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하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몸이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물 찾기를 쉬어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날마다 재를 넘어 다니니 산을 찾지 말아라. 바닷속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있으면서 '물이 어디가 있는가?' 하고 물을 찾지 말고, 날마다 재를 넘어 다니면서 '산이 어디가 있는가?' 하고 산을 찾지 말아라.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백 년이면, 일 년이 삼백육십 일이니까 백년이면 삼만육천 일인데, 백년(百年) 삼만육천조(三萬六千朝)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니라. 백 년 삼만육천 일 반복하는 놈이, 엎쳤다 뒤쳤다, 앉았다 일어났다, 오고가고, 그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더라.
오늘은 임술년(壬戌年) 2월 초하루, 반살림 결제(結制)날입니다. 그전에는 전강 조실(祖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쭈욱 해제(解制) 동안에도 스님네가 해제했다고 해서 이렇다 할 꼭 갈 곳도 없으면서 모다 걸망을 지고 불불이 나가서 여기저기 동서남북으로 그럭저럭 다니면서 다음 철 결제까지 기다리느라고 정처(定處)없이 모다 행각(行脚)도 하고, 모다 이리 가서 쉬기도 하고 약(藥)도 먹고 모다 그랬는데,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이 도량(道場)에서 결제 때와 똑같이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면서 정진을 하는 것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해서, 산철에도 가시지 말고 여기서 공부를 하시기를 바래서, 그렇게 해서 스님네가 이 산철에도 정진을 쭈욱 해 내려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금년(今年)부터서는—옛날에 그렇게 산철에 정진을 했지만, 뭐 '산철결제'라 하고 무슨 결제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고 그러지는 안 했습니다. 금년에는 이렇게 새로 선방(禪房)도 짓고 이렇게 법당(法堂)도 짓고 그랬으니, 기왕 산철에 결제를, 안거(安居)를 하기로 한다면 간략히 결제 법요식을 갖는 것이 우리의 신심(信心)을 굳건히 하고 여러 가지 분위기를 엄숙히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이리해서 여러 스님네의 뜻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간략히 법요식을 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다 신도님한테는 '산철 결제 법요식에 참석하시라'는 구체적인 발표는 하지 안 했는데, 이렇게 특별히 신심(信心)이 있는, 또 인연(因緣)이 있는 몇 분의 신도님네들이 참석을 해 주셔서 이것도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因緣)의 소치(所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각국사(眞覺國師)에 좌우명(座右銘)」이 있는데, 그 좌우명을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우리 정진(精進)을 해 나가는 출가(出家) 납승(衲僧)으로서 뜻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보살자(菩薩子) 보살자(菩薩子)여.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니라. 보살이여, 보살의 자식이여, 보살이여. 우리가 모다 보살의 자식이요, 새끼보살이라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여. 항상 스스로 자기 머리를 어루만져 보라 그 말이여. 깊은 씀[有]이 있으리라, 깊은 의의(意義)가 있으리라.
마두인득심사량(摩頭因得審思量)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냐. 머리를, 자기 머리를 자기가 떠억 어루만지면서 깊은 사량(思量)을, 생각한 바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여. '부처님이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져 준다'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가 자기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여.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냐, 출가(出家)한 본뜻이, 목적이 무슨 일을 목적으로 해서 출가를 했느냐?
승기상모속기심(僧其相貌俗其心)이요, 모냥은 분명히 중에 모냥을 하고 있는데, 그 마음은 속인(俗人)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참으로 여법(如法)한 출가인(出家人)으로서의 몸과 마음을 다 갖추었느냐. 가불참천이괴지(可不慚天而愧地)니라. 가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일이고, 땅을 내려다보고 부끄럽지 않느냐.
추행광언임여위(麤行狂言任汝爲)요 확탕노탄하회피(鑊湯爐炭何回避)리요. 머트러운 행동과 미치광이 같은 말을 니 멋대로 행하고, 니 멋대로 지껄이다가 확탕노탄(鑊湯爐炭)을 하회피(何回避)냐, 확탕(鑊湯)지옥과 노탄(爐炭)지옥을 어떻게 회피할 수가 있겠느냐.
이건 진각국사(眞覺國師)가 항시 자기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던 글입니다. 이 글은 바로 출가 납승으로서는 누구나 이러한 좌우명으로써 자기(自己)의 좌우명(座右銘)을 삼는다 해도 조끔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기가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이 좌우명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 가운데에도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있는 법문을 해 주셨는데, 네 가지의 은혜(恩惠)가 중(重)한 것을 잊지 않았느냐? 사대(四大) 오온(五蘊)이 생각 생각이 일 초 일 초 늙어가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안 했느냐?
너의 목숨이 호흡지간(呼吸之間)에 달려 있는 것을 잊지 안 했느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와 조사(祖師)를 만났느냐? 이러한 등(等)의 여러 가지 그 법문을 해 주셨는데, 그러한 말씀도 우리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그런 중대(重大)한 법문(法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출가한 선객(禪客)이 무엇이 제일 고민(苦悶)이냐? 옷이 없는 것도 고민이 아니요, 먹을 것이 없는 것도 고민이 아니요, 건강이 좋고 나쁜 것도 그것도 큰 고민이 아니고, 오직 큰 고민은 '정진(精進)이 순일(純一)하게 되냐, 안 되느냐?' 오직 이 하나의 고민이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중국에 고봉선사(高峰禪師), 『선요(禪要)』 법문을 하신 그 고봉선사께서도 처음에 출가해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參禪)을 하는데, 어떻게 잠이 퍼오던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포단(蒲團) 위에 앉어 있을 수가 없었어. 부득이 밥을 먹을 때에만 방석에 앉어서 밥을 먹고는 그밖에는 방석에 앉어 있을 수가 없어. 앉었기만 하면 혼침(昏沈)이 와서 졸음이 오기 때문에 앉지를 못하고.
금방 앉으려고 하면은 잠이 퍼와 가지고는 꾸뻑, 일어나 가지고 밖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는데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 먹을 때까지 그래 가지고 왔다갔다하면서 잠을 깨 가지고, 잠이 깨져서 막 좀 가서 방석에 가서 앉으려고 하면은 또 잠이 오고. 잠이 깨면은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망상이 좀 가라앉을만 하면 잠이 오고 이랬는데, 처음에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결심(決心)을 하기를 '3년 동안 정진을 해 가지고 3년이 되어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면 죽어 버릴 각오'를 하고 공부를 시작을 했는데, 3년이 거의 다 되도록 조끔도 공부가 진취(進趣)가 없었어. 죽을 날은 얼마 안 남았는데, 기한은 얼마 안 남었는데 공부가 전혀 진취가 없어.
이 세상에 무엇이고 3년 동안 적공(積功)을 들이면 숙달(熟達)이 되어서 많이 진취가 있는 것인데, 어찌된 셈인지 혼침(昏沈)과 산란(散亂)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아무리 고단해도 자리에 눕지를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데 3년이 되도록 조끔도 진취가 없어. 혼침과 산란, 두 가지로 완전히 24시간이 점철(點綴)이 되어. 혼침 아니면 산란, 산란 아니면 혼침. 아무리 곤(困)해도 자리에 눕지를 않고, 낮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밤새도록 잠을 안 자려고 도량에 나가서 왔다갔다. 밥 한 그릇 먹는 그 잠깐 동안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지를 아니했어.
그리다가 마지막에 가서 달마(達摩) 스님 기일(忌日)에, 달마 스님 모셔진 영각(影閣)에 올라가서 그 제사를 지내는데, 그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 진영(眞影)에 쓰여 있는 글에,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그 영찬(影讚)을 보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는데.(처음~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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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확철대오 하기 전 일주일 전에 꿈에 단교화상(斷橋和尙)이 보이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그 화두(話頭)를 꿈에 받고서 꿈을 깼는데,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밥을 먹어도 의심이요 똥을 누어도 의심이요, 산을 봐도 의심이요 물을 봐도 의심이요, 대중 가운데 있어도 대중은 한 사람도 보이지도 않고, 오직 의단만이 독로해서 밥도 건성으로 먹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하려고 해도 딴생각이 나지를 않고 오직 화두만이 독로를 했다.
그 전에는 화두를 아무리 들려고 해도 들을 때뿐이지, 금방 산란심(散亂心)이 들어와 버리고 그랬었는데, 꿈에 단교화상 '만법귀일' 화두를 받은 이후로는 제절로 그렇게 되었더라. 그래 가지고 이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가 일주일을 고대로 가는데, 마침내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 이란 영찬(影讚)을 보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는데.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해서 3년 동안을 그렇게 애를 썼어도 공부가 일호(一毫) 진취(進趣)가 없었느냐? 그 원인을 캐 보니까, 다른 데에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정(疑情) 상(上)에서 공부를 짓지 아니한 데 있더라. 화두(話頭)만을 자꾸 거각(擧却)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공부가 잘 안 된다', '의심이 잘 안 든다' 많은 수행승(修行僧)들이 이 년, 삼 년 내지 십 년을 선방으로 다니면서 공부를 해도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못하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가끔 "어떻게 하면 의정이 돈발하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다정한 도반(道伴)이 무상(無常)하게 죽은 것을 보고, 그 도반이 죽어서 사십구재(四十九齋)날 김응애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들어오셔서 그 용맹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하셨습니다마는. 그러한 특별한 발심(發心) 기연(機緣)이 있거나, 스스로 그렇지 못하면 이 고봉 스님의 경우와 같이 되고 안 되고 할 것도 따지지 말고, 아주 죽기로 맹서(盟誓)를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1년 2년 3년, 이렇게 피나는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공부가 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모기가 마치 쇠로 된 소에 입부리를 박듯이—모기가, 그 약하디 약한 모기가 어떻게 쇠로 지어 붓어진 소 몸에다가 그 입부리를 박은들 들어갈... 상식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들어갈 것이다, 안 들어갈 거다'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몸뚱이 채 쇠로 된 소 몸에다 뚫고 들어가는 것이여. 입부리와 자기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거나 말거나,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한 것을 전혀 따지지 아니하고 몸뚱이 채 아주 육탄(肉彈)으로 소를 향해서 몸을 던진다 이 말인데.
이러한 대용맹심, 조실 스님께서도 도반의 죽음으로 해서 무상함을 깨달라서 발심을 하셔 가지고 대중의 사분정진에 구애(拘礙)받지 아니하고,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하나 깔아 놓고 거기서 앉아서 정진을 하다가 졸으면 또 포행(布行)을 하고 또 졸음이 나가면 정진을 하고 무섭게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懇切)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대중이 모여서 방을 짜서 정진을 하게 되니까 대중(大衆)의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되겠지만, 대중의 규칙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철저한 자기 규칙,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고봉 스님처럼 전강 조실 스님처럼 그러한 철저한 가행정진을 해서 기어코 이번 철에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망회(忘懷)에 타귀굴(墮鬼窟)이요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라.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하고, 생각을 자꾸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노력을 하면, 망회(忘懷)를 잊어버리면, 회포(懷抱)를 생각을 잊어버리면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에 떨어지고,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다. 뜻을 착(着)하면,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이 무슨 생각이 되었건, 벌써 뜻을 착(着)하면 잔나비의 뜻에 놀아난 것이다.
갱의제이병(更擬除二病)하면, 생각을 잊으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뜻을 부딪치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이 두 가지 병[二病]을 없애려고 뉘기 짜면, 미면야호정(未免野狐精)이다. 야호에 정, 야호정(野狐精), 야호(野狐)는 여우, 여우에 정(精)을 면틀 못할 것이다.
생각을 잊어버리면 귀신굴(鬼神窟)에 떨어지고, 뜻을 부딪히면, 착(着)하면 원숭이의 정(精)에 놀아나고, 이 두 가지 병(病)을 없애려고 하면 야호(野狐)의 정(精)을 면틀 못한다.
그렇다면 물이 둥글고 모난 그릇에 따르듯이, 둥근 그릇에다 담으면 물도 둥그렇게 담아지고, 모난 그릇에다 담으면 물도 모나게 담아지고, 경수호환형(鏡隨胡漢形)이다. 거울은 검은 것이 거울 앞에 나타나면 검은 것이 거울 속에 비추고, 흰 것이 나타나면 흰 영상(影像)이 거울 속에 드러나듯이.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가져가면 어떻겠느냐. 유교환롱맹(猶較患聾盲)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마치 귀먹은 벙어리와 눈이 먼 장님에다가 비유할 수밖에는 없느니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아 가는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과연 어떻게 일용(日用)을 써 가겠는가, 수용(受用)을 해 갈 것인가?
고봉스님 3년 공부가 진취가 없었던 까닭은? 화두만을 자꾸 거각(擧却)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 고봉스님, 전강 조실스님처럼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懇切)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 / 자가철주(自家鐵柱) / (게송)망회타귀굴~, 수임방원기~ /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과연 어떻게 일용(日用)을 수용(受用)을 해 갈 것인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〇진각국사(眞覺國師)가 항시 자기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 쓴 「좌우명(座右銘)」 이 글은 바로 출가 납승으로서는 누구나 이러한 좌우명으로써 자기(自己)의 좌우명(座右銘)을 삼는다 해도 조끔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기가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이 좌우명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〇고봉스님이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해서 3년 동안을 그렇게 애를 썼어도 공부가 일호(一毫) 진취(進趣)가 없었느냐? 그 원인을 캐 보니까, 다른 데에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정(疑情) 상(上)에서 공부를 짓지 아니한 데 있더라. 화두(話頭)만을 자꾸 거각(擧却)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공부가 잘 안 된다', '의심이 잘 안 든다' 많은 수행승(修行僧)들이 이 년, 삼 년 내지 십 년을 선방으로 다니면서 공부를 해도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못하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〇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도반의 죽음으로 해서 무상함을 깨달라서 발심을 하셔 가지고 대중의 사분정진에 구애(拘礙)받지 아니하고,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하나 깔아 놓고 거기서 앉아서 정진을 하다가 졸으면 또 포행(布行)을 하고 또 졸음이 나가면 정진을 하고 무섭게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懇切)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대중이 모여서 방을 짜서 정진을 하게 되니까 대중(大衆)의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되겠지만, 대중의 규칙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철저한 자기 규칙,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고봉 스님처럼 전강 조실 스님처럼 그러한 철저한 가행정진을 해서 기어코 이번 철에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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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철수화개별시춘(鐵樹花開別時春)이요, 쇠나무, 쇠로 된 나무에, 고목(枯木)나무에 꽃이 피니 별단(別段) 이 봄이요, 차디찬 쇠로 된 고목나무에 꽃이 피니 이 특별한 이 봄이다. 사해향풍(四海香風)이 종차기(從此起)로구나. 동해, 동서남북 사해(四海)에 향기로운 바람이 이로부터서 일어나는구나.
오늘은 임술년(壬戌年) 입춘일(立春日), 날입니다. 벌써 임술년 정월 초하루가 지내간 지 열하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춘은 오늘 오시(午時)에 입춘(立春)이 들었습니다. 오늘 오시부터 정식으로 임술년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지나간 열흘 동안은 신유년(辛酉年)의 절후(節候)가 먹은 것이고 오늘부터서 정식으로 임술년(壬戌年)이 된 것입니다.
지난 삼동(三冬)에 소한(小寒) 대한(大寒)에 그 강추위가 오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천하 없이 추운 겨울이라 하더라도 입춘부터서는 맥을 추리지를 못하고, 하루하루 조끔 추웠다 더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보름이 지나가면, 15일간이 지나가면 또 우수(雨水)가 돌아와서 따듯한 봄날이 되고 여기저기서 꽃이 피게 됩니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이 비타득(非他得)이여.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고향(故鄕)을 떠나서 타관(他官)살이를 했는데, 그 타관살이 하는 것이 마치 자기 따뜻한 자기 고향에 자기집을 여의고, 춥고 배고픈 세월을 보낸 것이 그동안에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지낸 거와 같애. 그런데 육도윤회(六道輪廻) 속에서 고향을 잃고 방황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자기 고향을 한 걸음도 떠나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진묵겁전(塵墨劫前)에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마치 평생 동안 먹고 쓰고 남을 보물을 몸뚱이 안에, 옷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공연히 춥고 배고픈 그러한 거지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망각(忘却)하고 오늘날까지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성불한 도리를 어떻게 하면은 깨달을 수가 있느냐?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是道易親)이다. 마음 하나 참되면 이것이 바로 도(道)와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조석지변(朝夕之變)이여. 아침 먹었던 마음 다르고 벌써 낮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이제는 내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철저하게 이 참선(參禪)을 하리라' 법문(法門) 들을 때에는 그렇게 결심(決心)을 하고, 해 놓고서도 법문이 끝나고 문밖에 나가면 벌써 딴생각이 들어오고. 법문 들을 때에는 '다시는 내가 딴생각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이 정법(正法)만을 믿고 정법에 의지해서 살아가리라' 그렇게 굳게굳게 결심을 하고서도 집에 가면 누가 뭐라고 뭐라 하고, '어디를 가면 좋은 아주 기가 맥히게 잘 맞추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 가서 부작(符作) 하나만 가지면은 백사(百事) 소원(所願)을 성취한다' 그 말 한마디만 들으면 금방 귀가 솔깃해 가지고 당장 따라나서.
만약에 부작 한 장을 어디 가서 얻어 가지고 그 부작 하나로 해서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소원이 성취된다면 무엇을 이 세상에 걱정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부작으로써 업장을 소멸하고, 부작으로써 소원을 성취하고, 부작으로써 남편의 바람피우는 것을 막고, 아들 대학을 합격을 하고, 부작 한 장으로써 그러한 무서운 위력(威力)을 낼 수가 있다면, 만신이나 무당이나 점쟁이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고 앉었겠느냐 그 말이여. 먼저 자기부터 팔자를 고쳐서 자기 자식이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만석꾼이도 되고 하지, 자기는 왜 그 짓 해서 먹고살면서 남에게 써준 것은 그렇게 되고, 자기는 그렇게 안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이냐 그 말이여.
마음이 참되지를 못하고 요망(妖妄)하고 삿되고 경박(輕薄)해서, 참된 말, 진리(眞理)의 말, 최상승법을 일러주면은 그 말이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고, 간사(奸詐)한 말을 들으면은 그 말이 그렇게 고소하고 쏙쏙 마음에 들어가요.
오늘은 입춘날이라 인 · 오 · 술(寅午戌), 범해에 난 사람, 말해에 난 사람, 또 개해에... 개띠, 이 세 가지 띠를 가진 사람은 오늘이 삼재(三災)가 나가는, 금년(今年)이 나가는 해입니다. 그 '날삼재'라 해서, 그러께는 '들삼재', 작년에는 '앉은삼재', 금년이 인자 '날삼재'인데, '날삼재가 진짜 조심을 해야 한다. 날삼재 일 년간을 잘 넘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 신령스러운 부작을 꼭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유혹을 하는데, 들삼재 · 앉은삼재 · 날삼재, 그런 삼재에 안 들은 사람도 뜻밖에 재난(災難)을 만날 수도 있고, 삼재가 든 사람도 그런 부작을 지니지 아니해도 별 탈 없이 지낸 사람도 있고 그러한 것이지, 삼재가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좋지 않는 일이 있고, 그 부적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꼭 면(免)한 것이 아니거든.
어디 교통사고가 나서 여러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의 호주머니 속에서 그 여러 가지 부적(符籍)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 연전(年前)에 내 신문에서 본 일이 있는데, 부작(符作)에다가 의지를 하지 말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자기 마음을 진실(眞實)하게 갖고 참되게 마음을 가져 나감으로써 마음속에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해야 모든 재난(災難)을 면할 수가 있고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고요할 때에 생각해 보면 누구나 납득이 갈 수 있는 얘깁니다.
해마다 입춘(立春)이 되면 입춘 법요식(法要式)을 갖고 법문(法門)을 하고 또 공양(供養)을 올리고 축원(祝願)을 하고 이럽니다마는, 왜 입춘에 삼재(三災)풀이를 하고 또 입춘에 이 법요식을 갖느냐 하면, 입춘 날부터 새해의 절후(節候)가 정식으로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날짜로는 정월 초하루가 그 해의 시작하는 첫날이지만,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일 년을 스물네 가지 절후(節候)로 나눌 때, 절후로 따질 때에는 입춘일(立春日)이 그 해의 첫날이 되기 때문에, 첫날에 지나간 한 해를 반성(反省)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일 년간을 장애 없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뜻있는 한 해가 되도록 각오를 하고 마음을 다지는 그러한 날로 기념하기 위해서 절절이 입춘에 법요식(法要式)을 갖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고, 집을 하나를 지을 때에도 기공식(起工式)이라 하는 게 있고, 그 집을 다 짓게 되면 낙성식(落成式)을 하듯이, 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처음 탄생할 때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해마다 그 생일을 축하하고, 또 마지막 일평생을 살다가 하직한 날을 갖다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서 돌아가신 날을 추모(追慕)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일 년이 시작하는 날과 일 년이 끝나는 날은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고 반성을 하고 참회(懺悔)하고 새로이 뜻을 다져 나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뜻깊은 행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떠한 목적지를 향해서 여행(旅行)을 떠날 때에도 처음 한 발 내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북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출발을 남쪽을 향해서 출발을 하면 천리만리 엉뚱한 데로 가게 되고. '천 리 길도 한 걸음으로부터' 라고 하는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그 한 걸음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宗敎)를 믿을 때에도 맨 처음에 어느 종교 어느 종파(宗派)에 발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평생의 종교와 신앙(信仰)이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부처님을 모시면 다 마찬가지다. 부처님은 어느 절이나 한 부처님이다' 만신 집에 가도 부처님은 모셔져 있고, 무당집에 가도 부처님은 모셔 있고, 유사 종교(類似宗敎) 단체에도 가면 부처님이 다 모셔져 있어서, 부처님은 다 한 부처님인 줄 알고 지성(至誠)으로 다니지만, 다, 물론 말로는 한 부처님이고 같은 부처님이지만, 그 같은 부처님을 '어떻게 받들어 모시고 어떻게 실천해 나가느냐'는 절마다 다르고, 무당 다르고, 만신 다르고, 점쟁이 다르고, 다 다른 것입니다. 이름은 다 불교라 하지마는 그 종파에 따라서 그 '부처님의 법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용화사(龍華寺)는 참선법(參禪法)을 선양(宣揚)하고 최상승법이여. 용화사가 제일이고 다른 절은 못쓴다'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 그 정법(正法)이고 또는 방편 사법(邪法)이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각자가 보고 들어보면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사법(邪法)이고, 정법(正法)이냐?
그것은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欲樂)을 조장(助長)을 시키는 그러한 종교는 바른 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삼독심을 버리고, 오욕락을 버리고, 버린다기보다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비움으로 해서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指導)하고, 그 신앙을 가짐으로 해서 마음이 그렇게 되는 그러한 가르침은 그것을 정법(正法)이라 하는 것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종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 그 종교를 믿으면은 부자가 된다. 그 종교를 믿으면 아들을 난다. 그 종교를 믿으면 중생의 어떠한 욕구를 충족을 시켜준다' 이러한 식으로 선전을 하고 그러한 달콤한 낚숫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종파는 물어볼 것도 없이 삿된 종파다. 삿된 종교라고 결정을 해도, 판단을 해도 추호도 어김이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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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른 종교 다른 종파에 가면 부자도 되고, 아들도 되고, 모든 소원을 성취된다 하고, 용화사는 가 봤자 그러면 그런 것은 소용이 없고 이뭣고? 만 하지, 그러면 부자도 안 되고, 만날 해 봤자 소원도 이루지 않단 말이냐?' 혹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러한 것을 그 신앙의 목적을 삼고, 자기가 그 종교를 실천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면 벌써 믿는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 올바른 실천으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면, 자연히 마음속에 업장이 소멸이 되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큰 목적을 설정을 해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와 신심(信心)으로 여법하게 도를 닦아 나가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재산이건 권리건 명예건 건강이건 제절로 이루어진다면 그 이상 바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명색이 종교를 믿는다면서 미신(迷信)으로 종교를 믿는다면, 어디다가 내놓고 '나는 종교를 믿는다'고. '나는 무슨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무당집이나 다니고, 만신집이나 다니고, 점이나 치러 다니고, 그래 가지고 어디 가서 '나는 만신을 믿고 산다. 나는 무당을 믿고 산다. 그랬더니 이렇게 부자가 되았다'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이나 딸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친구 앞에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보살(佛菩薩)의 바른 법을 참되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해야만 자기도 떳떳하고 남편 앞에도 떳떳하고—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 몰래 만신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하고, 만신한테 비밀리 왕래를 하고 그러지, 떳떳하다면 왜 말을 할 수가 없습니까? 얼마든지 남편과 같이 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같이 와서 참선(參禪)을 하고, 같이 참선을 도반(道伴)으로서 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입춘에 좋은 부작(符作) 한 장 주지 아니하고, 할 말 없으니까 공연히 마음 닦으면 죄가 소멸이 되고 소원을 이룬다' 이렇게 생각하실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저 옛날에 함경도 사람이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향해서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머나먼 길을 걸어서 가자니 그것도 중간에 도적(盜賊)을 만날까 걱정이 되고, 또 그 머나먼 길을 가 가지고 또 과거에 합격이 안 되면 안 되겠다 해서 좁쌀을 한 되를 싸 가지고 그 부처님 모셔져 있는 절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 앞에 좁쌀을 떠억 올려놓고서, 담뱃대를 손에 든 담뱃대를 들고 부처님 앞에 꺼떡꺼떡하면서, "부텨!" 그 함경도 사람은 부처를 '부텨'라고. "부텨! 내 말 좀 잘 듣게. 내가 오늘 과거를 보러 가는데, 이번에 꼭 과거에 붙게만 해 주면 이다음에 이밥도 내가 갖다—그 쌀밥을 '이밥'이라 그러거든—이밥도 내가 갖다가 또 올릴 테니까 이번에 내가 꼭 과거에 붙게만 해 주게"
몇 번을 그 담뱃대를 흔들면서 간곡히 부탁을 하고 그리고서 과거를 보러 올라갔다가, 물어볼 것도 없이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이 과거에 떨어졌는데, 떨어지자마자 인자 고향으로 내려와 가지고 다시 그 절에 찾아가서, "내가 그 귀한 좁쌀을 갖다가 올려놓고 그렇게 내가 간곡히 부탁을 했는데, 내 좁쌀만 똑! 따 먹고 얼굴만 노래져 갖고 앉어서, 내 말대로 과거만 합격해 주었으면 내가 쌀밥을 갖다가 올렸을 텐데 다 틀렸다"고, "'부텨, 부텨' 해서 영험(靈驗)이 있는 줄 알았더니 영판 점쟁이만 못하다"고. "점쟁이는 다 과거에 붙고 떨어질 것도 알고, 잘하면 푸닥거리만 해도 병도 낫고 그러는데, 꺼먹꺼먹 우둑허니 앉어서 좁쌀만 똑 따 먹고, 무당만 영판 못하다”고 아주 큰 기침을 하고 나갔다고 그럽니다.
오늘 입춘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동참(同參)을 하셨는데, '입춘에 동참을 하고, 모처럼 이제 금년부터서는 무당이나 만신집이 부적 사러 가지 아니하고 한번 시험을 한번 해 보자' 그러다가 무슨 조그만 뭣이 뜻대로 안되면, 함경도 사람처럼 '그 입춘에 동참해 봤자 별 수 없고, 그 내년부터서는 그래도 무당한테 가서 부작(符作)을 꼭 사야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함경도 사람만 조끔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부작을 사거나 입춘에 동참을 하거나 또는 참선을 하거나, 쇠털 같은 많은 날에 혹 뜻대로 안 되는 수도 있고 또 뜻대로 되는 수도 있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는 데는—이 사바(娑婆)란 말이 인도 말인데, '인내(忍耐)', '감인(堪忍)', 인내, '참는다'는 말이거든. '사바세계' 하면은 '참는 세계'라.
여덟 가지 고(苦)—생(生) · 로(老) · 병(病) · 사(死)의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은 이별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또 미운 사람은 만나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또 구(求)하면 마음대로 얻어지지 아니한 구부득고(求不得苦), 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성고(五陰盛苦), 이 여덟 가지 고(苦)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중생(衆生)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러한 고해(苦海)에 왜 우리가 태어났느냐? 과거에 우리가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다 이 말씀이여.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으면서도 이만큼 살게 된 것, 이만큼 잘 사는 것도 이것도 다 참 천만다행(千萬多幸)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그러기 때문에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살면서 이만큼 산다고 감사하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무엇이 뜻대로 안되면 거기에서 오히려 더 발심(發心)을 하고, '무엇인가 내게에 참회해야 할 일이 있구나' 이리 생각하고 자기의 내면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자기의 잘못을 참회를 하고, 다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신심을 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이렇게 다져 나가야만 불법을 믿는 사람,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이요 바른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가 발전해 나가려면 견디기 어려운 난관(難關)을 만나서 그것을 극복해야만 그 나라도 발전을 하는 것이지, 너무 편안하고 일없으면 그 편안하고 살기 좋은 데에 도취(陶醉)가 되어 가지고 자연히 해태(懈怠)해지고,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국력이 쇠퇴해서 모든 국민이 게을러빠지고 사치에만 흘러서, 그러는 동안에 이웃나라가 반드시 그러한 틈을 타서 침범을 해 들어오고 마는 것입니다. 백제(百濟)가 망할 때에도 역시 그랬었고, 신라가, 그 꽃피었던 그 신라(新羅)가 망할 때에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월이 몇십 년, 몇백 년 지나다 보면 결국은 그 나라가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맹자(孟子)』에도 '하늘이 장차 훌륭한 인재(人材)를 낼 때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갖은 고통과 시험을 주어서 그 사람을 단련(鍛鍊)을 시킴으로써 위대한 사람을 만든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잘 다스리도록 한다' 그런 말이 있고. '나라에도 계속 그 충고하는, 나라의 정치와 통치자의 잘못을 힐난하게 비판하고 그 상소(上疏) 올리고 그러한 입바른 그러한 선비가 있어야 하고, 또 이웃나라에서 호시탐탐 그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적성 국가(敵性國家)가 있어야만 그 나라는 계속 튼튼하고 나라를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다' 이러한 내용에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역사를 통해서 역력히 볼 수가 있는 바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정(大疑情)으로 도(道)를 닦아서 도업(道業)을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 난관에 부딪혀서 거기에서 대분심과 대신심이 불타올라야만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에 조그마한 사업(事業)을 하나 하더라도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갖은 고통을 극복해야만 하나의 사업을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실패하면 또 일어서고 두 번 실패하면 또 일어서고, 곧 기업체가 쓰러지고 '내가 오늘 죽느냐 내일 죽느냐' 한, 그러한 참 참기 어려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수없이 겪으면서 그러면서도 쓰러지지 아니하고 버텨 나가야만 사업을 마침내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해탈도(解脫道)요, 대안락(大安樂), 큰 안락의 법문(法門)이라 하지만, 이 참선을 시작을 해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첫째, 육체적으로도 팔 다리 허리가 쑤시고 아프고 저리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 골치가 아픈 사람, 정신적으로도 온갖 번뇌(煩惱)와 망상(妄想)과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퍼일어나 가지고, 조끔 공부하려면은 '가정에 뭔 일이 있다' 그래 가지고 잠시도 편할 날이 없이 이 일 저 일 구름 일어나듯이 일어납니다마는, 그러한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착실히 다져 나감으로써 그렇게 백방(百方)으로 공부를 방해치는 그러한 사건들이 하나씩 둘씩 차츰차츰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는 그러한 일들이 내 공부해 나가는 데에 박차를 가해 줄지언정 그것이 나를 공부 못하게 하는 마침내 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오는 것입니다.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익힌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과 오욕락(五欲樂)으로 익혀 왔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다 되어져. 마치 잡초(雜草)는 그렇게 뽑아 내버리고 약을 치고 해서 그것을 못 자라게 해도 잡초는 저절로 그렇게 잘 자라고. 곡식(穀食)은 거름을 주고 그렇게 잘 가꾸려고 해도 영 잘 안 자라는 거와 같애서,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있어 번뇌망상(煩惱妄想) 사량분별심은 그렇게 안 하려고 그러고, 쫓아내려고 그러고, 못 일어나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잘 퍼일어나고, 화두(話頭)는 그렇게 생각 생각이 추켜들고 하려고 해도 그것은 잘 잊어버리고 안 되지요.
그러나 사불범정(邪不犯正)이여. 또 마침내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제아무리 무성(茂盛)했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노력을 하면 그 잡초를 제거하고 마침내 우리가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처럼, 끝까지 주저앉지 않고 쉬지 않고 공부를 다져 나가면 번뇌망상,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를 항복받아서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삼세제불(三世諸佛)이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요, 팔만사천 보살(菩薩)님네들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여실(如實)히 보여주신 것입니다.(20분49초~41분3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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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태어나서 오직 할 일은 이 한 일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일도 많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고 '일 다하고 죽은 무덤이 없다'고 한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일이 이 나의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참나를 깨닫는 이 일에다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 한 일, 이것만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 천 가지 만 가지 피해서는 안 될 내가 해야만 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자고 하는 일이지 목숨을 바쳐서 할 일은 못됩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목숨 바쳐서 할 일이 못됩니다. 돈이 없으면 안되어서 돈을 벌어야 하지만 목숨 바쳐서 돈을 벌 필요는 없는 것이고, 명예와 권리가 그것이 인간 세상에 필요하다 하지만 명예 얻기 위해서, 권리 얻기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박사와 예술이다, 무슨 학문이 소중하고 무슨 기술이 중요하다' 하지만, 목숨을 바쳐서 그것을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이 참선(參禪)만은, 이 도(道)만은 목숨을 천만번이라도 바쳐야 하고, 목숨 바쳐서 해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용화사(龍華寺)를 가면 병(病)이 낫는다 그러고, 무슨 소원을 성취한다 그러고, 그렇다고 해서 용화사를 갔더니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 겁먹으실 것은 없습니다. 당장 무슨 목숨을 바치라는 게 아니라, 목숨을 바칠 만큼 그런 간절(懇切)한 마음, 정성(精誠)스런 마음으로 닦아야만 하루라도 빨리 도(道)를 증득(證得)할 수가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출가(出家)한 스님네도 견성성불한 이가 드문데, 어떻게 세속(世俗)에 오욕락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도를 이룰 것인가? 일찌감치 포기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옴마니반메훔'을 부른 것이 낫다" 자꾸 이러한 말로써 유혹을 받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 참선(參禪)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궁극에 목적이기는 하지만, 견성성불했다고 해서 두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가 나온 것도 아니고, 또는 이마 위에 무슨 육계상(肉髻相)이 솟아오른 것도 아니고, 밤에도 이 몸에서 광명(光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내나 밥 먹고 똥 누고, 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도를 닦은 사람은 환경에...(녹음 끊김) ... 특수한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환경(環境)에 지배(支配)를 받는데, 도를 닦은 사람은 자기가 환경을 지배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차이점을 말할 수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우주(宇宙)에 주인공(主人公)이 되어 가지고 우주를 다스려야지, 내가 이 우주에 다스림을 받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중생(衆生)과 성현(聖賢)과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직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해서 성현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해서 참선을 해 나가면, 그때그때 환경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내 자신이 환경을 다스리는 주인공(主人公)이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감정(感情)에 노예(奴隷)가 되어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참선을 한 사람은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척! 돌이켜 가지고 참나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한 사람은 팔만사천 마구니가 침범을 못한다 이것입니다. 마구니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노리느냐 하면, 눈 ‧ 코 ‧ 입 ‧ 귀 ‧ 몸뚱이 ‧ 생각,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 여섯 구멍을 통해서 그리 마구니가 침범(侵犯)해 들어오는데,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볼 때에 보는 데에 홀려 들어가면, 무엇을 보다가 자기(自己)를 놓쳐버리면 그 눈을 통해서, 그 허점(虛點)을 통해서 마구니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을 듣는데, 누구 말을 듣던지 어떠한 소리를 들으면서 그 들음으로 인해서 자기의 이성(理性)을 잊어버리면, 들음으로 인해서 감정에 노예가 되어 버리면, 감정에 끄달려 버리면 그 귀를 통해서 마구니가 침범해 들어온다 그 말이여.
한 나라를 지키는데 있어서 그 지키는 병사(兵士)들이 한눈을 팔고 어디 가서 술을 먹고 낮잠을 잔다던지, 자기가 지켜야 할 성문(城門)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딴 데로 가서 그 성문을 지키지 아니하면, 바로 그 곳을 통해서 적병(敵兵)이 침범에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는 바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근문두(六根門頭)를 통해서 우리에게 침범해 들어오지, 절대로 다른 데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만을 잘 단속하면 팔만사천 마구니는 들어올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들어오지 아니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철통같은 것입니다. 절대로 재앙(災殃)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재앙은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허수히 함으로써 그 구멍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이 성문(城門)은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듦으로써 지켜지는 것이지, 빨간 글씨로 쓴 부작(符作)을 몸에 지녔다고 해서 그 육근문두(六根門頭)가 지켜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도 얼마든지 그까짓 부작을 몇만 장이라도 찍어서 노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거 할 줄 몰라서 안 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해 봤자 재앙이 막아지들을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아니 드리는 것입니다.
삿된 길을 가까이하면은 반드시 나의 마음도 삿되어지고 나의 믿음도 삿되어져서, 삿된 길에 한번 발을 디디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입춘법회 때마다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간곡히 말씀드려서 여러분이 이 정법(正法)에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뿌리를 박고 발을 디디고서 실천을 해 나가야만 여러분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악도(惡道)에 떨어지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벗을 가까이하면 나도 몰래 나쁜 버릇을 익히게 되는 것이, 마치 검은 것을 가까이하면은 내 몸이 검어지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연탄 공장에 들어가서 돌아댕기면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내 의복과 몸뚱이가 더러워진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행여나 삿된 길에 발을 디디지 말고, 걱정이 있어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고, 슬픔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괴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외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려 나가도록 그렇게 훈련을 쌓아 나가면, 과연 이 정법, 이 최상승법이야말로 영겁(永劫)을 두고 의지하고 믿고 내 몸과 마음을 맡길 수가 있는 그러한 '반야(般若)에 용선(龍船)이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사자굴중(獅子窟中)에 무이수(無異獸)여. 사자(獅子)가 살고 있는 사자 굴(窟)속에는 다른 짐승이 없어. 사자 굴속에 무슨 다른 짐승이 그 속에 감히 들어갈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사자 굴속에는 오직 사자만이 살 수가 있다. 상왕행처(象王行處)에 절호종(絶狐蹤)이로구나. 코끼리 왕, 코끼리 왕이 행(行)하는 곳에는 여우의 발자취가 끊어졌다. 코끼리가 턱- 걸어가는 앞에 감히 간특(奸慝)한 요사(妖邪)한 여우같은 것이 어찌 얼씬거릴 수가 있을 수가 있느냐.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나가는 그러한 최상승(最上乘) 불자(佛子) 앞에는 어떠한 삿된 마구니도, 어떠한 재앙도 그 앞에는 얼씬거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최상승법을 믿는 불자(佛子)로서의 긍지와 보람, 희망을 가지고 한 해를 떳떳하고 의젓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갱파일지무공적(更把一枝無孔笛), 다시 한 가지 구멍 없는 젓대를 잡고, 등한취출만년환(等閑吹出萬年歡)이라. 멋들어지게 만년환(萬年歡),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생사 없는 최고 무상(無上)에 깨달음에 곡조(曲調)를 불어 나갑시다.
화두(話頭)를 들고, 알 수 없는 화두를 들고 살아가는 것이 구멍 없는 젓대를 가지고 무상정각(無上正覺)에 곡조(曲調)를 불어 나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41분37초~58분5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철수화개별시춘~ / 진묵겁전(塵墨劫前)에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 / 진실하고 참된 마음을 가져야 업장(業障)이 소멸 / 입춘법회의 의의 / 탐진치, 오욕락을 비우고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하는 가르침이 정법이고 최상승법.
바른 법을 참되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하면 자연히 업장소멸이 되어 소원성취를 이룬다 / 함경도 사람의 좁쌀 공양(供養) / '사바세계' 하면은 '참는 세계' / 어려운 고통, 난관에 부딪칠수록에 거기에서 더 발심해야 / 끝까지 쉬지 않고 공부하면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직 할 일은 이 참선밖에는 없습니다. 참선만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할 일 / 도를 닦아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만을 화두(話頭)를 듦으로써 잘 단속하면 팔만사천 마구니는 들어올 곳이 없다 / 정법(正法)에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뿌리를 박고 실천해라 / (게송)사자굴중무이수~.
〇우리가 마치 평생 동안 먹고 쓰고 남을 보물을 몸뚱이 안에, 옷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공연히 춥고 배고픈 그러한 거지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망각(忘却)하고 오늘날까지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〇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欲樂)을 조장(助長)을 시키는 그러한 종교는 바른 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삼독심을 버리고, 오욕락을 버리고, 버린다기보다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비움으로 해서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指導)하고, 그 신앙을 가짐으로 해서 마음이 그렇게 되는 그러한 가르침은 그것을 정법(正法)이라 하는 것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〇올바른 신앙, 올바른 실천으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면, 자연히 마음속에 업장이 소멸이 되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〇끝까지 주저앉지 않고 쉬지 않고 공부를 다져 나가면 번뇌망상,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를 항복받아서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삼세제불(三世諸佛)이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요, 팔만사천 보살(菩薩)님네들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여실(如實)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〇사람으로 태어나서 오직 할 일은 이 한 일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이 한 일, 이것만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 천 가지 만 가지 피해서는 안 될 내가 해야만 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자고 하는 일이지 목숨을 바쳐서 할 일은 못됩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목숨 바쳐서 할 일이 못됩니다. 그런데 오직 이 참선(參禪)만은, 이 도(道)만은 목숨을 천만번이라도 바쳐야 하고, 목숨 바쳐서 해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〇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감정(感情)에 노예(奴隷)가 되어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참선을 한 사람은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척! 돌이켜 가지고 참나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〇팔만사천 마구니는 바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근문두(六根門頭)를 통해서 우리에게 침범해 들어오지, 절대로 다른 데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만을 잘 단속하면 팔만사천 마구니는 들어올 곳이 없는 것입니다.
〇행여나 삿된 길에 발을 디디지 말고, 걱정이 있어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고, 슬픔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괴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외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려 나가도록 그렇게 훈련을 쌓아 나가면, 과연 이 정법, 이 최상승법이야말로 영겁(永劫)을 두고 의지하고 믿고 내 몸과 마음을 맡길 수가 있는 그러한 '반야(般若)에 용선(龍船)이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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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여러분은 전강 조실 스님의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통해서 잘 들으셨고, 그 위에 조실 스님께서 여러분께 직접 보여드리지 못한 부분만을 금방 송담(松潭)이 올라와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쳐서 그 소리를 들려 드림으로써 경신년 삼동결제(三冬結制) 해제 법문을 다 설해 마쳤습니다. '빨리 법문이 끝나서 점심을 오늘 빨리 먹겠다' 하고 기대를 하실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 분을 위해서 말씀을 좀 더 해야겠습니다.
오늘은 백일기도 회향에다가 삼동결제 해제를, 해제 법회를 겸한 뜻깊은 법회입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결제요, 결제 때마다 되풀이되는 백일기도입니다. 사람은 같은 일이 되풀이될 때에 그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여겨져 가지고 그러한 행사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만 좀 관심을 새롭게 하고, 별로 새로운 것이 없고 마냥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때에는 아무 느낌도 없이 범연(泛然)하게 지나쳐 버리는 그러한 수가 허다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몇억만 년을 두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또 그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이렇게 똑같은 일이 되풀이됨으로 해서 아무도 해가 동쪽에서 떠 가지고 서쪽으로 진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은 서쪽에서 떠 가지고 동쪽으로 지는 수가 있으면 그때는 야단법석을 하겠지만, 어김없이 똑같은 일이 일어날 때에는 설사 그 일이 굉장히 어마어마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무슨 일이 크고 무슨 일이 엄청난다 하더라도, 설사 그 일이 세계적으로 세계를 깜짝 놀랄만한 그러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해가 동쪽에서 떠 가지고 서쪽에서 진 일에다가 비교하면 큰 바다 속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넘어진 거기에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일에 지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 이 일이야말로 지극히 평범하고 하나도 조금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보다도 더 엄청나고 무섭고 큰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서 숨을 쉬고 있지만,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허공 속에 공기, 이 공기를 한푼도 돈도 요금도 지불하지 아니하고 아무도 방해한 사람도 없고 시비한 사람도 없이 제절로 숨을 들어마시고, 들어마셔 가지고 산소는 흡수하고 그리고서 탄산가스를 배출하면서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공기야말로 이 공기 속에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일만큼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 중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대한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중대시하고 중대한 큰 일로 생각한 사람은 또 별로 없습니다. 만약에 이 찰나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공기가 없어져 버린다면 그보다도 더 무섭고 중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해제(解制)가 오늘 돌아왔는데, 사실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하고 오늘 해제를 하게 되고, 백일 동안 기도를 하고 오늘 회향을 맞이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늘도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고, 오늘도 우리는 아무 부담 없이 숨을 들어마셨다가 또 내쉬고 계속해서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하고 있습니다. 이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에서 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고 있는 이 사실이 정말 이 우주 법계(法界)에 있어서 또 우리의 인생 일대에 있어서 정말 엄청나고 위대한 사건이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잠깐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봐야 할 그 시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정반왕궁(淨飯王宮)을 하직하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12년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자발적으로 목숨 바쳐 고행하신 끝에 드디어 납월팔일(臘月八日) 샛별 반짝거린 것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아침마다 새벽마다 그 샛별은 번쩍거리고 있었겠지만, 그 평범한 그 사실을 보시자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는다, 확철대오를 한다, 견성성불을 한다' 한 것은 무슨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특별한 어떠한 그러한 사건을 만나야 깨닫게 되고, 그러한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러한 데에서 깨닫게 된다고 생각을 하신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다맛 그 반짝거리는 그 샛별을 보신 것입니다.
'깨달랐다' 하니까 무슨 굉장한 것처럼, 여러분들은, '현재 이 현실을 떠나서 무엇을 깨달랐을까?' 굉장히 그것을 궁금하게 생각하시겠지만, 그 깨달은 사실을 깨달은 그 현황을 말씀을 드리자면 부처님께서는 다못 그 별을 보신 보셨던 그것뿐인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포대화상(布袋和尙) 법문 가운데에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다못 이 말하는 이 말소리 이놈이니라' 하신 법문을 들었습니다.
눈으로 청황적백(靑黃赤白), 산과 나무, 물과 물소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귀로 듣는 것,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앞에 제출되는 모든 빛깔과 모든 소리와 육식(六識)을 통해서 접하는 모든 상황이 그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낱낱이 우리로 하여금 눈뜰 수 있는, 깨닫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던지, 귀로 무엇을 듣던지, 손으로 무엇을 만지던지, 우리의 생각에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던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느끼던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낱낱이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요,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契機)인 것입니다.(처음~13분50초)
(2/3)----------------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모든 조사(祖師), 선지식(善知識)들은 그렇게 해서 다 일대사(一大事)를 해결을 하고, 일대사를 요달(了達)을 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를 하고 계십니다. 법(法)에 수레바퀴를 끊임없이 굴리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이 시간까지도 깜깜한 채 나를 보지 못하고,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하고, 진리와 계합(契合)이 못한 채 지금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하루하루를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어서 지끔은 참선을 해봤자 깨닫기가 어렵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약해서 해봤자 소용이 없다. 과거에 업(業)이 많아서 우리는 금생에 아무리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자포자기한 말 외에는 아무 뜻이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지끔도 삼천년 전이나 다름없이 하늘에서는 별이 반짝거리고 산은 높고 물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도 다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밥을 먹을 수 있고 발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이 우주 법계에 삼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있으시다면 우리도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끔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해서 우리는 여태껏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쓸데없는 일에는 자존심을 가지고, 중대한 일대사(一大事) 문제에 있어서는 자포자기를 하고 있는 까닭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에 온갖 아만(我慢)과 자존심(自尊心)을 다 버릴 때에 참으로 가장 중대한 위대한 일에 있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집착(執着)을 해 가지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있는 동안에, 큰 중대한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하게 되고 망각(忘却)을 하게 되는 까닭에, 우리는 할 말이 없으니까 말세(末世)를 내세우고 근기(根機) 약함을 핑계하는 그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부처님, 부처님 간 곳이 어데냐? 다못 이 말하는 이놈이다' 조끔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를 설파(說破)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계합하지 못한다면 『화엄경』 『법화경』을 천만 번을 읽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간단한, 너무나도 당연하고 쉬운 이 단적(端的)인 한 말씀에 계합할 수가 있느냐?'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 우리가 들어서 이해하고 있는 모든 이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사량심(思量心)을 가지고 이러한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인 것입니다. 이 말은 중생의 사량심으로 이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량심으로 '아하, 그런 뜻이다' 하고 알았다면 이미 천만리(千萬里) 멀리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소리 이놈이라' 한 그 말씀 자체는 조끔도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가 무엇입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에 꽈악 맥혔을 때, 꽈악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할 때, 바로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에 계합(契合)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56억 7천만 년 뒤에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석가여래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출세하실 미륵(彌勒) 부처님께서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 한 어찌 보면 거지 같고, 어찌 보면 미친 사람 같고 그러한 모습으로 화현(化現)으로 출세(出世)하신 그러한 선지식(善知識), 그러한 선지식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세계에도 수없이 많이 출현을 하고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선지식, 그러한 화신불(化身佛)이 출현하신 것을 그때 사람들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러한 화신불, 그러한 선지식이 우리 주변에 우리 가정에 수없이 많이 계실는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눈뜨지 못한 탓으로 그러한 선지식과 화신불을 매일같이 친견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남편이 부처님의 화신일는지도 모르고,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아내가 그런 화신일는지도 모르고, 이웃에 사는 고약한 사람이 화신불일는지도 모르고, 일가친척 친구 가운데에 화신불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화신불은 누가 보던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모습이 거룩하고, 행동이 거룩하고 그렇게만 꼭 출현을 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도인(道人)이 출현할 때에 81가지, 81가지의 행동 행실 모습으로 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누구나 보면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렇게 거룩하고 훌륭하고 점잖하게만 출현하셨으면 참 좋겠지만, 그러한 모습으로만 출현을 하시지 않고, 오히려 중생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믿음이 가지 않게, 오히려 중생의 마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출현한 경우가 90프로(%)가 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원(醫員)은 중생이 병이 날 때 그 병을 고치는 데 목적이 있듯이 선지식과 불보살이 화현하실 때에는 중생의 사견(邪見), 중생의 삿된 소견(所見)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병을 낫을라면 침으로 찌르고 불로 지지고 칼로 수술을 하고 쓴 약을 먹여서 치료하듯이—어린애들이 쓴 약은 먹기 싫어하고, 달고 맛있는 그런 과자만을 좋아한다고 해서 마냥 단 과자만 먹일 수가 없는 것처럼—중생의 못된 버릇, 삿된 소견을 고칠려면 중생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크고 작은 온갖 충격을 가하지 않고서는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척사현정(斥邪顯正),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소견을 깨뜨려버리고 바른 소견을 나타나게 하는 데에 바로 불보살과 선지식의 화현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불 역경계(逆境界)로써 채찍을 가하지 아니하고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자기를 좀 칭찬해 주고 부드럽게 해 주면 '좋다' 그러고, 조끔 자기의 뜻에 거슬리고 까끄랍고 하면 '싫다'고 토라지고, 이래가지고서는 무량겁 생사업장(生死業障)이 녹을 까닭이 없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탈(解脫)할 가망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13분54초~27분42초)
(3/3)----------------
벌써 신유년을 맞이해서 15일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가 흐르는 물같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금년도 온 세계가 또 우리 국내도 여러 가지로 큰 일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온통 큰 일들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큰일을 맞이해서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그럴수록에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발심(發心)만 한 사람이면 어렵고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공부하는 데에 힘을 얻게 되는 법입니다. 편안하고 무사(無事)하고 모든 여건이 좋기만 하면 대단히 공부가 잘될 것 같지만, 우리는 중생이요 우리는 너무 편안하고 좋으면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져서 진취가 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나라들이 외부로부터 침공해 들어올려고 하는 적이 없고, 국내에서는 계속 충간(忠諫)하는 그러한—왕과 국가정책에 대해서 계속 힐난한 충고를 하고 자극을 주는 그러한 사람이 없을 때 그 나라는...(녹음 끊김) 나라에 대해서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상감마마에 소장을 올리고 진정서를 올리고 이럴 때에 그 나라는 더욱 발전을 하고 개선되어 가고 그런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일신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또는 직장 · 회사 · 국가 · 사회 모든 면에 있어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정신차려서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이 과학 문명이 발달이 되어서 여러 가지로 잘 먹고 잘 입고, 편리하게 왕래하고 참 살기가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 반면 우리는 많은 것을 망각하고 많은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차만 타고 다니기 때문에 다릿심이 없어지고, 사람 건강은 발로 걸어 댕겨야만 오장육부가 튼튼해지게 되어 있는데 걷지를 아니하니까 점점점점 오장육부가 퇴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잡곡 채소 모다 그런 것을 잘 먹어야 하는데, 우유다 계란이다 고기다 또 무슨 종합비타민이다, 좋다고 한 것은 다 고루고루 잘 먹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 때문에 또 그렇게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이 자연은 오염이 되고, 그러한 안일한 자세에서 그런 것을 자꾸 섭취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우리의 혈액도 오염이 되고, 몸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속으로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우리의 몸은 고혈압이다, 중풍이다, 동맥경화증이다, 간암이다, 자궁암이다, 이러한 당뇨병이다, 온갖 현대 의학으로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러한 무서운 병들이 우리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갈 길은 첫째,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정진을 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될 수 있으면 많이 걷고 음식도 너무 호의호식에 빠지지 말고 잡곡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고, 이렇게 생활을 개선해 나간다면 반드시 건강한 육체로 건전한 정신으로 이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 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반드시 우리의 소원,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성취할 것입니다. 우리 불자(佛子)로서 해 나갈 길은 식생활 개선 또 우리의 정신자세를 바로잡고 그래가지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건강이 안 좋을 때도 '이뭣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이렇게 살아가고, 하루하루를 이렇게 단속을 해 나가기를 당부해 마지않습니다.
앞으로 석 달간 춥도 덥지도 않는 그러한 좋은 계절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좋은 계절을 십분 활용을 해서 아침에는 조끔 일찍 일어나서 30분 동안, 1시간 정진은 참선하시고, 낮에도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계시던지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밤에 주무시기 전에도 떠억 앉아서 30분, 한 시간 정진을 하시다가 자리에 들어가시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누운 채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하면서 언제 잠든 중 모르게 잠이 들도록 이렇게 석 달 동안을 열심히 공부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제 동안에 절에 오셔서 석 달 동안을 규칙 생활을 하시면서 정진을 하신 것은 산철에 공부를 잘하기 위한 특별 수련 기간인 것입니다. 결제 때는 공부하고 산철에는 여기저기 구경이나 다니고 그럭저럭 지내도 괜찮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부는 때와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데서 불보살(佛菩薩)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어데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치 언제 중대한 뉴스가 나올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시 라디오나 TV 그 다이얼을 꼭 거기다가 맞추어 놓고 있어야 한 것처럼, 중대한 국가적으로 중대한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어떠한 중대한 뉴스가 있을는지 모를 때에는 다이알을 항시 맞춰 놓고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 어데서 불(佛), 진신불(眞身佛)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무엇하다가 툭! 터질는지를 모르니까, 항시 우리는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거기에다가 다이알을 딱!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이알을 맞추고 있지 않다가 중대한 뉴스가 지내가 버리면 듣지를 못한 것처럼,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깨달음은 오지를 아니한 것이고,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불보살이 수없이 우리의 눈앞에 지내가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좌간백운청수성(坐看白雲聽水聲), 앉아서 흰구름을 보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도로성색(徒勞聲色)이 본가풍(本家風)이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귀로 듣는 물소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흰구름이나 온갖 것이 다 본가풍(本家風)이더라.
일륜상월(一輪霜月)이 만공산(滿空山)헌디, 한 바퀴 서릿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헌디, 한안(寒雁)이 여천향북비(唳天向北飛)로구나, 차운 기러기는 하늘에 울면서 북(北)으로 날아가는구나. (27분50초~43분50초) (끝)
[법문 내용]
사람은 같은 일이 되풀이될 때에 그것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 이 일이야말로 지극히 평범하고 하나도 조금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보다도 더 엄청나고 무섭고 큰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 공기 속에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일만큼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 중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다맛 그 반짝거리는 그 샛별을 보신 것입니다 /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낱낱이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요,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아만(我慢)과 자존심(自尊心)을 다 버리고, 쓸데없는 일에 집착(執着)하지 말고, 중대한 일대사(一大事) 문제에 목숨을 바쳐라 / '부처님 간 곳이 어데냐? 다못 이 말하는 이놈이다' 조끔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를 설파(說破)하신 것 / 꽈악 맥혀서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할 때, 바로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에 계합(契合)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 / 도인 81가지의 행동 모습 / 척사현정(斥邪顯正), 파사현정(破邪顯正), 불가불 역경계(逆境界)로써 채찍을 가하는 것.
중생은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지기 쉽다 / 모든 면에 있어서 어렵고 복잡한 때야말로 우리가 참으로 정신차려서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 / 우리의 공부는 때와 장소가 없는 것, 항상 화두(話頭)를 들라 / (게송)좌간백운청수성(坐看白雲聽水聲) 도로성색본가풍(徒勞聲色本家風) 일륜상월만공산(一輪霜月滿空山) 한안여천향북비(寒雁唳天向北飛).
〇여러분은 전강 조실 스님의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통해서 잘 들으셨고, 그 위에 조실 스님께서 여러분께 직접 보여드리지 못한 부분만을 금방 송담(松潭)이 올라와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쳐서 그 소리를 들려 드림으로써 경신년 삼동결제(三冬結制) 해제 법문을 다 설해 마쳤습니다.
〇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에서 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고 있는 이 사실이 정말 이 우주 법계(法界)에 있어서 또 우리의 인생 일대에 있어서 정말 엄청나고 위대한 사건이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잠깐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봐야 할 그 시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〇부처님께서 정반왕궁(淨飯王宮)을 하직하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12년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자발적으로 목숨 바쳐 고행하신 끝에 드디어 납월팔일(臘月八日) 샛별 반짝거린 것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아침마다 새벽마다 그 샛별은 번쩍거리고 있었겠지만, 그 평범한 그 사실을 보시자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는다, 확철대오를 한다, 견성성불을 한다' 한 것은 무슨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특별한 어떠한 그러한 사건을 만나야 깨닫게 되고, 그러한 깊고 깊은 어떠한 그러한 데에서 깨닫게 된다고 생각을 하신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다맛 그 반짝거리는 그 샛별을 보신 것입니다.
〇눈으로 무엇을 보던지, 귀로 무엇을 듣던지, 손으로 무엇을 만지던지, 우리의 생각에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던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느끼던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낱낱이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요,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〇'무슨 까닭으로 해서 우리는 여태껏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쓸데없는 일에는 자존심을 가지고, 중대한 일대사(一大事) 문제에 있어서는 자포자기를 하고 있는 까닭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에 온갖 아만(我慢)과 자존심(自尊心)을 다 버릴 때에 참으로 가장 중대한 위대한 일에 있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집착(執着)을 해 가지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있는 동안에, 큰 중대한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하게 되고 망각(忘却)을 하게 되는 까닭에, 우리는 할 말이 없으니까 말세(末世)를 내세우고 근기(根機) 약함을 핑계하는 그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〇척사현정(斥邪顯正),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소견을 깨뜨려버리고 바른 소견을 나타나게 하는 데에 바로 불보살과 선지식의 화현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불 역경계(逆境界)로써 채찍을 가하지 아니하고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자기를 좀 칭찬해 주고 부드럽게 해 주면 '좋다' 그러고, 조끔 자기의 뜻에 거슬리고 까끄랍고 하면 '싫다'고 토라지고, 이래가지고서는 무량겁 생사업장(生死業障)이 녹을 까닭이 없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탈(解脫)할 가망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〇우리의 공부는 때와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데서 불보살(佛菩薩)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어데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치 언제 극가적으로 중대한 뉴스가 나올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시 라디오나 TV 그 다이얼을 꼭 거기다가 맞추어 놓고 있어야 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 어데서 불(佛), 진신불(眞身佛)을 친견할는지 모르고, 언제 무엇하다가 툭! 터질는지를 모르니까, 항시 우리는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거기에다가 다이알을 딱!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이알을 맞추고 있지 않다가 중대한 뉴스가 지내가 버리면 듣지를 못한 것처럼,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깨달음은 오지를 아니한 것이고, 화두를 들고 있지 아니하면 불보살이 수없이 우리의 눈앞에 지내가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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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1/4) 약 18분. (2/4) 약 19분. (3/4) 약 16분. (4/4) 약 13분.
(1/4)----------------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헌디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념불생전체현(一念不生全體現)헌디 육근자동피운자(六根纔動被雲遮)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파사노년(怕死老年)에 친석가(親釋迦)라. 죽기 싫은 늙으막에사, 죽을 날이 가까와진 늙으막에사 겨우 석가모니를 친하게 되었다. 불교를 믿게 되었다.
두상광음(頭上光陰)이 전두비(轉頭飛)로구나. 그런데 머리 위에 광음(光陰)은, 시간은 머리를 굴려 날아가는구나. 늙으막에사 겨우 불법(佛法)을 믿고 참선을 할려고 마음을 냈는데 그렇게도 세월은 빨리빨리 지내가는구나.
작년 다르고 금년 다르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희어지고, 허리가 아프고, 눕고 싶고, 어지럽고, 어째서 좀 더 젊었을 때부터서 열심히 공부를 안 했던가.
일념불생전체현(一念不生全體現)이요 육근자동피운자(六根纔動被雲遮)라.
한 생각 일어나지 아니하면, 한 생각 일어나지 아니하면, 한 생각을 내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전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육근(六根)이 자동(纔動)하면 피운자(被雲遮)로다.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눈으로 통해서 무엇을 보거나, 귀를 통해서 무엇을 듣거나, 코 · 입 · 몸 · 생각, 이런 육근이 딱! 움직이면 벌써 구름, 구름 한 점이 일어나 가지고 해와 달을 가리워 가지고 세상을 어둡게 한 것처럼,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는 전체가 여지없이 드러났는데, 한 생각 일으키면은 그것이 구름에 가리워지듯 어두워지는구나.
오늘은 경신년 정월 초아흐렛날, 신수기도(身數祈禱) 회향(廻向)일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임자년 정월 초여드렛날 설(說)하신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들으신 바와 같이 부안 내소사에 있는, 내소사 주지를 여러 해 지내신 서호 스님에 내력(來歷)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 서호 스님의 설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가 있었던가?
간탐심(慳貪心), '간탐심을 내면은 그 죄로 지옥에 들어간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고.
간탐심을 내 가지고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파재간탐(破財慳貪),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흩어서 보시(布施)를 한다든지, 시주(施主)를 한다든지, 보시는—공부하는 스님네나, 돈이 없어 밥이 없어서 굶고 춥고 배고픈 그러한 사람에게 보시를 한다든지 또는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는 사람에게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후원을 해 준다든지, 이것이 모다 자기의 재산을 흩어서 죄를 없애는 길, 그러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파재간탐(破財慳貪)을 하면 그러한 죄를 면(免)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고.
또 하나는 중요한 것이 참선(參禪)을 하면, 설사 옳은 참선이 아니라도 참선을 하면 그 무서운 지옥에 지옥고를 감형(減刑)을 받을 수가 있고, 참으로 참선을 하되 옳게 하면 완전히 지옥으로부터 해탈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서호 스님의 설화를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해 내려오기를 「선방(禪房) 앞에다 신발만 잠깐 벗어놔도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면한다」 한 말이 선방에 전해 내려오고, 경상북도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把溪寺) 성전(聖殿)에 최성팔이라고 하는 중음신(中陰身)이 천당에서 퉁수를 훔쳐 가지고 와서 불다가 천당에서 그 최성팔이를 잡으러 내려왔는데, 최성팔이가 그 파계사 성전 선방으로 들어와 가지고 자기의 죄를 전부 고백하고, 나를 잠깐만 이 참선하신 스님의 방석 밑에 숨게 해 주면 자기가 잽혀가는 것을 면하겠다고 사정을 해서, 그러라고 방석을 떠들어 줬는데 천당에서 최성팔이를 찾으러 와 가지고 사방을 찾았지만 종내 찾지를 못한 채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최성팔이가 다시 나와 가지고 자기가 머지않아 저 만주 땅 아무 성씨 집으로 태어나는데, 이제 가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소상한 설화가 있습니다마는, 이 선방이라 하는 것은 잡귀가 어리대지를 못한다. 또는 저승에서 온 귀신도, 천상(天上)에서 잡으러 온 그러한 신(神)들도 선방은 그렇게 함부로 침범을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그런 설화를 통해서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참선을 하면 설사 잘못하더라도, 겉으로 흉내만 내더라도 그러한 공덕(功德)이 있느냐? 그것은 공연히 참선의 위대성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내게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참나를 깨닫는 수행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이보다 더 소중하고 고귀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 법계(法界)가 넓고 크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 우리의 마음자리에 비교하면 이 우주는 좁쌀알만 한 것에 지내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자리는 이 허공만큼 큰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우주가 더 크고, 우리의 몸뚱이 우리 몸뚱이 속에 있는 마음자리는 참으로 좁쌀알만 한 그런 존재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그리고 절대적인 참나, 바로 그것이 우주에 근본이요, 우주에 진리요, 그것으로부터 요 우주는 다 벌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 우주에 뿌리가 바로 우리 낱낱이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혀를 통해서 맛보고, 몸을 통해서 춥고 더웁고 한 것을 감각하고, 뜻을 통해서 슬프다 괴롭다 즐겁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바로 그놈이 바로 우주에 근본이기 때문에, 우주에 근본인 참나를 찾는 공부야말로 이 세상에 어떠한 사업에다도 비교할 수가 없을 만큼 위대하기 때문에 참선하는 흉내만 내도 지옥에 고(苦)를 감형(減刑)을 받고, 참선한 사람은 염라대왕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표현이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참선한다고 앉아서, 참선을 하기 위해서 백양사 운문암에 간 그 서호 스님은 참으로 참선을 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내소사 주지를 하면서 논 3백 석지기를 사 놓고, 그리고 그 3백 석에서 나오는 도주[賭租]를 받어 가지고 해마다 논을 사는데, 자기가 그걸 먹고 있으면 일 년에 쌀 한두 가마니는 없어지고, 또 자기 시봉도 먹여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한 톨이라도 덜 먹기 위해서—선방에 가면 밥을 먹여 주고 공부를 하도록 외호(外護)를 해 주니까, 양석[糧食] 자기 양석 애끼기 위해서 선방을 가서, 일단 선방에 갔으면 참선이라도 열심히 했으면 지옥에를 아니 가고도 될 텐데,
가서 앉어서 죽비(竹篦)를 치면 딱 눈감고 앉어서 '금년에 어느 땅에서는 몇 가마니가 나오고, 어느 땅에서는 몇 가마니가 나오고, 그래서 그놈을 합하면 몇 가마니인데 논을 몇 마지기를 살 수가 있다. 그리고 내년에는 또 얼마고?' 해 가지고, 일 년 이태 앞으로 10년, 20년 한하고 그것을 눈을 감고서 속으로 암산(暗算)을 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시간을 지내다가 그 철에 결국은 죽어 가지고 지옥에 구경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도 삼사십 명의 보살님네들이 참선을 아주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마는, 그 가운데는 혹 죽비를 치고 앉아서 '내가 돈을 누구에게 암만를 줬는데 3부 이자를 받으면 얼마가 되겠다. 그놈을 모아 가지고 얼마가 되면 그놈 가지고 딸을 얼마 주고 아들 얼마 주고' 이런 계산을 하고 계신 할머니가 혹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서호 스님처럼 잠깐 지옥고(地獄苦) 구경만 하고 감형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가 다시 또 들어가서 지옥고를 받을 것이 아니라.
기왕 참선을 하실 바에는 첫째, 나도 나이야 많건 적건, 남자건 여자건,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기어코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다.
나에게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이 없는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참선은 시간, 오랜 시간을 걸려야만 하는 게 아니라, 올바르기만 하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는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신념(信念), 신념을 첫째 가지고.
두째는 분심(憤心), '어째서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과 역대 선지식(善知識)들은 진즉 나를 깨달라 가지고 견성을 해서 중생을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무엇 하느라고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하면서 금생에 이르도록 나를 깨닫지를 못했을까?' 이 점에 대해서 분심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분심 없이는 아무리 겨울마다 여름마다 선방에 앉아서 시간을 잘 맞춘다 하더라도 나를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는 신념, 두째는 분심.
분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용기와 직결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업이고, 어떠한 학문이고, 신념과 용기가 없이는 중도에서 그만두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지지부진(遲遲不進)해서 공부에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에는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화두에 대한 철저한 의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큰 의심 있는 곳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의심이 빈약을 하면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사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그마한 소견(所見)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신심과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정(大疑情), 대의심(大疑心)이 이 3가지가 구족(具足)할 때에 우리의 도(道)는 경각간(頃刻間)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자경(自警) 법문, 『자경(自警)』이라 하는 것은 신라 시대에 야운 스님, 원효 스님의 제자이신 야운(野雲) 스님이 3일 만에, 원효 스님의 제자가 된 뒤 3일 만에 확철대오를 한 그러한 대도인(大道人)입니다.
그 도인이 깨닫고서 후래(後來) 중생들을 위해서 각기 자기에게 경(警), 깨우치는, 자기를 일깨워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도를 닦도록 하기 위한 법문인 것입니다.(처음~18분39초)
(2/4)----------------
오늘은 7일 기도에 회향일로서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은 각기 어떠한 큰 소원과 또 작은 소원, 먼 소원과 가까운 소원들이 각기 있었을 줄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은 아주 효심이 지극해서, 그 노모(老母)가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노모가 병환이 났습니다. 그 노모 병환을 낫우기 위해서 천하에 명의를 다 모아 가지고 치료를 했고, 좋다는 약은 아무리 비싼 약도 불구하고 만금(萬金)을 주어서 약을 구해 가지고 썼지만, 백약(百藥)이 무효였습니다.
그래서 바라문(婆羅門) 학자들을 수백 명을 초청을 해서 공양을 올리고, 그 바라문 학자들에게 자기 어머니의 병을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문의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진리를 깨달은 대학자들이니까 반드시 우리 어머니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실 테니 그걸 좀 일러주십시요"
그러니까 그 바라문 가운데에 한 사람이 우멍하게 눈을 감었다 떴다 하더니, "지끔 하늘에 별들이 제자리에 있지를 못하고 이리저리 혼잡을 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 음양의 질서가 흐트러져 가지고 그것 때문에 국왕에 모친이 병환이 난 것이니, 하늘에 태양과 달과 별들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되 동물, 코끼리와 소와 말과 양 돼지 등 백 마리를 잡어서 희생으로 바치고, 거기에다가 아주 잘생긴 몸에 흠 하나 없는 소년을 갖다가 생(生)으로 그 희생(犧牲)으로 바쳐서 하늘나라에 제사(祭祀)를 지내면 병환이 낫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제사를 지내되 성 밖에 넓은 터에다가 제단을 차리고 직접 왕이 그 왕에 어머니를, 대비마마를 모시고 나와서 꿇고 앉아서 제사를 올리십시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왕은 믿고서 그러는 준비를 다 했습니다. 해 가지고 제사를 지낼려고 할 때에 부처님께서 가만히 관(觀)을 해 보시니까, 그냥 뒀다가는 백 마리의 그 산짐승과 아까운 소년 하나가 불에 타서 죽을 것을 염려하시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 제(祭)를 지낼려고 하는 현장에 나아가셨습니다. 가셔서 법문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무릇 곡식을 얻으려면은 땅을 갈고 씨를 심어서 잘 가꿔야만 곡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장수 수명장수(壽命長壽)를 하려면 마음을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항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죽은 목숨을 살려 주고, 다른 몸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 약을 사 주고, 이렇게 해서 자비심을 갖는 것이 자기의 수명을 연장(延長)시키는 최선의 길이니라. 그리고 부귀를 얻으려면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布施)를 하고 사회복지를 위해서 희사(喜捨)를 해야만 부귀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를 얻으려면은 학문을 열심히 닦아야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 지혜는 세속적인 지혜도 들어가고, 참으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벗어나서 진리의 지혜를 얻으려면 물론 마음을 비워서 참나를 깨닫는 것이 되겠습니다마는,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곡식과 장수와 부귀와 지혜를 얻는 방법을 말하셨습니다.
세상에 부자로 사는 부귀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음식과 옷을 주어도 먹지를 않고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부자로 고귀하게 사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그러한 음식을 주어도 잘 먹지를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하늘나라에 천신(天神)들은 그 집은 칠보(七寶)로 장엄이 된 궁전에서 살고, 입는 옷은 무겁지도 않고 아주 가볍고 따뜻하고 서늘하고 한 그러한 옷을 입으며, 음식은 감로(甘露)의 음식으로써 얼마든지 먹고만 싶으면 이미 배가 불러져 있을 만큼 그렇게 제절로 맛있는 음식 좋은 옷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인간 세상에 소나 돼지나 말 염소 그러한 추악한 추한 그런 고기를 먹으며 또 사람을 갖다가 바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그 신들이 그런 것을 먹기 위해서 이 제단에 올 수가 있겠느냐. 이러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을 듣고 그 왕도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懺悔)를 하고 또 거기에 모였던 바라문들, 수백 명의 바라문들도 자기들이 그러한 진리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말을 국왕에게 일러 가지고 큰 죄를 지을뻔한 것에 대해서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 국왕의 어머니는 그 법문을 듣고 거기에서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마음에 기쁨을 얻음과 동시에 백약이 무효했던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소원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자기의 업, 죄업(罪業)을 참회를 우선해서 해야 한다고 한 것을 이 기도 입재일(入齋日)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참회를 하고 그리고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십선(十善)을 닦는 것이 소원을 성취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기도(祈禱)라 하는 것은 어떠한 절대자에게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나아가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도록 기구(祈求)를 하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마는, 기도는 마치 산에서 산골짜기에서 고함을 치면 큰 고함을 치면 큰 메아리가 울려오고, 노래를 부르면 노랫소리가 울려 나온 거와 같이 그 사람의 정성(精誠)이 얼마만큼 철저했느냐, 기도하는 방법이 얼마만큼 바르냐, 얼마만큼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소원의 성취 여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충청남도 금산, 옛날에는 전라북도고 지금은 충청남도가 되었습니다마는 금산에 가면 보석사라고 하는 오래된 절이 있습니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이 6 · 25 동란이 나서, 그분은 부인을 데리고 사시는 분이었습니다마는 6 · 25 동란을 맞아 가지고 부산으로 피난(避難)을 갔습니다. 부산에 금수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그 절로 피난을 가서 방 한 칸을 얻어 가지고 그 할머니하고 같이 거기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연세가 많은 탓으로, 객지에 가서 날씨는 춥고 먹는 것은 센찬코, 도저히 그 고생이 형언(形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괴로왔던지 중풍병(中風病)이 일어나 가지고 반신(半身)을 쓰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방에서 대소변을 받아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백방으로 서둘러서 좋은 약은 다 구해다가 봉양을 하고, 좋은 의원이 있다고 하면 모셔다가 침(鍼)도 놓고 뜸도 뜨고 약도 쓰고 했지마는 전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석사 그 주지 스님은 아무리 생각해도—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나을까?' 하고 희망을 가지고 침도 맞고 약도 쓰고 백방으로 다 해 봤지만, 아무리 해 봤자 터럭끝만큼도 효험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병 나을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내가 하루 더 살면 하루 남을 괴롭게 하고 못살게 하고 나만 더 괴롭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내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밥도 굶고, 죽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아주 죽기로 결심을 하고서 계속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열흘, 이렇게 해서—누울라야 몸이 아퍼서 누울 수도 없고 그래서 이불을 말아 가지고 벽에다 세워 놓고 그 이불에다 등을 대고 다리를 뻗고 앉어서, 그래 가지고 아주 한시라도 빨리 죽기를 원(願)을 세우면서 계속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2주일 이렇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하루는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30년 전에 돌아가신 은사 스님이 떠억 찾어와서 "내가 지나다가 니가 여기서 고생을 하고 있다길래 잠깐 들렸다. 니 입은 옷이 센찬쿠나. 이 옷을 입어라" 하면서 조그만한 보따리를 주어서 그걸 끌러서 보니까 아주 얄팍한 얇은 그런 내복이었습니다.
"스님! 지금 아직 날씨가 추운데 이렇게 얇은 것을 입고 어떻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그래 괜찮다. 보기와는 달라서 이걸 입으면 가볍고 뜨시고 좋다. 그리고 니가 아프다니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 어디 진맥을 좀 해 보자" 그러면서 팔목도 만져 보고 왼쪽 팔, 왼쪽 다리, 아픈 데를 고로고로 문지르고 주무르고 고로고로 만져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잘 있거라. 그리고 병 치료 잘해라"
그리고서 그렇게 그 다리 속이 뼛속이 아프고 절리고 했던 것이 그 스님이 이렇게 만지는데 어찌 기분이 시원한 것 같애서 자기도 그 아픈 다리를 주물르면서 요렇게 다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이렇게 드니까 깜박할 사이에 스님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있어서 '참 이상하다' 그 스님한테 받은 옷은 간 곳이 없고 스님도 갔고, 그러고 만지고 하면서 있는데, 자기 그 할머니가 밖에 나갔다가 나가서 들어오면서 어디서 돌팔이같이 생긴 의원 영감님을 한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이분이 중풍병 고치는데 아주 공이 있으신 의원이라"고, "아주 어렵게 찾아서 이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니 좀 침(鍼)을 좀 맞읍시다" 헌께,
"나는 침 안 맞는다"고, "침 안 맞을 테니까 아주 그분을 보내라"고.
"그래도 여까지 왔으니까 한 번만 맞아 보라"고 하도 사정을 해서 '인자는 내가 30년 전에 돌아가신 스님이 와서 흰옷을 주고 간 것이 아무래도 나가 인자 오늘 죽거나 오래 살아도 수삼 일 이내에 내가 죽을 것이로구나. 내가 죽을 꿈을 그렇게 꾸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기왕 죽는 몸에, 죽는 김에 저렇게 그 마누라가 저렇게 서리가 부옇게 내린 새벽길에 나가서 의원을 저렇게 모시고 온 그것이 참 고마와서 그 사람 가슴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소원으로 이거 침을 맞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그러면 침을 놓으시라"고, 그래서 그 의원이 여기저기 몸에다가 수십 대 침을 놓았습니다.
놓고서 "어디 팔을 한번 들어 보라"고.
"그렇게 침을 맞고 약을 먹고 해도 낫지 않는 팔이 들어지겠습니까? 안 들어집니다"
"아니, 그래도 한번 들어 보라"고 하면서 의사가 그 노장님 팔을 쑥 들어올렸습니다. 뜻밖에도 팔이 들어올려지고, "다리도 한번 들어 보라"고. 다리도 딱 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원이 "그것 보라"고. "내 침이 보통 침이 아닌데, 아! 그렇게 그 팔이 움직여지고 다리가 움직여지는데 왜 안 들어진다고 하냐"고 아주 그 의원이 자기의 그 침이 그렇게 영험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자랑삼아서 기고만장(氣高萬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장님은 '니가 침 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까 꿈에 그 스님이 와서 주물러 주어서 그래서 나은 것이지, 니가 가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그 자기 침 때문에 나은 줄 알고 야단이다'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인사로 "참 고맙다"고. "덕분에 이렇게 몸이 많이 효과가 있다"고 그렇게 인사를 하고 그분을 보냈습니다. 그 뒤로 그 노장님 병이 완쾌하게 나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부산에 피난살이를 어느 정도 끝내고서 서울에 삼각산에 그 금선암이라고 하는 절을 짓고 10여 년간을 아주 건강하게 잘 사시면서 '이미 내 몸은 10여 년 전에 6 · 25 때 이미 죽은 몸인데,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내가 다시 살아났으니 이 몸뚱이는 내 몸이 아니라 오직 이 불법(佛法)을 펴기 위해서 일생을 마쳐야 할 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지막 80여 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신도 교화를 위해서 몸을 바치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화로써 어째서 그러면 중풍, 세상에 중풍을 염불(念佛)해 갖고 중풍이라고 하는 그런 병이 나았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조끔 안 믿어지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염불을 하던지, 기도를 하던지 정말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그러한 중풍병 뿐만 아니라, 문둥병과 같은 그러한 병도 나은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18분42초~37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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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보석사 주지 스님은 어째서 어떻게 했가데 병석에 앉아서 그렇게 했는데, 그런 무서운 중풍병이 나았느냐?
첫째는 '살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죽을려고 마음을 냈다' 죽되 왜 죽을라고 하느냐?
자기 몸이 괴로와서만이 아니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 줘야 하거늘 내가 육십 평생을 중노릇을 한 사람이 나로 인해서 저 나이 많은 마나님을 갖다가 저렇게 고생을 시키고, 이 피난살이에 그냥 와서 한쪽에 있는 것도 큰 폐가 되는데, 이러한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병이 되어 가지고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똥오줌을 싸고 냄새를 피우니 이 부처님께나 이 절 주지 스님에게도 그러한 죄가 될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하루라도 빨리 죽어야겠다' 이러한 마음을 가졌고, 또 하나는 단식(斷食)을 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병이 나면 어쨌던지 먹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먹고, 정신을 차리고 원기를 보충을 해야만 병이 빨리 낫는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단식(斷食)을 한다고 하는 거, 단식을 하는 것이 어떠한 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짐승들은 병이 나면, 소나 말이나 돼지나 병이 났다 하면은 단식을 합니다. 입을 딱! 다물고 아무것도 먹지를 않습니다. 먹지 아니함으로써 한 사흘쯤 굶으면 어지간한 병은 다 낫습니다. 병이 나은 다음에사 비로소 돼지나 개나 소나 말이나 음식을 먹습니다.
짐승은 병이 나면 단식해 가지고 스스로 자기 병을 낫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리석게 영리해 가지고 병만 났다 하면 그렇게 먹기 싫고 귀미[口味]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먹어 가지고, 병(病)을 밥상 밑으로 내쫓는다 해 가지고 억지로 먹어 가지고 끌끌거리고 소화가 안 되고, 맛이 없으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은 영양이 흡수가 되지를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지로 대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그 기력 없는 기력을 더 많이 소모하게 됩니다.
음식을 먹으면 활발하게 소화 작용이 벌어지고 또 흡수를 해 가지고 노폐물은 배설을 하고 영양은 섭취를 해 가지고 전신으로 공급이 되어야 하는데, 병이 나면 그러한 일들이 병나는 데로 모든 피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 동원되기 때문에 음식을 소화하고 흡수하고 배설할 수 있는 그러한 작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음식이 들어와도 소화도 못 시키고 흡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는 자동신호가 바로 '귀미(구미)가 떨어진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귀미가 떨어지면, '아하, 이거 먹지 말라 라고 하는 몸안에서의 소식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어디가 아퍼서 귀미가 떨어지던지 또는 속이 되게 상해 가지고 입맛이 뚝 떨어지던지, 무슨 근심 걱정이 있어 가지고 밥이 먹기 싫던지, 이럴 때에는 밥을 굶으십시요. 그리고서 냉수를 한 컵 마시세요. 이렇게 하면 병이 났다 하더라도 빨리 치유가 되고 또 체하는 법도 없고.
속이 되게 상할 때 밥을 억지로 먹어 놓으면 담방 체해 가지고 끌끌거리고 소화도 안 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여러 날 고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기 싫으면 먹지 말고.
요새 귀여운 아들과 딸을 가지신 분들은 애들이 아침에 밥을 안 먹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그렇게 가슴 아파하고, 이걸 어떻게 달래고 타일르고 해 가지고는 억지로 먹여서 보낼라고 야단입니다. 이건 우리도 어렸을 때 겪어봐서 압니다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먹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안 먹으려고 하는 애들은 잘 달래서 물이나 한 컵 먹여서 보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유도 좋지를 않고 계란도 좋지 않고, 더군다나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먹여서 보내 놓으면 좋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될 수 있으면은 혹 귀미(구미)가 있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은 모르지만, 먹기 싫거든 언제든지 먹지 마십시요.
우리가 일생 동안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열 가마니나 또는 스무 가마니 딱! 지정이 되어 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먹는 양을 많이 먹으면 그 지정된 자기의 식량이 빨리 없어질 것이고, 조끔씩 먹고 또 먹기 싫을 때 안 먹고, 병이 났을 때 안 먹고 또 아침에 안 먹고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그거 식량을 아껴서 먹으면 그것이 바로 육십 세까지 다 먹을 것을 그렇게 해서 평소에 조끔씩 먹고, 귀미 없을 때 안 먹고 또 아침에 안 먹고, 기분이 나쁠 때 안 먹고, 슬플 때 안 먹고 해서 자꾸 핑계를 대서 적게 먹으면 육십 세밖에 못 살 사람이 칠십 세도 살 수 있고 또 팔십 세도 살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돈을 아껴서 쓰면 오래 쓰고 막 함부로 쓰면은 빨리 바닥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우스게 말로 들으실는지 모르지만, 적게 먹되 그것을 잘 소화를 시키고 완전히 흡수를 하면은 그것이 좋은 것이고, 많이 먹되 소화도 잘 못 시키고, 흡수도 잘 못하고 잔뜩 대변만 많이 누면 이것은 몸만 괴롭게 하고, 아까운 곡석[穀食]과 음식물을 헛되이 낭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며, 나아가서는 건강도 나빠지고 수명도 단축하는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병자구입(病自口入)하고 화자구출(禍自口出)이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이 입을 통해서 들어온다' 하는 말은 음식물을 통해서 많은 병이 생긴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 재앙이 왜 입에서 나오느냐? 말조심을 하지 아니하고 말을 함부로 하다가 모든 재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에 말 잘못해 가지고 죽는 예가 많고, 부부간에 얼마나 많은 싸움이 말 한마디 때문에 일어나고 농짝을 때려 붓는 예가 많은 것입니다.
말이라 하는 것은 형제간에도 말 때문에, 일가 간에도 말 때문에, 친구 간에도 말 때문에 새이가 벙그러지고 웬수가 되는 예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재앙은 입에서 나오고, 병은 입을 통해서 들어온다」 하는 말씀이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아주 내 몸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선을 할 때에 무아(無我), 무아의 경지를 겪어야만 깨달음에 도달한다. 또 기독교에서는 '나의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에게 다 바치고. 나는 죄 많은 중생이요, 아무 힘도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 전체를 다 바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살려고 마음먹을 때에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구제를 받는다' 하는 교리와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칠 일 동안 가정에서 또는 이 법보선원에 나오셔서 각기 열심히 기도를 하셨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한 기도를 아까 이 보석사 주지 스님처럼 완전히 부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맽기고, 나의 모든 죄를 참회(懺悔)를 하고 그렇게 간절히 하셨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신 크고 작은 소원은 반드시 성취가 될 것을 저는 보증을 합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목적, 부처님 제자로서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아무리 내 뜻대로 얻어졌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밖에서 구해서 얻은 것은 반드시 밖으로 도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안에서 나의 안에서 찾아야만 그것은 영원한 것인 것입니다.
명예나 권리나 재산이나 무엇이고 밖에서 얻은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남이 훔쳐 가거나 빼앗아 가거나 제절로 나로부터 떠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안에서 찾는 거 '이뭣고?' 내가 나를 찾는 거, 참선 공부, 참선을 통해서 참나를 깨달은 것 그것만이 오직 영원한 것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참선을 할 때 그것을 열심히 하면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나 그런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은 제절로 다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를 등한히 하고 그리고서 밖으로만 명예와 권리와 재산을 구하는 사람은 설사 일시적으로 얻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나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맨들어 놓고 떠날 때가 꼭 있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필요한 만큼은 얻어지고, 설사 얻어졌다가 그것이 나로부터 떠난다 하더라도 그 떠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내가 불행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행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썩 행복해질 것도 없고, 그것이 이르러 오면 이르러 온 것에 따라서 적절히 나를 위해서 쓰고, 자손을 위해서 쓰고, 가정을 위해서 쓰고, 또 남을 위해서도 쓰고, 사회 국가를 위해서도 쓰는 것입니다.
쓴 만큼 쓰다가 또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해서 그것이 또 나로부터서 떠나면 떠난 대로 검소하게 살며, 많이 생기면 많이 생긴 대로 적절히 쓰고 또 적게 생기면 적게 생긴 대로 적절히 쓸 따름이지,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우쭐대고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으시대고 행세를 하다가 그것이 떠나면 하루아침에 불행한 사람이 되어 가지고 풀이 죽어 가지고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돈은 억지로 욕심을 부리면서 남을 해롭게 하면서 억지로 벌려고 한다고 해서 벌어지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분복(分福)이 있어서 부자로 살 사람은 오백 석 할 사람은 오백 석 하고, 천 석 할 사람은 천 석 하는 것이지, 오백 석밖에 못 할 복밖에는 없는 사람이 눈에다 불을 쓰고 칼을 두르고 휘두른다고 해서 그것이 천 석이 절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이뭣고?만 하고 돈벌이도 하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고, 그러면 눈만 감고 밤낮 앉았으면 내외간에 그래도 되냐?'
그것이 아닙니다. 세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의 기술과 형편에 따라서 적절한 직장을 가지고 충실하게 성실히 일을 해야 합니다. 농사를 짓건, 장사를 하건, 관공서에 나가건, 회사에 나가건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을 하면서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얻어지는 재산을 또 유용하게 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항시 마음으로는 '이뭣고?' 화두를 해서 마음에 양식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지는 것으로는 육체를 육체와 가정을 돌보지만, 참선을 통해서 자기의 영원한 마음을 잘 닦고 가꿈으로 해서 앞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37분28초~53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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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칠십 년,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돌아오고 맙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물질적인 육체에 지내지 못하고, 육체가 고장이 나면 그 육체를 버리고 다시 또 새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천상의 옷을 갈아입든지, 인간의 옷을 갈아입든지, 짐승의 털 난 가죽옷을 입든지, 뱀과 같은 파충류의 옷을 입든지, 귀신의 몸을 받든지, 지옥의 신세가 되든지, 모든 것은 자기가 어떻게 짓고 닦고 살았느냐 한 것에 따라서 그러한 옷이 자기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因果)의 법칙은 추호도 어김이 없는 팥 심은 데 팥이 나고,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그러한 지극히 과학적 사실에 지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과의 법칙을 우리의 눈앞에서 현실적으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인과의 법칙을 미루어서 생각하면 전생(前生) 일도 또한 내생(來生) 일도 환히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있어서의 일 초 일 초가 모여서 결국은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미래가 약속될 수가 없습니다.
현실을 바르게 그리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만이 자기가 금생 동안에 죽을 때까지의 자기의 운명도 결정되려니와 이 몸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내생에 저 내생, 무량겁을 두고의 자기의 운명도 오직 현생(現生)의 한 생각 한 생각이 중대한 원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옛날에 오무기(五武器)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 왕자는 아주 훌륭한 그 선생을 찾아가 가지고 다섯 가지의 무술을 익혔습니다. 활 쏘는 법 또 칼 쓰는 법 또 방패 쓰는 법 또 방(棒), 몽둥이 봉술 그리고 또 창을 쓰는 법,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을 아주 선생님에 못지않을 만큼 잘 배워서 능란하게 익혀 가지고 그 선생의 인가를 받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큰 광야를 만났는데, 광야를 지내오는 도중에 키는 야자수만큼 그렇게 몇십 척이 되는지 크고 그리고 눈은 큰 쟁반처럼 부리부리하고 그리고 아금니는 독수리 발톱처럼 생긴 그 무서운 아금니에다가 전신(全身)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털이 전신에 털이 나 갖고 있는 그러한 무서운 괴물을 만났습니다.
괴물이 앞을 턱! 가로막고서 "내가 여러 날을 굶었는데 마치 니 토실토실한 니 몸을 내가 먹어야겠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고서 달라들었습니다.
그때 이 오무기(五武器)라고 하는 왕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활을 갖다가 쏴 가지고, 그 괴물에 목을 향해서 쐈습니다. 뚫고 영락없이 뚫고 들어가 가지고 퍽! 쓰러질 줄 알았는데 쓰러지기 커녕은 그 화살이 그 번질번질한 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괴물은 또 한 발 다가왔습니다.
거기서 또 칼을 빼 들고 달라들어서 그 칼로 괴물에 목을 갖다 쳤습니다. 툭! 쓰러질 줄 알았는데 쓰러지지도 않고 칼이 괴물에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다음에 몽둥이를 휘둘러 가지고 몽둥이로 후려쳤는데 몽둥이도 딱! 들어붙어 버렸습니다. 방패도 딱 들어붙어 버렸습니다. 창도 갖다가 냅대 염통을 향해서 찌르고 달라들었는데 들어가지도 않고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몸에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무기가 다 그 괴물에 몸에 붙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주먹으로 냅대 치고 달라들었습니다. 주먹이 그 괴물에 몸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다음에는 발길로 냅대 찼습니다. 발로 냅대 차도 발이 딱 붙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목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가지고 그 괴물에 가슴팍에다 냅대 쳐 받았는데 모가지까지, 머리까지 괴물에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괴물이 하는 말이 "이제 다섯 가지의 무기와 니 주먹과 다리와 머리까지도 내 몸에 붙어버렸어. 이제 너는 꼼짝 못 하게 되었으니 이제 너는 내 입속으로 들어갈 수밖에는 없다. 어쩌냐, 각오는 단단히 되었느냐?"
오무기(五武器) 하는 말이 "허허, 니가 잘 몰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무기가 있는데 그 무기는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다. 인자 니가 나를 삼킬라면 삼켜 봐라. 내가 니 뱃속에 들어가 가지고 그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내두르면 니 창자 속이 갈기갈기 찢겨 가지고 너는 펄펄 뛰다가 죽어. 그러면 내가 니 배를 째고 나오면 되는 것이니 먹을라면 먹어라. 먹을수록 나는 더 좋다"
아, 그러니까 그 괴물이 아! 그 찬찬히 쳐다보니까 조끔도 두려운 기색이 없고 아주 자신이 만만해 가지고 먹으라고 하는데 겁이 왈칵 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금강이라는 무기를 빼 들고 달려들면 참으로 자기가 죽을까 싶어서 거기서 항복을 하고 빌었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나옵니다.
이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금강은 어떠한 쇠나 어떠한 것으로서도 이 금강은 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을 갖다가 '금강'이라 그러고. 『금강경(金剛經)』이라고 하는 경(經), 우리의 지혜(智慧) 지혜를 갖다가 금강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법보선원, 용화사 법보선원에 와서 이 금강을, 우리가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고 배워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건, 어떠한 슬픔을 만나건, 어떠한 괴로움을 만나건, 그때일수록 그 금강을 갖다가 챙겨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가슴이 아플 때도 '이뭣고?'
억울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참선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슬픔과 그 괴로움과 그 억울함 때문에 가슴속에 불이 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병이 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가정이 파탄이 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지만, 정법(正法)을 믿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사람은 그러한 어려운 고비 고비를 잠깐도 놓치지 말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허리를 쭈욱 펴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그때그때를 잘 단속해 나간다면 그러한 어려운 일들, 그 광야에서 나타났던 그 괴물, 괴물도 꼼짝을 못하고 항복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고 많은 괴로움과 재난도 이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화두(話頭) 한 생각으로써 결국은 다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결국은 어떠한 기도 기도도, 어떠한 불공(佛供)도, 어떠한 수행도—아까 여러 가지의 무기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활이나 칼이나 창이나 몽둥이가 염불 · 기도 · 독경 · 주력 모다 이러한 것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고,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는 바로 내가 나의 참마음을 깨닫는 지혜를 얻는 길, 참선 화두에다가 비교를 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길을 철저히 믿고 성실하게 해 나가면 얼마 안 가서 여러분은 과연 이 금강이라고 하는 무기가, 이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무섭고 훌륭하다고 하는 것을 직접 마음으로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을 느꼈을 때 여러분은 신심(信心)을 안 낼라야 안 낼 수가 없고, 분심(憤心)을 안 낼라야 분심을 안 낼 수 없고, 깨달음을 얻지 아니할라야 아니할 수가 없이 제절로 얻어질 것입니다.
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소원이 경각간(頃刻間)에 이루어지고, 앞으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 어려운 것이 오히려 나에 도움이 되어주도록,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밑거름이 되어지게 하는 묘(妙)한 방법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여~ (녹음 끊김) (53분27초~66분12초) (끝)
[법문 내용]
(게송)파사노년친석가~, 일념불생전체현~ / 파재간탐(破財慳貪), 서호 스님 이야기 / 최성팔 중음신(中陰身) /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정(大疑情), 대의심(大疑心) 삼요(三要).
부처님 당시에 왕의 노모 병환 치유 이야기 / 소원성취를 하려면 우선 죄업(罪業)을 참회하고, 나아가서 십선(十善)을 닦아야 / 기도는 올바르게, 정성(精誠)으로,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해야 / 충남 금산 보석사 주지스님 중풍 치료 이야기.
단식(斷食) /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병자구입(病自口入)하고 화자구출(禍自口出)이라」 / 우리의 부처님 제자로서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 / '이뭣고?' 나의 안에서, 내가 나를 찾는 거, 참선을 통해서 참나를 깨달은 것 그것만이 오직 영원한 것.
인과(因果)의 법칙 / 무량겁, 자기의 운명도 오직 현생(現生)의 한 생각 한 생각이 중대한 원인이 된다 / 오무기(五武器) 왕자 이야기.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의 무기 /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지혜(智慧)의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
〇참선이라 하는 것은 내게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참나를 깨닫는 수행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이보다 더 소중하고 고귀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 법계(法界)가 넓고 크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 우리의 마음자리에 비교하면 이 우주는 좁쌀알만 한 것에 지내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자리는 이 허공만큼 큰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우주가 더 크고, 우리의 몸뚱이 우리 몸뚱이 속에 있는 마음자리는 참으로 좁쌀알만 한 그런 존재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그리고 절대적인 참나, 바로 그것이 우주에 근본이요, 우주에 진리요, 그것으로부터 요 우주는 다 벌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이 우주에 뿌리가 바로 우리 낱낱이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혀를 통해서 맛보고, 몸을 통해서 춥고 더웁고 한 것을 감각하고, 뜻을 통해서 슬프다 괴롭다 즐겁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바로 그놈이 바로 우주에 근본이기 때문에, 우주에 근본인 참나를 찾는 공부야말로 이 세상에 어떠한 사업에다도 비교할 수가 없을 만큼 위대하기 때문에 참선하는 흉내만 내도 지옥에 고(苦)를 감형(減刑)을 받고, 참선한 사람은 염라대왕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표현이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〇화두에 대한 철저한 의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큰 의심 있는 곳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의심이 빈약을 하면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사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그마한 소견(所見)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정(大疑情), 대의심(大疑心)이 이 3가지가 구족(具足)할 때에 우리의 도(道)는 경각간(頃刻間)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〇기도(祈禱)라 하는 것은 어떠한 절대자에게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나아가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도록 기구(祈求)를 하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마는, 기도는 마치 산에서 산골짜기에서 고함을 치면 큰 고함을 치면 큰 메아리가 울려오고, 노래를 부르면 노랫소리가 울려 나온 거와 같이 그 사람의 정성(精誠)이 얼마만큼 철저했느냐, 기도하는 방법이 얼마만큼 바르냐, 얼마만큼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소원의 성취 여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〇「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병자구입(病自口入)하고 화자구출(禍自口出)이라」
〇기도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아주 내 몸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선을 할 때에 무아(無我), 무아의 경지를 겪어야만 깨달음에 도달한다. 또 기독교에서는 '나의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에게 다 바치고. 나는 죄 많은 중생이요, 아무 힘도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 전체를 다 바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살려고 마음먹을 때에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구제를 받는다' 하는 교리와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〇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목적, 부처님 제자로서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아무리 내 뜻대로 얻어졌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밖에서 구해서 얻은 것은 반드시 밖으로 도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안에서 나의 안에서 찾아야만 그것은 영원한 것인 것입니다.
명예나 권리나 재산이나 무엇이고 밖에서 얻은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남이 훔쳐 가거나 빼앗아 가거나 제절로 나로부터 떠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안에서 찾는 거 '이뭣고?' 내가 나를 찾는 거, 참선 공부, 참선을 통해서 참나를 깨달은 것 그것만이 오직 영원한 것인 것입니다.
〇허리를 쭈욱 펴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그때그때를 잘 단속해 나간다면 그러한 어려운 일들, 그 광야에서 나타났던 그 괴물도 꼼짝을 못하고 항복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고 많은 괴로움과 재난도 이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화두(話頭) 한 생각으로써 결국은 다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결국은 어떠한 기도 기도도, 어떠한 불공(佛供)도, 어떠한 수행도—아까 여러 가지의 무기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활이나 칼이나 창이나 몽둥이가 염불 · 기도 · 독경 · 주력 모다 이러한 것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고, 금강(金剛)이라고 하는 무기는 바로 내가 나의 참마음을 깨닫는 지혜를 얻는 길, 참선 화두에다가 비교를 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길을 철저히 믿고 성실하게 해 나가면 얼마 안 가서 여러분은 과연 이 금강이라고 하는 무기가, 이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무섭고 훌륭하다고 하는 것을 직접 마음으로 느끼실 것입니다. 그것을 느꼈을 때 여러분은 신심(信心)을 안 낼라야 안 낼 수가 없고, 분심(憤心)을 안 낼라야 분심을 안 낼 수 없고, 깨달음을 얻지 아니할라야 아니할 수가 없이 제절로 얻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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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오늘은 7월 24일 관음재 법요일입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당신의 일생 동안에 공안(公案)을 바로 이르신 것을 몇 가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안을 설파(說破)를 하셨습니다. 믿는 학자들 앞이라 기탄없이 당신이 일르신 공안을 공개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하고 간담이 서늘함을 느낍니다. 만약에 이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터럭끝만큼이라도 사량심(思量心)을 일으킨다던지 분별심(分別心)을 낸다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믿는 바른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량심이나 분별심,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가남을 해 보고 그러한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정법을 믿는 신심이 박약한 사람이 영리한 지해심(知解心)으로 알음알이로써 '아! 그 말씀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구나' 이러한 식으로 해서 요리조리 따져서 가남을 해 본다면 그것은 조실 스님의 그 자비하신 뜻을 만에 하나도 이해를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조실 스님은 학자들에게 까딱하면 무간지옥에 쏜살같이 떨어질 그러한 위험성이 있는 그러한 공안에 말씀을 우리한테 해 주셨느냐?
의리선(義理禪)과 조사선(祖師禪), 체중현(體中玄)과 현중현(玄中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우리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사량심이나 분별심으로 도저히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해야만 공안은 조사선(祖師禪) 도리,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꽈악 맥힌 채 눈을 감을지언정, 섣불리 사량심으로 공안을 더듬어 본다던지, 천착(穿鑿)을 해 가지고 아는 척 살림을 해 나가는 것은 스스로 무간지옥에 구뎅이를 자기 손으로 파는 일에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깨닫기만 하면 어떠한 공안이라도 바로 조끔도 사량심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공안을 이를 수가 있다고 하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공안을 공연히 사리상량으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철저한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공안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안에 답은 바로 가까운 데 있는 것을 여실히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공안을 보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라, 한 생각이라도 더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대신심과 분심과 의심으로의 거각(擧却)이 급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잠을 안 자고 이를 악물고 몸부림을 쳐도, 밥을 굶으면서 몸부림을 쳐도, 묵언을 하며 말을 아니하면서 몸부림을 쳐도, 이건 정말 애써 본 사람이 아니면 그 죽어버릴 수도 없고, 기둥에다가 머리빡을 짖쪄서 유혈이 낭자하게 맨들을 수도 없고, 어찌해 볼 수가 없을 만큼 이것은 정말 어찌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공부를 애당초에 알았던가? 차리리 이러한 것이 있는 줄을 몰랐으면 그저 배불리 먹고 편안히 잠자고 내생에야 지옥을 가건 말건 죽어 봐야 아는 것이고, 어째서 금생에 그러한 것을 알아 가지고 내가 이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대골통을 짖쪄서 꺼꾸러질 수도 없고 이런 법을 알았는가?'
정진하다가 적삼을 벗어서 방바닥에다 후려치면서 부처님과 조사 스님네를 원망하고 욕을 하는 그러한 납자(衲子) 스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괴롭게 구해라. 고행을 해라'
금생에 이 정진을 해 나가는데 여름에 더웁고 겨울에는 춥고, 몸뚱이는 뒤틀리고 때로는 골이 아프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이러한 가운데에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가. 공부가 안될수록에 더욱 침착하게 여법(如法)하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간절히 화두를 들고 나간다면 많은 어려움, 많은 괴로움을 겪을수록에 오히려 큰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격언에도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라」 이런 말도 있습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얼핏허면 한 소식했다고 아는 척을 하고, 그 아는 것을 남에게 보일려고 그러고,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짓인 것입니다. 누가 알아준다고 해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백만 명이 알아준댔자 자기 본분사(本分事)에는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지루하고 답답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대자유와 대해탈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하면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방초(芳草) 길, 잎도 피고 꽃도 피고 하는 그러한 방초(芳草)가 우거진 길을 걸어가지 아니하면, 꽃 떨어진 마을에 이르지 못하니라. 저 아름다운 꽃이 지고 피고 하는 그러한 마을에 가려면은 향기로운 풀이 우거진 그러한 오솔길을 걸어서 지나가야만 한다.
무량겁(無量劫) 업장(業障)을, 산보다도 더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무량겁 업장을 그놈을 녹이고서 그놈을 씻어내고서 본바탕 자기 마음을 보는데, 그렇게 그것이 수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괴로움 어떠한 장애라도 기어코 내가 디디고 넘어서야 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만한 각오, '목숨을 바치고라도 기어코 내가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해야겠다' 이만한 각오가 있어 가지고 정진을 해 나가면 실상은 그렇게 정진이 또 어려운 것만도 아닌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쪄눌리고 그렇지만 얼마 동안 익혀 나가면 다리도 저린 것이 없어지고, 허리 아프고 어깨 절리고 그런 것도 없어지고, 또 호흡을 잘 해서 요령을 얻어 놓으면 몸도 가볍고 또 혈액순환도 잘되고, 생각도 그렇게 퍼일어나던 번뇌와 망상도 차츰 가라앉아서 설사 망상이 전혀 안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화두는 떠억 들고 있는데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들고 있는데, 생각은 나에게 아무 타격도 주지 아니하고 그냥 슬쩍 스쳐만 지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공부해 나가는 데 조끔도 방해롭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가 잠깐 제 나름 저 혼자 일어났다 꺼지고, 잠깐 스쳐서 지내가고 그런 것은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아! 이런 생각이 안 일어나야 할 텐데, 이놈의 생각 때문에 화두가 여일치 못하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싸두는 것입니다. 가만 놔둬 버리고 화두만 떠억 챙겨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처음~15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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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를 들으라 들으라 하니까, "화두가.. 화두를 어떻게 듭니까? 어디가 놔졌어야 그놈을 들지, 어떻게 화두를 듭니까? 들어서 배꼽 밑에다가 딱 붙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그다가 붙이며.." 아주 그 대답하기가 대단히 거북한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고 우선 초학자는 이해를 하시면 되는 것이고.
"생각은 되는데 관(觀)이 안 됩니다. 근데 그 어떻게 하면 관(觀)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묻는 이도 있습니다. 또 "관(觀)이란 게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이도 있는데.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입니다. 생각에 일종인데, 그 생각을 자꾸 화두를 생각하고—사량심(思量心)으로 생각해 갖고는 안 되고, 사량심이 아닌 꽉 맥힌 의심(疑心),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한 번씩 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그러고.
한 번 '이뭣고?' 하고 화두를 한 번 생각하면, 들었으면, 그 생각이 한참 동안, 1분이 되었건 3분이 되었건 내지 10분 동안이라도 그 생각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여가 딱 있으면 그동안에 「화두가 들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딴생각이 쑥 들어와 가지고 화두가 어디로 가 버리고 없으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고.
또 딴생각이 들어오지는 안 했지마는 '이뭣고?' 한 그 생각이 희미해져 버려. 그래 가지고는 화두를 든 것인지 안 든 것인 중도 모르고 그냥 조용한 채 우두거니 앉어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른 새에 까빡 이렇게 되고 하는데. 그럴 때는 또 다시 화두를 떠억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한 번씩 챙기는 것이여.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딱 들어져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해서 계속 그렇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듯이 그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한 번 들어서 그 생각이 쭈욱 있으면 자꾸 연거퍼 그 위에다 자꾸 포개 놓지 안 해도 되어요.
이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따악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 요중선(鬧中禪)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요중선(鬧中禪)은 '시끄러울 료(鬧)' 자, '가운데 중(中)' 자, '참선 선(禪)' 자—시끄러운 가운데 참선하는 것을 요중선(鬧中禪)이라 그러고.
고요한 가운데 하는 참선, 정중선(靜中禪), 그건 인자 조용한 선방이나 조용한 방에서 아무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아니한 조용한 데 앉아서 따악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죽비를 치고 그렇게 앉아서 공부하면 그것을 정중선(靜中禪)이라 그러고.
밖에 나와서 일하면서 또 차를 타면서 걸어가면서 그런 가운데에 '이뭣고?'
이렇게 자꾸 그 시끄러운 속에서 공부를 다져 나가면 그걸 요중선(鬧中禪)이라 그러는데.
'조용한 데에서 공부를 익히는 것은 시끄러운 속에서 요중선(鬧中禪)을 하기 위해서 익히는 공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괜찮습니다.
만날 조용한 데서만 해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공부에 소극적인 방법을 취하는 사람이라, 이 공부가 매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는 것인데, 밤낮 조용한 데서만 익혀야만 공부가 좀 된 것 같고 그래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면은 그 사람은 정말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할 만한 그러한 힘 있는 공부에 힘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조용한 데에서 기초를 닦고, 시간 있는 대로 조용한 데에서 공부를 해야는 하지마는,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참선하는 데 옆에서 말을 하던지 또 애들이 떠들던지 그러더라도 '아! 공부 좀 헐라는데 시끄럽게 떠든다'고, '저것이 마구니가 와서 그런다'고 신경질을 팩! 내고 그럴 것이 아니라, 이 시끄러운 속에서 오히려 정신을 바짝 챙겨 가지고 화두를 한 번 떠억 들어라. 이런 식으로 마음을 써 나간다면 일 자체를 싫어하고 꺼려하고 그렇게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밤낮 조용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조끔 뭐 일할 거리가 생기면은 짜증이 나고 심술이 나고 불평이 나고 그런데, 일을 만나면 일한 속에서도 하고 조용한 시간에는 조용한 데서 하고, 명두래명두타(明頭來明頭打) 밝은 놈이 오면 밝은 놈을 치고, 암두래암두타(暗頭來暗頭打) 어둔 놈이 오면 어둔 놈도 치고, 사방팔면래연가타(四方八面來連架打) 사방팔면에서 오면은 작대기를 연거푸 치고, 허공래선풍타(虛空來旋風打)라, 허공에서 오면은 허공으로 오면은 바람을 돌려서 친다.
이건 보화(普化) 존자의 법문입니다마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정진을 해 나가면, 납자(衲子) 스님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 나가시면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수행 노선이라 훨씬 몸도 건강해지고 정진도 훨씬 더 힘 있게 되어 갈 것입니다.
더욱이 세속에서 사시는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께 '보살님'이라 한 이름을 붙여서 불러온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소승 나한(羅漢)은 생사(生死)에 빠지기를 가장 싫어해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에 들려면 첫째, 태중(胎中)에 들어가지 않해야겄다. 이것이 제일 중대한 조건입니다, 나한에 있어서는.
그래서 어쨌든지 '생사의, 태중에 들어가지 아니할려면은 또 그러한 업(業)을 짓지 아니해야 한다' 해 가지고 그러한 마음으로 도를 닦아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조용한 데만 찾기 마련인 것입니다. 사람 상대하기를 싫어하고, 일을 싫어하고 백만사를 멀리 여의고 끊고 여의고 해 가지고 조용한 데로 조용한 데만 찾아 들어가서 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보살(菩薩)은 '원래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닦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가 본래 없는 데 끊을 것이 무엇이 있냐?'
그래서 고인(古人)이 게송(偈頌)을 읊으기를, 일가수폐우중문(一家愁閉雨中門)이요. 한 집은 문을 닫고 비 가운데 근심을 하고 있는데, 삼월나유화하로(三月懶遊花下路)라. 삼월에 꽃 아래 길에서 오락가락한다.
한 집은 비 가운데 문을 닫고 근심한 것은 소승(小乘)의 경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비가 쏟아지는 데 행여나 비 맞을까 봐서 문을 쳐닫고 밖에를 나가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비 맞을 것이 무서우니까 집안에서 문을 닫고 떡 근심하고 있는 게고. 한 사람은 삼춘(三春)에 꽃이 만발했는데 그 꽃 아래 길에서 그 흥겨운 노래를 부르면서 오락가락 거니는 것.
보살(菩薩)은 세간에 살되, 거기에 세간(世間)이라 하는 것은 전체가 오욕락(五欲樂)인데, 오욕락 속에 살면서 생사 속에 살면서, 영욕득실(榮辱得失)과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 살면서, 조끔도 그런 것에 바람을 타지 아니한단 말여. 흥하면 흥한 대로 살고, 망하면 망한 대로 살고,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살고, 무슨 일이든지 닥치면 닥치는 대로 적절히 일을 처리해 나가되 자기 본심(本心)은 조끔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해 나가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을 해 나간다면 정말 여러분들에게 '보살'이라고 한 이름을 붙여도 조끔도 손색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라고 '보살님 보살님' 옛날부터서 불러 온 걸로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똑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은 행복하게 생각이 되고, 한 사람은 자기만이 불행한 사람으로 느끼면서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째서 같은 여건하에 있으면서 한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한 사람은 불행하게 사냐?
마음가짐이 '자기는 불행하다'고 생각을 해. 자기에게도 반드시 좋은 여건이 있으면서도 그 좋은 여건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두운 면을 자꾸 생각을 하면서 '자기는 불행하다, 자기는 불행하다' 아주 그것을 날이면 날마다 화두를 들듯이 자기는 불행하다고만 생각한 사람은 결국은 그 사람은 불행한—당장 그때도 불행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기어코 불행한 정말 명실공히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업이 조끔 여의치 못허다던지, 건강이 좀 좋지 못허다던지, 가정 문제가 원만하지 못헌다던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일들은 세속에 있어서 어느 집안이나 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꼭 나쁘게 생각하고 어둡게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원망만 하고 자기 신세만 한탄만 하고 그럴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로 봐줘. 그러한 대로 봐주면서 '그래도 나만한 여건하에 살기도 어렵다. 우리 집안만 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만한 어머니도 만나기 어렵다. 우리 며느리만한 며느리도 드물다' 이렇게 좋게 좋게 생각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고 또 화두를 들고 나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그렇게 마음에 섭섭하게 느껴졌던 어머니 시어머니, 마음에 항시 섭섭하게 생각이 되었던 며느리가 어느덧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게 되고.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그전에 잘못 봤구나. 이러한 좋은 며느리를 내가 그렇게 잘못 봤구나' 이리 생각하고.
'아! 우리 어머니가 난 처음에 시집와서는 굉장히 고약한 시어머니인 줄 알았드니 참 알고 보니까 그러한 좋은 어머니였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반야(般若)의 묘용(妙用)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는 지혜(智慧)인데, 지혜롭게 마음을 쓰면 그러한 묘(妙)한 작용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여서, 우리의 생각 조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180도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서 찾으라. 천당과 지옥도 시간과 공간을 멀리 잡고 딴 데에서 딴 시간에 찾지를 말고,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그곳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느끼게 됩니다. 화두(話頭) 한 번 들 때 지옥이 금방 천당이 되고.(15분7초~30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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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끔 시절이 뭐 '미끈 유월에 뭔 동동 팔월이니' 뭐 그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 지금 춥도 더웁지도 않고 마치 좋은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신도님네들도 이런 좋은 계절을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해 주시기 부탁을 드립니다.
공부는 언제 · 어데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입니다.
차중에서도 좋고, 길가에서 길 가운데서도 좋고, 밥 먹을 때도 좋고, 똥 눌 때도 좋고, 누구하고 얘기 할 때도 좋고 '이뭣고?' 썽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 돌이키는 그 공덕(功德)이, 팔만사천에 마구니를 항복을 받고 무량겁 죄를 녹여버리는 그러한 위신력(威神力)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거기에서 나오냐?
우리의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팔만사천 가지의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에서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우리는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라. 한 번 뛰어서 여래(如來) 땅에 올라간다」고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땅에 도달한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십만팔천 국토 서쪽에가 있다' 정토종의 경전에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아니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그러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 근기에 맞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표현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십만팔천 국토 서쪽으로 가야 있다'고 하는 말씀이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는 말은 정반대의 표현이지마는, 알고 보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번뇌망상 희로애락, 썽내고 웃고 슬퍼하고 그러한 생각들이 정말 우리 참선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썽낼 일도 없고 기뻐할 일도 없고 슬퍼할 일도 없고 아주 숙맥이 되어서 맹충이가 되어 가지고 우두거니 반병신이, 무슨 어떤 정신적인 큰 충격을 받던지, 중풍 같은 그런 병을 앓아 가지고 그런 바보가 되었다면 가련하게도 그 사람은 참선을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주 완전히 마비가 되어 가지고 웃을 중도 모르고 울 중도 모르고 썽낼 중도 모르고 '에~ 헤' 하고 있다면 그 어떻게 참선을 하냐.
듣기 싫은 소리 하면은 썽도 낼 줄 알고, 신경질도 낼 줄 알고, 슬퍼할 중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또 번뇌와 망상도 한량없이 퍼일어난 사람, 따악 그 사람이야말로 정진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여. 오히려 자격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라야 더 하기가 좋고, 했다 하면 공부가 굉장히 빨리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전부가 다 참선을 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는 그러한 상호(相好)를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법회 때마다 새로운 얼굴들이 나오신 것을 보고 대단히 반갑게 여겨지고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처음 나오신 분도 들어보면 아실 것이고 이해가 되실 줄 생각합니다. 그동안에 다른 절을 다니셨건 또는 처음으로 오늘 나오셨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 천수(千手)도 못 외와서 아직 불명(佛名)도 탈 수가 없고 참선을 아직 못합니다' 천수를 외우고 절에 많이 댕겨야만 불명도 타고 참선도 할 줄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계신 거 같습니다.
이 참선은 오히려 그런 것을 외우지 못하고 다른 절에 다니면서 방편(方便)으로 된 그러한 의식 같은 것에 물들지 아니한 순박한 분이 오히려 더 공부를 잘하실 수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조끔도 뒤로 미룰 것이 없이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참선을 시작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
이런 법회 때 오히려 화두가 더 잘 들리고, 조실 스님 녹음을 터억 틀어 놓고 앉었으면은 더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하게 더 잘 들릴 줄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또 일이 있으면 일어나서 일하면, 일하는 가운데에도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시도록 훈련을 쌓아 나가시면, 일을 해도 된 중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뭐 누구를 기달리거나 정거장에서 차를 기달려서도 조끔도 지루한 줄을 몰라. 차 올 때까지 '이뭣고?' 30분, 1시간 언제 지내간 중 모르게 지내가.
어떠한 근심이 있어도 '이뭣고?'를 하면 근심이 스르르르 근심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러한 근심이 바꽈져 가지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다고 나는 믿고 그러한 실증(實證)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기도를 하는 것도 좋고, 주력을 하는 것도 좋고, 염불을 하는 것도 좋고, 경을 읽은 것도 다 그 사람 정성껏 하면 다 효과가 있고, 감응이 있는 것입니다.
'참선은 죽도록 해서 나중에 깨달으면 몰라도, 부자 되고 아들 합격하고 남편 좋은 것에는 참선해 갖고는 소용이 없다. 그저 참선은 하면서도 그런 급한 일 있으면 강화 보문이나 강릉으로 쫓아가야지, 그거 안 된다' 혹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더러 있는 거 같습니다.
절대로 진짜 부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 불상(佛像),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자기 몸안에 있는 부처님은 산 부처님이고,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은 돌 쇠로 된 불상 같으면 용광로에다 넣으면 녹을 것이고, 나무로 된 불상은 불에다 넣으면 탈 것이고, 흙으로 빚어서 맨든 불상은 물에다 집어넣으면 흐믈흐믈해 질 것입니다.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용광로에 넣어도 녹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풀어지지 아니한 부처님은 바로 자기 마음의 부처님이여. 그 마음 찾으라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여.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는데 그 묘법을 설하신 바로 그 핵심이요, 요점이 「각기 너희 마음 부처를 깨달으라」 그거거든.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사람에게 부처님이 복(福)을 주시지, 그것을 등한히 하고 팔도로 쫓아다닌다고 부처님이 그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복을 주시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무리 '이뭣고?'를 해도 도저히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걱정이 되고 해서 마지못해서 집을 비우고 몇백 리 산속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시는 뜻을 나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가신 것을 꼭 나쁘다고 하진 않는데, 가서 거기서는 죽자사자 목탁을 치면서 목이 쇠도록 부르고, 오는 길에는 차중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런 분들이 수없이 많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차가 발딱 뒤집어져 갖고 팔이 부러지고. 여기에 오신 분들 가운데는 한 분도 그런 분이 안 계실 것을 잘 압니다.
앞으로 가을철이 되어서 단풍이 물들고 하면 공연히 옆구리 꾹꾹 찌르면서 '야! 설악산 가자. 오대산 가자' 오면서 가면서 화두는 다 놓쳐 버리고 엉뎅이 춤을 추면서 그러한 일이 지끔 이 시국에 있어서 정법을 믿는 여러분들은 그런 일이 없으셔야 할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 성지(聖地)에 기도를 가신다던지 성지 순례하신 것은 좋은 일이지마는 거기에다가 관광을 깃들여서 얼근히 한 잔 취해 가지고 광태를 부리다가 사고가 난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삼남(三南) 지방에는 수해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참 당하지 못할 재산과 인명 피해 속에서 있으니 만큼 여러분들도 분 따라서 분 따라서 그 의연금을 내시고,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지나치게 가을철을 낭비하시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실 것을 당부를 합니다.
의리선(義理禪)과 조사선(祖師禪), 체중현(體中玄)과 현중현(玄中玄)에 대한 분명한 인식 /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사량심이나 분별심으로 도저히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괴롭게 구해라.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다 / (게송)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
「화두를 든다」 = 「화두를 생각한다」, 「관(觀)」이라 하는 것도 내나 「생각」,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하면, 그것을 「화두를 든다」 / 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 요중선(鬧中禪), 정중선(靜中禪) / 소승 나한(羅漢)의 수행, 보살(菩薩)의 수행 / 일가수폐우중문(一家愁閉雨中門) 삼월나유화하로(三月懶遊花下路) / 반야(般若)의 묘용(妙用) / 행복은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서 찾으라 / 화두(話頭) 한 번 들 때 지옥이 금방 천당이 된다.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 / 번뇌와 망상, 모든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우리는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는 것.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땅에 도달한다.
썽도 낼 줄 알고, 신경질도 낼 줄 알고, 슬퍼할 중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또 번뇌와 망상도 한량없이 퍼일어난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정진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 했다 하면 공부가 굉장히 빨리 성취할 사람 /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한 놈, 조화가 무궁무진한 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이뭣고?'
절대로 진짜 부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 金佛不度爐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묘법(妙法)의 핵심이요, 요점이 「각기 너희 마음 부처를 깨달으라」
〇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사량심이나 분별심으로 도저히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해야만 공안은 조사선(祖師禪) 도리,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바로 깨닫기만 하면 어떠한 공안이라도 바로 조끔도 사량심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공안을 이를 수가 있다고 하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공안을 공연히 사리상량으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철저한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공안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안에 답은 바로 가까운 데 있는 것을 여실히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공안을 보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라, 한 생각이라도 더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대신심과 분심과 의심으로의 거각(擧却)이 급할 따름인 것입니다.
〇무량겁(無量劫) 업장(業障)을, 산보다도 더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무량겁 업장을 그놈을 녹이고서 그놈을 씻어내고서 본바탕 자기 마음을 보는데, 그렇게 그것이 수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괴로움 어떠한 장애라도 기어코 내가 디디고 넘어서야 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만한 각오, '목숨을 바치고라도 기어코 내가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해야겠다' 이만한 각오가 있어 가지고 정진을 해 나가면 실상은 그렇게 정진이 또 어려운 것만도 아닌 것입니다.
〇단전호흡(丹田呼吸)과 화두(話頭)가 언제나 같이 되어 가도록 그렇게 익혀 나가면, 단전호흡을 터억 하면 화두는 그 가운데 제절로 딱! 들어지고, 또 화두를 딱! 들면 제절로 단전호흡이 따악 제절로 같이 따라오도록 이렇게 나중에는 되어 가는 것입니다.
〇만날 조용한 데서만 해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공부에 소극적인 방법을 취하는 사람이라, 이 공부가 매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는 것인데, 밤낮 조용한 데서만 익혀야만 공부가 좀 된 것 같고 그래야만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면은 그 사람은 정말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할 만한 그러한 힘 있는 공부에 힘을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〇반야(般若)는 지혜(智慧)인데, 지혜롭게 마음을 쓰면 그러한 묘(妙)한 작용이 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여서, 우리의 생각 조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180도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서 찾으라. 천당과 지옥도 시간과 공간을 멀리 잡고 딴 데에서 딴 시간에 찾지를 말고,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그곳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느끼게 됩니다. 화두(話頭) 한 번 들 때 지옥이 금방 천당이 되고.
〇공부는 언제 · 어데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입니다.
차중에서도 좋고, 길가에서 길 가운데서도 좋고, 밥 먹을 때도 좋고, 똥 눌 때도 좋고, 누구하고 얘기 할 때도 좋고 '이뭣고?' 썽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 돌이키는 그 공덕(功德)이, 팔만사천에 마구니를 항복을 받고 무량겁 죄를 녹여버리는 그러한 위신력(威神力)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거기에서 나오냐?
우리의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팔만사천 가지의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에서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우리는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라. 한 번 뛰어서 여래(如來) 땅에 올라간다」고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땅에 도달한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〇듣기 싫은 소리 하면은 썽도 낼 줄 알고, 신경질도 낼 줄 알고, 슬퍼할 중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또 번뇌와 망상도 한량없이 퍼일어난 사람, 따악 그 사람이야말로 정진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여. 오히려 자격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라야 더 하기가 좋고, 했다 하면 공부가 굉장히 빨리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〇절대로 진짜 부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 불상(佛像),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자기 몸안에 있는 부처님은 산 부처님이고,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은 돌 쇠로 된 불상 같으면 용광로에다 넣으면 녹을 것이고, 나무로 된 불상은 불에다 넣으면 탈 것이고, 흙으로 빚어서 맨든 불상은 물에다 집어넣으면 흐믈흐믈해 질 것입니다.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용광로에 넣어도 녹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풀어지지 아니한 부처님은 바로 자기 마음의 부처님이여. 그 마음 찾으라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여.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는데 그 묘법을 설하신 바로 그 핵심이요, 요점이 「각기 너희 마음 부처를 깨달으라」 그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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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오늘은 기미년 여름 안거에 결제(結制)날입니다. 본래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하는 것이 준례였지만, 금년에는 유월에 윤달이 들어서 한 달을 늦추어서 5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음력 7월 15일에 해제(解制)를 하도록 했습니다.
지난 2월 28일에 본인은 미국 뉴욕주립대학에 초청으로 일 년간 학생과 교수 직원들에게 참선을 지도해 줄 것을 목적으로 해서 초청을 받아 가지고 미국을 갔다가 지난 6월 3일 날, 지난 일요일 날 귀국을 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여러 법보제자님들께 인사를 하고 그리고 떠나야 할 것이었지마는 공연히 번폐스러운 것을 막기 위해서 조용하게 갔다가 지난 일요일에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께 이렇게 보고에 인사를 하더라도 별 번폐스러울 것이 없기 때문에 간략히 인사를 아울러서 드릴까 합니다.
뉴욕주립대학에 불교학 교수로 있는 박성배 박사의 주선으로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뉴욕주립대학은 미국에 있는 많은 대학 가운데에 가장 불교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학으로써 대학 내에 불교 도서관을 가지고 있을 만큼 그러한 대학입니다.
더군다나 대학 근처에 120에이카(acre, 약 14만7천평)나 되는 광대한 숲을 가지고 있는, 땅을 가지고 있는 그 안에 보리정사라고 하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은 중국인 실업가인 시티쉔 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 절을 세우고 그 절에 세계에 고승을 초빙해다가 이 학생들과 그 교수 그리고 스토니브룩 주변에 있는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불교를 선양하기 위해서 그 마련된 사원입니다.
일 년간 초청을 받았지마는 내 사정이 한국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을 수가 없는 그런 사정이 있으므로 겨우 석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몇 차례 강의를 하고 그리고 그 보리정사에서 그 학생과 교수들이 와 가지고 3일 동안 특별수련대회를 가졌습니다. 수련대회를 갖는 동안 좌선과 또 참선에 대한 설법(說法)과를 잘 시간을 짜 가지고 적절히 수련대회를 진행을 해서 그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이들은 이미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발간된 선(禪)에 관한 서적들을 읽은 사람도 많았었고, 실지로 그런 일본 승려들에 의해서 참선을 해 보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는, 대부분 사람들이 다리가 오그라지지 않아서 대단히 고생들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 무릎과 허리, 몸의 아픔을 참으면서 너무나도 진지하게 3일 동안의 수련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 3일을 마치고 마지막 시간에는 그동안 강의와 수련대회를 통해서 느낀 그 소감을 적어 내라고 해서 그것을 보고, 그리고 가지고 왔습니다마는 전부 그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목이 아프고 그랬지마는 일생 동안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바른길을 알게 된 데에 대해서 모다 감명 깊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께 법회 때마다 말씀드린 그러한 요지를 간추려서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또 그것을 실천하도록 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은 의식구조라든지 사고방식이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진 바가 있어서 여간해서 이해시키기가 곤란했습니다.
또 한 가지 애로점은 내가 하고자 한 말을 직접 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통역(通譯)을 통해서 말을 하게 됨으로 해서 그것이 퍽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마는, 박 교수가 잘 통역을 해서 상당히 효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마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을 그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온 것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더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몇 차례 더 수련대회를 갖고 더 많은 설법을 해 준다면 자기네들은 보다 더 깊이 참선을 이해하고 또 실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더 오래 머물러 줄 것을 모두 다 요청을 했고, 또 다른 과 학생들도 자기네들에게 참선에 대한 강의를 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대로 여기서 떠날 때 그렇게 오래 있을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결제 안에 가볍게 돌아올 것을 예상을 하고 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채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이들은 내년이나 내후년(來後年)이라도 또 와서 이러한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아직 현재로써는 그러한 구체적인 생각을 해 보고 있지 않습니다마는, 바닷물을 온 바닷물을 다 마셔봐야만 바닷물이 짠 것을 바닷물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만 찍어서 혀끝에다 대 봐도 바닷물의 맛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짧은 설법을 들었지마는 그것이 최상승 활구법이요, 불교에 진수라고 하는 것을 성의를 다해서 말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정말 밤중에 기둥에다가 이마를 부딪친 것처럼 눈이 번쩍 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관절 이 기둥이냐? 벼람박이냐? 몽둥이냐? 무엇이 와서 느닷없이 마빡을 갈겼는가?' 어리둥절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생각하지도 말라. 이론적으로 따지지도 말라. 알려고 하지도 말라. 더듬어 볼려고 하지도 말라. 망상도 일어나는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아라. 또 망상을 따라가지도 말아라'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어째서 조주는 무(無)라고 했는고?' 이렇게만 하라고 하니 그 사람들로서는 도대체 그런, 수수께끼도 아니고, 무슨 철학도 아니고, 도대체 그런 소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이렇게 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무량겁(無量劫)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탈(解脫)해서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역설했지마는 '도대체 그렇게 해 갖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이렇게 질문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배불리 밥 먹고, 뜨뜻하게 입고, 그리고 주말이면은 배를 타고 바다로 호수로 놀러가고, 등산을 하고, 춤을 추고, 인간으로서 아무런 부러울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는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런 참선을 하나의 취미로 오락으로 재미로 그렇게 해 보려고 하는, 경험 삼아서 한번 좋다니까 해 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도 한두 사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고 강의와 법회가 진행이 되고 수련대회 하루 이틀이 지내는 동안 처음에는 장난으로 취미로 오락으로 했던 사람들까지도 정말 그 부러질 것 같이 아픈 다리와 허리의 아픔을 참으면서 진지하게 마지막까지 버텨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어날 때부터서 1600년 전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로 신라, 백제, 고려, 이조를 통해 오면서 면면(綿綿)히 불법(佛法)이 이 땅에서 커 왔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에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불교에 향내가 배어 있고, 우리의 몸안에는 명명(明明)히 뛰고 있는 우리의 피속에 불법(佛法) 정신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법을 나면서부터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고, 크면서 몇 번 안 들어서 불교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게도 됩니다마는, 그러나 앞으로는 물질문명의 최첨단에 있는 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목이 마르도록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 불법이였습니다. 또 그렇다고 하는 것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에 선구자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이 이제 들어가 가지고 겨우 초기에 지나지 못하지만 머지않아서는 우리보다도 오히려 더 열렬하게 불법을 믿고 목마르게 받아들이면서 깨달음으로, 깨달음으로 달려가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선조(先祖)에 유산으로써 간직하고 있을 뿐, 정말 목마르게 이것을 찾고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반가운 중을 모르고 있지 않나 이리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제 새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정말 한 번 맛봤다 하면은 목숨 바쳐서 실천을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오십 년이나 백 년 뒤에는 미국 사람들이 우리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나올 때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정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문명(物質文明)에 있어서도 그 사람들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상 때부터서 가지고 있는 불교의 정신, 불교의 진리를 그것마저도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주지를 못하고, 가르키지를 못하고, 어름어름하고 지내다가 마침내는 그 사람들이 또 그것마저도 우리를 가르키기 위해서 온다면 우리는 어디다가 얼굴을 들고 살 것인지, 우리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서 부처님 제자로서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참선을 하고 실다웁게 깨달라서 나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은 물론 온 세계 인류,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데 앞장을 서야 할 줄 생각합니다.
금방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원래 우리가 갖추어 있는 진여불성, 본래 생사 없는 그 해탈 도리, 어째서 우리는 미(迷)했나? 왜 미(迷)해 가지고 이렇게 생사윤회를 하고 있나? 어떻게 하면 본래 가지고 있는 진여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간곡한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석 달 동안 하안거(夏安居) 정진(精進)이 시작이 됩니다. 여름 석 달은 비가 오고, 너무 더웁고 해서 행각(行脚)을 하면서 수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름 석 달 동안, 그리고 겨울 석 달은 너무 춥고 그래서 또 숲속이나 산에서 도를 닦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이러한 선원(禪院)에 모여서, 정사(精舍)에 모여서 정진을 하도록 마련된 것이 하안거, 동안거입니다.
오늘부터서 하안거가 시작됩니다마는 날씨는 더워서 찌고, 죽비(竹篦)를 치고 앉았다 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땀이 등으로 줄줄줄줄줄 흘러내려서 궁딩이가 척척하니 젖는 날이 계속이 될 것입니다. 궁딩이에는 땀띠가 더덩캥이가 지고,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한 생각 놓칠 새라 칼끝을 턱 밑에다 괴우듯이, 그런 이를 갈아붙이고 정진을 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혼침(昏沈)에 빠지고, 혼침에서 겨우 깨어날 만하면 천 사량(思量), 만 가지 망상(妄想)이 퍼일어나서 산란(散亂) 속에서 살림을 하다가 또 그 생각이 겨우 가라앉을 만하면 또 혼침에 빠지고, '어떻게 했으면 이런 혼침과 산란 속에서 여일(如一)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는가?' 이것이 오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숙제가 될 것입니다.(처음~21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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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혼침 속에서 혼침을 이겨낼 수 있느냐?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일직선으로 코스를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5분 내지 10분 동안 포행(布行)을 하면 혼침도 달아나고, 가슴이 답답한 것도 후련해지고, 다시 또 그 자리에 가서 또 정진을 할 것이여.
정진을 하다가 또 혼침이 오면 허리를 쭉 펴고—혼침이 올 때에는 언제든지 허리가 꾸부러져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허리가 꾸부러지므로 해서 혼침이 오는 것이고, 혼침이 왔다 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허리가 꼬부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벼운 혼침은 허리를 쭉 척량골(脊梁骨)을 버티고, 정신을 바짝 차림으로 해서 달아나지만, 워낙 혼침이 무거운 놈이 오면은 천상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포행을 하거나, 찬물에 세수를 하거나, 이렇게 해서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일어나기가 수선스럽다 해서 앉아서 계속 코를 골면서 혼침 속에서 한 시간 두 시간을 지낸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또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이겨나야 하냐?
일어나는 생각을 안 할려고 하고, 누를려고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방법입니다. 일어나는 생각, 그 생각은 별별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내간 이야기, 어렸을 때 이야기, 지금 집에 애가 학교서 왔냐, 안 왔냐? 출장간 남편이 돌아왔냐, 안 왔냐?' 별별 생각이 납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차츰차츰 생각 따라서 파고 들어가다 보면 정말 재미가 꽤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차츰 차츰 차츰 더듬어 들어가다 보면 정말 시간이 10분, 20분은 어떻게 간 중 모르게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퍼뜩 정말 그 생각을 그만두기가 아까울 정도로 지나간 자미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퍼뜩 '아! 내가 또 속았구나' 한 생각도 할 겨를도 없이 허리를 쭉 펴고 심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떠억 하면서 화두(話頭)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생각을 쫓을려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은 고대로 그냥 놔두고 화두만 척! 추켜든다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버릴려고 하지 말고, 누를려고 하지 말고, 다못 고대로 놔둔 채 화두만 든다고 하는 것, 이것이 가장 지혜스럽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해 버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참선 중에 지나간 인상 깊었던 일이 생각난 것은 차라리 어떨런지 모르지만, 지나갔던 아주 기분 나빴던 고약한 사건들이 떠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도 척량골을, 등뼈를 쭉 펴고 심호흡을 하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혼침도 거기에는 붙지 못할 것이고, 아까 일어났던 그러한 생각들도 자취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어도 그러한 생각들이 잘 물러가지를 않고 집요하게 그런 생각이 퍼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자꾸자꾸 한 달, 두 달, 일 년, 삼 년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진지하게 정진을 계속해 나가면 간단하게 화두가 거각이 되면서 그러한 산란심, 망상심, 번뇌심은 쉽게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함으로 해서 거기서 습관이 되고, 습관이 장차는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무의식 속에 되어지게까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기술도 역시 마찬가지고, 운동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생활상에 있어서의 습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면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되어지게끔 되는 것입니다.
역시 참선(參禪)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어도 금방 화두는 간 곳이 없고 온갖 생각이 퍼일어나고, 또 들어도 또 그렇고 이렇지마는 차츰차츰 오랜 세월 동안 해 나가면 반드시 제절로 되어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이것을 말하기를 '숙처(熟處)는 생(生)하고, 생처(生處)는 숙(熟)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익은 것은 설어지고 생(生)해지고, 생한 것은 익어진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이 익은 것이 생(生)해지냐?
무량겁으로 익혀 온 번뇌 망상은 익어 있는 것이고, 지끔 시작해서 하는 참선 화두는 설어 있다 그 말이여. 생(生)해 있다. 생소(生疏)하다 이 말이여.
그 아주 익어 있던 번뇌 망상은 차츰차츰 안 해지게 되니까 생소해지고, 지끔 시작한 참선은 우선은 생소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애써 나가다 보면 차츰차츰 익숙해진다 이것입니다. 익숙해지면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는 단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처음 시작할 때처럼 그렇게 답답하고, 맛없고, 못 견디게 괴로운 것이라면 어떻게 이것을 「안락(安樂)의 묘문(妙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해 가면서 차츰차츰 습관이 되고, 그래서 체질화가 되면 할려고 안 해도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어지고, 화두가 성성적적하게 들어지므로 해서 번뇌와 망상도 자취 없이 수그러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몸도 가벼워지고, 오랜 만성병(慢性病)도 약도 별로 먹지도 아니했는데 언제 낫은 중 모르게 차츰차츰 낫어지게 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바빠서 못 한다. 아직은 애들을 다 가르켜 놓고 다 결혼을 시켜 놔야지, 아직은 그런 일들이 복잡해서 할 겨를이 없다'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마는 그런 말씀은 참선에 대해서 아직 잘 이해를 못 하신 탓으로 해서 그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모든 일 끝내 놓고, 병 다 고쳐 놓고 그리고 늙발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숨은 한 숨, 호흡 들어마셨다 내쉬었다—'일평생 동안 너는 몇 번 동안 숨을 쉬다가 죽어라', '나는 몇 반 동안 호흡을 쉬면 죽는다'고 하는 것이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숨 한 번 쉴 때마다 자기의 죽음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전호흡을 통해서 될 수 있으면 호흡을 천천히 쉬어서 횟수를 줄일 것이고, 그 호흡이 한 호흡, 한 호흡 줄어질 때마다 헛되이 지내지 말고, 그 호흡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잊어버리지 말고 화두(話頭)를 잘 거각(擧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화두를 놓쳐 버리고 공연히 숨만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면 피땀 흘려서 벌어 논 돈, 한 군데도 쓸모 있게 쓰지 못하고 돈을 갖다가 풀풀풀풀풀 바람에 날려 버리는 미친 사람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억지로 참아 가지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참고 있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 말뜻을 잘 못 알아들으신 분입니다.
단전호흡은 어디까지나 무리가 없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깊이 수르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억지로 시계를 보고 20초, 30초, 50초, 1분 이렇게 손바닥으로 콧구먹을 막고 참으라는 게 아닙니다. 들어마신 호흡을 2-3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호흡이 길어져야지, 억지로 호흡만 참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호흡만 참을려고 하는 사람은 뭔 사람과 같으냐 하면은 '내가 이 피땀 흘려서 번 돈이니까 이것은 남편이 죽어도 이 돈은 못 쓴다' 꽉! 오그려 쥐고 금고 열쇠를 열지 아니한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번 것은 요긴한 데 쓸려고 버는 것이여. 아무리 애끼고 싸 놔 봤자 죽을 때 한푼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이여. 아무리 애끼고 오그려 싸도 돈이 나갈 때가 되면 이상한 이유가 생겨 가지고 내 몸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부자가 될라면 오그려 쥐면 부자가 될 것 같지만 아무리 오그려 쥐어도 돈은 나갈 때 되면 나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쓸 때 올바르게 쓰면 바로 그것이 돈을 버는 목적이 될 것입니다. 올바르게 쓰면 다시 그것이 자본이 되어 가지고 또 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좀 있기는 있지마는, 나중에 많이 벌어 가지고 내가 솜씨 있게 돈을 좀 쓰리라' 그래서 우선 좀 생긴 돈이 있지마는, 나중에 크게 쓰기 위해서 오그려 싸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지 이러한 법문(法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젖을 짜 먹는 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젖을 짜서 식구대로 노나 먹고, 노나 먹고 해서 아주 맛있는 우유를 짜 먹었는데, 며칠 후에 큰 잔치가 있어서 많은 손님들이 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매일 짜 먹다가는 그때 손님이 왔을 때 충분히 대접을 할 수가 없으니까 며칠 동안을 젖을 짜 먹지 아니하고, 그 젖이 소 뱃속에 많이 고여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 동안 지난 뒤에 잔칫날이 돌아와서 큰 널벅지를 몇 개를 갖다가 놓고 식구대로 달라들어서 젖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짜도 평소에 나오는 양 이상은 별로 나오지를 안 했습니다. 그 젖은 짜야, 짜야 또 고이고 짜야 또 고이고 하는 법이지, 짜지 않고 놔둔다고 해서 널벅지로 그렇게 많은 젖이 소 뱃속에 고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번 재산도 번 쪽쪽 작게 벌면 작게, 많이 벌면 많게,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보시를 하던지, 돈 없어서 공부 못한 사람에게 학비를 대주던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돈 없어서 고치지 못한 사람을 곤쳐 주던지, 또는 어떤 불사(佛事)에 시주(施主)를 하던지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적게 하고, 또 부자는 부자대로 넉넉히 하고, 많고 적은 것은 그 사람 형편에 있는 것이지 그 정성에 있어서는 조끔도 차이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한 등(燈),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라는 말씀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데 있어서 호흡도 한번에 오랫동안 참을려고 할 것이 아니라, 숨이 가쁠 때는 가쁜 대로 또 오랫동안 조용하게 앉았으면 상당히 호흡이 조용하고 안정이 되면 그때는 그런 대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조끔도 부담 없이 부담 없이 호흡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길게 그리고 조용하게 호흡을 하면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 번 들어마셨다 내쉬는 시간이 10초 또는 8초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경우도 있고, 걸어 다니거나 달음박질하고 난 뒤에는 5초도 못 되게 가슴이 헐근헐근합니다. 그때는 그런 대로 하고. 또 숨이 긴 사람은 15초, 20초 내지 30초까지도 가는 사람도 있고, 요가를 평생 동안 한 사람은 몇 시간 동안을 숨 한 번도 안 쉬고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가의 전문가, 요기(yogi)들은 일주일 동안을 큰 물통 속에다 넣고 그 뚜껑을 단단히 닫아 놓고 나서 일주일 동안 뒤, 일주일이 지난 뒤에 그 뚜껑을 열고 꺼내니까 조끔도 상관이 없이 나와서 다시 숨을 쉬는 그러한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책에서 봤습니다.
호흡은 자기의 분(分) 따라서, 체질 따라서 하되 수루루루 들어마셨다가 잠깐 2-3초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 공부를 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다 내쉬었으면 또 수루루르르~ 들어마셔,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진 상태에서 2-3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처음 시작한 사람은 숨 내쉴 때마다 화두를 한번씩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여러 날, 여러 달 해서 익숙해지면 숨을 한번 들어마셨다가 내쉴 때 들어 가지고, 그다음 들어마실 때도 고대로 '이뭣고?~'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하는 가운데, 몇 차례고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고, 들어마셨다 내쉬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기만 한다면 자꾸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습니다.
숨을 한 열 번, 스무 번, 들어마셨다 내쉬고, 들어마셨다 내쉬면서도 한 번 들은 화두(話頭)가 고대로 딱 들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21분28초~41분34초)
(3/3)----------------
그렇게 해서 정진을 해 가면 나중에는 아침에 새벽에 한 번 따악 들었던 화두가 종일 화두가 들어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밥 먹을 때도 고대로, 자꾸 들지 않아도 들어져 있어요.
저녁에 잘 때도 화두가 따악 들어져 있는 채로 잠을 자게 됩니다. 아침에 눈을 딱! 떠도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고 자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알뜰히 알뜰히 정진하신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한 경지(境地)가 오게 됩니다. 그러한 경지가 와서 일주일이 그런 상태로 계속이 되면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됩니다.
비로소 자기에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불조(佛祖)에 패궐처(敗闕處)를 보게 됩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에 안목을 일시에 투탈(透脫)하게 됩니다.
할 수가 있고, 반드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그렇게도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라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불보살(佛菩薩)이 자비(慈悲)가 넘쳐흐르신다 해도 이것만은 우리 대신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은 공부하는 이 길만을 일러주실 뿐 우리 대신 깨달라 주실 수가 없습니다.
불보살이 아무리 자비가 있으시다 해도 우리가 지어 놓은 업(業)을, 업으로 받아야 할 무간지옥(無間地獄)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우리 대신 벗어 주실 수는 없습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을 길만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실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 우리가 지은 업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소멸을 해야 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간지옥에 옥문(獄門)을 때려 부셔야 합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또 저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은 「내가 나를 깨닫는 가장 간단하고 요긴한 길」에 대해서, 방법에 대해서 잘 이해하셨을 줄 생각합니다.
이 석 달 동안 선방에서 공부하신 스님네나 보살님네는 그동안에 일어나는 좋은 일, 나쁜 일, 기뻤던 일, 속상했던 일, 우리 뜻에 맞는 일을 순경계(順境界)라 하고, 우리 뜻에 맞지 않는 일을 역경계(逆境界)라 합니다. 우리 뜻을 거슬리는 경계라 합니다.
순경계를 만났을 때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아픈 채찍을 자기에게 가하면서 정진을 가다듬을 것이며, 어떠한 종류에 역경계를 만나더라도 이것이 바로 불보살(佛菩薩)이 우리로 하여금 정신차리도록 하시기 위한 채찍이라 이렇게 생각하시고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거각해 나가실 것입니다.
가정에서 계시는, 공부하시는 보살님네들은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꼭 절에 와서 선방에만 앉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은 때와 장소가 없습니다. 참선하는 방법을 옳게만 알고 있다면 오히려 역경계, 역경계가 더 많이 있는 가정이 훨씬 더 공부하기에 좋은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가정이 살기가 편안한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 늦게 일어나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고, 새벽같이 일어날 필요도 없고, 괴로우면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낮잠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아무리 침대가 편안하다 해도 숨, 자꾸 나도 모르는 새에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자꾸 지내가 버리면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고, 한숨 잘 자고 났더니 죽음만 성큼 다가선 결과가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오히려 이를 악물고 그 시간 시간,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내지 1시간 또 일하면서 애들 돌봐주면서, 남편 돌봐 드리면서, 어디 일이 있어서 출타하면서, 차중(車中)에서, 걸어가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그때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들어가기 전에 첫째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어 나간다면,
오히려 좁은 방에 푹푹 뜨는 방에 앉아서 억지로 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졸다가 망상을 부리다가 하기보다는, 정 더울 때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도 한 번 하고, 그러고 나와서 시원하니 선풍기도 틀어 놓고 앉아서 터억 '이뭣고?'를 한번 해 보시란 말씀이여.
'선방에서 금년에는 가서 좀 왔다갔다하면서 하려고 했더니 석 달 한 사람만 받는다고 인자 인심이 많이 고약해졌구나'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분하거들랑 '나는 차라리 이 좋은 데서 선풍기 틀어 놓고 한바탕, 절에 계신 분 몇 배의 능률을 올리신다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시다가 한 소식 하시거나, 이상한 경계가 나타나면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선지식을 찾아서 점검을 받으실 것이고.
별일이 없으면 집에서 하루하루 카렌다에다가 오늘부터서 똥그래미를 하나씩 딱딱 치시거든. 저녁에 주무실 때 '오늘 하루는 내가 얼마만큼 단속을 했던가? 정말 헛되이 보냈던가? 내게 지정된 호흡을 몇 번 쉬는 동안에 그만큼 효과적으로 투자를 했나? 낭비를 했나?' 똥그래미와 사각과 삼각과 가위표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표를 정해 놓고,
백점 만점 잘했을 때는 똥그래미를 표하고, 아조 잘못했을 때에는 가위표를 하고, 오늘은 그래도 조끔 괜찮게 되었다 싶을 때는 세모꼴 삼각으로 딱하고, 조끔 더 잘하면 사각으로 하고, 조끔 더 잘하면 아주 잘했으면 똥그래미를 하고.
이렇게 해서 표를 딱 해 놓고 하루하루 표를 해 나가면서 공부를 다잽이하신다면 정말 금년 여름철이 무량겁을 통해서 정말 보람 있는 한 철이 될 수 있을 줄 생각합니다.
이러한 요긴한 말씀, 언제나 법회 때마다 해 드리는 말씀, 들을 때는 '아, 그렇게 해야겄다'
금방 문밖에 나가면 밥부텀 잡술라고 쫓아가시고, 절에 있는 동안에는 조끔 괜찮다가 금방 문밖에 나가면 '곗돈이 어쪘고, 무슨 어쩌고저쩌고...' 집에 가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시다가는 정말 뒷날 통곡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오늘 이렇게 들은 말씀을 여러분들이 믿지를 않고 실천을 아니한다면, 내생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아무리 한탄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내용의 게송이었습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말씀을 마치고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 중대한 알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 생존 시부터 조실 스님 밑에서 조실 스님 상좌로 그 총무의 직책을 맡아서 정말 위법망구적(爲法忘軀的)으로 정말 진실하게 조실 스님의 뜻을 받들어서 사중 일을 잘 보다가 또 조실 스님이 열반을 하신 뒤에도 5년간 계속해서 조실 스님 계실 때보다도 훨씬 더 열심히 일을 봐 오신 상법 스님이, 그동안에 조실 스님 계실 때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안 했고, 신도님네들도 별로 그렇게 많지를 않고 그래서, 그리고 또 대부분 또 그 머리 아픈 일은 조실 스님이 스스로 다 그런 일들을 다 처결을 하시고 해서 그저 간단한 것만 이렇게 말씀대로 해 드리면 되았었습니다마는,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로 이렇게 조실 스님의 법력을 추모해서 이렇게 신도님들이 많이 불어나시고 그래서 일이 몇십 배가 불어났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이름만 원장(院長)을 띠고 있었지, 모든 원장이 해야 할 일을 전부를 총무 스님이 독으로 짊어지고 그 일을 주야를 가리지 아니하고 동분서주하면서 그 일을 잘 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나는 이름만 띠고도 이렇게 용화사 일이, 용화사가 이만큼 아무 지장이 없이 이렇게 잘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말 한마디 없이 묵묵한 가운데에 그 복잡한 사중에 일을 잘 처리해 준 상법 스님의 그 공로라고 높이 치하를 하고,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너무 지쳐서 총무에다가, 원장에다가, 총무에다가, 재무에다가, 원주에다가, 별좌에다가, 서기에다가, 이렇게 많은 일을 혼자 맡아서 해 왔었습니다. 너무 지쳐서 병이 났습니다. 열이 오르고 머리는 툭툭툭툭툭 열이 상충해서 터지고, 골치가 뽀개질라고 그러고, 신경통이 생겨서 무릎은 저리고, 그래서 식사도 잘 못할 정도로, 잠도 잘 못 잘 정도로 그렇게 지나치게 지쳤습니다.
벌써 작년 그러께부터서 '제발 나를 좀 쉬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정말 이 일은 총무 스님이 아니고서는 누구한테 적당한 사람한테 맽길 수가 없고 그래서 차츰 '누구 적당한 사람 생길 때까지 조끔만 더 참아라. 조끔만 더 참아라' 한 것이 한 철 두 철 하다가 이렇게 5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본인이 아무리 사정을 해도 내가 들어주지는 않고 조끔만 참으라 하니, "니가 조실 스님을 생각해서라도 좀 참아야지, 그런 것 하나를 못 참아 갖고 그래 조실 스님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까지 하면서 도저히 내가 응하지를 안 하니까,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일을 대충대충 모다 다 봐서 다 작성을 다 해서 마무리를 해 놓고는 내가 오자마자 살모시 도망가다가, 비오는 날 도망가다가 나한테 붙잡혔습니다. 강제로 여러 사람이 띠미다시피 해서 방에다 모셔 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 얘기를 하고 간신히 가라앉혀서,
"결제 때까지만 기달려라. 지지리 애쓰고 애쓴 뒤에 밥 다 먹고 마지막에 콧방울 떨어지듯이 그렇게 애써 놓고 갈 때, 가면 니가 무슨 허물이 있어서 도망갔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한테 단단히 감정이 있어 가지고 간 사람 밖에 더 되냐? '내가 괄세하고 잘못해 가지고 갔다'고 신도마다 다 나한테 원망을 할 테니, 내가 그 인사 받기 싫으니까 결제 때까지 참아서 결제 때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가면, 가더라도 내가 그때야 왜 내가 막으며, 가면 조실 스님 상좌가 아니고 용화사 스님이 아니겠냐? 가서 쉬어 가지고 다시 와서 또 여기 와서 공부해야지 어디를 갈 것이냐?" 이렇게 해서 할 수 없이 오늘 이 날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임으로는 용화사 대중으로 조실 스님 계실 때, 조실 스님의 법은을 입은 지끔은 저 경기도 여주 그 서래암에 조용한 데서 그 산 좋고, 물 좋고 거기는 신도도 그렇게 많이 오지 아니한 그런 조용한 절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조실 스님의 제자, 우리 권속입니다.
그저 급히 사람을 보내 가지고 오게 해 가지고,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내가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명령을 하니까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와서 일을 좀 보도록 했습니다. 총무 스님의 후임으로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10년간 너무나도 진실하고, 착실하고, 말도 잘 하지도 않고 삐긋이, 얼굴 벌게 갖고 삐긋이 웃으면 그만인 그런 총무 스님에 정이 들을 대로 들었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좀 쉬러 가는 것이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시지 말고, 또 후임이 똑 쑥떡 같은 사람이 하나가 왔습니다. 아조 진실하게 일을 잘 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전과 다름없이 무엇이던지 잘 의논을 하시고 하신다면 용화사는 앞으로 그전과 다름없이 잘 선방이 되어 갈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두 분이 앞으로 나와서 인사... 박수로써 환영을... (41분35초~61분36초) (끝)
[법문 내용]
미국 뉴욕주립대학에 박성배 교수의 추천으로 초청을 받아 약 3개월간 미국 스토니브룩에서 학생 교수에게 불교의 진수인 활구참선법을 가르치신 말씀 / 미국 사람들은 목마르게 불법(佛法)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50년 100년 뒤에는 오히려 미국 사람들이 우리들을 불법을 가르키기 위해 오지 않을까, 이렇게도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혼침을 이겨낼 수 있느냐? 가벼운 혼침은 허리를 쭉 려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 무거운 혼침은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포행을 하거나, 찬물에 세수를 한다 / 산란심(散亂心)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하냐? 일어나는 생각을 버릴려고 누를려고 쫓을려고 하지 말고, 다못 고대로 놔둔 채 화두만 든다. 이것이 가장 지혜스럽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해 버리는 방법.
고인(古人)은 '숙처(熟處)는 생(生)하고, 생처(生處)는 숙(熟)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익은 것은 설어지고 생(生)해지고, 생한 것은 익어진다'--->아주 익어 있던 번뇌 망상은 생소해지고, 참선은 우선은 생소하지만 애써 해 나가다 보면 익숙해져서 저절로 되어진다.
화두순숙, 의단독로가 일주일이 그런 상태로 계속이 되면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가 있고, 반드시 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
순경계(順境界), 역경계(逆境界) / 참선은 때와 장소가 없습니다. 참선하는 방법을 옳게만 알고 있다면 오히려 역경계가 더 많이 있는 가정이 훨씬 더 공부하기에 좋은 것 / 총무 스님의 소임 잘 본 것에 대한 공로 치하와 새 총무 스님과의 교대 인사.
〇일어나는 생각을 쫓을려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생각은 고대로 그냥 놔두고 화두만 척! 추켜든다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버릴려고 하지 말고, 누를려고 하지 말고, 다못 고대로 놔둔 채 화두만 든다고 하는 것, 이것이 가장 지혜스럽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해 버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〇역시 참선(參禪)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어도 금방 화두는 간 곳이 없고 온갖 생각이 퍼일어나고, 또 들어도 또 그렇고 이렇지마는 차츰차츰 오랜 세월 동안 해 나가면 반드시 제절로 되어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이것을 말하기를 '숙처(熟處)는 생(生)하고, 생처(生處)는 숙(熟)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익은 것은 설어지고 생(生)해지고, 생한 것은 익어진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〇할 수가 있고, 반드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그렇게도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라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불보살(佛菩薩)이 자비(慈悲)가 넘쳐흐르신다 해도 이것만은 우리 대신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해야 합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은 공부하는 이 길만을 일러주실 뿐 우리 대신 깨달라 주실 수가 없습니다.
〇순경계를 만났을 때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아픈 채찍을 자기에게 가하면서 정진을 가다듬을 것이며, 어떠한 종류에 역경계를 만나더라도 이것이 바로 불보살(佛菩薩)이 우리로 하여금 정신차리도록 하시기 위한 채찍이라 이렇게 생각하시고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거각해 나가실 것입니다.
〇집에서 하루하루 카렌다에다가 오늘부터서 똥그래미를 하나씩 딱딱 치시거든.
저녁에 주무실 때 '오늘 하루는 내가 얼마만큼 단속을 했던가? 정말 헛되이 보냈던가? 내게 지정된 호흡을 몇 번 쉬는 동안에 그만큼 효과적으로 투자를 했나? 낭비를 했나?' 똥그래미와 사각과 삼각과 가위표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표를 정해 놓고,
백점 만점 잘했을 때는 똥그래미(O)를 표하고, 아조 잘못했을 때에는 가위표(X)를 하고, 오늘은 그래도 조끔 괜찮게 되었다 싶을 때는 세모꼴 삼각으로 딱하고, 조끔 더 잘하면 사각으로 하고, 조끔 더 잘하면 아주 잘했으면 똥그래미를 하고.
이렇게 해서 표를 딱 해 놓고 하루하루 표를 해 나가면서 공부를 다잽이하신다면 정말 금년 여름철이 무량겁을 통해서 정말 보람 있는 한 철이 될 수 있을 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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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4분. (4/4) 약 17분.
(1/4)----------------
해천공활월성륜(海天空濶月成輪)헌디 호호청파난사은(浩浩淸波爛似銀)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막괴편주능좌우(莫怪扁舟能左右)하라 행선유재파소인(行船由在把梢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해천공활월성륜(海天空濶月成輪)한디, 바다, 넓고 넓은 저 바다 위에 하늘이 툭 틔여서 한정 없이 넓은데, 거기에 둥근달이 밝게 떠 있다.
호호청파난사은(浩浩淸波爛似銀)이로구나. 그 넓고 넓은 바다에서 맑은 물결이 마치 은(銀)을 갖다가, 은가루를 뿌려놓은 거와 같다.
바닷물이 파도를 쳐서 찰랑거리는데 휘황창 밝은 달이 비추니까 그 물결마다 마다 마치 은가루와 은편(銀片)을 갖다가 흩어놓은 거와 같이 그렇게 찬란하다 그말이여.
막괴편주능좌우(莫怪扁舟能左右)하라. 그 바닷 가운데에 조각배가 가는데 그 배가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고, 왼쪽으로도 가고 오른쪽으로도 가고, 그 배 가는 것을 조끔도 괴이(怪異)하게 여기지 말어라.
행선(行船)이 유재파소인(由在把梢人)이니라. 배 가는 것은, 배가 이리가고 저리가고 하는 것은 오직 그 키를 잡은 사람에 달려 있느니라. 배 키를 잡은 사람이 키를 조정하기에 따라서 왼쪽으로도 가고 오른쪽으로도 가고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것이다.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입춘(入春)날인데, 날짜로는 아직도 임술년(壬戌年) 섣달 스무이튿날, 임술년 섣달 스무이튿날이지만, 입춘 · 우수 · 경첩 · 춘분하면 그 절후(節候)로 봐서는 오늘이 입춘날이기 때문에 '봄으로 들어서는 날'이여.
새해 계해년의 봄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날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 오후 6시 40분 정각부터서 계해년 첫 시간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그래서 음양가(陰陽家)에서는 사주(四柱)를 본다든지 그 음양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따지는데 있어서는 아직도 섣달이지만 오늘부터, 오늘 또 6시 40분부터 계해년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 8일이 지나야 계해년 정월 초하루가 되지만, 절후로는 오늘부터서 정식으로 계해년이 시작이 되는 것이여.
그래 입춘날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는 것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 지나간 한 해를 반성(反省)하고 새로 시작하는 이 해에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지기 위해서 입춘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는데, 보통 세속 사람들은 새해에 삼재(三災)가 뱀띠 · 닭띠 · 소띠, 이 사유축(巳酉丑), 이 해에 난 사람은 삼재(三災)가 시작이 된다.
금년에 시작이 되고 내년, 내후년까지 3년 동안 삼재(三災)가 드는데, 그 삼재를 면하기 위해서 절에 가서 불공(佛供)도 드리고 또 좋은 법문(法門)도 듣고, 또 어떤 절에 가면은 부작(符作)도 받고, 또 그 절에 가서 부작을 못 받으면 무당이나 만신집이나 사주 점쟁이 한 그런 데 가서라도 몇만 원, 몇십만 원씩을 주고 그 부작을 사 가지고 와서 몸에 지니기도 하고, 집안에 갖다 붙이기도 하고 해서 오늘 대단히 여러 군데 절을 다니기 위해서 바쁘신 분도 계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용화사(龍華寺)에서는 그러한 부작(符作)을 노놔 드리지 아니하고, 부작보다도 더 영험이 있는 그러한—삼재를 3년 동안만 막는 게 아니라, 일생 동안 내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 삼재(三災), 백재(百災), 천재(千災)를 다 소멸하는 그러한 불에다 넣어도 타지 않는 그러한 부작을 노놔 드리고자 합니다.
삼재를 없애려면 종이에다가 경면주사(鏡面朱砂)로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그래 가지고 그것이 참으로 삼재의 뿌리가 뽑아지냐 하면, 그것은 참 '그리하면 좋다니까' 해 보는 것이지, 참으로 그 삼재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통사고나 무슨 그런 일이 그런 사고(事故)를 났을 때 그 사고 난 사람의 호주머니를 뒤지니까 부작이 나왔다' 이런 신문에 그런 기사도 나오고 합니다마는, 그런 것을 볼 때에 부작을 가졌다고 해서 꼭 삼재가 멸해진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것을 우리는 또 알 수가 있습니다.
삼재(三災)를 참으로 면(免)하려면은 삼재의 원인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삼재의 원인이 무엇이냐?
삼재가 해필 뱀띠나 소띠나 닭띠에 난 사람에게만 삼재가 붙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당사주(唐四柱)를 볼 때에 포태양생(胞胎養生) 이걸 갖다가 붙여서 그래서 인자 삼재가 걸리면은 그걸 '삼재가 들었다' 해 가지고 대단히 그것은 '흉(凶)한 살(殺)이다' 이렇게 모다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그런 말을 듣고 지내 보면 정말 삼재 든 해에는 여러 가지가 어려운 일이 있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들삼재 · 앉을삼재 · 날삼재, 이 삼재 땜을 이렇게 금년에는 했다' 이렇게 해서 틀림없이 그 삼재가 들면은 과연 그러한 좋지 않게 넘어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삼재(三災)가 안 든 사람은 전혀 그러한 어려운 일이 없고, 흉한 일이 없느냐 하면은 또 그렇지도 않죠.
그래서 삼재는 포태양생(胞胎養生)을 붙여서 걸리는 것 그것으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삼재의 그 뿌리는 우리의 생각—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삼재가 일어난다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에 입각(立脚)해서 관찰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정확하고,
그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회향(回向)을 한다면 거기에서 참으로 그 삼재의 뿌리채 소멸을 하는 길이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 삼독(三毒)의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삼재가 생로병사... 삼재(三災)면은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 병들어서 죽어 가지고 장사 지내는 거, 그 포태양생(胞胎養生)이 내나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과 관련이 되는 것인데,
그 십이인연법이라는 것이 낳아 가지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의 그 과정을 갖다가 열두 가지 단계로 노놔놓은 것이 그것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고, 그것이 또 포(胞)는 '안을 포(胞)' 자거든. 남녀가 서로 안아 가지고 포태(胞胎), 입태(入胎)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낳아서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단계가 그 음양가에 있어서는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 이거란 말이여.
그러면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나 포태양생의 그 십이궁(十二宮)이 결국은 그 원인은 한 생각 무명(無明)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因)해서 태어나 가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탐심과 진심과 치심—탐내는 욕심, 내 욕심껏 내 마음대로 안되면은 썽을 내고,
그 한 번 두 번 해 보면, '아하,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내 욕심껏 안되는 것이로구나.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이 안되는 것이로구나. 바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는 곳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도 안되는 일이 더 많구나' 그런 것을 알고서 자기의 분(分) 따라서 노력을 해 나가고.
또 내 마음대로 안된다 하더라도 진심(瞋心)을 내기보다는 복(福)과 지혜(智慧)를 닦아서 과거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그럼으로써 업장이 소멸이 되면 자연히 내가 하고자 하는 원(願)이 장애 없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인과법(因果法)을 분명히 인식을 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의 모든 생활을 갖다가 여법(如法)하게 해 가도록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파도 속에서 생사 없는 참된 삶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밤낮 그것을 되풀이하거든.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렸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 이루어지면은 속이 상하고 썽을 내고, 그것을 평생 동안을 되풀이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그말이여.
아까 「배가, 그 달빛이 파도에 찬란하게 부서지면서 반짝거리는 그 파도 속에 배가 동서남북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것은 뱃사공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마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우리 중생들도 마치 찬란한 달빛이 반짝거리는 파도 위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느냐 서쪽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축생으로 가느냐 아귀도에 가느냐, 온전히 우리의 마음 하나에 달렸어. 천당(天堂)에 가려 하면은 천당에 갈 짓을 하면은 천당에 가는 게고, 지옥(地獄)이나 축생(畜生)으로 가려면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갈 짓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지끔 경면주사로 종이에다 쓰는 부작을 노놔 드리는 대신에, 여러분이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극락에 가고 싶으면 극락으로 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여러분에게 가리켜 드리는 것이 종이에다 쓴 부작 한 장 노놔 드린 것보단 훨씬 더 훌륭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들어보시면 알 것입니다.(처음~18분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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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운데에는 '빨리 법문이 끝나야 뭘, 부작을 사러 갈 텐데' 이러한 생각을 혹 하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까짓 부작은 한 장뿐만이 아니라 백 장씩이라도 노놔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인쇄를 해다가 노놔 드린다면 백 장 천 장이라도 노놔 드릴 수가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가서 참으로 삼재를 면하고 업장을 소멸한다면은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삼재(三災)가 다른 것이 아니라—혼침(昏沈) 산란(散亂), 참선하려고 앉었으면은 혼침(昏沈)이 오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난다 그말이여.
잡담(雜談)을 하면은 눈이 초롱초롱해 가지고 조는 사람이 없는데, 죽비를 치고 참선을 하거나 또 이렇게 법문(法門)만 들으려고 하면은 눈껍데기가 천근만근 쪄 누르면서 잠이 퍼온다 그말이여.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세계는 불보살(佛菩薩)도 꽉 차 있지만, 팔만사천 마구니도 꽉 차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법문을 들으면, 법문(法門)을 바로 듣고 발심(發心)을 하면 마구니의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들이 발붙일 곳이 없고, 마왕 파순이의 궁전이 흔들려서 무너질 테니 어쨌든지 법문을 못 듣게 해야겠다 그 말이여. 법문만 바로 들었다 하면 그 사람은 발심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 마구니가 갈 곳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은 법문을 못 듣게 해.
애당초에,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나오시기까지도 대단히 신심(信心) 있는 분이 아니면 여기에 오시지를 못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못 온다 우리 아들 하나... 온갖 핑계를 대고... (녹음불량) ... 영판 핑계를 대고 못 나오는데, 그 핑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마구니들이 온갖 수단을 다 써 가지고 그렇게 해서 못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못 오는 사람은 벌써 마구니의 수단에 걸려 가지고 못 오는 것이고, 그러한 마구니의 온갖 수단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오는, 이 법회에 참석하신 것만도 대단히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참석을 해 가지고서도 아까 법문 시작하기 전에 옆에 사람하고 뭐라고 무슨 잡담을 한 동안에는 단 한 사람도 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 시작할 때부터 벌써 꾸벅꾸벅 졸다가, 지끔도 지금 내가 그렇게 눈을 감고 조는 꼴이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가끔 눈을 감아 버립니다마는, 그 마구니가 그 눈뚜껑 위에 딱! 붙어 가지고 막 눈뚜껑을 눌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 눈을 뜨려고 해도 마구니 힘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눈이 막 저절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눈을 뜨고 '누가 나 잠자는 것을 본가, 안 본가?' 이렇게 뚤레뚤레 살펴보지만, 그러자마자 또 자는 수가 있어. 아무리 안 자려고 해도 법문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히 그 마구니의 그 수단에 의해서 그렇게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마는.
혼침(昏沈) 산란(散亂), 공부를 해 본 사람이면 졸음이 오고, 졸음이 안 오면 온갖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이 좀 가라앉을만 하면 잠이 오고, 두 가지 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이렇게 까지 그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혼침과 산란을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주 가끔 그러한 질문을 하십니다마는, 참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그 이전에 혼침 산란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미 그것은 그르친 것입니다. 또 혼침 산란이 일어나는 것을 물리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도 또한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또 아무리 물리치려고 해도 물러가지를 아니해서 '어떻게 해야 이놈을 물리칠 수가 있을까?' 이렇게 근심을 하면 이건 다시 또 그르치는 것입니다.
또 설사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다든지, 용을 써 가지고 그놈이 그 혼침 산란이 물러가 가지고 다 물리쳐 버리고 성성(惺惺)해서 깨끗해졌다 할지라도 그것도 또한 이미 그르친 것이다 그 말이여.
생각을 내서 물리치려고 하면 그럴수록에 점점 그르쳐 버리는 것이여.
'그러면 대관절 그렇게 말하면, 아하 생각을 내서 혼침 산란을 물리치려고 하면 그르쳐 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은 생각을 내지 말고 혼침이 오거나 산란심이 오거나 내버려두고 그저 실컷 코가 땅에 닿도록 혼침에 빠져서 잠이 오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그저 죽비를 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방선(放禪)할 때까지 침을 지르르르 흘리면서 그저 실컷 졸고 있으면 그러면 괜찮으겄구나. 내가 왜 진즉 그것을 몰랐던고. 이제부터서는 참선하는 것을 그렇게 하나도 그 걱정할 것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된장(똥)을 똥(된장)인 줄 알고 상추를 싸 먹을 사람이거든.
분명히 말하자면, 유심(有心) 무심(無心)으로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그 다 그르친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생각을 내서 혼침 산란을 물리치려고 해도 그르치고, 또 물리치지 않으려고 해도 그르치고, 물리치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않고 실컷 자도 그르친다고 하니 이것을 내가 어떻게 해야겄냐? 참선을 하지 말라는 건가, 하라는 건가 큰일났다'
먼저 혼침 산란이... (녹음 불량) 스님들은 참선 하려고...
무량겁래(無量劫來)로,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 (녹음 불량) ... 수없이 많은 겁 동안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면서 번뇌 망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번뇌 망상과 혼침 속에서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물리치려고 해도 안 물리쳐져. 그래서 혼침과 산란이 퍼일어난 것이고, 그 혼침 산란의 뿌리는 무량겁으로 오면서 한 생각 염기(念起)해서 온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고.
또 그다음에는 지끔 우리가 눈으로 모든 색상(色相)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듣고서 생각 생각이 모든 각각 장소와 인연(因緣)이 되어 왔어.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온 거다. 이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고.
또 그래 가지고 내 마음을 마침내 보아서, 내 마음을 친견(親見)해서, 그러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려는 그러한 생각을 내는 것이 그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뿌리다.
또 하나는, 최초에 '생사(生死)... 생(生)을 갖다가 뛰어넘고, 죽음을 갖다가 초월(超越)하리라' 하는 '한 생각' 내기 때문에 혼침 산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참선을 해 가지고 도(道)를 이룬다' 한 그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조사(祖師)가 되고 성불(成佛)을 한다'고 한 그 생각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된다. 혼침 산란의 뿌리가 바로 성불작조(成佛作祖) 하려는 그 생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30분52초(여기부터 음질 조금 괜찮음)
'위없는 대보리(大菩提)를 얻어 가지고 대열반(大涅槃)에 들어가리라' 그러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지(乃至) '세간(世間) · 출세간(出世間)의 가지가지 법(法) 가운데에 터럭 끝만큼이라도 일어나는 어떠한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바로 혼침 산란의 근원(根源)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혼침 산란은 번뇌(煩惱) 망상(妄想)으로부터서 성불(成佛)하려는 생각, 열반(涅槃)에 들리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이 혼침 산란의 원인이 아닌 것이 없어.
그러니 그놈을 버리려고 한 것도 그르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놈을 버리려고 해서 물러가지 아니한다고 번뇌심을 내는 것도 그것이 그르쳐 버리는 것이고, 그놈 그 혼침 산란을 물리쳐서 깨끗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어떻게 해야 과연 우리는 올바르게 공부를 해 갈 것인가?
막장한학해(莫將閒學解)하야 매몰조사심(埋沒祖師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장한학해(莫將閒學解)하야 매몰조사심(埋沒祖師心)이니라.
한가한 알음알이 배우는 것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알음알이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를 가지고 조사(祖師)의 마음을 묻어 버리지를 말아라.
산승(山僧)이 오늘 입춘 법요식을 당해서 삼재(三災)를 면(免)할 수 있는 법... (녹음불량)... 산란과 혼침을 물리치는 법,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음으로써 영원히 삼재를 멸하는 법,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모두 엄격하게 말하면, 한가(閑暇)한 학해(學解)를 가지고 조사심(祖師心)을 매몰(埋沒), 묻어 버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산승이 말하는 것만이 조사심을 묻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산승의 말을 듣는 것도 또한 조사심을 매몰하는 데에 가담한 공범자(共犯者)를 면(免)틀 못할 것입니다.
왕왕(往往)이 자기의 한 생각이 진실하고 참으로 간절(懇切)하지 못한 것을 책망(責望)하지 아니하고, 간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절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지 아니하고—'혼침 산란이 장애가 되어서 도(道)를 닦을 수가 없다'고 걱정을 하는 사람은 마치 뭣과 같으냐 하면 컴컴한 방에 앉아서 '왜 모든 물상(物象)이 훤하게 보이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사람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깜깜한 방에 앉어서 모든 것이, '글자나 모든 물건이 훤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노망했거나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어째서 한 생각 참으로 간절하지 못해 가지고서 (간절하지) 못한 것은 책망을 하지 아니하고 혼침 산란만을 책망을 할까 보냐 이 말이여.
옛날에 도반(道伴)이 죽거나 하면 거기에서 무상(無常)을 느끼고 며칠간은 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며칠을 하고, 또 도반 가운데 누가 참선을 잘하거나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면 거기에서 분심(憤心)이 나 가지고 며칠 동안을 모다 온 대중이 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그러한 일화도 있습니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약해 가지고 혹 어떠한 법문을 듣고서 분심이 좀 나고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 분심이 좀 나도 며칠이 안 가서 비그르르르 허니 용맹심이 가라앉아 버리고, 다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태심(懈怠心)이 나고 방일(放逸)을 하게 된다 이말이여. 그래서 혼자 하기보다는 좋은 도반(道伴)들과 또 선지식(善知識)을 의지해서 우리가 모여서 공부를 하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여러 대중이 모여서 살면 그 가운데는 누군가 반드시 분심과 발심을 해서 가행정진을 하고 있는 분이 있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 그런 분이 한두 사람만 있어도 여러 대중이 그 좋은 영향을 받아서 따라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리란 놈은 아무리 그놈이 몸이 날래서 잘 나른다 하더라도 지가 하루에 천리(千里)를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千里馬) 꼬리에 딱! 들어붙어 갖고 있으면, 천리마 꼬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탁! 붙어만 있으면 그 파리도 천리를 하루에 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 힘으로, 지 날개로 날아가지 아니하고 천리마 꽁딩이에만 붙어 갖고 있어서 천리를 가는 것이 옳다면, 저는 공부는 아니하고 선지식이나 어느 도반 꽁딩이만 따라다니면 되겄구나' 이렇게 착각(錯覺)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셨습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는 생각하기를, '좋은 도반(道伴)을 만나는 것은 도(道)에 절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서 그 생각이 옳은가 그른가를 부처님께 가서 판단을 받으러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니 생각이 틀렸다. 좋은 도반을 만나는 것은 도에 절반을 이룬 거와 같은 것이 아니라 도(道) 전부(全部)를 이룬 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교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좋은 도반, '선우(善友)'라 하는 말은 도반과 선지식(善知識) · 선각자(先覺者)를 다 포함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여러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같이 법문을 들으러 오고 또 자주 만나서 공부에 관한 의논(議論)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에 관해서 의논하는 동창생이나 이웃 도반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집니다.
바른 사상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그러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인생을 바로 살아가고 법을 바로 믿어 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점쟁이나 좋아하고, 사주쟁이나 좋아하고, 무당이나 만신이를 좋아하는 그러한 친구들이...(녹음불량)...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한테 쫓아가 가지고 모든 일이 해결이 된다면 무엇이 걱정을 할 것이 있습니까? 돈 많은 사람은 무당을 차라리 자기집에다가 모셔다 놓고, 조실 스님으로 모셔 놓고 백만사(百萬事)를 의논한다면은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하고, 무슨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학 합격이나 무엇이 걱정이겠느냐 그말이여. 점쟁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재앙이나 복(福) · 불복(不福)은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으로 오면서 지은 우리의 업(業)에 의해서 받어지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짓는 대로 받는 것이여.
그 여러분 가운데에는 그 말이 잘 믿어지질 않고 '우리가 별로 죄(罪) 지은 것도 없는디 왜 이러한 액난(厄難)을 당해야 하느냐. 그것은 맞지 않는 소리다' 또 '아무개는 평생 동안 법이 없어도 살 그렇게 정직하고 그렇게 착하고 한데 왜 그러한 못 당할 일을 당하느냐. 그러니 그것도 맞지 않는 말이다' 또 '아무개는 그렇게 평생을 사기를 처묵고 살고 못된 짓만 하고 살아도 그렇게 잘사는 걸 보면 그거 다 인과(因果)라는 게 멀쩡한 소리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당장 받는 그런 현생보(現生報)가 있어요.
그런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받는 것을 현생보(現生報)라 그러고, 금생에 지어 가지고 이 다음 생에 받는 것을 순생보(順生報)라 그러고, 또 금생에 지어 가지고 저 몇 생을 가 가지고 훨씬 뒷 생에 가서 받는 그러한 것을 갖다가 순후보(順後報)라 그러는 거여.
현생보(現生報), 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 이렇게 세 가지로 지은 원인에 따라서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당장 받는 예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고 금생에 지어...(녹음 끊김).
삼생(三生)을 다 환히 보는 성현들의 말씀에 의지하면,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받게 되기 때문에 혹 금생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해도 금생에 그 과보를 안 받는 경우도 있고, 금생에 그렇게 착한 일을 하고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금생에 그 좋은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종류로 받을지언정 기어코 언제 받던지 자기가 지은 것은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받고, 악한 것은 악한 대로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터럭끝 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컴퓨타(computer)로 따지고, 전자계산기로 따진 것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것이 이 인과(因果)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 컴퓨타는 그 재료를 거기다가 넣는 그 범위 내에서만 나오는 것이지, 그 재료를 넣지 아니하면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과의 법칙은 자기가 지은 원인에 따라서, 이것은 행동[身]뿐만이 아니라—행동으로 살생을 하고, 행동으로 도둑질을 하고, 행동으로 음행을 하고, 행동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죄를 범하는 것뿐만이 아니라—말[口]로 짓는 죄 또 생각[意]으로 지은 것까지도 하나도 어김없이 다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죄는 소승적(小乘的)인 계율(戒律)로 보면, 속으로는 누구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행동으로만 죽이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또 현대의 모든 법률도 마음으로 온갖 도둑질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행동으로 범하지만 않으면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대승법(大乘法)에 있어서는, 우리의 인과의 법칙에 있어서는 속으로 생각을, 행동으론 옮기지 안 했어도 속생각으로만 한 생각 먹었다 하더라도 이미 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승법,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그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생각을 바르게 다스려 나가도록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남을 도울 생각, 좋은 생각을 하면 그 좋은 생각으로 인해서 우리는 천상(天上)에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또 생각으로 '누구를 죽이리라, 무엇을 훔치리라, 누구하고 무슨 음행을 하리라' 이러한 생각을 먹어도 이미 그 사람은 지옥(地獄)에도 갈 수가 있고, 축생(畜生)에 떨어질 수도 있고 그러한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우리는 천당(天堂)에도 갈 수가 있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서도 독사가 될 수도 있고, 소가 될 수도 있고 또 지옥에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에서는 지옥에 가기를 싫어하지도 아니하고 천당에 가기를 바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러냐?
지옥에 가면, 한 생각을 일으켜서 지옥에 가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내도 이미 한 생각이 움직였기 때문에 육도(六道) 중에 어느 곳엔가는 우리는 떨어지게 되는 것이고, 또 천당에 가기를 원하지를 않지만, 천당에를 가기를 원하나 원하지 않으나 이미 한 생각은 동(動)한 것이기 때문에 육도 중에 어느 곳엔가는 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 봤자 자기가 지은 공덕(功德) 만큼 다 받으면 다시 또 떨어지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천당에만 가면은, 천당에 가는 것이 모든 자기 종교를 믿는 구경(究竟)에 목적으로 삼고 있지만, 천당에 가는 것 별로 좋지 않습니다. 천당에 가 봤자 자기가 지은 만큼 다 복(福)을 받으면 다시 떨어지는 것입니다. 활을 하늘에다 대고 쏘면 그 힘이 다하면 다시 지상에 떨어지는 거와 똑같은 것입니다.(37분51초~52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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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천상도 옅은 데로부터서 저 높은 데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습니다마는, 그 천상 가운데에 도솔천(兜率天)이라 하는 곳이 있어.
도솔천에도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외원궁(外院宮)에 가도 거기에는—이 지구가, 이 세계가 온통 불이 나 가지고 불로써 온 세계가 다 타 버리는 때가 언젠가는 옵니다마는, 그 불이 도솔천 외원궁까지는 그 불길이 닿아서 타 죽습니다. 그런데 그 내원궁(內院宮)에는 그 불길이 미치지를 못해요.
그래서 성현들이, 앞으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강림(降臨)하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이 그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도 인도(印度)에 가비라(迦毘羅 kapila) 왕국에 삼천년 전에 태어나시기 전에 그 도솔천 내원궁에 계시다가 이 사바세계에 오셨고, 앞으로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음 부처님으로 출현하실 미륵 부처님, 미륵불(彌勒佛)도 현재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지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 참선하는 수행인들은 내생(來生)에 몸을 받아나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기를 원(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가면 바로 미륵 부처님을 비롯한 많은 성현(聖賢)들을 친견(親見)할 수가 있고, 거기 가서 그러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빨리 이 사바세계에 내려와서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러한 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도솔천 내원궁을 제외하고는 다른 천상에 태어나 봤자 그것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천상에 태어난 것도 바래지 아니하고, 또 지옥에 태어나는 것도 싫어하지를 아니하고 무엇을 생각하느냐?
'이 무엇고?'
좋은 일을 봐도 '이 뭣고?',
궂은 일을 봐도 '이 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이 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몸에 병이 나도 '이 뭣고?',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 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일분일초를 등한(等閑)히 보내지 아니하고 '이 무엇고?' 우리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우리의 생각 생각을 돌이킬 때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들어붙을 틈을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들어붙지 못하는데 무슨 삼재(三災)가 우리에게 붙을 것이냐 그말이여.
설사 과거에 어떤 지은 업(業)에 의해서 삼재가 우리에 붙은다 하더라도 그 삼재는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할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에게 붙기 위해서 전후좌우에 엿보고 있다가도 '이 뭣고?'를 들면, 그 마구니가 찰나간에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로 변해질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이 잘 아신 바와 같이 부처님이 과거 인행(因行) 때에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고 계시는데, 잠잘 중도 잊어 버리고 밥 먹을 중도 잊어 버리고 그 설산 속에서 고행을 해 가지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境地)에 들어갔다.
어데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제행(諸行)이라는 것은 모든 행이,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존재와 모든 현상이 다 이것이 무상(無常)한 것이요, 무상하기 때문에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다 그말이여. 나 가지고는 없어지고, 나 가지고는 변해서 없어지고 다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다—그러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이여.
그 노랫소리가 너무너무 맑고 아름답다 그 말이여. 그래서 눈을 번쩍 뜨고 앞 뒤 옆을 다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다 살펴봐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훌륭한 노래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어.
그래서 잘 살펴보니까 저만큼 그 왕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은 세 개가 붙은 독수리 손가락을 한, 그리고 뿔이 돋힌, 사람을 생으로 막 잡어먹고 피를 빨아먹는 나찰(羅刹) 귀신이 금방 덮쳐 올 것 같이 무서운 형상을 하고 노려보고 있다 그 말이여.
저런 나찰 귀신의 입에서 그러한 아름다운 목소리, 그러한 훌륭한 법문이 울려 나올 것 같지는 않으나, 그 나찰 귀신 말고는 아무한테도 그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행여나 하고 나찰 귀신 보고 물어봤다 그 말이여.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하는 그 노래를 금방 니가 불렀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뭐라고요? 지금 나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시치미를 뚝 딴다 그 말이여.
"정말 니가 그 노래를 불렀다면 반드시 그 노래의 뒷 구(句)가 있을 테니 그 뒷 구를 한 번 나에게 일러다오" 간절히 청(請)을 했습니다.
그러니 나찰 귀신이 "나는 배가 고파 죽겄다. 나는 당장 너를 잡어먹어야겄어" 그러면서 달라들라고 그러니까,
"좋다! 니가 그 다음 구절만 일러준다면은 내 몸을 너한테 던지리라"
"내가 널 일러주면은 도망가려고 그러지?"
"아니다. 니가 그것이 의심스럽다면은 내 몸뚱이는 다 니 입에다 넣어놓고 내 귀만 내놓고 일러다오"
그러니까 나찰 귀신이,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낙(樂)이 되느니라, 아! 그 노래를 부르는데 그 설산동자(雪山童子)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어.
'내가 이러한 좋은 법문을 듣고 나만 깨달라 가지고 나찰 귀신의 밥이 된다면은 안될 일이다. 나 말고도 한량없는 중생(衆生)이 있는데 나만 알고 죽어서는 안되겄다'
이래 가지고 바위에다 나무에다 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그 법문(法門)을 갖다가 막 썼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로써 그 법문을 갖다가 써 놓고서 나찰 귀신의 입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찰나간(刹那間)에 온 하늘과 땅에서는 장엄(莊嚴)한 하늘나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그 무서운 나찰 귀신은 간 곳이 없고, 찰나간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모습으로 변해 가지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설산동자를 공경스럽게 두 손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이 말씀은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법문인데, 설산에서 설산동자만이 그러한 경계가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 진실한, 간절한 한 생각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의 불보살(佛菩薩)로 화현(化現)을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여지없이 이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재앙을 만나고 어떠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때 그 슬픔에 빠지지 말고 가슴 아픈 데에 빠지지 말고, 노여움에 빠지지 말고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한다면, 그 노여움과 슬픔과 괴로움은 찰나간에 나를 깨달음에 이끄는 불보살의 따뜻한 화현으로 변할 것입니다.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헌디 석양재오서(夕陽在吾西)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허니 석양(夕陽)이 재오서(在吾西)로구나.
돌아와서 빈 방에 앉었으니 석양은 이미, 태양은 내 서쪽에 있구나.
무량겁(無量劫)을 윤회(輪廻)하다가 금생에 겨우 불법을 만나 가지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이 최상승법을 만나서 이 참선 공부를 하려고 하니 벌써 나이가 육십, 칠십이 되었구나.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르고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어떠한 물이고 흘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는 거여.
왜 그러냐 하면, 저 달빛이 바다에 비춰, 호수나 물에 비추어서 분명히 물속을 보면 그 달이 물에 와 있지만—천만 개의 호수, 천만 개의 물에 달이 비치지만,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니여. 달은 하늘에 조끔도, 한 걸음도 하늘을 여읜 것이 아니더라.
혼침 산란이, 혼침 산란이 전체가 본래(本來) 본지풍광(本地風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본지풍광인데 그놈을 버리려고 하면 버려질 것이며, 쫓으려고 하면 쫓아질 것이냐 그 말이여.
물속에 있는 달을 그놈을 건지려고 하면 건질 거여? 무슨 놈의 달이 물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오늘부터 계해년 첫날이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생(衆生)의 업(業)이 지중해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아닙니다.
조끔도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이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52분7초~1시간8분36초) (끝)
[법문 내용]
(게송)해천공활월성륜~ / 용화사에서 나눠 드리는 무량겁 삼재를 소멸하는 부작, '이뭣고?' / 삼재의 원인인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회향(回向)해야 / 유심(有心) 무심(無心)으로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다 그르친 것 / 혼침 산란은 번뇌망상으로부터서 성불하려는 생각, 열반(涅槃)에 들리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이 혼침 산란의 원인 / (게송)막장한학해~ / 자기의 한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懇切)하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혼자 하기보다는 좋은 도반(道伴)들과 또 선지식(善知識)을 의지해서 우리가 모여서 공부를 해야 /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 현생보(現生報), 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 / 인과의 법칙은 어김이 없다.
참선 수행인들은 내생(來生)에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기를 원(願) /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한다 / 『열반경』에 있는 설산동자 법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진실한, 간절한 한 생각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의 불보살(佛菩薩)로 화현(化現)을 하는 것.
(게송)귀래좌허실~ /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른다 /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
〇아까 「배가, 그 달빛이 파도에 찬란하게 부서지면서 반짝거리는 그 파도 속에 배가 동서남북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것은 뱃사공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마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우리 중생들도 마치 찬란한 달빛이 반짝거리는 파도 위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느냐 서쪽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축생으로 가느냐 아귀도에 가느냐, 온전히 우리의 마음 하나에 달렸어. 천당(天堂)에 가려 하면은 천당에 갈 짓을 하면은 천당에 가는 게고, 지옥(地獄)이나 축생(畜生)으로 가려면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갈 짓을 하면 되는 것이다.
〇어째서 한 생각 참으로 간절하지 못해 가지고서 (간절하지) 못한 것은 책망을 하지 아니하고 혼침 산란만을 책망을 할까 보냐 이 말이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〇부처님 말씀에,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셨습니다.
〇설사 과거에 어떤 지은 업(業)에 의해서 삼재가 우리에 붙은다 하더라도 그 삼재는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할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에게 붙기 위해서 전후좌우에 엿보고 있다가도 '이 뭣고?'를 들면, 그 마구니가 찰나간에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로 변해질 것이다
〇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르고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어떠한 물이고 흘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는 거여.
왜 그러냐 하면, 저 달빛이 바다에 비춰, 호수나 물에 비추어서 분명히 물속을 보면 그 달이 물에 와 있지만—천만 개의 호수, 천만 개의 물에 달이 비치지만,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니여. 달은 하늘에 조끔도, 한 걸음도 하늘을 여읜 것이 아니더라.
혼침 산란이, 혼침 산란이 전체가 본래(本來) 본지풍광(本地風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본지풍광인데 그놈을 버리려고 하면 버려질 것이며, 쫓으려고 하면 쫓아질 것이냐 그 말이여. 물속에 있는 달을 그놈을 건지려고 하면 건질 거여? 무슨 놈의 달이 물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아무리 중생(衆生)의 업(業)이 지중해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아닙니다.
조끔도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이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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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하라. 긴히, 긴밀히 꽉!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라. 승두(繩頭)는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話頭), 화두를 놓치지 말고 단단히 거각(擧却)을 해서 공부를 잡두리를 해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이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 향기가 진동을 하는 것입니다. 추운 강추위가 없이 겨울 날씨가 뜨뜻, 마냥 이상(異常) 기온으로 뜨뜻해서 매화꽃이 싱겁게 피어 놓으면 그 매화는 향기가 진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는데,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데 영 순일(純一)하지를 못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않고, 그래 어떻게 했으면 화두가 잘 들리며, 어떻게 했으면 이 발심(發心)이 되어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잘 들려서 공부를 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종종 문의를 받습니다.
화두를 타 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하려고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생각이 맹렬하지를 못하고, 들어도 한 번 두 번 들면 들을 때만 잠깐 있다가, 돌아서 일 분도 못 가서 또 화두가 안 들리고. 이리해서 '이거 공부를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냐? 화두가 나한테 맞지를 않아서 그런 것이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저 또 딴 큰스님네한테 가서 화두를 새로 타 가지고 또 해 보니, 새 화두를 가지고 해 보니 뜬금없이 그전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었던 화두가, 묵은 화두가 생각이 나고,
'이것 새 화두는 그만두고 또 묵은 화두를 들고 한바탕해 보까?' 그러니 또 새 화두가 또 생각이 나고.
이리해서 갈팡질팡 이 화두 조끔 들어보다 저 화두 좀 들어보다가, '아! 이것이 그 잘 안되는 것이 업장(業障)이 많아서 그러나? 이 업장소멸(業障消滅)하기 위해서 기도를 좀 해 보까?'
마치 어떤 사람이 월급만 받아 가지고는 살림이 도저히 꾸려 나갈 수가 없으니까 '무슨 계를 좀 해 보자. 계를 하려니 무슨 장사를 조끔 해 보까? 밀수 장사를 좀 해 보까? 화장품 장사를 좀 해 보까?' 이것 쫌 해 보다, 저것 쫌 해 보다, 마냥 집에 붙어 있는 겨를이 없이 밖으로 밖으로만 돌아댕기다가 살림도 엉망이고 곗돈도 띠이고, 화장품 장시하다가 들켜 가지고 들통이 나고 이리해서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하는 그러한 사람이 신문에도 가끔 납니다마는 참선(參禪) 공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팔지니라. 몇 자 파다가 물이 안 나온다고 또 저만큼 옮겨서 끌쩍끌쩍, 조끔 파보다 안 나오면 또 저그 가서 끌쩍끌쩍, 그 사람은 종래 물을, 좋은 우물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열 자를 팠는데, 나는 열 자를 파도 안 나오면 스무 자를 파고, 스무 자를 파서 안 나오면 삼십 자를 파고, 기어코 바위가 나오면 그 바위를 떨어내고 이리해서 다른 사람 집 우물보다도 훨씬 맛이 좋은, 가물 때나 장마 때나 변함이 없이 솟아오르는 진짜 생수를 지하수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물을 만날려면은 다른 사람보다도 몇 배를 더 파고 들어가고, 바위까지 뚫고 들어갈 만한 그러한 끈기와 용기와 참을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도 그만한 인내력 끈기가 있어야만 이 무량겁으로 얽히고 얽힌 생사업(生死業)을 뽑아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은 열 자 파는데, 자기는 겨우 서너 자 파고 그때부터서 물이 안 나온다고 짜증을 내고, '이것 우물 자리가 좋지 못해서 이러냐?'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해 가지고 자꾸 화두를 바꿔 쌓고, 그래 가지고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약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실지로 닦아 가는 실참실오(實參實悟)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법문을 해 주셨는데, 법당 공기가 너무 혼탁한 탓인지 모두 조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냥 보통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면은 멀쩡하니 눈이 반짝거리고 잠이 안 오다가, 참선 법문만 시작했다 하면은 또 죽비(竹篦) 치고 「이뭣고?」만 했다 하면 눈이 스르르르 감겨 가지고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웬수 만난 듯이 이를 갈아붙인다 해도 또 스르르르..
죽비를 안 치고 이야기를 하고 앉었으면 잠이 안 오는데, 왜 죽비를 치고 「이뭣고?」를 하면 잠이 오냐? 이것이 대단히 이건 참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어떤 노장님이 하루는 찾어와서 참선을, 출가하신 지가 그분도 근 20년이 된 분인데 비구니 스님인데, "참선을 새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조실 스님께 계를 받고 불명을 타고 그래서 중이 되었는데 인자 조실 스님 돌아가셨으니 천상 원장(院長) 스님을 의지해서 참선을 해야겄으니 공부를 새로 좀 가리켜 주십시요"
"아니 그동안에 20년이란 세월을 선방으로 다니시면서 했는데 무슨 공부를 새로 한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저기 경상도 어떤 큰스님을 만나 뵈옵고 어떻게 해야 도를 빨리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쭤봤더니 "어쨌든지 앉아서 많이 졸으라"고, "그저 많이 졸라야지 많이 졸라야 하느니라" 이리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앉아서 가만히 옆에 사람 모다 10년 20년 공부한 구참 스님네 가만히 보니까 전판 죽비를 치니, 치고 나서 5분도 못 되아서부터서 졸기 시작하는데 방선(放禪)할 때까지 그렇게 맛있게 자고 있단 말이여.
'아하! 저분들은 참 공부가 참 깊이든 분들이로구나. 에이! 나도 한바탕 자 봐야겄다' 앉아서 아무리 잠을 자려고, 기를 쓰고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애를 먹었다고 그럽니다. 한 달 두 달 어떻게 해야 이것이 잠이 오나 하고 아무리 공을 들여 봤자 점점 잠이 안 오거든.
그래 가지고 옆에 사람 '누가 저 공부를 잘하나?' 아하 확실히 금방 된 시작한 사람은 잠을 안 자고, 오래된 사람일수록 잠을 잘 자거든.
그것참, 그래서 그 일 년 이태 사오 년 내지 십 년을 걸려서 자오는 연습을 해 가지고 이제 겨우 잠을 나도 참 어디다 내놓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자랑삼아서 그 새로 된 사람 선배 후배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떠억 꺼내서 자랑을 했더니 "아! 노스님, 공부 그것이 아니에요. 잠자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 니가 모르는 소리다. 내가 큰스님한테 내가 들었는데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러니 그 옆에 있는 구참들도 모다 그렇지 않다고 그러거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 또 다른 스님네한테 가서 또 물어보니까 역시 '존 것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확실히 그 존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이제사 왔습니다. 입맛 나자 노수 떨어진다고 이제 겨우 질 나서 잘 좀 자게 되었는데 이제사 그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라 하니 이거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몸은 늙고 신경통으로 무릎은 쑤시고 하니 이거 큰일났습니다"
큰스님 한마디는 '그 많이 졸라야 한다'는 말씀은 농(弄)이 좀 들어 있는 말씀이지마는, '어쨌든지 앉아서 「이뭣고?」를 열심히 해라' 아마 이러한 뜻으로 하신 말씀을 조끔 농적으로 표현을 하셨던 모냥인데, 그 말을 아주 고지식하게 듣고서 조는 것이 참선인 줄 알고, 그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십 년 적공(積功)을 들여서 질을 냈다고 그럽니다.
그만큼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 산란 아니면 혼침, 중국에 고봉(高峰) 스님이라고 한 큰스님도 '내가 3년 동안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은 내가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으리라' 이래 3년 사한(死限)을 세우고서 참선을 시작했는데, 겨우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 있을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잠이 퍼일어났습니다.
잠이 퍼일어나면 일어서서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하다가 잠이 깨지면 다시 또 포단 위에 올라가서 정진을 하는데, 앉으면 이 생각 저 생각 산란심(散亂心)이 퍼일어나고 산란심이 조끔 가라앉을 만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고 이리해서,
그리고 화두를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어느 곳으로부터서 어데로부터서 내가 왔으며, 죽으면 내가 어느 곳으로 가는고?」 화두를 이렇게 하라고 그 지도를 받아 가지고 아! 그렇게 화두를 하는데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졌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데서 왔으며, 이 세상을 살고 죽으면은 어느 곳으로 가는고?' 아 이렇게 두 갈래 길로—생각도 이렇게 간추려 지지를 아니하고, 앉았다 하면은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 산란 아니면 혼침,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 지낸 것이 어느덧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가고 며칠 안 가면 마지막 3년 기한이 차서 그날이 지내가면 천상 자살을 해 버리려고 했던 그날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착잡하기가 말할 수 없고, 초조하고 불안하기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경황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하룻저녁에는 꿈에 단교(斷橋) 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이 화두를 해라' 아 꿈에 화두를 탔는데, 꿈을 깨서 보니 그 꿈속에서 탄 그 화두가 그렇게 성성(惺惺)하게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제절로 들려.
밥 먹을 때도 건성, 똥 눌 때도 건성, 대중생활 속에서 생활을 해 나가는데 일체 건성이고, 오직 「만법귀일(萬法歸一)이 일귀하처(一歸何處),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리는데 기가 맥혀.
하루 이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저녁까지 밤새 잠 뭐,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해 볼려고 해도 딴생각이 나지를 않고 오직 화두만 독로(獨露)—하늘을 쳐다봐도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땅을 봐도 화두, 하늘을 봐도 화두, 사람을 뭐 수백 명 사람 모인 데에 있어도 그 화두뿐이라 그 말이여.
그렇게 해서 6일, 엿샛날이 돌아간, 엿샛날 채웠는데 그때 달마 스님 제삿날을 맞이해서 탑전(塔前)에 제사를 사시(巳時)에 마지(摩旨)를 올리러 갔다가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의 영탱화(影幀畵)에 그 찬(讚)이 있는데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백 년이면 삼만육천 일이죠. '백 년, 삼만육천 일에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그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로구나' 한 아! 그 게송을 보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3년 동안 사한(死限)을 해 가지고, 3년 해서 되지 아니하면 죽을 기한을 한 사람이 공부야 되건 안 되건 등한히 지내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안 들리고, 아무리 혼침에 떨어져도 단 일 분, 단 일 초도 등한히 지내지를 안 하고 계속 최선을 다해서, 앉아서 잠이 오면 서서 거닐면서 화두를 들고 쪼옥, 졸음이 나가면 다시 와서 앉고 하기를 3년을 되건 안 되건 한결같이 단속을 했던 것입니다.(처음~20분57초)
(2/3)----------------
이 공부는 '잘된다'고 생각이 된다고 해서 잘된 것도 아니고, '잘 못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그 공부가 잘 못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화두가 제법 잘 들리고 성성하다고 '아! 화두가 참 잘 들리는구나. 이런 상태로 주욱 나갔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공부가 잘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아! 화두가 잘 들리는구나. 참 이렇게 좀 쭉 나갔으면' 고 생각이 벌써 화두를 놓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게 공부 옳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여.
잘되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를 들고 나가는 것뿐인 것이여.
또 그렇게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그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그런 때가 또 옵니다. 그러나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야말로 내가 한 계단 힘을 얻을 수 있는, 올라서려고 하는 그러한 고비가, 바로 그 공부가 잘 안 되고 뒤틀리고 지루하고 몸부림쳐 지고 한 때가 그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그럴 때가 대단히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것을 잘 아시고, 조끔도 짜증을 내지 말고 허리를 주욱 펴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이뭣고?」 하면서 이렇게 내쉬어.
참 앉아서 뒤틀리고, 답답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고 이럴 때에는 조용히 일어서서 밖에 나가 가지고 '한 일(一)' 자로 떠억 노선을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고, 가슴이 좀 시원해지고 혼침이 없어지면 다시 또 자리에 가서 하고.
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잘 지혜스럽게 그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조끔도 한 생각도 후퇴하지 말고 지혜롭게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하면은 한 걸음, 한 고동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로써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고비요 거기서 힘을 더는[省力]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간절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그 맛없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정말 잘 잡드리해서, 생각 생각이 잡드리해서 거각(擧却)해 나간다고 하면 결정코 그 한마디가 나에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참, 열쇠요 관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놈이 뭣고?~~」
처음에는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숨 내쉬는 것과 화두를 요렇게 합해서 해 들어가면 초학자(初學者)도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과 화두를 함께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초학자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방법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공부가 기초가 잡혀서 익숙해 들어가면 구태여 숨 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두 번 세 번마다 한 번씩 들다가, 나중에는 다섯 번 여섯 번 숨 쉴 동안에 한 번씩 들다가, 나중에 참으로 더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뜰 때—입선(入禪)할 때만 든 게 아니라—아침에 눈 딱! 뜨면 벌써 그때 화두를 턱! 챙길 줄 알아야 혀.
딱! 뜰 때 「이뭣고?」
떠서 화장실에 갈 때도 「이뭣고?」
세수하고 양치질할 때도 그때 「이뭣고?」를 한번 떡! 챙겨 보도록.
차 탈 때도 챙겨 보고, 시장바닥에 시장에 가서도 화두를 떠억 챙겨 보거든.
시장에 가서 조심할 것은 돈지갑을 잘 단속을 하고 「이뭣고?」를 해야지, 잘못하다가 그 쓰리꾼한테 떼껴 가지고 '시장에서 이뭣고? 하라 하더니 돈만 뺏겼다' 이러지 말고.
처음에는 화두를 들고 참선하게 되면, 화두 하는데 정신을 쏟다 보면 일상 그 생활하는 일에 혼란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밭을 매는데 가꾸어야 할 곡식은 뽑아 버리고 잡초는 남겨 두고 이러한 수도 혹 있을 수가 있고, 그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 화두에 전념을 하다 보면 하고 있는 일에 차질이 오는 수도 더러는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자꾸 찾고, 생활 속에서 공부를 익혀 놓으면 무심(無心) 속에—속으로는 항시 화두를 화두에 의심(疑心)을 관(觀)하고 있지마는, 무심 속에 소지가 제절로 되고 빨래가 제절로 되고 밥도 제절로 밥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운전사나 모다 그 운전사 운전하는 것을 보면 왼쪽 발 오른쪽 발, 왼손 오른손, 눈 귀, 전체를 다 활용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야기하면서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기아를 꺾고, 왼발 오른발은 그 악셀레다나 그놈 모다 맘대로 그놈 이놈 밟았다, 저놈 밟았다 자유자재로 하거든. 그것이 익숙해지면 그렇게 되는 것이여.
참선도 화두가 들려서 익숙해지면 생활하면서 화두가 되고, 화두 드는 가운데 생활이 제절로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주위 환경 모든 것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위를 요리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진을 하지 아니한 사람, 모든 주위에 노예 노릇을 하고, 밖에 것이 주인이 됩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바로 나의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살림을 하는 것이지, 살림이 주인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집 살림, 종으로부터서 일체 모든 기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참선을 한 사람이라야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나에 부하요, 나에 가구요, 나에 살림이 될 때에 바로 내가 이 우주법계(宇宙法界) 주인이 되는 것으로써 이 세계는 고대로 놔둔 채 불세계(佛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극락세계(極樂世界)요, 깨달음의 세계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겨울도 물러가고 완연히 봄기운이 돌아왔습니다. 어제가 우수(雨水)로써 '입춘 우수가 지내면 대동강 물이 녹는다'고 그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이 환절기가 되어서 몸조심하시고 이제 춥지도 더웁지도 않는 이러한 계절인 만큼 각별히 정진에 힘을 써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순경계(順境界), 우리의 뜻에 맞는, 우리 뜻대로 되는 그러한 일을 당하면은 좋아하고, 우리의 뜻에 어긋나는 역경계(逆境界)를 만나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당장 남을 원망하고 자기를 한탄하고 삽시간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순경계(順境界)라고 해서 그렇게 좋아서 날뛸 것도 없고 그럴수록에 더욱 근신하고 더욱 자중해서 일을 잘 수습해 나가야 할 것이고, 더욱이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 때 이것이 '이것이야말로 나에 인격과 나에 역량을 가름해 보는 좋은 관문이요 계기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허리를 쭉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터억 들고서 그 어려운 문제를 냉철하게 관찰을 해야 합니다.
그 역경계가 대인 관계가 되었건, 사업 문제가 되었건, 또는 재산 문제가 되었건, 또는 자손 문제가 되었건, 부부간에 문제가 되었건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내 뜻에 어긋나는 그러한 문제가 있을 때 더욱 마음을 안정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내 본심을 딱! 챙겨 가지고 관망을 한다고 하면은 거기에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덜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내 본심(本心)을 딱! 챙기지 못하면 감정(感情)이 먼저 발동(發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 발동을 했다 하면 이성은 숨어 버리게 되는 것이고, 이성은 숨어 버리고 감정이 발동된 상태에서 무엇을 보면 그 일이 절대로 옳게 보여지질 않고, 그러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했을 때는 반드시 실수를 이중 삼중으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만나되, 하나는 당장 그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상대방을 원망하고 감정이 발동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일을 처리한 것과, 한 사람은 '아! 이 좋은 때를 기회를 만났구나. 내 인격과 역량을 시험해 보는 좋은 시험 문제가 내 앞에 왔구나. 어디 한바탕 멋지게 한바탕 이것을 처리해 보자'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역경계를 다스린 사람과는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참선을 하는 법보제자는 이렇게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이렇게 처리해 나가신다고 하면은 이 세계는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나쁜 세계가 아니라, 도업을 성취할 수 있는 그러한 불보살(佛菩薩)이 계시는 우리에 수도원(修道院)이요 선방(禪房)이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대단히 자기의 마음을 돌리는데 아주 효과적인 마음가짐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에 도업(道業)을 시험할 수 있는, 나에 도(道)를 이룩하는 불무깐(대장간)이다. 여기에서 내가 꺼꾸러져서 되겠느냐, 이것에 내가 져서는 되겠느냐'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로 나간다고 하는 것은 보다 더 강력하고 용기와 지혜를 가져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써 아주 상식적인 말이기도 합니다마는, 여러분이 일상생활 속에 이러한 마음가짐을 활용을 해 나가시고 실천을 하신다면은 사람이 사람됨이 자타가 공인할 만큼 달라져 가는 것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20분58초~39분26초)
(3/3)----------------
벌써 정월 보름에 해제(解制)하고 열흘이 지내 가지고 정월 관음재(觀音齋)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물 흘러가듯이 세월이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있었던 사람이 오늘 없고, 오늘 같이 담소했던 사람이 내일은 황천객(黃泉客)이 되고. 그렇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기가 맥히게 무상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작년 겨울에는 한국에 큰스님네가 몇 분 또 열반하시고 그렇게 해서 해를 거듭할 때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차례차례 가시게 됩니다.
어쨌든지 금생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 만났을 때에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아직 죽을려면 멀었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 번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고, 다시 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 꺼지면 그것이 또 한 생(生)이 지내간 것입니다.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그 일념(一念), 한 생각 한 생각의 생사가 결국은 이 몸뚱이의 생사와 직결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을 누누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하고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그 기러기 발자취는 모래 위에 남아 있구나. 사람은 황천으로 떠나갔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 이러한 내용의 게송이었습니다.
기러기가 모래밭에 강변에 놀다가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아까 그 기러기가 놀던 모래 위에는 그 기러기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러기 발자취가 과연 얼마 동안 남아 있을 것인가? 바람 불고 비 오면은 금방 그 자취는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70년 내지 80년 살다가 저승으로 떠나갑니다. 떠나간 뒤에 얼마 동안 그 사람의 이름이 그 집에 남아 있습니다. '저건 아무개 집이다. 아무개 집이다. 아무개가 저 집에서 살았다' 이렇게 집에 이름만 남아 있지만 여간 훌륭한 인물이라야 역사적으로 아무개 아무개, 그것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이름을 기억한 사람이 줄어져 가는 것입니다. 보통 3년, 1년.
죽은 뒤에 며칠간 잠깐 있다가 일 년 지내면 잊어버리고, 삼 년 지내면 더 잊고, 십 년 지내면 거의 다 잊어버리고, 삼십 년 못 가서 그 사람의 이름을 물으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져.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물질적인 재산, 조끔 수준이 있는 사람은 권리나 명예를 대단히 존중을 합니다마는 그 명예라 하는 것도 모래밭에 남아 있는 기러기 발자취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하는 길, 이것밖에는 모래밭에 기러기 발자취에 지내지 못하고, 재산이라든지 권리라든지 이런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꼭 필요하다고 하지마는 이러한 것에 지나치게 욕심을 가지고 함부로 대들다가는 칼날, 멀금하게 든 칼날에 묻은 꿀과 같애서 그 단맛만을 생각하고 함부로 그 칼날 끝에 묻어 있는 꿀을 핥아먹다가는 혀에 상처를 입게 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재산이 필요해서 우리는 힘을 다해서 재산을 모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잘 알아서 재산을 모아야지 잘못 모이다가는 오히려 인생을 불행하게 맨드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칼날 끝에 묻은 꿀이나, 모래밭에 남아 있는 발자취,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 필요하기는 하지마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고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십분 이해를 하시고,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공부에 대해서 정말 나에 온 정성을 쏟을 수 있을 때 인생으로서 태어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하루하루 이렇게 늙어가고 있어서 지끔 사십 오십이라 하더라도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육십 칠십이 금방 돌아오는 것입니다.
관(棺) 속에 들어갈, 우리는 기어코 한 번은 관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천하 없는 사람도 그걸 면할 길이 없습니다마는 그때 관 속에 들어가서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가지고 '아! 내가 그때 열심히 공부를 좀 젊었을 때 좀 할 것을...'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지금 이만끔 건강했을 때 우리 모두 다 같이 열심히 정진을 해서 노자(路資)를 많이 벌어 놔야 되겠습니다.
어떤 이는 죽을 때 쓸려고 돈을 많이 모여 가지고, 죽은 뒤에 49재도 지내고 제사도 지내고 하라고 돈을 모이는 할머니를 제가 봤습니다마는, 그것은 진짜 노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자기 화장(火葬)은 죽은 다음에는 누가 해 주던지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돈 한푼 남겨 놓지 안 해도 땅에 묻지 아니하면 불에다 태우게 되어 있습니다. 자손이 없어도 그것은 사실은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걱정할 것은 이 몸뚱이를 버리고 떠나는 '이 주인공, 그놈을 어떻게 닦어 놨느냐?' 그것이 진짜 노잣돈입니다. 돈을 황금으로 뭉쳐서 저승에 가기 위해서 뭉쳐 놔 봤자 그것은 염라대왕 앞에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관 속에다 넣어 주어도 그것은 관 속에 남아 있지, 그 영혼이 그것을 가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놓을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 뭣고?」 많이 해 놓은 것 그거라야 염라대왕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불법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믿되 참선을 했느냐 안 했느냐?'
여러 법보제자들은 어쨌든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이 '참선(參禪)을 했다'고 하는 그 한마디를 잊지 말고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수가 있느냐?
죽을 때에는 그 병 아픔을 자기가 이기지 못해서 죽게 됩니다. 이길 수만 있으면 더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그것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결국은 죽게 되는데, 그 고통이 너무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때 화두(話頭)가 잘 들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숨이 꼴딱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를 한 사람이라야 염라대왕 앞에서도 떠억 「이뭣고?」를 할 수가 있고, '니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했느냐?' 물어볼 때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때 너무너무 아프고, 딸 생각 외손자 생각하다가 화두를 놓쳤다 하면은 내생(來生)에 가서 자기가 무엇을 전생(前生)에 했는가를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많은 수백 명 법보제자 계십니다마는 '전생에 자기가 무엇을 했던가?' 아마 아신 분이 계신가? 아마 계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입태(入胎) 출태(出胎) 할 때에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생에 사람이 다시 또 사람이 되았나? 개가 사람이 되았나? 무엇이 되았나?'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전생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 모르듯이 내생(來生)에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도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 딱! 끊어질 때에도 화두를 턱! 역력(歷歷)하게 화두를 떠억 들고서 숨이 딸끄닥 끊어지도록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은 아까 중국에 고봉 스님처럼 공부가 되건 안 되건, 앉아서건 서서건 누어서건 아주 죽기로 이를 갈아붙이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야, 평상시에 그렇게 해 놔야만 마지막 숨 거둘 때에도 「이뭣고?」 딸깍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게 되겄습니까? 그때에도 「이뭣고?」를 할 수 있게 되려면은 밥 먹을 때도 「이뭣고?」
똥 눌 때도 「이뭣고?」
누가 나 억울한 소리를 해서 속을 박박 긁어줄 때에도 나는 「이뭣고?」
배가 아플 때도 「이뭣고?」
머리가 아플 때도 「이뭣고?」
누었을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 놔야 돼.
옆에서 조끔 문만 덜꺼덕 닫힌다고 짜증을 내고,
누가 좀 떠든다고 짜증을 내고,
밥을 빨리 안 가져 온다고 짜증을 내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고,
이래저래 화두는 다 놓쳐 버리고 이래 가지고서는 죽을 때에 화두가 들려질 까닭이 없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가 「이뭣고?」를 했단 말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스갯말 같지마는 댁에 가셔서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이 그 확실히 그럴 것이로구나' 분명 가남이 가실 줄 믿습니다.
하루 잠깐 소매만 스쳐 가는 인연도 5백 생의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한 법당에서 같이 법문을 듣고 또 법을 설하고 또 법을 듣고 이러한 인연은 몇억만 겁의, 몇억만 생의 무량겁의 인연이 쌓이고 쌓여 가지고 이러한 모임을 만남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연이 해탈로를 걸어, 인연으로 해서 해탈로를 걸어서 마지막 목적지인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만날 때까지 한 사람도 한 분도 이탈한 분이 없도록.
기왕 이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르지만, 만나 가지고 여기서 물러서 가지고 '아! 참선해 봤자 되지도 않고 기도를 좀 해 보까?' 갈팡질팡하실 일이 아닙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뭔 일이 그 잘되더니 참선을 시작하면서부터서는 뭔 일이 잘 안된다' 그러한 분, 그래 가지고는 '참선을 하고 부터서는 그 장사가 잘 안된다' 이런 분을 접때 한번 봤는데,
참선을 한다고 해서 장사가 안되고, 참선을 시작했더니 장사가 잘된다고 또 좋아하시고—다 참선을 안 한 분도 장사가 잘될 수도 있고, 또 참선을 한 분도 잘될 수도 있고 또 안될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
그런 일이 조끔 잘된다고 해서 금방 거기에다 붙여 갖고 좋아하고, 조끔 안된다고 해서 '아! 그 참선을 했더니 안되는가?' 이렇게 가볍게 생각을 하실 일이 아닙니다.
잘되거나 못되거나 좀 든든하게 묵중하게 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가신다고 하면 조끔 안된 듯하다가도 잘되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올바른 진리를 향해서 나가는 데 어째서 뭔 일이 안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혹 '니가 정법을 믿는데 얼마만큼 철저히 믿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제석천왕(帝釋天王)이 그러한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럴 때에 시험에서 탈락이 되지 않도록—아들 대학이나 고등학교 시험 본 데만 신경을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의 이런 진리, 참선에 있어서의 시험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할머니가 자기 공부해 나가는데 멋지게 합격이 되도록 해야만 아들딸 손자손녀도 학교에 멋지게 합격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부디 열심히 공부하셔서 도업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39분30초~58분7초) (끝)
[법문 내용]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 우물을 팔지니라 / 왜 죽비 치고 「이뭣고?」를 하면 잠이 오냐? / 조는 것이 참선인 줄 착각한 스님 / 중국 고봉 스님의 3년 사한(死限) 수행.
화두는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열쇠요 관문 / 참선도 화두가 들려서 익숙해지면 생활하면서 화두가 되고, 화두 드는 가운데 생활이 제절로 되어지게 되는 것. 숙련된 운전사의 운전하는 비유 /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바로 나의 살림이 되는 것 / 순경계(順境界), 역경계(逆境界)를, 나의 도(道)를 이룩하는 불무깐으로 삼는 적극적인 마음가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것이 한 생(生)이 지내간 것.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 / (게송)안비천말적유사~ / 오직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하는 길, 이것밖에는 다 무상(無常)한 것 / 진짜 노잣돈은 지금 이만끔 건강했을 때 열심히 참선 정진한 것 / 「이뭣고?」 많이 해 놓은 것 그거라야 염라대왕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 한 법당에서 법을 설하고 또 같이 법을 듣고 이러한 인연은 몇억만 생의 무량겁의 인연. 모두 다 마지막 목적지인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만나야.
〇우물을 파되, 좋은 물을 만날려면은 다른 사람보다도 몇 배를 더 파고 들어가고, 바위까지 뚫고 들어갈 만한 그러한 끈기와 용기와 참을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도 그만한 인내력 끈기가 있어야만 이 무량겁으로 얽히고 얽힌 생사업(生死業)을 뽑아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〇"어떻게 해야 도를 빨리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쭘에 '그 많이 졸라야 한다'는 큰스님 말씀을 아주 고지식하게 듣고서 조는 것이 참선인 줄 알았던 스님.
〇아까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기뻐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된 것처럼, 공부가 그렇게 답답하고 지루하고 잘 안된 때라고 해서 심술을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잘 지혜스럽게 그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조끔도 한 생각도 후퇴하지 말고 지혜롭게 마음을 써서 그 고비를 넘긴다고 하면은 한 걸음, 한 고동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바로써 '그 잘 안될 때에 용심(用心)을 잘해 가지고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라'고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고비요 거기서 힘을 더는[省力], 힘을 얻는[得力]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간절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 간단한 맛없는 말이지만, 그 맛없는 그 간단한 한마디를 정말 잘 잡드리해서, 생각 생각이 잡드리해서 거각(擧却)해 나간다고 하면 결정코 그 한마디가 나에 무량겁 생사(生死) 업장(業障)을 무너트려서 보리(菩提)의 과(果)를 성취하게 하는 중요한 참, 열쇠요 관문인 것입니다.
〇참선도 화두가 들려서 익숙해지면 생활하면서 화두가 되고, 화두 드는 가운데 생활이 제절로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주위 환경 모든 것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위를 요리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진을 하지 아니한 사람, 모든 주위에 노예 노릇을 하고, 밖에 것이 주인이 됩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바로 나의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〇어쨌든지 금생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났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고, 만났을 때에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아직 죽을려면 멀었다'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 번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고, 다시 또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 꺼지면 그것이 또 한 생(生)이 지내간 것입니다. 일념 일념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그 일념(一念), 한 생각 한 생각의 생사가 결국은 이 몸뚱이의 생사와 직결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을 누누이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〇죽을 때에는 그 병 아픔을 자기가 이기지 못해서 죽게 됩니다. 이길 수만 있으면 더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그것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결국은 죽게 되는데, 그 고통이 너무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때 화두(話頭)가 잘 들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숨이 꼴딱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를 한 사람이라야 염라대왕 앞에서도 떠억 「이뭣고?」를 할 수가 있고, '니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했느냐?' 물어볼 때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때 너무너무 아프고, 딸 생각 외손자 생각하다가 화두를 놓쳤다 하면은 내생(來生)에 가서 자기가 무엇을 전생(前生)에 했는가를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〇마지막 숨 딱! 끊어질 때에도 화두를 턱! 역력(歷歷)하게 화두를 떠억 들고서 숨이 딸끄닥 끊어지도록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은 아까 중국에 고봉 스님처럼 공부가 되건 안 되건, 앉아서건 서서건 누어서건 아주 죽기로 이를 갈아붙이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야, 평상시에 그렇게 해 놔야만 마지막 숨 거둘 때에도 「이뭣고?」 딸깍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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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부처님께서 80세를 일기(一期)로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열반에 드신 해를 1년으로, 원년(元年)으로 해 가지고 금년이 2525년이니까, 80세에 열반하신 그 해가 불기(佛紀) 1년이니까 2525에다가 79를 보태면 오늘이 부처님 탄생하신 그 햇수가 되는 것입니다.
2525에다가 79를 보태면은 2604년이 됩니다. 2604회 「부처님 오신 날」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는 마땅히 부처님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西紀)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을 일 년으로 해서 금년이 1981년이 되지만, 불기(佛紀)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를 일 년으로 해 가지고 불기(佛紀)를 지금 따지고 있으니까, 부처님 나신 생신으로 따진다면 2604년이라 하는 것을 우리 불자(佛子)들은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불기에 대해서 경전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현재 세계 불교학자(佛敎學者)들이 여러 가지로 깊이 연구한 결과 2525년으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2600년 전 인도(印度) 가비라 왕국(迦毘羅王國)에 태자(太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가비라 왕국이 어디냐 하면 지금의 네팔(Nepal) 나라인 것입니다. 네팔 나라에 있는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은 탄생을 하셨습니다.
태자로 태어나셔서 그 태자의 모든 영광과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온갖 고행(苦行)을 다 겪으시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그 모진 고행(苦行)을 하셨는가? 그것은 오직 인간 석가(釋迦)로 볼 때에는 당신의 생사(生死) 문제, '인간은 왜 태어났으며, 왜 늙어서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인가?'
어릴 때부터서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항시 마음속 깊이 그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러시다가 마침내 출가(出家)를 하셔서 '이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출가를 하셔서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 그 많은 무서운 고통을 견디시면서 도(道)를 닦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석가(釋迦)로 보지 아니하고, 저 구원겁(久遠劫) 이래로 진묵겁(塵墨劫) 전에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중생(衆生)들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태어나셔 가지고, 일부러 출가하셔서 고행을 하셔서 대도를 성취한 그 모습을 우리 중생들에게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이렇게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역사, 『팔상록(八相錄)』 또는 여러 가지 부처님에 대한 전기(傳記)를 읽어 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부처님의 역사에 대해서도 진리(眞理)의 몸으로서의 부처님 또는 일단 사바세계에 사람의 몸을 받아서 태어나신 이상은 인간 석가(釋迦)로서 보는 그러한 부처님의 역사,
각도에 따라서는, '부처님은 저 허공에 오색구름 위에 계시고 한 걸음 옮기실 때마다 그 발자죽에서는 연꽃이 피어나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위대하고 신성하고 거룩하신, 우리 중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그러한 훌륭하신 부처님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마는,
각도를 바꿔서, '인간 석가(釋迦)다. 일단 인간의 세계에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신 부처님은 설사 대도(大道)를 성취한 성현(聖賢)이시지만, 우리가 언제라도 가까이 모실 수 있고 가까이 가서 무엇이라도 여쭈어 볼 수 있고 무슨 괴로움이라도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는 따뜻하고 자애로우신 할아버지와 같은 그러한 성현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그러한 것도 또한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부처님' 하면 굉장히 우리하고 거리가 멀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의 할아버지시다. 언제라도 가까이 가서 여쭈어보면 무슨 일이라도 자상하게 인자하게 일러주실 수 있는 그러한 어른이다. 사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우리의 할아버지다’ 이렇게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것이 훨씬 우리들에게 더 가깝고 고마우신 성현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리키고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하고 우리하고는 아주 바탕이 달라서 도저히, 전혀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부처님은 그 본바탕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다.
옛날에 ‘양반이다’ ‘상놈이다’ 이러한 계급(階級) 의식이 강할 때, 특히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인도 나라는 네 가지 계급이 있어서 인종(人種)의 차별(差別)이 대단히 심했습니다마는—바라문 계급이라든지, 또는 왕족 계급이라든지, 또는 일반 농민 서민 계급이나, 또는 노예 계급, 이러한 사(四) 계급이 있어서 노예들은 바라문이나 왕족의 옆을 지내가지를 못하고 옷만 스쳐가도 큰 벌을 받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맨 먼저 계급(階級) 타파(打破)를 부르짖어서 부처님의 제자를 만들 때는 농민(農民)도 출가(出家)를 허락을 하셨고, 백정(白丁)도 출가를 허락을 하셨고, 또는 왕족(王族)이나 바라문(婆羅門)도 허락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한 것에 구애(拘礙) 없이 허락을 하셨냐 하면, 동쪽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나 서쪽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나 또는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나 일단 물이 바다에 흘러들어 오면, 바다는 깨끗하다고 해서 받아들이고 더럽다고 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고 모든 종류에 물을 추호도 차별 없이 다 받아들였습니다.
일단 받아들이면 어떠한 종류의 물이라도 바다에 도달하면 짠맛! 짠맛으로 변하고 마는 것처럼, 어떠한 계급(階級)의 인종, 어떠한 죄(罪) 많은 사람이라도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해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다 부처님의 혈통을,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부처님의 진리(眞理),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해서 불제자(佛弟子)가 되었습니다. 불자(佛子)가 된 이상 우리도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입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죄 많은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부처님과 같은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옛날에 어떤 큰 부자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들을 하나를 낳아 놓고 그 아들이 말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렸을 때 그 장자 부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에 가장 훌륭한 보배 구슬, 그 보배 구슬 하나만 있으면 평생을 먹고 쓰고도 남을 만한 그러한 훌륭한 보배 구슬을 그 어린애기한테 전해 봤자 소용이 없어서 자기가 가장 믿는,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그 보배 구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것입니다.
그 보배 구슬을 어린아이의 옷 속에다가 넣고 잘 꿰매 놓았습니다. 그리고서 그 자기 친구에게, "이 간난애기 품 안에다가 보배 구슬을 넣고 잘 꿰매 놨으니 이 아이가 크거든 자네가 ‘이 보배 구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일러주어 가지고 그 어린아이로 하여금 먹고 입고 사는데 궁(窮)함이 없이 잘 살도록 일러주기를 바라네" 이렇게 부탁을 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서 많은 세월(歲月)이 흘렀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자기 몸에 간직한 보배 구슬, 그 보배 구슬이 자기 몸안에 있는 것을 전연 인식(認識)하지를 못하고, 부모 없는 자식이 되어서 고향(故鄕)을 떠나 가지고 천하를 얻어먹고 돌아다니면서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자 어느 날 자기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하다가 바로 그 소년이 자기의 친구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친구의 유언(遺言)에 따라서 그 어린 거지 아이의 몸안에 구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는 자기 몸안에 있는 보배 구슬을 꺼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집도 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식량도 사고 또 부릴 사람도 사고, 이래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하는 옷 안에 구슬, 「옷 안에 구슬」이라고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처음~20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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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 우리 안에, 우리는 이 지수화풍(地水火風)—흙으로, 흙 또 물 또 불기운, 바람기운, 이 네 가지의 원소(元素)가 모여 가지고 이 육체(肉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네 가지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는 일단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 죽을 수 밖에는 없는 그러한 무상(無常)한 존재에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상(無常)한 몸뚱이 속에 영원히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에게 주고 그래도 끊임없이 바닥이 날 줄 모르는 그러한 보물이 이 몸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우리 몸안에 그러한 훌륭한 보배가 있다고 한 사실을 우리에게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일러주시기 위해서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탄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보배 구슬이 우리 안에 있는 증거가 무엇이냐?
몸을, 오장육부(五臟六腑)를 해부(解剖)를 해 보아도 그 구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몸뚱이를 빨가벗겨 놓고 온 몸을 두루두루 다 살펴보고 눈, 코, 입, 귀, 아홉 구멍을 다 뒤져도 그 보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해부를 해도 나오지 아니하고 아홉 구멍을 다 두루 살펴봐도 없다면 대관절 어떻게 해서 우리 몸안에 그러한 위대한 보배 구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보배 구슬!
여러분들은 ‘다이아몬드’라든지 무슨 그러한 오색(五色)이 찬란한 그러한 보석을 보면 굉장히 기뻐하고 부러워하고 갖고자 원하시지만, 그러한 물질로 된 보배는 언젠가는 내 몸으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이고, 아무리 잘 간직한다 하더라도 도둑을 맞거나 불에 넣으면 타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부서지거나 또 형편이 어려워지면 내 몸으로부터 떠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일생 동안 잘, 복(福)이 있어서 잘 간직한다 하더라도 칠십 년 팔십 년 이승을 다 살고 갈 때에는 그것은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왜? 죽을 때 관 속에 넣어 가지고 가면 되지 않느냐!'
관 속에 그 보배, 보석을 가지고 가 본들 썩어 가는 육체와 함께 묻어 놓은 뿐이지 내가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몸뚱이는 목숨이 끓어지자마자 십 분이 되면 벌써 내장부터 버글버글 썩어 들어 갑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몸으로부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영혼은 이미 떠나가고 없기 때문에 시체와 함께 그 보석을 묻어서 같이 묻어 놓아 봤자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질로 된 보물을 욕심내고 간직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말 금생 일생 동안 실컷 쓰고 남고 또 이승을 하직(下直)하고 다시 새 몸을 받을 때에도 그 가지고 갈 수 있는 그러한,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않고, 땅에 묻어도 썩지 않는, 그리고 다른 사람이 훔쳐갈 수도 없고 도둑맞을 수도 없는 그러한, 그러한 보배를 우리는 찾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몸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해부를 해도 나오지 아니하고 화장(火葬)을 해도 타지 않는 것이냐?'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안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가 있으며, 있는 증거를 내 보여라'
지금 이 송담(松潭)이 여러분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송담의 말을 귀를 기울이고 지금 듣고 계십니다. '그 듣고 있는 놈이 무엇이냐?'
'귀가 듣지 무엇이 듣느냐?'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있습니다. 귀를 통해서 듣는 놈!
지금 이 법상에 올라와서 지금 말을 하고 있는데, 저의 모습을 여러분들은 보고 있습니다. 눈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이 있습니다.
그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놈! 그놈이 바로 여러분이 찾어야 할, 개발해야 할, 여러분이 깨달러야 할 여러분의 영원한 보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 찾는 공부밖에는 인생으로서 태어나서 할 일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공부를 하는 목적, 돈을 버는 목적, 정치를 하는 목적, 모든 목적이 '보다 더 잘 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보다 더 행복(幸福)하게 살기 위해서 돈도 벌어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하고, 예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돈 많이 번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정치가가 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술을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궁극에 행복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더라.
내가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이다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說)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 속에서 많은 경전(經典)을 읽고 연구하고 해서 교리적으로 밝은 지식을 쌓으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전혀 교리가 무엇인 중도 모르고 그저 소박한 신앙심으로 그저 절에 와서 공양을 올리고 절을 많이 하고 '어쨋든지 우리 아들 명 길고 잘살게 해 주십시오' '우리 딸 좋은 데로 시집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 신랑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손이 발이 되도록 10년 20년 30년을 한결같이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다니신 분, 참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감사하고 기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거기에서만 근쳐서는 아니되겠다 이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소박(素朴)한 신앙(信仰)도 대단히 좋고, 어떠한 참선을 하신 분도 또한 그러한 소박한 신심도 가지고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래야 종교인다웁고, 또 그러한 신앙을 가져야 또 겸허(謙虛)한 자세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시골 할머니와 같은 소박한 신심도 가져야 하고.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지 말고 참나를 깨닫는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진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요새 과학 문명(科學文明)이 발달이 되어서, 물질문명(物質文明)이 발달이 되어 가지고 젊은 사람들, 지식층에서는 그러한 소박한 신앙을 강요해 봤자 잘 먹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참나를 깨닫는 참선법(參禪法)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것이 불법(佛法)이라면 나도 한 번 해보겠다. 나의 인간성을 개조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고 우리의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는 그러한 수행법이라면 나도 한 번 해보겠다'
한마디에 탁! 인식을 하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한 분을 나는 많이 만났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최상승법을 널리, 그리고 높이 선양할 때가 바야흐로 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서양사람들이 불교에, 이 참선법(參禪法)에 뜨거운 관심을 나날이 가져가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한국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그리고 학생들이, 젊은 분들이 이 참선을 들으려고 그러고, 알려고 그러고 또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 옛날에는 절에 오신 분이 대부분 오십 · 육십이 넘은 할머니들만이 절에 오시고, 혹 젊은 부인들은 집안 모다 남편이나 시어른 몰래 친정어머니하고 같이 생남불공(生男佛供)하기 위해서 극히 비밀리에 살짝 왔다가, 와서 공(功)만 들이고 가시던 그러한 때가 불과 십여 년 전에까지도 그래 했었던 것을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보면 거의 90%가 젊은 분들이고,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는 겨우 1할 정도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자체는 남녀노소가 없지만 이 시국이, 이 시대가 불법,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야만 이 시대를 건지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때가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40억 인구 속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적극 실천한 사람이 과연 몇 프로나 될 것인가?' 생각할 때에, 아직도 우리 불자(佛子)들이 더 신심을 내서 이 불법을 선양(宣揚)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입으로만 '불법', '참선' 하고 떠들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실천을 해서 나날이 새로와지고 나날이 향상되어 가는 우리 자신을 가족들에게 보이고, 일가친척들에게 보여주고,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이웃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따라오도록 이러한 수행, 이러한 수행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포교(布敎)의 방법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면서 인연(因緣) 있는 사람에게 권고한다면 따라오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다, 소리를 듣는 그때가 바로 참나로 돌아가야 할 때다.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던지 나무를 보던지 또는 사람을 보던지 어떠한 색상(色相)을 본 바로 그때가, 그곳이 참나로 돌아가야 한, 돌아가는 그 곳이다 이것입니다.
'참나는 어떻게 찾는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야만 있느냐, 부처님을 모신 절에만 가야만 찾느냐?'
그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든지 또는 들에서든지 또는 직장에서든지 기차나 버스 속에서든지, 어디에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릴 때 그때 '이 무엇고?'
눈으로 무엇을—산을 보고 새를 보고 기차를 보고 사람을 보고, 무슨 빛깔, 청황적백(靑黃赤白) 무슨 빛깔을 보던지, 무슨 모냥을 보던지 볼 그 찰나가 바로 '이 무엇고?'
이것이 바로 참나, 자성불(自性佛), 내 몸안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는 그 찰나(刹那)더라 이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일 분 일 분, 한 시간 한 시간을 살아가고 닦아가고 공부해 간다면,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더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만 출세하신 것이 아니라,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무엇고?’ 할 그 찰나(刹那)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라.(20분47초~41분9초)
(3/3)----------------
부처님께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말씀하시기를,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염부제(閻浮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다음 부처님으로, 다음 교주(敎主)로 탄생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는 한 생각 한 생각,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에도 '이 무엇고?'를 놓치지 아니할 때, '이 무엇고?'를 관조(觀照)할 때, 그때 그때가 바로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때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것을 듣고서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하! 내가 여태 불교를 믿어도 헛믿었구나.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태어나신 줄 알았는데,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부처님이 탄생하시고 그 부처님을 뵈올 수가 있다니, 당장 이 자리에서 부터서라도 내가 이 최상승법, 이 참선(參禪)을 하리라'
가만히 내가 눈을 감고 살펴보니까, 이를 악물고 그렇게 결심하신 분이 지금 상당히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말씀을 듣고서도, '그 소리가 뭔 소리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
전혀 믿지 아니하고, '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야지, 다 그런 거 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고집을 부린 분도 개중(個中)에는 또 몇 분이 계신다 이 말씀입니다.
좋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미타불만 불러야지 다른 것은 나는 안 하겠다' 그러한 철저한 결심이 있는 분은 계속해서 '아미타불'을 불러도 좋습니다. 또 '나는 부처님한테 맹세하기를, 죽을 때까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겠다'고 맹세하신 분이 계시다면 좋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죽을 때까지 열심히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최상승법은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부른 만큼의 공덕(功德)이 있다고 한 사실을 나는 이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서 여러분께 말씀을 아니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컷 부르세요. 부르다가, 맨 끝에 가서 떠억 마음을 가다듬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번 해 보시라 그 말이여. 대관절 여태까지 '관세음보살'을 내가 실컷 불렀는데, '이 관세음보살 부르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한 번 돌이켜서 생각을 해 보시라 이 말씀입니다.
백팔 염주(百八念珠)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 한 번 부를 때마다 염주알을 이렇게 이렇게 굴리시는데, 다 백팔 번을 굴리면 마지막에 가서 제일 큰 염주알이 딸크닥 걸립니다.
그 염주알 걸릴 때, 그때 떡!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이 무엇고?~~~' 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렇게만 해 보신다면, 백팔 번 염불하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 백팔 번 염불하는 그 공덕을 탁! 합쳐 가지고 그 공덕을 야무지게 뭉쳐서 성불할 수 있는 단계로 비약하는 것이 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하시다가 나중에, 나중에는 '관세음보살'보다도 '이 뭣고?'가 더 하고 싶은 때가 꼭 올 것입니다. 그때는 여지없이 뒤도 돌아보지도 말고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은 고대로 놔 버리고—버리려고 할 것도 없어. 그냥 고대로 놔 버린 채 '이 뭣고?'만 열심히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열심히 한 그 공덕이 완전히 푸욱 썩어 가지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가지고 머지않아서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때가 반드시 오고야만 말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을 여러분께 설해 드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많고도 많은 법문(法門)을 설하셨습니다. 삼천년 동안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나오셔서 설하신 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 '이 뭣고?' 이 법 하나를 설(說)하시고 전(傳)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지끔 이 용화사, 용화사를, 용화선원(龍華禪院)을 창설(創設)하신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이 주안에다가 자리를 잡으신 목적도, 바로 우리들에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계속해서 이 최상승법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진리의 부처님이 누구시냐 하면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십니다. 지금 우리 용화사 법당 이 탁자에 모셔진 부처님입니다.
다른 절 부처님은 전부 손을 이러한 모습으로 하시던지, 또는 이러한 모습으로 하시던지, 이런 모습으로 하든지, 모다 손 모습이 다른데, 용화사 부처님 모습은 딱 이렇게 손이 되어 가지고 있거든! 이 부처님의 모습은 바로 비로자나불,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이다 그 말이여.
말하자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여. 중생을 교화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화신(化身)으로,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나신 부처님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너희들은 이 육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32상(三十二相)을 받아서 태어난 이 육체의 석가모니불을 믿지를 말아라. 진리, 여래(如來), 진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너희들 자신 속에 있는 부처님을 믿어라. 그것을 깨달라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진리의 표상(表象)이 바로 우리 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 진리의 부처님, 참나, 아트만, 그 부처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이여. 이 법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이 돈과 쌀과 떡과 꽃, 온갖 공양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뜩차도록 공양(供養)을 올린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오늘 들으심으로 해서 여러분들은 가장 훌륭한 공양(供養)을 올리신 것이고, 그것을 실천을 하신다면 여러분의 소원은 거기에서 성취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많은 절을 합니다마는, 예배(禮拜)라고 하는 것은 공경진성(恭敬眞性)이요 굴복무명(屈伏無明)이다. 참된 성품, 참된 나 자신의 성품(性品)을 공경하는 것이 이것이 부처님께 예배드린 가장 가까운 예배다.
나무나 쇠나 흙으로 빚어서 만든 부처님께 절하는 공덕도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내 몸안에 있는 참부처님을 공경하고 그것을 닦기 위해서 '이 무엇고?'를 하는 이 공부야말로, 억만 배, 백억만 배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된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굴복무명(屈伏無明)이다', 무명(無明)을 굴복(屈伏)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다. 예배(禮拜)의 의의는, 바로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하는 이상의 예배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따라서 '이 무엇고?'를 하면서 기도도 하고, '이 뭣고?'를 하면서 공양도 올리고, '이 뭣고?'를 하면서 예배를 올린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소원을 달성을 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용화사를 여기에다 창건한 목적이 그것이요, 이렇게 법당(法堂)을 크게 지어 가지고 법회 때마다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바도 바로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은 입을 통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법(法)을 설(說)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연중무휴로 전파를 발송을 해 가지고 계속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언제라도 우리 자신이 다이알만 딱! 맞추면 그 방송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듯이, 끊임없이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 최상승법, 위대한 진리의 법문을 설하시고 계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 비로자나 부처님의 사신(使臣)으로서, 사신으로서 사바세계에 오신 것입니다. 역대조사(歷代祖師)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반하신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도 부처님으로부터 77대의 법맥(法脈)을 이으신 도인(道人)이십니다마는, 그 도인만이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누구라도 부처님의 진리법(眞理法)을 전해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법을 이어받으려면,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함으로써 그 다이알을 비로자나 부처님과 다이알을 맞추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해야만 진리법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구현(具現)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604회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기어코 실천해서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각오를 튼튼히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아울러서 이 자리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사부대중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을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축원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들었기 때문에, 듣고 실천을 하려고 각오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소원은 보다 더 빨리 성취가 되실 것으로 나는 믿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소원을, 다 소원을 갖지만 성취되는 사람, 안 되는 사람, 더디 되는 사람, 빨리 되는 사람, 왜 그 차이가 있느냐 하면 과거에 지은 업(業)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업(福業)을 많이 지은 사람,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뜻대로 잘됩니다. 부자도 되고, 높은 벼슬도 되고, 아들딸도 낳고, 오복을 다 겸비하지만, 과거에 복(福) 지은 것은 적고 죄(罪) 지은 것은 많으면, 그 지은 죄의 장애(障礙)로 인해서 우리의 소원은 그렇게 목마르게 바래지만 잘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지은 업(業)에 장애물을 녹여 없애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한 방법보다도 훨씬 수승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언제 어데서라도 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도 쉬운 방법,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를 드립니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원컨댄 법계(法界)에 모든 중생들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다.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일시(一時)에 성불(成佛)하여지이다.
앞으로 일주일 뒤, 음력 사월 보름날은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여름 석 달, 여름 음력 4월 15부터 7월 15일까지 석 달은 하안거(夏安居)라 해 가지고 특별 수련 기간입니다.
사정이 허락하신 분은 이 특별 수련에 동참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직접 오셔서 공부를 못 하신 분도 참례를 하시면 좋고, 또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또 법회가 있고,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천도(薦度)를 하는 법요... (녹음 끊김) (41분10초~61분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문성시증시~ / 서기(西紀)와 불기(佛紀) / 부처님의 역사. 진리(眞理)의 몸으로서의 부처님과 인간 석가(釋迦)로서의 부처님 /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 /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차별 없이 다 부처님의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
『법화경(法華經)』에 '옷 안에 보배 구슬'의 비유. 우리 몸안에도 그 보배가 있다 / 그 보배를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이다. 궁극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 / 내가 나를 찾는,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 / 소리를 듣는 그때, 눈으로 무엇을 볼 그때 '이뭣고?' 이것이 내 몸안에 있는 부처님을 친견(親見)하는 그 찰나(刹那)더라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컷 부르다가, 맨 끝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번 해 보시라 /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우리들에게 최상승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 예배(禮拜)는 공경진성(恭敬眞性)이요 굴복무명(屈伏無明) / 업장소멸을 해야 소원성취가 된다. 가장 수승한 업장소멸 방법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〇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어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리키고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도 참부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가리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하고 우리하고는 아주 바탕이 달라서 도저히, 전혀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부처님은 그 본바탕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다.
〇어떠한 종류의 물이라도 바다에 도달하면 짠맛! 짠맛으로 변하고 마는 것처럼, 어떠한 계급(階級)의 인종, 어떠한 죄(罪) 많은 사람이라도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해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면 다 부처님의 혈통을, 진리(眞理)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부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부처님의 진리(眞理),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해서 불제자(佛弟子)가 되었습니다. 불자(佛子)가 된 이상 우리도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입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딸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죄 많은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부처님과 같은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자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〇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놈! 귀를 통해서 듣고 있는놈! 그놈이 바로 여러분이 찾어야 할, 개발해야 할, 여러분이 깨달러야 할 여러분의 영원한 보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것을 찾는 공부가 바로 도(道)를 닦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 찾는 공부밖에는 인생으로서 태어나서 할 일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〇내가 나를 찾는 공부, 참나를 찾는 공부만이 인생으로써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우선적인 소중한 일이다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리켜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〇최상승법을 여러분께 설해 드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많고도 많은 법문(法門)을 설하셨습니다. 삼천년 동안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나오셔서 설하신 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 '이 뭣고?' 이 법 하나를 설하시고 전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지끔 이 용화선원을 창설하신 전강선사(田岡禪師)께서 이 주안에다가 자리를 잡으신 목적도, 바로 우리들에게 이 최상승법을 설해 주시기 위해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셨다.
〇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은 입을 통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법(法)을 설(說)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연중무휴로 전파를 발송을 해 가지고 계속해서 방송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언제라도 우리 자신이 다이알만 딱! 맞추면 그 방송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듯이, 끊임없이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 최상승법, 위대한 진리의 법문을 설하시고 계십니다.
그 진리법을 이어받으려면, '이 무엇고?' '이 무엇고?를 함으로써 그 다이알을 비로자나 부처님과 다이알을 맞추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해야만 진리법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구현(具現)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은 '이 최상승법을 기어코 실천해서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하는 각오를 튼튼히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아울러서 이 자리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사부대중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을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축원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들었기 때문에, 듣고 실천을 하려고 각오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소원은 보다 더 빨리 성취가 되실 것으로 나는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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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불기(佛紀) 2524년이라고 합니다마는, 2524년은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해를 불기(佛紀) 일 년으로 쳐서 금년(今年)이 2524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탄생(誕生)하신 해부터서 금년까지 몇 해가 되었느냐 그것을 알아보려면 부처님께서는 80세까지 생존(生存)하셨으니까, 2524에다가 79를 보태면 부처님께서 오늘 탄생하신 해부터서 금년까지 2603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불교도대회(世界佛敎徒大會)에서 열반하신, 돌아가신 해를 일 년으로 쳐서 불기(佛紀)를 결정을 했기 때문에 보통 '불기 2524년' 그렇게 얘기들 합니다마는, 앞으로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햇수를 알고자 하면 부처님은 80세까지 사셨으니까 한 살을 빼서 79를 보태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해가 나온다고 하는 것을 잘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불기(佛紀)도 2900년대를 그동안에는 오래 전부터서 그렇게 사용을 해 오다가 2500년대를 사용하게 된 것은 불과 십여 년 밖에는 안 됩니다. 2900년대는 중국으로 해서 우리나라 이 북방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전(北傳)으로 통해서 볼 때에는 2900년대가 되고, 남방으로 전해 내려오는 햇수로는 2500년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400년이라고 하는 차이가 나느냐 하면 워낙 오래된, 역사가 오래되어서 경전에 따라서 이렇게 쓰여진 데도 있고 저렇게 쓰여진 데도 있고 그런 것입니다.
보통 불기(佛紀)를 따질 때,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아쇼카왕이 즉위(卽位)한 해에 기념탑(記念塔)을 세웠는데, 그 아쇼카왕이 즉위한 해가 바로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 백 년 뒤다' 또는 '이백십팔 년이다' 이렇게 설(說)이 그것도 차이가 있어서 학자마다 연대(年代)가 다 일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중성점기(衆聖點記)라고 하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부터서 손으로 쓴 경책에다가 해마다 점(點) 하나를 찍어서 쭈-욱 내려오는 중성점기라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그 점을 찍어 내려오는 그것으로 따져서 보는 것과 이렇게 남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불기에도 또 차이가 있어서 여러 학자들 간에 불기(佛紀)에 대한 설이 다릅니다.
그러나 십여 년 전에 세계불교도대회에서 2524년, 금년(今年)이 2524년으로 따지는 불기를 사용하기로 서로 결의(決意)를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것에 따라서 금년을 2524년으로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불기가 2900년대가 옳으냐? 2500년대가 옳으냐? 그러한 것들은 학자들이, 사학가(史學家)들이 연구할 문제고, 우리 불자(佛子)들로서는 그러한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할 줄 생각합니다.
불교의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부처님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으신 분이라, 생사가 없기 때문에 태어나신 때도 없고 또한 돌아가신 때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가 없는데 무슨 '불기가 몇 년이다' 그런 것 가지고 논란을 할 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급하고 중대한 것이지, '부처님께서 몇 년도에 태어나셨다' 이런 것은 저 학자들이 연구해도, 학자에게 미루어도 충분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셨는가?' 그것이 우리에게는 당장 급한 일이요 중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느냐?
우리 중생들도 부처님과 조끔도 다름없는 만고(萬古)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등(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등(燈)에 부처님께서는 불을, 불을 켜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반왕(淨飯王), 정반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태자(太子)로 태어나셨습니다. 태자로 태어나셔서 이 세상에 영화와 부귀 그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6일 만에 부처님을 낳아 주신 어머니 마야부인은 이 세상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부처님의 이모, 이모이신 대애도(大愛道) 부인께서 부처님의 계모(繼母)로 들어오셔서 당신 형이 낳아 놓으신 실달태자(悉達太子)를 잘 양육을 해서 19세에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래가지고 온갖 정성을 다해서 그 태자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기 위해서 노력을 하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서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거기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시고, 언제나 시간만 있으면 고요한 데, 숲속 이런 데를 찾아서 고요히 앉아서 묵상(默想)에 잠기시기를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그럴수록에 부왕(父王)이나 왕궁(王宮)에서는 그 태자로 하여금 보다 더 기쁘게, 그러한 무상한 그런 마음을 갖지 않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춘하추동에 지내기 편리하도록 삼시전(三時殿)을 짓고, 온 나라에 미인들을 모여서 춤과 노래로써 기쁘게 해 드렸지만, 그런 것에도 아랑곳없이 해가 거듭할수록 실달태자(悉達太子)는 점점 무상함을 느끼고 드디어 29세 되던 해에 '라후라(羅睺羅)'라고 하는 당신의 아들을 낳으시고 그리고서 성(城)을 넘어서 설산(雪山)으로 들어가셔서 6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하루같이 목숨 바쳐서 수도(修道)를 하셨습니다.
설산 안에 있는 모든 훌륭한 성자(聖者)들을 찾아서 그 성자의 지도에 따라서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그 고행(苦行)을 해서 그 스승보다도 더 월등한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그 스승의 귀여움과 붙잡음을 받았지만 거기에도 만족이 안 되어서 차례차례로 스승을 버리고 또 더 위대한 스승을 찾고, 이렇게 하기를 6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지낸 끝에 드디어 붓다가야의 그 보리수 나무 밑에서 거기에 딱!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서 “내가 이 자리에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아니하면 죽어도 이 자리로부터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맹세를 하시고 정진(精進)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임오년(壬午年) 12월 초여드렛날, 그때가 부처님으로서는 35세 때입니다. 35세 때 동천(東天)에서 빛나는 샛별을 보시고 대도를 성취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서 깨닫고 나서 일체 중생(衆生)을 살펴보니 저 죄 많고 어리석은 모든 중생들도 당신과 똑같은 본성(本性)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간파(看破)를 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자리에서부터서 80세를 일기로 열반(涅槃)에 드실 때까지 앉은 자리 더워질 겨를 없이 인도(印度)에 동서남북을 유행(遊行)을 하시면서 한량없는 중생을 위해서 법(法)을 설하셨습니다. 일생 동안 설하신 그 법이 바로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에 봉안(奉安)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 우리가 어떻게 닦아 가야 한다고 하는 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그 일부에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일부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팔만대장경인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법은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그것만이 아니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태양과 달과 별, 이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중생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암흑(暗黑)을 비추기 위해서 켜 놓으신 부처님에 등(燈)불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소리는 중생의 때를 씻쳐 주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법으로 설해 주신 경전(經典)인 것입니다.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바람소리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소리를 언제 어디서라도 들을 수 있고 그 소리를 들음으로 해서 참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영원히 끊임없이 들을 수 있는, 연주하고 있는 아름다운 음악(音樂)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푸른 하늘, 푸른 산, 봄에 아름답게 피는 노랗고 빨간 모든 꽃들, 이런 것들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그 보는 그 찰나(刹那)에 그 보는 자신을 돌이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오색이 찬란한 빛깔로 부처님의 경전을 써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코로 맡을 수 있는 냄새, 혀로 맛볼 수 있는 짜고 달고 쓰고 시고 한 이러한 맛,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부드럽고 까끄럽고 따뜻하고 차가운 모든 이러한 것들도 우리의 몸뚱이와 감각을 통해서 느끼는 찰나(刹那)에 우리의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모양으로 경전을 설해 놓으신 것입니다.
종이로 쓰여 있는 경전만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의 전부(全部)라고 생각하신 것은 부처님의 진리를 잘 이해를 못하신 사람에 보는 바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참으로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그 소리 가운데에는 성현(聖賢)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착하고 아름다운 소리뿐만이 아니라 욕을 하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요새 공해(公害)로 공장에서 울려 퍼지는 그런 소리까지도 전부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고에 진리의 일면(一面)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 갈 때, 우리는 온 육도법계(六道法界)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살아 있는 설법(說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이로 된 경전만이 경전인 줄 알고 그 경전(經典)에 집착(執著)하고 밤낮 그것을 뒤적거리고 그것을 읽고 외우는 것만이 부처님의 경전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본 장님이 '코끼리는 구렁이같이 생긴 것이다' 하고 집착을 하고 우기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몸소 저 도솔천(兜率天)에서 계시다가 지금으로부터 2603년 전에 인도(印度)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에 태자(太子)로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나실 때 여섯 개의 아금니를 가진 하얀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摩耶夫人)의 태중(胎中)으로 들어오셨다고 하는 말씀이 고대(古代) 경전(經典)에 쓰여 있습니다.
부처님 자신으로 볼 때에는 이미 진묵겁(塵墨劫) 전에 대각(大覺)을 성취하셔서 다시는 영원히 생사 문제에 떨어질 이유가 없으시지만, 우리 불쌍한 생사 속에서 헤매고 있는 가엾은 중생들을 건져 주시기 위해서 몸소 왕궁에 태자(太子)로 태어나셔 가지고 무상(無常)을 느끼시고 그래 가지고 귀여운 아내와 아들과 왕궁에 부귀를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이 세상에 어떠한 성현도 겪지 못한 그러한 무서운, 견디기 어려운 고행(苦行)을 몸소 다 겪으시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을 위해서 일부러 그러한 모냥을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처음~20분4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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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왕(往往)이 '도(道)를 통하려면 그런 고행(苦行)을 해야 한다' 이렇게 혹 생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리고 과거에 많은 수행자들도 그렇게 고행을 위주로 해서 도를 닦은 분들도 있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대도를 성취하신 뒤 최초에 당신을 모시러 왔다가 결국은 당신과 더불어 같이 수행을 하고 있었던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비구들을 위해서 최초(最初)에 무슨 법문(法門)을 하셨느냐 하면은 지나치게 편안하고 사치에 빠져서 도를 닦는 것도 지혜로운 수행법이 아니지만, 동시에 지나친 고행(苦行) 위주에 수행도 지혜롭고 성스러운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맨 처음에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道)는 너무 사치에 빠지고 편안한 데 빠져서 도를 닦아도 그 도는 올바른 수행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써 위주를 삼는 그러한 수행법도 지혜로운 수행법이 아닌 것입니다.
적당하게 먹여 주고, 적당하게 재워 주고, 적당하게 입혀 주는, 그러면서 우리가 정신(精神)을 차려야 할 곳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는 우리의 그 생각,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야무지게 잘 단속(團束)을 하느냐’ 거기에다가 우리의 모든 정성을 집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 없이는 결단코 건전한 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건전한 정신이 없고서 올바르게 수행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6년이라고 하는 긴 뼈아픈 고행 끝에 결국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흘러가는 강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목욕을 하고 나오자 마치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에 처녀가 수행인을 위해서 바치기 위해서 끓여 가지고 온 유미죽(乳糜粥) 한 그릇을 얻어 잡숫고, 그래 가지고 거기서 새 정신을 차려 가지고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서 정진을, 그 건강한 몸과 상쾌한 정신으로 도를 닦아서 드디어 대도(大道)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때 아까 말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의 비구들은 ‘대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단식(斷食)을 하고 그렇게 고행(苦行)을 하기로 해 놓고서 떠억 처녀가 갖다 바친 유미죽을 잡순 것으로 봐서 타락(墮落)을 했다. 벌써 변심(變心)을 했다. 그래 가지고 무슨 대도를 성취하겠느냐?’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러한 타락한 변절(變節)한 태자(太子)하고 우리는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이래 가지고 그이들은 태자 있는 데로부터 떠나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네끼리 공부를 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다섯 비구들을 떠나보낸 뒤 계속해서 정진을 해 가지고 드디어 대도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 부처님 오신날은 정말 우리가 어떠한 최고의 방법으로 그날을 축복을 해 드리고 경축(慶祝)을 한다고 해도 모지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을 안 하셨다면 우리는 계속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五欲樂)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이다.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들이 전부다'고 하는 이런 데에 빠져 가지고 그것을 구하면 구할수록 탐진치에 불은 왕성히 타올라 가지고 계속 탐진치의 괴로운 불더미 속에서 헤매다가 죄(罪)를 짓고 그 죄 지은 죄로 인해서 다시 또 내생(來生)에 삼악도(三惡道), 육도(六道)를 윤회(輪廻)를 하면서 영겁(永劫)을 두고 고해(苦海)에서 헤맬 것을, 부처님께서 탄생을 하셔 가지고 그러한 위대한 묘법(妙法)을 설하셔서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백천만 겁에 몸을 바꾸어 나면서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이러한 행복의 씨를, 행복의 불을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나에게 목숨을 바쳐라’ 이렇게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못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가르쳐 주신 그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도를 닦으면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며, 그렇게 열심히 닦아 가지고 참나를 깨닫게 된다면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참아들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께서 바라신 것은 오직 그것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오신날을 기해서 이렇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등불을 모다 켜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복(福)을 받기를 소원을 하고, 소원성취하기를, 소원을 모두 하셨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빌기보다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그날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날인가에 대해서 그것을 봉축하고 축하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실 것이며,
나아가서는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진리법, 그 진리법도 팔만대장경 팔만사천법(八萬四千法)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법인 참선법(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참선법을 깊이 믿고 이것을 옳게 지도 받아서 열심히 실천을 하심으로써 우리의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완성을 해서, 영원히 생사 없는 진리를 이 몸으로 구현(具現)해서, 부처님의 등불을 이어 받아서 나 자신도 영원히 생사 없는 진리 속에서 하나가 되고, 일체 중생을 이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자가 되는 것만이 오늘을 참되게 축복하고, 참되게 복을 받는 가장 올바르고 지혜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 우리는 정말 크고 작은 모든 소원(所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을 바래가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옹졸한 원(願)을 세울 것이 아니라, 크고 두렷하고 원만하고 위대한 원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한다면 조그마한 원은 그 가운데 저절로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대승불교,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불공(佛供)하는 법이요, 기도(祈禱)하는 법이요, 축원(祝願)하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불자(佛子) 여러분! 사부대중 여러분!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이 몸을 새로 바꾸지 아니하면서 새로 태어날 날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생사는 육체 태어난 것으로써 생(生)을 삼고 육체 죽은 것으로써 죽음[死]을 삼는 이러한 생사관은 표면적(表面的)인 생사관(生死觀)에 지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사는 우리의...(녹음 끊김)
생사를 생사인 줄 알고 그 생사가 무섭고 중요한 것이라고 알고, 한 생각 일어날 때 퍼뜩 정신을 채려서 ‘이뭣고?’ 그 한 생각이 꺼질 때 퍼뜩 정신을 채려서 ‘이뭣고?’를 하고 이렇게 단속(團束)을 해 나간 사람에게는, 그이에게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아니한 것입니다.
생사를 이 육체의 생사로만 생각하고 ‘앞으로 내가, 지금 한 이십 삼십이니까 앞으로 내가 적어도 사오십 년은 살 것이다’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하고 생사가 두려운 줄 모르고 그럭저럭 살다가는, 정말 생사는 눈 한번 감었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아무리 후회를 하고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질 때 그때 생사의 두려움을 느끼시고 생사의 무상(無常)함을 느끼시고 ‘이뭣고?’ 그때마다 ‘이뭣고’를 간절히 챙겨서 관조(觀照)를 하신다면 우리는 바로 그때그때 생사(生死)의 업(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생사(生死)의 인(因)을 짓지 않고 진리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한 생각을 단속하고 불법을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참불법을 만난 사람이요,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진짜 부처님 제자(弟子)요, 대복(大福) 무량(無量)한 복(福)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 진리를 믿고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아직도 참선이 좋다고 한 말만 듣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천을 아니하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경신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 날을 기(期)해서 누구 못지않게 철저한 최상승(最上乘) 불자가 되어서 자기가 자기를 돌이켜 깨달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도록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부탁을 드리고자 한 말씀은, 앞으로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양력으로 6월 1일 날이...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결제(結制)날이 됩니다. 결제는 여름 석 달 동안 특별 수련을 하는 참선(參禪) 기간입니다.
도로계획으로 이 절이 철거가 언제 될는지를 몰라서 여름결제를 망설였습니다마는, 우리는 단 한 달이라도 두 달이라도 또는 석 달이라도 우리가 모여서 열심히 정진해야만 하기 때문에 여름결제를 갖기로 결의(決意)를 했습니다.
신도 여러분들은 인연 따라서, 아마 전강 조실 스님께서 지으신 이 아래 선방(禪房)에서 결제(結制)를 갖는 안거(安居)는 금년 여름이 마지막이 되지 아니할까 생각을 합니다.
조실 스님의 법(法)을 추모(追慕)하는 불제자(佛弟子) 여러분들은 좁지마는, 좁고 어둡고 답답하지만 조실 스님의 입김이 서려 있는 그 소박한 선방에서 금년 안거를 가짐으로 해서 조실 스님의 위대한 법(法)에 은혜를 마음껏 받아서 그 가피(加被)로 대도를 성취하시게 되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매년, 매월 음력 24일에 법회(法會)를 가졌었습니다. 그 관음재(觀音齋) 법회를 가져 왔었는데 지난달부터는 양력 첫째번 일요일에 법회를 갖기로 변경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공서(官公署)나 직장에 다니신 불자님들도 법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機會)를 드리기 위해서 여러 신도분들의 여망(輿望)에 따라서 그렇게 변경을 하게 되았습니다. 그래서 아빠 엄마 누나 동생들 전부 손에 손을 맞잡고 이 법회에 첫째번 일요법회에 참석하셔서 온 식구가 고루고루 정법의 광명을 받아 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혹 ‘일주일 동안 공사(公私) 간에 너무 신경을 쓰고 피로한데 나는 오늘 집에서 편안하니 쉬고 싶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렇다면 나도 법회에 못 가겠다' 이래 가지고 아빠 때문에 보살님까지 법회에 참석을 못 하신 분도 상당수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어떠한 방법을 쓰든지 어떠한 아양을 떨던지 잘 달래고 꾀수고 해 가지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법회에 같이 참석을 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남편을 최선을 다해서 정성스럽게 받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
집에서 쉰다 해도 혹 몸은 좀 쉬어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절에 경건한 마음으로 같이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거기에서 좋은 말씀을 귀담아듣고서, 거기서 어떠한 인연에 맞는 감명 깊은 말씀을 듣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처(安息處)를 찾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루, 집에서 억지로 좀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뭐 책 좀 봤다 그러면서 쉰다면 그것이야말로 잠깐 동안 쉬는 것이 될 것이지만, 법문을 듣고 참선하는 법을 알아서 일생 동안 옳은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참나를 찾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무량겁(無量劫)을 편안하게 사는 길을 배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부인의 공덕이야말로 이 세상에 현모양처는 그 이상의 현모양처(賢母良妻)가 없을 줄 생각합니다. 남편을, 공사(公事)는 벼개공사가 제일이라는데, 법회에 모시고 나올만한 수단이 없어서 가지고야 무슨 지혜로운 주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주일 후에 결제 때는 동시에 백일기도(百日祈禱)를 봉행(奉行)을 합니다. 백일기도에도 참석하시고 또 결제도 하시고 하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많이 오셔서 동참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등(燈)을 모다가 켜셨을텐데 연등을 켜신 분도 계시고, 또 이 주름등을 켜신 분도 계시고 합니다마는 무슨 등(燈)을 켜시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각기 인연(因緣) 따라서, 무슨 연등을 켰다고 해서 복(福)을 더 많이 받으신 것도 아니고, 주름등을 켰다고 해서 복을 적게 받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각기 성의(誠意)를 다해서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우리의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하고 부처님의 광명을 우리 가정에, 내 가슴에 켠다고 하는 그러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등불을 켜시는 것이니까, 문제는 정성(精誠)이 중대하지 등(燈)의 모냥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 경건한 마음으로, 유쾌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지냄으로 해서 무량겁(無量劫) 업장(業障)이 다 오늘로 다 소멸이 되시고, 영겁을 두고 꺼지지 않는 등불을 오늘 여러분의 가슴속에 켜신 채 오늘 하루를 뜻있게 보내시고 오늘부로 최상승(最上乘) 불자(佛子)가 되셔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20분45초~42분3초) (끝)
[법문 내용]
(게송)수지왕사일륜월~ / 불기(佛紀)에 대한 학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의 모습.
지나치게 편안한 데 빠지거나, 지나친 고행의 양 극단이 아닌 지혜로운 수행 / 적당한 의식주와 '일어났다 꺼지는 우리의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團束)하느냐’ 거기에다가 우리의 모든 정성을 집중해야.
부처님의 은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참나를 깨달아라' / 자신도 영원히 생사 없는 진리 속에서 하나가 되고, 일체 중생을 이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자가 되는 것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불공 기도 축원하는 법이다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질 때가 생사(生死), 그때마다 ‘이뭣고’를 간절히 챙겨라 / 법회 참석의 중요성.
〇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셨는가?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느냐? 우리 중생들도 부처님과 조끔도 다름없는 만고(萬古)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등(燈)을 가지고 있으니, 부처님께서는 그 등에 불을 켜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〇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〇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법은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그것만이 아니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眞理)의 모습인 것입니다.
〇종이로 쓰여 있는 경전만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의 전부(全部)라고 생각하신 것은 부처님의 진리를 잘 이해를 못하신 사람의 보는 바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참으로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그 소리 가운데에는 성현(聖賢)의 말씀뿐만이 아니고, 착하고 아름다운 소리뿐만이 아니라 욕을 하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요새 공해(公害)로 공장에서 울려 퍼지는 그런 소리까지도 전부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고의 진리의 일면(一面)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 갈 때 우리는 온 육도법계(六道法界)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살아 있는 설법(說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이로 된 경전만이 경전인 줄 알고 그 경전(經典)에 집착(執著)하고 밤낮 그것을 뒤적거리고 그것을 읽고 외우는 것만이 부처님의 경전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본 장님이 ‘코끼리는 구렁이같이 생긴 것이다’ 하고 집착을 하고 우기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〇도(道)는 너무 사치에 빠지고 편안한 데 빠져서 도를 닦아도 그 도는 올바른 수행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육체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써 위주를 삼는 그러한 수행법도 지혜로운 수행법이 아닌 것입니다.
적당하게 먹여주고, 적당하게 재와주고, 적당하게 입혀주는, 그러면서 우리가 정신(精神)을 차려야 할 것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는 우리의 그 생각,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야무지게 잘 단속(團束)을 하느냐’ 거기에다가 우리의 모든 정성을 집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〇한 생각 일어났다 꺼질 때 그때 생사의 두려움을 느끼시고 생사의 무상(無常)함을 느끼시고 ‘이뭣고?’ 그때마다 ‘이뭣고’를 간절히 챙겨서 관조(觀照)를 하신다면 우리는 바로 그때그때 생사(生死)의 업(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생사(生死)의 인(因)을 짓지 않고 진리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한 생각을 단속하고 불법을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참불법을 만난 사람이요,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진짜 부처님 제자(弟子)요, 대복(大福) 무량(無量)한 복(福)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〇주말에 집에서 쉬는 것은, 혹 몸은 좀 쉬어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법회 때, 경건한 마음으로 같이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거기에서 좋은 말씀을 귀담아 듣고서 거기서 어떠한 인연에 맞는 감명 깊은 말씀을 듣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처(安息處)를 찾는 것’이 될 것입니다.
〇법회에 참석을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하는 법을 알아서 일생 동안 옳은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참나를 찾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무량겁(無量劫)을 편안하게 사는 길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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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