東君今已廻)냐. 누가 봄소식이 이미 돌아온 줄을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유유영매선누설(唯有嶺梅先漏洩)하니, 오직 저 재 너머에 매화가 먼저 봄소식을 누설(漏洩)을 하니,
일지독향설중개(一枝獨向雪中開)로구나. 한 가지가 홀로 눈 속을 향해서 피었구나.

세상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하고 온 세계가 이렇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이뭣고?’를 하는 그 찰나찰나에 매화꽃 한 송이가 피어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고 있다.
그 향내가 잠시 피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 활짝 활짝 피어서 온 세계를 향내로 가득 채워서 온 세계에 더럽고 어두운 세계를 향내로 가득차게 되기를 바랍니다. (처음~39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 / 열심히 활구참선(活句參禪)만 한다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축복의 장엄(莊嚴)이 아니고 무엇이냐 / 죽어 갈 때 편안하게 웃으면서 죽을려면은 아직 덜 늙어서부터 항상 ‘이뭣고?’를 하고 불법(佛法)에 의해서 열심히 수행을 쌓아야 / 한 생각만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냥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된다 / 생각 하나 돌이키면 지옥 경계를 극락 경계로 찰나간에 뒤집을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극락세계나, 열반이나, 깨달음이나, 자기 속에서 찾는 것이 그것이 정법(正法)이다 / 수행해서 얻어진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자기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자기 속에서 부처를 찾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게 되면은 완전히 사람이 아주 정신이 개혁이 되는 것이다 /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 ‘이뭣고?’를 해야 한다 / 진짜 참선은 생활 속에서 그것이 살려 나가질 때 그것은 ‘산 참선’.

(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이 몸뚱이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버지가 얼마나 감사한가! / ‘내 자신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세계가 달라진다’고 하는 부처님 말씀을 깊이 명심을 하고 열심히 정진(精進)하시기를 바랍니다 / (게송) 상풍괄지소고해(霜風刮地掃枯荄)~.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하면, 만약 부질없는 일, 쓸데없는 일을 마음에 걸어 두지만 않으면, 쓸데없는 일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다. 문듯 이 인간에 좋은 시절이더라.

한 생각만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냥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는데, 그 한 생각을 돌리지를 못하고 속에다 탁! 꽁~한 생각을 가슴속에 두고 그것만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일어나거든. 비어 버리면 되거든, 딱 비어 버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은 ‘내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고. 이 사바세계(裟婆世界)는 되는 것보다도 안 되는 재미로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바세계란 말이 ‘사바(裟婆)’란 말은 인도 말인데, ‘참고 견딘다’는 말이여.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계다’ 그래서 사바세계(裟婆世界)거든.

행복을 보통 어리석은 사람들은 밖에서 찾거든. ‘돈이 많으면은 얼마나 좋으까?’ 하고 돈을 벌려고 야단이고, ‘무슨 높은 벼슬 권리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해서 그것을 구할라고 야단이고, 맘대로 구해지지도 않지마는 구해져 봤자 오래 가지도 못하는 거고, 얻어 놓고 보면 그것이 진짜 행복도 아닌 것이여.
근데 자기 속에서 구하면, 행복도 자기 속에서 구해야 반드시 구해지는 것이고, 구해지면은 영원히 그거 행복이 자기 것이고, 살아갈수록 해를 거듭할수록 그 행복이 점점 더 커지고 더 깊어지고 그런 것이고, 금생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금생에 수행을 쌓아서 정진력을 얻어 놓으면 그래서 거기서 얻어진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은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

참선(參禪)이 절에 와서만 하고, 절에다 방부(房付) 드릴 동안에만 하고, 입선(入禪) 중만 하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생활 속에서 이것을 살려 나가지 못한다면 그 참선은 진짜 참선이 아닙니다.
진짜 참선은 생활 속에서 그것이 살려 나가질 때 그것은 ‘산 참선’이거든. 그래서 그것을 ‘살 활(活)’ 자,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죽은 참선’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산 참선’이거든.

한 사람이 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마음이 깨끗해짐으로 해서 온 세계가 깨끗해지는 도리가 바로 이 정법(正法)이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것이거든.

깨닫지를 못하고 보니까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고,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 이 더러운 것을 싸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가죽푸대에 지내지 못하지만,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마음의 근원,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온통 이것이 본래신(本來身)이여, 생사 없는 본래의 몸뚱이거든.

’정말 이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 나지 안 했으면 어떻게 이런 좋은 법을 만났으며, 어떻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정말 감사하고.
어려서 나를 잘 멕이고 잘 입히고 해 주시지 못하고 고생을 하면서 자랐다 하더라도, 심지어는 나를 나 가지고 키울 형편이 못 되어 가지고 고아원이나 길갓에다 나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래도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오늘에 나가 있다. 그래서 이 정법을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몸뚱이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버지가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느낄 것이고.
아무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늙어서 냄새가 나고 대소변을 가리지를 못하고 앓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할머니 그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내 몸이 어디서 태어났겠는가. 내 사랑하는 자식이 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어떻게 내 사랑스런 자식과 딸이 태어날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이 정법(正法)을 믿고 이 공부를 하고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자식을 봄과 동시에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효심(孝心)이 우러나게 되는 것이고, 생로병사 이러한 현상을 보고 발심(發心)을 하게 되는 것이고, 흥망성쇠 속에서 오히려 더 분심(憤心)을 내서 더욱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하고 온 세계가 이렇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이뭣고?’를 하는 그 찰나찰나에 매화꽃 한 송이가 피어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고 있다 거든.
그 향내가 잠시 피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 활짝 활짝 피어서 온 세계를 향내로 가득 채워서 온 세계에 더럽고 어두운 세계를 향내로 가득차게 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01~525)2023. 4. 25. 13:45

 

 

(No.518)—1993년 11월 첫째일요법회 (73분)

 

(1) 약 43분.

 

(2) 약 30분.


(1)------------------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헌디  난봉상엽축풍비(亂峰霜葉逐風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계산갱호사양리(溪山更好斜陽裏)에  지대황혼월상귀(只待黃昏月上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헌데, 떨어진 해 가을빛이 산기슭에 가득찬데,
난봉상엽축풍비(亂峰霜葉逐風飛)로구나. 어지러운 봉아리에는 서리 맞은 이파리가 바람을 쫓아 나는구나.

계산갱호사양리(溪山更好斜陽裏)에, 시내 산에는 다시 기울은 해 속에, 석양(夕陽) 속에, 좋은 석양 속에,
지대황혼월상귀(只待黃昏月上歸)다. 다못 황혼(黃昏)에 달이 떠오른 것을 기다리드라.

요새 한참 삼천리 방방곡곡 산봉우리와 시내, 단풍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서 한참 찬란하게 가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가을에 그 울긋불긋한 단풍이 오전보다도 오후에 그 따가운 햇빛 속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찬란한 그 단풍으로 물들이고 장엄된 곳에 해가 지면 이윽고 밝은 달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람은 어피차 한번 태어나면 마침내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태어나 가지고 어려서 자라고, 소년기(少年期) · 청년기(靑年期)를 거쳐서 다 배울 것 배우고 익힐 것 익혀서 청년 · 장년기(壯年期)에 나아가서 자기에 역량과 기술을 십분 발휘하고 사십 · 오십 · 육십, 노년(老年)을 향하면서 마지막 자기 인생에 끝마무리를 멋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아무리 잘했어도 늙어가면서 끝을 야무지게 마무리짓지를 못하고 잘못하면, 젊어서 잘한 보람도 없고 일생 동안 애쓴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 ‘다 먹은 밥에 코 빠진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모든 제자들이 이마를 땅에다가 짓찧면서 완전히 실신 상태에 이르도록 너무너무 슬퍼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도 부처님의 사촌으로 부처님 성도(成道)하신 날 아란존자가 태어났고, 그래 가지고 마침내 출가해서 부처님의 시봉(侍奉)을 하게 됐는데 시봉한 사람으로서 더욱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했던 것입니다.

그때 한 노스님이 “그렇게 슬퍼만 할 게 아니라 시자로서 부처님 마지막 열반하시기 전에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여쭈어야 할 일이 있느니라” “무슨 말씀을 여쭐까요?”

“첫째는 모든 경전, 나중에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마당에 ‘모든 경전 앞에다가는 어떻게 시작을 할까요?’ 그것을 여쭙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 태자(太子)로 계실 때 부처님의 마부(馬夫)를 했고, 출가하실 때도 부처님의 말꼬삐를 잡고 모신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라고 하는 사람이 부처님이 출가하시니까 자기도 따라서 출가를 했는데, 평생 동안 자기가 부처님의 마부였다고 하는 것을 배경으로 그것을 코에다 걸고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마구잽이 행패를 부리고 오직 부처님 말씀만 쫌 듣고 일체 다른 사람 말은 듣지를 않고 제멋대로 구는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를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어떻게 대처를 할까요?’ 그걸 여쭤 보고,
셋째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넷째에 가서는 ‘무엇에 의지해서 닦아 갈까요?’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질문을 해라”

그래서 부처님께, (첫째) ‘경전 앞에는, 어떻게 경전 앞에 쓸까요?’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래 놓고 경전을 주욱 결집을 해라’ 그렇게 일러주시고.
(둘째) 가루다이(찬다카, 차익車匿)에 대해서는 ‘묵빈대처(默檳對處)를 해라’ 묵빈대처라 하는 것은 ‘일체 상대를 하지 말라’ 그거거든. 잘하거나 못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말도 그 사람하고는 하지 말고 그렇게 상대를 해라 그랬어.

세 번째,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어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계위사(以戒爲師)하라, 계행(戒行)으로써 스승을 삼으라’
네 번째는 의지처(依支處), ‘무엇을 의지해서 공부를 할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네 가지 생각을 머무르는, 바르게 머무르는 관(觀)을 해라’

그런데 사렴주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몸뚱이[身]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외부 일을 요렇게 받아들이는, 정신작용에다 받아들이는 것[受]과 또 일체 경계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心]과 또 이 몸과 받아들이는 것과 또 우리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거,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 이것이 법(法)이다 그 말이여. 제법(諸法)이라고도 그러고, 법이라 그러는데, 그 법.

그래서 ① 「몸뚱이[身]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고.
② 「받아들이는 것[受]은 괴로운 것[苦]이다」 저거는 ‘좋다, 나쁘다’ 척!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떤 사물을 대했을 때 딱 받아들이거든,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거거든.
③ 우리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마음[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하고.
④ 「이 세상에 모든 것[法]은 무아(無我)다」 아(我)라고 하는 주재(主宰)가 없는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이라 하는 것은—부처님 당시에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참선법(參禪法)이 그때 없었고, 그때는 모든 제자들에게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닦은 뒤에는 이 사렴주관을 통해서 정진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는데 그것이 차츰차츰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발전해서 성숙한 것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부정(不淨)하다」고 한 것은 중생들은 이 몸뚱이 속에 피와 오줌과 똥과 피고름 모다 그런 것이 가득차 있어서 아홉 구멍으로부터 아무리 씻고 닦고 향수를 발라도 금방 뀌역뀌역 기어나온다 그 말이여. 팔만사천 털구먹 땀구먹으로 나온 것이 다 오줌이요, 다 그게 다 똥물이다 그말이여.
며칠만 안 씻으면 거기서 쉰내 · 비린내 · 노랑내 · 구린내, 별별 냄새가 다 난 것을 보면 분명 이 몸뚱이 속에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틀림이 없고, 결국은—자기 어머니는 어린 자기 애기는 아무리 똥오줌을 싸서 뭉개도 더러운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럽지 아니한 것은 아니여—늙어가면서 점점 그 노쇠해 가면서 점점 그 추태(醜態)가 드러나게 되는 거고, 결국은 병이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기 마련인데, 숨이 끊어지자마자 10분도 못 가서 오장육부가 버글버글 버글버글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그 말이여.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확실히 달관(達觀)을 해 버리면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질 것이 없고, 더군다나 남자가 여자를 볼 때에도 ‘더러운 것을 살짝 껍데기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에 그 마음이 동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인도나 중국에서는 공동묘지, 묘지에 거기는 풍장(風葬)이라 해서 시체를 땅에다 묻지도 않고 태우지도 않고 그냥 한데에다 이렇게 버려두는 그러한 그 장례법이 있는데, 그러면 모다 독수리나 새 매 그런 것들이 달라들어서 살은 다 뜯어먹기도 하고.
그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배가 고프면 가서 탁발(托鉢)을 해서 한 끼 먹고서 밤낮을 그 시체 옆에서 앉아서 그 모냥을 관(觀)하는 거여. 그러다 보면 확실히 「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하는 것을 깨닫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사렴주관(四念住觀),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한 것을, 낱낱이 따로따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네 가지를 합해서 이렇게 관(觀)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러한 수행법이 부처님 당시에 원시불교 때 많은 수행승들이 그걸 해 왔다 그 말이여.
지금도 역시 남방에 가면 그런 그 사렴주관을—비파사나(vipassanā)라고 인도(印度) 말로 그러는데, 비파사나도 세월이 감에 따라서 차츰차츰 더 자상하고 구체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법이 개발되어서 지금까지도 전해 오고 있고 일부 스님네들이 거기 가서 배워 가지고 와서 한국에 와서 또 포교를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法)은 중생의 근기(根機)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개발되고 발전되어서 어떠한 근기의 중생도 다 이 정법(正法)과 인연을 맺어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하실 때에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사렴주관으로써 의지처를 삼으라」 하신 그러한 법문의 요지가 십선, 대승십선 중계(大乘十善重戒)를 받고 화두를 타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 바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최후에 교훈을 우리는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허고  송경팔만세(誦經八萬歲)하고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을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계율을 지키기를 삼천겁(三千劫)을 하고, 경을 외우기를 팔만세(八萬歲)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을, 밥 반 그릇 먹을 동안에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다. 단정히 앉어서 실상(實相)을 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부처님께서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는데, 어째서 ‘계 지키기를 삼천겁을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을 팔만세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반식경(半食頃) 동안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너무한 표현이 아니냐?

부처님께서 계율(戒律)을 지키고 경(經)을 외우라고 한 본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형식적으로 계율 지키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경을 외우면 공덕이 장하다 하니까 그저 경만을 주야로 읽고 여러 가지 경전을 많이 읽고 그러되, 경의 참뜻을 아지 못하고 공덕에만 떨어져서 어쨌던지 많이만 읽으면 좋다하는 거기에만 집착하기 때문에—정말 경을 외우는 참뜻과 계율을 가지라는 참뜻을 알고서 ‘이뭣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 참선한 것만 같지 못하다 그거거든.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조달(調達)이 제바달타(提婆達多)가 부처님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추셨는데 조달이는 30상을 갖췄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육만 장경을 다 외우고, 모든 계율을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엄격히 스스로도 지키고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지키도록 권장을 했어.
부처님께서는 원칙적으로는 사시(巳時)에 공양(供養)을 한 번씩만 하되 나이가 많아서 병이 들거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배고픈 것을 너무 못 견디는 어린아이한테는 저녁에 약(藥)으로 조끔씩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허락을 하셨는데, 조달이는 ‘아무리 늙어서 병들거나, 아무리 어리더라도 하루 한 끼 이상은 안 된다’ 이렇게 엄격히 하거든. 그거 하나만 보더라도 어떠한 식으로 계율을 지키도록 했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그렇게 철저하게 제자들을 그렇게—자기가 부처님보다도 훨씬 더 거룩하고 훌륭하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선동하고 유혹해서 끌고 가고 그렇게 했지만, 결국은 조달(調達)이는 근본정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삿되어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마각(馬脚)이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사세(阿闍世) 태자를 시켜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가지고 부처님을 짓밟도록 그렇게 코끼리를 내몰게 했고, 부처님 행차하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바윗돌을 굴려서 부처님 다리를 다치게 했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갖다가 현혹시켜서 끌고 가서 그런 대중을 파(破)하는 그런 죄를 범했고, 연화색 비구니를 주먹으로 쳐서 즉사하게 맨들었고, 손톱 속에다 독약을 묻혀 가지고 부처님 발에 엎드린 것처럼 해 가지고 부처님을 해코자했고 이런 오역무도(五逆無道)한 죄를 지어 가지고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한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율사(律師)다, 계행(戒行)이 청정하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나를 갖다가 존경해라’ 이양(利養)을 받기 위해서 꾸며서 계율을 지키는 그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 올바르게 마음 씀과 말함과 행동을 바르게 갖는 것이고, 공부를 올바르게 하다 보면 제절로 살생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도둑질을 안 하게 되는 거고, 모든 계율은 그 가운데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부처님께서는 80세를 일기(一期)로 이승을 하직을 하셔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중생의 세계에 마치 저 달이 호수에 비치듯이, 물 있는 곳마다 그 달이 비치듯이, 인연 따라서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투셨다가 또 인연이 다하니까 또 다시 그 그림자를 거두신 것이지, 참부처님은 오고가고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서 성도(成道)하셔 가지고 49년 동안 팔만대장경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80세 열반하신 그 부처님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잊지 않고 숭배하고 추모하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믿고, 사찰마다 거룩한 상(像)으로 조성을 해서 모시고 또 가정에도 신라 백제때는 고려 때는 가정에도 다 집집마다 다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역시 가정에 많은 분들이 불상(佛像)을 모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렇게 모시는 것은 ‘항상 우리집에 우리와 같이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투철한 신념을 항상 일깨우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죽어갔다고 해서 꼭 슬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못 인연 따라서 나타났다가 인연 따라서 사라진 것뿐이지 죽고 사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표현을 그렇게 할뿐이지,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분명히 있어 가지고 정말 우리를 기쁘게 했다가, 아프게 했다가, 슬프게 했다가 그러한 현상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예나 권리나 재산과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헌디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나무~아미타불~
조제화락진소식(鳥啼花落眞消息)을  지자희이설향수(只自熙怡說向誰)오
나무~아미타불~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헌디, 불법(佛法)이 유통해서 행해지는 것이 어찌 시대에 관계할까보냐. 시대에 관계하지 않는다.
‘정법시대다, 상법시대다, 말법시대다’ 해 가지고 정법시대(正法時代)에는 불법에 의지해서 깨달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사람이 있고. 깨달은 것으로써 법을 삼어.
상법시대(像法時代),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천 년 뒤에는 상법시대인데, 상법시대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경전을 찍어 내고, 탑을 세우고 하는 모다 그러한 것이 불법이고 그것을 열심히 성의껏 잘해야 불법을 잘 믿고 불법을 흥왕하게 맨든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 왔고,

말법시대(末法時代)에는 투쟁견고(鬪諍堅固)시대여. 철저하게 도 닦은 사람도 드물고, 겨우 그저 상법시대에 그 끝으로 절이나 짓고, 불상이나 모시고, 탑이나 세우고 그렇게 하고. ‘그저 경을 읽고 열심히 염불하면 극락세계 간다’ 이렇게만 믿고 할 따름이지 정말 확철대오해서 부처님이나 조사처럼 된 분은 거의 구경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말법시대인데, 그러면 무엇을 주로 하냐 하면 투쟁견고시대여. 맨 싸움으로 일을 삼아. 승가(僧伽)라 하는 말은 화합중(和合衆)이란 말인데, 화합해서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맨 싸움 파벌싸움 싸움을 한다.
이러한 말이 옛날부터서 『멸의경(滅義經)』 같은 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이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이구나!’ 이렇게 수긍이 가나, 정말 참불법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법시대라고 해서 깨달을 수 있고, 말법시대라고 해서 정법은 없어져 버리고 아무리 닦어 봤자 깨달을 수 없다’고 한 생각은 참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의 표현이 아니여.

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이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또 부정불구(不淨不垢)인데, 어찌 시대에 따라서 그것이 변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우리의 생각이 ‘아! 말세니까 말세에는 투쟁만 견고해지고 싸움만 모다 하고 닦어 봤자 견성성불도 못한다’ 그러한 말에 현혹되어 가지고 수행을 그러한 생각을 속에다 품고서 수행을 한 것과,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하는 것과는 영판 천지 차이(天地差異)가 있는 것이여.

부처님 당시에도 새는 숲속에서 노래하고, 꽃은 봄에 꽃은 피었다가 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었을 것입니다.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는 바로 거기에 진리에 참소식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자희이설향수(只自熙怡說向誰)오. ‘다못 이 새 노래하고 꽃이 피고 지고 하는 이 속에 참소식을[鳥啼花落眞消息] 다못 내 스스로 즐길지언정 누구를 향해서 이 도리를 말할까’ 하는 고조사(古祖師)에 게송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정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기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그 법에 의지해서 항상 열심히 닦아 가는 사람은 더욱 다행한 일이고.
‘이것밖에는 다시는 우리가 눈을 돌리고 마음을 쓸 곳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 받아 나기 어려운, 태어나기 어려운 몸을 받아 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그 정법에 의해서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보다도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숨이 지고 세세생생에 이 법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오직 이 한 일을 향해서 나에 모든 것을 바치리라’ 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해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는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은 그 사람에게는 따 논 당상(堂上)이여. 틀림없이 그 사람에게는 견성성불이 약속되어진 것입니다.(처음~43분15초)





(2)------------------

「삼천 겁(劫)을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고, 팔만장경을 다 외운 것보다도 밥 반 그릇 먹은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이 더 낫다」고 한 그 말씀을 깊이 새겨서 음미를 해 본다면 우리는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참선을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 ‘정말 내가 이 말세에 어떻게 해서, 전생(前生)에 무슨 선업(善業)을 지었기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을까’ 세상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거나 말거나, 집안에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럴수록에 더 열심히 ‘이뭣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한 국토에 태어난 거, 함께 태어난 것은 일천 겁(劫) 동안을 함께 선근(善根)을 심은 결과고, 하루 동안 같이 어디를 동행을 하는 것은 이천 겁 동안을 같이 선근을 심은 그 결과고, 하룻밤을 같이 자는 것은 삼천 겁 동안을 선근을 같이 심은 인연이고, 한 고을에 같이 동족으로 태어난 것은 사천 겁 동안의 인연이고, 한 마을에 함께 살게 된 것은 오천 겁의 인연이고, 하룻밤을 한 벼개를 베고 동침을 하는 것은 육천 겁의 인연이고, 한 집안에서 한 식구로 같이 살게 된 것은 칠천 겁 인연이고, 부부간으로 사는 것은 팔천 겁 인연이고, 형제간으로 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인연은 구천 겁 인연이다. 부모나 부모자식 간 또는 한 스님과 상좌로 태어난 것은 십천 겁, 만 겁 동안에 거쳐서 함께 선근을 심은 인연으로 그렇게 된다」 하셨어.
그러니 우리가 한 가정에 부부나 형제나 부모자식, 부부간 이렇게 태어난 인연이 얼마나 지중(至重)한가를 알 수가 있고, 이렇게 한 법당에서 사부대중이 같이 이렇게 법문을 듣는 것은 몇억천 겁 인연이다 그 말이여.

그런 깊은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같이 만났다면 우리는 그런 깊은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든지 좋게 생각하고, 다 풀어버리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내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풀어버림으로 해서 또 상대방도 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집안에도 화합 평화가 오고, 온 직장에도 서로 화합이 통하고, 사찰에도 스님네끼리 노소 · 선배 · 후배가 서로서로 다 화합하고, 신도들끼리도 서로 다 화합을 하고 스님네와 신도들까지라도 서로 마음과 마음이 합해져서 함께 불법을 믿고 닦아가는 좋은 인연으로 승화(昇華)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잡비유경(雜譬喩經)』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뱀이,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을 하기를 “내가 응당 내가 더 위고, 내가 더 크다” 그러니까 꼬리가 머리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더 크고, 내가 더 우선이고, 내가 더 어른이다”

머리가 “나는 귀가 있어서 뭔 소리를 들을 줄도 알고, 눈이 있어서 무엇을 볼 줄도 알고, 입이 있어서 모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또 어디를 갈 때는 항상 내가 앞서가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그러지도 못하고 하니, 너는 나를 의지해서 살아야 하고 나를 따라댕겨야지, 니가 무슨 나보다 더 크고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냐”
꼬리가 말하기를, “니가 생각을 잘못한 거다. 내가 너를 앞세우고 가는 것이지 내가 너를 따라간 것이 아니여. 내가 너를 가도록 해 주니까 니가 가지, 내가 만약 안 갈라고 마음을 먹고 딱! 마음을 먹으면 너는 못 가. 그 니가 멋대로 간 것 같지마는 내 허락이 있어야 가지, 내 허락 없이는 못 가니까 내가 더 어른이지 니가 더 어른이냐. 내가 한번 보여 줄 테니까 봐라“ 나무를 갖다가 칭칭 틀어 감고 ”어디 가보고 싶으면 가봐라”

3일 동안을 나무 틀어 감은 것을 풀어주지 아니하니까 뱀이 꼼짝을 못해. 배가 고파도 갈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결국은 개구리 한 마리도 못 잡어먹으니까 배가 고프단 말이여.
그래서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나 놔라. 날 풀어줘. 니 니가 정말 니가 크다. 니가 어른이니까 이거 좀 꼬리를 풀어 줘라. 풀어다오” 하니까, 꼬리가 그 말을 듣고서 즉시로 떠억 풀어 주었다 그 말이여.
머리가 꼬리에게 말하기를 “그래 내가 니 말이 옳다고 했으니 인자 어디 갈 때도 니가 앞서가라, 내가 뒤따라가마”

꼬리란 놈이 앞서 가지고 뿍뿍뿍뿍뿍 기어간다 그 말이여. 머리는 인제 꼬리 따라가는 대로 끌려서 꺼꿀로 가는데, 몇 걸음 못 가서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뱀이 결국은 죽었다 그 말이거든.
어리석은 중생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가 잘났다고 그러고, 인아상(人我相)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을 비유해서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말세(末世)가 되어 가지고 도처가 싸움입니다. 정부도 정치도 여당 야당이 싸우고, 회사도 노사분규가 일어나서 싸우고, 가정도 그저 서로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고, 부부간에도 싸우고 도대체가—‘비 온 끝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 있어서 싸운 끝에 정이 더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 싸움이 한 번 두 번이라야지 사사건건이 의견 충돌해 가지고 되는 일이 없다면 그 문제가 있는 것이고.
여당 야당도 서로 건설적인 안을 내세워 가지고 서로 그렇게 하다가 좋은 쪽으로 가결을 봐 가지고 잘해 나기기 위한 것은 참 좋지마는, 싸움을 위한 싸움은 이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부간에도 처음에는 다 좋아서 결혼을 했겠지마는, 살다 보면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그러고, 자기 맘대로 할라고 그러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그러다가 보면 싸움이 습관이 되고, 싸움 안 하면 밥맛이 없어.
부부간에 싸움은 속전속결, 간단하게 몇 마디하고서 서로 상대방의 말이 옳으면 ‘아! 당신 말이 옳소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되어야지, 그 싸움이 장기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냉전으로 들어가 가지고 서로 부부간이 아주 지긋지긋하게 뵈기도 싫어지고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되고, 그 불행이 자녀들한테로 떨어지게 된다면, 뱀이 머리하고 꼬리가 서로 싸우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 말이여.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가정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 한번만 착! 돌이키고 보면 ‘하! 허허’ 웃고 말아 버릴 것이고, 상대방의 단점을 들어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아 직장에 나가서 여러 가지 복잡한데 하루 종일 일하고 오니 얼마나 피곤할까’ 좋게 생각하고, ‘처자를 위해서 저 애를 쓴다’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집에서 모다 살림하니라고 애쓴다‘고 생각하고, ‘어디 답답한데 어디 좀 나가 보라’고 하기도 하고.
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을 그렇게 생각해서 서로서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보고보고 또 볼수록 더욱 좋지, 왜 그것이 지긋지긋한 웬수로 보일 것이냐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합을 해야 부모에게도 효도를 할 수가 있고,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되는 법이거든.

부모에게 불효(不孝)한 사람은 불효한 자식을 동시에 맨들게 돼요. 그 어린 자식이 부모한테 불효한 것을 봤기 때문에, 어려서 밤낮으로 그걸 봤기 때문에 그놈이 커서 오죽 불효를 잘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배운 것이 그것밖인데. 뭐라고 그런 법이 아니라고 하면 ‘엄마아빠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했냐?’고 대든 통에 꼼짝을 못하거든.
그래서 가정이 부부간에 화목을 해야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자기도 효자 효녀 효부를 만나게 되는 것이여. 그렇게 될 때 그 집안에 복(福)이 들어온 것이지, 집안이 화목을 못하고 무슨 복이 들어올 것이냐 그 말이여. 들어올려고 한 복(福)도 다 머리를 돌리고 다른 집으로 가 버릴 거다 그 말이여.

부부간에 화목을 할려면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만심(我慢心)을 버려야 되거든. 내 마음을 비우게 돼, 그럼.
억지로 거 항아리 속에나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은 자꾸 꺼꿀로 들고 흔들고 퍼내 버리면 비어지는데, 우리의 자존심은 병원에 가서 가슴을 열고 해부를 해도 소용이 없고, 뭔 독한 약을 먹고 헹궈 낼 수도 없고, 무슨 수가 있냐 하면 자꾸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를 하면 비워지는 거여, 이게. 다른 도리가 없어.
머우대로 쑤셔내도 그것은 안 없어지고 별짓을 다 해 봤자 안 비워져. 창자는 비워지는데 우리의 마음은 안 비워지거든.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심(貪心)도 없어지고, 썽내는 마음도 없어지고, 어리석은 마음도 없어지고 자꾸 맑아져서 결국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면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국토가 극락세계로 변하는 것이고, 정법시대가 되는 거여.
누구한테 미룰 일이 아녀, 이것은. 스님네한테 미룰 일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한테 이걸 미룰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하거든. 이 세계의 주인은 낱낱이 자기여. 낱낱이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거든.

하늘에 뜬 달이 그건 누구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는 사람이 주인인 거여. 해도 역시 그렇고 별도 그렇고, 요 허공에 모든 공기도 자기가 소유거든. 자기가 그것을 좋은 달로 맨들고, 좋은 공기로 맨들고.
산도 소유권은 국가가 소유권이 되는 산도 있고 개인이 소유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가다가 그 산에 가면은 그 산이 자기의 소유고, 흐르는 시냇물이 흘러가는 물이 주인이 있을까마는 자기가 그 시냇물을 보고 시냇물에 손을 씻고 발을 씻으면은 그 시냇물이 자기 소유여. 약수터에서 풍풍 쏟아지는 물이 임자가 없겠지마는, 그래도 그 물을 먹은 사람이 그이가 주인이라 그 말이여.

기차나, 자동차나, 비행기나, 도로나 모든 것이 자기가 그것을 보고 자기가 그것을 수용을 하는 동안에는, 돈을 내고 비행기를 타더라도 그 비행기는 자기가 타는 동안에는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걸어가면 그 도로가 자기의 도로거든. 우주 법계가 다 자기가 소유여.
우주 법계를 자기가 소유할려면은 ‘이것은 내 것이다’고 한 생각을 버리면은 제절로 다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소유로 되는 거여. 제일 부자가 되는 길은 어쨌든지 긁어 모아 가지고 몇백 억 재산가가 되고 갑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놔 버린 것이 법계(法界)에 대주인공(大主人公)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불법(佛法)에 철저하게 불법에 귀의(歸依)해서 이 최상승법을 닦으면 법률도 사실은 복잡한 법률도 필요 없어. 형무소도 필요가 없고, 큰 재산도 그렇게 필요가 없고, 명예 권리도 그렇게 필요가 없어.
뭐 요새 고속도로에서 휴지를 버리면 뭐 3만원, 가래침 뱉으면 얼마, 담배꽁초 버리면 얼마, 지금 법이 오직 사람들이 지각이 없어 가지고 그렇게 하니까 그러한 법까지 만들겠습니까. 다 담배꽁초 버린 사람이 없고, 휴지를 버린 사람이 없다면 뭐 할 일이 없어서 그런 법을 맨들겄냐 그 말이여. 그 법을 맨들게 한 사람이 바로 국민들이다 그거거든.
국민들이 다 자각을 하고 정말 정법을 믿고 전부 ‘이뭣고?’를 해서 자기의 삼업(三業)을 청정히 한다면 법률은 점점 간소화 될 것이다 그 말이여. 뭐 순경도 그렇게 많이 필요도 없고, 순경 경찰 안 하고 다른 생산직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한 마음 돌이켜서 우주 법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고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으로 변하는 것이여. 온 사회가 살기 좋고 간 곳마다 전부가 다 한집안 식구요, 간 곳마다 도반(道伴)이요, 간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 보살화현(菩薩化現)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거거든. 이것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그것이 가능한 것이여.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중생심을 발동을 하고, 탐욕심(貪欲心) 진심(瞋心)을 발동을 하면 갈수록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가정이고 직장이고 간 곳마다 아귀(餓鬼)와 나찰귀신(羅刹鬼神)이 득실거릴 거다 그 말이여.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는 참 좋은 사람이고, 참 법이 없어도 살 그런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모다 못되어 갖고 이 세상이 이렇게 된다’ 생각하거든.
다 ‘자기가 나쁜 놈’이라고 한 사람은 술이나 먹으면 그런 소리할까, 바른 정신 가지고서는 자기 나쁜 놈이라고 생각 안 해. 술을 잔뜩 먹으면 울면서 ‘야 내가 나쁜 놈이여, 내가 나쁜 놈이여’ 술 깨면 ‘자네가 나뻐’ 이러거든.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술도 가끔은 그 필요한갑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이라는, 술 잔뜩 취해 가지고 부처님 계신 데 와 가지고 “나 스님이 되겄다”고 한 바라문이 와서, 부처님이 당장 제자를 시켜서 머리를 깎게 하고 그 입고 온 옷을 벳기고 가사(袈裟)를 딱 수(垂)해서 저 제일 말석에다 딱 앉혀 놓으니까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했기 때문에 아무 정신없이 픽 쓸어져서 잤다 그 말이여.
실컨 자고 일어나더니 눈을 떠서 자기 옷을 보더니 가사(袈裟)가 입혀져 갖고, 머리를 만져보니까 홀랑 깎아졌다 그 말이여. “나 중노릇 안 한다”고, “내 옷 내놓으라”고 해 가지고, 옷을 내주니까 그놈 입고 똥이 빠지게 도망쳤다 그 말이여.
그래 제자가 부처님께 “왜 그 술 취한 놈을 갖다가 머리를 깎아 갖고 저렇게 도망가게 만드셨습니까?” 항의를 했거든.
“그놈이 술 취한 그 시간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어 보겠느냐”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에는 누가 중이 된다고 하면은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해 가지고 ’이 사람이 확실히 출가해서 도 닦을 발심(發心)을 했냐 안 했느냐, 또 눈동자는 바로 백혔는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과연 이 사람은 출가했으면 좋겠다‘ 할 때, 그러면 행자(行者)로 받아들이고 꽤 엄격하게 그렇게 했었는데.
이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 법문을 경전에서 보고부터서는 누구든지 오겠다 하면 ‘그래 있어 봐라’ 있으면 한 일 년간 행자 생활을 하고—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소지도 하고 빨래하고, 대중스님네 시봉(侍奉)도 하고 운력(運力)도 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일을 다 겪으면서 일 년 이상을 참고 대중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않고 하면 그때 계(戒)를 주어 받도록 하고, 그 안에 참지 못하고 간다는 사람은 ‘그래 가거라. 가더라도 니가 그동안 절에 있는 그 공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또 가겠단 사람 또 억지로 붙잡지 않죠.

여러분들도 ‘내가 말세다, 여자다, 늙었다, 이렇게 몸이 아프다’ 그러한 것을 핑계 대고 참선(參禪)을 안 할려고 하지 말고, 밥 반 그릇 먹을 동안만이라도 탁! 앉아서 하면 그 공덕(功德)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씨를 심어 논 것이거든, 그게.
그래서 그동안에 염불을 하신 분, 그동안에 경전을 외우고 천수경을 외우신 분들도 그거 한 만큼 공덕은 다 없어지지 않고 앞으로 참선하는 데 좋은 기초가 되고 밑거름이 될 것이니까, ’그동안에 했던 거 아까워서 이뭣고? 못 한다‘ 그러시지 말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술 취한 바라문이 ’술 취한 동안에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그 공덕으로 언젠가는 출가해서 성불을 할 것이다‘고 부처님께서는 수기(授記)를 주셨어. 하물며 멀쩡한 맑은 정신으로 불법(佛法)을 의지해서 수행을 한 공덕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산승(山僧)에 이런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셔. 그렇게 된다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정에 들어가면 지긋지긋하다’고, ‘마누라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안 들어간다’고, 왜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어서 집으로, 직장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쏜살같이 돌아오도록 분위기를 그렇게 맨들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억지로 소지를 해 놓고, 꽃을 갖다 꽂아 놓고, 구석구석이 카튼에다가 향수를 뿌려 놓고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보만 고치면 되거든. 마음보만 타악! 고쳐. 편안하거든. 자기도 편안하고 사람도 편안하면 그거야 돈 하나 안 들고도 가정을 편안하고 좋은 보금자리로 변하는 방법이 바로 그거거든.

책임은 각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은 다 불보살(佛菩薩) 화현(化現)이다’ 자기한테 잘해 줄 때만 ‘나 참 내가 시집 잘 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못해 줄 때 ‘야! 저 사람이, 불보살 화현이 나를 제도할려고 일부러 저런 역행법(逆行法)을 쓰는구나’ 그렇게도 생각하면서 항상 자기를 고칠라고 노력을 해야 되거든.

남을 고칠라고 자기가, 꽁지가 지가 어른이라고 내다가 불구덩이, 물구덩이 빠질라고 하지 말고, 항상 꼬리는 머리를 애껴주고, 머리는 꽁지를 억지로 억압할라 하지 말고, 서로 꽁지 없이 머리가 어떻게 존재하며, 머리 없이 어떻게 꽁지가 존재하냐 그 말이여. 내나 한 몸뚱이인 것을.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먹은 것이 그것이 바로 대승 사상(大乘思想)이거든, 대승! 소승적인 사상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자기 일신(一身)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차라리 오직하면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대승심은 자기도 좋고 남도 좋고 항상 남을 위하고,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극기추상(克己秋霜)이요 대인춘풍(對人春風)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환영을 할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모다 환희심을 낼 것이고, 그 사람을 보면 다 삐뚤어진 마음도 바로잡아 질 것이다 그거거든.

오늘이 입동(入冬)입니다. 오늘부터 이 겨울 계절이 시작된 날입니다. 앞으로 차츰차츰 날씨가 추워질 것이고, 눈이 내리고 거센 바람이 불 테니 모다 감기에 조심하시고.
‘모든 병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셨으니 마음보를 잘 쓰고 항상 흐뭇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살고, 다른 사람도 마음도 기쁘게 해 주고, 감사한 마음이 나도록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대한다면 우리의 질병도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다시 또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반(半)에 반(半)으로 줄어질 것이고 해서 우리는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결정코 금생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43분16초~1시간12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낙일추광만취미(落日秋光滿翠微)~ /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려고 할 때에 여쭌 4가지 질문 ①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경전을 결집할 때 모든 경전 첫머리에 어떠한 말을 써야 합니까? ②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육군비구(六群比丘)나 차익(車匿)과 같이 악한 비구와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합니까? ③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까요? ④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를까요?

사렴처관(四念處觀), 사렴주관(四念住觀), 비파사나(vipassanā). 「몸뚱이[身]와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 마음[心]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법(法)이 다 괴로운 것[苦]이고 더러운 것[不淨]이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한 것이다」
사렴주관이 차츰차츰 발전해서 중국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오셔서 결국은 참선법으로 성숙하였고, 참선법 가운데에도 육조(六祖) 스님 이후로 차츰 이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까지 발전해서 오늘날 정법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깨닫고 생사해탈하도록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 현재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지도하신 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면 그 속에 이 사렴주관이 고대로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고 하는 생각을 철저하게 달관하기 위해서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 앞에다 따악 자리를 정해 놓고 완전히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그래 가지고 뼈다구가 앙상하니 드러날 때까지 아홉 가지 단계[九想]로 그것을 여러 해를 걸려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여.

(게송)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 /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근본 뜻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지킨 것을 강요하시지 안 했습니다 / 계율을 지키는 본(本) 바른 뜻을 알아서 올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치에서 본다면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 불법유행불관시(佛法流行不關時)~ /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 / 법(法)에는 정법 말법이 없고 즉심(卽心)이 변시(便是)다. 이 마음 있는 곳에는 바로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그 마음자리를 찾으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

『잡비유경(雜譬喩經)』에 ‘뱀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다투다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었다’라는 비유의 법문 / 마음 하나만 바로 돌이키고 보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거여. 그럴려면 ‘이뭣고?’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 취한 바라문(婆羅門)의 출가 일화 /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항상 ‘이뭣고?’를 앞세우고 사시면은 있는 발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그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주 법계가 그냥 부처님의 몸뚱이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영겁 동안을 생사윤회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하지 마라’ 하셨거든 / 극기추상(克己秋霜) 대인춘풍(對人春風), 자기를 갖다가 다스리는 데는 추상(秋霜)같이 하고, 다른 사람 상대하는 데에는 봄바람[春風]같이 해라.


모든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짓는 모든 죄가 근본은 마음에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짓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삼독심을 거두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제절로 계율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을 다스림으로써 지엽(枝葉)이 제대로 무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 뿌리를 잘 북돋우고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비료를 주게 되면 가지는 제절로 무성해지는 거와 같고, 뿌리가 다 드러나고 거름을 주지 않고 수분이 부족하면 아무리 이파리를 갖다가 잘 키우게 할라고 한다 해도 그 나무는 시들어 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법회(法會)를 법당에서 이렇게 매월 이렇게 모시고 법회 때마다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새벽마다 예불(禮佛)을 드리고 사시(巳時)에는 마지(摩旨)를 올리고 한 것도 역시 ‘항상 부처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그러한 공경하는 마음과 믿는 마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행여나 그러한 생각이 식어질까 등한해질까 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사찰에 모든 법도(法度)가 그렇게 제정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이 우리 몸밖에 계신다’고 처음에는 믿다가 차츰차츰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바로 우리 낱낱이 우리의 몸뚱이 속에 부처님이 바로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온갖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더러운 것이 묻지 못하고, ‘더럽다 깨끗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불어났다 줄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백천만 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한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 우리의 부처님은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한 것을 우리는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생사가 있는데도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셨거든.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조사(祖師)를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믿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실 현실 사회에서는 분명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하신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생사(生死) 속에 생사가 없는 이치를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에 관계가 없어.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천 년이나, 부처님 열반하신 뒤 삼천 년이 지내나,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자리는 즉심(卽心)이 변시(便是)여.
우리의 곧 마음이 곧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철저한 신념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정법(正法), 말법(末法)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말법이라고 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닫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거거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바르게 닦되 생명을 바쳐서 열심히 닦는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01~525)2021. 6. 30. 20:20

 

 

((No.512))—1993년 하안거해제 및 백종, 백일기도회향(93.09.01) (59분)

 

 

(1/3) 약 22분.

 

(2/3) 약 20분.

 

(3/3) 약 18분.

 


(1/3)----------------

당하지귀아시수(當下知歸我是誰)오  의정거처요분명(疑情擧處要分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심량중복탁(莫把心量重卜度)하라  혜등호향풍전속(慧燈好向風前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당하지귀아시수(當下知歸我是誰)오, 당하(當下)에, 즉하(卽下)에 ‘내가 이 누군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의정거처요분명(疑情擧處要分明)이다. ‘이뭣고?’ 이 의정(疑情) 일어나는 곳에, 화두를 척! 들어 일으키는 곳에 분명(分明)함을 요하느니라.

막파심량중복탁(莫把心量重卜度)하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이리저리 점치고 따지고 그러지를 말아라 그 말입니다.
혜등호향풍전속(慧燈好向風前續)이니라. 지혜의 등불을 바람 앞을 향해서 잘, 꺼지지 않도록 이어갈지니라.

오늘은 계유년 음력 7월 15일 하안거 해제날이고 또 백중날입니다.
하안거 해제는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해서 오늘 해제를 하는데 용주사 · 위봉사 · 세등선원 각처(各處)에서 정진(精進)을 하던 도반들이 오늘 용화선원에 모여서 함께 이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석 달 동안 그 더위와 혼침(昏沈)과 산란(散亂)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정진을 한 그 도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해제 법요식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7월 15일 해제를 기해서 백중(百中) 천도재를 거행하는데, 백중날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 목련존자(目連尊者)가 그 어머니 청제부인이 생전에 지은 죄로 지옥에 떨어져서 만반고통(萬般苦痛)을 받고 있을 때 그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서 갖은 정성을 다했지만, 목련존자의 그 신통술로도 어찌하지 못해서 그래서 부처님께 간절히 “우리 어머니를 천도(薦度)해 주십시오. 저 무서운 지옥고로부터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간청을 했습니다.

“그 어머니를 구제하는, 아귀도 지옥고에서 백 가지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어머니를 구제하는 방법은 해제날 대중공양을—백 가지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해제에 모인 대중 스님들께 공양(供養)을 올려라. 그럼으로써 그 공덕으로 너의 어머니가 지옥고로부터 구제를 받을 수가 있느니라”
이렇게 해서 그때부터서 삼천년이 되도록 인도 · 동남아 · 중국 · 한국 · 일본, 이렇게 내려오면서 7월 15일 백중날, 지옥고에 신음하고 있는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선원 부처님 앞의 탁자에도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의 정성 어린 공양구(供養具)가 많이 쌓여져 있습니다.
모르는 분은 영가(靈駕) 위패(位牌) 앞에 많이 차려놓고 영가들을 위해서 '영가들 훈감하라'고 이렇게 많이 갖다 놓은 걸로 착각을 하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첫째, 부처님께 올리고 그다음에는 대중 스님네께 올리고 또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도 공양하고, 이러한 공양(供養)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7월에는 해제 때를 기해서 전국 각 사암(寺庵)에서 또 방생(放生) 법도 많이 행하는데, 이 방생이라 하는 것도 대단히 뜻이 깊은 것이어서 ‘죽어가는 생명을 놓아준다’ 그래서 방생이라 그러는데. 방생에는 흔히 자라나 잉어 등 어류(魚類)를 많이 사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강물이나 호수나 그런 데에다 모다 많이 놔주고 그러는데.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생존(生存) 시에 많은 방생을 하셨습니다. 차떼기로 엄청난 고기를 갖다가 사서 방생을 하시고 몇백 관(貫)씩 이렇게 하셨는데, 마땅히 조실 스님의 법을 신(信)하는 우리로서는 조실 스님의 그런 행하시던 좋은 일을 본받아서 우리 용화선원에서도 방생 법회를 갖음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전강 조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방생을 하지 안 하고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왜 그 방생을 하지 않았냐? 마땅히 그런 좋은 것을 왜 안 하고 있나?' 신도들로부터 종종 요청도 있었고 그런 질문도 받았습니다마는.
원래 방생의 뜻이 죽어 가는 사람, 죽어 가는 동물—비단 꼭 물고기뿐만이 아니라 육지에서 사는 동물, 하늘에 나르는 새, 무엇이고 죽어 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나아가서는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비심, 자비 종자(種子)를 잘 증장을 시키고, 그래서 어떠한 종류의 생명이라도 그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자기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어 가고 있는 그러한 생명을 그걸 놔주자, 죽지 않도록 해 주자’는 데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월 해제라든지, 7월 해제를 기해서 전국 사찰에서 방생을 한다 해 가지고 며칠 전부터서 고기 장수에게 부탁을 해 가지고 ‘자라를 이백 마리, 잉어를 몇백 마리 그리고 뭐 미꾸라지를 몇백 관, 이렇게 어김없이 그날 잡아다가 놔라’ 이렇게 미리 계약을 해 가지고, 그 고기 장수는 그날 그만한 양을 대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살로 자라를 찍고, 그물로 고기를 잡고 해 가지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전에 더러 보면 자라 등어리에 작살이 찍힌 자죽이 있는 자라도 보았습니다.

그 자라들이 입이 있어서 말을 한다면 또는 그런 잉어나 고기들이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방생 법회인가 뭐 그것 때문에 이렇게 등어리에 작살을 찍히고 우리는 이렇게 곤욕(困辱)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고 스님네한테 원정(原情)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연히 강변에를 갔다든지, 우연히 바닷가를 갔다든지 해서 ‘자라가 잡혀서 죽게 된다 또는 잉어가 죽어 가게 되었다’ 이럴 때에 자기에게 있는 돈을 털어서 사 가지고 그래 강에다도 놔주고, 바다에다도 놔준다면 그건 대단히 좋은 방생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흥부(興夫)가 우연히 제비 새끼가 떨어져서 발목이 부러져서 버르적거리고 있는데 그걸 가는 실로 잘 짬매서 약을 발라서 그걸 나꾸어 가지고 날려 주어서 그래서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어 가지고 그렇게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니까, 그 형 놀부는 멀쩡한 제비를 후려잡아 가지고 다리를 부질러 가지고 그놈을 짬매서 날려 주어 가지고, 그 참 엄청난...
그 재미있는 내용의 흥부전(興夫傳)을 여러분도 봐서 아시겠지만, 마치 전국 사찰에서 행하는 방생 법회라 하는 것이 놀부가 하는 그러한 식의 방생이 된다면, 방생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강 조실 스님 생존 시에 제가 조실 스님께도 말씀드렸는데 “그런 고기를 몇백 관씩 차떼기로 해서 방생을 하신 것도 참 좋은 일인데, 우선 대중 가운데에 병 있는 대중에게 약을 먹이고 병을 치료해 준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씀도 여쭈었는데, “누가 아프냐?”
“아무개가 치질로 앓고 있습니다”
“그럼 진즉 나한테 말하지, 말을 않으니 내가 치질을 앓는지, 치통을 앓는지 내가 알 수가 있냐? 왜 너는 나를 무자비한 사람을 만드느냐” 이렇게 해서 꾸지람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마는.

여러분들도 방생은 7월 백중이나 정월 보름을 기해서 정기적으로 행사로써 그렇게 방생하는 방생보다는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날짜를 정하지 않고서 언제라도 죽어 가는 그런 생명이 있으면 살려주고, 사람도 병들어서 돈이 없어서 죽게 된다든지 그런 사람이 있으면은 그럴 때에 우연히 자비심이 발동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행해져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기는 연전(年前)에 '외국 화물선을 타고 저 남미를 가는데, 갑판에 올라가서 그 선원이 바람을 쐬다가 발을 헛디뎌서 바다에 떨어져서 밤중에 영락없이 죽은 줄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 배가 짐을 풀고 다시 돌아오면서 보니까 저만큼 바다에 까마니 무엇이 떠다닌 것이 보여서 그래 망원경으로 보니까 그 전날 물에 빠져서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물에서 떠다닌다 그 말이여.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큰 거북이를 타고 해상에 이렇게 떠돌고 있어서 그래서 건져 냈다. 알고 보니 그 선원의 어머니가 신심이 있어서 항상 방생을 행했다. 자라도 많이 놔줬다' 이런 이야기도 신문에 난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어떤 사람은 음식점을 하는데 파리 한 마리도 안 죽였어. 그리고 음식에 혹 파리가 빠지더라도 그것을 좋게 건져서 습기를 제거해 가지고 날려 주고. 그 음식점을 하니 얼마나 많은 파리가 성가시게 했겠습니까마는, 될 수 있으면 한 마리의 파리도 죽이지 않고 그렇게 날려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죄에 혐의로 잡혀 들어가 가지고 영락없이 살인 혐의(嫌疑)를 받아 가지고 그렇게 죽게 되었는데, 판사가 '사형(死刑)'이라고 이렇게 판결문을 쓰려고 하면 붓 끄터리에 파리들이 모여들어서 글씨를 도저히 쓸 수가 없어. 그래서 그 파리를 내키고 다시 쓰려고 하면 또 모여들고 모여들고 그래서 그 사람 보고 “평소에 네가 파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저는 별거 없고 음식점을 하는데 약허약허했었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파리 한 마리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고 죽이지 않는 사람이 어찌 사람을 죽였겠느냐?' 다시 여러 가지로 심사를 해 가지고 알아본즉 모략에 의한 애매한 혐의로 잡혀왔다는 것을 알아서 석방이 된 그런 일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몸에—요새는 약이 많이 발달이 되어 가지고 '이[蝨]'를 구경할래야 할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몸에 '이'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가 드글드글했었습니다.
그럴 때에도 '이'를 죽이지 않고, ‘이[蝨]도 저도 살라고 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걸 뚝뚝 죽일 수가 있느냐’ 해서 '이'도 안 죽이고 항상 가려우면 슬슬 긁고 그렇게 살았는데, 어떤 원결(怨結) 관계가 있어 가지고 그 사람이 자고 있을 때 자객이 칼을 품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보니까, 가슴에 벌써 누가 한 걸음 먼저 와서 가슴을 찔러서 죽였다 그 말이여. 벌거니. 그래서 칼을 들고 찍을려다가 도로 가버렸어.

그런데 사실은 그 몸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스스로 부딪치고 해 가지고는 몸에 있는 피를 터뜨려 가지고 마치 칼에 찔린 것처럼 그렇게 보여서 '이'들이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했다. 그러한 설화도 전해오고.(처음~21분39초)





(2/3)----------------

또 어떤 큰 부자는 집안에 어떻게 쥐가 많던지 창고에도 몇백 마리가 드글드글 끓고, 온 집안에도 쥐 때문에 살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쥐덫을 놔라. 쥐약을 놔라’ 모다 그랬지만 “아니다. 저 쥐들도 나와 인연이 있어서 우리집에 와서 사니, 쥐가 아무리 많이 먹는다 해도 사람 먹을 것은 남겠지. 죽이지 말라 해 가지고 살렸는데, 하루는 쥐들이 수백 마리가 마당에 모여 가지고 쥐들이 춤을 춘다는 거여. 그래서 온 집안 식구가 나와서 야단이여.
그래서 그 주인도 그걸 구경하러 마당에 나와서 그걸 구경을 하는데, 나오자마자 대들보가 부러져 가지고 집이 왕창 가라앉았다 그 말이여. 그 주인이 쥐들의 춤을 구경하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으면은 영락없이 대들보와 서까래에 깔려서 즉사(卽死)를 했을 것이다. 그런 쥐들도 자기네들의 생명을 그렇게 죽이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해서 은혜를 갚았다 이거거든.

이런 것으로 보면 쥐나 파리나 또는 몸의 피를 빨아먹는 '이'까지도, 하물며 영특한 자라라든지 용이 되어갈 잉어라든지 그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이' 같은 그런 작은 존재도 자기의 생명의 은혜를 알더라 그거거든.부처님 말씀에 「사람이나 동물이나 저 꿈적꿈적한 준동함령(蠢動含靈)까지라도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시는 그 말씀이 이러한 설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정말 믿어지는 것입니다.

사람 몸을 빨아먹는 '이'를 죽이고,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 또 변소에 가서 더러운 곳에 앉았다가 그 발에는 균이 드글드글할 텐데, 그 발로 밥상에 날아와서 앉고, 응당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도 인간에 해를 끼치는 그런 해충을 약을 써서 구제(驅除)해야 할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그러한 작은 벌레도 자기가 살라고 하는 그 생명력, 스스로 그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벌레까지도 차마 죽이지 못하는 그러한 마음이 어찌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법정 스님의 수필집에 보니까, 모기가 가면서 그 며느리 보고 ‘오늘 내가 나가면은 어떤 모진 사람의 손바닥에 맞아서 내가 죽을는지도 모르고, 다행히 그렇지 않은 분을 만나면 다시 살아올는지도 모르나, 하여튼 잘 있거라’ 그리고 나갔다고 그러는데.
모기가 와서 붙어 가지고 피를 빨아먹으면 무의식 중에 탁! 쳐 가지고 죽이기도 하고 또 모기가 날랜 놈은 또 피해서 도망가기도 하겠는데, 정말 요새처럼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당하는 세상은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교통사고로도 날이면 날마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무슨 공사장에서도 실수로 많이 죽고, 비행기가 떨어져서 죽고, 기차가 가라앉아서 죽고, 자동차가 접촉 사고로 죽고 또 강도로 죽고, 자식이 애비를 죽이고 일가족을 죽이고 해서 날마다 사람이 죽이고 죽는 그러한 생명을 경시하는 그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정말 깊이 반성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기 목숨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면 동물의 목숨도 소중합니다. 자기의 목숨이 참으로 소중한 줄 안 사람은 남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인간의 목숨이 소중한 줄 알면 동물의 목숨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나아가서는 동물뿐만이 아니라 식물, 더 나아가서는 자연환경까지라도 정말 소중히 할 줄 알아야 그것이 바로 문화인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성을 바로 지닌 사람의 행위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歸依)해서 정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법보재자(法寶弟子) 여러분! 정말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게송(偈頌) 속에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요,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기러기가 놀다 간 모래사장에는 발자죽만 남아 있고, 사람은 황천(黃泉)에 갔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더라’(人去黃泉名在家) 그런 게송을 읊으셨는데, 정말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명예나 권리나 재산이나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영원성이 없는 무상(無常)하고도 허망한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보다 더 자기가 많이 소유하고 갖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짓밟고,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고 이러한 풍조가 만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러면 다른 사람도 또 그렇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도 내 생명을 소중히 여겨 주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입니다.
산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면 메아리가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크게 돌아오고, 노래를 부르면 노래가 돌아오고, 좋은 말을 하면 그 메아리는 좋은 말로써 돌아오고, 산에다 대고 입에 못 담을 고약한 욕을 퍼부으면 메아리는 그런 무서운 욕으로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메아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서로서로 존중히 여기고 서로서로 따뜻하게 자비롭게 상대하면 상대방도 역시 또 나한테 그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살고 갈 이 세계를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우리만 살고 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손들이 살 이 세계를 보다 더 살기 좋은 세계로 만들어 놓고—자식들을 위해서 집은 좋은 집을 줄라고 하면서 정말 우리 모두가 살 이 세계는 어찌 피비린내 나는 수라장(修羅場)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집만 잘 단속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백중날 방생을 할 생각이 있으신 분은—자기 아들이 꼭 외항선을 타는 선원이 된다면 거북이를 사서 바다에다 혹 넣고 싶은 생각이 나실는지 모르나, 방생의 참뜻을 깊이 이해를 하셔서 마음속에 자비심을 가져서, 항상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생명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연에게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하면 그것이 벌써 방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죽어 가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어디 자라 잡아서 죽이는 데 없나? 잉어 잡아서 죽일라는 거 없나?’ 그걸 찾으러 다닐 게 아니라, 집안에서 직장에서 또는 회사에서 사회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하고, 자기 마음속에 자비심을 항상 이렇게 일으키고 자비로운 말, 자비로운 행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자라 천 마리, 만 마리를 사서 물에다 넣어준 것 못지않게 큰 공덕(功德)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금생에 태어나서 일생 동안 병치레만 하거나 또는 인생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단명(短命)하게 죽거나, 본의 아니게 불의(不意)의 어떤 사고로 비명액사(非命縊死)를 한 거나, 이런 것이 다 우연한 결과가 아니고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業)에 의해서 그러한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장래에 있어서 또는 저 영원한 내세에까지라도 항상 건강하고 수명이 장수하고 그럴러면, 그리고 그런 비명액사를 당하지 않고 자기의 명(命)대로 행복하게 잘 살라면 방생을—경우에 다라서는 자라나 잉어나 그런 죽어가는 동물을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식의 방생도 하지마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자비롭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꼭 몽둥이나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죽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이미 총칼보다도 무서운 살생(殺生)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가지고도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는 그런 악한 말을 하는 것도 역시 살생에 준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때리고 치고 찌른 것, 말로써 사람을 그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는, 근심과 고통과 공포를 주는 그런 말도 역시 마찬가지고, 행동으로는 안 나타냈어도 속으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죽일 생각을 하고, 저 사람이 오그라 죽기를 바라고 저주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우란분(盂蘭盆)의 역사에 최초의 근본은 목련존자로부터서 시작이 되었는데, 목련존자는 부부간에 금실(琴瑟)이 좋아서 참 재미있게 잘살았는데, 목련존자의 전생 얘기죠.
오백생 전생의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 어머니가 ‘이놈이 결혼하기 전에는 어미한테도 곧잘 잘하고 그러더니 장가간 뒤로는 계집한테 빠져 가지고 아주 어미한테는 소홀히 하고’ 그렇게 느끼셨던지, 노상 ‘며느리 저년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 자식의 마음이 변했다. 그런 여우같은 며느리한테 빠져 가지고 어미를 우습게 본다’ 이래가지고 노상 사사건건이 큰 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며느리를 미워하고 들볶고 그랬다 말이여.

그러니까 목련이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참 자기 아내 보고 ‘어머니한테 잘해 드려. 어머니한테 잘해 드려’ 이렇게 마누라를 달래기도 하고 또 어머니를 위안을 시켜 드리고 했는데 세월이 가도 조금도 효과가 없고 점점 집안이 아주 대단히 두 고부간(姑婦間) 사이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래서 골이 나 가지고는 “어떤 기운 센 놈이 와서 저 늙은이 좀 때려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아! 이런 말을 툭 자기도 모르게 나왔다 그 말이여. 그 과보로 오백생 동안을 죽을 때는 꼭 맞아 죽었어.
마지막 오백생에 출가해 가지고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신통제일 목련존자가 되었는데, 그 효심이 지극해서 지옥에 빠진 어머니 청제부인을 지옥에서 구제를 해 드린 그리고 아라한과를 증득해서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증득한 대성현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에 외도들에 의해서 맞아서 돌아가셨다 그 말이여.
말 한마디가—어머니한테 한 말, 그 악한 한마디가 오백생 동안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다 이겁니다. 하물며 행동으로 마음으로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은 과연 어떠한 무서운 과보를 받게 될 것인가?

우리의 몸뚱이는 잘났건 못났건, 잘 배웠건 못 배웠건, 부모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건, 얼마나 많은 유산을 받았건 못 받았건, 부모가 아니면 이 몸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반드시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몸뚱이를 받아 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만큼 좋은 몸을 받아 났고 또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이 정법을 만난 그 근본은 부모님으로 인해서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과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들도 해제 법요식과 아울러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대천도의 법회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운집(雲集)을 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21분40초~41분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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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뒤에 선망부모를 정성을 다해서 천도해 드리는 것도 대단히 좋은 일이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 그러냐?

부모에게 불효를 하면 그 부모도 사람이요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 자식이 불효하면 다른 사람한테 몇십 배 구박을 받은 것보다도 더 가슴이 아프고 원통(冤痛)하고 절통(切痛)한 것입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저를 어려서부터 어떻게 낳아서 키웠는데 지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러한 생각이 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 부모가 좋은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미워해도 안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품어도 안 되는데,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숨을 거두었다면 그 부모는 좋은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냐 하면은 그 자식의 아들이나 손자로 태어나는 것이여.

엊그제 자식이 자기 부친을 죽이고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전생의 원수가 보복을 위해서 자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자식이 다 부모에게 은혜 갚기 위해서 태어난 것만이 아니여. 웬수가 보복을 하기 위해서 자식으로 태어나 가지고 일생 동안을 불효를 하고, 처음에는 지극히 효도를 하다가 막판에 가서는 부모 속을 갈기갈기 찢고 그런 예도 있습니다. 가문을 망치거나 재산을 망치거나 심지어는 부모를 살해하기까지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끼리 화목을 해야 하는 거고, 남에게도 생명과 재산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어쨌든지 남을 해롭게 해서는 안 돼.


석 달 동안 그 무덥고 힘드는데, 서늘한 데에서 목욕을 하고 선풍기 틀어 놓고 낮잠도 자고 그러지 않고서 그 방부(房付)를 들이고 더운 데 와서 그 등어리에 땀이 줄줄줄줄 흐르는데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앉아서 입선(入禪)을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고 하루 종일 그렇게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는 선방의 선객(禪客) 스님들 또 보살님네들, 또 시민선원의 모다 거사님네들, 참선(參禪)을 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생사 문제 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방생입니다.
맨 처음에 자기가 자기를 방생을 시켜야 남도 죽게 되는 사람을 살려내지, 자기가 쇠사슬에 콱! 묶여 갖고 다른 사람 쇠사슬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열심히 해서 우선 자기 방생을 하고, 자기 방생을 하면서도 항상 그 뜻은 보살심(菩薩心), 마음속에 탁! 뜨거운 보살심을 지니고서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고, 대중 속에서 정진을 하면서 행여나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하는 말 한마디라도 대중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대중 공부하는데 폐를 끼치지 않도록 그렇게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돌아가서도 또는 직장에 다니신 분은 직장에 나가서도 항상 말 한마디 조심하고, 발 한 걸음 옮길 때에도 조심을 해서 남에게 조그만한 피해도 가지 않고, 더군다나 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 기분만 언짢게 하는 그러한 정도의 일까지라도 조심을 해야 하는데, 마냥 조심을 하다 보면 살기가 대단히 불편할 것 같으나 항상 화두를 들고 정진하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고, 항상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으로 화두를 들고 생활을 하게 되면 저절로 살생은커녕 자비심이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거고, 남의 것을 훔치기커녕은 내 것을 남에게 보시하려는 그런 마음이 나오는 거고, 음행을 하기커녕은 항상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갖게 되고,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기커녕은 항상 진실한 마음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이것이 최상승법이고, 이것을 갖다가 불법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피치삭발유래유(披緇削髮有來由)하되  막향청산공백두(莫向靑山空白頭)니라
나무~아미타불~
사십구년다소설(四十九年多少說)이  종횡위아지귀휴(縱橫爲我指歸休)니라
나무~아미타불~

먹물 옷을 입고 삭발(削髮)을 한,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청춘을 다 버리고 출가(出家)해서 도를 닦는 데는 반드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고 깊은 뜻이 있는 것이어서,
막향청산공백두(莫向靑山空白頭)니라. 그런 깊은 원력(願力)과 그러한 뜻이 있어서 출가를 했는데, 어찌 청산 속에 공연히 머리가 희어 가고 있느냐.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해서 먹물 옷을 입고, 머리를 깎아서 수행자로서 나섰다면 정말 철저한 신심과 철저한 분심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용화선원 선방 스님네나 또 용주사 중앙선원이나 위봉사 선원, 세등선원 여러 모다 선방에서 정말 모다 열심히 정진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랬다'고 그렇게 알뜰히 열심히 하셨지만, 도반의 입장에서—정말 해제를 하고서도 풀어진 마음으로 살지 말고, 해제 기간일수록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결제 중보다도 더 알뜰히 잡드리를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십구년다소설(四十九年多少說)이 종횡위아지귀휴(縱橫爲我指歸休)여.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셨는데, 그 많은 법문(法門)이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종횡으로 팔만사천 가지 방편(方便)을 설하셨지만, 한마디로 '밖으로 치닫지 말고 한 생각 돌이켜서 바로 자기를 찾으라'는 그 한마디여.

그 한마디만을 철저하게 단속하고 철저하게 잡드리한다면 결제, 해제가 무슨 차등이 있겠느냐 그거거든. 산으로 가나, 들로 가나, 차를 타나 걷거나, 목욕탕에를 가거나 변소에를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옛날 도인은 장바닥에 가서 공부를 하신 분도 있었고, 노동판에 가서 정진하는 이도 있고, 곡천 선사(谷泉禪師)는 거짓으로 죄를 지어 가지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도를 닦으신 분도 있어.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한데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묘봉정상일전신(妙峰頂上一轉身)하면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이여. 정체(正體),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여. 어떤 말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떠한 모양도 거기에는 찾아 볼 길이 없는 것이여.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야. 아무리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귀로 들을라고 하고, 손으로 만지려고 하고, 생각으로 알라고 해도 그 자취를 볼 수가 없어. 그 자체는 성색(聲色)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여.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거기서 행여나 떨어질까 봐서 그걸 붙잡고 발발 발발 떨지 말고 거기서 턱! 손을 놔 몸을 굴리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을 것이다. 온 법계(法界)가 다 정체(正體)가 여여(如如)한 면목이더라 그거거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공안에 철저히 참(參)해서 사량복탁(思量卜度)을 하지 말고, 해 갈수록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거기에서 다시 그놈을 되집어서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하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이렇게 사량분별로 따지고, 알아지고 얻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 깨달음이 아니야.

우리의 선망부모가 오늘 이 백중날을 기해서 여러 석 달 동안 열심히 도를 닦은 청정한 수행자들의 간곡한 신심과 원력과 수행력에 의해서 우리의 선망부모가 오늘 천도가 잘되실 것입니다. 이어서 법요식(法要式)이 진행이 될 것입니다.(41분2초~58분41초) (끝)





[법문 내용]

(게송)당하지귀아시수~ / 백중날, 부처님께 대중스님께 공양(供養)을 올려서 지옥고에 신음하고 있는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하는 전통 / 방생(放生)의 뜻.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연에게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하면 그것이 벌써 방생을 하고 있는 것.

마음속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이미 총칼보다도 무서운 살생(殺生)을 하고 있는 것 / 목련존자가 전생에 어머니한테 한 악한 말 한마디가 오백생 동안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다.

참선(參禪)을 하는 뜻은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자기 방생입니다 / 참선, 화두를 들고 생활을 하면 저절로 자비심, 청정심, 진실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참선은 최상승법이고, 불법의 핵심 / (게송)피치삭발유래유~ /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은 한마디로 '밖으로 치닫지 말고 한 생각 돌이켜서 바로 자기를 찾으라' / (게송)정체종래절성색~ /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


원래 방생의 뜻이 죽어 가는 사람, 죽어 가는 동물—비단 꼭 물고기뿐만이 아니라 육지에서 사는 동물, 하늘에 나르는 새, 무엇이고 죽어 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나아가서는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비심, 자비 종자(種子)를 잘 증장을 시키고, 그래서 어떠한 종류의 생명이라도 그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자기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어 가고 있는 그러한 생명을 그걸 놔주자, 죽지 않도록 해 주자’는 데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입니다. 산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면 메아리가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크게 돌아오고, 노래를 부르면 노래가 돌아오고, 좋은 말을 하면 그 메아리는 좋은 말로써 돌아오고, 산에다 대고 입에 못 담을 고약한 욕을 퍼부으면 메아리는 그런 무서운 욕으로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메아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서로서로 존중히 여기고 서로서로 따뜻하게 자비롭게 상대하면 상대방도 역시 또 나한테 그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꼭 몽둥이나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죽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이미 총칼보다도 무서운 살생(殺生)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가지고도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는 그런 악한 말을 하는 것도 역시 살생에 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잘났건 못났건, 잘 배웠건 못 배웠건, 부모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건, 얼마나 많은 유산을 받았건 못 받았건, 부모가 아니면 이 몸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반드시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몸뚱이를 받아 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만큼 좋은 몸을 받아 났고 또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이 정법을 만난 그 근본은 부모님으로 인해서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과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생사 문제 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방생입니다. 맨 처음에 자기가 자기를 방생을 시켜야 남도 죽게 되는 사람을 살려내지, 자기가 쇠사슬에 콱! 묶여 갖고 다른 사람 쇠사슬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열심히 해서 우선 자기 방생을 하고, 자기 방생을 하면서도 항상 그 뜻은 보살심(菩薩心), 마음속에 탁! 뜨거운 보살심을 지니고서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고, 대중 속에서 정진을 하면서 행여나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하는 말 한마디라도 대중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대중 공부하는데 폐를 끼치지 않도록 그렇게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이여. 정체(正體),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여. 어떤 말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떠한 모양도 거기에는 찾아 볼 길이 없는 것이여.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야. 아무리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귀로 들을라고 하고, 손으로 만지려고 하고, 생각으로 알라고 해도 그 자취를 볼 수가 없어. 그 자체는 성색(聲色)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여.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거기서 행여나 떨어질까 봐서 그걸 붙잡고 발발 발발 떨지 말고 거기서 턱! 손을 놔 몸을 굴리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을 것이다. 온 법계(法界)가 다 정체(正體)가 여여(如如)한 면목이더라 그거거든.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76~600)2021. 1. 25. 15:22

 

 

((No.587-2))—1997년 동안거 해제 법어(97.02.22) (39분)

 

587-1(1997년 동안거해제:약21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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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2(1997년 동안거해제:약18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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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 21분. (2) 약 18분.

(1)------------------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식구년묵(欲識九年默)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월(山月)이 투창백(投窓白)인데,  계성(溪聲)이 입호명(入戶鳴)이로구나.

산 달이 창에 비추어 흰데, 시냇물 소리가 방안으로 들어와 울리는구나.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默)인댄, 달마대사(達摩大師)가 9년 동안 소림굴(少林窟)에서 묵묵히 앉아 계신 그 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라.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힐지니라.

 

이 가운데가 무엇이냐?

산월(山月)이 투창백(投窓白)이요, 계성(溪聲)이 입호명(入戶鳴)하는 바로 그 가운데를 향해서 달마대사 9년 묵무언(默無言) 하신 뜻을 밝힐지니라. 서산대사(西山大師)의 게송입니다.

 

 

오늘은 정축년(丁丑年) 정월 대보름날인데, 병자년(丙子年)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일(解制日)이고 또 백일기도 회향 법회날입니다. 병자년 해제일을 맞이해서 대중은 조실(祖室) 스님, 전강선사(田岡禪師)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敬聽)을 했습니다. 해제 법문은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충분히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올라와서 해제 법문을 하러 올라온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여러 선원에 도반들, 선배 후배들, 여러 스님네 선객(禪客)들이 참석을 하셨고, 또 용화사 대중과 시민선원 · 보살선방 대중을 비롯해서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 형제자매들도 참석을 하셨습니다. 원장으로서 몇 마디 조도(助道)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해제(解制)라 하는 것은, 원래 인도(印度)에서는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우기(雨期)가 아닌 때에는 나무 밑에나 돌 위나, 모다 인연 따라서 모다 흩어져서 각자 걸식(乞食)을 하면서 정진(精進)을 하다가, 비가 오는 장마철이 되면은 한데에서 기거(起居)를 할 수가 없으니까, 기원정사(祇園精舍)라든지 죽림정사(竹林精舍)라든지 또는 모다 그런 여러 군데 정사(精舍)에서 비를 피하느라고 결제(結制)를 했고,

중국에 와서는 기후가 겨울철에는 추우니까 어쩔 수 없이 그 설한(雪寒)을 피하기 위해서 겨울철 결제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름 석 달 · 겨울 석 달을 하안거(夏安居) · 동안거(冬安居)를 이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해제(解制)날에는 자자일(自恣日)이라 해서, '스스로 자(自)' 자, '방자할 자(恣)' 자, 방자(放恣)하단 말은 '뜻대로' '마음껏' 그런 뜻인데, 스스로 무엇을 마음껏 하느냐?

석 달 동안 지내는 동안에 규칙(規則)에 위반되는 언행이 있던가, 법규(法規)에 어긋나는 행동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 스스로 마음속으로 참회(懺悔)할 뿐만 아니라, 대중한테 "내가 지난 석 달 동안 지내면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자비(慈悲)로써 기탄없이 지적을 해 주십시오" 전부 한 무릎을 땅에다 대고 한 무릎은 세우고서 합장하고서 대중한테 자청(自請)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자(自恣)'인데, 그것을 부처님은 안 하시고 가만히 계시고 대중만 시키시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자신부터서 맨 먼저 이 자자(自恣)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대중 가운데에 제일 부처님 다음으로 윗자리에 앉은 가섭 존자(迦葉尊者)라든지 또는 수보리 존자(須菩提尊者)나 목련 존자(目蓮尊者)와 같은 제일 웃자리에 앉은 부처님 제자가 부처님을 일으켜 드리면서 "세존(世尊)께 무슨 잘못이 있겠사옵니까?"

그렇게 해서 부처님 다음으로 또 가섭, 다음 부처님 제자가 그와 같이 대중에게 물으면 아무 대답이 없으면 지적할 것이 없으니까 다음 분으로 넘어가고, 잘못이 있으면 자비로써 잘못을 지적을 하면서 대중이 많이 모일 때는 자정(子正)이 넘도록 그러한 법요식이 매우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시경전(原始經典)에 보면은 너무도 엄숙하고 경건해서 가슴이 벅차고 콧잔등이 시큰허도록 그렇게 엄숙하게 이 자자(自恣) 법요식(法要式)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마 총림(叢林)에서는 이런 법요식이 진행이 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됩니다마는, 왜 그런 자자 법요식을 거행을 했냐 하면은 석 달 동안 여러 대중들이 그렇게 모여서 지내니 크고 작은 문제점이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 스스로도 반성(反省)하고, 대중이 지적을 해 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조끔도 숨김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대중 앞에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고, 발로참회(發露懺悔)를 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잘못이 있었어도 그것을 덮어놓고 우물쭈물 그럭저럭 지낸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 자자회(自恣會)를 통해서 지적할 것은 도반들이 자비심으로 지적을 해 주고,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참회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조그만한 잘못을, 큰 잘못을 그 철 해제날 깨끗이 참회를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정진(精進)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제(結制) 해제(解制)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뜻이 있어서 결제 해제를 한 것이 아니고, 기후 관계로 해서 더위와 비와 눈,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그 공부하는 과정상 그런 결제 해제를 한 것뿐이지, 우리 정진(精進)해 나가는 내용에 있어서는 결제 해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부처님을 위시(爲始)한 모든 부처님 제자들이 한군데서 모여서 지내니까 그래도 언행을 조심하고 모다 규칙에 의해서 엄숙하니 지내다가 해제를 하면 각자 인연(因緣) 따라서 흩어져 가지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흩어지게 되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럭저럭 산만하게 지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자자회를 통해서 참회를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를 하자는 뜻이지, '해제 했으니까 걸망 지고 아무데나 자유롭게 지내자' 이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결심을 다지고 분심(憤心)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결제 중보다도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하는데 이 해제(解制)의 자자(自恣) 법요식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선(禪)과 교(敎)를 비교해서 판단하는 글이 있는데, 그것이 『선교석(禪敎釋)』이라 한 글입니다.

거기에 보면, 학자소참활구(學者所參活句)는, 선학자(禪學者)가 참구(參究)하는 그 활구(活句), 화두(話頭)는 여일단화(如一團火)하야, 한 무더기 불덩어리와 같애서, 근지즉요각면문(近之則燎却面門)이라. 섣불리 잘못 가까이하다가는 얼굴을 확! 태워 버리게 된다 이거거든.

활구공안(活句公案)에는 무불법조착지처(無佛法措着之處)라. 불법(佛法) 도리(道理)도 거기에다가는 어리댈 수가 없는 것이고, 지유대의(只有大疑)하야 여열염긍천(如烈焰亘天)이라. 다못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만이 있어서 마치 훨훨 타는 맹렬한 불덩어리가, 불꽃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아야 할 것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아주 간곡히 말씀을 해 주셨지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이리저리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콱 맥혀야, 알 수 없는 맥힌 의심(疑心)으로 정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외의 생각은 『화엄경』에 말씀, 『법화경』 『금강경』에 말씀이라도 그런 불교의 교리(敎理)나 도리(道理)를 가지고 이게 비교하고 분석하고 따져서 적용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나가야 그 공부가 옳게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 가다 보면 처음에는 온갖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혼침(昏沈) 산란(散亂)이 일어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으로, 의심을 거각(擧却)해 나가면, 언젠가는 들지 않아도 제절로 화두가 터억 독로하게,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하게 된다 이거거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도 일여(一如)하게 되고, 몽중(夢中)에서도 그 순일무잡한 의단(疑團)이 계속이 되면은 머지않아서 어떠한 찰나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된다 그 말이여. 홀약타파칠통(忽若打破漆桶)하게 된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의심, 콱! 맥혀서 알 수 없지마는 그 의심으로 나가다 보면 어떠한 찰나간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의심을 타파하게 된다 이거거든.

 

사량분별로는 절대로 그런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나갈 때 터져. 풍선을 불 때 머리카락 바늘구녕만 있어도 아무리 불어도 그 풍선은 빵빵해지지도 않고, 빵빵해지지 않기 때문에 팡! 하고 터지는 수가 없어. 꽉 맥힌 풍선이라야 불고 불고 더 불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풍선이 터진 것과 비슷하다 그 말이여.

이로(理路)가, 이치 길이 있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는 그러한 참선은 의리선(義理禪)이요 사구선(死句禪)이라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소의지하(小疑之下)에 소오(小悟)하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큰 의심하에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크게 깨달음이 있다 하시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 무오(無悟)라, 의심이 없는 공부는 깨달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여.

 

타파칠통(打破漆桶)을, 홀연히 타파칠통을 하면은 기네 아니네 붙일 수가 없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義)를 불구이원득(不求而圓得)이니라. 백천법문(百千法門)과 한량없는 묘(妙)한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원만(圓滿)하게 깨닫게 된다. 『선교석』에 그러한 법문이 있고.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고 하는 법문에 보면은 '수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해 나가야 하느냐?'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단능착파의(但能着破衣)하고, 다맛 능히 헤어진 옷을 입고, 누데기 옷이죠. 누데기 옷이라 하니까 헌옷도 찢어서 헝겊을 대 가지고 조작으로 누데기 옷을 만들어라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새 옷을 입지 말라'고 하시고, 새 옷을 누가 해 오면 거기다가 괴색(壞色) 물을 들여 가지고 쪼가리, 헌 쪼가리를 어느 옷 끝에다가 그것을 기우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헌옷이라고 하는 표식(表式)이죠.

무명옷이면 무명옷, 기지옷이면 기지옷, 새 옷이면 새 옷, 인연 따라서 생긴 대로 입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무슨 천이 되었건 먹물 옷을 들여서 그렇게 입고.

손추손(飱麤飱)하며, 밥은 거칠은 음식을 먹어라. 꼭 맛있고 좋은 그런 음식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보리밥이면 보리밥, 잡곡밥이면 잡곡밥, 밥이면 밥, 죽이면 죽, 국수면 국수, 식단이 나온 대로 그냥 그것을 먹으라 그거거든. 입는 것과 먹는 것에 대한 말씀을 그렇게 하시고.

 

마음가짐은 요연수본진심(了然守本眞心)하야, 요연(了然)히는, 확실하게 근본 참마음을 지켜라 그거거든. 근본 참마음이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은 본래청정(本來淸淨)한 것이고,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내게 있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거여.

그 '근본 마음을 확실히 지킨다'고 하는 것은 참선 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게 되고, 선지식(善知識)을 찾게 되고, 선지식의 말 한마디로 그것을, 그 화두(話頭)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할 때까지 그걸 밀고 나가는 것이여.(처음~20분45초)

 

 

 

 

(2)------------------

 

양치불해어(佯癡不解語)하면, '거짓 양(佯)' 자, '어리석을 치(癡)' 자.

속은 환-하지. 뭐 바보가 아니고 멀쩡하니까 환하겠지만, 거짓 어리석은 척하라 말이여. 바보 노릇을 하라 그거거든. 말귀도 못 알아들은 것처럼 바보가 되라 그 말이여.

 

어디 가서, 참선 선방(禪房)에 가서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유식한 체하고, 수완이 있는 것처럼 뽐내고 그러란 것이 아니고,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들이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목탁 치면 가서 아무 말없이 공양하고, 목탁 치면 가서 소지(掃地)하고 운력하고, 속이 있는지 없는지, 바보인지 천치인지, 무식한지 유식한지, 전혀 옆에 사람도 모르게 완전히 숙맥(菽麥)이 되라 이거거든.

그렇게 지내는 것이 최생기력이능유공(最省氣力而能有功)이라. 가장 기력(氣力)은 덜면서도 능히 공(功)이 있다. 가장 힘은 덜 들이면서도 수행을 철저하게 하고 큰 깨달음을 얻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다 이거거든.

 

세속(世俗)에서는 유식한 척하고, 잘난 척하고, 똑똑한 척해야 남이 알아주고, 높은 자리에 벼슬도 하고 좋은 데에 취직도 하고 벌어묵고 살고 남이 알아줘야 하겠지만, 출가(出家)해서 도(道)를 닦는 마당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똑똑해야 합니까? 명예와 지위 · 부귀 · 권리를 얻기 위해서 똑똑해야 하는 것이냐 그말이여.

바보 천치가 되어서 열심히 정진하면 가는 곳마다 밥이 있고. 공부하다 얼어 죽은 사람 없어요. 이왕 출가해서 도(道)를 닦을 바에는 청춘도 버리고 인생도 버리고,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셈 치고 오조 홍인대사의 『최상승론』의 법문과 같이 그렇게 해야 과연 정진(精進)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입니다.

 

산승(山僧)이 처음에 출가(出家)할 때, 규정에 의해서 일주일 만에 고암(古庵) 스님과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계(戒)를 받고, 계를 받고 며칠 동안 '도량석(道場釋), 천수(千手)는 외어야 하고, 예불(禮佛)드리는 것은 외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것을 며칠 동안에 그것을 외우고, 목탁 치는 법도 조실 스님한테 나주(羅州) 다보사(多寶寺) 나한전(羅漢殿)에서 일주일간을 기거하면서 그걸 대충 다 배웠습니다. 그걸 배워는 놓고는 한번도 불공(佛供) 한번도 해 보지도 않고 바로 묵언(默言)을 했습니다.

 

뭐 '군대 안 갈라고 묵언(默言)했다'고 무슨 불교신문엔가 그런 말이 났는데, 그때는 병역법(兵役法)이 없었습니다. 군인에 간 사람은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라 해 가지고 자원한 사람에 한해서 갔지 병역법이 없었어요. 훨씬 몇 해 뒤에사 병역법이 생겼는데.

나는 그때 묵언(默言)을 시작한 것은 아주 일생 동안을 바보 천치 농판이 되어 가지고 안 태어난 셈 치고 그저 조실 스님 모시고 그렇게 일생을 지낼라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한 10년 그러다가 묵언을 텄습니다마는, 지금 생각으로서는 조실 스님 명령을 안 하시고 이런 원장(院長)이라고 하는 직책도 맽기시지 안 했으면 저는 훨씬 더 좋았으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말씀이 나왔습니다마는, 이 '조실(祖室)'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와 같은 법력(法力)과 불조와 같은 도력(道力)과 불조와 같은 원력(願力)과 불조와 같은 덕행(德行)과 시절인연(時節因緣)과 지연(地緣)과 복력(福力)을 다 갖추고, 나아가서 건강(健康)까지도 갖추어야 조실(祖室)이라고 하는 직책(職責)을 가지고 부처님의 지혜(智慧) 법등(法燈)을 높이 들어서 모든 후배 도반들에게 봉사(奉仕)를 하는 직책입니다.

지금 열거한 그런 여러 가지의 힘을 갖추지 못하고, 되나캐나 조실(祖室)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자기가 죽는 길이며, 대중(大衆)을 죽이는 것이며, 불법(佛法)을 망하는 일이라고 산승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전강(田岡) 대종사(大宗師)는 우리가 존경하는 만공(滿空) 스님의 제자이신 고봉(高峰) 스님, 또 만공 스님의 제자이신 금봉(錦峰) 스님, 그러한 스님께 들은 바로는, "말세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태어났을까? 만공 스님도 꼼짝을 못했거든. 그 혜(慧)가 빠르기를 번갯불과 같았다" 그런 큰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금봉 스님께는 내가 직접 들었고, 고봉 스님께는 내가 직접은 듣지 못하고 그 말을 가깝게 모신 시자(侍者)를 통해서 그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은 무슨 일을 처리한 데에는 두서(頭緖)가 없으셨고, 모도 참 '제삼자(第三者)가 어떻게 생각할 건가?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전혀 그런 것을 고려하시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뭐 이러쿵저러쿵, '돈 얘기를 많이 하시네 어쩌네' 녹음법문에도 돈 얘기도 많이 하신 것은 사실이나, 그 돈을 참 좋아하시고 그러시는 것 같애도, 내가 30여 년을 모신 바로는 전혀 돈을 모르셨습니다. 좋아하시기는 하면서도 전혀 그걸 모르셨고.

돈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 돈을 함부로 쓰시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예금을 해 놓고 열반(涅槃)하시면서 나에게 그것을 다 전(傳)하고 가셨습니다. 그것으로 대전에 불양답(佛糧畓)을 사놨다가 그것을 팔아서 여기 용궁장, 이 터를 사서 지금 시민선원도 하고 또 주차장도 하고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마는.

 

좋아하신 것 같애도 전혀 애착심(愛着心)이 없었고, 그것을 하시기를 말년에 자꾸 그 통장을 나를 주실려 그러고, 나보고 자꾸 법상(法床)에 올라가라고 하셨지만, 저는 극구(極口) 그것을 사양을 했습니다.

 

"조실 스님, 돈은 조실 스님 쓰시고 싶은 대로 쓰십시오. 병든 수좌(首座)들에게 약값도 주시고 여비(旅費)도 주시고 마음대로 쓰시지 그걸 뭐하러 그걸 저한테 전할라고 하십니까? 제가 능력이 있으면 조실 스님이 돈을...."

"그걸 내가 나 쓸라고 내가 돈을 모인 것이 아니다. 너를 위해서 내가, 돈을 내가 모인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시길래.

 

"저, 제가 힘이 있으면 조실 스님이 돈을 전해 주시지 안 해도 내가 얼마든지 하는 것이지, 돈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니가 참 내 뜻을 모르는구나" 하시고, 그렇게 참 섭섭하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내가 주변이 없어서 신도한테 '돈 내라' 그런 얘기도 잘 못하고, 또 구변(口辯)이 없어서 설법(說法)도 잘 못하고, 또 내가 그런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여러 가지 능력, 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조실(祖室)을 안 하고, 조실 스님께서 열반을 하셨어도 우리가 조실 스님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우리가 조실로, 살아계신 조실(祖室)로 모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여담(餘談)입니다마는, 오늘 이런 말씀을 올릴 수밖에 없어서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조실 스님께서 (당신) 열반하신 뒤를 걱정을 하셔 가지고, 열반하시기 전 한 10년 이래로 마치 녹음기(錄音器)가 나와 가지고 그 녹음기를 통해서 날마다 대중을 앞에 놓고 그 기력(氣力)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해 놓으셨습니다.

당신 「일대기(一代記)」에 대해서도 하셨고,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이나 『몽산법어(蒙山法語)』나 『선가구감(禪家龜鑑)』이나 또 이 닥치는 대로 후배 우리들을 위해서 많은 요긴(要緊)한 법문(法門)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해제일을 맞이해서 조실 스님의 사자후(獅子吼)를 우리는 다같이 듣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열반(涅槃)하셨지마는, 우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을 교주(敎主)로 모시고 불교(佛敎)를 믿고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22년 전에 열반하셨지만,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는 꼭 생존 시에 하신 법문과 같이 우리는 경건하고 엄숙하게 법문(法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조실 스님 지난 추모재 때도 간략히 언급을 했습니다마는—제방(諸方)에 다른 선원(禪院)은 나는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스님을 조실로 모시건 다 그 문중에서 존경할 만한 법력(法力)이 있는 스님을 조실로 모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우리 이 용화사와 전강 조실 스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라도 조실 스님 이상 가는 대도인(大道人)이, 앞에 말한 그런 여러 가지 법력(法力)과 도력(道力)과 원력(願力)과 덕행(德行)과 복력(福力)을 다 갖추신 그런 대도사가 나온다면 물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조실로 추대된들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러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조실의 이름을 띠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나 대중을 위해서나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을 위해서 삼가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참 숙세(宿世)에 깊은 인연(因緣)이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된 것을 산승은 대단히 감격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오늘 해제는 했지마는, 어느 산중(山中)에 가서 또 방부(房付)를 들인다 하더라도, 지난 한철보다도 훨씬 더 알차고 짬지게 정진(精進)을 하셔서 도업(道業)을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금생에, 오늘 이렇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산승(山僧)이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렸는데, 그리고 서산(西山) 스님의 법문과 5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법문을 소개를 했습니다마는, 이런 말씀을 깊이 명심(銘心)을 하고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한 줌 버들가지를 거두어 얻지 못해서, 거두어 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 맺어두노라.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오늘 회향(回向)을 맞이했습니다. 회향을 맞이해서 소원을 모다 성취하고 보람 있는 새해를 맞이해서 또 열심히 법문 듣고 그 법문에 의해서 알뜰하게 생활을 통해서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20분47초~39분1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산월투창백~ / 결제(結制) 해제(解制), 하안거(夏安居) · 동안거(冬安居)의 기원 / 자자(自恣)는 해제 중에 훨씬 더 결심을 다지고 분심(憤心)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결제 중보다도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하자는 뜻.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최상승론(最上乘論)』 법문 / 송담 스님의 10년 묵언 / '조실(祖室)'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와 같은 법력(法力)과 불조와 같은 도력(道力)과 불조와 같은 원력(願力)과 불조와 같은 덕행(德行)과 시절인연(時節因緣)과 지연(地緣)과 복력(福力)을 다 갖추고, 나아가서 건강(健康)까지도 갖추어야 조실(祖室)이라고 하는 직책(職責)을 가지고 부처님의 지혜(智慧) 법등(法燈)을 높이 들어서 모든 후배 도반들에게 봉사(奉仕)를 하는 직책

 

만공 스님의 제자이신 고봉(高峰) 스님과 금봉(錦峰) 스님의 전강 조실 스님에 대한 말씀 "말세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태어났을까? 만공 스님도 꼼짝을 못했거든. 그 혜(慧)가 빠르기를 번갯불과 같았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후배들을 위해 많은 요긴한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 용화사에서 조실(祖室)로 전강 스님을 모시는 이유 / (게송)금생약불종사어~, 일파유조수부득~.

 

 

결제(結制) 해제(解制)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뜻이 있어서 결제 해제를 한 것이 아니고, 기후 관계로 해서 더위와 비와 눈,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그 공부하는 과정상 그런 결제 해제를 한 것뿐이지, 우리 정진(精進)해 나가는 내용에 있어서는 결제 해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산(西山) 스님의 『선교석(禪敎釋)』 법문, 「學者所參活句 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최상승론(最上乘論)』 법문, 「但能著破衣 飱麤飱 了然守本眞心 佯癡不解語 最省氣力而能有功 是大精進人也」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소의지하(小疑之下)에 소오(小悟)하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큰 의심하에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크게 깨달음이 있다 하시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 무오(無悟)라, 의심이 없는 공부는 깨달음이 없다」

 

이 '조실(祖室)'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와 같은 법력(法力)과 불조와 같은 도력(道力)과 불조와 같은 원력(願力)과 불조와 같은 덕행(德行)과 시절인연(時節因緣)과 지연(地緣)과 복력(福力)을 다 갖추고, 나아가서 건강(健康)까지도 갖추어야 조실(祖室)이라고 하는 직책(職責)을 가지고 부처님의 지혜(智慧) 법등(法燈)을 높이 들어서 모든 후배 도반들에게 봉사(奉仕)를 하는 직책입니다.

지금 열거한 그런 여러 가지의 힘을 갖추지 못하고, 되나캐나 조실(祖室)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자기가 죽는 길이며, 대중(大衆)을 죽이는 것이며, 불법(佛法)을 망하는 일이라고 산승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전강(田岡) 대종사(大宗師)는 우리가 존경하는 만공(滿空) 스님의 제자이신 고봉(高峰) 스님, 또 만공 스님의 제자이신 금봉(錦峰) 스님, 그러한 스님께 들은 바로는, "말세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태어났을까? 만공 스님도 꼼짝을 못했거든. 그 혜(慧)가 빠르기를 번갯불과 같았다" 그런 큰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금봉 스님께는 내가 직접 들었고, 고봉 스님께는 내가 직접은 듣지 못하고 그 말을 가깝게 모신 시자(侍者)를 통해서 그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당신) 열반하신 뒤를 걱정을 하셔 가지고, 열반하시기 전 한 10년 이래로 마치 녹음기(錄音器)가 나와 가지고 그 녹음기를 통해서 날마다 대중을 앞에 놓고 그 기력(氣力)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해 놓으셨습니다.

당신 「일대기(一代記)」에 대해서도 하셨고,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이나 『몽산법어(蒙山法語)』나 『선가구감(禪家龜鑑)』이나 또 이 닥치는 대로 후배 우리들을 위해서 많은 요긴(要緊)한 법문(法門)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 이 용화사와 전강 조실 스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라도 조실 스님 이상 가는 대도인(大道人)이, 앞에 말한 그런 여러 가지 법력(法力)과 도력(道力)과 원력(願力)과 덕행(德行)과 복력(福力)을 다 갖추신 그런 대도사가 나온다면 물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조실로 추대된들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러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조실의 이름을 띠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나 대중을 위해서나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을 위해서 삼가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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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51~575)2021. 1. 24. 18:16

 

 

((No.557))—1995년 10월 첫째일요법회 (68분)

 

557-1:4(1995년 10월 첫째일요법회:약19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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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2:4(1995년 10월 첫째일요법회:약17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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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3:4(1995년 10월 첫째일요법회:약16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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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4:4(1995년 10월 첫째일요법회:약17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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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약 19분. (2/4) 약 17분. (3/4) 약 16분. (4/4) 약 16분.

(1/4)----------------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하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헌데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 밝은 달이 희고, 사람마다, 사람 사람마다 다리 아래는 청풍(淸風)이 부는구나.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헌데, 거울을 타파하여 그림자와 자최[迹]가 없어졌는데,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올랐구나.

 

 

오늘은 을해년(乙亥年) 10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오늘은 대승십선계첩(大乘十善戒牒)—십선계(十善戒)를 설(說)하고, 화두(話頭)를 설하고, 또 불명(佛名)을 수여하는 법요식(法要式)이 거행되겠습니다.

 

불도(佛道) 수행(修行)을 성취코자 하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삼학(三學)을 겸해서 닦아야 하나니, 계(戒)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물이 담기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해야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첫째, 불상생(不殺生)이니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둘째, 불투도(不偸盜)니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

셋째, 불사음(不邪淫)이니 '사음을 하지 말라'

 

넷째, 불망어(不妄語)니 '거짓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불기어(不綺語)니 '음탕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지 말라'

여섯째, 불양설(不兩舌)이니 '이간하는 말을 하지 말라'

일곱째, 불악구(不惡口)니 '악한 말을 하지 말라'

 

여덟째, 불탐욕(不貪欲)이니 '탐욕심을 내지 말라'

아홉째, 불진애(不瞋恚)니 '진심을 내지 말라'

열째, 불사견(不邪見)이니 '어리석고 삿된 견해를 갖지 말라'

 

불살생(不殺生) · 불투도(不偸盜) · 불사음(不邪淫)은 몸으로 짓는 죄(罪)고, 망어(妄語)와 기어(綺語)와 양설(兩舌)과 악구(惡口)는 입으로 짓는 죄고, 탐욕(貪欲)과 진애(瞋恚)와 사견(邪見)은 마음으로 짓는 죄여.

 

"이상 설한 열 가지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는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네!"

 

"이상 설한 십선대계(十善大戒)는 불자로서 마땅히 잘 지키고 이것을 실천해서 스스로도 생사해탈(生死解脫)하고 일체 중생(衆生)을 제도하는 대원(大願)을 세우고, 구경(究竟)에 원을 이루어야 할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네!"

 

"이상 설한 십선대계(十善大戒)는 대승불자(大乘佛子)로서 능히 잘 지키고 실천해서 나도 해탈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네!"

 

편안하게 앉으세요.

 

첫째, '살생(殺生)을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우리 불법을 믿는 대승 불법을 믿는 불자는 자비심(慈悲心)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그러한 서원을 세웠거늘, 어찌 산목숨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둘째,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 하는 것은, 내 것을 널리 보시(布施)를 해서 일체 중생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를 시키고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데,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살생(殺生)을 하면 자비종자(慈悲種子)를 상(傷)하게 되고, 도둑질을 하면 복덕종자(福德種子)를 손상하게 되고, 사음(邪淫)을 하면은 청정종자(淸淨種子)를 잃게 된다 그 말이여.

'자비심'과 '복덕심'과 '청정한 마음'이 있어야 도(道)를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할 텐데, 어찌 사음(邪淫)을 할까 보냐?

 

넷째, '망어(妄語)를 하지 말라’ 하는 것은 망어를 하면, 거짓말을 하면 진실종자(眞實種子)를 잃게 되아. 진실한 마음 하나가 스스로도 도업(道業)을 이루고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인데, 어찌 진실한 마음을 잃고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 불기어(不綺語)는, 음탕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면은 공부하는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그러한 음탕하고 상스러운 말을 해서 스스로도 마음이 흔들리고 남의 마음도 흔들게 되면 그것도 또한 진실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여. 그러니 기어(綺語)를 하지 말아라.

 

여섯째, 불양설(不兩舌)은, 두 가지 말로 서로 화합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이를 화합을 붙일지언정, 어찌 여기 가서 이 말, 저기 가서 저 말 해 가지고 이간(離間)질을 해 가지고 화합(和合)을 깨뜨릴 수가 있느냐?

부처님 몸에 피를 내고,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고 하는 오역죄(五逆罪)와 같은 죄가 바로 대중(大衆)의 화합을 깨트리는 것인데, 두 가지 말을 해 가지고 화합을 깨뜨리는 죄는 바로 오역죄에 해당이 되는 것이여. 그러니 불양설(不兩舌)이다.

 

(일곱째) 불자(佛子)는 항상 자비롭고 부드럽고 좋은 말로써 해야 할 텐데, 입에 못 담을 흉악한 말 함부로 내뱉으면 그것이 어찌 불자로서 해야 할 일이겠느냐? 악구(惡口), 욕질을 하지 말아라.

 

여덟째, 불탐욕(不貪欲)이니, 탐욕심(貪欲心)을 내지 말라. 무엇이든지 남의 것을 제 것을 맨들라 그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탐욕심을 내면, 탐욕의 불로 인해서 스스로의 복덕(福德)을 잃게 되는 것이여. 끝없는 탐욕은 결국은 패가망신(敗家亡身)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탐욕심을 내지 말아라.

 

아홉째, 불진애(不瞋恚)니, 무엇이든지 제 욕심대로 하고 제 욕심에 차지 아니하면은, 제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진심(瞋心)을 내는 것이 일반 중생의 버릇인데, 진심을 내면은 그동안에 쌓은 모든 공덕(功德)을 찰나간에 잃게 되는 것이여. 그러니 진심을 내지 말라.

 

열째, 불사견(不邪見)이니, 어리석고 삿된 견해라 하는 것은 인과(因果)의 법칙을 믿지 않는 것이여. 인과의 법칙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인데, 그걸 믿지 아니하고 부정해 버리고, 인과를 부정하고 믿지 아니하면 못 할 짓이 없어.

모든 결과는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原因)이 있어 가지고 그런 결과(結果)가 나타난 것인데, 그러한 인과의 법칙을 부정하고 마구잽이 행동을 하면은 그 사람은 정도(正道)에서 벗어나고 삼악도(三惡道)밖에는 갈 곳이 없어.

 

그러니 몸으로 짓는 3가지, 입으로 짓는 4가지, 마음으로 짓는 3가지 합해서 이 10가지 계를 잘 지키면 십선계(十善戒)를 지키는 것이고, 이 10가지 계를 지키지 아니하고 마구잽이 행동을 하면 이것은 십악(十惡)을 행(行)하게 되는 것이여.

십선(十善)을 지키면은 불자로서 도(道)에 나아가는 기초가 잘 이루어진 것이고, 십선을 지키지 아니하고 십악(十惡)을 행하면 그 사람은 도문(道門)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 말이여.

 

연비(燃臂).

 

호궤합장(胡跪合掌).

 

지심참회(至心懺悔) 원멸(願滅) 사생육도법계(四生六途法界) 유정다겁생래(有情多劫生來) 법보재자(法寶齋者)

 

탐심중죄(貪心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

진심중죄(瞋心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

치심중죄(癡心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연비 끝날 때까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자종금신지불신(自從今身至佛身)

견지금계불회범(堅持禁戒不毁犯)

유원제불작증명(唯願諸佛作證明)

영사신명종불퇴(寧捨身命終不退)

 

원이차공덕(願以此功德)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 (처음~18분57초)

 

 

 

 

(2/4)----------------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받고 연비(燃臂)를 마쳤습니다.

 

연비(燃臂)하는 뜻은, 무량겁 이래(以來)로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罪)를 참회(懺悔)한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앞으로는 그러한 죄를, 그러한 악을 짓지 않겠다고 하는 맹서(盟誓)를 부처님께 한 것입니다. 계를 받고 연비를 한 이 공덕으로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다시는 그러한 악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10가지 악을 짓지 않을 수가 있을까? 10가지를 조목조목이 따로따로 지키려고 하면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마는, 항상 언제 어데서나 자연스럽게 간단하게 잘 지키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까 전강 조실(祖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으로 들려주신 내가 나를 찾는 공부, 참선법(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면, 제절로 살생(殺生)을 안 하게 되고, 도둑질도 안 하게 되고, 거짓말도 안 하게 되고, 입으로 짓는 4가지 죄도 안 짓게 되고, 마음으로 짓는 3가지 죄도 제절로 안 짓게 된다 그 말이여.

 

우리는 무량겁으로 내려오면서 익힌 바가 습기(習氣)로 남아 있어서 무심결에 그러한 악을 범하게 되는데, 그러한 생각이 일어날라가도 퍼뜩 '이 뭣고?' 화두를 들면 그 죄를 범하기 전에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항상 화두(話頭)를 챙기고 화두를 들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면 제절로 계(戒)가 지켜지는 거여. 참선하는 사람이 무슨 살생을 하며, 도둑질을 하며, 사음을 할 것인가.

 

화두 드는 공부에 대해서는 방금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간곡히 설해 주셨다 그 말이여. '이 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닌 이놈이 무엇인가?'

속이 상할 때나, 기분이 나쁠 때나, 썽이 날 때나, 외롭고 슬플 때나, 원망스러울 때나, 무슨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어날라고 하자마자, 퍼뜩 숨을 깊이 들여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르~ 들여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하다 보면, 치밀어 올라오던 가슴이 스르르르르~ 가라앉으면서 제절로 계(戒)를 지키게 되고 참나를 찾는 공부로 나아가니 이것이 바로 최상법(最上法)이다 그 말이여.

 

 

이제 여름이 가고 이에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도 늦은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산에는, 들에는 여기저기 오곡백과(五穀百果)가 익고, 들에는 벼가 익어서 누렇게 금파(金波)가 물결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일향(一向)으로 자연을 예찬(禮讚)만 하고 있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아름다운 산에 골짜구니는 등산객들로 인해서 물을 마실 수가 없는 형편이고, 그 공장 폐수다 생활 폐수다 그러한 것이 흘르고 흘르고 흘러서 한강 · 금강 · 영산강 · 낙동강 · 섬진강, 우리나라에 큰 강들이 그냥 그 물을 마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강에서 살고 있는 모든 크고 작은 고기들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강물이 흘러 흘러 바다에 이르면 바닷물이 뿌옇게 오염이 되고, 바다 밑에는 그런 독한 물질들이 가라앉어서 바다 밑은 참 무서운 독약으로 쌓이고 쌓여서, 해일이 일어나고 태풍이 불면 그 바다 밑에 가라앉었던 물이 뒤집어지면 그것이 바로 적조 현상(赤潮現象)이라 하는 거여.

바닷물이 벌게져 가지고, 옛날에는 부분적으로 쪼끔 일다가 말았는데 지금은 그 적조 현상이 일어나 가지고 남해로부터 동해로 막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수억 마리의 고기떼들이 다 죽고, 조개들이 다 죽고, 미역 해조류(海藻類)가 다 썩어 문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재지변(天災地變)도 아닙니다. 인간들이 어리석어 가지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몰지각(沒知覺)한 인간들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유유히 흐르는 강이, 그 넓고 넓어서 맑은 물이 물결치던 저 바다가 오염(汚染)이 된 것입니다. 자연이, 산과 강과 바다가 오염이 되면 결국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미역이다, 다시마다, 김, 그리고 많은 생선들 안 먹어버리면 그만이다' 하겠지만, 어민들은 그것에 생계를 유지하고, 모든 국민들은 해산물을 먹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김이나 미역이나 고기들이 병들고 변질되고 그 많은 해변가에 조개들이 모다 썩어 문드러지는데, 아직 안 죽었다 하더라도 독(毒)한 물질로 전부가 병(病)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게 되면은 신경통이 생기고, 암이 생기고, 심장병이 생기고, 골수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공기는 오염이 되어서 밤이면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가을 하늘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것인데, 지금은 하늘이 파랗지를 않습니다. 언제나 시커먼 구름이 끼어 있어서... 이것은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煤煙),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 먼지와 매연에 의해서 하늘이, 푸른 하늘이 없어진 것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도 먹지 못하고, 또 들에는 독한 농약을 함부로 써서, 유기 비료(有機肥料)를 쓰지 아니하고 화학 비료만을 냅대 쓰고 농약을 처대가지고 곡식도 마음놓고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으니 그나마도 그걸 먹게 되니, 옛날에 그렇게 별로 구경하기조차 어렵던 각종 암(癌) 병이 여기서 저기서 우리의 가족들이 친지들이 암으로 모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을 거리에 나가면 여기저기 모다 쓰여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어라. 외국산 먹지 말고 국산을 먹어라' 그러한 말로 널리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신(身), 몸뚱이와 땅[土]은 둘이 아니여[不二]. 그러니 둘이 아니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을 먹어야 한다. 그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나, 앞으로 외국 쌀이 값싸게 들어오고 맛이 좋으면, 농약에 쩔은 국산 쌀, 그리고 비싸고 한 국산 쌀 안 먹을 것입니다. 너도나도 외국 쌀을 사먹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값도 싸고 크고 안전하고 멋있으면 다투어서 외국차를 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애국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것이 좋지 못하고 비싸기만 하면 누가 우리나라 것을 애용하겠습니까?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 설득력이 없을 것입니다. 외제보다 값이 싸고 튼튼하고 멋있고 또 맛도 좋고 몸에 좋아야만 국산품을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나왔으니, 그 본뜻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정(有情), 우리 모든 중생들이 과보(果報)에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 중생에 몸과 마음은 이것을 정보(正報)라 해. 정(正), 바른 과보(果報)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 밖에 세계(世界)와 국토(國土), 산과 강,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입고 있는 옷,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기구들은 이것을 '의지할 의(依)' 자, 의보(依報)라 하는 것입니다.

 

정보(正報)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의탁(依託)하는 환경, 이것이 '의지할 의(依)'자, 의보(依報)인데, 정보(正報)와 의보(依報), 다시 말해서 신토, 신토(身土)—신(身)은 정보(正報)고, 토(土)는 의보(依報)다 그 말이여. 이 정보(正報)와 의보(依報), 2가지는 이것은 2가지가 아니여, 바로 하나다 그 말이거든.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은, 우리의 몸도 우리가 과거에 지은 업(業)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받아난 것이여. 우리가 의지하여 살고 있는 세계(世界)와 국토(國土)도 우리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이러한 세계, 국토를 만나게 된 것이여. 그래서 우리의 심식, 심식(心識)을 통해서 지은 과보(果報)로 이러한 몸도 받아난 것이여.

 

인간(人間)이라 하면, 저 위에 대통령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 인간이여. 그렇지만 지혜, 머리, 지혜도 영리한 사람과 둔한 사람이 있고, 우리의 상호(相好)도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아주 멋있게 잘생긴 사람도 있는가 하면은 아주 뵈기 싫고 흉하게 생긴 사람도 있어. 또 복록(福祿)이, 진진(津津)한 복(福)이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은 아주 박복(薄福)한 사람도 있다 그 말이여.

이것이 다 자기가 무량겁으로부터 자기가 지은 업(業)으로 인(因)해서 각각 그렇게 다르게 태어난 것이여.(19분5초~36분15초)

 

 

 

 

(3/4)----------------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다 지구(地球)지마는, 각 나라마다 산과 강과 바다와 들, 다 다르다 그 말이여. 자기가 지은, 과거에 지은 과보(果報)에 의해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 아프리카 저런 대단히 살기 힘든, 사람으로서는 살기 어려운 그러한 곳도 있다 그 말이여. 한 나라 안에서도 또 다르다 그 말이여.

이것도 자기가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에 태어나고, 물도 흔하고 토실도 비옥하고 바다도 맑아서 산에서 좋은 물이 흘러내리고, 들에는 오곡이 잘 익고, 바다에는 좋은 해산물이 많이 나와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그러한 곳을 만나게 된 것은 자기가 과거에 그만큼 잘 지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태어나는 것이여.

 

다행히 우리 대한민국은 비록 나라는 조그마하지마는, 산 좋고 들 좋고 물 좋은 그러한 옛날부터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이름할 만큼 대단히 좋은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좋은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그만큼 잘 지었기 때문에 그런 좋은 나라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좋은 나라, 좋은 국토에 태어나 가지고 그러한 아름다운 산, 산에 놀러가면 쓰레기를 버리고 마구잽이 함부로 해 가지고 오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강물을 마구잽이 공장 폐수, 생활 폐수, 쓰레기를 마구 버려 가지고 그 강물이 우리가 마실 수 없는 그러한 독한 고약한 강물로 우리 인간이 만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의 발이 지나가기만 하면 산이고 강이고 바다고 온통 오염이 되고 난장판이 되냐 이거여.

 

우리의 조상들은 수천 년을 이 땅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산과 강과 바다가, 공기가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자연(自然)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단군(檀君) 이래로 오천년을 내려오면서 우리의 많은 조상들이 이 강산(江山)에서 살다 가셨지만 우리에게 아름다운 산, 맑은 물, 맑은 바다를 고대로 우리에 전해 주신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되어서 우리는 옛날을 '미개(未開)한 시대(時代)'라 이렇게 말하고, 우리는 아주 발달한 '문명(文明)의 시대(時代)'라 해 가지고 뽐내지만, 우리는 어리석기가 곰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인간들은 잘살기 위해 사업을 하고 나라를 부국(富國)을 만들기 위해서 갖은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이 파손이 되고, 강물이 오염이 되고, 바다가 온통 고기도 살 수가 없고, 미역도 자랄 수가 없고, 김도 자랄 수가 없는 그러한 황폐한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돈은 좀 벌고 외화 획득을 해서는 차도 좋은 차도 타고 살기에 퍽 편리하게는 되었지만, 우리는 병들어 가고 있고 미래의 우리의 후손들도 마음놓고 살 수 없는 지옥(地獄)보다도 더 고약한 곳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地獄), 지옥은 차라리 하룻낮 하룻밤에 만 번을 죽고 만 번을 살리고 하는 그런 무서운 고문과 고통을 받는 곳이지만, 자기가 살생(殺生)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를 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옥에 갔어. 자기가 지은 과보로 지옥에 갔다 그 말이여. 그건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그 고통을 받으면서 뼈에 사무치는 정말 참회(懺悔)를 할 것입니다. 저절로 참회진언(懺悔眞言)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지내다가 언젠가는 그 지옥에서 벗어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린 것이 우리 중생들인 것입니다.

 

미리 조끔만 지혜가 있으면, 미리 참회(懺悔)를 하고 그랬으면 지옥에도 안 가게 될 것이고, 조끔만 우리가 앞을 내다보고 지혜(智慧)를 썼으면 산이 저렇게 망가지고, 강이 저렇게 더러워지고, 바다가 저렇게 더러워지지는 안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우리는 지옥보다도 더 고약한 못된 강토(江土)를 만들어서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그것을 남겨주고 가게 되었습니다.

좋은 공기도 못 마시고, 좋은 물도 마시지 못하고, 맛있는 김도 미역도 해물도 못 먹고 살아야 하는, 이대로 가다간 우리의 후손들은 소아마비와 심장병과 기형아가 많이 태어나게 될 것이고, 차라리 안 태어난 것만도 못한 그런 애들이 점점 많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기와 물과 온갖 식품과 약품 이런 물질적인 오염의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은 삐뚤어지고 꼬이고 전도(顚倒)된 인간의 마음보, 그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오장육부와 체내에 흐르고 있는 피가 오염이 된데다, 마음보까지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썩어 문드러진 그러한 인간들 사이에 태어난 우리의 후세가 어찌 온전하게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속담에, 「종기(腫氣)가 크면 고름이 많이 나고, 이다불대(泥多佛大)라, 진흙 덩어리가 많으면 불상(佛像)이 크게 조성이 된다」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인데 이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쬐끄맣게 뽀드락지가 난 것은 그 짜봤자 고름이 조끔 밖에 안 날 거고, 종기가 이만이나 하니 등창이 났다든지 허벅지에 났다면 그놈을 짜면 고름이 많이 쏟아지게 될 것이여.

불상(佛像)을 진흙으로 조성하는 데 진흙을 많이 갖다가 그놈을 잘 이겨서 그걸 그 많은 진흙으로 불상을 조성하면 큰 부처님이 조성이 될 것이여. 진흙을 조끔 갖다가 빚어서 불상을 맨들면 쬐끄만 불상 밖에는 못 만들 것이다 그 말이여.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허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라

나무~아미타불~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전단 향나무로 중생의 모냥을 조각을 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다, 부처님 상호와 보살 상호를 또 조각을 한다 그 말이여.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여. 중생의 모습도 갖가지로 조성을 하고, 부처님 모습도 각각으로 조성을 하고, 보살(菩薩)의 모습도 각각으로 조성을 하고, 소나 돼지나 말의 모습도 갖가지로 조각을 했다 그 말이여.

그 모냥이 다 각각 다르지마는,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여. 내음을 맡어 보면, 부처님 상을 조상한 것도 맡어 보면 전단향(栴檀香) 냄새가 나고,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상(像)을 조각한 것도 맡어 보면 전단향(栴檀香) 냄새가 나고, 중생의 갖은 모습을 조각을 한 것도 맡어 보면 전단향 향내 냄새는 마찬가지다.

왜 그러냐 하면 그 근본이 전단향으로 조성을 했기 때문에 비록 모냥은 달라도 향내는 일반(一般)이다 이거거든.

 

좋은 공기, 좋은 물, 좋은 음식을 먹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합해서 그 사이에서 애기를 나면 아름답고 착하고 멋진 아기를 낳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 말이여.

건강(健康)한 육체와 건전(健全)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정치를 해도 바른 정치를 할 것이고, 경제를 해도, 사업을 해도 올바른 사업을 할 것이고, 교육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더라도 올바른 교육자가 되고, 올바른 농사꾼이 되고, 올바른 장사가 되고, 올바른 판검사가 될 것이다 그 말이여.(36분16초~51분56초)

 

 

 

 

(4/4)----------------

 

삐뚤어진 정신을 가진 사람이 공장 하는데, 공장을 하는 데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깊이 100m 이상 깊이 뽐뿌를 박아 가지고, 빠이프(pipe)를 박아 가지고 거기서 물을 뽑아서 쓰는데 몇천만 톤 뽑아 쓰면은 물도 한계가 있어서 안 나오거든.

그러면 공장에서 쓰고 남은 독한 약품이 섞여 있는 공장 폐수를 그 100m 이상 깊은—물이 인자 떨어져서 안 나오는—그 물구녁에다가 공장 폐수를 거기다 집어넣는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100m 이상 깊은 우물 속으로 공장 폐수를 집어넣으면, 지하의 수맥(水脈)이 있는데 그 수맥으로 그 공장 폐수가 나가면 근처나 멀고 가까운 데에 우물을 파면 그 공장 폐수로 인해서 오염이 된 물이 솟아나옵니다. 저 100m, 1000m 밖에 흘러나오는 물이 바로 공장 폐수가 나오는 그 물을 사람이 먹으면 뭣이 되겠느냐.

 

자기도 잘살아야 하지만, 자기가 잘살려고 남에게 해를 끼쳐선 안 되는 거여. 자연을 오염을 시키고 자연을 파손을 해선 안 된다 그 말이여.

자기가 좀 돈 좀 벌려고 사업을 한답시고 자연을 파손하고 지하수를 갖다가 오염을 시켜 놓으면, 그러한 마음씨를 가지고 큰 부자 되겄습니까? 그러한 삐뚤어진 마음씨, 불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어떻게 큰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이거여. 그러한 마음으로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봤자, 부모를 죽이는 폐륜아 밖에는 그 속에서 태어나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요새 '환경을 보호하자!' 이러한 말이 자꾸 드높여지고 있습니다. 법(法)을 엄하게 제정을 해서 감시를 철저히 하고 벌칙을 강화를 하는 것,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민간 환경을 정화하는 그런 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적으로 확대 전개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선행(先行)되어야 할 중요한 것은, 돈도 안 들고 시간도 안 걸리고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보를 고치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의 몸은 '정보(正報)'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세계 국토와 가옥과 의복과 음식 기구 이런 것은 '의지할 의(依)' 자, '의보(依報)'라 했습니다마는, 그 정보(正報) 가운데에 진짜 이 '마음보'라 하는 거, 이것이 정보(正報) 의보(依報)를 진짜 바로잡는 것이 우리 마음보입니다.

'마음보' 하나를 바로잡으면 몸도, 이 세계도 영원토록 우리가 살 수 있는 좋은 극락국토(極樂國土)를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보 고치는 데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보를 고치는데 아까 받은 십선계(十善戒)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말이여.

십선계를 잘 지키면서, 막연하게 십선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건 사실상 이 어려운 일이여.

 

'이 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5년, 10년 내지 30년을 '이 뭣고?'를 해도 여전히 마음보를 고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참선(參禪)을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여.

자녀를 기르는 데 맛있는 음식과 고기를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면 그것이 자식을 잘 기른 것이 아니고, 목동이 소나 말이나 돼지를 길르는데 사료만 배가 터지도록 잔뜩 맥인다고 해서 좋은 목동이 아니여. 책상에 밤낮 붙어 있는다고 해서 그 학생이 공부 잘한 것이 아니여.

 

참선(參禪)도 마찬가지여. 제대로 참선을 하면은 첫째, 우리 마음보가 바로잡아지거든.

마음보가 바로잡어지고 안 잡아지고 한 것은 무엇으로 아느냐 하면은 몸으로 하는 행동을 보고, 입을 통해서 하는 말을 들어보고, 마음씨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마음보가 고쳐졌느냐 안 고쳐졌느냐, 알 수가 있는 거여.

밤낮 참선한다고 해도 썽을 잘 내고 탐욕심이 아주 시커먼 탐욕심을 내고, 심술(心術)궂고 그리고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거짓말한다면, 그거 어떻게 그 사람이 바로 참선을 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이거여.

 

말과 행동과 마음 씀, 그것에 즉(卽)해서 '이 뭣고?'를 해야 돼.

'이 뭣고?'를 앉어서나 서서나 걸어가면서나, 일할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이 뭣고?'를 하면 자연히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반영이 되고, 생활 속에서 '이뭣고?'가, 생활에 즉(卽)해서 '이 뭣고?'를 자꾸 챙기게 해서 참선과 생활이 둘이 아니여. 바로 '신토불이'가 거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거거든.

 

'외국산 먹지 말고 한국산 먹자'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뜻이 어찌 그렇게 값없이 해석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신토불이(身土不二)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몸과 이 세계가 둘이 아니다」 이거거든.

그러니 마음보를 고침으로 해서 몸도 건강하고 우리의 주변 환경도 아름다워지고 좋아져서, 그렇게 해서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자 이거거든. 이것이 바로 신토불이의 참뜻이다 이거거든.

 

 

오늘 이 법회(法會)에 참석하고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고 화두(話頭)를 탄, 그리고 불명(佛名)을 탄 이 공덕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우리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세세생생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화두(話頭)는 '이 뭣고?'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통해서 우리는 '이 뭣고?' 화두를 탔습니다. '이 뭣고?'

'이 뭣고?' 처음에는 별로 재미도 없고 맛도 없지만, 법문을 자주 듣고, 녹음법문을 자주 들으면서 자꾸 그 법문대로 '이 뭣고?'를 열심히 하면, 차츰차츰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 뭣고?~~~'만 추켜 들어라 그 말이여. 그러면 번뇌 망상은 원래 뿌리가 없는 것이라 제절로 없어지는 거고,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으면 오후(悟後)에 공부해 나가는 법을 지도를 받을 것이요,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닐 때에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해 가야 할 것입니다.

 

 

신여백운래환계(身與白雲來幻界)하고  심수명월향하방(心隨明月向何方)고

나무~아미타불~

생래사거유운월(生來死去惟雲月)이라  운자산혜월자명(雲自散兮月自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신여백운래환계(身與白雲來幻界)여  심수명월향하방(心隨明月向何方)고.

몸은 흰구름처럼, 흰구름과 같이 이 사바세계에 왔다가 만났고, 심수명월향하방(心隨明月向何方)이냐, 마음은 밝은 달처럼, 밝은 달을 따라서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우리 몸뚱이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입니다. 그 몸뚱이는 구름과 같애. 수증기가 올라가서 구름이 뭉쳤다가 바람이 찬 기운을 만나면 비가 되는 거고, 또 눈이 되는 거고, 또 바람이 불면 자최 없이 저 날아서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여. 우리의 육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우리의 마음은 달과 같애. 달은 항시 밝아 있지마는 구름이 끼면은 그 달이 가리워져서 안 보여.

구름이 다 날아가 버리면 밝은 달이 휘황창 밝아지듯이, 비록 이 육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병들어서 늙어서 죽게 되는데, 그게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인연(因綠) 따라서 뭉쳤다가 구름 흩어지듯이 흩어진 것인데, 이름을 그것을 '생(生)' 이라 그러고, 이름을 그것을 '죽었다' 그러는 것이지, 생사(生死)는 본래(本來) 없는 거여.

 

구름은 흩어져 버리고 날아가고 없으면은 달만 환하니 휘황창 밝아 있어.

 

우리가 '이 뭣고?'를 열심히 해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고 보면 우리는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과 더불어 영원을 사는 것이여.

생사(生死)란 것이 그렇게 크게 좋아할 것도 없고, 크게 슬퍼할 것도 없어요. 구름이 나타났다가 날아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고, 알고 보면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없고 그렇게 싫어할 것도 없지만,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분명(分明)히 생사(生死)가 있고 분명히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있다 그 말이여.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급한 것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는 거여. '이 뭣고?'를 해서 결정코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야, 그래야 이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것이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거여.

 

불명(佛名)은 이 법회가 끝난 뒤에 차례대로 다 노놔 드릴 것입니다. 서로 불명(佛名)을 부르고 불러주고, 불명을 부를 때마다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는 것이니 불명을 받은 사람은 그 계첩(戒牒)을 액자로 해서 잘 갖다 방에, 집에다 붙이고 친구간에나 가족끼리도 서로서로 불명을 부르도록 하시길 바랍니다.(51분57초~68분29초) (끝)

 

 

 

 

[법문 내용]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화두 불명 십선계 법회 / 대승십선계 / 항상 화두(話頭)를 챙기고 화두를 들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면 제절로 계(戒)가 지켜지는 것이다.

 

자연 오염 문제 말씀 /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은 신(身), 몸뚱이와 땅[土]은 둘이 아니여[不二] / 모든 중생[有情]들의 과보(果報)에 정보(正報, 우리의 몸과 마음)와 의보(依報, 우리 몸과 마음이 의지하는 세계와 국토 산 강 집 옷 음식 모든기구) 2가지가 있는데, 신(身)은 정보(正報)고, 토(土)는 의보(依報)다. 이 정보와 의보, 2가지는 하나다[不二]. 이것이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본뜻.

 

자연 오염보다, 삐뚤어지고 꼬이고 전도(顚倒)된 인간의 마음보가 더 큰 문제 / (게송)전단목주중생상~ /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것이 우리의 마음보를 고치는 것 / 정보(正報) 의보(依報)를 바로잡는 것이 우리 마음보 하나를 바로잡으면 몸도, 이 세계도 영원토록 우리가 살 수 있는 좋은 극락국토(極樂國土)를 만드는 것.

 

제대로 참선을 하면은 첫째, 우리 마음보가 바로잡아진다 / 생활 속에서, 말과 행동과 마음 씀, 그것에 즉(卽)해서 '이 뭣고?'를 해야 참선과 생활이 둘이 아니어서, 바로 '신토불이'가 거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 신토불이(身土不二)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몸과 이 세계가 둘이 아니다」

 

(게송)신여백운래환계~ / 우리의 몸뚱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는 구름처럼 인연(因綠) 따라서 뭉쳤다가 흩어지는 것인데, 이름을 그것을 '생(生)' 이라 그러고, 이름을 그것을 '죽었다' 그러는 것이지, 생사(生死)는 본래(本來) 없는 거여 / 우리가 '이 뭣고?'를 열심히 해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고 보면 우리는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과 더불어 영원을 사는 것이여.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급한 것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는 거여. '이 뭣고?'를 해서 결정코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야, 그래야 이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것이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거여.

 

 

불도(佛道) 수행(修行)을 성취코자 하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삼학(三學)을 겸해서 닦아야 하나니, 계(戒)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물이 담기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해야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연비(燃臂)하는 뜻은, 무량겁 이래(以來)로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罪)를 참회(懺悔)한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앞으로는 그러한 죄를, 그러한 악을 짓지 않겠다고 하는 맹서(盟誓)를 부처님께 한 것입니다. 계를 받고 연비를 한 이 공덕으로 우리가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우리는 무량겁으로 내려오면서 익힌 바가 습기(習氣)로 남아 있어서 무심결에 그러한 악을 범하게 되는데, 그러한 생각이 일어날라가도 퍼뜩 '이 뭣고?' 화두를 들면 그 죄를 범하기 전에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항상 화두(話頭)를 챙기고 화두를 들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면 제절로 계(戒)가 지켜지는 거여. 참선하는 사람이 무슨 살생을 하며, 도둑질을 하며, 사음을 할 것인가.

 

우리가 '이 뭣고?'를 열심히 해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고 보면 우리는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과 더불어 영원을 사는 것이여.

생사(生死)란 것이 그렇게 크게 좋아할 것도 없고, 크게 슬퍼할 것도 없어요. 구름이 나타났다가 날아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고, 알고 보면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없고 그렇게 싫어할 것도 없지만,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분명(分明)히 생사(生死)가 있고 분명히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있다 그 말이여.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급한 것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는 거여. '이 뭣고?'를 해서 결정코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야, 그래야 이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것이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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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76~600)2021. 1. 19. 12:54

((No.596))—1997년 11월 첫째일요법회 (61분)

 

596-1:3(1997년 11월 첫째일요법회:약19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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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2:3(1997년 11월 첫째일요법회:약21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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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3:3(1997년 11월 첫째일요법회:약21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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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약 19분. (2/3) 약 21분. (3/3) 약 21분.

(1/3)----------------

 

만물영고자유시(萬物榮枯自有時)하야  난향춘일국개지(蘭香春日菊開遲)니라

나무~아미타불~

세간궁달개여차(世間窮達皆如此)하야  선후수수일양사(先後雖殊一樣思)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물영고자유시(萬物榮枯自有時)하야  난향춘일국개지(蘭香春日菊開遲)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번영(繁榮)할 때가 있고 또 쇠퇴(衰退)할 때가 있어. 마치 봄, 여름에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한참 번성해 가지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져서 시들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고목나무만 남는다. 인생도 마찬가지여. 한때,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모든 역사가 다 그렇습니다.

봄에는 난초가 향기를 풍기다가 가을이 되면 모든 꽃들이 다 시들어 버리고 시들어 버리고 국화만이 서리를 이기면서 향내를 풍긴다 그 말인데.

 

세간궁달(世間窮達)도 개여차(皆如此)해서, 세간(世間)에 고생하다가 또 벼슬을 하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고 한참 명예와 권리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또 시절(時節)이 지나가면 참 허망하고 비참하게 그런 권좌(權座)로부터 물러나. 그러한 것을 우리는 과거에 역사 속에서도 숱하게 많이 봐 왔고 현실적으로도 그런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선후수수(先後雖殊)나 일양사(一樣思)다. 시간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차이가 있을지언정, 한때 성(盛)하면 그 고비를 넘기면은 또 운명이 바뀌고 세월이 바뀌고 운세가 바뀌어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수천 년 만 년 전부터서 파장(波長)을 이루면서 역사가 흘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 공부를 하면 명예나, 권리나, 부귀영화라 하는 것이 달팽이 뿔과 같아서 푸욱 솟아올랐다가 푹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그렇게 믿을 것이 못되고 허망한 것인 줄을 충분히 알 수가 있어서 그까짓 것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대들만한 가치가 없는 일인데, 그러한 허망하고 비참한 모냥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러한 데에 대한 욕망(欲望)과 애착(愛着)을 끊지를 못한 것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형편인 것 같습니다.

 

고인(古人)이 시(詩)를 읊기를,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요,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기러기가 놀다간 모래사장에는 기러기의 발자죽만 남아 있고,

인거황천(人去黃泉)에 명재가(名在家)다. 사람이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다가 저 황천객(黃泉客)이 되었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

 

채득백화성밀후(採得百花成蜜後)에, 일백(一百) 꽃에서 꿀을 따다가, 벌이 꿀을 따다가 떠억 벌집에다가 모아놨는데,

부지신고위수감(不知辛苦爲誰甘)고, 그 벌이 그 날이면 날마다 멀고 가까운 꽃은 꽃은 다 찾아다니고 개천에도 찾아다니고, 심지어는 변소 시궁창까지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따다가 맨들아논 그 꿀, 그 벌의 고생은 생각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그러한... 누구를 위해서, 누구의 입을 달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벌들이 고생을 하면서 꿀을 만들아놨던가 이 말이여.

 

세상 사람들은 국가와 사회와 인류를 위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정치도 하고, 학문도 하고 모다 그런 명분을 세워서 일생 동안을 몸과 목숨을 거기다 바칩니다. 물론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그러한 분들의 피땀으로 인(因)해서 이 역사가 이루어졌고 오늘날과 같이 문명사회(文明社會)가 이루어져서 모두가 다 살기가 편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좋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할아버지들, 역대(歷代)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피땀 흘려서 애를 쓰셔 가지고 이루어놓은 그것으로 인해서 그 아들과 딸과 손자손녀들이 또 잘살고 그 가문을 전통해 나가고 또 그런 점도 있습니다마는.

 

정말 넓은 의미로 보면, 기러기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린 뒤에 그 발자죽이 모래밭에 남아 있다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그 자죽은 없어져 버리고, 또 사람이 한평생 살다가 저생(저승)으로 가버린 뒤에는 아무 소용도 없고 이름만 얼마 동안 남아 있는 것뿐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것을 위해서 정말 목숨과 모든 것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벌이 그 고생을 하면서 꿀을 모아놓은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따 먹으라고 벌이 꿀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벌은 벌대로 따다 놓아 가지고 겨울에 꽃이 없을 때 그것을 자기들 먹을라고 해 놓은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따다가 먹는 것뿐이다 그 말이여.

자손들을 위해서 그 못 먹고 못 입고 재산을 모아놓는데, 그 자손들이 부모가 애써서 모아놓은 그 재산으로 정말 행복하게 꼭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부모의 유산을 많이 받었다고 해서 그 자손이 행복하라는 법도 없고, 부모가 아무것도 남겨 준 것이 없어도 고생 고생하면서 자수성가(自手成家)해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큰 사업도 하고 큰 정치가도 되고 학자도 되고 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자손을 위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자손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 하는 그러한 생각보다는, 자손을 위해서 부모가 꼭 해야 할 일은 재산을 많이 넘겨주기보다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가리켜 주는 것이 정말 부모로서 할 도리고, 정말 자손을 위한 부모의 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속담에 '고기를 잡어서 갖다가 줄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리켜 주는 것이 낫다'고 그런 속담도 있습니다마는.

 

 

옛날에 조주(趙州) 스님이라고 하는 큰,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고 칭찬을 받을 만한 대도사가, 조사(祖師)가 계셨는데, 『전등록(傳燈錄)』이나 『염송(拈頌)』에 보면 조주 스님으로 인해서 나온 공안(公案)이 참 많고, 조주 스님은 참 학자(學者)를 제접(提接)하는데 능소능대(能小能大)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해서 참 대단히 거룩하고 훌륭한 그런 도인(道人)이신데,

아까 녹음을 통해서 법(法)을 설하신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참 조주 스님을 무척 존경하시고, 조실 스님께서 학자를 제접하는 그 가풍(家風)을 보면 조주 스님과 참 많이 닮으신 데가 있다.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주 스님의 시봉(侍奉)에 문원(文遠), '글월 문(文)' 자, '멀 원(遠)' 자, 문원(文遠)이라고 하는 수좌(首座)가 조주 스님의 시자(侍者)로 있었는데, 그 시자하고 노상, 그렇게 훌륭한 큰 도인(道人)이시지만 그 시자하고 서로 어울리고 이야기할 때는 할아버지와 손자와 같이 이렇게 인자 문답(問答)을 하시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시고 그러는데.

어느 날 "우리 그 떡을 내기를 하자. 내기를 하는데 서로 말을 해 가지고 지는 것으로써 이긴 것으로 하자. 예를 들어서 가위 바위 보를 하는데, 내가 돌(바위)을 내면 저쪽에서 보자기를 내면 저 사람이 이긴 것이지만, 주먹을 (가위 바위 보) 바위를 낸 사람이 졌지마는, 진 사람이 이긴 걸로 하자. 또 내가 가위를 내면 상대방이 보자기를 내면 보자기 낸 사람이 졌지마는, 그 보자기 낸 사람을 이긴 걸로 하기로 하자" 이랬단 말이야. 그래 가지고 떡 내기를 했어.

 

그러니까 문원(文遠)이라고 하는 시자가, "그러면 스님께서 먼저 하십시요"

그래 인자 조주(趙州) 스님이 인자 먼저 말씀을 하시기를, "나는 나귀다. 나는 한 마리 나귀다" 그랬어. 사람도 있고, 뭐 임금님도 있고, 뭐 하늘도 있고, 뭐 좋은 것이 이 세상에 꽉 찼는데, "나는 나귀다" 그러셨단 말이여.

그러니까 그다음에 문원 시자(侍者)는, "저는 나귀의 팔꿈치입니다" 나귀는 온통 한 마리고, 나귀 다리에 팔꿈치는 그 일부분이니까 문원이 말한 것이 좀 더 작아졌다 그 말이여.

 

그다음에 조주 스님이, "그러면 나는 나귀 똥이다" 그랬어. 나귀의 팔꿈치보단 똥은 더 추접하고 작다 그 말이여.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문원이, "저는 그 나귀 똥에서 살고 있는 버러지입니다"

 

그런데, 조주 스님이 인자 얘기를 하실 판이라. "너 그러면 그 똥 속에서 무엇을 하노? 하고 있노?" 그러니까, "그 속에서 여름을 지내고 있습니다"

"너 이놈! 떡 가져 와"

 

이거 천칠백... 얘기처럼 되어서 우리는 웃지마는, 사실은 이 속에 웃을 수 없는 무서운 뜻이 이 속에 들어 있어.

 

"나귀다"

"나귀 팔꿈치다"

 

"나는 나귀 똥이다"

"저는 나귀 똥 속에서 살고 있는 버러지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조주 스님이 얘기를 할 판인데, "너 그 똥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노?" 그러니까, "여름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단 말이여.

 

"여러 소리 말고 가 떡 가져오너라"

거기에서 이 '누가 지느냐' 하는 내기를 해서 결국은 그렇게 이 공안(公案)은 끝났지마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된 거냐?' 이것을 내가 여러분 보고 일르라고 말은 하지 않습니다.(처음~18분29초)

 

 

 

 

(2/3)----------------

 

여기에 고인(古人)이 한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만사무여퇴보휴(萬事無如退步休)헌디  백년허환몽중구(百年虛幻夢中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주불시쟁호병(趙州不是爭胡餠)이라  요사시인열처구(要使時人劣處求)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사무여퇴보휴(萬事無如退步休)요   백년허환몽중구(百年虛幻夢中軀)다.

세상만사가 퇴보(退步)해 가지고 뒤로 물러서서 쉬는 것만 같지 못하다. 왜 그러냐?

백년허환(百年虛幻)은 몽중구(夢中軀)여, 백년, 인생이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리를 누리고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이 살았다 하더라도, 백년 살고는 기러기 발자죽만도 못하고 벌의 신세만도 못한 그러한 허망한 몸뚱이여.

 

조주 스님이 떡이 먹고 싶어서 떡 내기, 시자(侍者) 데리고 떡 내기 수수께끼를 한 것이 아니고,

요사시인열처구(要使時人劣處求)라. 세상 사람들이 너무 서로 지가 잘난 체하고, 지가 옳다고 그러고, 무엇이던지 지가 해야만 되고, 지가 이길라고 그러고, 크고 작은 싸움 · 전쟁 · 시비, 죽이고 죽고,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싸움이 그칠 세가 없고 그러니,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겸손하고, 서로 사양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사람을 추대하고, 이러한 도리(道理)를 가리키기 위해서 시자(侍者)하고 그러한 수수꺼끼와 같은 그런 법담(法談)을 한 것이다 이거거든.

 

산승(山僧)이 이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여간해서 정치 문제 그런 데에는 언급을 하지 않고, 언제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권장을 하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세상이 무상(無常)한 줄을 깨달라서 어쨌든지 참나를 깨달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우리가 다 같이 참선 공부를 하자. 그런 얘기를 주로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불과 한달 남짓하면은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대통령 선거는 우리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그러한 중대사입니다. 훌륭한 대통령을 뽑아서 정치를 잘해야 우리나라가 흥하게 되고, 우리 백성이 모다 잘살게 되고, 우리나라가 세계에 일등국(一等國)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중대한 시기입니다.

 

그러니만큼 오늘은 이런 얘기를 조끔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옛날부터서 불교(佛敎)와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해 오고, 현재도 역시 불교를 믿는 불교신도가 천육백 내지 이천만 명에 넘는다고 그런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마는, 항상 자기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앞세우고, 자기 몸보다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부처님의 자비사상(慈悲思想)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유교(儒敎)도 인의(仁義)를 역설을 하고 한 것이 모두가 다 중요한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으로 중국의 역사에도 기록될 만큼 우리나라는 그러한 민족성(民族性)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근자에 민주주의다 해 가지고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무슨 지방장관 선거, 선거 때만 되면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고, 어디 무슨 나라 국적(國籍)을 가진 민족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그러한 양상이 벌어집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정치에 있어서, 옛날에 성현(聖賢)들이 정치를 하는 군주주(君主主) 시대, 그것은 우리 눈으로는 직접 보지 못하고, 동양(東洋) 모다 중국역사를 보면은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과 같은 그런 성현(聖賢)이 천자(天子)가 되실 때는 정말 백성이 믿고 살 수 있는 그런 시대였었고, 성현이 천자나 왕이 되지 못할 때에는 훌륭한 성군(聖君)을 만나기가 대단히 어려웠었습니다.

성인(聖人)이 왕(王)이 되고 천자(天子)가 되기가 어렵다면, 그다음으로 좋은 정치는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제일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도 단점(短點)이 있습니다.

 

세상을 내다볼 줄 알고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없는 사람은 몇 사람이 안 되고, 전부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자기 개인의 영달(榮達)과 자기 당(黨)에서 정권을 잡어야만 자기도 영달을 할 수가 있으니까 자기 당략(黨略) 당권(黨權) 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거개(擧皆)가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다수가결(多數可決)로 법(法)을 맨들고 뭔 일을 추진을 하면 그런 사람들 의견으로 다 모든 것이 가결(可決)이 되고 추진이 되어서 정말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한 그런 훌륭한 사람의 말은 수가 적으니까 마냥 뜻대로 안되는 거, 그것이 민주주의에 단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손 치더라도, 선거 때 자기의 '어떻게 하리라'고 한 자기의 포부를 널리 알려서 자기를 찍어달라고 강의도 하고 토론도 하고 그것은 좋지마는, 상대방을 갖은 모략(謀略)과 중상(中傷)으로 상대방을 짓밟고 차고 꼬집어 뜯고, 귀로도 들을 수도 없고 입에도 담을 수도 없고 눈으로도 볼 수 없는 악랄하고도 비겁하고 한 그러한 방법을 써서 상대방을 비난한 거 이것은 참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장관 선거쯤은 또 모르겠는데,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그런 대통령(大統領)으로 출마한 그런 분들이 나서 가지고는 그렇게 비난하고 헐고 뜯고 욕설을 퍼붓고 한 것은, "저러한 분을 대통령으로 뽑아 갖고 정말 우리가 믿고 정권을 그이한테 맽길 수가 있을 것인가? 저런 비인격적(非人格的)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은 우리나라 운세(運勢)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것이 정말 가슴 아프고 한탄스러움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국민(國民)의 권리(權利)요 의무(義務)로써 머지않아서 가서 한 표를 던지셔야 되겠는데, 물론 그분의 과거와 현재와 모든 것을 널리 생각해서 자격도 있고 능력도 있고, 포부도 있고 배짱도 있고 전체를 포섭할 만한 아량도 있고 한 그러한 분을 여러분은 뽑겠지마는, 남을 헐고 뜯고 한 사람은 그 점도 하나를 보아야 한다 이겁니다.

 

자기의, '이렇게 이렇게 잘하겠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잘했다' 그것도 선거 때가 아니면 자기 자랑한 거 별로 인격적으로 챙피한 노릇이지만, 그래도 선거 때는 자기 자랑을 해 주어야 남이 아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고 하더라도, 남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략중상(謀略中傷)한 것은 그건 나는 별로 그 사람 찍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악랄한 방법을 써 가지고 남을 비방하고 헐뜯고 한 것은 대통령이 될 만한—그분이 잘 대통령을 잘해야 우리가 잘살 수 있고 대한민국이 빛날 텐데, 비인격적이고 부도덕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 어떻게 나라를 빛내고 백성을 잘살게 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조주(趙州) 스님처럼, 자기가 잘난 체하고 그래 가지고 이길라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특히 우리 도(道) 닦는 사람은 잘난 체하고 뽐내고 아만통을 부리고 남을 업신여기고 한 것을 대단히 안 좋게 여기고,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항상 남의 좋은 점은 찬양하고 남의 좋은 점은 본받으려고 노력을 하고, 설사 다른 사람이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용서(容恕)를 하고, 아량(雅量)으로 봐주고, 참회(懺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렇게 해서 서로가 화합을 하도록, 이것이 출가한 스님네가 일생 동안에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덕목인데.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믿는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서로 상대방을 좋은 점은 찬양을 하고 안 좋은 점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이해해 주고 양보해 주고 위로해 주고, 그렇게 해서 부부간이 화목(和睦)해서 잘 살아야 자녀들도 그 부모님들이 하시는 것을 보고, '야! 부부간은 저렇게 사는구나. 나도 커서 장가가고 시집가면 그렇게 살아야겄다' 그래 가지고 그 자녀들이 성장이 되면 또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어 나갈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어떻게 된 것인지 연애할 때는 서로 상대방의 좋은 점만 보고 찬양하고 이쁘다고 그러고 서로 결혼을 하는데, 결혼을 해 가지고는 첫날 저녁부터 싸움을 시작을 해. 그래 가지고 첫날 저녁에 이혼한 사람도 있고, 머지않아서 패물을 적게 가져왔다고 싸우고, 살면서 '부부간에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해 가지고 부부간에 싸움은 안 하는 것이 이상(異常)이고 싸움하는 것은 보통이 되었고, 그래 가지고 수없이 이혼을 한다 그 말이여.

이혼을 해서 새로 시집을 간다고 해서 꼭 훌륭한 좋은 남편을 만나리라고 한 보장도 없는 거고, 또 재추(재취) 삼추 간다고 해서 좋은 아내를 얻으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거기서 이혼 가정에 아들과 딸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고아(孤兒)의 신세가 되는 것이고, 결손 가정(缺損家庭)에 아들들은 대부분 문제아가 되어 가지고 학교에 가서도 문제가 되는 거고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어데서 싸울 데가 없어서, 싸울 사람이 없어서 부부간에 싸우냐 그 말이여. 아내는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과 집과 형제자매를 떠나서 시집을 갔습니다. 시집을 가서 그 시집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시집에서는 그 들어온 그 며느리를 자기의 정든 부모를 버리고 내 집 식구가 되었으니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잘 봐주고, 위로를 해 주고 따둑거려 주고 용서를 하고, 그래야 할 것이고.

시집에 올 때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왔습니까? 신랑 하나 보고 왔는데 그 신랑이 아내를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고 그래야 할 것을, 그 달달 볶아서 못살게 군다면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이여.

 

한 부부간에 문제, 가정의 문제도 그렇고, 형제간에 문제도 그렇고, 사회 국가도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뭐 노론(老論) 소론(少論)이니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해 가지고 자기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상대방을 역적(逆賊)으로 몰아서 귀양을 보내거나 죽이거나 해 가지고 자기가 정권을 잡고 한 것이 이조(李朝)... 뭐 백 년 이백 년 전에 우리나라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임진왜란(壬辰倭亂)도 당하고 또 일본에 식민지(植民地)가 되기도 한 역사가 엊그제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는, 물론 민주주의(民主主義) 시대(時代)니까 여당(與黨)도 있고 야당(野黨)도 있고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나, 정책으로 서로 토론을 하고 싸운 것은 그것은 국가 발전을 위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나, 그런 것을 떠나서 인신공격을 해 가지고 악랄한 방법으로 이렇게 서로 싸우다가 나라의 꼬라지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누구 한두 사람의 잘못으로 책임을 몰아붙일 일도 아니고, 정치한 사람들이 전부 자기는 잘못이 없고 다른 사람한테 책임을 몰아붙이지만, 모두가 다 같이 책임(責任)을 절감(切感)을 하고 서로 화합(和合)을 해서 '나라를 어떻게 해야 우리가 건질 수가 있겠는가?' 거기다가 초점을 맞춰서 해 나가야 할 것이고.

 

꼭 정치한 사람한테만 꼭 책임 있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온 국민이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잘살게 될 것인가?' 각자 자기가 있는 자기 위치에서 자기의 직장에서 자기 할 일을 찾어야 합니다.

회사면 회사, 관공서면 관공서, 공장이면 공장 해서, '내 한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이 공장이 살아나고 내 한 사람이라도 어떻게 해야 이 회사에 보탬이 된가?'

공장일 그만두고 정치에 어쩌고... 그것은 성현들은 그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최선을 각각 다할 때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되아간다고 그랬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정치를 얘기한 자리가 아니지. 정치 얘기는 우리가 그것을 떠나서 살 수가 없고, 곧 코앞에 우리가 해야 할 권리와 의무를 이행할 일이 다가오기 때문에 내가 한마디 언급을 한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것은 게송(偈頌)으로 한마디 읊겠습니다.(18분30초~39분28초)

 

 

 

 

(3/3)----------------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한데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차일신비아유(只此一身非我有)커늘  휴휴신외갱하구(休休身外更何求)리오

나무~아미타불~

 

행년홀홀급여류(行年忽忽急如流)헌디,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퍼뜩 퍼뜩 퍼뜩 지내가서 흘러가는 물과 같이 급하게 흘러간다 그 말이여.

노색간간일상두(老色看看日上頭)다. 늙으면, 번듯번듯 날이면 날마다 머리 위로 올라간다 그 말이여. 머리가 자고 나면 허옇고, 자고 나면 허옇고 우시우시 머리가 쏟아진다 그 말이여.

늙은 것이, 속으로 기운이 없어지고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도 하지마는, 제일 쉽게 나타나는 것이 귀밑 머리로부터서 허옇기 시작해 가지고 금방 머리 여기저기서 희끗희끗 흰머리가 솟아 온다 그 말이여.

 

우리가 태어나면 백 년 이백 년 오래오래 살 것 같지만, 뱃속에 포태(胞胎) 되어 가지고 뱃속에서도 죽을 수도 있고, 뱃속에서 몇 달 안 되어서 유산(流産)할 수도 있고, 태어나다가 죽을 수도 있고, 태어나서 며칠 안 있다 죽기도 하고 몇 달 안 되다 죽기도 하고, 열 살 안에도 죽고 스무 살 안에도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고, 싸우다가 죽고, 친구 칼에 맞아 죽기도 하고, 도둑한테 죽기도 하고, 인생의 목숨이라는 게 도무지 파리 목숨만도 못해.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도 모른다 그 말이여.

정말 무상(無常)을 깨달라야 하고 정말 믿을 것이 없어. 믿을 것이 없이 허망(虛妄)하고도 무상(無常)한 줄을 확실히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해야 지나친 탐욕심(貪慾心)도 안 부리게 되고, 자기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해롭게 하는 일을 안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사람이 남을 죽이고 돈을 뺏겠습니까? 남을 죽이고 돈을 뺏을 때는 그것 갖고 잘먹고 잘살 줄 알고 그러지만, 정말 무상(無常)한 줄을 깨달라야 지나친 탐욕심(貪慾心)을 안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지차일신비아유(只此一身非我有)여. 알고 보면 이 한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여.

우리는 이것을 '내 몸이다' 생각해 가지고 음식을 보면 맛있는 거, 영양 있는 것 많이 먹으려고 그러고, 다른 사람보다도 우선 제 입에 먼저 넣으려고 그러고, 좋다고 하면은 마구 먹어대고, 그리고 그 피부가 좋아진다고 하면은 온갖 것을 얼굴에다 처바르고 비싼 화장품을 사 가지고 얼굴에다 찍어 바르고 토닥거리는데, 그래봤자 내나 늙는 것은 마찬가지고, 그런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이 몸뚱이는 흙기운과 물기운과 불기운과 바람기운과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사대(四大), 뭐 요새 여러 가지 원소(元素)는 수백 수십 가지 원소가 되겠지만, 인도(印度)에서는 네 가지로 크게 분류를 했어. 중국(中國)에서는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다섯 가지로 분류를 했고, 인도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네 가지로 분류를 했는데. 그야 분류를 하기에 달린 건데.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육체(肉體)는 몽쳐지고, 또 오온(五蘊)이라 해 가지고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물질적(物質的)인 것과 정신적(精神的)인 것으로 요렇게 또 두 가지로 노누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렇게 분류하면 노나져 버리는데, 그러면 '내'라는 게 어디가 있느냐? 하면 죽음에도 없어.

지금 요새 과학적으로 해부를 하고 분류를 해서 다 분석을 하면 여러 가지 원소(元素)가 나오겠지마는 '내'라 하는 놈 찾아보면 원자현미경으로 봐도 '내'라는 놈은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이것을, '내'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내가 내 앞으로 등기(登記)를 해 놓은 집이나 땅이나, 모다 그런 통장이나 그걸 '자기 소유다. 내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잠시 관리(管理)를 맡고 있는 것뿐이지, 자기 것은 사실은 아닌 거여. '내 개인 소유다. 내 것이다' 그러지만 자기 것은 아닌 거여. 관리만 하고 있다가 그냥 죽을 때면 그냥 고대로 놓고 가는 거여.

자손한테 남겨주기 위해서 그 못 먹고 못 입고 애끼고 그러지만, 그것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꼭 행복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서양에서는 자손한테 준 것은 세금을 많이 뜯어가지고, 주어봤자 세금 물다 보면은 별로 자손한테 돌아갈 것이 없으니까 차라리 공익 단체에다가 기증을 하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그러는데, 그건 대단히 우리도 본받아야 할 만한 좋은 법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 이 한 몸뚱이도 내것이 아닌데, 무엇을 구(求)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休休身外更何求)

 

정치도 자기가 아니면 대통령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마는, 서로 험담을 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고, 과거에는 상대와 맞수가 되면은 죽이고 자기가 하는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확실히 증명이 안 되고 있지마는, 그래 가지고 해 봤자 무엇입니까 그게. 결국은 자기도 제 명(命)에 못 죽는 거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아들들에게 정치하라고 시키지 말고, 첫째는 불법(佛法)을 믿어라. 그리고 무엇이든지 너에게 소질(素質)이 있는 거, 니가 하고 싶은 거, 음악이면 음악, 뭐 그림이면 그림, 또 학문이면 학문, 꼭 나가서 권리를 잡으려고 하는 그런 데로만 가야만 좋은 것으로 그렇게 억지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생(前生)에 정치를 많이 해서 그런지 정치라고 하면 아주 이가 갈립니다.멀쩡한 사람이 출마만 하면 정신병자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도 혹 출마를 하면 저렇게 될까?'

나도 과거에 정치했을 때—내가 숙명통(宿命通)이 안 나서 전생에 내가 왕 노릇을 했는가 어쨌는가, 내가 확실히는 몰라도 언젠가는 왕도 한번은 했지 않을까 속으로 짐작이 그렇게 가요. 왜 그러냐?

그런 거 하기 싫은 것을 보면은 내가 과거에 했지 않은가 싶어요. 젊어서 어려서 보리밥을 너무 많이 먹어 가지고 신물이 나면 보리밥을 보면 아주 정떨어져 보기도 싫다고 그러거든요? 그런 것을 보아서 정치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면, 과거에 전생에 임금 노릇도 몇 번 쯤은 해봤지 않을까?

 

임금님을 했다면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또 거기서 장관도 하고 대신도 하고, 또 임금이 되면 많은 처첩을, 궁녀를 거느리고 후궁을 거느리고 하니까 또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그래서 여러분들도, 정치하면은 명예가 올라가고 권리가 생기고 그러니까 그런 맛으로 서로 하려고 그러고, 한번 잡으면 안 내놓으려고 그러거든.

그게 사실은 별로 좋은 것도 아니고 그 할 짓이 못되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잘한다'고 한 사람은 일부분이고 대부분 '잘못했다'고 한 사람이 더 많다 그 말이여. 어떻게 아무리 임금 노릇을 잘하고 대통령 노릇을 잘하기로서니 온 국민을 다 좋게 해 줄 수가 있는 문제냐 그 말이여.

이것을 법을 이렇게 제정하면 일부에서는 좋다고 하지만 일부에서는 손해 본 사람은 다 싫다고 하는 거여.

 

그래서 정치를 이미 손을 대 가지고 손을 뗄 수가 없고, 그것 아니면은 해 묵을 것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또 해야지, 여태까지 여당이다 야당이다 하다가 이 법문(法門) 듣고 '아이고, 내 그거 그만두어야 겄다' 할 사람 한 사람도 있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하기는 하되 정당(正當)하게 하고, 일단 하게 되면 정말 사심(私心)없이 해야 하고, 이 몸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바친다는 그러한 마음으로 보살(菩薩)의 정신(精神)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렇다면 거기에 사욕(私慾)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떻게 하면 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잘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대통령을 하고 나오면, 대통령 하고 나오면은 호위하는 사람이 없어도 가는 곳마다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대통령 할아버지' 이렇게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러한 대통령을 해야 하고.

 

정말 사리사욕(私利私慾)이 없고, 자기에게 경륜(經綸)이 있어서 이 침체된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모든 교육과 모든 것을 정말 잘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경륜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원력(願力)을 세우고 한번 해 볼 만하는데, 그거 그런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겄습니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은 그러한 대원력(大願力)과 대자비(大慈悲)와 대지혜(大智慧)를 갖춘 사람이 할 일이 바로 대통령이고 왕(王)이다 그 말이여. 그렇지 않으면은 할 짓이 못돼.

 

여러분은 (IMF 경제 위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뉴스를 듣고, 그러한 속에서 귀를 막고 살 수는 없고, 그런 흐름 속에도 우리도 다 같이 이렇게 국가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도 같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그래도 이 자리에 모이신, 또 산승(山僧)의 이러한 간곡한 말을 들으신 인연(因緣) 있는 분은, 정치를 하되 자기의 위치에서 사욕과 사심이 없이 성실히 하고, 인연이 있어서 관여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그만 둘 때는 깨끗하게 미련없이 놓아 버리고, 니아까를 끌던지 운전사를 하던지 농사를 짓던지 장사를 하든지, 영국에 윌슨 수상은 옥스포든가 켐브리진가 그 영국에 좋은 대학을 나와 가지고 영국에 수상이 되었는데, 아직 임기가 아직 남아 있어도 후배들을 위해서 미리 사표를 내고 나와 가지고 그 이튿날 운전사로 취직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쯤 되어야 하거든. 할 때는 멋들어지게 하고, 그만둘 때는 깨끗이 끝내고.

우리나라 이조(李朝) 동안에도, 그 이름은 내가 잊어버렸는데, 훌륭한 정승(政丞)이 있었는데 구십구 칸이나 되는 큰 건물 집을 짓고 많은 권속을 들이고 그렇게 참 권리를 누리고 정치를 하다가, 인연이 돌아와서 그만두게 되니까, 그것 다 고대로 버리고 자기가 키우고 있는 학 한 마리와 개나리 봇짐만 짊어지고 저 시골 고향 농촌으로 돌아간 그러한 훌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치라는 게 권리(權利)를 잡을 때는 명예와 권리가 따르고, 내놓을 때는 비참한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집니다. 할 때는 열심히 하고 멋지게 하고, 내놓을 때는 깨끗하게 내놓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고, 이렇게 그러한 멋있는 장부(丈夫)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라야, 그런 각오가 있어야 탁! 현재 가정에 살림도 하고 사업도 하고 직장도 있지만 딱! 법회(法會) 때가 돌아오면 법회에 와 가지고 법문(法門)을 따악 듣고 '이 뭣고?'를 하고.

 

'이 뭣고?'를 해야 그런 멋진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왜 '이뭣고?'를 해야 그렇게 되냐 하면, 한 생각으로 억만 겁 일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억만 겁 미래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천금 만냥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목숨도 놓아 버릴 수가 있거든. 오욕락(五慾樂) 부귀영화(富貴榮華) 그까짓 것이 탁! 놓아 버릴 수가 있는 거여.

'이 뭣고?' 한마디면은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업장(業障)이 탁! 소멸(消滅)이 되어 버리는데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이뭣고?'를 한 사람은 궁극(窮極)에 어디에 도달하냐 하면 무쟁삼매(無諍三昧)에 들어가, 다툼이 없는 삼매에 들어가는 거여.

우리는 무한경쟁(無限競爭) 시대라 해 가지고 노상 경쟁, 경쟁, 경쟁 속에서 이렇게 해서 한시도 방심을 할 수가 없고, 회사에 들어가도 경쟁, 학교에 가도 경쟁, 정치를 해도 경쟁, 우두거니 있다가는 내가 쫓겨나고 내가 짓밟히고 하니까 그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 뇌물을 쓰고 모략중상(謀略中傷)을 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동안에는 사회는 좋아지지 않습니다. 세계는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는, '탁!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여. 놓는 공부가 '이 뭣고?'여.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욕심(慾心) 탐심(貪心),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개인적인 것 가정적인 것 사회적인 것, 탁! 생각을 돌이키고 자기 본심(本心)으로 돌아올 줄을 알어야 한다 그 말이여. 돌아오는 방법이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또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놈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며, 이렇게 외로우며, 이렇게 괴로우며, 이렇게 원망스러울까, 이렇게 억울허까?' 그러한 생각 속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날 새기를 하고 잠을 안 자도 안 없어집니다.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 뭣고?' 자꾸 하다 보면 스르르르~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다같이,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다시 한 번,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우리가 참사람 되는 길이 여기에 있고, 개인의 평화, 가정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바로 이 '한 생각' 돌이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말을 맺고자 합니다.

 

벌써 날씨가 추워져서 겨울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모두 건강에 조심하시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이 뭣고?'로써 우선 자기 중심(中心)을 딱! 잡고서, 그리고서 모든 일을 느긋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연구하면 반드시 지혜(智慧)와 자비(慈悲)가 떠오를 것입니다. (39분29초~60분59초) (끝)

 

 

 

 

[법문 내용]

 

(게송)만물영고자유시~ / 명예 · 권리 · 부귀영화라 하는 것이 달팽이 뿔과 같다 / (게송)안비천말적유사~ / 조주 스님과 시자 문원의 떡 내기(지는 것으로써 이기는 것, 못나기 내기). 『선문염송(禪門拈頌)』 제439칙. 「투열(鬪劣)」

 

(게송)만사무여퇴보휴~ .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투열화(鬪劣話)' / 온 국민이 자기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최선을 각각 다할 때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잘된다(1997년 11월은 대한민국이 외환 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 12월에 국제통화기금(IMF) 자금을 지원받은 어려운 시기)

 

(게송)행년홀홀급여류~ / 정말 무상(無常)한 줄을 깨달라 탐욕심(貪慾心)을 버려야 / 정치는 정말 사심(私心)없이 보살(菩薩)의 정신(精神)을 가지고 해야 한다 / '이 뭣고?' 한마디면은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업장(業障)이 탁! 소멸(消滅)이 되어 버린다 / '이뭣고?'를 한 사람은 궁극(窮極)에 무쟁삼매(無諍三昧), 다툼이 없는 삼매에 들어간다 / 진정한 행복, 평화는, '탁!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놓는 공부가 '이 뭣고?'여. 탁! 한 생각을 돌이키고 자기 본심(本心)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이 뭣고?'

 

 

역사 공부를 하면 명예나, 권리나, 부귀영화라 하는 것이 달팽이 뿔과 같아서 푸욱 솟아올랐다가 푹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그렇게 믿을 것이 못되고 허망한 것인 줄을 충분히 알 수가 있어서 그까짓 것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대들만한 가치가 없는 일인데, 그러한 허망하고 비참한 모냥을 번연히 보면서도 그러한 데에 대한 욕망(欲望)과 애착(愛着)을 끊지를 못한 것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형편인 것 같습니다.

 

산승(山僧)이 이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여간해서 정치 문제 그런 데에는 언급을 하지 않고, 언제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권장을 하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세상이 무상(無常)한 줄을 깨달라서 어쨌든지 참나를 깨달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우리가 다 같이 참선 공부를 하자. 그런 얘기를 주로 많이 해 왔습니다.

 

조주(趙州) 스님처럼, 자기가 잘난 체하고 그래 가지고 이길라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특히 우리 도(道) 닦는 사람은 잘난 체하고 뽐내고 아만통을 부리고 남을 업신여기고 한 것을 대단히 안 좋게 여기고,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항상 남의 좋은 점은 찬양하고 남의 좋은 점은 본받으려고 노력을 하고, 설사 다른 사람이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용서(容恕)를 하고, 아량(雅量)으로 봐주고, 참회(懺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렇게 해서 서로가 화합을 하도록, 이것이 출가한 스님네가 일생 동안에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덕목인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은 그러한 대원력(大願力)과 대자비(大慈悲)와 대지혜(大智慧)를 갖춘 사람이 할 일이 바로 대통령이고 왕(王)이다 그 말이여. 그렇지 않으면은 할 짓이 못돼.

 

'이 뭣고?'를 해야 한 생각으로 억만 겁 일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억만 겁 미래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천금 만냥도 놓아 버릴 수도 있고, 목숨도 놓아 버릴 수가 있거든. 오욕락(五慾樂) 부귀영화(富貴榮華) 그까짓 것이 탁! 놓아 버릴 수가 있는 거여.

'이 뭣고?' 한마디면은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업장(業障)이 탁! 소멸(消滅)이 되어 버리는데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느냐. 그래서 이 '이뭣고?'를 한 사람은 궁극(窮極)에 어디에 도달하냐 하면 무쟁삼매(無諍三昧)에 들어가, 다툼이 없는 삼매에 들어가는 거여.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는, '탁!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여. 놓는 공부가 '이 뭣고?'여.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욕심(慾心) 탐심(貪心),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개인적인 것 가정적인 것 사회적인 것, 탁! 생각을 돌이키고 자기 본심(本心)으로 돌아올 줄을 알어야 한다 그 말이여. 돌아오는 방법이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또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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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51~575)2020. 12. 3. 10:14

((No.575))—1996년 9월 첫째일요법회(96.09.01) (80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20분. (4/4) 약 18분.

(1/4)----------------


파납몽두올연좌(破衲蒙頭兀然坐)하니  부귀영예운외몽(富貴榮譽雲外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병옹수무일립미(甁甕雖無一粒米)나  만고광명조대천(萬古光明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두생두영수형(種豆生豆影隨形)한데  삼시업과여경조(三時業果如鏡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자작자수무회피(自作自受無廻避)라  나득원천갱우인(那得怨天更尤人)이리오

나무~아미타불~


파납몽두올연좌(破衲蒙頭兀然坐)하니, 떨어진 누데기로 머리를 무릅쓰고 올연히 앉았으니, 부귀와 영예가 구름 밖에 꿈이로구나.

병옹수무일립미(甁甕雖無一粒米)나, 쌀 도가지에 비록 한 알갱이 쌀도 없지마는,

만고광명조대천(萬古光明照大千)이로구나. 만고(萬古)에 광명이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비추는구나.


이것은 누데기를 입고 가난한 수행하는 수행자의 생애를 읊은 게송입니다.


종두생두영수형(種豆生豆影隨形)이요.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그 형체 따르듯 한다 그말이거든.

삼시업과(三時業果)가 여경조(如鏡照)요.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해서 업보(業報)가 거울에 비추듯이 환하다 이거거든.


자작자수무회피(自作自受無廻避)여. 자기가 지어 가지고 자기가 받는 것이라 피할 곳이 없어.

나득원천갱우인(那得怨天更尤人)이리요. 어찌 하늘을 원망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허물할까 보냐.

그게 다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해서 모든 과보는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이지, 하늘이 억지로 죄를 주며, 자기가 죄 받는 것을 남을 원망할 것이 없다. 이것도 역시 고인(古人)의 시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제방(諸方)에서 또는 용화선원에서 여름 삼하결제(三夏結制), 삼하안거를 마치고 다시 이 자리에 모인 여러 선배 · 후배 · 형제자매 · 도반들을 위해서 정진하는 데 아주 요긴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산승(山僧)이 더이상 무슨 말을 첨가해서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병을 앓았습니다. 병을 앓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문병을 하도록 지시를 하셨습니다.

인도에 유마거사나, 중국에 방거사(龐居士)나, 우리나라에 부설거사(浮雪居士)는, 그밖에도 많은 훌륭한 거사님네들이 참 출가해서 도 닦은 스님네와 맞먹거나, 못지않는 훌륭한 거사님네들도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언필칭(言必稱) '인도에 유마거사, 중국에 방거사, 한국에 부설거사' 이렇게들 말합니다. 물론 현대에도 깨달은 그런 거사님들도 여기저기 모다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유마거사가 병이 나서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들을 문병(問病)을 가도록 지시를 했는데,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다 '과거에 어디서, 언제, 어떻게 하다가 유마거사한테 방(棒)을 맞고, 그래서 차마 얼굴을 들고 문병을 갈 수가 없습니다' 전부가 한결같이 다 사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처님께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문병을 가도록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여러 보살들 가운데에도 으뜸가는 보살이라, 부처님께서 지시를 하시니까 가시기로 했습니다.

문수보살이 간다 하니까 여태 사절하고 못 간다고 한 부처님 제자들이 '아, 그렇다면 우리도 문수보살을 따라서 가겠습니다' 와! 하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래가지고 유마거사가 앓고 있는 집으로 문병을 갔습니다.


가서 문수보살이 문병을 하기를, "어쩌다가 이렇게 병환이 나셨습니까?"

"중생이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나도 앓고 있습니다"


"언제나 병이 나으시겠습니까?"

"중생이 병이 다 나으면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병문안(病問安)을 마치고.


유마거사는 "기왕 이렇게 모였으니 우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각기 자기의 깨달은 바를 얘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차례차례 자기가 깨달은 바를, 불이법문에 대해서 깨달은 바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문수보살이 불이법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말을 했냐 하면은 "불이법은 말로써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인 모든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가 다 참, 불이법에 대해서 가장 잘 말을 했다고, 대답을 했다고 모두 감탄을 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면 맨 마지막에 유마거사께서 불이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시오" 이렇게 되었습니다.

유마거사는 아무 말도 않고 묵언(默言)을 했습니다. 입을 딱! 다물고 말을 안 해.


그것을 선가(禪家)의 문구로 '양구(良口)'라고 하는데—유마경에는 '막을 두(杜)'자, '두구(杜口)'라고 쓰여 있는데—양구(良口), '어질 양(良)'자, '입 구(口)'자, 양구라 그러는데.

양구라 하는 것은 무슨 법을 묻는데 대해서 입을 딱!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한참 있는 거동인데, 양구를 하니까 거기에 모인 모든 대중들이 정말 유마거사야말로 불이법에 대해서 가장 훌륭하게 일렀다고 모다 찬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마(維摩)의 두구(杜口)’라고, 그런 문자로 지금까지도 참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는데.


나는 학생 때 그 유마경(維摩經)을 읽고서 그 유마거사가 양구를 한 그 뜻을, 그 참다운 그 진리를 어찌 내가 알았으리요. 진짜 깨달은 것은 아니고, 속담에 「웅변은 은(銀)이라면 무어(침묵)는 금(金)」이라든가 그런 속담도 있듯이 '정말 그 말을 안 함으로써 최고의 진리를 여지없이 표현한 도리가 있구나' 껍데기로, 겉으로 그러한 느낌을 가졌어.

'내가 만약에 출가해서 중이 되면 일생 동안을 말을 하지 않고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서 수행을 하고, 벙어리로서 일생을 마치리라' 이러한 건방진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중이 되어 가지고 전강 조실 스님의 지시에 따라서 '아무리 참선을 하더라도 기초 염불은 해야 되는 것이다. 천수(千手)와 쇳송[鍾頌]과 예불 젓숩고, 상단(上壇) · 중단(中壇) · 각단예불(各壇禮佛)은 할 줄 알아야 하고, 사시(巳時)에 마지(摩旨)는 올리고, 그놈을 또 올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 일주일 걸려서 주야불철하고 그것을 읽고 외우고 해 가지고 조실 스님께 바치고.

그 목탁(木鐸) 치는 법, 모다 요령(鐃鈴) 흔드는 법도 전부 조실 스님한테 직접 배우고. 배우기는 배워 놓고는 한 번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바로 묵언에 들어갔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군대 안 갈라고 내가 묵언을 했다'고, 그런 사실과 다른 얘기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때는 한국에 병역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없어 가지고, 군대고 무엇이고 그런 것도 없고.

다못 내가 일생을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셈 치고, 벙어리로서 이 세상을 아주 오직 하나만을 심중(心中)에 세우고, 그렇게 병신 노릇을 할라고 한 사람이지, 무슨 그때는 군대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10년을 묵언을 하다가 조실 스님께서 '이제 그만해라. 수행 방법으로써 묵언이지, 묵언을 하기 위한 묵언이라는 것은 그것이 썩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명령을 하셔서 묵언을 텄습니다마는, 지금도 역시 그때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입은 열기는 열었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차라리 묵언을 한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는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해 봅니다.


사실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두서없는 말을 하고 있지마는,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차라리 유마거사의 흉내를 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퍽 마음으로 좋아합니다.

유행가에 뭐 '마음 약해서 잡지 못했네. 돌아서는 그 사람~' 뭐 그런 말이 있는데, 마음이 약해서 이렇게 참—여러분 앞에 내가 제일 좋아하고, 여러분 앞에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고, 여러분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이렇게 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널리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요새 여러분들은 뉴스를 통해서 전직 대통령이 모다 그 사형언도를 받고, 징역을 받고, 모다 그런 것을 잘 알고 계실 텐데, 우리에게는 그 각기 나름대로 그런 것에 대한 충격도 받고 모다 여러 가지 감회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기에는 그 형량이 많고 적고 그런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해 봤자 한이 없는 것이고, 미래에 있어서 동서양 대소 국가 모든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대작을 맡고 있는 각부 장관이나, 대소 관료들이 이 재판을 통해서 정말 거울삼아서 일대 각성(覺醒)을 해서, 자기의 직분을 정말 깨끗하게 사심(私心) 없이 정말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멋지게 자기의 직분을 다할 수 있다면 참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정말 슬프고도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그러한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참 뭐라고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처음~20분49초)





(2/4)----------------


일체 허영도 없고, 시새우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법률이나 역사에 대해서도 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럴 두려워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도반들은 머리를 깎은 스님네거나, 머리를 깎지 않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노소남녀 여러분들이 다 그러한 분들이 이 자리에 모다 모이셨다고 산승은 생각합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거고, 떨어지고 만다고 하는 인과법을 깊이 믿게 된다면 이러한 부끄럽고 창피한 전철을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밟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권리나 명예 · 재산 · 부귀영화라 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고 믿지 못할 것인가, 그런 것을 뼈아프게 느끼셨으리라고 생각을 하고, 특히 부도덕한 방법으로 얻어진 부귀공명이라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큰 권리도, 큰 명예도, 큰 재산도 없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면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하루하루를 착실히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은 얼마나 고상하고, 떳떳하고, 멋진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인 것입니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피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추진되고, 운영되고, 생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조국, 가비라(迦毘羅) 왕국은 고살라국 혹 사위국(舍衛國)이라고도 하는데, 고살라국의 유리왕에 의해서 멸종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나타난 원인은 이유는 부처님의 나라, 가비라 왕국은 비록 나라는 작지마는 양반의 나라이고, 고살라국은 엄청나게 나라도 크고 부강하고 그렇지만 상놈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살라국의 왕, 파사익왕이 가비라 왕국에 혼인을 청했습니다. '자기(의 유리 태자)하고 가비라 왕국에 공주하고 결혼을 하자' 이렇게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가비라 왕국에서는 '도저히 그런 상놈의 나라에게 공주를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안 주면은 금방 무력으로 침공을 해 들어올 것이고. 그래서 극비리에 의논을 하기를, 공주는 직접 줄 수가 없고 궁녀 가운데, 종 가운데에 가장 공주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골라서 공주로 속여가지고 시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결혼을 해서 시집을 보냈는데, 그 유리 태자가 아직 어리니까 그 파사익왕은 외갓집으로 보내서, 외갓집 가비라 왕국으로 보내서 거기 가서 문무(文武)에 관한 여러 가지를 잘 배우도록 외갓집으로 보냈습니다. 가비라 왕국에서는 그 유리 태자를 맞이해 가지고 혼자만을 가리키기보다는 궁중이나 모다 고관대작의 아들, 모다 소년들을 오백 명을 모아가지고 큰 회관에서 유리 태자와 같이 모든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 태자는 자기로 인해서 그 오백 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모여서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런 교육이 실시가 되니까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안하무인이 되어가지고 막 언행을 함부로 하고 막 그러니까, 그 고관대작의 아들들도 나름대로 다 긍지가 있는데 고살라국 유리 태자가 건방지게 느껴져 가지고 '종놈의 자식이 까불고 자빠졌다'고, 이렇게 뒤에서 욕을 했습니다.


유리 태자가 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내용을 잘 알아본 결과 자기가 맞이한 아내가 가비라 왕국에 궁녀였다고 하는 것을, 정식 공주가 아니고 궁녀였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내가 만약에 왕이 되면 기어코 이 나라를 갖다가 멸종을 시키리라'하고 마음으로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나이가 차츰 먹어가지고 자기 아버지가, 부왕이 없는 틈을 타서 자기가 왕위를 찬탈을 해가지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무력 준비를 해가지고 가비라 왕궁을 침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서 두 나라 국경 지대에 큰 고목나무 밑에 가서 떠억 앉아서 계셨습니다. 유리왕이 국경을 넘어가다가 부처님이 고목나무 밑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웬일이십니까? 세존이시여. 해필 이 많은 나무가 있는데, 해필 죽은 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계십니까?"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유리왕은 그길로 회군을 해서, 침공을 중단을 하고 회군을 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침공을 하기로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아봤자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알고 그냥 막지를 않으셨는데, 유리 태자는 이제는 부처님이 거기 가서 계시더라도, 돌아서라도 가서 기어코 끝장을 내려고 마음을 먹었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가비라 왕국에 들어가서 막 지딱지딱 때려 부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데, 마하남(摩訶男)이라고 하는 그때 그러니까 유리왕에 외할아버지 격이죠, 실제는 아니지마는 "잠깐 중지를 해라. 내가 이 마당에 연못 속에 들어가서 있다가 나올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다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유리왕이 생각하기에 '물속에 들어가서 있어 봤자 불과 1, 2분이면 나오겠지' "뭐 그렇게 하라"고 그래가지고 물속에 마하남 왕이 들어갔는데, 1분이 지나도 안 나오고, 5분이 지나도 안 나오고, 10분이 지나도 안 나와서 나중에 사람을 시켜서 물속에 살펴보라고 하니까, 물속에 있는 나무뿌리에다가 머리를 풀어서 거기다 칭칭 동여매고 죽어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동서남북 문으로 모다 빠져나갔는데, 동쪽으로 나간 사람이 서쪽으로 다시 들어오기도 하고, 서쪽으로 나간 사람이 남쪽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해가지고, 들랑달랑하기만 하지 별로 많이 도망해 간 사람이 없었다고 그럽니다.


그때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가비라 왕국에 5천 명의 젊은이들을 뽑아가지고 저 하늘나라에 어디다가 피신을 시켰습니다. 난리가 어떻게 무참하게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지 피가 아주 도성에 가득차고 냇물 흐르듯이 흘렀다고 그럽니다.

난리가 다 가라앉고 유리왕과 그 군인들이 다 돌아간 뒤에 목련존자가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5천 명의 청년을 보니까 다 죽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난리가 다 가라앉은 다음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비라 왕국 도성에, 현지에 와 보셨습니다.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그 피비린내를 맡을 수도 없고, 그 비참한 부처님에 가족들, 일가친척, 사촌, 6촌들, 모든 도성 안 백성들이 다 무참하게도 살해를 당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전에는 내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모여 놓고 설법을 했건마는, 그러시고서 "여래는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부처님의 경지에서는 생사가 없으시고, 너와 내가 없으시고, 멀고 가까운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에 계신 부처님이시지만, 부처님께도 그런 것을 보시고 참 얼마나 속이 언짢으셨으면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리라' 그러셨겠습니까. 그러시고 "7일 후에 고살라국은 불 세례를 받을 것이다. 불에 의해서 화재가 나서 다 타 죽을 것이다" 그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고살라국에서는 그런 말을 전해 듣고, 불에 안 타 죽기 위해서는 물가로 가는 것이 좋다 해가지고, 그 왕족과 대신과 모든 사람들이 전부 바닷가로 갔습니다. 가 가지고 큰 강가로 가 가지고 큰 배를 타고, 물에서 일주일을 노래를 부르고 그러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느닷없이 먹구름이 하늘에서 일어나 가지고 뇌성벽력을 해가지고 왕궁에도 벼락을 때려서 왕궁이 다 불에 타고, 타고 있는 배에도 불이 나 가지고 다 타 죽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당신의 조국을 그렇게 사람을 많이 살육을 하고 했으니까, 감정적으로 신통력으로써 아주 벼락을 쳐서 죽게 했다고 혹 그렇게 오해를 하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부처님이 절대로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고살라국 유리왕을 비롯한, 고살라국 사람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사람을 죽이고 그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죽였냐 하면은 칼로 쳐 죽이고,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큰 전차를 가지고 와서 막 깔아뭉개고, 수백 마리 코끼리 떼를 몰고 와 가지고 직신직신 밟아서 창자가 터지고 가슴팍이 부서지고, 뼈다구가 부러지고 대가리가 깨지고 해가지고 수백 명, 수천 명을 일시에 개떡처럼 만들었으니, 동서고금에 그러한 역사는 보기가 어려우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을 죽여도 그렇게 죽이는 법이 없고, 설사 공주로 속여 가지고 궁녀를 보냈기로서니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거든. 그러한 과보로써 그렇게 죄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과거에 무슨 인연으로 이와 같은 무서운 과보를 가비라 왕국 사람들은 받게 되었을까요?"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참 계시다가 말씀을 하시기를, "과거 무량겁 전에 한 나라가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다 떨어졌어. 그래서 큰 호수를 막고 물을 품어 가지고 그 호수 속에 있는 고기를 잡아 가지고 그 굶주림을 면했느니라. 그때  한 고기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그때 앙심을 품고 죽은 고기가 바로 저 유리왕이고 저 신하들이다"


그 고기를 잡아서 그물로 잡아 가지고 육지로 던져놓으면 고기가 팔딱팔딱팔딱 뛰니까, 한 소년이 그 고기의 대가리를 작대기로 가지고 다니면서 딱 때리고, 딱 때리고 하면서 그렇게 재미있게 뛰고 놀던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소년이 누구냐 하면은 부처님의 전생(前生)이었다 그말이여.

그 고기를 잡아서 먹은 모든 사람들은 가비라 왕국에 왕을 비롯한 왕족과 모든 백성들이고, 그 고기의 대가리를 막대기로 때리고 다니면서 놀던 소년은 부처님이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리가 수미산으로 눌러 놓은 것처럼 뻑적지근이 항시 머리가 아프셨다 그거거든.


무량겁이 지났고,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신 성현 가운데 대성현이신 부처님께서도 그때 그 고기들의 대가리를 때린 그 과보로 머리 골이 아프셨어. 인과라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여.

부처님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에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고 하는 조항이 바로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마는.(20분52초~41분47초)





(3/4)----------------


연전(年前)에 KAL기(대한항공 비행기)를 소련에서 미사일로 쏴 가지고 120여 명인가 그 비행기 탄 사람들이 참 영문도 모르고 폭파해서 다 죽었습니다. 내가 육신통, 숙명통이 안 나서 왜 그러한 과보를 KAL기가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내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번에 러시아 비행기가 141명을 태우고 북극을 지나다가 떨어져서 몰살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비행기를 쏘더니, 그놈 잘 떨어져서 뒤졌다' 내가 그런 생각으로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러시아 비행기가 떨어졌는가 그것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또 과거에 무슨 과보로 그랬는가도 확실히 알 수가  없고, 우리나라 비행기를 그렇게 떨구더니 그 과보로 떨어졌는가 그것도 내가 확실히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소련에 적성국가(敵性國家)도 아니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군용 비행기도 아니고 민간 항공기를 무엇이 잘못되어서 국경을 조금 본의 아니게 침범을 했다 하더라도 좋게 나가라고 하고 인도를 해서 정식 궤도로 가도록 하면 그만이고, 또 나중에 국제법으로 그것을 따질지언정 거기다 대고,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한 짓을 하는 법이 아니거든. 국가적으로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일을 처리해서는 아니 되거든.


우리나라는 오천 년을 두고 일본에 크고 작은 침범과 약탈을 당해 왔습니다. 동해, 남해, 서해로 수없는 일본 왜놈에 해적들이 와 가지고 여자도 강간하고, 재산도 납치하고, 갖은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신라 문무왕, 불국사 석굴암도 동쪽을 향해서 짓고 또 동해에다가 대왕암을, 자기의 시체를 동해에다가 묻어서 용이 되어 가지고 일본 해적을 막으려고 그렇게 원력을 세운 역사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지고 우리나라를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경술년 합방(合邦, 경술국치庚戌國恥)으로 해서 우리나라는 완전히 일본에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세계 역사에 없는 식민지 정책, 교활하고 악랄한 정책을 써서 우리나라를 피를 빨아먹고 짓이겼습니다. 우리나라 백성이라면 세세생생에 용서할 수 없는 그러한 고약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 나도 애국자도 아니고, 일개 평범한 중이지만 그 생각을 하면은 이가 부득부득 갈리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런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왜 잊게 되었느냐 하면은 어째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본래 아이누족이 그 본토에서 사는 소수 족속이고,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사람들—가야가 망해가지고 그리 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뿌리박고 살고,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특히 백제 사람들이 많이 가서 거기 가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나라에다가 백제 사람들이 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현재 나라[奈良]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가서 모다 했다는 것을 고분을 발굴해도 그 증거가 나오고 모든 역사의, 일본에 만요우스[萬葉]니, 고사기니 그런 책을 봐도 하나하나가 다 증거가 드러나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일본에 국조신(國祖神)인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니,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의 동생인 스사노오노 미코도가 바로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인데도 자기네들은 그것을 숨기고 말을 안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일본이라는 나라 교육도 시키고, 글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다리 놓고 집 짓는 법도 가르키고, 도자기 굽는 법도 가르키고, 모든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가르켰는데, 왜 세계에서 제일 미워하고, 제일 못살게 한국을 못살게 구냐?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이놈들을 언제라도 이 버릇대기를 고쳐줘야, 한 생(生)을 성불을 늦게 하더라도 이놈들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먹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본 것이 아니고 가만히 이치를 미루어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야가 망하니까 나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신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고구려 · 고려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가서 살고, 백제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갔다 그말이여.


여기서 망한 사람들이 거기를 갔으니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그말이여. '언젠가는 힘을 길러 가지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해야겠다. 다시 한국을 뺏어서 다시 한국을 차지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말이여.

그래놓으니 처음에 1대, 2대, 3대에 올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다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 내려오지만, 5대, 10대 지나가서 부터서는 그런 생각 다 잊어버리고 몰라. 모르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그게 다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런 국민학교 · 유치원 애들한테도 물어보면 '세계에서 제일 싫은 나라, 미운 나라가 어디냐?'하면 한국이라고 한다는 여론조사를 해 보면.

그러니 이것이 한국에서 망한 나라가 가 가지고 종자가 퍼진 것이 일본 사람들이라고 보면,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리여! 그렇겠지'하고 내가 지금은 미운 생각을 안 갖고.


그 사람들도 그러한 이웃지간에 가까운 나라를 역사를 잘 연구해 보면 미워해서는 안 될 형님의 나라요, 자기의 조상에 나라인데, 한국을 그렇게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을 존경하고, 숭배하고, 가장 한국을 아끼고, 물심양면으로 한국을 도우려고 하는 그러한 나라가 되어서 정말—알고 보면 같은 단군(檀君)의 후예거든. 비록 나라가 망해 가지고 갔을망정 한 핏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워해서도 안 되고, 일본 사람들도 한국을 미워해서는 안 될 가장 가까운 단군의 후손들이여.


그래 지금은 미운 생각이 없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니까 그러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져주었으면 참 좋겠는데, 전혀 그런 징조가 보이지를 않고 경제적으로 지금은 우리나라를 침범을 하고 들어오고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 물건'하면 다 선호를 하고, '일본 문화'하면은 다 무슨 향수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앞으로 그 사람들이 정말 불법(佛法)을 옳게 믿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바른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일본은 언제라도 화산이 터질 것이고, 지진이 일어나서 고베와 대판에 일어나는 그런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도 정신을 못 차리면 앞으로 몇천 년 뒤에나 몇억 년 뒤에는 결국은 바다 밑에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지금도 매년 조금씩은 가라앉는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돌연히 뭐 쇳덩어리 가라앉듯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지만, 많은 시간과 여유가 있으니까 일본 사람들은 마음보를 고쳐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 6.25동란이 왜 일어났을까? 공산주의 때문에 그렇다고 지금 우리는 생각하고 있지마는, 저 몇백 년,  몇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치 가비라 왕국이 고살라국에 의해서 그렇게 멸망된 것처럼 반드시 이것도 까닭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을 시킨 그 과보로 6.25동란이 또 일어나 가지고 남한 일대를 피바다를 만들었을란가도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정말 보복하는 그런 마음을 아니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보복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그러한 일은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아니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을 해치면서까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 반드시 그 과보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머지않아서 그것이 나로 부터서 떠나게 되고, 떠날 때는 거저 떠난 것이 아니라 나를 갈기갈기 몸과 마음을, 가정을 찢어 좃아 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는 '새 한국 건설'이라고 하는 그러한 슬로건으로 새 정치를 하려고 모다 노력을 하고 있고, 부정을 척결한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도 모다 갇히고 사형언도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생각하면 받는 편은 깊은 참회(懺悔)가 있어야 할 것이고, 정말 그분들은 자기의 잘못을 정말 참회를 하고, 법의 공정한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는 없고.

생각 생각이 참회하는 염불, 금강경이라든지 반야심경이든지, 고왕경 같은 경을 주야불철하고 읽어서 자기의 몸이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시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형을 당하느니, 무기징역을 당하느니 그런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고, 어떤 심판이 내리더라도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보통 고기들은 잡기 위해서 도마 위에다 올려놓으면 펄떡펄떡 뛰어서 도망가는데, 잉어는 큰 잉어도 도마 위에다 딱 올려놓으면 절대로 뛰지 않고 가만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 실제로 잉어를 잡어 보지 않아서 모르는데, 그런다는 말을 어릴적부터서 들었습니다.

일국에 대통령을 살고 참 고관대작을 지냈으면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을 하고 참회를 하고, 국가와 민족과 인류 앞에 참회를 하고, 조용하니 공정한 심판을 기다릴 줄 안다면 그것도 또한 멋진 죽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법에 있어서는 공정한 법에 의해서 처결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우리 국민들은 소련 비행기가 떨어져서 141명이 죽은 것을 좋아할 필요가 없듯이, 그것을 보고 형이 약하느니, 가볍느니, 잘 죽었느니, 마땅히 죽어야 하느니, 이런 생각 우리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과연 나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가? 우리 부모나 우리 형제나, 우리의 형제간에는 그런 잘못이 없는가?


죄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잘못은 우리 중생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나 다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요, 치심(癡心)입니다. 탐심이 과(過)하고 진심이 과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과하면, 그 시대 그 환경에 놓여지면 능히 그러헐 죄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없고 그런 기회를 타지 못하니까 그런 죄를 안 범한 것이지, 기회가 주어지면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어도 양심을 가지고 정심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계와 이백오십 계, 오백 계, 그런 계율이 불가(佛家)에는 엄정한 계율이 있는데,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율사(律師)와 청정한 스님네들은 모두가 다 그런 계율을 잘 지키려고 하시고 또 잘 지키고 있다고 믿습니다마는 엄격히 말하면 소승계(小乘戒), 대승계(大乘戒)를 총망라해서 완전무결하게 지킬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아직까지는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대승계 단계에까지 가서 본다면 우리도 많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으키면 바로 범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물론 용화사 이 경내에서는 '우리는 신문도 보지 말자. 라디오나 텔레비젼도 보지 말자. 온갖 잡지도 보지 말고 여기에 지내는 이 석 달 안거 동안에는 일체 그런 매스컴에 접하지 말고 오직 정진만 하자'고 우리가 결의를 해 가지고 그렇게 살고 있어서, 여기서 참선하고 있는 총무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네, 선방 스님네, 전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계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41분48초~61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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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이고, 부처님도 이미 그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모다 지내고 계신 그러한 처지에 계시면서도 당신의 조국이 고살라국에 의해서 침공을 당하게 될 때, 떠억 가서 고목나무 밑에 가서 앉아서 그것을 막으려고 하신 그 마음을 생각하면 우리도 우리의 조국에 대해서, 우리의 민족에 대해서 출가한 몸이지만 항상 부처님 앞에 이 나라가 편안하고 잘되기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침 뱉고 욕하고 돌팔매질을 할 것이 아니라, 20세기 말기에 보살 화현이, 역행보살(逆行菩薩)이 이 나라에 화현(化現)으로 온 분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함직 하다고 나는 생각을 한겁니다.

그러면 역행보살로 태어나신 분이니까 거기다 대고 절을 하고 그러라는 것이 아니고, '그걸 보고 나를 반성하고, 세세생생에 내가 만약 그런 기회와 입장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명예와 권리와 부귀영화에 대해서 부도덕한 방법으로 그것을 취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 오욕락 · 명예 · 권리 · 지위 · 부귀영화라는 것이 정말 허망한 것이고,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고, 그런 것을 취득하기 위해서 법을 어기고 남을 해꼬자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마음먹는다면은 우리는 그 역행보살들의 몸으로 보여준 역사적인 법문을 우리는 잘 뼛속 깊이 간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마음을 먹을 때 앞으로 우리들은 세세생생에 그런 일이 없을 것이고, 우리의 자녀들도 그러한 짓을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크고 작은 차별은 있고, 종류는 다를지언정 한 생각 잘못 먹으면 그렇게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언제나 말씀드리듯이 '이뭣고?'인 것입니다.


같이 "이뭣고?"

(신도) "이뭣고?"


"이뭣고?"

(신도) "이뭣고?"


글자 석 자고 아무 맛도 없는 말이지만, 무서운 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석 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요약해서 추출해서 낸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정말 옳게 읽고 그 뜻을 안 사람이면 '이뭣고?'밖에 할 것이 없거든.

그대신 '이뭣고?'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간곡히 말씀을 하셨지만,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로 따지는 것은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을 막힘이 없이 다 따진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염기염멸(念起念滅)을 위지생사(謂之生死)니', 생각이 일어났다 그 생각이 꺼지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는 것이여.

생사가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생사라 하는 것은 그것은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범부(凡夫)들의 눈에서 볼 때 그러는 거고, 정법을 믿고 참선하는 분상에는 생각 일어나는—좋은 생각을 일으키거나, 나쁜 생각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태어난 거고, 그 생각이 꺼지면 죽은 거여.


그래서 일생 동안에 몇천만억의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 그 생사 속에서 끝없는 생사를 또 짓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또 무서운 미래의 과보를 위해서 또 생사업(生死業)을 짓는 거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할 바로 그때에 '이뭣고?'거든. 두 번째 생(生)을 받기 전에 바로 지금 당(當)한, 이 지금의 이 생애에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이뭣고?'

몸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화두를 드는 거여.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가야지, 거기서 지각심(知覺心)을 내면 안 되는 거여.


열심히 하다 보면 많은 기복을 거쳐서 많은 망상과 번뇌와 싸우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삼년 이렇게 해 가다 보면 차츰 망상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순일하게 탁 들어진 때가 오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야! 인자 공부가 좀 잘되는구나'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서도 안 돼.


화두가 독로해서 망상이 다 끊어져. 그것을 '적적(寂寂)하다' 그래서 적(寂)이라고 그러는데, 적적한 가운데에서도 너무 순일(純一)하고 깨끗하고 망상이 없으니까, 그 맑고 깨끗한 경계를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그러다보니까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잊어버린다 그말이여. 화두 들 생각마저도 없어져 버리는 거여. 너무 깨끗해.

화두를 오히려 생각을 일으켜서 '이뭣고?'하다 보면 그 깨끗하고 순일한 것이 깨질까 아까우니까, 화두도 놔 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것을 이렇게 맛보고 있다 그말이여, 그 속에 들어앉아서. 그러면 그것은 적적한 가운데 화두에 대한 의단이 없으면 그것을 무기(無記)라고 그런 것이거든.


무기의 상태에서는 이 몸뚱이가, 이 육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것조차도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거여.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을 해도 다리도 절이는 법도 없고, 허리도 아프지도 않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는 거여.

옆에서 흔들어야 간신히 알 정도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게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가 오지마는 그 화두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거거든.


적적한 가운데에도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성성(惺惺)하게 현전을 하도록 해 나가야 하는 것이거든. 그것을 영지(靈知)라 그래. 신령스럽게 안다, 영지라 그러는데.

적적한 가운데에도 화두가 성성하게 떠억 현전하도록 그렇게 공부를 지어나가면 불일성지(不日成之)다. 머지않아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고 자기의 면목(面目)을 보게 된다. 이것은 고조사(古祖師)들이 한결같이 말씀한 바입니다.


그런데 정진을 하다 보면 공안에 대해서 그전에는 전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전혀 짐작도 안 가고 아지를 못했는데, 어떠한 찰나에 '아!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 도리를 이른 것이로구나!' 이렇게 지견(知見)이 생겨 가지고 무슨 공안이든지 보면 막힘이 없어. '정전백수자'도, '부모미생전본래면목'도, '마삼근'도 하나도 막힌 일이 없다 그말이여. 자기 나름대로.

'아, 이것이 견성이로구나!' 그래가지고 이분 저분 찾아가 보면 더러 인가 받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고 또 부정을 받기도 하고 그러는데, 정말 그러한 경계에 이르러서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분명하게 간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진하다가 그런 소견이 난 것은 참, 도반의 입장에서 참 대단히 반갑고도 조심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반갑다'하는 것은 '얼마나 열심히 정진을 했으면 순일무잡한 그런 경지를 거쳐서 그런 경계가 났을까?' 그 점까지는 대단히 반가운데, 염려가 되는 것은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그러한 정각(正覺)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일과성으로 일어나는 잠깐 스쳐가는 그런 경계를 본인이 그것을 잘못 착인(錯認)을 해 가지고 거기서 공부가 중단이 되면 어쩔까?' 그것이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법은 만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렵고, 그것을 직접 몸을 던져서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몸을 던져서 여러 해를 정진하다가 어떤 경계가 났는데, 그 경계가 구경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그것을 여지없이 내던져 버리고 정말 초학자(初學者)의 입장, 완전히 초학자의 입장에 돌아가서 다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감으로 해서 20세기 말기에 정말 정법을 일으킬 대도인(大道人)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은 황벽선사(黃檗禪師)라고 하는 임제종(臨濟宗)의 대법통(大法統)을 이으신 선지식의 게송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생사(生死)의 진로(塵勞)를 해탈(解脫)하는 것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말이거든.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緊)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을 지을지니라. 승두는 정진할 때에 화두, 화두를 정말 여법하게 잘 들으라 그거거든.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한번 뒤쳐서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피는 매화라야 그 매화의 향기가 코를 치는 것이지, 겨울에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뜨뜻한 겨울 끝에 매화꽃이 피면 향취(香臭)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왕 정진을 할 것이면, 정말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의리(義理)로 따져서 의리로 알아 가지고 체중현(體中玄), 그러한 경계에 머물러서야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 가지고 너무너무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황벽선사에 게송으로써 법상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61분49초~1시간19분15초) (끝)





[법문 내용]


(게송)파납몽두올연좌~, (게송)종두생두영수형~ / 유마거사 불이법문(不二法門), 유마(維摩)의 두구(杜口) / 송담스님의 출가 묵언, 10년 묵언 후 전강 조실스님의 '이제 묵언 트라'는 명령.


인과(因果)의 법칙을 피하고는 살 수가 없다 / 고살라국 유리왕에 멸종된 부처님의 조국 가비라국, 두 나라의 과거 인연 / 부처님의 두통 인과 / 부처님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 하나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인연 / 우리나라에 6.25동란이 왜 일어났을까? / 보복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하지 말라. 반드시 안좋은 과보가 있다 / 중생이면 누구나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입니다.


역행보살(逆行菩薩) / 무서운 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이뭣고?'를 해야 한다 / 팔만대장경을 요약해서 추출한 것이 바로 '이뭣고?' /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生死) /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103-104. (가로판 p101~103)



나는 학생 때 그 유마경(維摩經)을 읽고서 그 유마거사가 양구를 한 그 뜻을, 그 참다운 그 진리를 어찌 내가 알았으리요. 진짜 깨달은 것은 아니고, 속담에 「웅변은 은(銀)이라면 무어(침묵)는 금(金)」이라든가 그런 속담도 있듯이 '정말 그 말을 안 함으로써 최고의 진리를 여지없이 표현한 도리가 있구나' 껍데기로, 겉으로 그러한 느낌을 가졌어.

'내가 만약에 출가해서 중이 되면 일생 동안을 말을 하지 않고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서 수행을 하고, 벙어리로서 일생을 마치리라' 이러한 건방진 생각을 했었습니다.


일체 허영도 없고, 시새우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법률이나 역사에 대해서도 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럴 두려워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큰 권리도, 큰 명예도, 큰 재산도 없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면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하루하루를 착실히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은 얼마나 고상하고, 떳떳하고, 멋진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인 것입니다.


무량겁이 지났고,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신 성현 가운데 대성현이신 부처님께서도 그때 그 고기들의 대가리를 때린 그 과보로 머리 골이 아프셨어. 인과라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여. 부처님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에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고 하는 조항이 바로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일본이라는 나라 교육도 시키고, 글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다리 놓고 집 짓는 법도 가르키고, 도자기 굽는 법도 가르키고, 모든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가르켰는데, 왜 세계에서 제일 미워하고, 제일 못살게 한국을 못살게 구냐?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이놈들을 언제라도 이 버릇대기를 고쳐줘야, 한 생(生)을 성불을 늦게 하더라도 이놈들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먹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본 것이 아니고 가만히 이치를 미루어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야가 망하니까 나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신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고구려 · 고려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가서 살고, 백제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갔다 그말이여.


여기서 망한 사람들이 거기를 갔으니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언젠가는 힘을 길러 가지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해야겠다. 다시 한국을 뺏어서 다시 한국을 차지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놓으니 처음에 1대, 2대, 3대에 올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다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 내려오지만, 5대, 10대 지나가서 부터서는 그런 생각 다 잊어버리고 몰라. 모르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그게 다 있다 그말이여.


죄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잘못은 우리 중생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나 다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요, 치심(癡心)입니다. 탐심이 과(過)하고 진심이 과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과하면, 그 시대 그 환경에 놓여지면 능히 그러헐 죄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없고 그런 기회를 타지 못하니까 그런 죄를 안 범한 것이지, 기회가 주어지면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어도 양심을 가지고 정심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계와 이백오십 계, 오백 계, 그런 계율이 불가(佛家)에는 엄정한 계율이 있는데,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율사(律師)와 청정한 스님네들은 모두가 다 그런 계율을 잘 지키려고 하시고 또 잘 지키고 있다고 믿습니다마는 엄격히 말하면 소승계(小乘戒), 대승계(大乘戒)를 총망라해서 완전무결하게 지킬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아직까지는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대승계 단계에까지 가서 본다면 우리도 많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으키면 바로 범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가 크고 작은 차별은 있고, 종류는 다를지언정 '한 생각' 잘못 먹으면 그렇게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언제나 말씀드리듯이 '이뭣고?'인 것입니다.

글자 석 자고 아무 맛도 없는 말이지만, 무서운 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석 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요약해서 추출해서 낸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정말 옳게 읽고 그 뜻을 안 사람이면 '이뭣고?'밖에 할 것이 없거든.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103-104. (가로판 p101~103)

念起念滅 謂之生死 當生死之際 須盡力提起話頭 話頭純一 起滅卽盡 起滅卽盡處 謂之寂 寂中 無話頭 謂之無記 寂中 不昧話頭 謂之靈 卽此空寂 靈知 無壞無雜 如是用功 不日成之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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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51~575)2020. 11. 28. 16:38

((No.558))—1995년 11월 일요법회 및 추계산철해제(95.11.05) (65분)

(1/4) 약 17분. (2/4) 약 20분. (3/4) 약 18분. (4/4) 약 11분.

(1/4)----------------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여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헌데, 당당(堂堂)한 대도(大道)가 밝고 분명(分明)하다 그말이여.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낱낱이 다, 뚜렷이 다, 원만히 다 성취되어 있더라 그말이여.

부처님이나 우리 중생이나 조금도 차별이 없고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어. 진묵겁(塵墨劫) 전에 원만히 다 성취해서, 새로 성불(成佛)할 것이 없이 구족하게 다 갖추어져 이루어져 있다 그말이여.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진 그 탓으로 해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다. 영겁을 두고 만 가지 모냥을 현출(現出)을 하고 있더라.

당초에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놈을 단속을 못 해가지고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이니라.



오늘은 을해년 11월 첫째 일요법회 날이고, 아울러서 을해년 가을철 산철 해제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금봉 스님의 임종게(臨終偈)와 조실 스님께서 그 임종게에 화답하는 만사(輓詞), 만시(輓詩)에 대한 말씀도 있었고, 생사해탈하는 최상승법에 대한 법문을 우리는 경청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단히 민족적인 문제에 부딪쳐 있습니다.

고인이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요, 눈이 온 뒤에라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에 절개를 알 수가 있고, 일이 어려워진 일을 당해 봐야 장부에 마음을 볼 수가 있다(事難方見丈夫心)」 그런 시가 있는데.

눈이 오기 전에는 소나무나 잣나무나 무슨 다른 모든 나무가 다 똑같이 다 푸르르니까 다 똑같이 보이지만,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온 뒤에라사 정말 소나무와 잣나무에 서리와 눈에도 불구하고 푸르름을 변치 않는 그 송백(松柏)에 지조(志操)를 알 수가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하기 전에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같은 사람들로 보이지만, 어려운 일을 딱! 당해 놓고 보면 비로소 그 사람의 인격을 볼 수가 있다 이거거든.


옛날에 '가산난리라고 하는 난리(亂離)가 온다'고 모다 예언으로 그렇게 전해 내려왔는데, 그러자 '난리가 왔다!'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소리소리 지르고, 피난 가야 한다고 야단이다 그말이여. 우리나라도 6.25동란 때 모다 그러한 난리 소동을 보았습니다마는.

그때는 가하지(家下地), 강.. 가하지, 잘 붙여 보면 강아지가 되는데, '강아지라야 그 난리를 피할 수가 있다' 그다음에 임진왜란 때에는 송하지다. 송하지(松下地)라고 하는, '송아지의 뜻을 알아야 난리를 피할 수가 있다' 그러고 6.25동란이나 또는 앞으로는 도하지(道下地), 도하지는 잘 붙이면 돼지, 도하지 · 돼지 · 도야지가 되는데.


가하지는, 강아지는 집 아래에서 피난을 해라.

송아지는 소나무 밑에서 피난을 해라.

되아지(돼지)는 '길 도(道)'자, 도 밑에서 피난을 해라.


그런데 그 '강아지'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가하지(家下地)라는 게—그래서 아무도 그 가하지 뜻을 몰라. 모르고 있는데,

어느 날 그 마을에 두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난리가 났을 때 우리들 가족을 무난히 피난을 시킬 수가 있는가?' 그것을 서로 의논 끝에 한 집이 '그러면 미리 훈련을 시켜야겠다'해 가지고, 한 집에서는 온 집안 식구들을 마당으로 모이게 해 가지고, "집에서 키우는 소를 저 사다리를 사용하고 뭐 무슨 방법을 사용하던지 지붕 위에다가 끌어올리라" 그렇게 명령을 했어.

그러니까 집안 식구, 아들이고 손자고 며느리고 딸이고 할 것 없이 심지어는 할멈까지도 "미쳤다고 소를 갖다가 지붕 위로 끌어올리느냐, 그러다가 잘못하면 소 다리나 부러지고 사람까지 다치고 할 텐데, 무엇 때문에 지붕 위로 끌어올리느냐"고 온 집안 식구가 전부가 반대하고.


"그래도 내가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한번 들으라"고 강요를 해 가지고 하니까, 마지못해서 사다리도 갖다 놓고, 사다리 위에다가 나무때기도 걸치고 그저 이리 해 가지고는 끌어올리는데, 마음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지 서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불평과 불만, 서로 마음이 합해지지 아니하니까,

'끌어올리라'고 영감은, 할아버지는 소리소리 지르고, 그냥 억지로 하다가 소 다리가 사다리 사이로 빠져가지고는 잘못해 가지고 송아지 다리만 부질러 버리고 또 그러다가 또 해 가지고는 온 집안 식구들은 결국은 소를 올리지 못하고 소 다리만 부러 버리고 말아버리고, '할아버지는 죽을라고 노망했다'고 그러고, 온 집안 식구들은 야단이여.


그리고는 또 다른 할아버지가 "그러면 우리집에 가서 한번 해 보세"

집안 식구를 전부 모이라 해가지고, "이 소를 지붕 위로 끌어올려야겠는데 어디 한번 해 봐라" 그러니까, 온 집안 식구가 집에 있는 사다리도 가져 오고, 이웃집에 있는 사다리도 빌려 오고, 사다리를 2중 3중으로 이어대고 포개고, 그 위에다가 멍석을 갖다가 덮고, 판대기를 덮고, 새끼로 엮고 해 가지고, 그 소를 목을 짬매고, 몸뚱이를 짬매고 해 가지고, 먼저 사람이 올라가서 끌어올리고 밑에서 밀고 그래가지고는 아! 너끈히 지붕 위에다 소를 끌어올렸다 그말이여.


그래 좀 쉬어가지고 "다시 끌어내리자"

끌어내리기가 올리기보다도 더 어렵다 그말이여. 그래도 '이것이 하면 되지, 안 되겠나?'해 가지고, 그걸 위에서 여러 사람이 소를 잡고서 서서히 해 가지고는 또 끌어내렸다 그말이여.

"자네는 되었네" 그렇게 인자 훈련을 했는데.


난리가, 가산난리는 무슨 난리냐 하면은 갑자기 폭설이 쏟아져 가지고 눈이 무릎으로, 허리로, 어깨로, 머리 위로 해서 지붕까지 눈이 쌓였어.

그 가산이란 지방이 강원도인지, 함경도인지 내 확실히 모르겠는데, 눈이 많이 와가지고 난리인데, "난리야! 피난가자!" 온 마을 사람들이 하니까, 전부 집안 밖으로 뛰쳐나갔어.


그 갑이란 할아버지하고, 을이란 할아버지는 "나가지 말라. 여기 집에 있으라"고 암만 처질러 봤자 "피난 다 가는데 우리만 안 가면 되냐?"고, 소 다리 부지른 집에서는 전 식구가 다 도망가고 손자 하나만 할아버지 손을 잡고 안 죽고.

그 한 할아버지는 미리 줄을 각 사람 몸에 집안 식구대로 줄을 다 묶고 매고, "절대로 이 줄에서 빠져나가지 말고 내가 앞장서서 갈 테니 내 오는 데로만 따라오너라" 그래가지고는 한 시간, 두 시간을 돌다가 "인자 그만 좀 쉬어 가자"


그런데 폭설이 와 가지고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졌어. 그 칠흑같이 어두워져 버리고 해도 넘어가고 그래 어두워졌는데, 눈이 지붕 있는 데까지 차올랐는데, 그 할아버지는 그 앞장서서 자기집 처마밑으로만 수십 바퀴를 돈 거여. 돌다 보니 눈은 지붕 위에까지 쌓아 올라갔어.

그래가지고 "우리 쉬어가자" 해가지고 들어가서 찬찬히 보니까 자기집이여. 자기집 부엌으로 들어가고 "우리가 밥을 해서 먹자"해 가지고 밥을 해서 다 먹고 밖을 보니까 눈이 그렇게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가산난리를 무사히 그 집안은 피난을 하고, 한 집 뿐만이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눈 속에 들로 산으로 나가 가지고는 눈 속에서 다 얼어 죽었어. 수천수만 명이 다 얼어 죽은 거야.


지금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냐 하면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구정선사(九鼎禪師)에 말씀을 하셨고, 96종 공안에 막혀가지고 그런 말씀도 잠깐 비치셨는데,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 바른 선지식의 한마디에 자기의 목숨을 바쳐야, 그것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


'몸을 잊은다'는 것은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 몸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장래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다 거기다 바쳐 버려야, 그리고 오직 한마디 말씀에 의지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위법망구의 정신이 되어야 끝장이 나는 거여.

자기의 소견이 붙어 있고, 자기의 사량복탁(思量卜度)이 붙어 있고, 이래저래 의심하고 따지고 그래가지고서는 이 문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


배워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어. 참선이라는 것은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한 신심(信心) 하나로써 오직 꽉 막힌 의심(疑心)으로 나아간 데에서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가르켜 갖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 그래서 이것은 믿음이 없으면 백날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거든.


구정선사가, 그 선지식이 '솥을 걸어라' 하는데, 애를 써서 걸어 놨는데 '이따위로 걸었냐'고 확 뒤집어 버리고 '새로 걸어라' 그래. '뭐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으니까 이렇게 고치라' 그게 아니어. 무조건하고 잘못되었다고, 한나절 내 공력을 들여서 솥을 걸어 놨는데 확 뒤집어 버리고 '다시 걸어라'고.

또 해 놓으면 또 그러고 해서, 아홉 번까지 해도 불평불만이 없이 한결같은 신심으로 더욱 정성을 들여서 했다 그말이여. 그만한 끈기와 그만한 인내와 그만한 신심이 아니면은 안 된다 그거거든.


할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온 집안 식구가 불평불만을 하고, 그 집안 식구는 그렇게 해서 가족이 거의가 다 죽고, 소를 지붕 위로 끌어올린 사람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가산난리를 무난히 피난을 했다 말이여.(처음~17분12초)





(2/4)----------------


화종목출환소목(火從木出還燒木)하고  지인정기각제정(智因情起却除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심관망명위지(正心觀妄名爲智)하고  지능입각부사의(智能入覺不思議)니라

나무~아미타불~


아까 가산난리는 집안에 있어야 피난을 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솔 아래 있어야 피난을 한다. '송하지(松下地)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여송(李如松)이가 와 가지고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는데, 그 이여송이 부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왜적이 함부로 달라들지 못해서 피난을 했고,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호(號)가 송운대사(松雲大師)인데, 사명대사가 계신 근처에 있는 사람은 피난을 했어. 그래서 송하지가 그렇게 해서 맞았고.


앞으로 되야지, 도하지(道下地)는—명예나 권리나 재산이나 그러한 것을 탐착하면 피난을 못해. 이래 죽고 저래 죽고 다 죽어.

6.25동란 때에도 명예가 권리가 높고, 재산이 많고 한 사람들은—정말 미리 부산이나 외국으로 도망간 사람은 살았을는지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돈 많은 사람들이, 재산 많은 사람들은 '지주다. 반동분자다'해 가지고 굉장히 곤욕을 당했는데, 현재나 미래도 명예 · 권리 · 재산 많은 것이 사실은 그게 썩 좋은 것이 아니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그것이 없어서도 못 살지마는 그것이 있어야 그래도 기를 펴고 살고, 어깨에다가 힘을 주고 살고 또 사람 살 맛도 있고, 사람 구실도 하고 사실 그러기는 하나, 대부분 사람들은 필요 이상에 욕심에 한(限)이 없어 가지고 더 높게 더 많이 탐욕을 낸다 그말이여.

그것이 결국은 참다운 행복과 연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루도 편안하게 잠도 못 자고, 편안하게 밥도 못 먹고, 온갖 근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과 고민 속에서 결국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살아서 쇠고랑 차거나 죽어서 지옥에 가기가 십상팔구인데.


도하지(道下地), 도(道)라고 하는 것은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참부처를 찾는 거여. 그럼으로써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거기에서 참다운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이고, 영원한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인데,

중생들은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오면서 익힌 습기(習氣)로 말미암아서 탐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진심(瞋心) 내는 것이 아주 습관이 들고, 한 번 두 번 경험을 해 봐서 '아! 탐욕과 진심이라는 게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고, 나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알아차리고 그 탐심과 진심을 돌이켜서 내 마음 닦는, 자기의 분(分)을 알아서 자기 마음 닦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다' 그러는 거여.


탐진치(貪瞋癡)라고 하는 것을 삼독심(三毒心)이라 그러고, 그 탐진치 삼독심을 고치면은 그것이 삼학도(三學道)가 되는 건데, 말세가 될수록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은 점점 더 깊어지고 더 치성해진다 그말이여. 거기에서 일체 재앙이 거기서 다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지금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시겠지만, 전(前) 대통령들이 모다 지나친 부정한 재산을 많이 모아가지고 저렇게 되었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결할 길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자살해 버릴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이리저리 버티고 거짓말해 봤자 그것이 통하는 것이 아니여.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정부도 덮어둘 수도 없고,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국민들은 여기서 저기서 모다 데모를 하고, '잡아넣으라' 그러고, '엄벌에 처하라' 그러고, '뭘 밝히라'고 야단인데, 이게 죽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감옥에 처넣는, 법적으로는 당연히 감옥에 넣어야 하고, 엄벌에 처한다 하지마는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볼 때 어떻게 볼 것이냐 그말이여.

지존파니 무엇이니, 그러한 몇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 것과는 본질이 달러. 국민을 대표한 상징적인 대통령이 이렇게 했으니, 그 사람 한 사람만 매도(罵倒)한다고 해서 이것이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우리 국민 전체, 우리 국가 민족의 전체의 체면이 달려 있다 그말이여.


우리나라가 좋은 점도 많은데 좋은 점으로 세계에 이름이 나야지, 대통령이 저런—물론 미국도 워터게이트(Watergate사건)니 뭐 해가지고 닉슨이 대통령에서 쫓겨나고, 일본도 다나까 수상이 뇌물 관계로 해서 징역도 살고 그런 일도 있지만, 그것이 강 건너 불로 우리는 생각했다 그말이여.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우리 손으로 뽑았던 대통령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걸 욕할 수도 없고, 비난할 수도 없고, 매도할 수도 없고. 이게 탐진치 삼독심 때문에 이것이 이렇게 된 거여!



옛날에 저 강원도 철원, 보개산 심원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내가 이 이야기를 지금부터 10여 년 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한 바가 있는데, 그 절에서는 종(鐘)이 없고 또 절이 퇴락(頹落)해서 중수(重修)도 해야겠고, 그래서 인자 그 주지 덕문대사라고 하는 스님이 화주승(化主僧)이 나와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종 시주(施主)도 받고, 법당 모다 중수 시주금도 받고 그러는데.

그 한 마을에 한 사람은 앉은뱅이고, 한 사람은 눈이 안 보이는 장님이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살림도 하고, 일도 하고, 돈도 벌고 해서 다 분 따라서 시주를 모다 하는데, 그 앉은뱅이가 무슨 수로 돈을 벌며, 일도 못하고, 눈이 어두운 콱 아무것도 안 보이는 장님이 무슨 수로 무슨 돈이 있어서 시주를 할 것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두 친구가 서로 만나서 참 한탄을 하고 그러다가 한 꾀를 하나를 냈어.

"자네는 다리는 못 쓰지마는 눈이 밝고, 나는 눈은 없지마는 다리는 성하니까, 다리가 성한 내가 자네를 업고 다니면서 쇠붙이, 무엇이고 필요할 만한 그런 것을 줏어 모아가지고 그걸 많이 모아다가 절에다가 갖다가 주면 그것으로 종을 만드는 데 그것을 보태서 쓰면 되지 않겠는가?"

"대체, 그러면 그렇게 하세"


그래가지고 날마다 온 마을을 다니고 이웃 마을을 다니고 앉은뱅이를 업고 장님이—장님, 눈은 안 보이지마는 앉은뱅이가 '이리 가, 저리 가' 이렇게 해서 업혀 다니면서 그래가지고 골짝 골짜구니 다니면서 고철을 줏어 모았어.

그래가지고 절에다 갖다 주고 해서 3년 동안을 그렇게 해서 많은 고철, 쇠붙이 뭐 숟가락몽둥이, 젓가락 부러진 거, 닥치는 대로 줏어서 다 갖다가 주었어.


그래가지고 드디어 종을 지어 붓고 또 법당도 중수를 하고 하는데, 그래서 인자 마지막 그 회향 타종식(打鐘式), 준공식과 타종식을 겸해서 회향(廻向) 법회를 하는데, 그래서 인자 자기네들도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가는데 그 절에 오색광명(五色光明)이 일어나는데 그 광명 속에 찬란한 불보살(佛菩薩)이 탁! 나타나거든.


그 앉은뱅이가 업혀서 보니까, "야! 저 부처님 봐라! 부처님 봐! 부처님!"

그러니까 "에이, 무슨 부처님이 있어?" 아, 그러면서 눈을 뚝! 떴다 그말이여. 심봉사가 그 심청(沈淸)이 공덕으로 눈 뜨듯이 눈을 뚝! 떴어.

그게 심원사에 내려오는 역사가 지금도 내려오는데, 그래서 '그 큰 빛이 거기서 났다'해서 '대광(大光)'이라고 하는 마을이 지금도 있고, 또 '부처님을 봤다'해서 불견령(佛見嶺)—'부처 불(佛)’자, '볼 견(見)’자, '마루 령(嶺)’자, 불견령이 지금도 그 철원에 가면 있어.


이 심원사 설화를 내가 말씀을 한 까닭은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소질도 다릅니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을 합치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다 이룰 수가 있고, 좋은 여건을 가지고 태어났지마는 서로서로 마음을 합하지 아니하면은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머지않아서 대학입시 문제로 또 학부모 여러분들이 가슴을 조이는 시기가 돌아옵니다마는 일류 대학 그것만 찾을 게 아니라, 자기의 아들과 딸이 어떠한 방면에 소질이 있는가? 어떤 방면으로 가면은 그 소질을 살려서 기쁜 마음으로, 보람 있는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가 있는가? 그렇게 해서 과를 선택하고 학교를 선택을 해야지, 덮어놓고 일류 대학만 가려고 하는 생각은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앉은뱅이는 눈이 보이니까 그 눈을 활용을 하고, 장님은 다리가 성하니까 그 다리를 활용해서, 앉은뱅이와 장님이 두 사람이 합해서 한 사람 구실을 하니까 그 어려운 종 불사(佛事)를 성취를 해서 그 종을 떵떵 쳐가지고 그 종소리를 들은 모든 중생이 고통을 면하고,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고, 그 종소리가 지옥에까지 들리면은 지옥에 고(苦) 받는 중생들이 그 고통을 쉬는 것인데, 어떻게 앉은뱅이 혼자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장님 혼자 힘으로 그 종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 불구자 두 사람이 합치니까 그런 훌륭한 불사를 성취했다 그말이여.


그래서 옛날에는 법과 대학만 가야 제일이고, 판검사만 되어야 제일 좋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을 했었습니다. 법과, 별로 그렇게 좋은 것이—그것도 가야 하기는 하겠지만, 별로 그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고 자기의 소질, 자기의 성격, 자기에게 맞는 과를 선택하면 어느 과나 다 좋은 것입니다. 대학도 서울 대학만 제일 좋은 것도 아니고, 서울 대학 아니라도 사립 대학도 좋고, 지방 대학도 좋은 것입니다. 자기의 거시기에 맞춰서 가면 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과를 가든지 불법을 믿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고, 본성을 닦는 공부를 하면 어느 과를 가더라도 훌륭한, 행복한,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이거든.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지 아니하면 끝내 죽을 때까지 불구자에 그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불구자가. 그러나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한 데에서 성한 사람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불사(佛事)를 성취한 거여.


그래서 우리는 지금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이러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해서 '때려죽이라'고 고함을 친다고 해서 그거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의 가족, 자녀, 손자손녀 가운데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고, 장관이 나올 수도 있고, 수많은 인재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 자녀들에게, 후손들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바르게 사는 법, 정법(正法)을 믿는 법을 가르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만 바로잡고 올바르게 사는 길만 알면 부자가 되어도 좋고 높은 벼슬해도 좋지만, 마음을 바르게 쓰고 정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돈을 많이 가지면은 그 돈은 자기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올가미에 지나지 못한 것이고, 높은 권리와 지위를 줘 놓으면 그것을 악용해 가지고 죄를 지어서 결국은 살아서 쇠고랑 차고 죽어서 지옥에 밖에는 갈 길이 없다 그말이여.(17분15초~36분32초)





(3/4)----------------


화종목출환소목(火從木出還燒木)이라. 불은 나무에서 나와 가지고 결국은 나무를 다 태우는 거여.

지인정기각제정(智因情起却除情)이다. 지혜는 정(情)으로부터 나와. 눈으로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알고 하는 우리의 감정에서, 그놈을 여의고 지혜가 나온 것이 아니라 그놈을 돌이키면, 그놈을 돌이켜서 나의 본심을 찾으면은 거기서 지혜를 얻는 거여.

그래가지고 그 지혜는 자기의 번뇌와 망상, 모든 정(情)을 갖다가 제(除)할 수가 있는 거여. 참 이게 간단한 말이지만 바르게 공부해 나가는 방법이 이 속에 다 들어 있어.


정심관망명위지(正心觀妄名爲智), 바른 마음, 바른 마음으로 망령(妄靈)된 것을 관(觀)하면은—망령된 거라는 게, 중생은 눈으로 봤다 하면은 망견이요, 듣고 보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고 행동하는 것이 전부가 다 망령된 번뇌 망상이여!

부처님, 그 소중한 부처님 경전을 읽어도 중생의 망령된 생각으로 읽으면 그 주옥같은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이 전부 망상(妄想)이여, 그게 다. 백년을 두고 연구하고 따져봤자 망상이여.


향나무로 불상(佛像)을 조성(造成)을 하거나, 돼지를 조성을 하거나, 소를 조성을 해도 그 냄새를 맡아보면 향내가 풀풀 나지마는, 고약한 구리고 고린 그러한 물건으로 만들어 놓으면 아무리 거룩한 불상을 만들어놔도 맡아보면 구릉내, 고린내가 나는 거여.

그래서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과 정법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여. 똑같은 짓을 하고, 같은 밥 먹고 살아도 다른 거야!


여러분의, 현재 여러분들도 포함해서 여러분들의 자녀를 잘 가르키려면은,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키려면은 여러분 자신들이 입으로 "정법을 믿어라, 최상승법을 믿어라, 절에 가서 법문을 들어라" 강요한다고 해서—물론 부모 말씀을 듣고 학생 법회에도 나오고, 그런 착하고 효심이 있는 자녀들도 있습니다마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문제거든.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부모님이 열심히 법문도 듣고, 그 법에 의해서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지혜와 자비로써 살아가도록 모범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러면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녀들이 따라올 것입니다.


「바른 마음으로 망령된 것을 관한다[正心觀妄]」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거나 그때 그 경계에 따라가지 말고 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게, 그것이 바른 마음으로 망령된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것이 바로 지혜가 되는 거여.

그렇게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한 달 열흘, 일 년, 십 년 해 가다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현전(現前)을 하게 되는 거여.


지능입각부사의(智能入覺不思議)여. 그래서 그 지혜가 깨달음으로 나를 끌고가는 거여.

그러니 이 화두 하나가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그 철저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 이 삼요(三要)가 갖추어짐으로 해서 똥만 가득찬 이 중생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증득하니 이것이 부사의(不思議) 도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상찰나실난측(無常刹那實難測)한데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오

나무~아미타불~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꿈 가운데에 한 알갱이 쌀을 탐착하다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다. 금대, 저 천상의 금대(金臺)에 만겁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잉어가 수십 년 내지, 백년을 커 가지고 머지않아서 용이 되어 갈 텐데, 밥티 하나가 낚시에 걸려서 앞에 와서 아른아른하니까 그놈 덜커덕 채 먹다가 낚시에 걸려서 죽게 되거든.


정법을 믿고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열심히, 자기의 직업에 충실하고 열심히 하고 부정한 데에 마음을 쓰지 말고 열심히 하고서 정다운 월급을 받고, 그것을 검소하게 분 따라서 분상에 맞도록 검소하게 살면서 그저 열심히 참선하고 살면, 또 전생에 지은 복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도 차츰 부자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부정한 짓해서 그 사기 협잡하고 그래가지고 돈을 모아 봤자 그런다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일확천금하고 부정한 짓해서 모아 봤자, 자식이 그 아버지가 돈 모이는 것을 환히 보거든. 어떻게 해서 그 돈을 모이는가 봐가지고, 그렇게 모인 돈은 자식이 아껴 써 주지도 않고 마구잡이 막 갖다 쓸라고 그러거든.

'자동차를 사 내라, 무엇을 사 내라, 무엇을 사 내라'하고 막 쓰고, 안 주면은 막 부모한테 불효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가출하고, 온갖 못된 짓 다하고, 그놈이 커서 장가보내고 살림 모아주면 탁! 때려먹고 쇠고랑 차. 절대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서 자손한테 물려줄 생각하지 마세요.


무상찰나(無常刹那)라 실난측(實難測)이여. 우리의 목숨은 젊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고, 언제 죽을 줄 몰라. 눈 한번 감았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세(來世)여.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오. 어찌 뼈아프게 반성을 해서 자기의 마음을 돌리지를 못하느냐 이거여.



아손자유아손복(兒孫自有兒孫福)하니  불위아손작우마(不爲兒孫作牛馬)니라

나무~아미타불~

처자권속삼여죽(妻子眷屬森如竹)이라도  임종독자고혼서(臨終獨自孤魂逝)니라

나무~아미타불~


아손자유아손복(兒孫自有兒孫福)이여. 우리 자손은 자손 스스로 자기 복을 다 타고나는 것이여.

불위아손작우마(不爲兒孫作牛馬)여. 그러니 자손을 위해서 소나 말이 되어가지고 그 애쓸 필요가 없어.

물론 부모의 책임상 먹이고 입혀서 가르켜야 하기는 하겠지만, 정성을 다해서 다 알뜰히 키우고 알뜰히 입히고 알뜰히 가르켜야 하겠지만, 완전히 소나 말이 되어가지고 아주 완전히 자식을 아주 상전처럼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부당한 요구를 해도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고 그래서는 안 돼. 그런다고 해서 그 자식이 잘되는 게 아니거든. 들어줄 것은 들어주고, 안 될 것은 안 들어주고.


일본에 어떤 훌륭한 사람이 '자식이 말한 것은 열 가운데 8, 9가지는 들어주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면 그 자식이 효심이 있고 공부도 잘하고, 무럭무럭 잘 자랄 것 같지마는 그렇게 키운 자식 반드시 커서 불효하고 못된 자식이 되거든.

들어줄 것은 들어주고, 안 들어줄 것은 딱! 안 들어줘야 하거든. 그러한 절도와 지혜와 아량과 자비가 있어야 해. 덮어놓고 해 달라는 대로만 다 해 주면 좋은 것이 아니거든.

옛날 분들은 그것을 알아서 했는데, 요새 사람들은 원판 어떻게 된 것인지 자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줘야 좋은 부모 노릇을 한 줄 아는데 그게 아니거든.


처자권속(妻子眷屬)이 삼여죽(森如竹)이라도, 처자 권속이 삼대와 같고 대나무처럼 그렇게 즐비하더라도, 임종독자고혼서(臨終獨自孤魂逝)여. 죽을 때는 혼자 가. 아무리 착한 아내라도 남편 대신 죽어 주도 못하는 거고, 자식들이 우르르 해도 자식들이 부모 대신 죽어 주들 못해. 갈 때는 자기 혼자 외롭게 쓸쓸해 가는 거여.


그래서 자손을 위해서 종노릇도 하고, 소나 말이 되지 말고, 최소한도로 부모의 도리는 하지마는 자기 갈 길은 자기가 닦아야 해. 항상 '이뭣고?'를 해서 자기 갈 길을 닦아야지, 누가 내 대신—재산도 염라대왕은 소용이 없고 알아주지 않고, 명예와 권리가 아무리 높아도 염라대왕은 안 알아줘.

'이뭣고?'한 사람이라야 죽음을 당하더라도 겁날 것 없고,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나더라도 겁날 것이 없어.


자기가 과거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는 받아야지. 받지마는, 탁! '이뭣고?'를 하면서 받으면 그것도 그렇게 썩 고약한 것이 아니어.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곡천선사(谷泉禪師)가 자기의 오후보림(悟後保任)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일부로 무슨 죄를 지었던지, 무슨 누명을 쓰고 감옥에를 갔던지, 가서 지게를 지고 복역을 하는데, 날마다 흙을 파다가 대를 메우는데, 마지막 날이 돌아왔던지 흙지게를 따악 받쳐놓고 앉아서,

'불시상천당(不是上天堂)이면  변시입지옥(便是入地獄)이다. 내가 천당에 올라가지 아니하면 지옥에 갈 거다. 6월 6일(六月六日) 곡천수죄족(谷泉受罪足)이다"

임종게(臨終偈)를 따악 써 놓고는 탁! 열반(涅槃)에 들었어.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나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맞이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그럭저럭 지내다가 죽을 때 가 가지고 그때 가서 허둥대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큼 젊었을 때 준비를 해야 해.

항상 해 놔서 그놈이 길이 들고, 습관이 되고, 체질화가 되도록 해 놔야 언제 죽더라도 무슨 상관이냐 말이여. 어피차 죽을 거 빨리 죽으면 빨리 죽고, 좀 몇십 년 살다 죽으면 죽고 그런 것이지.


'이뭣고?'를 탁! 해 놓으면—아, 죽을 때 숨이 가쁘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지. 아프면 '아이고! 아이고!'하면서도 탁! 속으로는 '이뭣고?'를 하면서 딱 숨을 거두어야 한다.(36분37초~54분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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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세사(百年世事)는 삼경몽(三更夢)이요  만리강산일국기(萬里江山一局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고래다소영웅한(古來多少英雄漢)이  남북동서와토니(南北東西臥土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씨가 독일에서 오늘 새벽에 임종을 하셨습니다.

이분은, 이분의 누이동생 또 일가 분들이 용화사 신도라서 그분을 통해서 윤이상 씨와 생존 시에 전화도 했고 또 내 녹음 테이프(tape)도 갖다가 많이 들으시고 그랬는데, 생존 시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용화사에 와서 법문도 듣고, 한국에 와서 여생을 보내기를 원을 했지마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결국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에서 임종을 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참, 부처님을 믿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명을 마치셨는데 '내가 죽거든 용화사 스님이 와서 염불을 좀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셨고, 자기가 돌아가거든 용화사에 만년위패(萬年位牌)에다가 위패를 올려 달라고 요청을 해서 지금 저기다가 그 윤이상 선생님의 빈소를 마련했습니다.

거기 혹 인연이 있으신 분이나, 생각이 있으신 분은 향을 올리고 조문을 하셔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외국에 가서 예술이 되었건, 음악이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또는 과학자가 되었건 철학자가 되었건, 가서 참 세계적인 공로를 세우고 우리나라를 빛냈다면은 그것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마땅히 존경해야 할 만한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백년세사(百年世事)는 삼경몽(三更夢)이요. 백 년에 세상일은 삼경(三更)에 꿈이요,

만리강산(萬里江山)은 일국기(一局碁)다. 만리 강산은 한 바둑판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백 년 역사를 한번, 이조 말기로부터서 왜정으로부터서 해방 후로 50년, 오늘날까지를 간략히 이렇게 한번 훑어보시라 그말이여. 그것이 지내 놓고 보면은 다 꿈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말이여.


만리 강산이 한 바둑판이여. 저 고구려 · 신라 · 백제로 이조로 오면서 오늘날까지 그런 긴 역사를 더듬어 보라 그말이여.

고구려 땅이 신라로 통일이 되고, 백제가 신라로 되고 그러다 그것이 고려가 되었다가, 이조가 되었다가, 또 왜정 36년 동안 식민지로 있다가, 이것이 바둑을 두다 보면 내 땅이 되었다, 저 사람 땅이... 지지리 따는 줄 알고 해 놨는데 한 수 잘못 두어 가지고 탁! 뺏겨 버리거든. 중국 역사나,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 역사가 다 마찬가지여. 그래 분명히 이게 바둑판과 같은 거여.


고래다소영웅한(古來多少英雄漢)이, 그 역사가 이리저리 변화되는 데에 따라서 반드시 역사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건데, 그 가운데는 훌륭한 왕 · 천자 · 정치가 · 학자, 별의별 그 장군, 그 영웅들이 동서남북에 다 땅속에 흙으로 다 변했어. 묻어도 지가 썩어서 흙이 되는 거고, 화장을 해서 버려도 그것이 한줌 흙에 지나지 못한 것이지.


이것은 순치황제(順治皇帝), 청나라 세조(世祖)라고 하는 천자(天子)가 순치황제인데, 그분의 그 출가시(出家詩)에 보면은 원래 인도에, 천축에 한 수도승이 한 생각 잘못 먹어가지고 청나라 천자가 되었어.

순치황제가 되어가지고 탁! 가사를 벗어 버리고, 곤룡포를 떡 입고 18년간을 황제 노릇을 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버렸어. 역사로는 죽었다고 되어 있지마는 죽은 게 아니라 절로 가서 부목 노릇을 했어.


그래가지고 그 출가할 때 지은 시(詩)가 바로 '아손자유아손복(兒孫自有兒孫福)'이라든지, '백년세사삼경몽(百年世事三更夢)'이라든지, 출가시가 여러 수(首)가 있는데.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도 이 순치황제의 시를 읽고서 대통령 노릇을 했으면 정말 대통령을 내놓고 나온 뒤에도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국부(國父) 대접을 받았을 것이여.


이박사도 그렇고, 박대통령도 그렇고, 대통령마다 이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항상 외우고 마음에 새겼던들 그까짓 대통령을 해 먹으려고 갖은—물론 하면서 공로가 없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공로, 오늘날 우리나라를 이만큼 잘살게 한 공로가 다 역대 대통령들이 그만큼 정치를 잘해서 그랬겠죠.

물론 그 정치가라든지, 경제계라든지, 학계라든지, 전부가 다 그만큼 애써서 이만큼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게 잘하는 가운데 마음보를 바르게 썼으면 정말 국부 대접을 받았을 것이고, 대통령 내놓고도 가는 곳마다 다 존경을 받고, 어디 가서 살아도 마음놓고 살고 그럴 텐데, 이 생각이 한 생각을 잘못 가짐으로 해서 애쓴 보람은 아무도 인정을 해 주지를 않고, 말로(末路)가 저렇게 참 비참하게 되었다 그말이여.


여러분도 이 말씀 깊이 새겨서 내생(來生)에 대통령하더라도 정말 이 순치황제를 잃어버리지 마셔.

참선한 사람은 한 생각만 먹으면은 왕(王) 되려면 문제가 없는 거여. '하늘에서 내야 한다'하지만, 순치황제의 역사를 보거나, 운문선사에 그 일화를 보면, 참선만 열심히 하면 한 생각만 먹으면 그 되어져 버리거든.


이제 가을도 다 익어가고 내일 모래 글피면 또 입동이 돌아옵니다. 오늘 해제를 맞이한 여러 도반들, 다시 눌러서 여기에서 정진을 하시건 또 다른 데에 가서 겨울철을 지내시건, 어쨌든지 신심과 분심과 대의단으로 철저하게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54분10초~64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강아지(가하지 家下地), 송아지(송하지 松下地), 도야지(도하지 道下地, 도 밑에서 피난을 해라) / 구정선사 / 선지식의 한마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 / 참선이라는 것은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게송)화종목출환소목~ / 도하지(道下地), 도(道) 아래에서 피난을 해라. 내 마음속에 참부처를 찾아야 영원한 행복이 거기에 있다 / 탐진치(貪瞋癡)로 인해 일체 재앙이 거기서 다 일어난다 / 심원사 설화(앉은뱅이와 장님) / 자기의 본성(本性)을 닦는 공부를 하면 훌륭한, 행복한,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다 / 자녀들에게 바르게 사는 법, 정법(正法)을 믿는 법을 가르켜야.


「바른 마음으로 망령된 것을 관한다[正心觀妄]」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거나 그때 그 경계에 따라가지 말고 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것, 그러면은 그것이 바로 지혜가되는 것이다 / (게송)탐착몽중일립미~ / (게송)아손자유아손복~ / 곡천선사(谷泉禪師)의 임종게(臨終偈) / 죽음을 준비하라. '이뭣고?'를 해야.


(게송)백년세사삼경몽~ /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씨의 임종 / 청나라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출가시 / 백년 세상일이 한밤중의 꿈, 만리강산 세계역사가 바둑판, 모든 영웅들이 다 한줌 흙에 지나지 못한다.



가하지는, 강아지는 집 아래에서 피난을 해라[家下地]. 송아지는 소나무 밑에서 피난을 해라[松下地]. 되아지(돼지)는 '길 도(道)'자, 도 밑에서 피난을 해라[道下地].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 바른 선지식의 한마디에 자기의 목숨을 바쳐야, 그것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린다'

'몸을 잊은다'는 것은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는다' 몸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장래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다 거기다 바쳐 버려야, 그리고 오직 한마디 말씀에 의지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위법망구의 정신이 되어야 끝장이 나는 거여. 자기의 소견이 붙어 있고, 자기의 사량복탁(思量卜度)이 붙어 있고, 이래저래 의심하고 따지고 그래가지고서는 이 문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


배워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어. 참선이라는 것은 배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한 신심(信心) 하나로써 오직 꽉 막힌 의심(疑心)으로 나아간 데에서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가르켜 갖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 그래서 이것은 믿음이 없으면 백날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거든.


도하지(道下地), 도(道)라고 하는 것은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참부처를 찾는 거여. 그럼으로써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거기에서 참다운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이고, 영원한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인데,

중생들은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오면서 익힌 습기(習氣)로 말미암아서 탐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진심(瞋心) 내는 것이 아주 습관이 들고, 한 번 두 번 경험을 해 봐서 '아! 탐욕과 진심이라는 게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고, 나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알아차리고 그 탐심과 진심을 돌이켜서 내 마음 닦는, 자기의 분(分)을 알아서 자기 마음 닦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다' 그러는 거여.


탐진치(貪瞋癡)라고 하는 것을 삼독심(三毒心)이라 그러고, 그 탐진치 삼독심을 고치면은 그것이 삼학도(三學道)가 되는 건데, 말세가 될수록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은 점점 더 깊어지고 더 치성해진다 그말이여. 거기에서 일체 재앙이 거기서 다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심원사 설화(앉은뱅이와 장님)를 내가 말씀을 한 까닭은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소질도 다릅니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을 합치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다 이룰 수가 있고, 좋은 여건을 가지고 태어났지마는 서로서로 마음을 합하지 아니하면은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바르게 사는 법, 정법(正法)을 믿는 법을 가르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만 바로잡고 올바르게 사는 길만 알면 부자가 되어도 좋고 높은 벼슬해도 좋지만, 마음을 바르게 쓰고 정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돈을 많이 가지면은 그 돈은 자기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올가미에 지나지 못한 것이고, 높은 권리와 지위를 줘 놓으면 그것을 악용해 가지고 죄를 지어서 결국은 살아서 쇠고랑 차고 죽어서 지옥에 밖에는 갈 길이 없다.


「바른 마음으로 망령된 것을 관한다[正心觀妄]」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거나 그때 그 경계에 따라가지 말고 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게, 그것이 바른 마음으로 망령된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것이 바로 지혜가 되는 거여. 그렇게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한 달 열흘, 일 년, 십 년 해 가다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현전(現前)을 하게 되는 거여.


지능입각부사의(智能入覺不思議)여. 그래서 그 지혜가 깨달음으로 나를 끌고가는 거여. 그러니 이 화두 하나가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그 철저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 이 삼요(三要)가 갖추어짐으로 해서 똥만 가득찬 이 중생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증득하니 이것이 부사의(不思議) 도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나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맞이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그럭저럭 지내다가 죽을 때 가 가지고 그때 가서 허둥대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큼 젊었을 때 준비를 해야 해. 항상 해 놔서 그놈이 길이 들고, 습관이 되고, 체질화가 되도록 해 놔야 언제 죽더라도 무슨 상관이냐 말이여. 어피차 죽을 거 빨리 죽으면 빨리 죽고, 좀 몇십 년 살다 죽으면 죽고 그런 것이지.

아, 죽을 때 숨이 가쁘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지. 아프면 '아이고! 아이고!'하면서도 탁! 속으로는 '이뭣고?'를 하면서 딱 숨을 거두어야 한다.


여러분도 이 말씀 깊이 새겨서 내생(來生)에 대통령하더라도 정말 이 순치황제를 잃어버리지 마셔. 참선한 사람은 한 생각만 먹으면은 왕(王) 되려면 문제가 없는 거여. '하늘에서 내야 한다'하지만, 순치황제의 역사를 보거나, 운문선사에 그 일화를 보면, 참선만 열심히 하면 한 생각만 먹으면 그 되어져 버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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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76~600)2020. 4. 14. 17:07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593)—1997년 정축년 하안거 해제 (61분)

(1/3) 약 21분. (2/3) 약 19분. (3/3) 약 21분.

(1/3)----------------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헌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하(가)(耳聲眼色曾無暇)헌데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이다.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돌고 돌아서 따뜻하다가 또 다시 추워지고, 추워졌다가 다시 또 따뜻해지고, 그게 사시가 돌고 도는 가운데에,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다. 원숭이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더라.


원숭이는 계절 따라서 맛있는 열매가 여는 계절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말이지.

꽃이, 여섯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지고 하면 거기에는 맛있는 과일이 열렸다가 또 익어 가니까 육화촌(六華村)을 항상 그렇게 깊이 그리워한다 그말이여.


이성안색증무하(가)(耳聲眼色曾無暇)여.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온갖 색상을 보는데 틈이 없어.

이 말은 아까 원숭이가, 산에서 사는 원숭이로 여러분은 알아들으셨었는지 모르는데, 이 원숭이는 '마음에 원숭이'를 말하는 거여.


우리의 '마음'을 원숭이에다가 비유하고, 우리의 '뜻'을 말에다가 비유해서 '심원의마(心猿意馬)'라고 고인(古人)네들이 비유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건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팔식(八識)이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뛰었다가 내려갔다 이 나무 저 나무로 건너다니면서 온갖 수선을 피고, 저는 운동을 하느라 그러는지 그렇게 설쳐대는 것이 마치 우리의 마음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반연(攀緣)해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나부대는 우리의 마음에 원숭이가 마치 그와 같다.


그 눈과 코와 귀와 혀와 몸뚱이를 통해서 우리의 팔식(八識)이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 우리의 마음의 원숭이가 육근(六根)을 통해서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이 바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누가 알거나 그말이여.



오늘은 정축년 하안거(夏安居) 해제(解制)날입니다.

하안거 해제에다가, 백중(百中)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에다가, 백일기도 회향을 겸해서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어째서 우란분재,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하는 우란분재에 법요식을 하안거 해제일에 행하게 되느냐?

이것은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의 효도(孝道)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 청제(靑提) 부인은 남편이 남겨놓은 많은 재산을 삿된 생각으로 낭비를 하면서 살생(殺生)을 하고 갖은 죄(罪)를 지었습니다. 그 죄 지은 과보로 아귀도(餓鬼道), 무간지옥도(無間地獄道)에 떨어져서 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그 아들 목련이 효심(孝心)이 지극해가지고 그 어머니가 어디서 무얼하고 무슨 고통을 받고 계신가 그것이 궁금했고, 급기야는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서 갖은 방법으로 어머니를 그 지옥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려고 애를 썼지마는 끝내 이루지를 못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부처님께 간청을 해서 어머니를 구제(救濟)하는 방법을 여쭈어보니까, '여름 하안거 해제날 석 달 동안을 더위를 무릅쓰고 열심히 도 닦은 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림으로 해서 그 공덕(功德)으로 어머니를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가 있느니라' 그 방법을 가르켜 주셨어.


그래서 목련존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양할 거리를, 백 가지 과일과 모다 맛있는 음식을 잘 마련을 해가지고 해제 때—부처님 회상(會上)에서 지내던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멀고 가까운 데에서 각기 모다 공부하고 있던 수행자(修行者)들이 부처님 회상에 해제 때에는 모다 모여들었습니다.

그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이 공양(供養)을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공덕으로 지옥에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그 어머니 청제 부인을 지옥고로부터 이렇게 벗어나게 해 드린 고사(故事)가 『목련경(目連經)』이라든지 『우란분경(盂蘭盆經)』이라든지 그런 경전을 보시면은, 사람으로서는 그 처절한 고통 받는 그 내용을 소상(消詳)하니 알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因緣)으로해서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지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동남아 여러 국가나 중국 · 한국 · 일본 불교국가에, 믿는 나라에서는 이 칠월(七月) 해제일을 기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저 선망부모를 위시(爲始)해서, 가족에 아들딸 형제자매 원근친척들의 영혼을,

물론 그 가운데는 비명(非命)으로 돌아가신 분—횡사(橫死)해서 돌아가신 분, 교통사고나 또는 물에 빠져죽고 목 매달아 죽고, 약 먹고 자살하고 한 온갖 비명횡사한 그런 영가(靈駕)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영가들을 천도하는 법요식을 해마다 연례 행사로써 거행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백중(百中)날이 좋으냐 하면은 석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해서 몸도 청정하고 마음도 청정한 수행자들, 수행자들에게 공양 올린 공양공덕(供養功德)이 얼마나 장(壯)한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보면은,

‘악(惡)한 사람 백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착한 사람 한 사람한테 공양(供養)하는 것이 낫고,

착한 사람 천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오계(五戒)를 지키는 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게 낫고,


오계를 지키는 사람 만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한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수다원과를 증득한 백만 명에게 공양한 것보단 사다함(斯陀含)을 증득한 한 성현한테 공양한 것이 낫고,

사다함 천만 인에게 공양한 것보단 아나함(阿那含)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아나함 일 억의 성현에게 공양한 것보단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십 억의 아라한에게 공양한 것보단 한 분의 벽지불(辟支佛)에 공양한 것이 낫고,

백 억의 벽지불에게 공양한 것보단 한 사람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의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천 억의 삼세제불에 공양한 것보단 한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한 것이 낫다’


『사십이장경』에는 '무념(無念) · 무주(無住) · 무수(無修) · 무증(無證)한 사람에게 공양(供養)한 것이 낫다' 그러는데.

무념(無念)이요, 무주(無住)요, 무수(無修)요, 무증(無證)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그말인데.


이 무심도인은 어떠한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이냐?

생각을 하되 생각 없는 생각을 하고, 행(行)을 하되 행이 없는 행을 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고, 증(證)하되 증한 바가 없이 증하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하는데, 이 무심(無心)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한 것이 무심도인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무심도인(無心道人)인지 아닌지를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석 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한 수행자 가운데에는 몸도 마음도 청정(淸淨)해서 무심(無心)한 경계(境界)에 들어간, 들어갈 공부를 했고 그 가운데에는 이미 무심한 경계에 들어간 스님이 몇 분인가는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설사 오늘날 당장 완전히 진무심(眞無心) 경계에 들어가지 안 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를 향해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도 준(準) 무심도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 해제 때 모이신 그 스님네들에게 공양을 올리면은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비명횡사해서 거리 중천에서 갈 곳을 모르고 해매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와 가족들로 하여금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공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무심도인(無心道人).


'내가 무심도인이다'하면 그게 무심도인이 아니여.

'내가 한 소식을 했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니고,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다'한 생각을 가지면 이미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닌 거여.


어떻게 하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느냐?


본참공안(本參公案)—'이뭣고?' 화두가 되었건, '판치생모(版齒生毛)' 화두가 되었건, '무자(無字)' 화두가 되었건,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指定) 받은 그 본참공안을 하나를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은산철벽(銀山鐵壁)에 탁! 부딪힌 것처럼, 나아갈라야 나아갈 데도 없고 물러설라야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꽉 맥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본참공안에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나감으로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마침내는 무심도인이 되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셔가지고 일생,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說)하신 요점이, 목적(目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해제법문(解制法門)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녹음법문을 통해서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그것을 경청(敬聽)을 했음으로 해서 해제법문을 산승(山僧)이 설할 것은 없습니다. 또 설할 줄도 모릅니다.

다맛 석 달 동안을 그 삼복성염(三伏盛炎)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고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을 만났으니 너무 반갑고, 고향에 일가친척을 만난다고해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일가친척은 만나봤자 거북하고 신경쓰이고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저기서 한 철을 지내고 모인 도반들은 안면이 있는 분이나, 안면이 없는 분이나 이렇게 해제를 하고 만나면 수십년 보고 싶었던 고향친구가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변이 없어서 내가 반가운 척은 못합니다마는, 마음속으로는 정말 반가운 것입니다.


나와 같이 한 목적을 향(向)해서 가는 도반(道伴)이요, 현재 한 목적을 향해서 고행(苦行)을 해 나가는 형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또 다시 만나야 할 도반이요 궁극(窮極)의 목적지에서 다시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가지고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해야 할 그러한 도반이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21분1초)





(2/3)----------------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하시기를,

'대저 도(道)를 닦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한 나무토막이 물에 있어서 흐름을 따라서 흘러 흘러가다보면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또 흘러가다가 어떠한 사람한테 이렇게 사람이 건져버리지 않고 또 어떠한 귀신이나 그런 것에 의해서 차단을 당하지 아니하고, 또 소용돌이치는 그런 물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빙빙 돌면서 떠내려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다가, 흘러 내려가다가 썩어져서 없어져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나무토막은 결정코 바다에 도달하는 거와 같다'


그러면 <양쪽 언덕에, 물이 흘러가다가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는다>하는 것은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하는 그러한 소견(所見)에, 그러한 두 언덕에 집착(執著)을 하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고.

<사람에게 건짐을 당하지 않는 것>은 인천(人天)에, 사람의 세계나 하늘나라에 선업(善業)을 지어가지고 복(福) 받는데 빠지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여.


사람이 살아감에 악(惡)한 짓은 하지 말고 선업(善業)을 닦아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곳에 태어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이 도문(道門)에 있어서는 그렇게 복(福) 받고 호강하고 잘 먹고 잘산 거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복 받고,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고 그러면 자연히 사람이 교만해지고 거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고 편안한 데에 빠져가지고 도(道) 닦을 마음을 내기가 어려워서 그거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별로 그걸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귀신에 차단(遮斷)을 당하지 않는 것>은 사견, 불법을 믿으면서도 정법(正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백히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사견에 빠져 놓으면 겉으로는 열심히 도(道)를 닦은 것 같애도 속마음에 사견에 떨어져 있어 놓으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出現)해도 그 사람은 제도할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이미 그릇에, 아무리 그 그릇이 좋아도 못된 것이 가뜩차 갖고 있으면 다른 것을 아무리 그 그릇에다 담으려고 담어도 소용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견 가운데에도 가장 으뜸가는 사견은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견(空見)에 집착해 빠지는 것이여.

공견에 빠지면은 인과법을 믿지 않고 막행막식 해가지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법도(法度)가 없어가지고 마구잽이 닥치는 대로 하거든.


인과법을 철저히 믿으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하고 무서운 것을 알며, 행동 하나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한 것인 줄 알며, 그러기 때문에 인과법을 철저히 믿어야 저절로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정법(正法)을 믿고서 정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이 빙빙빙 도는 회오리 소(沼)에 한 번 빠지면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삼계(三界)의 회오리거든.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 삼계(三界)의 회오리 속에 빠지면 여간해서 거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해.

그속에는 오욕락(五欲樂)—재산에 대한, 색(色)에 대한, 명예 권리에 대한, 또 안락(安樂)과 수면(睡眠)에 대한 그런 오욕락에 빠져가지고, 그리고 서로 인연을 악연(惡緣)과 선연(善緣)을 지어가지고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또 복수하고 은혜를 갚고 그러한 업연(業緣)에 얽혀가지고 여간해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말이여.


인과법을 믿되, 믿기는 철저히 믿되, 거기에 '어떻게 하면 인과(因果) 속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여.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정법에 의해서 수행(修行)을 해야 우리가 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얽히지 아니하고 해탈(解脫)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 나무토막이 흘러가다가 썩어서 부패해가지고 부서져버리면 바다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에다가 비유한 것이냐 하면은 불교에 소승(小乘)과 중승(中乘)에, 이승(二乘)에는 멸진정(滅盡定) 외도(外道), 멸진정이라고 하는 경계(境界)가 있는데 그 멸진정에 한 번 빠져 놓으면 몇만 겁(劫)이 지내도 거기서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수행을 하되, 참선(參禪)을 하되 무기(無記)에 빠져가지고, 그 편안하고 깨끗하고 조용한 그 경계에 빠져서 그것에 맛을 들여 가지고 거기에 빠진 채 그것이 공부인 줄 알고 수행을 하면 결국은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져가지고 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을 하되 처음에는 화두를 들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자꾸 일으켜 가지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하지만, 차츰차츰 망상(妄想)이 가라앉고 조용하고 깨끗해지면 화두 드는 것도 귀찮애지고, 화두를 들면은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않고 가만히 고요한 것을 맛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공(無記空)에 빠지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산승(山僧)이 항상—화두가 끊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와서 화두를 놓치거나 하면 다시 자기의 화두를 들되, 이미 들어진 화두가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거든 거기에서는 자꾸 거기다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그렇게 어거지로 거기다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말고, 이미 독로한 그 의단을 묘(妙)하게 잘 관(觀)해 가도록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면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그 의심관(疑心觀)을 하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르 하니 의심이 성성(惺惺)하지를 못하고 그냥 의심이 없어져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럴 때는 터억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자기의 화두[本參話頭]를,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때는 한 번 또 챙겨야 하는 거여. 챙겨가지고 또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면 그때는 그 독로한 의단을 터억 관(觀)해 나가는 거여.


'어떤 것이 무기(無記)냐?' '어떤 것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들려져 갖고 있느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관찰을 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한 소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인천(人天)의 선업(善業)에 걸리지 아니하고> <사견(邪見)에 맥히지 아니하고> <삼계(三界)의 회오리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해도 성성적적하게 의단이 독로한 채로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고조사(古祖師)가 한결같이 보증(保證)을 하시고 증명(證明)을 하신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들어갈 수 있도록 간곡(懇曲)하게 설법을 해 주시는 선지식, 또 그러한 선지식이 설해주신 법문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으면서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에 말씀하시기를,

'내 법(法)은 염무념념(念無念念)이요, 생각하되 생각 없이 생각하고, 행무행행(行無行行)하며, 행하되 행하는 바가 없이 행하고, 언무언언(言無言言)하며, 말을 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수무수수(修無修修)하야, 닦되 닦음이 없이 닦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바로 나의 정법(正法)이다' 그 말씀입니다.


이 무념(無念)의 념(念), 무행(無行)의 행(行), 무언(無言)의 언(言), 무수(無修)의 수(修)의 이 뜻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수행하는 요지(要旨)가 거기에 있어.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이 수행법을 아지를 못한 사람은, 미(迷)한 사람은 저 멀다 그말이여.[會者近爾 迷者遠乎]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닦아가는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여, 말길이 끊어졌으며, 비물소구(非物所拘)여, 이것을 가로막을 아무 물건도 거기는 없는 것이며, 그런데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이것이 무념(無念)이요, 이것이 무행(無行)이요, 이것이 무언(無言)이요, 이것이 무수(無修)요, 이것이 무증(無證)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말이여.

실지수유(失之須臾)여. 수유(須臾)라고 하는 것은 잠깐, 번갯불 번쩍하는 그 찰나간(刹那間)을 ‘수유(須臾)’라 그러는데, 수유 동안에 놓쳐버리는 것이여.


근게 도저히 이 도리(道理)는 여기에 나아가려면은 활구참선(活句參禪)보다 더 요긴(要緊)한 방법은 없다 그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아가야 거기에는 병폐(病弊)가 붙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이 거기에는 붙지를 못하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요리조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해서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점점 도(道)에는 멀어져 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 보았자 그것은 사견(邪見)이요,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佛法)을 망해 먹을 외도(外道)가 되는 것이다.


일생 동안을 알 수가 없고, 아무것도 얻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고, 느낀 바도 없어도 그 상관이 없어.

알 수 없는 의단으로 나가면은 결정코 깨달음을 얻고야만 마는 것이고,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지 아니해서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도 원망할 것도 없고, 그것은 별로 나쁜 것이 없어.


아무리 바르게 열심히 해도 인연이 도래하지 아니하면 더디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얼마 안 닦아도 퍼뜩 깨달은 사람은 전생(前生)에 많이 닦아 놓은 사람이고.

전생에 닦아 놓은 것이 없으면은 금생(今生)에 비록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더디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마지막 죽어갈 때도 깨닫지 못하고 의단이 독로한 채 터억 숨을 거둘 수 있다면은 무엇이 원통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빨리 깨달라 가지고 '아무개가 견성(見性)했다', '내가 빨리 조실(祖室)도 한바탕 해야겠다', '천하(天下)를 향해서 큰소리도 한번 쳐봐야겠다'

쯧! 도(道)가 무엇인 줄 모를 때에는 혹 그런 생각도 할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먹을 것도 안 먹고, 하고 싶은 것도 안 하고 청춘을 버리고 참 도(道)를 닦게 될 수도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해도 그것이 오히려 좋고, 누가 나를 무시를 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일생을 바보처럼 산다 해도 그 속에 한량없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이 있는 법이지, 누가 알아주고 그런다고 해서 그게 괴롭기만 하지 그 별로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과거에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께서 말씀하신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든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선교석(禪敎釋)」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바보가 되아 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고, 오직 배고플 때 밥이나 먹고 화장실이나 갈 줄이나 알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똥멍청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고.

만공(滿空) 스님께서도 "그러한 바보가 되어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일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니라"고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도반들께서도 그러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신다면은 결정코 남에게 속지 않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 진정한 수행자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많은 수행자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21분2초~39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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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진로형탈, 진로(塵勞)라는 것은 생사의, 생사진로(生死塵勞)여. 생사진로를 멀리 해탈(解脫)하는 일은 이것 보통일이 아니다 그말이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콰악 승두(繩頭)를 잡어서, ‘마음의 머리’, ‘화두의 머리’를 잡어가지고 한바탕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하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매화꽃은 눈 속에서 눈이 펄펄 휘날릴 때에 매화꽃이 피는데, 삼동(三冬)에 기후가 되게 강추위를 해야, 헌 뒤 끝에 매화가 피어야 그 향취(香臭)가 진동하는 법이여.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겨울이 춥지를 않고 뜨뜻한 속에서 매화꽃이 피면 향취가 없다.


그와 같이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바보 천치가 되어서 오직 하나만을 향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열심히 정진을 해서 그래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얻어져야 대오(大悟)를 할 수가 있다는 황벽(黃檗) 스님의 우리의 후학자(後學者)들에게 위해서 남겨주신 게송(偈頌)입니다.



이것은 우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께 말씀드리는 말씀이고, 오늘 백중날을 기해서 선망부모와 비명에 간 원근친척 형제자매의 그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서 모이신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에게 한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에 칠칠일, 천도재(薦度齋)도 지내시고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지내시고 백일이나 또 이 소상(小祥) · 대상(大祥)의 천도재도 여러 번 모다 지내시고 해서 그러한 정성(精誠)으로 이미 다 좋은 곳에 가서 태어나신 영가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인연이 아직 도래하지 못해서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한 그런 영가를 위해서는 이런 칠월 백중날 이런 우란분재(盂蘭盆齋)에—우란분(盂蘭盆)이란 말은 범어(梵語)인데, 한문으로는 '구도현(救倒懸)'이여. '구제할 구(救)'자, '꺼꾸러질 도(倒)'자, '매달릴 현(懸)'자. '꺼꾸로 매달려서 지옥고를 받고 있는 그런 선망부모에 영가를 구제한다'는 뜻에 '구도현'인데, 범어로는 '우란분(ullambana)'이라 그러는 거여.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을 맞이해서 여러분이 이렇게 오셨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자리에는 용주사 선방, 또 저 승련사라든지 또 전주 위봉사라든지, 또 대전에 세등선원이라든지 또 회룡사라든지 또 저기 윤필암이라든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다 열심히 공부한 수행자, 무심도인(無心道人)이거나 준(準) 무심도인 후보자거나 그러한 수행자(修行者)들이 이 자리에는 많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회(法會)가 끝나면은 그런 분들에게 여러분이 내신 정성스러운 동참금, 모다 가지고 오신 모든 맛있는 과일들, 그런 것들, 그 정성 들여 온 공양구(供養具)가 그러한 스님네께 바쳐질 것입니다.


그런 스님네께 공양한 그 공덕으로 여러분이 그렇게 마음속에 묻었던, 마음속에 떠나지 못한 그러한 영가들이 좋은 곳으로 다 해탈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동안에 마음속에 묻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그런 영가들을 오늘을 기해서 깨끗이 잊어버리시고 밝고 명랑한 마음으로, 그 대신 철저히 정법(正法)을 믿고 여러분들은 열심히 참선(參禪)을 하셔야 합니다. 참선을 해야 아귀도나 지옥고나 축생도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떨어진 뒤에, 여러분의 자손들이—또 우란분재(盂蘭盆齋)에 해주면 그때 가도 늦지 않으리라—그런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이 나중에도 또 이 불법(佛法)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알 수가 없고, 개종(改宗)을 할는지 종교를 안 믿게 될는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거든요.

자기가 자기 마음도 믿지를 못하는데, 똥 누러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고, 아침에 먹은 마음 막 금방 일어서면서 마음이 변하는 건데, 어떻게 자식이 아무리 착한들 자식을 꼭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살아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해 놔야 금생에 확철대오를 하면 그건 말할 것도 없고, 확철대오 하는 길로 가는 길을 알고 열심히 가기만 해도 그 어디냐 그말이여.

정법을 믿고 화두(話頭)를 타고 안거증(安居證)을 탁 타놓으면 도솔천내원궁에 가는 특별 뭐, 그 차표라고 하나, 비행기표라고 하나, 티케트(ticket)를 타놓은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러니까 첫째는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그것을 실천을 해야 하고, 실천을 하되 실다웁게 실천을 해 나가면 그거이 어디로 가냐 그말이여. 공든 탑은 절대로 무너지는 법이 아니거든.


이 법문이 끝나면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고 축원(祝願)을 하고 그다음에는 이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진—위패는 오만육천 번의 위패가 모셔져가 있고, 그 위패 가운데 모셔진 영가 수는 팔만육천 위(位)의 법보영가(法寶靈駕)가 이 법당(法堂)에 모셔져 있습니다. 나날이 그 위패의 수가 불어나서 머지않아서 이 법당 안에 가뜩차게 되아서 법당을 새로 짓던지 무슨 수를 내야겄는데.


이것은 그 여기 법보단(法寶壇)에 영가를 모셔 놓으면 이렇게 법회(法會) 때마다 영가도 우리와 같이 법문(法門)을 듣고—다 몸, 육체는 없지마는 그 영가의 그 영식(靈識)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해서 우리 육체를 가진 사람보다도 법문을 더 잘 들으십니다.

그래서 생존시에 얽혔던 원한 관계도 다 풀어지고, 못다 푼 한도 다 풀고, 그래가지고 영가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터억 정진을 하다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돌아오면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환생(還生)을 할 거고 또 인간에 인연이 있으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여러분의 좋은 아들로, 손자 손녀로, 며느리로 이렇게 또 만나게 됩니다.


만나봤자 숙명통(宿命通)이 열리지 아니하면 한솥밥을 같이 평생을 먹어도 모릅니다.

모르지만 아들딸 · 손자 · 손녀 · 며느리 · 손자 · 손부가 우연히 만나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우연히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인연(因緣)을 지어가지고 그 인연에 의해서 만나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좋은 인연을 맺어야 좋은 가족으로 또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으로 오는 사람이 꼭 남의 식구만 오는 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자기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또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집에 돌아오는 확률이 제일 많습니다.


왜 많으냐?

제일 인연을 많이 지어놨거든.


그러니 부모님께 또는 조부모님께 효도로써 잘 봉양(奉養)을 하면, 그 집에 아들딸 · 손자 · 손녀 · 손부로 요렇게 오되 효자 · 효녀 · 효부로 들어온다 그말이고.


부모에게 불효(不孝)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불효를 하고 그러면, '이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가르켰는데, 내가 못 먹고 못 입으면서 너를 내가 어떻게 가르켰는데, 니가 나한테 불효를 해? 장가가더니 기집한테 빠져서 나한테 불효를 해?'


부모가 성현(聖賢)이 아니거든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성현이 아닙니다.

잘해 드리면은 좋아하시고, 잘 못해 드리면은 '이놈! 두고보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중생(衆生)이기 때문에.

그러한 원한을 품고 돌아가셨을 때에 그 집에 아들딸 · 손자 · 손부(孫婦)로 오면은 그 사람이 효자(孝子) 효부(孝婦)가 되겠냐 이 말씀이여.


그러니 자기의 부모는 자기를 그렇게 키웠는데, 자기는 부모한테 효도를 못하거든. 그러면서 그 자식이 자기한테 효도를 하기를 바래겠습니까?

못 바랩니다. 그놈은 더 불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이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이야 정법(正法)을 믿는 여러분인데 이런 말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 효자이시고 효부이시고 다 그러셔서 이런 말이 군더더기 말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주마가편(走馬加鞭)으로,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식으로 내가 말씀을 드리는 건데, 여러분은 정말 자식들을 사랑하듯이 부모님께도 효도를 해야 합니다. 그동안에 효도를 하셨어도 더욱 잘하셔야 합니다.


효도하는 방법은 맛있는 것 많이 해 드리고 좋은 옷 해 드린 것, 그것은 껍데기 효도고,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마는 마음으로부터서 우러나와서 해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해 드리냐 하면은 '시부모다' 생각하지 말고, '친어머니, 친아버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좀 말도 좀 임의(任意)롭게 해도 좋고, 그냥 형편이 안되면 쪼끔 잘 못해 드려도 흉허물이 없습니다.


'시어머니다, 시아버지다' 생각하니까, 형식적(形式的)으로 하니까 하기가 매우 힘들고,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시부모는 먼저 알고 있습니다. 흥! 지가 형식적으로 한 것 빤히 알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받드는 것 잘 압니다.

미처 형편이 안 닿고, 미처 시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형편이 안되어서 못해 드려도 더 알고 있어.

친정 친어머니 친아버지는 더 잘 아시는 법이예요. "염려마라!" 피차 지내기가 대단히 편합니다.


여러분이 아들, 딸을 시집보낼 때 "시어머니한테 잘해라. 잘해라"하지 말고, "친정어머니 아버지한테 하듯 해라" 그 말만 하면 더이상 자세한 설명이 필요가 없어.

나는 어쩌다 한 번씩 옛날에는 주례(主禮)를 섰는데, 지금은 해달라고 해도 내가 그거 하다보면 한이 없으니까 미안하지마는 나는 사절(謝絶)을 하고 통 안 하는데, 이 자리에 아들딸 여의지 않은 분들에게 주례사(主禮辭) 겸해서 하는데, 친정어머니한테 하듯, 친정아버지한테 하듯 하면 그 복잡한 주례사가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가운데 연세가 많으신 분도 있고, 연세가 아직 젊으신 분도 있고 어린 사람도 있고 그러는데, 정말 부모한테는 잘해야 하고, 그 나의 부모한테 잘하듯이 다른 연세 많은 분한테도 그러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집안도 복(福)을 받게 되고, 그 사회도 살기 좋은 사회가 되고, 그러한 사람이 기업을 운영을 해야 그 기업체도 잘되어가고, 그러한 분이 정치를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해야 정치도 잘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인간세상이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법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내가 나를 찾는 사람은 자연히 십선(十善)을 행하게 되고, 십선을 하나로 뭉치면 그것이 바로 '이뭣고?'요, 그것이 바로 부모에게는 효도가 되고 나라에게 대면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한 말씀은 육체를 가진 여러 도반들뿐만이 아니라 이 법보전(法寶殿)에 팔만육천의 법보영가(法寶靈駕)를 비롯한 우주법계에 가득찬 우리의 인연 있는, 인연 없는 모든 영가(靈駕)도 다 이 말씀을 들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사 과거에 인연을 잘못 지어서 아직 좋은 곳에 가시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과 산승(山僧)의 이 간곡한 말씀을 듣고서 원한을 다 풀어버리시고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시게 되기를 바래고,

기왕이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우리 법보가족이 되기를 바래고, 인간이 아주 질렸으면 저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가셔서 거기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시기를 바랩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정축년 하안거 해제와 또 우란분재와 백일기도 회향에 즈음해서 산승이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리는 것을 맺고자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곡히 해 드린 말씀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후세에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39분56초~60분3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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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제30권 '警世二十二首' 게송 참고.

*심원의마(心猿意馬) ; 마음[心]이라는 원숭이[猿]와 생각[意]이라는 말[馬]. 의마심원(意馬心猿).

마음과 생각이 제멋대로 대상(對象)을 향해 항상 동요하고 고요하지 못한 모양이 질주하여 달리는 말[馬]과 쉼 없이 움직이고 조잘대는 원숭이[猿]와 흡사하기 때문에 생긴 비유이다. 일정하지 않게 예측불허로 변화하는 생각을 나타낸다.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〇전오식(前五識) ; 팔식(八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말한다.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〇의식(意識) ; 팔식(八識) 가운데 제6 의식을 말한다. 육식(六識)의 하나.

①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 인식하는 마음 작용. ②알고 사고하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의식은 과거, 미래에의 대상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즉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상할 수가 있다.

6식설(六識說)에서는 의식(意識)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제6 의식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존재인데, 그 단계를 셋으로 나누면 첫째 제6 의식, 둘째가 제7 말나식, 셋째가 제8 아뢰야식이다.


〇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로, 의(意)라고 번역.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意)라 하지 않고 말나(末那)라고 한다.

8식설(八識說)에서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으로, 항상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함께 일어난다.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〇아뢰야식(阿賴耶識) ; 8식설(八識說)에서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진(眞)과 망(妄)이 함께 있다고 하여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도 하며, 본래 깨끗한 것이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고 하여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반연(攀緣 잡을·매달릴·의지할 반/인연 연) ; ①마음이 대상경계에 의지해 움직임(작용을 일으키는 것).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혼란. ②인식함. ③인식 대상. ④얽매임. 집착함. ⑤인연에 끌림.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우란분재(盂蘭盆齋) ; 지옥도와 아귀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베푸는 재(齋).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는 악도(惡途) 중생과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일체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를 구제하고자 삼보(三寶)에 공양하고 재(齋)를 베푼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우란분재가 성행하였다고 전한다.


우란분회(盂蘭盆會) · 우란분절(盂蘭盆節) · 우란법회(盂蘭法會) · 우란재(盂蘭齋)라고도 한다.

우란분재일인 음력 7월 15일은 많은[百]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라 해서 백중(百衆), 많은 음식을 마련하여 공양한다 해서 백종(百種),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이라 해서 백종(百終)으로 부르고, 세시일로는 백중(百中 · 白衆 · 백족白足)이라 한다.

*우란분(盂蘭盆) ; 산스크리트어 ullambana. 우란은 오람바나(烏藍婆拏)라고도 음사(音寫)하고, 도현(倒懸 :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 또는 구도현(救倒懸 :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한다)이라 한역(漢譯)한다.

분(盆)은 그릇(식기)의 뜻으로, 한역하면 구기(救器)라고 하며, 뜻으로 구성해 말하자면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음식을 가득 담아 삼보三寶에 공양 올리는) 그릇[救倒懸器]'이라 한다.


절에서, 음력 7월 15일에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는 의식.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부처님 제자 중에 신통력이 제일인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신통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모두 모이는 하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인 자자일(自恣日)에 삼보(三寶)에 공양하게 하여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악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십대제자(十大弟子) ;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을 이르는 말.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목련경(目連經) ; 목련 존자(目連尊者)가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건진 일을 다룬 경문으로, 음력 칠월 백중날이면 이 경을 읽고 기도한다.

*우란분경(盂蘭盆經) ; 1권.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번역. 목련(目連)존자가 아귀(餓鬼)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세존의 가르침대로 자자일(自恣日)에 여러 부처님와 보살, 그리고 스님에게 갖가지 음식과 과일을 지성으로 공양하여 어머니를 제도하였다는 효성을 설한 경.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十一)』

佛言 飯惡人百 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 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 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 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 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 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 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 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 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7~158 에서.(가로판 p150~151)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실참실수(實參實修)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관념에 그치거나 들어서 아는 지식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실천하는 선수행을 말한다.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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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二十七 無著得道)』 --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第37冊 No.669 四十二章經註 (1卷) 【宋 守遂註 明 了童補註】

佛言 夫爲道者 猶木在水尋流而行 不觸兩岸 不爲人取 不爲鬼神所遮 不爲洄流所住 亦不腐敗 吾保此木決定入海

(註) [不觸生死涅槃兩岸 不爲人天有漏善業所取 不爲邪見鬼神所遮 不爲三界洄流所住 亦不腐敗於二乘滅定 決入薩婆若海]


學道之人 不爲情欲所惑 不爲衆邪所嬈 精進無爲 吾保此人 必得道矣

(註) [情欲不能惑 衆邪不能嬈 正進無爲 道遠乎哉]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5분 59초)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5분 57초)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十八)』

佛言 吾法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 시절(時節) : 어떤 시기나 때. 도래(到來)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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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 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無常)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 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 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소상(小祥 작을 소/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大祥 큰 대/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무심도인(無心道人) ; ①모든 번뇌망상이 사라져 더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 없고 얻는 것도 없는 수행자.

②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무심적적(無心寂寂)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사량계교심을 다 놓아버리고 언제나 천진무구한 본연자성(本然自性)으로 살아가는 사람.

*공양구(供養具) ;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바치는 음식물·향·꽃 등의 물건, 또는 그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영식(靈識) ; 영묘한(靈妙- 신령하고 미묘한) 의식. 제8식. 영혼.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임의롭다(任意롭다) ; ①얽매이는 것이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②서로 친하여 거북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구애됨이 없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십선(十善) ; 십악(十惡)을 행하지 않는 일.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생각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〇몸(身)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〇말(口)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〇뜻(생각 意)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법문 내용]


(게송)사시순환난부한~ / 심원의마(心猿意馬) /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 목련존자의 효도 / 목련존자가 수행자들에게 올린 공양 공덕으로 아귀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제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1장, 무심도인(無心道人).

『사십이장경』 제27장 / 사견(邪見) 공견(空見)에 빠지지 말라 / 화두가 성성적적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면 그때는 그 의단을 관(觀)해 나가는 거여. 의심관(疑心觀) / 『사십이장경』 제18장.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여러분은 정말 자식들을 사랑하듯이 부모님께도 효도를 해야 합니다. 정말 부모한테는 잘해야 하고, 그 나의 부모한테 잘하듯이 다른 연세 많은 분한테도 그러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눈과 코와 귀와 혀와 몸뚱이를 통해서 우리의 팔식(八識)이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 우리의 마음의 원숭이가 육근(六根)을 통해서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이 바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누가 알거나 그말이여.


어떻게 하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느냐?


본참공안(本參公案)—'이뭣고?' 화두가 되었건, '판치생모(版齒生毛)' 화두가 되었건, '무자(無字)' 화두가 되었건,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 받은 그 본참공안을 하나를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은산철벽(銀山鐵壁)에 탁! 부딪힌 것처럼, 나아갈라야 나아갈 데도 없고 물러설라야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꽉 맥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본참공안에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나감으로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마침내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는 것이고, 확철대오해서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셔가지고 일생,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說)하신 요점이, 목적(目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과법을 믿되, 믿기는 철저히 믿되, 거기에 '어떻게 하면 인과(因果) 속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여.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정법에 의해서 수행(修行)을 해야 우리가 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얽히지 아니하고 해탈(解脫)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한 소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인천(人天)의 선업(善業)에 걸리지 아니하고> <사견(邪見)에 맥히지 아니하고> <삼계(三界)의 회오리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해도 성성적적하게 의단이 독로한 채로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고조사(古祖師)가 한결같이 보증(保證)을 하시고 증명(證明)을 하신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들어갈 수 있도록 간곡(懇曲)하게 설법을 해 주시는 선지식의 법문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으면서 정진을 해 간다면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아가야 거기에는 병폐(病弊)가 붙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이 거기에는 붙지를 못하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요리조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해서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점점 도(道)에는 멀어져 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 보았자 그것은 사견(邪見)이요,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佛法)을 망해 먹을 외도(外道)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살아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해 놔야 금생에 확철대오를 하면 그건 말할 것도 없고, 확철대오 하는 길로 가는 길을 알고 열심히 가기만 해도 그 어디냐 그말이여.

정법을 믿고 화두(話頭)를 타고 안거증(安居證)을 탁 타놓으면 도솔천내원궁에 가는 특별 뭐, 그 차표라고 하나, 비행기표라고 하나, 티케트(ticket)를 타놓은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러니까 첫째는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그것을 실천을 해야 하고, 실천을 하되 실다웁게 실천을 해 나가면 그거이 어디로 가냐 그말이여. 공든 탑은 절대로 무너지는 법이 아니거든.


이 자리에 모이신 가운데 연세가 많으신 분도 있고, 연세가 아직 젊으신 분도 있고 어린 사람도 있고 그러는데, 정말 부모한테는 잘해야 하고, 그 나의 부모한테 잘하듯이 다른 연세 많은 분한테도 그러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집안도 복(福)을 받게 되고, 그 사회도 살기 좋은 사회가 되고, 그러한 사람이 기업을 운영을 해야 그 기업체도 잘되어가고, 그러한 분이 정치를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해야 정치도 잘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인간세상이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법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내가 나를 찾는 사람은 자연히 십선(十善)을 행하게 되고, 십선을 하나로 뭉치면 그것이 바로 '이뭣고?'요, 그것이 바로 부모에게는 효도가 되고 나라에게 대면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26~550)2020. 3. 16. 12:09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533)—1994년(갑술년) 하안거결제 법어(94.05.25) (39분)

(1) 약 21분. (2) 약 18분.

(1)------------------


만법유래공리화(萬法由來空裏花)헌디  기의도산해중사(豈宜徒算海中沙)리오

나무~아미타불~

단종철벽은산거(但從鐵壁銀山去)호되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법(萬法)이 원래로 허공(虛空) 속에 꽃이다.

온 법계(法界)에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과 산천초목과 일체(一切) 만법(萬法)이 다 허공 속에 핀 꽃이여.


허공 속에 무슨 꽃이 있는가?

눈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볼 때에는 허공은 맑아서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난 사람의 눈에는 허공 속에 온갖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여.

실지는 없는 것인데, 눈병 난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허공 속의 꽃이다.


기의도산해중사(豈宜徒算海中沙)리오. 어찌 쓸데없이 모래, 바다 가운데 모래를 세고 있느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몸뚱이 자체도 지 · 수 · 화 · 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고, 이 가죽 주머니 속에는 피와 똥과 오줌과 고름이 가득차 있는 더럽고도 추하고, 허망하고도 보잘 것 없는 그런 몸뚱이로 태어났으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눈으로 보고 · 귀로 듣고 · 코로 냄새 맡고 · 혀로 맛보고 · 몸으로 느끼고 · 생각으로 온갖 것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는.

그런 것들이 다 바다 가운데 있는 모래를 얼마나 되는가 세어 보고, 모래 속에 있는 이쁘게 생긴 조개껍질 같은 것을 주워가지고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서로 그것을 취(取)할려고 싸우고, 일평생 동안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가지고 오욕락(五慾樂)에 빠져서 그것을 자기가 취(取)할려고 싸우는 것들이 허공 속에 있는 꽃인 줄 모르고, 바다 가운데에 있는 모래를 세고 있는 것에다가 비유를 하신 것이여.


확실히 그것이 영원성(永遠性)이 없는 것이고 허망(虛妄)한 것인 줄 알고, 쓸데없는 것인 줄 확실히 안다면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을, 그놈을 찾는 일밖에는 인생(人生)으로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단종철벽은산거(但從鐵壁銀山去)여. 은산철벽(銀山鐵壁),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하되 다맛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앞이 콱 맥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이 은산철벽처럼 그렇게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 지어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이거여.


'이 공부를 해서 내가 정말 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을 수 없을까?' '정말 내가 깨달을 만한 그러한 근기(根機)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도 따질 것이 없어.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여.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묻지를 말아라.


이 몸뚱이는 비록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조끔도 다름이 없는 거여. 진여불성(眞如佛性)은.

그래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나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해 나갈 뿐이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오늘 갑술년(甲戌年) 4월 15일 결제법문(結制法門)을 우리는 다 같이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더이상 여러 도반(道伴)들과 형제자매를 위해서 더이상 결제에 법문을 해 드릴 것은 없지만, 기왕 이렇게 여러 선원에서 도반들이 많이 왔고, 또 용화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공부하시는 스님네와 보살님 그리고 시민선원의 거사님네들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으니 불가불(不可不) 이 갑술년 여름안거 구순(九旬), 90일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精進)을 하기 위해서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살자(菩薩子) 보살자(菩薩子)여.

우리 진각국사는 후래(後來)의 우리 모든 불자(佛子)들을 보살자(菩薩子), '자(子)' 자는 어조사로도 볼 수가 있고, 우리가 '새끼 보살'이다 그런 뜻으로도 해석을 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보살자(菩薩子) 보살자(菩薩子)여.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다. 항상 스스로 자기의 머리를 이렇게 만지면서 깊이,

마두인득심사량(摩頭因得審思量)이라, 머리를 만지면서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오. 출가(出家)한—부모를 여의고, 형제자매와 가정을 여의고, 청춘(靑春)을 버리고, 온 세상을 다 버리고 출가한 그 본의(本意)가 무엇이었던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던가?

자기가 자기 머리를 만지면서 항상 그것을 생각하라.


승기상모속기심(僧其相貌俗其心) 가불참천이괴지(可不慚天而愧地)라.

겉모양은 승려(僧侶)의 모양을 하고 그 마음은 속심(俗心)을 가지고 있다면, 하늘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땅에 부끄럽지 않느냐.


추행광언임여위(麤行狂言任汝爲) 확탕노탄하회피(鑊湯爐炭何廻避)리오.

행동은 머트럽고 말은 뻘소리, 미친 소리를 니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펄펄 구리쇠물이 끓고 쇠물이 펄펄 끓는 그런 지옥을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느냐.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우리 후배들, 모든 불자(佛子)들에게...

이것은 자기 자신의 일생동안 따악 자기 거처하는 방 앞에다가 써 붙여 놓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채찍하는 좌우명이었습니다마는, 오늘날 우리는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다 앞에다 써 붙여 놓고 날마다 이 좌우명(右銘)을 읽으면서 우리의 머리를 만져 볼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맛 능히 떨어진 옷을 입고 거칠은 음식을 먹으면서, 출가본의(出家本意), 자기의 본래의 그 참된 마음을 잘 지켜가면서, 겉으로는 어리석어서 바보가 되아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인간의 무엇이 옳고 그른 시비(是非)와, 어떻게 하면 유익(有益)하고 어떻게 하면 해(害)롭고, 흥망성쇠(興亡盛衰) 시비곡절(是非曲折)의 그런 것도 전혀 판단할 줄도 모르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거짓 바보가 되아가지고 그렇게 살면서 오직 속으로는 '이뭣고?' 하나만을 철저히 해 나가라 이거거든.


이렇게 살아가야 외부로부터의 모든 경계(境界)에 끄달리지 않게 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 공부해 나가는데 방해를 받지를 안해. 가장 공부에 열중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리고서도 공부에는 가장 효과적이다 이거거든.

이렇게 살아가야 바로 이것이 대정진인(大精進人)이다 그거여. 크게 정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거거든.


잘난 체하고 똑똑헌 체하고 무슨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선방(禪房)에 걸망을 지고 댕겨도 자기 공부해 나가는데 많은 시간을 뺏기고, 정신을 뺏기고 공부하는 데는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모든 것을 잘한 척할라면 세속(世俗)에서 살지, 뭣하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아가지고—오직 일대사(一大事) 그 하나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다 바치려고 들어온 것이 바로 승단(僧團)이요 그 가운데에서도 선방(禪房)이다 그말이여.

부모형제를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모든 인생을 다 버리고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거거든.


오늘날처럼 우리가, 우리 출가인(出家人)이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정말 우리의 좌우명으로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형제자매 모든 도반들은, '갑술년(甲戌年) 하안거(夏安居)는 다시는 두 번 다시 우리에게 돌아와 주질 않는 것입니다'


형식적(形式的)으로 결제(結制)하고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지내다보면 또 여름 석 달이 지내갈 것입니다.

그러나 갑술년 여름철은 다시는 돌아오는 법이 아닙니다. 영원(永遠)을 두고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년에 다시 여름은 돌아오지마는 내년 여름은 갑술년의 여름이 아니고 을해년(乙亥年)의 여름이여.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헌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暇)헌디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이여.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四時)가 돌고 돌아서 더웠다 추워지고 추웠다가 또 더워지고, 이렇게 세월(歲月)이 돌아가는데.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여. 잔나비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는구나.


우리의 심 · 의 · 식(心意識), 마음 · 뜻 · 식.

제8 아뢰야식(第八 阿賴耶識)은 '마음'이고, 제칠 말라식(第七 末那識)은 '뜻'이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은 '의식(意識)'인데, 우리의 의식을 갖다가 심의식(心意識)을 원숭이에다가 비교해, 잔나비에다 비교했는데.


그 원숭이란 놈이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눈[眼]으로 보고 뭐 좋은 거 있으면 그것 그리 쫓아가고, 귀[耳]로 뭔 소리가 나면 그리 쫓아가고, 코[鼻]로 뭔 좋은 냄새가 나면 그리 쫓아가고, 혀[舌]로 무슨 맛있는 것을 만나면 그리 쫓아가고, 몸뚱이[身]로 부드럽고 좋고 시원하고 그러면 그리 쫓아가고, 생각[意]으로 이 좋은 것을 쫓아가고 이래가지고,

원숭이가 육화촌(六華村)에 좋은 맛있는 음식을 탐내서 그걸 쫓아다니고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의식(意識)도 항상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한다 그말이여.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마음대로 구해봤자 잘 구해지기도 어렵지마는 설사 구해졌다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그걸 구하다가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죄업(罪業)을 지어서 끝없는 육도윤회(六道輪廻)가 거듭될 뿐이다 그 말이거든.


끝없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그걸 추구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짐으로 해서—그 한 생각 한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은 죽음의 문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것이더라 이거거든.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바로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바깥 경계로 나가면 아무, 그 생각이 옳건 그르건, 좋건 나쁘건 그것은 '죽음의 문으로 가는 길'이더라 이거거든.(처음~21분24초)





(2)------------------


이 지구가, 지구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통해서 결국은 언젠가는 이 세계도 무너져서 없어질 때가 돌아오는 것이여.

이 몸뚱이가 생로병사를 통해서 결국은 죽어서 없어지듯이 이 세계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어.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현재현겁(現在賢劫),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이 있는데, 그 장엄겁(莊嚴劫)에도 성주괴공이 있고, 현겁(賢劫)에도 성주괴공이 있고, 미래 성숙겁(星宿劫)에도 성주괴공이 있는데,


이 겁(劫)이라 하는 것은 소겁(小劫)이 있고 중겁(中劫)이 있고 대겁(大劫)이 있는데, 사람의 목숨이 제일 많이 살 때가 팔만사천 세(歲)고, 제일 수명이 짧을 때가, 인수(人壽) 정명(定命)이 짧을 때가 십 세인데,


팔만사천 세에서 백년 지나면은 한 살 씩이 줄어져. 또 백년이 지내면 한 살이 줄어지고 또 백년이 지내면 한 살이 줄어지고 해가지고 열 살 때까지 내려와. 그것을 '감겁(減劫)'이라 그러고.

열 살까지 내려오면 그다음의 백년이 지내면은 사람 목숨이 한 살씩이 더 불어나. 또 백년이 지내면 열두 살, 또 백년이 지내면 열세 살, 해서 십 세로부터 팔만사천 세까지 올라가는 거여. 그것을 '증겁(增劫)'이라 그러는데.


한 번 감해져가지고 십 세까지 갔다가 또 다시 백년만에 한 살씩 불어나서 팔만사천 세까지 가는 것을 증겁(增劫).

감겁(減劫), 증겁(增劫) 합해서 이것을 '일소겁(一小劫)'이라 하는데, 일소겁(一小劫)이 스무 번을 되풀이를 하면 이것을 '(일)중겁(一中劫)’이라 하는 거여.


그러면 성주괴공(成住壞空)에 있어서 성(成), 이 세계가 이루어지는데 20소겁(小劫)이 걸리게 되는 거고.

또 20소겁이 되면은 주겁(住劫)이 되는 거여. 머무르는, 세계가 이루어져가지고 그러한 상태로 이렇게 머물렀다가, 그다음 20소겁 동안에 차츰차츰 무너지고[壞], 그다음 20겁은 완전히 텅 빈 상태[空]에서 20겁이 지내는 거여.


그래서 성주괴공(成住壞空), 20겁이 네 번이 되면은 이것이 80소겁인데, 이것을 '일대겁(一大劫)'이라 그러는 건데.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동안에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했는데 주겁 동안에, 성주괴공에 주겁(住劫) 동안에 출세를 하셨어.

그리고 현재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겁천불(賢劫千佛)에—주겁(住劫) 동안인데, 현겁천불에 네 번째 부처님으로 태어나신 거여.

이다음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彌勒佛)이 하강(下降)을 하시는데, 그리고 그다음에 차츰차츰 해서 마지막 부처님이 누지(樓至) 부처님이 출현을 하신다 그말이여.


이렇게 해서 현겁천불(賢劫千佛)이 출현하신 다음에는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 부처님이 또 천불(千佛)이 출세하셔.

미래성숙겁 천불도 성주괴공의 이 사기(四期)에 걸쳐서 해 가지고 이렇게 출현을 하시는데.


우리는 다행히 이 현재현겁(現在賢劫) 제4 부처님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을 하신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수(人壽) 백세(百歲) 정명(定命) 때 출현을 하셨는데, 지금 2천5백34년이 되아, 이천육백년 대 지금이 되었으니까 지금은 인수(人壽) 정명(定命)이 약 74세 정도야.


지금 사람의 평균수명이 70세 남짓 되니까 얼추 맞아 들어가는데, 앞으로 태어난 사람은 차츰차츰 사람 목숨이 짧아진다고 이 추측이 되는데.

과학이 발달함으로써 요새 사람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전쟁이 나고 그래가지고 원자탄이니 수소탄이니 화학무기가 발달하면 사람이 어떻게 죽어갈는지 몰라.

그래서 평균수명이 꼭 앞으로도 계속해서 줄어(길어)진다고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꼭 육체(肉體)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정말 사람의 생사(生死) 문제는 육체에다 기준을 둘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이,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새로 태어나고 그 생각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거쳐서 꺼지면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핍진(逼眞)한 생각이다 그말이여.


이 육체도 역시 뱃속에서 태어나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수백억만 번의 변화를 거쳐서 이렇게 오고 있으니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여.

다 '아무개가 몇 해에 몇 년도에 태어나가지고 몇 년도에 죽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닌 거여. 완전히 딴 사람이 되아가지고 있는 거여.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여.


예를 들어서 촛불을 하나 켰을 때, 그 촛불이 처음에 탁 불을 댕길 때 그때의 초가, 그때의 그 불이 한 시간 쯤 있다가 그 타고 있는 그 '불'과 한 시간 전의 '불'이 같은 불이 아니여. 초도 그 초가 아닌 거여.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몸뚱이도 변(變)해 가고 우리의 생각도 변해 가고 있어서,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항상 그때의 그것이 아니여. 태양도 계속 불이 타고 있는 불덩어리인데, 어제의 불덩어리가 오늘의 불덩어리가 아닌 거여.


그래서 확실히 그렇게 '변(變)해 가고 있고 고대로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다면, 우리도 마음 놓고 '아직도 내가 젊으니까 앞으로 몇 해는 더 살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공부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각각 자기의 생각을 말해보라"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우리가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 공부 못하겠다"


"한 식경(食頃)에도 죽음이, 밥 먹을 동안에도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도 공부 못하겠다"


"한 생각(호흡)에도 죽음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이러한 말씀이 아마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우리는 '그 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生死解脫)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어쨌든지 그 한 생각을 알뜰하게 야무지게 단속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거니와 갑술년, 2538년의 갑술년은 다시 오지 않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명심(銘心)을 하시고,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알뜰하게 이 한 여름을 잘 정진(精進)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보살선방(菩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신 보살님들이나 시민선방(市民禪房)에 방부를 들이는 거사님들이나 또 가정에서 정진을 하시는 백일기도에 동참(同參)하신 분, 전국 여러 선방에서 정진하시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들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흉중하애부하증(胸中何愛復何憎)이리오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제차현성공안외(除此現成公案外)에  차무불법계전등(且無佛法繼傳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흉중(胸中)에 하애부하증(何愛復何憎)이리오. 마음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할까 보냐.

미워하고 이뻐하고 하는 것도 잠깐 동안이고, 잠깐 동안에 꿈에 일어난 일들인데 무엇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집착하고, 무엇을 그렇게 미워하는데 집착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다 놓아 버려. 다 석방(釋放)해 버려.


미웁다고 그놈을 웬수를 맺고 꼭꼭 묶어매 놓고 그놈을 가둬 놓고, 마음속에다 가둬 놓고 산들 무엇이 그렇게 좋을 것이 있어. 마음속에서 다 놔 보네.

이쁘다고 그놈을 붙잡고 늘어져 본들 그것이 무엇이 거기서 나오며, 몇 조금 갈 것이냐 그말이여.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여.

'나는 바보다. 아무것도 제대로 남 앞에 내놓을 것이 없다'고 하는 바보라고 생각하고, 똑똑한 체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바보가 되어서 산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자기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어서 좋으냐.


어리석은 사람은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그러니 거기에서 남의 지탄(指彈)을 받고 남에게 오히려 미움을 받고 경계(警戒)를 당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탁! 까놓고 바보로 해버리면 그날부터 다리를 뻗고 자. 온전히 자기 시간을 가지고 공부를 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제차현성공안외(除此現成公案外)에,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 자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또 들고 이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이것 외(外)에는,

차무불법계전등(且無佛法繼傳燈)이여.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계승(繼承)해 나가는 이것밖에는 불법(佛法)이 없다 그 말이거든.



개혁운동(改革運動)도 좋고, 다 이 총무원에서 잘못된 종법(宗法)을 고치고 어쨌든지 새로 개혁을 해가지고 잘하자고, 잘 해 나가자고 하는 그런 원력보살(願力菩薩)도 좋지. 또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道伴)들은 바보가 되아가지고, '철저한 바보'가 되아가지고 오직 자기의 본참공안에 몰두(沒頭)해서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나간다면,

서울에서 개혁운동하는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과 바보가 되아가지고 선방(禪房)에서 '이뭣고?'하는 그러한 나한(羅漢)들과 서로 하나가 장단을 치면은 그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도 좋지 않느냐 이거여.


우리까지 나서서 거가서 떠들기보다는 바보로서, 탁! 바보로서 '이뭣고?'를 해야만, 서울에서 개혁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나선 보살화현들의 그 애쓴 보람에 보답(報答)하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는가.


나는 바보이기 때문에 바보 같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또 그러한 생각을 여러 도반들에게 말을 하니까,

그 바보의 말도 정말 '나 같은 바보한테는 그게 좋겠다' 이렇게 생각이 드신다면은 올 금년 한 여름을 그렇게 한번 살아보시고, 그것이 좋으면 또 다음 겨울철도 그렇게 살아가서 바보 속에, 개천에서 용 나듯이 '바보 속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그러한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을 사람이 나오리라고 나는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21분29초~39분21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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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법유래공리화(萬法由來空裏花)~'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제5권. 「선게(禪偈)」 '贈圓沙彌求頌' 게송 참고.

*만법(萬法 일만 만/법 법) ; 모든 존재 · 사상(事象 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현상). 여기에서의 법은 사상 · 사물의 뜻이다. 일체법(一切法) · 제법(諸法)이라고도 한다.

*'허공(虛空) 속에 꽃' ; 공리화(空裏花). 공화(空花).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88~89. (가로판 p92~94)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無生]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註解) 性本無生故로  無生涅也요  空本無花故로  無起滅也라  見生死者는  如見空花起也요  見涅槃者는  如見空花滅也니라  然이나  起本無起요 滅本無滅이라  於此二見에  不用窮詰이니  是故로  *思益經云, 諸佛出世가  非爲度衆生이요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라 하시니라.


(주해) 성품에는 본래 남이 없으므로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없고 허공에도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타나도 나타남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서는 더 따질 것이 없다。그러므로 『사익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고 하시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3분 44초)

[참고 ❸]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7~158 에서.(가로판 p150~151)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다맛 능히 떨어진 옷을 입고 거칠은 음식을 먹으면서, 출가본의(出家本意), 자기의 본래의 그 참된 마음을 잘 지켜가면서, 겉으로는 어리석어서 바보가 되아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것처럼' ; 오조 홍인(五祖弘忍) 스님의 『최상승론(最上乘論)』에서.

經云衆生若情誠不內發者 於三世縱値恒沙諸佛無所能爲 經云衆生識心自度 佛不能度衆生 若佛能度衆生者 過去諸佛恒沙無量 何故我等不成佛也


경(經)에 이르되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스러운 마음이 안으로부터 돈발(頓發)하지 아니한 자는 삼세(三世)에 비록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무소득(無所得)이니라. 어찌할 바가 없느니라.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서 자기가 자기를 제도(濟度)해야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항하사 무량의 수없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무슨 연고로 우리들은 아직도 성불(成佛)을 못했을 것이냐.


只是情誠不自內發 是故沈沒苦海 努力努力 勤求本心勿令妄漏 過去不知已過未來亦不及 今身現在有遇得聞妙去 分明相勸決解此語 了知守心是第一道

不肯發至誠心求願成佛受無量自在快樂 乃始轟轟隨俗貪求名利 當來墮大地獄中受種種苦惱 將何所及 奈何奈何 努力努力


다못 이것은 정성이 안으로부터서 돈발하지 못한 연고로 생사고해에 침몰한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해서 부지런히 본심을 깨달라서 잠깐 동안도 한눈을 팔지 말지니라.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했어. 다못 지금 우리가 현재 이 묘법(妙法)을 만났으니 분명히 서로 권고해서 결정코 내가 이제 말한 이 법을 깊이 이해해 가지고 확실하게 자기의 본심을 지킬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제일의 도(道)니라.


지극한 정성스런 마음을 발하지 못해 가지고 막연하게 성불하기를 바라고 자재해탈(自在解脫)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될 일이 아니고, 그럭저럭 속심(俗心)을 버리지를 못하고 명예나 이끗을 탐구해서 그렇게 그럭저럭 지낸다면은 당래(當來)에 대지옥에 떨어져서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但能着破衣飱麤飱 了然守本眞心 佯癡不解語 最省氣力而能有功 是大精進人也 世間迷人不解此理 於無明心中 多涉艱辛廣修相善 望得解脫 乃歸生死苦 了然不失正念而度衆生者 是大力菩薩


다만 능히 해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요연히 근본 참마음을 지키면서 거짓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처럼 하는 것이 가장 힘은 적게 들이면서 공부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대정진인이니라.

세간(世間) 사람은 이러한 이치를 아지를 못하고서 무명심(無明心) 가운데에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널리 상(相)에 나타나는 그러한 선(善)을 닦음으로 해서 해탈도(解脫道)를 바래니, 그러다가 결국은 생사고(生死苦)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느니라.

요연히 바른 생각을 잃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만이 이것이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게송) ‘사시순환난부한~’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卷第三十' '警世二十二首' 게송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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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定命) ; ①날 때부터 정하여진 운명. ②전생의 인연에 의하여 정하여진 목숨. 증겁(增劫)과 감겁(減劫)에 의하여 수명에 차이가 있는데, 나이가 팔만 살부터 100년마다 한 살씩 줄어 열 살 까지 줄었다가[減劫], 다시 100년마다 한 살 씩 늘어 팔만 살까지 이른다[增劫]고 한다.

*핍진하다(逼眞-- 가까이하다 핍/참 진) ; ①실물[眞]과 아주 가깝고[逼] 비슷하다. ②(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게송) ‘흉중하애부하증~’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二十九 ‘山居十首’ 게송 참고.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원력보살(願力菩薩) ; 중생구제의 원력으로 실천행을 하는 보살(수행자).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법문 내용]


(게송)만법유래공리화~ /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右銘) /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던가? / (게송)사시순환난부한~ / 한 생각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 생사(生死) /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게송)흉중하애부하증~.



'이 공부를 해서 내가 정말 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을 수 없을까?' '정말 내가 깨달을 만한 그러한 근기(根機)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도 따질 것이 없어.


이 몸뚱이는 비록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조끔도 다름이 없는 거여. 그래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나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해 나갈 뿐이다.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고 모든 것을 잘한 척할라면 세속(世俗)에서 살지, 뭣하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아가지고—오직 일대사(一大事) 그 하나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다 바치려고 들어온 것이 바로 승단(僧團)이요 그 가운데에서도 선방(禪房)이다—부모형제를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모든 인생을 다 버리고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오늘날 우리 출가인(出家人)이 이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좌우명(左右銘)」을 정말 우리의 좌우명으로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마음대로 구해봤자 잘 구해지기도 어렵지마는 설사 구해졌다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그걸 구하다가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죄업(罪業)을 지어서 끝없는 육도윤회(六道輪廻)가 거듭될 뿐이다. 그런데 끝없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그 오욕락을 추구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바로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바깥 경계로 나가면 아무, 그 생각이 옳건 그르건, 좋건 나쁘건 그것은 '죽음의 문으로 가는 길'이더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꼭 육체(肉體)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정말 사람의 생사(生死) 문제는 육체에다 기준을 둘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이,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새로 태어나고[生] 그 생각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거쳐서 꺼지면은 그것을 죽음[死]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핍진(逼眞)한 생각이다.


한 생각 속에 생사가 있다. 그래서 그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면 한 생각 속에도 생사해탈(生死解脫)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자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또 들고 이 공안을 참구(參究)하는 이것이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계승(繼承)해 나가는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