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출무생일곡가(唱出無生一曲歌)하니, 무생곡(無生曲) 한 곡을 불러내니. 한 곡에 무생곡, 생사 없는 도리를 읊은 무생곡을 한바탕 읊으니,
대천사계용금파(大千沙界涌金波)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금물결이 출렁이는구나.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아름다운 꽃이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다. 흰 해오라비가 논에 내리니 천 점에 눈송이더라.
때는 바야흐로 첫 여름에 접어들었습니다.
산천(山川)에 모든 나무에 잎은 피어서 나날이 푸르러 가고 있고, 그 푸른 나뭇가지에 노란 꾀꼬리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저 가지에서 이 가지로 노래를 부르며 날아가는데, 그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떠억 올라앉으니까 그게 바로 한 가지에 노란 꽃송이더라.
하얀 해오라비, 백로(白鷺)가 논에 내려앉으니까 천 송이의 눈이 내린 거와 같다.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고 하얀 백로(白鷺) 떼가 논에 내려앉는 거, 이것이 바로 무생곡(無生曲)을 읊어서 대천세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금물결이 일어나는 도리입니다.
오늘은 신유년(辛酉年) 4월 15일,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날입니다. 해마다 4월 15일이 되면 여름 결제를 합니다마는, 과연 그 결제가 연례행사(年例行事)로 끝나 버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4월 15일이 되면 결제(結制)하고 7월 15일이 되면 해제(解制)를 하고, 하루하루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이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문을 향해서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이여.
해는 어제도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오늘도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져 가지만, 그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 그 24시간 동안이 다름 아닌 우리가 죽음에 문을 향해서 하루씩을 다가서 가는 것이다.
물론 참나를 깨달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契合)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진리(眞理)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화엄경(華嚴經)』에 도리(道理)요 부처님 열반(涅槃)의 경지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사형장(死刑場)을 향해서 하루를 다가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어찌 하루를 그럭저럭 한만히 지낼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하루 죽도록 정진(精進)을 하고 해가 넘어가면 다리를 뻗고 통곡(痛哭)을 한 분도 계시고, 그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쫓고 공부를 하려고 애를 쓴 스님도 계시고, 저녁에 잘 때에는 나무를 동글동글하니 깎어서 둥글둥글한 목침(木枕)을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져서 깜짝 놀랜 바람에 눈을 떠 가지고 다시 또 정진을 하고, 밤에 잠을 안 자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밤새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저 산봉우리에서 이 산봉(山峰)으로 걸어다니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 스님도 계셨습니다.
오늘부터 90일간, 석 달 동안 하안거(夏安居)를 하는데, 아직 요새는 추웁도 덥지도 않고 참 좋지만, 불과 한두 달이 지내면 오뉴월 삼복(三伏)이 돌아와서 앉아 있으면 오금쟁이에 땀이 줄줄줄줄 흘르고 땀띠가 솟고, 등어리에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소금물이 줄줄 흐르고, 그렇게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위가 돌아옵니다마는,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來生)이요,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고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면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축생(畜生)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 무간지옥에 떨어졌을 때를 생각해.
무간지옥에 그 펄펄 끓는 가마솥에 하루에 만 번 들어갔다 만 번 나오고, 구리쇠 물을 먹고, 무거운 돌로 눌러서 죽이기도 하고, 톱으로 위에서 밑으로 썰기도 하고, 칼이 삐쭉삐쭉한 산에 굴림을 당하기도하고,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서운 지옥고(地獄苦), 그것이 금생에 몸뚱이 받았을 때 도(道)를 닦지 아니하고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 지옥고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러한 지옥고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단 한 시간도, 단 일 분도, 일 초도 등한(等閑)히 시간을 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방일(不放逸), 방일을 하지 않는다.
방일(放逸)이라 하는 것은 '놓아 지내지 않는다' '해태(懈怠)를 하지 않는다'
정진,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행정진(加行精進)하면 꼭 송곳으로 무릎을 찔러야만 하느냐, 꼭 똥글똥글한 목침을 비어야만 하느냐, 꼭 해가 넘어가면 다리를 뻗고 울어야만 하느냐, 꼭 무거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밤새 왔다갔다해야만 하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정진은, 방일(放逸)하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정진(精進)이더라.
어떤 것이 방일하지 않는 것인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 무엇고?’ 세수를 할 때에도 ‘이 무엇고?’ 앉았을 때에도 ‘이 무엇고?’ 섰을 때에도 ‘이 무엇고?’ 눈으로 파랗고 노란 색상을 볼 때에도 ‘이 무엇고?’ 다맛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것 그것이 바로 방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묘(妙)한 이치가 떠오르고 교리와 부합되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법견(法見) 불견(佛見)에 떨어지면 그 찰나에 벌써 그것은 마섭(魔攝)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바로 방일(放逸)이다 그 말이여. 한 생각 삐끗해 가지고 벌써 몇 겁(劫)의 과보(果報)가 거기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제일 두려워할 것이 '한 생각'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생각. 그 한 생각이 삐끗하면 바로 그 삐끗한 그 자리가 천만 길 떨어지는 무간지옥(無間地獄),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불방일이 있고, 가행정진이 있고, 용맹정진이 있는 것이여.
밤에 잠을 덜 자고 한다고 애를 쓰면서 낮에는 그럭저럭 잡담(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밤잠을 안 자고 애를 쓰면서 낮에는 온통 입선(入禪) 시간이고 할 것 없이 꾸벅꾸벅 맑은 정신은 하나도 없이 졸기만 하고, 목에 묵언패(默言牌)는 찼으면서도 온갖 의사 표시는 손으로 몸짓으로 다하고,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을 하고 '니가 잘했다 내가 잘했다' 시비를 가리고, 이렇게 수행을 해 가지고서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 까지 정진을 한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네, 특히 선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하는 분상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에서 백까지 오직 해야 할 일은 이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채찍질하는 일 밖에는 없는 것이여.
오직 그 한 일 충실하면 그 가운데 온갖 계율(戒律)도 그 가운데 다 지켜질 것이고,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지혜(智慧)와 모든 복(福)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根源的)인 일 하나에 충실하면 지엽적(枝葉的)인 것은 제절로 그 가운데에 다 따라온 것이요, 다 갖추어진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방편(方便)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지엽적(枝葉的)인 것에 집착(執著)을 해가지고 자기 딴은 애를 써서 한다고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뿌리는 썩어간 줄 모르고 저 잔가지나 이파리에 매달려 가지고 그러고 있다 그 말이여.(처음~18분2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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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결제에 여러 보살님네들이 방부를 들이셨는데, 해마다 결제 때는 말씀을 드린 바지만, 편안한 가정을 놔두고 절에 오셔서 새벽 3시에면 일어나서,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자고 싶어도 마음대로 자지 못하고, 눕고 싶어도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고, 그러한 대단히 구속(拘束)된 생활을 자진해서 선택을 하셔 가지고 절에 와서 안거를 하시는데 그만한 결심, 그만한 신심을 가지고 고생을 자초(自招)해서 들어오셨다면 정말 단 일 분도 일 초도 잡담할 시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니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니가 옳다 내가 옳다’, ‘저 사람은 어떻고 이 사람은 어떻고’, ‘반찬이 어떻고 밥이 어떻고’, ‘이 스님네가 어떻고 저 스님네가 어떻고’, ‘집안이 어떻고 뭐 손자가 어떻고 며느리가 어떻고’, 그러한 시비를 할 겨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환갑 잔치에 무슨 놀러가셨다던지, 어디 무슨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 관광을 가셨다던지, 놀러가셨다면은 잡담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저 뭐 춤도 추고 그저 그러시겠지만, 여기 절에 참선을 하시기 위해서 이 결제(結制)에 오셨다면 잡담할 겨를이 있을 수가 없고, 시비를 할 겨를이 없는 것이여.
겨우 입선(入禪) 시간에는 죽비를 치고 앉었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망상(妄想)을 끓이다가, 방선(放禪) 죽비(竹篦)만 치면 그저 지대방에 모여서 그저 이러쿵저러쿵 잡담하고, 심한 분은 큰방에 앉아서까지 그저 잡담을 하고, 둘씩 셋씩 넷씩 모여서 잡담을 하고 무슨 남의 시비를 하고. 여러 신도님이 그러신다는 게 아니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말씀이여.
지난 겨울, 저 지난 여름, 이 참, 해를 거듭할수록 이 선방에 오셔서 공부하신 보살님네들이 점점 모다 규칙을 잘 지키시고 정진을 잘하시고 해서 우리 용화사 선원은 참 잘해 오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결제 때는 으레이 더 그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랐다고 이렇게 이 경책(警策)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 잡담도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저런 말을 한다' 하고 속으로 그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지난철에 또는 저지난철에 스스로 ‘내가 얼마만큼 정진을 열심히 했던가?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히 단속을 하고 정말 알뜰하게 공부를 했던가?’ 반성(反省)을 해 보시고, ‘금년 여름은 정말 법(法)다웁게, 간절하게, 알차게 공부를 하리라’ 이렇게 결심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댁에서는 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가 있고, 누구가 이래라 저래라 말을 들으실 분들이 아니지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으니 정말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분일초를 아껴서 공부를 열심히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여기에 오셔서 즉접 참선을 못하시고 댁에서 공부를 하시는 분들, 설사 절에 와서 하시지는 못하더라도 댁에서 하신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러신 분일수록에 더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해서, 일하시면서 손자를 보면서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누워서도 ‘이 뭣고?’, 어디 출행(出行)을 하실 때 차를 타면서도 ‘이 뭣고?’, 차를 타고 오면서도 ‘이 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걸어다닐 때나 머물러 있을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말할 때나 말을 아니할 때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이 뭣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한 생각 일어나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 다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바로 돌이켜서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숨을 조용하게 깊이 들어마십니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丹田), 아랫배가 약간 볼록해짐을 느끼면서 들어마셔. 다 들어마셨으면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보시라 그 말이여.
물론 여러 철을 공부를 해서 이러한 자세한 말씀을 하지 안 해도 잘하신 분이 계시겠지만, 처음으로 선방에 나오신 분, 또는 처음으로 들으신 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만 잘 들면 그만이지 무슨 호흡(呼吸)은, 그까짓 거 호흡하다 보면 화두가 헷갈리는데 호흡은 할 것이 뭐 있느냐'
물론 화두만 여법(如法)하게 잘 들기만 한다면 호흡은 그까짓 거 상관이 없습니다마는, 이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간절(懇切)하게 의심(疑心)을 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니까, ‘간절하다’고 하는 그 뜻을 잘못 이해해 가지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온전히 이 이마에다가 화두를 모아 가지고 그 이마로 화두를 든다 이 말이여. 너무 힘을 써 가지고 억지로 화두를 막 들고서 밀고 나간다.
그렇게 한즉슨은 기운이 전부 머리로 올라가게 되고, 따라서 몸안에 있는 피도 머리로 모이게 되어서 얼굴이 붉어지고 골이 아파지고 목이 뻣뻣해지고 참선만 할라고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 말이여.
이러한 병이 바로 상기병(上氣病)이라 하는 것인데, 어리석게 공부를 하면 이러한 약(藥)으로 곤칠 수 없는 이러한 고약한 병이 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공부를 해라.
지혜롭게 공부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해서 혈액순환이 잘되게 하고, 생각이 안정이 되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기운은 머리로 올라가지 않고 저 배꼽 밑에 단전으로 기운이 다 내려가게, 그러한 상태에서 화두(話頭)를 들어야 머리도 개운하고 혈액순환이 잘되니까 몸안에 노폐물도 쌓이지 아니하고 밖으로 다 배출이 되고,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가행정진(加行精進)한다 해도 지치지를 아니하고, 부작용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소화도 잘되고, 공부가 지장이 없이 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하도록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잘 모르고 어리석게 공부를 해 가다가 까딱하면은 이 건강이 악화가 되어 가지고 엉뚱한 병이 생기게 되면, 그때에사 ‘어떻게 해야 이 병을 고칠 수가 있는가?’ 이렇게 호소를 해 옵니다마는, 물론 병을 못 고치는 것은 아니로되 상당히 힘이 들고, 이런 상기병 때문에 일생 동안을 정진을 정진답게 해 보지를 못하고 고생을 하고 있는 스님네도 상당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반드시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스승을 잘 만나지 못해 가지고 잘못 공부를 하면 공부는 성취도 되기도 전에 병 먼저 나게 되고, 까딱하면 삿된 경계에 떨어진다던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깨달랐다고 착각(錯覺)을 해서 그 착각 속에 집착을 해가지고 일생을 허송세월하고, 그러한 사람이 구변(口辯)이 좋다던지 학식(學識)이 많다던지 그렇게 되면 삿된 소견(所見)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리켜서 다른 사람까지도 삿된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자기의 죄가 얼마나 되며,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그르치게 되고 나아가서는 불법(佛法)까지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먼저 바른 스승을 찾는 것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남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은 마왕(魔王)이고, 바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 법을 듣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마왕(魔王)에 백성(百姓)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혈맥론』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간절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름 석 달 동안이 하루와 같이, 처음 마음먹은 그 결심이 날이 거듭할수록 더욱 견고해지면서 더욱 간절해지면서 하루하루를 알뜰히 공부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은 동시에 백일기도(百日祈禱) 입재(入齋)일입니다.
이 백일기도에 동참(同參)을 하셔서 집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시고 선방에 방부 들인 선객(禪客)이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사신다면, 복(福)과 지혜(智慧)를 겸해서 닦는 것이 되어서, 복과 혜를 쌍(雙)으로 닦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성인 가운데 성현(聖賢)이신 부처님께서는 이 복(福)과 지혜(智慧), 두 가지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대성현(大聖賢)입니다. 그래서 삼귀의례(三歸依禮)를 할 때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두 가지가 족(足)하신 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그 두 가지가 바로 복과 지혜여. 복과 지혜를 다 같이 갖추신 대성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우리도 공부를 할 때, 지혜만을 닦을 것이 아니라 복을 아울러서, 지혜와 복을 겸해서 쌍(雙)으로 닦으면 우리는 복과 지혜를 구족한 성현(聖賢)이 되는 것입니다.(18분23초~35분20초)
(3/3)----------------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하야 산중채락기년간(山中採藥幾年間)인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심심송라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 세상에 명예와 권리와 재산, 그러한 세간(世間)에 공명(功名)을 원하지를 아니하고 오직 산에, 산중 청산(靑山)만을 바래가지고 산중(山中)에 살기를 바래서,
산중채락기년간(山中採藥幾年間)인가. 산중에서 약(藥)을 캐기 그 몇 해나 되었던가. 산중에 산다니까 약도 캐서 먹어야 하고 솔이파리도 썰어서 먹어야 하고 그러니까, 산중(山中)에서 약(藥)을 캐서 살기를 몇 해 동안이나 되었던가.
심심송라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깊고 깊은 솔바람 불고 안개가 자욱한 속에,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라. 한 곡조 지초 노래, 지초(芝草) 캐는 노래 한 곡조(曲調)에 일만경계(一萬境界)가 한가하더라.
이 ‘세상을 버리고 산중에서 약을 캔다’ 이 말은, 약(藥)이라 하는 것은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약이거든. 장생불사. 어떤 것이 장생불사인가?
참나를 깨달라서 생사 없는 도리 깨달른 것,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 이것이 영생(永生)하는 법(法)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이여.
이것이 바로 영원히 죽지 않는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 참선(參禪)하는 것이 장생불사하기 위해서 약(藥)을 캐 먹는 거와 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뭣고?'
솔바람 불고 안개가 자욱한 그 깊고 깊은 산중(山中). 지리산이나 태백산, 오대산이나 설악산, 이런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야만 이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회지(都會地) 자동차 소리가 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온갖 소음 잡음이 나고, 공해로 인해서 공장에서 나오는 이 시커먼 연기가 자욱한 그러한 곳이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솔바람 불고 그 안개가 자욱한 깊은 산중이나 조끔도 다른 것이 없는 것이여.
아무리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앉었어도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드는 참선(參禪)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서, 산중 속에서 물소리 바람소리가 귀에 듣기 싫고 그 속에 앉어서 아들 생각 손자 생각, 명예 권리 재산 생각한다면 그 산중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느냐, 화두를 들지 아니했느냐에 따라서 지옥(地獄)이 천당(天堂)이 되기도 하고, 천당이 지옥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最上乘)에 있어서 이 세간(世間)을 보는 눈이다 그 말이여.
이 최상승(最上乘)을 닦은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은 육도(六道)를 자기가 육도윤회(六道輪廻)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옥을 천당으로 만들 수도 있고 천당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당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지옥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이 한 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육바라밀(六波羅蜜) · 십중대계(十重大戒) · 삼천위의(三千威儀) · 팔만세행(八萬細行) 일체법(一切法), 일체 좋은 법을 한 생각 돌이켜 닦는 데에서 다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다. 한 곡조 지초(芝草) 캐는 노래에 일만 경계가 한가하다.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 한 번 드는 곳에 무량겁(無量劫) 죄(罪)가 거기에서 다 녹아져.
인간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없고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 재산에 대한 걱정, 남편에 대한 걱정, 자식에 대한 걱정, 딸에 대한 걱정, 외손자에 대한 걱정, 그 많은 걱정 근심 일체장애(一切障礙)가 어디에서부터 일어난 것이냐 하면, 과거(過去)에 우리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다 생긴 것이다 그 말이여.
그 업을 녹이지 아니하고 잘살기를 아무리 바래고 아무리 재앙(災殃)이 없기를 바랜다고 해서 그것이 잘 살아진 것도 아니고 그 재앙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그 재앙을 없애고 내 소원을 성취하려면 내가 지은 업(業)을 소멸(消滅)하는 것이 가장 첩경(捷徑)이다.
그 업을 어떻게 소멸하느냐? '이 무엇고?'
기도(祈禱)를 하는 것도 대단히 좋은 방법이죠.
기도도 그 이치를 분석을 해 보면, 일심(一心)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른다던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른다던지 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부른다던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부른다던지, 일심(一心)으로 부름으로 해서 내 마음이 청정(淸淨)해져서 부처님 마음과 같이 깨끗해질 때 그때 우리의 소원(所願)을 성취(成就)하는데, 어째서 소원을 성취하냐 하면은 내 마음이 깨끗해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내려져 있는 업(業)이 녹아지기 때문에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그 말이여.
무슨 병이 있건, 무슨 근심 걱정이 있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른다든지, 고왕경(高王經)을 독송(讀誦)한다든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합니다.
아주 목숨 바쳐서 죽을 것을 각오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중풍과 같은 그러한 무서운 병도 낫는 것입니다. 꼭 죽을 수 밖에는 없는 그러한 사람도 살아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것을 열심히 한다면 더 말할 것이 없어.
'이 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功德)에 해당이 된다. 오히려 육백만 번 '관세음보살' 부르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것은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그리고 근원(根源)에서 다스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디 시간을 아껴서 정말 무상(無常)을 뼛속 깊이 깨달라서 열심히 공부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35분24초~47분4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창출무생일곡가~ /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문을 향해서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 / 무서운 지옥고(地獄苦)를 생각해 등한히 시간 보내지 말아라 / 정말 훌륭한 정진은 불방일(不放逸), 불방일은 바로 '한 생각' 단속해 의단독로 하도록 하는 것.
(게송)불원공명단원산~ /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 영생(永生)하는 법(法)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법 /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깊은 산중, 천당 /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 / 소원성취는 내가 지은 업(業)을 소멸(消滅)하는 것이 가장 첩경(捷徑), 업을 어떻게 소멸하느냐? '이 무엇고?' / '이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〇참나를 깨달아 확철대오(廓徹大悟) 해서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契合)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眞理)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 열반(涅槃)의 경지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사형장(死刑場)을 향해서 하루하루 다가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루를 그럭저럭 한만(閑漫)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〇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것은, ‘놓아 지내지 않는다’ ‘해태(懈怠)하지 않는다’
오직 '한 생각' 단속해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그것이 바로 방일하지 않는 것[不放逸]이요, 가장 훌륭한 정진(精進)인 것입니다.
〇아무리 묘(妙)한 이치가 떠오르고 교리와 부합되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법견(法見) 불견(佛見)에 떨어지면 그 찰나에 벌써 그것은 마섭(魔攝)이 되는 것이여. 그것이 바로 방일(放逸)이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제일 두려워해야 할 것이 그 한 생각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한 생각이 삐끗하면 바로 그 삐끗한 그 자리가 천만 길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불방일이 있고 가행정진과 용맹정진이 있는 것입니다.
〇이 공부는 먼저 바른 스승을 찾는 것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바른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남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은 마왕(魔王)이고, 바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 법을 듣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마왕(魔王)에 백성(百姓)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간절한 말씀인 것입니다.
〇참나를 깨달라서 생사 없는 도리 깨달른 것,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 이것이 영생(永生)하는 법(法)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이여.
〇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느냐, 화두를 들지 아니했느냐에 따라서 지옥(地獄)이 천당(天堂)이 되기도 하고, 천당이 지옥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最上乘)에 있어서 이 세간(世間)을 보는 눈이다.
이 최상승(最上乘)을 닦은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가 육도윤회(六道輪廻)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옥을 천당으로 만들 수도 있고 천당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당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지옥으로 가고 싶으면 가고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〇달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이 한 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육바라밀(六波羅蜜) · 십중대계(十重大戒) · 삼천위의(三千威儀) · 팔만세행(八萬細行) 일체법(一切法), 일체 좋은 법을 한 생각 돌이켜 닦는 데에서 다 갖출 수가 있는 것이다.
〇기도(祈禱)를 해서 소원성취하는 까닭은, 일심(一心)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부름으로 해서 내 마음이 청정(淸淨)해져서 부처님 마음과 같이 깨끗해질 때, 우리의 마음속에 내려져 있는 업(業)이 녹아지기 때문에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하물며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것을 열심히 한다면 더 말할 것이 없어.
〇'이 뭣고?' 한 번 하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육백만 번 하는 공덕(功德)에 해당이 된다. 오히려 육백만 번 '관세음보살' 부르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것은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그리고 근원(根源)에서 다스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디 시간을 아껴서 정말 무상(無常)을 뼛속 깊이 깨달라서 열심히 공부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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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한번 쳤습니다. 그리고서 이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 보이신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범부(凡夫)는 그 주장자의 겉모양을 보고, 도인(道人)은 그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도(道)를 닦지 아니하고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주장자를 들어서 법상을 칠 때에, '어째서 저 주장자는 왜 들어서 보이며 또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것이 무엇인가? 저 중이 설법(說法)을 할 때마다 주장자를 떠억 들어서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쿵! 하고 치는데 저게 무슨 짓인가?'
다맛 주장자를—들어 보이는 그 주장자를 볼 뿐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만을 들었을 뿐인 것입니다.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이 도리는 조실 스님의 법문에서는 '도인은 그 주장자를 들어 보는... 주장자를 보는 그놈을 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듣는 놈을, 들을 줄 아는 놈을 본다' 하셨습니다.
주장자를 눈을 통해서 보는 놈, 그놈을 과연 어떻게 보며,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마음을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
오직 화두(話頭), 공안(公案), '이 무엇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중생의 사량분별심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를 관조(觀照)할 때에 자기의 면목(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신유년(辛酉年) 정월 초삼일, 신수기도(身數祈禱) 입재일(入齋日)을 당해서 사부대중이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은 이 신수기도 입재에 동참(同參)함으로써 마음속에 크고 작은 간절한 소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동참을 하셨을 것입니다.
과거에 한량없는 겁(劫)을 통해서 우리가 지어온 업(業)으로 인해서, 또는 원력(願力)으로 인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났습니다.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喜怒哀樂) 속에서 무엇인가 소원(所願)이 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소원이 없다고 하면 그 인간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거나 희망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람 있게 살고자 하고 소망이... 의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소원이 부자가 되는 소원이건, 좋은 배필을 만나는 소원이건, 명예와 권리를 구하는 소원이건, 일생 동안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래는 소원이건 또는 그러한 유루(有漏)에, 인간 오욕락(五欲樂)에 관계되는 소원을 벗어난 넘어선 무루지혜(無漏智慧)를 얻고자 하는 인간에 지극히 높은 고상한 소원이건 간에, 인간으로서 반드시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려면 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두 가지 중 어느 하나건 또는 두 가지 다 소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조끔도 잘못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려면 반드시 그것이 갖추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법(佛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무루복(無漏福), 생사해탈(生死解脫)한 대지혜(大智慧)를 얻는 그러한 길이 있는 줄을 모르고 인간에 오욕락(五欲樂)이—재산이나 이성이나 명예 권리나 편안하게 사는 거, 오직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만을 바래고 그것만을 얻기 위해서 일생 동안을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그 원을 다 성취하지도 못한 채 한(恨)을 품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행히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한 무루복(유루복)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르지 아니하고 '참나'를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있는 것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분들입니다. 일단 최상승법에 눈을 뜨고 그것을 믿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무루복은 그 가운데 갖추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어서 전강 조실스님께서는 매년 정월 초삼일부터 아흐레까지 7일 동안을 특별히 신수기도를 봉행(奉行)하도록 준례를 만드셨습니다.
일 년 동안을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고, 관재구설(官災口舌)과 삼재팔난(三災八難)이 다 소멸(消滅)이 되고, 동서사방에 출입왕래(出入往來)하는데 항상 길(吉)한 일만을 만나고, 흉한 일은 멀리해서 우리가 하고자 한 모든 일이 뜻대로 되도록 간절한 소망으로 기도(祈禱)를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기도를 원만히 성취할 것인가?
그 기도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흉한 일을 원하면 흉한 일이 다가오고, 슬픈 일을 원하면 슬픈 일이 다가오고, 기쁘고 길한 일을 원하면 반드시 기쁘고 길한 일이 자기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죄 많은 중생이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바로 비로자나,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일부분(一部分)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법신불(法身佛)이요, 보신불(報身佛)이요, 화신불(化身佛)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이 몸 이대로 청정한 비로자나 법신불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면 여러분 가운데에는, ‘우리는 죄(罪) 많은 업(業)에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어찌 우리 몸이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이겠는가?’
이해가 안 되실는지 모르지만,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초목(山川草木)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청정법신불,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인 것입니다.
푸른 산, 흐르는 물, 우는 새, 날으는 구름, 하늘에 태양과 달과 별, 지상에 길가에 굴르는 조그만한 잡석(雜石)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몸뚱이 아닌 것이 없거늘, 하물며 만물(萬物)에 영장(靈長)인 우리의 몸이 부처님 몸이 아닐 까닭이 없습니다.
다맛 우리의 믿음이 바르고 철저하지를 못하고 참나에 눈을 뜨지 못해서 우리가 스스로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분명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고대로 다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말은 부처님의 설법(說法)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은 반드시 성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일 년에, 신년(新年) 초(初)에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원을 세우고 간절히 소망하는데 있어서 목적을 소원을 달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비근한 한 예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여학교 학생들이 몇 사람이 친구를 삼았습니다. 일곱 명이, 아주 다정한 일곱 명이 회원을 맨들아 가지고 아주 다정하게 놀고, 같이 공부도 하고, 같이 어디 등산도 가고, 특히 생일날에는 서로 그 친구의 생일 집에 모여서 파티를 열고 그리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아주 집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 어머니는 바느질 품삯을 팔아서 그 자기 딸에게 의복이며 소지품이며 학용품이며 모든 것을 어떠한 부잣집 딸 못지않게 아주 잘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그 애가 굉장히 부잣집 딸인 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본인도 친구들에게 자기집이 대단히 큰 부자인 것처럼 그렇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어느 날 그 아이의 생일날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집에서 친구들을 초청을 해가지고 파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날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생일날이 돌아오기 일주일 전부터서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고민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생일날에 그 다른 여섯 명의 친구들이 자기집에 오면 자기집 가난한 것이 폭로가 될 것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서 고민을 하다가 무슨 생각을 먹었느냐 하면 '우리집이 생일날 전날 불이 나서 다 타버렸으면' 이렇게 원을 세웠습니다. ‘불이 나서 없어져 버리면 친구들이 와서 볼 수가 없고, 우리집 가난한 것이 애들에게 폭로가 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집이 불이 나서 홀딱 타 버렸으면’ 이러한 생각을 밤낮으로 간절하게 간절하게 축원을 했습니다.
마치 생일 전날 애들은, '내일이 너의 생일이다. 너희 집에 갈 테니 맛있는 것 장만해서 우리를 기쁘게 먹고 놀게 해 달라'고 모다 참새처럼 모다 뛰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처음~21분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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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날 전날 저녁에 불이 나가지고—그 어머니는 떡을 찌고 모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피우고 하다가 그 불이 번져서 그 집이 불이 났습니다. 타 가지고 오두막집이 홀랑 타 버렸습니다. 그 어머니는 펄펄 뛰고 울었지만 그 딸은 속으로 너무너무 흡족해 했습니다.
이러한 어린 소녀에, 철부지 어린 소녀에 간절한 생각, 터무니없는 생각도 간절하게 바래는 데에서 그 원하는 대로 된 것을 보면, 정말 우리가 바른 원(願)을 세우고 간절히 원할 때에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칠 일 동안 여러분들 가장 중요한 원을 하나씩 세우고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하시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간절히 소원을 할 수가 있으며,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가 있겠는가?
간절(懇切)하다고 하는 내용, 간절히 하는 방법,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일체 다른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이 오직 청정(淸淨)한 마음, 간절한 마음.
마음을 비워야만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한 그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만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이 무엇고?’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쓸데없는 생각, 쓸데 있는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부질없는 생각, 무슨 생각이 되었건 항시 '한 생각'은 일어나 있기 마련인데,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무엇고?'
‘이 무엇고?’로 돌아옴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은 청정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그렇게 공부를 하고 마음을 닦아 놓은 사람이라야 이러한 기도 때에 정말 간절히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고, 설사 이런 신수기도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평상시에 그렇게 마음을 닦아 놓은 사람은 생활 속에 무엇인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즉각 즉각 그 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러한 일을 즉접 경험하고 확실히 그렇다고 하는 것을 여지없이 믿고 알고 계신분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우리의 원(願), 우리의 소원은 그 사람의 얼마만큼 간절하며, 얼마만큼 그 마음이 청정한가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을 단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원이 있어도 간절하지 못하고, 설사 간절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 그 원이 이루어지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 그것은 오직 간절(懇切)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청정(淸淨)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용화선원은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선양(宣揚)하는 정법도량(正法道場)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월 초에 일주일간 신수기도를 봉행하게 법을 만드신 조실스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인생이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복만 있고 혜가 없어도 안 되고, 혜만 있고 복이 없어도 아니된 것입니다.
혜(慧)가 밝아서 도인(道人)이 되어도 복이 없으면 불사(佛事)를 이룩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떠한 조실스님이 대도를 성취해서 큰 도인(道人)이지만, 전생부터서 너무너무 복을 닦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 도인을 믿고 그 도인에게 법(法)을 배우러 제방(諸方)에서 많은 제자들, 선객(禪客)들이 모였지만 식량이 없고 그 선원(禪院)을 운영해 나갈 만한 재정이 없어서 많은 선객들을 수용을 못했던 것입니다.
식량이 부족하고 그 선원을 운영해 나갈 만한 재정이 없어서 왔다가는 다 가고 왔다가는 다 가고, 단 열 사람도 지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福)을 닦지 아니하고 혜(慧)만을 닦으면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세속(世俗)에서 사는 사람 가운데에도 전생에 지혜(智慧)를 닦아서 머리는 천재이지만, 그렇게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지만 복(福)을 전생에 닦아 놓지 않기 때문에 너무너무 가난에 쪼들러서 자기의 그 유능한 두뇌와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러한 사람들을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에 여러분 이웃에서 그러한 사람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福)을 닦아 놓지 아니하고 오직 지식 지혜만 닦은 까닭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혜(智慧)는 닦지 아니하고 복(福)만을 닦아 놓은 사람은 머리는 바보이면서,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된 셈인지 돈은 많아 가지고 재산은 아주 불꽃 일어나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산은 많지마는 머리는 돌대가리여, 바보여.
부모덕에 돈은 많고 좋은 옷은 입고 그렇지만 머리가 나빠서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한 그러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福)만을 닦아서 갖추었지 지혜를 닦지 아니한 결과인 것입니다.
복도 필요하고 지혜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도 닦으면서도 복을 닦아야만 복과 지혜를 다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주법계(宇宙法界)에서 최고에 지혜(智慧)를 성취하시고, 최고에 복(福)을 성취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복과 지혜를 갖추신, 두 가지를 원만(圓滿)히 구족(具足)하신 성현(聖賢)이다. 그래서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다. 양족, '두 양(兩)'자, '족할 족(足)'자. 두 가지를 원만히 족하게 구족하신 성현이신 부처님이라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복과 지혜를 원만히 갖추신 대성현이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제자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 지혜와 부처님의 그 복을 본받아서 우리도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닦아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복혜쌍수(福慧雙修).
그동안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대지혜(大智慧)를 성취하고, 또 대복(大福)을 성취하기 위해서 또 이렇게 신수기도를 봉행하고, 보시를...
그 복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보시(布施)를 닦아야 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에 보시가 맨 꼭대기에 있습니다. 보시는 바로 희사(喜捨)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보시, 정신적인 보시, 법보시(法布施),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간탐심(慳貪心), 원망(怨望)하는 마음,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도 다 버려 버리는 이것도 또한 희사이고,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남에게 희사(喜捨)하는 것도 보시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온갖 것을 다 깨끗이 버려 버리는 것도 하나의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알려주어 가지고 정법(正法)을 믿게 하는 거, 이것도 보시요 희사인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신수기도를 열심히 수행을 해서 금년 일 년 동안 여러분의 모든 재앙이 다 소멸(消滅)이 되고, 여러분 마음 가운데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소원(所願)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반드시 소원이 성취되실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비록 천만산 구름처럼 구름 일어나듯 그렇게 많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해천명월(海天明月)은 본무언(本無言)이니라, 저 한없는 바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은 본래 말이 없는 법이다.
새해 신유년(辛酉年)은 여러분의 소원성취(所願成就)하는 해입니다.
그 소원이 틀림없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분 각기 마음보를 고쳐야 합니다.
'내가 왜 마음이 어때서 나보고 마음보를 고치라고 하느냐?'
그 마음보만 하나 탁! 고쳐 버리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무엇이 나뻐서 그래?' 내 마음이 좋다고 하는 고 마음보가 꼭 고쳐야 할 마음보인 것입니다.
조용히 가슴에다 손을 대고 정말 자기의 마음을 반성(反省)을 하고 참회(懺悔)를 하십시오.
남편과의 관계, 시부모와의 관계, 자식 며느리와의 관계, 형제간과의 관계, 일가친척 이웃과의 관계, 상관과 부하의 관계, 모든 관계에 있어서 '나는 잘하고 저 사람은 못하고, 나는 잘못이 없는데 저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다' 그 생각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 마음보가 좋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을 바다와 같이 넓게 깊게, 허공과 같이 높고 넓게 크게 그리고 맑게 가진다면, 내가 옳고 저 사람이 그르고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벌써 자기 마음이 깨끗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다.
'새해에는 마음보 고치는 해다. 마음보 고침으로 해서 소원을 성취하는 해다' 이 한마디를 명심(銘心)을 하시고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열심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21분6초~39분21초) (끝)
[법문 내용]
(게송)동풍취일과~ / '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 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 우리는 비로자나불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소원성취한다 / 어느 철부지 어린 소녀의 간절한 소원 / '이뭣고?'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깨끗해져서 소원을 성취 / 용화선원에서 신수기도를 봉행하는 뜻 /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닦아 나가야 / 보시는 바로 희사(喜捨) / 소원성취를 하려면 마음보를 고쳐야.
〇'어째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주장자로 법상을 쳤을까?' 이 도리는 조실 스님의 법문에서는 '도인은 그 주장자를 들어 보는... 주장자를 보는 그놈을 보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듣는 놈을, 들을 줄 아는 놈을 본다' 하셨습니다.
주장자를 눈을 통해서 보는 놈, 그놈을 과연 어떻게 보며,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마음을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
오직 화두(話頭), 공안(公案), '이 무엇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중생의 사량분별심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를 관조(觀照)할 때에 자기의 면목(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〇다행히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한 유루복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르지 아니하고 '참나'를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있는 것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분들입니다. 일단 최상승법에 눈을 뜨고 그것을 믿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무루복은 그 가운데 갖추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〇어떻게 하면 기도를 원만히 성취할 것인가?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흉한 일을 원하면 흉한 일이 다가오고, 슬픈 일을 원하면 슬픈 일이 다가오고, 기쁘고 길한 일을 원하면 반드시 기쁘고 길한 일이 자기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죄 많은 중생이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바로 비로자나,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일부분(一部分)인 것입니다.
〇다맛 우리의 믿음이 바르고 철저하지를 못하고 참나에 눈을 뜨지 못해서 우리가 스스로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분명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고대로 다 부처님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요.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말은 부처님의 설법(說法)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은 반드시 성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〇어떻게 하면 간절히 소원을 할 수가 있으며,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가 있는가?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야만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한 그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해야만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항시 '한 생각'은 일어나 있기 마련인데,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무엇고?’로 돌아옴으로 해서 우리의 마음은 청정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〇우리의 소원은 그 사람이 ‘얼마만큼 간절(懇切)하며 얼마만큼 그 마음이 청정(淸淨)한가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은 단축될 수 있는 것입니다.
〇용화선원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선양(宣揚)하는 정법도량(正法道場)인데, 신수기도를 봉행하는 법을 만드신 조실스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〇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선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복만 있고 혜가 없어도 안 되고, 혜만 있고 복이 없어도 아니된 것입니다.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대지혜(大智慧)를 성취하고, 또 대복(大福)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신수기도를 봉행하고, 보시(布施)를 닦아야 한다.
물질적인 보시, 정신적인 보시, 법보시(法布施),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간탐심(慳貪心), 원망(怨望)하는 마음, 괴로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도 다 버려 버리는 이것도 또한 희사이고,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을 남에게 희사(喜捨)하는 것도 보시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온갖 것을 다 깨끗이 버려 버리는 것도 하나의 보시인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알려주어 가지고 정법(正法)을 믿게 하는 거, 이것도 보시요 희사인 것입니다.
유시독립묘고봉(有時獨立妙高峯)타가, 어느 때에는 묘고봉(妙高峯), 저 수미산 꼭대기, 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 이 수미산(須彌山)인데 그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가,
각래단좌염라전(却來端坐閻羅殿)이라. 불현듯 염라전(閻羅殿)에, 염라대왕이 있는 염라전에 와서 떠억 단정히 앉었더라 그말이여.
견진인간지점두(見盡人間祇點頭)허니, 인간(人間)에 모든 것을 다 두루 다 보아 다하고서 다못 고개만을 꺼떡꺼떡 허니 점두(點頭)를 허니,
대비수안다방편(大悲手眼多方便)이로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손이 천이나 되고 눈이 천이나 되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그 대비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方便)도 많더라.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달은, 진리를 깨달은, 진리와 하나가 된 불보살(佛菩薩)은 때로는 중생이 이르지 못하는, 사량분별로 수긍할 수 없는 저 수미산 꼭대기에 가서 홀로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육도, 생사윤회(生死輪廻) 하는 그 육도(六道) 속에서 최악의 죄를 범하고 헤어날 기약이 없는 죄 많은 악한 중생(衆生)들이 고(苦)를 받고 있는 염라국에 와서 떠억 앉어 있다.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있는 중생이 너무나 가엽고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그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 중생이 그 갖인 고를 받으면서 신음을 하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 중생의 괴로움을 자기도 같이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지옥 문전(門前)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이것이 바로 불보살에 행화(行化)인 것입니다. 불보살의 행리(行履)인 것입니다.
어째서 불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만 고요히 앉아계시지 아니하고, 때로는 수미산 꼭대기에서 저 무간지옥(無間地獄)에까지, 오늘은 무간지옥에 계시다가 내일은 수미산 꼭대기에 계시다가, 왜 그러한 것이냐?
착한 일을 해서 그 복(福)을 닦은 공덕으로 한없는 천상락(天上樂)을 받고 있는 중생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중생이나, 그 근본성품(根本性品)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불보살은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악을 멀리하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왕래하시면서 모든 중생을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금방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대선사(大禪師)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마치 전기가 나가서 상태가 좋덜 못해가지고 법문의 내용을 잘 알아듣기가 어려우셨을 줄 생각합니다.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떠한 분은, '그렇게 잘 들리지 않는 법문을 아무리 틀어 보았자 그 청중(聽衆)이 알아듣지 못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차라리 그렇게 잘 들리지 아니한 법문을 틀기보다는 다믄 한마디라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여러 분이 말씀하신 것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회(法會)가 열릴 때에는 꼭 조실스님의 법문을 한 편씩 듣는 것은 그럴만한 뜻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입으로 설할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심(思量心)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설할 수 있는 법(法), 귀로 들을 수 있는 법, 사량분별심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이라면 벌써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조실스님의 법문 내용을 우리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잘 알아듣고 고개를 꺼떡꺼떡하고 이렇게 이해를 한다 하더라도 벌써 조실스님의 참법을 옳게 알아들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분별심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법문은 뭣허러 들을 것이냐? 또 입으로 설할 수도 없다면은 뭣허러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說)하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그 많은 법어(法語)를 남기시고, 또 오늘 이 송담(松潭)은 뭣허러 법상에 올라가서 입을 열고 있느냐?’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법은 입으로 가히 설할 수 없으되 눈썹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 도리를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어떠한 일이 있고 일이 바쁘고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다 물리치고, 백사(百事)를 다 물리치고 이 법을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說)해야 하고,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백사(百事)를 물리치고 이 법을 들어야 한 까닭은 무엇이냐?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의고 찾는 법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진리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여지없이 여러분 앞에 확! 헤쳐 놓았습니다. 중생에 분별망상(分別妄想)을 통해서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놈을 여의고도 찾아서는 아니 된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智慧)의 눈이 있는 사람이면, 이 정법(正法)에 조그마한 인연(因緣)이라도 있는 분이면 이렇게 말씀드린 이 말씀의 근본 의도를 마음속에 와 닿는 것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호소를 하신 분이 있는데, 망상을 여의고 찾으려고 하는 데에서 그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무엇고?'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망상, 일어나는 망상을 없애려고 하거나, 누르려고 하거나, 쫓으려고 하면 그 ‘쫓으려고 하는 또 하나의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때문에 벌써 한 생각 딴생각, 다른 또 하나의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공부의 길에서는 천만리(千萬里) 멀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의 업식(業識), 업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천만 가지 번뇌망상이, 깨달은 분에게는 그 망상이 바로, 업식(業識)이 바로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망상을, 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것이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떡! 화두(話頭)를 들으면 그것이 바로 망상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망상에 즉(卽)하지도 아니하고서 참나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여의려고 그러고, 우리의 생사(生死)를 버리고서 열반(涅槃)을 찾는 등(等)은 이미 공부에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이요 이것은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진리(眞理)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처음~16분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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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품, 물거품을 없애려고 물을 따둑거린다든지, 그 물거품을 미웁다고 몽둥이로 그 물거품을 친다든지 하면 또 다른 물거품이, 훨씬 더 많은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거품이라 하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요, 원래 있는 것은 물 자체인 것입니다.
물거품을 없애려고 하다가 더 많은 물거품을 생기게 한 거와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망상번뇌는 원래 없는 것이건마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신령스럽고 너무 가볍고 너무 맑고 깨끗한 것이어서, 때로는 선(善)으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악(惡)으로도 나타나고, 눈을 통해서는 보고 귀를 통해서는 듣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을 보고 말을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영롱하게, 신령스럽게 그것은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으로 메아리치고 물결이 치는 것입니다.
고요한 호수에 돌 한 개 던지면 그 조그만한 돌 한 개로 인해서 수천만 개의 파도가 일어나듯이, 똥그라미가 퍼져서 저-쪽 호수 가에까지 번져 나가듯이, 우리의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애서 한 생각에 천만 가지의 마음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파도를 없애려고 그걸 물에다가 손을 대거나 물체를 갖다가 대면 거기서 또 다른 파도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파도를 통해서 물에 본질(本質), 물에 본성(本性)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 일어나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번뇌망상 속에서 그 번뇌망상이 원인이 되어서 번져 가는 우리의 생사, 육도(六道)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이 대단히 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 내용을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웠었지만, 그 법문 설하신 요지(要旨)는 바로 그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생사 없는 진리를 내 마음에 구현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간곡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것이 지끔 이 송담(松潭)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이 무엇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매일같이 속상하는 일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신상(一身上) 문제, 가정 문제, 사회 문제, 회사 문제, 보고 듣는 것 생각되는 것이 기쁜 일도 간혹 있지만 거개(擧皆)가 나로 하여금 괴롭게 하는,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러한 수없는 일들이 내 앞에 제출이 됩니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내일 하루를 또 그렇게 지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지혜롭게 보고 지혜롭게 판단해서 지혜롭게 처리해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이고, 현실 사회에서 결국은 패병(敗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될 수 있으면 빨리 그 속상하는 마음으로부터 헤어 나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속상한 일로 해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서 큰일을 그르치게 되고 자기의 앞길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설사 어려운 일을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한 걸음 건너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 법문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면 얼마 안 가서 이 최상승법이 그렇게 요긴하고 위대하고 좋다고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그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 동안 설(說)하신 법문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여. 팔만대장경 그 많은 법문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지만 우리가 그 경책(經冊)을, 한문으로 된 경책을 갖다가 읽어 봐도 잘 알 수가 없고 또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근자(近者)에 번역된 경전이 나오고 있지만 번역된 경전을 읽어 봐도 읽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또 그만인 것입니다.
그 많은 경전 속에 가장 핵심, 핵심적인 것. 그 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를 시킨 대도사들. 그 대종사(大宗師)에 지도를 통해서 가장 쉬웁게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하면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어떠한 근심이 일어나건 노여움이 있거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 다른 생각으로 변(變)하기 전(前)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무엇고?’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해서, '뭐 그러한 것이 최상승법이요, 그걸 뭐 불법(佛法)이라고 할 것이 있느냐?'
쉬웁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무서운 지옥고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을 갖다가, 그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하나는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이 뭣고?’ 한마디로써 팔만사천의 마구니를 다 항복 받을 수가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煩惱)를 극복할 수가 있고,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뭣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많은 좋다고 하는 경전을 읽고 해석을 할 줄 아신 분이 계시겠습니다마는, 불법(佛法)은 많이 알고 해석할 줄 아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알고 있는 것을 비워 버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많은 경전을 설하셨지만 그 경을 옳게 이해한다면 많이 머릿속에 외워서 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 버리는 거여. 비움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용화사 이 법보전(法寶殿)에서는 최상승법, 이 활구참선법을 전강 조실스님 계실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宣揚)을 하고 있습니다.
‘이 뭣고?’
그다음에는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하는, 지금 이뭣고 할 때에 ‘이-’ 하고 있는 이 「‘이-’ 하는 이놈이 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고 꽉 맥힌 그 의심(疑心), 의관(疑觀), ...(녹음 끊김) ...입니다.
잠깐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진다면,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하루하루를 여법(如法)하게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려 나가면,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해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어 나가면, 묘하게도 화두(話頭)를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진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를 해 나가면 여간 걱정될 만한 일을 당해도 조끔도 당황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일로 해서 나의 마음이 동요(動搖)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침착해지고 아량(雅量)이 생기고, 그렇게 그전에는 미웠던 사람도 별로 미운 생각이 없고, 마음이 담담(淡淡)하게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담담해지고 아량이 있고 여유가 생긴다면은 얼마나 세상 살아가기가 좋겠습니까. 내 한 사람이 그렇게 됨으로 해서 나의 집안은 또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그러한 마음가짐이 된 사람이 직장에 가면 그 직장에 있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동료들도 얼마나 대하기가 좋겠느냐.(16분59초~33분3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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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한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한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머지않아서 나 자신 또는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느냐.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한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육도윤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여의고 열반(涅槃)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내 마음이 편해야 가정이 편안하고 가정이 편해야 직장에 가서도 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가 불안하고 내 마음 하나가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안정이 안 되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편안틀 못하고 풍파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쌀이 변질이 되어 있으면 그 쌀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이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어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만히 훌륭하게 하려면 첫째 내 마음부터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한다면 모든 것은 제절로 잘되어 갈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이렇게 사회가 문명이 발달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살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여기에 대처해서 우리가 거침없이 모든 일에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고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근본인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이 세상을 살기 좋고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이 공부밖에는 없다고 감히 단언(斷言)을 하는 것입니다.
목탁을 세 번 치고...(녹음 끊김)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요 희즉소혜비즉곡(喜則笑兮悲則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능어차선참상(若能於此善參詳)하면 육육종래삼십육(六六從來三十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여. 중(僧)은 이 중이고 속인(俗人)은 이 속인이다. 어찌 스님을 갖다가 속(俗)이라 하고 또 속인을 갖다 스님이라 할 것이냐 이 말이여.
기쁘면 웃어야지 기쁜데 웃지 아니하고, 슬프면 울어야지 울지 않고 웃고, 이래서는 평등(平等)한 진리(眞理)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여.
‘아휴, 오늘 내가 용화사에 가서 최상승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실천하니까 나는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오늘부터서 인자 나는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이여. 남편도 소용없고, 가정도 소용없고,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울지도 않고, 누구 기쁜 일이 있어도 따라서 웃지도 않고' 이렇게 되어 간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산을 깎어서 못을 메움으로써 그래가지고 산을 없애 가지고 깊은 구렝이(골짜기)에다가 메워 가지고 평지(平地)를 만듦으로써 평등(平等)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최상승법을 옳게 이해한 사람은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을 줄을 알아야 돼. 아내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각기 자기(自己)에게 주어진 책임(責任)을 충실(忠實)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여.
약능어차(若能於此)에 선참상(善參詳)하면, 만약 능히 여기에서 잘 공부를 지어나갈 줄 알면,
육육(六六)은 종래삼십육(從來三十六)이니라. 육(六)에다 육(六)을 곱하면 그 삼십육(三十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狀況)에 따라서—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 규범(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거든.
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댁에 가실 때, 댁에 가셔서 생활할 때, 또 내일 직장에 나가실 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을 행해 나가시면 우리는 반드시 부처님 제자로서, ‘정말 어쩌다가 금생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던가’ 생각할수록 다행하고 행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33분35초~45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유시독립묘고봉~ / 지옥 문전(門前)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 불보살에 행화(行化), 행리(行履) / 중생의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다 / 이 최상승법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다 /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뭣고?' 이것이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 /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신령함 /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참선법, 최상승법,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로써 번뇌를 돌이켜서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다.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내 마음 · 가정 · 사회 · 세상이 살기 좋은 편안한 곳이 된다 / (게송)승시승혜속시속~ /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〇어째서 불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만 고요히 앉아계시지 아니하고, 오늘은 무간지옥에 계시다가 내일은 수미산 꼭대기에 계시다가, 왜 그러한 것이냐?
착한 일을 해서 그 복(福)을 닦은 공덕으로 한없는 천상락을 받고 있는 중생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중생이나, 그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불보살은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악을 멀리하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왕래하시면서 모든 중생을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〇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히 입으로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이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법을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위법망구적으로 법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〇'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은 망상을 여의고 찾으려고 하는 데에서 그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뭣고?' 이것이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〇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그대로 놓아두고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망상(妄想)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망상에 즉(卽)하지도 아니하고서 참나로 돌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여의려고 그러고, 우리의 생사(生死)를 버리고서 열반(涅槃)을 찾는 등(等)은 이미 공부에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이요 이것은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진리(眞理)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〇쉽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쉽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가 우리로 하여금 무서운 지옥고(地獄苦)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과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하나는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뭣고?’ 한마디로써,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경(經)을 옳게 이해한다면, 머릿속에 많이 외워서 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고 참나를 깨닫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〇잠깐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지는 것이 있다면,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〇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한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한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머지않아서 나 자신 또는 가정 · 직장 ·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와 인내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 ·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한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〇쌀이 변질이 되어 있으면 그 쌀을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어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첫째로 내 마음부터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한다면 모든 것은 저절로 원만히 훌륭하게 잘 되어질 것입니다.
〇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狀況)에 따라서—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 규범(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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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이것은 나귀다, 이것은 말이다, 이것은 소다, 이것은 돼지다, 그러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낱낱이 다른 이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이 말이여.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청컨댄 저 넓고도 넓고 넓은 저 무정(無情)한 저 물을 보라 그말이여.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어느 곳에서는 모나고, 어느 곳에서는 둥근가?
물이라 하는 것은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나게 담겨지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담아지고, 긴 그릇에 담으면 길게 담아지고, 깊은 그릇에 담으면 깊게 담아지고. 깊은 데를 만나면 밑바닥부터서 차츰차츰 차 올라가 가지고 가뜩차면은 넘고, 높은 데에 처하게 되면 나차운 데로 나차운 데를 향해서 계속 떨어져 흘러 내려가고.
추위를 만나면 얼고, 더위를 만나면 녹고, 뜨거운 것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알고 보면 본래 한 물인데 장소와 여건에 따라서 모냥도 변하고 움직임도 변합니다.
그렇지마는 그 본바탕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얼음이 얼었다 하더라도 분명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고체가 되어 가지고 만져 보면은 찹지마는 차운 고체일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녹아서 물이 되어서 액체가 되어 있을 때에도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어도 변하지 않는 바가 있어.
그러면 그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이여. 습성! 젖은 성품.
습성은 액체일 때에도 그 습성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고, 고체인 얼음덩어리로 있을 때에도 젖은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수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을 때도 그 습성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말이여. 남산에 구름이 일어날 때나 북산에서 비가 내릴 때, 그 습성에 있어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한 바가 없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오늘 이 시간에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자리를 같이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돌고 돌았지만 그 도는 가운데에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지옥 중생이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49재를 맞이한 영가(靈駕)도 있고, 3재를 맞이한 영가도 있지만, 그 영가들도 현재 우리 사부대중과 함께 법문(法門)을 듣고 계십니다. 영가라고 해서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양복을 입다가 그 양복을 벗어 놓고 한복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 성이 변한 것도 아니요, 이름이 바뀌어진 것도 아니고 사람이 딴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 우리의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를 잠깐 벗어버리고 새 몸을 받아 나기 위해서 중음신(中陰身)의 위치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얼마 안 가면 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날 것입니다.
헌옷 벗어버리고 아직 새 옷을, 다른 옷을 입기 전에 잠깐 빨가벗은 몸으로 있는 것입니다. 빨가벗은 몸으로 있으면 오히려 모든 가식(假飾)을, 거짓 꾸민 것을 다 벗어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온전히 숨김없이 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법문을 들어도 더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잘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가는 그리고 우리 법보전에, 법보단(法寶壇)에 봉안되어 있는 수천수만의 법보 영가들도 지금 법문을 잘 듣고 계실 것입니다.
법문은 원래 입으로 설(說)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부득이해서 입을 빌려서 설(說)하게 되고 귀를 통해서 듣게 될 뿐입니다마는 '참법'은 입을 통하지 아니하고 설(說)해지는 것이고 귀를 통하지 아니하고 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가는 입도 없고 귀도 없지만, 입과 귀를 통해서 설하고 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가는 더욱 법문을 실(實)다웁게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국에 많은 분들이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 만년위패(萬年位牌)를 모시고—조상이나, 비명(非命)에 간 영가나, 한(恨)을 남기고 허공계를 방황하고 있는 많은 영가들을 용화사에 모시고, 모심으로써 많은 영가들이 돌아갈 곳을 찾고 의지할 곳을 찾아서 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기러기 놀다간 발자취는 모래사장에 남아 있듯이, 사람은 저 황천길로 떠나갔는데 그 사람의 이름만 집에 남아 있습니다.
억겁(億劫)을 두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 빠짐없이 다 또 그 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든 사람도 언젠가는 이 몸을 벗어버리고 또 다음 새로운 몸을 받기 위해서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입니다. 알고 보면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승을 하직했다고 해서 조끔도 슬퍼할 것이 없건마는, 사람은 정(情)이 있는 존재가 되어서 한 번 보고 두 번 보면 정이 들게 되고 하루 이틀 살다 보면 애착(愛着)이 생기고, 정과 애착으로 인해서 기뻐할 것도 없는 곳에 기뻐하고, 슬퍼할 것도 없는 터에 슬픔으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가?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첫째,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달러라. 정말 이 세상에 모든 존재는 삼라만상과 모든 동물과 만물의 영장인 사람까지라도 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렇게 무상한 줄을 철저히 깨닫고 그 무상한 가운데 영원한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라.
물과 얼음과 수증기, 모냥은 장소와 때에 따라서 이리저리 바뀌지만, 바뀌어지지 아니한 변함없는 습성(濕性)이 있듯이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와 성주괴공이 있는 이 무상한 속에서 변함없는 '참나'가 있다고 하는 사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바로 그것을 깨달은 선각자이다.
「우리도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선지식(善知識)의 지도에 의해서 깊이 믿고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우리도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살 수가 있다.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무상함을 깨닫고 참나를 깨닫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었으되 용맹심(勇猛心)과 분발심(奮發心)이 없으면 정진이 나아가지를 않는 것이니 정말 용맹심과 분심을 내라.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해 가지고 생사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왜 나는 오늘날까지 범부(凡夫)에 고해(苦海)를 해탈하지 못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 속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이를 악물고 분발심을 내서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공부를 하는 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이니,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그 방대한 법문이 있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방편(方便)으로 많은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궁극에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바는 방편법이 아니라 최상승법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는 것이여.
오직 한 가지, 견문각지(見聞覺知)—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모든 것을 감각할 때, 그리고 뜻으로 알 때, 바로 그때의 그 인연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인연에 즉(卽)해서 '참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처음~20분6초)
(2/3)----------------
자성구삼신(自性具三身)하니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리견문연(不離見聞緣)허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니라
나무~아미타불~
자성(自性)은 삼신(三身)을 갖추어 있어. 부처님에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있는데, 우리의 자성(自性)에도 법신과 보신과 화신, 이 삼신을 갖추고 있다 그말이여.
'부처님'하면은 삼천년 전 석가모니불을 우리는 연상(聯想)을 하지만,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삼천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부처님 얼굴을 보는 거울에 지내지 못합니다.
최상승법에 있어서의 부처님은 지금 산승(山僧)에 말을 듣고 있는 그 자체입니다. 지나간 부처님을 통해서 현재의 부처님을 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현실을 보다 더 훌륭하게 살기 위함이요, 미래를 보다 더 훌륭하게 건설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부처님을 우리가 존경하고, 과거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참부처님', 내게 있는 참부처님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참부처 · 참나를 깨닫는 데 온통 불법에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참나를 깨닫는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참나를 깨닫는 참선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풀이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산승의 설법을 듣고 있는 그놈, 지금 산승의 얼굴을 여러분은 쳐다보고 계시는데 그 볼 줄 아는 놈, 바로 그 들은 놈, 바로 그 보는 놈, 보고 듣고 하는 그곳을 여의지 아니하고 초연히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것,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바로 들을 때에 듣는 그 찰나를 즉(卽)해서 참나로 돌아가야 하고, 볼 때 보는 그 찰나를 여의지 아니하고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오금위여설(吾今爲汝說)하니 체신영무미(諦信永無迷)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학치구자(莫學馳求者)에 종일설보리(終日說菩提)니라
나무~아미타불~
오금위여설(吾今爲汝說)하노니,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서 설하노니,
체신영무미(諦信永無迷)니라. 간절히 영원히 미(迷)함이 없도록 깊게 깊게 알뜰히 믿어서 철저히 믿어서 영원히 방황하지 말어라. 무엇이 방황이던가?
막학치구자(莫學馳求者)에 종일설보리(終日說菩提)니라.
밖으로 밖으로 교리적으로 따지고 학문적으로 따지고, 사량분별로 더듬어 들어가고 불법이 마치 글자나 말속에 있고 무슨 책 속에 있는 줄 알고 계속 '어디를 가면 무슨 좋은 법문을 들을까? 어디를 가면 귀에 탁! 앵기는 좋은 법문을 들을까?' 밖으로 이치를 구하고 도리를 찾는 그러한 사람들이 종일토록 입으로 '불법, 불법, 깨달음, 도리, 열반' 입으로 이렇게 설하는 그러한 것을 찾고 돌아다니고, 그러한 것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지마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하신 뜻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시는 말인 것입니다. 행여나 중생들이 49년 동안에 설하신 팔만장경 속에 불법(佛法)이 있는가 하고 그 경을 뒤적거리면서 거기에서 찾을까 두려워서 '참으로 내 설한 바 법을, 법문의 뜻을 옳게 이해한다면 내가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그 말을 이해할 것이다'
법(法)이라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여.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지, 하늘에 있는 달은 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다면,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우리 중생 낱낱이 가지고 있는 참나, 나의 마음, 마음자리 그놈을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관조(觀照)하는 거, 이것이 불법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애설산중사(愛說山中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본래 산속에서 사는 사람이라.
애설산중화(愛說山中話)로구나. 산중의 얘기하기를 좋아하더라 그말이여.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사람은 친구들을 만나서 입을 벌렸다 하면 감옥 속에서 일어난 얘기들을 하고, 법률을 공부하고 법조계 있는 사람은 밤낮 만나면 법률 얘기, 무슨 사건 얘기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예술가는 모이면은 밤낮 입 벌렸다 하면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철학하는 사람이 모이면은 철학을 얘기하듯이, 원래 승려는 산중에서 도(道)를 닦는 것으로 일생에 업을 삼기 때문에 입을 벌렸다 하면 밤낮 도 닦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저 중은 법상(法床)에만 올라가면 무슨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하고 밤낮 참선만 하라고 한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도둑질 밖에는 해 먹고살 것이 없어서 그렇게 징역을 살고 나와도 2범 3범 4범 5범 다시는 안 한다고 나와도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무엇을 해 먹고살 것이나 그말이여.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세계 도처에서는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모든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인심은 날로 박해져 가고, 생각해 보면 너무너무 가슴 아프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험난하고 복잡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불자(佛子)는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더욱이 이 최상승법을 만나서 훨훨 타고 있는 이 불속에서도 타 죽지 않는 길을 우리는 찾았고, 생로병사의 이 고해 속에서도 그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만났지마는 만난 것으로써 다가 아니고 지금부터 참으로 목숨 바쳐서 열심히 도를 닦지 아니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배를 탔으면 부지런히 바른 방향을 잡아서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지, 배에 올라탔다고 해서 누가 내 대신 노를 저어주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노를 저어서 한시바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 지내가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죽음을 향해서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지, 무상살귀(無常殺鬼)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지,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런지 하여간 우리는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가고 또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을 향해서 또 한 걸음 다가가고,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모르고 그럭저럭 지냈을지언정 이러한 도리를 알고서는 그럭저럭 지낼 수가 없습니다. 꼭 이 선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와야만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댁에서도 직장에서도 차를 타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생각만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바로 그 자리가 공부할 때인 것입니다.(20분12초~37분5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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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상할 때, 보통 사람은 속상할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속상하는 일만 계속해서 생각하고 속상하는 속이 더 상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일을 이것저것 더 생각을 생각해 내면서 점점 더 속을 상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 참선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속상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상할 때 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상하는 마음은 한시바삐 없어져야지.
속상하는 것은, 확! 부해가 나고 속이 상한 것은 마치 집에 불이 붙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집에 불이 붙으면 빨리 끌수록 좋은 것입니다. 불이 붙은 데다가 휘발유를 갖다 끼얹고, 불 잘 탈 수 있는 나무를 갖다가 더 보태 주고 이렇게 한다면 그 재산은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울화(鬱火), 그래서 썽나는 것을 울화라고 그러거든.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꼭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깊이 속상할 만한 일들을 생각해 내고 더 속상할, 속이 더 깊이 상하도록 이리저리 연구해서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불이 났다 하면 그 불이 어린애가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났건, 자기가 실수를 해서 불이 났건, 도둑놈이 와서 불을 질렀건, 이웃 사람이 와서 불을 질렀건, 남편이 술짐에 불을 질렀건, 누전이 되어서 불이 났건 그 원인은 따질 것이 없습니다.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불이 난 줄 알았다 하면은 즉각 최선을 다해서 불을 꺼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슨 이유로 해서 우리가 부해가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슬픈 생각이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괴로움이 생겼건, 그 이유는 따질 것이 없고 다못 빨리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이렇게 해서 썽내는 불을 꺼야 하고, 슬픔의 불을 꺼야 하고, 괴로움의 불을 꺼야 할 것입니다. 그 불을 끔으로써 귀중한 재산을 지키고 손해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집은 불이 나서 타더라도 또 지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보험에 들어놨으면 헌 집 태우고 좋은 새집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많이 해 놓은 것이 있거나 다른 재산이 있으면 그까짓 쓰러질 것 같이 생긴 보기 싫은 집은 타버린 뒤에 오히려 더 좋게 잘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은 되게 타서 큰 충격을 받아버리면 10년 20년 수명이 단축이 되고 병도 생기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죽기도 합니다. 금생에 오랫동안 부해를 나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고, 오랫동안 괴로움에 잠겨 있으면 반드시 육체적인 병이 생기고 결국은 의원이 고칠 수 없는 무서운 중병의 상태에도 이르르고 결국은 죽게도 됩니다.
어쩌서 새로 지을 수 있는 집 같은 것에 불이 나면 백사(百事)를 제(除)하고 그 불을 끄려고 하면서 한번 타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우리의 육체와 생명에 불이 붙을 때에는 왜 그렇게 급히 끄려고 하지를 아니하느냐 이 말이여.
내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못 꺼줘요. 집에 붙은 불은 이웃 사람도 와서 꺼줄 수가 있고 소방서가 와서 꺼줄 수 있지만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꺼줄 수가 없어. 혹 좋은 말을 해서 위안은 시켜줄 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다 그말이여.
열반(涅槃)이라 한 말은 인도 말인데, 니르바나(nirvāṇa)라고 하는 인도 말인데, 중국에서 음으로 음사(音寫)하기를 열반(涅槃)이라 음사를 했는데, 뜻으로 번역하면 적멸(寂滅)이라고 번역을 해요. 적멸(寂滅), '적적할 적(寂)'자 하고 '멸할 멸(滅)'자 하고.
'적적하게 멸했다' 그 말은 훨훨 타던 마음에 불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그 뜻의 근원은 그렇게 된 거여.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그말이여.
그 방법이 꼭 머리를 깎어야만 참선을 할 수가 있고, 머리 깎은 사람만이 마음의 불을 꺼야 한다. 그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네만 꼭 마음의 불을 꺼야 하고, 세속에서 사시는 분은 불을 안 꺼도 된다 하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속에서 사시는 분일수록에 백배 천배 더 노력을 해야 하고 더 생명 바쳐서 참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에 그럭저럭하다가 안 해 놓으면 내생(來生)에 소가 될지, 개가 될지, 지옥에 갈지 누가 보증을 할 것이냐 이 말이여.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출가하신 이 스님네들도, 우리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정든 고향과 청춘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명예를 구해서입니까? 편안함을 구해서입니까? 무슨 권리나 재산을 구해서입니까?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 스님네는 정말 밤잠을 안 자고 모다 공부하신 스님네만 모다 오셨습니다마는, 지혜롭게 열심히 공부를 하되 지혜롭게 공부를 하셔서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를 해서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 데에 끈치지 마시고, 우리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도를 닦을 수 있게 해주시고, 도를 이루게 해주신 국가와 민족과 스승과 부모와 우리의 모든 의식주를 공급해 준 여러 신도님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깨달은 그 진리 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입니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허고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이요. 대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일렁하니까 그 대나무 그림자가 따라서 일렁일렁 움직이는 것이 마치 층계를 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여.
대나무 그림자가, 대나무가 바람에 움직임에 따라서 층계를 쓸고 있지만 층계에 있던 문지는 하나도 쓸어지지를 않더라. 움직이지를 않더라.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라. 달이 고요한 호수에 비추니까 저 호수 밑바닥까지 달이 가서 물을 뚫고 들어가서 호수 밑바닥까지 달빛이 들어갔는데 뚫고 들어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물에는 아무 구멍도 뚫리지를 않더라 그말이여.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문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37분54초~52분10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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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운기남산북산우~'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7.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 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無爲安樂)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8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 팔자재(八自在)라고도 함. 열반(깨달음)의 4덕(四德, 常樂我淨) 중 아(我)에 8종의 대자재(大自在)의 뜻이 있는 것을 말함.
선남자여, 크다[大]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음[不可思議]을 말함이니, 만일 헤아릴 수 없어서 일체 중생들이 믿을 수 없으면 대반열반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슨 인연으로 대(大)라 하는가? 한량없는 인연으로써 얻을 수 있으므로 대라 하느니라.
善男子 如世間人 以多因緣之所得者 則名爲大 涅槃亦爾 以多因緣之所得故 故名爲大
云何復名爲大涅槃 有大我故 名大涅槃 涅槃無我 大自在故 名爲大我
선남자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大)라 하나니, 열반도 그러하여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는 것이므로 대(大)라 하느니라.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열반에는 내[我]가 없지만 대자재(大自在)하므로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넷째는 자재한 연고로 자재를 얻는 것이다. 어떻게 자재한가? 여래의 일심은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지만 , 무량한 형상을 드러내어 각각에 마음이 있게 한다. 여래는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짓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마련하게 하며, 여래의 몸은 언제나 한 세계에 있지만 다른 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다섯째는 근(根, 감관)이 자재한 까닭이니,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변별하고 감촉을 느끼고 법을 인식한다. 여래의 육근(六根)은 또한 색을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 않으며 냄새를 맡지 않고 맛을 구별하지 않으며 감촉을 느끼지 않고 법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재하는 까닭으로 근으로 하여금 자재케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고 하느니라.
여섯째는 자재한 까닭으로 일체 법을 얻거니와,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나니, 왜 그런가? 얻을 바가 없는 연고니라.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이름하려니와 실제로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얻었다 하겠는가. 만일 여래께서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모든 부처님들이 열반을 얻는다 할 수가 없지만, 얻음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었다 하느니라. 자재함으로써 일체 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었으므로 대아라 이름하느니라.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므로,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할 때에 무량겁을 지내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니, 계행이거나 선정이거나 보시이거나 지혜 따위니라. 그러나 여래는 조금도 내가 설하고 저가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한 게송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글귀를 한 게송이라 하므로 세상을 따라서 게송이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할 곳이 없지만 자재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여덟째는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아 볼 수 없지만 자재로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자재를 대아라 이름하는 것이요, 이와 같은 대아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이런 이치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〇‘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〇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삼신(三身) ; 삼신(三身)은 깨달은 존재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불신관(佛身觀)의 대표적인 견해로,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3가지 몸 또는 3가지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개념.
①법신(法身).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②보신(報身).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거듭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 아미타불과 약사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③응신(應身). 때와 장소와,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나타나 그들을 구제하는 부처. 석가모니불을 포함한 과거불과 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함. 응화신(應化身)·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삼신(三身)의 명칭과 분류, 각각의 해석에 대해서는 경론(經論)에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 몸, 삼신(三身)을 서로 다른 부처님으로 보지 않고 동일한 불신(佛身)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삼신(三身)의 상호관계는 흡사 달의 체(體)와 그 빛, 그리고 그 그림자와 같다고 하며, 이것을 일월삼신(一月三身)이라고 한다.
곧 법신(法身)의 이체(理體)가 유일상주불변(唯一常住不變)인 것을 달의 체(體)에 비유하고, 보신(報身)의 지혜가 법신의 이체(理體)에서 생겨 일체를 비치는 것을 달의 빛에 비유하며, 응신(應身)은 변화하는 작용으로서 기연(機緣)에 따라서 나타나는 불신(佛身)이므로 달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念佛三昧寶王論卷中).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지마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하신 뜻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시는 말인 것입니다 ; 불설일자(不說一字).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미증(未曾), 부증(不曾) : 일찍이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의 교설은 언어문자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반야경』이나 『능가경』 등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 말을 선종에서 강조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밤부터 열반에 드시는 날에 이르기까지 결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은 법(法)은 명상(名相)이 없어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헤아릴 방법도 소멸하여 명상으로써 설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참고 ❷] 『선교석(禪敎釋)』 (서산대사)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智度論>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마지막 발제하까지, 이 두 기간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교외별전의 취지를 가리킨다.<『지도론』>
[참고 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제5권 (실차난타 역 | 김진철 번역 | 한글대장경) '3. 무상품 ② 無常品第三之餘'
대혜여, 만약 어떤 이가 법을 설하되 문자에 떨어진다면 이것은 허망하게 속이는 설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경 가운데서 '나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자도 설하지 않고 한 자도 답하지 않았다'고 설하였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났으므로 뜻을 따르지 않고 분별하여 설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관조(觀照)하는 거, 이것이 불법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 회광반조(廻光返照 방향을 바꾸다·돌리다 회/빛 광/돌이키다 반/비칠 조).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자신의 본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본래의 면목(面目)을 보는 것.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〇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게송) '본시산중인~' ; 『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제18권. 「祖師機緣 六祖下第四世之五(南嶽下後第三世之一)」에 나오는 몽암악(蒙菴岳)의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 다섯 가지 큰 은혜를 항상 명심(銘心)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 명심불망오종대은(銘心不忘五種大恩).
①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 : 각기 그 머무는 곳을 편안하게 해 주는 나라의 은혜.
②생양구로부모지은(生養劬勞父母之恩) : 낳고 길러 수고해 주신 부모의 은혜.
③유통정법사장지은(流通正法師長之恩) : 정법을 전해 주신 스승의 은혜.
④사사공양단월지은(四事供養檀越之恩) : 네 가지 공양물(衣食住藥)을 베풀어 주는 신도의 은혜.
⑤탁마상성붕우지은(琢磨相成朋友之恩) : 서로 탁마해서 공부를 완성시켜 주는 도반의 은혜.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 득력(得力).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게송) '죽영소계진부동~'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17.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법문 내용]
(게송)운기남산북산우~ / 물의 변하지 않는 것, 습성(濕性) / 윤회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다 / 영가가 오히려 법문을 잘 들을 수 있다 /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다.
(게송)자성구삼신~ /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 (게송)본시산중인~ /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생각만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바로 그 자리가 공부할 때.
속상하는 생각,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돌이킨다 / 내 마음에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불법이요, 참선이다 /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 우리가 출가한 목적,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다 / (게송)죽영소계진부동~ /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〇우리는 무량겁을 돌고 도는 가운데에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지옥 중생이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〇「우리도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선지식(善知識)의 지도에 의해서 깊이 믿고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우리도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살 수가 있다.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〇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는 것이여. 오직 한 가지, 견문각지(見聞覺知)—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모든 것을 감각할 때, 그리고 뜻으로 알 때, 바로 그때의 그 인연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인연에 즉(卽)해서 '참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〇내게 있는 참부처 · 참나를 깨닫는 데 온통 불법에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참나를 깨닫는 참선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풀이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〇어쩌서 새로 지을 수 있는 집 같은 것에 불이 나면 백사(百事)를 제(除)하고 그 불을 끄려고 하면서, 한번 타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우리의 육체와 생명에 불이 붙을 때에는 왜 그렇게 급히 끄려고 하지를 아니하느냐?
〇참선법이라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다.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〇우리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정든 고향과 청춘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명예를 구해서입니까? 편안함을 구해서입니까? 무슨 권리나 재산을 구해서입니까?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〇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먼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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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서릿달이 빈산에 가득한데, 서리 친 밤에 밝은 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한데, 외로운 기러기는 하늘에 울며 나르는구나.
비즉향하수(鼻直向下垂)하고, 사람 얼굴에 있는 코는 세로, 바로 박혀 가지고 아래를 향해서 드리워져 있는데, 안횡재상방(眼橫在上方)이다. 두 눈은 옆으로 가로 위에 붙어 있구나.
고인(古人) 언구에 ‘안횡비즉(眼橫鼻直)’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 ‘눈은 가로 박혔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미년 섣달 스무나흗 날, 기미년 마지막 관음재일(觀音齋日)입니다.
1년이 365일인데 엄벙덤벙하다가 한 달, 두 달이 지나가고 그래가지고 열두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 결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1년을 잠깐 살펴보건대 국내외적으로 무척 복잡하고 다단한 그러한 해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그리고 석유 값이 오르는 바람에 온갖 물가가 다 뛰어오르고, 국제적으로도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들이 연거푸 일어나서 그러한 영향이 결국은 또 우리나라에도 미쳐 오고. 우리 불교 종단도 분열이 되어 가지고 아직도 이렇다 할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또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우리 종단적으로 이렇게 파란만장하고 복잡다단한 이러할 때에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법보제자는 어떻게 행동을 하며, 어떻게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가?
다른 때보다도 몇 배 정신을 차려서 신심을 더욱 돈독히 하고 우리의 수행을 더욱 채찍질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주변이 어수선하고 복잡하다고 해서 나 자신까지 거기에 휩쓸려 가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렁저렁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신심 있는 정법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변이 복잡하고 여러 가지 조건이 좋지 못할 때, 그럴 때에 바짝 정신을 차려서 자기의 가야 할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정법을 믿고 불법을 믿는 불자(佛子)로서만이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가정도 이러한 어려운 때를 만나서 여러 가지가 참 물심양면으로 어려운 점이 많으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우리 정법을 믿는 여러분은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서 신심을 돈독히 해서 안으로는 착실히 수행을 다져 나가고, 밖으로는 그 수행력을 발휘해서 어른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이끌면서 인화(人和) 단결해 나간다면 시일이 지난 뒤에 오히려 그런 어려운 고비를 잘 극복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보다 더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경일난장일지(經一難長一智)다. 한 어려움을 겪으면 한 지혜가 길어난다, 성장이 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요 사난방견장부지(事難方見丈夫志)니라
나무~아미타불~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라. 눈 내린 뒤에야사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가 있고.
사난방견장부지(事難方見丈夫志)라. 일이 난관(難關)에 다달라 봐야 바야흐로 장부(丈夫)에 인격을 볼 수가 있다.
눈과 서리가 내리기 전에는 소나무나 잣나무나 보통 다른 모든 초목이 모두가 다 푸르러서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서리와 눈이 내린 뒤에야사 모든 나무와 풀은 단풍이 들고 다 시들어서 떨어져 버리는데 오직 송백(松柏)만이 그 푸르름을 더욱 자랑하는 거와 같이,
보통 일이 없을 때는 김 가나, 박 가나 모두가 다 마찬가지 남자들로 보통 다 똑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정말 난관을 만나서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에 비로소 장부의 인격을 알아볼 수가 있다 이런 말입니다.
세상이 살기 좋고 아무 일 없을 때는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수행을 열심히 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별것이 없습니다. 다 너도나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일신상으로 물심양면에 어려운 고비를 만나 봐야만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만큼 철저한 신심을 가진 사람이었던가? 얼마만큼 골똘하게 참되게 수행을 한 사람이었던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굳이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지혜롭게 그리고 씩씩하게 참을성 있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두려워하고, 자기가 어피차 가야 할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굳이 구태여 피할려고만 한다고 해서 자기 앞에 주어진 숙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더욱 신심을 돈독히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신심으로 그러한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착실히 밟아서 극복해 나간다면 그 어려운 일은 나에게 좋은 채찍이 되어줄 것이며, 불보살(佛菩薩)에 법문이 되어줄 것이며, 우리가 도업(道業)이 성장해 나가는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입니다.
지나간 1년을 오늘 댁에 가시면 고요히 반성을 해 보시고 잘못된 점은 잘못된 대로 그것을 반성을 해 가지고 새해에는 그러한 점을 더욱 보완해서 나아갈 것이며, 잘된 점은 더욱 채찍을 가해서 더욱 정진을 하셔야 할 줄 생각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첫째, 우리의 중생심, 번뇌 망상심—별념(別念)이라고 조실 스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의 범부(凡夫) 중생의 마음은 마치 바다 위에 파도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높은 파도가 일다 작은 파도가 일다가 언제나 고요한 때가 없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잠시도 가만히 있는 시간이 없이 천사량(千思量) 만사상(萬思想)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잠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번지다가 결국은 그 생각이 꺼지고, 꺼지자마자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른 생각으로 변해가지고 또 꺼지고.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많은 겁(劫) 동안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금생도 역시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습니다.
바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양상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맛 그 생각의 내용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주이멸(生住異滅)—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렀다가 딴 생각으로 바뀌어져 가지고 그 생각이 꺼지는, 그 생주이멸의 양상에는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무심 속에, 무의식 속에 그러한 생주이멸의 우리의 정신작용이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천당으로도 가게 하고, 지옥으로도 가게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게 하고, 아귀로도 되게 하는 원인이 될 줄이야! 그것을 철저히 인식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정신작용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한다고 하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이해한다고 하면은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아니 단 1분 동안도 무심코 생각 일어난 데에다 맡겨 버리고 세월을 보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참선한다 또는 수행을 한다, 도를 닦는다’하면 어떠한 장소가 꼭 필요하고, 어떤 시간이 꼭 필요하고, 특별한 그러한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물론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 공부하기에 편리한 여건을 갖춘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한 좋은 조건만을 기다려 가지고 공부를 할려고 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금생에 공부 잘하기는 썩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을 가진 사람은 가정의 일이 있고, 사회에 직장을 가진 사람은 그 직장의 일이 있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자식으로서 며느리로서 각기 한 몸에 여러 가지의 해야 할 일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도저히 우리가 피할라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의 책임을 완수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제쳐놓고 공부를 좀 잘해 볼까?' 이것은 조금 무리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일을 제쳐놓고 할려고 하는 기회를 계속 엿보면서 하루하루를 그렁저렁 지내기보다는,
그러한 일하는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관조(觀照)해 간다면 오히려 그 일도 괴로운 줄 모르고 재미스럽게 그 일을 보람 있게 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의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좋은 환경이 되어 주고, 오히려 그러한 복잡한 일 때문에 더욱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고,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좋은 채찍이 되겄게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행이 가정에 모든 사정이 허락이 되어서 이런 선원(禪院)에 오셔서 만사를 제쳐놓고 공부하실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가지셨다면 그것은 전생에부터서 많은 복을 쌓으신 분이고 또 금생에도 대단히 정법을 믿는 마음이 돈독하고 나아가서는 용기가 있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 와서 공부하신 분이라고 해서 가정에 꼭 일이 없어서만 오신 것이 아니고, 그만큼 머리를 쓰고 용기와 지혜로써 일을 처리함으로써 와서 공부하실 수 있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에 일이 도저히 자기 몸이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분이라 할지라도 가정에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일을 하는 그 속에서—일 하면서도 계속 우리는 무슨 생각이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니까,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분은 벌써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것입니다.
무슨 병이 났건, 바보 천치가 되었건, 넋이 나가서 전혀 생각이 일어나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고 속이 상할 일도 없고 슬플 일도 없고 목석처럼 되어 버린 사람이 있다면,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은 ‘아! 그런 사람은 공부하기가 대단히 편리하겠다’ 혹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공부할 자격을 이미 상실한 사람입니다.
욕을 하면 성낼 줄 알고, 바가지도 긁을 줄 알고, 속도 상할 줄 알고, 고민도 할 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러한 생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처음~21분44초)
(2/3)----------------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일어나는 그 생각 그 찰나를 탁!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않고 딴생각만 자꾸 일어납니다”
‘딴생각 일어난다’고 생각한 그 생각을 가지고 바로 ‘이뭣고?’를 하실 일입니다.
‘이뭣고?’는 아무 뜻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파고들어 봤자 거기에서 어떤 재미있는 뜻이 전개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맛없는 하나의 말이기 때문에 아무리 되씹어 봤자 여기에서는 별맛이 없습니다.
(별맛이) 없지만, 자꾸 돌이켜서 관조하고, 돌이켜서 관조하고 해 나가면—처음에는 ‘이뭣고~?’해도 그 속에 벌써 지나간 생각이 떠오르고, 닥쳐올 일이 떠오르고, 이 생각 저 생각이 뿌리도 없이 퍼일어납니다.
그렇지만 그 퍼일어나는 생각을 귀찮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것을 억누를려고 생각하지도 말고, 다못 거기서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고?’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딴생각이 일어납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을 없앨라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이렇게 다구쳐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야무지게 단속해 나가면, 한 달 두 달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들려고 애를 써도 깜빡하면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화두는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화두는 입으로는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딴생각이 바글바글바글 하고 그러던 것이, 애를 쓰고 또 애를 쓰다가 보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이뭣고~?’한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가슴속이라고 할까, 눈앞이라고 할까, 알 수 없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거든.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똥을 눌 때도 알 수 없는 생각, 걸어갈 때도 알 수 없는 생각, 시장에를 가도 알 수 없는 생각,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다 보면은 알 수 없는 그 생각 때문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버리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그런 상태에 이르러도 조금도 ‘아! 내가 공부가 잘되나 보다, 아! 인자 얼마 안 가면 내가 힘을 얻을려나 보다’ 그런 생각마저도 하지를 말고 계속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중 모르게 지나가고, 그렇게 그전에는 발과 무릎이 그렇게 저리고 했던 것이 저린 것도 없어져 버리고, 몸이 괴로운 것도 없어져 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싱그러울 정도로 정신이 깨끗한 상태에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수행하는 사람은 ‘아! 참 좋다. 이러한 상태로 계속 나갔으면, 영원히 이런 상태에 있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흔아홉 길까지 올라가 가지고 마지막 한 길을 남겨 놓고 천길만길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그 장면인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여일(如一)하게 잘 들리고 조용하고 깨끗하고 맑다 하더라도 조끔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수행하는 사람 앞에는 팔만사천 마구니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와서 탁! 엿을 보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코를 통해서, 입을 통해서, 몸을 통해서, 우리의 뜻을 통해서, 그 여섯 문밖에서 기회만 있으면 들어와 가지고 우리의 심왕(心王), 마음의 왕을 갖다가 낚아채 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 딴생각 먹으면 그때 이미 마왕(魔王)의 올개미에 걸리는 것입니다. ‘아! 좋다. 기쁘다’ 이런 생각내면 벌써 마왕의 올개미에 걸려 들어갈려고 하는 그 찰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잘된다고 기뻐하는 생각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내서도 아니됩니다. 짜증을 내도 올개미, 기뻐하는 생각을 내도 올개미인 것입니다.
화두가 여일하게 들리고 잘 되어갈 때, 그때 조금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아침부터 점심까지, 점심부터 저녁까지, 저녁에도 잠이 들 때까지 계속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녁에 이부자리에 들어가서도 계속 화두를 들면서 언제 잠이든 중 모르게 잠이 드는 것입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눈을 딱! 뜨면 화두를 새로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저절로 따악 들어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뻐하는 마음을 내며, 어서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무엇이냐 그말이여.
홀득자가저(忽得自家底)하니, 문득 자기집, 자가저(自家底) 자기집을 얻으니,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라. 모든 것이 다못 이것일래라.
육근문두(六根門頭)에—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문두(六根門頭)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면목(本面目)을 깨닫게 되면 육근문두에 어리대고 있던 팔만사천 마구니가 마구니가 아니라 전부가 자기의 종이요, 자기의 식구요, 자기의 살림인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의 위대한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미(迷)하면 팔만사천 마구니였던 것이 ‘한 생각’ 돌이켜 깨달으면 팔만사천 묘법(妙法)이 되는 것이고, 팔만사천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 번뇌망상 하지만 한 생각 깨달으면 그 번뇌망상이 전부가 다 보리심(菩提心)이 되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르는.... ‘이뭣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성이 날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은 너무 우리와 가까운 거여. 너무 쉬운 것이며 너무 가까운 것이여.
경(經), 팔만사천경(八萬四千經)이 한량없이 많고 어렵지마는 그것을 다 읽으려고 해봤자 죽을 때까지 십분의 일도, 백분의 일도 다 읽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책으로 된 경만이 부처님의 법문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 산이나 나무나 돌이나 구름이나 새나,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 입으로 맛볼 수 있는 모든 시고 짜고 달고 하는 모든 맛,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모든 물건, 우리의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이 전부가 다 화엄경(華嚴經)인 것입니다. 부처님에 최고의 설법이요 경전인 것입니다.
이 진짜 경(經)을 읽는 것이 바로 이 참선(參禪)입니다.
종이에 씌여져 있는 경은 팔만사천경이라 합니다마는 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읽을 수 있는 경에다가 비교하면 억만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경책(經冊)을 한 장도—이 종이로 된 경을 한 장도 읽지도 아니하고서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부처님의 ‘참 경’을 다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뭣고?’ 한 생각 돌이킬 때에, ‘이뭣고?’ 한 번 할 때, 우주에 가득차 있는 경을 한번 읽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자신 있게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번 할 때에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 한 공덕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한 번 다 읽은 공덕이 있다」
이렇게 고조사(古祖師)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이 말씀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뼛골에 사무치도록 감사하고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서 보증을 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우리의 일심(一心)으로부터 전부가 다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생각을 돌이킨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을 통해서 너무나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물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물에게는 너무나도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은 자기의 자성을 지키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고정된 어떠한 모습을 가질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영하의 추운 기온을 만나면 얼음이 되기도 하고, 그것이 또 기온에 따라서 증기가 되어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면 구름이 되기도 하고, 그 구름이 다시 차운 공기를 만나면 엉켜서 빗방울이 되기도 합니다.
공기에 떠 있는 수증기가 차운 공기를 만나면 우박이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합니다. 눈이 되었다, 물이 되었다, 증기가 되었다, 얼음이 되었다, 여러 가지 모양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변해 갑니다.
그런데 얼음이 되었건, 물이 되었건, 눈이 되었건, 수증기가 되었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라도 변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물에 습성(濕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습성(濕性), 젖은 성질, 습성, 출렁거리는 물도 젖은 성품은 가지고 있고, 꽁꽁 어는 얼음이 되었을 때에도 젖은 성품은 가지고 있고, 휘날리는 눈이 되었다 할지라도 습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수증기일 때도 역시 습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온과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도 마침내 변하지 아니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도 때에 따라서 기뻐할 줄도 알고, 때에 따라서 슬퍼할 줄도 알고, 때에 따라서 성낼 줄도 알고, 때에 따라서 즐거워할 줄도 압니다. 그렇게 별별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우리는 생각을 발휘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낼 때도 진여불성은 그 속에 있는 것이며, 슬퍼할 때에도 진여불성은 그 속에 있는 거여. 괴로워할 때에도 진여불성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얼음이나 물이나 수증기나 어떠한 모양으로 되어 있건 그 속에 습성은 있는 것처럼 중생의 팔만사천 가지 온갖 생각들 속에도 진여불성은 있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서 그런 것들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망상, 중생의 온갖 괴로움과 슬픔과 기쁨, 그러한 생각 생각들을 한 생각도 방치하지 말고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불성을—뱃속에 똥과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어 갖고 있는 채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성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났다, 여자의 몸을 받아 났다’ 그런 것이 전혀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에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또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근기(根機)를 하열(下劣)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또는 정법(正法)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보다도 십 배, 백 배 더 노력을 해야겠다고 하는 이러한 강인한 결심을 다질지언정,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참선을 해봤자 안된다더라.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아무리 해봤자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못하고, 어쨌던지 인연이나 맺고 하는 척이라도 해야 나중에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할 때 구제 받는다더라’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불쌍한 생각을 우리는 가져서는 안되겠습니다.(21분45초~41분2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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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기미년(己未年)은 앞으로 일주일이면 끝납니다. 이름을 붙여서 기미년입니다.
기미년이 되었건, 경신년(庚申年)이 되었건, 해는 동쪽에서 떠 가지고 서쪽으로 집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나 가지고 기미년 365일이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경신년이 되어도 역시 해는 동쪽에서 떠 가지고 또 서쪽으로 지나갑니다. 꼬박꼬박 하루에 24시간씩이 지나가면 또 그 다음날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경신년 1년이 또 그렇게 지나갈 것입니다. 경신년이 지나면 신유년(辛酉年)이 또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금생에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 나 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왔고 금년부터서 또 내년, 내후년(來後年) 해서 우리는 금생에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또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갈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불보살(佛菩薩)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해 가지고 스스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량겁을 두고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하루하루를 지내 가지고 금년까지 왔습니다. 아직도 이 정법을 믿는 신심(信心)이 철저하지 못해 가지고 또 내년에 또 내명년(來明年)으로 간다면 우리는 금생 일생도 또한 이렇다한 진취가 없이 일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내생에 다시 또 사람 몸을 받느냐? 축생이 되느냐? 지옥을 가느냐? 천당을 가느냐? 아무도 보장한 사람이 없습니다.
보장한 사람이 없습니다마는 저는 여러분이 정법을 믿고 이렇게 법회에 참석해서 한 말씀이라도 듣고서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려는 그 신심 그것만으로 내생에 또다시 불회상(佛會上)에서 만날 것을 축원(祝願)하고 또 간절히 축원을 합니다마는,
여러분이 과거에 어떻게 닦아 왔으며, 금생 일년 동안을 정말 어떻게 닦았느냐에 따라서 내생에 분명 우리가 다같이 한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게 될 것인가? 여러분 자신들이 정말 깊이깊이 반성을 해보실 필요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이뭣고?’
그럭저럭 하루를 지나면 그것이 쌓이면 한 달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 1년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밥도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고, 몸도 씻어야 하고 또 일도 해야 하고, 누구하고 얘기도 해야 하고, 어디 외출도 해야 합니다. 그러한 일 하다가 그럭저럭 방치를 하고 하루를 하는 일 없이 지낸다면 나의 생사 문제는 내 대신 아무도 해결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 일이 바뻐서 못한다’ 이런 핑계를 대신 분은 혹 없으십니까? 그러한 핑계가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가서는 듣지를 않습니다.
절에 와서는 “바뻐서 못 왔습니다. 바뻐서 참선을 잘 못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해도 “아! 그러셨느냐”고, 이렇게 내가 인사로 받기는 합니다. 그러나 염라대왕 앞에 가서는 그런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일은 자기가 과거에 지어 놓은 빚—자기가 과거에 지은 원에 의해서 그러한 숙제를 금생에 가뜩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인간으로서의 숙제 문제고, 영원한 자기의 마음, 자기의 영혼에 숙제는 그러한 일에 핑계 대 가지고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사바세계, 이 말세(末世)라고는 하지마는 천상(天上)보다도 더 공부하기에 좋고, 육도(六途)의 어느 세계보다도 가장 공부하기에 적당하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세입니다.
정법을 믿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사바세계가 온통 불구덩이고, 고해(苦海)이고, 그렇게 여겨지겠지만 정법을 믿는 사람은 차라리 천당보다도 더 좋고, 지옥보다 더 좋은 것은 설명할 여지가 없겠습니다.
어째서 천당보다 더 좋으냐?
천당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가 내 마음대로 되고, 하나도 내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이 모든 일이 즐겁고 편안하고 좋기만 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좋으면 참 공부하기는 대단히 좋겠구나. 마음껏 먹고, 마음껏 입고, 마음껏 즐기면서 하나도 공부에 방해될 것이 없으니 누워서 떡 먹듯이 공부가 잘될 것이 아니냐’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거기는 너무 좋기만 하고, 너무 내 뜻에 맞는 일만이 있기 때문에 발심(發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역경계(逆境界)를 만나야만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역경계를 만나야만 정신을 차리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을 내고, 각오를 새롭게 해서 다시 새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천당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의 충격적인 일은 없고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좋기만 하니 발심할 필요도 없고, 도를 닦을 필요도 없고, 거기에는 오직 즐거움과 편안함과 안일(安逸)만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이라도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또한 무방하겠으나 자기가 복(福)을 지은 만큼 다 받아 버리면 다시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통장에 예금을 많이 해 놓은 사람이 당분간 돈을 벌지 않고 그놈만 곶감 빼먹듯이 인출을 해다가 잘 먹고 잘 입고 쓰는 동안에는 좋지만 아무리 많은 액수를 예금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쓰기에 따라서는 금방 바닥이 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어떤 복을 지어서 천당에 간다 하더라도 천당의 복을 누릴 만큼 다 누리면 결국은 바닥이 나서 지옥이나 축생이나 인간에 다시 되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 없는 진리,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우리는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자유(大自由)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전히 일어나는 생각을 그때 그때 단속함으로써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바로 정법이요 불법인 것입니다. ‘이뭣고?’
삿된 말, 마구니의 말은 즐겨 받아 듣고, 성인의 가르침과 이 정법의 말을 하면은 짐짓 들을려고 하지를 않는다.
‘어디를 가면 병이 낳는다. 어디를 가서 기도를 하면은 재수가 대통한다. 어디가서 무슨 부적을 사 가지고 하면은 삼재가 면한다’ 이러한 삿된 소리는 대번에 귀를 기울이고 솔깃하고 무슨 거짓말, 핑계를 대 가지고라도 빠져나가 가지고 거기는 잘들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참선법, 정법을 설하는 법회에는 핑계가 굉장히 많습니다. ‘무슨 날이라 못 오고, 어째서 못 오고, 어째서 못 오고’ 이것은 웃을 일도 아니고.
예수교에서는 일요일마다 가게문을 닫고 전부 다 교회를 가고, 그 중간에도 무슨 설교가 있다 또는 부흥회가 있다 하면은 밤이고 새벽이고 노상 아주 제백사(除百事)하고 온 가족이 참여를 합니다.
거기에 비교하면 불교를 믿는 신자들은 겨우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없는 법회인데 너무 핑계가 많고, 그 핑계가 결국은 자기 수행하는 데에까지 핑계를 대서 그 아까운 시간이 하루하루 무료하게 지나감으로써 또 한 해를 넘기게 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도 이렇다한 투철한 결의와 각오가 없이 맞이했다 또 보내고, 맞이했다 보내고 해서 세월만 흘러갑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지 벌써 6년째 접어들었습니다. 법회 때마다 조실 스님의 간곡한 법문을 듣고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많은 감명을 받고 신심이 돈독해져 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해에는 그러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보다 더 혁명적인 정신, 정신에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각오로 일 년을, 새해를 맞이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앞으로 해제(解制)도 한 20여 일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해제가 있을 수 없지만 우리는 편의상 정월 보름날을 해제날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20여 일 간을 여태까지 결제 동안에 지나온 그러한 정도에 그치지 말고, 보다 더 알뜰하게 한 시간 한 시간,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결제 중에 보살님네 선방에서 크고 작은 일들, 어린이와 같은 철이 안 든 일들, 철철이 같은 내용의 비슷한 일들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과 같은 그러한 사건들이 한 건, 두 건 이렇게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보다 더 공부를 잘할 수 있게는 못할지언정,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 공부에 지장(支障)이 있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이라면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과거에 불보살은 어느 손바닥 만한 땅도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수많은 몸을 중생을 위해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성현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그 뜻을 받들어 행한다고 하는 불자(佛子)로서 어찌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보다 더 채찍을 가하고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만약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 간곡한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내생에 지옥에 떨어져서 ‘그때 그 말을 내가 어째서 깊이 듣고 실천을 안했던가’ 아무리 후회를 하고 한탄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41분23초~58분54초)(끝)
[법문 내용]
(게송)상월만공산~ / 경일난장일지(經一難長一智) / (게송)설후시지송백조~ / 어려운 일 속에서도 신심으로 공부해 나가야 / 화두 의심 외에 잠깐 딴생각 먹으면 그때 마왕(魔王)의 올가미에 걸리는 것 / 忽得自家底 頭頭只此爾 /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은 너무 우리와 가까운 거여. 너무 쉬운 것이다
팔만대장경과 참선 / ‘이뭣고?’ 한번 하는 공덕은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공덕이 있다 / 물의 습성(濕性), 중생의 온갖 생각 속에 진여불성 /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하근기이니까 더 노력을 해야.
하루하루가 쌓여 무량겁 / 나의 생사 문제는 내 대신 아무도 해결해 주지를 않습니다 / 염라대왕 앞에서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핑계를 말고 투철한 각오로 수행해야 / 공부하기에 이 사바세계가 적당, 복진타락(福盡墮落) / 다른 사람 공부에 지장을 준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〇고인(古人)이 말하기를 ‘경일난장일지(經一難長一智)다. 한 어려움을 겪으면 한 지혜가 길어난다, 성장이 된다’
〇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더욱 신심을 돈독히 해서 화두를 들고 신심으로 그러한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착실히 밟아서 극복해 나간다면 그 어려운 일은 나에게 좋은 채찍이 되어줄 것이며, 불보살의 법문이 되어줄 것이며, 우리가 도업(道業)이 성장해 나가는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것입니다.
〇「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정신작용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아니 단 1분 동안도 무심코 생각 일어난 데에다 맡겨 버리고 세월을 보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〇욕을 하면 성낼 줄 알고, 바가지도 긁을 줄 알고, 속도 상할 줄 알고, 고민도 할 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러한 생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면 누구라도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〇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일어나는 그 생각 그 찰나를 탁!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않고 딴생각만 자꾸 일어납니다” ‘딴생각 일어난다’고 생각한 그 생각을 가지고 바로 ‘이뭣고?’를 하실 일입니다.
〇‘한 생각’ 미(迷)하면 팔만사천 마구니였던 것이 ‘한 생각’ 돌이켜 깨달으면 팔만사천 묘법(妙法)이 되는 것이고, 팔만사천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 번뇌망상 하지만 한 생각 깨달으면 번뇌망상이 전부가 다 보리심(菩提心)이 되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〇책으로 된 경만이 부처님의 법문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 산이나 나무나 돌이나 구름이나 새나,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 입으로 맛볼 수 있는 모든 시고 짜고 달고 하는 모든 맛,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모든 물건, 우리의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이 전부가 다 화엄경(華嚴經)인 것입니다. 부처님에 최고의 설법이요 경전인 것입니다. 이 진짜 경(經)을 읽는 것이 바로 이 참선(參禪)입니다.
〇「‘이뭣고?’ 한번 할 때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 한 공덕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한번 다 읽은 공덕이 있다」 이렇게 고조사(古祖師) 스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이 말씀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뼛골에 사무치도록 감사하고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서 보증을 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우리의 일심(一心)으로부터 전부가 다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생각을 돌이킨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〇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망상, 중생의 온갖 괴로움과 슬픔과 기쁨, 그러한 생각 생각들을 한 생각도 방치하지 말고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우리는 한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불성을—뱃속에 똥과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어 갖고 있는 채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성인 것입니다.
〇절에 와서는 “바뻐서 못 왔습니다. 바뻐서 참선을 잘 못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해도 “아! 그러셨느냐”고, 이렇게 내가 인사로 받기는 합니다. 그러나 염라대왕 앞에 가서는 그런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〇오직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 없는 진리,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우리는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자유(大自由)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전히 일어나는 생각을 그때 그때 단속함으로써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바로 정법이요 불법인 것입니다.
〇과거에 불보살은 어느 손바닥 만한 땅도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수많은 몸을 중생을 위해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성현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그 뜻을 받들어 행한다고 하는 불자로서 어찌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해제를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금년은 4월에 윤달이 들어서 그래서 6월 15일에 해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여름 결제를 한 비구 · 비구니 수행 납자(衲子)들이 망월사 또 도봉산에 원효사, 의정부 회룡사, 저 전라도 맨 끄터리 강진 만덕산 백련사, 또 부산에서는 대성암 이런 모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하다가 해제를 맞이해서 이렇게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도 각기 자기 인연 따라서 여기저기에서 정진을 하고서 오늘 해제일에 몇십 리, 몇백 리를 걸어서 부처님 회상(會上)에 모여 가지고 자자(自恣)라 해서 빙 둘러서 앉아 가지고 자자의 의식을 거행을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물을 자(恣)자, '자자(自恣)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묻느냐?’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던가?’하고 각자 자기의 허물을 대중에게 물어 가지고, 자진해서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직접 지적해 주실 것을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이 법요식(法要式)은 맨 먼저 부처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지난 석 달 안거(安居) 동안에 나에게 수행에 방해가 될 만한 법도에 어긋난 일이 있으면 대중은 자비심으로 그것을 지적을 해 주시오" 이렇게 대중을 향해서 부처님께서 몸소 제일 먼저 자자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대중이 아무 말이 없으면 그 허물이 없었던 걸로 인정을 하고 또 그 다음 목련존자, 또 사리불존자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차례대로 그러한 법요식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는 무슨 허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법(法)을 존중하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맨 먼저 그렇게 대중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물었을 때에 맨 위에 첫자리에 앉았던 목련존자나 또는 가섭존자나 사리불 그러한 수제자가 부처님 곁으로 경건하게 가까이 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그 자자(自恣)를 할 때에는 왼쪽 무릎은 땅에 대고 오른쪽 무릎은 세우고서 합장을 하고 대중에게 묻는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에 그 옆에 있던 맨 윗자리 제자가 부처님께 다가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시고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부처님께 무슨 허물이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해서 공경스럽게 부처님을 일으켜드림으로써 다음 사람으로 그 법요식은 진행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그때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설법을 하시고 제자들을 이끌으시고 하는 그 생생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승불교(小乘佛敎)라 해서 수천 년간을 푸대접을 받아왔었지만 근자에 이 소승불교 『아함경(阿含經)』과 같은 이러한 경전이 새롭게 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자자를 행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해서 '석 달 동안 어떻게 수행을 했는가? 수행을 하는 동안 행여나 자기에게 어떤 잘못이 없었던가? 다른 대중에게 어떠한 피해는 끼친 바가 없었던가? 자기로 인해서 불법(佛法)에 누명(陋名)은 끼치지 않했던가?' 이렇게 해서 반성을 하고, 자기 혼자 반성을 할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그것을 지적해 달라고 스스로 간청하는 그러한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해인사나 그 밖에 총림(叢林)에서는 이러한 법요식이 거행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대단히 좋은 법도(法度)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해제 법요식을 맞이해서 여기에 모이신 비구 스님 또는 비구니 스님 또 여러 청신사 · 청신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낱낱이 부처님 당시에 행해졌던 그 자자(自恣) 법요식을 경건한 마음으로 상기하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어떠한 수행상에 잘못은 없었던가? 부처님 법도에 어긋나는 그러한 일은 없었던가? 나로 인해서 다른 대중에게 피해를 입힌 바는 없었던가?'
고요히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을 해서 행여나 잘못이 있으면 그러한 잘못은 이 자리에서 참회를 하시고, 앞으로 수행해 나가는 데에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청정하게 원만하게 수행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가 한 철, 한 철을 거듭해 나갈 때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바로잡아 나가고 자신의 수행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 나간다면, 결정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말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를 하면 걸망을 짊어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오대산을 가느냐, 설악산을 가느냐 또는 남해를 가느냐?' 이렇게 걸망 귀신이, 벌써 반살림 지나면 걸망 귀신이 들썩들썩한다고 옛날부터 그런 말이 전해 내려오고.
겨울철에는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勇猛精進)이 끝나면 벌써 그때부터서는 걸망 귀신이 동요가 되아 가지고 정진할 마음은 벌써 들떠버린다고 그런 말이 있어 왔습니다마는.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반살림이 지내면서부터 더 열심히 정진들을 하시고 해제에 임박해서는 더 모다 가행정진(加行精進)들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회룡사나 망월사, 원효사 그 밖에 강진 백련사 그런 데서도 여러 대중들이 많이 오셨습니다마는 거기서도 각각 못지않게 정진들을 잘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다른 사람을, 물론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일체 중생을 참으로 위하려면은 우선 자기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사해탈,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이것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고행 정진을 하게 된 만큼, 오늘 해제한 뒤에 참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동안에 석 달 동안은 삼복더위 중이라 대단히 정진하기가 어려웠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한 더위 속에서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하셨거든 하물며 앞으로 넉 달 반이라고 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겨울 결제를 할 때까지는 넉 달—다른 해에는 석 달밖에 없었는데 금년은 윤달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넉 달 반이라고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기간은 춥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 그러한 좋은 계절입니다. 어쨌든지 그 긴 좋은 기간을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동안에 여기서 저기서 모다 정진하고 오신 스님네들로부터서 여러 가지 그 정진에 관한 문의를 해 왔는데, 정진이란 게 '화두(話頭)를 어떻게 단속(團束)해 나가느냐?' 한마디로 말해서 화두 하나만을 잘 잡드리할 줄 안다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다 따라오는 것인데.
사실 정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 그러면 서서 종일 일을 하고, 종일 말을 하고, 종일 서성거려도 상관이 없느냐 하면, 앉은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또한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이것입니다.
참으로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참뜻을 안다면, 종일 앉아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요, 종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정진은 여일(如一)하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한 이 뜻을 잘 못 이해한 사람은 ‘좌(坐)에 있지 않다’ 그 말에만 잘못 집착을 하면, 공연히 서서—정진은 진짜 속으로는 되지도 아니하면서 공연히 미친 사람처럼 나부대고 설쳐 대는 데에 가까웁게 될 것이고.
또 ‘좌(坐)를 여의지 않는다’한 그 말에만 집착을 한다면, 너무 앉은뱅이처럼 앉아서만 하는 것만이 공부라고 해서 좌에 국집(局執)하는 그러한 잘못된 정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좌(坐)에 국집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공연히 설쳐 대서도 아니 될 것이고, 또 ‘좌를 여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너무 좌(坐)에만 국집하는 것도, 그것도 올바른 정진이 아닐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좌에 국집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좌를 여의지도 아니한다’고 하는 이 두 가지 뜻을 참으로 올바르게 인식을 한다면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가 다 좌(坐) 아님이 없을 것이고.
이 도리를, 이 두 가지 뜻을 잘 이해를 못한다면 비록 좌(坐)를 여의지 아니한다 해도 참다웁게 좌선(坐禪)을 못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넉 달 반에, 그 긴 좋은 기간 동안에 좌(坐)에 국집하지도 말고 또한 좌(坐)를 여의지도 아니하면서 정진을 알뜰히 해 주실 것을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처음~20분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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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혹 어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러 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좋은 도반(道伴)을 찾아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성지(聖地) 도량에 순례차 떠날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건강상 휴양차, 건강을 위해서 어느 의원을 찾아가거나 또는 약을 먹기 위해서 어느 장소를 찾아가거나 또는 모래찜을 하기 위해서 강변이나 해변을 찾아가시는 도반도 계실 줄 생각을 합니다.
어디를 가시건, 누구를 만나러 가시건, 어데 가서 무엇을 하건,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은 가야 할 데도 있고, 만나야 할 곳도 있을 것이고, 만나 해야 할 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때 그 장소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여의지 아니한다면 어데 간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누구를 만난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어데를 가서 강에 몸을 담그거나 모래 속에 몸을 묻거나,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거나 또는 어느 계곡 어느 봉우리를 발로 등산을 하고 거닌다 하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한 마음, 한 생각에 있을 것입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한데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러니,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분명하게 육도(六道)가 있더니—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귀도 있고, 희로애락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고.
분명히 그 꿈속에서는 그러한 육도가 있더니, 각후(覺後)에는 공공무대천(空空無大千)이로구나. 깬 뒤에는 비고 비어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없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꿈속에 돈 뭉탱이를 주섰다. 하! 이런 보배 뭉탱이를 주섰다.
'이러한 좋은 보배를 평생에 갖고 싶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내가 얻었던가!' 그렇게 기쁘고 흐뭇하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꿈을 딱! 깨고 보니까 그렇게 좋아하고 만지작거렸던 그 보물이 간 곳이 없더라.
꿈속에 그 독사란 놈이 물려고 쫓아와서 그 진땀을 흘리고 두려운 공포에 떨었었는데 탁! 눈을 뜨고 보니까 그 혀를 널름거리고 달라들었던 독사가 간 곳이 없더라.
천당과 지옥도 중생의 환몽(幻夢)—환상(幻想)의, 환각(幻覺)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천당이 있었고 지옥이 있었고 축생이 있었지만, 중생의 그 환몽을 깨버린다면 천당도 간 곳이 없고 지옥도 간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출세(出世)하셔 가지고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6년의 그 피나는 고행을 하셔서, 마침내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확철대오를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을 설하셨는데, 깨달으신 것이 무엇을 깨달렀냐?
환몽(幻夢)을 깨신 것이고, 설하신 것이 무엇을 설하셨냐 하면 그 환몽을 깨는 방법을 설하신 것이여.
처음에는 바로 그 환몽(幻夢)을 깨는 법을 설하셨지만, 중생의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해서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알아듣기 쉬운, 행하기 쉬운 방편(方便)을 설하시다가 마지막에 가서 바로 이 깨는 법을 여지없이 설하셨다 그말이여.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여.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한데 뭉쳐서 삶아서, 거기에 아주 그걸 농축을 해 가지고 뽑아낸 거여.
바로 이 활구참선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어요. 물론 깨달은 분이 보면은 글자마다, 한 말씀마다 바로 활구참선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은 깨달은 눈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활구참선법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는 것이고.
용궁(龍宮)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이 한 자(字)도 빠짐이 없이, 한마디도 빠짐이 없이 전부 다 용궁에는 그것이 다 용왕에 의해서 그것이 다 보관이 되어 있지만, 그 용궁에 있는 경전 속에도 이 활구참선법은 없다 이것입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것은 교외별전이기 때문에 경전에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그 교(敎), 경(經) 중 가운데에는 없는 이 활구참선법이 달마대사(達摩大師)에 의해서 천오백 년 전에 중국에 전해졌고, 이조 혜가(二祖慧可), 삼조 승찬(三祖僧璨), 사조 도신(四祖道信), 오조 홍인(五祖弘忍), 육조 혜능(六祖慧能) 선사를 거쳐서 오늘날에까지 그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이 활구참선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활구참선법이라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여.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는니라"
문헌에 오른 공안(公案)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공안이여. 천칠백 화두인데, 어느 공안이나 좋고 나쁘고 한 것이 없어.
그러나 자기가 믿는,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따지지 말고, 그 한 공안상에 대의단(大疑團)을 일으켜서 그 의단 하나만을 간절히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결국은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어진 단계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쉬웁고 너무 가까와서 그래서 하기가 어렵고, 잘되어도 잘된 줄을 모르고 이미 화두가 들어져 갖고 있어... (녹음끊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로 가르켜 줄 수 있는 스승을 자주 만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애써서 공부를 해 가지고 중대한 고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비를 잘 단속해 나갈 줄을 모르고, 공연히 거기서 스스로 분별심을 내 가지고 공연히 주저하고 망설이고 갈팡질팡하고 스스로 혐의심(嫌疑心)을 내 가지고 아까운 고비를 헛되이 지내버리는 예가 종종 있습니다.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의 법문을 보면,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아니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부림이 처지고, 나귀를 끌고 우물로 들어가는 거와 같고, 앞도 맥히고 뒤도 맥히고 좌우도 끊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고비, 이러한 경계에 도달한 것이 이것이 공부가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앞으로 크게 깨닫게 될 그 이전의 경계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경계에 도달했을 때에 번뇌심을 내지를 말고 짜증을 내지 말고, 두려워서 ‘이것이 내가 이거 잘못 될라고 그런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물러서지를 말고 그러한 고비에서 지혜스럽게 잘 단속을 해서 그 고비를 넘겨라.
‘절대로 물러서거나 공부를 놓아버리지 말고, 잘 그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누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그 고비를 잘 넘기는 것이냐?’하면,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쩌 눌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고, 이 오목가슴에 무슨 뭉텅이가 생겨 가지고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소화도 잘 안되고, 화두를 들어도 머리는 먹먹해 가지고 영 애를 먹을 때에,
그럴 때에는 앉아서 억지로 바울라고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적당한 장소에 일직선으로 딱 정해 놓고서, 한 4~50미터를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단전호흡을 하면서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이 말씀이여.
그러면은 그 답답하고 복잡하고 하는 것이 스르르르~ 하니 그것이 없어지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말이여.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을 그렇게 포행을 하고서 시원해지거든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허리를 쭈욱 펴고 극히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이 말씀이여. 아주 개운하고 시원하게 화두가 들릴 것이다 그말이여.
또 얼마 동안 잘되어 가다가 다시 또 답답해지면 또 그 앉아서 단전호흡을 몇 번을 하면 또 시원해지면 고대로 시간을 끌고 나가고, 그렇게 해도 또 공부가 안 되면은 또 조용하게 나가서 포행을 하고.
하기는, 여러 대중이 꽈악 짜고 정진하고 있는데 그렇게 들랑날랑하면 옆에 분들이 미안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지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억지로 앉아서 그 죽비(竹篦) 칠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참 대단히 거북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옆에 분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허리가 아프던지, 그렇게 정진이 답답해서 가슴이 미어질라고 하면 조용하게 나가서 지혜롭게 정진을 해 가지고 이 고비를 넘긴다면, 그러고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결 정진이 수월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공부가 한 단계 힘을 덜게 되는데, ‘그 힘을 덜게 되는 것[省力]이 바로 정진에 힘을 얻는 것[得力]이 된다’ 이 말씀입니다.
앞으로 산철 동안에는 그러한 규칙에 그렇게 크게 얽매이지 않는 계절인 만큼, 지금 산승(山僧)이 일러드린 말씀을 십분 참작해서 그 여름 더운 동안에 못다 한 공부를 이 산철 동안에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해서 그 봉을 빼도록 노력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20분16초~38분7초)
‘방일한다’고 하는 것은 ‘놓아 지낸다’ 그말이여. ‘그럭저럭 놓아 지낸다’ 그말인데, 그럭저럭 놓아 지내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참정진'이다 이 말씀이여.
‘정진을 한다’하면은 꼭 아주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 그 정진상(精進相)을 지어서 막! 이 몸을 갖다가 얽어매고 알날신심(遏捺身心)한 것을 갖다가, 몸과 마음을 억지로 구속하고 얽어매 가지고 몸을 못살게 구는 것을 갖다가 가행정진이다 또는 용맹정진이라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진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참다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은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글자 석 자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불방일만 한다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바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화두가 들린다면 앉아서도 정진이요 서서도 정진이요, 24시간 간단없이.
장차(將次)는 참으로 정진이 익숙해지면 꿈속에서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릴 것이고, 꿈도 없고 그 깊은 잠에 들었을 때에도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떠억 들린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용맹정진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이 말씀이여.
그렇게 될라면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우리 수행인은 거기에다 목표를 두고 계속해서 정진을 다져 나가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정진을 다져 간다면 무슨 파(破)해야 할 계율이 있으며, 다시 또 무슨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무슨 따져야 할 시비가 있으며,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죽이면 죽, 밥이면 밥, 떡이면 떡, 국수면 국수 그때그때 공양 시간이 되면 공양하고, 잘 시간이 되면 자고, 울력 시간이 되면 울력을 하고, 소지(掃地) 시간이 되면 소지를 하고, 또 빨래를 할 시간에는 빨래를 하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만을 알뜰하고 간절하게 단속해 나간다면, 비구 250계(戒), 비구니 348계, 또는 보살의 십중대계(十重大戒)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의식적으로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근본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면, 계(戒)의 지키는 상(相)이 없이 저절로 모든 계가 지켜져 버리면 이것을 바로 최상승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六祖) 스님께서는 『법보단경(法寶壇經)』에 자심(自心), 그 마음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마음 어지러운 것 · 산란한 것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정(定)이요, 마음에 그름 · 허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 자성(自性)의 혜(慧)라, 이렇게 설파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백일기도 회향일인데,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들은 바로 용화사 법보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하는 보살님과 그 근본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백일기도에 들었기 때문에, 그 백일기도에 들은 그 정성에 의해서 이 용화선원이 잘 운영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 스님네들이 정진을 잘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으로 이 선원이 잘 운영되어 가는데 여러분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에 살았겠느냐 그말이여.
법회 때 나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법문을 듣고 가셔서 댁에서 이 활구참선법, 참선을 댁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참선을 하셨으니 어찌 그것이 이 용화선원에 방부를 들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말이여.
바로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닦으신 분들이다 그말이여. 복을 지어서 선원을 잘 운영해 나갔으니 한량없는 무루복(無漏福)을 닦은 것이고, 또 여러분도 가정에서 참선을 열심히 했으니 최상승법을 닦아서 무루혜(無漏慧)를 닦은 것이 된다 그말이여.
‘이 세상에서 어느 분이 복(福)과 혜(慧)를 가장 원만히 구족하신 분이냐?’하면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과 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이다.
그래서 삼귀의(三歸依)를 할 때에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두 가지가 족[兩足]한 최고의 높으신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하다'하는 것은 바로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구족하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에 의해서 닦아 가는 불제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한다면 우리의 정진은 결단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백일기도 회향이 바로 오늘입니다.
‘백일기도가 끝났으니까 인자 나는 뭐 닦아야 할 복도 없고, 닦아야 할 혜도 없다’ 그리 생각하지를 말고 산철 동안 열심히 정진을 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고, 상(相)에 떨어지지 않는 정진을 해 나가시면, 또 다시 음력 10월 15일이 들면 그때 또 백일기도에 동참을 하시고, 또 가정 형편이 허락이 되면 또 여기에 정식으로 방부를 들여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셔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그 공덕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크고 작은 소원이 반드시 성취가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진로형탈(塵勞逈脫)—티끌 수고로운 거, 생사진로(生死塵勞) 생사해탈하는 것이 이 일이 조그만한 보통 일이 아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밀하게 승두(繩頭)를 잡아서—화두를 놓치지 말고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바탕 이 추위가 뼛골 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냐.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을 것이냐.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핀 매화라야 코를 치는 그러한 향내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겨울 날씨가 이상(異常) 기온이 되어가지고 뜨뜻해서 강추위를 아니하면 그런 끝에 핀 매화는 향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매화꽃이 그러듯이 우리가 정말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뼛골에 사무치는 그러한 간절하고도 알뜰한 정진을 하지 않고서 어찌 고불조(古佛祖)와 같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을까 보냐 이 말씀이여.
이 게송은 황벽 스님께서 우리 후래(後來) 불자를 위해서 일러주신 게송입니다. 수행 납자(衲子)가 하루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좋은 좌우명(座右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38분8초~51분49초)(끝)
[법문 내용]
(게송)작야강남우~ / 자자(自恣) 법요식 / 자기의 생사해탈,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정진하는 것 / 정진이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하는 것 / 참선은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게송)몽리명명유육취~ /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를 하셔 가지고 환몽(幻夢)을 깨신 것이고, 49년 동안 설하신 것은 그 환몽을 깨는 방법을 설하신 것이다 /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 / 화두를 들어도 아주 안될 때, 지혜스럽게 잘 단속을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 한결 정진이 수월하고 공부가 한 단계 힘을 덜게 되는데, ‘그 힘을 덜게 되는 것[省力]이 바로 정진에 힘을 얻는 것[得力]이다.
불방일(不放逸)하는 것이 참다운 용맹정진 / 한 생각 돌이켜 화두를 들어나가면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는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 /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과 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 우리도 불제자(佛弟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해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황벽 스님께서 우리 후래(後來) 불자를 위해서 일러주신 게송. 수행인이 하루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좋은 좌우명(座右銘).
〇스스로 자(自)자, 물을 자(恣)자, '자자(自恣)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묻느냐? 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던가?’하고 각자 자기의 허물을 대중에게 물어 가지고, 자진해서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직접 지적해 주실 것을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〇'참선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참뜻을 안다면, 종일 앉아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요, 종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정진은 여일(如一)하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〇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여.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한데 뭉쳐서 삶아서, 거기에 아주 그걸 농축을 해 가지고 뽑아낸 거여.
바로 이 활구참선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어요. 물론 깨달은 분이 보면은 글자마다, 한 말씀마다 바로 활구참선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은 깨달은 눈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활구참선법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는 것이고.
〇문헌에 오른 공안(公案)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공안이여. 천칠백 화두인데, 어느 공안이나 좋고 나쁘고 한 것이 없어.
그러나 자기가 믿는,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따지지 말고, 그 한 공안상에 대의단(大疑團)을 일으켜서 그 의단 하나만을 간절히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결국은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어진 단계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〇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쩌 눌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고, 이 오목가슴에 무슨 뭉텅이가 생겨 가지고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소화도 잘 안되고, 화두를 들어도 머리는 먹먹해 가지고 영 애를 먹을 때에, 그럴 때에는 앉아서 억지로 견뎌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적당한 장소에 한 4~50미터를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그러면은 그 답답하고 복잡하고 하는 것이 스르르르~ 하니 그것이 없어지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을 그렇게 포행을 하고서 시원해지거든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허리를 쭈욱 펴고 극히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아주 개운하고 시원하게 화두가 들릴 것이다.
‘방일한다’고 하는 것은 ‘그럭저럭 놓아 지낸다’ 그말인데, 그럭저럭 놓아 지내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참정진'이다.
‘정진을 한다’하면은 아주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 그 정진상(精進相)을 지어서 막! 이 몸을 갖다가 알날신심(遏捺身心), 몸과 마음을 억지로 구속하고 얽어매 가지고 몸을 못살게 구는 것을 갖다가 가행정진이다 또는 용맹정진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진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참다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은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글자 석 자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〇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만을 알뜰하고 간절하게 단속해 나간다면, 계율을 의식적으로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근본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면, 계(戒)의 지키는 상(相)이 없이 저절로 모든 계가 지켜져 버리면 이것을 바로 최상승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六祖) 스님께서는 『법보단경(法寶壇經)』에 그 마음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마음 어지러운 것 · 산란한 것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정(定)이요, 마음에 그름 · 허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 자성(自性)의 혜(慧)라, 이렇게 설파를 하신 것입니다.
〇‘이 세상에서 어느 분이 복(福)과 혜(慧)를 가장 원만히 구족하신 분이냐?’하면은 바로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이다.
그래서 삼귀의(三歸依)를 할 때에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두 가지가 족[兩足]한 최고의 높으신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하다'하는 것은 바로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구족하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에 의해서 닦아 가는 불제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한다면 우리의 정진은 결단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우리가 부처님보단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 자리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부처님이 우리 중생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뜻을, 내가 나를 깨닫지를 못해서 오직 그 하나 때문에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달이 법회를 열고 무슨 말을 할 말이 있느냐? 무슨 기특하고 재미있는 얘기 거리가 있는 것이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법상에 올라오며, 무엇을 듣기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이렇게 법보전(法寶殿)에 이렇게 모이시는 것이냐?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성현들은 이 문제를 해결을 했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동서 사방으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 번 만 번 법문을 듣고 서울로 지방으로 법회를 법문을 들으러 다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냥 마찬가지여.
법문을 들을 때에는 가슴이 좀 후련하고 무엇인가 얻은 바가 있는 것 같다가, 한 시간 두 시간 지내고 하루 이틀이 지내면 도로 답답하고 방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공부해 나가는 그 근본 뜻을 바로 알아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精進)이요, 수도(修道)요, 공부를 해가는 것인데.
그 공부해 나가는 그 요점을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여나 무슨 좋은 말씀을 들을까?’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법문을 들을까?’ 밤낮 들어봐도 들을 때 뿐이고 공부는 조금도 나아가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일용 생활,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오줌 누고, 똥 누고, 걸어 다니고, 차 타고, 하는 이러한 일상생활,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는다면 이것은 영원히 찾아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여.
여의고 그놈을 떠나서—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잡고, 발로 걸어 다니고,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놈을 버리고, 그놈을 떠나서 나의 자성(自性) 자리가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그놈을 버리고 찾겠지만, 그놈을 떠나서는 세상없이도 없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항시 마음만 급하고 마음만 바뻐.
‘내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떻게 하나!’
‘오늘도 이렇게 그럭저럭 하루가 지냈구나!’
‘이러한 모다 그 이런 복잡한 일 때문에 내가 공부를 못한다’
남편 때문에 못하고, 자식 때문에 못하고, 살림살이 때문에 못하고, 병 때문에 못하고, 그러한 것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마음만 조급하다 그말이여.
마음이 조급하니까 짜증만 내고 신경질만 내고 일체 생활에 안정을 잃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평과 불만이 가뜩 차있어. 그러니 무슨 일을 한들 그 일이 제대로 되며, 무슨 공부가 될 것이냐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모든 기회(機會)와 경계(境界) 위에서 잡아가지고 쓸 수가 있다 그말이여.
기회,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기회와 경계상에 그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턱! 잡어서 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는 바로 거기서 잡아 낚아채야 하고, 귀로 무엇을 소리를 들을 때에는 듣는 그 찰나에 퍼뜩 잡아서 써야 해.
속담에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번갯불 번쩍하는 그 번갯불에다가 콩을 구워 먹어.
번갯불 번쩍할 때 바로 그때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바늘에다 실을 폭 뀌듯이, 그 찰나를 잘 잡아 쓸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공부하는 바른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여.
선방에 3년, 10년, 20년, 30년을 다녀도 그러한 기회와 경계를 여의고 따로 공부를 지어 나가려고 그러고, 그놈을 여의고 공부를 할려고 한 사람은 아무리 애써봤자 공부에 진취가 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쪼끔 시끄러우면 파르르 신경질을 내고, 쪼끔 복잡하면 도망할 궁리를 하고, 경계와 기회를 피하고 도피해 가지고 따로 공부를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일,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장소, 모든 일이 내 마음과 내 마음에 순(順)하는, 내 마음대로 되는, 조끔도 내 마음을 거슬리지 아니한 그러한 곳은 저 천상에, 하늘나라 천당에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천당에 가면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고, 모든 즐겁고 기쁘고 편안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는 도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신 것입니다.
천당(天堂)은 좋고 기쁘고 편안한 일만 있어서 그러한 상태에서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없어.
축생(畜生)이나 지옥(地獄)은 모든 일이 괴로움만 있어서 괴로움이 지나치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우리의 근기(根機)로 그것을 이겨 나갈 수가 없어.
오직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이 사바세계는 내 마음에 합당한 일도 있고, 기쁘고 편안한 일도 있으려니와 슬프고 괴롭고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도 있어서 우리가 분심(憤心), 발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일부러 무상(無上)의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 대도를 성취해서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사바세계에도 오셨는데, 우리는 과거에 무슨 수승한 인연이 있어서 다행히 금생에 이 사바세계에 왔습니다.
이 '사바세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져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좋다는 것이여.
그런데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피하고 슬픈 일은 피하고 기쁜 일만을 찾고, 괴로운 일을 피하고 즐거운 일만을 찾고, 시끄러운 것을 피해서 조용한 것만을 찾고,
벌써 시끄러운 것을 버릴려고 할 때에 그르쳐 버렸고, 다시 편안하고 즐거운 곳을 찾을 때에 두 번째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 어긋나고 그르치기만 해 가지고 언제 바른길을 한 걸음이라도 갈 수가 있느냐 이말이여.
공부하는, 참으로 발심을 해서 진정으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계—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어떠한 순경계(順境界)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지라도 바로 그 기회와 그 경계를 단 일분일초라도 놓치지 말고 바로 되잡아 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간다면 우리가 있는 장소는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 되었건, 어떠한 일을 만나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하건,(처음~21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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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곳곳마다 최상의 선방(禪房)이요, 바로 부처님 회상(會上)이요, 닥치는 일마다 부처님이요, 불보살을 친견한 것이요,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모든 소리는—나를 칭찬하는 소리나,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나, 새가 우는 소리나, 닭이 우는 소리나, 개가 짓는 소리나, 자동차 소리나, 모든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소리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 될 것이며,
내가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은—저 해와 달은 말할 것도 없고 흘러가는 구름과 물, 겨울에 내리는 눈이나, 봄에 피는 꽃이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나,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나, 모든 것이 다 불색(佛色), 부처님의 몸이, 불신(佛身)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접촉하는, 상대하게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되고, 바로 그것이 최상의 육신통(六神通)으로 되는 것입니다.
소신통(小神通)은 내일 일을 알고, 여기서 서울 일을 알고,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뒷일을 알고, 여기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 축지법을 하고, 이러한 것은 소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조그마한 신통이라 하는 것이고.
참으로 최상의 대신통(大神通)이라 하는 것은,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대간하면 한숨 자고, 이것이 바로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삿된 사람은 소신통이 대신통인 줄 착각을 하는 거고, 참으로 불법(佛法)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옳게 인식한 사람은 바로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바로 이것이 신통 중에 최고로 크고 높은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대신통을 착각을 해 가지고 소신통을 추구한 사람은 공부해 나가다가 사견(邪見)에 빠지기가 쉽고, 마구니의 권속으로 끌려가서 미치거나 삿된 경계에 빠지는 것이고.
소신통에 집착을 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대신통의 위대함에 눈뜬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항시 부처님에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하고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수한야랭어란멱(水寒夜冷魚難覓)한디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요, 나무를 얻어서 그 가지를 붙들고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이것은 족히 기특한 것이 되지를 못하고,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니라. 그 낭떠러지에 그 붙잡고 있던 그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지고 안 떨어지려고 매달려 있던 그 손을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탁! 놔 버릴 때 바로 대장부(大丈夫)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질까 두려워서 나무가지를 붙잡고 그 안간힘을 쓴다’하는 것은 무엇을 표하는 말이냐 하면 한 마음, 일심을 얻어가지고 그 일심을 놓치지 아니할려고 그 안간힘을 쓰는 데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여.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거나,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또는 옴마니반메훔이나 그러한 주력을 하거나 그 어떠한 자기 나름대로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어떤 한 경계를 맛보아 가지고, 그 경계를 놓치지 아니할려고 그 안간힘을 쓰는데,
조끔 시끄러우면 신경질을 내고, 조끔 복잡하면 그걸 피하려고 하는 이유가 한 마음 경계를 얻어가지고...
그 시끄럽고 고요한 것, 복잡하고 편안한 것 그러한 경계에, 그러한 것에 집착을 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말고 용감하게 그놈을 놔 버려. 그 한 곳마저도 놔 버릴 때에 대장부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수한야랭어란멱(水寒夜冷魚難覓)이여. 물은 차고, 밤은 냉랭(冷冷)해서 고기를 찾기가 어려워. 고기란 놈이 저 깊은 물 밑 속에 가서 가만히 숨어 버렸기 때문에 고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말이여.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로구나. 빈 배에는 달만 가득 싣고 돌아오더라 그말이여.
‘참선하는 사람은 일체 경계(境界)에 집착을 해도 못쓴다. 또 경계를 버리려고 하지도 말아라’
‘어떠한 경계를 다달았어도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해라’
이렇게 법회 때마다 그렇게 강조를 하고 주장을 하고 설교를 해왔는데, '한 마음마저도 놔 버려야 한다'
‘그러면 화두를 들지 말고 놔 버리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려지면, 어찌 화두에 집착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가 안 되고, 공부를 바른길을 찾지를 못하니까, 자꾸 일체 경계에 다다러서 ‘그 경계를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화두를 놓치지 말라’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는 없었지만,
그렇게 애를 쓰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하게 되면, 마침내는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저절로 의단이 현전(現前)을 해서 앉아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경계가 시끄럽거나 편안하거나, 조용하거나 복잡하거나, 전혀 그러한 것에 상관이 없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무엇을 집착을 하며,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싫어하고 미워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렇게 될 때 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서, 법문도 열심히 듣고 화두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하도록 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피나는 노력 없이 어떻게 그러한 경계가 올 것이냐 이말이여.
‘짜게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게 몸과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를 알뜰히 정진해 나가고,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 속에서 일분일초도 등한히 하지 아니하고 애를 써 나간다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비(竹篦)를 치고 잠시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십시오.
오른다리를 밑으로 잡어댕기고 그 위에다가 왼다리를 올려놓고, 그리고 그 발 위에 배꼽 앞에다가 오른손 손바닥을 위에로 해서 놓고 그리고 왼손바닥을 그 위에다가 포개놓고 엄지손을 이렇게 배를 맞대셔.
그러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뜰썩뜰썩 이렇게 흔들어서 한 가운데에다가 딱 안정을 시키고,
몸을 단정하게 척량골(脊梁骨)을 세우되 어깨나 목에 힘을 다 빼고, 어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혀끄터리를 갖다 대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뜹니다.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하는데,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여.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3번 ‘준비 호흡’을 하는데, 준비 호흡은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이 그득하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들어마시세요.
가뜩 들어마셨으면 숨을 딱 정지를 해가지고 한참동안 참는 거여.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데까지 참았다가 입을 조끔 벌리고 입으로 ‘후~’하고 숨을 다 내쉬는 겁니다. 내쉬세요. 가슴속에 한 점도 없이 다 내쉬어.(1번)
다 내쉬었으면 다시 한 번 또 코로 들어마셔. 어깨를 좀 드는 듯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십니다. 가뜩 들어마셔 가지고 딱! 정지를 해, 한참 참았다가 입으로 ‘후~’하고 내쉬는 거여.(2번)
다 내쉬었으면 또 한 번 코로 가뜩 들어마셔. 정지. 입으로 또 ‘후~’하고 다 내쉬어요.(3번)
이것이 준비 호흡이 끝났습니다. 다 내쉬었어.
완전히 다 내쉰 다음에 조용하게 인자 코로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코로 들어 마시되, 불룩하기는 배꼽 밑에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면서 아랫배를 불록하게 만들면 되는 거여, 의식적으로.
아까 (준비 호흡 때) 가슴으로 들어마실 때는 가뜩 들어마셨지만, 이제는 준비 호흡이 아니고 정식으로 단전호흡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게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니에요. 8부(八部) 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약 8부 쯤만 들어마셔. 아랫배가 1~2cm 쯤 약간 볼록해진 듯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니 내쉬는데, 입으로 내뿜는 게 아니라 입은 다문 채 코로 내쉬어요. 코로 내쉬면서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렇게 하면서 내쉬는 거여.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코로 들어마시면서 아랫배가 또 차츰차츰 차츰차츰 볼록해지도록 하면서 마시는 거여. 8부 쯤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 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또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은 약 4초나 5초 쯤 들어마신 시간보다 조금 더 길게 내쉬는 거여.
내쉴 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화두를 생각하면서, 화두를 들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숨을 내쉴 때에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단전호흡과 화두를 함께하는 가장 묘(妙)한 방법입니다.
죽비를 치세요.
(입선 入禪)
같이 입선을 한 이 공덕(功德)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모두가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축원(祝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또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하셨습니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보배 곳, 영원히 평생 동안 쓰고도 남을 소중한 보배. 영원한 보물. 그 보배 곳,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21분52초~43분2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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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득지재심응재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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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도사(大導師 큰 대/길·인도하다·이끌다 도/스승 사) ; 불(佛) · 보살(菩薩)의 존칭. '크신[大] 길 인도하는[導] 스승[師]'이라는 말.
도(導)는 「길[道] · 인도(引導)하다 · 이끌다」의 뜻으로, 대도사는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큰 스승이라는 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度] 하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대도사(大度師)와 같은 뜻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 삼무차별(三無差別 :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불원천리(不遠千里)하다 ;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색(佛色) ; 불색신(佛色身). 형체를 갖춘 부처님의 몸을 일컫는 말. 상대어는 법신(法身)으로 진리를 인격화한 부처님을 가리킨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대간하다 ; ‘고단하다(지쳐서 피곤하다)’의 사투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〇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척량(脊梁 등마루 척/대들보 량) ; 등마루의 거죽 부분. *등마루 ; 등골뼈가 있어서 울룩불룩하게 줄진 등의 가운데 부분.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팔부(八部) 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〇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〇비구들아, 만일 여래(如來)가 열반할 때가 되면, 또 대중들이 청정할 뿐 아니라 믿고 이해함이 견실하여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환히 알며 깊은 선정을 성취하게 되면, 여래는 이를 알고 곧 성문과 보살들을 모아 이 가르침을 설한다.
세상에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으로 멸도하는 일은 없나니 오직 일불승(一佛乘)으로써만 멸도(滅度)할 수 있다.
비구들아, 알라. 나는 중생들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그들이 소법(小法)을 즐기며 오욕에 깊이 집착함을 알았기에 방편으로 열반을 설했고, 중생들은 내 말을 듣고는 곧 믿고 받아 지녔다.
예를 들어, 아주 험난한 데다 사람마저 살지 않아 무시무시하며, 길이가 5백 유순이나 되는 나쁜 길[惡道]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진귀한 보물 있는 곳에 가기 위해 그곳을 지나려 한다고 하자.
그때 그들 가운데 한 길잡이[導師]가 매우 총명하여 그 길의 형세를 환히 다 알고 있었기에, 무리들을 이끌고 그 무서운 곳을 지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들은 얼마 가지 않아 귀찮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길잡이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너무나 피곤한 데다 무서워서 도저히 더이상 갈 수가 없소. 게다가 갈 길도 아직 멀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소.’
그러자 갖가지 방편(方便)을 지니고 있는 길잡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 참 딱하도다. 어째서 큰 진귀한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고자 하는가?’ 그리고는 방편을 써서 그 길의 3백 유순 되는 지점에 신통력으로 성(城) 한 채를 만들어 놓고서 무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두려워 마시오. 그리고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시오. 여기 이렇게 큰 성이 있으니 들어가서 마음껏 지내시오. 이 성에 들어가면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寶所]에 다다를 수 있소’
그러자 지쳐 있던 무리들은 매우 기뻐하며 기적 같은 일[未曾有]이라고 찬탄하며 말했다. ‘이제 이 험한 길[惡道]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얻었도다.’
그리고 그들은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성[化城]으로 들어가, 이미 험한 길 다 벗어났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길잡이[導師]는 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한 뒤 피로가 다 풀린 줄 알고는, 신통력으로 만든 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서 갑시다.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소(寶處在近). 예전에 있던 큰 성은 그대들을 쉬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신통력으로 만든 것이었소.’
비구들아, 여래 또한 이와 같아서 그대들을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다. 그래서 모든 생사 번뇌와 악도(惡道)가 험난하고도 하염없이 긴 것을 알고 또 응당 떠나고 건너야 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만일 중생들이 단지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만 듣는다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또 ‘부처님 되는 길은 멀고도 머니 오래도록 노력하여야 성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또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겁 많고 약하고 하열(下劣)함을 알기에 중도에 쉬게 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두 가지 열반을 설했다.
그리고 만일 중생들이 이 두 경지에 안주하면 여래는 곧 다시 이렇게 설한다.
‘그대들이 머물고 있는 경지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운 경지일 뿐이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얻은 열반을 잘 관찰하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요. 다만 여래가 방편으로 일불승을 분별하여 삼승(三乘)으로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저 길잡이가 무리들을 쉬게 하기 위하여 신통력으로 큰 성을 만들고, 다시 충분히 쉬었음을 알고는 ‘보물이 있는 곳은 가깝소. 그리고 이 성은 진짜가 아니라 내가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불승(一佛乘) ; 산스크리트어 eka-buddha-yāna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함.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가르침. 모든 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부처님의 유일한 가르침.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 ; 수불세수(水不洗水). '물로 물을 씻을 수 없다'는 말. '금으로 금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金不博金]'과 같은 비유이며 대구(對句)로 쓰인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가진 부처이기 때문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합일해야지 대상화하여 이분(二分)하거나 자기 밖에서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심을 얻어 간직함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한 곳마저도 없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범부의 망심도 다 떨어지고 성인의 앎도 없으며, 다만 사심 없는 비춤을 가지고 시비의 마당에 다시 올 뿐이다.
[참고 ❷] 『종용록(從容錄)』 제51칙 '법안선륙(法眼舡陸)'
水不洗水 金不博金 佛不求佛 法不說法
물로 물을 씻지 못하고 금으로 금을 바꿀 수 없으며, 부처가 부처를 구하지 못하고 법으로 법을 설할 수 없다.
[법문 내용]
(게송)득지재심응재수~ /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 공부해 나가는 요점 -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지 마라 / 공부하는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모든 기회(機會)와 경계(境界) 위에서 잡아가지고 쓸 수가 있다 /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져 있는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다.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 (게송)득수반지미족기~ /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〇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우리가 부처님보단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 자리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부처님이 우리 중생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뜻을, 내가 나를 깨닫지를 못해서 오직 그 하나 때문에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〇공부해 나가는 그 근본 뜻을 바로 알아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精進)이요, 수도(修道)요, 공부를 해가는 것인데, 그 공부해 나가는 그 요점을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여나 무슨 좋은 말씀을 들을까?’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법문을 들을까?’ 밤낮 들어봐도 들을 때 뿐이고 공부는 조금도 나아가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오줌 누고, 똥 누고, 걸어 다니고, 차 타고, 하는 이러한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는다면 이것은 영원히 찾아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여.
〇참으로 발심을 해서 진정으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계—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어떠한 순경계(順境界)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지라도 바로 그 기회와 그 경계를 단 일분일초라도 놓치지 말고 바로 되잡아 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간다면 우리가 있는 장소는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 되었건, 어떠한 일을 만나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하건, 우리는 곳곳마다 최상의 선방(禪房)이요, 바로 부처님 회상(會上)이요, 닥치는 일마다 부처님이요, 불보살을 친견한 것이요,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접촉하는, 상대하게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되고, 바로 그것이 최상의 육신통(六神通)으로 되는 것입니다.
소신통(小神通)은 여기서 서울 일을 알고,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뒷일을 알고, 여기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하고, 이러한 것은 소신통, 조그마한 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참으로 최상의 대신통(大神通)이라 하는 것은,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대간하면 한숨 자고, 이것이 바로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삿된 사람은 소신통이 대신통인 줄 착각을 하는 거고, 참으로 불법(佛法)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옳게 인식한 사람은 바로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바로 이것이 신통 중에 최고로 크고 높은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〇‘짜게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몸과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를 알뜰히 정진해 나가고,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 속에서 일분일초도 등한히 하지 아니하고 애를 써 나간다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〇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또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하셨습니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영원히 평생 동안 쓰고도 남을 소중한 보배. 영원한 보물. 그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
(1/4) 약 22분. (2/4) 약 21분. (3/4) 약 22분. (4/4) 약 11분.
(1/4)----------------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한디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신유년, 양력으로 1월 4일 첫째번 일요법회날입니다.
그동안에는 모든 법회를 아침 오전 11시에 시작을 했었는데 오늘부터서는 첫째번 일요법회에 한해서 오후 2시에 시작하기로 했는데, 날씨도 매우 춥고 그런데 이렇게 많이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법당이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아서 좀 춥습니다.
산승(山僧)이 연전(年前)에 해남 대흥사에서 있을 때, 그때 고려대학 학생들, 모다 서울대 학생들, 연세대 학생들, 대학생들이 모다 고등고시 준비하기 위해서 대흥사 절에 방을 빌려 가지고 와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이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건대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 자기집에서는 부모 밑에서 다 호강하고 그런 학생들인데, 그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그 절에 그 씁씁할 우거지 된장찌게에다가 김치 한 가지 놓고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도 반찬이 없단 말 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밤에면 밤을 패서 공부를 하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이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오면 밖에 나가서 달음박질도 하고 그 얼음을 깨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그래 가지고 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 또 잠이 오면 또 나가서 찬바람을 쐬고 들어오고 이렇게 무섭게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세속에 아직 철이 안 든 어린 학생들이 '고시 합격해서 판검사가 됨으로써 자기의 인생으로써의 출세 성공이다' 이리 생각하고 거의 목숨을 바치다시피 하면서 그렇게 공부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부모와 형제와 고향과 청춘을 버리고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한 승려가 어찌 수행에 일분일초라도 등한히 할 수가 있겠는가? 참선(參禪)하는 사람이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저 학생보다도 더 못해 가지고 어디에다 쓸 것인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거기에서 참, 이 분심(憤心)이 나고 느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같이 있는 젊은 모다 행자(行者)들에게도 "저 학생들을 보아라. 저 학생들이 그 밤잠을 안 자고 공부할려고 애를 쓰는 저 모습을 봐라. 도(道)를 닦는 출가인이 저 학생에 비교해서 저만 못해서 되겠느냐?" 이렇게 서로 경책을 하면서 지낸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공부할 때에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아니할려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하룻밤에 백 리 이상 길을 산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정진을 한 스님네들도 있었고.
밤에 잠시 잘 때에는 목침(木枕)을, 공과 같이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고 잤던 것입니다. 물씬물씬한 목침이나 네모진 목침을 베면 편안하게 몇 시간을 자게 되니까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면 잠깐 잠이 들어서 조끔만 움직거려도 두그르르 굴러서 머리가 방바닥에 툭! 떨어지면 깜짝 놀래가지고 다시 일어나서 공부하기 위해서 그런 둥글둥글한 목침을 깎아서 베었고.
어떤 이는 평생 동안을 목침을 베지 아니하고 자기 팔을 꾸부려서 팔꿈치를 베고 일생을 지내는 그런 침굉 선사와 같은 도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법당은 난방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밑에서는 찬기가 올라오고 윗 공기는 차와서 조금 춥습니다마는 아까 말한 그런 학생들 공부할려고 애쓰는 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과거에 도인들이 어떻게 수행을 하셨는가를 생각한다면 이 법당 이러한 정도의 추위쯤은 능히 참을 수 있고 오히려 뜨뜻한 난방이 잘되어 있는 법당에서는 훈훈한 공기 속에서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마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엄동설한에 일선(一線)에서 우리 후방 국민들의 무사안일(無事安逸)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국토를 지켜 주기 위해서 일선 장병들은 여러분들의 아들, 동생들은 이 혹한 속에서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먹을 것도 충분하지 못한 속에서 목숨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방위(防衛)에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당에 난방 시설을 해 놓지 아니하고 그러한 변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여 취산순환유루인(聚散循環有漏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하고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 우리의 생사가 찰나간(刹那間)에 있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한 것이 이것이 생멸심(生滅心)인데, 이 생멸이 바로 생사(生死)다 이거여.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비로서 죽음이고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바로 그때가 내생(來生)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때가 바로 내생이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또 실질적으로도 어제 멀쩡한 사람이 하룻밤 새에 저승 사람이 되고, 한 시간 전에 멀쩡했던 사람이 금방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이고, 1초 전에 멀쩡했던 사람도 1초 후에 저승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모았다 흩어지고,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고 이러한 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유루(有漏)의 인연(因緣)으로 그리된 것이다 이 말씀이여.[聚散循環有漏因]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쇠 금(金)'자, '까마귀 오(烏)'자, 금오(金烏)는 태양을 금오(金烏)라 하는데, 금까마귀라 하는데 금까마귀가 동쪽에서 솟아 가지고 서쪽으로 지고 또 그 이튿날 동쪽에서 떠 가지고 또 서산으로 지고 이것이 우리의 생명을 재촉하는 것이 된다. 하루해가 지나가면 하루 우리의 죽음을 향해서 다가가는 것이여.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다. 옥토끼는 달을 옥토끼라 하는데, 달이 떠 가지고 지고 또 떠 가지고 지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늙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하고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도자위경조수행(覩玆危境早修行)하여 근념미타생극락(勤念彌陀生極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 여름에 가물 때 웅덩이에 큰 고기, 작은 고기, 송사리가 더글더글더글더글 팔딱팔딱팔딱 뛰는데 물은 하루하루 물이 줄어져서 이제 거의 물이 다 바닥이 다 보이게 되었어.
물은 거의가 다 마르게 되고, 고기는 물이 마르니까 그런 데다 물은 햇볕에 데워져서 뜨겁고 고기가 우물우물우물하면서 곧 빨딱거리다 곧 죽게 된 그러한 형상을 농촌에서 혹 구경을 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세계 40억이라고 하는 인류가 각 나라마다 자기나라 잘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한 나라 안에서는 각기 자기만, 자기가 보다 더 좀 잘살겠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여름 뜨겁고 가문 날에 거의 말라가는 웅덩이 속에 송사리 떼가 몸부림친 거와 같은 현상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라. 큰 광야에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지나가는데 코끼리란 놈이, 성난 코끼리가 자기를 쫓아온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코끼리한테 잡혀서 짓밟히면 죽게 되니까 그걸 피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치다가 마치 큰 샘을 하나 만났다.
그 샘으로 피난을, 피하기 위해서 마치 그 샘 언덕에 등넝쿨이 있어서 그 등넝쿨을 잡고서 샘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말이여. 저 밑에 샘 밑바닥을 내려다보니까 거기에는 독룡 독사가 바닥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그래서 저 밑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위에로 올라가자니 코끼리란 놈이 코를 내두르면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런데 가만히 고개를 들어보니까 그 절벽에다가 벌이 집을 지어 놨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똑똑 떨어진다. 아무리 죽게 되었지만 아! 꿀이 똑똑 이 콧등어리로 떨어지니까 할 수 없이 그놈을 받아서 쪽쪽 빨아먹는다 말이여.
그런데 그때 흰 쥐와 검은 쥐가 나와 가지고 등넝쿨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대. 얼마 안 있으면 흰 쥐가 한바탕 갉고, 조금 있으면 또 검은 쥐가 갉고 흰 쥐가 갉고 그래서 그 등넝쿨 뿌럭지가 똑 떨어지면 샘 밑바닥에 떨어져 가지고 독사의 밥이 되게 되았다 그말이여.
그러면서도 똑똑 떨어지는 꿀 받아먹는 재미로 코끼리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두려움도 잊어버리고, 밑으로 떨어지면 독룡 독사에게 잡혀 먹는다고 하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등넝쿨을 갉아 대고 있다고 하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다 그말이여.
꿀 받아먹는 재미로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을지언정 이 사람의 죽음은 시간 문제다 말이여.
「어떻게 했으면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 문제가 공안(公案)의 하나입니다.(처음~21분39초)
(2/4)----------------
「어떻게 했으면 이 꿀을 받아먹고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우리의 중생, 우리 중생의 운명이, 신세가 마치 이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말씀이여.
광야(曠野)는 생사의 광야요, 인생의 광야요. 우리는 그 한도 끝도 없는 무상(無常)한 생사의 광야를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데 무상살귀(無常殺鬼),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무상살귀로부터 쫓김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그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고, 흰 쥐 검은 쥐는 낮과 밤이고, 그리고 그 등넝쿨은 우리의 생명줄이고, 생명이 수명이 뚝 끊어지면 죽어서 무간(無間), 저승이 기다리고 있다 그말이여.
똑똑 떨어지는 꿀은 무엇이냐 하면은 인간에 오욕락이다 그말이여. 오욕락(五慾樂), 재산 · 색욕 · 명예욕 · 명예 · 권리, 또 수면 · 안락 이런 것이 다 다섯 가지 인생의 즐거움인데.
이 인생에 다섯 가지 즐거움, 그 오욕락에 팔려서 그 재미 보느라고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망각한 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칡넝쿨에 매달려 있는,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여름 웅뎅이에 물 마른 데 퍼드덕거리고 있는 우글대고 있는 송사리 떼와 같은 신세, 칡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서, 도자위경조수행(賭玆危境早修行)이라. 이러한 위경(危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어서 속히 수행을 해라.
그래 가지고 근념미타생극락(勤念彌陀生極樂)이다. 부지런히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얻을지니라.
인생이 과거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세계 40억 인구가 다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오장육부가 다 있지만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비슷하게 닮은 사람은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각기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각기 생각한 바가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받음이 또한 다르다 이 말씀이여.
누구는 부자로 살고, 누구는 명예와 권리가 있고, 누구는 힘이 세고,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병약하고, 누구는 정직하고, 누구는 불량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차(差)가 있지만 이것이 다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그렇게 된 것이다.
일신상만 그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형과 동생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이지, 우연히 아무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이 그러한 관계가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여.
옛날에 정승(政丞)이, 아주 학식도 높고 경륜도 있고 인격도 훌륭하고 한 정승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의 부인도 남편 못지않게 어질고 착하고 모든 부덕(婦德)을 원만히 갖추었드라.
아들도 여러 형제 두고 살림도 풍족하고 그러한 아주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부인이 간 곳이 없어졌다. 혹 친정에를 갔는가, 이웃을 갔는가, 갈만한 곳을 다 연락을 해서 알아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래서 그 정승이 정승을 내놓고 그 아내를 찾으러 나섰다. 팔도를 다니면서 아내를 찾으러 다니는데, 마치 강원도 지방을 가 가지고 어느 산중을 지내다가 보니 자기 아내와 비슷한 사람이 가마니를 이고 어느 영감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 쫓아가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틀림없이 자기 아내여.
"여보, 당신이 아무개 아니요?"
"예, 기요"
그런데 왜 "어찌된 일이냐?"하고 물어보니까, 아무 이유도 없고 "그냥 나가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고.
"저 앞에 간 사람은 누구냐?"고.
"새로 만나 영감"이라고.
"그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무엇이요?"
"숯 가마니요"
"당신이 미쳤느냐"고 붙들고 낙루(落淚)를 하는데, 부인은 별로 울지도 않고 멀쩡해 갖고 섰다 그말이여. 저만큼 숯쟁이 영감이 가다가 암만 기다려도 안 오니까 지게를 거기다 받쳐 놓고.
"올라가자"
"싫다"
"자식도 보고 싶지 않냐?"
"안 보고 싶다"
"저 숯쟁이 영감이 무엇이 좋아서 나를 싫다 하느냐?"
"나도 모르겠소"
아! 이래 가지고 영감은 울고불고해도 할멈은 별로 그렇게 슬퍼한 기색도 없이 자꾸 숯쟁이 영감만 따라갈려고 한다 그말이여. 기가 맥혀서. 강제로 끌고갈 수도 없고, 본인이 싫다는데야 별도리가 없어.
그래서 참 그 영감은 그 숯쟁이 영감한테 마누라를 꼼짝없이 뺏기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건 도대체 어디에다 하소연할 수도 없고, 자기 권리로 숯쟁이 영감을 권력으로 눌러서 뺏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길로 한 발 두 발 걸어서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들어 갔어. 찾아들어 가 가지고 큰스님을 만나 가지고 일장 설화(一場說話)를 다 얘기를 했어.
"어째서 나와 반평생을 같이 사는 동안에 싸워 본 일도 없고, 피차 서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바도 없고, 이 세상에 임금님 내 놓고는 내가 이 세상에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나 이상 좋은 영감이 없을 텐데 남편이 없을 텐데, 어째서 나를 버리고 그 숯쟁이 영감을 갔는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으면 참선을 해라"
그래 가지고 참선(參禪)을 시작을 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이뭣고?'를 하는데 밥도 먹게 되면 먹고 말게 되면 말고, 잠도 자게 되면 정 고단하면 조금 자고 벌떡 일어나서 공부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정말 그 큰스님의 지도하에 목숨을 바쳐서 도를, 참선을 했습니다.
참선이란 것이 꼭—'내가 마누라와의 관계가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되었는가?' 참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승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해 볼 건 다해 보고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고, 오직 생짜로 마누라한테 내소박을 맞고, 숯쟁이 영감한테 가버린 그 이유가 자기 목숨보다도 더 궁금하고 기가 맥혀서 '이것은 기어코 내가 이것은 알고야만 말겠다!' 그래 가지고 죽기로 맹세를 하고 정진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밥을 먹어도 짜고 싱겁고 매운 중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중도 모르고 제절로 속에서 의심이 나는데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소지를 하면서도 '이뭣고?'
누가 자기 보고 '잘하네, 못하네' 무슨 그런 시비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속에서 자동으로 분심(憤心)이 나고 의심이 나는데, 옆에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했어. 간절한 의심이 속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데 '이뭣고?' 뿐이다.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하다가, 잠도 안 오고 배고픈 중도 모르고 의단이 독로해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해 가지고 툭 터졌는데 아! 자기 전생(前生)이 환히 다 보인다 그말이여.
이 말을 듣고서 '옳지! 참선을 하면 전생을 환히 아는구나'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아니됩니다.
이것은 인과(因果)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속에서부터 자동으로 의단이 독로해야 한다고 하는 것만을 얘기한 것이지, '아! 견성(見性)을 하면 전생 일을 훤히 안다, 전생 일을 아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다' 이렇게 비약을, 비약적으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전생에 과연 어떻게 해서 마누라를 만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니까 환하니 보이는데, 전생에 자기는 내나 그 오대산에서 공부하던 선객(禪客) 스님인데.
그 마누라는 누구인고 하고 보니까, 선방에 스님네들은 겨울에는 그 어한(禦寒)을 하기 위해서 솜을 넣어서 누벼 가지고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그것이 또 떨어지면 헝겊을 거듭거듭 대 가지고 마치 따오기를 새를 갖다가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처럼 그렇게 더덩캥이 누데기를 입고 사는데, 겨울에는 추워서 빨 수도 없고 한 해 겨울을 입고 그 이듬해사 그 누데기를 빨게 됩니다.
요새는 이[蝨]가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약을 할려고 해도 구경을 할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이가 아주 자주자주 옷을 갈아입고 그런다 해도 이가 전혀 없을 수가 없고, 더군다나 누데기 같은 것을 한 해 겨울을 입고 보면 누데기 안에 이가 뚱실뚱실한 황소만씩한 이로부터서 서카래까지 수없이 더글더글합니다.
그 누데기 속에 이가 한 마리가 크기 시작하는데 주먹탱이 만큼 컸는가, 가려우면 그놈을 잡아내 가지고 손바닥에다가 이렇게 굴려 보기도 하고 또 씨름도 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집어넣고.
그놈을 잡아서 버리면은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것 같고, 차마 그래서 도로 집어넣다가 심심하면 꺼내서 같이 또 놀고 집어넣고 그렇게 한 해 겨울을 지냈는데, 그래가지고 해동(解冬)이 되아서 이제 누데기를 빨게 되았다.
그냥 마구잽이 빨면 툭 터져서 죽으면 안돼았고, 그래도 한 해 겨울을 같이 지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아! 그 이를 어떻게 처리를 할까?
옷을 갈아입고 다시 또 몸에다 넣자니 그렇고, 그러던 차에 마치 개를 만났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그 개한테 이를 갖다가 개 몸뚱이에다 요렇게 살짝 넣어 주었다 그말이여.
그 이가 누구냐 하면은 자기 할머니(부인)였었다. 한 해 겨울을 따뜻한 자기 몸에서 함께 지냈으니 그 인연으로 그다음 생에 마누라가 되어가지고 자기와 일심동체가 되어가지고 반평생을 같이 살았어. 그러면 그 개가 누구냐 하면은 숯쟁이 영감이다.
이를 잡어서 개한테 넣어 줬는데, 그 자기 몸에서 잡아가지고 개한테 넘겨줄 그때가 돌아오니까 자기를 버리고—부인도 모르지, 모르고서 그 개한테 건너간 그 도수가 딱 돌아오니까 정승 영감을 버리고 정처 없이 가출을 해가지고 걸어가고 걸어가다 얻어먹고 얻어먹다 걸어가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그 숯쟁이 영감, 개가 숯쟁이 영감으로 태어났는데 그 숯쟁이 영감을 만나자 처음 만났는데 그냥 첫눈에 눈이 딱! 맞어 버렸다. 아무 이유도 모르고 까닭도 없이 그 숯쟁이 영감을 한눈에 딱! 보자마자 '이게 바로 내 영감이다'(21분40초~42분1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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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쟁이 영감, 매일 숯을 과서, 숯을 갖다가 구워가지고 그놈을 팔아서 30리 50리를 걸어서 강릉장에 가서 팔고 그놈을 팔아 가지고 또 잡곡을 사가지고 들어와서 그놈을 끓여 먹고 사는 홀애비 신세인데 옷도 참 말로 할 수가 없고, 숯쟁이 영감이 숯가루로 화장을 하고 사는데 수염허며 무엇이 볼 것이 있겠느냐 그말이여. 볼수락 정 떨어지게 생겼겠지만 전생의 인연으로 정승 영감 백보다 낫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숯쟁이 영감이야 정승 부인이 자기를 찾아왔는데, 자기가 정승 부인이라고는 안 하지만 벌써 정승 부인이면 밖으로 풍기는 그 귀인의 자태가 자르르 하고.
"여기서 영감님하고 영감님 밥도 해 드리고 여기서 같이 살 수 없을까요?"
"아이구, 그 말씀을, 어디 그런 말씀을 다 하시느냐?"고, "여기서 어떻게 사실 것이냐?"고, "안 된다"
"아니 상관이 없다"고, "여기서 같이 살게만 해 달라"고.
너무 자기하고 그 부인하고 비교를 해 보니 비교가 되지를 않고, 도대체 황감(惶感)하고 죄송해서 '아! 그러시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렇지만 호박이 넝쿨째 떨어져서 속으로야 기가 맥히게 좋지만 '안 된다'해도 뭐 자기가 탁 걷어붙이고 나아가서 밥을 하고.
그날 저녁에, 방은 쪼그만한 됫박만한 방 하나 밖인데 부인이 몇백 리를 걸어서 걸어서 와가지고 꾸벅꾸벅 졸다가 쓰러져 자는데, 영감은 그 옆에 잘 수도 없고 윗목에 가서 혼자 쪼그리고 앉았다가 '에이, 나도 모르겠다'해 같이 자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부부간이 되었는데.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부부간에 만나는 인연이 반드시 과거에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만나고, 금생에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고 이런 것이여.
여러분 가운데는 부부간에 정분이 기가맥히게 좋은 분도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좋다가 중간에 쪼금 그 냉각기가 있다가 또 나중에 또다시 좋기도 하고 또 중간에 헤어지기도 하고. 영화 같은 데 보면 헤어졌다 또 다시 만나기도 하고.
참,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기구한 것인데, 그것이 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여. 반드시 아까 숯쟁이 영감과 같은, 그보다도 더 이상한 묘한 그러한 인연이 얽히고설켜서 금생에 이렇게 만나는 것이여.
일생 동안을 잘 살아도 한마당 꿈에 지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잘 못산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한바탕 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꿈에 주먹탱이 만한 보석을 얻어 봤댔자 꿈 깨 버리면 간 곳이 없고, 꿈에 무서운 호랭이나 독사한테 쫓겨서 진일 켜 봤댔자 눈만 딱! 떠 버리면 호랭이도 간 곳이 없고 독사도 간 곳이 없습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꿈에 그런 호랭이한테 쫓긴다던지 독사한테 쫓길 때 그 무섭고 겁이 난 것이 말로 할 수 없는데, 아무리 도망갈려고 해도 발은 제자리에서만 동동거리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큰소리가 나지를 않고 그리하다가, 얼마 동안을 그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눈을 떠 보면 전신이 땀이 젖어 갖고 있고 이러한 꿈을 꾸는 수가 있었는데,
참선을 한 뒤로는 그런 어려운 그런 무서운 경지를 딱 닥치면 금방 탁! 화두(話頭)를 들면서 눈이 뚝 떠져 버린다 말이여. 그래서 그런 무서운 꿈을 잘 꾸지도 않지만 혹 꾸더라도 금방 내가 '에이, 이까짓 것'하고 탁! 정신을 차려버리면 눈이 뚝 떠져 버리는 그런 경험을 가끔 하게 되는데.
우리의 인생살이가 무섭건 괴롭건, 기쁘건 행복하건 간에 엄격히 말하면 인생 칠십이라고 해 봤자 잠깐 동안 꾸는 봄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이여.
행복하게 산다 하더라도 눈떠 버리면 허망한 것이고, 괴롭다 하더라도 무섭다 하더라도 딱! 눈떠 버리면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무서울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우리는 인생 어피차 과거의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에 의탁을 해서 이 몸을 받아 낳고 일평생을 길건 짧건 좋건 궂건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꿈은 꿈이로되 분명 현실은 또 있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꿈이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호랭이를 만나면 무섭고 독사를 만나면 무섭고, 보석이나 금덩어리를 주으면 기쁘고 그것을 빼앗기면 아깝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문제가 하나도 아니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인생에 명예와 권리와 지위와 부귀공명이 그것이 허망한 것이고 꿈이라 하지만, 인생으로써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되고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현실을 내놓고 꿈이 따로 없고, 꿈을 내놓고 현실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허망한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세상은 무상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다. 다 소용없는 것이다, 다 버려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그 가운데 그것이 허망한 줄을 알아야지, '허망한 것이니까 다 소용없다' 이러한 방향으로 이러한 태도는 올바른 불자(佛子)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충실하다고 해서 허망한 줄을 모르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거기에 얽매이면 그 사람은 또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허망한 줄만 알지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아빠로서 엄마로서 국민으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하지 아니한다든지, 그것에 충실한답시고 거기에 완전히 얽매어 가지고 참으로 이것이 허망한 줄을 모른다던지, 이 사람은 정반대의 입장이지만 두 사람이 다 바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 별, 그리고 산과 흐르는 물, 꽃과 잎, 모든 동물,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온갖 것이 이 두두물물이—이것을 불교의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하는데, 제법(諸法)이라고도 하고 일체법이라 하는데, 이 삼라만상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생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이것 자체가 어데서 왔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의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여의고 우리의 자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떠나서 우리의 참마음을 찾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번뇌와 망상이 우리의 진여자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우리의 자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저 출렁거리는 산더미 같은 바다에 파도, 크고 작은 파도가 물을 떠나서 파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는 물이 움직여서 파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파도가 바로 물인 것입니다. 파도를 버리고서 물을 찾는다면 우리는 물을 앞에다 두고 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웬수 같은 자식, 웬수 같은 남편, 웬수 같은 아내, 웬수 같은 형, 웬수 같은 동생, 웬수 같은 친구, 웬수 같은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어째서 훌륭한 부모, 좋은 자식, 좋은 형, 좋은 동생, 진정한 사랑할 수 있는 아내와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웬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야 하는가? 원망과 한탄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가? 온전히 이유는 그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
한 번 지어 놓은 인연(因緣)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기가 지어 놓은 인과(因果)는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나, 온갖 인과에 근원을 깨달라서 체달(體達)을 하면 제절로 모든 일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자기에게 자기가 지어서 받은 인과, 윤회 생사윤회를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녹음 끊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병 난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전거 구사리 같은 것이 이리저리 올라갔다 내려갔다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눈병을 깨끗이 치료를 한 뒤에 보면 아무것도 허공에는 원래로 없었던 것이여.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만 보였지 눈병이 나 있을 때나, 눈병을 나은 뒤에나 허공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보인 생사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생사해탈, 생사해탈' 말을 했지만,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어디까지나 중생의 입장에서 중생의 언어를 빌려서 그러한 표현을 방편(方便)으로 쓰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42분19초~63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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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리가 높고, 아무리 학문이 높고, 아무리 기운이 세고,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이 참나를 깨닫는 일만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모든 재산과 모든 힘과 모든 학식과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정승이라 하드라도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내, 얌전한 아내, 일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백년을 해로(偕老)할 줄 알았다가 뜻밖에 간 곳이 없으니, 삼천리 강토를 한 손에 움켜쥐고 호령을 했던 정승도 사랑하는 아내가 간 곳이 없어지자 살맛이 없어지고 정승도 다 팽개치고 그 아내를 찾어 나섰습니다.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재산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명예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하라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라.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두상광음(頭上光陰)이 전두비(轉頭飛)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이때를 향해서 자기를 밝히라. 이때, 이때란 어느 때냐?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건강할 때—바쁘다 핑계 대지 말고, 아직은 시간이 있다 뒤로 미루지 말고, 아들딸 키워 놓고 장가 보내 놓고 이러한 등등 핑계를 대지 말고. '몸이 건강치 못하니까 병을 낫은 다음에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좀 더 부자가 되어가지고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이만한 처지에서 바쁘면 바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당장 내일 일을 모르고 밤새 일을 모르고 한 시간 뒷일을 모르는 백지 한 장 밖을 내다보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 무엇을 믿고 뒤로 미루겠는가 이 말씀이여.
머리 위에 광음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시간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장소는 앉아 있을 때는 바로 그 자리가, 서 있을 때는 그 자리가, 걸어갈 때는 그곳이, 차를 탈 때는 바로 그 차 안이, 변소에 앉았을 때는 변소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감옥이, 병원에 있는 사람은 병원이 바로 그때 그 자리가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인 것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은 어디나 법당이요, 우주법계가 부처님이 꽉 차 계신다면 우주법계 · 허공계 · 육도법계는 온전히 바로 거기가 법당이요, 불회상(佛會上)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대화엄경이요, 대열반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입니다.
날아가는 새 소리, 비행기 소리,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까마귀 소리, 개 짖는 소리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고대로 전부 부처님에 설법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 나에게 억울하게 욕하는 소리, 부처님에 설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여러분은 최상승법을 믿는 최상승 수행인이요, 불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제부터서는 원망할 남편도 없고, 원망할 아내도 없고, 미워할 이웃도 없고 웬수도 없습니다. 어제까지 미웠던 사람도 이제부터서는 미워할 거리가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는 누구도 부처님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웬수도 이제부터서는 나로 하여금 참나를 깨닫게 해 주는 도반(道伴)이요, 관세음보살이요, 문수보살이요, 부처님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의 묘한 진리가 위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이 말씀을 믿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후생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입니다.(63분56초~1시간14분3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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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연비산산공착영~' ; 『관음예문(觀音禮文)』에 나오는 게송.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연전(年前) ; 여러 해 전.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공부할 때에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고' ;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인추자자(引錐自刺 송곳으로 제 몸을 찌르다)'에서.
저 옛날, 대우(大愚), 자명(慈明), 곡천(谷泉), 낭야(琅瑯)등 4인이 도반을 맺고 분양(汾陽) 화상 회상에 지내는데 그때 하동(河東)은 매우 추운 때라 대중은 망설이는데 오직 자명은 뜻이 도에 있어 밤낮으로 힘써 정진하되,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제 몸을 찌르며 탄식하기를 "고인은 생사의 큰일을 위하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거늘 나는 또한 어떤 놈이기에 게으르고 방종하여 살아서는 때에 보탬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이름이 없으니 이것은 내가 나를 버림에서라"하며 정진하더니 후에 분양 화상을 이어 도풍(道風)을 크게 떨쳐 '서하(西河)의 사자(獅子)'라고 불렸다.
*'밤에 잠시 잘 때에는 목침(木枕)을, 공과 같이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고 잤던 것입니다' ;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원침경수(圓枕警睡 둥근 목침으로 잠을 쫓다)'에서.
철(喆) 시자는 잠잘 때엔 둥근 나무토막을 베개로 자다가 좀 잠들면 곧 목침이 구르므로 잠을 깨고는 다시 일어나기를 일상으로 하였다. 혹 사람이 말하기를 "용심이 너무 지나치다"하면 답하기를 "나는 본래 반야에 연분이 박하니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망습(妄習, 虛妄習氣 거짓되고 망령된 습기)에 끄달리까 두려워한다"하였다.
*'어떤 이는 평생 동안을 목침을 베지 아니하고 자기 팔을 꾸부려서 팔꿈치를 베고 일생을 지내는 그런 침굉 선사와 같은 도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 조선 후기 침굉 현변(枕肱懸辯) 스님(1616~1684)을 말한다. '침굉(枕肱 팔뚝을 베고 잠)'이란 법호가 말해주듯 일생동안 팔꿈치를 베고 잠을 잔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님은 전라도 나주 사람이다. 자는 이눌(而訥)이고 법휘()는 현변(懸辯)이요, 속성(俗姓)은 윤씨(尹氏)이다. 12세 때에 보광(葆光) 법사를 따라 출가하여 장흥 천관산에 가서 불전을 공부하였다. 13세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소요태능(逍遙太能) 선사를 방문하였는데 한번 보고서 탄복하였다.
지리산 연곡사, 조계산의 송광사와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교화를 펼쳤고 말년에는 금화산 징광사에서 지내다가 입적하였다. 장례를 행할 때 다비(茶毘)하지 말고 들판에 버리라는 것이 임종할 때의 유촉(遺囑)이었는데, 제자들은 금화산 둘째 봉우리 바위틈에 봉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5년에 간행한 시문집 『침굉집(枕肱集)』이 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무사안일(無事安逸 없을 무/일 사/편안할 안/한가할 일) ; 어떤 일[事]에도 해결하려 하지 않고[無] 편안(便安)하고 한가하게[逸]만 지내려는 태도.
*주야불철(晝夜不撤 낮 주/밤 야/아닐 불/거둘·철수할·그만둘 철) ; 불철주야(不撤晝夜). ①어떤 일을 함에 있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않음[不]. ②밤낮없이.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비로서 죽음이고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바로 그때가 내생(來生)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때가 바로 내생이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p103-104. (가로판 p101~103)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고.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유위법(有爲法) ; 위(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고, 유위(有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을 가지는 것.
①여러 인연(因緣)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또는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및 존재(사물).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계의 일체의 사물. 인과 관계 위에 있는 존재.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에 의하여 화합생성된 것이므로 생(生)도 있고 멸(滅)도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하고, 무위법(無爲法)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절대적인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유루(有漏) ; ①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②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더글더글 ; (물체 따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마구 모이거나 겹쳐 있다.
*우물우물하다 ; 큰 벌레나 물고기 따위가 한군데에 많이 모여 자꾸 굼뜨게 움직이다.
*가물다 ; 땅에 물기가 바싹 마를 정도로 오랫동안 계속하여 비가 오지 않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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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했으면 이 꿀을 받아먹고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 이 물음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달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〇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할지어다.
*안수정등 기능장구(岸樹井藤 豈能長久) ;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의 근심을 면치 못한다. 부모가 내려주신 유체(遺體, 父精母血)를 받아 여러 인연을 임시로 빌려 함께 이루었다.
비록 다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견디어내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져 무상(無常)하게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이 사람으로 더불어 때를 정하여 약속하지 않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봄날의 서리, 새벽이슬과 같아 갑자기 없어지니,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순간 순간 빠르고 빨라서 일찰나 사이에 숨이 떨어지면 곧 내생이니, 어찌 편안히 헛되게 지내리요.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무간(無間) ; ①곧. 즉시. 끊임없이. 끊어짐이 없음. 또는 중간에 끼이는 것이 없음. '무간'은 시간적으로 계속된다는 뜻이고, 공간적으로는 끼일 틈이 없다는 뜻. ②무간업(無間業)의 준말. ③무간지옥(無間地獄)의 준말.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위경(危境) ; 위태로운 처지나 지경.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정승(政丞 정사 정/도울·정승 승) ;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 행정부의 최고 기관)의 수반(首班 행정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통틀어 이르는 말.
*부덕(婦德 아내·여자 부/덕·은혜·선행·행위 덕) ; 부녀자(婦女子 결혼한 여자와 성숙한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아름다운 덕행(德行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
*낙루(落淚 떨어질 낙/눈물 루) ; 눈물을 흘림. 또는 그 눈물.
*일장 설화(一場說話) ; 한바탕(크게 벌어진 한판)의 이야기.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생짜(生-) ; 아무런 근거나 조건도 없이 억지를 부리거나 강다짐을 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
*내소박(內疏薄 안·부녀자·아내 내/멀어질 소/야박할 박) ; 아내가 남편을 박대(薄待)함.
*박대(薄待 엷을·야박할 박/대접할·대우할 대) ; 남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野薄] 대접(待接)함. 푸대접. 인정 없이 모질게 대함.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적적성성(寂寂惺惺) ; 성성적적(惺惺寂寂).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내나 ; ①다름이 아니라. ②결국에 가서는.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어한(禦寒 막을 어/찰 한) ; 추위를 막음. 또는 추위에 언 몸을 녹임.
*더덩캥이 ; 더뎅이(부스럼 딱지나 때 따위가 거듭 붙어서 된 조각).
*누데기 ; ‘누더기(누덕누덕 기운 헌 옷)’의 사투리.
*이[蝨] ; 몸길이 1~4밀리미터이고, 몸은 보통 편평한 방추형이다. 사람의 불결한 머리나 옷, 동물의 털 등에 붙어 살면서 번식하여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해충이다. 피를 빨아 먹어서 몸을 가렵게 하는 외에 발진티푸스, 재귀열 등의 질병을 옮긴다.
*주먹탱이 ; 주먹(다섯 손가락을 모두 오무려 쥔 손)같이 둥글고 단단하게 한데 뭉쳐진 어떤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봄꿈 ; ①봄날에 꾸는 꿈. ②한때의 덧없는 일이나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생사대해(生死大海) ; '생사의 큰 바다[大海]' 중생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말.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공화(空花, 空華).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구사리 ; 일본어 'くさり(쿠사리)'이며, '쇠사슬'이라는 뜻. 자전거 체인을 말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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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偕老 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며 늙음.
*(게송)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 ;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 (가로판 p169) 게송 참고.
〇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
‘당장 이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광음(光陰 빛 광/응달 음) ; 햇빛[光]과 그늘[陰],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만단(萬端) ; 수없이 많은 갈래.
[법문 내용]
(게송)연비산산공착영~ / 대흥사 고시생의 공부 모습 / 과거 도인(道人)들의 정진 모습[선관책진(禪關策進)].
(게송)찰나생멸무상법 ~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생사 / 안수정등 기능장구 /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
자작자수(自作自受) / 숯쟁이 영감. 인간의 인연에 우연은 없다 / 우리 인생은 꿈이로되 현실.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 / 삼라만상(일체법)은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 생사는 본래 없다.
지금 이만할 때 자기를 밝히라. 이런저런 핑계 대고 미루지 말라 /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팔만대장경,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
〇오욕락(五慾樂), 재산 · 색욕 · 식욕 · 명예 · 권리, 또 수면 · 안락 이런 것이 다섯 가지 인생의 즐거움인데, 그 오욕락에 팔려서 그 재미 보느라고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망각한 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칡넝쿨에 매달려 있는,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 사람이 살아 갈수가 있느냐?
〇여름 웅뎅이에 물 마른 데 퍼드덕거리고 있는 우글대고 있는 송사리 떼와 같은 신세, 칡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서 이러한 위경(危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어서 속히 부지런히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얻을지니라.
〇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〇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〇불법은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〇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〇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바로 부처님 품안이요, 부처님 손바닥인 것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은 어디나 법당이요, 우주법계가 부처님이 꽉 차 계신다면 우주법계 · 허공계 · 육도법계는 온전히 바로 거기가 법당이요, 불회상(佛會上)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대화엄경이요, 대열반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입니다.
만사(萬事)가 유유(悠悠)한 이 백년(百年), 사람이 나서 한평생을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백 년인데, 그 백 년 동안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울다가 웃다가 슬퍼하다가 성내다가 기뻐하다가, 이럭저럭하면서 백 년 동안 인생살이가 마치 뭣과 같으냐 하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여행을 하는데, 출발해 가지고 목적지에까지 도달하는데 때로는 날씨가 좋았다가 때로는 비가 왔다가 때로는 바람이 불었다가, 겨울이면 눈이 왔다가 먹구름이 끼다가, 평지를 가다가 또는 물을 건너기도 하고 또는 산을 오르기도 하고 산을 내리기도 하고, 인생 일생사가 마치 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일별천애구시객(一別天涯俱是客)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로구나. 한번 저 하늘갓으로 떠나버리면, 이별을 해서 뚝 떠나버리면 떠나는 사람도 손이요, 전송을 하는 사람도 손이더라.
나도 여행을 하고 저 사람도 여행을 하는데, 여행하는 도중에 두 사람이 만나서 잠시 한 여관에 들어서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을 자다가 날이 새면 한 사람은 동쪽으로 떠나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떠나는 그러한 경우에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손이요,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객(客)이더라.
전송(餞送)을 하면서 또 전송을 받으니까 두 사람이 다 손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여. 구름은, 하늘에서 떠 있는 구름은 바람 따라서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고, 흐르는 물은 높은 데서 낮차운 데로 낮차운 데로 흐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이 뜬구름같이 떠났다면 서쪽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 내려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부모를 의지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때로는 남자로 태어나고 또 어떤 경우는 여자로 태어났어. 태어난 사람이 서로 결혼을 해서 아들딸 낳고 돈 벌고 이리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 또 한 사람은 나중에 떠나는데.
뜬구름이 하늘에서 바람 따라서 날아갔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흐르는 물이 지세(地勢) 따라서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내려갔다고 해서 그것을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여행 중에 두 사람이 만나가지고 여관에서 하룻밤 같이 이야기하고 지내다가 그 이튿날 이별할 때에 조금 섭섭은... 아주 다정한 경우에는 좀 섭섭한 생각은 있을 수가 있겠지만, 그걸 다리를 뻗고 땅을 치고 통곡하고 그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가족을 이루다가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뒷사람이 뒤에 간다고 해서 그렇게 통곡을 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럴 것도 사실은 없는데.
정(情)으로 얽힌 존재들이라 기왕이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해로(偕老)를 하고 자기의 명(命)을 다했으면 좋겠지만, 생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라, 이렇게 젊은 나이로 인생을 이승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민대법화 영가, 오늘 3재를 맞이해서 숙세의 인연이 있어서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서 3재 천도(薦度)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최상승 법문에 의해서 무량겁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렸고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서 다시 거기에다가 더 설할 법이 없지만 재자(齋者)의 간청으로 산승(山僧)이 잠간 법상(法床)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요, 흐르는 물과 같은 인생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 몸뚱이가 이루어졌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일점영명(一點靈明)은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수화풍 사대가 무너져서 이 육신은 버렸지만 이 일점영명은 무너진 것이 아니여.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낳다’고 해서 새로 태어난 것이 없고 ‘죽었다’고 해서 없어질 것도 없을 바에는—마치 허공에 꽃이 눈병 걸린 사람의 눈에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원래 공화(空花)는 없는 것이여.
눈병 걸린 사람에게 있어서 허공에 공화가 피었다고 해서 그 공화 자체가 피어 있는 것이 아니고, 눈병이 나아 버린 뒤에는 공화가 그 찰나에 없어진다고 해서 원래 없어졌든 공화가 새롭게 무엇이 없어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공화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생사에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고, 무엇을 천도(薦度)할 것이 또한 있느냐 이 말씀이여.
생사는 뜬구름 공화(空花)와 같은 것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원망하고 친숙하고 한 것도 또한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애착을 가질 것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처음~13분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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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한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하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인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만 송이 울긋불긋한 꽃과 잎이 우거진 청산에 둘러싸인 절이여. 절은 만 송이의 청산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고,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한 장대 길이만큼 높이 뜬 붉은 해는 영대(靈臺)를 비추더라.
영대는, 우리의 몸뚱이를 끌고 다니던 주인공 그 영대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이 빛나고, 지금 우리 용화사 법당 주변의 산이 천산만산(千山萬山)이 위요(圍繞)하고 있고, 붉은 꽃과 푸른 숲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데.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요, 곳곳이 푸른 버드나무에는 가히 말을 매 둘만 하다. 말을 버드나무에다가 말을 매 놓듯이—목적지를 향해서 가는데 말을 타고 가는데, 그 말을 쉬는데 있어서 어디라도 그 있는 버드나무에 묶어 맬 수가 있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라. 어느 집이든지 문밖에 나가면 방향을 잡어가면은 결국은 서울에 도달할 수가 있더라. 모든 길은 다 서울로 통하고 있더라.
생사(生死)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일정한 모양과 일정한 국집(局執)된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뜨면 해와 달이요, 땅으로 내려오면 산이요 물이요 나무요. 인연 따라서 천당도 좋고 극락도 좋습니다.
새로운 몸을 받아 날 때까지는 이 용화사 법보전에 여러 도반들과 더불어 법문을 듣고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좋은 곳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아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없는데 무엇을 도(道)를 닦으며, 본래 생사가 없는데 무슨 중생을 제도(濟度)하리요마는, 생사 없는 곳을 향해서 해탈(解脫)을 해야 하고, 설할 바 없는 법(法)을 향해서 법을 설해야 하고, 닦을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닦아야 하고, 한 중생도 제도 받을 바가 없는 곳을 향해서 제도를 하는 것이 바로 이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태어났다가 한평생을 살다가 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치에 있어서는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현실에 있어서는 면할 수 없는 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이 출현을 하셔야 하고, 우리는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지해서 닦아야 하고, 이렇게 또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인생에 있어서 짧은 생애를 가졌지만 본래 어질고 착하고, 불법에 깊은 인연을 맺었고 그러한 공덕(功德)으로 인해서 이 정법(正法) 도량에서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한이 있다 하더라도, 못다 푼 한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기해서 깨끗이 다 잊어버리고, 다 풀어버리고, 실상(實相)의 자리에 안주하시기를 바랍니다.(13분25초~23분9초)(끝)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 ;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재자(齋者) ; 절에 재(齋)를 올리거나 불공(佛供)하러 온 사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일점영명(一點靈明) ; 일점영광(一點靈光). 한 점의 신령한 밝음. 우리 본래 마음. 불성을 가리킨다.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〇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〇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그말이여.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공화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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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萬朶靑山圍梵刹 一竿紅日照靈臺’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염습(殮襲)’ 안좌게(安坐偈) 참고.
*(게송) ‘處處綠楊堪繫馬 家家門外通長安’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발인(發靷)’ 기감(起龕) 참고.
*영대(靈臺 신령할 영/대·받침대 대) ;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이르는 말.
*위요(圍繞 둘레·에워쌀 위/두를·에워쌀 요) ; 어떤 지역이나 현상을 둘러쌈.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삼매(三昧) : 정(定).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 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을 집중 · 통일시키는 수행, 또는 그 수행으로 이르게 된 평온한 마음 상태.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〇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법문 내용]
(게송)만사유유차백년~ / 인생일생사가마치긴여행을하는거와같다.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우리는 모두 객(客) /뜬구름, 흐르는 물과 같은 인생 /일점영명(一點靈明) / 생사는본래없는것입니다.
(게송)만타청산위범찰~ / 생사(生死)없는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 못다푼한을 다풀어버리고,실상(實相)의자리에안주하시라.
대지(大地)를 촬래(撮來)하니 속미립(粟米粒)이요. 대지. 지구덩어리. 이 지구 땅덩어리를 탁! 한 손으로 잡아오니 좁쌀 아레기, 좁쌀 한 톨밖에는 되지 아니하다.
일호두상(一毫頭上)에 현건곤(現乾坤)이로구나. 한 터럭끝에 하늘과 땅이 나타나는구나.
감소일월부도처(堪笑日月不到處)에, 우습구나, 해와 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개중별시일건곤(箇中別是一乾坤)이로구나. 이 가운데 따로 이 하늘과 땅이 있구나.
오늘은 1982년 1월 3일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과거에 온갖 슬픔과 괴로움, 모든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 없어져서, 새로운 희망과 보람으로 한 해를 맞이해서 모든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시고, 특히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돈독한 신심으로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합니다.
한 해가 시작했구나 싶으면 금방 봄이 지나가고, 더워졌구나 싶으면 금방 가을이 다가오고, 단풍이 졌구나 하면 벌써 백설이 휘날리고 그럭저럭 하다보면 또 한 해가 시작이 되고, 덧없는 세월이 이렇게 물 흘러가듯이 지나가노라면,
우리 인생도 아무 한 것 없이 백발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가고, 아무리 머리에 물을 들이고 화장을 해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안 보이게 하려고 노력을 해도 눈은 침침해지고, 허리는 아파지고, 몸은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리가 높고, 명예가 있고, 재산이 있다 하드라도 이 길은 막을 도리가 없고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의 모습입니다.
생사 속에서 중생의 욕심으로 아무리 생사를 면할려고 해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불법, 최상승법만이 이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 육체가 죽는 것을 면하고 이백 년, 삼백 년, 천 년 이렇게 살려고 하는 것은 신선도에서 그러한 길을 모색을 하고 있지만, 설사 몇백 년을 산다 하드라도 결국은 죽을 때가 있고만 마는 것이고, 그 죽는 그 자리는 허망하고 괴로운 것은 매양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오래 살려고 하는 길은 외도(外道)의 길이고,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요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기개남아시장부(幾箇男兒是丈夫)오
나무~아미타불~
생전(生前)에 부귀(富貴)는 초두로(草頭露)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고.
신후풍류(身後風流)는 백상화(陌上花)로구나. 죽은 뒤에 영화와 명예는 언덕 위에 핀 꽃과 같은 것이다.
살아생전에 큰 재산과 큰 명예 · 권리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여. 풀끝에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을 때 햇빛이 거기에 비추면 보석처럼 찬란히 반짝거리지만 바람이 한번 휙 불거나, 사람이나 짐승에 그 풀이 닿아서 움직이면 그렇게 번쩍번쩍하던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툭 떨어져버리면 간 곳이 없어지더라.
죽은 뒤에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세운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비석을 세운다, 기념관을 세운다, 무슨 사업을 한다, 죽은 뒤에 굉장히 그분의 공적을 찬양을 하지만 아무리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10년, 20년 가지 못해서 그 사람의 이름은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마치 언덕 위에 곱게 피었던 꽃이 불과 며칠이 안 가서 시들어져 떨어져버린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망망한 우주에 그 사람의 수가 한량이 없어. 지나간 과거에 살다가 간 사람이 몇억,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이 40억, 앞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또 가고 할 사람이 몇백 억이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 한량없는 수 가운데에, 기개남아(幾箇男兒)가 시장부(是丈夫)냐. 그 가운데 몇 사람이 생사 문제를 해결한 남아(男兒) 대장부(大丈夫)가 되겠느냐? 남아 대장부가 그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생사 속에서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문제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긴급한 숙제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을 하지 않는 한(限)은 육도(六途)에 윤회(輪廻)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낳아서 차츰 커가면서 공부를 하고 온갖 노력을 해서, 일생 동안 수없는 고생을 하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냐?
한 말로 말해서 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 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보다 더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자기의 목표를 설정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노력을 하고 있지마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지를 못한 채 한(恨)을 남기고 눈을 감고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는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 사람도 있지마는, 엄격하게 따져 보면 정말 그것이 자기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가 있었던가? 또 그 업적이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가?
따져 보면 별것이 아닌 것입니다. 재산이라든지 명예 · 권리라든지 또는 어떤 학문이라든지, 어떤 인간에 필요한 기계를 연구를 했다든지, 어떤 학설을 발표를 했다든지, 인간 세상에 일시 필요한 것일런지는 모르지만 궁극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최상승법은 모든 중생들에게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이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시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데에 그 길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간단한 것입니다.
금방 녹음(錄音)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마는 「내가 나를 찾는 공부,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參禪法)에,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병이 무엇이냐?
고황병(膏肓病)이라 하는 병인데, 고황병이라 하는 병은 한번 들어 버리면 천하 없는 명의도 이 병은 고칠 수가 없다. 이렇게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내가 결정코 타파(打破)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타파하는 데 있어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사용을 해서는 아니된다. 오직 그 화두에 대한 의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의심을 하는데, 화두를 금방 들었는데 1분도 못 가서 딴생각[別念]이 들어와 버려. 또 화두를 '이뭣고?'하고 들면 불과 1분도 못 가서 딴생각이 들어와 버려. 딴생각이 들어온 줄 알면 다시 또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화두를 들어서 묵묵히 의심으로 관조하고.
앉아서 들었던 화두가 서면서 깜박 잊어 버리고, 금방 들었던 화두가 누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찰나에 ”예“ 하면서 그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렇지만 끝까지 후퇴를 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져 있게 된 때가 꼭 오고만 마는 것입니다.(처음~21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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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해 나갈 때 화두를 들면 잘 들리고, 들렸던 화두가 고대로 주욱 의심으로 관조가 되어 갈 때에는 머리도 개운하고 가슴도 시원하고 30분, 1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게 휘딱 이렇게 지나가는데, 그리고 앉는 몸도 그렇게 편안하고 아무 부담이 없는데.
그렇게 잘 나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겁고 시간이 5분,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몸뚱이가 그렇게 뒤틀리면서 지루하고 이렇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슴은 답답하고.
이러할 때가 오는데, 이러할 때에 어떻게 이 고비를 넘겨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境界)가 왔을 때 '아하! 내가 이 마장(魔障)이 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에는 '아! 내가 이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 자세를 첫째,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서서히 부담없이 하면서 화두를 잘 들면 되는 것이고,
그리해도 그 가슴 답답하고 골이 아프고 지루하고 한 것이 잘 풀리지 아니하면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포행(布行)을, 한 10m 내지 20m 직선으로 조용한 뜰이나 마당에 정해 놓고서 직선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그 화두를 들어서 관조하고 이렇게 5분 내지 10분을 하면 가슴이 좀 후련해지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또다시 자기 자리에 들어가서 또 가부좌(跏趺坐),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서 호흡을 고르면서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그러한 경계를 잘 고비를 넘기면 한결 공부가 수월하게 되어 질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는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이라 하는 것을 잘 명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길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설사병이 나건 또는 감기를 앓건, 병을 한번 앓고 나면 한결 키도 자라고, 살은 좀 빠진 듯하지만 키가 완연히 한 치 가량이 푹 자라고 되고, 그리고 그전에 아니하던 귀여운 재롱도 늘게 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크다가 감기를 앓는다든지 설사를 앓는다고 해서 이걸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때 잘 거두고 조리를 잘 시키면 그러는 가운데 아이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기 한번 앓지도 않고, 설사 한번도 앓지를 않고 갓난애기 때부터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곱게 그렇게만 자란다고 하는 것은 있기가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과수(果樹)나무라든지 또는 화초 같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불고 눈서리를 맞으면서 그렇게 자라야만 그 나무가 온전히 굳세게 자라는 것입니다. 밤낮 온실 속에서 바람 한번 찬바람 한번 쐬 보지 못하고, 눈 · 비 · 서리도 맞아보지 아니하고 온실 속에만 자란 나무는 별로 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약해 빠져서 아무짝에도 못쓰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를 하는 사람도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 순경계(順境界), 때로는 공부가 순풍에 돛 달듯이 그렇게 수월하게 잘되어 가기도 하고, 때로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세차게 부는 바람을 앞으로 맞으면서 그 힘들여서 배를 저으면서 올라가는 그러한 고비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는데 밤낮 걸어가기 좋은 평탄한 길만 가기보다는 때로는 물을 건너기도 하고, 때로는 가파른 경사진 길을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가기도 하고, 곱이곱이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하고 등산을 해야만 거기에서 몸도 건강해지고, 인상에 남는 것도 있고 그럴 것입니다.
등산이라고 하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뭐하러, 오르기 좋은 그러한 산을 부담없이 기쁜 마음으로 올라갔다가 하루 재미있게 놀다가 내려오지, 왜 하필 히말라야 같은 그 힘든 얼음산을 올라가다가 둘씩, 셋씩 떨어져 죽고, 형이 떨어져 죽으면 또 동생이 가고. 그 사람이 운동도 좋지만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런 짓을 왜 할까 보냐, 미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냐?'하고 생각이 될는지 모르지만, 등산에는 등산의 도(道)가 있는 것입니다.
예술에는 예술의 도(道)가 있고, 학문에는 학문의 도(道)가 있듯이, 우리의 참나를 깨닫는 참선에는 참선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계가 없는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무 매력도 없고 맛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이고, 또 비약적인 경계에도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인행(因行) 때의 수행을 거치셨고 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셔가지고서도 12년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苦行)을 겪으시면서 도를 구하셨습니다.
물론 도라고 하는 것을 고행 일변도(一邊倒)로, 지나친 고행 위주(爲主)로의 수행도 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도를 닦는데 고행을 완전히 없이하고 순한 경계에서만 도를 닦으려는 마음도 또한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잘 잠 다 자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그러면서 참나를 깨달으려는 생각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생각인 것입니다. 도저히 대각(大覺)을 그래가지고서는 바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노두군자간(生死路頭君自看)하라 활인전재사인중(活人全在死人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화기자래심호리(花氣自來深戶裡)헌디 조성장재원림중(鳥聲長在遠林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생사노두(生死路頭)를 군자간(君自看)하라. 생사 길머리를 그대는 스스로 보아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차례차례 다 저승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지 않고 영원히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팔십에 가기도 하고, 칠십에 가기도 하고, 육십 오십에 가기도 하고, 젊어서 가기도 하고, 어려서 가기도 하고, 나오다가 가기도 하고.
활인전재사인중(活人全在死人中)이라. 살아 있는 사람은 온전히 죽은 사람 가운데 있구나. 우리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 가운데 있어.
앞에서 죽고 뒤에서 죽고, 왼쪽에서 죽고 오른쪽에서 죽고, 세계에 하루에 몇천 명, 몇만 명이 병으로 죽고, 차 비행기 사고에 죽고, 배가 가라앉아 죽고, 전쟁하다 죽고, 불이 나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온통 죽은 사람 속에 산 사람이 있어.
말을 바꿔서 말하면 내 자신도 '죽을 사(死)'자, 주검 위에 지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살다가 이 몸뚱이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그것을 '죽었다'고 그러는데, 그러한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죽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평생을 살다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육칠십 년을 살다 가는 게 아니라, 태어난 찰나부터 한 생각 일어나면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한평생을 살고 죽은 것이고, 그러자마자 또 한 생각이 일어나면 또 새로 태어난 것이고, 한 생각이 꺼지면 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1초 1초 지나가면서 수없는 생사, 생사, 생사가 되풀이되면서 생사의 수레바퀴, 생사의 수레를 타고 생사의 길을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우리는 정말 발심(發心)을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칠팔십 년 살다가 죽으리라, 그러니 아직도 내가 죽을라면 몇십 년이 더 있어야 할 테니 죽음 문제 같은 것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느긋하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慾樂) 속에 빠져서 참나를 깨달으려는 생각을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지내가고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생사(生死)가 코앞에 있고, 생사의 수레바퀴를 타고 죽음을 향해서 지금 끌려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낀다면 이 문제보다도 더 심각하고 급박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가정도 다 버리고, 직장도 다 버리고, 사회 국가도 다 버리고 우리도 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다 출가(出家)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40억 인구가 일제히 다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실천해 나간다면 온통 이 세계가 고대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이고,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될 것이고, 천당이 되어서 싸움도 거기에는 없을 것이고 그러겠지만,
그것은 모든 중생들의 업(業)이 천차만별이어서 이것은 강요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권력자의 명령으로도 될 수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인간으로서 맡은 책무를 성실히 실천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이미 출가를 한 것입니다.
'출가'라 하는 말이 꼭 속복(俗服)을 벗고 산으로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어야만 출가가 아니고, 세속에 있으되 세속에 있으면서 속복을 입고 머리 기른 채 한 생각 돌이키면,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벌써 거기에는 출가한 사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설사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고 절에서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화두를 놓치고 속된 생각이 일어난다면 바로 속인(俗人)이 되는 것입니다.
출가(出家)와 재가(在家)의 구별이 형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청정하냐, 청정하지 못하느냐'로 결정을 내야 할 것입니다.
소금이 마치 '빛깔이 희냐, 검느냐'로 판별을 할 것이 아니라, 아무리 희다 하더라도 조금도 짠맛이 없다면 그것은 모양이 아무리 소금같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금이라 할 것이 못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최상승법인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일정한 형식, 고정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차를 타면서도 하고 일을 하면서도 하고, 괴로울 때도 하고 슬플 때도 하고, 외로울 때도 하고 편안할 때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언제 어디서라도 할 수가 있는 것이요 어데서라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21분18초~42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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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정주부는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학과목 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 가운데 학교 가면서, 학교 가서 교정에 있으면서,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오면서, 집으로 와서 차(茶)를 타면서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면서 바로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슬플 때에 '이뭣고? 이 슬퍼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화두를 들면 슬픈 생각이 스르르르르 가라앉게 되면서 거기에서 도심(道心)이 발하게 될 것이여.
속이 상해서 가슴이 미어지려고 할 때에도 숨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할 때에 미어질 듯한 가슴 답답함이 스르르르르 가라앉으면서 감정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일대(一大)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도 썩어 문드러져서 그 나라가 도저히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부패한 나약한 나라가 될 때에는 반드시 이웃나라로부터의 침범을 받게 되는 것인데, 그러할 때를 당해서 충신열사(忠臣烈士)들이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빠져서, 해태(懈怠)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고 잘 먹고 잘 입고 무사안일(無事安逸)함만을 탐익(耽溺)하다가 세월은 흘러가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한 속에서 불법을 만나서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어서, 마음속에 무상(無常)을 깨닫고 참선을 해 가지고 정신혁명을 일으킨다면 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고, 너무 공부하는 도장(道場)이 바로 자기 발 디디고 섰는 곳이 선방(禪房)이요 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방에 앉았으면 방이 선방이요, 부엌에 가면 부엌이 자기의 선방이요, 차를 타면 차가 바로 자기의 선방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도반(道伴)이요, 우리의 선지식이요, 불보살(佛菩薩)의 화현(化現)이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시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지내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다져 나가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한 분에게는 모든 재앙은 사라질 것이며, 자기의 원하는 바는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이 차례차례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해서 모든 자기 마음속에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최상승법을 실천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항시 불보살의 따스한 자비의 눈매가 이마에 와 어루만져 질 것입니다.
그리고 법계(法界)에 모든 선신(善神)들은 그 사람을 항시 옹호(擁護)해 주고 있을 것입니다. 이십오 신장(神將)이 그 사람을 보호해 준다 했습니다.
마음속에 답답한 원이 있을 때 성지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항시 이 최상승법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한 생각도 망각함이 없이 다져 나가고 다져 나간다면 그 사람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불보살과 모든 선신들의 가피(加被)와 옹호가 따르기 때문에 무슨 소원이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죽비(竹篦)를 치고 잠시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자세를 편안하게 가지십시오. 반가부좌(半跏趺坐),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중심을 잡으십시오.
허리를 쭉 펴되, 항시 좌선할 때에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자세를 잡느냐 하면 머리, 이 정수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이렇게 쭉 들어가지고 그것을 저 천장에다가 달아매서 '이 몸뚱이가 머리카락 하나에 매달려 가지고 지금 앉아 있다'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머리, 이 정상으로부터 얼굴과 몸뚱이가 수직으로 될 것입니다. 좌우나 전후로 기울거나 넘어진 법이 없이 한 시간 두 시간을 앉아 있어도 그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 머리에, 정상에 있는 머리 한 올의 머리칼로써 지금 매달려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 말이 필요 없이 몸은 단정하게 될 것입니다.
어깨의 힘도 다 빼고, 목의 힘도 다 빼고, 이는 어금니부터서 지그시 물되, 너무 힘들여서 물지도 말고 지그시 물고, 입은 '한 일(一)'자로 다물되 가볍게 다무는 것입니다.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십시오.
눈은 너무 뚝 부릅뜨지도 말고, 너무 가늘게 뜨거나 감지 말 것이며 평상(平常)으로 뜨면 됩니다.
먼저 숨을 한 점도 남김없이 완전히 다 입을 통해서 토해 내십시오.
입을 동그스름하니 조그만하니 열고서 숨을 '후~'하고 완전히 다 내뿜으십시오. 가슴이 약간 홀쪽해진듯 하면서 다 내뿜으시는 것입니다.
다 내뿜었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코를 통해서 들어마십니다. 들어마실 때 가슴을 약간 드는듯 하면서 가슴에 가뜩 들어마시십시오. 가슴이 미여질 정도로 들어마셔.
더이상 들어마시지 못할 때 한참 그 상태로 참았다가 입으로 '후~'하고 또 내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또 들어마셔. 한참 참았다가, 입으로 '후~'하고 내쉽니다.
이렇게 세 번쯤 한 다음에 정식 단전호흡(丹田呼吸)으로 들어갑니다.
단전호흡은 코로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신다'하는 생각을 갖지 말고, 저 궁댕이 뒤에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 단전(丹田)이 약간 볼록해진 것을 느끼면서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8부(八部)쯤만 들여마셔.
들어마신 호흡을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되 '코로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로 수~욱 내보낸다는 기분으로 내쉬면서 배를 차츰차츰 홀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내쉬는 것입니다.
(정진)
참선을 30분이나, 한 시간 이렇게 하고 이제 그만 좌선(坐禪)을 하고 일어서려고 할 때에는 숨을 다시 깊이 들어마셨다가 '후~'하고 또 한 서너 번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몸을 또 좌우로 서너 번 이렇게 흔들고.
그리고 인자 이 손을 요렇게 싹싹싹싹 비벼서, 손바닥이 뜨끈뜨끈한 손을 가지고 눈 위에다 이렇게 오목하니 해서 눈을 이렇게 가리고 그 속에서 눈을 딱 뜨세요. 그리고 그 손으로 또 얼굴을 이렇게 만지고요.
또 손을 비벼서.... 이 비빌 때 눈을 감고 비비고, 그래가지고 그 뜨끈뜨끈한 손을 눈 위에다 덮은 다음에 그 속에서 눈을 이렇게 뜨세요. 뜨고 난 다음에 그 손으로 얼굴과 귀와 얼굴을 잘 만지세요.
그렇게 한 다음에 다리가 저린 사람은 다리를 뻗고 다리도 좀 주무르고, 발목도 돌리고 이렇게 해서 잘 푼 다음에 조용히 일어서는 것입니다.
30분이나 1시간 또는 2시간 이렇게 앉아서 좌선을 하다가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일어설 때 갑자기 불끈 일어서고, 갑자기 나가서 달음박질을 한다든지, 뛴다든지 이것은 대단히 해로운 것입니다.
그리다가 혹 심장병이 생기기도 하고 또는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기도 하고, 그것이 앉았다가 일어설 때 함부로 해가지고 그런 병이 생기는 수가 흔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선을 많이 하신 스님네나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께서도 앉았다 일어설 때 항시 그런 준비 운동을 하고 나서 조용히 일어서도록 주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부귀일시락(人間富貴一時樂)이요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인데 인무일점호신심(人無一點好身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간부귀(人間富貴)는 일시락(一時樂)인데, 인간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한때의 낙(樂)에 지나지 못하는데,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이다. 지옥에 쓰라린 고통은 만겁(萬劫)이나 길고 길더라.
잠깐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한 인간의 즐거움 그것을 맛보다가,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죄를 짓다가 그 잠깐 쌈박한 맛에 취해가지고 그것을 탐닉하다가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그 몸서리치고 쓰라리고 괴로운 그 고통은 무량겁이나 길고 지옥에서 나올 기약이 없더라.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인데, 이 세상에 일월(日月), 해와 달, 하루하루가 가면 한 달, 한 달 한 달이 가면 일 년, 일 년 일 년이 가면 십 년, 수천 년, 만 년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 많은 한가한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몸이 아무 병이 없이 편안하고, 마음도 아무 고통이 없이 즐겁기만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더라[人無一點好身心].
오장육부 사지백체(四肢百體) 어디가 아프던지 아프고, 무슨 걱정이 있든지 걱정이 있지, 걱정도 없고 몸이 괴롭지도 않고 그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더라 그 말씀이여.
자꾸 '생사가 두렵다. 인간이 무상하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정말 그놈의 생사를 어떻게 해야 면할 것인가? 여태까지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한 사람도 생사를 면한 사람이 없다니, 그럼 뭐 참선해 봤자 죽을 사람 다 죽고 그러니 뭐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소리가 뭔 소리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분명히 말하자면, 조금도 거짓을 붙이지 아니하고 사실 고대로 말하자면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어요. 그래서 해탈할 것도 없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생사가 없는데 무슨 또 지옥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지옥도 없는 것이요, 천당도 없는 것이요, 생사도 없는 것이여. 또 우리가 증득해야 할 열반(涅槃)이라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해탈(解脫) : [범] Vimokṣ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고황병(膏肓病) ; 고황(膏肓) · 고황지병(膏肓之病)이라고도 한다. 고황에 들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황은 심장과 횡격막의 사이에 있는 부분으로 이 사이에 병이 생기면 낫기 어렵다고 한다. 고(膏)는 심장의 아랫부분이고, 황(肓)은 횡격막의 윗부분.
고황에 병이 들었다는 의미는 병이나 못된 버릇이 고칠 수 없도록 심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벼운 것이 아닌 불치의 병, 중병 등을 말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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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어떤 일에 장애가 생기는 것. 불도(佛道) 및 선법(善法)의 수행에 장애가 생기는 것.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곱이곱이 ; 길이나 강물 따위가 여러 굽이로 휘어져 구부러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대각(大覺) ; 부처님의 깨달음. 정각(正覺) · 대오(大悟) 등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들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覺他] 각(覺)과 행(行)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대각이라 한다. 또는 부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
*'사람이 태어나서 육칠십 년을 살다 가는 게 아니라, 태어난 찰나부터 한 생각 일어나면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한평생을 살고 죽은 것이고.... ....1초 1초 지나가면서 수없는 생사, 생사, 생사가 되풀이되면서 생사의 수레바퀴, 생사의 수레를 타고 생사의 길을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p103-104. (가로판 p101~103)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고.
*화두(話頭) ;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출가(出家) : [범] Pravrajita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영산회상(靈山會上) ; ①석가모니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②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花微笑)의 회좌(會座).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무사안일(無事安逸 없을 무/일 사/편안할 안/한가할 일) ; 어떤 일[事]에도 해결하려 하지 않고[無] 편안(便安)하고 한가하게[逸]만 지내려는 태도.
*탐닉(耽溺 즐기다·좋아하다 탐/빠지다 닉·익) ; 어떤 일을 몹시 지나치게 즐겨서[耽] 거기에 빠짐[溺].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〇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〇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〇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옹호(擁護 안을·지킬 옹/보호할 호) ; 어떤 대상을 두둔하고 편들어 지킴.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게송) '인간부귀일시락(人間富貴一時樂)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 ; 『석옥청홍선사어록(石屋淸洪禪師語錄)』 하권, '산거시(山居詩)' 참고.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지백체(四肢百體) ; 몸의 전체.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법문 내용]
(게송)대지촬래속미립~ /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 /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생사노두군자간~ / 살아 있는 사람은 온전히 죽은 사람 가운데 있구나 / 출가(出家)와 재가(在家) / 참선 공부는 그래서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일대(一大)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 / (게송)인간부귀일시락~ / 생사는 본래 없다.
〇이 세상에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리가 높고, 명예가 있고, 재산이 있다 하드라도 이 길은 막을 도리가 없고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의 모습입니다. 생사 속에서 중생의 욕심으로 아무리 생사를 면할려고 해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불법, 최상승법만이 이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〇불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최상승법은 모든 중생들에게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이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시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데에 그 길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간단한 것입니다.
금방 녹음(錄音)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마는 「내가 나를 찾는 공부,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〇참선법(參禪法)에,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병이 무엇이냐? 고황병(膏肓病)이라 하는 병인데, 고황병이라 하는 병은 한번 들어 버리면 천하 없는 명의도 이 병은 고칠 수가 없다. 이렇게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〇공부가 잘되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겁고 시간이 5분,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몸뚱이가 뒤틀리면서 지루하고 가슴은 답답하고 이러할 때가 오기도 하는데, 이러할 때에 어떻게 이 고비를 넘겨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境界)가 왔을 때 '아하! 내가 이 마장(魔障)이 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에는 '아! 내가 이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〇그 길이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계가 없는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무 매력도 없고 맛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이고, 또 비약적인 경계에도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인행(因行) 때의 수행을 거치셨고 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셔가지고서도 12년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苦行)을 겪으시면서 도를 구하셨습니다.
〇살아 있는 사람은 온전히 죽은 사람 가운데 있구나. 우리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 가운데 있어. 말을 바꿔서 말하면 내 자신도 '죽을 사(死)'자, 주검 위에 지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입니다.
〇참선 공부는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일대(一大)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도 썩어 문드러져서 그 나라가 도저히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부패한 나약한 나라가 될 때에는 반드시 이웃나라로부터의 침범을 받게 되는 것인데, 그러할 때를 당해서 충신열사(忠臣烈士)들이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빠져서, 해태(懈怠)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고 잘 먹고 잘 입고 무사안일(無事安逸)함만을 탐익(耽溺)하다가 세월은 흘러가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한 속에서 불법을 만나서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어서, 마음속에 무상(無常)을 깨닫고 참선을 해 가지고 정신혁명을 일으킨다면 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정진을 한 다음에 다리가 저린 사람은 다리를 뻗고 다리도 좀 주무르고, 발목도 돌리고 이렇게 해서 잘 푼 다음에 조용히 일어서는 것입니다.
30분이나 1시간 또는 2시간 이렇게 앉아서 좌선을 하다가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일어설 때 갑자기 불끈 일어서고, 갑자기 나가서 달음박질을 한다든지, 뛴다든지 이것은 대단히 해로운 것입니다. 그리다가 혹 심장병이 생기기도 하고 또는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기도 하고, 그것이 앉았다가 일어설 때 함부로 해가지고 그런 병이 생기는 수가 흔히 있는 것입니다.
〇분명히 말하자면, 조금도 거짓을 붙이지 아니하고 사실 고대로 말하자면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어요. 그래서 해탈할 것도 없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생사가 없는데 무슨 또 지옥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지옥도 없는 것이요, 천당도 없는 것이요, 생사도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증득해야 할 열반이라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는 없는데, 현실적으로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