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26~450)2023. 7. 26. 13:55

 

 

(No.443)—1991년 4월 첫째일요법회(91.01.07) (72분)

 

(1) 약 39분.

 

(2) 약 33분.



(1)------------------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하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욕계 ・ 색계 ・ 무색계, 이 삼계 가운데에 분요요(紛擾擾)여. 수없이 윤회를 하고 돌고 도는 것은,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라. 다못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해 끊지 못한 탓이다.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하면, 한 생각 남[生]이 없어서, 한 생각이 나지 아니해서 마음이 깨끗해 버리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다. 갈 것도 없고, 옴도 없고, 생사도 없는 것이다.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다.

이 게송(偈頌)은 한산(寒山), 습득(拾得), 그 습득의 게송입니다.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수없는 삼계(三界), 육도(六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은 그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를 못한 까닭이다 이거거든. 한 생각 남[生]이 없는 도리를 바로 봐 버리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다.
우리 한 몸뚱이의 생사윤회도 그렇거니와 온 나라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고, 온 세계가 이렇게 전쟁, 경제적인 전쟁 또는 사상적인 전쟁, 종교적인 전쟁, 이러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편안할 날이 없는 것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개인의 생사윤회도 끊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전쟁도 끊어지질 않고, 한 나라의 평화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온 세계를 이루고,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우주 법계’ 하면 굉장히 커서 원래부터 다 존재한 것인 줄 알고 영원한 것인 줄 알지만,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문제 ・ 세계 문제 ・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책이다, 외교다’ 그런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마는 진정한 궁극적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고, 거기에서 요달을 해야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도 해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면 믿지를 않고 ‘그건 관념론적인 희론(戲論)에 지내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 사람은 한 생각 속에 무량겁이 들어 있고, 한 생각 속에 우주 법계가 거기에 들어 있고 한 이치를 확연히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 신미년(辛未年) 4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그 엄동설한(嚴冬雪寒)도 지나고 이제 입춘(入春) ・ 우수(雨水) ・ 청명(淸明)을 엊그제 지냈습니다. 벌써 여기저기 개나리가 피고 또 진달래가 여기저기 산언덕에는 피기 시작했습니다. 엄동설한이 계속이 되면 추워서 못살 것 갖지만 또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은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지나고 이렇게 또 청명을 보냈습니다.

계절도 이렇게 돌고 돌지마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이렇게 지나가고 흥망성쇠(興亡盛衰)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오래오래 살기를 다 바래고, 집안이 형편이 부자가 되고 풍요로우면 영원히 그렇게 잘살기를 바래지만, 때가 지나면 부자가 또 가난해지기도 하고, 부자가 영원히 부자로만 산다면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해지고 따라서 가난했던 사람이 또 부자가 되는 것은 겨울이 봄이 되고, 봄이 또 여름을 거쳐서 가을이 되고 또 겨울이 오듯이, 이렇게 인연(因緣) 따라서 순환하고, 업(業) 따라서 흥망성쇠가 있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우주의 섭리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인연(因緣) 따라서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또 오늘부터 영겁을 통해서 계속이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필 자기에게만 모든 좋은 여건이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욕심이요 이상일 것입니다. 그렇게 바란다고 해서 되지도 않고, 면할려고 한다고 해서 면해지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바르게 살아가는 법, 보람 있게 살아가는 길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엄동설한이 돌아오면 두터운 솜옷이나 털옷을 입고, 또 입춘 ・ 우수가 지나고 청명 ・ 곡우 이 따뜻한 봄이 오면 두터운 옷을 벗고 가볍고 엷은 옷을 입는 것처럼, 그때그때 따라서 내가 어떻게 지혜롭게 처신을 해 나가야 하느냐? 반드시 그 길이 있을 것이고.

또 살림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움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살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려움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는 법도(法度)가 있을 것입니다. 넉넉할 때에는 자기 혼자만 쌓아 놓고 자기 혼자만 쓸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이웃과 노누고,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를 하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소득이 있으면 일부는 자기가 사용하고, 일부는 보시를 하고, 일부는 후일을 위해서 저축을 하도록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마는.

사업을 잘 경영을 해서 부자가 되었건 또는 불보살께 기도를 하고 주력(呪力)을 해서 그 공덕으로 사업이 번창해 가지고 부자가 되었건, 그 자기의 수입 재산이 전부 자기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임시 관리를 하도록 주어진 것들이라 그것을 관리를 잘 함으로써 자기도 좋고 많은 공덕을 쌓아서 여러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관리를 잘 못해 가지고 탐심(貪心)으로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 혼자만 그것을 쓰고, 잔뜩 쌓아 놓고 그걸 갖다가 다 쓰지도 못하고 죽게 되면 그런 탐착으로 인해서 구렁이 같은 그런 무서운 과보를 받게 된 예는 옛날부터서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명예 권리도 자기 혼자 맘대로 하라고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그러한 명예나 권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도록 자기에게 위촉(委囑)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권리를 남용을 하고, 자기 사욕(私慾)을 챙기는 도구로 삼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면 그런 권리가 오히려 자기를 해치는, 자기의 몸과 명예와 가문을 더럽히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치(理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끊임없이 시끄럽고 복잡하고 투쟁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형제 가족끼리 싸우고, 이웃끼리 싸우고, 한 국민끼리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 이런 것들이 그런 부처님께서 설하신, 성현네들이 말씀하신 그러한 이치를 잘 알고 그대로 적절히 살아가고 처신해 간다면은 이렇게 세상이 어렵게만 되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산업 사회(産業社會)가 발달함으로 해서 모두 생활이 넉넉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좀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온통 인심(人心)은 각박해지고 범죄는 날로 늘어가고, 자연계는 오염이 되어 가지고 이대로 무슨 온 국민이나 인류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계속 나간다면 백 년, 몇백 년 안 가서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편리한 것은 정말 진정으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정말 다른 이를 해롭게 하지 아니한 그런 방도를 취해야지, 자기 일신의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요새 낙동강을 비롯한 한국의 온갖 하천이 오염이 되어서 상수도가 오염이 되어 가지고, 그 물을 먹으면은 병이 나고 사람이 살 수 없고, 우리가 먹고 사는 곡식 쌀 속에도, 채소 속에도 인체를 해롭게 하는 무서운 독성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을 낱낱이 다 예를 들어서 말할 것도 없이 정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이상 우리는 지금부터 새로운 각오(覺悟)를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몸도 마음도 자연계도 다 같이 병들어 시들어서 죽고만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학자들은 그런 과학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고 정책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러한 방향을 좀 달리해서 정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가 일어나는 우리의 수없는 그 생각들,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고 다스리지 않고—일어나는 생각, 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전부가 무명이요, 번뇌요, 망상이요, 탐심이요, 진심이요, 어리석은 마음인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놈을 방종(放縱), 놔 먹여 가지고 그것을 현실화(現實化)할 때에 거기에는 죄악 범죄를 이루는 그러한 결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무엇을 한들 그 결과는 나를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고, 자연계를 해롭게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해롭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현대 학교의 모든 교육이 전연(全然) 참인간을 만드는 교육에는 전혀 마음을 쓰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서 백까지 배우고 가리키고 연구하는 것이, 조금 과격한 표현을 한다면 인류를 멸망하는 그러한 교육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항상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에 거기에 선행(先行)해서 더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을 닦는 우리 참선법(參禪法), 참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한데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산정상(寒山頂上)에 월륜고(月輪孤)한데, 저 차운 산 봉다리, 봉아리 위에는 밝은 달이 외로이 밝았는데,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라. 그 맑은 하늘에 환히 비치니 한 물건도 없구나.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가, 하! 귀중하고도 귀중한 이 천연의 값없는 보배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오음(五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으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속에 파묻혀 있구나.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을 천연의 무가보(無價寶)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 한 물건, 눈으로 볼라야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데,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이 소소영령한 놈, 주인공.
바로 이놈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었고, 우주가 없어진 뒤에도 이것은 없어지질 안 해. 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는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어.

비록 우리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 속에 육도윤회를 이렇게 계속하고 있지만,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그러한 생겨난 때가 없이 존재해 온 바로 그러한 무가(無價)의 보배가 우리의 남녀노소 우리 모두의 몸속에 그놈이 타악 있다 그 말이여. 그놈이 들어서 탐심도 내고, 진심도 내고, 어리석은 생각도 내고, 오욕락을 즐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도 그놈에는 증감(增減)도 없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자기에게 그런 자기 집안에 그러한 훌륭한 보배가 있다면 그 보배를 통해서 얼마든지 평생 먹고도 남을 텐데 이 보배는, 어느 집안에 세계적으로 보배가 될 만한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몸안에 있는 이 소소영령한 값없는 보배와는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천하 없는 세계적인 보물 국가적인 보물도 생겨난 때가 있고, 생겨난 때가 있는 물건은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값비싼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없어진 때가 있어. 언젠가는 불이 타거나 또는 자연히 괴멸이 되거나, 어떠한 충격을 통해서 파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뚱이 속에 가지고 있는, 오음(五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 오음 속에 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은 누가 훔쳐갈 수도 없고, 이것은 이 몸뚱이가 천만 번을 죽었다 살았다 한다 해도 이것에는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오늘 화두(話頭), 회룡사에서 참선하는 수좌(首座)나 또 보살선방에서 정진하는 보살님, 또 이 화두를 타고자 신청한 분들, 아직까지 화두를 타지 아니하고 그냥 그럭저럭 지내신 그런 분을 위해서 특별히 오늘 이 법상(法床)에서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설하고자 합니다.
개별적으로 이렇게 받기를 원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런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서 이 법상에 올라온 기회를 타서 화두를 설하게 되니 개별적으로 화두를 탄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마음을 기울여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화두(話頭)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여.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그런데 이 천칠백 공안이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없지만, 그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로 나온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우리말로는 ‘이뭣고’고, 한문으로는 ‘시삼마’, 중국 발음으로는 ‘시씀마’ 그런데.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이 ‘시삼마’ 화두도 많이 설하셨지만, 특별히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많이 설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은 이미 전강 조실 스님께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판치생모’를 하시고, 오늘 새로 화두를 받고자 하신 분은 ‘시삼마’ ‘이뭣고?’—화두 중에, 천칠백 공안 중에 가장 최초의 화두고, 어느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해도 구경(究竟)에 가서 깨달을 때에는 이 ‘시삼마’ 화두를 깨닫게 되는 거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그놈을 봐야 그것이 견성(見性)이고, 그놈을 깨달라야 그것이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지.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이뭣고?’다 그 말이여. ‘이뭣고?’
‘이・것・이・무・엇・인・고?’ 표준어로 말하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거든.
‘이뭣고?’ 글자는 석 자밖에 안 되지마는 그 뜻은 ‘이것이 무엇인고?’

근데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지칭(指稱) 대명사(代名詞), 이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냐 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놈, 부르면 대답할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다정한 사람과 생이별 사이별을 하면은 슬퍼할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그러한 놈이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어.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이뭣고?~~~’

처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발 더 다그쳐 들어가면 더욱 좋다 그 말이여.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다가,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가 더 간곡하게 다그쳐 들어가려면 ‘이뭣고?’ 할 때 ‘이-’ 하는데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한 뜻으로 또 다그쳐 들어가고, 거기서 다그쳐 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이- 뭣고?’거든. ‘이- 뭣고?~~~’

글자는 ‘이뭣고’지만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이- 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되는 것이지,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이렇게 이론적으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어. 이리저리 자기가 그동안에 불경(佛經)을 읽고 또 법문(法門)을 듣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고 한 그런 지식과 교리적인 이론적인 것을 통해서 ‘아하, 그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따라서 이 공부는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벌써 잘못된 공부여.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잘못된 결과밖에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여. 그래서 공부를 바로 바르게 해 가야 혀.
이론을 떠나서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앞뒷이 끊어져야 하거든. 거두절미(去頭截尾), 앞뒤를 끊어 버리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해 갈수록, 성이 날 때도 ‘이뭣고?’ 하면은 성났던 생각이 찰나간에 끊어져 버리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존하도록. 슬플 때에도 무조건하고 ‘이뭣고?’ 하면 슬픈 생각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무조건하고 ‘이뭣고?’ 하면 번뇌 망상이 찰나간에 끊어져 버리거든.
그래서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데 있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그거거든.

자꾸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은 마음 길이 끊어져. 마음 길이 끊어짐으로 해서 공부가 제대로 되어가고 마침내는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참선한다고 앉아서 자꾸 이리저리 생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나가면 마음 길이 점점 끊어지기커녕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점점 더 치성하게 되니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뭣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성화 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놈을 물리치거나 끊을라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또 일어나면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처음~38분4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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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것이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화두인데, 이 화두를 바로 해 나가려면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해.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은, 보통 사람은 호흡을 하는데 아주 짧게 하거든. 짧게 들어마시고 짧게 내쉬고 하니까, 허파가 있는데 허파의 윗부분 기도(氣道), 기도에서 가까운 부분에만 호흡이 들어갔다 나왔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넓은 허파 속이 묵은 공기로 속은 가득차 있어. 마치 큰 창고를 소지(掃地)하는데 들어가는 입구만 싹싹 쓸고 말고, 저 창고 깊은 속까지 구석구석이 소지를 안 하면 안 된다.

호흡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다 내쉬고 그런 호흡을 해야 산소를 많이 몸안에 섭취를 하고, 몸안에 있는 그 오염된 탄산가스나 이산화탄소 같은 것을 깨끗이 다 청소해 내는데, 그럼으로 해서 피도 맑아지고 몸도 깨끗해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따라서 피로 회복도 되고 정신도 깨끗해지는 것이여.
그래서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자상하게 잘 알아 가지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화두(話頭)를 급(急)하지도 않고, 너무 긴(緊)하고 급해서는 안 되고, 적절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부작용도 없고 상기병(上氣病)과 같은 그러한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 단전호흡법이라든지 화두 드는 법은 사무실에서 「참선법」이라고 하는 녹음(錄音)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가 있으니까, 처음으로 참선을 하시고자 하는 분은 그것을 구해 가지고 여러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별로 어려운 말로 된 것이 아니나, 한 번 들어도 알 분은 알겠지만 그래도 여러 번 틀어 놓고 들으면서 하면, 한 번 들어서 모르는 거 두 번째 알게 되고, 두 번 들어서 모르는 거 열 번 들어서 차츰차츰 참선하는 요령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한마디지만, 이 한마디 ‘이뭣고?’ 이 한마디가 무량겁 생사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서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여.
이놈 하나를 가지고 거래거거(擧來擧去), 이놈을 들고 가고 들고 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한마디 화두를 간단(間斷)없이,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 화두가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간다면,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때가 많고 다른 번뇌 망상에 휩쓸려 넘어갈 때가 많겠지만, 자꾸 끈질기게 해 나감으로 해서 차츰차츰 화두 들어진 때가 불어나고, 번뇌 망상 속에 그냥 끌려다니는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도 개선이 되어 갈 것이고 또 건강이 안 좋으신 분은 건강도 좋아지실 것이고, 혈압이 높은 분은 혈압도 조정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거나 또 어떠한 일을 하거나 간에 벌써 그러한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기 자신이 옛날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많이 달라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도 ‘야! 저분이 어떻게 해서 참 달라졌다. 저분이 절에 다니시고 참선을 하신다더니 저렇게 인품이 달라질 수가 있을 것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데에도 ‘참! 내가 왜 진즉 이 참선을 하지 않았던가. 좀 더 젊었을 때 이것을 했었으면 내가 훨씬 더 행복하게 보람 있게 살 것이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을’ 이렇게 생각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늦었다고 한탄하시지 말고 지금 시작하는 것이 이른 때입니다. 설사 연세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고 칠십이 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육칠십 년 살고 그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앞으로 몇 해를 못 사시고 이승을 하직하신다 하더라도 금생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마지막 숨 끊어질 때까지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는 가운데 숨을 딱 거두게 되면, 저승에 가셔도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장을 할 것이고, 금방 몸을 새로 좋은 몸을 받아나셔서 또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으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늙다고 해서 포기를 하거나, 어떠한 이유로 해서도 이 공부는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어떠한 여건하에서도 오직 할 것은 이 공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화두 법문을 들으신 분은 오늘 화두를 새로 탔다고 그렇게 믿고 고대로 해 나가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이 공부해 나가는 데 주의할 점은 급한 생각도 내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느즈러진 생각도 갖지 말아라. 마치 거문고나 기타(guitar), 그런 줄을 고를 때에 너무 팽팽하게 강하게 조여 매면 끊어지거나 끊어지지 않더라도 소리가 제 음가(音價)가 나오지 아니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느슨하게 해 놓으면 그런 악기 가지고는 연주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참선도 너무 그렇게 되게 급(急)하게, 긴(緊)하게 이렇게 몰아붙여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불급불완(不急不緩), 그 중도(中道)를, 적절한 중도를 취해서 해 나가야만 이 공부를 부작용 없이 공부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도록 항상 고인(古人)네들도 말씀을 하시고 산승(山僧)도 그런 말씀을 자주합니다마는, 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이 덮어놓고 몸뚱이를 못살게 군다든지, 생각을 너무 긴하게 몰아붙여 가지고 미간(眉間)에다가 ‘내 천(川)’ 자를 쓰고 막 그냥 우격다짐으로 무리하게 막 몰아대라는 그런 것이 용맹정진이 아닙니다.
앉아서나 서서나 한 생각도 헛되이 놔 버리지 아니하고 항상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는 것을 말한 것이지, 무리하게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疑心)을 간절하게 하라’고,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 이 삼요(三要)로써 공부를 하라’고 『선요(禪要)』에서 고봉 스님도 말씀하셨지만, 이것도 역시 해석을 잘못하면 도(道)는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고 병만 얻게 될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한 분은 항상 법문(法門)을 자주 듣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으면서 이렇게 해 나가야만 바르게 공부를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 정월 일요법회 때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사분율(四分律)』에 말씀하신 바도 있고, 또 동양 의학에서도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에 대해서 자상하게 말한 바가 있고, 또 인도에서나 중국, 한국에서도 옛날부터서 뇨요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걸 시행을 해 오고 있습니다.

요새 이렇게 대기가 오염이 되고 또 우리 식수라든지 온갖 우리의 음식물이 다 이렇게 오염이 되어 가지고 나날이 환자가 늘어가는 것은—간염이라든지, 간경화증이라든지, 고혈압, 중풍, 각종 암 이런 난치병(難治病)들이 날로 치성을 하고, 그런 난치병으로 인해서 수없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때에 아직도 그러한 병을 완치시킬만한 좋은 약은 끊임없이 많은 의학 박사들이 연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특효약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수술을 한다든지 또는 주사를 맞는다든지 또는 광선 치료를 한다든지 모다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아직까지는 그 방법 외에는 별 적절한 방법이 없는 채 많은 사람들은 결국은 머리가 다 빠지고 그래 가지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삼천년 전에 이미 부처님께서도 비구(比丘)들로 하여금 뇨(尿)를 먹도록 말씀하신 바도 있고, 인도에는 부처님 탄생하시기 이전부터 뇨요법이 힌두교 성전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이것은 뇨(尿)는 배설물이라 대변과 비슷한 그런 불결한 물로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인식해 왔습니다마는, 사실은 전혀 그 본질이 다른 것이어서 뇨는 혈액이 시간이 오래되면 새로운 피가 생겨나면서 묵은 피는 신장으로, 신장에서 방광으로 거쳐서 이렇게 소변으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소변은 대변 속에 국물이 걸러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혈액이 시간이 좀 지나면 오줌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병이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오줌은 지극히 무균(無菌)이요 청결한 것이라고 그렇게 박사들의 조사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약간 비린내가 난 것은 사실이나 분석을 해보면 사람이 먹어도 조금도 그것으로 인해서 병이 나기커녕은 오래오래 먹으면은 그 무서운 난치병들이 다 나아가고 있는 그러한 청량 음료수요, 우리의 몸뚱이 속에 우리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령스러운 약(藥)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졌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뚱이 속에는 영원불멸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담아 있고, 또 이 몸뚱이에서 배설하는 뇨(尿)는 우리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또 그러한 병을 예방할 수 있는 그런 불가사의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저는 부처님의 경전이나 동양 의학이나 또는 많은 경험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들을 통해서 스스로 이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30년, 40년 경험을 통해서 많은 병을 나은 그런 사례를 적은 책도 보았습니다마는.

아마 돈도 많고 그런 분들은 ‘이걸 어떻게 그런 것을 먹을 수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시지만, 돈이 많아도 스스로 돈이 많다고 하는 생각이 없는 그러한 분, 또 실지로 돈이 없는 분, 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五陰)의 이 몸뚱이 속에 자성(自性)이 들어 있는, 영원불멸한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법을 믿는 분은 이 산승(山僧)의 말을 믿고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을 실천을 해서 몸뚱이가 살아계시는 동안 건강하고, 돌아가실 때 오래 앓지 않고, 오래 앓아 봤자 3일 이상을 앓지 않다고 그럽니다. 한 3일 조금 그러다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좋다고 하니까 또 하루 종일 나온 것을 전부 받아서 배가 부르도록 복용을 하실 것은 없고, 조석으로 두 번 정도 이렇게 복용을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첨부해서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이걸 복용을 하시면 반드시 치유 반응이라고 할까, 효과 반응이라고 할까, 이것을 의학적 술어로는 명현 현상(瞑眩現象)이라고 합니다마는 반드시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팠던 부위가 이렇게 가려움증이 생긴다던지 또 몸에서 열이 난다던지 또는 몸살을 앓는다든지, 아주 구미(口味)가 뚝 끊어져서 밥이 먹기 싫어진다든지, 자꾸 졸음증이 막 며칠을 두고 졸음이 온다든지, 또는 설사가 난다든지 이런 등등 또 아주 무기력해 가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천근(千斤)이나 된 것처럼 무거움을 느낀다든지 이런 등등 여러 가지 현상이 그 사람의 체질과 증상에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물어볼 곳이 어디냐? 한국에 뇨요법(尿療法)에 전문박사가 계신다면 그리 전화라도 해보시겠지만, 가장 가까운 것이 자기가 잘 아는 의사나 병원에 가서 물어볼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의사는 백이면 백 명이 다 ‘그 오줌, 먹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그 몸안에 불결한 것을 배설하는 것인데 그것을 다시 입에다가 먹다니. 그 큰일난다‘고. ’그것 먹어서 부작용이 일어난 거라‘고 천 명이면 천 명 그렇게 의사로서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뇨요법을 하신 분은 어떠한 부작용이 나더라도 의사한테 가서는 물어보지를 말아야 합니다.

의사는 왜 그렇게 말하냐 하면, 첫째는 그분이 ‘뇨는 대변, 소변, 땀 이런 것은 몸안에 불결한 것을 밖으로 배설하는 물질이다’ 이렇게 인식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런 것은 어쨌든지 자주 배설을 하고 버려 버려야 하고 자주 씻어서 깨끗이 해야지, 그것을 먹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의사로서는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현미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해 가지고 별로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의사로서는 오줌을 권장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환자들이 오줌 먹고 병원에를 안 찾아오면 그 병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아들이나 사돈네 가운데 훌륭한 박사가 있더라도 거기 가서는 물어보실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정 물어보고 싶으시거든 뇨요법(尿療法)에 대해서 좋은 책을 간행한 분이 있습니다. 김정희씨라고 하는 서울대학 생물학과를 나오시고 교수를 지내신 그런 분이 그 좋은 책을 발간을 했습니다. 그분을 알아서 그리 문의를 하시면 아주 친절하게 일러주실 것이고, 또 그런 책을 구해서 읽으시면 또 자상하게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조끔 해 보면 삭신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또 그리고 상기가 된다, 소화가 안 된다 여러 가지 그런 작용이 초(初) 단계에 있어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을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여법하게 화두를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 잘 해서 자꾸자꾸 되풀이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감으로 해서 차츰차츰 그 요령을 체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끔 해 보고는 뭣이 꿈자리가 고약하고, 무슨 무엇이 어쩌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거 할 거 아니라고 이렇게 간단하게 이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자포자기를 하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마는.

뇨요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명현 현상, 치유 반응이 나타나도 조금도 겁내시지 말고 꾸준히 해 나가면 한 달, 두 달, 석 달 내지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나가면 어떠한 난치병도, 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앓고 있던 병까지 결국은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믿으시고 꾸준히 이렇게 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평생 동안 무병(無病)하게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해가 심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공해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체질,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을 길르는 데에는 뇨요법(尿療法)과 참선법(參禪法)밖에는 아직까지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요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리라
나무~아미타불~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요. 향기로운 꽃다운 풀에는 삼춘(三春)에 비가 있고, 삼춘에 비가 옴으로 해서 꽃다운 풀이 파랗게 돋아날 것이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다. 붉고 붉은 아름다운 단풍을 위해서는 구월에 서리가 내려야 한다 이거거든. 삼춘에 비가 오면은 꽃다운 풀이 향그롭고, 구월에 서리가 내리면은 붉은 단풍이 아름답더라.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빈 마음으로 온갖 이러한 사물의 변화를 관(觀)한다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다. 모두가 다 무사(無事)하고 다못 평상(平常)일 뿐이다.

국가 사회나 온 세계가 이렇게 참 온갖 종류의 전쟁이 끊일 날이 없고 이렇게 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의 이런 변화를 빈 마음으로—빈 마음이 이 무엇이냐? 떠억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마음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가장 빈 마음에 가까운 것이여. 빈 마음으로 모든 사물의 변화를 보면 그것이 바로 평상(平常)이여.

봄에 비가 와서 푸른 꽃이 돋아나는 것이나, 서리가 내려서 붉은 단풍이 지는 것이나, 여기서 저기서 좋은 일을 한 소식도 있고, 나쁜 범죄 사실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고 흥망성쇠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화두(話頭)를 드는 마음으로 이것을 보아 나가고, 화두를 드는 마음으로 처신해 나가고 처리해 나가야지, 화두를 잠시 놓치고 중생심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 그 흥망성쇠 속에 자기도 휩쓸려 말려 들어가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 우리도 끌려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를 아까 말씀을 드렸는데, 이미 다른 큰스님으로부터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혹 타 가지고 공부를 한 분도 계실 것이고, 또 기타 분도 있겠으나,
‘정전백수자,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으면 됩니다.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지 말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어야 돼.
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가 무엇인가?’ 이렇게 참구(參究)를 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어떻게 드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것이 화두의 초점이고, 우리 의심(疑心)의 눈을 박을 곳이 바로 거기여.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가 무엇인가?’ 해 가지고 정전백수자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의심(疑心), 이게 중요한 거, 그것이 초점이니까 그렇게 화두를 참구하기를 바랍니다. (38분43초~1시간11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 /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 사회 국가 온 세계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룬다 /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 /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 속에서 지혜롭게 처신을 해 나가야 / 산업 사회(産業社會)의 발달로 인한 지구의 황폐, 불자(佛子)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야.

(게송)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 / 우리 몸안에 있는 이 소소영령한 값없는 보배, 이놈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로 나온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 어느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해도 구경(究竟)에 가서 깨달을 때에는 이 ‘시삼마’ 화두를 깨닫게 되는 거여 / 화두 드는 법.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앞뒷이 끊어져야 하거든. 거두절미(去頭截尾), 앞뒤를 끊어 버리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화두를 바로 해 나가려면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 화두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한마디지만, 이 한마디 ‘이뭣고?’ 이 한마디가 무량겁 생사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서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가지고 있다 /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 / 공부해 나가는 데 주의할 점은 불급불완(不急不緩).

뇨요법(尿療法 요료법) / (게송)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 /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 드는 법.


우리 한 몸뚱이의 생사윤회도 그렇거니와 온 나라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고, 온 세계가 이렇게 전쟁, 경제적인 전쟁 또는 사상적인 전쟁, 종교적인 전쟁, 이러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편안할 날이 없는 것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개인의 생사윤회도 끊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전쟁도 끊어지질 않고, 한 나라의 평화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온 세계를 이루고,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우주 법계’ 하면 굉장히 커서 원래부터 다 존재한 것인 줄 알고 영원한 것인 줄 알지만,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문제 ・ 세계 문제 ・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책이다, 외교다’ 그런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마는 진정한 궁극적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고, 거기에서 요달을 해야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도 해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면 믿지를 않고 ‘그건 관념론적인 희론(戲論)에 지내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 사람은 한 생각 속에 무량겁이 들어 있고, 한 생각 속에 우주 법계가 거기에 들어 있고 한 이치를 확연히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산업 사회(産業社會)가 발달함으로 해서 모두 생활이 넉넉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좀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온통 인심(人心)은 각박해지고 범죄는 날로 늘어가고, 자연계는 오염이 되어 가지고 이대로 무슨 온 국민이나 인류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계속 나간다면 백 년, 몇백 년 안 가서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학자들은 그런 과학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고 정책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러한 방향을 좀 달리해서 정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가 일어나는 우리의 수없는 그 생각들,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고 다스리지 않고—일어나는 생각, 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전부가 무명이요, 번뇌요, 망상이요, 탐심이요, 진심이요, 어리석은 마음인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놈을 방종(放縱), 놔 먹여 가지고 그것을 현실화(現實化)할 때에 거기에는 죄악 범죄를 이루는 그러한 결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무엇을 한들 그 결과는 나를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고, 자연계를 해롭게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해롭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항상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에 거기에 선행(先行)해서 더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을 닦는 우리 참선법(參禪法), 참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는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어. 비록 우리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 속에 육도윤회를 이렇게 계속하고 있지만,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그러한 생겨난 때가 없이 존재해 온 바로 그러한 무가(無價)의 보배가 우리의 남녀노소 우리 모두의 몸속에 그놈이 타악 있다 그 말이여. 그놈이 들어서 탐심도 내고, 진심도 내고, 어리석은 생각도 내고, 오욕락을 즐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도 그놈에는 증감(增減)도 없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처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발 더 다그쳐 들어가면 더욱 좋다 그 말이여.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다가,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가 더 간곡하게 다그쳐 들어가려면 ‘이뭣고?’ 할 때 ‘이-’ 하는데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한 뜻으로 또 다그쳐 들어가고, 거기서 다그쳐 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이- 뭣고?’거든. ‘이- 뭣고?~~~’
글자는 ‘이뭣고’지만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이- 뭣고?’

뇨요법(尿療法 요료법) ; 요료법(尿療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26~450)2023. 5. 5. 04:23

 

 

(No.442)—1991년 3월 첫째일요법회 (35분)

 

약 35분.



수행막대빈모반(修行莫待鬢毛斑)하라  호리신분개소년(蒿裡新墳皆少年)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인신일실기시환(人身一失幾時還)고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나무~아미타불~

오늘 신미년(辛未年) 3월 3일,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제방(諸方) 선원에서 경오년(庚午年) 삼동(三冬) 구순 안거(九旬安居)를 마치고 많은 선객들, 도반들, 형제자매들이 많이 운집(雲集)을 하셨고, 청신사 청신녀 여러 신도님네들도 법당 가득히 운집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경술년(庚戌年, 1970년)에 설하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경청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출가(出家) 인연과 또 발심(發心)해서 선방으로 나오신 인연, 또 깨달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하신 광경, 또 공부하시는 과정, 그리 깨달라 가지고 첫 번째 혜봉 큰스님을 찾아가서 거량(擧揚)하신 법문 내용 등 법문을 듣고 실로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산승(山僧)이 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여러분과 같이 듣고 더 무슨 말씀을 여기 와서 법문이라고 할 입을 벌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도반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고 그러니, 조실 스님께서 최초에 20세 미만에 같이 뛰어놀면서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을 같이 배우며 저 해인사 백련암에서 응해 큰스님을 모시고 시봉하면서 공부, 사미승(沙彌僧) 때 공부하시다가 그 같이 뛰놀던 그 친구가 미쳐서 죽은 것을 그것을 보시고 발심을 해서—그 친구가 죽었을 때 49재 때 그 응해 스님이 49재 천도(薦度) 법문을 하시면서 읊으신 게송(偈頌), 그것이 바로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서 금방 읊은 게송입니다.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수행하는 데 머리털, 귀밑에 털이 희어지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니라. 저 잡초밭 쑥대밭에 있는 공동묘지에 있는 그 무덤들이 모두 소년의 무덤이니라.

인신일실기시환(人身一失幾時還)이냐. 사람 몸을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어느 때에 돌아올 수가 있으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그 무량겁을 지옥고를 받을 텐데 언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올 수가 있느냐? 그러니 어찌 등한히 놀 수가 있겠느냐?

그 다정하게 뛰놀던 도반이 그렇게 미쳐서 뛰다가 죽은 그 광경을 보고, 그렇지 않아도 그 어린 마음에 그 슬픔이 한이 없고 무상(無常)하기가 한이 없는 그 심정에 큰스님의 이런 게송 법문을 듣고 여지없이 발심을 하셔 가지고 글 배우던 거 모다 다 때려치우고 그래 직지사(直指寺) 제산(霽山) 큰스님 회상으로 아주 새파란 어린 소년으로 발심해서 선방(禪房)으로 나오셨던 것입니다.


요새 그 악독한 잔인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참 쿠웨이트를 송두리채 먹고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침범을 하고 그래 가지고 전 중동(中東)을 손아귀에다 넣고 세계를 한번 뒤흔들어 볼려다가 그런 과대망상을 일으킨 사담 후세인이 결국은 시대를 착각하고, 최신 전자 무기의 위력을 잘 몰라 가지고 비참하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싸움은 휴전이 되었다고 하나, 배가 큰 배가 파도에 넘어지니까 온 바다에 있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와서 그 배에서 파손되어 가지고 거기 뭐 먹을 것이 있는가 하고 빠져서 죽은 사람도 뜯어먹고, 거기서 나온 무슨 곡식도 줏어 먹고 할려고 몇억 마리 고기들이 떼 몰려온 것과 같고, 부잣집이 곡식 창고에 불이 나니까 온 마을 철없는 아이들이 손에 손에 바구니를 들고 튀밥 줏어 먹으러 모여든 것처럼 이제 이라크 전쟁이 끝나니까 행여나 거기 복구 사업(復舊事業)하는 데 돈 좀 벌어보까 하고 온 세계가 또 모여들 것이 빤합니다.

인자 이런 일들은 국가에서 또는 대기업가들이 자기 자신의 기업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자기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모다 각축전이 벌어지겠지만 우리 불자(佛子)는 이러한 전쟁을 통해서 무엇인가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삿된 종교, 삿된 마음과 탐욕스런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저지른 모든 행동은, 다시 말해서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등진 모든 행위는 결국은 남을 해치고 멸망한다고 하는 교훈, 그래 가지고 세세생생에 헤어날 수 없는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문제는 저런 국가 대 국가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한 국가 내에서 기업과 기업 또 사람과 사람, 또 한 가정 내에서는 부부간에 또는 부모자식 간에 형제간에, 또 고부간에 또 역시 이러한 이치는 적용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삿된 생각을 버리고, 탐욕심을 버리고, 어리석은 마음을 버려.
탐욕(貪欲)은 물질적인 탐욕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아만(我慢)만을 내세우고 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법(正法)을 믿지 않는 사람,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항상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고, 자기 욕심만을 챙기고 그러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바로 어리석은 자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한 어리석은 마음으로 하는 일은 자기 딴은 잘한다고 한 일이 결국은 남을 망치고 자기도 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도 자기 딴은 전부를 다 모다 분열이 되어 가지고 싸우기보다는 모두 다 회교(回敎, 이슬람교)를 믿고 통일을 함으로써 아랍 제국을 통일함으로써 알라신(Allah神)에 복종하는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겠지만, 삿된 종교, 탐욕스런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저지른 일이라 결국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해제를 맞이한 도반(道伴)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참선을 하되 ‘바르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제산(霽山) 스님께서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봐라」 이러한 화두를 타 가지고 공부를 하시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믿어지지 안 해서 그렇게 따르지 않고 당신 나름대로 화두를 설정을 해 가지고 무섭게 정진을 하셨는데,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했더라면 그렇게 상기(上氣)가 되어 가지고 피가 목구녁으로 꿀꿀 핏덩어리가 넘어오고 그러지를 안 했을 텐데, 그렇게 했다고 잠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다행히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상기가 되고 머리가 툭툭 터지고,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고, 핏덩어리가 목구녁에서 넘어오던 그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공부를 쉬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으니까 참 다행한 일이었겠으나, 누구라도 다 그렇게 어거지로 억지로 해 가지고 피 아니라 염통이 송두리채 꺼꾸로 넘어온다 하더라도 확철대오를 하고 그날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전강 조실 스님의 경우는 항상 조실 스님의 도반이시며 조실 스님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믿고 공경하던 열반하신 고 윤고암 대선사께서 항상 저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네 스님은 전생 공부여. 자네 스님만큼만 깨달으소”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전생(前生)에 참, 공부를 많이 하셔서 확철대오한 대도인이 잠시 금생에 참 곡성(谷城) 어느 집에 태어나 가지고 서모(庶母) 밑에 갖은 천대를 받다가, 그래 서모 밑에 천대를 안 받았으면 출가할 발심도 늦어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마는, 다행히 그 천대를 받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어린 동생을 데리고 참 출가를 하셔서 그런 대도를 성취했는데—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고—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그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나오셔서, 누가 시켜서 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고, 그렇게 하라고 지도하지도 않는데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이 그렇게 무섭게 정진을 해 가지고 그렇게 깨달으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용맹정진한 뒤라, 하신 그 공덕으로 그렇게 빨리 깨치셨으리라고도 생각이 되지만, 전생에 공부를 해 논 것이라고 한 고암 스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금생에 그렇게 죽을 폭을 대고 그렇게 무지하니 막 해서 금생에는 죽고 내생에 다시 태어나서 확철대오를 한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혹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 도반이 계시다면 그러기보다는 그렇게 무지하게 하지 않고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열심히 정진한다면 피가 넘어오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평생 동안 지도를 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하신다면 그러한 피가 넘어오고 머리가 터지고 하는 그런 과정을 겪지 안 해도 충분히 도업(道業)을 성취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이 공부는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이 없이는 공부는 금생에 성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가행정진 용맹정진이—화두(話頭)를 갖다가 어떻게 드느냐?—그 화두에 대한 그 여법한 묘(妙)한 관(觀)으로 의심(疑心)을 잘 관조(觀照)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지,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그러한 것으로써 용맹정진을 삼는 것은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선객(禪客)들은 요새 참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의지해서 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들 정진을 하고 계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마는, 산승(山僧)이 근자에 여러 선객들로부터 들은 바가 있어서—출가한 지 5년 10년이 넘어서 자기 딴은 애써서 정진을 할려고 해도 아직까지도 아무 정진에 진취가 없으니 ‘정말 조실 스님께서 정진하신 것처럼 아주 몸뚱이를 아주 잡을 생각을 하고라도 그렇게 한 번 해보까요?’ 이렇게 와서 말하는 도반이 있어서 그게 참 느낀 바가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분은 정진을 하는데 제법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잡혀 나가. 그런데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이렇게 들려가다가 적적(寂寂)한 경지에 들어가면, 들어가다가 가만히 돌이켜보면은 ‘화두를 내가 들고 있는지, 안 들고 있는지 그것을 잘 모르겠다’ 이것입니다.
이건 참 공부하는 분이면 다 열심히 정진을 하신 분이면 다 이러한 경지를 아마 당하는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고 적적하게 들린다 해도 의단(疑團)이 없으면 안 되거든.

그래서 이 『몽산법어(蒙山法語)』에도 염기염멸(念起念滅)을 위지생사(謂之生死)니, 생각이 일어났다 생각이 멸했다 하는 것을 이것을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니, 당생사지제(當生死之際)하야 생사의 즈음에 당해서, 생사의 즈음에 당한단 말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 이르러서 수진력제기화두(須盡力提起話頭)호리니, 모름지기 힘을 다해서 화두를 들 것이니—화두를 든다고 해도 한 철, 두 철, 1년, 이태, 3년 여간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떠억 들어지게 되기가 어렵고, 어쩐 때는 좀 잘 들리다가, 어쩐 때는 또 뚝 변해 가지고 안 들리다가 그럽니다.

화두는 ‘이뭣고?’ 하고 들어도, 드는 그 순간에도 어느 틈엔가 딴생각[別念]이 침범해 들어오고 이러는데, 그래도 자꾸 또 들고 또 들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그놈을 물리칠라 하지 말고, 일어난 놈 그놈은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타악 화두만을 챙기거든.
앉아서도 챙기고, 서서도 챙기고, 누워서도 챙기고, 밥 먹으면서도 챙기고, 똥누고 오줌 누면서도 챙기고, 세수하고 양치질하면서도 챙기고, 이렇게 해서 자꾸자꾸 챙기다 보면 언젠가는 화두를 챙길려고 안 해도 터억 순일(純一)하게 들리게 된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던 그 기멸(起滅)이 제절로 끊어져 버려. 그 기멸(起滅)이 끊어진 곳, 그것을 적(寂)이라고 그러거든. ‘적적(寂寂)하다’고 적(寂)이여. 그 적(寂)한 가운데에 까딱하면 화두가 없어지거든. 왜 그러냐?
너무 적적하다 보니까 그 적적한 데에 따악 적적한 데에 있다 보니까 화두 들 중을 잊어버리고, 그 적적(寂寂)한 가운데가 어떻게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또 표현할 수 없이 편안하고 그러니까 그런 경지에서 화두를 들면은 오히려 그 적적한 경지가 깨질까 두려워서도 화두를 안 들고 그 고요한 데에 따악 멈추게 된다 그 말이여. 그럼 거기서부터 병(病)이 생기는 것이여.

적적(寂寂)한 가운데에 화두 없는 것을,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고 그런 거여. 그 적적한 데에 빠져 가지고 거기에 따악 빠지면 그것을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졌다 그런 거여.
무기(無記)에 떨어지면 한량없이 편안하고 한량없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참 편안하고 고요하고 맑아서, 그렇지만 그러한 경지에 오래오래 계속 머물러 있으면 오신통(五神通)은 나는 수가 있어. 오신통 중에 한 가지 두 가지 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신통은 못쓸 신통이여.
혹 사람을 보면은 ‘전생에 뭣이었었다’ 그런 것도 탁 보면은 알게 되고 ‘앞으로 저 사람이 몇 살에 죽겄다. 앞으로 무슨 재앙을 만나겄다’ 사람을 보면은 관상도 배우지도 안 했는데, 보면 요렇게 알아요. ‘아하! 오늘 오후에는 누가 오겄다’ 그런 것도 알아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은 공부에 벌써 마장(魔障)이 붙은 것이라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적적할수록에 화두가 성성하도록 화두를 챙겨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에도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성성(惺惺)하도록 잡드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해야만 이것을 ‘신령 영(靈)’ 자, 영(靈)이라고 한다 거든.
그래서 그 적적(寂寂)한 것이 공적(空寂)이고,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가 성성(惺惺)한 것을 영지(靈知)라고 해. ‘신령스럽게 안다’고 해서 영지(靈知)라고 하는데,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그러니까 성성하고 적적한 거,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그 경계가 무괴무잡(無壞無雜)해, 무너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아니해서,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나가면 불일성지(不日成之)하리라. 며칠 안 가서 확철대오하리라.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리라 이거거든.

이것은 보제존자(普濟尊者)가 각오선인(覺悟禪人)에게 보이신 법문인데, 지극히 짧은 법문인데도 공부해 나가는 참선 학자(參禪學者)에게는 극히 요긴한 법문인 것입니다.

앞으로 1년, 이태, 3년, 정말 전강 조실 스님께서 도반의 죽음을 보고 큰스님의 게송을 듣고 발심한 거와 같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이 삼요(三要)가 돈발(頓發)해서 정진을 해 나가면 반드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아무리 적적하더라도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미(迷)하지 않도록, 매(昧)하지 않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한 사람도 틀림이 없이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밀히 긴(緊)히 승두(繩頭)를 잡고 한바탕을 지을지니라. 승두는 우리의 마음이요, 또 화두(話頭)다 그 말이여.
화두를 한바탕 꽈악—그 화두를 조끔 공부한다고 해서 ‘화두가 잘 안 맞은가?’ 해 가지고 이 화두로 했다 저 화두로 했다 그렇게 자꾸 화두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안 되건 한 화두를 가지고 여법(如法)하게 간절히 잡드리해 나가면 언젠가는 순일하게 될 때가 있는 것이여.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뒤쳐서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시러금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코를 치는 향기를 얻으리요.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해서 그 강추위 끝에 핀 매화라야 향기가 진동한 법이지, 겨울이 이상난동으로 뜨뜻한 뒤끝에 피는 매화는 향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온 세계는 삼계(三界),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의 생사진로(生死塵勞)는 뭣과 같으냐 하면은 저 대해(大海), 넓고 넓은 바다와 같아서 노상 크고 작은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폭풍이 불면 작은 배는 다 넘어져 버리고 큰 배도 뛰뚱거리는 것이여. 예나 이제나 이 삼계(三界)는 그러한 크고 작은 난리와 전쟁과 시끄러운 것이 끊일 겨를이 없어. 조끔 조용한가 싶으면 금방 여그서 저그서 사고가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그러한 싸움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냐 하면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저 이라크에서 일어나니까 이라크 사람들이 잘못해서만 그렇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진짜 발심(發心)한 사람이면 한국에 앉은 바로 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탁! 느껴져야 하는 거여. 왜 그러냐?
아무리 이라크에서 싸움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내가 없으면은 나한테는 그 싸움과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거든. 내가 있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도 있는 것이고, 내가 있기 때문에 하늘에 태양도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태양이 떠 있거나 말았거나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무슨 상관 있냐 그 말이여. 그 이라크 전쟁도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내 이 한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면, 한 생각이 불생(不生)한다면은, 내 이 한 생각 남[生]이 없는 이치를 깨달라 버린다면 온 세계는 찰나간에 부처님의 해탈 적멸국토(寂滅國土)로 변하는 것이여.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한 마음이 깨끗하면 법계(法界)가 깨끗하다」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형제자매, 사부대중 여러 도반들께서는 어쨌던지 이만큼 건강할 때, 이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바로 이때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할,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열심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내려가고자 합니다. (처음~34분4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수행막대빈모반(修行莫待鬢毛斑)~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과 이라크 전쟁 / 물질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아만(我慢)만을 내세우고 한 것도 역시 탐욕.

참선을 하되 ‘바르게 공부를 해야 한다’ / 윤고암 대선사의 말씀 “전강 스님은 전생 공부여” / 아무리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고 적적하게 들린다 해도 의단(疑團)이 없으면 안 되거든 / 『몽산법어(蒙山法語)』에 ‘보제존자(普濟尊者)가 각오선인(覺悟禪人)에게 보이신 법문‘

(게송)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 삼계(三界)의 크고 작은 난리와 전쟁과 시끄러운 싸움은 우리 중생의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부처님 말씀에 「한 마음이 깨끗하면 법계(法界)가 깨끗하다」


항상 전강 조실 스님의 도반이시며 조실 스님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믿고 공경하던 열반하신 고 윤고암 대선사께서 항상 저(송담)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네 스님은 전생 공부여. 자네 스님만큼만 깨달으소”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전생(前生)에 참, 공부를 많이 하셔서 확철대오한 대도인이 잠시 금생에 참 곡성(谷城) 어느 집에 태어나 가지고 서모(庶母) 밑에 갖은 천대를 받다가, 그래 서모 밑에 천대를 안 받았으면 출가할 발심도 늦어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마는, 다행히 그 천대를 받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어린 동생을 데리고 참 출가를 하셔서 그런 대도를 성취했는데—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고—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그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나오셔서, 누가 시켜서 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고, 그렇게 하라고 지도하지도 않는데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이 그렇게 무섭게 정진을 해 가지고 그렇게 깨달으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용맹정진한 뒤라, 하신 그 공덕으로 그렇게 빨리 깨치셨으리라고도 생각이 되지만, 전생에 공부를 해 논 것이라고 한 고암 스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 가행정진 용맹정진이—화두(話頭)를 갖다가 어떻게 드느냐?—그 화두에 대한 그 여법한 묘(妙)한 관(觀)으로 의심(疑心)을 잘 관조(觀照)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지,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그러한 것으로써 용맹정진을 삼는 것은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1년, 이태, 3년, 정말 전강 조실 스님께서 도반의 죽음을 보고 큰스님의 게송을 듣고 발심한 거와 같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이 삼요(三要)가 돈발(頓發)해서 정진을 해 나가면 반드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아무리 적적하더라도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미(迷)하지 않도록, 매(昧)하지 않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한 사람도 틀림이 없이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계는 삼계(三界),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의 생사진로(生死塵勞)는 뭣과 같으냐 하면은 저 대해(大海), 넓고 넓은 바다와 같아서 노상 크고 작은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폭풍이 불면 작은 배는 다 넘어져 버리고 큰 배도 뛰뚱거리는 것이여. 예나 이제나 이 삼계(三界)는 그러한 크고 작은 난리와 전쟁과 시끄러운 것이 끊일 겨를이 없어. 조끔 조용한가 싶으면 금방 여그서 저그서 사고가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그러한 싸움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냐 하면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저 이라크에서 일어나니까 이라크 사람들이 잘못해서만 그렇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진짜 발심(發心)한 사람이면 한국에 앉은 바로 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탁! 느껴져야 하는 거여. 왜 그러냐?
아무리 이라크에서 싸움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내가 없으면은 나한테는 그 싸움과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거든. 내가 있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도 있는 것이고, 내가 있기 때문에 하늘에 태양도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태양이 떠 있거나 말았거나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무슨 상관 있냐 그 말이여. 그 이라크 전쟁도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내 이 한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면, 한 생각이 불생(不生)한다면은, 내 이 한 생각 남[生]이 없는 이치를 깨달라 버린다면 온 세계는 찰나간에 부처님의 해탈 적멸국토(寂滅國土)로 변하는 것이여.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한 마음이 깨끗하면 법계(法界)가 깨끗하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01~425)2023. 4. 24. 10:10

 

 

(No.425)—1990년 9월 첫째 일요법회(화두·불명·십선계 법회) (80분)

 

(1) 약 40분.

 

(2) 약 40분.


(1)------------------

<육사청(六師請)>

경청 석가모니불 예위화상아사리(敬請 釋迦牟尼佛 詣爲和尙阿闍梨)
경청 문수대지사 예위갈마아사리(敬請 文殊大智士 詣爲羯磨阿闍梨)
경청 당래미륵불 예위교수아사리(敬請 當來彌勒佛 詣爲敎授阿闍梨)
경청 시방제여래 예위증계아사리(敬請 十方諸如來 詣爲證戒阿闍梨)
경청 시방제보살 예위동학반려중(敬請 十方諸菩薩 詣爲同學伴侶衆)
경청 석범제천중 예위옹호장엄중(敬請 釋梵諸天衆 詣爲擁護莊嚴衆)

수계(受戒) 받으실 분은 호궤합장(互跪合掌)하고 앉아 주십시오. 모두 앉아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드세요. 예, 그렇게 앉으세요.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허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허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다.
꽃다운 풀 우거지는 삼춘(三春)에는 비가 내리고, 단풍이 울긋불긋 물드는 구월(九月)에는 서리가 내린다.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빈 마음으로 온갖 삼라만상 변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다. 일 없고 다맛 그것이 바로 평상(平常)이더라.

봄에 꽃이 피고 풀이 우거지며 또 비가 내리고, 가을에 단풍 지고 서리가 내린 것은 이 세상에 모든 물건(物件)이 인연 따라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없어져. 사람도 태어났다가 죽고, 모든 물건도 생겨났다 없어지고, 저 태양이나 이 지구도 몇억만 년 뒤에는 인연이 모아서 생겨난 것이라 언젠가는 파괴가 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우리 주변에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은 파괴와 생멸 · 생사 내놓고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러나 빈 마음으로,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할 수 있다면 그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요,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다 그 말이여. 생멸상(生滅相) 속에 열반상(涅槃相)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허겄더라.


오늘 경오년(庚午年) 9월 첫째일요법회를 기해서 십계(十戒)를 받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불명(佛名)을 신청한 분에게 계(戒)와 화두와 불명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신해년(辛亥年, 1971년)에 설하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미 계도 받고 화두도 다 탔습니다. 산승(山僧)이 다시 여기서 설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 더 간절하고, 그 이상 더 분명하고 감동적으로 설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로부터 화두도 탔고 또 계도 받았다고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일단 여러분이 새로 받기를 청했으므로 불보살(佛菩薩)을 증사(證師)로 모시고 간략히 십계를 설하겠습니다.


계(戒)는, 원래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갈라면 문(門)을 통해서 들어가고 또 그 방에서 나올 때에는 문을 통해서 나오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의 길이 있고, 불자(佛子)로서 불자에 길이 있어. 길을 놔두고 길로 다니지 않고 논으로 밭으로 가시덤불 속으로 다닐 수는 없거든.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길을 잘못 잡아 가지고 이리저리 위험한 데로 또 방향을 잘못 잡아서 간다면 애만 많이 쓰고 설사 목적지에 도달한다 해도 몇 배의 시간과 공력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불자로서 가져야 할 행실, 첫째, 몸[身]으로 지녀야 할 세 가지. 살생,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셋째는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다음에는 입[口]으로 지키는 네 가지.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또 기어(綺語), 기어라 하는 것은 이리저리 꾸며대고, 잡스럽고 잡탕스러운 말, 해서는 안 될 말 또 아무 뜻 없는 말, 이러한 말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양설(兩舌), 이간질을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는 악구(惡口), 욕을 하지 말아라. 이것이 입으로 지켜야 할 네 가지여.

그다음에 뜻[意]으로 지키는 세 가지는, 탐욕(貪欲)을 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불진에(不瞋恚), 썽내지 말어라. 그다음에 어리석은 마음, 삿된 소견을 내지 말어라.
이 어리석고 삿된 소견이라는 것은 첫째, 불자(佛子)로서는 인과법(因果法)을 부정하는 거여, 인과를 믿지 아니하고 인과의 법칙을 믿지 않고 인과를 부정하는 거, 이것이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그래서 살생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 주어야 하고, 또 도둑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내 것을 남에게 보시를 하고, 사음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행실을 청정하게 갖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말을 하고, 또 꾸며대는 말 또는 잡탕스러운 말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말을 신사답게 신사 숙녀에 어울리는 그러한 청정한 말을 해야 한다.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간질을 해 가지고 두 사람의 사이를 벙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합할 수 있도록 자비스러운 말로써 화합을 붙여야 한다.
악구(惡口)—‘호랭이 물어 갈 놈, 급살 맞을 놈, 벼락 맞을 놈, 오라를 질 놈’ 이런 입에 못 담을 말을 남에게도 해서는 아니되는데 이것이 습관이 되면은 자기 형제간에도 하고, 자식한테도 하고, 아무한테라도 그런 말이 풀풀 나온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말 한마디, 설사 꼭 미워서가 아니라 이뻐서 못 견디면 입에 못 담을 욕을 하는 수가 있거든. 이것도 불자로서는 해서는 아니된다 그 말이여.

입 밖에 한번 뚝 말이 떨어지면 그것이 한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낱낱이 언젠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면 그 말이 씨가 되어 가지고 그것이 현실화(現實化)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돈 드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말을 함부로 풀풀풀풀 해 버릇하면 망어(妄語)를 하고, 기어(綺語)를 하고, 양설(兩舌)을 하고, 악구(惡口)를 하면 그것이 낱낱이 다 그 과보(果報)로 나타나는 것이매, 참 말을 조심해야 해. 행동도 조심해야 하지만 말도 행동 못지않게 더 말조심을 해야만 불자(佛子)다운 불자다.

탐심(貪心)을 내는 거, 탐심을 내는 것은 남이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아휴, 저걸 내가 갖고 싶다. 어떻게 해야 저것을 내 것을 삼을까? 달라고 해서 안 주면 훔치기라도 허까?’ 이러한 탐심은 아마 어린애들 어린아이들이 내는 탐심일 거고.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대중에 이렇게 살아가고 세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이고, 제 생각대로만 하려고 밀어붙이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 되고 남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하면 썽을 내거든. 이것이 진심(瞋心)이여.
참! 지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뜻을 따라주지 아니한다고 썽을 내면 이것이 팔불출(八不出)도 못되고, 칠불출도 못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매 생각이 다른데,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을 것인데, 남의 말도 귀기울여 들을 줄 알고 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 말을 귀기울여서 들어보면 아 자기 말보다 ’저 사람 의견이 좋다’ 생각하면 아 대번에 그 사람의 의견을 또 찬동을 찬양을 해 주고, 이리해서 서로서로 지혜를 모아서 바른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가야지 제 주장만 내세워 가지고 둘 모이면 싸움하고, 셋 모이면 싸워. 집안에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회사에 가서도 식구끼리 싸우고.
물론 의견을 모이는 과정에서는 서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가 있지만, 이렇게 해서 여러 방면으로 토론을 하다가 그중에서 가장 좋은 의견으로 일단 모아지면, 그 의견에 모두가 다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행동을 통일해 나갈 때 사회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나라도 되어 가는 것이 있고, 또 온 세계도 평화가 올 때가 있을 것이다.

한 번 두 번은 몰라도 일생 동안을 탐욕(貪欲)과 진에심(瞋恚心)으로 일관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고 무엇이냐.
지끔 온 세상이 나날이 혼란하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되어 가는 일보단 참 앞날이 걱정스럽게 모든 일이 되어 가는 것은 이 사람들이 이 십선계(十善戒)를 믿고 지켜 나가지 아니하고, 그걸 지키지 아니하면 십악죄(十惡罪)가 되는 것이고, 이것을 믿고 지키고 실천해 나가면 이것이 십선계가 되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戒)만을 믿고 고대로 실천해도 그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어느 곳에 무엇으로 태어나되 항상 왕(王)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 계를 철저하게 잘 지키면은 천상(天上)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날 것이다」
인자 이 경(經)에 보면 이렇게 말씀이 쓰여 있지만,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천상에 태어나 봤자 자기가 지은 복(福)만큼 다 받으면 또다시 떨어지니 계(戒)만을 집착해서 계만을 지킨다면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참다운 대승계(大乘戒)가 되지를 못한다.

오늘 이 열 가지 계(戒)를 설하되, 어떻게 하면 이 계(戒)를 영원히 타락이 없는 대승계로써에 차원 높은 계를 우리가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설할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참선법을 설하기 전에,

이상 설한 열 가지 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열 가지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대승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편안하게 앉어요. 연비(燃臂) 먼저.

다시 호궤합장(互跪合掌).

참회진언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2분 20초 계속)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히 앉으셔요.

십계(十戒)를 받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따끔하게 그 연비를 한 찰나에 그렇게 무량겁 동안 지은 크고 작은 그 많은 죄가 소멸이 되느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이유가 있는 것이여.

나선 비구(那先比丘), 나가세나(Nāgasena). 나선이라고 하는 비구 스님한테 저 왕(王)이 묻기를, “평생 동안 지은 죄가 임종(臨終)할 때에 염불(念佛) 열 번만 하면 죄가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난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금생 백 년 동안 지은 죄뿐만 아니라 무량겁 동안 지은 죄가 어떻게 마지막 숨 딱 거둘 때에 아미타불(阿彌陀佛) 열 번만 불러도 죄가 없어진단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선 비구라고 하는 그 큰스님이 대답을 하기를, “큰 돌, 무거운 돌을 백 덩어리를 큰 배에다가 실으면 그 돌은 물속에 가라앉지를 않을 것이고, 조그마한 주먹텡이만한 돌 한 개도 배에다가 실지 않고 그냥 물에다가 던지면 그 돌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법을 믿고 일심(一心)으로 염불을 하면 그 부처님의 그 원력(願力)으로 마치 그 무겁고도 큰 돌만한 돌을 배에다가 실으면 안 가라앉듯이 반드시 그 사람은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날 것이고,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의 그 원력의 가피(加被)를 입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은 죄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또 이렇게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 그렇게 말씀이 있고.

또 『지론(智論)』에 보면 ‘어째서 보통 때 열 번 한 것보단 마지막 그 죽을려고 하는 그 임종시(臨終時)에 잠깐 염불한 것이 그렇게 무서운 힘이 있을까?’
보통 때는 아무래도 생각이 그렇게 가다듬어지지를 않고, 마지막 죽을 때는 이제 막바지라, 그러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 이제 내가 숨 거두면은 지옥에 갈지—반드시 자기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다. 다행히 열 번만 지극정성으로 불러도 극락에 간다니 일심(一心)으로 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면 ’내가 여기서 있는 힘을 다해서 목숨을 버리고 싸우지 아니하면 적한테 죽을 것이고, 여기서 인자 도망갈 곳도 없고 차라리 죽느니 한 사람이라도 더 적을 죽이고서 기어니 이 적을 다 몰아 다 쳐죽여야겄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나라도 살겄다‘ 이러한 마음을 내면 적은 군사로도 대적(大敵)을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고.
’아이고! 적이 저렇게 많으니 싸워 봤자 죽을 거 이것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도망쳐서 살꼬‘ 이런 생각을 먹으면은 눈 깜박할 새에 맞어 죽을 것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양(量)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금덩어리 한 냥과 꽃다발 백 개의 꽃다발을 처쟁여 놓으면 우선 꽃을 백 다발을 쌓아 놓으니 울긋불긋 보기도 좋고 잠시 향내도 나겠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면 그거 별것이 아니지만, 금덩어리 한 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숯불, 불꽃이 훨훨 타지도 않는 조그만한 숯불이 별로 보잘것없지만,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마른풀을 그 조그마한 숯불로 그것을 태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독사는 조그만한 독사 새끼라도 그 독사한테 물리면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여.

독사나 황금 덩어리는 조그만하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듯이,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난 그 간절한 한 생각은 능히 무량겁(無量劫) 죄(罪)도 소멸할 수가 있고, 억겁(億劫)의 생사윤회(生死輪廻)도 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끔 이 십계(十戒)를 받고 따끔하게 이 연비(燃臂)를 받은 그 찰나에 여러분의 죄가 소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거거든.

계를 지키면은 우선 우리의 양심(良心)이, 우리 사람 사람마다 다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 ·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자성의 부처님을 낱낱이 다 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여. 그 양심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은 우리의 그 불성(佛性)에서 나오는 거여.
그래서 항상 계행(戒行)을 여법(如法)하게 지키면 양심과 서로 계합(契合)이 되기 때문에 마음에 항상 편안하고, 마음에 항상 떳떳하고, 마음에 항상 기쁨이 있는 것이여.

계율을 파하고—살생을 헌다던지, 도둑질을 헌다던지, 사음을 헌다던지, 이간질을 헌다던지, 거짓말을 헌다던지, 또 탐욕을 내고 진심을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자기 마음의 양심에 가책을 받아 가지고 항상 얼굴이 어둡고 떳떳하지를 못하며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어둡고 불편하면 얼굴도 어둡고, 눈도 거뭇 껌껌해진 것이다 그 말이여. 똑바로 남의 얼굴을 쳐다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음이 바르지를 못하면 행동도 바르지를 못하고 밝지를 못하는 법이거든. 그러한 어둡고 바르지 못한 마음에서 어둡고 바르지 못한 행동이 나오고, 그러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안정을 얻지를 못하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한들 일이 제대로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를 못할 것이고,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하니,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어머니로서 존경 받지 못할 것이고, 아내로서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남편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이여. 아무리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전생에 지은 복이 있어서 잘산다 하더라도 남에게 존경 받지 못하면 어디다 쓸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세속에 사는 데 있어서도 이 계(戒)는 잘 가져야 할 것이고, 불자로서도 이 계는 잘 가져야 해. 계(戒)를 잘 가져야 그래야 정(定) 선정(禪定) 참선(參禪)을 올바르게 하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기 때문에 참선을 하더라도 올바른 참선을 할 수가 있어. 참선을 올바르게 해야 지혜의 눈을 떠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것이다.
견성성불을 할려면은 선정을 닦아야 하고, 선정을 올바르게 할려면은 계행(戒行)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삼학(三學), 세 가지 배움이여. 경(經) · 율(律) · 론(論), 삼장(三藏)을 분석을 하면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으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처음~40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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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받은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도 올바르게 참선을 해 나가시면 계는 그 가운데에 지켜져.
내가 계를—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하고—‘내가 계만을 청정하게 지켜야겄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파리 한 마리도 안 죽이고, 모기 한 마리도 안 죽이고, 그저 뭐 비린내 난 것도 안 먹고, 생선이고 뭐 고기 한 점도 먹지 않고 철저하게 아주 계를 지키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고 그렇게 실천을 하신 분이 스님 가운데도 있을 것이고, 신도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왕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계를 지킬 바에는 대승계(大乘戒)를 지켜야 하고, 최상승계(最上乘戒)를 지켜야 허겄더라.
형식으로 지키는 계(戒)는 그 잘 지킬려고 하는 그 마음은 참 갸륵하고 갸륵하나, 그러한 계는 계상(戒相)에 떨어지기 때문에 계상에 집착해 가지고 지킨 계는 기껏 지켜 봤자 천상(天上)에 태어나면 고작이여.

잘못해 가지고 길을 걸어가다가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였으면 ’아! 내가 살생을 안 할라고 했는데 저 살생을 했으니 내가 인자 어떻게 할까? 틀림없이 내생에 저 벌레가 나를 밟아 죽일 것이고, 저 벌레를 죽였으니 천상에 올라가기는 틀렸다‘ 이래 가지고 그것 한 마리 때문에 벌벌벌벌 떨고 불안초조해서 그런다면, 그러한 마음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냐 그 말이여.

파리 모기 안 죽일려고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승화(昇華)시켜서 자꾸 화두를 들고 참선을 여법히 해 나가면, 모르는 가운데 혹 벌레가 밟혀 죽을 수도 있고, 농사를 짓다 보면 농약을 뿌리게 되고 수없는 벌레가 죽게 되고, 밥을 먹고 채소를 씻쳐서 국을 끓이다 보면 수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도 그 속에서 죽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계상(戒相)에 집착해서 산다면 밥도 못 먹을 것이고, 국도 못 끓여 먹을 것이고, 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계를 지키라는 것이 아녀요.

물론 그 눈에 보일락말락한 그런 벌레도 그 생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생명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셨지마는, 부처님께서 그러한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뜻이 그 참뜻이 무엇이냐? 자비심(慈悲心)을 가져라 이거거든.
살생을 하면은 자비심을 손상하게 되니까 자비심을 함양을 해라. 항상 자비심으로 살아라. 자비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 자비심을 가지라고 하는 그 참뜻을 우리가 깊이 명심을 해야지, 파리 한 마리 모기 한 마리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그거여.


시라(sīla, 尸羅)가 불청정(不淸淨)하면—시라(sīla)는, 계(戒)를 인도 말로 시라(sīla)라 그러는데, ‘시라가 청정(淸淨)하지 못하면은 삼매(三昧)가 현전하지 못할 것이다. 삼매가 청정하지 못하면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하셨어.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비유해서,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올바른 자세>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물론 참선은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할 수 있어야 정말 참선을 제대로 하는 것이지. 그러나 기본자세(基本姿勢)라고 하는 것이 있어, 기본자세. 기본자세는 바로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여.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기본자세를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말이여.

그리고 낮에도 쉬는 시간, 항상 바른 자세를 가지고 의자에 앉더라도 바르게 앉고, 섰을 때에도 바르게 서고, 걸어갈 때에도 항상 바르게—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든지, 너무 뒤에로 요렇게 제치고 걸어간다든지, 좌우로 삐뚤어지게 이렇게—앉을 때 걸어갈 때도 역시 그런 거여.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는 거여. 자세만 봐도 ‘아 저 사람이 인격자다, 아니다’ 또 ‘저 사람이 지금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느냐,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런 것도 알 수가 있는 거여.
아무리 속에 지식이 들어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세가 삐뚤어져 가지고 턱을 내고 입을 헤벌레하게 벌리고, 눈은 생선 눈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존경할 수가 없어.
비록 속에는 별로 지식이 든 것이 없고 그렇지만 자세만 단정(端正)하니 이렇게 앉었어도 그 사람을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여. 특히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는 어디를 가나 어디서나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하는 거여.


사리불(舍利弗)과 목련존자(目連尊者)는,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왼팔이고 좌면 제자(左面弟子)고, 사리불은 부처님의 오른팔 노릇을 한 수제자인데, 원래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외도(外道)의 제자로서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린 외도로서는 큰 사람이여.
큰 종장이였었는데 그 스승이 죽고, ‘우리가 바른 스승을 찾아가자’ 누구든지 먼저 바른 스승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 연락을 해 주기로 하고 계속해서 나름대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왕사성(王舍城)에를 들렸는데, 참 자세(姿勢)가 바르고 그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거룩해요.

그분[아설시(阿說示), Aśvajit, 마승(馬勝)]이 바로 이 오비구(五比丘) 중에 한 분이였었는데, 너무나 그 자세도 장부(丈夫)답고 흥건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눈매가 아주 바른, 아주 그 눈매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맑고 안정이 되고 한 모습이 너무너무 ‘야! 틀림없이 이분은 훌륭한 분이다, 이분은 과연 누굴까? 이분에 스승은 누굴까?’
그래 다가가 가지고 물어보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승이란 말을 듣고 바로 그길로 따라가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지혜의 눈을 얻었고 또 목련존자한테 알려서 같이 그 제자들 백 명씩의 제자를 거느리고 부처님께 가서 제자랑 다 같이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부처님 왼팔—부처님께서 오비구(五比丘)를 제도하시고 머지않아서 삼가섭(三迦葉)을 제도하고 모다 그래 가지고 그 1,250인의 제자를 그렇게 얻어 가지고 그렇게 참 불법(佛法)을 펴셨는데, 그렇게 펴게 된 그 동기의 하나가 부처님의 그 오비구 중에 한 사람인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훌륭하고 거룩했기 때문에 사리불과 목련존자라고 하는 훌륭한 제자를 얻은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속은 시커먼 도적(盜賊)의 마음을 가지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맑게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항상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信心)으로 정진을 해 나가면 자연히 자세가 바르게 되겠지만, 우선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바르게 정진하는 법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하니 우선적으로 자세부터 바르게 함으로써 차츰차츰 바른 정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를 이렇게 바르게 하는 것은 너무 몸을 자지바지하니 뒤로 하고 목에다 힘을 주고 그러라는 것이 아니여. 바르게 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고, 목의 힘을 빼고, 우리 뭐 조끔 자기가 권리가 좀 있고 돈을 좀 벌면 ‘아주 목에다 힘준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러한 것은 자세를 바르게 한 것이 아니여.
단정(端正)하게 몸을 갖되 힘을 빼야 하거든. 어깨의 힘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눈도 선명하게 평상(平常)으로 뜨되—눈알이 왔다갔다 눈이 깜빡깜빡깜빡하고, 눈알이 좌우로 전후좌우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게 못쓰는 거여. 눈은 따악 안정이 되고, 그러니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거든.


<올바른 호흡>

그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해야 해. 숨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은—보통 우리는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마는 단전으로 호흡을 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게—너무 터지도록 들어마시란 게 아니라,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까지 가도록 이렇게 눌러 대는 것이 아니고, 숨은 들어마시면 이 허파까지 밖에 안 들어가는 것이여. 안 들어가지만 의식적으로 배만 약간 볼록하게 만들면 되는 거여.
들어마신 호흡이 거까지 가도록 눌러 대면 못쓰는 거여. 그러면 여그 오목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나중에는 못쓰는 거여.

답답하고 소화도 안 되는 것이니까, 들어마신 호흡을 거까지 밀어넣을라고 하지 말고, 스르르르~ 하니 자연스럽게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丹田)만 약간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게만 하는 거여. 그것을 잘 알으셔야 돼.
그래 가지고 8부쯤 들어마셨으면 잠깐 정지했다가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만 하면 되어요.

그래서 들어마시면 차츰차츰차츰 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배가 나온다니까는 이만큼 나오도록 그렇게 맨들라고 하면 안 돼. 포태(胞胎)해서 열 달쯤 된 것처럼 그렇게 배를 맨들라는 게 아녀요. 조끔만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라는 거여. 그것을 착각하면 그 단전호흡을 하다가 병났다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기분상으로만 조끔 볼록하게 하고 약 2cm나 3cm만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2cm나 3cm만 조끔 홀쪽하게 맨드는 거여. 그래서 배가 나왔다 또 정지했다가 또 홀쪽했다 이거여. 그놈 따라서 숨이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게.

이것은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건강에도 좋고, 피로 회복하는 데에도 좋고 또 뭐 신경을 너무 써서 열이 오르거나 혈압이 오르거나, 기운이 위로 오른 것을 내리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것이여요.
또 학생들 공부하는 데에도 항상 공부 시작하기 전에도 하고, 공부하면서도 하고, 공부하고 나서 쉬는 시간에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것이여. 가정주부도 좋고 또 회사에 나가는 사람도 좋고, 운동선수도 이것을 하면 대단히 좋은 거여. 피로 회복이 되고 혈액 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안정이 되고 하니까 대단히 좋은 것이고.

그런데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요가에서 하는 법도 있고, 신선도(神仙道)에서 하는 법도 있고, 또 사회에는 여러 가지 단전호흡법을 전문으로 가르키는 도장도 있고 합니다마는, 다 그 나름대로 장점이 다 있습니다.
몸에 특별한 병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도장에 나가서 그런 전문가한테 배워서 그 병을 나수는데 그런 호흡을 하는 것은 혹 가(可)커니와—참선하는 사람은 그러한 호흡법을 하다가는 언제 화두(話頭)를 드냐 그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러한 호흡법보다는 지끔 산승(山僧)이 말한 간단하고도 쉬운,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아무리 해도 아무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이런 간단하고도 쉬운, 계속해서 해도 조끔도 부담스럽지 않는 이러한 호흡법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은 분은 알아듣지마는, 또 그걸 잘 못 알아들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이 테잎(tape), 녹음 테잎(錄音tape)이 있으니까 그 테이프를 구득(求得)을 해서 그래서 그걸 가지고 여러 번 들으면서 하면 호흡하는 법,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법, 또 화두를 바르게 드는 법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의심>

화두는,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들어마실 때도 ‘이뭣고?’요, 머무를 때도 ‘이뭣고?’요, 내쉴 때도 ‘이뭣고?’ 항상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항상 끊어지지 않고 독로(獨露)해야 하지만, 초학자는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해보시라 그 말이여. 한결 화두가 잘 들어져.

처음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 한 달 두 달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뭐 ‘이뭣고?~’ 한 번 해 놓고, 호흡이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섯 번이고 몇 번 쉴 동안에도 ‘이뭣고?’ 한 번 해서 있는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면 되는 거여.
꼭 3년 10년을 두고도 계속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뭣고?’ 한 번 딱! 든 화두로 하루 종일 그 화두만을, 알 수 없는 의심이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따~악 거기에 있도록 그렇게 관해 나가야 해.

관(觀)이라 하는 것은 그것도 일종에 생각인데,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생각 없는 생각, 생각하면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생각이 이렇게 이렇게 왔다갔다하는데 움직이는 것인데, 관(觀)은 움직임이 없는 생각, ‘이뭣고?’ 했을 때 전후좌우 앞뒤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따~악 있는 거여. ‘이뭣고?’ 한 뒤에 그 남은 그—그 생각이 앞뒷이 다 끊어졌거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면 의단만을 따~악 관조(觀照)해야지, 의단이 있는 데다가 ‘이뭣고? 이뭣고?’ 하고 자꾸 덮치기로 하는 것이 아니여.

참 수백 번 들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처음 오신 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잘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잘 들 수 있으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여.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허고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리요
나무~아미타불~
무량겁래무차일(無量劫來無此日)허니  장부심지지임마(丈夫心志只恁麽)니라
나무~아미타불~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난득양신가허과(難得良晨可虛過).
여러분께 권하노니 깊은 신심으로 이 묘한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의 화두(話頭)를 참(參)해서 얻기 어려운 이 감격스러운 이날을, 이 좋은 날을 어찌 헛되이 지내리요.

오늘 여러분은 계(戒)를 받고 또 최상승 활구참선의 화두(話頭)를 탔고 또 불명(佛名)을 타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죄가 소멸하는 날, 부처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난 날입니다. 오늘 이 시간과 같은 이 마음으로 앞으로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1초 1초를 그렇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량겁래(無量劫來)로부터 오면서 어찌 오늘날과 같은 날이 그렇게 흔했겠습니까. 물론 과거에도 이러한 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또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우리 사부대중이 같이 만났을 것입니다마는, 이런 날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닙니다.

이날에 이 마음이 바로 장부(丈夫)의 마음입니다. 비록 여자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이 시간을 기해서 여러분도 장부가 되었습니다. 최상승법을 믿고, 계를 받고, 화두를 타고, 불명을 받게 되었으니, 거기에는 남녀상(男女相)이 없어.
이름하여 그것을 대장부(大丈夫)라 하느니, 불자(佛子)로서의 대장부 해탈장부(解脫丈夫)가 되었으니 영겁을 두고 우리는 대장부로서 생사요달(生死了達)을 하고, 생사요달한 장부로서 일체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은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그 유래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아까 말씀드린 목련존자(目連尊者), 목련존자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인데, 그 신통제일인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생전에 지은 죄로 아귀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고 있어. 목련존자가 신통을 얻어 가지고 어머니 계신 곳을 살펴보니 아귀도에서 그 배고프고 목마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어.

그래서 자기 신통술로 그것을 아무리 그 아귀도에 가 가지고 시원한 물을 드려도 불로 변해 가지고 목이 훨훨 타고, 밥을 갖다가 드려도 목이 콱 맺혀서 불이 나 가지고 더 고통을 받어. 도저히 자기 신통으로도 다 하지 못하니까 부처님께 여쭈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그 모친을 구제(救濟)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너의 신통술로도 안 되는 것이다. 백중날 모든 대중이 해제(解制)를 할 때에 그 대중은 청정한 몸과 마음으로 수행을 해서 다 도심(道心)이 맑고 청정해졌으니 부처님과 그 대중들께 대중공양(大衆供養)으로 백 가지 과일과 맛있는 음식으로 대중공양을 올리면 그 대중스님네 공양을 올린 공덕(功德)으로 너의 어머니가 그 아귀도에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것이다“

그래 가지고 목련존자는 그길로 가서 탁발(托鉢)을 해 가지고 많은 음식과 과일을 마련을 해 가지고 부처님과 대중께 백중날 대중공양을 올려 가지고 그 어머니를 그 고통으로부터 제도(濟度)를 했습니다.
그 뒤로 해마다 백중날은 그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대중공양을 올리고 또 그 남은 음식을 선망부모(先亡父母)에게 하는, 그런 부모를 천도(薦度)하는 그런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주욱 내려오고 있습니다.

요새 잘 모르는 분들은 ‘선망부모를 천도한다’ 해 가지고, 부처님께는 소홀히 올리고 대중스님께는 공양을 별로 안 올리고, 영단(靈壇)에다만 이렇게 쌓아 올린다. 그건 백중날의 그 근본 뜻을 잘 모르면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영단에도 올린 것도 좋지마는, 어쨌든지 부처님과 대중공양에 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정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는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법당(法堂) 가득히 이렇게 오시고 내일은 이 핑계 저 핑계하고 혹 안 오실라고 하신 분이 있을란가 모르지만, 정말 내일은 선망부모(先亡父母), 그 선망부모가 아니면 오늘날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까?
내일, 물론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다 모셨을 것이고 안 모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선망부모는 백중날 ‘어느 자손이 나를 천도해 줄 것인가?’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친구 따라서 와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자손들이 와 있는데 내 아들 딸 며느리는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정성으로 그분도 역시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스님네의 정진하신 그 정진력과 신심으로 그분도 좀 얻어 잡숫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속으로 섭섭하시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니 오늘 오신 분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또 여러분의 가족이나 일가친척 사돈네까지라도 여기 뭐 준비할 것 걱정하시지 말고 어쩠든지 많이 오셔서 모다 참석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불명(佛名)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 노나 드릴 테니 신청만 해 놓고 안 찾아가시면 그것이 이렇게 쌓이게 되니까 반드시 그 불명을 찾아가시기를 부탁을 하고, 그전에 신청을 해 놓고 안 가져가신 분도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허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니라
나무~아미타불~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하고, 먹구름이 일어나 문득 우뢰가 천하에 진동하고,
백우시종야외래(白雨時從野外來)라. 작달비 같은 비가 들로부터서 몰려오는구나.

사위행인세염열(似爲行人洗炎熱)하고  우종귀로정진애(又從歸路淨塵埃)라.
길 가는 나그네는 그 비를 맞고 그 더웁고 피로한 것을 비로 인해서 깨끗이 식혀 버리고, 돌아가는 길이 깨끗하게 씻어져서 문지(먼지)도 안 나고 좋구나.

지끔 온 세상은 이렇게 먹구름이 일고 우뢰가 치는 거와 같습니다. 세계 도처에는 온갖 무서운 무기를 장만하고 그것을 국경에다가 모다 하고 이웃나라를 침범하고 사람이 죽고, 지금 우리나라도 삼팔선(三八線) 모다 뭐 양쪽 뭐 총리 회의가 있다고 모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여전히 무력(武力) 대치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걱정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우리 국내에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온갖 일이 마치 먹구름이 일고, 모다 폭풍우가 일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나쁘게 보면 잠을 못 잘 지경이고 그렇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꼭 어둡게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고,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그것을 그렇게 우리가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먹구름이 일라면 일어라. 뇌성벽력이 일어날라면 일어나라. 작달비가 쏟아질라면 쏟아져라’ 더위를 식히는 것으로 우리는...
그럴 때에 우리는 신심(信心)을 가다듬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우리의 자성을 갖다가 반성하고 그래 가지고 더 무상(無常)을 깨닫고 신심을 더 돈독히 해서 정진을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서 우리의 앞길은 보다 더 밝게 열려 나갈 것이고, 집안도 보다 더 행복하게 나갈 것이고, 사회 · 국가 · 세계도 평화의 방향으로 열려 나갈 것입니다. (40분18초~1시간20분33초) (끝)





[법문 내용]

육사청(六師請) / (게송)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 / 화두·불명·십선계 법회 / 계(戒)라고 하는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우리 불자(佛子)의 목적지에 가는 안전하고, 빠른 길 / 십선계(十善戒) / 제 생각만 옳다고 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이것도 탐욕심 / 대승계(大乘戒).

연비(燃臂)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 / 나선 비구의 ‘배에다 큰 돌을 싣는’ 비유 / 생사윤회의 원인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 계(戒)로 인해서 바른 선정(禪定)을 얻을 수가 있고, 바른 선정을 인해서 지혜(智慧)를 얻는 것이다 /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올바른 자세> <올바른 호흡> <올바른 화두 의심>을 잘하면 그 속에 계(戒) · 정(定) · 혜(慧)도 다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모든 기초가 다 완성이 되는 것이다.

(게송) 권군심심참묘화(勸君深心參妙話)~ /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지옥고와 아귀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 / (게송) 흑운재기홀문뢰(黑雲才起忽聞雷)~ / 모든 어둡고 걱정스러운 일을 참선 수행인은 적극적(積極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최상승적(最上乘的)으로 그것을 보고 상대해 나가야 겄더라.


계(戒)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여. 목적지를 향해서 반드시 좋은 길을 택해서 가야 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그리고 바르게 갈 수가 있고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여.

우리 불자(佛子)의 갈 목적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그럴려면은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할려면은 계(戒)를 가져야겄더라.

마음으로 인과를 안 믿는 사람, 이것은 바로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로서는 가장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여.

우리 불자(佛子)에게 해당되는 이 탐심은 비단 그러한 남의 물건을 탐심을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거여. 이것은 참 무서운 탐욕이여.

구경(究竟)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떤 조끔 마음이 고요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공안(公案)에 대해서 짐작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구경(究竟)에 깨달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소견을 꽈악 속에다 오그려 쥐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 이런 것도 탐욕이여.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자기가 그러한 얻은 소견(所見)이 분명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줄 알건마는, 그래도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애써서 얻은 소견이라 해 가지고 그것에 대한 탐욕심을 내 가지고 따악 오그려 쥐고 있으면 그것도 못쓰는 거거든.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여지없이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돼. 그래 가지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순수(純粹) · 무구(無垢)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여.

십선계만 지켜 나간다면 이 아무리 지금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온 세계가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래지만, 그렇게 되기를 진실하게 원한다면 우리 불자부터 이것을 실천해 나가자.
그래서 오늘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상 이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설하셨고 또 오늘도 이 대승십선계를 이렇게 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비(燃臂)를 받은 뜻은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참회한 것입니다. 연비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다 소멸이 되고, 이제 금방 갓난애기처럼 몸과 마음이 청정해졌어.
앞으로 죄를 짓지만 아니하고, 이제부터 받은 화두(話頭)를 가지고 열심히 정진해 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량억겁(無量億劫)의 생사윤회는 무엇으로부터서 원인(原因)한 것이냐 하면은 우리의 ‘한 생각’ 때문에 무량억겁의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그동안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하느냐?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느냐?‘는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간절한 화두(話頭) 한 생각이 우리의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것이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을 올바르게 하면 정(定)도 계(戒)도 제절로 다 그 가운데 갖추어지게 되느니라. 화두(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한 사람이 어떻게 살생을 하며, 어떻게 도둑질을 하며, 어떻게 사음을 할 것인가. 그러니 참선 하나만을 올바르게 여법하게 잘 해 나가면 계는 지킬려고 안 해도 제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戒)는 그릇에다 비유하고,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물이 그 그릇에 온당하게 안정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물이 온전하게 안정이 되어야 그 물에는 하늘에 떠 있는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날 것이다.
지혜(智慧)의 달이 나타나게 하고자 하면은 선정(禪定)의 물이 맑고 조용해야 하고, 선정의 물이 맑고 고요할라면은 계(戒)라고 하는 그릇이 온당해야 한다.

그래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은 부득이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하자니까 셋으로 노나서 말하는 것이지, 원래는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동시(同時)여.
바른 계(戒)를 지킬라면은 정(定)과 혜(慧)를 닦아야하고, 바른 정(定)을 얻을라면은 계(戒)와 바른 혜(慧)를 가져야 하고, 바른 혜(慧)를 얻을라면은 바른 정(定)과 바른 계(戒)가 밑받침이 되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바로 붙이나 꺼꾸로 붙이나 동시여, 이 세 가지는 동시다.
이 계(戒) · 정(定) · 혜(慧)를 동시에 잘 닦을라면은 참선(參禪)을 잘해야 한다

가부좌나 반가부좌,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면 어쨌든지 철저하게 해 놓아야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기본자세를 항상 시간만 있으면 해야 하는 거여.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시간씩, 한 시간이 부득이해서 못할 때에는 다문 30분이라도 하고, 30분을 할 수 없을 부득이한 때는 단 10분이라도 따악 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날입니다. 백중날은 인도 범어(梵語)로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우란분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 꺼꾸로 매달려서 고를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저 아귀도(餓鬼道)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일은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 날이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서 그 고통을 쉬는 날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51~475)2023. 3. 16. 15:20

 

 

(No.456)—1991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71분)

 

(1) 약 40분.

 

(2) 약 31분.


(1)------------------

응물허령본주인(應物虛靈本主人)이여  상종출입매사인(相從出入昧斯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경행좌와수천변(經行坐臥雖千變)이나  멱비견래지일인(驀鼻牽來祇一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응물허령본주인(應物虛靈本主人)이여  상종출입매사인(相從出入昧斯人)이라.
모든 물건을 응(應)해서 허령(虛靈)해. 걸림이 없고 신령스러운 본주인(本主人)이여. 상종출입매사인(相從出入昧斯人)이다.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좋고 나쁜 것을 생각하라. 이 물(物)에 응(應)해서 나가고 들어가고 한 거기에서 사람을 매(昧)해 버리더라.

그렇게 신령스러운 본주인이 있건마는, 나가고 들어가는 데에서 매(昧)해 버려. 한 생각 일어날 때, 그 생각이 없어질 때 매(昧)한다 그 말이여.

경행좌와수천변(經行坐臥雖千變)이나, 걸어가고 앉고 눕고, 보고 듣고 그렇게 조화가 무쌍하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수 천년만년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미래로 치달을 수도 있어. 그렇게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신통을 부리지마는, 멱비견래지일인(驀鼻牽來祇一人)이여. 고삐를 잡고 착! 추켜들면 다못 본주인(本主人) 그 한 사람이더라 그 말이여.

그놈이 착한 일도 하고, 악한 일도 하고, 참! 한 생각 잘 돌리면은 천사(天使)와 같기도 하고, 한 생각 어떻게 삐끗 비끄러지면은 찰나간(刹那間)에 독사가 되기도 하고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그놈이 터억 한 생각을 원망을 품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면은 찰나간에 지옥으로 떨어지고, 한 생각 터억 용서를 하고 돌이키면은 금방 천당에도 올라간다 그 말이여. 그것을 이 게송에서는 본주인(本主人)이라, 나의 본래(本來) 주인공(主人公)이다.

온 세상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고,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고, 마치 도회지(都會地) 한 가운데에 차가 다니고 사람이 다니고 떠들고 웃고 울고 하는 장바닥 속 같애. 한쪽에선 무엇이 좋아서 춤을 추는데,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고 망했다고 울고불고한다 그 말이여.
이 삼계(三界)가 온통 죽이고 살고, 죽임을 당하고 망하고 흥하고,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서 뒤죽박죽이 된 것이 마치 큰 바다에 파도가 잘 날이 없는 거와 같애. 산더미 같은 큰 파도가 일어난가 하면은...
이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옛날이라고 해서 조용하고 지금이라고 해서 꼭 시끄러운 것도 아니여.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시끄럽고 힘들고 어려우냐?’
전부가 사람들은 ‘나라가 정치를 잘못해서 그런다, 사람들이 모두가 다 탐심(貪心)을 부리고 욕심을 부리고 진심(瞋心)을 쉬지 못해서 그런다’고 전부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그런다고 생각하지, 자기가 잘못해서 그랬다고 생각한 사람은 참 드물다 그 말이여.
이러한 모든 허물, 책임을 자기 아닌 다른 사람한테 돌리는 한(限)은 세상은 좋아지지를 안 해. 조용해지지를 않는 법이여.

육도, 삼계육도(三界六道)가 벌어져서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끊임없이 돌고 있는데, 몇 억겁(億劫) 전부터서 시작해 가지고 몇 억겁 뒤까지 처음과 끝이 없어. 순전히 그 책임이 자기한테 있고, 그 원인이 자기한테 있어.

세상이 말세(未世)가 되었다는 둥, 오탁악세(五濁惡世)가 되었다는 둥, 세상이 어쩔라고 이런가 모르겠다고 사람사람이 지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 걱정, 사회 걱정, 세계 걱정, 걱정 아니한 사람이 없는데.
모다 미국 소련에서 핵무기를 감축한다는 둥 모다 그러지마는, 그 뭐 참 좋은 소리지. 좋은 소리기는 하나, 온 세계가 다 그렇게 된다면 몰라도 미국하고 소련에서 핵무기를 좀 감축한다고 해서 세계 평화가 금방 오는 것이 아니여.
세계 평화가 오기에는—그 무기를 누가 만들었어? 사람이 만들었거든. 그 무기를 만든 사람, 무기를 만들게 하는 사람, 왜 또 무기를 만들어야 하느냐 그 원인을 잘 생각해보면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그 원인이다 그 말이여.

지금 온통 사치—뭐 ‘과소비(過消費)다’ 또 ‘외제 물품을 서로서로 쓸려고 한다’ 다 야단들이지만 이것이 다 어디에서 그런 것이 일어난 것이냐 그 말이여.
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과소비도 하게 되는 것이고, 사치도 하게 되는 것이고, 향락 풍조가 확산이 되는 것이고, 외제 물품을 선호하는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근검하고 절약하고, 그렇게 해 나가면 자연히 건전한 사회 분위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이여.

말로는 다 그리한다고 하면서 조금도 좋은 방향으로 가는 기색이 전혀 없어. 이것이 ‘다른 사람이 다 그런다’고 그러고, 그 ‘책임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우선 나부터 각자(各自), 김가나 이가나 박가나 각자 집집마다 자기부터서 한다면 남보고 이래라저래라 할 것도 없고, 세상을 한탄할 것도 없어. 자기부터 당장 오늘부터 하면 온 나라가 일시에 될 것이다 그 말이여.

원래 속이 가난한 사람은 겉으로 가난한 것을 보이기를 싫어해. 진짜 속이 알부자는 구태여 밖으로 부자인 척 꾸밀 필요가 없는 거고, 지식도 정말 속으로 깊은 지식 있는 사람은 어디 가서 자기가 유식한 체하고 그 뽐내지를 않는 법이여.
별로 지식이 없는 사람이 지식 있는 것처럼 문자 나부래기 쓰고 유식한 척 하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이 창피하니까 그것을 가리우기 위해서 옷도 일부러 좋은 옷을 사서 입고, 좋은 집을 살라 그러고, 좋은 차를 굴릴라고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속 알부자는 넉넉하니까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고, 지식이 속으로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은 구태여 자기가 유식한 척 그럴 필요도 없고, 남을 업신여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그런데 실지로 돈이 없어도 구태여 가난한 것이 별로 창피할 것이 없고, 속으로 별로 지식이 없어도 남에게 유식한 척 할 필요가 없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면 가난해도,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그렇게 창피할 것도 없고, 별로 유식하지 못해도 무식한 것이 그렇게 창피하지 안 해. 왜 그러냐?

참나를 찾는, 참나를 찾는 사람은 가난한 것도 별로 그렇게 창피할 것이 없어. 항상 마음이 넉넉해. 부자로 산 것도 그렇게 부러울 것도 없고, 가난한 것도 창피할 것이 없고.
마음 닦는 공부, 참선 공부를 아니한 사람은 꾀 부자이면서도 노상 마음이 가난해 가지고 한도 끝도 없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낸다 그 말이여.

우리나라 사람이 한글만 알아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고 편지도 쓰고, 어디서 한글 편지가 오면 읽을만 하면 그만하면 족한데, 그러기 때문에 설사 낫 놓고 기역자를 몰라도 참선을 해서 자기 마음을 닦은 사람은 그것도 별로 창피할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계진로여해활(三界塵勞如海闊)한데  무고무금요괄괄(無古無今鬧聒聒)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진향자가심념생(盡向自家心念生)이라  일념불생도해탈(一念不生都解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계진로(三界塵勞)가 바다와 같이 넓고 넓고 한이 없어. 무고무금요괄괄(無古無今鬧聒聒)이여. 예나 지금 할 것 없이 그 시끄럽고 복잡해. 어리석은 아무것도 아닌 콱 맥힌 사람들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 가득차 가지고 떠들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 그 말이여.
이 온 세계가 이렇게 말세적인 현상을 노출해 가지고 나라와 나라는 서로 무서운 무기로써 참, 전쟁 준비를 하고, 사회는 온통 탐심으로 자기만 잘살라고 그러고. 이렇게 세상이 남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욕심만을 챙겨 가지고 온 세계가 전쟁, 탐진치 삼독의 전쟁의 도가니 속이다 그 말이여.

그 원인이 다 자기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여.(盡向自家心念生)
한 생각만 돌이키고, 한 생각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해탈 세계가 될 것이다.(一念不生都解脫)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활구참선하는 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는데, 참선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10년 20년 애써서 정진을 하는데 ‘수마(睡魔) 때문에 공부가 잘 안된다, 번뇌마(煩惱魔) 때문에 공부가 잘 안된다, 몸에 병마(病魔) 때문에 공부를 실컷 못한다, 또 다른 사람 때문에 공부에 장애가 있어서 못한다’
전부 이렇게 공부해 나가는 데 자기는 발심(發心)을 해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라고 무던히 애를 쓰는데 여러 가지 형태의 그 마장(魔障) 때문에 참! 공부를 마음껏 못하고, 도를 통하지 못한다고 많은 도반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참 고민을 하고 한탄을 하고 또 호소를 해옵니다.

원래 마구니, 마(魔)라고 하는 것은 ‘인명(人命)을 죽게 하는 것이다‘ 또는 ’장애다‘ 또는 ’요란하게 한다, 파괴한다’고 하는 범어(梵語) māra 라고 하는 말에서 이 마(魔)라고 하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마(魔)의 왕(王)은 파순(波旬)인데, 마왕 파순이 누구냐 하면은 욕계(欲界) 제육천(第六天)에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궁의 왕이 팔만사천 마구니의 왕이여. 그리고 그 마왕 이외의 마왕의 권속들은 그것이 모두 ‘마의 백성’이다 그래서 마민(魔民)이라 그러는데.

그 마(魔)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을 하셨느냐?
우리가 그 마(魔)에 대해서 철저하게 달관(達觀)을 해 버려야 그 마구니를 우리가 조복(調伏)을 받을 수가 있고, 항복을 받을 수가 있고 그래서 우리가 도업(道業)을 참 성취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파사론(破邪論)』에 ‘어떠한 것을 이름하여 마(魔)라고 합니까?’ 여쭈니까, 대답하기를 ‘혜명(慧命)을, 지혜의 목숨을 끊는 것을 마(魔)라고 하느니라’
그리고 마(魔)는, 마에 걸리면은 항상 방일(放逸), 방일을 하고, 그래 가지고 자신을 해치기 때문에 마구니에 걸리면은 방일을 하게 되어. 방일이라 하는 것은 해태(懈怠)거든.
공부하는데 일념으로 해 나가지를 못하고, 이 마(魔)에 걸렸다 하면은 방일하고 해태굴(懈怠窟)에 해태하게 되는 거여. 한눈을 팔게 되아. 그래서 결국은 지혜의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마구니라고 한다.

또 『지도론(智度論)』에는 제법실상(諸法實相), 제법실상의 경지에 머물러 있어야지, 그것에서 어긋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면은 벗어나는 모든 나머지 일체법은 다 그것이 마구니다.
내 도 닦는 것을 방해하는 거, 물론 그 방해하는 것을 분류하자면 사람, 모든 일, 모든 물건, 모든 현상들, 인(人) ・ 사(事) ・ 물(物) ・ 현상이 전부 마(魔)가 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마(魔)는 3마, 4마, 5마, 모다 또는 10마, 광범위하게 말하면은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마구니가 있다 그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열 가지만 든다면 (첫째는) 오온마(五蘊魔)거든. 오온마라는 것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우리의 다섯 가지 오음(五陰) 또는 오온에 중악(衆惡)으로 인해서 우리의 정도(正道)를 갖다가 방해하고 혜명(慧命)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번뇌마(煩惱魔)에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과 같은 그런 번뇌, 번뇌에 미혹해 가지고 거기에 빠져 가지고 결국은 정도를 막고 또 혜명을 끊는.
또 셋째는 업마(業魔)여.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사음하고 거짓말하고 하는 그런 업(業)으로, 그러한 등의 악업(惡業)으로 해서 결국은 정도를 장폐(障蔽)하고 혜명을 끊게 되는 거.

넷째는 마음의 마[心魔]여. 아만심(我慢心)! 아만심, ‘내가 잘났다, 내가 옳다, 내가 유식하다, 내가 부자다, 내가 잘났다’ 자기에게 어떤 장점이 있으면 그것을 마음속에 딱! 가지고 남을 업신여기고 짓밟고, 아만심이여. 그것도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마구니다 그 말이여.

아만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좋게 해석을 해서 자기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자기는 참 ‘자존심을 가지고 참 떳떳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참선하는 사람은 ‘나야말로 참 발심한 사람이요, 나야말로 계행이 청정한 사람이요, 나야말로 공부 밖에는 모르는 청정한 수행인이다’ 그 생각을 떠억 가지고 있으면, 참 그것을 꼭 죄(罪)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그것도 공부에 크게 방해가 되는 것이고, 도를 성취하는데 막대한 마구니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다섯째는 ‘죽을 사(死)’ 자, 사마(死魔)여. 사람의 목숨은 한계가 있어 가지고 결국은 늙어서 병들어 죽어버리면 도(道)를 닦지 못하고 지혜 목숨을 해롭게 한다 그 말이여.
사람이 죽는 거야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지마는 그 죽음도 십마(十魔) 중에 다섯 번째 꼽히는 무서운 마구니의 하나여.
그래서 죽음을 우리는 면할 수도 없고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지만, 언제 죽을 줄 모르는 그러한 무상(無常)한 몸뚱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지금 이 시간, 이 찰나찰나를 무섭게 그리고 알뜰히 단속해서 공부를 지어 나가야지 잠깐 한눈팔면 이 무상살귀(無常殺鬼)의 침범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거거든.

여섯째는 천마(天魔)인데, 아까 말씀한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왕(王)이여. 가지가지 방법으로 착한 사람, 특히 도(道)를 닦고자 하는 사람, 또 도를 머지않아서 도를 성취할 사람, 마지막 도를 성취한 그 찰나 전까지 갖은 방법으로 방해를 치고 유혹을 하고 그런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실 때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얼마나 방해를 쳤냐 그 말이거든.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도 닦는 사람에게 갖은 방법으로 방해를 치는 것이여.

이 타화자재천 그 마왕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도 닦는 사람을 방해를 치고 착한 사람을 방해를 치냐 하면은 도를 이루게 되면, 도인(道人)이 하나 생기고 부처님이 생기게 되면 자기네 설 땅이 없어져. 그러기 때문에 도를 닦지 못하게 방해하고, 도를 성취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이거든.
도둑놈이나 사기꾼은 세상이 질서가 잘 잡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여. 밝은 낮을 싫어하고, 좀도둑도 낮에는 잘 안 하거든, 밤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거든.

(일곱째는 선근마善根魔)

여덟째는 삼매마(三昧魔)여. 선정(禪定)의 마(魔).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여법(如法)하게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해서 공부를 해 나가면 차츰차츰 번뇌 망상이 가라앉고, 마음이 조용해지고 깨끗하고 그렇게 되어 가면 정(定)에 들어가거든.
삼매에 들어가는데, 그 삼매의 그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한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너무 그 경지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게 참 좋으니까 그놈에 탐착(貪着)을 하거든.

그놈에 탐착해 가지고 그 맑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그런 경지에 집착을 해 가지고 따악 그놈을 들여다보고 그놈을 즐기고 있으면 세상없이도 그 사람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것이여.
설사 그런 선정에 들어 가지고 오신통(五神通)이 난다 해도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니거든. 공부를 해서 이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면은 대부분 사람이 그놈에 빠지거든.

그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가 오더라도 거기에서 성성(惺惺)하게 화두를 들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하는데, 여간 신심, 여간한 용기가 없고서는 거기에 빠져 버려.
그런 경지에까지도 이르르기도 참 힘든 것인데, 그렇게 애를 써서 거기에까지 와 가지고도 그놈에 집착해 가지고—그 속에서도 화두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다 화두 들기가 싫어. 화두를 들면 그 고요한 경지가 깨지니까, 깨질까봐 두려워서 화두를 안 들고 고요한 데 처박히거든.

앞에 말한 일곱 가지의 마구니보다도 이 여덟 가지의 삼매마(三昧魔)는, 삼매의 마구니는 더! 무서운 것이다 그 말이여.

아홉째는 선지식마(善知識魔)여. 우리가 도를 닦아서 참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선지식이 되었다 하더라고 그 자기가 얻은 그 법이 ‘얼마나 애를 써서 그 경지를 얻었고 그 법(法)을 깨달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아까워서 남한테 설할 수가 있느냐’ 이래 가지고 그 자기가 깨달은 그 법에 간탐심(慳貪心)이 나 가지고 입을 꽉 다물고 절대 남에게 일러주지 않고, 자기 혼자 딱! 그것만을 스스로 그걸 지켜가는 거여.

이걸 선지식마라 해서, 이것도—우리가 도를 닦는 것은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구경(究竟)의 목적이고, 그래서 우선 처음에 자기가 깨닫고, 또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고, 깨달은 사람으로 이 세계가 가득차게 하는 자각(自覺) ・ 각타(覺他) ・ 각만(覺滿)의 대원력(大願力)이 바로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수행자가 가져야 할 원(願)인데, 자기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계도(啓導)하지 않는 이것은 선지식마(善知識魔)라 하는 것이여.

그 열째 번에는 보리심마(菩提心魔)여. 보리심,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에 입각해서 그것을 수행을 해 가지고 지혜를 얻었어. 그 자기의 지혜에 집착하는 거여. 자기만이 이 법을 깨달았다. 자기가 깨달은 그 각견(覺見)에 집착을 해. 이것도 참 무서운 거여.
『금강경』에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을 때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하면은 벌써 이것이 아견(我見) ・ 인견(人見) ・ 중생견(衆生見) ・ 수자견(壽者見)에 떨어진 것이라 이것은 아라한이라 할 수가 없다」
보살도 역시 마찬가지여. 우리가 도를 닦아서 깨달았더라도 깨달은 자기의 그 각견(覺見)에 집착을 하면 이것도 참! 찰나간에 이것이 마구니에 포섭이 된 것이다.

이상 말한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 가운데에 대충 대표적인 것을 골라서 이렇게 열 가지 마[十魔]를, 이것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화엄경』에 이 말씀하신 것인데.
우리 정법을 믿고 공부해 나가는 법보재자(法寶弟子) 여러분은 이 대표적인 것 말고도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 그놈을 우리가 항복을 받아야 하고, 그놈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말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이 십마(十魔), 팔만사천 마구니에 걸려들지 않을 수가 있느냐?

이것은 치마법(治魔法), 마구니를 퇴치(退治)하는 방법이라 해서 경전에는 삼귀의(三歸依) 불법승(佛法僧)—귀의불, 귀의법, 귀의승, 또는 오계(五戒) 모다 이러한 것으로써 자기를 마음을 무장을 하라, 또 반야경(般若經)이나 보살계본(菩薩戒本) 같은 그런 경을 지극정성으로 독송을 해라, 또는 염불(念佛)을 해라, 또는 대승방등(大乘方等) 경전에 있는 마구니를 다스리는 주문을 외워라. 경전에는 여러 가지 그러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이 언제 반야경을 읽고, 보살계본을 읽고, 대승방등경에 있는 주문을 외우고 있을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언제 어디서나 일분일초도 방심을 하지 말고, 방일(放逸)을 하지 말고, 바른 자세로 터억 허리를 쭉 펴고서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탁! 챙기면 그것이 바로 마구니를 퇴치하는 이 세상의 가장 수승한 방법이다 그거거든.

아까 읊은, 처음에 읊은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마구니가 우리를 침범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고삐를 착! 추켜들면 본래 주인(主人)이다. 화두로써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의단을 일으키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면 거기에 무슨 마구니가 감히 침범해 들어올 틈이 있겠느냐 이거거든.(처음~39분3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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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니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니, 아까 열가지 대표적인 마(魔)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마는 전부가 우리의 한 생각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마구니의 집이, 마구니의 무리가 딴 데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여. 편의상 여러 가지로 분류를 했지만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자기의 일념(一念)에서 나타난 거여. 자기의 일념으로 인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일어난 것이지.

공부가 행부지행(行不知行)하고, 행하되 행한 줄을 아지 못하고, 좌부지좌(坐不知坐)하고, 앉았으되 앉아 있는 중도 모르고 한 이러한, 이렇게 순일무잡하고 한 이러한 경지에 이르르면 이때를 당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타악! 엿보고 있다가 수심생설(隨心生設)하느니라. 마음 일어나는 그 마음 따라서 마구니가 좀을 타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의 앞에 육근문두에 억만겁(億萬劫)을 엿보고 있은들 우리가 마음 하나만 일으키지 아니하면 지가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고 ‘도(道)가 높으면 마구니가 성(盛)한다’는 말이 옛날부터서 전해 내려오는 말인데, 아까 말한 선지식마(善知識魔)라든지 보리심마(菩提心魔)라든지 삼매마(三昧魔)라든지, 도를 열심히 닦아서 경지가 높아질수록 이러한 무서운 마구니가 더 치성(熾盛) 치열(熾烈)하게 침범해 들어오는 법이다 그 말이거든.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해서 상당히 깊은 경지에 들어갔는데, 그 멧돼지, 참선하는 도중에 멧돼지가 나타났어. 그래서 그놈을 콧대를 갖다가 탁! 잡고 막 버티었다 그 말이여.
멧돼지란 놈이 나타나 가지고 막 물고 달라들라고 하니까, 그놈 멧돼지 코를 갖다가 붙잡고 몸부림을 쳤는데 한참 몸부림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까 지가 지 코를 잡고, 자기 코를 잡고 나부댔다 그 말이여.

『능엄경(楞嚴經)』 오십삼 변마장(辨魔障)에 보면 가지가지 그러한 마구니가 전부 그 원인이 자기 마음속에 먹고 있던 그 생각으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에 따라서 가지가지 마구니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 소상히 밝혀져 있어.

뭣한 사람은 식(識)이 맑아지니까, 사람을 보면은 ‘아 저 사람은 전생에 짐승이 사람이 되었다, 전생에 저 사람은 천상에 있다가 되었다’ 그것을 보면은 알아지기도 하고.
또 현실적으로 그 사람을 요래 보면은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먹고 있다’ 그런 것도 알고, 또 ‘저 사람은 간이 나쁘구나, 허파가 나쁘구나, 위장병이 있구나’ 그런 것도 알고, ‘저 사람은 몇 해 후에 무슨 병으로 죽겠구나’ 그런 것도 알고.

여기에 작년에 행자(行者)로 있다가 딴 데로 간 행자가 있는데, 그이는 사람을 이래 보면 ‘아, 저 사람이 지금 돈을 몇만 몇천 몇백 원 가지고 있구나’ 그것이 환히 보인다 그래. 그것이 보여서 뭐 할 거냐 그 말이여.
쓰리꾼이나 해먹을라면 모를까, 남의 호주머니 속에 돈 몇만 원 있는 걸 알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장의사나 해먹을라면 모를까 그 사람이 몇 해 후에 죽을 것 알아서 뭐 할 거냐 그 말이여.

미래사(未來事)를 훤히 알면 ‘신통이 났다, 숙명통이 열렸다’ 모다 그래 가지고 세상 사람들은 굉장히 그 사람을 참 무슨 큰 도인(道人)이나 된 것처럼 굉장히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뭘 좀 안다 하면은 아주 길이 미어지도록 점을 치러 다니고 모다 그러는데.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우리는,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인연 따라서 흥(興)하면 흥한 대로, 망(亡)하면 망한 대로, 성(盛)하면 성한 대로, 쇠(衰)하면 쇠한 대로 인연 따라서 분(分)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되, 항상 인과법을 믿고 자기의 분을 알아서 형편 따라서 사는 것 뿐이고.
그래도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들이 잘살기를 바라고 잘되기를 바라고 그러지, 누가 가난하기를 바라고 안 되기를 원할 사람은 없겠습니다마는 다 부자 되기를 바라진다고 해서 다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다 오래 살기를 바라지마는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런 허욕(虛慾), 탐욕을 내기보다는 ‘모든 것은 과거에 자기가 지어서 그렇게 받는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고, 세상을 살아가되 옳은 일이면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되, 그 가운데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을 해 나가야 하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고 허욕을 낸 사람은 끝없는 탐심(貪心)과 자기 뜻대로 안 되면은 끝없는 진심(瞋心)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모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자기 뜻대로 되면 잠시 좋아하나 그것이 영원히 좋은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것은 정말 인과를 믿고, 자기 공부에 충실하는 것이여. 서로서로 뜻이 같은 사람을 도반(道伴) 삼아서 같이 밀고 끌고 하면서 공부할 것, ‘이뭣고?’ 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어.


노거인지천(老去人之賤)하고  병래친야소(病來親也疎)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평생은여의(平生恩與義)가  도차진귀허(到此盡歸虛)니라
나무~아미타불~

노거인지천(老去人之賤)하고, 늙어감에 사람들이 다 귀찮하게 생각하고 천하게 생각해. 누가 이 세상에 늙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 있냐 그 말이여. 자기 뱃속으로 난 자식 손자도, 늙으면 다 냄새나고 잔소리하고 싫다고 다 싫어하거든.
병래친야소(病來親也疎)로구나. 늙으면 병들기 마련인데 병들면 친한 사람도 다 멀어져 버려, 소원(疏遠)해진다 그 말이여. 삼 년 병들면 효자도 다 불효자가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늙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고, 늙어서 죽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 말이거든.

평생은여의(平生恩與義)가, 평생에 서로 은혜가 있고 서로 의리를 지킨 사람도 늙어서 병들어서 죽게 되면 다 소용없어.
도차진귀허(到此盡歸虛)여.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 소용없이 되어버린다 그 말이여. 평소에 의리가 있는 사람, 평소에 내가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도 내가 잘살고 건강해야지, 내가 늙어서 병들어서 별 볼 일 없이 되어버리면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그 말이여.

지금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큼 기동(起動)할 수 있고, 이만큼 살 때 우리는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해서 도(道)를 닦아야 한다 그 말이여. 선방(禪房)에 와서 하실만 하게 되면은 어쨌든지 선방에 와서 도반들과 같이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고.
설사 집안 살림을 다 버리고 오실 형편이 못된다 하더라도 가정에서 일 보면서 행주좌와, 다닐 때나 머물러 있을 때나 앉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고 선불장(選佛場)이다 그거거든.

한 생각을 그럭저럭 지내는 사람은 하루 해가 그럭저럭 지내가고, 하루를 그럭저럭 지내간 사람은 한 달이 그럭저럭 지내가는 법이여. 그래가지고 일 년이 휘딱 지내가거든. 그럭저럭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말이여.


마구니는 머리빡에 뿔을 달고 나오는 것이 아니여. 마구니가 우리에게 침범해 들어올 때는 뭣과 같으냐 하면은—사기꾼이 사기를 칠 때에 ‘나는 사기꾼입니다’ 그러고 오는 법이 없어. 가장 정직한 것처럼, 가장 당신을 내가 도와줄라고 온 사람처럼, 천사처럼 꾸미고 내게 오는 법이여.
그러기 때문에 믿고 그 사람한테 의지하고, 도장을 찍어주고 그 사람 시키는 대로 하다가 큰 재산도 날리고 같이 쇠고랑을 찬 것이 아니냐 그 말이거든.

우리가 도를 닦아 나가는데, 마구니도 무슨 머리에다가 뿔을 달고 나와서 그래 가지고 ‘내가 마구니다’ 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천사(天使)나 불보살(佛菩薩)의 탈을 쓰고 가장 나를 아껴주고 위해 준 것처럼 그런 탈을 쓰고 내게 오는 것이다 그 말이여. 도 닦다가 마구니에 걸려드는 계기가 역시 그렇다 그 말이여.
그래서 도 닦는 사람은 일체처(一切處)에 무심(無心)해라. 일체처에 무심한 사람에게는 그런 마구니가 파고들 틈이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공좌동행세막지(共坐同行世莫知)하고  기인당면변봉이(幾人當面便逢伊)인고
나무~아미타불~
부앙시청증불매(俯仰視聽曾不昧)인댄  하수향외문거귀(何須向外問渠歸)리요
나무~아미타불~

공좌동행세막지(共坐同行世莫知)여, 함께 자고 함께 가고, 밤마다 그놈을 끌어안고 자고 아침마다 같이 일어나고, 걸어갈 때도 그와 같이 걸어가고, 일을 할 때도 그와 같이 일을 하고, 밥을 먹을 때도 그와 같이 밥을 먹고.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인 줄을 몰라.
기인(幾人)이 당면변봉이(當面便逢伊)인고. 몇 사람이 당면해서 바로 그를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 말이여.

부앙시청증불매(俯仰視聽曾不昧)인댄, 하늘을 보나 땅을 내려다보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더라도 그 찰나찰나에 매(昧)하지 아니한다면, 하수향외문거귀(何須向外問渠歸)냐. 어찌 모름지기 밖을 향해서 그를 찾으러 돌아다닐까 보냐!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손으로 무엇을 만질 때, 우리의 생각에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 성이 날 때, 슬플 때, 기쁠 때, 그 찰나찰나에 탁! 거기에 속지 말고, 화두를 떠억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새삼스럽게 찾을 것이 무엇이 있어? 무엇을 바래고 무엇을 기다릴 것이 있느냐!

마구니는 우리가 마음의 틈이 생길 때 천사(天使)가 마구니로 변하고, 우리가 한 생각 돌이키면 웬수로 알고 마구니로 알았던 존재들이 전부 다 불보살(佛菩薩)로 변하는 것입니다.

남이 내게 잘해 주기만 바래지 말고, 아들딸 손자가 내게 잘해 주기만 바래지 말고, 잘 해드리면은 좋고 편안한 데에 빠져서 도심(道心)이 해태심(懈怠心)으로 변할 확률이 많지만,
아들이나 며느리나 손자나 형제간이나 내게 잘못하고 섭섭히 해 줄 때 그것을 한탄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 섭섭한 그 생각을 돌이켜서 떠억 화두를 든다면, 그리고 발심(發心)을 해서 시간을 애껴서 분심을 내서 더 편치 않는 마음을 화두로 돌린다면 조금도 원망할 것도 없고 서운할 것도 없고.
‘아! 그래 내가 어서 속히 더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내서 도를 닦아야겠다’ 이렇게 한다면 미운 생각도 없어질 것이고 야속한 생각도 없어질 것이고.

세상이 이렇게 온통 시끄럽고 복잡할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를 한다면, 뭐 세상 야당이고 여당이고 누구고 복 짓고 애국심 있는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도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해 나가야 할 것이여.

발심해서 도 닦는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꿈이거든. 이 세상이 전부가 꿈속에서 일어나는 한 현상이고,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극장에서 막을 올리고 무대에서 배우들이 연극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거여.
국가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남의 집 일도 그렇고, 내 집 일도 그렇고, 내 자신의 신세도 알고 보면 잠깐 꿈꾸고 있는 것이고, 무대에서 내가 배우로서 지금 연극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여. 왜 그러냐?

하나도 영원성이 있는 것이 아니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깐 그렇게 그렇게 지나가는 거여, 잘되나 못 되나 흥하나 망하나.
우리나라 역사만 보더라도 단군 이래로 오천 년 동안 흥망성쇠(興亡盛衰)—삼국으로 노나졌다가, 다시 신라 통일이 되었다가, 또 고려 이조(李朝)로 와 가지고 왜정(倭政) 36년을 거쳐서 해방이 되어 가지고 오늘날까지 오는 거 가만히 역사를 뒤적거려 보라 그 말이여. 무엇을 믿을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신라 통일이 되었다고 좋아하지만,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으로 힘을 합해서 신라가 통일은 되었지만 그 바람에 압록강 이북 그 넓은 만주가 그때 떨어져 나갔다 그 말이여. 그때 신라가 통일을 안 하고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은 만주까지 전부 대한민국일런지도 모른다 그 말이여.
그때는 잘한 것같지마는 지내 놓고 보면 잘한 것이 끝까지 잘한 것이 아니고, 그때 잘못된 것 같지마는 또 세월이 지내고 보면은 또 그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여. 백만 가지가 다 그렇다 그 말이여.

잠시 회사가 재수가 있어서 잘 되었다도 그거 별로 좋아할 것도 없고, 또 재수가 없어서 회사가 좀 망했으면 망했지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참 낙심천만(落心千萬)할 것도 없어. 그럴수록에 정신차려서 잘 살아가면 또 잘될 때가 오는 거고 그런 것이지.

인간 흥망성쇠에 놀아나지 않게 되는 것이 이게 정법(正法)을 믿는 수행자의 자세다 그 말이거든. 우리 자신의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인연 따라서 하지 어떻게 하냐 말이여.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화두를 들고 살아가다 보면, 그래도 병나면 ‘아이고...’ 병나면 또 약도 먹고 침도 맞고 하면서도, 아프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도 화두를 탁! 들면서 살거든.

죽게 되면 또 죽지,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죽는 그 찰나에도 떠억 화두를 들고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게 죽는 거냐 그 말이여.
죽을 때 ‘내 돈, 내 재산, 내 자식’ 그 눈을 뒤집어깔고 발버둥치면서 애착과 탐착심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면 그 얼마나 처량하고, 그러한 생각으로 마지막 숨을 거둔 사람이 어디를 갈 거냐 그 말이여. 탐착심으로 마지막 눈을 감은 사람이 어디를 갈거냐 그 말이여. 구렁이 아니면은 축생이요 지옥이지.

비록 우리가 오늘날까지는 과거의 업(業)으로 그럭저럭 그렇게 탐심과 진심과 탐착으로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오늘 이 법문을 들은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탁! 다 놔버려. 놔버리고 오직 화두 하나로써 하루하루를 살아가 봐.
그렇다고 해서 살림도 다 팽개치고 자식도 다 웬수라고 생각하고—도 닦는 데 방해친 것은 다 마구니인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느닷없이 오늘부터 부모 형제와 가족을 웬수로 보라는 건 아니여.

다 과거에 인연(因緣)이 있어서 만난 것이니 어떻게 할 거냐 그 말이여. 정성껏 성의껏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 할지언정 그렇게 미워하고 탐착할 것도 없고, 화두(話頭) 드는 마음으로 상대하면 그런 대로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다 도반(道伴)인 거여.
세상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온통 도 닦는 도량(道場)이요, 모든 사람들은 다 불보살 화현(化現)이고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전부가 경전이요, 법문이다 그 말이거든.


이제 가을! 중추(仲秋) 시절이 되었습니다. 머지않아서 또, 지금 조석으로는 서늘한데 또 얼마 안 가면 또 찬바람이 불게 될 것입니다. 계절이나 우리 인간의 생로병사나 흥망성쇠가 다 마찬가지여.
이제 모다 설악산이라든지 모다 그런 데는 가을 단풍이 곱다고 그러지만, 가을 단풍이 뭡니까? 그것이 시들어서 다 낙엽 지는 그 바로 직전에 약간 누르고 푸르고 빨간 것 뿐인데 그것이 좋다고 야단이고.

인간도 낳아서 소년기 ・ 청년기를 거쳐서 장년기, 이제 노년기가 되면 그 단풍 시절인데, 왜 산천초목이 단풍이 들면 그렇게 좋다고 하며, 사람이 늙으면은 그렇게 싫어하고 천대하냐 그 말이거든. 하나도 알고 보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할 단계가 아니거든.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인간의 흥망성쇠의 그 쓴맛 단맛을 다 봐가지고 정말 참나를 찾을—인생이 무엇이고,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그래도 알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할 것은 일대사(一大事) 문제 해결 밖에 더 있냐 그 말이여.

그러니 알고 보면 노년기야말로, 인자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벌써 사십 오십 넘으면 다 희끗희끗해지는데 그때야말로 인생의 맛도 알고, ‘인생으로 태어나서 과연 어떻게 우리가 끝마무리를 해야 할 것인가?’ 그런 자각심을 낼 굉장히 뜻깊은 그런 시절입니다. 흰머리 났다고 자꾸 물들여 쌓고 그래 봤자 별수 없고.

이 소중한 가을, 인생의 가을을 백곡(百穀)이 익어가는 좋은 계절이듯이, 시절이듯이 우리도 인생의 참! 일대사 문제를 결실 맺는 그러한 뜻깊은 계절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기를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에게 간곡히 다같이 다짐을 합시다.(39분34초~1시간10분47초) (끝)





[법문 내용]

(게송)응물허령본주인~ / 삼계육도(三界六道)가 벌어져서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끊임없이 돌고 있는 원인은 자기한테 있다 / 참나를 찾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넉넉해. 부자로 산 것도 그렇게 부러울 것도 없고, 가난한 것도 창피할 것이 없고 / (게송)삼계진로여해활~.

범어(梵語) māra, 마(魔)란 ‘인명(人命)을 죽게 하는 것이다‘ 또는 ’장애다‘ 또는 ’요란하게 한다, 파괴한다’ / 『파사론(破邪論)』에서 마(魔)란 ‘혜명(慧命)을, 지혜의 목숨을 끊는 것‘ 『지도론(智度論)』에는 제법실상(諸法實相)에서 벗어나는 모든 나머지 일체법은 다 그것이 마구니 / 『화엄경(華嚴經)』에서 말씀하신 열 가지 마[十魔]는 ①오온마(五蘊魔). ②번뇌마(煩惱魔). ③업마(業魔). ④심마(心魔). ⑤사마(死魔). ⑥천마(天魔). ⑦선근마(善根魔). ⑧삼매마(三昧魔). 선정(禪定)의 마(魔). ⑨선지식마(善知識魔). ⑩보리심마(菩提心魔) / ‘이뭣고?’ 탁! 챙기면 그것이 바로 마구니를 퇴치하는 이 세상의 가장 수승한 방법.

근본을 알고 보면 자기의 일념(一念)으로 인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일어난 것 / 도고마성(道高魔盛), 도(道)가 높으면 마구니가 성(盛)한다 /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것은 정말 인과를 믿고, 자기 참선 공부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뭣고?’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어.

(게송)노거인지천~ / 지금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큼 기동(起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해서 도(道)를 닦아야 한다 /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고 선불장(選佛場) / 그럭저럭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 도 닦는 사람은 일체처(一切處)에 무심(無心)해라. 일체처에 무심한 사람에게는 그런 마구니가 파고들 틈이 없는 것이다.
(게송)공좌동행세막지~ / 세상이 이렇게 온통 시끄럽고 복잡할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를 해라 / 인간 흥망성쇠에 놀아나지 않게 되는 것이 이게 정법(正法)을 믿는 수행자의 자세다.


신령스러운 본주인이 있건마는, 나가고 들어가는 데에서 매(昧)해 버려. 한 생각 일어날 때, 그 생각이 없어질 때 매(昧)한다.

참나를 찾는, 참나를 찾는 사람은 가난한 것도 별로 그렇게 창피할 것이 없어. 항상 마음이 넉넉해. 부자로 산 것도 그렇게 부러울 것도 없고, 가난한 것도 창피할 것이 없고.
마음 닦는 공부, 참선 공부를 아니한 사람은 꾀 부자이면서도 노상 마음이 가난해 가지고 한도 끝도 없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낸다 그 말이여.

『파사론(破邪論)』에 ‘어떠한 것을 이름하여 마(魔)라고 합니까?’ 여쭈니까, 대답하기를 ‘혜명(慧命)을, 지혜의 목숨을 끊는 것을 마(魔)라고 하느니라’
그리고 마(魔)는, 마에 걸리면은 항상 방일(放逸)을 하고, 그래 가지고 자신을 해치기 때문에 마구니에 걸리면은 방일을 하게 되어. 방일이라 하는 것은 해태(懈怠)거든.
공부하는데 일념으로 해 나가지를 못하고, 이 마(魔)에 걸렸다 하면은 방일하고 해태굴(懈怠窟)에 해태하게 되는 거여. 한눈을 팔게 되아. 그래서 결국은 지혜의 목숨을 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마구니라고 한다.

죽음을 우리는 면할 수도 없고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지만, 언제 죽을 줄 모르는 그러한 무상(無常)한 몸뚱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지금 이 시간, 이 찰나찰나를 무섭게 그리고 알뜰히 단속해서 공부를 지어 나가야지 잠깐 한눈팔면 이 무상살귀(無常殺鬼)의 침범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거거든.

삼매마(三昧魔)여. 선정(禪定)의 마(魔). 선정에 들어가지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가 오더라도 거기에서 성성(惺惺)하게 화두를 들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하는데, 여간 신심, 여간한 용기가 없고서는 거기에 빠져 버려.
그런 경지에까지도 이르르기도 참 힘든 것인데, 그렇게 애를 써서 거기에까지 와 가지고도 그놈에 집착해 가지고—그 속에서도 화두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화두를 들면 그 고요한 경지가 깨지니까, 깨질까봐 두려워서 화두를 안 들고 고요한 데 처박히거든.
앞에 말한 일곱 가지의 마구니보다도 이 여덟 째의 삼매마(三昧魔)는, 삼매의 마구니는 더! 무서운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일분일초도 방심을 하지 말고, 방일(放逸)을 하지 말고, 바른 자세로 터억 허리를 쭉 펴고서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탁! 챙기면 그것이 바로 마구니를 퇴치하는 이 세상의 가장 수승한 방법이다 그거거든.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마구니가 우리를 침범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고삐를 착! 추켜들면 본래 주인[本主人]이다. 화두로써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의단을 일으키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면 거기에 무슨 마구니가 감히 침범해 들어올 틈이 있겠느냐 이거거든.

마구니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니, 아까 열가지 대표적인 마(魔)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마는 전부가 우리의 한 생각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마구니의 집이, 마구니의 무리가 딴 데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여. 편의상 여러 가지로 분류를 했지만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자기의 일념(一念)에서 나타난 거여. 자기의 일념으로 인해서 팔만사천 마구니가 일어난 것이지.

마구니는 머리빡에 뿔을 달고 나오는 것이 아니여. 마구니가 우리에게 침범해 들어올 때는 뭣과 같으냐 하면은—사기꾼이 사기를 칠 때에 ‘나는 사기꾼입니다’ 그러고 오는 법이 없어. 가장 정직한 것처럼, 가장 당신을 내가 도와줄라고 온 사람처럼, 천사처럼 꾸미고 내게 오는 법이여.
그러기 때문에 믿고 그 사람한테 의지하고, 도장을 찍어주고 그 사람 시키는 대로 하다가 큰 재산도 날리고 같이 쇠고랑을 찬 것이 아니냐 그 말이거든.

우리가 도를 닦아 나가는데, 마구니도 무슨 머리에다가 뿔을 달고 나와서 그래 가지고 ‘내가 마구니다’ 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천사(天使)나 불보살(佛菩薩)의 탈을 쓰고 가장 나를 아껴주고 위해 준 것처럼 그런 탈을 쓰고 내게 오는 것이다 그 말이여. 도 닦다가 마구니에 걸려드는 계기가 역시 그렇다 그 말이여.
그래서 도 닦는 사람은 일체처(一切處)에 무심(無心)해라. 일체처에 무심한 사람에게는 그런 마구니가 파고들 틈이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공좌동행세막지(共坐同行世莫知)여, 함께 자고 함께 가고, 밤마다 그놈을 끌어안고 자고 아침마다 같이 일어나고, 걸어갈 때도 그와 같이 걸어가고, 일을 할 때도 그와 같이 일을 하고, 밥을 먹을 때도 그와 같이 밥을 먹고.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인 줄을 몰라.
기인(幾人)이 당면변봉이(當面便逢伊)인고. 몇 사람이 당면해서 바로 그를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 말이여.

부앙시청증불매(俯仰視聽曾不昧)인댄, 하늘을 보나 땅을 내려다보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더라도 그 찰나찰나에 매(昧)하지 아니한다면, 하수향외문거귀(何須向外問渠歸)냐. 어찌 모름지기 밖을 향해서 그를 찾으러 돌아다닐까 보냐!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손으로 무엇을 만질 때, 우리의 생각에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 성이 날 때, 슬플 때, 기쁠 때, 그 찰나찰나에 탁! 거기에 속지 말고, 화두를 떠억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새삼스럽게 찾을 것이 무엇이 있어? 무엇을 바래고 무엇을 기다릴 것이 있느냐!

마구니는 우리가 마음의 틈이 생길 때 천사(天使)가 마구니로 변하고, 우리가 한 생각 돌이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웬수로 알고 마구니로 알았던 존재들이 전부 다 불보살(佛菩薩)로 변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오늘날까지는 과거의 업(業)으로 그럭저럭 그렇게 탐심과 진심과 탐착으로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오늘 이 법문을 들은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탁! 다 놔버려. 놔버리고 오직 화두 하나로써 하루하루를 살아가 봐.
그렇다고 해서 살림도 다 팽개치고 자식도 다 웬수라고 생각하고—도 닦는 데 방해친 것은 다 마구니인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느닷없이 오늘부터 부모 형제와 가족을 웬수로 보라는 건 아니여.

다 과거에 인연(因緣)이 있어서 만난 것이니 어떻게 할 거냐 그 말이여. 정성껏 성의껏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 할지언정 그렇게 미워하고 탐착할 것도 없고, 화두(話頭) 드는 마음으로 상대하면 그런 대로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다 도반(道伴)인 거여.
세상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온통 도 닦는 도량(道場)이요, 모든 사람들은 다 불보살 화현(化現)이고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전부가 경전이요, 법문이다 그 말이거든.

인간도 낳아서 소년기 ・ 청년기를 거쳐서 장년기, 이제 노년기가 되면 그 단풍 시절인데, 왜 산천초목이 단풍이 들면 그렇게 좋다고 하며, 사람이 늙으면은 그렇게 싫어하고 천대하냐 그 말이거든. 하나도 알고 보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할 단계가 아니거든.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인간의 흥망성쇠의 그 쓴맛 단맛을 다 봐가지고 정말 참나를 찾을—인생이 무엇이고,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그래도 알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할 것은 일대사(一大事) 문제 해결 밖에 더 있냐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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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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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51~475)2021. 6. 30. 06:20

 

 

((No.466))—1992년 동안거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 (40분)

 

 

(1) 약 20분.

 

 

(2) 약 21분.

 


(1)------------------

큰 추위는 없었던 걸로 생각이 됩니다. 겨울은 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좋다고 모다 그렇게 생각되어 왔는데, 여기는 해변가가 되어서 해마다 겨울에는 강한 추운 바람이 불고 그래서 새벽에 모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 젓숫고 하는데 모다 노보살님들이 감기에도 많이 걸리시고 모다 그랬었는데 그런 면에서는 겨울이 그렇게 춥지 않은 것이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어피차 편안하고 자유롭고 따뜻한 가정을 떠나서 이렇게 선원에 오셔서 정진하시게 되면, 아무리 고단하고 춥고 힘이 들어도 새벽에는 일어나야 하고 또 잠자리가 편틀 못하고, 눕고 싶을 때 눕지 못하고,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여러 가지 참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이렇게 와서 서로 다투어서 방부(房付)를 드리고 또 심지어는 인원이 차서 방부를 못 드리고 또 울고 돌아가신 분도 많이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을 무릅쓰고 이렇게 정진할라고 하신 여러 신도님네들 또 거사님 보살님, 참 갸륵하고 그 고마움을 원장으로서는 참 가슴깊이 느끼는 바입니다.

금생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지 아니하면—편안한 것만 취하고, 맛있는 것만 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염라대왕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렵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은 사람만이 세세생생에 또 영원토록 참다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진을 해 나가는 데 처음부터 흡족하게 그렇게 수월하게 그렇게 정진이 되어가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는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자기가 지어 놓은 업(業)이 있기 때문에, 그 업이 천차만별이어서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정진을 해도 육체적으로 오는 거, 정신적으로 오는 거, 그 나타나는 경계라고 할까 그런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 50상(相) 변마장(辨魔障)에 보면 자기가 지은 업과 현재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생각들 그런 차이로 해서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입승(立繩) 스님이 적어 온 걸로 보면 사람 따라서 나타나는 경계가 여러 가지로 있는데,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안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그러한 경계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말씀을 했지마는 그런 경계는 집착(執着)을 하면은—환한 경계가 나타난다든지, 껌껌한 이불 속에서도 환히 머리카락이 다 보일 정도로 환하다든지, 머리가 시원하고 개운함을 느낀다든지, 미래 일이 나타난다든지, 꿈속에 뭘 느꼈다든지, 꿈속에 어떤 분이 나와서 뭐라고 일러줬다든지, 사람 몸을 보면 환히 오장육부가 다 보이고 어디가 병이 들었는지 그것도 다 알 수가 있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전생이 어떻다는 것도 알게 되고 또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든지, 자기 몸이 풍선처럼 가벼움을 느꼈다든지,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에 집착하면 공부가 삐뚤어져 나가는 거고, 그런 것에 전혀 생각을 두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좋다 나쁘다’ 생각을 갖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둔 채 자꾸 바른 자세로 화두(話頭)를 들고, 화두를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잡드리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런 경계가 나타났으니 내가 이거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그것에 대해서 밤낮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심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자랑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가 지금 공부가 상당한 지경에 이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자랑을 하고 이런 것은 진실한 수행자에게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보통 이러한 철저한 신심과 법문을 들은 사람이 아니면,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스스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여. 하도 신기하니까.
그러나 그런 법문(法門)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것에 하도 신기하고 이상하고 묘하고 그러니까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그런 법문을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데에 혼탁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런 것에 집착하면 벌써 사견(邪見)에 떨어진 것이고, 공부가 삿된 대로 빠져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점쟁이 같은 거, 이상한 모다 신기(神氣)가 있는 그러한 존재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탁! 놔 버려야 하거든.


그리고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몸을 단정히 갖되 몸의 어느 부분에도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정히 앉되 손을 이렇게 수계(手契)를 하는데, 여기도 너무 엄지손에 힘을 준다든지, 또는 엄지손과 (엄지)손이 떨어진다든지 이렇게 비틀어진다든지, (엄지)손으로 이렇게 손장난을 한다든지 그래서는 안 되고, (양 엄지손을) 대되 전혀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

어떤 분은 힘을 꼭 줘야 화두가 잘된 것 같이 느껴진다는 그런 분도 있는데, 그러더라도 (힘을) 꽉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요. (힘을) 꽉 주면은 나중에는 몸 전체가 그리 힘이 주어지기 때문에 공부해 나가는 데 지장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 우선 힘을 주면 된 것 같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기만 하고.
또 눈에다가 힘을 주고—간절히 의심을 할라고 하면은 미간(眉間)에 ‘내 천(川)’ 자가 쓰여질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거기다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힘을 주지 말고 또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단정하면서도 어깨에도 힘을 주지 말고,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또 미간에도 힘을 주지 말고. 힘을 어디다가 주었다 하면 정진해 나가는 데 장애 요소가 거기서 생길 수가 있다 그거거든.

그러면 단전(丹田)에다 힘을 준 것은 어떠냐?
단전은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약간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차츰차츰 홀쭉하게 하니까 거기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질 수가 있는데 그것도 너무 힘을 많이 주어서는 안 돼. 기분상으로만 가볍게 그렇게 하는 것이지, 너무 힘을 주어서는 그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걸 말씀을 드리고.


그 화두를—이 화두를 하니까 잘 안되어서 저 화두를 하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했다가 ‘무자(無字)’로 했다가 또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를 했다 이러는데, 안된다고 해서 화두를 자꾸 바꿔 쌓으면, 새로 바꾸면은 된 것 같다가 나중에 얼마 지내면은 옛날 것이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것을 들어보면 또 잘되고.
그래서 화두는 아무리 안되어도 한 화두를 가지고 자꾸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나중에 언젠가는 된 때가 오는 것이지, 안된다고 해서 또 바꾸고, 또 해 봐서 안된다고 또 바꾸고, 자꾸 바꿔 버릇하면은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 절대로 화두를 안된다고 해서 바꾸지를 말아라’ 그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고.

이미 바꿔 가지고 현재 잘 되어간다면 그분은 그냥 그것으로 해 나가십시오. 그동안에 자꾸 바꾼 것은 대단히 잘못된 거지만, 이미 바꾼 지가 오래되어 가지고 그대로 쭉 잘 되어가면 그분은 고대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면 정진하다가, 쭉 해 나가다가 중요한 고비가 닥쳤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여.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니까 그것을 조심을 하시고.


공부를 하다 보면 확 트인 것처럼 시원하고 개운하고 그러한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시적인 경계니까 ‘이것이 좋으네 나쁘네’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요.
'좋다 나쁘다' 생각하지 말고, 확 트인 것처럼 느끼거나 뭐 성성하거나 적적하거나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런 데에 집착하지 말고, 그런 데에 '좋냐 나쁘냐?' 자꾸 그걸 가지고 싱갱이를 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둬.

좋으면 좋은 대로, 시원하면 시원한 대로, 환하면 환한 대로, 껌껌하면 껌껌한 대로 그냥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아! 사람 건강도 소화가 잘되다 안되다, 뱃속이 거북하다 설사하다가 그렇지만, 그때그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할 거냐 말이여.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놔두고 살아가는 거지, 그것이 무슨 큰 괴변(怪變)이나 일어난 것처럼 무슨 큰 일로 취급을 하지 말고, 하다 보면 그런 것도 있으려니 하고 그냥 고대로 놔두고 여법하게 정진만 주욱 해 나가면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가끔 말씀을 드렸지마는, 어떠한 뭐 밥을 먹다가 한다든지, 차를 마시다가 한다든지, 목욕을 하다가 한다든지, 무슨 소리를 들은 찰나에 그냥 막힘이 확 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슨 시(詩)가 나오기도 하고, 다른 공안에 대해서 그냥 의심이 하나도 막히지를 않고 그런 것을 느끼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 해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그런데 정말 바로 깨달았는가? ‘바른 깨달음을 얻었냐, 안 얻었냐’ 하는 것은 자기 혼자로서는 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자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고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지 혼자로서는 좋다 나쁘다 할 수가 없고.
또 아무한테나 물어봐 가지고 옳다고 인증을 받았다고 해서—그것도 참 정말 바른 지혜를 갖춘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아야지, 아무한테라도 가서 받아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데 공부하다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경계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인데, 구경의 경지에 이르르지 않았다면 그러한 소견도 그러한 경계도 깨끗이 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거듭 말씀을 드린 것은 누구나 정진하다 보면 텅 빈 경계에 들어가기도 하고, 공안에 대해서 아무 의심도 다 없어져 버리고 너무너무 머리가 개운하고 그런 경계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구경각(究竟覺), 확철대오해서 조사(祖師)와 같은 그런 경지가 아니라면, 스스로 ‘이것이 참 깨달음이 아니다’ 한 것을 스스로 그것을 버려 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여법하게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향해서 정진을 해 나가야 합니다.(처음~18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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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떤 분은 항상 자기에 영가(靈駕)가 붙어 갖고 있는데, 절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영가는 거기서 떨어져서 절에서는 떨어져 버리고 또 절에서 일 다 보고 그러고 나가면은 딱! 또 들어붙고 그런다는 분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영가가 그렇게 붙고 떨어지고 하는 거.
또 항상 영가가 눈에 보여. 남 49재 하는 데도 가서 보면은 그 49재 하는 그 영가가 눈에 다 보인다 그 말이여. 생전시에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은 어떻게 생긴 것을 환히 다 알고, 그래 갖고 재자(齋者) 보고 ‘지금 오늘 49재 지낸 분이 얼굴이 이렇게 생겼고 무슨 옷을 입고 그랬냐’ 하면, ‘그렇다’고.
그런 것이 보인 사람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것은 깨달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특수한 사람에게는 영가가 보일 수도 있고 또 영가가 붙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道)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여.

영가라 하는 것은 내나 우리는 ‘몸뚱이가 있는 영가(靈駕)’고, 영가는 ‘몸이 없는 사람’이니까, 혹 지금 이 방에도 영가가 있을 수가 있고, 법당에도 법문할 때는 우주법계의 영가를 다 초청을 하니까 다 영가가 다 들어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 이 사바세계에 사는 우리 일반 사람에게는 그런 영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이죠. 보인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고 그런데.
영가는 사람이 죽어서 49재에 딴 데로 다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떠날 수도 있고, 백일에 떠날 수도 있고, 소상(小祥)에 떠날 수도 있고, 대상(大祥)을 지내고 떠날 수도 있고, 소상 · 대상 다 지내고도 떠나지 않고 자기집에서 그냥 또 그렇게 영가가 머물러 있는 수도 있고, 50년 내지 100년간도 안 떠나고 그 집에서 머물러 있는 수도 있다고 그럽니다마는.

참 이 영가는 나는 내 눈으로는 아직 영가를 보지를 못했고, ‘몸뚱이 있는 영가’는 많이 보지마는 ‘몸뚱이 없는 영가’는 내 눈에는 잘 안 보여요.

그래도 본인이 영가가 자기에게 보이고 자기 몸에 항상 붙어 있고, 꿈에도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모다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니, 그런 분은 내 생각에는 전생에 지은 업(業)에 따라서 또 금생에 와서 지은 업에 따라서 특수한 그런 체질이라고 할까, 특수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가가 보이고 나타나고 또 몸에 항상 따라다니고 하면은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고,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그런 분은 항상 계행(戒行)을 잘 지켜야 하고 심성을 착하게 곱게 써야 하고 또 백중이라든지 법보재라든지 모다 그런 때는 항상 그런 영가들을 위해서 천도(薦度)를 잘 해 줘야 하고 그렇죠.

대부분 그런 분에게 또 그런 영가가 많이 따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우주법계에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런 참 외로운 영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도를 잘 해 주고, 또 그분한테 가까이 가야만 천도를 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될 경우 그런 분한테 인연 있는 영가가 따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배고픈 사람 밥을 잘 준다’고 소문이 나면은 팔도(八道)의 모다 걸인들이 그 집을 찾아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영가 천도를 잘 해 주고 자꾸 그런 분에게는 그런 영가들이 꿈에 와서 현몽(現夢)을 대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천도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까 힘닿는 대로 잘 천도를 해 주신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밥 없는 사람 밥을 주고, 옷 없는 사람 옷을 주고, 직장이 없는 사람 직장을 알선을 해 주고, 병든 사람을 병을 치료해 주고 그러면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와서 잘 봐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 또 영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영가 천도를 그런 인연이 닿으면은 또 해 주시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또 어떤 분은 염라대왕이 자기를 끌고 갈라고 하는 그런 것을 느낀다고 그러는데, 염라대왕이 일부러 와서 자기를 끌고 간가 어쩐가 그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면, 끌려 가기 싫어서 안 끌려 간다면 그건 잘된 일이고, 그러나 언젠가는 가게 될 테니까 너무 그걸 미리서부터 걱정하실 것은 없고.
염라대왕이 끌고 갈라고 하거나,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使者)가 와서 끌고 갈라고 하거나, 참선한 사람은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를 딱 챙기시면 비명(非命)에 끌려 가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꼭 가게 될 인연이 되면은 조금도 두려운 생각하지 말고 ‘이뭣고?’를 하면서 갈 때 되면 가는 것이지 뭐,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안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까, 가게 될 때는 가더라도 ‘이뭣고?’ 하는 마음으로 가면 그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리고 한 가지 가끔 내가 듣는 소린데, 본인은 아직 시집을 안 가고 나이가 삼십을 넘고 그래도 그냥 처녀로 부처님 불법을 믿고 이렇게 정진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본인이 꼭 안 갈라 한 것은 아닐런지도 모르고 또 좋은 인연이 있으면 갈라고 하는 생각도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냥 이대로 보살로서 정진하다가 시절이 돌아오면은 출가해서 스님이 될려고 하는 생각도 있는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을 하고 그러는데, 자꾸 좌우에서 “시집을 안 가고 죽으면 몽달귀신이 되니까 시집을 가라”고 자꾸 권고를 하신 분이 있다 이것입니다.
시집을 가라고 권고한 것은 절대로 나쁜 마음으로 그러신 것은 아니고, 그래도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시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것이 뭐 당연한 것이고, '시집가서 남편과 해로하고 자녀도 낳고 그래야 나중에 늙으면 외롭지 않고 그럴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그것도 때가 있으니까 좋은 인연 있을 때 가라고 권고한 것은 좋은 마음에서 하신 것이지 절대로 뭐 해코자해서 그러신 것은 아닐 테지마는.

억지로 팔자에 시집 갈 팔자를 타고났는데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갈라고 하는 생각은 있어도 적당한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사주팔자가 되었건, 전생에 지은 인연이 되었건 간에 그런 인연이 닿지 않아서 안 가게 되고, 또 불법에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불자(佛子)로서 참선을 하고, 별로 그렇게 큰 고통이나 불편이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데 자꾸 몽달귀신으로 협박을 하면서 자꾸 가라고 그러실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노처녀로 있다가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서 도를 잘 닦은다면은 그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여러분들 다 시집가서 결혼해 가지고 이렇게 50년, 60년, 70년 이렇게 살아보셔서 ‘정말 나는 결혼을 해서 참 행복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이 가운데는 계시겠지만, 겪어보시면 결혼 생활이라 하는 것이 아마 출가해서 도 닦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스님이 되라’고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본인이 결혼 안 하고 이렇게 출가할 수 있는 사람을 몽달귀신 얘기를 해 갖고 공포심을 느껴서 가기 싫은 시집을 억지로 가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공부하러 오신 이 마당에는 공부에 관한 공부 생각만 해야지 다른 생각은 안 하신 것이 좋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고 그러니까, 절대로 그 자꾸 '시집가라, 시집가라'—막 좀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 좀 할라고 하면은—자꾸 그 '시집가라'고 그래 쌓으면 마음이 헷갈리거든. '내가 시집을 가야 옳은가? 안 가야 옳은가?' 그 소리가 듣기 싫으니까 한철 나왔다가 안 나와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여.

혹 집안에 홀아비가 있어서 '참 저 여자하고 짝을 맞춰줬으면 참 좋겠다' 싶어서 자꾸 그러실 수도 있지 않은가 싶은데, 결혼은 참 '처옥자쇄(妻獄子鎖)' 라고, 인자 장가를 가면은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그래서 '처옥자쇄(妻獄子鎖)'라 그러는데.
참, 결혼 생활은 여러분도 다 겪어보셨지마는 어쩔 수 없이 다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긴 했지만 결혼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습니까.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제가 보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힘든,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공부해 나가는 데에는 대보살(大菩薩)이 아니고서는 많은 지장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지어서 받는 업(業)으로 얽혀진 것이니, 전생에 지은 빚으로 만난 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 해야 하고.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 하면서 참선을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이 드시겠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 논 빚이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거고.
그놈을 갚으면서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 안 하고 그냥 거기에 빠지면은 그 업(業)으로 인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런 속에서도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고, 정진하면서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할머니 노릇도 해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여러 보살님네들은 참 너무너무 갸륵하고 훌륭하고, 참 그렇다고 생각이 됩니다.


끝으로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그런 소견(所見)이나 경계(境界)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소식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 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아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거기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은 중앙청까지 딱 가서 참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그래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 버리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 보름 남았는데, 또 이틀 후에 정월 초하루가 돌아와서 또 차례(茶禮) 행사도 있고 어수선하겠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놓치지 말고 정진하시도록 당부를 드리고, 남은 보름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잘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또 제가 말씀을 안 드린 그런 내용에 어떤 당신 나름대로 느낀 바도 있을 것이고, 물어보고자 한 그런 점을 속으로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낱낱이 여기서 다 말씀을 드릴 수도 없고.

어떠한 경계, 어떠한 느낌, 어떠한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이 아닌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조사(祖師)의 경지가 아니면 그냥 스스로 딱! 치워 버리면 그만이여.
없었던 걸로 탁! 놔 버리고, 깨끗한 초학자의 마음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조금 어디 아프다고 해서 낱낱이 병원에 쫓아다니면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지간한 것은 자기가 스스로 낫어야 하거든.

마을에서는 병원에 자주 간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런데, 그 병원이라 한 것은 물론 호미로 막아야 할 때 병원에 안 갔다가 가래로 막게 되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스스로 집착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딱! 놔 버리고 화두만 들면 낱낱이 병원에 안 가도 돼어. 그것이 기다(그렇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 거기서부터 병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 요점만을 내가 말씀을 드리면 요점만을 잊지 않고 고대로 해 나가시면 어떠한 병도 스스로 고칠 수가 있는 것이여.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자기가 집착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여. 심지어는 확철대오해 가지고도 ‘나는 깨달았다’ 하는 생각을 가져도 벌써 그것이 잘못인데, 깨닫지도 못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그걸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뭐 사람 몸뚱이가 환히 보이거나, 내일이나 모레가 어떻게 되고, 사람을 척 보면 전생에 무엇이다 하는 것도 안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그런 소견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어, 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을 속으로 딱 간직하고, 그걸 자꾸 써먹고, 남에게 자랑하고, 자기가 무슨 도통이나 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런 데에서 병이 되고 결국은 사도(邪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안 떨어지려면 집착하지 않고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뭣고?’만 해 가면 그건 괜찮다 그 말이죠.

되었습니다.(18분29초~40분15초) (끝)





[법문 내용]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 /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안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말고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해야.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구경의 깨달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 정진하는 데 몸을 단정히 갖되 힘을 주지 마라 / 화두를 안된다고 해서 바꾸지를 말아라

 

결혼은 '처옥자쇄(妻獄子鎖),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 자기가 지어 논 빚은 갚으면서 참선을 해야 / 구경각(究竟覺),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하는 그런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그런 경계는 스스로 그것을 버려 버리고,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마음으로 여법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을 해 나가야 한다.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자기가 집착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뭣고?’만 해 가야 / 시집을 안 가고 공부하러 온 보살에게 자꾸 '시집가라'고 말하지 말라 / 영가 천도를 인연이 닿으면은 해 주시는 것도 좋은 일.




금생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지 아니하면—편안한 것만 취하고, 맛있는 것만 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염라대왕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렵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은 사람만이 세세생생에 영원토록 참다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아무리 안되어도 한 화두를 가지고 자꾸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나중에 언젠가는 된 때가 오는 것이지, 안된다고 해서 또 바꾸고, 또 해 봐서 안된다고 또 바꾸고, 자꾸 바꿔 버릇하면은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 절대로 화두를 안된다고 해서 바꾸지를 말아라’ 그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고.

구경의 깨달음—구경각(究竟覺), 확철대오해서 조사(祖師)와 같은 그런 경지가 아니라면, 스스로 ‘이것이 참 깨달음이 아니다’ 한 것을 스스로 그것을 버려 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여법하게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향해서 정진을 해 나가야 합니다.

영가가 보이고 나타나고 또 몸에 항상 따라다니고 하면은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고,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그런 분은 항상 계행(戒行)을 잘 지켜야 하고 심성을 착하게 곱게 써야 하고 또 백중이라든지 법보재라든지 모다 그런 때는 항상 그런 영가들을 위해서 천도(薦度)를 잘 해 줘야 하고 그렇죠.

결혼은 참 '처옥자쇄(妻獄子鎖)'라고, 장가를 가면은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지어서 받는 업(業)으로 얽혀진 것이니—전생에 지은 빚으로 만난 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논 빚이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거고. 그놈을 갚으면서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 안 하고 그냥 거기에 빠지면 업으로 인해서 생사해탈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런 속에서도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고, 정진하면서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할머니 노릇도 해야 하죠.

어떠한 경계, 어떠한 느낌, 어떠한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 버리고 언제나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51~475)2021. 4. 9. 11:34

((No.472))—1992년 5월 첫째일요법회(92.05.03) (79분) (수행과 일상생활, 운전 초보와 능숙자 비유)

 

 

(1/4) 약 21분.

 

(2/4) 약 19분.

 

(3/4) 약 19분.

 

(4/4) 약 20분.

 


(1/4)----------------

우후정화연야발(雨後庭花連夜發)하여  청향산입효창신(淸香散入曉窓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화응유의향인소(花應有意向人笑)언만  만원선승공도춘(滿院禪僧空度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우후정화연야발(雨後庭花連夜發)하니  청향산입효창신(淸香散入曉窓新)이로구나.
비 온 뒤 뜰에 꽃이 밤을 이어서 피었어. 비가 오니 그 비 기운을 받아서 뜰에 꽃이 아주 만발을 했다 그 말이여.
청향산입효창신(淸香散入曉窓新)이다. 그 꽃에 맑은 향기가 나부껴서 새벽 창을 뚫고 들어왔어.

화응유의향인소(花應有意向人笑)언마는, 그 만발한 꽃은 응당 뜻이 있어서 사람들을 향해서 웃고 있건만,
만원선승(滿院禪僧)은 공도춘(空度春)이로구나. 이 선원에 가득한 모든 대중들은 그 꽃에 깊은 뜻을 모르고서 공연히 이 봄을 지내고 있구나.

편양(鞭羊) 선사의 게송입니다.


오늘은 임신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몽산법어(蒙山法語)』에 나오는 그 '동산숭장주(東山崇藏主)라고 하는 분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떠나는 제자를 향해서 설한 법문[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을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금년도 벌써 5월이 되었습니다. 엊그제 눈이 오고 우박이 쏟아지고 비가 오고, 벌써 꽃은 만발하고 있지마는 벌써 여름이 머지않아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입하(入夏)가 돌아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세월은 이렇게 하루하루 지나간 줄 모르게 지나가고 또 오는 소식도 없이 이렇게 오고, 그렇게 해서 재촉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흰머리가 생기게 하고 주름살이 불어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사형(死刑) 집행일이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시겠지마는, '미국은 민주주의 나라고, 살기 좋은 나라고, 부자의 나라고, 세계에서 제일 참 좋은 나라라고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모다 말들하고 그러는데, 그러한 나라에 흑인들 폭동(暴動)이 일어나 가지고[LA 인종 폭동(1992년)], 폭동이 일어난 피해를 입은 제일 큰 대상이 한국 사람들이라 하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좀더 잘살아 보려고 미국을 갔는데 무엇을 잘못해 가지고 흑인들이 한국 사람을 상대해서 800개에 가까운 한국 사람의 가게에다가 타거나 파괴가 되고 약탈을 당했다 하니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금생에 설사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잘살아 보려고 애썼을지언정 무슨 흑인들에게 잘못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백인에 대한,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 대우한 그 원한을 참 애잔한 한국 사람들한테 한풀이를 한 모양인데, 우리는 인과법(因果法)을 믿기 때문에 그 인과법에 입각해서 이것을 살펴보면 '설사 금생에 잘못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전생에 잘못한 그 과보(果報)가 있어서 금생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빚어서 구웠는데, 처음에 구운 것이 너무 불이 약해 가지고 허옇게 나왔어. 그것이 백인(白人)이고. 너무 허옇게 나와서 화력을 좀 강하게 했는데 너무 화력이 강해 가지고 시커멓게 구워진 것이 검둥이고. 그래서 세 번 만에 약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게 적당하게 구운 것이 황인종(黃人種)이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황인종이거든.

그런데 그러한 황(黃)이라 하는 것은 중(中)입니다. 검은 것은 북(北)이고, 빨간 것은 남쪽이고, 흰 것은 서쪽이고, 푸른 것은 동쪽이고 그리고 노란색은 중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 가지 색, 오색(五色)을 동 · 서 · 남 · 북 · 중앙에다가 배대(配對)를 하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황인종은 중앙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황인종은 '가장—너무 굽지도 않고, 너무 덜 굽지도 않고—적당하게 구워진 것이 바로 동양의 황인종이다' 인자 그러한 비유의 말이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우리 동양 사람은, 그러한 성현도 동양에서 많이 나오고, 그에 따라서 진리의 개발도 동양에서 일어나고, 모든 문화도 동양에서부터 발원지(發源地)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는 모다 물질문명을 다투어서 발전을 시켜 가지고 모다 살기에 편리하고, 또 그것이 악용이 되면은 무서운 무기를 만들어서 사람을 모다 죽이고 세계를 멸망케 하는 그러한 위험한 면이 있지만,
우리 동양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본성을 개발해서 그래서 진리를 자기에게 찾아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나아가서 온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느냐' 이러한 쪽으로 동양의 성현들은 공자님이나 부처님이나 또는 노자나 동양의 성현들은 전부 그러한 방향으로 문을 열어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나아가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가 동양인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서는 자기 자신도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 가지고 세계평화는 이룩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 와서 이 참선법(參禪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가 평화롭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거기서 열리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고, 백인은 유색 인종(有色人種)을 무시한다 그말이여. 이번에는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흑인들한테 피해를, 본의 아닌 참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으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물론 백인들이 그것을 자각을 하고 유색 인종을 멸시하고 탄압하고 무시하고 천대하는 그러한 생각들이 마음에서 없어진다면 혹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없어지지 않고 백인이라 해서 우월감을 가지고 유색 인종을 종 부리듯 생각하고, 법으로는 물론 평등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흑인뿐만이 아니라 황색 인종까지도 백인들은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보를 머지않아서 한국 사람이 이번에 당한 것 몇십 배, 몇백 배를 당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미국은 흑인이 지배하는 시대가 앞으로 오십 년, 백 년 후에는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그러한 참혹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려면은 마음속에서 유색 인종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그런 마음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우선 법적으로 했지만, 법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실지로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없어져야만 그런 무서운 과보를 면하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행여나 백인들이 이 동양 사람, 황색 인종을 무시하니까 황색 인종은 그 마음을 검둥이들한테 부애풀이를 한다든지, 겉으로 부애풀이는 못해도 마음속으로 천대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희거나, 검거나, 누르거나, 전혀 인간의 본성(本性)에 있어서는 차등(差等)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희다 하더라도 마음을 검게 쓴다면 검둥이만 못할 것이고, 설사 얼굴이 누르거나 검더라도 그 마음을 부처님을 믿고 진리를 믿는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로써 모든 사람을 상대한다면 그 사람은 백인보다도 훨씬 훌륭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귀의 노예가 되고, 눈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귀와 눈은 우리의 마음이 활동하는 문(門)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문(門)에 지나지 못한, 눈에 비친 색상과 귀로 들어오는 소리, 그것에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만다면 무서운 삼악도(三惡途)의 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엇을 듣건, 항상 거기에서 자기의 본심(本心)으로 돌아가고 본지(本旨)에 입각해서 행동을 하고, 본지에 입각해서 말을 하고, 본지에 입각해서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삼악도를 면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자꾸 불어나서 가정에서, 사회 국가에서, 온 세계에서 자기의 본심을 찾는 본지에 입각한 생활을 해 나간다면 세계평화는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움을 하고, 빛깔이 다르다고 해서 싸움을 하고,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싸운다면 결국은 온 세계는 원래는 다 한 집안 식구고, 한 형제간인데, 형제간끼리 싸우는 것이 되고, 집안끼리 싸우는 것밖에는 안된 것입니다.
가깝게 생각하면 한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싸우고, 형제간에 서로 의사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고, 한 가족 안에서도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고부간(姑婦間)에 싸우고 형제간에 싸운다면 그 가정이 불행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인 것입니다.

얼굴 빛깔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고, 상대방의 종교를 존중히 여기고, 그러면서 공통점을 찾아 나가고 언제나 근본에 의해서 근본을 향해서 공통점을 찾아 나간다면 지엽적으로 다른 점은 다 거기에서 적당하게 융화가 되어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한 철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하는 선방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참(久參)의 생각과 신참(新參)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또 남방에서 온 사람과 북방에서 온 사람이 다를 수가 있고, 다를 것이나 그 선원의 근본 규범에 서로 자발적으로 순종을 하고 개인의 의사를 지나치게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선원은 석 달 동안 아무 장애가 없이 정진을 잘해서 해제(解制)를 맞이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일을 자기의 의사만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의사를 짓밟는다면 중간에 결국은 걸망을 싸고 도망가게 되고, 서로 언쟁이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선방에 규범이 있고, 가정에는 가훈이 있고,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온 세계에는 인륜이라고 하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러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느냐?
문제는 자기 마음 하나를 다스리지를 못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마음만 다스릴 줄을 알고 자기의 감정만 다스릴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신사요, 숙녀요, 모범이 될 수 있는, 존경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처음~21분3초)




(2/4)----------------

앞으로 머지않아서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 돌아오고 또 결제날도 또 일주일 더 지나가면 또 돌아올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제일가는 대장부(大丈夫)이십니다. 왕 가운데 왕이요, 성현 가운데 성현이신데, 정말 대장부이시거든.

부처님께서는 장육금신(丈六金身)이여. 그래서 대장부이시냐? 32상(三十二相)을 갖추셨기 때문에 대장부이시냐?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셨기 때문에 대장부이시냐?

그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를 이기신 분이여.
어떻게 자기를 이기셨느냐?

과거 인행(因行) 때 부처님께서는 큰 힘을 가진 용의 몸을 받으신 때가 있었어. 어떻게 그 힘이 무섭고 그 안광(眼光)이 아주 태양보다도 더 밝고 그러던지, 담력이 약한 사람이 보면 그 용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담력이 큰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번만 보면 자기집에 돌아가서 죽게 되어.
그렇게 무서운 위력을 가진 용인데, 그 용이 날이 뜨뜻하니까 잠이 들었다 그 말이여. 졸았어.
푹 잠이 드니까 아무리 오색이 찬란하고 여의주를 가진 용이라도 잠이 들면은, 보통 잠이 들면 구렁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법이여.

잠이 푹 들은 상태에서 어떤 포수가 그 잠들어 있는 용을 보았다 그말이여. 보니까 구렁이로 보이는데, 어떻게 가죽 빛이 오색이 찬란한데 이 세상에서 그렇게 찬란하고 고운 것을 본 기억이 없어.
그래서 '저 구렁이를 잡아가지고 껍데기를 벗겨서 임금님한테 바쳐서 임금님의 옷을 만들게 하면 자기는 큰 상을 받고 큰 벼슬도 받으리라' 이러한 사견이 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그 용을, 구렁이를 갖다가 두 갈래진 작대기로 목을 눌러 가지고 꼼짝을 못하게 딱 해 놓고는 생으로 그 구렁이 가죽을 벗겼어. 그때 그 용이 눈을 떠서 보니 그런 상태에 놓여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용이 힘이 장사기 때문에 한바탕 꿈틀거리면 그까짓 작대기로 누른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고 무엇이고 이 지구도 갖다가 그냥 흔들어 놓을 정도로 그런 힘을 가졌지만,
'아서라! 내가 불법(佛法)을 믿는 용으로서 어떻게 내가 이러한 것 하나를 못 참을 수가 있겠느냐. 내가 저 포수도 죽여 버리고 온 세계도 갖다 발탁 뒤집어지고... 내가 한 생각을 참지 못하고 그런다면은 어찌 불법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 가지고 그것을 꾹 참았어.

참으니까 가죽을 다 벗겼어. 벗기니까 완전히 벌건 살덤벵기가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러니까 햇빛은 쨍쨍 나지, 개미와 벌레가 달려들어서 뜯어먹기 시작하는데 '만약에 내가 여기서 꿈틀거린다면, 아픈 것을 참지 못하고 꿈틀거린다면 저 벌레들이 다 내 몸에 치어서 죽을 것이다' 그래 가지고 꼼짝을 않고 다 뜯어 먹히고 바짝 말라서 아주 뼈만 남을 때까지 다 참은 거여.
그래 가지고 인욕(忍辱)을 하고 또 살생을 하지 않고, 진심(瞋心)을 내지 않고 그래 가지고 그 용은 결국은 숨이 끊어지자마자 천상(天上)에 가서 태어났어.

그 용이 결국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前身)이시고, 그때 그 구렁이를 죽여서 가죽을 벗긴 포수는 조달(調達)이여. 제바달다(提婆達多). 부처님의 사촌으로 태어났지마는 10생(十生)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의 라이벌이 되어 가지고 부처님을 갖은 방법으로 해롭게 한 조달(調達)이다 그 말이여.
그리고 부처님 몸뚱이의 피와 살을 빨아먹던 수많은 개미와 벌레들은 부처님이 최초에 녹야원(鹿野苑)에서 교진여(憍陳如)등 오비구(五比丘)에게 법을 설하실 때 그때 팔만의 모든 제천(諸天)이 다 득도를 했는데, 그 팔만사천의 하늘나라에 선신들이었다 그거거든.

부처님께서는 과거 인행 때에 그러한 인욕을 해 가지고 그러한 무서운 일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원한심을 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해가 끼치지 않도록 그것을 신심과 지혜와 자비로써 그런 과정을 능히 성취한 그러한 과보로써 결국은 거룩한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였으면서 한 생각 미(迷)한 탓으로 이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무량겁을 해서 오늘날에까지 왔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마는 그래 가지고 이 정법을 듣고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조그만한 일로 진심(瞋心)을 내고, 탐심(貪心)을 내고, 원한심을 내서 선원에서는 도반(道伴)들에 혐오감을 주고, 도 닦아가는 데 장애를 주고, 그래도 견디지 못해서 걸망을 싸고. 이러한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금년 임신년 사월 초파일을 기해서 정말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원력(大願力)으로써 새로 태어나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가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니라
나무~아미타불~
경정철석심(勁挺鐵石心)으로  직취보리로(直取菩提路)니라
나무~아미타불~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가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라.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는 육체상으로 남성(男性)을 받아 난 사람만을 여기서는 남아대장부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육체상으로 여자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오욕락(五欲樂)이 무상(無常)한 줄 알고 발심(發心)해서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남아대장부입니다.

설사 고추가 달렸어도 정법을 믿지 않고 오욕락에 빠져서 그렇게 산 사람은 그거 대장부라 할 수가 없어. 미련하기가 한이 없고 어리석기가 한이 없어.
정말 몸뚱이야 어떻게 생겼건, 정법을 믿고 발심한 사람이면 그게 바로 남아대장부다 그 말이여.

그런 발심을 한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는  작사막망로(作事莫莽鹵)여.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향해서 나아가는 데 그럭저럭하고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말이여. 한번 시작했으면, 정말 부처님이 왕궁의 부귀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갔으면 거기에 그럭저럭하실 수가 있었겠느냐 그 말이여.
우리도 그 장부(丈夫)를 본받아서 발심을 한 이상 어찌 그럭저럭 등한히 하고 사소한 일에 진심을 내고, 사소한 일에 우리의 아까운 시간과 생각을 빼앗기고 흔들릴 수가 있겠느냐 그거거든.

경정철석심(勁挺鐵石心)으로, 굳고 굳은 쇠와 돌같은 마음으로,
직취보리로(直取菩提路)니라. 바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을지니라. 한산, 한산(寒山) 습득(拾得)의 한산 성현의 게송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지은, 참 숙세(宿世)에 지은 공덕으로 원력으로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한국에 태어났고 또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아대장부로서 또 참선을 시작했다면 철저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배산에 일단 들어갔으면 기어코 보배를 캐내야만 말아야지, 그럭저럭 끌적끌적하다가 돌아올 수야 있겠느냐 이거거든.

참선은 '지금 열심히 해 가지고 장차 기어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하리라' 이러한 게 아닙니다.
참선은 '이뭣고?' 이외의 어떠한 일에도 집착심을 가져선 안 돼. 어지간한 일이면은 인연 따라서 수용하고, 오직 한 생각 철석(鐵石)같은 마음으로 '이뭣고?' 하나만을 단속해 나가야 돼.

우리는 상근기(上根機)도 아니고, 중근기(中根機)도 아니고, 하근기(下根機)거든.
하근기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가 없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에도 정신을 쓰고 저것에도 정신을 쓸 겨를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자기 소임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하고 어디 가서 혼자 '이뭣고?'만 하고 백 가지 일을 다 버리라는 게 아니야.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하되 그 속에서 화두(話頭) 하나를 잡드리해 나가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라 이거거든.

"어떻게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서 공양주(供養主)를 열심히 하냐? '이뭣고?'만 열심히 하다 보면 밥이 어떻게 되겠느냐? 밥할 때에는 밥을 정성을 쏟아야지 '이뭣고?'만 하고 있으면 밥이 죽이 되는지, 떡이 되는지, 되겠느냐?"
어떤 참, 수행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

공양을 짓는데 전(全) 정성을 거기다 쏟다보면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화두를 열심히 들다보면 밥이 다 타 버리거나, 죽이 되거나 한다 그 말이여. 틀림없이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채소밭을 매는데 '요것이 채소냐? 요것이 잡초냐?'를 봐 가지고 가려서 뽑아야지, '이뭣고?'만 열심히 하다 보면 뽑는 것이 채소는 뽑아 버리고, 남는 것은 잡초만 남고 그렇다는 것이지.

설사 그런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화두(話頭)를 놓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화두 잘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위해서 채소도 가꾸고 밥도 짓는데.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는 '밥이 타는 한이 있더라도 화두를 열심히 들어야 하냐?' 그렇더라도 '화두는 조금 등한히 들더라도 밥할 때는 밥할 때 정신을 쏟아야 하지 않냐?'
이것은 그 사람 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이것을 옳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저것을 옳다고 주장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 내가 지금 여기에 사부대중이 다 모이셨는데 '밥이 타더라도 화두를 열심히 들어야겠다' 하고 생각하신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내리세요.
'화두는 좀 등한히 들더라도 밥을 잘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신 분, 손들어 보세요.

그러면 이래도 손도 안 들고, 저래도 손도 안 든 분은 뭐여?
그건 아마 '두 가지가 다 일리가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뭐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손을 안 드신 분은 손 들어봐요. 내리세요.(21분4초~40분20초)




(3/4)----------------

그런데 내가 한 예를 들겠는데, 자동차 운전을 하면 눈으로는 앞을 봐야 하고 또 앞에 걸린 거울로는 뒤를 봐야 하고, 양쪽 거울을 통해서 끊임없이 뒤도 살피고 앞도 봐야 하고.
손으로는 운전을 하고, 발로는 브레이크도 밟았다 악셀레이터도 밟았다 클러치도 밟았다 하고, 손은 요새는 뭐 노클러치가 있어서 아주 편리하게 어지간하면 다 달릴 수가 있는데.

두 손, 두 발, 눈, 그리고 귀도 항상 열어 놓고 초비상으로 살펴야 하고, 코로도 이상한 냄새가 나면 그것도 '엔진에 무슨 문제가 있냐?' 코도 있어야 하고, 이목구비와 사지백체(四肢百體)를 다 적절하게 다 활용을 해야지, 앞만 보고 가도 안 되고 뒤만 봐도 안 되고. 앞 보면서 뒤를 봐야지, 뒤 보면서 앞을 안 봐도 안 되거든. 그러니 이론상으로는 도저히 운전은 못 해 먹을 노릇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처음에는 앞을 보면서 뒷이 잘 안 보여도 자꾸 연습을 하다 보면, 앞 보면서도 뒤도 보고, 옆에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할 것 다 하고 한다 그 말이여.

그것을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화두 들면서도 밥을 잘 지을 수가 있어요. 또 밥을 잘 지으면서도 화두를 들 수가 있는 거여.
처음에는 좀 어려울런지 모르지만, 자꾸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신심과 분심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거여.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고.

밥도 자꾸 열심히 하다 보면—처음에는 자꾸 뚜껑을 열어 보고 싶거든. '밥이 다 퍼졌나 안 퍼졌나? 물이 아직도 있냐 없냐?' 자꾸 열어 봐. 두 번 세 번 열어 보면 그 밥은 맛이 없어.
자꾸 하면 '거기서 나오는 김이 위에로 올라오냐, 옆으로 피식 하고 나오느냐' 그 김 나오는 것만 봐도 '물이 다 되었다, 아직도 물이 있다' 그걸 알 수 있는 거여.

문제는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이 문제지, 해보지도 않고 겉핥드기로 이론만 가지고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그것 따지다 시간 다 가는 거여.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열심히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면서도 한눈팔지 않고 정성으로 공양주(供養主)를 하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열흘,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밥도 잘되면서 화두도 터억 들리게 된 때가 오는 것이다 그 말이여.

해보지도 않고 조금 해보고서 주둥이만 까 가지고 이렇구 저렇구 따져 쌓으면 그거 안 되는 거거든.


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하고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천리계산수지두(고)(千里溪山隨指顧)하면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재선중선재수(人在船中船在水)요, 사람은 배 가운데 타고 있고, 배는 물 속에 있어.
수무부재방선행(水無不在放船行)이다. 물이, 배를 띄워서 달릴 수 없는 물은 없어. 물 있는 곳에는 배가 다 띄워서 갈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사람은 배를 타고 있는데, 배는 물 가운데 있다. 배를 띄워서 갈 수 없는 물은 없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에서부터 일어나. 사람이 있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번뇌 망상 있는 곳에는 불성(佛性)이 있어, 거기.
그래서 몸뚱이가 있으면 번뇌 망상이 있기 마련이여.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하니,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통해서 끊임없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낄 수 있다 그 말이여. 느낄 수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불성(佛性)이 있다 그 말이여.

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 불성(佛性)으로 인해서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내음을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 말이여.
그러니 몸뚱이를 가지고 있고, 눈으로 모든 색상을 볼 수 있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틀림없이 불성(佛性)이 있는 증거거든.

그래서 몸뚱이가 이만큼 보존되어 있을 때 유지되어 있을 때, 이만큼 진심도 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원망할 줄도 알고 괴로워할 줄도 아는 그런 번뇌 망상 일으킬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정말 참선(參禪)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참선을 해서 자기의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거거든.

물이 있는 곳에는 배를 띄울 수가 있고 그 배 가운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그 배를 어떻게 저어 가느냐? 어떻게 운전을 하느냐에 따라서 동쪽으로도 갈 수 있고, 서쪽으로도 갈 수 있고, 자기의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가 있는 것이거든.

천리계산수지두(고)(千里溪山隨指顧)요. 그 배 양쪽으로는 천리—압록강이라든지 양자강이라든지 두만강이라든지 또는 동해라든지 태평양이라든지, 천리계산(千里溪山)은 다 어느 쪽으로 가느냐? 방향을 틀기에 달려 있어.
일천풍월임봉영(一川風月任逢迎)이다. 배 양쪽에 모든 경치는 배 가는 대로 열려 나갈 것이다 그 말이거든.

아무리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고 또 몸뚱이를 통해서 시청언동(視聽言動)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할 수 있어도, 그것을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나가는 사람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아무리 이 좋은 몸뚱이를 가지고 정상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욕락에 빠져서 재산 모으는데 일생을 거기다 바치고, 명예 권리 하는데 거기다가 일생을 다 바치고, 오욕락에 거기다 일생을 다 바쳐버린다면 그 사람은 삼악도(三惡途)밖에는 갈 곳이 없고, 어떻게 그 사람이 견성성불을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정말 이렇게 생각할 때에 참 다행이여.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가 감사하고, 이러한 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더군다나 불법을 믿게 된 동기가 감사하고.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좋은 기회가 앞으로 10년 동안 유지가 될 것이냐? 20년 동안 유지가 될 것이냐? 30년 동안 유지가 될 것이냐? 전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이 일대사(一大事)를 향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여기다 다 바치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여. 이것만이 우리가 인생으로 태어난 보람을 바르게 누리고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세계가 혼란하면 할수록, 사회가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만이라도 불법을 믿기 때문에 더욱 중심(中心)을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배 안에 탄 사람이 폭풍우를 만났을 때, 그 배가 나무 이파리처럼 흔들려 온 배에 탄 사람이 고함을 지르고 비명을 지르고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울고불고 야단일 때, 그 속에 한 사람만이라도 탁! 정신차린 사람이 있어서 키를 바로잡고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하도록 해서—흔들릴수록에 사람이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하면 진짜 펄떡 배가 넘어가 버리거든—각자 양쪽에 탁! 앉아서, 탁! 붙잡고, 딱! 그래야만 그 배가 넘어가는 것을 방지할 것이라 그 말이여.

우리나라도 앞으로 경제 문제, 정치 문제, 교육 문제, 많은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정치는 안 하고, 직접 나서서 사업을 안 하더라도 또 하는 사람은 하더라도 우리는 정법에 의지해서 확고하게 우리의 양다리를 버티고 서야 하고, 중심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산이 커서 명산(名山)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선이 살고 도(道)를 닦는 수행자가 있어야 그 산이 명산」이라고 하는 옛말이 있습니다.
비록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고 세계가 말세적인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불법을 믿고 정법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 한은 그래도 거기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가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정법을 믿는 법보제자(法寶弟子)는 그러한 사명감을 굳건히 가져야 합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조그만한 사람일런지 모르지만, 정법을 의지해서 진리를 향해서 수행을 해 나간 사람은 인류 가운데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안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한 길을 가르켜 주신 사람이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앞으로 칠 일 후이면 '부처님 오신 날'이 돌아옵니다. 우리 절에서도 이 '부처님 오신 날'을 향해서 이렇게 많은 등(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동참하셔서 한마음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경축할 뿐만이 아니라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우리도 다시 한번 또 새롭게 태어나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보름 후이면 임신년 하안거가 시작이 되는데, 그 하안거를 기해서 모두 방부를 들이고 정진을 하시고 또 이 선방에 나아가기 위해서 화두를 타고자 하는 분이 여기에 모다 참석을 했는데, 화두는 '이뭣고?'
개별적으로 만나서 이걸 일러주기가 어려워서 법상(法床)을 빌려서 말씀을 한 것이니까, 화두를 안 타신 분은 잘 듣고.

'이뭣고?'

'이뭣고?'는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여, 시삼마. "씨슴마" 중국 발음으로는.
근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이뭐꼬)'거든, “이뭣고?”

화두는 간결할수록 좋은 것이라, '이 것 이 무 엇 인 고' 여덟 자나 되는데, '이뭣고'하면 석 자거든.

'이뭣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거든.
근데 그런 긴 소리는 생략하고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 누면서도 '이뭣고?'
소지하면서도 '이뭣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이것을 놓치지 않도록.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꼭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를 챙기지 않아도—'이뭣고?'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따악 관(觀)해야지, 그 의심이 있는데도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주 들고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어.

화두가, '이뭣고?' 한 번 들어서 그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면 그때 챙기고, 딴생각[別念]이 들어와서 놓쳐 버리면 그때 챙기는 것이지, 괜히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어.
'이뭣고?'는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것이 중요한 거여. '이뭣고?'(40분23초~58분55초)




(4/4)----------------

첫째, 참선하는 데는 자세를 바르게 하거든.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떠억 하고. 해서 자세를 바르게 해.
자세를 앞으로 숙어도 안 되고, 좌우로 이렇게 기울어도 안 되고 또 단정히 한답시고 너무 지나치게 뻣뻣하니 뒤로 자지바지 이것도 못쓰는 거여. 단정하면서도 양어깨에 힘을 다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은 감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뚝 부릅뜨지도 말고 평상(平常)으로 뜨는 거여.

평상으로 뜨되, 앉은 자기한테로부터 약 2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는 거여.
'눈을 떨군다' 하는 것은 그 2미터 지점에다가 무슨 콩 같은 것을 놔두고 그 자리를 이렇게 그걸 쳐다보고 그렇게 하면 못쓰는 거고, 그냥 본 바 없이 평상으로 눈을 거기다 떨구라는 것이지, 그 자리를 응시(凝視)할 필요는 없어. 응시해선 안 되아.

그렇게 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그렇게 평상으로 떴으면, 그다음에 호흡을 하되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데, 단전호흡은 깊이 들어마셔서 조용히 내쉬는, 그리고 천천히 들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거여.
왜 이 단전호흡이 필요하냐 하면 사람이 살아 있는 증거는 숨을 쉬고 있으면 '살아 있다' 하고, 숨을 못 쉬면 죽은 거여. 그래서 이 호흡은 인간 생사(生死)와 즉결되는 문제여. 대단히 중요한 거여.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흡을 무심히 하는 거여. 그저 무심히 하고 있지만, 사실은 호흡은 바르게 하는 호흡이 있고, 바르지 못한 호흡이 있어.
바르게 호흡을 해야 몸의 노폐물이 밖으로 잘 배설이 되고, 따라서 피로도 회복이 빨리 되고 몸도 가벼워지고, 몸만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아지고 안정이 되는 거여.

그래서 어렸을 때, 어머니 뱃속에서 막 갓 태어났을 때는 저절로 이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거여. 그런데 차츰차츰 커가면서 그 단전호흡을 잊어버린 거여.
그래 가지고 잘못 호흡을 해 가지고, 요새 사람들이 어떻게 조금만 건들면 파르르르 신경질을 내고 단기(短氣)하고, 참을성이 없고 경솔하고, 신경질을 잘 내고 한 것이 전부 어렸을 때 배우지 않고도 알고 있었던 그 단전호흡을 잊어버리고 잘못 호흡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거여.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단전호흡법을 잘 알아 가지고 서서히 그 어렸을 때 숨쉬던 단전호흡으로 돌아가면 사람이 신경질 잘 내던 사람도 안 나게 되고, 사소한 일에 흥분하는 버릇도 없어지고, 한 번 속상했다 하면은 며칠씩 그것이 안 없어지고 한 것도 단전호흡을 하면 금방 속이 좀 상하려고 하다가 금방 안 상할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른 새 상했다 하더라도 금방 그 생각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여. 그렇게 중요해.
그래서 몸도 가벼워지고 어지간한 병은 다 없어지고, 혈압이 높은 사람도 혈압 약을 안 먹어도 이 단전호흡을 잘하면 혈압도 조정할 수가 있어.
물론 오줌만 잘 먹어도[요료법(尿療法)] 혈압 같은 건 대번에 일주일이면 낫지마는, 오줌 안 먹더라도 단전호흡만을 열심히 해도 사람이 달라지는 거여. 자기의 감정을 자기가 자유자재로 할 수가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여.

그래서 참선을 안 하는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하면 참 좋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참선까지 한다면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전하고 나아가서 확철대오해서 생사(生死)까지 해탈(解脫)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하는 법을—단전호흡하는 법을 이 자리에서 더이상 내가 자세히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이 「참선법」이라고 하는 카세트(cassette)가 이 사무실에 가서 말하면, 그것을 구해 가지고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을 들으면은 자연히 이 단전호흡을 바르게 하는 법을 터득을 하게 되고, 화두를 드는 법도 터득을 하게 될 것인데 오늘은 간략히만 말씀을 드립니다.

준비 호흡을 세 번, 빨리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코로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았다가, 입으로 '후~~~' 완전히 하나도 없을 때까지 다 내쉬고, 다 내뿜었으면 또 들어마셔.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어. 그래 가지고 입으로 '후~~~' 하고 다 내쉬어.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을 하면 가슴속에 있는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내뿜게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서 세 번을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그때는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조용하게 숨을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 아랫배가 차츰차츰 볼록해진 것을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8부쯤만 들어마셨으면 하나, 둘, 셋,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니 숨을 내쉬되, 입으로 내쉬지 말고 코로 내쉬어. 코로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코로 조용하니 내쉬는 거여.

그러면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정지하는 시간이 약 3초, 내쉬는 시간은 조금 길게 한 4, 5초 이렇게 조용하니... 들어마시는 것도 약 8부쯤만 들어마시되, 내쉬는 것도 약 8부쯤만 내쉬어.
가뜩 너무 가뜩 들어마시고, 너무 오래 참고, 너무 완전히 내쉴라... 준비호흡은 그렇게 하지만, 본 호흡에 들어가서는 8부쯤만 들어마시고, 참는 것도 약 3초 동안만 정지했다가, 내쉬는 시간도 완전히 다 내쉴라 하지 말고 8부쯤만 내쉬라 그거거든.

하되 식사를 하고, 공양을 하고 2시간 이내에는 단전호흡을 하지 말아. 하면은 위(胃)에 압박을 주니까 2시간 이내에 하지 말고, 2시간 뒤에 단전호흡을 하고.
처음으로 한 사람은 한 5분간만 하고, 또 쉬었다가 또 하고 해서 조금씩, 조금씩 해서 익혀 나가도록.

이것이 좋다 하니까 너무 무리를 해 가지고, 밥 금방 먹고 가득 위에 음식물이 들어 있는데 무리를 해 가지고 소화가 잘 안되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이런 수가 있으니까.
아무리 좋은 것도 맛있는 음식일수록에 조그만치 먹어야지,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배탈이 나고 설사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단전호흡이 좋다니까 이걸 너무 무리하게 해 가지고 병 난 사람을 내가 가끔 보거든.

그래서 그런 일이 없도록 서서히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이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해서 익혀 나가도록 하고.

화두는 '이뭣고?'를 하되,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처음에는 그렇게 익혀 나가도록.

「'이뭣고?'를 하되 의심(疑心)을 간절하게 의심을 하라」 이렇게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셨고,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하고, 크게 의심이 크면은 크게 깨닫고, 의심이 적으면 적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고인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마에다가 아주 여기다 '내 천(川)’ 자를 쓰면서 (힘을 주면서)'이뭣고? 이뭣고?' 해 가지고 막 그냥 용을 쓰고 이렇게 얼마 안 가면 그 사람은 골이 뽀개지는 병이 생기는 거여.

간절하게 하는 것과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한 것과는 전혀 다른 거여.

그래서 이 참선하는 분은 반드시 법문(法門)을 자주 듣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바르게 해 나가야지, 참선이 아무리 좋아도 자기 식으로 우격다짐으로 말뚝 신심이 나 가지고 어거지로 막 몰아붙여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골치 아픈 병이 생기고, 소화불량이 생기고 아무짝에도 못쓴다 그 말이거든.

반드시, 그래서 달마 스님은 그 『혈맥론(血脈論)』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하고 아주 탁! 못 박아서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여.
눈으로 보고 가는 길도 두 갈래, 세 갈래 길이 나오면은 어디로 갈 줄 모르는 것인데, 그래서 반드시 길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이 참선은 눈으로 보이는 길이 아니거든.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어떻게 바른 스승 없이 제대로 해 갈 수가 있겠느냐?
까딱하면 병나고, 잘못하면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사견(邪見)에 빠지면 그거 미친 것이거든.

그래서 이것은 참! 바른 스승 없이는 하기가 어려운 것이고, 기왕 시작했다 하면 반드시 이것은 전신투구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해서 깨달아야 되는데, 바르게 해 나가야 한다.

오늘 화두를 새로 탄 사람은 그렇게 알고, 어쨌든지 출가한 사람은 '이거 하나 하자'고 출가를 하고, 출가법을 부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이니까 어쨌든지 철저하게 바르게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사로불용행(邪路不用行)하라  행지왕신고(行之枉辛苦)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요구불과(不要求佛果)하라  식취심왕주(識取心王主)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산(寒山), 습득(拾得),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 화현(化現)이고,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 화신(化身)이다' 하는데, 지금 산승(山僧)이 읊은 게송은 문수보살의 화현이신 한산의 게송입니다.

사로불용행(邪路不用行)이라, 삿된 길은 가지를 말아라.
행지왕신고(行之枉辛苦)니라, 삿된 길을 가면은 쓸데없이 쓰라림과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를 하는데, 자꾸 옆에서,
"이뭣고를 해 봤자 하근기(下根機)는 깨닫지도 못하고, 밤낮 해봤자 맛도 없고 아무것도 되는 것도 없고, 어쨌든지 지장경을 읽어라. 금강경을 읽어라. 무슨 주력을 해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아미타불은 부르다가 마지막 죽을 때 열 번만 부르면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반야용선을 가지고 데리러 오는데 그걸 하면은 돈도 안 들고, 참 고생할 것도 없고.
이뭣고 해 봤자 결제(結制)하러 가면은 돈 내야 하고 또 잠도 마음대로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죽비(竹篦) 치고 시간 맞춰서 앉으려면 허리 아프고 그러니 그까짓 거 뭐하러 그걸 하려고 하냐? 이것을 해라. 이거 읽으면 참 좋다는데 이것을 하지, 그거 참선은 다 최상근기를 타고 나야 그 사람이 닦지, 지금 참선한다고 해 봤자 누구 견성한 사람 봤어? 하지 말고 요렇게 이거하라"고 자꾸 옆에서 속삭속삭하면,

'대체 며칠 가서 해 봤지마는 별로 얻은 것도 없고, 누구는 꿈에 무엇을 나타나고 무엇을 했다는데 나는 별로 보인 것도 없고' 솔깃하니. 그래도 와서 법문 들어보면 '참선을 해야 한다'고 그러고, 또 그 옆에 말을 들어보면은 또 그것이 좋을 것 같고 갈팡질팡 갈팡질팡해.
그러지 말고 '굿을, 아무개가 굿을 잘하는데 굿을 하면은 어쩌고저쩌고 한다'
또 '굿을 할까?' 갈팡질팡하면 그 사람이 무엇이 되냐 그 말이여.

불요구불과(不要求佛果)여.
부처님이 탄생하신 뒤에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도 닦은 스님네나 청신사 청신녀가 수백만 명이지만, 부처님 같은 사람 한 번이나 나왔냐 이거거든. '그러니까 그거 다 소용없고 어쨌든지 아미타불 불러 갖고 극락세계 가는 것이 제일이다' 들어보면 그럴싸하거든.

참선을 하는데, 부처님과 같은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불과(佛果)를 구하지 말아라 이거여.

식취심왕주(識取心王主)니라.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나의 주인공을 탁! 알아버려라 그 말이여.
그것을 깨달아 버려야지, 거기다가 목표를 둬야지—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야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놈이 다 있거든.
바로 그놈을 탁! 식취(識取)하라 그 말이여. 딱! 알아차리라 그거거든.

성날 때, '이뭣고?'
탁! 이 성난 놈, 그놈을 챙기는 거거든.

뭘 볼 때, 탁! 볼 줄 아는 '이뭣고?' 탁! 챙겨라.
그렇게 챙겨 나갈 때 찰나찰나에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거여, 그게.
그놈 내놓고 무엇을 깨닫느냐 그 말이여. 그것을 깨닫는 것이 '불(佛)'이여.

'불(佛)'이란 말이 인도(印度) 말인데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말이거든.
실달 태자(悉達太子)가 출가해 가지고 구담(瞿曇) 사문(沙門)이 되었는데 견성, 그걸 깨달았거든.

별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깨달은 뒤에 32상(三十二相)을 갖추고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것이 아니어. 내나 깨닫기 전에 그 모습을 가지고 계셨어.

우리는 32상도 갖추지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하고, 배고프면 밥 생각나고, 때리면 아프고, 욕하면 성내니까 흉악한 박지범부(博地凡夫)지만,
성날 때 '이뭣고?' 하고, 슬플 때 '이뭣고?' 하고, 속상할 때 '이뭣고?' 하고, 원망스러울 때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이뭣고?' 한 그 찰나찰나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놈 내놓고 절대로 부처가 따로 없는 것이여.

우리는 그렇게 믿고, 부지런히 일체처 일체시에 그 경계(境界)에 팔려가지 말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그것밖에 정법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활구참선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견성성불의 길도 없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58분59초~1시간18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우후정화연야발~ / LA 인종 폭동(1992년). 인과법(因果法)의 과보(果報) / 참선법(參禪法)을 배워야 세계가 평화롭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 / 백인이나 유색 인종(有色人種)이나 인간의 본성(本性)에 있어서는 차등(差等)이 없는 것 / 자기 마음 하나를 잘 다스려야.

부처님께서는 자기를 이기신 분,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 제일가는 대장부(大丈夫)이시고, 왕 가운데 왕이요, 성현 가운데 성현 / 부처님께서 과거 인행(因行) 때, 큰 힘을 가진 용의 몸을 받으신 때의 인욕(忍辱) 일화 /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정말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원력(大願力)으로써 새로 태어나야 / (게송)남아대장부~ / 정법을 믿고 발심한 사람이면 그게 바로 남아대장부 / 참선은 '이뭣고?' 이외의 어떠한 일에도 집착심을 가져선 안 돼.

수행하는 것을 운전에 비유해서 말씀하심. '자꾸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신심과 분심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하되 그 속에서 화두(話頭) 하나를 잘 들 수 있다' / (게송)인재선중선재수~ / 번뇌 망상 있는 곳에는 거기에 불성(佛性)이 있다 / 번뇌 망상 일으킬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정말 참선(參禪)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참선을 해서 자기의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세계가 혼란하면 할수록, 사회가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만이라도 불법을 믿기 때문에 더욱 중심(中心)을 잡아가야 / 「산이 커서 명산(名山)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선이 살고 도(道)를 닦는 수행자가 있어야 그 산이 명산」 / '이뭣고?'는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것이 중요한 거여.

참선 자세, 단전호흡 / 단전호흡은 식사를 하고, 공양을 하고 2시간 뒤에 하라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하고, 크게 의심이 크면은 크게 깨닫고, 의심이 적으면 적게 깨닫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닫지 못한다」 / 간절하게 하는 것과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 / 달마 스님은 『혈맥론(血脈論)』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 (게송)사로불용행~ / '불(佛)'이란 말이 인도 말로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 일체처 일체시에 그 경계(境界)에 팔려가지 말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엇을 듣건, 항상 거기에서 자기의 본심(本心)으로 돌아가고 본지(本旨)에 입각해서 행동을 하고, 본지에 입각해서 말을 하고, 본지에 입각해서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삼악도를 면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자꾸 불어나서 가정에서, 사회 국가에서, 온 세계에서 자기의 본심을 찾는 본지에 입각한 생활을 해 나간다면 세계평화는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얼굴 빛깔이 다르거나, 생각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고, 상대방의 종교를 존중히 여기고, 그러면서 공통점을 찾아 나가고 언제나 근본에 의해서 근본을 향해서 공통점을 찾아 나간다면 지엽적으로 다른 점은 다 거기에서 적당하게 융화가 되어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였으면서 한 생각 미(迷)한 탓으로 이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무량겁을 해서 오늘날에까지 왔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마는 그래 가지고 이 정법을 듣고 믿고 또 그것을 실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조그만한 일로 진심(瞋心)을 내고, 탐심(貪心)을 내고, 원한심을 내서 선원에서는 도반(道伴)들에 혐오감을 주고, 도 닦아가는 데 장애를 주고, 그래도 견디지 못해서 걸망을 싸고. 이러한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금년 임신년 사월 초파일을 기해서 정말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원력(大願力)으로써 새로 태어나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떻게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서 공양주(供養主)를 열심히 하냐? '이뭣고?'만 열심히 하다 보면 밥이 어떻게 되겠느냐? 밥할 때에는 밥을 정성을 쏟아야지 '이뭣고?'만 하고 있으면 밥이 죽이 되는지, 떡이 되는지, 되겠느냐?"
어떤 참, 수행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에서부터 일어나. 사람이 있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번뇌 망상 있는 곳에는 불성(佛性)이 있어, 거기.
그래서 몸뚱이가 있으면 번뇌 망상이 있기 마련이여.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하니,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통해서 끊임없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낄 수 있다 그 말이여. 느낄 수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불성(佛性)이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몸뚱이가 이만큼 보존되어 있을 때 유지되어 있을 때, 이만큼 진심도 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원망할 줄도 알고 괴로워할 줄도 아는 그런 번뇌 망상 일으킬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정말 참선(參禪)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참선을 해서 자기의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거거든.

성날 때, '이뭣고?'
탁! 이 성난 놈, 그놈을 챙기는 거거든.

뭘 볼 때, 탁! 볼 줄 아는 '이뭣고?' 탁! 챙겨라. 그렇게 챙겨 나갈 때 찰나찰나에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거여, 그게. 그놈 내놓고 무엇을 깨닫느냐 그 말이여. 그것을 깨닫는 것이 '불(佛)'이여.
'불(佛)'이란 말이 인도(印度) 말인데 '붓다(Buddha)'인데, 번역하면 '깨닫는다' 말이거든. 실달 태자(悉達太子)가 출가해 가지고 구담(瞿曇) 사문(沙門)이 되었는데 견성, 그걸 깨달았거든.

별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깨달은 뒤에 32상(三十二相)을 갖추고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것이 아니어. 내나 깨닫기 전에 그 모습을 가지고 계셨어.

우리는 32상도 갖추지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하고, 배고프면 밥 생각나고, 때리면 아프고, 욕하면 성내니까 흉악한 박지범부(博地凡夫)지만, 성날 때 '이뭣고?' 하고, 슬플 때 '이뭣고?' 하고, 속상할 때 '이뭣고?' 하고, 원망스러울 때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이뭣고?' 한 그 찰나찰나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놈 내놓고 절대로 부처가 따로 없는 것이여.

우리는 그렇게 믿고, 부지런히 일체처 일체시에 그 경계(境界)에 팔려가지 말고, 바로 그 경계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챙겨 나가자.
그것밖에 정법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활구참선이 따로 없고, 그것밖에 견성성불의 길도 없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26~450)2021. 4. 7. 07:18

((No.430))—1990년 12월 첫째 일요법회(90.12.02) (78분)

 

 

(1/4) 약 20분.

 

(2/4) 약 18분.

 

(3/4) 약 20분.

 

(4/4) 약 21분.


(1/4)----------------

부처님 말씀에 중생이 10가지 일로써 선(善)을 삼기도 하고, 또한 10가지 일로써 악(惡)을 삼기도 하나니, 무엇 무엇이 10가지인가? 몸[身]으로 3가지요, 입[口]으로 4가지요, 뜻[意]으로 3가지니,
그 몸으로 3가지라고 하는 것은 살생(殺生)이요, 투도(偸盜)요, 사음(邪淫)이요.
입으로 4가지는 양설(兩舌)이요, 악구(惡口)요, 망어(妄語)요, 기어(綺語)다.
뜻으로 3가지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요, 어리석음[癡心]이다.

이와 같이 10가지 일을 성현(聖賢)의 도(道)에 따르지 아니하면 그것은 십악행(十惡行)이라 그러고, 그것이 열 가지 악(惡)이고, 그 악을 행하지 아니하면 악을 그치면 이것을 십선행(十善行)이라고 한다.

그러면 몸으로 3가지는 산목숨을 죽이는 거, 또 도둑질을 하는 거, 또 사음을 하는 것이고.
입으로 4가지는 첫째, 두 가지 말로 이간질하는 것이요[兩舌]. 욕을 하는 것이요, 악한 말을 하고, 저주하고 하는 거고[惡口]. 또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妄語]. 또 잡된 말, 음탕한 말, 모다 그런 꾸며 대는 말을 하는 것이다[綺語].
뜻으로 3가지는 탐심, 탐욕심. 그리고 진심을 내는 거. 어리석은 마음, 또 삿된 소견을 내는 것이다.

십선과 십악은 어떻게 다르냐? 내나 그 십선과 십악은 대상은 같은데, 그런 악한 짓을 하면은 십악(十惡)이 되고, 악한 짓 안 하면 그것이 십선(十善)이 되는 거여.

산목숨을 죽이는 것'은 생명을 끊는 것인데, 사람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일체 크고 작은 축생들 이게 다 들어가는데, 그 살생(殺生) 가운데에—가장 내 몸 밖에 다른 살생을 하는 것도 살생이지만,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끊는 것도 살생이여.
요새 노인들도 자식에게 버림받고 갈 곳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국민학교 어린 학생이 자살을 하는 예도 엊그제 모다 뉴스에 나왔습니다. 남을 죽인 것도 나쁘지마는, 자기가 자기를 죽인 것도 살생(殺生)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살생이라 하는 것은 꼭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만을 죽인 것만이 살생이 아니고,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타격을 주어가지고 생(生)의 의욕을 잃게 하는 것도 그런 것도 살생이고, 또 자기 스스로도 삿된 생각, 급한 생각,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육체에 대한 자포자기, 인생의 삶에 대한 자포자기, 그러한 것도 일종의 살생에 들어가고.

살생 가운데 제일 좋지 못한 살생은 무엇이냐?
'자기는 성불할 수 없다. 도를 닦아 봤자 소용이 없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도(道)에 대해서 자포자기하는 살생이야말로 살생 가운데 가장 무섭고도 옳지 못한 살생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법보제자는,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 누구 다른 사람을 죽일 리가 있습니까?
그러한 살생보다는 자기의 도를 닦는 데에 대한, 견성성불하는 데에 대한 자포자기 그것이 참으로 무서운 살생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도둑질하지 말아라.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이야 계(戒)를 받았건 안 받았건, 누구 것을 훔치겠습니까? 그런 일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도둑질을 하실 리는 없겠고.
자기의 분(分)이 아닌 것을 형제간이라던지, 친구 간이라던지, 분이 아닌 것을 적당한 구실을 붙여서 챙기는 거, 이러한 것도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촌쯤 되는 도둑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때문에 형제간에 재판도 하고, 모다 싸우기도 하고 또 정을 손상을 하게 됩니다.

요새는 어떻게 세상이 험해졌던지 청소년들도 사람을 죽이고 강도질을 하고, 날이면 날마다 강도 절도가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해서 강도를 없애는 전쟁을 선포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온 세상이 아주 강도 절도로 우글대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 불자(佛子)는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남이 주지 아니한 것을 몰래 훔치거나, 알게 훔치거나, 이런 훔치는 일이 없어야겠다.

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 아내, 자기 남편이 아닌 사람과 서로 사랑하지 말아라.
사음은 자기 스스로 몸을 더럽히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마음을 더럽히고, 몸과 마음을 더럽히면 항상 마음이 괴롭고 불안하고 언젠가는 자기 스스로를 멸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에 이끌고 불화(不和)로 인해서 행복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는 거짓말, 허황된 소리, 허망한 소리, 속이는 소리 그런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이간질해서 서로 싸움을 붙이고, 이간질은 아첨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인데—여기 가서는 그 사람에게 '저 사람은....' 또 딴소리해 가지고 상대방한테 아첨을 하다 보니 이간질이 되고.
이간질이라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는 자기가 무슨 이득을 얻은 것 같이 느껴질런가 모르지만, 얼마 안 가면 금방 그것이 발로(發露)가 되어서 결국은 인격적으로 매장이 되고, 양쪽에서 다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진실하고, 질직(質直)하고, 속임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악구(惡口)를 하지 마라. 악한 말, 추악한 말, 저주하는 말, 욕설을 퍼붓고 하는 그런 악한 말을 하지 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절을 못하면 조금 자기 비위에 틀리면은 막 사정없는 입에 못 담을 욕설이 터져 나오는데, 불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어떠한 자기 뜻에 어기는 일을 당할지라도, 주먹 같은 놈이 속에서 틀어 오르고, 곧 목구멍까지 욕이 나올려고 할 그러한 찰나에도 떠억 심호흡(深呼吸)을 하면서 생각을 돌려.
'아, 내가 십선계(十善戒)를 받았는데 이래서야 되겠느냐?' 심호흡을 하면—심호흡을 깊이 숨을 마셨다가 잠깐 참았다가, '후~' 하고 숨을 내쉬면 그 주먹같이 틀어 오르는 격분(激忿)이 스르르르 가라앉게 되는 것이여.

그 추악한 욕은, 지금은 어떻게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져 가지고 조금만 건드리면 눈에 살기(殺氣)를 띠고, 입에서 막 욕이 터져 나오거든. 택시를 타도 운전사가 그러고, 도처에서 사람들이 노상 사람마다 칼을 품고 다니는 것 같이 살기가 등등하다 그 말이여.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장애 없이 살아가려면 항상 스스로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을 해야지, 까닥하면 그런 사람한테 만나면은 부딪치게 된다 그말이여.
상대방이 좀 험하게 나오더라도 나는 항상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자비심으로 상대하면, 상대방이 험하게 나오다가도 그냥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스르르르 하니 상대방도 가라앉게 되는 것이여.

손뼉도 두 손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지, 한 손이 아무리 소리를 내려고 해도 반대쪽 손이 맞서지 아니하면 소리가 날 수가 없는 것이니, 집안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항상 화두를 들고 그렇게 살아가면 저절로 감정이 순화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을 필요도 없고, 또 자기도 욕을 할 필요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불기어(不綺語), 꾸며 대는 말을 하지 말아라.
이 기어(綺語)에 대해서는 '진실치 못한 것을 아주 그럴싸하니 입담 좋게 꾸며 대 가지고 번드르르 하니 하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라' 이렇게도 풀이를 하거니와,
'잡되고 더러운 말을 하지 말아라. 또 허튼소리를 하지 마라. 또 옳지 못한 말을 하지 말아라. 또 음탕한 말을 하지 마라'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합해져서 '비단같이 꾸며 대지 말아라. 그런 꾸며 대는 말을 해 가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음심(淫心)을 내게 하지 말아라' 그렇게도 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뜻으로 세 가지는 탐심(貪心), 탐욕을 내지 말아라.
중생은 자칫하면 그 탐심을 내게 돼. 탐심이란 게 물건에 대한 탐심만 탐심이 아니라, 무엇이고 자기의 의사만을 고집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려고 그러고 그런 것도 정신적인 탐욕이여.

물질적인 탐욕만 나쁜 게 아니라, 정신적인 탐욕—무엇이든지 자기주장(自己主張)만 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내세우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것, 이것도 참 탐욕 중에도 대단히 중요한, 몹쓸 탐욕인 것입니다.

진심(瞋心)은 무엇이냐? 자기 뜻대로 안되면 진심을 내거든.
진심을 낸 사람은 반드시 탐욕이 심한 사람이야. 탐욕이 없는 사람은 진심을 낼 필요가 없어.

자기 뜻과 좀 안 맞더라도 상대방 말을 귀담아 듣고, 상대방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고, 그래서 양보할 일은 양보하고 상대방 의사를 존중히 여기고, 이러면 어디를 가던지 화합을 할 수가 있고 일이 파탄이 되지 않고, 일이 성사가 될 것인데—지금 야당, 여당 모두 국회에서도 자기 당 말만 옳다고 내세우고 자기 당에 이로운 쪽으로만 몰고 가고 한 데에서 국회도 저렇게 자꾸 정회(停會)가 되고 모다 그런 거고.

상대방의 말을 존중히 여기고, 자기의 사욕을 버리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피차 똑같이 입으로만 국가만 내세울 게 아니라, 정말 양심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나간다면 어찌 사사건건이 반대가 될 리가 있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 되는 일도 있고, 합해지는 일도 있겠지만 근본 목적이 같고 또 사심 없이 대한다면 반대하다가도 다시 또 화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집안에서도 부부간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탐욕과 진심 이것 때문에 모든 미움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결국은 불화가 생기고 해서 혼돈이 오고, 원결(怨結)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사견(邪見)을 내지 마라.
사견은 어리석은 데에 나와. 그래서 '치심(癡心)을 내지 말라'나, '사견을 내지 말라'는 다 같은 말이여. 어리석기 때문에 사견을 내고, 사견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여.(처음~20분1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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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로서 가장 어리석고 삿된 생각은 무엇이냐?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 것이여.
인과를 믿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인과를 믿지 않고 마구잡이 한 사람은 반드시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인과법은 우주의 질서입니다. 원인이 없이 어떤 결과가 나타난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결과가 나타날 때에는 그 원인이 있었고,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나. 쉬운 말로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입니다.
행동에 있어서나, 말 한마디에 있어서나, 아무도 몰래 속으로 잠깐 일어났다가 꺼져 버리는 생각까지라도 반드시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육체적인 병도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어. 그 마음에 그러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이 육체적인 병으로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인과의 법칙을 철저하게 믿고 그러면 앞에 말한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사음이나, 망어 · 양설 · 악구 · 기어 · 탐욕 · 진심, 이런 앞에 아홉 가지의 죄과(罪過)를 자연히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인과의 법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철저하게 실천하게 되면 이 세상에 싸움은 없어질 것이요, 미움도 없어질 것이고, 따라서 감옥도 필요가 없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감옥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지옥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현세에 감옥이 없어지고 내생에 지옥이 없어진다면 온 세상이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자(佛子)는 인과를 철저하게 믿어 버려야 돼.
인과를 믿으면은 첫째, 자기 마음이 편안하고, 자기 하는 행동과 말과 생각이 다 십선법(十善法)에 맞도록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선법을 잘 지키면, 십선계(十善戒)를 지키면은 다 천상에 태어나고, 인간 세계에 태어나되 최고의 좋은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십선(十善)을 행하지 않고, 십악(十惡)을 행하면 지옥과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진다 그거거든. 십악을 행할 때 이미 금생에 삼악도의 고(苦)를 받게 되는 거고, 십선을 행하면 죽기 전에 이미 천상락(天上樂)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그것이 동시(同時)인 것입니다. 금생을 떠난 전생도 없고, 금생을 떠난 미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도 '전생사(前生事)를 알고자 하면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고, 내생에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짓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느니라' 그러셨어.

그래서 금생 속에는 전생도 물려 있고, 내생도 물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생 속에는 삼생(三生)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십선(十善)도 상품(上品)으로 닦느냐, 중품(中品)으로 닦느냐, 하품(下品)으로 닦느냐에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냐, 하늘나라의 과(果)를 받느냐, 또는 삼승(三乘)의 과를 받느냐, 또는 불과(佛果)를 받느냐? 이렇게 그 지키는 차원에 따라서 이렇게 많은 차등이 있고.
십악(十惡)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그 강약에 따라서 강한 사람은 지옥에, 중으로 그 십악을 한 사람은 축생, 또 아주 약하게 한 사람은 아귀, 이렇게 태어난다고 『화엄경』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선을 제일 잘 닦으면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게 되는데, 이 도솔천은 욕계육천(欲界六天) 가운데 제사천(第四天)인데, 거기는 상족천(上足天) · 묘족천(妙足天) · 희족천(喜足天) · 지족천(知足天), 이렇게 이런 말로 번역을 할 수가 있는데, 인간 세계에 있어서 사백세(四百歲)가 도솔천에 있어서는 일주야(一晝夜)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솔천에 태어나면 수명이 사천세를 살 수가 있어.

그리고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십이만 유순(由旬)의 지점에 있다. 그리고 그 도솔천은 칠보로 만든 아름다운 궁전이 있고, 도솔천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외원은 일반 하늘나라 사람들이 욕락(欲樂)을 누리는 곳이고, 내원은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염부제(閻浮提)에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출세(出世)하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지금 거기에 대기하고 계신 곳이다.

그리고 이 하늘 바로 아래는 사왕천(四王天)이 있고, 그 다음에 도리천(忉利天)이 있고, 야마천(耶麻天)이 있는데 거기에는 다 온갖 욕정에 잠겨 있는 곳이고, 그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는데 거기는 들뜬 마음이 많은 그러한 세계여.
그러면 도솔천 내원궁은 욕락에 잠기지도 않고, 또 그러한 들뜨지도 않으면서 천상락에 만족한 마음을 낸다. 들뜨지도 않고 또 잠기지도 않는 아주 그런 경계로 모두 살아가기 때문에 앞으로 부처님으로 출세할 그런 보처보살(補處菩薩)들이 항상 도솔천에 계시다가 부처님으로 이렇게 하강(下降)을 하시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마음이 어떤 기쁨에 들떠 있지도 않고, 어떤 탐욕 · 욕락에 잠겨 있지도 않고, 그러한 마음이라야 도를 올바르게 닦을 수가 있는 거여. 또 그렇게 닦아 가면 마음이 그런 상태로 되는 것이여.

그래서 실지로 로켓트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가면 정말 도솔천이 있는가? 얼마나 타고 올라가면 성층권을 지나서 진공권을 지내 가지고 얼마나 올라가면 있는가?
그것은 아직 과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 참선하는, 최상승(最上乘)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은 '도솔천 내원궁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극락세계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철저히 믿고 공부하면서도 내생에 우리가 십선계를 닦느냐, 십악을 범하느냐에 따라서 극락세계도 가고, 도솔천에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고 자기 이 짧은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없다'고 부정을 해서는 안돼.
부처님께서 '있다'고 하실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하신 것이고, 자기가 부처님 말씀을 믿고 열심히 올바르게 닦아 가면 바로 도솔천이나 극락세계가 일단은 제일차적으로는 자기 마음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고, 미륵 부처님이나 아미타불도 자기 마음속에서 친견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이미 생사(生死)가 없기 때문에, 있는 곳이 바로 불세계(佛世界)이기 때문에, 바로 그 찰나에 부처님을 친견한다고 하는 이러한 진리를 철저히 믿어야 하고, 죽어서 극락세계나 도솔천에 가는 것도 부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지옥이 있는 것입니다. '지옥과 천당이 공(空)했다'고 한 것은 깨달은 견지(見地)에서 볼 때 공한 것이지, 깨닫지 못한 사람에는 자기의 지은 업(業)에 따라서 분명히 지옥이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인과를 함부로 부정을 하고 '지옥이 어디가 있느냐?'고 하다가 쏜살같이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과법을 함부로 부정한 사람은 그건 못쓰는 사람이야.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올바른 길을 가기 어렵게 된 사람이여. 그래서 철저하게 인과법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선계, 이상 설한 십선계는 재가 불자(在家佛子)로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대중) 능지(能持)!

이상 설한 십선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잘 믿고 지켜야 할 것이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대중) 능지(能持)!

이상 설한 십선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바니, 능히 잘 지키겠는가?
(대중) 능지(能持)!

연비(燃臂)해 드려.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안하게 앉으십시오.

부처님 말씀에 '죄가 있거든 스스로 참회(懺悔)하고 그 마음을 몰록 쉬어 버리고 그걸 고치라' 그랬어.
참회하고, 하던 악을 중단하고 마음을 고쳐 버리면, 마치 무엇과 같으냐? 병을 앓다가 한약을 지어다가 먹고 푹 취한(取汗)을 하면, 땀을 푹 싸 버리면 아주 몸이 가뿐하고 병이 낫는 거와 같다.
참회를 하지 아니하고 고치지 아니하면, 지은 허물이 죄가 되어 가지고 그 마음에 따라붙어. 그래 가지고 물이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듯이, 바다에 들어가면 점점점점 바닷물이 불어나서 깊어진 거와 같다.

사람이 중생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허물을 저지를 수도 있고, 큰 허물, 작은 허물, 또 자기의 생각이 좁아 가지고 본의 아니게 그럴 수도 있고, 남의 꾀임에 빠져서 허물을 저지를 수가 있고, 그러나 항상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또 절에 와서 하다보면 '아하, 내가 잘못했구나!' 염불도 하고, 경도 읽고, 참선을 하다 보면 금방 자기를 반성하게 되거든.

'허물이 있는 줄을 알고, 그 허물을 고치고 선(善)을 행하면 지은 죄가 스스로 소멸이 된다' 그랬어. 참회를 하면 죄가 소멸이 되는 것이여.

참회법이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여.(20분13초~38분33초)




(3/4)----------------

그런데 참회를 하고 개과천선(改過遷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옛날에 잘못한 것을 자꾸 들추어내 가지고 '저 사람이 그런 나쁜 사람이다' 또 본의 아니게 형무소에 들어갔다가 한번만 나오면 취직도 안되고, 모두가...

형무소에서 참회를 하고, 그러고 인자 새사람이 되려고 나와도, 한번 형무소만 갔다 나오면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아주 도둑놈이라고 해서—모르고 취직을 해서 일을 하다가도 누가 '아, 저 사람 형무소 갔다온 사람'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대번에 쫒아내버리거든. 그러니 해 먹을 것이 없으니까 또 도둑질을 하고 강도를 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죄는 미워할지언정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라' 그런 말도 있는데, 실지 일를 당하고 보면 형무소 갔다 나왔다 그러면은 사람들이 모두 꺼리게 된다 그말이여.
또 형무소는 안 가더라도 내가 어떤 잘못을 한번만 하면 항상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한 사람이다. 무슨 짓을 한 사람이다' 모두가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수군수군하고 모다 그 사람을 모다 멀리하고 그러는데.

내가 한번 과거에는 그랬을망정 그것을 참회하고 그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그러더라도 그것을 미워하지 말고 '아, 내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으니까, 내가 참회하고 고친 줄을 모르고 저러는구나'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아야지, 그런다고 해서 자기도 같이 그 사람을 또 미워하면 자기는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착한 마음으로 옳게 살려고 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살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시기를 하거나, 까닭 없이 아니꼽게 생각해 가지고 비방하고 욕을 하더라도 그 사람과 같이 싸우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부처님이 마치 어디를 가셨는데, 외도(外道)가 되었던지, 바라문(婆羅門)이 되었던지, 아! 부처님한테 입에 못 담을 욕을 퍼붓는다 그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욕한 사람보고,
"내가 한마디 당신에게 물어보겠소. 당신이 나한테 맛있는 음식과 패물로써 나에게 갖다가 대접을 했을 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양을 한다면 그 맛있는 음식과 예물은 누구한테 돌아가겠소?"
"당신이 안 받으면 도로 내 것이지, 그것이 누구한테 돌아가겠느냐"고.

"그러냐"고. "그렇다면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욕을 퍼부었는데 나는 그걸 받아들일 이유도 없고, 내가 안 받아들이니까 그 욕은 당신한테 다 돌아가겠구려"
그러니까 그 외도가 얼굴이 빨개져 갖고 꼼짝도 못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나 어디서나 누가 전생의 업연(業緣)으로 그랬던지, 금생에 무슨 그 사람이 감정이 나서 그랬던지, 공연히 시비를 붙이고 나한테 친절치 못하게 군다 하더라도 동요하지 말어.
동요하지 말고, 떠억 화두를 들고 마음만 편안하게 하면 그렇게 시비를 걸던 사람도 그냥 별수 없이 입이 딱 붙어 버릴 것이고, 다음에는 그러지 못할 것이고.

그리고 저 사람이 그런다고 해서 내가 대꾸를 해 가지고 싸우면 옆에 구경하는 사람들은 둘이 다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을 할 것이다 그말이여. '또 싸운다'고, '좀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남 공부 못하게 한다'고, 다 그럴 거라 그 말이여.
그런데 한 사람이 자꾸 시비를 붙여도 나는 동심(動心)이 안되고, 같이 맞서서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옆에 사람들이 '아, 저 분이 참 훌륭한 분이로구나, 참 얌전한 분이로구나, 정말 보살이로구나' 모두가 다 존경할 것이라 그 말이여.

그래서 대중이 이렇게 많이 모여서 사시니, 모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나 피차가 서로 하심(下心)하고, 서로 양보하고, 자비심으로 대한다면, 참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공부도 잘하시게 될 것이고, 가정에서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가정도 참 화평하게 살게 되고, 화평한 가정에는 복이 굴러들어 올 것입니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제일 방해가 되는 것이 이 속상하는 것입니다. 오장이 확 뒤집어지면 여간해서 화두를 좀 챙길려고 해도 잘 안 들어지거든.
'이뭣고?' '이뭣고?' 해도 영 입으로만 되지 속으로는 안되어. 자꾸 속에서 이런 놈이 틀어 오르기 때문에 잘 안되거든. 그래도 자꾸 심호흡,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한 서너 번만 하면은 그냥 스르르르 가라앉게 돼.
그래서 참선해 나가는 데 이 심호흡이 대단히 중요하고 또 몸의 피로 회복하는 데에도 심호흡이 중요하고 또 자기감정을 스스로 잘 조정하는 데에도 심호흡이 대단히 중요해.

사람들은 '참으라, 참으라' 하지만, 참는 것이 그렇게 경우에 따라서는 참는 것이 대단히 참 중요할 때도 있지만, 매양 억지로 참다 보면 한도가 있어서 쌓이고 쌓이다 보면은 언젠가는 폭발을 하는데 그때는 걷잡을 수 없이 큰 사건이 일어나거든.
그리고 계속 참고 참다 보면 그놈이 속이 화(火)가 쌓여 가지고 적(積)이 되어서 소화가 안되고, 눌러 보면 주먹 덩이 같은 놈이 속에가 있거던. 그게 다 소시(少時) 때부터서 참고 참아 가지고 적이 된 거거든.
그것이 엑스레이를 찍어 보면 그것이 무슨 뭉텅이가 나올란가 어쩐가는 모르겠는데, 분명히 누르면 무엇이 있다고 그러거든.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생겼습니까?' 하면 '내가 화를 많이 끓여서 그런다'고.

며느리로 가 가지고 시어머니한테 당해 가지고 그러기도 하고, 남편 때문에 속상해 가지고 그러기도 하고, 모다 이리저리 해서 화를 많이 끓인데다가 그것을 터뜨리지를 못하고 속으로 참고 참다 보면 속이 적(積)이 들어앉는 거라 말이여. 그건 여간해 약 먹어도 낫지 않거든.
그래서 나는 참으라고—육바라밀(六波羅蜜) 속에 인욕(忍辱)이라는 항목이 있기는 있지만, 진짜 잘 참으려면은 억지로 쪄누르기 보다는 그 일어나는 생각을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로 돌려야 한다 그거거든.

돌리면은 그놈이 풀어지면서 그것을 계기로 해서 화두(話頭)를 드니까 업(業)을 짓지 아니하고, 깨달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데, 화두를 들지 않고 억지로 참다 보면 큰일이거든. 병이 나고, 결국은 언젠가는 참다 참다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서 터질 때는 무섭게 터지는 거라 그말이여.
그래서 앞으로는 억지로 참을라고 하지 말고, 그냥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뭣고?'를 하시라 말이여.

남편이나 아내나 또는 친구나 또는 어른이 억울한 소리를 하시면, 숨을 들어마시면서 '이뭣고?', 소리는 내지 말고 속으로 하라 그말이여. 어른이 뭐라 그러는데 '이뭣고? 이뭣고?' 하면 그 될 거냐.
속으로 '이뭣고?' 조용하게 '이뭣고?'를 하다보면 그 억울한 소리 하다가도 그냥 쑥 들어갈 거라 말이여.

그런데 '이뭣고?'를 안 하고, 그냥 눈을 휘번덕거리면서 말은 안 해도 속으로 그냥 잔뜩 골내고, 말하는데 뒤돌아서서 중얼중얼한다던지, 무슨 그릇 같은 것을 쾅쾅 놓는다던지, 절대로 그래도 안 되거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뭣고?' 하면 그 억울한 소리한 사람이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설하신 것이 되고 만다 그말이여.
아! 그 소리를 듣고 화두를 드니 그것이 법문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칭찬을 하면 우선 귀에는 듣기 좋지마는 화두가 잘 안 들려. 좋은 생각으로 들뜬 생각이 되어 가지고, 그래서 칭찬하는 소리는 도둑놈이요, 나를 충고하는 소리는 약으로 감로수(甘露水)처럼 받아들이라 그거거든.
칭찬하는 소리에 까닥 잘못하고 우쭐대다가는 큰일나는 법이고,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꾸짓는 말, 험담하는 말을 그 말을 잘 새겨서 받아들이고 고맙게 받아들이면,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가 바로 감로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칭찬도 듣게 되지마는, 흔히 어디를 가나 본의 아니게 욕을 먹기도 하고 비방을 듣기도 하는데, 그 칭찬하는 소리 별로 좋아할 것이 못되어.
그래서 공자님도 '칭찬하면 대단히 좋아하고,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주면 듣기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장래 두고 봤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하고는 친구를 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공자님도 세계의 삼대(三大) 성현의 한 분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표현은 달라도 부처님 말씀과 다 통하고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에도 다 그와 같은 뜻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칭찬한 걸 절대로 좋아해서는 안돼. 누구한테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부끄러운 생각을 가져야—'과연 내가 저런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인가? 참, 너무 과분한 말을 하시는구나'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고.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거나 충고를 해 주는 말은 척! 듣는 순간에는 조금 귀가 입맛 없다 그러거든. 그렇지만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면, 한참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또 그 이튿날쯤 또는 그날 저녁에 잘 때쯤 가만히 '어째서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아, 확실히 나한테 그런 말 들을 만한 요소가 있구나' 그렇게 참회를 하면 그때사 '아, 그 사람을 미웁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참 고맙게 생각해야겠다'

우리가 참선(參禪)을 많이 해서 찰나간에 자기의 감정을 돌릴 수 있는 훈련이 쌓아진 사람은 듣는 찰나에 바로 감로수처럼 받아들여질 것이고, 참선이 아직 익숙하지 못하고 수행이 옅은 사람은 그날 저녁에 잘 때쯤 또는 그 이튿날쯤 가면은 그런 생각이 들거여.

저기 저 북극지방에 에스키모인은 어떻게 둔하던지, 뭔 욕을 하면 그때는 아무렇지도 안 해. 조금도 눈빛 하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있다가, 그 이튿날에사 도끼를 갖고 쫒아온다 이거여. 그때사 와서 닿는 거여. 두텁띠 두터워 가지고 금방 말해도 못 알아들어.

그 사람들은 아주 다정한 손님이 오면 자기 부인을 데리고 자라고 대접을 한다 그러는데, 그 사람들 풍속이 그러니까, 그리고 신부가 거기를 갔다가 그 부인을 갖다 데리고 자라고 하는 통에 '그거 안됩니다. 나 그 못합니다'
도저히 그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 '어째서 우리의 친절을 거부한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거여.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안 해. 골낼 줄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다가 그 이튿날에사 느닷없이 도끼를 가지고 와서 '어제 왜 욕했냐' 이거거든.

중생들은 자기를 위해서 충고를 해 주고, 자기를 위해서 지적을 해 주어도 금방 고마운 줄을 못 알아듣는다 그말이여. 업(業)이 두터워서 금방 못 알아듣는 거여.
지금 에스키모인 얘기를 하니까 웃으셨지만, 중생은 어떻게 욕하는 소리는 금방 잘 알아듣는데, 자기를 위해서 충고를 해 주는 말은 거꾸로 알아듣는다 그 말이여. 에스키모 사람들하고는 조금 오장이 조금 다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참 그게 묘하거든.
그이를 위해서 좋은 말을 해 준 것은 잘 못 알아듣고. 그게 아마 오장육부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고.

어린애기들 병에 좋으라고 약을 주면 '쓰다'고 안 먹으라고 그러고, 단것은 이에도 해롭고 몸에 해로와도 자꾸 단것만 먹을려고 하는 어린애기들이 무엇이 나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그래서 그런 거와 마찬가지죠.
나이는 40, 50 먹었어도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것인지, 이제 법문을 자꾸 듣다 보면 반드시 '이것이 나한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은 첫째, 항상 자기의 마음을 항상 그 중심(中心)을 잡아 나가는 중요한 수행이여.
참선 안 한 사람은 노상 중심이 잡혀 있지 않거든. 눈으로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뭘 들으면 듣는 데에 끌려가고, 코로 뭔 냄새를 맡으면 냄새에 끌려가고, 항상 중심을 잃고.
예를 들자면 주부가 집을 비워 놓고 밤낮 밖으로 싸다니는 거와 마찬가지여. 그러면 집안 살림이 무엇이 되겠느냐 그 말이여. 하나도 집안도 소지도 안 되어 있을 것이고, 애들한테나 남편한테나 아내로서 해야 할,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이 전혀 안 되어 갖고 있으니 엉망진창이다 그 말이여.

항상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정돈하고 주부로서 할 일을 하고, 밖에 일이 있어도 냉큼 가서 일을 보고는 바로 또 집에 오고 해야지, 해가 다 넘어가도록 집에 안 들어오고—집에는 벌써 애들은 학교 갔다오고, 남편도 퇴근해 가지고 있는데 주부가 없으니, 끼니 밥 차려 줄 사람도 없고, 밥도 안 하고 이렇게 되어 있는 그러한 것과,
참선을 안 하고 밤낮 외부로 끌리고, 감정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끄달리고 산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그런 내 자신의 마음 살림이 그 집 비워 놓고 다닌 주부의 가정 살림과 똑같은 형상일 것이다 그 말이여.(38분33초~58분18초)




(4/4)----------------

그래서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항상 '이뭣고?'
'이뭣고?' 할 때 벌써 자기로 돌아온 거거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도 '이뭣고?'
벌써 소리나는 데로 갈 듯하다가 냉큼 돌아온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부처님도 자기에서 찾아야 하는데, 밖에서 찾지 말아라 그러셨거든.

소승, 중승, 대승, 최상승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빨리 자기로 돌아오는 법문이여, 전부가.
이 참선법은 철저하게 찰나찰나, 한 생각 한 생각,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로 돌아오는 공부가 바로 참선이요, '이뭣고?'다 이거거든.

'이뭣고?'

처음에는 누구나 잘 안돼. 잘 안되고.
'이뭣고?' 해도 그렇게 간절하게 의심이 안 나지만, 자꾸 하면 되거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자세를 단정히 하고 심호흡,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간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들어마신 호흡 약 3초, 들어마셔 가지고 머무르는 시간이 약 3초, 내쉬는 시간은 약 4-5초 조금 길게, 이렇게 하되 너무 가득 들어마시지 말고, 8부(八部)쯤만 들어마시고.
또 머무르는 것도 너무 오래 참을라 하지 말고, 또 내쉬는 시간도 너무 길게 시간을 잡지 말어.

지금 3초 · 3초 · 5초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도 본인한테 길다고 느껴지면 2초 동안 들어마시고, 2초 동안 머무르고, 내쉬는 것은 약 3초, 모두 합해서 한 8초나 9초 이렇게 되는데. 자기에게 조금도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범위 내에서 하라 그 말이여.
그래서 차츰차츰 길어지면 길어지는 대로 하고, 짧으면 짧은 대로, 언제나 자연스럽게 무리가 없이 해야지 억지로 하면은 안되거던. 몇 번 안 해서 된숨을 쉬어야 하고 너무 힘이 들고 이러면 안되거던. 무리 없이 할 것.

그리고 자세는 단정하니 하되,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고 목에다 힘을 주고 어깨에다 힘을 주고 그리고 용을 쓰고 그러면 안되는 거여. 단정하면서도 너무 어깨나 목이나 그런데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이런 자세를 가져야 돼.

오늘 불명(佛名)을 타고 또 십선계(十善戒)를 받고 또 화두를 타는 법요식(法要式)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해 드리는데, '참선을 하는데 단전호흡(丹田呼吸)을 꼭 해야 합니까?' 그러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호흡하는 법을 잘 올바르게 터득을 해서 잘하면 참선하는데 대단히 효과가 있고, 참선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에도 좋아.

왜 그러느냐?

혈액 순환이 잘되고, 혈액 순환이 잘되므로 해서 몸안에 있는 노폐물이 잘 배설이 되어.
뿐만 아니라 피로 회복도 잘되고 또 마음도 안정이 되고, 정신도 깨끗해지고, 또 감정도 자기가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침착한 성격으로 되고, 이 단전호흡을 하면 그 이익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대단히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래서 참선을 하는 데 이것을 곁들여서 하면은 대단히 효과적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람에 따라서 수식관(數息觀), 수식관을 시켜.
수식관은 자기가 자기의 호흡을 세는 거여. 들어마셨다 내쉬고 '하나' 또 들어마셨다가 잠간 머물렀다가 내쉬고 '둘' 이렇게 해서 호흡을 이렇게 세는 거여.
그래서 그것이 수식관인데, 수식관을 시키기도 하고 또 백골관(白骨觀)이라는 그런 관(觀)을 시키기도 하고 또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근기(根機)와 체질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쓰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것을 오늘날 차츰차츰 그런 것도 다 구체화되고 체계화가 되어 가지고, 여러 가지 운동하는 사람, 무술 하는 사람까지라도, 이 요가하는 사람, 전부 다 호흡법을 통해서 육체적인 건강, 정신적인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 호흡법이 널리 개발이 되어 있는데.
참선하는 사람은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호흡보다는 지금 산승(山僧)이 말한 간단한 방법을 쓰면서 그 호흡을 하면서도 화두를 드는데 지장이 없도록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단전호흡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되고, 여기가 콱 맥힌 것같이 느껴져서 도저히 단전호흡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호소를 하는 분을 또 가끔 만납니다.
그것은 '너무 무리하게 했지 않는가? 무리하게 호흡을 해 가지고 그러한 결과가 오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무리하게 한다'는 것은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그 호흡이 저 밑에 단전까지 가도록 막 눌러 댄다 말이여. 절대로 눌러 대서는 안돼.
또 '들어마셔 가지고 오래 참을수록 좋다'고 어디서 들어 가지고는 한 30초씩 얼굴이 벌게지도록 참고 있다가 '후 ~' 하고 내쉬고, 그렇게 하면 백이면 백 다 병납니다. 절대로 억지로 쪄 누르지 말 것이며, 그래 가지고 또 억지로 오래 오래 참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들어마실 때 그럼 어떻게 하느냐? 스르르르 들어마실 때 배만 볼록하게 만들지, 여기서부터 눌러 대지 말라 이거여. 이것을 잘 알으셔야 되아.
들어가는 호흡을 여기까지 누르면 그 호흡이 여기까지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기는 횡격막(橫膈膜), 가로막이라는 막이 허파 밑에 요리 있어 가지고 그 이상은 바람이 절대로 안 내려가.
허파까지 밖에 안 가는 것을 억지로 눌러서 배꼽 밑에까지 보낼려고 하니, 가지도 않고 결국은 답답하기만 하고 소화만 안되고, 안 내려가니까 기운이 부딪쳐 가지고 거꾸로 위로 올라오니까 상기병(上氣病)이 오히려 더 생길 수가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단전호흡이 좋다고 하지만 절대로 무리하게 하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어거지로 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그냥 보통 호흡을 해야지, 억지로 알지도 못하는 단전호흡을 무리하게 할라 하지 말고 보통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만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이거여.

그리고 앉아서 이 참선을 시작할 때는 미리 입선(入禪) 시간 전에 따악 와서 다리를 발목 운동도 하고, 발가락 운동도 하고, 다리 운동도 하고, 그리고는 앉아서 몸을 좌우로 한 서너 번 이렇게 흔들다가 한 가운데다가 딱 안정을 하고는 단전호흡을 서서히 해서 안정을 해 가지고 입선 시간을 맞이해야 돼.

어디서 잡담을 하면서 있다가 목탁을 치니까 헐레벌떡 쫒아와 가지고는 시근덕시근덕 하면서 그냥 할라고 하니 공부가 되냐 그 말이야.
항상 입선 시간을 잘 지키고, 다른 사람이 이미 죽비(竹篦) 친 뒤에사 그때서 '드르럭' (문을 열고) 들어오고, 와서 부시럭거리고 절대로 그러면 안되거든.
저 옛날에는 입선 죽비 딱! 치면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딱! '발'을 쳐 버렸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렇다고 하는데, 어쨌든지 시간을 잘 지키고.

또 방선(放禪)을 하고 일어설 때, 갑자기 불끈 일어서지 말고 몸을 좌우로 흔들고, 다리도 뻗고, 발목 운동도 하고, 그래 가지고는 조용히 일어나서 나가고.
그래서 입선 시간만 화두를 드는 게 아니라, 방선하고서도 그 화두를 들도록 하고, 방선하고 나가서 화장실에 가면서도 화두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도 화두가 놓쳐지지 않도록. 또 화장실에서 오는 길에도 화두를 들도록, 이렇게 까지 해 나가야 한다.

중국 선방에서는 화장실에 갈 때, 그 입승(立繩) 스님이 죽비를 갖고 따라다닌다는 말도 들었어요. 요리 따라가다가 화두를 놓치고 딴전 보는 성 싶으면 죽비로 그냥 등짝을 후려팬다고 그런 말도 들었는데, 지금은 중공(中共)이 되어 가지고 다 선방도 없어졌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러한 정도까지 입선 방선을 가리지 않고 알뜰히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하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도록 그러한 공력(功力)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명(佛名)은 이 법회가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로 모다 노나 드리게 되겠습니다.
화두는 '이뭣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아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이 있거든.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 그런데 그놈이 부르면 "예"하고 대답할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좋아할 줄도 알고, 이렇게 법문을 하면 듣고 '아하, 참 옳은 말씀하시는구나. 꼭 저 말씀은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놈이 있거던.

그놈을 보통 '마음'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고도 하고,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이름은 알고 있지만 실지로 우리는 보지는 못하거든.
그놈이 생각을 좋게 먹으면은 천사 같기도 하고, 그놈이 독한 마음을 먹으면 찰나간에 나찰(羅刹) 귀신도 된다 그말이여. 그러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는데, 대관절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거여.

어떻게 찾느냐?
'이뭣고?' 이렇게 찾는 거여.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사량분별로 따져서 찾는 게 아니라, 그냥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만 찾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렇게 찾으면 되는 거여. 이것을 화두(話頭)라 그래.
처음 불명을 타고, 처음 화두를 타고 하시는 분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면 십선계도 받았고, 화두도 받았고, 이제는 인자 불명(佛名)은 이 자리에서 낱낱이 다 일러드릴 수가 없으니 계첩(戒牒)을 법회가 끝나고 노나 드릴테니까 순서 있게 그것을 받아 가지고.
불명이 무엇인가 한번 보고는 갖다 어디다 쳐 놓고는 불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러면 안되거든. 자기의 불명이 확실히 무엇인가를 딱 마음속에 넣고, 계첩을 드리면 그것을 액자를 해서 딱 갖다 걸어놓고 밤낮으로 쳐다볼 때마다 내 불명이 무엇이다, 알고.

또 '이뭣고?'가 거기 한글로 딱! 쓰여 있으니까, 볼 때마다 '이뭣고?'
속상할 때 '이뭣고?'
기쁠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근심걱정 있을 때 '이뭣고?'
항상 '이뭣고?'를 챙겨.

오며 가며 챙기고, 앉으며 서며 챙기고, 또 친구들이 놀러오면 '이뭣고?'에 대해서 얘기도 해 주고, 또 '같이 가서 참선을 하자'고 권고도 하고.
이렇게 해서 명실공히 법보제자(法寶弟子)가 되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佛子)가 되었습니다.


계(戒)를 받고 연비(燃臂)를 했으니 과거에 지은,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모든 죄는 찰나간에 깨끗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새로 부처님의 아들로 부처님의 딸로 새로 태어났으니, 이제 몸도 마음도 깨끗해졌어. 그러니 과거에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국집(局執)할 것도 없고.
깨끗한 몸이 되었으니까, 깨끗한 마음으로 이제 '이뭣고?'만 열심히 하고, 앞으로 십선계만 잘 지키면 여러분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시는 것은 이미 표는 다 끊어놨어. 노나 드리는 계첩이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계첩입니다.

이 내원궁에 가는 그 표를 끊어 놓은 것이니까 그것을 잘 간직을 하시고, 어쨌든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될 수 있으면 금생에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열심히 공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악성공여반장(善惡性空如反掌)하니  지악행선순성도(止惡行善順聖道)니라
나무~아미타불~
자성본무살불살(自性本無殺不殺)하니  탐진치심본공(貪瞋癡心本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선악성공여반장(善惡性空如反掌)이여. '선이다 악이다, 저 사람은 착하다 악한 사람이다' 모다 그래 쌓지마는 선인(善人)이나 악인(惡人)이나 그 본바탕은 똑같은 사람이고, 다맛 업(業)에 따라서 습기(習氣)에 따라서 잠시 그런 것인데.

선(善)의 성품이 뿌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악(惡)의 성(性)의 뿌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내나 진여자성(眞如自性)에서 나오는 물결에 지나지 못한 것이지, 그 근본에 들어가서는 조금도 선도 악도 없는 것이니,
그래서 착한 사람도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손바닥 뒤집듯이 악한 짓을 할 수도 있고, 어제까지 악한 짓을 했어도 한 생각 탁! 돌이키면은 선한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악한 짓하던 사람은 그것을 딱! 참회하고 그쳐 버리고, 착한 일을 행해서 성현의 가르침을 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止惡行善順聖道)

자성(自性)이 본래 공(空)한 것이니, 그 공한 자성에서 나오는 선악(善惡)의 물결이 그것이 어디가 뿌리가 있을 것인가?
없는 뿌리를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남을 미워해서도 아니된 것이고, 설사 과거에 자기 성질이 좀 나뻤거나, 나쁜 성질을 썼고,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어쨌든지 부처님 앞에 참회하고, 생각을 돌이켜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해서 마음의 안락을 찾고,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58분19초~1시간18분34초) (끝)




[법문 내용]

십선행(十善行). 십악행(十惡行) / 자기의 도를 닦는 데에 대한, 견성성불하는 데에 대한 자포자기, 그것이 참으로 무섭고도 옳지 못한 살생 / 불법(佛法)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진실하고, 질직(質直)하고, 속임이 없어야.

불자(佛子)로서 가장 어리석고 삿된 생각은 바로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 것 / 불자(佛子)는 인과를 철저하게 믿어야 / 인과를 믿으면 자기 하는 행동과 말과 생각이 다 십선법(十善法)에 맞도록 행하게 된다 / 부처님 말씀에 '전생사(前生事)를 알고자 하면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고, 내생에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짓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느니라' / 십선을 제일 잘 닦으면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게 된다 / 우리 참선하는, 최상승(最上乘)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은 '도솔천 내원궁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극락세계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 참회를 하면 죄가 소멸된다.

대중생활은 서로 하심(下心)하고, 서로 양보하고, 자비심으로 대한다면, 참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공부도 잘하시게 될 것이다 / 속상할 때는 억지로 참으려고 쪄누르기보다는 그 일어나는 생각을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로 돌려야 한다 / 칭찬하는 소리는 도둑놈이요, 나를 충고하는 소리는 약으로 감로수(甘露水)처럼 받아들이라 / 참선(參禪)은 첫째, 항상 자기의 마음을 항상 그 중심(中心)을 잡아 나가는 중요한 수행이다.

참선법은 철저하게 찰나찰나, 한 생각 한 생각,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로 돌아오는 공부가 바로 참선이요, '이뭣고?'다 / 참선할 때 단전호흡을 하면 여러 가지 이익이 있으니 참선을 하는 데 이것을 곁들여서 하면은 대단히 효과적이다 / 어쨌든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될 수 있으면 금생에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열심히 공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게송)선악성공여반장~.


살생이라 하는 것은 꼭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만을 죽인 것만이 살생이 아니고,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타격을 주어가지고 생(生)의 의욕을 잃게 하는 것도 그런 것도 살생이고, 또 자기 스스로도 삿된 생각, 급한 생각,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육체에 대한 자포자기, 인생의 삶에 대한 자포자기, 그러한 것도 일종의 살생에 들어가고.

살생 가운데 제일 좋지 못한 살생은 무엇이냐? '자기는 성불할 수 없다. 도를 닦아 봤자 소용이 없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도(道)에 대해서 자포자기하는 살생이야말로 살생 가운데 가장 무섭고도 옳지 못한 살생이다.

중생은 자칫하면 그 탐심을 내게 돼. 탐심이란 게 물건에 대한 탐심만 탐심이 아니라, 무엇이고 자기의 의사만을 고집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려고 그러고 그런 것도 정신적인 탐욕이여.
물질적인 탐욕만 나쁜 게 아니라, 정신적인 탐욕—무엇이든지 자기주장(自己主張)만 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내세우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것, 이것도 참 탐욕 중에도 대단히 중요한, 몹쓸 탐욕인 것입니다.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그것이 동시(同時)인 것입니다. 금생을 떠난 전생도 없고, 금생을 떠난 미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도 '전생사(前生事)를 알고자 하면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고, 내생에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짓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느니라' 그러셨어.
그래서 금생 속에는 전생도 물려 있고, 내생도 물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생 속에는 삼생(三生)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도솔천 내원궁은 욕락에 잠기지도 않고, 또 그러한 들뜨지도 않으면서 천상락에 만족한 마음을 낸다. 들뜨지도 않고 또 잠기지도 않는 아주 그런 경계로 모두 살아가기 때문에 앞으로 부처님으로 출세할 그런 보처보살(補處菩薩)들이 항상 도솔천에 계시다가 부처님으로 이렇게 하강(下降)을 하시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마음이 어떤 기쁨에 들떠 있지도 않고, 어떤 탐욕 · 욕락에 잠겨 있지도 않고, 그러한 마음이라야 도를 올바르게 닦을 수가 있는 거여. 또 그렇게 닦아 가면 마음이 그런 상태로 되는 것이여.

우리 참선하는, 최상승(最上乘)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은 '도솔천 내원궁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극락세계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철저히 믿고 공부하면서도 내생에 우리가 십선계를 닦느냐, 십악을 범하느냐에 따라서 극락세계도 가고, 도솔천에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생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허물을 저지를 수도 있고, 큰 허물, 작은 허물, 또 자기의 생각이 좁아 가지고 본의 아니게 그럴 수도 있고, 남의 꾀임에 빠져서 허물을 저지를 수가 있고, 그러나 항상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또 절에 와서 하다보면 '아하, 내가 잘못했구나!' 염불도 하고, 경도 읽고, 참선을 하다 보면 금방 자기를 반성하게 되거든.
'허물이 있는 줄을 알고, 그 허물을 고치고 선(善)을 행하면 지은 죄가 스스로 소멸이 된다' 그랬어. 참회를 하면 죄가 소멸이 되는 것이여. 참회법이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여.

화두는 '이뭣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아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이 있거든.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 그런데 그놈이 부르면 "예"하고 대답할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좋아할 줄도 알고, 이렇게 법문을 하면 듣고 '아하, 참 옳은 말씀하시는구나. 꼭 저 말씀은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놈이 있거던.

그놈을 보통 '마음'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고도 하고,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이름은 알고 있지만 실지로 우리는 보지는 못하거든.
그놈이 생각을 좋게 먹으면은 천사 같기도 하고, 그놈이 독한 마음을 먹으면 찰나간에 나찰(羅刹) 귀신도 된다 그말이여. 그러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는데, 대관절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거여.

어떻게 찾느냐?
'이뭣고?' 이렇게 찾는 거여.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01~425)2021. 2. 5. 19:26

((No.411))—1990년 동안거 해제(90.02.10) (45분)

 

(1/3) 약 20분.

 

(2/3) 약 15분.

 

(3/3) 약 10분.


(1/3)----------------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하기회환(我人山下幾回還)고
나무~아미타불~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야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락천애기도왕(流落天涯幾度往)하고  아인산상(我人山上)에 기회환(幾回還)고.
저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한 생각 법왕(法王)을 어긴 죄(罪)로 끝없는 하늘가에 떨어져 나와 가지고 몇 번이나 돌아쳤으며,
아인산하(我人山下)에,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그 높고 높은 산 아래로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

은애하중홀봉사(恩愛河中忽逢師)하고, 사랑하고, 부모자식 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는 깊고 깊은 그 강 가운데에 유랑(流浪), 떠돌아다니다가 문듯 스승을 만났어.
그 스승을 만난 그 덕으로, 답득상락고향로(踏得常樂故鄕路)다. 생사(生死) 없는 상락(常樂)에 고향(故鄕) 길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게 되었구나.


오늘 경오년(庚午年) 정월(正月) 대보름날, 삼동안거(三冬安居) 회향 해제일과 백일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용화선원 대중과 또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또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 대중, 저 의정부 회룡사 선원 대중, 그리고 전주 위봉사 대중들, 기타 저 목포 · 여수 · 광주, 원근 경향(京鄕) 각지(各地)에서 이렇게 해제(解制) 법요식(法要式)을 기해서 이렇게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지난 갑인년(甲寅年) 정월 보름 해제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敬聽)을 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가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으로 우리가 금생에 다시 이 자아를 자각(自覺)하는, 내가 나의 자성(自性)을 깨닫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는 정법(正法)을 만났습니다.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이 최상법(最上法)을 만났으니, 그 인연만 하더라도 그 경행(慶幸)하기가 한량(限量)이 없으나, 기왕 이러한 불법을 만났을진대는 정말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겄더라.

한 철, 두 철 내지 세 철, 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소견(所見)이 날 수가 있습니다.
5년 1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오직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있을 뿐, 전혀 소견(所見)이 안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인가 소견이 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5년 10년 해도 소견이 안 난 사람은 공부를 잘 못하고, 한 철 두 철 해서 무엇인가 그 소견이 나면 그것이 좋으냐 하면 그것이 아니여.
'10년 30년을 해도 꽉 맥혀서 소견이 안 나도 공부를 옳게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바르게 공부를 한 거고, 한 철 두 철에 무슨 소견이 났으되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 나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달포 전에 어떤 젊은 수좌(首座) 한 사람이 왔습니다. 그 수좌는 여기서 행자노릇도 하던 사람인데, 어디 가서 중이 되어 가지고 선방(禪房)에도 다니고 여기도 와서도 한 철 지내고 그러던 사람인데, 중간에 쪼끄만한 토굴살이를 하다가, 토굴에 들어가서 정진을 하다가 연탄 불인지, 무슨 숯불인지 피워 놓고 그 가스에 중독이 되어 가지고 기절을 했다가 깨어났는데, 깨고 보니 '깨달랐다'고.
와서 '공안(公案)을 물으라?' 했습니다.

정진(精進)을 알뜰히 해서 소견(所見)이 났다면 당연히 참 물어볼 만도 하고, 또 바른 소견이 났다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면은 우리 이 문중에서, 우리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얼마나 환희(歡喜) 스럽고 얼마나 경행(慶幸)한 일이겠습니까.
'가스에 중독되어서 일어나서 보니 뭐 소견이 났다' 그러니, 물어볼 가치도 없고. 하도 기가 차서.
가스 중독해서 죽었다가 깨어나서 소견이 났다면 선방에다 연탄불 잔뜩 피워 놓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진을 하다가 한 철 두 철 알뜰히 하면 무엇인가 무슨 공안도 이를 것 같고, 공안을 보면은 환희 막힘이 없고, 자기 나름대로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진공(眞空)의 이치(理致), 공(空) 도리, 공의 이치를—일체(一切)가 다 공(空)하고, 돌이나 나무나 그 나름대로 '내가 돌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것이 공(空)한 것이고, 저 해도 '내가 해다' 하는 생각이 없으니 그 해는 해 그대로 그 자체가 공(空)한 것이다.
부처나 중생(衆生)이 둘이 아니고, 사람과 축생이 둘이 아니고, 악(惡)과 선(善)이 둘이 아니요, 밤과 낮이 둘이 아니요, 일체가 다 둘이 아닌 이것이 바로 공(空)이 아니고 무엇이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일러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입니다"

"조주(趙州) 무자(無字)를 일러라"
"무(無)"

'무엇이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놈이 공(空)했으니 거기에 무슨 딴 답(答)이 있을 것이냐' 이래 가지고 무슨 공안(公案)이든지 그렇게 이르기로 하면 천칠백(千七百) 공안이 무엇이 맥힐 것이 있으며, 참구(參究)할 것이 무엇이 더 있느냐?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오면, "참, 공부를 애써서 하다 보면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가지고 본인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여. 착각이니,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 현중현 도리를 바로 봐야지 그런 공(空) 도리, 체중현(體中玄) 도리, 그것 가지고서는 도저히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초견성을 했느니, 한 소식을 했느니' 이러한 스스로 그런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앉었고, 꺼뜻하면은 다른 도반이나 신도들한테 자기는 '초견성을 했다'고 이런 소리하고.
이러한 착각 속에 집을 짓고 살림을 해 간 사람은 그 사람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그런 소견을 가지고 있는 한(限)은 바른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서장(書狀)』을 배우신 분은 다 아시겠지마는, 증시랑(曾侍郞)이 대혜선사(大慧禪師)한테 묻는 편지(便紙)입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선지식(善知識)에 참(參)해 가지고 이 참선법(參禪法)을 들었는데, 이십에 결혼을 하고 또 벼슬을 하는 중에 이 공부를 철저하게 하지를 못하고 그럭저럭 이렇게 늙었습니다.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입지(立志), 뜻을 세우고 기어코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해야겠다고 하는 이 발원(發願)은 실로 그럭저럭한 생각이 아니고, 깨닫지 못하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고인친증처(古人親證處)에 이르러야만 휴헐지지(休歇之地)를, 큰 휴헐지지를 삼을까 하나이다.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삼을까 하나이다' 이러한, 그 편지 가운데에 이런 마디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차라리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구경각(究竟覺)을 얻어서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境地)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저는 깨달음을 삼지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증시랑(曾侍郞)은 속가(俗家)에 선비요, 벼슬아치로서 이렇게 철저한 발원(發願)을 했습니다.
하물며 정법(正法)을 믿는 납자(衲子)가, 최상승(最上乘)을 믿는 불자(佛子)로서 정진하다가 잠깐 무슨 소견(所見) 난 거, 공안(公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구경(究竟)의 깨달음도 얻지 못한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어찌 '초견성'이니, '한소식'이니 하고 '알았다'는 생각을 속에 둘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은 사람은 결단코 이러한 조그만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삼어서 되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도,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이나 소승사과(小乘四果) 중에 최고의 지위(地位)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했다 하더라도 '내가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이미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라, 어찌 그것이 참 아라한(阿羅漢)이겠느냐.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가를 하겠느냐.

실지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하더라도 '내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될 텐데, 하물며 바른 깨달음을 얻지도 못하고 정진하다가 슬쩍 지내가는 지나쳐 버리는 그러한 일시적(一時的)인 소견을 어찌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감히 이름을 붙일 것이냐 그 말이거든.
우리가 얻지도 못한 것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 자랑하고, 증(證)하지도 못한 것을 '증했다'고 스스로 착각을 하고 남에게 뽐낸다면, 어찌 그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목표로 하고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라 하겠습니까?

이 세상은 온통 사기로써 업(業)을 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불법문중에서, 이 최상승(最上乘) 정법문중(正法門中)에 학자(學者)는 결단코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이며, 불조를 속이지 말 것이며, 중생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어떠한 소견이, 설사 자기도 기약하지 못한 가운데에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否定)을 해 버리고 언제나 백지(白紙)의 초학자(初學者)의 입장에서 알뜰하게 짬지게 정진을 해 가야 할 것입니다.(처음~19분40초)




(2/3)----------------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하고  거래생사일진상(去來生死一眞常)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청정법신무내외(淸淨法身無內外)요, 청정법신(淸淨法身)에는 안과 밖이 없고,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진상(一眞常)이다. 가고 오고, 생(生)하고 사(死)하는,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죽어가는,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이 거래생사(去來生死)가 일(一) 진상(眞常)이여, 한 참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진리(眞理)다.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만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정상(毘盧頂上)을 걸어가는 것이다.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들어보면, '일념(一念)이 무념(無念)하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요, 불생(不生)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 해탈(解脫)이 곧 열반(涅槃)이다' 경전(經典)에는 다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념(無念)이 불생(不生)이요, 불생이 무심(無心)이요, 무심이 해탈(解脫)이다' 말로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 무념(無念)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번뇌(煩惱)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이 고대로 무기(無記) 속에 요렇게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내가 지금...' 흔히 한참 동안 멍청하게 시간 가는 중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중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한참 그렇게 그런 경지에 있다가 나와서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나왔다'고 보통 그렇게 얘기들 합니다.
그런데 그 '삼매(三昧 samādhi)'를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 '정(定)'인데, 그 정(定)도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이 있어서, 중생이 아무 생각 없이 멍청허게 정(定)에 들어간 그런 것은 다 사정(邪定)이거든.

뱀 같은 거, 구랭이 같은 것도 가을에 개구리 잔뜩 잡아먹고, 초겨울에 잡아먹고 그리고 굴속에 들어가서 삼동내 물 한 방울 안 먹고, 개구리 한 마리, 쥐 한 마리 안 잡아먹고 고대로 삼동(三冬)을 지냈다가 그 이듬해 해동(解冬)이 되고 경첩이 지나고 그러면은 그 속에서 땅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이 삼동내 아무것도 안 먹고, 물 한 모금도 안 먹고 가만 있다 나오니까 그것이 '삼매(三昧)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꺼떡하면 혼침(昏沈)에 빠져서 있다 나와 가지고 '삼매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그러한 착각을 합니다.

무념(無念).
삼세육추(三細六麤), 세 가지 미세한 생각과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이 다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잠기는 것이고, 그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우리 학자(學者)는 선지식으로부터 그 공안 하나를 간택 받아 가지고 그놈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그걸 참구(參究)를 해 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고, 말 길이 있고, 이치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이 그렇게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알 수 없어!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해 갈수록 알 수 없어야 그 공부가 옳게 해 가는 것이지, '이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저래서 무(無)라고 했는가? 아!' 이렇게 해서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면 그건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도 참 깨달음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수에서 여까지 와서 화두(話頭)를 타려고 여러분이 오셨는데, 또 앞으로 선방(禪房)에 가기 위해서 또 화두를 타려고 온 수좌(首座)도 있는데, 개별적으로 화두를 일러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법상(法床)에 올라온 김에 새로 화두를 타려고 하는 분, 또 화두를 타서 하되 아직도 어떻게 화두를 참구해야 옳게 한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치 못한 분을 위해서 간단히 화두 참구(參究)하는 법을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엇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무엇인고?' 그래서 '이 무엇고?' 이렇게 하다가,

'지금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구쳐 나가.
그러다 나중에 가서는,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더 다구쳐 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뿐이여!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이렇게만 말해도 벌써 알아듣는 분은 알아듣지만,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또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의 그 녹음법문(錄音法門), 녹음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가셔서 10번, 20번, 백 번, 천 번을 들으면서 자꾸 하다 보면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일체 화두를 자꾸 들어도, 들고 있으면서도 온갖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거든. 일어나되, 그 일어난다고 성화도 대지 말고, 짜증도 내지 말고, 그놈을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못 일어나게 할 것도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들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이여.
그 번뇌(煩惱)가 일어나면은 '그놈이 또 일어난다'고 성화를 대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놈을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을 치신 분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여. 그냥 놔둬 뭐. 놔 두고 '이 뭣고?' 화두(話頭)만 딱! 챙겨 버리면 그만인 것이여.

그놈이 어디서 일어나 간데.

내나 자성(自性)자리에서 그놈이 일어나거든. 그 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난 것이니까, 그냥 놔둬 버리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고, 화두를 들어버리면은 저절로 없어질 것을, 그놈을 없애려고 생각을 내니까, 없애려고 하는 그 또 한 새로운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뭣고?'
자꾸 놓치면은 또 '이 뭣고?' 딴생각[別念]이 일어나도 또 '이 뭣고?'
'이 뭣고?' 만 챙겨버리면 그만인 거거던.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렇게 해 나가면 차츰차츰 번뇌 망상은 줄어지고 화두를 드는 시간이 많아져.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질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아! 인자 공부가 잘되는구나. 아! 이것이 바로 무심(無心), 무념(無念)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내면, 그것이 벌써 무념(無念)이 아니고 벌써 망상(妄想)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지지리 애써서 공부해서 공부가 좀 익숙해질만 하면은, '하! 참 좋다. 툭 깨달았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내면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애석하고 어리석은 짓이 어디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무심(無心). 무심도 오히려 벌써 무심(無心)이라고 할 때 천만리(千萬里) 멀리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

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맞히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다못 꽉 맥힌 의심으로 정말 실(實)답게 참구(參究)해 나가고, 실(實)답게 정진(精進)을 해 나간 데에서 어떠한 찰나에 탁! 터지는 것이지, 정진하면서 그 공안을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렇게 따지면 맞을랑가, 저렇게 일르면 될랑가?' 이렇게 따져 가지고 공안을 보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그렇게 해서... 그것은 알아지는 것이지, 알아진 것이 어찌...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진 것이 어찌 그것이 참 깨달음이 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19분42초~34분28초)




(3/3)----------------

처음에는 생사 없는 도리를 믿다가—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그 말이여.

생사 없는 도리가 있는 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선(參禪)을 하지도 않을 것이여. 경(經)이나 보고, 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그러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있다고 한 것을 믿지 못한 사람은 참선 안 합니다. 아무리 참선이 제일이라고 해도 절대로 하질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정진을 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믿기 까지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마는, 일단 믿었을진대는 올바르게 정진을 해야 하거던. 여법(如法)하게 해야 하거던.
큰 깨달음으로써 기약을 삼어야지, 조끔 뭔 소견난 거 그런 것은 챙피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없었던 걸로 여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알뜰히 해 나가다 보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아.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다고 해서 그 공부가 거기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가 있는 것이여. 그것이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精進)을 한 것이여.

그렇게 해서 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 증(證)해야만 다시는 퇴전(退轉)을 않는 것이여.
증(證)한 다음에 거기서 공부가 또 끝나냐 하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참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겨우 조끔 공부하다가 스쳐가는 그러한 경계를 가지고 '깨달랐다'고 착각하고, 또 공안을 깨달랐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공부가 다 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되겄습니까.

하물며 공안을 타파하지도 못하고, 생사 없는 도리를 바로 깨닫지도 못하고서, 함부래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입을 함부로 벌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망하고, 불법(佛法)을 망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눈을 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해제날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 한마디, 한 구절 만 들어도, 한 편 만을 들어도 해제 법문은 그것으로써 충분합니다마는, 이렇게 여러 선원(禪院)에서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도반을 위해서 제가 이러한 노바심(老婆心)으로 이런 말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앞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할, 또 틀림없이 얻게 될 여러 도반들을 위해서 정말 눈물을 머금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게만 해 가면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것인데, 조그마한 그런 스쳐가는 소견을 가지고 '알았다'는 생각을 가짐으로 해서 공부가 거기서 사견(邪見)에 빠지고, 중도에서 중단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을 정말 가슴 깊이 명심(銘心)해 주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하야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요, 꽃이 피니, 꽃이 산전(山前)에, 산 앞에 활짝 피어 웃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법(無生法)을 설(說)함이로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꽃이 웃는 것이나, 새가 노래하는 것이 낱낱이 스스로 다 무궁(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으니,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그 무궁한 뜻을 바로 봐 버리면, 어디를 가나 무엇을 보나 근본도리(根本道理) 아님이 없도다. 이런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입니다.

바로 깨닫고 보면 무엇이 부처님이 아니며, 무엇이 부처님의 법(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자기의 면목(面目)을 바로 보지 못했으니,

꽃을 봐도 '이 뭣고?'요,
새 우는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요,
산을 봐도 '이 뭣고?'요,
물을 흐르는 것을 봐도 알 수 없는 '이 뭣고?' 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만 나간다면 그 올바르게,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알뜰히만 공부를 지어 간다면 결정코 조사(祖師) 스님들이 우리를 속이지 안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운집하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와 용무생사(用無生死)에 구경(究竟)에 이를 때까지는, 어떠한 소견(所見)이 나더라도 스스로 부정해 버리고, 정말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강조에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34분35초~44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유락천애기도왕~ / 어떤 젊은 수좌(首座)의 소견 / 정말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인가(印可)를 할 수 있다 / 『서장(書狀)』에 증시랑(曾侍郞)의 철저한 발원(發願) /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원만(覺圓滿)을 목표로 하는 정법학자(正法學者).

(게송)청정법신무내외~ / '삼매(三昧 samādhi)'는 한문으로 '정(定)' / 정정(正定)과 사정(邪定) /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 /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번뇌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둔 채, '이 뭣고?' 하고 화두만 한번 더 추켜드는 그것이 번뇌와 망상을 물리치는 묘방(妙方) / 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꼭!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화두를 타 가지고 정진을 한 것이다.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음--->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증(證)한 다음에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 / (게송)화소산전누천기~.


『서장(書狀)』에서 증시랑(曾侍郞)이 대혜선사(大慧禪師)한테 묻는 편지(便紙).
'차라리 깨닫지 못했으면 말려니와, 깨달았다 하면은 바로 구경각(究竟覺)을 얻어서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境地)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저는 깨달음을 삼지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삼세육추(三細六麤), 세 가지 미세한 생각과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이 다 끊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잠기는 것이고, 그 근본무명을 타파(打破)해야 자기(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그 학자가 바른 소견을, 바른 깨달음을 얻었나 안 얻었나를 점검(點檢)하는 데에 조사(祖師)들이 사용을 했지마는, 우리 학자(學者)는 선지식으로부터 그 공안 하나를 간택 받아 가지고 그놈을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그걸 참구(參究)를 해 가는 것입니다.

화두에 핵심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런가, 저런가' 따지는 의심이 아니라,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꽉! 맥힌 의심이라야 되거든.

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맞히는 그런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다못 꽉 맥힌 의심으로 정말 실(實)답게 참구(參究)해 나가고, 실(實)답게 정진(精進)을 해 나간 데에서 어떠한 찰나에 탁! 터지는 것이지, 정진하면서 그 공안을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렇게 따지면 맞을랑가, 저렇게 일르면 될랑가?' 이렇게 따져 가지고 공안을 보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알아지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진 것이 어찌 그것이 참 깨달음이 될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알뜰히 정진해 나가다 보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되아.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다고 해서 그 공부가 거기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지해서 오후(悟後)에 정말 참다운 보림(保任) 공부가 있는 것이여. 그것이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精進)을 한 것이여.

그렇게 해서 3년, 10년, 20년 하다 보면,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하게 되아. 증(證)해야만 다시는 퇴전(退轉)을 않는 것이여.
증(證)한 다음에 거기서 공부가 또 끝나냐 하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용무생사(用無生死)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써야 하는 거여.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써야 그것이 참 '깨달랐다'고 할 수가 있는 것.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만 나간다면 그 올바르게,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알뜰히만 공부를 지어 간다면 결정코 조사(祖師) 스님들이 우리를 속이지 안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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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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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76~500)2021. 1. 8. 22:13

((No.498))—1993년 1월 첫째일요법회 (57분)



(1/3) 약 21분. (2/3) 약 16분. (3/3) 약 20분.

(1/3)----------------


사서순환난부한(四序循環暖復寒)한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暇)고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사서순환난부한(四序循環暖復寒)한디,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四時), 사서(四序) 네 계절이 돌고 돌아. 그래 가지고 따뜻한 봄이 더운 여름이 되고, 더운 여름이 서늘한 가을이 되고, 서늘한 가을이 다시 추운 겨울이 돌아오다.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잔나비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고 있다.

원숭이는 여름 가을에 여섯 가지 모다 고운 꽃이 피고, 꽃 핀 뒤에는 맛있는 열매가 맺어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그 맛있는 과일을 이것도 따먹고 저것도 따먹고 하면서 그렇게 즐기고 놀다가, 추위가 돌아와서 눈이 덮이고 따먹을 과일도 다 없으니까 그때 그 육화촌에 맛있는 과일을 항상 그리워하고 있더라 그 말이여.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暇)여,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 눈으로 보는 모든 색상, 보고 듣는 가운데 잠시도 겨를이 없어.

시시각각으로 생각 생각이 죽음의 문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 것을 어찌 알까 보냐?(念念那知是死門) 밤낮 맛있는 육화촌에 온갖 맛있는 과일만을 그리워하다가 그러는 동안에 시시각각으로 죽음을 향해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이 게송(偈頌)은 인생(人生)이 이 세상에 나와서 오욕락(五慾樂),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재산에 대한 거, 또 예쁜 사랑하는 사람, 명예(名譽), 권리(權利), 또 안락(安樂), 수면(睡眠)—그것을 향해서 어려서부터 공부할 때 목표를 거기에다 설정을 하고 있다 그 말이여.

좋은 학교 들어가고, 좋은 학교 졸업하면 거기에서 명예가 생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예쁘고 아리따운 이성과 결혼을 하고, 좋은 아들을 낳고, 또 차츰 좋은 자리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모든 사람이 그런 육화촌(六華村)을, 육화촌의 맛있는 과일을 그리워하는 원숭이처럼 일생 동안을 오욕락(五慾樂)에다가 목표를 설정을 하고 그것을 향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구경(究竟)에 목적이 될 수가 없고, 우리에게 영원(永遠)한 행복(幸福)을 갖다 주는 것들이 아니여.


마치 독일에 부쎄(Busse)라고 하는 시인(詩人)이 저 산 너메, 「산 너머 저쪽」이라고 하는 제목의 시(詩)를 읊기를,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남 따라 찾아갔다가

아! 눈물만을 흘리고 돌아왔도다

산 너머 저쪽 더 멀리에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이러한 시(詩)에 말하듯이, '무언가 내년에는 무엇이 잘되겠지. 다음에는 무엇이 잘되겠지. 뭣이 재수가 있어서 사업이 잘되겠지. 내년에는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겠지. 내년에는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겠지' 항상 저 산 너메 행복을 구하듯이, 그러면서 '설마'에 속고 그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이여.


물론 우선 무엇이 안되어도 장래에다 희망을 걸고 노력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현재에 우선 목적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면 좋은 학교에 들어가 보면 우선은 기쁘고 좋지마는, 학교를 졸업하고 또 좋은 직장에 들어갈 일이 걱정이여. 마음먹은 대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마는, 마음먹은 대로 못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여.

또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들어가서는 우선 좋지마는 또 얼마 안 가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를 바래고 더 많이 월급을 타기를 바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 사업이 잘되어서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래나,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그 말이여.

그러한 일들이 평생 동안 쉴 사이 없이 자기가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늙어가고, 자기의 아들딸이 또 그러한 과정을 밟으면서 늙어가고, 또 그다음 손자손녀가 또 그다음 그렇게 그런 과정을 밟아서 늙어간다 그 말이여.


전인(前人)이, 앞사람이 농사(農事)를 짓다가 그 논밭을 자손에게 물려주고 죽어가고, 또 그 자손이 그 논밭을 또 갈고 벌어먹고 살다가 또 뒷사람한테 물려준 것이,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곰을 만났어. 곰이 다가오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마치 거기에 이렇게 아람드리 그 나무가 있으니까 나무 뒤로 우선 피했다 그 말이여. 곰이 나무를 가운데다 놓고 두 손으로 이렇게 사람을 잡을라고 하니까 자기도, 자기가 곰 손을 이렇게 탁! 잡고, 나무를 가운데다 놓고 곰과 사람이 이렇게 마주잡고 딱! 서 있다 그 말이여.

놓자니 돌아와서 자기를 잡아먹을 것이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있는 힘을 다하고 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떨고 있는데 마치 저기 사람이 지나간다 그 말이여.


"여보시오, 이리 좀 오시오. 여기 내가 곰을 한 마리 잡었는데, 이거 나 혼자는 힘이 모자라고 당신 이리 와서 요것 좀 잡으시오. 내가 마을에 가서 도끼나 밧줄을 가지고 와서 이놈을 잡어 가지고 둘이 잡어서 웅담(熊膽)을 팔아먹읍시다"

근께 그 사람이 '웅담'이란 말을 듣고 그 교대를 해 가지고 곰을 딱 잡고 있다 그 말이여. '옳다! 되었다' 하고 그 사람은 도망가 가지고 다시는 안 와버려.

그 사람도 가만히 이렇게 잡고 있다가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해도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 그 말이여. 그러자 마치 또 사람이 지내가니까 그 사람을 불러 가지고 자기가 당한 것처럼 또 그 사람한테 곰을 넘겨주고 또 도망갔어.


이것이 마치 이 지구 땅에, 이 지구상에 태어나 가지고 농사짓고 살고, 장사하고 살고, 또는 회사에 다니고 살다가 늙으면 후손한테 그런 모든 것들을 넘겨주고 죽어가고, 그러한 형상을—그러한 곰을 잡고, 아! 그 웅담은 욕심이 나지만 그놈을 잡고 놓기만 하면 그놈이 나를 죽일 테니 놓지도 못하고, 버리자니 아깝고 계속 붙잡고 있자니 힘든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그와 같다 그 말이여.


사람들이 큰 부자 되기를 다 바라지마는, 부자가 되고 보면 정말 그렇게 행복한 것도 아니여. 되기 전에는 큰 부자가 되면은 좋은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사고, 마음대로 세계에 유람도 댕기고, 얼마든지 참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 것 같지마는, 큰 부자가 되고 보면은 사실 그렇게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 말이여. 또 큰 부자가 되고자 욕심을 낸다 해서 저마다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인생으로 태어나서 목적으로 해야 할 행복(幸福)의 규정이 오욕락이 될 수가 없다 그 말이거든. 오욕락은 조끔도 영원성(永遠性)이 없고,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여.

그래서 일찍이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성현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획득해야 할 영원한 행복의 규정을 '밖에서 찾지 말아라.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설파(說破)를 하신 것입니다.



흉중하애부하증(胸中何愛復何憎)하면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제차현성공안외(除此現成公案外)에  차무불법계전등(且無佛法繼傳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흉중(胸中)에 하애부하증(何愛復何憎)이며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다.

가슴 가운데에 무엇을 사랑하며, 다시 무엇을 미워할까 보냐? 생각 생각이 죽음의 문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신세거든.


지금 새해를 맞이해서 오늘이 1월 3일인데, 어릴 때는 무척 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설이 돌아와서 때때옷을 입고 세뱃돈을 타고 하면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 나이가 차츰차츰 들어가서 세뱃돈도 타는 시기가 넘어가고, 나이만 자꾸 넘어가면 오히려 설 돌아온 것이 별로 기쁠 것도 없다 그 말이여.

죽음을 향해서, 한 해 한 살 더 먹으면은, 우리에게는 이미 죽을 날짜가 다 정해져 갖고 있고, 다맛 언제 죽을는지만 모르지 이미 죽을 날짜가 다 정해 있다고 봐도 틀림이 없어.


한 살 더 먹고 하루하루 지내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다가가는 것인데 무엇이 그렇게 설이라고 즐거울 것이 있으며, 그러한 마당에서 이미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누구를 이뻐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저 사람도 죽어 가고, 나도 죽어 가고 있는데.

죽을 날이 가까와지면 무엇인가 자기가 해야 할, 마무리 지을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신경을 쓰고 정돈을 하고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 낫지, 누구를 트집을 잡아서 미워하고 과거에 자기에게 조금 섭섭히 했다고 해서 그것을 미워하고 미운 생각을 품고 죽어 가면 될 것이냐 그 말이거든.


자괴인전(自愧人前)에 백불능(百不能)이여, 아무것도 남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할 뿐이다 그 말이여.

세속(世俗) 사람은 각기(各其) 자기의 장기(長技), 자기에 남이 가지고 있지 않는 특별히 참 잘한 것을, 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떠억 내놓고 으시대고 그것을 자랑삼아서 그 떳떳하고 보람 있게 이렇게 살아가는데, 사실은 박사 학위를 몇을 가졌건, 또는 높은 권리를 했건 많은 재산을 가졌건, 죽어 가는 입장에 뭐 그렇게 그놈을 코에다 걸고 으시대고 남을 업신여기고 할 만한 거리가 되지를 못하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참으로 허망한 것인 줄 깨달으면 그 사람이 인간 중에 상등인(上等人)이여.


죽어 갈 때, 일생을 그놈을 붙잡고 행세를 하다가 죽어 갈 때 그걸 한푼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냥 한(恨)을 품은 채 이렇게 죽어 가기 보다는, 죽기 전에 '그러한 것들이 무상(無常)하고 허망(虛妄)한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그런 것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그런 권리를 설사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정의(正義)에 입각(立脚)해서 잘 행사를 하고, 큰 재산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절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중을 위해서 적절히 잘 쓰고 그러려니와,


그러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서 떠억 '정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정말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불법(佛法)이요, 참나를 찾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다. 오직 이것만이 참나를 찾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온 세계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드는 평화 사업(平和事業)이다'

이렇게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재산이 없어도, 학식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놓을 만한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상등인(上等人)이여. 정말 상등인(上等人)이다 그 말이거든.(처음~21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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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화두(話頭)를 받아서 그 화두 하나를 가지고 생사 없는 진리를 향해서 등불을 삼고 지팽이를 삼고 꾸준히 나아간다 그 말이여.

늙어 가는 것도 두려울 것 없고, 세월이 지내간 것도 두려울 것이 없고, 온 세상이 탐욕(貪欲)과 진심(瞋心)의 불바다가 되어서 훨훨 타더라도, 이 화두 하나만 가지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정진해 나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 먹고 사는 것은 형편대로, 넉넉하면 넉넉하게 살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간략하게 살고 그뿐이라 그 말이여.


이 공안(公案)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나간 외에는 불법(佛法)에 법(法)을 전하는 등(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그렇게 해 나가는 데에 그것이 불법(佛法)이고, 그것이 바로 법등(法燈)을 전해 나가는 가장 요긴(要緊)한 방법이다 이거거든.


요새 참 여러분의 자녀들이 대학 진학하기 위해서 시험을 치르고 모다 발표를 해서 합격해서 기쁨에 넘치는 가정도 있을 것이고, 또 마음먹은 대로 합격을 못해서 온통 우울한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또 후기도 있고, 또 전문대도 있고, 또 금년에 안 되면 내년도 있으니만큼, 너무 대학에 마음먹은 대로 안 들어갔다고 해서 그렇게 슬퍼하고 걱정하고 절망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전기에 안 된 것이 후기에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고, 또 금년에 안 되어서 내년(來年)에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고.

인생살이라 한 것이 우선 좋아도 나중에 안 좋을 수도 있고, 우선은 안 좋아도 나중에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수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그런 것 때문에 상심하실 것도 없고, 못 들어간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위안을 주고 잘 달래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차기에 대비해서 잘 계획을 세워서 공부하도록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려고 그러고 모다 그런 것이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거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큰 부자가 되고 한 것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 그러거든.

그러면 행복이라 하는 것이 코앞에 무엇이 자기 욕심껏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하는 것은 우선 좀 기쁜 것뿐이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여. 대학에 못 들어가면 당장 아주 인생이 거기서 끝이 난 것처럼 야단들이지만 전혀 그것은 생각이 그릇된 것이다 그 말이거든.


인생은 긴... 무량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미래를 향해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한평생 산다고 하는 것이 한평생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그 여행이 힘들고 고생스러운 여행도 있을 것이고, 힘이 들지만 행복, 기쁨을 느끼는 여행도 있을 것이고, 아주 모든 일이 수월하게 모든 것이 다 맞아 떨어져서 아주 편안한 여행을 할 수도 있으나, 잠깐이거든.


좋은 여관에 잠을 자나, 산에서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새나 생각 나름으로, 산속에 움막에 지냈어도 하룻밤을 즐겁게 지낼 수도 있고, 좋은 여관에 호텔에 들어가서 잠을 자도 하룻밤 자는 동안에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딱! 중심(中心)을 잡고 그 상황에 즉(卽)해서 그 시간을 바르게 보람 있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야지, 조금 무엇이 마음에 안 맞다고 그것이 바로 자기에 불행인 것처럼 절망을 하고 남을 원망하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본참공안몰심사(本參公案沒心思)하야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하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리라

나무~아미타불~


본참공안몰심사(本參公案沒心思)하야, '이뭣고' 화두를 탄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타신 분은 '판치생모?'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한 분은 '정전백수자?'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분은 '마삼근?'

각자 자기가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話頭)가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여.


본참공안에 몰심사(沒心思)여. 완전히 거기에 몰입(沒入)을 해 가지고 다른 일체 생각이 거기서 다 끊어져야 한다 그 말이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화장실을 가나, 세수를 하나, 차를 타나, 일체 일을 하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져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서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이 없어.


그렇게 해서,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이여. 의심(疑心), 의심해 가고 의심해 와 가지고, 의심과 의심이 끊어진 사이가 없어. 항상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그렇게 해 가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여. 마른 남긔(나무)에 꽃이 피어 가지고 마른 가지에 그 꽃이 가득차게 되듯이, 엄동설한에 잎이 다 지고 앙상한 가지가 마치 죽은 나무처럼 그러나, 입춘(立春) 우수(雨水)가 지내면은 물이 오르고 파릇파릇 잎이 돋우고 꽃이 만발(滿發)을 해서 환히 고운 꽃이 피고 향내를 풍기듯이.


우리가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간 때는 마치 부모 초상을 만난 사람처럼—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이뭣고?'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요, 그래서 아무 기쁨도 없고 다못 생각 생각이 화두만을 들고 나가니, 인생이 이래도 그것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슬픈 일을 당해도 슬퍼한 중도 모르고, 기쁜 일을 당해도 기쁜 중을 모르고, 인생에 사는 맛이 오욕락을 즐기는 맛으로 사는데 오욕락을 다 버려버렸어. 부모 형제도 다 버리고 세상에 흥망성쇠에도 다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다 버려버리고 사니, 마치 죽은 나무와 같고 나무토막과 같고 돌덩어리와 같다 그 말이여.


그러나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터억 들려.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의심이 깊을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게 되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고, 불조(佛祖)에 면목(面目)을 보게 되고, 우주의 진리(眞理)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은 부처님을 위시(爲始)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몸소 실천을 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도리라, 이것은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여.


선방(禪房)에 어떤 분이 '견성(見性)을 한 경지(境地)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질문해 왔습니다.

견성(見性)한 경지(境地)는 자기가 깨달라 봐야 아는 것이지, 그 물이 더웁고 차운 것은 자기가 마셔 봐야 얼마나 차웁고 얼마나 뜨거운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보고 물어봐서 '어떻다'고, '얼마만큼 뜨겁다'고 말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여.


깨달음의 경지도 정말 그렇게 궁금하고 알고 싶으면,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어쨌든지 간절히 간절히 정진(精進)을 해서 스스로 탁! 깨쳐 봐야 할 일이더라 그거거든. 궁금한 것을 나보고 물어봐서 어떻게 하냐 그 말이여.

정말로 궁금하거든, '깨달음의 경지가 얼마나 좋고 대관절 그 경지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면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 또 '깨닫기 위해서는 정말 이뭣고?만 하면 꼭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냐?' 또 '자기가 그러한 방법으로 하면 자기도 깨달을 수 있는가? 그러한 것들이 정말 의심이 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건 부처님에 말씀이나 역대조사에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있다'고 믿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또 자기의 근기(根機)라고 할까, 그릇이 '자기도 열심히만 하면 깨달을 수 있냐 없냐? 깨달을 수 없으면 아예 그만두고 인생을 달리 다른 길을 찾아보고, 꼭 깨달을 수 있다면 자기도 한바탕해 보겠다' 이런 말인데.


우리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또 지식(知識)의 유무(有無)를 막론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 자격은 누구나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거든.

다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바르게 열심히만 찾으면 꼭! 찾고 마는 것이여.


방법(方法)이 틀리면 안 되아. 또 방법이 바르더라도 열심히 하지 않고 조금 하다 말다 하면 그것도 안 돼. 또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방법이 잘못되어 있으면 또 안 된다 그 말이여.

그런데 방법이 바르고, 그리고 열심히만 한다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만 되는 것이여.(21분29초~37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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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하고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허되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이여. 달이 돌고 은하를 하늘을 돌고 돌다 보면 점점 둥그러워져.

초생달이 하룻밤 지내면 조금 더 커지고 또 커지고 해서 보름이 되면은 완전히 둥글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여. 그 하얀 얼굴로 밝은 빛을 발산(發散)해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비추어.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이여. 그 밝은 달이 산중(山中) 옹달샘에도 그 비춰 가지고 원숭이가 달이 떨어졌다고 물속의 달을 건지자고, 원숭이끼리 팔에 팔을 연결을 해 가지고 그 물속에 떨어진 그 달을 건지려고 하는, 그 경전에 그런 설화(說話)가 있는데.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다. 그 하늘에 뜬 휘황창 밝은 달이 다맛 물 있는 곳마다 그 달 그림자가 비추는 것뿐이지, 청천(靑天)에서 그 달이 떨어져 버린 것이 아니더라.


이 세상에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났다 없어지고, 사람도 태어났다 죽고 태어났다 죽고, 사람들이 하는 사업도 잘되다가 망(亡)하고 잘되다가 망하고 망하다가 잘되고, 나라도 생겨났다가 얼마 지내다가 나라가 없어지기도 하고, 또 새 나라가 생겨나기도 하고.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이 돌고 돌듯이 인생에 흥망성쇠도 또한 그렇더라.


그렇지만 달이 그믐에는 완전히 아주 칠야삼경(漆夜三更), 아주 새카매 깜깜하지만, 초하루 초이틀 나흘 하다 보면 다시 또 초생달이 생겨서 또 보름이 되고, 보름달이 열엿새, 열이레, 열여드레 되면 차츰차츰 또 작아져 가지고 또 그믐이 되면은 까맣게 없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그래서 완전히 달이 둥근달은 보름날 저녁 한 번뿐인 거여.

인생에 있어서 모든 사업이 번창하고 잘된 것도, 잘되면 한없이 영원히 잘될 것 같지만 또 차츰차츰 기울어져서 부도가 나기도 하고 임자가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그 말인데,

그래서 '달이 졌다'고 해서 절망할 것도 없어. 어두워지면은 불을 켜고 등불을 켜는 거고, 밤에 어디를 가려면 불을 들고 가면 되는 것이지, '어두워졌다'고 해서 아주 영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그만 둘 수는 없는 것이거든.


사업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그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사업이 여의치 못하면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또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거고, 우리의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고, 우리 가정에 모든 일도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써 잘 처리해 나가면 반드시 또 좋은 길이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고 삶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학생이 성적이 떨어지고 대학에 떨어졌다고 해서 종종 자살을 하고 그런 문제들이 있는데, 그건 생각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우리가 법문(法門)을 듣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바른길을 안다면 인간에 흥망성쇠에 그렇게 민감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어려우면 어려운 속에서 지혜와 자비로써 살아가고, 무엇이 잘되면 잘되었다고 해서 지나치게 우쭐대고 그럴 필요도 없는 거여. 그런대로 더욱 겸허하게 잘 살아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하늘에 달은 언제나 허공 속에 있는 것이지, 태양과 지구와 달과의 관계에 있어서 때로는 초생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보름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믐달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 달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우리도 인생에 행복(幸福) 불행(不幸)도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마음대로 되기도 하고, 내 뜻대로 안되기도 하고,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그런 것인데, 그런 상황에 내가 잘 적응을 하고.


여행을 할 때 높은 산고개를 넘어가고 절벽을 기어오를 때에는 거기에 맞춰서 아주 조심(操心)스럽게 넘어가야 또 다시 내리막길이 있을 수도 있고, 평탄(平坦)한 길도 만나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본지(本旨)가 굽히지 않고, 자기 본심(本心)이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상황이 되어 있을 때,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서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래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그것 때문에 내가 좌절이 되지를 안 해.


작년 그러께인가 「보왕삼매론십대애행(寶王三昧論十大碍行)」을 보시(布施)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매일 한 번씩을 읽어 보셔야 한다 그 말이여.

그렇다면 무슨 어려운 일을 당(當)하더라도 바로 중심(中心)을 잡을 수가 있어.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오히려 지혜(智慧)를 낼 수가 있고, 용기(勇氣)를 낼 수가 있고, 더욱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킬 수가 있더라 그거거든.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여러분이 함이 없는 진리를 알고자 할진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천차만별(千差萬別)의 가운데를 여의지 않느니라.


천차만별(千差萬別)이 무엇이냐?

인생에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바로 천차만별이요,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천차만별이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천차만별이요, 빈부귀천(貧富貴賤)이 천차만별이여.

천차만별 속에 영원한 진리(眞理)가 그 속에 들어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여의고 행복을 찾고, 그것을 여의고 진리를 찾지마는, 진리가 바로 천차만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소승(小乘)은 생사(生死)가 두려워서 죽음을 여의려면, '죽음이 싫고 두려워서 죽음을 안 당하려면은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태어나면 죽게 되니까 안 태어나야만 죽음을 면할 것이다' 해 가지고 태중(胎中)에 들어가기를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해. 태중에 안 들어가는 데에다가 목표를 설정하고 공부를 하는데, 대승(大乘)에서는 그게 아니거든.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와 성주괴공 하는 이 자체가,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제법(諸法)인데, 모든 법인데,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본래(本來)부터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여. 항상 그 자체가 스스로 열반(涅槃)의 상(相)이다 그 말이여. 생사(生死) 없는 상(相)이여.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불자가 도(道)를 행(行)해 마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다.

'이 몸뚱이 죽은 뒤에 내생에 부처가 된다' 그렇게 새겨서는 안 되고.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으로 바로 그 도리(道理)를 보아 버리면, 그것이 바로 부처를 짓는 것이다.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그거거든.


그래서 인생에 이 천차만별(千差萬別)—흥망성쇠(興亡盛衰), 희로애락(喜怒哀樂),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버리고 생사(生死) 없는 진리를 찾을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자나깨나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다 희로애락이요, 생로병사요, 흥망성쇠의 바로 그 속에 있거든.

거기에 즉(卽)해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 찰나찰나에 떠억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시라 그거거든. '이뭣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그것 밖에는 영원한 진리를 찾을 길이 없어.


영원한 진리가 저 땅속 깊이 어디 묻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진리가 로케트(rocket)를 타고 몇백만 리를 허공으로 올라가야, 날아 올라가야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 그 시간에 거기를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거거든.


'이뭣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거든. 무조건하고 '이뭣고?'

자꾸 하다 보면 망상을 버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진 때가 오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어진 때가 오는 거여. 열심히 몸부림을 치고 부시대고 애를 쓰는 데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럭저럭하다 말다 하고 그래 가지고는 안 되거든.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마음 길이 끊을라고 해서 끊어진 게 아니라, 자꾸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데에서 저절로 끊어지는 거다.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가지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참 어려운 일이 한없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럴수록에 우리는 더 이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정진을 하고, '이뭣고?'를 챙겨서 마음이 중심(中心)이 잡혀야 모든 어려운 일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모두 대학에 떨어진 자녀를 가지신 분은 또 후기에 잘 보고, 또 전문대학도 좋고 그러니까 잘 그렇게 하시고, 정 아들딸들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렇게 그러면 잘 달래서 절로 데리고 와서 부처님께 절도 시키고 또 스님네한테 좋은 말씀도 듣고, 또 가능하면 후원에 와서 벗어부치고 그릇도 씻고, 이러한 기간을 잠시 가져 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낮에는 일하고 또 밤에는 또 참선도 하고, 이렇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또 재수를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머지않아서 교육법이 개정이 되어서 정말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후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보람 있게 젊은 시절을 보냄으로 해서 행복한 장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오늘 1993년의 1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해에는 어쨌든지 '인생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그 목표를 향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37분51초~57분21초) (끝)





[법문 내용]


(게송)사서순환난부한~ / 오욕락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 / 부쎄(Busse)의 시, 「산 너머 저쪽」 / 부처님, 성현들의 영원한 행복의 규정 '밖에서 찾지 말아라. 자기 안에서 찾으라' / (게송)흉중하애부하증~ / 활구참선법만이 참나를 찾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이것이 바로 온 세계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드는 평화 사업. 상등인(上等人)


정진해 나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어. 형편대로 살면 그뿐이라 / 인생은 무량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미래를 향해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딱! 중심(中心)을 잡고 그 상황에 즉(卽)해서 그 시간을 바르게 보람 있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야 / (게송)본참공안몰심사~ / 은산철벽 의단독로 타성일편 확철대오 본래면목,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참으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 올바르게 열심히만 한다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만 되는 것이다.


(게송)월마은한전성원~ / 보왕삼매론십대애행(寶王三昧論十大碍行) / 무슨 어려운 일을 당(當)하더라도 바로 중심(中心)을 잡을 수가 있어야 / (게송)군금욕식무위리~ / 천차만별 속에 영원한 진리(眞理)가 그 속에 들어 있다 /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인생으로 태어나서 목적으로 해야 할 행복(幸福)의 규정이 오욕락이 될 수가 없다. 오욕락은 조끔도 영원성(永遠性)이 없고,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여. 그래서 일찍이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성현들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획득해야 할 영원한 행복의 규정을 '밖에서 찾지 말아라.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설파(說破)를 하신 것입니다.


명예 권리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서 '정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정말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불법(佛法)이요, 참나를 찾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다. 오직 이것만이 참나를 찾아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온 세계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드는 평화 사업(平和事業)이다'

이렇게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재산이 없어도, 학식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놓을 만한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상등인(上等人)이여. 정말 상등인(上等人)이다. 오직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화두(話頭)를 받아서 그 화두 하나를 가지고 생사 없는 진리를 향해서 등불을 삼고, 지팽이를 삼고 꾸준히 나아간다.


인생은 무량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미래를 향해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한평생 산다고 하는 것이 한평생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거거든.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딱! 중심(中心)을 잡고 그 상황에 즉(卽)해서 그 시간을 바르게 보람 있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야지, 조금 무엇이 마음에 안 맞다고 그것이 바로 자기에 불행인 것처럼 절망을 하고 남을 원망하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들려.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의심이 깊을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게 되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고, 불조(佛祖)에 면목(面目)을 보게 되고, 우주의 진리(眞理)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위시(爲始)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몸소 실천을 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간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도리라, 이것은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여.


우리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또 지식(知識)의 유무(有無)를 막론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 자격은 누구나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거든.

다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여. 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찾기 때문에, 바르게 열심히만 찾으면 꼭! 찾고 마는 것이여.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와 성주괴공 하는 이 자체가,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제법(諸法)인데, 모든 법인데, 제법(諸法)이 종본래(從本來)로, 본래(本來)부터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여. 항상 그 자체가 스스로 열반(涅槃)의 상(相)이다 그 말이여. 생사(生死) 없는 상(相)이여.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불자가 도(道)를 행(行)해 마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다. '이 몸뚱이 죽은 뒤에 내생에 부처가 된다' 그렇게 새겨서는 안 되고.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으로 바로 그 도리(道理)를 보아 버리면, 그것이 바로 부처를 짓는 것이다.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 이 천차만별(千差萬別)—흥망성쇠(興亡盛衰), 희로애락(喜怒哀樂),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버리고 생사(生死) 없는 진리를 찾을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자나깨나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다 희로애락이요, 생로병사요, 흥망성쇠의 바로 그 속에 있거든.

거기에 즉(卽)해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 찰나찰나에 떠억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시라 그거거든. '이뭣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그것 밖에는 영원한 진리를 찾을 길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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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76~500)2021. 1. 6. 16:30

 

 

((No.479))—1992년 하안거 해제(92.08.13) (73분) (용479)

 

479-1:4(1992년 하안거해제:약21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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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2:4(1992년 하안거해제:약17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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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3:4(1992년 하안거해제:약20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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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4:4(1992년 하안거해제:약15분).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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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약 21분. (2/4) 약 17분. (3/4) 약 20분. (4/4) 약 15분.

(1/4)----------------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타가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나무~아미타불~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야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 젊어서부터 주욱 저 먼 타관(他官)으로 타관으로 방황을 하는데 아주 익숙해졌어.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몇 번이나 형산(衡山)을 돌고, 몇 번이나 소상강(瀟湘江)을 건넜던가. 저 타관으로 타관으로 젊어서부터 타향살이로, 나그네로 방황을 하면서 몇 번이나 형산을 돌고 몇 번이나 소상강을 건넜더냐 이거거든.

 

'젊어서부터'라고 하는 말은 저 무량겁(無量劫)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자기 마음의 고향을 등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천상(天上)에 갔다가, 인간세(人間世)에 왔다가,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졌다가,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졌다, 지옥고(地獄苦)에 떨어져서 무량겁을 그렇게 육도를 돌고 돌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왔더냐 이거거든.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니, 하루아침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으니,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다. 비로소 그 타향살이로, 타향으로 돌고 도는 그 세월이 길고 긴 것을 알게 되었더라 그거거든.

 

무엇 때문에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가?

'좀 더 돈을 좀 벌어 볼까, 무슨 공부를 좀 해 볼까, 남부럽지 않게 좀 잘살아 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조그마한 이양(利養)을 구하기 위해서 부모가 계신 고향을 떠났더라 그거거든.

그래 가지고 타향으로 가니 낯설고 기반이 없어 놓으니 발붙일 곳이 마땅치 안 해. 그래서 또 다른 데로 가고, 가서 보니 또 마땅찮으면 또 다른 데로 가고, 이리 갔다 동서남북을 그렇게 해매면서 저 끝없는 타향살이로 타향살이를 하면서 수없는 고초를 겪은...

 

그러다가 문듯 좋은 친구를 만나. 어진 선배를 만나 가지고 직장도 구하고 살길을 얻어.

그것이 바로 무엇에다가 비유했냐 하면은 육도윤회를 하다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을 구하기 위해서 육도(六道)를 돌고 돌다가 다행히 어느 날 불법(佛法)을 만났더라 이거거든.

어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법문을 듣고, 어느 도반(道伴)을 만나서 소개를 받고, 그래 가지고 정법(正法)을 믿게 되어서 그래서 자성(自性)을 깨닫는 참선(參禪)을 하다가 보니 정말 그동안 생사고뇌(生死苦惱) 속에서 헛되이 많은 세월을 보낸 것을 깨닫게 되었더라.

 

 

오늘 임신년(壬申年) 7월 15일 백중날을 맞이해서 용화사 법보선원 대중, 보살선방 대중, 시민선방에 모다 대중과,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회룡사 의정부 회룡사선원 대중, 대전에 세등선원 대중, 저 전주에 위봉선원 대중들, 그리고 멀고 가까운 사암(寺庵) 토굴에서 정진하는 도반들, 각 가정에서 분 따라서 정진(精進)하는 노소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이 해제일(解制日), 백종일을 맞이해서 이 도량(道場)에 가뜩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그동안에 그 삼복성염(三伏盛炎)에 그 더위를 이기면서 등어리에는 참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고 그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하느라 더운 줄도 모르고 석 달 구순안거(九旬安居)가 그렇게 석 달이지만 어떻게 지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정말 남이 억지로 시켜서는 못할 일이여. 이것은 스스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친 대신심(大信心)과 분심(憤心)이 아니고서는 이 삼복성염에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죽비를 치고 정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 달을 지내고 나면 휘청거리고—아무리 외호(外護)를 잘해서 대중공양(大衆供養)이 들어와서 잘 먹고 지냈다 해도 골(骨) 속이 비어서 휘청거리고, 앉었다 일어서면 앞이 캄캄하고, 오줌을 누면은 발등에 가서 떨어져.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다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다 면목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눈물 나는,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새카만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그러한 형제자매 도반들을 위해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그러한 도반들을 위해서 몇 마디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해제(解制)를 하면 석 달 동안 정진하던 선원(禪院)을 모다 이 걸망을 지고 또 모다 떠나시게 됩니다. 어디를 가던지 또는 다시 그 선원에 머물러서 산철 결제를 하던지, 앞으로는 더위도 가시고 차츰 서늘해질 거이니 그동안에 더위 때문에 시달렸던 몸과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정말 알뜰하게 착실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하여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한 부처님, 두 부처님 내지 천만 부처님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여. 부처님들이 모두 다 눈은 옆으로 백이고, 코는 바로 이렇게 백이셨드라 그거거든.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로, 석년(昔年)에 무량겁으로부터 오시면서 친(親)히 선근(善根)을 심어 왔어. 온갖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여. 금일(今日) 이와 같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으시게 되었더라.

그러한 선근(善根)을 심어 오지 안 했으면 어찌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추어서 스스로 깨닫고 무량(無量) 중생을 제도(濟度)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그런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부처님이 몸소 시범(示範)하신 바와 같이 그런 선근(善根)을 심지 않고서는 그런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출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육조(六祖)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천만 부처님 처소(處所)에서 일심(一心)으로 공양(供養)을 하고,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순(隨順)을 하고, 또 모든 보살(菩薩)이나 선지식 또는 스승님 · 부모 또는 연세가 많은 어른 존장(尊丈)의 처소에서는 항상 공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하고, 그 명령에 어기지 않고 그 뜻을 받들어서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어 왔고.

 

그런 부처님이나 보살님이나 또는 선지식 스승 부모뿐만이 아니라 육도(六道) 중생을 만나서는 살해(殺害)를 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중생을 속이지 않고, 천대하지 아니하고, 훼방하지 아니하고, 욕하지 아니하며, 그 축생(畜生)을 타지 아니하며 채찍질을 하지 아니하며 그 고기를 먹지 아니해. 항상 그 육도 중생을 '어떻게 하면은 좋게 해 줄까? 이익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상대해 왔더라 그말이여. 그렇게 해서 선근(善根)을 심어.

그리고 일체 빈고(貧苦),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할 때에는 자민심(慈愍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상대하고, 싫어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그 중생(衆生)이 요구하는 바는 자기의 힘 따라서 베풀고, 이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더라.

 

그러면 일체 악류(惡類), 악한 무리들—나를 해꼬자하고, 해꼬자하려는 그런 악한 무리를 상대할 때에는 유순(柔順)하고 화평(和平)한 마음으로 상대하고, 인욕(忍辱)하고 환희(歡喜)한 마음으로 이렇게 맞이하고.

나에게 좋게 해 준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악한 마음으로 나에게 피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그러한 상대를 만나서도 유순하고 인욕하고 환희한 마음으로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보살(菩薩)에 마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고, 고집 세고 비꼬인 생각을 쉬게 하는,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다 그거거든.

 

이것이, 그렇게 무량겁을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대표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우리의 교주(敎主)이시고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같은 그러한 성현 중에 대성현(大聖賢)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성현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 순종(順從)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1분17초)

 

 

 

 

(2/4)----------------

 

그래서 우리는 낱낱이 구체적으로 간략히 선근(善根)을 심는 법을 육조(六祖) 스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을 드렸거니와,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근기(下根機)로서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불보살과 스승과 어른 존장, 그리고 모든 육도 중생과 빈곤한 그런 중생들, 심지어는 우리를 해꼬자할 악한 무리들에까지도, 그러한 무리를 만나서도 우리의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고 선근을 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근기 약한 것만을 한탄하고 그러한 선근 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런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성색불애처(聲色不礙處)가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색(色)을 보되 색(色)에 관계치 아니하고, 관여(關與)하지 아니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어.

 

우리는 눈을 통해서 온갖 색상(色相)을 보는데, 그 색상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그것에 관여를 하게 됩니다.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크다 적다', '좋다 나쁘다' 그것이 바로 색에 관여하는 것이거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여. 무슨 소리든지 귀로 들으면, '아, 저건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애기 소리다. 저것은 개 짖는 소리다' 거기에서만 끝나지 아니하고, '저것은 나를 해롭게 하는 소리다. 나한테 욕하는 소리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다' 온갖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관여를 하고, 거기에서 싫어하는 생각을 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고, 다투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고, 원한심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色相). '저 사람은 이쁘다. 미웁게 생겼다. 뵈기 싫게 생겼다. 입맛 떨어지게 생겼다' '저 아무 점께 나한테 저렇게 욕한 인간이 또 오는구나'

하루 종일 · 날마다 · 달마다 · 일 년 내내 · 일생 동안을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을 보고 그렇게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업심(業心)이 발동(發動)을 하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를 통해서 시비를 일으키고 업이 발동을 해서, 얼굴에 그 표현(表現)이 되고 행동으로 표현이 돼.

그래서 한량(限量)없는 업(業)을 짓고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무슨 색상이 들어오거나, 처음에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들어오거나 말거나 거기에 걸리지를 안 해.

눈에 보이면 보인 대로 맺겨 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면은—내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거나, 나를 비방(誹謗)하는 소리를 듣거나 그냥 그런대로 놔두는 거여.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할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안 보려고 할 것도 없어. 보이면 보인 대로 놔두고 들으면 들린 대로 흘려보내는 거여.

 

부처님께서 어느 외도(外道)를 만나셨는데, 그 외도가 입에 못 담을 비방(誹謗)을 해. 온갖 비방을, 부처님 비방을 한다. 부처님 제자들에 관한 비방, 부처님에 관한 비방, 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로 갖은 고약한 소리를 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욕을 하고 비방을 하는데, 부처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그만하라는 말도 않고 다 들으셨다 그말이여.

 

다 듣고 난 다음에, "이제 말이 끝났습니까?"

"네, 끝났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한마디 묻겠는데, 내 집에 참 손님이 오셔서 그 주인이 참 갖은 음식을 많이 차려서 내놓고 손님한테 내놨는데, 손님이 그 음식을 안 먹고 가면 그 음식은 누가 먹어야 겠습니까?"

 

"그 손님이 안 먹으면 주인이 먹어야죠"

"그러면 되었다"고. 그리고서 부처님이 거기서 떠나셨습니다.

 

내게 당치않는 행동이나, 내게 당치않는 말로써 나를 비방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것을 취(取)하지 아니하면, 그것에 관여(關與)하지 아니하면, 그 욕과 악한 비방은 한 사람이 다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공연한 사람을 흔들어 놓을 흔들려고 그러고, 공연한 사람을 비방을 하고 욕하고 했으면, 상대방이 그놈을 받아들이면 그리 건너가겠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무심(無心)으로 상대(相對)해.

화두(話頭)를 떠억—그럴수록에 당치않는 소리를 하면 얼굴 하나 찌푸릴 것도 없이 화두를 떠억 들고 '이 뭣고?' 그러면 구태여 안 들을라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열심히 들은 것처럼 눈을 따악 뜨고 잘 들은 척하고, 들으면서 그냥 '이뭣고?'를 떠억 하란 말이여. 그러면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는 한 사람 입으로 도로 들어가는 거여.

그놈 지가 토해 낸 독(毒)을 잔뜩 들어마시고, 그 사람은 그 지은 죄업(罪業)으로 삼악도(三惡道)에 가서 고(苦)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 (욕하는) 말을 들으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뭣고?'를 하고, '판치생모'를 하고, '정전백수자'를 하고, '무자' 화두를 했기 때문에 그 공덕(功德)으로—(욕한 사람은) 한량없는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그 (욕한) 사람이 불법(佛法)을 믿게 될 것이다 이거거든.

같이 싸우고 그랬으면 다 같이 지옥에 떨어질 텐데, 내가 거기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시비(是非)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떠억 정심(正心)으로 상대를 하고 나는 화두를 들고 최상승법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욕한) 사람이 지은 죄 만큼은 받어야 되는 거고,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도 그놈을 받고 나서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했을 때에는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그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하고.

또 내가—그렇게 비방을 하고 욕을 한 데도—동심(動心)이 안 되고 떠억 화두를 들 수 있게끔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많은 부처님과 많은 선지식에게 공양(供養)을 하고 선근(善根)을 심어 온 그 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나를 비방하고 욕한 데 마음이 동요가 안 되고 화두를 거각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잘 길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한 그런 예를 들었거려니와,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팔풍(八風) 경계, 여덟 가지 종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러한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많은 일들,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많할 것입니다마는, 이 예(例)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를 무장(武裝)하고 그러한 '이뭣고?'에 철갑과 투구로써 무장을 하고 나간다면 그 앞에 이기지, 당해낼 수 있는...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천하 간단한 무기(武器)의 하나지마는 팔만사천 마구니를 퇴치(退治)할 수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에 그러한 좋은 무기를 우리는 지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여러 도반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팔만사천 마구니를 우리가 그것으로 이겨 낼 수가 있느냐 하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거든.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이 뭣고?' 하나만 탁! 챙기면 천하 없이 무서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도 그 앞에는 무릎을 꿇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들이 나를 보호하고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깨달라서 성불(成佛)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호위병(護衛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도반들은 앞으로 어데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화두(話頭)를 드는 그 정진력(精進力)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거나 무장무애(無障無礙)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역경계(逆境界)에 처(處)하더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화두(話頭)를 들고 나아간다면 무장무애하게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에 더 분심(憤心)이 나고,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21분18초~38분35초)

 

 

 

 

(3/4)----------------

 

오늘은 백종날, '일백 백(百)' 자, '가지 종(種)' 자, 백종(百種).

백 가지의 과일과 음식으로써 부처님과 오늘 해제를 맞이한 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림으로 해서, 그 공양을 받으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위해서 그 청정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축원(祝願)을 해 주시기 때문에, 또 공양을 올린 그 공덕으로 우리의 삼악도(三惡道)에 빠져서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에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 지옥도(地獄道)에 빠져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 청제부인(靑提夫人)을 그 고통으로부터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애를 썼으나 워낙 그 업(業)이 중(重)하기 때문에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그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가르켜주시라'고 간청(懇請)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백 가지 과일과 백 가지 음식으로써 오늘 해제(解制)를 맞이한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리도록 권하셨던 것입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백 가지 음식과 과일, 맛있는 공양으로써 해제를 맞이한 스님네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공덕(功德)으로 청제부인은 무서운 지옥고로부터 벗어났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因緣)으로 해서 해마다 돌아오는 해제일, 7월 15일 백중날에는 지옥(地獄)에 문(門)이 열려서 오늘 이 법당(法堂)에도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들이, 선망부모에 그 영가(靈駕)들이 어데서 무슨 고통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법회(法會)에 귀빈(貴賓)으로 초청(招請)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의 영가들도 또 이 법보전(法寶殿)에 만년위패(萬年位牌) 법보영가들과 함께 법문(法門)을 듣고 또 여러분의 정성으로 올리는 많은 과일과 음식을 공양을 받고 그리고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고 받고 있는 우리의 부모들의 얼마나 그 고통스러운가를 우리는 우리의 육안(肉眼)으로는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마는, 경전이나 또는 드라마나 그런 영화 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실지로 본 바와 다름없을 만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전이나 그런 영화에 나오는 고통은 그 일부에 지내지 않고, 정말 그 팔만사천 감옥에서 고통 받는 모냥은 우리는 차마 볼 수가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왜 그러한 고통을 받게 되느냐? 순전히 탐심(貪心) 때문입니다. 탐심, 무엇이든지 자기 욕심(欲心)을 부리는 거여.

그다음에는 진심(瞋心)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안되면은 썽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의 버릇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주장을 하다가 자기 주장대로 안되면 썽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 번 해 보고 안되고, 두 번 해 봐도 안되고, 세 번 해 봐도 안되면, '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는 것은 내 욕심대로 무엇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로구나. 내 주장만 내세우다 보니까 상대방과 부딪치게 되고 결국은 싸우게 되고 서로 감정을 사게 되는구나. 그러지 말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尊重)하고, 내 주장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양보할 중도 알고, 이렇게 해야 서로 화합(和合)이 되고 서로 마음과 마음이 합하고 힘과 힘이 합해서 어떠한 어려운 일도 성공할 수가 있겠구나' 이렇게 지혜(智慧)로운 마음을 내야 할 텐데,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러한 지혜로운 마음을 낼 줄을 모르고 끝까지 점점 고집이 세어지고 심술이 궂어지고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이 조끔도 누그러지지 않아. 그러니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衆生)이더라 그 말이여.

탐내는 마음, 썽내는 마음, 그걸 빨리 깨달을 줄을 모르고 끝까지 버릇을 못 고치니 그것이 어리석더라 그거거든.

 

그래서 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자기도 지옥고로 가고, 남도 뒤흔들어서 남에게 해독(害毒)을 끼친 그런 악한 못된 독(毒)이더라 이거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거여. 삼악도에 근본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거든.

 

선방(禪房)에서도 자기의 욕심만 챙기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고, 그래 가지고 그 안되면은 썽내고, 간 곳 마다 그러한 성질을 쓰는 사람.

가정(家庭)에서도, 가정이라는 게 참 가장 가까운 식구끼린데, 어찌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고 자기의 욕심만을 챙기고 그래 가지고는 부모자식 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부부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고부간에도 화합이 안되고, 형제자매 간에도 화합이 안되는 거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여. 관공서나 회사에서나 어느 단체 어느 모임에 가서도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되는 일이 없어.

 

국회도 마찬가지요, 정부도 마찬가이요, 당(黨)도 마찬가지요, 어떠한 친목 단체도 마찬가지여.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 옳다 그러고, 상대방의 의사를 짓밟고 업신여겨 가지고서는 잘될 수가 없어요. 큰 기업체도 그렇게 해서 망(亡)하고 큰 국가도 그렇게 해서 망(亡)하는 거야.

잘못된 것은 전부 상대방한테 몰아붙여. 여당은 야당한테 몰아붙이고 야당은 여당한테 몰아붙이지만, 책임은 각자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 집안이 화목을 찾게 되고, 국회도 정상화되고 한 당내(黨內)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여.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실천한 사람이라야 '자기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의 마음을 돌릴 때, 상대방의 마음도 누그러지고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화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단한 원리를 모른 사람이 어떻게 큰 정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대통령 선거니 무슨 지방장 선거니 그런 게 있겠습니다마는,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상대방을 역적(逆賊)으로 몰아붙이는, 이조(李朝)에 노론(老論) 소론(少論) 그런 사색정당(四色政黨)과 같은 그런 사람에게는 표를 찍어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표를 던지면 또 이조와 같이 나라를 망해 먹고, 나라를 왜(倭)놈한테 팔아넘길 수밖에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허고  사의순환기요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나무~아미타불~

금일여군도할단(今日與君都割斷)하고  출신방호장부아(出身方號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여. 한 물결이 움직이자마자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 고요한 호수에 돌맹이나 낚싯대를 한번 던져 봐라 그 말이여. 그 찰나에 수천수만의 물결이 거기서 끝없이 일어나더라.

우리가 '한 생각' 딱! 돌이키면 될 일을,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고 탐진치 삼독으로 뻗어나갈 때에는 온 집안을 흔들어 놓고 온 세상을 꾸정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의순환기요기(似蟻循環豈了期)리오. 그러한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를 못하고 끝없이 되풀이를 하니, 마치 개미가 쳇바퀴를 돌듯이 돌고 돌고 또 돌고 해서 한량없이 도는데 언제 끝날 기약이 없더라.

 

금년에 이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선방 · 사무실 · 후원 · 보살선방 해서 이백 명 대중(大衆)이 이렇게 지내는데, 후원에서 행자들과 또 여러 보살님네들이 모다 참 그 더위 속에서 참 많은 애를 쓰셨는데, 그러한 속에서도 서로서로 말을 조심(操心)하고 행동을 조심(操心)하고, 그 가운데에 일을 잘한 사람도 있고 또 서투른 사람도 있고 그래서, 그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석 달 동안을 그렇게 애를 쓰는 가운데에 참 많은 애를 썼지만, 서로서로 충고하고 서로서로 잘 아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켜주고 이렇게 해서 화합(和合)한 가운데 일을 잘 추려 나갔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패당(牌黨)을 지어서, '니가 잘한다, 내가 잘한다' '내 시킨 대로 해라' 자기의 주장을 앞세우고 상대방을 짓누르고,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이 석 달 동안에 무장무애하게 이렇게 해제를 맞이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기의 패당(牌黨)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직접 간접으로 압박을 주고 피해를 주는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면, 한 쪽으로는 공덕(功德)을 쌓고 또 한 쪽으로는 공덕을 소멸(消滅)하는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은 공덕(功德)은 좁쌀만큼 짓고 나쁜 업(業)은 산만큼 지어서 그 지은 공덕과 악한 업을 비교하면 비교가 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와서 일을 도운답시고 같이 일하는 대중에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주어서 모처럼 신심(信心)으로 와서 일하는 사람을 그렇게 흔들어 놓고 압박을 주고, 다시 와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한다면 그 한 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무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백 명 식구를 석 달 동안 이렇게 외호(外護)를 하고 한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 봉사하는 보살도(菩薩道)를 행(行)하는 그런 원력(願力)을 가진 신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 후원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어느 선방 어느 후원이라도, 후원에서 그 겨울에는 손이 꽁꽁 얼고 발이 꽁꽁 얼고, 여름에는 아무리 씻고 옷을 갈아입어도 금방 흠뿍 젖고 몸에는 땀띠가 돋고,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말없이 원주(院主) · 별좌(別座) · 공양주(供養主) · 채공(菜供), 그밖에 여러 후원 대중들의 그런 수고가 아니고서는 그 한 철 대중이 정진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38분35초~58분19초)

 

 

 

 

(4/4)----------------

 

그래서 불법(佛法)이 있는 동안 선방(禪房)이 안 없어질 것이고, 선방이 있는 동안에는 어느 선방이나 후원에서 애쓰는 보살화현(菩薩化現)들이 없이는 선방이 잘 운영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원에서 소임(所任)을 보는 원주 스님이나 도감, 별좌나 공양주나 채공, 또 그걸 돕는 여러 자원봉사(自願奉仕)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들도 그런 긍지를 가지고 신심으로써 잘 함으로써 한량없는—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화두(話頭)를 들어야 하거든. 일하면서도 화두를 열심히 들면 남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없고, 또 누가 자기한테 '잘하네 못하네' 말을 한다고 해도 조끔도 중심(中心)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분들이나, 외호(外護)하는 대중(大衆)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입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어야 그 속에서, 선방에서 정진하는 대중 가운데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분이 나올 것이고, 후원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툭! 터지는 대중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사(佛事)인 것입니다. 불사는 자기 하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를 위한 불사여. 일체 중생(衆生)을 위한 불사이기 때문에 불사는 아상(我相)이 없어야 하고,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아상과 자존심을 버릴 때, 저 사람이 바로 나요, 내가 바로 저 사람이어서 우리가 모두 한 몸뚱이가 되는 것이고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큰 불사(佛事)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용화사(龍華寺)가 전강 조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17년이 되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불사—법당이라든지 선방이라든지 또 이 각 기타 모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이렇게 볼 수 있는 불사가 이렇게 잘 이루어지고,

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 이렇게 신도님네들이 이렇게 많이 또 이 운집(雲集)을 하게 되는 것, 또 많은 분들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고 해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을 중심으로 해서 최상승법이 온 나라에 이렇게 자꾸 선양(宣揚)이 되고 외국에까지 이렇게 자꾸 선양이 되는 것은 이것이 온통 우리 법보제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精進)을 하신, 그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모든 불사(佛事)에 동참(同參)하신 그 공덕(功德)으로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산승(山僧)은 믿고 있습니다.

 

이 살아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모셔 있는 4만7천 위(位)의 이 법보영가, 우주법계(宇宙法界)에 수없는 우리의 선망부모들도 이 법회(法會)와 불사(佛事)에 모두가 다 동참을 하실 수 있도록 항상 이 법회 때마다 그러한 영가들을 이 법회에 청(請)하는 거량(擧揚)을 한 것입니다.

이 법당에 들어온, 또 이 법당에 들어오지 못한 밖에 있는 모든 영가들도 이 법문(法門)을 듣고서 이 불사에 동참을 한 그 공덕으로 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백종날, 이 해제(解制) 법회는 다른 법회보다도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또 비명액사한 모든 영가(靈駕)들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한 그러한 법회인 것입니다.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들께서도 이 법회의 그러한 특별한 의의(意義)가 있는 법회에 대해서 깊이 인식을 하시고 앞으로 이어지는 천도 법요식(薦度法要式)에 경건하게 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삼제구심심불견(三際求心心不見)호되  양안의전대양안(兩眼依前對兩眼)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수유검각주심(不須遺劍刻舟尋)하라  설월풍화상견면(雪月風花常見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제구심심불견(三際求心心不見)이여. 과거 · 현재 · 미래, 이게 삼제(三際)인데, 과거의 마음을 구(求)해도 구할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고, 미래의 마음을 구해도 구할 수가 없어.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한 번 찾어보시라 그 말이여. 어떻게 생겼나?

암만 찾어봐도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으로도 잡을 수가 없고, 우리의 생각으로도 아무리 어떻게 생겼는가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양안의전대양안(兩眼依前對兩眼)이여. 두 눈은 예나 다름없이 두 눈을 대하고 있더라.

거울을 떠억 보시라 그말이여. 거울을 따악 들여다보면 자기의 그 두 눈이 거울 속에 따악 들어 있거든. 거울 속에 들어 있는 그 두 눈이 바로 자기 두 눈에 영상(影像)이거든.

자기 두 눈을 아무리 보려고 해도, 하늘땅을 다 찾어봐도 그것은 찾을 수가 없는데, 거울을 딱 보면 그 속에 자기 두 눈이 딱! 들어 있거든.

 

그러면 거울 속에 들어 있는 그 눈이 진짜 자기 눈이냐 하면 아니여. 자기 눈에 그림자이지, 영상(影像)이지 진짜 자기 두 눈은 아니거든.

진짜 자기 두 눈은 아니지만, 자기 눈을 보려면은 거울을 보는 수밖에는 없어. 거울을 통(通)해서 자기 눈을 보는 거여.

 

거울을 딱! 보면은 자기 눈에 눈꼽이 끼인 것도 볼 수가 있고, 자기 눈이 빨갛게 충혈한 것도 볼 수가 있고, 그 거울을 가자(假藉)해서 진짜 자기 눈을 딱! 인식을 할 수가 있는 거여.

거울을 가자(假藉)하지 않고 아무리 눈을 찾어도, 땅을 파고 들어가도 그 속에는 없고, 하늘을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도 그건 없는 거다 그 말이여.

 

불수유검각주심(不須遺劍刻舟尋)이다. 잃어버린 칼을 찾기 위해서 뱃전을 찍지를 말아라.

배를 타고 가다가, 배에서 일을 하다가 칼을 잃어버렸어. '바로 여기에서 칼을 잃어버렸다' 해 가지고 그것을 표(標)하기 위해서 뱃전을 찍어서 표(標)를 하지 말아라 이거거든. 칼은 물에 빠졌는데, 그 물에 빠졌는데 뱃전에다가 표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거거든.

 

설월풍화상견면(雪月風花常見面)이여. 칼은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기 손에 들고 있거든.

자기 손에 들고 있으면서 칼을 잃어버린 줄 알고 뱃전에다가 그 칼로 '탁탁' 흠집을 내서 칼 잃어버린 자리를 표(標)를 했다면 어떻게 된 것이냐.

 

겨울이면은 펑펑 쏟아지는 흰 눈, 가을이면 휘황창 밝은 달, 여름이면 시원하게 부는 바람, 봄이면은 청황적백(靑黃赤白)으로 피는 아름다운 꽃, 설월풍화(雪月風花)를 항상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더라 그거거든.

 

겨울에 나리는 눈과 가을에 밝은 달과 여름에 부는 바람, 봄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들을 볼 때에 무엇을 봐?

 

'아! 꽃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아! 시원한 바람이 불면 '아! 시원하다'

달이 밝으면, '아! 달도 밝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아! 눈도 참 잘 쏟아진다'

 

그것을 화가(畵家)는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을 것이고, 시인(詩人)은 그것을 보고 시를 읊을 것이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보고 무엇을 해? 춤을 출까?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느니라. (58분21초~1시간13분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자소내내관원방~ /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없다 / (게송)일불이불천만불~ /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인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게송)견색비간색~ / 팔풍(八風)이 휘몰아치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팔만사천 마구니를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마구니는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다.

 

백종(百種)법회로 선망부모(先亡父母)들의 이고득락(離苦得樂) /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근본. 원인 / (게송)일파자동만파수~ / 선방(禪房) 대중이나, 외호(外護) 대중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사(佛事).

 

(게송)三際求心心不見 兩眼依前對兩眼 不須遺劍刻舟尋 雪月風花常見面 /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다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다 면목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다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피눈물 나는, 피땀 흘리는 정진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무량겁(無量劫)으로 쌓이고 쌓인 새카만 업보(業報)를 녹이고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자기도 지옥고로 가고, 남도 뒤흔들어서 남에게 해독(害毒)을 끼친 그런 악한 못된 독(毒)이더라 이거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축생 · 아귀 · 지옥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거여. 삼악도에 근본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거든.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분들이나, 외호(外護)하는 대중(大衆)이 다 같이 청정(淸淨)한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만, 그 회상(會上)이 바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입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어야 그 속에서, 선방에서 정진하는 대중 가운데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분이 나올 것이고, 후원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 툭! 터지는 대중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겨울에 나리는 눈과 가을에 밝은 달과 여름에 부는 바람, 봄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들을 볼 때에 무엇을 봐?

'아! 꽃이 아름답다' 여름에는 아! 시원한 바람이 불면 '아! 시원하다' 달이 밝으면, '아! 달도 밝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아! 눈도 참 잘 쏟아진다'

 

그것을 화가(畵家)는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을 것이고, 시인(詩人)은 그것을 보고 시를 읊을 것이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보고 무엇을 해? 춤을 출까?

들을 때에는 소리를 듣거든 온전히 듣고, 모든 색상을 볼 때에는 보는 것밖에는 법(法)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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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